전주최씨 명현록/전주최씨 무과편

서산대사 ( 임진(壬辰) 승장 중 휴정(休靜) 관련기사

아베베1 2010. 7. 17. 11:09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천축사의 모습  2012.8.14 촬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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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응(玄應)
청허(淸虛)
생졸년 1520 (중종 15) - 1604 (선조 37)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완산(完山)
활동분야 종교 / 불교인 / 고승, 승병장
과거 및 취재

[상세내용]

휴정(休靜)에 대하여1520년(중종 15)∼1604년(선조 37). 조선 중기의 고승(高僧)·승군장(僧軍將). 완산최씨(完山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법명이 휴정이다. 평안도 안주 출신.
1. 가계와 탄생일화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에 그를 낳았다.세 되던 해 사월 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할 것을 지시하였다.
2. 출가·승려활동
그뒤 아명은 운학이 되었다.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남다른 바가 있어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 傳燈》·《염송 拈頌》·《화엄경》·《원각경 圓覺經》·《능엄경 楞嚴經》·《유마경 維摩經》·《반야경》·《법화경》 등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雲水) 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
3. 승군활동
1589년(선조 22) 《정감록 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휴정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 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한수를 지었는데 《청허당집 淸虛堂集》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때 선조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휴정에게 선조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휴정은 문도 1,500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다가, 선조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4. 입적
선조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의 직을 물러나 묘향산으로 돌아와 열반(涅槃)을 준비하였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그뒤에도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묘향산의 안심사(安心寺),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屠)를 세웠고, 해남의 표충사(表忠祠),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하였다.
5. 선교관
휴정의 선교관(禪敎觀)에서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선교에 대한 이와같은 정의는 가장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그 진수를 밝히고 확립한 정의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정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기(一切衆生悉有佛性)’ 때문에 누구나 닦으면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성도문(聖道門)에 입각하고 있다. 그의 선교관은 석가모니 이후로 면면히 이어온 전통적인 불교관(佛敎觀)에 근거를 둔 것이며,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의 뜻을 삼처전심(三處傳心)과 오교(五敎)로써 풀이하였다.

또, 《선가귀감 禪家龜鑑》에서 “세존(世尊)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이 선지(禪旨)가 되고 부처님께서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한 다음, “세 곳이라 함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多子塔前 分半座)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靈山會上擧拈花)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밖으로 내보이심(沙羅雙樹示雙趺)이 셋째이니, 이른바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선의 등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선지의 근원을 밝혔다.

이어 “부처님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란, 49년 동안 말씀하신 다섯 가지 가르침이니, 첫째는 인천교(人天敎)요, 둘째는 소승교(小乘敎)요, 셋째는 대승교(大乘敎)요, 넷째는 돈교(頓敎)요, 다섯째는 원교(圓敎)이다. 이른바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교의 바다를 널리 흐르게 하였다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교의 근원을 밝혔다.

이는 선교의 근원을 밝힌 일종의 교상판석(敎相判釋)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바를,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시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이다. 또한,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일미(一味)이지만 뜻은 하늘과 땅같이 동떨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휴정의 선교관은 선이 주(主)가 되고 교는 종(從)이 되어, 깨달음에로 나아간다고 보았고, 선을 교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또한, 선교의 관계에 대하여 교는 부처의 가르침으로 먼저 모든 법을 가려서 보이고 다음에 공(空)의 이치를 가르친 것인데, 이 공의 이치에 곧바로 들어가서 체득하는 것이 선이며, 특히 조사선(祖師禪)은 그 자취가 뜻의 자리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6. 선교의 정의
이상의 선교에 관한 정의를 간추려보면 대략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선시불심 교시불어(禪是佛心敎是佛語)이며,

② 실재를 증득함이 없는 선지는 교의 흔적일 뿐이며, 마음을 얻은 자는 교문만이 아니라 시정(市井)의 헛된 수작까지도 먼지가 된다.

③ 선은 분별이 없는 경계를 뜻대로 오가는 천지간의 한도인(閑道人)이며, 교문의 8만 4000법문은 일심(一心)에 귀착하며 일념회광(一念廻光)으로 심성(心性)을 뚫어보는 견성일의(見性一義)에 귀결한다.

④ 교문은 공을 설파하여 유상(有相)의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이며, 조사선의 목적은 언하(言下)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게 함으로써 언어와 문자에 잡힌 분별을 끊고 자기의 영광(靈光)이 천지에 비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⑤ 교는 활과 같아서 우여곡절이 있지만, 조사의 격외선지(格外禪旨)는 직선의 활줄과 같아서 모든 차별을 여의고 일체의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는 일미에로 직입(直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점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관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7. 선교관의 정립
따라서, 선교양종을 제도상으로 통합하기 위한 토대로서 선교관을 정립할 필요를 느껴 그는 《선교석 禪敎釋》을 저술하였다.

《선교석》은 독단을 피하고 옛사람의 어록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론을 논리정연하게 설득시켜 선이 주요, 교는 선에 추종한다는 이론을 내세운 것으로 의의가 깊다.

즉, 선적(禪的)인 통일불교의 토대를 굳힌 것으로 재래의 선문에서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을 타파하고 있는데, 전통을 전수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지를 구명함에 있어서의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려 한 것이다. 그 예로서 《능엄경》을 선의 소의경전으로 삼아 오던 종래의 전통을 한낱의 갈잎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고, 《반야경》에 대해서도 성문(聲聞)을 위한 방편문(方便門)이 어찌하여 선종의 종주가 될 수 있는 것인가를 반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만 중히 여기고 마음을 가벼이 보면 비록 수많은 겁(劫)을 닦는다 하더라도 천마외도(天魔外道)를 지을 뿐이라.”는 고덕(古德)의 말을 인용하여 혹평하였다.

그리고 필경의 이치인 선의 본지, 즉 부처님의 본심에 대하여 “자기의 본분 위에는 본래 명자(名字)가 없지만, 방편으로 그것을 정법안장(正法眼藏)·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선교의 차이를 논하면서 선과 교를 통합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선교일치의 입장보다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그는 염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염불과 선을 일치시키려는 목적에서 “부처님은 상근인(上根人)을 위하여 말씀하시되, 마음이 곧 부처이고 마음이 정토(淨土)이며 자성(自性)이 곧 미타(彌陀) 이다(淸虛堂集 권4)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성미타’가 ‘자심정토’로 이룩됨을 강조한 것이다.” 하였다. 이러한 유심정토사상(唯心淨土思想)은 그의 선지의 진리와 상통하고 있다.
8. 법맥과 저서
휴정의 법맥, 즉 그 사상의 계통을 그 자신이 언명한 것을 보면, 벽송(碧松)은 조(祖)요, 부용(芙蓉)은 부(父)며, 경성(敬聖)은 숙(叔)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직제자인 편양언기(鞭羊彦機)의 말에 의하면, “태고(太古, 普愚)화상이 중국 무하산(霧霞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을 사(嗣)하여 이것을 환암(幻庵)에게 전하였으며, 환암구곡(龜谷)에게, 구곡정심(正心), 정심지엄(智嚴)에게, 지엄영관에게, 영관서산에게 전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휴정의 법맥은 중국 5가 7종 중의 한 종파인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며, 우리나라의 임제종조인 보우의 7대손이 된다.

휴정의 제자는 1,000여명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뛰어난 자가 70여명이나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현빈인영(玄賓印英)·완당원준(阮堂圓俊)·중관해안(中觀海眼)·청매인오(靑梅印悟)·기암법견(寄巖法堅)·제월경헌(霽月敬軒)·기허영규(騎虛靈圭)·뇌묵처영(雷默處英)·의엄(義嚴) 등이 특히 유명하며, 유정·언기·태능·일선의 네 사람은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문하의 4대파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 4권 2책과 《선교결 禪敎訣》·《심법요초 心法要抄》·《선교석》·《운수단 雲水壇》·《삼가귀감 三家龜鑑》·《설선의 說禪儀》·《제산단의문 諸山壇儀文》 등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西山大師集(東國譯經院, 1970 )   高僧傳(金東華, 三星文化財團, 1974)
西山大師의 生涯와 思想(金煐泰, 博英文庫 55, 1975)
護國大聖四溟大師硏究(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所, 1971)

 

 

弘齋全書卷五十三
 
西山大師畫像堂銘 幷序○甲寅 a_263_334a


釋家之通稱曰沙彌。沙彌者。息慈也。謂安息於慈悲之地也。故佛有三藏。而脩多羅爲首。佛有十回向。而救衆生爲首。槩戒律也。禪定也。智慧也。無一不慈悲乎究乘。而法界之功德在此。恒沙之福田在此。無上哉。慈悲之爲敎也。後世之沙彌則不然。雲天水甁。遊心於實相之外。翠竹黃花。比身於無情之物。而吾儒263_334b遂以枯木死灰譏之。非吾儒譏之也。後世沙彌自詒其譏也。若西山大師休靜之爲沙彌也。其亦不愧夫息慈之義乎。始焉腰包杖錫。徧參諸方樹法幢。爲人天眼目。則雲章。寶墨。寵賚。優異。至今。與貞觀永樂之序。爭耀於兜率蘭若間。中焉顯發宗風。弘濟國難。倡義旅。爲勤王元勳。則腥羶妖氛。應手廓淸。至今使方便度世之功。永賴於閻浮提無量劫。終焉隨緣現身。緣過攝身。尋因果爲上乘敎主。則梅熟蓮香。倏到彼岸。至今有望儼卽溫之像。受頂禮於西南香火之所。如此然後方庶幾乎濟大千。惠塵境。曾面壁數珠磨263_334c甎作鏡之謂慈悲乎。曾廣建塔廟多寫經律之謂慈悲乎。予因西南道臣之請其影堂額。賜南曰表忠。西曰酬忠。命官給祭需歲祀之。以今歲甲寅。追洪武甲寅。賜詩善世禪師之故事。爲之序若銘。俾揭諸堂。予雖未習佛諦。而嘗聞法華之義解矣。曰偈之義。如此方之序後銘。則此之銘。固梵之偈也。銘曰。
佛日初照。慈雲爲經。浩劫單傳。囑付丁寧。問其誓願。孰非施舍。義海茫茫。津逮者寡。福國多祐。高僧應期。卓錫一喝。魔軍離披。天晶月朗。波恬浪平。優曇鉢華。涌現東瀛。歸慶赤縣。返眞靑蓮。肅穆鐘魚。禪燈孤懸。263_334d名流竹。道存貝葉。寂鄕鉢寺。交暎眉睫。報祀伊何。蒲饌自官。儻布靈貺。長蔭旃檀。麻稻竹葦。匝域蓊若。匹周富庶。媲唐耕鑿。八萬四千。子孫同樂。予卽阼之十有八年甲寅四月初八日。安于表忠酬忠之祠中。

金陵集卷之十六 宜寧南公轍元平著
 碑銘
乾鳳禪院泗溟大師紀績碑銘 a_272_299a


金剛山自毗盧分爲二歧。斷髮嶺以西曰內岾。鴈門以東曰外岾。內岾之表訓寺。是西山大師施敎之地也。外岾之乾鳳寺。是泗溟大師募義之地也。二子者雖出於浮屠。而西山以其節。泗溟以其功。故地以人而重。寺之名於是乎甲于國中。按圖誌。唐乾元間。山272_299b人貞信設道塲。奉彌陀觀音兩菩薩像於此。號爲乾鳳寺。寺舊藏師畵像及願佛銀㙮香爐鐵杖橇鞋珊瑚念珠各一。織金袈裟一襲。而世傳如來牙事尤神奇。其說近於述異。而所謂石㙮者。至今尙存。山中人皆言夜或有瑞氣爲虹云。師名惟政。本姓任氏。密州人也。世有簪纓。稍長。從恩師中德。落髮於寺之樂西庵。而師事西山大師休靜。學蓮華經六萬九千餘言。萬曆二十年。倭寇朝鮮。休靜自妙香山募僧徒爲義兵。與提督李如松。大破倭兵于平壤。斬首二千級。昭敬王召見行在。親畵墨竹圖以賜之。仍命爲八272_299c道都摠攝義兵將。及車駕還都。執政大臣。多主和議。休靜請於上曰。臣老且死。願以兵事付弟子惟政。乞骸骨歸。昭敬嘉其志許之。命惟政乘馹至京師。遂統其衆。朝廷謂蠻夷素好佛道。宜遣惟政以成和。遂賜一品命服。以使臣禮送之。師至日本。乃以三塗五戒。說蠻王及平秀吉。其言皆以淸凈去殺爲宗。於是和事成。將還。贖得被虜男女五千餘口。先是新羅慈藏法師入西竺。得如來牙十枚。後爲倭所掠去。師乃懇辭乞還。以藏于寺。卽石塔是也。儒與佛異敎。學士大夫常譏斥之。不欲同中國曰。慈悲與仁義272_299d異旨。而見性不若格致。習靜有違誠敬。毫釐之差。去聖人之道遠甚。雖然。觀於西山與師之所樹立。則其於君臣父子之義何如哉。彼冠儒衣儒。細究性理。高談仁義而無其實者。不可同日而語也。佛名而儒行者。吾道而已矣。儒名而佛行者。異端而已矣。問之則非。校之則是。吾當進之矣。問之則是。校之則非。吾當退之矣。當朝廷與日本講和也。賢人君子進無可死之地。則退潔其身可也。西山之去。吾知其必有以也。如師者不與之同其去。而又爲之力贊其議何也。盖西山近於經而其節高。泗溟近於權而其功博。然和272_300a議之成。當時之士。多主其事。雖非師而不患其不成也。况日本崇信佛敎。堯舜孔子之道所不可化。則事固有因其勢而導之者。又師之忠信可以行蠻貊之邦而服人之心。此豈區區遊說之士所可得。而國家之享有其利者。今三百年矣。然則西山之退身守道。泗溟之屈志濟物。各有其義。而其忠於爲國一也。同時從西山學者。又有海眼與靈圭。海眼起義嶺南。靈圭嘗與趙文烈公憲。從死錦山之役者也。密州舊有師妥靈之祠。穆陵時賜號曰表忠。及我聖上卽阼以來。尤起感於西山,泗溟之事。嘗就寧邊故祠272_300b而表章之。本朝專尙儒術。未嘗廣度僧尼。崇侈寺刹。而二聖之眷眷於此者。徒以忠義爲奬也。豈不盛哉。余按關東。以本寺遺蹟。論移禮曹。又將請於朝施行。而其徒有以紀績之碑來屬者。遂捐錢百緡而施之。作募緣文五軸。以相其役。銘曰。
佛自西竺。流入中原。歷漢及梁。迄唐宋元。儒譏異端。不與同門。孰如大師。自禪而悟。義以爲車。信以爲路。拔乎其類。益見所樹。有儼師像。金剛之刹。傍有石㙮。藏如來骨。琉璃之咽。珊瑚之舌。千輪玅相。若相傳鉢。萬曆年間。島夷逆命。西山奏功。弟子曰政。王曰彼272_300c寇。維予之讎。干戈八年。百姓不休。凡厥廷臣。孰紓予憂。公卿曰吁。維玆蠻猾。僻處卉服。俗本崇佛。寧因勢導。難以理奪。於是起師。裝送日本。滄溟萬里。天長地遠。三月候風。四月揚帆。乃見酋長。言出至諴。雍容談笑。和事遂成。從此八路。倭氛廓淸。士女歌舞。同我太平。西山高節。泗溟偉功。或去不去。其義則同。跋涉山河。紺馬火龍。銅爐鐵杖。木鞋珠囊。千載摩挲。如聞佛香。西山如雲。泗溟如水。水流有迹。雲去無止。


 

 

정조 12년 무신(1788,건륭 53)

 7월5일 (을축)
호조 판서 서유린의 청으로 서산 대사의 사당을 세우게 하다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중 휴정(休靜)의 사적이 고 재상 이정귀(李廷龜)·장유(張維)가 지은 비문에 실려 있는데, 비문에 ‘서산 대사(西山大師)가 임진 왜란 때 국가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선묘(宣廟)께서 팔도 십육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으로 삼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 내리신 선묘의 전교와 의발(衣鉢)이 호남 대둔산(大芚山)에 간직되어 있으니, 영남의 예에 따라 사당 세우는 것을 허락하고 이어 표충(表忠)이란 두 글자의 편액(扁額)을 내리는 것이 조정에서 포장(褒奬)하는 뜻에 부합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원전】 46 집 1 면
【분류】 *사상-유학(儒學) / *왕실(王室)

 

간이집(簡易集) 제8권

 환조록(還朝錄)
삼응(三應)의 시권에 차운하다. 그는 휴정(休靜)의 사미(沙彌)인데, 지금 계속해서 유정(惟政)을 섬기고 있다.


오늘날의 오조(五祖)와 육조(六祖)가 바로 / 今之五六祖
우리 스님의 과거와 현재 스승들이시라나 / 卽尒故新師
세상 구하러 세상 벼슬 교대해 받은 터에 / 捄世遞恩印
서울에 와서 기대는 곳은 여전히 절간이군 / 依京猶道祠
선종(禪宗)의 가풍이 스님의 몸에 엄존(儼存)하거니 / 家風玆乃在
의발(衣鉢)을 전한 법이 어디에 또 옮겨 가랴 / 衣法也非移
하지만 나는 머리에다 관을 씌워 주고픈데 / 顧我冠顚志
과연 어느 쪽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일는지 / 孰成而孰虧
휴정과 유정이 서로 계속해서 승직(僧職)을 주고받았고, 유정이 현재 삼청(三淸)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1]오조(五祖)와 육조(六祖) : 중국 선종(禪宗)의 오조(五祖)인 홍인(弘忍)과 그의 제자인 육조대사 혜능(慧能)을 말하는데,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그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하지만 …… 주고픈데 : 삼응(三應)을 유가(儒家)로 인도하여 환속시키고 싶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한유(韓愈)가 승려를 전송한 시 가운데 “지금 그대를 우리의 도로 끌어들여, 삭발한 머리에 유자(儒者)의 관을 씌워 주고 싶구려.[方將斂之道 且欲冠其顚]”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2 送靈師》
다산시문집 제4권
 시(詩)
탐진 풍속 노래[耽津村謠] 15수

누리령 잿마루에 바위가 우뚝한데 / 樓犁嶺上石漸漸
길손이 눈물 뿌려 사시사철 젖어 있다 / 長得行人淚灑沾
월남을 향하여 월출산을 보지 마소 / 莫向月南瞻月出
봉마다 모두가 도봉산 모양이라네 / 峯峯都似道峯尖
월출산은 강진(康津)에 있고, 도봉산은 양주(楊州)에 있음.
동백나무 잎들은 얼어도 무성하고 / 山茶接葉泠童童
눈 속에 꽃이 피면 붉기가 학 이마 같아 / 雪裏花開鶴頂紅
갑인년 어느 날에 소금비가 내린 후로 / 一自甲寅鹽雨後
유하나무 감귤나무도 모두 말라 없어졌다네 / 朱欒黃柚盡枯叢
바닷가 왕대나무 키가 커서 백 자러니 / 海岸篔簹百尺高
지금은 낚싯배 상앗대로도 못 쓴다네 / 如今不中釣船篙
정원지기가 날마다 새 대를 가꾸어서 / 園丁日日培新笋
죽력 내내 권문세가에 바치기 때문이야 / 留作朱門竹瀝膏
성벽은 다 무너져 언덕바지 설렁한데 / 崩城敗壁枕寒丘
해가 지면 징소리만 주춧돌을 울린다네 / 鐃吹黃昏古礎頭
여러 섬에 나무들을 해마다 베어만 내지 / 諸島年年空斫木
청조루를 중건하는 사람은 통 없다네 / 無人重建聽潮樓
무논에 바람 불면 보리물결 장관이고 / 水田風起麥波長
보리타작 할 무렵에 모를 게다 꽂는다 / 麥上場時稻揷秧
배추는 눈 속에서 새로 잎이 파랗고 / 菘菜雪天新葉綠
병아리는 섣달에 솜털이 노랗다네 / 鷄雛蜡月嫩毛黃
석제원 북쪽에는 갈림길이 하 많아서 / 石梯院北路多歧
예부터 낭자들이 이별하는 곳이라네 / 終古娘娘此別離
한도 많은 문 앞의 수양버들 나무들은 / 恨殺門前楊柳樹
그통에 다 꺾이고 남은 가지 몇 개 없어 / 炎霜摧折少餘枝
눈처럼 새하얀 새로 짜낸 무명베를 / 棉布新治雪樣鮮
이방에 낼 돈이라고 졸개가 와 뺏는구나 / 黃頭來博吏房錢
누전의 조세를 성화같이 독촉하여 / 漏田督稅如星火
삼월하고 중순이면 세 실은 배를 띄운다네 / 三月中旬道發船
왕적(王籍)에 누락된 민전(民田)이 6백 여 결(結)에 이르는데 그것을 재
결(災結)로 거짓 보고하고 있으니 국가 조세가 얼마나 많이 축이 나겠는가.

완주의 황옻칠은 맑기가 유리 같아 / 莞洲黃漆瀅琉璃
그 나무가 진기한 것 천하가 다 알고 있지 / 天下皆聞此樹奇
작년에 성상께서 세액을 견감했더니 / 聖旨前年蠲貢額
봄바람에 밑둥에서 가지가 또 났다네 / 春風髡蘖又生枝
오만족 총각인지 머리털은 더부룩한데 / 烏蠻總角髮如雲
써내는 글씨 보니 중국 문자 아니로세 / 寫出三倉法外文
자바섬이 아니면 루손섬에서 왔으렷다 / 不是瓜哇應呂宋
장미빛 옥합에서 야릇한 향내 풍기네 / 薔薇玉盒發奇芬
이때 표류선이 제주도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음.
백련사 누대 앞에 둥그렇게 비친 물결 / 蓮寺樓前水一規
봄이면 눈 같은 조수 문중방까지 오른다네 / 春潮如雪上門楣
유명한 절 다해봐야 두륜사가 으뜸이지 / 名藍總隷頭輪寺
서산대사 공적 기린 어제비가 있으니까 / 爲有西山御製碑
시골 애들 습자법이 어찌 그리 엉망인지 / 村童書法苦支離
점획과파 모두가 낱낱이 비뚤어져 / 點畫戈波箇箇欹
글씨방이 옛날에 신지도에 열려 있어 / 筆苑舊開新智島
아전들 모두가 이광사에게 배웠었는데 / 掾房皆祖李匡師
가시밭길 어느 때나 앞길이 트일는지 / 荊棘何年一路開
누른 띠밭 참대나무 주릿대 비슷하네 / 黃茅苦竹似珠雷
형방의 아전들이 소란 떠는 것이 / 形房小吏傳呼急
서울에서 누가 또 귀양을 왔군그래 / 知是京城謫客來
삼월이면 송지에 말시장이 열리는데 / 三月松池馬市開
오백 푼만 집어주면 천재마를 고르게 되지 방언에 좋은 말을 일러 천재마(天才馬)라고 함. / 一駒五百揀天才
흰말총 체라던지 검은말총 갓이랑은 / 白騣籮子烏騣帽
그 모두가 한라산 목장에서 온 거라오 / 都自拏山牧裏來
전복이야 옛날부터 점대에서도 즐겼지만 / 自古漸臺嗜鰒魚
동백기름이 창자 훑어낸다는 것 헛말이 아니로세 / 山茶濯䐈語非虛
성 안의 아전들 들창문 안에는 / 城中小吏房櫳內
규장각 학사들의 서찰이 다 꽂혔네 / 徧挿奎瀛學士書
도독 영문 둔 지가 이백 년이 되었는데 / 都督開營二百年
부두에는 왜놈 배를 다시 매지 못했었지 / 皐夷不復繫倭船
진린의 사당 속엔 봄풀이 우북한데 / 陳璘廟裏生春草
아낙들이 돌을 던져 아들 점지 해달란다네 / 漁女時投乞子錢

[주D-001]청조루 : 강진현(康津縣) 객관(客館) 남쪽에 위치한 누대. 현감(縣監) 오순종(吳舜從)이 건립한 것이라고 함. 《東國輿地勝覽》
[주D-002]오만족 : 중국 사천성(四川省) 남부, 운남성(雲南省) 동북부 등지에 흩어져 사는 종족들. 《唐書 南蠻傳》
[주D-003]점획과파 : 습자(習字)하는 기본법. 즉 점찍고, 건너긋고, 삐치고, 파임하는 것이다.
[주D-004]글씨방이 …… 있어 : 영조(英祖) 연간의 서예가요 양명학(陽明學)에 밝았던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나주(羅州)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처음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었는데, 그의 문필을 좋아하는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자 그를 다시 진도(珍島)로 이배하였다. 이광사는 그 배소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후학 지도에 몰두하였음. 《東國文獻筆苑編》
[주D-005]주릿대 : 형구(刑具)의 일종. 원래 주뢰(周牢)인데 여기서는 글자를 바꾸고 음만 취하여 주뢰(珠雷)로 표기한 듯함.
[주D-006]점대 : 대(臺) 이름. 한(漢) 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서쪽에 있었는데, 송(宋)의 소식(蘇軾)이 쓴 〈복어행(鰒魚行)〉에, “점대에 사람 없고 긴 활만 쏘던 시절, 처음에는 사람들이 복어 먹을 줄 몰랐다네.[漸臺人散長弓射 初噉鰒魚人未識] …… ” 하였음.
[주D-007]진린 : 정유 재란(丁酉再亂) 때 우리나라에 파견되었던 명(明)의 수군 제독.

 

碩齋稿卷之九
 海東外史
[西山大師] a_287_152c


西山大師者。完山人也。俗姓崔氏。父昌世爲箕子廟參奉。師誕三歲。而有老人謂其父曰。吾訪少沙門耳。遂以兩手擧兒。呪數聲撫其頂曰。以雲鶴字此兒。因忽不見。以故名曰雲鶴。甞與羣兒遊。輒立石爲佛。聚沙爲塔。及長。風骨英秀。力學靡懈。事其親至孝。十歲287_152d而父母歿。就學於泮宮。欝欝不得意。南遊智異山。遂悟禪旨。聽法於靈觀大師。剃髮於崇仁長老。年三十。中禪科。自大選陞禪敎。判兩宗事。忽喟然歎曰。吾出家之志。豈在於斯乎。卽解綬歸楓岳。及壬辰之役。國王西幸龍灣。乃仗劒道謁。王曰。世難極矣。爾可弘濟耶。遂泣而拜命。命爲八道十六宗都捴攝。諭方岳禮遇之。當是時。雪英起於關東。處英起於湖南。師募緇徒一千五百。合關東湖南僧軍五千人。與提督李如松。戰倭于牧丹峯。斬獲甚多。倭宵遁。師以勇士百人。迎駕還都曰。臣年八十。精已耗矣。請以戎事287_153a屬臣之徒惟政處英。歸老西山。惟政者雪英也。王嘉其志。賜號國一都大禪師禪敎都捴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甲辰正月二十有三日。會比丘於竗香山之圓寂菴。爇香講法。取影本書其背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遂趺坐而逝。年八十五。法臘六十七。異香滿室。二十餘日而始歇。師法號休靜。名其堂曰淸虗。甞登香爐峯題詩曰。萬國都城如垤蟻。千家豪傑若醢鷄。師雖鞱光不耀于世。而問道者日衆。李提督甞以詩贈之曰。無意圖功利。專心學道仙。今聞王事急。捴攝下山巓。李如松亦稱細玩尊287_153b書。足覘所養。予以紅柬。東征文武諸公。又以爲國討賊。忠誠貫日。不勝珍謝。各以銀五兩靑布一段。謹助義饗。曰勑使行人司行人薛藩。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加一品服兵部右侍郞宋應昌。贊畫兵部員外劉黃裳。兵部主事袁黃寬。奠督陣葉邦榮。參贊軍機事同知鄭文彬。知縣趙汝梅。經理戶部主事艾維新。欽差布政司都御史韓取善。遼東都司張三畏。經歷鄧璠。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総兵官中軍都督府都督寧夏伯兼太子少傅李如松。中協守副総兵都督楊元。左287_153c協守副総兵李如栢。右協守副総兵都指揮張世爵。原任都司李鎭。中都司吳夢豹。遊擊章接。遊擊李文昇。督陣遊擊徐輝。義州衛參將李如梅。參將駱尙志。統領宣府東路副総兵楊紹先。提督標下中軍參將方時春。統領宣府副総兵任自強。統領宣府遊擊周弘謨。統領大同營遊擊高策。統領大同營遊擊谷燧。遊擊王承恩。統領標下親丁遊擊李寧。眞定遊擊趙文明。保定遊擊梁心。陝西遊擊高徹。山西遊擊施朝卿。參將陳邦哲。經畧標下遊擊錢世禎。密雲標營都司方時輝。建昌車營都司王問。防海南兵遊擊吳惟287_153d忠。參將胡澤。遊擊王守寬。遵化左營參將李芳春。原任參將張應种。參將郭夢徵。參將蘇國賦。參遊佟養中。參遊胡鸞寬。奠副総兵佟養正。副総兵祖承訓。副総兵査大受。原任副総兵孫守廉。副総兵王維貞。副総兵王有翼。副総兵吳希漢。經歷孫論。經畧委官通判王君榮。旗皷中軍王承恩。中軍王汝禎。答應官李起明。經畧沈思賢。遊擊張奇功。遊擊葛逢夏。遊擊沈惟敬。遊擊戚金。遊擊王友迪。監督都司樓大有。遊擊戴胡弁。參遊李郁。參遊李如梧。參遊趙之牧。參將周易拜。其見重於中國人有如此。今上甲寅。命建遺287_154a像之堂。以宸章銘之。


 

 

다산시문집 제12권

 변(辨)
송광사(松廣寺)의 옛 바리때[古鉢]에 대한 변증
 
 

어떤 객(客)이 나에게 묻기를,
“물건 가운데는 볼 수는 있으나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송광사(松廣寺)의 옛 바리때[古鉢]가 그것이다. 이 바리때는 옛날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물려준 그릇으로서 백동(白銅)으로 본떠 만든 것으로 모두 다섯 개인데, 정(丁)과 무(戊)를 갑(甲)과 을(乙)에 넣어도 들어가고, 을(乙)과 병(丙)을 갑(甲)과 무(戊)에 넣어도 들어간다. 내가 중[僧]들의 바리때를 많이 보았으나, 큰 것은 그 밖에 위치하고 다음 것은 그 다음에 위치하여 차서대로 층이 겹쳐지면서 적어질수록 더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 갑(甲)과 을(乙)의 차서는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었다. 그런데 서산(西山)의 바리때만은 이와 같으니, 어찌 이른바 영환괴궤(靈幻怪詭)하여 깊이 추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나는,
“그렇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다섯 개의 그릇이 서로 겹쳐졌을 때 그 그릇의 입이 어떠하던가? 대패[鉋]로 민 듯이 숫돌처럼 평평하던가, 아니면 밖에 있는 것이 조금 낮고 안에 있는 것이 조금 높아서 조금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던가?”
하니, 객이,
“조금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기는 하나 그 차이는 겨우 기장 한 알[一黍]의 차이 뿐이었다.”
하였다. 나는,
“그러면 그 그릇의 제도가 위아래의 둘레와 직경(直徑)이 차이가 없고 형상이 죽통(竹筒)과 같던가, 아니면 위는 넓고 아래는 좁아서 조금이라도 넉넉하거나 훌쭉한 차이가 있던가?”
하니, 그가,
“두껍고 얇은[豐剡] 차이가 있어서 거의 손가락 하나만 하였다.”
하였다. 나는,
“그러면 그 그릇의 두께[厚]는 소나 말의 가죽만 하던가, 아니면 견지(繭紙)처럼 얇던가?”
하자, 그는,
“그 두께는 늙은 누에가 지은 고치만한데 조련(調練)이 아주 균일하였다.”
하므로, 내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 그릇은 지극히 범상한 물건이요, 이른바 ‘영환괴궤(靈幻怪詭)’한 물건이 아니다.”
하니, 그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나는,
“그 그릇의 두께가 고치[繭]만하고 그 생김새는 위가 넓어서 다섯 개의 그릇 두께가 그 위의 넓이와 호발(毫髮)의 차이도 없게 만들었다면 갑(甲)과 을(乙), 을(乙)과 갑(甲)이 진실로 서로 들어갈 수 있으나, 그 그릇의 입에 이르러서는 한 알의 기장[黍]만한 차이는 없을 수 없다. 그러니 한 알의 기장만한 차이가 있어서 고치[繭]만한 두께가 있게 된 것인데 무엇이 이상한가. 그것을 만든 공인만은 양공(良工)임에 틀림없다.”
하니, 객이 껄껄 웃으면서,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이 그릇은 과연 ‘영환괴궤(靈幻怪詭)’한 것이 아니네그려. 사람들이 이른바, 보기는 하면서도 생각으로는 알기 어렵다는 것을 그대는 보지 않고도 생각으로 알아내니, 그대야말로 박식(博識)한 사람이네.”
하므로, 나는 감당치 못해 머뭇거리면서 사양하기를,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오직 항상 존재하여 오래도록 전해지는 물건은 이른바 영환괴궤(靈幻怪詭)’한 것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는 등의 요술은 바로 눈 한번 돌리는 동안에 벌어지는 일이요, 오래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다산시문집 제17권
 비명(碑銘)
화악 선사(華嶽禪師)의 비명(碑銘)

사문(沙門) 혜장(惠藏)이 보은(寶恩)의 산원(山院)에 있는 나에게 들러, 그의 법조(法祖) 화악(華嶽)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에게 묘비에 쓸 글을 청했다. 나는 그가 호매(豪邁)하되 불우(不遇)했던 것이 슬퍼서 이를 허락했다. 혜장의 말은 다음과 같다.
화악 선사는 색금현(塞琴縣 지금의 해남임)의 화산방(花山坊)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대둔사(大芚寺)에서 머리를 깎았다. 얼뜨기 같아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가래[鏵臿]ㆍ괭이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아 배를 채웠으므로 비록 짚신을 삼아 파는 자일지라도 그를 천하게 여겼다.
하루는 매우 고달파서 상원루(上院樓) 아래에서 진 짐을 벗어놓고 쉬고 있었다. 그때 취여삼우 선사(醉如三愚禪師)가 대중을 모아 놓고 화엄종지(華嚴宗旨)를 강론하고 있었다. 선사는 누판(樓板) 아래에서 남몰래 그것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깨달아, 지고 있던 농기구[田器]를 모두 동료에게 주고 귀의했다. 위로 올라가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며 굳이 가르침을 청하니, 이날 온 와중이 크게 놀랐다는 것이다. 그때 마침 대둔사에는 토목 공사가 있었는데, 선사는 낮에는 도끼질과 벽 바르는 일을 도와 주고, 저녁에는 돌아와 솔방울[松子]을 주워 부엌에 불을 넣고 밤을 새워가며 불서(佛書)를 읽었다. 3년이 지나자, 그와 같은 서열에 있던 자들은 모두 뒤로 처졌다.
그는 사방을 구름처럼 떠돌며 참오(參伍)하여 인증(印證)을 받았는데, 마침내 취여삼우(醉如三愚)의 방에서 점향(拈香)하게 되었다. 이때 사미(沙彌)들이 몰려들어서 대둔사의 모임에는 배우는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때 북방의 월저 선사(月渚禪師)가 소문을 듣고 와서 뵙고 그와 더불어 선지(禪旨)를 논하였다. 선사는 그 영도하던 대중을 모두 월저 선사에게 사양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크게 놀라 소란을 피웠다. 선사는 그들을 달래기를,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고는, 인솔하여 월저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방 한 칸을 쓸고는 두문 불출 하며 면벽(面壁)하였다. 월저는 돌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남쪽에 가서 육신(肉身)의 보살을 만났다.”
만년에는 술에 빠져 매일 밤 곤드레가 되어 커다란 절구공이를 들고 절의 주위를 몇십 번 혹은 몇백 번씩 돌았다. 그때 그는 절구공이로 집모퉁이 축대와 뜰의 낙숫물받이를 다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야릇하고 시끄럽게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배우는 자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방문을 나오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까닭을 물었으나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시적(示寂 승려의 죽음)하려 할 때에는 두륜산(頭輪山)에 천둥이 치더니, 다비(茶毗 화장(火葬)을 말함)한 뒤에는 사리(舍利) 두 알을 얻었다.
선사의 성은 김씨이고 법명(法名)은 문신(文信)인데,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연간의 사람이다. 그의 전등(傳燈)의 연원은 위로 서산(西山)의 사점주(四點炷)를 이었고 아래로는 혜장(惠藏)의 사견발(四見跋)에 이르렀으니, 선사는 그 가운데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땅파는 가래 있으니 / 有趙
가래 호미 사라고 외쳤다네 / 買䤥
이에 그 짐을 풀고 / 迺釋其㓺
눈물 콧물 가로세로 흘렸다네 / 涕洟衡從
굶어도 밥을 못 얻으니 / 飢不値餼
쉰밥 찬밥 어찌 가리리 / 害餲害饛
무지개가 밤에 떠서 / 蝃蝀夜隮
하늘에 높이 솟았네 / 碧落穹窿
조창이 고요한데 / 槽廠闃廖
술 취한 절구공이 콩콩 울린다 / 醉杵銎銎
너를 아는 자 적어 / 知爾者寡
귀머거리마냥 웃기만 하네/褎如其聾
만 골짜기에 바람 일어 / 不若大驚
크게 놀라게 함만 같지 못하다 / 萬壑生風
백년 뒤에는 / 百年而逅
밝기가 발몽(發矇)한 것과 같으리 / 昭若發矇

[주D-001]취여삼우 선사(醉如三愚禪師) : 취여(醉如)는 조선의 스님인 삼우(三愚)의 별호. 얼굴이 붉다 해서 그의 전법사(傳法師)인 해운(海運)이 지어준 별호.
[주D-002]전등(傳燈) : 등은 어두운 데를 비쳐주는 것이므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는 교법(敎法)에 비유하는데, 이 교법을 스승이 제자에게 서로 전하여 가는 것을 말한다. 법맥(法脈)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는 것을 등불이 꺼지지 않는 데에 비유한 것.
[주D-003]서산(西山)의 사점주(四點烓) …… 혜장(惠藏)의 사견발(四見跋) :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겐 네 명의 수제자가 있었으니 사점주란 그 네 명의 마음의 심지에 서산이 도(道)의 불을 붙여 주었다는 것을 말함. 그 네 명 중 소요 태능(消遙太能)의 계통이 화악 문신(華嶽文信)이고, 화악 문신의 재전 제자가 연파 혜장(蓮波惠藏)이다. 혜장은 네 명의 스승에게 배워 깊은 이치를 터득하였으니 사견발은 그것을 말함. 그 네 명의 스승은 아암 장공의 탑명에 나오는 춘계 천묵(春溪天黙)ㆍ연담 유일(蓮潭有一)ㆍ운담 정일(雲潭鼎馹)ㆍ정암 즉원(晶巖卽圓)임.
[주D-004]귀머거리마냥 …… 하네 : 유여(褎如)는 유여 충이(褎如充耳)의 준말. 유여 충이는 옷을 잘 입고 귀막이를 하였다는 뜻으로, 곧 외모는 훌륭하나 간언(諫言)이나 충언(忠言)을 듣지 않음을 비유.

백호전서 제34권
 잡저(雜著)
풍악록(楓岳錄)

임자년 윤7월 24일(정유) 맑음. 아침에 배와 대추 등 과일을 사당에다 차려놓고 풍악(楓岳)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출발하여 통제(統制) 외삼촌 댁에 도착하였다.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라곤 《주역》 두 권과 일기책 한 권뿐이고, 그 나머지 일행들의 필요한 여행 도구는 모두 외삼촌이 챙기셨다. 부평 사는 외삼촌도 오셔서 나더러 멀리 가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타일렀다. 통제 외삼촌과 함께 출발하여 동소문 밖에 나가 누원(樓院)에서 말에 꼴을 먹이면서 지나가는 중 덕명(德明)이라는 자를 만났다. 그 중은 일찍이 풍악산 구경을 했던 자로서 우리에게 대충 풍악의 뛰어난 경치를 말해주었다. 늦게야 양주읍(楊州邑)에 도착하여 외삼촌은 양주 목사를 찾아가고 나는 민가에 부쳐 있었는데, 양주 목사 이원정(李元禎)이 찾아와서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유군 여거(柳君汝居)-이름은 광선(光善)임- 가 따라왔다. 유군은 원래 모르는 사이였는데 외삼촌을 통해 와 좌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이다. 그 민가에 벼룩이 많아 잠자리를 고을 서당(序堂)으로 옮겼는데 고을 주수의 아들인 정자(正字) 담명(聃命)이 찾아왔고 주좌(州佐)인 우(禹)와 한(韓) 두 사람도 왔다. 날씨가 매우 더웠다.

25일(무술) 맑음. 양주 목사 부자(父子)가 또 왔다. 아침에 출발하여 무성(蕪城) 고개를 넘어 감악산(紺嶽山)을 바라보고 가면서 유군(柳君)과 함께 홍복(弘福)ㆍ고령(高靈)ㆍ도봉(道峯)ㆍ불암(佛巖) 등지를 가리키기도 했다. 입암(笠巖) 율정(栗亭) 아래서 말에 꼴을 먹인 후 일행과는 일단 갈라섰다. 나는 송형 석우 계신(宋兄錫祐季愼)이 살던 곳을 묻고 송군 욱(宋君澳)의 초당에 들렀더니 매화나무 대나무는 옛 그대로이고 벽에는 내가 몇 해 전에 써 준 기문(記文)과 허장 미수(許丈眉叟)가 쓴 기(記)가 걸려 있어 읽어보니 지난날의 회포가 일어 눈물이 글썽했다. 송군 제(宋君濟) 부자를 다 조문하고 일행을 뒤쫓아 간파령(干波嶺) 아래서 만났다. 차근연(差斤淵)을 건너서는 유군과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 가다가 저물어 신릉(新陵)정극가(鄭克家) 산장에 당도하여서는 함께 잤는데, 자해(紫蟹)에 홍주(紅酒)를 마시며 서로 흔쾌하게 보냈다.

26일(기해) 맑음. 정극가와 출발은 함께 했으나 길이 달랐다. 나는 진수동(眞樹洞)으로 이 참봉 언무 경윤(李參奉彦茂景允)을 찾아가서 그의 세 아들 태양(泰陽)ㆍ태징(泰徵)ㆍ태륭(泰隆)과 윤생 세필(尹生世弼)을 만나 보았다. 윤생은 이 참봉의 이모 아들로 우리 남원(南原) 윤씨라고 하였다. 이생 태양이 나를 따라왔다. 군영동(群英洞)에 이르러 허미수(許眉叟) 어른을 뵈었는데 일행들은 먼저 와 있었고, 미수 어른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허생 함(許生)ㆍ송생 직(宋生溭)ㆍ정생 태악(鄭生泰岳)을 만났다. 미수 어른은 서실로 나가고 그들과 함께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는데 초가집에 온갖 화초가 그윽한 정취를 풍겼다. 미수 어른이 두류산(頭流山)ㆍ오대산(五臺山)ㆍ태백산(太白山) 등의 기록과 정허암전(鄭虛菴傳)ㆍ답자대부상서(答子代父喪書)를 꺼내 보여 주기에 나는 일찍이 지은 선계설(禪繼說)로 수답하였다.
또 짐 꾸러미에서 술과 과일을 내놓아 몇 순배 대작한 후 섬돌 위에 있는 일월석(日月石)을 구경하였다. 옛날에 석경(石鏡)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해와 달 그림자가 석면에 훤히 비쳤으며 미수 어른이 손수 그 세 글자를 조각했다고 한다. 얘기 도중 길을 떠나는 정표로 글을 지어달라고 청했더니 쾌히 허락하고 또 전서(篆書)로 광풍제월(光風霽月) 낙천안토(樂天安土) 수명안분(受命安分) 이렇게 열두 자를 써 주어 유군과 나눴는데 유군은 수명(受命) 이하 네 글자를 차지했다. 늦어서야 하직하고 출발했는데 외삼촌과 유군은, 오늘은 산 속의 신선늙은이를 만나 봤으니 헛걸음은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징파도(澄波渡)를 건너 옥계역(玉溪驛)에서 잤는데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27일(경자) 맑음.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시냇가에서 말에 꼴을 먹이다가 길을 지나가고 있던 덕능(德能)이라는 산사람을 만났다. 풍악에 가면 서로 얘기할 만한 산인(山人)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유점암(楡岾菴)에 있는 나백(懶伯)과 장안암(長安菴) 곁에 사는 취양(就陽)이 있다고 대답했다. 식사를 끝내고 철원(鐵原) 고을을 향해 가다가 용담 고개 위에 올랐더니 동북으로 산이 확 트여 몇백 리가 훤히 바라다보였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거기가 평강(平康) 지경이라고 하였다. 한낮에 철원 읍내에 들렀더니 주수 권공 순창(權公順昌)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저녁에는 찾아와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는데 송이버섯ㆍ팥배ㆍ머루ㆍ다래 등 산중 별미를 두루 맛볼 수 있었다. 아침에 함께 북관정(北寬亭)에 오르기로 약속하고, 얘기 도중 권공과는 권수부(權秀夫) 얘기가 나와서 살아서 있고 죽어서 없고를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 앞길이 험난할 것이라는 쪽으로 말이 갔는데 이때 권공 말이, 앞길이 비록 험난하다 하더라도 노장(老將)이 일을 맡으면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외삼촌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리하여 외삼촌 말씀이,
“이번 길에는 내가 사양하지 않고 용사를 할 것이니 우리 일행 모두도 내가 통솔하면서 좌지우지 할 것이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8일(신축) 맑음. 아침에 주수가 와서 함께 북관정에 오르는데 펑퍼짐한 넓은 평야가 백 리 멀리 뻗쳐 있고,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금학산(琴鶴山)인데 그것이 벋어 가서 보개산(寶蓋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 가운데 서너 개 옹기종기 언덕이 있는데 그것은 보개산이 벋어나온 종적이라고 하였다. 간단히 술 한 잔 나누고 작별했는데, 그때 마침 시원한 바람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데 높은 산 가파른 절벽 위에는 이미 가을빛이 역력하였다. 정자가 큰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어 동으로는 궁예(弓裔)의 유허가 보이고 서북으로는 보개산ㆍ숭암산(嵩岩山) 등을 바라볼 수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데 오르면 시상이 떠오른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으나 그때는 시구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이 시는 그 뒤에 쓴 것이다.

내 봉래산 구경의 꿈을 안고 / 我夢蓬萊好
가다가 북관정에 올라 보니 / 行行登北觀
중간에 산들이 확 트이고 / 萬山忽中闢
감돌아 물이 흐르는 곳 / 一水何縈灣
저리 광활한 곳 궁예의 옛터인가 / 曠蕩弓王宅
우뚝 솟아 있는 보개산이로세 / 穹隆寶蓋山
비옥한 들판도 천만 주나 되어 / 沃野千萬疇
함곡관 같은 천연의 요새로세 / 天府猶函關
영웅 호걸도 각기 한때인지라 / 雄豪亦一時
옛터엔 쓰러진 담만 남아있네 / 故墟惟頹垣
흥망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되었을까 / 興亡機翻覆
국가 치란도 마찬가지라네 / 治忽迭相看
내가 왔을 때는 칠월이라서 / 我來屬流火
구름 사이론 기러기떼 날고 / 鴻鴈翔雲間
숲속에는 시원한 바람 일어 / 涼風起林木
고원에는 벌써 가을 기운인데 / 秋氣屯高原
삶과 죽음에 옛 감회가 깊고 / 存沒感舊懷
주인의 정은 끈끈도 하네 / 主人情惓懃
이별의 자리에 한 독 술이언만 / 離亭一樽酒
앞길은 얼마나 멀고 멀까 / 前路嗟漫漫
노장이 기율을 잃지 않아도 / 老將不失律
작별 앞두고 말에 파도가 이네 / 別語生濤瀾
석 잔 술로 말에 올라 떠나니 / 三杯上馬去
바람에 옷소매가 펄럭이네 / 征袂風翩翩

경재소(京在所)에서 말에 꼴을 먹이고 황 감사(黃監司) 정사에서 밥을 먹고 숨을 돌리는데, 푸르른 절벽 사이로 한 줄기 시내가 흐르고 있어 계산(溪山)의 정취가 물씬하였다. 우리를 맞으러 소년이 왔기에 성명을 물었더니 황응운(黃應運)으로 고 감사 경중(敬中)의 현손(玄孫)이며 수재(秀才) 석(錫)의 아들이라고 한다. 자기 선대의 유첩(遺帖)을 꺼내 보이는데 거기에 우리 선인(先人)이 황 감사를 전송하면서 읊으신 시 두 수가 적혀 있어 받들어 읽고는 슬픈 감회를 느꼈다. 황 수재를 시켜 그 시를 등사해 오게 하고 드디어 금화(金化)를 향해 출발하여 오다가 시냇가에서 쉬고는 금화 고을을 지나는데 앞길에서 바라보니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앞에 비각(碑閣)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바로 홍 감사가 순의(殉義)한 곳이라고 하였다. 말에서 내려 읽어 보니, 평안도 순찰사 홍명구 충렬비(平安道巡察使洪命耈忠烈碑)라고 씌어 있었다.
내가 몇 해 전에 이를 두고 쓴 시가 있기에 유군에게 외워 보였는데 시제는 애부여(哀夫如)로, 부여(夫如)는 금화현의 별호이다. 시는 이렇다.

화의가 성립된 후 일이 크게 잘못 되어 / 和議之後事大謬
외로운 십제성이 위기일발 이었다네 / 十濟孤城危一髮
구름 같은 남쪽 군대 북도 한 번 못 울리고 / 南師雲屯鼓不揚
북군들은 도망가고 숨기에 정신없어 / 北師鳥竄旗先奪
우리 공이 소매 털고 눈물로 일어났다가 / 我公投袂涕淚起
애석하게 힘이 다해 중도에 죽었다네 / 嗚呼力屈中道死
일사보국 그 마음을 한평생 다졌기에 / 平生一死許報國
싸움터에서 시체되는 것 두려울 바 아니지만 / 橫屍軍前非所惴
단칼에 교졸의 목 베버리지 않았다가 / 恨不用釼斬驕卒
천하사를 그르친 것 그것이 한이라네 / 倉卒失計天下事
홍 감사ㆍ유 병사는 / 洪監司柳兵使
어찌하여 적군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 胡不提兵走遼碣
단숨에 천지를 바꿔놓지 않았던가 / 一擧可以旋天地
하늘이 우릴 돕지 않고 서생은 옹졸해서 / 天不佑我書生拙
투구 벗어 투항하고 안장 밑에서 살아남은 자도 있고 / 脫兜被髮鞍底活
고관 차림으로 들창 아래서 죽어간 자도 있었는데 / 披紫肘金牖下沒
그대 송산에서 밤중에 일어난 창황한 일 보지 않았던가 / 君不見松山半夜事蒼黃
십만 명 관군이 일시에 멸망하고 말았네 / 十萬官軍隨火滅

역리(驛吏)의 집에서 잤는데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진우운(秦遇雲)이라고 했다. 이날 극가(克家)가 얘기 도중 정군평(鄭君平)의 시 세 수를 외웠는데 좋았다. 나도 구경 나와서 옛 것을 찾고 싶은 감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시를 여기에다 적어 보았다.

이 나라에도 성인이 나셨는데 / 有聖生殊域
때는 방훈과 동시대였다네 / 于時並放勳
동천에 돋는 해 맞이하고 / 扶桑賓白日
박달나무는 청운을 꿰뚫는 듯 / 檀木上靑雲
이땅에 제후를 처음으로 세워 놓았으나 / 天地侯初建
산하는 아직 혼돈상태였다네 / 山河氣未分
무진년부터 천 년을 사셨으니 / 戊辰千歲壽
우리 임금 위해 축수하고 싶네 / 吾欲祝吾君
- 이상은 단군(檀君)이다 -

상 나라 서울에 제비는 돌아가고 / 亳社歸玄鳥
황하 배안에 백어가 나타나자 / 河舟見白魚
여덟 가지 법 조목 챙겨 가지고 / 還將八條敎
동쪽의 나라에 와 살았는데 / 來作九夷居
해외라서 주의 영향 받지 않고 / 海外無周粟
낙서 전수는 하늘의 뜻이었네 / 天中有洛書
지금은 몰락해 버린 옛 터에 / 故宮今已沒
은허인양 벼와 기장만 우거져 있네 / 禾黍似殷墟
- 이상은 기자(箕子)이다. -

웅장한 왕검성 도읍지에 / 王儉都雄壯
천손의 일 까마득하기만 하네 / 天孫事寂寥
흰구름 속에 말만 보이지 / 白雲空見馬
바다에 다리 소식 들을 길 없어 / 蒼海不聞橋
황홀하게도 신선이 되었으리니 / 怳惚神仙化
처량한 세대 멀기만 하여라 / 凄涼世代遙
그래도 문무정이 남아 있어 / 獨留文武井
전조의 것임을 알 수 있다네 / 猶得認前朝
- 이상은 동명왕(東明王)이다. -

29일(임인) 맑음. 역리들이 술과 과일을 가져와 대접하였다. 아침에 출발하여 직목역리(直木驛里)에서 말에게 꼴을 주고 외삼촌을 대신해서 회양 군수에게 편지를 써 역졸을 주면서 전하라고 했다. 중치(中峙)를 지나니 금화(金化)와 금성(金城)의 분계점이라는 돈대가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서쪽으로는 지세가 구불구불하면서 동쪽으로 높아지고, 동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낮아져서 물이 모두 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재를 넘어 10여 리를 더 가 큰 시냇가에 이르자 사람들 수십 명이 모여 물건을 교역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금성 장터이고 시내 이름은 남대천(南大川)이라고 했다. 시내를 끼고는 느릅나무ㆍ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짙어가는 가을빛 속에 나무 사이사이로 인가가 은은히 보였으며 마을은 널찍하고 확 트인데다 전답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마(人馬)들도 오고가고 하였다.
말에서 내려 다릿 가에서 쉬고 있노라니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도 깡마른 늙은 아전 하나가 앞에 와서 절을 하였다. 성명을 물었더니 지응룡(池應龍)이라고 하는데 함께 얘기해 보니 문자도 꽤 알고 또 말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그래서 글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소년 시절 사서(四書)와 이경(二經)을 읽고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한유(韓愈) 등 여러 문장가의 시를 일만여 수나 외웠으나, 과거에는 응했다가 합격을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은 시가 있으면 외워보라고 했더니 그는,

하얀 이슬 갈바람 계절은 가을인데 / 白露西風八月秋
눈 같은 갈대꽃이 강주에 가득하네 / 蘆花如雪滿江洲
지사라면 누구나 감개가 많을 때인 것을 / 從知志士常多感
어찌하여 그때에 송옥만이 슬펐으랴 / 不獨當年宋玉愁

했고, 또 금강산에 가 놀면서 지은 것이라고 외우는데,

흰구름 가에 있는 영롱한 사찰 하나 / 玲瓏金刹白雲邊
누각 밑 숲 사이로 오솔길 하나 났네 / 踏閣攀林一徑穿
동문에는 용이 나와 언제나 비 뿌리고 / 龍出洞門常作雨
소나무에 학의 둥지 몇 해 됐는지 모른다네 / 鶴巢松樹不知年
전상에 중은 서서 밥때라고 종 울리고 / 僧從殿上鳴鍾飯
산중에 온 나그네는 자리 빌려 졸고 있네 / 客至山中借榻眠
밤들어도 이상하게 꿈 이루지 못하는 것은 / 恠底夜來難得夢
들창 밖 우는 샘을 갈바람이 맴돌아서라네 / 秋風窓外繞鳴泉

하였다. 그의 세계(世系)를 물었더니 고려 말기 지윤(池奫)의 후예라고 하였다. 지윤이 베임을 당하자 그 자손들은 아전으로 전락되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윤이 문리(文吏)였기에 그 기류(氣類)가 서로 유전된 것 아니겠는가. 그 사람은 비록 늙고 쓸쓸해 보였지만 그 시는 읊을 만했으니 그 골몰한 꼴이 가련했다. 시내를 따라 내려오다가 금성 읍내에 있는 역리 김서립(金瑞立)의 집에서 잤다. 외삼촌이 주수에게 보낸 쪽지는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8월 1일(계묘)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창도역(昌道驛)에서 말에 꼴을 먹였다. 역관(驛館)의 벽위에 시 두 수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민 이상 제인(閔貳相齊仁)이 가정(嘉靖) 기해년에 읊은 것을 그의 원손인 민정중 대수(閔鼎重大受)가 각자하여 달아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술년에 어느 과객이 쓴 것으로 그의 성명은 씌어 있지 않으나 다 읊을 만했다. 민제인의 시는,

사랑하고 먹여 주고 누가 그와 같으리오 / 寵恩榮養孰如之
종남산 돌아보니 그리운 님 생각 나네 / 回首終南尙戀思
북쪽 변방엔 찬구름 멀리멀리 가 버렸고 / 北塞寒雲歸去遠
동문엔 어제 진 해 언제 다시 뜬다던가 / 東門落日出來遲
들국화도 다 지도록 가을은 깊어가고 / 花殘野菊秋將老
우정을 산이 둘러 두 갈래로 길이 났네 / 山遶郵亭路自岐
도끼 짚고 강을 건너 노를 쳐부숴야지 / 杖鉞渡江聊擊楫
한평생 먹은 마음 저버릴 수 있다던가 / 一生安肯負心期

하였고, 과객의 시는 이렇다.

험난하고 어려운 일 맛볼 만큼 보았건만 / 艱難險阻備嘗之
객관에 찾아드니 위로해 줄 사람 없네 / 客館無人慰所思
지는 해에 외로운 구름 동으로 멀리 가고 / 落日孤雲東去遠
갈바람에 북으로 가는 수령 행차 더디어라 / 秋風五馬北歸遲
차라리 두보처럼 집 생각을 할지언정 / 寧同杜子瞻家室
양주 같이 기로에서 울고 있진 않으려네 / 不學楊公泣路岐
나라 은혜 입은 이몸 무엇으로 보답하리 / 身被國恩何以報
교화 책임 다해볼까 마음 기약 했었는데 / 承流盡責是心期

나도 길을 가면서 다음과 같이 절구 한 수를 읊어 두 군(君)들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였다.

헝클어진 세상사 가닥이 안 풀리어 / 世事如絲不可理
갈바람에 높은 산에나 올라볼까 생각이라네 / 秋風欲上望高峰
공자님 뒤를 따라 바다에서 떼를 탈까 / 倘從魯叟浮滄海
신선이 되어가서 적송자를 불러볼까 / 更擬飆輪喚赤松

이에 두 군이 다 화답을 하였다. 저녁이 되기 전에 하지성(夏遲城) 민가에서 묵기로 했는데, 집주인 성명은 이천봉(李天鳳)이었다. 그날 길가에서 풀 꽃 등을 꺾어 여러 일행들과 함께 그 꽃과 풀의 성미를 분석해보고, 혹은 마부에게 물어 보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쑥 종류가 제일 많았고 또 이름이 있는 것들도 일곱 종류나 되는데, 그 지방 이름으로는 백양쑥ㆍ물쑥ㆍ참쑥ㆍ사자발쑥ㆍ다복쑥ㆍ제비쑥ㆍ벌쑥이었다. 혹자의 말로는, 백양쑥은 떨기로 나는 쑥으로 바로 옛날에 시초[蓍]라고 한 것이고 중국 사람이 만든 본초(本草)와는 맞지 않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가을이 되어 자색꽃이 피는 것이 그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마 산국화 종류가 아닌가 싶었다. 이어 여러 사람들 말이, 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은 없다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물론이다. 타고난 재목 그대로만 이용한다면 천하에 버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착하지 못한 자도 역시 써먹을 곳이 있을까?”
했더니, 모두 하는 말이,
“천하에 제일 못쓸 것이 착하지 못한 사람인데 그것을 어디에다 써먹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천하에 제일 쓸모 없는 것은 중간치인 것이다. 냉하지도 않고 화끈하지도 않고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면서 취할 만한 좋은 점도 없고 그렇다고 꼬집어 말할 만한 악도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차라리 아주 불선한 사람은 그런 대로 써먹을 곳이 있는 것이다.”
했더니,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걸(桀)과 주(紂)가 지극히 불선했기에 탕(湯)과 무왕(武王)이 그들을 정벌하자, 하늘이 도와주고 백성들이 돌아오고 하여 천하를 통일해서 자손 만대에 전하였고, 항적(項籍)과 왕망(王莽)은 나쁜 중에도 더 나빠 한 고조(漢高祖)와 광무제(光武帝)가 각각 그들을 죽임으로써 천하를 진동시켰고 그 여풍이 백세를 두고 영향을 주어 한 나라 4백 년 사직이 유지될 수 있었으니, 그게 쓸모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뿐 아니라 전쟁과 병사 통솔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니 한 사람을 죽였는데 삼군(三軍)이 떨고 적국이 항복해 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영웅이나 패주(伯主)들이 사업을 경륜하면서 천하를 차지하는 데 밑천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얻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이며 나도 그래서 쓸모가 있다고 한 것이다.”
했더니, 모두들 하는 말이,
“궤변은 궤변이지만 그래도 일리는 있어 사람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었다.”
하고서,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또 길에서 행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 말이, 산삼을 캐는 사람이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 사람 동행했으면 좋겠습니다. 데리고 가다가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와 같은 영약이라도 캐면 그 역시 좋은 길동무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외삼촌 말씀이,
“보아하니 그 사람 용렬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겠다.”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용렬한 사람이기 때문에 쓸 만하다고 한 것이지요. 그가 만약 준수하고 영리하다면 우리에게 쓰일 사람이 아니겠지요. 옛날 허노재(許魯齋) 말이, ‘말은 상등 말을 타고, 소는 중등 소를 부리고, 사람은 하등 사람을 써야 한다. 말은 준마라야 탈 만하고 소는 유순해야 다룰 수 있고 사람은 못나야 부려먹기가 쉬운 것이다. 만약 그가 지혜 있고 약은 사람이면 나에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그의 이용물이 되는 것이다.’ 했었고, 또 사마군실(司馬君實)에게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와서 일한 지가 오래 되어 사마공의 지위가 비록 참정(參政)에까지 이르렀지만 그때까지도 군실 수재(君實秀才)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소자첨(蘇子瞻)이 왔는데, 그 종은 그때도 똑같이 그리 말하였으므로, 자첨이 그에게 타이르기를, ‘상공(相公)이 지금 이미 참정이 되었으니 대참상공(大參相公)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하여 그 종이 그 후부터서는 자첨이 가르쳐 준 그대로 부르자 공이 깜짝 놀라, ‘누가 너더러 말을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하자, ‘지난번 소 학사(蘇學士)가 그리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하는 말이, 좋은 종을 자첨이 버려 놓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사람은 하등 사람을 써야 한다는 증험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한번 서로 웃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두 이야기가 모두 폐단이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을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를 측은히 여기고 도와 주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용렬한 자를 부릴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개인만 알고 이기심이 강하여 남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못 주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패자(伯者)나 하는 짓이지 인인군자(仁人君子)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리를 아는 자와 할 말이지 간웅(姦雄)에게는 할 말도 아닌 것이다. 말을 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다시 드는 것이다.

2일(갑진)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야음불천(也音不川)을 건너고 또 관음천(觀音遷)을 거쳐 보리진(菩提津)을 건너고 통구원(通溝院)을 지나 길가 민가에서 말에 꼴을 먹였는데, 주인 성명은 전기천(全起天)으로 우리에게 벌꿀과 과일을 대접하고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드디어 단발령(斷髮嶺)을 오르는데 산 이름은 갈리치(葛离峙)이고 샛길이 험준하여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여 영상에 올랐더니 회정(檜亭)이 있었다. 섬돌에 앉아 쉬면서 풍악산을 바라보았더니 풍악의 여러 모습이 모두 눈 앞에 역력히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절구 한 수를 지어서,

도성문을 동으로 나와 여드레를 소비하며 / 東出都門八日行
금성을 지나치니 여기가 회양일레 / 金城踏盡是淮陽
마니령 마루에서 구름 헤치고 앉아 보니 / 摩尼嶺上披雲坐
일만이천 봉우리가 차례로 맞아 주네 / 萬二千峯次第迎

라고 읊고, 유군으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였다. 이 날은 신원(新院)에서 잤는데 집주인의 성명은 김세익(金世翊)이었고 서울에 오면 찾으라고 약속하였다.

3일(을사) 맑음. 신원의 물을 건너고 철이현(鐵伊峴)을 넘어 만폭동(萬瀑洞) 입구에 와서는 마부들을 시켜 시냇가에서 묵석(墨石)을 주워오게 하였다. 시내를 가로질러 이리저리 건넌 다음 길가 소나무 숲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는 한 동구에 이르니 소나무 노송나무가 줄을 이룬 사이로 해송도 드문드문 끼어 있어 산이 비로소 기특하게 보였고 수석(水石)도 더 맑아 보여 동천(洞天)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우천도(牛川渡)라는 시내를 건너 말에서 내려 걷다가 시냇물에 발을 씻고 송단사(松壇寺)에서 조금 쉬고 있노라니 승려 대여섯 명이 나와 맞아 주었다. 그들과 함께 절로 들어갔더니 문간에 우뚝한 누각 하나가 구름 닿게 지어져 있는데 앞에 마주 보이는 장경봉(長景峯)은 천 길이나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곁에 줄지어 있는 몇 봉우리도 모두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으면서 기괴웅장하여 이미 인간에서 보던 바가 아니었다. 절 이름은 장안사(長安寺)인데 그 절에 사는 중에게 물었더니,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비 기씨(奇氏)의 원찰(願刹)로서 마룻대 들보 등 목재가 굉장하고 단청이 휘황찬란하기가 이 산 속에서 으뜸이라고 하였다. 그날은 절 문간 앞에서 산책하고 거닐었는데 수석이 너무 아름다웠다. 말라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중의 말로는 계수나무라고 했다. 노송나무 몸통에 잣나무 껍질이었는데 가지와 잎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뒤따르던 승려 몇 사람이 젊은 중을 시켜 절간 앞에서 해송자(海松子)를 따 오라고 하더니 거기에다 꿀을 타서 새참으로 내왔는데 역시 산중의 별미였고 또 석지(石芝)를 아침저녁 상에 올렸는데 그 산에서 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4일(병오) 맑음. 장안사를 출발하여 정양사(正陽寺)로 가려는데 그 곳 승려가 남여(藍輿)를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바위골짜기의 맑은 물, 살짝 물들여진 단풍잎을 걸음마다 앉아서 구경할 만하였다. 걷기도 하다가 남여로 타다가 했지만 다리가 건너질러진 길이나 돌무더기 비탈길은 사람이 나란히 갈 수가 없었다. 명연(鳴淵)에 이르러 조금 쉬었는데 물이 몇 길이나 깊어 보였지만 맑아서 바닥이 훤히 보이고 곤이(鯤鮞) 같은 잔 물고기들이 그 속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승려 말에 의하면 여기가 만폭동(萬瀑洞) 입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못 속에는 그래도 잔 물고기가 있지만 여기서부터 그 이상은 물고기가 올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한 곳에 다다르니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완연히 문을 이루고 있고 절벽 전면에는 세 불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나옹(懶翁)이 남긴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는 백화암(白華菴)이라고 하는 고색창연한 사찰이 있었으나 사는 중은 없고 부도(浮圖) 다섯 종류와 비 네 개가 서 있었다. 부도는 청허 휴정(淸虛休靜), 제월 경헌(霽月敬軒), 취진 의영(就進義瑩), 편양 언기(鞭羊彦機), 허백 명조(虛白明照), 풍담 의심(楓潭義諶)의 것으로, 경헌ㆍ의영ㆍ언기는 다 서산대사 청허의 제자이고, 명조ㆍ동산은 송월 응상(松月應祥)의 제자이며, 의심은 편양의 제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는 월사 의정(月沙議政)ㆍ백주 천장(白洲天章)ㆍ이단상 유능(李端相幼能)ㆍ백헌 의정(白軒議政)이 지은 것이고 쓰기는 의창군 이광(義昌君李珖)ㆍ동양위 신익성(東陽尉申翊聖)ㆍ판서(判書) 오준(吳竣)ㆍ낭선군 이우(朗善君李俁)가 쓴 것으로, 큰 비에 훌륭한 각자가 산문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조금 머무르면서 그것을 다 읽고 나서 또 표훈사(表訓寺)로 갔는데 역시 규모가 큰 절이었다. 불당은 남쪽을 향하였고 부처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 절 승려 말에 의하면 이곳 지형이 가는 배 형국이어서 부처가 앉아서 키를 잡고 있는 것처럼 앉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부처가 남향을 하고 앉았다가 만력(萬曆) 을사년에 홍수로 절이 무너졌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옛 모양대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궤변은 궤변이지만 역시 풍수가의 설이 아니겠는가.
조금 쉬었다가 정양사를 향해 가는데 산길이 더욱 가팔라서 걷다 쉬고 걷다 쉬고 해야 했다. 장안사에서 표훈사까지 오는 동안 남여를 버리고 걷기를 여러 번 하면서 회암(晦菴)의 ‘남악운(南岳韻)’에 차운을 해 보았다.

종들이 피로할까봐서 수레 내려 걸어가니 / 爲憫人疲舍輿行
그 마음 생기는 것 그게 영명 아니던가 / 此心生處是靈明
그 원두야 옛 현자가 이미 한 말이지만 / 昔賢已自原頭說
천하가 태평해야 이 마음도 태평이지 / 天下平時此心平

더위잡고 기어서 오르노라면 마치 계단을 걸러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급기야 한 높은 등성이에 오르니, 천일대(天一臺)라고도 하고 또 천을대(天乙臺)라고도 하는 곳이었다. 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사방이 확 트이고 바라보면 놀라울 정도인데, 정양사 승려 대여섯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선승 보원(普願)이라는 자도 와서 맞아 주었는데 낙건(絡巾)에 가사 차림으로 얼굴이 깨끗하고 정신과 기운이 맑아 보여 산중의 중에 대해 호감을 가짐직하였다. 그와 함께 솔뿌리 위에 앉아 사방을 두루 돌아보며 가리키고 묻고 했는데, 능호(凌灝)ㆍ영랑(永郎)ㆍ비로(毗盧)ㆍ중향(衆香)ㆍ향로(香爐)ㆍ혈망(穴網)ㆍ망고(望高)ㆍ백마(白馬)ㆍ장경(長景)ㆍ시왕(十王) 등의 봉우리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니, 옛사람이 이른바 ‘일천 바위가 수려함을 시새우고 일만 골짜기 물이 다투어 흐른다’고 했던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었다.
그 중에서 비로봉이 가장 높고 중향봉은 더욱 기절했으며 혈망봉은 험준해 보이고 망고봉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저희들끼리 영웅을 겨루는 듯했고, 백마봉ㆍ장경봉은 멀리 보이는 것이 마치 병풍을 줄세워놓고 휘장을 쳐놓은 듯했으며, 영랑봉ㆍ향로봉ㆍ능호봉은 마치 서로 읍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시왕봉과 그 이하 관음(觀音)ㆍ미륵(彌勒)ㆍ문수(文殊) 등의 봉우리들은 모두 불가(佛家)의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마치 부처들이 줄지어 서고 나란히 앉아서 경을 읽고 도를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일만 골짜기에서 샘이 울고 거기에 솔바람 소리까지 섞여 있어 마치 비바람이 불어 오고 밑에서 뇌성벽력이 이는 것 같기도 했다. 승려들 말로는, 이 산 옛 기록에 일만 이천은 담무갈(曇無竭)이 머물던 곳이라고 했는데, 담무갈은 부처 이름이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담무갈이란 인도말인 듯한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승려 얘기는 비루하고 허탄한 말이었다. 아마도 옛분들은 이 산의 일만 봉우리 일천 봉우리가 모두 산신령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이 날 따라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오고 이슬기운이 차고 맑아 붉게 물들여진 모든 덩굴과 단풍잎으로 가을 기운이 산 속에 가득하였다. 게다가 또 푸르른 소나무 잣나무가 붉은색 사이에 섞여 있어 더욱 사랑스러웠다. 내가 여러 중더러 말하기를, 가을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는데 우리가 너무 일찍 구경 온 것이 아니냐고 하자 보원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로 무슨 물건이든지 구경을 하려면 한창이기 전에 해야지 한창인 때 하게 되면 때가 이미 지나쳐서 바로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막 무르익으려고 하는 이때 여유 있는 운치로 구경하는 것이 좋지요.”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노사(老師)의 말씀을 들으니 물건 보는 법을 잘 아시는 분이라고 하겠소. 옛사람 말에도, 꽃은 낙화되어 흩어질 때 보고 싶지 않고, 술은 곤드레 만드레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역시 노사를 두고 한 말이구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 두 군에게 말하기를,
“천지만물 모든 이치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네. 세상에서 부귀와 번화와 성색(聲色)을 누리고 있는 자들은 더구나 이 이치를 몰라서는 안 되네. 내가 언젠가 읊은 시 한 수가 있는데 그대들은 이 시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
했더니, 극가(克家)가 그 시를 소기(小記)에다 적었다. 그리고 유군은 말하기를,
“이 시는 아마도 그대가 뜻을 이루었을 때 지은 시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시는 이렇다.

말 타고 느릿느릿 가다가 말다가 / 騎馬悠悠行不行
돌다리 남쪽 가에 동자 하나 청수하네 / 石橋南畔小童淸
봄구경을 그대는 어디에서 하려는가 / 問君何處尋春好
꽃이 아직 피기 전에 풀싹이 돋으려 한다네 / 花未開時草欲生

충암 김선생 원충(冲菴金先生元冲)이 중에게 준 비로봉시가 우연히 생각나 두 군에게 읊어주었다.

해 지는 비로봉 정상 / 落日毗盧頂
동해 바다 하늘 멀리 아득하네 / 東溟渺遠天
불 일구어 바위 틈에서 자고 / 碧嵒敲火宿
소매 맞잡고 속세를 내려가네 / 連袂下蒼煙

그리고 내가 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고금의 시인들 작품 중에 절작이다. 이 시는 우리나라에만 없는 정도가 아닌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 시를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니, 두 군들도 동감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읊고 또 읊고 했더니, 사람으로 하여금 표연히 산 정상을 버리고 동해로 가고픈 생각이 들게 했다.
회옹(晦翁)의 ‘남악운(南岳韻)’에 차운하여,

구월이라 서리 내리고 하늘 가득 바람인데 / 九秋霜露滿天風
천을대 앞에 와서 가슴 한번 활짝 열었네 / 天乙臺前一盪胸
시 읊으며 돌아간 곳 어디에서 찾아볼까 / 詠歸何處尋行迹
곧바로 봉래산 최상봉에 올라야지 / 直到蓬萊最上峯

하니, 다른 여러 사람이 화답을 하였다. 동루(東樓)에 가서 벽에 걸려있는 여러 사람들의 시를 보았다. 여러 사람들의 작품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기재(企齋)ㆍ호음(湖陰)ㆍ용주(龍洲)ㆍ청음(淸陰)ㆍ이천장(李天章)ㆍ김도원(金道源)ㆍ신백윤(申伯潤)의 시들이 읊을 만했고 거기에서도 기재ㆍ호음의 것이 최고여서 후인으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세도와 인재의 부침(浮沈)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날 밤은 정양사에서 잤는데 보원과 얘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밤에 일어나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아보았더니 망고봉(望高峰)이 정동쪽이고 능호봉(凌灝峰)은 북에 있어 이 절 위치가 남을 향해 오위(午位)로 되어있고 동으로 아침 햇살을 받기 때문에 절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모양이다. 용주의 시에 맹학창(盲壑彰) 이 세 글자가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누구도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자는 초서를 쓰면서 잘못 쓴 것이라고 하였고, 혹자는 벽자라고 하기도 하면서 서로 한바탕 웃었다.

5일(정미) 맑음. 중을 시켜 나옹(懶翁)의 안주(眼珠)ㆍ갈포(葛布)ㆍ가려(珈黎)ㆍ철발(鐵鉢)ㆍ마노(瑪瑙)ㆍ주미(麈尾) 등을 내오라고 하여 보았더니, 안주 하나는 색이 파랗고 작은 팥만한데 불가에서 말하는 사리(舍利)라는 것으로, 그것을 유리그릇에 담고 금으로 봉합한 다음 비단으로 겹겹이 싸 놓았는데 그 곳 중들이 아주 보물로 지킨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에는 나옹은 제자가 많아 대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국법으로 베임을 당한 자여서 그 슬기가 별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중들은 그가 성불(成佛)하였다고 하면서 저렇게 존경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일까 싶어 그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 중들 역시 그 사건 전말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사람 몸에서 구슬이 나온다는 것은 원래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 이치로 보아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나로서는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승려 세계에서는 그 말을 절대 믿고 서로 전수하면서 높이 받들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깰 수가 없어 나로서도 끝까지 따질 수가 없었다.
팔각전(八角殿)의 석불(石佛)을 보았다. 그 벽에 해묵은 그림이 있었는데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오도자가 조선에 왔었다고는 들은 바 없으니 그 역시 허탄한 소리인 것이다. 이 날 극가(克家)가 그 절의 대들보에다 이름을 썼다. 그리고 이 날 동쪽 누대를 두 번 올랐는데 누대 이름은 헐성(歇惺)이었다. 시가 있는데 기재(企齋)의 시는,

기이한 봉 일만하고 그리고 또 이천인데 / 一萬奇峯又二千
바다구름 다 걷히자 아름다운 옥이로세 / 海雲飛盡玉嬋姸
젊어서는 병만 앓다 이제는 늙었으니 / 少時多病今成老
백년 두고 이 명산 이름만 듣고 만 격이네 / 孤負名山此百年

하였고, 호음(湖陰)의 시는,

일만 이천 봉우리를 대강 짚고 돌아오니 / 萬二千峯領略歸
쓸쓸한 낙엽이 옷 위에 지네그려 / 蕭蕭黃葉打征衣
비 내리는 정양사 향불 피우는 밤에 / 正陽寒雨燒香夜
사십평생 잘못 산 걸 거백옥이 알았다네 / 籧瑗方知四十非

했으며, 청음의 시는,

밤 지새워 내리는 처마끝 비소리에 / 琳琅簷雨夜連明
산중의 폭포 소리 누워서 듣는다네 / 臥聽山中萬瀑聲
참모습이 나오도록 봉우리들 씻어 놓아 / 洗出玉峯眞面目
날 개이자 시인의 눈에 뜨이는 게 그것이네 / 却留詩眼看新晴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는 중 한 명을 데리고 혼자 천을대에 올라가서 이곳 저곳을 바라보면서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가리키며 알아보았는데, 그 중의 송라협(松蘿峽)은 신라(新羅)의 왕자가 있던 곳이고, 능호봉(凌灝峯)방광대(放光臺)는 고려 태조 왕건이 부처에게 절하던 곳이란다. 아, 왕자의 한 일은 장해서 한(漢)의 북지왕(北地王)과 그 열렬함을 겨룰 만하고, 고려 태조의 그 굉장한 규모나 후한 덕은 송(宋) 태조와 어깨를 겨눌 만도 했는데, 어쩌자고 이교(異敎)에 정신이 팔려 허탄한 말과 옳지 못한 유적을 후대에까지 남겨놓았는지.
그 곳 산과 구릉의 형세를 대략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 두었는데 후일 뛰어난 그림 솜씨를 만나게 되면 이 승경을 다시 그리게 하려고 해서이다. 또 시를 읊기를,

아득히 먼 송라협이요 / 邈邈松蘿峽
높고 높은 능호대여라 / 迢迢凌灝臺
휘파람 크게 한 번 부니 / 悠然發大嘯
만폭에서 천둥이 이네 / 萬瀑隱風雷

하였고, 또 읊기를,

구구한 영욕 놓고 놀랠 것이 뭐라던가 / 寵辱區區不足驚
구월에 중향성을 날아서 올라왔다네 / 九秋飛上衆香城
머리 풀고 곧바로 동해로 가 떼를 탈까 / 直將被髮桴東海
봉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도 보고싶네 / 且欲驂鸞襲太淸

하였다. 보원이 하는 말이, 금년 봄부터 큰 새가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산 속에 날아다니고 있는데 생김새는 야학(野鶴) 모양이고 목이 길고 꼬리는 검고 다리는 적색이고 몸은 껑충한데,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반드시 제 몸을 돌려가며 보여주고 소리는 학의 소리를 내는데 아마 선학(仙鶴)인 것으로 지금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있지만 이 산 속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학은 우는 소리가 길고 맑아서 하늘에까지 들린다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시경》에서도, ‘학이 구고에서 우니 그 소리 하늘에까지 들리네’ 했고, 옛날 기록에도 역시 ‘난새와 봉황은 함께 무리 짓고 반드시 지대를 골라서 날며 때가 돼야 울기 때문에 그래서 선금(仙禽)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새는 난봉(鸞鳳) 같은 벗도 없고 사광(師曠)의 거문고 가락도, 상악(相岳)의 북소리도 없는데 왔으며, 또 우는 소리가 여운도 없고 높지도 길지도 않아 저 혼자 그런 체하는 것이지, 사실은 학 같아도 학이 아니면서 선금 축에 끼어보려고 하는 것이리라. 진짜가 아니면서 이름이라도 빌려보려고 함은 모든 물건이 다 그 모양인데 왜 새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언젠가 치사헌(致思軒) 이원(李黿)이 쓴 《금강록(金剛錄)》을 보았더니, 거기에 이르기를, “바위 틈에다 둥지를 틀고 사는 새가 있었는데 대개 평범한 들새였다. 그런데 중들이 학으로 잘못 알고 저를 학이라고 불러주니, 그 새가 반드시 둥지에서 나와서 제가 학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춤을 추어보였다.” 한 곳이 있었는데, 지금 그 새도 저 자신을 학으로 자처하고 있고 사람들도 학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도 깃털을 뽐내면서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렇게 이름만 내고 스스로 감출 줄은 모른다는 것인가. 어쩌면 산새 들새들도 진세의 속된 인간들과 똑같은 생각이란 말인가. 지금 이 일이 치사헌이 써 놓은 것과 아주 비슷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학이라는 것도 신령한 새여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지가 지금 천 년이나 되었는데 비슷하면서 진짜는 아닌 것이 하필 오늘에 나타났으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내 그 모든 것을 듣고 묵묵히 앉아 마음속으로 탄식을 했었다. 유군이 회암의 ‘여산운(廬山韻)’을 내놓으면서 나더러 화답하라고 하기에 심심풀이 삼아 읊어 보았다.

삼한의 삼신산 중에 / 三韓三神山
금강산이 제일 걸출하다네 / 金剛最爲傑
둘레 오백 리를 깔고 앉아 / 盤根五百里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 邈然與世絶
불가의 소굴되어 있는데 / 仙曇所窟宅
구름 속 나무는 보였다 말다하네 / 雲樹何明滅
내가 왔을 때 맑은 가을이어서 / 我來屬秋晴
빽빽이 줄서 있는 묏부리들 / 嶽峀正森列
기대 졸며 맑은 기운 들이키고 / 憑睡挹淸灝
지팡이 짚고는 높은 곳도 가소롭다네 / 杖策凌嵽嵲
구경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 勝遊自此始
내 두루 다 밟고야 말리 / 吾將窮跡轍

유군의 시는,

금강은 천하 절경이요 / 金剛天下勝
부자는 당대 영걸인데 / 夫子一代傑
명산이 고사와 만났으니 / 名山配高士
양절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 豈不稱兩絶
인과 지에 보탬 되려고 놀지만 / 遊爲資仁智
불자들 민망하기도 하지 / 志在憫寂滅
기마 꼬리에 붙어 온 이 존재야 / 賤子忻附驥
어떻게 나란히 서서 구경하겠습니까 / 陪賞豈行列
승경 읊은 공의 시를 보니 / 見公記勝詩
높기가 옥봉과도 같네요 / 高幷玉峰嵲
신선 사는 곳 구경 다하려고 / 丹丘興靡窮
그리로 가는 수레에 다시 기름칠했다네 / 復膏仙洲轍

하였다. 또 헐성루(歇惺樓) 시에도 차운했는데,

봉래산 일만 이천 봉우리가 / 蓬萊一萬二千峰
푸른 하늘 높이 솟아 태산과 마주섰네 / 高出靑天揖岱宗
옥 같은 봉우리들 우뚝하게 솟아 있고 / 玉巘竦奇形矗矗
장중을 자랑하는 은빛 같은 봉도 있어 / 銀巒鬪壯勢重重
바위 끝 고목에는 둥지 틀어 학이 살고 / 危巖古樹巢仙鶴
폭포 밑 깊은 못엔 독룡이 살고 있다네 / 怒瀑深湫毒龍
제일 좋긴 정양사에 가을비 개고 난 뒤 / 最是正陽秋霽後
소나무가 경쇠처럼 울어대는 소리라네 / 數聲淸磬發深松

라고 지어, 둘 다 써서 나에게 주었다.
내가 보원에게 이르기를,
“유가에는 지행(知行)이라는 것이 있고, 불가에는 정혜(定慧)라는 것이 있는데 혜가 정을 낳는 것입니까, 정이 혜를 낳는 것입니까?”
했더니, 그는,
“아마 정이 혜를 낳는 것이지요?”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선 정혜의 이치를 모른다면 어떻게 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또 마음을 지키는 정력(定力)이 없고서야 마음의 진각(眞覺)이 또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하니, 보원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이 당연히 혜를 낳는 것이지만 혜도 정을 낳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유가에도 그러한 법이 있고 그에 관한 학설이 구구한데, 스님은 정말 말씀을 잘 했습니다. 다만 유가에는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 이치를 알려고 하는 것은 장차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서인데 불가에서는 공명(空明) 그것만을 지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그도 그렇다고 대답하고서 이어 우리 유가의 도통(道統) 연원에 대하여 묻기에 내가 대략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또 불가의 의발(衣鉢) 전수 관계를 물었더니, 그도 대답해 주었는데 그의 말은 달마(達摩)를 종(宗)으로 삼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달마는 벽을 향해 앉아 수도만 하다가 결국 남이 준 독약을 먹고 죽고 말았는데 도를 통했다는 자도 그럴 수 있습니까?”
했더니, 그의 대답이,
“달마는 각박한 세상 인심 그게 싫어서 일부러 입적한 분이니 그의 몸은 서방정토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부도씨(浮屠氏)들은 원래 환설(幻說)을 많이 하니까요.”
하고 이어, 불가에는 선(禪)과 교(敎) 두 파가 있는데 대사는 어느 쪽이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경교(經敎)를 대강 듣고 염불이나 일삼고 있지 심학(心學)에 관한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와 이틀 밤을 함께 지냈는데 언제나 밤중이면 미타(彌陀) 소리가 들려왔다.
금강산(金剛山)이 높고 가파르고 수려하기 동방에서는 으뜸인데, 그 산맥은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되어 검산(劍山)에서 높이 치솟고 철령(鐵嶺)을 가로질러 추지(楸池)에서 기복을 이루고 이어 여기에서 서려 이루어진 것이다.
툭 튀어난 봉우리가 능호봉(凌灝峯)인데 그 봉은 흙과 돌이 섞여 있고 돌무더기 산이 죽죽 뻗어가다가 펄쩍 뛰어올라 영랑재[永郞岾]가 되고 또 갑자기 높이 솟아 비로봉(毗盧峯)이 되었는데 바위 전체가 솟아 봉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늘까지 치솟아 높고 거대하기로는 이와 맞먹을 봉우리가 없다. 비로봉에서 형세가 한풀 꺾여 내려오면서 험준하게 첩첩으로 싸인 것이 중향성(衆香城)인데 푸르른 바위 절벽이 둘러서서 성을 이루고 하얀 바위들을 바라보면 그 빛이 마치 분을 발라놓은 것 같다. 그리고 바위 사이로는 노송ㆍ잣ㆍ해송(海松)ㆍ만향(蔓香) 나무들이 하나의 무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연달아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이 솟아 있고, 그 아래 가로로 줄서 있는 것이 백운대(白雲臺)ㆍ금강대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이고, 그 시냇물은 만폭동(萬瀑洞)인데 백천동(百川洞)의 물과 만나서 남으로 흘러 회한(淮漢)의 상류가 된다. 그리고 또 서쪽으로 가서 망고봉(望高峯)이 되었는데 그 높이는 비로봉 다음 가고, 또 그 다음으로 백마(白馬)ㆍ현등(玄登) 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서쪽을 향하여 엎드리려는 듯하다. 또 남으로 바닷가까지 나가서 들을 끼고 달려간 놈은 천후(天吼)ㆍ설악(雪嶽)ㆍ한계(寒溪)가 되었고, 서남으로 간 놈은 오대산이고, 곧바로 남으로 달려간 놈은 영(嶺)의 좌우 그리고 호(湖)의 서남쪽 줄기가 되고 있다.
비로봉 서쪽은 내산(內山)이라고 하는데, 바위가 우뚝우뚝 서있고 바람은 서풍을 받고 햇볕은 석양 햇볕을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그리 자라지 못하고 있다. 비로봉 동쪽은 바위 사이로 흙이 꽤 많고 아침 해가 비치는데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 그 기운까지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해를 가리고 구름 위까지 치솟아 있는데 그 쪽은 외산(外山)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백 리도 다 못가 동해에 이르러 끝나고, 서쪽으로 뻗은 가지는 회수(淮水) 서쪽을 끼고 바다까지 다 못 가서 양강(楊江)과 만나 거기에서 끝나는데 천 리 절반 정도로서 가깝고, 북으로 뻗은 가지는 높은 산이 첩첩이고, 둥그렇게 서려 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룡연(九龍淵)이다. 만폭동은 바위낭떠러지가 수려하고 수석도 맑아 지팡이 짚고 신발 신고도 건널 만하기 때문에 구경 온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으나, 구룡연은 어두컴컴하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용과 새짐승들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낮에도 풍정(風霆)이 일고 괴물이 나타나고 하여 인적이 미칠 수 없는 곳이다.
내 늙고 병들어 짧은 지팡이에 동자 관자 거느리고 비로봉 정상에 올라가서 운무(雲霧)를 딛고 비바람 맞으며 굽이굽이 모든 산천 다 구경하고 동서남북을 향해 내 영혼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지 못한 것이 한이고, 또 높은 봉우리 가파른 벼랑을 타고 넘어 구룡연 깊은 못가에 가서 괴물들이 사는 굴들을 훑어보고 험준하고 으슥하고 기기괴괴한 곳까지 다 구경함으로써 나의 이 가슴속에 쌓인 우울하고 답답한 회포를 다 털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내가 벌써 이렇게 늙었단 말인가. 이율곡 숙헌(李栗谷叔獻)선생이 소년 시절 무슨 일로 인하여 집을 떠나 이 산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중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 일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있는 자가 없었다. 그 중들이야 물론 무식한 것들이지만 지금 1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유향(遺響)이 아득할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밤에 보원과 얘기를 하는데 보원이, 정지상(鄭知常)은 어떤 인물이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고려 때 문사(文士)이고 그의 시가 깨끗하고 민첩하여 당인(唐人)의 기풍이 있었으나 요망한 중 묘청(妙淸)에게 현혹되어 나랏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보잘것 없는 사람이지요.”
했더니 또, 김부식(金富軾)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 말이, 문장력이 있어 삼국사(三國史)를 썼고 장군이 되어 묘청의 난을 토평하기도 했다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는 부식이 정지상과 명예 다툼을 했는데 번번이 이기지 못하자, 이어 지상을 모함해서 죽였다가 뒤에 결국 지상의 영혼에게 되죽음을 당했다고 합디다. 그게 무슨 좋은 사람이겠소.”
하면서, 부식이 죽은 일을 얘기했는데, 마치 두영(竇嬰)과 전분(田蚡) 사이에 있었던 일처럼 말하니 얘기가 매우 해괴하였다. 나는 전에 들은 바 없는 얘기이기에 여기에 써 두었다가 언젠가 누구에게 물어보기로 하겠다. 보원의 말에 의하면 김부식이 언젠가 시관(試官)으로 원(院)에 들어가 원의 문에다 시를 쓰기를,

촛불이 다하자 날은 새려고 하고 / 燭盡天將曉
시가 이루어지니 구절이 향기롭네 / 詩成句已香
뜰 가득히 사람들 시끌시끌한데 / 滿庭人擾擾
장원을 할 자는 뉘라던가 / 誰是壯元郞

했는데, 지상이 그 시를 보더니 즉석에서 붓을 들고 삼경(三更)ㆍ팔각(八角)ㆍ낙월(落月)ㆍ부지(不知) 이 여덟 자를 써서 다섯 자씩 된 위에다가 각기 얹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식이 자기 재주로는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모함을 하게 된 것이라고 운운하였다.

6일(무신) 맑음. 유점사(楡岾寺)를 가기 위하여 나서면서 시를 읊어 보원상인(普願上人)과 작별하였는데 충암(冲菴)의 ‘풍악증승운(楓岳贈僧韻)’을 차운하여,

금강산에 가을이 드니 / 秋入金剛洞
구름 걷히자 하늘은 쪽빛이로세 / 雲收蔚藍天
그대 만나 사흘 밤을 얘기하고 / 逢君三宿話
돌아가려니 소매에 창연이 이네 / 歸袂惹蒼煙

라고 읊고, 극가로 하여금 써 주게 했다. 드디어 견여(肩輿)를 타고 나와 만폭동을 향하였다. 표훈사를 다시 지나 서쪽으로 석문(石門)을 들어가는데 겨우 견여 하나가 빠져 나갈 정도이고 그것이 금강굴(金剛窟)이라고 하였다. 몇십보를 더 가니 왼편에는 오현(五賢), 바른편에는 학대(鶴臺)가 있고 두 시내가 마주치는 곳에 석봉(石峯)이 하나 솟아 있는데 그 이름은 향로(香爐)이고 거기가 바로 만폭동이다. 붉은 낭떠러지 푸른 절벽하며 돌은 희고 물은 맑았다. 집채만한 바위 하나가 시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구경왔던 사람으로 그 바위에다 이름을 써 놓은 자들이 천 명이나 될 정도로 혹은 아주 새겨놓기도 했고 혹은 먹물로 써 놓기도 하였다. 시냇가에 또 널찍한 큰 바위가 있었고 거기에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 모양이 날아 움직이는 듯하여 볼 만했다. 그 곳 중에게, 여기에 학소암(鶴巢巖)이 있다는데 왜 학소암이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옛날에는 학이 여기에다 둥지를 틀고 살았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바위가 이지러지자 둥지도 기울어져 학은 날아가 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극가가 그 바위에다 이름을 쓰기에 나도 그 바위에다 용문석(龍門石)이라고 썼다. 그랬더니 두 군들이 그 뜻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세상에서 말하기를 풍악에 와서 노는 자면 이름을 선적(仙籍)에 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데, 자고 이래로 과연 상계(上界)로 뽑혀 올라간 자가 있었다고는 들은 바 없고, 다만 성명을 고기비늘 모양으로 그 밑에다 다닥다닥 써 놓은 것이 마치 용이 되기 위하여 용문(龍門)에 모여든 물고기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이마에 점찍고 꼬리 불태우고 용이 되어 올라 가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과 똑같아서 내 그 뜻으로 쓴 것이라네.”
하였다. 글씨를 쓰고 나서 시내를 따라 걸어가 보니 잎이 지고 단풍이 물들고 하늘이 시원한 것이 바야흐로 구월 같았다.
한 곳에 갔더니 맑은 물줄기가 옥을 뿜어대는데 감돌아 흐르기도 하고 그냥 내리쏟아지기도 했으며 하얀 바위가 펑퍼짐하여 그냥 앉거나 걸터앉을 만했는데 이름이 진주담(珍珠潭)이라고 했다. 내가,
“왜 진주담이라고 했을까?”
했더니, 유군이 말하기를,
“샘물이 펑퍼짐한 바위 위로 흘러 바위에 웅덩이가 생기고 그 웅덩이 가운데 마치 진주조개가 진주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함괴(涵瑰)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겠지.”
하여, 내가,
“그렇구나. 그럴싸한 생각이다.”
라고 하였다. 또 조금 올라가니, 청룡담(靑龍潭)ㆍ구담(龜潭)ㆍ선담(仙潭)ㆍ화룡담(火龍潭)이라는 것들이 있는데, 물이 더 맑고 돌도 더 깨끗하고 굼틀굼틀 흘러내리는 폭포도 완연히 무지개가 구름을 가로지른 듯, 피륙이 공중에 뻗쳐 있는 듯했고 둘러싸인 산들의 푸르른 나무와 잎들이 맑은 운치를 더해주고 있어 사람들 모두가, 참으로 이곳이야말로 선계(仙界)이고 천하의 장관이라고 아우성이었다. 비록 곡림(曲林) 파곶(葩串)의 백석이나 송도(松都)의 박연폭포(朴淵瀑布)라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서로 갓끈을 씻으며 즐겼다.
내가 절구 한 수를 읊기를,

콸콸콸 쏟아지는 만폭동 / 虩虩萬瀑洞
밤낮없이 울려 퍼지는 물소리 / 奔流轟晝夜
용이 성나 일어나서 / 直恐龍怒作
천하를 비에 잠기게 할까 두렵네 / 雷雨盈天下

하여, 극가를 시켜 바위에다 쓰라고 했더니, 극가도 다음과 같이 한 수 읊어 바위에 썼다.

만옥봉 앞에는 벽옥이 흐르고 / 萬玉峯前碧玉流
흰구름에 단풍나무 동천이 그윽하네 / 白雲紅樹洞天幽
시 쓰려고 수시로 돌에 앉아 쉬기도 하고 / 題詩坐石時時歇
좋은 경치 찾아다니며 여기저기 머문다네 / 杖策探奇處處留
술독에는 술이 다해 취할 수가 없네그려 / 酒盡窪尊難一醉
신선이 봉래로 간 지는 몇천 년이 되었을까 / 仙歸蓬海機千秋
산신령은 늦게 온 것 이상하게 여기지마오 / 山靈莫怪尋眞晩
꿈 속에는 벌써부터 비로봉에서 놀았다오 / 慣向毗盧夢裏遊

벽하담(碧霞潭)에 이르러 한 곳을 바라보니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 비각(飛閣) 하나가 은은히 보이고 구리기둥 하나가 그 밑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군과 함께 그 비탈을 더위잡고 올랐는데, 그때 외삼촌께서는 늙어 다리힘이 없으니 견여를 타야겠다고 하셨고, 극가는 바위에 시를 쓰느라 함께 따라오지 못했다. 그 곳에 갔더니, 암자 하나가 있었는데 보덕굴(普德窟)이라고 편액만 달려 있고 중은 없었다. 벽에는 기(記)가 걸려 있었는데 조계선종(曹溪禪宗) 연(衍)이 쓴 것으로 글씨도 새가 날으는 듯 살아 있었고 내용 역시 문원(文苑)의 기운과 맛이 있어 읽을 만했다. 높다란 누대 굽은 난간에서 1천 길이나 되는 밑을 내려다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오싹하게 할 것 같아 나는 그 실내에만 들어가고 난간 쪽은 밟지 않았다. 이유는, 높은 데 오르지 말고 위태로운 데 가지 말라는 성인의 교훈이 생각나서였고 또 우물 내려다보는 데 관한 팽조(彭祖)의 경계에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비탈길을 타고 다시 내려와 벽하담 남쪽으로 나와서 돌을 밟고 건너와 화룡담 바위 위에 앉아서 쉬었다. 거기서부터 위쪽으로는 물도 얕고 산도 갈수록 좁아 명승처는 거기에서 거의 끝났다. 드디어 견여가 앞서서 갔는데 잔도나 비탈길이 위험하여 걸어서 내려온 곳이 절반이나 되었다. 길 따라 오면서는 중들을 시켜 도로파초(都盧巴草)를 뜯게 하고 혹 직접 캐기도 했는데 이 풀은 이 산 높은 곳에서만 나는 풀로서 잎은 성근 솔잎 같고 뿌리는 가느다란 천궁뿌리 같으며 향기 역시 천궁 비슷한데 좀 특이한 향초이다. 올 때 허미수에게서 듣고 여기 와서는 중들에게 물어 캐게 된 것인데 중들도 그것을 간혹 부처 앞에다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산중에 만향(蔓香)이 있는데 그것이 잣나무이긴 해도 가지가 덩굴로 자라고 바위 틈에 잘 나는데 그다지 크지 않아 잣나무로서 다른 종류이다. 비로봉 둘레는 온통 이 물건이 널려 있으니 중향(衆香)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이것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해송과 노송나무ㆍ잣나무 그리고 적목(赤木)이 섞여 있는 가운데 단풍나무가 가장 많아 풍악(楓岳)이라는 산 이름 역시도 그래서 붙여진 것이 아니겠는가. 적목이라는 것은 몸통은 노송나무에 잎은 잣나무 잎이고 씨는 산호(珊瑚)처럼 생겼는데 어째서 적목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날 지난 곳은 금강대(金剛臺)ㆍ백운대(白雲臺)ㆍ만회동(萬檜洞) 등이었으나 다 그냥 지나치기만 하였고, 사자암(獅子菴)에 왔더니 큰 바위가 사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암자만 있지 중은 없었다. 들어가서 보고 한 곳에 이르니 석조탑이 해를 가리고 있고 바위 사이에다는 장육상(丈六像)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나옹(懶翁)의 작품이라고 한다. 아, 불도들이 허황한 짓들을 하여 이 명산의 맑은 운치를 모두 더렵혀 놓았으니 가탄스러운 일이다. 묘길상(妙吉祥) 옛터를 지나 마하연(摩訶衍)에 이르니 옛스러운 사찰이 깨끗하고 소나무ㆍ노송나무가 숲을 이루었으며 지세가 편평하면서 아늑하고 바위 비탈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이 하나 혼자 살고 있으면서 생식을 하고 수좌(首座)라고 불렀는데 수좌라는 명칭은 그 무리들 중에서 참선하는 자를 이르는 말이다. 말을 시켜 보았더니 역시 배운 것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산 속에 있으면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이 무섭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만약 그런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여기에서 있겠습니까.”
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아도 동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산중에 아름다운 여색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귀신이요 도깨비가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만약 귀신이나 도깨비가 아니라면 네 마음이 동하지 않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
“인간의 대욕망으로 가장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 음식과 남녀 관계인데 색욕은 그래도 억제할 수가 있으나 가장 참기 어려운 게 식욕인 것이다. 내가 옛날 들은 얘기지만 토당(土塘) 오 상공(吳相公)이 언젠가 이 산 구경을 왔는데 어느 한 궁벽한 곳 작은 절에를 갔더니 나이 젊은 화상(和尙) 하나가 살고 있으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피했다. 그를 불러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더니 뜰에 있는 송백을 가리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빛이 청백한 것이 오랫동안 그것을 먹고 공이 많이 쌓인 자더라는 것이다. 그와 얘기하면서 꿩고기를 꺼내 숯불에다 구워 먹고 다른 절로 내려와서 자는데 밤중쯤 되어 누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기에 물어 보았더니, 바로 아침에 만났던 그 중이었고,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아침에 본 꿩구이 좀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만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은 그가 그 식욕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온 것을 알고 일행 중의 사람을 불러 그 고기를 내주게 하고 실컷 먹으라고 했더니, 그 중이 다 먹고 나서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이고 말하기를, ‘소승이 여러 해 곡식을 끊고 저 자신 공력이 깊다고 생각했었는데 아까 공의 행리 속에 있는 고기 반찬 냄새를 맡고는 식욕이 갑자기 동해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안 되고 발광이 나서 이렇게 와 이 짓거리를 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더라는 것이다. 공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게 식화(食火)라는 것으로 사람이면 다 있는 것인데 그를 금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했더니 그 중이 사례를 하고 갔다고 하였다. 식욕과 색욕은 다 천성(天性)인데 불가에서는 그것을 금기하고 있으니 그게 어디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겠는가. 수좌가 하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은 못 될 것 같다.”
하고서 서로 웃고 말았는데, 그 중도 대꾸가 없었다. 보기에 그의 사람 됨됨이가 자기들 도(道)에서 무엇인가 들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고상한 것으로만 생각한 것인데, 우리 유자(儒者)들로서 군자의 대도(大道)는 듣지 못하고 은미한 일이나 캐고 괴이한 짓이나 하여 후세에 무엇인가 남겨 보려고 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랴. 역시 우리들로서도 경계해야 할 바인 것이다.
나무 한 그루가 절 앞에 서 있었는데 노송나무 몸통에 소나무 잎이고 씨 역시 솔씨와 같았으며 잎은 푸르른 것이 겨울을 나도 끄떡없는데, 장안사에서 보았던 계수나무였다. 하지만 냄새를 맡아보아도 향기가 없고 맛을 보아도 맵지 않으며 꼭 측백(側栢) 비슷한데, 혹시 《이아(爾雅)》에서 말한, 소나무 잎에 잣나무 몸통을 한 전나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점심을 거기에서 먹고 출발하려고 할 때 나 혼자서 뒤 산등성이에 올라 오래도록 거닐면서 읊조리고 감상하였다.
마하연(摩訶衍)은 인도 말인데 여기서는 대승(大乘)을 말한 것으로 이 산에서 가장 좋은 곳을 말하며 그 곳에 있으면 성도(成道)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곳을 출발하여 내수재[內水岾] 등성이에 이르니 해는 이미 기울었고 외삼촌과 극가는 먼저 와서 재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들 오륙십 명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유점사(楡岾寺) 중들이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여부(輿夫)를 교체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거기에 와서 돌아다보니 푸르른 묏부리들이 아득히 멀리 보이고 비로봉은 우뚝 서 있어 두고 가기에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쉬었다가 그 재에서 출발했는데 중들 말에 의하면 내수재를 안문재[鴈門岾]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 아래로는 소나무ㆍ노송나무가 빽빽히 들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견여를 타고 이십여 리를 오는 동안 금강산 동쪽 기슭에 기이한 바위 가파른 봉우리들이 나무끝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하였고 길은 평탄했으나 혹 걸어야 할 곳도 있었다. 그리고 시내를 따라 가노라면 수석이 맑고 아름다운 곳도 있었다. 한 곳에 다다르니 쉬어갈 만한 몇 칸짜리 판옥(板屋)이 있었는데, 하산할 때 점심 먹는 곳이라고 중이 말하였다. 내산(內山)에는 사찰은 많아도 중들의 생활이 모두 빈곤하여 견여를 메는 중들도 각 사찰에서 모아온 것이었으나, 여기 와서는 모두가 유점사 중들인데 메는 솜씨들이 잽싸고 빨라 마치 준마(駿馬)가 낯익은 길을 달리듯 하였다. 그리하여 잠깐 사이 이미 숨 한 번 돌릴 곳까지 왔는데, 동을 바라보니 큰 바위봉우리 하나가 가파르고 빼어난 것이 마치 내산의 면목과 같았고 이름은 만경대(萬景臺)라고 하였다.
해가 이미 저물어 유점사에까지 가서 자려면 구경할 틈이 없었다. 잠시 쉬었다가 또 한 곳에 이르러 낭떠러지를 따라가는데 무서워서 감히 바로 걷지 못하고 겨우겨우 건넜다. 또 치마바위[裳巖]라는 한 시내를 건넜는데, 이는 모양이 그리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대적암(大寂菴)을 지나 7, 8리쯤 가니, 중들 몇 십 명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다섯 개의 부도(浮圖)와 비 셋이 서 있었는데, 부도는 서산 휴정(西山休靜)ㆍ동산 응상(東山應祥)ㆍ춘파 쌍언(春坡雙彦)ㆍ기암 법견(奇嵒法堅) 그리고 보운(普雲)의 것이고, 비갈은 동산 것은 정두경(鄭斗卿), 춘파 것은 김좌명(金佐明), 기암 것은 이관해(李觀海)가 쓴 것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절로 들어가 운취당(雲翠堂)에서 쉬었는데 중이 다과를 들고 나와 접대했다. 그 절의 수승(首僧) 이름은 혜식(慧識)이고 삼보(三寶) 이름으로는 임관(任寬)이었다. 고성(高城)의 원 조카가 구경 왔다가 뵙기를 요청하였다.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만(晩)이라고 하면서 자기 서제(庶弟)인 천립(賤立)이라는 자와 고 제주 목사우량(宇亮)의 아들과 함께 왔다고 하였다. 밤중에 비가 조금 내렸다.

7일(기유) 아침에 비가 조금 오다가 금방 개었다. 절간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웅장하고 사치스럽기가 장안사보다 더하여 마치 귀신이 지은 솜씨 같았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갑인년에 완전히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때 중전(中殿)의 원당으로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 만약 부처를 섬겨 복을 얻게 된다면 절을 이렇게도 잘 지은 복력(福力)은 흉한 재앙을 충분히 소멸시킬 수가 있었을 것인데 결국 면치 못하고 말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더구나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 자기 일신의 행복을 축원하는 일이 어찌 흥왕(興王)으로서 할 일이겠느냐.”
하였다. 중이, -성화 6년(成化六年) 이 네 글자가 있는 본도 있음- 우리 성종 대왕이 사찰 전지에 대해 조세를 면제해 준 사패(賜牌) 및 원(元) 나라 태정(泰定) 2년 원 나라 황제의 호지고천축수성지(護持告天祝壽聖旨)ㆍ성유(省諭)ㆍ위이관(逶迤觀)ㆍ오탁정(烏啄井)ㆍ오불전(汙佛殿)ㆍ노춘당(盧偆堂) 및 세조 어실(御室)에 관한 것들을 꺼내 보였는데 그 중의 말이 이상야릇하여 더 캐물을 것이 없었다. 거기에서 나와 산영루(山映樓)에 올라 보니 역시 잘 지어진 집이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홍문(虹門)으로 누대 아래의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백헌(白軒)ㆍ북정(北汀)ㆍ박일성(朴日省)ㆍ최유연(崔有淵)ㆍ이지익(李之翼)이 남긴 시와 여러 구경 왔던 이들이 이름을 써 놓은 것들이 있었다. 그 절의 기적(紀蹟)을 보았더니, 절이 창건된 것은 한(漢)의 평제(平帝) 원시(元始) 2년인데, 신라 탈해왕(脫解王) 1년에 부처 57구(驅)가 돌로 만든 배에 실려 월지국[月氏]에서 바다를 건너 이곳에 왔는데 이른바 노춘(盧偆)이라는 자가 그 당시 고성(高城) 유수로서 그 곳에다 그 절을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불교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 중국보다 먼저이겠으나 그러나 거기에서 말한 원시 2년이 신라 탈해왕 1년도 아닐 뿐만 아니라 돌배를 타고 월지국에서 바다 건너 왔다는 말이 너무 허탄하고 가소로워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이 사실은 금강산 동쪽 기슭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모든 산이 거기를 중심하여 둘러 있고 일백 시냇물도 그 곳을 중심으로 감돌아 흐르는데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들이 만마(萬馬)를 수용할 만큼 크고 넓고 또 해를 가리고 구름 높이 치솟은 빽빽한 나무들이 수도 없이 서 있는데 모두가 해송이 아니면 토삼(土杉)ㆍ적목들이다. 그리고 전우(殿宇)의 굉장하고 화려함, 문정(門庭)의 넓고 확 트임 또는 각 암자 자리 기타 시설물 그 밖의 기용(器用) 따위가 충분히 왕공(王公)과 맞먹을 정도이고, 금벽(金碧)의 장식이나 심지어 놀이개 도구 하나까지도 모두 최고의 사치를 다하고 있었다. 아, 불교는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이 정도로 혹세(惑世)를 하고 있고,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여 이교(異敎)가 저렇게까지 판을 치고 있게 했단 말인가. 고인들이 천하 명산은 중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니, 참 서글픈 일이다.
조금 늦게 백련암(白蓮菴)에 있는 중 천오(天悟)라는 자가 왔는데 나이는 80이고 자기 말로 응상(應祥)의 도제(徒弟)이며 치언(雉彦)과는 동문이고 사명당 송운 유정(四溟堂松雲惟政)을 사숙(私淑)하고 있다고 하였다. 얘기를 나눠 보니 국내에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지 산과 물의 원위(源委)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 곳에 있는 중 계필(戒必)이란 자도 천오와 함께 종유하는 자인데 그와도 함께 얘기했다. 그리고 또 그의 말이, 금강산은 내산(內山)이 등이고 외산(外山)이 얼굴이며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황룡(黃龍)에서 푹 솟고 추지(楸池)에서는 잠복했다가 힘차게 달려와서 여기에 와 이렇게 뭉치고는 다시 동해 쪽으로 가 머리를 수그리고 천후(天吼)ㆍ설악(雪岳)이 되었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가 대산(臺山)이 되었으며,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달려가 태백(太白)ㆍ소백(小白)이 되고 유두(流頭)에서 마무리를 했다고 했는데, 그의 말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풍악산이 내산은 모두 바위뿐이어서 깎아지른 듯이 험준하기만 하고 풍후(豐厚)한 맛이 없는 데 반해 외산은 높으면서도 흙이 많이 있고 동해를 내리보고 있어 서로 자웅(雌雄)을 이루고 있는데 노사(老師)의 말씀이 대체로 맞는 말 같소이다.”
하고, 이어 만폭동에서 용문석(龍門石)이라고 썼다는 얘기를 했더니, 천오가 다 듣고는 두 손을 마주잡으면서 하는 말이,
“선생께서는 사물을 잘 묘사해 내는 분이라 할 수 있으니 산중의 고사(故事)가 되기에 충분하겠습니다. 이 노승(老僧)이 잘 기억해 두었다가 뒤에 오는 이들에게 전수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천오가 비백(飛白)을 잘 쓴다기에 몇 폭 부탁했더니, 일필휘지로 쓰는데 붓놀림이 민첩하고 빨라 이러한 서예에 노련한 자로 보였으며, 역시 애호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당인(唐人)의 시, 충암의 비로봉시, 차운하여 보원(普願)에게 준 나의 시 등을 써서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졌다. 식후에는 극가 등 몇 사람과 앞 시내로 자석(磁石)를 캐러 갔었으나 캐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산 속 물이 차가운데 중들이 물 속에 들어서서 돌을 굴리면서 모래 이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고 그 곳 중에게 청하여 자석을 얻었다. 그리고 그날 양양 태수(襄陽太守) 이구 대옥(李球大玉)이 사람을 보내 편지와 시를 부쳐 오면서 식량과 반찬 그리고 술에 안주까지 보내 왔다. 그의 시는 이러했다.

선구에서 지내는 그 자미가 어떠한가 / 仙區行色問如何
오르는 곳곳마다 흥미가 진진하리 / 處處登臨發興多
어느 때나 영랑호를 읊조리며 지나련가 / 吟過永郞湖幾日
명사에서 피리 불며 기다릴까 싶네마는 / 笙歌吾欲候鳴沙

이날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8일(경술) 아침 안개가 비로 변하여 온종일 멎지 않았다. 천오가 가겠다기에 작별 인사로 절구 한 수를 써 주었다.

동화를 마음 두고 삼 년을 다녔더니 / 三載東華志未平
흰구름 가을빛이 중향성에 가득하네 / 白雲秋色衆香城
산영루 앞에 와서 자기까지 하고 보니 / 更投山映樓前宿
불탑에 연기 녹고 야기가 그리 맑네 / 佛榻煙消夜氣淸

이렇게 써 주었더니, 천오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하는 말이,
“노승은 죽을 날이 머지 않아 뒤에 다시 만날 기회가 없겠지만 이 시면 충분히 죽기 전의 면목(面目)이 되겠습니다.”
했는데, 그는 문자(文字)도 알고 얘기도 잘하고 비교적 올바른 정신이 있는 자였다. 대옥(大玉)이 보낸 심부름꾼이 돌아가는 편에 그의 시에 차운한 시를 보냈다.

내 자미가 어떠냐고 그대가 물었는데 / 君問吾行事若何
구월이라 가을빛이 안문에 짙다네 / 九秋風色雁門多
이번 길엔 기어코 호선의 뒤를 따라 / 此行且追湖仙躅
모래밭에 비치도록 예상을 보내려네 / 須遣霓裳映晩沙

유군 역시 절구 두 수를 지어 그는 그대로 보냈다.
이 날은 대적암(大寂菴)으로 가서 나백(懶伯)에게 물어 만경대(萬景臺)를 오르려고 했고, 또 절운(切雲)ㆍ은선(隱仙) 등의 대에도 올라 십이폭(十二瀑)을 구경하고 그리고 외산(外山)도 한번 살펴보려고 했었는데 비 때문에 그리 못하였으니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9일(신해) 아침 비가 늦게 개었다. 출발하려 하면서 오자시(五字詩)를 지어 천오 대사에게 부쳐 주도록 계승(戒僧)에게 주었다.

구름 속에 사는 글 잘하는 중 / 雲間碧眼字
붓 휘두르자 벌레와 새가 꿈틀거리고 / 筆下生虫鳥
산수에 관한 얘기까지 잘해 / 況復談山水
나로 하여금 속세를 잊게 했네 / 令我俗緣了

운취당(雲翠堂)을 출발하여 산영루(山映樓)를 거쳐 명월교(明月橋)ㆍ백운교(白雲橋)ㆍ월운교(月雲橋)를 건너서 동으로 가노라니, 푸른 절벽의 단풍잎들이 좌우를 비추고 있고 비가 갠 뒤라서 맑은 바람 밝은 태양이 우리로 하여금 청명(淸明)한 기운을 더 느끼게 했다. 그리고 시냇가 수석(水石)들이 하나같이 신선 세계여서 도중에 절구 한 수를 읊어 두 군들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했다.

비 지난 가을 산에 시원한 바람 불고 / 一雨秋山送晩凉
동천의 운물들 아침 햇살 받아 곱네 / 洞天雲物媚朝陽
절벽의 단풍나무 무지개다리 속이어니 / 丹崖錦樹虹橋裏
나더러 신선이란들 안 될 것이 뭐겠는가 / 呼我爲仙亦不妨

한 잿마루에 올랐더니 구현(狗峴)이라고 했다. 중의 말에 의하면 처음 유점사 터를 잡을 때 개가 앞을 인도하여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재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떠나 백천교(百川橋)를 건너는데 돌다리가 몇십 보 되는 골짜기를 가로질러 있고, 돌을 깎아 난간을 만들어 두었으니 흐르는 물 위를 가로질러 있으며, 수석이 기절하기 이를 데 없고 푸른 소나무가 길 옆으로 죽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다시 닦고 보게 하였다. 견여에서 내려 걸어서 건넌 뒤 소나무와 바위에 걸터 앉아 한참 있다가 떠났다. 거기에서는 또 견여를 타고 얼마쯤 가 외삼촌이 있는 곳까지 갔더니 내산(內山)에서 보내온 산외(山外)의 종과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잠시 쉬면서 행장을 챙기고 누룽지를 꺼내 요기를 했는데, 견여를 메던 중들은 거기에서 모두 물러가고 이후로는 말을 타고 갔다. 절에서 여기까지는 20리(里)쯤 되었으며, 중들 몇이 뒤를 따랐는데 읍리(邑里)로 가는 자들이라고 했다.
산외에서 온 노복과 말들은 장안사(長安寺) 북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오다가 추지령(楸池嶺)을 넘고 통천(洞川)ㆍ고성(高城)ㆍ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산 아래까지 왔는데 거의 3백 리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의 말을 들으면 장안사에서 남쪽으로 나와 건봉(乾鳳)의 앞재를 거쳐 여기까지 오려면 이 길보다 꽤 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이 자리잡고 있는 둘레는 5, 6백 리쯤 되는 것으로 옛날에, 8백 리라고 한 말은 허탄한 말인 것이다.
이 재는 금강산 동쪽 기슭의 한 가지로서 유점사에서 오자면 하나의 작은 재에 불과하지만, 이 재에서 동으로는 산마루가 그렇게 험준하고 구불구불 구절양장이어서 동해가 내려다보인다. 내가 중에게, 이 재 이름이 좋지 않아 내가 지금 망양령(望洋嶺)이라고 고쳤으니 뒤에 사람들이 오거든 그렇게 말하라고 했더니 중이 그리 하겠노라고 하였다. 그 재에서 내려가니 나뭇잎이 아직 단풍 들지 않아 마치 여름 같았다. 경구(京口)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는데, 여기가 유점사 중들 물방아 찧는 곳이라고 하며 물방아가 수십 군데 있었다. 재가 가파르고 길이 험해서 말이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방아를 찧어가지고 지고 산으로 간다는 것이다. 고성 남강(南江)에 이르자 고성 주수의 조카 만(晩)이 원통(圓通)에서 뒤쫓아왔다. 그리하여 함께 남강을 건너 읍내 민가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주수가 사람을 시켜 고기반찬 등을 보내왔다. 이는 외삼촌이 오셨기 때문인데 자기는 병이 있어 와 보지 못한다고 심부름 온 자가 말하였다.

10일(임자) 맑음. 길을 떠나 외삼촌은 주수를 찾아보러 가시고 나와 두 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 진동루(鎭東樓)에 올라 구경하였다. 또 해산정(海山亭)에 올랐더니 벽 위에 전인(前人)의 시판(詩板)이 많이 걸려 있었고, 그 중에서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지은 절구 한 수가 가장 운치가 있어 읊을 만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파도가 오밤중에 서광을 뿜어내더니 / 午夜溟波噴瑞光
여섯 용이 해를 들어 부상에 떠올리네 / 六龍擎日上扶桑
상서로운 구름들이 수도 없이 떠 있으니 / 彤雲紫蓋紛無數
뜬구름아 널랑은 태양 가까이 가지 말렴 / 莫遣浮雲近太陽

하였다. 정자가 동해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서쪽으로는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고 또 남강이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데다 바다 입구에는 포구산(浦口山)ㆍ석범산(石帆山)ㆍ칠성석(七星石) 등이 줄지어 눈 안에 들어오고 있어 참으로 경치가 좋았는데 정자 이름을 해산(海山)이라고 한 것도 아마 그래서 붙여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다만 읍(邑)이라고 해야 민가가 열 집도 채 안 되고 성도 망루도 다 무너진 상태여서 읍의 꼴이 아닌 것이 흠이었다. 주수가 외삼촌을 통해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그 정자로 찾아와서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 얘기 몇 마디를 끝내고 바로 일어나 삼일포(三日浦)로 향하였다. 주수가 미리 사공을 시켜 포구에다 배를 대어 놓게 하고 또 홍생(洪生)도 동행하게 하여 함께 배를 타고 사선(四仙)이 썼다고 하는 바위 사이의 단서(丹書)를 보았더니 글자 획이 모두 흐려져서 알아볼 수가 없고 판독할 수 있는 것은 ‘남석행(南石行)’ 이 세 글자뿐이었다. 용린석(龍麟石)을 구경하고 배를 그 바위 아래에서 돌려 사선정(四仙亭)에 올랐더니 홍귀달(洪貴達)ㆍ이관해(李觀海) 등 여러 사람이 읊은 시가 있어 읽어 보았다. 주수가 소주 몇 잔을 보내온 것이 있어 홍생과 대작하고 나서, 내가 시 한 수를 지어 읊어 주면서 그대로 주수에게 전해달라고 하였다.

고성 고을 태수가 어떤 인물이라던가 / 高城太守是何人
선왕조 때 바른말로 잘 간하던 신하였다네 / 曾在先朝諫諍臣
지금도 성상께선 나라 걱정에 애태우시니 / 聖主卽今臨食嘆
국가 치안 묘책을 돌아가서 아뢰구려 / 治安九策要歸陳

다시 호구(湖口)와 남강을 건너 간성(杆城)으로 향하며 또 시를 지었다.

열흘을 구경해도 흥은 아직 가시지 않아 / 十日金剛興未闌
구정의 가을빛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네 / 九井秋色更回看
사선암은 있건마는 신선들은 간 곳 없고 / 四仙嵒畔幽蹤遠
포구의 연파 속 배 안에 내가 있네 / 浦口煙波倚木蘭

이 날 해산정에서 이관해의 절구 몇 수를 읽어보고 그것을 베끼고 또 차운까지 해보려 하였으나 때마침 주수가 왔기 때문에 미처 못하고 말았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을 더듬어 보았으나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다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다가 중도에 길을 잃고 되돌아왔는데, 한 호수를 지나다 보니 물은 굽이쳐 흐르고 바위는 기이한데 바다 어구에 임해 있어 뛰어난 경치가 삼일포에 못지 않았다. 들에 있는 동자에게 그 호수 이름을 물었더니 감호(鑑湖)라고 하였다. 거기를 구경하고 세상에 알린 자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그렇게 묻혀 있는 것이니 이 역시 서글픈 일이었다. 말을 멈추고 눈여겨보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 돌아다보게 만들었다. 조금 가다가 길가에서 말에게 꼴을 주고 현종석(懸鍾石)ㆍ석주(石舟) 등을 구경하면서 바위 위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 석주니 현종석이니 하는 것들은 바로 유점사 사적에 기록되어 있는, ‘금불(金佛)이 서역국에서 올 때 석주를 타고 왔고 또 종을 이 바위에 매달았다’고 한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민간에 서로 전해 오고 있고 또 그 부근 마을 백성들은 그것을 다 사실로 여기고 있다. 대강역(大康驛)에서 잤는데 오늘 온 길은 25리쯤 되었다.

11일(계축)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운근역(雲根驛) 역리(驛吏) 집에서 말에 꼴을 주었다. 그 사람의 성명은 박성보(朴聖輔)였고 막걸리와 소금에 절인 전복을 내와 마시고 취하였다. 이 날은 일행 모두가 죽포역(竹浦驛) 역리 집에서 잤는데 그 집에서는 배를 내왔다. 이 날은 70리쯤 걸었으며 해변을 따라 걸었는데 이 날 따라 북풍이 세차게 불었기 때문에 바다에 파도치는 소리가 뇌성벽력 같았다. 바닷가 사람들 말에 의하면 바람 따라 물결이 용솟음치는 것을 일러 해악(海惡)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동풍ㆍ북풍이 불면 파도가 서로 마주치고 남풍ㆍ서풍이 불면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파도가 별로 일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두 군들에게 묻기를,
“사해(四海)의 물이 끝도 없이 넘쳐 흘러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데 과연 어디가 높고 어디가 낮을까?”
했더니, 극가가 하는 말이,
“듣기에 북극(北極)은 높고 남극(南極)은 낮다 하니 사해의 물 모두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모든 시냇물은 동으로 흐른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동해에는 밀물과 썰물이 없고, 감(坎)은 북방이어서 물이 모두 그리로 가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사해의 물은 모두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것일 것이다. 한구암 명길(韓久菴鳴吉)도, 남해와 북해는 밀물 썰물이 있고 동해 서해에는 없는데 그것은 마치 사람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여 나도 구암의 그 말이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남해는 목구멍과 같아서 기운이 들고 나는 곳이라 치더라도 북해는 미려(尾閭)와 같아서 밀물 썰물이 당연히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 바람의 동정과 바닷물의 간만으로 미루어 봐도 북해는 가장 아래 있어 밀물 썰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이치로 보아 더욱 미더운 말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운이 잠겨 있으면 조수는 없고 바람이 역풍을 일으키면 파도가 일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극은 높고 남극은 낮다는 것은 천체의 은현(隱見)을 두고 한 말이지 지세(地勢)의 높낮음을 말한 것은 아닌 것이다.”
했더니, 극가의 대답이,
“그대 논리는 궤변이지 어디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날 또 명사(鳴沙)를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서해의 해변은 모두가 뻘이어서 질컥질컥 빠지지만, 동해는 모두 하얀 모래 위에 맑은 파도뿐이니, 그 하얀 모래 위를 말을 몰고 가노라면 말발굽 사이에서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는 마치 눈을 밟는 소리 같기도 하며 또 혹은 새들이 서로 조잘대는 소리 같이 들릴 때도 있다. 그래서 이른바 명사(鳴沙)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또 해당화가 길 옆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데 씨가 이미 여문 것도 있고 꽃이 아직 피어 있는 것도 있었다. 옛사람이 이른바, ‘명사십리해당홍(鳴沙十里海棠紅)’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 것이다. 나도 시 한 수를 읊었다.

기구한 곳 다 지나고 이제 앞이 트이는가 / 歷盡崎嶇望始通
바다 위의 풍경들이 그야말로 창창하네 / 海天雲物正蒼蒼
인간에는 좋은 곳이 없다고 말을 말게 / 人間莫道無佳境
집집마다 벼와 기장 그 향기가 좋을씨고 / 千室稻粱滿地香

두 군들에게 들려 줬더니, 유군이 내 시에 화답하고 나서 또 두보(杜甫)의 기행시(紀行詩)를 외우고는 나에게 함께 차운할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읊기를,

늙은 내가 구경 한번 해 보려고 / 吾衰事遠遊
힘에 부치는 것도 마다 않고 / 不辭筋力苦
늘 수석 그윽한 곳을 찾아 / 每探水石幽
예스런 곳이면 금방 앉곤 했네 / 頻坐嵒菴古
가고 또 가고 바닷가를 왔더니 / 行行出海邑
구름인지 물인지 서로 뒤엉켜 있고 / 雲水相呑吐
천둥소리가 땅속에서 나고 / 轟地中雷
반공중에선 세찬 비가 내리네 / 滃濛半天雨
산을 의지해 살고 있는 백성들 / 居民傍山多
셀 정도의 어부들 집이었네 / 蜑戶復可數
구이에 가 살고 싶다던 그 말씀 / 緬想居夷歎
옛 성인도 가늠이 있어 그랬겠지 / 先聖豈無取

기하(圻下)에서 영서(嶺西)를 거치는 동안 가을이 비록 풍년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두 자 빠짐- 경치가 좋아 추흥(秋興)이 꽤 있었다. 산으로 들어온 이후로는 들판의 경치며 농사 일이 모두 딴 세상 일로 생각되었는데 어제 경구(京口)에 와서야 비로소 곡식이 심어져 있는 전답을 보았다. 그런데 바닷가로는 옥토는 없고 빈 땅이 많았으며 마을이나 살고 있는 백성들이 사뭇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또 과수원이나 풍성한 숲도 없어서 새와 짐승들이 깃들 곳도 없었고 가을 농사 역시 영서 지방만 못하였다. 이곳 백성들은 모두가 게을러서 농사에 주력하지 않으며 가끔 고기잡고 해초 캐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단호(蜑戶)가 있기는 하였으나 지난 해에 흉년이 크게 들어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었다고 하여 듣기에 슬펐다.

12일(갑인) 맑음. 주인의 집이 바다 부근에 위치해 있어 해돋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므로 여러 벗들과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구름이 살짝 가렸다. 주인 말에 의하면, 언제나 해돋이 구경을 하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늘 가려 버려 확실히 볼 수 있는 청명한 날은 드물다고 한다. 그 곳을 일찍 출발하여 간성(杆城)의 북천교(北川橋)를 건너고 읍성(邑城)을 지나 소나무숲 속으로 10여 리를 가니 중간에 둘레가 3리쯤 되어 보이는 호수 하나가 있었다. 남쪽에는 묏부리가 못 속까지 들어와 있고 고색창연한 바위에 모래알들은 하얀데 게다가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못 안에는 순채잎이 가득하여 그야말로 ‘천리호 순채국에다 된장만 풀지 않은 격’이었는데, 이른바 선유담(仙遊潭)이라는 곳이었다. 서로 말을 달려 올라가서 한참을 감탄하며 보다가 내가 일행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 행색이 너무 맑아 흥을 도와 줄 만한 물건 하나 없으니 이곳 경치가 좋기는 하지만 무작정 오래 있을 수는 없겠네.”
하고, 드디어 길을 떠났다. 길가에 기러기들이 떼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부 한 사람을 시켜 총을 쏴 보라고 했으나 맞추지 못해 서로 한바탕 웃었다. 30여 리를 와 한 곳에 다다르니 붉은 기둥으로 된 높은 누각이 바다를 향하여 있고 어촌(漁村)이 저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구름과 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말에서 내려 난간에 올라 보니 마음까지 시원하였고, 옛날에 이른바 청간정(淸澗亭)이라는 곳이었다. 청간이라는 명칭은 역(驛)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던 것인데 지금은 창해정(滄海亭)이라고 이르고 있다. 일행 모두가 하는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구경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경치 좋은 곳은 일찍이 보지를 못했다. 참으로 한평생 제일 좋은 구경이요 천하의 장관이라고 하겠다.”
하고, 드디어 그 곳에서 유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곳 벽 위에는 여러 사람들의 시가 걸려 있었는데, 노소재(盧蘇齋)ㆍ차식(車軾)ㆍ최간이(崔簡易)의 시 두 수를 차운하였다.

부상에는 아침에 해가 뜨고 / 扶桑朝出日
밤이면 창해에 바람 이네 / 滄海夜生風
속세 일들 누워 생각하니 / 臥想塵間事
허공의 한 점 구름일레라 / 如雲點太空

또 차운하기를,

저 멀리서 돛단배는 둘씩둘씩 오고 있고 / 天外風帆來兩兩
구름가 물새들은 쌍쌍으로 날아가네 / 雲邊水鳥去雙雙
창망한 예 오른 뜻 다 풀 길이 없어 / 蒼茫不盡登臨意
한밤중 창해루의 들창을 밀친다네 / 滄海樓中夜拓窓

했는데, 이 시는 차군(車君)의 작품을 다소 새로운 의미로 화답해 보았을 뿐이다. 노소재의 본운(本韻)은 이러했다.

하늘은 동해에 뜬 달을 아끼는가 / 天靳東溟月
한 밤중 바람에 시름을 못 이기네 / 人愁夜半風
선사가 아직 닿을 시간이 못 되어 / 仙槎應未泊
휘파람 불며 푸른 하늘 생각한다네 / 孤嘯想靑空

소재 아버지가 간성 원이 되어 왔을 때 소재가 따라왔다가 이 정자에 올라 이 시를 누대 기둥에다 써 놓고 그 곁에다, 군자(郡子) 노수신(盧守愼)이라고 써 놓은 것을 후인들이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고 하는데, 소년 시절의 작품이지만 이미 소[牛]를 삼킬 만한 기개가 있었다. 그리고 최간이의 시는 이렇다.

이 마음이 저 바다와 더 크기를 겨루다가 / 此心與海堪爭大
하늘 땅이 승락 안 해 쌍벽 이루고 말았다네 / 未許乾坤只作雙
끝까지 장애물이 없을 수는 없겠기에 / 終始不能無物障
연하 한 점 없는 곳에 들창문을 달았다네 / 煙霞盡處着軒窓

간이가 일찍이 이 고을 원을 지냈기 때문에 이 시를 쓴 것인데, 시가 매우 힘이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억지로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차식의 시는,

성긴 비에 갈매기는 둘씩둘씩 날아가고 / 疏雨白鷗飛兩兩
석양의 고깃배들 쌍쌍으로 떠 있네 / 夕陽漁艇汎雙雙
동천에 해가 돋는 그 모습 보기 위해 / 擬看晹谷金烏出
화각의 동쪽 머리에 창을 달지 않았다네 / 畫閣東頭不設窓

라고 읊었는데, 붓 끝이 생동감이 있고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속담으로 전해오고 있는, ‘양양백구비소우(兩兩白鷗飛疏雨)’라는 것이 바로 이 시의 선창이 아니겠는가.
차식(車軾)은 송도(松都) 사람으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들이 운로(雲輅)와 천로(天輅)이다. 늙은 소명윤(蘇明允)이라면 식(軾)과 철(轍) 두 아들을 두었던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시는,

푸른 바다에 붉은 무리 해는 이미 한나절인데 / 碧海暈紅窺日半
이끼 푸르고 바위 흰 것 갈매기와 연파로세 / 蒼苔嵒白煙鷗雙
금은대 위에 앉아 휘파람 한 소리에 / 金銀臺上發孤嘯
드넓은 천지가 팔방으로 활짝 열리네 / 天地浩然開八窓

했는데, 이 시 역시 의사가 소통하고 보는 이를 깨우쳐 주는 점이 있어 그런 대로 좋았다. 그리고 또 벽 위에 걸려 있던 박 승지 길응(朴承旨吉應)의 시 두 수도 생각과 운치가 매우 좋았었는데, 미처 화답을 못했던 것이 한이고 지금은 기억할 수도 없다.
그날 만경대(萬景臺)에 올랐더니 소나무와 바위가 대를 형성하고 바다를 내리보고 있었고 그 좌우에는 1백 호(戶)나 되어 보이는 어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배는 끊임없이 오가고 숱한 갈매기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또 달빛어린 포구에 배를 띄우고 섬바위 위에 앉아 어부에게 뱃노래를 시켜놓고 듣고 있는데 그 가사가 모두 바람 걱정 물 걱정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고기잡는 장소를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앞바다에 가면 물마루[水脊]가 있는데 어부가 만약 바람을 타고 그 곳을 벗어나면 거기서부터서는 무변대해여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배를 댈 만한 섬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갈대가 하늘을 찌르고 물새들이 떼를 지어 새끼를 치고 있고, 사람을 보면 제 새끼 잡아갈까봐서 뭇놈이 모여들어 쪼아대는 바람에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가 없다. 또 식량과 물이 동나서 죽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그 곳을 저승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기잡이배가 아침에 나갔으면 반드시 저녁에 돌아와야지 만약 그날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식구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며, 또 그렇게 죽어간 자들이 늘 있어 뱃사람으로서 정작 늙어 죽은 자는 오히려 적은 편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들이 왜 그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가?”
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먹고 사는 길이 이것뿐인데다 관가(官家)로부터의 요구에 책임을 지고 응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죽음이 앞에 닥쳐올 것을 알고서도 별수없이 해야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이 날 어부가 새로 따온 전복과 대구(大口)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전복은 회치고 대구는 삶고, 또 막걸리까지 사다가 흥풀이를 하였다. 달놀이를 마치고 정사(亭舍)로 돌아와 자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쓰고 두 군으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아침 햇살에 먼지 한 점 없더니 / 旭日氛埃滅
갈바람에 큰 파도 일어 / 秋風大海波
태산에라도 오르는 기분으로 / 還將登岱興
달 아래 뗏목에 올랐었지 / 更上月邊槎

양양(襄陽) 주수가 관인(官人)을 시켜 우리 일행을 탐문하였다.

13일(을묘) 새벽에 일어나 일출 광경을 보았더니 구름이 가리고 있었으나 구름과 해가 서로 부딪치는 바람에 황금빛이 내리쏘이고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 매우 좋았다. 길 중간에 언덕이 하나 보였는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대의 크기는 모두 화살 감이었으며 바다 속의 섬들도 모두 푸르른 대숲으로 되어 있었다. 노포(蘆浦)에 와서는 호수가 터져 건널 수가 없어서 뱃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배를 끌어다가 건너게 했었다. 내가 보기에 동해에 있는 배들은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으로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것이 마치 말구유 모양이고 몸통도 매우 적은데 그래야 배가 파도를 잘 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큰 배 한 척을 보았는데 모양이 서해(西海)에서 부리는 배 같았고 모래 위에 정지해 있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들 말이, 동해에는 그렇게 생긴 배가 없고 지난 큰 흉년 때 영남(嶺南) 백성들이 살 길이 없자, 그 배로 고기 잡고 해초라도 캐기 위해 파도를 무릅쓰고 동해로 들어왔던 것인데, 그들은 동해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생활을 꾸려가자는 속셈이었으며, 파도에도 역시 별 걱정이 없었다고 하였다. 내 그들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을 때 동해의 작은 배들은 그것이 거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들 쓰기에 편리하게 만든 것이지만 저 큰 파도는 큰 배가 아니고서는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국가가 동해에는 파도가 거세지 않다 하여 관(官)의 힘으로 큰 배를 부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해에는 큰 배가 필요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지금 지난 흉년 때 들어왔다는 저 배를 놓고 보더라도 동해ㆍ서해를 배로 통행할 수 있음을 알지 않겠는가.
그날은 또 염막(鹽幕)을 지나다가 소금 굽는 법을 들어가서 보았는데 바닷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 우선 서해와 다르고 소금 맛도 너무 써서 음식을 만들면 달고 맛있는 서해 소금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다. 서해안의 소금 만드는 법을 동해안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또 따뜻한 날씨에 동남풍이 불어 바닷물이 잔잔했는데 가끔 고래가 나와 노는 모습이 보였다. 큰 새처럼 생긴 몸집이 새까맣고 물을 뿜어대면 눈발 같았으며 소리는 소울음소리 같았다.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바닷고기로는 고래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또 황수차(黃水差)라고 하는 고기가 있는데 서로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고래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 황수차는 꼭 떼를 지어 다니다가 만약 고래를 만나게 되면 수컷 하나가 지휘자로 뒤에 딱 버티고 서서 그 무리들로 하여금 번갈아서 나가게 하여 꼭 죽여 놓고야 만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종류별로 서로 제어를 하고 또 싸우는 기술까지 갖고 있다니 그 역시 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20여 리를 더 가 건봉(乾鳳) 하류를 건너 낙산(洛山)을 바라보고 달리다가 산등성이로 올라 얼마를 더 가서 절 문간에 들어서니 중들이 견여를 메고 나와 맞이했다. 견여를 물리치고 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올라 앉아 있었다. 정자는 절 문간 밖에 있었는데, 그 절의 문정(門庭)이나 헌각(軒閣)이 웅장하여 바로 하나의 큰 아문(衙門)이었다. 절은 설악산을 등진 채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지세가 편평하며 넓고 건물도 탁 틔어 넓었다. 당(堂)에 올라 보니, 금벽(金碧) 장식이나 용마루 등의 높이는 비록 장안사ㆍ유점사 등만 못해도 대문과 담의 꾸밈새나 전망이 좋기는 그 두 절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양양 태수 이대옥(李大玉)이 온다는 시간에 대오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린 뒤에 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옛날 산당(山堂)에서 있었던 일처럼 중들로 하여금 북을 울리게 하여 그가 시간에 대어 오지 못한 것을 장난삼아 책하고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앉아 있는데 대옥이 술과 안주를 차려가지고 와 함께 마시며 즐겼다. 얘기 도중 극가가 말하기를,
“고성 태수(高城太守)는 이 좋은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서, 천리 멀리 구경 나온 서울의 사우(士友)들을 만났는데도 서로 위로하는 술 한잔도 없으니 그 어디 풍류 있는 태수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그 일은 배울 일이 아닙니다.”
하자,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고성 태수는 천성이 원래 깔끔해서 애당초 그 생각을 않은 것뿐이지 정의가 박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네.”
하였다. 내가 뒤이어 말하기를,
자신이 깔끔하기 때문에 남을 대우하는 것도 냉냉하게 하는 것이 물론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주식(酒食)에 빠져 그칠 줄 모르는 자에 비한다면 훨씬 더 고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라야 술 속의 취미도 알아서 사람을 운치 있게 대우하는 것이지,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야 마치 기와조각을 물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언제나 편안하고 차분할 때가 없는 것인데 남이 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것이며, 또 그런 자와 어떻게 호산(湖山)의 승경을 논할 만하겠습니까.”
했는데, 그때 좌중에 술을 마시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서로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한잔씩 들고는 밤이 깊어 파하고 함께 선당(禪堂)에서 잤다.
내가 시 한 수를 읊어 대옥에게 주니 대옥도 화답하였다.

삼천 길 설악산에 뭉게뭉게 구름인데 / 雲垂雪嶽三千丈
구만 길 동해에선 둥그렇게 달이 솟네 / 月湧東溟九萬尋
이화정 위의 오늘 가진 이 모임에 / 今日梨花亭上會
한 가락 아양곡은 고인의 마음이어라 / 峩洋一曲故人心

이상은 내 시인데, 그날 따라 하늘이 비가 내릴 듯 설악산 절반을 구름이 가리고 있었고 달이 중천에 오르자 비로소 빛이 있었다. 또 좌중에는 현금(玄琴)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시에서 이를 언급한 것이다. 대옥의 화답시는,

신선을 보자하고 높은 누대 올랐건만 / 獨上高臺望仙子
아득하다 봉래섬 어디메서 찾는단말가 / 蓬島微茫何處尋
거문고에 실어보는 아양곡 한 가락에 / 惟有峩洋琴一曲
두 사람 마주 앉아 우정을 다짐하네 / 兩人相對百年心

했고, 또 읊기를,

동쪽 바다 저멀리 이화정이 있거니 / 梨花亭逈海東傍
술을 들고 오르자 유흥이 절로 난다 / 杯酒登臨引興長
누가 그리 말했던가 낙양의 탐승객이 / 誰道洛陽探勝客
한때는 수운향을 너무 좋아했노라고 / 一時靑眼水雲鄕

하고서 나에게 화답을 구했으나 나는 술에 취해 자느라고 화답하지 못하였고 유군만이 화답하였다.
그날 밤 내 잠자리에는 기생들이 곁에 있었다. 내가 좌중의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꽃과 버들은 봄빛과는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풍류로는 그만이지만 그러나 초 나라 군대가 한왕(漢王)을 겹겹으로 에워싸는 날이면 빠져 나올 길이 없을 것 같은데 이 일을 어쩌지?”
했더니, 대옥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기고 지고는 내 하기에 달린 것인데 가까이하면 어떤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한 나라 군대가 사면에서 모두 초가를 부르다가 그들이 요란스럽게 장막 아래까지 다가오면 그때는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가려 해도 안 될 것이니 내 아예 자리를 걷어가지고 피하고 싶네.”
했더니, 모두들 웃으면서, 싸움을 해 보지도 않고 미리 도망치는 것은 속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제군들이 안 보았을 뿐이지 병법(兵法)에 있는 말일세.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아예 패배하지 않을 위치를 택하는 법이야.”
하고, 드디어 그 자리를 떴더니 유군 하는 말이,
“그대야말로 성문을 굳게 닫고 철저히 지키는 자로구먼.”
하였다. 외삼촌이 하신 말씀이,
“내가 자리를 바꿔 그 자리에 있어야 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께서는 노장이어서 모든 일에 익숙하시기 때문에 패배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서 서로 농을 하며 한바탕 웃었다. 이어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옛날 개서막(開西幕)에 부임해 있을 때 명 나라 사신 뇌유령(雷有寧)이 바다를 통해 나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기일이 오래 지나도 오지 않아 원접사(遠接使) 이하 여러 명승들이 모두 모여 20여 일간이나 머무르고 있었지. 그때 원접사는 김신국(金藎國)이었고, 구봉서(具鳳瑞)ㆍ정태화(鄭太和)가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감사(監司) 장신(張紳), 병사(兵使) 유림(柳琳)이 좌음(佐飮)을 위해 남북의 기생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한 사람당 각기 20여 명의 예쁜 여인들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너도나도 못하는 짓이 없이 별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는 처음에는 돌아본 체도 아니하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가도 결국에는 별수없이 한통속이 된 사람도 있다. 그때 조경(趙絅)이 문례관(問禮官)으로 함께 있었는데 그가 평소 청고(淸苦)하다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러 공들이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려고 그 중에서 예쁜 여인을 골라 조공을 꼭 품안에다 넣도록 당부를 했는데, 조공은 처음부터 난색 하나 보이지 않고 그와 함께 기거하며 날마다 앞에다 두고 부리는 등 모든 행동을 함께 하면서도 끝까지 지킬 것을 지켰기에, 우리는 거기에서 그 늙은이의 지조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했다. 그 말 끝에 일행 모두가 말하기를,
“그 늙은이를 혹 경멸하고 헐뜯는 자도 있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단계가 높은 분이지요.”
하였다.

14일(병진) 새벽에 빈일료(賓日寮)에 나가 일출광경을 보려고 했는데 그날따라 하늘에 비가 올 징후가 있어 붉은 노을이 남북을 통해 하늘에 질펀하였고 만경창파 같은 구름물결이 끝도 없이 하늘을 띄워 보내고 해를 목욕시킬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하늘 밖에 나가 놀게 만들었다. 조금 후 하늘은 금방 변하여 새벽빛이 다시 짙고 하늘끝도 희미했다. 태양은 비록 뜬구름에 가려 있었지만 구름이 변화하는 태도라든지 별스럽게 자꾸 바뀌는 모양은 보기에 이채로웠다. 그날은 기일(忌日)이었기에 혼자 빈일료에 앉아서 재계하였다. 늙은 중 비경(秘瓊)이라는 자를 불러 함께 얘기하다가 최간이(崔簡易)가 읊었다는 운(韻)자를 들었는데 운자만 있고 시는 없었다. 그 운자에 차운하여 써 주고, 또 벽상에 걸려 있는 홍녹문(洪鹿門)ㆍ정동명(鄭東溟) 운에도 차운하였다.

동해의 동쪽에는 낙산사가 있거니 / 洛寺寺臨東海東
부상에서 해가 뜨면 온 하늘이 붉어지네 / 扶桑出日滿天紅
절간의 이른 새벽 향 피우고 앉았으니 / 上方淸曉燒香坐
상서로운 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하여라 / 身在祥雲紫氣中

위의 시는 간이의 운에 차운한 것이고,

설악산 동해 바다 그 사이 낙가정에서 / 雪嶽東溟洛伽亭
붉은 해가 푸른 하늘로 오르는걸 내 보았네 / 直窺紅日上靑冥
해산이 다한 곳에 이름난 고장 있어 / 海山窮處名區在
육경에 뛰어난 호걸스런 사람 같애 / 却似人豪出六經

위의 시는 동명의 운에 차운한 것인데,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차운하였다.

우주 개벽 어느 때에 됐다던가 / 宇宙幾時闢
이 절은 신라 시대에 지었다네 / 禪宮羅代開
새는 구름 저 멀리로 사라지고 / 鳥向雲邊滅
돛단배 저 하늘 밖에서 오네 / 颿從天外來
바람 일자 파도는 태양을 흔들고 / 風生波盪日
가을 짙어 객은 누대에 오르네 / 秋晩客登臺
바닷가 삼천 리를 다 돌아보고나니 / 遵海三千里
이 정자가 참으로 장쾌하여라 / 玆亭實快哉

또 한 수는,

위치는 산수 좋은 곳 차지했고 / 地占山河勝
들창은 바다 쪽으로 향해 있네 / 窓臨溟海開
하늘 밖에서 흰구름 일고 / 白雲天外起
붉은 해가 밤중만 온다네 / 紅日夜中來
바람은 금선굴 흔들어대고 / 風撼金仙窟
파도는 의상대를 절구질하네 / 波舂義相臺
구이에 가 살고픈 뜻이야 있었다만 / 居夷夙有意
날 따를 자가 누구란 말가 / 從我其誰哉

했는데, 여러 사람이 다 함께 차운하였다. 정동명의 원운(元韻)은, ‘임지로 가는 유열경(柳悅卿)을 보내며’인데,

일만 그루 배나무꽃 바닷가 정자 / 萬樹梨花海上亭
낙산이 바닷가라 바다가 끝이 없네 / 洛山邊海海冥冥
문정에 송사 없고 종일토록 한가하리니 / 訟庭竟日閒無事
부상의 대제경이나 챙겨서 읽게그려 / 須讀扶桑大帝經

하였고, 홍녹문의 원운은, ‘낙산사에서 노두(老杜)의 운으로’인데,

이곳이 용왕의 집자린데 / 地卽龍王宅
어느 해에 절이 섰다던가 / 何年梵宇開
하늘은 푸른 바다에 떠 가고 / 天浮靑海去
산은 백두산에서 왔다네 / 山自白頭來
가을 풍경을 실컷 보기도 하고 / 縱目觀秋色
석대에 올라 쉬기도 했네 / 扶笻倚石臺
여기에 올라 세월의 무상함을 어루만지노라니 / 登臨撫今古
생각키는 이런 일 저런 일 끝이 없어라 / 俯仰恩悠哉

했으며, 손홍우 희(孫洪宇煕)는 차운하기를,

창파가 아득하여 끝이 없구나 / 滄波杳無際
천지는 언제쯤 개벽되었다지 / 天地幾時開
옛절엔 가을빛이 다해가는데 / 古寺秋光盡
모래밭으로 물새들이 오는고야 / 明沙海鳥來
시 읊조리며 옛일 더듬어도 보고 / 吟詩憶舊迹
먼 곳 바라보며 누대에 앉기도 하지 / 騁眺坐寒臺
황학이 한번 날아가더니 / 黃鶴一飛去
흰구름마저 왜 그리도 먼지 / 白雲何遠哉

하였다. 그리고 그날 비경이 최간이의 시 두 수를 가지고 왔었는데 그 하나는,

누대하면 해 뜨는 바다 장관이라 들었더니 / 樓觀海日昔聞奇
달로 치면 중추가절 햇수로는 일년이라 / 月得中秋一歲期
이 날이요 이때에 장마비를 만났으니 / 此日此時逢久雨
하늘이 날 영동에서 시 쓰라고 잡아 두었네 / 天公停我嶺東詩

라고 읊었으니, 이 시는 낙산(洛山)을 읊은 것이고, 또 십칠조(十七朝)라는 시는 이렇다.

높고 높은 저 하늘 달이 진 후 동쪽에서 / 玉宇迢迢落月東
갑자기 만경창파가 붉게 붉게 끓더니만 / 滄波萬頃忽翻紅
굼틀굼틀 괴물들은 모두 다 어디가고 / 蜿蜿百怪皆如畫
곱디고운 안개 속에 황금바퀴가 튀어 나오네 / 擎出金輪彩霧中

이상의 시들은 최공(崔公)이 간성 유수로 있을 때 판각해서 달아 두었던 것으로 언젠가 화재로 그 현판은 다 불타 없어지고 말았는데, 어느 선비 집에 남아 있던 이 시를 비경이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해 베껴 온 것이다. 그리고 또 정수몽(鄭守夢)이 유수로 있으면서 비경에게 준 사운시(四韻詩)도 읊기에 그럴 만하여 역시 베끼게 하였다. 그리고 내가 좌중에다 말하기를,
“선배들은 별것 아닌 이 시 한 수까지도 그렇게 관심들을 가졌었는데 어찌해서 지금 후배들은 그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도 없는지 모르겠어.”
하였다. 정수몽의 시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적을 수가 없으니, 일행들에게 다시 물어 보아야겠다. 그 중의 시축에는 요즘 여러 사람들 시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다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었다.

15일(정사) 흐림. 가랑비가 싸늘하게 뿌리다가 멎었다. 기신(忌辰)이라 좌재(坐齋)하면서 《주역》을 읽었고 부리(府吏)를 시켜 일록(日錄)을 베끼게 하였다. 또 어제 유군을 통해 눌승(訥僧)에게서 얻은 향언지로가(鄕言指路歌)는 퇴계(退溪)가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내용을 볼 때 학문에 조예가 없이는 지을 수 없는 내용이기에 역시 후일 아이들의 영가(詠歌) 자료로 삼기 위해 베껴 두게 하였다.
영덕 현령(盈德縣令) 심철(沈轍)이 지나다가 절에 들러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는 고 판서(判書) 집(諿)의 손자이고, 사간(司諫) 동구(東龜)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날 또 두 군을 통해 김 장군 응하(金將軍應河)의 애사(哀詞) 두 편을 들었는데, 둘 다 읊을 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어서 추후 기록하기로 하겠다. 말이 난 김에 명(明) 나라 희종(熹宗)이 김응하를 포증(褒贈)한 일에 관해 말을 해야겠기에 내가 두 군들에게, 당시 명 나라에서 포증할 때 천자로부터 조서(詔書)가 있었는데 그 조서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보았다고 하면서,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명문이 아니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건 그렇지 않다. 나도 그 조서를 읽어 보았지만 누가 초안한 것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천자가 자칭 과인(寡人)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김군(金君)을 수양(睢陽)의 장순(張巡),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에게 비유하여 말하기를, ‘장순(張巡)ㆍ허원(許遠)이 죽지 않았더라면 당(唐)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고, 문천상이 죽지 않았더라면 송(宋)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며, 장군이 죽지 않았던들 과인의 나라에 신하 없는 폭이 되었을 것이다.’ 했는데, 그 말뜻이 전도되고 사체(事體)를 모르는 정도가 심하였다. 또 문장의 표현 방법까지 서툴고 껄끄러워 마치 고문(古文)을 흉내내 보고자 하였으나 문장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천자 나라에서 외국 신하를 포증하려면 조서를 만들 때도 반드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쓰게 해야 할 것인데, 지어 놓은 글이 그 모양인 것을 보면 나라가 망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만하지 않은가.”
하였다.
내 언젠가 또 숭정(崇禎) 연간에 황 감군(黃監軍)이 나왔을 때 그가 읊었다는 시를 보았는데, 내용이 말도 못하게 거칠고 추하고 졸렬한데도 그 자신은 그것마저도 모르는지라 장계곡(張谿谷)이 그의 작품을 써 놓고 비웃었다는 것이다. 듣기에 그 황은 진사(進士) 출신으로 조정에 오른 이후 우리나라를 왕래할 정도였으니 역시 한때 쟁쟁한 인물이었을 것인데도 그 모양이니 인재가 쇠할 대로 쇠해 세상이 오래 못 가리라는 징조인 것이다. 문장(文章)이라는 것이 비록 별것은 아니로대 한 시대의 성쇠가 거기에도 그렇게 반영되는 것이다. 아, 후세 사람들이 지금을 보면 지금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못할런지 어떻게 알겠는가.

16일(무오) 새벽에 일어나 들창을 밀치고 일출 광경을 보았다. 그날 따라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바다도 활짝 개어 동쪽이 밝기도 전에 서광(瑞光)이 만 길이나 치솟고 있었고 뭇별들은 이미 드문드문해져 함께 빛을 겨룰 만한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늘가에 갑자기 구름 같은 것이 띄엄띄엄 생기면서 가릴 듯이 하더니 막상 붉은 기운이 점점 무르익자 그것들은 녹은 듯이 없어지고 다만 금물결이 만 리나 뻗어 하늘과 물이 서로 밀고 당기는 것과 같은 것만 보였다. 그것은 화륜(火輪)을 달구느라고 홍로(洪爐)가 너무 뜨거워 바다 전체가 끓고 있는 것과 같기도 했고, 또 어찌보면 태양 궤도가 잠겼다 떴다 하면서 뛰어도 뛰어도 오르기 어려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태양이 불끈 솟자 위아래에서는 서로 받들고 좌우에는 상서로운 구름 자색 서기가 무수히 깔려 있어 마치 그것들을 타고 올라온 것 같기도 했다. 이에 해는 둥실둥실 떠오르고 그 빛은 아래로 내리쪼여 바다는 바다대로 깊고 넓게만 보이고 하늘은 하늘대로 높고 크게만 보였으며, 상하 사방이 똑같이 밝아지고 삼라만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천지간의 일대 장관이었다. 날마다 기다렸지만 그때마다 뜬구름이 가리더니 오늘에야 비로소 장쾌하게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밝음 속에도 어딘가 일말의 그 무엇이 살짝 가리운 빛을 띠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마 겸손해야 하고 밝음을 숨겨야 하는 천지 조화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뜻이 아닐런지 나로서는 감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어 생각하면 모든 물건의 이치가 각기 종류별로 움직이고 형상에 의해 동화되고 있는데 그것을 달리 비유하면 마치 군자가 나오려고 하면 반드시 소인이 나타나 이간질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세상은 항상 드물고 어지러운 세상이 언제나 많은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군자가 참으로 당당한 위치를 확보하고 그리하여 세상이 치평을 향해 치닫게 되면 저 소인이라는 것들은 풀이 죽어 자취를 감추거나 아니면 과거를 청산하고 이 쪽으로 심복해 오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다. 우리 쪽에 병통이 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말을 따르고 받들면서 우리 쪽의 쓰임이 될 것이다. 문제는 군자 자신이 자기를 소명하고 순수하고 밝은 덕을 길러 음(陰)을 저 땅 밑에서부터 철저히 배제하고 자기 스스로 높고 밝은 위치로 부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는 또 세상을 맡아 다스리는 자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에 이르기를,
“태양은 날고 음은 매달려 있으면 만물이 화락하리라.”
했는데, 그를 해설한 자의 말에 의하면, 태양은 군자를 말하고, 매달려 있다는 것은 녹아 없어짐을 뜻하며, 음은 소인을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군자의 기가 성하면 뭇 음은 저절로 없어진다는 뜻으로 바로 오늘에 필요한 점괘인 것이다.
이 날도 기신이어서 재계하면서 앉아 있었다. 밤에 비는 개고 달은 기망(旣望)이어서 바다에 뜨는 달을 또 구경하려고 했었는데, 생각지 않게 17일이 진짜 보름이어서 그런지 해가 서산에 채 지기도 전에 달이 이미 동천에 솟아 있었고, 막 눈을 들고 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달이 벌써 구름 끝에 나와 있었다. 저녁이 되어 중 몇 사람과 함께 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나갔더니 중천에 솟은 달이 바야흐로 빛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그 빛은 바다 밑까지 비치고 있었으며 만경창파는 은물결로 변하여 위아래가 모두 마치 벽유리(碧琉璃)와도 같았다. 이윽고 바람이 해면을 스치자 파도가 넘실대고 달은 그 속을 출몰하니, 마치 삼켰다 뱉았다 당겼다 놓았다 하는 것 같았고, 또 잠시 후 하늘을 보았더니 높고높은 푸른 하늘에는 외로운 달만이 천천히 옮겨 가고 있었다. 고인이 이른바, ‘사방에 구름 걷히고 은하마저 없는 하늘[纖雲四卷天無河] 일년 중에 오늘 밤 달이 제일 밝네그려[一年明月今宵多]’ 했던 것이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인 듯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광채는 비록 일출을 볼 때만큼 장엄하지는 못했으나, 그러나 그 맑고 밝고 깨끗한 자태로 태양을 대신해서 비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천하의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천지 음양의 이치가 서로 양보라도 하듯이 하나가 차면 하나는 비는 것으로, 옛분들이 말했던, ‘백옥반(白玉盤)ㆍ요대경(瑤臺鏡)’ 같은 말로는 지금 이 광경을 비교 표현하기에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중 비경 등이, 오늘 밤 달빛은 일년 중 보기 드문 달빛이라고 한 말에 대해 나도 동감을 하였다. 이미 일출 광경을 보았고 지금 또 중추(中秋)의 밝은 달까지 보았으니 이만하면 이번 걸음은 헛걸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삼촌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나서 두 군들을 불러내어 같이 구경하다가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대고 밤 기운이 너무 시원해서 요사(寮舍)로 들어가 《주역》 계사(繫辭)를 종편까지 읽었다. 향을 가져와 피우게 했더니 중이 침향(沈香)이라고 하는 것을 가져왔기에, 내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들은 이름만 취택하고 실물은 취택하지 않는게로군. 중국에서 말하는 침향이라는 것은 바로 나무 이름인데 남국(南國)에서 나는 나무야. 지금 그대들이 물 속의 썩은 나무를 가져다가 부처 앞에다 피우면서 그것을 아주 향기로운 것으로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에 현혹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하고, 다시 흑단(黑檀)을 가져와 피우게 하였다. 흑단은 시속 말로는 노가자(盧柯子)라고 하는 것으로 그 향기가 매우 맑았다. 또 중향성(衆香城)에서 얻어 왔다는 도로파(都盧芭)도 피워 보았는데 그것은 향기가 천궁 비슷하면서 역시 정신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내 이어 생각해 보니,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주무숙(周茂叔)의 가슴 속을 상징하는 말이고, 서일상운(瑞日祥雲)은 정백순(程伯淳)의 가슴 속을 상징하는 말이며, 태산교악(泰山喬岳)과 해활천고(海闊天高)는 또 주회옹(朱晦翁)의 기상을 그린 것인데, 내 사실 이번 걸음에 그러한 것들을 다 직접 보고 정신적으로 느껴 보았고, 일만 겹의 봉래산과 동해의 구름 물결 그리고 해돋이 때의 눈부신 광채와 휘영청 밝은 가을 달도 내 모두 살펴보고 희롱해 보았다. 게다가 또 하늘까지도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비, 바람, 구름, 먼지 등으로 훼방을 놓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가령 안문(鴈門)의 가을비, 죽포(竹浦)의 거센 파도, 낙산(洛山)의 찬이슬 같은 것은 풍백(風伯)ㆍ우사(雨師)가 앞장서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준 작품들로서 누군가가 우리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번의 이 기회를 단순히 구경만 했다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무엇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터득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요산요수 그리고 호연지기라는 것과도 상통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천 년 전의 고인들을 만나 본 것과도 같을 것이다.
해돋이 구경에 관해서는 나중에 시를 지어 그 일을 적어 둔다.

바다를 바라보며 해 뜨는 곳 살핀 뜻은 / 看看海色候扶桑
떠가는 저 구름이 하늘을 더럽힐까였는데 / 常恐浮雲穢太淸
눈부신 해가 갑자기 나타나서 / 忽覩爀曦懸陰處
천 길이나 뻗는 광선 천지사방 다 비추네 / 千丈毫光六合明

그리고 낙산중추월(洛山中秋月)을 두고는 노소재(盧蘇齋)의 ‘청간정(淸澗亭)’ 운자로 읊었는데,

바다의 달빛 가을 들어 더 밝고 / 海月當秋白
거센 파도는 밤바람에 일어라 / 鵬濤入夜風
절 방에 외로이 누워 있노라니 / 禪窓孤臥處
뭇 생각이 싹 가시네그려 / 萬慮落眞空

하고, 또 읊기를,

티없는 것 중추의 달빛이요 / 霽色中秋月
파도소리 큰 바다 바람이어라 / 波聲大海風
그 소리 그 빛깔 말고도 / 須知聲色外
텅빈 하늘이 또 있다네 / 更有寂寥空

하였다.
아침에는 심군 철(沈君轍)이 왔다가 갔고, 저녁에는 간성 군수 윤세장(尹世章)이 동해신(東海神) 제사의 예차관(預差官)으로 와서 이 절을 지나다가 여러 사람들과 서로 만나고 또 나를 와서 보았는데, 윤(尹)은 바로 윤 상공 해원(尹相公海原)의 증손이요 윤 판서 이지(履之)의 손자라고 했다. 대옥 역시 동해신 제사 일로 저녁에 떠나면서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감사(監司)와 도사(都事)가 부(府)에 온다는 말을 듣고 하직을 고하고 떠난 것이다.
낮에 그 곳의 중 몇 사람과 함께 의상대(義相臺)에 올라 관음굴(觀音窟)을 바라보았더니 작은 집 하나가 파도에 의해 무너져 있었다. 대(臺) 위에 앉아 잠시 물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정(鄭)군과 유(柳)군이 내게로 와 함께 잤다. 그날 사눌(思訥)이라는 중이 영남 태백산에서 와 그 절을 위해 예불(禮佛)을 하고 있었다. 그 중은 방에서 혼자 거처하며 밤 5경이면 일어나서 불전에 향을 올리는데, 낮에도 자지 않고 밥도 하루 한 끼만을 먹으면서 언제나 시간 맞추어 염불을 했다. 내가 데리고 얘기해 보니 그는 선정(禪定)의 설을 듣고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자였다. 내가 묻기를,
“노선(老禪)께서 마음 공부를 하신 지가 오래인 모양인데 지금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까지 갔습니까?”
하자, 그는 그렇다고 하면서 아무리 어지럽고 화사한 성색(聲色)을 듣고 보아도 그것을 안 보았을 때와 똑같이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성색에 대한 생각은 그래도 제어하기가 쉽지만 마음에는 유주상(流注想)이라는 것이 있어 바로 온갖 잡념이 때없이 왕래하는데, 노선께서는 마음 공부를 하여 그러한 것들도 다 제거가 되었습니까?”
하니 그는,
“공부 초기에는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그것이었는데 지금은 온전히 없어졌지요.”
하였다. 공부를 몇 년이나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하였고, 마음에 잡념 하나 일어나지 않고 혼자 훤한 것을 느낄 때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게 바로 이른바 비치지 않고 있는 거울 같고 파도가 일지 않고 있는 물 같다는 것 아닙니까.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마음이란 불과 같다고 하는데 불은 다른 물건에 의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풀에 붙거나 혹은 나무에 붙거나 또 혹은 다른 물건에 붙어야지 만약 그 물건들이 없다면 그 불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비록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 발동은 없을지라도 잠깐 사이에 얼핏 스치는 생각이 없지는 않은 것인데 그 역시 마음이 동한 것입니다. 노선이 말씀하신 이른바, 거울이 비치지 않고 물이 파도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을 무엇으로 증험할 수 있습니까?”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것은 너무 극단적인 논리라서 이 노승(老僧)으로서도 잘 알아차릴 수가 없네요.”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시오. 전인들 화두(話頭)에 얽매이지도 말고 문자(文字)를 가지고 참조 고증할 것도 없고 다만 내 마음에 얻어진 것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와서 내게 말하시오.”
했더니, 그 중이 그러겠다고 하고 떠나갔는데, 밤이 되어 간찰 하나를 부쳐왔다. 거기에 이르기를,
“마음의 허령(虛靈)이라는 것은 아무런 생각도 염려도 없고 형체도 소리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마음은 있는 것이외다.”
하고, 또 시가 있었는데,

휘영청 밝은 달은 언제나 그 빛이요 / 明明白月千秋色
옹기종기 푸른 산은 만고의 모습이어라 / 點點靑山萬古容
그나 내나 유별나게 다른 것이 뭐 있으리 / 伊我別無奇特事
불전에 분향하며 종이나 치는게지 / 焚香佛前打鳴鍾

했으며, 또 말하기를,
“마음에 모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질 때가 물론 있기는 있으나 다만 그것은 순간이고 지속하기란 매우 어렵다.”
했기에, 내가 이르기를,
“그대 본 것이 매우 정밀하고 말도 다 좋은 말이오. 나도 시로 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지금 기좌(忌坐)중이어서 내일로 미루어야겠소.”
했는데, 그 중은 그길로 물러갔다.

17일(기미) 맑음. 나도 재계가 끝났고 대옥도 제소(祭所)에서 돌아왔다. 나더러 동해신묘비문(東海神廟碑文)을 지으라고 하고 서로 손을 잡고 작별을 고했는데, 그날 모두 한번 실컷 즐기고 싶었으나 마침 관사(官事)가 바빠 부득이 서둘러 돌아가야 했기에 간성 군수 윤군이 행리 속에서 꺼내 온 술과 안주로 몇 순배 돌리고 각기 파했다. 중 사눌이 나를 보러 왔기에 내가 시로 답하였다.

휘황한 해와 달은 언제 봐도 그 빛이요 / 輝煌日月千秋色
높고 넓은 산과 바다 만국이 일반이지 / 嵬蕩山河萬國容
만약에 모든 것이 고요해야 된다면야 / 若道寂然爲究意
불전에서 종인들 어찌하여 치단말가 / 佛前那用打鳴鍾

중 사눌은 하직을 고하고 떠났고, 정극가는 강릉(江陵)을 다녀오기 위해 뒤에 머물렀다. 우리 일행이 서로 헤어지려 할 때 중들이 나와 전송하였는데, 모두 작별하기 아쉬워하는 빛을 보였다. 동구 밖을 나와 설악산을 바라보며 15리 남짓 가서 신흥사(神興寺)에 들렀더니 중들이 견여를 가지고 동구 밖까지 환영을 나왔다. 그 절은 설악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전각(殿閣)이나 헌루(軒樓)가 역시 규모가 큰 사찰 중의 하나였고, 여기에서 바라다보이는 설악산과 천후산(天吼山)의 깎아지른 봉우리와 가파른 산세는 마치 풍악(楓岳)과 기걸함을 겨루기라도 하는 듯했다.
여기에 있는 육행(六行)과 쌍언(雙彦)이라는 중은 다 얘기 상대가 될 만하여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외삼촌을 모시고 유군과 함께 견여로 5, 6리쯤 가 앞 시내의 수석(水石)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날 대옥이 심부름꾼 한 사람에게 술과 안주를 보내왔기에 편지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또 극가에게 부탁하여 금강산에서 얻었던 소마장(疏麻杖) 하나를 허미수(許眉叟)에게 가져다 드리도록 했는데 그 지팡이는 바로 금강산중이 말하는 산마(山麻)라는 것으로 색은 청록색이고 재질은 옹골지며 매끈하고 가벼워 지팡이 감으로 좋았다. 그런데 그것을 산마라고 하지만 초사(楚辭)에 이른바, ‘소마(疏麻)를 꺾음이여, 백옥같은 꽃이로다’라고 한 그것이 아닌가 싶어 드디어 소마로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극가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쳤다.

땡땡한 녹색 옥장을 / 鍧鍧綠玉杖
저 금강대에서 다듬었지 / 斲彼金剛臺
그대 통해 노인께 드렸지만 / 憑君奉老子
돌아올 때 풍뢰 조심하게나 / 歸路愼風雷

유군도 대옥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극가가 시와 함께 이름을 그 밑에다 적었으나 그 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날 밤 최간이(崔簡易)의 낙산시 운자로 절구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주었다.

동쪽 태산 남쪽 형산 천하의 명산이라 / 東岱南衡海內奇
공자도 주자도 그 마음 같았으리 / 仲尼元晦共心期
그 뉘라서 알았으랴 천 년 후에 이 땅에서 / 誰知千載東溟外
그 풍경 구경하고 짧은 시를 읊을 줄을 / 無限雲波屬短詩

이렇게 쓰고서 내 말이,
“이 시는 표현을 더 다듬어야 할 곳이 있는 것 같아 손질을 좀 해 달라는 것이네.”
하였다.

18일(경신)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뒷 고개를 넘어 외삼촌을 따라가다가 유군과 뒤떨어져 계조굴(繼祖窟)에 들어갔다. 바위에 나무를 걸쳐 처마를 만들어서 지은 절인데 지키는 중은 없었다. 앞에는 깎아지른 바위 하나가 서 있는데 그 이름이 용바위[龍巖]이고 아래는 활모양으로 된 바위 하나가 반석을 이고 있었다. 그 크기가 집채만 했는데 중 하나가 흔들어도 흔들흔들하여 이른바 흔들바위[動石]라는 것이다. 천후산 중간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설악산과 마주하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어 역시 한번 구경할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바다가 침침해서 멀리 볼 수는 없었다.
그 절 벽상에 기(記)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기를 보니,
“이 굴은 의상(義相)이 수도하던 곳이다. 동으로 부상(扶桑)을 바라보면 망망한 큰 바다에 해와 달이 떴다 잠겼다 하고, 남으로 설악을 바라보면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눈안에 죽 들어온다. 안개 낀 동정호(洞庭湖)의 물결이 제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고, 여산(廬山)이 비록 도인(道人)들이 앞다투어 찾는 곳이라지만 역시 만경창파는 없는데, 여기는 그 모두를 다 겸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승경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리가 비좁고 암자 모양도 왜소하여 경치 좋은 곳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중들 말에 의하면 몇 해 전에는 수계(守戒)하는 중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포악한 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장주(莊周)가 이른바, ‘안으로는 수련을 쌓아도 겉은 표범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이학(異學)의 무리들은 인간과 유리되고 세상과 동떨어진 일 하기를 좋아하면서 그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러한 일을 당해 마땅한 것이다.
그 굴 뒤로는 지상에서 몇 천 길 높이로 석부용(石芙蓉)이 치솟아 있는데 서쪽에서 달려온 것으로서 기기교교한 형상의 봉우리가 40여 개나 되었다. 어떤 것은 검극(劍戟) 같고, 어떤 것은 규벽(圭壁) 같고, 어떤 것은 종정(鍾鼎) 같고, 어떤 것은 기고(旗鼓) 같고, 어떤 것은 불꽃이 튀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용솟음치는 파도와도 같아 모양이 제각기 형형색색이고, 중간의 한 봉우리는 구멍이 나 있어 마치 풍악의 혈망봉(穴網峯)처럼 생겼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산을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비바람이 있으려면 미리 울기 때문에 천후(天吼)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계조(繼祖)라고 한 것도 아마 이 산의 조산(祖山)이 풍악을 닮았다는 뜻 아니겠는가.
견여를 타고 산에서 내려와 미시령(彌時嶺) 재 아래 계시는 외삼촌 뒤를 좇아왔다. 재에 와서 재 아래 있는 여러 고을들을 내려다보며 내가 유군에게 이르기를,
“영동(嶺東) 한 구역을 옛날에는 창해군(滄海郡)이라고 불렀다. 장자방(張子房)이 이르기를, ‘동으로 가 창해국 임금을 뵙고 거기에서 역사(力士)를 만나 진시황에게 철퇴를 던지게 됐다.’고 했다 하니, 아마도 그가 여기까지 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했었다. 또 견여를 타고 재를 넘어오는데 재가 높고 험해 걸음마다 마치 사다리와 같은 가파른 바위가 거의 30리나 뻗쳐 있었다. 난천(煖泉) 가에 와서 말을 쉬게 했는데, 이른바 난천이란 겨울에도 얼지 않아 길 가는 사람들이 눈에 막히고 해가 저물면 반드시 거기에서 자고 갔다는 것이다. 연도에는 꽤 아름다운 수석들이 있었으나 이미 풍악과 낙가(洛伽)의 승경을 구경한 우리들 눈에는 별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큰 바다나 높은 산을 구경한 자에게는 어지간한 산과 물이 산과 물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인(聖人)의 문에서 노는 자에겐 도술(道術)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재 위에 군데군데 옛 성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고장성(古長城)인 것으로 금강산ㆍ설악산 정상에도 그러한 곳들이 더러 있었다. 우리나라 삼국(三國) 시절에 피란 나온 이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모여 있으면서 서로 버티던 곳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3백여 년 태평을 유지하는 동안 성 단속을 하지 않았다가 중간의 왜놈 난리에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이리저리 도망만 치다가 결국 문드러지고 말았다. 지금도 병진(兵塵)이 일어나지 않은 지 한 세기가 다 되어가고 있으니, 태평 뒤에는 비운이 반드시 오는 법이어서 염려가 안 될 수 없다.
도중에 천후산 흔들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賦)를 지었다.

천후산 앞에 큰 바위 하나 어디에서 떨어져 계조암(繼祖菴) 가에 있을까. 한 명이 흔들어도 흔들리지만 옮기려면 천 명 가지고도 안 될 바위. 어찌보면 우(禹)가 구독(九瀆)을 뚫고, 구주(九州)를 개척하고, 구택(九澤)을 쌓고, 사경(四逕)의 물길을 낸 다음, 구주의 쇠붙이를 모아 만들어놓은 솥 같기도 하고, 또 진시황(秦始皇)이 이주(二周)를 삼키고 육왕(六王)을 죽이고 사해(四海)를 통일하고 오랑캐까지 제어한 다음, 천하 병기를 모두 녹여 주조한 종(鍾)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솥이라고 해도 상제(上帝)께 술 한 잔 올릴 수도 없고, 종이라고 해도 꽝꽝 울지도 못한다. 기껏 중들만 이곳을 이용하여 절로 꾸며 두고, 구경꾼들만 그를 두고 별소리 다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월출산(月出山) 꼭대기에 바위 아홉 개가 있었는데 중화 도사(中華道士)가 서에서 와서 그 중 여덟 개를 쳐 없애버렸다고 들었지만, 나도 두보(杜甫)가 말했듯이 맹사(猛士)의 힘을 빌려 그를 들어다가 저 하늘 밖에다 던져버림으로써 사특한 말 편벽한 행동이 판치지 못하게 하고 싶다. 하지만 한편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찢어지고 귀신들이 울부짖고 미워하면서 갱혈(坑穴) 속에 가만히 있지 못할까 봐서 머뭇거리며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탄식만 한다. 장자방을 데리고 창해군(滄海君)을 찾아가서 역사(力士)를 만나 300근 철퇴를 옷소매에 넣고 있다가 그를 저격하여 혼비백산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아, 신력(神力)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날은 남교역(嵐校驛)에서 잤는데 마을 앞에서 한계산(寒溪山)을 바라보니 그다지 멀지 않고 또 그 골이 깊고 수석도 기괴하다고 들었으나 가는 길목이 아니고 또 우회해야 하기 때문에 가보지 못했다. 주인의 성명은 함응규(咸應奎)라는 자였는데 우리에게 꿀차를 대접하였다. 또 문자를 꽤 알고 있었으며 점도 칠 줄 알았다. 내가 집을 떠나온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집 안부가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걱정 없다고 하면서 옥녀상봉(玉女相逢)의 점괘가 나왔다고 하였다.

19일(신유)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안개를 무릅쓰고 일찍 출발하여 인제(麟蹄) 원통역(圓通驛)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주인 성명은 박윤생(朴潤生)인데 꿀차를 대접했고, 역리(驛吏)들은 술과 과일을 대접했다. 춘천(春川)의 청원(淸源)을 보려고 홍천(洪川) 가는 큰길을 좌로 하고 굽은 시내를 건너 한 골짜기에 들어갔다가 과거보기 위해 떼지어 걸어가고 있는 선비들을 길에서 만나 말에서 내려 서로 읍을 했는데 그렇게 하기를 두 차례나 했다. 시내 하나를 열여섯 차례나 건너 산골의 민가를 찾아 잤는데 아주 궁벽한 곳이었다. 주인의 말이, 자기 나이는 70이고 아들이 셋, 딸이 넷인데 금년 봄에 굶고 병들어 모두 죽었으며 집안간에 죽은 자들이 30명도 더 되는데 아직 땅에다 묻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 땅을 버리고 떠돌이로 나서고 싶어도 자기 자신은 그 고을의 토착민이고 아들이 또 어궁졸(御宮卒)이어서 쉽사리 옮겨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정이 불쌍했고 산골짜기의 백성들 생활상이 그렇게도 맵고 고통스러워 장초지탄(萇楚之歎)이 없지 않았다. 슬픈 일이었다. 땅은 인제 땅이었고 마을 이름은 가음여리(加陰餘里)였다.

20일(임술) 맑음. 일찍 출발하여 광치(廣峙)를 넘는데, 재가 매우 가파르고 길이 전부 돌 뿐이어서 사람이나 말이나 힘들고 괴롭기가 미시령에 버금갔다. 원화촌(遠花村)윤동지(尹同知) 옛집에서 조반을 먹었는데 윤생 천민(尹生天民)이라는 자가 술과 과일을 가져와서 대접했다. 재를 넘고 골짜기를 벗어나니 들판이 매우 넓고 민가 수십 호가 여기 저기 살고 있었으며 지붕은 모두 기와로 덮었는데 그 모두가 선비들 집이라고 했다.
윤생의 말에 의하면 윤동지라는 자는 이름은 수(洙)이고 관향은 파평(坡平)인데 그의 증조부가 처음으로 그 곳에 들어와 농사에 주력하여 재산을 이루었고 그 고장에 삼(蔘)이 생산되는데 한 근 한 냥이 아니라 캐면 섬으로 캐기 때문에 가세가 매우 요족하고 곡식도 1만 석을 쌓아 두었다가 병자년 난리에 싸우러 가는 북로군(北路軍)이 모두 그 곳을 지나게 되어 그 군대들 먹을 것을 전부 그가 대었고,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그에게 가선(嘉善)의 품계를 내렸다고 하였다. 난리로 인하여 세상이 그렇게 어지러울 때 자기 사재를 털어 국가의 다급함을 돕는다는 것은 복식(卜式)과 같은 사람인데, 국가에서 그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영직(影職)이나 공함(空啣)뿐이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충성을 권장하고 공로에 보답할 것인가. 더구나 그 사람으로 말하면 자기 자력으로 치부하여 그 고을에서 우뚝하게 솟았고 또 자기의 힘이 많은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그만하면 재질로나 힘으로나 기릴 만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사람 쓰는 것은 꼭 쓰일 사람이 쓰이는 것도 아니고 쓰였다고 해서 꼭 쓸 사람도 아니어서 그 역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날 수인천(水仁遷)을 지났는데 매우 위험한 길이 거의 10여 리나 되었다. 수인역 마을에서 잤는데 그 곳은 양구(楊口) 땅으로 그날은 70여 리를 온 셈이다. 내가 역리 한 사람과 얘기해 보았는데 내가 말하기를,
“이 고장은 지대가 궁벽하고 산이 깊어 산삼이 날법하다.”
했더니, 그 역리 말이,
“이 고장에 물론 산삼이 나지요. 그러나 근년 들어 유랑민들이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는 바람에 산택(山澤)이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고 또 남아난 재목도 없어 옛날과는 딴판입니다.”
하였다. 이렇게 서로 주고 받다가 내가 말하기를,
“내가 산중을 다녀 보니까 금강산도 내산 외산 할 것 없이 모두 황무지 개간한답시고 아무리 높은 데도 다 올라가고 아무리 깊은 곳도 다 들어가 초목도 자라지 못하여 새짐승도 붙어 살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서는 고기 못 먹고 가죽 옷 입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집도 잘 지을 수 없고, 생활의 변화를 도모할 수도 없고, 의약(醫藥)도 제대로 쓸 수 없으며, 죽어서는 널마저도 쓸 수 없게 만들고 있어, 그로 인한 재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부역(賦役)과 형벌을 피해다니며 국가로 하여금 저들을 기속하지 못하게 하는데, 일단 무슨 경급(警急)이라도 있으면 서로 모여 도둑으로 변해버리고 마니, 참으로 국가의 간민(姦民)인 것이다. 고을 수령들이 그 피해를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들이 원적(元籍)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세 이외의 수입을 노려 그들을 사민(私民)으로 삼아 그들 요구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 폐단이 자꾸 번지고 있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숲을 모두 태우거나 베어 내어 토석(土石)이 전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장마라도 한번 지는 날이면 모두 무너져 흘러내려 산은 산대로 깎이고 시내와 평원은 막히고 메워져서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던 산과 물이 깊던 못들이 전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와 짐승은 다 도망가고 물고기도 자라도 자리를 옮겨 근세 이후로 토지는 더욱 척박해지고 백성들은 더욱 가난에 찌들리며 산이 무너지고 시내가 말라 비구름도 일지 않고 수재 한재가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 모두가 사람들이 살피지 않아서 그렇지 다 원인이 있어 그리 된 것이다. 그대도 그것을 알고 있겠지.”
하였다. 유군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지금 그것을 금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할 것인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만약 호구(戶口) 정책을 엄하게 하여 떠돌이의 길만 막는다면 옛날처럼 위 아래로 풋나무 새짐승까지도 다 제 삶을 즐기는 정책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를 다 설명하자면 말이 기네.”
했더니, 역리가 절을 하면서 하는 말이,
“상객(上客)의 말씀이 옳습니다. 꼭 할 말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산에 들어가 경작하는 자들은 참으로 국가로 보아 간교한 백성들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산골 백성들이 더 입고 있습니다.”
하였다.

21일(계해) 아침날씨가 음산하더니 이어 가랑비가 내렸다. 조반 후 출발하여 부창현(富昌峴)을 넘어 부창역 마을에서 말에게 꼴을 주었다. 가랑비 때문에 늦게 출발하여 기락이천(祈樂伊遷)을 지났는데, 기락이는 방언으로 기어서 나온다는 말로서, 그 천의 길이 너무 좁고 또 바위 구멍이 있어서 누구나 그 곳을 가는 자는 반드시 기어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전(泉田)의 길가 큰 시내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날은 하루 내내 산골 험한 길만을 걸었는데, 여기에 이르자 산들이 확 트이고 그 가운데 큰 평야가 펼쳐 있었으며 강물이 굽이치고 돌아가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북쪽을 바라보니 높다란 산이 하나 있고 그 아래 민가 수십 호가 있었으며 뒤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느릅나무가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데 유군의 말로는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후(李煦)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시냇가에 작은 저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생 후평(李生后平)이 집에 있는가 물었더니, 지금 양양(襄陽)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20여 리를 가면서 북으로는 청평산(淸平山)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소양정(昭陽亭)을 가리키며 오다가 배로 앞 강을 건너 소양정에서 잠시 쉬었다. 그 곳 벽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남긴 시가 걸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월봉(月峯)ㆍ청음(淸陰)ㆍ백헌(白軒) 그리고 유창(兪㻛)의 것을 보고 드디어 춘천(春川) 읍내로 들어와 유군 종의 집에다 여장을 풀고 주수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주수는 병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비장(裨將) 신완(申椀)을 보내 왔다. 그리고 조금 뒤에 주수의 형 이생 석(李生錫)이 왔고, 또 최남(崔男)의 아들 상인(喪人)인 이억(爾嶷)도 왔으며, 이생을 통해 서울에 있는 집안 소식도 대강 들었다. 유군이 이르기를,
“듣기에 청평산에 이자현(李資玄)의 식암 영지(息菴影池)가 있다는데 식암은 자현이 홀로 앉았던 곳으로 동사(東史)에 이른바, ‘둥글둥글하기가 곡란(鵠卵)과 같다.’고 한 것이 그것이고, 영지는 식암 아래 있는 겨우 반묘(半畝)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못으로, 해 뜨는 아침, 달 돋는 밤이면 식암의 풍경과 사람의 동정까지도 모두 그 못 속에 비친다고 한다. 그리고 자현이 죽었을 때 불가의 법대로 화장을 하여 불에 탄 그 뼈를 아직까지 그 곳 중이 간직하고 있는데 빛이 푸르른 청옥(靑玉)과 같다. 그리고 용마루에는 또 김열경(金悅卿) 친필이 있다. 그래서 신상촌(申象村)의 송인시(送人詩)에, ‘이자현 유골은 풍류가 대단하고[李資玄骨風流遠], 김열경 글씨는 유일의 자취로세[金悅卿書逸躅存]’라고 하였으니, 그 모두가 다 값진 고적들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이자현으로 말하면 능히 세리(勢利)의 길에 초연하여 몸을 운수(雲水)에 의탁하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퇴계(退溪)는 그를 위해 억울함을 밝혀 주고 그 사실을 영탄(咏嘆)했으며, 열경(悅卿)은 국가 위난을 평정한 세상에서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뜻을 높이 샀는데, 사실은 동방(東方)의 백이(伯夷)인 것으로, 그의 청고한 풍도와 모범을 남긴 행위는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족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 길에 그 유적지를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만 내가 탄 말이 걸음이 더디고 바탕이 둔해서 외삼촌을 따라가야겠기에 마음대로 못하겠네.”
하고, 서로 말이 나쁘다고만 탓했다. 내가 웃으면서, 재상상진(尙震)의 소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유군이 못 들었다기에 내가 얘기하기를,
“상진공이 언젠가 들을 지나는데 어느 늙은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면서 쟁기 하나에다 소 두 마리를 메워가지고 아주 힘들게 밭갈이를 하고 있더라네. 상진공이 한참 구경하다가 이어 말하기를, ‘농사일을 참 잘하시는구려, 그런데 그 소 두 마리 중에도 우열(優劣)이 있습니까?’ 했더니 그 농부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상진공이 농부 앞으로 다가갔더니 그 늙은이가 이 쪽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공이 물은 대로 두 소 중에 한 마리는 힘이 세고 옹골찬데 한 마리는 힘도 약하고 미련한데다 늙기까지 했지요.’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이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대답을 않고 지금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그 늙은이 말이, ‘소는 큰 짐승이어서 사람 말을 알아듣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알지요. 내가 그 힘의 덕을 보고 그 놈을 부려먹으면서 그 놈 부족한 점을 꼬집어 그 놈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오.’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은 그 말끝에 크게 반성을 하고 그때부터는 한평생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장후(長厚)한 군자가 됐다는 거야. 지금 우리들이 그 말들 힘으로 천리 길을 두루 돌면서 온갖 험난한 곳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말이 병들었거나 둔함을 그렇게 헐뜯을 일이 아닌데, 더구나 그들이 듣는 데서 그래서야 되겠는가. 사람도 꾸짖고 욕설을 하면 풀이 죽고 치켜세우면 흥을 내는 법인데, 저 말들이 오늘은 뽐내면서 달릴 기운이 더욱 없겠네. 그것은 우리가 대우를 잘못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했더니,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참으로 소나 말이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나 보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2일(갑자) 맑음. 아침에 이생 석이 왔고, 최이억도 왔다. 조반을 먹고 출발하여 유군과 함께 봉의루(鳳儀樓)에 올라가 보았다. 그 고을 뒷산이 날아가는 봉의 형국이기 때문에 산 이름이 봉산이고 누대 역시 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이 모양은 매우 그럴싸했으나 거민이 100호도 안 되는데다 성지(城池)도 목석(木石)도 없어 국가를 지킬 요충지는 못 되었다. 만약 삼악산(三岳山)에다 관(關)을 설치하여 그 삼면을 막고 지킨다면 이 나라의 한 보장(保障)이 될 법했다. 우리들이 봉의루에 올라 있음을 주수가 듣고 술과 배를 가지고 와 행장에 챙겨주었다. 외삼촌을 뒤좇아 신연(新淵) 나룻가에 와서 만나고 신완(申椀)과도 서로 만났으며 만호(萬戶) 반예적(潘禮積)이라는 자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석파령(席破嶺)을 넘었는데 산 이름은 삼악(三岳)이었다. 재가 매우 높아 길은 평평했어도 길가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말에서 내려 걸었다. 재 너머 서쪽은 전부 산 아니면 깊은 골짜기뿐이고, 그 재에서 군(郡)까지의 거리는 20여 리였다. 거기에서 또 20리를 더 가 안보역(安保驛)에 다다르니 청풍부부인(淸風府夫人) 묘가 있었고, 그 아래 있는 재사(齋舍)가 매우 조용하여 거기에서 잤다. 저녁에는 나와 강가를 거닐었다.
이 날은 춘천(春川)을 떠났다. 이는 대개 청평산에 들어가 진락옹(眞樂翁)과 매월당(梅月堂)의 유적을 찾아 보려고 했던 것인데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시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화답을 청했다.

춘주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고을인데 / 春州素號水雲鄕
더구나 청평학사 별장까지 있음이랴. / 况有淸平學士莊
청연에 물이 고여 둥실둥실 배 떠있고 / 水積靑淵舟泛泛
구름 덮인 화악에는 바위 빛이 푸르다네 / 雲霾華岳石蒼蒼
희이자 뼈 푸르다니 신선 상징 분명하지 / 希夷骨碧仙蹤杳
매월당이 남긴 글씨 그 체취가 풍긴다네 / 梅月書留道韻長
서운하게 식암 영지 바라만 보단말가 / 惆悵菴池空入望
그들이 남긴 향기 누가 가서 맡으라고 / 澗蘅誰復嗅遺香

춘천(春川)과 잿마루와의 거리는 멀지 않은데, 물이 급류에다 여울이 얕다. 주(州)의 북쪽에 청연(靑淵)이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심이 배를 띄울 만한데 여기는 바로 소양강(昭陽江) 상류이다. 그 강이 양구(楊口)의 강과 합류하여 신연도(新淵渡)를 이루고 평야 가운데로 굽이굽이 흘러 파강(巴江)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경운(慶雲)의 북치(北峙) 서쪽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있는데 일명 화악산(華岳山)이라고도 한다. 가파른 바위 산이 구름 높이 솟아 있어 영서(嶺西)에서는 화악만큼 높은 산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경운은 청평의 원래 이름이다. 유군의 화답시는 이러하다.

진락공 그 명성이 이 고을에 자자한데 / 眞樂公名表此鄕
더구나 청평하면 그 있던 곳 아니던가 / 淸平況是故時莊
예스러운 못과 누대 지원처럼 경개 좋고 / 祗園勝槪池臺古
보지의 가을 풍경 나무들이 푸르러라 / 寶池秋容樹木蒼
치솟은 바위산과 겨룰 만한 높은 절의 / 淸節漫爭山骨聳
고상한 풍류는 장강유수 그것이라네 / 高風直與水流長
선구를 지척에 두고 계획이 틀려서 / 仙區咫尺違心賞
선생께 판향 하나 피워 올리지 못한다오 / 未薦先生一瓣香

23일(을축) 새벽에 안개가 잔뜩 끼었다. 일찍 출발하여 가평(加平) 길을 거쳐 초연대(超然臺)를 지나면서도 안개 때문에 올라가 구경하지 못하였다. 가평읍 아래 와서 조반을 먹고, 아현(芽峴) 남쪽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청평(淸平) 언덕을 지나 굴운역(屈雲驛) 마을에서 잤는데 그 마을 북쪽에 있는 언덕의 형세가 매우 좋아 보여 올라가서 종을 시켜 치표(置標)를 해 두게 하였다. 그 주산(主山)의 이름을 물었더니 청취전(靑翠田)이라고 했는데, 그 산이 백운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운등산(云登山)이 되고 거기에서 또 동으로 달려가다가 회강(淮江)을 만나 거기에서 멎었는데 곱게 감싸고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의 장례를 받아들이고 싶은 듯이 보였다.

24일(병인) 흐렸다. 일찍 출발하여 천괘산(天掛山)을 향하여 가다가 마치현(摩蚩峴)을 넘어 그 고개 서쪽에서 조반을 먹고 여러 사람 무덤들을 가리키고 물어가면서 길을 가는데 시내 곁 단풍잎들이 마치 붉은 비단 같았다. 대개 평천(平川)의 가을 빛이 이제 와서야 비로소 무르익고 있었다. 풍양(豐壤)에 당도하여 왕숙천(王宿川)을 건너고 퇴가원(退駕院)을 지나 오릉(五陵) 밖에서 쉬노라니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이 보이기 시작했다. 들은 넓고 시내는 편평하여 새삼스러운 감회가 있기에 율시 한 수를 읊었다.

만 겹이나 푸르른 봉래산을 꿈에 보고 / 夢入蓬萊翠萬重
구름 따라 동쪽 땅을 한 바퀴 다 돌았네 / 一笻東盡白雲求
아침이면 넓은 바다 부상의 해를 보고 / 朝看滄海扶桑日
밤에는 비로봉 가을 나무에 의지했다네 / 夜將毗盧碧樹秋
자장처럼 호탕하게 놀자는 뜻 아니었고 / 不因子長疏宕擧
나그네 모진 시름 달래려고도 아니었네 / 非關楚客慍惀愁
돌아와서 동산에 다시 올라 바라보니 / 歸來更上東山望
끝도 없는 연파가 한강 섬에 자욱하네 / 無限煙波江漢洲

늦게야 성안에 들어와 동소문(東小門) 안에서 외삼촌과 작별하고 집에 돌아와 사당에 무사히 돌아왔음을 고하였다.
풍악(楓岳)의 경치가 삼한(三韓)에서 으뜸이요 천하에 소문이 나 있어 내 늘 사영운(謝靈運)처럼 나막신을 장만하여 사마자장(司馬子長)같이 한번 마음껏 구경을 해보려고 벼르기는 했으나, 세상일도 뜻대로 되지 않고 병마에도 시달리다 보니 속절없는 풍진 세월에 흰머리가 이미 머리에 가득해갔다. 임자년 7월 내가 동성(東城)에 부쳐 있으면서 마침 유동(楡洞) 사시는 통제사 외삼촌과의 자리에서 옛 친구 정극가를 뜻밖에 만나 담소하던 차에 산수(山水) 구경 얘기가 나왔다. 외삼촌 말씀이,
“내가 진작부터 관동(關東) 구경의 뜻이 있었으나 몸이 무부(武夫)라서 미처 못했었는데 지금 마침 집에 있게 되었으니 구경갈 때는 바로 이때다. 극가도 같이 갈 생각이 있는가?”
하자, 극가가 대답하기를,
“그렇잖아도 지금 그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인데 안 가다니요.”
하였다. 외삼촌은 또 나더러도,
“너도 이번 걸음에 불가불 동행을 해야겠다.”
하시기에, 나 역시,
“가구말구요. 그것이 저의 평소 원이었는데요.”
하고, 드디어 중도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하여 그 해 윤월(閏月) 정유일에 침석정(枮石亭)에서 내가 외삼촌과 만나 동소문을 출발했는데 유군 여거(柳君汝居)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뒤좇아 왔다. 연산(漣山)에 가 미수(眉叟)에게 문안하고 석록(石鹿)에서 극가를 데리고 그로부터 9일 만에 풍악의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이틀 밤을 정양사에서 자고 천을대(天乙臺)를 구경하고 마하연(摩訶衍)으로 옮겼다가 안문(鴈門)으로 나와 남천(南川)을 끼고 동으로 갔었다. 유점사에서 사흘을 묵으면서 산영루(山暎樓)를 산책하고 만경대(萬景臺)를 바라보았으며 맑은 가을의 운물(雲物) 등 온갖 경치를 두루 감상하였다.
내 늙고 병들어 비록 비로봉 절정에 올라 깊은 구룡연을 내려다보면서 아주 높고 으슥하고 험한 곳까지 샅샅이 다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풍악산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의 산빛이나 늦가을 풍경에 관하여는 그런대로 볼만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성(高城)을 경유 해산정(海山亭)에 오르고, 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청간정(淸澗亭)에서 거닐었으며, 선유담(仙遊潭)ㆍ영랑호(永郞湖)에서 쉬기도 하였다. 또 양양의 낙산사(洛山寺)에서 묵으면서 동해를 바라보며 부상에 떠오르는 해를 구경하기도 하고 중추에 바다에 뜬 달도 완상했다. 그리고 다시 신흥사(神興寺)에 들러 설악산을 바라보고 천후산을 답사했으며, 또 춘천에 들러 회강(淮江)을 건너고 몽□(夢□)에 올라 우수(牛首 춘천의 옛이름) 평야를 굽어보고 경운산(慶雲山)ㆍ화악산(華岳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돌아왔다. 비록 사방을 두루 돌아보고 싶은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평생의 소원을 다소는 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길에 들른 고을이 15개 주에 달하고, 길은 1천여 리 길이었으며, 왕복에 한 달이 걸렸다. 돌아다니는 동안 작은 일기책에다 날씨와 그날그날 가고 구경한 곳을 적어 옛분들 유행록(遊行錄)에 대신하였고, 또 동정부(東征賦) 한 편을 써서 거기에 나의 영귀(詠歸)의 뜻을 대강 펴 보았다.
임자년 9월 일 침석정(枮石亭)에서 쓰다.

[주D-001]상 나라……돌아가고 : 상(商) 나라가 망한 것을 뜻함. 고신씨(高辛氏)의 비(妃) 간적(簡狄)이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를 올렸을 때 제비가 떨어뜨리고 간 알을 먹고 설(契)을 낳았다. 그 후손인 탕(湯)이 천하를 두었으므로 제비는 상 나라의 상징조가 된 것임.《詩經 商頌玄鳥》
[주D-002]황하……나타나자 :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하기 위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는데, 백어(白魚)가 배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무왕은 이를 은(殷)을 쳐서 이길 징조라고 생각하고 정벌에 임하였음. 《史記 周紀》
[주D-003]바다에 다리 : 고주몽(高朱蒙)이 형제와 사이가 좋지 않아 졸본부여(卒本扶餘)로 가기 위하여 물을 건너려 하자, 자라와 물고기떼들이 모여 다리를 놓아 주었다고 함. 《東史槪略》
[주D-004]장초지탄(萇楚之歎) : 사나운 정사를 원망하는 것. 정사가 번거롭고 조세가 무거워 백성들이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초목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낫겠다는 탄식을 이름. 《詩經 檜風》
[주D-005]복식(卜式) : 한(漢) 나라 때 사람. 양을 쳐서 부자가 된 후 자진해서 많은 사재를 내놓아 무제(武帝)의 변방 경영을 돕고 빈민 구제도 했다가 그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에서 어사대부(御史大夫)까지 되었음. 《漢書 卷58》
[주D-006]지원(祗園) : 지수급고독원(祗樹給孤獨園)의 약칭. 즉 그 정원 안에 있는 수목(樹木)은 지타태자(祗陀太子)의 소유이고 그 정원은 급고독의 소유라는 뜻으로 급고독이 그 정원을 지타태자에게서 구입하여 거기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부처를 청하여 거기에서 살면서 설법을 하도록 하였다고 함. 
[주D-007]보지(寶池) :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팔공덕(八功德)의 물. 그 물을 마시면 모든 선근(善根)이 잘 자란다고 함. 《觀無量壽經》
성소부부고 제13권
 문부(文部) 10 ○ 제발(題跋)
풍간상첩(豐干像帖) 뒤에 쓰다

옛날 향산(香山)에 오도자(吳道子)가 그렸다는 풍간(豐干)의 상(像)이 있어 승가(僧家)에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그것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얻지 못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다. 가 죽을 임시에 그의 제자 원준(元俊)에게 말하기를,
“교산(蛟山 허균의 호)이 늘 이 그림을 갖고 싶어 하였지만 내가 숨겼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보물이므로 아무에게나 간직하게 할 수는 없다. 옹(翁)은 본시 선기(禪機 불교의 진리)를 아는 분이니 가져다 주도록 하라. 죽기 전에 틀림없이 우리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하였다. 이듬해 봄에 원준이 한 중을 시켜 보내왔기에 보니, 소폭화(小幅畫)로, 노승(老僧)은 호랑이를 타고 앉았고, 한 산동(山童)은 보따리를 지팡이에 걸어 어깨에 메고 뒤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비록 빛깔도 어둡고 그림도 벗겨지고 떨어져 나가곤 하였지만 필치는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것이니 참으로 오래된 보물이다.
내가 생각건대, 오도현(吳道玄)은 개원(開元 당 현종(玄宗)의 연호) 이전의 인물이고 풍간도 그와 동시 사람이다. 이름은 비록 ‘같은 시대의 화가가 같은 시대의 인물을 그렸다.’고 드러나 있지만 그것은 무리인 것 같다. 만일 풍간의 상이라고 한다면 오도현의 그림이 아닐 것이며, 만일 오도현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풍간의 상이 아닐 것이니, 반드시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작가가 당(唐) 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니 보물로 여길 만하다.
이정(李楨)은 이 그림을 구경하고 삼주야(三晝夜)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이징(李澄)은 보고서 고화(古畫) 10여 점을 가지고 이것과 바꾸자고 애걸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유능한 화가들이므로 반드시 그 진가를 알았을 것이다. 다만 배접을 해서 간직하였다가,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산문(山門)으로 돌려줄 생각이다.

[주D-001]풍간(豐干) : 당(唐) 나라 때 명승(名僧)의 이름. 이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化身)이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제11권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
윤원형의 세력에 붙은 사람들

임백령(林百齡)은, 자는 인순(仁順)이며, 본관은 선산이다. 중종 기묘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을사년에 녹훈(錄勳 숭선군(嵩善君))되어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어머니 현씨(玄氏)는 성품이 엄하고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백령은 그 형 억령(億齡)과 함께 박상(朴祥)에게 수업하였다. 박상이 억령에게 《장자》를 가르치며, “너는 반드시 문장가가 되리라.” 하고, 백령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너는 관각(館閣) 문자에 능하리라.” 하였다. 억령은 천성이 소탈하고 또 행실이 얽매이지 않았으며, 백령은 단정하고 자상하여 잡된 일이 없으므로 그 어머니가 몹시 사랑하며, 자리에 눕고 일어날 때에 백령을 시켜 부축하도록 하였는데 모든 일을 다 마음에 맞게 하였다. 《기재잡기》
○ 임백령이 젊어서 과거 공부만 하고 경학(經學)을 공부하지 않더니, 식년초시(式年初試 5년에 한 번씩 보는 과거)에 합격한 뒤에 경전을 읽으려 하여도,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몰라 쩔쩔매었다. 어느 날 밤에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한 노인이 와서, “너는 한 세상의 위인이 될 것이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여 대답하기를, “제가 경학을 잘 모르니, 어찌합니까?” 하니, “네 이름을 괴마(槐馬)로 고치고, 또 강경할 때에 경서 중에서 어느 장(章)이 출제될 것이니, 그 장을 많이 읽어 익히고, 다른 데 정신을 낭비하지 말라.” 하였다. 꿈을 깬 뒤에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으므로, 곧 불을 켜고 그 장을 뽑아 별도로 책자를 만들어 베꼈다.괴마(槐馬)로 개명하려 하였으나, 그것이 이름으로는 무리하므로 별호를 괴마라 하고, 마침내 베낀 경서의 장구를 읽어 하나하나 완전히 이해하였다. 시강(試講)하는 날 강석에 들어가 앉으니 문제를 장(帳) 밑으로 내보내는데 먼저 익힌 것과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강이 끝나자 시관들이 모두 경학에 정미함을 탄복하였다.시관 한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이 유생이 반드시 괴마일 것이다.” 하므로, 백령이 깜짝 놀라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시관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패(牌)를 받고 시장(試場)에 들어와서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머리가 허연 노인이 ‘이번 방에는 괴마라는 사람이 한 세상의 위인이 될 것이요, 또 경학에 정통함도 비길 데 없으리라.’ 하더니, 이번 과거 보는 유생 중에 이만한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괴마가 아닌가.” 하고, 또 묻기를 “자네가 반드시 괴마일걸세.” 하였다. 백령이 자기의 호가 괴마라고 대답하니 시관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출세하여서는 행동이 나쁘기가 저와 같았으니, 소인이 세상에 나는 것도 모두 시운과 관계가 있음을 알겠다. 《기재잡기》ㆍ《축수편》
○ 인종이 승하하자 유관(柳灌)이 빈청(賓廳)에서 울며, “신민이 복이 없어 이런 불세출의 임금을 잃었으니, 나라 일을 장차 어떻게 하랴.” 하는데, 임백령이 옆에 있다가, 유관의 띠 고리[帶鉤]를 잡으면서, “대감께서 은밀히 의논하시는 일에 소생도 참여하고자 합니다.” 하니, 유관이 놀라 눈물을 거두며, “새로 성군을 잃었으니, 종사의 불행이 되므로 한 말일 뿐인데, 공의 말은 무슨 말인가.” 하였다.백령이 물러나며 소리를 높여, “선왕의 한 아드님이 계신데, 국사를 근심할 게 무엇이오.” 하고, 나와서 떠들기를, “유관의 뜻이 반드시 있는 데가 있다.” 하고, 마침내 이기 등과 더불어 불측한 말을 조작하여 모함하니, 유관이 죽은 데는 백령의 중상한 힘이 많았다. 《축수록》
○ 병오년에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우의정을 차함(借啣 실직(實職)을 행하는 것은 아니고 벼슬의 명칭만 빌리는 것)하고, 북경에 가서 병이 나니, 백령이, “내가 일어나지 못하는가 보다. 의정 차함을 하고 또 오년(午年)을 만났으니, 신인이 말하던 괴마가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하더니, 영평부(永平府)에 와서 죽었다. 《패관잡기》
○ 이전에 임백령의 시호를 소이(昭夷)라 의논하여 아뢰었다. 시법(諡法)에 용모가 단아함이 소(昭)요 행동거지가 편안하고 자상함이 이(夷)라 하였는데, 문정왕후가 알맞는 시호가 못된다고 매우 노하여 응교 박순(朴淳) 등을 파직시키고 마침내 시호를 고치라 하여 봉상시(奉常寺)에서 다시 의논하는데, 참봉 장응정(張應禎)이, “이 시호는 어려울 게 없다.” 하니, 여러 사람이, “왜 그러냐?”고 묻자, “내 생각에는 문정공(文正公)이 가장 합당하다.”라 하니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문충(文忠)으로 고쳤다. 《기재잡기》
허자(許磁)는, 자는 남중(南仲)이요,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병진년에 나서 중종 병자년에 생원, 계미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을사년에 1등공으로 녹훈하여 병오년에 벼슬이 찬성에 이르고, 경술년에 홍원(洪原)으로 귀양 가서 신해년에 죽었다. 뒤에 사헌부의 아룀으로 인하여 직첩을 도로 주었다.
공은 풍도가 빼어나고 신채가 단정하며, 젊어서 김안국(金安國)에게 수학하여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처음에 비록 정순붕(鄭順朋) 등과 같이 일을 하였으나, 반역의 명목으로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는 것은 그 본심이 아니므로, 유관 등을 죄줄 때에도 그 죄명이 과중하다 하였고, 그 뒤에도 매번 사림을 구원하는 말을 하였다. 항상 스스로 한탄하기를, “내가 소인이 되었구나.” 하고, 병을 핑계하고 일을 많이 피하여 이기에게 미움을 받았고, 녹훈할 때에 공신의 자제까지 녹훈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나, 공이 일곱 번이나 굳이 사양하여 윤허를 받으니, 다른 공신의 자제도 다 녹훈되지 못하고, 다만 정순붕의 아들 현(礥)만이 녹훈에 참여되었다.이기가 정색하며, “공신은 마땅히 국가와 더불어 좋고 나쁜 것을 같이 해야 하는데, 지금 공신의 자제를 함께 녹훈하라는 전교를 공이 어찌 홀로 고사하는가.” 하고, 이로부터 이기가 더욱 불쾌히 여겼다. 공이 뒤에 이조 판서로 전의감 제조를 겸하니, 이기가 그 친한 의관 배우령(裴于齡)을 전의의 직에 오래도록 있게 하고자 하여, 녹사(錄事)를 시켜 정청(政廳)에 와서 청하니, 공이 노하여 그 녹사를 잡아내며 꾸짖기를, “내가 정청에서 붓을 잡는 아전이 아닌데, 네가 어찌 감히 이런 일로 와서 말하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이때에 민제인(閔齊仁)이 또한 사류(士類)를 구원하다가 죄를 얻어 공주에 귀양 갔는데 의식을 스스로 마련할 수 없었다.공이 이 말을 듣고 그 아우 제영(齊英)을 당진 현감에 제수하였으니, 제인을 돌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간사한 무리가 이를 미워하더니, 마침 공이 친한 사람 최여주(崔汝舟)에게, “을사년 일로 녹훈까지 되어 마음속으로 항상 한스럽노라.” 하자, 여주가 그 말에 깊이 감복하여, 공이 이기와 사이가 벌어진 줄을 알지 못하고 이기에게 말하니, 이기가 모함하려 하여도 구실이 없던 참이므로, 여주의 말을 듣고 대사헌 진복창(陳復昌)ㆍ사간 이무강(李無疆) 등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다. 진복창이 일찍이 사간으로 있을 때 공이 상소하여 복창을 탄핵하였었으므로 복창이 이를 원망하고, 이무강도 공에게 용납되지 않아 원망을 품고 있었는데 모두 이기의 심복이었다.세 사람이 공을 모함하여 탄핵하기를, “나라 일은 근심한다 칭탁하고 흉한 무리를 은밀히 보호하고, 나라 위하는 사람을 배척하여 시비가 뒤바뀌게 합니다.” 하고, 또 민제영으로 당진 현감을 시킨 일을 말하며, 처음에는 연안(延安)에 있게 하였다가 그날로 간성(杆城)에 귀양 보내고, 또 낙안(樂安)으로 옮기고, 이튿날 또 홍원(洪原)으로 옮기며, 1등훈을 3등으로 강등하였다.얼마 안 되어 이기가 공에게 죄를 더주어 사사(賜死)할 것을 청하려고, 아뢰는 글의 초고를 가지고 대궐에 들어갔다가 아뢰지 못한 채 이기가 궐내에서 갑자기 죽으니, 공이 죽음을 면하고 홍원에 일 년이 넘게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죄없이 모함된 사유로 극력 논하니, 임금이 또한 깨달아서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직첩을 돌려주었으며, 예법대로 장사 지내니, 가정(嘉靖) 신해년이었다. 《국조기사》
○ 경술년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자기의 공이 수치스러우므로, 소인의 이름을 면하지 못하였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서 시비를 현란케 하였으니, 공을 삭제하고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였다. 《유분록》
○ 일찍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청탁을 받지 않고 어진 이와 어질지 않은 이를 구별하여 형적이 너무 드러나서 마침내 이기에게 모함을 당하였다. 평생토록 의를 좋아하여, 녹봉을 받을 때마다 자기 쓸 것을 제하고 남은 것은 따로 두었다가, 이웃과 친척에 상사가 있으면 부의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도와주었으므로, 죽던 날에 사람이 다 애석해 하였다. 《국조기사》
민제인(閔齊仁)은, 자는 희중(希中)이며, 호는 입암(立岩)이요,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중종 경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을사년에 위훈(僞勳)으로 여원군(驪原君)이 되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기유년에 죽으니 나이가 57세였다.
착한 선비들이 죄를 받아 죽은 뒤에 스스로 젊은이들의 청론에 배척됨을 알고 항상 마음에 불안해 하였다. 정언 김난상(金鸞祥)의 집이 같은 동네에 있었는데, 제인이 하루는 조정에 나가다가 난상의 집에 들려 명함을 들여 보내니, 조금 후에 젊은 여종이 나와서, “지금 머리를 빗으시니 우선 문안으로 들어오시오.” 하였다.제인이 몹시 부끄럽고 분하여 곧 집으로 돌아와서 한탄하기를, “내가 남에게 끌려 하루 아침에 죽는 일을 차마 못했다가 이웃 젊은이에게 욕을 당하니, 누구를 탓하랴.” 하였다. 항상 분하고 한스러워하며 다른 사람을 대하면 한탄하기를, “당초에 윤임(尹任)만 내치려 한 것인데 일이 점점 이 지경에까지 이르러서 녹훈되고 상을 받았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하더니, 말에 새어 공이 삭제되고 관직이 삭탈되었다. 《유분록》
○ 무신년에 정승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동정하는 말로 죄인을 애석하게 여기고, 또 안명세(安名世)가 적은 사기(史記)를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하여, 마침내 공이 삭제되었다. 《유분록》ㆍ《우암집(尤庵集)》 비문에 자세하다.
○ 만년에 스스로 뉘우치고 시를 짓기를,

이미 당시에 죄를 받았으니 / 旣被當時罪
응당 후세의 비방을 받을 것이로다 / 應逢後世譏

하였다. 상동(上同)
김광준(金光準)은, 자는 숙예(叔藝)이며,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중종 기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사벌국(沙伐國)은 상주(尙州)의 구호이다. 숭품재상 김광준은 그 아버지가 첩을 몹시 사랑하여 재산을 많이 주고, 적자에게는 박하게 한 것 때문에 항상 서모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임인년간에 그 아버지가 죽어 광준이 대사간으로 사벌에서 거상하고 있는데, 형이 또 병으로 죽으니, 그 형의 아내를 사주하여 관가에 소장을 내어, “서모와 서제가 요사한 술법으로 우리 아버지를 죽게 하였으니, 붙잡아 치죄하소서.” 하였으나, 목사 송희규(宋希奎)가 그 증거없음을 의심하여 죄로 다스리지 않았다. 광준이 몰래 희규에게 편지를 보내어 급히 치죄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네 차례나 형벌을 주었다.이언적(李彦迪)이 희규를 방문하였더니, 희규가 그 일을 말하므로 언적이, “아버지의 애첩과 애자를 어찌 차마 분명하지 않은 일로 거상 중에 수금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어찌 이런 일을 하는가.” 하였다. 희규가 광준의 편지를 보이며, “부득이한 일이었네.” 하였다. 언적이 함창(咸昌)에 와서 광준에게 편지를 부치고 그 일이 옳지 않다는 뜻을 밝혔더니, 답장에 분해하는 말이 많았다. 문경에 이르니 현감 안경우(安景祐)가 그 사건의 추관으로 그 잔인하던 형상을 보고 와서 자세히 말하였다.경우는 악한 것을 미워하고 말을 잘 참지 못하여서 사람만 보면 그 이야기를 하여 광준이 매우 의심을 받았다. 뒤에 대사간이 되어 사면할 때에 이 일을 거론하여 드러내 밝히고, 그 뒤에는 조정에서 당을 제거한다는 기회를 타서 전날 자기의 일을 아는 이들의 입을 봉하려 하여 본도 출신의 조정에서 벼슬하는 재상 및 사벌 이웃 고을에 사는 사람으로 그 일을 아는 이를 다 적어, 몰래 권신에게 넘겨 주어 모두 제거하게 하였으므로, 정미년 화변에 송ㆍ안이 다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회재집(晦齋集)》
송기수(宋麒壽)는, 자는 태수(台叟)이며, 호는 추파(楸坡)요,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정묘년에 나서 중종 신묘년에 진사, 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을사년 위훈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러 기사(耆社)에 들고, 신사년에 죽었다.
기수는 인수(麟壽)의 종제이다. 을사년에 어떤 사람이 사림을 일망 타진할 계획을 기수에게 말하며, “규암(圭庵 인수의 호)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기수는, “동산에 가시덤불이 무성한데, 그 가운데 한 송이 매화가 있으면, 어찌 매화가 상한다고 가시덤불을 없애지 않겠는가.” 하여, 마침내 인수를 죽일 계획이 결정되었다. 기수는 끝내 위사훈(衛社勳)에 참록되었는데, 사람들이 형을 모함한 공신이라고 지목하였다. 《축수편》
○ 윤원형이 송기수에게, “규암이 죄명을 쓰고 죽으니, 마음에 참으로 미안하다.” 하니, “특별한 곳의 매화가 어찌 오래 보존되겠소. 사람의 생사는 모두 운수가 있는 것이니, 무슨 한할 것이 있겠소.” 하였다. 《패관잡기》ㆍ《유분록》
○ 김성일(金誠一)은 강직하여, 남이 하지 못할 말을 능히 하였다. 선조(宣祖) 때에 송기수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나왔는데, 그 아들 응개(應漑)는 옥당으로, 응형(應泂)은 주서로 함께 들어왔다. 강이 끝난 뒤에 이야기가 을사사화에 미치니, 송기수가 울며 억울한 사정을 진술하여 좌우의 사람이 다 슬퍼하였다.김성일이 정언으로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송기수는 을사년에 권간에게 아부하여, 위훈에 녹훈되고 부귀를 20년 동안이나 누렸는데, 지금 어지신 임금이 위에 계시고 공론이 크게 행해지자, 이에 슬픈 말로 을사사화의 원통한 사정을 말하여 공론이라는 이름을 도적질하려 하니, 참으로 소인의 정상입니다.” 하니, 기수는 황공하여 물러났다. 삼부자가 일시에 병을 빙자하여 조정에 나오지 않으니, 듣는 이가 목을 움츠렸으나 성일은 말하는 태도가 태연스러웠다. 《부계기문》
○ 그 뒤 조강에서, “전하께서 송기수가 기록해 놓은 것을 보시면, 을사사화의 원통함을 더욱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선조는, “기수가 이미 간인들의 정상을 알았으면, 어찌 그때에 바로 말하지 않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이르기를, “그러면 어찌 병이라 핑계하고 물러가지 않고, 아직까지 녹훈과 관작을 보전하고 있는가.” 하였다. 《패관잡기》ㆍ《유분록》
김명윤(金明胤)은, 자는 회백(晦伯)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요, 극핍(克愊)의 아들이다.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다. 선비로 있을 때에 헛된 이름을 얻어 조광조의 현량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가, 합격이 취소된 뒤에 곧 벼슬하여 익위사 시직이 되고, 중종 갑신년에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면목을 바꾸어 시세를 좇아 이익을 탐하며 뻔뻔스럽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므로 세상 사람들이 더럽게 여겼다. 을사년에 위훈으로 광평군(光平君)이 되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가 선조 때에 삭탈되고, 외방에 내쫓겨서 죽었다.
젊어서 선하다는 명망이 있어 현량과에 뽑히고, 합격이 취소된 뒤에 명윤은 도로 유건을 쓰고 과거장에 들어가서 급제하자, 시비를 가리지 않고 출세하기에만 급급하였다. 을사년 화란에 권간의 뜻을 받들어 봉성군(鳳城君)과 계림군(桂林君)을 무고하여, 큰 화가 하늘까지 닿아 사림이 일망타진되었고, 명종(明宗) 말년에 바른 의논이 다시 일어나 여러 간신들의 세력이 꺾이니, 명윤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을사사화에서 남은 무리들이 원통함이 많이 있으니, 원통을 풀고 치욕을 씻어서 인심을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조식(曹植)ㆍ이항(李恒) 등이 부름을 받자, 명윤이 착한 선비들에게 아첨하려 하여 아뢰기를, “이들은 마땅히 대간이나 시종의 벼슬을 주어야 합니다.” 하였다. 시세를 따라 이익만을 취하는 술법은 늙을수록 더욱 교활하여 사람이 분개하고 미워하여, 선조 초년에 죄로 관작이 삭탈되고도 오히려 목숨을 보전하게 된 것을 사람들이 불쾌히 여기었다. 인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사헌부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기묘사화의 원통함을 씻으려고 아뢰는 말에, “기묘년 일에 관계된 선비는 정직하지 않은 이가 없다.” 하자, 지평 백인걸(白仁傑)이 그 구절을 말소하자 하니, 동료 중에 노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인걸이 말하기를, “임금에게는 털끝만큼이라도 속여서는 안 된다.기묘년에 현인이 많았지마는, 어찌 다 정직한 사람이라 하겠는가. 현량과가 혁파된 뒤에 책보를 끼고 과거 보러 들어간 이도 또한 정직한 사람이었는가.” 하였다. 뒤에 인걸이 명윤에게, “당신은 천백 억의 화신[千百億化身]이다.” 하니 사람들이 꼭 맞는 말이라 하였다. 《석담일기》
○ 경진년 봄에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세자를 보좌하고 호위하는 관청)를 설치하는데, 김명윤이 신잠(申潛)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다시 사모를 쓰게 되나보다.” 하였다. 그 까닭을 물으니, “내가 들으니 조정에서 현량과에서 취소된 사람으로 동궁의 신료에 충당한다 하더라.” 하였다. 신잠이 그 말을 믿고 홍유손(洪裕孫)에게 전하였더니, 유손이 웃으며, “이는 반드시 제가 하고 싶어서 자네의 뜻을 떠보는 것일세.” 하더니, 수일 후에 명윤이 과연 세마(洗馬 익위사의 벼슬)에 임명되고, 뒤에 부솔(副率 익위사의 벼슬)로서 다시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다. 《기묘당적보》
○ 선조 초년에 김명윤의 삭작을 청하여 아뢰기를, “명윤이 얻으려고 걱정하고 잃을까 걱정하며 온갖 짓을 다하였으니, 어찌 일찍이 옥당 벼슬을 한 사람으로서 다시 과거 보는 유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기에게 아첨하고 윤원형을 도와 앞장서서 큰 옥사의 단서를 열어 불측한 화를 조성하였으며, 이량(李樑)이 권력을 잡자, 옛 세력을 버리고 새 세력을 좇아 종의 낯을 하고 아비처럼 섬겨서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도모하여 꼬리를 흔들고 추태를 부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이량의 시양자(侍養子)라 하며, 아버지는 젊은데 아들은 늙었다는 조롱까지 하였습니다.이량이 평안 감사로 나갈 제 아녀자처럼 서교(西郊)까지 따라가서 울며 작별하였는데, 윤원형을 찾아 봄으로써 옛 정을 다시 맺었습니다. 금방 원수를 잊고 달라붙으니 행동이 개ㆍ돼지와 같고, 음모는 귀역(鬼蜮)보다 심합니다. 권문(權門)이 연이어 패망하였는데 명윤의 벼슬은 전과 같으니, 자고로 소인들이 악한 일을 하나만 한 것이 아니로되, 이처럼 심한 자는 없었습니다. 선왕께서 무고한 죄를 씻으려는 것을 보고 이들의 추방을 주장하는 말을 아뢰었으니,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는 못하는 짓이 없었나이다.” 하였다. 《국조기사》
진복창(陳復昌)은, 자는 수초(遂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중종 신묘년에 생원, 을미년에 송경(松京)의 친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진복창은 문벌이 미천하였다. 그 아버지 의손(義孫)이 녹사(錄事)로서 현감을 하였다. 혹 말하기를, “복창의 어미는 여러 사람을 거쳐 의손에게 왔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천하게 여겼다.” 하였다. 복창이 글을 잘 하고 글씨를 잘 쓰며, 또 교활하여 제 자랑을 잘 하므로, 구수담(具壽聃) 같은 무리들도 그에게 속아서 칭찬하고 천거하였다.윤원형이 정권을 잡고 사림을 마구 해치자 복창이 이에 아부하여 그의 주구가 되어 원형이 해치려고 하는 자는 복창이 곧 공격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키니, 일시의 명사들이 죽고 귀양 간 이가 극히 많아, 사람들이 그를 독사로 지목하고, 보는 이는 눈을 흘겼다. 구수담도 마침내 그에게 해를 당하였으며, 그 뒤 원형도 싫어하여, 복창을 삼수(三水)로 귀양 보내고, 또 유배 중에 나쁜 행동을 하였다 하여 가시울타리를 쳐서 못 나오게 하여 죽였다. 《동각잡기》 ○ 구수담이 경술년에 귀양 갔으니, 복창과 이무강(李無彊)이 귀양 간 것도 마땅히 경술년에 있었을 것이다.
○ 윤원형이 진복창을 사주하여 황헌(黃憲)을 탄핵하니, 복창이 상소를 정원에 바치고, 옥당에 나와 동료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권신을 탄핵하였으니, 반드시 중벌을 받을 것이다. 동료들과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흐느껴 울더니, 조금 있다가 어찰(御札)로 칭찬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잊는 정성은 고금에 드물거늘 주운(朱雲)ㆍ급암(級黯 한(漢) 나라 때의 직언(直言) 잘하는 신하)의 충성보다 나으므로, 매우 가상히 여기고 탄복하여 이에 중종(中宗)께서 입으시던 의복과 은잔을 주어 기특히 여기는 뜻을 보이니, 나라 위하는 충성을 시종 변하지 말라.” 하였다. 윤원형이 황헌을 죄주려는 뜻을 이미 대비에게 진달하여, 복창이 그 지시를 따라 한 일이니, 반드시 죄를 얻을 염려가 없는 것인데, 거짓으로 곧은 체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그러나 어찌 방관하는 사람이 그 뱃속을 들여다 보듯 환히 아는 것을 알겠는가. 《동각잡기》
○ 함풍군(咸豐君) 계수(繼壽)의 집 뜰에 모란꽃이 한창 피었는데, 진복창이 와서 보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 꽃을 베어버리니, 사람들이 함풍군의 위태로움을 근심하였으나, 마침내 해를 가하지 못하였다. <함풍군 묘지(咸豐君墓誌>
이무강(李無彊)은, 자는 경휴(景休)이며,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중종 임오년에 진사, 병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천성이 음험하여 진복창과 결탁하여 악한 일을 같이 하다가, 복창이 패망하자 무강 또한 경원(慶源)으로 귀양 갔다.
진복창이 부제학이 되어서 마침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에서 부제학을 선출 임명하는 기록)을 하는데, 모임 중에서 크게 말하기를, “이번에 경휴가 마땅히 수천(首薦)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경휴는 무강의 자이다. 좌우에 있던 사람이 다 끄덕끄덕했는데, 권점(圈點)을 세어보니 이에 들어 있지 아니하였으므로, 좌중이 서로 보면서, “누가 권점을 아니하였는가.” 하고 서로 미루니, 듣는 이가 모두 웃었다. 《동각잡기》
○ 이무강이 일찍이 어사로 북도(北道)에 갔을 때, 그 지방 수령 중에 을사년 일로 귀양 온 사람을 돌봐준 이가 있으므로 이를 적발하여 죄를 주었다. 뒤에 무강이 경원에 귀양 오니, 수령들이 서로 경계하여, “이 사람은 전일에 귀양 온 사람을 돌봐준 수령을 죄주던 자이다.” 하고 도와주지 아니하니, 보는 이가 모두 제 자신이 앙갚음을 도로 받는다고 하였다.이준경(李浚慶)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이무강이 탄핵하기를, “재주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병권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고 한 일이 있었다. 이준경이 순변사로 경원에 이르자, 역졸이 성안에 있는 작은 집을 가리키며, “이무강이 있는 집입니다.” 하니, 이준경이 먹을 것을 후히 주었다. 어떤 이는 원수를 은혜로써 갚는다고 비웃었으나, 준경은, “내가 은혜를 베풀려 한 것이 아니라, 그 곤궁함을 보니,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하였다. 《동각잡기》
윤춘년(尹春年)은, 자는 언구(彦久)이며, 호는 창주(滄洲)요,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이조 참판 안인(安仁)의 아들이요, 윤원형의 족제(族弟)이다. 갑술년에 나서 중종 갑오년에 생원, 계묘년에 문과 청백리로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정묘년에 죽었다.
윤춘년이 윤원형에게 붙어서 원형의 형 윤원로를 치죄할 것을 상소하여, 이로 인하여 출세하여 갑자기 현달한 관직을 역임하여 경박하고 빙자하게 자신하였는데, 경박한 무리가 많이 좇아서 강학하였다. 윤춘년이 함부로 스스로 높고 큰 척하며 사도(師道)로 자처하였으니, 위인이 경박하고 학문이 매우 잡되어 불교와 노자의 도를 깨달았다고 스스로 자랑하며, 또 음률을 깊이 안다 하였다. 또 남이 지은 글 두어 구절만 보아도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과, 장수하고 요절할 것과, 귀하고 천할 것을 다 안다고 떠들었다.의논이 드날려서 걸핏하면 성현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그의 말에 “성인도 다를 것이 없다. 천심에 합하기만 하면 된다.” 하고, 시비와 의리를 가리지 않고, 일을 이루는 것만으로 천심에 합한다 하였다. 또 김시습(金時習)은 동방의 공자이니, 공자를 보지 못하였으면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을 보면 된다 하였는데, 그가 김시습을 추앙하는 것도 다 세상에 떠도는 괴상한 행적이요, 실제로 시습이 한 일이 아닌 것이었다. 중 보우(普雨)를 보고 매우 특이하게 여겨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보우가 선학(禪學)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깨달았으나, 그침은 알아도 아직 안정함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하니, 그 허탄하고 망녕됨이 모두 이러하였다. 춘년이 주색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그 문도가 비록 주색을 몹시 좋아하더라도 춘년을 보면 반드시 주색을 끊었다 하여 서로 속이니,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다만 춘년이 조금 청렴하여 뇌물을 받지 않으므로, 혹 좋게 여기는 이가 있었다. 윤원형이 패망하자 예조 판서로서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어, 선조 초년에 시골로 돌아가 심열(心熱)로 냉수만 마시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석담일기》
○ 윤춘년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드나드는 잡객이 없고, 때때로 도승을 맞이하였다.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같은 중을 초당으로 영접하여 산수를 얘기하니 세속을 떠난 생각이 있는 것같이 하고, 이조 판서로서 벼슬을 추천할 때에 반드시 깨끗한 명성이 있는 이를 등용하여 대각에 널리 배치하니, 비록 권력에 아부하는 주구들이 한둘 그 틈에 끼었어도 사류들이 그를 청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 하였으나, 실은 모두 그의 농락하는 가운데 든 줄을 몰랐다. 《기재잡기》

[주D-001]관각(館閣) 문자 : 상소나 교서 등을 말하는 것으로 옥당ㆍ대간ㆍ예문관에서 짓는 문장들을 말한다.
[주D-002]신인이 …… 아니겠는가 : 괴(槐)는 정승의 고사(故事)에 관계 있는 나무이며, 오(午)는 말에 속하므로 괴마(槐馬)를 이렇게 풀이한 것이다.
[주D-003]주운(朱雲) : 한 나라 성제(成帝) 때에 주운이 임금에게, “참마검(斬馬劍)을 빌려 주시면 아첨한 신하인 장우(張禹)의 목을 베겠습니다.” 하였다.
[주D-004]권점(圈點) : 대제학ㆍ부제학을 선출할 때에 후보자의 성명에 동그라미를 찍는 것인데, 지금의 무기명 비밀투표와 비슷한 것이다.
[주D-005]그침은 …… 못하였다 : 《대학(大學)》에 있는 말인데, 지(止)와 정(定)을 수양하는 데 있어 한 단계로 말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임진(壬辰) 승장 중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묘향산(妙香山)의 늙은 중 휴정(休靜)은, 호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이고 또 청허선사(淸虛禪師)라고도 한다. 덕행이 높고 계율을 엄히 지켰으며 불경에 두루 통하고 또 무장도 잘 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는데, 이때에 제자 수천 명을 모아 거느리고서 파천하는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의 환난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널리 구제할 수 없느냐.” 하였다. 휴정이 울면서 절하고, “국내의 늙고 병든 중들에게 이미 각기 있는 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수도해서 부처님과 신의 도움을 빌도록 하였고, 그 외에는 신이 모집하여 왔으니 군중에 나가고자 하나이다.신 등이 비록 일반 백성은 아니오나,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길러주시는 은혜를 받자왔사온데,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까와하겠습니까? 충성된 마음을 바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일국도 대사 팔도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一國都大士八道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堦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게 하였다.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으로 삼고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주둔하면서 원수(元帥)를 응원하였다.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중들이 모두 달려왔고, 그의 뛰어난 제자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권율(權慄) 막하에 갔다.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 휴정은,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다. 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중들 가운데 소문이 났다. 그가 금강산을 유랑한 때에 지은 시에,

태평 성세에 요선(曜仙) 천길 노송나무[檜]인데 / 舜日曜仙千丈檜
숲을 사이에 두고 □□ 한 소리 물 여울이로다 / 隔林□□一聲灘

하는 것이 있었다. 기축년의 정여립 옥사에 명승(名僧)으로 잡혀 갇혔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석방되고, 어제시(御製詩)와 의복을 하사하여 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임진왜란)에 임금은 그를 불러서 중들을 거느리고 힘을 모아 적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지봉유설》 《소대기문》
○ 유정은,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송운(松雲)이고 또 사명산인(泗溟山人)이라고도 한다. 속성은 임(任)씨이다. 용모가 헌걸스럽고 수염은 깎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또 불경에도 달통하였다. 이때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있었는데, 적군이 절에 들어오니 중들이 모두 달아났으나 유정은 동요하지 않았다.적군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혹은 합장하여 지극히 공경을 표하고 물러갔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교서와 휴정의 격문이 도착하니, 유정은 불탁(佛卓) 위에 펼쳐 놓고 모든 중들을 불러놓고 읽어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산중에 있는 중들을 모두 동원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글을 사방에 띄워서 각각 승병을 일으키게 하였더니, 평양에 도착할 때에는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성 동쪽에 주둔하면서 접전하지는 않았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여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으니 모든 도(道)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 영남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왜장 청정(淸正)이 만나기를 청하므로, 유정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니, 적군은 몇 리나 벌여 섰고 창검은 묶어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유정은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청정을 보고 조용히 담소하였다. 청정이 유정에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하니, 유정이, “우리나라에서 너의 머리를 천근의 금과 만호가 되는 고을을 주겠다고 현상하였으니, 네가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대답하니, 청정이 크게 웃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때 왜병의 방비가 매우 성하여 유정이 겨우 한 번 보고 물러나왔으니, 필시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10년 뒤에 강화 사건으로 일본에 갔는데 왜놈들은 그를 후히 대접하고 보냈다. 《지봉유설》 ○ 유정은 벼슬이 지중추(知中樞)고 사시(私諡)로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서원이 없었으나 가정(嘉靖 가정은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1542)에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豐基郡守)가 되었을 때에 풍기군의 속현인 순흥(順興)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본관(本貫)이며, 살았던 옛터이므로 거기에다 그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선비들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곧 백운동(白雲洞)이다. 《후청쇄어》
이황(李滉)이 세붕을 이어 군수가 되어, 조정에 건의하여 송(宋) 나라의 고사에 따라 사액(賜額)한 것과 책을 내려줄 것, 토지와 노비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더니, 명종 5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고, 또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서원에 사액하는 것과 책을 내린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명신록》
○ 주세붕이 황해 감사가 되었을 때에 해주에 문헌당(文憲堂)을 세웠는데 향선생(鄕先生) 문헌공(文獻公) 최충(崔冲)을 모신 것이었다. 사우와 강당(講堂)ㆍ재사(齋舍)가 모두 향교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그리고 유생을 뽑아서 거처하게 하고 경비를 공급하였다. 이로부터 다른 도의 각 고을에서도 서원을 세우는 자가 있었다. 만력 4년 선조 9년 에 이르러서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지가 겨우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데, 모든 지방에서 다투어 본받게 되니 조정에서는 혹 사액과 사서(賜書)한 곳도 있으나, 명현을 모시는 사우이거나 특수한 지방이 아니면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향사도 없으면서 서원을 세운 것이 더욱 많으니 대개 60~70개 소나 되었다. 《후청쇄어》
○ 서원은 송 나라 때에 비롯하여 원(元) 나라의 말기에 성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을 창건한 후에 각지에서 계속 건립하게 되었는데, 영천(永川)에는 임고서원(臨皐書院), 함양(咸陽)에는 남계(灆溪)서원, 송도(松都)에는 숭양(崧陽)서원, 성주(星州)에는 천곡(川谷)서원, 해주에는 문헌(文憲)서원, 능성(綾城)에는 쌍봉(雙峯)서원, 양주에는 도봉(道峯)서원, 예안(禮安)에는 도산(陶山)서원, 안동에는 수곡(樹谷)서원, 영천(榮川)에는 이산(伊山)서원, 강릉에는 구산(丘山)서원, 대구에는 획암(畫巖)서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선대의 학자가 살던 곳이거나, 혹은 왕래한 곳으로 사우(祠宇)를 아울러 세워서 향사하였다. 이외에도 또 많이 있다. 《동각잡기》
○ 각 지방의 향교는 곧 공자묘가 있는 곳이다.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교육하므로 모든 서원에 비교하면 존비(尊卑)가 있다. 그러나 서원의 선비는 주세붕이 처음 세워 선비 중에서 해액자(解額者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가 거하게 하고, 비록 해액자가 아니라도 반드시 글을 많이 아는 자로서 보충하도록 규율을 세웠으므로, 거기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였다. 향교는 생원ㆍ진사에 합격한 자는 가지 아니하고 대개 용렬한 잡것들이 병역을 피하기 위한 자가 많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향교를 천하게 보고 서원을 높이고 받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스스로 원유(院儒)를 가탁하여 수령을 깎고 추었으므로 수령 또한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후청쇄어》
○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미 창건되었는데, 모든 유생이 가(稼) 가정(稼亭) 이곡(李穀)ㆍ목(牧)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의 좌차(坐次)가 나란히 되는 것을 의심하여 서울에 있는 자손 이덕형(李德泂)에게 묻고 학식이 높은 여러 선비에게 물었더니 모두 결정하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가서 물었더니, 항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오기량(吳紀亮)의 아들 즐(騭) 부자가 함께 중서령(中書令)이 되어서 조회 때에는 늘 임금이 운모 병풍(雲母屛風)을 주어 사이에 치고 따로 앉았으니, 이제는 장자(樟子)를 사이에 치고 격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드디어 그 말을 따라 장자를 치고 앉게 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閒話)》
목은의 화상이 문헌서원에 있었는데, 권근(權近)이 찬(贊)을 지어서 그 뒤에 쓰기를, “영락 갑오 9월 하한(下澣) 문인 권근 기(記)”라 하였다. 덕산(德山)에 있는 이씨의 옛집에 또 목은의 영당이 있었는데, 그 기문에 정덕(正德) 갑술이라 하였다. 화상이 처음에 두 벌 있었는데, 그 중 한 벌은 치관(豸冠)을 쓰고 서대(犀帶)를 띠며,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수염이 반백인 것은 지금서원의 소장본이 그것이다. 영당본은 그것으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한 벌은 야인(野人)의 복색이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원본은 임진병란에 잃어 버렸는데, 뒤에 일본으로 사신 갔던 자가 얻어 왔다. 일본의 노인이 주면서, “이것은 옛날의 귀인 도화(貴人圖畫)”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 자손에게 주었는데, 타국으로 돌아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 되었으므로 깁[生綃]이 찢어져서 그 아래 절반이 없어졌다. 자손이 두 벌을 모사(模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의 집에 봉안하고, 한 벌은 구본과 아울러 문헌 사당에 봉안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은 선조가 어필로 써서 사액하였더니, 임진년 병란에 편액은 불에 탔는데 숙종이 다시 어필로 액을 써주었다.
○ 홍가신(洪可臣)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의열서원(義烈書院)을 세우고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ㆍ계백(階伯)ㆍ흥수(興首)와 고려 정언 이존오(李存吾)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날 밤에, 가신의 꿈에 네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고 착한 일에 감동하는 빛이 있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서생(書生)이 집사(執事)로 재사(齋舍)에 갔는데, 이날 밤 또 꿈에 네 사람이 같이 문에 들어오면서 읍을 하고 당에 올라왔다고 한다. 《죽창한화(竹窓閒話)》. 이 일은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서원기(書院記)>에 상세하게 말했다.
광해 때, 평양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을 세우고 조정에서 향사의 예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감사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향사의 잘못은 김계휘(金繼輝)에게서 시작한 것입니다. 대개 기자(箕子)는 동방의 성군(聖君)으로 이미 국가의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데, 다시 사자(士子)들이 사사로이 향사하는 것은 외람한 것입니다. 팔조(八條)의 교(敎)가 처음 동방에 펴졌으니, 이제 서원을 구도(舊都 평양)에 세우고 많은 선비가 모여서 장수(藏修)하고, 그가 끼친 가르침을 강명(講明)하면 족한 것이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서울의 북쪽에 조계동(曹溪洞)이 있다. 이이첨(李爾瞻)이 조계동의 조자(曹字)가 조식(曹植)의 성자(姓字)와 같은 것을 이유로 사당을 세워서 조식을 향사하려 하여 서원을 짓고, 그 무리를 모아서 제 주구(走狗)들을 길렀다. 임숙영(任叔英)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조계에 조남명을 향사한다면 공덕리(孔德里)에는 공자를 향사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계해년 인조반정 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조식의 서원을 근년에 중흥동(中興洞) 어구에 세웠는데, 요새 들으니 어떤 사람이 모두 헐고 그 위패를 던지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지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이 서원은 적괴(賊魁) 이첨이 주장한 것이므로 유식한 사자(士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고, 처음에 창설할 때부터 지금까지 지키는 자는 모두 무뢰한 흉도로서, 서울과 지방에 폐를 끼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었으므로 이제 이런 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원에 대한 원망은 비록 이첨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조식은 유현(儒賢)인데 어찌 이첨의 개인적인 사람이겠습니까. 인심이 이와 같으니 실로 사림의 욕됨이 되니, 청하옵건대, 소속 고을에 영을 내려, 군인을 많이 정해서 엄숙하게 금단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소암집(踈庵集)》 《월사남궁록(月沙南宮錄)》
○ 효종 때 서필원(徐必遠)의 상소로 인하여 조정에서 비로소 서원에 대해서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기로 의논하였고, 숙종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명을 내려 각 도에 서원을 사사로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영종 신유년에는 무릇 갑오년 이후에 창설한 것은 모두 훼철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금령을 범하고 사사로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필원의 소 결(缺)
○ 영종 신유년 영조 7년 4월에 전교하기를, “갑오년에 법을 정한 후에 조정에 아뢰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사원(祠院)을 세우거나 또는 기설(旣設)된 서원에도 사사로이 추향(追享)한 자는 유현(儒賢)이거나 대신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철거하고, 당시에 그것을 알고 묵인했던 감사는 이미 죽은 자 외에는 모두 파직하고, 수령은 잡아다가 처벌하며, 앞장서서 주창한 유생은 5년 동안 과거에 응하지 못하게 하고, 이후에 아뢰지 않고 세운 사원 및 추향자를 알고도 묵인하는 감사는 잡아다 처벌하며, 수령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삼등을 내리는 율로 다스리게 하고, 유생은 멀리 귀양을 보내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근년에 이 일로써 공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소위 조사한다고 하고 책임 얼버무리기만 일삼으니 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또 서원 외에 향현사(鄕賢祠)라 일컫고, 혹은 영당(影堂)이라 일컫고서 그 중에 세력이 있는 자면 감사와 수령이 덮어주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후로는 감히 그 같은 짓을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비변사로부터 특별히 공문을 보내 엄하게 단속하고, 또 조사한 보고가 온 후에, 조정에서 다만 훼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그 영대로 즉시 거행할는지 꼭 알 수 없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각 도의 감사로 하여금 따로 관원을 파견하여 직접 가서 훼철시킨 뒤에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하게 하였다.
○ 10월에 정언 어석윤(魚錫胤)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아아, 저 태학에 이미 성묘(聖廟)를 받들었고, 각 도에는 향교(鄕校)가 있는데 막중한 대성(大聖)을 어찌 감히 사사로 서원을 세워 받들 수 있겠느냐. 지명이 비록 같으나 조정에서 명령한 것이 아니니,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 또 어찌 감히 마음대로 서원을 세우겠느냐.이 폐단을 버리지 아니하면 태학을 도리어 경하게 보고 사사 원우(院宇)를 중하게 볼 것이며, 나라에서 태학과 향교를 설치한 도리와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하고 성인을 높이는 뜻이 차차 희미해 질 것이니, 태산(泰山)에 제사한 것을 배척한 공자의 말씀을 어찌 과하다 하겠는가. 위패는 거두어 향교에 묻고 화상은 거두어다 각 성전(聖殿)에 받들면, 높이고 중히 여기는 예가 갖추어 지리라.” 하였다.
○ 영종 때 명을 내려 예안(禮安)의 도산서원과 해주의 소현서원의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해서 보았다.


경기(京畿)
개성부(開城府) 숭양서원(崧陽書院) 만력 계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서경덕(徐敬德)ㆍ김상헌(金尙憲) 인조조의 정승ㆍ김육(金堉) 효종조의 정승ㆍ조익(趙翼) 효종조의 정승 ○ 곁에 정몽주 화상이 있다.
화곡서원(花谷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선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화담이 살았던 옛 터 : 서경덕(徐敬德)ㆍ박순(朴淳) 선조조의 정승ㆍ허엽(許曄) 선조조의 명신ㆍ민순(閔純) 추배(追配)하였다.
오관서원(五冠書院) 신유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 자는 성부(誠夫)이며 호는 반남(潘南),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보문각(寶文閣) 직제학을 지냄. 목은(牧隱)의 문하생(목은의 문인이란 말의 잘못된 기록임. 목은의 매부로서 나이는 네 살 아래임) : 박세채(朴世采) 숙종조의 정승
숭절서원(崇節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 선조(宣祖) 임진조에 들었다.ㆍ김연광(金鍊光) 호는 송암(松巖)이며 송도(松都)에 살았다. 임진년에 회양(淮陽) 부사로서 사절(死節)하여 예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유극량 선조 임진조에 들었다.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인조 임오년에 세웠으며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 인조조의 정승ㆍ이상길(李尙吉)ㆍ이시직(李時稷)ㆍ홍명향(洪命享)ㆍ황선신(黃善身)ㆍ권순장(權順長)ㆍ김겸(金兼) 이상은 동벽(東壁)에 모셨다.ㆍ심현(沈誢)ㆍ윤전(尹烇)ㆍ송시영(宋時榮) 호는 야은(野隱)ㆍ구원일(具元一)ㆍ강흥업(姜興業) 이상은 서벽(西壁)에 모셨다. 모두 강도사절(江都死節)에 상세하다.
서하영당(西河影堂) 갑자년에 세웠다. : 이민(李敏)ㆍ조관빈(趙觀彬)
□□영당(□□影堂) 병술년에 세웠다. : 이인엽(李寅燁)
보명영당(保明影堂) 영종 을축년에 세웠으며 갑곶나루[甲串津]에 있다. : 이성량(李成樑) 명 나라 영원백(寧遠伯)ㆍ이여매(李如梅) 명 나라의 도독(都督). ○ 모두 중국인이다.
양주(楊州)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계유년에 절터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기묘년의 명신ㆍ송시열(宋時烈)
석실서원(石室書院) 숭정(崇禎) 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헌ㆍ김상용ㆍ김수항(金壽恒) 현종조의 정승ㆍ민정중(閔鼎重) 숙종조의 정승ㆍ이단상(李端相)ㆍ김창협(金昌協)
청절사(淸節祠) 병인년에 세웠으며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단종조에 들었다. 곁에 박세당(朴世堂)의 화상이 있다.
임간서원(臨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남을진(南乙珍) 고려 문하부사(門下府事)이며, 호는 사천(沙川)ㆍ조견(趙狷) 태조조에 들어 있다.
파주(坡州) 파산서원(坡山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으며 효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백인걸(白仁傑) 선조조의 명신ㆍ성혼(成渾)
자운서원(紫雲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숭정□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선조조의 명신ㆍ김장생(金長生)ㆍ박세채
풍계사우(豊溪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는데 임진병란에 불에 타 없어지고, 인조 을축년에 사액하고 기유년에 중건하였다. : 김안국(金安國) 기묘의 명현ㆍ이언적(李彦迪) 명종조의 명현ㆍ홍인우(洪仁祐)ㆍ정엽(鄭曄)ㆍ이원익(李元翼)ㆍ홍명구(洪命耉)ㆍ이식(李植)
고산서원(孤山書院) 숭정(崇禎) 병인년에 세웠으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이요,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 정언(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을 책하는 상소를 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죽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무진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ㆍ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구암서원(龜巖書院) 정사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집(李集)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벼슬은 고려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이다.ㆍ이양중(李養中) 호는 석탄(石灘)이며 벼슬은 고려 형조 참의ㆍ정성근(鄭誠謹)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정엽(鄭曄)ㆍ오윤겸(吳允謙)ㆍ임숙영(任叔英)
수곡서원(秀谷書院) 을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의건(李義健) 자는 의중(宜仲)이며, 호는 동은(峒隱)이요,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벼슬은 공조 정랑이며 집의를 승직하였다.ㆍ조속(趙涑)ㆍ이후원(李厚源) 효종조의 정승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축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익(趙翼)ㆍ조복양(趙復陽)ㆍ조지겸(趙持謙)
수원(水原) 매곡서원(梅谷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불에 탔다. : 송시열(宋時烈) 화상(畫像)이 있다.
남양(南陽) 용백사(龍栢祠) 병오년에 세웠으며 현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한 제갈량(漢諸葛亮)ㆍ송 호안국(宋胡安國)ㆍ윤계(尹棨)
안곡서원(安谷書院) 현종 무신년에 세웠으며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는데, 기유년에 철폐하였다가 경신년에 복구하였다. : 박세훈(朴世勳) 호는 백촌(栢村)이며, 벼슬은 첨정인데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ㆍ박세희(朴世熹) 기묘의 명현ㆍ홍섬(洪暹) 선조조의 정승
장단(長湍) 임강서원(臨江書院) 인조 계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 향(珦)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ㆍ이색(李穡) 태조조에 들었다.ㆍ김안국(金安國)ㆍ김정육(金正堉) 모두 기묘의 명현
용인(龍仁) 심곡서원(深谷書院) 효종 경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충렬사(忠烈祠)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광해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조광조ㆍ김식(金湜) 기묘 명현ㆍ김육(金堉)ㆍ남언경(南彦經)ㆍ이제신(李濟臣) 추가하여 배향하였다.
안성(安城) 도기서원(道基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
남파서원(南坡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홍우원(洪宇遠)
포천(抱川) 용연서원(龍淵書院) 숙종 병진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덕형(李德馨) 선조조의 정승ㆍ조경(趙絅)
화산서원(花山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 선조조의 정승
김포(金浦) 우저서원(午渚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지평(砥平) 운계서원(雲鷄書院) 계사년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에 ‘용문(龍門)’이라 사액하였다. : 조성(趙晟)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벼슬은 의영 고령(義盈庫令)에 이르렀다.ㆍ조욱(趙昱)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신변(申忭)ㆍ조형생(趙亨生) 호는 둔곡(遯谷)이며, 벼슬은 현감이고 욱(昱)의 손자이다. ○ 위의 두 위[二位]는 처음에 함께 배향[幷亨]하였다가 숙종 갑오년에 전교로 인하여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웠다.
교하(交河) 신곡서원(新谷書院) 계해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윤선거(尹宣擧)
풍덕(豐德) 귀암서원(龜岩書院) 을묘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이천(利川) 운봉서원(雲峯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서희(徐熙) 호는 복천(福訓)이며 시호는 장위공(章威公)이다. 벼슬은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냈다.ㆍ이관의(李寬義) 호는 율정(栗亭)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안국(金安國)
금천(衿川) 충현서원(忠賢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강감찬(姜邯贊) 고려 태사(太師)인데 시호는 인헌공(仁憲公)이다.ㆍ서견(徐甄) 태조조에 들었다.ㆍ이원익(李元翼)
□□영당(□□影堂) 인조가 옛터에 집을 짓게 하고 유상(遺像)을 봉안하였다. : 이원익(李元翼)
과천(果川) 민절사(愍節祠) 숙종 신유년에 세웠으며 신미년에 사액하였다. :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모두 단종조에 상세하다.
노강서원(鷺江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태보(朴泰輔)
호계서원(虎溪書院) 숙종 신유년에 세웠다. : 조종경(趙宗敬) 호는 독암(獨庵)이며 전한(典翰)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종경(宗敬)의 손자이다.
사충서원(四忠書院)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가 정미년에 훼철(毁撤)하고 을해년에 중건하였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ㆍ이건명(李健命)
마전(麻田) 미강서원(嵋江書院) 신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評穆) 숙종 때의 정승
인천(仁川) 학산서원(鶴山書院) : 숙종 임오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이단상(李端相)ㆍ이희조(李喜朝) 호는 간암(艮庵)이며 추향하였다. 이조 참판을 지냈고 찬성을 증직하였다.
연천(漣川) 임장서원(臨漳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畫像)
가평(加平) 잠곡서원(潛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육(金堉)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ㆍ이의건(李義健)ㆍ김수항(金壽恒)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峯書院) 무진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민준(閔純)ㆍ남효온(南孝溫) 갑자화적(甲子禍籍)조에 들었다.ㆍ김정국(金正國)ㆍ기준(奇遵) 기묘 명현ㆍ홍이상(洪履祥)ㆍ정지운(鄭之雲) 자는 정이(靜而)이며 호는 추만(秋巒)이고, 사재(思齋)의 문인이다.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였다.ㆍ이신의(李愼儀) 선조조의 명신ㆍ이유겸(李有謙) 참의를 지냈으며 호는 만회(晩晦)이다.
통진(通津) 영당(影堂) 기사년에 사액하였다. : 장만(張晩)
양성(陽城) 덕봉서원(德峯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오두인(吳斗寅)


홍충도(洪忠道 충청도의 별칭)
공주(公州) 충현서원(忠賢書院) 만력 신미년에 세웠고 천계(天啓)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존오(李存吾)ㆍ이목(李穆) 무오당적(戊午黨籍)조에 들었다.ㆍ성제원(成悌元) 명종 유일(遺逸)ㆍ조헌(趙憲)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서기(徐起) 선조 때의 학자
청강서원(滄江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황신(黃愼)
도산서원(道山書院) 계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득기(權得己) 호는 만회(晩悔)이며, 예조 좌랑을 지냈는데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권시(權諰)
부용강영당(芙蓉江影堂)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이만원(李萬元)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평안도 관찰사[箕伯]를 지냈다.
청주(淸州) 쌍천서원(雙泉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신식(申湜)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며,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퇴계(退溪)의 문인이며 광해조 때 폐모 의논에 불참하였고, 《가례언해(家禮諺解)》를 저술하였다. 효도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신항서원(莘巷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색(李穡)ㆍ이이(李珥)ㆍ경연(慶延) 자는 징군(徵君)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성종 때는 유일(遺逸)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 박훈(朴薰) 기묘 명현ㆍ김정(金淨) 기묘 명현ㆍ한충(韓忠) 기묘 명현ㆍ송인수(宋麟壽) 을사당적(乙巳黨籍)에 들었다.ㆍ송상현(宋象賢)ㆍ이득윤(李得胤) 호는 서계(西溪)이며, 괴산(槐山) 군수를 지냈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어필(御筆)로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화양동(華陽洞)에 또 만동묘(萬東廟)가 있는데 계미년에 세웠고, 명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향사한다.
국계서원(菊溪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박증영(朴增榮) 호는 눌재(訥齋)이며, 교리를 지냈다.ㆍ변경복(卞景福) 호는 백음(栢陰)이다.ㆍ이덕수(李德洙)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이수언(李秀彦) 호는 농계(聾溪)이며, 대사헌을 지냈다.
기암서원(機巖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강백년(姜栢年)
송천서원(宋泉書院)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김사렴(金士廉) 벼슬은 안렴사(按廉使)이다.ㆍ최유경(崔有慶) 호는 죽정(竹亭)이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평도공(平度公)이다.ㆍ이정간(李貞幹) 벼슬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고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다.ㆍ박광우(朴光祐) 을사당적조에 들었다.ㆍ이지춘(李之春) 호는 삼우당(三友堂)이며, 장령을 증직하였다.ㆍ조강(趙綱) 호는 모계(慕溪)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이대건(李大建) 이시발(李時發)의 부(父)이다. 호는 오촌(梧村)이며 진사에 급제하고 27세에 죽었다. 사람들이 관중안자(館中顔子)라 하였다. 우상(右相)을 증직하였다.ㆍ이제신(李濟臣)ㆍ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ㆍ이인혁(李寅爀) 호는 매산(梅山)이며 사복정(司僕正)을 지냈다. 이상 3인을 추배하였다.
백록서원(白麓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권상(權常) 호는 남강(南岡)이며, 동흥군(東興君)으로 봉하였다. 동지(同知)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변시환(卞時煥) 호는 일공(一筇)이며 흥덕(興德) 현감을 지냈다.
봉계서원(鳳溪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 선조조의 명신ㆍ신송(申誦) 호는 하은(霞隱)이며, 감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신집(申潗) 호는 종산(鍾山)이며 지평(持平)을 증직하였다.
□□영당(□□影堂) 경인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
체화당(棣華堂) : 노계원(盧繼元) 호는 송헌(松軒)이다.ㆍ노후원(盧後元) 호는 국헌(菊軒)이다.ㆍ노종원(盧從元) 호는 매헌(梅軒)이며, 지평을 지냈다.ㆍ노일원(盧一元) 호는 죽헌(竹軒)이다.
표충사(表忠祠) 영종 신해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봉상(李鳳祥) 병사로서 영종 무신년에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며, 좌찬성을 증직했다.ㆍ남연년(南延年) 영장(營將)이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며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홍림(洪霖) 비장(稗將)을 지냈고, 병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충주(忠州) 운곡서원(雲谷書院)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
팔봉서원(八峯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자(李耔) 기묘 명현ㆍ이연경(李延慶) 기묘 명현ㆍ김세필(金世弼) 기묘명현ㆍ노수신(盧守愼) 선조조의 정승
누암서원(樓巖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철훼(撤毁)하였다가 을사년에 복구하였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ㆍ권상하(權尙夏)
충렬사(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영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임경업(林慶業)
문의(文義) 노봉서원(魯峯書院) 만력 갑인년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송인수(宋麟壽)ㆍ정렴(鄭)
검담서원(黔潭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浚吉)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 유희령(柳希齡)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ㆍ유흥룡(柳興龍)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ㆍ우신언(禹愼言)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정응창(鄭應昌) 호는 유항(柳巷)이며 공조 좌랑을 증직하였다.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이문건(李文楗) 호는 검재(黔齋)이며 승지를 지냈다.ㆍ노수신(盧守愼)ㆍ김제갑(金悌甲) 목사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ㆍ유근(柳根) 광해조의 문형(文衡)ㆍ이신의(李愼儀)ㆍ허후(許詡) 이상(貳相)을 지냈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ㆍ박세무(朴世茂) 헌납을 지냈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ㆍ전유형(全有亨) 호는 학송(鶴松)이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아산(牙山) 인산서원(仁山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조광조(趙光祖)ㆍ정여창(鄭汝昌)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이언적(李彦迪) 명종 명현ㆍ이황ㆍ기준(奇遵)ㆍ이지함(李之菡) 선조 때 사람ㆍ홍가신(洪可臣) 호는 만전(晩全)이며 판서를 지냈다.ㆍ이덕민(李德敏) 처사이며 참봉을 지냈고, 호는 송파(松坡)이다.ㆍ박지계(朴知誡) 4인은 무신년에 추향하였다.
현충사(顯忠祠) 숙종 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선조조의 명신ㆍ이완(李莞) 순인의 종자(從子)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고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봉상(李鳳祥)
연기(燕岐) 봉암서원(鳳巖書院) 신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한충(韓忠) 기묘 명현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기ㆍ송시열
제천(堤川) 남당서원(南塘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윤선거(尹宣擧)
보은(報恩) 상현서원(象賢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만력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성운(成運)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성제원(成悌元) 명종조의 유일로 보은(報恩) 현감을 지냈다.ㆍ조헌(趙憲) 신유년에 추향하였다.ㆍ송시열 을해년에 추향하였다.
산앙사영당(山仰祠影堂)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ㆍ송시열ㆍ권상하(權尙夏)
단양(丹陽) 단암서원(丹巖書院) 현종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고려 때에 좨주(祭酒)를 지냈다. 호는 역동재(易東齋)이며 자는 보안(甫安)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ㆍ이황(李滉)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황종해(黃宗海) 호는 오천(杇淺)이다.
홍산(鴻山) 청일서원(淸逸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창렬사(彰烈祠) 삼학사(三學士)를 향사하였다.
옥천(沃川) 창주서원(滄洲書院) 만력 무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김집(金集)ㆍ송시열ㆍ송준길ㆍ곽은(郭垠) 호는 용촌(龍村)이며 승지를 지냈다. 효종 경인년에 따로 창주사우(滄洲祠宇)를 세워서 향사하였다.
용문영당(龍門影堂) 무인년에 세웠다. : 송시열
호계사우(虎溪祠宇) 숭정(崇禎) 신묘년에 세웠다. : 남수문(南秀文) 호는 경재(敬齋)이며 직제학을 지냈다.
대곡영당(代谷影堂) 계사년에 훼철하였다. : 전팽령(全彭齡) 호는 송정(松亭)이며 감사를 지냈다.
표충사(表忠祠)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조완기(趙完基)
신창(新昌) 도봉서원(道峯書院) 경술년에 세웠다. : 조익(趙翼)ㆍ조극선(趙克善) 자는 유선(有善)이며 호는 야곡(冶谷)이다.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으며 유일(遺逸)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
청풍(淸風) 봉강서원(鳳崗書院) 신해년에 세웠으며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ㆍ김권(金權)
황강서원(黃江書院) 영종 병오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권상하
연산(連山) 돈암서원(遯巖書院) 숭정 계유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ㆍ김집ㆍ송준길ㆍ송시열
귀산서원(龜山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윤전(尹烇)ㆍ윤순거(尹舜擧)ㆍ윤원거(尹元擧) 자는 백분(伯奮)이며 벼슬은 진선(進善)을 지냈다.
팔현서원(八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는데, 지금은 액(額)을 충곡(忠谷)이라 한다. : 백제 장군 계백(階伯)ㆍ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익겸(金益兼)
휴정서원(休亭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유무(柳懋) 호는 휴계(休溪)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이항길(李恒吉) 호는 과암(果庵)이며 참봉을 지냈다.ㆍ김망(金望)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현감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권□(權□) 호는 반곡(盤谷)이며, 감사를 지내고 영상에 증직되었다.
보령(保寧) 화암서원(花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지함(李之函)ㆍ이산보(李山甫)ㆍ이몽규(李夢奎)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며, 추향되었다.
홍주(洪州) 녹운서원(綠雲書院) 임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혜학서원(惠學書院) 숙종 을유년에 세웠고 경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세귀(李世龜) 호는 양와(養窩)이며, 목사를 지냈다.
용계서원(龍溪書院) 숙종 갑오년에 세웠다. : 윤증(尹拯)
황간(黃澗) 모현서원(慕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조위(曺偉)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박영(朴英) 중종조의 명신ㆍ김시창(金始昌) 호는 풍정(嵐亭)이며, 효절(孝節)로써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ㆍ박응훈(朴應勳) 호는 오촌(梧村)이다.ㆍ송시열(宋時烈)
송계서원(松溪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다. : 남지언(南知言) 호는 삼괴당(三槐堂), 참봉을 지냈다.ㆍ박유동(朴惟東) 호는 일석(一石)이며, 참봉을 지냈다.
한천서원(寒天書院) 정유년에 세웠고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서천(舒川) 명곡서원(鳴谷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산보(李山甫)ㆍ조헌(趙憲)ㆍ조수륜(趙守倫) 자는 경지(景至)이며, 호는 풍옥헌(風玉軒)이고, 호조 좌랑을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추향되었다.
부여(扶餘) 의렬사(義烈祠) 만력 을해년에 세웠고, 선조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성충(成忠) 백제(百濟)의 좌평(佐平)을 지냈다.ㆍ흥수(興首) 백제의 좌평을 지냈다.ㆍ계백(階伯) 백제의 장군ㆍ이존오(李存吾) 고려의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ㆍ정택뢰(鄭澤雷) 호는 화강(花岡)이며, 광해조 때 남해(南海)에 귀향갔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ㆍ황일호(黃一皓) 호는 지천(芝川)이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고 찬성에 증직되었다.
부산서원(浮山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숙종 기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ㆍ이경여(李敬輿) 인조조의 정승
청안(淸安)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이준경(李浚慶) 명종조의 정승ㆍ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落齋)이다. 현감을 지냈다.ㆍ박지화(朴枝華) 자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수암(守庵)이고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교관(敎官)을 지냈고, 예서(禮書)에 정통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ㆍ이득철(李得澈) 위에 보라. 호는 신곡(莘谷)이다.ㆍ이당(李瑭) 호는 방촌(芳村)이며 참봉을 지냈고 추배되었다.
□□사우(□□祠宇) 영종 기미년에 세웠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며, 단종조의 사람이다.ㆍ이보흠(李甫欽) 본관이 영천(永川)이며, 순흥(順興) 부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영동(永同) 초강서원(草江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박연(朴堧) 호는 난계(蘭溪)이며, 세종조의 명신이다.ㆍ박사종(朴嗣宗) 호는 읍청(挹淸)이며 참봉을 지냈다.ㆍ송방조(宋邦祚) 병조 좌랑을 지냈다.ㆍ송시영 위에 보라ㆍ송시열ㆍ윤황(尹煌)
화암사우(花巖祠宇)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장항(張沆) 호는 눌재(訥齋)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시호는 문현공(文顯公)이다.ㆍ박흥생(朴興生) 호는 국당(菊堂)이며 현령(縣令)을 지냈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장필무(張弼武) 호는 백야(栢冶)이며, 자는 무부(武夫)요, 시호는 양정공(襄貞公)이다. 청렴결백한 장군으로서 절도사를 지냈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박인(朴忍) 만호(萬戶)를 지냈다.ㆍ장지현(張知賢)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며 감찰을 지냈다. 임진왜란에 순절하였는데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필무(弼武)의 아들이다.
회덕(懷德)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에 옮겨 세웠다. : 정광필(鄭光弼) 중종조의 정승ㆍ김정(金淨)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ㆍ이시직(李時稷)ㆍ송인수(宋麟壽)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영(宋時榮) 이시직과 송시영의 사당은 따로 있다.
정절사(靖節祠) 갑자년에 세웠다. : 송유(宋愉)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ㆍ백팽년(朴彭年)ㆍ송갑조(宋甲祚) 호는 수옹(睡翁)이며, 참봉을 지냈고 영상에 증직되었다.ㆍ송상민(宋尙敏) 호는 석곡(石谷)이며 좌랑을 증직하였다.ㆍ김경여(金慶餘) 부제학을 지냈으며 영상에 증직되었다. 호는 송애(松崖)이며 추배되었다.
종회사영당(宗晦祠影堂)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용호사우(龍湖祠宇) 정축년에 세웠다. : 강학년(姜鶴年) 호는 복천(復泉)이며, 장령을 지냈고 대사헌에 증직되었다.ㆍ강세귀(姜世龜) 호는 삼휴당(三休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
미호서원(渼湖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규렴(宋奎濂)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이성(尼城) 노강서원(魯崗書院) 갑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윤황(尹煌)ㆍ윤문거(尹文擧)ㆍ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
온양(溫陽) 정퇴서원(靜退書院) 기사년에 세웠다.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맹희도(孟希道) 호는 동포(東浦)이며 수문제학(修文提學)을 지냈다. 사성(思誠)의 부(父)이며, 추향되었다.ㆍ홍가신(洪可臣)
충효사우(忠孝祠宇)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강봉수(姜鳳壽) 호는 창암(窓巖)이며 참찬에 증직되었다.ㆍ조상우(趙相禹) 호는 시암(時庵)이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강백년(姜栢年)ㆍ윤현(尹俔)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도사(都事)를 증직하였고, 추향하였다.
면천(沔川) 향현사(鄕賢祠) 병술년에 세웠다. : 이안눌(李安訥)
대흥(大興) 우천향현사(牛泉鄕賢祠) 정해년에 세웠다. : 이약수(李若水) 호는 우천(牛泉)이며 진사에 합격하였고, 기묘 명현이다. ○ 소정방사(蘇定方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청산(靑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조헌(趙憲)ㆍ송시열(宋時烈)
임천(林川) 칠산서원(七山書院) 정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ㆍ유계(兪棨)
예산(禮山) 덕잠서원(德岑書院) 을유년에 세웠고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구(金絿) 기묘 명현
집성사영당(集成祠影堂)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ㆍ송시열
평택(平澤) 포충사우(褒忠祠宇) 신축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향현사(鄕賢祠):우남양(禹南陽) 호는 운곡(雲谷)이며, 처사를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
한산(韓山) 문헌서원(文獻書院) 만력 갑오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곡(李穀) 고려조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봉하였으며, 호는 가정(稼亭)이다.ㆍ이색(李穡)ㆍ이종학(李種學) 호는 인재(麟齋)이며 제학(提學)을 지냈다.ㆍ이개(李塏)ㆍ이자(李耔)
진천(鎭川) 백원서원(百源書院) 가정(嘉靖) 임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종학(李種學)ㆍ김덕숭(金德崇) 호는 모재(慕齋)이며, 본읍 군수를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여(李畬) 호는 송광(松匡)이며 문학(文學)을 지냈다.ㆍ이부(李阜) 호는 행원(杏園)이며, 교리를 지냈고 현량과에 합격하였다. 김유신(金庾信) 사당은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지산서원(芝山書院)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
서산(瑞山) 성암서원(聖岩書院) 을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숙(柳淑) 고려조에서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사암(思庵)이다.ㆍ김홍욱(金弘郁) 호는 학주(鶴洲)이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인정서원(仁政書院) 중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세웠다. 송곡향현사(松谷鄕賢祠)라고도 한다. : 유방택(柳方澤) 호는 금헌(琴軒)인데 고려조에서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지냈다.ㆍ정신보(鄭臣保) 본관은 서산(瑞山)이며 고려조에 인주(麟州) 수령을 지냈다.ㆍ정인경(鄭仁卿) 신보(臣保)의 아들인데, 고려조의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양렬공(襄烈公)이다.ㆍ유백유(柳伯濡) 방택(方澤)의 아들인데 호는 저정(樗亭)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연풍(延豐) 원천사(源泉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기홍(李箕洪) 호는 직재(直齋)이며 집의(執義)를 지냈다.
해미(海美) □□영당(□□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숙종조의 정승
진잠(鎭岑) 집성사(集成祠) 숙종 갑술년에 세웠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은진(恩津) 갈산사(葛山祠) 숙종 계사년에 창건하였다. : 강응정(姜應貞) 생원에 합격하였고, 호는 화재(和齋)이다.ㆍ서익(徐益) 호는 만죽헌(萬竹軒)이며, 의주 목사를 지냈다.ㆍ양응춘(楊應春) 호는 도곡(道谷)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금곡사(金谷祠) 무진년에 중건하였다. : 김수남(金秀南)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병조 정랑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비인(庇仁) 청절사(淸節祠) 경인년에 세웠다. : 유기창(兪起昌)ㆍ유여림(兪汝霖) 기창(起昌)의 아들인데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안공(景安公)이다.
전의(全義) 뇌암서원(雷岩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이상(李翔) 본관은 우봉(牛峯)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타우(打愚)이다.
덕산(德山) 회암서원(晦庵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담(李湛) 호는 정존재(鄭存齋)이며, 부학(副學)을 지냈다.ㆍ조극선(趙克善)
석성(石城) 봉호서원(蓬湖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윤문거(尹文擧)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 가정(嘉靖) 임인년에 세웠고 명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ㆍ안축(安軸) 자는 당지(當之)이며, 호는 근재(謹齋)요, 본관은 복주(福州)이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졌다.ㆍ안보(安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ㆍ주세붕(周世鵬) 호는 신재(愼齋)이며 참판을 지냈고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단계서원(丹溪書院)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담(金淡)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기영사(耆英祠) 병진년에 세웠다. : 금축(琴軸) 호는 송계(松溪)이며, 진사이다.ㆍ남몽오(南夢鰲) 호는 삼송(三松)이며 진사이다.ㆍ박선장(朴善長) 호는 수서(水西)이며, 도사를 지냈다.ㆍ권호신(權虎臣) 호는 도은(陶隱)이며, 생원이다.
금성단(錦城壇) 영조 임술년에 세웠는데 은액충신신단(恩額忠臣神壇)이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도계견일사(道溪見一祠) 효종 정축년에 세웠다. : 이수형(李秀亨) 호는 도촌(桃村)이며 평시령(平市令)을 지냈다.ㆍ이여빈(李汝馪) 호는 취사(炊沙)이며 전적(典籍)을지냈다.
초계(草溪) 청계서원(淸溪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다. : 이희안(李希顔) 명종조의 유일(遺逸)ㆍ김치원(金致遠) 호는 탁계(濯溪)이며, 찰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이대기(李大期) 호는 설학(雪壑)이며, 정랑을 지냈다.
송원서원(松原書院) 강희(康熙) 임신년에 세웠다. : 안우(安遇) 호는 노계(蘆溪)이며, 현감을 지냈다.ㆍ노필(盧㻶) 호는 묵재(墨齋)이며, 지평을 지냈다.ㆍ안극가(安克家) 호는 뇌암(磊巖)이며, 현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노극성(盧克誠) 호는 매죽와(梅竹窩)이며 직장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영주(榮州) 이산서원(伊山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선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삼봉서원(三峯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다. : 김이음(金爾音) 호는 삼로(三路)며, 본관은 함창(咸昌)이고, 호조 참판을 지냈다.ㆍ이해(李瀣) 명종조 사람ㆍ김개국(金盖國) 호는 만취(晩翠)이며, 정랑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융(金隆) 호는 물암(勿巖)이며, 참봉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오계서원(汚溪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다. : 이덕홍(李德弘) 호는 간재(艮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의산서원(義山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이개립(李介立) 호는 성오당(省吾堂)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이며 좌윤(左尹)을 지냈다.
장암서원(壯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귀산정사(龜山精舍) 만력 을묘년에 세웠는데, 상현사(象賢祠)라고도 한다. : 김담(金淡)ㆍ박승임(朴承任) 호는 소고(嘯皐)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김늑(金玏) 호는 백암(栢巖)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영조(金榮祖) 호는 망와(忘窩)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사계정사(泗溪精舍) 효종 경자년에 세웠다. : 황효공(黃孝恭) 호는 귀암(龜巖)이다.ㆍ나이준(羅以俊) 호는 매헌(梅軒)이며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진사로서 홀로 성전위판(聖殿位版)을 배행(陪行)하였다.
용궁(龍宮) 삼강서원(三江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
소천서원(蘇川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전원발(全元發) 호는 국파(菊坡)이며 고려조에서 병부 상서를 지냈고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마산리사(馬山里社)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는데 완택향사(浣澤鄕社)이다. : 정귀령(鄭龜齡) 호는 삼수(三樹)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옹(鄭雍) 수찬을 지냈다.ㆍ정사(鄭賜) 직제학을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ㆍ정환(鄭渙) 응교를 지냈다.ㆍ정광필(鄭光弼)
기천정사(箕川精舍)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문근(文瑾)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문관(文瓘) 근(瑾)의 아우이며, 호는 옥계(玉溪)고, 승지를 지냈다.ㆍ이구(李搆)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이문흥(李文興) 호는 몽암(夢庵)이며, 대사성을 지냈다.ㆍ안준(安俊) 호는 노포(蘆浦)이며 고려조에서 판봉상(判奉常)을 지냈다.
충효사(忠孝祠) 갑신년에 세웠다. : 반유(潘濡) 찰방에 증직되었다.ㆍ반충(潘沖) 호는 관물당(觀物堂)이다.
용곡리사(龍谷里社) 을축년에 세웠다. : 강응청(姜應淸) 호는 삼산(三山)이며 인의(引儀)를 지냈다.ㆍ강제(姜霽) 호는 백석(白石)이며, 이조좌랑을 지냈다.ㆍ강우(姜䨞) 호는 석봉(石峯)이며, 현감을 지냈다.
개령(開寧) 덕림서원(德林書院) 임진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정경세(鄭經世)
예안(禮安) 도산서원(陶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역동서원(易東書院) 융경 경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청계서원(淸溪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이식(李埴) 퇴계(退溪)의 아버지이며 진사이다.ㆍ이우(李堣) 호는 송재(松齋), 호조 참판을 지냈다. 퇴계의 숙부이다.ㆍ이해(李瀣)
분강서원(汾江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이현보(李賢輔)
향현사(鄕賢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계양(李繼陽) 진사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조부이다.ㆍ김효려(金孝廬) 진사이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동계정사(東溪精舍) 숙종 기묘에 세웠다. : 금난수(琴蘭秀) 호는 성성재(惺惺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 문인인데 징역(徵辟)하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영양(英陽) 영산서원(英山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고,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향현사(鄕賢祠) 숙종 기사년에 세웠다. : 남민(南敏) 당(唐)의 안렴사(按廉使)였다. 신라가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하고,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시조(始祖)로 삼았다. 본래의 성명은 김충(金忠)이며,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중국 사신으로 왜(倭)에 갔다가 표류(漂流)되어 영해(寧海)에 표착되었다. 남으로부터 왔다 하여 성(姓)을 남(南)으로 하사하였다.
인동(仁同) 동락서원(東洛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장현광(張顯光)
오산서원(吳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
소암서원(嘯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채몽연(蔡夢硯) 호는 투암(投巖),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채무(蔡楙) 호는 백포(栢浦), 병랑(兵郞)을 지냈다.
현암사(賢巖祠) 임신년에 세웠다. : 장잠(張潛) 호는 죽정(竹亭), 진사이다.
선산(善山) 금오서원(金烏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ㆍ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ㆍ장현광(張顯光)
월암서원(月巖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주(金澍) 호는 농암(礱巖)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고려조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ㆍ하위지(河緯地)ㆍ이맹전(李孟專) 단종 때 생육신(生六臣)이다.
낙봉서원(洛峯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김숙자(金淑滋)ㆍ김취성(金就成) 호는 진락(眞樂), 처사이다.ㆍ박운(朴雲) 호는 용암(龍岩)이며 진사이다.ㆍ김취문(金就文) 호는 구암(久庵), 대사간을 지냈다.ㆍ고응섭(高應涉) 호는 왕곡(枉谷), 사성(司成)을 지냈다.
무동향현사(茂洞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전좌명(田佐命) 호는 성암(性庵), 좌랑을 지냈고, 우상(右相)에 증직되었다.ㆍ이우(李瑀) 호는 옥산(玉山), 이(珥)의 아우이다. 군자정(軍資正)을 지냈다.ㆍ전윤무(田胤武) 호는 가정(檟亭), 현감을 지냈다.
□□영당(□□影堂) 숭정 임오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
칠곡(漆谷) 사양서원(泗陽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호는 석담(石潭),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군위(軍威) 남계서원(南溪書院) 태창(泰昌) 경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성룡(柳成龍) ○ 또 김유신 사당이 있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칠원(漆原) 덕연서원(德淵書院) 신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세붕(周世鵬)ㆍ배세적(裵世績) 호는 정곡(靜谷), 현감을 지냈다.ㆍ배석지(裵錫祉) 호는 율리(栗里), 현감을 지냈다.ㆍ황협(黃悏) 호는 독회당(獨悔堂), 처사이다.ㆍ주박(周博) 세붕(世鵬)의 아들. 자는 약지(約之), 호는 귀봉(龜峯), 교리를 지냈다.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을사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윤흥신(尹興新) 다대포(多大浦)의 첨사를 지냈다.ㆍ노개방(盧蓋邦)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승지를 증직하였다.
충렬사(忠烈祠) 을축년에 세웠다. : 정발(鄭撥) 부산 첨사를 지냈다.ㆍ조영규(趙英珪) 양산(梁山) 군수이다.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문덕겸(文德謙) 교생(校生)이다.ㆍ김희수(金希壽) 비장(裨將)이다ㆍ송백(宋伯) 호장(戶長)을 지냈다.ㆍ김상(金祥) 부민(府民)이다.ㆍ송봉수(宋鳳壽) 비장을 지냈고, 판관에 증직되었다.ㆍ신여로(申汝櫓) 겸인(傔人)이다. ○ 문 밖에 정포(旌褒)된 이는 상현의 첩 금섬(金蟾)과 발(撥)의 첩 애향(愛香)이다.
함안(咸安) 서산서원(西山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원호(元昊)ㆍ김시습(金時習)ㆍ성담수(成聃壽)ㆍ남효온(南孝溫) 단종 때의 생육신이다.
도림서원(道林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덕암서원(德巖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다. : 조순성(趙純性) 동지좌중군(同知左中軍)을 지냈다. 태조가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ㆍ박한주(朴漢柱) 정언을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무오당적에 들었다.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ㆍ조종도(趙宗道)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송정서원(松亭書院) 임인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영산(靈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이후경(李厚慶) 호는 외재(畏齋), 현감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도고(李道攷) 호는 복재(復齋), 처사이다.
도천서원(道泉書院) 을해년에 세웠다. : 신사장(辛斯藏) 호는 곡강(曲江),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ㆍ이중(李中) 예조정랑을 지냈다.ㆍ배학(裵鶴) 호는 임천(林泉), 참봉을 지냈다.
함창(咸昌) 임호서원(臨湖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표연말(表沿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홍귀달(洪貴達) 갑자화적에 들었다.ㆍ채수(蔡壽)ㆍ권달수(權達手)ㆍ채무일(蔡無逸) 호는 휴암(休庵), 헌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유포(柳砲) 호는 가촌(嘉村), 현감을 지냈다.ㆍ유달준(柳達遵) 호는 대암(臺巖), 생원이다.ㆍ이겸(李謙) 호는 수헌(睡軒), 진사이다.ㆍ정윤해(鄭允海) 호는 서귀재(鋤歸齋), 참봉을 지냈다.ㆍ이영갑(李英甲) 호는 야옹(野翁), 도사를 지냈다.
아곡정사(雅谷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박눌(朴訥) 찰방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남영(南嶸) 호는 고산, 군수를 지냈다.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박성민(朴成敏) 호는 수묵옹(守默翁)이다.ㆍ남근명(南近明) 호는 수운(峀雲),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유종인(柳宗仁) 호는 취미(翠微)이다.ㆍ홍약창(洪約昌) 호는 귀촌(龜村),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언양(彦陽) 반귀서원(磻龜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ㆍ정구(鄭逑)
양산(梁山) 송담서원(松潭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백수회(白受繪)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충렬사(忠烈祠) 병자년에 세웠다. : 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경산(慶山) 고산서원(孤山書院) 경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정경세(鄭經世)
장기(長鬐) 죽림영당(竹林影堂) 을유년에 세웠다. : 송시열
연일(延日) 오천서원(烏川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습명(鄭襲明) 고려조에서 추밀(樞密)을 지냈으며, 시호는 영양공(榮陽公)이다.ㆍ조몽주(趙夢周)
□□방묘(□□傍廟) 경신년에 세웠다. : 정사도(鄭思道) 호는 설곡(雪谷)이다.ㆍ정철(鄭澈) 선조조의 정승
자인(慈仁) 관란서원(觀瀾書院) 경자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용계서원(龍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최문병(崔文炳) 호는 성재(省齋), 좌윤을 증직하였다.ㆍ이광후(李光後) 호는 매헌(梅軒)이다.ㆍ이창후(李昌後) 호는 죽헌(竹軒)이다.ㆍ김응명(金應鳴) 호는 취죽당(翠竹堂), 생원이다.
울산(蔚山) 구강서원(鷗江書院) 무오년에 세웠으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
신녕(新寧) 백학서원(白鶴書院) 무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호는 금계(錦溪), 자는 중거(仲擧)이다. 지평(持平)과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냈다.
귀천서원(龜泉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권수(權銖) 임진 때 사람 ○ 다른 책엔 “명천사(鳴泉祠) 현감 윤명운(尹明運)을 향사한다.”고 되어 있다.
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허조(許稠) 세종조의 정승이다.
밀양(密陽) 예림서원(禮林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고 숭정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박한주(朴漢柱)ㆍ신계성(申季誠) 호는 송계(松溪), 처사이다.
삼강향현사(三江鄕賢祠) 가정 계해년에 세웠다. : 민구령(閔九齡) 호는 욱재(勗齋), 처사다. 다섯 형제가 삼강(三江)에 집을 짓고 살고,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무신[虎臣]이 천랑(薦郞)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ㆍ민구소(閔九韶) 호는 경재(敬齋)이다.ㆍ민구연(閔九淵) 호는 우우재(友于齋)이다.ㆍ민구주(閔九疇) 호는 무명당(無名堂)이다.ㆍ민구서(閔九叙) 호는 삼매당(三梅堂)이다.
중봉충효사(中峯忠孝祠) 정해년에 세웠다. : 손인갑(孫仁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노개방(盧盖邦) 교수였다. 임진란 때 함께 죽었다.ㆍ손약해(孫若海)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함께 죽었다.ㆍ신동현(申東顯) 호는 매당(梅堂), 판관에 증직되었다.
승려사우(僧侶祠宇) :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ㆍ홍제당 유정(弘濟堂惟政)ㆍ기허당 영규(奇虛堂靈圭) 모두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청도(淸道) 자계서원(紫溪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현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김극일(金克一) 호는 절효(節孝), 일손(馹孫)의 아버지이다. 지평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일손(金馹孫)ㆍ김대유(金大有) 기묘록(己卯錄)에 있다.
남계서원(南溪書院) 숙종 경진년에 세웠다. : 김지대(金之垈) 고려조에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영헌공(英憲公)이다.
선암서원(仙巖書院) 융경 무진년에 세웠다. : 박하담(朴河淡) 호는 소요당(消遙堂), 생원이다. 효행으로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는 응청(應淸)이다.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 숭정 계유년에 세웠으며, 영조 때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단성(丹城) 도천서원(道川書院) 고려 때 창건하였으며 만력 임자년에 중건(重建)하였다. : 문익점(文益漸)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우문제학(右文提學)을 지냈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두릉서원(杜陵書院) 무자년에 이건(移建)하였다. : 권도(權濤) 호는 동계(東溪),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도정서원(道正書院) 경진년에 세웠다. : 정탁(鄭琢) 선조조의 정승
청곡향현사(淸谷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이천경(李天慶) 호는 신당(新堂), 본관은 벽진(碧珍), 남명(南冥)의 문인이다.
거창(居昌) 도산서원(道山書院) 현종 병신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
완계서원(浣溪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
용원사우(龍源祠宇) 병인년에 세웠다. : 문위(文緯)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본관은 단성(丹城), 거창(居昌)에 이거(移居)하였다. 남명(南冥)과 덕계(德溪)의 문인이다. 독행(篤行)으로 천거되어 교관(敎官)에 제수되었다.
원천서원(源泉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변벽(卞璧) 호는 귀산(龜山)이다.ㆍ전팔고(全八顧) 호는 원천(源泉)이다.
포충사(褒忠祠) 영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술원(李述原) 무신년에 순절(殉節)하였으며,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경충사(景忠祠) 결(缺) : 신명익(愼溟翊) 승지에 증직되었다.
용천향현사(龍泉鄕賢祠) 결(缺) : 형사보(刑士保)ㆍ유자방(柳子芳)ㆍ이계준(李繼俊)ㆍ전팔고(全八顧)ㆍ전팔급(全八及)ㆍ서숙(徐䎘)
성주(星州) 천곡서원(川谷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이천(程伊川)ㆍ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ㆍ이인복(李仁復)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숭인(李崇仁) 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정곤수(鄭崑壽) 선조조의 명신
향현사(鄕賢祠) 병신년에 세웠다. : 김맹성(金孟性) 호는 지지당(止止堂), 이조 정랑이다.ㆍ도형(都衡) 호는 행정(杏亭)이며 병조 좌랑이다.ㆍ송희규(宋希奎) 을사당적에 들어 있다.ㆍ김희삼(金希參) 호는 칠봉(七峯), 부사를 지냈다.ㆍ홍계현(洪繼玄) 호는 대암(臺巖), 처사이다ㆍ여희림(呂希臨) 지평을 지냈다.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
노강영당(老江影堂) 숙종 신묘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유계서원(柳溪書院) 숙종 임오년에 세웠다. : 정곤수(鄭崑壽)ㆍ이순(李淳) 호는 야로(野老)이다.ㆍ박찬(朴澯) 호는 설봉(雪峯)이다.
청천서원(晴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김담수(金聃壽) 참봉을 지냈으며 호는 서계(西溪)이다.ㆍ박이장(朴而章)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용담(龍潭)이다.
신계향현사(新溪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이승(李承) 호는 청휘당(晴暉堂), 별제(別提)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경오년에 세웠다. : 송사이(宋師頤) 호는 신연(新淵), 참봉을 지냈다.ㆍ이홍량(李弘量) 호는 육일헌(六一軒), 참봉을 지냈다.ㆍ이홍우(李弘宇) 호는 모재(茅齋), 현감을 지냈다.ㆍ이홍기(李弘器) 호는 용재(容齋), 현감을 지냈다.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 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이백년(李百年)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ㆍ이천년(李千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ㆍ이만년(李萬年) 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ㆍ이억년(李億年) 문과에 합격하였다.ㆍ이조년(李兆年) 위에 보라.ㆍ이인기(李麟起) 평양 부윤을 지냈다.ㆍ이승경(李承慶) 평장사를 지냈다.ㆍ이포(李褒) 문하시중을 지냈다.ㆍ이원구(李元具) 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ㆍ이인복(李仁復) 위에 보라.ㆍ이인임(李仁任) 출향(黜享)되었다.ㆍ이인민(李仁敏)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ㆍ이숭인(李崇仁) 앞에 있다.ㆍ이직(李稷) 태조조의 정승ㆍ이제(李濟) 태조조의 명신ㆍ이사후(李師厚) 한성윤(漢城尹)이다.ㆍ이육(李稢) 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ㆍ이광적(李光廸) 공조 판서를 지냈다.
덕봉충렬사(德峯忠烈祠) 경진년에 세웠다. : 박영서(朴永緖) 갑자년 이괄의 변에 들어 있다.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을사년에 세웠다. : 이사룡(李士龍) 성주 포수(星州砲手)인데,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칠 때 청 나라에 징발되어 가서 탄환을 빼고 공포를 세 번 쏘다가 발각되어 난작(亂斫) 살해되었다.
안의(安義) 용문서원(龍門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임훈(林薰) 명종조의 유일ㆍ임운(林芸) 호는 첨모당(瞻慕堂), 연은전(延恩殿) 참봉을 지냈다.ㆍ정온(鄭薀)
성천서원(星川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송준길(宋浚吉)ㆍ이숙(李䎘) 숙종조의 정승
역천사우(嶧川祠宇)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정유명(鄭惟明) 호는 역양(嶧陽), 진사이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초계(草溪), 온(蘊)의 아버지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다.ㆍ임득번(林得蕃) 호는 석천(石泉),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귀연사우(龜淵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신권(愼權) 호는 요수(樂水),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ㆍ성팽년(成彭年) 호는 석곡(石谷),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황암사우(黃巖祠宇)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 《임진록(壬辰錄)》에 들어 있다.ㆍ조종도(趙宗道) 위에 보라.ㆍ정용(鄭庸)ㆍ유개(劉盖) 두 의사(義士)의 사당은 따로 있다.
산청(山淸) 서계서원(西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오건(吳健) 선조조의 명신
영해(寧海) 단산서원(丹山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우탁(禹倬)ㆍ이곡(李穀)ㆍ이색(李穡)
인산서원(仁山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이휘일(李徽逸) 참봉
구봉정사(九峯精舍)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박의장(朴毅長) 자는 사강(士剛),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병사(兵使)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주를 탈환하였고 다섯 번 병사를 지내는 동안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 같았다.ㆍ박홍장(朴弘長) 의장(毅長)의 아우, 자는 사임(士任), 목사를 지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적에게 굽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라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기사년에 세웠는데, 충렬사라고도 한다. : 박종문(朴宗文) 도사를 지냈다.ㆍ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임진년에 세웠다. : 박선(朴璿) 호는 도와(陶窩), 교관을 지냈다.ㆍ권경(權璟) 호는 대은(臺隱),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
함양(咸陽) 남계서원(藍溪書院) 가정 임자년에 세웠으며 만력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ㆍ강익(姜翼) 호는 개암(介庵), 참봉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별사(別祠)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유호인(兪好仁) 성종조의 명신
당주서원(溏洲書院) 만력 신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되었다. : 노진(盧禛) 선조조의 명신
백연서원(栢淵書院) 기유년에 세웠으며 사액되었다. : 최치원(崔致遠) 자는 고운(孤雲),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ㆍ김종직(金宗直)
도곡향현사(道谷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조승숙(趙承肅) 호는 덕곡(德谷), 고려조에서 부여 감무(扶餘監務)를 지냈다.ㆍ정복주(鄭復周) 호는 죽당(竹堂), 고려조에서 전농사(典農事)를 지냈다.ㆍ노숙동(盧叔同) 호는 송재(松齋), 대사헌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이며, 옥계(玉溪)의 증조부이다.ㆍ노우붕(盧友朋) 호는 신고당(信古堂), 참봉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귀천 향현사(龜川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박맹지(朴孟智) 호는 춘당(春塘), 교리이다.ㆍ양관(梁灌) 호는 일로당(逸老堂), 동돈녕(同敦寧)을 지냈다.ㆍ강한(姜漢) 호는 금헌(琴軒), 현감을 지냈다.ㆍ표연말(表沿沫)ㆍ양희(梁喜) 호는 구졸재(九拙齋),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하맹보(河孟寶) 호는 우계(愚溪)이다.
영덕(盈德) 신안영당(新安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남강서원(南江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흥해(興海) 곡강서원(曲江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廸)ㆍ조경(趙絅)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 가정 을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장현광(張顯光)
도잠서원(道岑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도계향사(道溪鄕社)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박인로(朴仁老) 만호이다. 호는 무하옹(无何翁)이다.
입암서원(立巖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ㆍ정사진(鄭四震) 호는 수암(守庵), 세마(洗馬)를 지냈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유방선(柳方善)ㆍ곽순(郭珣)ㆍ이현보(李賢輔)ㆍ심지원(沈之源) 호는 만사(晩沙)이다.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 가정 신유년에 세웠고 천계 계해년에 사액하였다. : 설총(薛聰) 시호는 홍유후(弘儒侯)이다.ㆍ김유신(金庾信)ㆍ최치원(崔致遠)
옥산서원(玉山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숭렬사우(崇烈祠宇) 숙종 경진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최진립(崔震立) 임진란의 여러 장수[諸將]조에 들어 있다.
귀강사우(龜岡祠宇) 경오년에 세웠고 화상이 있다. : 이제현(李齊賢) 호는 익재(益齋), 자는 중사(仲思)이다. 고려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동강사우(東江祠宇)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손중돈(孫仲暾) 호는 우재(愚齋), 이조 판서를 지냈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
인산영당(仁山影堂) 기해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을사년에 조령(朝令)으로 중건하였다.
진주(晉州) 은열사(殷烈祠) 천희(天禧) 신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강민첨(姜民瞻) 병부 상서ㆍ추밀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은렬공(殷烈公)이다.
덕천서원(德川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만력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최영경(崔永慶) 《기축록(己丑錄)》에 있다.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 임진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김시민(金時敏)ㆍ양산숙(梁山璹) 이하는 동무(東廡)ㆍ김상건(金象乾)ㆍ김준민(金俊民) 거제(巨濟) 사람ㆍ강희열(姜希烈) 의병장이다.ㆍ조경형(曺慶亨) 진해(鎭海) 사람ㆍ최기필(崔琦弼) 판관을 지냈다.ㆍ유함(兪晗)ㆍ이욱(李郁)ㆍ강희복(姜希復) 의병장이다.ㆍ장윤현(張胤賢)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ㆍ박승남(朴承男) 판관을 지냈다.ㆍ하계선(河繼先)ㆍ최언량(崔彦亮)ㆍ고종후(高從厚) 이하는 서무(西廡)ㆍ이잠(李潛) 의병장이다.ㆍ이종인(李宗仁) 김해사람ㆍ성영달(成穎達) 우후(虞侯)이다.ㆍ장윤(張潤) 사천(泗川) 사람ㆍ윤사복(尹思復) 첨정(僉正)을 지냈다.ㆍ이인민(李仁民)ㆍ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義兵代將)이다.ㆍ정유경(鄭維敬) 주부(主簿)를 지냈다.ㆍ김태백(金太白) 수문장을 지냈다.ㆍ박안도(朴安道)ㆍ양제(梁齊) ○ 또 충민사(忠愍祠)가 있는데 김천일과 황진(黃進)과 최경회(崔慶會)와 장윤(張潤)만을 향사한다.
대각사우(大覺祠宇)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하항(河沆) 호는 각재(覺齋), 징사(徵士)다.ㆍ손천우(孫天佑) 처사이다.ㆍ김대명(金大鳴) 군수를 지냈다.ㆍ하응도(河應圖) 현령을 지냈다.ㆍ이정(李瀞) 목사를 지냈으며, 임진년에 왜를 친 공이 있다.ㆍ유종지(柳宗智) 처사이다.ㆍ하수일(河受一) 정랑(正郞)을 지냈다.
종천사우(宗川祠宇) 정사년에 세웠다. : 하홍탁(河弘度) 호는 겸재(謙齋), 진사이다.ㆍ하진(河溍) 호는 태계(台溪), 헌납을 지냈다.ㆍ하연(河演) 시호는 문효공(文孝公), 세종조의 정승
임천사우(臨川祠宇) 을유년에 세웠다. : 이준민(李俊民)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庵),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좌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효익공(孝翼公)이다.ㆍ강응태(姜應台) 수찬을 지냈다.ㆍ하증(河憕) 처사이다.ㆍ한몽삼(韓夢參)
신당서원(新塘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지서(趙之瑞)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었다.
정산향현사(鼎山鄕賢祠) 무인년에 세웠다. : 유백온(兪伯溫) 호는 정산(鼎山), 생원이다. : 정온(鄭蘊)ㆍ강숙경(姜叔卿)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하조(河潮) 벼슬은 지평(持平)ㆍ이제신(李濟臣) 처사ㆍ이담(李淡) 처사ㆍ하천주(河天澍) 처사ㆍ진극경(陳克敬) 처사ㆍ박민(朴敏) 승지에 증직되었다.
□□사우 신축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인계향현사(仁溪鄕賢祠) : 최탁 벼슬은 익찬(翊贊)
사천(泗天)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정(李禎) 호는 귀암(龜岩)이며, 자는 강이(剛而),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중종 때 괴과(魁科)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 김덕함(金德諴) 인조조의 명신
합천(陜川) 이연서원(伊淵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신천서원(新川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다. : 하연(河演)ㆍ하우명(河友明) 호는 연당(蓮塘)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효도로써 정문(旌門)이 세워졌다.ㆍ하혼(河渾) 찰방(察訪)ㆍ김유(金紐) 호는 박재(璞齋), 별제(別提)를 지냈다.
용연서원(龍淵書院) 경자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 박인(朴絪) 호는 무민당(无悶堂), 참봉이다.ㆍ박소(朴紹) 중종조의 명신(名臣)
명곡향현사(明谷鄕賢祠) 기미년에 세웠다. : 배일장(裴一長)
삼가(三嘉) 용암서원(龍巖書院) 만력(萬曆) 계묘년에 세우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
고암사우(古巖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노흠(盧欽) 호는 입재(立齋), 진사이다.ㆍ이흘(李屹) 호는 노파(蘆坡), 고려 때 세마(洗馬)를 지냈다.ㆍ임진무(林眞懋) 호는 임곡(林谷), 진사이다.
평천서원(平川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옥량(鄭玉良) 호는 경재(耕齋),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청백리(淸白吏)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의령(宜寧) 덕곡서원(德谷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창녕(昌寧) 관산서원(冠山書院) 갑오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연암향현사(燕巖鄕賢祠) 갑오년에 세웠다. : 이장곤(李長坤) 기묘(己卯)의 명현(名賢)ㆍ성안의(成安義) 호는 부용당(芙蓉堂), 승지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승언(李承彦) 벼슬은 참군(參軍),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물계(勿溪) 세덕사(世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성송국(成松國) 고려 시중(侍中)이다.ㆍ성삼문(成三問)ㆍ성제원(成悌元)ㆍ성담수(成聃壽) 호는 문두(文斗)이다.ㆍ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성운(成運)ㆍ성혼(成渾)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봉화(奉化)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萬曆) 갑진년에 세웠으며 사액(賜額)하였다. : 이황ㆍ조목(趙穆)
문계리사(文溪里社) 갑자년에 세웠다. : 금휘(琴徽) 벼슬은 사온령(司醞令)이다.ㆍ금원정(琴元貞) 호는 농수(聾叟), 진사(進士)이다.ㆍ유종개(柳宗介) 벼슬은 학유(學諭)를 지냈고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ㆍ금축(琴軸) 호는 남계(南溪), 참봉이다.
반천리사(盤泉里社) 병진년에 세웠다. : 김중청(金中淸) 호는 구전(苟全), 승지를 지냈다.
현풍(玄風)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 ○ 서원 곁에 따로 사당이 있다.ㆍ곽승화(郭承華) 진사(進士)ㆍ원개(元凱) 참봉(參奉)ㆍ배신(裴紳) 호는 낙천(洛川), 자는 경여(景餘), 교관(敎官)을 지냈다.ㆍ곽율(郭) 호는 예곡(禮谷), 생원(生員)이다.
예연서원(禮淵書院) 숙종 갑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ㆍ곽재우(郭再佑)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
송담사우(松潭祠宇)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박성(朴惺) 호는 대암(大庵), 부사(府使)를 지냈다.
청백사(淸白祠)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곽안방(郭安邦) 군수(郡守)ㆍ곽지운(郭之雲) 호는 연일당(燕日堂), 호조 좌랑을 지냈다.
풍기(豐基) 욱양서원(郁陽書院) 현종 임인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우곡서원(愚谷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유운룡(柳雲龍) 호는 겸암(謙巖), 목사(牧使)를 지냈다.ㆍ황섬(黃暹) 호는 식암(息庵), 대사헌을 지냈다.ㆍ이준(李埈) 호는 창석(蒼石), 부제학(副提學)이다.ㆍ김광엽(金光曄) 호는 죽일(竹日), 응교(應敎)를 지냈다.
예천(醴泉) 정산서원(鼎山書院) 만력(萬曆) 정축년에 세우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봉산서원(鳳山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권오복(權五福)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무인년에 세웠다. : 조용(趙庸) 호는 송정(松亭),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윤상(尹祥)ㆍ권오복(權五福)ㆍ정총(鄭塚)
고령(高靈) 도암서원(道巖書院) 병오년에 세웠다. : 김면(金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이기춘(李起春) 호는 옥산(玉山)이며 처사(處士)이다.
문연서원(文淵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박윤(朴潤) 호는 죽연(竹淵)이다.ㆍ박택(朴澤) 호는 요락당(樂樂堂), 처사이다.ㆍ윤규(尹奎) 호는 월오(月塢), 처사이다.ㆍ박정번(朴廷璠) 호는 학암(鶴巖),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최여계(崔汝契) 호는 매헌(梅軒)이며, 처사이다.
운천서원(雲川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영연사(靈淵祠) 신묘년에 세웠다. : 신덕린(申德麟) 호는 순은(醇隱), 대제학을 지냈다.ㆍ박은(朴誾)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정사현(鄭師賢) 호는 월담(月潭), 처사(處士)이다.
매림사(梅林祠) 정해년에 세웠다. : 정수강(鄭壽崗) 생원(生員)ㆍ오선기(吳善基) 호는 한계(寒溪), 처사이다.
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 만력(萬曆) 병오년에 세웠고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유성룡(柳成龍)ㆍ정경세(鄭經世)
옥성서원(玉城書院) 숭정(崇禎) 임신년에 세웠다. : 김득배(金得培) 호는 난계(蘭溪), 고려 상락군(上洛君)이다.ㆍ신잠(申潛) 기묘년의 명현(名賢)ㆍ김범(金範) 명종 때의 유일(遺逸)이다.ㆍ이전(李琠) 호는 월간(月澗)이며 현감을 지냈다.ㆍ이준(李埈) 전(琠)의 아우이다. 앞에 있다.
근암서원(近嵒書院) 을사년에 세웠다. : 홍언충(洪彦忠)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이덕형(李德馨)ㆍ김홍민(金弘敏) 호는 사담(沙潭), 전한(典翰)을 지냈다. 범(範)의 아들이며 승지에 증직되었다.ㆍ홍여하(洪汝河) 호는 목재(木齋),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고종후(高從厚)의 외손이다.
속수서원(涑水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다. : 신우(申佑) 안렴사(按廉使)이다.ㆍ손중돈(孫仲暾) 좌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ㆍ김우굉(金宇宏) 호는 개암(開巖), 부제학을 지냈다.ㆍ조정(趙靖) 자(字)는 안중(安仲), 호는 금간(黔澗),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백옥동영당(白玉洞影堂) 임진년의 병화(兵火)에 불타고 그 뒤 을해년에 중수했다. : 황희(黃喜)ㆍ김식(金湜) 호는 사서(沙西), 이조 참판을 지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ㆍ김충(金冲) 호는 서대(西臺)이다.ㆍ고인계(高仁繼) 호는 월봉(月峯), 벼슬은 사예(司藝)이다.ㆍ송량(宋亮) 호는 우곡(愚谷)이다.
봉산서원(鳳山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다. : 노수신(盧守愼)ㆍ심희수(沈喜壽) 선조 때의 정승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연(連)의 조카이며 사부(師傅)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흥암서원(興巖書院) 임오년에 세우고 을유년에 어필(御筆)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俊吉)
충렬사(忠烈祠) 기축년에 세웠다. : 권길(權吉) 상주(尙州)의 판관(判官)이다ㆍ김종무(金宗武) 찰방(察訪)ㆍ정기용(鄭起龍)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박걸(朴傑) 호장(戶長)을 지냈고, 임진년에 권길과 함께 죽었다. 따로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한다.
연악서원(淵岳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박언성(朴彦誠) 호는 낙지정(樂志亭),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ㆍ김언건(金彦健) 호는 운정(芸亭), 감찰에 증직되었다.ㆍ강응철(康應哲) 호는 남계(南溪), 찰방이다.
화동서원(化東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운계서원(雲溪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신석번(申碩蕃) 호는 백원(白原), 장령(掌令)을 지냈다.
안동(安東) 호계서원(虎溪書院) 만력(萬曆) 병자년에 세우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주계서원(周溪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우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구봉령(具鳳齡) 호는 백담(栢潭),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권춘란(權春蘭)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이다. 사간을 지냈으며, 퇴계(退溪)와 백담(栢潭)의 문인(門人)이다.
삼계서원(三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벌(權撥) 명종 때의 명신(名臣)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유성룡(柳成龍)ㆍ유진(柳) 성룡(成龍)의 아들이다. 호는 수암(修巖), 참판에 증직되었고 추향(追享)되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 우탁(禹倬)
청성서원(靑城書院) : 권호문(權好文) 호는 송암(松巖), 처사(處士)이다.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김방경(金方慶)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이다.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 참판을 지냈다.ㆍ김구용(金九容) 호는 척약재(惕若齋), 전판교(典判校)를 지냈다.ㆍ김양진(金揚震) 호는 허백당(虛白堂), 참판을 지냈다.
경광서원(鏡光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다. : 배상지(裴尙志) 호는 백죽당(栢竹堂), 고려 사복정(司僕正)이다.ㆍ이종준(李宗準)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권우(權宇) 호는 송소(松巢), 이계정사(伊溪精舍)로 옮겨져 독향(獨享)된다.ㆍ장흥효(張興孝) 호는 경당(敬堂), 추향(追享)되었다.
노림서원(魯林書院) 효종 계사년에 세웠다. : 남치리(南致利) 호는 비지(賁趾), 처사이다.
도연서원(道淵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
사빈서원(泗濱書院) 을축년에 세웠다. : 김진(金璡) 호는 청계(靑溪),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성일(誠一)의 아버지이다.ㆍ김극일(金克一) 호는 약봉(藥峯), 사성(司成)을 지냈고, 성일(誠一)의 형이다.ㆍ김수일(金守一) 호는 귀봉(龜峯)이다.ㆍ김명일(金明一) 호는 운암(雲巖), 생원이다.ㆍ김성일(金誠一)ㆍ김부일(金復一) 호는 남악(南岳), 사성을 지냈으며 성일의 아우이다.
덕봉서원(德峯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용(金涌) 호는 운천(雲川), 병조 참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 묵계정사(默溪精舍)로 이봉(移奉)하였다.
묵계정사(默溪精舍) 병자년에 세웠다. : 옥고(玉沽) 호는 응계(凝溪), 장령(掌令)이다.ㆍ김계행(金係行) 호는 보백당(寶白堂),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ㆍ김용
이계정사(伊溪精舍) : 권우(權宇)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옮겨 모셨다.
백록리사(栢麓里社)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종준(李宗準)ㆍ이홍준(李弘準) 호는 눌재(訥齋), 진사이다.ㆍ정유일(鄭惟一) 호는 문봉(文峯)이며 대간(大諫)을 지냈다.ㆍ홍준형(洪俊亨) 호는 매헌(梅軒), 참봉이다.ㆍ김성구(金聲久)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추향(追享)되었다.ㆍ권두인(權斗寅) 정랑(正郞)을 지냈다. 추향되었다.
대구(大丘) 연경서원(硏經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정구(鄭逑)ㆍ정경세(鄭經世)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기묘년에 세웠다. : 김경창(金慶昌) 호는 계동(溪東), 지평(持平)을 지냈다.ㆍ이숙량(李叔樑) 호는 매암(梅庵),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현보(賢輔)의 아들이며,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이강서원(伊江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樂齋),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앞에 나왔다.
낙빈서원(洛濱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응부(兪應孚)
표충사(表忠祠) 경술년 때 세웠으며 현종 13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 고려 때의 정승ㆍ신원길(申元吉)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을묘년에 세웠으며 귀암서원(龜巖書院)이라고도 한다. : 서침(徐沉) 호는 귀계(龜溪), 제처사(制處使)로서 환상(還上)의 모곡(耗穀)을 감면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은공을 갚았다.ㆍ서거정(徐居正)ㆍ서성(徐渻)
상덕사(尙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숙(李䎘)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소생시켰으므로 도내 인심이 그에게 쏠렸다.
황청향현사(黃淸鄕賢祠) 갑술년에 세웠다. : 손처눌(孫處訥) 호는 모재(慕齋)이다.
백원향현사(百源鄕賢祠) 임신년에 세웠다. : 서시립(徐時立) 호는 전귀당(全歸堂), 참봉을 지냈으며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다. 효자이다.
남강향현사(南崗鄕賢祠) 갑술년 봄에 세웠다. : 박수춘(朴壽春) 호는 국담(菊潭), 임진왜란때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순절(殉節)하였다.
사양서원(泗陽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하동(河東) 영계서원(永溪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정여창(鄭汝昌)ㆍ김성일(金誠一)
청하(淸河) 학산서원(鶴山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거제(巨濟) 반곡서원(盤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김진규(金鎭圭) 호는 죽천(竹泉),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창집(金昌集)
김산(金山) 경렴서원(景濂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종직(金宗直)ㆍ최선문(崔善門) 공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약동(李約東)ㆍ조위(曺偉)ㆍ김시창(金始昌) 앞에 나왔다.
진보(眞寶) 봉람서원(鳳覽書院) 만력(萬曆)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김해(金海) 신산서원(新山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는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신계성(申季誠)
예암향현사(禮巖鄕賢祠) 무자년에 세웠다. : 조이추(曺爾樞)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창원(昌原) 회원서원(檜原書院)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허목(許穆)
운암향현사(雲巖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박신윤(朴身潤) 호는 우곡(愚谷)이다.
의성(義城) 빙계서원(氷溪書院) 가정(嘉靖) 정사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학산충렬사(鶴山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진민사(鎭民詞) 정덕(正德) 정축년에 세웠다. : 김용비(金龍庇) 고려조의 태자첨사(太子詹事)이다.
장대서원(藏待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김광수(金光粹) 호는 송은(松隱), 진사이다.ㆍ이민성(李民宬) 호는 경정(敬亭), 승지를 지냈다.ㆍ신원록(申元祿) 호는 매당(梅堂)이다.ㆍ신지제(申之悌)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峯), 승지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아주(鵝州)요, 의성(義城)에 살았다.
충렬사(忠烈祠) : 김홍술(金洪術) 고려조의 장군(將軍)이다.
청송(靑松) 병암서원(屛巖書院)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
송학서원(松鶴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문경(聞慶) 소양향현사(瀟陽鄕賢祠) 숙종 계사년에 세웠다. : 김낙춘(金樂春) 호는 인백당(忍百堂)이다.ㆍ정언신(鄭彦信) 선조 때의 정승이다.ㆍ심대부(沈大孚) 호는 가은(嘉隱), 헌납(獻納)을 지냈으며 추향(追享)되었다.ㆍ이심(李襑) 호는 색은(穡隱), 찬성(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한천향현사(寒泉鄕賢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안귀손(安貴孫)ㆍ신숙빈(申叔彬) 처사(處士)이다. 개(槩)의 손자이다.ㆍ성만징(成晩徵) 호는 추담(秋潭), 교관(敎官)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고성(固城) 갈천서원(葛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이암(李嵒)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ㆍ노필(盧㻶)ㆍ어득강(魚得江)ㆍ조사석(趙師錫) 숙종 때의 정승
충렬사(忠烈祠) 만력(萬曆) 갑인년에 세웠으며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유월사(柳月祠) 기축년에 세웠다. : 심광세(沈光世) 호는 휴옹(休翁),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비안(比安) 귀천서원(龜川書院) 숙종 기미년에 세웠다. : 박서생(朴瑞生) 호는 율정(栗亭), 대사헌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우(李瑀)


전라도(全羅道)
임실(任實) 구고사우(九臯祠宇) 경자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박번(朴蕃) 호는 인덕정(仁德亭), 벼슬은 교수(敎授)이다.ㆍ박훈(朴薰) 호는 수심정(收心亭), 진사이다.ㆍ홍붕(洪鵬) 호는 경재(敬齋), 벼슬은 첨정(僉正)이다. 추향되었다.ㆍ이흥순(李興淳) 호는 운암(雲巖),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조평(趙平) 호는 운학(雲壑), 벼슬은 세마(洗馬)이다.
부안(扶安) 도동서원(道洞書院) 가정(嘉靖) 갑오년에 세웠다. : 김구(金坵) 고려 평장사(平章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김여맹(金汝孟) 구(坵)의 아들이며 문한학사(文翰學士)이다.ㆍ최수손(崔秀孫) 호는 고궁당(固窮堂), 진사이다.ㆍ성중엄(成重淹) 무오화적(戊午禍籍)ㆍ김석홍(金錫弘) 호는 옹천(瓮泉), 군수(郡守)를 지냈다.ㆍ홍익한(洪翼漢)ㆍ최필성(崔弼成) 수손(秀孫)의 아들이다.ㆍ김계(金啓) 호는 설강(雪江), 참판을 지냈다.
파산서원(巴山書院) 계유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이름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다. : 유형원(柳馨遠) 호는 반계(磻溪)이다.ㆍ유문원(柳文遠) 호는 삼우당(三友堂), 진사이다.ㆍ김서경(金瑞慶) 호는 담계(澹溪)이다.
유천서원(柳川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허진동(許震童) 호는 동상(東湘), 판관(判官)을 지냈다.ㆍ김택삼(金宅三) 호는 농암(礱岩),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송세정(宋世貞) 호는 도봉(道峯), 진사이다.ㆍ이승간(李承幹) 호는 석호(石湖)이다.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만력(萬曆) 계축년에 세웠다.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유희춘(柳希春) 을사년의 명신(名臣)이다.
귀산서원(龜山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순(宋純)ㆍ송정순(宋廷筍) 호는 물염(勿染),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ㆍ김언욱(金彦勗) 호는 서석(瑞石),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ㆍ김응회(金應會)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ㆍ이안눌(李安訥)ㆍ나무춘(羅茂春) 호는 구봉(九峯),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송희경(宋希璟) 호는 노송(老松)이며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이다.ㆍ송징(宋徵) 호는 율옹(栗翁), 진사이다.ㆍ김대기(金大器) 호는 만덕(晩德), 처사이다.
익산(益山) 남촌서원(南村書院) 천계(天啓) 계해년에 세웠다. : 이공수(李公遂) 호는 남촌(南村)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고려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소세량(蘇世良) 호는 곤암(困庵), 대사간을 지냈다.ㆍ소세양(蘇世讓)ㆍ이약해(李若海) 명종조에 들어 있다.ㆍ소동도(蘇東道) 호는 면와(眠窩), 감사를 지냈다.ㆍ소영복(蘇永福) 호는 발영당(發永堂), 진사이다.ㆍ소광진(蘇光震) 호는 후천(后泉), 벼슬은 교리(校理)다.
전주(全州) 화산서원(華山書院) 만력(萬曆)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ㆍ송인수(松麟壽)
서산사우(西山祠宇) 인조 병술년에 세웠다. : 최양(崔瀁) 호는 만육(晩六), 대제학을 지냈다.ㆍ최덕지(崔德之)ㆍ송영구(宋英耈)ㆍ이계맹(李繼孟)ㆍ이흥발(李興浡)ㆍ이기발(李起浡) 호는 서귀(西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인봉사우(麟峯祠宇)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다. : 최명룡(崔命龍) 호는 석계(石溪), 진사이다.ㆍ김동준(金東準) 호는 봉곡(鳳谷), 감찰을 지냈다.
학봉사우(鶴峯祠宇)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이정란(李廷鸞)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ㆍ신중경(申重慶) 호는 금서당(琴書堂)이다.ㆍ이상진(李尙眞) 숙종 때의 정승이다.
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정렬사(旌烈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숙(梁山璹)ㆍ임회(林檜)
월정서원(月井書院) 경자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
반계서원(潘溪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ㆍ박소(朴紹)ㆍ박세채(朴世采)ㆍ박태보(朴泰輔)
미천서원(眉泉書院) 숙종 임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許穆)
죽봉사우(竹峯祠宇) 갑진년에 세웠다. : 유준(柳浚) 호는 사교당(四矯堂), 벼슬은 판관(判官)이다.ㆍ유상운(柳尙運) 숙종 때의 정승이다.
송재사우(松齋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나세찬(羅世纘)ㆍ임형수(林亨秀)
창계서원(滄溪書院) 경인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설재서원(雪齋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가신(鄭可臣) 호는 설재(雪齋), 벼슬은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ㆍ정식(鄭軾)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가신(可臣)의 5대손이다.ㆍ신장(申檣) 호는 암헌(巖軒)이며 숙주(叔舟)의 아버지이다.
영광사우(榮光祠宇)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이해(李懈) 호는 모산(茅山), 진사이다.ㆍ이영우(李永祐) 호는 야은(野隱), 진사이다.ㆍ이유경(李有慶) 호는 오풍(五楓), 사부(師傅)를 지냈고 정랑(正郞)에 증직되었다.
서하사우(西河祠宇)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영당(□□影堂) : 오자치(吳自治) 참판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장성(長城) 필암서원(筆菴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인후(金麟厚) 인종 때의 명신(名臣)
모암서원(慕巖書院) 전조(前朝) 때 세웠는데 인조 무자년에 중수(重修)하였다. : 서능(徐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절의(節義)와 효도가 지극하였다.ㆍ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다. 앞에 있다.ㆍ조정로(趙廷老) 영규(英圭)의 아들인데 별검(別檢)에 증직되었다.ㆍ최학령(崔鶴齡) 호는 율리(栗里), 진사이다.ㆍ정운룡(鄭雲龍) 호는 하곡(霞谷),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봉암서원(鳳巖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변이중(邊以中) 호는 망암(望庵), 벼슬은 종정(宗正)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변경윤(邊慶胤) 호는 자하(紫霞),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추산서원(秋山書院) 을유년에 세웠다. : 기건(奇虔)ㆍ기효간(奇孝諫)ㆍ기정익(奇挺翼) 호는 송암(松巖), 참봉이다.
□□영당 임인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의성군(義城君)을 봉했고 시호는 양효공(良孝公)이며, 호는 맹암(孟巖)이다.
학림서원(鶴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ㆍ박희중(朴熙中) 호는 위남(葦南),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다.ㆍ김은(金穩) 호는 학천(鶴川),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다.ㆍ김응두(金應斗) 호는 서천(逝川), 응교(應敎)를 지냈다.ㆍ박준철(朴濬哲) 호는 기양(岐陽), 진사이다.
영광(靈光) 수강서원(壽崗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송흠(宋欽)ㆍ이장영(李長榮) 호는 죽곡(竹谷), 대사간을 지냈다.
용암사우(龍巖祠宇) 임술년에 세웠다. : 윤황(尹煌)ㆍ윤선거(尹宣擧)
장천사우(長川祠宇) 임진년에 세웠다. : 심우신(沈友信)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하였다.ㆍ이제형(李齊衡) 호는 취수헌(醉睡軒), 군수를 지냈다.ㆍ이단석(李端錫) 호는 쌍호(雙壺), 문과 병사(文科兵使)를 지냈다.
용계사우(龍溪祠宇) 임자년에 세웠다. : 강항(姜沆) 임진록(壬辰錄)에 있다.ㆍ윤순거(尹舜擧)
무장영당(畝長影堂) 태종이 화상(畫像)을 내렸다. : 이천우(李天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산사우(栢山祠宇) 경종 계묘년에 세웠다. : 이세필(李世弼)
백산영당(栢山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이제현(李齊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峯書院)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으며 효종 을미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
포충사(褒忠祠) 만력 신축년에 세웠으며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ㆍ유팽로(柳彭老)ㆍ안영(安瑛)
의열사(義烈祠) 만력 갑진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옥(朴光玉) 자는 중수(重粹), 호는 회재(懷齋)이다. 지평(持平)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ㆍ김덕령(金德齡)ㆍ오두인(吳斗寅)
천동사우(泉洞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
경렬사우(景烈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정지(鄭地) 삼도절제사(三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시호는 경렬공(景烈公)이다.ㆍ정충신(鄭忠信)ㆍ김상의(金尙義) 귀성 부사(龜城府使)이다.
운암서원(雲巖書院) 병진년에 세웠다. : 송제민(宋濟民) 호는 해광(海狂), 처사이다.ㆍ권운(權韗)ㆍ송타(宋柁) 호는 화암(禾庵), 진사이다.
태인(泰仁) 남고서원(南皐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李恒)ㆍ김천일(金千鎰)
무성서원(武城書院) 만력 을묘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최치원(崔致遠)ㆍ신잠(申潛)ㆍ정극인(丁克仁) 호는 불우헌(不憂軒), 정언(正言)을 지냈다.ㆍ송세림(宋世琳) 호는 눌암(訥庵), 예조 정랑을 지냈다.ㆍ정언충(鄭彦忠) 호는 묵재(默齋), 참봉을 지냈다.ㆍ김약묵(金若默) 호는 성재(誠齋), 양주(楊州) 목사를 지냈다.ㆍ김관(金灌) 진사
모충사(慕忠祠) 병오년에 세웠다. : 백광언(白光彦)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덕린(金德麟)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다.
보성(寶城) 정충사(旌忠祠) 숙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안홍국(安弘國) 보성(寶城) 군수를 지냈으며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용산사우(龍山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전(朴光前) 호는 죽천(竹川), 벼슬은 익위(翊衛)를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문인이다.
대계서원(大溪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안방준(安邦俊)
양산사(梁山祠) 신묘년에 세웠다. : 염세경(廉世慶) 효자(孝子)이다.
무장(茂長) 충현사(忠賢祠) 만력 무신년에 세웠으며 광해군 때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ㆍ유희춘(柳希春)
도암향현사(道巖鄕賢祠) 신미년에 세웠다. : 김질(金質) 호는 영모당(永慕堂), 진사이다.
죽산향현사(竹山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오익창(吳益昌) 호는 사호(沙湖), 공조 정랑을 지냈다.
순천(順天) 옥천서원(玉川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웠고, 무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정충사(旌忠祠) 계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장윤(張潤)
충민사(忠愍祠)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祺)ㆍ안홍국(安弘國)
지봉서원(芝峯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이수광(李晬光)
겸천서원(謙川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조유(趙瑜) 호는 처곡(處谷), 고려조의 절신(節臣)인데, 태조조(太祖朝)에 들었다.ㆍ조숭문(趙崇文) 유(瑜)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화를 입었다. 병사(兵使)를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조철산(趙哲山) 숭문(崇文)의 아들이요, 성승(成勝)의 사위다. 육신(六臣)의 변에 함께 화(禍)를 입었다.
청사사(靑莎祠) : 정소(鄭沼) 호는 청사(靑莎), 진사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
향현사(鄕賢祠) 임진년에 세웠다. : 남명한(南溟翰) 호는 취은(醉隱), 주부(主簿)에 증직되었다.ㆍ남두건(南斗健) 호는 경재(敬齋)ㆍ이계맹(李繼孟)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ㆍ이순인(李純仁) 호는 고담(孤潭), 승지를 지냈다.
김제(金堤) 용암서원(龍巖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조간(趙簡) 호는 열헌(悅軒),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ㆍ이계맹(李繼孟)ㆍ나안세(羅安世) 호는 달계(達溪), 교리를 지냈다.ㆍ윤추(尹推) 호는 농은(農隱), 장령을 지냈다.ㆍ이세필(李世弼)ㆍ나응삼(羅應參) 호는 구산(龜山), 처사이다.
백석사우(白石祠宇) 계사년에 세웠다. : 유읍(柳揖) 호는 백석(白石), 벼슬은 자의(諮議)를 지냈으며 지평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임파(臨陂) 봉암서원(鳳岩書院) 경오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 앞에 있다.ㆍ김구(金絿)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산두(崔山斗)ㆍ정구(鄭逑)ㆍ임억령(林億齡)ㆍ안방준(安邦俊)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김신(金侁) 중국에 가서 참정(參政)을 지냈다.ㆍ윤택(尹澤) 호는 율정(栗亭), 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고향인 금주(錦州)에 돌아가 죽었다.ㆍ길재(吉再)ㆍ김정(金淨)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
종용사(從容祠)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고인후(高因厚)ㆍ변응정(邊應井)ㆍ안영(安瑛)ㆍ유팽로(柳彭老)ㆍ이광륜(李光輪)ㆍ조택기(趙宅基)ㆍ한순(韓楯)ㆍ승 영규(僧靈圭)
향현사(鄕賢祠) : 한교(韓皦)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유택(李惟澤) 호는 송곡(松谷), 현감을 지냈다.
반계서원(磻溪書院) : 이유태(李惟泰) 용강서원(龍江書院) :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유계(兪棨) 산천사(山泉祠) :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ㆍ윤추(尹推) 부이영당(富移影堂) : 길재(吉再)의 네 군데 서원(四院)은 모두 영종 신유년에 철폐(撤廢)하였다.
무안(務安) 송림서원(松林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권(金權)ㆍ유계(兪棨)
녹동서원(鹿洞書院) 숭정 경오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최덕지(崔德之)ㆍ최충성(崔忠成) 덕지(德之)의 손자이다. 호는 산당(山堂), 진사이다.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
죽정사우(竹亭祠宇) 신유년에 세웠다. : 박성건(朴成乾) 호는 오한(五恨), 현감을 지냈다.ㆍ박권(朴權) 호는 고광(孤狂), 벼슬은 정언이다.ㆍ박규정(朴奎精) 호는 수옹(壽翁), 생원이다.ㆍ이만성(李晩成)
서하사(西河祠) 정사년에 세웠다. : 조행립(曺行立)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 숭정 신미년에 세웠으며 정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신호(申浩)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하였다. 시호는 무장공(武壯公)이다.ㆍ김준(金浚) 목사를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 정묘록에 들어 있다.
도계서원(道溪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이희맹(李希孟)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안공(文安公)이다.ㆍ김재(金齋) 호는 오봉(鰲峯), 장령을 지냈다.ㆍ최안(崔安) 호는 모암(慕庵), 직장(直長)을 지냈다.ㆍ김지수(金地粹) 호는 태천(苔川), 승지를 지냈다.ㆍ김제안(金齊顔) 호는 죽헌재(竹軒齋), 민(閔)의 아우이다.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 임술년에 중건(重建)하였고, 사액하였다. : 이대원(李大源) 벼슬은 녹도 만호(鹿島萬戶)이다. 명조조 을묘왜변에 상세하다.ㆍ정운(鄭運)
정읍(井邑) 충렬사(忠烈祠) 경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고암서원(考巖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육방(六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연곡서원(淵谷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월천사우(月川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문익점(文益漸)ㆍ문위세(文緯世) 호는 풍암(楓巖), 목사이다.
양강사우(楊江祠宇) 경진년에 세웠다. : 김경추(金景秋) 호는 죽정(竹汀) 또는 송정(松亭)이다.
충렬사우(忠烈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한온(韓薀)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명세(鄭名世) 호는 독곡(獨谷),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선세강(宣世綱) 호는 매곡(梅谷), 영장(營將)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죽천사우(竹川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위덕의(魏德毅) 호는 청계(聽溪), 병조 좌랑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감호영당(鑑湖影堂)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 : 전녹생(田祿生) 호는 야계(壄溪), 벼슬은 고려조의 사인(舍人)이다.ㆍ전유추(田有秋) 호는 송담(松潭)
남평(南平) 봉산서원(蓬山書院) 숭정 경인년에 세웠으며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백인걸(白仁傑)
풍산사우(楓山祠宇) 숙종 무오년에 세웠다. : 정준일(鄭遵一) 호는 향북당(向北堂), 참봉이다.ㆍ김만영(金萬英) 호는 남포(南浦), 벼슬은 세마(洗馬)이다.ㆍ임세정(任世鼎) 호는 일신재(日新齋),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ㆍ정익신(鄭翊臣) 호는 초심당(草心堂), 참봉이다.
용구사우(龍丘祠宇) 병술년에 세웠다. : 서봉령(徐鳳齡) 호는 용구(龍丘), 참봉이다.ㆍ조상우(趙相愚) 추향되었다.
능주(綾州) 죽수서원(竹樹書院) 융경(隆庚) 경오년에 세웠으며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ㆍ양팽손(梁彭孫)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
포충사우(褒忠祠宇) 만력 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경회(崔慶會)ㆍ조현(曺顯) 병사(兵使)에 증직되었다.ㆍ문홍헌(文弘獻) 진사인데 지평에 증직되었고 계사년에 전사(戰死)하였다.
도산사우(道山祠宇) 효종 병신년에 세웠다. : 안방준(安邦俊)
용담(龍潭) 삼천서원(三川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안자(顔子)ㆍ백정자(伯程子)ㆍ숙정자(叔程子)ㆍ주자(朱子)ㆍ제갈무후(諸葛武侯)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만력 정미년에 세웠다. : 신말주(申末舟) 호는 귀래공(歸來公), 형조 참의를 지냈다.ㆍ김정(金錚)ㆍ김인후(金麟厚)ㆍ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현계서원(玄谿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이능간(李凌幹)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ㆍ정염(丁焰) 호는 만헌(晩軒)이며 광주 목사이다.ㆍ변유(邊瑜) 호는 정묵재(靜默齋), 추향되었다.ㆍ정견(丁涀) 호는 육졸(六拙), 추향되었다.
요계서원(蓼溪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김화(金澕) 호는 재간당(在澗堂), 참봉이다.ㆍ이상형(李尙馨) 호는 천묵재(天默齋), 수찬을 지냈고 부제학에 증직되었다.ㆍ김지순(金之純) 호는 담암(澹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ㆍ김지백(金之白) 호는 용암(舂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고암서원(高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진극순(陳克純) 호는 환성당(喚醒堂), 처사이다.ㆍ황신귀(黃信龜) 호는 운계(雲溪), 벼슬은 도사(都事)이다.
영천서원(寧川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안처순(安處順) 호는 사재당(思齋堂), 판관을 지냈다.ㆍ정환(丁煥) 호는 회산(檜山), 벼슬은 도사이다.ㆍ정황(丁熿) 을사록(乙巳錄)에 들어 있다.ㆍ이대유(李大㕀) 호는 활계(活溪), 좌랑을 지냈다.
방산서원(方山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노진(盧禛)ㆍ윤효손(尹孝孫)ㆍ최행(崔荇) 호는 성만(星灣), 좌윤(左尹)을 지냈다.ㆍ이경석(李景奭) 인조 때의 정승
우룡서원(右龍書院) 만력 기묘년에 세웠고 사액되었다. : 노진
충렬사(忠烈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기원(鄭期遠)ㆍ이복남(李福男)ㆍ임현(任鉉)ㆍ김경로(金敬老)ㆍ신호(申灝)ㆍ이덕회(李德恢)ㆍ이원춘(李元春)ㆍ오흥업(吳興業) 추향되었다. 정유왜란 때에 순국했다. 칠충신사(七忠臣祠)라고도 한다.
정충사(旌忠祠)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 군수를 지냈으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ㆍ안영(安瑛)
용호영당(龍湖影堂) 영종 갑자년에 세웠다. : 송 여남전(宋呂藍田)ㆍ주자(朱子)
곡성(谷城) 덕양사우(德陽祠宇)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 선조 22년에 세웠고 숙종 21년에 사액하였다.
□□영당 정사년에 세웠다. : 안유(安裕)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장수(長水) 창계서원(滄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 세조 때의 정승ㆍ유호인(兪好仁)ㆍ장응두(張應斗) 호는 송탄(松灘), 생원이다.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김인후(金麟厚)ㆍ유팽로(柳彭老)ㆍ이흥발(李興浡)ㆍ신이강(辛二剛) 호는 청파(靑坡)이다.
용안(龍安) □□영당 : 이단하(李端夏)ㆍ이세필(李世弼)
운봉(雲峯) 용암서원(龍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박광옥(朴光玉)ㆍ황일호(黃一皓)ㆍ변사정(邊士貞) 호는 도탄(桃灘), 첨정(僉正)을 지냈다.ㆍ노형필(盧亨弼) 호는 운제(雲堤), 벼슬은 사부(師傅)이다.ㆍ서식(徐湜) 호는 명암(銘巖), 효자(孝子)이다.
창평(昌平) 송강서원(宋江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철(鄭澈)
절산사우(節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박이관(朴以寬) 호는 보옹(葆翁), 벼슬은 보덕(輔德)을 지냈다.ㆍ박이홍(朴以弘) 이관(以寬)의 아우이다. 호는 월영(月暎), 진사이다.
내동사우(內洞祠宇) 계해년에 세웠다. : 우유일(禹惟一) 호는 이우당(二友堂), 벼슬은 전적(典籍)이다.
죽림사우(竹林祠宇)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조수문(曺秀文) 호는 죽림(竹林), 진사이다.ㆍ조호(曺浩) 호는 운곡(雲谷), 수문(秀文)의 아들이다.ㆍ조부(曺溥) 호는 삼청당(三淸堂), 벼슬은 전적이다.
함평(咸平) 기산사우(箕山祠宇)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박정원(朴鼎元) 호는 동호(東湖), 벼슬은 도사다.ㆍ이후정(李后定) 호는 만안(晩安), 응교를 지냈고 기묘년에 절개를 지켰다.
월산사(月山祠) : 이순신(李舜臣)ㆍ이덕일(李德一)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추향되었다.
수산사우(水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증산사우(甑山祠宇) 숙종 임오년에 중건하였다. : 김덕생(金德生) 호는 증산(甑山), 용력(勇力)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벼슬은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태종의 잠저(潛邸) 때 몸바쳐 보호하였다. 뒤에 원통하게 죽었다. 세종 때에 증직되었다.
모평사우(牟平祠宇) : 이유인(李有仁) 호는 파우(破愚), 참봉이다.
금구(金溝) 귀성사우(龜城祠宇)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윤증(尹拯)
육송사우(六松祠宇) 현종 계묘년에 세웠다. : 김관(金瓘)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양공(恭讓公)이다.ㆍ김승서(金承緖) 호는 귀암(龜巖), 참봉이다.ㆍ송정기(宋廷耆) 호는 죽계(竹溪), 추향되었다.ㆍ김천서(金天瑞)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해남사우(海南祠宇) 경인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유형(柳珩)ㆍ이계년(李桂年)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유길(李有吉)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두 사람은 추향되었다.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경여(李敬輿)ㆍ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창효사(彰孝祠) 신해년에 세웠다. : 오준(吳浚) 직장(直長)에 증직되었다.
고산(高山) 화산서원(華山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광양(光陽) 향현사(鄕賢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최산두(崔山斗)
무주(茂朱) 주계영당(朱溪影堂)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죽계(竹溪) 향현사(鄕賢祠) 계사년에 세웠다. : 김신(金侁) 고려조의 참정(參政)이다.ㆍ장필무(張弼武)
진안(鎭安) 모혜사(慕惠祠) : 이우성(李羽成)ㆍ이현익(李顯益)
화순(和順) 추모영당(追慕影堂) 인조 무자년에 세웠다. : 홍명하(洪命夏)ㆍ홍우익(洪禹翊) 현감


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 오봉서원(五峯書院) 가정 병진년에 세웠다. : 공자 화상(孔子畫像)
송담서원(松潭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고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
향현사우(鄕賢祠宇) 순정 갑신년에 세웠다. : 최치원(崔致遠)ㆍ최응현(崔應賢) 호는 수헌(睡軒), 대사헌을 지냈다.ㆍ박수량(朴遂良) 기묘록에 들어 있다.ㆍ최운우(崔雲遇) 호는 도경(蹈景), 횡성(橫城) 현감을 지냈다.ㆍ최수(崔洙)ㆍ박공달(朴公達)ㆍ최수성(崔壽峸)
□□영당 정해년에 세웠다. : 오명준(吳命峻)
원주(原州) 충렬사(忠烈祠) 현종 무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원충갑(元冲甲) 호는 응양(鷹揚), 상호군(上護軍)이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ㆍ김제갑(金悌甲)ㆍ원호(元豪)
도천서원(陶川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허후(許厚)
칠봉서원(七峯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원천석(元天錫)ㆍ원호(元昊)ㆍ정종영(鄭宗榮)ㆍ한백겸(韓百謙) 호는 구암(久庵)
광암향현사(廣巖鄕賢祠) : 정시한(丁時翰) 벼슬은 진선(進善)이다.
□□영당(□□影堂) 병인년에 전교(傳敎)를 내려 세웠다. : 익안대군방의(益安大君芳毅)
춘천(春川)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이정형(李廷馨)ㆍ조경(趙絅)
도포서원(道浦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신숭겸(申崇謙)ㆍ신흠(申欽)ㆍ김경직(金敬直) 호는 우정(憂亭), 벼슬은 사간(司諫)이다.
운곡영당(雲谷影堂) 갑신년에 세웠다. : 김수증(金壽增) 호는 곡운(谷雲), 참판을 지냈다.ㆍ김창흡(金昌翕)
울진(蔚珍) 귀암서원(龜巖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김시습(金時習)
고산서원(孤山書院) 기미년에 세웠다. : 임유후(任有後) 호는 만휴(萬休), 병조 참판을 지냈다.ㆍ오도일(吳道一) 호는 서파(西坡), 반대당의 배척을 받아 본 고을 수령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향현사(鄕賢祠) 임자년에 세웠다. : 남사고(南師古)ㆍ주경안(朱景顔) 효자(孝子)이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몽양재(蒙養齋) 숙종 임진년에 비로소 향사하였다. : 전이석(田爾錫) 효자(孝子)ㆍ주필대(朱必大) 생원(生員)
귀장서당(龜藏書堂) : 전구원(田九畹) 생원
삼척(三陟) 부동사우(府東祠宇) 만력 기묘년에 세웠다. : 김효원(金孝元) 호는 성암(省庵)
용산서원(龍山書院) : 이세필(李世弼)
통천(通川) 휴산사우(休山祠宇) 기사년에 세웠다. 경덕사(景德祠) : 정구(鄭逑) 상렬사(尙烈祠)ㆍ최윤덕(崔潤德)
평해(平海) 명계서원(明溪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황응청(黃應淸)ㆍ황여일(黃汝一) 호는 해월(海月), 공조 참의를 지냈다.
향현사(鄕賢祠) 강희(康熙) 신해년에 세웠다. : 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명고리사(明皐里社) : 김담(金譚) 호는 탁계(卓溪)ㆍ장효갑(張孝甲) 호는 동명(東溟), 벼슬은 첨추(僉樞)이다.ㆍ장온(張薀) 호는 매헌(梅軒), 효자(孝子)이다.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 숙종 을축년에 세웠고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민충소사(愍忠小祠)ㆍ엄흥도(嚴興道)
평창(平昌) 둔계사우(遯溪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곽세익(郭世翼) 호는 둔계(遯溪), 벼슬은 사예(司藝)이다.
이천(伊川) 부서사우(府西祠宇) 을해년에 세웠다. : 박태보(朴泰輔)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을사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금화(金化) 충장사(忠壯祠) 병신년에 세웠다. : 원호(元豪)
충렬사(忠烈祠) 경인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홍명구(洪命耈)
고성(高城) □□사(□□祠) 경오년에 세웠다. : 조지겸(趙持謙)


황해도(黃海道)
송화(松禾) 도동서원(道東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안악(安岳) 취봉서원(鷲峯書院)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숭정(崇禎)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황주(黃州) 백록동서원(白麓洞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고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은율(殷栗) 율곡서원(栗谷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숙종 신묘년에 옮겨 세웠다. : 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
충효사우(忠孝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박훈(朴薰) 호는 장련(長連)이며 현감을 지냈다.
김천(金川) 도산서원(道山書院) 숙종 임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제현(李齊賢)ㆍ이종학(李種學)ㆍ조석윤(趙錫胤)
민충사(愍忠祠) 갑술년에 세웠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중로(李重老) 좌방어사(左防禦使)이다.ㆍ이성부(李聖符) 우방어사(右防禦使)이다.ㆍ박영신(朴榮臣) 풍천 부사(豐川府使)ㆍ이사주(李師朱) 이천 부사(伊川府使)ㆍ윤정준(尹廷俊) 옹진 현령(瓮津縣令)ㆍ권호원(權浩源) 훈국초관(訓局哨官)ㆍ장면(張緬) 훈국초관ㆍ방흡(方潝) 방어군관(防禦軍官). 갑자년 이괄(李适)의 변조에 상세하다.
평산(平山) 동양서원(東陽書院) 숭정 임오년에 세웠고 숙종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이색(李穡)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병자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고려 때 세웠는데 임진ㆍ정유년의 병화로 불에 탄 것을 병자년에 중건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고려 때 사람으로 시호는 무공공(武恭公)이며, 철상(鐵像)이 있다.ㆍ유금필(庾黔弼) 고려 때 사람이다. 시호는 충절공(忠節公)이며, 철상이 있다.
재령(載寧) 경현서원(景賢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이
수안(遂安) 용계서원(龍溪書院) 현종조 임인년에 세웠고 숙종조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한(漢) 나라 관녕(管寧)ㆍ이연송(李連松)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ㆍ강백년(姜栢年)
연안(延安) 비봉서원(飛鳳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경신년에 사액하다. : 주자(朱子)ㆍ최충(崔冲)ㆍ김굉필(金宏弼)ㆍ성혼(成渾)ㆍ이이(李珥)ㆍ박세채(朴世采)
현충사(顯忠祠) 숭정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이정암(李廷馣)ㆍ신각(申恪)ㆍ송덕윤(宋德潤) 첨사(僉使)ㆍ장응기(張應祺) 군수(郡守)ㆍ김대정(金大鼎) 부사(府使)ㆍ조광정(趙光庭) 생원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해주(海州)에 살았다.
문화(文化) 봉강서원(鳳崗書院) 갑신년에 세웠고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정계사원(程溪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 유관(柳寬) 세종 때의 정승이다.
충효사(忠孝祠) 신묘년에 세웠다. : 유언겸(兪彦謙) 효자(孝子)ㆍ홍진(洪禛) 현령을 지냈는데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다.
신천(信川) 정원서원(正院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고, 현종 신해년에 중건하였으며, 숙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해주(海州) 소현서원(紹賢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字)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청성묘(淸聖廟)는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문헌서원(文憲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최충(崔冲) 호는 성재(惺齋),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고려 태사(太師)이다. 자는 호연(浩然)이며, 해동부자(海東夫子)로 일컬어진다.ㆍ최유선(崔惟善) 충(冲)의 아들이다. 시호는 문화공(文和公)이며, 추향하였다.
충렬사(忠烈祠) 문헌서원 곁에 따로 세웠다. : 최영유(崔永裕)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고려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였을 때 해주 목사로서 인신(印神)을 못에 던지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통인(通引)과 통인의 개도 따라 죽었다.
장련(長連) 봉양서원(鳳陽書院) 숭정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박세채(朴世采)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 동서양사(東西兩祠)가 있는데 선조의 어필(御筆)로써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조헌(趙憲)ㆍ박세채(朴世采) 이상은 서사(西祠) 4위ㆍ안당(安瑭)ㆍ신응시(辛應時)ㆍ오억령(吳億齡)ㆍ김덕함(金德諴) 이상은 향현동사(鄕賢東祠) 4위
봉산(鳳山) 문정서원(文井書院)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계미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ㆍ강석기(姜碩期)
충렬사(忠烈祠)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김만수(金萬壽) 공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무과 출신으로 부사를 지냈다.ㆍ강찬(姜燦)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천수(金千壽) 형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백수(金百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구수(金九壽)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김광협(金光鋏)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옹(李蓊) 울진(蔚珍) 현감을 지냈다. 모두 임진 의병이다.
서흥(瑞興) 화곡서원(花谷書院) 병술년에 세웠다. : 김굉필(金宏弼)ㆍ이이(李珥)ㆍ김귤(金橘) 호는 검재(儉齋), 이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강령(康翎) 충렬사(忠烈祠) 인조 계미년에 세웠다. : 유응부(兪應孚)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ㆍ유빈(柳蘋) 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백현(白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ㆍ정린(鄭麟) 본 고을 현감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토산(兔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장연(長淵) 용암서원(龍巖書院) 선조 기축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ㆍ이이


평안도(平安道)
안주(安州) 청천서원(淸川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최윤덕(崔潤德)ㆍ이원익(李元翼)ㆍ김덕함(金德諴)
충민사(忠愍祠) 신유년에 세웠고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남이흥(南以興) 병사(兵使)ㆍ김준(金浚) 본 고을의 목사이다.ㆍ이상안(李尙安) 강계(江界)ㆍ김상의(金尙毅) 귀성(龜城)ㆍ박명룡(朴命龍) 벼슬은 우후(虞侯)이다.ㆍ이희건(李希建) 용천(龍川)ㆍ장돈(張暾) 죽천(竹川)ㆍ김양언(金良彦) 태천(泰川)ㆍ송덕영(宋德榮) 맹산(孟山)ㆍ김언수(金彦壽)ㆍ한덕문(韓德文)ㆍ송도남(宋圖南) 영유(永柔)ㆍ윤혜(尹惠) 박천(博川)ㆍ함응수(咸應秀)ㆍ양진국(楊晉國)ㆍ임충서(林忠恕) 이들은 정묘년에 순절(殉節)하였다.
강서(江西) 학동서원(鶴洞書院) 계해년에 세웠고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반(金泮)
강동(江東) 청계서원(淸溪書院) 숙종 신해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조호익(曺好益)ㆍ김육(金堉)
자산(慈山) 의열사(義烈祠) 신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최춘명(崔春命) 벼슬은 고려조에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다.ㆍ홍명구(洪命耈)ㆍ최경후(崔景候) 본 고을 부사이다.ㆍ김지저(金之佇) 판관
□생사(□生祠) 갑신년에 세웠다. : 이세재(李世載) 감사ㆍ정석빈(鄭碩賓) 부사ㆍ김의만(金義萬)ㆍ조익징(趙益徵) 부사
철산(鐵山) 쌍충사(雙忠祠)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원정(李元禎) 고려 때 철주(鐵州) 방어사(防禦使). 백마장군(白馬將軍)으로서 몽고난때 입절(立節)하였다.ㆍ이희적(李希勣) 판관으로 함께 죽었다.
충무사(忠武祠) 숙종 을해년에 세웠다. : 정봉수(鄭鳳壽)ㆍ김여기(金礪器)ㆍ정인수(鄭麟壽)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용강(龍岡) 오산서원(鰲山書院) 을미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김정국(金正國)
정주(定州) 봉명서원(鳳鳴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신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신안서원(新安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병신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 화상(朱子畵像)
순안(順安) 성산서원(星山書院) 숭정 정해년에 세웠으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한우신(韓禹臣) 호는 정안(靜安), 추향되었다. 벼슬은 내자정(內資正)이다.
강계(江界)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기유년에 세웠으며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성천(成川) 학령서원(鶴翎書院) 숭정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ㆍ정구(鄭逑)ㆍ박대덕(朴大德) 호는 합강(合江)
쌍충사(雙忠祠) 선조 기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의(鄭顗) 고려조의 중랑장(中郞將)이다.ㆍ최춘명(崔椿命) 고려조의 추밀부사(樞密副使)다.
창성(昌城) 충렬사(忠烈祠) 기해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평양(平壤) 충무사(忠武祠)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을지문덕(乙支文德)ㆍ김양언(金良彦)
충정서원(忠正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홍명구(洪命耈)
무열사(武烈祠) 제사조(諸祠條)에 상세하다.
용곡서원(龍谷書院) 효종 무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선우협(鮮于浹)
인현서원(仁賢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기자수용(箕子睟容)
벽동(碧潼) 구봉서원(九峯書院)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귀성(龜城) 정공사우(旌功祠宇) 계미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서(朴犀) 고려조의 병사(兵使)이다. 침공한 몽고병을 방어한 공으로 정원 대도호(定遠大都護)에 승진했다.ㆍ김경손(金慶孫) 분도장군(分道將軍)이다.
영변(寧邊) 약봉서원(藥峯書院) 숙종 무진년에 세웠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
선천(宣川) 주자서원(朱子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이(李珥)
충렬사(忠烈祠) : 김응하(金應河)ㆍ김만중(金萬重) 벼슬은 문형(文衡)이다.ㆍ박태보(朴泰輔)
충민사(忠愍祠) : 임경업(林慶業)
삼충사(三忠祠) 고려 목종 때에 거란(契丹)과 싸워 전사하였다. : 양규(楊規) 벽상공신(壁上功臣)이며, 서북도순검사(西北都巡檢使)이다.ㆍ김숙흥(金叔興) 벽상공신이며, 서북도지사(西北都指使)이다.ㆍ유백부(庾伯符) 통주부서(通州府署)
삭주(朔州) 금창서원(金昌書院) 정해년에 세웠다. : 김익호(金翼虎) 호는 만학재(晩學齋), 효행과 우애가 있고 학문이 깊었다.
곽산(郭山) □□서원 인조 기축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ㆍ홍경우(洪儆禹) 호는 월포(月浦), 벼슬은 봉상첨정(奉常僉正)이다.
태천(泰川) 둔암서원(遯庵書院) 무술년에 세웠다. : 선우협(鮮于浹)ㆍ김익호(金翼虎)
희천(熙川) 상현서원(象賢書院) 만력 병자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박천(博川) 지천사우(遲川祠宇) 정해년에 세웠다. : 최명길(崔鳴吉)
의주(義州) 읍내사우(邑內祠宇) 숙종 16년 경오에 세웠다. : 을파소(乙巴素) 고구려의 국상(國相)ㆍ김상헌(金尙憲)
백마산성사우(白馬山城祠宇) 숙종 35년 을축에 세웠다. : 강감찬(姜邯贊)ㆍ임경업(林慶業)
영유(永柔) 삼충사(三忠祠) 제사(諸祠)에 들어 있다.


함경도(咸鏡道)
함흥(咸興) 문회서원(文會書院) 가정 계해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문선왕(文宣王) 화상 사우(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는데 문회서원의 서쪽에 있다. : 이계손(李繼孫)ㆍ유강(兪絳) 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숙민공(肅敏公)이다.ㆍ이후백(李後白)ㆍ한준겸(韓浚謙)ㆍ이광하(李光夏) 감사ㆍ남구만(南九萬)ㆍ문덕교(文德敎) 호는 동호(東湖), 좌랑을 지냈고 행실이 올바름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아우 선교(善敎)가 왜병에게 살해되자 공은 의병을 수창(首倡)하였으나 자기가 지은 임진록엔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창의사(彰義祠)에 들지 못했다. 현종 정미년에 추향되었다. 영종 때에 도령(都令)에 증직되었다.
운전서원(雲田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ㆍ조헌(趙憲)ㆍ민정중(閔鼎重)
창의사(彰義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백응상(白應祥) 임진왜란 때에 묘파보(妙坡保) 권관(權管)으로 본부(本府) 판관에 승진되고 의사(義士)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ㆍ유응수(柳應秀) 삼수(三水)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아버지가 적에게 살해됨을 통분히 여겨 중위장(中衛將)으로서 창의(倡義)하여 원수를 갚았다. 선조가 명을 내리어 별장(別將)을 삼았는데 영남에서 왜를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다.ㆍ이유일(李惟一) 부사(府使)인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동위장(東衛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한인제(韓仁濟)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방원 만호(坊垣萬戶)로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북진(北鎭)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여섯 번 격파하였다.ㆍ박중립(朴仲立) 벼슬은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좌기장(左騎將)으로서 창의하였다.ㆍ이희록(李希祿) 벼슬은 첨정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유생(儒生)으로 의병을 일으켰다.ㆍ정해택(鄭海澤) 벼슬은 만호(萬戶)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길남(朴吉男)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의분심과 지략(智略)과 훌륭한 활솜씨로 의병을 일으켰다.ㆍ박응숭(朴應嵩) 벼슬은 만호이며 군기정중위장(軍器正中衛將)에 증직되었다. 정유년에 유응수(柳應秀)를 대신하여 별장(別將)이 되었다.ㆍ이사제(李思悌) 판관이며, 부정(副正)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나이 겨우 19세였으나 끝까지 충성을 다하였다.ㆍ한경상(韓敬商) 참봉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생원으로서 동위장(東衛將)이 되었고 임기응변과 지려(智慮)가 뛰어났다.ㆍ김응복(金應福) 직장(直長)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학식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격문을 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뒤에 문과에 올랐다.
영흥(永興) 흥현서원(興賢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계손(李繼孫)
길주(吉州) 명천서원(溟川書院) 병오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향현사(鄕賢祠) : 허유례(許惟禮) 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효장공(孝莊公)이며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적개공신(敵愾功臣)이다.ㆍ원충서(元忠恕) 참의에 증직되었다.ㆍ허진(許珍) 유례(惟禮)의 증손인데 도사(都事)에 증직되었다.ㆍ김국신(金國信) 금부도사에 증직되었다.ㆍ허수민(許秀敏)ㆍ허대성(許大成) 유례의 5대 손이다.ㆍ허성일(許誠一) 유례의 6대 손이다.
경성(鏡城) 창렬사우(彰烈祠宇)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 임진록에 들어 있다.ㆍ이붕수(李鵬壽) 지평에 증직되었다.ㆍ강문우(姜文佑)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ㆍ최배천(崔配天) 판관(判官)에 증직되었다.ㆍ지달원(池達源)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이희당(李希唐) 훈련부정(訓練副正)에 증직되었다.ㆍ이기수(李麒壽) 좌랑에 증직되었다.ㆍ박유일(朴惟一)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서수(徐遂) 좌랑에 증직되었다.ㆍ오경헌(吳慶獻)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
□□묘우(□□廟宇) 고려조에 육진(六鎭)을 개척한 공으로 사당을 세운 것이다. 부(府)의 서쪽 2리에 있다. :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 평장사(平章事)이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선조 16년에 창건하였다.
청덕당(淸德堂) 을사년에 세웠다. : 성하종(成夏宗) 병사(兵使)이다. 창흥군(昌興君)으로 봉해졌고 청백리(淸白吏)이다.
흥혜사우(興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다. : 이광하(李光夏) 판윤(判尹)으로서 선비 양성에 공을 세웠다.
회령(會寧) 현충사우(顯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ㆍ신세준(申世俊) 첨지(僉知)였는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최언영(崔彦英) 벼슬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이다ㆍ오윤적(吳允迪)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허관(許灌)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ㆍ정여경(鄭餘慶) 벼슬은 예빈봉사(禮賓奉事)이다.ㆍ윤립(尹岦) 벼슬은 예빈(禮賓)ㆍ이희백(李希白)ㆍ오준례(吳遵禮) 모두 수문장(守門將)이다.
□□사우(□□祠宇) 만력 병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ㆍ김시양(金時讓)
종성(鍾城) 종산서원(鍾山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기준(奇遵)ㆍ유희춘(柳希春)ㆍ정엽(鄭曄)ㆍ김상헌(金尙憲)ㆍ정홍익(鄭弘翼)ㆍ정온(鄭蘊)ㆍ조석윤(趙錫胤)ㆍ유계(兪棨)ㆍ민정중(閔鼎重)ㆍ남구만(南九萬) 두분(二公)이 추향되었다.
행영사우(行營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ㆍ김응하(金應河)
온성(穩城) 충곡서원(忠谷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기준(奇遵)ㆍ김덕함(金德諴)ㆍ유계(兪棨)
덕원(德源) 용진서원(龍津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창주영각(滄洲影閣) : 주자(朱子)의 화상(畫像)
문천(文川) 문포서원(文浦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
□□영당(□□影堂) : 공자의 화상(畫像)
단천(端川) 복천영당(福川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문선왕(文宣王)의 화상(畫像)
경원(慶源) 충렬사(忠烈祠) 임신년에 세웠다. : 김응하(金應河)ㆍ최진립(崔震立)
북청(北靑) 노덕서원(老德書院) 숭정 갑오년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李恒福)ㆍ김덕함(金德諴)ㆍ정홍익(鄭弘翼)ㆍ이상진(李尙眞)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
안변(安邊) 옥동서원(玉泂書院) 만력 무신년에 중건하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계손(李繼孫)ㆍ김상용(金尙容)ㆍ조석윤(趙錫胤)
삼현사(三賢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경승(李慶承) 호는 율도(栗島), 문과에 합격, 판관을 지냈다ㆍ이선승(李善承) 호는 미곡(薇谷), 감찰을 지냈다.ㆍ이지온(李之馧) 호는 빈교(貧郊), 참판을 지냈다.
정평(定平) 망덕서원(望德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김상헌(金尙憲)ㆍ조익(趙翼)ㆍ민정중(閔鼎重)
무산(茂山) □□사우(□□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주D-001]장수(藏修) :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후세에 서당이나 서원을 장수하는 장소라고 칭하였다.
[주D-002]소수서원(紹修書院) :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중국에서 시초의 서원인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계승[紹]하여 닦는다[修]는 뜻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하였다.
[주D-003]지명이 비록 같으나 :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있으면 주자(朱子)가 살았던 중국의 운곡을 따라 주자의 서원을 세웠었다.
[주D-004]태산(泰山)에 …… 하겠는가 : 노(魯) 나라의 진산(鎭山)인 태산에 노 나라의 임금이 아니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인데, 권신(權臣) 계씨(季氏)가 태산에 제사를 지내므로 공자가 태산의 산신(山神)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5]절현사(節顯祠) : 현절사(顯節祠)의 오기인듯 하다.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염재기(念齋記)

송욱(宋旭)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자다가 해가 떠올라서야 겨우 잠에서 깨었다. 누워서 들으니, 솔개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며, 수레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시끄러우며, 울 밑에서는 절구 소리가 나고 부엌에서는 그릇 씻는 소리가 나며, 늙은이의 부르는 소리와 어린애의 웃음소리, 남녀 종들의 꾸짖는 소리와 기침하는 소리 등 문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 없건만 유독 자신의 소리만은 들리지 않았다.
이에 몽롱한 가운데 중얼거리기를,
“집안 식구는 모두 다 있는데 나만 어찌하여 없는가?”
하며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고리와 바지는 다 횃대에 놓여 있고 갓은 벽에 걸려 있고 띠는 횃대 끝에 걸려 있으며, 책들은 책상 위에 놓여 있고, 거문고는 뉘어져 있고 가야금은 세워져 있으며, 거미줄은 들보에 얽혀 있고, 쇠파리는 창문에 붙어 있다. 무릇 방 안의 물건치고 하나도 없는 것이 없는데 유독 자기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일어서서 제가 자던 곳을 살펴보니 베개를 남쪽으로 하여 요가 깔려 있으며 이불은 그 속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송욱이 미쳐서 발가벗은 몸으로 집을 나갔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매우 슬퍼하고 불쌍히 여겼다. 한편으로 나무라기도 하고 한편으론 비웃기도 하다가, 마침내 의관(衣冠)을 안고서 그에게 찾아가 옷을 입혀 주려고 온 길을 다 찾아다녔으나 송욱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성(城) 동쪽에 살고 있는 소경에게 가서 점을 쳐 보니, 소경이 점을 치며 말하기를,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갓끈이 끊겨 염주가 흩어졌구나. 저 부엉이를 불러다가 헤아려 보게 하자꾸나.”
하고는 엽전을 던지자 동그란 것이 잘도 굴러가 문지방에 부딪쳐서야 멈추었다. 소경이 엽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축하하기를,
“주인은 여행을 나가고 나그네는 여의(旅衣)가 없구나.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이레가 지나면 돌아오리라. 이 점사(占辭)가 크게 길(吉)하니 마땅히 과거에 장원급제하리라.”
하였다. 송욱이 크게 기뻐하여 매양 과거가 열려 선비를 시험할 때면 반드시 유건(儒巾)을 쓰고 응시를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 시권(試券)에다 비점(批點)을 치고 나서 큰 글씨로 높은 등수를 매겨 놓았다. 그래서 한양(漢陽)의 속담에 반드시 이뤄질 수 없는 일을 두고 ‘송욱의 과거 보기〔宋旭應試〕’라고 말한다.
식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미치긴 미쳤으나 역시 선비답구나. 이러한 행동은 과거에 응시하면서도 과거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계우(季雨)는 성격이 소탈하여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목청을 높여 노래하면서 스스로 ‘주성(酒聖)’이라고 호를 지었다. 세상에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보면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지기나 한 듯 구역질을 하였다.
내가 그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하니, 계우가 수심에 잠겨 한동안 있다가,
“그대의 말이 옳소.”
하고는, 드디어 그 당(堂)의 이름을 ‘염재(念齋)’라 짓고 나에게 기(記)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송욱의 일을 써서 그를 권면하는 바이다. 저 송욱은 미치광이이기는 하지만 그 또한 스스로 노력한 자이다.

[주D-001]여의(旅衣) : 여행 도중 입을 옷, 즉 행장(行裝)을 말한다.
[주D-002]계우(季雨) :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연암집》 권5 여중관(與仲觀)에 백우(伯雨)의 동생으로 언급되어 있다.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종북소선집(鍾北小選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염재당기(念哉堂記)로 되어 있으며, 그와 함께 ‘계우’가 ‘숙응(叔凝)’으로 되어 있다. 숙응은 연암의 친구인 신광온(申光蘊)의 아우 신광직(申光直 : 1738 ~ 1794)의 자(字)로, 그의 호가 또한 염재(念齋)였다. 신광직은 젊은 시절 연암뿐만 아니라 홍대용(洪大容)과도 절친하여 담헌서(湛軒書)에도 ‘여신염재부증박연암지원(與申念齋賦贈朴燕巖趾源)’ 등 신광직과 관련된 시문이 몇 편 있다. 김영진의 「조선 후기의 明淸小品 수용과 小品文의 전개 양상」(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2003) 참고.
[주D-003]세상에 …… 하였다 : 공자는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며 몰래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둑에 비겨 비판하였고, 《論語 陽貨》 백이(伯夷)는 시골 사람과 서 있을 적에 그가 관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으면 뒤도 안 보고 가 버리면서 ‘마치 자기 몸이 더럽혀지기나 할 듯이 여겼다.〔若將浼焉〕’고 하며, 《孟子 公孫丑上》 오릉중자(於陵仲子)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거위 요리를 먹고 난 뒤 그 거위가 바로 형에게 선물로 들어온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나가서 구역질을 하였다.〔出而哇之〕’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주D-004]술에 …… 않겠는가 : 《서경(書經)》 다방(多方)에 “성인이라도 반성하지 않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이라도 반성할 줄 알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고 하였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을 강조한 말이다. 본래 《서경》 다방에서의 ‘광인’은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송욱(宋旭)의 경우와 연계되어 쓰였으므로 ‘미치광이’로 새겼다.
 완당전집 제5권
 서독(書牘)
백파에게 주다[與白坡]

백파 노사(白坡老師) 선안(禪安)하신지요? 이미 더불어 거리낌없이 말을 마구 했는데 어찌 체면을 보아 자제할 이치가 있으리오. 전후 지묵(紙墨)의 사이에 일호라도 노여움을 숨겨 둔 뜻은 없었는데 보내 온 깨우침이 갑자기 이렇게 중언부언한 것을 보면 이는 사(師)가 스스로 갈등을 일으킨 것이라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 머금은 밥알이 튀어나와 서안(書案)에 가득하구려.
사의 나이 장차 팔십이요, 더구나 오늘날 선문(禪門)의 종장으로서 평소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했고 또 명안(明眼)의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기봉(機鋒)을 누가 들어서 발전(撥轉)해 주리오. 정문(頂門)도 따라서 인색(湮塞)하게 되어 침침한 귀굴(鬼窟) 속에 허다한 세월을 그저 넘기고 말다가 갑자기 목놓아 말하는 사람의 큰 사자후(獅子吼)를 부딪치니 의당 그 눈이 휘둥그레질밖에요.
내 비록 천박한 사람이지만 어찌 늙은 두타(頭陀) 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서 아울러 그 선장(先狀)에까지 언급하였겠소. 사는 하나의 속세 문자에 있어서도 오히려 깊이 궁구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심심(甚深)한 불지(佛旨)를 꿰뚫어 갈 수 있으리오. 이에 나아가 사의 무너지고 빠침이 여지가 없음을 알겠으니 어찌 더욱 터져 나오는 밥알이 서안에 가득하지 않겠소.
지금 이 열다섯 가지의 조례에 대하여 앞의 일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뒤의 일설은 도로 다시 몽롱하여 수미(首尾)의 천 백 말이 한 구절도 마음에 터득되어 폐부 속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전혀 없고 예전 그대로 박잡하고 윤척(倫脊)이 없는 성어만을 주워 모아 구차스레 설명해 가는 것뿐이니 어찌하지요.
지난날에 한 산중의 노고추(老古錐)와 더불어 선(禪)을 논한 일이 있었는데 역시 이와 같은 말을 하여 묵은 먹과 식은 밥이 한 판에 찍어낸 것 같으니 이것이 바로 치문(緇門)의 베껴 전하는 묵은 종이[故紙]로서 굳을 대로 굳어져 깨뜨리지 못하는 것인지요?
이를테면 불설(佛說)은 화두(話頭)의 활구(活句)가 아닌 것이 없고 《법화경(法華經)》과 《화엄경(華嚴經)》은 바로 교적(敎迹)의 사구(死句)라 하였는데 두 경은 유독 불설이 아니던가요?
《소초(疏抄)》나 사기(私記)도 역시 묘유(妙有)이나 《법화》ㆍ《화엄》은 다 선문의 상승(上乘)이 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른바 《소초》ㆍ《사기》는 별도의 한 서(書)로 수다장(修多藏) 속으로부터 새로 번역해 온 것이어서 이 두 경과는 판연히 두 건의 물(物)인데 또다시 두 경의 문자보다 뛰어나다는 말인가요? 경은 상승이 아니요 소초가 도리어 묘유라는 말은 듣지 못했소.
더구나 그 입을 열면 대기(大機)에 대용(大用)이요 마음에 발작하면 살인(殺人)과 활인(活人)이라 하지만 본지(本地)의 풍광(風光)에 대기ㆍ대용을 어디에다 쓸 것이며 청평(淸平)의 세계에 살인ㆍ활인도 장차 무엇을 할 건고? 대기ㆍ대용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맡긴 것도 족히 가소로운 일이며 살인ㆍ활인은 한 때의 기(機)에 당한 말인데 어찌 상투로 답습하여 평소의 능사로 삼으려 드는 건가?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를 나누어 두 문으로 만들어 마치 아울러 서고 쌍으로 일어나는 것과 같이 하니 어찌 한 마음이 다심(多心)으로 반복하는 건지요? 이는 《기신(起信)》을 잘못 읽은 사람들로서 총림(叢林) 속의 잡설과 만담이 이와 같이 몰이해하여 그 내력이 이미 오래였으니 또 어찌 전혀 사만 허물할 게 있소.
염화(拈華)의 소식을 들어 보이자 오직 가섭(迦葉)만이 알고 아난(阿難)도 몰랐는데 누가 들어서 역력히 설명하여 이와 같이 적확하고 분명하게 말한단 말이오. 언어의 길이 끊긴 곳에는 문자가 역력하여 증거할 수 있어 마침내 묘유문(妙有門)이라 생멸문(生滅門)이라 수연(隨緣)이라 보리(菩提)라 관조반야(觀照般若)라 활인검(活人劍)이라 잡화포(雜貨鋪)라 이르지 않았소.
묘유ㆍ생멸ㆍ수연ㆍ보리ㆍ관조반야 등 어와 불설에 대하여는 경(經)치고 없는 데가 없어 팔만의 권속(眷屬)이 듣지 못한 사람이 없고 믿어 받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또 어찌 염화를 들어 중(衆)에게 보여 줄 것이 있겠으며 중이 다 모르는데 가섭만 유독 알았단 말이오?
염화의 소식이 만약 과연 이에 있다면 또 어찌 문자를 세우지 않은 데 있겠는가.
황면(黃面)의 노자(老子)도 오히려 이를 언어나 문자에 나타내지 못했는데 사(師)는 마침내 다반사(茶飯事)로 말하니 문자도 본시 한 선(禪)이요 문자를 세우지 않은 것도 한 선(禪)이란 말인가? 하나의 선인데 혹은 문자를 세우고 혹은 문자를 세우지 않았단 말인가? 이는 다 말이 되지 않는 거외다.
이는 또한 사 한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후세의 선가(禪家)들이 거개 이와 같았는데 사 같은 이는 바로 또 그것을 주워 모아 구두선(口頭禪)을 만들어 주체(湊砌)하여 마지않고 천착하여 마지않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은가.
달마(達摩)가 서역에서 와서 진단(震旦)의 문자가 번역으로 와전되고 붓으로 받아 쓰는 데서 와전되고 윤색하다 와전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일체를 소제해 버리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으니 이는 부득이한 일이었던 거요.
그러해도 달마는 오히려 《능가경(楞伽經)》을 이조(二祖)에게 부쳐 주어 서로 전하여 오조(五祖)에 이르렀는데 《능가》의 문자가 간회(艱晦)함으로써 《반야경(般若經)》으로 바꾼 것은 그것이 간직(簡直)하고 평이하여 사람마다 즐겨 따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어렵고 쉬운 사이에 달마의 본지와는 사뭇 다름이 있었는데 사람이 다시 수정을 더한 일이 없어서 마침내 오늘날에 이르러 《능가》는 폐해지고 《반야》가 크게 행세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육조(六朝) 이래로 해석하는 자가 가장 많았는데 혹은 얕은 데 잃고 혹은 깊은 데 잃고 혹은 간략한 데 잃고 혹은 번다스러운 데 잃었던 거지요.
이를테면 삼십이분(三十二分) 같은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소롭게 하는데 이는 사람이 망령되이 조명(照明)을 의탁한 것이니 바로 깎아버려도 되며 천친(天親)의 이십칠의(二十七疑)와 무차(无差)의 십팔주(十八住)는 반드시 보존하지 않아도 되며 또한 그것이 과연 두 대사(大士)의 손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거고요.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설은 이것이 바로 육조의 친필이란 말이오? 본래 글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가서 얻어왔단 말인가요. 구결(口訣) 두 글자는 곧 그것이 파탄나는 곳이니 이 역시 망탁(妄托)인 거요. 사는 헛설사로 한번 이마에 땀 쏟는 경우를 면치 못할 거외다.
함허(涵虛)의 설은 내유(來喩)로 보아 더욱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반야경》엔 어찌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또 이미 공종(空宗)이라 일렀는데 내유를 들어 말하면 성종(性宗)이라 일러도 되고 조사종(祖師宗)이라 일러도 되지 않겠소? 매양 조사선을 위하여 따로이 문자를 세우고자 하니 역시 이상한 일이지요.
앞뒤가 비끗해지고 전부가 어긋져 떨어짐이 또 이와 같이 말한 자는 전혀 없으니 이는 망설이요 두찬(杜撰)인 것이며 지난날에 사의 말한 ‘생반삼분(生飯三分)’ 같은 것은 당초에 《대교왕경(大敎王經)》의 한 구절 한 대문도 얻어 보지 못하고서 함부로 만들고 함부로 풀이한 것인데 지금 또 《반야경》에다 사마귀를 붙이고 혹을 달 작정인가? 함허의 무리도 역시 이 병을 면치 못했는데 하물며 점점 끝이 되는 사 같은 이에 있어서랴.
화두는 지난날에 또한 누누이 말했는데도 마침내 반성하여 깨치지 못하고 또 이와 같이 황잡(荒雜)하게 말해 오니 비록 대방(大方)이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거요.
화두는 비록 조주(趙州)의 화(話)로써 화두를 삼지만 조주가 어찌 일찍이 사람에게 화두를 가르쳤는가? 특히 조주뿐만 아니라 달마(達摩)가 이조(二祖)에게 화두로써 가르쳤던가? 삼조ㆍ사조도 역시 화두 속에서 왔는가? 오조가 육조에게 의발(衣鉢)을 전하면서도 역시 일찍이 화두에 미치지 않았으며 남악(南岳) 마조(馬祖) 백장(百丈) 황벽(黃蘗)들도 화두를 들어 사람을 가르쳤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화두는 조송(趙宋) 이후부터 차츰 행해진 것인데 지금은 마침내 불어(佛語)는 화두 아닌 것이 없어 의리(義理)로써 설파하면 교의(敎義)가 되고 몰의리(沒義理)로써 타파하면 화두가 된다고 이르니 조송 이후의 불을 섬기는 것은 무엇 때문에 미리 옮겨 쓰고 거슬러 취하여 혹은 의리(義理)로 설파하고 혹은 몰의리(沒義理)로 타파한다는 거요?
불설은 장경(藏經)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장경 속의 팔만이 의리가 있지 않은 것은 없어 사람마다 이해할 수 있는데, 모르괘라, 어느 경이 몰의리의 경이 되는지요? 지금 화두를 불어(佛語)와 불의(佛意)로 삼는다면 세 곳에서 전심(傳心)할 때에 어찌 한 구절도 화두가 없었던가?
지금 교적(敎迹)을 사구(死句)로 삼아서 스스로 구하는 일도 끝내지 못했는데 스스로 구하는 일도 끝내지 못한 처지로서 어떻게 더 넓히어 팔만대장(八萬大藏)의 당상(唐喪)의 타진(唾津)을 하려 드는가?
화두로 사람 가르치는 것은 곧 상계(像季) 이래의 말법으로서 가장 강흔(剛狠)한 자들이 제멋대로 쓰는 것이니 화두로 사람 가르친 이후로는 다시 남악 마조 같은 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혹 한두 사람이 깨쳐 얻은 것이 있다 할지라도 심히 기특한 것은 없으며 그도 또한 열 백에 하나인 것이외다. 이 밖에는 허랑되이 세월만 낭비하여 오늘날 영남(嶺南)의 칠불선실(七佛禪室)과 같을 뿐이니 이 어찌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으며 대혜(大慧)가 그 화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으리오?
대혜의 문하에서 화두로부터 깨쳐 들어간 것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장자소(張子韶)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데 꾀어서 자소를 데려다가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었으니 그 자소를 가르친 것은 곧 하나의 음모(陰謀)와 비계(祕計)로서 심지어는 사람들이 여불위(呂不韋)에게 비한 일도 있는데 사의 두대(頭戴)한 것은 바로 곧 이와 같을 따름인 것이외다.
종풍(宗風)의 문(門)은 문대로 호(戶)는 호대로 서로서로 분열되고 서로서로 형극이 되었는데 사는 단지 대혜(大慧)만을 알고 대혜의 법형(法兄)인 법일(法一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 호(號)는 설소(雪巢))을 알지 못하며 단지 청허(淸虛)만 알고 청허의 법형인 홍정(弘正)을 알지 못하니 이는 다 대혜ㆍ청허보다 한 등을 넘어선 자들이라오.
중고(中古)에 있어 외도(外道)를 변파한 주굉(袾宏)이나 근세에 반선(班禪) 서천의 활불 을 면척(面斥)한 달천(達天)이라든가 또는 육신(肉身)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덕청(德淸) 같은 이와 사리가 비[雨] 같았다는 성공(性空)의 여러 대덕들은 또 어찌 진묵(震黙)환성(喚醒)설파(雪坡)의 무리들에게 넘어 설 뿐이겠소.
사의 성문(聲聞)으로는 반드시 이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 칭술한 것은 편방(偏方)의 한 문호(門戶)의 작은 소견으로서 썩은 쥐새끼를 놓고 봉에게 소리 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외다.
선(禪)의 교법(敎法)은 체식(體式)이라 이른 것은 도대체 선을 어떻게 체식한다는 거요? 이미 문자를 세워 놓고 또 하나의 체식을 더하니 어찌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는지 이는 모두가 진부한 것만 주워 모으고 하나도 신심(身心) 상의 체험ㆍ연구가 없이 날랜 이뿌리로 말만 늘어 놓는 것이며 또한 말을 가리지 못하고 떠들어댄 것이외다.
지난번에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읽으라고 권한 것은 어찌 《반야》와 《법화》를 몰라서리요. 특히 사의 근기(根器)와 식해(識解)가 이로 말미암아 들어가야만 문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안반수의》로써 이 방편의 교체(敎體)를 세워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비유하자면 《법화》중의 화성(化城)과 같아서 비유하여 말한 것이니 실로 사를 슬퍼하고 민망히 여겨서 그런 것이며 사를 얕잡아 보거나 업신여긴 것은 아니오.
사의 문하의 작은 도리(闍黎)도 항상 가벼이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에게랴. 사는 끝내 이 의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사부(士夫)의 거만으로 여기니 어찌 평심하여 자세히 강구하지 못하시오. 사부의 거만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산승의 거만이겠소.
오늘날의 할 일을 위해서는 종전의 갈등을 일체 다 소제해 버리고 빨리 사의 신상에 나아가 회광반조(回光反照)하여 먼저 진ㆍ치(嗔癡)의 두 가지 독소를 도려내 버리고 다음으로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과 갈마비니(羯磨毗尼) 등의 법을 취하여 한결같이 마감 증험해 나가면 거의 혹 앞에 나타나는 광명이 있을 것이나 사는 지금 늙지 않았소.
그러나 우리 성인의 말씀에 이르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하였으며 사의 가문(家門)에도 역시 "소 잡는 칼을 내려뜨리고 당장에 부처를 이뤘다.”는 말도 있으니 사의 앞길은 상기도 한량이 없지 않소. 격(格) 밖에 위로 향하는 그 한 구멍에 이르러는 또 문자나 언어로써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시험 삼아 다시 생각하고 또 거듭 생각하기 바라오.
개중(個中)의 설은 더욱 낙착이 없으니 만약 개중을 논한다면 어찌 초목 곤충의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말할 게 있는가. 축생(畜生)과 아귀(餓鬼)에 이르러는 어떻게 개중을 들어 논하리오. 초목 곤충의 유정 무정에 대하여 그 소식을 탐득(探得)하면 장차 무엇을 하자는 거요?

[주D-001]선지식(善知識) : 지식은 그 마음을 알고 그 형(形)을 아는 뜻이다. 선(善)이란 나에게 유익함이 되어 나를 인도하는 것이다. 《법화문구(法華文句)》4에 “문명(聞名)을 지(知)라 하고 견형(見形)을 식(識)이라 하는데, 남이 나에게 보리(菩提)의 도를 더해주면 선지식이라 이름한다.” 하였고, 《법화경(法華經)》묘장엄왕품(妙莊嚴王品)에 “선지식이란 것은 바로 대인연(大夤緣)인데 이른바 화도(和導)하여 부처를 얻어보게 하여 아누다라삼막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발(發)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음.
[주D-002]기봉(機鋒) : 석씨(釋氏)가 선(禪)을 말할 때 그 언사(言辭)는 적상(跡象)에 떨어지지 아니하면서 봉망(鋒鋩)이 예리한 것을 이름. 소식의 시에 “鈍根仍落箭鋒機”가 있음.
[주D-003]정문(頂門) : 침구(鍼灸) 법의 뇌문(腦門)으로부터 씻어내리는 침을 이름인데 이를 들어 행사(行事)의 액요(扼要)에 비유하여 씀.
[주D-004]두타(頭陀) : 범어(梵語)에 중을 칭하여 두타라 하는데 그 뜻은 번뇌를 두수(抖擻)한다는 것임. 세속에서는 승려의 행각 걸식(行脚乞食)하는 자를 말하며 또한 행자(行者)라고도 칭함.
[주D-005]윤척(倫脊) : 도리(道理)를 이름. 《시(詩)》소아(小雅) 정월(正月)에 “維號斯言 有倫有脊”이라 하였음.
[주D-006]노고추(老古錐) : 노고(老古)한 송곳도 능히 물건을 뚫는 용(用)이 된다는 것인데, 노고라는 것은 존칭이고 사가(師家)의 설득하는 기봉(機鋒)이 초준(峭峻)함을 말한 것임. 《허당백엄록(虛堂柏嚴錄)》에 “版齒生毛老古錐 夜深聽水爐邊坐”라 하였음.
[주D-007]치문(緇門) : 승려는 치의(緇衣)를 입으므로 승문(僧門)을 이름.
[주D-008]《소초(疏抄)》 : 《화엄대소초(華嚴大疏抄)》를 이름인데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抄)》의 약명으로 징관(澄觀)이 스스로 대소(大疏)를 해석한 것임.
[주D-009]묘유(妙有) : 불가의 용어인데 비유(非有)의 유(有)를 묘유라 함으로써 비공(非空)의 공(空)에 대하여 진공(眞空)이라 이름.
[주D-010]상승(上乘) : 상인(上寅)이라고도 하는데 대승(大乘)의 이명(異名)임. 《세친섭론(世親攝論)》에 “如是三藏 下乘上乘 有差別故 則成二藏”이라 하였음. 승(乘)은 운재(運載)로써 의(義)를 삼아서 교(敎)의 법을 이름한 것임.
[주D-011]수다장(修多藏) : 수다는 수다라(修多羅)인데 범어로 경(經)의 뜻임.
[주D-012]대기(大機)에 대용(大用) : 선가(禪家)의 종장(宗匠)이 언어로는 미치지 못하는 기미 징오(機微徵悟)를 들어 마음을 써서 학자(學者)에게 베푸는 것을 이름. 《곡향집(谷響集)》9에 “대기는 종사(宗師)에게 있고 학자에게 베푸는 것을 대용이라 한다.” 하였음.
[주D-013]살인(殺人)과 활인(活人) : 검(劍)을 지(智)에 비한 것인데 진성(眞性)의 기용(機用)을 부활(復活)하는 것을 이름.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6 암두전활조(巖頭全豁條)에 “不霜雖有殺人劍 但無活人劍”이라 하였음.
[주D-014]기신(起信) : 즉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약명임. 마명보살(馬鳴菩薩)이 지은 것으로 두 역(譯)이 있는데 하나는 양(梁) 진체(眞諦)의 역 1권이고 하나는 당(唐) 실차난타(實叉難陀)의 역이다. 정신(正信)을 일으키기 위하여 대승의 극리(極理)를 말한 것임.
[주D-015]염화(拈華)의 소식 : 《연등회요(聯燈會要)》석가모니불장(釋迦牟尼佛章)에 “세존(世尊)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뽑아들어 중(衆)에게 보이니 모두 묵묵히 말이 없었는데 유독 가섭(迦葉)만이 파안미소(破顔微笑)하므로 세존이 말하기를 ‘나는 정법안장(正法眼藏)ㆍ열반묘심(涅槃妙心)ㆍ실상무상(實相無相)ㆍ미묘법문(微妙法門)에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교외(敎外)의 별전(別傳)이 있다.’ 하고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付囑)하였다.” 하였음.
[주D-016]황면(黃面)의 노자(老子) : 석가를 가리켜 말한 것임. 여래(如來)가 금색신(金色身)이 되기 때문에 황면이라 하였음. 《무문관(無門關)》에 “黃面瞿曇 傍若無人”이라 하였음.
[주D-017]주체(湊砌) : 포개진 것에 더 포갠 것으로 층첩비차(層疊比次)를 말한 것임.
[주D-018]달마(達摩) :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중으로 천축인(天竺人)인데 양 무제(梁武帝) 때에 영접하여 금릉(金陵)에 와서 불리(佛理)를 담론하고 강을 건너 위(魏)로 가서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앉아 면벽(面壁)한 지 9년 만에 화거(化去)하였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주D-019]진단(震旦) : 인도의 고대에 중국을 진단이라 하였음. 《번역명의집(繙譯名義集)》에 “동방은 진(震)에 속하여 바로 해 돋는 지방이므로 진단이라 한다.” 하였음.
[주D-020]이조(二祖) : 선종(禪宗)을 이름인데 불교의 일파로서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여래(如來)로부터 가섭(迦葉)에게 부촉(付囑)하여 제1조(第一祖)가 되었고 28세(世)를 전하여 달마(達摩)에 와서는 동토(東土)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양(梁) 나라 때 바다에 떠 광주(廣州)에 도달하여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의발(衣鉢)을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여 이조가 되었음. 혜가의 초명(初名)은 신광(神光)이요, 북위(北魏) 낙양(洛陽) 사람인데 달마대사가 소림사에 있을 때 도(道)를 청하기를 심히 진지하게 하여 눈이 내리는 어느날 밤에 그 왼팔을 자르니 달마가 보고 느껴서 허락하였다. 그래서 그 이름을 혜가라고 고쳤으며 뒤에 승(僧) 찬(璨)에게 전하여 삼조가 되고 도신(道信)이 사조가 되고 홍인(弘忍)이 오조가 되고 혜능(慧能)이 육조가 되었는데, 다 그 의발로써 서로 전하였음.
[주D-021]육조(六朝) : 오(吳)ㆍ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이 서로 이어 건강(建康)에 도읍하였으므로 육조라 이름.
[주D-022]천친(天親) : 사람 이름임. 범명(梵名)은 파수반두(婆藪槃豆), 또는 파수반타(婆修槃陀)라고 함. 혹은 천제(天帝)의 아우이기 때문에 천친이라 한다고 함.
[주D-023]함허(涵虛) : 조선 세종 때의 승(僧). 법호는 득통(得通), 속성(俗姓)은 유(劉)이고 충주(忠州) 사람임. 21세에 관악산(冠岳山) 의상암(義相庵)에서 중이 되었으며 세종대왕이 청하여 대자어찰(大慈御刹)에 머물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원각소(圓覺疏)》ㆍ《반야경오가해설의(般若經五家解說誼)》ㆍ《현정론(顯正論)》ㆍ《반야참문(般若懺文)》ㆍ《윤관(綸貫)》 등이 있음.
[주D-024]생반삼분(生飯三分) : 생반은 출반(出飯)이라고도 함. 밥을 먹기 전에 중생을 위하여 밥을 조금 덜어 시여(施與)하는 것으로서 지계(持戒)하는 자의 법식임.
[주D-025]조주(趙州) : 제4권 주 38) 참조.
[주D-026]남악(南岳) 마조(馬祖) : 마조는 승명(僧名)으로 당(唐) 강서(江西) 도일선사(道一禪師)를 이름인데 남악양(南岳讓)의 법사(法師)가 되었다. 속성이 마씨이므로 당시에 마조라 칭하였고, 원화(元和) 중에 시호를 대적(大寂)이라 내렸다. 《전등록(傳燈錄)》6에 “육조(六朝) 혜능화상(慧能和尙)이 양(讓)에게 이르기를 ‘향후의 불법은 너의 변(邊)에서 나올 것이니 마구(馬駒)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일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강서(江西)의 법사가 천하에 퍼져서 마조(馬祖)라 불렀다.” 하였음.
[주D-027]백장(百丈) 황벽(黃蘗) : 홍주(洪州) 황벽선사(黃蘗禪師)의 이름은 희운(希運)이요, 민인(閩人)인데 어렸을 때 복주(福州) 황벽산에서 출가(出家)하여 강서(江西)에 가서 백장사(百丈師)에게 참알(參謁)하여 종교(宗敎)를 부양(敷揚)한 지 무릇 40여 년에 그 도를 통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입실 제자(入室弟子)가 41인이었음.
[주D-028]세 곳에서 전심(傳心)할 때 : 선종(禪宗)을 이름. 세존(世尊)이 세 곳에서 가섭(迦葉)에게 전심하였는데 하나는 영산(靈山)에서의 염화미소(拈華微笑)요, 하나는 다자탑(多子塔)에서 반좌(半座)를 나눈 것이요, 하나는 쌍림수(雙林樹) 아래에서 관(棺) 속으로부터 발을 내민 것임. 《선종상감(禪宗象鑑)》에 “세존이 세 곳에서 전심한 것이 선지(禪旨)인데 한 시대에 말하는 자들은 교문(敎門)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禪是佛心 敎是佛語’라 한다.” 하였음.
[주D-029]당상(唐喪) : 미상함. 상(喪)은 장(裝)의 오자로서 당 나라 현장(玄裝)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함.
[주D-030]상계(像季) : 불가의 용어로 말세를 이름. 불멸(佛滅)한 뒤 5백 년은 정법(正法)이라 하고 정법 후 1천 년은 상법(像法)이라 하는데 법이 행할 때와 같다는 말임. 계(季)는 상법의 계세(季世)를 가리킴. 《서방요결후서(西方要訣後序)》에 “生居像季 去聖斯遙”라 하였음.
[주D-031]장자소(張子韶) : 송(宋) 염관인(鹽官人)으로 이름은 구성(九成)임. 소흥(紹興) 연간에 정시(廷試) 제일로 누천(累遷)하여 예부 시랑 겸시강(禮部侍郞兼侍講)으로 제수되었는데 진 회(秦檜)에게 거슬려 낙직(落職)하고 남안군(南安軍)에 거주하였다. 이에 앞서 경산(徑山) 승(僧) 종고(宗杲)가 선리(禪理)를 잘 이야기하여 종유하는 자가 많았는데 구성도 가끔 그 사이에 왕래하였다. 진회는 그가 자기를 거론할까 두려워서 사간(司諫) 첨대방(詹大方)을 시켜 그가 종고와 더불어 조정을 비방한다고 논죄하여 남안으로 귀양보냈던 것이다.
[주D-032]대혜(大慧) : 송(宋) 항주(杭州) 경산(徑山)의 불일선사(佛日禪師)로 이름은 종고(宗杲)인데 효종(孝宗) 융흥(隆興) 원년 8월 10일에 경단 명월당(明月堂)에서 입적하였다. 수(壽)는 75세, 시(諡)는 보각(普覺), 탑(塔)은 보광(寶光)이다. 《어록(語錄)》 30권이 있어 대장(大藏)에 칙입(勑入)하였음.
[주D-033]청허(淸虛) : 조선 승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법호임.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며 안주(安州) 사람으로 묘향산(妙香山)에 오래 있어서 서산대사라 칭한다. 10세에 부친을 여의고 안주 목사를 따라 서울에 가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동학(同學) 몇 사람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열람하다가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얻고 마침내 중이 되었음.
[주D-034]홍정(弘正) : 서산대사와 동시의 승인데 도력(道力)이 서산이나 한무외(韓無畏)의 위에 있었다고 함. 본집(本集) 권10 금선대시(金仙臺詩)의 완당 자주(自注)에 보임.
[주D-035]주굉(袾宏) : 명 나라 운서대사(雲棲大師)의 이름. 자는 불혜(佛慧), 호는 연지(蓮池)임. 처음에는 유생(儒生)으로 있었는데 30세 이후에 출가하여 다년간 행각(行脚)한 나머지 항주(杭州)의 운서산(雲棲山)에 머물러 선림(禪林)을 창건하고 염불을 장려하여 계율(戒律)을 엄히 하였음. 신종(神宗) 만력 43에 81세로 입적하였으며 32종의 저서가 있음.
[주D-036]덕청(德淸) : 명 나라 금릉(金陵) 전초인(全椒人)으로 속성은 채씨(蔡氏), 이름은 덕청, 자는 증인(澄印), 호는 감산(憨山)임. 11세에 출가의 뜻을 품고 이듬해 보은사(報恩寺) 서림(西林) 영녕(永寧)에게 투신하여 경교(敬敎)를 송습(誦習)하며 또 유학(儒學)을 닦다가 19세에 서하산(棲霞山) 운곡법회(雲谷法會)에 참알(參謁)하여 참선의 뜻을 결심하고 영녕에게 청하여 삭발하였음. 세상에서는 감산대사라 칭함. 저술로는 《감산대사몽유전집(憨山大師夢遊全集)》이 있음.
[주D-037]성공(性空) : 일본 승임. 《日本高僧傳》에 보임.
[주D-038]진묵(震黙) : 승명(僧名)은 일옥(一玉). 조선 때 만경(萬頃) 사람임. 7세에 출가하여 전주(全州)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棲寺)에서 불경을 배워 글을 한번 보기만 하면 외웠다. 득도(得道)하여 신기한 이적(異迹)의 전설이 파다하였으며, 72세에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어록(語錄)》이 있음.
[주D-039]환성(喚醒) : 속성(俗姓)은 정(鄭)이요, 충주(忠州) 사람임. 12세에 미지산 용문사(龍門寺)에서 중이 되어 상봉정원(霜峯淨源)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7세에 월담설제(月潭雪霽)의 법을 이어 경전을 힘써 연구하였음. 그 후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를 베푸니 모인 학승(學僧)이 1천 4백 명에 달하였음. 저술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와 《환성시집(喚醒詩集)》이 있음.
[주D-040]설파(雪坡) : 속성은 이(李)요, 무장(茂長) 사람인데 어려서 어버이를 잃고 19세에 선운사(禪雲寺) 희섬(希暹)에게 계(戒)를 받아, 호암(虎巖)의 법을 잇고 33세에 용추사(龍湫寺) 판전(板殿)에서 개강(開講)하여 십여 년 동안 정업(淨業)을 닦다가 일생을 마쳤다. 나이는 85세, 법랍(法臘)은 66세요, 저술로는 《구현기(鉤玄記)》가 있음.
[주D-041]썩은……것 : 《장자(莊子)》추수(秋水)의 “夫鵷鶵 發於南海 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於是鴟得腐鼠 鵷鶵過之 仰而視之曰嚇”에서 나온 말임.
[주D-042]화성(化城) : 불가어인데 일시에 화작(化作)한 성곽을 이름. 《법화경(法華經)》에 “화성의 유품(喩品)이 있는데 그 비유한 뜻은 일체 중생이 성불(成佛)하는 곳을 보소(寶所)라 하며 이 보소에 이르자면 길이 하 멀고 험악하다. 그러므로 가는 사람이 피로하여 퇴각할까 두려워서 가는 도중에 하나의 성곽을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머물러 쉬면서 그곳에서 정력을 길러 마침내 보소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하였음.
[주D-043]도리(闍黎) : 범어(梵語)임. 또한 아도리(阿闍黎)라고도 하는데 승도(僧徒)의 스승이다. 행실을 바르게 하여 능히 제자의 품행을 규정(糾正)하는 승려를 이름.
[주D-044]회광반조(回光反照) : 도가(道家)의 수련하는 법을 이름. 《참동계(參同契)》 주(注)에 “사람이 능히 회광반조하여 출식(出息)은 미미(微微)하고 입식(入息)은 면면(綿綿)하여 간단(間斷)하게 말면 신기(神氣)가 뿌리로 돌아가서 오래오래 하면 호흡이 다 없어진다.” 하였음. 《태상순양진군경(太上純陽眞君經)》에 “回光返照中 神歸氣穴裏”라 하였음.
[주D-045]사분율(四分律) : 경(經)의 이름. 사율(四律)의 하나로 60권인데 오부(五部) 중 담무덕부(曇無德部)의 율장(律藏)임. 본서(本書)에 대한 주석 및 본서에 관한 저술은 《사분율소(四分律疏)》 6권 도부(道覆)의 찬(撰)과 《사분율소》 4권 혜광(慧光)의 찬과 《사분율소》 20권 당(唐) 법려(法礪)의 찬 등이 있음.
[주D-046]오분율(五分律) : 서명(書名)으로 《미사새부화해오분율(彌沙塞部和醢五分律)》의 약명인데 오부율(五部律) 중 미사새부의 율본(律本)을 말한 것임.
[주D-047]소 잡는……이뤘다 : 《산당사고(山堂肆考)》에 “도아(屠兒)가 열반회상(涅槃會上)에 있어 도도(屠刀)를 내려뜨리고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었다.”라 하였는데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빠름을 말한 것임.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7권
 춘명일사(春明逸史)
불립(佛笠)

불립은 지금의 승립(僧笠)으로, 음(音)이 변하여 굴립(屈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제도는 멀리 당(唐)나라 때의 포대화상(布袋和尙)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무학(無學), 유정(惟正) 등의 스님들이 모두 착용하였는데, 이는 공복(公服)에 갖추어 쓴 것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삿갓 위에 작은 대(臺)가 있는데, 이것은 옥로(玉鷺)를 붙이는 곳이다. 내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화상(畫像)을 보고서 그것을 알았다.

[주D-001]굴립(屈笠) : 굴갓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벼슬을 가진 중이 쓰던 갓을 말한다. 대오리를 걸어 만드는데, 모자 위가 둥글게 되어 있다.
[주D-002]포대화상(布袋和尙) : 중국 후량(後梁)의 고승(高僧)이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뚱뚱한 몸에 지팡이를 들고 온갖 일용품을 담은 포대(布袋)를 둘러메고 거리를 다니며 남의 길흉과 날씨를 점쳤다고 한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2권
 순일편(旬一編)
고승매(高僧梅)

정릉(靖陵) 재실 뜰에 소나무와 회나무 등 푸른 나무들이 빽빽한 가운데 매화나무가 있는데, 꽃이 아름답게 핀다. 이는 바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직접 심은 것이다. 정축년 봄에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보았지만, 50년 사이의 영고(榮枯)는 모르겠다.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이때에 각 도의 군사들이 여기저기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경기도에서는 본도 감사인 심대(沈岱)ㆍ전 사간 우성전(禹性傳)ㆍ전 정언 정숙하(鄭淑夏)ㆍ수원인(水原人) 최흘(崔屹)ㆍ고양인(高陽人) 이노(李魯)와 이산휘(李山輝)ㆍ전 목사 남언경(南彦經)ㆍ유학 김탁(金琢)ㆍ충의위 이일(李軼)ㆍ서얼 홍계남(洪季男)ㆍ선비 왕옥(王玉) 등이, 충청도에서는 전 제독관 조헌(趙憲)ㆍ중 영규(靈圭)ㆍ전 청주 목사 김홍민(金弘敏)ㆍ서얼 이산겸(李山謙)ㆍ선비 박춘무(朴春茂)ㆍ충주인(忠州人) 조덕공(趙德恭)ㆍ충의위(忠義衛) 조웅(趙熊)ㆍ보령 현감(保寧縣監) 이의정(李義精)ㆍ해미 현감(海美縣監) 정명세(鄭名世)ㆍ옥천 군수(沃川郡守) 권희인(權希仁) 등이, 전라도에서는 전 판결사 김천일(金千鎰)ㆍ첨지(僉知) 고경명(高敬命)ㆍ전 영해 부사(寧海府使) 최경회(崔慶會)ㆍ절도사 최원(崔遠)ㆍ선비 양산숙(梁山璹)ㆍ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ㆍ중 처영(處英)ㆍ좌수사 이순신(李舜臣)ㆍ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ㆍ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ㆍ해남 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 등이, 경상도에서는 진보 현령(眞寶縣令) 임계영(任啓英)ㆍ현풍인(玄風人) 곽재우(郭再祐)ㆍ고령인(高靈人) 전 좌랑 김면(金沔)ㆍ합천인(陜川人)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ㆍ예안인(禮安人) 전 한림 김해(金垓)ㆍ교서관 정자 유종개(柳宗介)ㆍ초계(草溪) 선비 김대기(金大期)ㆍ군위(軍威) 교생 장사진(張士珍)ㆍ훈련원 봉사 권응수(權應銖)와 정대임(鄭大任)ㆍ본도 병사 박진(朴晋)ㆍ진주 판관 김시민(金時敏) 등이, 강원도에서는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ㆍ중 유정(惟政) 등이, 황해도에서는 제도초토사(諸道招討使) 이정암(李廷馣)ㆍ중화인(中和人) 김진수(金進壽)ㆍ황주인(黃州人) 황하수(黃河水)와 윤담(尹耼)ㆍ봉산인(鳳山人) 김만수(金萬銖)가, 평안도에서는 전 도사(都事) 조호익(曺好益)ㆍ종실 호성도정(湖城都正)ㆍ중 휴정(休靜) 등이 일어나서 혹은 의병이 되어 순절하고 혹은 고단한 군사로 적에게 대항하기도 하였다.
○ 심대(沈岱)는 본관은 청송(靑松), 자(字)는 공망(公望)인데, 사람됨이 강개하였다. 난리가 일어나자 항상 분히 여기며 사명을 띠고 출입함에 있어 평탄하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감사 권징(權徵)이 갈려가자 자청하여 대임이 되어, 순행할 때마다 먼저 공문을 평시와 같이 보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순행하여 조금도 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군사를 모아 스스로 영솔하고 서울을 수복하고자 전진한다고 외쳤다. 매일 사람을 성중에 보내어 군사를 모집해서 내응할 것을 약속하니, 성안 사람들이 난리가 평정된 뒤에 적에게 붙었다는 죄를 받을까 염려하여 연명으로 서장(書狀)을 만들어 심대의 군영 앞에 나아가 자진하여 안에서 내응하겠노라고 말하는 자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었다. 그들은 명목을, ‘약속을 듣기 위해서 왔다’ ‘군기를 수송한다’ ‘적의 정세를 보고한다’ 하고, 왕래가 줄을 이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적군의 눈과 귀가 되어 우리의 동정을 살피는 자도 끼어 들었는데, 심대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었었다. 하루는 삭녕군(朔寧郡)에서 군사를 점검하고 있는데 적이 이를 염탐하고 밤에 몰래 대탄(大灘)을 건너서 어둠을 타고 습격해 왔다. 심대가 놀라 일어나서 급히 피하였으나 적이 쫓아가 죽이었는데, 군관으로서 장(張)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심대를 몸으로 가리고 싸우다가 죽고 적은 이윽고 본진으로 돌아갔다. 경기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어 산속에 묻었는데, 뒤에 적이 심씨 집의 종으로 가장하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며 자기 주인 시체의 소재를 묻고 다니므로, 고을 사람들이 참으로 심씨 집 사람으로 여기고 무덤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더니, 적이 무덤을 파내어 시체의 머리를 베어 종루 거리에 걸어 두었는데, 50~60일이 되어도 얼굴빛이 생시와 같았다. 서울 사람들이 그 충의를 슬퍼하여 서로 재물을 거두어 지키고 있는 왜인에게 뇌물을 주고 걸어놓은 머리를 빼내어 급히 강화도로 보냈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 시체와 함께 고향의 산에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조정에서는 벼슬을 추증하고, 아들 대복(大復)은 음직으로 현감에 이르렀다.
○ 이산휘(李山輝)는 재치있게 대응하는 지혜가 있어 계략을 써서 적을 많이 사로잡았다. 하루는 도성 안의 적이 도성 밖으로 흩어져 나와 약탈을 하였다. 정토사(淨土寺)는 성의 서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4명의 적이 절에 들어왔다. 이산휘는 중들과 서로 이리이리 하자고 약속을 하니, 중들이 다 승낙하였다. 그래서 4명의 왜적을 맞이하여 흔연히 법당에 끌어들여 자리를 펴서 앉힌 다음 급히 밥을 지었다. 왜적들은 후히 대접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의심치 아니하였다. 밥이 다 되어 중은 밥상을 공손히 바치고 노승 한 사람이 주인 자리에 앉아 왜적에게 먹기를 권하고 식사가 끝난 다음에 더운 물을 가져오도록 불렀다. 이때에 다른 중들은 이미 물을 펄펄 끓여 기다리던 참이라 4명의 중이 큰 바가지에 가득 담아서 들어오니, 왜적이 각기 자기 밥주발을 가지고 쳐다보고 물을 받으려 하였다. 여러 중들이 일시에 끓인 물을 얼굴에 급히 쏟으니, 적은 모두 땅에 엎어졌다. 여러 중들이 나무 몽둥이로 때려 죽여 그 머리를 베고, 시체는 끌어다가 절 뒤에 묻었는데, 그 눈을 보니 눈알이 모두 익었다. 이것은 비록 작은 지혜이지만, 임기응변은 이와 같았다.
○ 홍계남(洪季男)은 가장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였는데, 단기(單騎)로 만군(萬軍) 속으로 달려들어가 적의 목을 베기를 마치 공을 던지듯이 하니, 천안(天安)과 안성(安城)의 경내에는 적이 감히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 조헌(趙憲)은 일찍이 서울에서 옥천(沃川)으로 물러나와 있었는데, 매양 조정에서 자신의 책략을 써주지 않기 때문에 울분으로 병이 되어 미친 듯이 바보같기도 하였다. 하루는 속리산에 놀러 갔었는데, 자리에 누워 슬피 울며 아침에 밥상을 들여도 먹지 않으므로, 중이 이상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도 대답을 아니하였다. 뒷날에야 중 현지(玄智)에게 말하기를,
“전에 밤에 별의 변괴가 매우 심하여 시사(時事)를 알 수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하고서, 목놓아 통곡하니, 절의 중들이 모두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일찍이 대둔산(大芚山)에 놀러 갔었는데, 한 달 남짓 있으면서 독서는 일삼지 아니하고 매일 산골짜기에 가서 높이 올라 먼 곳을 바라보거나, 풀을 깔고 시냇가에 앉는 것이 일이었으니, 대개 마음속의 근심 걱정을 잊고자 한 것이요, 경치를 구경하며 날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이 떨어지면 자기 손으로 짚신을 삼아서 신고 중에게 빌리지 아니하였다. 보통 말을 하면서도 탄식하는 소리가 끊일 새 없었고, 밥상을 대할 적에도 때로는 수저를 내던지며 탄식을 마지 않으므로 중들은 그 뜻을 알아차리지를 못하였다. 하루는 중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데 조헌은 먼저 몇 숟가락을 뜬 다음 나머지를 네 사람 중에게 밀어주며 말하기를,
“명년에 반드시 왜란이 있어 내가 의병을 일으켜 근왕할 것이니, 오늘 이 밥을 같이 나누어 먹은 사람은 내가 기병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곧 찾아와서 나와 죽음을 같이 하자.”
하니, 중들이 그 말을 이상하게 들으면서 거짓으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승낙을 하였다. 그뒤 늘 기와와 돌을 밥광주리에 담아서 아내에게 날마다 산언덕을 오르내리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내가 이런 고생을 미리 익히려는 것은 나중에 피란을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 24) 가을 7월 7일에 조헌이 금산 군수(錦山郡守) 김현성(金玄成)을 찾아가서 영벽루(暎碧樓)에 올랐는데, 선비 박정로(朴廷老)가 그 자리에 있었다. 미시에서 신시 사이에, 홀연히 붉은 기운이 동방으로부터 일어나 세 갈래로 갈라져서, 한 줄기는 북쪽으로 향하여 하늘 끝까지 뻗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향하여 길이가 하늘 반쯤에 달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또 하늘 반쯤까지 뻗치었는데, 그 빛이 지상에까지 비치었다. 조헌이 살펴보고 이정로(李廷老)에게 말하기를,
“수길(秀吉)의 군사가 이미 움직이고 있으니, 명년 봄에는 반드시 이 붉은 기운처럼 대거 침략해 올 것이다. 나는 장차 모친을 모시고 공주(公州)로 피란할 터이니, 그대도 나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 해 3월에 조헌은 옥천(沃川)으로부터 김포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에 와서 성묘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하면서, 난리로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는 뜻을 고하였다. 친구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믿지 않았으나 시험 삼아 난리가 나면 피할 만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조헌은,
“강화도의 마니산에 들어가면 면하게 될 듯하다.”
하였다.
4월에 그의 아내가 죽어 장사를 지내려 할 적에 친척과 손님들이 다 모였는데, 홀연히 하늘에서 천둥처럼 요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조헌이 크게 놀라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천고(天鼓) 소리이다. 적이 반드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다시는 어쩔 수가 없다.”
하고 눈물을 계속 흘렸다.
이때에 이르러 호남ㆍ영남 지방에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하니, 그의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선비 장덕익(張德益)ㆍ신난수(申蘭秀)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및 전 참봉(參奉) 이광륜(李光輪) 등이 조헌의 의리를 사모하여 다투어 모여들었다. 전에 대둔산(大芚山)에서 약속한 넷 중에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다리에 병이 나서 오지를 못하였다. 이에 좋은 달 좋은 날을 택하여 공주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키니 정예 군사가 1천 6백이었다. 그때 왜적은 청주를 점거하고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는 무너졌다. 조헌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청주로 전진하여 곧장 성의 서문 밖을 공격하는데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합진하여 나갔다. 그래서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종일 독전하니 적병이 크게 패하였다. 아군이 개미처럼 붙어 기어 올라가려는데 홀연히 한 줄기의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와 천지가 캄캄해지니 전사들이 추위에 떨었다. 조헌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 하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하고, 징을 울려, 조금 후퇴를 명하였다. 이날 밤에 한 여자가 적진에서 도망쳐 나와 말하기를,
“적병이 멀리 이쪽 군대의 위용을 바라보고서 모두 실색(失色)이 되어 ‘저 의병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달려들며 꺾일 기세는 조금도 없으니 저들과 싸울 수가 없다.’ 하고, 곧 불을 피우고 깃발을 세워 군사가 지키는 것처럼 해놓고 쌓인 시체를 다 불태우고 병영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조헌 등이 진격하여 머무르고 방어사에게 청하여 미곡 수만 석을 곤궁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와 말 수백 마리를 각 마을에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자고 하였으나, 이옥(李沃)이 듣지 아니하고 하는 말이,
“이미 순찰사와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니 이것을 남겨두었다가 적이 다시 점거할 때 쓰게 해서는 아니 된다.”
하고, 곡식을 다 태우고 가버리니, 군중에는 다만 현미 몇 곡(斛)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찌할 계책이 없어 드디어 군사들에게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추위를 막을 차비를 차리도록 하고, 결심하고 근왕하러 서쪽으로 떠났다. 온양에 이르렀을 때 금산의 왜적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이 들리고, 또 순찰사와 사환이 와서 조헌에게 말하기를,
“국토가 모두 적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오직 호서와 호남만이 병화에 빠지지 않았으니, 생각하건대, 하늘이 은밀히 그대를 도와 중흥을 이룩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하니, 조헌은 자못 그렇게 여기고 공주에 돌아가 순찰사와 만났으나 의논이 또 맞지 아니하여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순찰사는 다시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관군(官軍)으로서 제 마음대로 의병의 진에 참가하는 자는 처벌할 것이니, 각기 원대에 복귀하라.”
하니, 조헌의 막하에 있던 관군들이 모두 흩어지고 오직 7백 의사(義士)만이 종군을 희망하였다. 조헌이 이에 군대를 이동하여 금산(錦山)으로 향하는데, 장사(將士) 한 사람이 강력히 주장하기를,
“적이 을묘년 호남의 패전에 징계되었기 때문에 지금 금산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정예한 군졸인데다가 그 숫자가 수만이 넘는데, 어찌 우리같은 오합지졸로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군사를 멈추고 형세를 관찰하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림이 옳겠습니다.”
하니, 조헌이 울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 계시는데, 감히 군사의 날래고 무딘 것을 따지겠는가.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을 통해서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한번 죽는 것만 알뿐이다.”
하고, 드디어 의승(義僧) 영규(靈圭)와 연합하여 진격하였다. 또 전라 의병장 권율과 서로 날짜를 약속하고 적을 협공하기로 하였었는데, 권율이 편지를 보내어 기일을 변경하였으나 그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조헌은 이미 금산 성 밖 1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권율의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이 사실을 염탐해서 알고 몰래 군사를 출동시켜 아군이 진을 치기 전에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육박하여 왔다. 조헌은 군중에 영(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죽고 살고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니, 사졸들이 모두 명령에 복종할 뿐 아무도 감히 어기지를 못하였다. 오래도록 힘껏 싸웠는데, 적은 세 번이나 패하였다가 다시 합치고 아군의 화살이 다하자 적은 장막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막하의 사졸 한 사람이 조헌을 붙들고 피하기를 청하니, 조헌이 웃으며 말하기를,
“장부가 죽을지언정 난리를 당하여 구차히 피할 수 없다.”
하고, 북채를 끌어잡고 더욱 급히 독전하니, 병사들은 모두 앞으로 달려가 맨주먹으로 서로 치면서도 오히려 열(列)을 떠나지 않고 마침내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다. 조헌의 아우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중에 들어가 조헌의 시체를 찾아서 업고 옥천(沃川)으로 들어가서 나흘만에 염하였는데, 안색이 산 사람과 같고 노한 기운이 발발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꼿꼿이 섰으므로 그가 죽은 지 오래된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 청주가 수복되기 전에 조정에서는 조헌이 기병(起兵)한 것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교서를 내려 선유하였다.
내가 밝지 못하여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충언을 알지 못하였도다. 나에게 진언(進言)하는 자들 중에 국가의 위망이 조석간에 달렸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비록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실로 깨닫지 못하였도다. 이제 우려할 것은 인심이 흩어지는 것인데, 다만 도적이나 외적만을 걱정하여, 성과 해자가 높고 깊으며 갑옷과 병장기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면 백성을 보위하고 국가를 편안히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민력(民力)을 다하여 이것만을 도모하였도다. 애써서 이룩한 성지와 갑병이 모두 적의 밑천이 되고 백성의 원망만 나에게 돌아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느냐.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고 생령(生靈)은 다 죽었는데도 막아내지 못하였으니, 그 허물은 오로지 나에게 있도다. 오늘날 비록 천백 가지의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내 죄로 인정하고 감히 고통을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내 마음은 슬프도다. 다행히 천지 조종(天地祖宗)의 혼령에 힘입어 인심은 조국을 사모하고 백성은 나를 버리지 않아, 여러 곳의 충의들이 곳곳에서 적을 토벌하는데 너의 이름이 또한 그 중에 있으니, 내 심히 가상히 여기도다. 너에게 이미 봉상시 첨정을 제수하였는데 너는 알았느냐? 나의 쓰라린 마음은 전후에 내린 교서에 다 말하였거니와, 너는 나의 개과(改過)할 것을 인정하고 힘써 충의를 떨쳐 구물(舊物)을 회복하는 일에 힘쓰라. 요즘 오래 호중(湖中)의 소식을 듣지 못하니 마음이 답답하여 돌아가는 사신편에 나의 뜻을 알리고 아울러 본도의 적세(賊勢)는 어떠하며, 유진한 곳은 몇이고, 그 무리는 몇만이며, 그 기세가 전일에 비하여 어떠한지, 너와 같이 도적을 잡으려고 의병을 일으킨 자는 또 누구이며, 적의 목을 벤 전과는 얼마인지 탐지하기를 명하노라. 근래에 명 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 바야흐로 적을 물리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가을날은 맑고 길은 건조하니 이때야말로 오랑캐를 사로잡을 때이며,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죽이기에 알맞은 때이로다. 철마(鐵馬)는 대정(大定)ㆍ청천(晴川)에 뻗치었고, 군함은 산동과 강절(江浙)에 줄지었으니, 죄악을 쌓아온 미친 오랑캐에게는 천벌이 마땅히 내려질 것이다. 경성과 황해도에 우리 의병 또한 많은데 계속 적을 베고 승전한 소식이 끊이지 않으며 인심이 분발하니, 이는 실로 국가 재건의 좋은 기회이로다. 너는 더욱 충성을 다하여 앞으로 나아감에 게을리 하지 말고, 인(仁)으로써 군사를 어루만지고 의(義)로써 용맹을 돋우어 기회를 보아 나아가서 만전을 기한다면 그 거룩한 일이 아니겠느냐. 본도의 전몰한 장지현(張智賢) 등 이하와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적을 토벌한 승려 처일(處一)ㆍ정억만(鄭億萬) 같은 무리에게는 이미 은상(恩賞)을 내리도록 하였으니, 너는 나의 이러한 뜻으로 그들에게 간절히 위로하라. 기묘한 계책을 많이 써서 후미를 공격하기도 하고 밤에 무찌르기도 하여,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 일로(一路)를 먼저 말끔히 숙청하고 와서 남군(南軍)을 도와 도성(都城)을 수복하여, 원릉(園陵)의 송백(松柏)이 뽑히지 않고, 도망간 노약자가 죽지 않게 된다면 오늘날의 으뜸되는 공로는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상과 관직이 나의 손에 달렸으니 산하를 두고 맹세하노라. 파천한 지 오래이나 극복할 길이 끝이 없으니, 성천(成川)의 서리와 이슬에는 종묘사직의 나부끼어 떨어짐을 민망히 여기고, 의주의 강과 늪에서는 장전(帳殿)의 쓸쓸함을 부치는도다. 고향을 생각하는 데는 귀천이 다를 것이 없으니,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간절하도다. 너희들이 와서 내 수레를 맞이할 날을 발돋움하여 고대하노라. 말을 마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네가 마땅히 생각할 것이지만 지극히 슬프도다. 아! 부끄럽게도 묘당에서는 계책이 없으니 성사는 너희들의 힘에 기대하는 바이며, 어지러운 때에 충신을 알 수 있으니 공은 오늘날에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교시하니 자세히 짐작할 것으로 믿는다.
교서가 이르기 전에 조헌은 이미 죽었다. 조정에서 듣고 탄식하고 슬퍼하여 가선대부 이조참판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를 추증하여 포장(褒獎)하였다. 그의 친구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제문을 지어 곡하였다.
나의 벗 여식(汝式 조헌의 자)은 공자(孔子)와 안자(顔子)를 배우고 가의(賈誼)와 굴원(屈原)을 사모하여, 곧음에 죽고자 하더니 마침내 절의에 죽었구나. 슬프다, 여식(汝式)이여!
이 싸움에서 조헌(趙憲)의 아들 조완기(趙完基)는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성품과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전쟁에 패하게 되자 일부러 의관을 화려하게 입었으니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한 것이다. 이에 적이 그를 주장(主將)으로 알고 그 시체를 찢었다.
○ 승장(僧將) 영규(靈圭)는 용력(勇力)이 있어 잘 싸웠는데 적을 만나면 먼저 나가 싸우니, 적은 모두 우수수 쓰러졌다. 조헌이 죽게 되었을 때 적의 포위를 뚫고 들어갔으나 조헌을 찾지 못하고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 이광륜(李光輪)은 자는 중임(仲任)인데,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며 강개하고 큰 뜻이 있었다. 수백의 무리를 이끌고 조헌의 의거를 성실하게 도우다가 마침내 함께 전사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사헌부 집의를 추증하였다.
○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천성이 소박하고 정직하며, 활쏘고 말달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척후병으로 밖에 나가 있다가 사태가 급한 것을 바라보고서 말을 채찍질하여 돌진해서 많은 왜병을 쳐 죽이고 전사하였다.
○ 선비 김절(金節)은 맨 먼저 조헌에게 종군하여 전공이 많았다.
○ 이려(李勵)는 고 영의정 이탁(李鐸)의 손자인데, 학문이 밝고 행실이 돈독했다. 조헌이 기병하였다는 말을 듣고 의병에 가담하였다. 또 만호 변계(邊繼)ㆍ온양 현감(溫陽縣監) 양응춘(楊應春)ㆍ봉사 곽자하(郭自河)ㆍ무인 김헌(金獻)ㆍ강인서(姜仁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정원복(鄭元福)ㆍ이인현(李仁賢)ㆍ이양원(李養元)ㆍ김인남(金仁男)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 등은 모두 막하의 비장(裨將)으로서 먼저 나가 견고한 적진을 꺾기도 하고 혹은 용기와 충의를 떨치기도 하였다. 또 선비 박세진(朴世珍)ㆍ김선후(金善後)ㆍ박응길(朴應吉)ㆍ신경일(申慶一)ㆍ서응시(徐應時)ㆍ윤여익(尹汝翼)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慶男)ㆍ김충남(金忠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 등은 혹은 글로 혹은 행동으로 모두 조헌의 막하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이때에 와서 함께 죽었다. 뒤에 문인인 박정량(朴廷亮)ㆍ김승절(金承節)이 의사들의 뼈를 한곳에 모아 무덤을 만들고 의총(義塚)이라 불렀다.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의 호)이 순의비(殉義碑)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원한은 가을 하늘 속에 배어 답답함을 펴지 못하는데 / 恨入秋陰鬱不開
충사는 자취 없고 누런 먼지만 자욱하네 / 蟲沙無跡但黃埃
위급해서야 충언이 맞음을 알겠으며 / 時危始覺忠言驗
싸움은 패했어도 오히려 적세만은 꺾었도다 / 兵敗猶令虜勢摧
청산에 한 조각 비석만이 남아 / 一片靑山留琬琰
천년의 매운 절개 벽력을 울리는 듯 / 千年烈氣挾風雷
양공의 타루비를 논할 것이 무어랴 / 何論墮淚羊公石
길이 영웅들 슬픔 가누지 못하리라 / 長有英雄不盡哀
○ 조웅(趙熊)은 또한 용감한 선비였는데 말 위에 선 채로 창을 들고 달릴 수 있었다. 5백 명의 의병을 모아 충주에서 일어나 수없이 적을 죽이었다. 하루는 조웅이 깊은 안개 속에서 행군하는데 적이 방비가 없음을 틈타서 뒤를 엄습하였다. 조웅이 포위를 뚫고 나오다가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적에게 사로잡혔다. 적이 그의 수족을 잘랐으되 끊임없이 꾸짖으니 사지를 찢어 죽였다.
○ 김천일(金千鎰)은 자는 사중(士重)이요 그 조상은 광주인(光州人)이었는데, 그의 조부 때부터 나주(羅州)에 이사하여 와서 살았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살다가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독실한 뜻으로 힘껏 행하여 언제나 성현을 법도로 삼았다.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내ㆍ외직을 거쳤는데, 모두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대관(臺官)이 되어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말과 직간을 하였다. 용모는 보잘것 없고 키는 작아서 마치 입은 옷을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으나 의로운 일에 당하여 용감함에 있어서는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일지라도 꺾을 수 없었으니 충의로운 성품은 타고난 것이었다. 전직 부사로서 나주의 시골집에 은퇴하여 살았는데, 서울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목놓아 통곡하여 거의 기절하다가 다시 분연히 말하기를,
“내가 울기만 하면 무엇하겠는가? 나라에 환란이 있어 임금께서 파천하였는데, 나는 세신(世臣)으로서 어찌 새나 짐승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원해서야 되겠는가. 내 의거를 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강약(强弱)이 달라 대적할 수 없으면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나의 보답하는 길이다.”
하고는 글로써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ㆍ정담(鄭湛) 등에게 전란에 종사할 뜻을 전하니, 고경명(高敬命) 역시 그의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고용후(高用厚) 및 전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ㆍ선비 안영(安瑛) 등을 거느리고 담양부(潭陽府)로 와서 모였고, 의사(義士) 송제민(宋濟民)ㆍ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ㆍ임권(林權)ㆍ이광주(李光宙)ㆍ서정후(徐廷厚) 등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6월 3일에 피를 입에 바르고 여러 사람들과 맹세를 하였다. 김천일(金千鎰)이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흔연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서 날 것같다.”
하고, 이에 최경회(崔慶會) 등과 먼저 본군(本郡)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 최경회(崔慶會)는 자는 우선(遇善)인데, 능성현(綾城縣)에 우거하고 있었다.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살이하며 예서(禮書)를 읽다가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바로 뛰어들어가 일을 같이 하였다.
○ 고경명(高敬命)은 자는 이순(而順)이요, 광주인(光州人)이다. 문장에 능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는데 애매한 죄로 시골에서 나오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다. 적병이 경내에 침입하여 우리 군사는 무너지고, 또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목놓아 통곡하였다. 이광(李洸)의 군사가 금산에 이르러서 해산하고 돌아가자 글을 보내어 준절하게 책망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격문(檄文)을 여러 도(道)에 전달하고 잇달아 출병하였는데,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 의병장 절충장군 행부호군 지제교 고경명(高敬命)은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삼가 급히 고하노라. 요사이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否塞 꽉 막혔다는 뜻)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으르렁거리도다.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 어기는 것을 본뜨더니, 나중에는 춘추 때에 구오(句吳)가 주(周) 나라를 갉아먹던 짓을 함부로 하는도다. 우리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허술한 데를 무찔러 쳐들어와서, 하늘도 속일 수 있다 하고 거침없이 북상하는도다. 장수들은 기로에서 배회하고 고을 수령들은 산골로 도망해 숨는도다. 임금과 어버이를 도적에게 버리고 있으니 어찌 차마 할 일이며, 임금으로 하여금 사직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 그대들에게 편안하겠는가. 백년 동안 길러놓은 백성으로서 어찌 한 명의 의기로운 남자가 없단 말인가. 외로운 군사로 깊숙이 들어왔으니 여진(女眞)의 본래 병법을 모르기 때문이요, 중행열(中行說)을 매질하지 못한 것은 한(漢) 나라가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로다. 장강(長江)이 갑자기 천참(天塹)의 가치를 잃게 되니 오랑캐의 말굽이 이미 수도에 육박하였도다. 남조(南朝)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며,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넜다는 말이 불행히도 오늘과 비슷하도다. 우리 임금께서 태왕(太王)이 빈(邠)을 떠나던[去邠]심정으로, 명황(明皇)이 서촉(西蜀)으로 피난하듯하셨으니, 이 일은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므로 지방을 순회하는 것같은 잠깐의 노고쯤이야 꺼릴 것이 있으랴. 공락(鞏洛)의 풍진(風塵)에 놀란 왕의 얼굴에는 여러번 깊은 근심이 나타나고, 민산(岷山)과 아미산(峨眉山)의 험한 사닥다리 길에 취화(翠華 일산)가 먼길을 달리던 당 명황의 일과도 같도다. 하늘이 이성(李晟)같은 원로(元老)를 낳음은 난리를 숙청하는 일을 맡기고자 함이요, 조서를 육지(陸贄)가 기초(起草)하였듯이 애통하는 글이 또한 조정에서 내리었도다. 무릇 혈기(血氣) 있고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분통하여 죽고자 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계획이 잘못되어 나라의 일이 이다지 어렵게 되었는가? 봉천(奉天)으로 피란 갔던 행차는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상주(相州)에서 싸우던 송(宋) 나라 군사처럼 우리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도다. 저 오랑캐들이 벌떼처럼 독을 뽑는데, 이 악당들을 아직 잡아 죽이지 못하고 있도다. 적이 성안에서 숨을 붙이고 있으니 불붙은 장막 위에서 날고 있는 제비와 다를 것이 없고, 서울 지방을 점거하고 있으니 우리 안에서 날뛰는 원숭이와 같도다. 비록 명 나라 군사가 소탕할 날이 있을 것이나, 흉악한 무리가 당장 흩어져 달아남을 기대하기는 어렵도다. 고경명(高敬命)은 일편 단심의 만절(晩節)뿐이요, 흰 머리의 썩은 선비로다. 밤중에 닭소리를 들으니 국가의 고난함을 견딜 수 없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외로운 충성을 다짐하노라. 오직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을 뿐이요, 모기가 산을 지는 미약한 힘을 따질 겨를이 없도다. 이에 드디어 의병을 규합하여 바로 서울로 향할 것이니, 소매를 떨치고 장단(將壇)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러 동지들에게 맹세하노라. 범을 치고 곰을 잡는 장사들은 우뢰같이 올라타고 바람같이 달려오며, 뛰어 올라타고 관문(關門)을 뛰어넘는 무리들은 구름같이 합하고 비오듯이 모이니, 협박을 당하여 호응하였거나 강제로 붙들려 온 것이 아니로다. 오직 신자(臣子)로서의 충의심이 다 같이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국가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어찌 감히 작은 제몸을 아낄 수 있으랴? 이름은 의병이라 하였으니 처음부터 어떤 직분에 매인 것이 아니요, 군사란 곧음으로써 씩씩한 것이니 강하고 약한 것은 논할 것이 아니로다. 여러 인사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말이 같으며, 원근의 지방에서 소문만 듣고도 다같이 일어나는 형편이니 각 군의 수령들과 각지의 인사들은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로써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은 병기로 돕고, 혹은 군량으로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진두에 앞장서고 혹은 쟁기를 놓고 논두렁에서 일어나서라. 힘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는 오직 의(義)의 길로 나아갈 뿐이니, 임금을 위해 난리를 막을 자 있다면 나는 그와 더불어 함께 일어날 것을 맹세하노라. 생각하니 행궁(行宮)이 아득하다, 서토(西土)여! 그곳 풍속의 아름다움은 멀리 기자(箕子) 때부터 비롯되었고, 군사가 강하여 일찍이 수(隋)와 당(唐)의 백만 대군을 꺾었도다. 조정의 계획이 장차 정해질 것이니 국가가 어찌 한 구석에서만 있을 수 있겠는가. 패배해도 잘만 하면 망하지 않으니, 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에서 운수가 열리나니 사람들이 노래하며 한(漢) 나라를 더욱 생각하도다. 여러 호걸들이 시국을 바로잡으니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울던 일은 없을 것이며, 백성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서울로 돌아오는 임금 행차를 보게 되리로다. 마땅히 힘을 내어 앞장서기를 바라면서 마음을 터놓고 간절히 고하노라.
격문(檄文)이 이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감격하여 울면서 분연히 궐기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이 또 조정에 글을 올려 이광(李洸)의 죄를 따지고, 여러 고을 수령들과 더불어 의병을 거느리고 김천일(金千鎰)의 뒤를 이어 출동하면서 개연히 장단(將壇)에 올라 늙고 병든 것을 사양치 않으니, 응모하는 자가 날로 모여들었다.
고경명(高敬命)이 집에 있을 때,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금년에는 장성(將星)이 불길하니 장수는 반드시 불길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금년에 반드시 횡액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족의 일을 부탁하고 전주에서부터 북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때에 의병이 모두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모였는데 여러 도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김천일이 의병들에게 타이르기를,
“우리 군사는 의거한 것이니, 전진만이 있고 후퇴는 없다.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음대로 가라.”
하니, 모두가 감격하고 분발하여 아무도 몰래 도망하지 아니하고 흩어졌던 군사들도 점점 돌아왔다.
호서(湖西)에 당도했을 적에는 군사가 수천을 헤아렸다. 드디어 진군하여 수원에 둔(屯)을 치니 군세가 크게 떨치었다. 이에 장사들을 모아 이따금 출격하여 전과가 있었으며, 또 금령(金嶺)의 적을 습격하여 물리치고, 막하의 선비 양산숙(梁山璹) 등을 보내어 상소를 받들고 샛길로 행재소에 가게 하였다.
양산숙(梁山璹)은 자는 회원(會元)인데, 기묘 명현 홍문관 교리 양팽손(梁彭孫)의 손자요, 부윤 양응정(梁應鼎)의 셋째 아들이다.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시사(時事)가 날로 그릇됨을 보고 과거에 뜻을 버리고 나주(羅州) 삼향리(三鄕里)에 은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모였다. 이때에 지방의 장수들이 매양 의병의 활동을 저지하려 들고 적은 더욱 성하게 몰려들자 김천일은 보좌관들과 상의하여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마침 전라 병사 최원(崔遠)도 본도의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중로(中路)에 이르렀는데, 군의 정세가 갑자기 크게 변하여 하루에 50명을 참수(斬首)하여 필사의 뜻을 보여도 오히려 중지시키지를 못하니 김천일(金千鎰)과 합군(合軍)하여 강화도에 들어가서 사졸로 하여금 건너가지 못하게 하고 해를 넘겨 애써 지키니,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으나 그 뜻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신하로서 절개를 잃지 않은 사람은 오직 최원(崔遠)뿐이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金千鎰)이 먼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창의사(倡義使)라는 호를 내려 가상히 여겼다. 도망을 갔던 관리들도 김천일이 왔다는 말을 듣고 점점 모여들었으며, 경기의 백성들은 있는 곳마다 단결하여 모두 의병이라 칭하고 호응하였다. 김천일은 이에 군과 약속하고 강변에 목책을 만들어 세우고 전수(戰守)의 차비를 하였다. 이때에 왜적은 경성을 점거한 지 이미 오래이므로, 백성들이 피란을 했다가 서울에 많이 돌아와서 적과 섞여 살고 있었다. 김천일은 이에 결사대를 모집하여 성중에 잠입하여 순역(順逆)과 이해를 들어 효유하니, 사람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여 김천일에게 경비(經費)를 보내는 자가 수만이었고, 혹은 몰래 적을 죽여서 그 목을 바치기도 하며 자진하여 돌아오는 자가 또한 하루도 수백 명이나 되었고, 임시 막사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김천일이 때때로 출병하여 공격하니 강의 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병이 잇달아 도망하였다. 김천일은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전선 4백 척으로 강을 거슬러 직상하여 양화도(楊花渡) 나루에서 북을 치면서 군사의 위세를 보이며 수길(秀吉)의 죄상을 들어 강위에 방을 써서 걸고 성안의 도적에게 도전하였으나, 적은 끝내 발동하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열렬하다 창의공이여 / 烈烈倡義公
충분이 흰 태양을 꿰었도다 / 忠憤貫白日
여러 군졸을 규합하여 / 糾合百千卒
범과 이리의 소굴로 내달았도다 / 直趨虎豺窟
험준한 곳에 의거하니 천연의 요새요 / 據險天塹在
목책을 가설하니 용맹한 군사가 들어섰도다 / 設柵豼貅列
적장들이 서로 혀를 깨물면서 / 衆酋爭咋舌
화살 하나 감히 쏘지 못하도다 / 一矢不敢發
그때에 고경명(高敬命)의 군사는 여산(礪山)에 머물렀는데,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던 차에 조령의 적이 나뉘어 황간(黃澗)으로 향하여 금산(錦山)으로 넘어와서 군수가 전사하였으며 적세가 창궐하다는 소문을 듣고, 휘하의 사병들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기를 청하였다. 고경명 역시 그렇게 여기고 드디어 진산(珍山)으로 병사를 옮겨 금산의 왜적을 치려 하였다.
이때에 정예 군사가 많이 응모하여 군사의 성세는 더욱 떨치었다. 전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가 고경명(高敬命)에게 말하기를,
“금산에 있는 적은 그 수가 수만(數萬)인데 우리 군사들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코 막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제군(諸軍)과 함께 힘을 합해 험준한 곳에 의지해 분산해 있다가 적이 교만하고 게을러지면 정예한 군사를 뽑아 사면에서 공격함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유팽로(柳彭老)는 한쪽 눈이 멀었고 용모가 잘 생기지 못하여 막하의 군사가 모두 업신여겨 끝내 그의 계책은 쓰이지 아니하였다.
○ 유팽로는 자는 군수(君壽)인데, 옥과현(玉果縣) 사람으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문과에 오른 지 수년이었으나 벼슬에 나아갈 생각을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유하면,
“내가 벼슬을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억지로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파리나 개처럼 작은 이익에 악착스레 구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하였다. 세리(勢利)에 담박하기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그의 어진 것을 모르고 홀대하였다. 완산(完山 전주)의 형세가 날로 위급하자 군사들이 모두 가서 구하고자 하므로 고경명은 부득이 군사를 나누어 금산(錦山)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언약하고 좌우익(左右翼)이 되어서 정예한 기병(騎兵) 수백을 내어 적의 소굴을 바로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고경명이 북을 울려 독전하니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앞장서서 적을 토성 안으로 몰아넣고 성밖의 집들을 전부 불지르고, 또 진천뢰(震天雷)를 쏘아서 성안의 가옥들도 불태우니 성세가 매우 웅장하였는데, 적에게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힘껏 물을 길어 불을 끄고 적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출해 나왔으나 의병이 사면으로 에워싸고 공격하여,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감히 나오지를 못하였다. 그때 마침 해는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을 도와주지 아니하고 성은 단단하여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으므로 군사를 물려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서 다음날 합세하여 싸우기를 약속하였다. 고경명의 장자(長子) 종후(從厚)가 고경명에게 말하기를,
“아군이 승리하였으니, 이 승세를 지니고 군사를 완전히 후퇴시켰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나와 공격함이 옳겠습니다. 만약 많은 적과 대치하면서 들에 묵으면 밤에 습격을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하니, 고경명은 말하기를,
“네가 부자(父子)의 정으로 나를 걱정하느냐. 나는 싸워 죽을 따름이다.”
하자 종후(從厚)는 다시 말을 못하고 물러갔다. 방어사는 싸우지 않은 여러 장수들에게 벌을 내리고 다음날 다시 싸우도록 하였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야간기습을 모의하였는데, 염탐하던 의병이 갑자기 냇가에서 사람과 말[馬]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밭 가운데 엎드려 나가 동정을 살피었다. 적병 중에 먼저 밭 가운데 매복하고 있던 자가 의병이 그들의 계획을 발각하였음을 알고 달아나버렸다. 다음날 방어사와 함께 진병하여 적진 5리쯤 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고경명이 먼저 기병 8백여 명을 보내어 싸움을 걸자 적이 성을 비우고 나와서 바로 관군(官軍)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 김성헌(金成憲)은 말을 몰아 먼저 달아나고, 적이 또 광주(光州)와 흥덕(興德)두 진을 공격하니, 방어사는 멀리서 형세만 보고 흩어져버렸다. 고경명은 혼자 감당할 생각으로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잔뜩 당기고 기다리게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지르기를,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
하고 외치니, 의병의 진이 따라서 무너졌다. 고경명이 앉은 채로 일어나지 아니하고,
“나는 말타는 데 숙달하지 못하고 오늘 싸움에 패했으니,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하였다. 막하의 군사 안영(安瑛) 등이 고경명을 말에 오르기를 청하면서,
“이번에 한번 후퇴하였다가 다시 뒷날 의거하기를 도모함이 옳습니다.”
하니, 고경명은,
“내 어찌 구차히 모면하랴. 그대는 빨리 빠져나가라.”
하였다. 휘하의 군사가 억지로 부축하여 말에 앉히었는데, 말이 달아나서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지니, 안영이 말에서 내려 고경명에게 말을 주고 도보로 따라갔다. 적이 급하게 달려들어 고경명은 위급하게 되었다. 종사(從事)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빠져나가면서 그 하인을 돌아보고 대장이 벗어났느냐고 물으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급히 말을 몰아 되돌아 들어가서 고경명을 따르고자 하니, 하인이 말고삐를 끌어잡고 울면서 말리었다. 유팽로가 듣지 아니하고 칼로 하인을 찍으려 하니, 하인이 부득이 말고삐를 놓고 그뒤를 따랐다. 고경명은 유팽로가 다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빨리 달려 나가라.”
하니, 유팽로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차마 대장을 버리고 홀로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하였다. 적이 경명에게 달려드니 유팽로와 안영이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다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 안영(安瑛)은 자는 원서(元瑞)인데, 기묘 명류 홍문관 교리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이고,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이다. 남원에 살았는데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였다. 이때에 바야흐로 남원에 있었고 어머니는 서울에 있었는데, 길이 막혀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화도로 들어가 어머니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하였는데,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막하에 들어갔다. 막하의 제생들이 큰 소리만 치면서 그를 깔보았지만 안영은 아무 말 없이 대오에 따랐을 뿐이었다. 싸움에 패하자 제생(諸生)들은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으나 안영만은 가지 아니하였다. 그때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는 무사를 거느리고 앞줄에 서서 화살 속을 드나들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걸상에 의지하고 인솔한 대열을 정돈하여 돌격전을 벌이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
고경명의 장자(長子) 고종후(高從厚)가 경명의 시체를 수습하여 산사(山寺)에 임시로 장사지내고, 다시 흩어진 무리를 수습하여, 복수군(復讐軍)이라 호칭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경명 등이 양산숙(梁山璹)을 행재소에 보내었는데, 그가 돌아올 때 왕은 친히 불러보고 이르기를,
“돌아가면 고경명 등에게 말하여 빨리 국가를 회복하여 나로 하여금 너희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있게 하라.”
하고, 고경명에게 공조 참의 지제교 겸초토사의 벼슬을 제수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주어 위로하였다.
내가 임금 노릇을 잘못하여 백성을 편안해 살 수 있게 하지를 못하였도다. 첫째로 인화(人和)를 잃었고 또 오랑캐를 막는 데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도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나온 지 이미 달을 넘겼도다. 종묘사직이 빈 터가 되고 생령(生靈)이 죽었으니, 아아! 이 무슨 일인가. 그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실로 한없이 부끄럽도다. 서남(西南)은 멀고 아득하여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는데, 이번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에서 무너졌다고 들리니 다시는 남쪽을 바라며 구해 주기를 기대하던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도다. 그런데 이에 양산숙(梁山璹) 등이 해상과 육지를 거쳐 이곳에 진달하여, 너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병마(兵馬)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둔을 쳤다고 하니, 나같이 부덕(不德)한 사람이 어찌 이처럼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단 말인가? 우리 조종(祖宗) 2백 년의 깊고 두터운 인택(仁澤)이 인심을 감격시킴이 지극한 것이니, 내 매우 기쁘도다. 그래서 곧 양산숙(梁山璹) 등을 군중(軍中)으로 돌려보내니 너희들은 나의 고충을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내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다. 비록 인덕(仁德)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혜택이 아래까지 다하지 못하였으며,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정사는 실수가 많았으나 내 본심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을 본의로 알았다. 근년에 들어 변방에 소란이 많고 군정(軍政)이 느슨해진 것을 보면서도 도리어 생각하기를, ‘성과 해자가 높고 깊으며 갑옷과 병기가 굳고 날카로우면 오랑캐와 도적을 막을 수 있다.’ 하고, 중외(中外)에 신칙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도록 하였으나, 성이 높을수록 국세는 날로 줄고, 참호가 깊을수록 백성의 원망은 날로 더해져서 뽕잎 떨어지듯 기왓장 부서지듯이 이 지경이 될 줄이야 실로 헤아리지 못하였도다. 더구나 궁중을 엄밀하게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을 속이고 작은 이익을 취했으며, 왕자(王子)는 산택(山澤)의 이권을 독점하고 백성은 생업을 잃었으니, 백성이 나를 원수로 여긴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이미 유사에게 명하여 모두 다 혁파하고 반환하도록 하였지만, 이러한 것들을 어찌 내가 다 알고 있었겠는가? 알지 못한다는 것도 나의 허물이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후회한들 어찌하랴. 차라리 스스로 희생이 되어 천지와 종사(宗社)와 백신(百神)의 신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가 손가락을 깨물며 후회하기를 이미 이와 같이 하였으니, 바라건대, 네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정치를 계획하도록 허락해 주기 바라노라. 나의 실덕(失德)은 대략 개진(開陳)하였거니와, 이번 재난은 실로 뜻밖의 일이로다. 무지하고 흉악한 왜적이 천자의 나라를 칠 꾀를 생각하고, 나에게 역당이 되라, 길을 빌리자 하기에, 내 의리를 들어 거절하였더니, 흉악한 짐승같은 마음으로 나의 큰 덕을 저버리고 작은 원망을 맺으려고 하는도다. 내 생각하건대, 종묘사직이 망하고 신민은 버릴지라도 군신(君臣)의 직분은 천지가 살피는 바이니,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흉중을 태양 아래에 드러내어 천지신명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기에,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천조(天朝)에 호소하였도다. 황제께서 성명(聖明)하시어 나의 지극한 뜻을 살피고, 요동 총병관 조승훈(祖承訓)을 보내어 유격장군과 마병(馬兵) 1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고 서울의 적을 소탕하고자 하였고, 또 강소(江蘇)와 절강의 선봉군사 6천 명이 조석을 앞두고 강을 건너올 것이며, 본도의 병마 또한 수만 명이 모였으니, 천자의 위엄과 성세가 미치는 곳에 군사는 마땅히 더욱 분발할 것인데 하물며 궁지에 몰린 오랑캐는 죄악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천벌이 당연히 가해져야 할 것이다. 평양의 왜적은 기세가 이미 꺾이어 섬멸을 당하게 되었도다. 맑은 가을이 다가오고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으니, 군대의 위용이 있는 곳에 살기(殺氣)는 순해지고, 충의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이기지 못하랴. 너희들은 이미 경기 땅에 있으니, 형세를 살펴 군사를 합쳐서 서울을 수복하기 원하노니! 네가 힘쓰지 않으면 내 또 누구를 의지하랴. 군량이 모자라면 경기ㆍ호남에 있는 창고의 것을 네 마음대로 가져다가 공급하고, 군기(軍器)가 다하면 경기ㆍ호남의 병장기를 네 마음대로 가져다 쓰면서 각기 힘쓰도록 하라.
이제 고경명에게 공조 참의를 제수하고 초토사의 관직을 더하며, 김천일에게는 장예원 판결사에 올려 창의사(倡義使)를 더하고, 박광옥(朴光玉) 등 이하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관직을 올려주노라. 너의 충의를 생각하면 작상(爵賞)을 바라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 일은 이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받아줄 것이며, 더욱더 힘쓰기를 바라노라. 용만(龍灣) 한 구석에 국운(國運)이 어렵게 버티고 내 땅 경계는 끝났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꼬. 인정(人情)이 이미 끝에 달했으니, 이치가 당연히 수복되기를 그리워할 것이다. 가을 기운이 잠깐 일어나니, 변지(邊地)의 날씨는 일찍 차도다. 장강(長江)을 바라보니 또한 동으로 흐르는데, 돌아가고자 하는 일념(一念)은 강물처럼 도도하구나. 교시가 이르면 너희 신민들은 반드시 나의 뜻을 가련하게 여기고 슬퍼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이성(李晟)을 낸 것은 성궐(城闕)을 다시 회복할 날을 기대하게 한 것이고, 날마다 장준(張俊)을 바라는 것은 원릉(園陵)이 무사하다는 기별을 기다림이라. 하루 빨리 이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이슬과 서리를 맞는 나의 고통을 면하게 하기를 바라노라. 이에 교시하노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양산숙(梁山璹) 등이 고경명(高敬命)의 군진에 돌아오니, 고경명은 이미 죽었었다. 양산숙이 이에 교서를 반포하여 선유하니, 남은 군사와 백성, 억센 장수와 완악한 졸개까지도 울지 않는 이가 없으니 사람들이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에서 내린 애조(哀詔)에 비유하였다. 양산숙은 이에 강도(江都)로 돌아가 김천일의 군진에 들어갔다.
고경명은 폐거(廢居)하고 있던 사대부로 하루아침에 의기를 떨쳐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는 무리를 불러 모았으니, 일은 비록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의열(義烈)은 빛나 두터운 봉록을 먹는 계획없는 관리들이 부끄럽게 될 것이다. 조정에서는 고경명의 죽음을 듣고 탄식하며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임금도 역시 슬퍼하여 고경명에게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성균관사의 증직을 내리도록 명하고, 고인후(高因厚)에게는 예조 참의를, 유팽로(柳彭老)에게는 사간원 사간을, 안영(安瑛)에게는 장악원 첨정을 증직하여 광주(光州)에 사당을 짓게 하고,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하여 세시(歲時)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또한 모두 분향하고 술을 올렸으니, 그의 충의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고종후(高從厚)가 의병을 다시 모아 여러 도(道)에 격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20년(1592, 선조 25) 월 일, 복수 의병장 전 임피 현령(臨陂縣令) 고종후(高從厚)는 피눈물로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열읍 의병청(義兵廳)의 제공들과 여러 군자들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고자(孤子)는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설욕하기 위하여 기병하여 절에 있는 종들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어 그 수가 실로 많으나 열읍을 두루 다니기는 나로서 너무도 겨를이 없으므로 다만 관리의 힘만을 의뢰하고 있는 형편이라 행군할 시기를 놓칠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가지고 감히 당세(當世)의 의사(義士)들에게 고합니다. 혹시 문서나 장부에 유의하여 사리(事理)에 방해됨이 있지나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계책상 부득이한 일이긴 하나 역시 죄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고자(孤子)는 집이 본래 가난하여 왕통(王通)의 헐어빠진 움막집이 있을 뿐이요, 성품조차 소활하여 자공(子貢)과 같은 재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도적만은 잊을 수가 없어서 이에 감히 금혁(金革)의 변례(變禮 긴급한 경우 예를 변경함)로 상복을 벗고 군대에 나선 것인데 호걸로서 대열에 참여한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국가의 원한 깊은 원수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재물이 부족하면 군사를 모을 수 없고, 병기가 날카롭지 못하면 적을 누를 수가 없습니다.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감히 안공(顔公)처럼 미곡(米糓)을 애걸하고 맨 땅에 빈 손으로 일어나니, 조적(祖逖)처럼 병기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군사들이 배를 주리게 되면 어찌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겠습니까?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 사는 이상 결코 제 한 몸이 잘되기를 꾀하는 것이 아니요, 맨주먹을 휘두르고 칼날을 무릅쓰니 천리(千里)를 싸워 나가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오직 죽은 이를 위하여 한번 씻고자 함인데, 어찌 힘있는 분들이 가만히 앉아 바라만 볼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 한 도(道)의 제장(諸將)들이 누군들 나라의 백성이 아니리오. 단에 올라 피로써 맹세하니, 혹은 죽은 어버이에게 의기를 허락하고 어깨를 치고 소매를 끌어잡는 사람 중에는 역시 고자(孤子)에게 연분이 있습니다. 비록 얼굴을 대해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만은 서로 접속되고 있는 처지이니, 백세(百世)나 떨어져도 감응이 있는 자도 있는데 하물며 같은 시대에 태어났음에 있어서랴. 이번 6월의 군대 출동은 결사적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몸소 먼저 무부가 되어 비록 훈업(勳業)을 생전에 다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인륜을 유지해서 그 의열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날 것이니, 이는 한 집안의 사론(私論)이 아니요, 백세의 공론(公論)이라 하겠습니다. 저 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을 흘리거늘 하물며 선비들에 있어서 어찌 슬픈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의(義)를 사모하고 인(仁)을 힘써 행한다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여야 할 것입니다. 수전노가 되기보다는 남의 급한 것을 구해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비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아우를 격려하니 어찌 월(越) 나라가 진(秦) 나라 여윈 것을 바라보듯하겠으며, 현(縣)이 다르고 군(郡)이 다르다 하여 저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여기지를 마십시오. 사해(四海)는 모두 우리의 형제들이니 한 말의 곡식도 오히려 방아찧어 나누어 먹을 수 있고, 작은 고을이라도 충신이 있다하였으니 한 세상을 속여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옛말에도 있으니 여러분은 들으십시오. 한 삼태기의 흙이 산이 되고, 한 치의 쇠붙이도 사람을 죽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각자가 자기 힘에 따라 할 것이니 어찌 다 구비하기를 바라리오. 글로써 성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여기에서 말을 마치겠습니다. 악의의 전[樂毅傳]을 읽으면 반드시 책을 놓고 울 것이며, 노숙(魯肅)이 창고를 털어주듯 하면 소문을 듣고 일어날 것입니다. 자산과 기계를 내어 서로 도와주시려고 하시면 여러분은 성명을 이어 서명하소서.
○ 격문이 이웃 고을에 전해지자, 사인(士人)과 무졸(武卒)들이 눈물을 뿌리며 의리를 사모하고 모여 들었다. 그 중에서 드러낼 만한 사람으로는, 정자(正字) 오빈(吳玭)이 있었는데, 광주(光州) 사람으로 의기를 자부하여 일찍이 고씨(高氏) 문중의 충효를 흠모하다가 이에 종사(從事)가 되었고, 김인혼(金麟渾)은 진원(珍原) 사람으로 하서선생(河西先生) 김인후(金麟厚)의 종제(從弟)인데, 담력과 꾀가 있어 막하의 참모가 되었으며, 오유(吳宥)는 보성(寶城) 사람으로 처음에 원수의 막하에 있다가 의리를 사모하여 와서 부장이 되었다.
그때에 권율도 본진의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근왕하러 갔다. 처음에 권율이 용인(龍仁)으로부터 본진에 돌아와서 이광(李洸)의 명령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주장(主將)이 응당 분부가 있을 것이니, 군대의 대열을 정리하고 기다리라.”
하였더니, 오래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권율이 개연히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고 왕이 파천해 계시는데 신하로서 어찌 국가의 멸망을 편안히 앉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으랴?”
하고, 경내의 자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또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1천여 명을 더 얻어서 경상도 경계로 나아갔다가 남원의 백성들이 집과 부락을 불태우고 관아의 창고를 약탈한다는 말을 듣고 권율이 곧 남원으로 이동하여 인심을 안정시키고 난민을 단속하였다. 순찰사 이광(李洸)이 남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권율을 임시로 본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라 칭하고, 제군(諸軍)을 독려하여 난동하는 것을 막게 하였다. 권율이 사기(士氣)를 안정시키고 격려하니 군의 위세는 날로 성하고, 제장은 부서(部署)를 정하여 배치하는데 모두 법도가 있었으며, 은혜와 위엄을 함께 시행하니 호령은 명확하고 엄숙하며, 진중에 임하여 군사와 맹세할 적에는 의로운 빛이 얼굴에 나타나니 사졸들이 용기를 떨쳐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곧 군대를 이현(梨峴)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영남의 적세는 매우 창궐하여 곧장 전라도를 공격하여 군병을 나누어 쳐들어왔다. 은 적세가 심히 성하다는 말을 듣고 영(嶺)을 의지하여 진을 굳건히 하고 군사를 엄밀히 단속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하루는 잿마루에서 적과 만나자 군사를 풀어서 급히 공격하였다.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은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이었는데, 돌격전을 벌이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후퇴하니 온 군사가 기세가 꺾여 투지가 없이 칼을 감추고 머리를 싸고 슬슬 달아나므로 군중이 흉흉하였다. 저녁때 왜적은 우리 군사가 지친 틈을 타서 우리의 성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권율이 칼을 빼어 크게 호통을 치며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독전하니, 사졸들이 모두 용감하게 달려 나가 성위에 뛰어올라 힘껏 막아내는데,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웠다. 이에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화살과 돌은 빗발치듯 하니 적이 감당하지 못하고 드디어 갑옷을 벗어버리고 시체를 끌고 달아났는데, 땅에 버려진 군수 물품과 병장기가 낭자하였고 피는 흘러 길을 덮었다. 왜적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남을 근본으로 삼아 국가의 보장(保障 울타리)이 되었으며, 수년 사이에 동서(東西)로 나누어 군비를 공급하여 끊어지지 않게 한 것은 권율의 힘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목사가 관청에 이르기 전에 본도의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권율이 방어사로 하여금 대신 이치(梨峙)를 지키게 하고 자기는 직접 전주에 이르러 도내의 군사 만여 명을 출동시켜 서쪽으로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 왜적의 괴수 행장(行長)은 이미 평양을 빼앗아 성을 점거하고 있었고, 장정(長政)은 황해도를, 융경(隆景)은 개성부를, 평수가(平秀嘉)는 제추(諸酋)를 독솔하여 대병을 이끌고 경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병사를 풀어놓아 사방을 약탈하므로 서로(西路)가 이미 막혀 근왕하는 여러 장수들은 모두 강화도에 들어가 강을 요새로 적병을 피하고 있었다. 주상께서 의주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은 모두 적진인데 서울은 근본이 되는 땅이니, 서울을 먼저 수복하기만 못하다. 그리고 행장(行長)의 뒤를 끊어서 동쪽을 돌아보며 의심하게 하여 마음놓고 서진(西進)하지 못하도록 하면 적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만약 강도(江都)로 들어간다면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수원의 독성(禿城)에 진주하였다. 주상께서 권율이 독성에 진주하였다는 말을 듣고 차고 있던 칼을 풀어서 급히 내려보내며 이르기를,
“제장들 중에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다스려라.”
하였다. 권율은 주상의 명을 받고 날로 사졸을 독려하니, 평수가(平秀嘉)는 그 병세가 매우 날카로움을 꺼려 수만의 군대를 세 진으로 나누어 오산역(烏山驛) 등지에 진을 치고 왕래하며 도전하였다. 권율은 성벽을 단단히 하고 굳게 지키며 교전하지 아니하고 간혹 기병(奇兵)을 보내어 적을 대응하여 가는 곳마다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다. 적의 계책은 완전히 실패되어 약탈할 곳조차 없게 되자 며칠 뒤에 병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망하고, 기내(畿內)의 여러 왜적도 차례로 성안으로 들어가버리니, 이로부터 서로(西路)가 통하게 되었고 여러 군(郡)의 의병이 소문을 듣고 봉기하여 일시에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다. 지금에 와서 중흥의 공을 논하자면 권율이 으뜸이라 하겠다.
○ 이순신(李舜臣)도 가리포(加里浦)에서 전라도 좌수영(左水營)에 달려가서 군사를 훈련하고 병선을 정돈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적병이 이미 육지에 내려 여러 군(郡)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별다른 계책이 나지 않으므로 노량(露梁) 어귀에 배를 배열하여 적의 오는 길목을 막고 성을 수축하여 지키고자 하다가 또 본도를 굳게 지켜 한산(閑山) 어귀를 엿보지 못하게 하려고도 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글을 띄워 일어나고, 또 자신이 달려와서 바다로 내려갈 계획을 힘껏 찬동하였다.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이순신의 군관(軍官) 송희립(宋希立)이 발분하여 죽음을 걸고 힘을 다할 것을 자원하며 강개한 언사로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영남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니 그 기세가 반드시 수륙으로 닥쳐올 것인데, 공은 어찌 이다지 신중하기만 하십니까? 공이 출전하시면 정운(鄭運) 등이 선봉으로 나가겠습니다.”
하였다. 이순신은 정운(鄭運) 등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5월 초 4일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려면서도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고, 전선 백여 척 및 화포(火砲)와 군기를 바다 속에 다 던지고 수하의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ㆍ이운룡(李雲龍) 등을 거느리고 네 척의 배에 타고 곤양(昆陽) 해구(海口)로 가서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고자 하니, 수군 만여 명이 모두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었다. 이영남(李英男)이 간언하기를,
“공이 왕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나갔다가 후일 조정에서 죄를 내릴 때 어떻게 해명하겠습니까? 전라도에 청병하여 적과 한번 싸워 이기지 못한 뒤에 도망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원균이 옳게 여기고 이영남(李英男)을 시켜 이순신에게 가서 청병을 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각기 분계가 있는데 만약 조정의 명령이 없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월경(越境)할 수 있겠는가.”
하고 사절하였다. 원균이 다시 이영남을 보내어 청하기를 무릇 오륙 차나 왕래를 하였다. 이영남이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그뒤 이순신은 배 4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閑山島)에 나와서 원균의 군사와 함께 옥포(玉浦)에 이르니 앞바다에 적의 전함 30여 척이 있는데 사면을 장막으로 두르고 백기와 홍기를 세우고 바다 가운데 정박하고 있고, 유격병을 분산시켜 해안에 올라가서 가옥을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산에 가득하였다. 왜적이 우리 군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 일시에 배에 올라 급히 노를 저어 나와 해양 중에서 이순신의 군사와 교전하게 되었다. 이순신 등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적선에 육박하여 화통(火筒)과 화전(火箭)을 바람을 따라 일시에 쏘아대니 적선 36척이 불타고 바다 물결이 모두 붉었다. 왜적은 패하여 물러갔으나 정운(鄭運)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아군은 징을 쳐서 철수하고, 다음날 다시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때마침 서쪽에서 온 사람이 왕이 서행(西幸)하였다고 전하므로 이에 각 군은 본진으로 돌아왔다. 승첩한 소식이 행재소에 알려지니 백관이 옷깃을 여미고 서로 축하하며 이순신을 가선대부로 올려 포장하였다. 하루는 이순신의 꿈에 백발의 늙은이가 이순신을 깨워 일으키면서 ‘적이 왔다.’ 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벌떡 일어나 급히 전함 23척을 거느리고 노량(露梁)에서 원균과 만났는데, 적이 과연 이순신의 배를 엄습해 오므로 이순신이 북을 울려 교전하여 적선 한 척을 불태우고 사천(泗川) 바다 가운데로 쫓아가니 멀리 해상에 산이 하나 보이고 백 명의 왜적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그 밑에 11척의 연안을 따라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에 아침 조수는 이미 밀려가고 항구의 물은 얕아서 배가 전진할 수 없으므로 이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물이 얕고 바다가 좁아서 배를 돌리기 어려우니 거짓 물러나는 척하고 적을 유인하여 바다의 넓은 곳에 이르렀을 때 큰 배로 돌아서서 치면 승전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은 분이 나서 바로 쫓아가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을 모릅니다. 그렇게 하여서는 반드시 패합니다.”
하고, 곧 소라를 불고 기를 휘둘러 후퇴하였다. 1리를 못 가서 적이 배를 타고 쫓아왔다. 이윽고 좁고 험한 길목에 다다르자 이순신이 북은 한번 크게 쳐 여러 배가 일제히 돌아서서 바다 가운데에서 늘어서니, 바로 적선과 수십 보의 거리에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순신이 본영에 있을 적에 늘 왜구를 근심하고 새로운 법으로 따로 배를 만들었으니 위에 판으로 덮어 마치 형상이 엎드린 거북과 같고, 노를 젖는 자는 그 안에 있는데 여장(女墻 성위의 얕은 담)이 가로막힌 것 같으며, 좌우 전후로는 화포(火炮)를 많이 싣고 종횡으로 출입하여 베짜는 북과도 같고 물오리 같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돌진시켜 먼저 적진을 시험하고 적선 12척을 불사르니 남은 왜적이 멀리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한참 싸우고 있는데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어깨에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활과 화살을 쥐고 독전하였는데 전쟁이 끝나고서야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철환(鐵丸)을 파내니, 온 군사들이 비로소 알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포(唐浦)까지 추격하였는데 또 적선 20척이 강 언덕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큰 배가 한 척 있는데 위에는 층루를 설치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 장막이 드리워졌는데, 적의 괴수 한 사람이 금관을 쓰고 금의(錦衣)를 입고서 모든 적병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제장으로 하여금 노를 저어 바로 돌격하게 하고, 순천 부사 권준(權俊)은 아래서 위를 쳐다보며 화살을 쏘아 그 괴수를 명중시키니, 왜적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온 군사가 환성을 올리고 해가 저물자, 사량(蛇梁) 앞바다로 회진(回陣)하였다. 군중에서는 갑자기 밤에 놀라 소란을 피웠으나 이순신은 꼼짝 않고 누웠다가 한참 뒤에 방울을 흔들게 하니, 군중이 안정되었다. 얼마 아니되어 다시 당항(唐項) 앞바다로 나갔는데 전라 우병사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왔다. 제장들이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간 것을 염려하던 차에 이억기의 군사가 오니, 모두 기운이 더욱 났다. 이튿날 모든 군사가 바깥 바다로 나가니 적은 당항 앞 포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이 먼저 순찰하는 배를 보내어 형세를 탐지하게 하였더니 초선이 겨우 바다 어귀에 나가자마자 곧 신호포를 쏘아 적이 있음을 알리므로 여러 군사가 일시에 노를 급히 저어 고기 꿰미처럼 잇달아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항구에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3층으로 판각(板閣)을 짓고 밖에 검은 비단 장막을 드리웠으며, 앞에는 푸른 일산이 세워졌는데 멀리 장막 안을 보면 은은히 시립(侍立)하고 있는 모양이 보여 그가 두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몇 번 결전도 하지도 않고 이순신이 거짓 패한 체하고 물러나니, 층각 있는 큰 배가 아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돛을 올리고 바로 따라왔다. 모든 군사가 양쪽에서 공격하여 날랜 기운으로 적을 무너뜨리니, 적의 괴수가 화살에 맞아 죽고 왜선 백여 척을 불태우고, 적병 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기별이 행재소에 알려지니, 이순신은 자헌대부로, 이억기(李億祺)는 가선대부로 올렸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흉적이 바다 가운데 출몰하는데 / 鯨鯢出沒海之央
그 사나움을 누가 한 손으로 막아내랴 / 狂浪誰能一手障
눈물을 뿌리며 배에 오르니 하늘 또한 노하는데 / 洒泣登舟天亦怒
중류에서 노를 저으니 해도 빛을 감추었네 / 中流擊楫日無光
백우선을 휘두르니 삼군이 출동하고 / 暫揮白羽三軍動
금투구를 쓰니 여러 요귀가 숨구나 / 乍着金兜衆妖藏
고개 돌리니 동한 땅에 날랜 장수 있어 / 回首東韓飛將在
웅장한 이름은 천고에 빛나리 / 雄名千古汗靑芳
그때에 적이 또 경상우도로부터 전주 경내에 들어오니 김제 군수 정담(鄭湛)과 해남 현감 변응정(邊應井)이 관군을 규합하여 이끌고 극력 막아서 종일 크게 싸워 적병을 많이 사살하였다. 적이 물러가려는데 때마침 해가 저물고 화살이 다하였다. 적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니 두 사람이 힘을 다하여 전사하자, 군사가 드디어 크게 무너졌다. 다음날 적이 전주성 밖에 이르니 관리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려 하는데 본 고을 사람 전 전적 이정란(李廷鸞)이 입성하여 이속(吏屬)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성첩을 굳게 지키면서 성밖에다 가짜 병사들을 많이 만들어놓고, 낮에는 깃발들을 벌여놓고 밤이면 횃불을 늘어놓아 전후의 봉우리 위에 출몰하니 적이 몇 바퀴를 돌아보고는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 또 김덕령(金德齡)은 광주(光州)에서 나왔는데, 자는 경수(景樹)요, 뛰어난 용맹이 있어서 나는 새가 넘어가지 못하고 원숭이가 오르지 못하는 곳도 몸을 솟구쳐 넘기를 평지 밟듯이 하며, 그가 타는 백마도 그 사람같아 하루 천리를 달리고 가는 곳마다 승전하고 포위를 뚫고 전진에 뛰어들기를 마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왜적들이 서로 돌아보고 어이없이 놀라며 부르기를, ‘비장군(飛將軍)이다’ 하고, 그가 지나는 곳에는 모두 칼을 거두고 피하며 감히 교전하지 못하니,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쳐, 용사와 무부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드디어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남에 진입하였는데, 적들이 듣고 여러 곳에 유둔한 적병을 거두어 한 곳에 합쳐 대군(大軍)을 만들어 가지고 항거하였다. 그는 좌의병(左義兵) 진보 현감(眞寶縣監) 임계영(任啓英)과 서로 구원군이 되었다.
○ 현풍(玄風)의 곽재우(郭再祐)는 김덕령(金德齡)이 온 것을 보고서 또한 집안의 종들과 지방의 호걸들을 이끌고 가재(家財)를 전부 내어 군비에 제공하여 정진(鼎津)을 견고히 지키면서 많은 적을 베니 적이 자못 두려워하며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다. 적이 의령(宜寧) 땅을 넘보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곽재우(郭再祐)의 공이라 말하였다.
○ 김면(金沔)은 죽은 무장(武將) 김세문(金世文)의 아들인데, 거창(居昌) 우척현(牛脊峴)에서 적을 막고 여러 차례 적들을 물리쳤다. 조정에서 본도의 우병사로 발탁하였는데 오래 못 가서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 유종개(柳宗介)가 전사하니 예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 장사진(張士珍) 역시 군위(軍威)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매우 많이 죽이니, 적이 두려워하여 장장군(張將軍)이라 부르며 감히 그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과 서로 만나 군사를 풀어 추격하는데, 적이 복병을 하고서 유인하였다. 장사진이 승전한 기세로 밀고 나가다가 갑자기 복병한 왜적에게 빠졌으되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힘껏 싸웠다. 화살이 다하고 해는 저물었는데, 적 하나가 돌진하여 와서 장사진의 한 팔을 쳐서 자르니, 장사진은 한 쪽 팔로 분격하다가 드디어 말에서 떨어져 전사하였다. 조정에서 수군절도사를 증직하였다.
○ 처음에 박진(朴晋)이 밀양(密陽)에서 돌아와 산골에 들어가 충의군(忠義軍)을 비밀리 규합하여 동서로 출몰하여 가는 곳마다 적을 쳐서 무찌르고 시종 한결같은 절개로 절대로 굽히지 않아, 여러번 위태로운 일이 있었지만 피하지 아니했다. 조정에서는 전 병사(兵使) 이각(李珏)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하여 바로 잡아 죽이고 박진(朴晋)을 대신 병사로 삼았다. 그때에 적병은 사방에 가득하여 행조(行朝)의 소식이 남방에 통하지 않는 지 이미 오래되니, 인심이 동요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박진이 병사(兵使)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흩어졌던 백성이 차차 모여들고, 수령은 이따금 산곡(山谷) 사이에서 나타나 일을 맡으니, 비로소 조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효순(韓孝純)ㆍ이수일(李守一) 등이 선비와 백성을 규합하여 적의 길을 끊은 것도 역시 박진에게 의뢰하였다. 박진은 한편으로 군사를 수습하고 한편으로 급히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이 이로 인해서 적의 정세를 탐지할 수가 있었다. 주상께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박진의 행동을 보면 곧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 같으니 박진이 만약 죽는다면 나라 일이 잘못될 것이다. 그래서 박진같은 사람이 어찌 허무하게 죽을 이치가 있겠는가마는 의당 형세를 관찰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하여,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말하던 중에 넘쳤다. 또 활과 화살을 내리니 박진은 특별한 은혜에 감격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서 마침내 도내의 장사들을 수습하여 점차 진형을 갖추었다. 한 도의 끊어졌던 기맥을 다시 소생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적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은 박진의 공이었다. 박진은 전 봉사 권응수(權應銖)ㆍ정대임(鄭大任) 등을 시켜 향병(鄕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천(永川)에서 적을 포위하였는데, 군사들이 적을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두 사람 모두 담력과 용기가 있어 당장 몇 사람을 베고 몸을 빼어 나가 사졸들의 앞장을 서니 사졸들이 다투어 성을 넘어 들어가 크게 싸웠다. 적은 이기지 못하고 창고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명원루(明遠樓)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아군은 불을 놓아 공격하니 타죽은 자가 매우 많아 냄새가 멀리 밖까지 풍겼으며, 살아남은 왜적은 경주(慶州)로 도망쳤다. 이뒤로부터 신녕(新寧)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안동(安東) 등지의 왜적은 모두 한 지역에 모였으니, 좌도(左道)의 군읍들이 보전하게 된 것은 영천(永川) 싸움의 공이었다. 이에 박진은 좌도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慶州) 성 아래에 육박하였다. 적이 몰래 북문(北門)으로 나와 대비하기도 전에 엄습하니, 박진의 군사는 놀라고 소란해져서 안강(安康)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다시 결사대 1천여 명을 모집하여 성 밑에 잠복하고 있다가 여러 발의 진천뢰(震天雷)를 성안에 쏘아 여기저기 여러 곳에 떨어뜨렸다. 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다투어 모여들어 서로 밀치면서 구경하다가 갑자기 포가 자연 그 안에서 폭발되니,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철편(鐵片)이 별처럼 부서지면서 맞아 쓰러지는 대로 즉사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모두 폭발되니 한 포에 맞아 죽은 자가 거의 3천여 명이나 되었고, 맞지 않은 자라도 한참이나 쓰러졌다가 일어나니 적들은 놀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원인을 알지 못하고 모두 신명(神明)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드디어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은 드디어 경주에 입성하여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었다. 사실이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대부, 권응수(權應銖)는 통정대부로, 정대임(鄭大任)은 예천 군수로 올려 포상하였다.
진천뢰(震天雷)는 예전에 없던 무기인데, 군기시의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새로 창안해 낸 것이다. 마름쇠와 철편(鐵片) 등을 인화(引火) 장치와 함께 하나의 원구(圓球)로 만들어 대완구(大碗口)에 실어서 불을 던져 발사하면 5백~6백 보를 날아서 땅에 떨어진 지 한참만에 불이 그 속에서 일어나 폭발한다. 왜적이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그 제작이 어떠한지 모르니 가탄할 일이다.
○ 적의 한 부대가 다시 해현(海縣)을 돌아나와 진주를 포위하였다.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목천(木川) 사람인데, 무과에 올랐고 재략(才略)이 있고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때 마침 성안에 있었는데 성을 굳게 지킬 계획을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날 생각을 하니, 김시민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군중(軍中)에서 맹세하고, 감히 떠난다고 말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호령하였다. 그리고 경내의 사민(士民)들을 수습하여 성에 들어오게 하여 남녀를 섞어 대오를 짜고 병장기를 설치하고 깃발을 세웠는데, 적이 성 아래까지 이르러 몇 겹으로 포위하니 형세는 새알을 깨는 것과 같이 위태로웠다. 김시민은 아내와 함께 직접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성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에게 먹이고 밤낮없이 분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죽기로 싸웠다. 적은 대패하여 갑옷을 벗어버리고 무기를 끌고 달아나 감히 다시 진주를 엿보지 못하였다. 이 공으로 김시민은 진주 목사에 올랐는데 그 전투에서 날아온 탄환에 맞아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교서를 내려 본도의 군민(軍民)을 선유하였다. 교시는 다음과 같다.
군신(君臣)은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요, 충의는 인도(人道)의 대절(大節)이니, 이는 본래 가지고 있는 사람은 권면할 필요조차 없다. 하물며 영남은 신라 때부터 터전을 잡아 부로(父老)는 효제(孝弟)를 행하고 자제는 시서(詩書)를 익혔도다. 비록 난리를 겪은 뒤일지라도 어찌 분발하는 무리가 없겠는가. 중악(中岳)에서 달밤에 맹세하니 김유신(金庾信)의 칼은 절로 칼집에서 벗어나왔고, 한산(漢山)에서 적을 꺾을 때는 실로 몸에 꽂힌 화살은 고슴도치와도 같았도다. 전에 왜적이 처음 닥쳐왔을 때는 이상하게 한 사람도 창의(倡義)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장신(將臣)들이 형세를 살피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니, 실로 사민(士民)들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도다. 다투어 놀라 흩어지려 하니 불러모으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열읍은 텅 비어 한 지방이 깨졌도다. 백성은 어육이 되어 재생을 도모하지 못하고 창고는 잿더미가 되어 손을 쓸 수가 없도다. 내가 서쪽으로 옮겨온 뒤로 이미 남쪽에 대한 희망이 끊어졌더니, 어찌 너희들이 앞장서서 군사를 규합하고 고심하여 적을 토벌하며 의기가 하늘에 뻗치고 열사들이 호응하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린 밥을 모아 양식으로 삼으니 백성을 괴롭혀 모은 쌀 창고는 텅 비었고, 대를 깎아 활을 만드니 무기고의 병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진(鼎津)에서 군사가 출동하자 도망가는 적병이 정신을 잃었고, 무계(武溪)에서 접전했을 때는 떠내려가는 시체가 강에 찼었다. 관군은 어찌하여 번번이 무너지고 의병은 어찌하여 줄곧 승첩하는가. 관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형벌인데, 형(刑)이 시행되지 못하고, 의병이 맺어진 것은 의(義)인데 의는 물러나기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과 해자를 만드는 공사를 그만두고 민력을 후히 기르며, 절진(節鎭)을 봉하는 일을 그만두고 군사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킬 줄을 미리 알았던들 떠다니는 혼령들이 어찌 동래(東萊) 들녘에 흩어지며, 독한 칼끝이 어찌 평양성에 이를 수가 있었으랴.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니 후회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번에 본도의 배지인(陪持人 지방 관아의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가던 사람) 강만혼(姜萬渾)이 돌아가는 길에 한 장의 과인의 잘못을 서술한 교서로 천리 밖의 내 마음을 전하였으나, 바다와 산을 무사히 거쳐서 진중에 선포가 되었는지 모르겠도다. 이에 최원(崔遠)의 군중에 부탁하여 나의 뜻을 설명하여 알리노니, 적정을 계속 염탐하라. 너희들이 나의 글을 볼 것이니, 나의 회포를 어이 다하랴. 성천(城川)의 이슬과 서리에 종묘사직의 쓸쓸함을 민망히 생각하고, 의주 강가에 장전(帳殿)의 소슬함을 부치는도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귀천이 다를 것이 없으니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조석으로 간절하도다.
천조(天朝)에서 가엾게 여겨 맹장들에게 명령을 내렸으니 명 나라 군사가 이르는 곳에 산악도 빛을 띠우리라. 가을날은 맑고 길은 마르니 바로 오랑캐를 사로잡을 때요,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줄일 시기로다. 철마(鐵馬)는 대정(大定)ㆍ청천(晴川)에 뻗치었고 군함은 등래(登萊)ㆍ강절(江浙)에 줄지었도다. 미친 오랑캐가 죄악을 쌓았으니 천벌이 내려져야 할 것인데, 하물며 우리의 의병과 열사들이 경기ㆍ황해ㆍ충청도에서 일어났음에랴. 곳곳에서 적을 베고 날로 전과를 올리니, 실로 천지가 말없이 도와주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국가 재건의 기회로다. 바라노니 그대들이여! 더욱 정충(精忠)을 힘쓸지어다. 듣건대 김성일(金誠一)은 거창에 주둔하고 한효순(韓孝純)은 영해(寧海)를 지킨다 하니, 각기 좌ㆍ우도 관찰사 등의 호칭을 내리고 대소의 의병장들은 차등에 따라 관직을 내리노라. 너희들은 절제(節制)의 지시를 듣고 또한 서로 계획을 짜내서 돌아가는 적을 맞아 쳐서 그 후미를 공격하라. 적이 머물고 있는 곳을 염탐하여 병영을 야습할 것이니, 멀리서 통제하기 어려우므로 기회를 관찰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맡기노라. 김인갑(金仁甲)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슬퍼하여 판서를 추증하고, 이형(李亨) 등의 전사를 슬퍼하여 아들 하나에게 벼슬을 주노라. 상과 관직을 어찌 상관하며 옥과 비단을 어찌 아끼랴. 영남 지방을 먼저 숙청하고 하루 빨리 나를 맞이해 주기 바라노라. 내 말을 마치고자 하니 눈물이 먼저 떨어지도다. 내 어찌 잊겠는가.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아! 예악의 나라에서 바다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내고, 산이 숫돌처럼 되고 바다가 가는 띠가 되도록 봉토를 나누어 받는 영광을 누리도록 할지어다. 교시하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교서가 이르자 군민(軍民)은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모두 발분하여 힘쓸 것을 생각하였다. 그때에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에는 적병이 가득 차 있었는데, 연안(延安) 고을이 고립되어 위험이 더욱 심하였다. 이조 참의 이정암(李廷馣)과 아우 이정형(李廷馨)이 함께 개성(開城)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는데 임진강의 군사가 무너지자 급히 연안(延安)으로 달려갔다. 부중(府中)의 호걸 송덕윤(宋德潤)ㆍ조광정(趙光廷)이 백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맞이하면서,
“공이 예전에 이 땅에 은혜를 베푸셨으니, 여기에 머물러서 우리를 살려주시오.”
하니, 이정암은 웃으며,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
하고, 바로 입성하여 5백 명을 얻어 효유하고 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해서 사문(四門)을 지키겠는가? 누가 성위에 올라서 적이 참호에 접근 못하도록 막겠는가? 누가 군량을 관리하고 누가 병장기를 수선하겠는가?”
하며, 각자의 재주에 따라서 부서를 나누고, 포(礮)를 돈대(墩臺)에 모아놓고 그 옆에는 솥을 늘어놓았다. 늙은이와 어린이조차도 다 일에 힘쓰고, 사람들이 다 직무에 착실하였다. 하루는 적의 추장 장정(長政)이 재령(載寧)ㆍ신천(信川) 등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해주(海州)를 함락시킨 뒤, 3천의 군사로 강음(江陰)의 왜적과 합세하여 총출동해 쳐들어오니 성안에서는 크게 겁을 내어 진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암이 말하기를,
“나는 군사들과 백성들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하였다. 백성을 죽음에 빠뜨리고 나 혼자 살기를 도모할 수는 없다. 겁이 나는 자는 마음대로 성을 나가라. 붙잡지 않겠다.”
하니, 온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써 지킬 것을 다짐했다. 해는 이미 기울고 적병은 세 겹으로 에워쌌는데 갑자기 한 적장이 성밖을 두루 돌아보고 성루를 만지며 지나다가 수문장 장응기(張應祺)가 쏜 화살에 가슴을 맞고 죽으니 적병은 기가 죽어 감히 가볍게 나오지 못하고, 서쪽 성에서는 비충(飛衝)을 만들어놓고 성안을 내려다보는 것을 대포로 때려부수니, 불화살이 난발하였다. 성 둘레에는 초가집이 많이 있어 인심이 흉흉해지더니,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크게 불어 연기와 화염이 성밖을 휩쓰니 적은 어찌할 수가 없어 막사를 철거하여 참호를 메우고 성위로 개미같이 기어올랐다. 이정암이 할 수 없음을 알고 쌓아놓은 풀섶 위에 앉아 아들 이준(李濬)에게 이르기를,
“성이 함락되면 스스로 불타 죽겠다.”
하니, 듣는 자가 감격하여 울고 한 마음으로 다 같이 죽을 힘을 다하였다. 혹은 큰 돌을 던지고 혹은 끓는 물을 끼얹고 혹은 불탄 재를 날리며 싸우기를 4일이나 하였는데, 적도 사상자가 반이 넘었다. 이날 밤에 적이 도망을 가려고 시체를 끌어다 다 불태우고 다음날 아침에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아군은 추격하여 적의 머리 18개를 베고 소와 말 90여 필과 군량 1백 30여 석을 빼앗았다. 조정에서는 처음에 이정암이 포위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상하가 모두 놀랐는데, 승첩문이 도착해서도 다만 적이 어느날 포위하고 어느날 물러갔다고만 적고 장황한 말은 한 마디도 없으니,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물리치기는 쉬워도 공로를 자랑하지 않기는 어렵다.”
하였다. 주상께서 특히 가선대부 본도 도순찰사(本道都巡察使)를 명하고, 문무 장관(文武將官)들은 모두 이정암의 절제(節制)를 듣게 하고 제장(諸將) 이하는 차등에 따라 상을 주었다.
○ 전년에 신각(申恪)이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 조헌(趙憲)이 왜구(倭寇)가 장차 쳐들어올 때는 연안은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이지만, 성중에 물이 없는 것이 걱정이라 생각하여, 신각에게 편지를 보내어 북신당(北神堂)의 물을 성중에 끌어들여 방비할 준비를 하라고 하였더니, 이때 와서 그의 힘을 입었다.
○ 앞서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가 여주(呂州 여주(麗州))로부터 본진에 귀환하였는데, 적병이 원주ㆍ충주ㆍ양주ㆍ광주(廣州) 등지에 출몰하므로, 원호(元豪)가 그들의 태만함을 틈타서 두 번 이겼다. 처음에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였고, 또 이천 부사(利川府使) 변응성(邊應星)과 합병하여 배에 사수(射手)를 싣고 안개가 끼었을 때에 마탄(馬灘)에서 요격하여 많은 적병을 죽였다. 이로 인하여 원주로 가는 왜적의 길이 끊기었다. 순찰사 유영길(柳永吉)이 또 원호를 재촉하여 급히 진격하도록 하니 원호는 이미 연승을 하였기 때문에 적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있었다. 적이 그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복병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원호가 모르고 진격하다가 복병이 갑자기 덤벼들어 드디어 여기에서 죽었다.
○ 또 조호익(曺好益)은 창원(昌原) 사람인데, 훌륭한 뜻과 행실이 있었다. 남에게 무함을 당하여 온 집이 강동(江東)으로 이사를 왔는데, 가난이 날로 심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며 20여 년이나 살았으나 지조가 더욱 굳었다. 임금의 거가(車駕)가 평양에 이르러서 그의 죄를 용서하고 불러 의금부 도사로 임명하였다. 평양이 포위되자 그는 강동(江東)으로 가서 군사를 모아 평양을 구하고자 하였다. 평양은 이미 함락되고 군민이 모두 흩어지자 조호익은 다시 행재소로 돌아왔다. 중국 군사가 강을 건너오리라는 말을 듣고 그는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상원(祥原)에 출진하여 흩어져 노략질하는 적을 요격해서 많은 적을 베었다. 조호익은 활 쏘고 말 달리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였는데 다만 충의로 군사의 마음을 격려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 이때에는 온 나라가 병란을 피하느라 마치 끓는 솥안에 있는 물고기같이 위급하여, 선문(禪門)의 중들도 모두가 달아났다. 이때에 청허선사(淸虛禪師) 휴정(休靜)은 묘향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승니(僧尼)들이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존칭한 사람이다. 속성(俗姓)이 최씨(崔氏)이니 그 본관은 전주이다. 행실이 고매하고 율법이 엄하며 석가의 경전에 달통하고 문장에도 능하여, 조정의 사대부들과도 두루 사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나라에 널려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문도 1천 5백 명을 규합하여 칼을 짚고 주상을 행재소에 가서 뵈었다. 상이 이르기를,
“국난이 이러하니 네가 구제할 수 없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흘리고 절하면서,
“국내의 승도로서 늙고 병들어 소임을 맡을 수 없는 자는 있는 곳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로 신의 도움을 기도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들은 다 모집해 와서 전장에 나가고자 합니다. 신들이 비록 속세를 떠났으나 국내에서 태어나 성상(聖上)의 은혜와 길러주심을 입었사오니,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습니까. 원컨대, 충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크게 기뻐하여 일국도대선사 팔도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一國都大禪師八道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의 칭호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그의 무리를 이끌고 순안(順安)의 복흥사(伏興寺)에 주둔하고 팔로(八路)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감한 승려들이 오지 않는 자가 없었다. 휴정(休靜)의 높은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일어나 권율의 막하에 들어갔고, 유정(惟政)은 금강산에서 일어났다. 유정(惟政)은 호는 송운(松雲) 또는 사명산인(四溟山人)이라고 하였다. 용모가 호걸스럽고 수염을 깎지 아니하였으며, 성품과 도량이 넓고 불전(佛典)에도 달통하였다. 이때 그는 표훈사(表訓寺)에서 강경(講經)을 하고 있었는데, 적병이 산중에 들어오자 중들이 다 도망하였으나, 유정만은 가부좌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적이 보고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어떤 자는 합장하여 경례를 드리고 가기도 했다. 근왕의 교서와 휴정(休靜)의 격문이 산중에 이르자, 유정은 불탁(佛卓) 위에 펴놓고 여러 중을 불러놓고 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효유하니, 산중의 중 7백여 인이 다 일어나 서쪽으로 근왕하러 떠났는데, 평양에 이르러서는 그 무리가 천여 명이 되었다. 성의 동쪽에 주둔하여 순안(順安)의 군사들과 서로 긴밀히 구원하는 병력이 되었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국가는 다난하고 파도도 거센데 / 邦家多難海波驚
옥련은 휩쓸려 압록강에 머물렀네 / 玉輦飄□鴨水營
어디 군사가 위급함을 구제하겠으며 / 何處蚍蜉能濟急
충의로운 맹세 몇 사람이나 할 것인가 / 幾人忠義更同盟
지금껏 은택은 다같이 입었으니 / 由來恩澤曾均被
나라 생각은 유나 선이 다를 수가 있으랴 / 却喜儒禪不異情
묘향산 휴정대사를 보아라 / 請看香山靜老宿
계도(중이 가지는 작은 칼) 휘두르는 곳에 장삼옷이 가볍도다 / 戒刀揮處衲衣輕
○ 7월. 중국 조정의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등이 차례로 강을 건너왔다. 상은 접반사 유성룡을 보내어 동강(東江)에서 맞이하여 의주로 왔는데, 유격 사유(史儒)를 선봉으로 삼아 가산(嘉山)으로 진격하였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 장군은 조급하고 지모가 부족하니, 반드시 성공하지 못하리라.”
하였다. 조승훈이 가산에 이르러 우리 나라 사람에게 묻기를,
“평양의 적이 이미 물러간 것이 아닌가?”
하니 물러가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조승훈이 술잔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빌기를,
“적이 아직 있음은 반드시 하늘이 나에게 큰 공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날 순안(順安)에 이르렀는데, 삼경에 수십 리를 행군하고 조승훈과 사유는 더 진군하려고 의논하였다. 군중에 왕만자(王蠻子)가 있었는데 점을 잘 친다고 하였다. 조승훈이 물으니, 왕만자는,
“오늘이 가장 좋은 날입니다. 물러서지 마시오.”
하였다. 조승훈이 그렇게 여기고 진격하여, 새벽에 성밑에 이르렀다.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부수고 조승훈이 칠성문(七星門)으로 들어갔는데, 성내가 길이 좁고 굽은 골목길이 많아서 말이 잘 나갈 수가 없었다. 적이 험준한 곳에 의지하고 조총을 마구 쏘아대니, 철환(鐵丸)이 비오듯 하였다. 사 유격(史游擊)이 앞장서서 육박전을 벌여 군마가 많이 죽었다. 사유(史儒)가 성위에서 활을 쏘니, 적이 그가 장령(將領)인 것을 알고 일제히 총을 쏘아 사유는 탄환에 맞아 땅에 떨어지고 대조변(戴朝弁)ㆍ천총 장국충(張國忠)이 또한 탄환에 맞아 죽었다. 조승훈과 마세륭(馬世隆)은 부상을 입고 후퇴하였는데, 마세륭은 말에서 떨어져 죽고 후군(後軍)으로 진흙 속에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은 모두 적에게 피살되었다. 조승훈은 군사가 무너지자 하룻밤에 2백 리를 달려 안주성(安州城) 밖까지 와서야 말을 세우고 역관 박의검(朴義儉)을 불러 말하기를,
“내 오늘 적을 많이 죽였다. 불행히 사유격이 전사하였고, 천시(天時)가 불리하여 큰비가 와서 진흙탕이 되어 적을 섬멸치 못하였으니, 마땅히 군대를 더 보태서 다시 나가리라. 너희 재상은 동요하지 말고 부교(浮橋)도 철거하지 말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달려 이강(二江)을 건너 공강정(控江亭)에 주둔하였다. 조승훈은 전쟁에 패한 뒤로 간담이 서늘하여 적이 추격할까 두려워 이강(二江)을 건너려고 이처럼 급히 달렸던 것이다. 접반사 유성룡과 종사관 신경진(辛慶晋)이 가서 위로하고 양식과 찬을 실어 보냈다. 조승훈이 공강정에 이틀을 머무는데 밤낮 계속 큰비가 오고 군사는 들판 가운데 노숙하니, 의복과 갑옷이 다 젖어 모두 조승훈을 원망하므로 부득이 요동으로 퇴환하였다. 조승훈의 군사가 패하자 적은 더욱 교만하여져서 우리 군중(軍中)에 글을 보내왔는데, 양떼를 가지고 한 호랑이를 치는 격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양은 명 나라 군사에 비유하고 호랑이는 자신들을 비유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일본의 해군 10여만 명이 다시 서해로부터 올 터인데 대왕(大王)의 행차는 이로부터 어디로 가겠는가?”
하였다. 적이 본래 수륙으로 합세하여 승전한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쳐들어오려고 하였는데, 이미 이순신에게 저지당하여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순신은 또 이달 초 6일에 원균(元均)ㆍ이억기(李億祺) 등과 노량(露梁)에서 모였는데, 적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바로 배를 정비하고 바다로 나갔다. 적은 우리 군사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배를 돌려 입항(入港)하였다. 항구에는 원래 70여 척이 길게 줄을 지어 진을 치고 있었는데, 항구가 좁고 물이 얕은데다가 숨겨진 섬들이 많아서 돌아 나오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순신은 군사를 조금 내보내서 적을 유인하니, 적이 보고서 전부 나와서 추격하여 왔다. 아군은 싸우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하여 한산도(閑山島) 바다까지 끌고 나와서 배를 돌려 접전하는데,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불화살과 화포를 함께 발사하였다. 적이 기세가 꺾이어 조금 후퇴하자 장수와 군사들이 소리를 지르고 분발하여 적선 63척을 불태우니, 남은 적 4백여 명이 배를 버리고 해안에 올라 도망하였다. 여러 장병이 안골포(安骨浦) 앞바다까지 진군하였을 때 또 적선 40여 척이 있었다. 그중에 3척은 층루를 세웠는데 여러 배가 차례로 줄을 지어 정박하였다. 적은 이미 여러번 패한 터라 적접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앞에는 얕은 항구를 의거하고 뒤로는 견고함을 지고서 감히 나오지를 못하므로 이순신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교대로 공격하였다. 해가 저물고 안개가 사방에 깔렸는데 남은 적 20여 척이 밤을 타서 항구를 빠져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1백 50여 명을 베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수없이 많았다. 이에 군공과 명성은 크게 떨치었고, 정헌대부로 진급되었다. 승전한 뒤 이순신은 문득 제장을 경계하며,
“자주 승리를 하면 교만하기 쉬운 법이니 제장은 삼가라.”
하였다. 이때 적이 여러번 호남을 엿보고 소란을 피우니, 이순신은, 국가의 군수물자가 모두 호남에 의지하고 있으니 호남이 실패하면 국가는 망한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다하고 사려를 깊이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드디어 적의 한 팔을 자르니, 행장(行長)이 비록 평양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감히 더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 조 총병(祖摠兵)이 강을 건너 돌아가서 요동 총병 양소훈(楊紹勳)에게 보고하기를,
“조선이 반역하여 전쟁중에 조선의 한 진영이 적에게 가담하였기 때문에 패전하였습니다.”
하니, 양소훈은 공문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산해관 주사(山海關主事) 장동(張棟) 역시 양승훈의 말을 신용하고 조선을 계속 의심하였다. 병부에서는 금의도지휘사(錦衣都指揮使)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의주에 가서 사실을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를 중강(中江)에서 맞이하였다. 황응양이 왜의 서신을 얻어 증거를 삼고자 하므로 예조 판서 윤근수가 적이 대동강에서 보낸 서신을 두 장이나 보였으나 황응양은 믿지 아니하였다. 이항복이 서울에 있을 때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고 신묘년(1591, 선조 24) 통신사 등에게 준 왜의 서한을 가지고 있다가 그 편지를 보이니, 황응양이 가슴을 치며 크게 통탄하고 주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귀국의 사정이 이러한데도 중국의 의심을 면하지 못하고, 중국을 대신하여 병화를 입었는데도 도리어 악명을 입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조선을 위하여 사실을 해명하겠습니다.”
하고, 즉시 돌아가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고하기를,
“조선의 임금과 신하가 초야를 헤매이며 나라와 함께 몸이 없어질 망정 천자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군사를 일으켜서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석성이 듣고 마음에 감동되어 이에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기를 청하게 되었다. 이때 중국에서는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하였다. 혹은 압록강을 굳게 지켜 그 변동을 관망하자고 하고, 혹은 이적(夷狄)끼리 서로 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므로 중국이 구원할 필요가 없으니, 마땅히 압록강을 기키고 무력을 드러내서 시위하자 하고, 혹은 외번(外藩)이 나라를 잃게 되었으니,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기도 하였다. 석성은 또 화약과 적을 막아낼 병기를 먼저 주자고 하니, 과도관(科道官) 등이 상본(上本)하여, ‘병기와 화약을 외국에 주는 것을 금지한 것은 고황제의 법이니, 어길 수 없다.’ 하자, 석성이 다투어 말하기를,
“고황제(高皇帝)가 말씀하신 외국이란 워낙 멀리 있어서 명색만 속국이지 그 나라의 흥망이 중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일은 국내의 일과 같은데, 만약 왜가 버젓이 조선에 살면서 요동을 침범하고 산해관에 이르게 된다면 경사(京師)가 진동할 것이니, 이는 곧 배와 가슴에 있는 병과 같은데, 어찌 예사로 논할 수 있으랴. 만일 고황제께서 오늘날에 계신다 하더라도 의심없이 반드시 내려줄 것이다.”
하였다. 그때에 사은사 신점(申點)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중정(中庭)에 불러들여 요동의 변을 보고한 문서를 꺼내 보였다. 신점이 크게 통곡하고 일행과 함께 조석으로 간절히 애원하고 매일같이 아문(衙門)에 이르러 강력히 원병을 요청하였더니, 황제는 문무 대신ㆍ구경(九卿)ㆍ와도(科道) 등 관(官)이 모여 여러 가지를 의론하도록 명하였다. 그 논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20년 7월 일, 먼저 해당 병부의 제본(題本)에, ‘특별히 대신 경략을 섬서(陝西) 각 진에 보낼 것과 군사를 거느려 왜노를 칠 것 등에 관하여 성지(聖旨)를 받들기를, ‘보낸 대신이 부(府)ㆍ부(部)ㆍ와도(科道) 등의 관에 도착시켜서 회의하고 와서 말하라.’ 하셨습니다. 각 아문에 이문(移文)하여 통지하는 것 외에 근래 해당 섬서독무 제신(諸臣)들의 주보(奏報)에 적의 형세가 군색해져서 멸망할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경략을 보낼 필요가 없는 듯하다는 것과 왜가 조선을 범한 일에 대해서는 근래 요동 독무관의 자문에, ‘조선 팔도를 이미 다 차지하고, 또 인민을 어루만지며 쌀과 포목을 흩어주어서 항복하도록 꾀니 하는 짓이 헤아릴 수 없다.’는 것과 전항(前項)에 정왜문무대신(征倭文武大臣)을 보내야 할 것인지의 여부는 응당 속히 모여 의논하되, 본월 18일 5부(府)ㆍ9경(卿)ㆍ과도관이 궐문에 일제히 나아가 공동으로 회의한 것에 따르시리라 생각됩니다. 해당 후군도독부 장부사태부 겸태자태부 정국공(後軍都督府掌府事太傅兼太子太傅定國公) 서문벽(徐文璧)ㆍ중군도독부 장부사 정원백(中軍都督府掌府事靖遠伯) 왕학례(王學禮)ㆍ좌군도독부 장부사 오계작(吳繼爵)ㆍ우군도독부 장부사 숭신백(崇信伯) 비갑금(費甲金)ㆍ전군도독부 장부사 영강후(永康侯) 서문위(徐文偉) 등의 의논에는, ‘왜가 우리 울타리인 조선을 이겼으니 출병하여 구원하는 것이 진실로 좋은 방책입니다. 그러나 꼭 매우 급박하고 절실한 때에 모름지기 헤아려서 행해야 합니다.’ 하고, 해당 이부 상서 손농(孫鑨)ㆍ시랑 진우폐(陳于陛)의 의논은, ‘정왜대신을 보내는 것은 진실로 지력(智力)으로 치는 것이 상책이지만 우리 군사는 지형에 익지 못하고 군량을 계속 대기 어려우니, 적진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본 병부의 2좌(佐)에 1원(員)을 더 두되, 병기(兵機)에 익히 단련한 자를 구해서, 일이 없으면 본 병부에서 조도(調度)하고, 일이 급하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로(諸路)의 응원이 되게 하소서.’ 하고, 호부 상서 양준민(楊俊民)의 의논은, ‘강해(江海)가 넓고 멀어 험하고 평탄함을 헤아리기 어렵고 마초(馬草)와 군량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윤조(綸詔 중국 황제의 조서)를 내시어 조선의 신민(臣民)에게 선유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옛 나라를 광복하게 하기만 못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본디 화기(火器)가 없고, 산동 순무(山東巡撫)에서 제조한 것이 자못 많다고 들었는데, 필요한 수량을 나누어주소서.’ 하고, 호부 시랑 노유정(盧維楨)의 의논은, ‘대신은 모름지기 왜의 사정을 익히 알고 본디 홍제(弘濟)에 우수한 자를 얻어야만 바야흐로 보내기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 하고, 예부 시랑 한세능(韓世能)의 의논은, ‘조선을 은혜로 어루만질 것이고, 군사를 동원하여 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또 절직(浙直)에는 총병을 설치하여 남병(南兵)을 제압하게 하고, 진강(鎭江)에는 총병을 설치하소서.’ 하고, 형부 상서 손비양(孫丕揚)의 의논은, ‘연해의 독무에 비왜칙서(備倭勅書)를 두어 그 지역을 구획하여 나누어 막게 하되, 순천(順天) 10로에는 유병영(游兵營)을, 보정(保定) 6부(部)에는 민기병영(民奇兵營)을, 산동에는 비왜위(備倭衛)를 두어, 왜와 싸운 경험이 있는 장수들을 다시 뽑아서 수전(水戰)을 가르치도록 하소서.’ 하고, 공부 상서 증동형(曾同亨)의 의논은, ‘경략(經略)을 다시 설치한다면 평일에 총독을 설치한 의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인민은 적고 관리만 많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니, 계요총독부(薊遼總督府)에 비왜칙서를 증설하는 것이 편의하겠으며, 예전의 전례에 비추어 병부 시랑 1원을 증설하소서.’ 하고, 도찰원 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 이세달(李世達)의 의논은, ‘정왜 대신을 파견하는 것은 의리에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만, 시세를 헤아려서 시행함이 차례가 있어야 합니다. 왜노가 실컷 노략질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반드시 돌아갈 것이요, 만약 그대로 평양 등지에 있게 된다면 다만 앞서 분부대로 명령을 행할 뿐이니, 요동 무진장(遼東撫鎭將)이 먼저 병마(兵馬) 2개 부대를 출동시키고 다시 2개 부대를 첨가하되, 지모와 용맹이 있는 장관(將官)을 가려 군량을 많이 싸 가지고 그 경내에 바로 들어가서 조선 각 도의 용장ㆍ정병과 협동하여, 기회를 살펴 협력하여 적을 쳐부수기를 도모하고, 혹은 각 부근에 복병시켰다가 맥없이 돌아가는 것을 쳐부순다면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왜노로 하여금 조선의 개성과 평양을 차지하게 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떠나지 않고, 국왕이 이미 와서 내국(內國)에 붙으면 저 백성들이 임금이 없어 인심이 붙일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반드시 국왕에게 선유하여 저들 가운데 충의로운 배신으로 하여금 왕의 자제 중에 어진 이를 가려서 권서국사(權署國事)하게 하여, 여러 모로 각 도의 호걸들을 소집해 협력하여 근왕하게 하여 빨리 회복하도록 한 뒤에 우리의 선견 대장(先遣大將)이 정병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아울러 진격하여 섬멸한다면 실로 또한 어려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 모름지기 선견 대장이 사용해야 할 병마와 선척과 마초나 군량을 어디서 준비하겠습니까? 반드시 다 넉넉해야만 장수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계획으로는 요좌 진무에서 빨리 행할 것 뿐이니, 적당한 사람을 많이 차출하여 속히 조선에 가서 왜노의 거주를 정탐하여 수시로 빨리 보고하게 하여 진지(進止)를 결정하소서.’ 하고, 통정사(通政使) 두기교(杜其驕) 등의 의논은 ‘문무 대신은 재주와 명망이 충실한 자를 살펴서 5부와 첨서(僉書)의 반열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마땅한 사람을 추천하여 쇄약(鎖鑰)을 삼가면 요좌 봉강(封疆)의 경계로 인하여 구해낼 방도가 있으며, 또 조선이 제 나라를 회복할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습니다.’ 하고, 대리시경(大理寺卿) 조세경(趙世卿) 등의 의논은 ‘조선이 공손히 순종한 지 오래였는데, 하루아침에 왜노의 짓밟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즉시 수신(帥臣)을 보내어 정벌하여, 망국을 보존하고 번방을 튼튼히 하는 것이 또한 좋은 계책이지만 왜노가 조선을 새로 깨뜨리려는 속셈도 다 알기 어려우니, 관(官)을 보내어 정벌하는 것은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과도급사(吏科都給事) 이여화(李汝華) 등의 의논은 ‘대신이 적진 깊이 들어가서 정벌하는 것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하여 군량을 이어 대기 어려우므로 형세가 반드시 보낼 수 없습니다.’ 하고, 하남 도어사(河南都御史) 부호례(傅好禮) 등의 의논은 ‘왜노가 금과 비단이나 자녀들을 도모하지 않고 조선을 점거하고 있으니, 반드시 딴 뜻이 있는 듯합니다. 하물며 관백(關白)이 필부로 나라를 빼앗고 또 많은 나라를 아울러 차지하여 드디어 조선을 깨뜨렸으니, 이 또한 강적이므로 문무 대신 경략을 보내야 하나 저들의 지경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한 것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온전한 것으로써 승리를 취하는 것은 제왕의 군사요, 저들의 망할 것을 밀어서 우리의 보존할 방법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천조의 의리입니다. 모름지기 해당 조선의 주보(奏報)에 왜의 기세가 창궐하다 하니, 신들의 관직이 본 병부에 속해 있으므로 의리에 쳐 없애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미 우리에게 공손히 순종하는 속국을 함락하고 우리의 가까운 울타리를 거두어서 큰 멧돼지나 긴 구렁이처럼 탐욕에 한정이 없습니다. 만약 저들로 하여금 깊이 뿌리가 박히도록 한다면 반드시 화가 우리 중국에 미칠 것입니다. 신들이 애초에 특별히 문무 대신을 보내어 군대를 드날려 정벌하자는 의논은 우리의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인덕(仁德)을 드러낼 뿐 아니라 또 저들이 내지(內地)를 범하려는 생각을 중지시키는 것이니, 병(兵)은 미리 소문내는 것을 귀히 여기는데 대개 의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로를 알기 어렵고 마초와 군량을 계속 공급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말하면 신하들의 의논한 내용이 진실로 이유가 있는 의견이지만, 조선 국왕이 우리에게 목숨을 맡기고 구원을 매우 급하게 바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들이 길을 인도할 것이니 도로를 알기 어려운 걱정은 없으며, 저들이 군량을 마련할 터이니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것도 어려운 걱정은 없습니다. 또 담당 신하들이 일찍이 정예 인원을 보내어 평양 깊숙히 들어가서, 왜노가 인민을 불러모아 안심시키고 병장기를 정돈하면서 20여만 명이라 하는데 실제로도 수만 명임을 직접 보고 왔으니, 이러한 상황을 어찌 가벼이 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요동 진무가 이미 군사를 내어 가서 응접하니 특별히 문무 대신을 보내는 것에 대하여 기다려야 할 듯하다고 한 것은 요동 진무로서도 당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의논드린 것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사람마다 나라에 대한 계책이 충성스럽기는 같습니다. 그 안에 조선에 선유하여 의병을 소집하는 것같은 것이 망국을 진작시키는 으뜸가는 계책이니, 바라옵건대, 윤음을 내리시어 달려 보내어 한편으로 조선 국왕에게 직접 알려 팔도의 배신(陪臣)에게 격문을 전달하여 근왕병을 크게 모집하여 구업을 회복하도록 빨리 도모하게 하고, 우리는 강병을 더 보내어 함께 섬멸을 도모하소서. 왜노가 만일 먼저 도망친다면 우리도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고, 만일 군대를 거둬모아 웅거하면서 조선을 멸망시키려고 우리와 겨룬다면 하늘의 토벌을 크게 드러내어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때에 가서 크게 군대를 징발하여 문무 대신을 특별히 보낸다면 이부ㆍ공부가 의논한 대로 병부 시랑 1원을 더 설치하여 왜의 일을 오로지 처리하게 하자는 것이요, 이는 곧 신들이 말한 경략대신을 선임해야 한다는 것이거니와, 좌도어사 이세달이 청한 대신을 선임하여 강병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게 하자는 것은 바로 신들이 말한 무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오니, 제신들의 의논이 신들과 같지는 않으나 그 뜻은 처음부터 서로 합치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신들이 예부와 이부 및 보정(保定)ㆍ산동 독무에게 공문을 보내어 일체 조회한 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 성지(성지)를 받았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이 왜의 침입으로 함몰되어 국왕이 매우 급하게 구원병을 요청한다. 이미 많은 관원의 회의를 거쳤고, 너 병부에서도 정보를 엿들어 실정을 알아냈으니, 곧 해야 할 일을 헤아려서 빨리 가서 구하고, 늦추어서 소용없게 되어 도리어 우리 변경에 해를 끼침이 없게 하라. 관을 설치하고 장수를 보내는 일에 관해서는 모두 의논드린 대로 하라. 잘 알았노라.
○ 병부에서 곧 먼저 원임 유격장군 장기공(張奇功)을 차임하여 은 2만 냥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보내주어서 마초와 양식을 사들여서 군량을 대게 하고, 또 흠차통령 절직조병 신기영 좌참장(欽差統領浙直調兵神機營左參將) 낙상지(駱尙志)를 보내는데 남병(南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의주 압록강 가에 둔을 치게 하였다.
낙상지는 호는 운곡(雲谷), 절강(浙江) 여요현(餘姚縣) 사람인데, 힘이 아주 뛰어나 천 근의 물건을 들 수 있으므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렀다. 또 황차통령남북조병(皇差統領南北調兵) 원임 부총병(原任副摠兵) 사대수(査大受)에게 보군(步軍) 3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압록강을 건너가서 행궁을 호위하게 하였다. 사대수는 요동 철령위 사람이니,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의 가정(家丁)이다. 날래고 씩씩하며 싸움을 잘하여 공을 여러번 세워 총병관에 이르렀다. 증명하는 시가 있다.
비호같은 장사들 압록강 건너오니 / 羆虎先驅渡鴨江
바다의 사나운 왜적들이 일시에 항복하리 / 鯨鯢海若一時降
황은이 넓고 넓어 하늘과 같아 / 皇恩浩蕩同天覆
다시 살아난 쇠잔한 백성 두 줄기 눈물을 흘리네 / 肉骨殘氓涕淚雙
○ 8월 1일. 순찰사 이원익(李元翼)ㆍ순변사 이빈(李薲) 등은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유둔(留屯)하고,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 등은 용강(龍江)ㆍ삼화(三和)ㆍ증산(甑山)ㆍ강서(江西) 4개 읍의 군대를 거느리고 20여 개의 둔을 만들어 평양 서쪽에 진을 치고, 김억추(金億秋) 등은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진을 쳐서 서로 지켜주는 형세를 만들었다. 그날 이원익 등이 제장들과 약속하고 일제히 진격하는데 평양성 북쪽으로부터 홀연히 적의 선봉을 만나 갑자기 맞닥뜨려 적 20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얼마 못 가서 적의 대군이 이르러 군졸이 놀라 무너지고 강변의 용사들 또한 손실이 많아 드디어 순안에 돌아와서 둔쳤다. 그때 중국 조정에서 바야흐로 나와 구원할 것을 의논할 적에 마침 섬라국(暹羅國)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이 의논을 듣고서 도와서 왜국병을 멸망하고자 하였다. 병부에서 곧 제독주사(提督主事)의 게보(揭報)에 따라 상본(上本)하기를,
“섬라국왕 사신 악바라(握叭喇)가 군사를 독려하여 왜의 소굴을 소탕하기를 원하는 등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성지를 다음과 같이 받았다.
오랑캐 나라 사신이 말한 내용에 의거하면 충의를 자세히 알 수 있으나, 일이 중대함에 관계되니 돌아갈 때 양광 총독(兩廣摠督)에게 가는 이문(移文)을 가지고 가게 하되, 일에 능숙한 관원 한 사람을 별도로 뽑아 오랑캐 나라 사신과 동행시켜 조선에 가서 조정의 덕의를 선유하고 회문(回文)을 가지고 와서야만 바야흐로 거행할 수 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의논드린 대로 하라.
○ 병부에서 성지에 의하여 선유하고, 또 절강 사람 심유경(沈惟敬)을 유격장군으로 삼아 보내왔는데, 천자의 명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왕과 의주에 모여 덕음을 선유하였다. 심유경은 절강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복건(福建) 사람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 아비가 장사하러 일본에 왕래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일을 잘 알았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가정 연간에는 절직총독(浙直摠督) 호종헌(胡宗憲)의 수하에 있었는데, 간첩을 사용하여 왜인을 많이 독살하여 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조정에 글을 올려 이로 인하여 나오게 되었고, 왜적의 실정을 정탐하는 것도 편의대로 처리할 것을 허락받았다.”
하였다. 그달 25일에 심유경이 순안에 도착하여 건산(乾山)에 올라 평양성을 바라보고 곧 통첩을 써서 자기 집 안사람 심가왕(沈嘉旺)에게 주었는데, 심가왕이 누런 보자기에 싸서 등에 짊어지고 말을 타고 곧장 달려서 보통문(普通門)을 거쳐 들어가서 적에게 힐문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우리 속국에 깊이 들어와서 감히 천자의 군사에 항거하는가?”
하였다. 적의 추장 행장(行長)은 곧 절강 포로 장대선(張大膳)을 시켜 와서 서로 모여 의논할 것을 청하니, 심유경이 29일에 단기(單騎)로써 만나기로 했다. 행장은 또 심유경에게 글을 보내기를,
“가정 연간에 중국 조정의 장단(蔣丹)이란 자가 우리 일본을 유인하여 화친을 약속하고 공물(貢物)을 통하게 하겠다 하고는 복병을 하였다가 우리 사절을 남김없이 죽이더니, 오늘날 중국 조정에서 온 자도 장단의 옛일과 같은 짓을 하려는 것이나 아니오?”
하니, 심유경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은 속국이 망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군사를 보내어 와서 구원하려는 것이다. 너희 나라가 만약 마음을 고쳐 군대를 풀고 돌아간다면 일본의 백성들도 다 같은 우리 백성이니 중국 조정에서는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할 것이다. 어찌 속임수를 써서 백성의 목숨을 해치겠는가?”
하였다. 행장은 이를 믿고 기일이 되어 산밑에 진영(陣營)을 벌려 놓았다. 심유경이 가려는데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만류하는 자가 많으니 심유경은 웃으며,
“저들이 어찌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
하고, 집안 하인 서너 명을 데리고 떠나 왜의 진영 안에 들어가서 행장ㆍ조신(調信)ㆍ의지(義智)ㆍ현소(玄蘇)ㆍ종일(宗逸) 등과 만나보았다. 우리 군사가 대흥산(大興山)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니, 왜군이 매우 많고 창칼이 서릿발처럼 번뜩이며, 심유경이 말에서 내려 진영 속으로 들어가는데 왜적들이 사면을 에워싸서 잡힐 듯하였다. 심유경이 중국 조정에서 백만 대군으로써 국경에 와서 진치고 있으니 너희들의 목숨이 조석에 달렸다고 큰소리치고, 또 현소를 꾸짖기를,
“하늘은 생명을 살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너는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면서 어찌 반역하는 오랑캐를 좇아서 우리 속국을 무찌르느냐?”
하니, 현소가 머리를 조아리며,
“중국에 중봉조사(中峯祖師)의 4대손이 있었으니, 사명선사(四明禪師)라고 하였습니다. 가정(嘉靖) 18년에 나의 스승이 중국에 들어가서 사명선사를 뵈옵고 제자가 되었는데, 천자께서 그 멀리서 온 것을 가상히 여기시고 가사 한 벌을 하사하셔서 여태까지 보존하고 있습니다. 소승(小僧)은 의발을 계승하였기에 중국을 향하여 순종하려는 정성이 없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역적을 도와 몹쓸 짓을 하겠습니까. 본국이 중국 조정과 오랫동안 끊어졌으므로 조선에 길을 빌려 봉공(封貢)을 구하고자 하는데, 조선이 도리어 군사를 집결하여 우리를 막기 때문에 오늘의 사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저만의 죄이겠습니까?”
하였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미 정성껏 순종할 것을 생각하였다면 중국 조정에서 어찌 봉공(封貢)을 아껴서 멀리 있는 오랑캐의 소망을 끊어버리겠는가?”
하니, 행장의 무리가, “네 네.” 하였다. 이에 평양성 서북쪽 10리 밖에 표목(標木)을 세웠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오는데 왜군들이 그를 매우 공순하게 전송하였다. 이튿날 행장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드리고 또 말하기를,
“대인께서 서슬이 푸른 칼날 속에 계시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시니, 비록 일본 사람일지라도 해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심유경이 대답하기를,
“그대는 당조(唐朝)에 곽 영공(郭令公 곽자의(郭子儀))이란 분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단기로 회흘(回紇)의 10만 군진 속에 들어가서도 두려워 위축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대를 두려워하랴.”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돌아가서 성황(聖皇)께 보고하면 처분이 계실 것이다.”
하였다. 이에 9월 29일에 요동으로 돌아가서 내각(內閣)ㆍ본병(本兵)에 자세히 보고하니, 명하여 각(閣)ㆍ부(部)ㆍ구경(九卿)ㆍ와도(科道)에 회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성지를 받들어, 실직(實職)으로 유격장군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를 제수하여 경략의 수하에 보내어 위임하여 쓰게 하였다. 그때 심유경이 돌아간 뒤 50일이 지나도 오지 않자 왜가 의심하여 큰 소리치기를,
“설날에는 압록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겠다.”
하고, 적진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온 백성도 있었는데 모두,
“적이 성을 공격하는 기구를 크게 수리한다.”
하여, 사람들이 모두 매우 두려워하였다.
11월 6일. 심유경이 다시 강을 건너왔는데, 병부에서 차부(箚付) 심유경에게 주어 왜군에게 타일러서 전군이 물러가게 하고 또 조선의 성곽과 토지와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주면 납관(納款)하는 일과 철병(撤兵)하는 것을 허락하겠거니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만 대군으로써 가서 쳐 없애겠다고 하였다. 심유경이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으며, 또 작은 모자 수만 개를 왜병들에게 고루 나누어 줌으로써 군대 수효가 많고 적음을 알아내어 장차 제독에게 보고하여 두 배의 군사로 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 대병(大兵)은 오히려 나오지 않아 조정에서는 다시 배신(陪臣) 심희수(沈喜壽)ㆍ윤근수(尹根壽)ㆍ정곤수(鄭崑壽) 등을 잇달아 보내서 원병 요청을 매우 급하게 하였는데, 사신의 행차가 서로 잇달아 길에 엮어놓은 듯하였다. 천자가 군사 출동을 이미 허락하니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정곤수 등을 화방(火房)에 불러들여 사태를 직접 물으니,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려 마지 않았으며,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설번(薛藩)을 보내와서 칙서를 받들어 유지를 내리게 하였다. 그 칙서는 다음과 같았다.
그대 나라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켜 본래부터 공순하게 섬겼고, 의관(衣冠)과 문물이 낙토(樂土)로 불리었도다. 근래에 들으니, 왜노들이 창궐해서 함부로 침략질하여, 왕성(王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평양을 노략질하여 점거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온 나라 안이 시끄러워졌으며, 국왕은 서쪽 바닷가로 피난하여 초야에서 떠돌아다닌다 하는데, 이렇게 몰락된 것을 생각하면 짐의 마음이 매우 측연하도다. 어제 급박함을 알리는 소식을 전하니, 이미 변신(邊臣)에게 칙명을 내려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였고, 또 문무대신 2원(員)을 보내어 요양(遼陽)의 각 진(鎭)의 정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치는 것을 돕게 하였으니, 그대 나라 병마(兵馬)와 앞뒤로 협공하여 흉악한 왜노를 쳐 없애서 씨도 남지 않게 하기를 기약하라. 짐은 천명(天命)을 받았으니 중화와 사이(四夷)의 임금이다. 바야흐로 만국이 다 편안하고 사해가 조용한데, 보잘것 없는 저 왜놈들이 감히 함부로 날뛰는도다. 다시 동남 해변의 여러 진(鎭)에 칙명을 내리고 아울러 섬라국(暹羅國)ㆍ유구국(琉球國) 등에 선유하여 수십만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함께 일본을 쳐서 바로 그 소굴을 쳐서 부수리라. 힘써 왜적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여 바다 난리가 편안해진다면 관작과 후한 은전을 짐이 어찌 아끼겠는가. 이제 특별히 행인사 행인 설번을 차임해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가서 그대 국왕에게 효유하노라. 그대 국왕은 조종 대대로 전해온 기업(基業)을 생각해야 하는데, 어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릴 수 있겠는가. 빨리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하여 구국(舊國)의 광복을 힘껏 도모해야 하며, 다시 그대 나라의 문무 신민에게 각각 임금에게 은혜 갚는 마음을 굳게 하고 원수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도록 효유하라. 대개 선세(先世)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큰 효도이고 군부의 환난을 급히 구하는 것은 지극한 충성이 되는 것이다. 그대 나라 군신(君臣)은 본디 예의를 알고 있으므로 반드시 짐의 마음을 본받아서 먼저 구물(舊物)을 회복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를 부르며 환도(還都)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이에 종묘사직을 보전하고 번방을 길이 지켜 짐의 먼 지역을 걱정하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위로하라. 공경할지어다.
칙서가 이르니,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압록강 가에서 맞이하는데 목놓아 통곡하고, 신하들도 모두 통곡하니, 설번이 여러 말로 위로하였다. 왕이 설번에게 이르기를,
“왜노들이 상국을 범하려 하므로 소방(小邦)이 의리로 거절하다가 이런 참화를 당하게 되었소. 중국 조정에서 만약 왜노의 서계를 보면 그 사이의 실상을 알 것이오.”
하니, 설번은
“조정에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는, 칙서를 반포한 뒤에 곧 돌아갔다.
○ 설번은 호는 앙병(仰屛)이요, 광주부(廣州府) 순덕현(順德縣) 사람이다. 기축년에 세 번 진사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얼굴이 엄숙하고 말이 민첩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또 사람을 보내어 요양(遼陽)까지 뒤따라가서 글을 올려 진정하니, 대략 이러했다.
소방(小邦)의 군병이 순안(順安)에서 군영을 치고 서쪽 통로를 가로막은 자 및 관군과 의병이 여러 곳에 나누어 둔친 자들이 모두 여름부터 가을을 보내게 되어 군사는 쇠잔하고 말은 지치며, 먹을 것은 없고 병장기는 낡았으며 더구나 옷은 없는데 추위는 닥쳐 아침저녁에 무너질 형세입니다. 적은 바야흐로 튼튼한 성에 웅거하고 창고를 독차지하여 먹을 것이 넉넉하고 날카로운 기세를 길러, 기회를 봐서 튀어나올 계획을 하고 있으니 소방의 상황이 하루가 더욱 급합니다. 이보다 앞서 누차 급함을 아룀이 한두 번만이 아닌 이유는 혹 중국 원병이 제때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서 장황스럽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7월 24일 병부가 제본(題本)을 올려 성지를 받들기를, ‘조선이 왜노의 침략을 받아 함락되고 국왕이 원병을 청함이 더욱 급박하다. 그런데, 이미 많은 관원들의 회의를 거쳤고, 네 병부에서 득실을 탐지하였으니, 곧 행해야 할 일을 헤아려서 빨리 가서 구원하고 늦추어서 소용이 없게 되어 훗날 우리 변경의 폐해를 끼침이 없도록 하라.’ 하였는데, 소방의 임금과 신하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모두 소생할 날이 멀지 않았고 이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여겨 바야흐로 양곡을 쌓아두고 도로를 말끔히 닦아 목을 세워 몹시도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여태까지 출사(出師)의 기일도 정해지지 않아 죽음을 앉아 기다리고 있사오니, 매우 답답하옵니다. 순안에 주둔한 군사가 정말 피약하기는 하나 오히려 힘껏 적을 막아 끓어서 지금 4개월이 되었으므로, 혹시 요양(遼陽)의 군사가 의주 및 탕참(湯站) 등지에 머물게 되고, 남병(南兵)의 포수 5~6천 명이 당도하여 며칠내로 압록강을 건너와서 성세(聲勢)를 벌이게 되면 협력하여 적을 섬멸하여 전승을 거두어서 위로는 황제의 작은 나라를 구휼하시는 인덕(仁德)을 펼 수 있고 아래로는 저희 나라의 끊어지게 된 목숨을 연장할 수 있으며, 앉아서 세월을 보내가며 대군이 오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중국 조정에서 구제하는 지역을 밟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의 시기가 매우 급박하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간청하오니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나이다.
설번이 이 글을 보고 회보하기를,
“천자께서 이미 나가 구원할 것을 허락하시어 대군이 귀국에 도착하게 되었으니, 과히 염려하지 마시고 적을 멸망시킬 기일을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병부에서 정곤수 등이 돌아올 적에 마가은(馬價銀) 3천 냥을 주어 궁면(弓面)ㆍ화약 등을 사가지고 가서 군수물자를 돕게 하였다.
또 병부 우시랑 겸우첨도어사(兵部右侍郞兼右僉都御史) 송응창(宋應昌)을 흠차경략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왜군무(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로, 병부 직방청리사 원외랑(兵部職方淸吏司員外郞) 유황상(劉黃裳)ㆍ병부 직방청리사 주사 원황(袁黃)을 모두 흠차찬획 방해어왜 군무(欽差贊畫防海禦倭軍務)로 삼아 요동에 머물러서 모든 장수들을 절제(節制)하게 하였다.
송응창은 호는 동강(桐岡)이며, 항주(杭州) 우위적(右衛籍) 인화현(仁和縣) 사람이다. 가정 을축년에 진사에 올랐다. 일찍이 영하(寧夏)를 정벌한 공으로써 은 30냥과 모시 2표리(表裏)를 상으로 받고, 공에 준하여 승직(陞職)하였는데 이때에 조정에서 추천하여 조선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맡게 하였다.
유황상(劉黃裳)은 자는 현우(玄于), 호는 태경(太景), 하남(河南) 여녕부(汝寧府) 광주(光州) 사람이다. 만력 갑술년에 진사에 올랐는데, 천성이 매우 허탄하였다.
원황(袁黃)은 자는 곤의(坤儀), 호는 요환(了丸), 절강 가흥부(嘉興府) 가선현(嘉善縣) 사람이다. 만력 병술년에 진사에 올랐고 천성이 부처를 좋아하여 몸가짐을 중처럼 하였고, 일로(一路)의 관참(館站)에 표하차관(標下差官)을 두어 폐단을 금하니, 사람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 또 전군도독부 도독 동지가태자소보(前軍都督府都督同知加太子少保) 이여송(李如松)을 흠차제독 계요보정 산동등처 방해어왜군무 총병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摠兵官)으로 삼아 3개 영장을 거느리고 전진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은 호는 앙성(仰成),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자태보 중군도독부 좌도독 광녕총병관 영원백(太子太保中軍都督府左都督廣寧摠兵官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이다. 이성량의 조부는 본래 우리 나라 이산군(理山郡) 사람으로 독로강(禿魯江)에서 살았는데, 어떤 일로 사람을 죽이고 부부가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가서 그대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변방에서 공을 세워 비로소 유격장군이 되었다. 이성량은 음직으로 지휘사가 되고, 오랑캐를 쳐부순 공으로 험산참장(險山參將)이 되어 땅 천리를 개척하여 오보(五堡)를 세워서 훈작(勳爵)을 받게 되었다. 이성량은 천성이 침착하고 엄숙하며, 지모가 많고 전투를 잘하며, 오랑캐들이 두려워하고 심복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사모하였다.
이여송의 아우 여백(如栢)ㆍ여장(如樟)ㆍ여매(如梅)ㆍ여오(如梧)ㆍ여정(如楨)이 모두 벼슬이 총병에 이르러 금의옥대(錦衣玉帶)가 집안에 번쩍이고, 막사(幕士)나 가정(家丁)으로 도독 및 2품의 장군이 된 자 10여 명이 굽실거리며 성심으로 섬겨 노예와 같으니 세상에서는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에게 비유하였으며, 또 당시의 명장 남당(南塘) 척계광(戚繼光)과 명성이 비슷하였다. 그래서 중국 조정에서도 의지하여 동북쪽의 쇄약(鎖鑰)으로 삼았다. 이여송의 어머니 숙씨(宿氏) 또한 여자 중의 배도(裵度)ㆍ곽자의(郭子儀)였다. 장수 집안에 태어나서 변방 일에 잘 알고 천성도 엄정하며, 장사(將士)를 더욱 잘 다스렸다. 요진(遼鎭)에 있을 적에 해마다 한 번씩 철령위에 돌아왔는데, 지나는 곳의 요새와 성곽의 완전하고 허술한 것, 군대의 정예하고 피폐한 것, 거마와 깃발의 정숙하고 어지러운 것 등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진영의 비장들이 부인을 영원백과 다름이 없이 경외하였다. 여섯 아들 중에 다섯이 그의 소생인데 부귀가 모두 지극하였지만 자기 자신은 오히려 여자가 할 일을 지켰으며, 모든 며느리들은 담비갖옷이나 비단옷이 매우 많았지만 그녀의 생일에는 반드시 다 청포(靑布)같은 물품을 바치게 하여, 검소하기에 힘써야 함을 보여 주었으니, 이 또한 학문하는 사대부들도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부인으로서 이와 같음에 있어서랴.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일이다. 나이 겨우 40때에 영원백에게 소실을 두기를 권하여 예쁜 색시 왕씨(王氏)를 구해서 바치고는 자신은 여행을 하면서 왕씨로 하여금 사랑방을 차리게 하였다. 또 여러 자녀 및 며느리들로 하여금 왕씨를 자기처럼 대우하게 하고,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게 하면 그 자녀들에게 꾸중하기를
“왕씨는 내가 데려다놓은 사람이다. 왕씨를 업신여기면 이는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너희들 마음에 편안하겠느냐.”
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이미 고관 대작이 되었으되 조금이라도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자가 있으면 곧 어린애처럼 땅에 엎드려서 매를 맞게 하였으나 감히 방자한 자가 없었다. 딸 하나가 소씨(蘇氏)에게 시집을 갔었는데, 그 남편과 사이가 나쁘자, 어린 아들이 가서 그 누이 편을 들어주었다. 부인이 듣고 크게 성내어,
“네가 이미 출가하였으면 이는 집을 나간 사람인데, 너희들이 문벌(門閥)의 성대함을 믿고 도리어 네 남편에게 거만을 피움이 이와 같은가.”
하고, 곧 아들을 불러 뜰에 꿇어앉히고 종아리를 수십 대나 때리니, 그 딸이 울면서 호소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네가 지금부터는 네 남편과 시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나를 볼 생각을 말라.”
하였으니, 그 교훈의 엄정함도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이여송 등이 잘 지켜 마침내 큰 공훈을 세웠으며, 부인이 복록을 누리는 것이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여송은 대대로 장수 집안이어서, 병법을 익히 알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선비를 사귀었으며, 용모가 괴걸(魁傑)하고 도량이 너그러우며, 행군하고 진치는 데에는 단속을 적절하게 하니 지나는 곳마다 편하게 여겼다. 신묘년(1591, 선조 24) 여름에 토관총병 유동양(劉東暘)이 발승은(哱承恩) 등과 영하(寧夏)를 점거하고 오랑캐가 반란하여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발승은은 바로 항복한 호인(胡人) 발배(哱拜)의 아들이다. 부자가 사납고 전투를 잘하여 흉노병을 여러번 패하게 하였으므로 벼슬이 총병에 올라 두 군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정(家丁) 역시 수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순무도어사(巡撫都御史) 당형(黨馨)이 매양 억제하니, 발승은 부자가 달마다 주는 양식을 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중을 격동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관군이 누차 패하여 버티지 못하였다. 이여송이 총병 소여훈(蕭如薰)ㆍ상거경(常居敬)ㆍ심사효(沈思孝)ㆍ요계가(姚繼可)ㆍ마귀(麻貴)ㆍ유승사(劉承詞)ㆍ이여장(李如樟)ㆍ양문부(楊文孚)ㆍ이영(李寧) 등을 거느리고 10만 군사로 소탕해 내니, 곧 이여송의 관직을 도독동지(都督同知)로 승진시키고, 음직으로 자식에게는 금의위 지휘동지(錦衣衛指揮同知)의 관직을 세습시키고, 상으로 은 1백 냥과 대홍저사(大紅紵絲) 4표리(表裏)를 받았는데, 군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또 동쪽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래서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경(北京)으로 달려갔다가 그대로 요동을 향하여 모든 장수를 분담시켜 왜를 정벌하였다.
정왜 부총병관서 도독첨사(征倭副摠兵官署都督僉事) 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았다. 이여백은 호는 배성(背城), 제독의 아우인데, 친병(親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서 도독첨사 양원(楊元)을 좌협장군(左協將軍)으로 삼았다. 양원은 호는 국애(菊厓), 정요좌위(定遼左衛)의 사람이다. 처음에는 송경략(宋經略) 중군(中軍)이었는데 끌어와 친병 2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 도지휘사(征倭副摠兵官都指揮使)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았다. 장세작은 호는 진산(鎭山), 광동 우위(廣東右衛) 사람이다. 친병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3영을 나눈 뒤에 모든 장수를 3영에 분속하였다. 흠차협수선부 동로통령 전영병도지휘사(欽差協守宣府東路統領前營兵都指揮使) 임자강(任自强)은 자는 체건(體乾), 호는 관산(冠山), 대동(大同) 양화위(陽和衛) 사람인데, 선부병(宣府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계요 준화참장(欽差統領薊遼遵化參將) 이방춘(李芳春)은 자는 응시(應時), 호는 청강(晴岡), 북직례(北直隷) 대명부(大名府) 평로위(平虜衛) 사람인데, 마병(馬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는 말타며 활쏘기가 장기여서 행군하다가 새를 만나면 문득 몸을 뒤집어 달리면서 쏘아 잡았다. 군사를 아주 엄하게 대하고 상벌을 즉시 처결하여 부하들이 애모하였다. 흠차유격장군(欽差游擊將軍) 고책(高策)은 호는 대정(對庭), 산서(山西) 천성위(天城衛)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산동 추반경략표하어왜방해 유격장군(欽差統領山東秋班經略標下禦倭防海游擊將軍) 전세정(錢世禎)은 호는 삼지(三池), 남직례(南直隷) 소주부(蘇州府) 오강현(烏江縣)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니, 호령이 엄정하고, 흠차통령가 호소송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嘉湖蘇松調兵游擊將軍) 척금(戚金)은 호는 소당(蕭塘), 산동(山東)등주위(登州衛) 사람인데, 자칭 남당(南塘) 척계광(戚繼光)의 일가라 하고 어떤 이는 그의 손자라 한다. 그에게 보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통령선부 중영병유격장군(欽差統領宣府中營兵游擊將軍) 주홍모(周弘謨)를 군사 1천 명을, 흠차통령계진 유격장군(欽差統領薊鎭游擊將軍) 방시휘(方時輝)는 산서 울주위(蔚州衛)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흠차하양 유격장군(欽差河陽游擊將軍) 고승(高昇)은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건창 유격장군(欽差建昌游擊將軍) 왕문(王問)은 호는 의유(義儒), 의리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고 몸가짐을 매우 바르게 하여 지나는 곳마다 편안하다 하였다. 그는 마병 1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 아홉 장수는 모두 이여백이 통솔하게 하였다.
흠차통령 요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遼陽原任副摠兵) 왕유익(王有翼)은 호는 심헌(心軒), 하남(河南) 언능적(鄢陵籍) 사람이니, 마병 1천 2백 명을, 흠차통령계진조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薊鎭調兵原任副摠兵) 왕유정(王維貞)은 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의주위 진수참장(欽差義州衛鎭守參將) 이여매(李如梅)는 호는 방성(方城),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요진 조병참장(欽差遼鎭調兵參將) 이여오(李如梧)는 또한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5천 1백여 기를, 흠차요동 총병표하영 영이병 원임참장(欽差遼東摠兵標下營領夷兵原任參將) 양소선(楊紹先)은 전둔위(前屯衛) 사람인데 마병 5천여 기를, 흠차진수요동동로부총병(欽差鎭守遼東東路副摠兵) 손수염(孫守廉)은 호는 고촌(古村), 철령위 사람인데, 마병 5천여 기를, 흠차통령보진건준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保眞建遵調兵游擊將軍) 갈봉하(葛逢夏)는 마병 2천여 기를 거느리게 하니, 이 일곱 장수를 모두 양원(楊元)이 통솔하게 하였다.
원임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은 평양에서 패하여 파직되어 충군이 되었는데 백의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고, 흠차통령 절강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은 호는 운봉(雲峯), 절강 금화부(金華府) 의오현(義烏縣) 사람인데 보병 1천 5백 명을,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은 남병(南兵) 1천명을, 흠차통령 창평우영병참장(欽差統領昌平右營兵參將) 조지목(趙之牧)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남북 조병탁주참장(欽差統領南北調兵涿州參將) 장응충(張應种)은 마병 1천 5백 기를, 흠차통령 산서영 원임참장(欽差統領山西營原任參將) 진방철(陳邦哲)은 보병 1천 명을, 흠차제독표하 통령대동영병 유격장군(欽差提督標下統領大同營兵游擊將軍) 곡수(谷燧)는 대동위(大同衛) 사람인데 마병 1천 기를, 흠차보정 유격장군(欽差保定游擊將軍) 양심(梁心)은 마병 1천 기를 각각 거느리게 되니, 이 여덟 장수를 모두 장세작이 통솔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청용 장관(聽用將官)이 그 부류가 또한 많았다. 유격장군 왕수신(王守臣)은 호는 덕헌(德軒), 요동 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조승훈과 평양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돌아갔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나왔고, 흠차통령 요동조병 기보양영 관전보부총병(欽差統領遼東調兵騎步兩營寬典堡副摠兵) 동양정(佟養正)은 자는 자충(子忠), 호는 몽천(蒙泉), 요동위 사람이니, 만력 경진년에 무과 진사하였고, 의주에 와서 머물었다. 통령대령영병 원임참장(統領大寧營兵原任參將) 장기공(張奇功)은 요동 사람으로 심유경과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심유경이 행장(行長)과 서로 만나보고서 행장을 놓아 돌려보냈다는 것을 듣고 발을 구르며 탄식하기를,
“만약 한 명만이라도 복병하였다가 잡았으면 군사 한 명 수고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이런 기회를 놓쳤으니, 애석하다.”
하였으니, 대개 심유경의 본심을 몰랐던 것인데, 이때 와서 마병 1천 기를 거느리고 왔다.
흠차진정 유격장군(欽差眞定游擊將軍) 조문명(趙文明)은 마병 1천 기를, 흠차섬서 유격장군(欽差陝西游擊將軍) 고철(高徹)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요동좌영조병 원임 부총병 서도독동지(欽差統領遼東左營調兵原任副摠兵署都督同知) 이평(李平)은 호달(胡㺚)사람인데, 영원백 이성량(李成梁)이 그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자기 아들로 삼았으며, 공을 쌓아 이 관직에 이르렀는데, 마병 8백 기를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산서 유격장군 시조향(施朝鄕)은 마병 1천 기를, 요동도지휘사 사첨사(遼東都指揮使司僉使) 장삼외(張三畏)는 요동 삼마위 사람인데, 의주에 와서 머물면서 군량과 마초를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고 몸가짐을 간략하게 하여 사람들이 매우 편의하게 여겼다. 책사(策士) 사용재(謝用梓)는 호는 용암(龍巖), 절강 소흥부(紹興府) 여요(餘姚) 사람인데, 태학사 사천(謝遷)의 손자라 자칭하였는데, 참장 낙상지(駱尙志)를 따라 나왔다. 수비(守備) 웅정동(熊正東)ㆍ이대간(李大諫) 등도 청용(聽用)으로서 왔다. 대간은 호는 북천(北泉) 절강 가흥부(嘉興府) 수수현(秀水縣) 사람인데, 압록강가에 와 있었다. 또 원임 하간부동지(原任河間府同知) 정문빈(鄭文彬)ㆍ산서(山西) 노안부(潞安府) 호관현(壺關縣) 지현(知縣) 조여매(趙如梅) 등은 군량과 마초를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다. 조여매는 호는 초암(肖庵), 요동 철령위사람인데, 제독과 가장 친하여 군사(軍事)를 모두 함께 상의하였다. 제독이 부대 편성을 마치고, 세 영장을 전진하게 하고, 또 사대수(査大受)를 선봉으로 삼고, 갈봉하를 행궁 호위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제독은 스스로 표하장관 원임 참장 도지휘사 방시춘(方時春), 영원백의 가정(家丁) 원임 참장 이영(李寧), 원임비어(原任備禦) 한종공(韓宗功)ㆍ이봉양(李逢陽) 등을 거느리고 잇달아 전진하였는데, 정병이 4만여 명이요 용장이 60여 명이며, 군호를 10만이라 하고 통원보(通遠堡)까지 와서는 유둔(留屯)하고 전진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집의 이호민(李好閔) 등을 보내어 제독에게 다음과 같이 정문(呈文)하였다.
조선국 배신(陪臣) 사헌부 집의 이호민(李好閔) 등은 적(賊)의 모계를 헤아릴 수 없고 사세가 더욱 급박하여 빨리 대병을 진출시켜 먼저 힘을 발휘해서 승리를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는 일로 말씀드립니다. 이달 13일에 요동도사 군정첨서 관둔 도지휘사(遼東都司軍政僉書管屯都指揮使) 장(張)의 패문(牌文)을 받았으며, 흠차경략 계요보정산동 등처 어왜군무 병부 우시랑(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禦倭軍務兵部右侍郞) 송(宋)으로부터 근간에 부총병관(副摠兵官) 동양정(佟養正)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중화(中和)ㆍ토성(土城) 등지를 침입 점령하였다고 하고, 또 심유경(沈惟敬)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조공 왕래를 청원하고 애걸한다고 하는 등의 정황이 각각 병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 의거하면 왜노가 거짓으로 조공 왕래를 빙자하고 비밀리에 토성을 공격하는 것이 분명히 우리 군사를 늦추려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마땅히 왕래를 금지하고 엄하게 조사 힐문하여야 하기에 이 패문을 올리는 것이니 본관은 조선 국왕에게도 알려서 병마(兵馬)를 긴요한 곳에 많이 설치하여 서로 서로 힐문하게 하며, 만일 심유경 본인이나 혹 그의 보내는 사람, 혹 가정(家丁)으로 저들 주둔지에 있는 자가 평양(平壤)으로 가서 소식을 전하는 것이나, 혹 가솔 가운데 중국으로 달아 돌아오는 자를 만나면 곧 조사 나포하여 병부로 보내어 사실을 캐어 처리하게 할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거듭 유시를 받고, 국왕의 전지도 함께 받들었는데, 그 긴급한 소관사는 이미 경략과 병부의 전령에 의하여 이렇게 시행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동에 치보(馳報)하고, 본국의 급박한 사정을 들어 제독(提督)과 경략 두 노야(老爺) 앞에 드리고, 빨리 진병(進兵)하여 주시기를 청하게 되어 이 직책을 받들기로 위임을 받고 나왔습니다. 살펴보면 왜적의 흉모가 저희 나라에만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미 저희 나라를 다 함락하고 평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형세와 언사가 더욱 어긋나 그 계획이 그만두고 말 것이 아니니, 말 한 마디로 군사를 풀어 돌아간다고 하니 단정코 이럴 이치가 없습니다. 전일 심 유격(沈游擊)이 재차 적진에 가서 저들과 화친에 대한 의논을 하였는데, 그 사실을 비밀로 하여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은폐(銀幣)를 가지고 갔으며 또 10명의 왜노를 대동하고 경사(京師 명나라 서울)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또 두 관원을 보내어 대마도로 갔으니, 저희 나라 군신들이 모두 해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격은 해를 가리키면서 다른 일이 없다고 하니 그저 믿고 바라는 심정에 감히 의심을 하지는 못하고 이것은 반드시 일을 안전하게 성취하려는 것이라고 하니 천조의 조정 계책도 반드시 저들의 의논을 따라 춘추(春秋)의 수치로 삼는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 보장되므로 의심을 품은 채 믿음을 지키면서 성공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겨울철도 그럭저럭 지나 섣달이 다 가게 되었으니, 적을 토멸할 시기가 이미 십 중 아홉은 잃어버린 것으로 온 나라가 다 같이 민망히 여깁니다. 지금 송 경략의 유시를 받아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늦추고 겨울을 지나게 할 계획임을 알게 되니, 저희 나라에서는 비로소 전일에 조정 계획을 우러러 믿었던 것이 허사가 아니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 어르신의 은덕으로 겨우 해관(海關)을 지나자 벌써 깊은 곳을 찔렀으니 탄복하는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오면, 저 도적은 유격이 기한이 지나도 이르지 않는 것을 보고 현저하게 그것을 구실삼아 서쪽으로 나올 염려가 있는데, 근일 또 도순찰사 김명원(金命元)의 급보를 보면, 심 유격의 가정 왕귀(王貴)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유격을 따라 적진에 들어가서 보았는데 적의 추장 평행장(平行長)이 유격을 향하여 본국 통사(本國通事) 김덕회(金德澮)가 유격을 이간하려고, 명(明) 나라 군사가 기회를 노려 장차 오니 반드시 살해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권하여 먼저 거병(擧兵)해서 서쪽으로 향하기를 권하며, 검을 들고 죽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유격을 보니 그것이 간사하고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와 함께 일반통사 김덕회(金德澮)가 옥에 갇힌 원인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본도 순찰사 홍세공(洪世恭)의 급보에 의하면 그 중 안변(安邊) 등의 부(府)에 나갔던 초탐(哨探) 군인의 계속되는 급보인데, 왜적이 경성(京城)에 있던 무리들을 끌어내어 병력을 증가해서 살인과 약탈을 마음대로 행하는데 혹은 각처로 끼어 들고 혹은 진영을 들어 나가는 것이 목적은 본도의 양덕현(陽德縣) 지방을 향하려는 것으로서 봄철이 가까워지는데, 적의 모계가 더욱 깊어간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저 왜적이 원래 간첩이 많아서 우리 형편을 잘 알고 또 김덕회가 이미 기만당한 일로 잡혀서 갇히게 되었으니, 온갖 계교를 염탐해가면서 실익과 공을 얻으려고 반드시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안변의 왜적이 역시 말하기를, ‘양덕 지방으로 향하려 한다.’고 하니 모계(謀計)를 합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의심 없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왜적이 중화(中和)ㆍ토성(土城)을 침공하니, 이곳 진영은 전투를 제일 잘하기로 이름이 났으니 먼저 군사를 합하여 이곳을 취한 것으로써 어찌 뒤쪽의 근심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돌진해 나와서 우리 편이 머뭇거리고 있는 기회를 틈탄다면 어찌 군병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군병이 원래 약하고 또 늙어서 막아낼 수가 없는데 각지의 물자와 마초는 도리어 적의 소유가 되니 그 사세가 정말 급박합니다. 낮은 관직에 있는 제가 어르신께서 이미 군병을 출발시킨 것을 모르고 사람을 보내 급박한 형편을 고하고, 당일로 어르신의 큰 군대 깃발이 앞에 서서 나가고 군사의 성세가 빛남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저희 나라의 급한 형편을 어르신께서 먼저 살피신 것을 알게 되어 우러러 바라보며 감격합니다. 곧 물러가서 저희 임금께 보고하려고도 합니다만 적이 밀려들어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이 지경에서 날도 저물었기에 감히 입을 들어 몇 말씀 드립니다. 다시 속히 전진하여 주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어르신께서는 이미 큰 명을 받들어 저희 나라를 구제하시게 되었으니, 다시 속히 출동하시고 머무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기회가 누설되기 전에 나가고, 먼저 발동하여 남을 제어하는 계책을 생각하여 크게 황제의 위엄을 떨쳐주시면 이만한 다행이 없겠나이다. 긴급한 사기(事機)에 관련하여 차질을 가져오는 일은 없을까 해서 다시 번거롭게 글을 올려 청원하오니 자세히 살펴 시행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제독이 올린 글을 보고, 정월에 진병하기로 허락하고서도 오히려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또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를 보내어 제독의 군문으로 달려나가서 속히 군사의 출발을 청하였는데, 말과 태도가 간절하며 말할 때마다 눈물이 따라 떨어졌다. 제독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려 하니 이산보(李山甫)가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풀속에 계신데 의리상 차마 성례(盛禮)의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뜰 아래로 내려와서 통곡하니 제독이 감동하여 12월 25일에 강을 건넜다. 깃발이 1천 리에 펄럭이고 징과 북소리가 서로 들렸다. 우리 나라 백성들이 이 광경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상이 여기서 제독과 더불어 접견하여 극진히 위로하고 이어 눈물 흘리며 이르기를,
“황상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대인을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저희 나라의 실낱같은 운명을 대인에게 부탁할 뿐입니다.”
하였다. 제독이 손을 들어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미 황명(皇命)을 받았으니 어찌 죽기를 사양하겠습니까. 또 저희 선대는 본래 귀국 사람인데 제가 나올 때 부친이 역시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귀국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례하여 마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의주에는 예전부터 전해오는 이런 노래가 있었다.
막좌리 벌이 강물에 무너질 때 / 莫佐里坪盡爲江水所破
백마 장군이 마이산에서 오리라 / 當有白馬將軍從馬耳山出來
이른바 막좌리 벌이라는 것은 의주의 서쪽 성밖 땅으로서 성중 사람들이 여기서 농사짓는데 바로 인산보(麟山堡)에 연접되었으며, 마이산은 의주 통군정(統軍亭)과 마주 대한 곳으로 중국 지역이다. 이때 압록강 물이 점점 남쪽으로 옮겨 큰 들을 거의 다 파고 들어가서 의순관(義順館) 문앞에 이르러 나루터가 되었으며, 제독의 탄 말이 백마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또 증명하는 시가 있었다.
장군 한번 나오자 번개 빛 날으는데 / 將軍一出電光飛
흰 말 금 안장에 붉은 비단 옷이네 / 白馬金鞍赤錦衣
천자의 명을 받은 장수는 구름밖에 우뚝히 임하였고 / 玉節高臨雲外逈
천자의 군대가 저 멀리 해뜨는 곳을 가리키네 / 天戈遙指日邊歸
흉중의 병법에는 온전한 적이 없는데 / 胸中韜略無全敵
막하의 웅장한 군사는 호랑이 위엄 갖추었네 / 帳下雄兵藉虎威
압록강 머리에 북소리 진동하니 / 鴨綠江頭雷鼓震
동쪽 사람들 이마에 손 얹고 깃발을 바라보구나 / 東人加額望旌旗
○ 계사년 정월 1일. 흰 기운 세 줄기가 서북쪽에서 하늘로 뻗쳐 태양을 가로 건너질렀는데 곁에 쌍무지개가 있어 세 겹을 둘러싸니 사람들이 모두 웅장한 군사의 기운이 적을 이길 형상이라고 하였다.
○ 4일. 명 나라 대군이 숙천(肅川)에 당도하며,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를 시켜 먼저 순안(順安)으로 가서 왜노를 속여 말하기를,
“명 나라에서 이미 화친을 허락하였고, 심유격이 또 온다.”
하니, 여러 왜노들이 모두 기뻐하였으며, 현소(玄蘇)는 이런 시를 올렸다.
부상에 전쟁 그치고 중화에 복속하니 / 扶桑息戰服中華
사해 구주가 다 같은 한 집이라네 / 四海九州同一家
기쁨이 넘치는 그 기운 세상의 눈 다 녹이니 / 喜氣忽消寰外雪
천지의 봄 아직 이른데 태평화 필 것이네 / 乾坤春早太平花
왜노 추장 행장(行長)이 이에 소장(小將) 평호관(平好官)ㆍ길병패삼랑(吉兵覇三郞) 등 왜노를 보내어, 20여 명의 왜노를 거느리고, 통사(通事) 장대선(張大膳)과 함께 순안(順安)에 와서 심 유격(沈遊擊)을 맞이한다고 하는데, 실은 허실을 엿보려는 것이었다. 제독이 이에 부총병 사대수(査大受)ㆍ유격장군 이영(李寧)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유인하여 함께 술을 마시게 하고 군사를 장막 뒤에 숨겼다가 여러 왜노가 술이 취하자 이영 등이 잔을 들고 호령하니 복병이 갑자기 나타나 여러 왜노를 쳐서 거의 다 없애고, 또 길 추장과 호관을 잡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도망해 갔다. 적진 중에서는 이때에야 대군이 온 것을 알고 크게 소란하여 그치지 않았다. 제독이 이영(李寧) 등을 군령으로 처단하여 두루 보이니, 군중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찬획(贊畫) 유황상(劉黃裳)ㆍ원황(袁黃)이 급히 압록강을 건너와서 왕을 통군정(統軍亭)에서 만나 뵙고 물러나 글을 지어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유하였다.
너희 나라는 본래부터 문물이 발달하고 대대로 충정(忠貞)이 돈독하였다. 근래에 왜이(倭夷)가 무도하여 오랫동안 침략해 와서 너희 군신을 수풀 속에 있게 하니 계속 떠돌아다녀 그 곤궁함이 어떻겠느냐. 우리 대명(大明) 황제께서, 너희가 2백 년 동안 신하의 예절을 부지런히 지킨 것을 생각하여 만금의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너희 나라에는 어찌 종실(宗室)로서 중임을 받고 충분(忠憤)이 분발할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고을 관장으로서 지방을 지키며 강개히 목숨을 내놓을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충신으로서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된다는 생각을 품을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의사(義士)로서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할 생각을 일으킬 이가 없을 것인가. 마땅히 하늘같은 큰 위엄이 진동하는 기회를 타서 빨리 의병을 불러모아 각기 한 부대씩의 군사를 이끌고 함께 구벌(九伐)의 뜻을 펴야 할 것이다. 지금 왜이(倭夷)가 강한 양 날뛰지만 그 세력이 반드시 멸망될 것이요, 너희 나라가 비록 미약하지만 그 세력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니 서로 계획을 세우라.
먼저 천도(天道)로 논하자면 조선은 분야(分野)가 석목(析木)의 자리이다. 지난해 목성(木星)이 인방(寅方)으로 돌았는데 일본이 와서 범하니 이것은 우리가 세성(歲星)의 빛을 받았는데 저들이 침노하는 것으로 하늘을 거슬러 행하는 일이니 비록 강하나 반드시 약해질 것이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왜의 천성이 추운 것을 두려워하는데, 금년은 음(陰)이요, 풍목(風木)이 하늘을 맡고 양명(陽明)이 금을 마르게 하여 처음 기운이 되며, 입춘 후에도 20~30일 간이나 찬기운이 소멸되지 않는 것이 즉, 천시를 이용할 만하다. 이것이 둘째 이유이다. 너희 나라 군신이 모두 이 성에 모였는데, 새벽에 일어나 기운을 바라본즉 아름답고 왕성하여 비단이나 일산같다. 왕성한 기운이 우리에게 있으니 세력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다음 인사로 논하자면, 대국의 웅병(雄兵)이 범과 곰같으며, 무적의 대포가 한번 쏘면 1천 보(步)를 나가는데 저들이 자기 힘을 생각하지 못하니 힘없는 가루가 되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경략(經略) 송(宋)은 깊은 계책과 함축 있는 모계를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며, 제독 이(李)는 일편단심 충성심으로 온갖 전투에 용맹을 떨친 이로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다. 두 관직이 원래부터 충성과 절개를 가졌는데, 이제 동심 협력하여 이 도적을 섬멸하여 천자께 보답하려 하니, 두 나라의 군사를 합하여 이 궁한 도둑을 몰아내는 것은 떨어지는 것을 흔드는 것과 같다. 이것이 둘째 이유이다. 관백(關白)이 강포하여 위로 그 임금을 위협 제어하고 아래로 그 민중을 학대하여 하늘이 망하게 하려고 하여 우리에게 손을 빌리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어제 국왕을 뵈니, 거동이 침착하고 용모가 준위(俊偉)하여 형세가 반드시 중흥할 것이며, 너희 나라에서 전후에 보낸 여러 사절이 천조(天朝)에 군사를 청하는데 성의가 간절하고 측은하며 눈물이 비오듯하여 신포서(申包胥)가 초(楚) 나라의 사정을 울며 호소하던 뜻과도 유사하다. 임금과 신하가 이러하니 어찌 끝내 침체하고 곤궁하기만 할 것이며, 순(順)으로 역(逆)을 치는데 무슨 공이나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넷째 이유이다.
왜노의 믿는 것은 조총이다. 그러나 세 번 쏜 후에는 계속 쏘기 어려우며, 그 군사가 많지만 강한 자는 얼마 안 된다. 앞에 있는 1백~2백 명만 죽이면 나머지는 모두 바라만 보고도 도망해 갈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이길 수 있는 기회요, 바로 지사(志士)가 공을 세울 때이다. 천조의 명령이 우리 나라나 너희 나라를 물론하고 누구나 평수길(平秀吉)ㆍ평수차(平秀次) 및 중 현소(玄蘇)를 사로잡거나 베는 자가 있다면 사람마다 은 1만 냥을 상으로 주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대대로 계승하게 하고 평수가(平秀嘉)ㆍ평수충(平秀忠)ㆍ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진신(平鎭信) 등 이름 있는 여러 추장을 사로잡은 자는 은 5천 냥을 상으로 주고 대대로 지휘사를 계승하게 하며, 그 아래의 사로잡은 자에게는 각각 상여의 등급이 있게 하였다. 너희 나라 신민이 이때에 군중을 모아 함께 큰 공을 세운다면 본국의 사직을 회복할 수 있고, 또 천조의 후한 상을 탈 수도 있으며, 쇠한 나라의 유민(遺民)으로서 집안을 일으키는 시조가 될 것이니, 어찌 빛날 일이 아니겠는가. 여러 도의 신민과 의병으로 이미 일어난 자는 다시 전진하고, 아직 일어나지 못한 자는 속히 불러모아, 혹은 협력해서 왜노의 세력을 좌절시키고, 혹은 그 해이하게 돌아가는 것을 공격하며, 혹은 군량 운반을 계속하되 모든 조처를 수시로 모두 편리할 대로 하게 하라.
조정에서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이 선유문을 가지고 주야로 여러 곳에 분포하며, 제독은 대군을 거느리고 계속 전진하였다. 안주(安州)에 이르러 성의 남쪽에 진영을 설치하니 군대의 깃발과 위용이 정제되고 엄숙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체찰사 유성룡이 제독에게 보기를 청하니 제독이 들어오라고 하였다. 유성룡이 동헌으로 나가니 제독이 의자를 마련하고 서로 접대하였는데, 유성룡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며 이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내어놓고 형세와 병마가 들어갈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제독이 다 보고서 붉은 먹을 묻혀 붓으로 그곳들을 점찍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적은 조총만을 믿는데 우리는 대포를 사용하여 모두 5~6리쯤 나아가니 적이 어찌 당해내리오.”
하였다. 유성룡이 물러나왔는데, 제독이 시 한 수를 부채 폭에 써서 유성룡에게 보내었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강을 건너니 / 提兵星夜渡江干
삼한이 편안치 못해서라네 / 爲說三韓國未安
임금께서 날마다 군사 오는 소식 기다려 / 明主日懸旌節報
신하들은 밤에도 술잔을 들지 못하였네 / 微臣夜釋酒杯歡
봄 들어 살벌한 기운에 마음이 오히려 장대한데 / 春來殺氣心猶壯
이 요사한 기운을 제거하니 등골 벌써 싸늘하리 / 此去妖氛骨已寒
담소간의 큰 소리가 승산이 아니지만 / 談笑敢言非勝算
꿈에도 언제나 말타고 달린다네 / 夢中常憶跨征鞍
유성룡이 백상루(百祥樓)에 있다가 이 시를 받아 보고, 읊으며 되새겨보기를 한참 동안하였다. 이날 밤 삼경에 문득 제독의 휘하 사람이 군중의 비밀 약속 세 조목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 성명을 물으니 말하지 않고 갔다. 이튿날 제독이 활을 당겨 줄을 울리며 곧 두어 명 기병으로 달려 순안(順安)으로 나가고, 여러 군중에서도 연일 뒤따라 떠나갔다.
○ 6일. 명 나라 군사가 바로 평양성 밖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부대별로 나누어서 사면으로 둘러쌌다. 왜적 1만여 명이 벌려 섰는데, 앞에는 사슴뿔 모양의 나무 울타리를 둘러치고, 방패를 끼고 검을 휘두르며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또 한 왜장은 왜적 4~5천 명을 거느리고, 대장기를 세우고 북을 달고 치고 소라를 불고 징을 두들기면서 성중을 순찰하고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또 본성 안팎에 험한 시설을 하여 형세가 아래서 위로 공격하기 어려웠다. 평양성 북쪽 모란봉(牧丹峯) 위에는 적 2천 명이 있는데 청백색의 깃발을 세웠으며, 거마목(拒馬木)을 벌여 설치하고, 북치고 떠들어대며 함성을 올리면서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봉우리가 높이 솟아서 형세가 제일 요긴하였다.
제독이 이에 남방 군사 1지대(枝隊)를 보내어 모란봉 길을 따라 나가며 올려칠 것같이 하니, 우리 나라에서도 승병으로 그 형세를 돕게 하였다. 적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포를 쏘자 우리 군사들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니 적이 비로소 고개를 넘어서 따라왔다. 명 나라 군사가 무쇠 방패를 버리고 가니 적이 다투어 가졌는데 명 나라 군사가 다시 공격하여 얼마를 베고 노획하였다. 적이 물러가 봉우리 위에 머물자 제독이 징을 쳐서 군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와서 유진(留陣)하였다. 이날 밤 인시(寅時)에 왜 3천여 명이 함매(銜枚)하고 가만히 나와서 총병 양원(楊元)ㆍ총병 이여백(李如栢)ㆍ도지휘사(都指揮使) 장세작(張世爵) 등의 세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세 진영 장수가 각기 그 병사를 통솔하여 힘써 싸워서 죽여서 격퇴하였다.
○ 7일. 밤에, 적병 약 8백여 명이 다시 이여백의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들이 일시에 기와 등불을 없애고 거마목(拒馬木) 아래서 일제히 불화살을 쏘니 대낮같이 밝았으며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 8일. 이른 새벽에 제독이 분향하고 날을 점쳐 길한 괘를 얻었다. 부대별로 여러 장수를 억제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는 일이 없도록 효유하여, 3면을 공격 포위하되 동쪽 1면을 비워두게 하고, 오유충(吳惟忠)에게 맡겨 모란봉을 공격하여 가만히 서남쪽을 취하게 하되, 왜가 고려 군사를 쉽게 여기므로 조승훈(祖承訓)을 시켜 거짓으로 복장을 모방하고 잠복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제독이 전령을 끝내고, 밥을 먹고 장비를 갖춘 다음 세 영(營)의 장수들과 함께 나누어 각기 소속 장병을 거느리고, 성밖 서북쪽을 둘러싸서 진을 칠성(七星)ㆍ보통(普通)ㆍ함구(含毬) 세 문밖에 벌였다. 적은 성위에 홍백색의 깃발을 세우고 항전하는데, 제독의 수하 병사 2백여 기(騎)가 성 아래까지 나가서 오가며 지휘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으며 진시(辰時)에는 여러 군병들을 나누어서 차례로 점차 나아갔다. 제독의 군영에서 먼저 대포를 쏘고, 각 진에서도 각종 화기를 일시에 함께 쏘니 메아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산악이 모두 움직이는 듯하였다. 큰 들판이 캄캄해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으면 수십 리나 퍼져나가는데 불화살이 공중으로 퍼져나가는 모양이 베를 짜는 것같았다. 불길이 세고 바람이 급하여 바로 성안으로 향해 치달리니, 숲이 다 불탔으며, 먼저 밀덕(密德) 토굴을 불태워 거의 다 불붙었다.
제독이 여기서 여러 군사를 북을 쳐 호령하여 성으로 올라갔는데, 적이 가까운 거리에 엎드려 많이 총환을 사용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로써 죽기를 각오하고 막아 지켰다. 또 긴 창과 큰 칼을 사용하여 밖으로 날을 가지런히 하니 총총한 모양이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명 나라 군사들이 차츰 물러서자, 제독이 직접 겁내어 물러서는 사람 하나를 베어서 여러 군사들에게 돌아가며 보이고, 몸을 날려 바로 앞으로 나가서 크게 외치기를,
“먼저 성위에 올라가는 자는 은 50냥을 상을 주겠다.”
고 하니, 여러 군사들이 북치고 고함을 치며 일제히 나아갔다. 용맹을 뽐내며 성으로 다가가서 마패(麻牌)를 지고, 창을 들고 서로 섞여 올라가며 혹은 총을 쏘고 포를 놓으며 혹은 성가퀴를 지키는 적을 쳐 찌르니 적이 당하지 못하고 차츰 물러가게 되었다. 제독이 몸을 날려 먼저 올라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올라갔다. 부총병 낙상지(駱尙志)가 함구문(含毬門)에서 창을 들고 몸을 솟구쳐 성첩을 잡고 올라가는데 적이 성가퀴 위에서 큰 돌을 굴려 떨어뜨려 그 배를 맞추었지만 낙상지는 끄덕하지 않고 크게 외치며 뛰어올랐다. 또 절강(浙江) 군사가 적의 깃발들을 뽑아버리고 명 나라 군중의 깃발을 세우니 적병이 감히 버티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관군도 따라 들어가며 베고 사로잡은 적이 적지 않았다. 적이 바야흐로 남쪽을 고려 군사라고 하여 가볍게 여겼는데, 조승훈이 위장했던 것을 벗어버리고 명 나라 군사의 투구와 갑옷을 드러내니, 적이 급히 군사를 나누어 막는데 조승훈이 용맹을 뽐내며 나아갔다. 장세작 등은 칠성문을 따라 대포로 문루를 쳐부수고 군사들을 정돈하여 들어가고, 이여백 등은 함구문을 경유하여 들어가며, 양원은 보통문을 경유하여 들어가서 승리한 기세로 앞을 다투어 나아갔다. 유격장 오유충은 탄환에 맞아 가슴이 뚫려 피가 흐르고 다리가 부었지만, 분발하며 큰 소리로 싸움을 독려하였다. 제독은 탔던 말이 포환에 맞아 죽어 독약이 온 몸에 풍기는데, 말을 갈아타고 달려나가다 참호 속에 빠져 코끝에서 불이 나지만 군사를 휘동하여 오히려 나아가니 군사 한 명이 적 백 명을 당해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면으로 쳐서 죽이니 적의 무리가 무서워서 장막 속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또 불화살을 사용하여 거의 다 불태웠다. 진중에서 머리 벤 수가 1천 2백 85급인데 그 중에는 평수충(平秀忠)ㆍ평진신(平鎭信)ㆍ종일(宗逸) 등 25명이 있었다. 생포한 것이 2명인데 통사 장대선(張大膳)도 있었다. 말 2천 9백 85필을 노획하고, 왜의 기구 4백 52건을 얻었으며, 본국에서 포로되었던 남녀 1천 2백 25인을 구출하였다. 불에 타 죽은 적이 몇만 명은 되는데, 피비린 냄새가 10리는 퍼지며 그 밖의 성에서 떨어지고 물에 빠진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행장 등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달아나서 풍월정(風月亭) 토굴로 들어갔는데, 제독이 시초(柴草)를 독려하여 운반하게 하여 사면에 쌓아놓고, 불화살을 사용하여 일시에 함께 불태워버리려 하였다. 그런데 칠성문ㆍ보통문과 모란봉의 왜적이 모두 여러 토굴을 차지하고 있어 갑자기 어찌할 수 없으며 왜적은 굴 속에서 벌집처럼 구멍을 많이 뚫고 총알을 비오듯 쏘아대니 명 나라 군사들이 쓰러지는 자가 잇따랐다.
제독이 군사를 수습하여 본영으로 돌아와서 여러 군사들을 밥 먹이고, 통사 장대선을 보내 행장에게 효유하여 말하기를,
“우리 병력으로 단번에 섬멸할 수 있지만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는 없어 네가 살아갈 길을 열어주니 너는 속히 여러 추장들을 거느리고 원문(轅門 진영에 설치한 문)에 나와서 나의 약속을 들으라.”
하였다. 행장이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물러나 돌아가겠으니 뒷길을 차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오.”
하니, 제독이 허락하고 통역관으로 우리 나라에 알리어 한쪽의 복병을 철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밀리 이영ㆍ조승훈ㆍ갈봉하(葛逢夏) 등에게 명하여 요로에 매복토록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해 갔는데 이영 등이 요격하여 3백 59급을 베고 2명을 생포하였다. 중화(中和)ㆍ황주(黃州) 등지에 군영을 설치했던 왜적은 평양의 포소리를 듣고 먼저 이미 도망쳤다.
그때 순변사 이일(李鎰)이 별장 김응서(金應瑞)와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성밖으로 물러나와 유둔(留屯)하였는데, 이때에 와서야 적이 도망해 돌아간 것을 알았으나 또한 뒤따라 추격하지 않았다. 제독이 이것을 나무라고 또 이일이 장수 재목이 아니고 이빈(李薲)에게 그 소임을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이일의 죄를 문책하는데, 군법을 시행하려 하다가 얼마 후에 놓아주고 이빈으로 대신 그 군사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彦)과 김경로(金敬老) 등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며 이시언은 굶주리고 병들어 낙후한 자 60여 명만 베었으므로 체찰사 유성룡이 베려고 하였는데, 제독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그 죄가 죽어야 하겠지만 적을 아직 멸하지 못하였으므로 한 명의 무사도 아껴야 한다.”
하면서, 백의로 종군하게 하였다. 황주 판관 정엽(鄭曄)만은 행장의 뒷길을 끊어 90여 급을 베고, 중도에서 또 30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 이미 평양에서 승전하니 여러 군사들이 다투어 가며 왜적의 물건을 빼앗았는데, 전세정(錢世禎)만이 군사들을 단속하여 물건을 취하지 않았다. 제독이 평양에 머물고 또 좌협(左協)대장 장세작(張世爵)과 선봉장의 총병 사대수(査大受) 등을 명령하여 진병하게 하고, 또 유성룡과 접반사 이덕형(李德馨)으로 급히 앞으로 나가서 마초와 양곡을 마련하도록 독려하고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또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을 전임으로 하여 좌랑 김계현(金繼賢)과 이자해(李自海)를 거느리고 군중 일행을 따르며 군량과 마초를 주관하게 하고, 또 박충간(朴忠侃)을 독촉하여 수송 관계를 주관하여 보살피게 하고, 또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권징(權徵)을 보내 종사(從事) 황치경(黃致敬)과 권협(權悏)ㆍ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 신암(申黯)을 데리고 강화(江華) 교동(喬桐)으로 들어가서, 공사간의 저장 물자를 다 징발하여 군량을 보태고 이어 충청ㆍ전라도의 해상 수송을 독려하게 하였다. 또 사간원 정언 극중(黃克中)을 보내어 작업을 감찰하게 하고, 의정부 우의정 유홍(兪泓)으로 여러 가지 사무를 총독하게 하되 모두 주야로 독촉하여 시각을 지체하지 못하게 하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는 또 흠차 경리 정왜양향 호부산동 청리사 주사(欽差經理征倭糧餉戶部山東淸吏司主事) 애유신(艾維新)으로 이달에 강을 건너 양곡 운반을 독촉하게 하였다. 애유신의 호는 시우(時宇), 하남(河南) 개봉부(開封府) 난양현(蘭陽縣) 사람으로서 만력 병술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양곡 운송이 제때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검찰사 김응남(金應南)과 호조 참판 민여경(閔汝慶)ㆍ의주 부윤 황진(黃璡)을 곤장을 때리니 가는 곳마다 모두들 부들부들 떨었다.
○ 9일. 명 나라 군사 선봉이 이미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나오는데, 나뭇가지가 길을 막아 통행할 수 없었다. 유성룡 등이 이리저리 돌아 빨리 나와 군사들 앞으로 나오는데 중화에 들려 황주에 이르니 밤이 벌써 3경은 되었다. 이때에 적병이 겨우 물러가고 경내가 황폐해지고 공허한데 민중들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급히 글을 황해 감사 유영경(柳永慶)에게 보내어 수운을 독촉하게 하고, 또 글을 평안 감사 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내어 김응서(金應瑞) 등이 거느린 군사 중에 싸움을 할 수 없는 자들을 뽑아서 평양으로부터 지고 이고 뒤를 따라 황주까지 보내도록 하였다. 또 평안도 세 현(縣)의 곡식을 배로 실어 운반하되 청룡포(靑龍浦)에서 황해도로 운송하게 하였는데, 일이 미리 준비가 있은 것이 아니라 임시로 갑작스럽게 하는 것인데 대군이 뒤를 따라왔지만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여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선봉 마군(馬軍)이 뒤를 따라 계속 떠나서 개성부(開城府) 땅 청석동(靑石洞)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험하고 좁으며 좌우쪽에 절벽이 하늘에 닿게 높이 서고 가운데로 외길이 통한다. 적 수백 명이 모여 있다가, 명 나라 군사들은 바라보고 달아나 숨으며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므로 추격하여 30여 급을 베었다. 중협장(中協將) 이여백이 드디어 개성을 빼앗으니 적의 무리 수만 기(騎)가 임진강을 건너 경성으로 도망해 돌아왔다.
○ 19일. 명 나라 군사가 동파탄(東坡灘)을 경유하여 얕은 곳을 걸어서 건너 추적 습격하니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으며 진중에서 1백 65급을 베어 얻었다. 우리 나라 방어사 고언백(高彦伯)도 와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평안ㆍ황해ㆍ강원ㆍ경기 4도가 함께 회복되고 함경도만이 청정(淸正)이 막아 지키는 곳이 되었는데, 개성이 격파되니 그 역시 경성으로 빨리 돌아왔다. 왕이 평양으로 향하여 떠나려 하여, 누각에 올라 의주 백성들을 효유하고 모든 부역을 감면하고 또 전세(田稅) 곡식을 하사하여, 서쪽으로 명 나라 서울을 향하여 망궐례를 행하고 떠났다. 승장(僧將) 휴정(休靜 서산대사)이 용사 1백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대가(大駕)를 맞이하니 제독이 문첩(文帖)을 보내어 칭찬하고 권장하였는데 그 중에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치는데 충성이 태양을 꿰니 흠앙하는 마음 금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었다. 또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공리를 도모하는 뜻이 없었고 / 無意圖功利
도선을 배우는 데 전심하였네 / 專心學道禪
국사 급하다는 말 지금 듣고서 / 今聞王事急
총섭이 산에서 내려오셨네 / 摠攝下山巓
○ 경략(經略 송응창)이 평양의 승전 소식을 듣고서 지휘사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면사첩(免死帖 죽이지 않는다면 증명서)을 가지고 가서 서울 안의 왜노에게 붙었던 백성들을 불러내려 하는데, 안주(安州)에 이르러 왕을 뵙고 국왕의 교서를 청구하였다. 상이 잠시 장막 뒤로 들어가서, 이호민(李好閔)을 불러 교서를 지어 드리라고 하니 이호민이 구상할 겨를이 없이 즉시 초안을 작성하여 드렸는데 황응양이 이를 가지고 떠나갔다. 그 교서에 이렇게 말하였다.
아아, 너희들 경성의 민중들아! 성천자(聖天子)의 밝으신 명을 공경히 듣고 소동하는 일이 없을지어다. 성천자께서 우리 한 나라 지역이 죄없이 저 미친 도적의 핍박을 당하여 도탄에 빠져서 조석간에 다 없어지게 될 것을 불쌍히 여기사 빛난 위엄으로 천자의 군대를 명하시어 구제하게 되었다. 경략 계요 보정 산동 방어왜군무 병부시랑(經略薊遼保定山東防禦倭軍務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과 제독계요 보정 산동 방해 어왜군무 도독부도독동지(提督薊遼保定山東防海禦倭軍務都督府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이 병마 5만을 거느리고 이미 금년 정월 8일 계해에 평양을 진공하여 하루아침이 다 지나기 전에 성을 함락시켜 불사르고 적을 남김없이 베었으며, 획득한 수급과 갑옷ㆍ마필ㆍ기계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병기가 가리키는 곳에 군사가 머물지 않고 풍운이 빛을 움직이고 귀신이 넋을 잃었다. 남은 추위는 숙살(肅殺)하는 위엄을 돕고, 새 봄은 양화(陽和)의 은택과 화합하니, 산을 들어다 새알을 누르는 것으로도 그 성공의 쉬움을 그대로 비유할 수 없도다. 황해도에 유둔하였던 적이 영채(營寨)를 불태우고 밤에 도망가니 어느 누구도 감히 왕사(王師)를 막을 자는 없을 것이다. 뇌성같은 호령과 대쪽을 가르는 것같은 형세로 며칠내로 저 경성에 이르게 될 것인데 너희들 경성에서 예전부터 생육(生育)하던 백성은 술과 광우리 밥을 가지고 길 양쪽에 서서 맞아 위로하는 것이 황해도의 백성들이나 다름 없을 것이니 내가 구태여 번거롭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하면, 너희 어리석은 백성들이나 노약자로 적 속에 있는 자들은 혹시라도 겁내고 박절한 중에서 살기를 꾀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구멍의 개미가 살려고 달아나는 격이요, 노둔한 말이 구유의 콩을 잊지 못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진실로 애통한 일이다. 또 포로가 되어 자력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자도 출몰하면서 적정을 정찰하고 주선하면서 틈탈 기회를 생각할 것이니 너희들의 실정을 보고 듣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성천자께서도 아마 불쌍히 여기고 근심하실 것이다. 지금 지휘사 황(黃)이 삼가 은덕의 뜻을 받들어 가서 경성의 백성들을 불러 위무하고 너희들의 죽은 목숨을 살려줄 것이니 내가 무슨 많은 말을 하리오. 오직 성천자의 은덕의 뜻을 받들어 선포할 따름이다. 우리 성황제의 천지의 부모같은 은덕이 우리의 다 끊어진 목숨을 연장하여 주시고, 다시 우리의 다 엎어진 세업을 회복하여 주시고 그 깊은 인덕(仁德)의 남은 은택이 적에게 얽매어 있는 백성들에게 함께 미치니, 천지의 함육(涵育)해 주시는 은혜를 무슨 말로 칭송할 수 있으랴. 저 산하를 돌아보니 오직 눈물이 소매를 적실 뿐이로다. 교서가 이르는 대로, 너희들 민중으로서 저들에게 유인되어 잘못을 범한 자는 서로를 거느리고 명령하는 곳으로 돌아와서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할지어다.
황응양이 떠난 다음 왕이 평양으로 돌아와서 제독을 접견하고 사례하며 위로하고 효유하였으며, 또 제독에게 나아가서 서울을 회복할 것을 청하니 제독이 허락하였다. 대개 서울은 우리 나라의 도회지로, 왼쪽에는 강원도, 오른쪽에는 황해도, 동쪽은 경상도, 남쪽은 전라도가 있으며 함경도와 충청도가 서로 호응하는 형세로 되어 있어 천연의 요지를 차지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가 잇달아 이겨서 또한 적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니 사람들이 매우 근심하였다. 제독이 먼저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앞길을 정찰하고 제독도 자신이 이어 떠나서 25일에 개성부에 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적의 추장은 평양에서 패한 것을 분개하고 또 혹시라도 서울 안의 사람들로서 내응이 있는가 의심하여 있는 대로 찾아내어 종루(鍾樓)에서 한강에 이르는 사이에 수만 여명을 늘어앉힌 다음 긴 칼을 빼어들고 남녀를 논할 것 없이 차례로 나가며 베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목을 늘여 칼을 받고 감히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없었다. 한 사람이 함께 앉은 자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죽을 것인데 도망해 달아나면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니, 곁에 앉은 자들이 모두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오활한 생각을 하지 말라. 반드시 큰일 날 것이다.”
하였다. 그 중 혹 듣지 않고 일어나서 달아나 살게 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낙지(樂地)에 나가기나 하는 듯하니, 인심이 정상이 아닌 것이 이러하였다. 적은 또 여염집을 거의 다 불태웠으며 여러 곳에 유둔하였던 적이 모두 서울로 모여들어 명 나라 군사에 항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우리 나라의 체찰사 이하가 잇달아 진병할 것을 제독에게 청하였는데, 제독이 여러 날을 지체하다가 27일에야 새벽에 덕진(德津)을 경유하여 내려가서 파주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어두운 새벽에 적 수백이 나와서 미륵원(彌勒院) 앞 들판에 진을 치자 사대수가 고언백(高彦伯)과 더불어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적 1백 30급을 베고 달려가서 제독에게 품의하여 말하기를,
“적이 이미 기가 죽었으니 빨리 진군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제독이 휘하 수십 인과 더불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왔다. 삼협 대장들이 역시 휘하 병사 수십 명을 데리고 서로 뒤를 이어 달려나왔다. 제독이 혜음령(惠陰嶺)을 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낯을 상하였는데 다른 말을 바꾸어 타고 앞으로 나오니 여러 장수들도 용맹을 뽐내며 앞을 다투어가며 적진을 바라보고 나왔다. 여기서 제독은 그 군사를 지휘하여 두 날개를 만들어 가지고 앞장섰다. 적이 깃발을 여현(礪峴)에 벌여 세우고 적은 군사를 유인하여 거짓 패하여 달아나면서 진흙 수렁 가운데로 끌어들이니 그만 진흙 속으로 빠져서 말이 나가지 못하였다. 왜적이 그때는 산의 후면에서 산으로 올라와서 진을 치는데 몇 만여 명이며, 칼날이 번쩍번쩍 번득이고 깃발이 해를 가렸다. 명 나라 군사들이 바라보고 모두들 겁을 집어먹었다. 좀 있더니 적의 무리가 검을 휘두르며 나와서 두어 겹으로 둘러싸는데, 제독의 거느린 군사는 모두가 북방의 기병이라 화기(火器)는 없고 단검만을 가졌다. 적병이 앞으로 다가들며 진영을 돌격하고 좌우로 휘둘러 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지고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낼 자가 없었다. 제독이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장사들을 독려하여 죽기를 각오로 싸우기를 사시부터 오시까지 하였다. 금갑옷을 입은 왜장이 바로 제독을 치니 거의 몸에 미치게 되었는데, 지휘사 이유승(李有昇)이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면서 두어 왜노를 베고 마침내는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서 왜노들에게 사지를 찢기게 되었다. 이유승은 요동 철령위(鐵嶺衛) 사람으로 용력이 비상하고 항상 제독을 따라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여기서 죽었다. 좀 있다가 이여백(李如栢)ㆍ이영(李寧) 등이 양면으로 막아 협격하고, 이여매(李如梅)가 옆에서 금 갑옷 입은 왜적을 쏘아 죽였는데 때마침 양원(楊元)이 대군을 거느리고 겹겹이 둘러싼 적을 공격하니 왜적이 그만 물러갔는데, 명 나라 군사 중에 정예 병력이 많이 죽었다. 하늘에서는 또 큰 비가 내렸는데 서울 가까운 평지에 논두둑이 많고 얼음이 녹아 진흙에 깊이 빠지니 말이 달릴 수가 없어 사람과 말이 서로 밟고, 기구 및 갑옷과 창들은 길위에 흩어져 깔렸다. 여기에 왜는 산악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앞에 놓고 구슬 꿰미처럼 포진하고 널리 비루(飛樓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적을 쏠 수 있는 시설)를 세우고 조총을 구멍속에서 쏘아 수시로 사람을 죽이니 명 나라 군사가 그만 퇴각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제독이 파주에 돌아왔는데, 노상에서 원수(元帥)의 깃발을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을 보전하여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고 하였으며, 이유승의 사위 왕심(王審)을 불러보고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호남아(好男兒)가 나를 위하여 죽었다.”
고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고는 비록 패전한 것을 숨기지만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실되었다. 밤에, 이유승의 죽음을 생각하며 아침까지 통곡하고는 이튿날 동파(東坡)로 퇴군하려 하였다.
체찰사 유성룡ㆍ우의정 유홍(兪泓)ㆍ도원수 김명원(金命元)ㆍ부원수 이빈(李濱) 등이 제독의 장막 아래 이르러 뵙기를 청하니 제독이 장막 밖에 나와 섰고 여러 장수들이 좌우 쪽에 벌여 섰다. 유성룡 등이 말하기를,
“저희들이 들으니 노야(老爺)께서 장차 서쪽으로 돌아가시려 한다는데, 노야의 깊은 의사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작은 실패로 경계를 삼는다면 아마도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常事)이니 형세를 보아서 다시 진격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경솔하게 움직이려 하십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많이 적을 죽였으니 불리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비가 와서 진창이 되어 군사를 주둔하기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동파로 돌아가서 군사들을 쉬어 가지고 다시 나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 등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말하였지만, 제독이 이미 초안을 작성한 주본(奏本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내어보였다. 그 중에는,
“적이 도성에 있는 자 20여 만이니 중과부적입니다.”
한 것이 있고, 끝부분에 가서는 말하기를,
“신이 병이 심하니 다른 사람으로 소임을 대신함을 청합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깜짝 놀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적병이 매우 적은데 어찌 20만이 될 수 있습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그것은 당신네 나라 사람이 말한 것이오.”
하였는데, 이는 칭탁하여 말한 것이었다. 명 나라의 여러 장수 중에도 장세작(張世爵)과 이여백(李如栢)이 더욱 제독에게 퇴병하자고 권하였는데, 유성룡 등이 굳게 다투며 물러가지 않으니 매우 화를 내며 발로 이빈을 걷어차며 물러가라고 소리치는데, 언성과 기색이 매우 사나웠다.
이때 큰 비가 연일 와서 도로가 통하지 못하고, 적은 또 길가의 여러 산을 불태워서 벌거숭이가 되어 쑥 한 포기가 없으며 게다가 마역(馬疫)이 겹쳐서 수일 사이에 거꾸러져 죽은 말이 만 필이나 되었다. 이날 세 진영의 장수가 임진강을 도로 건너 동파역(東坡驛) 앞에 진쳤다. 이날에는 동파에서 또 개성부로 돌아오려 하자, 유성룡이 또 힘써 다투며 말하기를,
“대군이 한번 물러가면 적의 기세가 더욱 교만하고 원근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임진강 이북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니, 원컨대 좀 멈추어 기회를 보아 움직이소서.”
하니, 제독이 거짓으로 허락하였는데, 유성룡 등이 물러갔다. 그런데 제독이 그만 말을 달려 개성으로 돌아가고 여러 진영도 차례로 물러갔으며,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장군 관승선(毌承宣)만을 머물러 천여 명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을 지키게 하였다. 유성룡 등이 이후로 사람을 보내어 다시 진군하기를 청하니, 제독이 느슨하게 대답하기를,
“하늘이 개고 길이 마르면 진군하여 정벌하여 초토하겠다.”
고 하였는데, 사실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증명한 시가 있었다.
벽제관에서의 한 번 실패에 / 一自碧蹄䘐
웅장한 기개 속으로 사라졌네 / 壯志乃暗消
도리어 기미 계책에 / 還將羈縻計
왜노의 세력만 교만해졌다네 / 徒使奴勢驕
중국 10만 군사가 / 漢家十萬師
말 잘하는 유세객만 못하다네 / 不如說舌饒
머리를 돌이켜 신성한 도읍 바라보니 / 回首望神都
살기가 하늘 높이 뻗쳤네 / 殺氣干雲霄
대군이 개성부에 이르러 매우 오래 있었는데 군량이 이미 다 되었다. 오직 수로를 따라 마른 풀을 강화도에서 가져오고, 또 배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마초를 운반하여 조금씩 도착하였는데, 오는 대로 다 떨어지니 그 형세가 더욱 급하였다. 하루는 여러 장수들이 양식이 모자란다고 구실을 삼아 제독에게 회군을 청하니 제독이 매우 성내었다. 체찰사 유성룡ㆍ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ㆍ경기좌도 감사 이정형(李廷馨) 등을 뜰 아래에 꿇리고 큰소리로 힐책하며 군법을 가하려 하였는데, 유성룡이 다만 사죄하기를 마지 않고 눈물을 흘릴 뿐이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며 명 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로 화를 돌려 말하기를,
“너희들이 예전 서하(西夏)에 종군하였을 때에는 군중에서 수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도 감히 돌아가자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끝내는 큰 공을 이루었다. 지금 조선에 와서 우연히 수일간 양식을 대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문득 돌아가자고 하느냐. 너희들은 가려면 가라. 나는 적을 멸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오직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가지고 갈 뿐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유성룡 등이 사례하고 물러나와서 시기에 맞지 않게 양곡을 방출한 죄로 개성 경력(經歷) 심예겸(沈禮謙)을 곤장으로 때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전라도에서 바다로 수송해 오는 쌀과 콩 2만 2천여 석과 황해도에서 수송해 오는 마초 수만 석이 후서강(後西江)에 닿아서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이 총병 장세작을 시켜 유성룡 등을 불러 위로하고 또 군사(軍事)를 의논하였다.
이때 전하는 말이 청정(淸正)이 또 양덕(陽德)ㆍ맹산(孟山)으로 빙 둘러 와서 몰래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고 하였다. 제독이 벌써부터 서쪽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큰 소리로,
“평양은 근본이 되는데, 만일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대군이 돌아갈 길이 없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면서, 드디어 여러 군사들에게 일제히 물러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으로 향하고 유격장군 왕필적(王必迪)만을 머물러 개성부를 지키게 하며 이덕형에게 조선 군사가 세력이 외롭고 구원병이 없으니, 함께 강 북쪽으로 돌아가서 적에게 승세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유성룡이 이때 동파에 있다가 종사관 신경진(辛慶晋)을 보내어 달려가서 제독을 보고, 퇴군할 수 없다는 의사를 진술하여 말하기를,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 지역에 있는데,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어 신(神)과 사람의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갈 수 없는 것이 하나요, 경기 이남의 남은 백성들이 날마다 왕사(王師)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왕사가 물러갔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굳건한 뜻을 가지지 못하고 서로 무리를 거느리고 적에게로 돌아갈 것이 둘이요, 우리 나라 강토를 한 자ㆍ한 치도 용이하게 버리지 못할 것이 셋이요, 장사(將士)가 비록 힘은 약하지만 지금 바야흐로 천병(天兵)을 의지하여 함께 나가 취할 계획을 하는데, 한번 철군의 명령이 내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들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으로 흩어져갈 것이 넷이요, 한번 물러가면 적이 그뒤를 따라 갈 것이니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도 온전할 수 없는 것이 다섯입니다.”
하였는데, 제독이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조정에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퇴병하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제독이 역시 듣지 않으니 윤두수가 간절하게 사연을 말하며 동쪽으로 나가기를 청하면서 눈물이 말할 때마다 떨어지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는 안색을 지었으며, 그래서 우는 각로(閣老)라는 칭호가 생기게 되었다.
진사 태현(太玄) 심조환(沈朝煥)이 이러한 동쪽에서의 사실을 듣고 두 수의 율시(律詩)를 지어 탄식하였다. 그 첫번째 시는 이러하다.
들리는 말 요양 수자리에 / 聞說遼陽戍
위태롭고 혈전도 많다네 / 羈危血戰多
오랑캐 진영이 새날개처럼 벌리자 / 虜營分鳥陣
중원의 군사들 큰 물결에 휘말렸다네 / 漢卒偃鯨波
험한 곳에 들어가는 일 병법의 비밀인데 / 入阻鞱鈴祕
떠도는 글은 도로에 잘못 전해지네 / 飛書道路訛
장군님 어려움도 많으니 / 將軍自辛苦
유세하는 그 사람 끝내 어떨런지 / 說舌竟如何
그 두번째 시는 이러하다.
오랑캐 항복 받는 계획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 伏羌圖未上
비방하는 광주리의 글 의심할 일 많구나 / 謗篋摠堪疑
말을 잃은 것이 어찌 복은 되지 않으며 / 失馬寧非福
제후 봉한 곳에 운수가 기구하지 않으리라 / 封侯數不奇
나라의 많은 재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 國脂流海甸
전쟁에 죽은 시체 강가에 처참하다네 / 戰骨慘江垂
여러 경영하는 일들 / 多少經綸事
빈말만으로 부질없이 끌어가려나 / 空談謾欲持
○ 2월. 병부에서 제문(題文 명 나라에서 관원이 공사로 황제에게 아뢰던 글의 일종)을 올려 청하여 내고(內庫)의 은 3천 냥을 내어보내어 조선의 공로가 있거나 공사에 죽은 인원에게 주게 하였다. 조선에서 왜를 막아 공로가 있거나 공사에 죽은 관원들은 그 충성과 용맹을 칭찬할 만하니 상품을 고루 나누어주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거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국왕에게 전유하기를,
“각도 장령을 엄하게 독려하여 힘써 회복을 도모해서 중국에서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또 흠차 순안요동 겸관해방군무 감찰어사(欽差巡按遼東兼管海防軍務監察御史) 주유한(周維翰)과 흠견 분수요동영원 겸둔전산서 포정사우포정사(欽遣分守遼東寧遠兼屯田山西布政司右布政使) 한취선(韓取善) 등을 보내어 군사를 감찰하고, 흠차 통령천귀 한토관병 참장(欽差統領川貴漢土官兵參將) 유정(劉綎)과 원임(原任) 참장 허국충(許國忠) 등으로 계속 구원하게 하였다.
주유한은 호는 도우(鞱宇)인데 북직례(北直隷) 하간부(河間府) 부성현(阜城縣) 사람이며, 만력(萬曆) 경진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양으로 왔는데, 성품이 간결하고 정중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과 서로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명 나라 사람들도 꺼려하였다. 한취선은 호는 성암(惺菴)인데 산동 제남부(濟南府) 치천현(淄川縣) 사람이다. 만력 정축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사람됨이 매우 정직하였다. 유정은 자는 자신(子紳)이요, 호는 성오(省吾)인데, 강서(江西) 남창부(南昌府) 홍도현(洪都縣) 사람이다. 사천(四川)ㆍ파촉(巴蜀) 지방 군사 5천 명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해귀(海鬼) 수십 명이 있으니 그 종족이 남번(南番)에서 생장하여 낯빛이 아주 새까매서 귀신같으며,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다녔다. 또 키가 큰 사람이 있으니 형체가 두 길은 되는데 말을 탈 수가 없어 수레를 타고 왔다. 또 미후(獼猴)로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타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데 적진중에 들어가서 말 굴레를 풀어놓기도 하였다. 허국충은 남방 군사 포수 1천 명을 거느렸는데, 머리에는 흰 사모두건을 쓰고 몸에는 소매가 짧은, 우리 나라 나장(羅將)의 옷같은 것을 입었는데 색깔은 적ㆍ백ㆍ청ㆍ황색을 사용하였으며, 불화살ㆍ대포ㆍ창ㆍ칼의 기술을 잘 사용하는데 모두 왜노보다 나았으며 잇따라 강을 건너서 왔다.
이때, 대군이 이미 서쪽으로 물러갔기 때문에 왜노의 여러 추장들이 경성에서 그 세력을 합하여 형세가 더욱 성하였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 독성(禿城)으로부터 휘하 정병 4천 명을 나누어서, 전라도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로 선봉장을 삼았는데, 자신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의 군사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양천(陽川)을 경유하여 진군하여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쳤으며, 선거이는 금천산(衿川山)에 영채를 설치하여 멀리서 도움을 주었다. 전라도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이 역시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양천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자신이 감독 제조한 화차(火車) 3백을 나누어서 권율의 진중으로 보내었다. 서울 안의 왜적이 권율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으며, 발끝으로 차서 거꾸러뜨릴 계획으로 군사들을 다 거느리고 나왔다.
○ 12일. 새벽에 정탐군이 보고하기를,
“적이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서 홍색과 백색의 깃발을 가지고 본영을 향하여 온다.”
하였다. 권율이 군중에 명령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5리쯤 거리에 있는 들판 언덕 위에 적의 무리가 이미 가득 찼는데, 선봉 백여 명의 기병이 어느 사이에 점점 가까이 오더니 잠시 후에는 수만여 명의 군사가 들판을 덮어오는데 모두 홍기와 백기를 등에 지고 황금 일산을 펴들었으며 귀신의 얼굴, 짐승의 형상으로 심히 괴이하게 분장한 자가 본영을 둘러싸고, 맨 나중에는 많은 군사로 계속 나와서 두세 겹으로 둘러쌌다. 권율이 곧 군중에 전령하여 식사를 하게 하고 활 잘 쏘는 군사들을 뽑아 내려다보이는 곳에 배치하고 화살을 내려 쏘기를 비오듯 하였다. 또 용사들을 뽑아 돌을 던져 공격하며 계속하여 화차에서 석환(石丸)을 쏘고 또 각종 화기를 발사하니, 적이 진영을 세 곳으로 나누어 한편으로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번갈아 가며 나왔다. 권율이 검을 빼어들고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묘시에서 유시에 이르는 동안에 적이 아홉 번 진출하였다가 아홉 번 다 퇴각하였다. 그리고는 마초 묶음을 가지고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채를 불태우는 것을 성중에서 물을 부어 구원하였다. 처음 승군장(僧軍將) 처영(處英)으로 승군 1천 명을 거느리고 서북쪽에서 있는 근처의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 와서 승군이 좀 물러가니 적이 크게 외치며 밀고들어와 온 군사가 휩쓸렸다. 그런데 권율이 스스로 검을 휘두르며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니 모두들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해 나가며 싸우자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일시에 달아나 흩어졌다. 그리고 시체를 네 무더기로 모아놓고 마초를 모아 불태우니 냄새가 10리나 퍼졌다. 우리 군사들이 싸우면서 머리 벤 수가 1백 10급이요, 왼쪽 귀가 두 개이며, 빼앗은 활ㆍ살ㆍ투구ㆍ갑옷ㆍ칼ㆍ총 등 병장기가 모두 7백 27건인데, 살아남은 왜적은 통곡하면서 성으로 돌아갔다.
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이때 임진강에 있으면서 왕래하며 정찰 탐지하다가 권율이 크게 승첩한 소식을 듣고 와서 보았는데, 진영을 정돈하여 기다리니 깃발들이 선명하고 병장기가 정밀하고 예리하며, 호령이 엄숙하고 부서 대열이 어지럽지 않으니 사대수가 공경하여 대접하며 감탄하여 말하기를,
“권씨 집안 군대는 다른 진영과 특별히 다르다. 외국에도 장수다운 장수가 있다.”
하였다.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자문을 본국에 보내고, 포상을 시행하게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왜노(倭奴)가 조선 왕국을 꺾어 함락함으로부터 삼도(三都 한양ㆍ개성ㆍ평양)와 여러 군현이 모두 소문만 듣고 달아나고 흩어지며 한 명의 영웅호걸도 의병을 일으켜 큰 국난을 배제하고 맡은 지역을 지켜 회복을 도모하는 자가 없으니,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하였다. 유독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외로운 성을 막아 지키면서 민중들을 불러모으고 자주 특이한 모계를 써서 때때로 큰 적에게 항거하였으며, 근일에는 다시 모래를 주머니에 모아 양식인 척 속여 왜를 유인하여 와서 모이게 하고 공격하여 섬멸하였으니 이는 바로 왕국이 위급할 때의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다. 지금 붉은 비단 네 필과 백금 50냥을 상으로 주어 충성과 용맹을 권장하게 한다.
송 경략은 또 우리 나라로 하여금 작위와 녹봉을 더하여 본국의 대신ㆍ관료들을 깨우치게 하였으며,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글을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조선 여러 도(道) 중에서 홀로 전라도에서 정사를 펴고 명을 거행하는 배신(陪臣) 권율이 외롭고 위태로운 곳을 지켜서 강경한 적을 항거하였으니 권장하고 상을 주는 전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황제의 전지에,
“조선은 강국이다. 지금 전라도에서 참획한 수가 많은 것을 보니, 그 나라 백성은 아직도 진작시킬 만하다. 짐이 매우 가상히 여기는 일이니 해부(該部)에서는 알라.”
하였다.
이리하여 병부에서 홍로시(鴻臚寺) 관원을 보내어 선유하고 상여한 물건이 매우 많았다. 이 후로 명 나라 조정에서는 문무 대소 장수와 관원이 권율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전일 행주에서 승전보를 아뢴 이인가?”
하며, 반드시 문서를 보내어 은근한 뜻을 표시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자헌대부로 승진시켜서 상을 주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시가 있다.
순찰사 훌륭한 이름 바다 지역을 진동하여 / 巡察英名動海區
군사 이끌고 바로 올라와 왕도를 진압했네 / 提兵直上壓王都
창을 비껴 든 장한 기운은 적을 삼킬 수 있고 / 橫戈壯氣能呑敵
피를 마셔 맹세하는 영웅의 마음은 한 몸을 버리기로 하였다네 / 歃血雄心在殞軀
황제의 글이 내려오니 삼군이 흥기하고 / 天書旣下三軍躍
옥으로 장식된 검을 반포하자 모든 장교들 나와 절하네 / 玉劍纔頒列校趨
큰 공훈 깃발 날려 사직을 보존하니 / 勳合旂常存社稷
능연각(공신의 화상을 모시는 곳)에 훗날 새 화상이 걸리겠네 / 凌煙異日掛新圖
이 제독이 행군하여 평산(平山) 보산역(寶山驛)에 이르러, 행주에서 승첩한 소식을 듣고 군사를 후퇴한 것을 뉘우치면서 이여백(李如栢)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큰일을 지체하여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한 것이 모두 너 때문이다.”
하니, 대개 이여백이 그 서울 진공을 중지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제독이 여기서 장세작(張世爵)으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다시 개성부로 가서 양곡을 모아 저장하여 기다리게 하고 제독은 인하여 평양으로 돌아가서 성안에 머물러 주둔하였다.
권율은 여기서 군사를 이동하여 서쪽으로 올라와서 제도(諸道)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및 부원수 이빈(李薲)과 더불어 파주산성을 근거하여 지키고, 방어사 고언백(高彦伯)ㆍ이시언(李時言)과 조방장(助防將) 정희현(鄭希賢) 등은 유격장이 되어 해유령(蟹踰嶺)을 차단하여 막으며, 의병장 박유인(朴惟仁)ㆍ윤선정(尹先正)ㆍ이산휘(李山輝) 등은 오른쪽 길을 따라 경릉(敬陵)ㆍ창릉(昌陵) 사이에 복병하고 각기 그 군사로 출입하며 유격전을 벌이되 적이 많이 나오면 피하고 싸우지 않으며, 적게 나오면 그뒤를 따라 요격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경기 수사 이빈(李蘋), 충청 수사 정걸(丁傑), 전 전라 병사 최원(崔遠)은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용산(龍山) 서강(西江)을 따라 혹은 물러가고 혹은 나오면서 적의 세력을 분산시켰다. 충청도 순찰사 허욱(許頊)은 이미 윤선각(尹先覺)을 대신하여, 권율과 더불어 서쪽으로 올라와서 양성(陽城)에 있었는데, 다시 본도로 돌아가서 수호하면서 적의 남쪽으로 공격해 올라오는 세력을 방비하게 하고, 양근 군수 이여양(李汝讓)도 용진(龍津) 상류에 있으면서 적의 여기 저기로 날뛰는 것을 방어하니 우리 나라 병세가 매우 장엄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벤 적의 머리를 모두 개성 남문 밖에 매달아놓으니 명 나라의 참장 여응종(呂應鍾)이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이 지금은 적의 머리 취하기를 공 놀리듯 한다.”
하였다. 하루는 적이 동대문으로 나와서 크게 산골짜기를 수색하였는데 양주(楊州) 적성(積城)에서 대탄(大灘)에 이르는 동안에 아무런 전과가 없자 약탈을 마지 않았다. 총병(總兵) 사대수(査大受)가 적이 습격하여 올까 두려워하여 유성룡 등을 멀리 피하게 하며 또 거느린 용사 수십 명을 나눠 보내어 와서 호위하게 하며 밤을 새워 경비하였다. 이때 적이 행주의 패전을 보복하려 하여 화군(火軍)을 거느리고 서로(西路)를 따라 나와서 광탄(廣灘)에 이르니 파주산성과는 수십 리 떨어졌다. 군사를 주둔하고 나오지 않으며 오시에서 미시에 이르기까지 공격하지 않고 도로 물러갔는데, 이렇게 하기를 세 번 정도 하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때 적이 경성을 차지한 지 이미 2년이 지나 적병의 칼날이 미치는 곳에 천리 사이가 텅 비어 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거의 다 굶어 죽었다. 서울 성안의 남은 백성들이 갖은 고생으로 붙들고 이끌며 메고 지고 와서 우리 군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이 말타고 가다가 노상에서 어린 아이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며 우리 나라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되었으니 앞일을 어찌 할 것인가.”
하며, 또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걱정하고 땅이 슬퍼할 일이다.”
하였다.
마침 남방의 양곡을 실은 배가 강언덕에 와서 정박하고 전라도 소모관(召募官) 안민학(安敏學)도 겉곡식[皮糓] 10만을 모집하여 배로 수운하니, 곧 전 군수 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監賑官)으로 임명하여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열 홉에 쌀가루 한 홉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도록 하였지만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살아난 사람이 얼마 안 되었다. 중국 장수도 역시 불쌍히 여겨 군량 30석을 나누어 주었지만 백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였다. 하루는 밤에 큰 비가 왔다. 굶주린 백성들이 좌우쪽에 있으면서 슬피 부르는 소리가 처량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기 저기에서 쓰러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역시 전 전적(典籍) 이노(李魯)를 보내어 체찰사부(體察使府)에 급한 사정을 고하며 말하기를,
“전라 좌도의 곡식을 가져다가 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여 구제하고 또 봄갈이 씨앗으로 사용하려 하는데 전라 도사가 구제미로 꾸어주려 하지 않으니 나누어주게 하여 주십시오.”
하므로, 체찰사부에서는 공문을 체찰부사 김찬(金瓚)에게로 보내었다. 김찬이 이때 호서(湖西)에 있었는데, 전라도로 급히 가서 직접 남원 등지의 창고를 열어 1만 석을 영남으로 옮겨 구제하게 하였다. 대저 경도(京都)에서 남변(南邊)까지는 적병이 가로질러 있고 인민들은 산위에 오르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밭 갈고 심은 곳이 없으니, 적으로 하여금 다시 수개 월간만 물러가지 않게 하였더라도 백성이 다 없어졌을 것이다.
제독이 앞서 병을 칭탁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서울의 적이 20여 만이다.’ 하고, 또 ‘관백(關白)이 배를 띄워 들어가 침범한다.’는 설이 있는 등 극히 장황하니 경략이 이를 듣고서 3월에 원임(原任) 계진 동협부총병 후부서도독첨사(薊鎭東恊副摠兵後部署都督僉事) 왕승은(王承恩)과 통령 유격장군 지휘동지(統領游擊將軍指揮同知) 왕여징(王汝徵)ㆍ중군 기고(中軍旗鼓) 장구경(張九經) 및 수영 참장(隨營參將) 소국부(蘇國賦)ㆍ원임 통판 심사현(沈思賢)ㆍ감생(監生) 도량성(陶良性)ㆍ유격장군 오종도(吳宗道) 등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안주(安州)로 나와서 주둔하였다.
왕승은은 대녕(大寧) 전위(前衛) 사람인데 얼마 안 되어 사사로이 관아에 소속된 말을 팔아먹은 사실로 경략의 규탄을 받아 파직되어 갔으며, 왕여징은 마ㆍ보병 2천 명을 거느렸는데 경략이 정주(定州)ㆍ영원(寧遠)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였다. 장구경은 호를 봉죽(鳳竹)이라 하였는데, 하남(河南) 수양부위(睢陽府衛) 사람이요, 심사현은 자는 방달(邦達), 호는 사천(沙川)이라 하였는데 절강(浙江) 소흥부(紹興府) 여요(餘姚) 사람이다. 도양성은 호는 양오(養吾)인데 절강 건주부(虔州府) 진운현(縉雲縣) 사람이며, 오종도는 자는 여행(汝行), 호는 석루(石樓)인데 절강 소흥부 산양현(山陽縣) 사람으로 무진사(武進士) 출신이며 오래도록 우리 나라에 주둔하여 깊이 사정을 잘 알아 상사(上司)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경략이 급히 제독에게 격문을 보내어 기회를 타서 진병하게 하고 또 부총병 동양정(佟養正), 중군 왕승은 등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철산(鐵山) 해안에 봉화대를 설치할 만한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철산군 땅에 이르니 고을 사람이 화문석(花紋席)을 주었는데 동양정이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후에 일이 있어 파직되었다. 태현(太玄) 심백함(沈伯含 조환(朝煥)의 자)이 〈의동정개가(擬東征凱歌)〉 여덟 수를 지어 경략에게 주었다.
큰 조개는 누르고 고래는 날으는 혈전의 전장에 / 蜃壓鯨飛血戰場
군사 백만이 요양을 지났네 / 干戈百萬度遼陽
쌍무지개 밤에 비치니 요사한 기운이 조용하여 / 雙虹夜照妖氛靜
넓은 바다의 새로운 광명 붉은 해가 비치네 / 滄海新回赤日光

주나라 기자 봉했던 옛 제후 나라에 / 周箕封國古諸侯
강산을 회복하니 계책도 장하구나 / 恢復山河屬壯猷
대장은 아홉 관문 지나 용맹한 장병 몰고 가는데 / 大將九關駈虎豹
중원의 1만 기병은 준마로 달리네 / 中原萬騎控혁騮

적우전 날려 궁성에 승전 보고하는데 / 分飛赤羽報丹서
팔도의 금과 꼴로 천자의 군대에 공급한다네 / 八都金蒭供六師
행장 등 다투어 와서 씩씩한 위용을 엿보아 / 行長爭來窺虎步
오랑캐 임금이 직접 와서 용기에 절하리 / 夷王親自拜龍旗

말을 달려 티끌 일으키는 중원 장수 영웅인 것이 / 蹀馬吹塵漢將雄
관군들 일제히 모란봉에 오르네 / 官軍齊上牧丹峯
악당의 시체들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동주로 표할 것이 / 封鯨作觀標銅柱
동해 넓은 물결에 큰 바람 보리 / 東海洋洋覽大風

압록강 물 깊은데 밤에 무기를 씻는 것이 / 鴨綠江深夜洗兵
중국의 조두소리 점성 곁에서 들리네 / 漢家刁斗傍苫城
오랑캐 물결 참담한데 교만한 기색 없으니 / 夷波慘惔無驕色
천자의 분부가 옥경(신선이 거처한다는 곳)에 있다네 / 天子分付在玉京

붉은 색 큰 깃발에 해 떨어지자 자색 기운 어두워지는데 / 日落紅旗紫氣昏
금인과 옥대 진영의 문에 가득하네 / 腰金拖玉滿轅門
온 군사 번개치듯 변방에 바람이 이니 / 全軍電掃邊風逐
여러 격서 날으는 곳에 바다 위의 해라도 삼키네 / 列檄雄飛海日呑

오랑캐 척후 모두 가요 부르니 / 夷方斥堠盡歌謠
말하는 선비 말이 없고 싸우는 군사 쓰러지네 / 說士無言戰士消
다시 동쪽 위세로 북벌을 엄히 하니 / 更遣東威嚴北伐
두 손으로 일월 받들어 남조를 향한다네 / 雙擎日月向南朝

작인 높이 달고 준여(군기의 일조)를 지나는데 / 鵲印高懸度隼旟
위엄을 선양하니 위타서 보내지 않으리 / 宣威不遣尉佗書
전라도 경상도에 장책 행하니 / 全羅慶尙紆長策
만세토록 요황이 황제 계신 곳을 향하리 / 萬歲要荒拱帝居
경략이 또 군자금을 청하니 천자가 다시 형금(冏金) 20만 냥을 내주어 군비에 보태게 하고, 흠차 사험군공 병부무선 청리사주사(欽差査驗軍功兵部武選淸吏司主事) 가유약(賈維鑰)을 보내어 안주(安州)에서 공을 조사하고 군사를 위로하였다. 가유약은 자는 무경(無扃)이요, 호는 지백당(知伯堂)인데 북직례(北直隷) 순천부(順天府) 준화현(遵化縣) 사람이다.
이때 평수가(平秀嘉)가 용산창(龍山倉)을 점거하였는데 쌓인 곡식이 수십만 석이요, 경성으로 그들의 소굴을 삼았다. 제독이 이에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 등으로 1만 명 기병을 거느리고 개성에 주둔하게 하고, 양원(楊元)을 명하여 평양에 진을 치고 대동강을 점검하여 군량길을 잇게 하며, 이여백(李如栢)은 보산역(寶山驛) 등지에 주둔하여 도움을 주도록 하며 사대수(査大受)는 이전 그대로 임진강을 지키게 하고, 제독 자신은 몸소 동서로 살펴보면서 조절하였다.
또 비밀리 사대수를 시켜 결사대를 모아 샛길로 나가서 용산에 쌓인 곡식을 불태우게 하니 왜적이 식량이 결핍하여 동남쪽 여러 고을로 나가 노략질하여 마음대로 빼앗으니 땅굴 속에 감추었던 미곡까지 모두 파내어 가져가게 되었다. 또 가평(加平)ㆍ포천(抱川)으로 향하고 깊숙히 춘천까지 들어가서 불을 놓고 빼앗기를 거의 다하였다. 청정(淸正)은 또 졸병을 천여 명 혹은 수천 명씩 나누어 보내어 노략질하기를 마지 않으며 서울 주위 군읍에는 무덤까지도 파내니 보기에도 참담하고 가슴이 아파 통곡할 만한 일이었다. 증언하는 이런 시가 있다.
사람 사는 연기 천리간에 거칠고 쓸쓸해지니 / 人煙千里莾蕭瑟
귀신이 울고 원망하는데 밤에는 도깨비 불만 푸르르구나 / 鬼哭神怨夜燐靑
긴 끈으로 오랑캐를 얽어맨다고 부질없이 말하지만 / 浪說長纓堪繫虜
깨끗이 맑게 하는 공 누가 다시 창명을 진정하나 / 廓淸誰復鎭滄溟
제독이 철병할 의사를 가지면서도 근심에 잠겨 결정을 못하였는데 군막 중의 선비 정문빈(鄭文彬)ㆍ조여매(趙如梅)가 역시 화친하기를 권하고 군사 파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처음 제독을 중강(中江)에서 맞이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기를,
“제독의 군사가 기율이 있으니 반드시 이 도적을 격파할 것입니다. 다만 막하에 정문빈과 조여매 두 사람이 일을 주장하니 방해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과연 그대로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 역시 경략에게 규탄을 당하였다. 대개 평양을 극복할 때는 그 기세가 매우 성하고 다시 개성에서 싸워 형세가 대쪽을 가르는 것같았는데,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면서 그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벽제(碧蹄)에서 패전하게 되자 기운이 크게 꺾였다. 또 이 역에 와서 군사를 상실하고, 질병이 성행하니 여기서 두 사람의 모계를 받아들여 급히 휴식하여 판을 매듭지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적 역시 양식이 결핍되고 군사는 종기가 많이 생겼다. 또 명 나라 군사가 다시 호준포(虎蹲砲) 등의 대포 및 전차를 강위에 벌여놓고 전세가 날로 커지니, 적의 추장 행장(行長)이 평양에서의 패전을 경험 삼아 돌아갈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군중에 이신충(李藎忠)이라는 자가 자청하여 서울에 들어가서 적정을 탐지하다가 두 왕자 및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 등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적이 화친할 의사가 있음을 말하면서 왕자의 글 및 황정욱 등의 장계를 내놓았다. 그 장계 등은 모두 두 본이 있는데 진본 장계에서는 적중의 사정을 자세히 쓰고 또 그 언문으로 자세히 적었으며, 위본 장계에는 적이 말하는 대로 썼는데 그 중에는 관백 전하라는 말도 있으며 또 신(臣) 자를 쓰지 않았으니, 그 계교가 대개 임시방편으로 적을 속이려는 의사에서 나온 것인데 스스로 주위 사람이 비밀리 엿보는 데 빠져들어가는 줄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이신충의 전하는 글을 얻고 또 용산에서 수군이 적의 추장과 통화(通和)하는 글을 얻었는데 모두 체찰사에게 보냈다. 체찰사는 다만 위본 장계 한 건을 등록하여 행재소에 계달하고 또 말하기를,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 또 왜적의 글로 사대수(査大受)에게 보이니 사대수가 곧 가정(家丁) 이경(李慶)을 시켜 평양에 달려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황정욱 등이 적에게 절개를 잃고 또 의심할 만한 일이 있다고 여겨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 후일 국문하는 단서를 열어놓았다. 이것은 모두 일찍이 철원에서 격서(檄書)를 전할 때에 사성 황신(黃愼)이 붓을 들고 지은 내용 중에,
“묘당에서 힘써 금(金) 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니 진회(秦檜)의 고기를 먹어야 하고, 간신이 제일 먼저 촉(蜀)으로 행행(行幸)할 것을 주장하였으니 국충(國忠)의 머리를 베어 매달아야 한다.”
하였는데, 그 뜻이 실은 누구를 가리킨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체부(體府)에서는 이 말을 듣고 원래 벌써부터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와서 모함하는 흔적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일은 은미하고 굴곡된 실정을 자세히 알기 어려웠고 사람들의 말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이후로 전쟁과 화친 두 가지의 일로 서로 논란하고 변명이 있었으니 명 나라 조정에서도 잘 분간하지 못하였다.
만력(萬歷) 20년 임진 6월부터 21년 계사 3월까지 도합 2년간이다.

[주D-001]조경남(趙慶男) : 원문에는 이름의 경(慶)이 경(敬)으로 되었으나 《한양 조씨 족보(漢陽趙氏族譜)》에 의거하여 경(慶)으로 고침. 또 원문에는, “선비 박세진(朴世珍)…… 조경남(趙敬男)…… 모두 조헌(趙憲)의 막하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이때에 와서 함께 죽었다.” 하였는데, 조경남은 조헌의 문인으로 종군(從軍)한 적은 있으나 임진왜란 때 전사하지 않고 1641년(인조 19)에 병사(病死)하였다.  
[주D-002]충사(蟲沙) : 전쟁터에서 죽은 군사들을 말함. 《포박자(抱朴子)》에 “전장에서 죽은 장교들은 원학(猿鶴)이 되고 군사들은 충사(蟲沙)가 되었다.” 하였음.
[주D-003]양공(羊公) : 진(晉)의 태산(泰山) 남성(南城) 사람 양호(羊祜)를 말함.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매우 얻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 백성들이 평소에 늘 오르던 현산(峴山)에 비를 세웠는데, 그 비를 바라보고 모두 눈물을 흘려 타루비(墮淚碑)라 불렀다.
[주D-004]맹분(孟賁)과 하육(夏育) : 모두 옛날의 용맹한 사람.
[주D-005]양(亮) : 금(金)의 황제. 임금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으므로 역적 양이라 하였다. 송(宋)과의 맹약(盟約)을 어기고 송(宋)을 치다가 중도에서 자기의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주D-006]외로운 …… 때문이요 : 여진족이 군사로 송(宋)에 깊이 쳐들어갔을 때 송의 장수가, “여진이 본래 병법을 모르는구나.”라고 하였다.
[주D-007]중행열(中行說) : 한 문제(漢文帝) 때의 환관(宦官). 흉노(匈奴)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항복하여 본국을 해치므로 가의(賈誼)가 임금에게 “신이 흉노를 쳐서 중행열의 등에 매를 치겠습니다.” 하였음.
[주D-008]남조(南朝)에 …… 비웃음 : 금(金) 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송(宋) 나라에 쳐들어가서, “남조[宋]에 사람이 없구나, 이 지방을 지켰더라면 내가 강을 건너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주D-009]북군(北軍)이 …… 말 :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진(陳) 나라에 수(隋) 나라 군사가 창졸간에 침입하는 것을 보고 북군(北軍)이 강을 날아서 건너왔다고 놀랐다.
[주D-010]빈(邠)을 떠나던 : 태왕(太王)은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 처음에 빈(邠)에 살았는데 적인(狄人)의 침입을 받자 빈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겼음.
[주D-011]명황(明皇)이 …… 피난하듯 : 명황(明皇)은 당 현종(唐玄宗)의 시호.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서촉(西蜀)으로 피난하였음.
[주D-012]이성(李晟) :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 당(唐)의 역적 주자(朱泚)가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덕종(德宗)이 봉천성(奉天城)으로 파천하였을 때 이성(李晟)이 주자를 쳐부수고 서울을 회복하니, 덕종이 기뻐하여, “하늘이 이성을 낳은 것은 사직(社稷)을 위해서요 짐(朕)을 위함이 아니로다.” 하였음.
[주D-013]육지(陸贄) :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 당 덕종이 주자(朱泚)의 난을 피해 봉천(奉天)으로 파천하였을 적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종행(從行)하여 많은 조서(詔書)를 지었는데, 그가 기초한 조서를 보고 장수와 군사들이 느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주D-014]봉천(奉天)으로 …… 행차 : 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피해 봉천성(奉天城)으로 갔던 일을 말함. 여기서는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파천한 것을 비유한 말.
[주D-015]밤중에 …… 들으니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유곤(劉琨)과 같이 잠을 자다가 밤중에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유곤을 발로 차서 깨우며, “난리가 나겠구나, 공을 세워보세.” 하였다.
[주D-016]중류(中流)에서 …… 치며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말하기를, “중원(中原)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주D-017]복덕성(福德星)이 …… 임했고 : 옛날에 복덕성(福德星)이 있는 나라를 침범하면 침범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복덕성이 오(吳) 나라 분야(分野)에 있을 때에 진(秦) 나라가 침범하였다가 몇 해 뒤에 오 나라는 회복되고 진 나라는 망하였다.
[주D-018]신정(新亭)에서 …… 울던 일 : 진(晉) 나라가 외래 민족에게 중원(中原)을 잃고 강동(江東)으로 옮겨 갔을 때에 여러 사람들이 서로 보며 울매, 왕도(王導)가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회복할 생각은 않고 울기만 하는가.” 하였다.
[주D-019]왕통(王通) : 수(隋) 나라 때의 유학자(儒學者). 벼슬하지 않고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선인(先人)이 남겨준 헌 집이 있으니, 벼슬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있다.
[주D-020]자공(子貢) : 춘추(春秋) 때 위(衛) 나라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제자로 말을 잘하고, 또 식화(殖貨)에 능하여 집에 천금을 두고 노(魯) 나라와 위(衛)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주D-021]안공(顔公) : 당(唐) 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을 말함. 안진경이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성을 개축하고 참호를 파고 또 미리 미곡을 많이 저축하여, 난리를 대비한 일이 있다. 〈걸미첩(乞米帖)〉이 있다.
[주D-022]조적(祖逖) : 진 원제(晉元帝) 때의 사람. 군사를 이끌고 강음(江陰)에 주둔하여 병기(兵器)를 제작한 일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2천여 명의 군사를 얻어 진군하였다.
[주D-023]어찌 …… 바라보듯 : 춘추시대(春秋時代) 열국의 하나인 월(越)은 중국의 남방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을 중심으로 한 지방이고, 진(秦) 나라는 서북방으로 지금의 섬서(陝西) 지방이다. 두 나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양국 사이에 직접적인 이해 상관이 없음을 말한다.
[주D-024]작은 …… 있다 : 《논어(論語)》 공야장편(公冶長篇)에, “공자가 이르기를, ‘작은 고을이라도 반드시 구(丘 공자의 이름)처럼 충신(忠信)한 사람은 있으나 구처럼 학문을 좋아하지는 못한다’[子曰十室之邑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하였다.
[주D-025]악의(樂毅) : 전국(戰國) 때 연(燕) 나라 장수. 연 소왕(燕昭王) 때 조(趙)ㆍ초(楚)ㆍ한(韓)ㆍ위(魏)ㆍ연(燕) 5개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齊)의 70여 성을 함락하였다. 뒤에 소왕의 아들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파직되어 망명하였음. 《사기열전》에 있음.
[주D-026]노숙(魯肅) :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吾) 나라 사람. 재산이 많았는데 난리중에 어려운 사람을 많이 구제하였다. 오(吳)의 장군 주유(周瑜)가 양곡을 필요로 하자, 미곡 3천 곡(斛)이 쌓인 곳간을 가리키며 흔쾌히 주유에게 주었다.
[주D-027]무계(武溪) : 강 이름. 한(漢) 나라 마원(馬援)이 남쪽 오랑캐를 무계(武溪)에서 격파하였다.
[주D-028]차부(箚付) : 장관이 관원을 보낼 때 공문서를 주는 것.
[주D-029]구벌(九伐) : 《주례(周禮)》에 의하면 옛날 천자는 여러 나라의 불법 무도한 죄악행위를 징계하는 방법으로 그 죄악의 종류에 따라 생(眚)ㆍ벌(伐)ㆍ단(壇)ㆍ삭(削)ㆍ침(侵)ㆍ정(正)ㆍ잔(殘)ㆍ두(杜)ㆍ멸(滅) 등 9개 정벌이 있었다고 한다.
[주D-030]석목(析木)의 자리 : 옛날 중국에서는 국가의 위치를 하늘에 있는 별들의 방위에 응하여 분야(分野)를 정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중국의 연(燕) 나라와 함께 동쪽 석목성(析木星)의 위치에 해당하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주D-031]풍목(風木)이 하늘을 맡고 : 목(木)은 방위에 있어서 동쪽이 되고 4계절에 있어서 봄이 되니 동방은 음양의 기운이 비로소 움직이고 만물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하고, 맹춘(孟春) 즉 음력 정월의 동풍은 겨울의 동결(凍結)을 해소하며 만물의 생동을 돕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동방 나라의 이른 봄을 의미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주D-032]신포서(申包胥)가 …… 호소하던 뜻 : 옛날 중국에서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초 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진(秦) 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어 가서, 울며 사정을 호소하면서 구원병을 간청하여 결국은 오 나라의 침략군을 격파하고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한 일이 있었다.
[주D-033]거마목(拒馬木) : 거마(拒馬)는 말[馬]을 막는다는 뜻으로, 옛날 적군을 방어하는 시설의 일부를 말하는 것인데, 나무를 앞에 차(叉) 자 형으로 세운 것.
[주D-034]함매(銜枚) : 옛날 전투시 군사들이 소리없이 행진하게 하던 한 방법인데, 마치 말에 재갈을 물리듯 입에 나무 막대를 물리고 행군하였다.
[주D-035]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 분조(分曹) 즉 분정부(分政府)의 호조 판서를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중 왕과 정부 일행이 북으로 의주(義州)를 향하여 피난가는 도중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세자 즉 광해군(光海君)으로 따로 일부의 정부 대신들을 데리고 분정부를 조직 강원(江原)ㆍ경기도 지방을 중심으로 임시 전수(戰守), 민정의 일을 별도 시행하게 하였는데, 분조라고 하여 육조의 관원을 따로 임명하고 집무하게 하였다.
[주D-036]비방하는 광주리의 글 : 비방하는 광주리의 글은 옛날 중국의 전국(戰國) 시대에 위(魏) 나라 장수 악양(樂羊)이 중산(中山) 땅을 치고 돌아와서 그 공을 말할 때에 임금 문후(文侯)는 광주리에 가득찬 그를 중상하는 글을 보이니, 악양은 그제야 자기의 세운 공이 많은 사람들의 중상을 받아주지 않은 임금의 힘에 의한 것임을 알고 감사하였다는 것이다.
[주D-037]말을 잃은 것이 : 진(秦) 나라 때 변방에 한 늙은이가 말을 기르다가 잃은 것이 다시 복이 되어 나갔던 좋은 말을 데리고 들어오고, 그후에도 그 말로 인하여 화와 복이 반복되었지만 그 주인 늙은이는 이러한 일시적인 화와 복에 모두 태연하여 화복을 인간 생활의 상사로 알고 지냈다는 것이다. ‘새옹지마’의 고사임.
[주D-038]용기(龍旗) : 두 마리의 용을 그린 큰 깃발로 용기(龍旗), 교룡기(交龍旗)라고도 하는데 천자의 깃발이다.
[주D-039]동주(銅柱) : 구리 기둥을 세워 국경을 표시한다는 것인데, 중국 한(漢) 나라 때 마원(馬援)이 남쪽의 먼 나라 교지(交趾)를 정벌하고 구리 기둥으로 경계 표시를 하였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주D-040]점성(苫城) : 옛날 노(魯) 나라 땅 즉 지금 산동성의 한 지방이었다. 전국시대 제(齊) 나라에서 노 나라를 칠 때에 계씨(季氏)의 가신 점이(苫夷)라는 사람이 양호(陽虎)의 무모한 행동을 억제하여 이곳에서 패전을 면한 일이 있었다.
[주D-041]작인(鵲印) : 중국 한(漢) 나라 때 장호(張顥)라는 사람이 양(梁) 나라 정승이 되었는데 까치와 비슷한 새가 날아와서 땅에 앉으려 하므로 사람을 시켜 잡으니 한 개의 돌로 화하였으며, 그 돌을 깨뜨리니 충효후인(忠孝侯印)이라고 새긴 금인(金印)이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어진 신하의 이적(異蹟)을 작인(鵲印)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주D-042]위타서(尉佗書) : 위타(尉佗)는 한(漢) 나라 진정(眞定) 사람인데 원래 성명은 조타(趙佗)였으며, 남해위(南海尉) 임효(任囂)가 죽은 다음 직무를 수행하면서부터 위타로 부르게 되었다. 세력이 커져 일시는 장사(長沙) 등지를 공략하고 남월(南越)의 무제(武帝)로 자칭하기도 하였는데 한 나라 문제가 육가(陸賈)를 보내어 그 무도함을 책망하니 위타가 사죄하며 한 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주D-043]요황(要荒) : 요황(要荒)은 천자 도읍지에서 먼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즉 중국에서는 본토 밖 5백리 되는 곳을 번복(藩服)이라 하고 거기서 다시 5백리 밖을 유복(綏服), 유복에서 5백리 밖을 요복(要服), 요복에서 5백리 밖을 황복(荒服)이라 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에 말하는 요황은 곧 요복ㆍ황복의 의미이니 중국에서 가장 먼 지방의 나라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44]진회(秦檜) : 진회(秦檜)는 중국 송(宋) 나라 말기의 유명한 간신이다. 금(金) 나라와의 화친을 적극 주장하여 송 나라의 중흥을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충신 악비(岳飛)를 죽이고, 장준(張浚)ㆍ조정(趙鼎) 등을 찬축(竄逐)하고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결국 송 나라를 위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데, 여기서는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 조정에서 일본과 화친을 말하는 자를 이 진회에 비유한 것이다.
[주D-045]국충(國忠) : 중국 당(唐) 나라 현종 때 양태진(楊太眞) 즉 양귀비의 족형 양국충(楊國忠)인데,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먼저 촉(蜀) 땅으로 피난갈 것을 주장하였으며, 피난 도중 마외역(馬嵬驛)에서 금군(禁軍)들에게 살해되었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의 발생과 함께 왕에게 피난을 건의한 대신들을 양국충에게 비유한 것이다.
 
청성잡기 제3권
 성언(醒言)성언(醒言)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란 뜻으로, 총 3권에 인물평 및 일화, 사론(史論), 필기(筆記), 한문단편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교주가 되려는 승려들의 추태

선문(禪門)에서 도를 전수받은 사람을 작가(作家)라 한다. 작가는 법사(法師)가 불경을 통달하고 선(禪)을 깨달아 교주(敎主)가 될 만한 자를 뽑아서 당호(堂號)를 내려 주고 신구(信具)를 주는데, 이렇게 하면 당장에 부처가 되어 높이 사좌(獅座)에 앉는다.
지금의 학승(學僧)들은 몇 년 동안 스승을 따라다니며 불경 한 질을 배우고 나면 곧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막상 당호를 받게 되면 스스로 학문이 부족하다며 두세 번 사양하는 체하고, 끝내는 머뭇거리며 도망하여 숨지만 그것도 절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법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먼 곳에서부터 온 산을 뒤져 내려오기를 사나흘간 하기도 한다. 마침내 그를 찾아내어 곁부축하고 법사 앞에 이르면, 중은 초례청에 나가는 신부처럼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어와서는 다시 굳이 사양하면서 눈물 흘리며 머리를 조아린다. 그러면 법사는 더욱 간곡히 권한다. 이때 남녀의 경승(經僧)들과 신도들이 모두 열 지어 서 있는데, 당호와 신구를 화려하게 앞에 늘어놓으면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는다. 중은 그제야 마지못해 일어나 절하고 부처가 법통을 전하듯이 정중하게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는 중 또한 슬그머니 잘난 체하며, 어제까지 한자리에 있던 동료는 도리어 북향하고 스승으로 섬겨 잠깐 사이에 귀천이 갈라지니 일반 중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경승들이 작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벼슬하는 자가 높은 벼슬을 얻어 현달하기를 바라는 것보다도 심하여, 힘이 약한 자는 주변에 청탁하고 심한 경우에는 뇌물까지 바쳐서 얻기도 한다. 작가가 되고 나서는 도리어 스스로 도덕이 부족하다고 사양하면서 다른 사찰로 옮겨가서 몇 년 동안 불경을 본 뒤에 돌아와 그제야 비로소 법사로 자처하며, 사람들 또한 그를 법사로 대우한다.
그러나 작가가 많으면 법사에게도 이롭다. 문하(門下)에 작가가 많은 것을 여러 산사에서 흠모하고, 법을 전해 받는 자가 상자에 가득한 승복과 탁자에 가득한 떡ㆍ과일로 법사를 공양하며 큰 은혜에 공경히 보답하면 법사도 이를 태연히 받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온 산사에 있는 사람들도 그 남은 음식으로 모두 배불리 먹으니, 공덕이 모두 법사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산사(山寺)를 전할 적에는 전송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호위하고, 맞이하는 자는 멀리 마을까지 내려가서 환영하며, 음식으로 위로해 주고 의장을 성대히 갖추니 유문(儒門)의 종장(宗匠)도 이들만 못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애써 작가가 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산사의 일을 잘 아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와 같이 이야기해 주었다.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가 법을 전할 때에도 지금 말한 대로 하였을까? 나쁜 풍습이 전염되어 이어지고 있으니 더욱 가소롭다.
작가들의 추악한 작태를 단번에 설파하였으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주D-001]당호(堂號) : 도를 이루었으므로 교파의 계통을 물려주는 표지로 법사가 지어 주는 이름이다.
[주D-002]신구(信具) : 가사와 바리때를 가리키는데, 불법(佛法)을 전수하는 증거가 됨을 뜻한다.
[주D-003]사좌(獅座) : 부처가 설법하던 자리를 말하며 사자좌(獅子座)라고도 한다. 부처가 중생의 지존임을 백수의 왕인 사자에 비유한 말이다.
청성잡기 제4권
 성언(醒言)
승과(僧科)와 보우(普雨)
 청장관전서 제49권
이목구심서 2(耳目口心書二)

망상(妄想)이 달릴 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쳐다보노라면 온갖 잡념이 없어지는 것은 정기(正氣)가 돌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이 좋을 적에 꽃 한송이, 풀 한 포기, 돌 한 덩어리, 물 한 그릇, 새 한 마리, 고기 한 마리라도 가만히 관찰하노라면, 가슴속에 연기가 모락모락 구름이 뭉게뭉게 이는 듯하여 흔연(欣然)히 스스로 터득[自得]되는 것이 있는 듯하다가 다시 터득한 것을 이해하여 보려고 하면 도리어 아득해지고 만다.

자세히 만물들을 관찰하면,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 이외는 모두 생기가 발랄하여 억제할 수 없고, 후줄근히 축 늘어진 것은 오래지 않아 썩어서 냄새가 나게 될 것들이다.

일이 순조로운 환경 속에서 이루어짐이 좋다는 것은, 아첨하고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첨하고 연약한 것이 어찌 순조로운 환경이겠는가. 이는 도리어 역경인 것이다.

재주 있고 경박한 사람은 기교(機巧)를 부림이 간사하고 천박하며, 어리석고 둔한 사람은 기교를 부림이 간휼하고 노골적이기 때문에, 군자들의 안목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중에 혹 간사하면서도 음침하거나 간휼하면서도 비밀스러우면, 이런 사람은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아아, 고금에 기교 부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신장(腎臟)은 정액[精汁]을 저장하는 내장이니, 맡은 바가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귀가 두껍고도 단단하고 큰 사람이 반드시 오래 사는 법이니, 비로소 신장은 귀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장이 실하면 귀가 좋고 귀가 좋아야 오래 사는 것은 자연적인 반응이다.

폐(肺)가 여섯 조각임은 육률(六律)과 공통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두 귀까지 합쳐 여덟 조각이 됨은 팔음(八音)과 공통됨이 아니겠는가. 한 조각에 24개의 구멍이 있음은 24절기(節氣)와 공통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생황(笙簧)의 형상대로 된 것이다. 또 금(金)은 오행(五行) 중에서 소리가 두드러진 것이니, 폐가 금에 속하기 때문에 소리를 맡은 오장인 것이다.

봄철의 우는 새 소리는 화평하고 가을철의 벌레 소리는 처절한데, 이는 절후(節候)의 기운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당우(唐虞) 적의 글은 혼후[渾灝]하나 말세의 글들은 겉치레만 하니, 시절의 기운을 어찌할 것이가.

옛사람들은 자기의 재질을 부릴 줄 알았으나 후세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재주의 부림을 받는다. 자기 재질을 부리는 사람은 마땅히 쓸 데다 써먹고 또한 그만두어야 할 적엔 그만두지만, 재주의 부림을 받게 되면 한없이 날리어 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두려운 일이다.

사람들의 병폐는 부박하지 않으면 반드시 융통성이 없는 법인데, 두고 보건대, 이 두 가지를 면한 사람이 대개 얼마 되지 않는다. 부박함은 동(動)의 유폐(流弊)요, 융통성이 없음은 정(靜)의 유폐이니, 스스로 수양하려는 사람이나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참작해야 한다.

뜻만 크고 곡진하지 못한 사람은 허술한 짓을 하고, 재주가 거칠고 정밀하지 못한 사람은 외람한 짓을 하는 것이다.

편의(便宜)만 추구하는 사람은 큰 고비에 멍하고, 인순(因循 그전대로만 하는 것)하는 사람은 큰 사업을 놓치고, 고식적인 사람은 큰 근심거리를 만나고, 이기기 좋아하는 사람은 큰 적수를 만나게 되는데 사세가 그렇게 되는 법이다.

군자가 일을 처리함에 민첩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안정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정밀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정확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누구나 반드시 깊이 좋아하는 것 때문에 성공도 하고, 또 깊이 좋아하는 것 때문에 실패도 하는 것이다.

아무 일이 없을 때 지극한 낙(樂)이 있는 것인데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뒷날 반드시 문득 깨닫게 되었을 적은 이를 위해 근심 걱정하는 때인 것이다. 가령 전 관장(官長)이 편안하고 조용하여 별로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없다가, 그 다음 관장이 조금 맹렬하여 백성에게 사납게 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전 관장을 사모하여 마지않는다.

맑은 하늘 복판에 뜬 한 조각 순백(純白)의 구름은 분명히 이형암(李炯菴 저자 자신)이 마음을 알게 되는 경지이다.

형이 그의 아우 업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보노라니 속마음이 문득 애연(藹然 마음이 화평해지는 것)해져 웃음을 띠고서, 정대(鼎大)의 글읽는 소리를 한 식경이나 듣고 있었다.

의서(醫書)를 읽어, 사람이 기운을 받아 형체가 구성된 것과, 피부ㆍ뼈ㆍ살ㆍ골수ㆍ근육ㆍ터럭ㆍ맥ㆍ내장이 어디로부터 나와 비로소 사람이 된 것인지를 알고 나면, 사람들이 모두 효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쉽사리 풍감(風鑑 관상보는 것)이나 성수(星數 사주보는 것)의 설에 현혹되어, 멋대로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이, 환난이나 영리(榮利)에 당하여 올바르게 할는지를 내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말의 머리가 쳐들어진 것은 화(火)의 형상이고, 소의 머리가 수긋한 것은 토(土)의 형상이다.

천지 사이에 벌레가 없는 것이 없어, 강한 쇠나 뜨거운 불에도 모두 벌레가 있는 법이니, 사슴에게 벌[蜂]이 있고 뱀에게 모기가 있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

지금 사람들이 옛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지금 사람들이 스스로 하기를 옛사람들이 스스로 하듯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좋은 일 해두기를 오직 옛사람들처럼만 한다면, 반드시 후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아무 옛분이 해 놓은 아무 좋은 일은 배워야 한다.'고 칭찬하게 될 것이고, 그 소위 좋은 일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오늘 해둔 것에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부릅뜨고 치떠보는 눈동자와 오무렸다 폈다 하는 혀는, 아아, 두렵기만 하지만, 자애[慈祥]로운 거동과 화평[樂易]한 언사는, 아아, 사랑스럽기만한 것이다.

나는 천리마(千里馬)를 타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고요히 상상해보건대, 밤에 천리마를 타본 사람이 북두성(北斗星)을 쳐다본다면, 말쑥한 띠처럼 기다랗게 보일 것이다.

늘씬한 한 장부(丈夫)가 나의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너는 한탄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성내는 버릇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시기하는 짓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자만심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조급한 성질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게으름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명예에 대한 마음을 버려라."
하기에,
"감히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서책에 대한 기욕을 버려라."
하기에, 속으로 어이가 없어 뚫어지게 보다 말하기를,
"글을 즐겨하지 않고 무엇을 좋아해야 합니까? 나를 귀머거리와 소경을 만들려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그 장부가 웃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너를 시험해본 것이다."
하였다.

내가 18~19세 되던 무렵에 하는 말들이,
"마음에 망령된 생각과 뜻을 갖지 않아야 오래되면 꽃이 피게 되고, 입에 망령된 말을 담지 않아야 오래가면 향기가 나게 되는 법이다."
했었는데, 백양숙(白良叔)이 붓을 들고 끙끙거리다가,
"부처다. 부처를 말하는 것이다."
하기에, 내가 오랫동안 서글펐다.

우둔한 동자(童子)들을 알아듣게 만들고, 소견 좁은 부녀자의 마음을 돌리기란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미욱한 백성의 송사(訟事)를 결단하고, 흐트러진 군병의 기율(紀律)을 정돈하기보다 어려운 것이다.

만물을 관찰할 적에는 따로따로 안목을 갖추어야 하는 법이니, 나귀가 다리를 지나갈 적엔 오직 귀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 집비둘기가 뜰에서 거닐 적엔 오직 어깻죽지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고, 매미가 울 적엔 오직 가슴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고, 붕어가 물을 삼킬 적엔 오직 뺨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는 모두 그들 나름의 정신이 발로되는 곳으로 지극한 묘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저자에 절반쯤 물고 절반쯤 성하여 20문(文) 가량 나갈 생선이 있다고 하자. 사려는 사람이 가장 부패된 것을 가져다 보고서는 어이없이 서서 코를 찌푸리다가 돌아보며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미 썩었으니 나나 주지."
하자, 파는 사람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지그시 웃더니, 가장 덜 썩은 것을 들고서,
"오늘 잡은 것인데 어찌 썩었다고 하는가?"
하고, 거짓 화를 내며, 생선의 뺨과 지느러미를 손질하여 서서히 감추어 버린다. 사려는 사람이,
"그렇기는 하지만 값이 얼마인가?"
하자, 파는 사람이,
"썩은 고기가 무슨 값이 있어?"
하니,
"말해 보아라. 40문인가? 10문인가? 팔려면 팔고 말려면 말라."
하여, 반 나절이 되도록 다투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권하며 20문으로 값을 조정하자, 둘이 다 툴툴거리기를,
"내가 돈을 많이 주었나보다."
"내가 돈을 적게 받았나보다."
해놓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족들에게 자랑하기를 생선 값이 각자가 모두 합당하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무엇하러 수고롭게 손빈(孫臏)ㆍ우허(虞詡)와 같은 방법을 쓰는 것일까? 당초 각자의 마음에 이미 값이 20문 할 것을 알아차려, 서로 순조롭게 주고 받았어야 할 것인데, 지금 두 사람이 반 나절이나 다투었으니, 과연 누가 이득이고 누가 손해이겠는가.

음덕(陰德)을 펴기란 귀울음[耳鳴]과 같아서 자신은 알 수 있으면서도 남에게는 알게 할 수 없는 법이니, 내가 하지 못하면서도 능히 하려고 하는 일이다. 남의 과오를 논함은 피를 머금었다 남에게 뿜는 것과 같아서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히는 법이니, 내가 하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다.

문장(文章)이라고 하는 것은, 남들이 표현하기 어려운 경지(境地)에서 터득되는 것을, 나는 마치 천구(天球)처럼 좋아하는 바이다. 나의 조카 심계(心溪)가,
깊은 동굴에 한가한 거미 속절없이 휘감는다/邃洞幽蛛虛自裊
하였고, 나의 벗 기평자(騎萍子)는,
황소가 빗소리 듣느라 뿔을 쫑긋거린다/黃牛聽雨角崢嶸
하였는데, 거미가 휘감을 때를 상상하건대, 그 다리가 한가로이 헛놀았을 것을 추측할 수 있고, 소가 빗소리 들을 때를 상상하건대, 그 뿔이 쫑긋해졌을 것을 알 수 있다. '동굴[洞]'이니 '비[雨]'니 하는 표현에 영자(影子)와 골자(骨子)의 차이가 들어 있다.

바라건대 하늘이 나의 가슴속에 묵은 것이 없게 해주고, 사람들의 입에 빗나간 의논이 없게 해주었으면 한다.

마음이 들뜨고, 또 무엇에 크게 빠져 정처가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찮은 놀이라도 하여 다소 마음을 붙이고 순탄하게 지내며 번거로운 조바심을 잊어야 한다.

비록 미미한 풀벌레라도 한 번 뒤집히거나 거꾸러지면 한 번 소리쳤지 어찌 일찍이 가식(假飾)하거나 구애(拘礙)받는 일이 있었는가. 오직 천성[眞機]대로 맡겨 둘 뿐이다.

내가 만일 복랍(伏臘)에 대접할 것이 있어 늙은 부모님들을 주리시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무엇하러 과거 공부를 일삼겠는가. 어찌 내가 도를 펴고 백성 혜택 보일 사람이겠는가. 밥만 먹는 우졸(迂拙)한 선비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아니하여 천성[天眞]을 상실하게 할 수야 있겠는가. 우졸하기는 하지만 십삼경(十三經)이십이대 역사를 읽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원석공(袁石公)은 어찌 기이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의 시(詩)에,
시원하자 좋은 꿈 꾸었고/好夢因涼得
물에 오니 심심한 시름 잊힌다/閑愁到水忘
하였는데, 마음이 없었어도 꾸게 되고, 마음을 두어서 잊힌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있었는지 마음이 없었는지를 논할 것 없이 오직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다. '독서(讀書)'라는 시에,
책 위 먼지 털고서/拭却韋編塵
의관하고 고인을 뵙네/衣冠對古人
쓰인 건 모두 심혈로서/著來皆肺腑
알고 나니 정신을 돕네/道破益精神
도끼 들고 주옥을 캐고/把斧樵珠玉
그물 쳐 봉린을 잡은 듯/恢綱網鳳獜
나도 한 자루 비 들고/擬將半尺帚
온 땅의 가시를 쓸리라/匝地掃荊榛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독서하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을유년(乙酉年) 겨울 11월에 형재(炯齋 저자의 서재)가 춥기 때문에 뜰 아래 있는 조그마한 모옥(茅屋)으로 이사했는데, 집이 매우 누추하여 벽에 언 얼음이 뺨을 비추고 구들의 매연(煤煙)이 눈을 시게 했다. 아랫목이 불쑥하여 그릇을 놓으면 물이 반드시 엎질러지고, 해가 비치면 쌓였던 눈이 녹아 썩은 띠에서 누르스름한 장국 같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한 방울이라도 손님의 도포에 떨어지면 손님이 깜짝 놀라 일어나므로, 내가 사과하면서도 게을러서 집을 수리하지 못했었다.
어린 아우와 그대로 있은 지 무릇 석 달 동안에, 그래도 글 읽는 소리를 그치지 않으며, 세 차례나 큰눈을 겪었는데, 한 차례의 눈이 올 적마다 이웃에 사는 작달막한 늙은이가 반드시 새벽이면 대비를 들고 문을 두들기며 중얼중얼 혼자서 말하기를,
"딱한 일이여! 연약한 수재(秀才)가 추위에 얼지 않았는지."
하면서, 먼저 길을 낸 다음 문 밖에 벗어 놓은 파묻힌 신발들을 찾아내어 털어놓고, 말끔히 쓸어모아 둥글하게 세 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가곤 하는데 나는 이미 이불 속에서 옛 글을 벌써 3~4편씩이나 외곤 하였었다.
이제는 날씨가 자못 풀렸으므로 그만 책들을 챙겨 서쪽 형재로 옮겨야 하는데, 차마 떠나지 못하는 연연(戀戀)한 생각이 있어, 몸을 일으켜 서너 번 돌다가, 곧바로 형재로 나가 쌓인 먼지를 털고 필연(筆硯)을 정돈하고 도서(圖書)들을 점검했다. 그리고 시험삼아 앉아보니, 또한 오래 객지(客地)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 있었으며, 필연이나 도서와 자질(子姪)들이 나와서 인사하는 것이 비록 면목이 조금 생소한 듯했으나, 사랑스러워 안아 주기를 저절로 금할 수가 없었다. 아아, 이것이 인정인지.
병술년 상원(上元 음력 정월 보름)에 쓴다.

진정(眞情)의 발로는 고철(古鐵)이 활기차게 못에서 뛰놀고, 봄날 죽순(竹筍)이 성낸 듯이 흙을 뚫고 나오는 것 같고, 가식된 정이란 먹물이 매끈한 넓은 돌에 발린 것 같고, 기름이 맑은 물에 뜬 것과 같은 법이다. 칠정(七情) 중에 슬픔[哀]이 가장 직접 발로하여 가장하기 어려운 것인데, 슬픔이 극심하여 울음이 터지게 되면, 지성스러운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우는 울음은 뼈 속에 사무치게 되고, 가식으로 우는 울음은 겉으로 뜨게 되는 법이니, 만사의 진가(眞假)를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이 닥쳤을 때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하여, 오직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만 싶고 한 치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진다. 다행히 내가 두 눈알을 지녀 자못 글자를 알므로,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마음을 자위(自慰)하며 보노라면, 조금 뒤엔 좌절되던 마음이 조금 안정된다. 만일 내가 눈이 비록 오색(五色 청ㆍ황ㆍ적ㆍ백ㆍ흑)을 볼 수 있지만 서책에 당해선 깜깜한 밤 같았다면, 장차 어떻게 마음을 쓰게 되었을는지.

번뇌스러울 때 눈을 감고 앉았으면, 눈동자 속이 하나의 착색(著色)한 세계가 되는데, 붉었다 푸르렀다 검었다 희었다 하는 광채가 어른거려 형용할 수 없다가, 조금 있으면 뭉게뭉게 이는 구름처럼 피고 또 조금 있으면 푸른 파도처럼 되며, 또 조금 있으면 무늬 있는 비단처럼 되고, 또 조금 있다간 부서진 꽃송이처럼 되며, 어느 때는 구슬이 번쩍이듯 하고 어느 때는 좁쌀이 흩어진 듯하여, 잠시 동안에 변했다 없어졌다 하며 그럴 적마다 새 판이 생겨, 족히 한 바탕의 번잡한 근심을 해소하게 된다.

풍시가(馮時可)의《전행일기(滇行日記)》에 '전남(滇南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지방은 비록 눈이 산마루에 그득할 적에도 추위가 살갗에 들어오지 않고 겨울에도 해가 짧지 않다.'고 했다. 심전기(沈佺期)의 시를 고찰하건대,
사기가 추위를 적게 나누고/四氣分寒少
삼광의 해 배치를 치우쳤네/三光置日偏
하였는데, 이는 이 실지가 그런 것이다.

이태백(李太白)의 유별종십륙경(留別宗十六璟)이란 시에,
내가 동상 사람은 아니지만/我非東床人
영자와 부부가 되었네/令姊黍齊眉
하였으니, 비로소 태백의 아내가 종가[宗氏]임을 알 수 있다.

성리학[理學]을 한 선배들도 그림에 능한 분이 있었으니, 한훤당(寒喧堂 김굉필의 호)ㆍ퇴계(退溪 이황의 호)ㆍ농암(農巖 김창협의 호) 세 선생이 모두 그림에 능했었는데, 한훤당은 여러 가지 기법이 모두 좋은 분이었다.《화전(畫傳)》에 '사마속수(司馬涑水 사마광을 말한다)ㆍ주자(朱子)도 모두 유명한 화가다.' 했고 《패설(稗說)》에 '진백사(陳白沙)는 매화(梅花)를 그렸다.' 했다.

지리산(智異山) 속에 소[湫]가 있는데 소 위에 소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항시 그 소 속에 쌓여 있다. 거기서 나는 고기의 무늬가 매우 아롱아롱하여 가사(袈裟) 같으므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하니, 대개 소나무 그림자대로 변화한 것이다. 구득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삶아서 먹으면 병이 없게 되고, 오래 살게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초기에 삼공(三公)이 서대(犀帶 정1품ㆍ종1품의 벼슬아치가 두루는 띠)를 이어받은 가문이 있어, 하연(河演)이 신석조(辛碩祖)에게 전했었는데, 석조가 판서까지만 하고 졸(卒)하여 드디어 서대를 전승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여건(呂虔)의 일 과 같은 것이다.

청평산(淸平山) 절에 고려 때의 청평산 거사(淸平山居士) 이자겸(李資謙)의 두골(頭骨)을 담아 놓은 돌함이 있었는데, 경오년(庚午年) 큰 장마에 산 물이 갑자기 몰아닥치게 되어 그만 돌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또 김부식(金富軾)이 비문을 지은 석비(石碑)가 있었는데, 70년에 강원 감사(江原監司) 유모(兪某)가 아전을 시켜 탑본(搨本)하게 하자, 때가 겨울철이어서 먹물이 얼므로 숯불을 피워 비를 달구매 비가 모두 부서졌으니, 사리를 모르는 세속 아전의 짓이 애석하기만 하다.

온눌제(膃訥臍)는 해구(海狗)이다. 우리나라의 영해(寧海)ㆍ평해(平海) 등지에서 나는데 모두 수컷이다. 해마다 떼를 지어 바다를 따라 남으로 가다 남해현(南海縣)에 이르러 암컷을 만나 교미(交尾)하다 가는데, 암컷을 낳으면 그 지방에 두고 수컷을 낳으면 동해(東海)로 옮겨간다.

문중자(文仲子) 왕통(王通)은 15세에 남의 스승이 되었고, 정우 선생(定宇先生) 진역(陳櫟)은 15세에 마을 사람들이 스승으로 삼았으며, 이익재(李益齋 익재는 이제현의 호)도 15세에 사람들이 모두 스승으로 여겼었다.

자여역(自如驛)에 사는 사람이 새로 망아지를 샀는데, 꼴이나 콩을 먹지 않으므로 시험 삼아 오곡(五穀)을 주어도 역시 먹지 않았고, 사람이 먹는 것까지 모두 시험삼아 주어도 먹지 않다가, 소주(燒酒)를 주자 비로소 반가운 듯 마셨고 또 황대구(黃大口)를 썰어서 주니 잘 먹었으며, 그 뒤에 잇달아 두 가지를 먹이자 하루 7~8백 리씩을 갔는데, 정축년에 주금(酒禁)이 생긴 뒤 먹지 못해 죽었다.
옛적에 12세 동자(童子)가 산중 집에서 자며 지은 시에,
유인의 집에서 잠을 자니/夜宿幽人宅
속객의 마음 더없이 맑아지네/彌淸俗客心
문 앞엔 시냇물 흐르고/門前流水在
처마 귀엔 파란 산 섰도다/簷角碧峯臨
만년의 지조 국화에 의탁하고/晩節依寒菊
한가한 심정 거문고로 풀도다/閑情托素琴
솔바람이 이 뜻을 아는 양/松風如有意
불다말다 나의 시정 화답하네/斷續和孤吟
라고 했었다.

옛적에 만호(萬戶) 임득충(林得忠)이라는 사람이 성격이 호방했었는데,
숭례문(崇禮門)에 올라가 읊조리기를,
단청한 누각 허공에 높이 솟아/畫閣巖嶢出半空
올라보니 마치 나는 기러기 탄 듯/登臨怳若駕飛鴻
평소의 장지를 의탁할 데 없어/平生壯志憑無地
천지의 만리 바람에 혼자 누웠네/獨臥乾坤萬里風
라고 했었다.

옛적에 김흥갑(金興甲)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일반 백성이었다. 시에
능하여 자못 한가롭고 담박했는데, 인로휴금(隣老携琴)이라는 시에,
끼니 뒤 종소리에 마음 절로 한가하여/飯後鳴鐘意自閑
다리 머리에 조그만 사립문 깊이 닫혔네/橋頭深閉小柴關
외로운 다듬이 언제나 황혼 때면 빨라지고/孤砧每急黃昏際
몇 집의 마을 언제나 고목 속에 쓸쓸하네/十室長寒古木間
울며 나는 외기러기 그래도 북곽 찾는데/鳴度斷鴻猶北郭
지쳐 오던 초승달 다시 서산에 지네/照來纖月更西山
이웃 늙은이 본시 청광이 아닌 분인데/隣老不是淸狂者
어찌 밤낮 술을 가지고 가랴/日夕那能佩酒還
했었고, 전파과산사(餞罷過山寺)라는 시에,
참선하는 자리에 오니/到來參佛坐
고요하여 도심이 생기네/寂寞道心生
헌칠한 벽엔 늘 구름기 일고/虛壁恒雲氣
텅 빈 문엔 단지 시내 소리/空門只澗聲
외로운 탑은 풍상 속에 섰고/風霜孤塔立
아침 저녁엔 종 한 번씩 울리네/朝暮一鍾鳴
자주 하늘가에 머리 돌려/天際頻回首
은근히 나그네 길 염려하도다/殷勤念客行
라고 했었다.

도학(道學)은 인습(因襲)해야 하고 문장(文章)은 개혁해야 되는 법이다.
천성(天性)은 동일하니 이치[理]이기 때문이고, 재주는 오만 가지로 기(氣)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일이 모두 하나의 권 자(權字)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경(經)이니 권(權)이니, 하는 권을 의지가 혼매한 사람이 사용하다가는 잘못 권세(權勢)의 권에 빠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 사용하다가는 저절로 실수하게 되고 마는 법이다.

졸(拙)한 사람은 외람하지 아니하니, 외람하지 않으면 결백하고, 결백하면 정직한 법이다. 아, 졸한 사람이 누구일까.

절벽[石壁] 위에 세 그루의 소나무가 층층이 크고 있어, 노(老)ㆍ장(壯)ㆍ유(幼)를 구별할 수 있다. 맨 아래 소나무는 맨 위 소나무의 손자이고, 중간에 있는 소나무와 맨 위 소나무는 맨 아래 소나무의 아비와 할아비로서, 오래도록 고요히 완상하노라면 엄연히 윤기(倫氣)가 있어 보인다.

웃음에는 세 가지가 있는 법이니, 기뻐서 웃고, 감개(感慨)스러워 웃고, 취미가 맞아 웃는 것은 누구나 모두 그럴 수 있는 것이지만, 대저 무시하느라 웃고 아첨하느라 웃는 짓은 일체 없애야 한다.

외손(外孫)이 잇달아 문직(文職)이 되었다. 고려 때의 관제(官制)에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는 직품이 낮은 것이지만 반드시 문장과 중망(重望)이 있어 앞날에 문단의 맹주가 될 사람을 가려서 시켜, 그 선발을 지극히 깨끗하고도 소중히 했는데, 우리나라 초기에도 그대로 했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응교를 지낸 다음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을 맡았었고, 아들 지재(止齋) 권제(權踶)가 또한 그 직을 지냈으며, 권제가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啓甸)에게 전했는데, 계전은 곧 양촌의 외손이다. 그가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에게 전했는데 곧 양촌의 외손서이며, 문충공(文忠公) 서거정(徐居正)에게 전했는데 거정도 역시 양촌의 외손이다. 양정공(襄靖公) 채수(蔡壽)는 곧 양촌의 아우 매헌공(梅軒公)의 외증손으로서 양촌에게는 재종(再從) 외증손인데 또한 그 직을 맡았었다.

처남과 매부가 한때에 대배(大拜 정승이 된 것)했었다. 좌상(左相) 윤자운(尹子雲)은 곧 영상 신숙주(申叔舟)의 처형(妻兄 아내의 오빠)으로서 한때에 대배했는데, 신숙주가 시 한 구를 짓기를,
심지 맞는 벗이 다같이 흰털 났네/靑眼故人俱白髮
하자, 윤자운이 화답하기를,
검은 머리 어진 정승은 오직 단심이라네/黑頭賢相只丹心
했었는데, 신숙주의 첩 이름이 '지단심(只丹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문에서 세 특이한 사람이 났었다. 북창(北窓) 정염(鄭)과 고옥(古玉) 정작(鄭碏) 형제가 이미 수련(修鍊)하는 법에 심오하였고, 그의 종형 계헌(桂軒) 정초(鄭礎)는 젊어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화려한 벼슬을 여러 번 지내다가 병으로 사양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금단(金丹)의 비법을 연구했었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말이 하늘의 신선이 그의 집에 내려와 시 한 구를 주기를,
계향의 꽃다운 향기 그윽하기에/桂香芳馨郁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왔노라/仙馭自天來
하므로 따라서 아호(雅號)를 계헌이라고 했다 한다.

종실(宗室 종친(宗親))의 나이 79세에 비로소 봉작(封爵)되었다. 호천군(湖川君) 모(某)는 세종의 증손이자 한남군 어(漢南君□)의 손자이다. 한남군의 어머니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일찍이 단종(端宗)을 봉양했었는데, 단종이 상왕(上王)이 되자 혜빈도 연좌되어 폐출되고 죽음을 받았었다. 어는 함양(咸陽)으로 귀양가 흥안군 중생(興安君衆生)을 낳았고 중생이 호천군을 낳았으나, 이미 속적(屬籍)이 끊어져 평민에 편입되었다. 나이 79세이던 가정(嘉靖 명 세종의 연호) 갑오년(중종 29, 1534)에 대궐 문에 엎드려 글을 올리자, 비로소 다시《선원보(璿源譜)》에 올리도록 하고 호천 부수(湖川副守)로 봉작하였으며, 명종(明宗) 초년에는 그의 조부를 한남군으로, 그 아버지를 흥안군으로 추봉(追封)하도록 했었고, 호천군 또한 아들의 공으로 인해 군으로 추봉하게 된 것이라 한다.

스승과 제자가 같은 시기에 국자(國子 성균관)의 장관과 차관이 되었다. 퇴계 선생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을 때 귀암(龜巖) 이정(李楨)이 사성(司成)이 되었는데, 퇴계의 제자이다.

성균사업(成均司業). 인조(仁祖)가 큰 난리를 극복하고 나서 맨 먼저 초야에 있는 어진 사람을 찾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지평(持平)으로 불렀는데, 나이 늙었다고 사양하자 특별히 성균사업으로 제배(除拜)했었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이런 관직이 없었으니 특히 여헌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갑자생(甲子生)의 관작이 옛사람과 동일했다. 홍인재(洪忍齋 이름은 섬(暹))가 갑자생으로 두 차례 문형(文衡)을 맡았었고, 예조 판서로 이상(貳相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겸임하고 있다가 무진년에 정승으로 들어갔었는데, 이월사(李月沙 이름은 정귀(廷龜))의 생년(生年)ㆍ문장(文章)ㆍ지위[位次]가 은연중 합치되었다. 그러나 인재는 80세를 살고 월사는 73세를 살았다고 한다.

세 손자가 한꺼번에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의 손자 셋이 동시에 한성(漢城)의 진사 시험에 제일 제이 제삼으로 합격하게 되자,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의 호)가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세 개의 구슬 나란히 꿴 삼형제/三顆聯珠叔仲昆
일시에 방이 올라 특이한 공 세우겠네/一時榜上策奇勳
누가 만일 그 집안을 묻는다면/旁人若問渠家世
상당과 고양의 내외손이라네/上黨高陽內外孫
했었다.

세 사위가 용두회(龍頭會)에 참례했다. 찬성(贊成) 채수(蔡壽)의 사위가 세 사람이니, 김감(金勘)ㆍ김안로(金安老)ㆍ이자(李耔)였다. 채수가 용두회를 마련했었는데, 안로와 이자가 모두 참례했고 김감도 참례하고 싶었으나 장원하지 못한 것 때문에 거절당하자, 김감이 자기 부인을 시켜 말하기를,
"사위 제가 35세에 대제학(大提學)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들어가 참례하게 되기 바란다."
하므로 채수가 웃으면서,
"이야말로 참례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불러다 잔치에 참례시켰었다.

은문(恩門 시관(試官)을 뜻한다)의 대부인(大夫人)에게 헌수(獻壽)했다. 신유년(辛酉年)의 삼방(三榜) 장원 이석형(李石亨)이 삼방의 합격자들을 거느리고 은문인 지재(止齋) 권제(權踶)에게 헌수하는데, 이때 대부인 이씨(李氏)가 나이 70이 넘었는데도 건강하여 병이 없었고, 아들 찬성 남(擥)ㆍ승지(承旨) 지(摯)ㆍ중추(中樞) 반(攀)ㆍ호군(護軍) 마(摩)ㆍ사복(司僕) 경(擎)이 모두 한때의 훈신(勳臣)으로서 공명이 혁혁했었다.

우상(右相)이 이조 판서를 겸임했었다. 선조(宣祖) 신묘년(1591)에 유서애(柳西厓 서애는 유성룡의 호)가 우의정(右議政)이었는데, 상이 이조 판서를 겸임하도록 하므로 서애가 전에 그런 사례가 없음을 들어 사양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었다.

대사간(大司諫)이 바로 도승지(都承旨)에 제배됐다. 인조(仁祖) 을축년(乙丑年)에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대사간으로 있다가 도승지로 전임되었다. 승정원의 옛 사례는 승지는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차례로 승진하게 되어 있는데, 이번은 사간원을 거쳐 곧장 본직(本職)에 제배되었으니 특별한 은전(恩典)에서 나온 것이다.

의정(議政)이 대제학을 겸임했다. 세조(世祖) 때에 신숙주(申叔舟)가 영의정으로서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ㆍ예조 판서를 겸임했고, 어세겸(魚世謙)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가 의정으로서 대제학을 겸임했으며, 선조(宣祖) 때에 유성룡(柳成龍)이 좌의정으로서 대제학ㆍ이조 판서를 겸임했다.

성대하게 뽑힌 사신 접대관. 고천준(顧天埈)ㆍ최정건(崔廷健) 두 조사(詔使 중국 사신)가 나올 적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는 원접사(遠接使)가 되고,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ㆍ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ㆍ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은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ㆍ석주(石洲) 권필(權韠)ㆍ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는 사자관(寫字官)으로서 역시 일행 중에 있었으며,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은 도사선위사(都司宣慰使 뒤에 영위사(迎慰使)라고 개정했다)로 차임(差任)되었으니, 대개 한 시대를 망라하여 뽑은 선량(選良)들이었다.

세 여인의 절행(節行). 형벌 받다가 죽은 이윤장(李允章)의 아내는 이오리(李梧里 오리는 이원익의 호)의 소실에서 난 딸이었는데, 남편이 죽자, 죽기로 맹세하여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다가, 하루 쌀 한 줌씩을 먹고 몸에 상복(喪服)을 벗지 않은 채 5년 만에 죽었다. 그의 여동생은 이시행(李時行)의 아내였는데, 정축년(丁丑年)에 강화[江都]로 피난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어 오랑캐들이 자녀(子女)를 몰아가게 되자, 그대로 서서,
"나는 완평군(完平君) 이 정승[李相國]의 딸이다."
부르짖고는 드디어 자결했다.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는 오리의 큰 딸인데, 처음에 여동생이 사로잡히게 되어 죽었다는 것을 듣고도 울지 않다가 까닭을 물어본 다음에 울면서 말하기를,
"죽기 잘했다. 그 이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정씨(鄭氏) 가문의 충효. 정백형(鄭百亨)은 자가 덕후(德後)인데, 오랑캐의 난리 때, 전장령(前掌令)으로 강화에 들어갔다가 오랑캐들이 성을 함락하자, 조복(朝服)을 입고서 행재소(行在所)를 바라보며, 4배(拜)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므로, 충신으로 정문(旌門)하게 했고, 아버지 효성(孝成)은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를 말한다) 때에 청렴한 선비로 이름났고 착한 행적이 있으므로 제문을 세웠으며, 조부 원린(元獜)은 또한 지극한 효행이 있어 효자로 정문을 세웠다. 고조 성근(誠謹)은 곧은 말로 간하기 좋아하므로 폐주(廢主 연산군을 말한다)가 죽였고, 증조 주신(舟臣)은 아버지가 비명(非命)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먹지 않다가 생명을 잃었는데, 공희왕(恭僖王 중종을 말한다) 때에 모두 정문을 세웠고, 5대조 척(陟)은 세종 때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었다.

효자ㆍ열녀ㆍ충신ㆍ절의(節義)가 4대 동안에 여덟 사람이나 났다. 영응 선생(永膺先生) 이지남(李至男)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 장령(掌令) 언침(彦忱)이 을사년(乙巳年)에 서천(舒川)으로 귀양갔다 죽으매, 선생이 운상(運喪)하여 돌아와 장사하되 친히 흙과 돌을 날랐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올라가 슬프게 울므로 묘의 띠풀이 말라 죽기까지 했으며, 어머니 안 부인(安夫人)은 절행(節行)이 있었는데, 이질(痢疾)을 앓다 거의 위급하게 되자, 선생이 변[糞]을 맛보았고 목욕하고 하늘에게 빌었으며, 근심을 너무하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의 부인[孺人]정씨(鄭氏)는 을사년의 명신(名臣) 정원(鄭源)의 딸로 그의 친정이 이미 멸문(滅門)의 화를 입어 죽고 계모(繼母) 권씨(權氏)가 돌아갈 데가 없자, 유인이 시어머니에게 간청하여 데려다가 30여 년을 봉양하였고, 선생이 돌아가자, 하루에 한 줌 쌀로 연명하고 추워도 옷을 갈아 입지 않았으며, 3년 동안 곡하기를 한결같이 초상 때처럼 했었는데, 현종(顯宗) 12년에 선생 및 유인의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했었다.
장남 기직(基稷)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선생이 돌아가자, 슬픔이 극하여 울다가 머리가 모두 희게 되었는데, 소상(小祥)도 치르지 못하고 죽었고, 차남 기설(基卨)은 소경왕(昭敬王) 때 행신[行誼]이 있어 불러다 등용하였다가, 광해군 때에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차녀(次女)는 성년(成年)하기 전에 선생이 돌아갔는데, 죽만 먹으며 3년을 울다 죽었고 기설의 아들 돈오(惇吾)는 강화가 함락될 때 절의를 지키다 죽으매, 그의 아내 김씨도 난리에 임하여 자결하였으며, 차자 돈서(惇敍)는 강화에 있다가 적을 만나 의리를 굽히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가 죽었다.

한 가문에서 3대 동안에 네 열녀가 났다. 정축년(丁丑年)의 강화 난리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부인 권씨(權氏),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의 아내 박씨, 현주(玄洲) 이소한(李昭漢)의 아내 이씨(李氏), 명한의 아들 청호(靑湖) 일상(一相)의 아내 이씨가 모두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일상의 아내는 분사(汾沙) 이성구(李聖求)의 딸인데, 성구의 아내 권씨 역시 죽었으니, 이는 또한 그 딸에 그 절개인 것이다.

전처(前妻)와 후처가 모두 열녀였다. 한오상(韓五相)의 자는 세익(世翊)인데 나이 37에 죽었다. 첫 아내는 상국(相國) 이성구(李聖求)의 딸인데, 정축년에 강화가 함락되자 절개를 지키다 죽었고, 다음 아내는 부사(府使) 정기숭(鄭基崇)의 딸로, 오상이 죽자 정씨도 자결했으나 특히 절명하지 않았는데, 아들 균(均)이 또한 죽으매 마침내 먹지 않다 죽었다.

3대가 거상(居喪) 중에 죽었다.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가 상사를 다 치르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아들 적(迪)이 역시 복제(服制)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으며, 적의 손자 유부(有阜)가 또한 법제에 벗어나게 애통하다가 삼년상을 치른 지 겨우 한 달 만에 죽었다.

영순군(永順君)이 거듭 과거에 합격했다. 세조 때에 등준시(登俊試)를 마련하여 모든 경대부(卿大夫)ㆍ대관(大官)ㆍ종실(宗室)ㆍ부마(駙馬)들을 모두 과거보도록 하고 친림(親臨)하여 책문(策問)하고, 대신 정인지(鄭麟趾)ㆍ정창손(鄭昌孫)ㆍ신숙주(申淑舟)가 대독관(對讀官 시관)이었는데,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 이름은 여(璵))의 아들 영순군 보(溥)가 정 1품으로서 응시하여 5등을 하자, 의정부(議政府)에다 은영연(恩榮宴)을 내렸고, 장원한 김수온(金守溫) 이하에게는 각각 안장 딸린 말을 내렸었다.

온양(溫陽)에 행행하여서는 중시(重試)를 마련했는데, 영순군이 또한 중시의 1등으로 뽑히자, 상이 크게 기뻐하여 특별히 하루를 더 유가(遊街)하게 하고, 쌀 50석ㆍ갈옹(喝翁) 3명ㆍ천동(天童) 2백을 내렸으니, 그야말로 특이한 은전(恩典)인 것이다. 영순군이 4대의 조정을 내리 섬기며 두 차례를 책훈(策勳)되었고, 총명하고 활달하며, 비록 부귀하였지만 조금도 교만하거나 과시하는 기색이 없었고,《계감(誡鑑)》및《육전(六典)》편찬을 맡아보았으며, 성종 때에 이르러 돌아갔는데, 나이 27세였다.

종실(宗室)과 부마(駙馬)가 급제했다. 영순군 보가 등준시(登俊試)에 오르고, 춘양군 내(春陽君䋱)가 식년(式年)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부마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가 친시(親試 임금이 친히 나와 보이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했다.

종실(宗室)이 문무직을 지냈다. 세조 때에 진례군 형(進禮君衡)이 문무의 재질이 있어, 경상 병사(慶尙兵使)로 있다가 이조 참판으로 들어왔다.

종실이 정승으로 들어갔다. 세조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을 때인 단종 계유년(1453)에 영의정으로 제배되었고, 귀성군 준(龜城君浚)은 영묘(英廟 세조를 말한다)의 손자인데,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여 두 차례나 공신이 되었고, 세조 무자년(1468)에 특별히 영의정으로 제배되었는데, 이때의 나이 28세였으며, 18세에 병조 판서, 21세에 도원수(都元帥)를 지냈다.

지존(至尊 임금을 말한다)이 은문(恩門)이 되었다. 세조가 등준시(登俊試)를 보여 13명을 뽑고서, 제인(諸人)들을 내전(內殿)으로 불러 이르기를,
"예부터 좌주(座主 급제할 적의 시관)니 문생(門生 급제한 사람의 시관에 대한 자칭)이니 하는 명칭이 있는데, 이번의 이 과거는 내가 친히 책문(策問)하였으므로 내가 마땅히 은문이 되어야 하니, 이 궁전(宮殿)을 마땅히 은전(恩殿)이라 해야 한다."
하였고, 두어 날이 지나 양전(兩殿 임금과 왕비)이 사정전(思政殿)에 자리하고 제인들이 잔 올리기를 한결같이 문생이 좌주에게 하는 준례대로 했었으니, 우리 동방(東方)에 없던 훌륭한 일이다.

삼장(三場 곧 세 차례라는 뜻)의 과거를 모두 장원했다. 율곡 선생(栗谷先生)이 생원시(生員試) 및 회시(會試)ㆍ전시(殿試)에 장원하고,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가 또한 진사시ㆍ회시ㆍ전시에 장원했다.

종실(宗室)이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세조 때에 은천군(銀川君 호를 세심정(洗心亭)이라 한다)이 강개(慷慨)한 의지와 정민(精敏)한 재주가 있었는데,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누차 금군(禁軍 궁궐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의 장수가 되었으며, 두 차례나 명을 받고 제도(諸道)를 순찰했다.

형제가 다같이 한 지방의 장관이 되었다. 이파(李坡)가 뽑히어 평안도 관찰사로 제수되고, 이듬해에 아우 봉(封)이 또한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한 시기에 형제가 다같이 한 지방의 중한 소임을 받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정승이 부모가 모두 생존해 있었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여섯 차례나 수상이 되어 의정부[黃閣]에 있은 지 10여 년이었는데 부모가 모두 생존하여 탈이 없었다.

아버지 및 남편과 아들이 모두 영상(領相)이었다. 영상 송일(宋軼)의 딸은 영상 홍언필(洪彦弼)의 아내인데, 아들 섬(暹)이 또한 영상이 되었으므로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만사(挽辭) 짓기를,
한 덕으로 삼종하며 정승의 영화 보고/一德從三上臺貴
백 살에 여섯 빠지도록 오래 살았네/百年除六老星尊
하였다. 또한 그의 수명이 94세인데다가, 삼종(三從)이 또한 모두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내게 되어, 아버지 때에는 처녀(處女)로서 따라가 정원에다 복숭아나무를 심었는데, 남편 때에는 부인이 되어 따라갔다 보니 그 복숭아나무 꽃이 진실로 난만(爛熳)했었고, 그 다음에는 또 대부인이 되어 아들을 따라갔다 보니, 복숭아나무가 이미 노쇠하였으므로 드디어 더위잡고 한숨 쉬며 금성 읍류(金城泣柳)의 한탄을 했다.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을 천거토록 했다. 문종(文宗) 신미년(1451) 11월에 상이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조정에 배치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귀한 집 자제들로서 배우지 않아 학술(學術)이 없다. 국학(國學)의 유생들 중에 반드시 경사(經史)를 꿰고 치체(治體)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천거하도록 하라."
하므로, 드디어 진사 안양생(安良生)을 천거하니 상이 우등한 품계(品階)로 임용했었다.

젊은 나이에 입각(入閣 정승이 되는 것)하고 주문(主文 대제학이 되는 것)하다. 귀성군 준(龜城君浚)은 28세에 정승이 되고, 윤사흔(尹士昕)은 39세에 정승이 되고 이항복(李恒福)은 43세에 정승이 되었다. 이덕형(李德馨)은 38세에 정승이 되고 31세에 주문하였으며, 김수항(金壽恒)은 44세에 정승이 되고 34세에 주문하였으며, 김감(金勘)은 35세에 주문하고, 이행(李荇)은 40세에 주문하였으며, 남지(南智)는 17세에 경상 도사(慶尙都司)가 되었으니 특이한 일이다.

가택(家宅)을 하사받은 것은 세 사람뿐이다. 세종 때에 황희(黃喜)가 가택을 하사받고, 선조 때에 이원익(李元翼)이 가택을 하사받고, 숙종 때에 허목(許穆)이 가택을 하사받았다.

기로연(耆老宴)에 친림(親臨)했다. 태종(太宗)이 기로연에 친림하여《제명안(題名案 지금의 방명록 같은 것)》을 가져다가 임금의 이름[御諱]를 친히 썼었고,〈이 뒤로는〉임금의 나이 60이 되면 임금의 이름도 실었으니, 상의 분부에 따른 것이다. 또, 토전(土田)ㆍ노비(奴婢)ㆍ어장(漁場)을 내려 후히 부양하고 기로소(耆老所) 대문 밖에서는 공경(公卿) 이하에게 말에서 내리도록 했다.

홍씨 가문에서는 3대가 수(壽)를 누렸다. 홍유손(洪裕孫)은 남양(南陽)의 아전 족속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호)의 제자로서 호가 소총자(篠叢子)인데, 사화(史禍) 때에 선량한 사류(士類)들이 모두 죽었으나 홀로 몸을 깨끗이 가져 오래 살다 마쳤고, 그의 아들 지성(至性)은 백가서(百家書)에 해박하여 천 명의 사람들을 교수(敎授)하였는데, 또한 오래 살기로 이름났었으며, 또 그의 아들 찬천(贊天)이 역시 80까지 살아, 장헌왕(莊憲王 세종을 말한다) 때로부터 순효왕(純孝王 인조를 말한다) 시대까지 2백 70여 년 동안에 단지 3대가 되었을 뿐이다.

7대가 오래 살았다. 태종의 왕자 익녕군 이(益寧君移)가 80여 세, 아들 수천군 정은(秀泉君貞恩)이 87세, 아들 청기군 표(靑杞君彪)가 83세, 아들 함천군 억재(咸川君億載)가 84세, 아들 문충공 원익(文忠公元翼)이 88세, 아들 완선군 의전(完善君義傳)이 80세, 아들 창수 수약(倉守守約)이 79세를 살아, 7대가 2백 70여 년이 된다.

이씨(李氏) 가문의 축수연[慶壽宴]. 선조 35년에 승정원이 아뢰기를,
"전참의(前參議) 이거(李蘧)의 어미가 지금 나이 99이니 마땅히 늙은이를 대우하는 은전(恩典)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하므로, 그 이듬해 1월에 희름(餼廩 고기와 쌀)을 내렸고, 그 아들의 벼슬을 우윤(右尹)으로 올리고 3대를 가자(加資)하였으며, 또한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제배하게 되자, 술을 마련하여 축수하는데, 경대부(卿大夫)로서 대부인을 봉양하여 받드는 사람이, 진흥군(晉興君)ㆍ금계군(錦溪君)ㆍ윤 판서(尹判書)ㆍ한 참판(韓參判)ㆍ홍 중추(洪中樞)ㆍ남 참판(南參判)ㆍ이 중추(李中樞)ㆍ진창군(晉昌君)ㆍ여흥군(驪興君)ㆍ윤 참지(尹參知)ㆍ권 소정(權少正)ㆍ강 익위(姜翊衛)ㆍ이 중부(李中部) 등 13명이나 되었다.
이듬해에 크게 경수연을 차리게 되자, 상이 제도(諸道)로 하여금 물품을 공급하게 하고 또한 법악(法樂 국가에서 쓰는 정악(正樂))도 내렸는데, 백세 부인(百歲夫人)이 상수(上壽)로서 가장 높고, 강 상국(姜相國)의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명부(命婦)로서 가장 현달하므로 모두 대청 중앙에 남향으로 앉고, 이 이하 여덟 대부인들은 각기 명수(命數 봉작(封爵)의 등급)에 따라 차서를 정하여 동과 서로 마주하여 앉았으며, 제부인(諸夫人)들은 각각 뒷줄에 차서대로 앉았다. 예가 끝나자, 진흥군 이하 제공(諸公)들이 모두 재배(再拜)하였고, 자손 중에 의관을 갖추고 모시고 선 사람이 19명이나 되었는데, 절충장군(折衝將軍) 문전(文荃)ㆍ국자 전적(國子典籍) 홍립(弘立)ㆍ헌납(獻納) 양(讓)이 가장 현저하였으며, 집사(執事)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또한 16명이었는데 각기 술잔을 올려 축수했다.
백세 부인은 채수(蔡壽)의 질녀인데, 홍치(弘治 명 효종의 연호) 갑자년(연산군 10, 1504)에 출생하였다가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병오년(선조 39, 1606)에 세상을 떠나, 3만 6천 갑자(甲子)를 지남으로써 1백두 살을 먹었고, 관찰공(觀察公)은 70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두 누이는 모두 90세를 살았고, 손자 추부공(樞府公)은 또한 80여 세를 살았으며, 제집사(諸執事)의 자손 중에는 정승으로 들어간 사람이 1명, 수의(繡衣)가 되어 조정에 오른 사람이 7명, 대성(臺省 사헌부와 육조 관원)의 관원된 사람이 1명, 고을 원으로 나간 사람이 6명이었다.

두 딸이 왕비가 되었다. 예종(睿宗)의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의 공혜왕후(恭惠王后)는 모두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딸이었다. 또, 두 딸이 하나는 왕후가 되고 하나는 왕자(王子)의 부인이 된 일이 있으니,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딸이 소혜왕후(昭惠王后 덕종(德宗)의 왕비)가 되고, 또 하나는 계양군 증(桂陽君璔 세종의 아들)의 부인이었다. 또 사위 둘이 모두 대군(大君)인 사람이 있으니,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의 사위가 월산대군 정(月山大君婷 덕종의 아들)과 제안대군 현(齊安大君琄 예종의 아들)이었다.

외손 일곱이 왕자(王子)였다. 홍일동(洪逸童)의 딸이 성종의 숙의(淑儀)였는데, 완원군 수(完原君燧)ㆍ봉안군 봉(鳳安君 㦀)ㆍ견성군 돈(甄城君惇)ㆍ익양군 회(益陽君懷)ㆍ경명군 침(景明君忱)ㆍ운천군 연(雲川君 )ㆍ양원군희(楊原君憘)를 낳았다. 또, 김원(金元)의 딸이 세종의 신빈(愼嬪)이었는데, 계양군 증(桂陽君璔)ㆍ의창군 공(義昌君玒)ㆍ밀성군 침(密城君琛)ㆍ익현군 관(翼峴君璭)ㆍ영해군 당(寧海君瑭)ㆍ담양군 거(潭陽君 璖)를 낳았으니 이는 여섯 왕자이다.

형제가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태조조(太祖朝)에 경신궁주(慶愼宮主)의 부마(駙馬)는 상당위(上黨尉) 이애(李薆)였는데, 아우 청평위(淸平尉) 백강(伯剛)은 태종의 정순옹주(貞順翁主) 부마였고, 예종조에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부마는 풍천위(豐川尉) 임광재(任光載)인데, 아우 풍원위(豐原尉) 숭재(崇載)는 성종의 휘숙옹주(徽淑翁主) 부마였으며, 태종조에 숙녕공주(淑寧公主)의 부마는 파성위(坡城尉) 윤우(尹愚)였는데 종제 파평위(坡平尉) 윤엄(尹嚴)은 숙경옹주(淑慶翁主) 부마였고, 성종조에 경순옹주(慶順翁主)의 부마는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인데 종제 의천위(宜川尉) 섭원(燮元)은 휘정옹주(徽貞翁主) 부마였으며, 선조조에 정선옹주(貞善翁主)의 부마는 동□위(東□尉《선원보》에는 길성위(吉城尉)로 되어 있다) 권대임(權大任)인데 재종제 동창위(東昌尉) 대항(大恒)은 정화옹주(貞和翁主) 부마였다.
또, 조부와 손자가 공주에게 장가든 사람이 있으니, 세종조에 정현옹주(貞顯翁主)의 부마는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인데 손자 영평위(鈴平尉) 섭(燮)이 성종의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였고, 성종조에 혜숙옹주(惠淑翁主)의 부마는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인데, 그의 손자 영천위(靈川尉) 의(檥)는 중종의 경현공주(敬顯公主) 부마였다. 또, 삼촌과 조카가 공주에게 장가든 사람이 있으니, 정종조에 덕천군주(德川郡主)의 부마는 부사(府使) 변상복(邊尙服)인데 조카 유천위(柔川尉) 효순(孝順)이 태종의 소선옹주(昭善翁主) 부마였다.

3대가 장원으로 급제한 것은, 김천령(金千齡)ㆍ김만균(金萬鈞)ㆍ김경원(金慶元)이고, 형제가 장원한 것은, 유자한(柳自漢)ㆍ유자빈(柳自濱), 민정중(閔鼎重)ㆍ민시중(閔蓍重), 유명천(柳命天)ㆍ유명현(柳命賢), 오원(吳瑗)ㆍ오찬(吳瓚)이다.

6형제가 등과(登科)했다. 원해굉(元海宏)의 아들 식(植)은 인조(仁祖) 임오년에 등과하고, 집(楫)은 인조 을유년에 등과하고, 적(樀)은 효종 갑오년에 등과하고, 격(格)은 효종 신묘년에 등과하고, 절(梲)은 현종 정유년에 등과하고, 철(㯙)은 현종 계묘년에 등과했다.

선산(善山)의 명현(名賢)들. 선산에서는 고려 때부터 명현이 배출되었으니, 김주(金澍)ㆍ길재(吉再)ㆍ김숙자(金淑滋)ㆍ김종직(金宗直)ㆍ이맹전(李孟專)ㆍ하위지(河緯地)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이다.

명현(名賢)이 같은 시기에 장원했다. 퇴계(退溪 이황의 호)와 남명(南冥 조식의 호)이 다같이 경상도에 살면서 같은 시기에 모두 좌도(左道) 또는 우도(右道)의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각각 장원하였으니 훌륭한 일이다. 두 선생이 같은 시대에 출생하여 같은 도에 살면서도 평생에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퇴계가 돌아갔을 적에 남명의 비애가 심했으리라.

지존(至尊)이 교외(郊外)에까지 가서 도원수(都元帥)를 전송했다. 우리 국조(國朝)에서는 도원수를 어유소(魚有沼)ㆍ윤필상(尹弼商)으로부터 임진(壬辰) 이후의 몇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도 단(壇)을 설치하고 추곡(推轂)하는 예를 차린 적이 없었다. 인조가 즉위하던 해 4월에 도원수 장만(張晩)을 서쪽 교외에서 친히 전송했는데, 상이 융의(戎衣 군복) 차림에 동궁(彤弓)과 적시(赤矢)를 갖추고, 말을 타고 나와 진(陣)에 이르자, 도원수가 장수와 사졸들을 거느리고 동개[櫜鞬 활집과 화살통]를 갖추고서 길 한편에서 맞이했으며, 상이 악전(幄殿 천막으로 만든 임시 궁전)에 나아가자 대사마(大司馬 병조 판서)가 군령(軍令)을 발하여 도원수를 불러들여 군중(軍中)의 예로써 만나보았고, 예가 끝나자 자리로 나아가 군악(軍樂)을 차리고 예선(禮饍 예식이 끝난 뒤의 음식)을 올렸는데, 상이 찼던 칼을 풀어 주었으니, 수백년 이래 없던 일이다.

남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가 짝이 되어 활쏘기를 했다. 세조(世祖) 신사년(1461)에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성직(宗成職)이 평무속(平茂續)을 보내 비밀히 변방 국경의 경계에 관한 보고를 하므로, 상이 아름답게 여겨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벼슬을 제수했다. 하루는 후원(後苑)에서 관사(觀射)를 하는데, 무속이 야인(野人 여진족) 낭장가로(浪將家老)와 짝이 되어 무예(武藝)를 겨루므로 상이 삼군도진무 예조 판서(三軍都鎭撫禮曹判書) 홍윤성(洪允成)에게 이르기를,
"네가 춘관(春官 예조)의 장관이고 또한 병무(兵務)를 맡아보아 변방 국경의 일을 모두 주관하는데, 지금 남북이 한집안이 되어 모두들 성의를 바침은 진실로 오직 경 등이 요리하는 방책 때문이다."
하였고, 그 뒤에 무속이 직접 판서의 사제(私第)로 가서 뵙고 몸소 노예(奴隷)의 예절을 차리려 하매, 상이 특별히 편의하게 서로 접하도록 윤허하였다.

양생가(養生家)들이 자시(子時)가 된 다음에는 옷을 걸치고 동쪽 혹은 남쪽으로 향하고 앉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36번을 고치(叩齒)하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숨을 정지하며 마음속으로 오장을 내려다보며, 폐(肺)는 희고 간장(肝臟)은 푸르고 비장(脾臟)은 누르고 심장은 붉고, 신장(腎臟)은 검어지도록 생각한 다음, 마음이 광명하고 통철(洞徹)해져 하단전(下丹田 배꼽과 불두덩 사이)으로 몰리기를 생각한다.
불가(佛家)에는 백골관(白骨觀)이란 것이 있는데, 처음부터 자기의 형체가 한 점의 정기(精氣)에 따라 시작되어 점차로 포태(胞胎) 속에서 자라나고 출생하여 어릴 적엔 젖을 먹고 장성하여 튼튼해지며 노쇠하면 병으로 죽게 되어, 시체가 퉁퉁 붓거나 뻣뻣하게 말랐다가 오래 지나면 백골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미 백골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언제나 백골처럼 여기는 것이니, 이래서 이탈(離脫)을 싫어하면서도 연연한 생각을 둘 염려가 없게 되는 것이다.
대범 양생가와 불가가 하는 짓을 우리 유가(儒家)의 함양(涵養)하고 성찰(省察)하는 공부에 비교 해보면 모두 망령된 생각이다. 그러나 또한, 일종의 부황하고 경망한 무리가 한가하게 살고 홀로 있으면서도 뭇 욕망이 얽히고 설켜 한정이 없는 것보다는 십배나 나으니, 대저 양생가나 불가의 공부는 독실한 것이 사랑스럽다.

문장(文章)은 형용을 잘한 것이 좋은 것이다. 두보(杜甫)는,
거위 새끼 술빛처럼 누렇도다/鵝兒黃似酒
하였고,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는,
술은 천연한 사람 얼굴처럼 희도다/酒如人面天然白
하였으며, 조맹견(趙孟堅)의 매보(梅譜) 시에는,
매끈한 수염 일곱에 꽃받침 셋/踢鬚正七萼則三
점안은 초목(椒目) 가지는 서미 같도다/點眼名椒梢鼠尾
하였고, 부굉(傅宏 송대 사람 자는 자익(自翼))의《해보(蟹譜)》에는,
"게의 눈은 매, 발은 조개치레[鱟], 뇌는 큰 새우[䖱]는 매미 같고, 딱지는 주먹 쥔 것과 비슷하며, 쏘는 발은 집게와 비슷하다."
하였으며, 유익기(兪益期)는,
"빈랑(檳榔)나무가 큰 것은 세 아름이나 되고, 높은 것은 아홉 길이나 되는데, 잎사귀가 나무 끝에 모여 있고 잎사귀 밑에 꽃받침이 달렸으며, 꽃은 꽃받침 속에서 피고 열매는 꽃받침 밖에서 맺는데, 이삭은 기장 이삭처럼 빠지고 열매는 도토리 열매처럼 붙는다. 나무 껍질은 오동나무 같으면서도 두껍고 마디는 대나무 같으면서도 빽빽하며, 속은 비었지만 겉은 강강하고, 굽은 것은 무지개 뒤집어 놓은 것 같으나 곧은 것은 밧줄 같으며, 그 숲 속을 지나보면 헌칠한 맛이 나고 그 그늘에 앉았으면 소조(蕭條)한 느낌이 돈다."
하였고, 이치(李廌)의《화품(畵品)》에는,
"용 두 마리가 산 밑에서 나와, 한 마리가 굼틀굼틀 머리를 쳐들고 구름 속으로 올라가자, 물이 구름 기운을 따라 올라가 위에 펼쳤다가 비가 되어 용의 발톱과 갈기 속에서 쏟아지매, 고기와 새우가 딸려갔다가 더러 반공중(半空中)에서 떨어졌고, 용 하나는 아직도 꼬리가 굴 앞에 있으며 큰 바위에 걸터앉아, 머리를 들고 구름 속을 바라보며 함께 가려고 하여 성낸 발톱이 성성이[猩猩] 같으매, 푸른나무들이 모두 쓸리고 파도가 진탕 쳤다."
하였으며, 《다경(茶經)》에는
"어목(魚目 고기 눈알처럼 되는 물거품)이 물 구멍에서 솟아나 구슬을 꿴 것처럼 되듯하는 것으로써, 물 끓이는 온도를 맞춘다."
하였으니, 이런 것들은 미루어 문장이 잘 형용된 것인지를 볼 수 있다.

어떤 일이 다행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는 법이니, 이광(李廣)과 옹치(雍齒)가 봉작[封侯]되고 봉작되지 않은 것만이 아닌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아들 다섯이 모두 돼지 같고 개 같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고, 두보(杜甫)의 종 단(段)과 한유(韓愈)의 종 성(星)이, 만일 부귀하기만 했지 무식한 사람의 종이 되었더라면 어느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장수로서 절의(節義)에 죽은 사람이 자고 이래로 몇 사람일지 알 수 없는데, 지금 중국 사람들이 집집마다 관운장(關雲長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關羽))의 신을 받들되, 조각한 초상ㆍ그린 초상ㆍ지어부은 초상ㆍ수놓은 초상ㆍ찰흙으로 만든 초상 등을 모시어 불교(佛敎)와 동등하게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사당을 세웠으니, 어찌 다행한 중에도 특별한 것이 아니겠는가.
증선지(曾先之)의《십구사략(十九史略)》이 중국에서는 천히 여겨 거의 없어지고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와 소아(小兒)들이 먼저 배우는 글이 되었다. 가장 포복 절도(抱腹絶倒)할 한 가지 일은 왜국(倭國)의 관백(關白)에게 대대로 대사마 대장군 박륙후(大司馬大將軍博陸侯)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대개 한 선제(漢宣帝) 때에 곽광(霍光)이 머리를 조아리며 정권을 반환하였으나 상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매 모든 일을 모두 먼저 광에게 관백(關白)한 다음 상주한 데에서 취한 것으로서 임금의 뜻에 관백이 발호(跋扈)하여 왕을 폐립(廢立)하는 일이 있을까 싶으므로 이를 빌어 이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광에게 다행한 일이겠는가. 불행한 일이겠는가. 어찌하여 겸해서 곽(霍) 자를 가져다가 성(姓)을 만들지 않았는지. 그렇게 하였다면, 더욱 다행한 일이겠는가, 더욱 불행한 일이겠는가.

무릇 물이나 곡기(穀氣)의 맛이 위에 들어가면 진액이 각각 제 길로 가게 되어, 신맛은 먼저 간으로 들어가고 쓴맛은 먼저 심장으로 들어가고 단맛은 먼저 비장(脾臟)으로 들어가고 매운맛은 먼저 폐로 들어가고 짠맛은 먼저 신장(腎臟)으로 들어가는 법이다. 내가 일찍이 매운 것을 다 먹기도 전에 눈물이 나고 신 것을 먹다가 침을 흘렸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간은 목(木)에 속한 것이어서, 신맛이 돌아 목기(木氣)가 왕성해지면 토(土)인 비장(脾臟)이 움직이며 염천(廉泉)이 열려 침이 솟아나게 되고, 폐(肺)는 금(金)에 속한 것이어서, 매운맛이 돌아 금기(金氣)가 왕성해지면 목(木)인 간장이 움직이며 액도(液道)가 열려 눈물이 흐르게 되는 것임을 알았다. 또한 비록 신 것을 먹지 않았어도 혹시 신 것을 보거나 신 것을 말하거나 신 것을 생각하면, 침이 금방 질질 나옴은 어째서인지 알 수 없다.

옛사람이 '애호하더라도 그의 악한 점을 알고, 미워하더라도 그의 착한 점을 알아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천하에 공정한 마음이 광대하고도 곡진한 말이요, 또, '악한 점은 덮어두고 착한 점은 드러낸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남에 대하여 처신해가는 것을 말한 것으로서 별로 곡진함이 없는 것이요, 또 '착한 일을 보면 내가 한 것같이 여기고 악한 일을 보면 나의 병폐같이 여긴다.'하였는데, 이는 두 가지를 분별한 것으로서 측은한 진심이기는 하나 조금 모가 드러나는 말이다.
이 두어 가지에 있어서 일찍이 명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또한 스스로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여 내 몸에 도움이 되도록 주력하다가, 주자(朱子)가 '착한 점은 키워 주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준다.'고 한 말을 보게 되어서는 자연히 나도 모르게 되풀이하여 그 지극히 충후(忠厚) 정대함에 감탄하였다.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함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을 한 번 보게 되면서는 자연히 협소하게 되어버리고 더욱 의리가 무궁함을 깨달았었다.
다만 '애호하면서도 악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착한 점을 알기'와 '착한 점은 키워 주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주기'는 공부가 순실(純實)해진 다음에야 할 수 있는 일이나 '내가 한 것같이 여기고, 나의 병폐처럼 여기기'는 힘만 더 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고, '악한 점은 덮어두고 착한 점은 드러내기'와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하기'는 비록 중등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의 할 수 있는 것이니, 이 두어 가지 말들은 대개 어렵고 쉬움과 정미(精微)하고 거친 구별이 있는 것이다.
또 일종의 치밀하면서도 자세히 그 실정을 따져보면 어그러짐을 엄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장자(莊子)가 '착한 일을 하여 명예를 가까이하지 말고, 악한 짓을 하여 형벌을 가까이하지 말라.' 하였는데, 만일 이 말과 같이 한다면 소소한 악은 가려서 하지 않는 것이 없이 하고 큰 선은 버리고서 감히 하지 아니하여, 중간에서 비위 맞추며 아첨하는 정상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니, 이는 중등 선비도 부끄럽게 여기고 하지 않을 일이다. 장자휴(莊子休)가 어찌 호걸과 거인(巨人)이 아니겠는가마는 어찌하여 말이 미미한 사람과 흡사한가. 몸을 보전(保全)하고 피해를 멀리하려는 학문의 유행하는 폐단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단(異端)인 것이다.
한 소열(漢昭烈 유비(劉備)를 말한다)은 경력이 전투에 벗어나지 않아 궁시(弓矢)와 군마(軍馬) 속에서 늙은 일개 무인(武人)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악이 적은 것이라 하여 하지도 말고, 선이 적은 것이라 하여 하지 않지도 말라.' 하였었다. 이 말은 분명하고 정대하여 장자도 능히 하지 못한 말이니, 그가 젊었을 때 노식(盧植)을 스승으로 섬기며 조금 유자(儒者)들의 학술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단과 우리 도(道)의 구별이 어디서나 나타나게 됨이 이러한 것이다.

김진광 계승(金眞狂啓升)은 필법(筆法)이 특이하고 뛰어났으며 사람됨이 활달하였는데, 그의 도서(圖書)와 인장(印章)에 '신라 헌강왕 제3자파팔대 평장지손(新羅憲康王第三子派八代平章之孫)'이라고 새겼었다. 용문산(龍文山) 완희재(玩羲齋) 주인 김계승(金啓升)의 '군일(君日)'이란 명칭은 곧 '진광(眞狂)'이라고 자호한 73세 늙은이의 자(字)이다.
약관(弱冠)에 옥책 서사(玉冊書寫)로 뽑혀 들어갔었고, 17세에는 또한 도성의 문액(門額)을 쓰도록 차정(差定)되었었으나 마침내 참예하지 못했었고, 무진년(영조 24, 1748)에 통신사(通信使)가 일본(日本)에 갈 때 별서사(別書寫)로 따라갔다가, 일본 정전(正殿)의 전액(殿額)을 썼었는데, 일본 산동 거사(山東居士)는 평하기를,
"그의 글씨만 보고 그의 얼굴은 보지 못하니 되겠는가. 우군(右軍 왕희지를 말함)이 쓴 것인지 진광이 쓴 것인지, 몸은 비록 다르지만 솜씨는 동일하도다. 특이하여 그 귀중함을 말하기 어렵도다."
하였고, 화화부인(□□腐人) 임본유(林本裕)는 평하기를,
"중국의 필법(筆法) 정맥(正脈)이 원상(元常)에게서 시작되어 옹기춘(雍紀春)에게서 그치고, 다시 계승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보건대 김(金)ㆍ이(李) 두 사람의 필법이 해동(海東)에서 났으니, 해동의 산천(山川)이 과연 어떻게 되어 인재를 출생시켰는지 알 수 없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필법을 현재 천하에서 제일가는 필법이라 할 수 있다.

연산(連山)의 사인(士人) 강씨(姜氏)가 아들은 없고 딸 둘만 두어 장녀는 5세 차녀는 2세였는데, 자모(慈母)가 돌아가게 되자, 장녀가 그 여동생을 업어주며 길렀었다. 을유년(乙酉年)에 장녀는 이미 12세이고 차녀는 7세였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이웃 마을로 놀러가고 그의 집에 불이 나게 되었다. 두 딸이 불이 미치지 않을 곳에 자리를 깔고, 먼저 사당으로 들어가 4대의 신주(神主)를 안아다 차례로 자리 위에 안치하고, 또 들어가 장녀는 어머니의 신주를 안고, 부위(祔位)되어 있는 신주 한 자리는 차녀가 안고 장차 나오려는데 불이 이미 급하게 사당을 둘러싸므로, 두 딸이 각기 손으로 굳게 신주를 안고 엎드려 죽었었다.
사람들이 불을 끄고 찾아보니 살갗은 타서 문드러졌지만, 신주는 완전하여 조금도 연기에 그슬리지 않았고, 죽으면서도 오히려 굳게 안고 있었으므로, 고을 안 많은 선비들이 정문(旌門)하기를 주청하자, 상이 윤허(允許)하되, 정문을 '순효 이녀 강씨지문(殉孝二女姜氏之門)'이라고 하도록 했었으니, 대개 그 가풍(家風)이 예절을 준수하므로 두 딸들이 아름다운 교훈을 익히 들었던 것이라고 했었다.
병술 1월에 쓴다.

광주(光州)의 촌부(村婦)가 아들 둘을 두어, 하나는 일곱 살, 하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모두 군적(軍籍)에 편입되어 있으므로 이장[里正]이 군포(軍布)를 징수하러 오갔었다. 촌부가 밤이 새도록 물레로 무명실을 뽑는데 두 아이가 모두 잠들자, 촌부가 자애로운 마음이 일어 손으로 두 아이의 음경(陰莖)을 만지며 혼자서 스스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이 있어 사내 자식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고 실을 뽑는 것이다."
했었는데, 두 아이가 거짓 잠든 체하여 몰래 듣고 있다가, 이튿날 함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서로 대하여 울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음경을 지녔기 때문에 어머니가 근심하고 수고하시니, 어찌 이를 없애어 우리 어머니의 근심을 풀어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칼을 가져다가, 형은 아우의 음경을 베고 아우는 형의 음경을 베어 묻어버리고서, 솜으로 상처를 쌌었는데, 피가 바지에 흐르므로 어머니가 놀라며 묻자, 아이들이 그 까닭을 말하니, 어머니가 붙들고 통곡하기를,
"너희들이 음경 지닌 것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이 사내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어여삐 여겨 농담한 것이었다."
하였었다. 원[太守]이 이 말을 듣고 그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는데, 5~6년 전에 우리 외가 친척 박여수(朴汝秀)씨가 나를 위해 말해 주었다.
병술 1월에 쓴다.

내가《잡기(雜記)》속에서 발견한 두 효자는 모두 구걸하는 아이였는데, 이제 합쳐서 쓰노라니, 감동되는 마음이 있다. 또 왕연(王延)과 강혁(江革)의 효도를 생각할 때면 눈에서 일찍이 눈물이 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문(吳門 중국 소주(蘇州)의 통칭)에 사는 귀인(貴人)이 달밤에 다리 위를 지나다가 그 아래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내려가 보니 구걸하는 아이였는데, 한 노파[老嫗]를 흙덩이 위에 앉히고 구걸하여 얻은 술을 질병[缶]에 담아 꿇어앉아서 올리며 노래를 불러 권하므로, 귀인이 의아스러워 힐문하자, 구걸하는 아이가 놀라다 웃으며 말하기를 '저는 간구한 사람이기에 이렇게라도 해서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므로, 귀인이 한참 동안 감탄하다가 돌아와 다음날 서로 전해가며 말을 하여 기이함을 칭찬했었고, 그 뒤 때때로 들여다보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린 일이 거개 이와 같은 것임을 보고는 이로부터 모든 귀인들이 잔치할 적마다 곧장 여분의 접시를 차려놓으며, 물으면, 구걸하는 효자 아이를 주려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었다.
장주(長洲)의 상성(相城)에 구걸하는 아이 하나가 있어, 성은 심(沈)가고 장년(壯年)이 되었는데 매양 심은군(沈隱君)이 살고 있는 맹주(孟洲)에 와서 구걸하기를 청하되, 무릇 얻은 것을 거의 먹지 않고 대롱과 광주리 속에 나누어 담았었다. 은군이 처음에는 여겨보지 않다가 오래 지나서 물어본즉 '늙은 어머니에게 드리려는 것이다.'고 하였다. 은군이 그제야 비로소 이상하게 여겨 가만히 사람을 시켜 그의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했었다. 구걸하는 아이가 한 군데의 언덕 곁으로 가더니 땅에 앉아서, 소쿠리 안의 음식을 내어 정리하여 받쳐들고 뱃머리로 갔다. 배가 비록 협착하나 매우 정결했고 노파가 그 안에 앉아 있었다. 구걸하는 아이가 배로 올라가 어머니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술을 따라 꿇어앉아서 올리되, 어머니가 술잔 들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 춤을 추며 산노래[山歌]를 부르다 우스갯소리를 하다 하여 어머니를 즐겁게 하니, 어머니가 마음에 자못 안락하게 여겼다. 반드시 어머니 먹을 것이 다 되어가면 다시 달리 얻어 보고, 만일 얻은 것이 없으면 자신이 굶었으면 굶었지 종시 먼저 먹지 않았으며, 무릇 여러 해를 날마다 이렇게 하다가 어머니가 죽자, 구걸하는 아이가 그제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은근히 감탄하여 또한 때때로 조금씩 돌보아 주었다.

굴원(屈原)의 회사(懷沙)는 너무 지나친 충성이고, 오릉(於陵)의 토아(吐鵝)는 너무 지나친 염결(廉潔)이니, 무릇 선행(善行)이면서도 너무 지나친 데 빠지는 일은, 보통 사람일지라도 감히 한두 가지도 하지 않는 것이고, 성인들 역시 극진한 선행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직불의(直不疑)가 금(金)을 사서 그 사람에게 변상했었는데 다행히도 그 뒤에 죄인이 잡히어 무고(誣告)한 것이 밝혀졌으니, 만일 죄인이 잡히지 않았다면 끝까지 태연하게 도둑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을 것인가. 그 사람의 금은 오히려 작은 일이니, 혹시 종묘[太廟] 제기를 도둑질했다고 무고하더라도 또한 변명하지 않고 달게 죄를 받을 것인지.
누사덕(婁師德)은 얼굴에 침을 뱉자 마르기만 기다리며, 침 뱉은 사람이 지극히 더럽게 여기는데도, 개돼지처럼 보기만 했었다. 나에게 과오나 악한 일이 없었다면 씻어버리고 깊이 성내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니, 만일 그가 더욱 무시하여 칼로써 찌르더라도 역시 피를 씻어버리지 않고 스스로 평소처럼 해야 할 것인지. 비록 그러하나 사덕의 말은 경박하여 성급한 사람과 사납고 고약한 사람의 경계가 될 수 있다.
양(梁) 나라 유응지(劉凝之)는 어떤 사람이 신고 있는 자기의 신을 제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자 즉시 주었었는데, 그 사람이 뒷날 잃었던 신을 찾게 되어 돌려보냈으나 다시 가지려 하지 않았다. 대범 주어버렸음은 남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돌려주는데도 받지 않았음은 무슨 의의 있는 일이겠는가. 집요한 짓이 아니라면 억지로 꾸미는 일이다.
금(金) 나라 왕거비(王去非)는, 북쪽 이웃에서 초상이 나 동쪽으로 나가기를 꺼려하고 있는데, 서북쪽은 모두 인가들이고 남쪽은 자기의 집이므로 거비가 잠실(蠶室)을 헐고 남쪽으로 나가도록 했었으니, 이도 역시 중(中)에 맞는 일이 아니다. 이웃 마을에 수화(水火)와 도적이나 병환 등의 급박한 일이 생겨 오직 내가 어찌한 다음에야 살게 될 수 있다면, 잠실뿐만이 아니라 비록 잠실보다 더한 것이라 하더라도 나의 힘이 닿는 데까지 해야 하겠지만, 이는 하나의 기휘(忌諱)에 구애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 정당한 이치가 아닌 것이니, 비록 책망하여 바로잡아 주더라도 될 일인데, 어찌하여 도리어 그의 뜻을 이루게 하겠는가.
명 나라 양저(楊翥)는, 이웃에 사는 불량한 자가 업신여겼지만 공(公)이 개의하지 않았고, 심지어 노새 울음이 그의 어린 아들을 놀라게 할까 염려하여 팔아버리매 그 불량한 자가 감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노새가 무심코 우는 것이 이웃집 어린 아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혹시 집에서 키우는 사나운 개가 사람을 만나자 그만 물었다면 팔아버릴 뿐만이 아니라, 죽여버리더라도 되겠지만, 노새는 비록 울게 되더라도 꼭 그럴 것이 없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의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가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을 시켜 《강목(綱目)》의 책 제목을 쓰는데, 종이 약간의 먹을 것을 들고 공의 자리에 다가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므로, 문강공이 공에게 말하기를,
"술을 가져오는 모양입니다."
하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아직 그대로 있거라."
하자, 종이 다시 다가서서 있다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어찌 이리 더디십니까?"
하매, 공이 웃으면서,
"가져 오너라."
하였고, 이미 가져 오자, 어린아이 여럿이 모두 남루한 옷에 맨발로 들어와 공의 수염을 잡았다 공의 옷을 밟다 하다가, 먹을 것을 모조리 집어가버렸고, 또한 공을 두들기기도 하니, 공이,
"아프다. 아프다."
하였는데, 모두 노비(奴婢)들의 아이였다. 이는 공의 천성이 너그럽고 후중하여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나, 빈주(賓主) 사이의 예절과 상하 사이의 기율에 있어서는 되지 않을 일이 아니겠는가.
대제학(大提學) 윤회(尹淮)가 젊었을 적에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어가자 숙박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뜰 아래 앉았는데, 주인 아이가 큰 진주(眞珠)를 가지고 있다가 마당에 떨어뜨리매 흰 거위가 삼켜버렸다. 주인이 찾다가 찾지 못하자 드디어 공에게 의심을 두어 장차 관에 고발하려 하였으나, 공이 변명하지 않고 다만,
"저 거위도 잡아매라."
했었는데, 이튿날 진주가 거위의 똥에 나오게 되자, 주인이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
"어제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공의 말이,
"말을 하면 반드시 해부(解剖)하여 찾아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모욕을 참으며 짐짓 기다린 것이다."
하였다. 공이 이미 '저 거위도 잡아매라.' 했는데도, 주인이 어찌하여 헤아려보지 않았다가 이제야 부끄럽게 여겼는지 알 수 없고, 공도 역시 어찌하여 분명하게, 내가 저 거위가 삼키는 것을 보았으니, 나와 함께 거위가 똥을 싸기를 기다리자고 말하지 않았는지. 그렇게 하였다면, 주인이 거위가 아까워 마땅히 조금 거위가 똥 싸기를 기다리게 되지 어찌 해부하게 되겠는가. 만일 주인이 포악하여 해부하게 되더라도, 이미 '저 거위도 또한 잡아매라.'는 말을 따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전기(傳記)의 말이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옛사람들이 백이(白夷)ㆍ숙제(叔齊)의 사당에다 쓰기를,
초목도 오히려 주 나라 우로에 자란 것이니/草木猶沾周雨露
그대가 수양산 고사리 먹은 것이 부끄럽도다/愧君猶食首陽薇
하였고, 또, 세이도(洗耳圖)에다 쓴 시에,
물 중에 깨끗한 물 있다면/水中若有水
그 물이 이 물을 씻으리/水亦洗其水
하였는데, 이는 남 책망을 여지없이 한 것으로서, 충후(忠厚)한 마음을 손상함이 또한 너무 지나치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비록 좋게 여기면서도 또한 섭섭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는 모두 현명한 사람들의 탁월한 대문인데도 오히려 뒷사람들의 논평을 받고 있으니, 더구나 중등 이하의 사람이겠는가. 더욱 처신하기 어려움을 깨닫게 된다.

옛 세상에는 5가지 큰 낙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더러 범연히 여기고, 오직 공명(功名)이 혁혁한 것만 낙으로 여겼다. 내가 표시하여 내겠는데, 첫째는 노래자(老萊子)가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 웃는 짓을 하여 두 어버이를 즐겁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는 당ㆍ우(唐虞) 시절의 군신(君臣)들이 도유우불(都兪吁咈)하면서 태평한 세상을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는 문왕(文王)과 태사(太姒)가 금슬(琴瑟)과 종고(鐘鼓)를 가지고 애정과 단락(團樂)을 노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넷째는 부자(夫子 공자를 말한다)의 행단(杏壇)에서 3천 제자들이 읍양승강(揖讓升降)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섯째는 장공예(張公藝)가 9대를 한집에 함께 살며 변함 없이 화목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몇 가지 일이 요는 인륜(人倫)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으니, 비로소 인륜을 완비한 사람에게 지극한 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인은 인륜의 극치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낙을 가리는 속에 성인이 세 가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정대(鼎大)에게 훈계하기를,
"네가 지금 나이 이미 10세가 되었으니, 마땅히 쉴 사이 없이 부지런하게 노둔(魯鈍)한 점을 씻어내며 극력 어른들의 훈계를 준수해야 하고, 한갓 뛰어다니며 놀기만 하여서는 안 된다. 잠깐 사이 15세가 되고 또 깜짝할 사이 20~30세가 되어 마침내 무식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누가 너와 이야기하려 하겠느냐. 옛사람이 짧은 시간 아끼기를 금덩이 아끼듯 하여 장성하여서도 문견 없는 것을 평생의 큰 근심으로 여겨, 일찍 터전을 마련했었다. 지금 너는 부질없이 놀기에 빠져 짧은 시간 아끼지 않기를 비 끝에 먼지 버리듯 하고 헛되이 하루 보내기를 떡 하나 먹어버리듯이 하니, 내가 매우 근심스럽다."
하고, 학동(學童)인 구씨(具氏)의 아들 궁기(宮其)에게 훈계하기를,
"네가 지금 나이 이미 15세이다. 대범 아들된 사람이 15~16세 무렵에는 어른이 될 바탕이 이미 7~8할은 틀이 잡히는 법인데, 지금 너는 걸음걸이가 차분하지 못하고 앉으면 몸을 흔들어대며, 말과 웃음이 철없고 글읽기를 매우 거칠게 하며 또한 싫증을 낸다. 대범 총기[聰明]란 지극히 정영(精英)한 것이니, 가령 총기에 신(神)이 있어, 네가 부지런히 노력하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면, 너의 그런 뜻을 사랑스럽게 여겨 너의 가슴속에 와서 있겠지만, 네가 만일 경박하고 태만하여 술 취한 사람 같기도 하고 미친 사람 같기도 하다면, 비록 잠시 네 가슴속에 있다가도 너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시급히 날아가 버리게 될 것이다.
네가 두 볼이 풍만하고 눈이 우묵하며 눈썹 사이가 널찍하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느냐마는, 사람들이 더러 네 얼굴을 기이하게 여겨 칭찬하기를 '사람됨이 저만하니 종시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한다고, 네가 그런 말에 자부심을 가져, 글읽기를 제2의 일로 삼아서 되겠느냐. 비록 네가 도주(陶朱)와 석숭(石崇)처럼 되어 황금(黃金)을 울타리 사이에 버려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아는 글자 하나도 없어, 사람들이 너를 대할 적에 반드시 비루하게 여기는 마음을 더하게 된다면, 네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도주와 석숭이 어찌 일찍이 글을 읽지 않았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를 훈계하는 것이니 너는 힘써야 한다."
하였다.

한(漢) 나라 주아부(周亞夫)종리(從理)가 입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굶어죽었다고 하나,《남사(南史 남조(南朝) 시대의 사서(史書)》에 수군도독(水軍都督) 저나(褚蘿)는 얼굴이 매우 뾰족하고 종리가 입으로 들어갔다고 했으나, 마침내 의식(衣食)을 보장하다 마쳤고,《사기(史記)》에 순(舜)은 중동(重瞳 겹으로 된 눈동자)이었고, 항우(項羽)도 중동이었다고 하였으나, 스스로 자결하여 죽었으며, 수(隋) 나라 어구라(魚俱羅) 역시 중동이었지만 양제(煬帝)에게 꺼림을 받아 베임 당하였고, 우리나라 남곤(南袞) 역시 중동이고, 우리 일가[族人]에도 옛적에 중동인 사람이 있었지만, 남보다 나은 일은 없이 다만 밥을 잘 먹지 못하므로 아침저녁으로 떡을 씹어 요기할 뿐이었다. 종리가 입으로 들어간 것은 동일하지만, 혹자는 굶어죽었고 혹자는 의식이 넉넉했으며, 중동은 동일하지만, 하나는 어진 제왕(帝王)이었고 둘은 모두 좋게 죽지 못하였으며, 하나는 충신과 선량을 모해(謀害)하여 만고에 간사한 사람이 되었고, 하나는 단지 용렬한 보통 사람이었으니, 관상(觀相)하는 법을 과연 믿어야 하겠는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예도(禮圖 예서(禮書)에 수록된 도본)에는 대여(大轝 국가에서 쓰는 큰 상여)에 복토(伏兎)가 있고, 의경(醫經 의서)에는 신가(腎街)를 복토라고 했다. 대범 토끼는 숨느라 엎드리기를 잘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형상을 취하여 이름한 것인데, 모든 기구에 이러한 것이 많이 있다. 선구(船具)에 묘(猫)라는 것이 있는데 곧 닻[碇]으로서, 대개 고양이가 예리한 발톱으로 무슨 물건을 끌어다가 굳게 고정시켜 놓기 잘하는 형상을 취한 것이고, 또 치(鴟)라는 것이 있는데, 솔개의 꼬리가 바람을 따라 돌기 잘하는 형상을 취한 것이다.

심계자(心溪子)가 여름철에 청풍(淸風) 시내의 쭈글쭈글 주름이 잡힌 바위 위에 오래 누웠다가 갑자기 눈을 똑바로 뜨며,
"내 몸이 절반은 돌이 되었겠다."
하고, 이어 한탄하기를,
"죽어서 이 산 귀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마음먹기에는 한가한 틈에 온갖 화초의 성질과 생태(生態)를 듣고 보아《화동호(花董狐 화사(花史)란 뜻》를 편집하고, 또한 고금의 고사(高士)들을 모아 논평을 붙여, 이름을《고사본초(高士本草)》라 하고 싶다.

심현재(沈玄齋 현재는 심사정의 호)가 수묵(水墨)으로 그린 용(龍)은, 턱[頦頷]이 비스듬히 모가 나고 앉은 길이가 한 길이나 되는 듯하여, 마치 다가와서 부딪힐 듯하고 수염 끝이 윤기가 나 물방울이 떨어지려 하는 것 같다.

방 안에다, 금분[泥金]으로 궁실(宮室)과 인물을 그린 왜연갑(倭硯匣)을 늘어놓고, 한석봉(韓石峯)의 액자(額字) 체첩(體帖)을 목각(木刻)하여 청색으로 장정을 하고, 필통(筆筒)을 마디 있는 대나무로 만들어 회회청(回回靑 도자기의 청색 도료)으로 '수ㆍ부ㆍ귀(壽富貴)' 석 자를 써서 굽고, 화분에는 금봉화(金鳳花)ㆍ계관화(鷄冠花) 따위를 난잡하게 심어놓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아사(雅士)라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속물[俗輩]이라 할 것이다.

황금(黃金)으로 왕마힐(王摩詰)을 지어 부어놓고 채색실로 미원장(米元章)을 수놓아 늘어놓고서, 좋은 철의 아름다운 경치 때 고상한 벗과 명사[名㳘]들을 맞이하여 시축(詩軸)과 화첩(畫帖)을 펴놓되, 반드시 먼저 향기로운 꽃을 꺾어다가 조촐한 개울에 띄우고 제를 지낸다면, 이날은 시정(詩情)과 화의(畫意)를 조장하게 될 것이니, 장사하러 오는 손들을 금하여 문 앞에 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한탄하기를,
"밭 1백 묘(畝), 책 1만 권, 화초 수백 그루, 법첩[法書]과 명화(名畫) 5~6백 폭, 징심당지(澄心堂紙) 10만 장, 반곡(潘谷) 이정규(李廷珪 남당(南唐) 제2의 묵공(墨工)의 먹 각각 1천 자루씩, 중산(中山)의 상호필(霜豪筆 질이 좋은 붓) 5~6독[瓮], 단계연(端溪硯) 수십 면(面)과 유명한 차ㆍ특이한 향(香)을 마음대로 명사 10여 인과 천호후(千戶侯)들에게 공급해 준다 하더라도 오히려 용탑(葺闒 쓸모가 없는 것)하여 고사(高士)가 되지 못할 것인데, 어찌 의관(衣冠)을 찢고서 버려진 백성이 되지 않으랴."
했다.

뜻에 맞는 일이 오래도록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오색 구름을 한없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유리(琉璃)를 쳐도 부서지지 않게 하고, 양주학(楊州鶴)도 타고 다닐 수 있게 해야 될 것이다.

심계자(心溪子)가 말하기를,
"날카로운 두 눈동자로 가을 물에 환히 비치는 허공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하늘과 심령(心靈)이 만나게 될 적에는 한가운데의 싸여 있는 허공이 광대하게 보이니, 그때의 맛이란 아득하고도 그윽하여 표현할 수도 없고 또 한말로 들려줄 수도 없다."
하자, 형암(炯菴)이 성을 내 흘겨보며,
"나의 두 귀가 영롱하게 뚫려 있는데, 유독 네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겠는가."
하였다.

최상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리고 최하등 사람은 가난을 은휘하다 가난을 호소하다 가난에 짓눌리다 가난에 사역되고, 또 그보다도 최하등의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 죽어간다.

입술과 혀에서 나와 낭랑(琅琅)하고 발랄한 것은 형태가 없는 글인 것이고, 종이에 먹으로 표시되어 정연하다 들쭉날쭉하다 한 것은 형태가 있는 말인 것이다. 수염ㆍ눈썹ㆍ치아(齒牙)ㆍ두 볼을 흔연(欣然)스럽게 접할 수 있어 간담[肝肺]이 서로 통해지기는 글이 말만 못하고, 정신과 사고[意想]를 은연(隱然)한 속에서 찾을 수 있어 기맥(氣脈)이 완곡(婉曲)하게 통해지기는 말이 글만 못한 법이니, 말은 해도 문채가 없어 한 번 입에서 나와버리면 이미 흔적이 없게 되기 때문에 글로 쓴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글을 지을 적에는 따로 마고(麻姑)와 같은 손톱을 가지고 통쾌하게 조화(造化)의 굴 속에 있는 것을 긁어내야 신묘한 빛이 종이의 먹 위에서 서너 길씩 뛰놀게 되는 법이다.

옛사람의 것을 답습(踏襲)한 글을 '인면창(人面瘡)'이라 하는 법이니 무엇을 패모(貝母 인명창을 치료하는 한약 재료) 대신 사용하여 시급히 그런 사람의 입을 막아버리게 될 것인지 모르겠다.

매화가 있는 감실(龕室)에 유자(柚子)를 놓아둠은 곧 매화를 모욕하는 짓이다. 전부터 매화는 맑은 덕과 조촐한 지조가 있다는 것인데, 어찌 차마 다른 것의 향기를 빌어다가 그를 돕게 하겠는가.

재주 있는 사람의 뱃속에는 한 줄기의 봄 생수처럼 솟아나는 것이 있어, 맑게 흐르는 소리를 내며 고운 물결이 일게 되고, 멈추어 쌓여 있지 못하는 법이니, 시험삼아 오른팔로 내보낸다면, 졸졸 흘러서 붓대에까지 미치어 붓끝에서 동그랗게 방울방울 떨어지되, 똑똑 하여 홍주(汞珠 수은 방울) 같기도 하고 앵무 사리(鸚鵡舍利 공작석(孔雀石)을 말한다) 같기도 하고 교인(鮫人)의 눈물 같기도 한 것이다.

좌중(座中)에 옛 그림이나 기이한 책을 펴놓자, 소리 높여 웃어대어 거품이 날리게 하고, 때묻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문지르다 긁다 하는 사람은, 결코 그림이나 글을 알아보는 사람도 아니고 단아한 선비도 아니고 학식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옛사람들의 만사[輓詩]나 애사(哀辭)를 모아 차례차례 대어보면, 갑(甲)이 죽으매 을(乙)이 조위하고 을이 또 어느새 죽으매 병(丙)이 조위한 것으로서 끝이 없게 된다. 옛사람들의 의논도 모아서 차례차례 대어보면, 갑의 말을 을이 반드시 비난한 것이어서, 을이 일단 갑을 비난한 것에 있어서는 딴 의논이 없을 듯한데도 병이 또한 비난하여 역시 끝이 없게 된다. 온 세상이 다만 이 두 가지 일이 어떠어떠하다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이 아닌지.

지인(至人 덕이 높은 사람)은 훼방이나 칭찬에 처했을 때, 사실이 있는 것이나 터무니없는 것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배부를 것도 없고 목마를 것도 없고 가려울 것도 없고 아플 것도 없는 법인데, 보통 사람들은 사실이 있는 칭찬이나 사실이 있는 훼방에 있어서도 잘 대처하지 못하니, 더구나 사실이 없는 칭찬과 잘못이 없는 훼방이 있어서이겠는가. 사실이 없는 칭찬이란, 어찌 꿈속에 밥 더 주고 그림자를 긁어 주는 것과 다르고, 잘못이 없는 훼방이란, 어찌 꿈속에 마실 물이 떨어지고 그림자를 때려 주는 것과 다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오직 꿈에라도 밥 더 주기를 바라고, 괴팍한 성미의 사람은 그림자 때려 주기를 오히려 한하는 법이다.

말 속에 숨은 칼날이 있음은 곧 물여우가 사람의 그림자를 쏘는 짓이니, 서로 대면하여 통쾌하게 꾸짖어버린 다음에 조용해져 뒷공론이 없는 것만 못한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이나 시 짓는 인사(人士)는, 좋은 계절의 아름다운 경치 때엔 시흥(詩興)으로 어깨가 산처럼 솟아오르고 눈에는 물결이 일게 되며, 두 볼에서는 향기가 생기고 입에서는 꽃이 피게 되는 법이지만, 조금이라도 노리는 짓을 한다면 곧 큰 결점이 되는 것이다.

시냇물이 맑고 돌이 시원스러운 데에서 낙엽을 주워다가 황량(黃粱 메조)으로 밥을 짓노라면, 구수한 향기가 진동한다.

청고(淸高)한 이웃, 기청(奇淸)한 아우, 괴기(怪奇)한 종[僕], 괴벽(怪僻)한 자손, 이 괴벽한 것 다음부터는 나는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구가(九歌)와 구장(九章)은 부러워하기만 짝없이 한 것으로서, 필연(筆硯)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적이 한 달에 거의 4~5차례나 있었다.

시(詩)가 귀신을 울리게 되고 글씨가 조화(造化)를 탈취하게 되고 그림이 영묘(靈妙)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 사람들은, 으레 청빈(淸貧)이 뒤따르니 빈궁한 귀신이 따라다니고, 태반이 세상일을 알지 못하니 바보 귀신이 끼었나 보다.

혀를 차며 한탄하는 세 가지 괴이한 일. 요(堯) 임금 때에 어찌하여 9년
홍수가 내리고, 구경(九經)이 어찌하여 진(秦) 나라의 화로(火爐)로 들어가고,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어찌하여 일찍 죽어 한(漢) 나라 왕실(王室)을 복구하지 못했는지.

세상에 세 가지 통쾌한 일이 있으니, 《강목(綱目)》에 '소열황제 장무 원년(昭烈皇帝章武元年)'이라 대서특필한 것,단 태위(段太尉)가 홀(笏)을 빼앗아 주자(朱泚)를 친 것,종동(終童)이 긴 바람을 타고 큰 파도가 이는 만리길을 돌파한 일이다.

조아(曹娥)의 비문(碑文)은 섬세하고 수려한 부인이 긍지(矜持)를 지키며 때로는 애교 있는 말을 하는 것 같고, 저수량(褚遂良)의《난정첩(蘭亭帖)》은 시와 술에 빠진 재사(才士)가 한 번 단아한 선비를 보게 되자 자기 스스로 조금씩 단속해가는 것 같고, 미 원장(米元章)의《아집도서(雅集圖序)》는 두 잠 지난 봄누에가 모두 활발하게 움직이려 하는 것 같다.

손님이 말하기를,
"뱃속이 포만할 적엔 글읽기가 좋지 않아 누어서 잘 생각만 하다가, 뱃속에 조금씩 시장기가 있어야 글읽기가 그제는 맛이 나게 되며, 글읽는 소리가 어느새 공중에 뜨게 되니, 부귀도 좋은 일이고 글 읽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하기에, 그제야 비로소 두 가지 좋은 일을 겸하여 누리는 사람은 천하에 유복한 사람임을 알았다.

아무도 없이 조용하다 하여 말을 실수하지 말 것이, 담에도 귀가 있어 듣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운 것이요, 아무도 없이 깜깜하다 하여 방심하지 말 것이, 방을 들여다보는 눈이 있을까 두려운 것이다. 극도로 조심하면 모든 장벽(墻壁)의 구멍이 환히 뚫려 귀나 눈처럼 여겨져서, 나귀의 귀가 쫑긋해지고 소의 눈이 날카로워져 응시(凝視)하거나 고요히 듣기를 무슨 뜻이 있어 하는 듯하니, 모두 삼가고 두려워서이다.

황봉(黃蜂 참벌)의 등에 까맣게 '무공(巫工)' 두 글자가 씌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오이밭을 호미질하다가, 마루에 올라가 붓을 잡으면, 팔이 몹시 떨려 마치 바람 속에 배가 까불리듯 한다. 혹자가, 기이한 것을 좋아하므로 짐짓 전필(顫筆 떨린 글씨)을 쓰는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병을 참으로 짐짓 생기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병이 아니기 때문에 떨리는 정신을 반드시 꾸짖어버리는 것이다.
6월 아침에 형암(炯菴)은 원각탑(圓覺塔) 동쪽에서 쓴다.

어린아이들이 모발 구멍과 뼈마디는 모두 어른들만 못하지만, 유독 눈동자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니, 이들의 눈동자가 큰 것을 보면 곧 기특한 조짐이다.

뿔이 달린 것에게는 윗 니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림 속에 용(龍)을 보면 삐쭉삐쭉한 이가 입에 그득하여 도시 이와 입이 합쳐졌으니, 이래서 용을 그리기 어려운 것이다.

납 탄환이 갑옷은 꿰뚫어도 회(灰)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대완구[大碗砲]가 열 길 성을 부수지만 포장(布帳)으로 막아낸다. 강강(剛强)한 적이 왔을 때 유화(柔和)로써 제어한다면, 다시 무슨 수고로운 것이 있으랴.

하늘이 낸 만물은 형체가 둥근 것이 많으니, 사람과 금수(禽獸)가 지닌 구멍이나 사지의 마디와 초목의 가지와 등걸꽃과 열매 및 구름ㆍ우뢰ㆍ비ㆍ이슬이 그것이다. 달은 해가 둥근 것을 표준하고 해는 하늘이 둥근 것을 표준하며, 물은 이 세 가지를 표준하여 만물을 생장시키고 만물은 이 네 가지 둥근 것을 표준하여, 둥근 것이 대부분이다. 물이 어찌 둥근 것이냐고 하겠지만, 수은이나 물방울이 모두 둥글어, 돌을 물에 던지면 파도가 호랑이 눈알처럼 굽이치게 된다. 사람과 금수의 눈동자도 수화(水華)를 응결(凝結)하여 해와 달을 표준하였기 때문에 가장 둥근 것이다.

상점(商店) 머슴이,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싼 변이 모두 산 생선으로 변했으니, 이는 중들의 뱃속에 생선이 든 것이다."
하자, 말 모는 사람이,
"부처가 만일 사람들에게 생선을 먹지 말도록 하였다면, 어찌하여 불상(佛像)에다 도금(鍍金)할 적에 부레풀을 사용하겠는가."
했는데, 부처가 사람들에게 비늘 달린 생선ㆍ깃 달린 날짐승ㆍ털 달린 짐승ㆍ껍질 달린 것들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금법을 마련하여 중생(衆生)들이 크게 학살하는 짓을 경계한 것이다.

말의 입술은 누에 입술과 비슷하고, 호도(胡桃)씨는 곧 부화할 벌이나 나비의 새끼 같으며, 쥐의 꼬리는 뱀과 비슷하고, 이는 비파(琵琶)와 같다. 서캐는 맥황(麥黃)과 같고, 푸른 줄무늬 오이 껍데기는 황록(黃綠) 줄무늬 개구리의 등과 같으며, 야명(夜明 박쥐)의 날개는 소의 볼과 같다. 노루 꼬리의 꼭지는 매행(梅杏)의 수염 같다. 귀뚜라미 소리는 대나무 대롱에다 팥을 담아 흔드는 것 같고, 등불[燈穗]은 파리의 눈과 같으며, 겨울 소의 넙적다리는 솔방울과 같고, 거미의 배는 사람의 엄지손가락과 같고, 가죽나무 잎사귀의 꼭지는 말의 발굽과 비슷하며, 꽁보리밥은 개파리 떼와 비슷하다.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자)가 양 소윤(楊少尹 이름은 거원(巨源) 소윤은 벼슬 이름)을 전송 한 서(序)에,
"또한 승상에게 고하고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亦白丞相去歸其鄕]"
하고, 또,
"그 도의 소윤을 삼았다.[以爲其都小尹]"
하였는데, '그의 고향'이니 '그의 도'니가 과연 어느 고향 어느 도인지. 퇴지의 붓 내려가는 길이 혼미해졌던 것이다.

갑(甲)이 말하기를,
"인간의 좋은 일들이 하나의 '먹을 식(食)' 자에 구애되어 그 길이 막히게 되고 만다."
하고, 을(乙)이 말하기를,
"코 밑에 있는 목구멍이 곧 잘못하여 빠지는 곳이다."
하자, 병(丙)이 말하기를,
"매미는 코 밑에 구멍이 없고, 맑은 바람이 시원한 높은 나무에 들러붙어 온종일 마음대로 울어대기를 조금도 그치거나 위축되는 짓이 없이 하여 통쾌하다."
하기에, 형형자(炯炯子 저자 자신을 말한다)가 듣고서 상쾌하여, 서쪽 처마 밑에서 적어둔다.

개가 사람을 물었을 적에 지렁이 똥을 상처에 발라 두면 개털이 그 속에 서리게 되니, 이는 곧 독이 모여 있기 때문이고, 상처가 이미 완쾌되었는데도 개털이 그 위에서 나게 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죽고 만다.

청한(淸寒)이,
"동이 이동 동이이 이동 동이 이동동(同異異同同異異異同同異異同同)"
하자, 혹자가 대구(對句) 짓기를 청하기에 형암(炯菴 저자)이 붓을 날려 '한 일[一 앞 구와 대구가 동일하다는 뜻] 자'를 그리고, 공계(□溪)가,
"삼사 사삼 삼사사 사삼 삼사 사삼삼(三四四三三四四四三三四四三三)"
하자, 또 대구 짓기를 청하기에 또한 '한 일 자'를 그리고 깔깔 웃으며 말하기를,
"청한과 공계는 잘도 지껄인다."
했다.

부레풀[魚膠]과 밤버섯[栗茸]은 모두 밤이면 빛이 나고, 썩은 버드나무도 밤이면 인화(燐火)와 같으며, 오원(烏圓 고양이의 이칭)의 등을 캄캄한 밤에 스치면 불빛이 번쩍번쩍한다. 이 네 가지 것들은 음(陰)의 종류이지만, 지극한 음의 것은 통명(通明)한 법이다.

무심코 하는 말을 유심히 듣는다면 세밀한 데 치우쳐 옹졸한 사람을 면하지 못하게 되고, 유심히 하는 말을 무심히 듣는다면 소루한 데 빠지기는 하지만 호인(好人)이 되기에는 방해롭지 않은 것이다. 무심코 하는 말을 유심히 들으면, 비록 앙화는 닥치지 않더라도 귀신이 반드시 모해하게 되고, 유심히 하는 말을 무심히 들으면 혹시 재앙은 닥치게 되더라도 하늘이 반드시 가엾게 여기는 것이다. 무심코 하는 말을 무심히 듣되 점화(點化)를 잘 해나가면 유심히 들은 것처럼 되고, 유심히 하는 말을 유심히 듣되 응접(應接)을 잘 해나가면 무심히 들은 것처럼 되는 것이다.

요란한 사람은 곧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인데, 일을 만듦이 극에 차면 우환이 닥치는 법이고, 고적한 사람은 곧 일을 덜어버리기 잘하는 사람인데, 일 줄이기를 오래하면 기쁜 낙이 긴 법이다.

약초밭 난간의 금봉화(金鳳花)가 이 새벽비에 붉은 기가 가셔버리게 되자, 어린 계집종이 꽃을 거머잡고 훌쩍거리매, 한 달관(達觀)한 사부(士夫)가 보고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하기를,
"항 패왕(項霸王)이 우 미인(虞美人)과 울며 이별할 적에 정말 저러했을 것이다."
했었다.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 말아야 하니, 거리낌없이 너그럽고 순탄 정직한 마음 갖기를 좋은 말을 타고 조금도 딴 마음 없이 큰길을 달리듯 해야 한다.

벌레나 새 등속의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들이 극도로 빠르게 날 적에는 털ㆍ깃ㆍ눈ㆍ부리가 온통 한빛이 되어 세밀히 분별할 수가 없는데, 예나 지금이나 화가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그릴 적에 섬세한 데도 빼놓ী 않고 온 몸을 모두 구상(具象), 쪼아 먹고 둥지에서 자는 것들과 다름이 없이 하니 이는 비록 명가(名家)라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점이다.

장무선(張茂先)이 말하기를,
"허리가 큰 것은 수컷이 없으니 거북이와 자라 따위이고, 허리가 가는 것은 암컷이 없으니 벌 따위이다."
하자, 내가,
"개구리는 허리가 커도 교접(交接)하고, 잠자리는 허리가 가늘어도 교미(交尾)한다."
했다.

호(號)가 '신재(矧齋)'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가난하여 활과 화살을 직업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해 한숨짓거나 분개함은 쓸데없는 수고이다. 이름난 화공(畫工)이 사람의 얼굴을 반쪽만 그려놓는다고 하자. 밥 짓는 종이나 장사하러 다니는 지아비가 가리키며 비웃기를,
"애꾸눈 하나만 가지고 보면, 집 모서리와 계단 구석이 뚝 끊어져 비스듬히 보일 것인데, 필경에는 틀림없이 한탄하는 소리가 '좋은 큰 집이 장차 쓰러지겠다.'고 할 것이다."
하리라. 천하의 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인데 무슨 한탄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욕심이 없어야 욕되는 일이 없는 법이다.

남의 것을 박탈하여 자신만 살찌게 하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견디겠는가. 필경에는 남들에게 박탈당하게 되는 법이다.

옛날 한 감여가(堪輿家 묘자리를 잡는 풍수)가 어떤 우매한 자제를 유인하여, 어느 등성이를 가리키며,
"여기가 돼지 주둥이 형국(形局)이다."
하고, 앞에 있는 조그만 바위를 가리키며,
"이것은 돼지 똥이 쌓인 형국이니, 돼지 주둥이에다 장사지내면 말할 수 없는 부자가 될 것이다."
하자, 우매한 자제가 과연 그의 부모를 장사지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오직 부자가 되기만 바라고 또한 풍수들에게 현혹되어, 조상을 욕되게 하는 부끄러운 일인 것을 돌보지 않는다.

고양이와 개는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가 고양이를 만나 무턱대고 쫓으면, 고양이가 응당 재빠르게 집 모서리로 올라가 개를 내려다보고 앉는데, 개가 머리를 흔들며 서로 바라볼 만한데도 맥없이 물러가 버린다. 고양이가 그러지 않아서 개가 한 번 차고 물러선다면, 고양이가 반드시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볼을 비비다가 발톱을 펴 개의 코를 후비게 되니, 개가 비로소 정작 성을 낸다면 고양이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갑(甲)은 소를 타고 을(乙)은 말을 타고 가다 여관에서 자고, 새벽에 떠나게 되어 갑이 말을 타고 을이 소를 타고 가되, 침침하여 갑은 소를 타고 을은 말을 탔으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가 날이 훤해진 뒤에 모색(毛色)이 다르자, 갑은 말을 탔고 을은 소를 탔었다.

아침 안개는 진사(辰砂)처럼 붉고, 저녁 안개는 석류꽃처럼 붉다.

남에게 돈이나 재물을 희사하면서 눈썹 사이에 억지로 하는 기색을 띠면 크게 음덕(陰德)을 덜게 된다.

장초보(張肖父)의 이우린(李于鱗)의 문집 서(序)에,
"고악부(古樂府) 중의 오언선(五言選)은 백두(白頭)맥상(陌桑)ㆍ조매(曹枚)를 우맹(優孟)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나는 말한다.
"대범 이처럼 우린의 글이 손숙오(孫叔敖)를 모방하듯이 한 것이라면, 후세에 선비들이 우린의 글을 배우는 것은 곧 우맹을 모방하는 일인데 모방하는 우맹과 진짜 손숙오는 상거가 멀지 않겠는가."

구각(口角 입 아귀)이 완전한 사람이 없는데, 그런 사람은 곧 완전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호색(好色)하는 사람은 골수가 마르고 살이 빠지다가 죽게 되는 날 저녁에는 정욕이 상승되는 것인데도 마침내 뉘우치는 마음이 없어, 단지 하나의 호색 속에서 주려 죽는 귀신이 되는 법이다. 내가 일찍이 비웃고 가엾게 여기고 두려워하다 경계하다 하면서도 나 자신이 불행히도 가까이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니,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이 너무도 호색하는 것과 비슷하다. 요사이 유행하는 풍열(風熱) 때문에 오른쪽 눈이 또한 가렵고 아프므로 사람들이 자못 책병[書祟]이라고 놀리게 되는데, 내가 다소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책은 차마 하루도 떠날 수가 없어, 매양 눈을 한 오라기 가량이라도 뜰 적마다 모여 있는 글자와 먹 속의 정수[精華]를 힘주어 식선자법(食仙字法)처럼 바라보게 되니, 색에 빠지는 그네들이 응당 나를 야유할 것이다.
9월 그믐날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는 실없이 쓴다.

나의 시문(詩文)은 2할은 달고 3할은 신 산과일[山果]와 같고, 나의 위인은 3할은 길들고, 7할은 선 야마(野馬)와 같다. 절반쯤 설고 절반쯤 익었으며 절반쯤 달고 절반쯤 시어, 세월이 아직도 까마득한데, 어찌하면 단사(丹砂)의 불처럼 농익은 과일이나 벽옥(碧玉)으로 다듬은 말발굽과 같게 될 것인지.
안목이 있어 논평을 잘하는 사람이 시(詩)나 문(文)을 읽어줄 적에는 큰글[章]과 거대한 편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흠있는 시구 틀린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만 값어치가 오르게 되니, 가만히 작자의 눈치를 살펴보면, 펄떡펄떡 하여 좋아하는 기색이 넘친다. 안목이 없어 논평을 잘 못하는 사람이 시나 문을 읽어줄 적에는 흠있는 시구 틀린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큰 글 거대한 편이라 하더라도 값이 떨어지게 되니, 가만히 작자의 눈치를 살펴보면, 위축되어 근심하는 기색이 감도는데, 값이 올라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고, 값이 떨어져도 근심하는 기색 없는 사람이 곧 기예(技藝)와 명성에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알아보는 사람과 더불어 논하게 된다면 내가 또한 안석에 기대고서 웃겠노라.

전동간(錢東澗)은 일평생이 절반은 한족(漢族)이고 절반은 호족(胡族)이며, 학문은 한때는 불교를 배우다 한때는 유학(儒學)을 배우다 하였고, 문장은 해학(諧謔)도 아니고 미어(謎語)도 아니었으니, 결국 '낭(狼)'이 뒷다리를 잃고 '패(狽)'가 앞다리를 잃은 격이다.
제(齊) 나라에는 무염현(無鹽縣)이 있고 초(楚) 나라에는 불갱현(不羹縣)이 있었다. 왜가리[鵙]는 백조(伯趙 때까치)이고 개는 계촉(季蜀)이다. 한(漢) 나라 적에 두시(杜詩)가 있었고 명(明) 나라 때에 한문(韓文)이 있었다. 양사오(楊仕伍)와 이팔백(李八百)은 신선이었다. 백기(白起)와 황헐(黃歇), 이이(李耳)와 율복(栗腹)), 손권(孫權)과 예형(禰衡)은 성명이 묘하게 짝이 된다. 지폐(地肺)와 천목(天目)은 산이고, 불류(不留 왕불류행(王不留行)의 준말)와 당귀(當歸)는 약이다.

공중에 서는 빗발은 거머잡고 볼 수가 없는데, 가령 볼 수 있다면, 원형으로 되었는지 육각으로 되었는지.

북두성의 윤곽이 네모난 것은 땅을 형상한 것이고, 북두성의 자루가 세번 꺾임은 하늘을 형상한 것인데, 네모가 난 것은 방(方)이고 세 번 꺾임은 원(圓)이다. 북두성은 생명을 맡아[司命] 원기(元氣)를 요량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형상한 것이다.

코에서 토해낸 회충(蛔虫)으로 자기(瓷器)의 깨진 틈을 붙일 수 있으니, 차진 기를 취하고 더러움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널리 알면서도 저술을 하지 못함은 열매가 맺지 않는 꽃과 같은 일이니, 어느새 떨어져버리지 않겠는가. 저술은 하면서도 널리 알지 못함은 근원이 없는 물과 같은 일이니, 어느새 말라버리지 않겠는가.

한(漢) 나라 문장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은 용납했고, 송(宋) 나라 문장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했고, 명(明) 나라 문장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또한 꾸짖거나 원수처럼 여긴 사람도 있었으니, 원미(元美)의 무리는 업신여긴 사람들이고 중랑(中郞 원굉도(袁宏道))의 무리는 꾸짖은 사람들이며 수지(受之 전겸익(錢謙益))의 무리는 원수처럼 여긴 사람들로서, 세도(世道)의 고저를 볼 수 있다.

양두사(兩頭蛇)와 구미호(九尾狐)는 천하에 지극히 악한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피 할 수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은 잡아죽일 수 있다. 오직 몸에는 의관을 꾸미고 입으로는 글과 역사를 곧잘 말하는 참부(讒夫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해치는 사람)에 있어서는, 현명한 사람도 피하지 못함은 그 참부의 유언비어 때문이니, 유언비어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용기있는 사람도 잡아죽일수 없음은 포(葡)가 여럿이기 때문이니, 인류(人類)를 어떻게 하나하나 함부로 죽일 수 있겠는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는 집에서 생장하여 사방에 사우(師友) 하나 없었는데도 능히 묘하게 문장(文章)을 깨달아 시원스럽게 세속의 때를 벗는 수가 있으니, 이는 성불(成佛)할 수 있는 자품이다. 자기 처지가 문헌(文獻)이 많이 있고 사우가 또한 많은데도, 글[書籍]이 종년[終年]토록 무디고 거칠기만 한 사람은 장차 어찌할 것이지. 아아, 슬픈 일이다.

깊이 알지도 못하고서 어찌 억지로 말할 수 있으랴.

생명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섭생(攝生 양생)이고, 복약(服藥)과 도인(導引)은 어디까지나 외물(外物 없어도 되는 것)인 것이다.
문장(文章)을 규인(閨人 안방의 여인)과 비유하는 법인데, 종백경(鍾伯敬)은 숙녀이고, 원중랑(袁中郞)은 재녀(才女)이다.
두렵고 두렵기는 조금 재주가 있으면서 기운을 부리는 것이고, 민망하고 민망한 것은 전연 알맹이가 없으면서 말을 재잘거리는 것이다. 하늘이 고원(高遠)한 것이 아니지만 만물이 모두 하늘에 덮여 노니는 것은 하늘이 공허하기 때문이니, 마치 고기가 물에 덮여 노니는 것과 같다.

일 없는 낮에는 흰 하늘을 보고 일 없는 밤에는 눈을 감는다. 흰 하늘을 볼때는 마음이 평탄해지고 눈을 감을 때는 마음이 평온해진다.

높은 지조는 서리[霜]처럼 늠름하고, 우아한 도량은 봄처럼 온화한 것이다.

고매한 사람이 속인(俗人)을 대하면 졸음이 오고 속인이 고매한 사람을 대해도 졸음이 오는 것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인데, 속인이 조는 것은 비루하여 말할 것이 없거니와 고매한 사람이 조는 것은 어찌 그리 마음이 협소한지. 만일 참으로 고매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졸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능히 남을 용납하기 때문이다.

문장(文章)은 하나의 기예(技藝)인데, 오히려 아담한 것과 속된 것, 진짜와 모방한 것의 구별을 혼동하고 있으니, 어떻게 산수(山水)를 품제(品題)하고 어떻게 인물(人物)을 감식(鑑識)하겠는가. 공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문장을 알아보는 법이고, 편견을 가진 사람과는 구설로 다툴 수 없는 것이다.

모방한 문장은 오히려 말할 수 있어도 가장한 도학(道學)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태평한 세상에는 보검(寶劍)이 쓸데없는 것이지만, 때로는 열주(熱酒 독한 술)로 신에게 제사한다. 왼쪽으로 갈기다 흘겨보며,
"난신(亂臣)과 역적들이 어디로 도망갈쏘냐?"
하고, 오른쪽으로 갈기다 흘겨보며,
"참부(譖夫)와 임인(壬人 간사한 사람)들이 어디로 도망갈쏘냐?"
하다가, 등잔불에 가까이 대고 보면, 시퍼런 서슬이 그만 가을 물과 같게 보인다.

백향산(白香山)의 하주부(荷珠賦)에,
"기운 곳에는 처하지 않고, 항상 반듯한 곳에 의지하며, 그칠 곳에 그치되 반드시 연잎 복판에 위치하고, 둥글 대로 둥글지만 물의 본성을 잃지 않는다."
하였으니, 군자가 몸 지키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최응(崔膺)의 금경부(金鏡賦)에는
"옥갑(玉匣 거울집을 말한다)을 막 열면 서늘한 빛을 내쏜다. 위로 맑은 하늘을 비추면 천지가 환히 통하고, 삼라만상이 그 속에 들어 텅 비고 깊기가 한이 없도다. 맑아서 시원한 못과 같고 흔들면 번쩍이는 번개 같도다. 공변될 뿐 마음 없어, 곱거나 추한 그대로 나타난다."
하였으니, 군자가 마음 밝힘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1]육률(六律) : 여섯 가지 음률(音律). 음률은 본래 음률(陰律)이 6, 양률(陽律)이 6으로 12율인데, 이 중의 양률에 해당하는 황종(黃鐘)·고선(姑洗)·대주(大簇)·유빈(蕤賓)·이칙(夷則)·무역(無射)을 말한다.
[주D-002]팔음(八音) : 여덟 가지 악기. 곧 금(金: 종(鐘))·석(石 : 경(磬))·사(絲 : 현(絃))·죽(竹 : 관(管))·포(匏 : 생(笙))·토(土 : 훈(壎))·혁(革 : 고(鼓))·목(木 : 지어(枳敔))을 말한다.
[주D-003]생황(笙簧) : 아악(雅樂)에 쓰는 관악기의 하나. 곧 큰 대[竹]로 판 통모양의 대마디 위에 길고 짧은 17개의 죽관(竹管)을 원형으로 세운 것. 그 끝에 소리를 내는 혀를 막아 불거나 들이마시면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주D-004]당우(唐虞) : 중국 고대의 나라 도당(陶唐)과 유우(有虞). 도당은 요(堯), 유우는 순(舜)을 말한 것으로서, 요순 시절을 의미한다.
[주D-005]손빈(孫臏)……방법 : 쓸데없는 일을 수고롭게 한다는 말. 손빈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장수로 위(魏) 나라 방연(龐涓)의 군사와 싸울 적에 위 나라에 들어가는 군사들로 하여금 부엌을 처음에는 10만을 만들었다가 다음날은 5만, 그 다음날은 3만으로 줄이게 하여, 군세가 약화된 것처럼 기만하여 승전했었다. 우허(虞詡)는 후한 시대 사람으로 자를 승경(升卿)이라 하는데, 오랑캐가 침입하였을 때 방어하러 나가, 사졸들로 하여금 각기 부엌 둘씩을 만들되 날마다 배로 증가하도록 하자 '손빈은 부엌을 줄이게 했는데 더 만들도록 함은 무슨 뜻이냐?'고 하니, '손빈은 약하게 보여야 하였지만 지금 우리는 강성하게 보여야 하여, 사세가 같지 않다.'고 했었다.《史記 卷六十五》 《後漢書 卷五十八》
[주D-006]복랍(伏臘) : 복은 한여름의 삼복(三伏), 납은 한겨울의 납일(臘日)로 세시 복랍(歲時伏臘)의 약어. 전(轉)하여 사철을 뜻한다.
[주D-007]십삼경(十三經) : 중국 고대 성현들이 저작한 열세 가지의 경서. 곧《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효경(孝經)》·《논어(論語)》·《이아(爾雅)》·《맹자(孟子)》.
[주D-008]이십이대 역사 : 청(凊) 나라 건륭(乾隆) 무렵에 선정한 역대의 정사(正史). 곧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晉書)》·《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양서(梁書)》·《진서(陳書)》·《후위서(後魏書)》·《북제서(北齊書)》·《주서(周書)》·《수서(隋書)》·《남사(南史)》·《북사(北史)》·《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신오대사(新五代史)》·《송사(宋史)》·《요사(遼史)》·《금사(金史)》·《원사(元史)》.
[주D-009]원석공(袁石公) : 중국 명대(明代) 사람. 이름은 굉도(宏道), 자는 중랑(中郞), 석공은 호. 형 종도(宗道)·아우 중도(中道)와 함께 재명(才名)이 있어 삼원(三袁)이라 불리며 시문(詩文)이 절묘했다. 저서에 《상정(觴政)》·《원중랑집(袁中郞集)》·《병화재잡록(甁花齋雜錄)》등이 있다.《明史 卷二百八十八》 《明詩綜 卷五十七》
[주D-010]칠정(七情) :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 곧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 또는 희·노·애·구(懼)·애·오·욕.
[주D-011]풍시가(馮時可) : 중국 명대 사람. 자는 민경(敏卿), 호는 여천(與川). 호광포정사 참정(湖廣布政使參政)을 지내며 치적(治績)이 있었고, 저서(著書)가 해내(海內)에서 중시되었다. 저서로는 《좌씨석(左氏釋)》·《상지잡기(上池雜記)》·《초연루집(超然樓集)》 등이 있다.《明史 卷三百八十八》 《明詩綜 卷五十一, 明詩紀事》
[주D-012]심전기(沈佺期) : 중국 당대 사람으로 자는 운경(雲卿)이고 벼슬은 태자소첨사(太子少詹事)에 이르렀다. 당시(唐詩)의 명가로서 송지문(宋之問)과 병치된다.《唐詩 卷二百二》 《舊唐書 卷一百九十》
[주D-013]진백사(陳白沙) : 명대의 학자로 이름은 공보(公甫)이고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백사는 호이며 산 맹자(孟子)란 칭이 있었다. 서화(書畫)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백사집(白沙集)》·《백사시교(白沙詩敎)》가 있다.《明史 卷二百八十三, 明名臣言行錄 卷三十九, 明儒學案卷五, 盛明百家詩 卷一》
[주D-014]여건(呂虔)의 일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자는 자각(子恪), 벼슬은 서주 자사(徐州刺史)에 이르렀다. 당초에 여건이 차는 패도(佩刀)를 도공(刀工)이 감정하고서, 이 칼을 차고 있으면 반드시 삼공(三公)이 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 뒤에 여건이 왕상(王祥)에게 주면서 '만일 적격자가 아니게 되면 반드시 해를 보게 되는 법인데, 당신은 삼공의 역량이 있으므로 주는 것이오.' 했었는데, 과연 왕상이 삼공이 되었다는 고사.《三國志 卷十八》 《蒙求 卷下》
[주D-015]왕통(王通) : 수대(隋代)의 학자로 자는 중엄(仲淹)이다. 문중자는 시호이다. 당(唐) 나라의 명신 방현령(方玄齡)·위징(魏徵) 등에게 왕좌(王佐)의 도리를 가르쳐 주었다. 저서로는 《문중자(文仲子)》 10권이 있다.《唐書 卷一百六十四, 舊唐書 卷一百九十》
[주D-016]진역(陳櫟) : 원대(元代) 사람으로 자는 수옹(壽翁)이고 호는 동부노인(東阜老人)이다. 송(宋) 나라가 멸망한 뒤 은거(隱居)하면서 주자(朱子)를 종주(宗主)로 삼고 저술에 전념했다. 저서는 《상서집전찬소(尙書集傳纂疏)》·《역조통략(歷朝通略)》·《근유당수록(勤有堂隨錄)》이 있다.《元史 卷一百八十九》 《宋元學案 卷七十》
[주D-017]수련(修鍊) : 몸을 건전하게 단련하여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게 하는 방법.
[주D-018]금단(金丹) : 선인(仙人)·도사(道士)가 조제한다는 불로 장수(不老長壽)의 묘약.
[주D-019]용두회(龍頭會) : 문과(文科)에 장원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잔치. 새로 장원한 사람이 여러 선배를 초청하여 베푼다.
[주D-020]등준시(登俊試) :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에게 특별히 보이던 과거.
[주D-021]책문(策問) : 문과 시험 과목의 한가지. 곧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 답하게 하는 것.
[주D-022]유가(遊街)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광대를 데리고 풍악을 잡히면서 거리를 돌며 시관과 선배·친척들을 찾아보는 것. 사흘 동안 행하는 것이 상례이다.
[주D-023]책훈(策勳) : 공로가 있는 사람의 이름을 공신록(功臣錄)에 기록하는 것.
[주D-024]식년(式年) : 정기적으로 과거 보이는 해. 곧 태세(太歲)에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드는 해.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온다.
[주D-025]생원시(生員試)……전시(殿試) : 모두 과거의 한 가지. 생원시는 주로 유생(儒生)들에게 경서(經書)를 시험 보이는 것. 회시(會試)는 문무과의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 다시 보는 시험. 전시는 문무과의 회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궐내(闕內)에 모여 왕의 친림(親臨)하에 서열을 매기는 시험.
[주D-026]삼종(三從) : 친정 아버지·남편·아들을 뜻하는 것이다. 옛날의 여성에게는 친정에서는 아버지를 좇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좇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좇는 삼종의 도가 있는 데서 생긴 말이다.
[주D-027]금성 읍류(金城泣柳) : 진(晉) 나라 시대의 환온(桓溫:자는 원자〈元子〉)이 강릉(江陵)에서 북벌(北伐)하러 나갈 적에 금성을 지나가다가, 젊어서 낭야(瑯琊) 지방관으로 있을 때 심어 놓았던 버드나무들이 모두 이미 열 뼘이나 된 것을 보고, 감개하여 '나무가 오히려 저렇게 컸는데, 사람이 어떻게 늙지 않고 배기겠는가.' 하며, 가지들을 거머잡고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이다.《淵鑑類函 楊柳》
[주D-028]사화(史禍) :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柳子光)의 무고(誣告)로 사초(史草)에 삽입되어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문제가 되어 사림(士林)들이 화를 입은 사건.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 등은 죽거나 귀양갔다.
[주D-029]명부(命婦) : 문무관(文武官)의 아내로서 남편의 직에 따라 봉작(封爵) 받은 여자의 통칭.
[주D-030]3만 6천 갑자(甲子) : 1백 해를 뜻하는 말. 곧 1년은 3백 60일, 10년은 3천 6백 일, 1백년은 3만 6천 일이게 된다.
[주D-031]추곡(推轂) : 임금이 장수를 출정시킬 적에 친히 수레를 밀어주어 격려하는 것.
[주D-032]관사(觀射) : 임금이 친림하여 사예(射藝)를 관람하는 것. 성적이 우수한 자가 있으면 상을 내리는 것이 관례이다.
[주D-033]고치(叩齒) : 치근(齒根)을 튼튼히 하기 위해 위아래 이를 딱딱 부딪치는 것.
[주D-034]조맹견(趙孟堅) : 송(宋) 나라 종실(宗室)로 자는 자고(子固)이며 호는 이재(彝齋)이다. 벼슬은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고 송 나라가 멸망하자 수주(秀州)에 은거하며 그림과 시문으로 소일했다. 원(元) 나라에 벼슬하던 종제 조맹부(趙孟頫)가 찾아오자 만나지 않다가, 부인의 권유로 뒷문으로 들어오게 하여 만나고는 다음에 방석을 세탁했다 한다. 저서로 《매보(梅譜)》·《이재문편(彝齋文編)》이 있다.《南宋書 卷十八》 《宋季忠義錄 卷十四》
[주D-035]이치(李廌) : 송대(宋代) 사람으로 자는 방숙(方叔)이고 호는 덕우재(德隅齋)이다. 벼슬에 뜻이 없고 고금 치란을 논하기 좋아했다. 저서로 《사우담기(師友談記)》·《덕우재화품(德隅齋畫品)》등이 있다.《宋史 卷四百四十四》 《宋元學案 卷九十九》
[주D-036]《다경(茶經)》 : 당대(唐代)의 은사(隱士)이자 차의 제일인자인 육우(陸羽 : 자는 홍점(鴻漸))가 차의 근원 및 차에 관한 기구와 끓이고 마시는 방법 등을 10가지로 분류하여 저술한 책.
[주D-037]이광(李廣)……것 : 이광은 한대(漢代)의 장수로 문제(文帝) 때부터 흉노(匈奴) 정벌에 출정하여 무제 때에는 북평태수(北平太守)가 되자 흉노들이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두려워하여 여러 해를 북평 지방에는 감히 들어오지 못했으며, 흉노들과 싸운 것이 대소 70여 차례가 되는데도 봉후(封侯)되지 못했다. 웅치는 한 고조가 기병(起兵)할 때 참여했고 뒤에 배반하고 갔다가 다시 귀순했다. 고조가 호감을 갖지 않았지만 전공(戰功)을 세웠기 때문에 십방후(什邡侯)로 봉작했었다.《史記 卷五十五·一百九》 《前漢書 卷一·卷五十四》
[주D-038]도연명(陶淵明)의 아들 : 중국 진대(晉代)의 시인으로 이름은 잠(潛)이다. 그의 책자(責子)란 시에 아들들의 불초에 대한 지탄을 말한 것이 있다.
[주D-039]증선지(曾先之) : 송(宋) 나라 말엽과 원 나라 초기의 사가(史家)로 자는 종야(從野)이다.
[주D-040]관백(關白) : 일본의 제 59대 임금 우다(宇多) 때부터 강호 막부(江戶幕府) 시대까지 일본의 정치를 관장하던 막부의 우두머리 관직.
[주D-041]곽광(霍光) : 선제(宣帝)의 장인. 자는 자맹(子孟), 시호는 선성(宣成).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유조(遺詔)를 받고 유주(幼主)를 보필하여 박륙후로 봉작(封爵)되었으며, 13년 동안 일
체의 정사를 처결했다.《漢書 卷六十八》
[주D-042]애호……한다 : 이 대문은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있는 말이다.
[주D-043]악한……드러낸다 : 이 대문은 《중용(中庸)》 제6장에 있는 말이다.
[주D-044]장자(莊子) :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사람. 자는 자휴(子休)로 《남화경(南華經)》곧 《장자》의 저자이며 도가(道家)의 창시자.《史記 卷六十三》
[주D-045]노식(盧植) : 후한 때 사람으로 자는 자간(子幹). 마융(馬融)을 사사(師事)하여 고금의 학문에 밝았다. 소제(少帝)의 폐출을 항쟁하다 동탁(董卓)에게 면관(免官)되어, 상곡(上谷)에서 은거했다.《後漢書 卷九十四》
[주D-046]임본유(林本裕) : 자는 익장(益長)이고 청 나라 초기의 명 나라 유민(遺民)으로서 절의(節義)를 지켰고, 성음학(聲音學)에 밝았다. 저서에 《성위(聲位)》·《요재전집(遼載前集)》이 있다.《四庫提要 卷七十四》
[주D-047]원상(元常)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종요(鍾繇)의 자이며 시호는 성(成)이고 당시의 명필이었다.《三國志 卷十三》
[주D-048]군포(軍布) : 군보포(軍保布)의 약어. 곧 정병(正兵)을 보조하는 조정(助丁)에게서 병역을 면해 주는 대가로 받는 삼베나 무명.
[주D-049]왕연(王延) : 전조(前趙 : 진(晉) 나라 때의 16국(國)의 하나) 사람으로 자는 연원(延元)인데 9세에 어머니를 잃은 뒤 기신 때마다 열흘이 넘도록 울었으며, 계모가 학대하였으나 더욱 조심스럽게 섬기므로, 감화되어 소생처럼 돌보게 되었다. 나이 60에 벼슬이 상서좌승(尙書左丞)이었는데, 변란에 절의를 지키다 죽었다. 강혁(江革)은 후한 사람으로 자는 차옹(次翁)인데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다 난리를 만나자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며 항시 나무를 하여 봉양했다. 누차 도둑들과 마주쳤으나 그의 효성에 감동되어 어머니를 무사하게 모실 수가 있었다.《後漢書 江革傳》 《晉書 卷八十八》 《南史 卷六十》
[주D-050]상성(相城) : 중국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 동북쪽의 상성당(湘城塘) 근처.
[주D-051]굴원(屈原)의 회사(懷沙) : 전국 시대 초(楚) 나라 대부 굴원이 회왕(懷王)에게 신임을 받다가 동료들의 시기 때문에 소외되고, 아들 양왕(襄王) 때에는 또한 참소를 입어 장사(長沙)로 추방되자, 《어부사(漁父辭)》등 여러 편의 글을 지어 뜻을 표시한 다음, 돌을 안고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史記 卷八十四》
[주D-052]오릉(於陵)의 토아(吐鵝) :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오릉에 은거하는 진중자(陳仲子)가 청백하여 형의 녹(祿)을 불의(不義)한 것이라 하여 먹지 않고 형의 집을 불의한 집이라 하여 살지 않으며, 형을 피하고 어머니를 떠나 오릉에 있다가, 어느 날 누가 거위를 형에게 선사하므로 얼굴을 찡그리며 '그 끼룩끼룩 하는 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였었다. 그 뒤 어머니가 그 거위를 잡아 주며 먹게 했었는데, 그의 형이 밖에서 돌아와 '그것이 끼룩끼룩 하던 거위의 고기다.' 하자, 나가서 토해버렸다는 고사이다.《孟子 滕文公下》
[주D-053]직불의(直不疑) : 한대(漢代) 사람. 시호는 신(信).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 금(金)을 훔쳐 갔다고 의심을 두자 변상했었는데, 그 뒤 억울한 실정이 밝혀지자, 의심 두었던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게 되었다.《史記 卷一百三》 《漢書 卷四十六》
[주D-054]누사덕(婁師德) : 당대 사람. 자는 종인(宗仁) 시호는 정(貞). 30년 동안 장상(將相)으로 있으며 변방 일을 도맡아 보았다. 아우가 대주 자사(代州刺史)로 가게 되자 '극도한 은총과 영화는 남이 시기하는 법인데, 장차 어떻게 해야 별일 없게 되겠는가?' 하매, 아우가 '이제부터 비록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하더라도 제가 씻어버리기만 하겠습니다.' 하자, 사덕이 '그러면 그의 뜻을 거스르게 되니 저절로 마르도록 해야만 한다.' 하였었다.《唐書 卷一百八》 《舊唐書 卷十三》
[주D-055]유응지(劉凝之) : 남조(南朝) 시대 사람. 자는 지안(志安), 소명(小名)은 장년(長年). 벼슬로 불러도 나가지 않고, 처자와 함께 강호(江湖)에서 노닐다가 형산(衡山) 남쪽에서 은거했다.《宋書 卷九十三》 《南史 卷七十五》
[주D-056]왕거비(王去非) : 금대(金代) 사람. 자는 광도(廣道). 집에서 지내며 교수(敎授)하여 수업료(授業料)가 많아지자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은애(恩愛)로 마을 사람들을 지도했었는데, 문인들이 순덕선생(醇德先生)이라고 사시(私諡)했었다.《金史 卷一百二十七》
[주D-057]양저(楊翥) : 자는 중거(仲擧)이며 호는 희안선생(晞顔先生)이고 벼슬은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올랐다. 독행(篤行)이 뛰어나 당시의 후덕한 진신(搢紳)들이 제일로 추앙했다.《明史 卷一百五十二》 《明詩綜 卷二十一》
[주D-058]세이도(洗耳圖) : 중국 고대의 요(堯)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양여하려 하자, 듣지 않고 하수(河水)에서 귀를 씻었는데, 소부(巢父)가 보고서 그 연유를 물은 다음 '내가 소[牛]에게 물을 먹이려는데 우리 소의 입을 더럽히게 되겠다.' 하며 드디어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먹인 고사가 《고사전(高士傳)》에 있는데, 이를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주D-059]노래자(老萊子) : 동주(東周) 시대 초(楚) 나라 사람.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겨, 나이 70에 어린애 짓을 하고 색동옷을 입었으며, 대청에 올라가다 거짓 미끄러지며 어린애 우는 시늉을 하여 양친을 즐겁게 했다 한다.《孝子傳》
[주D-060]도유우불(都兪吁咈) : '도유'는 찬성하는 뜻, '우불'은 반대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다. 곧 임금이 군신들과 정사를 의논할 적에 쓰이던 말.
[주D-061]행단(杏壇) : 공자가 제자들을 교수(敎授)하던 자리. 이 자리가 은행나무 밑이던 것이 유래가 되어 각 문묘(文廟) 안에 은행나무를 심는다는 것이다.
[주D-062]장공예(張公藝) : 당 나라 사람. 고종(高宗)이 그의 집에 친림하여 9대가 한집에 동거하는 전말을 묻자, 인(忍)자 1백여 자를 써서 올리므로 고종이 착하게 여겨 비단을 내렸다.《唐書 卷一百九十》 《舊唐書 卷一百八十八》
[주D-063]도주(陶朱)와 석숭(石崇) : 도주는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신하 범려(范蠡)로서 당대의 거부였다.《史記 貨殖傳》 석숭은 진대(晉代) 사람으로 자는 계륜(季倫), 소명(小名)은 제노(齊奴)인데 항해 무역(航海貿易)으로 당대의 거부가 되었다.《晉書 卷三十三》
[주D-064]주아부(周亞夫) : 한 문제(漢文帝) 때 사람으로 경제(景帝) 때에 오(吳)·초(楚) 등 7국의 반란을 평정하여 승상이 되었다. 그 뒤 임금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정위(廷尉)에게 내리자 5일을 먹지 않다가 드디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史記 卷五十七》 《漢書 卷四十》
[주D-065]종리(從理) : 관상법(觀相法)에서 말하는 '법령(法令)'이라는 것. 곧 이 종리가 입으로 흘러 들어간 사람은 굶어 죽는다고 한다.
[주D-066]어구라(魚俱羅) : 수 나라 장수로 전공(戰功)이 있어 주국(柱國)이 되었다. 아우의 죄 때문에 양제의 의심을 받게 되자, 모면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隋書 卷六十四》 《北史 卷七十八》
[주D-067]복토(伏兔) : 수레축[車軸]의 양쪽 끝에 붙어 차체를 지탱하고 연결하여 주는 역할을 하는 막대.
[주D-068]왕마힐(王摩詰) : 당대의 시인이자 서화가로 이름은 유(維)이다. 안록산(安祿山)의 반란 때 절의를 지켰고, 뒤에 벼슬이 상서 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남화(南畫)의 비조이다. 저서로 《왕우승집(王右丞集)》·《화학비결(畫學祕訣)》 등이 있다.《唐書 卷二百二》 《舊唐書 卷一百九十》
[주D-069]미원장(米元章) : 송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이름은 불(芾)이고 호는 녹문거사(鹿門居士)이다. 벼슬은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다. 저서로 《보진영광집(寶晉英光集)》·《미불서화사(米芾書畫史)》·《해악명언(海嶽名言)》이 있다.《宋史 卷四百四十四》
[주D-070]징심당지(澄心堂紙) : 오대(五代) 남당(南唐) 후주(後主) 때에 만든 종이. 질이 좋은 귀한 종이이다.《蜀牋紙譜》
[주D-071]단계연(端溪硯) : 중국 광동성(廣東省) 고요현(高要縣) 단계에서 나는 돌로 만든 질이 좋은 벼루.
[주D-072]천호후(千戶侯) : 1천 호의 영지(領地)를 봉작(封爵) 받은 사람. 곧 부귀한 사람을 뜻한다.
[주D-073]마고(麻姑) : 중국 한 환제(漢桓帝) 때의 선녀(仙女)로 손톱이 매우 길었는데, 채경(蔡經)이 보고서 "등이 가려울 때 이 선녀를 시켜 긁게 하면 기분이 시원하겠다."고 했다 한다.《神仙傳 卷七》
[주D-074]인면창(人面瘡) : 무릎 또는 손목·팔 등에 나는 부스럼. 그 모양이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다.
[주D-075]교인(鮫人) : 상반신은 인체(人體), 하반신은 어체(魚體)로 되어 있다는 가상의 동물. 고기처럼 물속에서 살며 끊임없이 베를 짜고, 울기를 잘하는데 우는 눈물이 진주가 된다고 한다.《述異記 卷下》
[주D-076]구가(九歌)와 구장(九章) : 모두 《초사(楚辭)》의 편명.
[주D-077]《강목(綱目)》……것 : 주자(朱子)가 《강목》을 편찬할 적에 정통(正統)을 조조(曹操)에게 주지 않고 유비(劉備)에게 준 것을 말한다.
[주D-078]단 태위(段太尉)……친 것 : 단 태위는 당대 사람으로 이름은 수실(秀實)이고, 자는 성공(成公)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태위는 관직이며 사농경(司農卿)으로 있을 적에 주자(朱泚)가 모반하면서 인망이 높은 것을 생각하여 맞아오게 하므로 거짓 협력하는 체하고서 하루는 일을 논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상홀(象笏)을 빼앗아 내리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크게 꾸짖으니 홀이 이마에 맞아 유혈이 얼굴을 뒤덮었는데 드디어 살해되었다.《新唐書 卷一百五十三》 《舊唐書 卷一百二十八》
[주D-079]종동(終童)……돌파한 일 : 한(漢) 날 때의 종군(終軍)을 말하는 것으로 남조(南朝) 시대의 송(宋) 나라 종각(宗慤 : 자는 원간(元幹))을 오서(誤書)한 것이다. 종각이 젊을 적에 그의 숙부가 뜻을 묻자 '긴 바람을 타고 만 리의 파도를 헤치며 가는 것이 소원이다.' 했었다.《南史 宗慤傳》
[주D-080]조아(曹娥)의 비문(碑文) : 후한(後漢) 때의 효녀 조아가 아버지가 강에 빠져 죽었는데도 시체를 찾지 못하자 강가에서 밤낮없이 울다가 17일 만에 강에 투신하여 죽은 것을 기록한 비문의 탑본(搨本)을 말하는 것인데,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전해온다.
[주D-081]저수량(褚遂良) : 당대 사람으로 자는 등선(登善)인데 문사(文史)에 해박하고 해서(楷書)·예서(隷書)에 능했다.《新唐書 卷一百五》 《舊唐書 卷八十》
[주D-082]항 패왕(項霸王)……이별 : 항 패왕은 항우(項羽)의 별칭이고 우 미인은 항우의 총희(寵姬)이다.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한(漢) 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우 미인이여 우 미인이여 어찌 하려는가?'라고 노래를 부르니, '……천첩이 어찌 살게 되리까?'라고 화답하고 드디어 자결했다.《史記 卷七》 《前漢書 卷三十一》
[주D-083]이우린(李于鱗) : 명대의 시인으로 이름은 반룡(攀龍)이고 호는 창명(滄溟)이며 벼슬이 하남 안찰사(河南按察使)에 올랐다. 저서로 《고금시산(古今詩刪)》·《이창명집(李滄溟集)》. 《明史 卷二百八十七》 《明詩綜 卷四十六》 《明詩紀事 己籤一》
[주D-084]고악부(古樂府) : 한시(漢詩)의 한 가지 형식인데 풍속·인정 등을 읊은 것으로 민간에서 유행하던 가요이다,
[주D-085]백두(白頭) : 《백두음(白頭吟)》의 약어. 고악부의 한 편인데 전한(前漢)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아내 탁문군(卓文君)의 작품으로 전해온다. 포조(鮑照)·이백(李白) 등도 같은 제목의 작품이 있다.《樂府詩集 白頭吟》
[주D-086]맥상(陌桑) : 맥상상(陌上桑)의 약어. 고악부의 한 편으로 조왕(趙王)이 자태가 아름다운 진녀(秦女)가 언덕 위에서 뽕 따는 것을 보고 차지하고 싶어 지었다는 것.《樂府詩集 陌上桑》
[주D-087]우맹(優孟) : 모방의 대명사.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명우(名優) 우맹이 초 장왕(楚莊王)을 섬기면서, 손숙오(孫叔敖)가 죽은 뒤에 그의 의관을 차리고 그의 행세를 하자, 초 나라 임금 및 좌우의 신하들이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고사.《史記 卷一百二十六·滑稽傳》
[주D-088]전동간(錢東澗) : 청대 사람으로 이름은 겸익(謙益)이고 자는 수지(受之)이며 호는 목재(牧齋), 또는 동간 노인(東澗老人)이다. 명 나라 때는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 청 나라 때는 예부 우시랑(禮部右侍郞)을 지냈다. 시문(詩文)에 능했다. 저서로 《초학(初學)》·《유학(有學)》 두 가지가 있었으나 발행이 금지되었다.《淸史稿 卷四百八十九》 《國朝名家詩鈔小傳》
[주D-089]두시(杜詩) : 후한(後漢) 시대 사람으로 자는 군공(君公)이고 세 차례를 시어사(侍御使)가 되고 남양 태수(南陽太守)를 역임했는데, 행정이 청렴하고 공평했으며 관내가 부유해지게 되므로 사람들이 두모(杜母)라고 불렀다.《後漢書 卷六十一》
[주D-090]한문(韓文) : 명대 사람으로 자는 관도(貫道)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며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 벼슬을 지냈고, 호부 상서(戶部尙書)가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견지하여 권행(權倖)들의 진출을 저지했다.《明史 卷一百八十六》 《皇明名臣言行錄 卷二十二》
[주D-091]백기(白起)와 황헐(黃歇) : 백기는 전국 시대 진(秦) 나라 장수이고 황헐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장수이다. 여기서 백(白)은 황(黃)과, 일어난다[起]는 마친다[歇]와 대(對)가 된다는 말이다. 이하도 같다.
[주D-092]이이(李耳)와 율복(栗腹) : 이이는 초 나라 사람으로 일명 중이(重耳)이고 자는 백양(伯陽) 또는 담(耼)이다. 노담(老耼), 곧 노자(老子)를 말한다. 율복은 전국 시대 연(燕) 나라 장수이다.
[주D-093]손권(孫權)과 예형(禰衡) : 손 권은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임금으로 자는 중모(仲謀)이다. 예형은 후한 시대 사람으로 자는 정평(正平)인데 문필(文筆)에 능했다.
[주D-094]원미(元美) : 명대의 문장가로 이름은 세정(世貞)이고 호는 엄주(弇州) 또는 봉주(鳳洲)이다. 벼슬은 형부 상서에 올랐다. 저서로 《엄주산인사부고(弇州山人四部稿)》·《왕씨서원(王氏書苑)》·《독서후(讀書後)》 등이 있다.《明史 卷二百八十七》 《明詩綜 卷四十六》 《明詩紀事》
[주D-095]종백경(鍾伯敬) : 명대 사람으로 이름은 성(惺)이고 호는 퇴곡(退谷)이며 벼슬은 복건제학첨사(福建提學僉事). 《고시귀(古詩歸)》·《당시귀(唐詩歸)》를 평선(評選)하여, 경릉체(竟陵體)라고 불렸다. 저서는 《제경도(諸經圖)》·《모시해(毛詩解)》·《명원시귀(名媛詩歸)》·《송문귀(宋文歸)》 등이 있다.《明史 卷二百八十八》 《明詩綜 卷六十》
[주D-096]백향산(白香山) : 당대의 시문가로 이름은 거이(居易)이고 자는 낙천(樂天)이며 향산은 호이다. 시호는 문(文)이고 벼슬은 형부 상서이다. 저서에는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등이 있다.《唐書 卷一百十九》 《舊唐書 卷一百六十六》
[주D-097]최응(崔膺) : 당대 사람으로 시문을 잘하고 그림에 능했다.《唐詩紀事 卷四十三》 《全唐詩 卷十》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3권
 명(銘)
서산대사 화상당명(西山大師畫像堂銘) 병서(幷序) ○ 갑인년(1794)

석가(釋家)를 통칭 사미(沙彌)라고 하는데, 사미란 식자(息慈)이니 자비의 땅에서 안식하는 것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불교에 삼장(三藏)이 있는데 수다라(修多羅)가 으뜸이며, 불교에 십회향(十回向)이 있는데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으뜸이다. 대체로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자비를 구승(究乘)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법계(法界)의 공덕도 여기에 있고, 항사(恒沙)의 복전(福田)도 여기에 있으니, 이보다 더한 것이 없도다, 자비의 가르침이여. 후세의 사미는 그렇지 않아서 운천(雲天)과 수병(水甁)의 실상(實相)의 밖에서 마음을 유람하고 취죽(翠竹)과 황화(黃花)의 정이 없는 물체에 몸을 비교하니, 마침내 우리 유학에서 고목(枯木)과 사회(死灰)라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유학에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사미가 스스로 비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같은 이의 사미됨은 아마 자비에서 안식하는 뜻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석장(錫杖)을 지니고 여러 곳에 두루 참례하여 법당(法幢)을 세움으로써 인천안목(人天眼目)이 되어 운장(雲章)과 보묵(寶墨)의 하사품이 특별히 융성하였으니, 지금까지 정관(貞觀)이나 영락(永樂)의 서문과 도솔란야(兜率蘭若)에서 영광을 다툴 지경이다. 중간에는 종풍(宗風)을 발현하여 국난을 크게 구제하고 의병을 창설하여 군왕을 구제한 원훈(元勳)이 되어 요사스럽고 성전(腥羶)한 기운이 손을 따라 맑아졌으니, 지금까지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한 공적은 염부제(閻浮提)ㆍ무량겁(無量劫)에 영원히 의지할 것이다. 끝에 가서는 인연을 따라 현신(現身)하고 업보를 따라 섭신(攝身)하여 인과(因果)를 찾아 상승(上乘)의 교주가 되어 매화가 익고 연꽃이 피어나 순식간에 피안(彼岸)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한 초상이 남아 있어 서북과 남도의 영당에서 정례(頂禮)를 받고 있다. 이러한 다음에야 비로소 삼천 대천(三千大千)을 구제하고 속세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몇 알의 염주로 면벽(面壁)하거나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따위를 자비라고 할 수 있겠으며, 탑묘(塔廟)를 많이 건축하고 경률(經律)이나 많이 쓰는 것으로 자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영당(影堂)의 편액을 요청하는 서남 도신의 청에 따라 남도는 표충당(表忠堂)이라고 하사하고, 서도는 수충당(酬忠堂)이라고 하사하는 한편, 관리에게 명하여 제수(祭需)를 주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금년이 갑인년(1794, 정조18)이므로 홍무(洪武) 갑인년(1374, 공민왕23)에 선세선사(善世禪師)에게 시를 하사한 고사를 추억하여 서설과 명문을 지어 영당에 걸게 하노라. 내 비록 불가의 진체(眞諦)를 익히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법화경》의 의해(義解)를 들은 일이 있는데, 게(偈)의 의미가 유학의 서문(序文) 다음에 오는 명문(銘文)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유학의 명문은 진실로 범어의 게송이다. 명문은 이러하다.

불일이 처음 비추니 / 佛日初照
자비의 구름 법이 되도다 / 慈雲爲經
호겁에 외길로 전수되니 / 浩劫單傳
부탁함도 정녕하다 / 囑付丁寧
그 맹서하여 발원한 것을 묻는다면 / 問其誓願
누구인들 보시(普施) 아니라 할쏘냐만 / 孰非施舍
의리의 바다 망망하니 / 義海茫茫
건너는 이 적었는데 / 津逮者寡
복된 나라 도움 많아 / 福國多祐
높은 스님 시기에 맞추었네 / 高僧應期
석장 세우고 한 소리 외치니 / 卓錫一喝
마귀의 군졸 흩어졌고 / 魔軍離披
하늘 맑고 달 밝은데 / 天晶月朗
파도는 잠들고 물결도 조용하여라 / 波恬浪平
우담바라의 꽃이 / 優曇鉢華
동해에서 피어났네 / 涌現東瀛
경사는 적현으로 돌려주고 / 歸慶赤縣
진으로 돌아간 곳 청련이어라 / 返眞靑蓮
엄숙하고 아늑하다 쇠북과 목어(木魚)여 / 肅穆鐘魚
선방의 등불 하나 호젓하구나 / 禪燈孤懸
이름은 죽간에 전해지고 / 名流竹簡
도는 패엽에 남겼도다 / 道存貝葉
적막한 시골 주발만 한 절간에 / 寂鄕鉢寺
모습 전하여 빛나도다 / 交暎眉睫
보답하는 제사 어떻게 하나 / 報祀伊何
채소 음식은 관청에서 보내리라 / 蒲饌自官
신령스러운 복 내린다면 / 儻布靈貺
길이 시주를 보우하리 / 長蔭旃檀
상마(桑麻)와 도량(稻粱) 대나무와 갈대가 / 麻稻竹葦
온 나라에 두루 무성하여 / 匝域蓊若
주 나라의 부유하고 많음을 짝하고 / 匹周富庶
당 나라의 농경에 비견하리라 / 媲唐耕鑿
팔만 사천 세를 / 八萬四千
자자손손이 함께 즐기리 / 子孫同樂
내 즉위한 지 십팔 년 / 予卽阼之十有八年
갑인 사월 초파일에 / 甲寅四月初八日
표충사와 수충사에 봉안하노라 / 安于表忠酬忠之祠中

[주D-001]인천안목(人天眼目) : 불가(佛家)의 용어로, 인간과 천상의 일을 환히 꿰뚫어 보는 지혜나 그러한 지혜를 갖춘 사람을 이른다.
해사록(海槎錄) 상
 정미년(1607, 선조 40) 정월 작음
20일(갑신)

맑음. 아침에 수회촌을 떠나 조령(鳥嶺)을 넘어 용추(龍湫)에서 잠깐 쉬었다가 문경현(聞慶縣)으로 달려 들어가니,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 그리고 가랑비가 살짝 뿌렸다. 일행의 군관(軍官)ㆍ역관(譯官)들을 모아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김효순(金孝舜)이 큰 사발로 연달아 10여 잔이나 마셨다. 비변사 차관(備邊司差官)이, 송운(松雲) 스님이 일본 중에게 보내는 편지 및 예물(禮物)을 가지고 나중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본가의 평안하다는 편지를 받아 보았다.
〈송운(松雲) 스님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원광원길(圓光元佶)장로(長老)에게 보냄 : 일찍이 노형과 더불어 서래곡(西來曲) 한 곡조를 불던 때가 어제 같은데, 춘추(春秋)가 두 번 바뀌었으니, 무정한 세월이 돌 불과 번개 그림자 같아 길이 탄식할 뿐입니다. 어찌하리까? 멀리서 생각건대, 노형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면목 위에서 능히 큰 광명을 발하여 모든 섬의 생령을 도탈(度脫)하였을 것이니, 훌륭하고도 훌륭합니다. 전번에 내가 선사(先師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유체(遺諦)로써 남쪽으로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놀 적에, 귀국에까지 가서 원광(圓光) 노형과 서소(西笑)장로(長老)ㆍ오산(五山)의 제덕(諸德)을 만나보게 되었는데, 임제(臨濟)의 광풍(狂風)을 성대히 논하여 종지(宗旨)를 별도로 밝힌 것이 또한 많지 않았습니까? 나의 본원(本願)은 다만 적자(赤子)를 다 데려옴으로써 선사의 ‘생령(生靈)을 보제(普濟)하라.’는 유결(遺訣)에 부응(副應)하려는 것이었는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매 서운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귀국한 뒤부터 노병이 이미 깊어졌으며 그 길로 묘향산(妙香山)에 들어가, 스스로를 지키며 죽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마침 사신이 간다는 말을 듣고 즉시 한훤(寒暄 추운 것과 더운 것. 곧 문안 드리는 것) 두 글자를 가지고 멀리 노형의 조용한 봄잠[春睡]을 깨우는 것이니, 바라건대 형께서 나의 본 뜻을 어기지 말고 마땅히 도생원(度生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소원)으로써 대장군에게 고하여 생령을 모두 돌려 보내어 주시어, 옛날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변변치 못한 물품은 모두 웃고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운손(雲孫 문종이의 별칭) 1권, 청향(淸香) 4봉(封), 진홀(眞笏) 6속(束), 약삼(藥蔘) 1근, 관성(管城 붓의 별칭) 20자루.
승태서소(承兌西笑)장로에게 보냄 : 해성(海城)에서 한 번 헤어진 뒤, 성상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거센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하니, 머리를 돌이켜 본들 어쩌겠습니까? 모든 섬에 봄빛이 찾아왔습니다. 멀리서 생각건대, 노형은 때에 따라 진복(珍福)하고 도안(道眼)도 더욱 높아졌으리라 여겨집니다. 뒤바뀐 초청(이쪽에서 먼저 초청하는 것)을 하여 곧 서래(西來)의 인(印)을 찍어주어, 해외의 중생이 모두 은택을 받아 모든 부처의 막대한 은혜에 보답하게 하였으니, 경희(慶喜 문수보살의 딴 이름)의 이른바, ‘이 깊은 마음을 가지고 진찰(塵刹)을 받드는 것이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를 또한 체험하지 않습니까? 송운은 돌아온 뒤 노쇠한 병이 찾아들어 묘향산에 들어가 이 보신(報身 불가에서 말하는 육신(肉身))을 마치기로 기약하였더니, 바다를 건너가는 사신의 일행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안부편지를 부치는 것입니다. 전번에 송운이 선사의 유체(遺諦)를 받들어 보제(普濟 널리 중생을 건짐)를 임무로 삼고, 남쪽으로 대마도에서 놀다가 드디어 귀국에 가서 녹원(鹿苑) 대장로ㆍ서소(西笑) 사형(師兄)ㆍ원광장로ㆍ오산의 제덕(諸德)을 만나보고 종지(宗旨)를 성대히 논하여 소종래(所從來)를 밝혔는데, 형도 선사의 정안(正眼)에 욕되지 않았고, 나도 동종(同宗)의 일맥임을 알게 되어 동해(東海)에 매우 빛이 났었습니다. 이것 또한 숙연(夙緣)이지 어찌 인력으로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전번에 내가 이미 보제(普濟)를 임무로 삼고 갔으니, 이역(異域)에 빠져 있는 조선의 적자는 비유컨대, 물불[水火]에 빠진 사람과 같은 것인데, 이를 건져내지 못하고서야 마음이 어찌 만족하겠습니까? 장군이 애초엔 쇄환해 주려 하였는데, 마침내 실천하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 사신의 행차가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니, 바라건대, 형께서 대장군에게 잘 보고하여 그때 돌려 보내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실어 보내어, 이전에 했던 말을 어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것이 노승에게 관계되는 일은 아니나, 사람을 건지려는 생각으로 멀리 돌아다니다가 대장군과 모든 장수, 모든 대장로를 알았기로 감히 이렇게 아뢰는 것이니, 형께서 잘 살펴주기 바랍니다. 변변찮은 물품은 웃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운손 2권, 청향 4봉, 진홀 6속, 약삼 3근, 관성 30자루.
현소(玄蘇)에게 보냄 : 작별한 것이 어제 같은데, 성상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그리워하는 일념은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온갖 풀의 위에 조사(祖師 달마대사(達磨大師))의 뜻이 있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위로하고 있을 뿐이니, 나머지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고덕(古德 덕이 높은 옛 스님)은 망주정(望州亭)에서 서로 만나 보기도 하고, 오석령(烏石嶺)에서 서로 보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므로, 도안(道眼)으로 본다면, 장로의 눈으로 송운이 보고, 송운의 눈으로 장로가 본다 하겠거늘 어찌 달리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서쪽으로 돌아와 쇠병(衰病)이 찾아들어 서쪽에 있는 묘향산으로 들어갔으며, 그대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사신이 간다는 말을 듣고 서로 그리는 문자를 보내서 노형의 안부를 만 분의 일이라도 물으려는 것입니다. 전번에 내가 선사의 유결(遺訣)에 따라 남방을 돌아다니다가, 귀도(貴島)에까지 가서 형 및 유천(柳川)과 더불어 일본에 가서 원광장로ㆍ오산의 제덕(諸德)을 만나 종지(宗旨)를 성대히 논하고, 또 소종래를 밝혔으니, 좋기는 좋으나 본원(本願)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으므로 서운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형께서 다시 힘을 다해 생령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되 전번의 언약대로 하여주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변변찮은 물품은 모두 웃으며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태수(太守)에게 고하는 문후(問候) 편지 : 병으로 깊은 산중에 누워 있느라고, 편지를 올리지 못하니,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또 뒤늦게 들으니, 유천(柳川)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몸이 건강하였는데, 이처럼 쉽게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음이 아픕니다. 풍전(豐前)에서 작별할 적에 청기와[靑瓦]ㆍ고연(古硯) 등 약간의 물품 구득을 말씀하셨는데, 내가 서쪽으로 돌아온 뒤부터는 곧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병으로 나다니지 못하였기에 사신의 편에 마련하여 부치지 못하니,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이 뜻으로 여러분에게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운손 1권, 청향 4봉, 진홀 5속, 약삼 1근, 붓 20자루.
숙로선사(宿蘆禪師)에게 보낸 편지 : 도(道)는 형체가 없는 것인데 무슨 막히는 바가 있겠으며, 마음은 형적(形迹)이 없는 것인데 누가 감히 보내거나 붙잡겠소. 보내거나 붙잡음도 없고 형체와 자취도 없지만, 흥이 나면 정신과 더불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 리 밖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같이 서로 보는 것이 스님과 나인데, 또한 어찌 우리 사이에 말할 필요가 있소. 스님도 이런 안목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변변찮은 물품이지만 모두 웃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운손 1권, 청향 3봉, 진홀 3속, 붓 10자루, 약삼 1근.

[주D-001]도탈(度脫) : 불가(佛家)의 말로서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서 미계(迷界)를 벗어나 오계(悟界)에 들어가는 것을 일컫는다.
[주D-002]임제(臨濟) : 임제종(臨濟宗)의 준말. 선종(禪宗) 5가(家)의 하나. 남악(南嶽) 아래의 제4대 임제의현(臨濟義玄)을 말한다.
[주D-003]서래(西來)의 인(印) : 서래(西來)는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천축(西天竺)에서 멀리 중국으로 온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인(印)은 불법의 지혜를 가리킨다.
[주D-004]진찰(塵刹) : 티끌 같이 많은 세계. 곧 온 우주 세계.
 
 
西山大師碑銘」
有明朝鮮國賜紫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休靜大師碑銘幷序」
嘉善大夫戶曹參判李雨臣 撰」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尹得和 書」
通政大夫吏曹參議知製敎曺命敎 篆」
粤在萬曆壬辰島夷犯京 宣廟西幸西山大師休靜率其弟子惟政等倡義募兵樹中興大功 宣廟嘉其功命立表忠祠于嶺南之密陽並腏休靜惟政所以褒忠獎義也逮我 當宁十四」
年戊午以相臣之請有給復守護之命師之法裔南鵬改創祠于密之靈鷲山三綱洞奉二師遺像名其堂曰弘濟涉千里走京師訪余而屬文曰吾法祖西山之碑是文忠公月沙先生之文」
也厥后師之法派四世碑文皆出於公之門列樹於金剛之白華菴中儒釋之交至於四世者斯儘古之所無公乃文忠公之嫡孫今將竪石于師之祀記師功烈來請于公者意非偶然公於斯」
文惡可辭乎於戱余嘗讀先生之文知師之爲禪門中奇傑人而先生之文至今爀爀然照人耳目逾久而逾光則其於不朽師也奚待余言然余於鵬之言竊有所感于心不揆僭妄沘筆爲文曰」
師法名休靜字玄應自號淸虛子又稱西山俗姓完山崔氏名汝信外祖縣尹金禹父世昌箕子殿叅奉母金氏有異夢生師於庚辰三月三歲燈夕有一老翁來撫其頂曰此兒名以雲鶴仍忽」
不見幼與羣兒遊輒以佛事爲戱而及長風骨秀異頓悟禪法受經于靈觀大師鬀度于崇仁長老三十中禪科選至禪敎兩宗判事己而解其印入金剛作三夢詞曰主人夢說客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亦是夢中人登香爐峯作詩曰萬國都城如垤蟻千家豪傑若醯鷄一窓明月淸虛枕無限松風韻不齊觀其發於辭者可稔其韜光匿影妙契於禪宗也己丑之獄爲妖僧無業誣」
引被逮供辭明剴宣廟卽命釋之取覽詩稿賜御畵墨竹命賦詩卽進絶句宣廟又賜御製而賞賚甚厚仍許還山壬辰之亂師仗劒赴行在宣廟敎曰世難至此爾爲出力弘濟耶師泣」
而拜 命曰臣統率緇徒悉赴軍前殫效忠赤宣廟命爲八路十六道摠攝師分部沙門惟政領七百義僧起關東處英率一千起湖南師自率門徒及所募僧一千五百會于順安與天兵或」
先或後助援聲勢進戰于牧丹峯斬醎甚夥天兵乘勝擊之賊遂空城宵遁師乃迎鑾還都李都督如松送帖嘉獎曰爲國討賊誠忠貫日不勝敬仰又題詩贈之諸將莫不欽贊於是師請」
曰臣老不足當事軍旅之務屬之惟政處英卽還舊棲以守本分臣之願也宣廟嘉其志許之仍賜號曰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甲辰正月會弟子於妙香圓寂」
菴開道場說曇法題自家影幀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書訖脩然坐化時年八十五法臘六十五異香滿室所著文稿行于世師爲人法顔魁梧慧智聰悟在家事親至孝入山淸」
淨守法而忠君衛國之誠亦根天性遇患難乃能結主知於縲絏之中而至于國難倡起義旅羽翼王師收復三京氛祲載靖便卽納印飄然一衲遂返舊寺身雲心月復照於金沙淨界倬倬英」
風有足以䟪頽俗而立懦頑求諸往牒無與匹休明之廣孝齊之秉忠名雖義釋志在功利心跡不明亦奚足論也嗚呼當今之世開僧聞釋抱奇俊之才而淪於異敎甘自棄於虛無寂滅之中」
者凡幾人哉苟能當宗社岌嶪之時不縶其法而自勵大義倬然所樹立如師之爲則其有補於邦國將如何而又何以異敎少之哉師之示寂于今數百載而朝廷之特軫表異之典者亦所以」
樹風聲而激人心也南鵬勉乎哉師之文章造詣傳鉢法派詳載文忠公所撰碑文中故只叙其生卒出處始終倡義靖亂顚末如右銘曰 巖瀆毓精異人挺形 仙婆告夢神翁錫名 字雖」
娿胎性則佛英 神秀氣淑髓綠骨靑 金鎞放光玉拂奏靈 道悟那羅理感死生 遂登法席摩尼照晶 無妄縲絏詩達天庭 恩隆御畵榮耀千齡 口呪梵音志在葵傾 逮國屯步」
先唱義聲 登壇誓衆雲集其兵 羽翼天戈掃彼穢腥 鼓勇迎鑾復我王京 忠義炳日華夷皆驚 功成納印歸錫雲扃 曇雲生鉢法月在甁 三夢舊偈玄契叮嚀 人間榮辱幻如」
夢醒 舍珠靈骨寶塔崢嶸 太古法派不滅光明 靈鷲立祠表揚忠貞 一軆同祭師弟共享 功紀麟臺道尊龍堂 一片貞珉万代留芳」
相位 領議政淸沙金公在魯 左議政藏密宋公寅明 右議政海村趙公顯命」
判位 吏曹判書 趙公尙絅 戶曹判書 尹公陽來 禮曹判書 尹公淳 兵曹判書 朴公文秀 刑曹判書 金公始炯 工曹判書 朴公師洙 漢城判尹 閔公應洙」
本道 觀察使 李公箕鎭 觀察使 趙公明謙 觀察使 鄭公益河 觀察使 沈公聖希 觀察使 金公尙星」
本府 府使任公守迪 府使尹公愗敎 府使李公玄輔」
士林 生員孫碩寬 學生朴世矩 幼學李宜龍 學生申命胤 生員曺夏瑋 幼學成德周 幼學申應岳」
宗匠 淸運 若垣 雷震 杜惠 萬薰 定慧 宣定 秀眼 軆淨 宏活 璽封 日暎 海源 最栢」
有司 鶴林 禧有 信惠 淸印 明學」
禪匠 一宗 震機 朗聰 眞淨 快善」
行有司 惠文 廣惠 崔萬昌 金麗昌」
守禦 宋時聖 金昌獜 姜後尙 丁就道 黃海澄 嚴世得」
禮曹 嚴漢鵬 高世瑜 文重郁」
本司 道內都摠攝海淑 北漢都摠攝性能 南漢都摠攝文旭 前摠攝翠眼 前僧統最日 海能」
本府 權漢章 金龍孫 金有享」
本營 中軍瑞胤 中軍垣梅」
本道前公員 贊和 能玉 世照 順基 時載文」
事判公員 前摠攝竺詮 義玄 垣珠」
僧孫 一行 快印 處澄 處華 秀玄 一還 崇遠」
本境內 慶州鎭 彩遠 義根 大邱鎭 順海 學輝 尙州鎭 寬機 性輝 最演 安東鎭 晋州鎭 哲雄 摠日 金海鎭 玄哲 淸眼 湖南僧統 楚文 星州鎭 宗益 錦日 善山鎭 太英 彦聰 東萊鎭 管晶 眞悟 漆谷鎭」
幹善 靈印 智性 覺信 貴悅 熙哲 根悟 一燁 雙洽 歸淑 旣澄 印遠 善印 孟洽 碩眼 信嚴 裕卞 萬善 碩岑 坐石 太性 朗伯 世弘 楚印 淸現 俊卞 快淑 日珠 碩天 湫鴈 曳運」
本院 僧統最心 和尙呂華 書記敏漢 海寬」
禪傳齋 圓俊 允言 致和 希性」
敎傳齋 尙玄 希律 順華 處俊 世弘 了岑」
神丹 金得海芳憲 姜淡沙里 徐戒昌 基主崔俊種 杜有元」
剞劂 歸允 國行 宏悅 管淸 吳漢伯 張瑞權 道淳 怡惠 世鵬 管海 漢楚」
浮石 碑石都監前摠攝楚玧 物財都監前僧統裕察 典供物財都監 處寬 行有司兼都書記善文 監役國坦 裕洽 鶴益」
典穀 演性 建祠 南鵬 有司 漢琦 宗正 大愚 主管演初書」
齋任」
정조 18년 갑인(1794,건륭 59)
 3월16일 (계묘)
묘향산 서산 대사 휴정의 사당에 수충사라는 이름을 내리다

묘향산(妙香山) 서산 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사당에 수충사(酬忠祠)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는 동시에 제위전(祭位田)을 주었다. 이는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의 요청을 따른 것이었다.
【원전】 46 집 456 면
【분류】 *왕실(王室) / *사상(思想) / *풍속(風俗) / *농업(農業)

弘齋全書卷五十三
 
西山大師畫像堂銘 幷序○甲寅 a_263_334a


釋家之通稱曰沙彌。沙彌者。息慈也。謂安息於慈悲之地也。故佛有三藏。而脩多羅爲首。佛有十回向。而救衆生爲首。槩戒律也。禪定也。智慧也。無一不慈悲乎究乘。而法界之功德在此。恒沙之福田在此。無上哉。慈悲之爲敎也。後世之沙彌則不然。雲天水甁。遊心於實相之外。翠竹黃花。比身於無情之物。而吾儒263_334b遂以枯木死灰譏之。非吾儒譏之也。後世沙彌自詒其譏也。若西山大師休靜之爲沙彌也。其亦不愧夫息慈之義乎。始焉腰包杖錫。徧參諸方樹法幢。爲人天眼目。則雲章。寶墨。寵賚。優異。至今。與貞觀永樂之序。爭耀於兜率蘭若間。中焉顯發宗風。弘濟國難。倡義旅。爲勤王元勳。則腥羶妖氛。應手廓淸。至今使方便度世之功。永賴於閻浮提無量劫。終焉隨緣現身。緣過攝身。尋因果爲上乘敎主。則梅熟蓮香。倏到彼岸。至今有望儼卽溫之像。受頂禮於西南香火之所。如此然後方庶幾乎濟大千。惠塵境。曾面壁數珠磨263_334c甎作鏡之謂慈悲乎。曾廣建塔廟多寫經律之謂慈悲乎。予因西南道臣之請其影堂額。賜南曰表忠。西曰酬忠。命官給祭需歲祀之。以今歲甲寅。追洪武甲寅。賜詩善世禪師之故事。爲之序若銘。俾揭諸堂。予雖未習佛諦。而嘗聞法華之義解矣。曰偈之義。如此方之序後銘。則此之銘。固梵之偈也。銘曰。
佛日初照。慈雲爲經。浩劫單傳。囑付丁寧。問其誓願。孰非施舍。義海茫茫。津逮者寡。福國多祐。高僧應期。卓錫一喝。魔軍離披。天晶月朗。波恬浪平。優曇鉢華。涌現東瀛。歸慶赤縣。返眞靑蓮。肅穆鐘魚。禪燈孤懸。263_334d名流竹。道存貝葉。寂鄕鉢寺。交暎眉睫。報祀伊何。蒲饌自官。儻布靈貺。長蔭旃檀。麻稻竹葦。匝域蓊若。匹周富庶。媲唐耕鑿。八萬四千。子孫同樂。予卽阼之十有八年甲寅四月初八日。安于表忠酬忠之祠中。

 

 

 

西山大師碑銘」
有明朝鮮國賜紫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休靜大師碑銘幷序」
嘉善大夫戶曹參判李雨臣 撰」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尹得和 書」
通政大夫吏曹參議知製敎曺命敎 篆」
粤在萬曆壬辰島夷犯京 宣廟西幸西山大師休靜率其弟子惟政等倡義募兵樹中興大功 宣廟嘉其功命立表忠祠于嶺南之密陽並腏休靜惟政所以褒忠獎義也逮我 當宁十四」
年戊午以相臣之請有給復守護之命師之法裔南鵬改創祠于密之靈鷲山三綱洞奉二師遺像名其堂曰弘濟涉千里走京師訪余而屬文曰吾法祖西山之碑是文忠公月沙先生之文」
也厥后師之法派四世碑文皆出於公之門列樹於金剛之白華菴中儒釋之交至於四世者斯儘古之所無公乃文忠公之嫡孫今將竪石于師之祀記師功烈來請于公者意非偶然公於斯」
文惡可辭乎於戱余嘗讀先生之文知師之爲禪門中奇傑人而先生之文至今爀爀然照人耳目逾久而逾光則其於不朽師也奚待余言然余於鵬之言竊有所感于心不揆僭妄沘筆爲文曰」
師法名休靜字玄應自號淸虛子又稱西山俗姓完山崔氏名汝信外祖縣尹金禹父世昌箕子殿叅奉母金氏有異夢生師於庚辰三月三歲燈夕有一老翁來撫其頂曰此兒名以雲鶴仍忽」
不見幼與羣兒遊輒以佛事爲戱而及長風骨秀異頓悟禪法受經于靈觀大師鬀度于崇仁長老三十中禪科選至禪敎兩宗判事己而解其印入金剛作三夢詞曰主人夢說客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亦是夢中人登香爐峯作詩曰萬國都城如垤蟻千家豪傑若醯鷄一窓明月淸虛枕無限松風韻不齊觀其發於辭者可稔其韜光匿影妙契於禪宗也己丑之獄爲妖僧無業誣」
引被逮供辭明剴宣廟卽命釋之取覽詩稿賜御畵墨竹命賦詩卽進絶句宣廟又賜御製而賞賚甚厚仍許還山壬辰之亂師仗劒赴行在宣廟敎曰世難至此爾爲出力弘濟耶師泣」
而拜 命曰臣統率緇徒悉赴軍前殫效忠赤宣廟命爲八路十六道摠攝師分部沙門惟政領七百義僧起關東處英率一千起湖南師自率門徒及所募僧一千五百會于順安與天兵或」
先或後助援聲勢進戰于牧丹峯斬醎甚夥天兵乘勝擊之賊遂空城宵遁師乃迎鑾還都李都督如松送帖嘉獎曰爲國討賊誠忠貫日不勝敬仰又題詩贈之諸將莫不欽贊於是師請」
曰臣老不足當事軍旅之務屬之惟政處英卽還舊棲以守本分臣之願也宣廟嘉其志許之仍賜號曰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甲辰正月會弟子於妙香圓寂」
菴開道場說曇法題自家影幀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書訖脩然坐化時年八十五法臘六十五異香滿室所著文稿行于世師爲人法顔魁梧慧智聰悟在家事親至孝入山淸」
淨守法而忠君衛國之誠亦根天性遇患難乃能結主知於縲絏之中而至于國難倡起義旅羽翼王師收復三京氛祲載靖便卽納印飄然一衲遂返舊寺身雲心月復照於金沙淨界倬倬英」
風有足以䟪頽俗而立懦頑求諸往牒無與匹休明之廣孝齊之秉忠名雖義釋志在功利心跡不明亦奚足論也嗚呼當今之世開僧聞釋抱奇俊之才而淪於異敎甘自棄於虛無寂滅之中」
者凡幾人哉苟能當宗社岌嶪之時不縶其法而自勵大義倬然所樹立如師之爲則其有補於邦國將如何而又何以異敎少之哉師之示寂于今數百載而朝廷之特軫表異之典者亦所以」
樹風聲而激人心也南鵬勉乎哉師之文章造詣傳鉢法派詳載文忠公所撰碑文中故只叙其生卒出處始終倡義靖亂顚末如右銘曰 巖瀆毓精異人挺形 仙婆告夢神翁錫名 字雖」
娿胎性則佛英 神秀氣淑髓綠骨靑 金鎞放光玉拂奏靈 道悟那羅理感死生 遂登法席摩尼照晶 無妄縲絏詩達天庭 恩隆御畵榮耀千齡 口呪梵音志在葵傾 逮國屯步」
先唱義聲 登壇誓衆雲集其兵 羽翼天戈掃彼穢腥 鼓勇迎鑾復我王京 忠義炳日華夷皆驚 功成納印歸錫雲扃 曇雲生鉢法月在甁 三夢舊偈玄契叮嚀 人間榮辱幻如」
夢醒 舍珠靈骨寶塔崢嶸 太古法派不滅光明 靈鷲立祠表揚忠貞 一軆同祭師弟共享 功紀麟臺道尊龍堂 一片貞珉万代留芳」
相位 領議政淸沙金公在魯 左議政藏密宋公寅明 右議政海村趙公顯命」
判位 吏曹判書 趙公尙絅 戶曹判書 尹公陽來 禮曹判書 尹公淳 兵曹判書 朴公文秀 刑曹判書 金公始炯 工曹判書 朴公師洙 漢城判尹 閔公應洙」
本道 觀察使 李公箕鎭 觀察使 趙公明謙 觀察使 鄭公益河 觀察使 沈公聖希 觀察使 金公尙星」
本府 府使任公守迪 府使尹公愗敎 府使李公玄輔」
士林 生員孫碩寬 學生朴世矩 幼學李宜龍 學生申命胤 生員曺夏瑋 幼學成德周 幼學申應岳」
宗匠 淸運 若垣 雷震 杜惠 萬薰 定慧 宣定 秀眼 軆淨 宏活 璽封 日暎 海源 最栢」
有司 鶴林 禧有 信惠 淸印 明學」
禪匠 一宗 震機 朗聰 眞淨 快善」
行有司 惠文 廣惠 崔萬昌 金麗昌」
守禦 宋時聖 金昌獜 姜後尙 丁就道 黃海澄 嚴世得」
禮曹 嚴漢鵬 高世瑜 文重郁」
本司 道內都摠攝海淑 北漢都摠攝性能 南漢都摠攝文旭 前摠攝翠眼 前僧統最日 海能」
本府 權漢章 金龍孫 金有享」
本營 中軍瑞胤 中軍垣梅」
本道前公員 贊和 能玉 世照 順基 時載文」
事判公員 前摠攝竺詮 義玄 垣珠」
僧孫 一行 快印 處澄 處華 秀玄 一還 崇遠」
本境內 慶州鎭 彩遠 義根 大邱鎭 順海 學輝 尙州鎭 寬機 性輝 最演 安東鎭 晋州鎭 哲雄 摠日 金海鎭 玄哲 淸眼 湖南僧統 楚文 星州鎭 宗益 錦日 善山鎭 太英 彦聰 東萊鎭 管晶 眞悟 漆谷鎭」
幹善 靈印 智性 覺信 貴悅 熙哲 根悟 一燁 雙洽 歸淑 旣澄 印遠 善印 孟洽 碩眼 信嚴 裕卞 萬善 碩岑 坐石 太性 朗伯 世弘 楚印 淸現 俊卞 快淑 日珠 碩天 湫鴈 曳運」
本院 僧統最心 和尙呂華 書記敏漢 海寬」
禪傳齋 圓俊 允言 致和 希性」
敎傳齋 尙玄 希律 順華 處俊 世弘 了岑」
神丹 金得海芳憲 姜淡沙里 徐戒昌 基主崔俊種 杜有元」
剞劂 歸允 國行 宏悅 管淸 吳漢伯 張瑞權 道淳 怡惠 世鵬 管海 漢楚」
浮石 碑石都監前摠攝楚玧 物財都監前僧統裕察 典供物財都監 處寬 行有司兼都書記善文 監役國坦 裕洽 鶴益」
典穀 演性 建祠 南鵬 有司 漢琦 宗正 大愚 主管演初書」
齋任」

서산대사비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사(賜) 국일도 대선사 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서산(西山) 청허당(淸虛堂) 휴정대사(休靜大師) 비명(碑銘) - 병서(幷序)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우신(李雨臣)은 비문(碑文)을 짓고,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윤득화(尹得和)는 글씨를 쓰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 지제교(吏曹參議知製敎) 조명교(曺命敎)는 전액(篆額)을 하다.

지난 만력(萬曆)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섬의 오랑캐들이 도성(都城)을 침범하자 선묘(宣廟)는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그의 제자 유정(惟政) 등을 거느리고 창의(倡義)해 승병(僧兵)을 모집하고 국세(國勢)를 중흥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이에 선조가 그의 공로를 가상하여 여겨 영남(嶺南) 밀양(密陽)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우고 휴정과 유정을 함께 배향(配享)하라고 명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의 충의(忠義)에 대해 표창(表彰)하고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금상(今上)께서 즉위(卽位)하신 지 14년째인 무오년(영조 14, 1738년)에 상신(相臣)의 청으로 인하여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전답(田畓)을 주어 수호(守護)하도록 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다. 대사의 법통(法統)을 이어 받은 남붕(南鵬)이 밀양의 영취산(靈鷲山) 삼강동(三綱洞)에 사우(祠宇)를 고쳐 새로 짓고는 두 대사가 남겨진 초상(肖像)을 봉안(奉安)한 뒤 그 당호(堂號)를 ‘홍제(弘濟)’라고 명명(命名)하였다. 그리고 천 리(里)되는 길을 헤치고 도성으로 달려와 나를 방문하여 글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법조(法祖) 서산 대사의 비문(碑文)은 문충공(文忠公) 월사선생(月沙先生)의 글입니다. 그 뒤 대사의 법파(法派) 4대(代)의 비문은 모두 공의 문중(門中)에서 나와 금강산(金剛山)의 백화암(百和菴) 안에 세워졌습니다. 유불(儒彿)의 교류가 4대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공은 바로 문충공의 적손(嫡孫)으로서, 지금 대사의 사당(祠堂)에 비석을 세워 대사의 공렬(功烈)을 제사하기 위해 공에게 와서 비문을 부탁하는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니, 공이 이 비문을 짓는 일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내가 일찍이 월사 선생의 글을 읽고서 대사가 선문(禪門)에서 걸출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의 문장은 지금까지도 밝게 빛나 사람의 귀와 눈으로 전해져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빛이 나니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대사의 공로에 대해 어찌 내가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남붕의 말을 듣고 가만히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어서 분수에 넘치고 망령된 일임을 헤아리지 않고 붓을 적셔 비문을 지었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며, 자호(自號)는 청허자(淸虛子)라 하고 또 서산(西山)이라고도 불린다. 속세(俗世)의 성씨(姓氏)는 완산(完山) 최씨(崔氏)이고,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외조부(外祖父)는 현윤(縣尹)을 지낸 김우(金禹)이고, 아버지 최세창(崔世昌)은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을 지냈다. 어머니 김씨(金氏)가 기이한 꿈을 꾸고 경진년(중종 15, 1520년) 3월에 대사를 낳았다. 3세였던 사월 초파일 저녁에 어떤 늙은이 하나가 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하라.”하고는, 바로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를 않았다. 어려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에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일로써 놀이를 삼았다. 장성하여서는 풍채와 골격이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빼어났고 선법(禪法)을 깨달아 알았다. 영각 대사(靈覺大師)에게서 불경(佛經)을 배웠고 숭인장로(崇仁長老)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30세에 선과(禪科)에 급제(及第)한 뒤에 벼슬이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이르렀다. 이윽고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몽사(三夢詞)’를 지어 말하기를,

“주인은 나그네에게 자기의 꿈 이야기하고,
나그네는 주인에게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네.
지금 두 꿈 서로 이야기하는 나그네
이 또한 꿈속의 사람이라네.”
라고 하였다.

그리고 향로봉(香爐峯)에 올라가 지은 시(詩)에서 말하기를,

“만국(萬國)의 도성(都城)은 개미집 같고
천가(千家)의 호걸(豪傑)은 초파리와 같도다.
창문 밖 밝은 달은 나의 베개 비추는데
끝없는 솔바람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하네.”
라고 하였다.

그 시의 내용을 보면 빛을 감추고 종적(蹤迹)을 숨진 채 선종에 대해 오묘하게 깨달았음을 익히 알 수가 있다.
기축년(선조 22, 1589년)의 옥사(獄事)에서 요승(妖僧) 무업(無業)의 무고(誣告)로 인하여 투옥(投獄)되었는데,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즉시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가 지은 시를 가져다 보고 손수 그린 묵죽(墨竹)을 하사(下賜)하고는 시를 지어 바칠 것을 명하였다. 대사가 그 자리에서 절구(絶句)를 지어 바치니 선조도 또한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하사하고는 매우 후하게 상을 내리고 이어서 산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임진년의 난리 때에 대사는 무장(武裝)을 하고 선조가 피난(避難)을 가 있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선조가 하교하기를, “세상의 난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대가 필요한 힘을 내어 어지러운 세상을 크게 구제하려는 것인가?”라고 하니, 대사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말씀에 절을 하고 말하기를, “신(臣)은 승도(僧徒)를 통솔하여 군부(軍府)로 급히 달려가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팔로십육도총섭(八路十六道摠攝)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사문(沙門)을 나누어 유정은 700명의 의승(義僧)을 거느리고 관동(關東)에서 기병(起兵)하게 하였고, 처영(處英)은 1,000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호남(湖南)에서 기병하게 하였으며, 대사는 스스로 문도(門徒)와 모집한 승려 1,500명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모여 명(明) 나라의 군사와 함께 혹은 선봉(先鋒)에 서기도 하고 혹은 후방에서 서기도 하면서 지원하여 위세(威勢)를 떨쳤다. 모란봉(牧丹峯)의 전투에 나가 싸워서 머리를 베어 죽인 왜적(倭賊)들이 아주 많았다. 명나라 군사들이 승기(勝機)를 틈타 왜적을 치니 적들이 마침내 성(城)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였다. 대사는 바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도독(都孚都督) 이여송(李如松)이 첩문(帖文)을 보내 칭찬하고 장려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여 충성심이 해를 꿰뚫으니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다.”
라고 하고, 또 시를 지어 주니 우리나라로 원정(遠征) 온 중국의 장수들이 모두 흠앙(欽仰)하였다. 이에 대사가 청하기를, “신은 늙었으므로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 군대의 사무는 유정과 처영에게 부탁하고서 곧바로 예전에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서 본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신(臣)이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시고, 이어서 ‘국일도 대선사 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갑진년(선조 37, 1604년) 정월, 묘향산(妙香山) 원적암(圓寂庵)에 제자를 모아 놓고 도량(道場)을 둘러본 뒤 설법을 마쳤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影幀)에다가 시를 지어,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쓰기를 마친 뒤, 초연하게 앉은 채로 입적(入寂)하였다. 이때의 나이가 85세요, 법랍(法臘)은 65세였다. 그때 기이한 향기가 온 방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대사가 저술한 문집(文集)은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대사의 사람 됨됨이를 보면 얼굴은 헌걸찼으며 지혜는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다. 집에 있었을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입산(入山)해서는나쁜 짓으로 지은 허물이나 번뇌의 더러움에서 벗어나 깨끗함으로 불법(佛法)을 지켰다. 그리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정성도 타고난 본성(本性)이었다. 무업에게 무고를 당하는 환란을 만났지만 감옥에 갇혀있는 가운데에서도 선조의 알아주는 은덕(恩德)을 입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의병을 일으켜서 나라의 군대를 도와 삼경(三京)을 수복(收復)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초연히 승복(僧服)을 입고 마침내 예전에 지내던 절로 돌아왔다. 대사의 몸과 마음은 구름과 달처럼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으며, 다시 선정(禪定)을 닦아 진실무착(眞實無着)하여 번뇌(煩惱)의 굴레를 벗어난 정토(淨土)를 관조(觀照)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영웅의 풍도(風度)는 무너진 풍속을 깨트리고 나약한 자와 완악한 자를 세우기에 충분하였으니, 지난 시대에서 찾아보아도 더불어 대사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를 밝혀서 효도를 넓히고 이를 가지런히 하여 충성을 구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의승(義僧)이었으나 뜻은 공리(功利)에 있었다. 그러니 마음과 자취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또한 어찌 따질 것이 있겠는가.
아! 지금 세상에 모든 승려를 통틀어보아도 기이하고 준걸(俊傑)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교에 몸담고서 기꺼이 허무적멸(虛無寂滅) 속에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있는 자가 무릇 몇 사람이겠는가? 만약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위급한 상황을 당하여서 불교의 계율(戒律)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대의(大義)에 힘써서 우뚝하게 대사가 했던 것처럼 공로를 수립한다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장차 어떠하겠으며, 또 이교라고해서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대사가 입적한 지 이제 수백 년이 되어 조정(朝廷)이 특별히 표창하는 은전(恩典)을 내리는 것은 풍교(風敎)를 수립하고 인심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니, 남붕은 힘쓸지어다.
대사의 문장(文章), 학문의 경지(境地), 의발(衣鉢)의 전수(傳授), 법파(法派)는 문충공이 지은 비문 안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생졸(生卒)과 출처(出處)의 시종(始終), 의병을 일으켜서 난리를 평정한 전말(顚末)에 대해서만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와 같이 명(銘)한다.

산천(山川)의 정기(精氣)를 받아
남과 달리 모습 빼어났네.
신선 할미 꿈에서 점지(點指)하고
신비한 노인 이름을 지어주었네.
아리따운 몸에 잉태(孕胎)하였으나
불가(佛家)의 영명(英明)한 성품 지녔네.
정신은 빼어나고 기운은 맑으며
기골(氣骨)이 준수(俊秀)하였네.
금 빗(金篦)으로 광명(光明)을 내고
옥 털이개(玉拂)로 신령(神靈)을 모았네.
나라(那羅)의 도리를 깨달았고
사생(死生)의 이치를 느끼었네.
마침내 법석(法席)에 오르니
마니주(摩尼珠)가 중생(衆生)을 비추었네.
뜻밖에 감옥에 갇혔으나
대사의 시(詩) 성상(聖上)께 진달(進達)되었네.
성상께서 손수 그린 그림 내려주는 은전을 입으니
영광이 천추(千秋)에 빛나네.
입으로는 불경(佛經)을 외우지만
뜻은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데 있었네.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미치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네.
단(壇)에 올라가서 대중(大衆)에게 맹세하니
병사들 구름처럼 모였네.
명나라의 군대 도와
저 더러운 왜적을 소탕하였네.
용기를 북돋아 어가(御駕)를 맞이하여
우리 수도(首都)로 돌아왔네.
충의(忠義)가 해처럼 빛나니
중국과 오랑캐 모두 놀랐네.
공(功)을 이룬 뒤 벼슬을 버리고
구름 낀 산사(山寺)로 돌아왔네.
담운(曇雲)은 바리(鉢)에서 생기고
법월(法月)은 병 속에 있네.
삼몽사(三夢詞) 지어 읊은 옛날의 게송(偈頌)
또한 오래도록 빛날 만하네.
인간 세상의 영화(榮華)와 치욕(恥辱)은
꿈같은 환상이라는 것 알았네.
사리(舍利) 구슬 신령하고
부도(浮屠) 탑 우뚝 솟아있네.
아주 오랜 법맥(法脈)
광명(光明) 사라지지 않았네.
영취산에 사당 세워
충정(忠貞)을 드러내었네.
일체 같이 제사하니
스승과 제자 함께 흠양하네.
공(功)은 공신각(功臣閣)에 기록되고
도(道)는 불당(佛堂)에서 존숭되었네.
한 조각 곧은 돌에
만대(萬代)토록 아름다운 이름 남기리라.

상위(相位)
영의정(領議政) 청사(淸沙) 김공재노(金公在魯), 좌의정(左議政) 장밀(藏密) 송공인명(宋公寅明), 우의정(右議政) 해촌(海村) 조공현명(趙公顯命)

판위(判位)
이조판서(吏曹判書) 조공상경(趙公尙絅), 호조판서(戶曹判書) 윤공양래(尹公陽來), 예조판서(禮曹判書) 윤공순(尹公淳), 병조판서(兵曹判書) 박공문수(朴公文秀), 형조판서(刑曹判書) 김공시형(金公始炯), 공조판서(工曹判書) 박공사수(朴公師洙), 한성판윤(漢城判尹) 민공응수(閔公應洙)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 이공기진(李公箕鎭), 관찰사 조공명겸(趙公明謙), 관찰사 정공익하(鄭公益河), 관찰사 심공성희(沈公聖希), 관찰사 김공상성(金公尙星)

본부(本府)
부사(府使) 임공수적(任公 守迪), 부사 윤공무교(尹公愗敎), 부사 이공현보(李公玄輔)

사림(士林)
생원(生員) 손석관(孫碩寬), 학생(學生) 박세구(朴世矩), 유학(幼學) 이의룡(李宜龍), 학생 신명윤(申命胤), 생원 조하위(曺夏瑋), 유학 성덕주(成德周), 유학 신응악(申應岳)

종장(宗匠)
청운(淸運), 약원(若垣), 뇌진(雷震), 두혜(杜惠), 만훈(萬薰), 정혜(定慧), 선정(宣定), 수안(秀眼), 체정(軆淨), 굉활(宏活), 새봉(璽封), 일영(日暎), 해원(海源), 최백(最栢)

유사(有司)
학림(鶴林), 희유(禧有), 신혜(信惠), 청인(淸印), 명학(明學)

선장(禪匠)
일종(一宗), 진기(震機), 낭총(朗聰), 진정(眞淨), 쾌선(快善)

행유사(行有司)
혜문(惠文), 광혜(廣惠), 최만창(崔萬昌), 김여창(金麗昌)

수어(守禦)
송시성(宋時聖), 김창린(金昌獜), 강후상(姜後尙), 정취도(丁就道), 황해징(黃海澄), 엄세득(嚴世得)

예조(禮曹)
엄한붕(嚴漢鵬), 고세유(高世瑜), 문중욱(文重郁)

본사(本司)
도내 도총섭(道內都摠攝) 해숙(海淑), 북한 도총섭(北漢都摠攝) 성능(性能), 남한 도총섭(南漢都摠攝) 문욱(文旭), 전(前) 총섭(摠攝) 취안(翠眼), 전 승통(僧統) 최일(最日) · 해능(海能)

본부(本府)
권한장(權漢章), 김용손(金龍孫), 김유형(金有享)

본영(本營)
중군(中軍) 서윤(瑞胤), 중군 원매(垣梅)

본도(本道) 전(前) 공원(公員)
찬화(贊和), 능옥(能玉), 세조(世照), 순기(順基), 시재문(時載文)

사판 공원(事判公員)
전 총섭 축전(竺詮), 의현(義玄), 원주(垣珠)

승손(僧孫)
일행(一行), 쾌인(快印), 허징(處澄), 처화(處華), 수현(秀玄), 일환(一還), 숭원(崇遠)

본경내(本境內)
경주진(慶州鎭) 채원(彩遠) · 의근(義根), 대구진(大邱鎭) 순해(順海) · 학휘(學輝), 상주진(尙州鎭) 관기(寬機) · 성휘(性輝) · 최연(最演), 안동진(安東鎭), 진주진(晋州鎭) 철웅(哲雄) · 총일(摠日), 김해진(金海鎭) 현철(玄哲) · 청안(淸眼), 호남승통(湖南僧統) 초문(楚文), 성주진(星州鎭) 종익(宗益) · 금일(錦日), 선산진(善山鎭) 태영(太英) · 언총(彦聰), 동래진(東萊鎭) 관정(管晶) · 진오(眞悟), 칠곡진(漆谷鎭)

간선(幹善)
영인(靈印), 지성(智性), 각신(覺信), 귀열(貴悅), 희철(熙哲), 근오(根悟), 일엽(一燁), 쌍흡(雙洽), 귀숙(歸淑), 기징(旣澄), 인원(印遠), 선인(善印), 맹흡(孟洽), 석안(碩眼), 신엄(信嚴), 유변(裕卞), 만선(萬善), 석잠(碩岑), 좌석(坐石), 태성(太性), 낭백(朗伯), 세홍(世弘), 초인(楚印), 청현(淸現), 준변(俊卞), 쾌숙(快淑), 일주(日珠), 석천(碩天), 추안(湫鴈), 예운(曳運)

본원(本院)
승통(僧統) 최심(最心) · 화상(和尙) · 여화(呂華), 서기(書記) 민한(敏漢) · 해관(海寬), 선전재(禪傳齋) 원준(圓俊) · 윤언(允言) · 치화(致和) · 희성(希性), 교전재(敎傳齋) 상현(尙玄) · 희율(希律) · 순화(順華) · 처준(處俊) · 세홍(世弘) · 요금(了岑)

신단(神丹)
김득해(金得海), 방헌(芳憲), 강담사리(姜淡沙里), 서계창(徐戒昌), 기주(基主) 최준종(崔俊種), 두유원(杜有元)

기궐(剞劂)
귀윤(歸允), 국행(國行), 굉열(宏悅), 관청(管淸), 오한백(吳漢伯), 장서권(張瑞權), 도순(道淳), 이혜(怡惠), 세붕(世鵬), 관해(管海), 한초(漢楚)

부석(浮石)
비석도감(碑石都監) 전 총섭 초윤(楚玧), 물재도감(物財都監) 전 승통 유찰(裕察), 전공물재도감(典供物財都監) 처관(處寬), 행 유사 겸 도서기(行有司兼都書記) 선문(善文), 감후(監後) 국원(國垣) · 유흡(裕洽) · 학익(鶴益), 전곡(典穀) 연성(演性), 건사(建祠) 남붕(南鵬), 유사(有司) 기(琦), 종정(宗正) 대우(大愚), 주관(主管) 연초서(演初書)

재임(齋任)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13권
 비명(碑銘) 9수(首)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병서


서산(西山) 청허대사(淸虛大師)가 입멸(入滅)하고 나서 28년이 지나 그 법사(法嗣)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해안(海眼), 쌍흘(雙仡) 등이 묘향산(妙香山)과 풍악산(楓岳山)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때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호) 이상공(李相公)이 명(銘)을 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영골(靈骨)을 이제 이곳에 봉안하기는 하였다마는, 속세에서 출가하여 법을 얻으신 것으로 말하면 실로 남쪽 지방에서 비롯되었고 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야말로 스승께서 일찍이 주석(駐錫)하신 곳이니, 뭔가 글을 남겨 두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에 해안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서 쌍흘이 대표로 나의 집을 찾아와 나에게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임제(臨濟)로부터 18대를 전해 내려와 석옥 청공(石屋淸珙)에 이르는데 여조(麗朝)의 국사(國師)인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실로 석옥의 법을 전수 받았고, 이로부터 다시 6대를 전하여 우리 스승에게 이르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여래(如來)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중국에 전해졌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60여 세 만에 우리 스승에게 부촉(咐囑)되었는데, 그 원류(源流)가 이처럼 심원하니 이런 내용으로 명(銘)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에 대해서는 내가 본디 배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실제로 그렇게 주고받는지를 내가 장차 어떻게 알아서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자, 쌍흘이 다시 말하기를,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나 안팎으로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인데, 예로부터 공문(空門 불가(佛家))의 기숙(耆宿)들 가운데에는 왕사(王事)에 힘을 쏟은 분들이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우리 스승께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납자(衲子)의 신분으로 한마디 말씀을 올렸다가 성조(聖祖 선조(宣祖)를 말함)의 지우(知遇)를 받고 임금의 글을 받는 은총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왜란(倭亂)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마침내 의(義)를 위해 떨쳐 일어나 무리를 한데 모은 뒤 명(明) 나라의 정토(征討) 사업에 협조하여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움으로써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모두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스승의 마음으로 말하면 어찌 일찍이 작위적(作爲的)인 요소가 하나라도 있었던 것이겠는가. 인연을 따라 행동하다 보니 그렇게 공적이 탁월하게 나타난 것일 뿐으로서 공유(空有)에 처한 마음이 충의(忠義)의 일로 빛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감히 이런 점들을 빙자하여 굳이 청하게 된 것이다.”
하기에, 내가 훌륭한 말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응낙을 하고 그 행장을 펼쳐 보았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그의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서 그 계보가 완산(完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법에 저촉되어 안주(安州)로 옮긴 뒤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내었다. 모친 김씨(金氏)가 대사를 임신했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태어난 지 3년이 지났을 때 홀연히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이 보고 싶어서 왔다.”
하고는, 마침내 아이를 끌고가 몇 마디 주문(呪文)을 외웠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이름은 운학(雲鶴)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어디로 간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 노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불사(佛事)와 관계되는 일이었다. 조금 자라나면서부터 풍신(風神)이 빼어났으며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주목(州牧)의 사랑을 받으면서 기동(奇童)이라고 일컬어졌다.
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주목(州牧)이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내전(內典 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出家)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낙발(落髮)을 하고 일선 화상(一禪和尙)에게서 수계(受戒)를 하였으니, 이때가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 35)으로서 대사의 나이 21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뒤이어 영관대사(靈觀大師)를 참예(參詣)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러다가 뒤에 시골 마을을 유행(游行)하던 도중 한낮에 우는 닭 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평생 바보같이 살아갈망정 문자 가르치는 선생 노릇 안 하리라.”
하고는, 붓을 들어 낙엽에 시를 짓기를 ‘머리털은 희어져도 마음은 희지 않는 것을 옛사람 일찍이 밝혀 놓았지. 이제 닭 울음 소리 한 번 듣고는 대장부 해야 할 일 모두 끝냈네[髮白心未白 古人曾漏洩 今聽一聲鷄 丈夫能事畢]’라 하였다.
이로부터 관동(關東) 지방의 명산(名山)들을 뜬구름처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경사(京師)에 들어간 기회에 선과(禪科)에 응시해서 선발되었으며, 계속 승진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는 옷을 떨치고 풍악산(楓嶽山)에 들어가서 삼몽음(三夢吟)을 지었다.
일선 화상(一禪和尙)이 입적(入寂)할 즈음에 참언(讖言)을 남기기를 ‘누구엔가 주어야 할 나의 옷 한 벌, 나무 인형들이 푸른 눈빛 다투누나. 다리가 누군들 없을까마는, 남쪽 바다에서 누가 오리라.[單衣有債 木人爭靑 不是無脛來自南溟]’ 하였는데, 때마침 대사가 모처(某處)에서 이르러 화상의 사리(舍利)에 기도를 하니 신령스럽게 반응하며 환하게 빛이 났다.
대사가 비록 자취를 감추고 광채를 감췄으나 도인(道人)으로서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진 결과 괜히 뻐기면서 아만(我慢)에 사로잡힌 무리들까지 소문만 듣고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서로 다투어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다.
기축년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요승(妖僧)이 무함하는 바람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으나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 대답이 명쾌하였을 뿐 아니라 선묘(宣廟) 역시 평소 그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를 인견(引見)하여 어제(御製)의 절구시(絶句詩) 1수와 어화(御畫)로 된 묵죽(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는데, 대사가 그 즉시 시를 지어 바치며 사은(謝恩)을 하자 상이 더욱 칭찬을 하며 상을 후하게 내린 뒤 산사(山寺)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묘가 서쪽으로 피난을 하자 대사가 산에서 내려와 행재(行在)에 가서 알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뿌리며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이 갸륵하게 여기면서 대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에 대사가 여러 상족(上足)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승병(僧兵)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정(唯政)은 관동(關東)에서 일어나고 처영(處英)은 호남(湖南)에서 일어나 권공 율(權公慄)과 병력을 합친 뒤 행주(幸州)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대사 자신은 문도(門徒) 1천 5백인을 이끌고 중국 군사를 따라 진격해서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이때 명(明) 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삼협(三協) 총병(摠兵) 이하 장좌(將佐)들이 대사의 이름을 듣고서 다투어 첩(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시(詩)를 증정하여 찬미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경성을 수복하고 나서 상이 장차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적에 대사가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호가(扈駕)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
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대사가 일단 묘향산(妙香山)에 돌아오고 나서는 무심하게 한가이 지내는 하나의 도인(道人)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갑진년 정월 23일에 장차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入寂)하려고 하였는데, 이날 가마를 타고서 폭설(暴雪)이 내리는 가운데 가까운 산의 암자들을 두루 찾아가 부처에게 절하고 설법을 한 뒤, 방장실(方丈室)에 돌아와 얼굴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서 불전(佛前)에 분향(焚香)을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잡고 자신의 화상(畫像)에 직접 제(題)하기를 ‘팔십년 전에는 그가 나로 되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그로 되는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하고, 또 글을 써서 유정과 처영 등 두 문인과 작별을 하고는 가부좌(跏趺坐)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대사의 세수(世壽) 85세요, 선랍(禪臘)은 65세였다. 특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사유(闍維 다비(茶毘) 즉 화장(火葬)임)를 행하여 영골(靈骨) 1편(片)과 사리(舍利) 3립(粒)을 얻었으므로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다 탑(塔)을 세워 봉안하였다. 그리고 유정(唯政)과 자휴(自休) 등이 또 정골(頂骨)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와서는 사리 몇 과(顆)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언덕에 모셨다.
대사는 젊었을 적에 영관(靈觀)에게서 법을 얻은 뒤로 근대(近代)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종풍(宗風)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제자가 1천여 인이나 되는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들만도 70여 인에 달하였으며, 후학을 영도하면서 일방(一方)의 종주(宗主)가 된 자들 역시 4, 5인을 밑돌지 않았으니, 정말 성대했다고 할 만하다. 만년(晚年)에 이르러서는 통탈자재(通脫自在)한 면모를 보여 주었는데, 이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는 무리들이 계(戒)를 뛰어넘는 행동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식자들은 이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사가 저술한 《선가귀감(禪家龜鑑)》ㆍ《선교석(禪敎釋)》ㆍ《운수단(雲水壇)》ㆍ《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총림(叢林)에 유행되고 있는데, 그 시게(詩偈)를 보면 상랑(爽郞)하면서 놀랄 만한 말들이 많고 필적(筆跡) 또한 소경(疏勁)하여 운치가 있다고 한다. 행장에 서술된 내용이 대략 이와 같은데, 이쯤되면 또한 두루 구비되었다고 할 만하다.
아, 대사의 환신(幻身)은 이미 변화되어 티끌로 돌아갔지만 환(幻)이 아닌 그 무엇은 변화되어 사라진 적이 일찍이 없었으니, 한 조각 돌에 몇 장의 글을 새긴다 한들 대사를 불후(不朽)하게 하는 일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그 도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보면 차마 그 자취를 민멸(泯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려는 그 문도들의 마음씨야말로 진정 근실하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세교(世敎)에서도 또한 수긍하고 있는 바이다. 장주(莊周)가 말하기를 ‘꼭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경우가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에 마침내 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처의 심인(心印) / 諸佛之心
조사가 전하였고 / 祖師傳之
조사의 의발(衣鉢) / 祖師之傳
청허가 받들었네 / 淸虛延之
청허의 경지 / 淸虛之學
본래면목(本來面目) 투득(透得)하여 / 得乎天全
한 올 걸림 없는 것이 / 一絲不罣
연못 속의 물고기라 / 如魚在淵
반쪽 게송에 철저히 깨닫고서 / 半偈徹聞
성인의 마음 말없이 계합(契合)했고 / 嘿契聖心
임금이 친서(親書) 내려 은총을 쏟아줌에 / 宸翰寵賁
그 영광 총림을 진동시켰네 / 光動叢林
국난당하여 의승군(義僧軍) 일으켜서 / 遘難奮義
나라의 중흥 협찬한 결과 / 贊我中興
존자(尊者)의 칭호 하사받았나니 / 錫號國一
그 영예 누구도 겨룰 수 없었어라 / 莫之與京
죽이고 살리는 일 방편이 자재(自在)하고 / 殺活自由
숨고 나오는 일 장애가 없어 / 隱見無累
세간과 출세간 두 가지 일을 / 世出世間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도다 / 兩盡能事
인연 다하여 이 세상 떠났으나 / 緣盡而逝
비유하면 다른 섶에 불을 다시 지핌이라 / 譬彼薪火
망망한 삼계 가운데에서 / 茫茫三界
누가 그이며 누가 나일런고 / 誰渠誰我
허깨비 같은 육신이야 사라졌어도 / 幻化雖滅
곡두 아닌 당체(當體)는 원래가 여여(如如)한 법 / 非幻自如
명산에 세워진 사리탑 속에 / 名山石龕
영롱한 사리 구슬 모셔져 있네 / 永閟玄珠
신령스런 이 구역 돌아다보니 / 睠玆靈區
실로 깨달음의 도량(道場)이라 할 만한데 / 實惟覺場
옥돌에 그의 행적 이곳에 새겨 / 鑱珉紀蹟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 하는도다 / 昭眎無疆


 

[주D-001]삼몽음(三夢吟)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의 꿈 이야기 손에게 말을 하고, 손의 꿈 이야기 주인에게 말을 하네. 지금 꿈 얘기 하는 두 사람 역시, 사실은 꿈속의 사람이라오.[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주D-002]꼭 …… 일이다 : 《장자(莊子)》 재유(在宥) 끝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다른 …… 지핌이라 : 생명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장작불 다 타들어 가도 불씨는 영원히 꺼질 줄을 모른다.[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