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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최공 문성공 8세손 공조정랑 휘 沫 선조님의 후손 판서 선무공신 길창군 권협 관련자료

아베베1 2013. 3. 2. 11:11


 




   
 전주최공 문성공   8세손 공조정랑 휘 沫 선조님의 외손
 사위     길창부원군 선무공신    권협,
 외손     증 좌의정 군수  길흥군 권신중  
 외증손  길성위 권대임 묘지명    권대임     


 -  전주최공 문성공파 
  시조공   문성공 고려문화시중       (휘)  아
   2세       중랑공     휘  용봉
   3세       사온동정   휘 을인                                   양촌 권근의 후손 
   4세      문과 호조참의    휘 담                                양촌선생은 문성공 5세손 휘 광지 직지 덕지의스승  
   5세      문과 집현전제학  휘 광지
   6세                      휘  생명    휘  도명   휘 성명  
   7세     고궁당 진사 휘 수손 (享祀 부안 행안서원)
   8세    사간원헌납   휘 극성                              

 

                                                                              권상 (동지중추부사) 

   9세    공조정랑      휘 말---------- 
                                         사위  문과 길창부원군  판서 권협  (부인 종실 전주인 이상필 여) 
                                         외손 군수 증 영의정 길흥군 권신중  - 아들 권대임 (길성위) 상정선옹주
                                         선조대왕 정빈민씨 출 (선조 대왕의 사위)  

                                         외손               생원  찰방                    권필중   자 권대덕 무과 부사 
                                                               현감                           권경중     
                                                               현감                           권정중-  자 권대윤 군수 
                                                               현감                           권근중 - 자 권대운 문과 영의정 
                                                               현감                           권번중
                                                               현감                           권위중  -자  권대제 문과 판서  
상기의 내용에서 볼수 있듯이 두가문은 이름이난 가문의 혼인 관계임을 알수가 있다
양촌 권근의 선생의 8대 제자중에 전주최공 5세손 휘 광지,직지, 덕지 공이 문화생으로 3형제분이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4제학의 집안의 내력과 혼인 이전에 상호 가문에 대한 내력을 잘 알 수 있었기에
 혼인이 이루어진듯하다 ..    
 양촌 권근 선생을 조선개국 공신으로 안동 권문의 명문가 집안으로 잘 알려진 집안이다
  점점 연구를 하여 여러가지를 공부하여야 할둣 하다..
 이후 몇대를 내려가서 문성공 13세손 양정제공 미백 13대 조고와 안동인 권상하 선생과 인연이 되어
우제선생인 송시열 선생의 문화생으로 안동인 권선생과 학문을 배우고 논하는 사이가 된것으로 보아서는
 수백년을 이어오는 인연이 아닐까 생각 되는 부분이다.    
     

 
 
 
 
 
 
 
 
 
 



 
백사집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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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증(贈)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 행(行)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권공(權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금상(今上)이 즉위한 지 17년째인 계미년에 한(漢) 나라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했던 전례(典例)를 원용하여 선공감 정(繕工監正) 권상(權常)을 통정(通政)에 특진시켰는데, 그로부터 4년 뒤에는 나이 80세로 가선(嘉善)에 증질(增秩)되어 마침내 삼세(三世)를 추은(推恩)하여 차등 있게 관작이 추증되었다. 그리하여 고(考) 전생서 참봉(典牲暑參奉) 휘 진(振)에게는 호조 참판이, 왕고(王考) 사도시 부정(司䆃寺副正) 휘 욱(旭)에게는 승정원 좌승지가, 증고(曾考) 호조 좌랑(戶曹左郞) 휘 온(溫)에게는 통례원 좌통례가 각각 추증되었다.
그리고 모든 큰 연향(燕饗)이나 조청(朝請) 때에는 수레를 타고 출입하도록 윤허하였고, 지위는 상서(尙書)의 밑에 있었으나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으로 천하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그 여문(閭門)을 지나는 사대부들이 모두 경례(敬禮)를 하며 말하기를,
“아, 훌륭하도다. 한 사람에게 관작을 내림으로써 온 세상의 부자(父子) 된 사람들이 다 흥기되었다.”
고 하였다.
그로부터 16년 뒤인 갑진년에는, 공의 아들 협(悏)이 일찍이 천조(天朝)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병난(兵難)을 구하는 데에 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고, 또 형 희(憘)와 함께 행행하는 어가를 관서(關西)에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아울러 책록됨으로써 거듭 작경(爵卿)에 봉해지고 예질(禮秩)이 삼공(三公)에 준하였으니, 생존시의 영화로움과 사후의 귀현함을 그 누구와 높낮이를 겨루겠는가.
아들 협이 이미 자헌(資憲) 품계에 올라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면서 내 집을 찾아와 나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인하여 행장(行狀)을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의당 명(銘)을 지어 주어야겠다.”
고 하였다.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니, 내용은 이러하다.
공의 자는 길재(吉哉)이다. 그 시조(始祖) 김행(金幸)이란 분이 견훤(甄萱)의 난리 때에 고창군(古昌郡)을 지키면서 스스로 신라(新羅)의 후손이라 하여 종국(宗國)이 패망함을 분개하게 여기고 고창군으로써 여조(麗祖)를 맞이하여 복수(復讐)의 계책을 세우니, 여조가 병기 달권(炳機達權)한 사람이라 하여 공에게 권(權)으로 사성(賜姓)하고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그 후로 덕을 쌓고 상서를 길러 세대마다 위인(偉人)이 있었다. 휘 보(溥)에 이르러서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다섯 아들과 세 사위가 모두 훈작(勳爵)을 받았으므로, 당시에 일문구봉군(一門九封君)의 경사로 일컬어졌다. 그로부터 팔세(八世)를 지나 참판공에 이르러 사의(司議) 신회(申澮)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덕(正德) 3년 모갑(某甲)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막 나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 어렸을 적에도 장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7세 때에는 참판공이 별세하자 마치 성인(成人)처럼 호곡(號哭)하였고, 무엇을 애써 쫓아가는 듯한 표정으로 조석(朝夕)의 전(奠)을 거행하면서 3년 동안을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날마다 신 부인(申夫人)의 슬하에 있으면서 부인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볼 적마다 문득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울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부인이때로는 공 때문에 슬픔을 절제하였다. 그래서 부인이 항상 공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는 후일에 의당 효(孝)로 명성을 이룰 것이다.”
고 하였다.
교리(校理) 이충건(李忠楗)은 명성 높은 기묘인(己卯人)으로 사림의 의표가 되었는데, 일찍이 공의 빼어난 재주를 사랑하여 공에게 유의(幼儀)를 가르치니, 감발(感發)할 바를 알았다. 그리고 자라서는 장음(長吟) 나식(羅湜), 급제(及第) 나숙(羅淑)ㆍ나익(羅瀷) 등과 서로 친구가 되어 좋게 지냈다.
무자년에는 진사가 되어 궁리(窮里)에서 곤궁함을 참고 있었으므로, 이웃 사람들도 공의 얼굴 보기가 드물었다. 그런데 하루는 문 밖에 관인(官人)이 제서(除書)를 가지고 와서 기쁜 소식을 알리며 말하기를,
“문소전 참봉(文昭殿參奉)이 되었습니다.”
하니, 가인(家人)들이 서로 의아해하면서 오보(誤報)라고 하였는데, 그 후 알고 보니, 낭관(郞官)이 공의 재행(才行)을 천거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낭천(郞薦)을 중히 여겼으므로 명성 높은 사람이 아니면 감히 참예할 수 없었는데, 공 같은 이는 스스로 재능을 숨기는데도 명성이 더욱 드러나니, 담론하는 이들이 “깊은 골짜기 난초의 향기가 멀리 퍼졌다.”고 하였다.
기묘년에는 직장(直長)으로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축년에는 의금부 도사에서 한성부 참군에 승진되었다가 이윽고 천거로 사옹원 주부가 되었다. 이어 운봉 현감(雲峯縣監)으로 나가서는 부지런하고 신중하며 청렴하고 검약하게 처신하면서, 흉년이 들자 음식물을 줄이고 용도를 절약하여 궁핍한 백성을 구제하고 산업에 안처하게 해서 유랑민들을 모아들이어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점유하게 하니, 전지(廛地) 받기를 원하여 안착한 백성들이 서로 연달았다.
그 후 본도(本道)의 문사(文士)로서 일찍이 사적인 일로 공에게 간청을 했다가 이루지 못한 자가 있어 다른 사항으로 공을 중상했다가, 공의 명성과 행실을 자세히 앎에 미쳐서는 즉시 부끄럽게 여기고 후회하여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불량한 짓을 한 것은 오직 권모(權某)를 탄핵한 한 가지일 뿐이다.”
고 하였으니, 그 남에게 존중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그 후 동부 주부(東部主簿),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용강 현령(龍岡縣令), 사옹원(司饔院)ㆍ예빈시(禮賓寺) 등의 판관(判官), 종친부 전섬(宗親府典籤), 광흥창(廣興倉)ㆍ풍저창(豐儲倉)ㆍ전설사(典設司) 등의 수(守),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선공감 정(繕工監正)을 역임하면서 이른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고, 끝내 효(孝)로써 드러났다.
공은 매양 기일(忌日)을 만날 적마다 반드시 기한에 앞서 어육(魚肉)을 단절하여 그 달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미쳐 이것으로 인하여 병이 나자, 가인(家人)이 어육을 들도록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장생(長生)하는 자가 있겠는가. 나는 이 정도로 죽으면 충분하다.”
하였다. 마침내 이질(痢疾)이 더욱 악화되어 기축년 7월 모일에 집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82세였다. 이해 9월로 날을 정하여 통진현(通津縣) 모산(某山)에 장사지냈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공은 나모(羅某)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큰아들 수()는 정묘년 문과에 장원하여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고, 다음 황(愰)은 병자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고양 군수(高陽郡守)가 되었으며, 다음 희(憘)는 갑신년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고, 다음 선(愃)은 무자년에 생원이 되었으나 요절하였으며, 다음 협(悏)은 정축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바로 나를 찾아와서 명(銘)을 요청한 사람인데, 이 사람과 그의 형 희는 나와 서로 좋게 지낸다. 큰딸은 학생 정희로(鄭熙老)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내금위 한부(韓孚)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현감 신길원(申吉元)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죽었다. 내외(內外) 제손(諸孫)이 60여 인이다.
공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생활은 매우 검박하여 초석(草席)을 깔고 자곤 하였다. 그러나 오직 어버이를 받드는 데에는 온갖 방법으로 봉양을 다하여 명한 바를 차질 없이 준비하였고, 밥상을 올릴 적에는 반드시 별도의 찬수(饌羞)를 더 마련해 올려서 친히 시저(匙箸)를 받들고 그 보드랍고 맛있는 것을 때에 맞추어 정성껏 봉양하였으되, 그 주방에는 그러고도 남은 고기가 있었다.
그리고 조석으로 어버이 곁에 있어 화락한 얼굴빛으로 모시었고, 밤이면 매양 친히 임석(袵席)을 정해 드리고 춥고 다스움을 살피었다. 부인(夫人)이 항상 몸이 편치 않았으므로, 공은 한 달 남짓 동안이나 허리띠를 풀지 않고 수저도 들지 않았으며, 그 질병이 조금 오래 감에 미쳐서는 밤마다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하여 자기를 대신 죽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부인이 수일 동안 점차로 소생하는 효과가 있자, 당시 사람들이 효감(孝感)의 소치라고 하였다.
그 후 상(喪)을 당함에 미쳐서는 공의 나이가 보드라운 음식을 먹어야 하는 50이 되었는데도 가슴을 치고 팔짝팔짝 뛰며 통곡하여, 지나친 슬픔으로 몸이 너무 야위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봉분(封墳)을 하는 데 남에게서 길 닦는 인부를 빌리지 않았고, 전(奠)을 준비하는 일도 남을 대신 시키지 않고 능숙하게 손수 집행하면서 일체 예(禮)에 의거하여 구차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묘의 곁에 여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날마다 두 번씩 성묘를 하였으며, 채과(菜果)와 염장(鹽醬)을 끊고 오직 거친 밥을 먹고 물만 마시다가 끝내는 뼈만 남도록 몸이 수척해지자, 사람들이 혹 위태롭게 여기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생명을 잃지 않게 된 것은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었겠는가.
장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옴에 미쳐서는 오직 조석의 상식(上食)을 그대로 거행하여 중지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말세(末世)의 실례(失禮)되는 행위인 줄은 잘 알지만 차마 갑자기 그만둘 수가 없다.”
하고, 마침내 종신토록 그 일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집에 있을 적에 무슨 일이 있으면 사당에 고하고 나서 행하였고, 밖을 나갈 적에는 어디를 다녀오겠다고 아뢰고 돌아와서는 배알(拜謁)하는 일을 마치 생존시에 부모를 섬기듯이 하였으며, 사당에 올리기 전에는 감히 새로운 음식물을 맛보지 않았고, 부모가 생전에 즐기던 음식은 언제나 물리치고 감히 먹지 않았으며, 제사(祭祀) 때나 삭망(朔望) 때에는 반드시 정을 다하고 신중을 다하여 정성껏 받들었다.
공은 홀로된 누이동생과 한 집에 살면서 화락하게 지냈는데, 의식(衣食)과 재용(財用)을 항상 누이동생에게 먼저 주고 자신은 나중에 가졌으며, 생질(甥姪)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여기어 혼수를 마련해서 장가들이고 시집보냈다. 그런데 남들이 집안에 별다른 일이 있는 줄을 몰랐기 때문에 40여 년 동안에 일찍이 털끝만큼의 이간하는 말도 없었다.
그리고 나라에 걱정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을 띠었고 심지어는 침식(寢食)을 폐하기까지 하였으며, 국기(國忌)에는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모두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나이 70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항상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선인(先人)을 장사지낼 때는 내가 유약(幼弱)하여 일을 보살피지 못했으므로, 그 광중(壙中)의 일에 대하여 지금도 마음이 몹시 아프니, 내가 죽거든 행여라도 후장(厚葬)하지 말아서 나의 지극히 슬퍼하는 마음을 부치어라.”
하였다. 또 항상 하는 말은 자기의 신심(身心)으로 좇아 깊이 연구하여 노력하는 것을 귀히 여길 뿐이었고, 세상의 마음을 화려하게 포장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경멸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남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욕심이니, 참으로 사욕만 극복한다면 저절로 천리(天理)와 부합되는 것이다.”
고 하였다.
만년에는 조용히 한 방에 거처하면서 자제들이 사적으로 알현할 적에도 또한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날마다 자제들과 경전(經傳)을 토론하면서 말하기를,
“인간의 즐거운 일이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느냐.”
고 하였다. 교칙(敎則)을 세운 것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 가정 교훈이 미친 바로 말하지면, 여러 아들이 서로 이어 조정에 들어갈 적에는 교유(交遊)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부지런히 봉공(奉公)할 일로 경계하였고, 오직 정숙함을 지키고 소탈하게 지내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나는 그 가장을 읽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다행히 남의 묘(墓)에 명(銘)을 쓰다가 본받을 만한 세 가지 도리를 얻었으니, 충효(忠孝)가 일치함과 우자(友慈)가 일치함과 지키는 데에 돈독하므로 직무에 성근(誠勤)할 수 있게 된다는 이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인도(人道)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도(天道)는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는 것이니, 어찌 이렇게 하고도 지위와 수명을 누리지 못하겠는가.
대체로 사씨(史氏)의 말을 익히 적는 사람들 가운데 잘 꾸미는 경우는 너무 실상에 지나치고, 어눌한 경우는 너무 질박하게 되니, 지금 나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할꼬. 그러나 너무 과장하여 실상을 없애 버리는 것이 어찌 질박하게 적어서 진실을 전하는 것만 하겠는가. 사실 그대로 서술함으로써 아름다움이 절로 드러난다는 것은 공을 두고 이른 말이라 하겠다. 더구나 나는 글도 잘하지 못하는데, 어찌 감히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삼가 그 가장에 따라서 서술하고 인하여 스스로 경계하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불은 기로 전해지는 것이니 / 火傳於氣
기가 미치는 곳은 아득히 멀고 / 氣所及者遐
나무는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라 / 木返於根
뿌리에서 다시 싹이 터 나오나니 / 根復萌爲芽
아, 오직 권군은 / 嗟維權君
대대로 효도를 그 집에 전하리라 / 維孝世其家

 









































권협(權悏)

 

조선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동지중추부사 권상(權常)의 아들.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고급사(告急使)로 명(明) 나라에 가서 원병을 청함.

시대: 조선후기   연도: 1553-1618


기언 별집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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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묘문(丘墓文)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공(權公)의 묘지명(墓誌銘)

공은 휘는 협(悏), 자는 사성(思省), 성은 권씨(權氏)로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다. 증조부 권욱(權旭)은 사도시 부정으로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고, 조부 권진(權振)은 전생서 참봉으로서 호조 참판에 추증되고, 부 권상(權常)은 지극한 행실이 있어 선조 때에 선공감 정에서 통정대부로 특진하였고, 또 수고(壽考)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뒤에 은혜를 미루어 영의정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 나운걸(羅云傑)의 딸로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봉되었다. 공은 명 나라 세종황제(世宗皇帝) 가정 32년(1553, 명종8) 5월 24일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서 재예(才藝)가 일찍 성취되었다. 24세 때에 정시(庭試)에서 제1인으로 발탁되고, 그 다음해 우리 선조 10년에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의 별칭)에 뽑혔다가 얼마 안 되어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사간원에 있을 적에 기축원옥(己丑冤獄)을 논핵하여, 좌상(左相) 정철(鄭澈)이 강계(江界)에 안치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상이 서도에 파천할 때에는 공이 집의(執義)로서 간하기를,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禮)에 한 나라의 임금은 사직(社稷)을 위해 죽고, 대부(大夫)는 백성을 위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비록 따르지는 않았어도 그 말에 감동하여 차고 있던 칼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이듬해 황제(皇帝 명 신종(明神宗))가 제독 이여송(李如松)을 파견하여, 남북 관병(官兵) 4만을 인솔하고 서경(西京 평양)을 수복할 때, 공이 어사(御史)로서 해서(海西 황해도), 경기(京畿) 등 도의 말먹이와 양곡을 수송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당시에 정철이 삼남 도체찰사(三南都體察使)로 기용되어 곧 상께 아뢰어 공을 종사관으로 삼았으나, 그는 공과 원한이 깊었던 터라, 당장에 유감을 풀어 버릴 생각으로 자신은 강화(江華)에 머물면서 공을 남방으로 보내어 병무에 관한 일을 다스리게 하니, 이때는 적의 서울 점거로 남방의 길이 통하지 않았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것이니,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왕이 욕을 당하는데 신하된 도리로 죽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때에 제독이 고양(高陽)에서 패전하고 왜적과 화의(和議)를 맺었으므로 모든 길이 비로소 통하였다. 공이 어사(御史)로서 호남(湖南)을 순무(巡撫)하다가 대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돌아왔다. 왜적은 그대로 남쪽 변방에 있으면서 다시 쳐들어오겠다고 하였는데, 정유년(1597, 선조30)에 과연 더 많은 군사로 우리나라를 침공하니, 인심이 크게 놀라 안팎이 소란하였다. 상(上)이 여러 신하 중에서 위급을 알리는 사신을 선발하였는데 공이 응교(應敎)로서 특별히 차출되어, 경사(京師 중국 서울)로 갈 적에 부사(副使)도 없이 전적으로 맡아 했다. 공이 명을 받고 곧 출발하여 30일 만에 경사에 당도하여 주문(奏文)을 올린 뒤에, 날마다 병부(兵部)의 군문(軍門 총병관(摠兵官)의 존칭)에게 우리나라는 허약하고 왜적은 강성하여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상황에 있음을 호소하였는데, 말만 했다 하면 눈물이 흘렀다. 군문이 지도(地圖 우리나라 지도)를 찾아내놓고, 이어서 우리나라의 성지(城池), 기계(器械), 병갑(兵甲), 저축과 왜병이 점거한 요해지를 묻자, 공이 지지(地誌)를 외어 여지도(輿地圖)를 그리고, 적의 침입로와 우리가 참패한 상황을 모두 갖추어 자세하게 열거하여 빠뜨린 계책이 없으니, 군문이 크게 기뻐하며 훌륭한 인재라 하였고, 좌우에 서 있던 군리사(軍吏士)까지도 놀라며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곧 주문을 거듭 올리고 성지(聖旨)를 받들어 남북(南北)의 수륙 관병(水陸官兵)과 산동(山東)의 양곡을 보내게 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사세가 다급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수송하는 길이 멀어서 반드시 서로 미치지 못할 것이니, 바라건대 우선 요동(遼東), 광녕(廣寧)에 있는 양곡과 영평(永平)에 있는 남병(南兵)을 보내 구원해 주십시오.”
하고, 근각(筋角 활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물건)과 초황(硝黃 화약을 만드는 데 사용됨)을 무역하기를 청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남북의 정병(精兵)을 징발하니 온 자가 1만 2천이었고, 뒤따라 온 대군(大軍)과 합하니 14만 명이었다. 겨울에 왜적이 경기에 육박하여 천병(天兵)이 이를 격퇴하였다. 적은 바닷가에 주둔하였는데 보루를 구축한 것이 6백 리를 잇달았으므로, 대군이 모두 남하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호조 참의로서 황해도 관찰사로 나아갔는데, 이때에 해우(海右 해서(海西))는 막 병란에 시달려 모든 것이 어지러운 데다가, 또 군대가 안정되지 않아 날마다 거기(車騎)가 길에 잇달았으므로 온갖 것을 수급해야 했다. 그러나 공은 몸소 부지런히 애써 장병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또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호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자년(1600, 선조33)에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아가서는 대란(大亂)이 처음으로 안정된 터라 주민의 노력을 덜어 주는 데 힘을 썼다. 3년 만에 승정원에 들어와 우승지가 되었으며, 2년 뒤 형조 참의로 승진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호조 참의가 되었다. 이때에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위차(位次)를 의정(議定)하였는데, 공이 원종(原從)에 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정유년에 왜적을 격퇴하고 병란을 진압할 적에 모(某)의 공력이 많았으니 원종에 둘 수는 없다.”
하고, 원공(元功) 3등에 기록하도록 명하고 효충장의 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는 호(號)와 가선대부의 품계를 하사하고, 길창군에 봉했다. 다음해에 대사헌으로서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전라도관찰사 겸 견성윤(全羅道觀察使兼甄城尹)이 되었을 때에, 정형(政刑)을 공평하게 하고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하였으며, 상국 김류(金瑬)가 속읍(屬邑)을 맡았을 적에 법에 걸려 축출당했으나 노여워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기를,
“청렴 정직하고 사심 없기가 옛 염문사(廉問使)와 같은 기풍을 지녔다.”
하였다. 정미년(1607, 선조40)에 조정으로 들어와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무신년에 상(上 선조)이 승하하였을 적에는 공이 상례 조상(喪禮詔相 조상(詔相)은 상례 때에 그 위의(威儀)를 알리는 것)을 관장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새로 즉위하고 정인홍(鄭仁弘)이 권세를 부리자, 선조 때의 공경(公卿)과 모든 근신이 교체되어 공도 예조 판서에서 파직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태묘(太廟)를 감수(監修)했다는 것으로 정헌(正憲)에 올랐으며, 갑인년(1614, 공해군6)에 신구(新舊)의 공신을 제향하고 숭정대부에 가자(加資)되어 1품에 오른 지 2년 만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으며, 2년 뒤 1월 27일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치니, 춘추가 66세였다. 부음을 아뢰니 의례에 따라 부조(賻吊)를 내리고 의정부 영의정 길창부원군으로 추증하였으며, 유사(有司)를 시켜 장례가 끝나기까지의 일을 돌보도록 하였는데, 분묘는 부평의 수탄(水呑)에 있다.
공은 젊어서 순천 도정(順川都正) 이관(李琯)에게 수학하여 수신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선부군(先府君)이 늘 교유(交遊)를 삼가고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는 훈계를 하였기 때문에, 공이 자신의 행동을 반드시 올바르게 하고 사람과 교제함에는 반드시 삼가서, 정의만을 행하고 이해를 돌보지 않았다. 조정에 40여 년 있는 동안 한결같이 관직에 태만하지 않는 것으로 경계를 삼았고 장중(莊重)하여 말이 적었고 거처를 반드시 엄숙하게 하였다. 3형제가 모두 높은 벼슬로 조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가문이 번창해도 늘 겸양하여 교만한 빛이 없었고, 한결같이 간결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부모가 노쇠해서는 언제나 조정에서 퇴근하면 반드시 곁에 모시고, 종일토록 섬기고도 오히려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상(喪)을 당해서는 상사에 성(誠)과 신(信)을 다하고도 예(禮)를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선공(先公 공의 아버지)의 상사 때에는, 공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경연(經筵)을 모신 날이 많았으므로, 상이 유사로 하여금 그 상사를 돌보도록 하고 은례(恩禮)를 매우 후하게 하니, 영광스럽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뒤 벼슬이 높아지고 나이 5, 60세가 되어서도 반드시 살아 계신 이를 섬기듯이 사랑을 극진히 하여, 수륙(水陸)의 맛 좋은 음식이 있으면 또한 천신(薦神 신주께 드림)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으며, 한 가지 일이라도 감히 효도를 잊지 않았는데, 자신이 생을 마칠 때까지 그 마음이 줄지 않았다. 아들이 없이 과부로 사는 누이가 있었는데, 꼭 한집에서 식사하도록 하여 부모가 보살피듯 하였으며, 나이 많은 형 지중추공(知中樞公)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여 입에 맞는 음식을 봉양하고, 때맞춰 의복을 장만해 드리는 등 모든 것을 그 뜻에 맞도록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녹봉(祿俸)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가난한 친척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고, 집에는 살림살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묻지 않았으며, 포용하는 마음이 돈후한 데다가 겸손하고 검소하여 선비들을 예우하였으며, 남의 허물은 말한 적이 없고 남의 잘한 일은 자랑하기를 좋아하였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이래로는 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면서 시사(時事)에 관한 일을 말하지 않더니, 병이 위독할 즈음에 대비(大妃 영창대군의 어머니)의 폐위를 의결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래도 부축 받아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한숨짓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인도(人道)가 사라졌다.”
하고, 형 참판공과 마주 대하여 개연(慨然)히 말이 없다가 지필(紙筆)을 가져다 두어 마디 말을 적어서 서로 보일 뿐이었다. 이때에 간하던 많은 사람이 모두 죄를 입자, 광해조 정승 한효순(韓孝純)이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정청(庭請)할 적에, 참판공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말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하고, 사절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니, 죄에 걸려 파직을 당하였다.
공은 평생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잘 알아 보았다. 한원(翰苑)에 있을 적에 동료 중에 정여립(鄭汝立)을 추천하는 자가 있었지만, 공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 사람의 명예가 날로 높아져서 온 세상에 따르는 자가 많았지만, 공과 집의(執義) 이경중(李敬中)만은 취하지 않았다.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추천한 자는 모두 죄를 입었지만, 공은 인정을 받아 선조가 매우 의지하고 신임하였다. 이분의 이력을 기술하면,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성균관의 전적ㆍ직강ㆍ사예, 호조 좌랑, 형조ㆍ예조ㆍ병조의 좌랑ㆍ정랑, 시강원 사서ㆍ문학(文學)ㆍ필선(弼善), 사간원의 정언ㆍ헌납, 사헌부의 지평ㆍ장령ㆍ집의, 홍문관의 부수찬ㆍ수찬ㆍ부교리ㆍ교리ㆍ응교ㆍ지제교를 지냈다. 정유년 사행(使行)에서 돌아온 후에는 승정원 우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 호조의 참의ㆍ참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사헌부 대사헌, 예조 판서, 도총부 도총관, 외직에 전보된 것이 통진ㆍ나주 두 고을, 방백으로 부임한 것이 황해ㆍ전라 등 도관찰사 두 번이었다.
부인은 최씨인데 관향은 전주로 사간원 헌납 최극성(崔克成)의 손녀요, 공조 정랑 최말(崔沫)의 딸이다. 부인은 평생에 말을 급하게 하거나 얼굴빛을 갑자기 바꾸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비복(婢僕)이나 천한 신분의 사람일지라도 꾸짖은 적이 없었고, 시부모를 섬기는 데에는 이미 벼슬이 높고 번창한 집안이었어도 반드시 몸소 음식을 만들어서 봉양하였으며, 정경부인에 봉하여졌다. 가정(嘉靖) 30년(1551, 명종6) 11월 3일에 태어나 만력(萬曆) 48년(1620, 광해군12) 11월 19일에 돌아가니 향년이 70세였다.
7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풍덕 군수(豊德郡守) 권신중(權信中), 의금부 도사 권필중(權必中), 연일 현감(延日縣監) 권경중(權景中), 사헌부 감찰 권정중(權正中),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 권근중(權謹中), 호조 좌랑(戶曹佐郞) 권심중(權審中), 진사 권위중(權偉中)이며, 사위는 이조 좌랑 유업(柳), 형조 참의 이시환(李時煥)이다. 군수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대임(權大任), 권대명(權大鳴), 권대식(權大式)인데, 권대임은 옹주(翁主 선조의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 정선옹주(貞善翁主))에게 장가가서 길성위(吉城尉)가 되었고, 사위는 박상빈(朴尙彬)이다. 도사는 6남 5녀가 있는데, 아들은 권대덕(權大德), 권대순(權大淳), 권대숙(權大淑), 권대주(權大胄), 권대하(權大夏), 권대화(權大華)요, 다섯 사위는 최진(崔璡), 이경회(李慶會), 정랑 윤유근(尹惟謹), 좌랑 이창현(李昌炫), 지여관(池汝寬)이다. 현감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대복(權大復), 권대장(權大壯)이요, 사위 2인은 현령 유중형(柳重炯), 이덕승(李德升)이다. 사어는 4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관찰사 권대운(權大運), 현감 권대윤(權大胤), 권대원(權大遠), 권대술(權大述)인데, 대윤은 중부(仲父) 감찰 권정중에게 양자로 갔으며, 사위는 사간(司諫) 이후(李垕), 이시계(李時繼), 송변(宋㺹)이다. 좌랑은 2남 3녀가 있는데, 권대민(權大敏), 권대익(權大益)이요, 사위 3인은 송도응(宋道凝), 이우(李), 노사민(盧思敏)이다. 진사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공산 현감 권대재(權大載)요, 사위는 이담(李墰), 최동로(崔東老), 이명린(李命麟)인데, 모두 생원(生員)이다. 증손과 현손까지 합하면 1백여 인이나 되니, 하늘이 반드시 후덕한 이에게 보시(報施)함이 실로 이와 같다.
공의 훌륭한 공로 중 그 큰 것만을 든다면, 나라가 크게 어지러울 때 온 힘을 다하여 산 넘고 물 건너 4천 리를 돌아다니면서 천자의 위령(威靈)을 감동시키고 대군을 동원, 왜적을 토벌하여 사직(社稷)을 보존한 것이다. 공이 이미 컸지만 스스로 말하지 않으니, 상(上)이 발탁하여 원공(元功)의 서열에 두게 하였다.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당하여 배척을 당한 것이 거의 10여 년이었으나, 얼굴에나 말에 근심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아가면 어진 이를 숨기지 않았고 물러서서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허물하지 않았으니, 《주전(周傳)》에 이른바 ‘충(忠)과 의(義)로써 나라와 국민을 구제하고 생을 잘 마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는 것이 공(公)을 두고 한 말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인에 독실하고 / 篤於仁
순수하고 충성스러워 / 純且忠
왕실을 위하여 / 勤王室
몸을 바쳤고 / 致匪躬
좋은 시기를 당해서는 / 際昌辰
높은 벼슬에 복록까지 누렸네 / 崇且亨
이정에 공로를 새기니 / 勒功彛鼎
그 이름 백대에 전해질 것이며 / 百代之名
또 저 하늘의 보답으로 / 又其天道之報
자손이 계속 번성하리 / 子孫之繩繩

[주D-001]기축원옥(己丑冤獄) : 선조 22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로, 당시 많은 인사가 사사(賜死)되거나 귀양 갔다.
[주D-002]이정(彛鼎) : 종묘에 사용되는 그릇에 새겨서 그 이름을 잊지 않도록 한다는 데서 인용된 말이다. 《禮記 祭統》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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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
신인본[新件] 선대 실록 편수관 명단

만력(萬曆) 임진의 변란에 춘추관(春秋館)과 성주(星州)·충주(忠州)에 분장(分藏)했던 선대조(先代朝)의 실록(實錄)은 모두 병화(兵火)로 불타 버렸고, 전주(全州)에 소장했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하였으므로 처음에는 해주(海州)로, 다음에는 영변(寧邊)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江華)로 옮겨 봉안하였다.
상(上)이 춘추관에 명하여 이 본(本)에 의거하여 3질을 인출(印出)하고, 구인본[舊件]은 강화의 마니산(摩尼山)에 보관하고 신인본[新件]은 춘추관과 안동(安東)의 태백산(太白山),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에 분장케 하였으며, 초본(草本) 1질은 강릉(江陵)의 오대산(五臺山)에 보관하게 하였다. 구인본은 5백 76권이고 신인본은 각기 2백 59권인데 이는 책의 장정에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역사(役事)는 계묘 7월에 시작하여 병오 4월에 완성하였다. 전후의 관원을 아울러 기록한다.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 이덕형(李德馨)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 윤승훈(尹承勳)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전양 부원군(全陽府院君) 신 유영경(柳永慶)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 신 기자헌(奇自獻)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신 심희수(沈喜壽)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연릉 부원군 겸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延陵府院君兼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신 이호민(李好閔)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숭정 대부(崇政大夫) 행 예조 판서 겸 지춘추관사(行禮曹判書兼知春秋館事) 연원군(延原君) 신 이광정(李光庭)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숭록 대부(崇祿大夫) 평천군 겸 지춘추관사(平川君兼知春秋館事) 신 신잡(申磼)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숭록 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세자 이사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議政府左贊成兼世子貳師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진원군(晉原君) 신 유근(柳根)
숭정 대부(崇政大夫) 행 예조 판서 겸 지춘추관사(行禮曹判書兼知春秋館事) 신 황진(黃璡)
수충 익모 수기 광국 공신(輸忠翼謨修紀光國功臣)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 겸 지춘추관사(判中樞府事兼知春秋館事) 무성군(茂城君) 신 윤형(尹泂)
숭정 대부(崇政大夫) 행 이조 판서 겸 지춘추관사 동지경연사(行吏曹判書兼知春秋館事同知經筵事) 양릉군(陽陵君) 신 허욱(許頊)
정헌 대부(正憲大夫)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 신 송언신(宋言愼)
추충 분의 협책 평난 공신(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 정헌 대부(正憲大夫) 한성부 판윤 겸 지춘추관사 오위 도총부 도총관(漢城府判尹兼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전성군(全城君) 신 이준(李準)
추충 분의 평난 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 정헌 대부(正憲大夫) 진흥군 겸 지춘추관사(晉興君兼知春秋館事) 신 강신(姜紳)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지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知春秋館事) 신 민몽룡(閔夢龍)
자헌 대부(資憲大夫) 행 동지중추부사 겸 지춘추관사(行同知中樞府事兼知春秋館事) 심 김신원(金信元)
자헌 대부(資憲大夫) 행 동지충추부사 겸 지춘추관사 오위 도총부 도총관(行同知中樞府事兼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신 서성(徐渻)
자헌 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 겸 지춘추관사(刑曹判書兼知春秋館事) 신 박홍로(朴弘老)
자헌 대부(資憲大夫) 공조 판서 겸 지춘추관사(刑曹判書兼知春秋館事) 신 윤돈(尹暾)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동지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春秋館事) 신 이정귀(李廷龜)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동지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春秋館事) 신 윤승길(尹承吉)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자헌 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 겸 동지춘추관사(議政府右參贊兼同知春秋館事) 금계군(錦溪君) 신 박동량(朴東亮)
자헌 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兵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事) 신 허성(許筬)
자헌 대부(資憲大夫) 행 동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 동지춘추관사(行同中樞府事兼知義禁府事同知春秋館事) 신 이시언(李時彦)
자헌 대부(資憲大夫) 행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춘추관사(行司憲府大司憲兼同知春秋館事) 신 박승종(朴承宗)
가의 대부(嘉義大夫) 호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戶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 신 홍이상(洪履祥)
가의 대부(嘉義大夫) 호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戶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 신 조정(趙挺)
가의 대부(嘉義大夫) 예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 신 정광적(鄭光績)
가의 대부(嘉義大夫) 예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 신 신식(申湜)
가의 대부(嘉義大夫) 호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戶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 신 권희(權憘)
효충 장의 선무 공신(効忠仗義宣武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길창군 겸 동지춘추관사(吉昌君兼同知春秋館事) 신 권협(權悏)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세자 우부빈객(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 신 오억령(吳億齡)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세자 우부빈객(吏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 신 한준겸(韓浚謙)
가선 대부(嘉善大夫) 형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刑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신 남이신(南以信)
가선 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춘추관사(司憲府大司憲兼同知春秋館事) 신 최천건(崔天健)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兵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 신 신흠(申欽)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兵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 신 이시발(李時發)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兵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 해창군(海昌君) 신 윤방(尹昉)
통정 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신 이수광(李晬光)
통정 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신 송응순(宋應洵)
통정 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신 홍경신(洪慶臣)
통훈 대부(通訓大夫)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신 홍식(洪湜)
통훈 대부(通訓大夫)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신 강첨(姜籤)
통훈 대부(通訓大夫)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신 황시(黃是)
통훈 대부(通訓大夫) 승문원 판교 겸 춘추관 편수관(承文院判校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수준(李壽俊)
통훈 대부(通訓大夫) 승문원 판교 겸 춘추관 편수관(承文院判校兼春秋館編修官) 신 신숙(申熟)
통훈 대부(通訓大夫) 승문원 판교 겸 춘추관 편수관(承文院判校兼春秋館編修官) 신 권경우(權慶祐)
통훈 대부(通訓大夫) 승문원 판교 겸 춘추관 편수관(承文院判校兼春秋館編修官) 신 윤경(尹暻)
통훈 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通禮院左通禮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윤양(尹暘)
통훈 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 겸 춘추관 편수관(通禮院左通禮兼春秋館編修官) 신 박동선(朴東善)
통훈 대부(通訓大夫) 봉상시 정 겸 춘추관 편수관(奉常寺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영(李瑩)
통훈 대부(通訓大夫) 봉상시 정 겸 춘추관 편수관(奉常寺正兼春秋館編修官) 신 홍치상(洪致祥)
통훈 대부(通訓大夫) 봉상시 정 겸 춘추관 편수관(奉常寺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조수준(趙守準)
통훈 대부(通訓大夫) 종부시 정 겸 춘추관 편수관(宗簿寺正兼春秋館編修官) 심 김권(金權)
통훈 대부(通訓大夫) 종부시 정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宗簿寺正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김순명(金順命)
통훈 대부(通訓大夫) 사옹원 정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司饔院正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윤의립(尹義立)
통훈 대부(通訓大夫) 사옹원 정 겸 춘추관 편수관(司饔院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조응문(趙應文)
통훈 대부(通訓大夫) 군기시 정 겸 춘추관 편수관(軍器寺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여유길(呂裕吉)
통훈 대부(通訓大夫) 내자시 정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內資寺正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수록(李綏祿)
통훈 대부(通訓大夫) 내섬시 정 겸 춘추관 편수관(內贍寺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송기(宋圻)
통훈 대부(通訓大夫) 사도시 정 겸 춘추관 편수관(司䆃寺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집(李潗)
통훈 대부(通訓大夫) 사도시 정 겸 춘추관 편수관(司䆃寺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조희보(趙希輔)
통훈 대부(通訓大夫) 군자감 정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軍資監正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안대진(安大進)
통훈 대부(通訓大夫) 군자감 정 겸 춘추관 편수관(軍資監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윤수민(尹壽民)
통훈 대부(通訓大夫) 군자감 정 겸 춘추관 편수관(軍資監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윤황(尹滉)
통훈 대부(通訓大夫) 제용감 정 겸 춘추관 편수관(濟用監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이경기(李慶禥)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行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신 조정립(趙正立)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行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신 이정혐(李廷馦)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보덕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世子侍講院輔德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송석경(宋錫慶)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보덕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世子侍講院輔德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유영근(柳永謹)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보덕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世子侍講院輔德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이덕형(李德泂)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통례원 상례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通禮院相禮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준(李埈)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사섬시 부정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司贍寺副正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문려(文勵)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예빈시 부정 겸 춘추관 편수관(行禮賓寺副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윤의(尹顗)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예빈시 부정 겸 춘추관 편수관(行禮賓寺副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진빈(李軫賓)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정협(鄭協)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심(李愖)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 교서관 교리 혜민서 의학 교수(行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校書館校理惠民署醫學敎授) 신 이선복(李善復)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유간(柳澗)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오백령(吳百齡)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김대래(金大來)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응교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교서관 교리(行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校書館校理) 신 유희분(柳希奮)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부응교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行弘文館副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신 박진원(朴震元)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필선 겸 춘추관 편수관(行世子侍講院弼善兼春秋館編修官) 신 조정견(趙庭堅)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필선 겸 춘추관 편수관(行世子侍講院弼善兼春秋館編修官) 신 이덕온(李德溫)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필선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世子侍講院弼善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지완(李志完)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사예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 교서관 교리(行成均館司藝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校書館校理) 신 정호선(丁好善)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사예 겸 춘추관 편수관(行成均館司藝兼春秋館編修官) 신 박효생(朴孝生)
통훈 대부 행 성균관 사예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成均館司藝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홍서봉(洪瑞鳳)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사예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 한학 교수(行成均館司藝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漢學敎授) 신 강홍립(姜弘立)
중훈 대부(中訓大夫) 행 성균관 사예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成均館司藝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이홍주(李弘胄)
중훈 대부(中訓大夫) 행 성균관 사예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成均館司藝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신원(李信元)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장악원 첨정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行掌樂院僉正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신 윤훤(尹暄)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장악원 첨정 겸 춘추관 편수관(行掌樂院僉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순경(李順慶)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장악원 첨정 겸 춘추관 편수관(行掌樂院僉正兼春秋館編修官)신 권형(權詗)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사재감 첨정 겸 춘추관 편수관(行司宰監僉正兼春秋館編修官) 신 이빈(李馪)
어모 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 겸 춘추관 편수관(行龍驤衛副護軍兼春秋館編修官) 신 경섬(慶暹)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이광윤(李光胤)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권진(權縉)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유시행(柳時行)
중직 대부(中直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성준구(成俊耉)
중훈 대부(中訓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권태일(權泰一)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兼春秋館記注官) 신 이윤징(李允澄)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조탁(曺倬)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신지제(申之悌)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兼春秋館記注官) 신 이충양(李忠養)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최기남(崔起南)
중훈 대부(中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김수현(金壽賢)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兼春秋館記注官) 신 신율(申慄)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兼春秋館記注官) 신 유성(柳惺)
봉렬 대부(奉列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兼春秋館記注官) 신 윤양(尹讓)
통덕랑(通德郞) 세자 시강원 문학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世子侍講院文學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조성립(趙誠立)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이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 혜민서 의학 교수(行吏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惠民署醫學敎授) 신 민경기(閔慶基)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예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禮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김지남(金止男)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예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禮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송보(宋)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예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禮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심집(沈諿)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병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 한학 교수(行兵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漢學敎授) 신 박엽(朴燁)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병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兵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박건(朴楗)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병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兵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유순익(柳舜翼)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형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刑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이현영(李顯英)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형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刑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심언명(沈彦明)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공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工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이춘영(李春英)
중직 대부(中直大夫) 행 병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兵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신요(申橈)
중훈 대부(中訓大夫) 행 병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兵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유경종(柳慶宗)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병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兵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유석증(柳昔曾)
봉렬 대부(奉列大夫) 행 이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吏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강주(姜籀)
봉렬 대부(奉列大夫) 행 예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禮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김정일(金鼎一)
봉렬 대부(奉列大夫) 행 병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兵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소광진(蘇光震)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이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 세자 시강원 사서(行吏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世子侍講院司書) 신 정입(鄭岦)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호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戶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송광계(宋光啓)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예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禮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조유한(趙維韓)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병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行兵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윤수겸(尹守謙)
통덕랑(通德郞) 병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兵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신 이형원(李馨遠)
통선랑(通善郞) 병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兵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이민성(李民宬)
봉직랑(奉直郞) 수 호조 정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守戶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윤광계(尹光啓)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직강 겸 춘추관 기주관(行成均館直講兼春秋館記注官) 신 원호지(元虎智)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직강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成均館直講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권반(權盼)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직강 겸 춘추관 기주관(行成均館直講兼春秋館記注官) 신 여우길(呂祐吉)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직강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成均館直講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성진선(成晉善)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직강 겸 춘추관 기주관(行成均館直講兼春秋館記注官) 신 조존세(趙存世)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직강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成均館直講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목장흠(睦長欽)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성균관 직강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成均館直講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최충원(崔忠元)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성균관 직강 겸 춘추관 기주관(行成均館直講兼春秋館記注官) 신 채형(蔡衡)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이호의(李好義)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조집(趙濈)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교서관 교리(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校書館校理) 신 이필영(李必榮)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종묘서 령 겸 춘추관 기주관(行宗廟署令兼春秋館記注官) 신 김원록(金元祿)
어모 장군(禦侮將軍) 행 세자 익위사 사어 겸 춘추관 기주관(行世子翊衛司司禦兼春秋館記注官) 신 이유연(李幼淵)
건공 장군(建功將軍) 행 용양위 부사직 겸 춘추관 기주관(行龍驤衛副司直兼春秋館記注官) 신 신감(申鑑)
진위 장군(振威將軍) 행 용양위 부사직 겸 춘추관 기주관(行龍驤衛副司直兼春秋館記注官) 신 최동식(崔東式)
소위 장군(昭威將軍) 행 용양위 부사직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行龍驤衛副司直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신 민여임(閔汝任)
소위 장군(昭威將軍) 행 용양위 부사직 겸 춘추관 기주관(行龍驤衛副司直兼春秋館記注官) 신 정영국(鄭榮國)
정략 장군(定略將軍) 행 호분위 부사직 겸 춘추관 기주관(行虎賁衛副司直兼春秋館記注官) 신 윤경(尹絅)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行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신 유색(柳穡)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行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신 민덕남(閔德男)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사서 겸 춘추관 기사관(行世子侍講院司書兼春秋館記事官) 신 임연(任兗)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사서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世子侍講院司書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윤탁(尹晫)
통덕랑(通德郞) 행 세자 시강원 사서 겸 춘추관 기사관(行世子侍講院司書兼春秋館記事官) 신 이호신(李好信)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이조 좌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吏曹佐郞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유홍(李惟弘)
중훈 대부(中訓大夫) 행 이조 좌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吏曹佐郞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조중립(趙中立)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이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吏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이극신(李克信)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이조 좌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吏曹佐郞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채경선(蔡慶先)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이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吏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윤효선(尹孝先)
조봉 대부(朝奉大夫) 행 병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兵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정호관(丁好寬)
통덕랑(通德郞) 행 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戶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변응벽(邊應璧)
통덕랑(通德郞) 행 예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禮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유중룡(柳仲龍)
통덕랑(通德郞) 행 병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兵) 신 윤홍국(尹弘國)
통선랑(通善郞) 행 예조 좌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禮曹佐郞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홍명원(洪命元)
봉직랑(奉直郞) 행 예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禮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윤황(尹煌)
봉직랑(奉直郞) 행 병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兵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박대겸(朴大謙)
봉직랑(奉直郞) 행 병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兵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권흔(權昕)
봉직랑(奉直郞) 행 병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兵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척(李惕)
봉훈랑(奉訓郞) 행 호조 좌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戶曹佐郞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이명준(李命俊)
봉훈랑(奉訓郞) 행 병조 좌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兵曹佐郞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신광립(申光立)
봉훈랑(奉訓郞) 행 병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行兵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정광성(鄭廣成)
승의랑(承議郞) 병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兵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성시헌(成時憲)
승의랑(承議郞) 병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兵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식립(李植立)
승훈랑(承訓郞) 예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禮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오여발(吳汝撥)
선교랑(宣敎郞) 수 병조 좌랑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守兵曹佐郞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이민환(李民寏)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전적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成均館典籍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남탁(南晫)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 전적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成均館典籍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윤길(尹)
중직 대부(中直大夫) 행 성균관 전적 겸 춘추관 기사관(行成均館典籍兼春秋館記事官) 신 이경운(李卿雲)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성균관 전적 겸 춘추관 기사관(行成均館典籍兼春秋館記事官) 신 송석조(宋碩祚)
봉렬 대부(奉列大夫) 행 성균관 전적 지제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成均館典籍知製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성(李惺)
승훈랑(承訓郞) 성균관 전적 겸 춘추관 기사관(成均館典籍兼春秋館記事官) 신 금업(琴)
선교랑(宣敎郞) 수 성균관 전적 겸 춘추관 기사관(守成均館典籍兼春秋館記事官) 신 서경우(徐景雨)
통선랑(通善郞) 행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行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신 기협(奇協)
봉훈랑(奉訓郞) 행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세자 시강원 사서(行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世子侍講院司書) 신 황경중(黃敬中)
선교랑(宣敎郞)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신 박안현(朴顔賢)
어모 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 부사과 겸 춘추관 기사관(行龍驤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조욱(趙稶)
진위 장군(振威將軍) 행 용양위 부사과 겸 춘추관 기사관(行龍驤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신성기(辛成己)
돈용 교위(敦勇校尉) 행 용양위 부사과 겸 춘추관 기사관(行龍驤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조희일(趙希逸)
봉훈랑(奉訓郞) 행 예문관 봉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藝文館奉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심광세(沈光世)
선무랑(宣務郞) 행 예문관 봉교 겸 춘추관 기사관(行藝文館奉敎兼春秋館記事官) 신 오익(吳翊)
봉직랑(奉直郞) 행 세자 시강원 설서 겸 춘추관 기사관(行世子侍講院說書兼春秋館記事官) 신 임장(任章)
선교랑(宣敎郞) 행 세자 시강원 설서 겸 춘추관 기사관(行世子侍講院說書兼春秋館記事官) 신 오정(吳靖)
통사랑(通仕郞) 예문관 대교 겸 춘추관 기사관(藝文館待敎兼春秋館記事官) 신 김대덕(金大德)
무공랑(務功郞) 행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신 이현(李俔)
무공랑(務功郞) 행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신 유학증(兪學曾)
승사랑(承仕郞) 행 승문원 정자 겸 춘추관 기사관(行承文院正字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정(李涏)
【원전】 21 집 172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왕실-국왕(國王)


[주D-001]만력(萬曆) :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주D-002]임진 : 1592 선조 25년.
[주D-003]이 본(本) : 전주 사고본을 말함.
[주D-004]구인본[舊件] : 전주 사고본.
[주D-005]계묘 : 1603 선조 36년.
[주D-006]병오 : 1606 선조 39년.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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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년)

1월 5일 부천사(副天使) 심유경(沈惟敬)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11일에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고, 인하여 명 나라로 돌아갔다.
6일 한효순(韓孝純)이 전라 좌수영에 도착하자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로부터 나와서 적을 막을 일을 상의하였다. 이튿날 부찰사(副察使)는 순천으로 돌아갔다.
10일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청정(淸正)이 병선 1만여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서생포(西生浦)ㆍ두모포(豆毛浦)ㆍ죽도(竹島) 등의 옛 보루를 수리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좌수영으로부터 한산진으로 돌아가다가 중도에 풍우를 만나 남해현(南海縣)에서 정박하는데, 정탐하는 배가 달려와 경상 좌수영이 소식을 보고하기를, “요시라(要時羅)가 사적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미 이달 10일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에 청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옛 병영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하였다.
○ 변방의 보고고 적병이 크게 이른 것을 알고 배신 권협(權悏)을 보내어 중국에 아뢰는 글을 가지고 가서 급함을 고하였다.
○ 도제찰사가 재촉하는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청야(淸野)하는 한 가지 일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어 가장 관건인데, 어렵지 않은 일을 진작 거행하지 아니하니 지극히 해괴하다. 종사관을 나누어 보내어 적간(摘奸)할 때에 각 고을 수령과 각 면의 도유사(都有司)와 이(里)의 유사 등을 군령에 종사하게 하여, 재삼 명령하여 말린 연후에 죽음을 받아도 한이 없도록 하라. 각처의 인민이 산성을 싫어하고 꺼려서 다른 고을로 옮겨 피한 자는 왜적에게 붙은 자이니 일일이 적발하여 먼저 목을 베고 난 뒤에 보고할 일이다.
이상을 3도에 관문(關文)으로 보내었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慄)과 의논하여 호남 군사 1만 명을 징발하여 군사를 나누고, 광양 현감으로 장수를 정하여 거느리고 와서 영남에 교부하게 하되, 담양ㆍ남원 등 산성이 있는 일곱 고을에는 군사의 징발을 제외하였다.
○ 남원부의 쌀과 콩과 첩입관(疊入官)인 운봉ㆍ장수ㆍ진안ㆍ임실ㆍ구례ㆍ곡성 등 여섯 고을의 쌀과 콩을 모두 교룡 산성(蛟龍山城)으로 실어 들이고, 각 고을의 아문을 성내에 설치하여 장차 모두 아문의 관할로 들이게 하고, 대소 인민은 모두 막(幕)을 지어 가속을 데리고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각도 각읍의 산성에 다 그렇게 하였다.
○ 도체찰사는 단결을 위한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각도 각 관아에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수효가 많기를 기하고, 명망이 있어 아랫사람을 통제할 만한 자로써 주장(主將)을 삼고, 그 고을에 무사 및 수령의 군사 가운데 무재(武才)와 용략(勇略)이 있는 자를 영장(領將)으로 정하여 각기 그 관아의 나장(羅將) 5인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하고, 무릇 군무(軍務)에 관한 것은 영병장(領兵將)이 직접 체찰부에 보고하되, 문서는 관인(官人)에게 주어서 왕래하도록 하라. 전직 조관(朝官)이나 생원과 진사 중에서 물망이 있는 자를 도청유사로 선택해 정하여 고을에서 문서에 능한 2명을 불러 사환으로 삼도록 허락하라. 조련군으로 군적을 만든 외에 빠진 남정과 전직 조관과 생원ㆍ진사ㆍ교생(校生)ㆍ좌수(座首)ㆍ한량ㆍ재인ㆍ백정을 60세 이하 15세 이상은 빠짐 없이 책을 만들어 별갑(別甲)으로 정하고, 조군(漕軍)ㆍ수군(水軍)으로 전에 도피한 자는 한량의 예에 의하여 소속시키고, 양반의 종은 3명에 1정(丁)을 취하고, 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그 아들을 취하고, 삼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두 아들을 취하고, 활과 화살을 각자가 준비하고, 화약과 조총은 관(官)에서 준비해 주고, 단결 훈련하여 죽음으로써 동맹하였다가 변방의 보고와 전령을 따라 즉시 거느리고 달려가되 일체 체찰부의 분부를 따르고, 원수(元帥) 이하는 절제하지 못한다. 운운.
이상을 3도에 관문으로 보내었다. 이때에 이원익이 초계(草溪)에 있으면서 진주(晉州)로 하여금 제석당 산성(帝釋堂山城)을 쌓게 하였다.
○ 밀양인 이대천(李大川)과 구례인 성진실(成眞實)이 장군이라 자칭하고 망령되이 선문(先文)을 내기를 김덕령의 일과 같이 하였으므로 체찰사가 듣고 매우 기뻐하여 군사를 허락해 주고 충의로써 격려하였더니, 그 뒤에 속이고 망령된 것이 드러나 베임을 받았다.
28일 도원수가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평행장(平行長)을 함양(咸陽)으로 청하여 잔치를 대접하게 하고, 인하여 청정의 적정을 탐지하였다.
2월 이순신이 아뢰기를, “신이 힘을 다하여 바다를 건너는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군기(軍機)를 놓쳐서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게 하였으니 신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다만 각 고을 수령 등이 수군의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남원ㆍ광주가 더욱 태만하였으니, 청컨대 명령을 내려 목을 베어 군중에 보여서 하나를 징계함으로써 백을 북돋우소서. 운운.” 하였다. 비변사에 계하(啓下)하기를, “부체찰사로 하여금 두 고을 원을 문초하라.” 하였다. 그 뒤에 부체찰사가 순천에서 두 원을 잡아다가 치죄하였다.
○ 권율이 대구에 머물면서 각도의 군사를 모은 것이 모두 2만 3천 6백인이었다. 장수를 정하여 적의 오는 길에 나누어 방어하게 하였다.
○ 원수(元帥)의 분부로 남원 판관 이덕회(李德恢)가 부(府)에 있는 총통(銃筒) 1천 자루를 대구에 가져다가 바쳤다.
11일 남원 부사 최염(崔濂)이 산성 별장 신호(申浩)와 더불어 7읍의 군사를 모아 산성을 지킬 절차를 준비하였다.
○ 명 나라에서 특별히 군사를 내고 은(銀)을 내어 두 번째 구제하기를 허락하므로 배신 윤승훈(尹承勳)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병부(兵部)에서 태복시(太僕寺)를 시켜 마가은(馬價銀) 2천 냥을 지출하여 오는 배신에게 주어 스스로 초약(焇藥)을 사도록 하고, 차량(車輛)을 연도(沿途)에서 번갈아 보내주었다. 우첨도어사 도찰원군문(都察院軍門) 정4품 양호(楊鎬)를 보내어 경리조선군무로 삼아서 조선으로 나오는데, 먼저 고시(告示)를 내어 군사를 금지시켰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또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어 먼저 적정을 탐지하게 하므로, 심유경이 중도에서 돌아와 서울에 이르렀다.
○ 요시라(要時羅)가 우리 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청정이 한 척의 큰 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작은 섬에 며칠 동안 정박하였는데, 내가 급히 통제사 이순신에게 통지하여도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소.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고, 전라 병사 원균(元均)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이 한산도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요적(要賊)이 전후에 행한 바가 모두 우리를 속이는 일인데도 우리 나라는 알지 못하였으니 통탄할만한 일이다.
15일 심유경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접반사 이광정(李光庭)과 감사 박홍로(朴弘老)가 따랐다.
22일 심유경이 영남 의령으로 향하였는데 접반사가 따라갔다.
○ 전라도민을 위유(慰諭)하는 교서를 내리기를,
“왕은 이렇게 이르노라. 멀리 있는 남도의 백성들아! 나의 말을 밝게 들어라. 임금답지 못한 내가 너희들 신민(臣民)의 위에 있어 위태로이 여기고 두려워하여, 항상 썩은 새끼줄이 끊어질 듯이 조심하였는데, 불행히 섬 오랑캐가 트집을 잡아 국가가 위급하게 되고, 전
란이 오래 얽히어 아직까지 섬멸하지 못하여, 조종(祖宗) 2백년 동안 길렀던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끓는 물과 불 가운데 허덕이게 하였으니, 나의 덕이 없는 소치를 또 어디에 허물을 돌리리오. 아!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부릴 이가 없고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섬길 이가 없는 것이니, 임금과 백성은 한 몸이라 어찌 공경하지 아니하랴. 하늘이 전란을 내리신 이래로 너희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고, 너희들에게 일로 괴롭힌 것이 어찌 나의 본심이랴. 다만 내가 바다 도적에게 대하여 쌓인 원한과 깊은 노여움이 있어 노심초사하고 절치부심하여, 6년 동안 경영한 것이 오직 군사를 훈련하고 양식을 넉넉히 하여 수치를 씻고 흉한 놈들을 제거하는 데 있었는데, 영남에는 적의 피해를 혹독하게 입어서 싸우려 해도 병사가 없고, 지키려 해도 양식이 없으니, 국가의 근본으로 믿을 것은 오직 호남 일대일 뿐이다. 영남과 인접하여 적의 침입을 받을 길이 한 군데만이 아니므로 방어의 긴요함과 운수(運輸)의 노고가 다른 도보다 백 배나 된다. 군사가 훈련되지 않았으니 속오(束伍)로 연습시키지 아니할 수 없고, 군량(軍粮)이 준비되지 못하였으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봄 조수가 밀려 올 때 적이 덤빌 염려가 있으니 산성 수축하는 것을 아니할 수 없고, 흉악한 꾀를 백 가지로 내어 곧장 쳐들어올 우려가 있으니 청야(淸野)하여 백성을 옮기는 것도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책사(冊使)가 왕래하는데 인부와 말의 징발이 끊이지 않고, 명 나라 장수를 접대하는데 갑작스러운 부역이 서로 이어졌거늘, 하물며 지금 적병이 다시 건너와서 몰래 옛 소굴을 점거하여 국사가 심히 급하여 화가 아침저녁에 있게 되었다. 장정을 뽑아서 전지로 가게 하고 양식을 운반하여 날마다 소비되는 것을 대어 주니, 어느 것인들 편안한 도리로써 백성을 부리는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명령을 받들어 거행하는 자들이 나의 뜻을 바로 받들지 못하여 징발함이 질서가 없어 민간을 소란하게 하고, 부역이 고르지 못하므로 도망하여 떠나는 백성이 날로 많아져 호남 수천 리의 땅이 소란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만들어, 원망과 호소가 하늘에 사무치고, 근심과 탄식이 길에 가득하니,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이것을 어찌 참을 수 있으랴. 너희들이 집을 편히 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나의 잠자리가 편치 않고, 너희들의 배고품을 생각하니 나의 먹는 것이 맛이 없다. 애타는 생각으로 아픔이 내 몸에 있다. 아! 화란이 있다 해도 오늘보다 심한 것이 없었고, 살육의 참혹함이 오늘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어찌 다만 국가의 원수일 뿐이랴. 또한 너희 선비와 백성들의 원수이니,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분해 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성내어 한 번 보복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하리오. 진실로 능히 동지를 규합하여 충의(忠義)로써 서로 격려하되, 혹은 날랜 군사를 모집하고 혹은 군량을 모아서, 모두 국가를 위해 죽을 마음을 가진다면 죽으러 온 적들이 하늘의 베임을 받을지 어찌 알리오. 명 나라 군사의 남북군 수십만이 연달아 나오고, 우리 나라 서북도의 정예한 군사도 이미 징집되어, 합세하여 남으로 내려가 일제히 용맹을 뽑낼 것이니, 너희 곰 같고 범 같은 장사들과 두 마음 가지지 않은 신하들은 전진하다가 죽는 것으로 영광을 여기고 퇴각하여 사는 것을 욕으로 여겨, 과감하고 굳세게 행하여 군공(軍功)을 이룩하라. 우리 선왕(先王)과 너희 조상들이 서로 믿고 걱정하여 편안히 살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후세의 우리들이 어찌 선왕이 너희 조상을 위해 수고롭던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랴. 아! 일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정치는 실제의 혜택을 필요로 한다. 남방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청야(淸野)에 대하여 말하니, 사세를 보아 처치하여 농사짓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 왕궁에 숙직 호휘하는 군사들을 특별히 제번(除番)하여 방어에 전력하도록 하되, 군대에서 분발하여 국가에 공을 세운 자는 본도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백성의 기대에 따르게 하노라. 또 생각하니, 역변(逆變) 이후에 도내의 걸출한 인물들을 오랫동안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 골짜기에 향기를 혼자 지니고, 아름다운 옥이 형산(荊山)에 광채를 감추게 되었으니, 오늘날 사방에서 인물을 불러들여 일을 같이 해야 하는 본의가 아니므로 순찰사로 하여금 인재를 찾아서 기록하여 아뢰어 등용한 준비를 하도록 하였으니, 너희 선비와 백성들은 잘 헤아리도록 하라. 아! 유독부(劉督府)가 주둔한 이후로 호남의 백성들은 그들에게 공급하느라 재물이 바닥나고 사역과 운반에 힘이 소진되어, 전답이 황폐하여 쑥대가 하늘에 닿았으니,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느냐. 지금 봄날이 따뜻하여 농사 시작할 철이 닥쳤는데도, 쟁기를 잡고 호미를 쥔 백성들을 몰아다가 갑옷을 입히고 칼을 잡는 일을 시켜서, 위로는 부모를 섬기지 못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지 못하게 하니, 불쌍하도다! 이 사람들이 어찌 나의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널리 고유할 때를 당하여 부끄러워 낯이 뜨겁도다. 아! 윗사람이 하는 바가 아랫사람이 따르는 바이므로 감히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는 분함을 펼치노니,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죽어서 각기 충효의 마음을 굳게 하라. 운운.” 하였다.
○ 비변사에서는 남원(南原)은 호남과 영남의 요충인데 만일 이 성을 버려서 적으로 하여금 들어와 점거하게 하면 각처의 산성이 소문만 듣고 붕궤될 것이라 하여,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본성도 겸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 심유경이 의령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평행장(平行長)을 맞이하게 하니, 평행장이 단기(單騎)로 나와서 의론하고 돌아갔다. 심유경이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고 극력 말하니, 평행장이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그대가 이미 아는 바이나, 청정(淸正)이 다시 나오자고 극력 주장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니 어찌하리요. 운운.” 하였다.
○ 이광정(李光庭)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황신(黃愼)을 심유경의 접반사로 삼았다.
○ 전란이 일어난 지 6년에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하여 한산도의 수졸이 열에 한둘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연변(沿邊) 시장에서 장사꾼을 함부로 잡아서 데리고 가는 폐단이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다.
○ 황제가 총병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서 선대(宣大)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양원(楊元)은 요동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南兵) 4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 우백영(牛伯英)은 밀운(密雲)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은 연유(延綏)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잇따라 강을 건너게 하였는데, 특히 계요총독군문(薊遼總督軍門) 형개(邢玠)로 하여금 다 통솔하게 하고, 참정(參政) 소응궁(蕭應宮)으로 하여금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호부 낭중 정5품(正五品) 동한유(蕫漢儒)는 군량을 감독하게 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3월 황제가 또 어사 진효(陳效)에게 명하여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형군문(邢軍門)의 차관(差官)이 칙서를 받들고 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에게 이르노라. 짐(朕)이 생각하건대, 그대 나라가 가까이 동번(東藩)에 있어 대대로 공순하였는데, 전년에 왜놈들이 그대 강토를 짓밟아 부수자 국왕이 의주로 파천해 와서 슬피 부르짖어 구원을 청하므로, 짐이 측은히 생각하여 특별히 문무 중신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려 동정(東征)하여 불에 타는 것을 구하고 빠진 사람을 건지듯 할 뿐만이 아니었다. 그때에 그대의 온 나라가 오히려 굳게 지킬 뜻이 있어 천토(天討)를 함께 도우니, 다시 국토를 회복하고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왔으며, 왜놈들은 겁내어 도망하고 머리를 숙여 봉공(封貢)을 청하였다. 짐이 그대 국력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음을 생각하여 우선 그의 청을 좇은 것은 그대를 편안케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휴식하는 수년 동안에 백성을 교훈하고 군사를 연습시키지 아니하다가 교활한 왜놈이 두 번째 침입하자 장황히 아뢰어 천조(天朝)에 구원을 청하므로, 이에 다시 동정(東征)하게 되어 군사를 수고롭게 하며 군량을 운반하여 험한 땅에 깊이 들어가 그대를 위하여 방어하고 구원하니, 짐이 소국을 사랑하는 인(仁)과 환란을 구해주는 의(義)가 또한 지극하였소. 이에 어사 한 사람을 보내어 군사를 감시하여 싸움을 독려하고, 보검 한자루를 군문에 하사하여, ‘장사가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먼저 목베고 뒤에 아뢰라.’ 하였으니, 그대 임금과 신하가 의당 온 나라가 노력하여 왕사(王師)를 도와서 스스로 하늘에게 버림 받아서 후회를 남기지 아니하도록 하오. 운운.” 하였다.
배신 정곤수(鄭崑壽)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사은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다만 《고사》에서는 이 칙서가 남원이 함락된 뒤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나는 문세(文勢)로 볼 때에 마땅히 이때에 있었을 것이므로 여기에 싣는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慄)과 함께 영천(永川)에 머물면서 호남 출신들을 본도 조방장(助防將) 김언공(金彦恭)에게 소속시켜 진주의 제석당 산성(帝釋堂山城)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22일 심유경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돌아와서 그대로 머무는데 접반사가 따랐다.
○ 청정이 다시 건너오자 내지(內地)에서 불안하고 두려워하여 짐을 꾸리고 농사에는 뜻이 없고, 술과 고기로 날마다 놀이를 일삼았다. 감사가 각 고을에 통첩을 보내기를, “가뭄이 잇따라서 파종할 시기를 놓쳤으며 양맥(兩麥)이 이미 말라서 어찌할 수 없는데, 무식한 어리석은 백성은 말할 것이 없거니와 이치에 밝은 선비들도 또한 장래에 대한 계책이 없이 곡식을 낭비하여 날마다 놀이로 일을 삼으니 앞일이 극히 염려된다. 이제부터는 일체 금지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28일 심유경이 부의 남쪽 서원에 갔다 왔다.
○ 제독 마귀(麻貴)가 대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부터 압록강을 건어 서울로 향하면서 먼저 절강(浙江) 유격장군 섭상(葉鱨)으로 하여금 조선에 이르러 군량을 독려하고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상이 서울에 도착하여 권려가(勸勵歌)를 지어 우리 나라 선비와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돌려 보였다. 첫머리에 서문이 있다.
근일에 바다 왜놈이 불법하게도 조선을 삼키고 물어뜯으므로 천조에서 속국을 생각하여 군사를 일으켜 멀리 구원하여 평양을 이기고 개성을 부수어 왕경(王京)을 회복시키고, 깊이 들어왔던 모진 오랑캐를 모두 부산으로 쫓아서 흉악한 것을 제거하고 수치를 씻어 공
덕이 가장 높았고, 그 뒤에 봉공(封貢)을 의론하고 싸움을 파하여 조금 휴식하기를 바라면서, 오히려 다시 물자를 대주고 부역에 고생하기를 해마다 잇따라 하여 날로 왜놈이 물러가기를 도모하여 본국을 편안케 하였으니, 돌보아 줌이 가장 후하였다. 그런데 지금 도망했던 왜놈들이 구렁이처럼 서리고 점거하여 정세를 헤아리기 어려워 번방(藩邦)에서 위급함을 고하니, 이치와 사세로 보아 반드시 구원해야 하겠기에 당사자가 이미 강한 군사 10만 명을 훈련하여 기회를 보아 나아가 구원하게 되었다. 다만 군사가 많아 양식이 부족하고, 전지(戰地)가 멀어 군사가 피로할까 염려하여, 먼저 본부(本府)에 통첩하여 국왕과 만나서 군사가 올 도로 변에 군량을 독촉하여 쌓아두고, 다시 국내에 전달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훈련하게 하였으니, 구원병이 이르거던 서로 의각(犄角)이 되고, 물러가서 스스로 지켜서 다시는 스스로 기운을 잃어 참혹한 화를 달게 받지 말라. 아! 조선이 이전에 왜란에 걸려 임금과 신하가 난을 피하여 방랑하고, 선비와 백성이 떠돌아 다니고, 집은 무너지고 타고, 부모와 형제가 살육되었는데, 우리 군사가 와서 구원하자 도처에서 공급하느라고 여러 번 소란을 겪어 천리가 분주하였다. 처음에는 전란으로 다음에는 흉년으로 젊은 이는 칼날에 죽고, 늙고 약한 이는 구렁에 버려져 동타(銅駝)가 가시덤불 속에 있고, 백골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으니, 보기에 참혹하여 이마가 절로 찡그러져 차마 말할 수도 없었다. 근자에 이 나라에 이르러 낮에 길을 다녀 보면 격문을 가진 사신이 번갈아 달려, 공급하고 접대하는 것이 눈앞에 가득 찼고, 밤에 관성(館城)에 자면서 보면 급한 문서를 가지고 밤에 달려 시끄러움이 귀에 가득하여 피와 기름이 다 마르고, 닭과 개도 편안하지 못하니, 만나는 일마다 상심되어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 없다. 조선이 무슨 연고로 이렇게 무거운 재앙을 만났는고! 특히 왜놈에게 얕보였기 때문에 업신여긴 바 되었고, 명 나라에 구원을 빌었기 때문에 소란함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명 나라에서 군사와 말을 덜어 주고 금전을 대주며, 해마다 연달아 와서 노고와 비용을 아끼지 않고 더해 주었으니, 모두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우리 대군을 치르고 우리 공차(公差)를 응접하는 데 온갖 폐단이 생겨서 성내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저 왜놈 때문이다. 만약 천조에서 조선 때문이 아니고, 조선이 왜놈 때문이 아니었다면, 각기 일없이 편안한 것이니 어찌 전날과 오늘의 소란함이 있으리오. 그렇다면 조선이 아직도 스스로 강하여 왜놈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천조에 의뢰하고, 천조에서는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드디어 안으로는 군사와 양식을 손실하고, 밖으로는 소란이 더하게 된 것이니, 지금 만약 봉공이 성사되지 않고 왜놈이 다시 치성하면 구원병이 또 장차 올 것이다. 어찌 천조에서 먼 곳에 군사 쓰기를 좋아하며, 군사와 말이 밖에 와서 고생하기를 기뻐하랴마는 부득이한 것이다. 만약 조선 사람이 스스로 분발할 줄 알아서 서로 격려하여 각기 그 원수를 갚아서 성공하기를 도모한다면 나라에 남은 용맹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왜놈을 두려워하며, 천조에 구원을 청해 소란스러운 해를 가져오리오. 그렇지 않고 약하면 남의 업신여김을 부르고 구원을 청하여 분요가 생기는 일을 반드시 자초하게 될 것이다. 본부가 이번에 와서는 사정을 잘 알아 돌보아 주기에 힘쓰고, 절약하여 폐를 덜도록 애쓰고는 있지만 도움됨이 얼마이겠는가? 다만 원하기는 온 나라가 군사(軍事)를 알고, 사람마다 용감히 싸워서 포악한 것을 제거하고 난을 물리치어 서로 태평을 누려서 원망도 할 필요가 없고 덕도 볼 필요가 없게 된다면 이것이 큰 다행이 될 것이다. 가령 한꺼번에 스스로 강해지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구원병의 위세를 빌려 한 배에 타고 함께 건너는 것처럼 마음이 일치되어, 혹은 죽을 힘을 내고, 혹은 군량을 수송하여, 이 한 번의 노고를 각오하여 영원히 편안하기를 구하고, 조그마한 비용을 아끼지 말아서 큰 일을 성취하지 않으리오. 이렇게만 된다면 일본이 다시 침범함을 어찌 족히 염려하랴. 일본은 어떤 사람이며 조선은 어떤 사람인가? 양편 군사가 싸움을 하면 피차가 서로 맞설 것이니, 어리석게 사는 것이 어찌 장렬하게 죽는 것만 같으리오. 하물며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면 살 수도 있는 것이니, 어찌 범을 겁내듯 하고 솔개를 피하듯 하여 그들에게 살육을 달게 받으랴. 또 왜놈들이 대병(大兵)이 나와서 구원한다는 말을 듣고 선성(先聲)에 벌써 기운이 절로 꺾이었다. 우리 군사는 경략(經略)의 절제를 받들어 실로 전일의 폐단을 고쳤으니, 다만 해만 없을 뿐 아니라 공이 반드시 배나 되어 조선에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조선은 미리 꾀를 같이 맞추고 기회를 당해 힘을 합하여 바다의 적을 소탕하여 조선을 영원히 편안케 하여, 천조에서 간절히 돌보아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고 전일의 분요스러운 사단도 없게 하라. 나의 속된 시가 운율에 맞지는 않지만 감히 뜻 있는 이를 위하여 노래 부르노니
조선은 본시 예의국이라 일컬어 / 朝鮮素稱禮義邦
군사를 천히 여기고 문장을 숭상하였다 / 羞稱武事尙文章
작년에 섬 오랑캐가 방자히 덤비어 / 當年島夷紛陸梁
모래 무너뜨리듯 대를 쪼개듯 평양에 들어왔네 / 崩沙破竹入平壤
국왕은 파천하여 풀밭에 있고 / 國君播越在草莽
왕자는 포로되어 일본으로 갔네 / 王子繫縲去扶桑
수도는 불에 타서 반이나 재가 되고 / 王京一炬半塵坱
벌거숭이 땅 천리에 눈앞이 참혹했네 / 赤地千里慘目光
추억하니 이가 갈려 원한이 깊은데 / 追思切齒恨何長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어찌 잊으랴 / 不共戴天讎豈忘
뜻은 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 無言有志力未遑
일은 사람이 힘을 다하기에 달렸으니 하늘이 돌보아줌이 있도다 / 事由人盡鑒由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면서 강한 오 나라를 다스렸고 / 君不見臥薪嘗膽治吳疆
창을 베개 삼고 벽돌을 운반하여 진 나라를 강하게 하였다는 것을 / 枕戈運甓輔晉强
또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장사가 성을 내자 흰 무지개가 길게 뻗쳤고 / 又不見壯士有怒白虹長
필부가 용감하면 뭇 사람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 匹夫敢勇衆難當
남아의 기절이 천지와 대등하니 / 男兒氣節等霄壤
7척의 몸뚱이로 마땅히 기강을 바로잡을 것이다 / 七尺躬宜振紀網
분발하여 정치를 닦는 것은 묘당에서 힘쓸 것이요 / 發憤修政厲廟廊
군사를 모집하여 왕을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은 민간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 募戈勤王起郊荒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격려하면 / 同心上下相激昻
위엄과 무력이 절로 떨침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 竚看威武自奮揚
구원병이 강성하니 함께 급히 서둘러 / 援師洸洸共劻勷
왜적을 소탕하기를 양을 몰듯이 하리라 / 掃蕩倭賊如驅羊
나라를 어지럽히는 왕성한 기운이 정히 다함이 없으니 / 銅駝王氣正未央
문을 열고 호랑을 맞아들이듯 하지 말라 / 勿效開門揖虎狼
복숭아를 심고 가시나무를 심는 것이 과연 어느 것이 좋겠으며 / 種桃栽棘果孰良
기왓장이 되어 완전한 것과 옥이 되어 부서진 것이 어느 것이 향기롭겠는가 / 瓦全玉碎認誰香
예로부터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하였으니 / 一言終古可興邦
나는 이제 이 노래를 사대부들에게 부르노라 / 我今歌向大夫行
원컨대 맹렬한 장사가 사방에서 일어나 / 願得猛士起四方
길이 동해를 맑게 하여 파도가 일지 않기를 바라노라 / 永淸東海無波揚
하였다. 조선에서 등서(騰書)하여 각도에 돌려보였다.
○ 호조 판서 김수(金晬)를 충청ㆍ전라도에 보내어 대군의 군량을 징수하게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청정(淸正)이 두 번째 건너온 뒤에 인심이 흩어져서 편히 살 뜻이 없는데, 연해의 각 읍에는 격군(格軍)의 일 때문에 농사와 장사가 모두 폐지되고 도로가 통하지 못합니다. 하삼도(下三道) 중에 충청도가 더욱 심하여 이 봄철을 당하여 농기구를 지고 나오는 자가 드므니 어찌 수학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적이 없어도 스스로 패하는 형상입니다. 지금 호조 판서를 가게 하되 역시 이 뜻을 알고 가게 해서 농사를 권면하는 일과 아울러 잘 단속하고 삼가도록 말씀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김수가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갔다.
○ 대군의 선봉 부총병 양원(楊元)이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성 좌윤(漢城左尹) 민준(閔濬)과 예조 참판 정기원(鄭期遠)을 접반사로 삼았다.
○ 한효순(韓孝純)이 순천으로부터 한산도에 들어가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위로 하였다. 권율(權慄)이 진주로부터 순천으로 향하였다.
4월 호조 판서 김수(金晬)가 전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창고 곡식을 친히 검사하고, 창고의 문을 봉하고 인하여 사운(四韻) 한 편을 지어 사민(士民)에게 돌려보이기를
4월의 맑고 화창한 좋은 철이 돌아왔건만 / 四月淸和佳節回
10년 동안 말 타고 갑옷 입은 객의 마음 재촉하네 / 十年鞍甲客心催
온갖 꽃은 나무에 피어 사람을 맞아 웃고 / 雜花生樹迎人笑
좋은 비는 바람을 몰아 낯에 스쳐 오네 / 好雨驅風拂面來
쓸개를 맛본 지 여러 해라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으나 / 嘗膽多時能唾手
적을 평정할 계책이 없어 홀로 누각에 오르네 / 平戎無策獨登臺
군량이 부족하니 걱정이 적지 않은데 / 軍興食乏憂非細
가는 곳마다 눈썹 찡그리니 또한 가소롭네 / 到底嚬眉亦可咍
하였다. 이날 밤에 김수가 부(府)의 서쪽 주포촌(周浦村)에 나와 머물고, 이튿날 심유경을 맞아 용두정(龍頭亭)에서 연회를 갖고 전라 우도로 가서 관청 곡식을 검사하였다.
8일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본도의 감사(監使)ㆍ병사(兵使)가 모두 와서 모였다.
13일 권율이 영남으로 돌아갔다.
○ 임금이 이순신(李舜臣)의 공과 허물이 서로 똑같다고 하여 놓아주어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원수부(元帥府)에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 시랑(侍郞) 손헌(孫憲)이, “심유경이 오랫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항상 강화한다는 것을 핑계로 자주 왕래하여 백성만 괴롭히니, 비록 전화(戰禍)를 해결한다 하나 실은 왜놈을 도우는 것이니, 먼저 심유경을 베어 죽여야 조선에 나갈 수 있겠다.” 하고, 차관(差官)을 조선에 파견하여 군량 사정을 묻고 인하여 심유경이 왜놈을 도운 실정을 탐지하게 하니, 심유경이 듣고 급히 체찰사ㆍ부체찰사ㆍ도원수 및 3도의 감사ㆍ병사를 남원으로 청하여 미리 답사(答辭)를 만들었다.
○ 양원(楊元)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오면서 우리 조정에 통첩하기를, “본부는 남원성을 지키겠으니 본고을의 태수는 대관(大官)으로 임명해 보내 주시오.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는 곧 문과통정(文科通政) 전 남도 병사 임현(任鉉)을 남원 부사로 삼았다.
○ 집에서 기르는 닭들이 눈이 멀어 다 죽었다. 계역(鷄疫)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 마귀(麻貴)가 모든 장수와 병마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왔는데, 접반사는 이조판서 장운익(張雲翼)이었다.
5월 문안사(問安使)를 남원에 보내어 심천사(沈天使)에게 문안하고, 5일에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였다.
○ 천사 심유경이 초청하므로 이원익(李元翼)ㆍ권율(權慄)ㆍ박홍로(朴弘老)가 모두 와서 모였다가, 이원익은 곡성으로 향하고 인하여 구례에 이르러 호남 출신의 군사들을 점검하여 제석당 산성으로 보내었다.
○ 대군의 군량을 준비하기 위하여 벼슬을 강제로 파니, 가선대부와 통정대부가 길에 이어졌고, 명목도 없는 세금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 양 총병의 중군 이신방(李新芳)이 먼저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접반사 정기원(鄭期遠)과 함께 남원에 도착하여 곧 본도 순찰사로 하여금 급히 각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수리하는 것을 맡게 하여 여장(女墻)을 고쳐 쌓기를 전보다 배나 높고 견고하게 하고, 또 명 나라 병사를 사역시켜 바깥 흙성을 쌓게 하되 기한을 정하고 역사를 독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 왜놈 요시라(要時羅)가 경상 우병사의 진에 이르러 병사에게 말하기를, “오는 가을 서울로 갈 때에 내가 사또를 위하여 이 진주의 길로 오겠소.” 하고는 곧 김해로 돌아갔는데, 막 영문 밖에 나가자 우리가 준 의관을 모두 벗어 땅에 던지고 갔다. 통분하다. 요시라놈이 간첩이 되어 전후에 우리를 그릇친 것이 한 가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강화를 약속한 것이라든지, 이순신을 모함한 일 같은 것은 더욱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에 와서는 하는 바가 역시 이와 같이 멸시하는 데도 오히려 죽이지 못하고 임의로 왕래하도록 하였으니, 아! 나라에 사람이 없다.
6월 양원(楊元)이 전주에 도착하자 중군이 달려가서 영접하였다.
○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또 금오(金吾)로 대장을 삼아 20여 추장(酋長)과 군사 50여 만을 거느리고 청정(淸正)ㆍ행장(行長) 등의 두 번째 침범하는 세력을 도왔다. 금오는 이때에 16세였다.
13일 양원이 전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중군과 민준(閔濬)이 따랐다. 총병이 용성관(龍城館)에 유진하고 심유경은 남정(南亭)으로 옮기었다.
19일 수군의 여러 장수가 한산도로부터 바다에 내려가서 거제 견내량(巨濟見乃梁)의 적과 교전하였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安洪國)이 죽었다.
○ 양원이 심유경으로 하여금 의령으로 달려가서 행장을 만나 강화를 의논하고 인하여 적정을 탐지하게 하니, 심유경이 출발하여 영남으로 향하였다. 그날에 손시랑(孫侍郞)의 차관(差官)이 남원에 도착하여 심유경의 간 곳을 물으니, 양원이 사실대로 고하였다. 곧 차관과 함께 함양으로 향하여 27일에 의령에 도착하여 심유경을 잡아 돌아왔다.
○ 이원익이 호남 향병(鄕兵)을 본도 도사 김순명(金順命)에게 맡기어 복수병(復讎兵)이라 칭하고, 금성(金城)을 순찰하여 지키는 일을 돕도록 하였다.
○ 제독 마귀(麻貴)가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을 시켜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전주성을 지키어 남원의 형세를 돕게 하였다.
7월 7일 양원이 친히 심유경을 압송하여 차관과 함께 서울로 향하였다.
○ 적의 배가 이달 초부터 잇따라 건너왔다. 원균(元均)이 여러 장수로 하여금 나아가 탐지하게 하고, 8일에 수병(水兵) 여러 장수가 웅천 바다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하여 배 10여 척을 부수었다. 적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므로 퇴진하여 원병(援兵)을 청하였다. 이때에 도원수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하동에 도착하여 접반사에게 관문(關文)을 보내기를, “제도(諸道) 도순찰사 권율은 왜의 정세에 관한 일로 관문을 보내오. 8일에 수군 여러 장수가 부산 바다에서 시위(示威)하였는데,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이 큰 배 두 척으로 선봉이 되어 웅포(熊浦)에 이르러 갑자기 적을 만나 접전하기를 한참 동안 하였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왜놈이 그 수를 헤아릴수 없었소. 왜놈들이 모두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달아나면서 빼앗은 군량 2백여 석을 배와 함께 불태우고, 또 1천여 척이 본토로부터 바다를 덮어 오는데 우리 군사가 가로막으니 적병이 피해 갔소. 운운.” 하였다.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 제석당 산성을 파하고 그 군사를 수군에 이속(移屬)시켰는데 원수(元帥)의 분부였다.
○ 임금이 남쪽 변방에 일이 급하다는 말을 듣고 선전관을 각진에 나누어 보내 군사를 독려하여 방어하게 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선전관이 수군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민준(閔濬)에게 고하기를, “8일에 수군이 접전하였는데 소득이 손실을 보충하지 못하였고, 또 적의 배가 바다 위에 가득 차서 국사가 망극하오. 운운.” 하였다.
16일 적병이 수군을 습격하여 통제사 원균이 죽었다. 처음에 원균이 원수(元帥)에게 곤장을 맞고는 분을 품고 물러나와 남은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달려서 부산에 이르렀는데, 적선 1천여 척이 또 본토로부터 나왔다. 원균이 노 젓기를 재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병이 물결처럼 흩어져서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 같이 보였다. 원균이 이 틈을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수령(水嶺)을 이미 지나서 대마도가 장차 임박하였으니, 뱃길을 잘못 들어 우리는 살아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천만의 수병이 적을 한 놈도 잡지 못하고 스스로 죽을 땅에 들었으니, 오늘의 일은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하였다. 원균이 듣고 드디어 배를 돌리게 하였으나 배가 역류를 넘느라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어, 전라 우수영의 배 7척이 동해로 표류하여 떠내려갔다. 원균이 여러 배를 독촉하여 급히 물러나서 밤낮으로 노를 저어 겨우 가덕도(加德島)에 이르렀는데, 적병은 우리 군사가 기세를 잃은 것을 알고 곧 신구(新舊) 병선 5백여 척을 동원하여 날 듯이 어지러이 추격하니 우리 군사는 또 영등포로 물러났다. 적병은 우리 군사가 영등포에 도착하면 반드시 땔나무와 물을 구하려 상륙할 것을 예측하고 밤에 빠른 배 50여 척을 영등포로 보내어 상륙시켜 매복하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과연 그곳에 이르러 적이 조금 멀어지자 여러 장수들이 급히 군인들을 상륙시켜 땔나무와 물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한데, 문득 포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며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베고 찍었다. 원균 등이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라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급히 배를 끌고 물러나 온라도(溫羅島)에 도착하니, 적의 배가 많이 와서 셀 수도 없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바다는 어두워져 피차가 군사를 거두고 적을 엄중히 경계하여 아침이 되기만 기다렸다. 원균이 밤에 여러 장수를 모아서 의론하기를, “적세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지탱할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어찌하랴. 오늘의 일은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다.” 하였다. 배설(裴楔)이 팔을 걷어 붙이며 큰소리로,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에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요긴한 계책이오. 우리가 부산 바다에서 기세를 잃어 군사들이 놀라 소란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여 용맹은 쓸 수 없으니 겁내는 것을 써야겠소.” 하였다. 원균이 그 뜻을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 하였다. 배설이 이에 제 배에 돌아가 은밀히 저에게 소속된 여러 장수와 더불어 군사를 퇴각시킬 것을 꾀하였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鼻居舠) 10여 척으로 하여금 몰래 우리 배 사이를 뚫고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兵船) 5ㆍ6척으로 가만히 우리 진영의 복병선(伏兵船)을 둘러 쌓는데, 당수와 군사들은 모두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복병선이 이미 적에게 불태워져 부서지자, 원균이 크게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화전(火箭)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갑자기 각 배의 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며 총탄이 쾅쾅하니 군사들이 크게 놀라 실색하였다. 원균이 비로소 적이 와서 정탐한 것을 깨닫고 추격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묘시에 적의 배가 가까이 포위하여 고함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총알이 비오듯 하였다. 원균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닻을 내리고 접전하는데, 형세가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휘감는 것 같아 감히 당적할 수 없었다. 배설이 바라보고만 있다가 퇴각하자 원균이 군관을 시켜 잡아오게 하니, 배설이 항거하다가 싸움이 한창일 때에 관하(管下) 12척과 더불어 달아났다. 원균이 힘을 지탱할 수 없어 여러 장수와 더불어 닻을 올리고 흩어져 달아나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오르니, 적병이 추격하여 내려와서 마구 죽였다.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ㆍ충청수사 최호(崔湖) 등이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사가 죽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ㆍ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행보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고는 앉은 채 죽음을 당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기롱하였는데, 곡성에 사는 생원 오천뢰(吳天賚)가 시를 짓기를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 / 閑山一島國南門
무슨 일로 조정에서 장수를 자주 바꾸었나 / 底事朝廷易將頻
처음부터 원균이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 不是元均初負國
원균의 배가 원균을 저버렸네 / 元均之腹負元均
하였다. 표류하였던 전라 우수영의 배 7척은 그 뒤에 경상좌도에 돌아왔다. 원균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불충불의한 무리는 아닌 듯한데, 그 뒤에 기롱하는 이가 심히 많고 달천(達川)의 기록에는 빼고 넣지를 않았다. 그 기록에 든 사람들은 과연 모두 충의를 다한 사람으로써 원균이 그들의 만분의 1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찌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그리도 공정하지 못하고, 당시에 장수된 자들이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고. 그 뒤에 논공(論功)할 때에 원균도 선무원훈(宣武元勳)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아! 왕법의 공정한 것을 볼 수 있도다.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 하여 적에게 죽은 사실을 죄준다면 저 관망하고 퇴각하여 달아나서 목숨만을 위한 자에게는 장차 무슨 죄를 주어야 할꼬.
○ 적병이 바다와 육지로 아울러 전진하여 살육하고 약탈함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한산도에 이르러 진막(鎭幕)을 불태우고 돌아가니, 한산도에서 미처 도피하지 못한 남녀들은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당초에 수길(秀吉)이 금오(金吾)를 내어 보낼 때에 명령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다만 사람이 귀는 둘이 있고 코는 하나 뿐이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고, 각기 코를 한 되씩 채운 뒤에야 생포(生捕)하기를 허락한다. 운운.” 하였으므로, 이번에 나와서는 사람만 보면 죽이건 안 죽이건 번번이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연간에 본국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 도로 이순신(李舜臣)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시켰다. 이때에 이순신이 영남에서 원수(元帥)의 막하에 있었다.
○ 양원(楊元)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돌아와 적세가 급하다는 말을 듣고 모든 군사에게 수리하는 역사를 독촉하였다.
○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아병(牙兵) 정옥수(鄭玉壽)를 시켜 가만히 창원 지경에 들어가서 적을 정탐하게 하였더니, 적의 패(牌)가 길가에 서 있는 것을 정옥수가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금오(金吾) 등이 길을 갈라 올라온다는 글이었다. 그 글에, “8월 3일에 각 진에서 출발하여 수륙 다섯 길로 전진하여 바로 대명(大明)을 침범하기로 하는데, 청정(淸正)은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밀양을 거쳐 초계ㆍ거창으로 향하고, 윤직무(允直茂)는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김해ㆍ창원을 거쳐 진주로 향하고, 성친(盛親) 등은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남해ㆍ흥양을 거쳐 나주ㆍ영산포(榮山浦)로 향하고, 행장(行長)ㆍ의지(義智)ㆍ의홍(義弘)은 군사 수십만을 거느리고 거제ㆍ남해를 거쳐 구례(求禮)로 향하고, 정성(正成)ㆍ갑비수(甲斐守) 등은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광양ㆍ순천ㆍ구례를 거쳐 15일에 모두 남원ㆍ전주에 모이도록 하는데, 전장(戰將)이 27명이요, 군사가 60만 명으로 혹은 충청도로 향하고, 혹은 서울로 향하고, 혹은 경상좌도를 거쳐 도로 내려오도록 한다. 운운.” 하였다. 적의 선성(先聲)이 비록 허장(虛張)한 데 가까우나 마침내 그들이 거친 길을 보면 이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뒤에 호남 각 고을에 바둑처럼 널려진 것이 거의 50여 둔(屯)에 이르고, 도로 경상좌도로 내려온 것과 연해(沿海)에 먼저 주둔한 것이 몇 진(陣)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패에 쓰인 숫자가 거의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 조방장 김언공(金彦恭)이 호남 군사를 거느리고 한산도로 가다가 길에서 수군이 패했다는 말을 듣고 퇴각하여 진주로 돌아왔다. 권율이 김언공으로 하여금 섬진강에서 가로 막게 하였더니 거느린 무사(武士)들이 본도가 급하다 하여 모두 장수를 버리고 돌아왔다. 권율이 듣고 김언공을 잡아다가 신문하였다.
○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이 경상좌도의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 산성(公山山城)을 지키고, 진주 목사 등으로 정개 산성(鼎盖山城)을 지키게 하고, 조방장 김해 부사 백사림(白士霖) 등으로 안음(安陰)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지키게 하고, 우병사로 악견 산성(岳堅山城)을 지키게 하였다.
○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순천에 나아가 진을 쳤다.
○ 남원의 교룡 산성(蛟龍山城)을 파하였다.
○ 호조 판서 김수(金晬)가 우도로부터 도로 남원에 이르러 주포(周浦)에 머물렀는데, 조정에서 또 호조 참판 이광정(李光庭)을 남원으로 보내어 힘을 합하여 군량을 주선하게 하였다.
○ 양원(楊元)은 민준이 연로하다고 하여 서울로 돌려보냈다.
○ 곽재우(郭再祐)가 영산(靈山) 화왕 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이때에 곽재우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있었다.
8월 3일 적병이 대거 수륙으로 함께 전진하는데, 밀양ㆍ김해ㆍ진해ㆍ거제의 길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았다. 금오(金吾)는 대장으로서 부산에 머물렀다.
4일 여러 갈래의 적이 이미 내지(內地)에 들어와서 행장 등 선봉은 사천ㆍ남해 등지에 분탕질을 하고, 청정 등은 이미 초계ㆍ함안을 통과하고, 이튿날 의홍 등의 군사는 곤양(昆陽)의 금오산(金鰲山)과 노량(露梁) 등지에 배를 대고 산중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선봉이 하동을 지나 진주ㆍ섬진으로 들어왔다. 진주 목사는 정개 산성을 버리고 우병사는 악견 산성을 버렸다. 갑비수(甲裴守) 등 적병이 광양(光陽)으로 향하니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퇴각하여 옥과(玉果)로 향하였다.
6일 적선이 나아와 악양(岳陽)에 정박하였는데, 영남 바다로부터 5ㆍ60리 사이에 배가 가득 차서 마치 바다가 물이 없는 듯하였다. 척후(斥候)의 정탐이 이미 끊어져 소식을 알 수 없어서 남원부에서 하인 양제(梁齊) 등 다섯 사람을 시켜 달려가 적의 경계를 탐지하게 하였더니, 삽암(揷岩)에 이르러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고는 곧 돌아와 적의 형세를 보고하였다.
○ 통제사 이순신이 원수의 진중(陣中)으로부터 출발하여 진주의 서로를 거쳐 구례로 항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터에 정백해 있는 것을 보고는 곡성을 거쳐 서해로 향해 갔다. 이때 배설이 배 12척으로 퇴각하여 진도의 벽파정 밑에 있었는데, 이순신이 그리로 달려갔다.
○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석주(石柱)로부터 퇴각하여 본성으로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피하여 남원으로 갔다.
7일 적병이 구례에 들어왔다. 이때 심유경이 요동에 있다가 일이 급한 것을 듣고 관하의 우파총(牛把摠)으로 하여금 집에서 부리는 병정 5명과 통사 1명을 거느리고 행장의 진으로 보내자, 이날 우파총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 본부에서 군관 하원서(河黿瑞)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여 구례 성 밖에 이르니, 적병이 우루루 나오다가 심유경의 성명을 쓴 표기(標旗)를 보고는 그쳤다. 이때 의홍 등 여러 추장(酋長)이 악양에 있으므로, 파총이 악양으로 가서 여러 추장을 보고 심유경의 뜻으로써 물러가라고 타이르니, 행장 등이 말하기를, “관백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반드시 전라도를 함락시키라.’ 하니, 사세가 중지할 수 없소.” 하고, 금ㆍ는ㆍ칼을 보내었다. 우파총이 이에 돌아와서 서울로 향하였다. 의홍 등이 구례에 이르니 적의 선봉이 남원 지경에 들어가 분탕(焚蕩)질하였다. 양원(楊元)이 성중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원천(原川)으로 향하는데, 정기원(鄭期遠)ㆍ임현(任鉉)이 따랐다. 숙성령(宿星嶺)에 이르러 군사를 사열하고 돌아왔는데, 이날 밤에 성중에 있던 우리 군사는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 청정 등 적이 이미 창녕ㆍ초계ㆍ합천ㆍ삼가를 지났는데, 지나간 각 고을은 불모지가 되어 남긴 것이 없었다.
8일 양원이 군사를 나누어 성을 지키는데, 성 위에 8백 명이요, 토장(土墻) 안에 1천 2백 명이고, 유군(遊軍)이 1천 명이었다. 우리 나라 각 진에 가정(家丁)을 나누어 보내 들어와 함께 지키기를 독려하였다. 이날 운봉 현감의 급한 보고 가운데는, “영남 좌우도의 적이 이미 거창ㆍ산음 등지에 이르러 모두 분탕질하였습니다. 운운.” 하였다.
○ 이때 본도의 피난민이 혹은 경상좌도로 들어가고 산중으로 들어간 사람도 또한 많았다.
○ 문안사(問安使) 오응정(吳應井)을 남원 총병부에 보내고 바로 오응정을 본도 방어사로 임명하였는데, 성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 이광정(李光庭)이 남원성 안에 머물러 있다가 이날 남문으로 향하여 나오면서, “우리 나라 군사가 산성을 맡아 지킨다면 직책은 비록 다르나 나도 또한 죽음으로써 함께 지키려 하였는데, 산성이 이미 파하였으니 여기에 있어야 무슨 소용이랴.” 하고, 주포(周浦)에 이르러 김수(金晬)와 함께 향교로 가서 변란을 대기하였다.
9일 흉악한 적이 둔산령(屯山嶺)을 넘어서 산안의 여러 마을을 불질렀다.
○ 운봉 현감의 급한 보고에, “적병이 진주ㆍ구례로부터 산에 들어와 수색하는 놈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이때 내가 부사의 서기(書記)로 성중에 있으면서 가족을 먼저 산중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지금 흉악한 적이 연일 산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는 충성할 마음도 비록 간절하나 노모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부득이 동문으로부터 나와서 집에 와보니 동리는 텅 비었고 다만 두어 명 하인이 산에 숨어 내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고, 처자는 영(嶺)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함께 상룡추(上龍湫) 가에 있는 산막에 들어갔다. 내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조모에게 의지하여 자랐으므로 외조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 임금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전교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다. 이때에 체찰사와 도원수가 거느린 군사들이 이미 다 흩어져 떠났고, 단기(單騎)로 말을 달려 왕명에 부복하였다.
10일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퇴각하여 남원성 안으로 들어갔다.
○ 양원이 적병이 들어와 점거할까 염려하여 부사 임현(任鉉)으로 하여금 산성 안에 있는 가옥을 모두 불사르게 하고 본성 밖의 인가도 불태우게 하였다.
○ 김수(金晬)가 이광정(李光庭)과 함께 향교에서 출발하여 부(府)의 북촌(北村)으로 퇴각하였다가 서울로 향하였다.
11일 오후에 흉악한 적이 숙성령(宿星嶺)을 넘어서 혹은 10여 명 혹은 20여 명씩 끊임없이 잇따라 내려 보내 원천(原川)의 촌락을 정탐하고, 밤에는 성밑에 들어와서 엿보고 돌아갔다. 다음날 행장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넘어 원천(原川) 원평(院坪)에 주둔하고 선봉이 이미 요천(蓼川) 가에 진출하였는데, 동남 4ㆍ50리 안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리우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였다. 나는 아직 왜놈을 직접 겪어보지 못하였으므로 용추(龍湫)한 고을은 군사를 피할 수 있다 하여 동형(洞兄) 진사 정사달(丁士澾)과 양덕해(梁德海) 형과 상의하였다. 적이 이리로 오리라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에 정진사는 파근원(波根源) 아래로 들어가고, 양형은 나를 따라서 상룡추(上龍湫) 가로 들어갔더니, 이날 밤에 본촌(本村) 사람이 적에게 잡혀 결박되었다가 도망해 왔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병화(兵禍)의 참혹한 것을 알았으며, 여기에는 잠깐도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곧 양형과 더불어 가솔 80여명을 이끌고 무산(毋山)쪽으로 달아나 장차 멀리 가고자 하였더니, 팔량현(八良峴)에서 패한 병사가 달려와서 말하기를, “영남의 적이 이미 산음ㆍ안음에 이르러 조만간에 여기에 도착할 것이다.” 하므로, 양형과 더불어 노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을 걱정하였더니, 운봉현 선비 주난수(周蘭秀)란 사람이 지리산 서쪽 기슭으로부터 달려와서 큰소리로 급히 외치기를, “당신들은 적병이 이미 가까이 닥친 것을 모르오? 대방(帶方)의 연기와 불꽃은 하늘에 치솟고, 영남의 포성은 땅을 진동하니, 이 깊은 산 험한 골짜기를 잃으면 중도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우리는 이미 큰 산에 막을 쳐 놓았으니, 당신들은 멀다 여기지 말고 한 곳에 함께 머물면서 같이 죽기로 마음을 맹세하면, 산을 수색하는 자질구레한 도적은 걱정할 것이 없소.” 하였다. 나는 양형에게 말하기를, “이 말도 역시 이치가 있다. 지금 만약 거기에 갔다가 화를 당한다 해도 그것은 주군(周君) 때문이요, 가족을 보존하고 생명을 건진다 해도 그것도 주군 때문이다.” 하고, 곧 망랑현(望閬峴)에 올라가 밤을 지내었다.
○ 병사 이복남(李福男)ㆍ조방장 김경로(金敬老)ㆍ산성 별장 신호(申浩) 등이 모두 남원성 안에 들어갔다. 처음에 이복남이 순천으로부터 옥과현에 이르니 현감 홍요좌(洪堯佐)가 창고를 다 불지르고 단신으로 변란을 대기하고 있었다. 이복남의 거느린 군사도 또한 거의 다 흩어지고 다만 수하의 편비(褊裨) 50여 명만이 있었다. 남원 서창(西倉)으로 가서 성중으로 향하는데, 김경로가 금성(金城)으로부터 오다가 시전(柹田)에서 이복남을 만났다. 이복남이 기뻐하며 손을 잡고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진군하여 비홍령(飛鴻嶺)을 넘어서니 적병이 이미 성 밑에 박두하였다. 이복남이 바라보고 눈을 부릅뜨고 손에 침 뱉고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급난(急難)을 위해 일할 날이 이날이 아니냐! 병졸은 분발함으로 말미암아 날래지고, 군사는 곧음으로써 씩씩하나니,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어느 겨를에 따지겠느냐?” 하고, 크게 나팔과 호각을 불며 북을 치며 서서히 행군하여 만복사(萬福寺) 앞 대로를 따라 행군하여 남문을 거쳐 조용하게 들어갔다. 외촌(外村)에서 불지르고 노략질하던 적들이 불을 멈추고 물러서서 손가락질하면서 구경하고, 성 밑에 있던 적들은 군대를 머물러 움직이지 아니하고 놀라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여러 왜적이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힐문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당돌함이 이 같으냐?” 하므로, “본도의 병사 이아무개이다.” 하였더니, 그를 장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13일 적병이 크게 성밑으로 진군하여 오니 산에 가득 차고 들을 뒤덮어 물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다. 선봉 행장과 의지 등이 먼저 방암봉(訪岩峯)에 이르러 진을 치고 큰 기를 세우고 포를 터뜨리며 호각을 부니 여러 괴수들이 이것을 신호 삼아 전진하여 요천(蓼川) 가에 이르러 세 길로 나누어 포위하였다. 1운(運 군대 편성의 단위 4대)은 방천(防川)에서 선원(禪院)을 거쳐 향교 앞까지 뻗쳐 장성교(長城橋)를 지나 서문 밖에 이르러 진영을 짜고, 1운은 칠장(漆場)으로부터 시내를 가로질러 덕암(德岩) 밑의 구지소(舊紙所) 앞을 지나 다시 내를 건너 율장(栗場)으로 뻗어 대무천(大毋泉)을 지나 서문 밖의 적과 서로 이어 진영을 짜니, 연이어 빙 둘러서 달무리처럼 백겹이나 에워쌌다. 유격병(遊擊兵)은 바로 평탄한 길을 따라 동문으로 항하여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왔다 물러났다 하며 도전하고, 왜장은 혹은 향교산(鄕校山)ㆍ기린산(麒麟山)에 올라 가고, 혹은 덕암봉(德嵓峯)ㆍ빙고봉(氷庫峯)으로 올라가 군막을 지어 진을 치고, 혹은 진중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이때 양원과 이신방은 동문에 있었고, 천총 장표(蔣表)는 남문에 있었고, 모승선(毛承先)은 서문에 있었고, 병사 이복남은 북문에 있으면서 군대를 나누어 성첩을 지켰다. 양원이 주라를 불며 포를 쏘게 하고, 성중에 전령하여 군기(軍器)를 함부로 허비함을 엄하게 금했다. 오시(午時)에 적 5명이 곧장 동문 밖으로 들어와 돌다리 위에 벌려서자 양원이 몰래 문을 나가 외성(外城) 안에 서서 장사를 뽑아 적을 쏘게 하였다. 우리 나라의 능한 포수 부장(部將) 김익룡(金翼龍)과 겸사복(兼司僕) 양득(梁得)과 별패진(別牌陣) 정금(鄭金) 등이 일시에 총을 쏘니, 세 놈이 그 자리에서 죽고 남은 놈들이 시체를 운반해 물러갔다. 미시(未時)에 거의 수만 명에 이르는 적병이 칠장(漆場)ㆍ선원(禪院)으로부터 고함치며 전진하여 성 바깥 백 보 지점에 벌려 서서 연달아 총을 쏘며 소리 높여 크게 고함쳤다. 성중에서 잇달아 진천뢰(震天雷)를 발사하여 적병의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자 적은 도로 물러갔다. 양원(楊元)은 적이 목숨을 헤아리지 않고 백주에 감히 전진하여 오니 밤에 반드시 난입할 것이라 예측하여, 마름쇠를 참호 밖에다 많이 박고 못판을 만들어 몰래 다리에 묻었다. 이날 밤에 양원이 친히 문밖에 있으면서 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밤 2경(二更)이 되어 잠시 발자국 소리가 있으므로 고개를 쳐들고 이들을 기다리니 과연 세 적병이 벌써 못판을 제거하고 다리를 건너오려 하므로 명 나라 군사 수명이 창을 들고 출전하여 그들을 베었다. 양원이 즉각 4개 문의 다리를 철거시켰다. 사면의 적진에서는 아침까지 불을 놓고, 밤새도록 쉬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포를 쏘아댔다. 그 나머지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니 백 리 안이 연기와 불길로 하늘이 뒤덮혔다. 이때 본도 감사 박홍로(朴弘老)가 이미 바뀌고 황신(黃愼)이 그를 대신하여 감사가 되었으나, 변산(邊山)으로 달아나 왜병을 피하고 있었다. 도사(都事) 김순명(金順命)은 군대가 무너진 뒤에 홀로 금성(金城)에 있다가 총부(總府)의 징원차관(徵援差官)과 같이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가다 적성진(赤城津)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 달아났다.
14일 적병이 숙성(宿星)ㆍ원천(原川)으로부터 산으로 흩어져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 펴듯 좌우익을 펴고 몰려오는 진법의 하나)을 벌리고 내려오는데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성밖에 와서 사면으로 나누어 에워싸고 토목(土木)의 역사를 전보다 더욱 급하게 서두르며 비운장제(飛雲長梯)를 많이 만들어 성에 오르는 기구로 삼고, 대무천(大毋泉) 모퉁이에다 풀ㆍ짚단ㆍ흙ㆍ돌을 운반하여 참호를 메워 길을 내고 그 밖에도 장대를 가로 매었는데 그것이 거의 백여 보에 이르렀다. 민가의 판자를 가져다가 장대에 기대어 죽 늘어 세우고, 또 성밖의 장벽을 뚫어 모두 총쏘는 곳으로 삼았다. 또 높은 사다리를 삽교(鍤橋) 모퉁이에다 매어 성안을 굽어보면서 무수한 탄환을 쏘아대니, 이 성의 안팎을 지키던 명 나라 사병들이 일시에 모두 죽어버려 동남 모퉁이의 성첩이 다 비게 되었다. 정오에 적병이 또 칠전(漆田)으로부터 고함치며 돌진하면서 일시에 총을 쏘아대니, 탄환이 우르릉거리는 뇌성과 쏟아지는 우박 같아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서문의 왜적은 수송용 차에다 만복사(萬福寺) 절 이름. 서문밖 2리 앞에 있는데 5백 나한(五百羅漢)이 있었다. 의 사천왕(四天王)을 싣고 와 성밖을 돌며 시위하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 양원은 말하기를, “적병은 연일 도전하고 아군은 움츠려들어 약세를 적에게 보인 것이 진실로 적지 않았으니, 이제 군대를 내보내 공격해야 한다.” 하자, 중군은 말하기를, “이것은 안전한 계책이 아니니 성을 굳게 지켜 응원군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듣지 아니하고 곧 천여 명의 군병을 모아 문을 열고 나가 싸우게 하니, 적병은 속임수로 물러갔다. 아군이 돌다리 밖까지 따라가자 적병은 문밖으로부터 상하로 잠복하였다가 기어서 앞으로 나와 포위하고 무찔러 죽일 심산이었다. 양원이 급히 주라를 불게 하고 초요기(招搖旗)를 여러 차례 펄럭이니 성밖의 군사들이 도로 들어왔는데,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수삼 명이었다. 날이 저물자 군사를 거두어 굳게 지켰다. 이날 적병 50여 명이 운봉현(雲峯縣)에 가 분탕질을 치고 산을 뒤져 가면서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15일 양원이 동문의 성위에 있으면서 주라를 몇 차례 불게 하였으나 성중은 고요하므로 관가(管家 하인)를 시켜 성위로 나가서 크게 두어 번 소리치게 하니, 왜놈 5명이 달려서 동문 밖 돌다리까지 와 꿇어앉아 전갈이 있기를 청하였다. 양원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몇 마디 말을 설파하게 하니, 다섯 왜놈이 방암봉(訪岩峯)으로 달려 돌아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 또한 몇 마디 말로 보고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양원이 적병에게 서로 사자(使者)를 내왕하게 하자고 말하자, 명병(明兵)을 먼저 보내라고 회보하였다.”고 말하나, 자세하지 않다. 양원이 그 자리에서 관가(管家) 두 사람을 불러 이야기하여 내보내니, 왜놈의 사자가 명병을 대동하고 방암봉을 향하여 갔다. 적의 장수와 만나 일을 의논하였는데, 행장(行長)은 음식을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저녁 때에 왜장의 사자 5명이 말을 타고 와서 곧장 동문에 이르니, 양원이 통사를 시켜 왜사(倭使)를 대동하여 남문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양원이 용성관(龍城館)에 들어가 앉아 왜사를 만나 의논하니, 왜사는 행장의 말이라면서, “빨리 성을 비기 바랍니다.” 하였다. 양원이 말하기를, “내가 15세부터 장수가 되어 천하를 횡행하면서 싸워 이기지 못한 적이 없소. 이제 정병 10만 명으로 이 성을 지키는데, 퇴각하라는 명령은 없었소.” 하니, 왜사들이 도로 남문으로 나아갔다. 왜사가 또 전언하기를, “천여 명의 잔졸을 가지고 어떻게 백만의 군대를 당할 것입니까? 천장(天將)께서는 조선에 무슨 은혜가 있어 후회할 일을 남기려 하시오?” 하였다. 양원이 몇 마디 말을 일러 보냈다. 여러 날 포위당하였는데 적의 형세는 더욱 성하여 호호탕탕하고 위급하기가 바람탄 불과 빠른 우레 같았다. 점차 성에 다가와 더욱 공세를 퍼부우니 우리 형세는 다급하여 날마다 점점 외롭고 위태해 갔다. 성 내외의 명 나라 병사들이 서로 부르짖기 시작하고, 우리 나라의 남녀들도 동분서주하며 울었다. 적이 이것을 알고 침공을 배나 더했다. 이날 밤에 큰비가 오자 적병은 어둠을 틈타 성을 공격하였는데, 우리 군대와 중국 군대는 맞아 싸우느라 잠자고 밥먹을 틈도 없었다. 이때 심산궁곡까지도 왜적의 발굽에 거의 짓밟혔고, 운봉(雲峯)ㆍ주성(周性)의 무리들도 모두 약탈을 당했다. 나와 양형(梁兄) 및 백암(白嵓) 이공직(李公直)의 부형과 가족 수백 명이 돌의 모서리를 붙잡고 기어서 내려갔다. 황류동(黃流洞)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와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三岐) 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 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날마다 고성(孤城)을 바라보니 적병이 달 무리처럼 에워싸 위급하였다. 포성은 하늘을 진동하고, 불빛은 낮과 같이 밝았다. 저 관군들이 힘을 다하여 지키고 방어하는 고생과 흉한 왜적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형상을 생각하니 가슴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울음과 눈물이 함께 나오고, 한숨 짓고 탄식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만일 1개 여단의 군대가 내 손에 있다면, 한 번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나아가 성원하여 아군이 갈망하는 마음을 풀어 주고, 저 왜적들의 집어 삼킬 듯한 기세를 꺾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만 애석하다! 수양(睢陽) 한 성이 함락에 임하여서는 장순(張巡)의 한쪽 손으로는 공효를 이룰 수 없었고, 하란(賀蘭)의 주둔병이 이미 흩어지니 제운(霽雲)의 혈성(血誠)도 무엇에 쓰겠소. 뜻은 있으나 속수무책이니 다만 통분할 뿐이오.” 하니, 모든 병사들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 청정 등의 군사가 함양(咸陽)에 이르렀는데, 선봉 수천 명이 진군하여 황석성(黃石城) 밑에 임박하여 통사(通事)를 시켜 개산(介山)을 불러 말하기를, “너의 부친이 여기 있으니 문을 열고 나와 보라.” 하였다. 백사림(白士霖)이 개산을 참수하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왜적이 말하기를, “비록 백 명의 개산을 죽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아깝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다음날 적병이 고함쳐 말하기를, “성을 비어 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 하니 백사림이 줄을 타고 성에서 매달려 내려가고 군사는 무너져 달아났다. 적이 입성하여 마구 죽이니,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ㆍ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 등은 가족과 함께 죽었으며, 근처 첩입관(疊入官)과 장졸 등 죽은 자가 5백여 명에 달했다. 개산은 김해(金海) 사람이다. 아버지가 임진란 초부터 적에게 붙어 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계책을 도왔다.
16일 흉적(兇賊)이 남원을 함락했다. 총병(總兵)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千摠) 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浩), 부사(府使) 임현(任鉉), 통판(通判) 이덕회(李德恢),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원춘(李元春) 등이 다 남원에서 죽었다. 양원이 50여 기(騎)로써 서문으로 나와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이날 적의 괴수 등이 양원이 성을 나가도록 재촉하였고, 양원도 또한 결국 함락을 면하지 못할 줄 알고서 군사를 버리고 갈 계획을 하자, 성중의 사람들이 법석대며 두려워하여 곡성이 우레 같았다. 적병이 성 밑에 육박하며 더욱 급히 공격하여 이경에 이르러 남문으로 마구 몰려들어 어떤 사람은 대모천(大母泉) 모퉁이로 해서 성에 올라왔다 하는데, 옳지 않다. 어둠을 틈타 마구 찌르니 명병과 우리 나라 장사들이 달려가 북문 안에 몰렸다. 적병이 칼을 휘두르며 따라와 죽이니 양군이 북성 안에서 모두 죽었다. 성중에서 전후하여 죽은 자가 거의 5ㆍ60명에 이르렀다. 왜적은 성 안팎의 관사와 민가를 다 불살라 버렸다. 양원이 접반사를 살리고자 그가 타지 않는 남은 말에 태워 같이 나왔다. 정기원은 말타는 데 익숙하지 못하여 누차 떨어져 잘 따라오지 못했다. 당초에 마귀(麻貴)가 여러 장수에게 분부하여 말하기를, “혹시 위급한 사태가 있게 되면 남원은 전주에 알리고, 전주는 공주에 알리고, 공주는 서울에 알려 차례차례로 달려가 응원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때에 진우충(陳愚衷)이 전주에 있었으나 와서 응원하지 아니하고 또 급함을 알리지도 아니하여 대군이 몰사하게 되었다. 이날 밤에 나는 양형(梁兄)더러 말하기를, “성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사람들이 살아날 길이 없소.” 하고, 서로 슬퍼하며 탄식했다. 양형이 말하기를, “성이 함락된 뒤에 적은 반드시 대거 산을 수색할 것이요, 그대는 모름지기 노복을 인솔하고 산을 내려가서 양식을 운반하여다 산에 머무를 밑천을 장만하시오.” 하여, 나는 곧 하인 10여 명을 인솔하고 문현(門峴)에 올라가 망을 보았다. 이날은 바로 청정(淸正)의 군대가 함양으로부터 운봉으로 넘어 들어갈 때이다. 황산(荒山) 상하에는 적병이 가득 찼고, 밤중에 고촌(高村)으로 내려가 보니 적병이 넘쳐나 길을 건너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바로 그대로 돌아왔다. 즉시로 양형과 이공직 등 여러 사람과 같이 황류천을 건너 은신암(隱身庵)의 옛터로 향로봉의 북쪽기슭 아래 있다. 들어가 막을 치고 머물렀다.
17일 행장(行長)의 선봉은 임실(任實)을 지나 분탕질하며 도둑질하고, 청정의 군대는 모두 운봉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행장 등이 전주로 향하자, 진우충은 성을 버리고 도망쳐 달아났다. 청정의 군사가 운봉으로부터 두 길로 나누어 남원으로 향하였는데, 1대는 바로 안신원(安信院)으로 향하고, 또 1대는 행진하여 구등굴(九等窟)을 거쳤다. 왜적 5명이 원주(原州)로부터 구등굴에 이르러 대화하고, 양로(兩路)의 군대가 모두 물러나 운봉으로 돌아가 며칠을 머무르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수색하다가, 혹은 사찰에 유숙하고, 혹은 산꼭대기에 모여서 잤는데,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는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19일 적병이 전주로 들어와 모두 분탕하여 없애고 성과 참호를 헐어버렸다.
20일 청정의 군대는 운봉으로부터 장수로 향하여 남원의 동천(東川)을 지나 번암(番岩)ㆍ철천(銕川) 등지에 머무르면서 차산(差山)에 가 대수색을 벌였다. 근읍의 사람들은 이 산이 군읍과 거리가 약간 멀고, 또 적병이 서울로 향하는 직로가 아니라 하여 피해 들어간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씨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적병은 장수(長水)와 진안(鎭安)을 지나 그대로 전주로 향하여 갔는데, 거치는 촌락과 산골짝에서 분탕질하고 해치고 노략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주에 이르러 양정포(良正浦)에 주둔하고, 행장 등의 군대와 같이 시장을 열고 남원에서 얻은 중국 물건을 뽐내 보였다. 적의 괴수들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임진년 싸움에 8도가 모두 함락되었으나 조선이 이때까지 부지(扶持)해 온 것은 수로(水路)로 서로 통하여 호서ㆍ호남 양호의 힘이 서로(西路)에 미친 소치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군대를 수륙으로 나누어서 응원하는 길을 막는 것만 같음이 없다.” 하고, 그날로 군사를 나누어 청정 등은 경기로 직행하고, 수가(秀家)와 행장(行長) 등은 회군하여 도로 내려가고, 의홍 등의 적은 나누어 우도로 내려가 열읍(列邑)에 주둔했다.
○ 적의 경보가 대단히 급하기 때문에 중전(中殿)과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 관서(關西)의 강계(江界)길로 향했다.
22일 적병 16명이 몰래 은신암의 산막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살해하므로 내가 그들을 격파하고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과 같이 월락동(月落洞)으로 넘어 들어가 머물러 있었다.
30일 수가와 행장 등의 군대가 임실로부터 남원을 지나 원천(原川) 원평(院坪)에 진을 치고 산골짜기를 대수색하며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9월 1일 행장 등의 적이 구례로 해서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 결진하여 성을 쌓고 막을 치고, 본부의 사람들에게 패(牌)를 주어 속여서 꼬여 소집하고, 군대를 나누어 본성과 광양성(光陽城)을 지키고, 사방으로 군대를 흩어 외촌에 주둔하며, 항복하여 붙은 사람과 같이 집결하여 한 마을을 만들고, 벼와 곡식을 수확하여 식량을 준비했다. 패를 받은 사람은 각각 쌀 3말씩을 납부했다. 수가는 섬진강(蟾津江)으로 해서 한산도(閑山島)에 유둔했다. 적의 괴수들은 먼저 천여 척의 배를 서해로 보냈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은 잔병(殘兵)을 거느리고 진도(珍島)의 명량구(鳴梁口)에다 유진하고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2일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 여러 사람과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려 식량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 도로 은신암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멎게 되었다. 이공직의 형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연상산(煙象山)으로 내려가고, 우리들은 밤에 황류천을 건넜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가서 겨우 정령성(鄭嶺城)에 도달하여 잠깐 쉬고, 아침에 서운암(瑞雲庵) 터에 내려가 매복하여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니 올라왔던 산적이 모두 내려갔다. 수색하는 왜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월운령(月雲嶺)을 달려 지나가 노숙(露宿)하고, 아침에 파근산(波根山)에 올라가 정찰하다가 처음으로 한 동리 사람을 만나 왜적의 형세와 고향 소식을 들었다. 그대로 숲속에 숨었다가 저녁 때에 경덕사(敬德寺)로 내려가 유숙했다. 인솔한 늙은이와 어린이도 아직까지 모두 탈이 없었다. 보는 사람마다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본촌 사람으로 왜적에게 죽은 자가 백여 명에 이르렀고, 유아들을 모두 내버렸다.” 했다. 며칠을 머물면서 왜적의 형세를 염탐하여 보고 노복을 본촌에 보내 벼를 베어 오게 하여 비로소 조석 끼니를 잇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사로운 일은 기록할 만한 것이 못 되나 이런 사실을 예로 들면 다른 일을 알기 때문이다.
6일 명 나라 장수 부총병(副摠兵) 해생(解生) 등이 적병을 직산(稷山)의 금오평(金烏坪)에서 대패시키니 청정 등은 쫓겨 도망쳐 영남으로 내려갔다. 처음 양호(楊鎬)가 평양에 있으면서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다랐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달려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부교(浮橋)를 동작진(銅雀津)에 가설하게 하고, 먼저 부총병 해생, 참장(叅將) 양등산(楊登山), 유격 파새(擺賽)ㆍ파귀(頗貴) 등의 군사 수만 명을 보내 적을 호서(湖西)의 땅에서 맞이하였다. 해생 등이 금오평(金烏坪)에 이르러 군사를 쓰기에 편리한 곳을 둘러보고, 군대를 3협(三協)으로 나누어 좌우로 엄습할 계책을 했다. 진우충은 전주로부터 도망하였는데, 적병이 뒤를 따라와 벌써 금강(錦江)을 건넜다. 임금이 밤낮으로 울면서 경리(經理)에게 호소하니 경리는 위안시키며 말하기를, “혹시 관군(官軍)이 불리하더라도 주군(主君)의 궁권(宮眷)들은 탈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고, 곧 마귀와 같이 대군을 영솔하고 길을 떠나 수원에 이르러 목채(木寨)를 치고, 갈원(葛院)에 군대를 보내어 개천(介川)의 상하에다 매복시켜 후원부대로 삼았다. 적병이 공주(公州)ㆍ천안(天安)으로부터 바로 서울로 향하여 5일 동틀 무렵에 전추참(田秋站)을 경유하여 홍경원(洪慶院)으로 향하니, 선봉이 벌써 금오평에 이르렀다. 명병의 좌협(左協)은 유포(柳浦)로 나가고 우협(右協)은 영통(靈通)으로 출발하여 대군이 곧장 평탄한 길을 따라갔다. 바라 소리가 세 번 일어나니 함성이 사방에서 어울렸다. 연달아 대포를 쏘고, 모든 깃발이 일제히 흔들리고, 철마(鐵馬)들이 구름처럼 떼지어 날뛰고, 창검이 떨쳐 나가는 듯하였다. 달려가 돌입하면서 마구 무찌르니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하루에 6차례나 맞붙어 싸우니 왜적의 형세가 산란해졌다. 날이 저물어서 각각 군사를 거두어 둔취(屯聚)하였다. 청정은 밤에 여러 군대에 명령하여 내일 아침에 죽음으로써 싸울 계책을 결정토록 했다. 해생은 비밀리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오늘 왜적의 형세를 보니 내일에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결심하고 물러갔으니 부디 죽음을 걸고 용감하게 싸워서 군율을 어기지 말라. 그리고 저 왜적은 교활하니 패하여 물러가게 되면 반드시 산길로 해서 갈 것이다. 험한 곳에서는 기병과 보병이 형세가 다르니 끝까지 추적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다음날 먼동이 틀 때 적병은 일제히 계속 포를 쏘며, 학익진(鶴翼陣)을 벌이고 진군하여 오는데, 흰 칼날을 서로 휘둘러 살기가 하늘까지 뻗치고 기괴한 형상은 사람들의 눈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명병이 포를 응사하면서 돌연히 일어나니 철편(鐵鞭) 아래에 왜적은 손을 쓸 사이도 없었다. 싸움이 붙은 지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패하여 도망하여 목천(木川)ㆍ청주(淸州)를 향하여 달아났다. 대군의 힘이 다 되고 또 산간 벽지의 길로 나갔기 때문에 마귀는 추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휴식시켰다가 길을 나누어 추격하여 내려갔다. 그 뒤에 왜적이 본국으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3대전(三大戰)을 말하기를, “평양(平壤)ㆍ행주(幸州)ㆍ금오평(金烏坪)이라.” 하였다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금오평 싸움에 명병은 홍경원에 결진하고 비밀리 화약을 군막의 풀 숲에 묻었다가 왜적이 이르러 오자 거짓 진을 버리고 달아나니, 적병이 앞을 다투어 들어와 막을 불사르다가 화상을 입고 죽은 자가 많았다.” 하니, 이 말이 사실에 가깝다. 경리(經理)는 수원에 가지 아니 하고 있다가 임금과 같이 종남산(終南山)에 올라가 멀리 기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적병이 패하여 달아났다.”고 하였다.
9일 양형과 같이 그대로 파근사(波根寺)에 있었다. 본부의 아전 정대인(鄭大仁)ㆍ배입(裴立) 등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올라와 말하기를, “근자에 왜적의 형세를 보면 결코 근절될 이치가 없습니다. 겨울이 깊어져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적의 수색이 그치지 아니하오면, 불쌍한 우리 남은 백성은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니, 아무개는 강개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본래부터 아는 터이니 격문을 사방으로 띄워 모집한다면 얼마의 장정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의 오는 길을 끊어버린다면 부모 처자를 걱정 없이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과 꼭 같다. 그러나 적의 떼가 가득 차 있어 한 장의 격문도 통과하기 어려워서 민망함을 참고 이 곳에 머물러 있자니 다만 통분할 뿐이었는데, 그대가 이토록 꾀하니, 실로 내 마음을 알았다.” 하고, 서로 날짜를 약속하여 장사를 모집하기로 하였으나, 또한 왜적의 형세가 갑절이나 치열하여져 사람과 물건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일 양형과 같이 가족을 인솔하고 송림사(松林寺) 터로 내려가니 상사(上舍) 정사달(丁士達) 형제가 처음 파근원(波根源)에서 패배를 당하여 몸만 빠져 남으로 달아났다가 내가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남촌에서 밤에 몰래 오다가 들 가운데서 나와 만나게 되어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이어서 산으로 들어가 한 곳에다 초막을 쳤다.
○ 청정 등 적이 청주에 이르러 길을 나누어 내려갔다. 1대는 청산(靑山)ㆍ황간(黃澗)을 지나 성주를 거쳐 남도로 내려가고, 다른 1대는 함창(咸昌)ㆍ상주(尙州)로부터 인동(仁同)ㆍ대구(大丘)를 거쳐 내려가고, 또 1대는 문경(聞慶)ㆍ군위(君威)ㆍ비안(比安)으로 해서 내려가 모두 전에 있던 소굴로 들어갔다. 윤직무(允直茂) 등은 청주로부터 공주로 도로 나와 청정의 군대 수만 명과 같이 호서의 우도를 분탕질하고, 이어서 전라우도로 내려가면서 모두 분탕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여 민패(民牌)를 내주며 백성을 달래고 쌀을 주니 곤궁한 인민이 다투어 들어갔다.
○ 의홍 등의 적은 순창(淳昌)ㆍ담양(潭陽)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져 주둔하고 지켰다. 창평(昌平)ㆍ광주(光州)ㆍ옥과(玉果)ㆍ동복(同福)ㆍ능주(綾州)ㆍ화순(和順) 같은 데는 적병이 많고,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며 민패를 발급하여 불러다 항복시키니, 달려가 붙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저자를 열어 교역하는데 까지 이르렀고, 연도(沿道) 각읍의 왜적도 모두 이같이 하였다. 동복(同福)의 생원(生員) 김우추(金遇秋)가 본현의 왜장(倭長)에게 편지를 올려 이르기를, “누구나 부리면 백성이요 누구나 섬기면 임금이니, 한 호(戶)로 편입되어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끝에다 서를 지어 붙이기를
칼을 짚고 동해를 건너오니 / 杖劍渡東海
장군은 왕의 보필감이요 / 將軍王佐才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는다면 / 殺人如不嗜
천하가 모두 돌아올 것이요 / 四海盡歸來
하였다. 그 뒤 난리가 평정되자 사림들이 왜적에게 붙었다는 것으로 죄주었다. 이때에, “창전(昌全)ㆍ옥삼(玉三)ㆍ동이(同二)ㆍ곡일(谷一).”이란 말이 있었는데, 전(全)이란 것은 창평 한 고을 사람이 전부 들어갔다는 것을 말함이고, 3ㆍ2ㆍ1이라 함은 그 괴수가 옥과에는 셋, 동복에는 둘, 곡성에는 하나라는 말이다.
17일 적장 평조신(平調信)이 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임실(任實)로부터 남원(南原)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구례로 향하여 그대로 본현에 유둔하고, 산에 들어간 사람을 유인해 내다가 민패를 주고 쌀도 주었다. 도로에다 난동을 금지하는 군대를 두어 왕래하는 왜적으로 하여금 수색하고 노략하지 못하게 하니, 궁한 백성이 우선 당장에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투항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때에 적병이 상도(上道)로부터 혹은 백여 명, 혹은 5ㆍ60명, 혹은 천여 명, 만여 명에 이르는 집단이 연속하여 내려왔다.
○ 적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도(右道)로부터 곡성(谷城)으로 와 주둔하여 민패를 주며 백성을 달래니, 투항해 들어가는 자가 여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민간에 가서 약탈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니 본현과 남원 남서면의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 민패를 받았다. 남원 출신 하원서(河黿瑞)의 딸이 곡성의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하원서는 민패를 차고 적진으로 들어가 그 딸을 보고, 요시라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요시라는 주관하는 왜장을 불러 물어 보니, 하씨의 딸은 금법을 내리기 하루 전에 붙들려 왔다고 하여, 원서는 찾아서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18일 적병 수천 명이 우도로 해서 남원에 이르렀고, 다음날 구례로 향하였다가 이어서 사천(泗川)으로 들어갔다.
19일 적병 만여 명이 우도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운봉으로 향하였는데,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곤 하였다. 근일에 내려오는 왜적은 다 남원을 거쳐 구례로 향하여 갔다. 운봉ㆍ함양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가 추수를 하는데, 이들 왜적이 불의에 돌진해 왔기 때문에 살해 당하고 약탈 당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ㆍ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이 서북의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별장(別將) 한명련(韓明連)ㆍ경상좌방어사(慶尙左防禦使) 고언백(高彦伯)으로서 선봉을 삼아 청정을 추격하여 비안(比安)까지 이르렀으나 따라 잡지 못하였다.
22일 내가 왜적 5명을 불우(佛隅) 부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에서 죽였으나 그 머리를 베지 않았다. 이때에 정사달ㆍ양덕해 등 제형과 함께 한 곳에 있으면서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막사로 모여 날마다 왜적의 동태를 바라보는데, 도로에 그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세력이 큰 왜적은 그래도 간혹 하루 걸러 내려오지만, 세력이 작은 왜적은 항상 내려왔다. 그들 생각에 우리 나라에는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서인지, 행군함에 있어서도 정돈된 항오로 습격에 대비하는 태도가 없었다. 내가 여러 형들에게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흉한 적들이여! 부끄럽도다, 우리 나라여! 영남에서 당초에 사변을 당하였을 때, 사람들이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못하여 각자가 살길을 도모하는데, 곽재우(郭再祐)는 한 빈한한 서생으로 남보다 앞서 자진하여 일어나, 혹은 공격하고 혹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적을 베니, 우도의 여러 고을이 12일 동안에 수복되었소. 이것은 국사(國士)의 기풍이 감발한 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소? 오직 우리 도는 본래부터 예의의 고을이라 일컬어 왔고, 충절과 효행이 고금에 드러났으니 임금께서 오늘날에 바라는 것은 호남과 영남이 다를 바 없는데, 왜적이 본도에 들어온 뒤로 한 사람도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토벌하여 사로잡고 목베어 바치는 사람이 없소. 비록 혹독한 왜적이 득실거려 어떻게 할 만한 방책이 없다 하지만, 임금님의 수복(收復)하려는 소망을 생각하고 신민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면, 꼭 한 번 죽어야 할 처지인데 그대로 산 숲속에 매복하여 편안히 있으면서 자신만을 도모해서야 되겠소. 이것으로 논하면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라도 참으로 나아가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할 것이니, 한 몸의 화복을 어찌 헤아릴 겨를이 있겠소? 더욱 지금 적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왕래하는 것이 고약(孤弱)하고, 우리 인민은 사변에 익숙해져서 밤을 이용하여 서로 통하니, 만일 이때에 밝게 깨우쳐서 장정을 모집해서 복병을 설치하여 왜적을 사로잡고, 군사를 동원하여 추격하면, 곽의사(郭義士)가 우도를 수복한 공적을 우리도 오늘에 쉽게 얻을 것이오. 고군(孤軍)을 이끌고 뱃전을 치며 강을 건너가면 용맹을 날릴 수 있거니와, 초수(楚囚)가 되어 산중에서 서로 마주앉아 우는 것이 어찌 충성이 될 수 있소. 어떻게 하면 적당한 사람을 얻어, 여러 형과 같이 그를 도와 대사를 도모하겠소? 이 서투른 말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고, 오직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힘을 합쳐 그것을 도모하면 다행하겠소.
여러 형들은 모두 충의를 가진 선비라 내 말을 듣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러한 사람이 적격자가 가까이 있는데 하필 멀리 가 구하겠소?” 하고, 동시에 바로 나에게 한 번 죽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분한 나머지 마음을 스스로 누르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왜적을 토벌한다고 소리쳤으나, 오활한 썩은 선비로 일찍이 향리에서 믿음을 받지 못하여 한 사람도 같이 일하겠다고 응모해 오는 사람이 없고, 말하기를, “간신히 생명을 보존하여 오늘까지 왔는데, 아무개는 무슨 꼴로 또 남은 백성을 죽이려 하는가?” 하였다. 나는 여러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기를, “근일에 피살된 사람들이 모두 의병 때문이란 말이오? 붙들려서 죽는 것보다는 순국(殉國)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소. 나 역시 이들 왜적의 천심(淺深)을 알지 못하지만 한 번 죽음으로써 시험하여 사인(士人)들의 의혹을 풀어주기 원하오.” 하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식구들을 풀속에 은신시켜 두고 단지 두 사람의 종만을 인솔하고 성부(城府)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박언량(朴彦良)은 사람됨이 강개하여 실로 충용한 사람인데,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활을 끼고 따라나섰다. 불우(佛隅)에 이르러 높은 데로 올라가 망을 보니, 흉적(凶賊) 5명이 성중으로부터 총을 메고 검을 휘두르며 이리로 왔다. 나는 박언량한테 말하기를, “우리는 4명이고 적들은 5명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지만 우리는 의리에 분발한 신예병(新銳兵), 저들은 바로 멀리 와 싸워 피곤한 군사다. 더욱 그대는 일당백할 용사요, 내 또한 한 번 죽음을 결심하였으니 이것으로서 헤아린다면 적은 바로 안중에 들어온 것이다. 힘써 싸우라.” 하고 말이 끝나자, 길가에 매복했다. 적병이 앞으로 오자 박언량과 함께 일시에 발사하니 잇달아 5명의 적이 맞았는데, 두 놈은 곧 거꾸러지고 세 놈은 검을 던지고 살려주기를 구했다. 나는 하인에게 명령하여 쳐죽이게 하니, 하인은 내가 수급을 필요로 하는가 여겨 귀를 베고자 하므로 내가 제지하며 말하기를,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은 수급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된 직책을 다하는 것 뿐이다.” 하였다. 휴식하는 사이에 포성이 들리므로 잠깐 산 위로 피하여 망보니, 적병 수백 명이 부(府)로부터 오다가 적의 시체를 보고 떠들썩하게 가리키며 부오(部伍)를 정돈하고 높은 데 올라가 망 보다 달아났다. 나는 고갯길에서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군사는 고단하고 화살도 다 없어져 분개하며 산으로 돌아왔다. 제형이 왜적을 섬멸한 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군자정(軍資正) 유지춘(柳知春)이 오차산(於差山)에서 패하여 단신으로 달려와서 내가 왜적을 친 것을 기뻐하며 말하기를, “흉한 왜적들이 가득 퍼지자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도모하니, 비록 크게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나 군사를 모집하기가 극히 어렵소. 참으로 그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정위(精衛)도 나무를 물어 나르면 큰 바다도 메울 수 있고, 노계(老鷄)도 알을 품을 때에는 미친 개도 쫓는 법이니 다만 진력함에 있는 것이지 어찌 수효가 많음을 일삼겠소.” 하였다.
23일 우리 군사가 왜적 36급(級)을 궁장현(弓藏峴)에서 죽였다. 이날 새벽에 또 가족을 숲속에 숨겨 두고 몇 사람의 하인을 거느리고 왜적을 토멸한다고 성명하니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20여 명이 되었다. 선달(先達) 김완(金完)은 영암(靈巖)인인데 새로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영남좌방어사(嶺南左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진중으로 가다가, 본도가 대패함을 듣고 노모(老母)가 있는 까닭에 말을 바치고 나와 남원에 이르렀으나,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하고, 마침 서로 만나게 되어 한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기뻐하여 함께 일어났고, 정사진(丁士進) 군은 강개(慷慨)한 선비로 나의 뒤를 따르니 박언량 등과 아울러 28명이 되었다. 송림으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요천(蓼川) 위의 방암봉에 올라가 숨어서 망을 보니 흉적 50여 명이 임실(任實)로부터 소와 말을 몰고 축천정(丑川亭) 성 북쪽 5리에 있으며 금우정(金牛亭)은 물 가운데 있다.을 지나 곧장 동도역(東道驛) 앞 소로를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군한테 말하기를, “이 왜적들의 행보가 별운교(別雲橋) 부의 동쪽 7리쯤에 있다. 로 들어가니 반드시 무산(母山)으로 향할 것이다. 궁장현은 길이 좁고 좌우에 막힌 곳이 많아 방연(龐涓)을 잡을 만한 곳이다. 이제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요, 만일 무산으로 향한다면 여원곡(女院谷)에서 추격하여 죽일 수 있을 것이오.” 하고, 말이 끝나자 망을 보니 적병이 과연 궁장현으로 향했다. 내가 달려가며 약속하여 말하기를, “군대란 정(精)한데 있지 수효 많은 데 있지 않소. 적을 만나 후퇴하여, 적으로 하여금 형세를 이용하게 하면 많은 것이 더욱 해로움이 있소. 그대들 가운데 만일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이제 뒤로 처지시오.” 하니, 말을 듣고 물러난 자가 7ㆍ8명이었다. 단지 수십 명을 거느렸는데, 궁시(弓矢)를 가진 자는 나와 김완ㆍ정사진ㆍ박언량 네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사람은 모두 몽둥이를 들고 산 위로 해서 달려 궁장현에 당도하니 왜적은 이미 요긴한 길목을 지나갔다. 우리는 이미 형세를 잃어버려 용맹을 쓸 만한 곳이 없어 적을 버리고 헛되이 돌아오게 되니 이는 나의 뜻이 아니었다. 마침내 고함치며 활줄을 세게 당겨 전진하니 적병이 칼을 뽑고 총을 안고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먼저 형세를 타지 못하였다 하여 겁을 먹고 모두 후퇴하고 들어가지 아니하니, 나를 따라 죽기로 나선 자는 6명뿐이었다. 싸움이 한창 붙게 되자 구릉을 한계로 삼아 왜적으로 하여금 난입할 수 없게 하고, 또 먼저 총 가진 자 3ㆍ4명을 쏘아서 죽였기 때문에 멀리서 덤빌 염려는 제거되었으나, 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 힘이 서로 대적이 안 되었다. 비록 활 쏘는 것을 정확하게 한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모두 맞칠 수는 없었다. 왜적의 전봉(前鋒)인 5명의 적이 그 자리에서 죽은 뒤로 나머지 왜적이 일시에 포위하고 들어오니, 우리들은 포위망 속에 있으면서 사면으로 발사하였다. 얼마 동안 치열하게 싸우자 왜적은 더욱 목숨을 내걸고 먼저 정군(丁君)은 쳐서 왼발 복아뼈를 찍어 대고 그 다음으로 박언량을 치니, 박언량이 활과 살로 그것을 막아서 활은 쪼개어지고 사람은 죽음을 면했다. 박언량은 맨손으로 포위를 뚫고 나와 모난 몽둥이를 들고 다시 들어가니 정군도 자기 상처를 돌보지 아니하고 굳게 서서 난사하였다. 나와 김군도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하는데, 뜻밖에도 김군의 활이 또 부러졌다. 한 놈의 왜적이 김군을 쫓아가서 일이 매우 위급하므로, 내가 돌아서며 그를 쏘니 한 살에 바로 죽었다. 나는 살을 뽑아 난사하고, 또 박필남(朴弼南)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김군을 추격하던 왜적이 내가 쏜 한 살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봤는가?” 하니, 박필남은 뒤에서 따라 오면서 대답하기를, “그것을 봤습니다. 봤습니다.” 하였다. 박언량이 급하게 김군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홀로 포위망 속에 있으면서도 죽기로 결심하고 물러가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달아나고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하였다. 이때에 적병으로 죽은 자가 15ㆍ6명이 넘었는데, 모두 싸움을 경험해 본 놈들이라 감히 결사적으로 싸워왔다. 그런데 나도 화살이 떨어져 급하게 경계(庚癸)을 부르니 박필남이 뒤에 처졌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화살을 던져 주므로 나는 살을 계속 주워서 쏘아 댔다. 진시(辰時)부터 교전하여 날이 신시(申時)ㆍ유시(酉時)에 이르자 여러 왜적이 모두 죽었는데, 그 수효는 36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포로된 사람들이라 다 거두어 돌아오니, 부북(府北)의 둔덕촌(屯德村) 사람 고한전(高漢傳) 등이었다. 두 왜적이 개울가에서 짐을 지키며 관망하다가 도망쳤는데, 날이 어둡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산꼭대기에 앉아서 군사를 쉬게 하고 다시 싸움터를 돌아보니, 넘어져 있는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웠는데 비린내 나는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 곧 노획한 왜놈의 행장을 나누어 군인에게 주고 뒷날의 거사에 미끼로 삼게 하였다. 밤중에 산에 돌아오니, 여러 사람이 나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뜻밖에 파목(頗牧)이 우리들 가운데 계셨소. 만일 조정에서 이런 줄을 알게 된다면 충갑(沖甲)의 공은 여실(麗室)에서만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뿐만이 아닐 것이오. 운운.”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김완과 박언량 등 몇 사람이 궁장(弓藏)으로 머리를 베어 왔다. 바야흐로 난투할 때에 사람이 모두 상처를 입었는데, 나만 홀로 종 대손(大孫)이가 모난 몽둥이를 가지고 곁에 있으면서 타격하는 것을 힘입어서 마침내 완전하게 이겼음.
○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 이순신은 왜적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경솔히 대적하지 말고 기회를 따라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 하였다.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삼킬 듯이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내도수(來島守)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으니,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으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하였다. 왜적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담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명량의 싸움을 말하였다 한다.
○ 곡성에 머물러 있던 요시라는 복병을 4개 도로 나누어 보내 우선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금하였다. 부성(府城)의 동문 밖의 요천(蓼川)에도 또한 와서 8명이 막을 치고 머물러 있으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달래어 모아들였다. 내가 박언량ㆍ김완과 같이 그들을 치는데, 먼저 왜놈을 경험한 사람으로 하여금 왜적의 군막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의 형세를 탐지하게 하니, 왜적은 민패를 받은 사람으로 여겨 싸울 생각이 없이 말을 지껄이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그들이 대비하지 못한 때를 이용하여 갑자기 습격하였다. 그래서 박언량은 그들의 수급을 다 거두어 돌아왔다.
○ 적병 50여 명이 오수역(獒樹驛)에 주둔하고 곡식을 거두어 군량을 준비하였다.
○ 명 나라 군사가 서울로부터 처음으로 호남지방에 당도하여 선봉 30여 명이 전주를 경유하여 와서 말을 달려 돌격하니 적병은 짐을 모두 다 버리고 도망쳐 구례로 향했다. 전주 이상에서 적병이 다 내려온 것을 비로소 알았다.
○ 적의 괴수 평수가(平秀家)는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순천(順天)의 왜교(倭橋)로 돌아나와 행장과 진영을 합하였다.
○ 이광악(李光岳)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삼고, 원신(元愼)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10월 명 나라 군사가 오수역으로부터 나아가 남원성을 탐색하다가 향교의 뒷산에서 말을 쉬고 있는데, 곡성의 왜적 30여 명이 소와 말을 몰고 만복사(萬福寺)에 이르러 동철 5백 나한(羅漢)을 녹인 구리쇠 을 싣고 가므로 명 나라 군사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 4급(級)을 베어 죽였다.
8일 청정 등 여러 도의 왜병이 두모(豆毛)ㆍ서생(西生)ㆍ도산(島山) 등 예전 보루로 들어가 진을 쳤다.
○ 마귀는 대군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뒤따라 전라도로 내려와 남원의 북쪽 율현(栗峴)에 이르러 곡성에 적이 있음을 탐지하고 전주로 도로 물러갔다. 배신(陪臣) 우상(右相) 이항복(李恒福)ㆍ반신(伴臣) 장운익(張雲翼)이 이들을 따라갔으나 얼마 안 있어 서울로 도로 향했다.
9일 아군은 왜적을 산동촌(山洞村)까지 추격하여 수급 다섯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왜적의 괴수 평조신(平調信)이 남원을 경유하여 구례로 향할 때, 그들의 군대 4백여 명을 산동촌에 머물러 두어 벼를 베어 양식을 준비하게 하였는데, 그 왜적들은 원내촌(院內村)에 주둔하여 복병을 원하천(院下川) 가에 배치하고 날마다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겸하여 산골짜기를 탐색하며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노략질한 것이 그 수효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본촌의 선비 형덕흥(邢德興)은 연일 급함을 고하여 왔으나, 나도 또한 가까운 적이 급급하여 가서 추격할 겨를이 없었다. 이달 이후로부터는 왕래하는 영적(零賊)들이 아군이 요지를 점거하고 있음을 꺼려 원천(原川)을 경유하지 않았다. 내가 막 가서 그 왜적을 잡으려 하는데, 이날에 형덕흥이 또 와서 살려 줄 것을 요구하므로 즉시 김완ㆍ박언량 등 10여 명과 같이 산동촌으로 향해 떠나니, 양덕해(梁德海) 형이 따라가 구경하기를 원했다. 숙성령(宿星嶺) 위에 이르니 작은 밤고개에 수십 인이 늘어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므로 불러서 그들을 오게 하니 모두 진안(鎭安) 사람이었다. 이때에 원수(元帥) 권율(權慄)이 호남과 영남의 경계로 와서 주둔하였으나, 각관의 수령들이 달아나 숨고 나오지 아니하며, 왜적을 토벌하는 데 뜻이 없는 까닭에 그 더욱 심한 자를 조사하여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본현의 현감 오장(吳長)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보내어 왜적의 귀를 얻어서 후환에서 벗어나려고 도모했으나, 그들은 아군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이곳에서 정탐하고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나게 되니, 기쁘고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진안의 영장(領將)한테 말하기를, “네가 내 뒤를 따르면 왜놈의 머리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싸움에 임하여 어물거리면 군법에는 피차가 없다.” 하니, 영장이 말하기를, “죽건 살건 명령을 따를 뿐이오.” 하였다. 행진하여 운제(雲梯)에 이르러 박언량ㆍ형덕흥에게 명령하여 산에 올라가 정탐하게 하니, 많은 왜적이 원(院) 내의 마을에 결진하고 복병한 군막은 원 아래에 있었다. 저녁 때에 적병 16명이 큰 진으로부터 와서 원 아래 군막을 지켰다. 내가 김완한테 말하기를, “왜적의 세력이 매우 성하여 싸울 수 없으니 마땅히 기계(奇計)를 내어 적을 제압하여야 하오. 이렇게 이렇게 하시오.” 하고, 즉시 군인으로 하여금 연관사(煙觀寺) 남쪽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자모장(自募將) 고민덕(高敏德)이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 벌써 여기에 와 있으면서 여러 날 틈을 엿보았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기뻐하며 말하기를, “일이 잘 이루어 질 것 같소.” 하였다. 밤 2경(二更)에 여러 군사와 같이 몰래 숨어 내려가 원후(院後)에 이르러 세 곳으로 나누어 매복하였는데, 하나는 큰 진의 길목을 끊고, 한 패는 개정(介亭)의 길목을 지키고, 한 패는 모전(茅田)의 험한 지형을 끼고 있었다. 또 박언량 등 7ㆍ8명과 같이 직접 왜군의 군막을 공격하니, 왜놈이 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은 자가 5ㆍ6명이 되었다. 나머지 왜군은 화살을 맞은 채 달아나 큰 진으로 들어갔다. 요로에 있던 군병이 살과 돌을 함께 쏘며 던지니, 빠져 달아난 왜적은 얼마 없었다. 나는 빼앗은 당마(唐馬)를 타고, 향로를 바꾸어 중산(中山)으로 올라가 연달아 삼혈 총통(三穴銃筒)을 쏘며 그 소리에 따라 고함치니, 왜적도 또한 불을 들고 떠들어대며 포를 쏘고 고함쳤다. 나는 다시 연관사(煙觀寺)로 올라가 잠깐 쉬었는데, 고민덕과 진안 사람들이 다 흩어져 갔다. 이날 밤에 큰 진의 왜적들이 숲속으로 숨어 들어 흩어져 매복했으므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닭이 울 때에 김완ㆍ박언량과 같이 군사를 이교(梨橋)의 높은 봉우리로 이동하여 총을 쏘며 고함치기를 어제 밤과 같이 하고, 즉시 다른 봉우리로 이동하여 숨어 엎드려 망을 보았다. 왜적의 진에는 2백의 기치가 세워져 있었고, 또 몇 사람의 기병이 구례로 파견되고, 이어서 8명의 적병이 중산으로 올라가 연기를 피워 사변을 알리고는 한참 망을 보다가 내려갔다. 잠간 있노라니 5ㆍ6기의 적병이 구례에서 달려오자 대진(大陣)의 적은 일시에 막사를 불태워버리고 철수하여 구례로 향하였다. 아군은 겨우 5명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김완ㆍ박언량 등은 적의 귀를 많이 얻어 가지고 은전을 입기 위하여 나와 같이 상의하고 그날로 사람을 전 초계 군수(草溪郡守) 첨지(僉知) 정이길(鄭以吉)에게 보내어 맞이하여서 대장을 삼으니, 정이길은 나와 재종(再從)간이다. 부모가 다 오차산(於差山)의 왜적에게 죽었기 때문에 초계로부터 와서 곡하고, 바야흐로 동지를 모집해서 복수를 도모하려 하다가 나의 소식을 듣고 기뻐서 달려왔다. 그가 우리 산막에 이르자 맞이하여 대장을 삼고, 보수(報讎) 두 글자로써 장표(章標)를 삼았다. 그리고 나를 출전장(出戰將)으로 정사달(丁士澾)을 종사(從事)로 유지춘(柳知春)을 참모(參謀)로 양덕해(梁德海)를 병량유사(兵粮有司)로 삼았다. 이날로 원수(元帥)에게 보고하기를, “의병장은 군공(軍功)을 보고합니다. 나라 운수가 두 번째 비색하여 흉한 왜적이 제멋대로 날뛰니, 관군은 무너져 흩어지고, 중국 군대는 패전하고, 남은 백성이 어육이 됨을 면한 자 거의 드뭅니다. 지난 아무 달 아무 날 제 부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죽은 곳으로 달려가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굴러 슬퍼함이 끝이 없었으며, 동지들과 의거하여 적을 토멸해 적의 살점을 찢어 원수를 만분지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본부의 유학(幼學) 조(趙) 아무개 등은 본래 충성되고 용맹한 사람으로서 복수의 대의를 떨쳐 정예를 모집하여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싸울 때에는 반드시 앞장서서 용감히 굽히지 않아서 여러 차례 크게 이겨 수급을 벤 것이 많았습니다. 임금께 여쭙지 않는 것이 사체에 옳지 못하다 여기고 군수를 청하여 모주(謀主)를 삼았습니다. 어버이를 여의고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여 참으로 미안한 줄 압니다만 복수에 급급한 나머지 감히 거절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전후의 군공(軍功)과 수급을 벤 수효와 왜놈의 짐을 모두 올려 보냈습니다. 본도가 함몰을 당한 뒤로 감히 한 사람도 왜적을 칠 계책을 하지 못하였는데, 다만 이 서생만이 용맹을 떨쳐 적을 공격하였으니 나라를 위한 정성이 실로 비길 데 없습니다. 이 같은 사람을 급히 포상하도록 계하하시어 훗날의 길을 넓혀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왜적의 상황으로 말하면, 남원 위로는 현재 적의 둔병이 없사온데, 곡성에 머무른 왜적은 1만여 명에 이르러 패를 주어 인민을 유인하고, 살생과 노략을 엄금하므로, 본현 사람과 남원 남서면 사람들 가운데 먼저 들어간 어리석은 백성들이 당분간이나마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민패를 받고 쌀을 바치니, 저놈들이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철수해 갈 뜻이 없습니다. 지난 모월 모일에 적병 50여 명이 상도(上道)로부터 내려와 오수역에 주둔하자 명군 30여 명이 전주로 해서 이곳에 이르러 말을 몰아 돌격하니, 적병이 도망쳐 구례로 향했습니다. 명군은 행진하여 향교 뒷산에 매복했는데, 곡성의 왜적 30여 명이 소와 말을 가지고 만복사(萬福寺)에 이르렀으므로, 명군이 기마병을 보내어 추격케 함으로써 4명을 베었는데, 그 후로 곡성 읍내에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뒤덮었으니 아마도 소굴을 불태우고 철거한 듯합니다. 우도(右道)로 말하면 적병이 여러 고을에 가득 차 있어 민패를 주고 쌀을 받았으며, 왕래하던 적들은 모두 옥과ㆍ곡성으로 해서 구례로 향하여 갔습니다. 본부로 말하면, 산동(山洞)에 있는 왜적의 수효가 4백여 명에 달하는데, 벼를 베어 군량을 준비하며 오래 머무를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달 9일에 조 아무개는 군대를 거느리고 고개 위에 둔을 치고 적의 형세를 엿보았으나, 중과부적이어서 감히 부딪쳐 싸우지 못하고, 밤을 틈타 습격해서 다수의 적을 베어 죽이니, 적병이 두려워하여 그날로 철수하였습니다. 몇 명이 되지 않은 군인이오나 분탕을 당한 나머지라 군량을 보급할 길이 없사오니, 한 집안이 모두 죽은 사람이나 도망한 군대의 전답에서 나오는 벼를 군용으로 가져다 쓰려 하오니,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이 때에 원수는 영남으로부터 장수현(長水縣)에 이르렀다가 다시 남원의 목동촌(木洞村)으로 갔다가 전주로 향하였다.
○ 배설(裴楔)은 교만하고 패악하여 군율을 어겨 이순신(李舜臣)에게 죄를 얻자, 자기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星州)의 본집으로 돌아가니, 이순신이 즉시 죄목을 갖추어 아뢰었다. 배설은 도망하였다가 그 뒤에 체포되어 주벌을 받았다.
15일 곡성의 왜적이 철수하여 구례ㆍ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서 진영을 합하였다.
○ 명군 30여 명이 남원으로부터 곡성으로 향했다. 이 때에 창평(昌平)의 왜적은 하동(河東)으로 철수하여 가면서 민패를 받은 사람을 모아서 쌀과 콩을 싣고 끌고 가다가 섬진(蟾津)에 이르러 놓아 돌려보냈다. 사람들이 적의 괴수에게 고하기를, “일본 병사가 끊임없이 왕래하니 중도에서 피해당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괴수는 인솔한 왜군 수십 명으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여 남원의 남촌(南村)에 이르렀는데, 명군과 서로 만나게 되었다. 명군은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막 적의 정세를 물으려 하는데, 왜적이 칼을 뽑아 들고 맞부딪쳐 명군을 살해하니, 명군이 활을 쏘아대어 적 두 놈을 베자, 나머지 왜적과 민패를 찬 사람 수백 명이 모두 달아나 흩어졌다. 명군은 그대로 압록(鴨綠)으로 해서 강을 따라 내려가 구례의 잔수역(潺水驛)에 이르러 잠복하여 망을 보니, 순천의 왜적 40여 명이 강을 건너 왔다. 명 나라 기병 수명이 먼저 나아가 약점을 보이니 적병이 칼을 휘두르며 일시에 돌입하였다. 뒤에 있던 명군이 고함치며 달려들어 돌격하며 난사하니 적병이 패하여 흩어져 모두 강물로 들어가므로 20여 급을 베었다. 기세를 타고 곧장 구례성으로 들어가 고함치며 달려드니, 적병이 사방으로 나와 포위하므로 명군이 후퇴하여 달아났다. 조신(調信)은 전날 산동(山洞)의 밤 습격에 놀랬고 또 이날 낮에 돌격할 때에 놀라서, 적의 대진(大陣)이 잇따라 올까 염려하고 즉시 철수하여 섬진을 향하였다가 이어서 남해도 들어가 군대를 유산도(流山島)이 현의 동문 밖 5리의 지점 에 주둔하여 섬을 빙 둘러 성을 쌓고, 호를 파서 배를 다니게 하였다. 평의지(平義智)는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이리로 나와 이곳에서 합진하고 본현의 인민을 유인하여 민패를 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 사람 손문욱(孫文彧)을 본현의 원으로 삼고, 하동(河東) 출신 김광례(金光禮)를 하동의 원으로 삼아 본읍의 일을 관장하게 하고, 민패를 발급하여 쌀을 받게 하고, 또 왜놈을 시켜 여러 진에 나누어 보내어 본현의 사람을 찾아서 하나하나 데려 오도록 하였다. 문욱(文彧)은 임진년에 왜놈에게 사로잡혀 가 다년간 왜국에 있었기 때문에 왜말을 잘했다. 남해에 있을 때에는 살생과 노략질을 엄금하게 해서 침해를 받은 사람이 많이 보전하여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조선으로 살아 돌아오니 포상하고 만호(萬戶)의 직을 제수했다.
○ 적의 괴수 의홍ㆍ윤직무ㆍ청정 등이 이것 또한 한때의 소문이 이 같았고 사실에 있어서 그 진위(眞僞)는 자세하지 않다. 각각 3ㆍ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남해 등지에 머물렀다. 한 번 명량에서 패전함으로부터 와야 할 배가 이르지 않자 윤직무(允直茂) 등은 우로(右路)를 경유하고, 의홍 등은 좌로(左路)를 경유하여 모두 남원으로 향하여 내려왔다. 21일에 선봉 30여 명의 왜적이 소와 말과 포로된 사람 등 40여 바리의 짐을 몰고 남문 밖에 이르렀다. 명군 6기(騎)가 인천(忍川)으로부터 성 아래에 가서 망을 보다가 적을 삽령(鍤嶺)에서 만났는데, 적병은 우리 나라의 옷을 입고 갓을 쓰고 속여서 명군을 부르며 말하기를, “재상님! 재상님!”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명군을 부를 때 재상님이라 하는 것을 적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니, 명군은 그들이 왜놈인 줄은 알았지만 형세가 서로 맞서 싸울 수 없어 후퇴하였다. 적병은 인천(忍川)까지 따라와 산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날이 어두워서 동문 밖의 토성 안에 주둔했다. 이때에 나는 마침 일 때문에 산에 있으면서 양형과 같이 용추동(龍湫洞)으로 옮겨 내려간 까닭에 일이 많아 못 갔다. 다만 박언량 등 4ㆍ5명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였다. 박언량 등이 적병이 토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엿보고 나서, 야밤에 숨어서 성 위로 올라가 화살과 돌을 마구 퍼부으니 적병이 가지고 있던 짐을 다 버리고 동문으로 들어가 달아났다. 박언량은 그들의 점유물과 소ㆍ말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왔다. 박언량은 용감무쌍하지만, 지식이 천박하여 병가의 기정(奇正)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왜적이 도망하여 탈출하게 되었음.
23일 의홍의 군사 4만여 명이 옥과ㆍ곡성을 경유하여 순진(鶉津)ㆍ홍령(鴻嶺)으로 갈라져 진군하고, 윤직무 등의 군사 수만 명은 순창(淳昌)으로부터 비홍령(飛鴻嶺)을 넘어 진군하여 이언(伊彦)ㆍ가방(加方)ㆍ방장(方丈) 등지에 결진하였다. 다음날 의홍 등의 군대는 구례로 향하여 원천(原川)ㆍ원평(院坪)ㆍ연화산(煙花山)의 상하에 이르고, 윤직무 등의 군대는 운봉으로 향하여 호산원(虎山院)에 이르러 진을 쳤다. 도처의 왜적이 종일 산을 수색하며 인명을 살해하고 재산을 노략질하였는데, 그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왜적이 대거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후방을 도모하려고 5ㆍ6명을 거느리고 성부(城府)로 향하다가 길에서 대적을 만나 달아나 산막으로 돌아와, 양형과 같이 노모를 업고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달아나 무상굴(無上窟) 용추동 북쪽에 있는데 철벽(鐵壁)이다. 로 올라가 한 곳에 앉히고, 나는 요충지에서 적병을 바라보니, 종일 온 산에 가득 찼으나 오직 이곳에는 오지 아니하니,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다. 잠깐 동안 있는데 마을 친구 박대호(朴大虎)가 가족을 거느리고 구등령(九等嶺) 위에 숨어 있다가 졸지에 몇 놈의 왜적을 만나 조개와 황새의 형세로 서로 버티고 있는데, 또 7명의 적이 뒤에 있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자 내가 가까이 있는 줄 알고 살려 주기를 청함이 매우 긴박하였다. 나는 노복에게 말하기를, “적이 만일 와서 범하거든 봉우리로 올라와 나를 부르라.” 하고, 바로 활줄을 한껏 당겨가지고 달려가니 적이 바라보고 도주하는데, 사람마다 모두 구우(口虞)를 가졌다. 박대호와 같이 꼭대기에 앉아 관망하면서 떠날 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명의 왜적이 내 말의 발자취를 밟아 벼랑으로 기어올라 이르니, 노복이 나를 부르지 못하고 도망쳐 달아나자 왜적은 앉아 있는 여러 사람을 보고 사면에서 에워쌌다. 늙은이와 어린이가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도망할 곳이 없어서 나를 비록 급하게 불렀으나 멀어서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문득 한 놈의 왜적이 큰 소리를 치며 봉우리를 지나가므로 내가 비로소 적이 노약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온 것을 알았다. 달려가면서 박대호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하러 여기에 왔겠는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뒤에 처지지 말아라.” 하고 그와 같이 활을 당겨 적진중으로 돌입하였다. 그들 왜적은 내가 둔하고 겁쟁이인 줄을 알지 못하고 후퇴하여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 모였다. 나는 사람을 구하기에 급하여 왜적과 교전을 하지 않고, 굴속으로 달려 들어가 두 집의 가족을 불러 모으니 한 사람도 상해가 없었다. 나를 보자 흐느껴 울며 죽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적병은 오랫동안 서서 우리의 허실을 탐지하다가 칼집에 칼을 꽂고 내려가버렸다. 어두울 녘에 높은 데로 올라가 바라보니, 30리 내에 적병의 불들이 낮과 같이 밝았다. 연화(煙花)ㆍ원평(院坪) 상하의 장수가 있는 군막들에는 붉은 담요 휘장을 치고, 큰 깃대를 세우고 큰 호각을 불어 여러 군인으로 하여금 흩어졌다가 모이게 했다가 하는데 거의 10여 곳이 되었다. 내가 헤아리기에 적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줄을 알고 있으니 내일 만일 대거 탐색하게 되면 화단을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즉시 두 집의 노약자를 거느리고 밤에 고촌(高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에 각처의 왜적이 불을 밝히고 호각을 불며 일시에 출발하여 갔다. 원천(原川)의 왜적은 구례로 향하여 가 화정(花亭)에 이르러 유둔하고, 호산(虎山)의 왜적은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인월(引月)에 이르러 결진하여 사면의 산골짜기를 밤새도록 수색하였다. 이날 나는 정령성(鄭嶺城)으로 향하였는데, 몇 대의 빠른 인마가 월운령(月雲嶺)으로부터 달려와 나에게 고하기를, “적병이 벌써 산과 들에 가득 찼고, 살상과 노략질이 한창 혹심하여 우리들은 피해 달아나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즉시 돌려서 무산(毋山)으로 향하니 적병이 또한 가득하므로, 판왕령(板王嶺)으로 올라가 부운령(浮雲嶺)모두 지리산 서쪽 기슭의 재 이름.을 지나 도로 고촌으로 내려왔다. 이튿날 용추의 산막으로 돌아오니 본촌 사람으로 화패(禍敗)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인월(引月)의 왜적은 다 영남으로 들어갔다가 이어서 좌도(左道)의 옛 소굴로 돌아갔다. 구례의 적은 길을 하동으로 잡아 이어서 사천(泗川)으로 들어가 법도(法島)에 주둔하여, 섬을 빙 둘러 성을 쌓고, 엄하게 기계를 설비하여 오래 머무를 계책을 하며 군대를 나누어 포진하니, 곤양(昆陽)ㆍ진주(晉州)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의 지방 각 촌락에서 벼를 거두어들이는 왜적의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동(河東) 유학(幼學) 하응구(河應龜)를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임명하고 가까운 고을의 일도 아울러 관장하게 하였다. 또 왜놈을 남해(南海)ㆍ거제(巨濟) 등의 진으로 나누어 보내어 사천 고을 등의 인물을 찾아 돌아오게 하니, 다른 곳에서 포로가 되어 섬 가운데 있으면서 도망칠 기회를 얻지 못한 자들이 거짓으로 사천ㆍ진주 사람이라 둘러대고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래서 달아나 돌아오게 된 자가 다수였다.
○ 명 나라 조정에서 남원의 패전을 듣자, 수길(秀吉)이 조정의 대은을 져버리고 관병을 무찔러 죽이고 조선에 해독을 주었다 하여, 황제는 크게 성을 내어 정전(正殿)을 피하고 수라를 줄이고 주악을 철폐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을 하옥하고, 심유경(沈惟敬)을 나포하여 국문하는 한편 급하게 군대의 양식을 발송하고 정벌에 전념하여, 제독 동일원(蕫一元)ㆍ유정(劉綎)과 수병제독(水兵提督) 진인(陳璘)으로 제장의 병마를 통솔하게 하여 각도로 나누어 동정(東征)하게 하였다.
29일 나는 박언량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구례로 향했다. 다음날에 진주와 하동으로 향했다. 지난 24일에 본촌 사람중 포로된 자가 매우 많았는데, 나는 그 집의 사람들이 울며 서로 사실을 늘어놓고 소리를 듣고 모두가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구례와 진주에 이르러서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져 돌아왔다.
11월 4일 내가 섬진에 이르러 높은 데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왜적이 놓은 불이 산을 태워 곳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잠깐 동안 있는데 몇 놈의 왜적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내가 별안간 습격하자 왜적은 말을 버리고 도주하므로 그 말을 거두었다. 초저녁에 하동현으로 들어가 숲속에다 군대를 숨기고 박언량과 같이 나아가 성중을 탐색하니, 성중이 고요한데 단지 금오산(金鰲山) 북쪽 한 곳에서 불빛이 밝았다. 박언량이 말하기를, “성중에 도적이 없으니 산 북쪽의 적을 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있어도 없는 듯, 찼어도 빈 듯이 한다는 기묘한 병법을 알지 못해서이다. 대낮에 멀리서 본성을 바라보니 살기가 등등하고 밥짓는 연기가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숨을 싹 감추고 영영 인기척을 끊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교활하고 속임수 잘하는 왜놈이 우리를 속이려는 계책이다. 내일 자세히 망을 보아서 거사함이 옳겠다.” 하였다. 새벽이 되어 성의 서산으로 올라와 정탐하여 보니, 과연 성에 머무른 적이 그 수효가 대단히 많고 인가와 왜군의 군막이 성내에 그물코처럼 연락되어 소ㆍ말ㆍ닭ㆍ개ㆍ거위ㆍ오리 등의 소리가 진동하였다. 박언량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아마 우리 장군님이 적을 예측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즉시 군인과 같이 물러와 숲속에 매복하여 소수의 왜적을 도모하려고 했으나 적병이 많이 흩어져 손을 쓸 도리가 없었고, 겸하여 날이 오래되니 양식이 떨어져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 돌아왔다.
8일 화정(花亭)에 이르렀다. 선전관(宣傳官) 김식(金軾)은 정장(鄭將)의 종제인데 피란했다가 처음 돌아와 의병대에 입속하였더니, 내가 적진으로 싸우려 나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 40여 명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나와 같이 일하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정장과 김식과 다 같은 재종간이다. 비록 오랫동안 무인지경으로 들어와 곤란과 고생이 막심했지만 다정한 벗의 두터운 바램을 홀로 저버릴 수 없어 적을 토벌함에 성심껏하여 조금이라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바로 군사를 연합하여 다시 구례로 향하여 노전촌(蘆田村)에 이르렀다.
11일 본현의 자모장(自募將) 강보기(姜甫起)와 합군하여 80여 명을 거느리고 순천으로 향하여 삽령(鍤嶺)에 이르러 앉아 쉬면서 먼저 박언량 등 10여 명에게 정혜사(正惠寺)ㆍ강청(江淸)ㆍ죽전(竹田) 등지로 들어가 염탐하라 하였다. 왜놈의 권농(勸農) 왜놈은 지진리(止珍里)라 부른다. 유수복(劉守福) 등 3명이 왜교(倭橋)에 부역(赴役)할 승군(僧軍)을 일으켜 보낼 양으로 말을 타고 절에 왔다가 박언량 등에게 포박되었다. 내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서 절에 가니 김식(金軾)이 유수복 등을 보자 불문곡직하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내가 그것을 말리며 말하기를, “이놈들이 왜적에게 가 붙어서 심부름을 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오. 그러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것이니 다스리지 아니 한다.’는 말은 옛사람이 경계하였고,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는 아성(亞聖)의 교훈도 있소. 비록 난리 속에 있다 하더라도 인명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니, 어찌 함부로 다시 살아나지 못할 형벌을 써서야 되겠소. 원수부(元帥府)로 붙잡아 보내어 죄상을 끝까지 심문한 뒤에 그를 죽여도 늦지 않소.” 하였다. 김식(金軾)은 잔인한 사람이라 듣지 아니하고 무부(武夫) 박만귀(朴萬貴)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유수복 등은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며 말하기를, “곤궁하여 왜적에게 부역하였지만 본심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는 각각 소와 말이 10여 마리씩 있으니 의병에 바쳐서 목숨을 대속받기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지극히 그들이 죽음에 나아감을 민망하게 여기고, 김식한테 말하기를, “군수품을 보충해 쓰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니, 마땅히 그들의 말을 들어 피차의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 무방하겠소.” 하니, 김식이 말하기를, “소와 말이 비록 만 마리라 하더라도 지금 왜적 가운데 있사온데 누가 그것을 잘 가져 오겠소.” 하므로, 나는 쾌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담당하여 끌고 오겠소.” 하고, 그 자리에서 절의 중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형세가 급박하여 민패를 받았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련하다. 숨어 있어도 소용 없으니 모두 와 내 명령을 들어라.” 하자, 중들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울면서 배알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지금 수복 등 세 사람이 바야흐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소와 말이 많이 있다 하여 그것을 바칠 터이니 생명을 살려 달라고 한다. 너희들 가운데 이 사람과 서로 절친한 자가 있으면 군인을 인솔하고 들어가 소와 말을 끌어 오라.” 하니, 한 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바로 저와 절친합니다. 제가 명령에 따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박언량 등 8명을 중과 함께 내려보냈다. 이때에 순천 광양 외촌에 주둔한 왜적이 우리 나라 사람과 이쪽 저쪽에 나뉘어 막을 치고 있었다. 중은 박언량 등을 인솔하고 인가(人家)에 몰래 들어가서 우마 27두를 몰고 돌아왔다. 그런데 박만귀는 김식의 밀부(密符)로서 벌써 세 사람을 절 아래에서 베어 죽였다. 나는 김식과 같이 일할 수 없음을 알고 한참 동안 통탄하였다. 다음날 나와서 노전(蘆田)으로 돌아와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고, 박언량 등을 모두 김식에게 넘겨주고 단지 5ㆍ6명과 같이 우마를 몰고 돌아와 정장(鄭將)을 만나니, 정장도 역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잘못으로 여기고, 또 나한테 말하기를, “우리 군대의 공은 전적으로 그대가 일을 먼저 시작함에 있는데, 그대는 공을 헤아리지 아니하니 무엇으로써 그것을 보상하겠소?” 하였다. 정장과 양덕해가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아무개는 중추(中秋)로부터 왜적 토벌에 마음을 다하느라고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얼마 안 되는 가을 곡식도 거둬들이지 못하여 노모와 처자가 앞으로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후부터 싸워서 얻은 우마를 그에게 두어 의사(義士)의 많은 식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바랍니다.” 하니, 정장이 흔연히 그것을 허락하고 또 즉각 표창하도록 원수부에 보고하려 하므로 나는 모두 굳이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다.
○ 이광악(李光岳)과 원신(元愼)이 본도에 이르러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며, 부(府)의 주포촌(周浦村)에 유진(留鎭)하였다.
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陰里)까지 추격하여 17ㆍ8명을 사살하고 데려온 사람과 짐승이 20여 구(口)나 되었다. 이때에는 내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왜놈과 싸워온 경험이 있는 자 10여 명을 구례에 있을 때 김식에게 전부 이속시켰기 때문에 내 수하에는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산음(山陰)과 사천(泗川)의 왜적이 함양ㆍ운봉을 분탕질하고 찾아다니며 살생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맨주먹을 흔들어 봤자 어찌할 수 없어 미칠 듯이 분격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히 단신으로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출발하여 운봉으로 향하니, 양ㆍ박 두 선비도 또한 의기가 솟아서 위험을 무릎쓰고 나를 따랐다. 길을 떠나 함양 산내(山內)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훌쩍 날듯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니 그는 바로 고향 친구 안선달(安先達) 사제(嗣悌)였는데 부모가 모두 오차산(於差山) 싸움에서 죽었기 때문에 항상 왜적을 죽여서 조금이라고 원통함을 풀고자 하였으나 맨손뿐이라 계책을 쓸 도리가 없었는데, 내가 왜적과 싸우려 나간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피차에 기뻐하고, 그와 같이 동행하여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 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 때에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馬川谷)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음리(陰里)로 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 함양의 남면 산내에 창고가 있다. 산음 사람 배의중(裴義重)은 날래고 건장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병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 있다가 향도가 되기를 자원하므로 나는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튿날 출발하니 근처 사람이 모두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몇 개의 활을 가지고 50여 명의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어찌 경솔하게 적과 싸우러 나간단 말인가? 운운.” 하였다. 음리(陰里) 건너편의 냇가에 얼음이 살짝 얼어 붙어 군사가 건너갈 수 없었다. 앉아서 망을 보니, 왜적 20여 명이 음리로부터 사람과 짐승을 몰고 군막을 불사르고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시켜 고함을 치게 하면서 계속 이어서 그들을 추격하여 탄구지(炭九之)에 이르니, 개울은 좁고 산은 험준한데, 우리와 놈들과의 거리가 서로 가까워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교전하였다. 적은 대부분 총을 소지하여 그칠 사이 없이 연달아 쏘아대므로, 나와 안선달ㆍ박군이 돌을 의지하고 마구 쏘아 연달아 6명의 왜적을 맞추니, 적은 사람과 가축을 버리고 엄천촌(淹川村)을 향하여 달아나고, 나는 사람을 시켜 물을 건너가 거두어 오게 하였다. 돌아오다 등구현 앞에 당도하니, 포성이 가까이 들리고, 고함치는 소리가 진동하므로 급히 달려가 망을 보니 본현의 원 남간(南侃)이 내가 왜적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아병(牙兵)과 산장이 수십 명을 산내로 보내어 성세(聲勢)를 돕게 하였는데, 적병 30여 명이 마천곡(馬川谷)으로부터 나와 의탄(義灘)에서 서로 만나 방금 접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합세하여 크게 싸웠다. 날이 저물자 우리와 놈들이 각각 동서로 후퇴하였다. 황현촌(黃峴村)에서 자려고 하였으나 적의 야습을 염려하여 물러나 백장사(白丈寺)로 올라갔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진 고군(孤軍)이 머물러 있어봐야 무익하므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적은 수백 명의 군사를 합하여 곧 황현에 이르러 수색하며 약탈하고 불지르며 우리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의병이 떠난 곳을 물었다. 드디어 운봉을 지나 몰래 남원의 동촌(東村)ㆍ번암(蟠岩)ㆍ견천(肩川)으로 들어가서 장수(長水)에 이르렀다. 병사 방어사(防禦使)와 원수부의 별장(別將) 조신옥(趙信玉)ㆍ홍대방(洪大邦) 등이 왜적이 온다는 경보를 듣고서 군사를 인솔하고 운봉에 이르렀다가 왜적이 간 곳을 놓치고 바로 진으로 돌아왔다.
○ 진주와 사천 등 여러 곳에 주둔하였던 왜적이 길을 나누어 침범해 오는데, 1대는 1백 50여 명으로 함양을 경유하여 장수로 향하고, 또 1대는 2백여 명으로 안음ㆍ거창을 향하여 수색하며 살육하였다.
○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가 대군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원수 권율은 명을 받들고 서울에서 돌아와 이곳에 이르러 수행하였다. 양호가 우리 임금이 같이 일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알고자 하여 어느 날 청하여 말하기를, “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에서 도산(島山)의 적을 토벌하려 하옵는데, 국왕께서는 의당 같이 가 주십시오.” 하니, 임금께서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응락하였다. 이튿날, 명군이 진을 이동하여 남하하는데, 경리는 주상과 같이 말고삐를 나란히하여 성을 나와 강가에 이르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리는데 형세가 바람과 번개 같았다. 임금께서도 빨리 달려 뒤지지 아니하였다. 부교(浮橋)를 건너서 준령(峻嶺)으로 올라가는데 벼랑 꼭대기에는 길이 없어서 말발굽이 미끄러지는데도 능히 말고삐를 당겨 위태롭지 아니하고 옥용(玉容)이 편안하여 여유마저 보이니, 경리는 돌아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이어 말에서 내려앉자 경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위로하여 말하기를, “왕께서는 같이 일을 할 만하옵니다.” 하였다. 이때에 백관과 호위들이 모두 임금 계신 곳을 잃어버리고 한 사람도 행진하여 따라온 자가 없었는데, 오직 선전관(宣傳官) 유승서(柳承緖)만은 말 뒤에 있다가 임금이 말에서 내리려 하자 앞으로 나가서 고삐를 붙들어 드렸다. 한 순간의 위급한 찰나에도 능히 체모를 잃지 아니하시니 저 큰 숲에서 열풍(烈風)과 뇌우(雷雨)를 만나고도 혼미하지 않았던 순(舜) 임금과 무엇이 다르랴. 며칠 후에 경리는 바야흐로 군대를 정돈하여 남정(南征)하는데 임금께서 같이 동행하기를 청하였으나 경리(經理)는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양호는 군사를 이끌고 경주(慶州)에 이르렀다. 이때에 청정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두모(豆毛)ㆍ서생(西生) 등의 진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도산(島山)에 머물러 있다가 대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복병을 나누어 보내어 요충지대를 차단하고, 또 각진에 왜병을 파견하여 위급함을 고하며 구원을 청했다.
○ 이덕필(李德弼)을 남원 부사로, 유승서를 판관으로 삼았다. 유승서는 특명으로 교지를 받음.
7일 아군이 적 1백 23명을 산음의 사촌(蛇村) 현 서쪽 30리에 있음. 에서 죽였다. 이때에 정이길(鄭以吉)은 친상에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여 병사(兵使)에게 보고하고 병권을 내놓았다. 내가 당초에 모집한 박언량의 무리는 모두 관군에 이속하였고 음리(陰里)의 싸움에는 단지 새로 얻은 약간의 군대로 적을 추격하였는데, 집에 돌아가자 그마저 모두 흩어졌다. 의분을 떨쳐 왜적을 치려는 정성은 지금도 변함 없으나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는 계책이 서지 아니하니, 처음에 같이 도모하던 사람들은 통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 또한 어느 것이 복이 되며, 어느 것이 화가 되랴 하여 비록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는 하나, 왜적을 죽이려는 마음은 언제나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다. 마을 노인 진사 유인옥(柳仁沃)이 나의 뜻을 알고 박ㆍ양 제군과 같이 동리 사람을 뽑아 내니 장정이 거의 60여 명에 이르러서 단결시켜 편대를 만들었다. 나보고 거느리고 가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기로 행하라 요구하므로, 본래부터 정한 계책이 있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다시 그 군대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산음과 진주의 땅에는 왜적의 주둔처가 바둑같이 포진되었고, 함양ㆍ운봉ㆍ안음ㆍ거창ㆍ장수 등의 고을에 남아있는 백성들은 여러 번 약탈을 당했고, 관군은 먼 곳으로 물러가 큰 화가 만연하여 우리 동촌(東村)도 위험이 조석에 다달았으므로, 여러 동지들은 내가 적을 막아 주기를 원하였다. 이달 3일에 나는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 운봉으로 향하니, 박대호(朴大虎)ㆍ유정진(柳挺震)ㆍ홍충갑(洪忠甲)이 다 의분을 떨쳐 이 일에 따랐다. 4일에 본현의 남면 가장동(加藏洞)에 이르니, 어두울 녘에 어떤 사람이 왔으므로 탐문하니
바로 본현의 원 남간이 보낸 사람인데, 전언하여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북촌에 머물러 계시는데, 오늘 낮에 적병 수백 명이 장수로부터 돌연히 이르러 각 촌을 수색 약탈하고 산막을 분탕하니, 나으리도 역시 쫓김을 받아 겨우 몸만 부지하여 달아나 삿점[簟店]에 와서 생원님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간절히 면담하고자 하오니, 내일 꼭 만나 보신 후에 떠나가십시오.” 하므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남간이 편비 몇 사람을 거느리고 왔다. 내가 전날 군대를 거느리고 현을 지날 때에 현하(縣下)의 아전들이 왜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므로 나는 군령으로써 곤장 수십 대씩을 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남간이 나와 만나 안부와 왜적에 대한 이야기를 물은 다음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나를 허물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왜적을 토멸하는 일은 공사요 국사인데, 본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사사로운 일로 간주하고 오만 무례하므로 그 죄에 대해 죄를 준 것인데, 영감은 어찌 그것을 탓하시오?” 하니, 남간이 그 말을 그만 두고, 아병(牙兵) 3명을 붙여 주며, “적의 정보를 탐지하는 대로 그들을 시켜 연락해 주오.” 하고, 또 말하기를, “왜적이 성하고 날래어 형세를 당할 수 없으니 진퇴를 헤아려 하시고 부디 경솔하게 대적하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영감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병법에 어렵고 쉬운 형세가 있는데, ‘어려움을 범하면 패전하고, 쉬운 것을 이용하면 이긴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나를 알고 남을 아는 기틀이니, 많고 적음은 논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1지대의 군사가 구등령(九等領)으로부터 오는데, 바로 본부 서면의 자모장(自募將) 박경춘(朴景春)이었다. 달려와 절하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합(烏合)의 졸병을 가지고, 왜적을 치고자 하오나 의뢰할 곳이 없어 여러 달을 지내오다가, 마침 의병장께서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서 목숨을 버릴 마음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것은 오로지 왜적을 치기 위한 것이고, 왜적을 치는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한 것이다. 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을 줄 아니, 이른바 철(鐵) 가운데서도 쟁쟁한 것이 아니겠느냐? 나의 지휘를 따라 전진이 있을 뿐이요. 후퇴는 말아라.” 하였다. 박경춘이 말하기를, “오직 명령에 따라 생사를 결판 짓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사람을 황산(黃山)의 봉우리 위로 보내어 적병을 정찰하게 하니, 적병이 벌써 산내로 들어가 원효(元曉)ㆍ실상(實上) 등 마을을 분탕질하였다. 두 대의 군사를 인솔하고 진군하여 비도현(非道峴)에 이르러 적의 행방을 정탐하니, 적병은 황현(黃峴)으로 내려가 함양의 등구현(登丘縣)을 향하여 갔다. 나는 제군들에게 말하기를, “적을 뒤밟아 여기에 이른 것은 진실로 적을 죽이고자 함이요, 적을 죽이는 요결은 싸움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적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니, 강성하고 날래어 범하기 어려우니, 승패의 형세를 싸우지 아니하여도 결단할 수 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반드시 어렵고 쉬운 형세를 가려서, 적을 제어할 만한 형세를 타서 화(火)로 할 만하면 화로 하고, 경(驚)하게 할 만하면 경하게 하고 이것은 화공(火攻)과 야경(夜警)을 말한 것인데 글을 생략함은 군기(軍機)라 비밀로 함. 혹은 낮에 혹은 밤에 하여 반드시 옛사람이 많은 적을 대적하던 기계(奇計)를 내 연후에야 거의 희망을 있을 것이오.” 하니, 제군이 말하기를, “그러하온데, 적병이 곧장 내려와 대병이 점점 가까이 오니, 야경(夜警)이나 화공(火攻)을 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므로, 나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날이 저물자 백장사(白丈寺)로 들어가기를 의논하는데, 문득 1대의 군사가 본사로부터 나오는데 바로 본부 북면의 자모장(自募將) 출신 구희로(具希老)였다. 그는 보고하기를, “제가 오늘 일찍부터 적을 추적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으나, 적의 형세가 너무 강성하므로 서로 교전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귀환하였다가 다시 출동할 생각입니다.” 하므로, 나는 기뻐서 말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고 모인 군사가 3군(軍)이 되니 오늘의 일은 하늘이 진실로 도운 것이다. 각각 마땅히 힘써서 전진하며 후퇴하지 말라.” 하니, 구희로는 대단히 난색을 하며 말하기를, “왜놈의 자취가 벌써 멀어졌는데 물러나지 않고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적병이 벌써 다 바다를 건너간 줄 아느냐? 산음과 함양 땅에 적진이 바둑처럼 깔렸다. 이 왜적이 비록 멀리 갔다지만 중지하지 않고 깊이 들어가면 수일 내에 반드시 그놈들을 만날 것이다. 오직 힘을 다하여 싸우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요, 물러나서는 안 된다.” 하자, 구희로는 말하기를, “저는 비둔하기 때문에 행보를 잘하지 못하고, 군사 역시 마구 긁어모은 것이라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니, 죽음을 각오하고 멀리가 싸우는 데는 같이 따르기 어렵습니다.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한번 죽음을 늦추려 합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백면서생으로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치느라고 여러 달 분주하게 다니며, 험한 고생을 꺼리지 않고 바람과 서리와 굶주림을 골고루 맛보며 오늘날까지 구사십생(九死十生)하여 온 것은, 상을 바래서도 아니고 벼슬을 바래서도 아니다. 국가가 위급하여 임금께서는 소간(宵旰)의 근심이 있으시고, 생민은 어육(魚肉)이 되고, 원수 왜적은 세력이 성하게 뻗었다. 이때를 당하여 진실로 신하와 백성된 자가 참으로 몸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 조그마한 힘이라도 다해야겠기에 마침내 피를 땅에 바르기로 결심하고 불공대천의 원한을 풀려고 생각한 것이다. 하물며 너는 명색이 없는 데서 뽑혀 이름이 홍지(紅紙)에 드러나 은혜가 지중하니 의리상 어떻게 해야겠느냐? 정예를 소집하여 왜적을 추격해서 여기까지 온 것을 보고서 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떳떳한 이치는 속일 수 없는 것이라 믿었는데, 어찌하여 한 번 적병을 만나자 바로 은혜를 저버릴 꾀를 내느냐? 또 병법에, ‘적에 임하여 군사를 후퇴시키는 자는 목 베이고, 싸움에 임하여 구원하지 않는 자도 목 베인다.’ 하였다. 네가 비록 무식하여 이것을 잘 모르지만 나는 대강 들었으니,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하니, 구희로는 이에 항거하여 말하기를, “주장(主將)은 제가 당신 군사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연히 진퇴의 자유가 있는데, 어찌하여 망령된 말씀을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병법에 물러나는 것을 곧다 하고 전진하는 것을 굽다 하였느냐? 진퇴의 사이에서 곡직(曲直)이 판단되는 것이다. 나는 공(公)과 직(直)을 가지고 논할 뿐이니, 주장의 소속이고 아니고는 따질 것 없다.” 하니, 구희로는 말이 수그러져 마침내 백장사(白丈寺)로 따라 들어왔다. 이날 밤에 그는 병을 핑계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척하고 슬그머니 군인으로 하여금 모두 도망가게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구희로를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의 심장은 개 돼지와 다름이 없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너 같은 무리에게서 바랄 것이 못 된다. 마음대로 해라. 너 같은 놈을 어찌 책하겠느냐.” 하였다. 구희로는 하직하고 물러갔다. 다음날 새벽에 아군이 등구현(登丘縣)에 이르니 적병이 이미 지나갔다. 배의중(裴義重)이 또 산골짜기로부터 와 나를 보고 기뻐하며 다시 전도(前導)가 되었다. 박경춘(朴景春)은 깊이 들어가는 것에 겁을 먹고, 양식이 떨어졌다고 핑계대어 굳이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나는 의리로서 회유하여 말하기를, “현군(縣軍)으로 깊이 들어와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며 마음에 맹서하고 힘을 합하여 함께 나라를 위해 죽기를 기약하였는데, 어찌하여 생각이 잘못 들어 구희로의 그릇된 자취를 밟고자 하느냐? 당초에 기병(起兵)한 것은 바로 적을 죽여야 한다는 의를 떨친 것이니, 오늘 적을 대하는 것은 선등(先登)의 용맹을 부릴 만한 기회이다.” 하고 즉시 아군이 운반하는 양곡 10여 두를 그에게 주면서 다시 격려를 하니 박경춘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이튿날 엄천촌(淹川村) 앞에 진군하니, 박경춘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억지로 고군(孤軍)을 이끌고 깊이 적의 소굴로 들어갔다가 혹 불리함이 있게 되면 누가 그 허물을 지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그를 꾸짖기를, “무기란 흉기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함은 인지상정이니, 너 같은 용렬한 사람이 어찌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줄을 알겠는가? 다만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본래 왜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니 왜적을 탐지하여 힘껏 싸우다가 다행히 살아나면 살 뿐이지, 어찌하여 기가 꺾여지고 또 군대를 철수할 뜻을 나타내느냐? 아! 마음대로 하라. 우리 군사는 너 같은 놈들에게 의뢰할 것이 못 된다.” 하였더니, 박경춘이 즉시 이끌고 돌아서려 하다가 적군을 중도에서 만날까 두려워서 산골짝에 들어가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고군(孤軍)으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더욱 전진하여 모곡촌(毛谷村)의 뒤에 이르니, 척후병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건너편에 적이 있습니다.” 하므로, 나는 군사들을 일제히 입에다 재갈 물리고 엎드리게 하고, 박생과 같이 자취를 감추어 엿보니 왜놈의 기병 6ㆍ7명이 막 산음의 자례촌(子禮村)에서 수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박경춘에게 급히 보내어 부르니, 박경춘이 즉시 산골짜기로부터 나오므로 나는 아군 10여 명을 박생에게 주어 박경춘과 군대를 합쳐 대진(大陣) 사이에 매복케 하고, 이때에 산음의 방곡ㆍ저품(宁品)ㆍ흑석(黑石) 등 마을에 모두 적이 주둔하였는데, 여기와의 거리가 10리도 안 되었고 방곡(方谷)은 4ㆍ5리쯤 되었다. 나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모곡의 앞 못을 거쳐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가 적 앞으로 바로 들어갔다. 적병이 달려 흑석으로 향하는데, 이때 여울에 살얼음이 얼어 박생과 박경춘은 건너지 못하였다. 나는 추격하여 쌍현(雙峴)에 이르렀으나 따라 잡지 못하고 돌아와 군사를 모곡의 뒷산에 주둔시켰다. 얼마 있다가 정찰하니 미시(未時)에 적병이 함양의 남촌 유등포(柳等浦)로부터 나와 바로 아군을 향해 오고 있었다. 사람마다 그 수효를 세었는데, 혹은 1백 25명이라 하고 혹은 1백 23명이라 하였다. 군사들이 중과(衆寡)가 현격하게 차이나는 것을 보자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박경춘의 병사는 아직도 왜놈과 전투한 경험이 없어서 두려워함이 더욱 심하였다. 나는 군정(軍情)이 이와 같음을 살피고 용인(龍仁)의 사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거짓으로 큰소리로 말하기를, “궁장(弓藏)에서의 싸움에 우리들 세 사람이 50여 명의 왜적을 다 섬멸하였는데, 오늘은 아군이 70여 명이라 각각 한 놈씩만 당하게 되면 그 가운데 또 어찌 10명을 당하고 20명을 당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힘을 다하는데 달려 있으니 너희들은 힘쓰라.” 하고 재삼 효유하니, 군심(軍心)이 약간 안정되었다. 여러 군사와 같이 활을 가득 당긴 채 기다렸다. 군사 가운데 김대호(金大好)란 자가 있어 정예라 자칭하면서 항상 싸우고 싶다고 말하며 여러 차례 군사를 나눌 때, 반드시 선봉이 되기를 원하더니, 이번 왜적을 만나서는 넋이 벌써 나가 활을 끌고 살을 던지고 산으로 달아났다. 유생(柳生)이 은밀히 말하기를, “김대호가 도망쳤습니다.” 하므로, 나는 급히 그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자, 유생은 말하기를, “왜 그러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가 도망가는 것을 알고도 죽이지 아니하면 군사는 반드시 해체될 것이고, 그 죄를 다스려 형률에 처하게 되면 군사 기밀이 반드시 탄로될 것이니,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공과 죄를 따질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마침 적병이 산밑으로 돌아 내려와 바로 큰 개울을 건너 사촌(蛇村)으로 흩어져 들어가 수색하면서 왁자지껄 하였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자 사방이 어둑하게 되니 여러 왜적이 머뭇거리면서 밤을 지낼 계획을 했다. 나는 박생에게 말하기를, “먹는 것이 군사에서는 첫째이니, 그대와 배의중이 여기에서 적을 기다리면 나는 마땅히 이러이러하겠다.” 하고, 즉시 군인에게 명령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가게 하여 밥을 지어 나누어 준 다음 다시 그전 장소로 돌아왔다. 배의중이 말하기를, “적병이 한 곳으로 소집되어 불을 밝히고 왕래하다가 밤이 으슥해서야 불이 꺼졌으니 무엇을 하는지 자세하지 않습니다.” 하므로 즉시 군사를 물가로 진출시켜 군사로 하여금 입에다 재갈을 물리고 달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모래밭에 군사를 멈추었다. 배의중에게 말하기를, “군사는 기지는 없으나 신속한 것을 귀히 여기고 기지는 있으나 행동이 더딘 것을 숭상하지 아니한다. 다만 모든 일을 미리 서둘면 군색하지 아니하고, 주밀하면 근심이 없는 법이니, 먼저 탐지하고 나중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하지 않은 듯하다.” 하였더니, 배의중은 그 뜻을 알고 두 박씨와 함께 가서 망을 보니, 적병이 세 개의 토막집으로 들어갔는데 같은 담장 안이었다. 돌길은 험악하여 형세가 매우 어려웠다. 세 사람이 와서 보고하자 여러 군사는 마음에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여 나아갈 듯 물러갈 듯하며 두려워하였다. 박생이 말하기를, “깊숙히 이곳에 들어온 것은 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다. 이제 만일 적을 버리고 도망하여 돌아간다면 어린애 장난과 같은 것이니, 어찌 남이 보고 들을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군인을 깨우쳐 말하기를, “저놈들은 일찍이 생각지도 못했고, 우리는 기세를 탔으니, 화공(火攻)으로 하고 야경(夜警)으로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일이다.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고 종사하라.” 하니, 군인들이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두 박씨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세 막사로 나뉘어 들어갔으니 일제히 행동하지 아니하면 갑이 을을 구할 것이다.” 하고, 즉시 아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박생이 거느려 북쪽 작은 막사를 맡고, 박경춘은 남쪽의 작은 막사를 맡고, 나는 서쪽의 큰 막사를 맡았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시종 행사를 이리이리하라.” 하였다. 그리고 각각 군인을 거느리고 몰래 담 안으로 들어가 맡은 군막을 포위하였다. 내가 휘파람을 세 번 소리내어 부이 3군이 마름과 막대기를 늘어 세우고서 막 안에다 불을 지르고 또 이엉을 말아서 계속 던지니, 막사 안에서 불이 활활 일어났다. 적들은 놀라 뛰므로, 우리는 어두운 곳에 서서 무수하게 난사하며 어쩌다가 뛰어 나오는 자가 있으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나오건 안나오건 간에 계속 두들겨대고, 또 마름과 막대기 등으로 군막을 둘러싸서 공격하게 하여 구멍을 뚫고 나오는 것을 대비하니, 적이 어찌할 방법이 없이 앉은 채로 재가 되었다. 마침내 불이 화약과 조총에 붙어 토막은 공중으로 날고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큰 고함소리를 한 번 울리고 군인들은 약간 퇴각하여 그 불을 피하였다. 이때에 눈이 얼어 붙고 심하게 추웠는데, 밤새도록 힘을 쓰고 나니 군졸들이 피곤하여 바로 물러가 산골짜기에 숨었다. 이튿날 새벽에 귀를 베어 오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도로 들어가니, 문득 포성이 땅을 흔들고 고함 소리가 하늘로 이어졌다. 적병 수백이 저품(苧品)의 대진(大鎭)으로부터 쇄도하여 오는데, 형세가 실로 범하기 어려우므로 이내 좌차(左次)하여 물러나 실상촌(實上村)에 이르니, 김식(金軾)이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 와 나에게 다시 들어가기를 요구했다. 나는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이번 거사에서는 적을 기만하고 가지만 이 뒤에는 적에게 기만당할는지 어찌 알겠는가?” 하니, 김식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를 따라오다가 중도에서 분산하였다. 김식의 사나운 졸개들이 산막을 출입하면서 숨어있는 사람들의 소와 말과 잡물을 노략질하여 수없이 탈취해 오니 그동안의 해는 왜놈들보다도 더 심하였다.
○ 흥양ㆍ장흥 연도의 왜적이 항상 내지로 들어와 분탕질하며 도둑질하였다.
○ 왜교(倭橋)의 적장 평행장(平行長)이 본진으로부터 연도의 각 진을 순시하고 장흥(長興)에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비록 다른 곳의 사람이라도 순천 사람이라 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면 모두 이끌고 왔다.
○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이 고금도(古今島)로 나와 진을 쳤다.
○ 경기 양호(楊鎬)는 경주로부터 제장을 독려하여 청정을 도산(島山)에서 공격하고, 반구정(伴鷗亭) 등처의 왜적의 소굴을 소각하여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는데, 청정이 형세가 궁해지니 도망할 꾀를 하였다.
○ 체찰부(體察府)의 장계에 의하여 3도의 수령 60여 명을 잡아다 옥에 가두어 신문하고, 관으로 돌아가 일을 보게 하지 않고 수개월 동안 형틀을 씌우고, 그 중에서 더욱 심한 자를 가려서 처형하니, 안성 군수(安城郡守) 유몽경(柳夢經)ㆍ용인 현감(龍仁縣監) 임충간(林忠幹) 등이 사형되었고, 그 나머지 사람은 쌀 30석을 경창(京倉)에 바쳐서 속죄하였다.
○ 양남(兩南) 여러 곳에 주둔(屯)한 왜적이 도산(島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발동하여 달려가 응원하는데, 왜교(倭橋)는 행장이 머물러 지키고 수가(秀家)는 군사를 이끌고 갔다.
○ 명 나라 군문(軍門) 형개(邢玠)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니, 이원익(李元翼)과 윤두수(尹斗壽)를 접반사로 삼아 내보냈다.
○ 본도의 방어사(防禦使)는 광양(光陽)의 왜적이 외롭고 약하단 말을 듣고, 이달 18일에 여러 장수와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달려 밤을 무릅쓰고 가서 어두움을 이용하여 성을 포위하였는데, 적병이 진에 올라와 방어하자, 아군이 스스로 궤멸되었다. 능성현(綾城縣)의 원과 본현의 원 김응서(金應西) 등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 명 나라 장수 사(司)ㆍ송(宋)ㆍ동(董) 3유격(遊擊)이 각각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이언(伊彦)ㆍ시라산(時羅山)에 진을 쳤다.
23일 왜적 백여 명이 함양ㆍ안음을 경유하여 장계현(長溪縣)을 분탕질하므로 병방어사가 군사를 보내어 잡게 하니 적병이 물러갔다. 관군은 인하여 육십현(六十縣)을 지켰다.
○ 명 나라 장수 절강유격(浙江遊擊) 계금(季金)이 수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호서에 정박하고 상륙한 다음 이내 남원에 이르러 시라산에 진을 쳤다.
○ 형군문(邢軍門)이 서울로 들어와 유진했다.
27일 이광악(李光岳)이 군사를 이끌고 장수(長水)로 향하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경준(李慶濬)이 마병 수천을 거느리고 남원에 이르러 흑성촌(黑城村)에 진을 쳤다. 이광악(李光岳)ㆍ원신(元愼)은 주포(周浦)로부터 백평촌(白坪村)으로 진을 옮겼다.
○ 양호와 마귀가 도산(島山)을 13일 동안 포위하여 밤낮으로 성을 공격하니, 왜병이 크게 곤궁하였다. 게다가 양식이 떨어지고 우물이 말라서 죽는 자가 날마다 쌓이니 청정이 자결하려 하였다. 그들은 매양 금ㆍ은과 여러 가지 보물을 성 밖으로 던져 우리의 공격을 늦추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비가 와서 날씨가 대단히 추워 아군은 힘이 다하고, 각처의 응원군이 바다를 덮고 몰려와서 학익진(鶴翼陣)을 벌이고 돌진하여 오므로, 좌차(左次)하여 물러났다. 양호는 바로 서울로 돌아오고, 마귀와 본국의 원수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慶州)에 머물렀다.

[주D-001]청야(淸野) : 전쟁 때 적의 이용의 편리를 주지 않기 위하여 백성과 곡식을 성안으로 옮기고 들을 비움.
[주D-002]아름다운…… 되었으니 :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내용으로, 초인(楚人)인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옥을 얻어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차례로 바쳤으나, 옥인(玉人)의 잘못된 판단으로 두 다리를 잃었고, 문왕(文王)에게 바쳐서야 보옥(寶玉)임을 인정받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후에 화씨벽(和氏璧)은 인재(人才)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D-003]섶에 눕고…… 분함 : 월왕 구천(越王句踐)이 오(吳) 나라에 패하여 회계(會稽)에서 욕을 당하고 돌아와서 짐승의 쓸개를 달아놓고 그것을 빨아 쓴맛을 보면서, “너는 회계의 수치를 잊었느냐?” 하고 스스로 깨우쳤다. 섶에 눕는다는 것은 편안한 자리에 누워 자지 않고 섶에 누워 잔다는 것이다.
[주D-004]의각(犄角) : “사슴을 잡는 데 비유하면 한 사람은 뿔을 잡고 한 사람은 발을 비트는 것과 같다.” 한 말이 있다. 《좌전(左傳)》
[주D-005]동타(銅駝) : 진(晉) 나라 장한(張翰)이 천하가 장차 요란할 징조를 보고는 낙양(洛陽)의 궁문(宮門)에 세워 놓은 동타(구리쇠로 만든 낙타)를 가리키며, “네가 장차 가시덤불 속에 들겠구나.” 하였다.
[주D-006]운벽(運甓) : 《진서(晉書) 도간전(陶侃傳)》의 내용으로, 진(晉) 나라 도간(陶侃)이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으면서 매일 아침이면 벽돌 백 개를 대문밖에 운반해 내었다가 저녁에는 운반해 들이면서, “지금 난세에 나라를 위해 일해야겠는데 너무 편안하면 장차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함이다.” 하였다는 말이 있다.
[주D-007]백홍(白虹) : 연(燕) 나라 형가(荊軻)가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기 위해 출발할 때에 하늘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주D-008]일언흥방(一言興邦) :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의 내용으로, 정공(定公)이 공자에게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이 있느냐’고 묻자, 공자는 ‘임금노릇하기가 어려운 줄을 안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키기를 기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D-009]원균의 …… 저버렸네 : 송 나라 장군 당진(黨進)이 몸이 비대하고 체구가 커서 많이 먹었다.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는 배를 만지면서, “배야 내가 너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였다. 어느 사람이 옆에 있다가, “장군이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배가 장군을 저버려서 먹기만 하고 한 가지 지려(智慮)도 내지 않습니다.” 하였다.
[주D-010]사천왕(四天王) : 동ㆍ서ㆍ남ㆍ북 사방을 지키는 제석천(帝釋天)의 부하,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동,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서,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남,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북이다.
[주D-011]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 비여(匪茹)는 자기분수도 모른다는 말로 《시경(詩經)》〈6월(六月)〉장에 ‘험윤비여(玁狁匪茹)’란 구절이 있고, 육량(陸梁)은 날뛴다는 뜻으로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괴수 육량(怪獸陸梁)’이란 구절이 있는데, 그 주석에 ‘동서로 행주(行走)하는 모양을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즉 말하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뛴다는 뜻임.
[주D-012]장순(張巡) : 송 나라 사람. 벼슬은 도종(度宗) 때에 민병부장(民兵部長)이다. 수양이 포위되었을 때에 장귀(張貴)와 같이 겹겹이 둘러싸인 포위망을 범하면서 역전(力戰)하다가 전사하였다.
[주D-013]하란(賀蘭) …… 제운(霽雲) : 하란(賀蘭)은 하란진명(賀蘭進明), 제운(霽雲)은 남제운(南霽雲)인데 모두 당(唐) 나라 사람임. 안녹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 장순(張巡)이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는데, 이윽고 양식이 떨어지자 남제운은 장순의 부하 장수로서 당시 절도사(節度使)인 하란진명에 가서 군사를 빌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하란진명은 장순의 성위(聲威)를 시기하여 종시 군사를 내주지 않아서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장순과 같이 적에게 잡혀 순절했음.
[주D-014]뱃전을 치며 : 《진서(晉書)조적전(祖逖傳)》에서 나온 말임. 조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벌할 때 강을 건너면서 중류(中流)에서 뱃전을 치며 맹세하기를, “중원(中原)을 맑히지 못하고 다시 건너 오는 날이면 이 강에 빠져 죽겠다고 맹서하겠다.” 하였음.
[주D-015]초수(楚囚) : 본시 초(楚) 나라의 포로라는 말이다. 좌전(左傳) 성공(成公) 9년에 진후(晉侯)가 군부(軍府)를 관찰하면서 종의(鍾儀)를 보고 유사(有司)에게 물으니, “정(鄭) 나라에서 바친 초수(楚囚)입니다.” 답하였음.
[주D-016]정위(精衛) : 해변에 사는 까마귀를 닮은 적은 새. 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에 빠져 죽어 이 새가 되었다 한다. 항상 서산(西山)의 석목(石木)을 물어다가 동해를 메우려 한 전설이 있다.
[주D-017]노계(魯鷄) : 닭의 일종. 대계(大鷄)ㆍ군계(軍鷄)ㆍ촉계(蜀鷄)라고도 한다. 월계(越鷄)는 알을 낳지 못하나 노계는 병아리를 낳는다.
[주D-018]방연(龐涓) : 전국시대 위(魏) 나라 사람. 손빈(孫臏)과 함께 병법을 귀곡자(鬼谷子)에게 배움.
[주D-019]경계(庚癸) : 군량(軍粮)에 대한 은어(隱語)임. 좌전(左傳) 애공(哀公) 13년에 오(吳) 사람 신숙의(申叔儀)가 공손 유산(公孫有山)씨에게 양식을 구걸하니 그 대답이 없고, “추(麤)는 있으니, 네가 수산(首山)에 올라가서 경계(庚癸)라고 외치면 바로 내주겠다.” 하였음.
[주D-020]파목(頗牧) :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명장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말함.
[주D-021]충갑(沖甲) : 충갑(沖甲)을 오용(誤用)한 것인데, 갑옷 위에다 평소 입는 옷을 껴입어서 사람의 눈을 가린다는 뜻임. 좌전(左傳) 양공(襄公) 27년에 “장차 송(宋) 나라 서문 밖에서 회맹(會盟)하려는데 초(楚) 나라 사람이 충갑(沖甲)을 했다.” 하였음.
[주D-022]소간(宵旰) : 소간은 소의간식(宵衣旰食)의 준말.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여 미명에 일어나 정복을 입고 해가 진 후에 저녁 밥을 한다는 뜻에서 온 말.
[주D-023]현군(縣軍) : 응원군의 후속이 없이 홀로 깊이 적지에 쳐들어 가는 군대.
[주D-024]보거(輔車) : 보(輔)는 협보(頰輔)인데 뺨에 붙은 뼈, 거(車)는 아거(牙車)인데 어금니 아랫뼈임. 서로 돕는다는 뜻임. 《좌전(左傳)》 희공(僖公) 5년조에, “속담에 이른바, ‘보거(輔車)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것’은 우(虞)와 괵(虢)을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음.
[주D-025]좌차(左次) : 행군(行軍)하는 데 쓰는 말임. 《주역(周易) 사괘(師卦)》에 “군대가 후퇴하며 머무니, 허물이 없도다(師左次無咎)”고 하였으니, 좌차(左次)는 후퇴하여 머무는 것을 말한다.




약천집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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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명(墓碣銘)
감찰(監察) 이공(李公) 묘갈명 무자년(1708, 숙종 34)

공은 휘가 상필(尙弼)이고 자가 몽경(夢卿)이다. 우리 태종대왕이 별자(別子)를 두었으니 효령대군(孝寧大君) 휘 보(補)이며, 효령대군의 손자인 율원군(栗原君) 휘 종(徖)은 적개 공신(敵愾功臣)에 책훈되었다. 율원군의 손자로 용강 현령(龍岡縣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휘 대(薱)는 종친의 친함이 다하여 비로소 조정에서 벼슬하였으며, 용강의 손자인 창녕 현감(昌寧縣監)을 지내고 호조 참판에 추증된 휘 규빈(奎賓)은 바로 공의 조고이다. 창녕의 아들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휘 척(滌)은 바로 공의 선고이며, 동지중추부사의 배위이신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김화 현감(金化縣監) 침(琛)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계묘년(1603, 선조 36)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빼어나서 보는 사람마다 모두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겨우 10세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성인(成人)처럼 상례를 집행하였으며, 조금 자라서는 문장의 뜻이 대단하였다.
19세에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의 가문에 장가들었는데, 현주공이 공의 의표와 법도를 보고 그 문장과 글씨에 감탄하여 칭찬해 마지않았다. 정묘년 성균관에 들어가 시험을 보면 번번이 앞 대열에 있었으나 끝내 한 번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병자년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동추부군(同樞府君)이 죽산 영장(竹山營將)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대가를 호위하였다. 공은 가솔을 데리고 병란을 피하다가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포위된 성안의 소식을 알고자 하였는데, 도중에 대가가 하성(下城)했다는 말을 듣고는 부군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모시며 기뻐한 것이 몇 년이었다. 기묘년 부군이 별세하였는데, 공이 공경을 지극히 하고 몸을 훼손하여 상례와 슬픔이 모두 지극하니, 친척들이 그 효성스러움을 칭찬하였다.
병술년 천거로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와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으로 옮겼으며,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하였다. 갑오년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갔는데, 부임하자 첫 번째로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살펴서 싫어하는 것을 중지하고 좋아하는 것을 시행하니, 온 경내가 편리하다고 칭찬하였다. 마침 동복현(同福縣)이 혁파되어서 본현에 합쳐졌는데, 동복현을 다스리기를 본현과 똑같이 하였으나 겨울에 하찮은 일로 파직당하였다.
정유년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무술년 감찰로 옮겼으며 체직되어 사평(司評)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지평 현감(砥平縣監)으로 나갔는데, 이때 양근(楊根)이 또 혁파되어 본현에 합쳐졌다. 이때 두 고을의 백성들은 다투어 칭하기를 “이 분은 우리 사또이고 너희 고을의 사또가 아니다.”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병으로 체직되었다.
갑진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으며 세 번째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니, 이때 공의 나이가 이미 회갑을 넘었다. 공은 탄식하기를 “노년에 작은 벼슬로 어찌 오랫동안 이 몸을 얽어매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병을 칭탁하고 일을 사절하였다. 그리고는 날마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세월을 보냈다. 또 조송설(趙松雪)의 서법(書法)을 좋아하여 자못 그 묘리를 얻으니, 사람들이 공의 글씨를 얻으면 잘 보관하여 소중히 여겼다.
정미년(1667, 현종 8) 4월 서울집에서 별세하여 교하현(交河縣) 북쪽 월롱산(月籠山) 서쪽 곤좌(坤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배위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바로 현주공의 장녀인데, 천품이 엄숙하고 공손하여 남편을 섬김에 예를 어김이 없었다. 공보다 1년 늦게 태어나 공보다 18년 뒤에 별세하였는데,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2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찰방 임한(任漢)이고 차남은 통덕랑 의한(儀漢)이며, 권협(權協), 권민(權慜), 현감 윤혁(尹爀), 박두왕(朴斗旺)은 사위이다. 찰방은 2남을 두었으니 숭령(嵩齡)과 형령(衡齡)이고, 통덕랑은 4남을 두었으니 태령(泰齡), 정령(鼎齡), 함령(咸齡), 복령(復齡)이며, 손녀 및 증손과 현손은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평생을 대략 말한다면 사랑과 공경으로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고 온화함과 즐거움으로 집안 식구들을 대하였으며, 안으로는 마음속에 벼슬을 얻고 잃음에 대한 얽매임이 없었고 밖으로는 남들과 영화를 사모하는 다툼이 없었다.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는 데에 발길을 끊고 서적을 토론하는 데에 취미를 붙여서, 비록 낮은 관리에 머물고 가난으로 어려웠으나 용모와 언어가 한 번도 근심하거나 한탄하며 불안해하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가산을 경영할 것을 권고하면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부귀는 천명(天命)에 달려 있다.” 하였다.
젊어서 일찍이 태학(太學)에 유학하였는데, 마침 증광시(增廣試)를 설치하였다. 유생들이 상소하여 종사(從祀)할 것을 청할 적에 많은 선비들이 다 몰려왔는바 모두 공을 추대하며 지론을 삼가고 문장을 잘한다 하여 스스로 공만 못하다고 하였다. 지평에 부임했을 적에도 적을 잡았는데 숫자가 포상(褒賞)하는 기준을 넘자, 공은 그 숫자를 줄여 보고하여 승진하는 것을 피하였으니, 세속의 관리들의 예(例)에 비하면 어찌 천리나 백리만 차이가 날 뿐이겠는가.
나는 일찍이 공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나 임한(任漢)이 우관(郵官 찰방)이 되었을 때에 내 집에 찾아와서 공의 묘갈문을 청하였고, 이제 또 형령(衡齡)에게 명하여 와서 예전의 청을 거듭하므로 이에 명문을 짓는다.

큰 지손의 번성함이 / 太支之蕃
종친 중에 으뜸이니 / 最于宗籍
면면히 계승하여 / 承繼綿綿
대대로 명망과 덕행이 있는 분 많다오 / 世多名德
공의 인품과 지위가 / 維公人地
크게 영달할 듯하였으나 / 宜若大啓
음직(蔭職)에 굽혀서 / 詘于門庇
재주가 높은데도 지위가 낮았네 / 才高位細
지위는 비록 낮으나 / 位則雖細
또한 그 직분을 다하였으며 / 亦盡其職
수명이 또 길지 못하였으나 / 壽且不遐
일찍 벼슬을 그만둠이 실로 드높아라 / 早休實卓
복록을 적게 누려 / 維其享少
후손들에게 많은 복 물려주리니 / 將以詒多
명문을 지어 실증해서 / 銘以質之
길이 무궁한 후세에 기약하노라 / 永期無訛

[주D-001]조송설(趙松雪)의 서법(書法) : 송설은 원(元) 나라 때의 명필가인 조맹부(趙孟頫)의 호이다. 왕희지(王羲之)의 서체(書體)를 잘 써서 송설체를 이루었다.







순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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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ㆍ진사[生進]

안건(安健) : 본관은 순흥(順興). 지제교(知制敎) 안수기(安修己)의 아들이다.

안걸(安傑) : 안건(安健)의 아우이다.

안영(安瑛) : 자는 자온(子溫). 군사(郡事) 안리(安理)의 손자이다. 정덕(正德) 기묘년(1519, 중종1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안공필(安公弼) : 안영(安瑛)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3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안공신(安公信) : 안영(安瑛)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이사증(李師曾) :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황직경(黃直卿) : 본관은 창원(昌原). 봉례(奉禮) 황전(黃躔)의 아들이다. 경태(景泰) 병자년(1456, 세조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황신경(黃藎卿) : 황직경(黃直卿)의 아우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김만평(金萬枰) : 자는 국형(國衡).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아들이다.

금륜(琴倫) : [본문 내용 없음]

한세림(韓世琳) : 자는 언규(彦圭).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권응기(權應箕) : 자는 경열(景說). 본관은 안동(安東). 참봉 권순(權純)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진사시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권응삼(權應參) : 자는 찬약(粲若). 권순(權純)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3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학행(學行)이 있었다.

민우삼(閔友參) : 자는 성지(省之), 본관은 여주(驪州). 정덕(正德) 정묘년(1507, 중종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황한충(黃漢忠) : 자는 양좌(良佐), 본관은 창원. 훈도(訓導) 창(瑒)의 아들이다. 홍치(弘治) 병진년(1496, 연산군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다. 우계(愚溪) 주변에 양성정(養性亭)을 짓고 독서하며 뜻을 구했다. 스스로 아호를 ‘우수(愚叟)’라 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 마을을 ‘우수동(愚叟洞)’이라 하였다. 저서로 《화당시고취(和唐詩鼓吹)》 2권이 있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일찍이 그를 방문하였다가 시를 짓기를,
드높은 소백산 하늘에 잇닿은 곳 / 峨峨小白與天齊
무릉도원 찾아와도 길 혼미하지 않네 / 客到桃源路不迷
이 몸도 이미 귀거래사 읊고 왔으니 / 我亦已成歸去賦
그대만 우계 가졌다고 자랑하지 말게나 / 莫誇君獨有愚溪
하였다.

황빈(黃彬) : 황한충(黃漢忠)의 아들이다. 진사(進士)를 지냈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하여 향교를 옮기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울 때 그가 많은 쌀을 내어 도왔다. 신재의 기문(記文)에서,
“그 의리가 옥산유씨(玉山劉氏)에 못하지 않다.”
라고 칭찬했다. 그가 거처하는 곳에 ‘중화당(中和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주세붕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지난해 부석사에서 함께 놀았기에 / 去年浮石共淸遊
그대 집에 가득한 가을 풍광 생각하였네 / 仍想君家滿院秋
중화당 아래 흘러가는 물 / 爲問中和堂下水
그 근원 어느 날 잠시라도 멈추랴 / 源頭何日暫停休
하였다.

권득평(權得平) : 진사이다. 〈효자(孝子)〉 조목에 보인다.

민흥업(閔興業) : 선조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안응기(安應箕) : 선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서한정(徐翰廷) : 본관은 화원(花園). 대사간 서충(徐衷)의 증손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호는 돈암(遯菴)이다.

손흥경(孫興慶) : 자는 경여(景餘), 본관은 경주. 참봉 손란(孫蘭)의 아들이다.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다. 만년에 명암(鳴巖) 위에 정자를 짓고 그 형 손흥국(孫興國)과 함께 살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칭송했다.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손약(孫禴) : 자는 성지(誠之). 손흥경(孫興慶)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권협(權協) : 자는 응해(應諧), 본관은 안동.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만력(萬曆) 병오년(1606, 선조39)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풍채와 문장이 뛰어나 친구들로부터 추중받았다. 안동에서 우계(愚溪)로 와서 살았다.

이개(李玠) : 자는 대규(大圭), 본관은 덕수(德水).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곽한(郭瀚) : 자는 대용(大容), 본관은 현풍(玄風).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호는 치계(癡溪)이다.

김황(金滉) : 자는 호호(浩浩). 판결사 김흠조(金欽祖)의 손자이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금인(琴軔) :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3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황득겸(黃得謙) : 자는 여익(汝益).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조정(趙貞) : 본관은 한양(漢陽).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의 5세손이다. 정덕(正德) 병자년(1516, 중종1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효행(孝行)이 있었다.

김사문(金士文) :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증손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김사명(金士明) : 김사문(金士文)의 아우이다. 중종 정유년(1537, 중종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김사호(金士皥) : 김사명(金士明)의 아우이다. 병오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남몽구(南夢龜) : 자는 문상(文祥), 본관은 영양(英陽). 영의공(英毅公) 민(敏)의 후손이고, 참봉 기(麒)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신축년(1601, 선조34)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남몽오(南夢鰲) : 남몽구(南夢龜)의 아우이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남구(南衢) : 자는 공달(公達). 남몽오(南夢鰲)의 조카이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김태시(金泰時) : 자는 형숙(亨叔). 만력(萬曆)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금복고(琴復古) :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6)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홍이성(洪以成) : 본관은 남양(南陽). 좌찬성 홍숙(洪淑)의 증손이다. 만력(萬曆) 신축년(1601, 선조3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김거(金勮) :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김정선(金廷善) : 김거(金勮)의 아들.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김이선(金履善) : 자는 이길(而吉). 김정선(金廷善)의 아우이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김지선(金止善) : 이조참의 김륵(金玏)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대근(李大根) :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아들이다. 홍치(弘治) 병진년(1496, 연산군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권호신(權虎臣) :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1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효자(孝子)〉ㆍ〈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권준신(權俊臣) : 권호신(權虎臣)의 아우이다. 생원시에 형제가 함께 합격하였다.

김명성(金鳴盛) : 본관은 수안(遂安). 경인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조이주(趙以周) : 조정(趙貞)의 증손이다.

곽진(郭) : 자는 정보(靜甫). 만력(萬曆) 연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곽현(郭玹) : 자는 중진(仲珍). 곽진(郭)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다. 문명이 있었다.

곽영(郭瓔) : 자는 계진(季珍). 곽현(郭玹)의 아우이다. 만력(萬曆) 기묘년(1609, 광해군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문명이 있었다.

이흥문(李興門) : 자는 자실(自實). 감역(監役) 이성근(李盛根)의 손자이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에 의병장(義兵將)이 되었다.

김경건(金慶建) :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2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이여빈(李汝馪) :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2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남희적(南希績) : [본문 내용 없음]

이문두(李文斗) : 본관은 진성(眞城).

남계영(南季英) : 남희적(南希績)의 아들이다.

김등(金簦) : 선산(善山)에서 사현정(四賢井)으로 와서 살았다.

서천일(徐千一) : 본관은 화원(花園).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한세진(韓世珍) : 상주(尙州)에서 화천(花川)으로 와서 살았다.

김택룡(金澤龍) : 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김여욱(金汝煜) : 본관은 연안(延安). 증승지(贈承旨) 김개국(金盖國)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6)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호는 허주(虛舟)이다. 영천(榮川)에서 성곡(聲谷)으로 와서 살았다. 거처의 편액을 ‘소리와(素履窩)’라고 했다.

김성진(金聲震) : 자는 시백(始伯), 본관은 함창(咸昌). 만력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여혐(李汝馦) : 이흥문(李興門)의 아들이다. 만력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정묘호란 때 의병장(義兵將)이 되었다.

금시해(琴是諧) : 자는 극성(克成). 금복고(琴復古)의 아들이다. 만력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호는 아양헌(峩洋軒)이다. 숭정처사(崇禎處士) 배유장(裵幼章)이 지은 행장에서,
“자질은 강직ㆍ방정하고 행실은 온화하였다. 실로 조정에 서서 포부를 폈더라면, 태평 시절에는 정직한 신하가 되었을 것이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대의에 목숨을 바치는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김감(金鑑) : 자는 응구(應久). 찰방(察訪) 김기선(金幾善)의 아들이다. 만력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김창조(金昌祖) : 진사(進士)이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신환(申瓛) : 만력(萬曆) 계묘년(1603, 선조36)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이성화(李成樺) : 이대근(李大根)의 증손이고, 이여빈(李汝馪)의 아들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성건(李成楗) : 이대근(李大根)의 증손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성간(李成榦) : 자는 자한(子翰). 이대근(李大根)의 증손이다. 문예에 능하였다. 광해군 때 과거 응시를 그만두었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 인조5)에 진사가 되었다.

신공온(申公蘊) :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금시조(琴是調) :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안욱(安頊) :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금충달(琴忠達) : 만력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진사가 되었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성이성(成以性) : 만력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와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안홍정(安弘靖) : 만력 신묘년(1591, 선조2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김회(金淮) : 자는 덕연(德淵). 참봉 김경건(金慶建)의 아들이다. 계유년(1633, 선조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어버이의 상에 아우 김면(金㴐)와 더불어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니, 사람들이 대련(大連)과 소련(小連)에 비유하였다. 정축년 변란 뒤에 형제가 함께 과거 응시를 그만두고 시주(詩酒)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임지도(任之道) : 자는 종보(宗甫), 봉관은 풍천(豊川).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박안복(朴安復) :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황익청(黃益淸) :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황중연(黃中衍) : 인조 임오년(1642, 인조2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김구정(金九鼎) :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김경원(金慶遠) :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손회종(孫會宗) : 인조 계유년(1633, 인조1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김강(金鋼) :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13)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명현(名賢)〉 조목에 보인다.

임확(任碻) : 자는 노유(魯攸). 임지도(任之道)의 아들이다. 생원을 지냈다. 천품이 강건하고 방정하였으며, 학문이 정밀하고 밝았다. 선조를 받듦에 정성을 다했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호는 무은(霧隱)이다. 그가 살던 곳 동쪽에 있던 봉화 조계사(藻溪社)에 제향되었다가, 뒤에 나라의 금령으로 철폐되었다.

김치추(金値秋) : 본관은 함창(咸昌). 감사(監司) 김이음(金爾音)의 후손이다. 진사이다.

김식(金鉽) : 참봉 김거(金勮)의 손자이다.

이광전(李光前) : 자는 사술(士述). 이양근(李養根)의 5대손이다. 숭정 을해년(1635, 인조3)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송대정(宋大庭) : 자는 태고(太古), 본관은 야성(冶城). 송함(宋涵)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정사년(1617, 광해군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광계(李光啓) : 자는 언술(彦述). 이양근(李養根)의 5대손이다. 무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창계(李昌啓) : 이광계(李光啓)의 아우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박안흠(朴安欽) : 자는 군경(君敬), 본관은 금성(錦城). 판교(判校) 박한(朴)의 아들이다. 숭정 기묘년(1639, 인조 1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희(李熺) : 자는 일장(日章). 이성건(李成楗)의 아들이다. 진사이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관(李爟) :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후손이다.

이극(李) : 이대근(李大根)의 5대손이다. 생원이다.

이첨(李燂) : 이대근(李大根)의 5대손이다. 생원이다. 행실로 일컬어졌다.

김시직(金是直) : 자는 여청(汝淸), 본관은 의성. 인조 26년(1648)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장과 행실로 이름났다.

박시우(朴施雨) : 자는 시약(時若). 박안흠(朴安欽)의 아들이다. 신묘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장과 글씨로 한 시대에 이름이 났다.

박시춘(朴施春) : 자는 영백(榮伯). 박한(朴)의 손자이다. 경자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효우(孝友)와 문장으로 일컬어졌다. 호는 동고(東皐)이다.

성갑하(成甲夏) : 자는 경여(慶餘). 응교(應敎) 성이성(成以性)의 아들이다. 경자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성대하(成大夏) : 자는 하경(夏卿). 승지(承旨) 성안의(成安義)의 손자이다. 숙종 19년(1693)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호는 단애(丹崖)이다. 학사(學士) 권두경(權斗經)의 만사(輓詞)에서,
학사에서 높은 평판 받았고 / 學肆推高價
문단에서 원숙한 선비였네 / 文林見宿儒
하였다.

박시창(朴施昌) : 자는 우경(遇卿). 박한(朴)의 손자이다. 계묘년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다.

박진갑(朴震甲) : 자는 장유(長孺). 박시창(朴施昌)의 아들이다. 정사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장과 행실로 일컬어졌다.

김세표(金世標) : 본관은 선성(宣城).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후손이다. 숙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권이삽(權以鈒) : 자는 응오(應五), 본관은 안동. 송소(松巢) 권우(權宇)의 증손이다. 기사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예천에서 와서 살았다. 지조가 고결하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의 친구 김길만(金佶晩)의 만사에서,
심사(心事)가 서리 내린 뒤의 달보다 맑고 / 心事淸於霜後月
모습은 눈 속의 매화처럼 청초하였네 / 形容瘦似雪中梅
하였다.

안중하(安重厦) : 자는 대경(大卿), 본관은 순흥. 숙종 임술년(1682, 숙종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명이 있었다.

김수연(金粹然) : 자는 유청(幼淸). 참판 김륵(金玏)의 5대손이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명이 있었다.

이한방(李漢芳) : 자는 유백(流百). 이대근(李大根)의 손자이다.

김경하(金景河) : 자는 천징(千澄), 본관은 의성.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의 6대손이다. 기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예와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일컬어졌다. 수식(水息) 두문(斗文)에 우거하였다.

김경식(金景湜) : 자는 원징(遠澄). 김경하(金景河)의 아우이다. 형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황복규(黃復圭) : 자는 여삼(汝三), 본관은 창원(昌原). 고려 대상(大相) 황석주(黃石柱)의 후손이다. 숙종 임오년(1702, 숙종2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영천(榮川)에서 사천(沙川)으로 와서 살았다. 문장에 뛰어나고, 뜻과 행실이 청렴하고 신중하였다. 평생 독서를 좋아했으며, 선현들의 격언을 직접 기록하여 스스로 경계하였다. 저서로 《일성록(日省錄)》 약간 권이 있다. 호는 활옹(豁翁)이다.

김천상(金天祥) :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후손이다.

장연상(張延相) : 자는 인숙(仁叔).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의 후손이다. 숙종 임술년(1682, 숙종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영천(榮川)에서 태장(台庄)으로 와서 살았다. 천품이 온아(溫雅)하고, 어버이에게 효성을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다.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자 과거를 그만두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 힘써 많은 인재를 성취시켰다. 자호는 만수암(晩修菴)이다.

황창술(黃昌述) : 숙종 무자년(1708, 숙종3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서성구(徐聖耈) : 자는 희언(希彦), 본관은 화원(花園). 직장(直長) 서호(徐浩)의 후손이다. 숙종 경오년(1690, 숙종1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장과 글씨로 이름이 났다.

이진만(李鎭萬) : 자는 맹능(孟能). 이여빈(李汝馪)의 후손이다. 숙종 임오년(1702, 숙종28)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문예로 이름이 났다. 호는 백은(白隱)이다.

박경지(朴敬祉) : 자는 명휴(命休). 생원 박시우(朴施雨)의 손자이다. 숙종 을유년(1705, 숙종3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행실이 신중하여 선비다웠으며 교육에 힘썼다. 호는 만회당(晩悔堂)이다.

황우일(黃宇鎰) : 자는 백겸(百兼), 본관은 회산(檜山). 사간(司諫) 황효공(黃孝恭)의 후손이다. 숙종 을유년(1705, 숙종3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유이관(柳以觀) : 자는 촌언(村彦), 본관은 전주(全州).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현손이다. 무자년(1708, 숙종3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권두광(權斗光) : 자는 명언(明彦), 본관은 안동.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5대손이다. 숙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서정구(徐鼎九) : 자는 태언(台彦), 본관은 화원(花園). 직장(直長) 서호(徐浩)의 후손이다. 무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강건하고 방정하였으며, 행실이 두터워 사림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호는 죽은(竹隱)이다.

황수익(黃壽益) : 자는 덕로(德老). 사간(司諫) 황효공(黃孝恭)의 후손이다. 무자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황역(黃櫟) : 본관은 회산(檜山). 사예(司藝) 황익청(黃益淸)의 아들이다. 숙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신중한 행실로 일컬어졌다.

손이웅(孫以雄) : 무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권대임(權大任) : 자는 국칭(國稱), 본관은 안동. 생원 권준신(權俊臣)의 현손이다. 무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권정태(權正泰) : 자는 통경(通卿).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후손이다. 숙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이진화(李鎭華) : 자는 장세(長世). 이진만(李鎭萬)의 아우이다. 숙종 경인년(1710, 숙종36)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다.

이진주(李鎭周) : 경인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서만유(徐萬維) : 자는 여장(汝張). 서정구(徐鼎耈)의 조카이다. 경인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황세섭(黃世燮) : 황력(黃櫟)의 아들이다. 경인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금성심(琴聖心) : 자는 희백(希伯). 금인(琴靭)의 후손이다. 경인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김성우(金星宇) : 자는 추언(樞彦). 김천상(金天祥)의 현손이다. 숙종 신묘년(1711, 숙종37)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강이일(姜履一) : 자는 탄지(坦之), 본관은 진주(晉州). 현감 강흡(姜恰)의 증손이다. 숙종 기해년(1719, 숙종4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두터워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구료하였고, 두 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독서를 좋아하여 세상을 떠날 때도 《시경(詩經)》 주송(周頌)의 〈유천지명장(維天之命章)〉을 단정하게 읊고서 숨을 거두었다.

김성(金) : 자는 장백(將伯), 본관은 풍산(豊山). 참판 김영조(金榮祖)의 증손이다. 숙종 갑오년(1714, 숙종4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금옥심(琴沃心) : 갑오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홍경(洪儆) : 자는 상겸(尙兼), 본관은 남양(南陽). 교관(敎官) 홍유경(洪游敬)의 아들이다. 경종 신축년(1721, 경종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벼슬이 이조낭관에 이르렀다.

황석중(黃錫中) : 자는 명여(命汝). 사예(司藝) 황익청(黃益淸)의 현손이다. 기해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몸가짐이 태연하고 단정하였고, 가정생활이 화목하였다. 세상을 떠나니 마을에서 농요(農謠)를 멈추었다.

이이단(李以檀) : 자는 군방(君邦), 본관은 우계(羽溪). 생원 이첨(李燂)의 증손이다. 기해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권택규(權宅揆) : 자는 이서(而敍). 동암(東岩) 권성오(權省吾)의 현손이다. 계묘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서지달(徐志達) : 자는 선칙(善則). 직장(直長) 서호(徐浩)의 후손이다. 계묘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안재진(安再軫) : 자는 중익(仲翼). 찰방(察訪) 안홍정(安弘靖)의 증손이다. 계묘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안택중(安宅重) : 을사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과(文科)〉 조목에 보인다.

윤봉적(尹鳳適) : 본관은 파평(坡平). 병오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권정긍(權正兢) : 자는 영경(英卿).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후손이다. 갑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경흡(李景潝) : 자는 내길(來吉). 김진만(金鎭萬)의 아들이다. 기유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명이 있었다.

김영엽(金英燁) : 자는 회중(晦仲).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후손이다. 을묘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다.

안종웅(安宗雄) : 자는 - 2자 원문 빠짐 -. 안택중(安宅重)의 아우이다. 경신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김익원(金益源) : 자는 겸지(謙之), 본관은 풍산(豊山). 지평(持平) 김봉조(金奉祖)의 후손이다. 경신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금필항(琴必恒) : 자는 자구(子久). 부사(府使) 금학달(琴學達)의 손자이다. 갑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총명하고 해박한 학식에 행실이 확실하고 문장이 넉넉하였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늘 주자서(朱子書)를 암송하였다. 호가 잠헌(潛軒)이다.

권정웅(權正雄) : 갑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 조목에 보인다.

김식만(金式萬) : 자는 공의(公儀), 본관은 선성(宣城). 김담(金淡)의 후손이다. 경종 신축년(1721, 경종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현재 생존자[時存]

금운심(琴運心) : 자는 천기(天機). 송계(松溪) 금인(琴軔)의 후손이다. 지금 임금 병오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권일리(權一理) : 자는 광은(光隱). 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의 후손이다. 기유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성신인(成臣寅) : 자는 인상(寅祥). 승지(承旨) 성안의(成安義)의 현손이다. 기유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성혜인(成惠寅) : 자는 춘보(春甫). 승지 성안의(成安義)의 현손이다. 갑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권정통(權正通) : 자는 맹긍(孟兢).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후손이다. 기묘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강택(姜澤) : 자는 민윤(民潤). 본관은 진주. 현감 강흡(姜恰)의 현손이다. 정묘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권속(權謖) : 자는 유상(幼常), 본관은 안동.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계유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성언극(成彦極) : 자는 입여(立汝). 응교(應敎) 성이성(成以性)의 5대손이다.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황덕배(黃德培) : 자는 덕이(德以). 황세섭(黃世燮)의 아들이다. 병오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행(文行)과 식견으로 고장에서 일컬어졌다.

안정좌(安廷佐) : 자는 중익(仲翼). 서파공(西坡公 안리(安理))의 13대손이다. 기사년(1809, 순조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병두(李秉斗) : 자는 원중(元仲).

홍전(洪) : 자는 사직(士直).

안효묵(安斅黙) : 자는 학여(學汝). 급제 안치묵(安致黙)의 아우이다. 신유년(1861, 철종 12)에 20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퇴도 이 선생(退陶李先生 이황(李滉))이 〈문정공세계원류도(文貞公世系源流圖)〉를 《죽계지(竹溪志)》 머리에 직접 기록하였다.



순흥안씨 한 가문 5~6세에서 현인 군자가 성대하게 배출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찬미하고자 직접 기록하여 특별히 드러낸 것이다.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 이후 몇 대 이하에서 위인이 또 배출되어 선조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여 해와 별처럼 빛나고 있다. 세대가 뒤떨어져 이 도표에 기록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 한림(翰林) 안명세(安名世)

[주D-001]우계(愚溪) : 부석면 소재지인 소천(韶川)에서 도탄마을[上石] 동편으로 흐르는 냇물.
[주D-002]옥산유씨(玉山劉氏) : 남송의 유윤적(劉允迪). 그가 의학(義學)을 세운 것을 이름. 《朱子大全 卷80 玉山劉氏義學記》
[주D-003]조연(趙涓 1374~1429)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초명은 경(卿), 자는 여정(汝靜).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인벽(仁璧)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을 지냈다.
[주D-004]무은(霧隱) : 원문의 ‘務’는 ‘霧’의 오기로 보임.
[주D-005]조계사(藻溪社) : 원문의 ‘曺’는 ‘藻’의 오기로 보임.
[주D-006]안명세(安名世 1518~1548)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후손이며, 부호군 담(燂)의 아들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ㆍ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 필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으며, 사관(史官)으로서의 노고를 인정받아 가자(加資)되기도 하였고, 이듬해에는 승정원주서에 올랐다. 그러나 1548년(명종 3) 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ㆍ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세 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를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그는 국문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ㆍ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사형에 임해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신원(伸寃)되어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




숙종 19년 계유(1693,강희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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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2일 (병오)
의안군 이성·판서 홍가신·판서 권협의 시호를 내려 주다

의안군(義安君) 이성(李珹)의 시호(諡號)를 의회(懿懷)【선조(宣祖)의 아들이다.】라고 내려주고, 판서(判書) 홍가신(洪可臣)의 시호를 문장(文莊)이라고 내려 주고, 판서 권협(權悏)의 시호를 충정(忠貞)이라고 내려 주었다.
【원전】 39 집 274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인사-관리(管理)







 
 기언 별집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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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묘문(丘墓文)
길성군(吉城君) 권공(權公)의 묘갈명(墓碣銘)

공은 휘는 대임(大任), 자는 홍보(弘輔), 성은 권씨로 그의 선조는 영가(永嘉) 사람이다. 영가 권씨는 태사공(太師公) 권행(權幸)이 성을 얻은 이래 8백 년 동안 대대로 현달한 관리나 귀인(貴人)이 많아서 대족(大族)으로 불렸다. 증조부 권상(權常)은 훌륭한 행실로 특별히 알려져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고, 뒤에 영의정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권협(權悏)은 남다른 공훈을 세운 명신(名臣)으로서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가 영의정 길창부원군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권신중(權信中)은 군수를 연임하였고 좌찬성에 증직되고 길흥군(吉興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뒤에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세종(世宗)의 별자(別子)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7대손이며, 사평(司評) 이정필(李廷弼)의 딸이다.
만력 23년(1595, 선조28) 11월 24일 공이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헌칠한 외모에 착실하고 총명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잘하였다. 겨우 10세에 재예(才藝)가 숙성하였으며 정선옹주(貞善翁主)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었는데 상이 남달리 총애하였다. 특히 공은 필법(筆法)에 뛰어나서 상이 칭찬해 마지않아 수없이 상을 하사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이르렀다. 인조대왕 2년(1624)에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상이 공주(公州)로 파천했을 때 공이 상을 호종하여 봉헌대부(奉憲大夫)로 올랐으며, 13년에 길성군에 봉해졌는데 길흥군이 세상을 떠나고 상사를 마친 뒤, 원공신(元功臣)의 적손(嫡孫)이라 하여 습봉(襲封)된 것이다.
다음해 겨울 청인(淸人)의 서울 침입으로 또 남한산성에서 상을 호종하여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올랐으며, 다시 도총관이 되었다. 3년 뒤 사명을 받들어 심양(瀋陽 지금의 봉천)에 갔을 때에는 우리나라가 겨우 병란에서 벗어난 때였는데, 행장 속에 있던 것을 모두 털어 주고 돌아오지 못한 노약자(老弱者)를 귀환시키니, 사람들이 흠모하였다. 23년(1645, 인조23) 10월 26일 공이 생을 마치니 나이 51세였다. 공이 앓을 적에 상이 특별히 의빈(儀賓)의 존속(尊屬)이라 하여 의약(醫藥)을 대어 주었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공을 위하여 조회와 시장을 철폐하였고, 조문과 부의를 의례대로 하사하였으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사를 보살피도록 하였으니, 이는 예(禮)에 따른 것이다. 선무(宣武)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이라 하여 유록대부(綏祿大夫)로 추후에 가자하여 정1품이 되었다.
공은 인자하고 돈독하여 부모 형제에게는 물론이고 종족에게까지 선하게 하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아우와 누이동생 한 분에게 공이 잡아들인 노예를 고루 나누어 줄 적에 반드시 그중에서 착하고 건장한 자를 택하여 후하게 주고도 오히려 부모께서 보살피는 것같이 못할까 걱정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이 적은 아우 한 분을 공이 매우 사랑하여, 그의 의식(衣食)을 언제나 자기에 비하여 결함이 없게 하였다. 성품이 차분하고 검소하여 유사(儒士)와 같이 자처(自處)하고, 사람을 충신(忠信)으로 사귀고 문장(文章)과 풍아(風雅)를 애호하였으므로, 당시의 벼슬아치와 학자가 사모하여 더불어 교유한 자가 많았다.
평생 사치하거나 방종하거나 편안함을 즐기지 않고 오직 삼가 바른 일을 행하였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이 어질게 여겼다. 국가 제도에 옹주(翁主) 집에는 종[奴]과 전답을 주게 되어 있는데도, 공은 이것을 받기를 즐겨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받은 은혜가 이미 많은데, 다시 이것 때문에 유사(有司)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만족을 모르는 짓이다.”
하였다. 정선옹주는 선조대왕의 딸로서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인데, 정빈은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의 손녀이며, 강화 도호부사 민사준(閔士俊)의 딸이다. 정빈은 어질고 예절을 좋아하였으므로 옹주 또한 공순하고 스스로 조심하여 부덕(婦德)을 이루었으니, 대개 본디 가르침을 받은 바가 있어서 그러하였다. 옹주는 만력 22년(1594, 선조27) 4월 1일에 탄생하여 42년(1614, 광해군6) 8월 1일에 생을 마쳤는데, 옹주가 공보다 한 살이 많았고 당시 춘추(春秋)는 21세였다. 부평(富平)의 수탄(水呑)에 안장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합장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권진(權瑱)이라는 분으로 돈녕부 봉사이다. 권진이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권이경(權以經), 권수경(權守經)이며, 사위 둘은 승지 오시수(吳始壽), 생원(生員) 홍만조(洪萬朝)다. 권이경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오시수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오상유(吳尙游)이고, 사위 한 분은 이경홍(李景鴻)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홍만조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다 어리고, 또 서출자(庶出子) 홍림(洪琳), 홍련(洪璉) 두 사람을 두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벼슬이 높아도 겸양할 줄 알고 / 尊而能讓
귀하게 되어서도 능히 몸을 낮추어 / 貴而能下
사랑하는 마음 독실하고 / 仁愛篤善
조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 戒愼不惰
중추공 3세 후에 / 中樞三世
길창군의 자손이 / 吉昌之孫
어질고 착한 것은 유래가 있다네 / 賢善有自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가문이었네 / 忠孝之門

 
기언 별집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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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묘문(丘墓文)
증(贈) 이조 참판(吏曹參判) 권공(權公)의 묘지명(墓誌銘)

공은 휘는 위중(偉中), 자는 군언(君彦), 성은 권씨로 본래 영가(永嘉) 사람이다. 영가 권씨의 시조는 태사 권행(權幸)으로 사적(事跡)이 《고려사》에 있다. 고조부 권욱(權旭)은 사도시 부정으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증조부 권진(權振)은 전생서 참봉으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 권상(權常)은 동지중추부사로 영의정 동흥부원군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권협(權悏)은 예조 판서 길창군(吉昌君)으로 영의정 길창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전주 최씨로 공조 정랑 최말(崔沫)의 딸이다.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31) 4월 30일에 공이 태어났다.
중추공부터 지극히 훌륭한 행실로 드러났는데 길창군은 크게 어지러운 시기에 한마디 말로써 천자의 위령(威靈)을 감동케 하여 대병(大兵)을 동원하여 왜란을 막았으니, 이를 일러 충효로 대를 이었다고 하겠다.
공은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착한 일을 좋아하였으며, 준엄하고 정직하여 입으로는 성색(聲色)과 화리(貨利)를 말하지 않았고, 갑자기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볼 수 없었으며, 사람들과 희롱하거나 무례함이 없었으므로 착한 자는 사모하고 착하지 않은 자는 부끄러워하였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을 독실히 좋아하여 문장을 지어도 기격(氣格)만을 숭상하고 과거 공부의 격식은 일삼지 않았으며, 또 해서(楷書)를 잘 썼다.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뽑혔다. 그때 광해군이 태후(太后)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아첨하는 신하가 모후를 폐위해야 한다는 논의를 주장하여 광해군의 비위를 맞추었고,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로 하여금 또한 소(疏)를 올려서 이것을 말하도록 하고, 논의하여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이들을 모두 중상하였으므로, 공은 한 번 과방(科榜)에 나아가 응시했을 뿐, 상사(庠舍)에 발을 끊었다. 당시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은 자가 많았으며, 더러는 술에 취하여 방랑하는 것을 서로 숭상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선비가 혼탁한 세상을 만나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지키는 것이 옳으니, 어찌하여 이러느냐?”
하고, 스스로 수신하는 데 더욱 힘썼다. 부당(婦黨)에 벼슬이 높았던 자가 있었는데, 전날에 파직을 당하여 등용되지 않았을 적에는 공과 서로 좋은 벗이었으나, 중흥(中興 인조반정을 가리킴)한 뒤 그 사람이 비로소 귀하게 등용되자, 공은 그와의 교유와 내왕을 끊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본디 공의 개결함을 알고 더욱더 어질게 여겼다. 그 마을에 권세 있고 벼슬 높은 사람이 공의 행실이 올바르다는 말을 듣고, 같은 마을 사람을 통하여 서로 만나 보고자 하였으나 공이 사절하고 만나지 않았다. 연성(蓮城)에 우거(寓居)할 때에는 조그마한 초당(草堂)을 짓고 날마다 문을 닫은 채 글을 읽으니, 향리(鄕里)에서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던 자들이 과오를 경계할 적마다 ‘권 상사(權上舍)가 모르게 하라.’ 하였다.
부모의 상사를 당해서는 3년 동안 묘막을 지켰으며, 초상 때에는 죽을 먹고 장사를 치른 뒤에는 거친 밥에 물만 마셨으며, 연제(練祭)가 지나고 나서야 채소와 과일을 먹었다. 형제간에 늘 지성으로 사랑하였으며, 일찍 과부가 되어 의지할 곳 없는 큰누이가 있었는데, 그를 섬기기를 어머니 섬기듯 하여 종신토록 그 마음가짐이 쇠하지 않았으니, 돈독한 행실이 이와 같았다. 숭정(崇禎) 2년(1629, 인조7) 6월 30일에 공이 세상을 떠나니, 나이 32세였다. 그해 8월에 부평의 수탄에 안장하였다. 공신의 아들이라 하여 원종(原從)으로 기록하고 추후에 사헌부 지평의 작록을 내렸다가, 뒤에 아들 권대재(權大載)의 벼슬이 아경(亞卿)에 이르므로, 임금의 은혜를 미루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하였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세조(世祖)의 명상(名相) 신숙주(申叔舟)의 8대손인 수의부위(修義副尉) 신종사(申宗泗)의 딸이며, 군수 김덕근(金德謹)의 외손이다. 수의공이 공의 어짊을 사모하여 사위를 삼아 매우 사랑하였고, 공 또한 특별히 공경하여 마음을 다하여 섬겼다. 수의공은 단지 딸 하나뿐 아들이 없는 데다가 일가 중에도 아들로 양자 삼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 뒤를 딸의 집에 의탁하고자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시면 대가 끊어집니다. 비록 먼 친척일지라도 반드시 양자를 세워서 대가 끊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수의공이 세상을 떠나고 공이 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인은 어질고 위의가 있어서 부인의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시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공의 상사를 당하여는 기필코 하종(下從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것)하리라 맹세했었지만 임신 중이라 차마 곧 결정을 못하다가, 아이를 낳자 유모에게 젖을 부탁하고 기어이 자결하려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않았다. 그러다 어머니 김 부인(金夫人)의 눈물 어린 말에 따라 다소 풀어졌지만, 공을 위하여 6년간 상복을 벗지 않았고 눈이 멀 정도로 곡(哭)을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권대재는 겨우 10세였고, 두 딸은 모두 어렸는데, 딸 하나는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다.
부인은 교육에도 법도가 있어서, 권대재가 글을 읽어 올바른 행동을 하였으며 문학으로써 출세하여 지금 대사헌이 되었다.
사위는 셋인데 이담(李墰)은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건원릉은 태조릉), 최동로(崔東老)는 호조 좌랑, 이명린(李命麟)은 제용감 봉사이다. 내외손(內外孫)에 남녀가 10여인이 있는데, 장손 권해(權瑎)는 과거에 급제하여 대사간이 되었고, 차손 권업(權璞)은 생원이다. 권대재가 공산 현감(公山縣監)이 되었을 때에 부인이 항상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삼가야 한다는 것으로 훈계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마다 현모(賢母)라고 일컬었다. 부인은 공보다 3세가 적으며, 만력(萬曆) 신축년(1601, 선조34) 1월 27일에 태어나서 정미년(1667, 현종8) 2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67세였다. 같은 해 4월에 같은 영내(塋內)에 안장하였으나, 분묘는 달리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오직 효도와 우애에만 / 惟孝友
돈독하고 진실하였으니 / 敦且純
그 자신에게는 발복이 없었지만 / 不發於其身
그 후손은 훌륭하게 되리 / 以裕其後人

연려실기술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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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임진왜란 임금의 행차가 서도(西道)로 파천(播遷)가다

남사고(南師古)는 명종 때 사람이다. 강원도에 살았는데 풍수ㆍ천문ㆍ복서(卜筮)ㆍ상법(相法)을 잘 알고, 아울러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결을 터득하여 그가 말을 하면 반드시 맞추었다. 명종 말년에 일찍이 말하기를, “머지 않아 조정에는 당파가 나뉠 것이다. 또 오래지 않아 왜변이 일어날 것인데, 만약 진(辰)년에 일어나면 오히려 구할 길이 있지만 사(巳)년에 일어나면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어서 세상을 태평케 할 임금이 거기서 나올 것이다.”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일일이 다 들 수 없다.
조정에는 을해년부터 비로소 당파가 생겼고 왜란은 진년에 일어났고 선조(宣祖)는 사직동 잠저(潛邸)에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다. 《상촌집》
사고는 울진 사람으로 학문을 힘써 주역에 달통하여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기이하게 맞았다. 여러 번 향시(鄕試 각 지방에서 보이는 과거의 예비시험)에 뽑혔으나 끝내 급제는 못하였다. 누가 묻기를, “자네는 남의 운명은 잘 알면서 자기 운명은 알지 못하여 해마다 헛걸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한즉 웃으면서, “사사로운 마음이 동하면 술법도 어두워진다.” 하였다.
만년에 천문학 교수로 서울에 있을 때 태사성(太史星)이 흐려졌다. 이때 관상감 정(觀象監正)으로 있는 이번신(李蕃臣)이 그중 나이가 많아 이것은 내가 죽을 징조라 한즉, 사고가 웃으면서 따로 죽을 사람이 있다 하더니 그 뒤 두어 달만에 사고가 과연 죽었다. 《지소록(識小錄)》
○ 일본 국왕 원(源)씨는 홍무(洪武) 초년에 나라를 세우고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은 지 거의 2백 년이 되었다. 우리나라 또한 사신을 보내어 길흉사에 경조(慶吊)를 표했다. 신숙주(申叔舟)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왕래한 일이 있는데, 그 뒤 신숙주가 죽을 때 성종이, “할 말이 있느냐?”고 물으니 숙주의 말이, “원컨대 국가에서 일본과 화친을 끊지 마소서.”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겨 부제학 이형원(李亨元)과 서장관 김흔(金訢)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들이 대마도에 이르러 풍파에 놀라 병을 앓게 되자 글을 올려 형편을 아뢰니, 성종은 국서와 폐백만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전하고 돌아오라고 명하였다. 이로부터 다시 사신을 보내지 않고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예(禮)로서 접대할 뿐이다. 《조야기문》ㆍ《징비록(懲毖錄)》
○ 내려오는 전례로 대마도 왜인이 우리나라에 조공하러 오면 변방 관리들은 그들이 타고 온 배의 크고 작음을 척량(尺量)해서 차등있게 식량을 주었다. 왜인들은 비록 후히 받는 것을 탐내어도 큰 배는 풍파에 불리하므로 큰 배가 오는 일이 드물었다. 무진년에 대마도주가 배의 척량을 하지 말도록 청하자 그 당시의 한 정승이 그 제의를 찬성했으므로 드디어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왜인들이 모두 작은 배를 타고 와서 큰 배의 식량을 받아갔다. 경상도에서는 각 고을에 쌓아 둔 군량으로 이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것을 걱정하여 옛 규정을 복구하려 했다.
유중영(柳仲郢)이 아뢰기를, “왜놈들은 경망하고 조급한데 이미 전일에 그 청을 들어주었다가 까닭없이 고치려 하면 그 잘못이 우리에게 있으니 반드시 트집을 잡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승문원(承文院)을 시켜 먼저 글로 타이르기를, ‘배를 척량하는 것은 원래 약정된 일이나 전일 도주의 청을 받아들인 것은 도주가 스스로 배의 대소를 분간해서 문서에 분명히 기록하여 속임이 없게 하라 한 것인데 지금 와서는 거짓이 날로 더하여 부당하게 받아가는 것이 더욱 심해져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도주는 이로부터 부하에게 엄중 경계하여 당초 약조대로 하게 하면 다행이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부득이 변장(邊將)을 시켜 당초대로 다시 배를 척량하겠다.’ 하소서.
그리하면 우리 말이 올바르고 잘못은 저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하여 조정에서 그대로 하였다. 〈유중영행장(柳仲郢行狀)〉○ 중영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아버지.
○ 정해년 선조 20년 봄에 왜적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략하였다. 녹도 만호(鹿島萬戶) 이대원(李大元)이 고립된 군사로 손죽도(損竹島)에서 애써 싸우다가 후원군이 없어 전사하였다. 좌수사 심암(沈巖)은 통솔함에 있어 군율을 어겼으므로 잡아다가 효시(梟示 목을 베어 매달아 일반에게 보이는 것)하였다. 《고사촬요》
○ 처음 적선 두어 척이 녹도를 침범하였다. 만호 이대원이 창졸간이라 보고할 겨를이 없어 혼자서 왜적을 잡았다. 좌수사 심암이 깊이 그를 미워하였는데 이때 적선이 또 죽도(竹島)를 침범하니 이대원으로 척후(斥候)를 삼아 싸우케 하고, 자기는 수군을 거느리고 관망만 하다가 구해주지 않고 물러나왔다. 이대원은 고립된 군사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심암은 스스로 군률을 어긴 것을 알고 적세가 대단하다고 거짓으로 아뢰고 내지의 군사를 징발하였다.
○ 우참찬 김명원(金命元)을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삼아 녹도를 침범한 적을 치게 하였는데 적은 이미 물러간 뒤였다.
○ 신립(申砬)과 변협(邊協)을 전라도 좌ㆍ우방어사(左右防禦使)로 삼았다. 신립 등이 밤을 틈타서 달려가고 감사 홍여순(洪汝諄)은 나주의 각 고을에 전령하여 군사를 일으켜 적을 막게 하였으나, 5, 6일이 지나도 해변에 적의 기척이 없어 각각 진(陣)을 파하였다. 조정에서는 심암의 사실을 듣고 잡아다가 효시하였다.
○ 정해년 11월에 일본이 대마도 왜인 귤강광(橘康光) 혹은 강광(康廣)을 파견하여 우리와 통신(通信)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사촬요》에는 무자년조에 들어 있다.
○ 이때 임금은 일본이 저희 임금을 쫓아내고 새 임금을 세운 역적의 나라라 그 사신을 접대할 수 없으니, 마땅히 대의(大義)로 타일러 돌려보내야 한다고 여겨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에게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비밀히 아뢰기를, “교화권(敎化圈) 밖에 있는 나라에 예의로써 책망할 수 없으니 사신이 나오면 그저 전례에 의하여 접대함이 마땅합니다.” 하므로 임금은 허락하였다. 《시정록》ㆍ《징비록》에 “강광이 병술년에 왔다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쓰여 있다.
○ 이때 원씨(源氏)가 망한 지 10여 년이 되었으나 여러 왜인들의 왕래에 누설 못하게 엄령한 까닭에 우리나라는 알지 못하였다. 《조야기문》
○ 평수길(平秀吉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성에는 ‘평씨’와 ‘원씨’(源氏)만 있는 줄 알고 수길의 성 ‘풍신’(豐臣)을 ‘평’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은 살마주(薩摩州) 사람의 종으로 혹은 중국 사람이라 하고, 혹은 천한 종이라 하나, 어느 곳 출신인지 알지 못한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명사(明史)》에는, “처음 생선 장수로 나무밑에 누워 있었다.”라고 나온다. 관백(關白) 원신장(源信長 ‘평수길’과 같이 신장의 성 직전(織田)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을 만났다. 그 부하들이 죽이려 하는 것을 관백이 그 얼굴이 이상하다고 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관백에게 총애를 받아 《명사》에는 “관백이 데리고 가서 말을 먹이게 하고 목하인(木下人)이라고 불렀다.” 하였다. 장수가 되었고, 싸움을 잘하여 공을 쌓아 대장에까지 이르렀다. 드디어 권력을 잡아 관백의 깃발과 도끼를 빌려 먼 지방에까지 나가 항복하지 않는 자를 토벌하였다. 국민들은 관백의 참람함을 미워하여 관백을 쳐서 죽였다. 수길은 승전하고 회군하여 이내 관백 원씨(源氏)를 섬멸하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혹은, “수길이 관백을 죽이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하고 《명사》에는, “그 참모 아기지(阿奇支)가 죽였는데, 수길은 아기지를 죽이고 관백이 되었다.” 하였다. 군사를 출동하여 사방으로 승리를 거둬 여러 섬을 다 정복하여 66주를 통합하고 정예군사 백만을 훈련하니 일본은 유사 이래 가장 융성해졌다. 수길은 득의만만하고 또 내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중국을 침범하기로 하였다. 그전 세대에도 여러 번 중국의 강절(江浙) 지방을 침범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먼저 조선을 점령하여 육로로 진격해서 요동과 계주(薊州)를 엿보려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였다. 《자해필담》 《징비록합록》
○ 이때 수길이 말하기를, “우리 사신은 여러 번 조선에 갔는데 조선에서는 사신을 보내지 않으니 이것은 우리를 업신여김이라.” 하고 드디어 귤강광과 평조신(平調臣) 등을 보내 국서(國書)를 올려 서로 화친하기를 요구하였다. 또 말하기를, “국왕 원의등(源義藤)은 우매해서 국민들이 불복하고 새 관백 평수길은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아니하므로 전국에서 추대하여 관백으로 삼고 민부경(民部卿)인 중[僧] 법인(法印)이 용사(用事)한다. ……” 하였다.
○ 수길의 국서 사연이 심히 오만하였는다. 지금 천하가 짐(朕)의 한 손아귀에 돌아왔다는 말이 있었다. 사신으로 왔던 귤강광은 그때 나이 50여 세로 얼굴이 큼직하였는데, 행동이 거만스러운 것이 전날 왜사와는 아주 달라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올 때 인동(仁同)을 지나면서는 창을 잡은 자를 흘겨보며 “너희들 창자루가 너무 짧다.” 하고, 상주(尙州)를 통과할 때, 목사 송응형(宋應泂)이 나와 접대하는 자리에서 통역을 시켜 목사에게 조롱하기를, “나는 수년 전장에 있어 머리털이 세었거니와 당신은 음악과 기생 속에 파묻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머리털이 센 것은 웬일인가.” 하였다.
예조(禮曹)에 이르러 연회를 하는데 강광이 호초(胡椒)를 자리 위에 흩뜨렸다. 기생들이 다투어 가지는 것을 보고 강광이 한숨을 쉬며 역관에게, “너희 나라가 망하겠다. 기강(紀綱)이 무너졌구나.” 하였다. 《징비록》
○ 조정에서는 다만 일본에서 온 국서에 답을 보냈을 뿐 바닷길이 멀다는 핑계로 사신 보내기를 허락하지 않으니 강광은 심히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강광이 돌아가 복명하니 수길이 크게 노하여 그 일족을 몰살했다. 강광은 그 형 강년(康年)과 더불어 원씨 때부터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관직까지 받은 일이 있으므로 우리나라를 두둔하다가 참혹한 화를 입는 데 이르렀다고 한다. 《징비록》
○ 이때 임금이 2품 이상으로 하여금 헌의(獻議)하게 하니 대개 통신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였으나 이산보(李山甫)만이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지봉유설》
○ 귤강광은 돌아가서 관백 평수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수길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 해도 트집거리가 없어 장차 중국에 쳐들어갈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핑계하였다. 임금이 대의로 거절하자 수길이 이것으로 군사를 일으키는 구실을 삼았다. 《자해필담》
○ 기축년 5월에 일본은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과 중 현소(玄蘇)를 사신으로 보내어 서로 사절을 교환하고 국교를 맺자고 청해 왔다. 이때 귤강광은 이미 죽었고 다시 의지 등을 보내왔는데, 현소는 모사(謀士)이고 조신은 용장(勇將)이었다. 임금은 중요한 기회라 여긴데다 또 현소가 글 재주가 있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그들을 접대할 선위사(宣慰使)를 특별히 선발하라고 하였다. 이조에서 이덕형(李德馨)을 추천하자 임금은 특별히 이조 정랑으로 승진시켜 보내어 부산에 가서 영접하여 서울로 오게 하였다.
의지(義智)가 공작(孔雀) 한 쌍과 조총(鳥銃)ㆍ창ㆍ칼 등의 물건을 바쳤다. 임금은 명하기를 공작은 남양 바다 섬으로 놓아 보내고 조총 등은 군기서(軍器署)에 간수하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 조총이 있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징비록》
이때 왜사가 공작을 가져오는데 서울 성안 귀천 남녀들이 나와 구경하느라고 한강에서부터 문안까지 길이 메이도록 혼잡하였고, 여염집들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였다. 《지봉유설》
○ 의지라는 자는 혹 말하기를 그 나라 대장 행장(行長)의 사위로 수길의 심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 종성장(宗盛長)이 대대로 대마도를 지키며 우리나라를 섬겨왔는데 수길이 종씨를 제거하고 의지로 대신 대마도를 지키게 하였다. 우리나라가 바닷길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구실로 삼아 사신 교환을 거절하자 그들은 의지가 대마도주의 아들이라 속여 말하고 그가 해로에 익숙하니 그와 더불어 함께 오겠다고 하였다. 그것은 또 우리나라 허실을 염탐하려는 것이었다. 의지는 나이 어리나 사람됨이 매서워 다른 왜인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는 오래 동평관(東平館 일본의 사신을 유숙시키던 곳) 남산 밑 왜관동(倭館洞)에 있다. 에 머물면서 꼭 우리 사신을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의논해서 중국에 통보하기로 하였다. 또 지난 정해년 봄에 왜구(倭寇)들이 죽도(竹島)에 침범하여 이대원(李大元)을 죽였으며 또 해변 백성 사화동(沙火同) 혹은 사을배동(沙乙背同) 이란 자가 일본 오도(五島)에 표류되었다가 섬 왜인들을 유인하여 와서 해마다 우리나라 해변을 괴롭혔다.
이때에 이르러 혹 말하기를, 그들 우두머리로 하여금 반민(叛民) 사화동(沙火同)을 잡아 돌려보낸 뒤에라야 통신사의 일을 의논할 수 있다고 하여, 그들의 성의 여하를 보자고 하였다. 접대자를 시켜 그 뜻을 전했더니 의지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고 즉시 평조신을 보내어 수길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징비록》 《조야기문》
○ 수길이 즉시 오도에 영을 내려 반민 사화동 및 그와 동모한 왜적 신삼보라(信三甫羅)ㆍ긴시요라(緊時要羅)ㆍ망우시라(望右時羅) 등을 잡아 바치고, 또 일찍이 왜구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공태원(孔太元) 등 80여 명을 돌려 보내왔다. 혹은 160명 ○《징비록》 《조야기문》
이때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수찬 허성(許筬)이 말하기를, “수길은 원래 일개 필부였는데 때를 타서 우뚝히 일어난 것이다. 섬 사람들 가운데 잘 복종하지 않는 자가 많아서 우리나라와 수호(修好)한 힘을 빙자하여 섬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요, 필시 별다른 뜻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사신을 보내어 그들의 허실을 자세히 탐지한다면 우리가 미리 대비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므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 좋다.” 하였다. 유성룡이 적극 찬성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니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는 이가 없어 사화동을 잡아 돌려보내기로 약조하였다. 《기재잡기》
○ 전 도사 조헌(趙憲)이 귀양 가게 되어 떠나면서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오랑캐는 신의가 없으니 개 돼지와 같습니다. 지금 화친을 청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와 있는 왜사(倭使)를 베고 명 나라에 알리면 황제가 환히 살펴서 우리에게 문책할 염려도 없을 것이요, 왜놈들도 두려워서 바다를 건너 올 뜻을 두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더욱 미친 소리라고 배척하였다. 《일월록》
○ 경인년 3월에 사화동을 포로로 잡아 종묘(宗廟)에 바치고 보고하였다. 《기재잡기》
○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와 군사를 진열시킨 가운데 사화동 등을 문초한 뒤에 성밖에서 참수하게 하고 의지에게 내구마(內廐馬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른 말) 한 필을 상으로 내리고 궁전 안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유성룡ㆍ변협 등은 회답사를 보내어 왜인이 트집을 잡지 못하게 하고 또 왜인의 동정도 살피게 하자고 하였다. 이에 조정의 논의가 비로소 일치되어, 첨지 황윤길(黃允吉)과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과 전적(典籍)허성(許筬)으로 통신사를 삼아 의지 등과 함께 출발하여 4월에 바다를 건너고 7월에 왜국 도성(都城)에 이르도록 하였다. 《조야기문》 《징비록》 ○ 《기재잡기》에 “차천로(車天輅)가 종사관이 되었다.” 하였다.
○ 일본으로 간 사신 일행이 숙소에 머무른 지 5개월 만에 비로소 국서를 전하였다. 수길은 단지 한 번만 만나 보았는데 예우를 심히 소홀히 하여 연회도 베풀지 않았다. 탁자 하나만 앞에 놓고 떡 한 그릇과 질그릇 잔으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며 두어 순배 돌리다가는 마쳤다.
수길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는데 좌중은 모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어린애를 안고 나와 마루를 거닐다가 난간에 기대어 우리나라 악공을 불러 주악하게 하고 방자하고 득의만만한 태도가 곁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하였다. 사신들이 돌아오려 해도 답서를 줄 생각도 않고 계빈(界濱)에 먼저 나가 답서를 기다리라 하더니 답서가 늦게 이르렀다. 그 문장의 뜻이 이어지지 않고 문리(文理)도 없고 극히 무례하고 거만하였다. 《징비록》
왜서는 이러하다. “일본국 관백은 조선 국왕 합하(閤下)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보내준 글월은 향을 사르며 접었다 폈다 두세 차례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60여 주(州)가 근래에 서로 나누어져 국가 기강이 문란하고 선대의 예법이 무너져 조정의 명령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한탄과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역의 무리를 치고 도당을 토벌하여 다른 지역 먼 섬까지 모두 내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나의 지나간 일을 돌아보건대 비루하고 미미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나를 처음 배태할 때 어머니 품안으로 태양이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하니 관상보는 이가 말하기를 “햇빛 비치는 곳은 내가 다스리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요, 장성하면 반드시 천하에 어질다는 명성이 들릴 것이며 사해(四海)에 위엄이 떨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힘입어 기적이 일어났으니 적의 마음이 자연 꺾이어,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음에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고아와 과부들을 불쌍히 여겨 돌보았으므로 백성들이 풍성하고 재물이 풍족하여 공납(貢納) 받는 것이 옛날보다 만 배나 불어났습니다.
우리나라 개국이래로 조정의 번성함과 낙양(洛陽)의 화려함이 오늘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백세를 채우기 어렵거던 어찌 답답하게 여기에만 있겠습니까.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고 산천이 가리어 있는 것도 거리낄 것 없이 한 번 뛰어 대명국에 곧장 들어가 우리나라 풍속으로 중국 4백여 주를 바꾸어 놓고 천자의 도성에서 정치와 문화를 억만 년 베풀어 보고 싶은 마음이 내 가슴 가운데 있으니, 귀국이 앞장서서 명 나라에 들어가 준다면 장래에는 희망이 있을 것이요 눈앞에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멀리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뒤늦게 나아오는 무리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국에 들어가는 날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兵營)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는 이웃 나라와 더욱 화친을 도모할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다른 것이 없고 단지 아름다운 명예를 삼국(三國)에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과 같으니 받으시오. ……”
○ 김성일이 이 국서를 보니 사연이 문리(文理)가 안 될 뿐 아니라 또 도리에 어긋나고 거만하여 전하(殿下)라 해야 될 것을 합하(閤下)라 하고 예폐(禮幣)라 해야 될 것을 방물이라 쓰고 있었다. 이에 현소(玄蘇)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의(大義)로 타이르고 만일 이 표현을 고치지 않을 때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국서를 가지고 갈 수 없다 하였다.
현소도 회답을 보내어 사과하고 국서를 작성하는 자가 말을 실수한 것이라 변명하고 합하를 전하로 방물을 예폐라고만 고치고 그 밖에 거만스럽고 협박적인 문구에 대해서는 말을 둘러대기를 이것은 명 나라에 조공하러 들어간다는 뜻이라 하면서 고치려 들지 않았다. 김성일은 두세 번 편지를 보내어 고치기를 요구했으나 말이 통하질 않았다. 황윤길과 허성은 현소의 해석이 그러하니 오래 버티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성일은 다투다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돌아왔다.
이때 황윤길일행이 이 사실을 국왕에게 복명할 수 없다 하였는데, 행장ㆍ의지ㆍ현소가 국서를 일부 고쳤으나 대명국에 뛰어 들어간다는 말은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 신묘년(1591) 3월에 황윤길 등 일행이 일본에서 돌아와 부산에 배가 닿자 먼저 왜국의 사정을 장계(狀啓)하기를, 반드시 병화가 있을 터이니 곧 서울에 들어와 복명하겠다고 하였다.
○ 수길이 평조신과 현소를 함께 파견해 보내면서 회례사(回禮使)라는 명칭을 붙였다. 대개 그 뜻은 해마다 왕래하여 우리나라의 허실을 탐지하려는 것이었다.
○ 임금이 황윤길 등을 불러 왜국의 형세를 물으니 윤길은, “왜적이 반드시 침범해 올 것입니다.” 하고 성일은, “일본은 지금 군사를 일으킬 기미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을 동요시킴은 심히 실상에 어긋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수길의 모양이 어떻더냐고 물으니 윤길은, “수길은 눈이 광채가 있어 담력과 지략를 갖춘 사람 같았습니다.” 하고 성일은, “그 눈이 쥐눈 같아 두려워할 만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허성은 그 중간을 잡아 윤길의 말을 약간 두둔하였다.
임금이 “세 사람의 견해가 이렇게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물으니 유성룡이 옆에 있다가 하는 말이, “설령 수길이 전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 모양과 행동을 들어볼 때 두려워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그 국서는 협박하는데 불과한 것이니 아직 근거없는 것을 미리 명 나라에 알렸다가 변방에 소요만 일으키게 되면 극히 미안하고, 복건(福建)이 일본과 멀지 않으니 만일 우리가 이렇게 알린 것이 일본 사람의 귀에 들어간다면 의혹을 살지도 모르니 결코 명 나라에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 황윤길 등이 어전(御前)에서 물러나자 일행이 이 실상을 퍼뜨려 온 나라가 흉흉해졌다. 《일월록》
이때 유성룡은 성일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어떤 이는 윤길의 말을 지지하고 혹은 성일의 말을 지지하기도 하여 의견이 분분해서 정해지지 못하였다. 동인(東人)ㆍ서인(西人)의 당파와도 관련이 되어 각각 자기 편을 옹호하였으나 허성만은 동인이면서도 왜병이 반드시 침범해 오리라 하였다. 그의 친우가 그 까닭을 물으니 성이 말하기를, “우리가 거기를 가 본즉 곳곳마다 성에 파리한 군졸들만 있는 것을 보니 이것이 평성(平城)의 옛 계략이다.” 하였다. 사람들은 성이 자기 당파에 편들지 않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자네 말이 황윤길의 말과 틀리는데 왜놈들이 과연 오게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물으니 성일이 대답하기를, “낸들 어찌 왜놈들이 끝내 오지 않으리라고 기필하겠는가마는, 단지 황의 말이 너무 심해서 마치 사신의 뒤를 따라 왜가 오는 것같이 하여 민심이 흉흉해지므로 이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서애집》ㆍ《징비록》
○ 김성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고개를 빳빳하게 하고 몸가짐을 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국서를 받아 제반 문제적 언사를 극력 다투어서 고쳤으므로 동행들은 머리를 움츠리고 왜인들도 공경하고 탄복하였다. 그러나 이웃 나라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는 그가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개 왕명을 받들어 사신 노릇을 한다는 것이 어찌 예법 절차에만 실수 없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랴.
임금이 적정을 물을 때 윤길 등은 모두 왜적이 올 징조가 있다 하는데, 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우겨 윤길을 공격하고 자기만이 적정(賊情)을 잘 알고 있는 것같이 했다가 이듬해 적병이 온 나라 힘을 기울여 들어와서 종묘와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민생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가 사신으로서 요령을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다. 만일 한고조(漢高祖)의 시대를 만났더라면 앞서 사신을 보냈던 열 사람[前使十輩]과 같이 처형됨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부계기문(涪溪記聞)》
○ 정구(鄭逑)가 김성일을 위하여 비문을 짓는데, “타국에 사신으로 가서 큰 절개가 더욱 빛났다.” 했다. “대명국에 한 번 뛰어 들어가겠다.”는 수길의 국서를 받아가지고 온 사람을 큰 절개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노서일기(魯西日記)》
○ 임금이 왜국의 정황에 대한 처리를 신하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영상 이산해(李山海) 등은 명 나라에서 우리가 왜국과 사통(私通)했다고 문책할 것이니 숨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대사헌 윤두수만이 자세하게 알리어 사대(事大)의 성의를 다하자 하고, 좌상 유성룡은 오랑캐놈의 협박하는 말을 황제에게 경솔하게 주달하면 부실(不實)하다는 나무람을 자초할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입시(入侍)한 신하들에게 두루 물으니 박동현(朴東賢)은 군(명 나라) 신(조선)의 대의로 숨길 수가 없으며 만일 알리지 않았다가 뒷날 어떤 화가 있을지 알 수 없다고 극진히 말해서 임금이 명 나라에 알리기로 결의하였다. 《일월록》 《명신록》
이때 윤두수는 당연히 명 나라에 알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유성룡은 알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때 조강(朝講)에서 양편이 서로 논쟁을 하였으나 결정짓지 못하고 낮이 되어 자리를 파했다. 그런데 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책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사실을 적었다.)에 왜국 실정을 중국에 알리는 일을 기록하면서 조정 공론은 알리지 않기로 했는데 자기가 홀로 알리자고 아뢰었다 하였다. 윤근수(尹根壽)가 일찍이 말하기를, “서애(西厓)가 임진년 일을 기록한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 모든 잘된 일은 다 자기에게 돌려 앗아갔다.” 하였다. 《석실어록(石室語錄)》
○ 왜국 국서가 왔을 때에 성룡은 당연히 명 나라에 자세히 알려야 한다 하고, 이산해는 명 나라에서 우리가 왜국과 사통했다고 문책할 것이니 숨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성룡은 말하기를, “왜국이 만약에 진실로 침범할 음모가 있는 것을 중국에서 조선이 아닌 다른 나라를 통해 알게 되면 중국이 반드시 우리를 깊이 의심할 것이고 우리는 더욱 스스로 벗어날 수 없으리라.” 하였다. 《서애집》
이때 윤두수와 황정욱(黃廷彧) 등은 명 나라에 주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유성룡 이하는 주달할 것 없다 하였고, 임금 역시 주달하지 않을 수 없다 했으나, 성룡 등이 바야흐로 조정 공론을 잡고 있던 때라 이에 간단하게만 알리자는 설(說)이 나왔는데 왜병의 침략 야심과 통신사의 내왕한 곡절은 빠뜨리고 주달하지 말자고 하였다. 이산해는 양쪽 모두 옳지 못하다 하여 가부를 결정짓지 못하였고, 이양원(李陽元)은 원래 용렬한데다 또 술에 취해서 그저 팔짱만 끼고 네, 네 할뿐이었다. 《기재잡기》
○ 전한(典翰) 오억령(吳億齡)으로 선위사(宣慰使 일본의 사신을 접대하는 임시 직책)를 삼아 조신(調信) 등을 접대하게 하였다. 억령이 현소(玄蘇)에게 물으니, 현소가 명년에는 크게 군사를 일으켜 조선에 길을 빌려 명 나라를 바로 침범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억령이 즉시 들은대로 왜적이 침입할 정세임을 장계하였다. 이때 국사를 담당하고 있는 자들은 왜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한쪽 말만 주장하고 있어 억령의 장계가 오자 조정과 민간이 크게 해괴히 여겨 즉시 아뢰어 억령을 교체시켰다. 억령이 조정에 돌아와 왜사와의 문답일기(問答日記)를 올리고 왜병이 반드시 움직일 형세라고 극언하여 당시의 공론에 크게 거슬렸기 때문에 질정관(質正官)으로 임명하여 밀어낸 것이다.
○ 윤3월에 조신 등 일행이 서울에 들어와 동평관(東平館)에 묵고 있었다. 임금이 비변사(備邊司)의 의논대로 윤길과 성일을 시켜 사사로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가서 왜사를 위로하고 그들의 국사(國事)를 조용히 물어보아 정세를 캐어 살피기로 하였다. 현소가 비밀히 성일에게 말하기를, “중국이 오랫동안 일본을 끊어 조공 길이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평수길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군사를 일으키려는 것이니 조선이 먼저 중국에 알리어 조공할 길을 통하게 해주면 필시 조선도 아무일 없을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걱정을 면할 것입니다.” 하였다. 성일이 대의(大義)를 들어 불가하다고 달래니 현소가 또 말하기를, 옛날에 고려가 원 나라 군사를 불러들여 일본을 친 일이 있으니 이번에 조선에 그 원수를 갚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여 그 말이 더욱 온순치 않으므로 성일은 다시 묻지도 않았다.
○ 4월 29일에 임금이 인정전에서 현소와 조신 등을 불러 보고 도승지 한응인(韓應寅)을 시켜 조신에게 이르되, “부사(副使)는 옛날부터 임금 앞에서 술을 올리는 일이나 벼슬을 주는 예가 없었으나 너희들은 다른 사신들과 달라 특별히 술잔을 올리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 일본의 정세가 수상한 것이 많으므로 임금이 별달리 은근한 뜻을 베풀어 그 마음을 무마한 것이다. 《기재잡기》
이때 임금이 친히 접대하려 하니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왜인을 접견하는 것은 심히 중대한 예(禮)인데 만일 여악(女樂)을 써서 함부로 나아오게 하면 제왕이 여색을 멀리해서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보여줄 도리가 못되니 예조(禮曹)에 명해서 남악(男樂)으로 대용하게 하소서.” 하므로 그대로 좇았다. 《기재잡기》
○ 이때 상하가 황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전 현감 조헌(趙憲)이 이 소문을 듣고 옥천에서 걸어 와 궐문 밖에 이르러 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신이 듣건대 일본에 갔던 사신이 겨우 돌아오자 적선이 바다에 머물러 있다 합니다. 저들이 우리를 사천(射天)의 죄에 빠뜨려 변명할 길이 없게 하고 기회를 타서 군사를 일으킨다면 변방이 허술하여 필시 싸우게 될 터에, 아직까지 조충국(趙充國) 같은 경략이 없고, 원사(元使)를 맞지 말라는 정몽주(鄭夢周)의 항의가 없어, 회륜(檜倫) 같은 신하가 나라를 그르쳐 임안(臨安 남송(南宋)의 수도로서 항주(杭州)에 있다)이 거의 함락되게 되었으며 강상(綱常)이 크게 무너져 군부(君父)의 화가 급해졌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오늘의 안위(安危)와 성패가 오직 호흡하는 사이에 달려 있으니 빨리 왜사를 베어 죽이고 급히 중국에 알린 다음, 적의 사지(四肢)를 찢어 유구(琉球) 등 모든 나라에 나누어 보내어서 천하가 함께 분노하게 하여 적을 방비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좌우에 이르기를, “조헌이 여러 번 광망(狂妄)한 말을 올려 귀양까지 가게 되어도 오히려 그칠 줄 모르니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다.” 하였다. 조헌이 대궐 밖에서 사흘이나 명을 기다려도 답이 내리지 않았다. 다음 조헌(趙憲)의 이름 조에 자세하다.
현소 등이 서울에 머물 때 관벽(館壁)에 시를 썼다.

매미는 우느라 당랑(蟷螂)이 저 잡으려는 것 잊었고 / 蟬噪忘螳捕
고기는 헤엄치느라 백로가 잠든 것을 기뻐하네 / 魚游喜鷺眠
여기가 어느 곳인지 알고 있노니 / 比地知何地
다른 해에 거듭 연회를 열리라 / 他年重開筵

돌아 갈 때 의지가, “삼척으로 가서 동해를 바로 건너고 싶다.” 하였다. 통역관이 “삼척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3천 리라 창졸간에 갈 수 없다.”고 대답하니, 의지가 눈을 부릅뜨고 우리나라 지도를 내보이면서 “이 나라에 어찌 천리 되는 경계가 있느냐.”고 하였다.
그가 동래에 이르러 객관(客館)에 시를 썼다. “명년에 만약 동풍편을 얻게 되면, 육십 칠 주가 웃고 말하는 가운데 있으리라.[明年若得東風便 六十七州談笑中]” 《난중잡록》 《일월록》
○ 황윤길의 군관 황진(黃進) 자는 명보(明甫), 익성공(翼成公) 황희의 5대손, 윤길(允吉)의 일족이 본래 주색을 좋아했으나 일본에서 돌아온 뒤 술을 끊고 색을 멀리하고 재물을 기울여 말을 사서 밤낮으로 말 달리기와 활쏘기를 익히며 말하기를, “큰 난리가 장차 일어날 터이니 대장부가 나라에 몸을 바침에 헛되이 죽을 수 없다.” 하였다. 《일월록》
○ 황진이 일본에 가서 전대[槖]를 털어 보검(寶劍)을 사면서 하는 말이, “오래지 않아 적이 오면 나는 이 칼을 쓰리라.” 하였다. 《계곡집(谿谷集)》 진주순절(晉州殉節) 아래에 있다.
조헌이 밤낮으로 보행 연습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왜 스스로 수고로운 짓을 하느냐고 물으니 조헌이 대답하기를, “명년 왜란 때 효력을 볼 것이다.” 하였다. 《일월록》
○ 현소 등이 돌아가는데 조정에서 답서를 주었다. “두 나라의 신의가 맺어짐에 고래 물결 만리를 헤쳐와 때에 맞추어 사신이 방문하였다. 이제 또 폐했던 예를 중수(重修)하여 옛 우호를 더욱 견고히 하니 실로 만세의 복이라. 보내준 안장과 말ㆍ기물[器玩]과 갑주(甲冑)ㆍ병기(兵器)는 명목도 많고 만든 것이 또한 정교하여 선물을 주는 정성이 보통의 경우를 훨씬 넘어섰다. 단지 앞뒤 두 서신은 사연이 장황하여 상국(上國)에 뛰어 들어가고자 하면서 우리나라가 같은 편이 되어주기를 희망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나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말한다면 보내온 국서에 말이 상국(上國)을 범한 것은 문자 사이에서 서로 다툴 것이 못되나, 말에 대답하지 않는 것 또한 교린(交隣)의 도리가 아니므로 감히 다 드러내어 말하니 밝게 살피기를 바란다. 우리 동국(東國)은 곧, 은 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곳으로 예절과 의리가 아름다워 중국에서 일컬음을 받은 지가 무릇 몇 대나 되었는지 모른다. 명 나라 시대에 와서 천하를 통일하여 위엄과 덕이 멀리 퍼져 바다의 안팎이 모두 주종관계를 가져 감히 거스르거나 항거함이 없다. 귀국 또한 일찍이 뱃길로 조공을 바쳐 수도에 이르렀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대대로 제후국으로 봉해져 그 자리를 지키고 섬기어 제후(諸侯)의 도리를 어김이 없었음에랴. 그런 까닭에 중국이 우리를 대우함 또한 국내와 같이 보아 알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타국보다 먼저 하고 걱정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구호하여 마치 집식구나 아버지와 아들 같은 친함이 있다. 이는 귀국(貴國)도 일찍이 들은 바일 것이며 천하가 다 아는 바이다. 무릇 당(黨)이라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고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이름이라. 남의 신하된 자가 당을 둔다면 하늘이 반드시 죄를 주거늘, 하물며 군부(君父)를 버리고 이웃 나라와 당을 하겠는가. 아아, 남의 나라를 치자는 물음은 어진 사람이 그들은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바인데 하물며 군부(君父)의 나라를 치자 함이랴. 우리나라 사람은 본래 예절과 의리를 지켜 군부를 높일 줄 알고 대륜대경(大倫大經)에 힘입어 떨어뜨리지 않았다. 지금 사사로운 교분의 두터움으로 하늘이 부여한 강상(綱常)의 도리를 바꾸지 못함은 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만히 생각건대 귀국의 오늘의 울분은 상국(上國)에 거절당한 지 오래되어 예절과 의리를 본받을 수 없고 무역(貿易)을 할 수 없고 만국이 폐백을 바치는 대열에 참여하지 못함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에 불과하다.
귀국은 어찌 반성하여 그 까닭을 찾아내어 스스로 그 도리를 다하지 않고 옳지 못한 계책만 하려는 것인가. 이야말로 생각지 못함이 심하다고 하겠다. 이포(二浦 부산포와 염포를 말한다)에 길을 열어준 일은 선조(先朝)에 조약이 이미 정해져 금석같이 굳어졌다. 만약 사신의 왕래가 일시 소홀해졌다 하여 오래된 약조를 경솔하게 고치는 것은 피차 모두 실수인 것이다. 그 일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황정욱(黃廷彧) 지음
○ 하성절사(賀聖節使) 김응남(金應南)이 북경에 가서 명 나라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왜변을 알리었다. 이미 명 나라 국경에 들어가 길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때때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귓속말을 하는 것이 친하고 미더워하는 기색이 없고 분위기가 전과 달랐다.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너희 나라가 왜국과 함께 우리를 배반하면서 무엇하러 오느냐.” 하고 꾸짖었으므로 사신들은 두려워하고 걱정하였다. 당릉군(唐陵君) 홍순언(洪純彦)은 통역관으로 오래 있어서 사리에 밝았다.
각로(閣老 명 나라 때의 재상의 호칭) 허국(許國)과 사인(舍人) 유심(兪深)과 가장 친숙한 사이라 유심에게 은밀히 편지를 하여 본국 사정을 진술하고는 각로에게 알리도록 사람을 구해 먼저 보냈다. 이윽고 일행이 통주에 이르자 어떤 사람이 높은 언덕에 앉아 손짓하여 부르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순언이 이문학관(吏文學官) 허징(許澂)과 달려가 보니 바로 유심이었다. 유심이 말하기를, “근일 복건(福建) 등지에서 너희 나라가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한다고 알려와서 논의가 자자한데 각로 홀로 힘껏 옹호하여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선에서 하성절사가 이제 곧 이르면 반드시 왜변을 알리는 문서가 있을 것이다. 만일 없으면 과연 의심할 만하다 하였다.
과도관(科道官)은 장계를 올려 너희 나라 사신이 이르거든 국문하자고 청한 일까지 있으나 각로가 사실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먼저 국문하는 것은 먼 나라를 회유(懷柔)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 까닭에 논의가 조금 수그러졌다. 장차 너희 나라의 왜변을 알리는 여부를 보고 처리하기로 했다가 이제 편지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나로 하여금 먼저 알려주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말을 마치자 옆 사람이 볼세라 두려워서 빨리 말을 달려갔다.
북경에 이르러 예부에 자문(咨文)을 올리니 시랑(侍郞) 한세능(韓世能) 또한 임신년(1572)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사람이라 친필 편지로 사신에게 알려주기를 황제께서 조선의 자문을 보고, 심히 기뻐하여 반드시 은상(恩賞)이 있으리라 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광록시(光祿寺)의 연회가 파하자 중관(中官 내시(內侍))이 안으로부터 나와 황제의 명으로 일행을 인도해서 회극문(會極門)으로 들어갔다. 이 문은 황극전(皇極殿) 안에 있고 이 안에 태액지(太液池)가 있어 외인은 오지 못하는 곳인데 술과 음식을 내어와 취하고 배부르도록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대우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백금(白金)ㆍ저사(紵絲)ㆍ채단(綵段)을 주었다. 《서애집》
○ 5월에 평의지가 단 한 척의 배를 타고 절영도(絶影島)에 닿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급히 알릴 것이 있으니 서울 가서 상면하여 말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경상 감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일월록》
이때 의지가 부산포에 닿아 배에서 내리지 않고 변장(邊將)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대명(大明)과 통하고자 하니 만약 조선이 우리를 위하여 아뢰어 주면 매우 다행이겠다. 그렇지 못하면 두 나라가 장차 화기(和氣)를 잃을 것이니 이것이 큰 일이므로 변장에게 와서 말해 알리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 조정 공론이 전일에 일본과 통신한 것을 탓하고 또 일본의 패려하고 거만한 것을 괘씸히 여겨 회답하지 않았다. 10여 일이 지나 의지가 불평한 마음으로 돌아간 뒤로 왜선이 다시 오지 않았고, 왜관에 머물던 왜인이 항상 수십여 명 있었는데 차츰차츰 귀국하여 임진년 봄에 이르러서는 왜관이 텅 비어버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징비록》
○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사람들이 태종우(太宗雨)라 하는데, 이백 년 동안에 금년에 처음으로 비가 내리지 않아 식자들이 은근히 걱정하였다. 《기재잡기》
○ 9월에 하절사(賀節使) 김응남이 돌아왔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우리나라로 하여금 섬라(暹羅)ㆍ유구(琉球) 등 나라와 연합해서 일본을 치라고 하였다. 《일월록》
이때 중국 무역상 진신(陳申)이 왜국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관백(關白) 수길이 장차 침범할 모양인데 조선으로 선봉을 삼으려 한다.” 하고, 또 허의후(許儀後)라는 자가 왜구에게 포로가 되어 살마태수(薩摩太守)의 귀염을 받고 있었는데 장차 중국을 침범한다는 것을 듣고 친한 미균왕(米均旺)을 시켜 몰래 중국 변방 장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에, “관백이 여덟 나라를 다 삼켰는데 오직 관동(關東)이 항복하지 않아 경인년 1월에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관동을 정벌하며 말하기를, ‘내가 곧 바다를 건너 대명을 침범하고자 한다’ 하였다.
드디어 비전주수(肥前州守)를 시켜 배를 만들게 하고, 10월에는 유구가 물건을 보내어 조공하니 금 백 냥을 주면서, ‘내가 대명을 정벌할 때 너희로 선봉을 삼으리라’ 하였다. 전에 왕오봉(汪五峰)의 도당들을 불러 물은즉 답하기를, ‘명 나라가 일본을 범같이 겁내니 대명을 취하기는 손바닥 엎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다.’ 하였다. 수길은 ‘나의 지혜로서 나의 군대를 움직이면 큰 물이 모래를 무너뜨리듯, 예리한 칼이 대[竹]를 쪼개듯 하니, 어떤 성(城)인들 격파하지 못하며, 어떤 나라인들 멸망치 못하랴. 내가 대명의 황제가 되리라.’ 하였다.
5월에 고려(조선을 말함)가 당나귀를 바치니 역시 유구에 하던 말로 말하고 금 백 냥을 주었다. 신묘년 7월에 고려가 조공을 들어와 관백에게 빨리 거사하도록 독촉하였고, 11월에는 공문이 살마주(薩摩州)에 왔는데 군사 3만 명을 대령하게 하고 대장 2명이 고려로 건너가 50여만 군사를 모아 관백이 친히 거느린 군사 50만과 합하여 합계가 백만, 대장이 150여 명, 전마(戰馬) 5만여 필, 대서도(大鋤刀) 5만, 참도(斬刀) 10만, 장창 10만, 작시도(斫柴刀) 10만, 조총(鳥銃) 30만, 장도(長刀) 50만이고, 석자 칼은 사람마다 가져 내년 임진년 봄을 기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하였다.
의후가 사실과 틀리게 보고한 것은 역시 왜놈이 거짓말을 만들어 제 백성들을 위협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유구국 세자 상녕(尙寧)이 또한 사신을 보내어 소식을 알다. 각로(閣老) 허국(許國)만이 홀로 하는 말이, “내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정형(情形)을 익히 아는데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 하였다. 김응남이 들어가자 허국이 불러서 조선의 사정과 왜놈들의 반역한 사실을 물은 뒤에 크게 기꺼워하면서 조정에 변명을 하여 여러 의심이 약간 풀리었다. 《일월록》
○ 동지사(冬至使) 이유인(李裕仁)이 주문(奏文)을 가지고 가서 다시 왜적의 동태 및 섬라와 유구에 통신을 보낸 적이 없는 실상을 알리었다.
○ 8월에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우리나라에 자문을 보내어 왜적의 실정을 자세하게 알리라 했으니 아마 허의후(許儀後)가 우리를 중상하여 보고한 때문일 것이다. 비변사에서 처음으로 따로 사신을 보내어 사정을 알릴 의논을 하여 결정하였다.
○ 겨울 10월, 한응인(韓應寅)을 보내어 왜적의 동태를 알리게 하고 우리나라가 허의후에게 무함당한 사실을 변명하였다. 황제가 칙서(勅書)를 내려 칭찬하고 백금(白金)과 채단(綵緞)을 주었다. 우리는 이내 신점(申點) 등을 보내어 진사(陳謝)하였다. 《일월록》
이때 황제가 오랫동안 조회에 안 나오다가 황극전(皇極殿)에 나와 사신을 불러들여 친히 물었다.
○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오자 임금은 전에 윤두수가 먼저 진주하자고 청하던 일을 기억하고 귀양을 풀어 주라고 특명을 내리니 대간이 여러 번 불가하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듣지 않고 해주로 옮기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 이때 왜적의 소식이 날로 급박해졌다. 임금이 비변사에 명하여 장수될 만한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순신(李舜臣)을 발탁하여 전라 좌수사를 삼았으니 좌상(左相) 유성룡이 추천한 것이다.
○ 변방의 사정을 아는 재신(宰臣)을 골라 하삼도(下三道)를 순찰케 했다. 김수(金晬)를 경상 감사, 이광(李洸)을 전라 감사로 삼고, 윤선각(尹先覺) 일명 국형(國馨)을 충청 감사로 삼아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케 하였다. 이때 오랫동안 태평이 계속되었으므로 서울과 지방이 편한 것만 알고 부역을 꺼려 원성이 가득하였다. 양남(兩南)에 쌓은 성은 모두 모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크고 넓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만 힘썼다. 《징비록》
○ 임진년 봄에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나누어 보내어 변방 준비를 순시(巡視)하게 했다. 이일은 충청ㆍ전라도에 가고, 신립은 경기ㆍ황해도에 가서 모두 달이 넘어 돌아왔는데 활ㆍ화살ㆍ창ㆍ칼이나 점검(點檢)하였을 뿐이었다. 신립은 본래 잔폭(殘暴)하기로 이름이 있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웠다. 《조야기문》 《징비록》
○ 특별히 승지 김성일을 경상 좌병사에 임명하였다. 비변사에서 유신(儒臣)은 이 소임에 합당하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징비록》
○ 이때 도성 안 선비들이 천ㆍ백(千百)으로 떼를 지어, 미치광이나 괴물처럼 노래하고 춤추며 웃다가 울고 하여 부끄러움을 모르고 도깨비나 무당의 흉내를 내며 다니니 흉하고 놀랍기 말할 수 없었는데, ‘등등곡(登登曲)’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명가(名家)의 자제인 정효성(鄭孝誠)ㆍ백진민(白震民)ㆍ유극신(柳克新)ㆍ김두남(金斗南)ㆍ이경전(李慶全)ㆍ정협(鄭協)ㆍ김성립(金誠立) 등 30여 명이 그것을 불렀다. 사람들이 이것을 난리가 나고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하였다. 《일월록》
○ 이때 재이(災異)와 변괴가 연달아 일어났다. 《재상전고(災祥典故)》에 자세하다. 시전 상인들이 도성 안팎 산에 술과 풍악으로 모임을 가져 해가 저물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노는 일이 봄ㆍ가을로 성행하였다. 경인ㆍ신묘년 사이에 서울에는, “오래지 않아 세상이 바뀔 터이니 생전에 취하고 배부름이 제일이라.”는 말이 전해지더니 다투어 놀기만 즐기느라 혹 파산(破産)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식자들이 이것을 상서롭지 못하다 여겼다. 《기재잡기》
○ 임진년 3월 보름, 능 제사에 제관이 열을 지어 섰는데, 홀연 건원릉(健元陵 태조의 능) 위에서 목이 메여 흐느끼는 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다가 일제히 이것이 무슨 소린가 하고 소리나는 곳을 찾아보니 소리가 능 위에서 들려왔다. 제관들은 상하 모두 송구해 마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혹은 하루 한 번씩, 혹은 수일에 한 번씩 한달이 다하도록 끊이지 않았다.
재실(齋室)의 관리와 수호하는 군사들은 귀에 익어 여사로 알았다. 5월에 왜적이 와서 정자각(丁字閣)에 섶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으나 섶만 타고 불은 저절로 꺼졌다. 기둥과 들보에는 불이 붙지 아니하였다. 서너번이나 이렇게 하다가 적은 귀신이 있다고 겁을 내어 돌아갔다. 지금까지 정자각이 남아있는데 새집 같다. 《백사집》
○ 운봉(雲峯) 팔량티(八良峙)에 피바위[血巖]가 있는데, 이것은 태조가 왜장 발도(拔都)를 쳐 죽인 곳으로 돌 위에 얼룩진 피가 지금까지 생생하다. 임진년에 바위에서 피가 맺혀 흐르고, 왜적이 왔으니 괴이한 일이다. 《지봉유설》
○ 4월 13일, 푸른 무지개가 궁궐 안 샘물에서 일어나 임금 몸에 핍박하였다. 임금이 두세 번 피하여도 자꾸 따라오다가 문을 닫으니 비로소 그쳤다. 나중에 들으니 이날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켰던 것이다. 크게 두려워하여 피난할 계책을 세웠다. 《기재잡기》
○ 임진년 4월 13일, 왜선이 부산을 침범하여, 첨사 정발(鄭撥)이 죽었다.
○ 평수길이 그 휘하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혹은 가(嘉)ㆍ행장(行長)ㆍ청정(淸正)ㆍ의지(義智) 등 36 혹은 34 명을 보내 우두머리를 삼아 군사 25만을 거느리고 침범해 들어왔다.
행장ㆍ의지ㆍ조신 등으로 선봉을 삼고 병선 4만여 척이 새벽 안개를 타고 바다를 덮을 듯한 기세로 곧장 부산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첨사 정발이 절영도에 사냥갔다가, 처음에는 조공(朝貢) 오는 왜인이라고 염려도 아니하였다가 조금 후에 적의 무리가 많은 것을 보고 낭패감에 성으로 돌아왔으나 왜병이 따라 상륙하여 구름처럼 모여드니 성은 드디어 함락되고 정발은 죽었다.
○ 13일 사시(巳時)에 해상에 황당선(荒唐船)이 나타났다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정발이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조공선(朝貢船)이 오는 것이라 하고 아무 염려도 아니하였다가 왜선이 차차 가까이 오면서 총을 연달아 쏘니까 정발이 비로소 당황하여 진영(鎭營)으로 돌아왔으나 적은 벌써 해안에 상륙하여 포위하고 있었다. 정발은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죽고 성안 사람은 노소 없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기재잡기》
일설에는 정발이 오랫동안 대전하다가 적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으므로 성에 들어와 방어할 준비를 갖추고, 장님을 시켜 퉁소를 불게 해서 조용하고 한가롭기 평소와 같이 하여 군민(軍民)들을 안정시켜 놀라지 않게 하였다. 14일 새벽에 적군이 성을 육박하여 백 겹이나 포위하고 포(砲)를 비오듯 쏘았다. 정발이 기운을 가다듬어 성을 돌고 군사들은 용기를 내어 활을 쏘아 무수한 적을 죽여 세 곳에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정발은 화살이 다해서 총알에 맞아 죽었다. 그의 첩은 나이 18세로 또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조야첨재》
○ 좌수사 박홍(朴泓)은 적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병기와 군량을 불사른 다음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박홍은 정발이 죽는 것을 보고 동래로 달려갔으나 역시 성에 들어가지 않고 달아났다. 《기재잡기》
○ 적이 연달아 서평(西平)ㆍ다대진(多大鎭)을 함락했다. 다대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일월록》
○ 좌병사 이각(李珏)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 동래에 들어갔다가 부산이 함락되자 겁을 먹고 당황히 물러가 소산역(蘇山驛) 동래땅 에 진을 쳤다.
이각은 본래 양순치 못하고 소행이 좋지 못하며 시속을 좋아했다. 그리고 죄로 귀양갔다가 석방되었던 것이다. 왜변을 듣고 동래로 달려갔다가 또 송상현(宋象賢)이 성을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겁을 내어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소산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기재잡기》
○ 동래 부사 송상현이 적이 온다는 말을 듣고, 이웃 고을 군사를 불러 성을 지켰다. 이각이 가려 하므로 상현이 여기서 같이 지키자고 만류하니 이각이 듣지 않고 아병(牙兵 친위병(親衛兵)) 20명만 남겨 두면서 나는 대장이니 마땅히 밖에서 의각(犄角)의 세(勢)로 해야 한다 하고 그 별장(別將)과 같이 문을 열고 달아나서 소산(蘇山)에 진을 쳤다. 상현은 남문루에 올라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적을 막았다. 적이 취병장(聚兵場)에 진을 치고 먼저 목판(木板)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 不戰則 假我道]”고 써서 성 밖에 세웠다.
상현도 역시 목판에, “죽기는 쉽고 길 빌려주기는 어렵다.[死易 假道難]”고 써서 적에게 던졌더니 적이 드디어 세겹으로 포위하여 왔다. 상현이 반나절동안 싸우며 진퇴를 거듭하였다. 15일 새벽에 적병이 성 뒷산으로 쏟아져 오며, 먼저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수건을 씌우고 등에 붉은 기를 짊어지우고 긴 칼을 채워 긴 장대에 잡아매 성안을 향해 열지어 들어 보였다. 성중이 발칵 뒤집히고 사람들은 놀라 울부짖었다.
적이 칼을 휘두르며 난입하여 조방장(助防將) 홍윤관(洪允寬)ㆍ우위장(右衛將)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ㆍ대장(代將) 송봉수(宋鳳壽)ㆍ교수(敎授) 노개방(盧蓋邦) 등을 모두 죽였다. 상현이 벗어나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급히 조복을 가져다 갑옷 위에 입고 남문루에 올라 걸상에 걸터앉아 있으면서 적이 가까이 와도 꼼짝 않고 꾸짖었다. “이웃 나라 도리가 이렇단 말이냐. 우리는 너희에게 저버림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찌 이 지경이냐.” 하고 신색이 변치 아니하였다. 그러자 적이 성내어 마침내 해침을 입었다. 일설에는 상현이 칼을 휘둘러 두어 적을 죽이고 죽었다 한다. 《일월록》 《청야만집(靑野謾輯)》
○ 상현은 자가 덕구(德求),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천곡(泉谷)이다. 급제할 때부터 장수감이라 일컬었다. 동래 부사로 나갈 때 벌써 왜국과 틈이 생겨 아침저녁으로 변이 생기리라 해서 남들이 모두 위태하다고 생각했으나 그 부친 감찰 송흥복(宋興復)이 아직 살아 있었는데 홀로 의연(毅然)히, “난리를 피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직분인데 죽은들 어찌 피하랴.” 하였다. 《계곡집(谿谷集)》 《명신록》
○ 상현은 본래 서생(書生)이었는데 발탁되어 동래 부사에 제수되었다. 모든 전쟁 준비를 거의 완전하게 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일찍 성밖 사면에 참호를 파고 울타리를 설치하여 아주 견고(堅固)하게 하고 잡목을 많이 심었다. 그리고 이날이 되자 성을 돌아다니면서 죽음으로써 지키기를 맹세하였다. 남문의 적병이 성밖 나무 숲밑으로 기어오르므로 화살과 돌로써 방어하였다. 묘시(卯時)부터 사시(巳時)까지에 적병이 크게 몰려왔다.
홍윤관(洪允寬)이 일이 급한 것을 알고 상현에게,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리까. 이 뒤에 소산(蘇山)이 있는데, 견고하고 험해서 가히 지킬 수 있으니 나와 같이 가서 지킵시다.” 하니 상현이, “성을 죽음으로써 지키지 않으면 조정에서 용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간들 어디로 가랴.” 하였다. 그러자 윤관이, “나도 마땅히 같이 죽겠소.”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적이 벌써 그를 베었다. 만여 명이 여기에서 벗어난 이가 없었다. 《기재잡기》
이때 상현이 걸상에 앉아 꼼짝하지 않으니 적병이 모여들어 사로잡으려 하였다. 상현이 신발 끝으로 차다가 드디어 해침을 입었다.
○ 성이 함락될 때,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왜적이 있었다. 일찍이 조신(調信)을 따라 왕래하면서 상현을 알게 되었는데 상현이 잘 대접하였으므로 조익이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이때 상현에게 눈짓하여 성 옆 으슥한 데로 피하라 했다. 상현이 응답하지 않으니 조익이 못 알아챈 줄 알고 옷을 끌어당기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현은 이미 걸상에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절을 마치자 부채의 앞면에 그 부친에게 보낼 글을 쓰기를,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는데, 줄지은 진영에선 베게를 높이 돌아 잠이 듭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는 무겁고, 부자간의 은의(恩義)는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陳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하였다. 또 부하에게 명하되, “내 허리 밑에 콩알만한 사마귀가 있으니 내 죽거든 이것을 표적으로 시체를 거두어라.” 하였다. 왜장 의지와 현소가 공의 죽음을 듣고 모두 슬퍼하고 아까워하면서 공을 죽인 적을 나오게 하여 베어 죽이고 공의 시체를 찾아 공의 첩의 시체와 함께 동문 밖에 매장하여 나무를 세워 표하고 시를 지어 제사 지냈다. 그뒤에 적이 포로로 잡힌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충신은 오직 동래 부사 한 사람뿐이다.” 하였다.
○ 을미년에 임금이 경상 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명을 내려 상현의 가솔을 시켜 적진에 들어가 관을 찾아오도록 하고 그 집에 생활비를 주고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이때 수신(帥臣)이 적장을 만나보니, 적장이 상현의 순절(殉節)한 일을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특명으로 증직(贈職)시키고 그 집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우암집(尤庵集)》
○ 동래 사람으로 울부짖으면서 공의 관(棺)을 백리나 따라와서 배웅한 자가 70여 명이나 되었다. 왜장 의지도 공의 관을 만나자 말을 내려 피하며 전송하였다. 공의 관이 적중에 있을 때 동래 사람 매동(邁同)이란 자가 공의 휘일(諱日 죽은 날)과 생신(生辰)을 당하면 반드시 제사를 성대하게 올리기를 해마다 하였다. 뒤에 공의 아우 상인(象仁)의 집에 이르러 공의 순절하던 일을 자세하게 말하고 목이 메어 울음을 그치지 못하며 고기를 주니 먹지 않으며, “오늘 공의 계씨(季氏)를 만나니 공을 보는 것 같은데 어찌 고기를 먹는단 말이오?” 하였다. 《명신록》 《지봉유설》 《일월록》
○ 접반사 이항복(李恒福)이 의령(宜寧)에 있다가 상현의 관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수렴(收斂)하여 관에 넣고 글을 지어 제사하였다. 그 글에, “유세차(維歲次) 모년 모월 모일 증 이조 판서 행 동래 부사 송공의 유해를 적중에서 고향으로 반장(返葬)하려고 의령의 마을 집에 권조(權厝 임시로 가매장하는 것)를 하였다.
그 벗 이모(李某 항복 자신)가 남도에 접반사가 되어 이 고을을 지나다가 술과 닭고기를 제물로 올리고 사방과 상하로 그 혼을 불러 제사한다. 아아, 외로운 성에 달빛이 흐린데 담소하면서 조용히 지휘한 것이 공의 열(烈)기가 아니던가. 슬프다, 동래 산빛은 푸르디 푸르고 남쪽 바다는 아득하고 아득하다. 그러나 길이 남아 훼손되지 않을 것은 천년 만세토록 드리울 이름일세. 남문에는 밤마다 붉은 기운 번쩍여 두우성(斗牛星)까지 쏘는 것은 공의 정(精)이 아니던가. 혹시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창합(閶闔 천상(天上)에 있는 궁궐의 문)을 두드리고 구천(九天)에 호소하여 우레를 휘몰고 여귀(厲鬼)를 타고와서 요망한 기운을 변방에서 쓸어버린 뒤에 표연(飄然)히 내려와 팔황(八荒)에 두루 다니어 가지 못할 곳이 없게 하지 않으려는가. 혹시 녹아서 냇물이나 강물이 되고 솟아서 산악이 되어 이로써 남쪽 국경을 방어하려는가.
공의 평소 마음에 쌓아 두고 발휘하지 못한 것을 혹시나 죽어서 하려는가. 항복이 정의로 제사는 드리나 글은 변변치 못하네. 객지에서 공을 만나니 눈물이 절로 나누나. 인간세상은 오늘 저녁뿐, 지하세계는 천추로다. 한 잔 술로 하직하니, 만리 밖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네.” 하였다. 《명신록》 《백사집》
○ 상현의 첩 김섬(金蟾)은 함흥 기생이다. 공을 따라 동래에 가 있다가 그날 공이 급히 조복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는 순절할 것을 짐작하여 즉시 여종 금춘(今春)을 데리고 담장을 넘어 공이 있는 데로 가니, 적이 모여 공을 해쳤다. 김섬도 붙잡혔는데, 그녀는 적군을 욕하고 꾸짖기를 그치지 않다가 사흘만에 드디어 죽임을 당하였다. 적들도 기특하게 여겨 관을 갖추어 공과 함께 장사지냈다. 《명신록》
○ 이씨(李氏) 여인도 역시 상현의 첩이였다. 상현이 적이 장차 멀지 않아 올 것이라 해서 이씨를 서울로 올려 보냈더니 떠난 지 하루 지나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슬피 울면서, “내가 차라리 남편 있는 데 가서 죽으리라.” 하고 동래로 돌아오다가 여종 만금(萬今)ㆍ금춘이와 같이 포로가 되어 바다를 건너갔다. 수길이 그를 범하려 하다가 이씨가 죽기로 거절하니 수길이 의롭게 여겨 놓아주고 전 관백의 딸과 별당에 있게 하여 마침내 수절하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몸에 지녔던 상현의 채색 갓끈을 부인에게 바쳐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다. 《명신록》 《우암집》
○ 관노(官奴) 한 사람이 상현의 옷을 부여잡고 울다가 같이 죽으니 적이 더욱 기특히 여겼다. 《일월록》
○ 서얼(庶孼)신여로(申汝櫓)가 상현을 따라 동래에 가 있었는데, 상현이 여로에게 어머니가 있으므로 적의 화를 입을까 걱정하여 돌려보냈다. 여로가 가다가 적이 부산을 함락시켰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공(송상현)의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 난리에 임하여 죽기를 아끼랴.” 하고 도로 상현에게 가서 같이 죽었다. 《명신록》
○ 비장(裨將) 4, 5명과 향리(鄕吏)들도 힘껏 싸우다가 다 같이 죽었다. 《조야첨재》
○ 이로부터 동래성 남문 위에 항상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치어 수년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우암집》 〈신도비(神道碑)〉
을미년(난리 후 4년)간에 상현의 아들 인급(仁及)이 꿈에 상현을 보니, “국가의 화란이 아직 평정되지 못하고 앞으로 닥칠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을텐데 마음먹은 일도 못하고 헛되이 죽었으니 어느 때나 눈을 감을고” 하고 시 한 수를 지어 보였다.

나쁜 운수가 다시 돌아와 선비들과 여자들이 모두 죽게 될 것이니 / 否運重回士女殱
병ㆍ정년 양의 화가 쪽[藍]보다도 더 푸르리 / 丙丁之禍碧於藍
서쪽으로 철옹(鐵甕 영변(寧邊))을 간즉 술 없음이 걱정되고 / 西行鐵甕愁無酒
동쪽으로 금강을 가면 소금 있음을 기뻐하리 / 東走金剛喜有䀋
임금의 일산[翠盖]이 비록 요동벌 학의 울음에 놀랐으나 / 翠盖雖驚遼鶴唳
황건적(黃巾賊)이 마침내 한 나라 사람의 가죽신 끝에 부수어지리 / 黃巾竟碎漢靴尖
다른 해 전쟁이 그침을 기다려 / 他年待干戈息
나의 뼈를 바다 남쪽에서 거두라 / 吾骨須收瘴海南

《일월록》
○ 15일에 이각이 소산에서 병영으로 도망쳐 왔으나 방비해서 지킬 생각은 없고 하인과 말을 재촉하여 그 첩과 면포 천여 필을 먼저 내어보냈다. 진무(鎭撫)가 난색을 보이니, 이각이 성을 내어 그를 베었으므로 성중이 흉흉해져서 군사들이 하룻 밤 사이에 네 댓번 놀랐다. 이각이 새벽에 몸을 빠져 나와 달아나 버리니 여러 군사들이 흩어졌다. 《징비록》
○ 좌위장 울산 군수 이언함(李彦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에게 항복하였다. 왜적은 부녀들을 모아 누(樓)에 올라가 풍악을 펼치고 술을 마시며 창고의 곡식을 저희 나라로 실어보냈다. 《일월록》 《기재잡기》에는, “언함이 동래에서 적에게 잡혔다가 이틀만에 탈주해 왔다.” 하였다.
○ 이때 나라가 태평하여 2백년 동안 백성들은 전쟁이란 것을 모르다가 소문만 듣고도 와해(瓦解)되어, 감히 그 칼끝을 대적해 보지도 못하였으므로 적이 군사를 몰고 들어가는 것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들어가듯 하였다. 《자해필담》
○ 감사 김수(金晬)가 각읍 수령(守令)에게 명을 내려 계속해서 군사를 올려보내게 했으나, 혹은 도중에서 도망치고 혹은 문을 나서자 달아나고 혹은 적을 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 초계 군수 이유검(李惟儉)은 군사를 풀어 놓아 흩어보내고 자기도 도망쳤다. 《기재잡기》
○ 이때 김수가 진주에서 동래로 가는 도중,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달려가 다시 영산(靈山)으로 돌아갔다.
○ 16일에 적이 양산과 울산을 함락시키고 길을 나누어 진군했다. 한패는 언양(彥陽)으로 해서 경주를 침범하고 다른 한패는 곧장 밀양을 침범했다. 밀양 부사 박진(朴晉)이 양산으로부터 황산(黃山) 다리 길을 차단하고 수비하였다. 적장이 은으로 만든 가마[轎子]와 은빛 일산을 펴고 진군하는 것을 박진이 힘껏 싸워 머리 몇 개를 베었는데, 군관 이대수(李大樹)와 김효우(金孝友)는 총알을 맞아 죽었다. 적은 재[嶺]를 넘어 박진의 귀로를 끊었다. 박진은 본부로 달려와서 창고를 불태우고 포위한 것을 뚫고 달아났다. 진은 이 까닭에 이름이 알려졌다. 《일월록》
○ 밀양 부사 박진은 젊을 때 글공부를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곧 무과(武科)에 급제해서 뛰어 올라 밀양부사에 이르렀다. 이 고을 사람들이 나이 젊어 일을 하지 못하리라고 걱정하였다. 부산이 함락됐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동래까지 갔다가, 동래가 역시 함락되자 박진이 이각에게 말하기를,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도 우리가 차지할 수 없으니 내가 앞을 질러 막거든, 공은 그 뒤를 점거(占據)하라” 하고 스스로 5백 명을 거느리고 앞에서 진치고 있었다. 적장이 말을 몰아 오는데 그 칼끝이 굉장히 매서웠다.
이각이 드디어 버리고 가니, 박진도 후원이 없어 역시 후퇴하여 돌아왔다. 즉 15일이었다. 《기재잡기》 ○《조야첨재》에는, “진이 동래로부터 달려와 까치원[鵲院]의 좁은 길을 질러 막으려 하였더니 적이 양산을 함락시키고 까치원에 이르러 지키는 군사가 있음을 보고 산 뒤로 개미같이 기어올라 산만하게 이르렀다. 좁은 목을 지키던 자가 바라보고 다 흩어졌다. 박진이 말을 달려 밀양으로 돌아갔다.” 하였다.
○ 15일, 박진이 패해서 달아났다. 16일 을사 에 재차 밀양 앞 강에서 패했다. 부산에서 여기까지 한 사람도 대전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박진이 거느린 3백여 명이 소산에서 패하고 밀양으로 달려와서 앞 강을 지키려고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으니 모두 이상하게 여기고 따르는 사람이 없어 군사를 정돈하기도 전에 적이 벌써 닥쳐왔다. 이날 짙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박진 역시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성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17일에 적이 앞 강을 건너오므로 박진은 성에 불지르고 달아났다. 적이 드디어 밀양을 함락시켰다. 《기재잡기》
○ 18일에 적선이 부산에서 김해로 다가왔다. 부사 서예원(徐禮元)은 남문을, 초계 군수 이유검(李惟儉)은 서문을 지켰다. 이날 밤에 유검은 야경(夜警)한다고 핑계를 대어 문을 찍어 부수고 달아나고, 예원은 유검을 쫓아간다고 말하며 달아나서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일월록》
예원이 문을 닫고 성을 지키는데 적이 성밖 보리를 베어다가 해자(垓字)를 메꾸어 삽시간에 성과 같이 만들어 성을 넘었다. 《징비록》
○ 17일 이른 아침에 적에 대한 보고가 처음으로 서울에 이르렀다. 좌수사 박홍(朴泓)의 장계 서울과 지방이 크게 떨었으며 대신이 비변사 당상(堂上)들과 빈청(賓廳)에 모여 임금에게 직접 아뢰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도(中道)로 내려가게 하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로 내려가게 하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도(西道)로 내려가게 하고, 유극량(劉克良)ㆍ변기(邊璣)를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극량은 대재[竹嶺]를, 변기는 새재[鳥嶺]를 수비하게 하였다. 전에 강계 부사로 있던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하여 경주 부윤으로 임명하고 즉일 파견하니 밤 사경에 대궐에 하직하였다. 모두 군관(軍官)은 자기가 선발하여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 얼마 뒤에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또 이르렀다. 이때 부산이 포위되어 사람이 통행할 수 없었다. 박홍의 장계에 단지 “높은 데 올라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에 가득차 있으므로 성이 함락된 줄 알았다” 하였다.
○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은 맡은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군졸들의 원망이 많으므로 이를 경질하여 김응남(金應南)으로 대신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뢴 대로 따른 것이다. 《기재잡기》에는, “신립(申砬)이 떠날 때 여순은 직책도 못하고 군사들에게 인심을 잃었다고 아뢰니 임금이 노하여 김응남으로 대신하게 했다. 즉 22일이다.” 하였다.
○ 18일에 여러 고을이 함락되고 패전한 보고가 연달아 이르러 사방으로 군사를 징집하였다. 이때 변방에서 장계로 급함을 알려온 지도 10여 일이 되어 도성 백성들은 당황하고 떨어서 모두 무너질 기색이었다.
○ 19일에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런 변란이 심한 때를 당하여 평상시의 법규만 지켜나갈 수 없다. 무릇 사대부로서 죄를 입어 파직되고 산직(散職)되었던 사람들을 모두 들어 써서 대기하도록 하고 무신(武臣)으로 상복을 입고 집에 있던 자들을 모두 기복하도록 하라.” 하였다. 《기재잡기》
○ 유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김응남(金應南)을 부사(副使)로 삼아 모든 장수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 판윤(判尹)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김여물(金汝岉)은 전일에 죄에 연좌되어 옥에 갇혔던 것을 전 의주 목사로 있다가 옥사에 연좌되었다. 죄를 풀어주고 신립을 수행(隨行)하게 했다.
임금이 여물의 재주와 용맹이 아깝다고 방어가 긴요한 곳에 귀양 보내 공을 세워 죄를 면하게 하였다. 여물이 출옥하자 성룡이 불러 국사를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히 여겨 아뢰기를, “신이 이제 처음으로 여물을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납니다. 청컨대 막하에 두고 그 책략을 취하여 쓰소서.” 하여 임금이 허락했다. 신립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 서도(西道)에 병사로 가 있을 때 여물을 알았는데 단지 재주와 용맹뿐 아니라 충성과 의리가 있는 선비였습니다. 신의 부하로 먼저 가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또 허락하고 조정 관원에게 명해서 각각 전마(戰馬) 한 필씩 내어 돕게 했다. 《조야첨재》
○ 경상도 우병사 김성일을 잡아오도록 명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성일이 왜적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하여 변방의 태세가 해이해져서 이러한 적변을 당하게 하였으니, 내가 장차 국문(鞫問)하리라.” 하였다. 이때 성일이 경상우도에서 적을 토벌해서 현저한 공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체포되어 직산에 이르렀을 때 놓아주라고 명하고 그 즉시 우도 초유사(招諭使 군사를 모집하고 백성들을 위유(慰諭)하는 임시 직책)를 시켜 도내의 인민들을 위무토록 하고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게 하였다.
○ 함안(咸安) 군수 유숭인(柳崇仁)은 전공이 있기 때문에 좌병사로 특진시키고 첨지(僉知) 김늑(金玏)을 경상좌도 안집사(安集使)로 임명하였다.
○ 적이 경주를 함락시켰다. 이때 부윤 윤인함(尹仁涵)이 유신(儒臣)으로 나약하고 겁을 낸다 하여 체직시켰다. 판관 박의장(朴毅長)이 단독으로 성을 지키다가 적군 한 패가 언양에서 지름길로 침범해오자 의장이 성을 비우고 도망쳤다.
○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이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兵營)으로 가다가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하양현(河陽縣) 대장(代將)이 군사 수백명을 거느리고 방어사에게로 모이고자 올라가면서 그 앞을 지나가는데, 복룡이 말을 내리지 않고 간다고 성을 내어 그들을 잡아다가 반란군이라고 꾸짖었다. 하양 군사들이 병사(兵使)의 공문을 내어 보이고 변명하려는 순간, 복룡이 자기 휘하의 군사들에게 눈짓을 해서 그들을 포위하고 남김없이 죽여서 시체가 들에 쌓였다.
복룡이 즉시 토적(土賊)을 잡아서 베었다고 방어사에게 알리고 순찰사는 복룡을 공(功)으로 장계해서 안동 부사로 승진시켰다. 뒤에 하양의 부모 잃은 고아와 남편 잃은 과부들이 매양 어사의 행차를 만나면 말머리를 막고 원통함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복룡이 당시에 명망이 있어 아무도 하양 사람을 신원(伸寃)해 주는 이가 없었다. 《징비록》 《순영록(巡營錄)》
○ 적이 좌병영(左兵營)을 함락시켰다. 이때 이각(李珏)과 우후(虞侯) 원응두(元應斗)가 먼저 달아났고 열세 고을 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궤멸되었다. 이각은 무예(武藝)가 뛰어나서 본 직책에 제수되었는데 포(砲)를 쏠 때에 따로 탄알 같은 해마석(海磨石)을 열 말 남짓 써서 시험하였으므로 소문과 기세가 크게 떨쳐 사람들이 자못 기대하였다. 그러나 탐욕이 한이 없고 성질이 또 겁이 많아 가는 곳마다 먼저 달아났다.
○ 이때 김수(金晬)는 어찌할 줄 모르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백성에게 피난하기만 권하였다. 이런 까닭에 도내가 모두 비게 되어 더욱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징비록》
○ 25일에 적이 상주(尙州)를 함락시키자 순변사 이일(李鎰)이 달아나 충주로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교리(校理) 윤섬(尹暹)ㆍ박지(朴箎)와 방어사의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ㆍ판관 권정길(權井吉)이 죽고, 조방장 변기(邊璣)도 죽었다.
○ 당초에 이일(李鎰)이 서울 정예병 3백 명을 거느리고 가려고 병조에서 선발해 놓은 병안(兵案)을 가져다 보니 여염 시정(市井)의 백도(白徒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장정들)ㆍ서리(胥吏)ㆍ유생들이 반을 차지했다. 임시 점고하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詩卷)을 가지고서, 아전들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병역을 면하고자 하소하는 자가 뜰에 꽉 차서 보낼 사람이 없었다. 이일이 3일이나 못 떠나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이일만 먼저 출발하고 별장(別將) 유옥(兪沃)이 나중에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다. 《징비록》
○ 21일에 이일이 문경(聞慶)에 이르러 급히 장계했는데, “오늘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 감히 당할 사람이 없으니 신은 죽음을 각오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기재잡기》
○ 처음에 경상도 수령들이 군사를 이끌고 대구(大丘)로 가서 냇가에서 노숙(露宿)하며 순변사를 기다린 지 이미 수일 되었다. 적의 소식이 점점 가까워지자 군사들은 스스로 서로 놀라고 요동하였다. 그때 큰 비가 내려 옷은 젖고 군량은 떨어지니 밤중에 다 흩어져버려 수령들도 모두 홀로 말을 타고 분주히 돌아갔다. 이일이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산중으로 도망했고, 판관 권정길(權井吉)만 혼자 있었다. 이일이 군사가 없음을 책망하여 그를 베려 하다가 용서하고 군사를 모으게 했다. 이일이 또 창고문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며 흩어진 백성들을 달래어 모이도록 해서 수백 명을 얻어 군대를 편성했다. 저녁에 개령(開寧) 사람이 와서 적이 왔다고 알렸다.
이일이 여러 사람을 의혹시킨다고 죽이려 하니 그 사람이 형에 임박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며, “우선 나를 가두어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적이 안 오거든 죽여도 늦지 않다.”고 해도 이일이 듣지 않았다. 그날 밤에 적이 선산에서 진군해 와서 이미 남면 20리 되는 장천리(長川里)에 진을 쳤는데, 이일의 군사는 척후병이 없으므로 그것도 알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적의 척후병이 두셋씩 짝을 지어 북천(北川)의 이일의 진 앞에 와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수차나 갔다왔다 했으되 군중에서 감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이일이 적의 포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성밖에 진을 치고 그 군사와 백성 8, 9백 명으로 북천 가에서 훈련했다.
○ 이달 25일에 성안을 바라보니 두어 군데 연기가 일어났다. 군관을 시켜 알아보고 오게 했는데, 적이 다리 밑에 잠복해 있다가 조총으로 군관을 쏘아 머리를 베어갔다. 우리 군사들이 이것을 바라보고 기가 죽었다. 얼마 안 있어 적이 몰려와서 조총으로 공격하니 맞은 자는 즉시 죽고, 우리 군사가 활을 쏜 것은 수십보쯤 가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적은 이미 좌우로 나누어 포위해 왔다. 이일은 말을 달려 북쪽으로 달아나고 종사관 윤섬ㆍ박지 교리ㆍ판관 권정길은 모두 죽었다. 《조야기문》 《징비록》
○ 이때 적은 무릎으로 기어 전진하여 잠깐 동안에 벌판을 덮었다. 우리 군사는 놀라 흩어지고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일월록》
○ 처음에 이일이 윤섬의 친구 한 사람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윤섬이 이일에게 가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홀어머니가 계시고 다른 형제가 없어 그 어머니가 밤낮으로 울고 있으니 공은 잘 생각해 주시오.” 하니 이일이 허락하면서, “국가의 존망이 장차 여기에서 결판날 것이니 종사관은 아주 잘 골라야 할 터인데 그대보다 나을 사람이 없겠네.” 하고 데리고 가려 하였다. 섬이 그 어머니에게 들어가 하직하니 어머니가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어째서 우리 둘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죽을 땅에 가느냐.” 하였다. 윤섬이 대답하기를,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부모의 은혜와 나라에 대한 의(義)를 다 온전하게 할 수 없으며, 또 집에는 동생이 있으니 어머니를 모실 것입니다.” 하였다.
동생 윤탕(尹逿)이 손을 잡고 울면서, “형은 어찌 친구만 생각하고 부모는 잊어버린 듯이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오?” 하니 윤섬이, “그는 형제도 없어 형편이 가긍하지만 우리 집은 네가 있을 뿐 아니라, 또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어찌 사정(私情)을 돌아보겠느냐.” 하였다. 상주 북쪽 가마소[甑淵] 위에 이르렀을 때 적군이 졸지에 닥쳤다. 이일이 달아나면서 윤섬에게, “헛되게 죽기만 하는 것은 쓸 데 없으니 나를 따르라.” 하니 윤섬이 대답하기를, “장차 임금을 뵈올 수 없다.” 하고 박지와 함께 죽었다. 윤섬의 행장
○ 박지는 김수의 사위이므로 이일이 김수의 도움이 있을까 해서 수행하기를 청했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일월록》 ○ 박지는 18세에 장원하였다.
○ 적군이 이일을 급박히 추격해 오자 이일이 말을 버리고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나 문경에 이르러 급히 장계하고 죄를 기다리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새재를 버리고 신립의 군중으로 갔다. 《징비록》
○ 21일에 이일의 패보가 왔다. 궁중에서도 역시 굳은 뜻을 갖지 못하고 드디어 미투리[繩鞋] 등 멀리 갈 행구(行具)를 사들이고, 또 사복시(司僕寺)에 명해서 영강문(永康門) 안에 말을 대기하게 하였다. 《기재잡기》
○ 우상 이양원(李陽元)을 수성(守城) 대장으로, 이전(李戩)ㆍ변언수(邊彦琇)를 좌우 위장으로,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을 경성 순검사로 삼아 서울을 지키게 하였다. 《기재잡기》
○ 22일에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을 기복해서 도원수를 삼아 한강에서 군사를 조련하게 하였다. 《기재잡기》
○ 23일에 내수사(內需司) 별좌 김공량(金公諒)을 시켜 내수사의 종[奴] 가운데 활 잘 쏘는 자 2백여 명을 거느리고 대궐을 숙직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기재잡기》
○ 종친(宗親)들이 합문 밖에 모여 통곡하면서 서울은 버리지 말도록 청하였다. 영중추(領中樞) 김귀영(金貴榮)도 여러 대신들과 함께 서울을 굳게 지키자고 청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종묘와 사직이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하였다. 《조야기문》 《일월록》
○ 방민(坊民)과 서리(胥吏)ㆍ삼의사(三醫司)들을 뽑아서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성첩에는 3만 여명이 있어야 하는데 인구는 겨우 7천밖에 되지 않았다. 상번군(上番軍)은 하리(下吏)들이 중간에서 뇌물을 먹고 사사로 놓아 보내는 자가 심히 많았으니 군정(軍政)의 해이함이 하나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조야기문》
○ 전 이조 판서 유홍(兪泓)이 소(疏)를 올려 계책을 아뢰기를, “서울을 굳게 지켜 사직(社稷)과 함께 죽읍시다.” 하고 또 아뢰기를, “미투리가 궁중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며 백금(白金)이 적을 막는 물건이 아닌데, 한창 급한 격서(檄書)가 왔다갔다 하는 판에 이런 것들을 사들이게 하니 전하께서 어찌 이러한 망국(亡國)의 일을 하십니까.” 하였다. 《계곡집》
이때 일반 백성들은 시골로 피해나간 자가 많았고 각 사(司)의 관원들도 역시 숨어버리고 출근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었다. 부원군 유홍ㆍ좌찬성 최황(崔滉)은 제일 먼저 그 가족을 시골로 보냈다. 《기재잡기》
○ 이산해(李山海)가 맨 먼저 서도로 피난갈 계책을 건의하였다. 유홍이 입궐하여 극력 간하였으나 사람마다 서울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유홍이 먼저 가속을 피난시켜 놓고 겉으로 이런 말을 하므로 사람들이 그 간사한 것을 미워하였다. 《자해필담》
○ 23일에 윤두수를 귀양살이에서 풀어주어 돌아오게 하였다. 대간들이 불가하다고 여러 번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 《기재잡기》
○ 사헌부ㆍ사간원에서 아뢰어 성문을 굳게 닫고 사대부와 서민들을 마음대로 못 나가게 하고 또 미투리같은 물건을 내보내고, 죽기를 각오하고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기를 청하였다. 《기재잡기》
○ 26일에 사헌부ㆍ사간원에서 함께 아뢰기를, “영의정 이산해는 수상(首相)의 몸으로 인심을 진정하지 못하고 토붕(土崩)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도당(都堂)에서 축출하게 하소서.” 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기재잡기》
안에서는 벌써 서울을 버릴 뜻이 있어 산해가 태복 제조(太僕提調)로서 말[馬]을 세워두고 대기하는 일에 참례한 까닭에 대간이 탄핵하였다. 《조야기문》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이 스스로 아뢰기를, “감히 죽음을 각오한 선비 10여 명이 신과 사생(死生)을 같이 하자 약속하고 있사오니 이들과 같이 적의 군중에 들어가 적장의 머리를 베어 국가의 위태로움을 조금 늦추어 볼까 합니다.” 하고 청했다. 조정에서는 오활한 말이라고 좇지 않았다. 《기재잡기》
황신(黃愼)이 군민(軍民)에게 유시하는 교서를 짓기를, “간신이 먼저 촉(蜀)으로 피난가기를 주장했으니 국충(國忠)의 머리를 매달아야 한다.” 했으니, 이산해를 가리킨 말이다. 아첨해서 임금의 총애를 굳게 하고 당을 만들어 공도(公道)를 어기어, 그 화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심하니 죄가 진실로 용서하기 어려우나, 서도로 피난하자는 것까지 넣어서 죄목을 삼는다면 그가 어찌 마음으로 자복하겠는가. 서도로 피난 가자는 계책은 종묘와 사직에 공이 심히 크니 헐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부계기문》
○ 27일에 생원(生員) 구용(具容)ㆍ권필(權韠)이 소를 올려, “유성룡의 강화(講和)와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친 일은 실로 오늘의 진회(秦檜)와 국충이니, 청컨대 베어서 백성을 위안하소서.” 했으나 비답(批答)이 없었다. 《기재잡기》
○ 이때 이일이 패전했다는 보고가 이르렀으나, 거리가 텅 비어 비록 성을 지키려 하여도 이미 사람이 없었다. 《기재잡기》
○ 처음에 왜적이 울산 군수 이언함(李彦諴)을 생포해서 수길의 글월을 전해 보냈다. 언함이 적중에서 돌아와 죄를 받을까 겁내어 스스로 도망쳐 왔다 하고 그 글을 숨기고 전하지 않았다.
상주가 함락될 때 기재잡기에는, “적이 밀양에 이르렀을 때”라고 하였다. 왜장 행장(行長)이 통역 경응순(景應舜)란 자를 잡아 또 수길의 글월과 예조에 보내는 공문 한 통을 전했는데, “조선이 강화할 뜻이 있거든 이덕형(李德馨)을 시켜 28일에 충주에서 우리를 만나게 하시오.” 했다. 덕형이 일찍이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왜인의 존경을 받았던 까닭이다. 이때 일은 급하나 계책이 없었으니 혹 이로 인하여 적병을 늦추어 보려는 뜻도 있고, 덕형 역시 가기를 자청하여 답서를 가지고 응순을 데리고 갔다. 《징비록》
덕형이 강을 건너 원수 김명원이 제천정(濟川亭)에 진치고 있는 데로 가보니 겨우 여염집에서 활쏘는 과녁을 거두어 가리었고 군사는 항오(行伍)도 차지 않을 뿐 아니라 모두 병들고 잔약한 자뿐인 것을 보고 다만 서로 통곡하고 작별하였다. 도중에서 죽산에 이르러 충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응순를 시켜 가서 알아보게 했더니 그만 청정(淸正)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덕형이 중로(中路)에서 발길을 돌려 평양에 와서 복명하였다. 《일월록》
○ 28일에 대신이 세자를 세워 인심이 믿는 데가 있게 하기를 청했다. 이에 광해군 혼(琿)을 세워 세자를 삼았는데 백관의 하례는 간략히 하여 동서반(東西班)도 이루지 못하였고 인장과 교서도 없었다.《기재잡기》
○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를 범하였다.
○ 경기ㆍ강원ㆍ황해ㆍ평안ㆍ함경 5도병을 불러들여 경사(京師)를 지원(支援)하게 하였다.
○ 이조 판서 이원익을 평안 감사로, 지중추 최홍원을 황해 감사로 임명하여 즉일로 떠나게 하였다. 장차 서도로 피난할 논의가 있는데, 원익은 일찍이 안주 목사로, 흥원은 일찍이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은혜로운 정치로 민심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가서 임금의 피난길을 미리 준비하도록 한 것이다. 《징비록》
이호민(李好閔)을 원익의 종사관으로 삼고 유영경(柳永慶)을 홍원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 25일에 적이 상주를 함락시키고 이어 함창(咸昌)을 함락시킨 다음, 26일에는 갑자기 문경(聞慶)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지고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홀로 말을 타고 산기슭으로 피해 갔는데 적이 쫓아가서 항복하라고 하였다. 길원이 분연히 꾸짖고 굴하지 않으니 적이 그의 사지를 잘라 죽였다. 《일월록》
○ 적병의 한 패는 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함락시키고, 한 패는 장기(長鬐)로부터 영일(迎日)ㆍ안동(安東)ㆍ풍기(豐基)를 함락시켰다. 수령들은 달아나고 감사 김수는 거창(居昌)으로 돌아와서 이유검(李惟儉)을 베었다. 적이 의령(宜寧)에 들어가자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이 달아났다. 이때 영남 60여 고을이 모두 무너지고 우도(右道) 6, 7고을이 겨우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군졸은 이미 흩어졌다.《일월록》
○ 28일에 적병이 충주에 들어갔다. 도순변사 신립(申砬)과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이 패하여 죽었다.
○ 처음에 신립(申砬)이 떠날 때 임금이 불러 보고 보검을 내리면서, “이일(李鎰) 이하 영(令)을 듣지 아니하거든 이 칼을 쓰라.” 하였다. 《조야기문》 《징비록》
○ 처음에 체찰사 유성룡ㆍ김응남이 중추부(中樞府)에서 한자리에 앉아 떠날 준비를 하려고, 군관에 응모한 자 80여 명의 명단을 써서 대궐에 들어가 아뢰려 하였다. 판윤 신립이 갑자기 밖에서 들어와 말하기를, “들으니 적병이 이미 밀양을 지나 곧 새재[鳥嶺] 밑에 이를 것이라 합니다. 조정에는 이일(李鎰)만 홀로 고군(孤軍)으로 전방(前方)에 있게 하고 뒤에서 응원할 장수를 보낼 계책이 없으니 사세가 심히 위급하오. 체찰사는 비록 내려가더라도 싸움터의 장수는 아닙니다.
적세가 만일 급하지 않다면 뒤에서 모든 장수를 감독할 것이지만, 지금 적이 벌써 가까이 왔는데 어찌 맹장(猛將)으로 하여금 밤낮없이 먼저 달려가서 이일의 군사를 응원하게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다. 성룡도 그렇게 여기고 답하기를, “공의 말은 옳으나 단지 갈 만한 무장(武將)이 없는 것을 어찌 하랴.” 하였다. 신립이 말을 받아, “국사가 당장 위급한데 누가 못 가겠소. 비록 소인이라도 가라면 감히 어찌 사양하겠소?” 하였다. 유성룡이 탄식하면서, “공이 나라에 바친 충성은 남이 따르지 못하는 바이오. 이것은 큰 일이니 즉시 들어가 아뢰겠소.” 하였다. 임금이 신립을 불러보고 순변사로 임명하였다.
신립이 궐문 밖에 나가 군관을 불러 모으다가 한참만에 중추부에 들어와서 자못 노기를 띠고 뜰에 있는 군관들에게, “너희들은 어찌 수월한 것만 원하고 괴로운 것은 싫어하느냐. 나에게는 왜 응모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느냐.” 하고 이내 성룡이 말하기를, “군관이 한 사람도 응모하지 않으니 괘씸하다.” 하였다. 성룡이, “다 같은 나라 일에 피차(彼此)가 있겠소? 내가 모집해 둔 사람을 공이 먼저 데리고 가면, 나는 뒤에 갈 것이니 다시 모집하여 가겠소.” 하고 군관의 명단을 그의 앞에 던졌다. 신립이 명단을 들고 나가고 김여물 또한 동행하였다. 《서애집》
처음에 신립이 떠날 때 임금이 불러보고 ‘적이 어떠냐.’ 하고 물으니 신립이 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변협(邊協)은 매양 왜인은 가장 대적하기 어렵다 하는데, 경(卿)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 하였다. 신립이 간 뒤에 임금은, “변협은 진실로 양장(良將)이라 내가 항상 이 사람을 잊지 못한다. 변협이 있었던들 내가 어찌 왜적을 걱정할까?” 하였다. 이때 협이 죽은 지 겨우 3년이었다. 《명신록》 《백사집》 〈변협비(邊協碑)〉
○ 처음에 신립이 빈청(賓廳)에 나가 대신들에게 하직하고 섬돌을 내려오는데, 머리 위의 사모가 홀연히 땅에 떨어져 보는 사람이 실색하였다. 용인(龍仁)에 이르러 올리는 장계에는 그 서명(署名)을 빠뜨렸으므로 사람들이 그 마음이 어지러운가 의심하였다. 《징비록》
이때 군에 응모한 자는 모두 시정의 악동들이었는데, 나라가 태평무사한 지 오래 되어 군사에 관한 일은 알지 못했으므로 식자들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신립이 용인에 이르러 적세가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적세가 심히 성해서 실로 막아낼 일이 어려우니 오늘의 일은 민망하고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라고 장계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신립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이런 장계가 올라오니 모든 사람이 겁을 내어 인심이 흉흉하였다. 《일월록》
○ 또 이일과 변기(邊璣)를 불러 같이 충주에 이르니 도내 군사로 모인 자가 8천여 명이었다. 《조야기문》
○ 신립이 충주에 당도한 4월 26일에 적은 이미 새재[鳥嶺]를 넘었다. 군관 한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보고하니, 이튿날 아침에 신립은 군관이 여러 사람을 현혹시켰다 하여 목을 베어 군중(軍中)에 돌렸다.
○ 28일 신립이 장계하기를, “적병이 상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는 적이 벌써 충주에서 6, 7리 떨어진 단월역(丹月驛)에 꽉 차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드디어 대군을 크게 패하여 거꾸러지게 하였다. 《서애집》
○ 척후장 김명원ㆍ안민(安敏) 등이, “적병이 이미 닥쳤다.” 하니, 신립이 홀연히 성밖으로 뛰어나갔으므로 온 군중이 소란스러웠으며 신립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밤에 객사(客舍)로 돌아와, “군관이 망녕된 말로 군중을 놀라게 했다.” 하고 목베었다. 《조야기문》 《일월록》
○ 신립이 새재[鳥嶺]를 막고 방어하려다가 길이 험해서 말달리고 활쏘기 불편하다고 물러와 충주에 진을 쳤다. 이일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새재를 버리고 충주로 갔다. 신립이 적세(賊勢)를 물으니 이일은, “이번 왜적은 경오ㆍ을묘년과는 비교가 안 되며 또 북쪽 오랑캐 같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이미 험한 곳에 주둔하지 못하여 넓은 들판에서 싸움을 하게 되어 당해 낼 도리가 만무하니 차라리 물러가 서울을 지킵시다.” 하였다.
신립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네가 패군(敗軍)하고 또 다시 군중을 놀라게 하여 요동시키니 군법에 의하여 마땅히 목을 벨 것이지만, 적이 이르거던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라.” 하고 또, “바다를 건너온 적은 능히 달리지 못한다.” 하였다. 드디어 달래강[㺚川]을 뒤에 두고 탄금대(彈琴臺) 대는 달래강 두 물길 사이, 충주부에서 5리쯤 되는데 있다. 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군사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일월록》
○ 처음 김여물이 신립에게 말하기를, “적이 기세가 날래어 맞대고 싸우기 어려우니 새재를 지키는 것이 옳을 것 같소.” 하니 신립이, “적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는 기병(騎兵)이니 넓은 들판에서 맞아 기병으로 짓밟으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하고 듣지 않았다. 적은 벌써 은밀히 재를 넘어 28일에는 길을 나누어 크게 밀려 닥쳤다. 여물이 또, “먼저 고지를 점령해서 역습을 합시다.” 해도 듣지 않고 배수진을 쳤다.
적이 아군 뒤로 나와 겹으로 포위하였다. 전투가 처음 벌어지자 아군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장수와 졸병이 겁결에 모두 달래강물에 뛰어들었다. 적이 칼로 마구 찍어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다. 신립이 여물을 불러, “자네는 살려고 하는가?” 하니 여물이 웃으면서, “어찌 내가 죽음을 아끼겠소?” 하고 같이 탄금대 밑에 가서 손수 적 수십을 죽이고 함께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일월록》 《명신록》
김여물은, 자는 사수(士秀)이며, 본관은 순천이다. 무신년에 태어나다. 소년 시절부터 영특하고 힘이 세어 활쏘기ㆍ말달리기를 잘하였다. 20세에 진사, 30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풍채가 준수하여 여럿 가운데 뛰어나서 당시의 호걸들로서도 그를 앞설 사람이 없었다. 대신의 추천으로 의주 목사가 되었다가 임진년에 역인(譯人)의 죄에 연루되어 장차 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 때마침 변방의 보고가 급박하게 이르렀으므로 임금이 죄를 용서하고 공을 세우도록 하였다. 유성룡과 신립이 공을 서로 자기의 부관(副官)으로 데리고 가려고 청하였다. 충주에 이르러 신립이 공의 말을 안 듣고 배수진을 쳤다. 공은 반드시 패할 것을 알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3도에 근왕(勤王)하는 군사가 한 사람도 없어 우리가 소매를 떨쳐 나섰는데도 돕는 이가 없다. 남아(男兒)가 나라 일에 죽는 것은 직분이거니와 단지 국치(國耻)를 씻지 못하고 장한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된다.” 하였다. 적의 군사는 60만이라 하였는데 그 형세가 미친 물결처럼 한꺼번에 솟구쳐 진격해 왔다. 신립이 창황하여 급히 장계를 올리고자 여물을 보고 지으라 하였다. 여물이 갑옷과 투구를 쓰고 팔에는 활을 메고 허리에 전통(箭筒)을 찬 채 붓을 놀리니 삭삭 바람 소리가 났다. 다 쓰고 붓을 던졌는데 한 자도 틀림이 없었으니 군중(軍中)에서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증직하고 정조 무신년에 장의(壯毅)라 시호를 주었다.
○ 광흥 주부(廣興主簿) 이운룡(李雲龍) 28세에 무과에 올랐고 당시 30세이다. 이 출정하기를 자원해서 신립의 막하에 갔다. 신립이 배수진 치는 것을 보고 운룡이 말하기를, “이것은 죽을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고 울면서 그 잘못을 말렸더니 신립이, “그 망녕된 말로 사기(事機)를 그르친다.”고 화를 내어 곤장(棍杖) 30대를 쳤다. 운룡이 피를 씻고 일을 보다가 군사가 패하자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죽었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그 자손을 등용하고 집에 납세와 부역을 면제하라고 하였다. 《팽성지(彭城志)》 평택현(平澤縣)을 팽성이라 하는데 그의 자손이 살고 있다.
이일(李鎰)이 몸을 빠져나와 달아나 산중에 들어갔다가 적 두셋을 만나 사살하여 머리 하나를 베어 가지고 강을 건너 급히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 비로소 신립이 패한 것을 알고 임금의 피난 행차가 곧 떠났다. 그러나 신립의 패전한 곡절은 능히 알지 못하고 또 생사(生死)도 알지 못했다. 혹은 산중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하고, 혹은 남도에 내려가 재차 군사를 일으킬 계책을 세운다 하고, 더러는 황해도까지 와 있는데 형벌로 죽을까 두려워 나오지 못한다 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군신들을 불러 계책을 의논하는데 걱정하는 빛으로, “적군을 과연 당하기 어렵구나.” 하니, 도승지 이충원(李忠元)이 낮은 소리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걱정마소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은즉, 신립이 과연 죽지 않고 황해도에 있다 하니 불러서 쓰게 되면 적은 걱정할 것 없사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냉소하면서, “이때를 당해서 장수 될 사람이 없는데 도승지 같은 사람이면 좋지 않을까.” 하니, 충원이 일어나 절을 하면서, “신은 실상 장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여 듣는 사람들이 포복졸도하였다. 《기재잡기》
○ 신립은, 본관은 평산이며, 찬성 신잡(申磼)의 동생이다. 무과에 급제해서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 29일 저녁에 충주 패전보를 전해 듣고 온 성안이 모두 떨었다. 임금은 동편 월랑에 의자 없이 앉아 있었다. 등촉을 밝혀 놓고 하원군(河源君) 이정(李鋥)ㆍ하릉군(河陵君) 이린(李鏻)이 모시고 급히 재상들을 불러 서울을 떠나 피난할 것을 의논하였다. 영상 이산해는, “사세가 이쯤 되었으니 행차가 평양으로 가시는 것이 가합니다.” 하고 도승지 이항복은, “지금은 중국으로 향하여 회복을 도모할 뿐입니다.” 하고, 장령 권협(權悏)은, “경성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하며 모두 강경히 청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은, “권협의 말이 충성스러우나 다만 형세가 나가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드디어 서도로 피난 갈 것을 결정짓고 세자는 임금의 행차를 따르고 여러 왕자는 각 도에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임해군 이진(李珒)은 함경도로 갔는데, 영중추 김귀영ㆍ칠계군(漆溪君) 윤탁연(尹卓然)을 따르게 하고, 순화군(順和君) 보()는 강원도로 갔는데 장계군 황정욱(黃廷彧)ㆍ호군 황혁(黃赫)ㆍ동지 이기(李墍)를 따르게 하였다.
처음 한준(韓準)으로 순화군을 따르게 하였다가 초하룻날 동파(東坡) 역에서 황정욱 등 3명에게 순화군을 배행하라 명하고 한준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이기는 강원도에서 명망이 있는 인물이므로 특히 벼슬 계급을 자헌(資憲)으로 승급하여 보내었다. 《일월록》 《기재잡기》
○ 이성중(李誠中)을 통어사(統禦使)로 삼아 여러 도의 징병을 통솔하게 하고 이언직(李彦直)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 이양원에게 명하여 서울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 이항복이 부름을 받고 정원에 들어가니 대궐 안이 벌써 소란해서 다시 공무에 질서가 없었다. 선정문(宣政門) 밖까지 들어가서 일을 아뢰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조금 뒤에 임금이 유성룡에게 서울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항복이 노사형(盧士馨)에게 말하기를, “서쪽으로 가서 국경에 다다라 멈춰야 하는데도 멈추지 못하면 강 하나 건너편에는 바로 중국의 강토라 응당 교섭하고 처변(處變)할 일이 있을 터인데, 현재 조정 신하로서 명민하고 사리에 밝고 익숙하며 말솜씨있는 사람은 성룡 한 사람뿐이다.
지금 행차가 한번 이동하면 서울은 지킬 수 없는 형세이니 성룡은 패전한 장수가 되는 데 지나지 않을 터이나 어가를 호종하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이니 따라가게 하도록 아뢰어 청함이 어떤가.” 하였다. 즉시 아뢸 글을 초(草)만 잡아 정서할 여가도 없이 초본 그대로 아뢰니 임금이 허락하여 다시 이양원에게 서울을 지키라 명하였다. 《서애집》부록 〈백사수기(白沙手記)〉
○ 이때 임금이 도성을 떠나려고 벌써 행구를 차렸으나 대간과 백관이 다 같이 떠날 수는 없다 하여 궁중에서 비밀히 행장을 단속하여 외인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성중 사람들은 뜬 소문으로 행차가 벌써 선인문(宣仁門)으로 해서 베옷을 입고 북도로 향하였다 하다가 한참 뒤에야 수그러졌다.
이때 위에서는 조관(朝官)으로부터 아래로는 군교(軍校)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달아나 숨느라고 성문이 닫히지 않았고, 시각을 알리는 야루(夜漏)도 치지 않았다. 인마(人馬)가 인정전(仁政殿) 뜰에 어지럽게 붐비어 상하가 울부짖으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얼마 뒤에 어가가 이미 북도로 향하였다 해서 모든 관리들이 넘어질듯 엎어질 듯 입궐하니 헛말이었다. 이정립(李廷立)이 이때 성밖에 살았는데 이 소문을 듣고 창황하게 양주까지 쫓아갔다가 길가에서 물으니 모두 모른다 하므로 돌아왔다. 《기재잡기》
○ 밤이 깊은 뒤에 이일의 장계가 왔는데 적이 금명간에 경성에 들어갈 것이라 하였다.
처음 이일이 충주에 이르러 적세가 대단하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이 장계를 보고 자못 두려워하였다. 하루는 궁중에 새가 처마 위에서 울고 날아다녀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데 처량한 소리로 사람을 향해 슬피 호소하며 마치 떠나기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멀고 가까운 데서 이것을 듣고 모두 흩어지고 달아날 생각을 가졌다. 임금도 역시 이상하게 여겨 드디어 서행(西行)하기를 결정했다.
모양은 대승조(戴勝鳥) 같으면서 작고 꼬리도 짧아 사람들이 일찍이 못 보던 새였다. 혹은 금강산에 있는 새라고 말하였다. 그믐날이 되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기재잡기》 《국보쇄어(菊圃瑣語)》에는, “새가 밤새도록 울어 그 소리가 이상한데, 들은 사람들은 각각 화도(化道), 혹은 각각 환도(環刀)”라고 하였다.
○ 임금이 병조 판서 김응남에게 표신(標信)을 주어 적절히 맡아 하도록 일임하였다. 응남이 목에 표신을 걸고 지휘를 하고자 해도 한 사람도 응종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밤은 삼경인데, 어가가 장차 출발하려 하나 군인의 수가 채워지지 않아 병조 좌랑 이홍로(李弘老)가 표신을 가지고 사위영(四衛營)에 두루 돌아다녔지만 위장 성수익(成守益)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또 하늘에서는 큰 비가 내려 밤이 칠(漆)같이 어두웠다.
임금이 단지 두세 젊은 내시들과 판방(板房)에 앉아 있는데, 무례한 무리들이 대내에 밀고 들어와 귀중한 물건들을 거리낌없이 훔쳐갔다. 시녀들은 맨발로 옷 벗은 채로 혹은 쓰러지고 혹은 울면서 궁문을 뛰쳐 나오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홍로는 작은 촛불을 갖고 임금을 인도해서 나오고 왕비와 비빈(妃嬪)들은 다 뚜껑있는 가마를 탔는데 교군들이 혹 7, 8명 혹 5, 6명으로 사경에 비로소 궁문을 나왔다. 임금은 말타고 따르는데 군복[戎服]에 채찍을 쥐었다. 《기재잡기》
○ 종묘 관원을 시켜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어 먼저 가게 하고 세자는 뒤를 따라 떠나고 신성군(信城君) 후(珝)와 정원군(定遠君) 후일의 원종 이 따랐다.
○ 30일 새벽 사고(四皷)에 행차가 떠나는데 백관은 모두 흩어지고 하늘에서는 비가 내려 밤은 검기가 칠빛 같았다. 중전은 혼자 시녀 수십 명을 데리고 인화문(仁和門)으로 걸어 나오는데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앞을 인도하니 중전이 돌아보고 물은 뒤 칭찬하기를 한참이나 하고 충의(忠義)를 권면하였다. 백사연보(白沙年譜)
○ 행차가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받들고 돈의문(敦義門)을 나가는데 중전 이하가 모두 말을 탔다. 보는 자들은 모두 울고 백관들은 새떼 흩어지듯 도망치고 따르는 자가 겨우 백여 명이었다. 모래재[沙峴]에 이르니 동쪽이 밝으려는데 비는 내렸다.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뒤늦게 이르렀다. 비를 맞고 서쪽으로 가서 벽제(碧蹄)역에 이르니 비가 심해 임금은 역에 들어갔다가 조금 후에 나왔다. 시종들과 대간들은 많이 뒤떨어졌다. 혜음재[惠陰嶺]를 지나갈 때 비가 퍼붓듯 하였다. 이날 밤 행차가 임진 나루에 이르렀을 때 상하가 서로 잃어버렸다.
이항복이 흙탕 속을 걸어다니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진강을 건너는데 나루터[津] 남쪽에 있는 승청(丞廳)을 불지르게 하여 그 빛이 강 북쪽에 비치어 길을 찾아갔다. 삼경에 동파역에 이르니 파주 목사(坡州牧使) 허진(許晉)과 장단 부사(長湍府使) 구효연(具孝淵)이 간단히 수라상을 마련하였다. 호위하던 사람들이 종일 굶었던 참이라 마구 부엌으로 들어와 가져다 먹으니 장차 임금께 올릴 것이 없게 되어 허진 등은 겁을 내어 도망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임금이 이항복을 불러, “빨리 영의정과 좌의정을 부르라. 윤두수(尹斗壽)는 어디 있느냐. 같이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 두수는 연안 적속(謫所)에서 명을 받고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멀리 거동할 때에 임시로 머무르는 곳)로 와 있었다. 임금은 눈물을 뿌리고 채찍으로 땅을 두들기면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산해ㆍ유성룡ㆍ윤두수, 일이 급하다. 계책을 어떻게 내야 하겠는가.” 하였다. 항복이 먼저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원래 약해서 적을 당할 도리가 없으니 지금 계책은 오직 서쪽으로 명 나라에 하소연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니 임금도, “내 뜻이 본래 그렇다.” 하였다. 백사연보 《일월록》
어의(御醫) 양예수(楊禮壽)는 노경에 다리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비록 권세있는 이들 집에서 진찰을 청해도 대개 가지 않는 일이 많았다. 이번에 창졸간에 말을 준비할 겨를이 없어 도보로 따랐다. 행차가 모래재에 이르러 이항복이 돌아보고 웃으며, “양동지, 다리병에는 난리탕(亂離湯)이 그만이로구나.” 하니, 임금이 듣고 말을 주라 명하였다.
○ 임금이 행차 머무를 곳을 물으니 이항복은, “의주에 진주(進駐)해서 8도가 모두 함락될 지경에는 명 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밖으로 한 걸음만 옮기면 조선은 우리나라가 못 됩니다.” 하니 항복이 다투기를 멈추지 않았다. 성룡이, “지금 관동과 북도의 병력이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있는 사람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 터인데 어찌 급히 이런 말을 하는가.” 하니, 항복이 깨닫고 그쳤다.
물러나서 성룡이 이성중(李誠中)에게 말하기를, “내 말로 이승지(항복)에게 전하라. 어찌 경솔하게 나라를 떠난다는 말을 하는가, 자네가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 길에서 임금을 따라 죽는 것은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나라를 떠난다는 이 말이 한 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瓦解)될 것이니 누가 능히 수습하겠는가.” 하였다. 서애행장
○ 임금의 행차가 성을 나서니 난민들이 맨 먼저 장예원(掌隸院)과 형조(刑曹)를 불질렀다. 이 두 곳에는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문서가 있는 까닭이다. 또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금과 비단 같은 것을 끌어냈으며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을 불질러 하나도 남겨두는 것이 없었다. 역대로 내려온 보화ㆍ귀중품과 문무루(文武樓)와 홍문관에 쌓아둔 서적, 승문원 일기가 모두 타버렸다. 또 임해군(臨海君)과 홍여순(洪汝諄)의 집을 불살랐다. 모두 왜적이 오기 전에 우리 백성들에 의해 불타버렸다. 《서애집》
○ 모든 호종하는 관원들은 서로 질서를 차리지 못하여 그 오고간 것을 모두 기억할 수 없어 우선 아문(衙門)을 분류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기재잡기》 다음도 같다.
영상 이산해ㆍ좌상 유성룡ㆍ우상 이양원ㆍ좌찬성 최황ㆍ우찬성 정탁(鄭琢)ㆍ좌참찬 최흥원(崔興源) 황해도 순찰사로 갔다. 사인 윤승훈(尹承勳)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빠졌다.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 평안도 순찰사로 갔다.ㆍ참판 정창연(鄭昌衍)ㆍ참의 이정암(李廷馣)ㆍ정랑 조정(趙挺)ㆍ유영경(柳永慶) 최흥원의 종사(從事)로 갔다.ㆍ정광적(鄭光績) 강원도 어사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좌랑 이호민(李好閔) 이원익의 종사로 갔다ㆍ김시헌(金時獻) 이외는 모두 빠졌다
호조 판서 한준(韓準) 참판 이하는 기억하지 못한다.
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 죽은 지 이틀째ㆍ참판 박응복(朴應福)ㆍ좌랑 이경류(李慶流) 상주에서 죽었다. 이외는 기억하지 못한다.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ㆍ참판 심충겸(沈忠謙)ㆍ참의 정사위(鄭士偉)ㆍ참지 황섬(黃暹)ㆍ정랑 이홍로(李弘老) 개성까지 와서 뒤떨어졌다.ㆍ구성(具宬) 개성서 파직ㆍ송순(宋諄) 파주 와서 뒤떨어졌다.ㆍ유희서(柳熙緖) 김명원의 종사로 갔다.ㆍ좌랑 서성(徐渻) 개성 와서 뒤떨어졌다.ㆍ박동량(朴東亮)ㆍ이형(李覮) 영변에 이르러 세자를 따라갔다.ㆍ최관(崔瓘) 평양에 와서 병으로 죽었다.
형조판서 이하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
공조 참판 이덕형 적중에 가서 안 돌아왔다. 판서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한성 판윤 홍여순(洪汝諄)ㆍ우윤 박숭원(朴崇元) 이외는 기억하지 못한다.
대사헌 이헌국(李憲國)ㆍ집의 권협(權悏평양에 이르러 상소하고 갔다.ㆍ장령 정희번(鄭姬藩)ㆍ이유중(李有中)ㆍ지평 이경기(李慶禥) 박천에 이르러 말없이 갔다.ㆍ남근(南瑾) 처음부터 안 왔다.
대사간 김찬(金瓚) 평양에 이르러 상소하고 갔다.ㆍ사간 이국(李)ㆍ헌납 이정신(李廷臣) 영변에 와서 말없이 갔다.ㆍ정언 정사신(鄭士信) 당초 안왔다.ㆍ황붕(黃鵬) 평양에서 뒤떨어졌다.
교리 이유징(李幼澄)ㆍ심대(沈岱)ㆍ수찬 박동현(朴東賢)ㆍ임몽정(任蒙正) 당초 안 왔다.ㆍ부수찬 윤섬(尹暹)ㆍ박지(朴箎) 이 두 사람은 상주에서 전사
도승지 이항복ㆍ좌승지 이충원ㆍ우승지 이정형ㆍ좌부승지 노직(盧稷)ㆍ우부승지 신잡(申磼)ㆍ동부승지 민여경(閔汝慶) 평양에서 뒤떨어졌다.ㆍ주서 박정현(朴鼎賢) 안주에서 말없이 갔다.ㆍ임취정(任就正) 안주에서 말없이 갔다.
봉교 기자헌(奇自獻) 뒤쫓아 평양으로 왔다.ㆍ대교 윤경립(尹敬立) 소를 올리고 아버지 임소(任所)에 갔다.ㆍ조존세(趙存世) 안주에서 말없이 갔다.ㆍ검열 김선여(金善餘) 안주에서 말없이 갔다.ㆍ강수준(姜秀峻) 평양에서 소를 올리고 물러갔다.ㆍ김의원(金義元) 이 나머지는 빠졌다.
기성군(杞城君) 유홍(兪泓)ㆍ해평군 윤근수ㆍ해원군 윤두수.
호군 이산보(李山甫)ㆍ유근(柳根)ㆍ홍진(洪進)ㆍ홍인상(洪麟祥) 평양에서 소를 올리고 물러갔다.ㆍ민준(閔濬)ㆍ윤자신(尹自新)ㆍ황정식(黃廷式)ㆍ황정립(黃廷立)ㆍ이관(李瓘)ㆍ성수익(成壽益) 한관(閑官)과 산관(散官)으로 따른 사람은 다 기록하지는 않는다.
대사성 임국로(任國老) 평양에서 소를 올리고 물러갔다.ㆍ직강 심우승(沈友勝)ㆍ박사 이효원(李效元)
사복첨정 박응인(朴應寅)ㆍ내승 박동언(朴東彦)ㆍ안황(安滉) 이하 각사 관원은 따라온 사람만 기록한다.
첨지 유희림(柳希霖)ㆍ정곤수(鄭崑壽) 이 두 사람은 《기재잡기》의 기록에는 들어 있지 않다. 또 말하기를, 한관ㆍ산관으로 따른 사람은 다 기록하지 않았다 했다.
종부첨정(宗簿僉正) 민선(閔善) 파주서 뒤처졌다.ㆍ사섬봉사 이신성(李愼誠) 파주서 뒤처졌다.
장악직장 이경전(李慶全) 평양서 뒤처졌다.ㆍ봉상봉사 홍봉상(洪鳳祥)ㆍ선전관 최빈(崔賓)ㆍ무겸(武兼) 한연(韓淵) 이 두 사람은 《기재잡기》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세자 종관(世子從官)으로 따른 사람은 보덕 심대 교리ㆍ필선 심우정(沈友正)ㆍ문학 이상의(李尙毅)ㆍ설서 이광정(李光庭)ㆍ부솔 강인(姜絪) 익위사(翊衛司) 관원은 다 오지는 않았고 오직 부솔 강인만 왔다.
근시(近侍)하는 신하들은 모두 행차를 따랐으나 지평 남근과 정언 정사신은 반송정(盤松亭)까지만 와서 간 곳을 모르고, 당초에 오지 않은 자는 임몽정 한 사람뿐이다. 그 나머지 소관(小官)과 산관들은 혹은 파주에서, 혹은 개성에서 마음대로 행동해서 기록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기재잡기》
○ 어둠을 타서 임진강을 건너는데 개울물이 불고 길이 질었다. 나룻배는 겨우 대여섯 척인데 이것으로 대소 인원들이 서로 건너기를 다투어 상하의 질서가 없고 하인과 말을 잃어버려 어떤 사람은 걷고 어떤 사람은 타도 밤새도록 다 건너지 못하였다. 후궁(後宮) 민빈은 가마 멀미로 파주에 있고 임금은 배를 타고 기다리노라고 벌써 이경이 가깝도록 저녁밥을 먹지 못하여, 내시를 불러 술과 차를 드리라 하였으나 모두 가져오지 않았다.
내의원(內醫院)에 있는 용운(龍雲)이 상투 속에 끼웠던 설탕 반 덩어리를 내어 강물에 타서 드렸다. 밤중에 동파관에 도착하여 사경에 임금이 비로소 싸래기밥을 먹고 세자 이하는 모두 끼니를 굶었다. 유성룡이 쌀 서 되를 바쳐 이튿날 아침에 밥을 지어 드렸다. 《기재잡기》
○ 임금이 윤두수를 불러 이르기를, “경이 재주가 있어 가히 나라의 급함을 구할 만하여 특명으로 석방하여 소환하였으니 사생이 결정되는 이 시국을 구해서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차고 있던 푸른 주머니를 풀어 주면서, “내 마음을 표시할 물품이 이것밖에 없다.” 하니 윤두수가 울면서 사례하고 나갔다. 《기재잡기》
○ 임금이 홀로 동파관에 서서 바라보니 어떤 한 선비가 밖에서 달려가므로 불러서 누구냐고 물으니, “신은 최황(崔滉)의 자식인 별좌 유원(有源)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네가 공신의 아들이니 마땅히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 하고, 붉은 혁대를 풀어 주면서, “이것을 띠고 나를 잊지 말라.” 하였다. 《기재잡기》
○ 5월 1일에 행차가 떠나서 개성으로 가려는데 오시에 가까워져도 아직 밥을 먹지 못하였고 군사와 인부들도 역시 모이지 않았다. 장단 부사 구효연(具孝淵)은 도망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승지들이 직접 경기 감사 권징(權徵)을 불러 지휘를 하게 해도 숨어서 나오지 않고 승지들이 화를 내어 꾸짖어도 응하지 않았다. 《기재잡기》
○ 행차가 떠나도 군졸들이 도망가고 흩어져서 호위할 사람이 없었다. 황해 감사 조인득(趙仁得)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오는데 서흥(瑞興) 부사 남억(南嶷)이 군사 수백 명과 말 5, 60필을 거느리고 먼저 왔다. 궁중 사람들은 두끼나 굶은 터라 군인들의 양식을 가져다가 허기를 면하고, 초현참(招賢站)에 이르러 인득이 길 가운데 장막을 치고 백관을 영접해서 비로소 밥을 먹었다. 《조야기문》
○ 저녁에 개성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을 멈추고 성중 부로(父老)들을 불러 위로하고 효유(曉諭)하려 했으나 말이 달아나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초경에 군인들이 놀라 소리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니 사람과 말이 서로 밟고 밟혔다. 궁녀 이씨는 밖에서 듣고 무슨 변이 생긴 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절명하지는 않았다. 이경에 또 놀라 소란스럽다가 한참만에야 그쳤다. 윤두수로 어영대장을 삼으니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 이때 어가가 개성에 이르니 백성들이 모여들어 혹은 통곡하고 혹은 눈물을 흘렸다. 그중 뚝뚝하고 무식한 부류들은 큰 소리로, “상감이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후궁들만 부유하게 해주고 김공량(金公諒)을 총애하여 제일 계책을 삼다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공량을 시켜 적을 토벌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임금을 향해 돌을 던진 사람이 있어도 시위(侍衛)하는 인원이 적고 병력이 약해서 막지 못하였다. 공량이 당시에 원망을 산 것을 알 수 있다. 《공사견문》
○ 2일 병조 정랑 구성이 안문에서 나와 급히 소리지르기를, “삼사가 입시하라고 소명하셨다.” 하니 홍여순이 헌납 이정신(李廷臣)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누가 명령을 전하기에 자네들이 입시하려는가?” 하였다. 대개 그것이 장차 이산해를 배척할 의논인 것을 알지만 마침 부르는 명령이 정원을 거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성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내가 친히 전교를 받았는데 어찌 들어오지 않는가?” 하고 대사간 김찬의 손을 끌어당겨 일으키니 여러 대간이 뒤따랐다.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 일은 누가 그 책임을 지겠는가?” 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이산해가 김공량과 결탁해서 그의 심복이 되었고 홍여순ㆍ이홍로ㆍ조정ㆍ송언신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림(士林)에 해독을 끼쳐 나라 일을 그르쳤사옵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수상의 몸으로서 서울을 지키자는 말은 없고 도리어 속히 나가기를 청하였고 그 아첨하는 태도는 지금 더욱 심하니 오늘 일은 이 사람의 소치가 아닌 것이 없사옵니다. 정법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산해가 비록 공량과 결탁하였다손 치더라도 어찌 이 때문에 나라 일을 그르쳐 왜적이 들어오게 되었단 말인가. 이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산해가 어찌 반드시 직접 공량의 집에 갔겠는가.”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밤을 타서 가만히 가는데 종적을 숨기려고 당나귀를 타고 밤에 가다가 나졸에게 잡힌 일이 있으니 어찌 헛말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도성을 버리자는 말은 산해뿐 아니라 좌상 유성룡 도 말했고 최이상(崔二相 찬성 최황)도 역시 말했다.” 하였다. 황붕이 아뢰기를, “당시 위급한 때를 당하여 누군들 도성을 버리자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구성이 황붕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나가게 하면서, “자네는 산해의 조카이면서 어찌 감히 입을 여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사모를 벗고 섬돌을 내려가 눈물을 흘리면서, “원컨대 신도 산해와 같이 국사 그르친 죄를 받겠습니다.” 하였다. 최황은, “신은 사태가 심각해지면 잠깐 다른 곳에 피해서 뒷날을 도모하자고 한 것이니 실상은 산해 등과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당일의 말을 기록해 쓴 한림(翰林)과 주서(注書)가 모두 여기 있는데 내가 어찌 말을 하겠느냐.” 하였다. 그러나 최황은 자리를 물러나 사죄하지 않았다. 임금이 드디어 산해는 파직하고 최흥원에게 영상을 대신 시켰다. 구성은 말이 시끄럽고 난잡하여 조리가 없어 입시할 때의 모습과 달랐다. 《기재잡기》
○ 3일 임금이 남문에 나와서 부로들과 백성들을 불러 위로하고, 고통스러운 점을 묻고, “할 말이 있거든 하라.” 하였더니 선비 10여 명이 대답하기를, “오늘 일은 모두 이산해와 김공량이 안팎으로 전횡하여, 경향(京鄕)의 백성들이 다 같이 원한을 품어 왜적을 들어오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숙원(淑媛) 김씨에게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기재잡기》
○ 승지 이충원이 성혼(成渾)을 부르기를 청하니 임금은, “어찌 불러 쓸 사람이 없으랴. 나는 꼭 불러오지는 않겠다.” 하였다. 이전에 행차가 파주를 지날 때 이홍로의 중상이 있은 까닭이다.
○ 대간이, “이산해가 궁중 사람과 결탁하고 왜적과 화친을 주장해서 나라를 그르쳤다.”고 탄핵해서 여러 번 아뢰었던 바 그 말을 따르고 유성룡으로 영의정, 최흥원으로 좌의정, 윤두수로 우의정을 시켰다. 임금이 남쪽 성문에 나와 백성들을 위로하고 효유하니 정철(鄭澈)을 소환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어 정철에게 급히 평양에 도착하여 왕자를 같이 호위하라 명하였다.
○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또 아뢰기를, “좌상 유성룡만 나라를 그르친 죄를 면할 수 없고, 병조 정랑 구성은 원래 근시(近侍)하는 신하도 아니며 또 왕명을 받들어 출입하는 직책도 아닌데 여러 신하가 입대(入對)한 뒤에 같이 시종하는 신하들의 반열에 있으면서 행동이 질서없어 조정의 체모를 크게 잃었으니 파직시키기를 청합니다.” 하여 임금이 그 말을 따라 유홍으로 우상을 시키고 최흥원과 윤두수를 차례로 승진시켰다. 《기재잡기》
○ 임금이 호남과 영남에서 징병을 하려 하나 한 사람도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보덕 심대가 강개하게 청하기를, “이런 때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이 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데 혼자서 가겠다고 청하니 정말 기쁘다.” 하고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려주어 보내려 한즉 심대는, “신이 만약 거기에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오면 상으로 주시는 벼슬을 잘못 받는 것이 되니 복명하는 날에 신이 마땅히 받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위로하여 보냈다. 《기재잡기》
○ 유홍ㆍ이항복에게 신성군ㆍ정원군 두 왕자를 모시고 먼저 평양으로 가게 하고 이항복을 이조 참의로 올렸다. 《계곡집》
○ 이날 3일 적이 서울에 들어왔다. 처음 동래서부터 세 길로 나누어 들어왔는데 한 패는 가운데 길로 양산ㆍ밀양ㆍ청도ㆍ대구ㆍ인동ㆍ선산으로 해서 상주에 이르러 이일의 군사를 쳐부수고, 한 패는 경상좌도의 길로 장기ㆍ기장을 거쳐 좌병영을 함락시키고 울산ㆍ경주ㆍ영천ㆍ신령ㆍ의흥ㆍ군위ㆍ비안을 유린한 후 용궁 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나와 상주의 왜적과 합세해서 조령을 넘어 충주에 들어가서 신립의 군사를 쳤다.
또 충주서 두 길로 갈라져 하나는 여주로 달려 강을 건너 양근을 지나 용진의 나루를 건너 서울 동쪽으로 나오고, 하나는 죽산으로 달려 용인을 지나 한강 남쪽에 이르고, 또 한 패는 김해를 지나 경상우도로 나가 성주 무계현으로부터 강을 건너 지례ㆍ금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가서 청주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내 경기도를 향하였는데 기치ㆍ창검이 천리에 뻗치었고 포성은 우뢰 같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어 지나는 곳마다 잔인한 살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또 동래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10리ㆍ5리 혹은 30리라 한다. 마다 요지에 병영을 만들어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고 있어 밤이면 불을 들어 신호하고 낮이면 징과 북을 쳐서 상대에게 알렸다. 《조야기문》 《징비록》
○ 적이 여주에 이르렀을 때 강원도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가 벽사(甓寺 신륵사)에 군사를 주둔시켜 뱃길을 끊어 적이 건너지 못하여 대치하고 있은 지 며칠 되었다. 순찰사 유영길(柳永吉)이 격서를 보내 원호를 본도로 불러 가버렸으므로 적이 민가와 관청을 헐어 그 재목으로 뗏목을 만들어서 강을 건너 양근으로 향하였다.
○ 이날 적의 선봉이 한강에 이르렀을 때 도원수 김명원이 제천정(濟川亭)에서 바라보니 적의 기세가 대단하고 날아오는 탄알이 정자 위에 떨어지므로 감히 싸우지도 못하고 무기를 다 강물에 빠뜨리고 임진으로 물러가서 주둔하였다.
한강을 지키지 못하자 종사관 심우정(沈友正)이 울면서 명원에게 말하기를, “임진을 지켜서 그 뒤를 막게 합시다.” 해서 명원은 드디어 임진으로 향하고 부원수 신각(申恪)도 역시 필마로 달아나서 대군이 무너졌다.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은 한강의 군사가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성을 지키지 못할 줄을 알고 양주로 달아났다. 이때 세 길로 올라온 적병이 모두 서울에 이르렀는데 성중이 조용하고 군사와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또 성문이 열려 있으므로 적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성중 반민(叛民)들이 나와 맞아들이니 적이 들어가 점거하고 종묘ㆍ궁궐, 공사 가옥(公私家屋)을 불태우고 재물들을 긁어다가 날마다 그들의 나라로 실어갔다.
○ 이때 성안 백성들이 모두 달아났다가 얼마 되지 않아 차츰차츰 돌아와서 방리(坊里)의 시장이 전일과 같고 적과 섞이어 물건을 서로 매매했다. 적이 성문을 지키고 우리 백성들로서 적의 첩(帖)을 가진 사람은 출입을 금하지 않으므로 모두들 적의 첩을 받아 적에게 복종하여 감히 영을 어기지 못하였다. 또한 적에게 아첨해서 길잡이가 되어 못된 짓을 하는 자도 있었다. 혹시 적을 죽이려 모의를 하면 그들이 밀고하므로 종루 앞이나 숭례문 밖에서 불태워 죽이고 극히 참혹한 짓으로 두렵게 하려고 시체를 그곳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 이 전에 양산 사람이 적에게 포로되었는데 적이 글로써, “네 나라가 방어한들 무슨 소용이랴. 불과 20일이면 마땅히 경성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써 보이더니 이때에 이르러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순영록》
○ 적이 처음 서울에 들어와서 궁궐만 불태우고 공사 가옥은 오히려 그대로 있었다. 적의 대장 평수가(平秀家)가 종묘에 거처하고 있는데 밤으로 괴이한 일이 많고 그 안에 있는 왜졸들이 가끔 폭사(暴死)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종묘에 신령이 있으니 오래 거처할 수 없다.” 하였다. 수가(秀家)가 겁을 내어 소공주(小公主)댁 지금 남별궁 으로 옮기고 종묘를 불태웠다.
○ 임금이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교서[罪己書]를 8도에 보내고 사신을 각 도에 보내어 의병(義兵)을 소집케 하였다.
○ 4일에 김명원이 임진(臨津)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적의 상황을 아뢰었다. 임금은 명원에게 군사가 없었다는 상황을 참작하여 퇴각하여 달아난 죄를 묻지 않고 다시 경기ㆍ황해도 군사를 징발하여 임진나루를 지키라 명하였다.
○ 남병사 신할(申硈)이 부름을 받고 올라오니 통어사로 삼아 함께 임진을 지켜 서해 쪽으로 내려가려는 적을 막게 하였다. 유극량(劉克良) 역시 군사를 영솔하고 와서 부하에 예속되었다.
○ 이날 임금의 행차는 개성을 떠나 저녁에 금교역에 도착하였다. 《일월록》과 《조야첨재》에는 다 《징비록》대로 3일에 떠났다 했다. 이하 4일에서 8일까지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 신잡ㆍ이홍로 2일 가 임금의 편지를 받고 남아있는 백성들을 위유(慰諭)하러 서울로 가다가 마산(馬山)에 이르러서 시중의 뜬소문을 잘못 듣고 오후에 신잡이 겁을 내어 혼자 돌아와서, “적이 벌써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임금이 즉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하였다.
○ 어둑어둑할 무렵에 행차가 떠났다. 《일월록》에는 3일 행차가 떠났다고 하였다. 상하가 시끄럽기는 임진강 건널 때보다 심하였다. 밤에 금교역에 도착해서 재상 이하가 모두 풀밭에서 노숙하였다. 이날 밤에 군인들이 놀라 소리친 것이 4, 5차례나 되어 사람들이 잠을 잘 수 없었다. 한응인을 순경사(巡警使)로 삼아 호위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기재잡기》
○ 5일 오후에 금암역에 도착하였다. 임금이 이조(吏曹)에 명하여 호종 인원의 성명을 써서 올리게 하고 해질 무렵 평산에 이르러 보산역에서 잤다. 《기재잡기》 ○ 《일월록》에는 4일이라 하였다. 《조야첨재》 《기재잡기》에도 같다.
○ 처음 예조 판서 정창연이 아뢰기를, “태묘(太廟) 신주를 말 위에 실으려면 50여 필의 말이 필요한데 지금 여러 고을의 말이 다 없어져서 신주를 옮길 여력이 되지 못하므로 만약 급한 경우가 닥치면 반드시 낭패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니 미리 정결한 땅속에 묻어 모시어서 일행의 행차를 쉽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여러 관원들은 모두 새 정승이 취임한 뒤에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나 어가가 떠났다는 말을 듣고 창연이 여러 대신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종묘와 사직단의 신주를 목청전(穆淸殿) 바른편에 묻었다.
보산역에 가서 해풍군(海豐君) 기(耆) 등이 윤두수의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대감이 대신으로서 유사(有司)가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버려도 알지 못한 것은 어인 일이오?” 하였다. 두수가 깜짝 놀라, “그날은 내가 정승 되던 날인데 내가 정승이 되자 나라가 망했구나. 공의 말이 아니었던들 나라가 나라의 꼴이 아닐 뻔했소.” 하고 흐느껴 울고 드디어 예조 참의 이정립과 종묘 제조 윤자신(尹自新)을 보내어 묻었던 신주를 모셔오게 하니 10일에 비로소 뒤따라 평양에 이르렀다. 《기재잡기》
○ 6일 《일월록》에는 5일에는 안성에서 점심을 들고 저녁에 용천(龍泉 서흥부(瑞興府))에서 자야 했지만 안성과 용천에서 지공(支供)을 못 대었다. 부득이 참(站)을 배나 더 가서 검수역을 지나 봉산에 도착하니 벌써 초경인데 상하 인원이 굶주려 움직이지 못했다. 대사헌 이헌국이 화를 내어 꾸짖기를, “정승이고 승지고 모두 개새끼이다. 어찌 임금이 수라도 못 잡숫고 가게 하는가.” 하고 말 위에서 팔을 치켜들며 마치 주먹으로 칠 것 같은 모양을 하니 모두 웃었다. 《기재잡기》
○ 7일에 행차가 황주에 닿았다. 《일월록》에는 6일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이 장연 현감 김여율(金汝嵂)에게, “자네 백씨 여물(汝岉) 는 비록 문관이나 적에게 죽었는데 자네는 젊은 무관으로 어떻게 편하게 앉아 있겠는가. 속히 가서 복수를 도모하는 것이 좋겠네.” 하니, 여율이 난처한 빛을 보였다. 충겸이 꾸짖어 말하기를, “자네처럼 겁많은 사람은 목을 베어 달겠네.” 하니 여율이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스스로 한 지역을 맡겠다고 청하였다. 임금은 그를 충의와 용기가 있다 해서 특별히 통정의 자급으로 올려서 보냈다. 《기재잡기》
○ 황해 병사를 신설하여 황해도 순찰사 조인득을 자리를 옮겨 임명하고 유영경을 순찰사로 삼았다. 《조야첨재》
○ 8일 《일월록》에는 7일 임금이 평양에 들어가니 감사 송언신이 3천여 군마를 거느리고 행차를 맞았다. 창칼이 햇빛을 받아 번쩍이고 성중 백성의 가옥들이 서울과 같아 호종한 사람들이 비로소 기운을 차렸다.
○ 조정에서 의논하여 김명원ㆍ신할이 비록 임진(臨津)에 있으나 병력이 아주 모자란다고 지사 한응인을 각 도의 도순찰사로 하고 이천(李薦)을 방어사로 삼았다. 《기재잡기》
○ 9일에 이성중이 와서 말하기를, “3일에 적이 서울에 들어오고 이양원은 간 곳을 알 수 없다.” 하였다. 드디어 유홍을 우의정 겸 도체찰사로 삼아 군사 3천 명을 주어 떠나게 하였으나 유홍은 명을 받은 지 여러 날이 지나도 떠날 기색이 안 보여 임금이 불러서 물으니, “다리 아래에 종기가 있어 그 때문에 떠나지 못합니다.” 하니 이헌국이 “대감이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데도 이미 정승이 되었으니 은혜가 지극히 큽니다. 그런데도 겁내어 가지 않으니 마치 연회에 나갈 기생이 발 아프다 핑계하고 가무하지 않는 것과 같소.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소.” 하고 꾸짖었다. 임금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한응인을 먼저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여 유홍은 마침내 가지 않았다. 《기재잡기》
○ 드디어 한응인ㆍ이천에게 평안도 강변(江邊) 정병(精兵) 5천 명을 영솔시켜 보내며 임진에 가서 적을 치되 김명원의 절제는 받지 말라 하였다. 《조야기문》 《기재잡기》
○ 수일 뒤에 임금이 대동관 문루에 나오니 부로(父老)들이 앞에 와서 절을 하므로 임금이 이들을 위무하였다. 생원 양의직(楊懿直) 등은 상소해서 변란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극진하게 아뢰었다. 임금은, “오늘 일은 나의 죄이며 소에 말한 뜻을 보니 충성이 가상하다.”고 답하였다. 이튿날 함구문(含毬門)에 나와서 손가락으로 옛날 정전(井田)을 구획한 곳을 가리키면서 성을 지킬 계책도 강구하였다.
○ 호종한 신하들에게 자급을 올려주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조 참판 이항복은 뜻과 생각이 곧고 밝아 위급할 때 크게 등용하기에 합당하니 마땅히 뽑아올려 중임을 맡겨야 한다.” 하고 금방 형조 판서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병조 판서를 시켰다.
○ 대간에서 이산해가 궁중과 결탁하여 나라 일을 그르친 죄를 발론하니 사흘만에 윤허를 받아 산해를 평해로 귀양보내었다. 또, “김공량은 일개 천한 사람으로 궁중 세력을 빙자하고 권흉(權兇)과 결탁하여 조정 정치를 흐리게 하고 선비들의 들고 나는 것이 모두 그의 손에 매여,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공량을 베어서 일국(一國)에 사죄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나라가 망할지언정 죄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 하다가 여러 번 청하니 윤허하였으나 이때 공량이 강원도에 피난 가 있어 찾지 못하였고 난이 평정된 뒤에도 다시 죄를 묻지 않았다. 《일월록》 《기재잡기》
○ 12일에 임금이 전교를 내리기를, “옛적부터 난을 만난 임금은 반드시 자신을 낮추는 거조가 있으니 이제부터는 모든 상주문서에 예성(睿聖)이라는 존호를 일체 쓰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이성중이, “이것이 참으로 훌륭하신 조처이니 당연히 따르고 받들어 겸손하신 아름다운 은덕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하였으나 윤두수는, “오늘날 마침내 이런 변을 만난 것이 모두 신하의 잘못인데 임금께서 먼저 자폄(自貶)하도록 권하는 것이 어찌 의리에 합당하단 말인가.” 하고 폄(貶)하여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니 여러 사람들이 옳게 여겼다.
○ 13일 이성임을 순찰부사로 삼아 뒤늦게 도착한 강변 토병(土兵)을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게 하였다. 《기재잡기》
○ 이덕형이 용인에서 뒤따라와서 복명하고 묘당(廟堂)에 말하기를, “여러 도의 인심이 원망과 반감을 품지 않은 곳이 없고 가는 곳마다 욕설을 퍼부으면서 공공연하게 윗사람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니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만약 큰 조처로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지 않으면 예측하기 어려운 변란이 가까운 시일 안에 있을 것이오.” 하였다. 윤두수는 안색이 변하여 대답하지 못하다가 천천히 말하기를, “나라가 아무리 위급한들 어찌 신하로서 감히 하지 못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오음(梧陰) 행장에는 단지 한 재상이라고만 하고 그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이때 덕형이 이항복과 같이 자면서 당연히 영무(靈武)의 옛일을 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항복이, “자네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기에 왜인이 조선왕으로 봉하려 한다는 말이 날마다 행조(行朝 지방에 임시로 파견된 조정을 말한다)에 퍼지고 있는데 지금 또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죽음이 겁나지 않는냐.” 하고 꾸짖었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국가에 이로울 일이라면 비록 죽게 되더라도 말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며 밤이 깊도록 다투며 견해를 바꾸지 않으니 항복이, “우선 내일 윤 정승에게 말해 보시오.” 하였다. 덕형이 그 의견을 말하자 두수가 눈을 치켜뜨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눈을 감고 답하지 않으니 덕형이 맥이 빠져 물러났다.
○ 부원수 신각을 참형하였다. 한강을 지키는 군사가 무너질 때 신각이 이양원을 따라 양주에 와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니 남병사 이혼(李渾)의 병력이 마침 와서 신각과 같이 진을 치고 양주 게재[蟹峴]에서 적과 맞붙어 싸워 머리 70급(級)을 베었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뒤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승전이 있어 모두들 듣고 어깨춤을 추었다. 양원은 이때 산골에 있어 장계를 올릴 길이 막혔는데 명원이 임진에서 장계를 올려, “신각이 주장(主將)의 명을 어기고 마음대로 다른 장수의 진에 가서 불러도 오지 않으니 죄를 주소서.” 하고 청하였다.
우의정 유홍이 문득 참하기를 청하여 선전관이 이미 출발한 뒤에 신각의 첩서(捷書)가 이르렀으므로 19일에 선전관을 보내고 오후에 첩보가 왔다. 죽이지 말라고 사람을 뒤따라 보내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일월록》 《기재잡기》
신각은 비록 무인이나 본래 청렴하고 근신하여 일찍 연안 부사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해자를 파두었으므로 이정암이 연안성을 온전히 지킨 것은 사람들이 신각의 공이라 하였다. 죄없이 죽은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90노모가 있다.
○ 좌병사 이각을 임진 군중에서 베었다. 이각이 성을 버리고 단신으로 달아나서 근왕(勤王)하러 간다 핑계하고 영남을 버리고 죽령을 넘어와서 김명원을 만났다.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어 목을 베어서 조리돌렸다. 《기재잡기》 《일월록》
○ 17일에 유극량(劉克良)ㆍ신할(申硈)이 임진에서 패전해서 죽고 여러 장수의 진이 무너져 돌아갔다. 처음 적이 서울에 들어와서 군사를 수일 쉬니 시중에 뜬소문이 퍼지기를 왜인이 멀리 와서 발이 부르트고 피곤해 쓰러지니 몽둥이로 때려 잡을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 행조(行朝)에서 이것을 전해 듣고 사실로 믿고서 한창 김명원이 한강을 지키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던 때라 명원을 재촉하여 임진강을 건너 전진하여 서울을 수복하라 명하였다.
명원이 감히 따르지 못하고 있을 즈음 한응인이 주청사(奏請使)로 갔다가 북경에서 돌아오고 관서의 토병(土兵) 천여 명도 이르렀는데 예전에 북방 오랑캐와 싸워 본 정예병이었다. 드디어 한응인으로 도순찰사를 삼아 그 군사를 영솔하고 임진에 주둔해서 기회를 보아 나가 싸우게 하니, 응인이 주저하지 않고 임진강 어귀까지 달려갔다.
○ 5월 12일에 김명원이 급히 장계하기를, “신은 이빈(李薲)ㆍ유극량 이하 여러 장수 20여명과 군사 7천여 명으로 임진에 주둔하고 벽제역 등지에 복병을 두어 적을 많이 잡아 죽였고 이양원도 역시 이일ㆍ신각 이하 여러 장수 10여 명과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대탄(大灘)에 주둔하여 바야흐로 전진하여 서울을 취할 것을 꾀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하가 듣고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행차가 환도하리라.” 하였다.
○ 13일에 권징이 급히 장계하기를, “적이 고립된 병력으로 깊이 들어와 발에 물집이 생기고 기운이 빠져 그 기세가 이미 꺾이었으니 원수(元帥)를 독려하여 기회를 타 급히 공격하도록 하소서.” 하니, 조정이 그 말을 믿고 계속 명원에게 명령을 내리고 적을 지켜만 보고 치지 않는다고 엄히 문책하였다.
○ 명원이 여러 장수를 포진시켜 지키며 서로 대치한 지 8, 9일이 되어도 적이 건너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이 군막을 불태우고 군기를 싣고 물러가는 모양새를 꾸미고 산골짜기에 군사를 숨겨 두고 허한 모습을 보여 아군을 유도하였다. 신할이 강을 건너 적을 추격하려 한즉 권징도 신할의 뜻과 같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피로하여 믿을 것은 강변 토병인데 멀리에서 와서 피곤하니 조금 휴식을 취하고서 거사하면 이길 것이다.” 하니 응인은 그 말하는 이를 이를 머뭇거리고 주저한다 여기고 두어 사람 베었다. 별장(別將) 유극량은 나이 많고 병사(兵事)를 익히 알아 가볍게 거사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말하니 신할이 극량을 베려 하였다.
극량이 말하기를, “내가 상투 틀고 나서부터 종군했으니 어찌 죽음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말이겠소. 내가 말한 것은 국사를 그르칠까 염려되기 때문이오.” 하고 분개해서 나가 그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건너가서 적의 순라하는 기병 두어 사람을 만나 베었다. 이때 명원도 역시 불가하다고 말하였으나 신할은 듣지 않았다. 일설에는, 명원이 응인은 명원의 절제(節制)를 받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 해서 알고도 감히 말 못했다 한다. 대개 조정에서는 신할에게 크게 의지하여 편의대로 진군하고 원수(元帥)의 절제를 받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응인은 모든 군사에게 강을 건너도록 하였다.
신할은 좌군(左軍)을 통솔하여 먼저 적의 진지에 근접하니 나무하고 풀 베던 적이 멀리서 보고 달려 돌아갔다. 여러 사람이 멀리서 그것을 보고 다 우리 군사가 이겨서 진군하는 줄 알았다. 검찰사 박충간과 독군관(督軍官) 홍봉상(洪鳳祥) 명원의 종사관 은 우리 군사가 반드시 이긴다고 환호하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봉상은 급히 강을 건너 관병(觀兵)하고 있는데 적 7, 8명이 알몸뚱이로 칼을 휘두르며 나와 우리 진에 바로 들어가고 복병이 동시에 일어나 칼과 총알이 부딪치니 우리 좌우 병력이 모두 달아나 흩어졌다.
극량이 신할을 불러 진을 수습하여 퇴각시키려 했으나 신할이 대꾸를 하지 않더니 신할이 드디어 죽었다. 극량이 말을 내려서 땅에 앉아, 여기가 내 죽을 곳이다 하고 활을 당기어 적을 쏘다가 살이 다해 죽고 모든 군사들도 강으로 다투어 뛰어드니, 적이 긴 칼을 휘둘러 어지럽게 베므로 물에 빠진 사람이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같았다. 봉상도 역시 죽었다. 이날이 17일이다. 《일월록》 《기재잡기》
○ 명원ㆍ응인이 강 북쪽으로 달아나 바라보고 기운이 빠졌다. 충간은 말을 타고 채찍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명원ㆍ응인ㆍ충간이 모두 푸른 옷을 입었는데 강가에 있던 군사가 멀리서 바라보고 한꺼번에 원수가 달아났다고 부르짖으며 흩어졌다. 응인이 친히 나와,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 외쳐서 군사들이 비로소 다시 모였는데 남은 군사가 겨우 천명이었다. 《기재잡기》
○ 명원ㆍ응인은 달아나서 행재소로 오고 권징은 가평으로 달아나서 숨었다.
봉상이 이날 싸움을 보려고 강을 건너려 하는 것을 명원이 말렸다. 봉상은 신할 등이 싸우는 것을 흡족하게 여겨 기어이 청해서 따라가서 드디어 죽게 되었다. 《일월록》
○ 유극량은 연안 사람이며 개성에 옮겨 살았음 시호는 무의(武毅)이며, 관직은 부원수에 이르렀다. 그 어머니는 홍섬(洪暹)의 여종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라 현달(顯達)하니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나는 홍 정승집 여종이었다. 젊을 때 잘못하여 옥잔을 깨뜨리고 벌받을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가 너의 아버지를 만나 너를 낳았다.” 하였다.
이에 극량이 깜짝 놀라 즉시 서울에 와서 상전의 집을 찾아가 그 사정을 말하고 상소하여 과거를 무효로 하고 도로 종이 되려 하니, 홍섬이 기어코 막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내 종이 아닌데 무슨 일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니 극량이, “어미가 이미 말한 것인데 어찌 감히 법을 어겨 상전을 배반하고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하였다. 홍섬이 그를 의롭게 여겨 종을 면하는 문서를 만들어 내어 주니 극량이 사례하고 갔다. 뒤에도 매양 상전이라 일컫고 찾아갈 때는 동구에서부터 걸어서 들어가고 선물은 반드시 손수 올렸다.
위장(衛將)이 되어 군사를 나누는데 홍섬이 대궐에 입직(入直)하다가 할 말이 있어 쪽지에 몇 자 적어 부르니 즉시 일어나 가려 하였다. 총부관(摠府官)의 말이, “군사를 나누는 것은 나라의 대사인데 자네가 어찌 경솔히 나가는가?” 하니 극량이, “상전이 부르는데 어찌 지체할 수 있단 말인가.” 대답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였다. 《명신록》
○ 이때 신할이 적병이 적음을 보고 강을 건너가서 치고자 하니 극량이, “적이 적은 것은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니 부디 경솔하게 건너가지 맙시다.” 하였다. 신할이 듣지 않고 배를 타고 건너니 극량이, “대장이 건너가는데 내가 어찌 뒤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따라 건넜다. 적병이 대규모로 오므로 할이 낭패하여 다시 건너오다가 반도 못 건너 빠져 죽었다. 극량은 초상(軺床)에 걸터앉아 꼼짝 않고 군사들을 지휘해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명신록》
○ 19일에 신할이 패전한 보고가 평양에 이르니 상하가 낙담하였다. 동원되지 않은 강변 토병(江邊土兵)들을 불러 모두 군대에 나가도록 하였다. 《기재잡기》
○ 27일에 적이 임진강 하류에서 조그마한 배를 타고 건넜다. 혹은 바로 건널 것 같은 기세를 해서 우리 군사를 시험했다고 했다. 부원수 이빈은 화살 한 대 쏘아보지 않고 먼저 도망치니 모든 군사가 일시에 무너졌다. 이양원 등은 적이 이미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흩어져 북도로 향했다. 《기재잡기》
○ 행장ㆍ청정 두 적이 임진강을 건너니 군사가 25만이었다. 황해도 경계에 이르러 청정은 함경도로 향하고 행장은 평안도로 향하였다. 《조야기문》
○ 평수가는 서울에 주둔하고 여러 장수들을 갈라 보냈다. 행장ㆍ청정ㆍ휘원(輝元)ㆍ장정(長政)ㆍ성정(盛政)은 같이 임진강을 건너서 군사 25만 안성역 평산 땅 에 이르러 함경ㆍ평안 양도를 나누어 침범할 모의를 하다가 각각 갈 곳을 결정짓지 못하여 제비를 뽑아 행장은 평안도, 청정은 함경도, 장정은 황해도의 제비를 뽑아 각각 군사를 인솔하고 갔다.
○ 29일에 왜적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임금이 구사맹ㆍ신잡ㆍ구성에게 명하여 신성군과 정원군을 모시고 영변(寧邊)으로 가게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임진의 군사가 족히 막아내리라 하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평안 감사 송언신과 병사 이윤덕은 사색이 되어 모두 넋을 잃은 채 미투리를 신고 갔다. 《기재잡기》
○ 당초 조정이 도성을 떠나던 날 백관으로 뒤에 떨어진 자들을 비록 일일이 죄줄 수 없는 일이나 총부ㆍ위장ㆍ의금부 관원은 한직의 아문(衙門)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여 모두 백의로 종군해서 공을 세워 죄를 씻도록 하였다. 이때 대사간 김찬ㆍ부제학 홍인상ㆍ집의 권협ㆍ종묘 령 권회ㆍ이조 정랑 박동현ㆍ봉교 강수준(姜秀峻)ㆍ대사성 임국로등은 연달아 상소하고 부모 있는 곳이 다 도륙되었으니 귀성(歸省)하기를 원한다 하므로 임금이 다 허락하였다.
그러자 상소하고 돌아가려는 자가 분분히 나와 그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임금이나 어버이가 일체인데 만일 모두 귀성하게 되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 일을 하겠는가 하고 일체 허락해 주지 말기를 청하였다. 이 뒤부터는 사직소를 올리지 않고 가버리는 자가 많았다. 《기재잡기》
○ 6월 1일, 이때 임진강의 방비가 무너지니 더욱 다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임금이 묘당(廟堂)을 시켜 거취를 의논케 하였다. 정철의 말은, “여기는 서울처럼 죽음으로 지켜야 할 곳은 아니니 한 대장을 시켜 지키게 하고 어가를 모시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심충겸ㆍ이덕형이 이어서 찬성하여 여럿이 다 옳게 여겼으나 다만 윤두수ㆍ이유징ㆍ박동량이, “이것은 매우 불가하다. 우리나라 강역이 남북이 수천 리에 불과한데 북도로 가면 땅이 끝나 더 갈 데가 없고, 압록강을 건너면 한 번 건넌 뒤에는 다시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비록 하루를 살아간들 무슨 유익됨이 있을까.
평양은 사면이 매우 험해서 방어하기 쉽고 군사가 만(萬)이 넘고 양식도 역시 많으니 여기서 한 걸음만 떠나면 국사는 끝장이 납니다.” 하였다. 두수가 그 말을 극력 주장하고 또 아뢰기를,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급히 요동(遼東)에 구원을 청하고 또 원수(元帥)와 여러 장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죽음으로써 지키기를 꾀하소서.” 하니 임금은, “국사는 이미 경에게 맡겼으니 잘하오.” 하였다.
이날 저녁에 이빈도 와서, “이 평양성 외에는 지킬 만한 곳이 없으니 다시 다른 의논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이, “내가 먼저 나갈 것이니 세자가 이 성을 지키라.” 하고 대동관에 나와서 부로(父老)들에게 세자와 같이 성을 지키라고 타이르니 심희수(沈喜壽)가 이 말을 전하는데 그 목소리가 슬프고 간절해서 성안 부로들과 시종하는 상하 관원들 중에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기재잡기》
○ 2일에 명원ㆍ응인이 단지 군관 5, 60명만을 데려오고, 이성임(李聖任)ㆍ이천 등은 도망하였다. 조정에서는 임진강을 지키지 못한 것이 모두 응인의 죄라고 하여 그로 하여금 강동(江東) 여러 곳을 지켜 공을 세워 죄를 씻도록 하였다. 《기재잡기》
○ 조정에서 적이 양덕(陽德) 길로 돌아올까 염려하고 홍여순을 순찰사로 삼아 양덕에 가서 방비하게 하였다. 여순이 임금에게 면대를 청하면서,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한 다음 역마(驛馬)를 징발하여 싸움에 대비하기를 청하니 윤두수는, “여순이 이러는 것은 가지 않으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보내지 말기를 청했다.
○ 2일에 이일(李鎰)이 중로에서 보낸 장계에, “신이 군사 3천을 거느리고 먼저 행재소(行在所)에 가겠사오니 평양을 굳게 지키고 다른 계책은 내지 마소서. 신이 힘을 다하고 명을 다하여 죽음으로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의 의논이 흉흉해서 가느냐, 머무느냐를 정하지 못하다가 이 장계를 보고 죽기로 지킬 마음을 가졌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거취를 의논하게 하니 두수가, “온 성중 사람이 모두 전하와 더불어 죽음으로 이 성을 지키기를 원하며 대가가 만일 나가면 일시에 무너질 것이라 하오니 인심이 이와 같으니 족히 적을 당해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성 외에는 어느 곳이 피난하기에 적합하며 어느 곳이 방어가 튼튼한 곳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은, “경의 말이 너무 답답하다.” 하고 다시 군신들과 더불어 거취를 의논하였다. 이때 임금의 얼굴빛이 참담하고 말소리가 슬프고 간절하여 신하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정철이 나와 두수에게, “좌상의 말이 좋긴 하나 주상의 안색을 보지 못하는가. 신자가 되어 어찌 차마 머무르게 하고 억지로 성을 지키려 하오.” 하니 두수가 소리를 높여, “공이 어찌 이러한 국사를 그르칠 말을 낸단 말이오. 만약에 서울을 굳게 지킬 계책을 일찌감치 가졌더라면 어찌 이 지경이 되었겠소.
공이 이 성을 지키고 싶지 않거든 행차를 혼자 모시고 가는 게 옳을 것이오.” 하니 정철은 대답하지 못하고 이덕형과 심충겸이 말하기를, “지금 국토가 이미 줄어서 단지 함경도 하나만 남았으나 함흥부는 군사가 많고 양식이 많아서 족히 막고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여러 사람도 다 그렇다 하였다. 두수는, “함흥의 형세는 여기에 반도 미치지 못하니 만일 적이 닥치면 다시 갈 곳이 있는가. 그리고 적은 북도에는 어찌 가지 않을 것인가.” 하고 임금께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이 성을 지키지 않으시려면 물러나 머물 곳이 세 군데가 있으니, 급히 영변으로 가셔서 무기를 고쳐서 강변 군사를 불러 지키다가 일이 위태하면 바로 의주로 가셔서 명 나라에 호소하는 것이 상책이오.
멀리 강계로 향해 가서 여러 고을 군사를 모아 성을 굳게 지키면 가히 1, 2개월은 지탱할 것이며, 일이 급하면 배를 타고 내려가면 곧 중국의 관전보(寬典堡)이니 이것이 둘째 계책이며, 함흥 형세는 신이 잘 아는 바로, 성은 크면서 낮고 사면에 험한 곳이 없어 근처 토병(土兵)을 불러들이면 북쪽 야인들이 허술함을 타서 침범하고, 남도로 향하다가는 길이 험하여 적이 뒤를 따르면 반드시 곤경에 빠질 것이니 여기에는 결코 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여러 사람은 오히려 북도는 길이 험하고 궁벽하여 적이 반드시 가지 않을 것이니 함흥은 지킬 수 있다고 하였다. 임금이 유홍에게 명하여 중전을 모시고 먼저 북도로 향하라 명하였다.
두수가 나와, “이일(李鎰)은 노련한 장수라 반드시 좋은 의견이 있을 것이오니 그의 오는 것을 기다려 북도로 가는 것을 결정짓기 바라오.” 하였다. 이날 낮에 이일이 이르니 온 조정이 이일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를 쳐다보면서 둘러싸고 앉았다. 이일은, “이 적은 당할 수 없으니 평양을 떠나야 하고, 함흥은 제일 먼저 적을 받을 이 성과 비교도 안 되니 그리로 가야 한다.” 하니 충겸은 그 등을 두들기며, “참다운 장수다.” 하고 덕형도 기뻐하면서, “그러기에 이일이다.” 하고 두수는, “실성한 사람이니 말할 것이 없다.” 하였다. 《기재잡기》
○ 6일에 유홍ㆍ최황 등이 중전ㆍ빈궁(嬪宮)ㆍ왕자를 모시고 함흥을 향해 떠났다.
○ 이때 적이 임진강을 건넌 지 열흘째인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초병을 보내어 정탐도 하지 않다가 처음으로 용사 김진(金珍)ㆍ임욱경(任旭景) 등 12명을 보냈더니 적을 황주에서 만나 머리 둘을 베어 돌아왔다.
○ 임금이 윤두수에게 명하여 김명원 이하를 거느리고 평양을 지키게 하였다. 임금이 세자로 하여금 평양을 지키게 하려 했으나 두수와 명원 등이 ‘인심들은 전하의 거취만 보고 있는데 어가가 나가면 세자가 비록 여기 있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이내 아뢰기를, “신들이 힘껏 지킬 터이오니 세자는 반드시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7일 아침에 적세가 조금 누그러지니 부제학 심충겸이 삼사(三司)를 거느리고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하기에 여기가 서울과 달라 죽기로 지킬 필요가 없는 줄 알았더니, 다시 생각한즉 이 외에는 이 성만큼 굳은 곳이 없으니 반드시 떠나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했다가 낮이 되어 중화(中和)에 적이 왔다는 소식이 오니 충겸이 또 삼사를 거느리고, “적세가 이미 임박했으니 어가가 머물 수 없습니다.” 하였다.
○ 8일에 적의 선봉이 대동강 가에 이르렀다. 임금이 드디어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하여 재신(宰臣) 노직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먼저 떠나니 아전과 백성들이 원망하고 격분해서 폭동을 일으켜 창과 칼로 마구 쳐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가 땅에 떨어졌다. 폭도들은 재신들을 보고 큰소리로 욕하기를, “너희들은 평일에 국록을 도적질해 먹고 국사를 그르쳐 이 지경이 되게 하지 않았는가. 성을 버리고자 하면서 우리를 속여 성안에 들어오게 하여 적의 손에 어육이 되게 하는가.” 하여 거의 궁문(宮門)에까지 와서 소란을 피울 기세였다. 감사 송언신이 주동자 세 사람을 베니 나머지는 흩어졌다.
이때 모든 신하들은 모두 겁이 나서 안색이 질렸다. 유성룡이 섬돌 위에 서서 손으로 그곳의 나이 먹은 토관(土官 그 지방 사람으로 하급 관리에 있는 사람)을 불러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힘을 다해 굳게 지키려는 것은 충성스럽기는 하나 어찌 궁문까지 놀라게 한단 말인가. 조정에서 지금 성을 지킬 공론을 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진정하지 않으면 죄를 면하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병기를 버리고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고 물러갔다. 《일월록》 《서애행장》
○ 이 밤에 적이 포로된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어, “한음(漢陰) 선생을 보기 원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이덕형을 가리킨 것이었다. 조정 공론이 덕형을 시켜 회담(會談)하여 화친하기를 의논해 보다가 안 되거든 용사를 시켜 조신(調信) 등을 쳐 죽이자 하니 두수는, “국세가 비록 이렇게 되었으나 어찌 도적의 지혜를 본뜨겠는가.” 했다. 《기재잡기》
덕형이 청하기를, “배를 타고 그들을 맞이하여 보고 군사를 늦출 것을 청해도 듣지 않으면 두 놈의 머리를 베겠다.” 하니 이항복이 “두 놈은 하찮은 것들로 죽여도 적에게 큰 손해도 못 되고 불의하다는 이름만 먼저 얻게 되니 옳은 꾀가 아니다.” 하니 그만 두었다. 〈백사행장〉
○ 9일에 덕형이 작은 배로 강 가운데서 적을 만나 보았다. 현소(玄蘇)가, “일본이 길을 빌려 중국에 조공하려 하는데 조선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니 지금이라도 한줄기 길만 빌려 중국에 들어가게만 해주면 무사하리라.” 하였다. 덕형이, 그들이 약속을 배반한 것을 책하고 또 군사를 물러가게 한 뒤에 의논하자 했으나 조신 등의 말이 자못 불손하므로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일월록》
덕형이 말하기를, “이번 거사가 무슨 명목이냐?” 하니 현소는, “귀국(貴國)과 서로 통할 말이 있었는데도 동래에서부터 서울까지 와도 말을 전할 수 없으므로 결국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하였다. 덕형이, “지금 이미 말을 통했는데도 어찌 군사를 물리지 않는냐?” 한즉 “일본은 전진할 줄 알고 뒤로 일보라도 후퇴할 줄은 모른다.” 하였다. 용사 박성경(朴成景) 등이 일이 틀린 것을 알고 죽이려 하는 것을 덕형이 눈짓으로 말리었다. 《기재잡기》
○ 10일에 행차가 곧 떠나려 하는데 궁녀들이 많이 먼저 나가니 성중 백성들이 도끼와 몽둥이를 가지고 길목에 기다리고 섰다가 마구 쳐서 판윤 홍여순이 상처를 입고 말에서 떨어졌다. 노인과 남녀들이 궁문 밖을 메우고 통곡하면서, “우리가 성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은 상감님만 믿고 죽기로써 지키려 한 것인데 갑자기 우리를 버리려 하니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 하고 부르짖으며 궁문을 헐어 부수고 모든 신하들을 쫓아버리려 했다. 승지가 나와 임금이 떠나기를 중지한다 해도 오히려 믿지 않았다. 이유징(李幼澄)이 큰 글씨로 ‘정행(停行)’이란 글자를 판목에 써서 사람을 시켜 지붕에 올라가 두루 보이게 하자 비로소 점점 흩어져 갔다. 《기재잡기》
이때 백성들이 홍여순의 등을 치면서, “금관자ㆍ옥관자 붙인 도적놈들아, 평시에 후한 녹을 먹고 왜적을 막지 못하고 또 임금으로 하여금 우리를 내버리고 가게 하려느냐.” 하고 난타했다.
○ 11일에 행차가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하는데 최흥원ㆍ정철이 따랐다.
○ 윤두수ㆍ유성룡ㆍ김명원ㆍ이원익ㆍ송언신 감사ㆍ이윤덕 병사 등에게 머물러 평양을 지키라 명했다. 《일월록》
○ 행차가 순안을 지나 저녁에 숙천에 이르렀다. 조정 공론이 국사가 이미 급해서 행차가 북도에 갈 것은 역시 기필할 수 없는데 중전만이 어찌 홀로 북도로 가겠는가. 영변으로 돌아와서 형세를 보아 거취를 정하는 것이 옳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기재잡기》
○ 행차는 이미 떠나고 윤두수ㆍ유성룡ㆍ김명원ㆍ이원익은 연광정에 있고 송언신은 대동문을 지키고, 이윤덕은 부벽루 위쪽 강나루를 지키고, 자산 군수 윤유후(尹裕後)는 장경문을 지키며 성중 군사와 장정들을 다 동원하니 3, 4천이었다. 성첩에 분배하니 부대와 항오(行伍)도 분명하지 못하여 어떤 곳은 듬성듬성 배치하고 어떤 곳은 빽빽하게 배치하였다. 옷가지를 을밀대 소나무 사이에 드문드문 걸어 두어 의병(疑兵)을 만들었다.
○ 이때 상하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임금이 여러 신하를 불러 계책을 물으니 이항복ㆍ이덕형은, “일이 급하니 신 등을 시켜 단기(單騎)로 명 나라에 달려가서 글을 올려 구원을 얻도록 하소서.” 하고 두 사람이 가겠다고 다투어 밤중까지 이르렀으나 임금은 입다물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심충겸은, “천하의 일은 형세뿐인데 지금 구원할 수 있는 형세라면 두 신하가 가지 않더라도 당연히 스스로 병력을 출동시킬 것이며 구원할 수 없는 형세라면 비록 두 신하가 같이 가더라도 무익합니다.
더구나 항복은 지금 병조 판서로 있으니 더욱 멀리 떠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덕형을 시켜서 청병하게 하였다. 떠날 때 항복이 남문에서 전별하는데 덕형이 “날랜 말이 없어 주야로 빨리 못 감이 한이로다.” 한즉 항복이 즉시 탔던 말을 풀어 주면서, “명 나라 군사가 못 나오면 자네는 나를 형장에서나 찾을 것이요, 서로 만나지 못하리라.” 하고 덕형은, “군사가 못 나오면 나는 마땅히 뼈를 노룡영(盧龍嶺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오는 국경의 재 이름)에 버리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지 않겠다.” 하고 두 사람이 눈물을 뿌리고 작별하였다. 백사행장
○ 12일에 임금이 안주 운암원(雲巖院)에 이르니 인민들이 모두 도망치고 흩어져 임금이 식사를 걸렀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부르니 다 벌써 흩어지고 없었다. 이후로 여러 호종하던 관원들이 모두 뒤에 처지고 행차를 따르는 사람은 10여 명이 되지 않았는데 역시 마음대로 먼저 앞에 가기도 하고 뒤에 떨어지기도 하여 시위하는 자는 많지 못하였다. 저녁에 안주에 이르렀다.
○ 13일에 임금이 영변에 이르니 성중에 사람과 가축이 벌써 다 흩어지고 없어 상하가 밥을 굶었다. 한응인이 급히 장계하기를, “적이 이미 대동강 동편 밖 여울을 건넜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를 불러 어디로 갈 것을 묻고 또 이르기를, “세자와 같이 한 곳에 있어서는 다시 국토를 수복할 가망이 없으니 갈라 가기만 못하다.” 하였다. 승지 이국(李)이, “명 나라는 부모의 나라이니 지금 의주로 가서 명 나라 조정에 구원을 청하고, 일이 만일 불리할 때에는 군신(君臣)이 압록강 물에 같이 죽어 대의(大義)를 천하에 알리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이항복도 역시 이 말이 옳다 하였다.
임금은, “내가 만약 요동으로 건너가게 되면 누가 능히 나를 따르겠느냐?” 하니 이항복ㆍ이국이 눈물을 흘리면서, “신 등이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최흥원ㆍ이헌국ㆍ이성중을 돌아보면서, “경 등은 모두 늙었으니 세자를 따르는 것이 옳다.” 하고 또 한준(韓準)에게, “경은 부모가 있으니 세자를 따르라.” 하니 여러 신하가 다 울고 임금도 눈물을 흘렸다. 《기재잡기》
○ 처음 임금이 경성(鏡城)으로 향하려 하니 이항복이, “함경 일도는 단지 한 갈래 길밖에 없어 적이 만일 바로 돌격하면 꼼짝 못하고 잡힐 수밖에 없으니, 이것은 위험한 길입니다. 또 방금 명 나라에 구원병을 청했으니 만일 명 나라에서 청을 들어주어 대병력이 하루 아침에 많이 오더라도 맞이할 사람이 없다면 황제가 듣고 우리들을 어떻게 여기겠는가. 바로 의주로 가서 명 나라 군사를 맞이해서 회복을 도모하다가 만약에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군신(君臣) 상하가 명 나라에 들어가 죽고 내부(內附 중국 내지로 들어가 부속된다는 것)하기를 요구해서 조용히 사세를 보아 다시 국토수복 전쟁을 거사하는 것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고 극력 주장하여 임금에게 뵈옵기를 청하자 밤이 이미 깊었다.
임금이 영변 동헌(東軒)에 나와 앉아서 촛불을 밝혀 놓고 불러들였다. 항복과 덕형이 이해(利害)를 진술하였다. 임금이, “내 뜻도 본래 내부(內附)하고 싶었는데 경의 말이 이러니 의주로 가야겠으나 단지 중전(中殿)이 벌써 북도로 갔으니 어찌 할고.” 하였다. 운산 군수 성대업(成大業)이 중전을 맞아 오기를 자청하고 그 군사를 인솔하여 밤새 달려갔다.
○ 이때 임금이 장차 의주로 가서 사세가 불리하면 요동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군신들은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난감하게 여겼다. 임금이 촛불 밑에 앉아서 대신들에게 한사람씩 친히 물으며 따라가기를 자원하는 자를 얻으려 하였다. 대신에게 물으니 대신이 대답하지 않아 다음으로 여러 신하에게 물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항복에게 이르자 대답하기를, “신이 나이 젊고 병이 없으며 또 부모도 없으니 어가를 따라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경에게 만약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억지로 갈 수 없으니 다시 생각하라.” 한즉, “이것은 신이 오늘 입으로만 전하의 물음에 말막음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떠날 때 죽기로써 맹세하고 처자와 형ㆍ누이들과 이미 영결하였으니 이 뜻을 결정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였다. 오직 이국ㆍ홍진(洪進)ㆍ이산보(李山甫)만 임금을 따르기를 원하고 다른 여러 신하들은 세자를 따르기를 원하였다.
대개 이날 밤에 임금이 세자에게 백관을 나누어 인솔하여 강원ㆍ경기도 등지에 진주(進駐)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이다. 항복은 부득이 아뢰어 호종단자(扈從單子)를 만들어 가지고 낙점(落點)을 받기를 청하니 최흥원이 여러 사람의 성명을 써 올리니 임금은 그 중에서 병이 없어 멀리 갈 수 있는 사람만 골라서 행차를 따르도록 낙점했다. 여러 신하들이 서로 말하기를, “압록강에 이르러 사세가 불리하여 강을 건너게 되면 나이 많고 병 있는 사람들은 따라갈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하였다. 《백사집》
○ 이때 적병이 점점 가까이 왔다. 임금이, “사세가 급박하게 되었으니 내가 마땅히 중국에 내부(內附)해야 하는데 부자가 다 압록강을 건너면 나라에 임금이 없게 된다.” 하고 세자에게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따로 강원ㆍ경기도 등지에 진주해서 사방의 군사를 불러 모아 수복하기를 명하였다. 영의정 최흥원 등이 따랐다. 〈백사행장〉
○ 이때 임금의 어가와 세자가 나뉘어 가는데 시위(侍衛)할 신하들이 따를 바를 알지 못하여 영의정 최흥원이 성명을 모두 써서 아뢰니 임금이 드디어 병 없고 멀리 갈 수 있는 사람만 골라 낙점하여 자기의 행차를 따르게 하였다.
지평 이정신(李廷臣)은 자기가 임금의 행차를 따르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하직도 아니하고 도망갔다. 임금이 또 한준(韓準)이 현재 호조 판서에 있으므로 자기를 따르도록 명했더니 한준이 낙상했다 핑계하고 성을 빠져나갔다. 《기재잡기》
○ 14일에 운산 군수 성대업, 익찬(翊贊) 유희담(柳希聃)을 보내어 중전과 세자빈을 맞아오게 하였다. 유홍 등이 중전을 호위하고 덕천에 이르러 급히 함흥으로 향하자고 날마다 재촉하는 말을 아뢰니 중전은 임금 행차 가신 곳을 아직까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이 고개를 한 번 넘은 뒤에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낭패가 될 것이라 하여 5일을 머무른 까닭에 대업 등이 뒤따라 만나게 되었다.
○ 15일 낮에 행차가 박천에 이르렀는데 이날 저녁에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왔다. 중전은 덕천에서 저물 무렵에 도착하여 임금과 중전이 급히 출발하였다. 세자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운산군으로 향하였다. 임금이 종묘와 사직 신주에 하직하면서 통곡하고 세자도 역시 통곡하였다. 행차가 떠날 때 세자가 절하고 하직하니 호종한 관원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하인들도 옷깃을 적시지 않은 자가 없었다. 《기재잡기》
이때 유홍이 세자를 호종하겠다고 자청하기를, “신이 이미 늙어서 요동을 건널 수 없사오니 세자를 따라 나라를 회복한 뒤에 어가를 영접하러 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행차가 떠나자 유홍이 길가에 엎드려 하직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답이 없었다. 뒤에 임금이 전교하기를, “유홍이 제 마음대로 행동하여 심히 군신(君臣)의 의(義)가 없다.” 하였다. 《기재잡기》
○ 세자가 이날 통곡하면서 강계로 향하였다.
○ 이날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처음 적병이 강기슭에 나뉘어 주둔해서 10여 개의 주둔지를 만들고 짚으로 막을 짓고 여러 날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윤두수ㆍ김명원이 성 위에서 바라보고 밤을 타서 엄습하면 가능하겠다 여기고 장사 4백여 명을 뽑아 고언백(高彦伯) 등을 시켜 인솔케 하고 능라도로부터 가만히 건너 삼경에 거사하기로 약속했으나 시간을 놓쳐 건너고 보니 벌써 새벽이었다. 적진에서 놀라 요란하였다. 아군이 많이 쏘아 죽이고 말 3백여 필을 빼앗았다.
조금 뒤에 여러 둔의 적이 크게 이르러 아군이 물러나 배를 타려 하나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적이 중류(中流)에 닥친 것을 보고 배를 대지 못하니 우리 군사 중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남은 군사가 왕성탄(王城灘) 대동강 상류에 있다. 으로 어지럽게 건너오니 적이 비로소 그곳이 물이 얕아 건널 수 있는 것을 알고 해가 저물 때 적병이 전부 건넜다. 왕성탄을 지키던 군사는 살 하나 쏘아보지 못하고 다 흩어져 도망하였다.
○ 이때 장사 임욱경(任旭景)ㆍ민여호(閔汝虎) 등이 퇴각하여 대동강변에 이르러 왜적을 잡아 거꾸로 쥐고 좌우로 마구 휘두르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왜적을 10여 명 쳐 죽였으나 마침내 그들도 빠져 죽었다. 명원 등이 연광정에서 목격하고 애통해 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이날 저녁에 적이 청은여울[靑銀灘]ㆍ백은여울에서 그 군사를 갈라 보내 건너려는 모양으로 시험하니 여울 지키던 장수 김억추(金億秋)ㆍ허숙(許淑)ㆍ이윤덕(李潤德) 등이 한꺼번에 도망쳐 흩어지고 위와 아래에 있는 여러 진이 따라서 흩어졌다. 《기재잡기》
○ 적이 건너고 나서도 방비가 있을까 의심하여 주저하며 들어오지 못하고 성밖에서 진을 치고 모란봉에 올라 한참동안 관망하다가 성이 비고 사람이 없음을 알고 이튿날 비로소 성에 들어왔다.
○ 윤두수등이 일이 글렀음을 알고 드디어 성중 사람들을 먼저 나가게 하고 이어 군기(軍器)는 풍월루(風月樓) 못 가운데 넣어버렸다. 종사관 김신원(金信元)은 잠깐 안악(安岳) 등지에 가서 군사와 백성을 불러모아 다시 무슨 계획을 하자고 청하였다. 두수는 울면서, “이미 성도 지키지 못하고 또 임금의 행차도 따르지 못하고서 해변에 떨어져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고 보통문으로 나와 순안으로 향하였다. 명원 등은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 신원은 배를 타고 달아나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 이날 저녁에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이르렀다. 임금과 중전이 급히 떠나니 밤이 이미 이경이었다. 비는 많이 내려 길은 질척거리며 시위하는 인원은 수십 명에 지나지 못하였다. 대신이라야 오직 원임대신 정철뿐이었다. 호종하고 가던 이항복이, “앞에 있는 시위 인원이 매우 적으니 내가 병조의 장관으로 뒤에 있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병조 좌랑 박동량과 더불어 말을 빨리 몰아 앞에서 인도하려고 어마(御馬)를 스치고 지나가니 임금이 더욱 든든하게 여겼다. 밤 오경에 가산에 이르렀다. 《일월록》 〈백사행장〉
○ 이날 저녁에 유성룡이 와서 평양을 지키지 못한 것을 보고하였다. 조금 뒤에 이원익이 이호민을 보내어서 적이 평양에 들어갔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급히 떠날 준비를 하게 하였다. 중전은 덕천에서 박천까지 재를 넘고 물을 건너 하루에 간 거리가 거의 160리이다. 가마에서 채 못 내리고 또 평양의 급보가 전해져 온 고을이 소란스러웠는데 저녁을 굶고 떠났다. 《기재잡기》
○ 이때 조정 신하로 행차를 따른 자가 겨우 10여 명이었다. 박동량은 6조의 통부(通符)를 차고 또 춘추관ㆍ한학 교수ㆍ내승(內乘) 등 직함을 겸해서 여러 사무를 처리하는데 모두 적절하게 처리하니 사람들이 주공근(周公瑾)에 비했다. 이때 나이 24세였다.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이때 위장 이환(李瓘)ㆍ성수익(成壽益) 등이 잇달아 흩어져 가고 행차를 따르는 것은 오직 나인[內人]과 환자(宦者) 대여섯뿐이었다. 박천군 관아에서 나가는 5리 길은 수목이 무성해서 빽빽한데, 또 비가 내리고 칠흑같이 어두웠다. 일행이 겨우 4, 50명이라 인심을 두려워하는 정도는 임진강 건너던 그날 밤보다 더 심했다. 《기재잡기》
○ 16일에 행차가 가산에 이르렀다. 전해오는 소식은 점점 급박하므로 자문을 요동으로 보내어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저녁에 정주에 이르렀다. 《기재잡기》
○ 이날 세자는 영변(寧邊)에 이르렀다. 임금이 분조(分朝)하기를 명하여 세자를 호종하는 관사(官司)를 무군사(撫軍司)라 일컫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임금과 세자가 나뉘게 되니 뜬소문이 돌아 평안도의 인심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항복이 비로소 유성룡의 선견(先見)에 탄복하고 사사로 찾아가서, “창졸할 때 한 수[一手]를 잘못 두어 대사를 그르치게 되었으니 후회하고 굴복한들 때가 늦었습니다.” 하니 성룡이, “나도 당초에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그저 불가하다고만 하였으니 실수가 아니라 할 수 없었소.” 하였다.
○ 17일에 정주에서 머물렀다.
○ 18일에 임금이 곽산에 이르러 명 나라 총병 조승훈(祖承訓) 등이 군사를 이끌고 운흥관 군(郡) 북쪽 17리 에 왔다는 말을 듣고 가서 보았다. 아래 명조(明朝)에 구원을 구한 기사에 자세히 있다.
○ 저녁에 행차가 선천에 묵으니 장지휘(張指揮)가 자문을 가지고 왔다. 아래 자세하게 적혔다.《조야첨재》에는 지휘 주국신(朱國臣)이라 되어 있다.
○ 19일에 행차가 차련관(車輦館)에 이르렀다. 철산군 북쪽 27리
○ 20일에는 행차가 용천에 이르렀다. 윤두수가, “오늘의 행차는 명 나라에 가서 호소하기 위해 노정을 더 빨리 하는 것이나, 다만 갑자기 의주에 이르면 인심이 더욱 놀라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적세가 약간 누그러졌으니 먼저 의주 등지의 관원으로 하여금 흩어진 백성을 모으게 하여 행차가 즉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뜻을 알려 믿는 바가 있게 한 뒤에 천천히 나아가면 원근(遠近)의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 21일에는 용천에 유하는데 원균(元均)의 첩보(捷報)가 왔다.
○ 22일
○ 23일에 행차가 의주에 이르렀다. 동쪽으로 향해 통곡하고 서쪽으로 향해 사배(四拜)했다.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목사가 거처하던 곳을 행궁으로 삼았다. 이때 성중 백성들이 다 달아나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까마귀나 참새도 날지 않아 마치 빈 산중의 황폐한 절과도 같았다. 호종한 관원 수십 명은 행궁 근처에 나누어 잤다. 《기재잡기》
○ 성중에 살던 백성이 모두 놀라 달아났다. 이항복이 임금께 요청하여 관청 건물들을 수리해서 오래 있을 의사를 보이니 아전과 백성들이 과연 조금씩 모여들었다. 또 말하기를, “호서ㆍ호남ㆍ영남 3도에서는 행재소(行在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급히 사신을 보내어 선유(宣諭)하여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하자.” 해서 드디어 대사헌 윤승훈(尹承勳)을 바닷길로 호남에 보내니 이로부터 조정 명령이 비로소 통하게 되었다. 〈백사행장〉
○ 7월에 감사 송언신과 병사 이윤덕이 산골로 피해 들어가서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므로 드디어 모두 체직(遞職)시키고, 이원익을 감사에, 이빈을 병사에 임명하였다. 《기재잡기》
○ 순찰사 이원익이 호종하는 군사가 적은 것을 염려하고 전투하는 군사를 나누어서 들여보내 호위하기를 청하니 이항복이 이를 물리치며 전쟁하는 군사는 적을 치는 데 쓰라 하고 달리 민간 군정(軍丁)을 뽑아서 임금의 호위군사로 보충하기를 청하였다. 백사행장
○ 이유징 성중의 아들 을 승진시켜 의주 목사로 삼고 이성중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 도원수 김명원ㆍ감사 이원익ㆍ순변사 이빈 등이 순안에 진을 치고 적을 막았다. 당초 적이 평양에 들어올 때 군사가 대략 6, 7천이었다. 적은 난민을 불러서 꾀여 졸병을 만들어 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서쪽 길을 향하지 않았다. 적들이 여러 곳에 군사가 갈라져서 영솔할 군사가 많지 않으므로 서쪽으로 오다가는 중국 군사와 마주칠까 겁을 낸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명원 등이 흩어진 군사와 강변 토병을 불러모아서 다시 군대의 모양새를 갖추어 한응인과 함께 순안에 따라와 부산재[釜山峴] 경계를 막아 지켰다. 이후로 순안 위쪽 여러 고을에는 아전과 백성들이 다시 모였다.
평양 서쪽 30리쯤에 부산재가 있는데 곧 서쪽으로 가는 큰 길이며 재[峴] 왼편 산에 선돌[立石]이 있어 사람들이 석장군(石將軍)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전에 석장군에서 흐른 피가 흘러오다가 부산재에 와서 멈추었다. 왜적이 평양을 점거하고도 마침내 재를 넘지 못한 것은 그 징험이었다. 전해오는 말에 왜적이 부산에서 일어나 부산에 그친다 하였다. 《국포쇄록(菊圃瑣錄)》
○ 8월에 이원익ㆍ이빈 등은 정예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조방장 김응서(金應瑞)ㆍ별장 박명현(朴命賢) 등은 용강ㆍ삼화ㆍ증산ㆍ강서 등 바닷가 여러 고을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20여 둔으로 쳐서 평양 서쪽에서 압박하고, 별장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입구를 점거하고 별장 임중량(林仲樑)은 2천 명을 거느리고 중화를 지켰다. 행조(行朝)에서는 평양에 있는 적세가 약하므로 우리 군사가 진격하여 그곳을 취할 수 있으니 명 나라 군사가 오기를 기다릴 것 없이 진격하라고 독촉하였다.
그리하여 세 길로 군사가 함께 나아가 보통문 밖까지 육박해서 적의 선봉을 만나 수십 명을 사살하고 나니 갑자기 적병이 크게 들이닥쳤다. 아군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죽은 자가 들판에 가득했으며 강변 토병 출신의 날쌘 군사들이 많이 상했다. 원익은 패해서 순안으로 돌아오고 응서의 부대가 돌아오지 않았다. 원익 등은 응서가 죽었다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서 응서가 적장을 베고 백마를 빼앗아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왔다. 원수가 장계하여 응서를 방어사로 승진시켰다. 《기재잡기》 《평양지》
이때 행장의 부장(副將)에 용력이 절등한 사람이 있으니 언제나 앞장서서 진을 함락시켜 행장이 소중히 여기고 일을 맡겼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이 그에게 잡혔는데 지극히 사랑을 받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서문에 가서 친척을 보고 오겠다 하니 왜장이 허락하였다. 계월향이 성 위에 올라, “우리 오빠 어디 있소.” 하고 연거푸 슬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응서가 답하고 가니 계월향의 말이, “만약 나를 탈출하게 해준다면 죽음으로 은혜를 갚겠소.” 하니 응서가 허락하고 계월향의 친오빠라 자칭하고 성에 들어갔다.
밤중에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계월향이 응서를 인도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왜장이 걸상에 앉아서 자는데 두 눈을 부릅뜬 채 쌍검(雙劍)을 쥐고 얼굴을 벌겋게 해가지고 마치 사람을 내리칠 것 같았다. 응서가 칼을 빼어 왜장을 베니 머리는 벌써 땅에 떨어졌는데도 칼을 던져 하나는 벽에 꽂히고 하나는 기둥에 꽂혀 칼날이 반이나 들어갔다. 응서가 왜장의 머리를 가지고 문을 뛰쳐나오니 계월향이 뒤를 따랐다. 응서가 둘 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짐작하고 칼을 휘둘러 베고 한 몸으로 성을 넘어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그 장수의 죽음을 알고 크게 놀라 소란을 피우며 사기를 잃었다.《평양지》
○ 7월에 총병 조승훈이 평양으로 진격하다가 패해서 요동으로 돌아갔다. 아래 명조에 구원을 구한 부분에 자세히 있다.
○ 호남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등이 양산숙(梁山璹)ㆍ곽현(郭賢)을 행재소로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렸다. 그가 돌아갈 때 임금이, “너희들이 돌아가 천일과 조헌(趙憲)에게 일러서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고 나를 다시 돌아가게 하라.” 하고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양산숙 등이, “호남에서 비록 의병이 일어났으나 조정이 멀리 떨어져 호령을 받기가 어려우니 한 중신(重臣)을 보내어 위무(慰撫)해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정철로 도체찰사를 삼았다. 산숙 등의 생각으로는 신잡 같은 사람을 원했던 것인데 조정에서 얼른 정철을 보내게 되니 그들이 깊이 불만스럽게 여겼다. 《기재잡기》
○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 편에 임금이 자기를 책하는 교서를 내려서 호남ㆍ영남 선비와 서민에게 유시(諭示)하였다. 이호민이 지어 바쳤다. 그 글 가운데, “의주 한 구석에 하늘 국운[天步]이 어렵구나. 우리 땅이 다 없어졌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사람이 어려운 형편이 되면 고향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것이라, 어느덧 가을의 서늘한 기운 일어나니 변방이 일찍 추워지는구나. 강물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한결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물결 흐름 같구나.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았으니 서울을 회복할 날이 있을 테지. 날마다 장소(張所)의 보고를 기다리노니 선왕릉의 탈없다는 소식을 기다린다.” 하였다. 애끊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기재잡기》 《지봉유설 합록》
○ 8월에 이순신의 첩보(捷報)가 이르렀다. 이순신을 3도통제사로 삼았다.
○ 8월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감사 송언신과 병사 이윤덕은 한 도의 주관(主官)으로서 산중에 깊이 들어가 오랫동안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홍세공(洪世恭)은 이미 조도(調度)의 명을 받고도, 오활하게 길을 둘러 회천으로 가서 구원병 오가는 것을 까마득히 알지도 못하고, 한준은 행차를 호송하라는 명을 직접 받고도 병을 핑계로 뒤에 떨어지고 또 제 눈으로 행차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을 해서 인심을 흔들리게 하고,헌납 이정신ㆍ지평 이경기ㆍ주서 임취정(任就正)ㆍ박정현(朴鼎賢)ㆍ검열 조존세(趙存世)ㆍ김선여(金善餘)는 시종하는 신하로서 하직도 않고 도망쳤으니, 언신과 준은 파직하고 윤덕은 백의(白衣)로 종군하게 하고 세공은 한 자급을 낮추고 이정신 이하는 삭직하소서.” 하였다. 《기재잡기》
○ 8월에 경기 감사 권징(權徵)은 멀리 강화로 들어가고 황해 감사 조인득(趙仁得)은 적을 피해서 섬으로 갔으므로 조정에서는 드디어 심대(沈岱)로 경기 감사를 삼고 유영경으로 황해 감사를 삼았다. 심대가 떠날 때 심희수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사람 쓰는 것이 무슨 도리인가. 나는 죽을 땅에 가고 공은 때를 얻었다.” 하니 희수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조정에서 공은 의기가 있어 험한 것을 피하지 않는다고 여겨 승자(陞資)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자급을 뛰어 올려 보내는 것이며, 적이 평양에 있어 아침 저녁에 발동할 것이니, 군신상하도 오히려 죽을 곳을 모르는데 공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으나 대(岱)는 투덜거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기재잡기》
○ 심대의 사람됨이 의기가 있어 변란 당초부터 늘 격분하여 사명을 받들고 출입해서 쉽고 어려운 일을 가리지 않았다. 이때 바로 삭녕으로 가서 군사 몇천 명을 소집하고 양주 목사 고언백과 약속하여 서울을 수복하기를 꾀하고 서울 성안 사람들을 모집하여 내응(內應)하기로 약속했다. 적이 염탐해서 알고 가만히 대탄(大灘)을 건너 밤에 습격했다. 심대가 놀라 일어나 옷을 입고 달아나는데 적이 따라와 해쳤다.
군관 장씨라는 사람도 막아 가리다가 죽었다. 경기 사람들이 심대의 시체를 거두어 산중에 묻었더니 적이 파내어 머리를 베어 종루 거리에 달아 놓았는데 5, 60일이 되어도 낯빛이 산 것 같았다. 뒤에 호성공신 청원군(扈聖功臣靑原君)으로 봉하고 벼슬을 증직하고 그 아들 대복(大復)을 음관(蔭官)으로 현감을 시켰다.
○ 종실 호성감(湖城監)을 보내어서 호서ㆍ호남에 징병하게 하고 충성스러운 내수사의 노비를 내어 군사를 만들고 스스로 지원하는 자도 허락했다. 호성감이 군사 2천 명을 얻어 아산에서 배를 타고 행재소로 돌아왔다.
○ 이때 임금이 의주에 오래 있으면서 시를 지어 신하들을 풍자하였다. “나라 일이 다급할때 뉘라서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 같은 충성을 능히 할꼬. 도성을 버린 것은 국가 대계(大計)를 위함이었으니, 회복하기는 여러 신하들을 믿도다. 관산(關山) 달을 보고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을 맞으며 상심하노라. 조정 신하들 오늘 이후에도 다시 서인이니 동인이니 할까.”
○ 10월에 대간에서, “병조 정랑 이홍로는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 이산해에게 발신되어 그 심복이 되고 김공량에게 교분을 맺어 그 노예가 되어, 음흉하고 사특한 귀역(鬼蜮)의 태도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사변 뒤에 와서는 거취를 제 마음대로 하니 삭직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탄핵하였다. 또, “병조 정랑 임몽정(任蒙正)은 시종하는 신하로서 서울 성문 밖에 나오자 먼저 달아났으니 파직하기를 청합니다.” 하므로 모두 허락하였다.
○ 이홍로의 상소에, “지금 일을 맡아 보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도성을 떠나자고 했다는 한 가지 일로 이산해에게 죄를 돌려 국사를 그르친 흉적이라 하나, 만약 지금 담당자들이 변란이 일어나는 초기에 있었다면 과연 능히 하늘을 찌르는 적세를 막아 서울을 떠나지 않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일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도 역시 전하를 위태한 곳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달게 여기겠습니까.
전하를 국경 끝까지 모셔다 두고서도 앉아서 말만으로 옛날 원한을 보복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염치없는 무리들이 분주하게 비위를 맞추어 기세만 올라가서 국가가 조석간에 망하게 될 형편을 염두에 두지 않으니, 나라를 그르친 적으로 말하자면 전자와 후자, 누가 더 심한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덕을 잃은 일이 없고, 선대에 적선하신 음덕이 있는데도 변란이 일어난 것은 운수가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한 것이니, 신이 국사가 날로 위태로움을 보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전하와 더불어 같이 천명의 거취를 기다리고자 하오나 권력을 쥔 사람들이 신으로 하여금 행궁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나이다.” 하였다.
이때 윤근수ㆍ구사맹은, 홍여순ㆍ유영길ㆍ이홍로가 어둔 밤에 서로 모여 재기를 노리는 음모가 반드시 있다 여기고 김응남ㆍ이덕형까지도 같이 쫓아내려 하였다. 성혼ㆍ윤두수ㆍ이해수는 만약 부득이하면 그 중에 심한 자만 제거할 것이요, 응남ㆍ덕형은 죄를 줄 명목이 없다 하였다. 홍로는 제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죽을 각오로 상소한 것이다. 이성중이 공청에 있다가 홍로의 소를 보고 소리를 높여, “군신 상하가 막다른 국경에 물고기처럼 우글거리게 한 것은 누구 소치인데 도리어 우리들을 가리켜 나라 일 그르친 적이라 한단 말이냐.
소(疏) 가운데 언사가 아첨 부리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가 평소에 나라 녹을 먹고 높은 자리에 앉아 말 한 마디 건의하여 여러 음흉한 무리들을 제거하지 못해서 필경 이런 욕을 받는 것이다. 모두 우리들 허물이니 누구를 탓하랴.” 하였다. 《기재잡기》
○ 12월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나라 일을 그르친 세 사람(홍여순ㆍ이홍로ㆍ송언신)을 귀양 보내라 청하니 비답(批答)에, “이 어느 때라고 이런 의논을 하는가. 이 사람들 죄는 내 알지 못한다. 단지 정철의 간악한 짓을 탄핵한 것뿐이라.” 하였다. 두 번 청하니 비답에, “무슨 계제를 만들어 놓고 사람을 빠뜨리려는 것이 아닌가. ‘고래 싸움에 새우 죽는다.’는 말이 이를 두고 이름인가. 안 따를 수 없다.” 하고 허락하였다. 이튿날 전교에 있는 한 마디를 고쳐, “정철을 탄핵하여 간악하다고 하였을 뿐이다.”고 하였다.
○ 12월에 동지 유영길(柳永吉)이 아뢰기를, “정철이 남도에 있을 때 주색에 빠져서 국사는 돌보지 않았고, 윤두수는 일이 실적이 없어 임금의 형세가 날로 고립되고 국사가 날로 급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경의 이 말은 자신의 의견이 있는 것인가?” 하니 영길이 한참 있다가, “단지 들은 대로 말한 것이고 별다른 견해는 없습니다.” 하고 물러났다. 정철은 간 곳마다 술에 취해 노닐고 맡은 임무는 두서가 없었다. 이런 까닭에 크게 인심을 잃었다. 영길이 비록 기회를 타서 비열하게 공격한 것이지만 정철의 처사가 실로 이런 말을 들을 만하였다. 《기재잡기》
○ 계사 1월 8일에 명 나라 도독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성을 격파하였다.

[주D-001]평성(平城)의 옛 계략이다 : 한(漢) 나라 고제(高帝)가 평성(平城)에서 흉노(兇奴) 묵특[冒頓]과 부딪쳤을 때, 사자(使者)를 보내어 적병을 정탐하였더니, 흉노가 정병(精兵)은 숨기고 파리하고 약한 군사만을 보였으므로 고제가 사자의 말을 듣고 전진하다가 곤경에 빠진 일이 있었다. 여기서는 왜(倭)가 흉노처럼 우리를 속인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2]사신을 보냈던 열 사람 : 고제(高帝)가 평성(平城)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간신히 빠져나와서 먼저 정탐갔다가 흉노에게 속고 와서 진격하자고 한 사자(使者) 열 사람을 베어 죽였다. 여기서는 김성일(金誠一)이 적의 정세를 잘못 보고 온 것을 말한다.
[주D-003]질정관(質正官) : 명 나라에 사신(使臣)이 갈 때 수행원 중에 질정관이란 직책이 있는데, 언어(言語)와 전고(典故) 등을 물어 알아오는 직책이다.
[주D-004]사천(射天) : 흉악한 무리가 하늘에다 대고 활을 쏜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조선이나 일본이 중국을 범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05]조충국(趙充國) : 한(漢) 나라의 이름난 장수로서 강(羌)이라는 종족을 방어하는 공을 세웠으며, 금성(金城) 지방에 가서 방략(方略)을 세워 요새지(要塞地)를 지켰다.
[주D-006]원사(元使) : 고려에 온 원 나라 사신을 말함. 고려 말년에 북원(北元)을 섬기자는 파와 명 나라와 친하자는 파가 있었는데, 원 나라 사신이 올 때에 정몽주는 그 사신을 거절하고 영접하지 말자고 주장하였다.
[주D-007]회륜(檜倫) : 송 나라의 진회(秦檜)와 왕륜(王倫)을 말한다. 금국(金國)에 원수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굴욕적인 강화를 주장하던 재상들이다.
[주D-008]남의 …… 물음 : 옛날에 노(魯) 나라 임금이 유하혜(柳下惠)에게 타국(他國)을 칠까 묻자 그는, “어진 사람에게는 남의 나라를 칠까 묻지 않는 것인데, 나는 어진 사람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주D-009]태종우(太宗雨) : 조선 태종이 병으로 위독할 때에 한재(旱災)를 걱정하였는데, 태종이 죽자 곧 비가 내렸다. 그 뒤에도 해마다 그 날에 비오는 때가 많으므로 ‘태종우’라 하였다.
[주D-010]두우성(斗牛星) : 진(晉) 나라 때에 장화(張華)가 천문(天文)을 보니,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쏘아 뻗치므로 그 기운이 생긴 곳을 찾아 땅 밑에서 보검(寶劍)을 파낸 일이 있는데, 여기서는 충의(忠義)에 죽은 사람의 기운을 말한다.
[주D-011]학의 울음 : 요동의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이 된 뒤에 학이 되어 고향에 왔다는 전설에서 인용된 것인데, 여기서는 다른 의미는 없고 다만 요동지방을 말한 것이다.
[주D-012]국충(國忠) : 국충은 양귀비의 친족으로 국사를 그르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다. 당 나라 명황(明皇)이 안녹산에게 쫓겨 촉중(蜀中)으로 파천(播遷)할 때 중로에서 양국충의 목을 베었다. 여기서는 이산해를 가리킨 것이다.
[주D-013]오늘의 …… 국충이니 : 임진란 직전에 온 일본의 사신을 접대하고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보낸 사실을 명 나라에 보고하지 말자고 유성룡이 주장했던 것을 송 나라 진회(秦檜)의 강화(講和)에 비교한 것이다.
[주D-014]형혹성(熒惑星)이 …… 범하였다 : 옛날 천문학상으로 형혹성이 남두성(南斗星)을 범하면 임금이 궁전에서 나와 도망갈 징조라 한다.
[주D-015]근왕(勤王) : 주(周) 나라 때에 왕실[천자]이 난을 당하면 지방의 제후(諸侯)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천자를 구원하였다. 근왕은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한다는 뜻이다.
[주D-016]영무(靈武)의 옛일 : 당 나라 명황(明皇)이 안녹산의 난리에 서촉(西蜀)으로 쫓겨갈 때에 황제의 위(位)를 전하였으므로 태자는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다.
[주D-017]6조의 통부(通符) : 피난 중에 벼슬 자리에 사람이 적으므로 한 사람이 임시로 육조(六曹)의 일을 맡아보기 위하여 육조에 통용되는 부신(符信)을 가지고 썼다는 것이다.
[주D-018]주공근(周公瑾) : 중국 삼국시대의 오(吳) 나라의 주유(周瑜)를 말하는데, 그는 소년(少年)으로 재상이 되었다. 공근(公瑾)은 주유의 자이다.
[주D-019]유성룡의 선견(先見) : 임금의 행차가 의주(義州)로 가서는 안된다고 유성룡이 주장하던 것을 말한다.
[주D-020]이성(李晟) : 당 나라 사람으로 주자(朱沘)의 난을 평정하여 수도 장안(長安)을 수복하고 종묘(宗廟)가 무사하다는 것을 임금에게 알렸더니 임금(덕종)이 기뻐하여, “하늘이 이성을 낳은 것은 사직(社稷)을 위함이로다.” 하였다.
[주D-021]장소(張所) : 송(宋) 나라 하북 초토사(河北招討使)로서 북방 호족(胡族)에게 함몰되었던 능(陵)이 무사하다는 것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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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가장 먼저 유영경(柳永慶)을 죽이다.

○ 전한(典翰) 최유원(崔有源)이 임금이 돌아가신 당일에 즉위(卽位)하여야 한다는 의논을 발의하였는데, 이는 왕비의 오라버니인 유희분(柳希奮)의 뜻을 받았던 것이다. 최유원이 동료를 거느리고 대신에게 청하였으나 유영경이 안된다고 고집하므로 두 번 세 번 청하면서 송 나라 이종(理宗)이 당일에 즉위하였음을 증거로 내세웠다.대신이 실록을 내어 조종조(祖宗朝)의 옛 관례를 상고하도록 명하였더니, 오직 성종(成宗)만이 당일에 즉위하였는데 이는 예종(睿宗)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이 너무 어리므로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상촌선생집 제5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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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志)
중국이 시종 군사를 내보내 도와준 것에 관한 기록[天朝先後出兵來援志]

임진년 5월 선묘(宣廟)가 평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요동(遼東)에 이자(移咨)하여 위급한 상황임을 알리고 군대를 청하였다. 6월에 대가(大駕)가 의주(義州)에 도착한 뒤로 잇따라 요동에 사신을 보내어 위급함을 고하였다. 중국 조정에서 요동 군사 3천여 명을 조발(調發)하여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지휘하게 하고 유격장군(游擊將軍) 사유(史儒)를 부참장(副參將)으로 삼았다. 7월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평양에 있는 적에게 진격하였다. 순안(順安)에 이르러 비를 만났는데 수십 리쯤 가다가 두 장수가 의논하여 행군을 멈추려 하였다. 이때 군중(軍中)에 왕만자(王蠻子)라는 사람이 있어 점을 잘 친다고 이름이 났으므로 승훈이 물어 보았는데, 만자가 말하기를 “오늘이 병사(兵事)에 가장 좋은 날이니 물러서지 말라.” 하자, 승훈이 그럴듯하게 여기고 진격해 들어갔다. 여명에 성 아래까지 근접한 뒤 군사를 지휘하여 성의 동북쪽 모퉁이를 허물었다. 사유가 성에 올라가 적을 쏘았는데 적이 발사한 화포(火炮)에 맞아 사유가 죽었다. 조승훈과 천총(千總) 마세융(馬世隆) 역시 부상을 당했는데 세융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에 조승훈의 군대가 무너지면서 하룻밤 사이에 2백 리나 달아나더니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철수하고 말았다.
우리 나라에서 크게 두려워하며 요동ㆍ광녕(廣寧)을 담당한 자에게 원군을 청하였는데 그 일로 사신들이 줄을 이었다. 병부(兵部)가 제본(題本)을 올려 출병을 청해 성지(聖旨)를 받들었다. 그리하여 요동으로 하여금 정병(精兵) 1개 부대를 일으키게 하고 은(銀) 2만 냥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와서 호군(犒軍)하게 하는 한편 유격장군 장기공(張奇功)을 파견하면서 은을 주어 보내 말먹이와 군량을 사들인 뒤 의주에 운반해서 군량을 충당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로 하여금 남병(南兵)을 이끌고 압록강 건너편 언덕에 주둔해 있게 하고, 또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해서 평양성에 들어가게 한 뒤 행장(行長) 등과 약속하되 성 밖 40리를 한계로 하여 표지를 세워서 나와 약탈하지 못하게끔 하였다. 그러나 대군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조정에서 다시 배신(陪臣) 정곤수(鄭崑壽)를 보내 거듭 대군을 요청하니 천자가 윤허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 군문(經略軍門)으로 삼고, 도독 동지(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을 제독 군무(提督軍務)로 삼았다.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恊大將)으로 삼고, 부총병 왕유익(王有翼)ㆍ부총병 왕유정(王維貞)ㆍ참장(參將) 이여매(李如梅)ㆍ참장 이여오(李如梧)ㆍ참장 양소선(楊紹先)ㆍ선봉(先鋒) 부총병 사대수(査大受)ㆍ부총병 손수렴(孫守廉)ㆍ참장 이영(李寧)ㆍ유격장군 갈봉하(葛逢夏) 등을 모두 양원에게 소속시켰다. 부총병 이여백(李如柏)을 중협대장(中恊大將)으로 삼고, 부총병 임자강(任自强)ㆍ참장 이방춘(李芳春)ㆍ유격장군 고책(高策)ㆍ유격장군 전세정(錢世禎)ㆍ유격장군 척금(戚金)ㆍ유격장군 주홍모(周弘謨)ㆍ유격장군 방시휘(方時輝)ㆍ유격장군 고승(高昇)ㆍ유격장군 왕문(王問) 등을 모두 이여백에게 소속시켰다.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恊大將)으로 삼고, 부총병 조승훈(祖承訓)ㆍ부총병 오유충(吳惟忠)ㆍ부총병 왕필적(王必迪)ㆍ참장 조지목(趙之牧)ㆍ참장 장응충(張應种)ㆍ참장 낙상지(駱尙志)ㆍ참장 진방철(陳邦哲)ㆍ유격장군 곡수(谷燧)ㆍ유격장군 양심(梁心) 등을 모두 장세작에게 소속시켰다. 참장 방시춘(方時春)을 중군(中軍)으로, 비어(備禦) 한종공(韓宗功)을 기고(旗鼓)로,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병부 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을 찬획(贊畫)으로,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惟新)을 독향(督餉)으로 삼았다. 이상 합계 4만 3천여 명이었으며 잇따라 나온 자가 8천 명이었다.
대군이 나오기 수개월 전에 천자가 행인사(行人司)의 행인(行人) 설번(薛藩)을 파견하여 칙서를 내리고 위로하였으며, 배신(陪臣) 정곤수(鄭崑壽)가 돌아갈 때 마가은(馬價銀 중국에서 국경 경비와 오랑캐를 막는 데 쓰는 은) 3천 냥을 주며 궁면(弓面)과 화약을 사서 군용(軍用)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계사년 정월 5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3협(恊) 대장인 양원(楊元)ㆍ장세작(張世爵)ㆍ이여백(李如柏) 등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주둔하였다. 그리고는 부총병 사대수(査大受)를 먼저 보내 왜추(倭酋)와 부산원(斧山院)에서 회동하기로 약속하게 하였는데, 적추(賊酋) 행장(行長)이 그의 비장(裨將) 평후관(平後寬)으로 하여금 영접하게 하자 사대수가 그들을 붙잡아 제독 중군(中軍)에게 끌고 갔다. 밤에 적 몇 명이 도망가자 군사들이 뒤쫓아 가서 죽이고 평후관은 그대로 억류시킨 채 보내지 않았다.
6일 새벽에 제독이 평양성 아래로 군사를 진격시킨 뒤 여러 장수들의 부대를 나누어 포위하게 하자 적이 군사를 출동시켜 성 북쪽 모란봉(牡丹峯) 위를 점거하게 하였다. 제독이 거짓으로 한 부대의 병사를 출동시켜 모란봉 길을 향하게 하면서 위쪽을 공격할 것처럼 하자 적이 높은 위치를 이용해서 포를 쏘아대었다. 이에 군사들이 퇴각하니 적이 비로소 성벽을 넘어와 중국군을 추격하였다. 중국군이 쇠방패를 내버리고 도망하니 적이 서로들 가지려 하였는데, 이때 중국군이 되돌아와 공격하니 적이 도망쳐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적 수백 명이 입에 하무를 물고 몰래 나와 우측 진영을 엄습하였는데, 중국군이 일시에 깃발을 눕히고 불을 껐다가 거마목(拒馬木) 아래로부터 일제히 화전(火箭)을 발사하여 대낮같이 환해지니 적이 범하지를 못하였다.
7일 사시에 3개 진영에서 군사를 모두 출동시켜 보통문(普通門)에 다다르니 적이 성문을 열고 나와 접전을 벌였는데 중국군이 적 30여 급(級)을 베고 다시 성문 입구까지 뒤쫓아 갔다.
8일 아침 일찍 제독이 삼군(三軍)의 식사를 마치게 한 뒤에 3영(營)의 장령(將領)과 함께 군사를 나누어 이끌고는 성 밖 서북쪽으로 포위해 들어오면서 칠성문(七星門)ㆍ보통문ㆍ함구문(含毬門) 밖에 진을 펼쳤다. 제독이 스스로 친병(親兵) 1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성 아래까지 접근해서 장수들을 지휘하였다. 이윽고 대포를 쏘자 각 진(陣)에서 일제히 포를 발사하였는데 그 소리가 벽력과 같았고 화염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으며 사방 수십 리까지 퍼졌다. 불꽃이 타오르면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 곧장 성 안으로 짓쳐 들어갔는데 먼저 밀덕(密德)의 토굴(土窟)을 불사르면서 거의 모두 불태워버렸다. 제독이 이에 군사들을 고무하여 성벽을 오르게 하였는데 적이 성가퀴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총을 쏘아대고 큰 돌을 굴리며 저항하자 중국군이 조금 물러났다. 제독이 겁을 먹고 물러나는 군사 한 명을 직접 베어 군중에 돌리고 직접 뛰쳐 나와 곧장 앞으로 나서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먼저 오르는 자에게는 은 5천 냥을 주겠다.” 하였다. 부총병 낙상지(駱尙志)가 함구문 쪽에서 긴 창을 몸에 지니고 몸을 솟구쳐 성가퀴 위로 올라가니 군사들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절강(浙江)의 군사가 적의 깃대를 뽑아버리고 중국군의 기치를 세우니 적이 감히 더 이상 대적하지 못하였다. 제독은 장세작(張世爵) 등과 함께 칠성문을 공격하였는데 대포를 쏘아 성루(城樓)를 무너뜨린 뒤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이여백(李如柏)은 함구문을 통하고 양원(楊元)은 보통문을 통해 승승장구하며 다투어 들어갔다. 기병과 보병이 구름떼처럼 몰려가자 적이 흩어져 몸을 움츠린 채 진영으로 들어가 숨었는데 거의 대부분 불살라 죽이고 1천 2백 85급을 베었으며 2명을 생포하고 투항한 왜인들도 아울러 포로로 잡았다. 절강 사람 장대선(張大膳)이 셀 수 없이 많은 마필(馬匹)과 기계를 노획하였으며, 붙잡혀 있던 본국의 남녀 1천 2백 25인을 구출하였다.
행장 등이 연광정(練光亭) 토굴로 도망쳐 들어가자 제독이 불로 공격할 계책을 세웠으나 칠성문과 보통문에 있던 적이 잇따라 여러 굴 속에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졸지에 평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굴 속에 있는 적들이 구멍을 통해 탄환을 비오듯이 쏘아대는 바람에 쓰러져 죽어가는 중국군이 속출하였으며 제독이 탄 말 역시 탄환에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제독이 진영에 돌아와 장대선을 시켜 행장에게 가서 타이르게 하기를 “나의 병력을 가지고 일거에 섬멸시킬 수 있지만 사람을 다 죽이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그대에게 살 길을 열어줄테니 그대는 속히 두목들을 이끌고 원문(轅門)에 와서 내가 약속해주는 말을 듣도록 하라.” 하였는데, 행장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물러갈 것이니 뒷길을 막아 끊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자, 제독이 이를 허락한 뒤 설관(舌官)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게 하며 일로(一路)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군사를 매복시키도록 하였다. 한밤중에 행장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갔는데, 중화(中和)와 황주(黃州)에 잇따라 진영을 설치했던 적들은 평양의 포성(砲聲)을 듣고 이미 먼저 도망쳐 버린 뒤였으며, 황주 판관 정엽(鄭曄)이 행장이 돌아갈 길을 끊고 90여 급을 베고 중도에서 또 30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 평양에 진주한 지 8일째 되는 날에 선봉 및 좌협 장세작 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진격시키게 하고, 또 우리 나라의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과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으로 하여금 급히 먼저 달려가서 말 먹이와 군량을 독촉해 마련하는 동시에 부교(浮橋)를 가설케 하였다. 선봉이 개성(開城) 청석골[靑石谷]에 도착하였을 때 적 수백 명이 멀리서 중국군이 오는 것을 보고 달아나자 중국군이 추격하여 30여 급을 베었다. 송경(松京)의 적 또한 도망쳐 경성으로 돌아갔으므로 각 부대가 임진을 건넜으며 우리 나라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도 도착했다.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모화관(慕華館)까지 정탐하고 돌아왔으며 선봉이 곧장 벽제(碧蹄)에 이르렀다. 제독도 평양에서 잇따라 출발하여 25일에 개성부에 들어갔으며, 27일 새벽 덕진(德津)을 거쳐 파주(坡州)에 진영을 설치했다.
동틀녘에 적 수백 명이 미륵원(彌勒院) 앞 들판에 나와 진을 쳤는데, 사대수가 공격하여 1백 30급을 베고 나서 치품(馳稟)하기를 “적의 사기가 이미 떨어졌으니 속히 진격했으면 한다.” 하였다. 이에 제독이 휘하의 정예 군사 수십 명을 데리고 말에 채찍질하여 나왔으며, 3협대장 역시 가정(家丁) 수십 명과 함께 서로 잇따라 말을 달려 나아갔다. 제독이 혜임령(惠任嶺)을 넘다가 말에서 떨어져 얼굴을 다쳤는데 다시 말을 갈아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적의 무리가 여현(礪峴)에 기치를 벌여 세우자 제독이 나아가 전투를 벌였다. 적이 약졸(弱卒)을 내세워 아군을 유인하면서 패한 척 달아나 진창 속으로 끌어들였다. 중국군이 자만심에 들떠 진격하다가 진창에 빠져 말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는데, 적이 이에 칼을 휘두르며 달려나와 마구 살육을 감행하였으므로 제독 휘하의 이유승(李有升)과 용사 80여 인이 모두 칼을 맞고 죽었다. 적이 다시 좌우에서 기병(奇兵)을 내어 퇴로를 차단하였는데, 제독만은 간신히 빠져 나왔으나 인마(人馬)가 서로 밟히게 되고 양식과 기갑(器甲)이 질펀하게 방치된 채 땅에 널려졌다.
얼마 뒤에 중국군 대부대가 일제히 이르자 적이 이를 보고 군대를 돌려 도망쳤다. 제독이 언덕을 내려와서 원수(元帥)의 표기(標旗)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기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다행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유승의 사위 왕심대(王審大)를 불러 통곡하며 말하기를 “호남아(好男兒)가 나 때문에 죽었다.”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도로 임진을 건너와 동파역(東坡驛)에 진영을 차리고는 3일을 머무른 뒤 개성에 돌아와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굳혔다. 그러다가 보산(寶山)에 이르러 우리 나라 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독이 무척 후회하면서 장세작(張世爵)으로 하여금 이덕형과 함께 개성에 가서 양식을 비축하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화의(和議)가 갑자기 일어나게 되었다.
송 경략(宋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사용재(謝用榟)ㆍ서일관(徐一貫) 등을 꾸며 보내 중국 사신으로 행세하게 하면서 적을 타일러 철수해 돌아가도록 하였는가 하면, 심유경(沈惟敬)ㆍ호택(胡澤)ㆍ심사현(沈思賢)의 무리들도 재차 행장(行長)과 용산강(龍山江) 위에서 회합을 가졌다. 4월 8일 제독이 거듭 개성에 도착하고 19일에는 경성에 들어갔는데, 적이 이때 비로소 철수하면서 서일관ㆍ사용재 두 사람과 두 명의 왕자를 대동하고 길을 떠났다.
5월 7일 제독이 경성을 떠나 충주(忠州)에 주둔하였는데, 상주(尙州)의 적이 둔소(屯所)를 불태우고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는 새재를 넘어 문경(聞慶)에 이르렀다. 이때 심유경이 바야흐로 왜영(倭營)에 있다가 대군이 새재를 넘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화의(和議)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 제독에게 품하니, 오유충(吳惟忠)과 유정(劉綎) 등의 군대는 머물러 있게 하고 이평호(李平胡)ㆍ낙상지(駱尙志)ㆍ조승훈(祖承訓)ㆍ사대수(査大受) 등은 운봉(雲峯)과 남원(南原)의 적로(賊路)에 주둔케 하였다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였다. 그리고 송 경략과 철군하는 문제를 의논하여 주본(奏本)을 올리고는 8월에 회군하였는데, 부산의 적들도 두 왕자 및 데리고 있던 배신(陪臣)들을 귀환시켰다. 갑오년 정월에 낙상지의 군대가 돌아가고 9월에는 마지막으로 유정의 군사도 귀환하였다.
병부(兵部)가 제본(題本)을 올려, 내고(內庫)의 은 3천 냥을 본국에 주어 본국에서 공을 세우고 일에 참여하다 죽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천자가 허락하였다. 또 산동의 양곡 10만 석을 주어 군량을 대도록 하고, 행인사(行人司) 행인(行人) 사헌(司憲)을 보내 조칙을 내리고 위로하는 한편 은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광해(光海)로 하여금 호조 및 병조의 관원과 함께 전라ㆍ경상도 사이에 주차(住箚)하면서 군무를 총괄하게 하였는데, 경략 송응창의 주본(奏本)에 따른 것이었다.
적추(賊酋) 수길(秀吉)이 일찍이 자기 군대가 진주(晉州)에서 꺾인 적이 있다고 하여 적들로 하여금 총력전을 펼쳐 진주를 공격해서 그 성을 멸망시키도록 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및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 경상 우병사였음)ㆍ황진(黃進 충청 병사였음)과 이종인(李宗仁 김해 부사였음) 등 수십 인이 모두 죽었으며 죽은 군민(軍民)의 수가 6만이었다.
예부(禮部)가 제본을 올려, 평양ㆍ개성ㆍ벽제(碧蹄)ㆍ경성에 단(壇)을 쌓고 전사한 관군에게 제사를 지내주도록 청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단의 이름을 민충(愍忠)으로 하는 한편 관은(官銀)을 주어 제수(祭需)를 마련케 해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제독과 경략의 대부대가 이미 모두 돌아갔는데도 해변에 웅거하고 있는 적들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병부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믿고 주화론(主和論)을 한결같이 강력히 주장하며 제본을 올려 관백(關白)을 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 결과 임회 훈위도독 첨사(臨淮勳衛都督僉事) 이종성(李宗誠)과 도독 첨사 양방형(楊方亨)을 봉왜(封倭) 사신으로 삼은 뒤 책보(冊寶)와 금백(金帛)을 싸가지고 심유경과 함께 일본에 가서 천자의 명을 선포하고 수길을 왕으로 봉하게 하는 한편 입공(入貢)을 허락토록 하였는데, 우리 나라 배신 황신(黃愼)과 박홍장(朴弘長)도 중국 사신을 수행하여 일본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11월에 두 사신이 부산 진영에 들어왔다.
병신년 정월에 봉왜 정사(正使) 이종성이 적이 허세를 부리며 공갈하는 것에 넘어가 밤중에 도망쳤는데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다가 한참 지난 뒤에야 깊은 산골에서 찾아내자 중외(中外)가 놀라며 동요하였다. 조정에서 배신 심우승(沈友勝)을 보내 치주(馳奏)를 올리니, 명을 고쳐 양방형을 정사로 올리고 심유경을 부사로 삼았다.
6월 16일 바다를 건너 일본에 도착했으나, 수길(秀吉)이 예의를 다하여 대접하지도 않고 철군도 하지 않았으므로 양사(兩使)가 소득 없이 돌아왔다. 조정이 배신 정기원(鄭期遠)을 보내 사유를 갖춰 주문(奏文)하였다. 중국 조정에서 수길이 조정의 큰 은혜를 저버리고 관군을 죽이며 조선에 해독을 끼쳤다고 하여 병부 상서 석성(石星)을 잡아 하옥시키고 심유경을 나문(拿問)하는 한편, 다시 군대를 동원하고 군량을 준비하며 정벌할 뜻을 굳혔다.
정유년 정월에 적추(賊酋) 청정(淸正) 등이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새까맣게 바다를 덮으며 침입한 뒤 서생포(西生浦)ㆍ죽도(竹島) 등 옛날의 보루를 다시 수선하면서 북상할 계책을 꾸몄다. 조정이 배신 권협(權悏)을 보내 주문(奏文)을 싸들고 가서 위급함을 고하게 하였다. 이에 중국 조정이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삼고, 병부 상서 형개(邢玠)를 총독군문(摠督軍門)으로 삼았다. 그리고 총병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선부(宣府)ㆍ대동(大同)의 군사 1천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양원(楊元)은 요동(遼東)의 군사 3천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南兵) 4천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游擊將軍) 우백영(牛伯英)은 밀운(密雲)의 군사 2천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은 연수(延綏)의 군사 2천을 거느리게 하여 잇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게 한 뒤 모두 형개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참정(參政) 소응궁(蕭應宮)을 감군(監軍)으로 삼고, 호부 낭중 동한유(董漢儒)를 독향(督餉)으로 삼았다. 7월에 경리가 군문보다 먼저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에 머물렀다.
이때 우리 나라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덕도(加德島) 앞바다로 들어갔다가 밤에 적에게 몰려 제군(諸軍)이 궤멸하였는데, 수사(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최호(崔湖) 등이 물에 빠져 죽고 원균은 상륙했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한산도(閑山島)의 수비가 무너지자 적이 승승장구하여 전라도로 밀고 들어와 곧장 남원(南原)을 공격하였다. 총병 양원(楊元)이 대적할 수 없자 서문(西門)을 통해 달아났는데, 이에 성 안에 있던 장사(將士)가 모두 죽었으며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과 부사(府使) 임현(任鉉) 등도 여기에서 죽었다. 적의 기세가 매우 날카로워지면서 거칠 것 없이 호우(湖右)를 치고 들어와 기보(畿輔)에까지 육박하자 경성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경리(經理)가 이를 듣고 평양에서 급히 달려와 경성에 들어온 뒤 제독과 여러 장수들을 불러 전투를 벌이지 않은 것을 꾸짖고는 제독과 계책을 정해 정예 마병을 뽑아 보내어서 적을 맞아 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각 진영의 정예 장사 2천 명과 요장(鐃將) 15명을 선발한 다음 해생(解生)ㆍ우백영(牛伯英)ㆍ양등산(楊登山)ㆍ파귀(頗貴)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천안(天安)으로 보냈는데, 장수들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해생 등 4명의 장수가 천안과 직산(稷山) 사이에서 적을 만났는데, 적들이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중국군이 우리 나라 사람인 줄만 알고 처음에 대비하지 않았다가 적이 포를 쏜 뒤에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이에 4명의 장수가 한꺼번에 말굽을 차고 나아가 공격하자 적이 바람에 쓸리듯 무너지며 도망하였는데 활과 곤봉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중국군이 진에 쳐들어가 31급(級)을 베었으며 파귀도 직접 3급을 베고 양등산과 해생도 각각 2급씩 벤 뒤 군사를 데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경리가 각 진영의 군대를 출동시켜 강 위에 진을 치고, 또 파새(擺賽)를 보내 기병 2천을 거느리고 가서 계속 지원하게 하였다. 파새가 급히 달려가다가 진위와 직산의 경계에서 적을 만났는데 4명의 장수와 함께 연합하여 격파하고 64급을 베는 한편 적장을 쏘아 맞추니 적들이 모두 군대를 거두어 물러갔다.
경리와 제독이 상에게 강 위로 나와 살펴보기를 청하니, 상이 그 말에 따라 동작진(銅雀津)을 건너와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형세를 자세히 살폈다. 그들이 마음 속의 계획이 있다고 하면서 배신 한 사람을 차관(差官)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보내 적의 형세를 샅샅이 알아보고 오게 했으면 좋겠다고 청하니, 상이 체찰사의 종사관 한준겸(韓浚謙)에게 명하여 가도록 하였다. 이때 인심이 두려움에 휩싸여 성 안에 사서인(士庶人)들이 하나도 없이 텅 비었고 백관들도 모두 짐을 싸들고 피난가려던 참이었는데 직산(稷山)에서 승리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경성이 조금 안정되었다.
행장(行長)은 순천(順天)에 주둔하고 심안돈오(沈安頓吾 도진의홍(島津義弘))는 사천(泗川)에 주둔하고 청정(淸正)은 울산(蔚山)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해변의 수십 개 고을이 다시 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경리가 군문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먼저 청정을 공격하여 적의 왼팔을 잘라버려야겠다.” 하였다. 11월 초 모일에 형 군문(邢軍門)이 경성에 도착하였으며 어사(御史) 진효(陳效)가 감군(監軍)하였다. 경리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이 달 8일에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마귀(麻貴)ㆍ고책(高策) 이하 제장(諸將)이 거느린 군사가 도합 4만 4천 8백 명이었다.
18일에 의성(義城)에 도착하였다. 경리가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아무리 정탐을 잘 한다 하더라도 조선 사람만큼 쉽게 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초군(哨軍) 송호한(宋好漢)과 전창(田倉)을 보내는 길에 조선인들과 함께 가서 도산(島山)의 정세를 탐지하고 오게 했으면 한다.” 하였는데, 덕형이 대답하기를 “이 사람들이 적 속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 사이의 정황을 상세히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데리고 온 여여문(呂余文)이라는 항왜(降倭)가 있는데, 영리하고 심계(心計)가 있다. 만약 후하게 은자(銀子)를 상으로 주면서 송호한과 대동해 경주(慶州)에 도착하게 한 뒤 머리를 깎고 왜인의 옷을 입혀서 적의 진영 안으로 들여보낸다면 적정(賊情)을 세밀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경리가 따랐다.
20일 경주에 진영을 설치하고 장수들을 불러 진공책(進功策)을 의논하였다. 21일 여여문이 적의 진영에서 돌아와 소매 속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었는데, 바로 도산(島山) 태화강(太和江) 적굴(賊窟)에 관한 것으로서 병졸의 수효 및 청정ㆍ희팔(喜八) 등의 굴혈(窟穴)이 모두 기재되어 있었다. 경리가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붉은 붓으로 진공하는 세 길을 지도 위에 표시한 뒤 장수들에게 보여 주었다. 22일 여러 부대를 파견할 때 좌협(左恊) 이방춘(李芳春) 등은 좌로(左路)를 따르게 하고, 중협(中恊) 고책(高策) 등은 중로(中路)를 따르게 하고, 우협(右恊) 팽우덕(彭友德) 등은 우로(右路)를 따르게 하면서 3로(路)에서 일시에 전진토록 하였다.
23일 아침에 경리가 설관(舌官) 송업남(宋業男) 등만 데리고 앞서 나갔는데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權慄)이 수행하였다. 한밤중에 제독이 먼저 울산에 도착하였는데 적의 보루와는 60리가 떨어진 지점이었다. 양등산(楊登山)ㆍ파새(擺賽)ㆍ파귀(頗貴) 등을 불러 묻기를 “그대들 중에 누가 선봉이 되고 싶은가?” 하니, 세 장수가 서로들 선봉이 되겠다고 다투었는데, 제독이 파새를 선봉으로 삼고 양등산을 그 다음으로 삼자, 파새는 기뻐하고 양등산은 노하여 주먹다짐을 벌이려고까지 하였다. 파새가 정예 친병(親兵) 1천여 인을 이끌고 가고, 양등산은 효기(驍騎) 2천을 거느리고 차례로 출동하였다. 날이 샐 무렵에 파새가 적의 보루에 육박하여 화전(火箭)을 쏘아대자 적이 달려 나왔는데 파새의 군사가 즉시 4급을 베었다. 양등산은 그 근처에 와 주둔하면서 성세를 도우려 하였는데, 파새가 퇴각하는 척하자 적이 추격해 오니, 파새가 다시 군사를 돌려 양등산과 연합해서 공격한 결과 적 4백 60여 급을 베고 소장(小將) 1인을 생포하였다. 얼마 뒤에 경리와 제독이 도착해 적의 보루가 바라다보이는 지점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24일 3협(恊)을 동시에 진격시키면서 좌군(左軍)은 반구정(伴鷗亭)의 적굴을 포위하게 하고, 중군(中軍)은 병영의 길을 통해 곧장 적의 진영으로 쳐들어가게 하고, 우군(右軍)은 태화강(太和江)의 적 보루를 포위하게 하고, 경리 자신이 직접 전투를 독려하였다. 군사들은 북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분발해 공격하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으며, 화전(火箭) 수백 발이 이에 상응하여 동시에 날아갔는데, 세찬 바람에 불길이 타오르면서 적진을 마구 불태워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승승장구하여 반구정과 태화강 두 곳의 적굴을 소탕하자 남은 적들이 도망쳐 도산(島山)으로 들어가 숨었는데, 중국군이 한창 수급(首級)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사이에 적들은 이미 안전지대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도산은 형세가 무척 험준하여 쉽게 소탕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경리가 보병을 지휘하면서 마군(馬軍)을 8영(營)으로 나눈 뒤 비늘처럼 잇대어 둔수(屯守)하게 하고 또 절강(浙江)의 군사 한 진영으로 하여금 강변의 길목을 끊어 물길을 통해 오는 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경리가 제독과 함께 도산 북쪽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이덕형 등이 칭찬하며 감사하자 경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작은 승리일 뿐이다. 내가 서생포(西生浦)와 부산에 있는 적들을 섬멸시키는 것을 본 뒤에야 기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25일 3협을 독려하여 진격시켰는데 시간을 지연시킨 두 사람을 붙잡아 목을 베고 또 뒤에 처진 한 사람을 붙잡아 직접 왼쪽 귀를 베니 군사들 모두가 분발하여 성 동쪽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적의 방비가 매우 치밀한데다 성벽이 견고하고 험준하여 먼저 올라간 사람은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밖에 있는 군사 역시 성을 허물지를 못하였다. 이때 유격장군 진인(陳寅)이 탄환에 맞았으며 사졸이 아무리 개미떼처럼 성벽에 붙어 올라가 공격하려 해도 발을 디딜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한 적이 녹색 옷을 입고 백기(白旗)를 손에 쥔 채 왕래하며 호령하였는데, 그가 누구냐고 항왜(降倭)에게 물어보니 바로 청정(淸正)이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자 오래도록 싸워 군사가 지쳤으므로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었다.
경리와 제독이 말을 달려 해변가로 가서 적선(賊船)의 형세를 살폈다. 그리고 이덕형을 불러 말하기를 “땔나무를 많이 준비하여 내일 성을 공격할 때 쓸 수 있도록 하라. 이 적이 굴혈에 웅거하고 있지만 성 안에 양식이 없고 또 마실 물이 떨어지면 머지 않아 저절로 숨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하였다. 26일에 또 이덕형을 불러 말하기를 “항왜(降倭)들이 꾀를 내어 성을 허물어보려 하니 시험삼아 해보게 하려 한다. 다만 이 성이 매우 높고 험하여 우리 군사들이 많이 상하게 될 것이니, 이 점이 걱정스럽다. 중국군은 오늘 사면에 배치하여 포위만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마초(馬草)나 베고 양식이나 구하며 휴식시킬까 한다. 그대의 군사가 항왜들과 함께 마른 나뭇가지와 방패를 들고 가서 시험삼아 화공(火攻)을 해 보라. 그리고 성 밑의 물 나오는 곳을 메워 적이 물을 얻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덕형과 권율 등 여러 장수가 모두 목책(木柵) 안 흙담 사이에 들어가고 각 군사들이 성 밑까지 이르렀는데 적이 비오듯 쏘아대는 총탄이 방패를 뚫고 들어왔으므로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해 어쩔 수 없이 철수하였다.
이때 적선이 남강(藍江)에 떠 있다가 다시 해안으로 접근하려고 하자 중국군이 많이 화전(火箭)을 쏘았는데, 적선 한 척이 포에 맞아 부서지자 나머지 배들이 포구 밖으로 나갔다. 적 한 명이 아군에게 와서 항복하니, 경리가 은(銀)을 상으로 주고 붉은 비단을 걸쳐 준 뒤 준마(駿馬)를 타고 적에게 과시하게 하였다. 이 뒤로 나와서 항복하는 자가 줄을 잇자, 청정이 엄하게 성문을 지키며 출입을 금지시켰다.
27일에는 비가 많이 왔다. 이때 남강에 있는 적선이 강 언덕으로 접근하자 절강(浙江)의 군사가 포를 쏘았는데 적선이 포탄을 맞고는 퇴각하였다. 적 몇 명이 대나무 끝에 편지를 매달고 백기를 든 채 성을 내려왔는데, 경리가 가져다 보니 바로 청정의 부장(副將)이 속임수로 우리 나라 병사(兵使) 성윤문(成允文)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 글에 “청정은 서생포(西生浦)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소장(小將)들만 여기에 있다. 만약 조선의 장관(將官) 1인을 차출해 우리와 함께 서생포에 가서 우호를 맺게 한다면 두 나라 사람들이 많이 죽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다. 경리가 적의 사신을 돌려 보내면서 타이르기를 “청정이 만약 항복해 온다면 그 성 안에 있는 사람이 죽음을 면하게 될 뿐만 아니고 조정에 아뢰어서 관직에 제수하고 상을 후하게 내리도록 할 것인데 결코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다.” 하고, 이어 설관(舌官) 및 중국군 1인으로 하여금 영전(令箭)을 지급하게 한 다음 회답을 받아 다시 나오도록 하는 한편, 설관 박대근(朴大根)과 항왜 월후(越後 강본월후(岡本越後))를 시켜 성 밑에서 불러 타이르도록 하였는데, 적이 답하기를 “싸우려면 싸우고 강화(講和)를 하려면 강화하자. 한 쪽을 열어 우리가 성을 나가도록 해주고 장관을 보낸다면 강화에 대한 일을 의논하겠다.” 하였다.
적이 성 안에 물이 없는 관계로 매일 밤 성 밖에 나와서 물을 길어 갔다. 우리 나라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가 수하의 항왜로 하여금 우물 곁에 매복하고 있다가 물 길러 오는 왜인을 번번이 잡아들이게 하였는데 하룻밤에 잡는 숫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경리가 상으로 붉은 비단 1필과 백금 5냥을 주었다. 28일에 비가 그치지 않고 왔다. 29일에 서풍이 크게 불고 추위가 살을 엘 듯하였는데 화구(火具)를 많이 준비하여 성을 공격할 계책을 세웠으나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경리가 진영에 돌아와 여러 부대로 하여금 초가집을 짓고 포위해 머물며 진영을 차리게 한 뒤 오래 머물 계책을 세웠다.
무술년 정월 1일 적 한 명이 성을 나와 청정의 글을 전했는데, 그 글에 “청정은 지난 달 22일 이곳에 왔으나 여기에는 글자를 아는 자가 없어 글자를 아는 승려를 서생포(西生浦)에서 불러 온 뒤에야 비로소 귀국의 글을 보았는데 3국의 강화(講和)를 함께 체결토록 하겠다.” 하였다. 경리가 유첩(諭帖)을 보내 속히 항복하라고 하니, 청정의 부장(副將) 금대부(金大夫)가 답서를 가지고 와서 설관(舌官)을 불러 그 뜻을 전하기를 “내일 정오에 귀국 관원과 내가 남산(南山)에서 회동하여 강화에 대한 일을 의논하면 좋겠다.” 하였다. 경리가 이에 답하지 않고 생포한 왜인을 힐문하니, 그가 말하기를 “청정이 도산(島山)에 있고 시마돈오(時麻頓吾)와 흑전갑비수(黑田甲斐守) 등 여러 적이 모두 이 성에 있는데, 그들이 회의하며 말하기를 ‘조선에 온 중국군 수만은 양식만 떨어지면 돌아갈 것이다. 중국군이 가고나면 우리 군사가 곧장 경성으로 쳐들어가 그곳에 머무르면서 3도(道)의 군량을 가지고 명 나라로 쳐들어가자.’ 하였다. 청정이 거느린 정예 군사가 3백~4백 명이고 각 진(陣)에서 조발(調發)해 온 군사가 모두 2만여 명인데 전일 태화강(太和江) 전투에서 태반이 결딴났다.” 하였다.
2일 적병이 서생포에서 오고 또 부산에서 와 염포(鹽浦)에 수백 척이나 정박하였다. 경리가 파새(擺賽)ㆍ파귀(頗貴)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전탄(箭灘)에 가게 하고, 오유충(吳惟忠)ㆍ모국기(茅國器)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강 언덕에 가서 상륙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비가 온 뒤로 북풍이 잇따라 불어 군사들 모두가 심한 동상에 걸리고 군마(軍馬)가 배고픔과 추위에 지쳐 쓰러져 죽는 등 군용(軍容)이 쓸쓸하기만 하여 전혀 위세를 떨칠 수가 없었다. 3일 새벽에 청정이 경리와 직접 만나 약속하고 싶다고 말을 전해 왔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4일에 경리와 제독이 여러 부대를 독려하여 사면으로 공격하면서 화공(火攻)을 하려 했는데 적이 성 밖에서 먼저 불을 밝히고 포를 쏘아대었다. 경리가 퇴각하는 사졸의 목을 베고 또 유격장군(游擊將軍) 이화룡(李化龍)을 포박하여 군중에 돌려 보이자 군사들이 이를 보고는 서로 다투어 진격하였다. 날이 밝아 오면서 적이 포를 더욱 급하게 쏘아대었으므로 전사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였다. 이때 우협(右恊)의 군사가 왜서(倭書)를 얻었는데, 그 내용은 “가덕(加德)ㆍ안골(安骨)ㆍ죽도(竹島)ㆍ부산(釜山)ㆍ양산(梁山) 등 지역에서 11명의 장수가 6만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오니 굳게 지키면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강(藍江)의 적선 90여 척이 일제히 태화강(太和江) 상류로 올라오고, 육로(陸路)로 오는 적이 또 아군의 뒤로 돌아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경리가 이덕형을 불러 말하기를 “성이 험준하여 함락시키기가 어려운데 구원병의 세력이 거대하니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하겠는가?” 하니, 덕형이 말하기를 “청정이 외로운 성에 포위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인데, 이번의 작전이 한 번 실패로 돌아가면 뒷날 도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대인은 1만 군사를 가지고 오로지 전탄(箭灘)과 언양(彦陽)의 길을 방어하면서 요격할 계책을 세우라. 이곳은 싸움터로 삼기에 매우 좋으니 적이 오더라도 충분히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경리는 말하기를 “며칠 동안 성을 공격하다가 병사가 많이 손실되었으니, 포위를 풀고 물러나 다시 뒷날 작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하였다.
그 날 밤에 경리가 각 진영을 철수시키면서 파새(擺賽)와 양등산(楊登山)으로 하여금 후위(後衛)를 맡게 한 뒤 차례로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게 하였다. 배 위에 있는 적들이 중국군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다투어 상륙하였는데, 경리가 돌기(突騎)로 하여금 이를 치게 하여 9급(級)을 베니 적이 물러갔다. 경리가 군사들로 하여금 군량과 기계를 불태우게 하고 밤새 말을 달려 경주(慶州)로 돌아왔다. 전탄(箭灘)에 있던 오유충(吳惟忠)과 조승훈(祖承訓) 등 장수들은 미처 철수해 돌아가지 못한 상황에서 적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는데 절강(浙江)의 군사 다수가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 전사자가 약 1천 3백~1천 4백 명에 달했고 부상자는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진인(陳寅)ㆍ진우문(陳愚聞)ㆍ진만금(陳萬金)도 모두 총탄을 맞았는가 하면 군량과 기계가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졌으므로 경리가 경주에 도착해서 뜻이 매우 아뜩하기만 하였다. 경리와 제독이 경성으로 돌아갔다.
6월에 군문 찬획(軍門贊畫) 정응태(丁應泰)가 경리를 무함하면서 ‘도산(島山) 전투에서 병마를 많이 잃었는데도 이를 숨긴 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논공(論功)할 때에도 공정하게 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주본(奏本)을 올려 탄핵하였으므로 경리가 삭직되어 돌아갔다. 천자가 급사중(給事中) 서관란(徐觀瀾)을 보내 도산에서의 공죄(功罪)를 자세히 조사토록 하고,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만세덕(萬世德)을 경리로 삼았다. 정응태가 잇따라 장소(章疏)를 올려 군문(軍門) 형개(邢玠) 등을 배척하고, 우리 나라가 왜국과 서로 내통하고 있다고 헐뜯었다. 이에 조정에서 배신 최천건(崔天健)을 보내 사유를 갖춰 주달함으로써 경리가 무함당한 것을 해명하고, 또 배신 이원익(李元翼)과 허성(許筬) 등을 보내 잇따라 주달하였으며, 또 배신 이항복(李恒福)과 이정구(李廷龜) 등을 보내 본국이 무함당한 것을 해명하였다.
이 해 9월에 군문과 경리가 여러 장수를 4로(路)에 나누어 보내 대대적으로 왜적을 정벌하였다.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동로(東路)를 담당하였는데, 참장(參將) 양등산(楊登山)ㆍ유격장군(游擊將軍) 파새(擺賽)ㆍ도사(都司) 설호신(薛虎臣)ㆍ부총병 오유충(吳惟忠)ㆍ참장 왕국동(王國棟)ㆍ유격장군 진잠(陳蠶)ㆍ유격장군 섭사충(葉思忠)ㆍ유격장군 진인(陳寅)ㆍ유격장군 파귀(頗貴)ㆍ부총병 해생(解生)ㆍ유격장군 진우문(陳愚聞)ㆍ유격장군 팽신고(彭信古) 등이 모두 마귀의 지휘를 받았다. 제독 동일원(董一元)은 중로(中路)를 담당하였는데, 부총병 이여매(李如梅)ㆍ유격장군 도관(塗寬)ㆍ유격장군 학삼빙(郝三聘)ㆍ유격장군 섭방영(葉邦榮)ㆍ유격장군 노득공(盧得功)ㆍ유격장군 모국기(茅國器)ㆍ유격장군 안본립(安本立)ㆍ부총병 이영(李寧)ㆍ부총병 장방(張榜) 등이 모두 동일원의 지휘를 받았다. 제독 유정(劉綎)은 서로(西路)를 담당하였는데, 부총병 이방춘(李芳春)ㆍ유격장군 우백영(牛伯英)ㆍ유격장군 남방위(藍芳威)ㆍ참장 이영(李寧) 총병과 이름이 같다.ㆍ유격장군 조희빈(曹希彬)ㆍ유격장군 오광(吳廣) 등이 모두 유정의 지휘를 받았다. 제독 진린(陳璘)이 수로(水路)를 담당하였는데, 유격장군 허국위(許國威)ㆍ참장 왕원주(王元周)ㆍ파총(把總) 이천상(李天祥)ㆍ유격장군 계금(季金)ㆍ유격장군 장양상(張良相)ㆍ유격장군 심무(沈茂)ㆍ유격장군 복일승(福日昇)ㆍ파총 양천윤(梁天胤) 등이 모두 진린의 지휘를 받았다. 남ㆍ북의 군사를 합쳐 모두 14만 2천 7백여 명이었다.
마귀(麻貴)가 대군을 지휘하여, 부총병 해생(解生)을 선봉으로 삼아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공격하게 하고, 보병을 신령(新寧)ㆍ의흥(義興) 사이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설호신(薛虎臣)의 군사 1천과 우리 나라 군사 1백 명을 좌수영(左水營)에 주둔해 있게 하고, 우리 나라의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를 경주(慶州)에 보낸 뒤 9월 19일에 먼저 온정(溫井)의 적을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차관(差官) 학운현(郝雲賢)이 중로(中路)에서 적에게 붙은 조선 백성들이 많이들 나오고 있다고 보고하니, 제독이 설관(舌官)을 불러 말하기를 “우도(右道)의 적이 철수하고 갈 움직임을 보이자 잡혀 있던 조선 백성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는데 지금 온정을 공격한다면 필시 조선 백성들이 많이 죽게 될 것이다. 너는 면사첩(免死帖)을 가지고 가서 오(吳)ㆍ왕(王) 두 장수와 상의하되 속히 진군할 필요는 없다고 하라.” 하였다.
11일 2경(更)에 해생과 양등산이 6천 군사를 이끌고 울산으로 신속히 이동하고, 왕국동과 파귀는 3천 군사를 이끌고 길가에 매복하였다. 그리고는 밤 열두 시에 곧장 전진해서 육박전을 벌여 17급(級)을 베고 이어 산 위에 주둔하였다. 21일 경주(慶州) 조역(朝驛)에 진군하였다. 4경(更)에 제독이 먼저 표병(標兵)을 출동시킨 뒤, 해생ㆍ양등산ㆍ왕국동ㆍ파귀 등 네 장수의 마병은 도산(島山)이 바라다 보이는 산 위에 진을 치게 하고, 제독 자신은 부평역(富平驛) 옛 터에 진영을 차렸으며, 보병은 병영(兵營)의 옛 터에 주둔시키고는 정예 기병을 선발해서 요격(邀擊)하게 하였다.
적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더니 이윽고 대병력을 출동시켜 기병과 교전하였다. 이때 천총(千總) 마운(麻雲) 등이 2백 기병을 거느리고 전탄(箭灘)을 거쳐 도산에 이르니, 적이 이렇게 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다가 어쩔 줄 모르고 도망하면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래서 1급밖에 베지 못했으나 적의 방옥(房屋)과 양초(糧草)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우리 나라의 장수 김응서(金應瑞) 역시 이 날 동래(東萊) 온정(溫井)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수십 급을 베었다. 제독이 각 진영으로 하여금 초막을 짓게 하여 둔수(屯守)할 계책을 세웠다. 해가 돋자 유병(游兵)이 왕래하며 싸움을 걸었으나 적이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오지 않았으며 중국군이 성에 가까이 가면 총탄을 비오듯이 퍼부었다.
26일 제독이 장수들로 하여금 진을 바꿔 퇴각하는 것처럼 하면서 적이 성에서 나오도록 유도하게 하였으나 적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29일 관발군(管撥軍) 양여덕(楊汝德)이 부산에서 오는 적의 응원군이 며칠 내에 당도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30일 새벽에 제독이 먼저 군량과 대포 등을 30리 밖으로 옮기고 기병을 뽑아 병영 서쪽 골짜기에 매복시킨 뒤 해가 돋을 무렵 여러 부대를 모두 물려 진을 치고서 기병 천여 명을 보내 백련암(白蓮岩) 아래 적선이 정박한 곳을 치달리게 하였으나 적은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제독이 네 장수와 우리 나라 장관(將官)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하는 일 없이 앉아서 세월만 보낼 수는 없다. 김 총병(金總兵)은 응서(應瑞)이다. 조선 군사와 관병(官兵)을 뽑아 일찍 동평(東坪)으로 가서 한편으로는 적을 섬멸하고 한편으로는 조선 백성을 불러내도록 하라.” 하였다.
다음 달 6일에 제독이 중로(中路)의 상황이 불리하다는 말을 듣고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완연하더니 즉시 회군하면서 네 장수를 머물게 하여 모화촌(毛火村)에 매복하게 하였다. 7일 포로로 잡혔던 우리 나라 사람 전이연(全以連)이 보고하기를 “관백(關白)이 이미 죽었으며, 가강(家康)이 청정(淸正)을 소환하였으므로 지금 철수해 돌아가려 한다.” 하였다. 제독이 23일 경주로 진영을 옮겼다가 영천(永川)으로 회군하였는데 적이 철수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였다.
동일원(董一元)은 대군을 거느리고 사천(泗川)에 가서 심안돈오(沈安頓吾 도진의홍(島津義弘))를 공격하였는데, 안찰부사(按察副使) 양조령(梁祖齡)이 감군(監軍)하였다. 제독이 여러 장수와 가야산(伽倻山) 아래에서 모여 적의 형세를 탐지하였다. 이 달 19일에 독촉하여 삼가(三嘉)로 향하면서 밤에 1백 10리를 달려가 동틀녘에 남강(南江)을 건넌 뒤 망진봉(望晉峯) 앞 들판에 진을 쳤다. 적이 멀리서 대군이 오는 것을 보고 도망쳤다. 곤양(昆陽)과 영천(永川)ㆍ신녕(新寧)의 적들도 영채를 불태우고 도망쳤다. 21일 제독이 휘하의 달기(㺚騎)를 보냈는데 곤양에 가서 12급을 베었다. 제독이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싸우지는 않고 서로(西路)의 소식을 기다렸다.
27일 우리 나라의 장관(將官)들이 결전할 것을 간절히 청하자, 제독이 보병 2천과 마병 1천을 정기룡(鄭起龍)에게 주면서 선봉을 삼고, 각 진영에서 정예 군사 4천을 뽑아내 제독이 직접 거느린 뒤 곧바로 사천성 아래로 짓쳐 들어가니 적이 성에서 나와 항거하였다. 이때 적장 한 사람이 비단옷에 황금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는 앞으로 뛰쳐 나왔는데, 중군(中軍) 방시신(方時新)이 활을 쏘아 얼굴을 맞추고 목을 베었다. 노득공(盧得功)이 앞장 서서 성을 오르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여러 부대가 합동 공격을 펼쳐 1백 30급을 베었는데 날이 저물기도 전에 제독이 군대를 정비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
다음 달 1일 제독이 다시 진격하여 적의 목책(木柵)까지 접근하였는데, 팽신고(彭信古)의 군중에서 불길이 치솟자 각 부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무너져 인마(人馬)가 서로 밟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적이 이때를 편승해 칼을 빼어들고 마구 찍어대었는데 제독은 간신히 몸을 피했으나 적이 망진봉까지 추격하며 쫓아왔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보병이 3천여 명이었으며 마병 역시 많은 숫자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제독이 흩어진 군사를 모아 진을 치려 하였으나 군사들이 이미 모두 도망쳐 지리멸렬한 상태였기 때문에 군세(軍勢)를 갖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祖)ㆍ모(茅)ㆍ양(楊)ㆍ남(藍)ㆍ팽(彭)ㆍ진(秦) 등 여섯 장수를 삼가에 남겨둔 채 밤새 말을 달려 합천(陜川)으로 돌아왔다. 좌영(左營)의 군대가 조금 모이고 우리 나라에서 수송해 온 군량도 도착하자 제독이 군사를 점검하고 머물러 진영을 차리려 하였으나, 팽신고가 제독을 속여 말하기를 “정기룡의 군대도 함몰되었다.”고 하니 제독이 이 말을 믿고 즉시 군대를 철수하여 성주(星州)로 돌아갔다. 방시신(方時信)이 병으로 죽자 그 대신 섭사의(葉思義)를 중군으로 삼았다.
제독은 일찍부터 모국기(茅國器)를 중하게 여겨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국기의 참모 사세용(史世用)이란 자는 일찍이 일본을 왕래했던 자였는데, 국기가 이 자를 통해 적과 강화(講和)하여 물러나게 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군대가 패하자 국기가 세용을 보내 적의 내부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심안돈오가 세용에게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대승리를 거두었으니 먼저 성주를 격파한 다음 경성을 취하고 서쪽으로 진격하겠다. 그대는 요동(遼東)에서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세용이 돌아와서 국기에게 이를 이야기하니, 국기가 크게 두려워하여 제독과 함께 군문(軍門)에게 급히 보고하였는데, 군문이 크게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강화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지 말라. 내가 먼저 너의 목을 베어버릴 것이다.” 하자, 세용이 공포에 질려 돌아왔다.
이 달 15일에 제독이 다시 군사 작전을 벌이려고 계획하였는데, 16일에 적은 이미 철수한 뒤였다. 17일에 장수들이 동양창(東洋倉)에 들어가 보니 병든 왜인 몇 사람과 우리 나라 여인 세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18일에 제독이 말을 달려와 방옥(房屋)과 보루를 불태워 없애고 돌아갔다.
유정(劉綎)은 대군을 거느리고 순천(順天)에 가서 행장(行長)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전주(全州)를 떠나려 할 즈음에 이덕형(李德馨)이 진군할 시기를 물으니, 제독이 말하기를 “희생을 죽여 기(旗)에 제사를 올리고 하늘에 고하며 군사와 맹세한 다음에 점차적으로 진군할 것인데, 편한 곳을 가려 진영을 차리고 며칠 동안 군사를 쉬게 해야 뭔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유정에게 진격해서 싸울 뜻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형이 또 묻기를 “차관(差官)이 예교(曳橋)에서 순천의 적이 진을 쳤던 지명이다. 가지고 나온 보고는 어떠한가?” 하니, 제독이 행장의 답서를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듣건대 관백(關白)이 이미 죽었다 하므로 행장도 떠나려 하고 있다.” 하였다. 그런데 그 답서라는 것은 바로 행장이 차관인 두(杜)ㆍ조(趙) 두 명의 기패(旗牌)에게 보내 온 것인데, 그 답서에는 다만 7~8일경에 서로 만나자고 되어 있을 뿐이었다.
11일 제독이 교장(敎場)에서 기(旗)에 제사를 올렸는데, 중국의 장수들 및 우리 나라의 의정(議政) 이덕형, 접반사 김수(金睟), 도원수 권율, 순찰사 황신(黃愼), 병사 이광악(李光岳)ㆍ이시언(李時言), 방어사 원신(元愼) 등이 모두 반열에 참여하였다. 제사를 마친 뒤에 닭의 피를 술에 타서 은배(銀杯)에 담은 뒤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제독 이하가 차례로 들어가 맹세하는 글을 읽고 피를 마신 뒤 절하고 물러나왔다. 그런데 그 맹세하는 글이라는 것이 바로 “중국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군량을 조달해 보내는 등의 일에 감히 어긋남이 없게 한다.”는 것이었는데, 아래로 천총(千摠)ㆍ파총(把摠)ㆍ초관(哨官)과 우리 나라의 하급 장관(將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맹세에 참여하였다.
마침내 여러 군사들의 부서를 나누었는데, 오광(吳廣)은 5천 6백 명을 이끌고 원신(元愼)과 함께 낙안(樂安)의 길로 들어가고, 왕지한(王之翰)ㆍ사무관(司懋官)ㆍ이영(李寧)은 8천 명을 이끌고 이시언(李時言)과 함께 구례(求禮)ㆍ광양(光陽)의 길로 들어가고, 제독은 이방춘(李芳春) 등의 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이광악(李光岳)과 함께 순천(順天)의 길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때 정탐하고 온 사람이 말하기를 “진주(晉州)와 사천(泗川)의 적추(賊酋)들이 모두 예교(曳橋)에서 모였다.”고 하니, 제독이 비밀히 동 제독(董提督)에게 통지하여 속히 진군해서 진격해 섬멸할 형세를 적에게 보여주도록 하고, 진주와 사천의 적들이 그들의 소굴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예교로 진격해 공격하기로 하였다.
20일에 비로소 순천의 옛 성에 도착한 뒤 사람을 보내 행장과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기패관(旗牌官) 왕문헌(王文憲)을 치장하여 제독으로 삼고 제독 자신은 천총(千總)의 관복을 입었으며, 우후(虞候) 백한남(白翰南)을 접반사로 삼고 도원수의 군관 변홍달(卞弘達)을 도원수로 삼아 중로에 가서 행장을 맞게 하는 한편, 왕지한과 사무관 등은 광양(光陽) 쪽에서 진군해 오다가 행장이 나올 때를 틈타 성에 육박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제독은 그 가운데에서 행장을 사로잡기로 하였는데, 먼저 군용 비둘기 20여 마리를 중로에 숨겨 두었다가 행장이 초막으로 나와 있을 때 비둘기를 날리는 것을 신호로 두 길에서 일제히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행장이 해농창(海農倉)을 나와 초막에 도착하기 전에 아군의 형세가 매우 성대한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의아심이 들어 앞으로 나아오지 않았는데, 이윽고 군중에서 군용 비둘기가 날아 오르면서 동로(東路)의 군대가 갑자기 진격해 오며 포를 쏘아대자 행장이 놀라 도망쳐 성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제독이 군대를 재촉해 추격하고 삼군(三軍)이 힘을 합쳐 90여 급을 베었는데 적은 감히 성을 나오지 못했다. 이 날 밤에 수병 도독 진린(陳璘)이 수군을 이끌고 앞 바다에 와서 진을 쳤다.
21일에 도독이 수군과 배들로 하여금 아침 조수(潮水)를 이용해 가까운 언덕에 정박한 다음 대포를 발사하게 하였는데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저녁에 적이 서문(西門)을 통해 나와 칼을 휘두르며 일진일퇴하였는데, 중국 기병 하나가 총포를 무릅쓰고 돌진하여 군기(軍旗) 하나를 빼앗아 오자 적이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밤에 제독이 친병(親兵)을 이끌고 각 진영을 순찰하며 날이 밝을 때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게 하였다.
22일 수군이 조수를 이용해 상륙한 뒤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니 적도 병력을 모두 동원해 성 밖으로 나왔다. 유격장군 계금(季金)이 탄 배가 얕은 여울에 좌초된 것을 보고 해안에 있던 적들이 비오듯 총탄을 퍼부어대자 중국군도 배 위에서 대연자(大鉛子)를 날렸는데 행장이 군대를 지휘하여 독려하며 전진해 왔다. 적 20여 명이 얕은 물줄기를 건너 와 그 배가 못 가도록 막자 계금이 군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며 항전하여 10여 급을 베자 적이 조금 물러갔는데 결국은 배를 저어 빠져 나갔다. 제독이 운제(雲梯)ㆍ비루(飛樓)ㆍ포차(炮車)를 마련토록 하여 10여 일만에 제작을 끝냈는데 이렇게 지구전을 벌이는 동안 적의 간계(姦計)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29일 이들 공성(攻城) 기구들을 성 밖에 운반해 놓고 크게 군세(軍勢)를 떨쳐 과시하였으며 이와 함께 수군도 바다를 까맣게 뒤덮으며 전진해 왔다. 그리고는 각자 무예를 뽐내며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총포를 발사하자 천둥 벼락이 떨어져 땅이 갈라지는 것 같았는데, 적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제대로 안정을 취하지 못하였다.
다음 달 2일 제독이 군대를 출동시켜 성을 공략하였다. 왕지한(王之翰)의 군대가 먼저 올라가 목책(木柵) 밖 10여 보(步)쯤의 위치에 도착하였을 때 적이 성벽 틈에서 나와 칼로 중국군을 찍어 넘긴 결과 전사자가 40여 명이나 발생하였으므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얼마 뒤에 또 진격하여 10여 급을 베었다. 이때 수군도 이미 앞바다에 도착하였는데 제독이 군사를 지휘하여 전진하였으나 중국군이 적의 총탄에 많이 쓰러져 삼군(三軍)의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그리고 비루(飛樓)와 포차(砲車)는 무거워서 신속하게 운반할 수가 없었는데 겨우 20보(步)쯤 나아갔을 때 적이 더욱 총탄을 퍼붓자 군사들이 모두 몸을 움츠린 채 비루와 포차 뒤에 서 있었다. 그러자 적이 크게 함성을 지르고 각종 포를 쏘아댔는데, 중국군은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기운이 이미 다 떨어졌고 게다가 조수(潮水)마저 점점 빠져나가 수군도 물러가고 있었다. 적이 남몰래 괘창(掛窓)을 통해 1백여 인을 밧줄을 타고 내려가게 한 뒤 오광(吳廣)의 군사를 엄습하였는데, 오광의 군대가 어지러워지면서 오광 자신도 도망치자 적이 포차에 뛰어들어가 20여 인을 베고 비루와 포차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때 이방춘(李芳春)과 우백영(牛伯英) 등이 맞서 대적하니 적들도 뒤따라 물러갔다.
3일에 진 도독이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조수를 타고 와 공격하면서 전투를 독려하기를 “배 한 척마다 적선 몇 척씩 잡아 오도록 하라. 오늘밤에 기필코 이 적을 남김없이 섬멸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순신이 조수가 빠져나간다고 말했으나 도독이 듣지 않았다. 이에 각 선박이 서로 전진하여 적선을 탈취하려 하다가 조수가 빠져나간 것도 모르는 사이에 사선(沙船)과 호선(號船) 23척이 얕은 여울에 걸려 꼼짝하지 않게 되었다. 적이 이것을 보고는 각 선박에 모여들어 포위하자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마구 칼과 창을 휘둘러 쓰러뜨렸는데 적들도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죽었으나 중국군도 전사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우리 나라 군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편전(片箭)을 쏘아대자 적이 비로소 한 쪽을 틔웠는데 포구(浦口)의 진흙탕 속에 빠져 있던 중국군 1백 40인이 이렇게 해서 모두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중국군 선박으로서 불태워진 것이 19척이고 빼앗긴 것이 4척이었다.
포로로 잡힌 우리 나라 사람이 성 아래쪽에서 부르짖기를 “적이 병력을 모두 동쪽에 집결시켰기 때문에 이 쪽은 텅 비어 있다. 만약 빈 틈을 이용해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덕형ㆍ권율ㆍ김수 등이 재차 나아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제독이 듣지 않았는데, 중로(中路)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회군할 뜻을 굳혔다. 이덕형 등이 만류하자 제독이 허락하는 체하였으나 군사들의 마음이 이미 동요되고 있어 그대로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7일 회군하면서 먼저 보병을 떼어내 옮겨 뒷산 봉우리에 진을 치게 하고 각 진영을 불태운 뒤 잔수(潺水)의 길을 향하게 하였다. 이때 조수가 바야흐로 밀려오는 때라서 수군이 조수를 이용해 적의 소굴을 다시 포위하려 하였으나 육군이 이미 흩어진 것을 보고는 마침내 배를 돌렸다. 왕 참정 사기(王參政士琦)는 남원(南原)에 있으면서 제독이 철수한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만류하는 한편 왕지한(王之翰)과 사무관(司懋官)을 붙잡아 치죄하려 하니 제독이 가서 참정을 찾아 보았다. 참정이 수군으로 먼저 남해(南海)의 적을 공격시키려 하였으나 제독이 따르려 하지 않으면서 왕(王)ㆍ사(司)ㆍ오(吳)ㆍ조(曹) 등 네 장수의 병력 1만여 명을 순천에 주둔시키고 오광(吳廣)은 성 안에 들어가 주둔케 하였다. 17일 제독이 예교(曳橋) 10리 밖에 있는 높은 산 봉우리 위에 올라가 각 보루를 두루 살핀 다음에 쌍암사(雙岩寺)로 돌아왔다.
18일에 오종도(吳宗道) 및 항왜(降倭) 등과 비밀히 의논하여 행장(行長)과 강화(講和)하기로 약속하였다. 제독이 황금과 비단을 행장에게 보내자 행장도 총과 칼을 선물로 바치면서 인질로 관원을 보내줄 것과 군대를 물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제독이 기수(旗手) 유만수(劉萬守)와 왕대공(王大功)을 참장(參將)으로 꾸미고는 가정(家丁) 30명을 대동하고 가게 하였는데, 행장이 가정의 숫자가 적다고 하면서 20명을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제독이 따랐다. 행장이 비밀리에 제독과 모의하기를 “내가 수급과 기계를 남겨두고 갈 테니 성에 들어와서 가지도록 하라.” 하고는 24일에 전 병력을 데리고 귀환길에 올랐는데, 제독이 그 성에 들어갔을 때는 행장은 이미 바다 한가운데에 나가 있었다. 제독이 수급을 찾아내는 한편, 포로로 잡혀 있다가 산골에 흩어져 있던 우리 나라 사람들까지 붙잡아 목을 베고 행장이 보낸 왜인 인질 여섯 사람도 목을 베어 수급의 숫자를 보충하였다. 그리고는 금색 글자로 ‘서로대첩(西路大捷)’이라는 네 자를 크게 써서 군문(軍門)에게 재빨리 보고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르지 못하게 여겼다.
진린(陳璘)은 수군을 거느리고 순천(順天)의 적을 공격하는 데 협조하였는데, 참정(參政) 왕사기(王士琦)가 감군(監軍)하였다. 등자룡(鄧子龍)ㆍ계금(季金)ㆍ양천윤(梁天胤)ㆍ복일승(福日昇)ㆍ왕원주(王元周)ㆍ심무(沈懋)ㆍ이천상(李天常) 및 우리 나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등과 함께 고금도(古今島) 쪽에서 바다로 나가 9월 21일에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수책(水柵)을 집중 공격하게 하였다. 22일 진공하여 적의 수급을 벤 것이 매우 많았다.
이때 유 제독(劉提督)이 한창 성을 공격할 비루(飛樓)와 포차(砲車)를 만들면서 제조가 다 끝난 뒤에 성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에 도독 역시 군사를 거두고 대기한 지가 10여 일이 되었다. 다음 달 1일 제독이 도독과 약속하여 서로 만나보고 말하기를 “내가 만들고 있는 공성(攻城) 기구의 제작이 완료되지 않았고, 군문(軍門)이 보낸 보충병 및 등자룡의 수군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나는 군사들이 모두 도착할 때를 기다려 작전을 개시했으면 한다.” 하였는데, 도독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공연히 노숙(露宿)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적이 필시 우리의 정세를 탐지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속히 전투를 벌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하니, 제독이 어쩔 수 없이 따랐다.
2일에 제독이 적의 소굴로 진공하겠다고 하자 도독이 배들을 이끌고 조수(潮水)를 이용해 올라왔는데 정오가 지나도록 육군이 나아오지 않았다. 3일에 또 만조(晩潮)를 타고 와서 크게 전투를 벌였는데 육군은 이 날도 오지 않았으며, 7일에 또 진격하였으나 이때는 제독이 이미 육군을 철수하고 난 뒤였다. 이에 도독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순천(順天)에서 죽어 귀신이 될지언정 철군은 차마 못하겠다. 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싸울 때마다 왜적 수백 명씩만 죽인다면 왜적이 또한 씨가 마를 것이다.” 하고, 며칠 계속 진공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19일 밤에 적선이 남해에 나타나자 이순신이 도독에게 알렸다. 도독이 계금(季金)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 여러 장수들이 뒤를 따랐는데 순신이 앞장서서 인도하며 앞바다로 나가 진을 쳤다. 22일 적선이 와서 전군(前軍)을 범했는데, 순신이 이를 격파하여 배 50여 척을 불태우고 2백여 급을 베었다. 24일에 적이 배들을 모두 이끌고 관음포(觀音浦)에 와서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행장이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 나갔다. 도독이 수군을 독려하여 사천(泗川)의 왜적을 모조리 죽였다.
적이 이순신의 배를 몇 겹으로 에워싸자 도독이 우리 나라 배에 바꿔 탄 뒤 포위망을 뚫고 곧바로 들어와 구원하였다. 적이 또 도독의 배를 포위하였는데 두 명의 왜적이 뱃머리로 뛰어오르자 중국군이 삼지창(三枝槍)으로 가슴을 찔러 바다에 떨어뜨렸다. 적선이 고기 비늘처럼 도독의 배 아래로 모여들자 도독이 닻을 내려 배를 멈추게 하였으며 왕원주(王元周)와 복일승(福日昇) 두 장수 역시 우리 나라 배로 갈아탄 뒤 도독의 배를 가운데에 두고 보호하였다. 도독이 군사들로 하여금 함성을 지르고 대포를 쏘게 하자 적들도 위를 쳐다보고 조총을 쏘아대었다. 이때 도독이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방패에 의지하고 엎드려 있게 하였는데, 적들이 이를 보고는 한꺼번에 칼을 빼들고 배 위로 올라오자 중국군이 장창(長鎗)을 가지고 낮은 자세에서 찔러대니 물에 떨어져 죽은 왜적의 숫자가 천을 헤아렸다. 여러 장수들도 죽을 힘을 다 내어 육박전을 벌였다.
얼마 뒤에 도독이 쇠방울을 흔들어 군사를 거두었는데 배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해지자 적이 의심하여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중국군이 높은 위치를 이용하여 분통(噴筒 화전(火箭))을 적선에 흩뿌리니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면서 적선 수백 척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온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이순신이 멀리서 도독이 포위된 것을 보고는 역시 포위망을 뚫고 진격하면서 힘을 합쳐 혈전을 벌였다. 등자룡(鄧子龍)의 배 안에서 불길이 치솟자 군사들이 불을 피하느라 소란해진 틈을 타서 적이 자룡을 죽이고 그 배를 불태웠다. 우리 나라 경상 수사(慶尙水使) 이순신(李純信)의 선봉선(先鋒船)도 적선 10여 척을 불태웠다. 매우 높다랗고 위에 붉은 휘장을 친 적선 한 척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세 사람이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군사를 집결시켜 집중 공격을 퍼부으며 황금 갑옷 입은 한 사람을 쏘아 맞추자 적선들이 도독은 놔두고 그 배를 구원하러 갔으므로 도독의 군사가 이 때문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에 순신의 여러 부대와 세력을 합쳐 호준포(虎蹲砲)를 쏘아 그 배를 산산조각내자 나머지 적들이 혼비백산하였는데, 그 결과 거의 모든 배를 불태워버릴 수 있었다.
다음 날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 휘하 군사들이 그의 죽음을 숨겨 발상(發喪)하지 않은 채 각적(角笛)을 불며 깃발을 눕힌 뒤 더욱 힘껏 전투를 독려하여 적선 2백여 척을 쫓아 불태우자 적이 혹 도망쳐 남해(南海)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노량진(露梁津) 쪽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 도독이 멀리 배 위에서 통제선(統制船)의 사졸들이 수급과 왜화(倭貨)를 다투어 갖는 광경을 보고는 말하기를 “통제사가 필시 죽었을 것이다.” 하였는데,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행장(行長)은 미조항(彌助項)의 외양(外洋)을 통해서 일본으로 도망쳐 갔는데, 행장을 잡아 목을 베지 못한 것은 그를 유 제독(劉提督)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6일 도독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면서 육로(陸路)를 통해 경성에 왔다.
기해년 5월 군문(軍門) 이하 여러 관원들이 모두 돌아가고, 경리(經理) 및 안찰부사(按察副使) 두잠(杜潛)과 제독군무총병관(提督軍務總兵官) 이승훈(李承勛)이 남아 있는 군대를 통솔하며 경성에 주둔하였다.
경자년 9월에 경리ㆍ안찰 및 남아 있던 군대가 모두 철수해 돌아갔다.
중국군이 와서 구원해 준 것은 다음과 같다. 임진년에 처음 평양(平壤)을 공격했을 때 동원된 병력이 3천 3백 19인, 계사년에 평양을 공격해 격파했을 때 동원된 병력이 4만 3천 5백 인, 뒤따라 도착한 병력이 8천 인, 정유년 이후 앞뒤로 와서 구원해 준 병력이 14만 2천 7백여 인, 기해년 이후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던 병력이 2만 4천여 인으로 도합 22만 1천 5백여 인이었으며, 양곡은 10만여 석, 은(銀)은 4만여 냥에 이르렀다.

어진 이를 가려서 성종을 세웠던 것이고 성종도 또한 그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기에 당일에 즉위하였던 것으로 지금 형세와는 달랐으나 대신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2월 2일 신시에 광해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서청(西廳)에서 즉위하니 백관은 조복(朝服)을 갖추고 천세(千歲)를 부르며 춤추고 나갔다. 이튿날 홍문관에서 예조 판서 권협(權悏)을 탄핵하고 그 자리는 정창연(鄭昌衍)이 대신하게 하였다. 《하담록》
○ 전날 밤에 총호사(摠護使)인 좌의정 허욱(許頊)이 아뢰기를, “저녁 상식(上食)을 오늘 저녁부터 거행해야 마땅하나, 난리 후에 사옹원(司饔院)외에서의 수라를 폐지하였으므로 허다한 그릇이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아서 해당 관청에 그릇을 구비하도록 독촉하였으나 아직 진배(進排)하지 않으니 신 등이 능히 감독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인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사헌부에서 아뢰어 각 해당 관원 및 빈전도감(殯殿都監)ㆍ차지관원(次知官員)을 파직하기를 청하므로 그대로 윤허하였다. 《정무록》ㆍ아래도 이와 같다.
○ 양사(兩司)에서 합계하여 어의(御醫)를 잡아서 국문(鞫問)하자고 하므로 그대로 윤허하니 허준(許浚)ㆍ이명원(李命源)ㆍ조흥남(趙興男)ㆍ박지지(朴知止)가 잡혀서 갇혔다.
○ 이산해(李山海)가 원상(院相)으로서 정원에 숙직하였다.
○ 7일에 영의정 유영경이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답하기를, “이때가 진실로 어느 때인데 감히 이와 같은 말을 하는가.” 하였다.
○ 8일에 유영경이 처음으로 올린 사직 상소에 대해 윤허하지 않는 비답을 지제교(知製敎) 신요(申撓)가 지어 바쳤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도승지 유몽인(柳夢寅)은 사람됨이 용렬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 두서가 없습니다. 국상(國喪)을 당하여 일이 많은 시기에 승정원의 장(長)의 임무는 결코 그가 감당하지 못하니 체직하소서. 그리고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 병환이 나신 지 한 해가 넘도록 약효를 보지 못하자 신자의 절박한 심정으로 그 지극한 정성을 쓰지 아니하는 곳이 없으니, 송석경(宋錫慶) 등이 수의(首醫)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실상 전하를 사랑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김대래(金大來)는 당론(黨論)에 부동하여 마음으로 군부를 무시하고 감히 변설을 놀려서 송석경 등의 죄를 허구 날조하여 흉악하고 참혹함을 방자히 하더니 마침내 그들을 공격하여 내쫓고야 말았습니다. 그 마음 쓰는 것이 극히 졸렬한데도 아직도 높은 벼슬을 차지하여 조정 논의를 주도하고 있으니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문 밖으로 내쫓으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윤허한다. 김대래는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 12일에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이 소를 올려서 유영경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조정을 어지럽힌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영의정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였겠는가. 논의가 과하다. 선조(先朝)의 대신을 가볍게 논의하는 것을 옳지 못하고 또 3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한다는 공자의 말씀을 예전에 들었는데, 선왕(先王)께서 유 정승[柳相]을 발탁(拔擢)하여 정승자리에 둔 지 우금 7년이라 의지하고 기댐이 더욱 두터웠다.이제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 한달도 못 되어서 그를 죄 주는 것은 다만 그 어버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에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구(耆舊)를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나니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정무록》
○ 이 축이 소를 올린 뒤에 영남 사람인 김응성(金應城)ㆍ강린(姜遴) 등이 잇달아 소를 올렸다. 《하담록》
○ 사간 송석경(宋錫慶)이 아뢰기를, “대비께서 내리시는 명은 반드시 전하를 먼저 거치고 난 뒤에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대비께서 산릉(山陵)에 관한 명령을 빈청(賓廳)에 직접 내렸는데도, 승정원에 있는 자가 흐리멍텅하여 잘 살피지 못하여 끝내 전하께 계품(啓稟)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을 죄로 다스리지 아니하면 후일에 폐단이 있을까 두렵사오니 해당 승지를 파직하기를 청하옵니다. 또한 내관(內官) 민희건(閔希謇)은 본디 거세당한 천한 종자로서 성질이 흉악하고 간교합니다.오랫 동안 내수사(內需司) 제조(提調)가 되어 세력을 믿고 폐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없고 백성에게 포학하게 굴어 팔도에 해를 끼치더니, 선왕께서 승하하신 후에는 악한 짓은 날로 심하게 하여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현저하게 있사오니 귀양보내시어 모든 방자한 환관에게 경계하는 보기가 되게 할 것을 청하옵니다. 영의정 유영경은 불측한 꾀를 마음에 품고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져서 천지간에 용납되기 어려운데도 아직껏 정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문 밖으로 내쫓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둘 다 윤허하지 않았다. 《정무록》
○ 이때 양사에서 합계한 정언 이사경(李士慶)ㆍ헌납 이호신(李好信)ㆍ사간 박이서(朴彛敍)ㆍ정언 임장(任章)ㆍ집의 목장흠(睦長欽)ㆍ장령 윤양(尹讓) 대략에, “영의정 유영경은 본래 음험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여 안으로는 궁중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사당(私黨)을 만들어서 제 마음대로 권력을 농간하고 임금의 이목을 가리워 치솟는 불꽃이 하늘까지 닿듯 하였으며, 흉악한 마음을 품어서 마음 속에는 임금이 없고 국가를 저버린 죄는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것으로 아오니 유영경의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문 밖으로 내쫓기를 청하옵니다.원흉이 악한짓을 하는데는 또한 반드시 간특한 무리들이 우익이 되는 것인데 김대래(金大來)ㆍ이유홍(李惟弘)ㆍ이효원(李效元)ㆍ성준구(成俊耇) 등이, 심복이 되고 혹은 부하가 되어 귀역(鬼蜮)과 같이 주야로 모이고 홍식(洪湜)ㆍ송전이 또한 그의 사주를 받고 조정을 어지럽히고 하였으니 아울러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기를 명하시어 간악한 당과들의 징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영상에 관한 것은 윤허하지 아니한다. 이효원 등을 파직하라” 하였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서 유영경에 대한 일은 쾌하게 공론을 좇기를 청하였다. 《정무록》
선조 병오년(1606) 봄에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를 낳았는데 계비 김씨의 소생이다. 영의정 유영경이 세종조(世宗朝)에 광평(廣平)ㆍ임영(臨瀛)대군이 났을 때의 옛 일을 끌어다가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인심이 흉흉하여 모두 임해군에 변이 생길까 의심하므로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이 도감(都監)에 속한 군사를 거느리고 행궁(行宮)을 호위하기를 청하였다.선조가 전교를 내려서 왕위를 동궁에게 전하고자 하니 영의정 유영경이 좌의정 허욱(許頊)ㆍ우의정 한응인(韓應寅)과 더불어 회계하는 글에, “지금 이 전교는 군정(羣情)에 어긋난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상하로 전파되어 유영경이 동궁에 대하여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계사년(1593) 가을 선조가 해주(海州)에 있을 때에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겠다는 전교를 내리니 윤두수(尹斗壽) 등의 방계(防啓)하는 소에 또한, “실로 군정에 어긋난다”는 말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윤두수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지금 똑같은 말을 가지고 유영경의 죄를 삼는 것은 계사년과 지금이 시세가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담록》
○ 양사가 합계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이 탄핵을 입었으니 사세가 정무(政務)를 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하물며 이런 때에 정승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영의정을 체차 하라.” 하였다. 《정무록》에도 있다.
○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았는데 이원익이 사퇴하는 소를 올리므로, 답하기를, “경이 지금 입성(入城)하겠다는 말에 조야(朝野)가 서로 기뻐하고 군민(軍民)이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니 몽복(夢卜)보다 낫지 않은가. 하물며 경은 공정하고 충성스럽고 청백하고 정직하여 진심으로 국사를 걱정하니 지금 영의정의 직임은 경이 아니면 안 된다” 하였다.
○ 사간원에서 정인홍(鄭仁弘)ㆍ이경전(李慶全)ㆍ이이첨(李爾瞻) 등을 빨리 석방하고 이어 관작을 회복시켜서 인심의 울분을 쾌하게 하도록 청하였으나 오랫 동안 윤허하지 않다가 중도 부처(中途付處)를 명하였다. 금부도사가 정인홍의 병이 중하여 중도에서 지체하니 극히 민망스럽다는 뜻으로 장계하자 비로소 사헌부의 청을 윤허하며, “정인홍은 선왕께서 귀양을 명하셨던 사람이라 감히 경솔하게 석방하지는 못하나 병이 중하다고 하니 부득이 사헌부의 청을 좇는다. 정인홍이 석방되었는데 이이첨 등을 그냥 죄적(罪籍)에 두면 억울할 듯하니 아울러 석방하라” 하였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조판서 성영(成泳)은 겉으로는 소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심으로는 간사한 마음을 품어 공론에서 버림받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권간(權奸)에게 아첨하여 두 번이나 이조판서 자리를 차지하여 전후에 조정을 어지럽힌 죄가 분명하여 덮을 수 없으니 파직을 청하옵니다. 또한 이조참의 성이문(成以文)은 그 아들이 이미 간악한 자들에 편당한 죄를 입었으니 그냥 이조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다.
○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홍식(洪湜)과 송전(宋●)은 원흉(元兇 유영경)에 아첨하여 위세를 조성하여 조정을 어지럽힌 죄가 이효원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아울러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였다.
○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권간이 집권하니 뭇 소인들이 모여드는데, 비유하면 승냥이와 이리가 세력을 얻자 여우와 삵괭이가 그 위엄을 빌려서 변괴가 백 가지로 나는 것과 같습니다. 구혜(具惠)는 변복(變服)하여 남몰래 엿듣고 먼저 동료를 모함하였으며 간흉에게 아부하여 선량한 선비를 귀양가게 하였습니다.남복규(南復圭)는 한 번 권문(權門)에 붙자 거꾸로 그 스승을 해쳤고, 이경기(李慶祺)는 정인홍을 궐정(闕廷)에서 국문하자는 의논을 힘써 주장하여 동궁에게 화를 전가하려는 계책을 꾸몄고, 유성(柳惺)은 원흉의 지친(至親)으로서 원흉의 세력을 빙자하여 정사를 어지럽히고, 신광립(申光立)은 이전에 홍문관에 있을 때 원흉을 구하였으며 사헌부로 옮겨가서는 유생들에게 죄 주기를 청하고, 최천건(崔天健)은 권간에게 아부하여 위세를 도왔으며 오랫동안 전형(銓衡)의 권한을 잡고 오직 유영경의 말을 따랐고, 성영은 간사한 마음을 품어서 남몰래 권간과 결탁하였고,송응순(宋應洵)은 권간의 세력이 한창 성할 때에는 그를 구하는 차자에 남보다 먼저 참예하였다가 공론이 중하게 나오자 또 역적을 다스리자고 청하는 논의를 따랐고, 이정(李瀞)은 사첩(史牒)을 누설하여 동료의 죄를 얽었으며 그 아비에게 강력하게 권하여 착한 사람들을 해쳤고, 신요(申撓)는 임금의 말씀이라고 사칭하여 바른 의논을 불령(不逞 불평분자가 분풀이를 하려는 것)이라고 지목하였고, 유업(柳)은 원흉의 아들인데 아직도 청직(淸職)에 있습니다. 구혜ㆍ남복규는 관직을 삭탈하여 도성문 밖으로 내쫓고, 이경기ㆍ신광립ㆍ유성은 관직을 삭탈하고, 최천건 이하는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황근중(黃謹中)이 전에 지평이 되었을 때에, 남의 사주를 받아 죄없는 사람의 죄를 얽어서, 항변하는 소를 올리는 유생(儒生)에게까지 화가 미쳤습니다. 공론에 매우 큰 죄를 지었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사건의 파급이 너무 심하여 심한 폐단이 있다. 너무 심한 것은 취하지 말라는 옛 말이 지당하다. 중도를 넘어선 지나친 일을 진정시키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병조 판서 박승종이 전에 대사헌이 되었을 때 정인홍에게 죄 주기를 청하는 데에 참여하였는데, 지금 홀로 정인홍을 모함한 죄를 면하였습니다. 해괴하고 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파직 시키소서.” 하였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전에 박승종ㆍ황근중이 대사헌과 지평이 되었을 때 정인홍의 죄를 논의하고자 하여 한창 초를 잡고 있다가 사간원에서 이미 그 일에 대하여 윤허를 얻었기 때문에 피혐(避嫌)하였는데 비록 들어가 아뢰지는 않았으나 이미 초를 잡았으니 그 논의가 사간원과 같습니다. 또 항변하는 소를 올린 유생을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니 권간에 아부하여 사류(士類)를 모함한 형적을 피할 길 없습니다……” 하였다.
○ 3월 1일에 정인홍을 승진시켜서 판윤을 삼았다. 인홍이 처음에 고향에서 귀양가라는 명을 받고 길에 올라 기내(畿內)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사명(赦命)을 받아 서울에 들어와서 판윤에 임명되었는데 소를 올려서 사직하고 영남으로 내려가므로 예관을 보내서 만류하였다. 5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어서 올라 왔다.
○ 임해(臨海)의 옥사가 처음 일어나자, 양사에서 “전에 유영경의 죄를 논의할 때 법 적용을 잘못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쭟기를 청하는데 그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하게 여긴다” 하여서 자신을 인책하여 피혐하더니 이튿날 합계하기를, “급제 유영경은 우선 먼 변방에 안치하고, 좌의정 허욱(許頊)은 본래 일개 용렬한 인간으로 종처럼 유영경을 섬기다가 정승자리에 이르렀으니 벼슬을 욕되게 함이 진실로 심하였습니다.예전에 이조에 있을 때에 영경의 사주를 받아서 자기들과 당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고 악행을 같이 하는 자를 끌어들여서 넓게 사당을 심어 흉한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정인홍이 항변하는 소를 올린 뒤에는 사실을 날조하여 인홍에게 죄 주기를 청하여 임금을 속였고, 원흉과 더불어 큰 옥사를 일으켜 사류를 무찔러 죽여 여러사람의 입을 막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 간교하고 참혹합니다.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였다.
○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문학 조명욱(曺明勗)이 전에 정언이 되었을 때 원흉을 구하여서 공론에 죄를 얻었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다.
○ 좌의정 허욱을 체차하고 기자헌(奇自獻)을 좌의정에 임명하였다.
○ 합계하여 유영경의 다섯 가지 큰 죄를 논하니 답하기를, “이미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았으므로 공론은 이미 행하여졌는데 어찌 다시 논의하는가” 하였다가 여러 번 아뢰니 멀리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 7월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교리 민경기(閔慶基)는 본래 간사한 사람으로서 거짓말을 지어 내어 간당(奸黨)에게 전파하였고, 영경의 죄를 다스리는데 대하여 윤허하지 않겠다는 비답을 극히 칭송하여 원흉에게 아첨하였기에 공론에서 버림을 받았으니 파직하소서.부호군(副護軍) 유영근(柳永謹)은 원흉의 친족으로서 간악한 의논에 동조하였습니다. 정인홍이 소를 올린 뒤에 전하께서 동궁으로 계시면서 영을 내리실때에 영근은 동궁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감히, “인홍이 영경을 무함하고 임금을 속였는데 죄인을 이제 잡았습니다” 라는 등의 말을 회답해 아뢰었고, 이유홍(李惟弘)의 집에서 선량한 사람을 궐정에서 국문하려는 의논에 참여하여 공론에 매우 큰 죄를 지었으니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였다.
○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보덕(輔德) 김신국(金藎國)이 원흉에게 아첨하여 지난 날 구혜의 소위가 모두 그의 사주에서 나왔는데, 구혜가 죄를 입은 뒤에는 허물을 구혜에게 돌리고 자신이 억울하다고 말하니 파직하소서. 이조좌랑 박안현(朴顔賢)은 권간에게 아부하여 이조에 벼슬자리를 얻었으므로 유식자들은 침 뱉으며, 비루하게 여깁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충추목사(忠州牧使) 이홍로(李弘老)가 의주에서 소를 올린 뒤에 그 심사가 탄로되었음을 알고 음모를 꾸미지 않음이 없습니다. 근거없는 불측스러운 말을 지어서 이간시키려는 계책이 극히 흉악하고 참혹하오니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여 강계로 귀양 보내었다.
○ 사간원에서, 허준(許浚)을 율(律)로 다스리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허준은 의술이 졸렬하고 재주가 없었던 소치이니, 이것때문에 죽이는 것은 정당한 율이 아닐 줄 안다” 하였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홍로는 멀리 귀양보내는 것만으로는 불가하니 먼 변방에 위리안치(圍離安置) 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고 전교를 내리기를, “절도(絶島)로 고쳐라” 하고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 라고 표를 붙였다.
○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홍여순(洪汝諄)은 성질이 본래 음흉한 데다가 탐내고 포학하여 도처에서 제 멋대로 악한 짓을 행한 죄상은 일일이 들 수가 없습니다. 근년의 일로 말하면, 선공제조(繕工提調)가 되어서는 관청 힘으로 개인집을 지었고 내섬제조(內贍提調)가 되어서는 구사(丘史 하인)에게 몹시 심하게 굴어서 조금만 자기 뜻과 맞지 않으면 형장(刑杖)을 지나치게 쳐서 죽은 자가 있기까지하였습니다.지난 기해년간에는 궁중(宮中)과 내통하고 불측한 말을 조작하여 이간시키려는 계책을 하였고, 경자년에는 몰래 이산해(李山海)를 꼬드겨 소장(疏章)을 올리게 하였는데 ‘왕궁을 포위하고 대부를 죽인다’ 는 말이 있기까지 하였으며 그 흉악함이 지독하니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으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말은 합당한 것을 귀히 여기고 형벌은 반드시 허물에 맞추어서 써야 하는데, 이미 그의 관직을 삭탈하였으니 다시 논의하지 말라. 선조(先朝)의 옛 신하에게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양사에서 다시 홍여순을 멀리 귀양보내기를 칭하니 그대로 윤허하고 진도(珍島)로 배소를 정하였다.
○ 양사에서 유영경을 위리안치시킬 것을 합계하므로 그대로 윤허하고 경흥(慶興)에 위리안치하였다.
○ 흉한 사람 소명국(蘇鳴國)이 소를 올려서 영경을 베고 홍로를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 3월 21일에 세자를 책봉하였다.
○ 생원 이사호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김신국ㆍ남이공(南以恭)ㆍ박이서ㆍ박이장(朴而章)에게 죄 주기를 청한 것이었다. 전교를 내리기를, “내가 일찍이 들으니 이사호가 병법과 잡술로서 임해(臨海)에게 붙어서 친밀한 교분을 맺어 모든 모의(謀議)는 다 사호가 주장이 되었다 하기에 잡아다가 문초를 하고자 하였으나 선비라고 행세하기 때문에 차마 경솔히 시작하지 못하고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제 그 소를 보니 과연 흉괴한 사람이다. 누가 이 계책을 만들어 나의 의사를 시험하려 하는가. 매우 가증스럽다” 하고 이사호가 올린 소는 계자(啓字)를 찍지 않고 내려 보냈다.
○ 대사간 박이장(朴而章)이 피혐하여 아뢰는 대략에, “시기를 타서 얽어 모험하려는 계략이 어찌 사호 한 사람만의 소위이겠습니까. 반드시 남의 재화(災禍)를 다행으로 알고 즐겁게 생각하여 남몰래 사주하고 중상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홍여순의 심사는 길 가는 사람도 지적하는 것이니 기해년의 일을 보면 형적이 모두 나타나서 그가 큰 간흉인 것을 알 것입니다. 지금 공론이 일어났으나 사실을 알아내어 죄를 정하려고 하면 이것은 마치 풀 (사호를 가리킴)을 두들겨서 뱀(홍여순을 가리킴)을 놀라게 하는 격입니다.그 위에 일신을 위하는 꾀를 극도로 쓰지 않음이 없습니다. 남의 손을 빌어서 유생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간악한 데에 편당하였다고도 하고, 창을 거꾸로 쥔다고도 하여, 영경으로서 고주(孤注)를 삼고 함정(陷穽)으로 삼아 이용할 기화(奇貨)로 삼아서 화를 조정에 전가해 놓고 곁에서 보면서 좋아서 웃고, 앉아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거두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정무록》
○ 4월 29일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기자헌(奇自獻)은 천성이 음흉하고 행실이 수상하여서 가만히 남을 해치는 것은 시랑(犲狼)보다 모질고, 탐내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농단(壟斷)보다 심하였습니다. 친족간에 음란(淫亂)하다는 소문이 성 안과 지방에 파다하고 불도(佛道)를 신봉하는 일은 남의 이목을 현혹하게 하였습니다. 전에 정승자리에 있을 때에 위세(威勢)를 크게 떨쳐서 꺼리는 것이 없었고, 조진(趙振)의 옥사에 흉한 심사를 마음껏 늘어 놓았는데, 전하를 속이고 생살권을 쥐었다 폈다 하는 형상은 옛날의 원흉과 비교하여도 이 같은 자는 드물 것입니다. 뇌물을 받고서 벼슬을 팔며, 남의 터를 빼앗아 제 집을 지었으며, 청지기를 시켜서 방납(防納)한 일들은 악행 중에서도 조그만 것이지마는, 성 안과 지방의 백성이 이것때문에 파산하고 원망하는 말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대개 음험하고 흉한 자는 반드시 남을 중상하고 해쳐서 화란을 얽어 만드는 것이며, 탐욕하고 방종한 자는 반드시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좀먹어서 재해를 아울러 일으키게 됩니다. 거짓되고 요망한 자는 반드시 풍속을 무너뜨려서 세상의 교화를 어지럽게 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국가에 화를 끼치기에 충분할 터인데, 하물며 모든 악함이 다 갖추어지고 다시 흉특하고 교활함이 더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가 다시 정승이 되자 백성의 원망하는 말이 자자하여 ‘유(柳)가를 기(奇)가로 바꿨다’는 말이 있으니 민심을 알 수 있고 공론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정무록》
○ 5월 10일에 전교를 내렸는데, “정경세(鄭經世)의 소에서, 선조(先朝)에 있지도 않은 실덕과 실정을 캐내기에 힘을 다하여 망패한 말과 거만한 언사를 차마 볼 수 없는건데, 대간은 그가 임금을 무시하는 부도한 짓을 보고서도 능히 죄로 다스리기를 청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두둔하고 옹호하는 자가 있으니 경세의 권세가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경세를 잡아들여 국문하고 율대로 다스릴까 하니 이 뜻을 대신에게 문의하라” 하였다. 《정무록》
○ 처음에 이조판서 성영(成泳)이 영경의 당이라고 탄핵당하여 파직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광정(李光庭)ㆍ김수(金晬)ㆍ이정귀(李廷龜)를 후임에 추천하였다. 임금이 망(望)을 더 내라고 명하므로, 신흠(申欽)을 천거하였으나 또 망을 더 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은 정창연(鄭昌衍)에게 뜻을 둔 것이었고, 창연은 왕비의 외숙이었다. 원익은 부득이 김신원(金信元)ㆍ한효순(韓孝純) 및 창연을 추천하니 드디어 창연이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뭇 사람이 시끄럽게 의논하고 외척의 권세가 성하게 되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그때 정경세는 대구부사(大丘府使)로 있다가, 국정에 대한 곧은 말을 구한다는 교지에 응하여 소를 올려서, 임금이 즉위한 뒤 처음으로 정사의 잘못됨을 심한 어조로 말하였는데, 마음에 둔 그 사람이 들어있지 않으면 망에 더 넣기를 명하고 또 들어있지 않으면 또 망을 더하기를 명하여, 반드시 그 사람의 성명이 들어간 뒤에야 낙점(落點)하니, 전하께서 자기의 사사로운 뜻을 개입시켜 마음대로 낮추었다 높였다 하시는 것이 이에 이르러 심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아무개 이산해 는 세자를 책립(策立)하게 한 공이 있다고 자처하여 그 아들이 무슨 벼슬이 되었고,아무개 기자헌 는 세자를 보호한 공으로 자처하여 자신이 아무 벼슬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화를 내어 이르기를, “정경세가 선왕을 책하였으니 내가 죄를 다스리고자 하나 언로를 막는 것이 될까 주저하여 그냥 두노라” 하였다. 정경세의 소에 대간에 저촉된 말이 있었으므로 대간이 모두 피혐하면서 우물쭈물하는데 정언 정홍익(鄭弘翼)만이, “망을 더하여 추천한 것은 정승으로서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고 하여 말이 지극히 준절하니 이날 정사(政事)에 수찬(修撰)으로 이임(移任)시켰는데 그의 논란을 꺼린 때문이었다.임연(任兗)이 임금의 심중을 엿보고 비위를 맞추고자 하여 피혐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사람을 쓸때에는 어진 이를 가리는데 제한이 없는 것인데, 경세라는 자는 말썽부릴 제목이 좋은 것(망을 더하여 추천하게 한 것을 간하는 제목)을 취하여 창연을 쫓아낼 계책을 꾸몄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대신이 의논하라는 말을 내렸는데 수 백마디나 되었다. 대략적인 내용에, “경세는 선왕의 경악(經幄)의 신하로서 선왕의 허물을 폭로하였으니 내가 변방으로 귀양보내려 한다”라는 말이 있었다.대신들은, 모두 “나라 일을 말하다가 죄를 받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하였고, 윤승훈(尹承勳)은, “전일에는 경세에 대한 처분을 그만두라 하시다가 이제는 귀양보내라 하시어 전후의 하교가 달라서 전하의 말씀으로서 체면에 손상이 있을까 합니다” 하니, 경세는 파직만 되었다. 홍가신(洪可臣)이 물러나서 시골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서 임연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어진 이를 질시한 죄를 논하였더니 답하기를, “경은 훈구중신(勳舊重臣)으로서 편당을 면하지 못하니, ‘하북(河北)의 적을 없애는 것이 쉽다’라는 말이 참 말이로다” 하였다. 연은 더욱 의기양양하여 피혐하기를, “경세가 앞소리를 매기면 홍익은 뒷소리로 화답하고, 가신은 칼을 들고 일어납니다”라는 말까지 하였다.드디어 전랑(銓郞)에 임명되니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이 해 겨울에 장령 이유록(李綏祿)이 정경세의 죄를 공박하는 소 가운데, 세자를 보호하였다고 자처하였다는 사람은 기자헌을 지목하는 것이고, 세자를 책립하였다고 자처하였다는 사람은 이산해를 지목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첨(爾瞻)의 무리는 세자를 보호하였다고 자처한 사람이라는 것은 정인홍을 지목한 것이다” 하여 경세를 공격하는데 더욱 힘썼다. 《하담록》
○ 진사 신업이 소를 올려 이조판서의 망(望)을 고쳐 내게 한 것과 외척이 이조를 맡게 한 잘못을 논하였다.
○ 8월 10일에 양사에서 유영경의 일 때문에 합계가 다시 나왔는데, 유영경ㆍ김대래는 율에 의거하여 처단하고, 이홍로(李弘老)는 잡아서 국문하여 죄를 정할 것이며, 기자헌은 먼 곳으로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다. 《정무록》
○ 광해가 이미 세자로 정하여진 뒤에 김대래가, 적자(嫡子)가 아니며 장자(長子)도 아니라는 말을 주장하였던 까닭에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대래의 마음은 뱀ㆍ개ㆍ돼지가 합쳐서 된 것으로, 같은 악인에게 부화뇌동하여 도와서 부도를 꾀하였으며, 영경을 위하여 용기를 뽐내어 남보다 먼저 전하를 모욕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 9월에 유영경ㆍ김대래ㆍ이홍로 등을 귀양가 있던 곳에서 죽였는데, 대신이 2품 이상의 조신(朝臣)을 거느리고 아뢰어 청한 것이었다. 일월록에는 ‘7월’로 되어 있으나 조야기문ㆍ조야첨재에는 ‘9월에 자살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 기유년 봄에 양사에서 합동으로, 전날 일을 말한 사람에게 죄를 더 주기를 아뢰어 아울러 절도에 위리안치(圍離安置)시켰는데, 이효원(李效元)은 거제(巨濟)로 보냈다. 이효원의 〈행장〉

[주D-001]천세(千歲)를 부르며 : 황제(皇帝)라야 ‘만세’(萬歲)를 부르는 법인데, 우리나라는 속국(屬國)이라 자처하여 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천세’(千歲)라 하였다.
[주D-002]몽복(夢卜) : 고종(高宗)은 부열(傅說)을 꿈에 보고 그를 찾아서 정승을 삼았다. 주(周) 문왕이 사냥하려 나가면서 점을 쳤더니, “패왕(覇王)을 보좌할 사람을 얻을 것이다.” 하더니, 과연 강태공을 얻어서 돌아왔다.
[주D-003]농단(壟斷) : 옛날에 어느 욕심많은 사람이 시장이 있는 언덕[壟斷] 위에 올라 서서 시장의 이쪽 저쪽을 바라보고 이익될 것을 모두 자기가 취하였다.

 서애선생문집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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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장(書狀)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기를 아뢰는 서장

요즈음 경기, 고양, 교하, 파주, 포천, 적성, 양주, 삭녕, 장단, 교동, 풍덕, 개성부 등의 백성과 서울에서 정처 없이 피란한 사족(士族)의 부녀들은 이루 셀 수 없습니다. 그 밖에 다른 곳에 있는 자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동파까지 와서 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사람만도 날마다 1,000명은 됩니다. 신은 눈에 뵈는 것이 참혹할 뿐 아니라, 더욱 염려되는 것은 우리 백성의 태반이 적과 뒤섞여 사느냐 죽느냐를 따져 거취를 정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손길을 조금 더 늘려 품안에 불러들이는 길을 넓히지 않을 수 없으나, 단지 곡식을 마련할 계책이 없습니다. 부득이, 명 군사의 군량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겉곡식 1,000여 섬을 덜어내어 되와 홉으로 몫몫이 나누어 주어도 여전히 모자라 하루 사이에 무려 8, 9명씩 늘어져 죽으니, 매우 원통하고 답답합니다.
강화의 피란민은 그 형편이 더욱 다급합니다. 며칠이 못 가서 백성이 다 죽을 것 같은데, 이런 일을 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였으니, 더욱 통곡할 일입니다. 이때에 군사 일은 급하고 곡식은 바닥났으니,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를 거행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다만 국가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어진 정치를 베품에는 어쩔 수 없다 해서 버려두고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명망 있고 자상한 문관 한 명을 급히 선발하여 진휼사(賑恤使)라 칭하고, 경기ㆍ강화 사이를 왕래하면서 미죽을 만들어 눈앞의 다급한 백성을 구제하기도 하고, 황해 등의 소금과 황각(黃角)을 조치하여 송기와 솔잎을 섞어 구렁에 뒹구는 백성을 구제하게 하소서.
그리고, 섬에 있는 피란민은 갈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황해도나 충청도 등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하나, 뱃길로 통하기 어려우니, 그대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형편입니다. 이런 것도 응당 잘 처리된 뒤에야 만에 하나라도 구제한 보람이 있습니다. 전 집의 권협(權悏)과 한성 서윤(漢城庶尹) 신식(申湜)이 지금 운량사 권징(勸徵)의 종사관으로 이곳에 있습니다.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진제사(賑濟使)라 이름하고 그 일을 주관하게 하여, 국가에서 백성을 보살피는 뜻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옳은 일입니다. 만일 중신으로 그 일을 맡기려면 판윤 유근(柳根)이 안무의 책임을 지고 강화에 있으니, 우선 구제하는 일을 겸하여 처리케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白軒先生集卷之四十○文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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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諡狀
兵曹判書贈領議政權公諡狀 a_096_38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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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_381a公諱徵。字而遠。號松菴。其先本金氏。新羅國姓。至高麗太師幸有大功。賜姓權。邑之吉昌。吉昌後爲安東。安東之權。蓋肇於此。十一世而至溥。以大冢宰。封永嘉府院君。五子皆封君。其第三子曰皐。檢校侍中。諡忠靖。是生僖。檢校政丞。諡靖簡。是生文忠公近。入我朝。以佐命功封爲吉昌君。官至贊成。號陽村。文忠生踶。亦官贊成。諡文景。文景生諱攀。禮曹參判。以佐翼功封花山君。諡安襄。卽公之高祖。曾祖諱佸。忠勳府都事。贈左承旨。祖諱愚。原州牧使。贈司憲府大司憲,永嘉君。考諱硡。博學有行誼。屢擧不第。遂棄其業。專096_381b精道學。手寫經傳及小學等書。講習朝夕。以訓其子弟。禦侮將軍行忠佐衛副司果。累贈至領議政,花城君。三代追榮。以公貴也。妣宋氏。贈左通禮承殷之女。公以嘉靖戊戌生。眉宇挺秀。氣度不凡。見者皆期以遠大。十歲就傅。非定省不窺戶外。誦讀孜孜。夜輒至鷄鳴。宋夫人恐其病。禁不火。公時時口油出以燃燈讀之。學日進。戊午中司馬。嘗棲山寺。夜有賊大掠傍刹。僧徒雉鳥散。俄薄公所。叫噪以懼之。公猶坐讀書不輟。賊黨大異之。公察其饑渴。以人所餉酒餠。開戶投與曰。汝輩良苦。可分喫而去。賊黨相謂曰。其堅固096_381c如此。他日必爲大官。乃食酒而還餠。使之療饑。相與辭謝而散。時有一老僧。避匿壁間。親聽而詳說云。壬戌。擢文科。癸亥。選入槐院。爲權知副正字。甲子。陞著作。尋拜承政院注書。遷藝文館檢閱。乙丑。轉待敎奉敎。丙寅。拜刑曹佐郞。改禮兵二曹佐郞。丁卯。明廟禮陟。以都監郞。監山陵之役。戊辰。丁外艱。爲之斷指。廬墓終三年。辛未外除。除典籍。改兵曹佐郞。遷司諫院正言弘文館修撰,知製敎。壬申。又爲兵曹郞。未幾。除海運判官。任重而不選授久矣。列邑慢之。公乃莅以嚴正。絀二三大吏。諸道肅然。癸酉。由正言轉獻納。096_381d遞爲直講。已而奉巡撫御史之命。之咸鏡道。道拜弘文館校理。改吏曹佐郞。旣復命。請告遞爲直講。遷吏曹正郞轉應敎。會銓郞缺乏。遂仍銓任。居無何。遷檢詳舍人執義。遞授尙衣院正。拜應敎禮賓寺正。又由應敎陞典翰。拜同副承旨至左副。丁丑。爲養乞郡。出尹全州府三年。政成財裕民蘇。有疑獄。公斷之惟明。人以爲神。旣歸。民歌謳以碑之。己卯。特拜左副承旨。庚辰。遞爲刑曹參議。頃之拜左承旨。辛巳。轉都承旨。旣免。又爲刑曹參議。時李公俊民判秋部。甚重公。曹務盡委之公。出爲安邊府使。首務養老。宴而禮之。且096_382a勤撫字。未朞而治。壬午。特命觀察關東。安之民走相謂曰。失吾父母。將何以活。老幼相與遮擁而守之者累日。旣不得遏。則又相與攀車而泣於路。樹之石以寓思焉。目其鶴浦遊處曰相公臺。稱道之久而不衰。其見慕如此。癸未北鄙聳。調兵轉餉。勞勩茂著。歲滿而命仍之。公爲親癠陳疏乞遞。特許歸省。以觀察得覲。實曠世異數也。八月入覲。九月旋歸。十二月。丁內艱。丙戌服闋。特拜戶曹參判。乞免不許。下敎曰。卿在關東。知卿有智慮。爰命仍任。豈料卿母遽至云亡。使卿不得面訣。永抱終天之痛。言念及此。不勝慘惻。公096_382b感泣肅謝。十月。移刑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無何。辭遞爲同知敦寧府事。丁亥。兼同知義禁府事。三月。有南警。朝廷徑遞忠淸監司李訒。薦公代之。公卽辭朝。上引見。錫之弓矢及藥物。比到。倭已退。明軍政撫民庶。乃以驛書條陳十三策。爲民隱及修攘也。上稱其謀猷之宏。盡職之誠。戊子。入爲刑曹參判。時有北顧憂。特加資憲階。爲咸鏡觀察使。臨行賜對。又賜餞都門外。亦異數也。公嘗巡撫于北。素諳邊情。至是區畫得宜。民悅夷懷。己丑。特拜兵曹判書。蓋上以司馬之長。非公不可也。公入朝上章固辭。優096_382c批不許。庚寅。兼同知經筵春秋館事。出爲平安觀察使。亦以特命也。時西塞有警。兵使申砬銳意欲用兵。公力陳其不可。上從公言。平壤城中素無井。民汲大同江以爲常。公以爲如或守城。則無水可乎。乃鑿井於大同館前。幾至九丈而無水。幕僚諫止之。公曰。掘之及泉。何地無水。使加鑿一丈。水大湧。壬辰之亂。大駕西狩。留城中師人有賴焉。人服公之遠慮。辛卯冬。坐事罷。蓋是時。松江鄭相公謫江界過平壤。公素相善。見而慰之。脫裘贐行。事聞。上非之。臺評遂發焉。壬辰三月。倭兵入寇。特命收敍。朝廷又以畿甸096_382d乃根本之地。方伯須得其人。乃遞李輅。擧公以代。公卽馳往水原。疏陳守城十七策。爲本兵洪汝諄所沮格。是時。金公命元爲都元帥。陣濟川亭。公選畿兵三萬。欲守漢江。將稟元帥。行到沙坪。船已沈矣。會元帥要與公議。公留兵沙上。乃以單舸渡。宣傳官忽到宣旨。令公將所領兵屬諸元帥。只帶若干卒。急入扈駕。公卽以軍書授帥府。請得帥府手下二百卒馳入。則大駕已行。中殿在後。輦卒多道亡。公以所帶兵充補。至松都。上召見公。使守臨津。公只有十餘偏裨。於是分遣從事及偏裨。募得近邑兵三百餘人。進096_383a守臨津。都元帥金公,都巡察使韓公應寅。尋亦領兵繼至。公傳上旨。誓以死守。沿江築壘。張兵峙糧。形勢頗盛。賊不能渡。韓公遣申硈領三千兵。渡江逆擊。公以爲勝敗難定。別立營壁以待之可也。再三言之。而諸公不以爲然。師竟敗績。公又以下流淺灘爲憂。自請往守。而所帶偏裨及牙兵。只有五六十人。路逢佐郞沈友正。使請兵元帥而繼援。友正如其言以數百兵至。軍情猶洶洶。公令曰。退者斬。衆稍定乃進。時關西多送軍器。以助江上軍。西民望見官軍敗。委之而走。公行且收取。先自腰一弓手長片箭而帶之。以096_383b爲諸軍倡。到灘上。賊方欲渡。公拒之堅。賊乃退。公素患痰病。觸冒風露。病勢轉劇。幕佐申公湜,李公尙毅等。更請調息。都事鄭公曄。亦在幕下。愍公之病。以公不欲擅離。往告帥府。而擁還東坡。公令中衛將李艤嚴備。旣賊往洛河渡。官軍遂潰。金韓二帥間行詣行在。李艤撤兵馳還。公相持諸幕僚而痛哭。強疾而作。分遣偏裨。招集散卒。行至朔寧。畫江以守。賊兵漸逼。幕僚等。請移駐伊川。相時以進。公曰。何可捨所部而之他。寧死於此。於是不敢更言。前承旨成公泳持服在砥平。聚得土團而無所屬。公馳啓請起復。稱以096_383c召募使。與之協力。巡撫御史黃公愼至。公營門者拒之。聞公令然後始得入。黃公喜其嚴肅。以爲非他鎭可比也。移陣加平。武將邊彥琇,邊應星,趙儆,高彥伯,朴宗男,李艤,邊應軫等。皆屬焉。聲勢漸張。聞天兵將至。布告列邑。咸使知之。且移書關東伯柳公永吉。勉之以偫糧。要與偕作。秋朝廷削公職。白衣從軍。以沈公岱代之。蓋前後馳啓不翅五六十度。而道路阻絶。未卽傳達。故譴責加焉。居數日有後命。復拜爲京畿都巡察使。使與沈公協謀共濟。朝廷始知公勞也。有旨繼至。趣入江都。號令西道。接應南軍。公與幕下趙096_383d廷芝卽入江都。先是。金公千鎰號倡義使。禹公性傳號仗義使。俱入江都。公與之共議區畫。聞全羅監司權公慄在禿城。馳往見之。面講進兵之策。癸巳春。命兼運糧。公辟前執義權悏,前正郞黃致敬爲從事。督運餫餉。是時。天朝提督李如松大破平壤賊。進陣松都。公與戶曹判書李公誠中犇走周旋。間或自擔。以勸其下。爭各運致。不乏軍興。公力居多。夏隨提督入京。時宣陵經賊變。公以山陵都監提調董役。又拜工曹判書。尋爲賑恤使。會戶判李誠中隨天兵而南。病卒于道。公又爲戶判。轉餉賑恤。左右酬應。籌096_384a營勞瘁。事克有濟。是年十月。上還都。兼都摠府都摠管。辭不許。甲午。爲司詔使館伴。又因病辭判度支。上下詢大臣。大臣對以時艱財匱。不可輕授他人。未得免。未久。風病暴重。疏三上得遞。授知中樞府事。醫問饋藥。恩數便蕃。居四年。卒於戊戌。訃聞。上震悼。輟朝二日。賜賻祭。三月而葬于廣州先塋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以公嘗錄宣武原從勳也。公事親盡誠。滫瀡之供。必親嘗之。居憂致哀。追慕不衰。每遇生朝。孝思益篤。友愛兄弟。出於至096_384b情。伯與二妹。祿必共之。取育其子女。婚嫁以時。燕居必夙興而正衣冠。終日儼然。雖子姪不以褻服見之。素甚淸儉。生事不掛念。有或語以爲子孫計者。公輒笑曰。遺之以淸白忠信足矣。常戒子弟曰。吾俸祿自足以贍一家。與民爭利。非士夫家所可爲也。爾輩宜謹之。不喜飮酒。常謂狂藥不宜多飮。以戒家人。先祖文忠公嗣續絶。公率宗人上疏立後。又卽宗家舊基。廟而祀之。器用祭服等物。亦皆備置。有一童蒙敎官家甚貧。公以幼時問字之義。常割俸以周之。其歿也。又爲之經紀而葬之。人稱其德。公性剛毅多智。好善096_384c疾惡。尹元衡權勢方盛。爲女擇對。聞公有才。使人相其貌。公陽作跛躄狀以絶之。後秉史筆。直書其惡。元衡嗛二事欲陷之。同僚爲公憂。公曰。禍福在天。非章子厚所能爲也。文定王后疾大漸。有諺書遺旨。乃兩宗勿罷事也。注書以大臣意傳授公。公郤之曰。吾事尙多。又受此耶。元衡聞而益怒。北道缺評事。元衡嗾銓官俾出公。判書閔公箕以公不解射爲解。元衡尋亦敗。得免陰中云。公之尹全也。逆豎鄭汝立以州人請告歸。氣勢甚張。公素惡之。接遇不款。用是爲其類所擠。及汝立叛。人歎其先見之明。當汝立初叛也。096_384d鄭彥信爲大臣。聞上變不信。有欲斬告者之言。後有發其言者。上問其時參聽諸宰。莫敢直告。大司憲洪公聖民,正言黃公愼䮕言大臣李山海糊塗之狀。上怒出聖民慶尙監司。愼高山縣監。公於筵中啓曰。言官以言黜。非盛世事。若爾則雖指鹿之奸。發於殿陞之間。誰敢言之。上不悅。贊成崔公滉爲之救解。且以李潑弟汲究問事。下公卿議。公又極陳汲黤昧及其老母之無罪。及錄平難勳。公慮其猥雜。上箚論之。以爲功臣之多。非國家利。聞者韙之。公屬有疾。聞金公千鎰守晉州死之。失聲大哭。疾益劇。久而得096_385a愈。當事義氣凜然。禦衆恩威竝施。故人樂爲之用。賊請平。提督信其言。公與金公命元,李公德馨等。呈文齊籲。力言追擊之宜。天朝李宗誠奉詔到釜山倭營跳出。中外震駭。公箚陳十二策。上優答。丁酉。倭兵再猘。公病已危。而又拜疏條上十八事。答曰。病中陳疏。字字忠赤。深用嘉歎。國事至此。卿又病甚。罔知攸濟。卿其益加調攝。以副上下之望。前後疏箚草本。俱逸不傳。君子惜之。平居耿耿一念。罔不在王室。聞政令善。則喜輒告於人。如聞有失。則憂不能寐。逢時之難。特蒙殊眷。苟可以利益於國。竭其心力而盡瘁096_385b之餘。病不能廷。齎志以歿。人莫不悲之。公所交者。皆一代聞人。而與鄭公澈,辛公應時,李公山甫,李公海壽,李公誠中。尤相善。夫人李氏。司憲府監察贈承政院左承旨孝彥之女。夫人孝敬端淑。事公以禮。訓子女以義。閨庭肅然。宗族仰其仁。先公四年而卒。有五男三女。長恪。庚寅生。進仕爲別坐。次恰。牙山縣監。次怡早夭。次怗。文科參判。次憬。翊衛。女長適具旭。監察。次適沈詻。吏曹判書。次適李星男。府使。內外曾玄孫百餘人。景奭生晩。不及識公。而自幼時。聞公之風。誦公之名久矣。謹据其家狀。撰次如右。以請易名之典。

 
龍洲先生遺稿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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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道碑
贈領議政吉昌府院君權公神道碑銘 幷序 a_090_35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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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強圉協洽之良月。永嘉權大夫。自諫議按節北臬。枉車騎不佞廬下。垂涕而言曰。不肖之先大王父勳八帶礪。秩視三揖。墓木不翅拱矣。而麗牲之石不刻無文。其實有待。久聞執事不喜諛墓。此不肖等所以圖不朽吾祖。舍執事無適也。敢以家狀一通累執事。不佞謝非其人。則辭之曰。昔燭之武有言曰。壯也猶090_352a不如人。況今老矣無能爲。事雖殊。此言可以諭。不佞老而耄者。其何能噓出久荒筆硏。形容大君子勳德大業。大夫後必悔是哉。猶不改圖。今年又走伻來。替羔雁爲禮。懃懃懇懇。蓋其意以爲不佞之齒齒稷下末流。能及宣廟在宥之日。或咫聞當時賢公卿風烈有之矣。此大夫公之必迫欲得不佞之杜撰一語。以此遂感其追遠誠至異夫人。許爲之而按狀。百濟甄萱無天而行。逞舁,浞之毒于羅王。羅之支守吉昌者曰幸。以郡迎麗王。灑不共天讎。麗王義之。錫姓以權。蓋言炳幾達權也。其後子孫極熾而蕃。數百年來090_352b率以忠孝著。至今不衰。有諱溥。亦以忠孝致大名。位僉議。建刊朱註四書行之。論者以爲東方理學自溥始云。八傳至諱常。同知中樞府事。天植誠孝。幾於感物。宣廟大異之。初賜緋。又以八十增秩嘉善。旌表門閭。詳在白沙相誌中。內子安定羅氏。高麗秪候直卿之後。禦侮云傑之女。封貞敬夫人。生丈夫子五人。議政公卽第五。諱悏。字思省。生而穎卓。始戴冠。大玩於詞。二十四。魁庭試。明年。闡謁聖科第四名。由槐院入史苑。遷堂後。咸用薦剡也。成均自典籍至直講,司藝。郞署戶禮兵刑。自員外至正郞。春坊自司書,文090_352c學至弼善,兼弼善。薇垣自正言至獻納。柏府自持平至掌令,執義。玉署自修撰至校理,應敎。恒帶知製敎。銓郞危得者亦數矣。壬辰。島夷爲封豕長蛇。荐食我國。事急。上將去邠。都下凶凶。公同大憲金瓚排闥而入。抗言曰。京師上有宗社。下有百官萬民。殿下去此將焉往。縱有急。背城借一可也。效死勿去。非孟軻之訓乎。宣廟雖不用其言。內嘉其忠。命賜佩劍。夜二鼓。翠華出崇禮門。公負羈靮從。甲午。天朝都督李如松率兵三萬。熸平壤窟賊。公承命督三道蒭輓餉天兵。士飽馬騰。議者休之。久之。鄭相090_352d澈爲三南都體察使。擇公自從。外稱其能。而實坐公曾在臺論己丑主獄之濫也。公入幕。唯以國事與之上下。彼眈眈無柰何。無幾何。體府自留江華。以湖嶺軍務屬公。當是時。漢以南郡邑民皆鳥獸竄。野無靑草。公投袂而往。夙夜撫集。以旣厥事。丁酉。行長,淸正新喋血湖南。乘銳有再蠢之幾。朝議以爲計無出請援天朝者。宣廟察群臣專對毋如權悏。公以應敎陞緋爲告急使。公受命疾驅。才一月到京師。呈咨奏雀立兵部軍門下。痛陳本國出入豺牙狀。淚隨言下。觀者激昂。軍門謂公曰。爾國山川夷險。道路徑090_353a迂。從某至某爲賊所者幾。爲爾國抱防者幾。峙糧幾何。坐甲幾何。爲圖以來。公習東國地志有素。口講指畫。使工成圖以進。軍門與本兵侍郞李楨。展圖核問公。公一一嚮應。無窮者。公旣退。侍郞招舌官表廷耇問公何官。且曰。如許人才。盡一國豈可多得。卽覆奏。發南北艦步。又調給山東糧餉。公仰謝天子大恩。頫而血面而進曰。小國方在涸轍。朝夕嗷嗷。西江之決。恐無及已。無已則南兵與餉宿永平者夥。永平與弊邦壤車牛之遞不足言矣。聖天子一視同仁。無間外內。大人奉而周旋極溺。必不少緩。軍門納公090_353b言。不待辭畢准請。公又請筋角硝黃。稇載而還。君子以爲其敏可及。其忠不可及。甲辰勘宣武勳也。宣廟特命錄公正勳封君。敎書若曰。子產善辭危懇。動冕旒之聽。包胥痛哭至誠。致金石之通。收七年之氛祲。而誰之力。奠三韓於枕席。於予有光。益信誦詩之才遠勝止戈之烈。當時南宮圖畫之臣非一二。華衮之褒夫幾人哉。明君知臣之語。不可改已。戊戌。按節海西。庚子。出牧羅州。皆有聲。壬寅。入司龍喉。自同副至右承。夏。秋曹右侍郞。冬。少司徒。甲辰冬。由京兆拜大司憲。乙巳。又拜大憲。秋。超資按節湖南。兼完090_353c山尹。時有一邑宰負時望者。怙勢弄法。公黜之不饒。其人不少懟。及柄用。乃曰。奉法淸愼如權某者豈易得。公可謂古之遺直也。丁未。拜禮曹判書。戊申。宣廟棄群臣。宗伯典喪禮。古也。公兢兢臨事。惟先王制禮是遵。索瘢者彈之。於公何傷。己酉。加正憲。監修宗廟也。甲寅。加崇政。會盟也。丙辰。拜謝恩正使赴京。公時年考益多。筋力幾何。而事不辭難。公之操也。視五千里由咫尺。復命則時沍寒也。老人血氣。豈無霜露之感于嚴程也。丁巳寢疾。戊午正月二十七日。啓手足于正寢。距其生嘉靖癸丑。壽六十六。訃聞090_353d賜弔。太宰議贈。贈曰議政府領議政,吉昌府院君。隱卒崇終至矣。公歿之始。卜山不中。權厝于富平水呑里。明年春。仍其岡爲竁。坐癸向丁也。公偉幹豐儀。蔚爲國器。自弱冠卽見。加以得明師順川都正爲依歸。其所磨礱浸灌者。非獨博士家言。釋褐以后直以家世忠孝及藝學翹楚。上結宣廟之知。及乎龍蛇之亂。竭蹷國家之急甚己之私。國之再造。公之力居多云。聖敎所稱。安可誣也。噫。公立朝四十餘年。靡職不踐。功無與讓。此則書之史策。照人耳目。婦孺亦能誦說。長公知事公。仲氏參判公。同居一里。事之如090_354a嚴父。得一甘毳。雖少必分。寒暑節至。衣服必供。無虛歲。溫公之事伯康何加焉。館嫠妹畜孤甥。終其身焉。姪孫男女之貧者。賴而有有歸有室者亦多。俸祿入門。施諸宗黨隣里。無毫髮計留也。公之晩節。尤有可觀者。杜門却掃。絶不與朝貴相往還。雖姻家在勢要則面之。人問之則曰。此吾東興公遺訓也。待子弟嚴而有法。常以盛滿戒曰。吾常讀易。有味乎一言。積善之家必餘慶是也。吾家爵位富貴。何非祖先忠孝之積。持之之難。甚於得之之難。持之之道。外儉約無他。由是公身都上卿。而椸無紈綺。食無重肉。室無丹楹。090_354b口無夸嫮。亦無訾毀人事。一生行之如一日。公可謂簡諒長德君子矣。疾之病而篤也。聞廢母后論起。使子弟扶起而坐。大歎曰。吾其左衽乎。索管赫蹏。書一寸遺知事公。知事公終立大節。亦公之助云。夫人全州崔氏。祖克誠。獻納。父沬。正郞。夫人婉靜有操。配君子。誠孝竝著。協尊章秖飭蘋蘩。敎子女御婢使皆以其道。閨閾之內雍穆如也。克受成福母有多男。封貞敬夫人。庚申十一月十九日不淑。祔公墓左。七男二女。男長信中。生員通政。豐德郡守。次必中。生員義禁府都事。次景中。武科延日縣監。次正中。司憲府監090_354c察。次謹中。世子翊衛司司禦。次審中。進士戶曹佐郞。次偉中。進士。女長適吏曹佐郞柳。次適刑曹參議李時煥。信中三男一女。男長大任。尙翁主授爵爲吉城尉。次大鳴,大式。女適朴尙彬。必中六男五女。男長大德。武科。次大淳,大淑,大胄,大夏,大華。女長適崔璡。次適李慶會。次適正郞尹惟謹。次適察訪李昌炫。次適池汝寬。景中二男二女。男大復,大壯。女長適縣令柳重炯。次適李德升。謹中四男三女。男長大運。文科咸鏡道觀察使。次大胤。抱川縣監。次大遠,大述。大胤爲正中後。女長適司諫李厚。次適李時繼。次適宋090_354d㺹。審中二男三女。男大敏,大益。女長適宋道凝。次適李。次適進士盧思敏。偉中一男三女。男大載。文科公山縣監。女長適生員李墰。次適生員崔東老。次適生員李命麟。大任一男瑱。敦寧府奉事。大鳴一男瑀。大式一男一女。男玹。大淳四男二女。男璟,玧,琛,璋。大胄一男四女。男幼。大夏四男四女。男幼。大華二男三女。男瑞。餘幼。大壯一男瓚。大運二男三女。男瑋,珪。大胤四男三女。男長瑗。生員。次瑍文科。次㻐,瑌。大敏二男三女。男珹,瑊。大益三男。琱,玿。餘幼。大載三男三女。男長瑎。文科承文院副正字。次瓀,玢。瑱二男二女。男090_355a以經,守經。內外曾玄二百餘人。銘曰。
挈土洒讎。義主動色。懿氏斯錫。百千耳孫。克念克紹。愈久愈肖。於吉昌公。事我宣祖。大洪祖武。移孝爲忠。惟命西東。茂著匪躬。聖燭賢勞。策公偉勣。丹書赫舃。位峻官尊。猶執謙光。易道是揚。伯仲與季。白首湛樂。擧世疇匹。紫誥回鸞。媲德脤賢。福祿之全。憂國肺肝。至死不歇。友于雙烈。我筆雖老。寔應銘法。過者必式。


 
孤潭逸稿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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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錄○雜著○敎文
扈聖錄券 a_053_06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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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曹參議李純仁
萬曆三十三年四月初五日。行都承旨臣申欽敬奉傳旨。人臣效忠而戮力。本無大小之殊。王者賞功而酬勞。寧有貴賤之別。盖率百王之舊。非循一人之私。顧眇末之寡躬。嗣艱大之洪業。綢繆迨未雨。念詎弛053_068d於侮予。憂懼若隕淵。戒恒存於臨汝。何圖賊虜之猖獗。未免神器之流離。幸賴皇威之遠揚。尙克寶命之無墜。斯不忘于修扞。用以紀夫旂常。惟玆卿士大夫。越爾吏胥下賤。或陪扈而奔走。或鞅掌而馳驅。凡繫前後協贊之徒。悉皆載錄原從之列。爰擧盛典。庸示寵章。順和君,仁城君珙,義昌君珖,達城尉徐景霌,海崇尉尹新之,東陽尉申翊聖,唐原尉洪友敬,錦陽尉朴瀰,全昌尉柳廷亮,吉城尉權大任,領中樞府事李德馨,判中樞府事沈喜壽,知中樞府事李希得,右承旨柳夢鼎,杞城府院君兪泓,前府尹李覮,前郡053_069a守趙公瑾,前經歷朴廷吉,淸平府院君韓應寅,牧使辛慶晉,僉知中樞府事吳億齡,戶曹判書李誠中,行判决事鄭光績,禮曹參議李純仁,知中樞府事閔夢龍,寧山副令禮胤,兵曹參議鄭士偉,參知黃廷式,副護軍李海龍,副護軍秦孝男,吏曺參議洪渾,前牧使許澂,前郡守朴承宗,前佐郞兪大建,前郡守李應寅,前郡守宋檥,前監察宋齊賢,茂城君尹泂,知中樞府事李薲,左贊成具思孟,三嘉縣監柳挺立,行參判尹又新,大司成李睟光,順川郡守金時獻,吏曹參議黃暹,錦山守誠胤,禮曹判書許筬,開城府留守許潛,及053_069b第黃愼,郡守李尙弘,廣林君李廷立,領議政尹承勳,左議政金命元,右議政奇自獻,及第鄭澈,全羅道觀察使洪世恭,大司憲朴應福,成川府使李尙毅,及第李尙吉,黃海道觀察使權憘,仁川府事尹健,前縣令韓濩,晉興君姜紳,副率朴東尹,行參議李瓘,參判丁胤福,雲川君愼,原川君徽,知敦寧府事柳自新,典翰柳希奮,前牧使邊良佑,刑曹參議柳祖訒,前正金玄成,前牧使崔岦,西興君鶴貞,咸安郡守邊以中,前郡守李貴,護軍尹昉,湖城君柱,右參贊黃璡,寧原君洪可臣,戶曺參判權悏,行護軍洪慶臣,左副承旨姜053_069c籖,宗簿寺正金權,軍資監正安大進,忠州牧使趙存性,前府使朴東善,司僕寺正李壽俊,弻善曺倬,前庶尹申黯,錦山郡守李翼賓,前正郞鄭宗溟,佐郞梁山璹等乙良。扈聖原從功臣一等。左贊成崔滉,商山君朴忠侃,益城君洪聖民,漢陰君俔,忠淸道觀察使李弘老,慶尙道觀察使李時彦,驪陽君閔仁伯,刑曺判書張雲翼,參判鄭彦智,參判柳永吉,淸川君韓準,知中樞府事鄭昌衍,文興君柳思瑗,及第李海壽,及第白惟咸,承旨柳拱辰,前府使黃沂,前正郞李春英,河山正璡,前府使金台佐,前郡守姜紞,及第南以恭,053_069d縣監李幼淸,正郞黃謹中,縣監宋廷琦,前洗馬李山斗,應敎柳澗,校理吳百齡,正郞崔起南,正言李民寏,獻納南晫,星州牧使洪瑞鳳,舍人李愖,司諫權縉,遂安郡守許筠,正郞閔汝任,修撰李光胤,掌令柳永謹,修撰蔡慶先,修撰閔慶基,安州牧使權盼,瑞山郡守金順命,注書吳靖,前縣監黃大義等乙良。扈聖原從功臣二等。河原君鋥,判中樞府事金睟,鵝川君李增,知中樞府事李戩,判書任國老,行咸鏡道觀察使徐渻,知中樞府事盧稷,參判閔汝慶,昌山君成壽益,參判金宇顒,左尹許晉,前府使洪履祥,吉州牧使安053_070a宗祿,副提學尹覃茂,行仁川府使姜綖,行驪州牧使禹俊民,行光州牧使李慶涵,左承旨柳夢寅,行丹陽郡守黃廷喆,司禦李啓,益城君享齡,寧堤君錫齡,興寧君秀荃,西陵君銛,西川君錦,參議任蒙正,行護軍趙振,前掌令崔有源,牧使成好善,前牧使李世溫,前牧使黃洛,韓山郡守金興國,郡守趙守翼,前府使李弘輔,華山都正楹,前郡守李培達,前正郞兪濯,博士金孝幹,行同知中樞府事李廷龜,典籍李德溫,文化縣令林懽,洗馬盧並俊,吏曹佐郞宋碩祚,縣令李雲福,監役官李星男,學生李井男,行副護軍鄭逑,縣令053_070b李元輔,承仕郞尹聃壽,贈吏曹參議尹春壽,府使尹暄,贈都承旨尹晛,贈直提學尹皥,前縣監尹履之,及第沈詻,參判李友閔,縣監李師閔,刑曹正郞申慄,前縣監尹晊,學生柳袽,學生柳袗,行牧使柳雲龍,及第鄭曄,全州判官金瑬,正言柳格,郡守洪汝栗,執義洪迪,持平李砬,前參奉成櫟,行黃州牧使朴東說,縣監沈大復,前縣監崔行,學生朴安吉,學生朴安義,直長宋興祚,縣監李春馨,縣監柳焞,行郡守沈仁謙,靑陽君沈義謙,行府使沈禮謙,司果沈智謙,行府使沈信謙,行郡守沈孝謙,水運判官沈悌謙,待敎沈忻,江華053_070c府使沈悅,前縣監沈悰,前翊贊趙玲,前縣監李劼,前縣監尹耆獻,持平姜秀峻,縣監魚夢龍,前郡守申景禧,監察申景祉,判尹申砬,監役官申礏,兵使申硈,府使申景禛,監察申景裕,學生李仁健,學生李義健,前縣監李應男,前縣令李文薲,左承旨姜緖,執義李德泂,應敎李善復,吏曺正郞丁好善,前佐郞成俊耉,佐郞李潔等乙良。扈聖原從功臣三等爲等如施行爲只爲。下吏曹爲良如敎。萬曆三十三年四月初五日。行都承旨臣申欽敬奉傳㫖。扈聖原從功臣一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父母封053_070d爵。二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子孫中。從自願加散官一資。其中無子孫者。兄弟壻姪中。從自願加散官一資。三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爲乎矣。各等通訓以上乙良。子孫兄弟甥姪女壻中一人乙。從自願加散官一資爲只爲。下吏曺爲良如敎。
扈聖功臣都監堂上臣李恒福,李好閔,朴東亮。

 
寄齋史草[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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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辰史草]
壬辰日錄[一] 起萬曆二十年四月十三日盡五月二十九日 凡一朔有奇


四月
十三日。日本國王秀吉。遣其將平秀嘉平行長政成淸正等。大擧入寇。陷釜山東萊。殺僉使鄭撥府使宋象賢等。屠其城。水使朴泓兵使李珏。聞變棄鎭而逃。列邑守令。望風奔潰。不四五日。遂陷諸郡。
別錄。至是釜山僉使鄭撥率舟師。方大獵于絶洋島。宿醉未解。十三日巳刻。有人來言海宗荒唐船出來云。撥曰。歲遣船久不來。今始到矣。不以爲意。稍近。自倭船連放銃筒。撥始知其爲賊。蒼黃還陣。纔入城中。賊已下岸。圍之數重。撥不放一矢。計無所出。賊已登船。斬撥頭梟之。城中人無少長皆殺之。○十四日癸卯陷東萊。府使宋象賢別將洪允寬皆死之。節度使李珏水使朴泓。棄鎭逃去。賊自釜山。直抵東萊城下。狼奔豕突。勢甚猖獗。城中之人。皆惴不敢爲之備。象賢本書生。有將帥才。自顯官超爲是職。繕治粗完。訓鍊軍兵。日亦不足。嘗於城外四面。治塹設柵。極其堅固。多樹以雜木。及是日巡城誓士。自守南門。賊犯附城外叢木之下。以防矢石。自卯至巳末。賊衆大至。別將洪允寬知事急。顧謂象賢曰。事已至此奈何。府後有蘇山。堅險可守。可與我同往守之。象賢曰不死守城。雖往保他境。朝廷必不饒我性命。且去又何之。允寬曰。然則我與公同死。言未畢。賊已斬之兩段。萬餘人無得脫者。水使之設。爲其率舟師使賊不得近於岸也。見鄭撥之報。馳白東萊。亦不入其城而逃。兵使李珏。本悖戾無行者。善事近習。有罪亦見放。聞賊報馳向東萊。又聞象賢將守城。懼不敢進。乃曰將守蘇山云。○十五日甲辰。兵使李珏棄蘇山而逃。密陽府使朴晉敗走。晉少業文不成。旋登武第。累遷官。遂躐是府。而拜辭之日。人皆以年少。恐不能稱巨府。聞釜山之陷。急領兵往赴之。東萊亦陷。晉謂珏曰。蘇山不守。嶺南非我有也。我扼其前。公可據其後。我敗。公可救。我勝。公可夾攻。愼勿負。珏曰諾。晉自率五百人陣於前。賊見勢弱。長驅而至。其鋒甚銳。珏望見晉軍不敵。遂棄去。晉退無後援。亦奔還。○十六日。朴晉大敗於密陽前江。當時監司金睟。分付各邑守令。相繼入送。而或中逃去。或出門輒走。草溪守李惟儉。放其軍使之散。繼而逃。蔚山守李彥諴在東萊。爲賊所執。後二日脫還。兵使水使相繼棄鎭。其他僉使萬戶。難以悉記。自釜山至此。一無交戰者。獨晉所率三百餘人。自蘇山敗還。馳到密陽。欲以前江爲守。又欲呼召散卒。則人皆扶之。莫有應者。未及治兵。賊已來迫。是日大霧。莫卞尺寸。以此晉亦未來。放師已潰去。遂馳入城中。○十七日丙午。賊到密陽前江。勢將逼城。晉自東萊還城之後。聚呼軍民。欲守待援。則內外居人。分散已盡。晉知無可爲之勢。遂焚燒倉圉。馳赴金睟所駐處。
十七日報至。中外大震。遂分遣八道左右防禦等使。以李鎰爲慶尙道巡邊使。卽日拔遣。
別錄。是日邊報始至。京城中外大震。文武官負聚于闕內。皆以爲。賊入寇之意。非於一日。不無四邊衝入。亟速先出嶺湖南左右防禦使助防將。以李鎰爲慶尙道巡邊使。以遣之。夜四更辭朝。
又遣義禁府都事。拿慶尙兵使金誠一而來。蓋將治言倭必不來之罪。十八日邊書告急。日且十數次。皆言賊勢浩大。難以防禦。都內人民。遑遑惴惴。皆是崩潰之色。
十九日備忘記曰。當此兵變孔棘之日。不可徒守常規。凡士大夫被罪罷散者。勿論大小久近。咸使錄用以聽調遣。武士居憂在家者。悉皆起復。○二十日。以申砬爲三道巡邊使。柳成龍爲都體察使。金應南副之。刻日發送。二十一日。李鎰到聞慶。馳啓曰。今日之賊。有似神兵。無人敢當。臣則有死而已。於是宮中亦有不固之志。遂貿繩鞋等遠行諸具。又命司僕寺整立馬。以待不時之用。○二十二日申砬將行。請面對啓曰。兵曹洪汝諄不能治事。大失群心。請罪之。上震怒。遂以金應南代之。○又起復慶林君金命元爲都元帥。治兵於漢江。○二十三日。上令內需司別坐金公諒。率內需司奴子能射者二百餘人。入宿大內。○時南報漸緊。京城小民。多有避出外方者。各司官員。亦有亡匿不仕者。杞城府院君兪泓。左贊成崔滉。首出其家屬于鄕家。上以尹斗壽可用於一隅。命放還。臺諫啓以爲不可放。上不從。兩司合啓。請堅閉都城。勿令士庶闌出。又出繩鞋等物。以示效死勿去之意。○二十四日府院君兪泓啓曰。繩鞋非禦敵之具。立馬豈鎭物之道。況我之所往。賊亦能往。不如君臣上下。同死社稷。○上諭義禁府。金誠一勿令拿來。誠一到稷山而還。○二十五日以宗室補摠管衛將號。分番入直于闕內。以備宿衛。○二十六日兩司合啓曰。領議政李山海。身爲首相。不能鎭定人心。致有土崩之勢。請出于都堂。上不允。○吏曹判書李元翼。自言有敢死士十餘人。約爲同死生。願與此輩俱入賊營。斬賊將頭。少紓國家之急。雖死無恨。朝廷以爲迂闊。不之用。○二十七日生員具容權鞸上疏曰。柳成龍之講和。李山海之誤國。實今日之秦檜楊國忠。請斬之。以謝百姓。不報。○李鎰到尙州。未及布陣。而一軍皆沒。是日報至。閭巷一空。雖欲守城。已無人矣。○賊到密陽。使人來言。願見李德馨。遂遣之。○二十八日冊封光海君爲世子。百官朝賀。草草不成東西班。無印章無敎書。宮僚亦不來。○百司各上疏。請堅守都城。不報。○二十九日左議政柳成龍都承旨李恒福。請對。言自古國家大亂之日。分遣諸王。號召軍兵。以圖禦敵。請分遣諸王子于各道。以謀再圖。遂命金貴榮尹卓然。陪臨海。往咸鏡道。韓準陪順和君。往江原道。又遣李元翼于平安道。崔興源于黃海道。蓋前爲本道守令監司時。俱有惠政也。○時自上欲去邠。已治行具。而臺諫百司。俱以爲不可去。宮中遂密爲裝束。不使外人知之。都人或訛言。大駕已自宣仁門。着布衣向北道。久而乃定。如是者日三四。○三十日申砬駐兵忠州。處事躁擾。朝令夕改。晝夜昏睡。不爲遮絶鳥嶺之計。及聞賊至。列陣草密低濕之地。爲賊所抱。無一人脫者。是日敗報至。上自朝官。下至軍校。相繼逃竄。城門不閉。夜漏不傳。人馬雜沓於仁政殿庭。○先一日。上以柳成龍爲留都大將。李誠中丁胤福爲左右統禦使。都承旨李恒福啓曰。今國事已去。若有請救中原之擧。則周旋應對之間。不可無柳成龍。請勿令留都。遂以右議政李陽元代之。至是上以標信。授兵曹判書金應南。一任便宜。金應南項帶標信。欲有指揮。而無一人應之者。時夜已三更。大駕將出。而軍人未備。兵曹正郞李弘老。持標信遍行四衛。只有衛將成壽益一人而已。天又大雨。夜暗如漆。上只與數三少宦。坐板房。無賴之徒。闌入大內。掠取寶貨。無所忌憚。侍女等跣足脫衣。或泣或哭。散出宮門。聲震徹天。李弘老持一小燭。跋導上而出。自坤殿至妃嬪。皆乘屋轎。而擔夫或七八或五六。四更始出宮門。上乘馬隨之。諸從官不相輪次。其來其去。不能盡記。姑列書衙門如左。
領議政李山海左議政柳成龍右議政李陽元 留都 左贊成崔滉右贊成鄭琢左參贊崔興源 巡察黃海道去 舍人尹承勳 餘員皆缺 吏曹判書李元翼 巡察平安道去 參判鄭昌衍參議李廷馣正郞趙挺正郞柳永慶 崔興源從事官去 正郞鄭光績 江原御史未還 佐郞李好閔 李元翼從事官去 佐郞金時獻 餘缺 戶曹判書韓凖 參判以下未記 禮曹判書權克智 卒二日參判朴應福 參議以下未記 左郞李慶流 死于尙州 兵曹判書金應南參判沈忠謙參議鄭士偉參知黃暹正郞李弘老 到開落後 正郞具宬 到開罷職 正郞宋諄 坡州 正郞柳煕緖金命元從事官去 佐郞徐渻 到坡州落後 佐郞朴東亮李覮 到寧邊從世子 佐郞崔瓘 平壤病去 刑曹判書 以下未記 工曹參判李德馨 賊中未回判書以下未記 漢城判尹洪汝諄 左尹以下未記 大司憲李憲國執義權悏掌令鄭姬藩李惟中持平李慶祺 到博川不辭去 持平南瑾 初不來 大司諫金瓚 到平壤上疏去 司諫李獻納李廷臣 寧邊不辭去 正言鄭士信 初不來 正言黃鵬 平壤落後 弘文館校理李幼澄校理沈岱修撰朴東賢修撰任義正 初不來 副修撰尹暹朴箎 俱死尙州 ○別錄與副提學鄭昌衍雜事合都承旨李恒福左承旨李忠元右承旨李廷馨左副承旨盧 平壤落後 右副承旨申磼同副承旨閔汝慶 平壤落後 注書朴鼎賢 安州不辭去 注書任就正 安州不辭去 奉敎奇自獻 追到平壤 待敎尹敬立 上疏赴父任所待敎趙存世 安州不辭去 檢閱姜秀峻 平壤上疏去 檢閱金義元 餘缺


閑散官從行者
杞城君兪泓,海平君尹根壽,海原君尹斗壽,護軍李山甫柳根,洪進,洪麟祥,閔濬,尹自新,黃廷彧,李廷立,李瓘,成壽益 餘不盡記 各司官從行者此以下只記其從行者
大司成任國老 平壤上疏去 直講沈友勝,博士李效元,司僕僉正朴應寅,內乘朴東彥,內乘安滉宗,簿僉正閔善 坡州落後 掌樂直長李慶全 平壤落後 司贍奉事李愼誠 坡州落後 奉常奉事洪鳳祥世子從官輔德沈岱弼善沈友正文學李尙毅司書 未記 說書李光庭 翊衛司官員皆不來獨副率姜絪來
近侍之臣。率皆扈從。而持平南瑾正言鄭士信。纔到盤松亭。便不知去處。自初不來者。唯任蒙正一人而已。其餘小官及散秩人等。或坡州開城。自任行止。多不能記者。○是午大駕。冒大雨到碧蹄。蹔歇。乘昏到臨津。溪澗漲溢。道路泥淖。津船纔五六隻。以此大小人等。競相取渡。上下紊亂。僕馬散失。或步或騎。達夜不能渡。後宮閔嬪。乘轎眩暈。仍留坡州。上乘船待之。已近二更。猶未進夕饍。顧謂內宦。進之酒。曰不來矣。進之茶。曰不來。忍渴默坐。內醫院人龍雲者。自頭髻裡。出砂糖半塊。和江水以進。夜分到東坡館。四更始御糲飯。世子以下皆闕膳。左議政柳成龍進米三升。翌朝炊進。


五月
初一日上召海原君尹斗壽謂曰。卿有大才。可救國家之急。故特命放還。死生相救。勿負予意。仍解所佩靑織囊。以賜之曰。無物可表情也。斗壽泣謝而出。○長溪府院君黃廷彧。護軍黃赫。亦來謁。上命陪順和君于江原道。又命同知李墍。與黃赫等偕行。仍號軍兵。蓋墍關東之望也。○上獨立于東坡館廳事後。望見一士人趨走于外。乃召謂曰。爾是何人。對曰。臣乃崔滉之子。別坐有源也。上曰。爾乃功臣之子。義當與國同休戚。遂解紫革帶。以賜之曰。帶此勿忘予也。○以鄭昌衍爲禮曹判書。洪麟祥爲副提學。皆口授也。時大駕將向開城府。而日將午。尙未進膳。軍夫亦未集。長湍府使具孝淵。逃匿不出。承旨等親呼京畿監司權徵。使之指揮。則臥而不起。承旨等怒罵之。猶不應。○午後駕發。暮到開城府。上駐馬召城中父老。欲慰諭。馬逸未果。○初更軍人驚呼。自西以東。人馬或踐。宮人李氏。在外聞之。以爲變生。自刎未絶。二更又驚呼。逾時乃止。○初二日上命承旨申磼正郞李弘老。賫御筆敎書。向京城。欲以慰諭人民也。○巳時。兵曹正郞具宬出自內門曰。自上召三司入侍矣。大小官列坐宮門外。言上若召對。則政院豈不召入乎。判尹洪汝諄謂獻納李廷臣曰。此不可入。豈具宬所當召乎。宬怒曰。我親承傳敎。爾安得坐而不起乎。仍執大司諫。金瓚手以起之。諸臺遂從而入。上曰。今日之事。誰任其咎。言未已。衆官皆言。領議政李山海。交結金公諒爲心腹。與洪汝諄李弘老趙挺宋言愼諸人。共作表裡。大肆氣焰。流毒士林。誤國敗事。至於去邠之日。身爲首相。旣不請止。反請速出。阿諛容說之態。到今益甚。今日之事。無非此人所致。請正王法。上曰。李山海雖與公諒相交。豈以此誤國致寇。此則不近之說也。皆曰。士大夫去就。無不與之主張。山海主於外。公諒主於內。一國之人。孰不知之。李憲國曰。山海乘夜潛往公諒家。蹤跡詭祕。豈不痛憤。上曰。豈必親往。此則非眞實之言也。憲國曰。乘驢夜行。爲邏軍所捉。豈虛言乎。上曰。去邠之事。不獨山海言之。左相亦言。崔二相亦言之。今者獨請山海之罪。予實未知。黃鵬曰。當時之事。危急特甚。人誰不以去都城爲可也。具宬執鵬衣以出曰。爾乃山海之侄也。爾何敢開口。柳成龍下階涕泣以拜曰。願與山海同受誤國之罪。崔滉曰。臣則只以若危急。暫避他處。以圖後日之事爲言。實異於山海等。上厲聲曰。翰林注書皆在此。予豈虛言。仍顧謂史官曰。爾等亦不聞之乎。史官曰。滉亦直請去邠。別無他言也。滉猶不避謝。▣亦遂罷山海。以崔興源代之。南道兵使申硈承召上來。稱以統禦使。駐兵臨津。○初三日。上出御南門。召父老人民慰勞。仍問疾苦。具使陳其所欲言者。有士人十餘。對曰。今日之事。皆由於李山海金公諒。表裡用事。而人民同懷怨憤。以致寇賊之來。此皆殿下惑嬖淑媛金氏之故也。○駕將還。承旨李忠元啓曰。請召成渾。上曰。豈無召用之人乎。予不必召來也。遂還行宮。○上以開城留守洪二恕有病。承旨李廷馨前爲本府經歷。有遺愛。遂以廷馨。擢拜留守。且命其兄李廷馣。同守開城府。以李爲承旨。○兩司合啓。左議政柳成龍不可獨免誤國之罪。兵曹正郞具宬本非近侍之臣。又非承命出入之任。而及諸臣入對之後。同在從臣之列。起居顚倒。大失朝儀。請罷之。上從之。以尹斗壽代成龍。○上命杞城府院君兪泓都承旨李恒福。陪信城定遠兩王子。先往平壤。擢拜李恒福參判。卽日發行。○又召寅城府院君鄭澈于江界謫所。與泓等同護王子。○禮曹判書鄭昌衍以爲。太廟神主。載之馬上。多至五十餘疋。今者列郡。皆無力可運。事若倉卒。必有狼狽。不如預爲奉安於淨潔之地。以簡一行。多官皆當待新相出仕後議之。○初四日上使從臣差一人。往兩湖徵兵。人無應之者。輔德沈岱曰。臣請往。上召謂曰。人皆避之。獨請自行。良用慰喜。欲陞堂上而送。岱曰。臣若不達而還。則是虛受賞秩也。復命之日。臣當受之。上慰諭遣之。午後申磼獨言。賊已入京城。蓋到馬山。聞道路訛傳。懼而還也。上卽命治行。○鄭昌衍聞駕發。不議諸大臣。卽奉廟主。安措于穆淸殿之右。○薄暮駕行。上下擾亂。有甚於臨津。夜到金郊。宰臣以下。皆露宿草中。是夜軍人驚呼者四五。人不得寢。以韓應寅爲巡警使。領扈衛軍。○初五日。上到金巖。令吏曹判書扈從人員姓名以啓。日晩到平山宿寶山。○初六日大駕當晝停于安城。夕歇于龍泉。而安城龍泉。俱闕支供。不得已倍站過劍水到鳳山。日已初更。上下飢乏不得行。大司憲李憲國怒罵曰。政丞及承旨皆犬子。安敢使君父不食而行乎。馬上奮袖。有若拳打之狀。人皆失笑。○初七日駕到黃州。兵曹參判沈忠謙。邀長淵縣監金汝嵂。謂之曰。公之兄汝岉。雖以文官。亦死於賊。況爾以年少武士。豈可安坐乎。宜速請以圖復讎。汝嵂面發赤。有難色。忠謙叱之曰。如汝武士之多㥘者。可以梟示。汝嵂不得已請於朝廷。願率軍自當一面。上以爲忠勇之士。特賜奬。仍陞通政以送之。○初八日大駕到平壤。監司宋言愼。領兵三千餘騎。前後迎駕。戈鋋照日。勢甚堂堂。城中人民室屋有似京城。扈從人等。始有生氣。○時朝廷衆議皆以爲。金命元申硈。雖在臨津。而兵勢甚孤。不如又差文武將官。協同防守。遂以韓應寅爲諸道都巡御史。李薦爲防禦使。○初九日李誠中來言。初三日。賊入京城。留都李陽元不知去向。遂以兪泓爲右議政都軆察使。授兵三千人發行。○初十日廟社主至。駕到寶山之日。宗室海豐君耆。執尹斗壽手。痛哭曰。公以國之大臣。有司棄廟社主。而不知覺。何也。古今寧有無廟社之國乎。斗壽曰。有司不遍議。徑行奉安。雖非吾所與。而烏可謂之非我罪乎。微公言。國不國矣。遂遣禮官陪來。是日始。○兪泓承命。逾日未有登道之色。上召問。卿至今不發何也。泓曰。脚底有腫。以此不得行矣。大司憲李憲國大聲叱曰。公無才無德。旣承政丞。恩至大矣。恇怯不行。乃曰脚底腫。正如當筵之妓托足疾而不歌者也。公何敢如是。有若相歐者。上亦哂之曰。先送韓應寅可也。泓竟不行。○十一日韓應寅李薦。領兵五千辭朝。上臨行賜酒。慰勉而送。備忘記。自古遇變之主。必有自貶之擧。自今以後。諭內外臣民。凡於章疏。而稱睿聖。且尊號。一切勿用可也。李誠中曰。此盛擧也。爲臣子者。不可不承順。以成其美。尹斗壽曰。今日之變。無非臣子之罪。豈有人君獨先自貶之理乎。遂以不可貶損之義爲對。○十二日以李恒福爲刑曹判書。申磼吏曹參判。柳希霖洪進閔濬爲承旨。○都元帥金命元啓曰。臣率李薲劉克良以下諸將二十餘人。軍士千餘人。把住臨津。設伏碧蹄等處。多斬獲。李陽元亦率李鎰申恪以下諸將十餘人。軍士五千餘人。駐兵大灘。方圖進取。上下聞之。莫不懽喜。皆以爲。不久當回鑾。○朝廷以爲。當去邠之日。百官落後者。雖不可一一皆罪。至如都摠府衛將禁府等官。非如閑慢衙門之比。盡令白衣從軍。以圖立功自效。○十三日。以李恒福爲大司憲。○京畿監司權徵馳啓曰。此賊孤軍深入。足腫氣疲。其勢已挫。請勅元帥。乘此機急擊勿失。時諸將官皆言。賊勢已摧。不得行步。朝廷信其說。連降旨金命元。責其玩寇不進之狀。○以李聖任爲巡察副使。領江邊土兵之還至者。往赴軍前。參贊應寅軍務。先是。聖任聞賊變。自請於朝。親往嶺南。募兵討賊。路塞不達而還。又請於朝。願助應寅討賊。遣之。○十四日上諭韓應寅曰。今賊勢已摧。而都元帥金命元。久無所爲。卿可刻日討賊。不可坐受命元節制。以誤軍機。○兩司合啓。李山海賦性凶險。交通宮禁。與公諒爲表裏。誤國致寇。去邠之日。又不請止。請竄于外。三日始蒙允。竄平海郡。○三司又論金公諒。以幺麽賤隷。憑藉宮禁之勢。交結權兇。濁亂朝廷。士類進退。皆出其手。人心怨憤。終至於此。請斬之以謝一國。上曰。國可亡。豈可枉殺一人乎。終不聽。○李德馨來言。承命到竹山。聞申砬已沒。遂使譯官送于倭中。而久未見出。不得已退還。又謂。尹斗壽曰。今人心怨叛。公然有怨上之語。以此事機無可爲。必有別樣慰悅人心之擧。然後庶有萬一之望。斗壽瞋目不答。德馨茫然若有失。面赭而退。○大司諫金瓚。副提學洪麟祥。執義權悏。宗廟令權憘。吏曹正郞朴東賢。奉敎姜秀峻。大司成任國老等。前後上疏言。父母所在之地。賊皆屠滅。願歸省。上皆允之。以此上疏乞歸者。紛紜不止。朝廷以爲。君親一體。若盡許其歸覲。則誰與爲國乎。請一切勿聽。自後多不辭而去者。○寧海府使韓孝純啓曰。朝廷聲聞不通。任意去就。臣方堅守本城。不知駕住何處。敢此起居。朝廷見其書。無不悲喜。遂陞孝純堂上。極加贊奬。○以鄭崑壽爲大司諫。沈忠謙爲副提學。李廷立兵曹參判。○寅城府院君鄭澈來啓曰。承命之後。卽欲起程。則府使洪世恭以爲。義禁府文移不來。不可只據有旨而遽發也。以此今始上來云。○朝廷以爲。八道災傷踏驗。今不可一一差官以遣。請一依去例施行。遂諭各道監司。○慶尙左道兵使李珏。自本道脫身來現于臨津軍中。朝廷遣宣傳官。斬之以徇。○駕到平壤之後。朝廷以爲。去邠之初。自上雖有宥被罪人之敎。而未有明命。不敢施行。遂列書名以稟。則以事干逆賊。被徒流者。皆賜放還。而洪聖民李海壽白惟咸張雲翼柳拱辰李春英。未蒙放。至於削奪官爵之類。已皆蕩滌。而但朴漸獨未見敍。後數日。洪聖民以下。亦皆放還敍用。○十六日臨津岸上列營之賊。一時燒營有撤去之狀。京畿監司權徵馳啓曰。此賊勢孤力疲。顯有燒屯遁還之狀。請勅諸將追擊之。朝廷亦以爲然。遂諭應寅等。促追之。○十七日應寅盡其軍渡江。申硈統左軍。先薄賊壘。樵採之賊。望見奔回。金命元以下。遙見其狀。皆以我軍乘勝而進。檢察使朴忠侃。及督陣官洪鳳祥以爲。我師必勝。懽呼踊躍。鳳祥則急渡江觀兵。已而賊七八。赤身舞劍而出。直衝我陣。左右軍一時大潰。申硈以下。四散奔走。盡投江而死。鳳祥亦死。時命元應寅忠侃。幷着靑段衣。忠侃見事不成。遂騎馬去鞍而走。江上之軍見其走。一時呼曰。元師走矣。遂潰去。命元應寅親出呼曰。我在此我在此。始得還集。軍士餘者僅千人。○十九日報至。上下喪膽。無復可望。遂徵江邊土兵未發者。盡赴軍。前僉使朴錫命有勇力。承命將赴戰。朝廷問擒賊之策。錫命曰。我一箭可斃賊五六。一部箭可殺賊百餘。但有慰心之事。然後可盡吾勇力也。朝廷知其必無實效。且欲陞堂上。遂超授折衝以送之。○朝廷以爲。賊中形勢邈無得聞。亦無策應。遂令宣傳官李好誼金繼賢。入京城。探視而來。○金命元啓曰。申恪違棄主將。招之不來。朝廷以爲。不可不誅。遂遣宣傳官。午後申恪戰於蟹踰嶺。斬賊七十餘級。捷書至。上命宥之。命至。頭已懸矣。○大司憲李恒福。言于朝曰。今日之賊。非我國獨敵。請速求救於天朝。尹斗壽以爲。今我軍防守臨津。足以防禦。朝廷又已遣人于下三道。兵必大至。北道之兵。亦不久當集。大軍厚集。自當有爲。況天朝發兵救援。固未可期。而上國之兵。一入我境。則厥後難處之憂。萬倍於此。豈可輕擧此事乎。恒福遂退。○寬奠堡摠兵。召義州牧使黃璡謂曰。爾國受兵。自上國不可不救。俺當不日領兵過江。爾其以此意。急急啓知。璡曰。我國雖猝被兵禍。擧國奔播。然弊境兵足以當賊。豈勞大人之救乎。摠兵笑而去。璡以此事具啓。上覽之怒曰。天朝欲發兵救援。黃璡有何兵力。爲此言以阻之耶。欲拿鞫之。朝議以爲。璡未聞命令。請差一大官。臨機好處。遂以左承旨柳根薦。上遂擢拜吏曹參判。以送之。○南道兵使李渾。聞賊迫京城。遂起兵勤王。到漣川。與李陽元合兵。具啓曲折。朝廷遣人嘉奬之。當賊犯邊之初。朝廷移咨遼東。厥後倉卒未得續報。駕到平壤。只遣譯官。泛然告急。至是遼東大人詰問于義州。上又命柳根。詳對前後曲折。○朝廷以江界府使洪世恭。有可用之才。召拜承旨。○兵曹判書金應南。聞母死於土賊。遂以李恒福代之。李德馨爲大憲。○二十七日賊於臨津下流。乘小船。若直渡之狀。以試我軍。副元帥李薲。不發一矢先遁。上下諸軍。一時大潰。李陽元等。聞賊已渡臨津。遂潰向北道。○二十九日報至。上命具思孟申磼具宬。陪信城君定遠君。往寧越郡。○時朝廷以臨津之軍。足以抵當。不復設防。至是平安監司宋言愼兵使李潤德。面無人色。俱失精魄。着繩鞋以行。○朝廷以賊之入北道者。若有陽德等處。繞出背後。則尤難應賊。遂以洪汝諄爲巡察使。往陽德防守。汝諄遂請對。言朝廷以臣爲巡察。而不給一卒。是何道理。此不過欲殺臣也。請一切便宜從事。上允之。遂取李潤德所領軍一半。且出大同驛馬以備戰用。尹斗壽曰。汝諄之如是。不過欲不去也。遂請勿令行。○聖節使柳夢鼎。書狀官閔夢龍。辭朝。去邠日。方物則盡皆拋棄。獨持表文而來。朝廷以爲。雖無方物。趁節赴京爲可。遂遣之。

 
인조 1년 계해(1623, 천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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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7일(갑인) 맑음
좌목
 정사가 있었다
27-10 정사가 있었다. 이비(吏批)에, 판서 오윤겸(吳允謙), 참판 이수광(李睟光), 참의 최명길(崔鳴吉), 좌승지 권진기(權盡己)는 나왔다.
홍주원(洪柱元)을 숭덕대부(崇德大夫) 영안위(永安尉)로, 이경립(李景立)을 공조 판서로, 이경전(李慶全)을 한평군(韓平君)으로, □몽호(□夢虎)를 □성군(□城君)으로, 유공량(柳公亮)을 공조 참판으로, 정광적(鄭光績)을 동지춘추관사로, 유비(柳斐)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박동선(朴東善)을 병조 □□로, 강대□(姜大□)를 예조 정랑으로, 최유해(崔有海)를 병조 정랑으로, 정기광(鄭基廣)을 □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으로, 임숙영(任叔英)을 지평으로, 홍영(洪霙)을 직강으로, 박언룡(朴彦龍)을 봉상시 판관으로, 박제생(朴悌生)을 상의원 판관으로, 정□명(鄭□溟)을 홍문관수찬 지제교로, 권도(權濤)를 주서로, 유순익(柳舜翼)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김지남(金止男)을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조위한(趙緯韓)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권신중(權信中)을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윤명지(尹命之)를 천안 군수(天安郡守)로, 강담(姜紞)을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김돈(金墩)을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이경인(李景仁)을 전라 도사로, 송도남(宋圖南)을 강원도사 겸 기주관으로, 신희업(辛業)을 겸 도원도찰방(兼桃源道察訪)으로, 신관일(申寬一)을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으로, 심기(沈榰)를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으로, 곽천□(郭天□)를 금교도 찰방(金郊道察訪)으로, 한인록(韓仁祿)을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으로, 신천익(愼天翊)을 □양 현감(□陽縣監)으로 삼았다.

인조 7년 기사(1629, 숭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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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4월 20일(을해) 맑음
좌목
 내일 윤대관에 교서관 교리 이순 등을 낙점하였다
20-08 내일의 윤대관(輪對官)에 교서관 교리 이순(李循), 전적 정석(鄭晳)ㆍ조황(趙熀), 사평(司評) 권신중(權信中), 장흥 주부(長興
인조 7년 기사(1629, 숭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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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6일(기축) 맑음
좌목
 풍덕 군수 권신중이 하직하였다
06-04 풍덕 군수(豐德郡守) 권신중(權信中)이 하직(下直)하였다.
主簿) 김홍업(金弘業)을 낙점(落點)하였다.

 
광해조일기 3(光海朝日記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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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년(1617)에서 무오년(1618) 정월까지

우찬성 허균(許筠)이 이이첨(李爾瞻)과 합소(合疏)하여 폐모론을 주장하였다. 무뢰한들을 불러모으자, 시골 비렁뱅이들이 날마다 그 집으로 모여들었다. 허균이 옷과 밥을 대고 유건(儒巾)과 유복(儒服)을 갖추어 주니, 이들은 번갈아 무도(無道)한 소를 올렸다. 허균은 또 그의 도당인 김언황(金彦滉)으로 하여금 경운궁(慶運宮 대비가 계신 곳)에 시서(矢書)를 던져 넣고 사람을 시켜 이를 고발하게 하니, 그 가운데 상을 배척한 것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또 유언비어를 만들어 ‘이 시서는 아무와 아무가 삼청동(三淸洞)에 모여 한 짓으로 짐작된다.’고 하여 먼저 조희일(趙希逸)을 죄에 몰아 이산(理山)에 안치시켰으며 장차 큰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상이 이것을 알고 놀라서 대신들과 세 대장(大將)을 불러 의논하니 수상 기자헌(奇自獻)은 
“이것은 간사한 사람이 화를 남에게 전가시키려는 계책이니, 반드시 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라고 간쟁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자, 다음날 새벽 드디어 필마로 성 밖을 나와 곧장 강릉(江陵) 산사(山寺)로 가서 누워 버리고 일어나지 않았다.
상이 승지 이홍주(李弘冑)를 보내어 그를 부르자, 기자헌은 차자를 올려 시서의 변괴를 저지른 자는 따로 있음을 극력 주장하였으니 곧 허균을 지목한 것이었다. 그래서 상의 마음도 약간 풀리게 되고 사건이 드디어 잠잠하게 되었다. 허균은 이미 기자헌과 적이 되었으므로 모사(謀事)는 더욱 급하게 되었다.
무릇 대비의 죄를 성토함에 있어 극도로 기율에 맞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의(李㼁)가 본래 선묘(宣廟)의 아들이 아니고 민간 집 아이를 데려다 궁중에서 길렀다고까지 하였다. 또 서응상(徐膺祥)이 궁중을 드나들면서 바깥 사람들과 몰래 통모(通謀)한다 하여 서응상을 죽이었으며 유생들을 사주하여 잇달아 소를 올려 직접 대비를 배척하게 하면서, 토역(討逆)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허균의 도당인 김개(金闓)와 원종(元悰) 등이 그의 막하에 들어가 모사한 것이다.


5월

형조 판서 허균이 화심(禍心)을 품고 먼저 공을 세워 나라의 권력을 잡으려고 항상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조야(朝野)를 현혹시키더니, 이번에는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중국의 《임거만록(林居漫錄)》이란 책에 종계피무(宗系被誣)의 사실이 지금까지 씻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광해는 이 말을 듣고 당황하여 즉시 허균에게 맡겨 변무(辯誣)하도록 위임하였다.
허균은 금은보화를 많이 싣고 갔다 온 듯이 하고 피차의 어보(御寶)와 문적을 위조하여 회보하니, 광해군은 크게 기뻐하여 특사를 내리고 증광과(增廣科)를 보였으며, 존호(尊號)를 올려 서륜입기 명성광열(敍倫立紀明誠光烈)이라 하였다.
원임대신(原任大臣) 심희수(沈喜壽)가 역적 허균의 정상을 알고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이전 기축년에 벌써 분명히 씻어졌는데, 오늘에 와서 또 무엇을 변무한단 말이냐.’고 하였는데, 허균이 이 말에 매우 앙심을 품고 곧 없는 죄를 꾸며서 축출하니, 심 정승은 드디어 서울을 떠났다.
○ 이이첨(李爾瞻)ㆍ박승종(朴承宗)ㆍ유희분(柳希奮)ㆍ이영(李覮)ㆍ이창후(李昌後) 등이 모여 술자리를 베풀어 감정을 풀고 서로 화합하기로 하였다. 이이첨ㆍ이영ㆍ이창후는 소위 대북(大北)이요, 박승종ㆍ유희분은 소위 소북(小北)으로, 양북이 서로 공격함이 물과 불 사이보다 심하였었는데, 이경전(李慶全)이 이 두 사이를 조화시켜 모후(母后)를 폐하는 의논에 협력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모임을 만든 것이라 한다.
○ 중국 조정에서 공성왕후(恭聖王后 광해군의 생모)에게 면복(冕服)을 내렸다.


6월

4일 영남 사람 남자신(南自新) 등이 상소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옥사가 잇달고 변괴가 백방으로 생겨서 임금을 모함하는 역적과 반역을 도모하는 무리들이 앞뒤로 발꿈치를 이었는데, 위로는 정승으로부터 아래로는 초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팔짱을 끼고 방관만 하면서, 물정에 어두워서 그렇다든지 성은으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든지 하여, 앞을 다투어 구원하며 한사코 그들을 두둔하는 실정입니다. 오직 한 신하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만이 자신을 잊고 나라일에 이바지하여 한마음으로 역적을 토벌하였습니다. 영경(永慶)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 꾀를 부릴 때, 이이첨이 아니었던들 그 뼈다귀를 베지 못하였을 것이요, 직재(直哉)가 반역하였을 때 이이첨이 아니었던들 그 몸을 찢어죽이지 못하였을 것이며, 제남(悌男)이 은밀히 무뢰한 도당과 결탁하여 어린아이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였을 때, 이이첨 등이 국사를 담당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난을 평정하지 않았던들 동교(東郊)의 변과 이교(二橋)의 꾀를 어떻게 막았겠습니까. 이 사람은 실로 나라의 기둥이요 사직의 원로입니다. 집에 처하여서는 옥같이 깨끗한 지조가 있고, 임금을 섬기는 데는 화살 같은 직언을 다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소하(蕭何)ㆍ조참(曹參)ㆍ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라 한들, 어찌 여기에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지목하기를, ‘위복(威福)을 제 마음대로 결단한다.’ 하니, 무엇을 지적하여 하는 말인지 신들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10년이나 역적을 토벌하면서 전혀 다른 마음이 없는 사람을 보고 권세를 부린다고 한다면, 가만히 앉아서 성패를 방관만 하고 자리만 지키면서 편안히 있는 자들을 일러, 임금께 충성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권세를 제 마음대로 부리는 신하란, 반드시 용렬하고 어리석은 임금 밑에서만 있는 것인데, 만약 이이첨이 권세를 부렸다 한다면, 우리 성상을 어떠한 임금에 비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적의 잔당과 간사한 도당들이 안팎에 잠복하여, 좌우로 엿보고 틈을 기다려, 원수를 갚으려 하는 자가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금번 과거가 공평치 못하다는 하교로 인하여 기회를 만나 틈을 탈 수 있다고 손바닥을 치며 칼을 어루만집니다. 이곤(以坤)은 앞장서서 주창하고 극건(克健)은 뒤에서 그것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또 금번 선도(善道)란 자는 해남(海南) 소생으로 유기(惟幾)의 집에서 자란 자입니다. 호남은 풍속이 영악하여 대대로 선량한 인재가 없는 곳이며, 유기는 더구나 불효불충한 역적놈으로, 그 서모를 쫓고 싶을 때에는 서모를 값을 받고 남에게 팔았고, 재산을 빼앗고 싶을 때에는 형을 죽이고 상속을 받았으니, 법을 쓴다면 사형을 면치 못할 놈인데, 가만히 영경(永慶)에게 붙어 벼슬이 정옥(頂玉)의 반열(정삼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에 이르게 되니, 맑은 조정의 수치스러움이 어찌 이처럼 심할 수 있겠습니까. 선도(善道)로 말하면, 원래 나쁜 기질을 타고난데다 또한 제일 악한 자의 집에서 교훈을 받았으니, 그 자신 꾀를 부리려는 데는 못 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유기를 벼슬시키려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 이이첨이 말하기를, ‘그 사람 코가 매의 발톱 같으니, 반드시 크게 간악할 것이요, 더구나 형을 죽이고 상속을 뻬앗은 죄가 있으니, 마땅히 변경에 축출할 놈인데 어찌 그놈을 영화롭게 해 주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유기가 이 말에 발끈하여 먼저 이곤(以坤)을 사주하고, 다음에 극건(克健)을 사주하였습니다. 이곤은 곧 정입(鄭岦)의 외종(外從)이요, 극건은 곧 극신(克信)의 동복 아우이니, 이놈들이 모두 영경(永慶)의 잔당이고 유기의 도당입니다. 세 간흉이 공모하여 온갖 계책으로 중상시키려 하여 필경에는 제 자식을 시켜 흉악한 소를 올리게 하고 속으로는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 했지마는, 실은 영경을 위하여 보복의 기틀을 만드는 동시에 제남(悌男)을 위하여 옥안(獄案)을 번복하려던 것이었습니다. 훗날의 화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군자의 사람 다스림은 그 실수가 항상 너그럽고 누그러지는 점에 있습니다. 임금을 모함하는 역적에게 법을 쓰지 못하고, 그놈들로 하여금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 남게 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멋대로 굴게 되고 꺼리는 마음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선도는 경기(慶起)의 사촌이요 효성(孝誠)은 현문(顯門)의 심복이므로, 이 독종들을 없애지 않는 한, 난이 안정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번갈아 이와 입술의 관계를 이루어, 서로 상소하면서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어 망측함이 한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대로 계속된다면 장차는 아비와 임금을 죽인 뒤에야 말 것이니, 이 어찌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악한 놈에게 한 무리가 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한 유기의 죄부터 다스리고, 다음으로 남을 무고하고 임금을 속인 선도의 죄를 다스리며, 급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이이첨을 타일러서 변함 없는 마음을 보이신다면 종묘와 사직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1월

16일 진사 정혼(鄭渾)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전일 유생의 상소는 온 나라의 대계와 관련된 것이니, 정원(政院)ㆍ대신ㆍ삼사(三司)가 피혐(避嫌)을 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태학 유생도 또한 잇달아서 소장을 올려야 할 일인데, 잠잠하게 날만 보내니 극히 한심한 일이다. 또 이영(李覮)이 화근을 뽑아 버리자고 선창하였는데, 이제 대사헌이 되었으니, 그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여 성과를 이루게 하되, 대신ㆍ삼사들과 함께 협력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는 것이었는데, 이 소는 보류되어 정원에 내려보내지 않았다.
17일 신방 진사(新榜進士) 정옹(鄭滃)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유희분(柳希奮)이 대비전에 사은숙배를 올리지 않으니, 미천한 신하들의 처신이 어찌 유희분만 못하겠느냐. 신은(新恩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경운궁(慶運宮)에 사은숙배를 올리는 것을 정지해 달라.”
는 것이었다.
19일 유학(幼學) 이지호(李之皓)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대론(大論 폐모론)이 이미 나왔으면, 대신과 삼사가 당연히 죄를 성토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며, 반궁(泮宮) 유생(儒生) 또한 소장을 올려 대의를 펴도록 청하여야 할 터인데, 아직도 역적을 두둔하는 말에 현혹되어 바른 의론을 말하지 않고, 녹봉만 축내면서 열흘이 지나도록 잠자코 있으니, 극히 한심한 일이다. 먼저 사간(司諫) 남이준(南以俊), 정언(正言) 김세렴(金世濂)의 교묘하게 회피하는 죄를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모든 소장을 서둘러 내리기를 청한다.”
는 것이었다.
20일 유학(幼學) 윤유겸(尹惟謙)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제남(悌男)이 역적 이의(李㼁)를 임금 자리에 세우려는 간악한 죄상은 다 드러났지마는, 궁중에서 저주를 하여 안팎으로 화를 일으킨 흉악하고 요괴한 행적은 지난 역사를 보아도 또한 드물 일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끝내 보호하시려 하니, 이는 전하의 끝없는 효도에서 나온 것이겠습니다만, 신들로서는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의리가 있으니, 평상시와 같이 생각하여 역적의 괴수를 보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음해 형조 판서 이경전(李慶全)과 완창군(完昌君) 이영(李覮)이 원대한 충성스러운 지모로 의기가 분발하여 화근을 뽑아 버리자는 의논을 주창하여, 박승종(朴承宗)ㆍ유희분(柳希奮)ㆍ이이첨(李爾瞻) 등 세 사람이 동심 협력하여 국가의 어려움을 건지려고 생각하였으나, 일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에 다른 의론이 함부로 나오는 바람에, 마침내 뜻대로 시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지사와 충신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겨 마지않는 바입니다.
또, 지난해에 제남(悌男)을 정형(正刑)하였으면 유사들은 대의로 쾌히 처결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법에 당연한 일인데, 1년 동안이나 끌어오면서 지금까지도 드러내어 토죄한 바 없으니, 그 결과 사기(士氣)는 사그러들고 국세는 점점 쇠해졌으며 맨 먼저 대론(大論 폐모론)을 발한 경전(慶全) 등은 화가 두려워 도리어 물러나겠다는 말을 하니, 다른 것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임금의 효도는 오직 국가를 편하게 하고 사직을 오래 가도록 하는 것뿐이므로, 옛 어진 임금께서는 이런 변고를 당하시면, 진실로 국가에 이익만 된다면 오직 대의를 따랐습니다. 만일 사소한 연모만 생각하여, 기미만 보고 가만히 있다가, 화의 기틀이 갑자기 일어나 임금 자리가 바꾸어지기라도 한다면, 어찌 효도하는 것이며 책임을 부끄럽지 않게 이행한다고 하겠습니까. 임금께서 의지할 사람은 대신입니다. 기자헌(奇自獻)은 임금을 버리는 죄를 지었고, 한효순(韓孝純)은 악한 무리와 편당한 흔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하께서 용서하시고 죄주지 않은 것은, 끝에 가서 기필코 화근을 제거하여 충성을 바치리라고 여기신 때문인데, 1년 동안이나 그럭저럭 녹봉만 받아 자신의 집을 윤택하게 하고, 국가 대계에는 한마디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 두 신하를 극진히 두둔해서 장차 어디에 쓰시렵니까.
세 사람(박승종ㆍ유희분ㆍ이이첨)으로 말하자면 이 두 대신과 형편이 매우 다릅니다. 기자헌이 4년 동안 국사를 맡아 보면서 추천해 올린 사람은 모두 전하를 싫어하는 자들이요, 효순은 원래가 역적을 비호한 괴수입니다. 막상 종묘와 사직이 위태하더라도 저들 자신은 화를 면할 여지가 있어서 우물쭈물 시기만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으나, 박승종이나 유희분 같은 이는 어떤 소망이 있다고 앉아서 성패를 방관하며 달가운 마음으로 역적을 따른단 말입니까. 이이첨과 더불어 협심하여 역적을 치지 않다가 뒷날 화가 내부에서 일어나서 천지가 바뀌어진다면 저희들만은 일족을 보존한단 말입니까. 이이첨은 충의를 조금 알아서 역적 칠 의논을 주장하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유(柳)ㆍ박(朴)과 한가지로 관망만 하며, 역적들의 근본은 그냥 두고 말단만 치고 있으니, 어찌 사직을 지키는 신하라 하겠습니까. 이첨이 비록 죽음으로써 나라를 위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헛된 죽음일 뿐 사소한 신의를 위해 도랑에서 목을 매고 죽는 것이 국사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예전 한 나라 태후 염씨(閻氏)가 그의 동생 염현(閻顯)과 난을 일으켰는데, 순제(順帝)는 여러 신하의 의논을 채택하여 별궁에 태후를 옮기었고, 이합(李郃)의 말에 의하여 명대로 살다가 죽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염현이 만일 태후의 아비였다면 이합이 어찌 감히 성은을 지극히 하여 용서하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노 환공(魯桓公)을 죽일 때 부인 강씨(姜氏)가 함께 알고 한 일이라 하여 공자께서 그 일을 《춘추》에 쓰기를, ‘부인이 제(齊) 나라로 피해 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씨를 쓰지 않은 것은 친속(親屬)에서 끊어 버린 것이요, ‘피해 가다.’ 한 것은 가고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더욱더 친속으로부터 끊어 버린 말입니다. 호씨(胡氏)가 해석하기를, ‘사사로운 정을 따르면 천하의 대의를 해치고 왕법(王法)을 받들면 모자의 지극한 은의를 상하게 한다. 경(經)에, 「부인이 제 나라에 피해 가다.」라고 썼으니 은의(恩義)의 경중이 분명해졌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러한 흉악하고 요괴한 저주의 변고에 안팎이 협심하여 장차 국명(國命)을 옮기려 하니 그 죄상이 임금을 죽이는 데에 참여한 것보다 지나친 것입니다. 아! 군신 상하가 한갓 구구한 사소한 은의 때문에 이런 큰 화의 싹을 길렀고, 미연에 막지 못하다니, 《춘추》의 대의가 아마도 이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의 우매한 소견으로는, 《춘추》의 법에 의하여 성상께서는 모자의 은혜를 보전하시고 온 나라의 신민들은 모두 끊어 버림으로써, 큰 의리를 천하에 밝히기를 청합니다마는, 성상께서는 과연 신의 말을 채택하여 시행하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청컨대, 대신과 삼사 및 인척되는 모든 신하를 불러 신의 소장을 보이신 뒤 모후의 존호(尊號)를 깎고 분조(分朝)의 관리와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을 철거시키며, 궁호(宮號)를 삭제하여 사저(私邸)를 만들고 별장(別將) 한 사람만으로 지키도록 하는 한편, 제도(諸道)의 공물과 관리들을 제수할 때, 은혜를 사례하는 일 등을 일체 정지시키고, 공주라는 칭호를 깎아 서민의 혼인 예식으로 행하며, 시위하는 궁인을 감하고 제남(悌男)의 아내는 노예 문적에 붙여, 온 나라 신민들에게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의리를 보이소서. 그리고 성상께서는 문안드리는 것과 음식 받드시는 일을 평상시의 의식대로 행하시어, 타고난 천명대로 잘 마치게 하시고, 모후가 돌아가신 뒤에는 국조의 정릉 고사(貞陵故事)에 의하여 모자의 은혜를 보전하는 것이 천륜을 다함이요 법제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신다면, 중외의 백성치고 누가 성상의 효도를 칭찬하지 않겠으며 또한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니, 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한 뒤에 제남 등 여러 역적을 처벌한 일을 백관들이 예부에 올려, 성상의 지극하신 효도로써 은혜를 보전하신 일과 신민들의 대의로써 법을 바로 행한 일을 황상(皇上)께 아뢰어 보고한다면 천조(天朝 중국 조정) 사람들도 반드시 전하의 지성어린 효도가 천부적인 것에 흠탄할 것이요, 화의 계제와 난의 조짐도 두루 방비하여져서 비록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간사한 무리가 있더라도, 중국에 일을 만들어 화를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도리어 걱정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은혜가 위엄보다 지나쳐 비록 기강을 막고 위를 범하는 자가 있더라도 용서하시는 까닭에, 요망하고 간특한 자들은 이 점을 믿고, 두려움 없이 역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간사한 의론이다.’ 하고 역적을 두둔하는 자를 ‘바른 의론이다.’ 하여 멋대로 과장하여 전하의 귀를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대신 이하가 두려워 위축되어 감히 먼저 발언하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부류에게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번 이 대의가 발의되어 위로 대신에서부터 아래로 모든 관료에까지, 만일이라도 이의를 주장하는 자가 있거든, 전하께서 왕법으로 처단하시고 권귀(權貴)라 하여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정대한 의논은 절로 세워지고 임금의 권위는 절로 떨쳐질 것이며, 화의 근원은 절로 제거되고, 요괴한 무리는 깨칠 수 있을 터이니, 종묘 사직의 한없는 복을 이룩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하실 수 있는 기회를 세 번이나 만났으나, 일차로 계축년에 놓치셨고 두 번째는 지난해에 놓치셨고 세 번째는 금년 봄에 놓치셨으니, 이 모두가 당연히 처단할 것을 처단하지 아니함으로써, 뭇 요망한 것들에게,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열어 준 까닭이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큰 효도로써 종결하시면 더욱 다행이겠습니다.”
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으나, 보류하여 정원에 내리지 않았다. 윤유겸(尹惟謙)이 소를 올린 날짜를 백사(白沙)의 《북천록(北遷錄)》에서 참고하면 11월 초 8일이나, 유겸의 소가 모든 유생 상소문 중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인 만큼 당연히 정혼(鄭渾)의 소 앞에 있어야 할 것이다.
○ 유학(幼學) 정만(鄭晩)의 상소는 이러하다.
“예전에, 문강(文姜)이 노(魯) 나라 임금을 죽이는 데 참여하고 나라를 떠나간 것에 대하여 《춘추》에 ‘피해 갔다’라고 하였고, 무씨(武氏)가 당(唐) 나라를 바꾸어 주(周) 나라라 하였다가 나중에 폐위시킨 것에 대하여 식자들은 ‘그 죄를 성토해서 죽이지 못한 까닭에 마침내 무삼사(武三思)와 위후(韋后)의 난이 일어났다.’고 한스러워하였습니다.
문강은 환공(桓公)의 부인인데 장공(莊公)에게는 어머니였고, 무씨는 고종(高宗)의 황후인데 중종(中宗)에게는 어머니였습니다. 일찍이 왕후가 되어 천하에 어머니 노릇을 하였지마는, 이미 용서 못 할 죄를 지었으니, 종사에 있어서는 그 의리로 보아 하는 수 없이 끊어서 화의 조짐을 막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가령 장공과 중종이 모자의 은의를 보전하려 하였던들, 천하의 대의는 뭐가 되며, 종묘 사직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또, 당(唐) 나라 숙종(肅宗)의 장 황후(張皇后)가 건녕(建寧 숙종의 아들, 장 황후의 전실 아들)을 음모하여 죽이자, 대종(代宗)이 황후를 폐위하고 약을 먹여 죽일 때, 안진경(顔眞卿)ㆍ양관(楊綰) 등 여러 사람은 조정에 있으면서 이를 찬성하였고, 송(宋) 나라 철종(哲宗) 때엔 태후가 음란한 죄가 있자, 한충언(韓忠彦) 등은 폐하려 하였고, 진관(陳瓘)은 다만 너무 심할까를 염려했을 뿐, 끝내 폐하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옛날 어진 신하는 이러한 변고를 만날 때 종사만을 위하여 대사를 행했을 뿐, 대체로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주로써 요괴를 부리고 외란에 내응한 죄가, 자식을 죽이고 음란한 짓을 하는 것보다 더 심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만일 빨리 왕법을 들어 화근을 제거하지 않으신다면 후일의 일은 차마 말 못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금번 초야에 있는 선비의 소가 한 번 들어갔는데, 우상 한효순(韓孝純)은 병을 칭탁하여 나오지 않고, 영상 기자헌(奇自獻)은 병을 칭탁하여 문안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두 정승을 불러 윤유겸(尹惟謙)의 소장을 보이시고 속히 대계를 결정지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 유학(幼學) 이전방(李傳芳)이 상소하였는데, 대의는 정만(鄭晩)의 소와 대략 같다.
○ 유학 한보길(韓輔吉)ㆍ박몽준(朴夢俊)ㆍ설구인(薛求仁)ㆍ한천정(韓天挺) 등이 연명하여 상소하였는데, 대의는 윤유겸과 대략 같다.
○ 유학 서의중(徐義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영상 기자헌(奇自獻)과 원임 대신 정창연(鄭昌衍) 등의 병을 칭탁한 죄를 다스려 무거운 형률에 처하고 또 정언 김세렴(金世濂)의 일을 회피한 죄를 다스려 대의를 전국에 밝히고 화란의 근본을 제거하기를 청한다.”
는 것이었다.
○ 예안(禮安) 유학 서신(徐兟)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빨리 모든 선비의 소장으로써 널리 여러 사람의 의논을 모아 분조(分朝)에 조알(朝謁)하는 것을 속히 철폐하고, 길이 원수와 끊어 버리되 혹 반대 논의가 있거든, 대역죄로 논하여 위로는 천자에게 고하고 아래로는 팔방(八方)에 효유할 일이며, 전하로서는 사은(私恩)만 보전하고 종묘 사직을 편하도록 하라.”
는 것으로, 입계하였다.
○ 유학 이숙(李璹)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대론(大論 폐모론)이 이미 나왔는데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이 한결같이 물러나 위축되어 성패만 관망하고 있다. 당초 삼가(三家)가 회합하여 화해한 것은 대사를 위하여 한 것인데, 아직까지 조용하게 한마디의 말도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이 두 사람을 효유하여 이이첨 등과 합의하여 난을 제거하고 종묘 사직을 편하게 하라.”
는 것이었다.
○ 유학 김정량(金廷亮)이 상소하기를,
“서궁(西宮)은 역적 제남(悌男)의 딸이요, 역적 이의(李㼁)의 어머니로서, 종묘 사직에 다음 세 가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첫째, 밖으로 그 아비를 시켜 모든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서 헤아릴 수 없는 일을 꾀한 것이요, 둘째, 안으로 어린 자식을 옹호하여 임금의 자리를 엿본 것이요, 셋째, 저주를 기도하여 옥좌를 위태롭게 한 것입니다. 이는 역적 괴수 중에서 더욱 심한 자임에도 아직 전하의 인자하시고 효성하신 마음이 중용에 지나침을 힘입어, 역신으로 하여금 해를 지날수록 더욱 봉양받게 하시니, 역적을 보호하고 봉양한다는 일은 천만고 이래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엇이 겁이 나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고 후일에 큰 변괴를 끼치려 하십니까. 여러 유생의 소에 한(漢) 나라 어느 임금은 어떠한 일을 행하였고, 당(唐) 나라 어느 임금은 어떤 일을 행하였다는 말은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역적을 베어 죽여 종묘 사직에 부끄러움을 씻고 국인에게 사과한다면, 천하 후세에 무엇이 두려울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옛일의 선례를 따를 것도 없이 곧 시행할 일입니다. 일을 맡아 보는 사람들은 ‘고수(瞽瞍 순 임금의 아버지)가 살인을 하면, 고요(臯陶)가 죄를 줄 것이다.’는 사실을 너무도 모릅니다. 사람 하나 죽인 작은 일 때문에 천자의 아버지를 감히 법으로 처단할 것인데, 하물며 종묘 사직을 전복시키고 큰 역적질을 도모한 자이겠습니까. 조정에 녹을 먹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오나 전하께서는 반드시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지성스러운 사람을 선택하여, 그들과 더불어 대사를 모의하고 큰 변을 없게 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이첨ㆍ이영ㆍ허균ㆍ임취정(任就正) 등을 불러 의논을 결정하지 않으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급히 이상 다섯 사람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명령을 받들어 밖의 일을 다스리게 하시고, 전하께서는 대강(大綱)을 결정하시어, 서궁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어 성문 밖으로 내보내 안치(安置)시킨 뒤 이를 지키도록 하고, 그렇게 한 후에 그 죄상을 중원에 고하면 종묘 사직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외진 곳에서 자라나 나이 어리고 무식하오나, 장인인 정지웅(鄭之雄)이 귀양살이하는 곳에 가 보았는데, 정지웅이 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말하기를, ‘나라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너희들이 어찌하여 이것을 하지 않느냐.’ 하기에 신이 이에 깨달은 바 있어, 먼길을 걸어와 저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유념하소서.”
라고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22일 장령 한영(韓泳)이 아뢰기를,
“국사가 걱정되는 이때에, 말할 책임을 맡은 자는 의리상 마땅히 생명을 잊고 나라일을 따름이 옳거늘, 정언 김세렴(金世濂)은 감히 자신만을 보전할 꾀를 부리어, 전후로 교묘하게 일을 회피하는 죄상이 가릴 수 없이 뚜렷하니, 명령하시어 그 관직을 삭탈하시기 청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윤허한다고 비답하였다.
23일 광해가 유생들 소장 아홉 통을 봉해 내리어, 대신에게 의논하라 시켰다.
○ 사인 유충립(柳忠立)이 어둡기 시작할 무렵에 문틈으로 아뢰기를,
“봉하여 내리신 유생 상소 아홉 통을 영상 기자헌(奇自獻)에게 전하니, ‘오늘은 저물었으니 의논을 드릴 수 없다. 우상에게 가 전하라.’ 하였습니다. 우상 한효순(韓孝純)에게 가니, 답하는 말이, ‘방금 사직을 청하고 있으니 열어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뜻을 영상께 돌아와 보고하니, 영상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ㆍ봉래부원군(蓬萊府院君)이 다 대신 반열에 있으니, 각각 그 낭청을 시켜 가서 의논하게 하고, 좌상(정인홍(鄭仁弘))에게도 한 벌 등사하여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이니, 봉한 소장을 열어 전해 보낼 것을 정원에 여쭈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 유생 소장은 우선 도청(都廳)에 두어라.’ 하기에, 의정부 궤짝 안에 봉치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24일 영의정 기자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유생들 소장을 묘당에 내릴 것을 청한 일에 대하여 계하하셨습니다.
신이 본래 학식이 없고 재주가 비열하며 인망이 가벼운데, 마침 사람이 모자라는 시기를 만나 정부에 수만 채웠습니다. 신이 만약 주장하여 갑자기 모후를 폐하였다가 국사(國史)에 기록되기를, ‘아무가 제 마음대로 폐하였다.’ 하면 만세의 공의(公議)에 죄를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의 수치가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성명(聖明)도 반드시 신 등을 죄주시고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전일 대간들은 단지 ‘모후와 별처하소서.’란 말만으로도 삭직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오늘 만약 이런 일을 하였다가 그 뒤에 신들을 죄주라고 청하는 자가 있다면 전하의 인자하심으로도 용서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더구나 영부사 이항복(李恒福), 좌의정 정인홍(鄭仁弘)은 밖에 가 있고, 전 우상 정창연(鄭昌衍)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우상 한효순(韓孝純)은 병으로 휴직한 지 여러 날이 지났으므로 대신들 중에 신 혼자만이 서울에 있습니다. 이런 막중막대한 일을 혼자서 어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또 계축년에 모든 대신들이 말씀을 드릴 적에 신 역시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 비록 자애(慈愛)롭지 못한 말이 있었지만, 말을 전후로 달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해 이원익(李元翼)이 견책을 받을 때 삼사들은 ‘조정에서는 본래 이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원익이 늙고 망령되어 오명을 임금께 입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때문에, 경자 연간에 전하에게 충성을 극진히 한 이원익이었지만 도리어 죄를 면치 못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중외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성상이 우순(虞舜) 같으신 효행이 있다.’ 하여, 대성인의 성덕을 흠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든 소장의 뜻으로 본다면, 신이 이미 계축년에 대신들의 계사(啓辭)에 참여하였으니, 신은 곧 죄를 지은 사람이면서도 정승 직위를 더럽히고 앉아 있는 지가 벌써 4년입니다. 지극히 온당치 않을 뿐더러 문안 등 행사를 전례대로 따라서 하고 있으니 신의 죄가 큰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보니, 장구령(張九齡)이 ‘역수(易樹 태자를 바꿈) 때를 당하여 신은 감히 조칙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한 말이 있으니, 이것은 죽더라도 다른 임금을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진덕수(眞德秀)가 이를 매우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신이 망령되게 장구령을 본받고자 하여 전에 아뢰기를, ‘백관이 모두 신이라 쓰고 또 숙배하였으니 만약 바꾸어 세운다면 이는 사람을 죽여 반역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일을 분석해 보면 곧 이와 똑같으므로, 혹 변란을 초래할까 두려워하여 자신이 죄를 짓는 줄도 모르게 되었으니, 신의 죄상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소장이 모두 산만하여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겠으나 이것이 전례 없는 큰 일이라 놀랍고 당황하여, 어떻게 처리하여야 인심을 굴복시키고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강씨(姜氏)와 무후(武后)의 일과 같은 것이 과연 하나하나가 이와 꼭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진(晉) 나라 혜제(惠帝) 때의 양 태후(楊太后) 일에 비하는 것은 망발일 것 같습니다. 그 일을 어찌 성명의 세상에 비기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장화(張華)의 ‘마땅히 별궁에 거처하여 시종 보전하라.’는 말은, 전일에 ‘모후와 각각 따로 거처하라.’는 의론과 같을 뿐이고, 왕황(王晃) 등은 오로지 폐위하라는 의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주희(朱熹)는 《강목(綱目)》을 편수할 때, 동양(董養)의 말을 취하여 기록하였지만, 그 뒤에 과연 오호(五胡)가 중국을 요란하게 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진덕수는 《대학연의》에서 대략 기록하기를, ‘동양(董養)이 태학(太學)에 가서 마루에 올라 탄식하며 말하되, 「조정이 이 집을 세워서 무엇하려는 것인가?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이미 소멸되었으니 장차 큰 난리가 올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그것을 논하기를, ‘「모후까지 폐하게 된 것은 너무나 심한 일이 아닌가.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이제 소멸되었도다.」고 하였으니 이는 식자들이 장차 큰 난리가 일어날 줄 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이것을 인용하여 예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장 황후(張皇后)의 일에 대하여 주희가 《강목》에 ‘이 보국(李輔國)이 죽였다.’고 특서하였고, 안진경(顔眞卿)으로 말하면, 숙종조(肅宗朝)에 봉주(蓬州)로 귀양갔다가 대종(代宗) 때 이주(利州)로 옮겼으니, 그때 조정에 돌아와서 찬성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양관(楊綰) 또한 장후의 일에는 언급한 바 없는데, 이 말이 어느 글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염후(閻后)는 처음에는 황제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 다음에는 황제를 폐위하고 북향후(北鄕侯)를 세웠으며, 마지막에 북향후가 죽자 다른 사람의 자식을 세우려 하였으니, 그 흉악 참혹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지마는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주거(周擧)가 이합(李郃)에게 한 말을 따다가 쓰기를, ‘옛날 고수(瞽瞍)가 항상 순(舜)을 죽이려 하자 순이 섬기기를 더욱 삼갔고, 정(鄭) 나라 무강(武姜)이 장공(莊公)을 죽이려 꾀하자, 장공은 황천(黃泉)에나 가서 어미를 보겠다고 맹세하였다. 진(秦) 나라 시황(始皇)이 모후의 어그러진 행실을 원망하여 오랫동안 모자가 절연하였다가 후에 영고숙(穎考叔)과 모초(茅焦)의 말에 감동되어 자식된 도리를 다시 닦았다 하여 《좌전(左傳)》에서는 이를 미덕이라 하였다. 이제 모든 염씨를 다 죽이고 태후가 이궁(離宮)에 갇혀 있어서 만약 슬픔과 근심으로 인하여 병이라도 나서 하루아침에 뜻밖의 일이라도 나게 된다면, 황제께서 장차 어떻게 천하에 호령하겠는가. 비밀리 조정에 글을 올려 태후를 받들도록 하고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예전같이 하여 하늘이 노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위로하여 주게 하라.’ 하였습니다. 이합은 즉시 상소하여 진정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순제(順帝)가 태후에게 조회하였다고 합니다. 그때에 주거의 말을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말대로 따라 하였으니, 그 역시 본받을 일입니다. 진관(陳綰)의 ‘너무 심하다.’는 말도 역시 불가하다는 뜻입니다.
신덕왕후(神德王后) 일은 죽은 뒤에 빈말만으로 처치한 것이요 지금에 와서는 한식제(寒食祭)를 드리니 오늘날 일에 비할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모든 소장의 끝맺는 말에 천조 관계를 말한 것이 많은데, 임진년 이후 천조는 우리 나라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석상서(石尙書)ㆍ정응태(丁應泰)ㆍ조집(趙楫)ㆍ이성량(李成樑) 등 족당(族黨)들이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있을 터이니, 만일 우리 나라에 일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의외의 걱정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소 가운데에 ‘천조에서 힐문할지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신이 근심한 바와 대략 같습니다. 천조 사람이란 욕심이 무궁하니 만약 이 기회를 틈탄다면 수만 양(兩)의 돈으로도 부족할까 걱정됩니다. 만약 동양이나 진덕수가 한 말을 하기라도 한다면 두렵지 않겠습니까.
근래 역적에 소속된 역관을 천조에 보내지 않는 것은 미리 장래를 내다보아 멀리까지 근심한 것입니다. 또 소 가운데 ‘군현(郡縣)의 청’을 말하면 기가 막힌 일입니다. ‘또 진강유격(鎭江游擊)이 두렵다.’는 말은 견해가 없는 것이 아니며, ‘예부에 자문을 올린다.’고 한 것이든가, ‘천자에게 고한다.’ 한 것은, 바로 잠자는 범의 꼬리를 밟는 것같이, 그냥 두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을 공연히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일에 임하여 두렵게 여기시어 심사숙고하소서.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오나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소원(疎遠)한 사람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의견이 혼미하고 막혀,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자리에 인도하고 싶으나, 스스로 의논을 세울 수 없어 겨우 사마광ㆍ주희ㆍ진덕수 등 여러 사람의 뜻을 주워 모아 감히 먼저 의논을 드립니다. 이 일은 매우 중차대하여 처리하기 극히 어려운데, 상소하는 사람들은 신을 ‘미루고 칭탈한다.’고 그르다 하오나,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근일에 본 것으로 말씀드리면 미루고 칭탈하는 자가 신뿐만이 아닙니다. 설령 신의 의논이 허망하다 하여 비록 드러내어 죽이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 대신들은 앞으로 집에 있어 알지 못하였다 할 것이니, 이항복(李恒福)ㆍ정인홍(鄭仁弘)ㆍ정창연(鄭昌衍)ㆍ한효순(韓孝純) 등에게 물어 보시고 또 조정의 의론을 널리 들어 처리하시면 반드시 국가를 위하여 좋은 계책을 드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달 22일 밤부터 낮까지 잇달아 큰 뇌성의 변고가 있었습니다. 육음(六陰)이 다하고 일양(一陽)이 생기기 전에 뇌성이 이같이 발발하니 이런 재변은 근래에 없던 바입니다. 형남(荊南)엔 10월 뇌성도 고금에 전해 오는데, 하물며 동짓달 뇌성이 수십 일을 안개가 낀 가운데 갑자기 일어남이겠습니까. 재변이란 까닭없이 나는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초래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장차 무엇이 여기에 응할지 모르겠습니다.
신같이 못난 것이 오래 앉아서는 안 될 자리에 앉아 섭리(燮理)를 못하여 이런 재변이 나게 되었으니, 면직을 시키고 다시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먼저 신을 죄주어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시기 바랍니다. 신이 현재 단독으로 맡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번잡하게 아룁니다. 죽을 죄를 지었으니 취사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송영서(宋永緖)가 상소하기를,
“모든 선비의 소장이 이제는 다 정부에 내려왔으니, 대신은 마땅히 조정의 모든 신하를 곧 모아, 의논을 들어 깎고 낮추는 일을 밖에서 하고, 전하께서는 봉양만을 다 하실 것이며, 화의 근원을 제거하는 의논에는 일체 참여하여 듣지 마시는 것이 곧 은의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대소 신민들이 눈을 씻고 귀를 기울여 대신의 명령을 기다렸는데, 대신이 도리어 이리저리 핑계를 댈 마음을 품고 차자에 올린 말이 그토록 흉하게 속일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기자헌(奇自獻)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말을 임금께 아뢴단 말입니까.
기자헌은 성질이 시랑(豺狼) 같고 행실이 짐승 같아서 평생을 오직 임금께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리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습니다. 조종 임금들이 억울하게 오명을 입어도 그 무고함을 흔쾌히 해명하려 하지 않았고, 흉측한 투서가 들어와 요망스러운 변괴가 일어나려 할 때 벼슬을 버리고 달아나 혼자 화를 면할 꾀를 부렸으며, 서궁(西宮)의 생일날에 모두 가지 않는데 저 혼자 가서 조하(朝賀)를 드리고는 스스로 잘한 일이라 자랑하였으니, 이 세 가지 죄에 한 가지만 있어도 백번 죽어 합당할 것인데, 하물며 이 세 가지를 겸하고 있음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용납하시어 벌하지 않으시며, 양사(兩司)는 겁내어 죄를 성토하지 않으니, 왕의 법이 이래서야 어찌 임금의 위엄을 세우며 나라의 큰 난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세렴(世濂)은 한미한 관원인데, 그의 장인 유희발(柳希發)의 사주를 믿고, 정부 관리를 탄핵한다는 핑계 아래, 교묘하게 회피할 꾀만 부렸다 하여 역시 먼 곳으로 귀양간 것입니다. 하물며 자헌은 대신으로서 상의 두터운 은혜를 받으며, 대사(大事 폐모론)를 실패시키려고 화의 괴수를 보호하려 하니, 머리를 베고 시체를 버린다 해도 시원치 않을 것입니다.
신이 근심되는 것은 자헌이 이렇게 하는 것이 어찌 믿는 것이 없고서야 그렇게 하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는 지금 나라의 권력을 잡고, 무관들과 결탁하여 도감의 장교나 졸병들이 다 그의 손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병판이 군색제조(軍色提調)를 겸임 못 하는 것이 전례인데, 자헌은 그대로 머물러 경질되지 않고 있습니다. 혹 바른 의논이 점점 강하게 나와서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서궁(西宮)을 끼고 병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 징조가 이미 보이므로 서울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다 전하께서만 모르고 계신다고 합니다.
아! 서궁의 흉악함을 말하자면 말이 길어집니다. 산능에 뼈를 묻어 재앙이 땅에 미치게 하였고 임금의 휘(諱)를 육편(肉片)에 써서 기(氣)를 제압하여 욕이 선후(先后)에 미쳤으며, 엄중한 교서(敎書)를 위조하여 유명(遺命)이라 거짓 칭하였으니, 무고한 것이 선대왕에게까지 미친 것이며, 궁중에서 저주를 행하여 만단으로 해독을 끼쳤으니, 성상의 몸에 화가 참혹하게 된 것입니다. 밖으로 제남(悌男)을 끼고 서족(庶族)들과 서로 통하고 내탕의 돈을 내어 역적 무리를 사들였으니, 종묘 사직에 죄가 관계된 것이며, 몰래 기화(奇貨)를 사들여 역적을 은밀하게 도와서 왜국(倭國)에 보내어 그 후원으로 상국(上國)을 침범하려 하였으니, 천조에까지 화가 미친 것입니다.
예로부터 요망한 왕후가 난을 일으킨 사적을 차례로 헤아려 보아도, 이같이 심한 적이 없으니, 신하들이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것이 이보다 더 부끄러울 수 있겠습니까. 자헌이 감히 그의 모든 악을 덮어두고 드러내어 토죄를 하지 않으려 하니, 자헌이 없어지지 않는 한 폐모론은 시행되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법에 의거하여 자헌을 베어 죽이고, 다시 어진 덕이 있는 사람을 골라 정승으로 세우시어, 이 어렵고 위태한 사태를 크게 구제하고 사직을 보전하라고 책임지우시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김서룡(金瑞龍)이 상소하였는데, 그 말이 송영서(宋永緖)의 상소와 대략 같다.
○ 유학 이구(李榘)ㆍ한보길(韓輔吉)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편당의 화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남(悌男)이 반역한 형상이 모두 탄로났으니 신하들로서는 당연히 눈물을 흘리며 성토할 것을 생각하여야 되는데, 다투어 가면서 역적을 비호하는 의논을 하여 스스로 임금을 무시하는 지경에 빠지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이 힘써 역적을 토벌하기를 주장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짐짓 상반되는 의논으로 맞서서, 훗날에 승리를 구하려는 것 때문에, 그들 자신이 역적을 따른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니 또한 슬픈 일입니다. 서론(西論)을 주장하는 무리들은 모두 제남(悌男)의 여당들이니 깊이 책망할 것 없지만, 남론(南論)을 주장하는 자들은 단지 이첨 등을 제거하려고 모함하는 계획을 힘쓰고 괴이한 말을 선동하여, ‘성상을 속일 수 있다.’하며, 이 세상을 무인지경인 줄 알고 있으니, 남인(南人)의 뜻은 이상스럽다 하겠습니다. 이제 모든 선비들이 잇달아 소장을 올려 화의 근본을 제거하기를 청하는데, 대신은 남인들의 뒷 논의가 있을까 겁을 먹고, 삼사들은 남인에게 보복당할 것을 겁내므로, 대의(大議 폐모론)가 나오다가도 그치고 말게 되니, 임금에게 있어서 남인이란 가슴속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 한효순(韓孝純)은 남인의 괴수로, 그 의논을 주장하다가 병을 칭탁하고 사표를 올렸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근시(近侍)를 시켜 권유하여, 만약 끝내 회피하고 나오지 아니하거든 곧 조옥(詔獄)에 잡아들여 임금 저버린 죄를 수죄한 뒤, 머리를 베어 대중 앞에 보임으로써 남인을 경동시켜 그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는 역적의 마음이 싹트지 못하도록 하고, 대신ㆍ육경ㆍ삼사를 불러, 옳고 그른 것을 의논하여 정하고, 예부에 그 사연을 올려 화의 근본을 없애고,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관학 유생 생원 김상하(金尙夏)ㆍ김극수(金克修)ㆍ최상질(崔尙質)ㆍ유진정(柳震貞)ㆍ박희(朴熺)ㆍ이전방(李傳芳)ㆍ이홍순(李弘詢)ㆍ이창발(李昌發)ㆍ유창길(柳昌吉)ㆍ조후겸(曺厚謙)ㆍ이책(李)ㆍ최광필(崔光弼)ㆍ이선철(李善徹)ㆍ조원규(趙元規)ㆍ김대진(金大進)ㆍ하인준(河仁浚)ㆍ정기(鄭淇)ㆍ신경업(辛敬業)ㆍ유의남(柳義男)ㆍ이건원(李乾元)ㆍ나만기(羅萬紀)ㆍ채유제(蔡有濟)ㆍ여응백(呂應伯)ㆍ이덕무(李德茂)ㆍ정희립(鄭希立)ㆍ임기지(任器之)ㆍ오운(吳霣)ㆍ배홍우(裵弘祐)ㆍ여후망(呂後望)ㆍ정성(鄭晟)ㆍ민심(閔)ㆍ정미(鄭渼)ㆍ정준(丁駿)ㆍ신홍업(辛弘業)ㆍ신경함(申景涵) 등과 유학 이영구(李榮久)ㆍ조익형(趙益亨)ㆍ건(李健)ㆍ박훤(朴萱)ㆍ민준(閔濬)ㆍ민설(閔渫)ㆍ이진서(李震瑞).김경원(金慶遠)ㆍ송대정(宋大廷)ㆍ전유흠(全有欽)ㆍ서경(徐競)ㆍ김주국(金柱國)ㆍ송사성(宋思誠)ㆍ최흘(崔屹)ㆍ금대아(琴大雅)ㆍ남길(南佶)ㆍ서상안(徐尙顔)ㆍ한지업(韓志業)ㆍ금대진(琴大進)ㆍ신욱(申澳)ㆍ김치우(金致禹)ㆍ김탁(金鐸)ㆍ박준영(朴俊榮)ㆍ윤사은(尹事殷)ㆍ박유빈(朴由彬)ㆍ한성(韓晟)ㆍ이발(李渤)ㆍ황정필(黃廷弼)ㆍ김집(金㠎)ㆍ마계변(馬繼卞)ㆍ장응한(張應翰)ㆍ김윤겸(金允兼)ㆍ김홍원(金弘愿)ㆍ이훤(李萱)ㆍ이광계(李光啓)ㆍ최준(崔準)ㆍ한영(韓瑛)ㆍ남순(南恂)ㆍ임원(任愋)ㆍ김경(金璥)ㆍ양응징(梁應澄)ㆍ남숙(南淑)ㆍ이광홍(李光弘)ㆍ송석우(宋錫祐)ㆍ김창(金暢)ㆍ권덕여(權德輿)ㆍ선방호(宣方虎)ㆍ정응선(鄭應善)ㆍ임휘지(任徽之)ㆍ정주한(鄭周翰)ㆍ김홍량(金弘諒)ㆍ이송수(李松壽)ㆍ김시헌(金時獻)ㆍ정시현(鄭時賢)ㆍ한천정(韓天挺)ㆍ박율(朴嵂) 등이 상소하기를,
“저 서궁(西宮)의 죄악은 말하기도 참혹합니다. 요사스러운 무당의 말을 믿고서, 의인왕후(懿仁王后)를 저주하기 위하여 뼈를 능 위에 묻어 욕이 황천까지 미치게 하고, 임금의 휘(諱)를 고기 조각에 적어 새와 짐승에게 먹이었으니 그 죄 하나입니다.
자식 이의를 귀하게 하려고 임금 기운을 제압한답시고, 마른 뼈와 허수아비를 만들어 궁중 안에 묻어 두고 흉악한 장님을 불러 경문을 외우게 하였으니 그 죄가 둘입니다.
선왕이 편찮으실 때 밖으로 영경(永慶)과 홍로(弘老)와 결탁하고 서로 성세(聲勢)를 합하여, 몰래 이진(李珒)과 약속을 맺고서 임금 자리를 전해 주었다가, 이의가 장성한 뒤에 돌려주기로 하였으니, 그 죄가 셋입니다.
비밀리 제남(悌男)을 시켜 대군방(大君房)의 종 천여 명을 단속하여 부서를 짜 두고 급한 일에 쓰려고 대비하였으니, 그 죄가 넷입니다.
좌상 정인홍(鄭仁弘)이 영경(永慶)을 공격하는 상소가 들어오자, 간사한 마음을 내어 그 기회를 타서 태자를 바꾸어 세우려고 선왕에게 울면서 권하여, 여러 차례 엄중한 교서를 내리게 한 결과 나라 근본(세자(世子)를 말함)이 위기일발에 처하였으니, 그 죄가 다섯입니다.
선왕이 돌아가시던 날에 유명(遺命)을 위조하여 자식 이의를 모든 대신에게 부탁하여 보호하게 하였으니 그 죄가 여섯입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뒤에는 무당을 시켜 여러 해를 두고 저주를 하였으며, 닭ㆍ개ㆍ염소ㆍ돼지 등 전체를 거의 날마다 궁중 정원에 던져 두고 반드시 성상의 몸에 해를 입히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일곱입니다.
제남(悌男)을 시켜 역적놈들과 결탁하고, 무사들과 연락하여, 틈을 타서 임금 자리를 옮기려 하였으니 그 죄가 여덟입니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위험한 말을 만들어 내어 전하를 무고하고, 그 족당에게 말을 퍼뜨리더니, 지금엔 역적 이의를 흉한 격문 속에 적어 넣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 죄가 아홉입니다.
내탕금을 많이 출자하여 양갑(羊甲)에게 후히 주고, 왜국에 들어가 후원받을 것을 체결토록 하여 이의를 임금으로 세운 뒤에 상국을 배반토록 하였으니 그 죄가 열입니다.
그가 지은 10대 죄악은 비록 여후(呂后)나 무후(武后)로도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전하께서 아직도 어머니로 받드시고 온 나라에서도 역시 국모로 존경하게 하니, 전하의 효도는 비록 지극하다 할지라도, 사직의 안정으로 보면 그렇지 못하며, 일국이 높이 받드는 정성은 비록 예(禮)라 할지라도, 군왕에 대한 충성은 못 됩니다.
사람의 윤리가 어두워지고 사특한 말이 흘러나와 위급한 화변이 호흡간에 박두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은의만 보전하려 하시고, 모든 신하들은 조알(朝謁)을 철폐하지 않으니, 삼강(三綱)이 떨어지고, 구법(九法)이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다스리고서 망하지 않음을 어찌 기대하겠습니까. 지금 모든 소장이 이미 내려와 지극한 계책이 이루어지려 하니, 신들은 청컨대, 《춘추(春秋)》의 필법으로 일국에 정의를 펴서 존칭을 깎아 버리시고, 분조(分朝)를 철거하며 시위(侍衛)ㆍ공헌(貢獻)ㆍ조알(朝謁)을 일체 정지시키시고, 전하는 다만 먹을 것만을 보내 주어 제 명대로 살다가는 죽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 시종 곡절을 예부에 글로 올려 윤이(尹彝)와 이초(李初) 같은 자의 참소할 길을 끊는 것이 지금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조정 신하들을 불러 좋은 의논을 따라 잘 처리하여 종묘 사직을 편하게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예전에 장간지(張柬之) 등이 중종(中宗)을 다시 세웠는데, 송(宋) 나라 선비 호인(胡寅)이 말하기를, ‘중종에게 아뢰지 않고 태묘(太廟)에만 고하고 그 죄상을 수죄하여 베어 죽였던들 참으로 《춘추》의 의리에 부합되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씨(武氏)가 중종(中宗)에게 길러 준 은혜가 있더라도, 대의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바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길러 준 은혜도 없으며, 무씨의 죄악만 있음이겠습니까.
기자헌(奇自獻)이 수상으로 국사를 담당하였으니, 이런 큰 변을 만났으면 당연히 목욕하고 성토하기를 청하여야 할 터인데, 가만히 딴뜻을 품어 역적 괴수를 옹호하고 조정 의논을 널리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흉한 차자를 올리니, 그 마음 가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자헌을 죄주지 않고서는 국시를 정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왕법(王法)을 바르게 하여 모든 신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여 입계하였는데, 답하기를,
“소장을 살피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을 넉넉히 알겠다. 내 불행하여 변을 만나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차마 귀로 들을 수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대신은 비록 저의 품은 생각을 진술한 것이나, 번란하게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25일 영상 기자헌(奇自獻)이 도당에 앉아 조정 백관의 의론을 봉상(捧上)하였다.
○ 이날에 양사가 중학(中學)에 같이 모였는데, 영상을 논계하기 위함이었다. 백관의 수의(收議)는 다음과 같다.
○ 영중추 이항복(李恒福 그때 동교(東郊)에 있으면서 의론을 올렸다) : 신이 8월 초 9일에 거듭 중풍병을 얻어 죽지는 않았으나 정력이 이미 탈진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을 바라보며 죽음에 임박한 것을 안 지 반 해가 되었습니다. 공사(公事)에 관한 것을 대답하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이 일은 국가의 대사이므로 남은 목숨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감히 병을 칭탁하여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까.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런 계획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임금 앞에는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진술하지 않는다는 것이 옛 성인의 밝은 훈계입니다.
우순(虞舜) 임금이 불행하여 그의 완악한 아버지와 어리석은 어머니는 항상 순을 죽이려고 우물을 파라, 곳간을 수리하라 하여 위태한 경우가 극도에 달하였으나, 부르짖어 울면서 자신을 원망하고 부모님을 사모하였으며, 부모님에게 잘못된 곳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부모가 설령 자애를 베풀지 않더라도, 자식으로서는 효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춘추》의 의리에는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급(伋)의 처된 사람은 백(白 자사의 아들)의 어머니가 된다.하였으니, 진실한 효의 중함이 어찌 간격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제 바야흐로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시어 점차로 교화될 가망이 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임금 계신 곳에 이르렀습니까. 지금 하실 일은 순 임금의 덕화를 받아 효도로써 화합하게 하되, 간단없이 하여 노여움을 돌려 자애스럽도록 하시는 것이 우매한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북청(北靑)에 귀양가다.
○ 전 분승지 정홍익(鄭弘翼) : 옛날 제왕들 중에 인륜의 변을 만난 사람 중에 우순(虞舜) 같은 사람이 없고 변에 대처하는 도리를 잘 한 사람도 순 임금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간사한 어머니가 화를 선동하여 백방으로 해치려는 처지를 당해서, 순 임금은 공손하게 자식된 직분을 다함으로써 차츰 감화를 시켰으니, 이것이야말로 인륜의 극치라 하겠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세자로 계실 적부터, 어질고 효도로써 정성을 다하시어,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선을 천하에 베푸는 지극한 교화를 기다렸는데, 불행하게도 인륜의 변을 당하시고 아래서 받들고 있는 모든 신하들이 성상의 효심을 잘 돕지 못해 순 임금의 아름다움과 같게 하지 못하고 이제 예전에 없던 일을 의논하게 되었으니 신은 당혹스럽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순 임금을 본받아 성실함과 효성을 극진히 하시어 양궁(兩宮 인목대비와 광해군) 사이에 화락한 기운이 넘치도록 하신다면, 일국 신민들이 인효(仁孝)한 교화에 들어갈 것이요, 성상의 미덕도 만세에 빛날 것입니다. 신은 외람되게도 성상의 은덕을 입어 벼슬이 3품까지 올랐습니다. 비록 극도로 어리석고 고루하여 무식하지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몸 바치려는 정성은 언제나 마음 가운데 간절합니다.
이제 의론을 바칠 적에 만약 미천한 목숨을 아껴서 품은 생각을 진술하지 않는다면, 임금의 넓으신 은덕을 저버리고 스스로 불충한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께서 무식한 사람이라 하여 그 말을 버리지 마시고 재량하여 주신다면 신이 비록 만번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 군기정(軍器正) 김덕함(金德諴) : 임금을 사랑하는 일편 마음은 이항복, 정홍익과 꼭 같습니다.
○ 청풍군(凊風君) 김권(金權) : 신의 성품이 본래 어리석고 졸렬하여 아무 견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나이 70이라 노망이 심하니, 이런 큰일에 어찌 감히 경솔하게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을 허물없는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은 미천한 신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며, 끝까지 은의를 보전하는 것은 성상께서 변에 대처하시는 큰 덕입니다. 천년 뒤에 순 임금과 나란히 지칭되시는 것이 간절한 신의 소망이므로, 황공한 마음으로 의론을 올립니다. 처음 강계(江界)로 귀양갔다가 무안(務安)으로 옮겨서 죽었다.
○ 사과 권사공(權士恭) : 천하의 일이 평상에 처하기는 쉬우나 변고에 처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상도(常道)는 사람마다 말할 수 있지마는, 변고에 이르러서는 도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고귀한 대신들이 묘당에 앉아 의논하고 있으니, 보잘것없는 소신(小臣)이 망령되게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임금이 일을 처리할 때에는 당연히 성인을 본받아야 할 것이요, 한(漢)ㆍ당(唐) 이하의 일은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 예전 성인이 인륜의 변을 만나서도 그 성인됨을 잃어버리지 않은 까닭은, 그 처리한 것이 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일은 조정에서 잘하고 못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반복하여 상의하고 고금의 일을 참고하며 그 경중을 참작하시어, 천리(天理)에 합하고 인정(人情)에 마땅하여,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것이 없도록 힘써야만 오늘에도 유감이 없고 후세에도 할 말이 있게 되며 옛 성인의 변에 처하는 법에도 부합될 것이니, 신중하게 토의하여 처리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 도사 민항(閔恒) :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는 성인을 본받을 뿐이지, 이 밖에 무엇을 의논하겠습니까.
○ 첨지 오윤겸(吳允謙) : 오늘날 변고에 대처함에 있어서 그 도리를 다하여야 천하에 할 말이 있고 후세에도 부끄러울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묘당은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있어 옛 성인의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극진히 한 사례를 찾아 본보기로 삼아, 성상의 효도가 더욱 크고 성상의 효도가 더욱 높을 수 있도록 하소서.
○ 부사용(副司勇) 이신의(李愼儀) : 제왕 중에 인륜의 변을 당한 이로, 우순(虞舜)만한 이가 없고, 처변의 도리를 잘한 이로도, 또한 우순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그의 어리석은 어머니가 화를 선동하여 백방으로 순 임금을 해치려 하는데도, 순은 공손하게 자식된 직분만 닦아 차차 감화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인륜의 지극한 바가 된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저궁(儲宮)에 계실 적부터 인과 효가 일찍 드러났으니, 우순의 마음을 체득하시어 우순의 도리를 행하신다면, 귀신이나 사람이나 모두 좋아함을 이루 다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서(書)》에 이르기를, “반드시 참음이 있어야 일이 이루어지고 포용함이 있어야 덕이 커진다.”하였으니, 무슨 일이든지 포용과 참음에서 이루어지고, 포용하지 못함과 참지 못함에서 실패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천하에 크고 작은 의논을 막론하고, 반드시 인정과 천리를 살펴본 뒤에라야 그 시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이 좋아하는 곳이라면 천리의 당연한 극치요, 사람의 정이 모두 좋아하지 않는 곳이라면 천리의 부당한 극치입니다. 지금 이 막중하고 막대하며 지극히 난처한 일에 있어서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정을 살피지 아니하고 경솔히 한다면 이는 포용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엎지러진 물은 다시 담기 어렵고 깨진 시루는 다시 맞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조정 의논이 만의 하나라도 잘못이 있다면 뒷날에 비록 뉘우친들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익히 천리를 살피고 흔쾌히 인정에 따른다면 대순(大舜)의 세상을 오늘날에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살피시고 또 살피어 성상으로 하여금 인효(仁孝)하신 덕을 끝내 보전토록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외로운 음관(蔭官)으로서 이 말을 한 번 내면 참으로 처벌을 받게 될 줄 아는 바이지만, 양조(兩朝)에 하늘 같으신 은혜가 망극하오니, 어찌 입을 봉하여 자신만 보전하고 성상을 저버리겠습니까. 입을 다물면 살고, 혓바닥을 놀리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국시(國是)가 분분한 이때 차마 입을 봉할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어리석은 말씀을 아뢰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특명(特命)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 호조 좌랑 김상(金尙) : 이처럼 막중한 일은 미관말직인 낭관이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변고에 대처함에 있어 한껏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입니다.
○ 예빈 주부 정사온(鄭思溫) : 천륜은 지극히 중하고 대의는 매우 밝은 것이니, 곧 천륜을 중히 여기고 대의를 밝히는 것이 변고에 대처하는 지극한 길입니다.
○ 서평 수(西平守) 이훈(李壎) : 신은 본래 용렬한 자질인데다 난리에 빌어 먹게 되어, 여러 해 동안 고생하다 보니 심신을 모두 상하여 평범한 말도 그 시비곡직을 분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국가의 막중 대사를 어찌 감히 망령되이 논의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여러 경사(經史)를 참고하고 원로에게 물어 뒷세상에 이의(異議)가 없도록 하소서.
○ 부호군 이시언(李時彦) : 이는 막중하고 막대한 일이라, 논의하기 진실로 어려운 일인데, 보잘것없는 여생이 이미 늙을 대로 늙어 쇠하고 보니, 더욱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신의 구구한 생각은 다만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뿐입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데는 마땅히 바른 도리로써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바라건대, 성상의 밝으심으로, 널리 경사(經史)를 상고하고 두루 신하에게 물어, 가장 옳은 방법을 택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봉상시 참봉 김지수(金地粹) : 오직 범상하지 않은 사람만이 범상하지 않은 방법을 극진히 할 수 있습니다. 묘당에는 반드시 이 일을 잘 처리할 사람이 있을 터이니 미천한 소신은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겠습니다.
○ 참판 장만(張晩) : 지금 모든 소장에 논의된 바는 막중 막대한 일이라, 학식과 문견이 얕은 자가 감히 의논에 참여할 바가 아니니, 오직 묘당에서 널리 옛 사적을 참고하고 자세히 토론하여 잘 처리하십시오.
○ 판서 서성(徐渻) : 일이 종묘와 사직의 안위에 관계되었으니, 신하된 도리로 마땅히 사생을 가리지 않고 할 일이며, 더구나 신과 같은 우매하고 졸렬한 것이 외람되게 성상의 은혜를 입었으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몸이 가루가 되어도 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본래 지식이 없고 또한 병으로 폐인이 된 지가 오래되어,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공경 대부들이 널리 의논하여 처리하는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호군 김신국(金藎國) : 이는 국가의 대계입니다. 한미한 관직에 있는 사람이 어찌 감히 의논에 참여하겠습니까. 오직 경외(京外)에 있는 모든 대신들이 의논을 통하여 적당하게 하여 일국 공론을 참작하여 잘 처리함이 마땅합니다.
○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 의빈(儀賓 부마(駙馬)를 말함)은 조정 정사에 참여를 못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때문에, 전부터 의론을 거둘 때 감히 의론을 바칠 수 없다는 뜻을 일찍이 아뢰었습니다. 나라 일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타고난 것이니, 아는 바가 있으면 누가 감히 아뢰지 않겠습니까. 오직 조정의 진지한 논의에 맡길 뿐입니다.
○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 신하로서 충성하기를 바라는 것은 천지에 떳떳한 법입니다. 더구나 어릴 적부터 성상의 은혜를 골수에 젖도록 입고 오늘까지 왔으니 보답할 정성은 몸이 가루가 되어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성법(成法)에 의빈은 국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으며, 더구나 신은 어리석어 본래 견식이 없으니 이 같은 조정의 큰일에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습니다.
○ 부사직 이필영(李必榮 한남군(漢南君)) : 국가가 불행하여 이전에 없는 이런 대변을 만났으니, 처리하는 방법을 누구나 경솔히 의론할 바가 아닙니다. 모든 대신들이 경사에 널리 참고하고 공론을 널리 들은 다음 자세하게 토론하여 잘 처리하도록 맡길 뿐입니다.
○ 지사 노직(盧稷 판중추) : 이 같은 막중 대사는 아무나 경솔하게 의론할 수 없는데, 더구나 다 죽어가는 혼미한 사람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말하겠습니까. 묘당에서 협의하여 잘 처리하도록 맡길 뿐입니다.
○ 능해군 구성(具宬) : 여러 해 병으로 정신이 혼미하고 쇠하여 전연 일을 모르니 감히 의론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 동돈녕 김극효(金克孝) : 나이 80에 앓던 병이 고질이 되어 정신이 혼미하고 쇠하였으니, 감히 의론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 분승지 목장흠(睦長欽) : 이러한 대사는 일개 하급 관원이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묘당에서 의리를 참작하여 선처하도록 하십시오.
○ 동지 김유(金瑬) : 오늘날 일은 막중 막대한 것이라, 신의 어둡고 얕은 소견으로는 의론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묘당에서 자세하게 토론하여 선처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 여양군(呂陽君) 민인백(閔仁伯) :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남에게 뒤지지 않으나, 오늘날 일은 묘당에서 선처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 동지 박자흥(朴自興) : 나라의 좋고 궂은 일을 같이할 인아(姻婭)로서,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야 남보다 갑절이지마는, 오직 묘당에서 의논을 널리 들어 처리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 전 승지 윤의립(尹毅立) : 국가의 막중 대사를 신같이 우매 무식한 자로서 어찌 감히 말하겠습니까. 오직 지나간 역사를 참고하여 잘 처리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 공조 판서 이상의(李尙毅) : 인륜의 변을 처리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성상의 타고난 효도는 어떤 왕보다도 뛰어나십니다. 항상 성대한 덕을 흠앙하였기에 감히 의론을 할 수 없으니, 오직 묘당에서 지난 역사를 널리 참고하여 신중하게 처리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 부호군 송영구(宋英耈) : 이 일은 의리상에 나아가 십분 강구하여야 합니다. 말단 관직에 있는 신은 전달부터 거듭 혈창증(血漲症)을 얻어, 조석간에 곧 죽게 되어 정신이 혼란하여 수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이와 같을 뿐이고, 모두가 묘당의 선처에 달려 있습니다.
○ 호군 민성징(閔聖徵) : 은의의 경중을 살펴서, 변고를 처리할 도리를 극진히 하는 것은 오직 묘당의 마땅한 처리에 달린 것입니다.
○ 전적 이지정(李志定) : 신은 미관 소관으로 아무 지식이 없으니, 국가 대사를 어찌 의론하겠습니까. 처리를 마땅하게 하는 것은 오직 묘당(廟堂)에 달렸습니다.
○ 사정 오숙(吳䎘) : 국가의 대계는 신 같은 미관말직이 참여할 바가 아닙니다. 성상께서 적합한 대책을 가리시어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시는 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 전 현감 이경엄(李景嚴) : 이런 중대한 대사는 묘당에서 처리할 일이지, 신 같은 말단의 전직 관리가 어찌 감히 의론을 하겠습니까.
○ 동지 김현성(金玄成) : 이런 중대한 대사는 늙고 혼미한 사람이 경솔하게 의론할 바가 아닙니다.
○ 행사직 정광성(鄭廣成) : 신은 본래 식견이 없고 또 학문에 어두우니, 막중한 일을 감히 의론하지 못하겠습니다.
○ 겸보덕 정광경(鄭廣敬) : 이런 막중한 대사는 신같이 미관말직의 관원으로는 의논할 바가 아닐 뿐더러, 지난달부터 병이 중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오늘날 수의(收議)하라는 분부를 들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 부사직 허흔(許昕) : 국가의 막중한 대사에 늙고 혼미한 사람이 입을 열 수 없으니, 대신과 상의하여 선처하시기만 바랍니다.
○ 사산 감역(四山監役) 윤형준(尹衡俊) : 신의 직책은 남산(南山)의 송백(松栢)을 잘 기르는 데에 있을 뿐이고, 조정의 큰 의논에는 감히 참여할 수 없으니, 오직 성상의 선처에 달렸습니다.
○ 절충 구인후(具仁垕)ㆍ이익(李榏) : 신들같이 무식한 무인들이 감히 의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묘당의 선처에 달렸습니다.
○ 행사직 박이서(朴彝敍) : 여러 해 동안 죄로 버려져 교외로 물러나 있으면서, 병이 고질화되어 정신이 혼미합니다. 조정의 크고 작은 논의를 전혀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오직 묘당에 달렸을 뿐입니다.
○ 전 현감 조직(趙稷) : 국가의 큰일은 오직 묘당에서 옳게 처리해야 할 것이니, 신 같은 미관말직의 산관(散官)이 어찌 참여하여 말하겠습니까.
○ 전 현감 구인기(具仁基) : 신은 미관말직의 음관이라 국가 대사를 알지 못합니다. 어찌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오직 묘당에서 좋은 의론을 따라 잘 처리하는 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 행사용 이서(李曙) : 오늘날의 일은 신같이 우매한 무부(武夫)가 감히 말할 바가 아니니, 오직 묘당에서 옳게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 전적 강홍중(姜弘重) : 국가의 막중한 일을 신같이 말단 관원이 어찌 의론하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습니다.
○ 주서 이진영(李晉英) : 이는 국가의 막중 막대한 일이라 신 같은 학식 없는 말단 관원이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상부(相府)에서 널리 지나간 역사를 참고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승문권지 박조(朴簉) : 국가의 중대한 일은 오직 묘당에서 참작하여 옳게 처리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니, 신 같은 미관말직이 감히 망령스러운 의론을 할 수 없습니다.
○ 공조 정랑 권첩(權怗) :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하였으니, 신같이 학문이 없고 소견이 얕은 사람으로서 경솔하게 의론할 바가 아닙니다. 덕망 있는 늙은 신하를 맞아들이고, 학문이 넓은 큰 선비에게 물어 예(禮)를 참고하고, 경(經)에 의거한 다음 익숙히 강론하고 밝게 분간하여 시종일관 삼가심이 옳을까 합니다.
○ 병조 좌랑 조길(曹佶) : 국가 대사는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신 같은 미관말직이 어찌 감히 논의하겠습니까.
○ 감역 이민수(李敏樹) : 일국의 중대한 일을 신같이 학문에 어두운 음관이 어찌 감히 의논하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선처에 달려 있습니다.
○ 동몽 교관 정언눌(鄭彦訥) :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묘당에 자문하여 정하는 것이니, 신 같은 미관말직은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삼가 지휘를 기다리겠습니다.
○ 사과 남이웅(南以雄) : 우리 임금 같은 진실한 효자로서 이러한 전에 없었던 변을 당하시니 신 같은 말단 관원이 어찌 감히 의론을 하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선처에 달려 있습니다.
○ 병조 정랑 오윤해(吳允諧) : 평상에 대처하기는 쉽지마는 변에 대처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직 묘당에서 전기(傳記)를 널리 고찰하고 참작하여 선처함에 달렸습니다.
○ 사용 홍진도(洪振道) : 이러한 막중한 일을 신 같은 미관말직의 음관이 어찌 감히 경솔하게 의론하겠습니까. 오직 조정에서 옛 역사를 널리 참고하여 옳게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전 직강 박노(朴) : 학문이 없는 소생이 어찌 감히 망령되이 의논하겠습니까.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 무겸 구굉(具宏)ㆍ신경원(申景瑗) : 신 같은 무식한 무부(武夫)가 국가 대사를 감히 의론할 수 없으니, 오직 묘당에서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 사과 윤이지(尹履之) :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야 귀천이 다르겠습니까마는 조가(朝家)의 중대한 일은 신 같은 미관말직이 감히 경솔하게 말할 바가 아닌 듯 싶습니다. 오직 묘당에서 익숙히 논의하여 선처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 부사과 심집(沈諿) : 이 일은 지극히 중하고 지극히 큰일이라 신 같은 미관말직이 의론할 바가 아닙니다. 묘당에서 더욱 신중을 가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공조 좌랑 이명한(李明漢) : 이 같은 국가의 대사는 신같이 나이 어린 미관말직으로서는 감히 의론할 수 없습니다.
○ 승문권지 한유상(韓惟翔) : 이 일은 막대한 일이니 신 같은 미관말직으로서는 의론을 할 수 없고 오직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습니다.
○ 부솔 조실구(曺實久) : 국가의 막중 막대한 일을 절충하여 처리함이 오직 묘당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승문권지 홍헌(洪憲) : 이 일은 막대한 일이니 신같이 미관말직으로서는 경솔히 의론할 바가 아닙니다. 묘당에서 다시 신중을 기하여 마땅하게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형조 정랑 신득연(申得淵) : 국가의 막중한 일을 신 같은 미관말직이 어찌 감히 의론에 참여하겠습니까. 묘당에서 참작하여 잘 처리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형조 좌랑 윤정지(尹挺之) : 신 같은 지극히 미약하고 천한 신하가 막중 막대한 일을 어찌 경솔히 말하겠습니까. 오직 묘당에서 옳게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군자감 정(軍資監正) 유효립(柳孝立) : 이러한 큰일을 신 같은 미관말직이 어찌 감히 경솔하게 말하겠습니까. 오직 묘당에서 상의하여 잘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 행 판중추 이정귀(李廷龜) : 오랜 병으로 다 죽어가는 중에 어제 또 삼촌상을 당하여 정신없이 울었더니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또 들으니, 유생들의 소장 중에 협(浹)이란 역적이 말한 바 모든 재상들을 다 베고 귀양보내라는 말이 있다는데, 신이 직책상 연회에 참석한 관계로 신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招辭 범죄 사건을 진술하는 말)에 나옵니다. 재상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신은 그때 성상의 은혜를 입어 흔쾌히 석방되었으나 오늘에 또 그것이 거론되어 공의(公議)가 지극히 엄중하니 이제 집안에서 거적을 깔고 죄를 기다리는 중이라 뻔뻔스럽게 의론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 예조 참판 윤수민(尹壽民) : 조정의 대사를 처리하는 데에는 묘당이 있고 대각이 있으니 서국(庶局 하급 관청)의 논할 바가 아닌 듯합니다. 하물며 신은 본래 지식도 없을 뿐더러 전대의 역사를 모릅니다. 이처럼 막중 막대한 종사에 관한 일에 대하여 어찌 감히 의견을 내어 입을 열겠습니까.
○ 이조 참판 유몽인(柳夢寅) : 신같이 편벽된 소견과 얕은 지식으로 고금의 역사에 통달하지 못하고 또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온데, 이러한 조정의 막대한 변고에 대처하는 사안에 대해 어찌 감히 쉽게 입을 놀리겠습니까. 일찍이 들으니, 옛사람 말에, 조정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상신(相臣)이요, 둘은 대각(臺閣)이요, 셋은 시종(侍從)이라 하였습니다. 이번 대론(大論)은 자연 세 곳에서 할 일이요, 신같이 서국(庶局)에서 수만 채우고 있는 사람이 가볍게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오로지 이 세 곳의 말을 들어서 고금의 마땅한 바를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 파돈녕 민형남(閔馨男) : 국가가 불행하여 일찍이 없었던 큰 변을 당하였습니다. 변고에 대처하는 방법은 아무나 경솔하게 말할 바가 아니고, 여러 대신들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대신들 가운데에는 한적한 곳에서 글을 읽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니, 널리 전대 역사를 참고하고 십분 헤아려서 인륜의 변을 잘 처리하십시오. 그리하여 만세 뒤에 임금으로 하여금 비난을 듣지 않도록 한다면 큰 다행이겠습니다.
○ 전 참판 조탁(曺倬) : 국가가 불행하여 전에 없던 변을 당하니 참으로 나라의 큰일입니다. 일찍이 들으니, “예전에는 나라에 일이 있으면 낭묘(廊廟 묘당)에서 꾀한다.” 하였고, 또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대사는 대신이 처리한다.” 하였습니다. 방금 대신들이 묘당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대사를 처리함에는 오직 묘당 대신들이 한마음으로 상의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 : 신은 나이 적고 배우지 못하여 아무런 지식이 없으니, 국가 대사에 대하여 어두워 어찌할 바를 몰라 의론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鑌) : 의빈부에서는 조정 의논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 까닭으로 전일부터 수의에 관한 것은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없다는 사정을 벌써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은 사람들마다 공통으로 품부받은 것인데 진실로 아는 바가 있다면 누가 감히 아뢰지 않겠습니까. 오직 조정에서 자세하게 의론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 복천군(福川君) 오백령(吳百齡) : 오늘의 일은 매우 중대합니다. 오직 묘당에서 힘껏 선처하여 국가를 편안하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 사직 민영(閔韺) : 국가에 조취가 이 일보다 중대한 사안이 없으니, 묘당 대신들이 헤아려 옳게 처리할 일이요, 신 같은 음관이 경솔하게 의론할 바는 아닙니다.
○ 지중추 박홍구(朴弘耈) : 전후로 올린 유생들의 소는 국가 대사에 관계된 것이므로 아무나 경솔하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옛말에,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대신들이 의론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삼공이 자리에 있고 낭묘에 사람들이 있으니, 묘당 대신들이 지난 일을 상고하고 오늘의 정세를 참작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극진히 힘써 뒷날에 다른 의논이 없도록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 병조 참판 이덕형(李德泂), 참의 정립(鄭岦) : 이번 막중 막대한 의논에 어찌 감히 입을 놀리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대신들이 옳게 처리해서 종묘와 사직을 편안하게 함에 달려 있습니다.
○ 행 판서 김상용(金尙容) : 이번 모든 소장에서 말한 바는 매우 중대한 일에 관계되었으니 아주 큰일이므로, 신같이 학문이 어둡고 얕은 자가 감히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묘당에서 옛 사적을 널리 참고하여 선처함에 달렸습니다.
○ 부제학 이호신(李好信) : 근래 모든 선비들의 소장이 모두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라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국가에 중대한 일이므로 낮은 지위에 있는 신은 본래 지식이 없어 제 마음대로 처단할 수 없으니, 오직 묘당에서 사리에 맞도록 처리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 : 국가의 큰일을 신 같은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이 어찌 감히 의론하겠습니까. 지난 기록을 참고하여 잘 처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 호군 이시발(李時發) : 일이 더없이 중대하니, 신같이 식견이 얕은 사람이 어찌 감히 의론하겠습니까. 오직 옛 역사를 널리 참고하여 옳게 처리하였으면 할 뿐입니다.
○ 부사정 정효성(鄭孝誠) : 국가의 막중한 대사를 신같이 미관말직인 음관에게까지 의논하고자 하시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처리를 잘하는 것이 오직 조정 공론에 달렸으니, 본관이 어찌 감히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 분 병조 참판 김지남(金止男), 통례 김위남(金偉男), 사과 김명남(金命男) : 동생(同生) 전 판관 계남(季男)의 초상을 당하여 아직 빈소도 못 차렸을 뿐더러 정신이 흐리고 어지러워 뭐라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묘당의 선처에 달렸으니 별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사직 윤휘(尹暉) : 막중한 일을 신의 얕은 소견으로는 의논할 수 없으니 오직 묘당에서 지난 기록을 참고하여 선처함에 달렸습니다.
○ 호군 박동선(朴東善) : 여느 일도 무식하여 재량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국가의 대사를 어찌 감히 의논하겠습니까. 오직 조정에서 익숙히 강론하여 선처함에 달렸습니다.
○ 분 승지 윤경(尹絅) : 이번 이 중대한 일은 오직 조정에서 잘 헤아려 처리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사직 경섬(慶暹) : 이러한 막중한 조처에 신의 얕은 소견으로 경솔하게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묘당에서 널리 경사를 참고하여 선처함에 달렸습니다.
○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 국가의 막중한 일을 혼미한 신하로서 의논할 바 아니니 묘당에서 익숙히 강론하고 신중하게 처리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는 데 달렸습니다.
○ 행호군 정문우(鄭文宇), 사과 윤안국(尹安國) : 천하의 일 중에 변고에 대처하는 도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은의의 경중을 자세히 살피는 것은 오직 묘당에서 참작하여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 판돈녕 박안세(朴安世) : 병이 위독하여 다 죽어가기에 감히 의논을 할 수 없으니, 오직 묘당이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 호군 신식(申湜) : 수의하라는 명이 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으나, 이것은 국가의 막중 막대한 변고에 대처하는 일이므로, 사람마다 경솔하게 의론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상부(相府)에서 널리 참고해서 선처하기에 달렸습니다. 하물며 한적한 곳에 있는 어진 재상으로 세상의 시귀(蓍龜)가 되어 큰 의논을 판결할 사람들을 두었다가 어디에 쓰려 하십니까. 속히 이들을 불러 문의하여 중론을 결정하시기를 청합니다.
○ 병조 판서 유희분 : 외람되게 근속(近屬)으로 있으면서 천지와 같이 넓고 깊은 은혜를 입었으므로 사생과 존망을 국가와 함께 할 것이니, 임금을 받들고 사직을 걱정하는 정성이 보통 인정에 비하면 만배나 됩니다. 어찌 소원하고 미천한 여러 선비보다 모자라겠습니까. 이번 여러 유생들의 소장 중에서 언급된 말들은 실로 국가의 막중한 변례(變禮)입니다. 친속(親屬 유희분은 광해군의 처남) 가운데 학문도 지식도 적은 신의 한두 마디 말이 어찌 공론을 기울게 하겠습니까. 더구나 이 몸은 이미 정옹(鄭滃)에게 창의(倡議)하였다는 조롱을 입어 놀란 마음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터라 감히 입을 열어 말할 수 없으나 다만 신의 보잘것없는 의견을 말한다면 이 같은 변례(變禮)는 지식이 고금을 통달하고 학문이 의리에 밝은 사람이 아니면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좌의정 정인홍(鄭仁弘)은 한평생을 한적한 곳에서 독서한 사람으로 식견이 고명하고 의지가 견실한데 성대(聖代)를 만나 성상의 신임이 지중하며 이미 큰 명망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재상을 맡고 있으니 그의 말이라면 기필코 큰 변을 처리하고 뭇 의심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유림들이 들고 일어나서 국사가 위급한 이때에 어찌 차마 물러나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편하게 여겨 임금의 급한 환란에 달려나오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친근한 신하를 보내어 화란을 구하고 변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효유하여 기어코 불러들인 뒤, 그와 더불어 변고에 대처하는 방도를 확정하여 국론을 정하고 종묘 사직을 안정시킨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좌찬성 박승종(朴承宗) : 지난해 신경희(申景禧)의 공사(供辭)에 박승종 등을 반드시 죽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다행히 성상께서 불문에 붙이셨으니 신이 목숨을 보전한 것은 모두 성상의 은덕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모든 소장을 밖에 나가 있는 시임 대신 (현직에 있는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압니다.
○ 화산 부수(花山副守) 이정(李汀) : 미관말직인 종친으로 본래 지식이 없어 이 같은 막중한 일에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묘당에서 선처하기에 달렸습니다.
○ 오천군(烏川郡) 이굉(李鍧) : 신 같이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 것이 국가 대사를 어찌 감히 참여하여 의논하겠습니까. 오직 정부의 재량 처리에 달렸습니다.
○ 여원정(礪原正) 이세헌(李世憲) : 종친들의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른 신하보다 배나 되오나 국가 대사에는 오직 조정의 처리에 달렸습니다.
○ 한음군(漢陰君) 이현(李俔) : 죽을 병에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베개에 엎드려 남의 손을 빌려 글을 쓰려 하니 뭐라고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굳이 말씀을 드린다면 여러 의논을 절충하여 시종 잘 처리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 선성 부수(先城副守) 이신원(李信元) : 미관말직인 종친으로 본래 지식이 없으니 국가 대사를 감히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묘당의 대신들이 옳게 선처하는 데 달렸을 뿐입니다.
○ 판윤 윤선(尹銑) : 종묘 사직에 죄를 지음은 신민을 격분하게 하는 일입니다. 폐모론이 이미 나왔으니 어찌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옳은 처리에 달렸을 뿐입니다.
○ 형조 판서 허균(許筠) : 우리 임금을 모해함은 우리의 큰 원수입니다. 원수인데도 그에게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분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자의 은의를 시종 보전하는 것은 성상의 사사로운 정이며, 의리를 들어 덜고 깎는 것은 신하의 직분입니다. 유생들이 올린 소장의 소견이 매우 정당하니, 그대로 시행함이 진실로 사리에 합당한 줄 압니다.
○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 : 신하에게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큰 의리가 있고, 성상으로서는 시종 보전할 사사로운 은혜도 있습니다. 모든 소장을 절충하는 일은 오직 묘당에 달렸습니다.
○ 우의정 한효순(韓孝純) : 대론이 바야흐로 일고 조정의 의논도 이미 결정되었으니, 오직 묘당에서 재량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는 데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 좌윤 김개(金闓) : 《예기》에 “임금의 원수는 아비의 원수와 같이 보라.” 하였으니, 임금의 원수와 아비의 원수는 진실로 차이가 없습니다. 옛사람 가운데 아비의 원수라 하여 종신토록 북면하지 않은 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임금을 모해하는 자는 즉 우리 임금의 원수입니다. 대의가 있는데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초야 유생들의 소장이 명확하고 통쾌하오니 그대로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합니다.
○ 한천군(漢川君) 조정(趙挺),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 우참찬 이충(李冲), 행호군 남근(南瑾), 형조 참판 조국필(趙國弼), 한산군(漢山君) 조진(趙振), 동중추 유간(柳澗), 행사직 조유도(趙有道) 등 : 서궁(西宮)의 변고가 매우 가까운 곳에서 나오다니 참으로 천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번 유생들 소장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으니, 신들이 어찌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에서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 이위경(李偉卿) : 일찍이 아직 벼슬을 하기 전에 태학 선비들과 함께 이미 소장을 올렸습니다. 윤인(尹訒)과 정조(鄭造)의 의론 또한 이러합니다. 임금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은, 비록 일찍이 홍무적(洪茂績) 등이 신의 머리를 베라고 청하는 변을 당하였지만, 아직까지 그대로 뜨겁습니다. 널리 의론하는 마당에 다시 무슨 의론을 드리겠습니까.
○ 형조 참의 정규(鄭逵) : 서궁의 변이 매우 가까운 곳에서 나오니, 참으로 천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어찌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 행좌참찬 민몽룡(閔夢龍) : 유생들의 소장이 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왔으니, 다시 무슨 의론이 있겠습니까.
○ 우윤 이원(李瑗) : 국가의 막중한 대사를 당하여 노신(老臣)의 혼미한 말이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입니다만, 종묘 사직에 죄를 짓는 것은 신민의 분노를 극도에 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생의 소장이 잇달아 올라와 정당한 의논이 바야흐로 격동하고 있으니,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 예조 참의 이명남(李命男)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오직 묘당에서 상의하여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 한흥군(漢興君) 조공근(趙公瑾)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묘당의 처리에 달렸을 뿐이며, 어찌 감히 입을 열겠습니까.
○ 승지 유대건(兪大建)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묘당의 처리에 달렸을 뿐입니다.
○ 지사 한희길(韓希吉) : 국가의 대론은 신 같은 무부(武夫)가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오로지 묘당에서 처리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는 데 달려 있습니다.
○ 참지 정조(鄭造) : 지난 계축년 언관으로 있을 적에 마침 천고에 없었던 변을 만나 망령되게 각처의 의논을 진술하였는데, 심지어 ‘모후가 안으로는 무고하고 밖으로는 역적들의 모의에 응하여 종묘와 사직에 죄를 짓고 스스로 어미된 도리를 끊어 버리니 어찌 모후로 대우하겠습니까.’라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서궁이 자기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고 몰래 모해하고 가만히 꾀를 부려 지극히 흉악하였던 일은 여러 사람 초사(招辭)와 부합되어 온갖 죄상이 다 탄로났으니, 이것은 천고에 없었던 큰 변고며 참으로 일국 신민들의 원수입니다. 이번 선비들의 소장이 분통한 마음에서 나와 말 지나친 줄 모르고 한 것은 상을 위하고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한 것입니다. 또한 예로부터 화와 변을 처리하는 데는 으레 그 도리가 있습니다. 권도(權道)와 경도(經道)를 참작하고 은의를 헤아려서 임금을 아무런 허물이 없도록 하여야 길이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군신 상하가 각각 그 도리를 다하게 하는 것은 오직 묘당에서 처리를 잘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리기를, ‘모자 사이는 남들이 말하기 어렵고, 종묘 사직의 일은 책임이 대신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널리 의론을 찾으니, 다시 전의 의견을 진술합니다.
○ 이원엽(李元燁)ㆍ이대엽(李大燁) : 대의가 있는 곳에는 정론(正論)이 같은 법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어찌 선비에게 뒤지겠습니까.
○ 지중추 조흥남(趙興男) : 서궁의 변이 매우 가까운 곳에서 나오니 이는 천고에 없었던 변입니다. 상께서 순(舜) 임금의 효도를 본받아 봉양하심을 더욱 힘쓰시니 성상의 인효하신 정성은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신민의 의리로는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묘당에서 공론을 따른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판결사 박경신(朴慶新) :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 듣기가 싫다고 하신 교시가 두세 번뿐만이 아님을 볼 때 참으로 매우 감읍할 뿐입니다. 그러나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비록 이 일이 전하께 달려 있지만, 또한 자유롭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 대헌 이영, 대사간 윤인(尹訒), 집의 임건(林健), 사간 남이준(南以俊), 장령 한영(韓泳)ㆍ강수(姜燧), 지평 정양윤(鄭良胤)ㆍ김호(金昈), 헌납 조정립(曺挺立), 정언 이강(李茳) 박종주(朴宗冑) : 신들의 의견은 합사(合司)의 의론에서 이미 다하였으므로 다시 의론할 것이 없습니다. 묘당에서 속히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행도승지 한찬남(韓纘男), 우승지 이창후(李昌後), 좌부승지 김질간(金質幹) : 변에 대처하는 도리는 경사에 나타나 있는데, 모든 소장에서 다 진술되어 모든 의론의 말이 같으니, 절충하여 시행함은 오직 묘당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우부승지 박정길(朴鼎吉), 동부승지 백대형(白大珩) : 대의는 지극히 엄하고 공론은 지극히 중하니 신하의 도리는 오로지 대의를 밝히고 공론을 일으켜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이 밖에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 전흥군(全興君) 이시언(李時言) : 국가의 대론에 대하여 신 같은 무부(武夫)가 말할 바가 아니니, 오로지 묘당에서 처리하여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키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봉상주부 이재영(李在榮) : 전후로 올라온 유생의 소장이 다 대론을 주장했습니다. 위로 모든 재상의 말과 아래로 여러 관리와 뭇 백성의 뜻이 모두 종묘와 사직을 위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여론과 공론을 알 수 있는데 다시 무슨 의론을 하겠습니까.
○ 봉상첨정 차운로(車雲輅) : 서궁의 일은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널리 조정의 의론을 거두어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키소서.
○ 판교 이수록(李綏祿) : 신같이 비천한 미관말직은 지극히 우둔하고 고루하여 국가의 대소 신민들이 모두 대론을 공론으로 여기니, 감히 다시 의론하지 못하겠습니다.
○ 직강 민호(閔頀) : 오늘의 대론은 실로 공론입니다. 여러 의론을 절충하여 장점에 따라 처리할 의무는 묘당과 삼사에 있습니다.
○ 이조 좌랑 한옥(韓玉)ㆍ황덕부(黃德符) : 사사로운 은의를 보전하는 것은 성상께서 하실 일이요, 변고를 처리하는 대의는 신하들이 할 일입니다. 뭇 의론을 절충하여 시종 처리를 잘 하여 신하된 도리를 극진히 하는 것은 묘당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예조 좌랑 한정국(韓定國) : 서궁은 임금의 원수입니다.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의리는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바인데, 어찌 감히 이의를 달아 임금의 원수를 잊어버리겠습니까.
○ 사인 유충립(柳忠立) : 오늘 변고에 대처하는 일은 국가의 큰일인데, 학문이 없는 하급 관원이 어찌 감히 의논하겠습니까. 재량하여 선처하는 것은 오로지 묘당에 달린 일입니다.
○ 직제학 이익엽(李益燁), 교리 이잠(李埁)과 이상항(李尙恒), 부교리 정준(鄭遵), 수찬 이광업(李光業)과 남명우(南溟羽), 부수찬 윤성임(尹聖任)과 서국정(徐國楨), 박사 조유선(趙裕善) 등 : 국론을 따르고 사사로운 정과 국법을 절충한다면 은의의 경중이 절로 처리될 것입니다.
○ 검열 이필달(李必達)ㆍ이점(李蒧) : 서궁의 죄악이 매우 많아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노합니다. 다행히 바른 의론이 나와 많은 사람이 같은 말을 합니다. 신들이 사국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곧은 붓으로 의론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속히 정론을 따라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기를 바랍니다.
○ 설서 이모(李慕) : 임금을 해치는 원수를 신하된 도리로서는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대의가 있는데 어찌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 전 사예 박홍도(朴弘道) : 서궁의 변은 천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신민들로서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의리가 있으니 누가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계축년 대간으로 있을 적에 몸을 떨쳐 역적을 성토하였고 저주하던 모든 역적도 많이 성토하였습니다. 이번 대론을 당하여 어찌 전후를 달리하겠습니까. 묘당에서 대의를 밝혀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기를 바랍니다.
○ 겸설서 임흥준(林興俊) : 모후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국 사람의 정론인데, 오늘날 신하된 자가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 장악정 이홍엽(李弘燁) : 일찍이 아직 벼슬을 하기 전에 대의에 몸을 분기하였으니, 오늘에 와서 어찌 다른 의논을 하겠습니까.
○ 전 사간 정도(鄭道) : 사은과 대의는 으레 경중이 있으니, 오직 묘당에서 절충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봉교 박종윤(朴宗胤)ㆍ구익환(具益煥), 대교 이경익(李慶益)ㆍ김주하(金奏夏), 검열 안응로(安應魯) : 죄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므로 신하들이 분노하는 바입니다. 정론이 이미 나왔으니 결단코 다른 의론이 없습니다.
○ 전 지평 홍요검(洪堯儉) : 유생들 소장이 의리를 들고 나와 정론이 벌어졌습니다. 사사로운 은혜가 비록 간절하더라도 큰 의리를 이길 수는 없으니 빨리 뭇사람의 뜻을 따라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옵소서.
○ 보덕 배대유(裵大維), 필선 곽천호(郭天豪) : 대론이 바야흐로 팽배한데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 교리 정흡(鄭洽) : 신하된 도리로는 역적을 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고, 조정이란 곳은 공론이 있는 곳입니다. 잘 처리하시기를 신은 날로 바랍니다.
○ 검상 남궁경(南宮儆) : 초야에 있는 선비들의 모든 소장이 모두 대론을 주장하는데 신 같은 하급 관원의 얕은 소견으로 어찌 감히 다른 의논을 드리겠습니까. 은의(恩義)의 경중은 절로 가름될 것이니 묘당에서 속히 선처하기를 바랍니다.
○ 행사용 김응하(金應河) : 초야 선비들의 소장에서 공론이 이미 나왔으니, 묘당에서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사정 최철견(崔鐵堅) : 여러 해 동안 병으로 누워 세상일에 대해 알지 못하나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간절합니다. 나라를 위하여 화근을 제거하는데 어찌 감히 다른 의논을 말하겠습니까.
○ 경양군(慶陽君) 이사공(李士恭) : 병으로 집구석에 엎드려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 수의하라는 명령이 내리니 황공하여 말씀드려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비의 소장이 공통된 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조정의 의논 또한 다름이 없으니, 좋은 것을 따라 처리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 봉산군(蓬山君) 정상철(鄭象哲) : 초야의 공론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조정의 온당한 논의가 이미 나왔으니, 잘 생각하여 처리하실 것입니다.
○ 해신군(海愼君) 이희령(李希齡) : 일국의 공론이 이미 나왔으니, 따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 문학 한희(韓暿)와 전적 한급(韓昅) : 신이 동생인 한오(韓晤)와 함께 초야 선비로 있던 계축년에 소장을 올려 역적을 성토하다가 흉한 놈 엄성(嚴惺)에게 국모를 동요시켜 인륜의 죄를 지었다고 모함되어 과거를 보지 못하게 되었고, 또 차례로 소장을 올려 신들을 베어 죽이기를 청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지와 일월이 굽어 살펴주시는 데에 힘입어 흉한 놈들을 통쾌하게 물리쳐 거의 죽을 목숨이 다시 살아났으니 털끝만한 것도 모두 임금의 은덕입니다. 임금을 위하고 종묘 사직을 위하는 보잘것없는 신의 마음은 결단코 다른 것이 없고, 오직 묘당에서 모든 소장을 절충하여 공론을 확장시키고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 전 정랑 정감(鄭鑑) : 모든 유생이 소장을 올리고 이민(吏民)들까지 소장을 잇달아 올리니, 하물며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는 더욱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묘당은 백관을 통솔하여 깊은 충성으로 청하고 부르짖어 임금의 뜻을 돌림으로써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키고 인심을 진정시키기를 바랍니다.
○ 전 현령 정흠(鄭欽) : 일반 선비들이 소장을 잇달아 올리니, 온 나라 사람이 다 같이 통분하고 대소 신료들은 의리상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대사를 결정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
○ 이의(吏議) 이희발(李希發) : 이번 유생들의 소장은 국가의 대계를 위하여 한 것이니 신이 별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 분 병조 참판 이성길(李成吉) : 전후로 있었던 유생들의 소장은 모두 종묘 사직을 위하여 한 것이니 빨리 공론에 따라 대의를 결정하십시오.
○ 분 병조 참의 박사제(朴思齊) : 모든 유생들이 소장을 올려 정대한 의론을 내었으니, 온 나라 신민들이 어찌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빨리 종묘 사직의 대계를 따라 역적을 치는 의리를 엄중하게 하십시오.
○ 동중추 박정현(朴鼎賢) : 예로부터 국가에 비상한 변이 있으면 묘당의 대신들이 공론을 널리 채택하여 논의를 정당하게 결정하는 것은, 진실로 이는 중대한 일이므로 사람마다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모든 소장에 진술된 바는 종묘 사직에 관계된 일이니, 오직 서울 밖에 있는 모든 대신과 의논을 통하여 잘 처리하여야 될 것입니다.
○ 행호군 유지신(柳止信) : 국가를 위한 공공 의론에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선처에 맡길 뿐입니다.
○ 행호군 여인길(呂裀吉) : 예로부터 제왕들이 비상한 변을 당하면 그 처리 또한 비상한 조처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널리 중론을 채택하여 변을 처리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고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 공조 참의 장자호(張自好)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으니, 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 전정 허경(許儆) : 대론이 바야흐로 확장되고 묘당의 헤아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 죽어가는 병든 신하가 어찌 이에 이의가 있겠습니까.
○ 선공직장 안홍(安泓) : 빨리 묘당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
○ 전 참봉 정대수(鄭大秀) : 서궁의 변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통분해하는 바이니, 묘당에서 속히 처리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킬 것입니다.
○ 공주 판관 여응주(呂應周) : 선비들 소장에 진술한 바가 나라의 큰일이오니, 묘당에서 공론을 따라 처리하는 데 맡길 뿐입니다.
○ 전 주부 조정순(趙廷純) : 이번 대론은 실로 공론에서 나왔으니, 묘당은 빨리 대계를 결정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기를 바랄 뿐입니다.
○ 전 좌랑 정대용(鄭大容) : 신민들에게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의리가 있으니, 빨리 대책을 결정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기를 원합니다.
○ 사옹주부 성흔(成忻) : 화는 서궁에서 빚어져 불측한 변이 되었으니 이는 신하로서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가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대의가 밝지 못하면 다른 의론이 뜻밖에 나오는 법입니다. 조처를 서두르지 않는 것이 통탄스러우니, 삼가 바라건대 묘당은 속히 모든 신료들을 거느리고 대궐 아래로 모여 정성을 바쳐 임금의 어의를 굳히게 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 전 참봉 이간(李簡)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된 것이므로 다시 의론할 것이 없으니, 의심치 말기를 바랍니다.
○ 시직 김수관(金守寬)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속히 공론대로 사직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 사과 조국빈(趙國賓) : 성스러운 시대에 국시를 잡고 있는 사람은 모두 의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의리를 알면 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니, 신 같은 미관말직이 어찌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 참봉 이협(李莢)ㆍ김원(金瑗) :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이오니 다시 의론할 것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묘당에서 처리하게 하되 의심하지 마소서.
○ 사과 이담(李憺) : 목욕재계하고 성토하기를 청하는 것은 문관과 무관이 다름이 없으니, 빨리 공론대로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 사과 이수(李修)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으니, 책임이 묘당에 있습니다. 변방에 있는 소신이지만,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름이 없습니다.
○ 전 부사 조명욱(曺明勗)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처리하는 것은 묘당에 달렸습니다. 신 같은 미관말직이 어찌 감히 의론에 참여하겠습니까.
○ 전 별좌 이성원(李誠元) : 유생들이 소에서 아뢴 것은 국가의 대계입니다. 오직 묘당에서 공론을 따라 처리할 뿐입니다.
○ 군기정 강린(姜繗) : 종묘와 사직이 중하니 사사로운 은혜로써 가리기 어렵습니다. 빨리 대론대로 뭇사람의 마음을 위안시키십시오.
○ 전 정랑 이문명(李文蓂)ㆍ전 판관 이문빈(李文薲) : 신하된 도리는 오직 의리일 뿐입니다. 처벌을 극진히 하는 것은 묘당에 달렸습니다.
○ 사과 송석조(宋碩祚) : 이번 의론을 바치는 일은, 초야의 공론도 이와 같습니다. 소신의 얕은 견해도 이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 참봉 임기령(任麒齡) :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으니 다시 의론할 것이 없습니다. 의심 마시고 처리하십시오.
○ 전 군수 이언직(李彦直) : 막중 막대한 의론이 이미 모든 소장에 나왔으니, 말단의 소관이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전정(前正) 이남(李覽) : 국시가 이미 정해졌으니, 오직 잘 처리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직강 유광(柳珖) : 전후로 올라온 유생의 소장이 실로 종묘 사직을 위한 것이니, 묘당에서 절충하여 잘 처리하는 데 맡길 뿐입니다.
○ 부사직 최위(崔椲) : 대의가 벌써 드러나 조야(朝野)가 한마음이니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중의(衆議)를 따라야 합니다.
○ 가내승(假內乘) 홍걸(洪傑) : 서궁에서 전하를 위태롭게 하려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전하가 위태함은 곧 종묘 사직이 위태한 것이니, 전하의 신민이 된 자가 서궁을 모후로 대우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처리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 호군 윤기헌(尹耆獻)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다른 의론이 다시 없습니다.
○ 사용 정호신(鄭虎臣) : 국가가 불행하여 변란이 망극합니다. 임금의 원수는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살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사용 정승조(鄭承曹)ㆍ이영생(李瀛生)ㆍ이유서(李惟恕)ㆍ김원남(金元男) : 빨리 공론을 따라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 사직 이담(李憺) : 공론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어찌 다른 의론이 용납되겠습니까.
○ 전 현감 이덕순(李德純) : 대론이 이미 나왔는데, 감히 다른 의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전 현감 신종적(辛宗迪) : 공론이 이미 나왔으니, 다시 무슨 의론이 있겠습니까. 속히 처리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 전 군수 한형(韓詗), 전 판관 이덕언(李德言)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 학유 조희진(趙希進)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으니, 오직 묘당의 선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전 감찰 황염(黃恬)ㆍ송문길(宋文吉)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으니, 신 같은 말단의 산관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만, 충의의 마음은 신하된 자 누구나 같습니다. 오직 묘당에서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 전 정랑 이정(李涏) : 이 일은 묘당에서 할 일이요, 감히 임금께 번거롭게 아뢸 일이 아닙니다.
○ 전 감역 홍우직(洪友直) : 종묘 사직에 막중한 일을 신 같은 음관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 일을 걱정하는 정성은 신하된 자 누구나 같습니다. 오직 묘당에서 잘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부호군 이문창(李文菖) : 유생들의 소장이 이미 나왔고 조정 의론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극진히 함은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 사과 조석명(趙錫明) : 전화위복의 기회가 이 일에 달렸습니다.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 전 현감 유호원(柳好元), 전 초관 신대지(申大枝) : 신하가 임금에게 있어서 의리가 있을 뿐입니다. 의리가 있는 바에야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전 금부도사 민진원(閔震元)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묘당에서 상의하여 처리할 일입니다.
○ 전 판관 안주(安湊) : 속히 묘당 의론에 따라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
○ 전 판관 김여순(金汝純) : 차마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산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정론이 이제 나온 것도 때늦은 것입니다. 대의가 있는 바에야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동부참봉(東部參奉) 구현(具玹) : 종묘 사직에 관계된 일인데, 어찌 사특한 논의가 있겠습니까.
○ 전 박사 이돈(李遯) : 예로부터 국가의 크고 작은 처결은 반드시 대신에게 있으며, 대신의 의론이 한 번 결정되면 소관들의 의론은 절로 결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번 일은 임금이 아실 바가 아니니, 그 처리가 더욱더 대신에게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이 한 번 여러 재상들과 묘당에 함께 모여 가부를 재량하여 옳게 처리한다면 기강(紀綱)은 엄하고 사체는 높으며 인심은 절로 정해지고 국세는 편안해질 터인데,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떠들썩하게 번번이 수의만을 일삼으며 미루는 듯하니, 대신은 일을 당하여 처결한다는 본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옛말에 “편안하고 위태함은 대신에게 달려 있다.” 하였으니, 모름지기 이 뜻을 생각하시어 많이 물어 보아야 된다고 고집하지 말고 서둘러 처리하면 다행이겠습니다.
○ 전 현감 민여현(閔汝賢) : 신하의 직분으로는 당연히 고요(皐陶)의 법을 집행하여야 합니다. 공론이 있는 바에야 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 전 현령 이경황(李慶滉), 전 군수 안종길(安宗吉)ㆍ이안민(李安民), 전 판관 홍응구(洪應龜), 전 묘령 권광환(權光煥), 전 주부 남수(南燧), 전 판관 이숭원(李崇元) : 대론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 전 현감 이운근(李雲根) : 빨리 묘당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 전 선전관 신경기(申景沂) : 이번 의론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나왔으니, 신 같은 말단의 무부(武夫)가 어찌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 전 현감 정혜연(鄭蕙衍) : 공론이 이미 나왔으니, 오직 묘당에서 처리할 뿐입니다.
○ 전 첨사 이효언(李孝彦) : 국론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오직 대신이 대의를 밝혀 잘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제용봉사 박첨(朴瞻), 판관 김현(金俔) : 의리에 의거하여 잘 처리함이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 세마 유시립(柳時立) : 모든 선비들의 상소는 국가를 편안하게 하려는 것으로, 이것은 실로 공통된 소원인데, 신 같은 미관말직이 무슨 별 의론이 있겠습니까.
○ 전옥주부 이순(李楯), 참봉 이계해(李繼海) : 속히 묘당에 명하여 선처하도록 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 익위 이평형(李平亨) : 유생들의 소장이 잇달아 올라와 대론이 바야흐로 벌어지니 묘당에서 은혜와 의리의 경중을 살펴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동몽훈도 이적(李績) : 서궁의 변이 지극히 가까운 데서 나오니, 신민된 도리로 보아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속히 공론에 따라 처리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 예빈별제 윤형임(尹衡任) : 종묘 사직의 대계이므로 공론이 이미 나왔으니, 말단의 소관이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사과 유홍보(兪弘輔) : 종묘 사직과 전하를 알 뿐이고 다른 의론은 알지 못합니다.
○ 사과 임위(任瑋) : 공론을 좇아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 동몽교관 김휘(金翬) : 서궁의 죄악은 실로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으니, 신민으로서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이번 처리할 때 목욕재계하고 성토하기를 청하는 것이 의리에 당연하니, 선유(先儒)들이 이미 결정한 공론대로 시행함이 좋을까 합니다.
○ 사옹봉사 이사민(李師閔)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오직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내섬정 이순민(李舜民), 주부 김연경(金延慶) : 변을 처리하는 도리는 경중을 저울질하여 의리에 맞도록 하여야 되는 것이니, 결단을 내려 시행하는 것은 오직 묘당에 달렸습니다.
○ 사어 신수을(愼守乙) : 대론이 모든 유생들의 소장에서 나왔으니, 신 같은 미관말직의 음관이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사섬부정 유격(柳檄) : 대론이 바야흐로 벌어졌으니 막을 수 없습니다. 빨리 중의를 좇아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 평시령 이문현(李文顯)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소장에 의하여 거행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 금부경력 정결(鄭潔) : 밖으로는 역적의 모의에 응하고 안으로는 저주를 한 것이 환하게 드러나 의심할 것 없으니, 이는 신자로서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지 못할 원수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사로운 은혜를 보전하려 하시나 공론이 이미 격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서궁을 폐해야 옳다 하니, 어찌 사사로운 은혜로써 큰 의리를 가리겠습니까. 신 같은 미관말직이 아는 바는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 예빈직장 이준익(李俊翼) : 모든 소장이 이미 들어왔으니, 따로 의론할 것이 없습니다.
○ 내자정 금변(琴忭)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소관이 어찌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 예빈정 금개(琴愷) : 삼사가 잇달아 아뢰고 선비들이 소장을 올렸습니다. 묘당에서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성균박사 황상겸(黃尙謙) : 공론을 아니 따를 수 없고 국시는 아니 정할 수 없으니, 공론을 따라 국시를 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한 일입니다.
○ 부사과 박기남(朴奇男) : 오늘날 대의는 성상을 위하여 화근을 제거하려 한 것이니, 빨리 공론을 따라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 사포별제 이경준(李慶浚), 선공감역 성창렬(成昌烈)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다시 드릴 의론이 없습니다.
○ 장악주부 민대(閔濧), 직장 최원우(崔元祐) : 《춘추》의 대의로 조야(朝野)가 함께 통분하는 바인데, 변고에 대처함을 당하여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훈련정 이충선(李忠善), 부정 이우철(李友哲)ㆍ허정식(許廷式) 등 : 대론이 이미 나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하니, 오직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습니다.
○ 전적 채승선(蔡承先), 학정 이유일(李惟一) : 유생들의 소장이 이미 들어왔고 공론이 더욱 엄하고 바야흐로 엄중하니, 속히 대의를 거행할 일인데 무슨 이의가 있겠습니까.
○ 전 판관 권령(權聆) : 임금의 큰 원수에 대한 처리는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쾌히 공론을 좇아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 분 병조 좌랑 성이민(成以敏) : 대론이 이미 나왔고 조정의 의론이 이미 정해졌으니 오직 묘당의 옳은 처리에 달려 있습니다.
○ 사과 이숙(李淑)ㆍ송의수(宋義壽), 호군 한찬(韓纘) : 화근을 제거하고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 전 현령 김조(金澡), 전 주부 박항길(朴恒吉) : 신하된 자는 다만 충의의 마음을 떨쳐 역적을 칠 뿐입니다. 어찌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 사예 박수서(朴守緖) : 공론은 아니 따를 수 없고 국시는 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공론을 따라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한 일입니다.
○ 전 현감 노망해(盧望海)ㆍ이양휴(李揚休)ㆍ이덕순(李德淳) : 이번 대론은 실로 공론에서 나왔으니 속히 처리하소서.
○ 전 참군 이문헌(李文藼), 전 감찰 신수일(申粹一)ㆍ김설(金渫)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된 만큼 은혜는 가볍고 의리는 중합니다. 화근을 제거하는 일이 정녕 오늘날에 있습니다.
○ 부사과 원종(元悰)ㆍ양홍(梁泓) : 노(魯) 나라가 문강(文姜)을 죄주지 않았던 까닭에 이어서 애강(哀姜)의 화가 일어났고, 당(唐) 나라가 무씨(武氏)를 베어 죽이지 않았던 까닭에 위씨(韋氏)의 난이 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춘추》에 절(絶)이라 기록하였고 호씨(胡氏)는 장간지(張柬之)를 논죄하였습니다. 풀을 제거할 때 뿌리를 뽑지 않으면 언제나 다시 나게 마련입니다. 묘당이 빨리 대의를 들어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 전 현감 유덕민(柳德民)ㆍ조효원(趙孝元), 상례 이시립(李時立) : 이번 유생들의 소장은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으니, 신같이 미관말직인 음관은 별 의론이 없습니다.
○ 훈련원 습독관 표정보(表廷甫)ㆍ표승리(表承李) : 서궁의 망측한 변은 전고에 듣지 못한 일입니다. 속히 선처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옵소서.
○ 형조 좌랑 이원여(李元輿) : 대의가 있는 바에 조야(朝野)가 다 통분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변을 처리함에 당하여 어찌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 사복첨정 유박(柳舶) : 초야의 선비와 거리의 백성들이 잇달아 소를 올려 여론이 다 합하였으니 다만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습니다.
○ 직강 정대해(鄭大海) :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과 사직을 편안하게 할 계책이 남에게 뒤지지 않으니 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 전적 이창정(李昌廷)ㆍ신식(申恜), 학정 권준(權濬) : 빨리 대계를 결정하여 사직을 부지하라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상의주부 신득일(申得一), 돈녕주부(敦寧主簿) 경선(慶選) : 모든 선비의 소장이 들어왔으니, 묘당에서 처리하실 뿐입니다.
○ 돈녕판관(敦寧判官) 유흥충(柳興忠), 참봉 이몽룡(李夢龍) : 모든 유생들의 소는 종묘 사직을 위한 대론이니, 속히 처리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위안하소서.
○ 예조 정랑 안경(安璥) : 온 나라 사람들의 공론이니, 오직 묘당의 옳은 처리에 달려 있습니다.
○ 전설별좌 심숙(沈淑) : 국론이 이미 나왔으니 전하의 신하된 자가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선공봉사 신순(申楯), 참봉 이유후(李裕後) : 공론이 이미 나왔으니, 오직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상의별제 임광후(任光後) : 서궁을 모후로서 대우할 수 없다는 것은 나라의 정론입니다. 전하의 신하된 자가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종부주부 이응철(李應喆), 직장 남궁격(南宮格) : 종묘 사직이 중대하니, 사사로운 은혜로써 대의를 가릴 수 없습니다.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 군자주부 김영(金韺), 봉사 이준(李竣) : 국론의 계책이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는 만큼 오직 묘당의 선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군자판관 이숙(李潚), 주부 정종길(鄭宗吉), 봉사 유여성(柳汝惺) : 국론이 일제히 나왔는데,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분 병조 좌랑 김우익(金友益)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는데,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제용봉사 조탁(趙鐸), 직장 박찬(朴璨), 참봉 정문회(鄭文晦) : 대론이 이미 나왔는데,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제용정 이시정(李時楨) : 서궁의 일은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이니, 대의를 좇아 선처함은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 조지별제 김수정(金守正) : 이러한 대론을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승문권지 심지청(沈之請) : 계축년 이후로 이미 모후로서 대우할 수 없다는 의리를 알았고, 이제 국론이 이미 나왔으니, 전하의 신하가 된 자로서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선공감역 임석준(任錫浚) : 모후로서 대할 수 없다는 것은 국인의 정론입니다. 전하의 신하된 자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풍저직장(豐儲直長) 최응두(崔應斗), 광흥봉사(廣興奉事) 정문승(鄭文升)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된 만큼 책임이 묘당에 있습니다. 미관말직인 소관이 어찌 감히 의논을 드리겠습니까.
○ 학정 박진(朴瑨)ㆍ오전(吳晪) : 종묘 사직이 더 중할 뿐더러 대론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속히 묘당에 명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 예좌 유약(柳瀹), 승정 유집(柳潗) : 신하로서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지 못할 의리가 있고 임금께서는 사사로운 은혜를 돌봐야 할 사정이 계시니, 오직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형정 나인(羅訒) : 많은 선비들이 여러 번 소장을 올리고 서민들이 모두 호소하니 나라의 공론이라 하겠습니다. 오직 은혜와 의리를 참작하고 경중을 헤아리는 데 달렸습니다.
○ 활인별제 이사성(李士星), 평시직장(平市直長) 이사증(李師曾) :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선비들의 소장에 의하여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 사산감역 유지호(柳之豪) : 사사의 은혜는 가볍고 큰 의리는 중하니, 중한 것을 따르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 통례 양극선(梁克選), 상례 정유번(鄭維藩) : 조정의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미관말직의 소관이 다시 무슨 의론을 드리겠습니까.
○ 종부정 유탁(兪濯) : 대론이 바야흐로 벌어졌는데, 국시가 정해지지 못하였으니, 오직 옛일을 널리 참고하여 잘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북부주부(北部主簿) 이시백(李時白) : 국가의 막중한 대사를 미관말직의 소관이 다시 무슨 의론을 드리겠습니까. 오직 마땅하게 처리하실 뿐입니다.
○ 수문장 송일민(宋逸民) : 서궁이 종묘 사직에 죄를 지었으니 신민들이 극도로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같이 무식한 군인은 이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 상서직장 최응하(崔應夏), 풍저봉사(豐儲奉事) 구해(具海), 상서직장 정연수(鄭兗岫), 사포 별제 김형윤(金亨胤), 광흥봉사(廣興奉事) 김양선(金揚善) : 좋은 도리를 좇아 속히 처리하여 대계를 정하소서.
○ 무겸(武兼) 이인헌(李仁憲) : 임자ㆍ계축ㆍ갑인년 사이에 포도종사관으로서 역적 응서(應犀) 등을 잡아 문초할 때 잠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아 종말을 자세하게 압니다. 그런데 대론이 5년 뒤에야 나오니 너무 늦은 감이 있을 뿐, 다른 의론은 없습니다.
○ 군기주부 윤호(尹昈) : 서궁에서 우리 임금을 모해한 죄상은 귀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들었습니다. 신하된 자로서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대의가 있는 바에야 어찌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 분 병조 정랑 이종언(李宗彦) : 역적을 치는 것은 천하의 대의요, 은혜를 오로지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사정(私情)이니, 어찌 한 사람의 사정으로 천하의 대의를 폐하겠습니까. 오늘날 수의에 당하여 다른 말은 다시 없습니다.
○ 군기부정 정문진(鄭文振) : 변을 처리하는 큰 의리는 이미 소장에 모두 진술되었는데, 어찌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 분 병조 정랑 박표(朴標) : 위로는 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선비ㆍ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의론이 모두 같으니 이것이 곧 국시입니다. 별 의논은 없습니다.
○ 감찰 이영식(李永式)ㆍ박미(朴楣)ㆍ정응성(鄭應星) : 대론이 유생의 소장에서 나왔으니, 오직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선공감역 서탁(徐晫) : 휘호(徽號)를 깎고 조알(朝謁)을 파하고 분사(分司)를 철폐하라는 말 이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예조 정랑 채겸길(蔡謙吉) : 국운이 불행하여 화의 근본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인간의 도리가 어두워서 이의가 방자하게 나옵니다. 《춘추》의 대의가 장차 끊어질 지경이므로 초야의 충신들이 흥분하여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임금께 호소한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아직 논의를 정하지 못하니, 임금의 밥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는 신하로서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기가 부끄럽습니다. 그 죄악을 나열하여 태묘(太廟)에 아뢰고 존호(尊號)를 깎으며 분사(分司)ㆍ공헌(貢獻)ㆍ조알(朝謁)을 철폐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좋은 의견을 따라 처리하여 종묘와 사직을 편안하게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 예조 정랑 최호(崔濩) : 당초부터 서궁에서 안으로는 무고를 만들고 밖으로는 역적들의 모의에 응한 일이 뭇사람들의 초사(招辭)가 모두 부합되니, 그 정상이 다 탄로났습니다. 초야의 선비로 있을 때, 신분에 벗어나서까지 소장을 올려 항의하였는데 하물며 오늘날 조야(朝野)의 말이 모두 같은데, 어찌 논의를 달리하여 종묘 사직을 저버리겠습니까.
○ 사옹정 윤정(尹綎) : 변을 처리하는 도리는 경중을 저울질하여 의리에 합치되도록 하여야 되는 것인데, 결단하여 시행하는 일은 묘당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 사도첨정 조계한(趙繼韓) : 나라의 공통된 의론이므로 다시 의론할 것이 없습니다.
○ 감찰 김종진(金宗振), 풍저주부(豐儲主簿) 김덕망(金德望) : 묘당의 공론을 따라 대의를 밝히소서.
○ 선공감역 오염(吳焰) : 휘호를 낮추고 조알을 파하고 분사를 철폐하라는 말 이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봉상주부 강문익(康文翼) : 한 하늘 아래에서 어찌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이는 누구나 베어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 형조 정랑 홍여일(洪汝一) : 선비들이 소장에 아뢴 것은 국가의 대사이니, 오직 묘당에서 처리하여 종묘와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감찰 김광익(金光翼)ㆍ신욱(申頊)ㆍ유경찬(柳景纘)ㆍ김대하(金大河)ㆍ정민구(鄭敏求)ㆍ강홍정(姜弘定)ㆍ이두남(李斗男)ㆍ조형남(趙亨男)ㆍ이경백(李慶百) : 속히 공론을 좇아 대의를 밝히소서.
○ 훈련중군 원수신(元守身) : 서궁의 변은 천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잘 처리하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 사직 문홍경(文弘慶)ㆍ김정간(金廷幹)ㆍ권극정(權克正)ㆍ김운성(金雲成)ㆍ이정생(李挺生) : 선비들의 소장을 읽어 보니, 대의가 당당합니다. 온 나라 신민들이 어찌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 부호군 황유중(黃裕中)ㆍ황경중(黃敬中)ㆍ허완(許完)ㆍ한항길(韓恒吉) : 공론을 좇아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 여우길(呂祐吉) : 비상한 변이 성대(聖代)에 일어나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오직 옳게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 안숭헌(安崇憲) :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 이외에는 다시 드릴 말이 없으니, 묘당의 모든 경상(卿相)들의 의론에 따르소서.
○ 사맹 이욱(李煜) : 신은 비록 재상 반열에 있으나, 본래 지식이 없으니 어찌 감히 입을 열겠습니까. 묘당에 명하여 속히 처리하시기를 청합니다.
○ 사맹 허상(許詳)ㆍ신연(申瑑)ㆍ원수남(元秀男) : 나라를 위한 공론인데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에서 잘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 분 승지 한회(韓懷) : 이것은 중대한 일이니 오직 조정에서 재량 처리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분 승지 윤경(尹絅), 행사직 성시윤(成時閏) : 오늘날의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오직 조정에서 상량 처리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 부사과 윤의(尹顗) : 임금께 아뢰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대신이 이를 담당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할 일이요, 위태로운 화가 조석에 박두하면 대신들이 당연히 진정시켜야 할 것인데, 어찌 분분하게 수의하여 마치 길가에서 집을 짓는 듯합니까.
○ 행호군 이득원(李得元)ㆍ황치성(黃致誠)ㆍ남빈(南贇) : 존망의 기틀이 중대하니, 오직 묘당에서 잘 처리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행사과 조의(趙誼)ㆍ김윤신(金允信)ㆍ조희보(趙希輔)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니, 쾌히 공론을 좇아 대의를 결정하십시오.
○ 행첨지 이유성(李惟誠), 호군 윤응삼(尹應三)ㆍ오정방(吳定邦)ㆍ고경민(高敬民) : 대론이 이미 나왔는데, 무부(武夫)가 무엇을 의논하겠습니까. 오직 조정에서 처리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행사과 정진철(鄭震哲)ㆍ강홍업(姜弘業) : 공론이 이미 나왔으니, 다시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 사용 김효신(金孝信)ㆍ윤인남(尹仁男) : 종묘 사직에 죄를 지어 신민들이 극도로 분노하였으니,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유경종(柳慶宗) : 모든 유생들의 소가 한결같이 화근을 제거하고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시라고 말하였으니, 대의가 있는 바에는 사사로운 은혜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일이 중대한 만큼 반드시 중국에 알리고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 원유남(元裕男)ㆍ유승서(柳承瑞) : 나라를 위한 공론인데,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 첨지 한총(韓叢)ㆍ유황(柳黋) :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이니, 다시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 이선복(李善復) : 인륜의 큰 변고가 성스러운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유생들의 소가 잇따르고 대론이 이미 나왔으니 오직 옳게 변을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 행사과 유림(柳琳)ㆍ유몽룡(劉夢龍)ㆍ이경호(李景湖)ㆍ박상(朴瑺)ㆍ이눌(李訥)ㆍ김응함(金應緘) : 일국의 막대한 논의가 이미 선비들 소장에서 나왔으니, 무식한 무부(武夫)가 어찌 감히 의논하겠습니까. 오직 조정의 선처에 달렸습니다.
○ 사정 김영남(金穎男)ㆍ유정생(劉挺生)ㆍ전득우(田得雨)ㆍ윤경기(尹景祺)ㆍ이능운(李凌雲)ㆍ홍기남(洪奇男)ㆍ구인경(具仁慶)ㆍ박난영(朴蘭英)ㆍ김원복(金元福)ㆍ이응성(李應星) : 쾌히 공론을 좇아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 사복주부 박수의(朴守誼), 호조 정랑 김적(金適), 사복판관 유희안(柳希安), 사복정 황익중(黃益中), 상의별좌 황식(黃湜), 의빈도사 이국형(李國衡)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고 여론이 모두 합치되었으니, 오직 묘당에서 처리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교관 이성석(李聖錫)ㆍ정응운(鄭應運) :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니, 다시 의론할 것이 없습니다.
○ 사섬주부 이탁(李晫), 직장 한여현(韓汝賢), 내자직장 우대유(禹大有), 중부주부 손종하(孫宗夏), 전생주부 박안국(朴安國), 봉사 신종근(申從謹), 참봉 구준(具濬) : 계책을 결정하여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오직 묘당에 달렸습니다.
○ 선전관 유파(柳坡), 군기주부 심이(沈怡), 장흥주부(長興主簿) 임영(林英) : 대론이 실로 공론에서 나왔으니, 무부(武夫)가 어찌 감히 의론을 드리겠습니까.
○ 사옹직장 박승안(朴承顔) : 모든 소장이 들어왔으니, 오직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26일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을 위리안치할 것을 합계하였는데, 답하기를,
“내가 불행하여 이런 큰 변을 만났다. 귀로 듣고 싶지도 않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매우 걱정되고 답답하다. 이런 때에 어찌 대신을 처벌하여 나의 덕이 없음을 더하랴. 그러나 대신이 논박을 입었으니, 형편상 나와서 일을 볼 수는 없다. 이런 위태한 시기에 정승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체차하라.”
하였다.
○ 생원 진호선(陳好善)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사의 합계를 즉시 윤허하지 않아 간사한 도당들이 다른 마음을 내어 이의가 더욱 성하니 속히 명하여 기자헌을 잡아들여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도록 하는 한편 도당의 수의에 이의를 올린 사람과 협(浹)이 초사(招辭)에서 끌어들인 역적 재상들을 먼저 베어 죽이고 잇달아 항복(恒福)을 죽임으로써, 신하가 되어 임금을 업신여긴 자를 경계하십시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한천정(韓天挺)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자헌(奇自獻)의 머리를 베어 신하가 임금을 저버리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27일 유학 김정량(金廷亮)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사는 늦출 수 없는 것인데 우상 한효순(韓孝純)이 어찌 시종 나오지 않는단 말입니까. 승지를 보내서 효유하여 보고 그래도 만약 부름에 응하지 않거든 자헌(自獻)과 함께 목 베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정지문(鄭之問)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서궁(西宮)의 죄악을 말하자니 괴롭습니다. 안팎으로 결탁하여 흉하고 요망스럽게 저주한 행적은 누구의 입에서도 한 가지 말이므로, 죄상이 뚜렷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의인왕후(懿仁王后)를 압승(壓勝)하려고 마른 뼈를 능에 묻은 것이라든가 고기 조각에 임금의 이름을 써서 금수에게 먹이고 이의를 위하여 복을 빈 일들이 고성(高成)과 응벽(應璧)의 초사(招辭)와 차극룡(車克龍)의 고변(告變)에서 남김없이 탄로되었으니, 이는 일국 신민의 원수일 뿐만이 아닙니다. 전하는 선왕후(先王后)가 길러 낸 아들로서 어찌 차마 살아 있는 서궁을 위하여 돌아가신 의인왕후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전하께서는 스스로 선왕후의 원수를 직접 갚지는 못할망정 어찌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그를 끊어 버리게 하지 않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난을 제거하는 일은 한 시각이 급한데, 정승 자리에 사람이 없어 여태껏 늦어졌습니다. 우상 한효순(韓孝純)이 비록 늙고 병들었다고 하나, 어찌 임금을 매우 위험한 상황 가운데 앉혀 두고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다가 스스로 제 몸을 망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엄한 말로 효유하고 대의로써 책하여 그로 하여금 속히 나와서 판국을 바로잡고 종묘 사직을 편안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28일 생원 선세휘(宣世徽)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론이 바야흐로 벌어진 오늘날을 당하여 이항복은 기롱하는 말로 감히 임금을 업신여기니, 빨리 신문하여 실정을 추궁하고 국시를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 생원 정충립(鄭忠立)과 유학 최성(崔晟)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먼저 조경기(趙景起)ㆍ정온(鄭蘊) 등을 목 베고 다음으로 김세렴(金世濂)은 장인의 사주를 받아 정론을 방해한 죄목으로, 기자헌과 이항복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목으로 각각 죽이소서.”
하였다.
○ 생원 곽유도(郭有道)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빨리 이항복의 머리를 베어 불충한 신하를 징계하고 김세렴을 먼 변방에 위리안치하여 관망하고 회피하는 자들로 하여금 두렵게 하는 한편 충성스럽고 어진 재상을 세워 위태롭고 의혹된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 생원 여후망(呂後望)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역적 변고의 곡절을 예부에 정문(呈文)하려면 먼저 양본실대(讓本失對)한 자들을 베어 죽여 중국으로 하여금 그 곡절을 알게 하고 전후에 역적들과 편당한 자를 함께 죽여 화근을 없애소서.”
하였다.
○ 진사 김현길(金鉉吉)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역적을 옹호하는 도당을 빨리 베어 죽여 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하였다.
○ 유학 이강(李杠)ㆍ이구(李榘)ㆍ윤지임(尹之任)ㆍ한보길(韓輔吉), 생원 지성해(池成海), 진사 김이일(金以一)ㆍ정희립(鄭希立), 유학 박률(朴嵂)ㆍ김탁(金鐸)ㆍ박준영(朴俊英)ㆍ김정계(金廷啓)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뜻은 위의 것과 대략 같다.


12월


1일 유학 이위(李瑋)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자헌ㆍ이항복 등의 서궁을 옹호한 죄를 다스려 국법으로 처단하여 화근을 없애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삼사가 아뢰기를,
“기자헌(奇自獻)을 위리안치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이 말에 대해서는 듣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데 여러 날을 두고 번거롭게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이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 오늘날 일을 보면, 끝내 아무 말도 없이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담당하지 않고서 좋은 이름이나 도적질하려는 자가 어찌 자헌(自獻)뿐이겠는가. 대신을 관직을 삭탈하여 시골로 내쫓는 것은 가벼운 처벌이 아니다. 위리안치는 너무나 무거우니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였다.
유학 양시익(楊時益)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유희발(柳希發)이 김세렴(金世濂)을 사주한 죄를 속히 처벌하소서.”
하였다.
○ 장령 한영(韓詠), 정언 이강(李茳) 등이 아뢰기를,
“부제학 이호신(李好信)이 대론을 회피하여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으니, 관직을 삭탈하여 성문 밖으로 내쫓아 버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파직만 시켜라.”
하였다.
○ 신방진사 민종(閔悰)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분사를 파하고 조알을 철폐하고 존호를 깎고 공헌(貢獻)을 끊고, 세렴(世濂)ㆍ자헌(自獻)ㆍ항복(恒福) 등을 골고루 죄주며, 또 유희발(柳希發)이 남을 사주하여 일을 방해한 죄, 박자응(朴自凝)이 병을 칭탁하여 대론을 회피한 죄, 지평 김호(金昈)와 정언 이강(李茳)이 대간이 되어 대론을 주창하지 않고 먼저 서궁에 가서 숙배한 죄 등을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2일 신방진사 윤유겸(尹惟謙)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빨리 삼사의 합계를 따라 자헌(自獻)을 베어 죽임으로써 그가 이의를 선동, 대관의 주론(主論)을 방해하는 폐단을 막고, 또 유충립(柳忠立)이 당하백관(堂下百官)을 거느리고 대론을 청하지 않은 죄와, 원수신(元守身)이 장졸들이 회봉하는 것을 억누른 죄를 다스려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3일 유학 서의중(徐義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빨리 기자헌을 죽이고 세렴(世濂)을 사주한 유희발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군기 부정 정문진(鄭文振)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먼저 자헌(自獻)을 베어 죽이고 다음에 역적을 옹호한 뭇 간신들의 죄를 다스리고 또 서궁의 휘호ㆍ시위ㆍ봉진 등을 철폐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황정필(黃廷弼)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춘추》의 대의로써 역적을 옹호하는 무리들, 기자헌(奇自獻)ㆍ이항복(李恒福)ㆍ한효순(韓孝純)ㆍ김세렴(金世濂)ㆍ박홍구(朴弘耈)ㆍ민형남(閔馨男)ㆍ정홍익(鄭弘翼) 등을 처단하여 속히 삼사의 청을 좇아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박증(朴拯)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수의 할 때 다른 의논을 올린 자들의 목을 베어 국시를 결정하고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무림군(茂林君) 이선윤(李善胤)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빨리 시골에 있는 어진 정승을 불러들여 국시를 결정하고 쾌히 공론을 좇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4일 유학 윤노(尹魯)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의를 올리는 간사한 무리들을 차례로 처단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삼사가 기자헌(奇自獻)을 위리안치시킬것을 아뢰었는데, 첫번 계에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아뢰니, 답하기를,
“부처(付處)하라.”
하였고, 세 번째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부처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남부방(南部坊) 백성 신인(辛仁) 등 1천 3백 32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궐내에 요망스러운 짓을 저질러 재앙이 임금의 몸에 가깝게 하고 흉악한 저주를 행한 죄상이 모든 나인들의 초사(招辭)에서 낭자하였고 마른 뼈를 선릉(先陵)에 묻어 선후(先后)를 압승하려 한 죄악 또한 반드시 복수해야 할 임금의 원수입니다.
신들은 비록 천한 무리이지만 가만히 앉아 성패만 보고 있을 수 없어 감히 뭇사람의 뜻으로써 호소합니다. 빨리 대신을 불러 모든 신료의 중론을 그들에게 보이고, 대계를 결정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고 민생을 이루어 주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동부방(東部坊) 백성 이봉(李鳳) 등 3백 37인이 상소하였는데, 남부방 백성들의 상소와 대략 같다.
○ 북부방(北部坊) 백성 허평(許平) 등 1백 42인이 상소하였는데, 남부방 백성들의 상소와 대략 같다.
○ 서부방(西部坊) 백성 김응학(金應鶴) 등 49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의 살고 있는 곳이 서궁에 매우 가까우므로 만일 화변이 일어나게 된다면 남보다 먼저 어육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녕 바라건대, 의심하지 마시고 쾌히 공론을 좇아 속히 큰 판국을 정해주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중부방(中部坊) 백성 김충(金忠) 등 64인이 상소하였는데, 남부방 백성들의 상소와 대략 같다.
○ 역관 김경생(金慶生) 등 2백 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불행하여 화근이 얽혀 멸망될 형세가 이미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신들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높은 품계로 천한 몸을 빛나게 하였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어찌 사대부에 뒤지겠습니까. 신들의 충심을 통찰하여 빨리 묘당으로 하여금 잘 처리토록 하여 국난을 제거하고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노직(老職) 가선(嘉善) 이종수(李宗壽) 등 70인과 시민(市民) 박억진(朴億辰) 등 1백 80인이 상소하였는데, 역관들의 상소와 대략 같다.
○ 기총 최춘기(崔春起) 등 1천 56인이 상소하였는데, 역관들의 상소와 대략 같다.
○ 생원 여후망(呂後望), 진사 오운(吳霣), 유학 정사길(鄭士吉)ㆍ박우(朴瑀)ㆍ강식(康軾) 등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빨리 상방검(尙方劍)을 충의로운 한 사람에게 내려 전후로 역적을 옹호한 자들의 목을 베임으로써 그 나머지를 경계시키는 한편 중국 예부에 자문을 올릴 때, 양본실대(讓本失對)한 자들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상국으로 하여금 그 곡절을 알게 하신다면, 종묘 사직의 다행이요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 부정 정문진(鄭文振)이 상소하였는데, 지난번의 상소와 뜻이 대략 같다.
○ 생원 곽유도(郭有道)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항복의 목을 베어 달고 김세렴을 위리안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생원 양시익(楊時益)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유희발(柳希發)의 김세렴(金世濂)을 사주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최성(崔晟)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흉악한 도당 조경기(趙慶起) 등을 먼저 베어 죽이고, 다음 세렴(世濂)과 자헌(自獻) 등을 죽임으로써 공론을 확장하고 화근을 제거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이위(李偉)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자헌의 목을 베어 희분(希奮)이 악당들과 편당했다는 비방을 불식함으로써 희분의 집을 보전하고, 또 이항복을 베어 화의 괴수를 제거하는 한편 빨리 현명한 정승을 임명하여 대국을 안정시키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생원 신서정(申瑞廷)ㆍ이여성(李汝惺)ㆍ한립(韓岦)ㆍ허수(許脩), 진사 이취인(李就仁)ㆍ오익황(吳益熀), 유학 이종영(李宗英)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덕망(德望)과 재기(才器)가 오늘의 변의 처리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조정에 앉혀서 국시를 결정하고 화근을 근절시키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박증(朴拯)ㆍ김영해(金瀛海)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자헌(自獻) 등, 이의를 주장하는 무리를 베어 죽여서 빨리 국가 대계를 정하고 화근을 근절시키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생원 선세휘(宣世徽)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서궁은 국가에 있어서 마치 싹에 피가 있고, 곡식에 가라지가 있는 것과 같아 위태로운 화가 조석에 박두하였습니다. 충성스럽고 의리있는 선비들이 소를 여러 번 올려서, 천지에 통하는 죄를 대략 임금께 알리도록 하였지만, 그 말이 소루한 실수를 면치 못하였고 관학 유생들이 열 가지 죄로 조목조목 진술하였으나 서궁의 오랜 죄악이 어찌 한두 가지로 헤아려지겠습니까. 선왕이 편찮기 전부터 오늘날까지 성상을 보루로 삼고 임금의 자리에 욕심을 내어, 아침에는 저주하고 저녁에는 역적을 도모하였으니, 모자의 명분을 칭탁하여 집안에서 화를 빚어 내고 대비라는 칭호를 빌려 흉악한 일을 한 것입니다. 기회를 타고 틈을 엿보아 귀역(鬼蜮) 노릇을 한 죄상은 남산의 대나무를 다 베어 죄를 기록하더라도 모두 기록할 수 없고 동해의 물을 끌어대더라도 다 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열 가지 죄목으로도 귀신과 사람들의 분함을 풀 수 없고 간사한 무리들의 의혹을 깰 수 없는 것입니다. 기자헌은 이의를 선창하였는데도 아직 목을 보전하고 있고 이항복은 자헌의 말을 본받아 서술하였는데도 아직 형벌을 받지 않았으니, 먼저 항복 등의 죄를 다스려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진사 윤유겸(尹唯謙), 유학 서선(徐兟)ㆍ김서룡(金瑞龍)ㆍ이개(李槩)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합사의 역적을 치라는 의론을 쾌히 좇아 속히 자헌(自獻)을 베임으로써 이의에 동조하고 간관을 방해하는 폐단을 막으며, 이어서 유충립(柳忠立)ㆍ원수신(元守身) 등의 정론을 막는 죄를 다스려 주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흉한 계책을 품었으면서 좋은 이름만 훔치며 역적에게 편당하는 자를 차례로 제거하여 다시는 싹이 돋지 못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진사 민종(閔悰)이 상소하기를,
“서궁은 곧 신하의 원수입니다. 전하의 신하된 자로서는 목욕재계하고 역적을 칠 것을 청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엄성(嚴惺)은 정론하는 선비를 힘써 배척하고, 간사한 이의를 주장하는 자들을 불러들여 임금을 협박하고 서궁을 옹호합니다. 때문에 영경(永慶)의 여당들은 사사로운 원한을 전하에게 갚으려 하는 자입니다. 호민(好閔) 등은 사신으로 가서 대답을 실수하여 17년 동안 세자로 계신 전하를 조사 대질하는 모욕을 당하시게 하였습니다. 양본(讓本)이란 말을 함부로 천조에 말하였고, 전은(全恩)이란 말이 마침내 여당(餘黨)에서 일어났으며 좋은 이름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허물은 임금께 돌렸으니, 그 죄상을 어찌 헤아려 말하겠습니까. 한보길(韓輔吉)이 이 말을 먼저 내었는데, 삼사는 기미를 보고 피할 것만 생각하여 번갈아 사직하였습니다. 이조에서 다시 삼사를 천거할 때 좌랑 황덕부(黃德符)가 김세렴(金世濂)은 타인과 다르다 하고 붓을 잡아 물망에 올렸는데 유희발(柳希發)이 소리질러 꾸짖고 이내 그 사위인 세렴을 사주하여 회피하게 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도리어 김세렴을 천거한 사람을 공격하였으니, 가까운 신하로서 오히려 나쁜 마음을 품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망령된 사람이니, 염치없다는 말로야 어찌 다 책망하겠습니까. 박자응(朴自凝)은 옥당의 직책에 있으면서 병을 칭탁하고 휴가를 청하였는데, 정원에서 오히려 제때에 미치지 못할까 할 정도로 속히 봉입하였습니다. 자헌(自獻)은 세렴(世濂)을 본땄고, 항복(恒福)은 자헌을 본받았으니, 세 사람은 한덩어리입니다. 죄는 같은데 벌을 달리하니 형벌의 잘못이 심합니다. 김호(金昈)와 이강(李茳) 등은 자신이 대간이면서 공론을 주창하지 아니하고 남보다 먼저 원수의 뜰에 무릎을 꿇었으니 어찌 죄가 없다 하겠습니까.
정부가 의론을 모을 때 정홍익(鄭弘翼)과 민형남(閔馨男) 같은 무리는 저들의 심장을 두어 줄 되는 글에 다 드러내었으니, 은근히 서궁을 추대하려는 뜻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역적을 옹호하는 무리와 엿보아 피하는 무리들을 먼저 처벌하는 한편 두문불출하는 대신을 빨리 불러들이고 산 속에 큰 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자문하여, 종묘 사직의 계책을 정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이광국(李光國)이 상소하기를,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무리를 빨리 처단하여 국시를 정하고 현명한 정승을 가려 뽑음으로써 위태롭고 의혹된 인심을 진정시키며, 《춘추》의 의리를 본받아 종묘 사직의 계책을 중히 하고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 하신 일을 행함으로써 신인(神人)의 분한 마음을 통쾌하게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동생 국헌(國獻)이 지난번 제남(悌男)의 죄를 성토하고 역적 이의를 제거할 때와 이번 대론에 있어서 모두 남보다 먼저 의로운 소를 올리니, 오늘날에 이르도록 사람들은 모두 함께 분개하게 되고, 의로운 공론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는 모두 신의 동생 국헌이 의리에 앞장서서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이미 충성을 바쳤는데 신인들 어찌 감히 미천한 몸을 아껴서 위태하고 요란한 오늘날에 의로운 마음을 떨치지 않겠습니까. 매우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이국헌(李國獻)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빨리 화근을 근절시키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유학 서의중(徐義中)의 상소는 대개 지난번의 상소와 뜻이 대략 같다.
○ 유학 송영서(宋永緖)가 상소하기를,
“빨리 자헌(自獻)을 베어 죽이고 다른 정승을 뽑아 시국을 안정시키고, 또 이경전(李慶全)의 간사하게 눈치를 살피는 죄와 유몽인(柳夢寅)의 전후로 이랬다저랬다 한 죄를 다스리소서.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감삭폄손(減削貶損)하는 것이 화의 근본을 제거하는 제일의 계책이라 말하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대비라는 명칭만이 없어지고 그 바탕은 그대로 있다면, 간악한 무리가 그 명칭이 없다고 하여 그를 받들기를 어렵게 여기겠습니까. 이것은 모든 신하들이 후세의 의론을 피하기 위해서 전은(全恩)을 주장하나 신은 삼가 위태롭게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소견이나 실상은 간곡한 충심에서 나온 것이니,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말까지 버리지 않으신다면 죽더라도 또한 영광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생원 이홍순(李弘詢)이 상소하기를,
“빨리 자헌(自獻)을 베어 임금을 위협하는 죄를 다스리고 현명한 정승을 선택하여 시국을 안정시키며, 또 사리에 밝은 중신(重臣) 한 사람을 잘 뽑아 백관들의 정문(呈文)을 가지고 제경(帝京)에 가서 천자의 재가를 얻어 시행하여 영원히 화근을 끊어 버리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선전관 백대진(白大璡) 등 18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신을 빨리 나오도록 효유한 다음 출사하여 묘당에서 의논을 모아 공론을 따르되 인정과 법을 참작하고 사사로운 은혜와 대의를 살펴서, 변을 처리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 국시를 결정하고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5일 전의감정 유경방(劉景邦) 등 41인이 상소하였는데, 전날 역관들의 상소와 뜻이 대략 같다.
○ 찬집청 서리 3인ㆍ승문원 서리(承文院書吏) 1인ㆍ승정원 서리 24인ㆍ실록청 서리 2인ㆍ홍문관 서리 15인ㆍ시강원 서리 12인ㆍ춘추관 서리 2인ㆍ예문관 서리 1인ㆍ보루청 서리 6인ㆍ사옹원 서원 5인ㆍ도총부 서리 1인ㆍ사복시 서리 1인ㆍ익위사 서리 1인 등이 상소하기를,
“위로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군인 서민까지 의리를 개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화근을 제거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들은 아전의 미천한 무리이지만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야 지위의 높고 낮음에 다름이 있겠습니까. 빨리 묘당에 명하여 모든 선비들이 소에서 말한 대로 거행하여 대의를 밝히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훈련도감 서자지(訓鍊都監書子的) 52인이 상소하였는데, 기총(旗總)들의 상소와 같다.
○ 유학 윤노(尹魯)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경기(慶起)ㆍ현문(顯門)ㆍ성(惺)ㆍ온(蘊) 등을 베어 죽이고 다음에 자헌(自獻)ㆍ항복(恒福)ㆍ홍익(弘翼) 등을 베어 죽임으로써 대론을 붙들어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진사 곽영(郭瓔)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빨리 뭇사람의 의론을 따라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관학유생 정기(鄭淇)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자헌ㆍ이항복ㆍ정홍익(鄭弘翼) 등을 베어 죽임으로써 신하로서 불충한 자의 경계를 삼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나의 뜻은 이미 다 효유되었고, 기자헌의 처벌도 결정되었으니, 다시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6일 율학교수 황언수(黃彦秀) 등 10인이 상소하였는데, 역관들의 상소와 대략 같다.
○ 관상감정 김덕신(金德信) 등 34인이 상소하였는데, 위와 같다.
○ 내수사 별좌 한덕량(韓德良) 등 10인이 상소하였는데, 위와 같다.
○ 산학교수 강인경(康仁慶) 등 39인이 상소하였는데, 위와 같다.
○ 우림위 전득춘(田得春) 등 53인이 상소하였는데, 위와 같다.
○ 훈련도감 대장 이시언(李時言), 중군 원수신(元守身), 천총 박형준(朴亨浚) 등이 파총과 초관 등을 거느리고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오늘날 대의가 없어지지 않아 공론이 격렬하게 일어나니, 초야의 항소와 묘당의 헌의로부터 여염(閭閻)ㆍ시정(市井)의 늙은이ㆍ군인ㆍ서민 등에 이르기까지 분해서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하는 말이, ‘서궁의 변은 천고에 없었던 일이다. 빨리 화근을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다.’합니다. 국론이 자자하고 국법이 지엄하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묘당에 명하여 시국을 안정시켜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양사의 서리 37인이 상소하였는데, 찬집청 서리의 상소와 같다.
7일 관학 유생 정기(鄭淇) 등이 상소하기를,
“기자헌ㆍ이항복ㆍ정홍익(鄭弘翼) 등 3흉을 속히 베어 죽이고 또 삼사를 다스려 항복과 홍익의 죄를 논하지 않은 죄를 묻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8일 혜민서 주부 조여로(趙汝櫓) 등 27인이 상소하였는데, 역관들의 상소와 같다.
○ 겸사복 양응림(梁應霖) 등 60인이 상소하였는데, 위와 같다.
○ 사과 황균(黃均), 무학 송복립(宋復立)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사의 청을 따라 화근을 근절시키기를 청합니다.”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부사과 송영록(宋榮祿)이 상소하기를,
“서궁이 자기의 소생을 임금으로 세우기 위해 성상을 모해한 온갖 사실이 다 폭로되었습니다. 종묘 사직에 죄를 얻고 스스로 나라 사람들에게 절연되었으니, 신하로서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지 못할 의리가 있습니다. 폐하든 몰아내든 어려울 바가 없지만 특히 전하의 마음을 상할까 하여 법으로 토죄하지 않은 것이고 오늘날의 의론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사정(私情)은 끊기 어려우나 대의는 지극히 엄합니다. 모자 사이를 유지하는 것은 전하의 사정이요 의리로써 끊는 것은 신하의 대의인데, 경중을 저울질하는 데에는 큰 법이 있으니 절충하여 잘 처리할 것이 양단간에 있을 뿐입니다. 제남(悌男)의 집이 곧 서궁의 옛집이니, 먼저 제남의 아내를 다른 곳으로 보낸 다음 우선 서궁을 그곳으로 옮겨 놓고 후일을 기다린다면 《춘추》의 주(邾) 땅에 물러났다.는 뜻에 근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화를 방지하는 도리에도 편리할 듯한데, 제신들의 의논이 여기에 미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일찍이 훈국낭청으로 사신을 따라가 미처 돌아오지 못한 까닭에 일제히 있었던 백관들의 헌의에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이제 따로 소를 올려 품은 생각을 아룁니다.”
하였다.
9일 내의원 정 박홍헌(朴弘憲) 등 8인이 상소하였는데 역관들의 상소와 같다.
○ 의정부ㆍ육조ㆍ각사(各司)의 서리(書吏) 등 1백 70인이 상소하였는데, 찬수청 서리들의 상소와 같다.
○ 훈련도감 기패관 김계생(金繼生) 등 24인이 상소하였는데, 역관들의 상소와 같다.
○ 사자관(寫字官) 이경량(李景良) 등 19인이 상소하였는데, 위의 것과 같다.
○ 대사헌 이영, 대사간 윤인(尹訒), 집의 임건(林健), 사간 남이준(南以俊), 장령 강수(姜燧)ㆍ한영(韓詠), 지평 정재중(鄭再重)ㆍ김호(金昈), 정언 이강(李茳)ㆍ박종주(朴宗冑) 등이 아뢰기를,
“현재 국론이 한창 일어나는데, 대사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마다 똑같이 분통을 터뜨리지만 건의는 혹 다르니, 인심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종묘 사직은 불안합니다.
신 등은 대간의 직책에 있으면서 눈으로 시국의 위험함을 보고도 정성은 위에 이르지 못하고 말은 미덥지 못합니다. 여러 날을 지체하여 힘이 지쳐 혈성(血誠)으로 담당하고자 하나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신들이 한숨 쉬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헌(自獻)의 죄는 제가 스스로 지은 것이니 그 죄상대로 처벌함이 당초에는 그렇게 심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전하께서 사사로움에 편중되어 굳이 거절만 하시니, 역적에게 편당하는 무리를 무엇으로 징계하며 바른 의론을 어떻게 진작하겠습니까. 정론이 떨쳐 일어나지 않으면 간사한 무리들이 겁낼 바가 없을 것이니, 인심을 어찌 안정시키며 종묘 사직을 어찌 편안하게 하겠습니까. 정론을 크게 일으키고 화란을 진정시킬 기틀이 오직 자헌(自獻)의 죄를 다스리는 데 달렸습니다. 위리안치도 감형인데 어찌 부처만으로 그쳐서야 되겠습니까. 어렵게 여기시지 마시고 속히 허락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죄를 결정하였는데, 어찌 번거롭게 거론하는가.”
하였다.
○ 대사헌 이영이 재차 아뢰기를,
“종묘 사직은 잊을 수 없는 것인데 이를 잊은 자는 자헌(自獻)이요, 임금을 저버려서는 안 되는데 저버린 자는 자헌입니다. 종묘 사직을 잊고 임금을 저버리는 것이 어떠한 죄악이길래, 자헌은 두 가지를 다 겸하였습니까. 신들이 주장한 위리안치도 또한 감형인데, 비답에 이미 죄를 결정하였다고 전교하시니 대의가 밝을 날이 없겠고, 국론이 정해질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장차 비상한 변괴와 예측할 수 없는 환란이 일어나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고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사흘 동안이나 글을 올려 호소하기를 마지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속히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부처(付處)나 안치(安置)가 다 같은 귀양이므로, 더 논할 필요가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이영 등이 세 번째 아뢰기를,
“자헌(自獻)이 한 번 선창한 뒤로 그를 두둔하는 의론이 잇달아 일어나 임금의 형세는 날로 위태로워지고 국시는 정해지지 않아서 닥쳐올 환란이 차마 말 못 할 지경에까지 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헌(自獻)의 죄가 좀 용서한다고 부처에 그친단 말입니까. 속히 윤허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이 부처까지 되었는데, 어찌 왕법이 행해지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위리안치는 중하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 홍문 교리 이잠(李埁)ㆍ정준(鄭遵), 수찬 신광업(申光業)ㆍ남명우(南溟羽), 부수찬 윤성임(尹聖任)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간이 아뢴 말과 같았다.
10일 합계하기를,
“신들이 이항복과 정홍익(鄭弘翼) 등의 수의(收議)한 것을 보니, 그들은 우순(虞舜)이 변고에 대처한 도리를 인용하여 말하였습니다. 순 임금은 인륜에 지극하신 성인이니, 법받아야 하겠지마는 오늘의 일에 견주어 본다면 서로의 상황이 매우 같지 않습니다. 순 임금은 그 당시에는 필부이므로 몹쓸 어머니에게 해를 입더라도 화가 한 몸에만 그치게 되니, 순 임금이 공손하게 자식된 직분을 닦는 것은 순 임금다운 일이지마는, 제왕은 종묘 사직과 신민들이 그에 의탁되어 있으므로 불행히 변을 당하게 되면 종묘 사직과 신민들에게까지 화가 미치니, 제왕의 변을 처리하는 도리가 필부와 같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령 순 임금이 당시에 이미 임금 자리에 있는데 몹쓸 어머니가 그와 같이 해치려고 했다면 순 임금은 비록 어머니로 대우했을 터이지마는, 순 임금의 신하된 자가 어찌 가만히 앉아 순 임금이 화를 입는 것을 보기만 하고 그 어머니의 죄를 밝히지 않았겠습니까.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이 작은 죄이지마는, 고요(皐陶)가 고수(瞽瞍)를 체포하더라도 순 임금은 이를 금하지 못하고, 다만 등에 업고 도망칠 계획을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면, 군신 사이와 모자 사이에서 하나는 의(義)로써 했고, 다른 하나는 은(恩)으로써 한 것이니 처리하는 도리가 현격하게 다르지 않습니까. 무고하고 저주한 변괴가 드러났고 밖으로 역모에 내통한 죄상이 탄로되었습니다. 만약 그 흉측한 꾀가 당시에 실행되었던들 성상께서 지금 어떠한 지경에 이르렀겠으며 종묘 사직과 신민의 화 또한 어떠하였겠습니까. 성상에게 등에 업고 도망할 뜻이 있다고 한다면, 유독 신자만이 고요(皐陶)의 법을 집행하고자 한 것을 말란 말입니까.
이번 묘당의 수의는 신하가 처할 바의 도리를 판단하는 것을 서로 상량하여 절충한 의논을 듣자는 것뿐이고, 전하께서는 조금도 그 사이에 관계가 없는 일인데, 항복과 홍익은 묘당에서 묻는 것은 대답하지 않고 위협과 억지의 말로 성상께 의논을 드린 자인 양 하니 그 뜻을 실로 추측할 수 없습니다. 의리가 어두워지고 정론이 막히던 때에 매우 다행히도 초야의 선비들이 소장을 올리고 서민들까지 격분하니, 이때야말로 신하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대의를 밝히고 대사를 결정하여 종묘와 사직을 편안하게 할 때입니다. 그러나 항복과 홍익은 뜻을 잃어 임금을 원망하는 자로서, 바닥을 비비면서 기회를 틈타다가 감히 역적과 한통속이 될 꾀를 내어 장황한 비유로 관계도 없는 전하까지 언급하여 대역(大逆)의 이름에 빠뜨리려 하니, 항복은 역적을 두둔하여 복을 구하려는 계책은 이루었지마는, 원수를 잊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자헌(自獻)보다 더 심합니다. 또 항복(恒福)의 의론 가운데 이른바, 급(伋)의 아내는 백(白)의 어머니라는 말은 더욱 통분합니다. 어찌 신하가 임금께 고하는 말이 이렇듯 이치에 어그러지고 방자할 수 있습니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그 일에 죽는다고 한 옛사람의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 신 등이 죽을지언정 차마 듣지 못할 일입니다. 김덕함(金德諴)은 항복ㆍ홍익과 똑같이 말하였습니다. 그 마음이 같다면 그 죄 또한 달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항복ㆍ정홍익ㆍ김덕함 등을 무인절도(無人絶島)에 위리안치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항복은 관직만 삭탈하고 정홍익ㆍ김덕함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합사(合司)가 재차 아뢰기를,
“이항복이 역적과 한통속이 되어 그들을 두둔한 죄상을 신들이 대략 말하였습니다. 그가 수의한 말을 관찰하면 장황하게 협박 견제하여 거만하고 악하며, 패만한 기색이 사연 가운데 넘쳐나와, 신들의 붓으로는 만분의 일도 형용하지 못하겠으니, 기가 막히고 울분만 할 뿐입니다. 홍익과 덕함은 항복의 졸병으로도 이미 그 죄를 입었는데, 항복을 관직삭탈에만 그쳐서 되겠습니까. 원수를 잊고 임금을 저버린 것이 얼마만한 죄악이길래, 대신이라 하여 형을 감합니까. 하물며 임금을 욕보인 구절은 홍익ㆍ덕함에게는 없었는데, 성상께서 항복의 죄를 홍익ㆍ덕함보다 도리어 가볍게 하신다면, 홍익ㆍ덕함이 반드시 불복할 것입니다. 속히 위리안치를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위리안치하는 것은 너무 과하다.”
하였다.
○ 옥당이 차자하였는데, 그 대략에,
“속히 명하여 이항복을 위리안치하소서.” 사연이 대간의 계사와 대략 같다.
하였는데, 비답은 위와 같았다.
○ 합사(合司)가 세 번째 아뢰기를,
“속히 이항복을 위리안치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으니, 번거롭게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 화원(畫員) 김신호(金信豪) 등 15인이 상소하였는데, 역관들의 상소와 같았다.
○ 내금위 박호(朴浩) 등 105인이 상소하였는데, 역관들의 상소와 같았다.
○ 강릉 참봉(康陵參奉) 유증리(柳增),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정준(鄭儁), 헌릉 참봉(獻陵參奉) 유신남(柳信男), 영릉 참봉(英陵參奉) 이협(李莢), 현릉 참봉(顯陵參奉) 이운(李蕓)ㆍ최진영(崔震榮), 광릉 참봉(光陵參奉) 이덕보(李德溥), 창릉 참봉(昌陵參奉) 박동민(朴東民), 태릉 참봉(泰陵參奉) 이유형(李唯馨)ㆍ양기(梁機), 경릉 참봉(敬陵參奉) 민결(閔潔)ㆍ김개(金凱), 선릉 참봉(宣陵參奉) 정창언(鄭昌言)ㆍ박대건(朴大健), 순릉 참봉(順陵參奉) 유철견(柳鐵堅), 정릉 참봉(靖陵參奉) 이태기(李泰基)ㆍ안홍진(安弘進), 희릉 참봉(禧陵參奉) 박승훈(朴承勳)ㆍ박니(朴柅), 효릉 참봉(孝陵參奉) 기징헌(奇徵獻)ㆍ한권(韓權), 목릉 참봉(穆陵參奉) 변일(邊逸)ㆍ심대림(沈大臨), 유릉 참봉(裕陵參奉) 유위(柳偉)ㆍ정재윤(鄭再胤)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속히 삼사의 청을 좇아 정승을 새로 정하여 여론을 채택하고 화근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11일 유학 박몽준(朴夢俊)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묘당에 명하여 변을 처리하는 도리를 잘 해서 화의 조짐을 막으소서.”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납은가선(納銀嘉善) 최학(崔鶴), 훈련정 전응진(全應珍), 훈도 김덕순(金德淳)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빨리 모든 선비들의 공론을 따라 삼사의 청을 허락하여, 큰 계책이 중도에 정지되고 국사가 날로 그릇되지 말게 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이국광(李國光)ㆍ이국헌(李國獻)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은 전에 세 번이나 소를 올려 역적을 성토하는 의론을 극진히 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제 네 번째로 피맺힌 소장을 올리며 사직을 위하여 죽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흉악한 역적 무리를 다 베어 죽여 인심을 바로잡고 속히 현명한 정승을 다시 세워 국시를 결정하여 《춘추》의 의리를 법받고 태종대왕이 한 일을 행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종묘 사직에 위급한 화가 조석에 닥쳤으니 묘당 대신들은 의당 백관을 거느리고 급히 정청(庭請)하기를, 마치 끓는 것을 만지듯이 하여 단 하루라도 지체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 좌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또 어찌 굳이 백관에게 수의(收議)하여 역적에게 편드는 것을 모집한단 말입니까.
하물며 좌상은 나이가 많고 기력이 쇠하여 이 엄동설한에 올라올 형편이 못 되니, 결코 좌상이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우상이 출사한 뒤에도 정청을 아니하고 이럭저럭 날만 넘기는데도 삼사에 있는 자가 잠잠한 채 한 사람도 시비를 말하지 않으니 조정의 신하들이 곧 유생만 못하단 말입니까. 삼사가 자기 직책을 수행 못 하는 죄 또한 처벌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12일 이문학관 이장배(李長培)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여론을 조사하여 종묘 사직의 큰 계책을 빨리 결정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합계하기를,
“기자헌과 이항복을 위리안치하소서.”
하였는데, 하루에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6일 합계하기를,
“기자헌과 이항복을 위리안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 생원 신광업(辛光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빨리 화근을 제거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17일 금부에서 정홍익(鄭弘翼)은 길주(吉州)에, 김덕함(金德諴)은 명천에 각각 정배하였음을 아뢰었다.
○ 좌우락천군(左右洛川君) 김개(金闓)가 상소하기를,
“어제 정사에서, 신이 분총관(分總管)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수의할 때 신은 이미 임금의 원수에게 북면하여 섬길 수 없다는 뜻을 아뢰었습니다. 만일 군사를 맡아 서궁을 엄중하게 지키라 한다면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지마는, 총관의 칭호로 서궁을 시위하여 군신의 예와 같게 하라 한다면 신을 비록 머리를 베고 가슴을 도려 낸다 하더라도 의리상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서궁이 선후(先后)를 압승(壓勝)하고 전하를 모해하여 자기의 출생을 세우고 전하를 위태롭게 한 죄상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인데, 임금의 녹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는 자들은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지 못할 의리를 알지 못합니다. 다행하게도 초야의 선비들이 격분하여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피맺힌 소를 잇달아 올린 덕으로 대의가 이미 발단하였으니 결말이 멀지 않습니다. 병조에서 결말 전에 분조를 아뢰어 파할 수는 없지마는 이미 비어 있는 벼슬자리를 새로 채울 것은 없는 일인데 미처 못할까 겁을 내어 의망하기에 급급하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을 파직하여 분총관직을 면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18일 금부에서 기자헌을 정평(定平)에, 이항복을 용강(龍岡)에 각각 정배하였다고 아뢰었다.
○ 지평 정재중(鄭再重)과 정언 이강(李茳)이 아뢰기를,
“기자헌ㆍ이항복ㆍ정홍익(鄭弘翼)ㆍ김덕함(金德諴) 등은 다 임금을 저버리고 종묘 사직을 잊어버린 죄인입니다. 먼 곳으로 옮겨 정배함으로써 엄중히 처벌하시기를 청합니다. 또 금부에서 사정(私情)을 따라 제 마음대로 정배하였으니, 금부의 당상과 낭청을 파직시키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고, 함께 추고하라.”
하였다.
○ 금부에서 기자헌을 삭주(朔州), 이항복을 창성(昌城)에 각각 고쳐 정배하였다고 아뢰었다.
19일 녹사 김윤옥(金潤屋)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서 국가의 큰 계책을 결정하여 화근을 제거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악사 임항(林恒) 등 50인이 상소하였는데, 위의 것과 같다.
○ 충의위 이의명(李義明) 등 30인이 상소하였는데, 위의 것과 같다.
○ 별무사 황몽륜(黃蒙綸) 등 20인이 상소하였는데, 위의 것과 같다.
○ 생원 이책(李)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자헌과 이항복을 속히 죽이고 바로 시국을 구제할 정승을 뽑아 대론이 다시 떨치게 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생원 박홍익(朴弘益), 진사 최광필(崔光弼), 유학 김상건(金尙健)ㆍ송석명(宋錫命)ㆍ원급(元伋)ㆍ이극성(李克誠)ㆍ최광달(崔光達)ㆍ이광계(李光啓)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자헌과 이항복 두 흉한을 속히 베어 죽이고 이어서 대신ㆍ육경ㆍ삼사를 시켜 국가의 큰 계책을 결정함으로써 화근을 제거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김여철(金汝哲)이 상소하였는데, 말뜻이 위와 같았다.
○ 유학 이국광(李國光)ㆍ이국헌(李國獻)ㆍ박충윤(朴忠胤)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과 임금이 무고에 빠짐을 차마 보지 못하여 병진년 팔월부터 잇달아 소를 올려 의논을 선창하였는데 다시 여섯 번째 피맺힌 소를 올리며 죽기를 기약하여 사직을 위하니 속히 태종대왕이 한 밝은 법전을 행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신방생원 이영구(李榮久)ㆍ안대섬(安大暹)ㆍ조준명(曺浚明)ㆍ금대아(琴大雅)ㆍ김경원(金慶遠)ㆍ이충가(李忠可)ㆍ정의(鄭顗)ㆍ김광보(金光輔)ㆍ민침(閔鍼)ㆍ전유흠(田有欽)ㆍ김주국(金柱國)ㆍ안대운(安大運)ㆍ정원석(鄭元奭)ㆍ이근후(李根厚)ㆍ김찬(金)ㆍ조윤(趙綸)ㆍ신응망(辛應望)ㆍ박문엄(朴文淹)ㆍ여상규(余尙珪)ㆍ신호(申灝)ㆍ원급(元汲)ㆍ이경승(李景承)ㆍ박규(朴規)ㆍ곽유(廓瀏瀏)ㆍ문익창(文益昌)ㆍ이종주(李宗冑)ㆍ한립(韓岦)ㆍ이남(李柟)ㆍ김극겸(金克謙)ㆍ정계(鄭洎)ㆍ송갑조(宋甲祚)ㆍ이립(李岦)ㆍ이진서(李震瑞)ㆍ허수(許修)ㆍ한혜(韓譓)ㆍ민설(閔渫)ㆍ박훤(朴萱), 진사 조익형(趙益亨)ㆍ박헌징(朴獻徵)ㆍ이정(李綎)ㆍ윤우벽(尹右辟)ㆍ김연(金沇)ㆍ변사민(邊士閔)ㆍ김덕승(金德承)ㆍ윤영(尹穎)ㆍ박문환(朴文煥)ㆍ양훤(楊暄)ㆍ정선후(鄭善厚)ㆍ김이형(金以亨)ㆍ최욱(崔煜)ㆍ이여협(李汝協)ㆍ이숭언(李崇彦)ㆍ한대립(韓大立)ㆍ정충갑(丁忠甲)ㆍ정규서(鄭逵恕)ㆍ안종우(安宗遇)ㆍ홍서(洪恕)ㆍ조호인(曺好仁)ㆍ이시열(李時悅)ㆍ이대일(李大溢)ㆍ황전(黃琠)ㆍ배경생(裵慶生)ㆍ윤증(尹拯)ㆍ임헌지(任獻之)ㆍ정백형(鄭伯亨)ㆍ임석준(任錫浚)ㆍ심지원(沈之源)ㆍ홍엽(洪曄)ㆍ심준(沈僔)ㆍ박융(朴肜)ㆍ민예(閔睿)ㆍ한상고(韓尙古)ㆍ허선(許璇)ㆍ이방여(李方輿) 등이 상소하기를,
“서궁은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므로 신들은 일찍 관학 유생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역적을 치기를 청하였습니다. 어제 사은숙배할 적에 감히 서궁에게는 사은숙배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묘당에 명령을 내리어 빨리 처리하여 화근을 근절하시고 역적에게 편드는 무리들을 무찔러 영원히 사특한 의론의 근본을 뿌리 뽑아 종묘와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한 말은 모두 잘 알고 있으나, 다만 내가 듣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 진사 최상질(崔尙質).채구강(蔡九江)ㆍ김이일(金以一)ㆍ김홍도(金弘度)ㆍ양정로(梁廷櫓)ㆍ이건원(李乾元)ㆍ정여경(鄭餘慶)ㆍ김여룡(金汝龍)ㆍ이덕무(李德茂)ㆍ안대수(安大遂)ㆍ유흥정(柳興汀)ㆍ채유제(蔡有齊)ㆍ민심(閔)ㆍ생원 윤탁(尹琢)ㆍ나만기(羅萬機)ㆍ신경함(申景涵)ㆍ정희립(鄭希立)ㆍ김상하(金尙夏)ㆍ가□(李□)ㆍ송승길(宋承吉), 신방선사(新榜選士) 안대섬(安大暹)ㆍ박융(朴肜)ㆍ유형춘(柳馨春)ㆍ유득신(柳得新)ㆍ안대운(安大運)ㆍ정인(鄭遴)ㆍ민설(閔渫)ㆍ민준(閔濬)ㆍ김사립(金斯立)ㆍ민종(閔宗)ㆍ서상안(徐尙顔)ㆍ전율(全瑮)ㆍ한상길(韓尙吉)ㆍ이경승(李景承)ㆍ유학 김탁(金鐸)ㆍ박율(朴嵂)ㆍ박준영(朴俊英)ㆍ정응선(鄭應善)ㆍ김왕장(金王章)ㆍ정시현(鄭時賢)ㆍ정경(鄭儆)ㆍ전홍량(全弘諒)ㆍ나만령(羅萬齡)ㆍ이곤원(李坤元)ㆍ한상주(韓相周)ㆍ한익주(韓翊周)ㆍ이광민(李光閔)ㆍ박시준(朴時俊) 등이 상소하기를,
“서궁의 죄악이 여지없이 드러났으니, 하루라도 모후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위로는 천조(天朝)에 고하고 아래로는 팔도에 효유하여, 그 역적됨을 밝히어 인심을 바르게 하소서. 분조ㆍ시위ㆍ공헌ㆍ조알을 철폐하고 이어 자헌(自獻)ㆍ항복(恒福)ㆍ홍익(弘翼)ㆍ덕함(德諴) 등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높이 닮으로써 뇌정(雷霆) 같은 위엄을 보이고 요괴 같은 무리를 숙청하여 한 번 호령으로 풍기(風氣)를 일신하게 하고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22일 유학 강호여(康皥如)ㆍ한지업(韓志業)ㆍ강교여(康曒如)ㆍ윤형(尹亨)ㆍ한성(韓晟)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청컨대, 속히 처단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유학 홍덕민(洪德民)이 상소하였는데, 말뜻이 위와 같았다.
○ 유학 한보길(韓輔吉)이 상소하기를,
“청컨대 속히 큰 계책을 결정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또 기자헌(奇自獻)ㆍ이항복(李恒福)을 귀양보낸 창성(昌城)과 삭주(朔州)는 중국과 몰래 내통하여 화를 일으킬 우려가 없지 않으니 북변(北邊)으로 옮겨 귀양보내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24일 금부에서 기자헌과 이항복을 다시 경원(慶源)으로 정배하기를 아뢰니, 전교하기를,
“남관(南關)의 다른 고을로 다시 정배하라.”
하였다.
○ 금부에서 기자헌과 이항복을 다시 삼수(三水)로 정배하기를 아뢰었다.
○ 창준(昌准) 장언(張彦) 등 25인이 상소하였는데, 방민(坊民)들의 상소와 같았다.
27일 유학 이국광(李國光)ㆍ이국헌(李國獻)ㆍ박충윤(朴忠胤)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종묘 사직이 장차 망하고 임금이 위태로운 데에 빠질 것을 참아 보지 못하여 이제 여덟 번째 소를 올립니다. 《춘추》의 대의를 본받고, 호씨(胡氏)의 정론에 의하여 통쾌하게 처단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 국광과 국헌이 다시 상소하였는데, 말뜻이 대략 위와 같았다.
○ 예조 좌랑 기준격(奇俊格)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역적의 사변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그 중 역적의 골수는 실상 허균이었는데도 아직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신은 줄곧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지금 허균이 역적 이의를 세운 다음 서궁을 끼고 정사를 맡으려 한 곡절을 낱낱이 진술하니, 다행히 죄인을 잡게 된다면, 종묘 사직이 공고해질 것입니다.
기유년 겨울에 신의 아비는 외직에 있었고 신은 홀로 서울에 있었는데, 어느 날 허균의 집에 갔더니 신의 아비 안부를 묻고 이어서 말하기를, ‘의창(義昌)은 선왕(先王)이 사랑한 아들이므로 매양 세자로 세우려 하였는데, 너의 아버지가 저해하므로 못 하게 되었다.’ 하니, 그 말은 아마 이의가 나기 전에 세자로 세우려다가 못 했다는 것입니다.
또 신해년 겨울에도 신의 아비는 역시 외직에 있었고 신은 홀로 서울에 있었는데, 어느 날 허균의 집에 갔더니 그가 말하기를, ‘연흥(延興)이 나를 시켜 정세(挺世)의 딸을 윤수겸(尹守謙)에게 혼인하도록 청하라 하였는데, 그것은 연흥과 수겸이 전부터 도감 군사들의 마음을 잘 사고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인을 맺고 대사를 행하여 두 송장을 끌어 낸 다음 대군(大君)을 세우고 대비가 수렴하게 하려고 하였다.’ 하기에, 신은 깜짝 놀라 ‘두 송장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상감과 동궁이다.’ 말하였습니다. 이어 ‘하룻날 내가 연흥과 함께 가서 윤수겸을 보고 혼인을 청하니, 윤은 아무리 싫더라도 어찌 감히 듣지 않겠는가.’ 하기에, 신이 ‘윤은 뭐라고 답하였는가?’고 물었더니, ‘할까 말까 중간이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연흥을 통하여 궁중의 일을 들으니, 상감께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 하였는데, 그것은 더욱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지금은 연흥을 지휘하고, 일이 성취된 뒤에는 내가 모두 병권을 장악한 다음 그때에는 무력을 써서 연흥까지 아울러 죽임으로써 내 권세를 최상으로 한 다음 대비를 끼고 일국을 호령하되, 다른 사람은 감히 숨도 못 쉬게 하여야 또한 높은 수단일 뿐더러, 그리하여 중국 조정에 주문(奏文)을 올리되, 임금의 입으로 이러이러한 중국에 대하여 반역적인 말을 했다고 하며, 또 적자가 아니므로 이미 폐하고 적자인 이의(李㼁)를 세웠다 하고서 은 만여 냥만 쓴다면 일이 순조롭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권세를 잡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심(沈)은 너의 집과 원수이니 심이 만약 득세한다면 너희 집은 망할 것이다.’ 하였는데 신이 그 말하는 기색을 살펴보니, 의기가 양양하여 방약무인하였습니다.
신이 그러한 말을 듣고 즉시 상소하고 싶었으나 그 당시 조정에 차 있는 사람들은 동서ㆍ남북을 막론하고 모두 신의 집을 미워하는 사람이었으니, 혹시 위협하여 도리어 죄를 둘러씌울까 겁이 나서 여러 번 생각해 보아도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를 몰랐으며, 다만 그들의 혼인만이라도 중지시킬 생각에서 곧 사약(司鑰) 조희형(趙希珩)을 불러 말하기를, ‘심과 윤이 혼사를 의논한다는 말이 들리는데, 그대는 윤과 잘 아는 처지가 아닌가. 그대는 꼭 나를 대신하여 윤에게 전하기를, 「비록 허와 김이 정세의 딸을 며느리 삼으라 권한다 하더라도 듣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허는 줏대가 없는 간사한 사람인데, 만약 그의 말을 들었다가는 뒤에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듯하다.」하라.’ 하였더니, 수일 만에 희형이 와서 전하기를, ‘윤이 생원님이 가르치신 대로 혼인을 않기로 하였습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수겸이 곧 신과 절친한 송구(宋耈)를 청하여 손을 흔들고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기를, ‘김과 허가 와서 혼사를 말하기에 나는 매우 민망하게 여겼는데, 만일 기 생원이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는 위태할 뻔하였다. 곧 기 생원에게 가서 혼인하지 않을 뜻을 전하고 사례 말씀을 드려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이 일로 인하여 심과 김의 집은 신을 미워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립니다.
허균이 윤에게 혼인을 권했던 일은 본말이 밝게 드러났을 뿐더러, 희형과 송구가 모두 살아 있으니 속일 수 없습니다. 수겸은 신의 덕에 힘입어 혼인을 안 하게 되었는데, 만약 혼인을 하였더라면 균에게 속은 바가 되어 어찌 나라에 화를 끼치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용렬하나 노련(魯連)과 병길(丙吉)의 높은 의리에 견주어 능히 시끄러운 일을 풀고 어려운 일을 배제하여 큰 화가 뻗어 나기 전에 소멸시키고도 감히 공(功)을 말하지 않았으니, 비록 신을 화를 미연에 방지한 신하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허균은 곧 역적의 주모자입니다.
허균은 선조(先朝)에 대하여 모해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있다가 파직되어 부안(扶安)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그 고을 수령은 곧 광세(光世)였습니다. 허균이 그와 더불어 이의를 세워 권세를 잡으려 도모하였고, 또 경술년에 죄를 받고 하옥되었으며, 이듬해인 신해년 정월에 귀양갔었는데, 그가 귀양에서 풀려 돌아와서는 허균의 집이 광세의 집과 문이 맞대 있었으므로 조석으로 상종하며, 흉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성품이 경망한 까닭에 신이 그의 말을 직접 듣게 된 것입니다. 소진(蘇秦)이 제(齊) 나라에 있으면서 연(燕) 나라를 위하여 제 나라를 피폐하게 했던 것과 같이 허균이 제남과 공모하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하면서 참서(讖書) 본문에도 본래 없는 말을 첨가해서 말하기를, ‘첫째는 한(漢)이요, 둘째는 하(河)요, 셋째는 강(江)이요, 넷째는 해(海)니, 하는 교하(交河)를 이른 말이다. 일국 인심을 소란하게 하고 원망하게 한 뒤에 그 틈을 타서 꾀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 또한 그가 한 말입니다. 허균이 공주 목사로 있을 적에 삼영(三營)을 설치하였다는 비방이 있었으니, 그것은 식객 심우영(沈友榮)ㆍ윤계영(尹繼英)ㆍ이재영(李再榮)을 두고 이른 것입니다. 우영은 허균의 아내의 가까운 친족이므로 서로 친밀한 정이 한 몸둥이와 같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허균이 일찍 서문(序文)을 지어 우영에게 준 말에 ‘나의 벗 심군’이라 하였고, 허균은 평소에 정도전을 흠모하여 늘 현인이라 칭찬하였으며, 그가 우리 나라의 시문(詩文)을 뽑을 때에는 도전의 시를 앞머리에 싣고, 우영이 지은 시도 그 가운데 뽑아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계축년 뒤에는 허균이 말하기를, ‘내가 복이 있어 남하할 때, 우영에게 준 시를 모두 가지고 가서 내 문집에 넣으려 하였는데, 마침 사변이 일어나 내가 곧 복을 면하게 됐다.’ 하였습니다. 우영과 양갑(羊甲)은 모두 허균이 기른 사람들입니다. 허균이 양갑의 자(字)를 석선(石仙)이라 지어 주었는데 황초평(黃初平)의 석양(石羊)의 사실을 취하여 한 것이며, 매양 말하기를, ‘내가 본 바로는 오늘날의 영웅은 오직 서석선(徐石仙)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허균이 법망에서 빠진 것은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축년에 허균이 태인(泰仁)에서 올라온 뒤에 말하기를, ‘옥사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염려가 되어 밥을 먹지 못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놓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올라오는 길에 선전관을 만나 혼이 나갈 정도로 놀랐었는데, 내가 서 있는 곳을 지나가는 것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역적의 격서(檄書)는 내가 지었으나 우영에게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나는 죄를 면하게 된 것인데, 허실(許實)이 어찌 내가 지은 줄 알고 타인에게 지나친 말을 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경술ㆍ신해년 사이에 허균이 신에게 말하기를, ‘임금께서 법궁(法宮)에 나오시지 않지만 법궁에는 반드시 주인이 계신다.’ 하기에, 신이 묻기를, ‘이른바 주인은 또 누가 있는가?’ 하자, 허균이 말하기를,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살펴보니, 대군(大君)이 결국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계축년 전에는 허균이 스스로 말하기를, ‘이의가 임금이 되면 원훈은 내가 차지할 것이다.’ 하고, 매양 이르기를, 이이첨(李爾瞻)의 집에 큰 뱀이 있으니, 이는 영경(永慶)ㆍ직재(直哉)의 귀신이다. 머지않아 반드시 패망할 것이다.’ 하더니, 과연 오래지 않아 패망하였고,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그가 몸을 둘 곳이 없어 곧 이첨(爾瞻)에게 붙었습니다.
계축년 가을에 신이 묻기를, ‘전에는 대비로 하여금 수렴하게 하고 이의를 세우려 하더니, 이제 와서는 어찌 대비를 폐하자고 말하는가?' 하니, 균의 대답이, ‘너 같은 연소한 이가 말로에 있는 사람을 어찌 알겠는가. 화살이 떨어진 자리에 과녁판을 세워야 처세하는 데 걱정이 없는 법이다.’ 하였습니다. 허균이 경박하지 않았더라면 신은 그의 말을 반드시 듣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마음도 역시 편하였을 것인데, 그가 이미 경망하게 말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그도 후회하고, 신의 집에서 그가 전에 임금을 모해하려던 일과 서궁을 끼고 이의를 세우려 한 것과 심(沈)ㆍ윤(尹)의 혼인을 권했던 일 등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미워한 끝에 반드시 신을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하고야 말겠다는 뜻에서 기회를 타 모함하는 데는 못할 짓이 없습니다. 신이 허균에게는 큰 은혜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일찍이 아뢰지 못한 죄는 달게 받을 것입니다만, 허균의 죄악은 남김없이 다하여 바닥까지 드러났습니다. 신의 아비의 차자는 그 당시 물정을 알지 못하여 죄에 저촉되었으니 혀를 깨물고 후회할 뿐입니다.
생각하면 남곤(南袞)이 광국(光國)의 봉훈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은 비록 허균이 없었더라도 저절로 그 잘못을 변론할 사람은 있었을 것이며, 대론에 있어서는 삼사ㆍ우상 또는 대간이 당연히 며칠 안에 거행할 일이지, 역적이 간여할 일은 아닌데, 물리고 또 연기하여 시일만 지연시키는가 하면 오직 신의 아비를 모함할 것만을 일삼아 공론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한을 갚으려 합니다. 허균을 오늘까지 세상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쉬도록 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 허균은 또 말하기를, ‘협(浹)이 문초받던 날에 이형원(李亨遠)이 멀리서 손을 흔들고 오기에 내 이름이 그 초사(招辭)에 나왔을까 겁이 났었는데, 뒤에 물어 보니 나오지 않아 간신히 화를 면하였다.’ 했고, 허균이 또 말하기를, ‘만약 내가 권세를 잡고 대비가 정치를 하게 되면 내가 사사로이 심이기(審食其)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원상(院相)이 되어 궁중에서 일국의 일을 처결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무뢰하고 패악한 죄는 머리털을 뽑아 헤아려도 다 셀 수 없습니다.
오늘날 대론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비록 참고할 만한 허균과 같은 역적의 행적이 없더라도 일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임금을 위태롭게 하려고 꾀하고 의창(義昌)을 세우려 하고, 이의를 끼고 대비를 수렴시키려 한 허균의 죄를 처결하소서.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번 소와 두 번째 소가 모두 어느 날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 기준격이 재차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그저께 소를 올리고 한편 명령을 기다리면서 다시 허균이 전하를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한 죄상을 자세히 진술함으로써 전하께 번거롭게 아룄습니다.
허균이 선왕 때에 홍로(弘老)와 합심하여 전하를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한 까닭에 그를 멀리 귀양보내려 하였더니, 그들은 김공량(金公諒)의 첩을 시켜 궁내에 밀통하여 선왕을 의혹케 하고, 이어 옥사를 일으켜 신의 아비를 죄를 얻도록 하고, 홍로와 더불어 조정의 권세를 모두 장악하려 하였으나 신의 아비가 그 기미를 알고 미리 방비를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전하가 외롭고 위태하실 시기를 당하자 허균은 감히 이런 흉악한 역적 도모를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가 죄를 얻은 것은 오히려 사소한 일이지만 장차 전하를 어떤 지경에 두려는 것입니까. 생각하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허균의 심중에는 전하가 반드시 임금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시리라 생각하였으므로, 홍로에게 마음을 쏟았으며, 홍로는 병오년 후에 심엄(沈㤿)과 인척이 되었으니, 심엄의 아들 정세(挺世)는 곧 제남의 사위입니다. 홍로가 심(沈)의 집과 인척이 된 것도 제남의 집과 이의를 위하여 한 일입니다. 허균이 홍로와 지극히 절친한 까닭에 곧 심의 집과 뜻이 합하였습니다.
무신년에 전하께서 즉위하시자 그 심엄이 놀라고 두려워하던 끝에 죽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목을 매어 죽었다.’ 합니다. 우영은 허균의 처삼촌이고 광세의 공족(功族)이므로 허균과 우영이 서로 절친한 것은 일국 사람이 다 아는 바이며, 몸뚱이는 둘이지만 심장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가 또 심(沈)과 윤(尹)의 혼인을 주장하다가 신의 말로 인하여 성사하지 못한 까닭으로 그들은 신의 집에서 그들이 전하를 모해한 일과 김제남ㆍ우영ㆍ광세 등과 역적을 도모한 일을 잘 알고 있음을 겁내고 꺼려하였습니다. 이유홍(李惟弘)ㆍ송언신(宋言愼)ㆍ조호(曺浩)ㆍ이홍로(李弘老) 등의 서간을 한 데 붙여서 드립니다. 허균이 전하를 모해한 시기가 제일 먼저이므로 죄상이 홍로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서간은 모두 네 장인데, 그 중 병한(病漢)이란 것은 유홍이요, 그 다음 쓰인 것은 허균이요, 호봉(壺峯)이란 것은 언신(言愼)이요, 호(浩)란 것은 조호요, 그 아래 두 장은 홍로의 편지입니다. 납지(蠟紙)로 모본을 뜬 다음 그들의 친필을 올려 전하께서 보시도록 하니, 화란의 근본은 모두 허균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였다.

[주D-001]윤이(尹彝)와 이초(李初) : 1309년(공양왕 2) 윤이와 이초가 명 나라 세력을 빌려 당시의 권신 이성계 일파를 타도하고 명 나라에 무고한 사건.
[주D-002]구법(九法) : 《주례(周禮》 하관(夏官) 대사마(大司馬)에, “방국(邦國)에 구법(九法)을 세워 왕을 보좌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경기(京畿)를 제정하고 나라를 봉하여 방국을 바로잡으며, 의례(儀禮)의 직위(職位)를 설정하여 나라의 등급을 정하며, 현인(賢人)을 올리고 공을 이루어 나라를 건설하고, 감(監)ㆍ 목(牧)을 세워서 나라의 벼리를 정하고 군제(軍制)와 금고(禁錮)를 만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공물(貢物)을 베풀고 직분을 나누어 나라 일에 임하고, 향민(鄕民)을 뽑아 나라 일에 쓰고, 고루 법을 지키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겨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 하였다.
[주D-003]급(伋)의 …… 어머니가 된다 : 급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이름이고, 백은 자사의 아들 이름이다. 《예기》 단군 상에서 백이 그의 재가한 어머니에게 상례를 행하지 않자, 자사의 문인 가운데 어떤 이가 자사에게 그 까닭을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자사가 이에 대답한 내용 중에 한 구절이다.
[주D-004]시귀(蓍龜) : 점칠 때 쓰는 시초와 거북. 《주역》 계사전에 “천하의 길흉을 결정하여 천하의 태평함을 이루는 것으로 시귀(蓍龜)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곧 나라를 다스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란 뜻.
[주D-005]문강(文姜) : 노(魯) 나라 환공(桓公)의 부인. 환공과 함께 친정인 제(齊) 나라에 갔을 때 오빠인 양공(襄公)과 간통하였다. 이를 안 환공이 화를 내자 문강은 양공에게 일러 환공을 죽이게 하였다.
[주D-006]애강(哀姜) : 노(魯) 나라 장공(莊公)의 부인으로 천성이 음탕함. 장공이 죽은 뒤 간부인 경부(慶父)와 모의하여 장공의 아들 반(般)을 죽이고 민공(閔公)을 세운 뒤 뒤에 다시 민공을 죽였음.
[주D-007]무씨(武氏) : 당 고종(高宗)의 황후 측천무후(則天武后). 고종이 죽은 뒤 정권을 잡고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신성황제(神聖皇帝)라 하여 국호를 주(周)로 개칭하였음.
[주D-008]위씨(韋氏) : 측천무후의 주선에 의하여 당 중종(中宗)의 황후가 되었다. 일찍부터 정치에 관여하였다. 무삼사(武三思)와 간통하여 중종을 죽이고 상제(殤帝)를 세운 뒤 계속 정권을 어지럽혔다. 뒤에 현종(玄宗)에게 폐위되어 축출되었다.
[주D-009]양본실대(讓本失對) : 임해군(臨海君)이 세자의 자리를 광해에게 양위했다고 명 나라에 잘못 답변한 사건.
[주D-010]상방검(尙方劍) : 칼 이름. 한(漢)의 성제(成帝) 때 괴리(槐里)의 태수 주운(朱雲)이 황제에게 상소한 글에, “상방검을 빌려 주시면 아첨하는 신하 장우(張禹)의 목을 끊겠다.”는 말을 하여 성제의 분노를 산 고사가 있다.
[주D-011]주(邾) 땅에 물러났다 : 주(邾) 땅으로 쫓겨났다는 뜻이나, 《춘추》에서 “물러났다[遜].”고 표현함으로써 명분을 세워 준 것에 불과하다. 광해군은 교동(喬桐)에 안치시켰으나 사가(史家)에 따라서는 “교동으로 물러났다[遜于喬桐].”고 쓴 사람도 있는 예와 비슷한 예다. 천성이 음탕하고 독한 노(魯) 나라 애강(哀姜 장공(莊公)의 부인)은 경보(慶父)와 간통했고 장공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반(般)을 죽인 뒤 민공(閔公)을 세웠다가 다시 민공도 죽였다. 희공(僖公)이 선 뒤에 애강은 주(邾) 땅으로 쫓겨났다가 뒤에 친정인 제(齊) 나라에서 불러들여 독살시켰다.
[주D-012]노련(魯連)과 병길(丙吉) : 노중련(魯仲連)은 전국 시대 때 제(齊) 나라 사람. 그는 어려운 일을 배제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진(秦)이 칭제하면 동해(東海)에 투신 자살한다 하였음. 병길(丙吉)은 한(漢) 때 노국인(魯國人), 자는 소경(少卿)이며, 위태자(衛太子)의 사건으로 투옥당하게 된 어린 선제(宣帝)를 구출하였다.
[주D-013]소진(蘇秦) : 전국 시대 때 낙양(洛陽) 사람. 장의(張儀)와 같이 유세객(遊說客)으로 유명하며 그는 제(齊) 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고국인 연(燕) 나라를 위하였다.
[주D-014]황초평(黃初平)의 석양(石羊) : 황초평이 집을 떠나 도사(道士)와 함께 양(羊)을 치고 있었다. 그 형이 찾아와 하는 일을 묻자 초평은 양을 기르고 있다고 하였다. 형이 양이 보이지 않자 양의 소재를 물었더니 초평이 채찍으로 돌을 치니 돌이 모두 양으로 변했다는 고사.
[주D-015]심이기(審食其) : 한(漢) 나라 패(沛) 땅 사람. 여후(呂后)에게 총애를 받아 좌승상이 되니, 여러 벼슬아치들은 그에게 사무 결재를 받았다.
[주D-016]원상(院相) : 임금이 죽은 뒤 26일 동안 대소 정무를 대행하던 승정원의 임시 벼슬.

順興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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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言卷之十九 中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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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丘墓 三
靜嬪閔氏墓誌 a_098_09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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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嬪閔氏。系出驪興。高麗名臣門下平章令謨之後也。曾大父諱子芳。尙康靖大王女敬淑翁主。爲驪川尉。大父諱希說。丹陽郡守贈吏曹參判。父諱士俊。江華都護府使。母孟夫人。籍新昌。國初相思誠之六世孫也。隆慶元年九月二十九日嬪生。宣祖卽位之十三年。冊淑儀。始十四。歷昭儀貴人。陞嬪。爲最貴。侍至尊三十年。恭敬畏愼。無一私恩干澤之事。上心敬之。每燕見。必冠。懿仁王后。亦禮遇殊甚。當兵革098_099d之世。從上西幸。備嘗艱難。及上登遐。持喪過節。退居私第。積疾十九年。仁穆太妃甚尊禮之。每以手札。問起居。謙下有禮。一以內訓自律。好儉約。常以溢尤爲戒。不御錦繡珠翠。私奉養孟夫人。至誠不怠。撫恤宗族。疏遠不遺。仁祖世連有大獄。長男仁城君連獄辭。事在鄭文簡公寬獄疏。上赦處原州。嬪常泣思。及疾革。少男仁興君上疏。乞母子相見。上感其言。寬釋之。未至而嬪卒。天啓六年十一月二日。春秋六十。上爲之弔賻特厚。令中貴人。抵喪葬之098_100a事。明年正月十七日。以禮葬楊州之塔谷。生二王子三翁主。仁城君珙,仁興君瑛。貞仁翁主下嫁唐原尉洪友敬。貞善翁主下嫁吉城君權大。貞謹翁主下嫁一善尉金克鑌。仁城君五男。海平君佶,海安君億,海原君健,海寧君伋,海陽都正僖。仁興君二男。朗善君俁,朗原君侃。內外子孫甚多。銘曰。
貞而靜。淑而愼。安而信。三宮儀式。是順是勸是訓。




生進

安健 : 順興人。知制敎修己之子。

安傑 : 健之弟。

安瑛 : 字子溫。郡事理之孫。正德己卯進士。

安公弼 : 瑛之子。嘉靖庚子生員。

安公信 : 瑛之子。嘉靖戊子司馬。見文科。

李師曾 : 見文科。

黃直卿 : 昌原人。奉禮躔之子。景泰丙子生員。

黃藎卿 : 直卿之弟。進士。

金萬枰 : 字國衡。文節公淡편001子。

琴倫 : [本文缺]

韓世琳 : 字彦圭。進士。

權應箕 : 字景說。安東人。參奉純子。嘉靖己酉進士第二。有文名。

權應參 : 字粲若。純之子。嘉靖庚子生員。有學行。

閔友參 : 字省之。驪州人。正德丁卯司馬。

黃漢忠 : 字良佐。昌原人。訓噵㻛之子。弘治丙辰生員。以文章名於世。築養性亭于愚溪上。讀書求志。自號愚叟。世因以愚叟洞名其村。所著有和唐詩鼓吹二卷。李聾巖賢輔嘗訪之。有詩曰。峨峨小白與天齊。客到桃源路不迷。我亦已成歸去賦。莫誇君獨有愚溪。

黃彬 : 漢忠子。進士。周愼齋守豊基時。移建鄕校。及創建白雲洞書院。公多出米租以助之。愼齋記文亟稱其義。與玉山劉氏無讓云。所居堂扁以中和。愼齋寄詩曰。去年浮石共淸遊。仍想君家滿院秋。爲問中和堂下水。源頭何日暫停休。

權得平 : 進士。見孝子。

閔興業 : 宣廟生員。見蔭仕。

安應箕 : 宣廟朝進士。

徐翰廷 : 花園人。大司諫衷曾孫。進士。事親盡孝。號遯菴。

孫興慶 : 字景餘。慶州人。參奉蘭子。孝友出天。晩年築亭於鳴巖之上。與兄興國共被而寢。鄕人稱之。隆慶戊辰進士。

孫禴 : 字誠之。興慶子。萬曆癸丑登生員。

權協 : 字應諧。安東人。陽村近之後。萬曆丙午生員。風儀文詞見推儕流。自安東來寓愚溪。

李玠 : 字大圭。德水人。嘉靖己酉進士。

郭瀚 : 字大容。玄風人。嘉靖己酉生員。號癡溪。

金滉 : 字浩浩。判決事欽祖孫。嘉靖丙午生員。

琴軔 : 嘉靖庚子進士。見名賢。

黃得謙 : 字汝益。嘉靖己酉司馬。

趙貞 : 漢陽人。良敬公涓五世孫。正德丙子司馬。有孝行。

金士文 : 文節公淡曾孫。生員。

金士明 : 士文弟。中宗朝丁酉司馬。

金士皥 : 士明弟。丙午司馬。

南夢龜 : 字文祥。英陽人。英毅之公毅之後편002。參奉麒子。萬曆辛丑進士。

南夢鰲 : 夢龜弟。萬曆癸酉進士。見名賢。

南衢 : 字公達。夢鰲侄。萬曆壬子進士。

金泰時 : 字亨叔。萬曆己酉司馬。

琴復古 : 萬曆癸酉生員。見蔭仕。

洪以成 : 南陽人。左贊成淑曾孫。萬曆辛丑司馬。

金勮 : 萬曆己丑司馬。見蔭仕。

金廷善 : 勮子。萬曆丙辰司馬。

金履善 : 字而吉。廷善弟。萬曆癸丑進士。

金止善 : 吏參玏子。司馬壯元。

李大根 : 署令秀亨子。弘治丙辰生員。見蔭仕。

權虎臣 : 萬曆壬午生員。見孝子蔭仕。

權俊臣 : 虎臣弟。生員聯璧。

金鳴盛 : 遂安人。庚寅生員。

趙以周 : 貞曾孫。

 : 字靜甫。萬曆進士。見蔭仕。

郭玹 : 字仲珍。子。萬曆壬子司馬兩試。有文名。

郭瓔 : 字季珍。玹弟。萬曆己卯司馬。有文名。

李興門 : 字自實。監役盛根孫。萬曆壬子生員。壬辰亂爲義兵將。

金慶建 : 萬曆辛卯進士。見蔭仕。

李汝馪 : 萬曆辛卯進士。見文科。

南希績 : [本文缺]

李文斗 : 眞城人。

南季英 : 希績子。

金簦 : 自善山來居四賢井。

徐千一 : 花園人。司馬兩試。

韓世珍 : 自尙州來居花川。

金澤龍 : 丙子司馬。見文科。

金汝煜 : 延安人。贈承旨盖國子。萬曆癸酉司馬兩試。號虛舟。自榮川來居聲谷。所居齋。扁以素履窩。

金聲震 : 字始伯。咸昌人。萬曆癸丑進士。

李汝馦 : 興門子。萬曆己酉生員。丁卯亂。爲義兵將。

琴是諧 : 字克成。復古子。萬曆己酉進士。號峩洋軒。崇禎處士裵公幼章所撰行狀有曰。剛方其質。愷悌其行。苟立朝展布。時平爲直道臣。世亂爲伏節士云。

金鑑 : 字應久。察訪幾善子。萬曆壬子生員。

金昌祖 : 進士。見蔭仕。

申瓛 : 萬曆癸卯生員。見名賢。

李成樺 : 大根曾孫。汝馪子。生員。

李成楗 : 大根曾孫。生員。

李成榦 : 字子翰。大根曾孫。素有文藝。光海時廢擧。天啓丁卯進士。

申公蘊 : 見蔭仕。

琴是調 : 萬曆壬子生員。見文科。

安頊 : 萬曆癸丑司馬。見文科。

琴忠達 : 萬曆丙辰進士。見文科。

成以性 : 萬曆丙辰生員。見文科名賢。

安弘靖 : 萬曆辛卯生員。見蔭仕。

金淮 : 字德淵。參奉慶建子。崇禎癸酉生員。親喪。與弟㴐廬墓三年。人比之大小連。丁丑變後。兄弟俱廢擧。以詩酒終老。

任之道 : 字宗甫。豊川人。天啓甲子生員。

朴安復 : 天啓甲子生員。見文科。

黃益淸 : 天啓甲子司馬。見文科。

黃中衍 : 仁廟壬午進士。見文科。

金九鼎 : 見文科。

金慶遠 : 見文科。

孫會宗 : 仁廟癸酉生員。見文科。

金鋼 : 崇禎乙亥生員。見名賢。

任碻 : 字魯攸。之道子。生員。天分剛方。學問精明。奉先盡誠。訓進後學。號務隱。所居東奉化有曺溪社以편003之。後以邦禁撤。

金値秋 : 咸昌人。監司爾音之後。進士。

金鉽 : 參奉勮之孫。

李光前 : 字士述。養根五代孫。崇禎乙亥司馬兩試。

宋大庭 : 字太古。冶城人。涵之子。萬曆丁巳進士。

李光啓 : 字彦述。養根五代孫。戊子生員。

李昌啓 : 光啓弟。生員。

朴安欽 : 字君敬。綿城人。判校子。崇禎己卯生員。

李熺 : 字日章。成楗之子。進士。有文名。

李爟 : 署令秀亨之後。

 : 大根五代孫。生員。

李燂 : 大根五代孫。生員。以行誼見稱。

金是直 : 字汝淸。義城人。仁廟戊子進士。以文行名。

朴施雨 : 字時若。安欽子。辛卯生員。文詞筆法名于一世。

朴施春 : 字榮伯。之孫。庚子司馬兩試。以孝友文藝稱。號東皐。

成甲夏 : 字慶餘。應敎以性子。庚子進士。

成大夏 : 字夏卿。承旨安義孫。肅廟癸酉生員。號丹崖。權學士斗經挽曰。學肆推高價。文林見宿儒。

朴施昌 : 字遇卿。之孫。癸卯司馬兩試。

朴震甲 : 字長孺。施昌子。丁巳生員。以文詞行義見稱。

金世標 : 宣城人。文節公淡後。肅廟朝司馬。

權以鈒 : 字應五。安東人。松巢宇曾孫。己巳生員。自醴泉來寓。志操高潔。以文詞名。友人金佶挽曰。心事淸於霜後月。形容瘦似雪中梅。

安重厦 : 字大卿。順興人。肅廟壬戌生員。有文名。

金粹然 : 字幼淸。參判玏五代孫。肅廟辛未生員。有文名。

李漢芳 : 字流百。大根之孫。

金景河 : 字千澄。義城人。開巖宇宏六代孫。己卯進士。以文藝行誼見稱。寓居水息斗文。

金景湜 : 字遠澄。景河弟。生員聯璧。

黃復圭 : 字汝三。昌原人。高麗大相石柱之後。肅廟壬午生員。自榮川來居沙川。文志行廉謹。事親盡誠。平生好讀書。手錄前脩格言以自警。有日省錄若干卷。號豁翁。

金天祥 : 寒暄堂之後。

張延相 : 字仁叔。延福君末孫後。肅廟壬戌生員。自榮川來寓台庄。天資溫雅。事親盡誠。友愛兄弟。親沒。廢擧業。講誨後學。多所成就。自號晩修菴。

黃昌述 : 肅廟戊子進士。見蔭仕。

徐聖耈 : 字希彦。花園人。直長浩之後。肅廟庚午進士。以文詞筆法名。

李鎭萬 : 字孟能。汝馪之後。肅廟壬午司馬兩試。以文藝名。號白隱。

朴敬祉 : 字命休。生員施雨孫。肅廟乙酉生員。儒雅謹飭。勤於敎誨。號晩悔堂。

黃宇鎰 : 字百兼。檜山人。司諫孝恭後。乙酉進士。有文名。

柳以觀 : 字村彦。全州人。領議政永慶玄孫。戊子生員。

權斗光 : 字明彦。安東人。冲齋橃五代孫。肅廟朝進士。

徐鼎九 : 字台彦。花園人。直長浩之後。戊子生員。天分剛方。行義敦深。士類推重焉。號竹隱。

黃壽益 : 字德老。司諫孝恭後。戊子進士。

黃櫟 : 檜山人。司藝益淸子。肅廟朝生員。以謹餙見稱。

孫以雄 : 戊子生員。見文科。

權大任 : 字國稱。安東人。生員俊臣玄孫。戊子生員。

權正泰 : 字通卿。冲齋橃後。肅廟朝生員。有文名。

李鎭華 : 字長世。鎭萬弟。肅廟庚寅生員。有文名。

李鎭周 : 庚寅進士。見文科。

徐萬維 : 字汝張。鼎耈從子。庚寅生員。

黃世燮 : 櫟之子。庚寅生員。

琴聖心 : 字希伯。軔之後。庚寅生員。

金星宇 : 字樞彦。天祥玄孫。肅廟辛卯生員。

姜履一 : 字坦之。晉州人。縣監恰曾孫。肅廟己亥生員。性孝友。母病刲指進血。敬事二兄如事嚴父。好讀書。臨絶。亦端吟詩頌維天之命章。而奄然逝。

 : 字將伯。豊山人。參判榮祖曾孫。肅廟甲午生員。

琴沃心 : 甲午生員。見文科。

洪儆 : 字尙兼。南陽人。敎官游敬子。景廟辛丑生員。官至銓郞。

黃錫中 : 字命汝。司藝益淸玄孫。己亥進士。持己恬雅。處家敦睦。及沒。里巷爲撤農謠。

李以檀 : 字君邦。羽溪人。生員燂曾孫。己亥生員。

權宅揆 : 字而敍。東岩省吾玄孫。癸卯生員。

徐志達 : 字善則。直長浩之後。癸卯生員。

安再軫 : 字仲翼편004。察訪弘靖曾孫。癸卯生員。

安宅重 : 乙巳進士。見文科。

尹鳳適 : 坡平人。丙午生員。

權正兢 : 字英卿。冲齋橃後。甲子生員。

李景潝 : 字來吉。鎭萬子。己酉生員。有文名。

金英燁 : 字晦仲。文節公淡後。乙卯生員。有文行。

安宗雄 : 字▣▣。宅重弟。庚편005生員。

金益源 : 字謙之。豊山人。持平奉祖後。庚申生員。

琴必恒 : 字子久。府使學達孫。甲子生員。聰明强記。博聞該識。操履確實。文詞富贍。平生好學。恒誦朱子書。號潛軒。

權正雄 : 甲子生員。見蔭仕。

金式萬 : 字公儀。宣城人。文節淡後。景廟辛丑生員。

時存
琴運心 : 字天機。松溪軔後。今上丙午生員。

權一理 : 字光隱。陶隱虎臣後。己酉生員。

成臣寅 : 字寅祥。承旨安義玄孫。己酉生員。

成惠寅 : 字春甫。承旨安義玄孫。甲子生員。

權正通 : 字孟兢。冲齋橃後。乙卯生員。

姜澤 : 字民潤。晉州人。縣監恰玄孫。丁卯生員。

權謖 : 字幼常。安東人。陽村近後。癸酉生員。

成彦極 : 字立汝。應敎以性五代孫。癸酉進士。

黃德培 : 字德以。世燮子。丙午生員。以文行見識稱於鄕。

安廷佐 : 字仲翼。西坡公十三代孫。己巳中司馬。

李秉斗 : 字元仲。

 : 字士直。

安斅黙 : 字▣▣편006。及第致黙弟。年二十。中司馬辛酉科。

退陶李先生手錄文貞公世系源流圖於竹溪志首。





順興安氏一閥五六世。賢人君子之盛。如此。故先生美而手錄。特加表著者也。文肅公以後數世以下。偉人又輩出。克紹先美。炳烺日星。惜乎世之後而未見錄於是圖也。
己卯名賢。翰林名世。

[편-001]▣ : 
[편-002]英毅之公毅之後 : ‘英毅公敏之後’의 오기로 보임.
[편-003]亨 : ‘享’의 오기로 보임.
[편-004]仲翼 : 《順興安氏三派族譜》에는 ‘重翼’으로 되어 있다.
[편-005]辛 : ‘申’의 오기인 듯함.
[편-006]▣▣ : 《順興安氏 西坡公派譜》에는 ‘學汝’로 되어 있다.


愚伏先生文集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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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
有明朝鮮國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煕運顯文毅武聖敬達孝大王穆陵誌 a_068_34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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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戲。恭惟我宣祖昭敬大王姓李氏。諱▣▣。中宗恭僖大王之孫。德興大院君岹之第三子也。母鄭氏。贈領議政世虎之女。王以嘉靖壬子十一月十一日。生於漢城府之仁達坊。生而英睿異常。幼時。明宗恭憲大王召與二兄偕。脫御冠令以次戴之。二兄者皆如命。王卽跪而辭曰。君上所御。臣子何敢近頭。恭憲王驚嘆。因問君與068_346b父孰重。令書字以對。對曰。君親雖不同。忠孝無二致。恭憲王大奇之。及長。封河城君。乙丑。恭憲王不豫。時世子暊蚤卒。儲貳未定。領議政李浚慶請選於諸姪中。恭憲王命王入侍。隆慶丁卯。恭憲王上賓。浚慶奉遺敎迎王。王方持母服在私第。涕泣固讓。迫而後入就恤宅。時翰林院檢討許國,兵科給事中魏時亮。奉穆宗皇帝登極詔出來。入境聞國君新喪且無嗣。甚憂之。頒詔日見王儀表。相與旋目嘆曰。東方眞主出矣。是時王甫十六歲矣。遣使告訃。請承襲。明年春。皇帝命太監姚臣,李慶齎詔。封爲國王。賜誥命冕服及綵幣。王自嗣服初。銳意圖治。專精講學。日必三接儒臣。討論經史。或至夜068_346c分。時李滉解官歸鄕里。屢召不至。王以誠意致之。擢爲貳公。滉疏陳治道六條。又撰聖學十圖。手寫以進。王嘉納之。命工作小屛。宴居觀玩。或不時召對。從容講道。禮遇隆重。及滉亡。傷悼不已曰。滉之片言隻字。皆可傳後。其令有司裒集刊行。本國舊稱文獻之邦。而其於格致誠正之學則罕有傳焉。自高麗鄭夢周始倡絶學。至我朝。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彥迪相繼輩出。發揮經傳。講明義理。王以大有功於斯道。特命賜祭。贈官與諡。錄其子孫。命儒臣柳希春等撰次其言行。名曰儒先錄。且以近思錄,小學,心經皆作士之本。本朝所撰三綱行實亦可以使民興行。竝命刊布。敎該曹曰。近來師儒之選。專068_346d尙文辭。黌舍游學之士皆以決科爲急。士習如此。他日成就。將何所觀。擇有學行堪爲師表者。擢授方面。使之巡行列邑。勸課敎誨。又以登進遺逸。爲新政第一務。馹召曺植,成편001等。不次超敍。嘗於筵中嘆曰。奸黨碑立而汴京墟。僞學籍成而南宋亡。賢邪進退之幾。顧不畏耶。臺官論南衮等戕害士林之罪。請削官爵。或以事在旣往爲言。王曰。罪南衮者。所以雪趙光祖之冤而定一時之趨向也。遂罪之。己巳秋。冊潘城府院君朴應順女爲妃。萬曆元年癸酉。大臣因天變乞免。王曰。推咎台衡以應災變。吾誰欺。欺天乎。下手札求言。首尾百餘言。無非引咎求助之意。太學生上闢佛疏。王以手札答曰。爾等居首善之地。講068_347a論者道義也。期待者程朱也。宜益動心忍性。切磋琢磨。敬義夾持。表裏交養。爲他日眞儒。立於朝端。上以輔寡君。下以澤斯民。使治隆俗美。則吾道之衰。異端之盛。不足慮也。何必如魏太武誅沙門毀佛寺之爲哉。又上疏請以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彥迪,李滉等從祀文廟。答曰。難愼而不敢輕許者。只緣其事重也。且尊五臣。莫如尊其學。宜懋時敏。相與講劘。共成大儒。勉輔不辟。是予所望也。時王有疾。日久乃瘳。禮官請陳賀。王曰。人之疾。殆未必不由於失攝。頃者不意得病。貽憂母后。驚動群下。方且祇懼悔罪之不暇。何可受賀。累請不許。乙亥。恭憲王妃沈氏薨。禮官據五禮儀。卒哭後當用玄冠烏角帶。持平閔純等068_347b以爲三年通喪。無貴賤一也。宜從朱子議。用白帽布裹角帶。廷議不一。而王斷然行之。一遵禮制。丁丑。榮靖王妃朴氏薨。禮官上請當從叔姪服服齊衰期。相臣朴淳及玉堂諫院以爲上於榮靖王。有祖孫之義。當以繼體之重服三年。若以叔姪論。則諸侯絶旁期。寧有服朞之理。王是其議。遂定爲三年喪。先是。明廟幼沖。李芑與尹元衡結爲腹心。以私怨誣尹任,柳灌等爲陰有貳志殺之。中外冤憤者積數十年。王以事在先朝。不欲輕改。至是命復任等官。削芑等勳。敎書下。八方咸服。丙戌。聖節使在會同館失火。王聞之驚駭。拏治使臣以下罪有差。奉表陳謝。皇帝嘉其忠愼。降勅錫齎以優之。丁亥。日本068_347c差使臣來款。時平秀吉簒奪自立。王曰。日本乃簒逆之國。其使不可納。命却之。廷議皆以爲化外不可責以禮義。或啓邊釁。王黽勉許之。而其義則凜然有不可犯者。戊子。謝恩使兪泓還自京師。天朝特允我國題奏。命雪宗系惡名。始太祖初。罪人尹彝,李初叛入中原。誣國系爲逆臣李仁任之後。皇明祖訓及會典。皆載其事。列聖以來累世陳辨。未蒙準改。王嗣服臨朝。嘆曰。國系受誣。久未昭雪。此祖宗之所深痛。而今其責在予。予不克繼先志雪先羞。死無以見祖宗於地下。宜極擇使价。血誠籲呼。以得請爲期。每使臣行。必宿齊預戒。丁寧告勅。至誠所發。有可以感動天地。至是。皇帝068_347d命史館悉行刊正。王喜甚。敎群臣曰。古之人君固有重恢祖業。光復舊物者。然此猶是外物耳。豈如使彝倫再敍。湔滌數百年深冤至痛乎。乃祭告于宗廟社稷畢。敎曰。今日親奉寶典。祇告廟社。志願畢矣。可大赦。與臣民同慶。且夫子彝倫之主。當親祭以告彝倫復敍之意。遂祭文廟。辛卯。平秀吉遣玄蘇來曰。明年當入大明。可假以道。辭甚悖逆。王以大義絶之。急遣使具奏天朝。壬辰夏。賊大擧入寇。我國累世昇平。民不知兵。所在瓦解。王分遣將士。據守要害。下罪已敎。徵兵爲效死勿去計。及忠,尙敗報至。王知京城不可守。謂群臣曰。此賊謀犯天朝。藩臣職當死守封疆。而奈衆寡不敵。旣不能力抗凶068_348a鋒。遮截賊路。則無寧歸近父母之邦。赴愬於聖天子。乞王師以討此賊耳。遂定西遷議。大臣白。當此危急。國本不可不定。王乃命光海君琿爲世子。未幾賊報益急。王出城西行。及平壤失守。進駐義州。遣鄭崑壽等申奏賊情。皇帝遣行人薛藩降勅慰諭曰。爾國世守東藩。素效恭順。衣冠文物。號稱樂土。近聞倭奴猖獗。大肆侵陵。攻陷王城。掠占平壤。生民塗炭。遠近騷然。國王西避海濱。奔越草莽。念玆淪蕩。朕心惻然。朕今專遣文武大臣二員。統率遼陽各鎭精兵十萬往助討賊。與該國兵馬前後夾攻。務期勦滅兇殘。俾無遺類。夫恢復先世土宇。是謂大孝。急捄君父患難。是謂至忠。該國君臣必能仰體朕心。光復舊068_348b物。俾國王奏凱還都。仍保宗社。長守藩屛。庶慰朕恤遠宇小之意。王率百官出迎江上。奉勅慟哭。哀動左右。群臣皆哭。十一月。皇帝特賜白金二萬兩。王拜受感泣。分賜扈從諸臣及陣上將士。十二月。提督李如松以皇帝命領遼廣兵四萬出來。王見提督泣曰。蒙皇上罔極之恩。得見大人。小邦一縷之命。惟託在太人。提督見王忠懇。爲之動色。癸巳春。提督協率本國軍兵。大敗平壤賊。夏。官軍收復京都。群臣請賀。王曰。可慰不可賀。但當率臣民行望闕禮。以謝皇恩而已。卽遣使奉表。謝收復京城。秋還京師。命減內廚日供米分賑飢民。收瘞遺骸。設壇賜祭。下書八道。減貢稅廢供獻。訪問孝子068_348c烈女及死國事者悉加褒錄。命收聚書籍藏之藝閣。敎禮曹曰。兵燹之中。都人死者何限。意遺民過半縞素。入城之日。都民塡塞。而未見有服喪者。此必喪亂之後倫紀廢墜而然。令各部糾檢。王欲親祭文廟以慰先聖之靈。禮官以爲聖殿燒盡。行祭無所。王曰。神之在天下也如水之在地中。無所往而不有。惟其致誠則神在是矣。故古人或設壇以祭。豈必待木主哉。遂命築壇於學宮之側。設位以舍采焉。冬。皇帝遣行人司憲降勅曰。昨者王以大兵驅倭出境。還歸舊國。上表來謝。朕心深用嘉悅。念玆復國重事。不可照常報聞。今特遣使降諭。兼賜大紅蠎衣二襲。綵段四表裏。以示朕惓惓爲王遙慰之意。時王寓居貞068_348d陵洞。一日謂近臣曰。閭閻不可久淹。欲於舊宮城裏略構草家以居。昔衛君茇舍于漕。此誠何時而欲大廈處乎。天將有以營建王宮爲言。王曰。深羞未復。何以家爲。天將歎服。丁酉。賊將淸正襲破閑山島。張兵再搶。先鋒到湖西。時提督麻貴提孤兵在京城。軍情危懼。王厲氣巡城。堅守不動。經理楊鎬亦自平壤疾馳來援。人心賴以鎭定。遂協助天兵。大翦賊鋒于稷山以却之。時有物怪。天將欲得卜人占吉凶。王曰。天之賦物。不得其常。是之謂怪。常者理而已矣。人事之失其理者。皆足以應之。豈幺麽瞽師之所能知乎。己亥。賊悉退。王奉表陳謝。皇帝降勑慰諭。賜綵幣。庚子。王妃朴氏薨。始王之誥068_349a命冕服。淪失於兵中。至是遣使請照例補賜。皇帝特允所奏。勑曰。爾朝鮮爲國素敦禮敎。懋篤忠敬。稱我優嘉。自頃以來越在草莽。典章文物。幾于蕩然。朕爲爾洗滌兇妖。恢還土宇。固我師武臣力亦不可謂非爾秉禮之效。否則軍旅安經。政令安行。順物不受。事乃大逆。尙有今玆之捷乎。爾以誥命冕服奔逬莫守。遣使來告。祈得賜如初。夫事上莅下。須此修容。復漢威儀。朕所矜許。是用勑尙方製給。仍錫之誥。爾尙敬之哉。藍縷啓楚。大布興衛。薪膽伯越。皆王今日事。懋哉毋忝命。王卽遣使奉表陳謝。禮官以長短不稱請改造。王曰。皇賜服之無斁。何可改也。予於西遷日。宮中物一無所挾。惟皇賜蠎龍衣。手索068_349b以自隨。擬於歸盡時服之。至今時復披見。不覺淚下也。壬寅秋。冊延興府院君金悌男女爲繼妃。甲辰。遣使押解漂海人民五十七名。具奏上聞。丁未。又押解十九名。皇帝皆降勑奬諭。竝賜白金文錦。王自兵亂以來。憂勞成疾。屢有內禪之計。以諸臣不釋之故。黽勉聽政。至丁未夏。疾彌留。戊申二月初一日。棄群臣於行宮之正寢。壽五十七。在位四十一年。是歲六月十二日丁卯。葬于揚州建元陵西阜酉坐卯向之原。諡曰顯文毅武聖敬達孝。陵號曰穆。廟號曰宣宗。明年己酉。皇帝遣行人熊化。祭以大牢。又賜誥命。諡曰昭敬。吏部官謂本國告訃使曰。此美諡。王之德有以得之也。丙辰。光海加上徽號。改068_349c廟號爲祖。王資稟弘毅。德行純備。恪謹侯度。出於至誠。四十年如一日。凡迎詔拜表望闕等禮。必肅敬將事。雖在流離顚沛之際。未嘗少懈。每封進方物。必親自點視。或物力不逮。情意少歉。則比使臣還。不能安于心。對群臣語。一則曰皇恩。二則曰皇恩。瞻戴之誠。不啻如孝子之慕父母。師興之後。天朝文武將官前後出來者無慮數十百人。而上自元戎。下至都司指揮。無不殫誠致款。各盡其禮。病革之日勑書至。猶自力扶人拜跪。蓋血誠。非強爲也。事兩大妃如事所生。承顏養志。靡不曲盡。朝夕問安之禮。未嘗一日廢。有疾則竭誠祈禱。及其喪也。哀戚而盡禮。友愛天至。待二兄一姊。愛敬兩盡。終身不少替。068_349d性儉約不喜奢靡。聲色遊畋之樂。不留於心。食不重味。衣用澣濯。妃嬪宮人亦不敢服侈。喪亂之後。尤以縞素爲資。宮中粒食。不令遺地曰。此皆農夫辛苦之物。安坐而食已泰矣。況可暴殄乎。嘗見內人炙牛以喫曰。非牛不耕。人而殺牛。不仁甚矣。況今蕩敗之餘。雖嚴禁猶懼不足以孶息。豈可任其屠殺乎。嘗於行中失御弓。有司捕拾遺者欲法之。王曰。旣已失之。必有得之者。命釋之。提督聞王筆法精妙。求之甚懇。王辭以疾。蓋其微意不欲以小技示人也。畿民苦催糴。呈訴於駕前。王曰。有司獨不見畿甸田野乎。蓬蒿滿目。而乃忍催租耶。重惜民命。未嘗妄殺一人。每當決獄。必詳審讞辭。以求生道。謹守成憲。非068_350a有大段礙貫。則不喜紛更。禮遇臺諫。雖或過激。務加優容。初年。搆小室於寢側。以爲讀書之所。亦密令內需司營之。不以煩有司。玉堂覵知之。上箚請停。言甚切直。而委曲措辭答之。臺官乃引飾非拒諫等語以犯之。聞者縮頸而終不譴怒。愛用人材。各稱其器。尤重儒術之士。或有擠毀之者。必曲加保全。嘗語大臣曰。我國人物眇然。而其所以取之者。專在科擧。其間豈無不屑擧業而空老林下者。以人事君。卿等之職也。宜務求瓌材異行之士。使予得以用之。昔晏嬰薦其僕臣。謝安擧其兄子。苟其人也。不以親戚而嫌。不以微賤而廢也。其爲政。摠攬權綱。裁決不差。發號施令。輒成典訓。至於籌邊料敵。策敗算成。莫不出人意表。謙068_350b沖之德。出於天性。未嘗以賢智自廣。功業自喜。戊子甲辰徽號之請。發於一國臣民歸美之至誠。而嚴辭固拒。閱月不許。雖衆情難遏。終不免俯從。而中心則不樂焉。觀書。十行俱下。一覽皆記。而至其日用功程。則初不以尋行數墨。解釋文義爲事。酬酢萬機之暇。輒凝神靜坐。玩心高明。其所得有超出先儒箋註之外者。嘗語講官曰。存心有要。日用之間外物之來。千緖萬端交接於前。必廓然大公。順而應之。不以動吾中。然後當靜而靜。當動而動。此先儒所謂動亦定靜亦定也。不然而邪思妄慮有如雲興。則雖欲靜之。而不可得矣。其獨詣之見類如此。晩而喜易。講讀硏窮。或至忘食。嘗曰。論語,孝經。特門人記孔子之言耳。聖人068_350c之所自作。只此十翼。天下豈有如此文章。讀之令人自不覺手舞而足蹈也。嗚呼。王文足以陶甄至治。武足以戡定禍難。明足以辨別忠邪。智足以綜理事務。眞所謂不世出之聖。大有爲之君。其中遭否運。暫罹播越。乃氣數治亂之所關。而卒能剗除戎疾。身致重恢。以永國祚於無窮。則非天下之英武。其孰能與於此。猗歟休哉。王元妃朴氏不育。繼妃金氏誕一男一女。男曰永昌大君㼁。爲李爾瞻,柳希奮等所搆誣。年八歲。廢處江華。府使鄭沆希光海旨。鎖之密室。燒其炕。令鬱冒而夭。女曰貞明公主。恭嬪金氏生二男。長臨海君珒。光海時以謀逆受誣。囚于喬桐。歿不以命。次卽光海君。戊申嗣位。欲敗度。縱敗禮。戕害同068_350d氣。幽閉母后。得罪於宗社臣民。癸亥廢。仁嬪金氏生四男五女。男長義安君珹。蚤卒。次信城君珝。次定遠大院君 。次義昌君珖。女長貞愼翁主。次貞惠翁主,貞淑翁主,貞安翁主,貞徽翁主。順嬪金氏生一男順和君。靜嬪閔氏生二男三女。男長珙。仁城君。戊辰孝立之叛。連謀事覺賜死。次仁興君瑛。女貞仁翁主,貞善翁主,貞謹翁主。貞嬪洪氏生一男一女。男慶昌君珘。女貞正翁主。溫嬪韓氏生三男一女。男長瑅。興安君。從逆賊李适于軍中。聽其擁立。爲官軍所戮。次慶平君玏。次寧城君㻑。女貞和翁主。貞明公主下嫁永安尉洪柱元。生三男皆幼。臨海娶牧使許銘女無子。光海娶知敦寧府事柳自新女。生一男祬068_351a光海未廢。封爲世子。癸亥。以罪廢賜死。信城娶判尹申砬女。生一女適典籍安弘量。大院君娶贊成具思孟女。生三男。今主上於序爲長。以天啓三年癸亥。撥亂反正。建中興之業。次綾原君俌。無子。次綾昌君佺。光海時受誣竄海島。冤瘐而歿。順和娶承旨黃赫女。生一女。適校理李景曾。珙娶參贊尹承吉女。生五男。佶,億,健。二幼。一女未笄。義昌娶判書許筬女。無子。慶昌娶僉知曺明勖女。生四男五女。男長昌原正儁。次陽寧君儆。出爲臨海後。次俅。次幼。女長適李後傑。餘幼。慶平娶郡守崔胤祖女。生一男幼。仁興娶佐郞宋煕業女。生一男二女。皆幼。寧城娶水使黃履中女。生一男一女皆幼。貞愼翁主下嫁達城尉徐景霌。生068_351b三男五女。男長貞履。縣監。次正履,愼履。女長適進士金珪。次適參奉李命寅。次適沈沆。次適正字權堣。次未笄。貞惠翁主下嫁海嵩尉尹新之。生二男。長墀。承旨。次坵。佐郞。貞淑翁主下嫁東陽尉申翊聖。生五男四女。男冕,昪,炅,最,曏。女長適洪命夏。餘幼。貞仁翁主下嫁唐原尉洪友敬。生一男琂。貞安翁主下嫁錦陽尉朴瀰。生一男世橋。貞徽翁主下嫁全昌尉柳廷亮。生二男二女。男淰,潝。女長適李重揆。次幼。貞善翁主下嫁吉城尉權大任。生一男石奮。貞正翁主下嫁晉安尉柳頔。貞謹翁主下嫁一善尉金克鑌。貞和翁主下嫁東昌尉權大恒。我中殿韓氏。西平府院君浚謙女。誕三男。長卽世子。次鳳林大君 。次麟平大君㴭。068_351c今主上卽位之八年崇禎庚午。原州牧使沈命世上疏言穆陵地不吉。且有水氣。上瞿然命大臣禮官議遷卜。咸曰。편002元陵第二岡實先王之所屬意。而戊申特以年月不利不克用。今不可舍此他就。上從之。以十一月二十一日丙申。奉遷焉。壬坐丙向也。方庀事。命曰。誌文可改撰。蓋以戊申誌文不錄璿派故也。臣經世職掌文翰。旣承綸音。不敢以不能辭。且嘗逮事先王。有一二嘉謨懿行得之於經幄者。而不見錄。故謹就原誌中略加檃栝。序列璿派如右。若其盛德大業之巍然煥然者。自當在人耳目。與天壤俱弊。非區區文字所能與也。













 孤潭逸稿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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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錄○雜著○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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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曹參議李純仁
萬曆三十三年四月初五日。行都承旨臣申欽敬奉傳旨。人臣效忠而戮力。本無大小之殊。王者賞功而酬勞。寧有貴賤之別。盖率百王之舊。非循一人之私。顧眇末之寡躬。嗣艱大之洪業。綢繆迨未雨。念詎弛053_068d於侮予。憂懼若隕淵。戒恒存於臨汝。何圖賊虜之猖獗。未免神器之流離。幸賴皇威之遠揚。尙克寶命之無墜。斯不忘于修扞。用以紀夫旂常。惟玆卿士大夫。越爾吏胥下賤。或陪扈而奔走。或鞅掌而馳驅。凡繫前後協贊之徒。悉皆載錄原從之列。爰擧盛典。庸示寵章。順和君,仁城君珙,義昌君珖,達城尉徐景霌,海崇尉尹新之,東陽尉申翊聖,唐原尉洪友敬,錦陽尉朴瀰,全昌尉柳廷亮,吉城尉權大任,領中樞府事李德馨,判中樞府事沈喜壽,知中樞府事李希得,右承旨柳夢鼎,杞城府院君兪泓,前府尹李覮,前郡053_069a守趙公瑾,前經歷朴廷吉,淸平府院君韓應寅,牧使辛慶晉,僉知中樞府事吳億齡,戶曹判書李誠中,行判决事鄭光績,禮曹參議李純仁,知中樞府事閔夢龍,寧山副令禮胤,兵曹參議鄭士偉,參知黃廷式,副護軍李海龍,副護軍秦孝男,吏曺參議洪渾,前牧使許澂,前郡守朴承宗,前佐郞兪大建,前郡守李應寅,前郡守宋檥,前監察宋齊賢,茂城君尹泂,知中樞府事李薲,左贊成具思孟,三嘉縣監柳挺立,行參判尹又新,大司成李睟光,順川郡守金時獻,吏曹參議黃暹,錦山守誠胤,禮曹判書許筬,開城府留守許潛,及053_069b第黃愼,郡守李尙弘,廣林君李廷立,領議政尹承勳,左議政金命元,右議政奇自獻,及第鄭澈,全羅道觀察使洪世恭,大司憲朴應福,成川府使李尙毅,及第李尙吉,黃海道觀察使權憘,仁川府事尹健,前縣令韓濩,晉興君姜紳,副率朴東尹,行參議李瓘,參判丁胤福,雲川君愼,原川君徽,知敦寧府事柳自新,典翰柳希奮,前牧使邊良佑,刑曹參議柳祖訒,前正金玄成,前牧使崔岦,西興君鶴貞,咸安郡守邊以中,前郡守李貴,護軍尹昉,湖城君柱,右參贊黃璡,寧原君洪可臣,戶曺參判權悏,行護軍洪慶臣,左副承旨姜053_069c籖,宗簿寺正金權,軍資監正安大進,忠州牧使趙存性,前府使朴東善,司僕寺正李壽俊,弻善曺倬,前庶尹申黯,錦山郡守李翼賓,前正郞鄭宗溟,佐郞梁山璹等乙良。扈聖原從功臣一等。左贊成崔滉,商山君朴忠侃,益城君洪聖民,漢陰君俔,忠淸道觀察使李弘老,慶尙道觀察使李時彦,驪陽君閔仁伯,刑曺判書張雲翼,參判鄭彦智,參判柳永吉,淸川君韓準,知中樞府事鄭昌衍,文興君柳思瑗,及第李海壽,及第白惟咸,承旨柳拱辰,前府使黃沂,前正郞李春英,河山正璡,前府使金台佐,前郡守姜紞,及第南以恭,053_069d縣監李幼淸,正郞黃謹中,縣監宋廷琦,前洗馬李山斗,應敎柳澗,校理吳百齡,正郞崔起南,正言李民寏,獻納南晫,星州牧使洪瑞鳳,舍人李愖,司諫權縉,遂安郡守許筠,正郞閔汝任,修撰李光胤,掌令柳永謹,修撰蔡慶先,修撰閔慶基,安州牧使權盼,瑞山郡守金順命,注書吳靖,前縣監黃大義等乙良。扈聖原從功臣二等。河原君鋥,判中樞府事金睟,鵝川君李增,知中樞府事李戩,判書任國老,行咸鏡道觀察使徐渻,知中樞府事盧稷,參判閔汝慶,昌山君成壽益,參判金宇顒,左尹許晉,前府使洪履祥,吉州牧使安053_070a宗祿,副提學尹覃茂,行仁川府使姜綖,行驪州牧使禹俊民,行光州牧使李慶涵,左承旨柳夢寅,行丹陽郡守黃廷喆,司禦李啓,益城君享齡,寧堤君錫齡,興寧君秀荃,西陵君銛,西川君錦,參議任蒙正,行護軍趙振,前掌令崔有源,牧使成好善,前牧使李世溫,前牧使黃洛,韓山郡守金興國,郡守趙守翼,前府使李弘輔,華山都正楹,前郡守李培達,前正郞兪濯,博士金孝幹,行同知中樞府事李廷龜,典籍李德溫,文化縣令林懽,洗馬盧並俊,吏曹佐郞宋碩祚,縣令李雲福,監役官李星男,學生李井男,行副護軍鄭逑,縣令053_070b李元輔,承仕郞尹聃壽,贈吏曹參議尹春壽,府使尹暄,贈都承旨尹晛,贈直提學尹皥,前縣監尹履之,及第沈詻,參判李友閔,縣監李師閔,刑曹正郞申慄,前縣監尹晊,學生柳袽,學生柳袗,行牧使柳雲龍,及第鄭曄,全州判官金瑬,正言柳格,郡守洪汝栗,執義洪迪,持平李砬,前參奉成櫟,行黃州牧使朴東說,縣監沈大復,前縣監崔行,學生朴安吉,學生朴安義,直長宋興祚,縣監李春馨,縣監柳焞,行郡守沈仁謙,靑陽君沈義謙,行府使沈禮謙,司果沈智謙,行府使沈信謙,行郡守沈孝謙,水運判官沈悌謙,待敎沈忻,江華053_070c府使沈悅,前縣監沈悰,前翊贊趙玲,前縣監李劼,前縣監尹耆獻,持平姜秀峻,縣監魚夢龍,前郡守申景禧,監察申景祉,判尹申砬,監役官申礏,兵使申硈,府使申景禛,監察申景裕,學生李仁健,學生李義健,前縣監李應男,前縣令李文薲,左承旨姜緖,執義李德泂,應敎李善復,吏曺正郞丁好善,前佐郞成俊耉,佐郞李潔等乙良。扈聖原從功臣三等爲等如施行爲只爲。下吏曹爲良如敎。萬曆三十三年四月初五日。行都承旨臣申欽敬奉傳㫖。扈聖原從功臣一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父母封053_070d爵。二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子孫中。從自願加散官一資。其中無子孫者。兄弟壻姪中。從自願加散官一資。三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爲乎矣。各等通訓以上乙良。子孫兄弟甥姪女壻中一人乙。從自願加散官一資爲只爲。下吏曺爲良如敎。
扈聖功臣都監堂上臣李恒福,李好閔,朴東亮。








 
 葵窓遺稿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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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난001난002靜嬪閔氏行狀 a_122_2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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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嬪閔氏。係出驪興。其上世有諱令謨。高麗仁宗戊午及第。金紫光祿大夫開府儀同三司,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集賢殿大學士,判尙書吏部事,監修난003,上柱國,太子太師。相明宗執政四十三年。享年八十四。贈諡文景。厥後世以文雅高顯。爲東國令族之冠。逮入我朝。高祖諱宗元。曾祖諱子芳。尙成宗大王女敬淑翁主。授順義大夫驪川尉。祖諱希說郡守。考諱士俊江華府使。妣淑夫人新昌孟氏。司瞻 편001寺僉122_219d 正諱益善之女。領議政諱思誠七代孫也。以隆慶丁卯九月二十九日生嬪。是年宣祖卽祚。萬曆庚辰。嬪年十四。選入爲淑儀。後歷昭儀난004貴人。又陞爲嬪。嬪自弄瓦之初。資性端貞。塞淵有素。及侍至尊。益礪恭謹。事宣廟난005十年。小心畏愼。非禮不行。其視私謁干澤。若有所浼。甚爲上所敬重。尋常燕見。上不冠則不見。宮中上下。莫不尊敬。比之如白玉無瑕。懿仁王后禮遇殊異。每事必咨。嬪仰事以誠。情義相孚。禮接嬪僚。恩愛兼篤。凡爲子孫計。一未嘗仰122_220a 籲宸聰曰。吾豈敢以私事。干瀆天聽。以累聖德乎。以故後世子孫。無不貧窮。人皆目之曰。此靜嬪之子孫。嬪有淸昭之德난006。不爲子孫난007立產業。唯以儉德遺後。故如是不富云난008。壬辰倭亂。去邠蒼黃。嬪隨往龍灣。期以一死。流離顚沛中。承事兩殿。終不少懈。未幾隨駕還京。丁酉之亂。又避海西。已而隨內殿還난009。丁난010。宣廟不豫。日漸危重。嬪侍側煎慮。氣絶者난011。宮中上下。爲之酸鼻。戊申。宣廟賓天。執喪踰制。仍成宿。退居外第者十九年。仁穆王后尤加尊122_220b 禮。時以手札。候問起居。或迎入禁中。咨訪女範。恩眷甚隆。癸丑。光海肆虐。倫紀滅絶。嬪憂懣病劇난012。乙卯。先君爲賊臣爾瞻所嫉。誣坐重獄。事將不測。嬪病益篤。廢絶人事난013。癸亥仁祖改玉。日月復明。首被禮遇。恩渥尤重。嬪奉養偏母。誠孝天至。睦姻有恩。周救不靳。至於下賤婢僕。無不懷恩。性好儉約。衣不曳地。錦繡珠翠。平生不御。留意女工。治絲繭務紡績。一如寒女。常閱內訓小學等書。動遵禮節。以訓子女。每以孟母三遷之義。反覆諄諄。先君與季父之學問就122_220c 난014。亦由嬪內訓有以導之也。乙丑。先君坐無妄之辜。遠謫嶺東。嬪憂念感疾。丙寅將不起。上聞疾劇。命放先君之謫。遣中官護行。使之連夜上來。行未戾洛。嬪已屬纊。嗚呼哀哉。嬪以天啓六年十一月初二日。卒於慶幸坊난015先君之第。享年僅六十。訃聞。九重震悼。朝野嗟惋。命官賜弔祭賻典特優。遣中官它 편002喪事。越明年丁卯正月十七日。禮葬于楊州塔谷里亥坐巳向之原。嬪有二王子三翁主。男長卽先君仁城君諱珙。次仁興君諱瑛。女長貞仁翁主。次貞122_220d 善翁主。次貞謹翁主。先君娶議政府난016左參贊尹承吉女。生五男二女。男長佶海平君。次億出繼三寸난017順和君後。海安君난018。次健乙未난019喪。因遺志用兄亡弟及之禮。定爲奉祀。海原君난020。次伋海寧君。次僖海陽都正。海平娶幼學申岌女。海安娶幼學高尙義女。海原娶幼學沈闈女。海寧娶幼學金有海女。海陽初娶進士安述女。再娶縣監鄭希尹女。三娶幼學李應善女。女長適武人난021南壽星府使。次適進士沈長卿。早沒無後。仁興君娶僉正宋煕業女。生二男二女。男長俁朗善君。122_221a 次侃朗原君。朗善娶直長成雲翰女。朗原娶右議政李行遠女。女난022幼學趙泰開。次幼。側出一女適尹敏聖奉事난023。貞仁翁主下適唐原尉洪友敬。生一男琂郡守。初娶正郞李莘女。再娶郡守呂爾亮女。貞善翁主下適吉城尉權大任。生一男瑱奉事。娶監司洪憲女。貞謹翁主下適一善尉金克鑌。無後。以族姪世泌爲後。監察。娶參議난024時煥난025女。海平無後。側出一女適幼學任大受。海安生二男三女。男長沈瀛昌君。次洬幼。瀛昌娶幼學宋孺慶女。女長適生員權德난026。側出三122_221b 男。난027克耽山守。난028冕耽溪守。난029㝸耽陵守。耽山娶幼學許湜女。耽溪娶幼學李元奎女。耽陵娶察訪宋榮業女。海原生六男一女。男長沇花昌都正。次湸花善都正。次渷花山副正。次㵾花春副正。次淝次洮난030。花昌娶縣監盧景命女。餘未娶。海寧生四男二女。女長適幼學尹世遇。餘幼。側出一男一女。男完瀛洲守。娶縣監洪興난031女。女適幼學沈楣。海陽無後。以渷爲後。壽星生一男天錫。娶府使黃埏女。朗原生二男幼。敏聖生三男三女幼。琂前室난032生一男。後室生二男二女。122_221c 男長箕敍進士。次箕疇,次箕協。箕敍娶府尹沈摠女。箕疇娶縣監趙時馨女。女長適進士李日翼。餘幼。瑱生二男一女。男長以經。次守經。以經娶獻納鄭錀女。守經娶佐郞李先慶女。女適獻納난033吳始壽。世泌生一女。適幼學鄭洙觀。耽山生一男一女。男材河陽令。未娶。女幼。耽溪生一女。瀛昌生一男德潤。生二女난034。花昌生一男一女。世遇生一女。瀛洲生二男一女。楣生三男二女。箕敍生三男。以經生一男一女。始壽生一男一女。幷幼。內外子孫。幷九十餘人。嗚呼。嬪之沒。今閱三十122_221d 年光。而尙闕墓道난035一字之난036文。實由家禍之罔極。每臨祭掃。俯仰天地。罪恨益深。顧惟當嬪無恙之時。健未弱冠。纔識嬪之面目。懿行淑範。未能心記。況今季父捐館。偏親終堂。兩兄相繼而沒。舊人無存。益無由考文而知之。冞增痛怛。姑以耳目所及聞見者。略記梗槪。及錄其譜系年난037子孫之列。以請碣陰之銘文。少伸追慕之至情。嗚呼痛哉。

[난-001]眞 : 無眞字
[난-002]母 : 母作妣
[난-003]國 : 國下。有史字。是。
[편-001]瞻 : 
[난-004]陞 : 無陞字
[난-005]四 : 四作三字
[난-006] : 自以故。至之德二十七字。不載。
[난-007]子孫 : 無子孫二字
[난-008]故如是不富云 : 無故如是不富云六字
[난-009]京 : 京作都字
[난-010]卯 : 卯作未字
[난-011]久 : 久作數字
[난-012] : 自癸丑。至病劇十五字。不載。
[난-013]廢絶人事 : 無廢絶人事四字
[난-014]道 : 就道。作成就。
[난-015]慶幸坊 : 無慶幸坊三字
[편-002]它 : 
[난-016]議政府 : 無議政府三字
[난-017]三寸 : 無三寸二字
[난-018]海安君 : 海安君三字。在於出繼之上。
[난-019]之 : 無之字
[난-020]海原君 : 海原君三字。在於乙未之上。
[난-021]武人 : 武人。作府使。
[난-022]適 : 適上有長字
[난-023]奉事 : 奉事二字。在適字下。
[난-024]參議 : 參議。作承旨。
[난-025]時煥 : 時煥二字。作俔字。
[난-026]潤 : 潤下。有餘幼二字。
[난-027]長 : 無長字
[난-028]次 : 無次字
[난-029]次 : 亦無次字
[난-030]幼 : 幼上有及女二字
[난-031]祖 : 祖作祚
[난-032]前室 : 無前室二字
[난-033]獻納 : 無獻納二字
[난-034]生一男德潤。生二女 : 瀛昌生一男德潤生二女凡十字。在於觀字下耽字上。
[난-035]墓道 : 墓道之下。無一字一箇字。
[난-036]刻 : 無刻字
[난-037]月 : 年月二字。作生卒。

 
 기언 별집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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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跋)
권생 순경(權生順經)의 가장 세적(家藏世跡)에 대한 발

서호(西湖)에 사는 권생이 이 늙은이를 연상(漣上)으로 찾아와서 그 선대의 필적을 나에게 보이며 ‘한 말씀 기록해 달라.’ 하니, 그가 조상을 위하는 뜻이 또한 갸륵하다. 그 가운데 길창(吉昌 충정공(忠貞公) 권협(權悏)의 봉호)과 길흥(吉興 권신중(權信中)의 봉호) 두 공(公)에 대해서는 이 늙은이가 일찍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은 일도 있다. 길창군의 공렬(功烈)과 거룩한 행적은 사책(史册)에 드러나 있으며, 생의 5대조(祖)인 동흥공(東興公 권상(權常)이니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이다)은 지행(至行)으로 자손을 가르쳐서 온 나라가 칭송하고 있다.
지금 생은 조상의 필적을 공경히 받드는 마음으로 그 유훈을 받들어 세덕(世德)에 욕이 미치지 않게 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능히 그 정성을 다했다 이를 만하다.
이 늙은이는 생의 성효(誠孝)에 감동하여 삼가 이 글을 써서 그 아름다운 뜻을 더욱 권장한다.
신유년 10월 13일에 팔십 노인은 석록임거(石鹿林居)에서 쓴다.


 
靑莊館全書卷之四十九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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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耳目口心書[二]
[耳目口心書] a_258_379a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577_av049_01_001: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妄想走作時。仰看無雲之天色。百慮一掃。以其正氣故也。且精神好時。一花一草一石一水一禽一魚靜觀。則胷中烟勃雲蓊。若有欣然自得者。復理會自得處。則却茫然矣。
細看萬物。腐臭以外。無非生氣英英。不可禁遏。而冉258_379b冉低垂者。匪久隣腐臭者也。
事從順境來好。非阿諛軟弱之謂也。阿諛軟弱。豈順境哉。是却逆境也。
才而輕者。機巧生則詐而淺。痴而鈍者。機巧生則譎而露。故不逃乎君子之眼也。其或詐而深。譎而秘。是無所不爲也。噫。古今無機巧者。果幾歟。
난001者。藏精汁之臟也。其所管不亦重乎。耳厚且堅大者。必壽。始知腎屬耳。腎宲則耳好。耳好則壽。自然之應。
肺六葉。應六律乎。幷兩耳爲八葉。應八音乎。葉中有258_379c二十四孔。應二十四候乎。大抵笙난002之象也。又曰。金五行之中。聲鋐鏗者也。肺屬金故爲聲臟。
春禽。其편001也和悅。秋蟲。其鳴也凄悲。是氣使之也。唐虞之文渾灝。叔季之文浮靡。其於氣何哉。
古之人。能役其才也。後之人。只爲才所役。役其才者。用於所當用。亦可止而止耳。役於才則飛揚滋蔓。無所不爲。愳哉。
人之病根。不浮則必滯。歷觀之。免乎此二者。盖無多矣。浮者。動之流弊也。滯者。靜之流弊也。欲自修及敎人者。於二者。必斟酌焉。
258_379d志大而無委曲者。濶。才粗而不精密者。濫。
便宜者。迷大節。因循者。失大業。姑息者。遭大憂。好勝者。値大敵。其勢然也。
君子處事。不可不敏。不可不靜。不可不精。不可不確。
人必以所好深者成。亦以所好深者敗。
無事時。至樂存焉。但人自不知耳。後必有忽爾。而覺爲此憂患時也。如前官恬靜。別無施惠於民。及其後官稍猛鷙。民始思前官不已也。
靑天中一片純白之雲。分明是李烱菴知心。
靜觀兄抱負。其弟者中心。忽藹然帶笑。聽鼎大讀書258_380a聲移時。
讀醫書。知人之得氣成形。皮骨肉膸筋髮脉臟之從何處來。廼始爲人。則人皆可爲孝子。
易惑於風鑑星數之說。而喜懼無常者。當患難榮利而得其正。吾未知信也。
馬首擧者。火之象。牛首曳者。土之象也。
天地間。無無虫之物。鐵之剛也。火之熱也。皆有虫。鹿有蜂。蛇有蚊。不足異也。
今人之不及古人者。只以今人自處。不以古人自處故也。若修置好事。但如古人而已。必有後人。贊我258_380b曰某古人。有某好事可學也。其所謂好事。不過吾今日所修置者也。
眙盱之睛。翕張之舌。吁其可怕。慈祥之儀。樂易之詞。噫其可愛。
我非乘千里馬者。然靜想夜乘千里馬者。仰看星斗應如練帶長。
有頎然丈夫。提余耳詔之曰。棄汝饕。曰。敢不從命。棄汝嗔。曰。敢不從命。棄汝猜。曰。敢不從命。棄汝矜。曰。敢不從命。棄汝躁。曰。敢不從命。棄汝懶。曰。敢不從命。棄汝名心。曰。敢不從命。棄汝嗜書。心瞠然熟視258_380c曰。書不嗜。當奚爲欲聾瞽我耶。丈夫笑撫背曰。聊試汝耳。
余十八九歲時。有語曰。心無妄意。想可久而花發。口無妄言。語可久而香生。白良叔搖筆沉吟曰。佛佛。余悵久之。
使鈍童子開聽。使狹婦人回心。事雖小。難於决頑民之訟。整亂軍之紀也。
觀萬物。可別具眼孔。驢度橋。但看耳之如何。鴿步庭。但난003之如何。蟬之鳴也。但看脇之如何。鯽之飮也。但看腮之如何。此皆精神發露。而至妙之所寄處258_380d也。
市有半餒半鮮之魚。可直二十文者也。買者。摘最敗之鮮。瞠立蹙鼻。顧笑而唾曰。已腐矣。可與犬。賣者。揚眉淺笑。摘最不敗之鱗曰。網今日。奚謂腐。佯怒整頓其腮鬣。徐藏之。買者曰。雖然。直幾錢。賣者曰。腐魚安有直。曰。試言之。曰。四十文。曰。十文。當販否則否。爭半晝。傍人勸之。平其價二十文。二者咄咄曰。我與錢多。我受錢少。旣歸。始詑眷屬。喜魚錢之各相當也。何勞勞乎。用孫臏虞詡法。初旣各心可知直二十文。相予受順無碍。今二者爭半晝。果誰258_381a得乎。誰失乎。
陰德如耳鳴。可自知。不可使人知。我不能而欲能者也。論人過失。如含血噴人。先汚其口。我爲而欲不爲者也。
文章到人所難言處。而會余心愛之。如天球。吾姪心溪子曰。邃洞幽蛛虛自裊。吾友騎萍子曰。黃牛聽雨角崢嶸。蛛裊時。想其脚幽虛可推也。牛聽時。想其角崢嶸可知也。洞與雨。影子骨子之間也。
願天。使我胸中。無宿物。使人口中。無橫議。
與其心飛揚而且大溺于物無所定也。寧細弄碎戱258_381b之。稍寓心而順暢。忘其煩躁也。
草蟲雖細。一飜倒一叫。何嘗有假餙。何甞有罥碍。只任眞機而已耳。
我若有伏臘之供。而不使老親飢。安事乎擧子業也哉。豈行道我乎。澤民我乎。只啖飯迂士耳。雖然。使我不勞役而淪其天眞。雖迂可不讀十三經,二十二代史乎。
袁石公。豈非異人乎。其詩曰。好夢因凉得。閑愁到水忘。無心而得耶。有心而忘耶。無論其有無。只自然耳。讀書詩曰。拭却韋編塵。衣冠對古人。著來皆肺258_381c腑。道破益精神。把斧樵珠玉。恢綱網鳳獜。擬將半尺帚。匝地掃荊榛。眞道得讀書法。
乙酉冬十一月。以炯齋寒。移居于庭下小茅屋。屋甚陋。壁氷照頰。坑煤酸眸。下嵲屼。奠器則水必覆。日射而上漏。老雪沁敗茅。墮漿垂垂。一滴客袍。客大駭起。余謝懶不能修屋。與弟相守。凡三月。猶不輟咿唔聲。歷三大雪。每一雪。鄰有短叟。必荷篲晨叩門。咄咄自語。可憐弱秀才。能不凍。先開逕。次尋戶外屨埋者。打拂之。快掃除。團作三堆而去。余已被中誦古書已三四篇矣。今天氣頗釋。遂抱書258_381d帙。西移于炯齋。有戀戀不忍離意。起身三周旋。廼出掃炯齋積埃。整頓筆硯。檢閱圖書。試安坐。又有久客還家之意。其筆硯圖書。如子姪之出拜。面目雖稍生。而憐愛撫抱。自不能禁也。吁其人情乎。丙戌上元書。
眞情之發。如古鐵活躍池。春筍怒出土。假情之餙。如墨塗平滑石。油泛淸徹水。七情之中。哀尤直發難欺者也。哀之甚至於哭。則其至誠不可遏。是故。眞哭骨中透。假哭毛上浮。萬事之眞假。可類推也。
哀之來也。四顧漠漠。只欲鑽地入。無一寸可活之念。258_382a幸余有雙眼孔頗識字。手一編慰心看。少焉。胸中之摧陷者乍底定。若余目雖能視五色。而當書如黑夜。將何以用心乎。
煩惱時。闔眼坐。睛瞙之間。作一着色。世界。丹綠玄素煜流蕩。不可以名。一轉而爲勃勃之雲。又一轉而爲瑟瑟之波。又一轉而爲纈錦。又一轉而爲碎花。有時而珠閃。有時而粟播。變沒須臾。局局生新。足可銷一塲繁憂。
馮時可滇行日記曰。滇南雖雪滿山頭。而寒不侵膚。冬日不短云。按沈佺期詩曰。四氣分寒少。三光置258_382b日偏。信然。
李太白。留別宗十六璟詩曰。我非東床人。令姊忝齊眉。始知太白妻宗氏也。
理學先輩。亦有能画者。寒暄退溪農岩三先生皆能画。而寒暄。諸法俱好者也。画傳曰。司馬涑水朱子皆名画。稗說曰。陳白沙画梅花。
智異山中有湫。湫上松樹森列。其影恒積于湫。有魚文甚斑爛。若袈裟。名爲袈裟魚。盖松影所化也。得之甚難。烹食則能無病長年云。
國初。有三公相傳帶。河演傳於辛碩祖。碩祖至判258_382c書而卒。帶遂不傳。此與呂虔事同。
淸平山寺。有高麗淸平居士李資謙頭骨。盛於石凾。庚午年大霖雨。山水暴至。仍失石凾。又有石碑。金富儀撰。七十年。兪江原監司某。命吏摺之。時冬月。墨凍。熾炭烘碑。碑皆破碎。惜哉。俗吏不曉事。
膃肭臍。海狗也。我國寧海平海等處。有之而皆牡也。每年作隊遵海而行。南至于南海縣。迎其牝孶尾而去。生牝則留其地。生牡則移居于東海。
文仲子王通。十五。爲人師。定宇先生陳櫟。十五。鄕人師之。李益齋。十五。人皆師之。
258_382d自如驛人。新買兒馬。不食蒭豆。試投五糓。亦不食。至於人所食者試之。皆不食。以燒酒與之。始喜飮。又剉黃大口與之。善吃。其後連喂二物。日行七八百里。丁丑歲酒禁後。不食死。
昔有十二歲童子。宿山家詩曰。夜宿幽人宅。彌淸俗客心。門前流水在。簷角碧峯臨。晩節依寒菊。閑情托素琴。松風如有意。斷續和孤吟。
昔有林萬戶者。名得忠。性豪邁。登崇禮門。吟曰。畵閣岧嶤出半空。登臨怳若駕飛鴻。平生壯志憑無地。獨卧乾坤萬里風。
258_383a昔有金興甲者。閭閻人也。能詩頗閒淡。其隣老携琴詩曰。飯後鳴鍾意自閑。橋頭深閉小柴關。孤砧每急黃昏際。十室長寒古木間。鳴度斷鴻猶北郭。照來纖月更西山。隣翁不是淸狂者。日夕那能佩酒還。餞罷過山寺詩曰。到來參佛坐。寂寞道心生。虛壁恒雲氣。空門只澗聲。風霜孤塔立。朝暮一鍾鳴。天際頻回首。殷勤念客行。
道學可因。文章可革。性一也。理也。才萬也。氣也。
天下事都不成於一權字。經權之權。志昏者用之。不知誤陷。權勢之權。氣越者用之。自歸失着。
258_383b拙者不濫。不濫則潔。潔則直。噫。拙人誰也。
石壁上三松層生也。老壯幼可辨。下松。上松之孫。中松上松下松之子與父。靜玩久之。儼有倫氣。
笑有三品。喜而笑。慨然而笑。雅諧而笑。人皆可以有此也。夫侮而笑。媚而笑。可一筆句當。
外孫連爲文職。高麗官制。有藝文應敎。秩雖卑。必擇其有文章重望。它日可主文盟者爲之。其選至淸且重。國初。仍之。權陽村近。經應敎。後典文衡。子止齋踶。又經其職。踶傳之李文烈季甸。季甸卽陽村外孫。傳之崔文靖恒。卽陽村之外孫婿。傳之徐文258_383c忠居正。居正亦陽村外孫也。蔡襄靖壽。卽陽村之弟梅軒公外曾孫。於陽村再從外曾孫也。亦得其職。
男妹一時大拜。尹左相子雲。卽申領相叔舟之妻兄也。一時大拜。申占句云。靑眼故人俱白髮。尹對曰。黑頭賢相只丹心。申妾名只丹心故也。
一門生三異人。鄭北囱,古玉碏兄弟。旣深修鍊之術。其堂兄桂軒礎。少闡大科。歷敭華貫。謝病杜門。硏精金丹之秘。世傳天仙降于其室。贈詩曰。桂香芳馥郁。仙馭自天來。因號曰桂軒。
258_383d宗室年七十九。始封爵。湖川君某。世宗曾孫。漢南君之孫。漢南母惠嬪楊氏。嘗奉養端宗。端宗爲上王。嬪亦坐廢。賜死。謫咸陽。生興安君衆生。衆生生湖川。旣絶屬。籍編民伍。年七十九。嘉靖甲午。伏闕上書。始命復錄璿譜。封湖川副守。明宗初。乃命追封其祖爲漢南君。父爲興安君。湖川。又以子功。追封君云。
師弟子一時爲國子長貳。退溪先生爲大司成時。李龜岩楨。爲司成。退溪弟子也。
成均司業。仁祖克大亂。首訪遺逸。張旅軒顯光。以258_384a持平召之。辭以老。特拜成均司業。國初。無此職。特爲旅軒設也。
甲子官爵。與古人同。洪忍齋甲子生。再典文衡。以禮判兼帶二相。戊辰入相。李月沙生年文章位次與之暗合。然忍齋壽八十。而月沙七十三云。
三孫同中進士。高靈府院君申叔舟孫子三人。同中進士。漢城試第一第二第三。徐四佳以詩賀曰。三顆聯珠叔仲昆。一時榜上策奇勳。旁人若問渠家世。上黨高陽內外孫。
三婿參龍頭會。贊成蔡壽婿三人。金勘,金安老,李耔258_384b也。蔡設龍頭會。安老,耔皆參之。勘欲與之。以非魁拒之。勘令其夫人告之曰。小婿三十五。爲大提學。乞以此入參也。蔡笑曰。是不可不許參也。召而與宴。
獻壽恩門大夫人。辛酉三榜壯元李石亨。率三榜獻壽于恩門權止齋踶。時大夫人李氏年踰七袠。康強無。有子贊成擥,承旨摯,中樞攀,護軍摩,司僕擎。皆一時勳臣。功名煥赫。
右相兼吏判。宣祖辛卯。柳西厓以右議政。上命兼吏判。西厓以前無此事。辭之。上不許。
258_384c大諫直拜都承旨。仁廟乙丑。鄭桐溪蘊。以大司諫遷都承旨。政院故事。承旨由同副。以次例陞。而今由諫院。直拜本職。出於特恩。
議政兼大提學。世祖朝申叔舟。以領議政。兼兩館大提學,禮曹判書。魚世謙,李荇,金安老。以議政。兼帶大提學。宣祖朝。柳成龍以左議政。兼大提學吏曹判書。
儐接盛選。顧崔兩詔使出來。李月沙廷龜爲遠接使。朴南郭東說,李東岳安訥,洪鶴谷瑞鳳。爲從事官。車五山天輅,權石洲韠,金南窓玄成。爲製난004官。258_384d韓石峯濩。以寫字。亦在行。李芝峯晬光。差都司宣慰使。後改迎慰使。盖極一時之選也。
三女節行。僇死人李允章妻。李梧里側室女也。夫死。誓死不食哭。日一啜溢米。衰麻不去身。五年而死。其妹李時行妻。丁丑避亂江都。江都敗。虜駈子女而歸。立號曰。吾完平李相國之女也。遂自刎。淑夫人李氏。梧里長女也。初聞其妹被擄死。不哭問故。然後哭曰。善乎死也。不沒其名也。
鄭門忠孝。鄭百亨。字德後。虜亂。以前掌令。入江都。虜陷城。衣朝衣。望行在所。四拜而自經。命㫌忠258_385a臣門。父孝成。昭敬時以淸士著名。有善行。㫌門。祖元獜。亦以至行。表孝子閭。高祖誠謹。好直諫。廢主殺之。曾祖舟臣。痛父非命。不食㓕性。恭僖時皆㫌其閭。五代祖陟。世宗朝錄淸白。
孝烈忠節四世八人。永膺先生李至男。性至孝。父掌令彦忱。乙巳謫舒川沒。先生以喪歸葬。親負土石。朝上冢悲號。莎草爲枯。母安夫人。有節行。患痢幾危殆。先生嘗糞。沐浴祈天。憂勞吐血以沒。孺人鄭氏。乙巳名臣鄭源之女也。其家旣滅門而死。繼母權氏無所歸。孺人請於姑。奉養於家三十餘年。258_385b先生之喪。日啜溢米。寒不易衣。三年哭一如。初顯宗十二年。命先生及孺人㫌表。長男基稷。性至孝。先生沒。哭極哀。頭髮盡白。未練以死。次基卨。昭敬朝以行誼。召用。光海時累徵不起。次女未笄。先生沒。啜粥哭。三年而死。基卨男惇吾。江都之敗。守節死之。其妻金氏。亦臨亂自决。次子惇叙。在江都遇賊。義不辱。赴海死。
一門三代四烈女。丁丑江都之亂。李月沙廷龜夫人權氏。白洲明漢妻朴氏。玄洲昭漢妻李氏。明漢子靑湖一相妻李氏。皆死節。一相妻。李汾沙聖求258_385c之女也。聖求妻權氏。亦死之。是又同女同節也。
前妻後妻皆烈女。韓五相字世翊。年三十七歿。初娶李相國聖求女。丁丑江都敗。守節死之。後娶鄭府使基崇女。五相死。鄭氏自刎殊而未絶。子均又死。終不食而死。
三世持哀而歿。洪耻齋仁祐。不勝喪而歿。子廸。亦未終制而歿。廸孫有阜。又哀毁逾制。旣三年。才逾月而歿。
永順君再登科。世祖朝設登俊試。命列卿大官宗室駙馬。皆赴試。親臨策問。大臣鄭獜趾,鄭昌孫,258_385d申叔舟爲對讀官。廣平大君子永順君溥。以正一品。入試居第五。賜恩榮宴于議政府。壯元金守溫以下。各賜鞍馬。幸溫陽設重試。永順君又擢重試第一。上大喜。特命加一日遊街。賜米五十石,喝翁三名,天童二百。乃異數也。永順歷事四朝。再策勳。聦明宏達。雖富貴。少無驕矜之色。掌撰誡鑑及六典。至成廟朝卒。年난005十七。
宗室駙馬及第永順君溥。登登俊試。春陽君䋱。參式年及第。駙馬河城尉鄭顯祖。參親試第三名。
宗室文武職。世祖朝。進禮君衡。有文武才。以慶尙258_386a兵使。入爲吏曹參判。
宗室入相。世祖爲首陽大君時。端宗癸酉拜領議政。龜城君浚。英宗난006孫也。討李施愛。再爲功臣。世祖戊子特拜領議政。時年二十八。十八爲兵曹判書。二十一爲都元帥。
至尊爲恩門。世祖設登俊試。得十三人。召諸人于內殿曰。古有座主門生之號。今是科予親策之。予當爲恩門。宜號是殿曰恩殿。越數日。兩殿坐思政殿。諸人獻爵。一如門生座主之例。東方所無之盛事也。
258_386b三塲壯元。栗谷先生。爲生員及會試,殿試壯元。李東州敏求。亦爲進士及會試,殿試壯元。
宗室登武科。世祖朝。銀川君號洗心亭。有慷慨之志。精敏之才。嘗擢武科。屢將禁旅。再受命分廵諸道。
兄弟同受方面。李坡。選授平安道觀察使。明年。弟封。又按黃海道觀察使。一時兄弟同受方面重寄。人皆榮之。
爲議政。父母俱存。鄭領相太和。六爲首相。處黃閣十餘年。父母俱存無
258_386c父及夫與子。皆上相。宋領相軼女。洪領相彦弼妻。而子暹。又爲領相。盧蘓齋守愼挽之曰。一德從三上台貴。百年除六老星尊。且其壽九十四歲也。三從又皆爲平安監司。父時以處女隨往。種桃于園。夫時爲夫人隨往。其桃花宲爛熳。後又爲大夫人。隨其子往。桃已老衰矣。遂攀援噓唏。有金城泣柳之嘆。
成均薦擧。文宗辛난007十一月。上語左右曰。今有布列朝著者。皆綺紈子弟。不學無術。國學生。必有通經史識治軆者。其令本館薦擧。난008薦進士安良258_386d生。上優秩用之。
入閣主文早年。龜城君浚。二十八。入相。尹士昕三十九。入相。李恒福四十三。入相。李德馨三十八。入相。三十一。主文。金壽恒四十四。入相。三十四。主文。金勘。三十五。主文。李荇四十。主文。南智十七。爲慶尙都事。亦異事也。
賜宅只三人。世宗朝。黃喜賜宅。宣祖朝。李元翼賜宅。肅宗朝。許穆賜宅。
親臨耆老宴。太宗親臨耆老宴。取題名案。親書御諱。上壽六十。則載上諱。從上敎也。又賜土258_387a田奴婢漁塲。以厚養耆老。門外。公卿以下皆下馬。
洪氏三世壽。洪裕孫。南陽吏也。佔畢弟子。號篠叢子。史禍。善類皆死。獨潔身以壽終。其子至性。博於百家。敎授千人。亦以壽考聞。又其子贊天。亦八十。自莊憲時。至純孝之世。二百七十餘年。只三世。
七世壽考。太宗王子益寧君移。八十餘。子秀泉君貞恩。八十七。子靑杞君彪。八十三。子咸川君億載。八十四。子文忠公元翼。八十八。子完善君義傳。八十。子倉守守約。七十九。七世二百七十餘年。
李氏慶壽宴。宣祖三十五年。政院啓前參議李258_387b蘧母今年九十九。當有老老之典。明年正月。賜餼廩。加爵其子右尹。推恩三世。又拜京畿觀察使。置酒上壽。卿大夫有大夫人承養者。晉興君,錦溪君,尹判書,韓參判,洪中樞,南參判,李中樞,晉昌君,興君,尹參知,權少正,姜翊衛,李中部爲十三人。明年大合設慶壽宴。上令諸道供給。又賜法樂。百歲夫人。以上壽最尊。姜相國貞敬夫人。以命婦最貴。皆中堂南面。其下八大夫人。各以命數爲叙。東西相向。諸夫人。各從後列序。禮畢。晉興以下諸公。皆再拜。子孫衣冠而侍列者。十九人。折衝將258_387c軍文荃,國子典籍弘立,獻納讓最顯。其在執事之列者。又十六人。各擧觴上壽。百歲夫人蔡壽之從女。生於弘治甲子。沒於萬曆丙午。歷三萬六千甲子。爲一百二歲。觀察公七十沒。有二姊。皆九十。孫樞府公。又八十餘。諸執事子孫入相者一人。繡衣陞朝者七人。爲㙜省者一人。出宰百里者六人。
二女爲王妃。睿宗章順王后。成宗恭惠王后。俱上黨府院君韓明澮女也。又有二女一爲王后。一爲王子夫人。西原府院君韓確女。昭惠王后也。又一女桂陽君璔夫人也。又有二婿皆大君者。258_387d平陽君朴仲善婿。月山大君婷及齊安大君琄也。
外孫七王子。洪逸童女。成宗朝淑儀也。生完原君燧,鳳安君㦀,甄城君난009,益陽君懷,景明君忱,雲川君,楊原君憘。又金元女。世宗朝愼嬪也。生桂陽君璔,義昌君玒,密城君琛,翼峴君璭,寧海君瑭,潭陽君난010。此六王子也。
兄弟尙主。太祖朝慶愼宮主駙馬。上黨尉李薆。弟淸平尉伯剛。太宗난011貞順翁主駙馬也。睿宗朝顯肅公主駙馬。豊川尉任光載。弟豊原尉崇載。成宗朝徽淑翁主駙馬也。太宗朝。淑寧公主駙258_388a馬坡城尉尹愚。從弟坡平尉尹嚴淑慶翁主駙馬也。成宗朝慶順翁主駙馬。宜城尉南致元。從弟宜川尉燮元。徽貞翁主駙馬也。宣祖朝貞善翁主駙馬。東尉權大任。再從弟東昌尉大恒。貞和翁主駙馬也。亦有祖孫尙主者。世宗朝貞顯翁主駙馬。鈴川尉尹師路。孫鈴平尉燮。成宗朝貞淑翁主駙馬也。成宗朝惠淑翁主駙馬。高原尉申沆。孫靈川尉檥。中宗朝敬顯公主駙馬也。亦有叔姪尙主者。定宗朝德川郡主駙馬。府使邊尙服。從子柔川尉孝順。太宗朝昭善翁主駙馬258_388b也。
三世壯元及第。金千齡,金萬편002,金慶元。兄弟壯元柳自漢,柳自濱。閔鼎重,閔蓍重。柳命天,柳命賢。吳瑗,吳瓚。
六兄弟登科。元海宏子植仁祖壬午科。楫仁祖乙酉科。樀孝宗甲午科。格孝宗辛卯科。梲顯宗丁酉科。㯙顯宗癸卯科。
善山名賢。善山自高麗時。名賢輩出。金,吉再,金淑滋,金宗直,李孟專,河緯地,鄭鵬,朴英。
名賢一時居魁。退溪,南冥。同居慶尙道。一時俱參左258_388c右道初試。各爲壯元。盛事也。兩先生生幷一世。同居一道。而一生末由相逢。退溪之沒。南冥痛悼甚也。
至尊郊送都元帥。國朝都元帥自魚有沼,尹弼商及壬辰以後數人。皆無設壇推轂之禮。仁祖卽祚之年四月。親送都元帥張晩于西郊。上御戎衣。彤弓赤矢。乘馬以出。至陣。都元帥率將士。具櫜鞬。迎於路左。上御幄殿。大司馬宣軍令。召元帥入。以軍禮見。禮訖。就座。張軍樂。進禮饍。上解所御釰以賜。數百年來所未有也。
258_388d南夷北胡爲耦射。世祖辛巳。對馬島主宗난012職。遣平茂續。密告邊警。上嘉之。授僉知中樞院事。一日後苑觀射。茂續與野人浪將家老。爲耦較藝。上謂三軍都鎭撫禮曹判書洪允成曰。爾職長春官。且典兵務。邊境之事悉主之。今南北一家。皆投誠欵。宲惟卿等左右之方是賴。其後茂續。親謁判書私第。身行奴隷之禮。上特許便宜相接。
養生家。子時後披衣坐。面東或南。盤足坐。叩齒三十六通。握固閉息。內視五臟。肺白肝靑脾黃心赤腎黑。次想心爲光明洞徹。入下丹田。佛家有白骨觀。258_389a初想其形。從一點精氣始。漸漸胞胎孕育。生産稚乳。長大壯宲。衰老病死。以至屍骸胖脹枯僵。久之化爲白骨。旣想爲白骨。則視其身常如白骨。所以厭棄脫離。而無留戀之患也。夫二家比諸吾儒涵養省察之工夫。皆是妄想。然亦十倍勝於一種浮躁之徒。閑居獨坐。衆慾紛挐。無所抵定也。大抵二氏工夫。篤宲可愛。
文章以善形容爲好。杜甫曰。鵝兒黃似酒。東坡曰。酒如人面天然白。趙孟堅梅譜詩曰。踢鬚正七萼則三。點眼名椒梢鼠尾。傳肱蟹譜云。蟹鶻眼鱟足雖258_389b腦蜩腹。其介類拳丁。其螫類執鉞。兪益期曰。檳榔木。大者三圍。高者九丈。葉聚樹端。房栖葉下。華秀房中。子結房外。其擢穗似黍。其綴宲似槲。其皮似桐而厚。其節似竹而穊。其中空。其外勁。其屈如覆虹。其伸如縋繩。步其林則寥朗。庇其廕則蕭條。李廌画品曰。有二龍。自山下出。龍蜿蜒驤首雲間。水隨雲氣布上。雨自爪鬣中出。魚蝦隨之。或半空而隕。一龍尾尙在穴前。踞大石而蹲。擧首望雲中。意欲俱往。怒爪如腥。草木盡靡。波濤震駭。茶經以魚目湧泉。連珠爲煮水之節。推此以觀。文章之善形258_389c容也。
事有幸不幸。不惟李廣雍齒之封侯與不封侯也。淵明之五子。皆豚犬耳。然至今其名不朽。杜甫之奴段。韓愈之奴星。若爲富貴無識之奴隷。則人孰能知之乎。以將帥而死於節義者。終古不知其幾人也。今中國人。家家奉關雲長神。刻像画像鑄像繡像塑像。與佛敎並埒。至我國亦立祠。豈非幸之甚者歟。曾先之十九史畧。中國賤之。幾乎絶而不見。幸而流於東國。爲小兒先入之書。最有絶倒一事。倭國關白。世世有大司馬大將軍博陸侯之號。盖258_389d取漢宣帝時。霍光稽首歸政。上謙讓不受。諸事皆先關白光。然後奏御。意關白跋扈。有廢立其王之事。假此以名之乎。於光。幸耶。不幸耶。何不兼取霍字爲姓耶。然則尤幸耶。尤不幸耶。
凡水糓之味。入胃則津液。各赴其道。酸先入肝。苦先入心。甘先入脾。辛先入肺。醎先入腎。余甞未究食辛而淚。食酸而涎。今始知肝屬木。酸味嗞而木氣旺。則脾土動而廉泉開。涎廼湧也。난013屬金。辛味嗞而金氣旺。則肝木動而液道開。淚廼流也。且雖不食酸。而或見酸談酸思酸。則涎輒滂霈何也。未可258_390a知也。
古人曰。愛而知其惡。惡而知其善。此天下之公心。廣大而且委曲。又曰。隱惡而揚善。此大統處人之言。別無委曲也。又曰。見善如己出。見惡如己病。此分別二者。眞心惻怛而稍露圭角也。於數者。未嘗不服膺。而亦自主。棄短取長。利益吾身。及見朱子長善救失之說。自不覺三復贊嘆其忠厚正大之至也。棄短取長。非不好也。此言一出。自歸褊小。益覺義理之無竆也。但愛知惡。惡知善。及長善救失。工夫純宲。然後可爲也。如己出如己病。加力則猶可258_390b及也。隱惡揚善。棄短取長。雖中人。庶幾爲之也。此數說。盖有難易精粗之別耳。又有一種密緻而細究其情則悖戾不可掩者。莊子曰。爲善無近名。爲惡無近刑。若如此言。擇其小惡。無所不爲也。棄其大善。不敢爲也。依阿中間。情狀盡露。此中士耻不爲也。莊子休。豈非豪傑巨人乎。何言之恰似細人也。全身遠害之學。流弊至此。此其所謂異端也。漢昭烈不過閱歷兵塵。老於弓馬之一武人。然其戒子曰。勿以惡小而爲之。勿以善小而不爲。此言明正。莊子之所不能道也。以其少師盧植。稍聞儒者258_390c之術故也。異端吾道之別。觸處現露如此夫。
金眞狂啓升。筆法奇逸。爲人磊落。其圖書印章。刻新羅憲康王第三子派八代平章之孫龍門山玩羲齋主人金啓升君난014甫自號眞狂七十三歲翁字。弱冠。選入於玉冊書寫。十七。又差都城門額。終不得預。而戊辰。通信使往日本。以別書寫。隨行。題日本正殿之額。日本山東居士評曰。見其書。不見其面可乎。右軍耶。眞狂耶。身雖異兮。手則同焉。異哉。貴所難言。匕匕腐人林本裕評曰。中國筆脉。自元常。止於雍紀春。無復繼者。今觀金李兩筆。出於258_390d海東。未知海東山川果何如。而孕出人才也。然則此兩人之筆。可謂當今之天下一筆也。
連山士人姜氏。無男。只有二女。長女五歲。次女二歲。慈母見背。長女負抱其妹。養之。乙酉歲。長女已十二歲。次女난015歲。一日父往遊隣里。其家失火。二女鋪席於火不及處。先入祠堂。抱四世神主。次第安措於席上。又入而長女抱其母神主。具有祔位神主一座。次女抱之將出。而火勢已急。圍祠堂。二女各以手堅抱神主。伏以死之。人滅火求之。膚燒爛。神主完全。不汚一點烟氣。死猶堅抱。邑中多士。258_391a請㫌門。上許之。命㫌曰。殉孝二女姜氏之門。盖其家風遵禮。二女習聞嘉訓云。丙戌正月記。
光州村婦。有二子。一七歲。一五歲。俱充軍籍。里丁來徵軍布。村婦終夜對紡車。引綿絲。二兒皆眠。村婦油然愛之。手撫二兒莖。獨自語曰。汝有此而爲男子子。故吾不辭勞而紡絲也。二兒佯睡潛聽。明日共於屛處。相對泣曰。吾輩有莖。故母憂而勞矣。盍去此以弛吾母憂也。遂引刀兄割弟莖。弟割兄莖。埋之。以綿創。血流于袴。母驚問。兒語其故。母持大哭曰。匪嫉汝有莖。吾憐汝爲男子而戱之也。太258_391b守聞之。復其戶。五六年前。外黨朴汝秀氏。爲余言。丙戌正月記。
余於雜記中。得二孝子。皆丐兒也。今合書之而有感。又思王延,江革之孝。余眼甞有淚而末由也。吳門。有貴人月夜過橋上者。聆其下有歌唱聲。下覷之則丐子也。坐一老嫗塊上。以所丐得酒。捧缶而跪進焉。唱歌以侑。貴人訝詰之。丐子驚嘻曰。儂寠人。聊爲阿母歡。貴人嗟嘆良久歸。明日轉相傳語稱異。後時時窺之。見所娛其母者。多類是。自是諸貴人。每宴。輒置餘豆間曰。以待孝丐兒也。長洲相城。258_391c有一乞兒。姓沈。年在中歲。每詣沈隱君孟洲所。請丐。凡所得。多不食而分貯之筒篚中。隱君初不爲意。久而問焉。則曰將以遺老娘耳。隱君始異之。潛令人偵其所爲。丐至一岸旁。坐地。出簞中飮食。整理之。擎至船邊。船雖陋而甚潔。老媼坐其中。丐登舟陳食母前。傾酒跪而奉之。伺母接杯。乃起蹈舞。而唱山歌。作嬉笑以樂母。母殊意安之也。必母食盡。乃更他求。若無得。則自受餒。終不先食之也。日日如之凡數年。母死。丐始不見。隱君嘆詑。亦時少周之。
258_391d屈原懷沙。過甚之忠也。於陵吐鵝。過甚之潔也。凡有善行而失於過甚者。平人所不敢爲一二。而聖人亦不以盡善許之也。直不疑買金償郞。幸後見獲而明其誣也。若不見獲。終晏然受盜之名乎。郞金猶細事。或誣以盜太廟祭器。亦不辨而甘受戮乎。婁師德唾面待乾。唾面者。至穢之而視猶犬豕也。吾無過惡。則拭之而不深怒。可也。彼若愈侮而刺之以刃。亦不拭血而自平常乎。雖然。師德之言。可戒浮躁狠愎者也。梁劉凝之。爲人認。所著履。卽予之。此人後得所失履。逬還。不肯復取。夫予之。異於258_392a人也。然還之而不受何義歟。非執拗則矯餙。金國王去非。北隣有喪。忌東出。西北皆人居。南則去非家。去非壞蠶室。使南出。此亦非中也。使隣里有水火盜賊憂病急迫之事。惟待我然後可活。則不惟蠶室。雖尤於蠶室。隨吾力。可爲之也。此不過一拘忌。非正理。雖責而繩之。可也。何乃反遂其志乎。皇明楊翥。隣有惡少侮之。公不爲意。至慮以驢鳴駭其幼子。而轉售之。惡少爲之感化。然吾驢無心之鳴。何與於隣家幼子也。或家有惡犬。逢人卽囓。不但轉售。殺之可也。驢雖鳴。未必然者乎。我國黃258_392b翼成公喜。使李文康石亨。書綱目題目。婢持小饌。倚公座。俯視。文康謂公曰。將進酒。公徐曰。姑安之。婢更倚立。厲聲曰。何遅遅也。公笑曰。進之。旣進。有小童數輩。皆藍縷跣足。或挽公鬚。踏公衣。盡攫其饌。且敺公。公曰。痛痛。皆奴婢之兒也。此公天性寬厚。本如此而賓主之禮。上下之紀。無乃不可乎。尹大提淮。少時。暮投逆旅。不許止宿。坐於庭下。主人兒持大眞珠。落於庭。白鵝呑之。主人索不得。遂疑公。將告官。公不卞。只曰。彼鵝亦係。明日珠從鵝後出。主人慙曰。昨何不言。曰。言之必剖出。故忍辱故258_392c待耳。公旣曰。彼鵝亦係。主人何不度之。而今乃慙乎。未可知也。公亦何不明言我見鵝呑。可與我待其遺矢矣乎。然則主人惜鵝。當少待其遺。何剖之有。若主人悍而剖之。已剖於彼鵝亦係之言矣。此傳記之說。或有誤耶。古人題夷齊廟曰。草木猶沾周雨露。愧君猶食首陽薇。又有題洗耳圖詩曰。水中若有水。水亦洗其水。此責人無餘地。恐傷忠厚亦過甚之失也。是故。君子雖多之。而亦少之也。此皆賢人之卓節。猶有後議。况中人以下乎。益覺處身之難也。
258_392d過去世有五大樂。而人或泛忽。只以功名烜爀爲樂也。余表而出之。其一。老萊子斑衣兒啼。悅其二親乎。其二。唐虞君臣都兪吁咈。以致太平乎。其三。文王太姒。琴瑟鍾鼓。友之樂之乎。其四。夫子杏壇。三千門人。揖讓升降乎。其五。張公藝九世同居。和睦無斁乎。此數者。要不出人倫之外。始知全人倫者。至樂存焉。聖人。人倫之至也。故擇五樂而聖人居三焉。
誡鼎大曰。汝今年已十歲矣。當汲汲孜孜。䟽滌魯鈍。克遵長者之訓。不可只騰踏挑達也。悠然而爲十258_393a五。又然而爲二十三十。終爲無識之人。則誰人欲與之語乎。古人惜寸陰如惜金。以壯大而無聞。爲平生大憂。早爲之地也。今汝溺於漫遊。不顧惜寸陰。如棄箒下之微塵。浪난016一日。如啖一餠。吾甚憂之也。誡學童具氏子宮其曰。汝今年已十五歲矣。大凡人子十五六歲時節。長者田地已七八分作基。今汝行不安詳。坐則搖身。言笑無節。讀書甚麤且厭。夫聦明至精英者也。假使聦明有神。見汝若勤苦不已。憐其志而來栖於汝胷中矣。汝若輕浮懈怠如醉夫如狂子。雖暫栖於胷中。當唾汝而258_393b急飛去矣。汝豊頰深目。眉間濶。何事不可作也。人或奇汝貌。譽之曰。爲人如彼。終不餓也。汝自負此言。而以讀書爲第二件事耶。雖使汝爲陶朱石崇。黃金棄籓籬間。腹中無一文字。人人對汝。必增鄙吝之心。汝其安於意乎。陶朱石崇。何嘗不讀書乎。吾愛汝而戒汝。汝其勉矣。
漢周亞夫。從理入口。餓死。南史水軍都督褚蘿。面甚尖危。從理入口。竟保衣食而終。史記舜重瞳。項羽亦重瞳。而自剄死。隋魚俱羅亦重瞳。爲煬帝所忌斬之。我國南袞亦重瞳。我族人昔有重瞳者。無過258_393c人之事。而只不能噉飯。朝夕啖餠。充飢而已。從理入口一也。或餓死或饒衣食。重瞳一也。一聖帝。二俱不令終。一陷害忠良。爲萬古奸人。一只庸庸平人。相法果可信耶。果不可信也。
禮圖。大轝有伏兔。醫經。以腎街爲伏兔。夫兔善隱伏之獸也。故取象而名之。凡器什如此者多。船具有猫。卽碇也。盖取猫利爪善攫物堅定之象也。亦有鴟。取鴟尾之隨風而善周旋之象也。
心溪子夏月。卧淸風溪老皺石上。久之忽瞪眼曰。吾身半成石。仍歎曰。死作此山鬼足矣。
258_393d意欲閒中見聞百花性情色態。編花蕫狐。又輯古今高士評論之號。曰高士本草。
沈玄齋水墨龍。頦頷槎牙。坐尋丈猶恐來拂。觸其髯端。明潤水欲滴。
室中排列泥金畵宮室人物之倭硯匣。韓石峯額體帖。木刻靑裝砂筆筒。作竹節狀。回回靑。書燔壽富貴三字盆中。雜種金鳳花,雞冠花。人雖曰雅士。吾必謂之俗輩耳。
黃金鑄王摩詰彩絲繡。米元章良辰美景。招佳난017名流。排鋪詩軸畵帖。必先掇芳花泛潔泉酹之祝。是258_394a日助詩情畵意。呵禁敗興。客不使來到門。
嘗歎曰。有田百畒,書萬卷,花草數百本,法書名畵五六百帖,澄心堂紙十萬枚,李廷珪潘谷墨各千笏,中山霜毫筆五六瓮,端硯數十面。名茶異香。隨意以供。名流十許人。與千戶侯等。猶闒茸不爲之。高士何不毁冠裂裳。作棄民乎。
適意事。如可久享。彩雲可使終年不散也。琉璃可使擊而不碎也。楊州鶴可騎而騰也。
心溪子曰。兩瞳子炯炯垂。秋水虛映空。忽天與靈逢。中之包空蕩蕩。其趣也灝邃不可言。亦無可以言258_394b聞者。炯菴怒睨曰。我有兩耳竅。玲瓏嵌空。獨不可聞爾之言耶。
太上安貧。其次忘貧。最下諱貧。訴貧壓於貧。僕役於貧。又最下。仇讐於貧。仍死於貧。
出諸唇舌而琅琅刺刺者。無形之文也。發諸紙墨而整整差差者。有形之言也。鬚眉牙頰。欣然可接。肝肺通暢。文不如言。精神意想。隱然可求。氣脉委宛。言不如文。言而無文。一出口。已無痕。故貴有文。
作文。可別具麻姑爪。快爬造化窟底來。神光騰出紙墨上三四丈。
258_394c蹈襲古人文字曰人面瘡。不知以何物。代貝母用。急抹其口。
梅花龕中置柚子。是辱梅花也。曾謂梅花之淸德潔操。忍能假借它家香以助己也。
才子肚中。有一派春泉湧出。琤淙漣淪不得停貯。試灌于右腕。涓涓而流。達于筆管。點滴毫端。圓了了如汞珠。如鸚鵡舍利。如鮫人淚。
座中展古畵奇書。轟笑飛沫。垢手。掬之捫之刮之者。决非知畵與書者也。决非雅士也。决非有識人也。
集古人輓詩哀辭。比次而觀。甲死而乙吊之。乙忽又258_394d死而丙吊之。以至于無窮。集古人議論。比次而觀。甲之言。乙必非之。乙之非甲者。似無它議。而丙又非之。亦無窮世界。只以此二事。如許如許銷遣了否。
至人之處毁譽也。無論眞與假。皆不飽不渴。不癢不痛。平人不能善處眞譽眞毁。况無宲之譽。無過之毁乎。無宲之譽。何異乎夢中飡加。影上爪爬。無過之毁。何異乎夢中漿乏。影上편003打。痴人。惟幸飡加於夢。愎人。猶恨편004打其影。
語中帶隱鋒。是蜮弩射影法。不如對面快嗔。去後寂258_395a然無後議。
騷人韻士。佳辰媚景。詩肩聳山。吟眸漾波。牙頰生香。口吻開花。少有隱機。大是缺典。
溪淸石凉拾紅葉。爨黃梁越添潤香。
淸高之隣。奇淸之弟。怪奇之僕。僻怪之裔。自僻以往。吾不知其爲何物。
九歌九章豔羡之極。欲焚筆硯。一月幾四五次。
詩而泣鬼神。筆而奪造化。畵而犯靈境。隨例淸貧窮。鬼隨之耶。太半不解世事。獃鬼挾之耶。
咄咄三怪事。堯天何以降九水。九經何以入秦爐。諸258_395b葛武侯何其早卒。不復漢室。
世間有三快。綱目。大書昭烈皇帝章武元年。段太尉奮笏擊朱泚。終童。乘長風破萬里巨浪。
曹娥碑。如纖秀婦人。自能矜持。時出嬌語。褚遂良蘭亭帖。如詩酒才子。一見雅士。自爾畧畧收檢。米元章雅集圖序。如再眠春蠶。無不勃勃欲動。
客曰。肚裡飽。不利讀書。只思卧睡。肚裡畧畧有飢氣。讀書頓覺有味。咿唔之聲。忽泛空中。富貴好事也。讀書亦好事也。始知兩好事兼享者。天下有福人。
莫謂至靜而失言。屬垣之耳可怕。莫謂至暗而放心。258_395c瞰室之眼可懼。小心之極。凡墻壁之孔竅通明。如耳如眼者。驢耳之軒軒。牛眼之炯炯。凝視而寂聽。似有意則皆洞洞屬屬也。
黃蜂背。有漆書巫工二字。
朝起鋤苽畦。上堂把筆。腕大戰如風中舟。或疑好奇。故作顫筆。病固可以故作乎。匪病故顫。神必呵之。六月朝。炯菴書于圓覺塔東。
小孩兒毛孔骨節俱减長者。獨眼睛不增不减。相小兒眼睛。大是奇朕。
角物不界上齒。畵中龍滿口槎牙都是齒。合口龍所258_395d以難畵。
鉛丸。洞甲而不能入灰。大碗砲碎十丈城布편005禦之。剛強之來。柔和以制之。復何勞。
天生之物。體圓者多。人獸之孔竅節肢。草木之枝株花果。與雲雷雨露是也。月準日圓。日準天圓。水準三圓。乃生萬物。萬物準四圓。圓者居多。水何圓。水銀雨鈴。皆圓。擲石於波。波洄虎眼也。人獸眼睛。凝聚水華。以準日月故最圓。
店雇曰。西山大師遺矢。皆化活鮮魚。是佛子肚裡有魚。軀馬人曰。佛若使人不食魚。緣何佛身鍍金。用258_396a膘膠。佛非不使人食鱗羽毛介。設此禁。爲众生戒大殺。
馬唇。類蠶唇。胡桃仁。如將化之蜂蝶子。鼠尾類蛇。虱如琵琶。蟣似麥黃。綠斑苽皮。如黃綠斑。蛙背夜明翅。類牛편006。獐尾根如梅杏鬚。蟋蟀聲如竹筩搖。荳燈穗如蠅眼。冬牛髀如松子窠。蛛肚類人拇。樗葉蒂類馬蹄。白麥飯類狗蠅。
退之送楊少尹序曰。亦白丞相去歸其鄕。又曰。以爲其都少尹。其鄕其都。果是何鄕何都。退之筆路昏墨。
258_396b甲曰人間好事拘牽。一食字路頭輒礙。乙曰。鼻下有穴。卽缺陷界。丙曰。蟬也無鼻下穴。粘高樹。淸風灑灑。終晝盡意而鳴。無少低垂曲縮樣子。快哉。炯炯子聞之。爽然而書于西簷。
犬噬人。以蚓蚯糞。貼瘡而傅之。犬尾蟠其中。是毒之鍾也。創旣完。而犬尾生其上。人必死。
淸寒云。同異異同同異異。異同同異異同同。或請作對。炯菴奮筆畵一字。溪云。三四四三三四四。四三三四四三三。又請對。又畵一字。呵呵曰。淸寒,溪。饒舌饒舌。
258_396c魚膠栗茸。皆夜有光。朽柳夜如燐。烏圓之背。黑夜拂之。火光燁燁。玆四者。陰類也。至陰通明。
無心言。有心聽。傷於密。而不免爲細人。有心言。無心聽。失於踈。而不害爲好人。無心言。有心聽。殃雖未至。鬼必謀之矣。有心言。無心聽。災或已至。天必憐之矣。無心言。無心聽。善於點化。則若有心也。有心言。有心聽。善於應接則無心也。
閙熱人。是喜生事人。生事之極。憂患至矣。孤寂人。是能損事人。損事之久。歡樂永矣。
藥欄干畔金鳳花。爲曉雨紅。小婢子攀花而泣。有258_396d達觀士夫。開眼孔曰。項覇王泣別虞兮。時政如是。
寧人負我。無我負人。坦蕩易直。如騁良驥。馳大途。無少回曲。
난018之倫。飛空虛者。迅邁之極。毛翅眼嘴。泯然一色。不可細辨。古今畵家。寫飛物。不遺微纖。擧體皆具。與啄飮栖睡者無異。是雖名家。未達處也。
張茂先曰。大腰無䧺。龜鼉類也。細腰無雌。蜂類也。余曰。蛙大腰也而接。蜻細腰也而媾。
有人號曰矧齋。貧而業製弓矢者也。
不遇知己。噓唏忼慨。徒勞耳。名畵工寫人五分面。爨258_397a婢販夫。指而嗤曰。一眼瞎。見屋角砌隅轉折欹斜。必從而歎曰。好大家將傾倒。天下事無不然。何歎之有。
惟無欲。廼無辱。
只有剝人肥身之心。人將何堪。畢竟爲人所剝。
古有堪輿家。誘一愚下子弟。指某丘曰。此猪嘴形也。指前小岩曰。此糞形也。葬於猪嘴富不可言。愚下子弟果葬其父母也。嗟世人只希爲富。人又惑術家。不顧忝先之爲羞。
猫與犬不相關。然犬遇猫無故而逐。猫當捷登屋角。258_397b俯犬而坐。犬可掀首相望。憮然而退矣。猫不此之爲。而犬一蹴却立。猫必弩脊鼓頰。張其爪攫犬鼻。犬始眞怒。猫不免矣。
甲跨牛。乙跨馬。宿旅館。曉將發。甲跨馬。乙跨牛。去駸駸。信無疑。甲跨牛。乙跨馬。日旣紅。毛色異。甲跨馬。乙跨牛。
朝霞辰砂紅。夕霞榴花紅。
施人錢財。眉有勉強色。大損陰德。
張肖父序李于鱗集曰。古樂府五言選。不以爲白頭陌桑。曹枚之優孟哉。余曰。夫如是。于鱗之文。贋孫258_397c叔敖也。後士有學于鱗之文。是贋優孟也。贋優孟與眞叔敖。相距遼夐哉。
口角無完人。其人便不是完人。
好色者。髓枯膚削。至于死之夕而慾火上升。終無悔心。成就只一色中餓鬼。余嘗笑之憐之。懼之戒之。勿顧自家有不幸而近之者。余之好書。太類好色。近以天行風熱。右眼亦癢。人頗恐動以書祟。余稍然之。然書不忍一日離。每開眼一線許。湊集字墨間。精華用脉。望食僊字法。彼殉於色者。應揶揄我。九月晦。吾友我居士戱寫。
258_397d僕詩文。如二分甘八分酸山果。其爲人也。如三分熟七分生野馬。半生半熟。半甘半酸。時節尙遠。何以則果濃丹砂頰。馬調碧玉蹄乎。
有眼目善評論者之讀詩與文也。鴻章鉅篇無論。雖瑕句纇什。頓增聲價。暗察主人之眉。翻翻焉湧溢喜氣。無眼目短評論者之讀詩與文也。瑕句纇什無論。雖鴻章鉅篇。越落聲價。暗察主人之眉。蹙蹙然隱約愁色。聲價增而無喜氣。聲價落而無愁色。是不奴僕於技與名者。然得與知者論。吾亦隱几而笑也。
258_398a錢東磵。平生半漢半胡。學問。乍佛乍儒。文章。非謔非謎。畢竟狼失後脚。狽失前脚。
齊有無鹽縣。楚有不羹縣。鵙爲伯趙。犬爲季蜀。漢有杜詩。明有韓文,楊仕伍,李八百。神仙也。白起,黃歇,李耳,栗腹,孫權,禰衡。名之竗儷也。地肺,天目。山也。不留,當歸。藥也。
空中之雨脚。不可把而玩也。假使玩。其圓徑乎。其六稜乎。
北斗之匡四象地。北斗之欛三象天。四稜方也。三折圓也。北斗司命而酌元氣。故象天與地。
258_398b鼻嘔之蛔。可粘甆釁。取其粘。忘其穢。
能淹博而不能纂著。猶無宲之花。不已落乎。能纂著而不能淹博。猶無源之泉。不已涸乎。
漢文章。異己者容之。宋文章。異己者斥之。明文章。異己者侮之。又有罵之仇之者。元美輩。侮焉者也。中郞輩。罵焉者也。受之輩。仇焉者也。可以觀世道升降也。
兩頭蛇,九尾狐。天下之至惡也。然明者。可以避。勇者。可以殺。惟身餙衣冠。口談文史之讒夫。明者不可避。以其讒者蜚語也。蜚語何能捍。勇者不可殺。以258_398c其葡數人類。何能人人恣殺。
生長農商家。四顧無師友。能竗悟文章。快脫塵染。是成佛之資。地則文獻多師友。又多書籍。終年鹵莾者。將若之何。嗚呼悲哉。
不能深諳。何可強談。
不做戕生之事。便是攝生。服藥導引。終涉外物。
文章。喩以閨人。鍾伯敬。淑女也。袁中郞。才女也。
可怕可怕。薄有才而使氣。可憫可憫。專無宲而騁辯。
天非高遠也。萬物咸被天而遊。以其空虛者。盡天也。猶魚被水而遊也。
258_398d晝無事。觀天白。夜無事。闔眼。觀天白。心坦然。闔眼。心怡然。
峻節霜凜。雅度春溫。
高人對俗人睡。俗人對高人睡。以其不相入也。俗人睡鄙無論。高人睡何其陿也。若有眞高人。必不睡何也。能容人也。
文章。一藝耳。尙渾混於雅俗眞贋之辨。山水何能品。人物何能鑑。持公心者識文章。偏見之守。不可以口舌諍。
贋文章。猶可說也。假道學。不可說也。
258_399a升平之世。寶釰無用。時以熱酒酹神。左揮而睨曰。亂臣逆子安所逃乎。右揮而睨曰。譖夫壬人。安所逃乎。逼燈而觀。靑熒之鋩。頓如秋水。
白香山賦荷珠曰。不寄寓於傾欹。每因依於平正。可止則止。必荷之中央。在圓而圓。得水之本性。喩君子守身也。崔膺金鏡賦曰。玉匣初開。寒光飛出。仰映淸空。天地洞通。萬象在中。虛涵不竆。湛爲寒潭。搖爲飛電。任在公以無心。有姸媸而自見。喩君子明心也。



 
光海朝日記[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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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年


正月
初二日
幼學鄭之問上疏大槪。請亟示好惡之正。以植忠良之氣。速愒西宮。數罪太廟。直加廢黜事。入啓。
合啓。國家不幸。變出肘腋。巫蠱狼藉於宮闈。外應逆謀。昭著於賊招。其謀立已出。圖害聖躬。明若觀火。至於壓勝裕陵。行兇節次。有不忍聞不忍言者。不但現於東亮之招。守護軍等。莫不搥心叩胷涕泣而道之。此豈得罪於宗社而已。實乃臣民之所共討而不饒也。是非不明。義理晦塞。徒拘名位之常例。不知不共之大義。角立邪說。眩惑人聽。使忠謀沮喪。義士囚舌。侵尋六載。正論長夜。何幸草野抗疏。臣庶叫閽。請去禍本。以絶深讎。而延時引月。結局無期。人情聽氷。士心如灰。奸釁日生。幾敗乃事。若不早定至計。不測之禍。可立待也。伏見崔世弼等之疏。其爲君父。深謀遠慮。所論甚確。臣等亦嘗據經參史。辟盡輕重於胷中者也。請令廟堂。依光弼等之疏。卽速擧行。以安宗社。答曰。予賦命奇險。累遭罔測之變。茹恨飮苦。直欲掩耳遠遁也。此豈予所聞者也。宜勿更言。
玉堂箚子大槩。快從公論。以定大計事。答曰。予意已諭于兩司。國忌日。勿爲煩擾。

初三日
洪德民上疏大槩。前上一疏。請斬四兇。累日伏待。兪音尙靳。不得已再陳危懇。更乞亟斬四兇。以完大事。入啓。

初四日
合啓。除禍根安宗社之擧。不容小緩。貶尊號。撤分司。絶貢獻停朝謁。廢置內宅。以備群不逞挾以爲亂之患事。入啓。
右相韓孝純率百官庭請啓曰。討賊之擧。以春秋爲法。處變之道。以宗社爲重。苟循私情。則義理不明。或有不忍。則亂亡必隨。此臣等所以有今日之請者也。唯此西宮。畜禍釀亂。書籍罕覩。古今未聞。玆揚十罪。以陳梗槪。逆㼁初生。令永慶亟陳賀禮。以探人心。又敎兇卜。稱譽極貴。日誦妖經。以祈大福。其罪一也。先王違豫。謀立已出。締結柳賊。表裡相應。諺旨潛通。防塞傳攝。其罪二也。草野大賢。盡忠抗疏。欲乘其隙敢圖易樹。泣動先王屢下嚴旨。未封等語。大駭群聽。其罪三也。先王升遐。詐稱末命。潛使希騫。矯摹御墨。托㼁七兇。同心保護。冀其長成。謀奪大位。其罪四也。密引悌男。由宿宮中。多結兇徒。日夜謀逆。團束宮奴。潛行部署。積峙糧器。以待緩急。且使孼豎。廣募武士。欲因夜操。乘釁作亂。其罪五也。設祭宮中。反手攢指。觸犯聖躬。有不可言。盲巫咀呪。無所不爲。鷄狗猪鼠。狼藉宮掖。十六各種。必欲售計。其罪六也。壓勝先后。穿掘陵寢。造作假像。已多行兇。寫經紅段。埋置夜半。書諱肉片。散飼鳥鳶。窮辱先靈。欲害聖躬。其罪七也。耕俊撰檄。其語不測。宮墻納矢。其書極慘。皆由做出。傳播外間。兇逆之輩。前後藉口。所不忍聞。形諸文字。其罪八也。黑門通書。應祥被捉。枕中破字。義一納招。使訴唐官。挑禍上國。其罪九也。多出金帛。厚資羊甲。入送倭中。陰結外援。誘以利害。又令友英。潛通老酋。欲假其勢。圖立幼穉。敢拒天朝。其罪十也。然則武氏之罪。比斯猶少。趙后滅嗣。方此不甚。失一國母臨之道。有臣子不共之義。唐廟數罪。雖不可已。漢家廢黜。合從寬典。伏願聖明。深思社稷大計。俯循擧國輿情。以去禍本。不勝幸甚。答曰。予以不德。賦命奇險。戊申癸丑之變。皆出於天倫。此旣常情所不可忍過。而顧緣宗社爲重。勉從廷臣之請。腐心痛懷。與日俱深。何圖今者。又聞此論。天乎天乎。予有何罪過。而降害之酷。一何至此極。寧欲脫屣人間。揇臂長往。遵海而處。以終餘年。宜察予悃。憐之憫之。勿復有言。

初五日
百官啓辭入啓。答曰。予以不德。半生危險極矣。仰俯天地。無事可樂。而今又如此莫大之變。置身無地。不知所處。宜察予意。毋爲更言。
館學儒生再疏入啓。答曰。予意昨已諭之矣。勿爲更煩。

初六日
李恒福奇自獻定配單子。傳曰。大臣雖曰有罪。不可置於邊上。況方有可憂之端。以吉州北靑等處定配。奇配吉州。李配北靑。
館學儒生四疏入啓。

初七日
合啓。前日臣等。將奇自獻奇俊格許筠並鞫事論啓。聖批以徐當發落爲敎。臣等非不知莫重之事連啓之爲當。而適値大論。急於合司。姑爲停止。以待發落矣。昨日廟堂之上。有以姑停爲非。至於往復相議云。臣等疲軟不職。以致如此。不可苟冒。請遞事。答曰。勿辭退待。
右參贊許筠上疏。伏以。臣於初四日二更。自外還家。黑暗中有壯丁。伏於籬間。將動手之際。馬後奴子覺之。叫曰有賊。賊逃出。隱匿於人家。聚里人搜覓得之。結縛問之。初稱文昌家奴。次稱政丞宅奴。因問何政丞。則不答。昨昨日送之於捕盜廳。昨日一善尉婢請其放送。又稱毛衣匠。出入於文昌家者云。臣謂。我獨當大論。仇人疾之。欲行李師道害裴度之事。豈可聽人嗾而放之哉。大將等推諉至今。不爲鞫問。其盤結權貴有欲爲之狀。據此可知。臣以孤根弱植。力主去禍根之論。異議者欲殺臣久矣。今因奇家之怨。嗾呈兇疏。而李覮乃臣素不相善者。頃日所啓。自撰謀危君父四字。加於臣身。臣竊以爲。俊格之疏未下。覮何以知而遽加不測之名乎。臣欲就鞫。必與覮對卞。問覮何以知臣謀危君上曲折。而只以徐當發落爲敎。臣席藁待命。欲於奇之出配。更陳血疏。乞與對卞。旋有臺啓未處置。徐爲定配之敎。故臣只俟入對而已。今刺客橫行。欲先除臣。臣一死之後。則無以雪臣至冤。故敢於大論方張之日。不避瀆擾。仰陳危懇。罪合萬誅。大槩自獻之必欲殺臣者。乃欲滅口也。癸丑變初。西宮凶逆之狀已著。臣謂奇曰。此臣子不共戴天之讎也。豈可容置於極尊之位。以滅人紀也。奇曰。君無爲此言。金悌男昏弱。豈能爲非常之謀。而宮中咀呪。安知非宮人自爲。嫁禍於大妃殿乎。況友英之招無他言。而羊甲怒其橫死於應犀之計。欲貽亂於國家。故爲此兇說也。渠輩雖言爲逆。孰肯從之。衛繚子之言曰。重刑之下。志士亦有誣服者。今主上無他子。而東宮尙無嗣息。萬歲之後。正論若起。爲今日此事者。雖在子孫。亦豈可擧顏耶。吾之外祖。卽林百齡也。今人道乙巳之事。今我面赤。君勿爲議也。其心蓋以金比之任瑠。而羊甲等謂之誣服云臣不勝寒心。臣竊自以爲。其子姪出於逆招。欲爲後日之地。立此論也。其後奇惡此言之洩。深用疑懼。臣亦不敢出諸口也。此外怨上之言。幸亂之說。入於臣耳者。不敢幷陳焉。俊格之疏。臣不得知。俊格受學於臣。訓誨之外。與年稚之人。談及時事。猶且不爲。況此兇疏中云云不測之說乎。渠若聽之。則何不早告。而乃發於渠父獲罪之日。不告之罪。渠亦甚矣。無其說而誣告陷人。則臣子所不忍聞者。乃敢筆之於書。苟非瀆亂天倫。習以爲常者。則安敢發此言。而至達天聽乎。其悖天逆上之言。自爲構出。則其罪有甚逆臣也。臣竊痛之。在丙午冬。臣兄筬爲吏判。有人言筬曰。弘老李覮於廣州京主人家。日夜聚會。陰謀祕計。無所不至云。須爲東宮補外可也。筬卽連擬於外州。其後竟爲定州而出。戊申年以弘老腹心被劾。五年削官。國人無不知爲弘老之黨也。寅緣幸免。得躋淸班。外假大論。內實觀望。初四日啓辭。不出廢黜二字。乃擧貶削節目。終曰遷置內宅。其本情盡露於此矣。覮乃敢受嗾修怨。反以惡名。橫加於臣。臣更冤焉。人臣負此大逆之名。不可一日容息於覆載之間。請急與奇自獻李覮等。下獄對卞。以亂謀何不早告。禍根何不欲去。窮問自獻。而仍問覮何以知臣謀危君上乎。以摘二人面譎之狀。一以雪微臣被誣之情。則千萬幸甚。臣爲君父。出萬死以扶宗社。而終遭罔極之讒。今日刺客。未必不出於嫉臣者之所爲。殿下若不快卞洞雪。以寢奸圖。則貞忠之臣。難得而保其餘生矣。情溢辭蹙。不知所裁。伏願殿下垂矜曲察焉。
百官庭請啓辭入啓。答曰。予聞。元首股肱。相須成軆。疾痛痾癢。無不相應。況玆莫大之變。予不忍聞知。但自呼天悶泣而已。卿等固當勿爲此論。以安予心。何用董率百僚。日三瀆擾乎。宜察予悃。亟停退去。

初八日
幼學薛求仁等上疏大槩。李覮爲弘老腹心。國人共知。渠亦被惡名者。大論方張之日。承望權貴風旨。强爲避嫌。以緩大論。且主貶削改遷之議。以誤大事。其下臺諫。非徒不爭。且爲苟從。請先斬李覮。以正黨惡之罪。次竄兩司。以治不忠之罪。仍將西宮。數罪太廟。如致堂之論事。入啓。

初九日
前訓導金大河上疏大槩。西宮罪惡貫天地。毋從廢黜。直加殛殺。永絶禍本。以安宗社事。入啓。
百官庭請啓。入啓。答曰。當此冱寒。卿等逐日來啓。不從之事。予深用憂悶。不知所諭。
館學儒生河仁俊等上疏大槪。姑從寬典。直廢西宮。以慰宗社。以謝天子事。入啓。答曰。諸生只一疏。見其誠而已。與百僚有別。伏闕日再瀆陳。甚不可。勿復煩擾。予言不再。
宗室等庭請。廢母后啓辭。入啓。答曰。宗戚亦忍爲此言耶。勿爲煩擾。
幼學尹魯上疏大槩。請先治韓孝純遲延不卽擧義之罪。次治三司容護孝純之罪事。入啓。
進士河仁俊閔渫鄭淇金尙夏等上疏大槪。爲宗社君父。伏闕連章。欲除禍本。而昨日得見元簋處所傳兇書中。有臣等四人姓名。禮曹判書李爾瞻。左參贊許筠。左承旨金質幹。副修撰徐國楨等姓名。亦皆擧論。誣以謀逆。敢以兇書封入。請拿問元簋。以覈兇書出處。俾攄臣等至冤事。入啓。
館學儒生李綎上疏大槩。伏奉聖旨。退在闕門外。更籲血誠。伏願姑從寬典。亟行廢黜事。入啓。答曰。爾等之誠。予已知之。豈可以出外闕外。入伏殿庭。有所輕重乎。言可用也。雖在千里之外。少無損於虛受。言不可用也。雖在几案之間。有何益於納約乎。爾等俱當一依舊例。遵行勿失。西宮之事。庭臣日三陳請。爾等不必並煩說。可休矣。
禮曹判書李爾瞻啓曰。臣再昨參進庭請時。聞館學儒生得一兇札。臣名亦在其中云。不勝驚駭。卽於依幕鼎坐之中。覓見其札。則乃琵岩稱號者。送書於元進士汝盛稱號者也。其書曰。汝盛大兄上狀。元進士侍史。除冗夕上奇相小錄。傳於彼耶。柳鑑與若干心友。近將擧事。先除仁俊尙夏淇等云云。此四人先除。則其餘不足憂也。尙夏仁俊與筠爾瞻。日聚兇徒。以伏闕爲辭。其心所在可知矣。此意柳令內通。而上意已許云。不久大亂將出。君其不爲强參兇疏大可。河金等爲逆賊之狀。愚夫愚婦。孰不知之。君累參兇黨之疏。吾輩不取也。君其亮處。尙夏乃質幹之姪。仁俊筠之姪。淇國楨之兄。爾瞻之黨。渠爲厥兇。開此逆謀。不久盡除。君其亮處。後悔何及。細細回示。因擾不盡。伏惟照之。卽琵岩醉不一一。其謂柳鑑。則未知指何人。近將擧事者。亦擧何事耶。且其所謂河金鄭閔四儒生。與臣等伏闕爲事。其心所在可知。以大論爲逆。則逆於西宮者。謂之逆乎。逆於殿下者。謂之逆乎。其所謂柳令內通。上意已許。不久大亂將出者。柳令亦是何人。敢爲此不測之言。假托內旨。諉脅兇徒乎。其所謂河金等逆謀之狀。愚夫愚婦。孰不知之者。今此大論。雖愚夫愚婦。皆知其大義。其果指此逆賊乎。其所謂渠爲厥兇。開此逆謀。不久盡除者。指何人爲厥兇。指何事爲逆謀乎。盡除之言。尤極慘矣。大抵大論之發。始於韋布。兇徒之欲先除此儒以壞事機者。無足怪也。大論方張。擧國同辭。邪議立幟。群兇彰蹤。必欲戕殺一代善類。竊恐武氏之亂未除。五王之禍先至也。臣一心殉國。前後討逆。固知諸孼之以臣爲仇按劍相向也。今臣被此惡名。未得卞明。則覆載之間。自無所容。伏乞命鞫元姓人。斯得致書者。摘發實狀。不勝幸甚。答曰。省啓具悉。自當覈處。卿宜安心。更篤忠貞。以安社稷。

十四日
進士河仁俊等上疏大槪。請速問元簋。以得實狀事。入啓。
幼學金琢上疏大槪。討逆大義。至嚴且重。罪關宗社。謀危聖躬。則雖以西宮之名位。尙不得保。況臣子謀逆者乎。奇俊格許筠等謀危之事。係關大逆。則虛實之間。所當汲汲明覈。而今日廷臣。尙不請鞫。古今天下。安有此理。請先治三司護黨之罪。次治廟堂勳戚諸臣。㥘於筠勢。莫敢請討之罪事。入啓。

十六日
左相率二品以上啓曰。頃日臺諫合啓。奇俊格上變。許筠自明上疏。皆是國家莫重之變。終不可掩置。而當此大論方張。百僚庭請。無論輕重。未遑他事。卽因館儒所進兇書。旣爲庭鞫。依前臺啓。奇俊格許筠一樣覈處何如。答曰。自當處之。不必煩啓。
合啓。再昨庭鞫。罪人元簋招辭。所謂琵岩。則自稱不知。前日尹惟謙等所見處簡了。則渠之妻四寸金元亮之所送云。此則屈志承服也。其書中所謂不可屈志强從。删而自守等語。當此大論方張之日。非臣子所可出口之言。其陰護禍本之意。不下於琵巖者。所謂渠爲厥兇。開此逆謀等語。又安知前書後書皆出於一手乎。請亟命嚴鞫元簋金元亮。覈得兇狀事。入啓。答曰依啓。
百官庭請啓辭。入啓。答曰。予雖寡昧。亦有人心。何可忍爲不忍爲之事乎。卿等宜體予意。毋庸强煩。

十八日
傳曰。左相力言閔夢龍大可用。予嘗不忘矣。相臣有窠。閔夢龍除授。領相鄭仁弘左相韓孝純右相閔夢龍 力言之左相乃仁弘也
百官庭請啓辭。入啓。答曰。大臣不來。而卿等何必强顏至此。百僚庭請。事體至重。不可無大臣而爲之。宜勿煩退去。
館學儒生李綎等上疏大槩。請亟斷大義。以安宗社事。入啓。答曰。嗟爾儒生。胡不諒予意乎。不忍之事。終不可爲。爾等徒勞而已。勿復瀆擾。
幼學柳時榮上疏大槩。請誅尹訒林健韓詠朴宗胄等。以治容護許筠之罪。次治廟堂㥘於筠勢。不爲連啓之罪。仍並鞫筠俊格事。入啓。
合啓。奇俊格許筠並鞫事。因大論發。間姑停矣。今者大臣。以終不掩置爲啓。俊格之疏。實出於自獻所敎。則自獻不可不鞫問。請自獻急速拿問。與俊格筠。一時並鞫。答曰。旣以。徐當發落下敎。則所當姑待處置。而當此庭鞫騷擾之日。何煩論至此。予竊怪焉。勿爲更論。
合啓廢妃事。答曰。可從之事不從乎。勿庸煩論。

十九日
宗室庭請啓辭。入啓。答曰。宗戚胡寧忍此。勿爲理外之議。重予不德。
合啓俊格筠等事。不可以庭請之日而掩置。請亟命並拿鞫。答曰。凡徐當發落云者。將有處置之意也。自先朝下此敎。則未聞有一臺諫上章催迫也。今此俊格告變之事。必須詳覈而處。俊格乃告於十年之後。而俊格等旣非逃躱之人。則自上當爲量處。爾等與大論。並瀆於調攝中者。果何意乎。孰主張是。極爲煩擾。姑待處置。勿用更煩。予言不再。
百官庭請啓辭。入啓。答曰。當此國家艱虞之日。百僚曠廢職事。力爭如是。事係宗社。衆情艱遏。但令百官。勿爲朝謁。此亦出於以義掩恩之意。而顧予險釁。遭此罔極之變。呼天涕泣。無面可顯。卿等宜察予情。勿復有言。館學儒生李綎等上疏大槩。正論日懈。邪黨生心。論大事之疏。近則寂然。巧避洋疏者。爭呈陷人之章。此莫非欲壞大事之輩。陰護西宮之計。亟請允輿情。以戢兇徒覬覦之謀。俾安宗社事。入啓。答曰。省疏具悉。凡徐當發落云者。將有處置之意。而兩司不待處置。徑先催迫於靜攝中。予竊怪焉。西宮事。予意已諭。勿爲更瀆。
進士鄭龍瑞上疏大槩。亟廢西宮。以永絶禍根事。

二十日
百官啓辭入啓。答曰。予迫於卿等之請。已令百官勿爲朝謁。則大義亦云幸矣。
仁城君洪慶昌君珊慶平君玏順寧君景儉文城君健茂林君善胤永川君瑜義寧君琥等。率宗親啓曰。臣等將西宮十罪不可不廢之意。叫呼天門。今曁旬月。而兪音尙閟。不勝悶鬱事。答曰。已令百官勿爲朝謁。則公議亦已行矣。何用更迫。以不忍爲之言乎。亟停可矣。

二十一日
百官啓辭入啓。答曰。參酌恩義。從副卿等之請。在予中情。如窮人無所歸焉。勿復爲不忍之言瀆擾如是也。
宗室啓辭入啓。
答曰。已諭勿煩。

二十二日
宗室啓辭初啓。
答曰。已令百官不爲朝謁。則卿等之論。亦云行矣。宗戚之義。與廷臣自別。勿爲已甚之議。使安予心。
宗室再啓。答曰。由予不德。累遭大變。登天無階。入地無從。予懷罔極。曷有其已。宗戚諸卿。宜察予心事。亟停大論。
宗室三啓。答曰。惟我宗戚。何不察予悶迫乎。廷臣假爲擧義之論。卿等與廷臣自別。何可雷同。勿爲執法之言。以紓予憂。
百官啓辭初啓。答曰。予聞。人有言曰。愛人以德。卿等何不以德愛予乎。予所不忍。强請迫行。雪寒氷庭。逐日來會。予雖深居。何以爲心。宜速停論。以慰予悶蹙之懷。
百官再啓。答曰。豈寡昧所忍聞之事乎。宜察予悶迫之情。毋庸更言。
百官三啓。答曰。情理之所不忍。古今之所不幸。予獨何爲遭變至此。勿爲太迫。以慰予心
館學儒生蔡有濟等上疏。廢西宮事。答曰。諸生之疏。至於累上。斐然之誠。予已知之。何必逐日煩擾乎。訖可歸矣。

二十四日
宗室啓辭入啓。答曰。予旣不忍聞知。則卿等何忍爲此論乎。莫如亟停。勿復言此。
百官啓辭入啓。答曰。十餘年來。累經禍亂。此實人世間所不堪之艱苦。慄慄憂懼。無樂爲君。不圖今日。又聞此論。寧欲鑽地而入。永不聞知也。宜察予情。更勿瀆陳。
館學儒生蔡有濟等上疏。廢西宮事入啓。答曰。爾等訖可停論。而日事瀆擾。使予憂惱。寧欲尙寐無聰。與世長辭也。宜勿更諫。退歸讀書。

二十五日
宗室啓辭入啓。答曰。卿等之誠。予已知之。訖可休煩以安予心。
百官啓辭入啓。答曰。予頃聞領相之議。不寐而尋繹。辭約義嚴。確乎不撓。古人片言折獄。何過於此哉。卿等須以此爲宗主。亦可謂知言矣。顧惟寡昧。所重者私恩。卿等掩義之論。誠不忍聞焉。願察予情。亟停可矣。
三司啓辭。西宮事入啓。答曰。三司之議。與草野有異。勿爲雷同苟且之言於調攝之中。
館學儒生上疏入啓。答曰。語不云乎。不在其位。不謀其政。爾等只陳所懷而止。至於連疏迫促。逐日瀆擾。有乖於事體。亟停可也。

二十六日
宗室啓辭入啓。答曰。難從之意。已盡諭之。勿復煩啓。百官啓辭入啓。答曰。榮辱成敗。何代無之。而未有如予之累遭禍變。極人間之艱苦也。此實由予罪過。復何怨尤。更勿煩啓。勿使得罪於天下後世。

二十九日
百官啓曰。西宮可廢之狀。臣等爭之盡矣。雖停其朝謁。撤其分司。罷其貢獻。貶其尊號。又去其大妃之名。而稱以西宮。若誥命尙在。冠服猶存。則豈可謂盡廢黜之典乎。罪浮武氏。而不數于廟。惡盈文姜。而不遜于齊。孝成之北宮未徙。閻后之別館未遷。仍居故闕。不處外第。則豈謂盡討逆之義乎。身爲首惡。而容息覆載。殿下之曲庇深矣。自犯大逆。而久享尊奉。殿下之循情極矣。禍延陵寢。而未加顯討。殿下之不忍大矣。謀背天朝。而尙不直奏。殿下之保全多矣。然則殿下之於西宮。私恩如此。其至臣民之於西宮。大義迄未得申。宗社之危。君父之急。將何以救之。神人之憤。朝野之望。將何以慰之。臣等昨承聖批。感激流涕。嘆服盛德。欽仰至仁。固當相率退去。議定節目。而血誠未遂。疾呼愈切。伏願聖明。夬賜乾斷。亟從輿情。千萬幸甚。答曰。已爲卿等所迫。忍從掩恩之論。在予中情。曷勝憂悶。亟停勿瀆。使予擧顏於天日之下。
幼學李箮上疏大槩。亟黜西宮。奏聞天朝事。入啓。
幼學李國獻上疏大槩。西宮罪惡貫盈。不可只行貶削之典。出置私第。圍籬牢守後。依▣▣定論。告宗廟處置事。入啓。
合啓。西宮。臣民不共戴之讎也。稱以西宮。只去大妃之號。不足以當其罪。請亟擧廢黜之典事。入啓。答曰。百官深諒予意。已爲停論。兩司何獨太煩乎。勿復瀆陳。

三十日
幼學李國獻薛求仁崔淑朴夢浚宋永緖韓輔吉韓天挺朴嵂金綜等上疏大槪。請快從公論。以行大義。廢置私第。圍籬牢守。然後依胡氏之論。告宗廟而處置事。入啓。
幼學李箮任徽之任瑗趙有璜權文郁李松壽金愼李光弘徐國材等上疏大槪。大妃之號旣去。則不可因處法宮。至於支供節目之講定。尤非臣子之所嘗慮。殿下只以御廚之物。絡繹私送。猶或可也。決不可以國人之支供。供於國人所不共戴之讎。請撤去支供。亟黜本第。告于太廟。奏于天朝事。入啓。

庭請進參秩
左相 韓孝純 兼工判 李尙殷 一善尉 金克鑌
判尹 尹銑 河淸君 鄭希玄 贊成 李冲
兼禮判 李爾瞻 海嵩尉 尹新之 益興君 李應順
淸陵君 金藎國 判敦寧 閔馨男 判中樞 盧稷
吉城尉 權大任 原隅君 宋康 驪陽君 閔仁伯
兼兵判 柳希奮 贊成 朴承宗 石陵君 金龍
文平君 柳公亮 碩興君 李惕 府院君 李光庭
韓平君 李慶全 海愼君 李希齡 刑判 趙挺
知事 朴弘耇 完山君 李順慶 鈴平君 尹重三
靈城君 李景行 漢山君 趙振 漢興君 趙公瑾
戶判 崔瓘 右參贊 柳澗 漢南君 李必榮
完昌君 李覮 蓬山君 鄭義哲 大憲 趙存世
禮參 尹壽民 吏參 柳夢寅 兵參 李德洞
工參 曺倬 戶參 慶暹 左尹 金闓
同知 朴鼎賢 同知 李膺 同知 朴自興
分兵參 李成吉 同知 沈惇 分兵參 金止男
同知 張晩 行司直 趙誼 行司直 宋安定
行司直 宋錫慶 行護軍 柳慶宗 行護軍 李應麟
行護軍 鄭廣成 行司直 禹致績 行司直 安玏
行司直 申忠一 行司直 李殷宗 行司直 金景瑞
行護軍 柳止信 行護軍 韓德修 行護軍 李得元
行護軍 金貞幹 行護軍 趙有道 行護軍 朴漃
行護軍 元裕男 行護軍 邊應祉 行護軍 李掬
行護軍 朴繼男 行護軍 呂裀吉 行護軍 柳琳
行護軍 呂祐吉 行護軍 尹暉 行護軍 崔胤祖
行護軍 李汝諧 行護軍 李訥 行護軍 成以文
行護軍 柳旻 行護軍 尹毅立 行護軍 南瑾
行司直 金守謙 行司直 權恫 行司直 田得雨
行司直 具德齡 行司直 鄭震哲 行司直 禹致績
行司直 金允信 行司直 李偉卿 行司直 尹顗
行司直 李善復 行司直 李玹 行司直 安寧尹
行司直 鄭承曹 行司直 鄭大立 行司直 李惟恕
行司直 元瑾 行司直 李伯福 行司直 柳應洞
行司直 趙惟精 行司直 金慶雲 行司直 愼仁民
行司直 趙暄 行司直 黃履中 行司直 朴蘭英
行司直 李挺生 行司直 高敬民 行司直 金應諴
行司直 具仁慶 行司直 蔡竣 行司直 韓恒吉
行司直 權曄 行司直 柳舜懋 行司直 李英男
行司直 金有亨 行司直 李愼儀 刑議 鄭逵
吏議 柳希發 工議 張自好 判決 朴慶新
兵議 鄭岦 禮議 李命男 敦寧都正 李馨郁
行護軍 朴彝敍 行護軍 閔洞 行司果 南贇
行司果 趙宏中 行司果 李汝儉 行司果 金元福
行司果 權瑾 行司果 兪大逸 行司果 南宮戭
行司果 鄭沈 行司果 鄭淪 行司果 成軾
分兵議 朴思齊 訓諫都正 柳承緖 行護軍 金應河
行護軍 康弘業 行護軍 柳沃 行司果 劉夢龍
行司果 田潤 行司果 安裕 行司果 洪大邦
行司果 廬世俊 行司果 尹景祺 行司果 李一元
行司果 黃洛 行司果 閔沆 行司果 洪昌世
行司果 權洽 行司果 閔宗亮 行司果 孫景祉
行司果 黃致誠 行司果 尹安國 行司果 尹耆獻
行司果 趙撥 行司果 權應元 行司果 鄭文宇
行司果 李時豪 軍資正 琴忭 濟用正 朴孝生
宗簿正 司宰正 宋克訒 司贍正 李舜民
司䆃正 李時立 掌樂正 李弘曄 奉常正 李時正
內資正 柳孝立 軍器正 姜繗 司饔正 鄭文振
禮賓正 尹綎 司僕正 黃益中 尙衣正 鄭道
訓鍊正 李忠善 通禮 琴愷 通禮 金偉男
司成 閔頀 判校 李綏祿 司藝 李昌廷
舍人 柳忠立 舍人 鄭廣敬 檢詳 南宮儆
吏曹正郞 韓玉 吏正 黃德符 禮正 蔡謙吉
禮正 崔濩 禮正 安璥 兵正 兪晉魯
兵正 朴慄 相禮 姜弘重 直講 蔡承先
吏曹佐郞 鄭遵 兵曹佐 曺佶 兵佐 柳鞾
兵佐 姜善餘 兵佐 李師孟 兵佐 金蓍國
禮佐 柳瀹 禮佐 韓定國 戶佐 李明漢
工佐 李志定 直講 柳洸 直講
直講 尹知養 戶正 尹履之 司正 吳䎘
典籍 洪敬纘 典籍 韓服 典籍 韓元謙
典籍 黃尙謙 典籍 申拭 典籍 梁時獻
奉常判官 趙錢 校書校理 鄭洽 奉常主簿 朴希賢
成均博士 吳腆 成博 權濬 成博 朴溍
學正 許燉 學正 趙塤 學正 韓正國
承文正字 沈之淸 承正 金琂 承正 鄭㤈
承正 柳準 承正 朴安孝 學正 李惟一
奉常主簿 姜文翼 奉常奉事 金慶厚 司贍副正 柳澈
庶尹 尹僖 軍器副正 鄭應井 訓鍊副正 許廷式
訓副 李友哲 廣興守 鄭謹 尙衣僉正 柳舶
敦寧僉正 姜秀崑 司宰僉正 朴天敍 掌樂僉正 鄭大海
訓鍊僉正 李大得 軍器僉正 韓汝徵 器僉 趙守憲
中樞經歷 李士濟 都摠經歷 李得可 摠經 康綽
摠經 李東龍 摠經 李應麟 司議 金敬說
刑曹正郞 申得淵 刑正 李應天 刑正 羅訒
刑正 洪汝一 戶曹正郞 朴光先 戶正 安景深
戶正 金適 工曹正郞 崔琢 工正 權帖
工正 尹挺之 尙衣判官 李承憲 司僕判官 柳希安
濟用判官 金俔 軍資判官 尹興忠 漢城判官 愼守身
訓鍊判官 沈大恒 訓判 房慶復 軍器判官 李斗望
平市令 李文顯 忠翊都事 嚴憓 忠勳都事 沈日明
儀賓都事 李國衡 中樞都事 李崇義 樞都 朴瑛
都摠都事 韓耆英 摠都 韓瑒 摠都 蔡穡
摠都 鄭國楨 摠都 邊彥璜 典簿 南以聖
贊儀 柳泳 翊衛 朴逸賢 翊衛 李彥直
司禦 愼守乙 司禦 崔煥 刑佐 朴守誼
刑曹佐郞 南以敏 刑佐 閔瀞 戶佐 洪得一
戶佐 崔振雲 工佐 慶選 工佐 金德望
工佐 尹衡哲 翊贊 李平亨 翊贊 柳鼎立
翊贊 趙誠 司評 黃立中 司評 申景進
禁府都事 鄭纘 軍資主簿 黃津 典牲主簿 朴安國
廣興主簿 韓師德 長興主簿 禹大有 司饔主簿 成忻
司贍主簿 李棹 禮賓主簿 鄭思溫 內贍主簿 金延慶
尙衣主簿 安彥吉 掌樂主簿 閔濧 宗簿主簿 徐晫
軍資主簿 鄭宗吉 司宰主簿 康世慶 內資主簿 金韺
司僕主簿 韓德胤 司僕主簿 成昌烈 敦寧主簿 李時白
司䆃主簿 金佑成 軍器主簿 尹昈 軍器主簿 沈怡
義盈主簿 南宮格 訓鍊主簿 鄭稷 訓鍊主簿 李廷彥
部主簿 柳健 部主簿 兪世曾 引儀 林就聘
引儀 洪師俊 引儀 曺次磨 引儀 柳敬春
引儀 鄭充岫 引儀 韓師聖 引儀 李欽
訓局郞廳 李重老 訓局郞廳 李英達 衛率 李雲根
禮賓別提 權必中 造紙別提 金守正 活人別提 沈暄
活人別提 李士星 活人別坐 鄭恒 歸厚別提 張昕
歸厚別坐 安鋌 瓦署別坐 李鼎臣 瓦署別坐 李宗立
司圃別提 金慶胤 司圃別提 李慶後 司圃 尹弘業
禁火別坐 韓晤 尙衣別坐 任光後 尙衣別坐 黃湜
司畜別提 宋鐸 司畜別提 崔葆 典設別檢 閔榏
典設別檢 任錫後 典設別檢 金橚 氷庫別檢 趙諶
氷庫別檢 任慶俊 氷庫別坐 任星老 掌苑別檢 金灦
漢城參軍 金應命 漢城參軍 洪有烱 敎官 李重溟
敎官 鄭雲瑞 敎官 尹商民 敎官 李成錫
敎官 李祟義 敎官 崔起門 敎官 崔德雯
內侍敎官 李日馨 司饔直長 朴承安 司饔直長 朴文燁
掌樂直長 崔元佑 長興直長 尹仁啓 司導直長 鄭涉
禮賓直長 李俊翼 司贍直長 韓汝賢 濟用直長 朴澯
平市直長 李師魯 義盈直長 韓昫 尙瑞直長 許恒
尙瑞直長 崔應夏 司宰直長 李景閔 副率 李浩源
副率 曺實久 侍直 李碩望 洗馬 趙鈺
洗馬 柳時立 洗馬 黃吉男 長興奉事 鄭文升
司饔奉事 李師閔 司饔奉事 鄭晉 司饔奉事 李埥
司饔奉事 柳汝惺 禮賓奉事 蔡繼先 司贍奉事 閔宣哲
濟用奉事 朴禧 濟用奉事 趙繹 繕工奉事 李應蓂
社稷參奉 尹保衡 社稷參奉 兪魯曾 社稷參奉 趙國俊
禮賓參奉 李格 司贍參奉 崔明善 司贍參奉 韓師一
濟用參奉 鄭文晦 繕工參奉 李裕後 繕工參奉 李竣
司宰參奉 鄭湛 部參奉 尹弘輔 部參奉 具玹
部參奉 成大受 部參奉 金瑗 監役 柳之豪
監役 金哲 監役 李敏樹 監役 金永耇
監役 洪逈 監役 禹時契 監役 申憶
監役 崔衢 典設別坐 沈淑 典牲奉事 申從謹
義盈奉事 許璉 長興參奉 金光國 監役 李光國
宣傳官 朴坤元 宣傳官 申蔡 宣傳官 李廓
宣傳官 李重匡 宣傳官 柳宗立 宣傳官 朴命龍
宣傳官 白大璡 宣傳官 李宗善 部將 李愼民
部將 金頴 守門將 申邦顯 守門將 安弘立
守門將 魚在淵 守門將 張世遠 守門將 李宗吉
守門將 梁弘發 守門將 柳成培 守門將 李綎
守門將 李揚門 守門將 申景涑 司直 李久澄
司直 李慶滉 司果 權士恭 司果 宋錫祚
司果 司果 韓謙 司果 趙國賓
司果 崔嵩 司果 朴奇男 司果 安弘望
司果 鄭暘 司果 韓顯一 司果 柳昌文
司果 權櫓 司正 李德符 司勇 黃德韺
司勇 梁斗南 司勇 李宜春 司勇 李穧
司勇 申克濟 司勇 金汝楨 觀象監正 以下
內醫院正 以下 司譯院正 以下 惠民署敎授 以下
律學敎授 以下 算學敎授 以下 內需司別坐 以下
兼引儀 假引儀等 司錄 玉晉輝 奉常主簿 玉輔臣
工曹正郞 朴簉 全興君 李時言 知事 韓希吉

大東野乘卷之四十二終


 옹정서원
[간략정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건립시기/연도 
  • 소재지 
  • 집필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 있었던 서원.
169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4년(숙종 2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생명(崔生明)·최계성(崔繼成)·손홍적(孫弘積)·김석량(金錫良)·최활(崔活)·최명룡(崔明龍)·김단(金湍)·채달주(蔡達周)의 학문과 덕행을 여 위패를 모셨다.
1778년(정조 2)에 중건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유허지에는 팔현(八賢)의 위패매안기념비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전고대방(典故大方)』
  • 『변산(邊山)의 얼』(부안군청, 1982)

 권협신도비명자손록(權悏神道碑銘子孫錄)

 

權悏神道碑銘 子孫錄
有明朝鮮國 贈議政府領議政 行宣武功臣 禮曹判書 吉昌君 諡忠貞公權悏之墓
貞敬夫人 全州崔氏 祔左
公有七男二女 信中 通政 郡守 必中 都事 景中 武 縣監 正中 監察 謹中 司禦 審中 佐郎 偉中 進士 女 長 柳 文 佐郎 次 李時煥 文 參議 信中 三男 大任 吉城尉 大鳴 同樞 大式 必中 六男 大德 武 通政 大淳 大淑 大冑 大華 大夏 參奉 景中 二男 大復 大壯 正中 以謹中子大胤後 謹中 四男 大運 文 領議政 大胤 都正 大遠 判官 大述 審中 二男 大敏 大益 武 縣監 偉中 一男 大載 文 判書 大任 一男 瑱 奉事 大鳴 一男 瑀 大式 一男 玹 縣監 大淳 四男 珩 玖 琛 瑜 大淑 以大華子瑍後 大冑 一男 瑛 大華 二男 瑞 瓀 大夏 四男 瑾 璸 㻑 大壯 一男 瓚 武 別提 大胤 四男 瑗 生員 瑍 文 參判 㻐 琝 皆佐郎 大運 二男 瑋 珪 文 參判 大遠 以大胤子㻐後 大述 以大夏子㻑後 大敏 二男 珹 瑊 大益 四男 琱 璈 玣 大載 二男 瑎 文 參判 璞 別檢 瑱 二男 以經 縣監 守經 郡守 瑀 一男 致經 玹 二男 順經 益經 生員 珩 一男 述經 玖 一男 幼 琛 三男 自經 餘幼 瑞 三男 皆幼 瓚 四男 有經 昌經 碩經 最經 瑗 三男 遇經 達經 道經 瑍 四男 應經 參奉 憲經 餘幼 㻐 三男 夏經 餘幼 瑋 一男 重經 文 參議 珪 一男 幼 瑎 以三從兄德明子信經後 璞 二男 弼經 餘幼 以經 三男 世泰 正郎 世鼎 生員 世恒 進士 守經 以以經子世鼎後 自孫女以下 及外孫皆不錄墓負癸向丁 其下 第一 嫡長孫 大任墓 二 嫡長子 信中墓 三 嫡長曾孫 瑱墓 四 嫡長玄孫 以經墓 墓後 坤向雙墳 第五子 謹中墓 又其後 丙向雙墳 第七子 偉中墓 並一岡
崇禎甲申後五十年癸酉五月 日 立

 

 

유명조선국 증의정부영의정 행 선무공신 예조판서 길창군 시충정공권협지묘
정경부인 전주최씨 부좌

공은 7남 2녀를 두었다. 신중은 통정대부로 군수를 지냈으며, 필중은 도사를 지냈고, 경중은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정중은 감찰을 지냈고, 근중은 사어를 지냈으며, 신중은 좌랑을 지냈고, 위중은 진사이다. 첫째 딸은 유업에게 시집갔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냈으며, 둘째는 이시환에게 시집갔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를 지냈다. 신중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 대임은 길성위이고, 둘째 대명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셋째는 대식이다. 필중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대덕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이고, 대순, 대숙, 대주, 대화, 대하는 참봉이다. 경중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대복, 대장이다. 정중은 근중의 아들 대윤을 양자로 삼았다. 근중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첫째 대운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으며, 둘째 대윤은 도정을 지냈고, 셋째 대원은 판관을 지냈으며, 넷째는 대술이다. 심중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는 대민이고 둘째 대익은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위중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대재는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를 지냈다. 대임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진은 봉사이다. 대명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우이다. 대식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현은 현감이다. 대순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형, 구, 침, 유이다. 대숙은 대화의 아들 환을 양자로 삼았다. 대주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영이다. 대화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서, 연이다. 대하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근, 순, 빈, 계이다. 대장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찬은 무과에 급제하여 별제이다. 대윤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첫째 원은 생원이고, 둘째 환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으며, 셋째 준과 넷째 민은 모두 좌랑을 지냈다. 대운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는 위, 둘째 규는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다. 대원은 대윤의 아들 준을 양자로 삼았다. 대술은 대하의 아들 계를 양자로 삼았다. 대민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성, 감이다. 대익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조, 오, 변, 격이다. 대재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 해는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으며, 둘째 박은 별검을 지냈다. 진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경은 현감이고, 수경은 군수이다. 우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치경이다. 현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순경과 익경 모두 생원이다. 형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술경이다. 구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침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는 자경이고, 둘은 어리다. 서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찬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유경, 창경, 석경, 최경이다. 원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우경, 달경, 도경이다. 환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첫째 응경은 참봉이고, 둘째는 헌경, 나머지 둘은 어리다. 준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는 하경이고 나머지 둘은 어리다. 위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중경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이다. 규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해는 삼종형 덕명의 아들 신경을 양자로 삼았다. 박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는 필경이요, 하나는 어리다. 이경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 세태는 정랑이고, 둘째 세정은 생원이며, 셋째 세항은 진사이다. 수경은 이경의 아들 세정을 양자로 삼았다. 손녀 이하 및 외손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공의 묘는 부계향정의 자리인데, 그 아래에 있는 첫 번째 묘는 적장손인 대임의 묘이고, 두 번째 묘는 적장자인 신중의 묘이며, 세 번째 묘는 적장증손인 진의 묘이고, 네 번째 묘는 적장현손인 이경의 묘이다. 묘 뒤에 곤향의 쌍분은 다섯째 아들 근중의 묘이고, 또 그 뒤에 있는 병향의 쌍분은 일곱째 아들 위중의 묘이다. 모두 한 언덕에 있다.

숭정 갑신년 후 50년 계유년 5월 일 세우다.

 

 

 權 悏神道碑銘
判書贈領議政權公神道碑(篆額)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吉昌府院君行幼忠仗議宣武功臣崇政大夫禮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揔管吉昌君權公神道碑銘并序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賔客 趙 絅 撰
 中直大夫行司憲府掌令 ▨▨▨ 篆
 通訓大夫行司諫院正言 趙威明 書
 

歲强圉恊洽之良月 永嘉權大夫 自諫議按節北臬 枉車騎不佞廬下 垂涕而言曰 不肖之先大王父 勳入帶礪 秩視三捐 墓木不趐拱矣 而麗牲之石 不刻無文 其實有待 久聞執事不喜諛墓 此不肖等所以圖不朽吾祖 舍執事無適也 敢以家狀一通 累執事 不佞謝非其人則辭之曰 昔燭之武 有言曰 壯也猶不如人 况今老矣 無能爲 事雖殊 此言可以諭 不佞老而耄者 其何能噓出 久荒筆硏 形容大君子勳德大業 大夫後必悔 是哉 猶不改圖 今年又走伻來 替羔鴈爲禮 懃懃懇懇盖其意以爲不侫之齒 齒稷下末流 能及宣廟在宥之日 或咫聞當時賢公卿風烈有之矣 此大夫公之必迫欲得不佞之杜撰一語 以此遂感其追遠誠 至異夫人許爲之而按狀 百濟甄萱無天而行 逞羿浞之毒于羅王 羅之支 守吉昌者曰幸 以郡迎麗王 灑不共天讎 麗王義之 錫姓以權 盖言炳幾達權也 其後子孫極熾而蕃 數百年來 以忠孝著 至今不衰 有諱溥 亦以忠孝致大名 位僉議 建刊朱註四書行之 論者 以爲東方理學自溥始云 八傳 至諱常同知中樞府事贈領議政 東興府院君 天植誠孝 幾於感物 宣廟大異之 初賜緋 又以八十增秩嘉善 旋表門閭 詳在白沙相誌中 內子安定羅氏 高麗祗侯直卿 之後 禦侮云傑之女 封貞敬夫人 生丈夫子五人 議政公卽 第五 諱悏 字思省 生而頴卓 始戴冠大玩於詞 二十四魁庭試 明年 闡謁聖科第四 名由槐院入史苑 遷堂後咸用薦剡也 成均自典籍至直講 司藝 郎署戶禮兵刑自員外至正郎 春坊自司書文學至弼善 兼弼善 薇垣自正言至獻納 栢府自持平至掌令執義 王署自修撰至校理應敎 恒帶知製敎銓郎 危得者亦數矣 壬辰島夷爲封豕長蛇 荐 食我國 事急 上將去邠 都下 公同大憲金瓉 排闥而入 抗言曰 京師 上有宗社 下有百官萬民 殿下去此 將焉往 縱有急 背城借一 可也 效死勿去 非孟軻之訓乎 宣廟雖不用其言 內嘉其忠命賜佩劒 夜二鼓 翠華出崇禮門 公負羈靮從 甲午 天朝都督李如松 兵三萬 熸平壤窟賊 公承命督三道 芻輓餉天兵 士飽馬騰 議者休之 久之 鄭相澈爲三南都體察使 擇公 自從外稱其能 而實坐公曾在臺論己丑主獄之濫也 公入幕唯以國事與之上下 彼眈眈無柰何 無幾何 體府自留江華 以湖嶺軍務屬公 治之 當是時 賊據京城 漢以南道棘▨▨ 人皆爲公危之 公曰 主辱矣 人臣義不辭死 無畏雖▨ 丁酉 行長淸正新喋血湖南 乘銃有再蠢之幾 朝議以爲計無出請援天朝者 宣廟察群臣 專對毋如權某 公以應敎陞緋 爲告急使 公受命疾驅 才一月到京師 呈咨奏 雀立兵部軍門下 痛陳本國出入豺牙狀 淚隨言下 觀者激昻 軍門謂公曰 爾國山川夷險 道路徑 從某至某 爲賊所者幾 爲爾國扼防者幾 峙糧幾何 坐甲幾何 爲圖以來 公習東國地志有素 口講指畫 使工成圖以進 軍門與本兵 侍郎李楨展圖核問公 公一一嚮應無窮者 公旣退 侍郎招舌官 表廷耉 問公何官 且曰 如許人才 盡一國豈可多得 卽覆奏 發南北艦步 又調給山東糧餉 公仰謝天子大恩 頫而血面而進曰 小國方在涸轍 朝夕嗷嗷 西江之決恐無及已 無已則南兵與餉宿永平者夥 永平與弊邦壤車牛之遞 不足言矣 聖天子 一視同仁 無間 外內大人奉而周旋 拯溺必不少緩 軍門納公言 不待辭畢准請 公又請筋角硝黃稛載而還 君子以爲其敏可及 其忠不可及 甲辰 勘宣武勳也 宣廟特命 錄公正勳封君 敎書若曰 子產善辭危懇 動冕旒之聽 包胥痛哭至誠 致金石之通 收七年之氛祲而誰之力 奠三韓於枕席 於予有光 益信誦詩之才 遠勝止戈之烈 當時南宮圖畫之臣非一二華衮之褒 夫幾人哉 明君知臣之語 不可改已 戊戌 按節海西 庚子 出牧羅州皆有 壬寅 入司龍喉 自同副至右承 夏秋曺右侍郎 冬少司徒 甲辰冬 由京垂拜大司憲 乙巳又拜大憲 秋 超資按節湖南兼完山尹 時有一邑宰負時望者 怙勢弄法 公黜之不饒 其人不少懟 及柄用 乃曰 奉法淸愼 如權某者 豈易得 公可謂古之遺直也 丁未 拜禮曺判書 戊申 宣廟棄群臣宗伯典喪禮 古也 公兢兢臨事 惟先王制禮是遵 索瘢者彈之 於公何傷 己酉 加正憲 監修宗廟也 甲寅 加崇政 會盟也 丙辰 拜謝恩正使赴京 公時年考益多筋力幾何 而事不辭難 公之操也 視五千里由咫尺 復命則時沍寒也 老人血氣 豈無霜露之感于嚴程也 丁巳 寢疾 戊午正月二十七日 啓手足于正寢 距其生嘉靖癸丑 壽六十六 訃聞賜吊 太宰議贈 贈曰 議政府領議政吉昌府院君 隱卒崇終至矣 公歿之始 卜山不中 權于富平水吞里 明年春 仍其岡爲竁 坐癸向丁也 公偉幹豊儀蔚爲國器 自弱冠郎見加以得明師 順川都正爲依歸 其所磨礱浸灌者 非獨博士家言 釋褐以后 直以家世忠孝 及萟學楚 上結宣廟之知及乎龍蛇之亂 竭蹷國家之急甚己之私 國之再造 公之力居多云 聖敎所稱安可誣也噫 公立朝四十餘年 靡職不踐 功無與讓 此則書之史策 照人耳目 媚孺亦能誦說長 公知事公仲氏參判公同居一里 事之如嚴父 得一甘毳 雖少必分 寒署節至 衣服必供 無虛歲溫 公之事伯康何加焉 館婺妹畜孤甥 終其身焉 姪孫男女之貧者 賴而有有歸有室者亦多 俸祿入門施諸宗黨隣里 無毫髮計留也 公之晚節 尤有可觀者 杜門卻掃絶不與朝貴相 往還 雖姻家在勢要則面之 人問之 則曰此吾東興公遺訓也 待子弟 嚴而有法 常以盛滿戒曰 吾常讀易 有味乎一言 積善之家 必有餘慶 是也 吾家爵位富貴 何非祖先忠孝之積 持之之難 甚於得之之難 持之之道 外儉約無他 由是公身都上卿 而椸無紈綺 食無重肉 室無丹楹口無嫮亦無訾毀人事 一生行之如一日 公可謂簡諒長德君子矣 疾之病而篤也 聞廢母后論起 使子弟扶起而坐 大歎曰吾其左袵乎 索管赫蹏書一寸遺知事 公知事公終立大節 亦公之助云 夫人 全州崔氏 祖克誠獻納 父沫正郎 夫人婉靜有操 配君子 誠孝並著 恊尊章秪 飭蘋蘩 敎子女御婢使 皆以其道 閨閾之內 雍穆如也 克受成福 母有多男 封貞敬夫人 庚申十一月十九日 不淑祔公墓左 七男二女 男長信中 乙巳生員通 政豊德郡守 次必必中 生員義禁府都事 次景中 乙巳武科延日縣監 次正中 司憲府監察 次謹中 世子翊衛司司禦 次審中 甲子進士戶曺佐郎 次偉中丁巳 進士 女長 嫁吏曹佐郎柳㒒 次嫁刑曹參議李時煥 郡守三男一女 男長大任 尙翁主 授爵爲吉城尉 次大鳴 大式 女嫁朴尚彬 都事六男五女 男長大德 武科 次大淳 大淑 大胃 大華 大夏 女長 嫁崔璡 次嫁 李慶會 次嫁正郎尹惟謹 次嫁佐郎李昌炫 次嫁池汝寬 縣監二男二女 男大復 大壯 女長 嫁經歷柳 重炯 次嫁李德升 監察無子 取司禦第二子大胤 子之 司禦中四男三女 男長大運 文科卽請銘者也 次大胤 監察 次大遠 大述 女長 嫁司諫李垕 次嫁李時繼 次嫁宋㺹 佐郎二男三女 男大敏 大益 女長 嫁宋道凝 次嫁李 次嫁生員盧思敏 進士一男三女 男大載文科正郎 女長 嫁李墰 次嫁崔東老 次嫁李命麟 皆生員 柳㒒三男 長廷琦奉事 次廷衍叅奉 次廷瑗監察 李時煥四女 長嫁都事安後昌 次嫁進士崔世昌 次嫁朴大圭 次嫁尹廷冕 內外曾玄 佹且二百餘人 鳴乎盛哉 其厚德之報也 銘曰挈土酒讎 義主動色 懿氏斯錫 百千耳孫 克念克紹 愈久愈肖 於吉昌公 事我宣祖 大洪祖武 移孝爲忠 惟命西東 茂著匪躬 聖燭賢勞 榮公偉勣 丹書赫舄 位峻官尊 猶執謙光 易道是揚 伯仲與季 白首湛樂 擧世疇匹 紫誥回鸞媲德脹賢 福祿之全 憂國肺肝 至死不歇 友于雙烈 我筆雖老 寔應銘法 過者必式
 崇禎甲申後二十九年癸丑 正月 日立

 

 

 

위치 :산 1-22번지 해제 :이 비는 1714년에 건립된 권대임신도비명(權大任神道碑銘)으로 허목(許穆)이 비문을 지었고, 이징귀(李徵龜)가 글씨를 썼다. 권대임(權大任)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홍보(弘輔)이다. 선무공신(宣武功臣) 길창군(吉昌君) 권협의 손자로 선조의 정빈 민씨(靜嬪閔氏) 둘째 딸 정선옹주(貞善翁主)와 결혼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 길성위(吉城尉)에 봉해졌고, 1636년 길성군(吉城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조선 중기의 서예가로서 어려서부터 재예(才藝)가 숙성하였는데 특히 글씨를 잘하여 선조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그가 살던 곳은 오늘날의 구로구 궁동 산 56번지였는데 정선옹주가 이곳으로 출가하면서 이 일대가 옹주의 사패(賜牌)땅으로 내려져 궁궐 같은 큰 집에서 살았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그의 묘는 옹주의 묘와 함께 이곳 안동권씨 문중묘역에 있다.

 

 權大任神道碑銘
儀賓吉城君墓(前面篆額)
權公神道碑銘(後面篆額)
有明朝鮮國贈綏祿大夫吉城君兼五衛都捴府都捴管行崇德大夫吉城君兼五衛都捴府都捴管謚
權公神道碑銘并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許穆 撰
 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知製敎兼經筵叅賛官春秋館修撰官 李徵龜 書
 從姪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權珪 篆
公諱大任 字弘輔 姓權氏 其先永嘉人 永嘉之權 自太師幸得姓來八百年 世多達官貴人 號爲大族 曾大父常 以善行特聞 爵至同中樞 後贈領議政 東興府院君 大父悏 以功業 貴爲名臣 官至禮曹判書 封吉昌君 贈領議政・吉昌府院君 父信中 連守郡邑 贈左賛成 襲封吉興君 後加贈右議政 母李氏贈貞敬夫人 世宗別子廣平大君璵之七世孫 而司評廷弼之女也 萬曆二十三年十一月廿四日公生 生而秀而媺 聡敏善學 甫十年 才藝夙成 尙貞善翁主 爲吉城尉 上寵愛之殊甚 公尤長於筆法 上稱善不已 賞賜無數 累進 階至通憲 純孝大王二年 李适叛 上狩公山 公從上 陞奉憲十三年 封吉城君 吉興君卒 而旣卒喪 以元功嫡孫襲封者也 明年冬 淸人入京城 又從上於南漢 進崇德 再爲都捴管 後三年 奉使瀋陽 時國家新去亂 悉捐槖中裝 贖還旄倪之未返者 人心德之 二十三年十月廿六日 公卒 春秋五十一公在疾 上特以儀賔尊屬 醫藥屬路 訃聞 上爲之罷朝巷市 賜予賻如儀 命有司庇葬事 禮也 以宣武原從 追加綏祿大夫爲正一品 公仁親篤厚 善於父母昆弟 以及宗族 父母旣歿 有二弟一妹 公均其臧獲 必擇其善饒而厚給之 猶恐其不如父母之視之也 其一弟年最少 公甚愛育之 其衣食服養 一視 而無缺 性恬靜儉約 自處如儒士 善與人忠愛 好文雅 一時薦紳文學 多慕與之遊者 平生不爲奢縱逸樂 雅飭惟謹 士大夫愈賢之 國制 主家有賜奴賜田 而公不肯准受曰 吾受恩已厚 復以此煩有司 不知足也 主昭敬大王女 而靜嬪閔氏出也 嬪康靖大王壻驪川尉子芳之孫 江華都護府使士俊之女也 嬪賢而好禮節 主恭敬謹飭 克順婦德 盖素所敎訓然也 主生於萬曆二十二年四月一日 卒於四十二年八月一日 主長於公一年 春秋二十一 葬於富平之水吞 至是乃合葬焉 有一男曰瑱 敦寧奉事 瑱生一男二女 男以經 守經 壻二人承旨吳始壽 生員洪萬朝 以經生三男一女 皆幼 吳始壽生二男二女 長男尙游 壻一人李景鴻 餘幼 洪萬朝生二男一女 皆幼 又有庶出子二人琳 璉 銘曰 尊而能讓 貴而能下 仁愛篤善 戒愼不惰 中樞三世 吉昌之孫 賢善有自 忠孝之門

 

 

권대임신도비명(權大任神道碑銘)

의빈(儀賓)길성군(吉城君)묘
권공(權公) 신도비명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수록대부 길성군 겸오위도총부도총관(贈綏祿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행숭록대부 길성군 겸오위도총부도총관(行崇德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시(謚) 권공(權公) 신도비명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議政府右議政 兼領經筵事 監春秋館事) 허목(許穆)이 글을 짓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부승지 지제교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承政院左副承旨 知製敎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이징귀(李徵龜) 가 글을 쓰고,
종질(從姪)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권규(權珪)가 전액(篆額)한다.

공의 이름은 대임(大任)이고, 자는 홍보(弘輔)이다. 성은 권(權)씨이며 본관은 영가(永嘉)이다. 영가권씨(永嘉權氏)는 태사(太師)를 지낸 행(幸)이 고려 태조에게 성을 받은 이후로 팔백년 동안 대대로 현달하여 귀하게 된 사람이 많아 명문대족으로 일컬어 졌다. 증조부 상(常)은 훌륭한 행실이 특별히 알려져 벼슬이 동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뒤에 영의정 동흥부원군에 증직되었다. 조부 협(悏)은 남다른 공훈을 세운 명신으로서 벼슬이 예조판서에 이르고 길창군에 봉해졌으며 영의정 길창부원군에 증직되었다. 부친 신중(信中)은 군수를 연임하였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길흥군에 세습하여 봉해졌고, 후에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모친 이씨(李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세종의 별자인 광평대군 여(璵)의 칠대손이며, 사평 정필(廷弼)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23년 11월 24일에 태어났는데, 수려한 용모에 총명하고 민첩하여 공부를 잘 하였다. 겨우 열 살이 되었는데 재주와 기예가 숙성하였으며 정선옹주(貞善翁主)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니 주상이 남달리 총애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주상이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수없이 상을 하사하시고 여러 번 승진하여 통헌대부에 이르렀다. 인조대왕 2년에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주상이 공주로 피난하자 공은 주상을 수행하여 봉헌대부에 올랐으며 13년(1635년)에는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는 길흥군(吉興君)이 세상을 떠나자 장사를 마친 뒤 원공신의 적손이라 하여 세습하여 봉(封)한 것이다.
이듬해 겨울 청나라의 군사가 서울을 침입하자 또 남한산성에서 주상을 수행하여 숭덕대부에 올랐으며, 다시 도총관이 되었다. 삼년이 지난 후 왕명을 받들고 심양(瀋陽)에 갔었는데 당시에 우리나라는 겨우 병란에서 벗어난 터였다. 공은 행장속에 가지고 있던 사재를 모두 내어 그곳에 잡혀있던 노약자를 귀환시키니 사람들이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인조 23년 10월 26일 졸하니, 나이 51세였다. 공이 병에 들자 주상은 특별히 왕실과 결혼한 사람이라 하여 끊임없이 의관과 약재를 내리셨다. 부음이 전해지자 주상은 공을 위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시장을 철시하였으며 부의를 의례대로 하사하였다. 아울러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장례를 돕도록 하였으니 모두 예에 따른 것이다. 선무원종공신이라 하여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추증하니 정일품이 되었다.
공은 성품이 인자하고 후덕하여 부모 형제에게는 물론이고 인척에게까지 잘 하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아우와 누이동생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었는데 반드시 그 중에서 온순하고 건강한 자를 택하여 후하게 나누어 주고도 오히려 공은 부모께서 살아계실 때와 같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린 아우를 매우 사랑하여 그의 의식(衣食)이 언제나 자기에 비하여 손색이 없도록 하였다. 차분하고 검박한 성품을 지닌 공은 언제나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선비처럼 처신하였다. 진실되게 사람과 사귀고 글을 애호하였으므로 당대의 많은 고관과 학자가 흠모하여 더불어 교유하였다. 평생에 사치와 행락을 몰랐으며 오직 삼가고 바른 일을 행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더욱 어질게 여겼다. 나라의 법에 옹주의 집에는 노비와 전답을 주도록 되어 있는데 공은 이것을 기어이 받지 않으면서 “내가 받은 은혜가 이미 깊은데 다시 이것 때문에 담당관리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옹주(翁主)는 선조대왕의 딸로서 정빈민씨(靜嬪閔氏)의 소생이다. 정빈(靜嬪)은 강정대왕(康靖大王 : 成宗)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자방(子芳)의 손녀이자 강화도호부사 사준(士俊)의 딸이다. 정빈(靜嬪)은 어질고 예절을 좋아하였으며 옹주 또한 공순하고 삼가 조금도 부덕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평소에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옹주는 만력(萬曆) 22년 4월 1일에 태어나 42년 8월 1일에 졸하였다. 옹주는 공보다 한 살이 많았으며 당시 나이는 21세였다. 부평의 수탄(水呑)에 장사지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합장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돈령부사 진(瑱)이다. 진(瑱)은 2남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경(以經)과 수경(守經)이며, 사위 둘은 승지 오시수(吳始壽)와 생원 홍만조(洪萬朝)이다. 이경(以經)은 3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오시수(吳始壽)는 2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상유(尙游)이고 사위는 이경홍(李景鴻)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홍만조(洪萬朝)는 2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또 서출(庶出)로 아들 둘이 있으니 임(琳)과 연(璉)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고관이 되어도 겸양할 줄 알고 ,귀인이 되었지만 몸을 낮추었네.
인자하고 후덕하였으며 삼가고 근면하였네.
중추공(中樞公)의 증손이자 길창군의 손자. 어진 사람 나온 곳은 충효한 가문일세.

일찍이 임자년에 미수(眉叟) 허(許)선생이 이글을 지었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갑오년에 비로소 비석에 새기게 되었는데 비문에 기록되지 못한 자손들을 다음과 같이 추가하여 기록한다. 이경(以經)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현감이 되었으며, 수경(守經)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군수가 되었다. 오시수(吳始壽)는 문과에 합격하여 우의정에 올랐으며, 홍만조(洪萬朝)는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 참판으로 있다. 이경(以經)은 3남1녀를 두었는데, 세태(世泰)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교리로 있다. 딸은 이한의(李漢儀)에게 시집갔다. 오시수(吳始壽)는 2남2녀를 두었는데, 상유(尙游)는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정언으로 있으며, 상보(尙溥)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두 딸은 참봉인 이경홍(李景鴻)과 이신명(李申命)에게 시집갔다. 홍만조(洪萬朝)는 사남이녀를 두었는데, 중형(重亨)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좌랑이 되었으며, 중휴(重休)는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 교리로 있다. 중인(重寅)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중징(重徵)은 문과에 합격하였다. 두 딸은 생원시에 합격한 목천현(睦天顯)과 남하성(南夏成)에게 시집갔다. 세태(世泰)는 4남1녀를 두었는데, 방언(邦彦), 명언(明彦), 필언(弼彦), 징언(徵彦)이며 딸은 이채(李采)에게 시집갔다. 세정(世鼎)은 아들인 태언(台彦)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세항(世恒)은 2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순언(舜彦)과 하언(夏彦)이며, 두 딸은 이택인(李宅仁)과 박이신(朴履新)에게 시집갔으며 한 딸은 아직 어리다. 이한의(李漢儀)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진사시에 합격한 서주(瑞冑)이다. 임(琳)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급경(及經)과 무과에 합격한 학경(學經)이다.

숭정(崇禎) 갑신년 후(後) 70년 월 일 세움.

 

 
 
기언 별집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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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묘문(丘墓文)
증(贈) 이조 참판(吏曹參判) 권공(權公)의 묘지명(墓誌銘)

공은 휘는 위중(偉中), 자는 군언(君彦), 성은 권씨로 본래 영가(永嘉) 사람이다. 영가 권씨의 시조는 태사 권행(權幸)으로 사적(事跡)이 《고려사》에 있다. 고조부 권욱(權旭)은 사도시 부정으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증조부 권진(權振)은 전생서 참봉으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 권상(權常)은 동지중추부사로 영의정 동흥부원군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권협(權悏)은 예조 판서 길창군(吉昌君)으로 영의정 길창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전주 최씨로 공조 정랑 최말(崔沫)의 딸이다.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31) 4월 30일에 공이 태어났다.
중추공부터 지극히 훌륭한 행실로 드러났는데 길창군은 크게 어지러운 시기에 한마디 말로써 천자의 위령(威靈)을 감동케 하여 대병(大兵)을 동원하여 왜란을 막았으니, 이를 일러 충효로 대를 이었다고 하겠다.
공은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착한 일을 좋아하였으며, 준엄하고 정직하여 입으로는 성색(聲色)과 화리(貨利)를 말하지 않았고, 갑자기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볼 수 없었으며, 사람들과 희롱하거나 무례함이 없었으므로 착한 자는 사모하고 착하지 않은 자는 부끄러워하였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을 독실히 좋아하여 문장을 지어도 기격(氣格)만을 숭상하고 과거 공부의 격식은 일삼지 않았으며, 또 해서(楷書)를 잘 썼다.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뽑혔다. 그때 광해군이 태후(太后)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아첨하는 신하가 모후를 폐위해야 한다는 논의를 주장하여 광해군의 비위를 맞추었고,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로 하여금 또한 소(疏)를 올려서 이것을 말하도록 하고, 논의하여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이들을 모두 중상하였으므로, 공은 한 번 과방(科榜)에 나아가 응시했을 뿐, 상사(庠舍)에 발을 끊었다. 당시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은 자가 많았으며, 더러는 술에 취하여 방랑하는 것을 서로 숭상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선비가 혼탁한 세상을 만나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지키는 것이 옳으니, 어찌하여 이러느냐?”
하고, 스스로 수신하는 데 더욱 힘썼다. 부당(婦黨)에 벼슬이 높았던 자가 있었는데, 전날에 파직을 당하여 등용되지 않았을 적에는 공과 서로 좋은 벗이었으나, 중흥(中興 인조반정을 가리킴)한 뒤 그 사람이 비로소 귀하게 등용되자, 공은 그와의 교유와 내왕을 끊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본디 공의 개결함을 알고 더욱더 어질게 여겼다. 그 마을에 권세 있고 벼슬 높은 사람이 공의 행실이 올바르다는 말을 듣고, 같은 마을 사람을 통하여 서로 만나 보고자 하였으나 공이 사절하고 만나지 않았다. 연성(蓮城)에 우거(寓居)할 때에는 조그마한 초당(草堂)을 짓고 날마다 문을 닫은 채 글을 읽으니, 향리(鄕里)에서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던 자들이 과오를 경계할 적마다 ‘권 상사(權上舍)가 모르게 하라.’ 하였다.
부모의 상사를 당해서는 3년 동안 묘막을 지켰으며, 초상 때에는 죽을 먹고 장사를 치른 뒤에는 거친 밥에 물만 마셨으며, 연제(練祭)가 지나고 나서야 채소와 과일을 먹었다. 형제간에 늘 지성으로 사랑하였으며, 일찍 과부가 되어 의지할 곳 없는 큰누이가 있었는데, 그를 섬기기를 어머니 섬기듯 하여 종신토록 그 마음가짐이 쇠하지 않았으니, 돈독한 행실이 이와 같았다. 숭정(崇禎) 2년(1629, 인조7) 6월 30일에 공이 세상을 떠나니, 나이 32세였다. 그해 8월에 부평의 수탄에 안장하였다. 공신의 아들이라 하여 원종(原從)으로 기록하고 추후에 사헌부 지평의 작록을 내렸다가, 뒤에 아들 권대재(權大載)의 벼슬이 아경(亞卿)에 이르므로, 임금의 은혜를 미루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하였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세조(世祖)의 명상(名相) 신숙주(申叔舟)의 8대손인 수의부위(修義副尉) 신종사(申宗泗)의 딸이며, 군수 김덕근(金德謹)의 외손이다. 수의공이 공의 어짊을 사모하여 사위를 삼아 매우 사랑하였고, 공 또한 특별히 공경하여 마음을 다하여 섬겼다. 수의공은 단지 딸 하나뿐 아들이 없는 데다가 일가 중에도 아들로 양자 삼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 뒤를 딸의 집에 의탁하고자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시면 대가 끊어집니다. 비록 먼 친척일지라도 반드시 양자를 세워서 대가 끊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수의공이 세상을 떠나고 공이 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인은 어질고 위의가 있어서 부인의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시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공의 상사를 당하여는 기필코 하종(下從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것)하리라 맹세했었지만 임신 중이라 차마 곧 결정을 못하다가, 아이를 낳자 유모에게 젖을 부탁하고 기어이 자결하려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않았다. 그러다 어머니 김 부인(金夫人)의 눈물 어린 말에 따라 다소 풀어졌지만, 공을 위하여 6년간 상복을 벗지 않았고 눈이 멀 정도로 곡(哭)을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권대재는 겨우 10세였고, 두 딸은 모두 어렸는데, 딸 하나는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다.
부인은 교육에도 법도가 있어서, 권대재가 글을 읽어 올바른 행동을 하였으며 문학으로써 출세하여 지금 대사헌이 되었다.
사위는 셋인데 이담(李墰)은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건원릉은 태조릉), 최동로(崔東老)는 호조 좌랑, 이명린(李命麟)은 제용감 봉사이다. 내외손(內外孫)에 남녀가 10여인이 있는데, 장손 권해(權瑎)는 과거에 급제하여 대사간이 되었고, 차손 권업(權璞)은 생원이다. 권대재가 공산 현감(公山縣監)이 되었을 때에 부인이 항상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삼가야 한다는 것으로 훈계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마다 현모(賢母)라고 일컬었다. 부인은 공보다 3세가 적으며, 만력(萬曆) 신축년(1601, 선조34) 1월 27일에 태어나서 정미년(1667, 현종8) 2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67세였다. 같은 해 4월에 같은 영내(塋內)에 안장하였으나, 분묘는 달리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오직 효도와 우애에만 / 惟孝友
돈독하고 진실하였으니 / 敦且純
그 자신에게는 발복이 없었지만 / 不發於其身
그 후손은 훌륭하게 되리 / 以裕其後人

 

 



 
백사집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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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사(遺事)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행(行)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 제도도원수(知中樞府事諸道都元帥) 권공(權公)의 유사(遺事)

원조(遠祖) 김행(金幸)은 본디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으로 처음에 고창군(古昌郡)을 지켰는데, 견훤(甄萱)의 난리로 인하여 신라가 망한 것을 마음아프게 여기고 고창군을 가지고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맞이하니, 태조가 김행을 병기 달권(炳機達權)한 사람이라 하여 권씨(權氏)의 성(姓)을 하사하고 태사(太師)의 관작을 내렸으며, 고창군을 식읍(食邑)으로 삼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으니, 권씨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십삼세(十三世)에 이르러 비로소 창대해졌으니, 휘 보(溥)가 고려를 섬겨 벼슬이 도첨의(都僉議)에 이르렀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다섯 아들과 세 사위가 모두 봉군(封君)되어 한 집안에 아홉 사람의 봉군이 있었으니, 그분이 공에게 구대조(九代祖)가 된다.
팔대조(八代祖) 휘 고(皐)는 벼슬이 검교 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고 또한 영가부원군에 봉해졌다. 칠대조(七代祖) 휘 희(僖)는 벼슬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육대조(六代祖) 휘 근(近)은 우리 태조(太祖), 태종(太宗)을 내리섬기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호는 양촌(陽村)이다.
오대조(五代祖) 휘 제(踶)는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고조(高祖) 휘 마(摩)는 벼슬이 연천 현감(漣川縣監)에 이르렀고, 자헌대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 휘 교(僑)는 벼슬이 양근 군수(陽根郡守)에 이르렀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祖) 휘 적(勣)은 벼슬이 강화 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에 이르렀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철(轍)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이다.
외조(外祖)의 성은 조씨(曺氏)이고 휘는 승현(承晛)인데, 적순 부위(迪順副尉)가 되었다. 고려(高麗) 좌정승(左政丞)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예이다.
공의 휘는 율(慄)이고 자는 언신(彦愼)이며 호는 만취당(晩翠堂)인데, 가정(嘉靖) 16년인 정유년 12월 28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놀고 장난하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자람에 미쳐서는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썼다. 의정공(議政公)이 일찍부터 시망(時望)을 지니어 화려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호남ㆍ영남의 관찰사가 되어 나갔다가 들어와서 이조ㆍ형조ㆍ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는 동안 집안이 크게 빛나고 명성이 자심하였다. 그러나 공은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여가에는 한결같이 독서에만 뜻을 두고 스스로 심신을 담박하게 지키어 호강(豪强)한 기습을 없애었다. 그리하여 나가서 동류들과 노닐 적에도 귀세(貴勢)를 띠지 않았으므로, 귀족 자제의 기습이 전혀 없었다.
공은 나이 40이 되도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이가 음사(蔭仕)하기를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더욱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나이 46세 때인 만력(萬曆) 임오년에 명경(明經)으로 진사제(進士第)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에 선보(選補)되었다. 그해 9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병술년에는 복을 마치고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정해년에는 전라도 도사로 나갔다가, 무자년에 들어와서 예조 좌랑이 되었고, 이해 9월에는 호조 정랑에 승진되었으며, 10월에는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이 되어 나갔다. 경인년 8월에는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었다. 신묘년에는 다시 기용되어 호조 정랑이 되었는데, 언제나 재능 있는 관리로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해 9월에는 의주 목사(義州牧使) 자리가 비었으므로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여 의주 목사에 임명하니, 낭료(郞僚)에서 발탁되어 당상(堂上)에 뛰어오른 것을 시론(時論)이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임진년 봄에는 경사(京師)에 간 역관(驛官)이 상국(上國)에 유언비어를 퍼뜨리어 요동(遼東)을 진경(震驚)시켰다는 말이 있어, 모두 옥관(獄官)에게 부쳐 국문한 결과, 말이 본주(本州)에 관련되었으므로, 공 또한 조사를 받았으나 일이 끝내 실증이 없어 무사하게 되었다.
그해 4월에는 일본국(日本國)의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60만이라 호칭하는 대군(大軍)을 징발하여 휘원(輝元), 청정(淸正), 행장(行長) 등 여러 추장(酋長)들을 장수로 삼아 조선을 침략해 와서 부산(釜山), 동래(東萊) 등의 성(城)을 연해서 함락시키자, 중외(中外)가 크게 진경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권모(權某)가 쓸 만한 재능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양남(兩南)의 거진(巨鎭)에 관직을 제수하여 그 재능을 시험해 보겠다.”
하고, 그날로 공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사은(謝恩)하고 곧바로 떠났다. 이때 나는 도승지로 정원(政院)에 직숙하고 있었는데, 공이 찾아와서 나와 작별을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왜 그리 급하게 떠나십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해졌으니, 이는 정히 신자(臣子)가 몸을 바칠 시기인데, 어찌 감히 잠시나마 머뭇거려서 세속 아배(兒輩)들의 슬피 울부짖는 꼴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나라가 태평세월이 오래 지속되어 온 터라, 갑자기 왜병(倭兵)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조신(朝臣)들이 양남(兩南) 지방을 마치 사지(死地)처럼 여겼는데, 공은 말이 비분강개한데다 당당하게 길을 출발하니, 정원의 동료들이 모두가 공의 큰 도량을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단기(單騎)로 달려서 광주(光州)에 이르렀는데, 미처 직사(職事)에 임하기도 전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하면서 군대를 징발하여 들어와서 방위하게 하였다. 그러자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의 군대를 징발하여, 이광은 스스로 2만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를 선봉(先鋒)으로 삼았고, 곽영은 또 2만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공을 중위장으로,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런데 공이 문인(文人)으로서 전행(前行)에 서게 된 것을 어떤 이가 의아하게 여기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나의 직사이다.”
라고 하였다.
이달 20일에 양군(兩軍)이 길을 나누어 전진하여, 이광은 용안(龍安)에서 강을 건너 임천(林川), 온양(溫陽) 등의 길을 경유하였고, 곽영은 전주(全州)로부터 여산(礪山), 공주(公州) 등의 길을 경유하여 함께 직산(稷山)에서 모이었다. 이때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와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도 모두 여기에 와서 모였는데, 충청의 병력 또한 수만이나 되어 군용(軍容)이 매우 성대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수원(水原)에 나아가 진을 쳤는데, 이광이 곽영으로 하여금 용인(龍仁)으로 진격하게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적(賊)이 이미 험고한 지역을 점거했으니, 지금 그들을 쳐다보고 공격하기는 어렵다. 지금 주공(主公)이 경내(境內)의 군사들을 몽땅 징발하여 들어와서 구원을 하는 중이니, 국가의 존망이 이번 한 차례의 일에 달려 있는 만큼 힘써 신중히 하여 만전을 도모해야지, 소소한 적과 교전하여 신위(神威)를 지레 허비해서는 안 된다. 오직 의당 조강(祖江)을 곧바로 건너서 임진(臨津)을 막는다면 서로(西路)가 절로 튼튼해지고 군량의 길 또한 트일 것이니, 그 형세의 편의함을 얻어 예기(銳氣)를 기르고 틈을 엿보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고 하였으나, 이광이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곽영이 먼저 백광언을 시켜 가서 도로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백광언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길은 좁고 수목이 빽빽하여 함부로 진격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이광이 성내는 빛이 있었다. 그러자 곽영이 말하기를,
“그러면 일을 장차 어찌해야겠는가.”
하고 마침내 진군(進軍)시키니, 이광이 이지시로 하여금 와서 싸움을 돕게 하였다. 그리하여 5월 5일에 이지시와 백광언이 각각 정병(精兵)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출전하면서 적을 매우 가벼이 여기는 기색이 있으므로, 공이 그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신중하여 함부로 진격하지 말고 중위군(中衛軍)이 이르기를 기다려서 싸워야 한다.”
고 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르기도 전에 백광언이 적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는 군사들을 독촉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그래서 적이 칼을 뽑아 들고 큰 소리를 외치면서 구릉을 따라 내려오자 아군이 바람에 쓸리듯이 무너져 버리므로, 적들이 승세를 타서 아군을 마구 찔러 이지시와 백광언이 모두 죽었다. 그리하여 이날 밤에 군중(軍中)이 지나치게 놀란 나머지 전사(戰士)들이 모두 싸울 뜻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적들이 산골짜기를 따라 기(旗)를 펼치고 나오자, 제군(諸軍)이 크게 궤멸되었다.
공은 마침내 광주(光州)로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주장(主將)이 의당 분부(分付)가 있을 터이니, 군대를 정돈하고서 기다리겠다.”
하였는데, 그 후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종사(宗社)가 잿더미가 되고 대가(大駕)가 파천을 하였는데, 신하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광주 경내의 자제(子弟) 500여 인을 모으고, 방군(傍郡)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또 천여 명의 군사를 얻어서 경상도의 계상(界上)에 나아가 진을 쳤다. 그랬다가 남원(南原)의 백성들이 스스로 여사(盧舍)를 불지르고 관창(官倉)을 겁략한다는 말을 듣고는, 공이 본부(本府)로 진을 옮겨 치고 인심을 위무하여 진정시켰다. 이때 순찰사 이광이, 공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을 임시로 도절제사(都節制使)라 칭하고 인하여 제군(諸郡)의 군사들을 독솔(督率)하여 돌격하는 적을 차단하게 하였다. 그래서 공이 이치(梨峙)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이때 영남의 여러 적들이 형세가 매우 창궐하여 곧바로 전라도를 공격하고 군대를 나누어 공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러자 공이 적의 형세가 매우 치장하다는 말을 듣고 영(嶺)을 의지하여 험고(險固)로 삼고 군대를 엄격히 정돈하고서 기다리었다.
이해 7월에는 영상(嶺上)에서 적과 만나서 군대를 놓아 급히 공격하였다.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은 용맹이 제군(諸軍)에 으뜸이었는데, 그가 적탄을 맞고 퇴각하자 일군(一軍)이 사기가 꺾여 군사들이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 차차로 창을 싸매고 머리를 안고 달아나니, 군중(軍中)이 흉흉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포시(晡時)에 적들이 아군이 지친 틈을 타서 아군의 성채(城砦) 안으로 뛰어들어오자, 공이 이에 칼을 뽑아 들고 크게 소리를 외치면서 친히 칼날을 무릅쓰고 더욱 힘차게 싸움을 독책하니, 사람들마다 죽기를 결단하고 싸움으로써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이 되었다. 그래서 이에 외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시석(矢石)이 비 오듯 쏟아지므로, 적들이 아군을 당적하지 못하고 마침내 갑옷을 버리고 시체를 질질 끌고서 도망쳐 버렸다. 그리하여 군자(軍資)와 기계(器械)들이 낭자하게 버려지고 길바닥에는 피가 벌겋게 흘러서 천곡(川谷)이 온통 비린내투성이었다. 그래서 적이 재차 호남을 엿보지 못하여, 여기가 근본이 되고 나라의 보장(保障)이 됨으로써 수년 동안에 걸쳐 동서(東西)로 물자를 운반 공급하여 군량이 한 번도 핍절된 적이 없었던 것은 바로 공의 힘이었다.
이해 가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본도(本道)의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공이 진중(陣中)에서 교서(敎書)를 맞이하여 받고는 머리를 조아리고 서쪽으로 향하여 통곡하니, 슬퍼하는 기상이 일군을 감동시켜 군교(軍校), 장리(將吏), 사졸(士卒)들이 눈물을 뿌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공은 이에 방어사로 하여금 이치(梨峙)를 대신 지키게 하고, 친히 전주(全州)에 이르러 도내(道內)의 군사 만여 명을 징발하여 이해 9월에 근왕(勤王)차 서쪽으로 향하였다. 이때 적추(賊酋) 행장(行長)은 이미 평양(平壤)을 함락하여 그 성에 들어가 점거하였고, 장정(長政)은 황해도(黃海道)를 점거하였으며, 융경(隆景)은 개성부(開城府)에 있었고, 평수가(平秀嘉)는 여러 추장들을 독솔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경성(京城)에 주둔하면서 군대를 놓아 사방으로 겁략함으로써 서로(西路)가 이미 단절되었다. 그래서 근왕하는 제장(諸將)들은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가 강을 의지하여 험고로 삼아서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
이때 공은 상(上)이 의주(義州)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을 불러서 계책을 논의하여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 지역은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경성(京城)이 가장 근본이 되는 지역이니 먼저 경성을 수복하여 행장이 주둔한 평양성과 군대를 연접시켜서, 행장으로 하여금 의혹을 품고 동쪽을 돌아보느라 서쪽으로 추축하는 데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 적들이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만일 강화로 들어간다면 이는 적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이때 상은 공이 독성에 주둔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칼 한 자루를 급히 보내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여러 장수들 가운데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가 있거든 이 칼을 가지고임의로 처단하라.”
하였다.
이때 평수가는 공의 병세(兵勢)가 매우 정예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수만의 군대를 삼진(三陣)으로 나누어 오산(烏山) 등지의 군영과 연결하여 왕래하면서 싸움을 걸어 왔다. 그러나 공은 성벽을 견고히 하여 굳게 지키기만 하고 적과 교전을 하지 않으면서 가끔 정예한 군사를 내어 적이 향하는 곳에 응전해서 적의 예봉을 꺾었다. 그러자 적의 기아(機牙)가 절로 무너지고 각거(角距)가 모두 타락되어 표략(剽掠)하여도 얻어진 것이 없었으므로 수일 후에는 군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망쳐 버렸고, 기내(畿內)의 다른 여러 적들도 차례로 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이때부터 서로(西路)가 통하게 되자 열군(列郡)의 의병(義兵)들이 공의 풍채를 바라보고 봉기(蜂起)하여 일시에 메아리처럼 호응해 왔다.
공은 어지러운 난리 속에 기용되어 외로운 군대를 거느리고 수많은 적들의 사이에 있으면서 허세를 부려 협박을 하고 억지로 위엄을 떨치어 호남, 호서를 붙들어 보호하였으므로, 지금 중흥(中興)의 공을 논하는 이들이 공을 으뜸으로 일컫는다.
계사년 2월에는 휘하의 정병(精兵) 4000을 나누어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서 그로 하여금 금주산(衿州山)에 군영(軍營)을 만들어 멀리서 성원을 하게 하고, 공은 스스로 정병 2300을 거느리고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나아가 진을 쳤으니, 그것은 서로(西路)를 누르면서 경성(京城)을 엿보려는 뜻에서였다.
이때 천조(天朝)의 대장군(大將軍)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수복하여 위명(威名)이 크게 진동하였다. 그러자 적추(賊酋) 청정(淸正)은 함경도에 있다가 경성으로 회군하였고, 융경(隆景), 장정(長政) 또한 달아나서 경성으로 돌아갔으며, 행장(行長)은 의지(義智), 조신(調信) 등과 함께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모아서 여러 추장들과 경성에서 합세하니, 적의 형세가 날로 더욱 치성해졌다.
그러자 공이 군대를 멀리 인솔하여 깊이 들어가서 곧바로 서쪽 겨드랑이 부분을 핍박하니, 적들이 아군의 규모가 적은 것을 보고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신 끝으로 걷어차서 대번에 거꾸러뜨릴 계획으로 군중을 몽땅 동원하여 나왔다. 드디어 2월 12일 새벽에 후리(候吏)가, 적들이 좌익(左翼), 우익(右翼)으로 나누어 홍기(紅旗), 백기(白旗)를 들고 본영(本營)을 향하여 온다고 아뢰므로, 공이 군중(軍中)에 동요하지 말라고 명하고 대(臺)에 올라서 바라보니 본영과 5리쯤 떨어진 언덕 위에 적의 무리가 이미 그득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 선봉(先鋒) 100여 기(騎)가 차츰차츰 핍박해 오더니, 이윽고 수만여 병졸이 들판을 가득 덮어와서 본영을 포위하고 최후에는 대군으로 계속 진격해 오므로, 아군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는데, 적들은 군대를 삼영(三營)으로 나누어 군졸들을 휴식시키면서 교대로 진격해 왔다. 그런데 묘시로부터 유시에 이르기까지 무릇 세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적이 불리하였다. 그러자 적이 군중 사람들로 하여금 섶뭉치[束芻]를 가지고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서 우리 성책(城柵)을 불지르게 하므로, 우리 성중에서는 물을 쏟아 내리었다.
처음에 승군(僧軍)으로 하여금 서북면(西北面)의 자성(子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승군이 잠시 퇴각한 사이에 적들이 큰 소리를 외치며 성 안으로 어지러이 쳐들어오니, 온 군중이 바람에 쓸리듯 괴란되었다. 그러자 공이 스스로 칼을 뽑아 들고 장수들을 독책하니, 장수들이 모두 칼날을 무릅쓰고 격투를 벌임으로써 적이 이에 퇴각하였다. 적이 물러가서는 시체들을 네 무더기로 쌓고서 섶을 모아 시체를 불태우니, 그 냄새가 10리 밖까지 풍기었다. 이때 아군은 적의 남은 시체들을 수습하여 130여 급(級)을 베고, 군자(軍資), 개갑(鎧甲), 기치(旗幟), 도창(刀槍) 등을 무수히 노획하였다.
이때 이 제독은 개성부(開城府)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먼저 선봉(先鋒) 유격장군(遊擊將軍)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왕래하면서 적정(賊情)을 탐지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공의 대첩(大捷) 소식을 듣고는 바로 그 다음날에 부장(副將)을 보내어 어제 전투한 곳을 살펴보게 하고 예물(禮物)을 보내어서 하례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일 후에는 공과 서로 만나 보기를 요청하므로, 공이 군진을 정돈하고서 기다렸는데, 기치(旗幟)는 선명하고 기계(器械)는 정예하며 호령(號令)은 엄명하고 부오(部伍)는 질서 정연하였으므로, 천장(天將)이 공을 더욱 공경히 대우하였고, 심지어는 서로 말하기를,
“권가군(權家軍)은 다른 진영과 자별(自別)하니, 참으로 외국(外國)에 참다운 장수가 있도다.”
라고까지 하였다.
그로부터 3개월 뒤에는 천조(天朝)의 총독 군문(總督軍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본국에 이자(移咨)하여 공에게 별도로 장상(獎賞)을 행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왜노(倭奴)가 조선(朝鮮)을 꺾어 무너뜨림으로부터 왕국(王國)의 삼도(三都)와 여러 군현(郡縣)들이 모두 왜노를 바라만 보고도 궤멸되었고, 일찍이 의사(義師)를 일으켜 대란(大亂)을 평정하고 봉강(封疆)을 지켜서 회복(恢復)을 도모한 영웅 걸사(英雄傑士)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왕국에는 진정 사람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유독 전라 관찰사(全羅觀察使) 권모(權某)는 외로이 떨어진 지역을 눌러 지키면서 군중을 불러모으고 자주 기계(奇計)를 내어 수시로 대적(大敵)을 방어하였고, 요즘에는 다시 모래주머니를 군량인 것처럼 위장하여 왜노들이 와서 약탈하도록 유인해서 그들을 겁살하였으니, 이는 정히 왕국에 있어 난세(亂世)의 충신(忠臣)이요 중흥(中興)의 명장(名將)이다.”
하고, 인하여 홍단견(紅段絹) 4단(端)과 백은(白銀) 50냥(兩)을 상으로 내리어 충용(忠勇)을 권장하는 뜻으로 삼고, 또 국왕(國王)으로 하여금 작록(爵祿)을 올려 주어 본국의 요재(僚宰)들을 감화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천조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상서(上書)에서는,
“전라도가 썩 조정의 명을 잘 받들어 배신(陪臣) 권모(權某)가 홀로 외롭고 위태로운 지역을 지키면서 강경한 적을 막아냈다.”
는 일로 주문(奏聞)하니, 천자가 공을 가상히 여겼다. 그리하여 이해 3월에 병부(兵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말하기를,
“조선은 본디 강하기로 일컬어졌거니와, 이제 전라도에서 참획(斬獲)한 것이 매우 수다함을 보니, 해국(該國)의 인민들이 스스로 진작할 수 있겠다.”
하고, 인하여 홍로시(鴻臚寺)의 관원을 차견해서 본국에 선유(宣諭)하였다. 이로부터 천조의 문무(文武) 대소관(大小官)들이 매양 공의 이름을 들을 적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지난날에 행주대첩을 아뢴 사람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행주대첩이 있은 뒤로는 전라도의 일진(一陣)이 제군(諸軍)의 으뜸이 되었다.
그 후 공은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진을 옮겼는데, 적이 군중을 총동원하여 서쪽으로 가서 행주의 패배를 보복하려 하였으나, 공의 벽루(壁壘)가 높고 깊음을 보고는 군중을 거두어 물러갔는데, 이렇게 한 것이 무려 세 번이었다. 그런데 그해 4월에 평수가(平秀嘉)의 여러 추장들이 스스로 저들의 병세(兵勢)가 점점 쇠퇴해짐을 알고는 제독(提督)과 서로 강화(講和)를 하고 군대를 전부 거두어서 도망쳐 돌아갔다. 이때 공이 그 소식을 듣고 간단한 병력으로 밤새도록 달려서 성에 들어가 보니, 적은 이미 강을 건너버린 뒤였다. 그러자 공이 재촉하여 선봉(先鋒)으로 하여금 이틀길을 하루로 잡아 급히 달려서 그 뒤를 밟아 쫓도록 하고, 공은 대군을 정돈하여 진격할 차비를 갖추었는데, 공이 미처 길을 떠나기 전에 제독이 여러 장수들을 독책하여 모의하기를,
“전라 포정사(全羅布政使)는 비분강개하여 싸움을 잘하고 사졸(士卒)들이 그의 명을 잘 따르므로, 지금 그가 만일 군중을 총동원하여 적을 추격한다면 우리가 강화한 일을 무너뜨릴 것이다.”
하고, 한밤중에 급히 유격장군(遊擊將軍) 척금(戚金)을 보내어 노량진(露梁津)으로 달려가서 진선(津船)을 모조리 걷어치워서 군사들을 건너지 못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척금이 자기 심복을 공에게 보내어 함께 일을 계획하기 위해 서로 만나기를 요청하므로, 공이 그곳에 가니 척금이 공을 힐책하여 말하기를,
“공이 이야(李爺)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적을 추격하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그리고는 날마다 그 밑에 사람을 보내어 공의 동정을 살피게 하여 은밀히 방비를 하였으므로, 공이 감히 움직일 수 없어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본도로 돌아갔다. 이해 6월에는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제군(諸軍)을 독솔하여 영남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갑오년에는 병으로 해면을 요청하니, 상이 특별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간병을 하게 하였다. 그때 한 무관(武官)이 전장에 나가기를 꺼리어 금주(金州)로 도망가 숨어서 스스로 천장(天將)에게 의탁하였으므로, 공이 누차 본주(本州)에 이서(移書)하여 그를 결박해서 군문(軍門)으로 압송하도록 하였으나, 주관(州官)이 천장을 두려워하여 감히 누구냐고 말도 못하였다. 그러다가 을미년에 공이 본주에 이르러 이졸(吏卒)을 풀어서 그를 체포하니, 천장이 입이 닳도록 애걸하였으나 공이 끝내 그를 목 베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남방으로 군사를 시찰하러 나간 국상(國相)이 본주에 이르렀을 때, 그 무관의 집에서 국상에게 공을 모함함으로써 공이 마침내 이 일로 파면되었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장(大將)이 된 지 3년에 도망간 병졸 하나를 목 베고 관직이해면되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이해 10월에는 한성부 판윤, 비변사 당상, 호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병신년에는 충청도 관찰사에 제배되었다. 이때 적이 오래도록 물러가지 않으므로 조정에서 한창 원수(元帥) 임명할 일을 의논하였는데, 상이 묻기를,
“누가 원수가 되기에 적합한가?”
하니, 좌우에서 다른 사람으로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권모(權某)로 삼지 않는가?
하고, 인하여 공을 특별히 원수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공이 상소하여 해면하기를 요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卿)은 충로(忠勞)가 성대히 드러났고 용략(勇略)이 세상에 뛰어나서, 명성은 천하에 널리 알려지고 위엄은 적국을 습복(慴伏)하게 하였으니, 원수의 직임을 경말고 그 누가 맡겠는가. 경은 의당 사양하지 말고 다시 더욱 마음을 다하여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였다. 그로부터 수일 뒤에 공이 경연에 입시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죄로 인하여 경이 오랫동안 밖에서 노고를 하였으니, 경이 아니면 국가가 어떻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하고, 특별히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하사하였다.
이해 3월에 공이 원수로 나가면서 배사(拜辭)하니, 상이 공을 인견하고 남방(南方)의 형세와 군량(軍糧), 기계(器械)의 많고 적음, 인심(人心)과 풍속(風俗), 수령(守令)의 현부(賢否)와 제장(諸將)의 용겁(勇怯), 군정(軍情)의 고락(苦樂)과 인재(人材)의 침체(沈滯) 등에 관하여 반복해서 자문하되, 해가 기울도록 태만한 표정이 없었으며, 또 말하기를,
“경을 수고롭게 하여 재차 내보내노니, 흉적들을 섬멸하여 국가를 편안하게 해 주기만을 내가 오직 바라노라.”
하고, 인하여 술을 내리었다. 공이 나옴에 미쳐서는 상이 또 이르기를,
“국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나의 죄이지만, 경이 사졸들을 독려하여 한시바삐 적을 평정하라. 지금 시사(時事)가 조금 편안해진 것은 바로 경의 공을 힘입은 것이다.”
하고, 또 내구마 한 필 및 마장(馬粧)을 하사하였다.
이때 천조(天朝)에서 막 일본(日本)에 사신을 보내어 수길(秀吉)을 일본 국왕(日本國王)에 봉하였으므로, 우리 나라 변방에 주둔한 왜추(倭酋)들과 본국의 제장(諸將)들이 모구 각각 진군(進軍)을 정지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은 임지에 부임하자마자 군무(軍務)에 관한 칠사(七事)를 조목조목 올렸는데, 적봉(賊鋒)이 재차 창궐하게 될 것을 깊이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병신년 겨울에는 우리 쪽 사람이 일본에서 돌아옴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비로소 두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과 청정(淸正)이 곧 재차 조선을 건너오게 될 것을 알게 되어, 중외(中外)의 인심이 흉흉하여 안정치 못하였다. 공은 이때 밀양(密陽)에 있으면서 내가 그 경계에 들렀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서로 만났는데, 공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요즘 듣건대, 좋지 못한 변보(邊報)가 있음으로 인하여 제공(諸公)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괴로이 근심 걱정만 하고 있을 뿐, 변방의 일에 대하여 한 가지 계책도 언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란 말인가. 가령 청정이 재차 나온다 하더라도 단지 지난날의 청정에 불과할 것이니, 이 적이 지난날에 이미 뜻을 얻지 못했는데 어찌 재차의 도전에서 공을 거둘 것을 기필하겠는가. 그런데도 장상(將相)들은 앉아서 걱정만 하고 있단 말인가. 국가의 일을 그러고도 해낼 수 있겠는가. 만일 조정에서 소아배(小兒輩)들이 대사(大事)를 그르치도록 놔두지 않고 나로 하여금 손을 쓰게 하여 약간의 시일만 허용해 준다면, 청정이 설령 온다 하더라도 나에세 스스로 그를 대비하는 방책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군대를 나누고 성책을 나열하여 동서로 응원하는 계책을 진술해 올리니, 상이 매우 가납(嘉納)하여 그 의논을 정신(廷臣)들에게 내리었다. 그런데 이때 변보(邊報)가 날로 급박해지자, 정신들이 눈을 부릅뜨고 서로 쳐다보기만 하고 감히 한 가지 생각이라도 짜내서 말하는 자가 없었다가, 공의 장계(狀啓)를 보고는 모두 말하기를,
“원수가 이러하니, 약간 마음이 든든해진다.”
하고, 즉시 공의 의논을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으로 복계(覆啓)하였으나, 그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정유년 가을에는 적들이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올라오는데 선봉이 이미 충청도에 이르렀다. 그러자 조정에서 한강(漢江)을 차단하고자 하여 공으로 하여금 급히 달려 입조(入朝)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서로 협력해서 한성을 수어(守禦)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공이 입조하여 유성룡과 함께 입시(入侍)했는데, 유성룡이 강면(江面)을 차단할 일을 오로지 공에게 책임지울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처음에 공이 입조했을 때, 상이 놀라면서 이르기를,
“남방의 적세(賊勢)가 한창 치성한데, 원수가 어찌하여 갑자기 입조하였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분부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좌우에서 모두 말하기를,
“요즘에 적봉(賊鋒)이 이미 경기(京畿) 지역을 핍박하였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한강을 차단하여 지키자는 쪽으로 모아졌는데, 권모가 아니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를 불렀던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들이 직산(稷山)에서 막 꺾이어 군중을 말듯이 몰아쳐 돌아가므로, 조정에서는 또한 서북병(西北兵)을 징발하여 적을 추격하게 하고, 공을 재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여신(餘燼)을 수습하고 장수들을 책려(策勵)해서 천병(天兵)과 협동하여 재차의 거사를 도모하도록 하였다.
이해 겨울에는 흠차경리도찰원도어사(欽差經理都察院都御史) 양호(楊鎬)가 제독총병(提督總兵) 마귀(麻貴)와 함께 4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삼도(三道)로 나누어 수륙(水陸)으로 아울러 진군해 왔다. 그러자 공은 여러 장수들에게 각자의 직무를 분담시키어 천병을 협조하여 따르면서, 자신은 경기(輕騎)를 거느리고 효용(梟勇)한 장수를 뽑아 대동하고서 친히 제독의 군영을 따랐다.
그런데 제독이 문경현(聞慶縣)에 이르러서는 삼로(三路)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놓고 은밀히 군무(軍務)를 논의했는데, 공 또한 그 자리에 참여했었다. 이때 제독이 은밀히 말하기를,
“천병이 울산(蔚山)에 이르거든 원수 또한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전선(戰船)을 정비하게 하여 포수(砲手)를 많이 싣고 앞바다에서 병위(兵威)를 과시하여 성세(聲勢)를 돕도록 하시오.”
하므로, 공은 일체 그의 말대로 하였다. 그런데 제독이 울산을 공격하다 불리함에 미쳐서는, 경리(經理)가 공으로 하여금 홀로 본국의 토병(土兵)을 거느리고 화공전(火攻戰)을 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공이 여러 장수들을 독책하여 돌진하다가 가장 뒤늦게 온 군졸 두 사람을 목베어 조리를 돌리니, 제군(諸軍)이 모두 팔짝팔짝 뛰며 환호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였다. 그리고 본국의 대장(大將), 병사(兵使), 방어사(防禦使) 이하 여러 장수들이 개미처럼 늘어붙어 올라가 함께 책내(柵內)로 들어가서 성하(城下)에 육박하니, 제독이 장전(帳前)에서 바라보고 은밀히 공의 뛰어난 용병술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원수가 호령(號令)을 능히 행한다.”
하였고, 그 이튿날에는 경리 또한 칭찬하여 말하기를,
“조선의 군병(軍兵)이 힘껏 싸워서 성세를 도와 주니 매우 기쁘다.”
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경리에게 말하기를,
“지금 도산(島山)을 공격하자면, 우도(右道)의 연해에 적진(賊陣)이 별처럼 나열해 있으니, 그들이 도산이 급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형세가 반드시 군대를 규합해 와서 구원할 것입니다. 그러니 의당 일진(一陣)의 병마(兵馬)를 나누어서 외부의 구원병을 차단한다면 청정의 머리를 휘하에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천병이 도산을 12일 동안이나 포위한 결과, 성(城)이 작고 견고한데다 적들 또한 성대히 방비를 하였으므로 온갖 방도로 성을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이때 공은 천병을 협조하여 주선하면서 창을 베고 한데에서 거처를 하다 보니, 투구와 갑옷 속에서 이[蟣虱]가 생기기까지 하였으나 예기(銳氣)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그 후 끝내 적의 원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천병이 그 때문에 안전 지대로 퇴각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일체 공의 말대로 되었던 것이다.
무술년에는 대군(大軍)이 이미 돌아간 뒤였으므로 공이 병을 핑계로 상소하여 파면을 요청하니, 상이 사람을 급히 달려 보내어 하유하기를,
“경은 이미 행주(幸州)의 공을 세워서 위명(威名)이 원래 드러났는데, 지금 이 도산의 싸움에서는 제독이 또한 호령을 능히 행한다고 경을 칭찬하였으니, 재반(宰班)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실로 경을 대신할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경은 다시 더 책려(策勵)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을 한정으로 삼을지어다.”
하였다.
이해 가을에는 천조의 총독 군문(總督軍門) 대사마(大司馬) 형개(邢玠)가 세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삼로(三路)로 재차 진격하게 하여, 제독 마귀(麻貴)는 울산(蔚山)의 길로 향하고, 제독 동일원(董一元)은 사천(泗川)의 길로 향하고, 제독 유정(劉綎)은 순천(順天)의 길로 향하게 되었는데, 대군(大軍)이 곧 출발하려 할 적에 세 대장이 각각 희망하는 것이 있었으니, 본국의 명장을 얻어서 자기들을 협조하여 따르게 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마귀와 유정은 모두 권 원수를 얻기를 요구하여 서로 다투어 마지않으므로, 상이 끝내 공을 유정에게 맡겨 주었다.
이윽고 천병이 순천에 이르러서는 왜교(倭橋)를 포위하고도 함락하지 못하였고, 유 제독은 아예 싸울 마음도 없었다. 그러자 공이 몹시 분개하게 여기어 스스로 각 영(各營)에서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는 군사로서 적봉(賊鋒)을 돌격하는 데에 용감한 자들을 모집하여 소리를 크게 외치고 먼저 올라서 천병과 협력하여 일제히 진격하기를 청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시험삼아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의논하겠다.”
하고는 우물쭈물하고만 있었으니, 그의 뜻은 이미 퇴각하기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독이 왜교를 9일 동안이나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군(軍)이 끝내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공이 처음에는 마귀를 따랐고 두 번째는 유정을 따랐는데, 도산의 싸움과 왜교의 싸움은 대소(大小)의 체제와 존비(尊卑)의 차서가 서로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장(天將)을 받들어 섬기느라 손을 놓고 성공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천장의 통제를 받아 그 명령만을 오직 삼가서 따를 뿐이었고, 감히 자기 주장을 써서 그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누차 해 볼 만한 기회를 만나서도 머뭇거리며 감히 진취하지 못함으로써, 끝내 화류(驊騮), 산자(山子)와 같은 천하 준마의 재능으로 하여금 중도에서 발을 굽히게 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던가. 애석하도다.
공이 이치(梨峙)의 싸움에서 위성(威聲)이 처음 드러났고, 행주(幸州)의 대첩에서는 영문(榮聞)이 멀리 전파되었다. 그래서 뒤에 행장(行長)이 의지(義智), 조신(調信)과 함께 매우 간절히 강화(講和)를 요구하면서 경상 병사(慶尙兵使) 김응서(金應瑞)와 중로(中路)에서 만나기를 요청하였는데,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절반도 하기 전에 세 추장이 권 원수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정성을 바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리고 청정(淸正)이 본국의 순신(純信)한 사람과 강화하기를 원했을 적에는 조정에서 산인(山人) 유정(惟政)을 그의 군영에 들여보냈는데, 청정이 맨 먼저 권 원수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는 왜인(倭人)들이 매양 본국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권 원수는 어디에 있으며 요즘에는 무엇을 하는가 등을 물었다. 그리고 경사(京師)에 조회 간 본국 사신이 어떤 일로 병부 아문(兵部衙門)에 갔을 적에는 상서(尙書) 석성(石星)이 이야기하던 차에 말하기를,
“너의 나라의 군신(群臣)들 가운데 권모(權某) 같은 사람 수인(數人)만 더 있다면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고 하였다.
기해년 봄에는 공이 영남에 있었는데, 하루는 두루마리[卷子] 하나를 가져다가 임진년 이후 전후로 받은 성지(聖旨)들을 기록하고서 두어 번 훑어보고 말하기를,
“나는 아들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선덕(先德)을 천양(闡揚)할 사람이 없거니와, 나 또한 본디 내 신후(身後)의 일을 꾸며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비록 그러나 사위 이 의정(李議政)이 있어 반드시 나의 묘지(墓誌)를 쓸 것이니, 만일 나의 평생사(平生事)를 찾으려고 한다면 다만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런데 이해 여름에 끝내 담질(痰疾)을 얻어 고향에 돌아가 죽기를 요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이 이 명(命)을 얻고는 먼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화(江華)의 촌사(村舍)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들어앉아 수년 동안 질병을 요양한 다음에 환조(還朝)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런데 강화로 돌아갈 때에 미쳐 병이 위독해져서 길을 출발할 수 없으므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경성에 들어와서 의약(醫藥)을 찾아갔는데, 경성에 이르러서는 이미 조회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7월 6일에 우사(寓舍)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63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몹시 애도하고 그를 위하여 2일 동안 철조(輟朝)하였으며, 낭관(郞官)이 그 집에 조문하였다.
병란(兵亂)이 일어난 이후로는 국가의 저축이 고갈됨으로 인하여, 무릇 재상(宰相)의 죽음에 있어서도 모두 치부(致賻)를 그만두었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유사(有司)가 전례에 따라 치부하지 말기를 청하니, 상이 특별히 부제(賻祭)를 내리었다. 그로부터 수일 후에는 상이 공에게 관직을 추증하고자 하여 그 의논을 대신에게 내리니, 대신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권모는 처음에 일개 수령(守令)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구원할 적에도 의기(義氣)가 가상하였거니와, 행주(幸州)의 싸움에 이르러서는 난리가 일어난 이후 하나의 대첩(大捷)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성(京城)을 수복한 것은 권모의 공이라고 하였습니다. 적과 대진(對陣)한 지 8년 동안에 기나긴 풍로(風露)를 겪으면서 몸이 파리해지도록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였으니, 인신(人臣)의 의리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여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하였다.
공의 전취(前娶)는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조휘원(曺輝遠)의 딸인데,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후취(後娶)는 강서 현령(江西縣令) 박세형(朴世炯)의 딸인데,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전부인(前夫人)에게 1녀가 있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게 시집갔으니, 이가 바로 나이다. 9월 15일에 홍복산(洪福山) 압곡(鴨谷)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공을 장사지냈는데, 선대부(先大夫) 의정(議政)의 묘가 바로 그 위에 있다.
이에 앞서 공이 작고하여 염(殮)을 끝낸 뒤 빈객(賓客)들이 일을 마치고 나서 회곡(會哭)하고 물러가려 할 적에 공의 형(兄)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상호군(上護軍) 권군 순(權君恂)이 공의 군좌(軍佐), 고리(故吏)들과 꾀하여 말하기를,
“아, 내 아우의 재덕(才德)과 공렬(功烈)은 의당 서술하여 죽은 이를 높여 주는 후인(後人)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끝없이 전하는 데에 또한 크게 유익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이 일을 나에게 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어려서 의탁할 곳 없는 고아(孤兒)가 되어 공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서, 삼가 일찍이 공의 사실을 능히 말할 만한 구가 고로(舊家故老)에게서 공에 대한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에 이르기를,
“공이 조정에 있을 때는 고니처럼 우뚝 서서 일을 만나면 천둥처럼 격동하였고, 신출귀몰하여 기변(機變)이 무궁하면서도 정도를 잃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시조인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면 의연(毅然)하고 곁에 나아가 보면 온화하며 화락함으로써 사람을 접대하여 충심을 남김없이 토로한 것으로 말하면 양촌(陽村)과 같은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그리고 높은 관(冠)에 큰 띠를 띠어 풍채가 준정(峻整)하고 일을 당해서는 정도를 굳게 지키어 질박하게 하고 까다롭게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의정(議政)의 국량이 있었다. 그러니 이 세 가지를 겸하고도 공렬(功烈)은 그분들보다 뛰어났다는 것이 공을 두고 이른 말이다.”
고 하였다. 나는 이제 감히 여러 장리(將吏)와 종인(宗人)의 말을 취하여 붓을 잡은 이의 채택(採擇)에 대비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