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관련 공부자료/새 카테고리3

신라말기 三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자료

아베베1 2013. 3. 25. 05:51

 

 신라 말기 3최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관련 연구 자료  

 

 

 

 
동문선 제57권
 서(書)
대 견훤 기 고려왕 서(代甄萱寄高麗王書)

최승우(崔承祐)

지난날 신라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족하(足下)를 서울로 불러들이게 하니, 마치 암자라[鼈]가 수자라[黿]의 소리에 응하는 것 같고,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가지려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뜨리고 사직(社稷)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므로, 이에 먼저 조적(祖逖)은 말채를 잡았고 한금호(韓擒虎)는 도끼를 휘둘렀습니다. 백관들에게 맹세(盟誓)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하였고, 육부(六部)에 효유(曉諭)하기를 의풍(義風)으로 하였는데, 뜻밖에 간사한 신하는 도망하고 임금은 변을 당하여 죽었으므로, 곧 경명왕(景明王)의 외종(外從)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을 권하여 즉위하게 하니 “위태로웠던 나라는 중흥되고 잃었던 임금은 있게 되었다.”는 말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족하는 충고(忠告)하는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다만 유언(流言)을 듣고 여러 가지 꾀로 넘겨다 보고 다방면으로 침략하였으되, 아직 나의 말머리[馬首]를 보지 못하였고 나의 소털 하나를 뽑지 못하였습니다.
초겨울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아래에서 손을 묶였고, 이달에는 좌상(左相) 김낙(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해골을 버렸으니, 죽인 것이 이미 많을 뿐 아니라 추격하여 사로잡은 것이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승부(勝負)를 가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평양(平壤)의 누각(樓閣)에다 활을 걸고 패수(浿水)의 물을 말에게 마시게 하려고 기필하였는데, 지난 달 7월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나에게 와서 왕의 조지(詔旨)를 전하기를, “그대는 고려와 오랫동안 화호하였고 인맹(隣盟)을 맺었다가, 요즈음 볼모[質]로 교환했던 아들들을 양편에서 모두 죽인 관계로 옛날의 화친을 깨뜨리고는, 서로 강토를 침략하여 전란이 그치지 않는 것을 알고, 이제 오로지 사신을 그대의 서울로 보내니, 본도(本道)에서는 고려에 글을 보내어 서로 친선(親善)하여 길이 아름다움을 보전하라.” 하였습니다. 나는 의(義)로는 존왕(尊王)하는 데 돈독하고 정은 사대(事大)하는 데 깊은지라 조지를 듣고는 곧 그대로 시행하려고 하였지마는, 다만 염려되는 것은 족하로서는 그만두라 하여도 능히 하지 못하여, 곤궁하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까 하여 이제 그 조서를 기록하여 부쳐보내니, 청컨대 유의(留意)하여 살피십시오.
교활한 토끼와 뛰어난 사냥개가 서로 도망가고 잡으려 하나 끝내 잡히거나 잡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고,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또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니, 족하는 마땅히 고칠 줄 모르는 성미를 경계하여 스스로 후회를 끼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D-001]조적(祖逖) : 진(晉) 나라가 흉노(匈奴)족에 쫓기어 강남으로 내려갔는데 조적은 흉노족과 싸우려고 북으로 향할 때에, 말채찍으로 북방을 가리키며 죽을 때까지 그들과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주D-002]한금호(韓擒虎) : 수(隋) 나라의 대장으로 남조의 진(陳) 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주D-003]교활한 토끼와 …… 원망하게 되고 : 사냥개가 교만한 토끼를 다 잡으니 그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옛말이 있다.

 

동사강목 제5상
기유년 진성 여주 3년(당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 889)



○ 나라 안에 도적이 일어났다.
이때 주군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아니하여 부고(府庫)가 비게 되었다.
여주가 사자를 보내서 독촉하니, 각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기훤(箕萱)은 죽주(竹州)지금의 죽산(竹山) 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양길(梁吉)은 북원(北原)지금의 원주(原州) 영원성(鴒原城)으로 원주 치악산(雉岳山) 남쪽 산줄기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로는 이 성은 양길이 점거하던 곳이라 한다 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기타 무리를 옹호하여 스스로 칭호하는 자는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이에 원종(元宗)ㆍ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를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여주가 내마 영기(令奇)에게 명하여 체포하게 하였으나, 영기는 도적을 무서워하여 나가 싸우지 못하고 촌주(村主) 우련(右連)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여주가 칙명으로 영기를 참형(斬刑)에 처하고 나이 10여 세 된 우련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다.
최승우(崔承祐)를 당에 보내어 유학시켰다.
최승우는 그 뒤 경복(景福 당 소종의 연호) 2년(893)에 시랑 양섭(楊涉)의 방하(榜下)에 급제하였다. 사륙체 문집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쓰고 《호본집(糊本集)》이라 하였다.
신라는 당을 섬긴 이후부터 항상 왕자를 보내 숙위하고, 또 학생을 보내 태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닦게 하며, 10년의 연한이 차면 본국에 돌아오게 하고 다시 다른 학생을 보냈는데, 입학하는 자가 많을 때에는 1백여 인이나 되었다. 서적을 구입하는 은화는 본국에서 지급하고, 학습하는 서적과 양식은 당의 홍로시에서 공급하였다. 그러기에 학생의 가고 오는 자가 서로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장경(長慶 당 목종의 연호) 초에 김운경이 처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빈공과는 과거가 있을 때마다 항상 외국인을 위하여 별시(別試)를 보여 방(榜) 끝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김운경으로부터 당 말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자가 58인이며, 오대(五代)의 양(梁)과 당(唐) 때에도 32인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나타낸 자는 최이정(崔利貞)ㆍ김숙정(金叔貞)ㆍ박계업(朴季業)ㆍ김윤부(金允夫)ㆍ김입지(金立之)ㆍ박양지(朴亮之)ㆍ이동(李同)ㆍ최영(崔霙)ㆍ김무선(金茂先)ㆍ양영(楊頴)ㆍ최환(崔渙)ㆍ최광유(崔匡裕)ㆍ최치원(崔致遠)ㆍ최신지(崔愼之)ㆍ김소유(金紹游)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ㆍ최승우(崔承祐)ㆍ김문울(金文蔚) 등으로 모두 성재(成材)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박인범은 시(詩)로 울렸고, 김악은 예(禮)로 일컬어졌으며, 최치원ㆍ최신지ㆍ최승우는 더욱 저명한 자이다. 또 원걸(元傑)ㆍ왕거인(王巨仁)ㆍ김수훈(金垂訓) 등은 모두 문장으로 저명하나 사서에 빠져서 전하지 않는다. 최치원의 문집에서 보충


 

 

 

동사강목 제5하
확대원래대로축소
무오년 효공왕 2년(당 소종 광화(光化) 원년, 898)



춘정월 어머니 김씨를 추존하여 의명 태후(義明太后)라 하였다.
○ 준흥(俊興)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계강(繼康)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월 궁예가 왕건(王建)을 정기 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았다.

추7월 궁예가 송악군(松嶽郡)에 도읍하였다.
이에 앞서, 양길(梁吉)이 북원(北原)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등 30여 성을 취하여 차지하였는데, 자기에게 궁예가 두 마음 품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엄습하려고 하였으나, 궁예가 이를 알고 먼저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이에 궁예는 병세(兵勢)가 날로 융성하여져서 드디어 패서도(浿西道) 및 한산주(漢山州) 관내의 30여 성을 취하였다. 궁예는, ‘송악군(松嶽郡)은 한수 북쪽의 이름난 고을로서 산수가 기이하고 수려하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이곳을 정하여 도읍을 삼고 공암(孔巖)지금의 양천(陽川)ㆍ검포(黔浦)지금의 김포(金浦)ㆍ혈구(穴口)지금의 강화(江華) 등 30여 성을 쳐서 깨뜨렸다.

동11월 궁예가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 아찬(阿飡) 최치원(崔致遠)이 죄가 있어 면직되었다.
치원이 서쪽으로 당나라를 섬기면서부터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와서도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자, 스스로 불우함을 상심하여 다시 벼슬하여 출세할 뜻을 버리고 스스로 산수 사이를 방랑하였는데, 대사(臺榭 누대와 정자)를 마련하며 송죽(松竹)을 심고 서사(書史)를 탐독하며 풍월을 읊조렸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인간의 요로 통진(要路通津 현달한 벼슬길)에는 눈을 떠 볼 만한 곳이 없고, 물외(物外 속세 밖의 세계)의 청산녹수(靑山綠水)는 꿈에라도 돌아갈 때가 있으리라.”
한 것이 있었다. 왕건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울 것을 알아보고 편지를 보냈는데,
계림에는 나뭇잎이 노랗고 / 鷄林黃葉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 / 鵠嶺靑松
라고 한 구절이 있었다. 뒷사람이 그곳을 이름하여 상서장(上書庄)이라 하였는데 지금 경주 금오산(金鰲山) 북쪽에 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꺼려하자, 치원은 곧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여, 모형(母兄 동복형)인 중 현준(賢俊)ㆍ정현사(定玄師)와 더불어 도우(道友)를 삼고 함께 기거하면서 노래(老來)를 마쳤다. 저술한 문집(文集) 30권이 세상에 전한다. 이규보(李奎報)는 이렇게 적었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또 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실었고, 자주(自註)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으로 빈공 급제(賓貢及第 외국인으로 중국 과거에 급제한 것)하여 고병(高騈)의 회남종사(淮南從事)가 되었다.’ 하였는데, 나는 이를 읽고 중국 사람의 도량이 끝없이 넓어서 외국 사람이라 하여 경중을 두지 않은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무용(武勇)에 있어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모두 고려 사람인데도 각기 열전에 나열하여 그들의 사적을 갖추 기록하였으나, 문예에 있어서는 유독 고운(孤雲 최치원의 호)을 위하여 전을 두지 않았다. 생각하건대, 옛날 사람들이 문장에 있어서 서로 혐기(嫌忌)하였거늘, 하물며 치원은 외국의 고독한 유생으로 중국에 들어가 그 고장의 이름난 무리들을 짓눌러 버렸으니, 이는 중국 사람들이 혐기할 만한 것이다. 만약 전을 세워 그 사실을 곧바로 기록하면 그 혐기에 관계될까 하여 일부러 생략한 것인가?”
【안】 선비가 불행히도 쇠란(衰亂)한 세상에 처하여, 만약 지위가 높고 책임이 무거워서 형세가 조정을 떠나지 못할 때에는, 나라가 있으면 함께 있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하여 그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멀리 빠져나가서 임천(林泉)에 자취를 숨기고 인간의 일에 간여함이 없거나, 오직 이 두 가지 길뿐이다. 고운은 신라 때에 4조(四朝)를 내리 섬겼고 지위가 아찬에 이르렀으니, 사서에는 비록 ‘때를 만나지 못하여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하였더라도 또한 총애(籠愛)가 지극하였다고 할 만하다. 궁예는 신라 왕실의 반적(叛賊)이 되고, 고려 태조는 그 도당이 되었으니 그도 또한 반적이다. 비록 그 용 같은 모습과 봉 같은 자질에, 웅대한 도략과 심원한 계책으로 제왕이 될 만한 기상과 나라를 개창할 조짐이 있더라도 나의 마음 가운데 더욱 개탄하는 바가 있었다면 어찌 차마 글을 올리고 교제를 청하여 선견지명을 자랑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 태조는 신라의 유민(遺民)으로 혼란을 틈타서 굴기(倔起)한 사람이다. 고운이 당세의 명망을 등에 지고서 만약 환ㆍ문(桓文)의 사업을 본받아서 왕실을 부흥할 것을 면려하였더라면, 고려 태조의 명달(明達)하고 관인(寬仁)한 도량으로 혹 생각하는 바가 있었을 터인데,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후일 고려 현종(顯宗)이, 고운이 태조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시호를 추증하고 포장(褒獎)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고운에게 영광이었겠는가?
아아, 양웅(揚雄)은 머리가 세도록 경서를 연구하였으되 마침내는 왕망의 대부(大夫)가 되었고, 고운은 문장이 세상을 경동시켰으되 마침내 고려 왕조의 공신이 되었으니, 선비가 글을 읽음에는 의리를 아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데, 의리가 이에 이르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고운의 평생 동안 발자취는 어린 나이에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약관이 못 되어 과제(科第)에 올랐고, 그가 귀국함에 미쳐서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렸으니, 공명을 위하여 의지를 가다듬어 입신 양명에 마음을 두었음을 가히 알겠다. 그러나 당에서나 신라에서나 기족(驥足 뛰어난 재질)을 펴보지 못한 채 침체하고 좌절되었으며, 숨은 재기를 누르기 어려워 조금 재주 있음을 자랑하였으되 큰 도리를 깨닫지 못하였고, 자중(自重)하지 못하여 마침내 경솔한 데 빠지고 말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문사(文士)는 절조를 지키는 자가 적다.’ 하였는데 그것은 고운을 두고 한 말인가? 그러나 최승우(崔承祐)는 일찍이 적(賊) 진훤(甄萱)을 위하여 격문을 초하였고, 최언위(崔彦撝)도 또한 고려 태조의 총신(寵臣)이 되었으되, 고운은 여기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은둔으로 세상을 마친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주D-001]환ㆍ문(桓文)의 사업 : 중국 춘추 시대 오패(五覇)의 우두머리인 제(齊) 환공(桓公)과 진(晋) 문공(文公)을 가리킨 말. 이들은 당시 쇠미해진 주(周) 왕실을 받들고, 이적(夷狄)의 침입을 막았다.

 

동사강목 제5하
정해년 경애왕 4년 왕(王) 김부(金傅) 원년, ○ 진훤 36년, 고려 태조 10년(후당 천성 2, 거란 태종 천현 2, 927)



춘정월 고려 임금 건이 진훤을 치니, 왕이 군사를 내어 도와서 축산(竺山)뒤에 용주(龍州)라 고쳤는데, 지금의 용궁(龍宮) 을 취하였다.
진훤이 맹약을 어기고 여러 차례 변방을 침략하여 자못 억지로 병탄할 뜻을 두었으므로 고려왕이 이를 친 것이다.
○ 진훤이 왕신의 상(喪)을 고려에 호송(護送)하였다.

2월 후당에 병부 시랑(兵部侍郞) 장분(張芬)을 사신보냈다.
당이 분에게 검교 공부 상서(檢校工部尙書)를, 부사(副使) 박술홍(朴術洪)에게는 겸어사중승(兼御史中丞)을, 이충식(李忠式)에게 겸시어사(兼侍御史)를 제수하였다.

3월 고려 임금 건이 진훤의 군사를 운주성(運州城) 아래에서 격파하였다.

하4월 웅주(熊州)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추8월 고려의 임금 건이 진훤을 공격하여 강주(康州)를 함락하였다.
이에 앞서 고려왕이 해군 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ㆍ능식(能式) 등을 보내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강주를 치게 하여 사람과 짐승을 사로잡아 돌아왔으며, 또 원보(元甫)ㆍ김낙(金樂) 등을 보내어 대량성(大良城)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을 사로잡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려왕이 친히 강주에 가서 이를 함락시키니, 이에 백제의 여러 성들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왕이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지금의 문경(聞慶) 을 통과할 때 성주 흥달(興達)이 귀순하니, 왕이 가상하게 여겨 그의 세 아들에게 녹읍(祿邑)을 내렸다.

9월 진훤이 입구(入冦)하였다.

동11월 진훤이 왕을 포석정(鮑石亭)에서 시해하고 문성왕(文聖王)의 후손 김부(金傅)를 세워 왕을 삼은 다음,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가니, 고려가 구원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왕실이 쇠약하자 훤은 고려가 먼저 침입할까 두려워하여 9월에 곧 군사를 정돈하여 고려의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이니 상주(尙州)에 속하였다 을 쳐서 불사르고 입구하여 고울부(高鬱府)에 이르러 교기(郊畿 서울, 즉 경주의 근교)에 육박하였다. 이에 왕이 연식(連式)을 보내어 고려에 위급을 알리니, 고려왕이 시중(侍中) 공훤(公萱), 대상(大相) 손행(孫幸), 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이르기를,
“신라는 우리와 더불어 우호를 같이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위급함이 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공훤 등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훤은 구원병이 아직 이르지 않아서 11월에 갑자기 왕도에 침입하였다. 그때에 왕은 비빈(妃嬪)ㆍ종척(宗戚)들과 더불어 포석정 정자는 지금 경주부 남쪽 7리 금오산(金鰲山) 서쪽기슭에 있는데 돌을 다듬어 포어(鮑魚) 모양으로 만들었으므로 포석정이라 이름하니,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적(遺跡)이 완연하다 에 나가서 놀이를 하는데,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은 본래 병비(兵備)가 없었으므로 병풍으로 손수 가리고 광대 백여 인을 거느려 막았으나 대적할 수 없게 되자, 부인과 더불어 성 남쪽 이궁(離宮)으로 달아나 숨었으며, 시종하던 관원과 궁녀들은 모두 함몰되었다. 훤은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노략질하게 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왕을 찾아내어 핍박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는데, 왕은 4년 동안 재위하였다. 훤은 억지로 왕비를 욕보이고 부하들을 풀어 빈첩(嬪妾)들을 난행하니, 공경 대부의 사녀(士女)들이 도망쳐 숨고 놀라 땀을 흘렸으며, 땅을 기며 노복이 되기를 빌어도 모면하지 못하였다.
이에 문성왕의 후손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인 김부(金傅)를 세워 왕을 삼으니, 곧 왕의 표제(表弟 외종 아우)로서,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자녀(子女)ㆍ백공(百工)ㆍ병장(兵仗)ㆍ진보(珍寶)들을 모조리 취하여 돌아갔다. 처음 왕이 매양 미인들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노닐며 번화지곡(繁華之曲)을 연주하였는데, 그 가사에 이르기를,
기원실제의 두 절 동쪽 / 祇園實際兮二寺東
새삼 덩굴 깊은 골에 두 소나무 함께 얽혔네 / 兩松相倚兮蘿洞中
머리 돌려 바라보니 꽃은 언덕에 가득하도다 / 回首一望兮花滿塢
엷은 안개 가벼운 구름 한데 엉기어 몽롱하도다 / 細霧輕雲兮並濛朧
하였다.
식자(識者)들은 이를 후정화(後庭花)에 견주었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징험되었다.
○ 고려 임금 건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 고려 임금 건이 진훤(甄萱)과 공산(公山)에서 싸워 패적(敗績)하여서, 대장군 신숭겸(申崇謙)과 원보(元甫) 김낙(金樂)이 죽었다.
고려왕이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公山桐藪) 공산은 지금 영천군(永川郡) 서쪽에 있으니, 속칭 태조지(太祖旨)라고 한다. 혹은 대구(大丘)에 있다고도 한다 에서 훤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훤의 군사가 몹시 급하게 왕을 포위하였는데, 숭겸의 모습이 왕을 닮았으므로 대신 왕의 수레를 타고 김낙과 더불어 힘을 다하여 싸우다 죽었다. 훤의 군사는 그를 고려왕으로 알고 목을 베어 가지고 갔으며 고려왕은 겨우 몸만을 모면하였다. 훤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지금의 인동(仁同) 속현(屬縣) 약목(若木)이다. 일설에는 지금 목천(木川)이라고도 한다 을 취하여 전야(田野)에 노적한 곡식을 모두 불살랐다. 숭겸은 광해주(光海州)
【안】 광해주는 지금은 미상.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숭겸은 곡성(谷城) 사람이다.’ 하였는데, 고려 초기에 곡성이 승평(昇平)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나주에 속하였으니, 두 부(府)를 광해로 호칭한 일이 있었던가? 《신씨보(申氏譜)》에는 춘천(春川)을 광해주라 하였는데, 춘천은 협읍(峽邑 산협에 있는 고을)으로 ‘해(海)’ 자에 합당치 않으니 이는 잘못인 듯하다.
사람으로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있었다. 죽었을 때는 그의 왼쪽 발에 북두칠성(北斗七星)처럼 있는 검은 사마귀를 징험하여 그 시체를 찾아내었다. 고려왕이 애도하고 장절(壯節)이라 시호를 내리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하였다.
김부는 즉위하자 왕의 시신을 모시어다가 서당(西堂)에 빈소를 차리고,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곡하였으며, 경애(景哀)라 시호를 올려서 장사하였다.
○ 진훤이 고려의 벽진군(碧珍郡)을 침략하니, 정조(正朝) 벼슬이름 색상(索湘)이 죽었다.
○ 거란이 진훤에게 사신을 보냈다.
거란의 사신 사고마돌(裟姑麻咄) 등 35인이 훤에게 내빙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차견(差遣)하여 바다를 건너 같이 가게 하였는데, 북쪽으로 가다가 바람을 만나 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러서 모조리 죽음을 당하였다.
○ 아버지 효종(孝宗)을 추존하여 신흥 대왕(新興大王)으로 삼고, 어머니 김씨를 높여 왕태후(王太后)로 삼았다.
어머니 계아 부인(桂娥夫人) 김씨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이다.

12월 진훤이 고려에 글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훤이 고려왕에게 서장을 보내어 이르기를,
“지난날 신라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足下)를 서울로 불러들여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듯 서로 호응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찢어 헤치려는 것이어서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사직을 구허(丘墟)가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먼저 조편(祖鞭)을 잡고 홀로 한월(韓鉞)을 휘둘러서, 백료(百僚)들에게 밝은 태양과 같이 맹세하고 육부(六部)를 의로운 기풍으로 효유하였더니, 불의에 간신은 도망치고 나라 임금은 훙(薨)하였습니다. 그래서 경명왕의 표제(表弟)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권하여 존위(尊位)에 나아가게 하여 위태롭던 나라를 다시 일으키니, 임금을 잃었다가 임금을 다시 얻은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족하는 나의 충고를 상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유언(流言)만을 들어, 온갖 계교로 왕위를 넘보고, 여러 방면으로 나라를 침요(侵擾)하였으나, 오히려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고 나의 쇠털[牛毛] 하나 뽑지 못하였습니다. 초겨울에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 아래에서 손을 묶였고, 요사이에는 좌상(左相) 김낙(金樂)이 미리사(美里寺) 지금 대구 공산 아래에 있다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습니다.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승부를 알 수 있을 것이오. 기약할 바는 평양의 누대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말에게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지(詔旨)를 전하기를 ‘경은 고려와 더불어 옛날에는 환호(歡好)를 통하여 함께 인맹(隣盟)을 맺었었는데, 근래에 양쪽의 볼모가 모두 사망함으로 인하여 드디어 옛날의 화친하던 우호를 잃고 서로 국경을 침구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오로지 이 일로 사신을 보내어 경의 본도(本道)에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서로 친목하여 길이 평화를 이룩하도록 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나는 존왕(尊王 제후가 왕실을 높이는 것)하는 의리가 돈독하고, 사대(事大)하는 정의가 깊어서 조유(詔諭)를 듣고는 그 명령을 삼가 받들고자 하되, 다만 족하가 우리를 깨뜨리고자 하여도 깨뜨리지 못하고 지쳐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고 할까 걱정됩니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드리니, 청컨대 마음에 두고 상세히 살피기 바랍니다. 그리고 토끼와 사냥개가 서로 피곤하면 마침내는 반드시 조롱을 받을 것이요, 조개와 도요새[蚌鷸]가 서로 버티면 또한 비웃음을 당할 것이니, 마땅히 미복(迷復)을 경계로 삼아 스스로 후회를 초래함이 없도록 하십시오.”
하니, 이는 최승우(崔承祐)가 지은 것이다. 승우가 당으로부터 돌아오니 나라가 이미 어지러웠으므로, 드디어 진훤에게 의탁하여 이 글을 지은 것이다. 고려왕이 답서하기를,
“나는 위로 천명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 외람되이 장수(將帥)의 권한으로 경륜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삼한(三韓)이 액운을 만나고 구토(九土)가 흉황(凶荒)하여, 백성들은 대부분 황건적(黃巾賊)에 속하고 전야는 적토(赤土 황폐하여 농작물이 생산되지 못하는 땅) 아님이 없었습니다. 풍진(風塵)의 소란함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제하려고 하여, 이에 스스로 이웃 나라와 친선하여 우호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가 농상(農桑)으로 생업을 즐기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한가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더니, 유년(酉年 을유년으로서 경애왕 2년을 말한다) 양월(陽月 10월)에 이르러, 갑자기 일이 생겨 교병(交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족하는 처음에 적을 가벼이 여기고 곧바로 전진하기를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항거하듯 하더니,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용퇴(勇退)한 것은 모기가 등에 산을 짊어진 것[蚊子負山]과 같았으매, 공손한 말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세(永世)토록 화친(和親)하겠다.’ 하였습니다. 나도 또한 지과(止戈 즉 무(武)의 파자로서, 전쟁을 그치는 것이 ‘武’의 본뜻이다)의 무(武)를 숭상하고 살생하지 않는 인(仁)을 기필하여 드디어 여러 겹의 포위를 풀어서 피로한 사졸을 쉬게 하였으니, 이는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삽혈(歃血 서로 맹세할 때 마시는 희생의 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아서 흉악한 위협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봉채(蜂蠆 벌과 전갈)의 해독이 생령을 침해하고, 낭호(狼虎)의 광기가 기전(畿甸)을 가로막아 금성(金城 경주)이 군색하여지고, 황옥(黃屋 임금의 수레, 여기서는 임금을 가리킴)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대의를 의지하여 주(周)나라를 높이는 것은 비록 환문(桓文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의 패도(覇道)와 같으나, 기회를 틈타서 한(漢)나라를 도모한 것은 오직 망탁(莽卓)의 간사함을 볼 뿐입니다. 왕의 지존(至尊)으로서 족하에게 몸을 굽혀 아들이라 일컫게까지 하였으니, 존비가 차례를 잃었고, 상하가 모두 근심에 싸여 이르기를 ‘원보(元輔 임금의 보필)의 충순(忠純)함이 있지 않으면 어찌 사직을 다시 편안케 할 수 있으랴?’ 하였습니다. 나는 마음에 모진 뜻을 감춘 적이 없고, 왕실을 높이는 뜻이 간절하기 때문에 장차 조정을 구원하여 나라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 하였으나, 족하는 터럭끝 같은 작은 이익만을 보고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를 잊어, 군왕을 참륙(斬戮)하고 궁궐을 불사르며, 경사(卿士)를 살해하고 사민(士民)을 함부로 죽이며, 희강(姬姜 희씨와 강씨란 뜻으로 궁중의 비빈을 일컫는 말)을 취하여 수레에 함께 태우고 진귀한 보배를 빼앗아 가득히 실었으니, 원악(元惡 악인의 괴수)으로는 걸주(桀紂)보다도 더하고, 불인(不仁)하기는 경효(獍梟 경은 악수(惡獸)로 나면서 아비를 잡아먹고, 효는 올빼미로 어미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보다도 심합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진 데 대한 원한이 사무치고 해를 돌이키려는 정성이 깊어서, 매가 참새를 쫓듯이 견마(犬馬)의 근고(勤苦)를 다하려고 다시금 군사를 일으켜 괴류(槐柳 회화나무와 버들로, 여기서는 세월을 뜻한다)가 두 차례나 바뀌었는데, 육전(陸戰)을 하면 천둥이 달리고 번개가 부딪치듯 하였고, 수공(水攻)을 하면 호랑이가 치고 용이 뛰어오르듯 하여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거행하면 헛되게 발함이 없었습니다. 윤빈(尹邠)을 해안(海岸)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과 같았고, 추허조(鄒許祖)를 변방 성에서 사로잡을 때는 엎어진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연산군(燕山郡)지금의 연기현(燕岐縣) 들판에서는 길환(吉奐)을 군영 앞에서 참수하고, 마리성(馬利城)지금의 안음현(安陰縣 가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纛旗] 아래서 죽였습니다. 임존(任存)을 함락하던 날에는 형적(邢績) 등 수백 인이 목숨을 버렸고, 청주(靑州)를 격파할 때에는 직심(直心) 등 네댓 무리가 머리를 바쳤으며,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바라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지금의 성주부(星州府) 에서는 구슬을 입에 물고[含璧 패자(敗者)가 손발을 묶이고 구슬을 물고 항례(降禮)를 올렸다] 투항하였습니다.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와서 귀순하였으며, 나부(羅府 나주)는 서쪽으로부터 와서 복속(服屬)하였습니다. 침공한 땅이 이와 같으니, 수복할 날이 어찌 요원하겠습니까? 기필코 저수(泜水)의 군영 가운데서 장이(張耳)의 천 갈래 한을 씻고, 오강정(烏江亭)에서 한왕(漢王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한 번 싸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그치게 하고 길이 천하[寰海]를 맑게 할 것입니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명(命)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 전하는 특별히 단금(丹禁 금성(禁城) 즉 대궐)에서 윤음(綸音)을 내려 청구(靑丘 우리 나라를 가리킨다)에서 난리 그치기를 효유하였고, 이미 훈모(訓謨 국가 대계가 되는 가르침)를 받들었으니, 감히 존봉(尊奉)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족하가 예의(睿意 임금의 뜻)를 삼가 받들어 흉기(凶機)를 모두 놓는다면, 다만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해(東海)의 끊어진 왕통도 잇게 될 것이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최치원이 지은 것이다.
【안】 신라가 망한 것은 오로지 폐행(嬖倖)이 용사(用事)하여 기강이 문란ㆍ해이하여진데서 연유한 것이요, 걸주(桀紂)의 포학이나 망진(亡秦)의 정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궁예와 진훤이 이때를 틈타서 난리를 불러일으켜 왕호를 참칭하고 국토를 몰래 할거하였으니, 그 죄가 진실로 이미 하늘에까지 통하였지만, 고려 태조가 궁예를 대신하여 왕을 일컬은 것도 또한 반역한 죄과에 돌아가는 것이니,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오직 그의 한 가닥 마음은 왕실을 높이는 의리를 알아서, 도적 진훤의 난리에 일찍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구원하였고, 또 장수를 보내어 머물러 주둔하게 되었다. 그가 진훤에게 답장한 글에 이르기를, ‘금성이 군색하여지고 황옥이 크게 놀랐으며, 대의에 의지하여 주나라를 높이는 것이 환문(桓文)의 패도와도 같으나, 기회를 틈타서 한(漢)나라를 도모한 것은 오직 망탁(莽卓)의 간사함을 볼 뿐이다.’ 하였고, 또 ‘나는 왕실을 높이는 뜻이 간절하다.’ 하였으며, 또 ‘거의 매가 참새를 쫓듯이 하여 견마의 근고를 다하려고 한다.’ 하였다. 그 말이 이와 같았으니, 반드시 왕의 도성을 핍박하고 왕의 궁궐에 거처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신라의 군신이 만약 기운을 떨치고 정신을 가다듬고서 고려의 구원을 얻어 덕 있는 정사를 닦아 밝히며,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서 회복할 도모를 하였더라면, 아마도 조금이나마 더 국운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인데, 느릿느릿 한 가지 일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이 손을 묶인 채 망하여 갔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 고려가 임언(林彦)을 후당에 사신보냈다.


 

[주D-001]기원(祇園) : 기수원(祇樹園)ㆍ기타원(祇陀園)ㆍ기수급고원(祇樹給孤園)의 약칭. 옛날 인도의 기타 태자(祇陀太子) 소유의 원림(園林)을 수달장자(須達長者 : 급고독(給孤獨)임)가 구입하여 석존(釋尊)을 모셨다. 또 기원(祇洹)ㆍ기환(祇桓)이라고도 한다.
[주D-002]실제(實際) : 불가의 말로 진여 실상(眞如實相)의 이성(理性).
[주D-003]후정화(後庭花) : 악부(樂府)의 이름. 진(陳) 후주(後主)가 항상 빈객을 청하여 비빈들과 유연(遊宴)하면서 지은 시 중에서 잘된 것을 골라 곡을 붙여 궁녀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였다. 그 곡의 하나가 옥수 후정화(玉樹後庭花)로서, 뒤에 옥수와 후정화로 나뉘었는데, 모두 장 귀비(張貴妃)와 공 귀빈(孔貴嬪)의 자색을 찬미한 것이다. 진 후주는 뒤에 유연에 빠져 수군(隋軍)이 쳐들어오는 것조차 모르고 포로가 되었다.
[주D-004]조편(祖鞭) : 조생지편(祖生之鞭)의 준말로 남보다 먼저 공을 이루었다는 뜻. 진(晋)나라 유곤(劉琨)이, 조적(祖逖)이 임용되었다는 말을 듣고, 친구에게 편지하기를 “나는 항상 조생이 나를 앞지를까 두려워했다.” 한 고사에서 나온 말. 《晋書 卷62 劉琨傳》
[주D-005]한월(韓鉞) : 한금호(韓擒虎)의 부월(斧鉞)이란 말. 한금호는 수(隋)나라 장수로 진(陳)나라를 쳐서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를 사로잡았다. 《隋書 卷52》
[주D-006]미복(迷復) : 끝까지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면 흉(凶)하다는 말.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상육(上六)은 미복이니 흉하다[上六 迷復 凶].” 하였다.
[주D-007]버마재비 …… 하듯 : 약한 자가 자기의 힘도 헤아리지 않고 강자에게 덤빈다는 말. 춘추 시대 제(齊) 장공(莊公)이 사냥을 가는데 버마재비가 앞다리를 쳐들고 수레를 항거하였다는 고사. 당랑거철(螳螂拒轍). 《莊子 秋水》
[주D-008]망탁(莽卓)의 간사함 : 망탁(莽卓)은 전한(前漢)의 왕망(王莽)과 후한의 동탁(董卓)을 가리키며, 왕망은 왕실이 쇠약한 틈을 타서 제위를 찬탈하고, 동탁은 왕을 폐하였다.
[주D-009]저수(泜水) …… 씻고 : 장이(張耳)는 초한(楚漢) 때 사람으로, 처음에는 조(趙)나라의 정승이 되어 진여(陳餘)와 가까이 지냈는데, 뒤에 불화하여 장이가 한(漢) 고조(高祖)에게로 가자 원수가 되었다. 그 후 장이는 한신과 함께 진여를 잡아 저수에서 참수하였다. 《漢書 卷32 張耳陳餘傳》
[주D-010]오강정(烏江亭) …… 이루어 : 오강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화현(和縣)에 있는 강 이름. 유방에게 쫓긴 항우(項羽)가 이곳에서 자살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피서록(避暑錄)
확대원래대로축소
 피서록(避暑錄)
피서록(避暑錄)



기려천(奇麗川)은 만주 사람이다. 그는 성격이 몹시 교만하여 윤형산(尹亨山)을 멸시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으나, 형산은 일부러 알지 못하는 체하고 얼굴에나 말씨에도 겸손할 뿐이다. 대체로 윤(尹)은 기(奇)에 비하여 나이가 20여 세나 많고 벼슬도 역시 조금 높은 편이다. 그러나 그는 한인이라 해서 마치 나그네처럼 된 처지였으니, 그 정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여천이 거처하고 있는 방이 나의 사관과 문이 마주 보이는 터라, 내가 형산을 찾아서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여천의 문 앞을 지나치게 되므로 나는 반드시 여천에게 먼저 들른다. 그러면 형산은 나의 뜻을 모르고서 반드시 나의 뒤를 따라서, 그곳에 잠깐 지체했다가 곧 일어서면서 다른 곳에 약속이 있다고 핑계한다. 여천은,
“윤공(尹公)이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야.”
하고,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그리고 형산도 언젠가 돌아앉아서,
“저 비둘기처럼 생긴 눈이 여태껏 탈을 벗지 못해.”
하면서 악평한다. 만족과 한족 사이의 심한 알력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어느날 여천이 나에게,
“전에 어떤 산동에 포정사(布政司)로 부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탐관으로 이름이 높았답니다. 그가 일찍이,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자 / 視民若子
법률은 산같이 엄중하리 / 立法如山
라는 주련(柱聯) 두 구를 지어서 아문(衙門)에 붙였더니, 그날 밤에 어떤 이가 그 끝에다 잇달아서,
하면서 말을 나직이 한다. 이는 아마 형산을 가리키는 듯싶기에 나는 그 뒤에 우연히 형산더러,
“당신은 일찍이 산동 포사로 부임하신 일이 있소.”
하고 물은즉, 형산은,
“그런 일이 있었지요.”
하였다.
그 뒤에 연경(燕京)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 인사들과 이야기하다가 기(奇)를 아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머리를 흔들 뿐이다. 풍병건(馮秉健)이 홀로 분개하는 어조로,
“점잖은 선비가 어찌 되놈의 새끼를 안단 말이요.”
한다. 나는 또,
“윤형산은 어떤 인물인가요.”
하고 물은즉, 모두들 기쁜 빛으로,
“그는 참으로 백락천(白樂天)과 같은 유의 인물이지요.”
하였다.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남쪽 골목 둘째 문은 동씨(董氏)의 집이다. ‘쌍청문(雙淸門)’이란 현판이 붙었는데 강희의 어필이다. 또 지금 황제가 쓴 ‘양세삼효(兩世三孝)’라는 액자가 붙어 있다. 이곳은 구외(口外)의 민가(民家)임에도 불구하고 천자의 거둥이 세 번이나 있었다 한다.
강희가 절강(浙江)에 순행할 때에 산음(山陰)에 살고 있는 노인 왕석원(王錫元) 등 5형제를 불러 보았다. 그들은 누런 머리에 어린 아이의 이빨이며 서로 붙들고 다닌다. 황제가 행궁(行宮)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들 다섯 중 맏이와 둘째는 쌍둥이로 나이가 80이요, 그 다음은 78, 다음은 76, 다음은 75인데, 통계하면 3백 89세이다. 그들의 자손은 모두 45명인데, 각기 비단을 나누어 주고 또 어필로 ‘일문인서(一門仁瑞)’라는 액자를 써서 주고 황태자는,
다섯 가지 비단 나무 이 세간의 영화이고 / 五枝錦樹榮今代
백세토록 높은 나이 한 집안에 모였구나 / 百秩仙籌萃一門
라는 주련을 써서 주었다. 이로 미루어서 요즘 그들의 정려(旌閭)나 표창하는 은전이 전대보다 지나침을 짐작할 수 있겠다.
북진묘(北鎭廟) 뜰에 서 있는 늙은 솔을 지금 황제가 친히 그림 그려서 검은 돌에 새겨 바위 뱃구레를 파고 간직했는데, 그 바위의 높이는 겨우 한 길 남짓하다. 이를 명(明) 때에는 취운병(翠雲屛)이라 불렀더니 지금 황제가 보천석(補天石)이라 고치고 그림 곁에 시를 지어서 새겼다.
북진묘 서이러냐 일산처럼 퍼진 솔이 / 鎭廟門西似蓋松
절반은 시들었고 푸른 잎도 상기로다 / 半存枯幹半籠葱
정신이 어렸으니 포박자(갈홍(葛洪)의 호)를 보는 듯이 / 凝神如見抱朴子
얼굴을 그리자니 진소옹(미상)이 내 아니다 / 圖貌慙非陳少翁
밑에 서서 볼 양이면 비나 개나 의심이요 / 立下忽疑晴與雨
앞에 뵈는 그 무엇이 색이 공임 깨닫고녀 / 現前可悟色兮空
유월이라 더운 날에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 何當六月其根坐
낭랑히 글을 외며 맑은 소 들어보렴 / 讀疏仡聽謖謖風
그리고는 건륭의 낙관이 찍혀 있다. 또,
“갑술년(1754년)에 내가 동쪽으로 순행하는 길에 친히 북진묘에 치제하고, 예가 끝나자 묘 속에 들어가서 두루 구경하였다. 늙은 솔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반은 벌써 철석같이 굳은 가장귀였고, 다만 동편 한 가지가 울창할 뿐이다. 오히려 기이하고 에굽은 품이 사랑스러웠다. 이내 나무 밑에 서서 이 그림을 그렸다. 구월 이십사일 어필.”
이라는 글이 있고 ‘천지위사(天地爲師)’라는 도장이 찍혔다. 황제의 글씨나 그림이 모두 공교롭다.
바위 곁에 또 삼한(三韓) 사람 김내(金鼐)의 시가 있었다.
의무려산 이마 턱에 때때로 오르거다 / 時登醫巫閭山頭
구름이랑 바다랑 한 눈에 다 보리라 / 雲舍滄桑望裏收
돌 옷과 바위 털은 티끌 자취 혐의롭고 / 石髮巖衣嫌跡擾
우는 새 읊는 매미 사람 소리 섞이누나 / 鳥鳴蟬噪帶人幽
공중에 솟은 나무 늙은 용은 어디 가고 / 凌空樹古龍飛去
그 곁에 피는 꽃이 봉황 성터 남아 있네 / 傍地花新鳳壘留
북두성 높디높아 하늘 괴는 기둥이라 / 北斗惟神天一柱
갸륵하신 우리 님은 억만 년을 누리소서 / 億年萬紀庇皇秋
그 끝에는 ‘화공(和公)’이란 낙관을 찍었으며 필력(筆力)이 몹시 옹졸하다. 혹은,
“이 시는 조선 사람 김내가 지은 것이다.”
하였으나, 이는 요동(遼東)을 또한 삼한이라 일컫는 줄을 모르고 한 말이다. 고정림(顧亭林)은 일찍이 관함이나 지명에 옛 이름을 빌려서 쓰는 것을 배격했으나, 아직도 그를 본받아 남용하는 이도 없지 않을뿐더러, 이 시가 비록 잘된 것은 아닐지라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의 구기(口氣)는 아니다.
난설헌(蘭雪軒 이조(李朝)의 여류 문학가 허초희(許楚姬)) 허씨(許氏)의 시는 《열조시집(列朝詩集 전겸익(錢謙益) 저)》과 《명시종(明詩綜 주이준(朱彛尊) 저)》에 실려 있는데, 혹은 이름으로, 또는 호를 쓰되 모두 경번(景樊)으로 적혀 있다. 내 일찍이 〈청비록서(淸脾錄序 《청비록》은 이덕무(李德懋) 저)〉를 쓸 때에 상세히 고증한 일이 있었다. 무관(懋官 이덕무의 자)이 연경에 있을 때에 그것을 축 한림(祝翰林) 덕린(德麟)과 당 낭중(唐郞中) 낙우(樂宇)와 반 사인(潘舍人) 정균(庭筠)의 세 사람과 함께 돌려 가면서 읽고 모두 칭찬했다 한다. 이제 내가 이곳에 와서 시 중의 빠지고 그릇된 곳을 논하다가 이내 허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윤공(尹公)이 말하기를,
우회암(尤悔菴) 동(侗)이 지은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보면 그 첫머리에 귀국의 것을 지어 실었는데,
양화도 드는 어귀 살구꽃이 붉으레라 / 楊花渡口杏花紅
팔도 민요들이 그 나라의 국풍이라 / 八道歌謠東國風
못내 님을 그리노니 저 비경 여도사를 / 最憶飛瓊女道士
들보 올려 글 지려고 달나라에 노닌다오 / 上梁曾到廣寒宮”
라고 하였고, 그는 또 주석을 내기를,
“규수 허경번이 나중에는 여도사가 되었으며, 그는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廣寒宮白玉樓)의 상량문(上梁文)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이에 허경번에 대한 그릇된 것을 상세히 변명하였더니, 윤과 기 두 사람이 각기 나누어 기록하여 간직한다. 중국의 명사들이 마땅히 이 일로써 또 한 번 저서의 자료를 삼을 것이다.
대체로 규중 부인으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나, 이 외국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으로서는 일찍이 그의 이름이나 자가 본국에도 나타나지 못했은즉, 이 난설의 호 하나라도 오히려 분에 넘치는 일이어늘, 하물며 경번의 이름으로 잘못 알고는 군데군데에 기록되어서 천추에 씻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가 어찌 뒷세상의 재사(才思)가 풍부한 규중 재녀들의 의당히 경계하여야 할 거울이 아니겠느냐.
여러 가지 요술 중에는 술을 만들어 낸다는 주석(酒石)이 가장 요긴한 물건이다. 만일 참으로 이러한 돌이 있다면 의당히 천하에 다시 없는 보배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명(明)의 천계(天啓) 연간에 왜(倭)가 유구(琉球)를 쳐서 그 임금을 사로잡았는데, 유구의 태자가 그 나라의 세보(世寶)를 싣고 가서 그 아버지를 속(贖)하려 하다가, 배가 풍파에 휩쓸려서 제주(濟州)에 닿았다. 목사(牧使) 아무가 배에 무슨 물건이 실렸느냐고 물으니, 태자가 주천석(酒泉石)과 만산장(漫山帳)이 있다고 답하였다. 주천석은 모양이 마뇌(瑪瑙)처럼 생겼는데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이고 물 한 잔이 들 정도이다. 맑은 물을 채우면 곧 아름다운 술이 되고, 만산장은 바닷거미의 실에다 약으로 물빛을 들여서 뜬 것인데, 적게 펼치면 집 하나를 덮을 정도이나 넓게 펼치면 산 하나를 덮을 수 있으며, 작은 놈으로는 모기나 파리, 큰 놈으로는 뱀이나 이무기 따위가 모두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목사가 그것을 얻고자 청하였으나 태자는 허락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내어서 배를 에워싸니 태자가 돌과 창을 모두 바다 속에 던졌다. 목사가 배에 실은 물건을 다 몰수하고는 태자를 죽였다. 태자가 죽기에 임하여,
착한 말은 분간 없고 몹쓸 옷을 입은 이 몸 / 堯語難分桀服身
꿈이러냐 이 죽음을 푸른 하늘 아오리까 /臨刑何暇訴蒼旻
삼량이 묘혈 판들 누구라서 속해 낼꼬 / 三良臨穴誰能贖
두 아들 배를 탈 제 도적 어이 잔폭하오 / 二子乘舟賊不仁
백골은 모래벌판 거친 풀에 얽혔어라 / 骨暴沙場纏有草
혼이야 고국 간들 슬퍼할 이 누구던고 / 魂歸古國吊旡親
죽서루 밑 저 물 소리 처량도 한져이고 / 竹西樓下滔滔水
만고의 끼친 한을 분명히 울어 예네 / 遺恨分明咽萬春
라는 시 한 편을 읊었다.”
한다. 이 사실은 이중환(李重煥 이조 때 학자. 자는 휘조(輝祖))의 《택리지(擇里志)》에 실렸으며, 목사는 대간의 탄핵을 만나서 사형에 한 등급을 감하여 멀리 귀양보냈다 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이 기록이 하나의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일이 과연 참말이라면 목사의 죄악은 비록 거리에다 시신을 진열한다 해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이제 그의 자손이 어찌 길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유구 중산왕(中山王) 상녕(尙寧)이 해마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편에 자주 글월과 예폐를 부쳐 오더니, 갑신년 뒤로는 다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내 이번 걸음에 해외의 모든 나라 사신을 만나보지 못함이 더욱 유감이다. 아까 구경하던 요술 중의 주석으로 미루어 보면, 유구의 주석도 역시 요술의 하나인 듯싶다. 그리고 민중(閩中 복건성) 사람 왕삼빈(王三賓)이 말한 바와 같이, 바닷거미가 범을 얽는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이 만산장(漫山帳)은 이치에 그럴 법도 하다.
열하의 술집들은 몹시 번화하여 연경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다. 바람벽 위에는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이 많이 붙어 있다. 유하정(流霞亭)에는,
높은 이름 좋은 벼슬 이제야 아랑곳가 / 功名富貴兩忘羊
나의 삶이 얼마런고 이 술 한 잔 기울이세 / 且盡生前酒一觴
고운 꽃 삼백 포기 심어 두고 보려무나 / 多種好花三百本
낮은 울타리 비바람에 향내 줄곧 풍기리라 / 短籬風雨四時香
라는 시가 붙어 있다. 또 취구루(翠裘樓)에 들렀더니 역시 벽 사이에 써 붙인 시가 있는데 먹 흔적이 아직도 젖은 듯싶다. 우민중(于敏中)이나 아극돈(阿克敦)의 필치인 듯싶기에 술아범더러,
“이 글씨 쓴 분이 누구냐.”
고 물으니, 그는,
“아까 어떤 손님이 이걸 써서 걸어 두곤 막 나갔답니다. 그러니 그의 성명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한다. 그 시에 이르기를,
님을 섬겨 하올 맘은 한당만 못잖건만 / 致主初心陋漢唐
이 몸이 늙어 가서 밭집 아비 되었구나 / 暮年身計落農桑
내 낀 숲 속 소 발자국 동문 밖 나는 길에 / 草煙牛跡東郊路
술다락에 높이 누워 저녁 볕을 보내누나 / 又臥旗亭送夕陽
(육유(陸游) 작)
라고 하였다. 이 두 시는 모두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바람을 쏘이면서 한 번 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가 무량하게 할 뿐이다. 둘 다 부채에 써 두었다가 돌아와서 윤형산에게 물은즉, 그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으나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윤형산이 나더러,
“고려의 박인량(朴寅亮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학가. 자는 대천(代天))이 당신에게 어떻게 되시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귀국을 말한다면 모수(毛遂)와 모담(毛聃 미상)과 같은 터수일 것입니다. 저는 애초에 토성(土姓)으로 여덟 집이 나눠졌으므로 관향이 각기 달라서 서로 한 겨레가 되지 못하며, 역시 감히 분양(汾陽)을 통곡(痛哭)할 수도 없는 터수입니다.”
한즉, 형산은 또,
“그러면 강희 연간에 박뇌(朴雷)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자는 명하(鳴夏)요, 역시 조선 사람이라 합디다. 이제 대청(大淸)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외가 한 집이 되고 보니 결코 푸른 입술의 혐의란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푸른 입술의 혐의란 무슨 말입니까.”
한즉, 형산은,
“송(宋)의 원풍(元豊 송 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 연간에 고려 사신 박인량이 명주(明州)에 이르렀을 때에, 상산위(象山尉) 장중(張中)이 시로써 전송하였더니, 박인량의 답시(答詩) 서문에,
‘꽃 같은 얼굴이 곱게 불을 부니 이웃 여인의 푸른 입술이 움직임을 부끄럽게 하고, 상간(桑間)의 야비한 소리로써 영인(郢人)의 백설(白雪) 곡조를 잇노라.’
는 글이 있었습니다. 언관(言官)이 낮은 벼슬에 있는 장중이 사사로 외국의 사신을 교제함은 부당한 일이라 하여 탄핵했습니다. 신종(神宗)이 좌우에게 ‘푸른 입술’이란 어떠한 고사인가 하고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 없어 조원로(趙元老)에게 물었더니, 원로가 아뢰기를,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어떤 이가 본즉 이웃집 사내가 그 아내의 불 부는 것을 보고,
불 부는 예쁜 맵시 붉은 입술 오물오물 / 吹火朱唇動
섶나무 때고 나니 하얀 팔뚝 드러났네 / 添薪玉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저 얼굴이 / 遙看煙裏面
피는 것이 꽃이런가 안개 더욱 은은해라 / 恰似霧中花
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 하는 말이, 당신도 어찌 그를 본받지 않느냐고 하였을 때에, 남편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먼저 불을 불면 내 응당 본떠서 시를 지으리라 하고, 이내 읊되,
불 부는 님의 양은 푸른 입술 벌렁벌렁 / 吹火靑唇動
장작을 때고 나니 검정 팔뚝 비꼈구나 / 添薪墨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그 상판은 / 遙看煙裏面
무엇에 비할쏜고 구반다(추악한 귀신의 이름)가 이 아니냐 / 恰似鳩槃茶
라고 하였었는데, 이 이야기는 본래는 왕벽지(王闢之)의 《민수연담록(澠水燕談錄)》에서 나왔다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학지정(郝志亭)더러,
“장군은 비록 무관 출신이지만 장고(掌故)에 몹시 익숙하고 문필이 유려하여, 비록 이름 있는 학자나 늙은 선비라도 장군의 짝이 될 자 드물까 하오니, 귀국의 무관은 반드시 문관과 학문이 넉넉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군은 특히 유가의 연원이 깊어서 정원(定遠)의 문장이 금석에 새겼음을 본받은 것이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저의 집은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더니 이제 다행히 성스러운 시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수(隨 한(漢) 때의 장수 수하(隨何))ㆍ육(陸 미상)ㆍ강(絳 한(漢) 때의 장수 주발(周勃). 강은 그의 봉호)ㆍ관(灌 한(漢) 때의 장수 관영(灌嬰))의 한스러운 일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지 않습니까. 저 같은 자는 수레에 싣거나 말로 셀 수 있을 만큼 많으니 무엇을 칭찬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태학사(太學士) 아계(阿桂)와 얼마 전에 태학사를 지낸 서혁덕(舒赫德)과 같은 분은 모두들 문장이 태평 성대를 이룩할 만하며, 무략이 어지러운 난리를 평정할 수 있고, 부귀와 수복(壽福)은 분양(汾陽)ㆍ서평(西平 미상)이요, 공로와 훈벌은 배진(裵晉 배도(裵度). 진은 봉호)ㆍ문로(文潞)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관도 할 수 없고 무관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사이(四彝)가 모두 복종하고 풍진이 고요하니, 저 같은 자는 가위 한 개의 썩은 무부(武夫)였습니다.
서른 해 쉬지 않고 옛 병서를 읽고 나서 / 三十年來學六韜
꽃다운 그 이름이 당시에 문장이라 / 英名嘗得預時髦
나라에 몸을 던져 금 갑옷 입었을 제 / 曾因國難披金甲
아무리 가난해도 보배칼을 팔진 않네 / 不爲家貧賣寶刀
뛰노는 이 팔뚝에 화살 힘이 약다 하랴 / 臂健尙嫌弓力輭
오히려 밝은 눈에 싸움 터를 바라보네 / 眼明猶識陣雲高
어젯밤 뜰 앞에서 가을 바람 일어나니 / 堂前昨夜秋風起
꽃 놓인 옛 전포를 보기도 부끄러라 / 羞見團花舊戰袍
이 조한(曹翰)의 시를 외고 나면 그들이 안장에 걸터앉아서 사면을 돌보던 모습이 못내 그리워질 뿐입니다. 옛날부터 글 읽은 장수로서 손무(孫武)ㆍ오기(吳起)ㆍ염파(廉頗)ㆍ악의(樂毅)ㆍ왕전(王翦)ㆍ조충국(趙充國)ㆍ반초(班超)ㆍ심경지(沈慶之)ㆍ한세충(韓世充) 등은 모두 7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심경지는 글 모르는 까막눈인데, 어찌 글 읽은 장수라 하시요.”
하였더니, 지정은,
“심공(沈公)이 일찍이 농사일은 사내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고, 길쌈 일은 여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다고 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은 그 당시에 벌써 인정된 것이었고, 척남궁(戚南宮)은 더욱 시 공부가 깊어서,
호각 소리 처량할사 초목 그저 쓸쓸하군 / 畫角聲傳草木哀
구름 머리 높이 솟고 돌문이 열리누나 / 雲頭起對石門開
삭풍 불어 술이 찰 제 취하지도 않거니와 / 朔風邊酒不成醉
지는 잎 기러기는 요란스레 우는구나 / 落葉歸鴻無數來
다만 당 과 쉬어 살기 아예 사라지면 / 但使元戈銷殺氣
이 몸이 헛 늙은들 그 무엇이 한이리요 / 未妨白髮老邊才
높은 봉에 이름 새김 이 내 뉘와 함께 할꼬 / 勒名峯上吾誰與
칼춤 추던 저 대 위에 그리워라 이 장군이 / 故李將軍舞劍臺
이라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리고 보면 그의 장수 재주는 미칠 수 있겠으나 시 재주는 미칠 수 없겠습니다그려.”
하고 웃었다.
저녁 무렵에 풍윤성(豐潤城)에 올랐더니 수염이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내 앞에 와서 손을 들어 읍하면서,
“저의 성명은 임고(林皐)요, 절강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나의 성명을 물어서 알자 놀라는 듯 반기면서,
“당신은 필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의 일가시죠.”
한다. 나도 역시 놀라서,
“당신은 초정을 어떻게 잘 아시나요.”
한즉, 임고는,
“지난해에 초정이 같은 나라 사람 이형암(李炯菴 이덕무. 형암은 그의 호)과 함께 문창루(文昌樓)에 올랐다가 이내 그 고을 호형항(胡逈恒)에게 묵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성 밑에 있는 한 집을 가리키면서,
“저곳이 곧 호씨(胡氏)의 집이며, 그 바람벽 위에는 초정의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한다. 이에 변계함(卞季涵)과 정 진사(鄭進士) 각(珏)으로 더불어 함께 그 집을 찾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하였다. 주인이 등불 넷을 켜서 벽을 밝혀 주기에 그 시를 한 번 낭독하니 이것은 곧 우리 집이 전동(典洞 이조 때 서울에 있던 동리)에 있을 때에 형암이 마침 왔다가 지은 것이다.
쓸쓸한 가을 소식 저 나무가 먼저 아네 / 泬㵳秋令樹先知
춥고 더움 다 잊으나 바보되고 말았구나 / 任忘暄涼做白癡
고요한 벽과 벽엔 벌레 소리 유난하곤 / 壁靜萬蟲勤自護
발 틈으로 새 한 마리 엿보기 일쑤러라 / 簾虛一鳥慣相窺
돈 벽일랑 버리거나 이 몸을 더럽힐 듯 / 抛他錢癖如將浼
나를 일러 서음(書淫)이라 하니 나는 이를 사양 않소 / 呼我書淫故不辭
중국 것만 좋다 하여 부질없이 그리 마오 / 好事中州空艶羨
요봉(청(淸) 문학가 왕완(王琬)의 호)은 문필이요 완정(왕세진(王世稹)의 호)은 시라 하네 / 堯峯文筆阮亭詩
백로지(白鷺紙) 두 폭을 붙여서 쓴 것인데, 글씨 자태가 물 흐르는 듯하고 한 글자의 크기가 마치 두 손바닥만 하다. 전날에 우리들이 중국일을 이야기할 때에 부질없이 그리워만 했던 것이 이 몇 해 사이에 차례로 한 번씩 구경하였을 뿐 아니라, 이렇게 먼 만리 타향에서 이 시를 읽으매 마치 고인의 얼굴을 만나는 듯싶었다.
유리창(琉璃廠) 육일재(六一齋)에서 유황포(兪黃圃) 세기(世琦)를 처음 만났다. 그의 자는 식한(式韓)인데, 눈매가 맑고 눈썹이 길기에 나는 그가 혹시 반정균(潘庭筠)ㆍ이조원(李調元)ㆍ축덕린(祝德麟)ㆍ곽집환(郭執桓) 등과 같은 명사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들은 나보다 앞서 교유한 이가 있으므로 그들의 이름이 입에 향기롭고 그들의 수염이나 눈썹이 눈에 선하였던 까닭이다. 이제 유(兪)와 필담을 하는 사이에 그는 유혜풍(柳惠風 유득공(柳得恭). 혜풍은 호)이 그 숙부 탄소(彈素 유금(柳琴)의 호)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
고운 국화 시든 난초 님의 수레 비치옵네 / 佳菊衰蘭映使車
맑은 구름 보슬비는 구월도 늦가을 / 澹雲微雨九秋餘
이 말씀 한 토막을 중토에다 전하고저 / 欲將片語傳中土
지북의 어떤 사람 다시금 글을 쓸꼬 / 池北何人更著書
를 써서 보였더니, 황포는,
“지북의 어떤 사람이란 누구를 이름이시오.”
하고 묻기에, 나는,
“이것은 완정이 지은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실린 우리나라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고사를 쓴 것이지요.”
한즉, 황포는,
“글쎄, 《감구집(感舊集 왕세진 저)》 가운데 이름은 상헌(尙憲)이요, 자는 숙도(叔度)라는 이가 있더군요.”
한다. 나는,
“옳습니다. 저,
엷은 구름 가벼운 비가 시누이의 사당터에 / 淡雲輕雨小姑祠
고운 국화 시든 난초 팔월이 이때라네 / 佳菊衰蘭八月時
라는 시는 곧 청음이 지은 것이요, 또 완정의 논시절구(論詩絶句)에는,
맑은 구름 이슬비가 소고사가 여기로다 / 淡雲微雨小姑祠
빼어난 국화 지는 난초 때마침 팔월이야 / 菊秀蘭衰八月時
조선에서 오신 손님 그 말을 기억하니 / 記得朝鮮使臣語
동쪽 나라 그분네가 시를 과연 알더구먼 / 果然東國解聲詩
이라 하였으니, 혜풍의 이 시는 완정을 본받아서 지은 것입니다.”
한즉, 황포는 또,
“혜풍의 시는 실로 얻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동국 사람이 시를 안다는 말이 과연 그렇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을 더 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다. 나는 곧,
글을 읽다 눈물 지니 옛 역사가 아롱지네 / 看書淚下染千秋
물에 닿은 저 시인은 시름도 하도 할사 / 臨水騷人旡限愁
확사(심덕잠(沈德潛)의 자)가 시를 엮되(《청시별재(淸詩別裁)》) 너무나 초라터라 / 碻士編詩嫌草草
《치청전집》 있다 하니 어디서 구해 볼까 / 豸靑全集若爲求
를 썼더니, 황포는 손을 흔들며 붓으로 ‘치청전집’ 넉 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금서(禁書)랍니다. 철군(鐵君 이개(李鍇)의 자)의 선조는 애초에 귀국 사람이라지요.”
한다. 나는,
“무슨 까닭으로 금법에 걸렸나요.”
하였더니, 황포는 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또 잇달아서 그 다음 절의,
시 짓기로 이름 높은 곽집환이 있다고녀 / 有箇詩人郭執桓
담원(곽태봉(郭泰峯)이 거처하는 곳)이 읊은 글귀 동국에 헌사롭네 / 澹園聯唱遍東韓
이제껏 삼 년이라 소식 그저 끊겼으니 / 至今三載旡消息
처량한 이 꿈속에 물 소리 뿐이로세 / 汾水悠悠入夢寒
를 읊었더니, 황포는 평하려 들면서,
“곽은 어느 고을에 살고 있는 시인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그는 태원(太原)에 산답니다.”
하고, 또,
“사동망(師東望)과 양유동(梁維棟)은 어떤 인물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모두 다 모른다고 답한다. 나는 또,
“그러면 서점 중에는 갓 새긴 《회성원집(繪聲園集)》이 있겠습니까. 그 책머리에 사와 양의 두 서문이 있고, 역시 저의 것도 있습지요.”
한즉, 황포는 곧 ‘회성원집’ 넉 자를 써서 문수당(文粹堂)서사(書肆)의 편액(扁額)이다. 에 사람을 보내어 구했으나 없다 한다. 나는 또,
“선생은 반정균학사를 잘 아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황포는,
“일찍이 사귀어 본 일은 없습니다.”
한다. 나는,
“반 학사의 댁이 종인부(宗人府)에서 벽 하나가 가렸답니다. 제가 나라를 떠나올 때에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종인부 대문을 지나 오른편으로 돌면 그 댁이 있다.’ 합니다. 그러면 종인부가 여기에서 거리로 얼마나 됩니까.”
한즉, 황포는,
“선생이 예부(禮部)를 잘 알고 계시겠지요.”
하고 반문할 즈음에 마침 한 손님이 좌석에 들어앉더니,
“종인부를 찾을 것 없이 그 댁이 여기서 멀지 않소이다. 저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있는 단씨(段氏)의 백고약포(白槀藥鋪)에서 마주 선 문이 곧 반이 우거한 곳입니다.”
하고 설명한다. 황포가 그와 무어라고 이야기하더니 곧,
“지난해 가을에 그가 이곳으로 옮아왔다 하는데, 선생은 누구를 통해서 그를 아셨나요.”
한다. 나는,
“저의 나라 사람 홍대용(洪大容)이 건륭 병술년(1766년)에 공사(貢使)를 따라서 연경에 왔다가 반을 만났고, 그 뒤에도 그와 서로 사귀어 본 이가 있으니, 저는 비록 그를 보지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벌써 서로 통했답니다. 반은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여 일찍이 스스로 복숭아와 버드나무를 그리고서,
우리 집은 서자호(서호(西湖)) 물가를 둘린 나무 / 吾家西子湖邊樹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네 / 淺碧深紅二月時
이렇듯한 저 강남을 돌아가지 못하고는 / 如此江南歸不得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는 시를 써서 홍대용에게 주었답니다.”
한즉, 황포가 크게 권주를 치면서,
“선생의 벗 홍 수재(洪秀才)의 아름다운 글귀를 듣고자 합니다.”
한다. 나는,
“일찍이 외우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혜풍(惠風)이 탄소(彈素)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서,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오 / 淺碧深紅二月時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항주가 낳은 선비 그 사람은 반향조를 / 杭州擧子潘香祖
어여쁠사 그의 시구 남시와 어떻던고 / 可憐佳句似南施
하였으니, 우리나라 시인들이 중국의 명사를 그리워함이 이렇답니다.”
한즉, 황포는 또 이에 권주를 치면서,
“반은 진실로 이름 있는 선비이긴 하나 혜풍의 것도 역시 아주 아름답습니다.”
하고, 황포는 곧 그 종이를 거두어 품속에 넣으면서,
“제가 방금 〈구당시화(毬堂詩話)〉를 쓰고 있는데 다행히 이런 한 토막 재미있는 이야기를 얻었소이다.”
하고는 이내 같이 문을 나와서 작별할 제, 황포는,
“이 길이 바로 양매서가로 가는 것입니다. 단씨의 약포는 저 문패에 큰 물고기를 그린 곳이 그 집이랍니다.”
하고, 한 곳을 가리켰다.
강녀묘(姜女廟)는 산해관 밖에 있는데, 이는 이른바 망부석(望夫石)이다. 왕건(王建 당(唐) 시인. 자는 중초(仲初))의,
고운 님 바라던 곳 강물만이 예는구나 / 望夫處江悠悠
이 몸이 돌 될망정 고개도 안 돌리네 / 化爲石不回頭
나날이 이 산 위에 바람 불고 비 내릴 제 / 山頭日日風和雨
님이 돌아오시는 땐 이 돌 응당 입 열 것을 / 行人歸來石應語
이란 시가 곧 이것을 말함이다. 세간에서는 망부석이 이 한 군데뿐이 아니라 하나는 태평(太平)에 있고, 또 하나는 무창(武昌)에 있으니, 그러면 왕건이 읊은 것은 이 돌이 아님을 알겠다. 지금 이곳에 행궁(行宮)이 있는데, 그 웅장ㆍ화려함이 북진묘(北鎭廟)에 못지 않고, 또 과친왕(果親王)이 금자(金字)로 쓴 ‘진고명적(振古名蹟)’이라는 주련이 있으며, 건륭 8년(1743년) 10월에 황제가,
서늘 바람 늙은 가지 저녁 볕에 우는 듯이 / 涼風頹樹吼斜陽
이제껏 구슬프게 고운 님을 그리웁네 / 尙作悲聲吊乃郞
천고의 내 절개를 자랑코자 하랴마는 / 千古旡心誇節義
이 몸이 죽고 죽음 강상을 위함이네 / 一身有死爲綱常
그날부터 내려오며 강녀라 이름 불러 / 由來此日稱姜女
당년에 그 슬픔은 기량을 울었다네 / 盡道當年哭杞梁
이 마음 본받아서 아름다움 지킨다면 / 長見秉彝公懿好
전한 말이 그르다손 무엇이 해로우랴 / 訛傳是處也何妨
라는 시를 지어서 돌에 새겼고, 돌 곁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진의정(振衣亭)이다. 대체로 청의 황실은 대대로 명필이 많으나 과친왕(果親王)이 더욱 이에 능하여 미원장(米元章)보다도 나을 듯싶었다.
사신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는 이는 반드시 칭호 하나씩을 가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역관을 종사(從事)라 하고, 군관을 비장(裨將)이라 하며, 놀 양으로 가는 나와 같은 이는 반당(伴當)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말에 소어(蘇魚)를 반당(盤當)이라 하니 대개 반(盤)과 반(伴)의 음이 같은 까닭이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면 아까 이른바 반당은 은빛 모자와 정수리에 푸른 깃을 꽂고 짧은 소매에 가뿐한 행장을 차리게 된다. 이를 본 길가의 구경꾼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새우라고 부른다. 어째서 새우라 하는지는 모르나 대체로 무부(武夫)의 별호인 듯싶다. 또 지나는 곳마다 어린이들이 떼를 지어 몰렸다가 일제히,
“가오리가 온다. 가오리가 오네.”
하고, 또는 말 꼬리에 따라오면서 다투어가며 지껄인다. 대체로 가오리가 온다는 것은 고려(高麗)가 온다는 말이다. 나는 일행더러,
“이제 세 가지 물고기로 변하는구먼.”
하고는 웃었다. 모든 사람들은,
“어째서 세 가지 고기라 하는고.”
한다. 나는,
“길을 떠날 때에는 반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소어요,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새우라고 하니 새우도 역시 고기의 한 족속이요, 되놈 애들은 모두 가오리(哥吾里)하고 부르니 이는 홍어(洪魚)가 아닌가.”
한즉,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나는 이내 말 위에서 시 한 절을 불렀다.
푸른 깃 은 정수리 의젓한 무부로서 / 翠翎銀頂武夫如
천리라 요동 길을 사신 뒤를 따랐구나 / 千里遼陽逐使車
중국 땅에 들어서자 고기 별호 세 번째와 / 一入中州三變號
예부터 못난 이 몸 종이 씹는 좀이라오 / 鯫生從古學蟲魚
고려(高麗)는 애초에 고구리(高句驪)로부터 나온 이름이었는데, ‘구(句)’ 자와 ‘마(馬)’ 변을 생략한 것이다. 만일 산과 물이 곱다고 풀이해서 ‘고려’라고 읽는다면 이는 천자문(千字文) 중에 있는 금생려수(金生麗水)의 ‘려(麗)’ 자가 될 것이니 이는 거성(去聲)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평성(平聲)의 ‘리(麗)’로 발음한다. 수ㆍ당 때에도 고구리를 모두 ‘고리’라고 불렀으니 ‘고리’란 이름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다. 이무관(李懋官)은 일찍이,
“‘고구리’란 말은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처음 나타났으며, 그들 조상은 금와(金蛙)인데, 우리나라 말로 와(蛙)를 개구리(皆句麗)라 하고 또는 왕마구리(王摩句麗)라 한다. 옛 사람들이 몹시 질박하여 곧 임금 이름으로써 나라 이름을 삼고는 성을 그 위에다 씌워서 ‘고구리’가 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일시의 조롱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마는 제법 이치에 맞는 말이다. 외국의 방언이 대체로 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는 것이 많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한자로 옮겼을 때 예를 들면, 은(銀)을 몽고(蒙古)라 하고, 아름다운 금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하며, 장사(壯士)를 예락하(曳落河)라고 부르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산서(山西)에 살고 있는 사람 곽집환(郭執桓)의 자는 봉규(圭)요, 또는 근정(勤庭)이며, 호는 반오(半迂)요, 혹은 동산(東山)이며, 또는 회성원(繪聲園)이라 한다. 그는 건륭 병인년(1746년)에 났으며,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하고 집이 대대로 부유하였으며, 그의 집은 호산(虎山)을 뒤에 지고 앞에는 노천(蘆泉)이 흐르고 있다. 그의 아버지 태봉(泰峰)의 자는 청령(靑嶺)이요, 호는 금랍(錦衲)이니 나라에서 중헌 대부(中憲大夫)의 직함을 주었는데, 뒤에 또 자정 대부(資政大夫)에 승진되었다. 금랍은 날마다 심덕잠(沈德潛)ㆍ가락택(賈洛澤) 등 모든 명사와 더불어 그 동산에서 시를 창수(倡酬)하였다.
봉규가 일찍이 그와 한 고을에 살고 있는 등문헌(鄧汶軒) 사민(師閔)을 통하여 우리나라 명사들에게 담원팔영(澹園八詠)의 시를 청하였으니, 담원은 곧 금랍이 거처하는 곳이었으며, 이 시는 대체로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다.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
붉은 파초 푸른 바위 담 너머로 솟아 뵈고 / 紅蕉綠石出東墻
한 그루 오동일랑 깊숙한 찰 간직했네 / 一樹梧桐窈窕堂
평생에 오만한 몸 손님 맞이 게을리하여 / 傲骨平生迎送懶
어른님 하시는 일은 저문 산에 절만 하네 / 丈人惟拜暮山光
위는 내청각(來靑閣)을 읊었다.

남쪽 비탈 그림자는 진종일 나풀나풀 / 南陀竟日影婆娑
그림자 물에 지자 나를 불러 누구인가 / 耐可呼吾亦喚他
산들바람 잠깐 불 제 해오라기 저어가니 / 乍綴微風鳬鷺去
요란한 물결 위에 백 동파가 설렁이네 / 不禁撩亂百東坡
위는 감영지(鑑影池)를 읊었다.

코 끝에 희끗하며 보기는 보았건만 / 已觀微白鼻端依
무엇이고 맡으려니 콧구멍이 닫혔고나 / 欲辨臟神掩兩扉
다만 암향 있어 꿈에 들어 싸늘하네 / 獨有暗香侵夢冷
나부산 밝은 달에 매화 가지 춤추는 듯 / 羅浮明月弄輝輝
위는 소심거(素心居)를 읊었다.

卍자 새긴 난간 위에 울한 솔이 덮여 있고 / 松覆深深卍字欄
기운 바위 넌출 달려 푸른 빛이 어울렸네 / 垂蘿欹石翠相攅
그림 배에 바람 불어 가는 대로 두려무나 / 一任畫舫風吹去
밤새도록 들려오는 찬 여울 물소린 듯 / 盡夜寒聲瀉作灘
위는 송음정(松陰亭)을 읊었다.

가볍게 뿜는 놀은 취한 넋을 깨우는 듯 / 噀輕堪醒醉魂花
하늘 말이 높이 달려 푸른 갈기 너울너울 / 天褭行空翠鬣髿
약 캐러 갔다가 옛 신선을 찾으려니 / 採藥將尋劉阮去
적성 아침 놀에 길마저 아득코녀 / 路迷廉閃赤城霞
위는 비하루(飛霞樓)를 읊었다.

꽃은 하도 은근하여 가는 임을 붙드는 듯 / 花似將歸强挽賓
비바람 어이하여 도리어 새우는고 / 囑他風雨反逢嗔
골짝 꽃 꺾어다가 화병에 모셔 두니 / 自從洞裏修甁史
일년 삼백 육십 날이 어느 때가 봄 아니랴 / 三百六旬都是春
위는 유춘동(留春洞)을 읊었다.

옥파리채 맑은 저녁 높은 대에 홀로 올라 / 玉塵淸宵獨上臺
버들 울에 서리 내리고 기러기 슬피 울 제 / 杞棚霜落雁流哀
찢어지듯 한 소리에 가을 구름 흩어지고 / 一聲劃裂秋雲盡
깨끗한 저 하늘에 달님 이제 오신다네 / 萬里瑤空皓月來
위는 소월대(嘯月臺)를 읊었다.

꽃다운 화예부인 이 궁에 들어올 제 / 花蘂夫人初入宮
수줍은 채 말하자니 뺨이 먼저 붉었다네 / 含羞將語臉先紅
앵가의 사리쯤이 그 무엇이 묘하던고 / 鸚哥舍利元非妙
아란의 깨달은 도를 누구라서 알아주리 / 誰識阿難悟道功
위는 어화헌(語花軒)을 읊었다.
봉규가 그가 지은 ‘회성원집(繪聲園集)’ 각본(刻本) 한 권을 나에게 보내고는 서문을 청하였다. 그 글을 읽어본즉 청허(淸虛)하고도 쇄탈(灑脫)하여 세속 사람의 것과 같지 않고, 그는 약관 때부터 그 아버지의 가진 재산을 받았으며, 해내의 사객(詞客)들을 초빙하여 글과 술로 회합을 지었으니, 양유동(楊維棟)ㆍ노병순(盧秉純) 등이 모두 그 서문을 쓰게 되었다. 그의 ‘회진문서정(懷津門西亭)’이라는 시에,
향기 흩자 꽃이 지니 작은 정원 가을이라 / 香散花殘小院秋
추녀 끝에 달린 달은 갈퀴인양 되었으리 / 西亭簾角月如鉤
북으로 예는 외기러기 푸른 공중 스쳐오니 / 北來一雁橫空碧
그 그림자 동남으로 바다에 흘러드네 / 影下東南入海流
라 하였고, 또 그의 ‘제표요산수소폭(題表耀山水小幅)’이라는 시에는,
고기잡이 갯마을에 물빛은 밝았는데 / 蟹舍漁灣水色明
이슬 젖은 나무 숲에 흐렸다가 맑아지네 / 煙條露葉半陰晴
하늘가 구름 사이 외로운 배 멀리 저어 / 雲間天際孤帆遠
적막한 석양 속에 한 소리 기러기를 / 寂寞斜陽一雁聲
이라 하였고, 또 그의 ‘유감(有感)’에는,
강가에 밝은 달빛 가을이 맑노매라 / 壕梁月色照淸秋
회남의 갈대 숲에 내 꿈이 둘리누나 / 夢繞淮南蘆萩洲
초원에 잠긴 비는 갯마을이 고요하고 / 雨暗楚原連浦靜
고목에 급한 바람 강물 소리 섞여 흘러 / 風催古木雜江流
외로운 배 방향 몰라 건곤이 넓은지고 / 孤舟旡依乾坤濶
물과 구름 같은 신세 내 홀로 떠 있구나 / 隻影空持雲水浮
한없이도 쓸쓸한 건 시력이 끝난 그곳 / 最是蕭條極目處
머나먼 만리 길에 끝없는 나의 시름 / 迢遙萬里使人愁
이라 하였다. 내 일찍이 금오(金鰲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橋])와 옥동(玉蝀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橋]) 사이를 배회한 일이 있으니, 저 우촌(雨村)이조원(李調元) 과 추루(秋樓)반정균(潘庭均), 지당(芷塘)축덕린(祝德麟) 의 모든 명류는 오히려 만나 볼 기회가 있겠으나, 다만 곽씨 집환(執桓)은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6년이나 되었다. 집환이 건륭 을미년 8월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회성원집’은 아마 중간된 책[本]이 있을 듯 싶기에 유리창 안에서 구하여 보았으나, 끝내 얻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윤경(尹卿)이 검은 종이로 장정한 작은 부채를 내어서 대와 돌을 그리고 또 젖에다 금가루를 타서,
라고 써 있고, 그 밑에는,
“윤가전(尹嘉銓)이 쓰니 이때에 나이는 70이다.”
라고 썼다.
《명시종(明詩綜)》에 나의 5세조(世祖) 금양군(錦陽君)의 대동관제벽(大同館題壁)의 한 절로서,
한 나라의 홍가(한(漢) 성제(成帝)의 연호) 연간에 일어난 고구려 / 高句麗起漢鴻嘉
쓸쓸한 옛 궁터가 풀숲에 가리웠네 / 宮殿遺墟草樹遮
슬프다 을지문덕 그이가 죽은 뒤에 / 怊悵乙支文德死
나라가 망한 것 후정화 탓 아니라네 / 國亡非爲後庭花
가 실려 있다. 고구려의 일어남은 홍가 연간이 아니요, 곧 한 원제(漢元帝)의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이다. 성제(成帝)의 홍가 3년에는 백제(百濟)의 태조 고온조(高溫祚)가 직산(稷山)에 왕도를 정하였던 것을 선조께서 우연히 상고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유식한(兪式韓)의 《구당록(毬堂錄)》에는 《일지록(日知綠)》을 이끌어서 조선 역사의 자료로서 《서경(書經)》 대전(大傳)을 고증삼아, 이 시 가운데서 쓴 홍가의 그릇된 것을 변증(辨證)하였으니, 중국의 선비들이 고거(考據)와 변증에 알뜰하여 이로써 박아(博雅)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장주(長洲 우동이 살고 있던 지명) 우동(尤侗) 회암(悔菴)이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지으매, 그 첫머리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그 다음 백여 나라의 민요(民謠)와 토산(土産)의 대개를 소개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서도 그의 서술이 오히려 그릇된 것이 많으니 하물며 해외 만 리의 먼 곳이랴. 더군다나 문자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그들의 토속을 통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조선(朝鮮)을 두고 읊은 시에,
고구려를 하구려로 낮추어서 고쳤다니 / 高句麗降下句麗
조선이란 옛 이름이 보다 더 아름답네 / 未若朝鮮古號宜
천 리란 그 서울엔 온갖 연극 벌여 있고 / 千里王京陳百戱
한 나라 옛 모습을 이곳에서 보겠구나 / 漢城猶見漢官儀
라 하고는 그 주(注)에는,
“옛 조선이 고구려에게 합병되었으므로 수(隋)가 그를 쳤으되 항복받지 못하고는 그를 낮추어서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더니, 명(明)의 홍무(洪武) 연간에 그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고 조서(詔書)를 받들었으므로, 다시 조선의 이름을 회복시켰으며 한성(漢城)을 서울로 삼았다. 매양 조사(詔使)가 이르면 여러 가지 연극(演劇)을 진열하였다.”
라고 하고, 또 그 뒤를 이어서,
긴 저고리 넓은 소매 절풍건은 머리에다 / 長衫廣袖折風巾
다듬 종이 이리 붓은 한자 쓰면 진서라네 / 硾紙狼毫漢字眞
스스로 쓴 역사에는 전통이 오래다니 / 自序世家傳國遠
《상서》의 구주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이라네 / 尙書篇內九疇人
라 하고는, 또,
작은 아이 여덟 살이 황창이라 부르는데 / 小兒八歲號黃昌
칼춤을 추다 말고 백제왕을 베었다네 / 舞劍能誅百濟王
8월이라 한가윗날 회소곡을 다시 불러 / 更唱嘉俳會蘇曲
아침 나절 그 길쌈이 대바구니 가득 찼네 / 朝來蠶績已盈筐
라고 하고, 또 그 주에,
“신라(新羅)의 황창랑(黃昌郞)이 8세에 그의 임금을 위하여 백제(百濟)에 가서 거리에서 춤추는데, 백제왕이 그를 불러 궁중에서 춤추게 하였더니, 그는 이내 그 칼로써 백제왕을 죽였다. 7월 보름에 신라왕이 왕녀(王女)로 하여금 육부(六部)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넓은 뜰에서 길쌈을 시작하여, 8월 보름에 이르러서 그들의 공적을 비교하여 이에 진 자가 비용을 담당하여 주연을 벌이고 서로 노래 부르며 춤추되, 이를 ‘가위[嘉俳]’라 하였다. 그 중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회소곡(會蘇曲)을 불렀더니, 그 뒤에 조선이 신라를 깨치고 끼친 소리를 모의하여 황창과 회소의 두 곡조를 만들었다.”
하였다.
기려천(奇麗川)이 《소대총서(昭代叢書 청(淸) 장조(張潮) 저)》 를 내놓고 이 글을 뽑아서 나에게 뵌다. 내가 윤형산(尹亨山)에게,
“이름을 ‘하구려(下句麗)’로 낮춘 것은 곧 왕망(王莽) 때 일입니다.”
한즉, 윤은,
“그렇습니다.”
한다. 나는 또,
“스스로 쓴 역사라는 구절은 온통 그릇된 것입니다. 기씨(箕氏)의 조선은 위만(衛滿)에게 축출된 것입니다.”
하였더니 윤은,
“그거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에서는 복잡한 관계인 동방(東方)의 삼국(三國)을 통틀어 이야기한 것이요, 오로지 귀국만을 가리킨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가 이른바 전통이 오래다는 것은 대체로 그의 나라 이름 조선이 벌써 기자(箕子)로부터임을 말하며, 귀국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찬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본시 가작(佳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다시피 또는 가죽신을 격해 놓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의 주(注)에 이르기를 조선이 신라를 깨쳤다는 것은 더욱 그릇된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려를 이었고, 고려는 신라를 이었으니 어찌 5백 년 앞의 신라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한즉, 여천은,
“이야말로 을축(乙丑)ㆍ갑자(甲子)라는 겁니다.”
하고, 크게 웃는다.
내가 윤경더러,
“현존한 시인(詩人)으로서 해내(海內)에 가장 으뜸될 분은 누구십니까.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경은,
“천하가 넓은지라, 홍장(鴻匠)과 묘재(妙才)가 진실로 없는 것은 아니로되, 저는 나이가 늙고 세상일을 모두 끊어버렸으므로 젊은 재자들은 아는 이가 없고, 다만 저의 늙은 벗으로서 원 태사(袁太史) 매(枚)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자는 자재(子才)였고 뜻이 고상하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입니다. 그는 벼슬을 사랑하지 않고 산수에 방랑하여 가장 회고적(懷古的)인 작품이 능수입니다.”
하고는, 이내 소리를 높여서 그의 시 두어 귀를 읊는다. 나는 그가 읊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글씨로 써서 보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의 〈박랑성시(博浪城詩)〉에,
약을 캐는 진인들은 봉래산을 향해 가고 / 眞人採藥走蓬萊
아득한 박랑의 모래벌은 망해대에 연했구나 / 博浪沙連望海臺
구정은 아직 잠기고 삼호들은 일어섰네 / 九鼎尙沈三戶起
여섯 왕이 쓰러지자 한 방망이 오는구려 / 六王纔畢一椎來
범과 용이 기개 높은들 누른 금은 다하였네 / 虎龍有氣黃金盡
산도깨비 소리 없고 흰 구슬만 슬프다네 / 小鬼旡聲白璧哀
열흘 두고 찾다 못해 손을 마침 떼었다네 / 大索十日還撒手
그대 같은 기이한 재주 예부터 몇이런고 / 如君終古儘奇才
하였으니, 그 시를 보아서도 가히 중국 사대부(士大夫)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산이 구태여 이 시를 읊어 보임도 역시 그의 뜻이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려천(奇麗川)에게도 기피하지 않음은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강희 무오년(1678년)에 강우(江右)에 살고 있는 계문란(季文蘭)이라는 여인이 되놈들의 노략을 당하여 심양으로 가다가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러서 바람벽 위에 시 한 절을 썼으되,
뭉텅 머리 방망인양 옛 단장 가엾어라 / 椎髻空憐昔日粧
길 나선 초라한 양은 비단 치마 다 낡았네 / 征裙換盡越羅裳
아빠 엄마 어떠신고 그곳 몰라 애태우며 / 爺孃生死知何處
봄 바람에 흐뭇 울어 심양으로 예는구나 / 痛哭春風上瀋陽
하고는, 그 아래에 또 쓰기를,
“저라는 계집은 곧 강우에 살고 있는 우 상경(虞尙卿) 수재(秀才)의 아내로서 지아비는 놈들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이제 왕장경(王章京)에게 팔린 몸이 되어서 심양으로 가는 길이오. 무오년 정월 21일에 눈물을 뿌려 벽을 닦고 이 시를 쓰노니, 오직 천하에 유심(有心)한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서 이 몸을 가엾이 여겨 건져 주시옵길 바랍니다. 제 나이는 지금 21세외다.”
하였다. 그 뒤 6년 만인 계해(1683년)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공(金公) 석주(錫胄)가 사신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이 일을 기록하여 돌아왔고, 또 그 뒤 30여 년을 지나서 노가재(老稼齋) 김공(金公) 창업(昌業)이 역시 이곳을 지나니 바람벽에 쓴 글자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이제 나는 노가재보다도 60여 년 뒤인 이날에 또 이곳을 지나다가 이를 생각하여 배회하였으나 벽 사이의 글자는 다시 찾아 볼 곳이 없었다. 내 우연히 이 시로써 기풍액(奇豐額)에게 이야기하였더니 그는 산연(潸然)히 눈물지우며,
“진자점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산해관 밖에 있습니다.”
하였더니, 기는 곧 시 한 절을 읊었다.
붉은 단장 아침 나절 되놈에게 팔렸으니 / 紅粧朝落鑲黃旗
호가의 슬픈 박자 그 다섯째 글귈러라 / 笳拍傷心第五詞
천하에 많은 사내 맹덕이 이제 없으니 / 天下男兒無孟德
천금이 있다손들 채문희를 속할쏘냐 / 千金誰贖蔡文姬
강희의 산장시(山莊詩)는 통틀어 36마디였는데, 모두가 야비하고 졸렬하여 운치가 없으니, 대체로 그는 억지로 읊어서 평소의 포부를 자랑한 것인데 그의 모든 신하들이 반드시 뭇 글을 수집ㆍ나열하여 전주(箋注)를 내었으니, 한 예를 들면 그의 연파치상(煙波致爽)을 읊은,
서늘한 이 산장에 가끔 와서 더위 피하니 / 山莊頻避暑
잠자코 고요하여 떠들썩한 일 드무네 / 靜黙少喧嘩
는 아무런 주석도 필요하지 않건마는 그들은 양(梁) 소통(蕭統 양(梁)의 문학가. 자는 덕시(德施)) 시의,
수레를 바삐 몰아 산장으로 가자꾸나 / 命駕出山莊
든가, 유우석(劉禹錫) 시의,
푸른 넌출 그늘 속에 산장 하나 예 있구나 / 綠蘿陰下有山莊
라든가, 대숙륜(戴叔倫) 시의,
지초 이랑 대추밭 길 오가기도 잦았고녀 / 芝田棗逕往來頻
와, 손적(孫逖 당의 문학가) 시의,
이 땅이 가장 맑으니 숲 속 정자 좋을씨고 / 地勝林亭好
시절이 태평인 제 잔치도 자주로다 / 時淸宴賞頻
와, 위징(魏徵) 구성궁 예천명(九成宮醴泉銘)의,
“황제께서 구성궁에서 더위를 피하셨다.”(그 서문의 한 구절)
와, 양 간문제(梁簡文帝 자는 세찬(世纘)) 납량시(納涼詩)의,
높은 오동 그 밑에서 더위를 피하노라니 / 避暑高梧側
가벼운 바람 들어 옷깃이 서늘하군 / 輕風時入襟
과, 백거이(白居易) 시의,
봄철을 바라보며 꽃빛이 따뜻하고 / 望春花景暖
더위를 피하니 대 바람이 서늘코녀 / 避暑竹風涼
와, 《남사(南史)》 심린사전(沈麟士傳)의,
“나이가 80이 지났으나 귀와 눈은 오히려 총명하므로 남들은 그의 몸 수양이 정(靜)ㆍ묵(黙)한 소치라고 말하였다.”
와, 황보증(皇甫曾 당의 문학가. 자는 효상(孝常)) 시의,
화창한 바람엔 풀잎이 빼어나고 / 草長光風裏
잠자코 고요한데 꾀꼬리만 우는구나 / 鶯啼靜黙間
와, 하손(何遜 양의 문학가. 자는 중언(仲言)) 시의,
뵈는 거나 듣는 것이 떠들썩한 일 전혀 없네 / 視聽絶喧嘩
등을 이끌었으니, 이 시는 겨우 두 글귀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내용이 풀이하지 못할 것도 없거늘 어찌 허다한 전주(箋注)를 내었을까. 제용작가(帝庸作歌)라는 글이 있으나 어찌 허다한 출전을 밝힐 것이야 있으리요.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일찍이 말하기를,
관관저구(關關雎鳩)란 말은 애초부터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라고 하였으니, 이야말로 시학(詩學)에서의 대성(大成)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가두에 떠드는 말 하간전 외는 소리 / 街頭喧誦河間傳
규중의 슬픈 노래 양백화가 이 아니야 / 閨裏悲歌楊白花
이 시는 곧 점필재(佔畢齋)가 사방지(舍方知)를 풍자한 것이다. 사방지라는 자는 사천(私賤) 계층의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여복(女服)을 가장하여 얼굴에 분과 기름을 단장하며 재봉을 배웠더니, 자라나서 조사(朝士)들의 집에 드나들곤 했다. 천순(天順) 7년(1463년) 봄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일을 풍문으로 듣고 체포하여 그가 평소에 간통하던 여보살에게 취조한즉, 보살은,
“그의 양도(陽道)가 유달리 큽니다.”
한다. 이에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서 만져 보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도 번차례로 실험하며 보고는 모두 혀를 뽑으면서,
“에이, 대단하더구만.”
하였다. 이때에 중국에서도 역시 이보다 먼저(뒤인 것을 잘못 센 것 같다.)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오군(吳郡)양순길(楊循吉)의 《봉헌별기(蓬軒別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성화(成化) 경자년(1480년)에 경사(京師)에 과부 하나가 여공(女紅)에 능란하고 젊고도 예쁘며, 또 신이나 버선이 네 치에 지나지 않을 만큼 작았다. 모든 부귀가에서 서로 맞이하여 수놓기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남자를 보면 문득 부끄러운 빛으로 회피하기도 하려니와, 밤이면 그에게 배우는 여자와도 서로 자누이되 자물통을 튼튼히 잠그곤 한다. 그러므로 남들은 더욱이 그가 자기 몸조심에 가장 엄격하다고 믿었다. 이때 태학생(太學生)으로 있던 아무개가 그를 연모하여, 처음에는 그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그 과부를 자기의 집에 맞이하고, 가만히 그 아내에게 타일러 밤들어 문을 열고 거짓으로 뒷간에 가는 듯이 하고는,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끄니 과부는 고함을 치자, 그는 과부의 목덜미를 껴안고는 강탈한즉 곧 남자인지라 구속하여 관청에 보내어 조사하니, 그의 성은 상(桑)이요, 이름은 중(翀)이며, 나이는 24세인데 어릴 때부터 발을 싸 매었다 한다. 법사(法司)가 그 옥사를 위에 아뢰었더니 헌종 황제(憲宗皇帝)가 이는 ‘인요(人妖)’라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한다.
망부석(望夫石)에는 천산(千山) 범광원(范光遠)의 시 일절이 쓰여져 있다.
성 쌓은 이 어디 가고 보이지를 않는구나 / 不見築城人
다만 정녀 아씨 그 자취 완연쿠나 / 但見貞女迹
묻노라 만리장성 너는 이를 알려니 / 試問萬里城
이 한 조각 돌에 비겨 봄이 어떠할꼬 / 何如一片石
강희때 간행한 전당시(全唐詩)는 모두 1백 20권이나 되는 거질이었으니, 마땅히 빠진 것이 없을 것이로되 당 현종(唐玄宗)의 〈어제사신라경덕왕(御製賜新羅景德王)〉이라는 5언 10운(韻)의 시가 그 속에 실리지 않았다. 《삼국사(三國史)》에,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 봄 2월에 경덕왕은 당 현종이 촉(蜀)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당의 절강으로부터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공물(貢物)을 바쳤더니, 조서(詔書)로 말하기를,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바쳐서 능히 예악(禮樂)과 명분(名分)을 지키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시 한 수를 지어준다 하고,
넷 벼리 나누어서 밝은 햇빛 나타나고 / 四維分景緯
여러 가지 기상들이 그 속에 포함되네 / 萬象含中樞
구슬과 피륙들은 온 천하에 깔려 있고 / 玉帛遍天下
다리 놓고 배를 저어 우리나라 찾아드네 /梯航歸上都
아득한 이내 회포 푸른 뭍이 막혔더니 / 緬懷阻靑陸
오랜 세월 흐르도록 우리 위해 수고했소 / 歲月勤黃圖
망망한 하늘가를 그즈음 누가 알꼬 / 漫漫窮地際
창창한 그 어란이 바다 구석 자리잡아 / 蒼蒼連海隅
갸륵한 이 나라는 명분을 지켰다네 / 興言名義國
산천이 멀다 하여 허수로이 생각하랴 / 豈謂山河殊
우리 사신 갔을 때엔 풍속 교화 전해 있고 / 使去傳風敎
그들이 이에 오면 옛 법을 배워 가네 / 人來習典謨
옷갓이 정제하니 예식을 알아 하고 / 衣冠知奉禮
충실하고 믿음 지켜 유학을 높였구나 / 忠信識尊儒
어린 정성 나타나니 하느님이 하감하고 / 誠矣天其鑒
어질도다 그의 덕은 외롭진 않으리라 / 賢哉德不孤
깃발 안고 함께 일어 인민을 기르리니 / 擁旄同作牧
아름다운 이 선물은 생추에 비할쏘냐 / 厚貺比生蒭
님이 가진 푸른 뜻을 더 한층 굳게 하여 / 益重靑靑志
바람 서리 치더라도 어디까지 변치 마오 / 風霜恒不渝
라고 하였다.”
한다. 송(宋)의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의 사신 김부의(金富儀)가 이 시의 각본(刻本)을 가지고 관반(館伴)으로 있던 학사(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더니, 이병이 황제 휘종 황제(徽宗皇帝) 에게 올렸는데 이내 양부(兩府)와 모든 학사들에게 보이고, 황제는 또,
“이 진봉시랑(進封侍郞)이 올린 시는 당 명황(唐明皇)의 글씨가 틀림없는 것이야.”
하고 가탄하여 마지않았다. 이 시가 이미 중국에 들어가서 도군(道君 송(宋) 휘종이 자칭한 별호)의 예상(睿賞)을 겪었으나, 후세 사람이 당시(唐詩)를 엮는 이는 모두 이를 수록하지 않았음을 보아서, 비로소 옛날의 잃어버린 글은 듣고 본 것으로서만이 다할 바가 못 되고, 도리어 해외 편방(偏邦)의 선비가 이따금 천유(闡幽)의 업적이 있음을 깨달았으니, 이 어찌 우리들의 다행이 아니리요.
오중(吳中)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부박하고 허탄하며, 경솔하고 변덕이 많으나 대체로 문장이 공교롭고 글씨 그림을 잘하기로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그러나 중원(中原)의 인사들은 모두 그들을 미워하여 장사치나 장쾌들을 지목할 때에는, 반드시 항주풍(杭州風)이라고 일컬으니 대체로 오인(吳人)은 교활한 술책이 많았던 까닭이다. 전당(錢塘) 전여성(田汝成)의 《위항총담(委巷叢談)》에,
“항주의 풍속이 부박하고도 허탄하여 남을 자랑함에도 가벼이 하려니와, 구차히 나무라기도 잘하여 한 길에서 들은 말들을 다시 생각하여 보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아무개가 이상한 물건을 가졌다고 하거나, 또는 아무개의 집에 범상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고 한 사람이 외치면 뭇 사람이 따라서 남의 의심나는 일에는 스스로 증언하되, 마치 자기의 눈으로 환하게 본 듯이 하여 저 바람처럼 일 때에도 머리가 나타나지 않거니와, 지나는 곳에도 그림자가 없어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까닭으로, 상말에 ‘항주 바람은 포착하자 없어져 버린다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모두 한 패가 되어 있네.’라고 하였거니와, 또 이르기를, ‘항주 바람은 한 묶음 파라네. 꽃은 쭝긋쭝긋 속은 다 비었다네.’라고 하였으며, 또 그들의 습속이 거짓을 만들어서 눈앞의 이익을 맞이하되, 신후(身後)의 일을 돌보지 않음도 일쑤이다. 그리하여 술에다 재를 타고 닭에다 모래를 채우고 거위 배때기에 바람을 불어 넣고, 고기나 생선에 물을 집어 넣으며, 천에 기름과 분을 바르는 따위의 일이 벌써 송(宋) 때부터 그러하였다.”
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기 귀주(奇貴州)에게 육비(陸飛)의 글씨와 그림이 공교함을 이야기하였더니, 기는,
“그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 벌레입니다.”
한다. 이도 역시 항주풍을 두고 말함이다. 그들 북쪽 사람이 남쪽 선비를 미워함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최두기(崔杜機)성대(成大) 의 〈이화암노승가(梨花菴老僧歌)〉에,
오왕이 연극 보다가 뭉텅 상투 슬퍼했고 / 吳王看戲泣椎結
전수가 중이 되어 춘추 필법 위탁했네 / 錢叜爲僧托麟筆
라 하였으니, 우리나라 선배들이 매양 중국 일에 대하여 풍문에 휩쓸려서 실적에 충실하지 못함이 일쑤이다.
이에 이른바 오왕은 오삼계(吳三桂)를 말함이요, 전수는 전겸익(錢謙益)을 말함이다. 겸익이나 삼계가 모두 되놈에게 항복하여 머리털이 희도록 오래 살았으나 무료히 지나는 중에, 그 하나는 비록 의거(義擧)에 의탁하였으나 임금의 칭호가 벌써 참람하였고, 또 하나는 저서에 뜻을 붙였으나 대절이 이미 이지러졌으니, 비록 교활하게 후세의 공격을 회피하고자 한들 누가 믿어 주리요. 우리나라 상말에 대체로 사물(事物)에 어두운 것을 ‘몽롱춘추(朦朧春秋)’라 한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춘추를 이야기하기 좋아하나 몽롱하기가 이러한 종류와 같은 것이 많으니, 어찌 만인(滿人)들의 조소를 입지 않으리요.
송 휘종(宋徽宗)의 대관(大觀) 연간에 섭몽득(葉夢得)이 고려 사신의 관반(館伴)이 되었더니, 옛 규칙에 사신이 대궐 아래에 이른 지 달이 넘지 않아서 곧 돌려보내는 법이었는데, 휘종은 그로 하여금 전시(殿試) 신방(新榜)과 상지(上池 상림원(上林苑)의 못)를 구경시키고자 하여, 드디어 거의 70일을 머물게 되었다. 사신이 자못 몸가짐을 삼가고 행동이 아담하였으므로 섭(葉)이 그를 전송하려 점운관(占雲館)까지 이르러서 하직하였더니, 그의 부사(副使) 한교여(韓皦如)가 섭에게 옥대(玉帶)를 주면서,
“이것은 애초에 당(唐)의 고물이었으며, 우리 선조부터 대대로 보배로 삼았던 거요.”
하고는, 또 스스로 홀(笏) 위에다가 시 한 수를 써서 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이별이 장차로다 / 泣涕汍瀾欲別離
이 몸이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 此生旡復再來期
다만 보배 띠로 깊은 뜻을 베푸노니 / 謾將寶帶陳深意
이 물건 볼 때마다 이 사람을 잊지 마오 / 莫忘思人見物時
라 하였으나, 섭은 고려 사신의 옛 일에 물건을 끌어서 기증하는 예가 없었으므로 굳이 사양하고는 다만 그 시가 비록 박졸(朴拙)하긴 하나, 가히 그의 견권한 뜻은 짐작할 수 있겠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옹정(雍正) 초년에 칙사(敕使) 서산(書山)이 부벽루(浮碧樓)에 시를 썼으되,
풍물은 아름다워 옛적과 같건마는 / 風物獨依舊
산천은 어찌하여 부끄럼을 띠었는고 / 山河猶帶羞
하였으니, 서산은 만인(滿人)인데도 불구하고 별안간 한(漢)을 생각하는 말을 지음은 무슨 까닭일까.
얼마 전에 상선(商船)이 바람을 만나서 옹진(甕津)에 닿았는데, 배 가운데에는 시에 능통한 자가 있어서 율시 한 편으로 수사(水使)에게 올렸으되,
고국에 누구 있어 변한 음률 슬퍼하랴 / 故國誰憐鍾簴變
타향에 이 몸이란 성명이 부끄럽소 / 殊方還愧姓名通
천고에 주의 있어 신정에 빚은 눈물 / 千秋周顗新亭淚
바다에 뿌려본들 마를 줄이 있으랴 / 空灑滄溟水不窮
하였더니, 그 전편(全篇)을 얻어 보지 못함이 유감이려니와 그의 성명도 전하지 않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석림시화(石林詩話)》 섭몽득(葉蒙得) 저(著)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고려가 태종조(太宗朝)로부터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더니, 원풍(元豐) 초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매 신종(神宗)이 장성일(張誠一)을 관반(館伴)으로 삼고는, 그에게 다시 조회하는 뜻을 물었더니, 그는 답하기를,
‘우리나라가 거란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더니 그들의 주구(誅求)에 견디지 못한 국왕(國王) 왕휘(王徽)문종(文宗)의 휘 는 늘 《화엄경(華嚴經)》을 외어 중국이 재생하기를 빌었는데, 하룻저녁 꿈에 별안간 이 경사에 몸이 이르러서 성읍과 궁실의 번영함을 샅샅이 구경하고 꿈을 깨자, 이곳을 연모하여 즉시로 시를 읊으셨는데,
악한 인연 어이하여 거란에게 이웃되어 / 惡業因緣近契丹
한 해에 바친 공물 몇 가지나 괴롭혔네 / 一年朝貢幾多般
이 몸에 날개 돋쳐 먼 중국에 왔건마는 / 移身忽到中華裏
애달파라 깊은 대궐 누수 소리 날 새려네 / 可惜深宮滴漏殘
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수지(錢受之 전겸익(錢謙益). 수지는 자)의 이른바,
김모재(金慕齋)가 지은 시인데 그의 본집(本集 《모재집(慕齋集)》)에 실려 있다. 수지가 《황화집(皇華集 화찰 저)》에 발(跋)을 달 때에 이 시를 들어서 조롱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화홍산(華鴻山)찰(察)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비로소 작용(作俑)한 것이다. 예를 들면,
넓디넓은 이 들판엔 가이 없는 물이요 / 廣野無邊水
기나긴 저 하늘엔 기러기 한 점뿐일러라 / 長天一點鴻
라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이는 야(野) 자는 넓게 쓰고, 천(天) 자는 길게 쓰며, 수(水) 자는 그 편방(偏傍)을 떼어서 무변(無邊)이 되고, 홍(鴻) 자는 비점(批點)을 쳐서 한 점(點)이 된다. 이를 일러서 두 글자의 뜻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배신(陪臣)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가자면 반드시 사학(詞學)에 능통한 선비를 묘선(妙選)하여 종사(從事)를 삼아서 별안간 나타나는 응수(應酬)에 대비하였으며, 조사(詔使)는 역시 도중에서 으레 이러한 문제를 구상하여 두는 법이다. 이는 접반(接伴)을 곤란하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의 접반을 맡은 이들도 또한 반드시 이러한 문제를 미리 연습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드디어 한 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기뻐서 함은 아니거늘, 수지가 홍산을 위하여 이 《황화집》에 발을 쓸 때에 그 실상(實狀)은 모두 없애 버리고는 다만 우리나라 사람의 한 글귀를 뽑아내어 웃음거리를 삼았을뿐더러 또 그들과 함께 창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동국(東國) 인사의 마음을 후련하게 할 수 있겠는가. 내 일찍이 이 일을 들어서 유식한(兪式韓)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식한은 곧 이를 적어서 품속에 간직하되 마치 귀중한 보물을 얻은 듯이 기뻐하였다.
최간이(崔簡易)의 〈삼일포시(三日浦詩)〉에,
갠 봉우리 서른 여섯 조개인 양 나비 눈썹 / 晴峰六六斂螺蛾
흰 해오라기 쌍을 지어 맑은 물결 희롱할 제 / 白鳥雙雙弄鏡波
사흘을 바장이곤 님은 다시 못 오시니 / 三日仙遊猶不再
십주 아름다운 곳이 많은 줄을 알았노라 / 十洲佳處始知多
라 하였다. 내 일찍이 사선정(四仙亭)에 올랐더니 심백수(沈伯修)가 이 시를 새겨서 정자 위에 걸었으나 이는 결코 가작은 아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간이(簡易)가 왕감주(王弇州)만나러 갔더니 그는 공무가 산처럼 많이 쌓여 있어서 수십 명의 서리(書吏)가 번차례로 문서를 아뢰는데, 감주는 교의에 기대고 앉아 파리채를 휘두르면서 좌수우응(左酬右應)하되, 결재가 몹시 빠르매 뭇 사람들의 붓이 일제히 움직여서, 잠깐 사이에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또 10여 명의 청년이 각기 그들의 과작(課作)한 시(詩)와 문(文), 또는 소품(小品)ㆍ서종(書種) 등을 바치면 감주는 곧 붉은 먹으로써 비점(批點)을 치며 빨리 넘기는 손에는 붓이 멈춰지지 않았다. 간이는 이를 보고 크게 경복(驚服)하여 시자(侍者)더러, ‘노야께서는 전에도 늘 저러시고 계셨던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오늘은 마침 자리가 조용하여 조금 한가하신 편입니다. 노야께서는 전일에 벌써 시 1만 수(首)를 읊었으며 글 천 권을 지으셨답니다.’ 한다. 간이는 한참 잠자코 풀이 죽어 소매 속에 간직하였던 자기의 글을 내어서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글짓기에 뜻을 둔 분임은 알 수 있겠으나 다만 글 읽은 게 많지 못하고 문견이 넓지 못하니, 이제 돌아가서 창려(昌黎)의 글 중에서 〈획린해(獲麟解)〉를 5백 번만 읽고 나면 마땅히 글 짓는 혜경(蹊逕)을 알 것이오.’ 하였다. 간이가 크게 부끄럽고 한스러워서 감주를 만났던 일을 깊이 숨기고는 글쓸 때에 일부러 뒤틀린 버릇으로 기괴한 글을 썼으니, 이는 이우린(李于鱗 명(明) 문학가 이반룡(李攀龍). 우린은 자)에게 배운 것이라 하였다. 우린은 원래 감주를 가장 두려워하는 바이므로 이것으로써 그를 한 번 누르려던 것이다.”
허균(許筠)주 태사(朱太史) 지번(之蕃)을 접대할 때에 주(朱)에게,
“일찍이 감주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는,
“일찍이 계사년(1593년) 봄에 태창(太蒼 강소성에 있는 지명)에 가서 감주에게 배움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그때에 남사구(南司寇)로서 치사(致仕)하였는데 얼굴은 중인(中人)에 비하여 지나침이 없으나, 눈빛이 별 같고 서재를 화원(花園)에 쌓고 문도를 모아서 술 마시며 시를 읊는데, 감주는 날마다 5ㆍ6말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누구라도 시문(詩文)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시비(侍婢)로 하여금 음악으로 아뢰게 하면서 먹을 갈며 종이를 펴는 것이 마치 풍운과 귀신이 이는 듯이 빠릅니다.”
한다. 그는 또,
“그러면 감주도 누구를 두려워하는 이가 있던가요.”
한즉, 주는,
“공이 평생에 두려워하고 심복하는 이는 오직 창명(滄溟 이반룡의 호) 한 분이 있을 뿐이니, 그는 매양 글귀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이우린(李于麟)의 〈진관시(秦關詩)〉에,
푸른 용이 멀리 걸리니 진천에 비 내리고 / 蒼龍遠掛秦天雨
돌 말이 길이 우니 한원에는 바람 이네 / 石馬長嘶漢苑風
를 높은 목소리로 읊었으니 그는 어찌 두려운 이가 없으리요.”
하고 답하였다.
심분(沈汾 남당(南唐) 때의 문학가)의 《속신선전(續神仙傳)》에 이르기를,
“신라(新羅)의 빈공(賓貢) 진사(進士) 김가기(金可紀 신라 때의 문학가)가 신선이 되었다.”
고 하였는데, 장효표(章孝標)의 〈송김가기귀신라(送金可紀歸新羅)〉라는 시에,
당나라에 과거 하여 말소리도 닮았더니 / 登唐科第語唐音
해돋이를 바라보곤 고국 생각 간절하다네 / 望日初生憶故林
일엽편주 바람 일 제 고래 등에 나는 듯이 / 風高一葉飛魚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삼신산이 솟아나네 / 湖淨三山出海心
라 하였으니, 김가기가 본국(本國)으로 돌아온 것은 명확한 일이다. 그런데 《속신선전》에는,
“가기가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살고 있더니, 그 뒤 3년 만에 뱃길로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도복(道服)을 입고 종남산에 들어가 음덕(陰德)을 힘써 행하더니, 당(唐)의 대중(大中) 11년(857년) 12월에 별안간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신(臣)이 옥황(玉皇)님의 조서를 받자와 명년 2월 25일에 마땅히 하늘에 오르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선종(宣宗)이 이를 이상히 여겨서 궁녀(宮女) 네 명과 향악(香樂)과 금채(金綵)를 하사하고, 또 중사(中使) 두 사람을 보내어 가까이 모시게 하였더니, 그날에 이르러 과연 채색 구름과 난새ㆍ학새와 저ㆍ퉁소와 금ㆍ석과 깃일산과 깃발이 공중에 가득하더니, 그는 학을 타고 승천하였다. 조사(朝士)나 서민(庶民)을 나눌 것 없이 구경하는 이가 산골짜기에 모여서 누구든지 우러러 절하며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였고, 한무외(韓无畏)의 《전도록(傳道錄)》에는, 또,
“김가기가 최승우(崔承祐)와 중 자혜(慈惠)와 더불어 신원지(申元之)를 좇아서 도술(道術)을 배우더니, 종리 장군(鍾離將軍)과 지선(地仙) 2백의 무리를 만났다.”
고 일렀으나, 이는 아마 부회(傅會)한 이야기인 듯싶다.
나의 벗 나걸(羅杰) 중흥(仲興 나걸의 자)은 글 잘하고 괴걸(魁傑)한 선비이다. 그는 역리(易理)에 깊고 평생에 종(鍾 조위(曹魏) 때의 서예가 종요(鍾繇))ㆍ왕(王 왕희지(王羲之))의 서법(書法)을 사랑하여 휴지 한 장이나 편지 한 쪽을 얻게 되면, 언뜻 종이 뒷장에 예학명(瘞鶴銘) 두어 글자를 쓰다가 때로는 종이가 부족하여 점이나 획을 마음껏 쓰지 못할 경우에는 붓을 움직여 종이 밖에까지 뻗어서, 앉은 자리가 모두 검게 하는 까닭에 만일 문밖에 중흥의 나막신 소리가 나면 반드시 먼저 연구(硯具)를 감춘 뒤에 나가서 맞이하고, 중흥이 방에 들어오자 반드시 먼저 좌우(左右)를 살펴서 종이와 붓을 찾아도 눈앞에 뜨이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인사를 교환하게 된다. 그의 진솔함이 이와 같았다.
지난 병신년(1776년) 동짓달에 그는 신 서장(申書狀) 사운(思運)을 따라서 연경(燕京)에 들어갔으니, 그때의 정사(正使)도 곧 금성위(錦城尉)로서 선비에 대한 대우가 높아서, 그에게 아무런 검속을 가하지 않고 부채와 환약을 공급하기도 하려니와, 자주 역관에게 타일러서 그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중흥의 천성이 몹시 진솔하므로 이르는 곳마다 저지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껏 유람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중국의 이름 높은 선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한다. 그가 연경 길을 떠날 때에 내가 송도(松都)까지 전송하였다. 그가 돌아오자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태평차(太平車) 한 대를 만들어서 그의 처자를 태우고는 적상산(赤裳山 전북 무주(茂州)에 있다) 속으로 들어간 지 이제 벌써 4년이 되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내 내가 이 길을 떠날 때에 상자 속에 두었던 친구들의 서찰과 시문을 찾아서 다시 간직하려다가 중흥이 옛날에 쓴 시를 발견하였는데 행초(行草)로 쓴 것이 자못 찬란하였다. 곧 행탁(行槖)에 집어넣었던 것을 이에 기 귀주(奇貴州)에게 내어 보였더니 기는,
“창건하고도 침울하며 그의 격력(格力)은 흡사 노두(老杜 두보를 높인 말)와 같아.”
하고는 크게 칭상(稱賞)하였다. 그의 〈우성(偶成)〉에,
산 사립문 비었는데 옷갓을 다 버리고 / 山扉寥廓棄冠巾
이 몸이 늙어갈수록 한가한 일뿐이라네 /老去漸能幽事親
빈 뜰에 홀로 앉으니 햇빛만 고요코야 / 階除留對日華靜
공중에 지나는 구름 한 조각 또 한 조각 / 空外翻過雲片新
꾀꼬리 어디서 오자 푸른 숲에 울어 있고 / 黃鳥忽來啼綠樹
아롱진 꽃 수없이 청춘을 수놓는다 / 斑花旡數度靑春
어느 것 한 물건이 내 뜻을 새오리요 / 知旡一物違吾意
하느님 길러 주시는 그 은덕을 저버리랴 / 不負皇天長育辰
하늘가의 금서산은 산 밖에 또 산이고 / 天外錦西山復山
요즈음 집을 지니 한가함이 늘상이라 / 近來卜宅不離閒
외로운 봉우리 갠 바위 공중에 비겼구나 / 孤峰晴石依空翠
벼랑 길 깊숙한 꽃 점점이 아롱졌네 / 側徑幽花點細斑
나는 새도 조심스레 비 맞은 채 지나가고 / 鳥避誤疑沾雨過
꿀벌은 너도 나도 꽃향기로 배불리네 / 蜂窺爭占飫香還
흥겨운 그날 그날 청려장을 짚고 일어 / 興長日日扶黎杖
보고 읊고 읊고 보니 객의 시름 사라지네 /一望一吟開旅顔
흑치 장군(백제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전장터서 그 동쪽에 자리 잡아 / 戰經黑齒郡之東
타향살이 몇 해런고 일일마다 다 잘 아네 / 久住殊方事盡通
깊은 산 새벽 구름 골짜기에 잠겨 있고 / 峽曉雲移幽洞翠
시냇가 저녁놀은 옛 성에 붉었구나 / 澗曛日隱古城紅
늦게 일고 일찍 잠도 멋대로 하려니와 / 晩興早寢從他好
짧은 노래 긴 읊음이 그 맛이 무궁하구나 / 短咏長吟不自窮
다만 지체하여 흥취마저 없다 하면 / 若道淹留旡逸興
나그네 이 시름을 어느 때나 씻으리요 / 何時得豁旅愁空
라고 하였고, 또 그의 〈불매(不寐)〉에는,
밤 들어 산 구름은 보암직도 한져이고 / 入夜喜看連峽雲
먼 허공에 붉은 빛이 어지러이 떠오르네 / 遙空漸改赤紛紛
처마를 향해 앉자 새 소리도 고요하곤 / 對簷獨坐息喧雀
베개 괴고 잠깐 졸매 모기들이 모여드네 / 支枕乍眠還聚蚊
산 나무 시냇 모래 부질없이 헤어 볼까 / 峰樹溪沙漫欲數
남기성과 북두성은 저절로 무늬로다 / 南箕北斗自成文
시름이 병이 된들 무엇이 해로우랴 / 未憐愁劇添新病
아름다운 시를 낳아 비단에 수놓은 듯 / 剩得詩如刺繡紋
이라 하였고, 또 〈오침(午枕)〉에는,
낮 졸음에 잠겼더니 날씨가 찌는 듯이 / 昏昏午睡困炎蒸
모든 일에 게을러서 하는 수가 없구나 / 萬事疎慵著不能
책권을 펴 두니 엿보는 건 제비이고 / 未卷牀書窺紫燕
벼루에 먹물 고여 파리를 배불리네 / 常餘硯墨飽靑蠅
길 지나던 손님들이 부질없이 찾아오곤 / 客過小徑虛相問
밭 이랑이 거치니 아내마저 밉구나 / 妻對荒畦久欲憎
맑은 빛이 별안간에 달돋이를 보고서는 / 忽得淸光看月出
붉은 해가 솟는가봐 그릇되이 의심코녀 / 錯疑赫日碾空昇
라고 하였다.
귀주(貴州)는 이에 대하여 비평하되,
“실로 명구(名句)가 많긴 하나 이따금 음률에 맞지 않은 것이 있다.”
하니, 이는 대개 우리나라 음운(音韻)이 중국의 것과 같지 않으므로 가끔 음률에 어긋남이 있었던 것이다.
박충(朴充)과 김이어(金夷魚)는 모두 신라(新羅) 사람으로서 당(唐)에 들어가 빈공(賓貢)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당 장교(張喬 당(唐) 소정 때의 문학가)의 〈송김이어봉사귀본국(送金夷魚奉使歸本國)〉이라는 시(詩)에,
바다를 건너와서 선적(빈공과의 학적(學籍))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고향에 돌아갈 젠 한의(중국의 문물(文物))를 갖추었네 / 還家備漢儀
라 하였고, 장교는 또 〈송박충시어귀해동(送朴充侍御歸海東)〉이라는 시에,
하늘가에 떠나온 지 이제 벌써 스물 네 해 / 天涯離二紀
대궐에 드나들어 세 임금을 섬겼구나 / 闕下歷三朝
라고 하였더니, 중국의 인사들이 나와 처음 만날 때에 반드시 먼저 항해(航海)의 노정과 어느 곳에서 상륙하였는가를 묻기에, 나는 줄곧 육로를 따라 요동으로부터 산해관을 들어 연경에 닿았다고 답하면 그들은 혹시 믿지 않은 이가 있어서,
바다에 건너와서 선적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라는 글귀를 외어 고증(考證)을 삼으니, 이는 우리나라가 저 먼 바다 밖에 있는 유구(琉球)나 구라(毆邏 구라파)와 같은 나라인 줄로 아는 모양인즉 중국 사람들이 가끔 무식하기가 이와 같았다.
이무관(李懋官)이 묵장(墨莊)을 찾았을 때에 반추루(潘秋樓)에게 시를 청했더니, 묵장은 한림서길사(韓林庶吉士) 이정원(李晶元)이니 촉(蜀)의 금주(錦州) 사람이요, 추루는 반정균의 호이다. 반(潘)은,
“내 앞날에 시를 쓸 때 제법 생각을 허비하여 몹시 곤작(困作)이었기 때문에 시가 많지 못함을 한했더니, 요즈음 운철소(惲鐵簫 청(淸)의 문학가)의 한류(寒柳)를 읊은 책자(冊子)를 읽은즉, 왕추사(王秋史 청(淸) 문학가 왕평(王苹). 추사는 자)가 그 뒤에다 네 편의 시를 썼으며, 이 버들은 곧 명(明) 은 상국(殷相國 미상)의 통악원(通樂園) 옛 나무였기에 느낌이 있어서 읊되,
서러운 이내 심사 화공에다 얘기할까 / 愁心都付畫工論
애처로운 긴 가지가 갯마을이 꿈에 드네 / 凄絶長條夢水邨
바다 한 편 묵은 정자 명사들은 흩어지고 / 海右亭荒名士散
하늘가 지는 잎은 옛 동산만 남았다네 / 天涯木落廢園存
반만 남은 지새는 달 봄 두고 이별할 제 / 半規殘月春留別
석양 빛 어제대로 저녁 넋을 거두었네 / 一例斜陽暮斂魂
예순 해를 읽어 오던 곱게 꾸민 그 책들을 / 六十年來看粉本
먹 향기 종이 빛깔 티끌 속에 침침할 뿐 / 墨香牋色又塵昏
그 둘째는,
슬슬 동풍 고루 불어 씻어 간 곳 새로운데 / 看遍東風窣地新
잠긴 가지 나는 가지 모두가 정이 얽혀 / 蘸波吹絮摠情塵
푸른 잎 매미 울던 그곳이 그리웁고 / 可憐碧葉吟蟬地
붉은 난간 말 매던 이 찾을 길 전혀 없네 / 不見紅欄係馬人
낡은 다락 그림자에 늙은 두보 슬퍼했고 / 衰影驛樓傷老杜
시름 어린 이 마음에 털보 그대 추억되오 / 離悰門巷憶髯秦
자주(自注) : 진관사(秦關詞)에 이르기를, “꽃 밑에는 거듭 문이요, 버들 가에는 깊은 마을이다.”라고 하였다.
작화산 저 기슭에 우뚝 섰는 가지 밖에 / 鵲華山麓髡枝外
맑은 호수 가에 앉아 수건 씻는 이만 뵈네 / 只有明湖冷濯巾
그 셋째는,
화가나 시인들이 한꺼번에 사라졌고 / 畫人吟子一時稀
아름드리 푸른 숲도 엉성해진 옛 성일네 / 減盡金城翠十圍
언덕 기슭 누운 가지 저문 눈 속 비껴 섰고 /緣岸臥枝欹暮雪
어둔 빛이 스민 다락 겨울 해를 띠었구나 / 入樓暝色帶冬暉
떨어진 잎 숨 죽인 채 소리도 적거니와 / 靜中黃葉旡多響
아득한 까치마저 두어 점이 날아가네 / 遠處昏鴉數點歸
오히려 진흙 젖은 부질없는 한이 있어 / 猶有沾泥閒恨在
다시금 봄이 온단들 한목 날지나 말아다오(버들꽃을 말한다) / 逢春莫更作團飛
그 넷째는,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초라한 두 나무에 들 서리 자욱하네 / 兩株憔悴野霜濃
전조에 세운 누대 모래톱이 남아 있고 / 前朝臺榭沙痕在
늙을 무렵 변방살이 숲 그늘이 층층코녀 / 晩歲關河樹影重
우연히 선비 위해 푸른 눈을 지어보나 / 偶爲士流靑眼放
흡사 기생처럼 흰 머리로 서로 만나 / 恰如女妓白頭逢
오동꽃 떨어지곤 산 생강이 늙다 한들 / 桐花零落山薑老
왕랑의 아름다운 얼굴 뉘라서 알아볼까나 / 誰識王郞濯濯容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이에서도 한인(漢人)들이 접하는 것마다 감흥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것을 형산(亨山) 제공(諸公)에게 보였더니, 모두 슬픈 빛으로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남약천(南藥泉) 구만(九萬)이 어사(御史)로 순행하다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밤에 본 고을의 선생안(先生案)을 열람하다가,
“제말(諸沫)은 만력(萬曆) 계사(1593년) 정월 아무 날에 도임(到任)하여 4월 아무 날에 파귀(罷歸)하였다.”
라는 말을 발견하고, 그는 우리나라에 제(諸)의 성(姓)을 지닌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기에, 자못 괴이하게 여겨서 윤형성(尹衡聖)에게 물었더니, 윤(尹)은,
“중국 강(江)ㆍ절(浙) 사이에 제씨(諸氏)가 살고 있으니, 제말의 조상은 아마 중국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며, 임진왜란 때에 제말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쳐서 그가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니, 이름이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높았다오.”
라고 답하였다 한다. 이 일은 《약천집(藥泉集 남구만의 시문집)》 중에 실려 있다. 약천과 같은 박식으로도 오히려 백 년 이내인 제말의 사적을 알지 못하였는즉, 그가 미천한 계층의 출신인 줄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비록 공을 세움이 이렇다 했더라도 이름이 그만 묻혔으니, 어찌 그 억울함이 원혼이 되지 않았겠는가.
성주에 살고 있던 정석유(鄭錫儒)가 급제(及第)에 오르기 전에, 본 고을의 자제들과 함께 공령(功令 과체(科體)의 시문(詩文))을 짓느라고 동헌(東軒)에 유숙하니, 그 집 뒤에는 매죽당(梅竹堂)이 있고 당 앞에는 지이헌(支頤軒)이 있었다. 하루는 정(鄭)이 지이헌 속에서 홀로 거니는데 때마침 달이 몹시 밝았다. 별안간,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붉은 도포(道袍) 입은 이가 대밭 속으로부터 나오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는 이 고을 옛 목사(牧使) 제말이다. 나는 본시 고성현(固城縣)에 살던 백성으로 임진의 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쳤으매, 조정(朝廷)에서 특히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제수(除授)하였다. 저 웅해(熊海)ㆍ작영(斫營)ㆍ정진(鼎津) 등지에서 왜적을 맞으면 깨뜨리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당시의 격문(檄文)이 없어지고 역사가 전하지 못하였으니, 그때 정기룡(鄭起龍) 같은 여러 사람은 모두 나의 비장(裨將)이었다.”
하고는, 이내 허리에 찼던 보검(寶劍)을 뽑으면서,
“이 칼로써 일찍이 왜장(倭將) 몇 놈을 베었다.”
한다. 그는 이마 위에 불꽃이 펄펄 이는 듯하고 성기고 뻣뻣한 수염이 움직이면서 시를 읊었다.
머나먼 산 길에선 구름과 함께 예고 / 山長雲共去
높디높은 하늘에는 달과 함께 외롭네 / 天逈月同孤
그는 또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칠원(漆原 경남 창원)에 있으나, 자손이 없어서 이제껏 묵고 있다.”
하고는, 표연히 읍하고 물러가서 다시 대숲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날이 밝은 뒤에 함께 그 일을 이야기한즉, 그들도 평일에 비록 선생안(先生案)에 제말이라는 이가 있었으나, 성(姓)도 쓰여 있지 않았음을 의심하였을 뿐, 그의 공렬(功烈)이 이렇게 갸륵함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제 별안간 알게 되어 감탄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감사(監司) 정익하(鄭益河)가 이 이야기를 듣고, 정석유를 불러 상세히 물은 뒤에 바야흐로 장계(狀啓)를 올려 조정에 알리려 하였으나, 마침 벼슬이 갈렸으므로 여의치 못하고, 다만 칠원에 통첩하여 그의 무덤을 수축하고 묘지기 두 호(戶)를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칠원의 원으로 있던 어사적(魚史迪)이 낮에 졸다가 꿈에 한 관인(官人)이 와서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이 동헌에서 몇 리쯤 되는 아무 마을 아무 좌향(坐向)에 있다. 감사가 마땅히 무덤을 수리하라 명령하실 테니, 그대는 유의할지어다.”
한다. 꿈을 깨자 이상히 여겼더니, 그날 저녁에 통첩이 이르렀으므로 어사적이 드디어 그 무덤을 크게 수리하였다 한다. 제말은 실로 시골뜨기여서 살아 있을 때는 글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이런 갸륵한 공적이 있었다 해도 스스로 나타내지 못하고 본즉, 죽어서 그 억울한 영혼이 맺히어 흩어지지 않음이 이와 같을 뿐더러, 그는 또 능히 시를 읊을 줄 알았다 하였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 평사(辛評事) 경연(慶衍)이 나이 열두 살에 배천(白川)에서 서울로 올라갈 제, 길에서 명(明)의 조사(詔使)를 만났다. 때마침 역놈이 신(辛)이 탔던 말을 빼앗았으므로 그는 사정이 몹시 궁박하였다. 그는 도보로 조사의 점심참에 닿아 하소연하였더니, 조사는 그의 얼굴이 백옥처럼 맑음을 보고 사랑하여, 길가에 서 있는 장승(長丞)을 가리키면서,
“그대 능히 이를 두고 시를 읊는다면 마땅히 말을 주리라.”
하여, 신이 운자(韻字)를 청하니, 조사가 운자를 내어 주었다. 신은 곧 대답하기를,
초 패왕(항적(項籍))의 혼령인 양 천추에 남아 있네 / 楚伯千秋尙有靈
오강을 건널 체면 없어 형체만 남았구나 / 渡江旡面只存形
당년에 한스러운 일은 음릉 길을 잃은 것이 / 當年恨失陰陵道
언제나 길에 서서 앞잡이 노릇 하렵니다 / 長向行人指去程
하매, 조사가 크게 놀라서 탄식하여 칭상하고 문방(文房)의 여러 보물을 주었다 한다. 이 글이 무명씨(無名氏)의 작으로 《명시선(明詩選 명(明) 이반룡(李攀龍) 저)》에 실렸으며, 그는 광해(光海) 때 과거에 올라서 벼슬이 평안도(平安道) 병마(兵馬) 평사에 이르렀을 때에, 서쪽 변새에 일이 있어서 청천강(晴川江)을 아홉 번 건넜으며 이내 관에서 죽었는데, 그의 혼령이 여러 번 나타났다. 그 뒤 수십 년에 그의 벗 아무개가 그를 관서(關西) 도중에서 만났는데, 그는 친구의 자를 부르며 옛 일을 이야기함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벗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자손이 심히 가난한데 유물이 있는 것을 미처 전하지 못했네. 보도(寶刀)와 옥관자 한 쌍이 우리집 들보 위에 얹혀 있어도 집 권속들이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니 그대는 부디 이 말을 전해 주소. 이 두 가지 물건을 판다면 많은 값을 받을 것이네.”
하매, 그의 벗은 크게 이상히 여겨 돌아오자 곧 그 자손에게 이야기하여 함께 그 집을 들춰서, 마침내 보도와 옥관자를 발견하였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길 위에다가 매 10리 5리 마다 나무로 장군과 같이 깎은 등선을 세우고 지명과 이정을 기록하여 두는데, 이를 보통 ‘장승’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중국의 장정(長亭)ㆍ단정(短亭)과 같으므로, 우리나라 시민들은 흔히들 장정을 빌려 쓰면서 혹은 중국의 이정표도 우리나라 장승과 같은 줄만 알고, 또는 장정을 정장(亭長)으로 잘못 알기도 하니 심히 고루한 일이다. 내가 중국에 들어와 보니, 길에는 장정표를 세우고 아무 땅이라 쓰고는, 그 좌우에는 단정표를 세우며, 동으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요, 서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라고 써 있었다. 이제 열하에 오는데 장정 밖에는 장정에 흔히들 신(汛) 자를 썼는데 무엇을 말한 것인지를 모르겠다.
신장(辛丈) 돈복(敦復)씨가 일찍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중종(中宗) 때 남주(南趎 조선 때 학자. 자는 계응(季應))가 열아홉 살에 급제(及第)하여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천에 올랐으며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일이 많았다. 매일 아침 글방 선생에게 글을 배우는데 결석할 때가 많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가만히 그의 뒤를 밟은즉, 도중에 지레 어떤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정사(精舍)가 있는데 주인의 행동이 맑고 훤하여 속기(俗氣)가 없었다. 주가 그의 앞에 절하고 나아가서 글을 강론받고 반드시 해가 저문 뒤에야 돌아오곤 하였다. 집 사람들이 물으면 문득 괴변으로 대답하더니, 그 뒤 신선의 수련술(修鍊術)을 행하였고 그가 급제하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곡성현(谷城縣)에 귀양갔고, 이내 그곳에서 집을 정하고 살았다. 하루는 종을 시켜 편지를 갖고 지리산(智異山)청학동(靑鶴洞)에 들여보냈는데, 오채가 영롱한 집이 있고 극히 정려(精麗)하며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하나는 운관(雲冠)과 자의(紫衣)요, 또 하나는 늙은 중이었다. 둘이 종일토록 바둑만 두기에 그 종은 하루를 묵고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었다. 종이 애초에 2월에 떠나 산에 들어갈 제는 초목이 바야흐로 무성하던 것이, 산을 나올 때에는 들판에서 익은 벼를 거두는 것을 보고 괴이히 여겨 물으니 곧 9월 초순이다. 남주가 죽을 때 나이가 30세였다. 널을 들어보니 유달리 가벼운지라, 집안 사람들이 관을 열고 본즉 빈 것이었고 그 안에 시가 쓰였는데,
창해에 떠난 배는 찾을 곳이 전혀 없고 / 滄海難尋舟去跡
청산에 나는 학은 흔적조차 뵈지 않네 / 靑山不見鶴飛痕
라 하였다. 그 마을 앞에 김을 매던 농부가 공중에서 흘러내리는 음악 소리를 듣고 쳐다본즉, 남주가 말을 타고 둥실 떠서 흰 구름 사이로 올랐다 한다. 지금 충주(忠州)에 살고 있는 진사(進士) 남대유(南大有)가 그의 방손(傍孫)이라 한다.”
한유(韓愈)의 시에도,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 木石生妖變
하였지마는, 당(唐)의 말년에 소주(蘇州)에 살고 있던 중 의사(義師)는 나무로 새긴 부처를 만나면, 문득 한 군데 모아서 불살라 버렸다 한다. 우리나라 양주(楊州)회암사(檜巖寺)에 옛날부터 나무로 만든 큰 부처가 있어서 극히 영검스러우므로, 원근 사람들이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숭배해서 향화(香火)가 심히 성하였다. 나옹(懶翁 이성계(李成桂)의 스승으로 있던 중)이 처음 주지(住持)가 되어 이 절에 도임할 제, 뭇 중들에게 명하여 그 부처를 끌어 내어 불사르게 하였다. 모두들 놀라고 두려워하여 굳이 간했으나, 나옹은 듣지 않고 중 백여 명을 시켜 큰 동아줄로써 동여매라 하고 밀쳐당겼으나 털끝도 까딱하지 않았다. 나옹이 노하여 스스로 한 쪽 손으로 밀어 곧 넘어뜨리고 절 밖에 이끌어 내어 장작을 쌓고 태우니, 더러운 냄새가 견디지 못할 만큼 풍겼다. 대개 큰 뱀이 부처 뱃속에 서리어 있던 것으로 그런 뒤에는 오래도록 재환이 없었다 한다. 대체로 나무가 오랫동안 묵으면 접신(接神)이 되므로 허물어진 절간의 나무 부처에 많이들 이상한 요물이 붙는 법이니, 곧,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오늘 저 반선(班禪)이 우리에게 준 부처는 길이가 거의 한 자나 될뿐더러, 아마 나무로 새긴 데다 금을 입힌 것인즉 이에는 어찌 요물이 붙지 않았을 줄 알리요. 창졸간에 이 물건을 받긴 했으나, 일행의 상하가 모두 꿀 단지에 손 빠뜨린 듯이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다. 내가 밤에,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잘 구처하겠습니까.”
하고 정사께 물었더니, 정사는,
“벌써 수역(首譯)을 시켜 작은 궤짝을 만들어라 하였네.”
한다. 나는,
“잘 하셨소이다.”
하였더니 정사는,
“뭐가 잘했단 말인가.”
하기에 나는,
“이는 강에 띄우고자 하는 의미뿐이겠죠.”
하고 대답하였더니, 정사가 웃기에 나도 웃었다. 대저 이 부처를 길가 사찰에다 내어버린다면 중국의 노염을 입을까 두렵고 또 이를 이끌고 입국한다면 마땅히 물의(物議)를 일으킬 테니, 저들과 우리나라의 국경에서 순류(順流)에 띄워 바다에 추방하는 수밖에 없고 보니, 띄울 곳은 압록강(鴨綠江)이 가장 좋을 것이다.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은 평생에 호사로이 지냈다. 나이가 젊을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에게 나아갔더니, 평성이 때마침 수상(首相)이 되어서 별장 깊숙한 곳에 앉아 시비(侍婢) 수십 명을 시켜 호음을 인도하여 들어오게 하니, 호음이 겹문을 지나 들어오는데 곳곳이 아롱진 누각이요, 구비구비 붉은 난간이다. 평성은 못 위 반송(盤松) 그늘 밑에 앉았는데 좌우에는 시비들이 모두 비단 치마를 질질 끌고 번갈아가면서 진귀한 음식상을 올리고, 또 기생 몇 패가 풍악을 하면서 날이 다하도록 기쁜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끝날 무렵에 호음이 공사(公事)에 대한 결재를 청했으나 평성은,
“이 늙은 사람은 애초에 무인(武人)이라, 다행히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를 만나 몸이 이 자리에 이르렀으니, 다만 스스로 마음을 기쁘게 하여 성세(盛世)의 은혜를 보답할 따름이므로 그대가 가진 공사는 돌아가서 본조(本曹)의 판서(判書)에게 물어보게.”
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음은 망연히 어쩔 줄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일을 평생에 연모하였으므로 늙을 때까지 호사를 계속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6세조(世祖) 금계군(錦溪君)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실려 있다. 그리고 세속에서 전하는 말에,
“호음이 평성의 이 일을 연모하여 호백구(狐白裘)를 훔치는 수단에 익숙하니, 그가 일찍이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되었을 때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정양사(正陽寺)에서 묵는데 순금 부처를 훔쳐서 드디어 크게 치부(致富)하더니, 나이 늙으매 그 일을 심히 참회하여,
정양사 깊은 곳 향불 태던 그날 밤에 / 正陽寺裏燒香夜
40년 그릇된 일을 거원인 양 깨우쳤네 /蘧瑗方知四十非
라는 시를 읊었다.”
한다. 내 일찍이 정양사에 놀 때 과연 바람벽 위에 이 시가 쓰여 있음을 보았다. 이제 삼사(三使)들의 선사받은 금부처는 모두 셋인즉 수천 냥의 돈을 얻기에는 어렵지 않을 것이며, 만일 호음으로 하여금 이 경우를 만나게 하였으면 반드시 저 정양사에서만 잘못을 깨달았을 뿐 아니리라. 내 부사와 이 이야기를 하고 서로 크게 한바탕 웃었다. 나는 또,
“이제 이 불상이 불행히도 나무 몸뚱이인지라 멀찍이 물리쳐 버렸지만, 만일 순금으로 된 몸이었더라면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논(論)도 아마 좀 생각할 점이 있겠지요.”
하고는, 서로들 허리를 잡았다.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에 이르기를,
“말 머리엔 굴레를 씌우고 소 코엔 코뚜레 꿴다.”
하였으니, 소의 코 꿰는 일은 옛날부터 그러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소는 난 지 겨우 7, 8삭이 되면 벌써 코를 꿴다. 왕형공(王荊公)의 시에,
미련한 저 소에다 코를 꿰지 않을 양이면 / 牛若不穿鼻
맷돌 방아 찧으려도 곧잘 되지 않으리라 / 豈肯推入磨
하였으니, 맷돌 방아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수레 끌기나 밭 갈기야 어떠하겠는가. 이제 책문(柵門)에 들어온 뒤 열하에 이르기까지 호(戶)마다 기르는 소가 7ㆍ8두(頭) 이하가 없고, 혹은 3ㆍ40두에 이른다. 그런데 밭을 가나 수레를 이끄나 모두 뿔을 얽매어서 부리고, 하나도 코를 꿴 놈은 없었으며, 소는 모두 유달리 크되 집집마다 방목하였으며, 작은 아이 하나가 수십 마리를 몰 수 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역시 뿔도 얽매지 않았으니, 중국 사람들의 소치는 기술이 비록 우리에 미칠 바 아니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는 것은 역시 고금의 다름이 있는가 싶다. 그리고 진(晉) 두예(杜預 진(晉)의 학자. 자는 원개(元凱))의 상소(上疏) 중에도,
“전목(典牧)의 종우(種牛)가 4만 5천여 두나 있으나, 수레도 이끌지 않을뿐더러 늙을 때까지도 코를 꿰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를 보아도 중국서도 옛날에는 부리는 소는 모두 코를 꿰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강녀묘(姜女廟)의 주련(柱聯)은 문 승상(文承相)이 쓴 것이 가장 비장(悲壯)하다. 그 글에,
강녀가 죽지 않았고나 천 년 묵은 조각돌이 정렬하고 / 姜女未亡也千年片石猶貞
진황은 어디로 갔는고 만리성엔 원망만 쌓였구녀 / 秦皇安在哉萬里長城築怨
라 하였는데, 글씨도 몹시 기굴(奇崛)하고 과친왕(果親王) 윤례(允禮)가 쓴 시는 역시 전려(典麗)하다.
푸른 전나무 잎은 고생살이 나머지요 / 栢葉從來常自苦
매화꽃은 곱잖아도 향기로 한몫 보네 / 梅花終古不爲姸
그 글씨는 신화(神化)한 듯싶고, 또 건륭(乾隆) 을해년(1755년) 동짓달에 황삼자(皇三子) 등금거사(藤琴居士)가 쓴 시는 또한 산한(酸寒)하다.
늙은 솔 허물어진 담장 옛 사당이 보이고녀 / 松老頹垣見古祠
임 위해 죽은 강녀 그 일이 슬프구나 / 崩城姜女事堪悲
집 방춧돌 바라다가 기절을 이루고는 / 藁砧望斷成奇節
환패만 남았으니 옛 자태를 보는 듯이 / 環佩空餘識舊姿
돌에 뿌린 눈물 자취 그날의 한이러냐 / 石洒淚痕當日恨
예는 물 구슬퍼서 이내 생각 자아내네 / 水流鳴咽後人思
정자 기슭 옷을 털매 쓸쓸하기 짝이 없어 / 振衣亭畔凄涼甚
임의 그 어린 눈동자 이제 더욱 그리워라 / 猶憶凝眸睩曼滋
그 글씨는 더욱 민묘(敏妙)하다. 그리고 방류요수(芳流遼水)는 건륭황제(乾隆皇帝)의 어필이요, 경절처풍(勁節凄風)은 과친왕의 글씨였고 ‘망부석(望夫石)’이란 세 글자는 태원(太原) 백휘(白輝)가 쓴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글자로부터 말 배우기로 들어가고 우리나라 사람은 말로부터 글자 배우기로 옮겨가므로 화(華)ㆍ이(彝)의 구별이 이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로 인하여 글자를 배운다면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따로 되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천(天) 자를 읽되 ‘한날천(漢捺天)’이라고 한다면, 이는 글자 밖에 다시 한 겹 풀이하기 어려운 언문(諺文)이 있게 된다. 설부(說部) 중에 《계림유사(鷄林類事)》가 실렸는데, 천(天)을 가른 한날(漢捺)이라 하였다. 작은 아이들이 애당초에 ‘한날(漢捺)’이란 무슨 말인 줄을 알지 못한즉, 더군다나 천(天)을 알 수 있겠는가. 정현(鄭玄)의 집 여종이 모두 《시경(詩經)》으로써 문답할 수 있었다 하여, 천 년 동안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돌고 있지마는, 그 실제에 있어서는 중국 사람들은 부인이나 어린이도 모두 문자(文字)로 말을 하므로, 비록 눈으로는 정(丁) 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입으로는 봉(鳳)을 토(吐)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은 모두 그들의 입에 익은 항용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의 어린이가 시내를 격해서 어머니를 부를 때,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외다 / 水深渡不得
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크게 놀라서,
“중국엔 다섯 살 먹은 아이가 입을 열자 시가 이룩되데그려.”
한다. 이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말이 이러함이요, 무슨 뜻이 있어서 글귀를 이루려는 것은 아니다. 노가재(老稼齋)가 일찍이 천산(千山)에 놀러 갔다가 어떤 술 파는 촌 할미를 보고서,
“길이 궁벽하고 사람이 드문 이곳에 누가 술을 사 마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꽃 향내 풍기니 나비 옴도 저절로 / 花香蝶自來
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말이 아니되 사의(辭意)가 명창(明暢)하여 저절로 운치 있는 말이 되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글자로 인하여 말 배우기로 들어간 묘증(妙證)이다. 우리 집 소비(小婢)가 사람됨이 지극히 혼미(昏迷)하여, 어느 날 떡을 얻어 먹게 되었을 때, 엿을 얻어 가지고는 기뻐서 치하하는 말로,
하니, 이는 지패(紙牌 노름의 일종)에 유행되는 말이다. 그가 애초부터 파촉이나 관중을 아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은즉, 그 말은 저절로 맞아버린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중국말이 알기가 어렵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정씨(鄭氏)의 여종이 천고에 유식하기로 이름 높지 못한 것을 알았노라.
《청비록(淸脾錄)》 이덕무(李德懋)의 저 에 이르기를,
“삼한(三韓) 사람으로서 중국을 골고루 구경한 사람으로는 이익재(李益齋)이름은 제현(齊賢)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의 유력(遊歷)한 것이 시(詩)에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정형(井陘)ㆍ예양교(豫讓橋)ㆍ황하(黃河)ㆍ촉도(蜀道)ㆍ아미(峨眉)ㆍ공명사당(孔明祠堂)ㆍ함곡관(函谷關)ㆍ민지(澠池)ㆍ이릉(二陵)ㆍ맹진(孟津)ㆍ비간묘(比干墓)ㆍ금산사(金山寺)ㆍ초산(焦山)ㆍ다경루(多景樓)ㆍ고소대(姑蘇臺)ㆍ도량산(道場山)ㆍ호구사(虎口寺)ㆍ표모묘(漂母墓)ㆍ탁군(涿郡)ㆍ백구(白溝)ㆍ업성(鄴城)ㆍ담회(覃懷)ㆍ왕상비(王祥碑)ㆍ효릉(崤陵)ㆍ장안(長安)ㆍ정장공묘(鄭莊公墓)ㆍ허문정공묘(許文貞公墓)ㆍ관용방묘(關龍逄墓)ㆍ망사대(望思臺)ㆍ무측천릉(武則天陵)ㆍ숙종릉(肅宗陵)ㆍ빈주(邠州)ㆍ경주(涇州)ㆍ보타굴(寶陀窟)ㆍ월지사자헌마(月支使者獻馬) 등이 있으니, 그 발자취가 이른 곳이 모두 웅장한 곳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미쳐 보지 못한 곳이었고, 그 시도 마땅히 동방 2천 년 이래의 명가(名家)가 될 것이다. 그 화려하고 곱고 밝고 맑음이, 삼한의 궁벽하고 고루한 누습(陋習)을 활짝 벗어 버렸으나, 이즈음 사람들은 딱하게도 익재가 곧 이제현임을 알지 못하고, 고군협(顧君俠 미상)이 《원백가시선(元百家詩選)》을 엮을 때도 고려 사람의 시는 한 수도 뽑히지 않았으며, 당시의 목암(牧菴)요공(姚公)과 염자정(閻子靜 원(元) 문학가 염복(閻復). 자정은 자)ㆍ장양호(張養浩 원(元) 문학가. 자는 희맹(希孟)) 등도 모두 익재의 시를 칭찬하였으나, 역시 한 수도 뽑힌 것이 없으니 이는 실로 괴이한 일이다.”
고 운운하였다. 익재의 무덤은 금천(金川) 지금리(只錦里) 도리촌(桃李村 개성(開城))에 있고, 그 밑에는 곧 익재의 구택(舊宅)이요, 구택에다 서원(書院)을 세워서 향례를 치르게 되었다. 나의 연암별업(燕巖別業)이 그 서원에서 십 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나도 일찍이 한두 번 서원에 가서 그 유집(遺集 《익재난고(益齋亂藁)》)을 읽고서, 더욱이 《청비록(淸脾錄)》의 논평한 말이 철론(鐵論)임을 믿었다. 그의 〈사귀(思歸)〉에는,
늦은 가을 청신(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 숲은 비 속에 잠겨 있고 / 窮秋雨鎖靑神樹
해 저물녘 백제성(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엔 구름이 비꼈구나 / 落日雲橫白帝城
하였고, 〈이릉조발(二陵早發)〉에는,
주사(이이(李耳)의 벼슬 이름)의 약 솥에는 구름만 감돌고 / 雲迷柱史燒丹竈
문왕(주(周) 문왕) 비 피했던 능엔 눈마저 덮여 있네 / 雪壓文王避雨陵
하였고, 〈주행아미(舟行峨眉)〉에는
비에 쫓긴 송아지는 어점으로 돌아오고 / 雨催寒犢歸漁店
물결에 밀린 해오라기 손님 배를 따르더라 / 波送輕鷗近客舟
하였고, 〈다경루(多景樓)〉에는,
밤들어 풍경 울 제 포구에 밀물 들고 / 風鐸夜喧潮入浦
도롱이채 우뚝 서니 비 새는 그 다락을 / 煙簑暝立雨侵樓
하였고, 〈함곡관(函谷關)〉에는,
흙 주머니 그 입을랑 황하 북에 묶어두고 / 土囊約住黃河北
땅덩어리 둥글둥글 백일 서편 둘렀구나 / 地軸句連白日西
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이 중국의 고사를 쓸 때, 멋대로 차용하기는 했으나,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서 체험한 이는, 오직 익재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내 이제, 한 번 고북구(古北口)를 나오자 스스로 옛사람보다 낫다고 생각되었으나, 다만 익재에 비한다면 참으로 모자라는 것이 많음을 깨달았다.
《감구집(感舊集 왕사진(王士稹) 저)》에 청음 선생(淸陰先生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시가 실려 있었다. 대개 왕이상(王貽上 왕사진. 이상은 호)의 전처(前妻) 추평(鄒平) 장씨(張氏)는 강남(江南) 진강부(鎭江府)추관(推官) 만종(萬鍾)의 딸이요, 도찰원(都察院)좌도어사(左都御史) 충정공(忠定公) 연등(延登)의 손녀이다. 숭정(崇禎) 말년에 선생이 뱃길로 중국을 향하매, 길이 제남(濟南)을 거치게 되었다. 그때 장충정(張忠定)이 한 번 보고 곧 기뻐하여 엿새를 만류하고, 선생의 ‘조천록(朝天錄)’ 1권에 서(序)를 썼다. 이상이 선생을 익숙히 알게 된 것은 대개 그 처가를 통해서이다. 그가 선생의 시를 초록하여 실은 것은 다음과 같다.
늦은 가을 바닷가엔 기러기 처음 오고 / 三秋海岸初賓雁
깊은 밤 천문에는 객성 하나 번뜩인다 / 五夜天文一客星
폭군의 모진 손에 돌다리는 끊어졌고 / 橋石已從秦帝斷
은하성 높은 배에 사신 오길 허락했네 / 星槎猶許漢臣通
조각달 오경 깊어 수역의 성 머리에 / 五更殘月水城頭
외로이 역사 읊어 배 닿은 이 누구런고 / 咏史何人獨艤舟
동쪽 바다 향해 서서 돌아갈 길 찾지 않고 / 不向東溟覓歸路
북두성 의지하여 신주(중국의 별칭)를 바라보네 / 還依北斗望神州
남쪽 장수 북쪽 손님 모래톱에 모여 들어 / 南商北客簇沙頭
그림 새 푸른 주렴 몇 군데나 배 떴던고 / 畫鷁靑簾幾處舟
죽지사 함께 불러 팔 겨르고 지나가니 / 齊唱竹枝聯袂過
성 속에 연월 가득 이곳도 양주(양자강 운화가 통하는 곳)인 듯 / 滿城煙月似揚州
이들은 모두 이상이 이른바, 맑고 완순하여 가히 읊을 만하다는 작품이다. 이상은 당시 해내의 시종(詩宗)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은 그의 척자(隻字)ㆍ편언(片言)에 대하여 다반(茶飯)처럼 입에서 떠나지 못하므로, 청음의 성명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천고 대절(大節)은 아는 이가 없었다. 학지정(郝志亭) 성(成)이 김숙도(金叔度 김상헌. 숙도는 자)의 몇 편 가작(佳作)을 들었으면 하고 청하기에, 나는 답하기를,
“저는 애초부터 그의 시를 외는 것이 없고, 다만 이번 걸음에 청음 선생의 6대손(代孫) 이도(履度)의 별장(別章)이 있습니다.”
한즉, 지정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 역시 기이한 일이군요.”
하기에, 나는 그 시를 내어 보였다. 지정이 두세 번 읊더니 그 뒤에 이 일을 그의 초록한 《용재소사(榕齋小史)》중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화산(華山 김이도의 호) 김이도(金履度)는 조선 사신 김청음 상헌의 6세손인데, 그의 〈봉별연암조경(奉別燕巖朝京)〉 원고(原稿)에는 ‘부연(赴燕)’으로 된 것을 지정이 ‘조경(朝京)’이라고 고쳤다. 이란 시에,
넓디넓은 저 연산은 사면에 벌여 있고 / 四面燕山濶
높다란 이 장성은 만 리를 뻗쳤구나 / 萬里秦城高
그 중에 말 달리며 가시는 임이시여 / 中有垂鞭者
백발이 성성하시니 먼 길에 수고할사 / 白髮行邁勞
그 둘째다.
경개하신 담헌(홍대용(洪大容)의 호)이요 / 耿介湛軒子
척당할사 연암님을 / 倜儻燕巖叟
사해가 넓건마는 그의 성명 다 알리라 / 海內知姓名
앞 가고 뒤따르니 높은 바람 한 가지라 / 高風屬前後
하고, 그 뒤를 이어서, ‘건륭(乾隆) 경자년 5월 23일에 화산 김이도는 쓰다.’라고 하였다. 그의 자(字)는 계근(季謹)이요, 글씨는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으니 동국(東國)의 문장 기사(奇士)이다. 그의 벗 박연암(朴燕巖)ㆍ한석호(韓錫祜)와 함께 시주로써 막역의 친구를 삼았더니, 이해 8월에 박연암이 공사(貢使)를 따라 북경에 와서 나와 함께 만나 서로 기뻐하였다. 이에 나는 화산의 증행시(贈行詩) 석 장을 얻어 읽은즉, 그는 사모(四牡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 황화(皇華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의 끼친 뜻을 깊이 지니었다. 나는 그 중 두 마디를 뽑아서 기록하였다.” 원시(原詩)에는, ‘수방지성명(殊方知姓名)’과 ‘고풍계전후(高風繼前後)’라 했던 것을 지정이 수방(殊方)을 ‘사해(四海)’로, 계(繼)를 ‘속(屬)’으로 고쳤다.
지정은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암의 족손(族孫) 남수(南壽)의 자는 산여(山如)요, 호는 금성(錦城)이니, 그는 얼굴이 아름답기가 관옥(冠玉 옥으로 꾸민 갓)과 같다 한다. 그의 〈증행(贈行)〉에,
머리가 세었다고 임은 슬퍼하지 마오 / 莫云頭已白
이 하늘 이 땅이란 잠깐인 듯 가 없어라 / 天地忽無窮
요동성 넓은 들에 필마로 돌아 들면 / 匹馬遼東野
한 번 채찍 휘두르매 만리의 바람 부네 / 一鞭萬里風
라고 하였다.” 금성(錦城)은 우리 관형이므로 남수가 금성 박남수 산여라고 썼던 것을 지정은 그릇 호인줄 알았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나라의 고사(高士) 이재성(李在誠) 중존(仲存 이재성의 자)의 호는 지계(芝溪)인데, 연암의 부제(婦弟)이다. 그의 〈증행(贈行)〉에는,
압록강 두른 물은 띠처럼 되어 있고 / 鴨綠衣帶水
만 리라 저 장성은 묵어서 가올 것을 원고(原稿)에는 ‘연성(燕城)’이라 되었던 것을 지정이 ‘장성(長城)’이라 고쳤다. / 長城宿舂之
머나먼 이 길 떠나 오가는 나그네여 원고에는 ‘고래경유객(古來經遊客)’이라 되어 있었다. / 悠悠遠行客
역력히 알고파라 묻노니 누구누구 / 歷歷知是誰
라고 하였고, 또,
열 해나 지나도록 바위 틈에 숨은 선비 / 十載巖棲客
새벽에 행장 묶어 먼 길을 떠난다니 / 晨裝告遠遊
반생을 글만 읽고 본 적이 없던 것을 / 半生方冊裏
이제야 구경하니 제왕의 거룩한 고을 / 今日帝王州
이라 하였고, 또,
뽕나무 활 다북 살은 일찍 품은 뜻이언만 / 宿昔桑蓬志
사슴 떼와 함께 놀아 불우한 지 몇 해런고 / 沈冥鹿豕群
오히려 두 눈 있으니 이 구경이 재미로서 / 猶被雙眼役
헝클어진 백발 시름 잊어나 보올까나 / 可忘白頭紛
라고 하였고, 또,
여름 비 끓는 곳에 강물은 부풀고 / 雨熱關河漲
구름은 찌는 듯이 계문 숲이 낮게 뵈네 / 雲蒸薊樹低
청컨대 임이시여 먼 길에 조심하오 / 請君愼行李
임은 떠나 가시거다 부디 평안 하옵소서 원고에는 ‘면전신행역(勉旃愼行役)’이라 되어 있다. / 去矣莫棲棲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한석호(韓錫祜) 혜당(惠堂 한석호의 호)과 양상회(梁尙晦) 백후(伯厚 양상회의 자)와 이행작(李行綽) 유재(裕齋 이행작의 자)는 모두 개성(開城)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개성은 여씨(麗氏)의 옛 도읍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송경(松京)이라 부른다. 이는 옛 개주(開州)이며 옛 이름은 촉막군(蜀莫郡)이다. 이곳에는 신숭(神嵩 개성(開城)의 진산(鎭山))ㆍ자하(紫霞 개성의 동명(洞名))의 좋은 경치가 있고, 문인(文人)과 운사(韻士)들은 오히려 을지생(乙支生)ㆍ정인지(鄭麟趾)가 끼친 풍채를 지녔다. 이는 우리 성조(聖朝)의 문교(文敎)가 널리 먼 나라에까지 미친 보람이었다. 혜당의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에,
우연히 방향 몰라 이 몸을 붙인 곳이 / 偶爾無方住著身
한 하늘 아래건만 바다 동쪽 가이라네 / 一天之下海東濱
가까운 곳 먼 지역을 평등으로 본다 하면 / 如將遠邇看平等
문밖으로 안 나와도 만리 사람 되오리라 / 不出門時萬里人
새벽 달 뫼에 걸려 시냇집 창이 밝고 / 曉月依山磵戶明
목련화 나무 밑에 남은 정서 이끌리네 / 木蓮花下藹餘情
중국의 아름다움 꾀꼬리는 모르고서 / 黃鸝不識中州好
이별이 서러 우냐 소리소리 울더라 / 啼作陽關惜別聲
푸른 하늘 들을 덮어 사면을 둘렀는데 / 靑天蓋野四周環
동남쪽 솟은 뫼는 한점 두점 사라지네 / 漸失東南點點山
요양에 들어서는 무엇이 보이던고 / 行到遼陽何所見
햇바퀴 빙글 굴러 고국 산천 가리키네 / 日輪回指海雲間
만리 배에 몸을 싣고 바람에 저어가서 / 常願風漂萬里舟
천하 명루 곳곳마다 두루 올라 보고져라
/ 遍登天下有名樓
유유히 필마로써 금대 길 달려 본들 / 悠悠匹馬金臺路
가을 바다 외로운 돛에 설렁임과 어떻더니 / 何似孤帆碧海秋
장성이 무너지자 나라도 그렇건만 / 長城自壞國隨之
도시와 인물이야 갑자기 변탄말가 / 朝市人煙遂不移
공자문 사당에는 돌북이 상기 있어 / 夫子廟庭周石鼓
인간 세상 몇 번이나 석양을 겪었던고 / 人間幾度夕陽時
라고 하였고, 또 그의 〈춘원세우(春院細雨)〉에는,
이슬이 방울짐을 오동잎이 먼저 듣고 / 露重梧先聞
우레 소리 가벼우니 새들도 놀라지 않네 / 雷輕鳥不疑
고운 풀 깊어가니 꿈이런가 의심하고 / 嫩草深疑夢
짙어가는 꽃봉오리 흡사히 어린 듯이 / 濃花恰欲痴
검정 개미 섬돌 위에 미끄럼을 타는 듯이 / 玄蟻緣階滑
파랑 벌레 잎을 안아 그 재주 위태롭네 / 靑蟲抱葉危
물 속에 솟아 선 건 쌍무지개 멀리 뵈고 / 水立雙虹遠
연기를 뚫고 가니 외론 새 더디고나 / 煙穿獨鳥遲
시름에 잠긴 채로 홀로 앉은 나그네 / 悄悄孤客坐
그리운 님 생각에 깊이깊이 잠겼구나 / 湛湛美人思
라고 하였고, 백후(伯厚)의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에는,
눈이 닿도록 바라보니 갈 길이 실이라네 / 極目山河路一絲
마음이 얽혔다면 따라갈 수 없단말가 / 心如相約未相隨
떠나려는 이 자리에 한잔 술 거듭 권하니 / 離筵更進一杯酒
때마침 석양이라 양류만 그저 청청 / 楊柳靑靑斜日時
이라 하였고, 이행작(李行綽)의 〈송별(送別)〉에는,
바닷가에 떠나는 임은 채찍 하나 믿을 뿐 / 濱海行人信一鞭
먼 하늘 유월 철에 빗줄기 길이 달려 / 遼天六月雨長懸
노정을 헤어보니 이에서 삼천 리를 / 計程從此三千里
묻노니 어느 때에 연경에 이를꼬 / 借問幾時可到燕
라”
하였다.
중국 사람들의 기록이 대체로 이와 같다. 이는 비단 원시(原詩)를 많이 점화(點化)하였을뿐더러, 그가 이른바 을지생(乙支生)과 정인지(鄭麟趾)의 끼친 바람이라는 말은 더욱 허리를 잡을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을지생이란 사람이 없은즉, 이는 아마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이름일 것이다. 을(乙)ㆍ정(鄭)은 실로 수천 년이나 멀리 떨어진 인물인데, 이제 그들을 나란히 열거하였으니, 이는 아마 을(乙)은 《수서(隋書)》에 나타났고, 정(鄭)은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한 까닭으로 특히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의 기록 중에 계근(季謹)이 한석호(韓錫祜)와 더불어 술로써 막역한 벗이라 하였으니, 가장 가소로운 일이다. 이 둘은 비단 서로 얼굴을 모를 뿐 아니라, 비록 같은 때에 살고 있었으나, 이름자도 통하지 못하였은즉 어찌 시주로써 막역한 벗이 되었겠는가. 더군다나 둘 다 평생에 술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를 어찌할꼬. 명일 내 별안간 길을 떠나게 되었기에, 그 그릇됨을 지적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불(李紱 청 문학가. 자는 거래(巨來))의 《목당집(穆堂集)》 중 〈경인원조조조시(庚寅元朝早朝詩)〉에,
조선 사람 멀리 천자국에 통래한 지 오래되니 / 朝鮮內屬來王久
의관이 속될망정 괴이할 것 무엇 있나 / 肯怪衣冠太俗生
사모 쓰며 관복 입고 봄 들어서 공 바치니 / 紗帽版袍春入貢
바닷가 해돋이에 태평시절 누리고녀 / 海隅日出最昇平
하였으니, 아침 날 산장(山莊) 밖에 천관(千官)들의 퇴근하는 모습을 구경한즉, 붉은 벙거지에 마제수(馬蹄袖)를 입은 차림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기 짝이 없음에 비하여, 우리나라 사신들의 의관이야말로 신선처럼 빛이 찬란하였다. 그러나 그 거리에 노는 아이들까지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서 우리를 도리어 연극하는 배우 같다고 하니, 아아, 서글프다.
이익재(李益齋)의 자는 중사(仲思)요, 또 하나의 호는 역옹(櫟翁)이며, 관(貫)은 경주(慶州)이고, 나이 15세에 급제에 올랐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의 수도에 머물 때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동으로 돌아올 의사가 없어서 익재를 불러 부중(府中)에 두고 중국의 명류(名流) 조자앙(趙子昻 원(元)의 문학가,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자앙은 자)ㆍ원복초(元復初 원의 문학가 원명선(元明善). 복초는 자) 등과 함께 창수하였으며, 그는 또 서촉(西蜀)에까지 사신으로 간 적도 있거니와, 강남(江南)에도 강향(降香)하여 이르는 곳마다 제영(題詠)한 작품이 남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그가 동으로 돌아오자, 다섯 임금을 섬겨 네 번이나 재상이 되었다. 충선왕이 고자질에 얽혀서 토번(吐蕃)에 귀양살이 갔을 때, 만 리를 달려가서 위문하되 충분(忠憤)의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 뒤에 김해후(金海侯)에 봉했더니 나이 81세에 졸하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시는 화려하고 곱고도 밝고 맑아서 우리나라 사람의 궁벽하고 고루한 기습에서 쾌히 탈피하였다. 그의 〈노상(路上)〉에,
말 위에 끄덕끄덕 촉도난을 읊으면서 / 馬上行吟蜀道難
다시금 오늘 아침 진관(감숙성에 있는 관문(關門))으로 들어갈 제 / 今朝始復入秦關
푸른 구름 저문 날에 어부수(감숙성에 있는 수명) 막혀 있고 / 碧雲暮隔魚鳧水
붉은 나무 아침 숲은 조서산(감숙성에 있는 산명)이 여기라네 / 紅樹朝連鳥鼠山
문자는 남아 있어 천고 한을 더하였고 / 文字賸添千古恨
명리에 지친 몸은 언제나 한가할꼬 / 利名誰博一身閒
나의 생각 잠긴 곳은 안화사 옛 길에서 / 令人最憶安和路
죽장 망혜 짚고 신고 오가던 그 일뿐을 / 竹杖芒鞋自往還
하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연암(燕巖) 뒷산 기슭에서 한 재 마루턱을 격하여 안화사(安和寺)의 옛 터가 있으므로 익재의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가 죽장 망혜로 이 사이에 서성이던 것을 연상하기도 하려니와 저 촉도(蜀道)ㆍ진관(秦關)ㆍ어부(魚鳧)ㆍ조서(鳥鼠)의 이야기를 듣고서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은 듯이 멍하였거든, 하물며 나의 이번 걸음은 또 익재가 이르지 못한 곳일까보냐.
송(宋) 원풍(元豐) 7년(1084년)에 경동(京東) 회남(淮南) 고을에 조서를 내려 고려(高麗) 정관(亭館)을 세우게 하였으므로 밀(密)ㆍ해(海) 두 고을에 시소(時騷)가 일어 백성이 도망한 자가 있었다. 그 이듬해에 소식(蘇軾)이 그곳을 지나다가 제도의 웅장 화려함에 감탄하여 시 한 수를 읊었으되,
처마 끝 높이 솟아 담장 밖에 나르는 듯 / 簷楹飛舞垣墻外
농가 숲은 쓸쓸하여 도끼 자취 뿐이고나 / 桑柘蕭條斤斧餘
오랑캐의 종으로서 다 내주고 보니 / 盡賜昆耶作奴婢
내 몰라라 그들에게 얻은 것이 무에런고 / 不知償得此人無
하였으며, 동파(東坡)가 고려를 미워함이 이르는 곳마다 이러하니, 만일 그로 하여금 강희(康熙)가 세운 33참(站)의 찰원(察院 조선 사신의 내왕을 위해 설치한 숙소)을 보았던들, 그는 또 무어라 하였겠는가.
황산곡(黃山谷 송(宋) 문학가 황정견(黃庭堅). 산곡은 호)의 〈차운목보증고려송선(次韻穆父贈高麗松扇)〉에,
은 마구리 옥 물리고 깨끗한 고치 종이 / 銀鉤玉唾明繭紙
솔 부채 가벼운 바람 한꺼번에 보내 주네 / 松箑輕涼幷送似
가애롭다 이 부채가 책구루고려의 성(城) 이름 를 멀리 건너 / 可憐遠度幘溝漊
더위에 알맞음이 내대자(피서립(避暑笠))와 어떠한고 / 適堪今時褦襶子
라 하였고, 또
옥보다 결백한 문인 기운이 높고 차고 / 文人玉立氣高寒
삼한에 사신 가서 삼신산을 보았다네 / 三韓持節見神山
안기생(중국 신선의 이름)의 불사약을 의당코 얻어다가 / 合得安期不死藥
티끌 속 이내 몸에 옛 껍질을 벗겨 주리 / 使我蟬蛻塵埃間
하였으니, 이제 와서는 고려의 송선(松扇)이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내 일찍이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의 좌상(座上)에서 반정균(潘庭筠)의 〈차왕추사한류시(次王秋史寒柳詩)〉를 외었더니 한자리에 앉았던 손들이 모두 좋다고 칭찬한다. 나는 이내,
“왕추사(王秋史)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풍명재(馮明齋) 병건(秉健)은,
“이는 곧 역성(歷城) 왕 진사(王進士)인데, 이름은 평(苹)이요, 자는 추사(秋史)이며, 자호(自號)를 칠십이천주인(七十二泉主人)이라 하였으니, 반(潘)의 시에,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는 곧 이를 두고 이른 것이랍니다.”
하고, 능사헌(凌蓑軒 사헌은 능야의 호) 야(野)는,
“국조(國朝)의 시인으로서는 많이들 추사를 추앙합니다. 그는 일찍이,
어지런 폭포 속에 나막신 소리 누구던고 / 亂泉聲裏誰通屐
누른 잎 숲 사이에 스스로 글을 쓰네 / 黃葉林間自著書
라는 글귀를 읊었고, 그는 또,
누른 잎 떨어질 제 황소 등에 해 늦었고 / 黃葉下時牛背晩
푸른 뫼 이지러진 곳 술 취한 손님 지나가네 / 靑山缺處酒人行
를 읊었으므로, 한때 사람들은 그를 왕황엽(王黃葉)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한다.
고 태사 역생 풍승기(馮乘驥 풍병건. 승기는 자) 등 모든 사람과 더불어 명성당(鳴盛堂)에서 이야기하다가 도보(道甫 이조 때의 문학가ㆍ서예가 이광사(李匡師)의 자)가 쓴 글씨첩 하나를 내어 보였다. 그들은 서로 살펴보더니, 이윽고 나에게,
“이 글씨는 동한(東韓)에 있어서 어떤 등류(等流)에 속합니까.”
한다. 나는 이에 대하여 멍하니 무엇이라 대답하기 어렵기에 다만,
“우연히 행장(行裝) 속에 들어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스스로 옛날 조자(趙資)의 말처럼 슬쩍 피해버렸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주이준(朱彝尊) 저)》에 《동국사략(東國史略 저자 미상)》과 《고려사(高麗史 정인지(鄭麟趾) 등의 저)》 열전(列傳)의 말을 실었는데, 그 글에,
“고려 세자(世子)가 원(元)에 들어가서 원제(元帝)를 편전(便殿)에서 만날 제, 그가 무슨 글을 읽느냐고 물으니, ‘세자는 선비 정가신(鄭可臣 고려 때의 정치가. 자는 헌지(獻之))ㆍ민지(閔漬 고려 때의 문학가. 자는 용연(龍涎))가 따라왔으며 시위하는 여가를 타서 그들에게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질문합니다.’ 하였더니, 원제가 기뻐하여 세자에게 명하여 그들과 함께 들어오게 하고 자리를 주고서, ‘본국(本國)의 세대(世代)가 서로 전해온 순서와 치란(治亂)의 자취와 풍속의 아름다움을 말하라.’ 하여 조금도 지루하게 여기지 않고 들었다. 그 뒤 공경에게 명하여 교지(交趾 월남(越南))를 치려고 할 때 그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의론하니, 그 진술한 것이 뜻에 맞기에 정가신에게는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주고, 민지에겐 직학사(直學士)를 제수하였다.”
하고, 열전(列傳)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제(元帝)가 세자를 자단전(紫檀殿)에서 불러 볼 때 가신이 뒤를 따랐더니, 원제가 명하여 앉게 하고 이내 명하여, ‘갓을 벗기되 수재(秀才)는 머리를 묶을 필요가 없으니 의당 건(巾)을 써야 될 것이야.’ 하였다. 그리고 어안(御案) 앞에 어떤 물건이 있는데, 둥글면서도 조금 뾰죽하고 빛은 깨끗하며, 높이는 한 자 다섯 치며, 그 안은 술 댓 말쯤 수용될 만하다. 이는 마하발국(摩訶鉢國 미상)에서 바친 낙타조(駱駝鳥)의 알이라 한다. 원제가 세자에게 구경시키면서 이내 세자와 종신(從臣)들에게 술을 내리고 가신으로 하여금 시를 읊게 하였다. 가신이 시를 드리되,
알이라 했지마는 크기는 항아리라 / 有卵大如甕
그 속에 간직한 건 늙지 않는 봄이리다 / 中藏不老春
원컨대 천세 수를 임이 먼저 누리시고 / 願將千歲壽
남은 은택 나누어다 해동에도 미치소서 / 醺及海東人
라 하니, 원제가 기뻐하여 자기의 식탁에서 국을 하사하였다.”


 

[주D-001]우양도 …… 썼더라는군요 : 여기서 ‘우양도 …… 것이니’는 《맹자》 만장 상(萬章上), ‘우리는 …… 지키자’는 《맹자》 이루 상(離婁上), ‘보물도 …… 생기니’는 《중용》 26장, ‘이것이 …… 보냐’는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엮은 것이다.
[주D-002]하였다. : ‘그 뒤에 연경 …… 하였다’는 ‘수택본’에는 소주(小註)로 되었으나, 여기서는 여러 본에 의하여 대문(大文)으로 하였다.
[주D-003]우회암(尤悔菴) 동(侗) : 청의 문학가. 회암은 호요, 동은 이름. 자는 전성(展成).
[주D-004]〈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 : 외국의 지방 풍속을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읊은 것.
[주D-005]비경(飛瓊) : 중국 여도사의 이름. 여기서는 허초희를 그에게 비한 것이다.
[주D-006]나는 …… 것을 : 허경번은 본시 여도사 번 부인(樊夫人)을 경모(景慕)하여서 지은 것인데, 번천(樊川) 두목(杜牧)의 아름다운 풍모를 연모하여 지었다는 그릇된 것을 변명하였다.
[주D-007]목사(牧使) 아무 : 김려(金鑪)의 《유구왕세자외전(琉球王世子外傳)》에는 이난(李灤)이라 하였다.
[주D-008]삼량(三良) : 어진 세 사람. 춘추시대 때 진 목공(秦穆公)이 죽으매 순장(殉葬)시킨 엄식(奄息)ㆍ중행(仲行)ㆍ겸호(鎌虎)를 가리킨 말이다.
[주D-009]두 아들 …… 잔폭하오 : 전국 때 위 선공(衛宣公)의 두 아들 급(伋)과 수(壽)가 계모의 흉계에 의하여 배에서 피살된 일을 말한 것. 《左傳 桓公 16年》
[주D-010]모수(毛遂) : 전국 때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문하에 있던 변사(辯士).
[주D-011]분양(汾陽) : 당의 정치가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자도 역시 자의(子儀).
[주D-012]상간(桑間) : 하남성에 있는 지명. 음탕한 남녀들이 모여드는 곳.
[주D-013]백설(白雪)의 곡조 : 백설은 곡조 이름. 백아(伯牙)가 저속한 하리(下俚)를 탈 때에는 듣는 이가 많았는데, 백설을 타니 화답하는 자가 적었다 한다.
[주D-014]《태평광기(太平廣記)》 : 송의 이방(李昉) 등이 어명을 받들어 엮은 책.
[주D-015]왕벽지(王闢之) : 송 철종(宋哲宗) 때 학자. 벽지는 이름이요, 자는 성도(聖塗).
[주D-016]정원(定遠) : 후한의 명장 반초(班超). 정원은 봉호요, 자는 중승(仲升).
[주D-017]그러나 …… 일은 : 위의 네 장수는 모두 무식하다는 이름을 얻은 자들이다.
[주D-018]문로(文潞) : 송 인종(宋仁宗) 때 명상 문언박(文彦博). 노는 봉호. 자는 관부(寬夫).
[주D-019]사이(四彝) : 사이(四夷). 연암과 필담하였기 때문에 이(夷)를 이(彝)로 하였다.
[주D-020]그들이 …… 모습 : 전국 때 조(趙)의 장수 염파(廉頗)를 늙었다고 등용하지 않기에 그는 말에 올라서 자기는 늙었어도 전장에 나갈 수 있음을 과시하였다.
[주D-021]농사일은 …… 의당하다 : 이 몇 구절은 한(漢) 진평(陳平)의 말인데, 심경지가 빌려 썼던 것이다.
[주D-022]원(元) : 현(玄)이다. 청 나라 사람은 강희의 이름이 현엽(玄曄)이었으므로 ‘현(玄)’ 자를 피하여 ‘원(元)’ 자로 대신 썼다.
[주D-023]이 장군 : 이광(李廣)
[주D-024]돈 벽 : 화교(和嶠)가 그 가멸기가 왕자에 비길 만하였으나 오히려 돈을 아꼈으므로 그를 전벽(錢癖)이라 하였다.
[주D-025]서음(書淫) : 황보밀(皇甫謐)이 글 읽기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침식을 잊으므로 그를 서음(書淫)이라 하였다.
[주D-026]《치청전집》 : 청 이개(李鍇) 저. 치청은 그의 호. 치청산인(豸靑山人).
[주D-027]종인부(宗人府) : 황족(皇族)의 관계 사무를 보는 관부.
[주D-028]기량을 울었다네 : 전국 제(齊)의 사람. 그가 전쟁에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무덤에 가서 우는 소리가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제인(齊人)은 그것을 노래로 불렀다 한다.
[주D-029]봉규(圭) : 어떤 본에는 봉규(封圭)로 되었으나 잘못된 것이다.
[주D-030]담원팔영(澹園八詠) : 담원의 주위에 벌여 있는 팔경(八景)을 읊어서 축하하는 시.
[주D-031]절만 하네 : 송(宋) 서예가 미불(米芾)이 무위(無爲)라는 고을에서 커다란 괴석(怪石)을 발견하고는 의관을 갖추어 절하여 형(兄)이라 일컬었다.
[주D-032]백 동파 : 소식(蘇軾)이 미피(渼陂)에서 놀 때의 고사.
[주D-033]나부산 : 매화가 많이 난 고장.
[주D-034]적성(赤城) : 천태산(天台山) 부근에 있다.
[주D-035]화예부인 : 오대 때 촉왕(蜀王) 맹창(孟昶)의 부인으로 절색에 문장을 겸하였다.
[주D-036]아름다운 …… 같으리 : 이 시는 벌써 《망양록(忘羊錄)》 중에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주석은 생략하였다.
[주D-037]진서라네 : 당시에는 국문을 언문이라 하고 한자를 진서(眞書)라 하였다.
[주D-038]구주(九疇) :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홍범편(洪範篇)〉에 실린 정치 이론.
[주D-039]육부(六部) : 신라 초기에 그 서울인 경주를 중심으로 설치한 행정 구역.
[주D-040]약을 …… 가고 : 진 시황이 서시(徐市)로 하여금 동남(童男) 동녀(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바다 섬으로 보내어 불사약(不死藥)을 구했다.
[주D-041]박랑의 모래벌 : 장량(張良)이 창해 역사(滄海力士)를 시켜 박랑 모래벌에서 매복하였다가 철퇴로써 진 시황을 쳤으나 잘못되어 다음 수레가 맞았다.
[주D-042]구정은 아직 잠기고 : 구정은 하우(夏禹) 때부터 내려오던 신기(神器)였으므로 나라가 망한 것을 구정이 잠겼다 한다. 여기서는 주(周)가 망했다는 말.
[주D-043]삼호들은 일어섰네 : 초(楚)의 항적(項籍)을 말한다.
[주D-044]여섯 왕이 쓰러지자 : 당시의 한(韓)ㆍ조(趙)ㆍ위(魏)ㆍ연(燕)ㆍ제(齊)ㆍ초(楚)의 6국이 망했음을 말한다.
[주D-045]손을 마침 떼었다네 : 진 시황이 저격한 범인을 열흘 동안을 찾았으나 잡지 못했다.
[주D-046]호가의 슬픈 박자 : 한말 채문희(蔡文姬)가 되놈에게 몸이 팔리어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어서 스스로 슬퍼하였다.
[주D-047]채문희를 속할쏘냐 : 조조(曹操)가 천금으로 채문희를 속환하였다.
[주D-048]대숙륜(戴叔倫) : 당 현종(唐玄宗) 때 문학가. 자는 유공(幼公).
[주D-049]제용작가(帝庸作歌) : 《시경》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한 구절.
[주D-050]관관저구(關關雎鳩) : 《시경》 관저장(關雎章)의 첫 구절.
[주D-051]양백화 : 음탕한 일을 풍자한 패곡(牌曲)의 이름인 듯하나 출전 미상.
[주D-052]점필재(佔畢齋) : 이조 때의 문학가 김종직(金宗直)의 호. 자는 계온(季昷).
[주D-053]생추(生蒭) : 《시경》 소아(小雅) 백구장(白駒章)에 나오는 말로서 예물(禮物)이라는 뜻.
[주D-054]기 귀주(奇貴州) : 기풍액(奇豐額). 귀주는 그가 그 고을을 맡고 있었다.
[주D-055]최두기 …… 일쑤이다 : 최두기는 멋모르고 변절한 오삼계가 상투를 보고 명(明)을 생각해서 울었다 하고, 또 전겸익이 청(淸)에 벼슬까지 한 것을 지사인 듯 칭찬하였는데, 이는 모두 ‘몽롱춘추’라는 것이다. 최두기는 조선 정조(正祖) 때 문학가로, 두기는 호요, 성대는 이름이며, 자는 사집(士集)이다.
[주D-056]주의(周顗) : 진(晉)의 지사(志士). 자는 백인(伯仁). 신정에서 고국이 망하였음을 슬퍼하였다.
[주D-057]나라 …… 있네 : 국(國)자 속에 과(戈) 자를 떼고 일(一) 자와 인(人) 자를 더 넣은 듯하나 무슨 글자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주D-058]김모재(金慕齋) : 조선 때 유학자 김안국(金安國)의 호. 자는 국경(國卿).
[주D-059]화홍산(華鴻山) 찰(察) : 명(明)의 관리이면서 문학가. 홍산은 호요, 찰은 이름이며, 자는 자잠(子潜).
[주D-060]최간이(崔簡易) :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학가 최립(崔岦). 간이는 호요, 자는 입지(立之).
[주D-061]사흘을 바장이곤 : 국선(國仙)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안상(安詳)ㆍ남석(南石) 네 사람이 사흘을 놀았다 해서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주D-062]심백수(沈伯修) : 조선 영조(英祖) 때 관리이며, 문학가인 심염조(沈念祖). 백수는 자.
[주D-063]왕감주(王弇州) : 명의 문학가 왕세정(王世貞). 감주는 호.
[주D-064]만나러 갔더니 : 최립은 일찍이 이정귀(李廷龜)의 사행을 따라서 명에 갔다.
[주D-065]획린해(獲麟解) : 불과 2백 자도 차지 않는 단편이지마는 논리의 정연함과 조직의 체계로 보아서 전형적인 고문장의 궤범이 된다.
[주D-066]허균(許筠) :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의 저명한 문학가ㆍ사상가. 자는 단보(端甫).
[주D-067]주태사(朱太史) 지번(之蕃) : 명의 정치가요, 문학가. 자는 원개(元介) 또는 원승(元升).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일이 있다.
[주D-068]빈공(賓貢) : 당(唐)에 외국 학생을 받기 위해 설치한 학과(學科). 곧 빈공과.
[주D-069]한무외(韓无畏) : 조선 선조(宣祖) 때 신선이 되었다는데 방술에 저명하였다.
[주D-070]최승우(崔承祐) : 신라 진성왕(眞聖王) 때 문학가. 일찍이 당에 유학하였다.
[주D-071]종리 장군(鍾離將軍) : 한 고조(漢高祖) 때 장군 종리매(鍾離昧). 한신(韓信)을 위해서 자살하였다.
[주D-072]예학명(瘞鶴銘) : 육조(六朝) 때 양(梁)의 은사 도홍경(陶弘景)이 초산(焦山) 석벽 위에 지어 새긴 글의 탑본(搨本).
[주D-073]사운(思運) : 자는 형중(亨仲). 어떤 본에는 ‘사운(思運)’이란 두 글자는 소주로 되어있다.
[주D-074]칠십천 : 왕추사가 살고 있던 성수천(聖水泉)은 원(元)의 우흠(于欽)이 품정(品定)한 72 천(泉) 중의 24천이었으므로, 그는 《이십사 천초당집(二十四泉草堂集)》이 있었다.
[주D-075]왕랑의 …… 얼굴 : 진(晉)의 왕공(王恭)의 얼굴이 아름다우므로 사람들이 탁탁한 봄 버들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왕추사가 서로 견준 것이다.
[주D-076]남약천 구만(九萬) : 조선 숙종(肅宗) 때 문학가며 정치가. 약천은 호요, 구만은 이름이며, 자는 운로(雲路).
[주D-077]선생안(先生案) : 그 고을 장관을 지낸 이의 성명과 약력을 기록한 책.
[주D-078]윤형성(尹衡聖) :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자는 경임(景任). 당시의 진주 목사(晉州牧使).
[주D-079]곽재우(郭再祐) : 조선 선조(宣祖) 때 저명한 장수. 자는 계수(季綬)요, 호는 망우당(忘憂堂).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다.
[주D-080]웅해 …… 정진(鼎津) : 모두 경상도에 있는 작은 지명들이다.
[주D-081]음릉 …… 것이 : 항적이 한 고조(漢高祖)와 싸우다가 해성(海城)에서 패하여 음릉으로 도망할 때, 어떤 노부의 말을 들어 길을 잃었고, 오강에 이르러서는 강동(江東) 사람들을 대하기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주D-082]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 : 조선 중종(中宗) 때 문학가. 호음은 호요, 사룡은 이름이며, 자는 운경(雲卿).
[주D-083]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 : 조선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중종을 맞아들인 훈신. 평성은 봉호요, 원종은 이름이며, 자는 백윤(伯胤).
[주D-084]금계군(錦溪君) : 조선 문학가 박동량(朴東亮). 금계는 봉호요, 자는 자룡(子龍).
[주D-085]호백구 …… 수단 : 전국 제(齊)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이 진(秦)에서 붙들려 있을 때에, 그의 문객이 개구멍 도적질을 잘하여 진왕(秦王)의 흰 여우 갖옷을 훔쳐서 진왕의 애희(愛姬)에게 바치고 면했다.
[주D-086]거원(蘧瑗) : 전국 때 위(衛)의 현인으로서, 나이 50이 되어서 49세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
[주D-087]설부 …… 계림유사(鷄林類事) : 설부는 명의 도종의(陶宗儀)가 엮은 것이요, 계림유사는 손목(孫穆)이 지었다.
[주D-088]파촉 …… 관중(關中)이랍니다 : 파촉은 중국 사천 지방이요, 관중은 섬서 지방으로서 한 고조 유방과 초 패왕 항적이 서로 먼저 관중을 점령하려고 경쟁을 할 때 생긴 말. 꿩 대신에 닭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주D-089]시(詩)에 …… 있으니 : 정형은 하북성정형산 위에 있는 요새지. 예양교는 전국 때 절사(節士) 예양이 지백(智伯)을 위해서 조양자(趙襄子)를 저격하려고 숨었던 다리. 촉도는 사천성에서 섬서성으로 통하는 험로(險路). 아미는 사천성에 있는 산명. 공명사당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공명은 그의 자. 함곡관은 하남성 서북부 황하의 계곡에 있는 요해의 관문. 민지는 하남성에 있는 호수명. 이릉은 하남성 효(殽)에 있는 명소. 맹진은 하남성에 있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칠 때 제후를 모았던 곳. 비간묘는 은의 충신 비간의 무덤. 금산사는 강소성 진강부에 있는 명소. 초산은 강소성 단도현(丹徒縣)에 있는 명소. 다경루는 강소성감로사(甘露寺)에 있는 명소. 고소대는 강소성 오현(吳縣)에 있는 명소. 도량산은 강소성에 있는 명소이며, 호구사도 같다. 표모묘는 강소성 회음(淮陰)에 있는데, 한신(韓信)에게 밥을 먹인 표모의 무덤. 탁군은 하북성에 있는 지명. 백구는 위와 같음. 업성은 하남성에 있으며 담화도 같다. 왕상비는 하남성에 있으며 왕상은 진(晉)의 효자. 효릉은 하남성에 있는 명소. 장안은 섬서성에 있는 도시. 정장공묘는 전국 때 정장공의 무덤. 허문정공묘는 원의 유학자 허형(許衡)의 무덤. 문정은 시호. 관용방묘는 하(夏)의 충신 관용방의 무덤. 망사대는 한 무제(漢武帝)가 그의 아들 여 태자(戾太子)를 죽이고 후회하여 쌓은 대. 무측천릉은 당의 황후 무조(武曌)의 무덤. 숙종릉은 당 숙종의 무덤. 빈주는 섬서성에 있는 지명. 경주는 안휘성에 있는 지명. 보타굴은 절강성에 있는 명소. 월지사자헌마는 중앙 아시아 지방에 있던 월지국 사자가 헌납한 말을 보고 읊었다.
[주D-090]요공(姚公) : 원(元)의 문학가 요수(姚燧). 목암은 호요, 자는 단보(端甫).
[주D-091]주행아미(舟行峨眉) : 원제(原題)는 〈8월 17일 방주향아미산(八月十七日放舟向峨眉山)〉.
[주D-092]다경루(多景樓) : 원제에는 〈다경루배권일재용고인운동부(多景樓陪權一齋用古人韻同賦)〉.
[주D-093]깊은 …… 번뜩인다 : 한 나라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배 위에 발을 올렸을 때 태사(太史)가 여쭙기를 객성이 제좌(帝座)를 범했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김상헌이 자기가 사신으로 왔음을 말한 것이다.
[주D-094]은하성 …… 허락했네 : 한(漢)의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으로 사신 가던 고사.
[주D-095]만리 …… 보고져라 : 연암의 아들 종간(宗侃)의 주(注)에, “삼가 상고하옵건대 이 두 글귀는 원집(原集) 중에 있는 것을 혜당(惠堂)이 이용한 것이다.”
[주D-096]강향(降香) : 유명한 사원(寺院)이나 묘우(廟宇)에 내리는 치전(致奠).
[주D-097]촉도난(蜀道難) : 촉도의 험준함을 읊은 이백(李白)의 시가 있다.
[주D-098]조자(趙資) : 삼국 때 오(吳)의 변사. 자는 덕도(德度). 조위(曹魏)에 사신 갔을 때 임기응변이 많았다.
[주D-099]슬쩍 피해버렸다 : ‘고 태사 역생 …… 피해버렸다’ 까지의 이 한 절은 다른 본에 없던 것을 이에 ‘일재본’에 의하여 넣었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2 - 도장류 1
확대원래대로축소
 도장총설(道藏總說)
도교(道敎)의 선서(仙書)와 도경(道經)에 대한 변증설 부(附) 도가 잡용(道家雜用)(고전간행회본 권 39)




총설(總說)
도가(道家)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황제씨(黃帝氏)가 공동산(崆峒山)에서 도(道)를 물었다는 것을 인하여 칭하게 되었나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도(道)란 요점과 근본을 잡아 청허(淸虛)로써 자신을 지키고 겸양으로써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니, 이는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요(堯) 임금의 극양(克讓)과 《주역(周易)》의 겸겸(謙謙)으로, 한번 겸손하여 네 가지 유익을 받는 것에 합하니 이것이 그 장점이다. 그러나 방탕한 자가 이것을 하게 되면 예학(禮學)을 끊어버리고 인의(仁義)까지 버리려고 하면서 ‘오직 청허대로만 하여도 법이 될 만하다.’ 한다.” 하였다.
또한 신선(神仙)에 대하여 “신선이란 성명(性命)의 진(眞)을 보전하여 세상 밖에서 한가히 구하는 것으로 애오라지 의욕을 씻어버리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사(死)ㆍ생(生)의 경지를 초월해서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혹자들은 오로지 이것만을 힘써 허탄하고 괴이한 글이 점점 더욱 많아졌으니, 이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아니다.” 하였다.
도교(道敎)란 이런 것에 불과한데, 그 서적은 매우 많다. 이제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를 인용하여 그 자세한 전말(顚末)을 밝히려 한다.
《수서》경적지에 “상고 시대로부터 황제(黃帝)ㆍ제곡(帝嚳)ㆍ하우(夏禹)의 황제들이 모두 신인(神人)을 만나서 부록(符籙 미래의 일을 미리 짐작하여 적어 놓은 글)을 받았는데, 연대가 이미 멀어서 경(經)ㆍ사(史)에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사적을 자세히 미루어 보면 《한서(漢書)》 제자(諸子)에 도서(道書)의 부류가 37가(家)인데 큰 종지(宗旨)는 모두 건선(健羨 끝없는 탐욕을 말한다)을 버리고 충허(沖虛 마음이 담박하고 공허한 것)에 처할 뿐이고, 상원천관(上元天官)이니 부록(符籙)이니 하는 따위의 일이 없다. 이 중 《황제(黃帝)》4편과 《노자(老子)》2편은 가장 깊은 뜻을 얻었다. 옛말에 도홍경(陶弘景)이란 자가 구용(句容)에 은거하여 음양 오행(陰陽五行)을 좋아하고 풍각(風角)ㆍ성산(星算)을 잘 했으며 벽곡(辟穀)ㆍ도인(導引)의 법을 이수하여 도경(道經)과 부록을 받았다.
무제(武帝 양(梁) 나라 소연(蕭衍)의 묘호)가 본래 그와 교유했었는데, 선대(禪代)할 즈음에 미쳐 홍경이 도참의 글을 모아 ‘경량(景梁 하늘이 양 나라를 도와 준다는 뜻)’이란 글자를 합성(合成)하여 바쳤다. 이 때문에 무제의 은총이 더욱 두터웠다. 또 《등진은결(登眞隱訣)》을 편찬하여 옛날에 신선의 일이 있었음을 증명했으며, 또 ‘신단(神丹 단약(丹藥))을 만들 수 있는데 이것을 먹으면 장생(長生)하여 천지와 함께 영원히 산다.’고 하자, 무제는 홍경으로 하여금 시험삼아 신단을 만들게 했으나 끝내 성취되지 못하였다. 이에 중원(中原)은 너무 거리가 멀어 약재가 정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니, 무제는 그렇게 생각하여 더욱더 공경하였다.
그러나 무제가 소년 시절에 일을 좋아하여 먼저 도법(道法)을 수학했었는데, 즉위한 뒤에까지도, 오히려 조사(朝士)로서 스스로 글을 올려 도법을 수학한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삼오(三吳) 지방과 해변 가에서 더욱 심히 신봉하였으며, 진 무제(陳武帝) 역시 대대로 오흥(吳興)에서 살았기 때문에 또한 신봉하였다.
후위(後魏) 때에 숭산(嵩山)의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가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진인(眞人) 성공흥(成公興)을 만났으며, 뒤에 태상노군(太上老君)을 만나 겸지에게 수여하여 천사(天師)를 삼고 또 《운중음송과계(雲中音誦科誡)》20권을 주었으며, 다시 기(氣)를 마시고 도인(導引)하는 법을 전수하여 마침내 벽곡(辟穀)하는 방법을 얻었다. 그리하여 기운이 성하고 신체가 가쁜하여 안색이 고왔는데, 제자 10여 명이 모두 그 술(術)을 터득하였다. 그후 또 신인(神人) 이보문(李譜文)을 만났는데, 그는 바로 노군(老君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노자(老子)의 존칭)의 현손(玄孫)으로 도록(圖籙)ㆍ진경(眞經) 등 백신(百神)을 부르는 책 60여 권과 금단(金丹)ㆍ운영(雲英)ㆍ팔석(八石)ㆍ옥장(玉漿)을 녹여 만드는 법을 전수받았다.’하였다.
태무제(太武帝) 시광(始光) 초기에 이에 대한 책을 받들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는 알자(謁者)로 하여금 옥백(玉帛)과 희생(犧牲)을 받들어 숭악(嵩岳)에 제사하고 나머지 제자들을 불러다가 대도(代都)의 동남쪽에다가 단우(壇宇)를 세운 다음, 도사 1백 20여 명을 두어 그 법을 선양해서 천하에 펴게 하고는 태무제가 친히 법가(法駕)를 갖추어 부록(符籙)을 받게 하였다.
이로부터 도업(道業)이 크게 행해져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반드시 부록을 받아 고사(故事)가 되었으며, 천존상과 여러 신선의 상을 새겨서 공양하였다.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뒤에는 남교(南郊)의 곁에 도량(道場)을 설치하니, 사방이 2백 보(步)였는데 정월과 시월의 보름에 아울러 도사ㆍ가인(哥人) 1백 6명을 두어 절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그후 후제(後齊)의 무제(武帝)가 업(鄴) 땅으로 천도한 다음 마침내 폐지되었다가, 문양(文襄) 때에 다시 관우(館宇)를 설치하고 정통한 자를 뽑아 거처하게 하였다.
후주(後周)가 위(魏) 나라를 이어 도법(道法)을 숭봉하여 황제마다 부록을 받기를 옛날 위 나라처럼 하였는데, 얼마 후 불법(佛法)과 함께 멸망했다가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 초기에 다시 일어났다. 고종(高宗)은 본래 불법을 믿었으므로 도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대업(大業 수 양제(隋煬帝)의 연호) 때에 도술로써 등용된 자가 매우 많았는데, 강습하는 도경(道經)은 모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근본으로 하고, 다음에 《장자(莊子)》와 《영보(靈寶)》ㆍ《승현(昇玄)》 따위를 강습했다. 기타 여러 경(經)은 혹자들이 말하기를, ‘신인(神人)에게 전수받았다’ 하나 권수가 똑같지 않다.
도가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천존(天尊)의 성은 악(樂)이고 이름은 정신(靜信)이다’하는데, 대부분 모두 천박하고 저속하므로 세상에서 심히 의심한다. 그 술업(術業)이 우수한 자가 부적과 주금(呪禁)을 행하는 것에 왕왕 신비한 증험이 있으나, 금단(金丹)ㆍ옥액(玉液)으로 장생불사한다는 일은 역대에서 비용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허비했을 뿐, 끝내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하였다.
《속박물지(續博物志)》에 “한 순제(漢順帝) 때에 낭야궁(瑯琊宮)에서 그 스승을 높였으며, 우길(于吉)이 곡양(曲陽)의 우물가에서 신서(神書) 1백 70권을 얻었는데 이름은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라 하였다. 이 책에서 말한 것은 음양 오행을 종지(宗旨)로 삼았으나 무당들의 잡된 말이 많다. 뒤에 장각(張角)이 이 책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송(宋) 나라 때 숭산(嵩山)의 구겸지(寇謙之)가 장도릉(張道陵)의 도술을 배웠는데, 일찍이 노자를 만나 명을 받아 도릉을 계승해서 천사(天師)가 된 다음, 벽곡 경신(辟穀輕身)하는 방법을 전수받아 도교를 정돈하게 했다. 또 신인 이보문(李譜文)을 만났는데 그는 바로 노자의 현손으로 도록(圖籙)ㆍ진경(眞經)을 전수하여 북방 태평진군(北方太平眞君)을 보좌하여 천궁(天宮)이 고요히 움직이는 법을 만들어냈으며, 최호(崔浩)는 이 도술을 전수받았다.” 하였으니, 도교의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다.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중 선도록(仙道錄)은 첫째 경계(經戒), 둘째 복이(服餌), 셋째 방중(房中), 넷째 부록(符籙)으로 모두 1천 1백 38권이며, 호응서(胡應瑞)의 선도록은 2천 5백 95질이다. 방중이란 바로 소녀(少女) 용성(容成)의 술(術)로 음정(陰精)을 채취하는 방법이다. 반고(班固)의 《한서》 예문지에 황제(黃帝) 삼왕(三王)의 방중술 20권, 요(堯)ㆍ순(舜)의 방중술 22권, 탕왕(湯王)ㆍ반경(盤庚)의 방중술 20권이 실려 있는데 모두 몹시 저속하고 음설하다.
왕의(王禕)의 《청암총록(靑巖叢錄)》에 “노자의 도(道)는 청정(淸靜)에 근본하여 무위(無爲)로써 체(體)를 삼고, 무위이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써 용(用)을 삼는다. 《도덕경》은 모두 5천여 자이고 81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이것을 넘지 않는다. 임금으로는 한 문제(漢文帝)와 신하로는 조참(曹參)이 항상 이 도를 써서 정치를 하여 백성이 안정하게 되었으니, 이 도를 국가와 천하에 사용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학문이 한번 변하여 신선 방기(神仙方技)의 술이 되었고 두 번 변하여 미무 좨주(米巫祭酒)의 교가 된 뒤로부터 마침내 이단이 되었다. 그러나 신선 방기의 술도 두 가지가 있는바, 연양(鍊養)과 복식(服食)으로 이 두 가지는 지금의 전진교(全眞敎)가 바로 이것이며, 미무 좨주의 교도 두 가지가 있는바, 부록(符籙)과 과교(科敎)로 이 두 가지는 지금의 정일교(正一敎)가 바로 이것이다.
연양의 일은 황제의 책에 비록 언급하였지만 이는 모두 후세에서 모방하여 가탁(假託)한 것이며, 적송자(赤松子)와 위백양(魏伯陽)이 나오고부터 비로소 본종(本宗)이 되었다. 노생(盧生)ㆍ이소군(李少君)ㆍ난대(欒大)의 무리로 말하면 또 연양을 변하여 복식이 되었으니, 그 술이 더욱 편벽되다. 부록의 일은 황제의 책에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장도릉(張道陵)ㆍ구겸지(寇謙之) 등이 실로 이 법을 제창하였으며, 두광정(杜光庭)과 임영소(林靈素)의 무리에 미쳐서는 또 부록을 변하여 경건(經典) 과교가 되었으니, 그 일이 더욱 비루하다.
그러나 한번 논한건대, 연양의 말에 대해서는 구양자(歐陽子 구양수(歐陽脩)를 가리킨다)가 일찍이 《황정경(黃庭經)》을 산정(刪正)하였으며, 주자(朱子)도 일찍이 《참동계(參同契)》를 고쳐 주달았다. 이 두 분은 큰 유학자인데도 모두 그 학설을 나쁘다 하지 않았으니,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홀로 수행하는 선비가 이것을 써서 양생(養生)을 하여 천명을 온전히 하는 것은 진실로 명교(名敎)에 죄를 짓는 것이 되지 않는다.
과교(科文)의 설은 비루하여 떳떳지 못한 것으로 황관(黃冠 도사(道士)를 가리킨다)이 이것을 빌어 밥먹는 도구로 삼는바, 세상의 좀이 되었으나 피해가 그리 심하지는 않다. 다만 복식ㆍ부록 두 가지 학설은 본래 사벽(邪僻)하고 무망(繆妄)한 것으로 여기에 혹하는 자들은 화를 당하지 않는 자가 적다. 난대ㆍ이소군ㆍ우길(于吉)ㆍ장진(張津)의 무리는 이 때문에 몸이 죽었고, 유필(柳泌)ㆍ조귀진(趙歸眞)의 무리는 이것으로 남에게 화를 입혔다가 자신도 끝내 죽임을 당했으며, 장각(張角)ㆍ손은(孫恩)ㆍ여용(呂用)의 무리는 마침내 이것으로 천하와 국가를 패망하게 만들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연양과 복식 두 가지 술이 함께 전해오는데 전진교(全眞敎)에서는 이것을 겸용한다. 전진이란 명칭은 금(金) 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남종(南宗)ㆍ북종(北宗) 두 가지가 있는데, 남종은 성(性)을 우선으로 하고 북종은 명(命)을 우선으로 한다.
근세에 또 진우 도교(眞又道敎)가 있으며 칠조 강선(七祖康禪)의 교가 있는바, 이 학설이 각기 서로 모순된다. 부록ㆍ과교로 말하면 함께 서적이 있는바, 정일교를 믿는 종파에서 사실상 이 업술(業術)을 관장한다. 현재 정일교에서는 또 천사(天師)ㆍ종사(宗師)가 있어서 남종ㆍ북종의 일을 나누어 관장하고 있는데, 강남(江南)의 용호각(龍虎閣)과 조모산(皂茅山)의 삼종부록(三宗符籙)이 또 각기 같지 않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도가의 학설이 잡되어 여러 갈래다’ 하였는데, 참으로 그렇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도가의 서적이 모두 한 환제(漢桓帝) 때에 시작된바, 지금 그들의 경전(經典)에 ‘천사가 영수(永壽 한 환제의 연호) 때에 노군(老君)에게서 전수 받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태평경(太平經)》이 가장 오래 되었고 또 많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국가를 일으키고 자손을 널리 퍼지게 한다’는 말은 방중술의 음담패설에 지나지 않는다. 《대동경(大洞經)》등으로 말하면 대부분 육조(六朝) 이후의 문사(文士)가 기술한 것으로서 그 문장이 볼 만하나, 왕왕 천근하고 비루하여 그리 고상한 의론이 없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불교에서는 노자의 좋은 점만을 절취(竊取)했는데, 뒤에 도가에서는 또한 불가의 나쁜 점만을 절취했다’하였으니, 이 말씀을 가지고 연구해 본다면 도가의 본말을 말할 수 있다.” 하였다.
도가의 남ㆍ북종은 전수한 것이 근거가 있다. 동화(東華 신선이 사는 곳)의 소양군(少陽君)이 노담(老聃)의 도(道)를 얻어 한 나라 종리권(鍾離權)에게 전수하였고, 종리권은 당 나라 여암(呂巖)과 요(遼) 나라 유조(劉操)에게 전수하였으며, 유조는 송 나라 장백단(張伯湍)에게 전수하였고, 장백단은 석태(石泰)에게 전수하였으며, 석태는 설도광(薛道光)에게, 설도광은 진남(陳枏)에게, 진남은 백옥섬(白玉蟾)에게, 백옥섬은 팽상(彭相)에게 전수하였으니, 이것이 남종이다. 여암은 금(金) 나라 왕철(왕嚞)에게 전수하였고, 왕철은 일곱 제자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하나가 구장춘(丘長春)이며, 구장춘이 송도안(宋道安)ㆍ담처단(譚處端)ㆍ유처현(劉處玄)ㆍ왕처일(王處一)ㆍ학대통(郝大通)ㆍ마처옥(馬處鈺)ㆍ손불이(孫不二)에게 전수하였으니, 이것이 북종이다.
진(秦)ㆍ한(漢) 이후로 마침내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올라가 변화하는 도술이 있어서, 황정(黃庭) 대동(大同)의 법과 태상(太上)ㆍ천진(天眞)ㆍ목공(木公)ㆍ금모(金母)의 칭호와 단약(丹藥)ㆍ기기(奇技)ㆍ부주(符呪)ㆍ법록(法籙)으로 귀신을 잡고 부리는 것을 모두 도가로 돌리니, 이는 학자들이 그르친 것이다. 황로(黃老 황제와 노자)는 도가의 근본이고 방기(方技)는 도가의 말류이다. 노자 《도덕경》의 본뜻은 원래 육신을 단련하여 신선을 구하는 술이 아니었는데, 세상의 신선을 배우는 자들이 노자에게 가탁한 것이다. 이는 마치 선비가 글을 읽어 과거(科擧)에 응시하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유학의 가르침이다.’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잡도(雜道) 중에 시해(尸解)하는 한 법이 있다. ‘시해란 육신을 단련하여 마치 매미가 껍질을 벗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집선전(集仙傳)》에 “육신이 산 사람과 똑같은 것이 시해이며, 발이 푸르게 변하지 않고 살가죽이 쭈그러지지 않는 것이 시해이며, 안광(眼光)이 여전하여 산 사람과 똑같은 것이 시해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도 있고 염(斂)하기도 전에 시체를 잃어버린 자도 있으며 터럭이 벗겨지고 육신이 날라간 자도 있으니, 이것이 모두 시해이다. 한낮에 시해된 자가 최상이고 한밤중에 시해된 자가 최하이며 새벽에나 저녁에 시해된 자는 지하(地下)의 주(主)가 된다.” 하였다.
도서(道書)에 “시해가 다섯 가지이니, 금ㆍ목ㆍ수ㆍ화ㆍ토이다.” 하였다. 도경에 《시경해(尸解經)》이 있고 또 금단(金丹)을 만드는 학(學)이 있다.
도경에 《황백요경(黃白要經)》ㆍ《팔공황백경(八公黃白經)》과 《침중황백경(枕中黃白經)》5권이 있다. 헌원(軒轅 황제씨(黃帝氏))의 《술보장론(述寶藏論)》에는 20종의 금(金)이 있으며, 그후의 황백술은 《황정경》의 구전팔경단(九轉八瓊丹)인바, 곧 단가(丹家) 외단(外丹)의 비법(祕法)이다. 한(漢) 나라 회남자(淮南子)는 팔공(八公)과 함께 금약(金藥)을 점화(點化)했다는 말이 있는데, 유향(劉向)이 그 책을 얻어 시험하여 만들다가 이루지 못하고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면하였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오리(五利 방사(方士) 소옹(少翁)의 봉호)ㆍ문성(文成 방사 난대(欒大)의 봉호) 무리가 단사(丹砂)를 변화하여 수은(水銀)으로 만들고 수은을 변화하여 황금을 만든다는 말을 제창했으며, 또 부엌에 제사하여 약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했으나 이것 역시 효험이 없었다.
그후 포박자(抱朴子)와 도홍경(陶弘景)도 시험하였으나 끝내지 못하였고 오직 위백양(魏伯陽)이 시험한 결과 효험이 있어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 문득 금단의 조종(朝宗)이 되었다. 그러나 그 술(術)을 얻을 수 없어, 당(唐) 나라 유필(柳泌)은 시험하여 만들어서 복용했다가 피를 흘리고 죽었다. 임금으로 도사 파사매(婆娑寐)를 믿었던 당 태종(唐太宗)과 유필ㆍ경무(敬武)를 믿었던 헌종(憲宗)이 있는바, 이 두 임금은 모두 단약을 복용했다가 조갈증이 나서 숨졌는데, 백거이(白居易)에 이르러 깨진 화롯불을 보았다. 송(宋) 나라 반소요(潘逍遙 소요는 반낭(潘閬)의 호)가 방법을 올렸다가 태종(太宗)이 죽자, 벰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정자(程子)는 불복(佛腹)의 글을 얻어 화로를 시험해 보았고, 소자유(蘇子由 자유는 소철(蘇轍)의 자)도 시험해 보았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진희량(陳希良)의 부자는 부풍(扶風)에 사는 중에게 방법을 배워 크게 연단하는 화로를 만들었다가 대번에 화를 당하여 죽었으며, 부필(富弼)은 황백술(黃白術)을 적은 책을 쌓아 두었다가 뒤에 불에 넣어 태워버리고 크게 깨우쳤다. 양해(楊偕)ㆍ두순경(杜舜卿)ㆍ호숙(胡宿)에 이르러도 아울러 기이한 전수가 있었지만 하지 않았으며, 범중엄(范仲淹)은 동사생(同舍生 태학에 함께 있는 생도)에게 방법을 얻었고,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은 부풍의 중에게 방술을 얻었으나 끝내 시험하지 않았다. 근세에 청 성조(淸聖祖)가 남쪽 지방을 순행할 적에 강남(江南)에 사는 백성 왕구웅(王求熊)이 연금(鍊金)ㆍ양신(養身)하는 비서(祕書) 한 책을 바쳤으나 받지 않고 돌려 주었으니, 이것이 금단의 대략이다.
전설에 “금단을 만들 수 없고 생명은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이군실(李君實 군실은 이일화(李日華)의 자)은 말하기를 “세상에서 방사로써 금ㆍ은을 점화(點化)해서 세상에 오래 살고 소녀에게서 약을 취해 장생한다 하나, 이미 기욕(嗜慾)을 채우고 또 신선이 된다면 어찌 이처럼 편리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아! 옳은 말이다. 연단에도 위조(僞造)가 있으니, 좌자(左慈)의 행금단(杏金丹)과 허탄한 전진교(全眞敎)의 점묘(點茆) 따위를 세속에서는 제수(提手)라고도 하고 혹은 대강(臺扛)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이 술을 한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방사(方士)가 없기 때문이다.
또 교문(敎門)이 있는바, 게문(偈文)과 경(經)을 말하며 남녀가 뒤섞여 있는데, 그 조목은 백련(白蓮)ㆍ분향(焚香)ㆍ문향(聞香)ㆍ혼원(混元)ㆍ용원(龍元)ㆍ홍양(洪陽)ㆍ원통(圓通)ㆍ대승(大乘)이 있다. 산동(山東) 지방에는 분향ㆍ백련이 있으며 강남(江南)에는 장생(長生)ㆍ성모(聖母)ㆍ무위(無爲)ㆍ자단(糍團)ㆍ원과(圓果) 등 약 수십여 파가 있어서 각기 문호를 세워 서로 전수해 온다. 그 근원은 진인(眞人) 장도릉(張道陵)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장각(張角)을 시조로 삼는다. 앉아서 운기(運氣)를 공부하고 표문(表文)으로 하늘에 기도하는 것은 모두 도교의 「과의(科義)」로서, 이른바 성모(聖母)란 바로 두모(斗母)이고, 자단(糍團)이란 것은 바로 허정(虛靜)으로 천사(天師 장도릉의 존칭)가 즐기던 것이다. 용호산(龍虎山) 제사에 반드시 인절미[糍]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명(明) 나라 때에 노생(盧生)이란 자가 망령되게 위경(僞經)을 편찬하고는 《오부육책(五部六冊)》이라고 이름했었는데 근세에 그를 높여 노조(盧祖)라 하였다. 또 교비(敎匪)라는 것이 있는데 팔괘(八卦)로 표호(標號)를 지으니, 백련교(白蓮敎) 같은 따위이다. 백련교는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때에 난리를 일으킨바,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느라 온 국내가 소모되었으나 오히려 뿌리를 뽑지 못하였다.
현재 요도(妖道)에서 불식법(不食法)은 벽곡환(辟穀丸)을 말하고, 미리 일을 아는 것은 도우인(桃偶人 복숭아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을 말하고, 소단법(燒丹法)은 방중약(房中藥)을 말하고 점금술(點金術)은 축은법(縮銀法)을 말하고, 입명법(入冥法)은 말리근(茉莉根)이고, 신선을 부르는 것은 영귀(靈鬼)를 빌린 것이고, 반혼법(返魂法)은 여우와 도깨비를 부리는 것이고, 물건을 운반하는 것은 오귀(五鬼)의 술이고, 병인(兵刃)을 피하는 것은 철포삼(鐵布衫)이고, 사람을 유혹하여 나를 따르게 하는 것은 호선(狐仙)과 기이한 향(香)과 고수(蠱水)이다.
도가 외에 또 도가 같으면서 아닌 것이 있으니 곧 비건국(毗騫國)의 왕으로, 청(淸) 나라에서는 동객이사호이 파파왕(董喀爾寺乎爾把把王)이라고 칭한다. 《남사(南史)》ㆍ《북사(北史)》에 이르기를 “왕의 머리 길이가 3척이며 예부터 죽지 않았다. 저서가 있는데 불경과 같은 것으로 3천 자가 되며, 사람의 선악과 장래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한다. 남쪽 지방에서는 장경왕(長頸王)이라 호하며 그 자손의 수명은 일반인과 같다.” 하였다.
비건국에 대하여 《남사》에 이르기를 “이 나라는 양(梁) 나라 때에 알려진바, 돈손(頓遜)의 밖 큰 바다 섬 가운데에 있는데, 부남(扶南)에서 8천 리나 된다. 그 왕의 신장은 두 길이나 되며 목 길이가 3척이다. 예부터 죽지 않아 그 나이를 알지 못한다. 왕이 신성(神聖)하여 나랏사람의 선악과 장래의 일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속이는 자가 없다. 남쪽 지방에서 장경왕이라 호하며, 왕은 항상 누대에 거처하고 혈식(血食)하지 않으며 귀신을 섬기지 않는다. 그 자손의 수명은 일반인과 같고 오직 왕만이 죽지 않는다. 왕은 또한 천축(天竺)의 책을 만들었는데 3천 자가 되는바, 숙명(宿命)의 원인을 말한 것으로 불경과 비슷하며 아울러 선한 일을 논했다.” 하였다.
우리나라 도교도 연혁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도교가 없었던바, 《북사》에서 이미 말하였다. 그 처음 시작된 것은 고구려부터였으며 승조(勝朝 고려를 가리킨다)와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본조의 중엽에 이르러 혁파되어 영영 없어졌다.
《삼국사기》를 상고해 보면, 고구려 영류왕(榮留王)이 수 공제(隋恭帝) 의령(義寧) 2년(무인)에 즉위하여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16년(임인)에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시해되었다. 그 해에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이 왕에게 이르기를 “유(儒)ㆍ불(佛)ㆍ선(仙) 삼교(三敎)는 비유하면 마치 솥발과 같은 것인데, 지금 유교와 불교는 아울러 일어났으나 도교는 성하지 못하오니, 청하옵건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해 오소서.” 하니, 왕은 그 말을 따랐다. 영류왕 7년(갑신) 2월에 당 나라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어 왕을 책봉(冊封)하고 또 도사를 명하여 천존상(天尊像)과 도교를 보내와 노자의 《도덕경》을 강했으며, 8년(을유)에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어 불(佛)ㆍ노(老)의 교법을 배우게 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년(계묘)에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자, 황제는 도사 숙달(叔達)등 8명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의 《도덕경》을 하사하였다.
고려에 이르러는 이중약(李仲若)이 산에 들어가 선학(禪學)을 좋아하였다. 뒤에 항해하여 송(宋) 나라에 들어가서 황대충(黃大忠)을 따라 친히 도교의 요점을 전수받고 본국에 돌아와 상소하여 현관(玄觀 도관(道觀)의 별칭)을 설치하여 국가의 재초(齋醮)하는 곳을 삼으니, 복원궁(福源宮)이 바로 그것이다.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면, 고려에는 도관이 없었는데 휘종(徽宗)의 대관(大觀) 때에 조정에서 도사를 보내어 고려에 가서 마침내 복원궁을 세우고 도사 70여 명을 두니, 이는 예종(睿宗) 때 무자년(1108, 예종 3)ㆍ기축년(1109, 예종 4) 사이였다. 고려 인종(仁宗) 신해년(1131, 인종 9)에 노장(老莊)의 학을 배우는 것을 금지했으며, 신라와 백제에 있어서는 역사 책에 나오지 않는다.
본조에 들어와《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을 보면, 10가지의 도류(道流)를 뽑는데, 금단(禁檀)을 외고 《영보경(靈寶經)》ㆍ《과의(科義)》ㆍ《연생경(延生經)》ㆍ《태일경(太一經)》ㆍ《옥추경(玉樞經)》ㆍ《진무경(眞武經)》ㆍ《용왕경(龍王經)》중에서 세 경을 읽었다. 소격서(昭格署)를 서울의 삼청동(三淸洞)에 두고 삼청(三淸)의 초제(醮祭)를 관장하게 하고 제조(提調)ㆍ영(令)ㆍ별제(別提)ㆍ참봉(參奉)을 두었으며, 또 자수궁(慈壽宮)을 설치하고 여도사(女道士)가 거주하였다. 중종(中宗) 기묘년(1519, 중종 14)에 삼사(三司 홍문관(弘文館)ㆍ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에서 간하여 폐지하였다가 을유년(1525, 종종 20)에 다시 세웠으며, 임진 왜란 이후에 영영 폐지되었다.
또 태일전(太一殿)이 의성현(義城縣) 동쪽 빙산(氷山)에 있는바, 매년 상월(上元 정월 보름)에 강향(降香)하여 제사하다가 성종(成宗) 기해년(1479, 성종 10)에 태안(泰安)의 백화산(白華山)에 옮기고는 인하여 강향을 폐지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 도교의 전말이다.
또 수련(修鍊)에 대한 한 가지 말이 《전도록(傳道錄)》에 실려 있는바, 신돈복(辛敦復)이 그 일을 기록하였다. 인조(仁祖) 때에 한 중이 관동(關東 강원도(江原道) 지방에 놀러 갔다가 구류되어 관청에게 수색을 당한 결과 책 한권을 내놓았는데 제목을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이라 하였다. 고을 원이 이 책을 택당(澤堂) 이식(李植)에게 보내자 택당은 위하여 한 글을 붙여 세상에 전하였다. 여기에 말하기를 “당 문종(唐文宗) 개성(開成) 때에 신라의 최승우(崔承祐)ㆍ김가기(金可紀)와 중인 자혜(慈惠) 등이 당 나라로 유학가서 종남 천사(終南天師) 신원지(申元之)와 교분을 맺었다. 신원지는 선인(仙人) 종리 장군(鍾離將軍)에게 소개하니, 그는 말하기를 ‘신라에는 도교의 인연이 없어서 다시 8백 년을 지난 다음에야 마땅히 환반(還反)의 지결(旨訣)이 있어서 저들에게 선양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도교가 더욱 성하여 지선(地仙) 2백이 나와 온집이 하늘로 올라가서 신선이 되어 도교를 크게 할 것이다.’ 하고는 세 사람에게 도법을 전수해 주니, 《청화비문(靑華祕文)》ㆍ《영보필법(靈寶畢法)》ㆍ《팔두오악결(八頭五岳訣)》ㆍ《금고(金誥)》ㆍ《내관(內觀)》ㆍ《옥문보록(玉文寶籙)》ㆍ《천둔(天遁)》ㆍ《연마법(鍊魔法)》등의 책과 구결(口訣)이 있었으며, 또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와 《황정경(黃庭經)》ㆍ《용호경(龍虎經)》ㆍ《청정심인경(淸淨心印經)》과 연등(燃燈)이 있는데 서로 전수하여 명맥을 전한다.” 하였다.
최고운(崔孤雲 고운은 최치원(崔致遠)의 호)도 당 나라에 들어가 환반(還反)하는 학설을 얻어 전하여 아울러 우리나라 단학(丹學)의 시조가 되었으니, 그 가장 뛰어난 것은 《참동계》의 16가지 구결이다. 단학파 중에 저서하여 전수한 것으로 정염(鄭)의 《단가요결(丹家要訣)》, 권극중(權克中)의 《참동계주해(參同契注解)》, 이지함(李之菡)의 《복기문답(服氣問答)》, 곽재우(郭再祐)의 《복기조식진결(服氣調息眞訣)》이 그 관건이며, 근세에 허미(許米)가 단학에 대한 공부를 깊이 깨달아 도교의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니, 이는 단학의 시말(始末)이다.
또 시해(尸解) 한 파가 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시해가 다섯 가지인바, 곧 금ㆍ목ㆍ수ㆍ화ㆍ토 다섯 가지의 시해이다. 신라의 석현준(釋玄俊)이 당 나라에 들어가 그 법을 배워 보사 유인(步舍游引)하는 술을 저술하였다. 최고운 역시 중국에 유학하여 그 법을 얻었으나 우리나라에 돌아온 다음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현준(玄俊)에게 배우니, 현준은 바로 그의 외삼촌으로 가야 보인법(伽倻步引法)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 또 양수 시해(量水尸解)와 송엽 시해(松葉尸解)가 있는바, 이 법 역시 4, 5가지로 나뉘었으니, 이는 모두 도가의 지말(枝末)이다.
그 전도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 종리권(鍾離權)이 신라 사람 최승우ㆍ김가기와 중 자혜에게 전수하였으며, 최승우는 최고운과 이청(李淸)에게 전수하였고, 이청은 명법(明法)에게 전수하였으며, 명법은 다시 자혜에게 전수하여 그 요점을 모두 얻었다. 자혜는 권청(權淸)에게 전수하였고, 권청은 원(元) 나라 설현(偰賢)에게 전수하였으며, 설현은 김시습(金時習)에게 전수하였고, 김시습은 홍유손(洪裕孫)에게 《천둔검법(天遁劍法)》과 《연마진결(鍊魔眞訣)》을 전수하였으며, 또 옥함(玉函)에다가 단약을 만드는 요점을 기록하여 정희량(鄭希良)에게 전수하였고, 《참동계》ㆍ《용호경》의 비지(祕旨)를 윤군평(尹君平)에게 전수하였다. 윤군평은 곽치허(郭致虛)에게 전수하였고, 정희량은 중 대주(大珠)에게 전수하였으며, 대주는 정염(鄭)과 박지화(朴枝華)에게 전수하였다. 홍유손은 밀양(密陽)에 사는 과부 박씨(朴氏) 묘관(妙觀)에게 전수하였고, 묘관은 강귀천(姜貴千)과 장도관(張道觀)에게 전수하였으며, 곽치허는 한무외(韓無畏)에게 전수하였다. 권 청은 남궁두(南宮斗)에게 전수하고 또 조운흘(趙云仡)에게 전수하였다.
스승의 전수없이 여러 책에 흩어져 나오는 것으로는 남추(南趎)ㆍ최탕(崔湯)ㆍ장세미(張世美)ㆍ강귀천과 단양(丹陽)의 이인(異人), 이광호(李光浩)ㆍ갑사(岬寺)에 사는 중과, 김세마(金世麻)ㆍ문유채(文有彩)ㆍ정지승(鄭之升)ㆍ이정해(李廷楷)ㆍ곽재우ㆍ김덕량(金德良)ㆍ이지함ㆍ정두(鄭斗) 등 여러 사람인데, 듣고 보는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산만하여 차서가 없다.
도가가 당초에는 선도(仙道)가 아니고 구류(九流)에 나열된 것이었는데, 후세에는 마침내 신선을 도교라 하여 점차 방기(方技)의 유(流)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변증이 없을 수 없다. 신선도 다섯 종류가 있으며 도사도 다섯 등급으로 나뉘어진다.
천선(天仙)이란 여러 겁(劫)을 수행하여 일찍부터 영근(靈根)과 혜성(慧性)을 간직하고 선(善)한 가문에 의탁하여 태어나서 천진 그대로 도(道)에 들어간다. 지인(至人)이 무상(無上)한 한 가지 방편을 전해 주어, 하늘과 땅을 화로와 솥으로 삼고 해와 달을 물과 불로 삼아 청정(淸靜)하고 자연스러워 내외가 지극히 순수하며 삼계(三界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뛰어나 우리[樊籠]를 타파하니, 이는 바로 하늘을 의지하여 하늘에서 나온 자이다.
지선(地仙)이란 올바른 행실을 반드시 실천하고 뜻은 세속을 떠날 결심이 굳어 장년기에 도를 배워서 조화의 기이한 것을 환히 알고 생물의 이치를 안다. 단약을 연단하고 약을 먹어 장생해서 육신을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러 두어 육지에서 신선을 행하니, 이는 바로 땅을 의뢰하여 땅을 얻은 자이다.
신선(神仙)이란 날 때부터 선풍 도골(仙風道骨)이 있어 크게 충성하고 크게 효도하여 공을 많이 쌓고 행실을 닦는다. 소년에 도를 사모하여 진세(塵世)에서 살기를 싫어하고 명산 복지(名山福地)에 들어가 정(精)을 연마하여 기(氣)로 만들고 기를 연마하여 신(神)으로 만들고 신을 연마하여 허(虛)로 만들어, 먼저 옥액(玉液)을 수련하고 뒤에 금단(金丹)을 연단하여 음이 다하고 순전히 양만 있어, 범인(凡人)을 초월하여 성인에 들어간다. 형(形)ㆍ기(氣)를 분화하여 유유자적하게 소요(逍遙)하니, 이는 바로 신을 연마하여 신으로 돌아온 자이다.
인선(人仙)이란 겸손하고 공경하는 것으로 자기를 지키고 사람과 함께 하기를 잘한다. 중년과 말년에 명리(名利)에 대한 기심(機心)이 없어서 환경을 대하면 정욕을 잊어 운기(運氣)로 명을 접속시킨다. 납[鉛]을 뽑아 내고 수은을 더하여 감(坎)을 취하여 이(离)를 메운다. 토해내고 들이마시는 것을 때에 따라하고 도인(導引)으로 뼈마디를 단련해서 심신이 안락하여 병을 물리치고 수명을 연장하니, 이는 사람을 빌어 사람을 구제하는 자이다.
귀선(鬼仙)이란 성품이 본래 용렬하여 대도(大道)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한 가지 화두(話頭)를 갖고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여 식신(識神)이 깨치는 것을 한 경지로 삼으며, 혹은 재계(齋戒)를 잘 지켜 육신은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꺼진 재와 같아서 선정(禪定)할 때에는 음신(陰神)이 나올 수 있고 죽은 뒤에는 정령(精靈)이 흩어지지 않아 능히 투태(投胎)하고 탈사(奪舍)하니, 이는 바로 순전히 음뿐이고 양이 없어 끝내 귀신의 기미를 떠나지 못한 자이다.
이것이 바로 선도의 다섯 가지 종류로서 천선ㆍ지선ㆍ신선ㆍ인선ㆍ귀선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 천선과 지선은 절대로 배우기 어렵고 신선이나 인선에 이르면 약간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범속하고 고루한 것을 뛰어넘고 벗어나지 않으면 결코 바랄 수 없으니, 《참동계》의 환반하는 지결을 자세히 읽으면 반드시 할 수 있다. 귀선으로 말하면 끝내 귀신의 기미에 들고 마니, 이것은 비록 각각 다섯 신선 가운데 나열되긴 하지만 어찌 할 만한 것이겠는가.
예로부터 신선이 신을 내는 것에 대해서는 딴 특별한 말이 없다. 신은 이미 나의 원신(元神)이니 금액(金液)을 점화해서 따뜻하게 10개월을 기르면 기(氣)가 충족하고 신이 신령스러워 환골 탈태를 하고 스스로 나와, 몸 밖의 몸을 가져서 빛이 구천(九天)에 비추니, 이는 존상법(存想法 나의 신을 보존하여 나의 몸을 생각하는 것)에 비할 수 없는 것으로 실로 양신(陽神)의 광(光)이다. 귀신은 볼 수도 없는 것이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귀신을 만일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이는 음신과 같은 것이요 양신이 아니다. 10개월의 공이 완전하여 불 온도가 어그러지지 않으면 기가 충족하고 신이 온전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자유로이 한다. 몸 밖의 몸이란 바로 법신(法身)으로, 모이면 형체가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기가 이루어진다. 음신은 능히 분신(分身)하거나 화형(化形)하지 못하지만 양신은 한 몸으로 백만 개의 몸이 되어 각기 음식할 수도 있고 사물을 응접할 수도 있으며, 사람이 그를 합치면 다시 하나가 되니, 이른바 ‘성스러워서 알 수 없는 것을 신이라 한다.[聖而不可知之之謂神]’는 것이다. 은현(隱顯)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변화가 무쌍하여 해와 달 아래서 걸어도 그림자가 없고 쇠나 돌에 들어갈 때에도 장애가 없으며 천리 만리를 순식간에 도달하고 과거와 미래를 일일이 모두 알아야만 바야흐로 양신이 될 수 있다. 양신은 출입할 때에 모두 정문(頂門)을 말미암으니, 아, 훌륭하다. 반환(反還)의 도여! 천지와 똑같이 훌륭한데 사람만이 능하니, 천지 사이에 무엇이 사람보다 신령스러운 것이 있겠는가.
도사에 있어서도 다섯 가지 등급이 있다. 《삼동도과(三洞道科)》에 이르기를 “도사가 다섯 가지이니, 첫째는 천진도사(天眞道士)로 고현(高玄)ㆍ황인(黃人)의 따위이고, 둘째는 신선도사(神仙道士)로 두충(杜沖)ㆍ윤궤(尹軌)의 예이고, 셋째는 산거도사(山居道士)로 허유(許由)ㆍ소보(巢父)의 무리이고, 넷째는 출가도사(出家道士)로 송윤(宋倫)ㆍ팽심(彭諶)의 무리이고, 다섯째는 재가도사(在家道士)로 황경(黃瓊)ㆍ전갱(籛鏗)의 무리이다.” 하였다.
도가에서 이미 노자를 높여 조종으로 삼았으니, 노군의 내력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여러 말을 수집하여 중복되는 것을 따지지 않고 그 기록한 바를 따라서 근본 학설을 보존하려 한다.
노자에 대하여 진(晉) 나라 이석(李石)의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노군의 어머니가 일찍이 태양의 정기가 유성(流星)처럼 낙하하여 입 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이때부터 임신하여 72년 만에 진(陳) 나라 와수(渦水)의 오얏나무 아래에서 낳았는데, 왼쪽 겨드랑을 찢고 나왔으며 몸 길이가 12척이었다.” 하였다.
주 정왕(周定王) 3년(정사)에 노자가 출생하였는데, 《유서(類書)》에 이르기를 “노자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耳)이며 또는 담(聃)이라고도 하고 또는 백양(伯陽)이라고도 하는바, 초(楚) 나라 고현(苦縣) 뇌향(瀨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가 밤에 오색 진주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진주를 삼켜 임신해서 뱃속에 있은 지 81년 만에 오얏나무 아래에 소요하다가 그를 해산하게 되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왼쪽 겨드랑을 찢고 나와서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나의 성이다.’ 하였다. 신장이 8척 8촌이며 살갗이 황색이고 눈썹이 아름다우며 귀가 길고 눈이 크며 이마가 넓고 이빨이 성기며 입이 네모지고 입술이 두터우며 이마에는 삼오(三五)의 달리(達理)가 있고 일월각(日月角)이 또렷하며 코에는 쌍주(雙柱)가 있고 귀에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발로는 이오(二五)를 밟고 손에는 십문(十文)을 잡고 있었다.” 하였다.
노담이 산림에 있을 적에 공자(孔子)가 보고는 “유신(游神 정신을 쓰고 있는 것)하는 바를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노담은 “나는 현재 물건의 태초(太初)에 유신하고 있다.” 하였다. 공자는 “나는 새는 화살로 잡을 수 있고, 달아나는 짐승은 그물로 잡을 수 있으며,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로 잡을 수 있지만, 용에 있어서는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어쩔 수가 없으니, 노자는 그 용과 같다.” 하였다.
노자는 주(周) 나라가 쇠망하는 것을 보고는 푸른 소를 타고 관(關)을 나가니 자주빛 기운이 떠 올랐다. 윤희(尹喜)를 위하여 《도덕경》을 지었다. 양읍(襄邑)의 남쪽 뇌향(瀨鄕)에 노자의 사당이 있으며 사당 안에 아홉 개의 우물이 있는데, 능히 청결하게 재계하고 이 골짝에 들어오는 자는 더운 물과 시원한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며, 한 우물에 물을 뜨면 아홉 개의 우물이 모두 움직인다 한다.
윤희는 주 나라 대부(大夫)로 관을 맡았다. 그의 어머니가 낮 꿈에 하늘에서 붉은 비단을 내려 자기 몸을 감싸는 꿈을 꾸었다. 진인(眞人 윤희를 가리킨다)이 태어날 때에 육지에 있던 그 집에서 즉시 연꽃이 나왔는데 빛깔이 몹시 고왔다. 눈에는 태양의 정기가 있었으며 키가 크고 모습이 단아하며 팔이 무릎 아래까지 드리워서 당당히 천인(天人)의 용모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수많은 서적을 관장하고 있었으며, 천문(天文)과 비위(祕緯 비밀스러운 위서(緯書))를 잘 알아 위로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를 살펴서 모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비록 귀신도 그 참모습을 숨길 수 없으므로 노자가 감탄하였다 한다.
진강(陳剛)의 자는 무욕(無欲)이며 별호는 진무귀(陳无鬼)이다. 그의 말에 “노자는 주 나라 말기에 출생하였는바, 바로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영보현(靈寶縣) 지방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광(廣)으로 시골의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잣집에서 품팔이하며 나이가 70이 넘도록 아직 아내가 없었으며, 노자의 어머니 역시 시골 어리석은 부인으로 나이가 40이넘도록 아직 남편이 없었다. 이들은 우연히 산중에 있다가 구차히 결합하였는데, 천지의 영기를 얻어 노자를 밴 지 80개월이나 되었다. 그의 주인은 임신 기간이 오랜 것을 미워하여 집에 있지 못하게 하므로 부득이 들판의 큰 오얏나무 아래에 달려가서 머리털이 희고 눈썹이 흰 한 아들을 낳았다. 그 어머니는 남편인 광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곧 오얏나무[李]를 가리켜 성을 하였으며 귀가 큰 것을 보고는 마침내 이(耳)라 이름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의 머리털이 흰 것을 보고 노자(老子)라 불렀다. 장성하자 주 나라 천자가 관람하는 장서각의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는데, 고사와 고례(古禮)를 많이 알고 있었던 까닭에 공자가 그에게 예를 묻고 벼슬을 물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이가 들자 주 나라 황실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보고는 마침내 푸른 소를 타고 서쪽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 관문을 지키는 윤희를 만나 스승이 되어 《도덕경》 5천 자를 짓고는 마침내 진천(秦川) 주질현(盩厔縣)에서 죽어, 그 무덤이 이곳에 있으니, 이것이 노자의 본말이다. 생전에 능히 주 나라 황실의 혼란을 구원하지 못하고 또 터럭끝 만한 공업을 세상에 세우지 못했는데, 죽어서는 마침내 도리어 천상의 삼청(三淸)이 되었다 하니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현묘내편(玄妙內篇)》에 “노자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다.” 하였다. 《노사(路史)》소호기지(少昊紀志)에 “노자의 아버지는 건원고(乾元杲)로 나이가 72세였으나 아내가 없었는데, 이웃 사람 익수(益壽)와 야합(野合)하여 임신한 지 10년 만에 노자를 낳았다.” 하였다. 위(魏) 나라 최홍(崔鴻) 이 지은《전량기(前涼記)》에는 “노자의 아버지는 이름이 건(乾)이고 자가 원고(元杲)로 배안의 발병신에 귀가 없으며 한쪽 눈은 밝지 못하고 고단하여 나이 72세가 되도록 아내가 없었는데, 이웃 사람 익수씨(益壽氏)의 늙은 여자와 야합하여 임신한 지 80년 만에 마침내 노자를 낳았다.” 하였다. 《현묘내편》에 “노자가 처음 낳았을 때의 이름은 현록(玄祿)이다” 하였고, 하상공(河上公)은 이르기를 “노자의 일명은 중이(重耳)이다.” 하였으며, 《사기》에 “노자의 자는 담(聃)이다.” 하였다.
《원화지(元和志)》에 “노자의 어머니 사당이 진원현(眞元縣) 동쪽 14리에 있다. 건봉(乾封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원년에 책봉하여 선천태후(先天太后)라 호하였으니, 노자의 어머니이다.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으로 위(魏) 나라 장수가 되었다. 종의 아들은 주(注)이고 주의 아들은 관(官)이며 현손 가(假)는 한 문제(漢文帝)에게 벼슬하였다.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膠西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자손들이 대대로 현달하였으며 모두 충효(忠孝)로 가문을 계승했다. 박주(亳州)에 노군의 비(碑)가 있다.
노군(老君) 뒤에 장도릉(張道陵)이란 자가 있었는데, 호가 천사(天師)로 도교의 괴수가 되었으니, 이 역시 그 사실을 간략히 기재하지 않을 수 없다.
장천사 도릉의 자(字)는 보한(輔漢)으로 장량(張良)의 자손이라 하기도 하며, 아니라고도 한다. 이응(李膺)의 촉서(蜀書)에 “장도릉이 뱀에게 먹히어 상승(上昇)하였다는 설은 잘못이다. 도릉 이후 대대로 부첩(符牒)과 기초(祈醮)를 맡아 일삼아 왔으며, 또 송(宋)ㆍ원(元) 시대로부터는 천사라는 직호(職號)를 수여했다가 명(明) 나라 초기에 진인(眞人)으로 호를 고쳤는데, 품계(品階)가 정2품(品)이다. 공자(孔子)의 자손에게 대대로 연성공(衍聖公)을 수여한 것과 같으나, 반열(班列)이 연성공의 위에 있어서 도교를 높이는 것이 성인(聖人 공자를 말한다)을 높이는 것보다 중히 했다.” 하였다.
청(淸)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때 강서(江西)의 수신(守臣 지방을 맡은 관원)이 말하기를 ‘장씨에게 직함과 인장(印章)을 주는 것이 법전에 실려 있지 않으니, 길이 폐지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따라 조칙으로 진인이라는 호를 버리고 상청관 제점(上淸觀提點)이라 했었는데,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초기에 다시 회복하여 지금까지 내려온다.” 하였다.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12년(정묘)에 복준(覆準)하기를 “강남(江南)의 장씨가 용호산(龍虎山)에 세거(世居)하는바, 진인이란 칭호는 조관(朝官)의 경(卿)이나 윤(尹)의 칭호가 아닙니다. 그 옛 명칭을 그대로 두는 것은 바로 유품(流品 품계가 있는 일반 관리)과 구분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진실로 상고할 만한 옛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특별한 은혜를 받아 품계가 광록대부(光祿大夫)에까지 이르고 3대(代)나 봉해 준 것은 너무 분수에 지나친 영광이므로 의리상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정일 진인(正一眞人)으로 말하면 용호산의 상청궁(上淸宮)에 있는 도교의 신도를 통솔할 책임이 있으니, 도법을 전하는 제점(提點)보다는 약간 낫습니다. 상고하옵건대, 태의원 사(太醫院使)의 품계가 정5품이니, 의원이나 무당은 본래 서로 비등합니다. 그러니 정일 진인 역시 당연히 정5품을 수여해야 합니다. 조근(朝覲)이나 연회에 참예하는 것 역시 불편하니, 도류(道流)들을 이 사이에 참예하게 하는 것도 일체 정지해야 합니다.” 하였다.
1행
자고로 황로(黃老)와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한 연 소왕(燕昭王)ㆍ제 선왕(齊宣王)ㆍ진 시황(秦始皇)ㆍ한 무제(漢武帝) 같은 역대의 제왕은 먼 옛날이니 말할 것 없고, 도교를 높인 것은 당 현종(唐玄宗)보다 심한 자가 있지 않다. 당 현종 천보(天寶) 원년에 황제는 친히 노자에 제향하고 현원황제(玄元皇帝)로 봉했으며, 몸소 어버이 사당에 제향하고는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 문자(文子)를 통현진인(通玄眞人), 열자(列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에, 경상자(庚桑子)를 동허진인(洞虛眞人)에 봉하여 배향하였다. 처음에 태청궁(太淸宮)이 완성되자 기술자를 명하여 태백산(太白山)에서 흰 돌을 캐다가 현원황제의 상(像)을 만들어 남향하고 좌우에 현종과 숙종(肅宗 현종의 아들)의 상이 모시고 서 있게 하였다.
송 진종(宋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무신)에 천서(天書)를 얻었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신인(神人)이 성관(星冠 도사가 쓰는 관)과 붉은 옷을 입고 나에게 고하기를 ‘마땅히 천서를 내릴 것이니, 정전(正殿)에다가 황록도량(黃籙道場)를 베풀라.’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조원전(朝元殿)에서 재계하고 신의 주문(呪文)을 저장해 두었다. 그런데 마침 황성사(皇城司)에서 아뢰기를 ‘왼쪽 승천문(承天門) 지붕의 남쪽 귀퉁이에 황색 비단이 치미(鴟尾)위에 내려져 있다.’ 하므로 궁중의 사신을 시켜서 가보게 하였더니, 비단 길이가 두 길쯤 되는데 푸른 끈으로 묶여져 있으며 은은히 글자가 있었다.” 하였다. 재상인 왕단(王旦) 등이 재배하고 축하하니, 황제는 도보로 승천문에 이르러 우러러보고 재배한 다음, 진극수(陳克叟)를 시켜 읽게 하였다. 이 천서는 황색 글자로 3폭에 씌어져 있었는데 황금 궤에 넣었다가, 25년인 건흥(乾興) 원년(임술)에 황제가 붕(崩)하자 천서를 순장(殉葬)하였으니, 이 역시 도교를 높인 것의 하나이다.
휘종(徽宗) 중화(重和) 원년(무술)에 태학(太學)과 벽옹(辟雍 학궁(學宮)의 하나)에 각각 《황제내경(黃帝內經)》ㆍ《도덕경》ㆍ《장자》ㆍ《열자》에 대한 박사(博士) 1명을 두게 하였다. 채경(蔡京)이 “고금의 도교에 관한 일을 모아 기지(紀志)를 만들자.” 하니, 이에《도사(道史)》라는 명칭을 하사하고는, 장주(莊周)를 봉하여 미묘원통진군(微妙圓通眞君)을 삼고, 열어구(列禦寇)를 치허관묘진군(致虛觀妙眞君)에 봉하여 책명(冊命)을 행하고 혼원 황제(노자)에 배향하였다. 이때 임영소(林靈素)라는 도사가 있어서 존숭하는 일을 맡았다.
《송사(宋史)》 영소전(靈素傳)에 “본명은 영악(靈蘁)이었는데 선화(宣和 송 휘종의 연호) 때에 지금의 이름인 영소로 사명(賜名)하였다. 영소는 채경을 북부육동(北部六洞)의 마왕(魔王)과 제이동(第二洞)의 대귀두(大鬼頭)라 하고 동관(童貫)을 비천대귀모(飛天大鬼母)라 하여 황제에게 벨 것을 권하였다. 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를 보고는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시를 지어 올렸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소와 황이 문장가가 되지 못하고 / 蘇黃不作文章客
동과 채가 도리어 사직신 되었구려 / 童蔡飜爲社稷臣
삼십 년 동안 정론이 없었으니 / 三十年來無定論
간당이 누구인지 알 수 없네 / 不知姦黨是何人
그 다음날 황제는 이것을 채경에게 보이니, 채경은 황공해서 밖으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그의 관직은 ‘고상신소옥청부 우극서대선경 뇌정옥추원명 보화천사 동명문일계원응진전도보교종사 금문우객 충화전시신 행시진태재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 노군 개국공(高上神宵玉淸府右極西臺仙卿雷霆玉樞元明普化天師洞明文逸契元應眞傳道輔敎宗師金門羽客沖和殿侍宸行時進太宰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魯郡開國公)’이며 봉읍(封邑)이 8천 7백 호로서 실봉이 3천 호였고, 자옥방부통진달령원묘호국선생(紫玉方符通眞達靈元妙護國先生)이란 호를 하사하였다. 정화(政和) 7년(정유)에 휘종은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라 존칭했다.” 하였다. 원 성종(元成宗)은 방사(方士) 장여재(張與材)를 태소응신광도진인(太素應神廣道眞人)으로 삼아 강남 여러 도(道)의 도교를 통솔하게 하였다.
무릇 역대의 여러 임금들이 도교를 존숭하기는 쉬웠고 도교를 배척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불교를 높이고 도교를 배척하는 것을, 이단(異端)을 물리친 것이라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몽고(蒙古)의 헌종 몽가(憲宗蒙哥) 때에 북지(北地) 장춘궁(長春宮)의 도사가 번승(番僧)과 혐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번승은 달단(韃靼)의 임금을 달래면서 말하기를 “도경(道經)은 위작이고 황당한 말들입니다. 몽가 때에 도사가 불교를 배척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머리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도경을 불살라야 합니다.” 하였다. 달단의 임금은 과연 남군(南郡)ㆍ북군(北郡)에 있는 도장경(道藏經)을 불살라버리고 다만 노자의 《도덕경》을 허락했으며, 거의 도사를 멸하여 머리 깎고 중을 만들었다. 명 성조(明成祖)는 금단(金丹)과 도경의 책을 훼손하였다.
도교의 시초는 천전 도서(天篆道書)가 있는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그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수서》경적지에 “도경이란 맨 처음에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있었는데, 태원(太元)보다는 먼저 태어났고 자연의 기(氣)를 부여받아 충허(沖虛 회포가 담박하고 공허한 것)하고 응정(凝定) 원대하여 궁극을 알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지느니 겁수(劫數)가 끝나느니 하는 말은 대략 불경과 같다. 그들은 말하기를 ‘천존의 체(體)가 언제나 존재하고 불멸하여 매양 천지가 처음 개벽하게 되면 혹은 옥경(玉京)의 위, 또는 궁상(窮桑)의 들에 있어서 비도(祕道)를 전하는데 이를 개겁(開劫)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다.’ 한다. 그러나 이 개겁은 한 차례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연강(延康)ㆍ적명(赤明)ㆍ용한(龍漢)ㆍ개황(開皇)이 있는바, 이것이 그 연호이다. 이 사이의 거리는 41억만 년이다.
구제해 주는 대상은 모두 여러 천선(天仙)의 상품(上品)으로서 태상노군(太上老君)ㆍ태상장인(太上丈人)ㆍ천진황인(天眞皇人)과 오방(五方)의 천제(天帝) 및 여러 선관(仙官)이 있어서 서로서로 전수해 받는데 일반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 끼지 못한다. 이들이 말한 경(經) 역시 원일(元一)의 기(氣)를 받고 자연히 생긴 것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어서 이것도 천존과 같이 항상 존재하고 불멸한다. 그리하여 천지가 파괴되지 않으면 깊이 쌓여 있어 세상에 전하지 않다가 만일 겁운(劫運)이 열리게 되면 그 글이 스스로 나타난다.
이 글은 모두 여덟 글자로서 도체(道體)의 심오한 이치를 묘사한 것인데, 이를 천서라 한다. 글자는 크기가 사방 한 길쯤 되는데 8각에서 빛이 나와 광채가 휘황찬란한바, 자연히 마음이 놀라고 눈이 현황하여 비록 여러 천선(天仙)이라 하더라도 능히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천선이 개겁할 때에야 천진황인을 명하여 천음(天音)으로 고쳐 읽어 분석한 다음, 천진황인으로부터 여러 신선에 이르기까지 서로서로 계급을 두고 순서에 따라 전수해 준다. 그리하여 여러 신선이 전수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에 전수된다.” 하였다. 이는 바로 도교의 본말인바, 세속의 선비들이야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
1행
도가의 글씨는 32종이 있다. 명 나라 진계유(陳繼儒)의 《미공비급(眉公祕笈)》에 도가의 글씨를 기록하고는 “도가의 자학(字學)은 삼동경(三洞經) 교부(敎部)에 나온다.” 하였는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본부(本部) 운전(雲篆) 팔체육서문(八體六書文) 부자(符字) 팔현(八顯) 옥자결(玉字訣) 황문제서(皇文帝書) 천서(天書) 용장(龍章) 봉문(鳳文) 옥첩금서(玉牒金書) 석자(石字) 제소(題素) 옥자(玉字) 옥록(玉籙) 옥편(玉篇) 문생동(文生東) 옥찰(玉札) 단서(丹書) 옥책(玉策) 복운지서(福運之書) 낭규경문(琅虯璚文) 백은지륜(白銀之綸) 적서(赤書) 화련진문(火鍊眞文) 금호묵집자(金壺墨汁字) 경찰(瓊札) 자자(紫字) 자연지자(自然之字) 사회성자(四會成字) 낭간예서(琅簡蕊書) 석공(石碽).
보유(補遺)로는 무광(務光)의 도해서(倒薤書)와 석상선전(石上仙篆)이 있다.
《집고록(集古錄)》에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선전(仙篆)을 논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복주(福州)의 영태현(永泰縣)에 무명의 전서(篆書)가 관음원(觀音院) 뒷산 위에 있는데, 세속에서는 선전이라고 전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조금도 전각한 흔적이 없어서 마치 사람이 손가락으로 진흙에 글자를 만든 것 같으며, 둥근 돌 모양을 따라 수레 바퀴처럼 원형으로 씌어져 있어서 머리와 끝을 알지 못한다.”

도경(道經)
도가의 경(經)은 권질(卷帙)이 매우 많아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할 만하다.
송 나라《삼조국사지(三朝國史志)》에는 반고(班固)의 《한서》 예문지의 도가(道家) 외에 다시 신선을 열거해 놓고는 방기(方技)에 넣었다. 동한(東漢) 이후에 도가가 비로소 나타났는데, 진선(眞仙)의 경고(經誥)가 특별히 나왔다. 당 나라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때에 이 책들을 열거하여 도장(道藏)의 서목을 만들고 삼동경망(三洞瓊網)이라 한바, 총 3천 7백 44권이었다. 그 후 난리통에 혹은 파손되고 없어지기도 했었는데, 송 나라에서 다시 관원을 보내어 대조한바, 이 사실이 《노석지(老釋志)》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일찍이 이 서적을 구하여 7천여 권을 얻은 다음, 서현(徐鉉) 등을 명하여 교수(校讐)하게 하여 이 중에 중복된 것을 버리고 3천 7백 37권으로 만들었다. 송 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때에 왕흠약(王欽若) 등을 명하여 옛 서목을 대조해서 삭제도 하고 보충도 하니 모두 4천 3백 59권이었다. 동진부(洞眞部)가 6백 20권, 동원부(洞元部)가 1천 13권, 동신부(洞神部)가 1백 72권, 태진부(太眞部)가 1천 4백 7권, 태평부(太平部)가 1백 92권, 태청부(太淸部)가 5백 76권, 정일부(正一部)가 3백 70권인데, 이를 합하여 신록(新錄)을 만드니, 총 4천 3백 59권이며, 6부(部)가 3백 11가지였다. 또 편목(篇目)을 찬하여 올리니, 《보문통록(寶文統錄)》이라 사명(賜名)하였다.
《수서》 경적지에는 도경의 서목을 사부(四部)의 끝에 넣었으며, 당 나라 관소록(毋昭錄)에는 을부(乙部)와 병부(丙部)에 산재해 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도가에서 말하기를 삼동(三洞)과 삼태(三太)가 모두 옥경(玉京 옥황상제가 살고 있다는 선경)에 있다 하는데, 상진(上眞)만은 구해 볼 수가 없으며, 장군방(張君房)이 수집한 도서는 모두 4천 5백 65권이었는데, 숭관(崇觀 송 휘종의 연호인 숭녕(崇寧)ㆍ대관(大觀)) 사이에 증가되어 5천 3백 87권에 이르렀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도서(道書)에 1권을 규(㢧)로 쓰는데 《진고(眞誥)》에는 권(卷)과 같이 쓴다 하였다. 혹은 규()로도 쓰는데 《정자통(正字通)》에 “음은 주(周)이다. 도서에 1권을 1규()라고 하는바, 도구성(陶九成 구성은 도 종의 (陶宗儀)의 자)의 《설부(說郛)》에 썼다.” 하였다. 구본(舊本) 《자휘보(字彙補)》의 일설(一說)에는 규()는 곧 권(券)자라고 하였으며, 《자전(字典)》에는 양신(楊愼)의 《전주고운(轉注古韻)》을 인용하여 “규()는 음이 규(樛)이니 곧 도경(道經)에서 이를 빌려 권질(券帙)의 권(卷)자로 쓴다.” 하였다. 《설문(說文)》에 의하면 “규(糾)는 마땅히 규()로 해야 한다. 규(糾)는 두르는 것[繞]이다. 도경에 있는 규(㢧)는 마땅히 규()로 써야 한다.” 하였다. 《동관시론(東觀詩論)》에 “소송(小宋 송기(松祈)를 가리킨다)의 태을궁시(太乙宮詩)에,
고목은 천 길이나 높고 / 古木千尋竦
신선 그림은 몇 폭이나 열렸는가 / 仙圖幾弔開
했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진고》에 1권을 1조(弔)라고 했다.” 하였다. 《진고》에 “규()는 곧 권(卷)자이다.” 한 것은 글자를 약자로 쓴 것이니, 조(弔)자가 아닌데, 이것을 모른 것이다. 벽허자(碧虛子) 진경원(陳景元)은 《진고》를 근거로 하여 이 글자를 편(篇)자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틀린 것이다.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도서에는 1권을 규()라고 하였고, 《속설부(續說郛)》에는 포형(包衡)이 말하기를 ‘도서에 1권을 1규(㢧)라고 하는데 음은 주(周)이다. 규(㢧)는 규()로도 쓰는데 축(軸)과 같다’ 했다.” 하였다. 제가(諸家)의 해석이 대동소이한바, 대개 권(卷)과 같다.
진(晉) 나라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도경의 총목이 모두 6백 70여 종인데,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삼황내문(三皇內文)》 천ㆍ지ㆍ인 3권ㆍ《미언(微言)》3권ㆍ《원문(元文)》상ㆍ중ㆍ하 3권ㆍ《내시경(內視經)》ㆍ《혼성경(混成經)》2권ㆍ《문시선생경(文始先生經)》ㆍ《현록(玄錄)》2권ㆍ《역장연년경(曆藏延年經)》ㆍ《구생경(九生經)》ㆍ《남궐기(南闕記)》ㆍ《이십사생경(二十四生經)》ㆍ《협룡자기(協龍子記)》7권ㆍ《구선경(九仙經)》ㆍ《구궁경(九宮經)》5권ㆍ《영복선경(靈卜仙經)》ㆍ《삼오중경(三五中經)》ㆍ《십이화경(十二化經)》ㆍ《선상경(宣常經)》ㆍ《구변경(九變經)》ㆍ《절해경(節解經)》ㆍ《노군옥력진경(老君玉曆眞經)》ㆍ《추양자경(鄒陽子經)》ㆍ《묵자침중오행기(墨子枕中五行記)》5권ㆍ《일보경(溢寶經)》ㆍ《현동경(玄洞經)》10권ㆍ《식민경(息民經)》ㆍ《학명경(鶴鳴經)》ㆍ《기산경(箕山經)》10권ㆍ《원시경(元示經)》10권ㆍ《녹대경(鹿臺經)》ㆍ《자연경(自然經)》ㆍ《소동경(小僮經)》ㆍ《음양경(陰陽經)》ㆍ《하락내기(河洛內紀)》7권ㆍ《양생서(養生書)》1백 5권ㆍ《거형도성경(擧形道成經)》5권ㆍ《태평경(太平經)》50권ㆍ《도기경(道機經)》5권ㆍ《구경경(九敬經)》ㆍ《견귀기(見鬼記)》ㆍ《갑을경(甲乙經)》1백 70권ㆍ《무극경(無極經)》ㆍ《청룡경(靑龍經)》ㆍ《관씨경(官氏經)》ㆍ《중황경(中黃經)》ㆍ《진인옥태경(眞人玉胎經)》ㆍ《태청경(太淸經)》ㆍ《도근경(道根經)》ㆍ《통명경(通明經)》ㆍ《후명도(候命圖)》ㆍ《안마경(按摩經)》ㆍ《반태포경(反胎胞經)》ㆍ《도인경(導引經)》10권ㆍ《침중청기(枕中淸記)》ㆍ《원양자경(元陽子經)》ㆍ《환화경(幻化經)》ㆍ《현녀경(玄女經)》ㆍ《순화경(詢化經)》ㆍ《소녀경(素女經)》ㆍ《금화산경(金華山經)》ㆍ《팽조경(彭祖經)》ㆍ《봉망경(鳳網經)》ㆍ《진사경(陳赦經)》ㆍ《소명경(召命經)》ㆍ《자도경(子都經)》ㆍ《보신기(保神記)》ㆍ《장허경(張虛經)》ㆍ《귀곡경(鬼谷經)》ㆍ《천문자경(天門子經)》ㆍ《능소자안신기(凌霄子安神記)》ㆍ《용성경(容成經)》ㆍ《거구자황산공기(去丘子黃山公記)》ㆍ《입산내경(入山內經)》ㆍ《왕자오행요진경(王子五行要眞經)》ㆍ《내보경(內寶經)》ㆍ《소이경(小餌經)》ㆍ《사규경(四規經)》ㆍ《홍보경(鴻寶經)》ㆍ《명경경(明鏡經)》ㆍ《추생연명경(鄒生延命經)》ㆍ《일월임경경(日月臨鏡經)》ㆍ《안혼기(安魂記)》ㆍ《오언경(五言經)》ㆍ《황도경(皇道經)》ㆍ《주중경(柱中經)》ㆍ《구음경(九陰經)》ㆍ《영보황자심경(靈寶皇子心經)》ㆍ《잡집(雜集)》ㆍ《서록(書錄)》ㆍ《용교경(龍蹻經)》ㆍ《은함옥궤기(銀函玉匱記)》ㆍ《정기경(正機經)》ㆍ《금판경(金版經)》ㆍ《평형경(平衡經)》ㆍ《황로선록(黃老仙錄)》ㆍ《비구진경(飛龜振經)》ㆍ《원도경(原都經)》ㆍ《녹로교경(鹿盧蹻經)》ㆍ《현원경(玄元經)》ㆍ《도형기(蹈形記)》ㆍ《일정경(日精經)》ㆍ《수형도(守形圖)》ㆍ《혼성경(渾成經)》ㆍ《좌칠도(坐七圖)》ㆍ《삼시집(三尸集)》ㆍ《관와인도(觀臥引圖)》ㆍ《호신신치백병경(呼身神治百病經)》ㆍ《함경도(含景圖)》ㆍ《수산귀로매치사정경(收山鬼老魅治邪精經)》3권ㆍ《관천도(觀天圖)》ㆍ《입오독중기(入五毒中記)》ㆍ《목지도(木芝圖)》ㆍ《휴량경(休粮經)》3권ㆍ《균지도(菌芝圖)》ㆍ《채신약치작비법(採神藥治作祕法)》3권ㆍ《육지도(肉芝圖)》ㆍ《등명산도강해칙지신법(登名山渡江海勅地神法)》3권ㆍ《석지도(石芝圖)》ㆍ《조태백낭중요(趙太白囊中要)》5권ㆍ《대백잡지도(大魄雜芝圖)》ㆍ《입온기역병대금(入瘟氣疫病大禁)》7권ㆍ《오악경(五岳經)》5권ㆍ《수치백귀소오악승태산주자기(收治百鬼召五岳承太山主者記)》3권ㆍ《은수기(隱守記)》ㆍ《흥리궁택궁사법(興利宮宅宮舍法)》5권ㆍ《동정도(東井圖)》ㆍ《단호랑금산림기(斷虎狼禁山林記)》ㆍ《허원경(虛元經)》ㆍ《소백리충사기(召百里虫蛇記)》ㆍ《견우중경(牽牛中經)》ㆍ《만필고구선생법(萬畢高丘先生法)》3권ㆍ《왕미기(王彌記)》ㆍ《왕교양성치신경(王喬養性治身經)》3권ㆍ《납성기(臘成記)》ㆍ《복식금기경(服食禁忌經)》ㆍ《육안기(六安記)》ㆍ《입공익산경(立功益算經)》ㆍ《평도기(平道記)》ㆍ《도사탈산율(道士奪算律)》3권ㆍ《정심기(定心記)》ㆍ《이문자기(移門子記)》ㆍ《귀문경(龜文經)》ㆍ《귀병병(鬼兵法)》ㆍ《산양기(山陽記)》ㆍ《입망술(立亡術)》ㆍ《옥책기(玉策記)》ㆍ《연형기(鍊形記)》5권ㆍ《팔사도(八史圖)》ㆍ《극공도요(郄公道要)》ㆍ《입실경(入室經)》ㆍ《녹리선생장생집(甪里先生長生集)》ㆍ《좌우계(左右契)》ㆍ《소군도의(少君道意)》10권ㆍ《옥력경(玉曆經)》ㆍ《번영석벽문(樊英石壁文)》3권ㆍ《승천의(昇天儀)》ㆍ《사령경(思靈經)》3권ㆍ《구기경(九奇經)》ㆍ《용수경(龍首經)》ㆍ《갱생경(更生經)》ㆍ《형산기(荊山記)》ㆍ《사금경(四衿經)》10권ㆍ《공안선연적부자대람(孔安仙淵赤斧子大覽)》7권ㆍ《식일월정경(食日月精經)》ㆍ《동군지선각로요기(董君地仙却老要記)》ㆍ《식육기경(食六氣經)》ㆍ《이선생구결주후경(李先生口訣肘後經)》2권ㆍ《단일경(丹一經)》ㆍ《태식경(胎息經)》ㆍ《행기치병경(行氣治病經)》ㆍ《승중경(勝中經)》10권ㆍ《백수섭제경(百守攝提經)》ㆍ《단호경(丹壺經)》ㆍ《민산경(岷山經)》ㆍ《위백양내경(魏伯陽內經)》ㆍ《일월주식경(日月廚食經)》ㆍ《보삼강육기경(步三罡六紀經)》ㆍ《입군경(入軍經)》ㆍ《육음옥녀경(六陰玉女經)》ㆍ《사군요용경(四君要用經)》ㆍ《금안경(金雁經)》ㆍ《삼십육수경(三十六水經)》ㆍ《백호칠변경(白虎七變經)》ㆍ《도가지행선경(道家地行仙經)》ㆍ《황백요경(黃白要經)》ㆍ《팔공황백경(八公黃白經)》ㆍ《천사신기경(天師神器經)》ㆍ《침중황백경(枕中黃白經)》5권ㆍ《백자변화경(白子變化經)》ㆍ《이재경(移災經)》ㆍ《압화경(厭禍經)》ㆍ《중황경(中黃經)》ㆍ《문인경(文人經)》ㆍ《연자천지인경(涓子天地人經)》ㆍ《최문자주후경(崔文子肘後經)》ㆍ《신광점방래경(神光占方來經)》ㆍ《수선경(水仙經)》ㆍ《시해경(尸解經)》ㆍ《중둔경(中遁經)》ㆍ《이군포천경(李君包天經)》ㆍ《포원경(包元經)》ㆍ《황정경(黃庭經)》ㆍ《연체경(淵體經)》ㆍ《태소경(太素經)》ㆍ《화개경(華蓋經)》ㆍ《행주경(行廚經)》ㆍ《자래부(自來符)》ㆍ《금광부(金光符)》ㆍ《태현부(太玄符)》3권ㆍ《통천부(通天符)》ㆍ《오정부(五精符)》ㆍ《석실부(石室符)》ㆍ《옥책부(玉策符)》ㆍ《침중부(枕中符)》ㆍ《소동부(小童符)》ㆍ《구령부(九靈符)》ㆍ《육군부(六君符)》ㆍ《현도부(玄都符)》ㆍ《황제부(黃帝符)》ㆍ《소천삼십육장군(少千三十六將軍符)》ㆍ《연명신부(延命神符)》ㆍ《천수신부(天水神符)》ㆍ《사십구진부(四十九眞符)》ㆍ《천수부(天水符)》ㆍ《청룡부(靑龍符)》ㆍ《백호부(白虎符)》ㆍ《주작부(朱雀符)》ㆍ《현무부(玄武符)》ㆍ《주태부(朱胎符)》ㆍ《칠기부(七機符)》ㆍ《구천발병부(九天發兵符)》ㆍ《구천부(九天符)》ㆍ《노경부(老經符)》ㆍ《칠부(七符)》ㆍ《대한액부(大捍厄符)》ㆍ《현자부(玄子符)》ㆍ《무효경(武孝經)》ㆍ《연군용호삼낭벽병부(燕君龍號三囊辟兵符)》ㆍ《포원부(包元符)》ㆍ《침희부(沈羲符)》ㆍ《우교부(禹蹻符)》ㆍ《소재부(消災符)》ㆍ《팔괘부(八卦符)》ㆍ《감건부(監乾符)》ㆍ《뇌전부(雷電符)》ㆍ《위희부(威喜符)》ㆍ《현정부(玄精符)》ㆍ《음양대진부(陰陽大鎭符)》ㆍ《압괴부(壓怪符)》10권ㆍ《육갑통령부(六甲通靈符)》10권ㆍ《옥부부(玉斧符)》10권ㆍ《만필부(萬畢符)》ㆍ《거승부(巨勝符)》ㆍ《옥력부(玉曆符)》ㆍ《침중부(枕中符)》ㆍ《호공부(壺公符)》20권ㆍ《육음행주용태석실삼금오목방종부(六陰行廚龍胎石室三金五木防終符)》합5백권ㆍ《팔위오승부(八威五勝符)》ㆍ《북대부(北臺符)》ㆍ《치백병부(治百病符)》10권ㆍ《구대부(九臺符)》9권ㆍ《군화소치부(軍火召治符)》ㆍ《채녀부(採女符)》.
당(唐) 나라 단성식(段成式)의《유양잡조(酉陽雜俎)》에 선경(仙經)의 도서가 모두 24종인데,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자일왕검(雌一王檢)》ㆍ《사규명경(四規明經)》ㆍ《오주중경비귀질(五柱中經飛龜帙)》ㆍ《비황자경(飛皇子經)》ㆍ《함경도(含景圖)》ㆍ《와인도(臥引圖)》ㆍ《원지도(園芝圖)》ㆍ《대외신지도(大隗新芝圖)》ㆍ《견우경(牽牛經)》ㆍ《옥진기(玉珍記)》ㆍ《단대경(丹臺經)》ㆍ《금루경(金樓經)》ㆍ《중황장인경(中黃丈人經)》ㆍ《협룡자녹대경(協龍子鹿臺經)》ㆍ《옥태경(玉胎經)》ㆍ《관씨경(官氏經)》ㆍ《봉망경(鳳網經)》ㆍ《육음옥녀경(六陰玉女經)》ㆍ《백호칠변경(白虎七變經)》ㆍ《등중유수섭제경(縢中有首攝提經)》ㆍ《적갑경(赤甲經)》ㆍ《금강팔첩록(金剛八疊錄)》.
이상 기록한 것 중에는 《포박자》의 도경 이름과 같은 것도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기록하였다.
【보유(補遺)】 무릇 48종인바,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옥추경(玉樞經)》 《포박자》와 단 성식의 도경 목록에 《옥추경》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는 두광정(杜光庭) 등의 위작(僞作)이라는 설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나 보다.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책에는 “《옥추경》을 뇌성보화천존법어(雷聲普化天尊法語)라 칭하는데, 두광정 등이 위찬(僞撰)한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 또 도가와 석가의 이본(異本)이 있다.ㆍ《참동계(參同契)》ㆍ《청화비문(靑華祕文)》ㆍ《영보필법(靈寶畢法)》ㆍ《금고(金誥)》ㆍ《입두악결(入頭嶽訣)》ㆍ《내관옥문보록(內觀玉文寶籙)》ㆍ《천둔련마법(天遁鍊魔法)》ㆍ《용호경(龍虎經)》ㆍ《청정심인경(淸淨心印經)》ㆍ《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ㆍ《십대동천령보본원경(十大洞天靈寶本元經)》ㆍ《태소랑서(太霄琅書)》ㆍ《상방대동진원묘경(上方大洞眞元妙經)》ㆍ《사십구장경(四十九章經)》ㆍ《사마자미(司馬子微)》ㆍ《천은자(天隱子)》ㆍ《장춘자(張春子)》의 수첩외단비요(手帖外丹祕要)》ㆍ《단방감원(丹房鑑源)》ㆍ《금단경(禁壇經)》ㆍ《영보경(靈寶經)》ㆍ《과의연생경(科義延生經)》ㆍ《태일경(太一經)》ㆍ《진무경(眞武經)》ㆍ《용왕경(龍王經)》ㆍ《중왕경(中王經)》ㆍ《호명경(護命經)》ㆍ《노자력장중경(老子歷藏中經)》ㆍ《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ㆍ《삼존보록(三尊譜錄)》ㆍ《태청금액신기경(太淸金液神氣經)》ㆍ《오악진형도(五岳眞形圖)》황제(黃帝)가 산에 가서 몸소 형상을 그린 것이다.ㆍ《동령진경(洞靈眞經)》ㆍ동방삭(東方朔)의《매귀서(罵鬼書)》,《도서(道書)》20권, 위백양(魏伯陽)의《참동계(參同契)》《삼상류(三相類)》《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성명규지(性命圭旨)》ㆍ《수양총서(壽養叢書)》, 여구방(閭丘方)의 《태평경(太平經)》13편ㆍ《동소지(洞霄志)》,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10권ㆍ《포박자(抱朴子)》내편(內篇)ㆍ외편(外篇) 1백 16편, 도홍경(陶弘景)의 《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ㆍ하(夏) 나라 무광(務光)이 염교를 거꾸로 해서 쓴《태상긴진경(太上緊眞經)》3권ㆍ 왕문록(王文錄)의 《태식경소(胎息經疏)》ㆍ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雲笈七籤)》.
【노자도덕경】 1권으로 주(周) 나라 이이(李耳)가 찬한 것이다. 도덕경을 찬하여 주 나라 관문(關門)을 지키던 윤희(尹喜)에게 주니, 바로 주 평왕(周平王) 42년이었다. 모두 5천 7백 48자이며 81장으로 되어 있다. 한 경제(漢景帝)는 《황자(黃子)》와 《노자(老子)》는 의미가 더욱 깊다 하여, 자(子)를 경(經)으로 고치고는 비로소 도학(道學 도교의 학)을 세워 조야(朝野)로 하여금 모두 외게 하였다. 조위(曹魏 삼국 시대의 위(魏) 나라) 때 산양(山陽)의 왕필(王弼)이 주(注)했고, 남조(南朝) 때 송(宋) 나라의 범양(范陽) 사람 조충지(祖沖之)가 해석하였으며, 휴령(休寧) 사람 김안절(金安節)이 《역로통언(易老通言)》과 《노군실록(老君實錄)》을 저술하였다.
관복고사(觀復高士) 사수호(謝守灝)는 말하기를 “《도덕경》은 당 나라 부혁(傅奕)이 여러 본(本)을 상고하여 그 글자를 낱낱이 교감하였다. 항우첩본(項羽妾本)이 있는데, 제(齊) 나라 무평(武平 북제(北齊) 후주(後主)의 연호) 5년에 팽성(彭城) 사람이 항우의 첩 무덤을 발굴하여 얻은 것이며, 안구망지본(安丘望之本)이 있는데, 위(魏) 나라 태화(太和 북위(北魏) 효 문제(孝文帝)의 연호) 때에 도사 구겸지(寇謙之)가 찾아낸 것이며, 하상장인본(河上丈人本)이 있는데 이것은 제(齊) 나라 처사 구미(仇微)가 전한 것이다. 이 삼가(三家)의 본은 5천 7백 22자로서 한비(韓非)의 《유로(喩老)》와 서로 맞지 않는다. 또 낙양(洛陽)에 관본(官本)이 있는데 5천 6백 35자이고, 왕필본(王弼本)은 5천 6백 83자, 또는 5천 6백 10자이며, 하상공본(河上公本)은 5천 3백 55자, 또는 5천 5백 90자로서 여러 본이 서로 틀린다.” 하였다. 석 적지(釋適之)의 《금호기(金壺記)》에 “주 나라 뇌향(瀨鄕)의 석실(石室) 가운데에 전서(篆書)로 쓴 《노자도덕경》이 있는데 채옹(蔡邕)이 예서(隸書)로 증거했다.” 하였다.
제가경해(諸家經解) 엄군평(嚴君平)의 《노자지귀(老子指歸)》, 양호(羊祜)의 《노자주(老子注)》2권, 나중(羅仲)의 《노자주》2권, 종회(鍾會)의 《노자주》2권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본조(本朝)에 박세당(朴世堂)의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2권과 홍석주(洪奭周)의 《노자도덕경주(老子道德經注)》2권이 있다. 초굉(焦竑)의 《노자익(老子翼)》 초굉이 여러 주가(注家)를 모아 《노자익》을 만들었다. 주가는 모두 65이다. 에 “도경에 《노자력장중경(老子歷藏中經)》이 있는데 어쩌면 노자가 지은 것일 것이다.” 하였다. 우선 여기에 기록하여 후일 밝게 변별할 자를 기다리는 바이다.
【장자남화경(莊子南華經)】 3권으로 주 나라 장주(莊周)가 찬한 것이다. 모두 30편(篇)으로 수십만 자(字)에 이르는데 편은 다시 내편(內篇) 7편과 외편(外篇)ㆍ잡편(雜篇) 셋으로 나뉜다. 진(晉) 나라 탁군(涿郡) 사람 노심(盧諶) 이 주(注) 했으며, 남조 때 송 나라 범양(范陽) 사람 조충지(祖沖之)가 해석하였다. 진(晉) 나라 초군(譙郡) 사람 대옹(戴顒)은 《장주대지(莊周大旨)》를 저술했고, 무명씨(無名氏 즉 저자미상)는 《장자궐의(莊子闕疑)》를 지었으며, 곽상(郭象)은 《익장(翼莊)》을 지었고, 명(明) 나라 원숭도(袁崇道)는 《도장(導莊)》을 지었고, 원굉도(袁宏道)는 《광장(廣莊)》을 지었다.
곽자현(郭子玄 자현은 곽상의 자)은 이르기를 “시골 선비들이 망령되이 기괴한 말을 지어냈으니, 알혁의수지수위언유부자서지편(閼奕意修之首危言游鳧子胥之篇)은 모두 교묘하고 잡된 것으로 10분의 3을 차지한다.” 하였다. 엄군평(嚴君平)은 《노자지귀(老子指歸)》를 지으면서 《장자》를 인용한 것이 모두 수십 조항인데, 한결같이 《장자》에 들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임운명(林雲銘)은 《독장자법(讀莊子法)》을 지었는데 마치 패(貝)를 보는 것과 같다.
《장자》를 경(經)이라고 한 것은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원년에 있었던 것으로, 노자를 높여 현원황제(玄元皇帝)라 하고 장자를 높여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 하고 그의 저서를 높여 《남화경(南華經)》이라 한바, 남화란 장자가 살던 마을 이름이다.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때에 《천록임랑서목(天祿琳琅書目)》에 실려 있는 송판(宋版) 《남화경》에 노자의 상(像)이 있다. 명 나라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때에 사인(舍人) 왕불(王紱)이 칙명을 받들고 찬(贊)을 지었다. 혜시(惠施)는 장자의 제자이다.
제가경해 진 나라 곽상(郭象)의 《장자주(莊子注)》, 진 나라 상수(尙秀)의 《장자주》, 초 굉(焦竤)의 《장자익(莊子翼)》 초굉이 여러 주가를 모아 《장자익》을 만들었다. 주가는 모두 49이다.
【열자(列子)】 8편으로 주 나라 열어구(列禦寇)가 찬한 것이다. 열자의 이름은 어구로 정(鄭) 나라 사람이다. 그의 저서는 모두 8편으로 되어 있는데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의 《사기(史記)》에는 열자를 전(傳)에 넣지 않았다. 이 책은 비록 유향(劉向)의 《교수략(校讐略)》에 실려 있는 숫자와 합하긴 하지만 사실인즉 전오씨(典午氏)가 남도(南渡)한 이후에 바야흐로 제가(諸家)에서 섞여나왔을 것이니 진본(眞本)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당 현종 천보 원년에 열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을 삼고 현원황제에 배향했으며, 송 휘종(宋徽宗) 중화(重和) 원년에 열자를 치허관묘진군(致虛觀妙眞君)으로 봉한 다음 책명(冊命)을 행하고 혼원황제(混元皇帝 노자. 현원황제와 같음)에 배향하는 한편, 태학(太學)과 벽옹(辟雍)에 《내경(內經)》ㆍ《도덕경》ㆍ《장자》ㆍ《열자》에 대한 박사(博士)를 2명씩 두었다.
【문자(文子)】 노자의 제자로 이 책에는 평왕문도(平王問道)가 있다. 당 현종 천보 원년에 문자를 통현진인(通玄眞人)으로 봉하고 현원황제에 배향하였다.
【경상자(庚桑子)】 이름은 초(楚)로 주 나라 때 사람이다. 당 현종 천보 원년에 경상자를 통허진인(通虛眞人)으로 봉하고 현원황제에 배향하였다.
【석각도경(石刻道經)】 도경도 석각(石刻)한 것이 있어 마치 유가(儒家)의 석경(石經)이 있는 것과 같으므로 아울러 기록한다.
석각도덕경(石刻道德經) 명 나라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이 《도덕경》에 쓰기를 “《진사(晉史)》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가 산음(山陰)의 담양촌(曇村)에 사는 도사를 위하여 《도덕경》을 써주고는 거위를 채롱에 넣고 돌아갔다 하는데, 《광금석운부고(廣金石韻府考)》를 상고해 보면 여기에 《도덕경》이 실려 있은즉, 후인들이 돌에 새겼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하였다.
또 청 성조(淸聖祖)의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畫譜)》 서변증(書辨證)을 상고해 보면 여기에 《왕씨법서원(王氏法書苑)》을 인용하였는데, 이백(李白)이 우군(右軍)의 글씨에 대하여 쓴 것이 두 편이 있다. 하나는 《황정경(黃庭經)》을 써주고 거위와 바꾼 일이며, 하나는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와 바꾼 일이다. 그 첫편에,
우군이 본래 청진하니 / 石軍本淸眞
소쇄하게 풍진을 벗어났네 / 瀟灑出風塵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 / 山陰遇羽客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맞이하였네 / 要此好鵝賓
흰 비단에 도경을 쓰니 / 掃素寫道經
필법의 정묘함 신과 같았네 / 筆精妙入神
글씨 다 쓰자 거위 채롱에 넣고 가니 / 書罷籠鵝去
언제 주인과 작별한 적 있었나 / 何曾別主人
하였는데, 이는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를 얻은 일을 말한 것이다.
일찍이 송 나라 하송(夏竦)의 《고문사성운해(古文四聲韻解)》를 상고해 보니, 여기에 《고노자(古老子)》를 인용하였다. 그렇다면 《노자》는 고본(古本) 전각(篆刻)이 있는 것이다.

석각황정경(石刻黃庭經) 고사기(高士奇)의 《천록지여(天祿識餘)》에 “진(晉) 나라 왕우군이 33세에 난정서(蘭亭敍)를 썼고, 37세에 《황정경》을 썼는데, 후세 사람들이 돌에 새겨 전한다.” 하였다. 《동관여론(東觀餘論)》을 상고해 보면 “《황정경》을 세상에서는 일소(逸少 왕희지의 자)가 썼다고 전하는데, 내가 일찍이 상고해 보니 틀린 말이다.” 하였다. 《왕씨법서원(王氏法書苑)》에는 “황백사(黃伯思《동관여론》의 저자)의 말이 틀렸다. 《황정경》을 써주고 거위를 바꾼 것과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를 바꾼 것은 각기 두 일이다. 이태백(李太白)은 이것이 두 가지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왕우군의 글씨에 대하여 쓴 것이 2편이다. 그 1편인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경호의 맑은 물결 일렁이는데 / 鏡湖淸水漾淸波
광객이 배타고 돌아가니 고상한 흥취 많고야 / 狂客歸舟逸興多
만일 산음의 도사를 만난다면 / 山陰道士如相見
응당 황정경 써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 / 應寫黃庭換白鵝
하였는데, 이는 《황정경》을 써주고 거위를 얻은 일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광금석운부고(廣金石韻府考)》를 상고해 보면 왕유공(王維恭)의 《황정경》이 있으니, 어쩌면 왕유공이 쓴 것이 석각본인지 모르겠다.

천태경당(天台經幢) 이것은 《광금석운부고》에 보이는데, 석각 도경인 듯하다. 아직 뒤에 참고하기로 한다.

고노자(古老子) 《광금석운부고》를 상고해보면 여기에 《고노자》가 있는바, 이것도 후세에서 돌에 새겨 전한 것이다. 또 하송(夏竦)의 《고문사성운해(古文四聲韻解)》에 보인다.
【도가사첩(道家史牒)】 도가에도 실기(實紀)가 있어 사첩(史牒)과 같다. 그러므로 도사(道史)ㆍ선사(仙史)라는 명칭이 있으니, 지난 일을 가지고 장래 일을 알 수 있다. 여러 서적에서 널리 뽑아 대략 수록을 하나, 짐작건대 반드시 누락이 있을 것이다.
도가 사첩(道家史牒)은 한(漢) 나라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72인, 진(晉) 나라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송 나라 채경(蔡京)의 《도사(道史)》, 등목(鄧牧)의 《장천우모산지(張天雨茅山志)》, 두광정(杜光庭)의 《동천복지기(洞天福地記)》, 장송여(張松如)의 《귀대완염문(龜臺琬琰文)》에 신선 72인, 왕언(王言)의 《서화선록(西華仙籙)》에 여선(女仙) 36인, 부운도사(浮雲道士)의 《선사(仙史)》에 고금의 진인(眞人)과 열선(列仙) 47인, 증조(曾慥)의 《집선전(集仙傳)》, 심분(沈份)의 《속신선전(續神仙傳)》, 우리나라 본조(本朝)에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 불초(不肖)가 찬한 《속보해동이적(續補海東異蹟)》, 무명씨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일본(日本) 사람의 《신선전(神仙傳)》이 있다.
【도가화첩(道家畫牒)】 옛사람들이 선도(仙道)의 유적을 회화(繪畫)한 것이 있는바, 이 역시 민멸(泯滅)하기 어려우므로 간략히 도가 사첩의 끝에 부록한다.
도가화첩은 곽충서(郭忠恕)의 누거선도(樓居仙圖), 당 나라 관동(關仝)의 선유도(仙遊圖), 촉(蜀) 나라 석각(石恪)의 옥황조회도(玉皇朝會圖), 주량(朱梁 오대(五代) 시대 주전충(朱全忠)의 후량(梁後)) 장도(張圖)의 자미조회도(紫微朝會圖), 무명씨의 황정경도(黃庭經圖), 육황(陸晃)의 장생보명진군(長生保命眞君)ㆍ구천정명진군(九天定命眞君)ㆍ천조강액진군(天曹降厄眞君)ㆍ천조익산진군(天曹益算眞君)ㆍ천조장록진군(天曹掌祿眞君)ㆍ구천사명진군(九天司命眞君)ㆍ천조사복진군(天曹賜福眞君)과 이팔백(李八百)의 누이가 《황정경》을 생산해 내는 상(像), 임지미(林知微)의 팽조예북두도(彭祖禮北斗圖), 진(晉) 나라 위협(衛協)의 목천자겸요지도(穆天子謙瑤池圖).

선약설(仙藥說)
도교 이외에 다시 일종의 선약(仙藥)에 대한 학설이 있는바, 바로 복이술(服餌術)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약물이란 것이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진실로 황당하다. 굳이 취하여 기록한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 나오는 선약(仙藥)은 다음과 같다. 종산백교(鍾山白膠)ㆍ낭풍석뇌(閬風石腦)ㆍ태미자마(太微紫麻)ㆍ태극정천(太極井泉)ㆍ야진일초(夜津日艸)ㆍ청진벽적(靑津碧荻)ㆍ원구자내(圓丘紫柰)ㆍ백수령합(白水靈蛤)ㆍ팔천적해(八天赤薤)ㆍ창랑청전(凔浪靑錢)ㆍ삼십육지(三十六芝)ㆍ용태예천(龍胎禮泉)ㆍ붕악전류(崩岳電柳)ㆍ현곽기총(玄郭綺蔥)ㆍ회수옥정(佪水玉精)ㆍ백랑상(白琅霜)ㆍ월례(月醴)ㆍ홍단(虹丹)ㆍ홍단(鴻丹)ㆍ청요여령화(靑腰女靈華)ㆍ북제현주(北帝玄珠)ㆍ오정금(五精金)ㆍ백호탈치(白虎脫齒)

도관(道觀)
【도관(道觀)】 한 원제(漢元帝)가 병에 걸리자 방사(方士)를 구하니, 한중(漢中)에서 도사 왕중도(王仲都)를 보내왔으므로 곤명관(昆明觀)에 처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후세에서 도사가 거처하는 곳을 모두 관(觀)이라 하였다.
【정사(精舍)】《삼국지(三國志)》강표전(江表傳)에 “도사 우길(于吉)이 오회(吳會) 지방을 왕래하면서 정사를 세우고 향을 사르고 도서(道書)를 읽었다. 손책(孫策)은 그를 베면서 말하기를 ‘옛날 남양(南陽) 사람 장진(張津)이 교주 자사(交州刺使)가 되어 항상 붉은 파두(帕頭 머리를 싸매는 것)를 쓰고 거문고를 타며 향을 사르고 사속(邪俗)한 도서를 읽었는데 만이(蠻夷)에게 살해되고 말았은즉, 이는 매우 무익(無益)하다.’ 했다.” 하였다. 그렇다면 도사가 거처하는 곳 역시 정사라 하는 것이다.
당 나라 《혼원육전(混元六典)》에는 천하의 관(觀)이 1천 6백 87곳이라 하였으며, 청(淸) 나라 《회전(會典)》에는 성조(聖祖) 강희(康熙) 4년 직성(直省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성(省))에 칙명으로 세운 것을 통계해 보니, 큰 사묘(寺廟)가 총 6천 73곳이며 작은 사묘가 총 5만 8천 6백 82곳이며, 도사가 총 2만 1천 2백 86명이라 한바, 석교(釋敎) 하(下)에 자세히 보인다.

상설(像設)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도가의 학설은 노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른바 삼청(三淸)이란 대체로 불가의 삼신(三身)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삼신에 법신(法身)은 석가(釋家)의 본성이고, 보신(報身)은 석가의 덕업(德業)이며, 육신(肉身)은 석가의 진신(眞身)으로 실지로 존재한 인물이다. 그런데 지금에 이 교를 믿는 자들이 마침내 나누어 삼상(三像)을 만들고 아울러 진열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본지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도가의 무리들이 저 불가의 짓을 모방하고자 하여 마침내 노자를 높여 삼청인 원시천존(元始天尊)ㆍ태상도군(太上道君)ㆍ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하고 호천(昊天) 상제(上帝)는 도리어 그 밑에 앉게 되었으니, 패려(悖戾)하고 참역(僣逆)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또 옥청원시천존(玉淸元始天尊)은 이미 노자의 법신이 아니고 상청태상도군(上淸太上道君)은 또 노자의 보신이 아니다. 가령 두 상이 있다 하더라도 노자와 하나가 될 수는 없으며, 노자는 또 상청태상군(上淸太上老君)이 되니, 이는 불가의 잘못을 따른 것으로 더욱 잘못된 것이다. 노자의 학파들은 다만 자기의 교주인 노자ㆍ관윤(關尹)ㆍ열자ㆍ장자 등을 제사하고 안기생(安期生)ㆍ위백양(魏伯陽) 등에게까지 미칠 뿐, 천지(天地)와 백사(白祀)는 당연히 천자(天子)의 사관(祀官)에 소속시켜서 도가로 하여금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진무(眞武)는 본래 현무(玄武)였는데 청 성조(淸聖祖)의 휘(諱)를 피하기 때문에 진무라 하는 것이다. 현(玄)은 거북이고 무(武)는 뱀이니, 이는 본래 허성(虛星)과 위성(危星)의 형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인하여 북방(北方)을 이름하여 현무 칠성(玄武七星)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현무를 진성(眞聖)이라 하여 그 아래에 진짜 거북과 뱀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인데 또 천봉(天蓬)ㆍ천유(天猷) 및 익성진군(翊聖眞君)을 보태어 사성(四聖)이라 하니 더욱 의의가 없는 짓이다.
이른바 익성이란 바로 지금에 말하는 효자(曉子)란 것인데 진종(眞宗) 때에 이 신(神)이 내려왔다. 그러므로 마침내 신군(神君)으로 봉하였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진무상제벽하원군(眞武上帝碧霞元君)은 향화(香火)가 끊기지 않고 내려온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예종(睿宗) 때에 복원궁(福源宮)을 세우고 우류(羽流 도사) 10여 명을 두고 재초(齋醮)와 과의(科義)를 한결같이 송(宋) 나라와 같이 하였다. 인종(仁宗) 때에는 정 지상(鄭知常)이 왕에게 청하여 팔성당(八聖堂)을 궁중에 두고 모두 상을 수놓아 만드니, 이는 진 시황(秦始皇)이 임오년(시황 28, 서기전 220)에 산천의 여덟 신에게 제사한 따위이다. 첫째는 백두악(白頭岳) 태백선인(太白仙人)이고, 둘째는 용원악(龍圓岳) 육존자(六尊者)이고, 셋째는 월성악(月城岳) 천선(天仙)이고, 넷째는 구려(駒驪) 평양선인(平壤仙人)이고, 다섯째는 구려 목멱선인(木覓仙人)이고, 여섯째는 송악(松岳) 진거사(震居士)이고 일곱째는 증성악(甑城岳) 신인(神人)이고, 여덟째는 두악(頭岳) 선녀(仙女)이다. 곡령(鵠嶺 송악산)은 여덟 신선이 거주하는 곳이라 하여 송악산에 팔선궁(八仙宮)을 짓고 정지상이 팔성문(八聖文)을 찬했는데, 여기에 ‘이 사이에 팔선을 모시되 백두를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았다.’ 한바, 팔선이란 곧 팔성이다.
또 한 가지 증거가 있다. 신라(新羅) 진흥황(眞興王) 신미년(551, 진흥왕 12) 에 비로소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였으니, 이는 비록 불가의 일이긴 하지만 도가의 재초(齋醮)를 겸한 것이다. 상국(相國) 신흠(申欽)의 《승국유사(勝國遺事)》에 “팔관회는 매년 11월 15일 하는데 이는 복을 비는 것이다. 둥근 뜰에다가 윤등(輪燈) 한 자리를 만들어 놓고 사방에 향등(香燈)을 나열해 놓으며, 또 채붕(綵棚)을 맺되 각각 높이가 다섯 길이 넘게 하고, 온갖 유희와 가무(歌舞)를 하며 앞에는 사선 악부(四仙樂部)와 용(龍)ㆍ봉(鳳)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배를 베푸니, 이는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를 쓴 것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법은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를 베풀라는 말을 따라 행한 것이다. 국조(國朝 조선조)에 들어와 소격서(昭格署)를 설치하니, 중국의 태일전(太一殿)에 초사(醮祀)하고 칠성(七星)의 여러 별에게 제사하는 의식을 따른 것으로, 그 상(像)은 모두 머리를 산발한 여자의 모습이다. 삼청전(三淸殿)에서는 옥황상제(玉皇上帝)ㆍ태상노군(太上老君)ㆍ보화천존(普化天尊)ㆍ재동제군(梓潼帝君) 등 10여 위(位)를 제사하는데 여기는 모두 남자의 상이다. 기타 여러 단(壇)에는 사해(四海)의 용왕(龍王)과 신장(神將), 명부(冥府)의 시왕(十王), 수부(水府)의 여러 신을 만들어 놓았는데, 위판(位版)에 이름을 써 붙인 것이 무려 수백 개나 된다.
이 초사(醮祀)에 참가하는 헌관(獻官)과 서원(署員)들은 모두 흰 옷과 검은 건을 쓰고 치재(致齋)하며, 관을 쓰고 홀(笏)을 꽂고 예복(禮服)을 입고 제사를 지낸다. 여러 과일과 밥ㆍ떡ㆍ다(茶)ㆍ탕(湯)과 술을 올리고 분향백배(焚香百拜)하며, 도사들은 머리에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몸에는 아롱진 검은 옷을 입고 경쇠를 24번 울린 다음에 두 사람이 도경을 외며, 또 축사(祝辭)를 푸른 종이에 썼다가 불사른다. 청사(靑詞)에는 소격서 기우청사(昭格署祈雨靑詞), 마니산 참성초 삼헌 청사(摩尼山塹城醮三獻靑詞), 소격서 진무초 청사(昭格署眞武醮靑詞), 수성초청사(壽星醮 靑詞), 분야성초 삼헌 청사(分野星醮三獻靑詞), 태일초 삼헌 청사(太一醮三獻靑詞)가 있다.
대저 도가에서 상(像)을 만들어 놓은 것은 허무하고 황당한 것 같은데, 여러 돌ㆍ나무ㆍ뼈ㆍ뿔ㆍ자개ㆍ껍질에도 간혹 천연적으로 그려진 신선과 부처의 상이 있고 보면 실지로 있는 듯도 하다. 《잠운루잡기(簪雲樓雜記)》에 “대흥(大興)에 사는 시랑(侍郞) 이석당(李奭堂)의 아우 아무개가 농막을 헐다가 주모(珠母) 한 개가 나왔는데, 크기가 5~6촌쯤 된다. 이 안에 진무상(眞武狀)이 있는데,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오른 손으로 의자를 잡고 왼손으로는 …… (원문 1자 빠짐) …… 거북과 뱀이 발을 받들고 영관(靈官)이 창을 메고 모시고 있는데, 눈을 부릅뜬 모습을 했으며 구름이 에워싸고 네 신장이 나타나 있는데 황홀하여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바, 모두 모습을 갖춘 사람의 상이다. 그 등에 ‘고려의 국왕이 바친 것’이라고 새겼으며, 자금(紫金)으로 만든 궤에 넣어져 있었다. 이는 아마도 궁중의 물건이었는데 민간에 흘러 들어간 것일 것이다. 이씨는 열 꿰미의 돈을 주고 샀는데, 수 문제(隋文帝)의 합리불(蛤蜊佛)이나 송 나라 조무구(晁無咎)의 저치백불(猪齒白佛)보다도 더 기이하다.” 하였다. 주모(珠母)란 진주 조개이니, 조화는 참으로 공교하다 하겠다.
《묵장만록(墨莊漫錄)》에 “통천서(通天犀) 가운데 해ㆍ달ㆍ별ㆍ구름ㆍ꽃봉오리ㆍ산ㆍ물ㆍ새ㆍ물고기ㆍ용ㆍ신선ㆍ귀신ㆍ궁전ㆍ의관(衣冠)과 미목(眉目)이 완연히 이 뿔 속에 나타나 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신선과 귀신은 예부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모방해서 상을 만든 것으로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 이미 천연적인 상이 있으니, 어찌 인위로 만든 상이 없겠는가.

부록(符籙)과 재초(齋醮)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여러 신선이 천서(天書)를 맨 처음 얻어서 인간에게 전수하는 것도 연한(年限)이 있는바, 상품(上品)은 연한이 오래고 하품(下品)은 연한이 짧다. 그러므로 현재 도(道)를 전수받은 자들은 49년을 경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인간에게 전수할 수 있다. 그 대지(大旨)를 미루어 보면 이 역시 인애(仁愛)하고 청정(淸靜)하여 많은 수양을 쌓아서 점차 장생(長生)하여 자연히 신화(神化)하게 되는 것이다.
도를 전수받는 법은 맨 처음에 오천문록(五千文籙)을 받고 다음에 삼동록(三洞籙)을 받고 다음에 동현록(洞玄籙)을 받고 다음에 상청록(上淸籙)을 받는데, 녹(籙)은 모두 흰 비단에 씌어 있는바, 천조(天曹 하늘에 있다는 여러 관서)의 관속(官屬)과 좌사(佐使)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 여러 신부(神符)가 이 사이에 섞여 있다. 이것을 받는 자는 반드시 먼저 깨끗이 재계(齋戒)한 다음에 금환(金環) 하나를 나누어 각기 반을 갖고 약속을 한다. 재계하는 방법은 황록(黃籙)ㆍ옥록(玉籙)ㆍ금록(金籙)ㆍ도탄(塗炭) 등의 재계가 있는데, 세 층의 단을 만들고 층마다 면절(綿蕝 띠풀을 묶어 위치를 품시하는 것)을 두어 한계를 만들고 옆에는 각각 문을 열어 이 면절의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런 다음 고기 꿰미처럼 나란히 열(列)을 이루어 면박(面縛 두 손을 뒤에 묶고 얼굴을 내밀어 죽을 각오를 하는 것)하고 자신의 과오를 낱낱이 말하여 신명이 고백하되 밤낮을 쉬지 않고 혹은 칠일 또는 이칠일(二七日 즉 14일)에 끝난다.
또 재액(災厄)을 없애는 법이 있다. 음양 오행의 술수(術數)에 의하여 사람의 수명을 추수(推數)하여 마치 장표(章表)를 올리는 의식처럼 쓰고는 아울러 폐백을 갖추어 향을 사르고 읽기를 ‘천조에게 아뢰노니 부디 제액해주옵소서[奏上天曹 請爲除厄]’ 하는데, 이것을 상장(上章)이라 한다. 한밤중 여러 성신(星辰)의 아래에 술ㆍ포ㆍ면ㆍ음식ㆍ폐백을 진설해 놓고 천황(天皇)과 태일(太一)에게 낱낱이 제사하고 오성(五星)과 여러 별에게 제사하며 상장하는 의식과 같이 글을 만들어 아뢰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초(醮)라 한다. 또 복이(服餌)ㆍ벽곡(辟穀)으로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루 기록할 수가 없다.” 하였다. 초제(醮祭)의 축원문(祝願文)을 청사(靑詞)라 한다.

도가 잡용(道家雜用)
《수서》경적지에 “도가의 재초(齋醮) 이외에 또 나무로 인(印)을 만들어 성신(星辰)과 일(日)ㆍ월(月)을 그 위에 새기고 기(氣)를 마셔 붙게 한 다음 병을 앓는 자에게 찍으면 병이 낫는 자가 많다. 또 칼 위에 올라가고 불속에 들어간 다음 불사르고 찌르게 하여도 칼날이 상해를 입히지 못하고 불꽃이 뜨겁게 하지 못하는 방법도 있으며, 또 복이(服餌)ㆍ벽곡(辟穀)ㆍ금단(金丹)ㆍ옥장(玉漿)ㆍ운영(雲英)으로 찌꺼기를 제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루 기록할 수 없다.” 하였다.
【타발(佗髮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도사들이 머리 풀어 헤치는 것은 한 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사기(史記)》귀책전(龜策傳)에 “술로 초사하고 머리를 풀어 헤친다.[醮酒佗髮]” 하였는데, 색은주(索隱注)에 “타(佗)의 음은 도아절(徒我切)이니,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이다. 현재 도류(道流)들이 법석(法席)을 베풀고 부주(符呪)할 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을 한다.” 하였다.
【도사의 영패(令牌)와 인(印)】 도사들은 영패와 인이 있다. 《물리소지(物理小識)》에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를 사용하여 인패(印牌)를 만드는데, 이는 대추나무 속이 붉고 단단하며 벼락을 맞아 신통함을 취한 것이다. 《당육전(唐六典)》의 연문식법(羡門式法)에도 대추나무 속으로 만든다 하였다. 구양현(歐陽玄)의 《규거지(睽車志)》에는 ‘귀신은 백옥(白玉)을 두려워하니 백옥으로 만든 인을 차되 웅정낭(雄精囊)에 넣어야 한다.’ 했다.” 하였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는 “단풍나무와 대추나무 이 두 나무는 모두 신령을 통하기 때문에 점괘를 치는 자들이 많이 취하여 식반(式盤)과 식국(式局)을 만드는데, 단풍나무가 제일 좋고 대추나무는 나쁘다.” 하였다. 《당육전》의 삼식(三式)에는 “육임(六壬)으로 점치는 국(局)은 단풍나무를 하늘로, 대추나무 속을 땅으로 삼는다.” 하였다. 이 때문에 장문성(張文成)의 태복판(太卜判)에 “단풍나무는 하늘이고 대추나무는 땅이다.[楓天棗地]”란 말이 있으며, 《영기경(靈棋經)》의 법에는 ‘반드시 벼락맞아 쪼개진 대추나무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더욱 신기하게 맞는다.’ 하였다. 병법(兵法)에는 “단풍나무와 대추나무로 말을 매 놓은 말뚝을 만들면 말이 놀라고, 수레바퀴를 만들면 수레가 엎어진다.” 하였다. 이는 아마도 신(神)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니, 마치 귀(鬼)가 예장나무와 버드나무 뿌리에 깃들여 있는 것과 같다.
【천사(天師)의 법검(法劍)】도목(都穆)의 《철망산호(鐵網珊瑚)》에 “광미(廣微) 장여재(張與材)가 법검 한 자루를 소장하고 있는데 칼자루는 옥으로 되어 있다. 칼자루 위 양 면에는 각각 2행의 전문(篆文)이 있는데 1행에 10여 자씩이며 칼 길이는 4척 남짓하다. 양면에는 모두 자금(紫金)으로 가늘게 법전(法篆)이 씌어져 있으니, 그 일면을 대략 기록해 보면 ●ㆍ●ㆍ●ㆍ●ㆍ目ㆍ內ㆍ有ㆍ免ㆍ春ㆍ夏ㆍ秋ㆍ冬이 있고, 그 아래에는 삼태성(三台星)과 북두성(北斗星)이 있으며, 그 일면에 있는 글자는 능히 분변할 수는 없으나 맨 아래에 뇌(雷)ㆍ전(電)ㆍ운(雲) 세 자가 씌어 있다. 칼 양면에 모두 칼날이 있어 이지러지지 않았으며, 또 한 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1천 7백년 동안 여러 대에 걸쳐 이 법검을 의뢰하여 교를 펴고 있다.” 하였다.
【헌원경(軒轅鏡)】 도가에서는 오래된 고경(古鏡)을 사용하는데 이는 사마(邪魔)를 물리치는 방술이다. 헌원경이란 주사(硃砂)로 끈을 바르고 네 거울을 둘러 놓아 서로 비추게 하는 것인데 사(邪 잡귀)를 물리친다. 방이지(方以智)는 “능엄단(楞嚴壇)에 16개의 거울이 위아래에서 비춘다.”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이다.
【환실(寰室)】 곧 수련하는 정사(精舍)이다. 무릇 타좌(打坐 불교에서 가부좌(跏趺坐)하는 것을 말한다)할 때에 실내를 너무 높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높으면 양이 성하고 밝음이 많아서 백(魄)을 상하게 된다. 지붕은 너무 낮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너무 낮으면 음이 성하고 어둠이 많아서 혼(魂)을 상하게 된다. 음ㆍ양이 적중하고 밝음과 어둠이 서로 반씩 되게 하며 사방 벽에는 모두 여러 개의 창문을 내어 일ㆍ월ㆍ성두(星斗 두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통하게 한다.
【통기(通氣)하는 탁약(橐籥 쇠를 불리는데 쓰이는 기구)】 단가(丹家)의 비결에 금ㆍ은으로 탁약을 만들되 안에는 입과 코의 세 구멍이 통하는 숨통을 만들고 겉에는 비단으로써 방식대로 싼 다음 목 뒤에 띠를 묶어 매어 그 입과 코를 고정시켜 진기(眞氣)가 흩어지지 않게 한다. 이것은 환실(寰室)에 들어가 잘 때에 사용하는 것으로 곧 호흡통인 것이다.
【유목 의자(楡木椅子)】 느릅나무로 만드는데 그래야만 독이 없다. 수양하는 도가가 앉는 것이다.
【동화제군상(東華帝君像)】 동화제군상을 그려 뒷방에 받들고 장등(長燈)과 향수(香水)로 제사한다.
【천전(天篆)】 환실(寰室)의 사방 벽에 천전을 붙여 놓는다.
【조기(祖氣)】 무릇 도가의 서부(書符)에는 조기가 있다. 그 법은 동쪽을 향하여 기(氣)를 취해서 한입으로 마셔 뱃속으로 넣되 배꼽 밑 한치 세푼까지 이르게 했다가 그치고는 다시 배 위에서 입으로 올라오게 한 다음 붓을 들고 한 번 불어서 점선이 부권(符圈)의 안에 있게 하는데, 이것을 조기라 이름한다. 또 한 가지 법에는 조기란 곧 신(腎) 밑에 있는 수기(水氣)이다. 뇌국(雷局)을 사용하여 수(水)ㆍ화(火)를 화합하게 하여 미추골(尾椎骨) 밑에 이른다. 미추골 밑이란 바로 미려혈(尾閭穴)로서 위로 이환(泥丸 단전)에서부터 함께 나와 작용한다 한다. 도결(道訣) 주(注)에 자세히 보인다.
【도수결(搯手訣)】 염결(捻訣)이라고도 하며 또 겹결(恰訣)이라고 한다. 겹(恰)은 《광운(廣韻)》에는 고흡절(苦洽切)이라 하였고 《집운(集韻)》에는 걸흡절(乞洽切)이라 하였는데 음은 모두 겹이다. 《설문(說文)》에는 “마음을 쓰는 것이며 또 적당하게 한다는 말이다.” 하였다. 도(搯)는 자서(字書)에 음은 도(叨)라고 하였다. 《지북우담(池北偶談)》에 “도수결은 왼손 중지(中指) 셋째 마디에 가로로 그어져 있는 지문을 큰 손가락 손톱으로 두드리는 것인데, 주문(呪文)을 욀 때에 두드린다.” 하였다. 도(搯)는 자서에 보면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라 했을 뿐, 특별한 깊은 뜻이 없다. 주전공(朱錢功)의 《담산잡지(澹山雜識)》에 “사보문(謝寶文)이 옥관(獄官)으로 있을 때에 어떤 죄수 하나가 이 법을 잘하여 스스로 형틀을 벗곤 했는데, 늙은 하인이 ‘붓뚜껑을 가지고 양손의 중지를 두드리라.’ 하므로 그 말을 따르니 죄수가 그 술을 쓰지 못했다.” 했다. 도가와 불가에는 여러 가지 결(訣)이 있다.
【보두 답강(步斗踏罡)】 도가에 보두 답강하는 법이 있는데, 이는 소위 북두성(北斗星)의 괴성(魁星)과 천강성(天罡星)을 밟는다는 것이다.
【우보(禹步)】 세상에서 말하기를, 우(禹)는 짐승 이름인데 너풀너풀 걸으며 귀신을 잡아먹기 때문에 귀신들이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도가에서 그 걸음을 흉내내는 것이라 한다. 일설에는 하우씨(夏禹氏)가 홍수를 다스릴 때에 걸음을 절둑거리니 귀신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보라 하게 되었다 한다. 갈홍(葛洪)의 《등섭부록(登涉符籙)》을 상고해보면 우보법이 있는데, 반듯이 서서 오른쪽 발을 앞에 놓고 왼쪽 발을 뒤에 놓으며 다음에 다시 오른쪽 발을 앞에 놓고 왼쪽 발은 오른쪽 발의 뒤에 놓는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일보(一步)라 하며, 다음에 다시 오른쪽 발을 앞에 놓고 다음에 왼쪽 발을 앞에 놓아 왼쪽 발을 오른쪽 발에 따른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삼보(三步)라 한다. 이처럼 하면 우보가 끝나니, 곧 삼보에 발자국이 아홉 개인 것이다.
【어고간자(漁鼓簡子)】어고간자는 무시로 치는 악기이다. 대나무를 잘라 돼지의 새끼보를 양쪽 끝에 붙이고 대쪽을 쪼개어 마치 제비꼬리처럼 만들어 대통을 치면 쨍하고 소리가 난다. 도사들이 이 어고간자를 갖고 다니기 때문에 선인(仙人)인 한상자(韓湘子)를 그릴 때에는 반드시 이 기구를 안고 있으니, 이것이 맨 처음 잘못된 것이다. 한상자는 당 나라 사람이다.
【신선골(神仙骨)】 《명사(明史)》에 “예부(禮部)에서 말하기를 ‘대서양(大西洋) 사람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가 갖고 온 것이라 하며 또 신선골이 있다 하는데 이미 신선이라고 칭한다면 스스로 하늘로 날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어찌 뼈가 있겠습니까?’ 했다.” 하였다. 이는 당 나라 때의 불골(佛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장한웅(張漢雄)이 수련하여 도(道)를 얻었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소요산(逍遙山)에 들어갔다가 적에게 잡혀 작살(斫殺)되자 흰 기름과 같은 피가 나왔다. 다비(茶毗 화장(火葬))하였더니 삼주야(三晝夜) 동안 서광(瑞光)이 하늘에 비치었다. 사리(舍利) 72알을 얻었는데 크기가 감실(芡實)만하고 색깔이 감벽색(紺碧色)이었다. 이것을 탑 속에 보관해 두었다.” 하였다. 도가에도 사리가 있다면 이것은 신선골이라 하는가 보다.

총론(總論)
신선술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비록 천상(天上)에서 닭이 우느니 구름 속에서 개가 짖느니 하는 말은 있지만, 녹비공(鹿皮公)은 옥화(玉華)를 삼켰으나 시체에서 벌레가 생겨 문 밖으로 나왔고, 가계자(賈季子)는 금액(金液)을 마셨으나 시체 썩는 냄새가 백 리까지 풍겼으며, 황제(黃帝)는 형산(荊山)에서 아홉 개의 솥을 가지고 선약(仙藥)을 만들었다고 하나 교령(喬嶺)에는 묘가 남아 있으며, 이옥(李玉)은 운산(雲散)을 복용하여 남몰래 신선이 되었다고 하나 피살되어 머리와 발이 각각 있었다. 묵적(墨狄)은 홍단(虹丹)을 마시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영생(甯生)은 석뇌(石腦)를 복용하다가 불에 타 죽었으며 무광(務光)은 부추를 베다가 청령천(淸泠泉)에 빠졌고, 백성(柏成)은 기(氣)를 마시다가 창자와 위(胃)가 썩었다. 경액(瓊液 선약)을 두번 먹고 관(棺)에 들어간 자도 있으며, 도규(刀圭 약물(藥物))를 한 번 먹고 시체가 된 자도 있으니, 신선이란 실제가 없는 헛 말일 뿐이다.
먼저 도사가 되었다가 뒤에 벼슬한 자는 당 나라 시중(侍中) 위징(魏徵)과 승상(丞相) 노정(盧程)이며, 먼저 벼슬을 했다가 뒤에 도사가 된 자는 당 나라 예부 시랑(禮部侍郞) 하지장(賀知章)과 하남 참군(河南參軍) 정선(鄭銑)이며, 주양승(朱陽丞) 곽선주(郭僊舟)는 시를 지어 바쳤다가 파직되고 도첩(度牒)을 받아 도사가 되었다.

별론(別論)

세상에 전하기를 장생 불사하는 것을 신선이라 한다. 그러나 공동자(空同子)는 말하기를 “신선도 죽는 수가 있으니, 기(氣)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였다. 기에는 사라지고 불어나는 것이 있는데, 기가 불어나면 썩어 냄새가 풍기는 육신도 신선이 되고, 기가 사라지면 정령(精靈)도 말라빠지게 된다. 신선이란 천지와 일월의 정기를 훔쳐 비록 매미가 껍질을 벗듯 육신을 벗어나 신이 된다고 하지만, 원회(元會)의 수가 다하면 천지와 일월도 파괴되고 없어지는데 하물며 그 힘을 빌려쓰는 자이겠는가. 또 《황극경세(皇極經世)》를 보면 대화(大化 천지)가 장차 끝날 적에는 유회(酉會)에서 6천 년을 경과한 후에는 신선도 모두 없어져 남지 않는다 하였다. 또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완위여편(宛委餘編)》을 보면 신선은 파두(巴豆)를 먹으면 즉시 죽는데 쥐는 먹으면 자란다 하였으니, 신선이 도리어 쥐만도 못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신선을 부러워할 것이 뭐 있겠는가.


 

[주D-001]요(堯) 임금의 …… 받는 것 : 극양(克讓)은 능히 겸양하는 것.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요 임금의 덕(德)을 열거하면서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했다.[允恭克讓]” 한 말이 있다. 겸겸(謙謙)은 겸손하고 또 겸손한 것. 《주역(周易)》 겸괘(謙卦) 초육 효사(初六爻辭)에 “초육은 겸손하고 또 겸손하니 군자가 이 상(象)을 취하여 큰 내를 건너는 것이 길하다.[初六謙謙 君子用 涉大川 吉]” 하였다. 이는 음효(陰爻)인 초육효는 본래 유순한데다 또 맨 밑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 한다. 겸괘 단사(彖辭)에는 “천도는 가득한 것을 덜어내고 겸손한 것을 더해 주며, 지도는 가득한 것을 변하여 겸손한 데로 보내주고, 귀신은 가득한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을 복주며, 인도는 가득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 하였는데, 한번 겸손하여 네 가지 유익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 말이다.
[주D-002]풍각(風角)ㆍ성산(星算) : 풍각은 고대의 점후법(占候法)으로 사방 즉 동ㆍ서ㆍ남ㆍ북의 바람과 사우(四隅) 즉 동남ㆍ동북ㆍ서남ㆍ서북의 바람을 살펴 길흉을 점치는 것이며, 성산은 천문(天文)과 산수(算數)를 가리킨다.
[주D-003]금단(金丹) …… 옥장(玉漿) : 금단은 신선이나 도사들이 조제하여 만든 불로(不老)ㆍ불사(不死)의 약으로, 곧 황금액(黃金液)의 단사(丹砂)로 구워 만든 환단(還丹)을 말한다. 도가에서는 특히 이 단(丹)을 중요시하는바, 내단(內丹)ㆍ외단(外丹)의 분별이 있다. 내단이란 자기 몸에 있는 단전(丹田)의 정기를 수련하여 이룬 것이며, 외단이란 바로 단사로 구워 만든 단약(丹藥)이라 한다. 운영(雲英)은 운모(雲母)의 별칭. 팔석(八石)은 도가에서 복용하는 여덟 가지의 석약(石藥)으로, 주사(朱砂)ㆍ웅황(雄黃)ㆍ운모ㆍ공청(空靑)ㆍ유황(硫黃)ㆍ융염(戎鹽)ㆍ초석(硝石)ㆍ자황(雌黃)이다. 옥장은 옥이 녹은 물로 일명 옥천(玉泉)이라 하는데 맛좋은 음료로 복용하면 불로 장생한다는 것이다.
[주D-004]알자(謁者) : 궁중에서 빈객(賓客)을 안내하는 일을 맡아보며 또 임금의 명을 받아서 사방에 사자(使者)로 나가던 관리의 이름.
[주D-005]미무 좨주(米巫祭酒)의 교 : 후한(後漢) 말기 장도릉(張道陵)의 손자인 장노(張魯)가 스스로 칭한 명호(名號). 장도릉은 촉중(蜀中)의 명학산(鳴鶴山)에서 도술을 배웠는데, 환자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다섯 말의 쌀을 받았으므로 오두미도(五斗米道)라 칭하게 되었다. 그후 장노는 이것을 계승한 다음 관명(官名)인 좨주(祭酒)를 따서 미무 좨주라 하였다. 이 교는 장각(張角)으로 이어져 결국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후한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주D-006]전진교(全眞敎) : 금(金) 나라의 도사 왕철(王喆)은 삼교평등회(三敎平等會)를 만들어 유교의 충효(忠孝)와 불교의 계율(戒律)과 도교의 단정(丹鼎 : 단약을 만드는 솥)을, 한 화로에서 도야된 것이라 하여 전진교라 하였으며, 스스로 중양자(重陽子)라 호하고 전진암(全眞菴)에 거주하였으므로 전진도사(全眞道士)라 칭하게 되었다.
[주D-007]백옥섬(白玉蟾) : 원명은 갈장경(葛長庚). 남송(南宋) 사람으로 경주(瓊州)에 살았으며, 자(字)는 여회(如晦)이고 호(號)는 해경자(海瓊子). 처음에는 뇌주(雷州)에 이르러 백씨(白氏)의 양자(養子)가 된 다음 옥섬이라 이름하였다. 무이산(武夷山)에서 도(道)를 배워 태일궁(太一宮)에 거주하고 자청명도진인(紫淸明道眞人)에 봉해져 도교 남종(南宗) 오조(五祖)의 하나가 되었다.
[주D-008]삼청(三淸)의 초제(醮祭) : 삼청은 도교의 삼신(三神)으로 옥청 원시천존(王淸元始天尊)ㆍ상청 영보도군(上淸靈寶道君)ㆍ태청 태상로군(太淸太上老君)인데, 이 옥청ㆍ상청ㆍ태청은 또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한다.
[주D-009]구류(九流) : 아홉 가지의 학파로 유가류(儒家流)ㆍ도가류(道家流)ㆍ음양가류(陰陽家流)ㆍ법가류(法家流)ㆍ명가류(名家流)ㆍ묵가류(墨家流)ㆍ종횡가류(縱橫家流)ㆍ잡가류(雜家流)ㆍ농가류(農家流)를 말한다. 《漢書 藝文志》
[주D-010]영근(靈根)과 혜성(慧性) : 원래 불가의 말로 사람이 태어날 때 영특하고 훌륭한 근기(根機)를 받은 것을 말한다.
[주D-011]감(坎)을 취하여 이(离)를 메운다 : 감은 북방으로 물에 해당하는데 정(靜)을 의미하며, 이는 남방으로 불에 해당하는데 동(動)을 의미한다. 동은 욕정(慾情), 정은 수양(修養). 곧 수양으로 욕정을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주D-012]투태(投胎)하고 탈사(奪舍)하니 : 투태는 영혼이 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탈사는 도가에서 남의 시신(屍身)을 빌려 화신하는 법. 건강(建康)에 진 도인(陳道人)이 있었는데 항상 오인(仵人: 시체를 검사하는 사람)과 왕래하며 술을 마시곤 하여 매우 친하였다. 도인은 그에게 “나는 17~18세의 건강한 남자 시신을 얻고 싶다.” 하였다. 하루는 유 태위(劉太尉)가 한 소년을 매질하여 죽자 오인이 갖다 주었더니, 도인은 그 시체를 목욕시킨 다음 자기의 옷과 관을 입혀 한 탑자(榻子) 위에 가부좌(跏趺坐 : 발등을 포개고 앉는 좌법〈坐法〉)시키고 자기도 그 앞에 가부좌하였다. 다음날 아침 보니, 도인은 시체로 화하고 소년의 시체는 살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탈사법이라 한다. 《癸辛雜誌》
[주D-013]삼오(三五)의 달리(達里) : 도(道)를 통달할 수 있는 상징의 주름이라 한다.
[주D-014]복준(覆准) : 복의(覆議)를 거쳐 비준(批准)하는 것.
[주D-015]치미(鴟尾) : 일명 치미(蚩尾)라고도 하는데 지붕의 등마루에 기와로 만들어 놓은 짐승의 모습. 이는 원래 한(漢) 나라 궁전에 화재가 많았는데, 하늘에 있는 어미성(魚尾星)의 상(像)을 만들어 지붕 위에 놓으면 화재를 방지할 수 있다는 술자(術者)의 말을 따른 것이라 하기도 하며, 또는 치(蚩)는 해수(海獸)이기 때문에 화재를 막을 수 있다 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주D-016]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 : 원우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원우간당이란 사마 광(司馬光)을 위시하여 여문저(呂文著)ㆍ문언박(文彦博)ㆍ소식(蘇軾)ㆍ정이(程頤)ㆍ황정견(黃庭堅) 등 당시의 문인(文人)과 학자 1백 19명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신종(神宗) 때 구파(舊派)인 사마광은 신파(新派)인 왕안석과 격렬한 당쟁을 벌였는데 신종의 뒤를 이은 철종은 구파를 등용하였다. 그러다가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숭녕(崇寧) 원년 간신인 신파의 증포(曾布)ㆍ채경(蔡京) 등은 휘종에게 구파의 2백 20명을 간당이라 하고 비석에 새겨 단례문(端禮門)에 세울 것을 주청하여 그 다음 해에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원우간당비이다.
[주D-017]소(蘇)ㆍ황(黃) : 문장가인 동파(東坡) 소식(蘇軾)과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을 가리킨다.
[주D-018]동(童)ㆍ채(蔡) : 소인인 동관과 채경을 가리킨다.
[주D-019]한우충동(汗牛充棟) : 서적이 많아 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하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아 올리면 마룻보에 가득함을 말한다.
[주D-020]《유양잡조(酉陽雜俎)》에 …… 다음과 같다 : 현재 《유양잡조》에는 24종에 그치지 않고 35종에 이르며 그 순서도 다른 바, 참고하기 위하여 적는다. 《자일왕검》ㆍ《사규명경》ㆍ《오주중경비귀질》ㆍ《비황자경》ㆍ《녹로교경(鹿盧蹻經)》ㆍ《함경도》ㆍ《와인도》ㆍ《원지도》ㆍ《목지도》ㆍ《대외신지도》ㆍ《견우경》ㆍ《옥진기》ㆍ《납성기(臘成記)》ㆍ《옥안기(玉案記)》ㆍ《단대경》ㆍ《일월주식경(日月廚食經)》ㆍ《금루경》ㆍ《삼십륙수경(三十六水經)》ㆍ《중황장인경》ㆍ《협룡자녹대경》ㆍ《옥태경》ㆍ《관씨경》ㆍ《봉망경》ㆍ《육음옥녀경》ㆍ《백호칠변경》ㆍ《구선경(九仙經)》ㆍ《십상화경(十上化經)》ㆍ《등중유수섭제경》ㆍ《삼강육기경(三綱六紀經)》ㆍ《백자변화경(白子變化經)》ㆍ《은수경(隱首經)》ㆍ《입군경(入軍經)》ㆍ《천추경(泉樞經)》ㆍ《적갑경》ㆍ《금강팔첩록》.
[주D-021]전오씨(典午氏)가 남도(南渡)한 이후 : 동진(東晉) 시대를 가리킨다. 전오(典午)는 진(晉) 나라의 성인 사마씨(司馬氏)를 가리키는데, 진 나라는 원래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으나 오호(五胡)의 난리 때문에 강동(江東)인 건강(建康)으로 천도(遷都)하였으니, 이 이전을 서진(西晉), 이 이후를 동진이라 칭한다.
[주D-022]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 하 빈객은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낸 하지장(賀知章)을 가리킨다.
[주D-023]《삼국지(三國志)》 강표전(江表傳) : 강표전은 원래 진(晉) 나라 우부(虞溥)가 찬한 것인데, 현재 전하지 않고 오직 《삼국지》의 주(注)에 만이 인용된 바, 이 말은 오지(吳志) 손책전(孫策傳) 주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4]채붕(綵棚) : 그늘을 지게 하기 위하여 나무로 시렁을 만들고 채색 비단으로 꾸미는 것인데, 불교의 행사 때에 많이 사용한다.
[주D-025]녹비공(鹿皮公)은 …… 나왔고 : 녹비공은 곧 녹비옹(鹿皮翁)으로 한(漢) 나라 사람인데 재주가 있어 손으로 기계를 만들었으며 사슴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산에 들어가 은거하여 선술을 익혔다. 옥화(玉華)는 아름다운 옥으로, 도가에서는 옥을 복용하면 장생 불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먹었던 녹비공도 결국 죽어 시체에서 벌레가 나왔으므로 한 말이다.
[주D-026]원회(元會)의 수 : 역학가(易學家)인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보면 천지의 시종수(始終數)는 12만 9천 6백 년인데 이것을 1원(元)이라 한다. 이것은 다시 달의 수인 12지지(地支)로 나뉘어져 1회(會)는 1만 8백 년이 된다 한다. 그리하여 하늘은 자회(子會)에서 개벽되고 땅은 축회(丑會)에서 개벽하였으며 사람과 물건은 인회(寅會)에서 비로소 태어났다. 미회(未會)의 3~4천 년을 경과하고 나면 사람이 50세가 넘어 혈기가 쇠하는 것처럼 천지도 늙는다. 다시 유회(酉會)의 6천 년을 경과한 뒤에는 유도(儒道)가 쇠하고 신선이 모두 없어져 남지 않으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소위 우물에서 연기가 나오고 나무에서 불이 난다는 시기이다. 술회(戌會)와 해회(亥會)를 경과하면 현재의 천지가 완전히 파괴되고 다시 새로운 천지가 개벽된다 하였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2
확대원래대로축소
 인물(人物) - 한국
원효(元曉)와 의상(義相)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43)



우리나라의 감여서(堪輿書 풍수설(風水說)에 관한 글의 총칭) 가운데 《청구비결(靑丘祕訣)》이 있는데, 신라 원효의 제자인 의상대사 자혜존자(義相大師慈惠尊者)가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고해 보면, 의상은 곧 설사례(薛思禮)의 아들이요 설총(薛聰)의 아우로도 되어있다.
계림(鷄林 지금 경주(慶州)의 옛이름) 설씨(薛氏)의 내력은《신라유사(新羅遺事)》에 보인다. 즉 신라 유리왕(儒理王) 9년(32)에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성(姓)을 하사한 바, 명활촌(明活村)을 습비부(習比部)로 삼고 설씨의 성을 하사하였다. 이에 경주 설씨는 설지덕(薛支德)을 시조로 삼는데, 지덕은 곧 신라 유리왕 때의 사람이다. 그의 후손 곡(嚳)은 습비후(習比侯)에, 곡의 아들 교(喬)는 대아찬(大阿餐)에 이르렀고, 이금(伊琴)의 아들 사례(思禮)는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어 호(號)를 원효라 하였는데, 뒤에 환속(還俗)하여 소성거사(少性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사례의 아들 총(聰)의 자는 총지(聰智)로 학문이 해박하고 문장이 뛰어나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풀이하여 후학(後學)을 가르치고 또 속어(俗語)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에 사용하게 하였으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고 일찍이 화왕백두옹설(花王白頭翁說)을 지어 국왕을 풍간(諷諫)하였으며, 고려 현종(顯宗) 13년(1022)에 홍유후(弘儒侯)로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으니, 이것이 그 파계(派系)이다. 그럼《청구비결》에 의상을 원효의 제자라 한 말은 착오인 것이고 또 형(兄)은 동방(東方)의 유종(儒宗)이 되었는데 아우는 동토(東土)의 승조(僧祖)가 되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상한 일이다.
또 문소(聞韶 지금 의성(義城)의 옛이름) 김걸(金烋)이 편저한《해동문헌록(海東文獻錄)》의 석가류(釋家類)를 상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 원효의 속성(俗姓)은 설(薛), 아명(兒名)은 서당(誓堂)인데 그 모친이, 유성(流星)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았으며 나면서부터 총명이 뛰어났다. 어느 날 큰 길거리에 나와서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여하려나, 내가 하늘을 괴일 기둥 깎아 놓았지.[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하는 노래를 부르자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듣고 ‘저 대사(大師)가 귀부인을 만나 현명한 아들을 두려는 것이다.’ 하고 요석궁(瑤石宮)으로 끌어들여 과공주(寡公主)와 동거시켜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설총이다. 원효는 이미 불가(佛家)의 계율을 상실한 터이라 속복(俗服)으로 바꿔 입고 소성거사라 자호하였으며, 입적(入寂)한 뒤에는 총이 그 진상(眞像)을 흙으로 만들어 분황사(芬皇寺)에 안치하였다. 원효가《화엄경소(華嚴經疏)》와《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그 뒤에 일본국(日本國) 진인(眞人)이, 신라 사신 설 판관(薛判官)에게 준 시서(詩序)에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을 보고 본인을 직접 만나볼 수 없음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겨왔는데 지금 설랑(薛郞)이 바로 거사의 손자라 하니 그 조부는 만날 수 없으나 그 손자를 만난 것이 반가워 시를 지어 준다.’고 하였는데 그 시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하였고, 또,
“중 의상(義湘)의 속성은 김(金)인데, 29세에 머리를 깎고 사신(使臣)의 배를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 종남산(終南山)에서 지엄선사(智嚴禪師)를 만났고 함형(咸亨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원년(670)에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태백산에 들어가 있다가 왕명(王命)을 받들고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 의상은《법계도서(法界圖書)》를 지었으며,《추동기(錐洞記)》에 대하여는, 그가 문도(門徒)를 거느리고 소백산(小白山) 추동(錐洞)으로 들어가 3천 명의 도중(徒衆)을 모아놓고 90일 동안《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할 때 문인(門人) 지통(智通)이 그 중요한 것을 모아 2권을 만들고《추동기》라 한 것이다. 의상은 또 제반의 청문(請文 불사(佛事) 때 사용되는 의문(儀文))을 지었다.”
지금 문소 김걸의 기록을 상고해 보면 이처럼 서로 달라서, 의상 한 사람을 혹은 설씨, 혹은 김씨라 하고 이름의 아래 글자도 상(相), 혹은 상(湘)이라 하며 하나는 사례의 아들이라 하고 하나는 원효의 제자라 하니,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의《유설(類說)》에는 “동방의 이승(異僧)은 바로 의상(義相)이다. 상고해 보면, 원효와 의상은 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시대의 중이다. 혹은 의상은 원효의 아우라고도 한다.” 하였다. 어느 말을 따라야 할 것인가.
배휴(裵休)가《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략소주(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注)》에 해동 원효법사의 논(論)을 인용하여《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제목을 해석한 가운데에 “삼매는 바로 정사(正思)이다 …… ” 하였다. 술수서(術數書)로는《원효문답(元曉問答))이 있다.
일찍이《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을 상고해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당 문종(唐文宗) 개성(開成) 당 문종 개성 원년(836)은 신라 흥덕왕(興德王)이 11년 째에 훙(薨)하고 희강왕(僖康王)이 새로 즉위한 해이다. 연간에 신라 사람 최승우(崔承祐)ㆍ김가기(金可紀), 그리고 중 자혜(慈惠) 세 사람이 당 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가기가 먼저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화주 참군(華州參軍)으로 임관되었다가 장안위(長安尉)로 전임되었다. 승우도 이어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대리평사(大理評事)에 임관되었다. 함께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놀곤 하였다. 그때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가 종남산 광법사(廣法寺)에 있었는데, 자혜가 광법사에 우거(寓居)해 있으면서 신(申)과의 사귐이 매우 깊었으므로 최(崔)ㆍ김(金) 두 사람도 자혜로 인하여 신과 친숙하게 되어 늘 함께 놀았다. 어느 날 종리 장군(鍾離將軍)이 찾아오자 신이 종리에게, 세 사람에게 전도(傳道)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므로 종리가 이를 허락하고 도서(道書), 《청화비문(靑華祕文)》ㆍ《영보필법(靈寶畢法)》ㆍ《금고(金誥)》ㆍ《입두악결(入頭岳訣)》ㆍ《내관옥문보록(內觀玉文寶籙)》ㆍ《천둔연마법(天遁鍊魔法)》 등이다. 그리고 구결(口訣 입으로 직접 전수하는 것)을 전수해 주어 3년 만에 단학(丹學)을 이루게 되었다. 그 뒤에 승우는 서경(西京)에서 염철판사(鹽鐵判事)를 겸임하고 있는 이덕유(李德裕)를 따른 지 수년 만에 찬황(贊皇 이덕유가 찬황현백(贊皇縣白)에 수봉(受封)된 때문에 이른 말이다)이 애주(崖州)로 좌천되어 벼슬을 내놓고 귀국하므로 자혜도 함께 돌아왔는데, 가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귀국한 뒤에 자혜는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갔고 승우는 신라 조정에 벼슬하여 태위(太尉)에 이르렀으며, 93세에 죽었다. 자혜는 1백 45세로 태백산에서 입적(入寂)했다.”
하였다.
그러나 이후암(李厚庵) 이름은 만운(萬運), 벼슬은 조선 정조(正祖) 때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의《동국방안(東國榜眼)》을 상고해 보면,
최승우가 당 소종(唐昭宗) 경복(景福) 2년(893) 신라 진성여주(眞聖女主) 7년이다. 에 양섭(楊涉)이 장원(壯元)한 방(榜)에 합격했다.”
하였으니, 당 문종 개성 원년으로부터 신라 희강왕(僖康王) 원년이다. 당 소종 경복 2년까지 신라 진성여주 7년이다. 58년간으로 당 나라에서는 여섯 조정이 바뀌고 문종ㆍ무종(武宗)ㆍ선종(宣宗)ㆍ의종(懿宗)ㆍ희종(僖宗)ㆍ소종을 말한다. 신라에서는 아홉 임금이 바뀌었는데 흥덕왕(興德王)ㆍ희강왕ㆍ민애왕(閔哀王)ㆍ신무왕(神武王)ㆍ문성왕(文聖王)ㆍ헌안왕(憲安王)ㆍ경문왕(景文王)ㆍ헌강왕(憲康王)ㆍ진성여주를 말한다. 경복 2년에 비로소 급제하여 벼슬살이 몇 해 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면, 이는 중국에서 60~70년을 지낸 셈이 된다. 이 어찌 사리에 맞다고 하겠는가. 자혜가 9세에 머리를 깎고 당 나라에 들어갔다가 당 고종(唐高宗) 21년(670), 즉 함형(咸亨 당 고종의 여섯 번째 고친 연호) 원년 신라 문무왕(文武王) 10년이다. 에 귀국하였다는 글과 상반된다. 그리고 원효가 큰길거리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자 태종 무열왕이 듣고 과공주와 동거시켜 아들 총을 낳았다고 하였는데, 자혜를 총의 아우라 한다면 태종 무열왕이 당 고종 영휘(永徽) 5년(654)에 즉위하였는바, 영휘 5년으로부터 함형 원년 신라 문무왕 10년이다. 까지는 17년이 되므로 총도 태어나지 않은 때이며, 자혜가 함형 원년에 당 나라에서 돌아왔다면 그 나이는 이미 30이 훨씬 넘은 때이다. 그 형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 아우는 형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29의 나이로 당 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왔다면 이 무슨 사리이겠는가. 이 또한 상반된 말이다. 굳이 함형 원년에 귀국하였다는 말로 증거를 삼으려면,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14년(640) 신라 선덕여주(善德女主) 9년이다. 을 자혜의 출생한 해로 계산, 당 고종 총장(總章) 원년(668) 신라 문무왕 8년이다. 을 자혜가 29세에 머리 깎고 당 나라에 들어간 해로 보아야 함형 원년에 귀국하였다는 글과 어느 정도 부합될 것이다.
야승(野乘)이나 패설(稗說)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남(嶺南) 순흥부(順興府)에 위치한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부석사(浮石寺)가 있으니, 곧 신라 시대의 고찰(古刹)로 의상(義相)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것이다. 대웅전(大雄殿) 뒤에 하나의 큰 바위가 가로 세워져 있고 그 위에는 또 하나의 큰 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덮여 있는데, 얼핏 보면 두 바위가 위아래로 맞닿은 듯하나 자세히 보면 맞닿지 않고 상당한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노끈을 넣어서 잡아당기면 걸림 없이 잘 통하므로 비로소 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석사란 이름도 이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이치이다. 그리고 사문(寺門) 밖에는 흙덩이처럼 생긴 식사(息沙)가 있는데, 예로부터 부스러지지 않고 혹 깎아내어도 다시 생겨나곤 하여 마치 식양(息壤 저절로 생장하여 영원히 줄어들지 않는 토양(土壤))과 같다. 의상이 득도(得道)한 뒤에 서역(西域)의 천축(天竺)으로 들어가려 할 때 평소 거처하던 방문 앞 낙수(落水) 지는 자리에 주장자(拄杖子)를 꽂으면서, ‘내가 떠난 뒤에 이 주장자에 반드시 가지와 잎이 생겨날 것이며,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하였는데, 그가 떠난 뒤에 사승(寺僧)들이 흙으로 그의 상(像)을 만들어 그가 거처하던 방안에 안치하였고 창문 밖에 꽂아 놓은 주장자는 바로 가지와 잎이 생겨나 아무리 해와 달만 내리비치고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아도 죽지 않고 집 높이의 길이로 자랐다. 그렇다고 집 높이보다 더 자라지도 않고 겨우 1장(丈) 남짓하며 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변함이 없다. 광해주(光海主) 시대에 역신(逆臣) 정조(鄭造)가 영남 관찰사(嶺南觀察使)로 이 절에 와서 보고는 ‘선인(仙人)이 짚던 지팡이이니, 나도 짚어보고 싶다.’며 즉시 톱으로 베어갔는데, 바로 이어 두 개의 줄기가 생겨나 이전처럼 자랐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뒤에 정조는 역모에 의해 복주(伏誅)되었으나, 이 나무는 지금도 사철 푸르르고 또 잎도 떨어지지 않으므로 중들이 이를 비선화(飛仙花)라 부른다.”
그렇다면 의상은 진정 태백산에서 입적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천축으로 들어간 것이며, 《전도록》에 ‘자혜가 1백 45세에 태백산에서 입적하였다.’는 기록도 허위인 것이다.
성호(星湖) 이씨(李氏) 이름은 익(瀷) 는,
“의상이 지은《삼한산수비기(三韓山水祕記)》에 미래를 미리 논해 놓은 말이 마치 부절(符節)을 맞추듯 부합되니 참으로 신승(神僧)이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의 《설림(說林)》에도 극력 칭찬하였으니, 보통 중과 비할 바가 아니라 정법안(正法眼)을 갖춘 자이다.”
하였는데, 그가 홍유후(弘儒侯)의 아우라 하기 때문에 빼놓지 않고 변증하는 바이다.


 

[주D-001]정법안(正法眼) : 청정법안(淸凈法眼)을 말하는데, 선가(禪家)에서 이것으로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말이나 문자(文字)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심인(心印)을 삼는다.

 

임하필기 제11권
확대원래대로축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중국 과거 시험에 합격한 우리나라 사람들



당(唐) 장경(長慶 목종(穆宗)의 연호) 원년(821)에는 신라의 김운경(金雲卿)ㆍ함통중(咸通中)ㆍ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치원(崔致遠)ㆍ최광유(崔匡裕)ㆍ김문울(金文蔚)ㆍ이동경복(李同景福)ㆍ최승우(崔承祐)ㆍ최언휘(崔彦撝)ㆍ최광윤(崔光允)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이고, 발해의 고원고(高元固)ㆍ오소도(烏炤度)ㆍ오광찬(烏光贊)ㆍ사극찬(沙亟贊)이다. 송조(宋朝)에 과거 합격자 명단의 말미를 차지한 사람으로는 고려의 김행성(金行成)ㆍ강전(康戩)ㆍ최한(崔罕)ㆍ왕빈(王彬)ㆍ김성적(金成績)ㆍ강무민(康撫民)ㆍ권적(權適)ㆍ조석(趙奭)ㆍ김서(金瑞)ㆍ강취정(康就正)이다. 연우(延祐 원(元) 인종(仁宗)의 연호) 5년(1318)에 안진(安震), 지치(至治 원 영종(英宗)의 연호) 원년(1321)에 최해(崔瀣), 태정(泰定 원 진종(晉宗)의 연호) 원년(1324)에 안축(安軸), 원통(元統 원 순제(順帝)의 연호) 원년(1333)에 이곡(李穀), 지정(至正 순제의 연호) 6년(1346)에 안보(安輔), 지정 7년(1347)에 윤안지(尹安之), 지정 9년(1349)에 이인복(李仁復), 지정 13년(1353)에 이색(李穡)ㆍ김승언(金升彦) 등 아홉 사람이 있고, 명(明)나라 과거에 합격한 자는 김도(金濤) 한 사람이다.


 

 

 
졸고천백 제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다가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중보(李中父)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한림(翰林) 이중보(李中父)가 사명을 받들고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하면서 나에게 들러 하직 인사를 하기에,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진사(進士)로 인재를 뽑는 것은 본래 당(唐)나라 때 성행하여, 장경(長慶) 초에 김운경(金雲卿)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신라(新羅)의 빈공(賓貢)으로서 두사례(杜師禮)가 주관한 시험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천우(天祐) 말년까지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사람이 모두 58명이며, 오대(五代)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때에 또 32명이 있는데, 발해(渤海) 출신 1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우리 고려에 와서도 일찍이 송(宋)나라에 선비를 보내어, 순화(淳化) 연간에 손하(孫何)가 주관하는 시험에 왕빈(王彬)과 최한(崔罕)이 합격하였고, 함평(咸平) 연간에 손근(孫僅)이 주관하는 시험에 김성적(金成績)이 합격하였고, 경우(景祐) 연간에 장당경(張唐卿)이 주관하는 시험에 강무민(康撫民)이 합격하였고, 정화(政和) 연간에 또 친시(親試)를 시행하여 권적(權適), 김단(金端) 등 4명에게 특별히 상사급제(上舍及第)를 내렸으니,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 대대로 인재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賓貢科)라는 것은 정식 과거시험 때에 매번 별도로 시험을 치러 방목(榜目) 끄트머리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서 정식 과거의 급제자들과는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수받는 관직도 대부분 낮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관직들이고, 더러는 곧바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원(元)나라에 와서 온 천하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여 인재를 등용할 때에 출신 지역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중원(中原)의 수재(秀才)들과 나란히 응시하여 금방(金牓)에 이름이 오른 자가 이미 여섯 명이나 된다. 중보는 비록 이들보다 뒤에 나오기는 하였으나 과거에서 높은 등급으로 발탁되어 황궁(皇宮)의 관직에 제수되었고, 그 은택이 양친(兩親)에게 미쳐 모두 은명(恩命)을 입었다. 그리고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고국에 사신으로 와서 모친(母親)을 고당(高堂)에서 알현하고 선영(先塋)에 분황(焚黃)하여 살아 계신 분이나 돌아가신 분 모두에게 영예를 안겼으니, 뜻을 성취하여 고향으로 돌아옴이 장경(長卿)과 옹자(翁子)가 촉(蜀)과 월(越)에서 출세를 과시했던 정도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문의 문창공(文昌公)은 나이 12세에 서쪽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에 함통(咸通) 15년의 과거에 등제하였고, 중산위(中山尉)를 거쳐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의 막하에서 보좌하여 관직이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에 이르렀다. 28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귀국하니, 고향 사람들 사이에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오고 있다. 당시는 당나라 말기에 속하여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공은 객지살이하는 외로운 몸으로 번진(藩鎭)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비록 헌질(憲秩)을 제수받기는 하였으나 실직(實職)이 아니었다. 본국으로 귀국하였으나 나라가 또 크게 어지러워 길이 막혀서 복명(復命)도 하지 못하였다. 평생을 논해볼 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영화는 그다지 누리지 못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어찌 우리 중보(中父)가 좋은 세상을 만나 화근직(華近職)에 오르고 게다가 한창 강장(强壯)한 나이에 뜻까지 더욱 겸손하여 그 전도(前途)를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겠는가. 그러니 가문과 국가를 드러내 영광되게 하는 것이 어찌 이 한때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부귀로 몸을 감싸고 공명을 천하 가득 떨치고 주금당(晝錦堂)을 우리나라에 크게 짓는 것을 보게 되리니, 후대 사람들이 중보를 우리나라의 옛 인물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평가할는지 모르겠다.
다시 기억하건대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 8)에 나 또한 외람되이 원나라에서 시행되는 회시(會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해에 응시자가 정원을 채우지 못해 좌방(左牓)에 오른 자가 겨우 43명이었다. 그 가운데 나는 요행히 제 21 명에 들어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여 고향 마을로 물러나 살아온 지 이제 13년이 되었다. 그동안 젊을 때의 웅장한 포부도 날이 갈수록 사그라져 더 이상 날고 뛰는 기세가 없어지고 말았다. 근래에 중보를 보고 나서는 내가 끝내 자포자기에 안주하여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음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니, 성명(聖明)하신 임금님을 저버린 부끄러움을 또 어찌 다 말하겠는가.
중부는 부디 노력하여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서 아홉 길의 높은 산을 완성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도록 하게나. 나는 중보와 절친한 사이인지라 먼저 그의 행실을 칭찬하고 또 과거 나의 어리석음을 질타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는 바이다.
원통(元統)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 3월 초길(初吉)에 쓰다.

[주C-001]이중보(李中父) : 중보는 이곡(李穀 : 1298 〜 1351)의 자이다. 이곡의 초명은 운백(雲白), 호는 가정(稼亭),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이자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20년(충숙왕 7)에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참군(福州司錄參軍)이 되었고,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제 1 등으로 합격한 뒤 이듬해인 1333년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제 2 갑(第二甲)으로 급제하였다. 원나라 재상의 추천으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었고, 1335년에 흥학(興學)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고려에 환국하였다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그 후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이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에게 건의하여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지하게 하였다. 고려에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3대의 실록(實錄)을 편수하였다.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문집으로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이 글은 1335년 이곡(李穀)이 흥학(興學)의 조서를 가지고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왔다가 돌아갈 때 지어준 것이다.
[주D-001]장경(長慶) : 당나라 목종(穆宗)의 연호로, 821년 〜 824년이다.
[주D-002]빈공(賓貢) : 외국에서 중국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한 선비를 이른다. 《송사(宋史)》 권487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조에, “선비를 바치는 것〔貢士〕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왕성(王城)에서 바친 선비를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 바친 선비를 향공(鄕貢)이라 하고, 타국(他國)에서 바친 선비를 빈공(賓貢)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3]천우(天祐) : 당나라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의 연호로, 904년 〜 907년이다.
[주D-004]빈공과(賓貢科) : 《동사강목(東史綱目)》 당(唐)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889, 진성여주〈眞聖女主〉 3년) 조에, “장경(長慶) 초에 김운경(金雲卿)이 처음으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빈공과는 과거가 있을 때마다 외국인을 위하여 보이는 별시(別試)로서 과거의 방(榜) 끝에 그 이름을 붙인다. 김운경으로부터 당 말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자가 58인이며, 오대(五代)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때에도 32인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나타낸 자는 최이정(崔利貞), 김숙정(金叔貞), 박계업(朴季業), 김윤부(金允夫), 김입지(金立之), 박양지(朴亮之), 이동(李同), 최영(崔霙), 김무선(金茂先), 양영(楊潁), 최환(崔渙), 최광유(崔匡裕), 최치원(崔致遠), 최신지(崔愼之), 김소유(金紹游), 박인범(朴仁範), 김악(金渥), 최승우(崔承祐), 김문울(金文蔚) 등으로 모두 성재(成材)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박인범은 시(詩)로 명성을 날렸고, 김악은 예(禮)로 일컬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최치원, 최신지, 최승우가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 원걸(元傑), 왕거인(王巨仁), 김수훈(金垂訓) 등은 모두 문장으로 저명하나 사서(史書)에 빠져 있어 전하지 않는다.” 하였다.
[주D-005]순화(淳化) : 송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990년 〜 994년이다.
[주D-006]왕빈(王彬)과 최한(崔罕) :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 제과(制科) 조에, “성종(成宗) 5년(986)에 최한(崔罕)과 왕림(王琳)을 송나라에 보내어 국자감에 입학시켰는데, 11년(992)에 최한과 왕림이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여 비서랑(秘書郞)에 제수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송사(宋史)》 권487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조에는 “순화 3년에 상(上)이 각 도의 공거인(貢擧人)들을 친히 시험하여 고려(高麗)의 빈공(賓貢)인 진사(進士) 왕빈(王彬)과 최한(崔罕) 등에게 급제를 주고 관직을 제수한 다음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왕빈(王彬)의 경우 그 이름이 《고려사》에는 왕림(王琳)으로 되어 있고 《송사》에는 왕빈(王彬)으로 되어 있다.
[주D-007]함평(咸平) : 송나라 진종(眞宗)의 연호로, 998년 〜 1003년이다.
[주D-008]김성적(金成績)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목종(穆宗) 원년(998)에 김성적(金成績)이 송나라에 들어가 등제(登第)하였다.” 하였다.
[주D-009]경우(景祐) :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로, 1034년 〜 1037년이다.
[주D-010]정화(政和) :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로, 1111년 〜 1117년이다.
[주D-011]권적(權適), 김단(金端) 등 4명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예종(睿宗) 10년(1115) 7월에 김단(金端), 견유저(甄惟底), 조석(趙奭), 강취정(康就正), 권적(權迪)을 송나라 태학(太學)에 보내었고, 12년(1117)에 권적, 조석, 김단이 상사급제(上舍及第)로 등제(登第)하였다.” 하였다. 《고려사》에는 권적(權適)이 권적(權迪)으로 되어 있으며, 급제자 수는 4명이 아니라 3명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고려사》 세가(世家) 예종(睿宗) 12년 5월 조에는 “황제가 처음으로 권적(權適) 등을 집영전(集英殿)에서 몸소 시험을 보여 권적 등 4인에게 상사급제를 하사하고 권적에게는 특별히 화요직(華要職)을 제수하였다.”라 하여 본문과 일치한다.
[주D-012]금방(金牓) : 과거 급제자의 이름을 써서 걸어두는 방문(榜文)으로 금방(金榜)이라고도 한다.
[주D-013]여섯 명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의하면, 충숙왕 5년(1318)에 안진(安震)이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8년(1321)에는 최해(崔瀣)가, 11년(1324)에는 안축(安軸)이 각각 합격하였다. 나머지 세 명은 미상이다. 이곡은 충숙왕 복위 2년(1333)에 합격하였다.
[주D-014]높은 등급 : 이곡이 1333년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제 2 갑(第二甲)으로 급제한 것을 말한다.
[주D-015]황궁(皇宮)의 관직 : 이곡이 제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 재상의 추천으로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된 것을 말한다.
[주D-016]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追贈)될 때에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 나아가 이를 고하고 사령장의 부본(副本)인 누런 종이를 불태우던 일을 말한다.
[주D-017]장경(長卿)과 …… 정도 : 장경은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사마상여가 고향인 촉(蜀)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면서, 승선교(昇仙橋)를 지나다가 다리 기둥에 쓰기를, “높은 수레와 사마(駟馬)를 타지 않고는 이 다리 밑을 지나지 않으리라.〔不乘高車駟馬 不過汝下〕” 하였다. 그 뒤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를 읽은 한 무제(漢武帝)가 그를 등용하여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한 후 촉 땅에 사신으로 파견하자, 태수(太守) 이하 관원들과 그동안 자신을 박대하던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輿地廣記 卷29》《漢書 卷57 司馬相如傳》 옹자(翁子)는 주매신(朱買臣)의 자(字)이다. 주매신은 한 무제 때 엄조(嚴助)의 천거를 받아 고향인 오월(吳越)의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었는데, 부임하는 길에 수년 전 가난하게 지낼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옛 아내가 개가(改嫁)한 새 남편과 함께 부역에 나가 길을 닦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 부부를 뒷수레에 싣고 가서 마소를 먹이는 심부름을 시켰다. 또 주매신은 예전에 회계군(會稽郡)의 수저승(守邸丞)에게 기식(寄食)을 한 적이 있었는데, 회계 태수가 된 뒤 일부러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인끈을 품속에 감추고서 도보로 군저(郡邸)에 부임하여 관아의 아전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漢書 卷64 朱買臣傳》
[주D-018]문창공(文昌公) :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을 이른다.
[주D-019]함통(咸通) 15년 : 이규경(李圭景)의 ‘최문창(崔文昌) 사적(事蹟)에 대한 변증설〔崔文昌事蹟辨證說〕’에 의하면, 최치원이 배찬(裵瓚)이 주관한 과거에 합격한 것은 18세이며,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원년(874)으로 신라 경문왕(景文王) 14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함통 14년(873) 7월에 의종(懿宗)이 죽고 이듬해에도 함통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다가 11월에 가서야 건부로 개원(改元)을 했기 때문에 함통 15년과 건부 원년은 실제 같은 해를 가리킨다.
[주D-020]고 시중(高侍中) : 당나라 장수 고변(高騈)을 가리킨다. 황소(黃巢)의 난 때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로 난을 진압하다 최치원이 떠나고 3년 뒤인 887년에 부장(部將) 필사탁(畢師鐸)에게 살해당했다.
[주D-021]헌질(憲秩) : 어사(御史)의 직위를 가리킨다.
[주D-022]화근직(華近職) :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화려한 직임을 이른다. 이 역시 이곡이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된 것을 가리킨다.
[주D-023]주금당(晝錦堂) : 위국공(魏國公) 한기(韓琦)가 출세를 한 후 고향인 상주(相州)에 세운 건물로서, 동시대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한기를 위해 지은 상주주금당기(相州晝錦堂記)가 있다. 《古文眞寶 後集 卷6》 주금(晝錦)은 의금주행(衣錦晝行)의 준말로서 반대어인 의금야행(衣錦夜行)에서 나온 말이다. 즉 진(秦)나라 말기에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에 입성하여 진나라 서울인 함양(咸陽)을 도륙할 때, 어떤 이가 항우에게 관중에 그대로 머물 것을 권유하였는데, 진나라 궁궐이 이미 파괴된 것을 본 항우는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부귀를 얻고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富貴不歸故鄕 如衣錦夜行〕”고 대답하였다. 이 고사에서 연유하여 후대에 부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금주행(衣錦晝行), 줄여서 주금(晝錦)이라 한 것이다. 《漢書 卷31 項籍傳》
[주D-024]다시 기억하건대 : 국역 대본에는 ‘復記’로 되어 있는데,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잡록(雜錄)에 수록된 동일 작품에는 ‘復’ 자가 ‘因’ 자로 되어 있다. 《韓國文集叢刊 第3輯 232쪽》
[주D-025]나 또한 …… 있었는데 : 《고려사》 선거지(選擧志) 제과(制科) 조에, “충숙왕 7년(1320) 10월에 안축(安軸), 최해(崔瀣), 이연종(李衍宗)을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8년(1321)에 최해가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황제가 칙명(勅命)으로 요양개주판관(遼陽盖州判官)을 제수하였다.” 하였다.
[주D-026]좌방(左牓) : 《원사(元史)》 선거지(選擧志)에 의하면, 원나라 때에 과거 합격자의 방을 게시하면서 좌우로 두 개의 방을 붙였는데, 지배층인 몽고인(蒙古人)과 터키ㆍ이란ㆍ유럽 등의 색목인(色目人)을 우대하여 우방(右牓)에 게시하고 금(金)나라 유민인 화북(華北)의 한인(漢人)과 남송(南宋)의 유민인 강남(江南)의 남인(南人)은 좌방(左牓)에 게시하였다. 고려인이 좌방에 게시된 것으로 보아,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우대를 받는다는 최해의 형식적인 표현과 달리 실제로는 중하등의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일 작품에는 ‘용방(龍牓)’으로 되어 있다.
[주D-027]한 삼태기의 …… 못하는 :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밤낮으로 모든 일에 부지런하소서. 사소한 일이라 하여 신중히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니, 아홉 길의 산을 쌓으면서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夙夜 罔或不勤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 하였다.
[주D-028]초길(初吉) : 초하루를 이른다.


 

청장관전서 제11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아정유고 3(雅亭遺稿三) - 시 3
시를 논한 절구(絶句)



최씨 셋 박씨 하나가 중국에서 과거했으니 / 三崔一朴貢科賓
신라 시대 선비로는 이 네 사람뿐일세 / 羅代詞林只四人
어쩔 수 없이 우리와 중국은 한계가 있어 / 無可奈何夷界夏
약간의 시구가 남아 있어도 뚜렷한 정신은 없구나 / 零星詩句沒精神

목은은 황소를 배우고 포은은 당을 배워 / 牧隱黃蘇圃隱唐
고려 때 대가로 굉장히 울렸구나 / 高麗家數韻洋洋
금ㆍ원ㆍ송을 융화한 사람은 누구냐 / 問誰融化金元宋
역로(櫟老)의 시에서 만장의 광채 나네 / 櫟老詩騰萬丈光

살았을 때에 한참 휘둘러댔으면 그만이지 / 滔滔漭漭秪生時
죽은 뒤에 쓸데없이 문집은 왜 만들었나 / 身後何煩禍棗梨
참으로 백운은 촌학구에 지나지 않는다 / 眞箇白雲村學究
죽룡과 초봉이 어찌 그리도 어리석었나 / 竹龍蕉鳳一何癡


 

[주D-001]최씨(崔氏) …… 하나 : 최씨 셋은 최치원(崔致遠)ㆍ최승우(崔承祐)ㆍ최언위(崔彦撝)를 말하며, 박씨(朴氏) 하나는 박인범(朴仁範)을 가리키니, 이들은 모두 당 나라에 유학하고 과거에 급제하였다.
[주D-002]목은(牧隱)은 …… 배워 : 목은은 이색(李穡)을 가리키며, 황소(黃蘇)는 정견(黃庭堅)과 소 식(蘇軾)으로 송체(宋體)를 말한다. 포은(圃隱)은 정몽주(鄭夢周)의 호.
[주D-003]역로(櫟老) : 역Ș(櫟翁) 이제현(李齊賢)을 높여서 칭한 것.
[주D-004]백운(白雲) : 이규보(李奎報)의 호.

 

 

간본 아정유고 제6권
확대원래대로축소
 문(文)-서(書)
이낙서(李洛瑞) 서구(書九) 에게 주는 편지



비 내리는 밤에 등불을 밝히고 양철애(楊鐵崖 철애는 명(明) 나라 시인 양유정(楊維楨)의 호)의 시를 읽으니 그 시가 힘차고 쾌활하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이후의 재자(才子)들이야 여기에 비교하면 참으로 모기 소리와 같소.

족하가 나에게 부탁하여 그 장서(藏書)를 나의 자필로 교정하고 평점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내가 18~19세 때에 거처하던 집의 이름을 구서재(九書齋)라 하였는데, 이는 바로 독서(讀書)ㆍ간서(看書)ㆍ장서(藏書)ㆍ초서(鈔書)ㆍ교서(校書)ㆍ평서(評書)ㆍ저서(著書)ㆍ차서(借書)ㆍ폭서(曝書)를 일컬은 것이었는데 10년 후에 족하의 명자(名字)와 상부하게 되니 우연한 일이 아니오. 일찍이 구서재에 대한 시조를 지었으나 지금은 잊어 기억하지 못하오. 심초연(沈蕉硏 초연은 심염조(沈念祖)의 호)이 일찍이 도곡상공(陶谷相公 도곡은 이의현(李宜顯)의 호)의 소장서를 손수 평점하고 또다시 나에게 교점(校點)을 부탁하니, 그 책은 바로 《이십일사(二十一史)》인데 이는 모두 고인들이 남긴 전아(典雅)한 뜻을 이어받은 것이었소. 또 새해가 되었으니 족하는 많은 기서(奇書)를 얻어 슬기로운 지식이 날로 더해지기를 바라오. 나는 한가롭고 탈없이 지내는 형편이라, 창문에 비치는 햇빛이 항상 선명하며, 밤에는 잇달아 등(燈)을 밝힐 뿐이오. 여염의 나이든 친구인 간취자(看翠子) 이수익(李壽益)이 쓴 《금강기(金剛記)》 속에 낭선군(朗善君 종실로 이름은 우(俁))을 일컬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보내드리오. 마침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일본 종이를 보내왔으므로 시험삼아 먹을 갈아 놓고 붓을 휘둘러 옛사람들의 좋은 일을 찾아 쓰고 싶었소. 동성(同姓)ㆍ동한(同閈 같은 마을에 사는 것)ㆍ동지(同志)들 중에 좋은 사람을 회상해 보니 족하(足下)보다 더 좋은 이가 없소. 족하가 이미 나의 변변치 못한 편지를 간직하였으니, 종이가 나비 날개 같고 자획이 모기 다리 같더라도 모두 보내 주오. 내가 뽑아 등초하여 정의를 두터이하겠소.

내 집에 가장 좋은 물건은 다만《맹자(孟子)》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백 닢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의 호)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으니, 이는 자여씨(子輿氏 맹자(孟子)를 가리킨다)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생(左丘生 좌구명(左丘明)을 가리킨다)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리하여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이 참으로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이 도대체 요행을 바라는 술책이요, 당장에 팔아서 한때의 취포(醉飽)를 도모하는 것이 보다 솔직하고 가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서글픈 일이오. 족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파성(婆城)의 조경암(趙敬菴)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학문을 권면한 것이라 읽어 볼 만하였소. 세속 부랑자들은 《소학(小學)》 두 글자를 들으면 비평하고 나무라며, 《근사록(近思錄)》을 보면 기지개를 켜고 누우려 하니, 참으로 너무나 얄밉소. 족하는 심상한 말로 보아넘기지 않기를 바라오.

일본(日本)에서 모각(摸刻)한 역산비(嶧山碑 이사(李斯)의 글씨로 된 진(秦)의 덕을 칭송한 비)는 전가(篆家)에서 드물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화악묘비(華嶽廟碑 한(漢) 나라 때의 비로 화산(華山)에 있었다)는 예서(隸書) 중에서 오확(烏獲 진(秦) 나라의 용사)과 임비(任鄙 전국 시대 진(秦) 나라의 역사(力士))처럼 힘찬 것이라, 그것을 대하면 소름이 끼치며 떨리는 것이 마치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굵은 모래가 튀는 것 같고 군데군데 부러진 칼과 활촉이 노출된 격이라 장사(將士)의 가슴을 뚫고 표한한 장수의 목구멍을 찌르는 것이 연상되오. 족하는 세밀히 살펴보시오.

내가 단 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狌狌)이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과 같으므로 내 친구들은 모두 단 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 것이 있으면 나를 주곤 하는데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만은 그렇지 못하오. 그는 세 차례나 단 것을 먹게 되었는데, 나를 생각지 않고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나에게 먹으라고 준 것까지 수시로 훔쳐먹곤 하오. 친구의 의리에 있어 허물이 있으면 규계하는 법이니, 족하는 초정을 깊이 책망해 주기 바라오.

나는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좋은 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학집요(聖學輯要)》ㆍ《반계수록(磻溪隨錄)》ㆍ《동의보감(東醫寶鑑)》이니, 하나는 도학(道學), 하나는 경제(經濟),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방술로 모두 유자(儒者)가 할 만한 것이오. 도학은 진실로 사람됨의 근본이 되는 일이니 말할 것 없거니와, 요즈음 세상에는 오로지 사한(詞翰)만을 숭상하며 경제를 멸시하니, 의술(醫術)이야 그 누가 밝히겠는가?
옛날부터 전해 오는 두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으니, 진명경(陳明卿 명경은 명(明)의 진인석(陳仁錫)의 자(字))은 청초한 문인이지만 경제에 몰두하였고, 왕자안(王子安 자안은 당(唐)의 왕발(王勃)의 자)은 경박한 재사이지만 의술에 통달하였다 하오. 나는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일찍이 기특히 여기며 사랑하였는데, 지금 족하는 침착하고 슬기로워 바탕과 재질을 갖춘데다가 나이 또한 한창이니, 사장(詞章)에만 전심하지 말고 항상 이와 같이 참다운 마음으로 물건을 사랑하는 일에 심력을 기울이시오. 그러면 이 세상을 헛되이 살았다는 탄식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되오. 창고 속에서 누렇게 뜬 곡식과 같은 나야 말할 것도 없소. 이 두 책을 봉정(奉呈)하고 내키는 대로 세 책을 더 뽑아 보내니 이미 열람한 것은 중복해 보지 마시오.

삼가 이백시(李伯時 백시는 송(宋) 나라 이공린(李公麟)의 자)가 석탑(石榻)에 그린 선성(先聖 공자를 말한다)의 화상 및 72제자(弟子)의 화상을 보니, 자연(子淵 안연(顔淵)의 자)은 하관이 풍후하게 되어 빈요(貧夭)하지 않을 것 같고, 자공(子貢)은 얼굴이 파리하게 되어 재물을 많이 늘릴 것 같지 않고, 안쾌(顔噲)의 얼굴은 사납기가 번쾌(樊噲)와 같고, 번수(樊須)의 수염은 참으로 번수(繁鬚 텁석부리)이고, 양전(梁鱣)은 전어(鱣魚)를 들고 있으니 또한 무슨 의미요? 아마 백시(伯時)가 자기의 신통한 붓을 멋대로 내두른 것인가 보오. 그러나 관복(冠服)이 예스럽고 엄연하니, 마땅히 그것을 음미해 볼 것이지 까다롭게 그 수염에서 구해 볼 필요는 없는 것이오.

고종(高宗)이 찬(讚)을 지은, 후자리(后子里)ㆍ악자성(樂子聲)의 무리는 사적이 없는데도 억지로 그 찬을 꾸미고 보니 너무나 무미하여 도리어 붓을 휘둘러 의미를 붙인 백시의 것만 못하오. 한 위공(韓魏公 위공은 송(宋) 나라의 한기(韓琦)의 봉호)이 짓고 쓴 북악비묘(北嶽碑廟)는 은은하고 질박하며 아담하고 정제하니 참으로 대신(大臣)의 것이오. 서맥(書脈)은 노공(魯公 안진경(顔眞卿)의 봉호)을 모방하였는데, 다만 자획이 보다 비대하면서 약하오. 왕원미(王元美 원미는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자)가 이를 보고 ‘칼날이 사방으로 뻗쳐 바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옳은 평가가 아니오. 난시(亂時)의 절신(節臣 노공(魯公)을 가리킨다)과 치세(治世)의 보상(輔相 한 위공(韓魏公)을 가리킨다)을 그 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오.

전에 남의 책을 빌어다 읽는 사람을 보고 나는 그가 너무 부지런하다고 비웃었는데, 이제 문득 나도 그를 답습하여 눈이 어둡고 손이 부르트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참으로 사람은 자신을 요량하지 못하는 것이오. 《유계외전(留溪外傳)》 첫 권을 보내니 저녁에 한 번 읽어 보고 내일 이른 아침에는 돌려 주오. 이는 모두가 효자(孝子)ㆍ충신(忠臣)ㆍ열처(烈妻) ㆍ 기부(畸夫)에 관한 것인데 세도(世道)에 보익이 되는 글이라, 매양 갑신년 대목을 읽을 때에는 눈물이 어리고 뼈가 아프며 간담이 서늘하오.
어떤 이가 나에게 소책(素冊 지금의 공책과 같다)을 주기에 그것을 벼루 머리에 두고, 한적할 때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면 고인들의 득의한 명문(名文)을 아무것이나 뽑아 낭독하고 나서, 급히 먹을 갈아 세대를 구별하지 않고 그 글을 쓰면 마음이 몹시 즐거웠소. 이때에는 비록 좋은 술과 아름다운 꽃이라도 이 즐거움과 바꿀 수 없었소. 이제 문득 이헌길(李獻吉 헌길은 명(明) 나라 문인 이몽양(李夢陽)의 자)의 글이 생각나서 한두 수를 기록하여 보내려 하는데, 이것은 내가 7~8년 전에 읽은 것이오. 《설부(說郛)》 1권을 돌려보내오.

내가 어제 남한(南漢)에서 돌아왔는데, 물이 깊고 맑으며 하늘이 드높았소. 가을과 겨울에는 더욱 회포를 참지 못할 것이 산음(山陰) 길만 못하지 않소.
《수색집(水色集)》에 성명을 쓰지 않았으니, 전고(典故)에 익숙한 이가 아니면 그가 공신(功臣) 허적(許)임을 알 수 없고, 서문을 짓는 이도 성명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허균(許筠)으로 생각되오. 그 책을 찍어내어 없애지 않으려 하면서도 누구인가를 숨기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우매한 것이 이와 같소. 아는 이라야 더불어 말할 수 있을 것이오. 《산해경(山海經)》의 글을 뽑고자 하니 잠깐 빌려 주시겠소? 연선(演蟬)을 보내니 이것은 족하의 필적인 듯하오.

내가 비록 학자는 아니나 매양 《근사록(近思錄)》을 애중하여 가까이 두고 밤낮으로 3~4조목씩 보아 남몰래 경계를 삼는 터이라, 잠깐도 놓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러나 족하의 소청을 어떻에 따르지 않겠소. 9책을 모두 보내오. 이를 보내고 나면 내가 볼 책이 없으니, 《원문류(元文類)》나 혹은 《송시초(宋詩抄)》 두 책 가운데 하나라도 빌려 주는 것이 어떠하오.

해가 새로 바뀌고 사람은 점점 늙어가오. 군자는 밝은 덕을 높여야 할 것인데, 나는 해가 바뀐 후 남의 집 손이 되지 않으면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한 번도 한가한 틈을 타 상봉하지 못하니 마음이 불안하오. 그러나 창문의 햇볕은 따뜻하고 벼루의 얼음이 풀리므로 전에 하던 공부를 되찾고자 하오. 《전당시(全唐詩)》를 인편에 보내 주면 좋겠으며, 윤회매(輪回梅) 2수도 돌려보내 주는 것이 어떠하겠소.

《일지록(日知錄 명말 청초(明末淸初) 고염무(顧炎武)의 저술)》을 3년 동안이나 고심하면서 구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남이 비장(祕藏)해 둔 것을 얻어 읽어 보니, 육예(六藝)의 글과 백왕(百王)의 제도와 당세의 일에 그 근거를 고증한 것이 분명하였소. 아, 고영인(顧寧人 영인은 고염무(顧炎武)의 자)은 참으로 옛날의 기풍이 있는 큰 선비요.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 족하가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이며 내가 아니면 누가 다시 이를 초(鈔)하겠소. 4책을 우선 보내니 잘 간수하여 보기 바라오. 전에 보내 준 조그마한 책(쓰지 않은 책을 가리킨다)은 아미 다 썼으니 족하는 계속 보내 주어 나의 초하는 일을 마치게 해주기 바라오.

세월은 덧없이 흘러 또 여름이 되었소. 족하를 따라 경사(經史)를 토론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천 그루 도화(桃花) 속에서 미친 듯이 통음(痛飮)하거나, 아니면 문을 닫고 굶주리고 누워 빈사전(貧士傳)이나 읽으면서 오릉가 이조(於陵家李螬)의 글자 주(注) 내는 일 때문이오. 여러 운사(韻士)들의 시권(詩卷)을 보내니 한 번 보고 돌려주기 바라오.

어제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의 자)과 함께 묵계(墨溪)에 가서 용촌(龍村) 사는 임장인(林丈人 임씨의 어른이라는 뜻)과 만났는데, 장인은 소명하고 온화하며 자상한 분이었소. 이야기하는 도중에 이낙서(李洛瑞)를 칭찬하면서 세 번이나 치사하였소. 이때 모인 사람은 10인인데 시를 지은 사람은 7인이었소. 장인이 굳이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도 마지못해 지었소. 이제 장인이 하신 말씀을 써서 보내거니와 ‘과거(科擧)는 장사꾼이요, 문장은 이단이다.’ 하였소. 이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헤어져서, 오늘은 나는 듯이 미호(渼湖)로 향하여 가고 있소. 담원팔영(澹園八詠)을 보내 주면 좋겠소. 밤중에 차[茶]를 빌려가기에 족하가 편찮은 줄 알았는데 오늘은 병환이 어떠하오?

나처럼 나태한 사람이 어떻게 날마다 자전각(字典閣)에 나아가 허다한 글자를 교열하겠소? 옛날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 송 선생(宋先生)은 반드시 남에게 책을 빌려 주고 독서를 권하였다가, 빌려갔던 사람이 책을 돌려왔을 때 책에 보풀이 일지 않았거나 때가 묻지 않으면, 선생은 반드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음을 책망하고 다시 빌려 주곤 하였소. 그런데 어느 악소년(惡少年)이 책을 빌어다가 읽지 않고 돌려 주면서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 그 책을 밟고 문질러 많이 읽은 것처럼 꾸민 일이 있었소. 족하는 송 선생의 중후함을 본받으면 좋겠소. 하물며 내가 악소년처럼 밟고 문지르지 아니함에랴?

고려 말년 제공(諸公) 중에서 당(唐) 나라의 문장을 이을 만한 이는 포은(圃隱) 선생이오. 그러나 화려한 것이 익재(益齋)에 비하면 약간 손색이 있고, 기이하고 웅건한 것이 목은(牧隱)에 미치지 못하오. 대개 익재는 원(元) 나라 격조요, 목은은 송(宋) 나라 문체이니, 어찌 일찍이 포은의 유연한 운치에 미치겠소? 또 명가(名家)의 글이 있거든 보내 주면 좋겠소.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소. 그러나 박식한 이에게 강문(講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족하는 근본을 안다고 할 만하오. 내가 먼저 찾아갈 것이니 기다려 주기 바라오. 이공(李公)께서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의 호)의 《여지(輿地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말함)》를 보겠다고 하므로 내가 가져다 보여 드리려 하니, 보내 주기 바라오.

춘추 시대 1백 24개 열국에 외자로 된 국호가 많고 간혹 두 자로 된 국호가 있으니, 두 자로 된 것은 소주(小邾)ㆍ남연(南燕) 같은 것이오. 이 책에는 잇달아 써서 기본 숫자에 차지 않으니, 두 자 국호까지 분정하여 기본 숫자를 채워 보내 주기 바라오.

원(元) 나라 태정제(泰定帝)가 천하를 나누어 18로(路)를 만들었다고 하나 고증할 길이 없었는데, 다행하게도 《문헌통고(文獻通考 송(宋)의 마단림(馬端臨)의 저서)》와 《청일통지(淸一統志 화신(和珅) 등이 지은 전국의 지리서)》에서 연혁(沿革)을 상고해 내서 18로를 채워 쓰게 되었으니 지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보내 주기 바라오.

나의 생각에는, 중원(中原)은 원기(元氣)가 모인 곳이라 일월(日月)이 바로 비추고 수토(水土)가 그 조화를 이루어, 성현의 기지가 되고 문헌의 육성지가 되었다고 보오. 안남(安南)은 옛 교지(交趾)의 지역으로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1만여 리가 되나 역대의 문물이 왕성하여 볼 만하고, 유구(琉球)는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하나의 섬이나, 자손들을 중원에 입학시켜 명(明) 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근실하므로 오랑캐의 풍속을 크게 혁신하였소. 이는 모두 내가 전적(典籍)에서 상고한 것으로 나만이 흠모할 뿐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오.

우리 조선은 기성(箕聖)이 피난 온 곳으로 요동(遼東)과의 거리가 1천여 리밖에 되지 않고, 전장(典章)과 예악(禮樂)은 사이(四夷)의 으뜸이라, 저 교지ㆍ유구와 비교해 볼 때 그 문명이 어떠하겠소? 그리하여 전사(前史) 외이열전(外夷列傳)을 두루 읽어 보니 조선이 제일이요, 다음은 안남(安南)이요, 그 다음은 유구의 차례로 되어 있으니 이는 세력이 강한 것을 이름이 아니라 문명으로 따진 것이오. 그러므로 최치원(崔致遠)ㆍ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승우(崔承祐)가 당(唐) 나라 조정에 과거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고, 박인량(朴寅亮)이 송(宋) 나라에 사신가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쳤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저술하면서 김부식(金富軾)을 특별히 세가(世家)에 나열하였소.
호원(胡元)에 이르러서는 익재(益齋) 이공(李公)이 서천(西川)에 봉사(奉使)하고 강남(江南)에 강향(降香)하였으며, 가정(稼亭)ㆍ목은(牧隱) 부자가 제과(制科)에 올랐소. 우리 조선의 개국(開國)은 황명(皇明)과 함께 일어났는데,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 거의 없는 해가 없었소. 이와 같이 2백 년 동안 계속하여 그 주고 받은 의식의 성대함과 보고 느낌에 진지한 것이 참으로 지극하다고 말할 만하오. 그러나 도리어 세 조정(당(唐)ㆍ송(宋)ㆍ원(元))만큼 성대하지는 못하오.

묵장(墨莊)이 나에게 먼저 《패문시운(佩文詩韻)》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사양하고 《운략(韻略)》을 청하였더니, 《운략》은 희귀한 책이라, 유리창(琉璃廠) 20여 서방(書坊)을 뒤져 찾은 끝에야 비로소 이 책을 얻었다 하오. 그처럼 두터운 정의에 참으로 감격하였소. 갈 길이 바빠 미처 볼 겨를이 없었는데, 족하는 먼저 그 범례를 깨달아 우리들의 운문(韻文)에 대해 모두 금쪽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반공(潘公)이 이른바 ‘문운(文運)에 관계가 있다.’고 한 말이 허언이 아닌 듯싶소.

《통지(統志)》포주(蒲州)조에 이른 ‘기자묘(箕子墓)’는 몽현(蒙縣)에 있는 기자묘를 인증함에 불과하고, 별도로 포주에 묘가 있는 것은 아니오. 대개 기자묘가 셋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몽현에 있고, 하나는 평양(平壤)에 있고, 하나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소.

편지를 받고 근간의 기거(起居)가 편안함을 들으니 우러러 위로되는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하겠소. 이 못난 사람은 이원(摛院)에 번들어서 날마다 1만에 가까운 많은 말을 쓰니 손가락이 마비되었고, 또 사신이 압록강을 건널 날이 한 열흘 남았는데 두목(頭目 중국 사신 중에 무역을 위해 따라온 상인)을 공궤(供饋)하기 위하여 내일은 고을로 돌아가야 되겠소. 이처럼 수고로우니 크게 탄식한들 어찌하겠소. 《기년아람(紀年兒覽)》은 지금 서 직각(徐直閣 직각은 벼슬 이름. 서영보(徐榮輔)를 말함) 댁에 있고, 기타는 모두 고을 관아에 있으므로, 《청정국지(蜻蜓國志)》2책만 보내드리오.

《지지(地志)》의 초본을 한 번 자세히 보니 참으로 물샐틈 없이 잘되었다고 할 만하나 명환인물(名宦人物)은 실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 못난 사람의 천박한 식견으로는 한결같이 《승람(勝覽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말함)》에 의존하여 기록하고,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에서 세밀히 간추려 《승람》에 누락된 것을 하나하나 다 보충해야 할 것이오. 또 반계(磻溪 반계는 유형원(柳馨遠)의 호)의 《지지(地志)》와 최연촌(崔煙村 연촌은 최덕지(崔德之)의 호)의 《유초(流鈔)》에 의해 수록하되, 명종조(明宗朝)로 한계를 하고, 선조(宣祖) 이후는 우선 생략하였다가 가능할 때에 처리하였으면 하오. 《승람》에 기록된 것에 지나치게 소략하거나 잘못된 부분은 신빙성이 있는 책을 참고하여 첨부할 것이며, 효자(孝子)ㆍ열녀(烈女)에 이르러서도 《명사(明史)》의 예에 의거하시오. 이미 어제 만나 의논했듯이 《여지(輿地)》도 사류(史流)에 관계되는 것이니, 십분 신중하여 주기를 바라오.
인생의 이합(離合)이 흐르는 물과 뜬구름 같아서 본래 정처가 없는 것이나, 금년 봄처럼 분장(分張)이 극심한 적은 없었소. 나는 다행히 병이 없고 지난달부터 또다시 《무예도보(武藝圖譜)》의 일을 계속하였는데, 미구에 일을 마치겠으나 곧 내각(內閣)으로 들어가 어제(御製)를 교열하게 되었소. 유료(柳寮 유득공(柳得恭)을 가리킨다)도 이 일로 여지국(輿地局)에 있지 않소. 그 부하(府下)에 사는 사인(士人) 이인섭(李仁燮)은 곧 나와 단문지친(袒免之親 삼종(三從) 또는 사종(四從)의 친족)이오. 지난번에 연동(蓮洞) 장신(將臣)이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갔었는데, 인섭이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곧 본부 향인의 데릴사위가 되었소. 지금 자녀를 낳았으나 영원히 먼 곳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 어찌 가련한 일이 아니겠소. 곧 하인을 보내 찾아 보고 무슨 일이건 곡진히 돌봐 주며, 그로 하여금 관아에 출입하게 하여 믿고 의지할 곳이 있게 하면 매우 다행하겠소. 또한 그 사람됨이 근실하기만 하지 다른 재주는 없는지라 친근히 한다 하더라도 세도를 끼고 폐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오. 더구나 나의 족질(族姪)이 귀부의 부민(部民)이 되었으니 역시 드문 일이오.
또 들으니, 길현(吉衒)이란 자가 전관(前官) 별감(別監)이었는데 사건에 연루되어 부옥(府獄)에 구금되었다고 하니, 그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조부 고(故) 별제(別提) 인화(仁和)는 곧 관서(關西)의 부자(夫子 스승)였소. 향천(鄕薦)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신임무옥(辛壬誣獄)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귀향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소.
선조는 그 당시에 주서로 물러났고 / 先祖當年注書退
미손(微孫)은 오늘날 별제로 돌아오네 / 孱孫今日別提歸
성세에 어찌 감히 기미 알아 간다 하랴 / 敢言聖世知幾去
가을철의 살찐 노어 생각나서라네 / 却憶鱸魚秋正肥
선왕이 그 자손 연(衍)을 불러 보고 그 시(詩)를 읊조리며 가상히 여겨 포상하였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이오? 현(衒)의 죄가 이미 원악대대(元惡大憝 반역죄를 범하거나 크게 악한 것을 말함)가 아니라면 그 어찌 옛날을 생각하여 용서해 줄 길이 없겠소? 모름지기 영문(營門)에 논보(論報)하여 되도록이면 속히 감방(勘放)하여 현인의 손자로 하여금 그 가문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거듭 편지를 받아 읽으니 손을 잡고 마주앉아 자세한 일까지 얘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더구나 ‘요즈음은 늘 화도시(和陶詩)만 읊조리고 조굴부(吊屈賦)는 짓지 아니하며 운명에 맡겨 버린다.’ 하니 흠모하오. 나는 또 운서(韻書)를 편찬하는 일을 당하여 글자를 간추리고 자획을 조사함에 털끝처럼 미세한 데까지 이르고 있는데,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니 심력이 쉽게 풀어지고 그 번뇌를 이겨내지 못하겠소. 자신의 잔약한 몸뚱이를 돌아보매 겨우 형체만 갖추고 있는데, 나이 50에 믿는 것이라고는 밝은 눈 하나뿐이었소. 향조(香祖 청(淸) 나라 반정균(潘庭筠)의 호)가 말하듯이 다른 사람의 눈과는 다르다고 하나, 운자(韻字)를 편집한 뒤부터는 공중을 쳐다보면 어른거리니 이는 실로 작은 일이 아니오.
근자에 영공(令公)을 양이(量移 죄수의 유배지를 가까이로 옮기는 것)한 것은 대개 《여지(輿地)》를 쉽게 성취하려는 것이니, 비와 이슬을 내리고 서리와 눈을 내리는 것이 모두가 조화 아닌 것이 없소. 편지 속의 허다한 가르침을 각중(閣中)의 여러분들과 의논하니, 대개 착수가 너무 늦어진 것을 한탄하나 내각(內閣)의 서적을 함부로 시골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소. 그리고 좌보(左輔)에 해당되는 지역이라 차츰 옮겨 가까워지면 몹시 편리하겠으나, 이마 적적(謫籍)에 있으니 뜻대로 될지는 기필할 수 없소. 붓과 먹과 종이는 전과 같이 보내 준다 하니 그 말이 불가한 것은 아니오. 지금 보여 준 네 가지 어려움은 영공이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소. 대략 수찬(修纂)하였다가 후일에 다시 정정을 더해 완료하는 것이 일의 순서일 듯하오. 가능한 한 편리한 방법을 따라 속히 손을 써주기 바라오.
《인물고(人物考)》는 내각에 그 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기회를 보아 각신(閣臣)에게 요청하려 하나 기필할 수는 없소. 이 일이 마치 서담포(徐憺圃)가 전리(田里)에 쫓겨나가 《일통지(一統志)》를 편찬한 것과 흡사하니 어찌 이처럼 기이하게 일치하오? 《장릉지(蔣陵志)》 역시 지금까지 끌어올 일이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개정할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모(某) 태수(太守)를 두려워하겠소? 그 책이 모두 심대교(沈待敎 심염조(沈念祖))의 집에 있으니, 이는 그 배식록(配食錄)을 개수(改修)하기 때문이오. 찾아다가 교열하기 바라오. 배식록은 고증한 증거가 자세하고 명백한 것이라 없애지 못할 전적(典籍)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수정하면 본지(本志)의 힘이 덜할 것이오. 다만 초고(草藁)는 비장해 두고 내지 아니하니 어찌하겠소? 《경도지(京都志)》는 각중(閣中)에 있으니 거두어 보내겠소. 《황화여고(黃華旅稿)》는 내 마음대로 평점하여 감히 공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소. 다시 10여년 전 일부터 계속하면 그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

《전운(全韻)》초고 7장을 먼저 비성(祕省)에 보내어 교열한 다음에 그곳으로 보내니 반드시 상세히 보아 주(注)를 달고 만약 잘못된 곳이 있으면 쪽지를 붙여 주시오. 간명(簡明)을 기하려 하나 어떻게 진선진미하기를 바라겠소. 만약 사반공배(事半功倍)의 방법을 얻는다면 글을 다루다가 머리가 희었다는 나무람을 면할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나절이면 충분할 것이니 하인을 보내거든 즉시 그 편에 부쳐 보내어, 여러 곳에 돌려 보여서 짧은 기일내에 완공하면 그 얼마나 시원하겠소? 결락된 곳은 대강 보충하여 뒤로 물리거나 도려내고 덧붙이는 지경이 되지 않게 하기 바라오. 돌려 보는 순서는 먼저 비성(祕省)에 보내고, 다음은 집사(執事), 다음은 유(柳 유득공(柳得恭)), 다음은 박(朴 박제가(朴齊家)), 다음은 내각(內閣), 다음은 이 영공(李令公 영공은 존칭)으로 하여 물레바퀴와 같이 잠시도 쉬지 않고 돌리려 하오. 7장을 지금 보내니 오전에 다 보아 주기 바라오.

지금 온 다섯 장에 부전이 둘만 붙었으니 좌우(左右 상대에 대한 존칭)는 피곤한가 보오. 조금 전에 내각에 불려갔었는데, 여러 곳의 지속(遲速)이 한결같지 않으니 극히 민망하오. 어제 물어 온 세 글자의 뜻은 명백하지 못하니 답답한 일이오. 난수(灤水)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명백하고 하나는 분명치 못하니, 요서(遼西)의 수명(水明)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경측(瓊畟)이 《한단순예경(邯鄲淳藝經)》을 보았는데 거기에 ‘― ―’라 한 것은 지금의 투(骰) 자요. 세(勢) 자의 훈(訓)은 지금 그 장이 있지 않으니 다시 상고하기 바라오. 좌우께서 하시는 교정이 정밀하여 다시 적수가 없는데, 유혜보(柳惠甫 혜보는 유득공의 자)가 그 뒤를 이어 탐구해 찾아내 좌우께서 알지 못하는 것을 잡아내니 혜보가 교서(校書)에 공부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교서의 묘리가 끝이 없어서인가 하오. 또 12장을 바꾸어 보내니 전의 것과 아울러 62장이라, 이틀 동안이면 마칠 수 있을 것이오. 성시도(城市圖)와 금강봉시(金剛峯詩)를 보내 드리오.

종용(慫慂)의 종(慫) 자는 권(勸 권면하는 것)자로 해석되니 글자 그대로 종용인 것이오. 지금 이 운례(韻例)에 용(慂) 자에다 권(勸)의 뜻으로 해석을 붙이고 종(慫) 자에 또 다시 경(驚 경동하는 것)의 뜻으로 해석을 붙였으니, 종 자 밑에는 거듭 권의 뜻으로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오. 만약 종 자에 따른 해석이 없다면 거듭 권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오. 다른 나머지도 다 이와 다름이 없소.

흉용(洶溶)의 용(溶) 자는 과연 오서(誤書)된 것이나, 강(洚) 자는 곧 강(降) 자인데, 하내(河內)의 물이름으로 홍수(洪水)와 같은 뜻이니 참작하여 개정하시오. 옥(剭) 자의 해석을 ‘주(誅 목을 베는 것)라 형(刑 형벌하는 것)이라’ 한 것은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오. 규(葵) 자 밑에 퇴(椎 방망이)의 뜻으로만 붙여 놓은 해석은 어제 삭제하려다가 말았는데, 종규(終葵)로 해석을 붙인다 하더라도 긴밀하지 못하오. 이미 본의(本意)가 있으므로 이와 같은 해석을 덧붙이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는 운부(韻府)에 엮어진 문자(文字)와 흡사하기 때문이오. 규(葵) 자 밑에 성(姓)이라 써야 한다고 하나, 대개 성명(姓名)의 뜻으로 해석을 붙이는 것은 성과 인명으로 발음되는 것으로 사람의 성명에 따라 특별하게 하나의 별개 음(音)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니 바로 묵기[万俟]와 이기(食其) 같은 것이오. 그러나 규(葵) 자에 대해서는 그 음이 한 가지뿐이니 특별히 성(姓)이라는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소.
비(庳) 자의 해석에 대해서는 의례(義例)에 관계되는 것이니, 나타낼 만한 사람이 없으면 국명(國名)으로 해석을 붙일 뿐이오. 미(湄) 자에 대한 해석을 수초교(水草交 물과 풀이 한데 뒤엉키는 것)라 한 것이 가장 타당하니 그대로 바루어야 하겠소. 한 글자로 특별히 달리 발음되는 것은 두 가지 음으로 주(注)를 달 것이니, 항(缸) 자의 음이 강(江)과 항(降)으로 발음되는 따위오.
또 음은 같고 뜻이 다른 것과 글자의 뜻은 같고 음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본주(本注) 밑에 권(圈 둥근 계선)을 치고 별도로 주를 달아야 할 것이니 권을 치지 않으면 본주와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오. 이(黟) 자 밑과 기기(庪觭) 자 밑에는 여백이 있으니 주(注)를 첨부할 것이요, 이(餌) 자 밑에 기(耆) 자를 도려내고 붙인 것은 잘못이니, 이(餌) 자는 곧 저(底) 자요. 이와 같은 곳을 귀신같이 적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등에 찬물을 끼얹듯이 써늘하게 하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옹(翁) 자의 해석에 조경모(鳥頸毛 새의 목털)라 한 것을 고집하면서 ‘《설문(說文)》ㆍ《급취(急就)》에서 나온 것이라,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지는 않으리라.’고까지 하니, 족하는 어찌 이처럼 답답하게도 물정을 모르시오? 조경모(鳥頸毛)가 2책에 나왔다는 그것이 곧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이오. 도대체 《설문》이란 무엇이며, 《급취》란 무슨 물건이오? 또한 저 새[鳥]가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소? 왈칵 성을 내며 홀(笏)을 이끌고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오. 또한 그 많은 글자마다 다 본의를 갖추기 위해 해석을 붙인다면 불(不) 자 밑에도 화부(花跗)란 해석을 붙여야 하고, 언(焉) 자 밑에도 황조(黃鳥)란 해석을 붙인 다음이라야 그 근원을 추구하였다고 할 것이나 누가 이를 다 알겠소? 명철한 족하가 한바탕 웃으라고 이와 같은 해담(諧談)을 하였소. 지금 교정해 온 다섯 장을 일체 개정하였으니, 분명하게 서로 일치되었다 하겠소.


 

[주D-001]갑신년 : 명 의종(明毅宗)이 순국(殉國)하고 여러 충신들이 절사(節死)하였던 1644년(인조 22)을 가리킨다.
[주D-002]산음(山陰) :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거처하던 곳으로 경치가 좋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왕휘지에게 산음(山陰)의 산수(山水)를 물으니, 왕휘지는 “천암(千巖)이 경수(競秀)하고 만학(萬壑)이 쟁류(爭流)한다.” 하였다.
[주D-003]오릉가 이조(於陵家李螬) : 오릉(於陵) 집의 벌레먹은 오얏.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이지만 3일을 굶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자 엉금엉금 기어가 우물 위에 있는 벌레먹은 오얏을 따 먹은 뒤에 의식을 회복하였다는 말이 있다.《孟子 滕文公下》
[주D-004]신임무옥(辛壬誣獄) : 경종(景宗) 원년에 왕위의 계승을 에워싸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일어난 당쟁의 화옥(禍獄). 신축년(1721, 경종 1)ㆍ임인년(1722, 경종 2) 두 해에 일어났다 하여 신임무옥 또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주D-005]화도시(和陶詩) : 소동파(蘇東坡)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의고시(擬古詩)에 화답한 화도연명의고(和陶淵明擬古)를 가리킨다. 이 시는 대개 자연스럽고 한적한 정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古文眞寶 前集》
[주D-006]조굴부(弔屈賦) :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굴원(屈原)을 조상하는 조굴원부(弔屈原賦)를 가리킨다. 이 부는 강개 비분한 뜻이 내포되었다.《古文眞寶 後集》


해동역사 제18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예지(禮志) 1
학례(學禮)




국학(國學)
○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에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들을 가르쳤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려 사람들은 길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扃堂)’이라고 부르면서 혼인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경서를 읽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신당서》 ○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는 바로 고구려이다.
○ 신라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국학(國學)을 세웠다. 《화한삼재도회》 ○ 《요사》에는, “요 개태(開泰) 원년(1012, 현종3)에 귀주(歸州)에서 ‘귀주의 백성들은 본디 신라에 살던 사람들로 글자를 읽을 줄 모르니 학교를 설립해서 가르쳐 달라.’고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요청한 대로 하게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라는 문무왕(文武王)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태학(太學)에 나아가 석전제(釋奠祭)를 올리는 것을 보고 강론(講論)하고서 돌아와 《당서》에 보인다. 학교를 세울 뜻이 있었으나, 미처 세우지 못하고 훙하였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국학(國學)을 세웠으나, 제도가 아주 엉성하였다. 성덕왕(聖德王) 16년에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10철(哲), 72제자(弟子)의 상(像)을 바치니, 국학에 놓아두도록 명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 또 박사(博士)ㆍ조교(助敎)를 두어서 학례(學禮)와 학의(學儀)가 점차 갖추어졌다. 혜공왕(惠恭王) 때 및 경문왕(景文王)ㆍ헌강왕(憲康王) 때에 이르러서는 모두 국학에 행행하여 경전의 뜻을 강론하여 문물(文物)의 빛남이 중국과 짝하였다.
○ 고려에는 국자감(國子監)과 사문학(四門學)이 있으며, 배우는 자가 6천 명이나 된다. 《송사》
○ 고려의 국자감은 전에는 남쪽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었다. 앞에 대문이 있는데 ‘국자감(國子監)’이라고 편액을 달았다. 중앙에 선성전(宣聖殿)을 세우고 양쪽 행랑(行廊)에 재사(齋舍)를 설치하여 제생(諸生)들을 거처하게 했다. 전에 지은 것은 아주 좁았는데, 지금은 예현방(禮賢坊)으로 옮겼는바, 학도가 많이 불어났기 때문에 규모를 크게 지은 것이다. 《고려도경》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성종(成宗) 11년(992) 12월에 국자감을 창설하고, 예종(睿宗)이 또 학사(學舍)를 크게 키워 설립하여 문교(文敎)가 점차 떨쳐졌다. 그러다가 원나라를 섬긴 이후로 개체(開剃)와 변발(辮髮) 제도를 시행해 상서(庠序)의 가르침이 모두 없어졌다. 충렬왕(忠烈王) 때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국학(國學)을 설립하기를 청하면서 노비(奴婢)를 바쳐 설립을 도왔으며, 또 가재(家財)를 내어 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어서 선성(先聖) 및 그 제자들의 상(像)을 그려오게 하고, 제기(祭器)ㆍ악기(樂器) 및 육경(六經)과 그 외의 여러 책을 사오게 하였으니, 안공(安公)이 우리 유학(儒學)에 공을 끼친 것이 크다.
○ 조선의 성균국학(成均國學)은, 성전(聖殿)이 앞에 있고, 명륜당(明倫堂)이 뒤에 있다. 사학(四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조선부》 본주(本注)에는 또 이르기를, “남ㆍ중ㆍ동ㆍ서의 사학에서 올라온 자를 일러 승학(升學)이라고 한다. 북쪽을 피하여 감히 학교의 이름으로 하지 못한 것은 조정(朝廷)을 존중해서이다.” 하였다.
생원ㆍ진사로서 거재(居齋)하는 자를 상재(上齋)라 하고, 사학에서 올라와 거처하는 자를 하재(下齋)라 한다. 생원은 3년마다 명경(明經)으로 뽑은 자이며, 진사는 시부(詩賦)로 뽑은 자이며, 승학(升學)은 백성들 가운데서 준수한 자이다. 또 그것을 일러 기재(寄齋)라 한다. 《조선부 주》
살펴보건대, 태조(太祖) 6년(1397)에 비로소 성균관을 건립하였으며, 태종(太宗) 12년(1412)에 또 사부(四部)에 학교를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사학(四學)의 설립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유독 북부(北部)의 학교에 대해서만은 창설하고 폐지한 연대를 상고할 수가 없다.
○ 조선의 선성묘(宣聖廟)에는 대성전(大成殿)이라고 편액하였다. 묘제(廟制)는 영성문(靈星門)ㆍ의문(儀門)ㆍ정전(正殿)ㆍ양무(兩廡)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현들은 모두 소상(塑像)으로 모셔져 있어서 중국의 제도와 같다. 춘추(春秋)로 지내는 정제(丁祭)에는 모두 조정에서 내린 아악(雅樂)을 쓴다. 관원은 대사성(大司成)ㆍ소사성(少司成)이 있으며, 관생(館生)을 생원(生員)이라 하고, 부ㆍ주ㆍ군ㆍ현의 학생은 생도(生徒)라 한다. 이들은 모두 유건(儒巾)을 착용하는데, 부드러운 비단을 써서 만든다. 《조선기사(朝鮮紀事)》
○ 조선의 개성(開城)에 있는 지금의 군학(郡學)은 바로 왕씨(王氏) 때의 성균관이다. 성현들이 모두 소상으로 모셔져 있는 것이 평양(平壤)과 같다. 《조선부 주》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충숙왕(忠肅王) 7년(1320) 9월 무인에 문선왕(文宣王)의 상(像)을 만들기 위해 왕이 은병(銀甁) 30개를 내었으며, 재신(宰臣)과 추신(樞臣)들이 모두 재물을 내어 그 비용을 도왔다. 공민왕(恭愍王) 16년(1367) 7월 경자에 문선왕의 소상을 숭문관(崇文館)으로 옮겼다. 본조 선묘(宣廟) 7년(1574)에 개성ㆍ평양 두 부(府)에 있는 선성과 10철의 소상을 철거하고 위판(位板)으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과시(科試)
○ 고려의 공사(貢士)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왕성(王城)에서는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는 향공(鄕貢)이라 하고, 다른 나라 사람은 빈공(賓貢)이라 한다. ○ 곽원(郭元)이 말하기를, “본국에서는 3년마다 한 차례씩 거인(擧人)들을 시험 보이는데, 진사과(進士科)ㆍ제과(諸科)ㆍ산학과(算學科)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번 1백여 명이 시험 보는데, 그 가운데서 합격하는 자는 1, 2십 명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이상 모두 송사》
○ 당(唐) 정관(貞觀) 초에 태종(太宗)이 학교를 넓히고 학자들을 숭상하였는데, 고려에서 이에 뛰어난 자제들을 보내어 경사(京師)에서 교육시키기를 청했다. 그 뒤 장경(長慶) 연간에는 백거이(白居易)가 가행(歌行)을 잘 지었는데, 계림(鷄林) 사람들이 옷깃을 여민 채 감탄하고 흠모하였다. 근자에 사신이 고려에 가서 국자감이 세워진 것을 알았는데, 유관(儒官)을 가려뽑고, 학교를 새로 열었으며, 자못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의 제도를 준행하여서 제생(諸生)들의 등급을 매긴다. 고려의 선비를 뽑는 제도로 말하면, 비록 본조(本朝 송나라를 말함)의 그것을 규범으로 삼기는 하였지만, 전하여 듣고 구례를 따르고 하는 데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없지는 않다. 고려에서는 학생(學生)들에 대해서 매년 문선왕묘(文宣王廟)에서 시험하는데, 합격자는 중국의 공사(貢士)와 대등하다. 고려의 거진사(擧進士)는 한 해 건너 한 차례씩 그 소속 고을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뽑는데, 여기에 합격하면 중국의 공자(貢者)와 대등해지며, 도합 3백 50여 명을 뽑는다. 이 추천 선발이 끝나면 또 학사(學士)들에게 명해 영은관(迎恩館)에서 전체 시험을 치르게 하여 3, 4십 인을 뽑아, 갑ㆍ을ㆍ병ㆍ정ㆍ무의 5등급으로 나누어서 급제(及第)를 내리는바, 대략 본조(本朝)에서 시행하는 성위(省闈)의 제도와 비슷하다. 왕이 친히 시험을 실시해 관원을 뽑는 것으로 말하면 시(詩)ㆍ부(賦)ㆍ논(論) 3제(題)를 쓰고 살펴보건대, 《송사》에서는 그것을 염전중시(簾前重試)라고 이른다. 시정(時政)을 책문(策問)하지 않으니,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 이외에 또 제과(制科)굉사(宏辭)의 명목이 있는데, 비록 형식은 갖추어져 있으나 항상 실시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성률(聲律)을 숭상하고, 경학(經學)은 그리 잘하지를 못하는바, 그들의 문장은 당(唐)나라의 여폐(餘弊)를 방불케 했다. ○ 진사(進士)의 이름도 하나가 아니어서 왕성(王城) 안에서는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는 향공(鄕貢)이라 한다. 이들을 국자감(國子監)에 모아서 합시(合試)하는데, 거의 4백 명이나 된다. 그 뒤에 왕이 친히 시험 보여, 여기에서 합격하는 자에게 벼슬을 준다. 정화(政和) 연간부터 학생(學生)들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는데, 김단(金端) 등이 입조(入朝)하여 은사과(恩賜科)에 합격하였다. 이 뒤로는 선비를 뽑을 때 경술(經術)과 시무책(時務策)으로 공부의 우열(優劣)을 비교하여 고하(高下)를 정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은 유(儒)를 업(業)으로 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는데, 이는 대개 중국을 향모(向慕)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급제하면 청개(靑蓋)와 복마(僕馬)를 주어 성중(城中)에서 크게 놀아 영관(榮觀)으로 삼게 한다. 《이상 모두 고려도경》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과거 시험의 법은, 삼국 시대 때에는 무력(武力)만을 전적으로 숭상해서 정해진 제도가 없었다. 신라에서는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처음으로 위화부(位和府)를 두고서 영(令) 2명이 선거(選擧)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원성왕(元聖王) 4년(788)에 비로소 독서삼품출신과(讀書三品出身科)의 제도를 만들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문헌(文獻)에서 상고할 수가 없다. 고려의 경우는 광종(光宗) 7년(956)에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가 책사(冊使)를 따라 나왔다가 9년간 머물러 있으면서 비로소 건의하여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드디어 지공거(知貢擧)가 시(詩)ㆍ부(賦)ㆍ송(頌)ㆍ책(策)으로 진사과(進士科)ㆍ명경과(明經科) 및 제과(諸科)를 뽑았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실시한 처음이다.
○ 조선에서는 중국 조정의 정삭(正朔)을 받아서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의 간지가 들어간 해에 실시하고, 회시(會試)ㆍ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未)의 간지가 들어간 해에 실시한다. 성균관에는 항상 5백 명의 선비를 기르는데, 3년마다 명경(明經)으로 시취(試取)하는 자를 생원(生員)이라 하고, 시부(詩賦)로 시취하는 자를 진사(進士)라고 하며, 또 남ㆍ중ㆍ동ㆍ서 사학(四學)에서 올라온 자를 승학(升學)이라고 한다. 생원ㆍ진사로서 전시(殿試)에 합격한 자를 식년(式年)이라 하는데, 여기에 합격하여야만 관원이 되며, 합격하지 못하면 그대로 성균관에서 공부한다. 식년시는 3년마다 실시하며, 33명만 뽑는다. 《조선부 주》

빈공(賓貢)

○ 당 정관(貞觀) 13년(639)에 학사(學舍)를 증축하였는데, 1천 2백 구(區)나 되었다. 사이(四夷) 가운데 고구려ㆍ백제ㆍ신라와 같은 나라에서는 서로 잇달아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시켰으므로, 드디어 8천여 명이나 되었다. ○ 개원(開元) 연간에 신라 왕 김흥광(金興光)이 자제를 파견하여 태학(太學)에 입학시켜 경술(經術)을 배우게 하였다. 《이상 모두 신당서》
○ 당 태종(唐太宗)이 학교(學校)의 제도를 일으키자 신라ㆍ백제에서 모두 자제를 파견하여 와서 배웠는데, 그때 식량만을 주었다. 《명사》
○ 장경(長慶) 원년(821) 신축에 빈공(賓貢)은 1인으로, 김운경(金雲卿)이다. 《등과기(登科記)》 ○ 살펴보건대, 김운경은 신라 사람이다. 인물고(人物考)에 나온다.
○ 김가기(金可記)는 신라 사람으로 빈공진사(賓貢進士)이다. 《태평광기(太平廣記)》
○ 보력(寶曆) 원년(825)에 신라 왕이 상주(上奏)하여, 먼저 태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는 최이정(崔利貞)ㆍ김숙정(金叔貞)ㆍ박계업(朴季業) 등 네 사람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주기를 청하고, 또 새로 조공하는 데 따라간 김윤부(金允夫)ㆍ김입지(金立之)ㆍ박양지(朴亮之) 등 12명을 국자감(國子監)에 들여보내 학업을 익히게 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책부원귀(冊府元龜)》
○ 최치원(崔致遠)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賓貢)에 급제하였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최치원은 바로 신라 사람이다.
○ 최광유(崔匡裕)는 신라 사람이다. 당나라에서 신라의 사자(士子)들에게 현과(賢科)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자, 최광유와 최치원이 잇달아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광여기(廣輿記)》
○ 김이오(金夷吾)는 살펴보건대, 김이오의 오(吾)는 어(魚)로 되어 있는 데도 있다. 신라 사람으로 빈공에 합격하였다. 《전당시(全唐詩)》
○ 김문울(金文蔚)은 신라의 학생으로 빈공(賓貢)에 응시해서 급제하였다. 《책부원귀》
○ 고원고(高元固)는 발해국 사람으로 빈공에 합격하였다. 《전당시》
○ 당 태화(太和) 7년(833)에 발해 국왕이 상주하기를,
“학생 해초경(解楚卿)ㆍ조효명(趙孝明)ㆍ유보준(劉寶俊) 세 사람을 상도(上都)에 보내어 학문을 닦도록 하였습니다. 앞서 파견한 학생 이거정(李居正)ㆍ주승조(朱承朝)ㆍ고수해(高壽海) 등 세 사람은 학업이 대충은 성취되었을 것이니, 전례대로 이들과 바꾸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기 바랍니다.”
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책부원귀》
○ 후당(後唐) 동광(同光) 2년(924)에 발해 국왕이 그의 친족인 학당친위(學堂親衞) 대원겸(大元兼)을 파견하여 입조(入朝)하게 하면서 국자감승(國子監丞)을 시험치르게 하였다. 당나라 때부터 해마다 자주 제생(諸生)을 파견하여 경사(京師)의 태학(太學)에 나아가서 고금의 제도에 대해 익히게 하였으므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해졌다. 주량(朱梁)과 후당(後唐) 30년 동안에는 공사(貢士)로 과거에 급제한 자가 10여 명이었으며, 학사(學士)가 아주 많았다. 《오대사》
○ 사승찬(沙丞贊)은 발해국 사람으로, 오대 시대 정명(貞明) 연간에 등과(登科)하였다. 《통지략(通志略)》
○ 송(宋) 개보(開寶) 9년(970, 광종21)에 고려 왕이 김행성(金行成)을 파견하여 국자감에 취학하게 하였는데,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 5년에 고려 사람 강전(康戩)이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 옹희(雍煕) 3년(986, 성종5)에 고려가 본국의 학사(學士) 최한(崔罕)ㆍ왕빈(王彬)을 파견하여 국자감에 나아가서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 순화(淳化) 3년(992, 성종11)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의 빈공진사(賓貢進士) 왕빈ㆍ최한 등 40인에게 급제를 내렸으며, 모두 비서성 비서(祕書省祕書)로 삼은 다음 즉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 함평(咸平) 원년(998, 목종1) 2월에 조서를 내려 예부(禮部)의 방방(放榜)에서 고려의 빈공진사(賓貢進士) 김성적(金成績)에게 급제를 하사하고, 춘방(春榜)에 붙이게 하였다. ○ 경우(景祐) 원년(1034, 덕종3)에 고려의 빈공진사 강무민(康撫民)을 사인원(舍人院)에서 소시(召試)하였다. 4월 3일에 출신(出身)을 하사하였다. ○ 원부(元符) 2년(1099, 숙종4)에 조서를 내려 고려국왕이 선비를 빈공(賓貢)으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 숭녕(崇寧) 5년(1106, 예종1)에 고려 왕이 사자(士子) 김단(金端) 등 5명으로 하여금 태학에 들어가게 하니, 중국 조정에서는 그들을 위하여 박사(博士)를 두었다. ○ 정화(政和) 7년(1117, 예종12) 2월 정묘에 집현전(集賢殿)에 나아가 고려의 진사(進士)들에게 책문(策問)을 시험보였다. 3월 경인에 고려의 진사 권적(權適)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권적(權迪)으로 되어 있다. 등 4명에게 상사급제(上舍及第)를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송사(宋史) 및 옥해(玉海)》
고려에서는 자제들을 태학에 입학시켰는데, 과거에 급제하고서 돌아간 자가 아주 많다. 일찍이 선인(先人)들의 《동년소록(同年小錄)》을 보니, 그 가운데 빈공(賓貢)이란 것이 있었는데, 바로 고려에서 보내온 선비들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 고려의 이색(李穡)은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다음 해 원나라의 정시(廷試)에 응시하여 이갑진사(二甲進士)에 뽑혔다. 《명시종(明詩綜)》
○ 국초(國初)에 살펴보건대, 홍무(洪武) 초이다. 고려에서 김도(金濤) 등 3인을 보내어 태학에 입학하게 하였다. 《장안객화(長安客話)》
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 5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 짐이 중국과 사방 오랑캐를 통일하였기에 현인 군자를 얻어 등용하고자 한다. 금년 8월부터는 특별히 과거를 베풀되, 오경의(五經義)는 5백 자(字) 이상, 사서의(四書義)는 3백 자 이상으로 하며, 논(論) 역시 이와 같이 하고, 책(策)을 지음에 있어서는 오로지 사실대로 곧바로 서술하기를 힘쓰고 문장을 꾸미는 것을 숭상하지 말도록 하며 1천 자 이상으로 하라. 고려ㆍ안남(安南)ㆍ점성(占城) 등의 나라에서도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가 있으면 각각 본국의 향시(鄕試)에 나아가 합격한 다음 경사(京師)의 회시(會試)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되, 인원수에는 구애받지 말고 선발하라. 이상의 내용을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반포해서 알리라.”
하였다. 《속문헌통고》
○ 4년 3월에 봉천전(奉天殿)에서 회시(會試)에 합격한 거인(擧人)들에게 친히 책문(策問)을 시험보였으며, 오백종(吳伯宗) 등 1백 22명에게 진사급제(進士及第)와 진사출신(進士出身)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이 과거에 고려의 김도(金濤)가 삼갑(三甲)에 합격하였다. 김도에게 동창부(東昌府) 안구현승(安邱縣丞)을 제수하였는데, 김도가 중국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노자를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상동》 ○ 《엄주별집(弇州別集)》에는, “홍무 4년에 고려의 유생 가운데 들어와 응시한 자가 3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오직 김도(金濤)만이 삼갑(三甲) 제5등에 합격하였으므로 현승(縣丞)을 제수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낙방하였다. 3인은 모두 중국 말이 통하지 않아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하였다. ○ 《위숙자집(魏叔子集)》에는, “홍무 4년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은 송렴(宋濂)이었다. 그 제목은, 먼저 오경의(五經疑) 2수(首)와 다음 사서의(四書疑) 2수로 제1장(場)을 삼고, 논(論)ㆍ조(詔)ㆍ표(表) 각 1수로 제1장을 삼고, 책(策) 1수로 제3장을 삼았다. 이 과거에서 합격한 자는 1백 20인으로, 그 가운데 97번째인 김도는 고려 사람이다.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뽑는 방법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공민왕(恭愍王) 20년에 본국의 향시(鄕試) 거인(擧人) 가운데 한 사람인 김도가 삼갑(三甲)에 합격하여 진사출신(進士出身)을 하사받았고, 또 박실(朴實)ㆍ유백유(柳伯濡) 두 사람은 낙방하였다.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자, 황제의 분부를 받들어서 노자를 주어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 5년에 고려 왕이 자제를 파견해서 태학에 입학시키게 해 주기를 요청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태학에 입학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나, 멀리 바다를 건너와야 하니, 원하지 않는 자는 억지로 입학시키지 말라.”
하였다. 《명사》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중국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자는 신라의 김운경(金雲卿)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 장경(長慶) 초에 두사례(杜師禮)의 방(榜)에 합격하였다. 그후에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자는 58명이다. 오대 시대의 주량(朱梁)과 후당(後唐)의 과거에 합격한 자는 31명인데, 그 가운데 이름을 상고할 수 있는 자는 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치원(崔致遠)ㆍ최광유(崔匡裕)ㆍ김문울(金文蔚)ㆍ이동(李同) 함통(咸通) 연간에 합격하였다.최승우(崔承佑) 당 소종(昭宗) 경복(景福) 연간에 당나라에 들어가 급제하였다.ㆍ최언위(崔彦撝) 《고려사》의 최언위전에 이르기를, “최언위는 신라 사람이다. 나이 18세 때 당나라에 들어가서 유학하여 당나라 예부 시랑 설정규(薛廷珪)의 방(榜)에 급제하였다. 이때 발해의 재상(宰相)인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오광찬(烏光贊)이 같은 해에 급제하였는데, 오소도가 당나라에 조회하면서 그의 아들 이름이 최언위의 이름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는 표문을 올려서 청하기를, ‘신이 지난날에 입조(入朝)하여 급제하였을 적에는 이름이 이동(李同)의 위에 있었으니, 지금 신의 아들 오광찬의 이름이 최언위의 이름 위에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최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더 뛰어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하였다.ㆍ최광윤(崔光允) 최언위의 아들로 진(晉)나라 때 빈공진사(賓貢進士)에 급제하였다. 역시 최언위전에 보인다.ㆍ박인범(朴仁範) 빈공진사에 급제하여 저작랑(著作郞)이 되었다.ㆍ김악(金渥) 이상은 모두 신라 사람이다.ㆍ고원고(高元固)ㆍ오소도(烏炤度) 이동(李同)과 같은 방에 합격하였다.ㆍ오광찬(烏光贊) 오소도의 아들로, 최언위와 같은 방에 합격하였다.ㆍ사승찬(沙丞贊) 이상은 모두 발해 사람이다. 고려에 들어와서 송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자는 김행성(金行成)ㆍ강전(康戩)ㆍ최한(崔罕)ㆍ왕빈(王彬)ㆍ김성적(金成績)ㆍ강무민(康撫民)ㆍ권적(權適)ㆍ조석(趙奭)ㆍ김단(金端)ㆍ강취정(康就正)이 있다. 그러나 송나라 때의 빈공과(賓貢科)라는 것은 매번 별도로 시험을 보여 방(榜)의 끝에다가 붙이는 것이었다. 원나라 연우(延祐) 4년(1317, 충숙왕4)에 비로소 과거에 관한 조서를 반포하여, 정동성(征東省)으로 하여금 합격자 3인을 뽑아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게 해 중원(中原)의 뛰어난 자들과 함께 시험을 치러 금방(金榜)에 이름을 걸게 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자에는 안진(安震) 연우 5년에 제과(制科)의 제 삼갑(三甲) 15등에 합격하였다.ㆍ최해(崔瀣) 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8)에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ㆍ안축(安軸) 태정(泰定) 원년(1324, 충숙왕11)에 제과에 합격하였다.ㆍ이곡(李穀) 순제(順帝) 원통(元統) 원년(1333, 충숙왕 복위 2)에 제과의 제 이갑(二甲)에 합격하였다.ㆍ이인복(李仁復) 지정(至正) 원년(1341, 충혜왕 복위 2)에 제과에 합격하였다.ㆍ안보(安輔) 지정 6년에 제과에 합격하였다.ㆍ윤안지(尹安之) 지정 7년에 제과에 합격하였다.ㆍ이색(李穡) 지정 13년(1353, 공민왕2)에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현(歐陽玄)이 고시(考試)할 때 삼갑(三甲) 제2등에 합격하였다.ㆍ김승언(金升彦) 어느 해에 합격하였는지 상고할 수가 없다. 《동국여지승람》 안변부(安邊府) 인물조(人物條)에 김승언은 원나라의 제과에 합격하였으며, 재행(才行)이 있었다고 실려 있다. 등 9명이 있다. 명나라 조정에서 합격한 자는 오직 김도(金濤) 한 사람뿐이다.


 

[주D-001]경당(扃堂) : 고구려 때 세운 사학기관(私學機關)이다. 태학(太學)이 상류층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관학(官學)인데 비하여, 경당은 문무일치(文武一致)의 이념으로 평민층의 자제에게 경전(經典)과 무예를 교육시키던 곳이다.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전국의 각 곳에 설치하였다.
[주D-002]문선왕(文宣王) :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주D-003]10철(哲) : 공자의 제자 가운데 10명의 뛰어난 현인으로, 안회(顔回)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ㆍ재아(宰我)ㆍ자공(子貢)ㆍ염유(冉有)ㆍ계로(季路)ㆍ자유(子游)ㆍ자하(子夏)를 가리킨다.
[주D-004]사문학(四門學) : 국자감 사방의 대문 곁에 일반 서민을 위하여 세웠던 학교를 말한다.
[주D-005]개체(開剃) : 머리의 가장자리를 모두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만 남겨서 길게 땋아 늘이는 것을 말한다. 몽고에서 들어온 풍습으로, 고려 말기에 유행하였다.
[주D-006]정제(丁祭) : 선성(先聖)ㆍ선사(先師)를 모시는 제사로, 석전제(釋奠祭)를 말한다. 중춘(仲春)인 2월과 중추(仲秋)인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행한다.
[주D-007]가행(歌行) : 성률이 덜 근엄한 고체시(古體詩)의 일종으로 악부시(樂府詩)의 계통을 이은 것이다.
[주D-008]월서계고(月書季考)의 제도 : 매월 한 차례씩 배운 것을 써 보게 하고, 사계절에 한 차례씩 배운 내용이나 시문(詩文)을 시험 보이는 제도이다.
[주D-009]성위(省闈)의 제도 : 궁중(宮中)에서 실시하는 중앙고시(中央考試)를 말한다.
[주D-010]제과(制科) : 임시로 시험을 실시하여 특출한 인재를 발탁하는 과거로,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시험하는 과거이다.
[주D-011]굉사(宏辭) : 박학굉사(博學宏辭)를 말하는바, 관리를 뽑는 과거의 이름이다. 문장 3편으로 시험하였다.《文獻通考 選擧考 賢良方正》
[주D-012]위화부(位和府) : 신라 진평왕(眞平王) 3년(581)에 설치한 관아. 후세의 이조(吏曹)와 같은 구실을 하던 관아로, 경덕왕(景德王) 때 사위부(司位府)라고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 때 다시 본 이름으로 고쳤다.
[주D-013]독서삼품출신과(讀書三品出身科) : 신라 원성왕(元聖王) 4년(788)에 설치한 관리 채용 시험 제도이다. 국학(國學)에 독서삼품과라는 제도를 마련하고 독서의 성적에 따라서 3등급으로 나누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 독서삼품과의 설치는 종래 골품(骨品) 위주의 관리 등용을 지양하고 유학(儒學)의 교양에 따른 능력 위주의 제도를 마련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골품 제도가 강고하게 유지되었던 까닭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주D-014]주량(朱梁) : 오대 시대 때의 양(梁)나라를 말한다. 주씨(朱氏)가 창건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하며, 대개 남조(南朝)의 숙량(肅梁)과 구별하기 위해 주량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주D-015]소시(召試) : 임금이 앞에 불러다 놓고 물어서 시험하는 것으로, 선비를 채용하는 특별 방법이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경호(鏡湖)

최승우(崔承祐)

채궐산 바로 앞 월나라 안에 / 採蕨山前越國中
파아란 가을 물이 맑게 하늘에 닿았네 / 麴塵秋水澹連空
갈꽃 흩어지니 모래 위에 눈보라요 / 蘆花散擈沙頭雪
마름잎 흔들리니 호수 어귀에 바람일세 / 菱菜吹生波口風
동방삭은 붉은 주머니 차고 어디서 노는고 / 方朔絳囊遊渺渺
치이자의 계수 돛대는 총총히도 가버렸네 / 鴟夷桂楫去悤悤
명황이 하지장에게 빌려 주신 뒤로부터 / 明皇乞與知章後
만경의 은혜 물결이 끝내 아니 마르네 / 萬頃恩波竟不窮

[주C-001]경호(鏡湖) : 감호(鑑湖)의 별칭. 또 장호(長湖)ㆍ태호(太湖)ㆍ하감호(賀監湖) 등의 이름이 있다. 절강성(淅江省) 소흥현(紹興縣)에 남아 있다.
[주D-001]치이자(鴟夷子) : 곧 배를 타고 오호(五湖)에 떠간 월(越)나라 범려(范蠡)이다.
[주D-002]하지장(賀知章) : 당(唐) 나라의 시인이다. 현종(玄宗) 때 비서감(秘書監)으로 있다가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도사(道士)가 되어 돌아가기를 청하니, 경호(鏡湖) 한 구비를 조사(詔賜)하였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헌 신제 중서 이사인(獻新除中書李舍人)

최승우(崔承祐)

오색 신선 붓이 자미성에 들어가니 / 五色仙毫入紫薇
새로운 공업으로 거룩한 정치를 도우리 / 好將新業助雍熙
현경 돌 위에 늘 조서를 초하고 / 玄卿石上長批詔
임부 가지 새에 벌써 시를 지었네 / 林府枝閒已作詩
은 촛대의 심지를 갈기니 붉은 꽃송이 뚝뚝 / 銀燭剪花紅滴滴
구리대에 누각을 지키니 누수가 방울방울 / 銅臺輸刻漏遲遲
자수 그대 이제 등용된 뒤로 / 自從子壽登庸後
맑은 바람을 다시 뉘라서 이을꼬 / 繼得淸風更有誰

[주D-001]자미성(紫薇省) : 당 나라 때에 중서성(中書省)이라 했으며, 성(省) 안에 자미화가 있었다. 천자의 정령(政令)을 돕는 비서관서(秘書官署)였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나부산(羅浮山)으로 들어가는 진사(進士)조송(曹松)을 보내며[送曹進士松入羅浮]

최승우(崔承祐)

비 개고 구름 걷히고 자고새는 나는데 / 兩晴雲斂鷓鴣飛
고갯마루 시냇가에서 그리울 일 말하네 / 嶺嶠臨流話所思
염차의 광생은 부 짓기를 사양하라 / 厭次狂生須讓賦
선성 태수 제 어찌 시를 말하리 / 宣城太守敢言詩
달 속의 계수를 찾아 험한 하늘에 안 오르고 / 休攀月桂凌夭險
연하를 좇아 위태한 세상을 피해 가네 / 好把煙霞避世危
칠십 긴 시내 세 동천 안이 / 七十長溪三洞裏
일후에 그대로 이름 이뤄도 마땅하리 / 他年名遂也相宜

[주C-001]나부산(羅浮山) : 광동성(廣東省)에 있는 명산. 진(晉) 나라 갈홍(葛洪)이 이곳에서 선술(仙術)을 얻었다 한다.
[주D-001]염차(厭次)의 광생(狂生) : 염차(厭次)는 고을 이름. 한대(漢代)의 부평(富平)ㆍ동방삭(東方朔)이 평원(平原) 염차 사람으로 자칭 ‘염차의 광생’이라 하였으며, 그는 해학에 뛰어나고 사부(辭賦)에도 능했다.
[주D-002]선성 태수(宣城太守) : 남조(南朝)의 시인 사조(謝眺)가 이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있었다.
[주D-003]칠십 긴 시내 세 동천(洞天) : 나부산이 유심(幽深)하고, 괴기(塊奇)하여 그 안에 긴 시내가 70군데이고, 동천(洞天)이 세 군데가 있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봄날에 서천 절도사로부터 회남으로 전직하는 위태위를 보내며[春日送韋太尉自西川除淮南]

최승우(崔承祐)

광릉은 천하에 제일 웅장한 번진 / 廣陵天下最雄藩
어진 절도사 그대에게 잠깐 중임을 맡기었네 / 暫借賢侯重寄分
꽃은 거사를 차마 못 보내 금강에서 부쳐 잡고 / 花送去思攀錦水
버들은 늦게 온다고 회수에서 서성대네 / 柳迎來暮挽淮濆
백성들의 헌데ㆍ생재기는 이제 좋은 약을 얻었구나 / 瘡痍從此資良藥
주야로 애쓰는 성군의 근심을 늦추고야 말리 / 宵旰終須緩聖君
바람 앞에 거꾸로 나는 익새를 생각해 주오 / 應念風前退飛鷁
어찌하여야 닭무리에서 학처럼 뛰어날고 / 不知何路出鷄群

[주D-001]거사(去思) : 지방 백성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守令)이 가고난 뒤에 백성이 그를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주D-002]늦게 온다고 : 한(漢) 나라 염숙도(廉叔度)가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푸니 백성이 노래 부르기를, “염숙도는 왜 늦게 왔는가[廉叔度 來何暮].” 하였다.
[주D-003]바람 앞에 거꾸로 나는 익새 : 《춘추》에 “여섯 마리 물새가 후퇴하여 날아 송나라 도읍을 지나다[六鷁退飛 過宋都].”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작자가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데 비유하였다.
[주D-004]닭무리에서 학(鶴)처럼 뛰어날고 : 뭇 닭 중에 한마리 학(鶴)이 뛰어났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높이 출세하는 것을 비유하였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봄날에 서천 절도사로부터 회남으로 전직하는 위태위를 보내며[春日送韋太尉自西川除淮南]

최승우(崔承祐)

광릉은 천하에 제일 웅장한 번진 / 廣陵天下最雄藩
어진 절도사 그대에게 잠깐 중임을 맡기었네 / 暫借賢侯重寄分
꽃은 거사를 차마 못 보내 금강에서 부쳐 잡고 / 花送去思攀錦水
버들은 늦게 온다고 회수에서 서성대네 / 柳迎來暮挽淮濆
백성들의 헌데ㆍ생재기는 이제 좋은 약을 얻었구나 / 瘡痍從此資良藥
주야로 애쓰는 성군의 근심을 늦추고야 말리 / 宵旰終須緩聖君
바람 앞에 거꾸로 나는 익새를 생각해 주오 / 應念風前退飛鷁
어찌하여야 닭무리에서 학처럼 뛰어날고 / 不知何路出鷄群

[주D-001]거사(去思) : 지방 백성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守令)이 가고난 뒤에 백성이 그를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주D-002]늦게 온다고 : 한(漢) 나라 염숙도(廉叔度)가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푸니 백성이 노래 부르기를, “염숙도는 왜 늦게 왔는가[廉叔度 來何暮].” 하였다.
[주D-003]바람 앞에 거꾸로 나는 익새 : 《춘추》에 “여섯 마리 물새가 후퇴하여 날아 송나라 도읍을 지나다[六鷁退飛 過宋都].”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작자가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데 비유하였다.
[주D-004]닭무리에서 학(鶴)처럼 뛰어날고 : 뭇 닭 중에 한마리 학(鶴)이 뛰어났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높이 출세하는 것을 비유하였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증 설잡단(贈薛雜端)

최승우(崔承祐)

성군께서 그대가 조정의 기강을 정돈할 줄 믿고서 / 聖君須信整朝綱
몇 해나 그대의 재주에 법을 맡기셨네 / 數歲公才委憲章
고삐를 쥐매 두 궐 앞 길이 말끔해졌고 / 按轡已淸雙闕路
조정의 관원들 한 대 서리를 받들었네 / 搢紳俱奉一臺霜
기러기가 높은 하늘에 차츰 올라가더니 / 鴻飛碧落會猶漸
매는 가을바람에 비로소 날치네 / 鷹到金風始見揚
장경교를 돌아보지 말라 / 長慶橋邊休鶴望
갑자기 소식이 문창에 듦을 듣겠네 / 忽聞消息入文昌

[주D-001]고삐를 쥐매 : 후한(後漢)범방(范滂)이 환제(桓帝) 때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기주(冀州)의 뭇 도적을 안찰(按察)했다. 그가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면서 개연히 천하를 밝힐 뜻이 있었다.
[주D-002]조정의 관원(官員)들 한 대(臺) 서리[霜] :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아칭(雅稱)이 상대(霜臺)인데, 서릿발같이 엄한 관서라는 뜻이다.
[주D-003]기러기가 …… 올라가더니 : “기러기가 점점 나아간다[鴻漸].”는 말이 《주역(周易)》에 있으며, 벼슬이 아래로부터 위로 차츰 올라감을 비유하였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독 요경운전(讀姚卿雲傳)

최승우(崔承祐)

언젠가 사창 앞에서 표낭(책을 넣어두는 청백색 주머니)을 들쳐 보니 / 會向紗窓揭縹囊
낙양의 옛 일이 서럽기도 서럽네 / 洛中遺事最堪傷
시름은 벌써 아침 구름 좇아 흩어졌건만 / 愁心已逐朝雲散
원망의 눈물은 가는 물 따라 그지없었네 / 怨淚空隨逝水長
금곡 난간에서 몸 던진 것 안 배우고 / 不學投身金谷檻
송옥의 담을 엿봄에 응했구나 / 却應偸眼宋家墻
생각하면 도위가 재자를 어여삐 여겼지 / 尋思都尉憐才子
공조란 워낙 특별히 바쁜 신세 / 大抵功曹分外忙

[주D-001]아침 구름 : 초왕(楚王)이 고당(高唐)에 놀다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자가 와서 말하기를, “나는 무산(巫山)의 여인인데 고당에 왔다가 왕과 동침(同寢)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왕이 동침하였더니 여인이 가면서, “나는 무산에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아침저녁마다 양대(陽臺) 밑에 있습니다.” 하였다.《宋玉 高唐賦》
[주D-002]송옥(宋玉)의 담[墻] : 전국 때 초(楚) 나라 송옥(宋玉)의 〈호색부(好色賦)〉의 일절에, “초나라에 미인이 많되 신(臣)의 마을만한 데가 없고, 신의 마을에 미인이 많으나 신의 집 동녘 집 처녀가 으뜸이온데, 그녀가 신의 담을 엿본 지가 3년이로되 신이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나이다.” 하였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강서의 옛 놀이를 생각하며 지기에게 부침[憶江西舊遊因寄知己]

최승우(崔承祐)

검 파낸 성 옆에서 홀로 나무를 묻다가 / 掘劍城前獨問津
물가에서 일찍 사장군을 만났었네 / 渚邊會遇謝將軍
시 읊으니 둥글둥글 싸늘한 장 / 圑圑吟冷江心月
시름 앞에 펼쳐지는 조각조각 산 위의 구름 / 片片愁開岳頂雲
바람결에 기러기 소리는 외롭게 베개 가로 지나오고 / 風領雁聲孤枕過
별인 듯 어선의 불은 몇 배에 나뉘었던고 / 星排漁火幾船分
흰 막걸리 붉은 회가 꿈에도 그리우나 / 白醪紅膾雖牽夢
성시를 어이 저버리리 그대 다시 부러워라 / 敢負明時更羨君

[주D-001]사장군(謝將軍) : 진(晉) 나라 사상(謝尙)이 우저(牛渚)에서 놀았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별(別)

최승우(崔承祐)

월나라 진나라로 갈리는 정한 / 人越遊秦恨轉生
번번이 구슬픈 이별 장정이 어디뇨 / 每回傷別問長亭
푸른 술 세 병 취해야 하리로고 / 三尊綠酒應須醉
붉은 입술의 한 곡조 듣고 가야 하리 / 一曲丹唇且待聽
남포의 떠나는 배는 바람이 살랑살랑 / 南浦片帆風颯颯
동문에 말을 보니 풀이 더북더북 / 東門驅馬草靑靑
아녀자만 다정한 것 아니라 / 不唯兒女多心緖
누군들 이별 자리에 눈물 아니 흘리리 / 亦到離筵盡涕零

[주D-001]장정(長亭) : 정(亭)은 길에 있는 역사(驛舍) 비슷한 것인데, 오리(五里)에 단정(短亭)이요, 십리에 장정(長亭)이었다.
 
동문선 제1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칠언율시(七言律詩)
업하에서 수재가 거울을 주는 것을 화답하여[鄴下和李秀才與鏡]

최승우(崔承祐)

한남의 재자낙천의 신녀 / 漢南才子洛川神
재자ㆍ가인은 서로 맞는 이 몇 사람이나 있을꼬 / 每算相稱有幾人
두 볼의 고은 빛은 물결 넘치는 듯 / 波剪臉光爭乃溢
팔자로 비낀 눈썹은 먼 산처럼 아름다워라 / 山橫眉黛可會勻
너울너울 춤추는 소매는 옷을 들어 펄럭이고 / 紛紛舞䄂飄衣擧
가늘고 긴 노래소리 술을 자주 보내 주네 / 裊裊歌筵送酒頻
다만 두렵기는 명년 정월 대보름날 가만히 거울 가지고서 / 只恐明年正月半
진나라 망한 것 묻지 않을까
 / 暗敎金鏡問亡陳

[주C-001]업하(鄴下) : 삼국 때 조조(曹操)의 도읍. 지금 하남성 임장현(臨漳縣). 서쪽에 고성(故城)이 있다.
[주D-001]한남(漢南)의 재자(才子) : 조식(曹植)을 말하는데 그가 업하(鄴下)에 있었다.
[주D-002]낙천(洛川)의 신녀(神女) : 낙수의 신은 복비(宓妃)인데, 위(魏) 나라 조조의 아들 조식이 낙수를 건너면서 미인 견씨(甄氏)를 사념(思念)하여 복비를 빗대어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다.
[주D-003]다만 두렵기는 …… 묻지 않을까 : 남북조(南北朝) 때에 진(陳) 나라 후주(後主)가 정치를 어지럽혀 북조(北朝)인 수(隋) 나라가 엿보고 있었다. 낙창공주(樂昌公主)의 남편 서덕언(徐德言)이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공주에게, “나라가 망하면 당신은 귀인의 집에 들어갈 것이나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거울 반쪽씩 가졌다가 매년 정월 보름에 수도(首都)의 시장(市場)에 반쪽 거울을 내어다 팔아서 서로 맞추어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서로 만납시다.” 하더니, 과연 진나라는 망하고, 공주는 양소(楊素)의 집에 들어가 이듬해 정월 보름에 서덕언이 반쪽 거울을 가지고 시장에 갔더니, 공주 역시 종을 시켜 반쪽 거울을 찾고 있으므로, 공주의 거울에다 시(詩)를 써서 보냈다. 그것을 잡고 우는 것을 양소가 보고 그 애처로운 사정을 들어 서덕언을 불러 공주와 만나게 하고 돌려보냈다.






 
동문선 제57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서(書)
대 견훤 기 고려왕 서(代甄萱寄高麗王書)

최승우(崔承祐)

지난날 신라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족하(足下)를 서울로 불러들이게 하니, 마치 암자라[鼈]가 수자라[黿]의 소리에 응하는 것 같고,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가지려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뜨리고 사직(社稷)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므로, 이에 먼저 조적(祖逖)은 말채를 잡았고 한금호(韓擒虎)는 도끼를 휘둘렀습니다. 백관들에게 맹세(盟誓)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하였고, 육부(六部)에 효유(曉諭)하기를 의풍(義風)으로 하였는데, 뜻밖에 간사한 신하는 도망하고 임금은 변을 당하여 죽었으므로, 곧 경명왕(景明王)의 외종(外從)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을 권하여 즉위하게 하니 “위태로웠던 나라는 중흥되고 잃었던 임금은 있게 되었다.”는 말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족하는 충고(忠告)하는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다만 유언(流言)을 듣고 여러 가지 꾀로 넘겨다 보고 다방면으로 침략하였으되, 아직 나의 말머리[馬首]를 보지 못하였고 나의 소털 하나를 뽑지 못하였습니다.
초겨울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아래에서 손을 묶였고, 이달에는 좌상(左相) 김낙(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해골을 버렸으니, 죽인 것이 이미 많을 뿐 아니라 추격하여 사로잡은 것이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승부(勝負)를 가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평양(平壤)의 누각(樓閣)에다 활을 걸고 패수(浿水)의 물을 말에게 마시게 하려고 기필하였는데, 지난 달 7월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나에게 와서 왕의 조지(詔旨)를 전하기를, “그대는 고려와 오랫동안 화호하였고 인맹(隣盟)을 맺었다가, 요즈음 볼모[質]로 교환했던 아들들을 양편에서 모두 죽인 관계로 옛날의 화친을 깨뜨리고는, 서로 강토를 침략하여 전란이 그치지 않는 것을 알고, 이제 오로지 사신을 그대의 서울로 보내니, 본도(本道)에서는 고려에 글을 보내어 서로 친선(親善)하여 길이 아름다움을 보전하라.” 하였습니다. 나는 의(義)로는 존왕(尊王)하는 데 돈독하고 정은 사대(事大)하는 데 깊은지라 조지를 듣고는 곧 그대로 시행하려고 하였지마는, 다만 염려되는 것은 족하로서는 그만두라 하여도 능히 하지 못하여, 곤궁하면서도 오히려 싸우려 할까 하여 이제 그 조서를 기록하여 부쳐보내니, 청컨대 유의(留意)하여 살피십시오.
교활한 토끼와 뛰어난 사냥개가 서로 도망가고 잡으려 하나 끝내 잡히거나 잡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고,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또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니, 족하는 마땅히 고칠 줄 모르는 성미를 경계하여 스스로 후회를 끼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D-001]조적(祖逖) : 진(晉) 나라가 흉노(匈奴)족에 쫓기어 강남으로 내려갔는데 조적은 흉노족과 싸우려고 북으로 향할 때에, 말채찍으로 북방을 가리키며 죽을 때까지 그들과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주D-002]한금호(韓擒虎) : 수(隋) 나라의 대장으로 남조의 진(陳) 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주D-003]교활한 토끼와 …… 원망하게 되고 : 사냥개가 교만한 토끼를 다 잡으니 그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옛말이 있다.

 
동사강목 제5상
확대원래대로축소
기유년 진성 여주 3년(당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 889)

○ 나라 안에 도적이 일어났다.
이때 주군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아니하여 부고(府庫)가 비게 되었다.
여주가 사자를 보내서 독촉하니, 각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기훤(箕萱)은 죽주(竹州)지금의 죽산(竹山) 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양길(梁吉)은 북원(北原)지금의 원주(原州) 영원성(鴒原城)으로 원주 치악산(雉岳山) 남쪽 산줄기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로는 이 성은 양길이 점거하던 곳이라 한다 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기타 무리를 옹호하여 스스로 칭호하는 자는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이에 원종(元宗)ㆍ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를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여주가 내마 영기(令奇)에게 명하여 체포하게 하였으나, 영기는 도적을 무서워하여 나가 싸우지 못하고 촌주(村主) 우련(右連)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여주가 칙명으로 영기를 참형(斬刑)에 처하고 나이 10여 세 된 우련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다.
○ 최승우(崔承祐)를 당에 보내어 유학시켰다.
최승우는 그 뒤 경복(景福 당 소종의 연호) 2년(893)에 시랑 양섭(楊涉)의 방하(榜下)에 급제하였다. 사륙체 문집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쓰고 《호본집(糊本集)》이라 하였다.
신라는 당을 섬긴 이후부터 항상 왕자를 보내 숙위하고, 또 학생을 보내 태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닦게 하며, 10년의 연한이 차면 본국에 돌아오게 하고 다시 다른 학생을 보냈는데, 입학하는 자가 많을 때에는 1백여 인이나 되었다. 서적을 구입하는 은화는 본국에서 지급하고, 학습하는 서적과 양식은 당의 홍로시에서 공급하였다. 그러기에 학생의 가고 오는 자가 서로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장경(長慶 당 목종의 연호) 초에 김운경이 처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빈공과는 과거가 있을 때마다 항상 외국인을 위하여 별시(別試)를 보여 방(榜) 끝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김운경으로부터 당 말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자가 58인이며, 오대(五代)의 양(梁)과 당(唐) 때에도 32인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나타낸 자는 최이정(崔利貞)ㆍ김숙정(金叔貞)ㆍ박계업(朴季業)ㆍ김윤부(金允夫)ㆍ김입지(金立之)ㆍ박양지(朴亮之)ㆍ이동(李同)ㆍ최영(崔霙)ㆍ김무선(金茂先)ㆍ양영(楊頴)ㆍ최환(崔渙)ㆍ최광유(崔匡裕)ㆍ최치원(崔致遠)ㆍ최신지(崔愼之)ㆍ김소유(金紹游)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ㆍ최승우(崔承祐)ㆍ김문울(金文蔚) 등으로 모두 성재(成材)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박인범은 시(詩)로 울렸고, 김악은 예(禮)로 일컬어졌으며, 최치원ㆍ최신지ㆍ최승우는 더욱 저명한 자이다. 또 원걸(元傑)ㆍ왕거인(王巨仁)ㆍ김수훈(金垂訓) 등은 모두 문장으로 저명하나 사서에 빠져서 전하지 않는다. 최치원의 문집에서 보충

 
 동사강목 제5상
확대원래대로축소
기유년 진성 여주 3년(당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 889)

○ 나라 안에 도적이 일어났다.
이때 주군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아니하여 부고(府庫)가 비게 되었다.
여주가 사자를 보내서 독촉하니, 각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기훤(箕萱)은 죽주(竹州)지금의 죽산(竹山) 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양길(梁吉)은 북원(北原)지금의 원주(原州) 영원성(鴒原城)으로 원주 치악산(雉岳山) 남쪽 산줄기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로는 이 성은 양길이 점거하던 곳이라 한다 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기타 무리를 옹호하여 스스로 칭호하는 자는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이에 원종(元宗)ㆍ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를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여주가 내마 영기(令奇)에게 명하여 체포하게 하였으나, 영기는 도적을 무서워하여 나가 싸우지 못하고 촌주(村主) 우련(右連)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여주가 칙명으로 영기를 참형(斬刑)에 처하고 나이 10여 세 된 우련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다.
○ 최승우(崔承祐)를 당에 보내어 유학시켰다.
최승우는 그 뒤 경복(景福 당 소종의 연호) 2년(893)에 시랑 양섭(楊涉)의 방하(榜下)에 급제하였다. 사륙체 문집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쓰고 《호본집(糊本集)》이라 하였다.
신라는 당을 섬긴 이후부터 항상 왕자를 보내 숙위하고, 또 학생을 보내 태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닦게 하며, 10년의 연한이 차면 본국에 돌아오게 하고 다시 다른 학생을 보냈는데, 입학하는 자가 많을 때에는 1백여 인이나 되었다. 서적을 구입하는 은화는 본국에서 지급하고, 학습하는 서적과 양식은 당의 홍로시에서 공급하였다. 그러기에 학생의 가고 오는 자가 서로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장경(長慶 당 목종의 연호) 초에 김운경이 처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빈공과는 과거가 있을 때마다 항상 외국인을 위하여 별시(別試)를 보여 방(榜) 끝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김운경으로부터 당 말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자가 58인이며, 오대(五代)의 양(梁)과 당(唐) 때에도 32인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나타낸 자는 최이정(崔利貞)ㆍ김숙정(金叔貞)ㆍ박계업(朴季業)ㆍ김윤부(金允夫)ㆍ김입지(金立之)ㆍ박양지(朴亮之)ㆍ이동(李同)ㆍ최영(崔霙)ㆍ김무선(金茂先)ㆍ양영(楊頴)ㆍ최환(崔渙)ㆍ최광유(崔匡裕)ㆍ최치원(崔致遠)ㆍ최신지(崔愼之)ㆍ김소유(金紹游)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ㆍ최승우(崔承祐)ㆍ김문울(金文蔚) 등으로 모두 성재(成材)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박인범은 시(詩)로 울렸고, 김악은 예(禮)로 일컬어졌으며, 최치원ㆍ최신지ㆍ최승우는 더욱 저명한 자이다. 또 원걸(元傑)ㆍ왕거인(王巨仁)ㆍ김수훈(金垂訓) 등은 모두 문장으로 저명하나 사서에 빠져서 전하지 않는다. 최치원의 문집에서 보충


 
동사강목 제5하
확대원래대로축소
정해년 경애왕 4년 왕(王) 김부(金傅) 원년, ○ 진훤 36년, 고려 태조 10년(후당 천성 2, 거란 태종 천현 2, 927)

춘정월 고려 임금 건이 진훤을 치니, 왕이 군사를 내어 도와서 축산(竺山)뒤에 용주(龍州)라 고쳤는데, 지금의 용궁(龍宮) 을 취하였다.
진훤이 맹약을 어기고 여러 차례 변방을 침략하여 자못 억지로 병탄할 뜻을 두었으므로 고려왕이 이를 친 것이다.
○ 진훤이 왕신의 상(喪)을 고려에 호송(護送)하였다.

2월 후당에 병부 시랑(兵部侍郞) 장분(張芬)을 사신보냈다.
당이 분에게 검교 공부 상서(檢校工部尙書)를, 부사(副使) 박술홍(朴術洪)에게는 겸어사중승(兼御史中丞)을, 이충식(李忠式)에게 겸시어사(兼侍御史)를 제수하였다.

3월 고려 임금 건이 진훤의 군사를 운주성(運州城) 아래에서 격파하였다.

하4월 웅주(熊州)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추8월 고려의 임금 건이 진훤을 공격하여 강주(康州)를 함락하였다.
이에 앞서 고려왕이 해군 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ㆍ능식(能式) 등을 보내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강주를 치게 하여 사람과 짐승을 사로잡아 돌아왔으며, 또 원보(元甫)ㆍ김낙(金樂) 등을 보내어 대량성(大良城)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을 사로잡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려왕이 친히 강주에 가서 이를 함락시키니, 이에 백제의 여러 성들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왕이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지금의 문경(聞慶) 을 통과할 때 성주 흥달(興達)이 귀순하니, 왕이 가상하게 여겨 그의 세 아들에게 녹읍(祿邑)을 내렸다.

9월 진훤이 입구(入冦)하였다.

동11월 진훤이 왕을 포석정(鮑石亭)에서 시해하고 문성왕(文聖王)의 후손 김부(金傅)를 세워 왕을 삼은 다음,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가니, 고려가 구원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왕실이 쇠약하자 훤은 고려가 먼저 침입할까 두려워하여 9월에 곧 군사를 정돈하여 고려의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이니 상주(尙州)에 속하였다 을 쳐서 불사르고 입구하여 고울부(高鬱府)에 이르러 교기(郊畿 서울, 즉 경주의 근교)에 육박하였다. 이에 왕이 연식(連式)을 보내어 고려에 위급을 알리니, 고려왕이 시중(侍中) 공훤(公萱), 대상(大相) 손행(孫幸), 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이르기를,
“신라는 우리와 더불어 우호를 같이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위급함이 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공훤 등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훤은 구원병이 아직 이르지 않아서 11월에 갑자기 왕도에 침입하였다. 그때에 왕은 비빈(妃嬪)ㆍ종척(宗戚)들과 더불어 포석정 정자는 지금 경주부 남쪽 7리 금오산(金鰲山) 서쪽기슭에 있는데 돌을 다듬어 포어(鮑魚) 모양으로 만들었으므로 포석정이라 이름하니,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적(遺跡)이 완연하다 에 나가서 놀이를 하는데,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은 본래 병비(兵備)가 없었으므로 병풍으로 손수 가리고 광대 백여 인을 거느려 막았으나 대적할 수 없게 되자, 부인과 더불어 성 남쪽 이궁(離宮)으로 달아나 숨었으며, 시종하던 관원과 궁녀들은 모두 함몰되었다. 훤은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노략질하게 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왕을 찾아내어 핍박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는데, 왕은 4년 동안 재위하였다. 훤은 억지로 왕비를 욕보이고 부하들을 풀어 빈첩(嬪妾)들을 난행하니, 공경 대부의 사녀(士女)들이 도망쳐 숨고 놀라 땀을 흘렸으며, 땅을 기며 노복이 되기를 빌어도 모면하지 못하였다.
이에 문성왕의 후손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인 김부(金傅)를 세워 왕을 삼으니, 곧 왕의 표제(表弟 외종 아우)로서,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자녀(子女)ㆍ백공(百工)ㆍ병장(兵仗)ㆍ진보(珍寶)들을 모조리 취하여 돌아갔다. 처음 왕이 매양 미인들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노닐며 번화지곡(繁華之曲)을 연주하였는데, 그 가사에 이르기를,
기원과 실제의 두 절 동쪽 / 祇園實際兮二寺東
새삼 덩굴 깊은 골에 두 소나무 함께 얽혔네 / 兩松相倚兮蘿洞中
머리 돌려 바라보니 꽃은 언덕에 가득하도다 / 回首一望兮花滿塢
엷은 안개 가벼운 구름 한데 엉기어 몽롱하도다 / 細霧輕雲兮並濛朧
하였다.
식자(識者)들은 이를 후정화(後庭花)에 견주었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징험되었다.
○ 고려 임금 건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 고려 임금 건이 진훤(甄萱)과 공산(公山)에서 싸워 패적(敗績)하여서, 대장군 신숭겸(申崇謙)과 원보(元甫) 김낙(金樂)이 죽었다.
고려왕이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公山桐藪) 공산은 지금 영천군(永川郡) 서쪽에 있으니, 속칭 태조지(太祖旨)라고 한다. 혹은 대구(大丘)에 있다고도 한다 에서 훤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훤의 군사가 몹시 급하게 왕을 포위하였는데, 숭겸의 모습이 왕을 닮았으므로 대신 왕의 수레를 타고 김낙과 더불어 힘을 다하여 싸우다 죽었다. 훤의 군사는 그를 고려왕으로 알고 목을 베어 가지고 갔으며 고려왕은 겨우 몸만을 모면하였다. 훤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지금의 인동(仁同) 속현(屬縣) 약목(若木)이다. 일설에는 지금 목천(木川)이라고도 한다 을 취하여 전야(田野)에 노적한 곡식을 모두 불살랐다. 숭겸은 광해주(光海州)
【안】 광해주는 지금은 미상.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숭겸은 곡성(谷城) 사람이다.’ 하였는데, 고려 초기에 곡성이 승평(昇平)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나주에 속하였으니, 두 부(府)를 광해로 호칭한 일이 있었던가? 《신씨보(申氏譜)》에는 춘천(春川)을 광해주라 하였는데, 춘천은 협읍(峽邑 산협에 있는 고을)으로 ‘해(海)’ 자에 합당치 않으니 이는 잘못인 듯하다.
사람으로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있었다. 죽었을 때는 그의 왼쪽 발에 북두칠성(北斗七星)처럼 있는 검은 사마귀를 징험하여 그 시체를 찾아내었다. 고려왕이 애도하고 장절(壯節)이라 시호를 내리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하였다.
김부는 즉위하자 왕의 시신을 모시어다가 서당(西堂)에 빈소를 차리고,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곡하였으며, 경애(景哀)라 시호를 올려서 장사하였다.
○ 진훤이 고려의 벽진군(碧珍郡)을 침략하니, 정조(正朝) 벼슬이름 색상(索湘)이 죽었다.
○ 거란이 진훤에게 사신을 보냈다.
거란의 사신 사고마돌(裟姑麻咄) 등 35인이 훤에게 내빙하니, 훤이 장군 최견(崔堅)을 차견(差遣)하여 바다를 건너 같이 가게 하였는데, 북쪽으로 가다가 바람을 만나 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러서 모조리 죽음을 당하였다.
○ 아버지 효종(孝宗)을 추존하여 신흥 대왕(新興大王)으로 삼고, 어머니 김씨를 높여 왕태후(王太后)로 삼았다.
어머니 계아 부인(桂娥夫人) 김씨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이다.

12월 진훤이 고려에 글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훤이 고려왕에게 서장을 보내어 이르기를,
“지난날 신라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足下)를 서울로 불러들여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듯 서로 호응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찢어 헤치려는 것이어서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사직을 구허(丘墟)가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먼저 조편(祖鞭)을 잡고 홀로 한월(韓鉞)을 휘둘러서, 백료(百僚)들에게 밝은 태양과 같이 맹세하고 육부(六部)를 의로운 기풍으로 효유하였더니, 불의에 간신은 도망치고 나라 임금은 훙(薨)하였습니다. 그래서 경명왕의 표제(表弟)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권하여 존위(尊位)에 나아가게 하여 위태롭던 나라를 다시 일으키니, 임금을 잃었다가 임금을 다시 얻은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족하는 나의 충고를 상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유언(流言)만을 들어, 온갖 계교로 왕위를 넘보고, 여러 방면으로 나라를 침요(侵擾)하였으나, 오히려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고 나의 쇠털[牛毛] 하나 뽑지 못하였습니다. 초겨울에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 아래에서 손을 묶였고, 요사이에는 좌상(左相) 김낙(金樂)이 미리사(美里寺) 지금 대구 공산 아래에 있다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습니다.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승부를 알 수 있을 것이오. 기약할 바는 평양의 누대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말에게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지(詔旨)를 전하기를 ‘경은 고려와 더불어 옛날에는 환호(歡好)를 통하여 함께 인맹(隣盟)을 맺었었는데, 근래에 양쪽의 볼모가 모두 사망함으로 인하여 드디어 옛날의 화친하던 우호를 잃고 서로 국경을 침구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오로지 이 일로 사신을 보내어 경의 본도(本道)에 가게 하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서로 친목하여 길이 평화를 이룩하도록 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나는 존왕(尊王 제후가 왕실을 높이는 것)하는 의리가 돈독하고, 사대(事大)하는 정의가 깊어서 조유(詔諭)를 듣고는 그 명령을 삼가 받들고자 하되, 다만 족하가 우리를 깨뜨리고자 하여도 깨뜨리지 못하고 지쳐 있으면서도 오히려 싸우려고 할까 걱정됩니다. 이제 조서를 베껴서 보내드리니, 청컨대 마음에 두고 상세히 살피기 바랍니다. 그리고 토끼와 사냥개가 서로 피곤하면 마침내는 반드시 조롱을 받을 것이요, 조개와 도요새[蚌鷸]가 서로 버티면 또한 비웃음을 당할 것이니, 마땅히 미복(迷復)을 경계로 삼아 스스로 후회를 초래함이 없도록 하십시오.”
하니, 이는 최승우(崔承祐)가 지은 것이다. 승우가 당으로부터 돌아오니 나라가 이미 어지러웠으므로, 드디어 진훤에게 의탁하여 이 글을 지은 것이다. 고려왕이 답서하기를,
“나는 위로 천명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 외람되이 장수(將帥)의 권한으로 경륜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삼한(三韓)이 액운을 만나고 구토(九土)가 흉황(凶荒)하여, 백성들은 대부분 황건적(黃巾賊)에 속하고 전야는 적토(赤土 황폐하여 농작물이 생산되지 못하는 땅) 아님이 없었습니다. 풍진(風塵)의 소란함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제하려고 하여, 이에 스스로 이웃 나라와 친선하여 우호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가 농상(農桑)으로 생업을 즐기고, 7~8년 동안 사졸들이 한가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더니, 유년(酉年 을유년으로서 경애왕 2년을 말한다) 양월(陽月 10월)에 이르러, 갑자기 일이 생겨 교병(交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족하는 처음에 적을 가벼이 여기고 곧바로 전진하기를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항거하듯 하더니, 마침내는 어려움을 알고 용퇴(勇退)한 것은 모기가 등에 산을 짊어진 것[蚊子負山]과 같았으매, 공손한 말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세(永世)토록 화친(和親)하겠다.’ 하였습니다. 나도 또한 지과(止戈 즉 무(武)의 파자로서, 전쟁을 그치는 것이 ‘武’의 본뜻이다)의 무(武)를 숭상하고 살생하지 않는 인(仁)을 기필하여 드디어 여러 겹의 포위를 풀어서 피로한 사졸을 쉬게 하였으니, 이는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삽혈(歃血 서로 맹세할 때 마시는 희생의 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아서 흉악한 위협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봉채(蜂蠆 벌과 전갈)의 해독이 생령을 침해하고, 낭호(狼虎)의 광기가 기전(畿甸)을 가로막아 금성(金城 경주)이 군색하여지고, 황옥(黃屋 임금의 수레, 여기서는 임금을 가리킴)이 크게 놀라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대의를 의지하여 주(周)나라를 높이는 것은 비록 환문(桓文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의 패도(覇道)와 같으나, 기회를 틈타서 한(漢)나라를 도모한 것은 오직 망탁(莽卓)의 간사함을 볼 뿐입니다. 왕의 지존(至尊)으로서 족하에게 몸을 굽혀 아들이라 일컫게까지 하였으니, 존비가 차례를 잃었고, 상하가 모두 근심에 싸여 이르기를 ‘원보(元輔 임금의 보필)의 충순(忠純)함이 있지 않으면 어찌 사직을 다시 편안케 할 수 있으랴?’ 하였습니다. 나는 마음에 모진 뜻을 감춘 적이 없고, 왕실을 높이는 뜻이 간절하기 때문에 장차 조정을 구원하여 나라의 위태로움을 붙들어 일으키려 하였으나, 족하는 터럭끝 같은 작은 이익만을 보고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를 잊어, 군왕을 참륙(斬戮)하고 궁궐을 불사르며, 경사(卿士)를 살해하고 사민(士民)을 함부로 죽이며, 희강(姬姜 희씨와 강씨란 뜻으로 궁중의 비빈을 일컫는 말)을 취하여 수레에 함께 태우고 진귀한 보배를 빼앗아 가득히 실었으니, 원악(元惡 악인의 괴수)으로는 걸주(桀紂)보다도 더하고, 불인(不仁)하기는 경효(獍梟 경은 악수(惡獸)로 나면서 아비를 잡아먹고, 효는 올빼미로 어미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보다도 심합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진 데 대한 원한이 사무치고 해를 돌이키려는 정성이 깊어서, 매가 참새를 쫓듯이 견마(犬馬)의 근고(勤苦)를 다하려고 다시금 군사를 일으켜 괴류(槐柳 회화나무와 버들로, 여기서는 세월을 뜻한다)가 두 차례나 바뀌었는데, 육전(陸戰)을 하면 천둥이 달리고 번개가 부딪치듯 하였고, 수공(水攻)을 하면 호랑이가 치고 용이 뛰어오르듯 하여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거행하면 헛되게 발함이 없었습니다. 윤빈(尹邠)을 해안(海岸)에서 쫓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과 같았고, 추허조(鄒許祖)를 변방 성에서 사로잡을 때는 엎어진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연산군(燕山郡)지금의 연기현(燕岐縣) 들판에서는 길환(吉奐)을 군영 앞에서 참수하고, 마리성(馬利城)지금의 안음현(安陰縣 가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纛旗] 아래서 죽였습니다. 임존(任存)을 함락하던 날에는 형적(邢績) 등 수백 인이 목숨을 버렸고, 청주(靑州)를 격파할 때에는 직심(直心) 등 네댓 무리가 머리를 바쳤으며, 동수(桐藪)에서는 깃발만 바라보고도 무너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지금의 성주부(星州府) 에서는 구슬을 입에 물고[含璧 패자(敗者)가 손발을 묶이고 구슬을 물고 항례(降禮)를 올렸다] 투항하였습니다.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와서 귀순하였으며, 나부(羅府 나주)는 서쪽으로부터 와서 복속(服屬)하였습니다. 침공한 땅이 이와 같으니, 수복할 날이 어찌 요원하겠습니까? 기필코 저수(泜水)의 군영 가운데서 장이(張耳)의 천 갈래 한을 씻고, 오강정(烏江亭)에서 한왕(漢王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한 번 싸워 이긴 공을 이루어, 마침내 풍파를 그치게 하고 길이 천하[寰海]를 맑게 할 것입니다. 하늘이 돕는 바이니, 명(命)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오월왕 전하는 특별히 단금(丹禁 금성(禁城) 즉 대궐)에서 윤음(綸音)을 내려 청구(靑丘 우리 나라를 가리킨다)에서 난리 그치기를 효유하였고, 이미 훈모(訓謨 국가 대계가 되는 가르침)를 받들었으니, 감히 존봉(尊奉)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족하가 예의(睿意 임금의 뜻)를 삼가 받들어 흉기(凶機)를 모두 놓는다면, 다만 상국의 어진 은혜에 부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해(東海)의 끊어진 왕통도 잇게 될 것이나,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최치원이 지은 것이다.
【안】 신라가 망한 것은 오로지 폐행(嬖倖)이 용사(用事)하여 기강이 문란ㆍ해이하여진데서 연유한 것이요, 걸주(桀紂)의 포학이나 망진(亡秦)의 정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궁예와 진훤이 이때를 틈타서 난리를 불러일으켜 왕호를 참칭하고 국토를 몰래 할거하였으니, 그 죄가 진실로 이미 하늘에까지 통하였지만, 고려 태조가 궁예를 대신하여 왕을 일컬은 것도 또한 반역한 죄과에 돌아가는 것이니,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오직 그의 한 가닥 마음은 왕실을 높이는 의리를 알아서, 도적 진훤의 난리에 일찍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구원하였고, 또 장수를 보내어 머물러 주둔하게 되었다. 그가 진훤에게 답장한 글에 이르기를, ‘금성이 군색하여지고 황옥이 크게 놀랐으며, 대의에 의지하여 주나라를 높이는 것이 환문(桓文)의 패도와도 같으나, 기회를 틈타서 한(漢)나라를 도모한 것은 오직 망탁(莽卓)의 간사함을 볼 뿐이다.’ 하였고, 또 ‘나는 왕실을 높이는 뜻이 간절하다.’ 하였으며, 또 ‘거의 매가 참새를 쫓듯이 하여 견마의 근고를 다하려고 한다.’ 하였다. 그 말이 이와 같았으니, 반드시 왕의 도성을 핍박하고 왕의 궁궐에 거처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신라의 군신이 만약 기운을 떨치고 정신을 가다듬고서 고려의 구원을 얻어 덕 있는 정사를 닦아 밝히며,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서 회복할 도모를 하였더라면, 아마도 조금이나마 더 국운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인데, 느릿느릿 한 가지 일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이 손을 묶인 채 망하여 갔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 고려가 임언(林彦)을 후당에 사신보냈다.

[주D-001]기원(祇園) : 기수원(祇樹園)ㆍ기타원(祇陀園)ㆍ기수급고원(祇樹給孤園)의 약칭. 옛날 인도의 기타 태자(祇陀太子) 소유의 원림(園林)을 수달장자(須達長者 : 급고독(給孤獨)임)가 구입하여 석존(釋尊)을 모셨다. 또 기원(祇洹)ㆍ기환(祇桓)이라고도 한다.
[주D-002]실제(實際) : 불가의 말로 진여 실상(眞如實相)의 이성(理性).
[주D-003]후정화(後庭花) : 악부(樂府)의 이름. 진(陳) 후주(後主)가 항상 빈객을 청하여 비빈들과 유연(遊宴)하면서 지은 시 중에서 잘된 것을 골라 곡을 붙여 궁녀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였다. 그 곡의 하나가 옥수 후정화(玉樹後庭花)로서, 뒤에 옥수와 후정화로 나뉘었는데, 모두 장 귀비(張貴妃)와 공 귀빈(孔貴嬪)의 자색을 찬미한 것이다. 진 후주는 뒤에 유연에 빠져 수군(隋軍)이 쳐들어오는 것조차 모르고 포로가 되었다.
[주D-004]조편(祖鞭) : 조생지편(祖生之鞭)의 준말로 남보다 먼저 공을 이루었다는 뜻. 진(晋)나라 유곤(劉琨)이, 조적(祖逖)이 임용되었다는 말을 듣고, 친구에게 편지하기를 “나는 항상 조생이 나를 앞지를까 두려워했다.” 한 고사에서 나온 말. 《晋書 卷62 劉琨傳》
[주D-005]한월(韓鉞) : 한금호(韓擒虎)의 부월(斧鉞)이란 말. 한금호는 수(隋)나라 장수로 진(陳)나라를 쳐서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를 사로잡았다. 《隋書 卷52》
[주D-006]미복(迷復) : 끝까지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면 흉(凶)하다는 말.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상육(上六)은 미복이니 흉하다[上六 迷復 凶].” 하였다.
[주D-007]버마재비 …… 하듯 : 약한 자가 자기의 힘도 헤아리지 않고 강자에게 덤빈다는 말. 춘추 시대 제(齊) 장공(莊公)이 사냥을 가는데 버마재비가 앞다리를 쳐들고 수레를 항거하였다는 고사. 당랑거철(螳螂拒轍). 《莊子 秋水》
[주D-008]망탁(莽卓)의 간사함 : 망탁(莽卓)은 전한(前漢)의 왕망(王莽)과 후한의 동탁(董卓)을 가리키며, 왕망은 왕실이 쇠약한 틈을 타서 제위를 찬탈하고, 동탁은 왕을 폐하였다.
[주D-009]저수(泜水) …… 씻고 : 장이(張耳)는 초한(楚漢) 때 사람으로, 처음에는 조(趙)나라의 정승이 되어 진여(陳餘)와 가까이 지냈는데, 뒤에 불화하여 장이가 한(漢) 고조(高祖)에게로 가자 원수가 되었다. 그 후 장이는 한신과 함께 진여를 잡아 저수에서 참수하였다. 《漢書 卷32 張耳陳餘傳》
[주D-010]오강정(烏江亭) …… 이루어 : 오강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화현(和縣)에 있는 강 이름. 유방에게 쫓긴 항우(項羽)가 이곳에서 자살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피서록(避暑錄)
확대원래대로축소
 피서록(避暑錄)
피서록(避暑錄)

기려천(奇麗川)은 만주 사람이다. 그는 성격이 몹시 교만하여 윤형산(尹亨山)을 멸시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으나, 형산은 일부러 알지 못하는 체하고 얼굴에나 말씨에도 겸손할 뿐이다. 대체로 윤(尹)은 기(奇)에 비하여 나이가 20여 세나 많고 벼슬도 역시 조금 높은 편이다. 그러나 그는 한인이라 해서 마치 나그네처럼 된 처지였으니, 그 정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여천이 거처하고 있는 방이 나의 사관과 문이 마주 보이는 터라, 내가 형산을 찾아서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여천의 문 앞을 지나치게 되므로 나는 반드시 여천에게 먼저 들른다. 그러면 형산은 나의 뜻을 모르고서 반드시 나의 뒤를 따라서, 그곳에 잠깐 지체했다가 곧 일어서면서 다른 곳에 약속이 있다고 핑계한다. 여천은,
“윤공(尹公)이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야.”
하고,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그리고 형산도 언젠가 돌아앉아서,
“저 비둘기처럼 생긴 눈이 여태껏 탈을 벗지 못해.”
하면서 악평한다. 만족과 한족 사이의 심한 알력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어느날 여천이 나에게,
“전에 어떤 산동에 포정사(布政司)로 부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탐관으로 이름이 높았답니다. 그가 일찍이,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자 / 視民若子
법률은 산같이 엄중하리 / 立法如山
라는 주련(柱聯) 두 구를 지어서 아문(衙門)에 붙였더니, 그날 밤에 어떤 이가 그 끝에다 잇달아서,
하면서 말을 나직이 한다. 이는 아마 형산을 가리키는 듯싶기에 나는 그 뒤에 우연히 형산더러,
“당신은 일찍이 산동 포사로 부임하신 일이 있소.”
하고 물은즉, 형산은,
“그런 일이 있었지요.”
하였다.
그 뒤에 연경(燕京)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 인사들과 이야기하다가 기(奇)를 아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머리를 흔들 뿐이다. 풍병건(馮秉健)이 홀로 분개하는 어조로,
“점잖은 선비가 어찌 되놈의 새끼를 안단 말이요.”
한다. 나는 또,
“윤형산은 어떤 인물인가요.”
하고 물은즉, 모두들 기쁜 빛으로,
“그는 참으로 백락천(白樂天)과 같은 유의 인물이지요.”
하였다.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남쪽 골목 둘째 문은 동씨(董氏)의 집이다. ‘쌍청문(雙淸門)’이란 현판이 붙었는데 강희의 어필이다. 또 지금 황제가 쓴 ‘양세삼효(兩世三孝)’라는 액자가 붙어 있다. 이곳은 구외(口外)의 민가(民家)임에도 불구하고 천자의 거둥이 세 번이나 있었다 한다.
강희가 절강(浙江)에 순행할 때에 산음(山陰)에 살고 있는 노인 왕석원(王錫元) 등 5형제를 불러 보았다. 그들은 누런 머리에 어린 아이의 이빨이며 서로 붙들고 다닌다. 황제가 행궁(行宮)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들 다섯 중 맏이와 둘째는 쌍둥이로 나이가 80이요, 그 다음은 78, 다음은 76, 다음은 75인데, 통계하면 3백 89세이다. 그들의 자손은 모두 45명인데, 각기 비단을 나누어 주고 또 어필로 ‘일문인서(一門仁瑞)’라는 액자를 써서 주고 황태자는,
다섯 가지 비단 나무 이 세간의 영화이고 / 五枝錦樹榮今代
백세토록 높은 나이 한 집안에 모였구나 / 百秩仙籌萃一門
라는 주련을 써서 주었다. 이로 미루어서 요즘 그들의 정려(旌閭)나 표창하는 은전이 전대보다 지나침을 짐작할 수 있겠다.
북진묘(北鎭廟) 뜰에 서 있는 늙은 솔을 지금 황제가 친히 그림 그려서 검은 돌에 새겨 바위 뱃구레를 파고 간직했는데, 그 바위의 높이는 겨우 한 길 남짓하다. 이를 명(明) 때에는 취운병(翠雲屛)이라 불렀더니 지금 황제가 보천석(補天石)이라 고치고 그림 곁에 시를 지어서 새겼다.
북진묘 서이러냐 일산처럼 퍼진 솔이 / 鎭廟門西似蓋松
절반은 시들었고 푸른 잎도 상기로다 / 半存枯幹半籠葱
정신이 어렸으니 포박자(갈홍(葛洪)의 호)를 보는 듯이 / 凝神如見抱朴子
얼굴을 그리자니 진소옹(미상)이 내 아니다 / 圖貌慙非陳少翁
밑에 서서 볼 양이면 비나 개나 의심이요 / 立下忽疑晴與雨
앞에 뵈는 그 무엇이 색이 공임 깨닫고녀 / 現前可悟色兮空
유월이라 더운 날에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 何當六月其根坐
낭랑히 글을 외며 맑은 소 들어보렴 / 讀疏仡聽謖謖風
그리고는 건륭의 낙관이 찍혀 있다. 또,
“갑술년(1754년)에 내가 동쪽으로 순행하는 길에 친히 북진묘에 치제하고, 예가 끝나자 묘 속에 들어가서 두루 구경하였다. 늙은 솔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반은 벌써 철석같이 굳은 가장귀였고, 다만 동편 한 가지가 울창할 뿐이다. 오히려 기이하고 에굽은 품이 사랑스러웠다. 이내 나무 밑에 서서 이 그림을 그렸다. 구월 이십사일 어필.”
이라는 글이 있고 ‘천지위사(天地爲師)’라는 도장이 찍혔다. 황제의 글씨나 그림이 모두 공교롭다.
바위 곁에 또 삼한(三韓) 사람 김내(金鼐)의 시가 있었다.
의무려산 이마 턱에 때때로 오르거다 / 時登醫巫閭山頭
구름이랑 바다랑 한 눈에 다 보리라 / 雲舍滄桑望裏收
돌 옷과 바위 털은 티끌 자취 혐의롭고 / 石髮巖衣嫌跡擾
우는 새 읊는 매미 사람 소리 섞이누나 / 鳥鳴蟬噪帶人幽
공중에 솟은 나무 늙은 용은 어디 가고 / 凌空樹古龍飛去
그 곁에 피는 꽃이 봉황 성터 남아 있네 / 傍地花新鳳壘留
북두성 높디높아 하늘 괴는 기둥이라 / 北斗惟神天一柱
갸륵하신 우리 님은 억만 년을 누리소서 / 億年萬紀庇皇秋
그 끝에는 ‘화공(和公)’이란 낙관을 찍었으며 필력(筆力)이 몹시 옹졸하다. 혹은,
“이 시는 조선 사람 김내가 지은 것이다.”
하였으나, 이는 요동(遼東)을 또한 삼한이라 일컫는 줄을 모르고 한 말이다. 고정림(顧亭林)은 일찍이 관함이나 지명에 옛 이름을 빌려서 쓰는 것을 배격했으나, 아직도 그를 본받아 남용하는 이도 없지 않을뿐더러, 이 시가 비록 잘된 것은 아닐지라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의 구기(口氣)는 아니다.
난설헌(蘭雪軒 이조(李朝)의 여류 문학가 허초희(許楚姬)) 허씨(許氏)의 시는 《열조시집(列朝詩集 전겸익(錢謙益) 저)》과 《명시종(明詩綜 주이준(朱彛尊) 저)》에 실려 있는데, 혹은 이름으로, 또는 호를 쓰되 모두 경번(景樊)으로 적혀 있다. 내 일찍이 〈청비록서(淸脾錄序 《청비록》은 이덕무(李德懋) 저)〉를 쓸 때에 상세히 고증한 일이 있었다. 무관(懋官 이덕무의 자)이 연경에 있을 때에 그것을 축 한림(祝翰林) 덕린(德麟)과 당 낭중(唐郞中) 낙우(樂宇)와 반 사인(潘舍人) 정균(庭筠)의 세 사람과 함께 돌려 가면서 읽고 모두 칭찬했다 한다. 이제 내가 이곳에 와서 시 중의 빠지고 그릇된 곳을 논하다가 이내 허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윤공(尹公)이 말하기를,
우회암(尤悔菴) 동(侗)이 지은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보면 그 첫머리에 귀국의 것을 지어 실었는데,
양화도 드는 어귀 살구꽃이 붉으레라 / 楊花渡口杏花紅
팔도 민요들이 그 나라의 국풍이라 / 八道歌謠東國風
못내 님을 그리노니 저 비경 여도사를 / 最憶飛瓊女道士
들보 올려 글 지려고 달나라에 노닌다오 / 上梁曾到廣寒宮”
라고 하였고, 그는 또 주석을 내기를,
“규수 허경번이 나중에는 여도사가 되었으며, 그는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廣寒宮白玉樓)의 상량문(上梁文)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이에 허경번에 대한 그릇된 것을 상세히 변명하였더니, 윤과 기 두 사람이 각기 나누어 기록하여 간직한다. 중국의 명사들이 마땅히 이 일로써 또 한 번 저서의 자료를 삼을 것이다.
대체로 규중 부인으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나, 이 외국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으로서는 일찍이 그의 이름이나 자가 본국에도 나타나지 못했은즉, 이 난설의 호 하나라도 오히려 분에 넘치는 일이어늘, 하물며 경번의 이름으로 잘못 알고는 군데군데에 기록되어서 천추에 씻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가 어찌 뒷세상의 재사(才思)가 풍부한 규중 재녀들의 의당히 경계하여야 할 거울이 아니겠느냐.
여러 가지 요술 중에는 술을 만들어 낸다는 주석(酒石)이 가장 요긴한 물건이다. 만일 참으로 이러한 돌이 있다면 의당히 천하에 다시 없는 보배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명(明)의 천계(天啓) 연간에 왜(倭)가 유구(琉球)를 쳐서 그 임금을 사로잡았는데, 유구의 태자가 그 나라의 세보(世寶)를 싣고 가서 그 아버지를 속(贖)하려 하다가, 배가 풍파에 휩쓸려서 제주(濟州)에 닿았다. 목사(牧使) 아무가 배에 무슨 물건이 실렸느냐고 물으니, 태자가 주천석(酒泉石)과 만산장(漫山帳)이 있다고 답하였다. 주천석은 모양이 마뇌(瑪瑙)처럼 생겼는데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이고 물 한 잔이 들 정도이다. 맑은 물을 채우면 곧 아름다운 술이 되고, 만산장은 바닷거미의 실에다 약으로 물빛을 들여서 뜬 것인데, 적게 펼치면 집 하나를 덮을 정도이나 넓게 펼치면 산 하나를 덮을 수 있으며, 작은 놈으로는 모기나 파리, 큰 놈으로는 뱀이나 이무기 따위가 모두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목사가 그것을 얻고자 청하였으나 태자는 허락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내어서 배를 에워싸니 태자가 돌과 창을 모두 바다 속에 던졌다. 목사가 배에 실은 물건을 다 몰수하고는 태자를 죽였다. 태자가 죽기에 임하여,
착한 말은 분간 없고 몹쓸 옷을 입은 이 몸 / 堯語難分桀服身
꿈이러냐 이 죽음을 푸른 하늘 아오리까 /臨刑何暇訴蒼旻
삼량이 묘혈 판들 누구라서 속해 낼꼬 / 三良臨穴誰能贖
두 아들 배를 탈 제 도적 어이 잔폭하오 / 二子乘舟賊不仁
백골은 모래벌판 거친 풀에 얽혔어라 / 骨暴沙場纏有草
혼이야 고국 간들 슬퍼할 이 누구던고 / 魂歸古國吊旡親
죽서루 밑 저 물 소리 처량도 한져이고 / 竹西樓下滔滔水
만고의 끼친 한을 분명히 울어 예네 / 遺恨分明咽萬春
라는 시 한 편을 읊었다.”
한다. 이 사실은 이중환(李重煥 이조 때 학자. 자는 휘조(輝祖))의 《택리지(擇里志)》에 실렸으며, 목사는 대간의 탄핵을 만나서 사형에 한 등급을 감하여 멀리 귀양보냈다 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이 기록이 하나의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일이 과연 참말이라면 목사의 죄악은 비록 거리에다 시신을 진열한다 해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이제 그의 자손이 어찌 길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유구 중산왕(中山王) 상녕(尙寧)이 해마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편에 자주 글월과 예폐를 부쳐 오더니, 갑신년 뒤로는 다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내 이번 걸음에 해외의 모든 나라 사신을 만나보지 못함이 더욱 유감이다. 아까 구경하던 요술 중의 주석으로 미루어 보면, 유구의 주석도 역시 요술의 하나인 듯싶다. 그리고 민중(閩中 복건성) 사람 왕삼빈(王三賓)이 말한 바와 같이, 바닷거미가 범을 얽는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이 만산장(漫山帳)은 이치에 그럴 법도 하다.
열하의 술집들은 몹시 번화하여 연경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다. 바람벽 위에는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이 많이 붙어 있다. 유하정(流霞亭)에는,
높은 이름 좋은 벼슬 이제야 아랑곳가 / 功名富貴兩忘羊
나의 삶이 얼마런고 이 술 한 잔 기울이세 / 且盡生前酒一觴
고운 꽃 삼백 포기 심어 두고 보려무나 / 多種好花三百本
낮은 울타리 비바람에 향내 줄곧 풍기리라 / 短籬風雨四時香
라는 시가 붙어 있다. 또 취구루(翠裘樓)에 들렀더니 역시 벽 사이에 써 붙인 시가 있는데 먹 흔적이 아직도 젖은 듯싶다. 우민중(于敏中)이나 아극돈(阿克敦)의 필치인 듯싶기에 술아범더러,
“이 글씨 쓴 분이 누구냐.”
고 물으니, 그는,
“아까 어떤 손님이 이걸 써서 걸어 두곤 막 나갔답니다. 그러니 그의 성명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한다. 그 시에 이르기를,
님을 섬겨 하올 맘은 한당만 못잖건만 / 致主初心陋漢唐
이 몸이 늙어 가서 밭집 아비 되었구나 / 暮年身計落農桑
내 낀 숲 속 소 발자국 동문 밖 나는 길에 / 草煙牛跡東郊路
술다락에 높이 누워 저녁 볕을 보내누나 / 又臥旗亭送夕陽
(육유(陸游) 작)
라고 하였다. 이 두 시는 모두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바람을 쏘이면서 한 번 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가 무량하게 할 뿐이다. 둘 다 부채에 써 두었다가 돌아와서 윤형산에게 물은즉, 그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으나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윤형산이 나더러,
“고려의 박인량(朴寅亮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학가. 자는 대천(代天))이 당신에게 어떻게 되시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귀국을 말한다면 모수(毛遂)와 모담(毛聃 미상)과 같은 터수일 것입니다. 저는 애초에 토성(土姓)으로 여덟 집이 나눠졌으므로 관향이 각기 달라서 서로 한 겨레가 되지 못하며, 역시 감히 분양(汾陽)을 통곡(痛哭)할 수도 없는 터수입니다.”
한즉, 형산은 또,
“그러면 강희 연간에 박뇌(朴雷)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자는 명하(鳴夏)요, 역시 조선 사람이라 합디다. 이제 대청(大淸)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외가 한 집이 되고 보니 결코 푸른 입술의 혐의란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푸른 입술의 혐의란 무슨 말입니까.”
한즉, 형산은,
“송(宋)의 원풍(元豊 송 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 연간에 고려 사신 박인량이 명주(明州)에 이르렀을 때에, 상산위(象山尉) 장중(張中)이 시로써 전송하였더니, 박인량의 답시(答詩) 서문에,
‘꽃 같은 얼굴이 곱게 불을 부니 이웃 여인의 푸른 입술이 움직임을 부끄럽게 하고, 상간(桑間)의 야비한 소리로써 영인(郢人)의 백설(白雪) 곡조를 잇노라.’
는 글이 있었습니다. 언관(言官)이 낮은 벼슬에 있는 장중이 사사로 외국의 사신을 교제함은 부당한 일이라 하여 탄핵했습니다. 신종(神宗)이 좌우에게 ‘푸른 입술’이란 어떠한 고사인가 하고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 없어 조원로(趙元老)에게 물었더니, 원로가 아뢰기를,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어떤 이가 본즉 이웃집 사내가 그 아내의 불 부는 것을 보고,
불 부는 예쁜 맵시 붉은 입술 오물오물 / 吹火朱唇動
섶나무 때고 나니 하얀 팔뚝 드러났네 / 添薪玉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저 얼굴이 / 遙看煙裏面
피는 것이 꽃이런가 안개 더욱 은은해라 / 恰似霧中花
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 하는 말이, 당신도 어찌 그를 본받지 않느냐고 하였을 때에, 남편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먼저 불을 불면 내 응당 본떠서 시를 지으리라 하고, 이내 읊되,
불 부는 님의 양은 푸른 입술 벌렁벌렁 / 吹火靑唇動
장작을 때고 나니 검정 팔뚝 비꼈구나 / 添薪墨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그 상판은 / 遙看煙裏面
무엇에 비할쏜고 구반다(추악한 귀신의 이름)가 이 아니냐 / 恰似鳩槃茶
라고 하였었는데, 이 이야기는 본래는 왕벽지(王闢之)의 《민수연담록(澠水燕談錄)》에서 나왔다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학지정(郝志亭)더러,
“장군은 비록 무관 출신이지만 장고(掌故)에 몹시 익숙하고 문필이 유려하여, 비록 이름 있는 학자나 늙은 선비라도 장군의 짝이 될 자 드물까 하오니, 귀국의 무관은 반드시 문관과 학문이 넉넉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군은 특히 유가의 연원이 깊어서 정원(定遠)의 문장이 금석에 새겼음을 본받은 것이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저의 집은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더니 이제 다행히 성스러운 시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수(隨 한(漢) 때의 장수 수하(隨何))ㆍ육(陸 미상)ㆍ강(絳 한(漢) 때의 장수 주발(周勃). 강은 그의 봉호)ㆍ관(灌 한(漢) 때의 장수 관영(灌嬰))의 한스러운 일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지 않습니까. 저 같은 자는 수레에 싣거나 말로 셀 수 있을 만큼 많으니 무엇을 칭찬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태학사(太學士) 아계(阿桂)와 얼마 전에 태학사를 지낸 서혁덕(舒赫德)과 같은 분은 모두들 문장이 태평 성대를 이룩할 만하며, 무략이 어지러운 난리를 평정할 수 있고, 부귀와 수복(壽福)은 분양(汾陽)ㆍ서평(西平 미상)이요, 공로와 훈벌은 배진(裵晉 배도(裵度). 진은 봉호)ㆍ문로(文潞)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관도 할 수 없고 무관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사이(四彝)가 모두 복종하고 풍진이 고요하니, 저 같은 자는 가위 한 개의 썩은 무부(武夫)였습니다.
서른 해 쉬지 않고 옛 병서를 읽고 나서 / 三十年來學六韜
꽃다운 그 이름이 당시에 문장이라 / 英名嘗得預時髦
나라에 몸을 던져 금 갑옷 입었을 제 / 曾因國難披金甲
아무리 가난해도 보배칼을 팔진 않네 / 不爲家貧賣寶刀
뛰노는 이 팔뚝에 화살 힘이 약다 하랴 / 臂健尙嫌弓力輭
오히려 밝은 눈에 싸움 터를 바라보네 / 眼明猶識陣雲高
어젯밤 뜰 앞에서 가을 바람 일어나니 / 堂前昨夜秋風起
꽃 놓인 옛 전포를 보기도 부끄러라 / 羞見團花舊戰袍
이 조한(曹翰)의 시를 외고 나면 그들이 안장에 걸터앉아서 사면을 돌보던 모습이 못내 그리워질 뿐입니다. 옛날부터 글 읽은 장수로서 손무(孫武)ㆍ오기(吳起)ㆍ염파(廉頗)ㆍ악의(樂毅)ㆍ왕전(王翦)ㆍ조충국(趙充國)ㆍ반초(班超)ㆍ심경지(沈慶之)ㆍ한세충(韓世充) 등은 모두 7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심경지는 글 모르는 까막눈인데, 어찌 글 읽은 장수라 하시요.”
하였더니, 지정은,
“심공(沈公)이 일찍이 농사일은 사내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고, 길쌈 일은 여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다고 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은 그 당시에 벌써 인정된 것이었고, 척남궁(戚南宮)은 더욱 시 공부가 깊어서,
호각 소리 처량할사 초목 그저 쓸쓸하군 / 畫角聲傳草木哀
구름 머리 높이 솟고 돌문이 열리누나 / 雲頭起對石門開
삭풍 불어 술이 찰 제 취하지도 않거니와 / 朔風邊酒不成醉
지는 잎 기러기는 요란스레 우는구나 / 落葉歸鴻無數來
다만 당 과 쉬어 살기 아예 사라지면 / 但使元戈銷殺氣
이 몸이 헛 늙은들 그 무엇이 한이리요 / 未妨白髮老邊才
높은 봉에 이름 새김 이 내 뉘와 함께 할꼬 / 勒名峯上吾誰與
칼춤 추던 저 대 위에 그리워라 이 장군이 / 故李將軍舞劍臺
이라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리고 보면 그의 장수 재주는 미칠 수 있겠으나 시 재주는 미칠 수 없겠습니다그려.”
하고 웃었다.
저녁 무렵에 풍윤성(豐潤城)에 올랐더니 수염이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내 앞에 와서 손을 들어 읍하면서,
“저의 성명은 임고(林皐)요, 절강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나의 성명을 물어서 알자 놀라는 듯 반기면서,
“당신은 필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의 일가시죠.”
한다. 나도 역시 놀라서,
“당신은 초정을 어떻게 잘 아시나요.”
한즉, 임고는,
“지난해에 초정이 같은 나라 사람 이형암(李炯菴 이덕무. 형암은 그의 호)과 함께 문창루(文昌樓)에 올랐다가 이내 그 고을 호형항(胡逈恒)에게 묵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성 밑에 있는 한 집을 가리키면서,
“저곳이 곧 호씨(胡氏)의 집이며, 그 바람벽 위에는 초정의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한다. 이에 변계함(卞季涵)과 정 진사(鄭進士) 각(珏)으로 더불어 함께 그 집을 찾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하였다. 주인이 등불 넷을 켜서 벽을 밝혀 주기에 그 시를 한 번 낭독하니 이것은 곧 우리 집이 전동(典洞 이조 때 서울에 있던 동리)에 있을 때에 형암이 마침 왔다가 지은 것이다.
쓸쓸한 가을 소식 저 나무가 먼저 아네 / 泬㵳秋令樹先知
춥고 더움 다 잊으나 바보되고 말았구나 / 任忘暄涼做白癡
고요한 벽과 벽엔 벌레 소리 유난하곤 / 壁靜萬蟲勤自護
발 틈으로 새 한 마리 엿보기 일쑤러라 / 簾虛一鳥慣相窺
돈 벽일랑 버리거나 이 몸을 더럽힐 듯 / 抛他錢癖如將浼
나를 일러 서음(書淫)이라 하니 나는 이를 사양 않소 / 呼我書淫故不辭
중국 것만 좋다 하여 부질없이 그리 마오 / 好事中州空艶羨
요봉(청(淸) 문학가 왕완(王琬)의 호)은 문필이요 완정(왕세진(王世稹)의 호)은 시라 하네 / 堯峯文筆阮亭詩
백로지(白鷺紙) 두 폭을 붙여서 쓴 것인데, 글씨 자태가 물 흐르는 듯하고 한 글자의 크기가 마치 두 손바닥만 하다. 전날에 우리들이 중국일을 이야기할 때에 부질없이 그리워만 했던 것이 이 몇 해 사이에 차례로 한 번씩 구경하였을 뿐 아니라, 이렇게 먼 만리 타향에서 이 시를 읽으매 마치 고인의 얼굴을 만나는 듯싶었다.
유리창(琉璃廠) 육일재(六一齋)에서 유황포(兪黃圃) 세기(世琦)를 처음 만났다. 그의 자는 식한(式韓)인데, 눈매가 맑고 눈썹이 길기에 나는 그가 혹시 반정균(潘庭筠)ㆍ이조원(李調元)ㆍ축덕린(祝德麟)ㆍ곽집환(郭執桓) 등과 같은 명사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들은 나보다 앞서 교유한 이가 있으므로 그들의 이름이 입에 향기롭고 그들의 수염이나 눈썹이 눈에 선하였던 까닭이다. 이제 유(兪)와 필담을 하는 사이에 그는 유혜풍(柳惠風 유득공(柳得恭). 혜풍은 호)이 그 숙부 탄소(彈素 유금(柳琴)의 호)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
고운 국화 시든 난초 님의 수레 비치옵네 / 佳菊衰蘭映使車
맑은 구름 보슬비는 구월도 늦가을 / 澹雲微雨九秋餘
이 말씀 한 토막을 중토에다 전하고저 / 欲將片語傳中土
지북의 어떤 사람 다시금 글을 쓸꼬 / 池北何人更著書
를 써서 보였더니, 황포는,
“지북의 어떤 사람이란 누구를 이름이시오.”
하고 묻기에, 나는,
“이것은 완정이 지은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실린 우리나라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고사를 쓴 것이지요.”
한즉, 황포는,
“글쎄, 《감구집(感舊集 왕세진 저)》 가운데 이름은 상헌(尙憲)이요, 자는 숙도(叔度)라는 이가 있더군요.”
한다. 나는,
“옳습니다. 저,
엷은 구름 가벼운 비가 시누이의 사당터에 / 淡雲輕雨小姑祠
고운 국화 시든 난초 팔월이 이때라네 / 佳菊衰蘭八月時
라는 시는 곧 청음이 지은 것이요, 또 완정의 논시절구(論詩絶句)에는,
맑은 구름 이슬비가 소고사가 여기로다 / 淡雲微雨小姑祠
빼어난 국화 지는 난초 때마침 팔월이야 / 菊秀蘭衰八月時
조선에서 오신 손님 그 말을 기억하니 / 記得朝鮮使臣語
동쪽 나라 그분네가 시를 과연 알더구먼 / 果然東國解聲詩
이라 하였으니, 혜풍의 이 시는 완정을 본받아서 지은 것입니다.”
한즉, 황포는 또,
“혜풍의 시는 실로 얻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동국 사람이 시를 안다는 말이 과연 그렇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을 더 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다. 나는 곧,
글을 읽다 눈물 지니 옛 역사가 아롱지네 / 看書淚下染千秋
물에 닿은 저 시인은 시름도 하도 할사 / 臨水騷人旡限愁
확사(심덕잠(沈德潛)의 자)가 시를 엮되(《청시별재(淸詩別裁)》) 너무나 초라터라 / 碻士編詩嫌草草
《치청전집》 있다 하니 어디서 구해 볼까 / 豸靑全集若爲求
를 썼더니, 황포는 손을 흔들며 붓으로 ‘치청전집’ 넉 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금서(禁書)랍니다. 철군(鐵君 이개(李鍇)의 자)의 선조는 애초에 귀국 사람이라지요.”
한다. 나는,
“무슨 까닭으로 금법에 걸렸나요.”
하였더니, 황포는 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또 잇달아서 그 다음 절의,
시 짓기로 이름 높은 곽집환이 있다고녀 / 有箇詩人郭執桓
담원(곽태봉(郭泰峯)이 거처하는 곳)이 읊은 글귀 동국에 헌사롭네 / 澹園聯唱遍東韓
이제껏 삼 년이라 소식 그저 끊겼으니 / 至今三載旡消息
처량한 이 꿈속에 물 소리 뿐이로세 / 汾水悠悠入夢寒
를 읊었더니, 황포는 평하려 들면서,
“곽은 어느 고을에 살고 있는 시인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그는 태원(太原)에 산답니다.”
하고, 또,
“사동망(師東望)과 양유동(梁維棟)은 어떤 인물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모두 다 모른다고 답한다. 나는 또,
“그러면 서점 중에는 갓 새긴 《회성원집(繪聲園集)》이 있겠습니까. 그 책머리에 사와 양의 두 서문이 있고, 역시 저의 것도 있습지요.”
한즉, 황포는 곧 ‘회성원집’ 넉 자를 써서 문수당(文粹堂)서사(書肆)의 편액(扁額)이다. 에 사람을 보내어 구했으나 없다 한다. 나는 또,
“선생은 반정균학사를 잘 아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황포는,
“일찍이 사귀어 본 일은 없습니다.”
한다. 나는,
“반 학사의 댁이 종인부(宗人府)에서 벽 하나가 가렸답니다. 제가 나라를 떠나올 때에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종인부 대문을 지나 오른편으로 돌면 그 댁이 있다.’ 합니다. 그러면 종인부가 여기에서 거리로 얼마나 됩니까.”
한즉, 황포는,
“선생이 예부(禮部)를 잘 알고 계시겠지요.”
하고 반문할 즈음에 마침 한 손님이 좌석에 들어앉더니,
“종인부를 찾을 것 없이 그 댁이 여기서 멀지 않소이다. 저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있는 단씨(段氏)의 백고약포(白槀藥鋪)에서 마주 선 문이 곧 반이 우거한 곳입니다.”
하고 설명한다. 황포가 그와 무어라고 이야기하더니 곧,
“지난해 가을에 그가 이곳으로 옮아왔다 하는데, 선생은 누구를 통해서 그를 아셨나요.”
한다. 나는,
“저의 나라 사람 홍대용(洪大容)이 건륭 병술년(1766년)에 공사(貢使)를 따라서 연경에 왔다가 반을 만났고, 그 뒤에도 그와 서로 사귀어 본 이가 있으니, 저는 비록 그를 보지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벌써 서로 통했답니다. 반은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여 일찍이 스스로 복숭아와 버드나무를 그리고서,
우리 집은 서자호(서호(西湖)) 물가를 둘린 나무 / 吾家西子湖邊樹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네 / 淺碧深紅二月時
이렇듯한 저 강남을 돌아가지 못하고는 / 如此江南歸不得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는 시를 써서 홍대용에게 주었답니다.”
한즉, 황포가 크게 권주를 치면서,
“선생의 벗 홍 수재(洪秀才)의 아름다운 글귀를 듣고자 합니다.”
한다. 나는,
“일찍이 외우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혜풍(惠風)이 탄소(彈素)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서,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오 / 淺碧深紅二月時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항주가 낳은 선비 그 사람은 반향조를 / 杭州擧子潘香祖
어여쁠사 그의 시구 남시와 어떻던고 / 可憐佳句似南施
하였으니, 우리나라 시인들이 중국의 명사를 그리워함이 이렇답니다.”
한즉, 황포는 또 이에 권주를 치면서,
“반은 진실로 이름 있는 선비이긴 하나 혜풍의 것도 역시 아주 아름답습니다.”
하고, 황포는 곧 그 종이를 거두어 품속에 넣으면서,
“제가 방금 〈구당시화(毬堂詩話)〉를 쓰고 있는데 다행히 이런 한 토막 재미있는 이야기를 얻었소이다.”
하고는 이내 같이 문을 나와서 작별할 제, 황포는,
“이 길이 바로 양매서가로 가는 것입니다. 단씨의 약포는 저 문패에 큰 물고기를 그린 곳이 그 집이랍니다.”
하고, 한 곳을 가리켰다.
강녀묘(姜女廟)는 산해관 밖에 있는데, 이는 이른바 망부석(望夫石)이다. 왕건(王建 당(唐) 시인. 자는 중초(仲初))의,
고운 님 바라던 곳 강물만이 예는구나 / 望夫處江悠悠
이 몸이 돌 될망정 고개도 안 돌리네 / 化爲石不回頭
나날이 이 산 위에 바람 불고 비 내릴 제 / 山頭日日風和雨
님이 돌아오시는 땐 이 돌 응당 입 열 것을 / 行人歸來石應語
이란 시가 곧 이것을 말함이다. 세간에서는 망부석이 이 한 군데뿐이 아니라 하나는 태평(太平)에 있고, 또 하나는 무창(武昌)에 있으니, 그러면 왕건이 읊은 것은 이 돌이 아님을 알겠다. 지금 이곳에 행궁(行宮)이 있는데, 그 웅장ㆍ화려함이 북진묘(北鎭廟)에 못지 않고, 또 과친왕(果親王)이 금자(金字)로 쓴 ‘진고명적(振古名蹟)’이라는 주련이 있으며, 건륭 8년(1743년) 10월에 황제가,
서늘 바람 늙은 가지 저녁 볕에 우는 듯이 / 涼風頹樹吼斜陽
이제껏 구슬프게 고운 님을 그리웁네 / 尙作悲聲吊乃郞
천고의 내 절개를 자랑코자 하랴마는 / 千古旡心誇節義
이 몸이 죽고 죽음 강상을 위함이네 / 一身有死爲綱常
그날부터 내려오며 강녀라 이름 불러 / 由來此日稱姜女
당년에 그 슬픔은 기량을 울었다네 / 盡道當年哭杞梁
이 마음 본받아서 아름다움 지킨다면 / 長見秉彝公懿好
전한 말이 그르다손 무엇이 해로우랴 / 訛傳是處也何妨
라는 시를 지어서 돌에 새겼고, 돌 곁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진의정(振衣亭)이다. 대체로 청의 황실은 대대로 명필이 많으나 과친왕(果親王)이 더욱 이에 능하여 미원장(米元章)보다도 나을 듯싶었다.
사신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는 이는 반드시 칭호 하나씩을 가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역관을 종사(從事)라 하고, 군관을 비장(裨將)이라 하며, 놀 양으로 가는 나와 같은 이는 반당(伴當)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말에 소어(蘇魚)를 반당(盤當)이라 하니 대개 반(盤)과 반(伴)의 음이 같은 까닭이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면 아까 이른바 반당은 은빛 모자와 정수리에 푸른 깃을 꽂고 짧은 소매에 가뿐한 행장을 차리게 된다. 이를 본 길가의 구경꾼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새우라고 부른다. 어째서 새우라 하는지는 모르나 대체로 무부(武夫)의 별호인 듯싶다. 또 지나는 곳마다 어린이들이 떼를 지어 몰렸다가 일제히,
“가오리가 온다. 가오리가 오네.”
하고, 또는 말 꼬리에 따라오면서 다투어가며 지껄인다. 대체로 가오리가 온다는 것은 고려(高麗)가 온다는 말이다. 나는 일행더러,
“이제 세 가지 물고기로 변하는구먼.”
하고는 웃었다. 모든 사람들은,
“어째서 세 가지 고기라 하는고.”
한다. 나는,
“길을 떠날 때에는 반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소어요,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새우라고 하니 새우도 역시 고기의 한 족속이요, 되놈 애들은 모두 가오리(哥吾里)하고 부르니 이는 홍어(洪魚)가 아닌가.”
한즉,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나는 이내 말 위에서 시 한 절을 불렀다.
푸른 깃 은 정수리 의젓한 무부로서 / 翠翎銀頂武夫如
천리라 요동 길을 사신 뒤를 따랐구나 / 千里遼陽逐使車
중국 땅에 들어서자 고기 별호 세 번째와 / 一入中州三變號
예부터 못난 이 몸 종이 씹는 좀이라오 / 鯫生從古學蟲魚
고려(高麗)는 애초에 고구리(高句驪)로부터 나온 이름이었는데, ‘구(句)’ 자와 ‘마(馬)’ 변을 생략한 것이다. 만일 산과 물이 곱다고 풀이해서 ‘고려’라고 읽는다면 이는 천자문(千字文) 중에 있는 금생려수(金生麗水)의 ‘려(麗)’ 자가 될 것이니 이는 거성(去聲)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평성(平聲)의 ‘리(麗)’로 발음한다. 수ㆍ당 때에도 고구리를 모두 ‘고리’라고 불렀으니 ‘고리’란 이름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다. 이무관(李懋官)은 일찍이,
“‘고구리’란 말은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처음 나타났으며, 그들 조상은 금와(金蛙)인데, 우리나라 말로 와(蛙)를 개구리(皆句麗)라 하고 또는 왕마구리(王摩句麗)라 한다. 옛 사람들이 몹시 질박하여 곧 임금 이름으로써 나라 이름을 삼고는 성을 그 위에다 씌워서 ‘고구리’가 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일시의 조롱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마는 제법 이치에 맞는 말이다. 외국의 방언이 대체로 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는 것이 많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한자로 옮겼을 때 예를 들면, 은(銀)을 몽고(蒙古)라 하고, 아름다운 금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하며, 장사(壯士)를 예락하(曳落河)라고 부르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산서(山西)에 살고 있는 사람 곽집환(郭執桓)의 자는 봉규(圭)요, 또는 근정(勤庭)이며, 호는 반오(半迂)요, 혹은 동산(東山)이며, 또는 회성원(繪聲園)이라 한다. 그는 건륭 병인년(1746년)에 났으며,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하고 집이 대대로 부유하였으며, 그의 집은 호산(虎山)을 뒤에 지고 앞에는 노천(蘆泉)이 흐르고 있다. 그의 아버지 태봉(泰峰)의 자는 청령(靑嶺)이요, 호는 금랍(錦衲)이니 나라에서 중헌 대부(中憲大夫)의 직함을 주었는데, 뒤에 또 자정 대부(資政大夫)에 승진되었다. 금랍은 날마다 심덕잠(沈德潛)ㆍ가락택(賈洛澤) 등 모든 명사와 더불어 그 동산에서 시를 창수(倡酬)하였다.
봉규가 일찍이 그와 한 고을에 살고 있는 등문헌(鄧汶軒) 사민(師閔)을 통하여 우리나라 명사들에게 담원팔영(澹園八詠)의 시를 청하였으니, 담원은 곧 금랍이 거처하는 곳이었으며, 이 시는 대체로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다.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
붉은 파초 푸른 바위 담 너머로 솟아 뵈고 / 紅蕉綠石出東墻
한 그루 오동일랑 깊숙한 찰 간직했네 / 一樹梧桐窈窕堂
평생에 오만한 몸 손님 맞이 게을리하여 / 傲骨平生迎送懶
어른님 하시는 일은 저문 산에 절만 하네 / 丈人惟拜暮山光
위는 내청각(來靑閣)을 읊었다.

남쪽 비탈 그림자는 진종일 나풀나풀 / 南陀竟日影婆娑
그림자 물에 지자 나를 불러 누구인가 / 耐可呼吾亦喚他
산들바람 잠깐 불 제 해오라기 저어가니 / 乍綴微風鳬鷺去
요란한 물결 위에 백 동파가 설렁이네 / 不禁撩亂百東坡
위는 감영지(鑑影池)를 읊었다.

코 끝에 희끗하며 보기는 보았건만 / 已觀微白鼻端依
무엇이고 맡으려니 콧구멍이 닫혔고나 / 欲辨臟神掩兩扉
다만 암향 있어 꿈에 들어 싸늘하네 / 獨有暗香侵夢冷
나부산 밝은 달에 매화 가지 춤추는 듯 / 羅浮明月弄輝輝
위는 소심거(素心居)를 읊었다.

卍자 새긴 난간 위에 울한 솔이 덮여 있고 / 松覆深深卍字欄
기운 바위 넌출 달려 푸른 빛이 어울렸네 / 垂蘿欹石翠相攅
그림 배에 바람 불어 가는 대로 두려무나 / 一任畫舫風吹去
밤새도록 들려오는 찬 여울 물소린 듯 / 盡夜寒聲瀉作灘
위는 송음정(松陰亭)을 읊었다.

가볍게 뿜는 놀은 취한 넋을 깨우는 듯 / 噀輕堪醒醉魂花
하늘 말이 높이 달려 푸른 갈기 너울너울 / 天褭行空翠鬣髿
약 캐러 갔다가 옛 신선을 찾으려니 / 採藥將尋劉阮去
적성 아침 놀에 길마저 아득코녀 / 路迷廉閃赤城霞
위는 비하루(飛霞樓)를 읊었다.

꽃은 하도 은근하여 가는 임을 붙드는 듯 / 花似將歸强挽賓
비바람 어이하여 도리어 새우는고 / 囑他風雨反逢嗔
골짝 꽃 꺾어다가 화병에 모셔 두니 / 自從洞裏修甁史
일년 삼백 육십 날이 어느 때가 봄 아니랴 / 三百六旬都是春
위는 유춘동(留春洞)을 읊었다.

옥파리채 맑은 저녁 높은 대에 홀로 올라 / 玉塵淸宵獨上臺
버들 울에 서리 내리고 기러기 슬피 울 제 / 杞棚霜落雁流哀
찢어지듯 한 소리에 가을 구름 흩어지고 / 一聲劃裂秋雲盡
깨끗한 저 하늘에 달님 이제 오신다네 / 萬里瑤空皓月來
위는 소월대(嘯月臺)를 읊었다.

꽃다운 화예부인 이 궁에 들어올 제 / 花蘂夫人初入宮
수줍은 채 말하자니 뺨이 먼저 붉었다네 / 含羞將語臉先紅
앵가의 사리쯤이 그 무엇이 묘하던고 / 鸚哥舍利元非妙
아란의 깨달은 도를 누구라서 알아주리 / 誰識阿難悟道功
위는 어화헌(語花軒)을 읊었다.
봉규가 그가 지은 ‘회성원집(繪聲園集)’ 각본(刻本) 한 권을 나에게 보내고는 서문을 청하였다. 그 글을 읽어본즉 청허(淸虛)하고도 쇄탈(灑脫)하여 세속 사람의 것과 같지 않고, 그는 약관 때부터 그 아버지의 가진 재산을 받았으며, 해내의 사객(詞客)들을 초빙하여 글과 술로 회합을 지었으니, 양유동(楊維棟)ㆍ노병순(盧秉純) 등이 모두 그 서문을 쓰게 되었다. 그의 ‘회진문서정(懷津門西亭)’이라는 시에,
향기 흩자 꽃이 지니 작은 정원 가을이라 / 香散花殘小院秋
추녀 끝에 달린 달은 갈퀴인양 되었으리 / 西亭簾角月如鉤
북으로 예는 외기러기 푸른 공중 스쳐오니 / 北來一雁橫空碧
그 그림자 동남으로 바다에 흘러드네 / 影下東南入海流
라 하였고, 또 그의 ‘제표요산수소폭(題表耀山水小幅)’이라는 시에는,
고기잡이 갯마을에 물빛은 밝았는데 / 蟹舍漁灣水色明
이슬 젖은 나무 숲에 흐렸다가 맑아지네 / 煙條露葉半陰晴
하늘가 구름 사이 외로운 배 멀리 저어 / 雲間天際孤帆遠
적막한 석양 속에 한 소리 기러기를 / 寂寞斜陽一雁聲
이라 하였고, 또 그의 ‘유감(有感)’에는,
강가에 밝은 달빛 가을이 맑노매라 / 壕梁月色照淸秋
회남의 갈대 숲에 내 꿈이 둘리누나 / 夢繞淮南蘆萩洲
초원에 잠긴 비는 갯마을이 고요하고 / 雨暗楚原連浦靜
고목에 급한 바람 강물 소리 섞여 흘러 / 風催古木雜江流
외로운 배 방향 몰라 건곤이 넓은지고 / 孤舟旡依乾坤濶
물과 구름 같은 신세 내 홀로 떠 있구나 / 隻影空持雲水浮
한없이도 쓸쓸한 건 시력이 끝난 그곳 / 最是蕭條極目處
머나먼 만리 길에 끝없는 나의 시름 / 迢遙萬里使人愁
이라 하였다. 내 일찍이 금오(金鰲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橋])와 옥동(玉蝀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橋]) 사이를 배회한 일이 있으니, 저 우촌(雨村)이조원(李調元) 과 추루(秋樓)반정균(潘庭均), 지당(芷塘)축덕린(祝德麟) 의 모든 명류는 오히려 만나 볼 기회가 있겠으나, 다만 곽씨 집환(執桓)은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6년이나 되었다. 집환이 건륭 을미년 8월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회성원집’은 아마 중간된 책[本]이 있을 듯 싶기에 유리창 안에서 구하여 보았으나, 끝내 얻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윤경(尹卿)이 검은 종이로 장정한 작은 부채를 내어서 대와 돌을 그리고 또 젖에다 금가루를 타서,
라고 써 있고, 그 밑에는,
“윤가전(尹嘉銓)이 쓰니 이때에 나이는 70이다.”
라고 썼다.
《명시종(明詩綜)》에 나의 5세조(世祖) 금양군(錦陽君)의 대동관제벽(大同館題壁)의 한 절로서,
한 나라의 홍가(한(漢) 성제(成帝)의 연호) 연간에 일어난 고구려 / 高句麗起漢鴻嘉
쓸쓸한 옛 궁터가 풀숲에 가리웠네 / 宮殿遺墟草樹遮
슬프다 을지문덕 그이가 죽은 뒤에 / 怊悵乙支文德死
나라가 망한 것 후정화 탓 아니라네 / 國亡非爲後庭花
가 실려 있다. 고구려의 일어남은 홍가 연간이 아니요, 곧 한 원제(漢元帝)의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이다. 성제(成帝)의 홍가 3년에는 백제(百濟)의 태조 고온조(高溫祚)가 직산(稷山)에 왕도를 정하였던 것을 선조께서 우연히 상고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유식한(兪式韓)의 《구당록(毬堂錄)》에는 《일지록(日知綠)》을 이끌어서 조선 역사의 자료로서 《서경(書經)》 대전(大傳)을 고증삼아, 이 시 가운데서 쓴 홍가의 그릇된 것을 변증(辨證)하였으니, 중국의 선비들이 고거(考據)와 변증에 알뜰하여 이로써 박아(博雅)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장주(長洲 우동이 살고 있던 지명) 우동(尤侗) 회암(悔菴)이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지으매, 그 첫머리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그 다음 백여 나라의 민요(民謠)와 토산(土産)의 대개를 소개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서도 그의 서술이 오히려 그릇된 것이 많으니 하물며 해외 만 리의 먼 곳이랴. 더군다나 문자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그들의 토속을 통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조선(朝鮮)을 두고 읊은 시에,
고구려를 하구려로 낮추어서 고쳤다니 / 高句麗降下句麗
조선이란 옛 이름이 보다 더 아름답네 / 未若朝鮮古號宜
천 리란 그 서울엔 온갖 연극 벌여 있고 / 千里王京陳百戱
한 나라 옛 모습을 이곳에서 보겠구나 / 漢城猶見漢官儀
라 하고는 그 주(注)에는,
“옛 조선이 고구려에게 합병되었으므로 수(隋)가 그를 쳤으되 항복받지 못하고는 그를 낮추어서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더니, 명(明)의 홍무(洪武) 연간에 그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고 조서(詔書)를 받들었으므로, 다시 조선의 이름을 회복시켰으며 한성(漢城)을 서울로 삼았다. 매양 조사(詔使)가 이르면 여러 가지 연극(演劇)을 진열하였다.”
라고 하고, 또 그 뒤를 이어서,
긴 저고리 넓은 소매 절풍건은 머리에다 / 長衫廣袖折風巾
다듬 종이 이리 붓은 한자 쓰면 진서라네 / 硾紙狼毫漢字眞
스스로 쓴 역사에는 전통이 오래다니 / 自序世家傳國遠
《상서》의 구주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이라네 / 尙書篇內九疇人
라 하고는, 또,
작은 아이 여덟 살이 황창이라 부르는데 / 小兒八歲號黃昌
칼춤을 추다 말고 백제왕을 베었다네 / 舞劍能誅百濟王
8월이라 한가윗날 회소곡을 다시 불러 / 更唱嘉俳會蘇曲
아침 나절 그 길쌈이 대바구니 가득 찼네 / 朝來蠶績已盈筐
라고 하고, 또 그 주에,
“신라(新羅)의 황창랑(黃昌郞)이 8세에 그의 임금을 위하여 백제(百濟)에 가서 거리에서 춤추는데, 백제왕이 그를 불러 궁중에서 춤추게 하였더니, 그는 이내 그 칼로써 백제왕을 죽였다. 7월 보름에 신라왕이 왕녀(王女)로 하여금 육부(六部)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넓은 뜰에서 길쌈을 시작하여, 8월 보름에 이르러서 그들의 공적을 비교하여 이에 진 자가 비용을 담당하여 주연을 벌이고 서로 노래 부르며 춤추되, 이를 ‘가위[嘉俳]’라 하였다. 그 중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회소곡(會蘇曲)을 불렀더니, 그 뒤에 조선이 신라를 깨치고 끼친 소리를 모의하여 황창과 회소의 두 곡조를 만들었다.”
하였다.
기려천(奇麗川)이 《소대총서(昭代叢書 청(淸) 장조(張潮) 저)》 를 내놓고 이 글을 뽑아서 나에게 뵌다. 내가 윤형산(尹亨山)에게,
“이름을 ‘하구려(下句麗)’로 낮춘 것은 곧 왕망(王莽) 때 일입니다.”
한즉, 윤은,
“그렇습니다.”
한다. 나는 또,
“스스로 쓴 역사라는 구절은 온통 그릇된 것입니다. 기씨(箕氏)의 조선은 위만(衛滿)에게 축출된 것입니다.”
하였더니 윤은,
“그거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에서는 복잡한 관계인 동방(東方)의 삼국(三國)을 통틀어 이야기한 것이요, 오로지 귀국만을 가리킨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가 이른바 전통이 오래다는 것은 대체로 그의 나라 이름 조선이 벌써 기자(箕子)로부터임을 말하며, 귀국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찬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본시 가작(佳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다시피 또는 가죽신을 격해 놓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의 주(注)에 이르기를 조선이 신라를 깨쳤다는 것은 더욱 그릇된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려를 이었고, 고려는 신라를 이었으니 어찌 5백 년 앞의 신라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한즉, 여천은,
“이야말로 을축(乙丑)ㆍ갑자(甲子)라는 겁니다.”
하고, 크게 웃는다.
내가 윤경더러,
“현존한 시인(詩人)으로서 해내(海內)에 가장 으뜸될 분은 누구십니까.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경은,
“천하가 넓은지라, 홍장(鴻匠)과 묘재(妙才)가 진실로 없는 것은 아니로되, 저는 나이가 늙고 세상일을 모두 끊어버렸으므로 젊은 재자들은 아는 이가 없고, 다만 저의 늙은 벗으로서 원 태사(袁太史) 매(枚)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자는 자재(子才)였고 뜻이 고상하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입니다. 그는 벼슬을 사랑하지 않고 산수에 방랑하여 가장 회고적(懷古的)인 작품이 능수입니다.”
하고는, 이내 소리를 높여서 그의 시 두어 귀를 읊는다. 나는 그가 읊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글씨로 써서 보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의 〈박랑성시(博浪城詩)〉에,
약을 캐는 진인들은 봉래산을 향해 가고 / 眞人採藥走蓬萊
아득한 박랑의 모래벌은 망해대에 연했구나 / 博浪沙連望海臺
구정은 아직 잠기고 삼호들은 일어섰네 / 九鼎尙沈三戶起
여섯 왕이 쓰러지자 한 방망이 오는구려 / 六王纔畢一椎來
범과 용이 기개 높은들 누른 금은 다하였네 / 虎龍有氣黃金盡
산도깨비 소리 없고 흰 구슬만 슬프다네 / 小鬼旡聲白璧哀
열흘 두고 찾다 못해 손을 마침 떼었다네 / 大索十日還撒手
그대 같은 기이한 재주 예부터 몇이런고 / 如君終古儘奇才
하였으니, 그 시를 보아서도 가히 중국 사대부(士大夫)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산이 구태여 이 시를 읊어 보임도 역시 그의 뜻이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려천(奇麗川)에게도 기피하지 않음은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강희 무오년(1678년)에 강우(江右)에 살고 있는 계문란(季文蘭)이라는 여인이 되놈들의 노략을 당하여 심양으로 가다가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러서 바람벽 위에 시 한 절을 썼으되,
뭉텅 머리 방망인양 옛 단장 가엾어라 / 椎髻空憐昔日粧
길 나선 초라한 양은 비단 치마 다 낡았네 / 征裙換盡越羅裳
아빠 엄마 어떠신고 그곳 몰라 애태우며 / 爺孃生死知何處
봄 바람에 흐뭇 울어 심양으로 예는구나 / 痛哭春風上瀋陽
하고는, 그 아래에 또 쓰기를,
“저라는 계집은 곧 강우에 살고 있는 우 상경(虞尙卿) 수재(秀才)의 아내로서 지아비는 놈들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이제 왕장경(王章京)에게 팔린 몸이 되어서 심양으로 가는 길이오. 무오년 정월 21일에 눈물을 뿌려 벽을 닦고 이 시를 쓰노니, 오직 천하에 유심(有心)한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서 이 몸을 가엾이 여겨 건져 주시옵길 바랍니다. 제 나이는 지금 21세외다.”
하였다. 그 뒤 6년 만인 계해(1683년)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공(金公) 석주(錫胄)가 사신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이 일을 기록하여 돌아왔고, 또 그 뒤 30여 년을 지나서 노가재(老稼齋) 김공(金公) 창업(昌業)이 역시 이곳을 지나니 바람벽에 쓴 글자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이제 나는 노가재보다도 60여 년 뒤인 이날에 또 이곳을 지나다가 이를 생각하여 배회하였으나 벽 사이의 글자는 다시 찾아 볼 곳이 없었다. 내 우연히 이 시로써 기풍액(奇豐額)에게 이야기하였더니 그는 산연(潸然)히 눈물지우며,
“진자점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산해관 밖에 있습니다.”
하였더니, 기는 곧 시 한 절을 읊었다.
붉은 단장 아침 나절 되놈에게 팔렸으니 / 紅粧朝落鑲黃旗
호가의 슬픈 박자 그 다섯째 글귈러라 / 笳拍傷心第五詞
천하에 많은 사내 맹덕이 이제 없으니 / 天下男兒無孟德
천금이 있다손들 채문희를 속할쏘냐 / 千金誰贖蔡文姬
강희의 산장시(山莊詩)는 통틀어 36마디였는데, 모두가 야비하고 졸렬하여 운치가 없으니, 대체로 그는 억지로 읊어서 평소의 포부를 자랑한 것인데 그의 모든 신하들이 반드시 뭇 글을 수집ㆍ나열하여 전주(箋注)를 내었으니, 한 예를 들면 그의 연파치상(煙波致爽)을 읊은,
서늘한 이 산장에 가끔 와서 더위 피하니 / 山莊頻避暑
잠자코 고요하여 떠들썩한 일 드무네 / 靜黙少喧嘩
는 아무런 주석도 필요하지 않건마는 그들은 양(梁) 소통(蕭統 양(梁)의 문학가. 자는 덕시(德施)) 시의,
수레를 바삐 몰아 산장으로 가자꾸나 / 命駕出山莊
든가, 유우석(劉禹錫) 시의,
푸른 넌출 그늘 속에 산장 하나 예 있구나 / 綠蘿陰下有山莊
라든가, 대숙륜(戴叔倫) 시의,
지초 이랑 대추밭 길 오가기도 잦았고녀 / 芝田棗逕往來頻
와, 손적(孫逖 당의 문학가) 시의,
이 땅이 가장 맑으니 숲 속 정자 좋을씨고 / 地勝林亭好
시절이 태평인 제 잔치도 자주로다 / 時淸宴賞頻
와, 위징(魏徵) 구성궁 예천명(九成宮醴泉銘)의,
“황제께서 구성궁에서 더위를 피하셨다.”(그 서문의 한 구절)
와, 양 간문제(梁簡文帝 자는 세찬(世纘)) 납량시(納涼詩)의,
높은 오동 그 밑에서 더위를 피하노라니 / 避暑高梧側
가벼운 바람 들어 옷깃이 서늘하군 / 輕風時入襟
과, 백거이(白居易) 시의,
봄철을 바라보며 꽃빛이 따뜻하고 / 望春花景暖
더위를 피하니 대 바람이 서늘코녀 / 避暑竹風涼
와, 《남사(南史)》 심린사전(沈麟士傳)의,
“나이가 80이 지났으나 귀와 눈은 오히려 총명하므로 남들은 그의 몸 수양이 정(靜)ㆍ묵(黙)한 소치라고 말하였다.”
와, 황보증(皇甫曾 당의 문학가. 자는 효상(孝常)) 시의,
화창한 바람엔 풀잎이 빼어나고 / 草長光風裏
잠자코 고요한데 꾀꼬리만 우는구나 / 鶯啼靜黙間
와, 하손(何遜 양의 문학가. 자는 중언(仲言)) 시의,
뵈는 거나 듣는 것이 떠들썩한 일 전혀 없네 / 視聽絶喧嘩
등을 이끌었으니, 이 시는 겨우 두 글귀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내용이 풀이하지 못할 것도 없거늘 어찌 허다한 전주(箋注)를 내었을까. 제용작가(帝庸作歌)라는 글이 있으나 어찌 허다한 출전을 밝힐 것이야 있으리요.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일찍이 말하기를,
관관저구(關關雎鳩)란 말은 애초부터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라고 하였으니, 이야말로 시학(詩學)에서의 대성(大成)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가두에 떠드는 말 하간전 외는 소리 / 街頭喧誦河間傳
규중의 슬픈 노래 양백화가 이 아니야 / 閨裏悲歌楊白花
이 시는 곧 점필재(佔畢齋)가 사방지(舍方知)를 풍자한 것이다. 사방지라는 자는 사천(私賤) 계층의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여복(女服)을 가장하여 얼굴에 분과 기름을 단장하며 재봉을 배웠더니, 자라나서 조사(朝士)들의 집에 드나들곤 했다. 천순(天順) 7년(1463년) 봄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일을 풍문으로 듣고 체포하여 그가 평소에 간통하던 여보살에게 취조한즉, 보살은,
“그의 양도(陽道)가 유달리 큽니다.”
한다. 이에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서 만져 보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도 번차례로 실험하며 보고는 모두 혀를 뽑으면서,
“에이, 대단하더구만.”
하였다. 이때에 중국에서도 역시 이보다 먼저(뒤인 것을 잘못 센 것 같다.)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오군(吳郡)양순길(楊循吉)의 《봉헌별기(蓬軒別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성화(成化) 경자년(1480년)에 경사(京師)에 과부 하나가 여공(女紅)에 능란하고 젊고도 예쁘며, 또 신이나 버선이 네 치에 지나지 않을 만큼 작았다. 모든 부귀가에서 서로 맞이하여 수놓기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남자를 보면 문득 부끄러운 빛으로 회피하기도 하려니와, 밤이면 그에게 배우는 여자와도 서로 자누이되 자물통을 튼튼히 잠그곤 한다. 그러므로 남들은 더욱이 그가 자기 몸조심에 가장 엄격하다고 믿었다. 이때 태학생(太學生)으로 있던 아무개가 그를 연모하여, 처음에는 그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그 과부를 자기의 집에 맞이하고, 가만히 그 아내에게 타일러 밤들어 문을 열고 거짓으로 뒷간에 가는 듯이 하고는,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끄니 과부는 고함을 치자, 그는 과부의 목덜미를 껴안고는 강탈한즉 곧 남자인지라 구속하여 관청에 보내어 조사하니, 그의 성은 상(桑)이요, 이름은 중(翀)이며, 나이는 24세인데 어릴 때부터 발을 싸 매었다 한다. 법사(法司)가 그 옥사를 위에 아뢰었더니 헌종 황제(憲宗皇帝)가 이는 ‘인요(人妖)’라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한다.
망부석(望夫石)에는 천산(千山) 범광원(范光遠)의 시 일절이 쓰여져 있다.
성 쌓은 이 어디 가고 보이지를 않는구나 / 不見築城人
다만 정녀 아씨 그 자취 완연쿠나 / 但見貞女迹
묻노라 만리장성 너는 이를 알려니 / 試問萬里城
이 한 조각 돌에 비겨 봄이 어떠할꼬 / 何如一片石
강희때 간행한 전당시(全唐詩)는 모두 1백 20권이나 되는 거질이었으니, 마땅히 빠진 것이 없을 것이로되 당 현종(唐玄宗)의 〈어제사신라경덕왕(御製賜新羅景德王)〉이라는 5언 10운(韻)의 시가 그 속에 실리지 않았다. 《삼국사(三國史)》에,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 봄 2월에 경덕왕은 당 현종이 촉(蜀)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당의 절강으로부터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공물(貢物)을 바쳤더니, 조서(詔書)로 말하기를,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바쳐서 능히 예악(禮樂)과 명분(名分)을 지키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시 한 수를 지어준다 하고,
넷 벼리 나누어서 밝은 햇빛 나타나고 / 四維分景緯
여러 가지 기상들이 그 속에 포함되네 / 萬象含中樞
구슬과 피륙들은 온 천하에 깔려 있고 / 玉帛遍天下
다리 놓고 배를 저어 우리나라 찾아드네 /梯航歸上都
아득한 이내 회포 푸른 뭍이 막혔더니 / 緬懷阻靑陸
오랜 세월 흐르도록 우리 위해 수고했소 / 歲月勤黃圖
망망한 하늘가를 그즈음 누가 알꼬 / 漫漫窮地際
창창한 그 어란이 바다 구석 자리잡아 / 蒼蒼連海隅
갸륵한 이 나라는 명분을 지켰다네 / 興言名義國
산천이 멀다 하여 허수로이 생각하랴 / 豈謂山河殊
우리 사신 갔을 때엔 풍속 교화 전해 있고 / 使去傳風敎
그들이 이에 오면 옛 법을 배워 가네 / 人來習典謨
옷갓이 정제하니 예식을 알아 하고 / 衣冠知奉禮
충실하고 믿음 지켜 유학을 높였구나 / 忠信識尊儒
어린 정성 나타나니 하느님이 하감하고 / 誠矣天其鑒
어질도다 그의 덕은 외롭진 않으리라 / 賢哉德不孤
깃발 안고 함께 일어 인민을 기르리니 / 擁旄同作牧
아름다운 이 선물은 생추에 비할쏘냐 / 厚貺比生蒭
님이 가진 푸른 뜻을 더 한층 굳게 하여 / 益重靑靑志
바람 서리 치더라도 어디까지 변치 마오 / 風霜恒不渝
라고 하였다.”
한다. 송(宋)의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의 사신 김부의(金富儀)가 이 시의 각본(刻本)을 가지고 관반(館伴)으로 있던 학사(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더니, 이병이 황제 휘종 황제(徽宗皇帝) 에게 올렸는데 이내 양부(兩府)와 모든 학사들에게 보이고, 황제는 또,
“이 진봉시랑(進封侍郞)이 올린 시는 당 명황(唐明皇)의 글씨가 틀림없는 것이야.”
하고 가탄하여 마지않았다. 이 시가 이미 중국에 들어가서 도군(道君 송(宋) 휘종이 자칭한 별호)의 예상(睿賞)을 겪었으나, 후세 사람이 당시(唐詩)를 엮는 이는 모두 이를 수록하지 않았음을 보아서, 비로소 옛날의 잃어버린 글은 듣고 본 것으로서만이 다할 바가 못 되고, 도리어 해외 편방(偏邦)의 선비가 이따금 천유(闡幽)의 업적이 있음을 깨달았으니, 이 어찌 우리들의 다행이 아니리요.
오중(吳中)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부박하고 허탄하며, 경솔하고 변덕이 많으나 대체로 문장이 공교롭고 글씨 그림을 잘하기로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그러나 중원(中原)의 인사들은 모두 그들을 미워하여 장사치나 장쾌들을 지목할 때에는, 반드시 항주풍(杭州風)이라고 일컬으니 대체로 오인(吳人)은 교활한 술책이 많았던 까닭이다. 전당(錢塘) 전여성(田汝成)의 《위항총담(委巷叢談)》에,
“항주의 풍속이 부박하고도 허탄하여 남을 자랑함에도 가벼이 하려니와, 구차히 나무라기도 잘하여 한 길에서 들은 말들을 다시 생각하여 보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아무개가 이상한 물건을 가졌다고 하거나, 또는 아무개의 집에 범상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고 한 사람이 외치면 뭇 사람이 따라서 남의 의심나는 일에는 스스로 증언하되, 마치 자기의 눈으로 환하게 본 듯이 하여 저 바람처럼 일 때에도 머리가 나타나지 않거니와, 지나는 곳에도 그림자가 없어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까닭으로, 상말에 ‘항주 바람은 포착하자 없어져 버린다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모두 한 패가 되어 있네.’라고 하였거니와, 또 이르기를, ‘항주 바람은 한 묶음 파라네. 꽃은 쭝긋쭝긋 속은 다 비었다네.’라고 하였으며, 또 그들의 습속이 거짓을 만들어서 눈앞의 이익을 맞이하되, 신후(身後)의 일을 돌보지 않음도 일쑤이다. 그리하여 술에다 재를 타고 닭에다 모래를 채우고 거위 배때기에 바람을 불어 넣고, 고기나 생선에 물을 집어 넣으며, 천에 기름과 분을 바르는 따위의 일이 벌써 송(宋) 때부터 그러하였다.”
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기 귀주(奇貴州)에게 육비(陸飛)의 글씨와 그림이 공교함을 이야기하였더니, 기는,
“그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 벌레입니다.”
한다. 이도 역시 항주풍을 두고 말함이다. 그들 북쪽 사람이 남쪽 선비를 미워함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최두기(崔杜機)성대(成大) 의 〈이화암노승가(梨花菴老僧歌)〉에,
오왕이 연극 보다가 뭉텅 상투 슬퍼했고 / 吳王看戲泣椎結
전수가 중이 되어 춘추 필법 위탁했네 / 錢叜爲僧托麟筆
라 하였으니, 우리나라 선배들이 매양 중국 일에 대하여 풍문에 휩쓸려서 실적에 충실하지 못함이 일쑤이다.
 이에 이른바 오왕은 오삼계(吳三桂)를 말함이요, 전수는 전겸익(錢謙益)을 말함이다. 겸익이나 삼계가 모두 되놈에게 항복하여 머리털이 희도록 오래 살았으나 무료히 지나는 중에, 그 하나는 비록 의거(義擧)에 의탁하였으나 임금의 칭호가 벌써 참람하였고, 또 하나는 저서에 뜻을 붙였으나 대절이 이미 이지러졌으니, 비록 교활하게 후세의 공격을 회피하고자 한들 누가 믿어 주리요. 우리나라 상말에 대체로 사물(事物)에 어두운 것을 ‘몽롱춘추(朦朧春秋)’라 한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춘추를 이야기하기 좋아하나 몽롱하기가 이러한 종류와 같은 것이 많으니, 어찌 만인(滿人)들의 조소를 입지 않으리요.
송 휘종(宋徽宗)의 대관(大觀) 연간에 섭몽득(葉夢得)이 고려 사신의 관반(館伴)이 되었더니, 옛 규칙에 사신이 대궐 아래에 이른 지 달이 넘지 않아서 곧 돌려보내는 법이었는데, 휘종은 그로 하여금 전시(殿試) 신방(新榜)과 상지(上池 상림원(上林苑)의 못)를 구경시키고자 하여, 드디어 거의 70일을 머물게 되었다. 사신이 자못 몸가짐을 삼가고 행동이 아담하였으므로 섭(葉)이 그를 전송하려 점운관(占雲館)까지 이르러서 하직하였더니, 그의 부사(副使) 한교여(韓皦如)가 섭에게 옥대(玉帶)를 주면서,
“이것은 애초에 당(唐)의 고물이었으며, 우리 선조부터 대대로 보배로 삼았던 거요.”
하고는, 또 스스로 홀(笏) 위에다가 시 한 수를 써서 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이별이 장차로다 / 泣涕汍瀾欲別離
이 몸이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 此生旡復再來期
다만 보배 띠로 깊은 뜻을 베푸노니 / 謾將寶帶陳深意
이 물건 볼 때마다 이 사람을 잊지 마오 / 莫忘思人見物時
라 하였으나, 섭은 고려 사신의 옛 일에 물건을 끌어서 기증하는 예가 없었으므로 굳이 사양하고는 다만 그 시가 비록 박졸(朴拙)하긴 하나, 가히 그의 견권한 뜻은 짐작할 수 있겠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옹정(雍正) 초년에 칙사(敕使) 서산(書山)이 부벽루(浮碧樓)에 시를 썼으되,
풍물은 아름다워 옛적과 같건마는 / 風物獨依舊
산천은 어찌하여 부끄럼을 띠었는고 / 山河猶帶羞
하였으니, 서산은 만인(滿人)인데도 불구하고 별안간 한(漢)을 생각하는 말을 지음은 무슨 까닭일까.
얼마 전에 상선(商船)이 바람을 만나서 옹진(甕津)에 닿았는데, 배 가운데에는 시에 능통한 자가 있어서 율시 한 편으로 수사(水使)에게 올렸으되,
고국에 누구 있어 변한 음률 슬퍼하랴 / 故國誰憐鍾簴變
타향에 이 몸이란 성명이 부끄럽소 / 殊方還愧姓名通
천고에 주의 있어 신정에 빚은 눈물 / 千秋周顗新亭淚
바다에 뿌려본들 마를 줄이 있으랴 / 空灑滄溟水不窮
하였더니, 그 전편(全篇)을 얻어 보지 못함이 유감이려니와 그의 성명도 전하지 않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석림시화(石林詩話)》 섭몽득(葉蒙得) 저(著)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고려가 태종조(太宗朝)로부터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더니, 원풍(元豐) 초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매 신종(神宗)이 장성일(張誠一)을 관반(館伴)으로 삼고는, 그에게 다시 조회하는 뜻을 물었더니, 그는 답하기를,
‘우리나라가 거란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더니 그들의 주구(誅求)에 견디지 못한 국왕(國王) 왕휘(王徽)문종(文宗)의 휘 는 늘 《화엄경(華嚴經)》을 외어 중국이 재생하기를 빌었는데, 하룻저녁 꿈에 별안간 이 경사에 몸이 이르러서 성읍과 궁실의 번영함을 샅샅이 구경하고 꿈을 깨자, 이곳을 연모하여 즉시로 시를 읊으셨는데,
악한 인연 어이하여 거란에게 이웃되어 / 惡業因緣近契丹
한 해에 바친 공물 몇 가지나 괴롭혔네 / 一年朝貢幾多般
이 몸에 날개 돋쳐 먼 중국에 왔건마는 / 移身忽到中華裏
애달파라 깊은 대궐 누수 소리 날 새려네 / 可惜深宮滴漏殘
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수지(錢受之 전겸익(錢謙益). 수지는 자)의 이른바,
는 김모재(金慕齋)가 지은 시인데 그의 본집(本集 《모재집(慕齋集)》)에 실려 있다. 수지가 《황화집(皇華集 화찰 저)》에 발(跋)을 달 때에 이 시를 들어서 조롱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화홍산(華鴻山)찰(察)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비로소 작용(作俑)한 것이다. 예를 들면,
넓디넓은 이 들판엔 가이 없는 물이요 / 廣野無邊水
기나긴 저 하늘엔 기러기 한 점뿐일러라 / 長天一點鴻
라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이는 야(野) 자는 넓게 쓰고, 천(天) 자는 길게 쓰며, 수(水) 자는 그 편방(偏傍)을 떼어서 무변(無邊)이 되고, 홍(鴻) 자는 비점(批點)을 쳐서 한 점(點)이 된다. 이를 일러서 두 글자의 뜻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배신(陪臣)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가자면 반드시 사학(詞學)에 능통한 선비를 묘선(妙選)하여 종사(從事)를 삼아서 별안간 나타나는 응수(應酬)에 대비하였으며, 조사(詔使)는 역시 도중에서 으레 이러한 문제를 구상하여 두는 법이다. 이는 접반(接伴)을 곤란하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의 접반을 맡은 이들도 또한 반드시 이러한 문제를 미리 연습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드디어 한 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기뻐서 함은 아니거늘, 수지가 홍산을 위하여 이 《황화집》에 발을 쓸 때에 그 실상(實狀)은 모두 없애 버리고는 다만 우리나라 사람의 한 글귀를 뽑아내어 웃음거리를 삼았을뿐더러 또 그들과 함께 창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동국(東國) 인사의 마음을 후련하게 할 수 있겠는가. 내 일찍이 이 일을 들어서 유식한(兪式韓)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식한은 곧 이를 적어서 품속에 간직하되 마치 귀중한 보물을 얻은 듯이 기뻐하였다.
최간이(崔簡易)의 〈삼일포시(三日浦詩)〉에,
갠 봉우리 서른 여섯 조개인 양 나비 눈썹 / 晴峰六六斂螺蛾
흰 해오라기 쌍을 지어 맑은 물결 희롱할 제 / 白鳥雙雙弄鏡波
사흘을 바장이곤 님은 다시 못 오시니 / 三日仙遊猶不再
십주 아름다운 곳이 많은 줄을 알았노라 / 十洲佳處始知多
라 하였다. 내 일찍이 사선정(四仙亭)에 올랐더니 심백수(沈伯修)가 이 시를 새겨서 정자 위에 걸었으나 이는 결코 가작은 아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간이(簡易)가 왕감주(王弇州)를 만나러 갔더니 그는 공무가 산처럼 많이 쌓여 있어서 수십 명의 서리(書吏)가 번차례로 문서를 아뢰는데, 감주는 교의에 기대고 앉아 파리채를 휘두르면서 좌수우응(左酬右應)하되, 결재가 몹시 빠르매 뭇 사람들의 붓이 일제히 움직여서, 잠깐 사이에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또 10여 명의 청년이 각기 그들의 과작(課作)한 시(詩)와 문(文), 또는 소품(小品)ㆍ서종(書種) 등을 바치면 감주는 곧 붉은 먹으로써 비점(批點)을 치며 빨리 넘기는 손에는 붓이 멈춰지지 않았다. 간이는 이를 보고 크게 경복(驚服)하여 시자(侍者)더러, ‘노야께서는 전에도 늘 저러시고 계셨던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오늘은 마침 자리가 조용하여 조금 한가하신 편입니다. 노야께서는 전일에 벌써 시 1만 수(首)를 읊었으며 글 천 권을 지으셨답니다.’ 한다. 간이는 한참 잠자코 풀이 죽어 소매 속에 간직하였던 자기의 글을 내어서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글짓기에 뜻을 둔 분임은 알 수 있겠으나 다만 글 읽은 게 많지 못하고 문견이 넓지 못하니, 이제 돌아가서 창려(昌黎)의 글 중에서 〈획린해(獲麟解)〉를 5백 번만 읽고 나면 마땅히 글 짓는 혜경(蹊逕)을 알 것이오.’ 하였다. 간이가 크게 부끄럽고 한스러워서 감주를 만났던 일을 깊이 숨기고는 글쓸 때에 일부러 뒤틀린 버릇으로 기괴한 글을 썼으니, 이는 이우린(李于鱗 명(明) 문학가 이반룡(李攀龍). 우린은 자)에게 배운 것이라 하였다. 우린은 원래 감주를 가장 두려워하는 바이므로 이것으로써 그를 한 번 누르려던 것이다.”
허균(許筠)이 주 태사(朱太史) 지번(之蕃)을 접대할 때에 주(朱)에게,
“일찍이 감주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는,
“일찍이 계사년(1593년) 봄에 태창(太蒼 강소성에 있는 지명)에 가서 감주에게 배움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그때에 남사구(南司寇)로서 치사(致仕)하였는데 얼굴은 중인(中人)에 비하여 지나침이 없으나, 눈빛이 별 같고 서재를 화원(花園)에 쌓고 문도를 모아서 술 마시며 시를 읊는데, 감주는 날마다 5ㆍ6말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누구라도 시문(詩文)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시비(侍婢)로 하여금 음악으로 아뢰게 하면서 먹을 갈며 종이를 펴는 것이 마치 풍운과 귀신이 이는 듯이 빠릅니다.”
한다. 그는 또,
“그러면 감주도 누구를 두려워하는 이가 있던가요.”
한즉, 주는,
“공이 평생에 두려워하고 심복하는 이는 오직 창명(滄溟 이반룡의 호) 한 분이 있을 뿐이니, 그는 매양 글귀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이우린(李于麟)의 〈진관시(秦關詩)〉에,
푸른 용이 멀리 걸리니 진천에 비 내리고 / 蒼龍遠掛秦天雨
돌 말이 길이 우니 한원에는 바람 이네 / 石馬長嘶漢苑風
를 높은 목소리로 읊었으니 그는 어찌 두려운 이가 없으리요.”
하고 답하였다.
심분(沈汾 남당(南唐) 때의 문학가)의 《속신선전(續神仙傳)》에 이르기를,
“신라(新羅)의 빈공(賓貢) 진사(進士) 김가기(金可紀 신라 때의 문학가)가 신선이 되었다.”
고 하였는데, 장효표(章孝標)의 〈송김가기귀신라(送金可紀歸新羅)〉라는 시에,
당나라에 과거 하여 말소리도 닮았더니 / 登唐科第語唐音
해돋이를 바라보곤 고국 생각 간절하다네 / 望日初生憶故林
일엽편주 바람 일 제 고래 등에 나는 듯이 / 風高一葉飛魚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삼신산이 솟아나네 / 湖淨三山出海心
라 하였으니, 김가기가 본국(本國)으로 돌아온 것은 명확한 일이다. 그런데 《속신선전》에는,
“가기가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살고 있더니, 그 뒤 3년 만에 뱃길로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도복(道服)을 입고 종남산에 들어가 음덕(陰德)을 힘써 행하더니, 당(唐)의 대중(大中) 11년(857년) 12월에 별안간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신(臣)이 옥황(玉皇)님의 조서를 받자와 명년 2월 25일에 마땅히 하늘에 오르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선종(宣宗)이 이를 이상히 여겨서 궁녀(宮女) 네 명과 향악(香樂)과 금채(金綵)를 하사하고, 또 중사(中使) 두 사람을 보내어 가까이 모시게 하였더니, 그날에 이르러 과연 채색 구름과 난새ㆍ학새와 저ㆍ퉁소와 금ㆍ석과 깃일산과 깃발이 공중에 가득하더니, 그는 학을 타고 승천하였다. 조사(朝士)나 서민(庶民)을 나눌 것 없이 구경하는 이가 산골짜기에 모여서 누구든지 우러러 절하며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였고, 한무외(韓无畏)의 《전도록(傳道錄)》에는, 또,
“김가기가 최승우(崔承祐)와 중 자혜(慈惠)와 더불어 신원지(申元之)를 좇아서 도술(道術)을 배우더니, 종리 장군(鍾離將軍)과 지선(地仙) 2백의 무리를 만났다.”
고 일렀으나, 이는 아마 부회(傅會)한 이야기인 듯싶다.
나의 벗 나걸(羅杰) 중흥(仲興 나걸의 자)은 글 잘하고 괴걸(魁傑)한 선비이다. 그는 역리(易理)에 깊고 평생에 종(鍾 조위(曹魏) 때의 서예가 종요(鍾繇))ㆍ왕(王 왕희지(王羲之))의 서법(書法)을 사랑하여 휴지 한 장이나 편지 한 쪽을 얻게 되면, 언뜻 종이 뒷장에 예학명(瘞鶴銘) 두어 글자를 쓰다가 때로는 종이가 부족하여 점이나 획을 마음껏 쓰지 못할 경우에는 붓을 움직여 종이 밖에까지 뻗어서, 앉은 자리가 모두 검게 하는 까닭에 만일 문밖에 중흥의 나막신 소리가 나면 반드시 먼저 연구(硯具)를 감춘 뒤에 나가서 맞이하고, 중흥이 방에 들어오자 반드시 먼저 좌우(左右)를 살펴서 종이와 붓을 찾아도 눈앞에 뜨이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인사를 교환하게 된다. 그의 진솔함이 이와 같았다.
지난 병신년(1776년) 동짓달에 그는 신 서장(申書狀) 사운(思運)을 따라서 연경(燕京)에 들어갔으니, 그때의 정사(正使)도 곧 금성위(錦城尉)로서 선비에 대한 대우가 높아서, 그에게 아무런 검속을 가하지 않고 부채와 환약을 공급하기도 하려니와, 자주 역관에게 타일러서 그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중흥의 천성이 몹시 진솔하므로 이르는 곳마다 저지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껏 유람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중국의 이름 높은 선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한다. 그가 연경 길을 떠날 때에 내가 송도(松都)까지 전송하였다. 그가 돌아오자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태평차(太平車) 한 대를 만들어서 그의 처자를 태우고는 적상산(赤裳山 전북 무주(茂州)에 있다) 속으로 들어간 지 이제 벌써 4년이 되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내 내가 이 길을 떠날 때에 상자 속에 두었던 친구들의 서찰과 시문을 찾아서 다시 간직하려다가 중흥이 옛날에 쓴 시를 발견하였는데 행초(行草)로 쓴 것이 자못 찬란하였다. 곧 행탁(行槖)에 집어넣었던 것을 이에 기 귀주(奇貴州)에게 내어 보였더니 기는,
“창건하고도 침울하며 그의 격력(格力)은 흡사 노두(老杜 두보를 높인 말)와 같아.”
하고는 크게 칭상(稱賞)하였다. 그의 〈우성(偶成)〉에,
산 사립문 비었는데 옷갓을 다 버리고 / 山扉寥廓棄冠巾
이 몸이 늙어갈수록 한가한 일뿐이라네 /老去漸能幽事親
빈 뜰에 홀로 앉으니 햇빛만 고요코야 / 階除留對日華靜
공중에 지나는 구름 한 조각 또 한 조각 / 空外翻過雲片新
꾀꼬리 어디서 오자 푸른 숲에 울어 있고 / 黃鳥忽來啼綠樹
아롱진 꽃 수없이 청춘을 수놓는다 / 斑花旡數度靑春
어느 것 한 물건이 내 뜻을 새오리요 / 知旡一物違吾意
하느님 길러 주시는 그 은덕을 저버리랴 / 不負皇天長育辰
하늘가의 금서산은 산 밖에 또 산이고 / 天外錦西山復山
요즈음 집을 지니 한가함이 늘상이라 / 近來卜宅不離閒
외로운 봉우리 갠 바위 공중에 비겼구나 / 孤峰晴石依空翠
벼랑 길 깊숙한 꽃 점점이 아롱졌네 / 側徑幽花點細斑
나는 새도 조심스레 비 맞은 채 지나가고 / 鳥避誤疑沾雨過
꿀벌은 너도 나도 꽃향기로 배불리네 / 蜂窺爭占飫香還
흥겨운 그날 그날 청려장을 짚고 일어 / 興長日日扶黎杖
보고 읊고 읊고 보니 객의 시름 사라지네 /一望一吟開旅顔
흑치 장군(백제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전장터서 그 동쪽에 자리 잡아 / 戰經黑齒郡之東
타향살이 몇 해런고 일일마다 다 잘 아네 / 久住殊方事盡通
깊은 산 새벽 구름 골짜기에 잠겨 있고 / 峽曉雲移幽洞翠
시냇가 저녁놀은 옛 성에 붉었구나 / 澗曛日隱古城紅
늦게 일고 일찍 잠도 멋대로 하려니와 / 晩興早寢從他好
짧은 노래 긴 읊음이 그 맛이 무궁하구나 / 短咏長吟不自窮
다만 지체하여 흥취마저 없다 하면 / 若道淹留旡逸興
나그네 이 시름을 어느 때나 씻으리요 / 何時得豁旅愁空
라고 하였고, 또 그의 〈불매(不寐)〉에는,
밤 들어 산 구름은 보암직도 한져이고 / 入夜喜看連峽雲
먼 허공에 붉은 빛이 어지러이 떠오르네 / 遙空漸改赤紛紛
처마를 향해 앉자 새 소리도 고요하곤 / 對簷獨坐息喧雀
베개 괴고 잠깐 졸매 모기들이 모여드네 / 支枕乍眠還聚蚊
산 나무 시냇 모래 부질없이 헤어 볼까 / 峰樹溪沙漫欲數
남기성과 북두성은 저절로 무늬로다 / 南箕北斗自成文
시름이 병이 된들 무엇이 해로우랴 / 未憐愁劇添新病
아름다운 시를 낳아 비단에 수놓은 듯 / 剩得詩如刺繡紋
이라 하였고, 또 〈오침(午枕)〉에는,
낮 졸음에 잠겼더니 날씨가 찌는 듯이 / 昏昏午睡困炎蒸
모든 일에 게을러서 하는 수가 없구나 / 萬事疎慵著不能
책권을 펴 두니 엿보는 건 제비이고 / 未卷牀書窺紫燕
벼루에 먹물 고여 파리를 배불리네 / 常餘硯墨飽靑蠅
길 지나던 손님들이 부질없이 찾아오곤 / 客過小徑虛相問
밭 이랑이 거치니 아내마저 밉구나 / 妻對荒畦久欲憎
맑은 빛이 별안간에 달돋이를 보고서는 / 忽得淸光看月出
붉은 해가 솟는가봐 그릇되이 의심코녀 / 錯疑赫日碾空昇
라고 하였다.
귀주(貴州)는 이에 대하여 비평하되,
“실로 명구(名句)가 많긴 하나 이따금 음률에 맞지 않은 것이 있다.”
하니, 이는 대개 우리나라 음운(音韻)이 중국의 것과 같지 않으므로 가끔 음률에 어긋남이 있었던 것이다.
박충(朴充)과 김이어(金夷魚)는 모두 신라(新羅) 사람으로서 당(唐)에 들어가 빈공(賓貢)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당 장교(張喬 당(唐) 소정 때의 문학가)의 〈송김이어봉사귀본국(送金夷魚奉使歸本國)〉이라는 시(詩)에,
바다를 건너와서 선적(빈공과의 학적(學籍))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고향에 돌아갈 젠 한의(중국의 문물(文物))를 갖추었네 / 還家備漢儀
라 하였고, 장교는 또 〈송박충시어귀해동(送朴充侍御歸海東)〉이라는 시에,
하늘가에 떠나온 지 이제 벌써 스물 네 해 / 天涯離二紀
대궐에 드나들어 세 임금을 섬겼구나 / 闕下歷三朝
라고 하였더니, 중국의 인사들이 나와 처음 만날 때에 반드시 먼저 항해(航海)의 노정과 어느 곳에서 상륙하였는가를 묻기에, 나는 줄곧 육로를 따라 요동으로부터 산해관을 들어 연경에 닿았다고 답하면 그들은 혹시 믿지 않은 이가 있어서,
바다에 건너와서 선적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라는 글귀를 외어 고증(考證)을 삼으니, 이는 우리나라가 저 먼 바다 밖에 있는 유구(琉球)나 구라(毆邏 구라파)와 같은 나라인 줄로 아는 모양인즉 중국 사람들이 가끔 무식하기가 이와 같았다.
이무관(李懋官)이 묵장(墨莊)을 찾았을 때에 반추루(潘秋樓)에게 시를 청했더니, 묵장은 한림서길사(韓林庶吉士) 이정원(李晶元)이니 촉(蜀)의 금주(錦州) 사람이요, 추루는 반정균의 호이다. 반(潘)은,
“내 앞날에 시를 쓸 때 제법 생각을 허비하여 몹시 곤작(困作)이었기 때문에 시가 많지 못함을 한했더니, 요즈음 운철소(惲鐵簫 청(淸)의 문학가)의 한류(寒柳)를 읊은 책자(冊子)를 읽은즉, 왕추사(王秋史 청(淸) 문학가 왕평(王苹). 추사는 자)가 그 뒤에다 네 편의 시를 썼으며, 이 버들은 곧 명(明) 은 상국(殷相國 미상)의 통악원(通樂園) 옛 나무였기에 느낌이 있어서 읊되,
서러운 이내 심사 화공에다 얘기할까 / 愁心都付畫工論
애처로운 긴 가지가 갯마을이 꿈에 드네 / 凄絶長條夢水邨
바다 한 편 묵은 정자 명사들은 흩어지고 / 海右亭荒名士散
하늘가 지는 잎은 옛 동산만 남았다네 / 天涯木落廢園存
반만 남은 지새는 달 봄 두고 이별할 제 / 半規殘月春留別
석양 빛 어제대로 저녁 넋을 거두었네 / 一例斜陽暮斂魂
예순 해를 읽어 오던 곱게 꾸민 그 책들을 / 六十年來看粉本
먹 향기 종이 빛깔 티끌 속에 침침할 뿐 / 墨香牋色又塵昏
그 둘째는,
슬슬 동풍 고루 불어 씻어 간 곳 새로운데 / 看遍東風窣地新
잠긴 가지 나는 가지 모두가 정이 얽혀 / 蘸波吹絮摠情塵
푸른 잎 매미 울던 그곳이 그리웁고 / 可憐碧葉吟蟬地
붉은 난간 말 매던 이 찾을 길 전혀 없네 / 不見紅欄係馬人
낡은 다락 그림자에 늙은 두보 슬퍼했고 / 衰影驛樓傷老杜
시름 어린 이 마음에 털보 그대 추억되오 / 離悰門巷憶髯秦
자주(自注) : 진관사(秦關詞)에 이르기를, “꽃 밑에는 거듭 문이요, 버들 가에는 깊은 마을이다.”라고 하였다. 
작화산 저 기슭에 우뚝 섰는 가지 밖에 / 鵲華山麓髡枝外
맑은 호수 가에 앉아 수건 씻는 이만 뵈네 / 只有明湖冷濯巾
그 셋째는,
화가나 시인들이 한꺼번에 사라졌고 / 畫人吟子一時稀
아름드리 푸른 숲도 엉성해진 옛 성일네 / 減盡金城翠十圍
언덕 기슭 누운 가지 저문 눈 속 비껴 섰고 /緣岸臥枝欹暮雪
어둔 빛이 스민 다락 겨울 해를 띠었구나 / 入樓暝色帶冬暉
떨어진 잎 숨 죽인 채 소리도 적거니와 / 靜中黃葉旡多響
아득한 까치마저 두어 점이 날아가네 / 遠處昏鴉數點歸
오히려 진흙 젖은 부질없는 한이 있어 / 猶有沾泥閒恨在
다시금 봄이 온단들 한목 날지나 말아다오(버들꽃을 말한다) / 逢春莫更作團飛
그 넷째는,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초라한 두 나무에 들 서리 자욱하네 / 兩株憔悴野霜濃
전조에 세운 누대 모래톱이 남아 있고 / 前朝臺榭沙痕在
늙을 무렵 변방살이 숲 그늘이 층층코녀 / 晩歲關河樹影重
우연히 선비 위해 푸른 눈을 지어보나 / 偶爲士流靑眼放
흡사 기생처럼 흰 머리로 서로 만나 / 恰如女妓白頭逢
오동꽃 떨어지곤 산 생강이 늙다 한들 / 桐花零落山薑老
왕랑의 아름다운 얼굴 뉘라서 알아볼까나 / 誰識王郞濯濯容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이에서도 한인(漢人)들이 접하는 것마다 감흥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것을 형산(亨山) 제공(諸公)에게 보였더니, 모두 슬픈 빛으로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남약천(南藥泉) 구만(九萬)이 어사(御史)로 순행하다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밤에 본 고을의 선생안(先生案)을 열람하다가,
“제말(諸沫)은 만력(萬曆) 계사(1593년) 정월 아무 날에 도임(到任)하여 4월 아무 날에 파귀(罷歸)하였다.”
라는 말을 발견하고, 그는 우리나라에 제(諸)의 성(姓)을 지닌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기에, 자못 괴이하게 여겨서 윤형성(尹衡聖)에게 물었더니, 윤(尹)은,
“중국 강(江)ㆍ절(浙) 사이에 제씨(諸氏)가 살고 있으니, 제말의 조상은 아마 중국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며, 임진왜란 때에 제말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쳐서 그가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니, 이름이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높았다오.”
라고 답하였다 한다. 이 일은 《약천집(藥泉集 남구만의 시문집)》 중에 실려 있다. 약천과 같은 박식으로도 오히려 백 년 이내인 제말의 사적을 알지 못하였는즉, 그가 미천한 계층의 출신인 줄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비록 공을 세움이 이렇다 했더라도 이름이 그만 묻혔으니, 어찌 그 억울함이 원혼이 되지 않았겠는가.
성주에 살고 있던 정석유(鄭錫儒)가 급제(及第)에 오르기 전에, 본 고을의 자제들과 함께 공령(功令 과체(科體)의 시문(詩文))을 짓느라고 동헌(東軒)에 유숙하니, 그 집 뒤에는 매죽당(梅竹堂)이 있고 당 앞에는 지이헌(支頤軒)이 있었다. 하루는 정(鄭)이 지이헌 속에서 홀로 거니는데 때마침 달이 몹시 밝았다. 별안간,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붉은 도포(道袍) 입은 이가 대밭 속으로부터 나오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는 이 고을 옛 목사(牧使) 제말이다. 나는 본시 고성현(固城縣)에 살던 백성으로 임진의 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쳤으매, 조정(朝廷)에서 특히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제수(除授)하였다. 저 웅해(熊海)ㆍ작영(斫營)ㆍ정진(鼎津) 등지에서 왜적을 맞으면 깨뜨리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당시의 격문(檄文)이 없어지고 역사가 전하지 못하였으니, 그때 정기룡(鄭起龍) 같은 여러 사람은 모두 나의 비장(裨將)이었다.”
하고는, 이내 허리에 찼던 보검(寶劍)을 뽑으면서,
“이 칼로써 일찍이 왜장(倭將) 몇 놈을 베었다.”
한다. 그는 이마 위에 불꽃이 펄펄 이는 듯하고 성기고 뻣뻣한 수염이 움직이면서 시를 읊었다.
머나먼 산 길에선 구름과 함께 예고 / 山長雲共去
높디높은 하늘에는 달과 함께 외롭네 / 天逈月同孤
그는 또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칠원(漆原 경남 창원)에 있으나, 자손이 없어서 이제껏 묵고 있다.”
하고는, 표연히 읍하고 물러가서 다시 대숲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날이 밝은 뒤에 함께 그 일을 이야기한즉, 그들도 평일에 비록 선생안(先生案)에 제말이라는 이가 있었으나, 성(姓)도 쓰여 있지 않았음을 의심하였을 뿐, 그의 공렬(功烈)이 이렇게 갸륵함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제 별안간 알게 되어 감탄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감사(監司) 정익하(鄭益河)가 이 이야기를 듣고, 정석유를 불러 상세히 물은 뒤에 바야흐로 장계(狀啓)를 올려 조정에 알리려 하였으나, 마침 벼슬이 갈렸으므로 여의치 못하고, 다만 칠원에 통첩하여 그의 무덤을 수축하고 묘지기 두 호(戶)를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칠원의 원으로 있던 어사적(魚史迪)이 낮에 졸다가 꿈에 한 관인(官人)이 와서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이 동헌에서 몇 리쯤 되는 아무 마을 아무 좌향(坐向)에 있다. 감사가 마땅히 무덤을 수리하라 명령하실 테니, 그대는 유의할지어다.”
한다. 꿈을 깨자 이상히 여겼더니, 그날 저녁에 통첩이 이르렀으므로 어사적이 드디어 그 무덤을 크게 수리하였다 한다. 제말은 실로 시골뜨기여서 살아 있을 때는 글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이런 갸륵한 공적이 있었다 해도 스스로 나타내지 못하고 본즉, 죽어서 그 억울한 영혼이 맺히어 흩어지지 않음이 이와 같을 뿐더러, 그는 또 능히 시를 읊을 줄 알았다 하였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 평사(辛評事) 경연(慶衍)이 나이 열두 살에 배천(白川)에서 서울로 올라갈 제, 길에서 명(明)의 조사(詔使)를 만났다. 때마침 역놈이 신(辛)이 탔던 말을 빼앗았으므로 그는 사정이 몹시 궁박하였다. 그는 도보로 조사의 점심참에 닿아 하소연하였더니, 조사는 그의 얼굴이 백옥처럼 맑음을 보고 사랑하여, 길가에 서 있는 장승(長丞)을 가리키면서,
“그대 능히 이를 두고 시를 읊는다면 마땅히 말을 주리라.”
하여, 신이 운자(韻字)를 청하니, 조사가 운자를 내어 주었다. 신은 곧 대답하기를,
초 패왕(항적(項籍))의 혼령인 양 천추에 남아 있네 / 楚伯千秋尙有靈
오강을 건널 체면 없어 형체만 남았구나 / 渡江旡面只存形
당년에 한스러운 일은 음릉 길을 잃은 것이 / 當年恨失陰陵道
언제나 길에 서서 앞잡이 노릇 하렵니다 / 長向行人指去程
하매, 조사가 크게 놀라서 탄식하여 칭상하고 문방(文房)의 여러 보물을 주었다 한다. 이 글이 무명씨(無名氏)의 작으로 《명시선(明詩選 명(明) 이반룡(李攀龍) 저)》에 실렸으며, 그는 광해(光海) 때 과거에 올라서 벼슬이 평안도(平安道) 병마(兵馬) 평사에 이르렀을 때에, 서쪽 변새에 일이 있어서 청천강(晴川江)을 아홉 번 건넜으며 이내 관에서 죽었는데, 그의 혼령이 여러 번 나타났다. 그 뒤 수십 년에 그의 벗 아무개가 그를 관서(關西) 도중에서 만났는데, 그는 친구의 자를 부르며 옛 일을 이야기함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벗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자손이 심히 가난한데 유물이 있는 것을 미처 전하지 못했네. 보도(寶刀)와 옥관자 한 쌍이 우리집 들보 위에 얹혀 있어도 집 권속들이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니 그대는 부디 이 말을 전해 주소. 이 두 가지 물건을 판다면 많은 값을 받을 것이네.”
하매, 그의 벗은 크게 이상히 여겨 돌아오자 곧 그 자손에게 이야기하여 함께 그 집을 들춰서, 마침내 보도와 옥관자를 발견하였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길 위에다가 매 10리 5리 마다 나무로 장군과 같이 깎은 등선을 세우고 지명과 이정을 기록하여 두는데, 이를 보통 ‘장승’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중국의 장정(長亭)ㆍ단정(短亭)과 같으므로, 우리나라 시민들은 흔히들 장정을 빌려 쓰면서 혹은 중국의 이정표도 우리나라 장승과 같은 줄만 알고, 또는 장정을 정장(亭長)으로 잘못 알기도 하니 심히 고루한 일이다. 내가 중국에 들어와 보니, 길에는 장정표를 세우고 아무 땅이라 쓰고는, 그 좌우에는 단정표를 세우며, 동으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요, 서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라고 써 있었다. 이제 열하에 오는데 장정 밖에는 장정에 흔히들 신(汛) 자를 썼는데 무엇을 말한 것인지를 모르겠다.
신장(辛丈) 돈복(敦復)씨가 일찍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중종(中宗) 때 남주(南趎 조선 때 학자. 자는 계응(季應))가 열아홉 살에 급제(及第)하여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천에 올랐으며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일이 많았다. 매일 아침 글방 선생에게 글을 배우는데 결석할 때가 많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가만히 그의 뒤를 밟은즉, 도중에 지레 어떤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정사(精舍)가 있는데 주인의 행동이 맑고 훤하여 속기(俗氣)가 없었다. 주가 그의 앞에 절하고 나아가서 글을 강론받고 반드시 해가 저문 뒤에야 돌아오곤 하였다. 집 사람들이 물으면 문득 괴변으로 대답하더니, 그 뒤 신선의 수련술(修鍊術)을 행하였고 그가 급제하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곡성현(谷城縣)에 귀양갔고, 이내 그곳에서 집을 정하고 살았다. 하루는 종을 시켜 편지를 갖고 지리산(智異山)청학동(靑鶴洞)에 들여보냈는데, 오채가 영롱한 집이 있고 극히 정려(精麗)하며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하나는 운관(雲冠)과 자의(紫衣)요, 또 하나는 늙은 중이었다. 둘이 종일토록 바둑만 두기에 그 종은 하루를 묵고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었다. 종이 애초에 2월에 떠나 산에 들어갈 제는 초목이 바야흐로 무성하던 것이, 산을 나올 때에는 들판에서 익은 벼를 거두는 것을 보고 괴이히 여겨 물으니 곧 9월 초순이다. 남주가 죽을 때 나이가 30세였다. 널을 들어보니 유달리 가벼운지라, 집안 사람들이 관을 열고 본즉 빈 것이었고 그 안에 시가 쓰였는데,
창해에 떠난 배는 찾을 곳이 전혀 없고 / 滄海難尋舟去跡
청산에 나는 학은 흔적조차 뵈지 않네 / 靑山不見鶴飛痕
라 하였다. 그 마을 앞에 김을 매던 농부가 공중에서 흘러내리는 음악 소리를 듣고 쳐다본즉, 남주가 말을 타고 둥실 떠서 흰 구름 사이로 올랐다 한다. 지금 충주(忠州)에 살고 있는 진사(進士) 남대유(南大有)가 그의 방손(傍孫)이라 한다.”
한유(韓愈)의 시에도,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 木石生妖變
하였지마는, 당(唐)의 말년에 소주(蘇州)에 살고 있던 중 의사(義師)는 나무로 새긴 부처를 만나면, 문득 한 군데 모아서 불살라 버렸다 한다. 우리나라 양주(楊州)회암사(檜巖寺)에 옛날부터 나무로 만든 큰 부처가 있어서 극히 영검스러우므로, 원근 사람들이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숭배해서 향화(香火)가 심히 성하였다. 나옹(懶翁 이성계(李成桂)의 스승으로 있던 중)이 처음 주지(住持)가 되어 이 절에 도임할 제, 뭇 중들에게 명하여 그 부처를 끌어 내어 불사르게 하였다. 모두들 놀라고 두려워하여 굳이 간했으나, 나옹은 듣지 않고 중 백여 명을 시켜 큰 동아줄로써 동여매라 하고 밀쳐당겼으나 털끝도 까딱하지 않았다. 나옹이 노하여 스스로 한 쪽 손으로 밀어 곧 넘어뜨리고 절 밖에 이끌어 내어 장작을 쌓고 태우니, 더러운 냄새가 견디지 못할 만큼 풍겼다. 대개 큰 뱀이 부처 뱃속에 서리어 있던 것으로 그런 뒤에는 오래도록 재환이 없었다 한다. 대체로 나무가 오랫동안 묵으면 접신(接神)이 되므로 허물어진 절간의 나무 부처에 많이들 이상한 요물이 붙는 법이니, 곧,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오늘 저 반선(班禪)이 우리에게 준 부처는 길이가 거의 한 자나 될뿐더러, 아마 나무로 새긴 데다 금을 입힌 것인즉 이에는 어찌 요물이 붙지 않았을 줄 알리요. 창졸간에 이 물건을 받긴 했으나, 일행의 상하가 모두 꿀 단지에 손 빠뜨린 듯이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다. 내가 밤에,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잘 구처하겠습니까.”
하고 정사께 물었더니, 정사는,
“벌써 수역(首譯)을 시켜 작은 궤짝을 만들어라 하였네.”
한다. 나는,
“잘 하셨소이다.”
하였더니 정사는,
“뭐가 잘했단 말인가.”
하기에 나는,
“이는 강에 띄우고자 하는 의미뿐이겠죠.”
하고 대답하였더니, 정사가 웃기에 나도 웃었다. 대저 이 부처를 길가 사찰에다 내어버린다면 중국의 노염을 입을까 두렵고 또 이를 이끌고 입국한다면 마땅히 물의(物議)를 일으킬 테니, 저들과 우리나라의 국경에서 순류(順流)에 띄워 바다에 추방하는 수밖에 없고 보니, 띄울 곳은 압록강(鴨綠江)이 가장 좋을 것이다.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은 평생에 호사로이 지냈다. 나이가 젊을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에게 나아갔더니, 평성이 때마침 수상(首相)이 되어서 별장 깊숙한 곳에 앉아 시비(侍婢) 수십 명을 시켜 호음을 인도하여 들어오게 하니, 호음이 겹문을 지나 들어오는데 곳곳이 아롱진 누각이요, 구비구비 붉은 난간이다. 평성은 못 위 반송(盤松) 그늘 밑에 앉았는데 좌우에는 시비들이 모두 비단 치마를 질질 끌고 번갈아가면서 진귀한 음식상을 올리고, 또 기생 몇 패가 풍악을 하면서 날이 다하도록 기쁜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끝날 무렵에 호음이 공사(公事)에 대한 결재를 청했으나 평성은,
“이 늙은 사람은 애초에 무인(武人)이라, 다행히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를 만나 몸이 이 자리에 이르렀으니, 다만 스스로 마음을 기쁘게 하여 성세(盛世)의 은혜를 보답할 따름이므로 그대가 가진 공사는 돌아가서 본조(本曹)의 판서(判書)에게 물어보게.”
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음은 망연히 어쩔 줄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일을 평생에 연모하였으므로 늙을 때까지 호사를 계속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6세조(世祖) 금계군(錦溪君)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실려 있다. 그리고 세속에서 전하는 말에,
“호음이 평성의 이 일을 연모하여 호백구(狐白裘)를 훔치는 수단에 익숙하니, 그가 일찍이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되었을 때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정양사(正陽寺)에서 묵는데 순금 부처를 훔쳐서 드디어 크게 치부(致富)하더니, 나이 늙으매 그 일을 심히 참회하여,
정양사 깊은 곳 향불 태던 그날 밤에 / 正陽寺裏燒香夜
40년 그릇된 일을 거원인 양 깨우쳤네 /蘧瑗方知四十非
라는 시를 읊었다.”
한다. 내 일찍이 정양사에 놀 때 과연 바람벽 위에 이 시가 쓰여 있음을 보았다. 이제 삼사(三使)들의 선사받은 금부처는 모두 셋인즉 수천 냥의 돈을 얻기에는 어렵지 않을 것이며, 만일 호음으로 하여금 이 경우를 만나게 하였으면 반드시 저 정양사에서만 잘못을 깨달았을 뿐 아니리라. 내 부사와 이 이야기를 하고 서로 크게 한바탕 웃었다. 나는 또,
“이제 이 불상이 불행히도 나무 몸뚱이인지라 멀찍이 물리쳐 버렸지만, 만일 순금으로 된 몸이었더라면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논(論)도 아마 좀 생각할 점이 있겠지요.”
하고는, 서로들 허리를 잡았다.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에 이르기를,
“말 머리엔 굴레를 씌우고 소 코엔 코뚜레 꿴다.”
하였으니, 소의 코 꿰는 일은 옛날부터 그러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소는 난 지 겨우 7, 8삭이 되면 벌써 코를 꿴다. 왕형공(王荊公)의 시에,
미련한 저 소에다 코를 꿰지 않을 양이면 / 牛若不穿鼻
맷돌 방아 찧으려도 곧잘 되지 않으리라 / 豈肯推入磨
하였으니, 맷돌 방아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수레 끌기나 밭 갈기야 어떠하겠는가. 이제 책문(柵門)에 들어온 뒤 열하에 이르기까지 호(戶)마다 기르는 소가 7ㆍ8두(頭) 이하가 없고, 혹은 3ㆍ40두에 이른다. 그런데 밭을 가나 수레를 이끄나 모두 뿔을 얽매어서 부리고, 하나도 코를 꿴 놈은 없었으며, 소는 모두 유달리 크되 집집마다 방목하였으며, 작은 아이 하나가 수십 마리를 몰 수 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역시 뿔도 얽매지 않았으니, 중국 사람들의 소치는 기술이 비록 우리에 미칠 바 아니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는 것은 역시 고금의 다름이 있는가 싶다. 그리고 진(晉) 두예(杜預 진(晉)의 학자. 자는 원개(元凱))의 상소(上疏) 중에도,
“전목(典牧)의 종우(種牛)가 4만 5천여 두나 있으나, 수레도 이끌지 않을뿐더러 늙을 때까지도 코를 꿰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를 보아도 중국서도 옛날에는 부리는 소는 모두 코를 꿰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강녀묘(姜女廟)의 주련(柱聯)은 문 승상(文承相)이 쓴 것이 가장 비장(悲壯)하다. 그 글에,
강녀가 죽지 않았고나 천 년 묵은 조각돌이 정렬하고 / 姜女未亡也千年片石猶貞
진황은 어디로 갔는고 만리성엔 원망만 쌓였구녀 / 秦皇安在哉萬里長城築怨
라 하였는데, 글씨도 몹시 기굴(奇崛)하고 과친왕(果親王) 윤례(允禮)가 쓴 시는 역시 전려(典麗)하다.
푸른 전나무 잎은 고생살이 나머지요 / 栢葉從來常自苦
매화꽃은 곱잖아도 향기로 한몫 보네 / 梅花終古不爲姸
그 글씨는 신화(神化)한 듯싶고, 또 건륭(乾隆) 을해년(1755년) 동짓달에 황삼자(皇三子) 등금거사(藤琴居士)가 쓴 시는 또한 산한(酸寒)하다.
늙은 솔 허물어진 담장 옛 사당이 보이고녀 / 松老頹垣見古祠
임 위해 죽은 강녀 그 일이 슬프구나 / 崩城姜女事堪悲
집 방춧돌 바라다가 기절을 이루고는 / 藁砧望斷成奇節
환패만 남았으니 옛 자태를 보는 듯이 / 環佩空餘識舊姿
돌에 뿌린 눈물 자취 그날의 한이러냐 / 石洒淚痕當日恨
예는 물 구슬퍼서 이내 생각 자아내네 / 水流鳴咽後人思
정자 기슭 옷을 털매 쓸쓸하기 짝이 없어 / 振衣亭畔凄涼甚
임의 그 어린 눈동자 이제 더욱 그리워라 / 猶憶凝眸睩曼滋
그 글씨는 더욱 민묘(敏妙)하다. 그리고 방류요수(芳流遼水)는 건륭황제(乾隆皇帝)의 어필이요, 경절처풍(勁節凄風)은 과친왕의 글씨였고 ‘망부석(望夫石)’이란 세 글자는 태원(太原) 백휘(白輝)가 쓴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글자로부터 말 배우기로 들어가고 우리나라 사람은 말로부터 글자 배우기로 옮겨가므로 화(華)ㆍ이(彝)의 구별이 이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로 인하여 글자를 배운다면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따로 되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천(天) 자를 읽되 ‘한날천(漢捺天)’이라고 한다면, 이는 글자 밖에 다시 한 겹 풀이하기 어려운 언문(諺文)이 있게 된다. 설부(說部) 중에 《계림유사(鷄林類事)》가 실렸는데, 천(天)을 가른 한날(漢捺)이라 하였다. 작은 아이들이 애당초에 ‘한날(漢捺)’이란 무슨 말인 줄을 알지 못한즉, 더군다나 천(天)을 알 수 있겠는가. 정현(鄭玄)의 집 여종이 모두 《시경(詩經)》으로써 문답할 수 있었다 하여, 천 년 동안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돌고 있지마는, 그 실제에 있어서는 중국 사람들은 부인이나 어린이도 모두 문자(文字)로 말을 하므로, 비록 눈으로는 정(丁) 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입으로는 봉(鳳)을 토(吐)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은 모두 그들의 입에 익은 항용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의 어린이가 시내를 격해서 어머니를 부를 때,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외다 / 水深渡不得
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크게 놀라서,
“중국엔 다섯 살 먹은 아이가 입을 열자 시가 이룩되데그려.”
한다. 이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말이 이러함이요, 무슨 뜻이 있어서 글귀를 이루려는 것은 아니다. 노가재(老稼齋)가 일찍이 천산(千山)에 놀러 갔다가 어떤 술 파는 촌 할미를 보고서,
“길이 궁벽하고 사람이 드문 이곳에 누가 술을 사 마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꽃 향내 풍기니 나비 옴도 저절로 / 花香蝶自來
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말이 아니되 사의(辭意)가 명창(明暢)하여 저절로 운치 있는 말이 되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글자로 인하여 말 배우기로 들어간 묘증(妙證)이다. 우리 집 소비(小婢)가 사람됨이 지극히 혼미(昏迷)하여, 어느 날 떡을 얻어 먹게 되었을 때, 엿을 얻어 가지고는 기뻐서 치하하는 말로,
하니, 이는 지패(紙牌 노름의 일종)에 유행되는 말이다. 그가 애초부터 파촉이나 관중을 아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은즉, 그 말은 저절로 맞아버린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중국말이 알기가 어렵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정씨(鄭氏)의 여종이 천고에 유식하기로 이름 높지 못한 것을 알았노라.
《청비록(淸脾錄)》 이덕무(李德懋)의 저 에 이르기를,
“삼한(三韓) 사람으로서 중국을 골고루 구경한 사람으로는 이익재(李益齋)이름은 제현(齊賢)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의 유력(遊歷)한 것이 시(詩)에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정형(井陘)ㆍ예양교(豫讓橋)ㆍ황하(黃河)ㆍ촉도(蜀道)ㆍ아미(峨眉)ㆍ공명사당(孔明祠堂)ㆍ함곡관(函谷關)ㆍ민지(澠池)ㆍ이릉(二陵)ㆍ맹진(孟津)ㆍ비간묘(比干墓)ㆍ금산사(金山寺)ㆍ초산(焦山)ㆍ다경루(多景樓)ㆍ고소대(姑蘇臺)ㆍ도량산(道場山)ㆍ호구사(虎口寺)ㆍ표모묘(漂母墓)ㆍ탁군(涿郡)ㆍ백구(白溝)ㆍ업성(鄴城)ㆍ담회(覃懷)ㆍ왕상비(王祥碑)ㆍ효릉(崤陵)ㆍ장안(長安)ㆍ정장공묘(鄭莊公墓)ㆍ허문정공묘(許文貞公墓)ㆍ관용방묘(關龍逄墓)ㆍ망사대(望思臺)ㆍ무측천릉(武則天陵)ㆍ숙종릉(肅宗陵)ㆍ빈주(邠州)ㆍ경주(涇州)ㆍ보타굴(寶陀窟)ㆍ월지사자헌마(月支使者獻馬) 등이 있으니, 그 발자취가 이른 곳이 모두 웅장한 곳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미쳐 보지 못한 곳이었고, 그 시도 마땅히 동방 2천 년 이래의 명가(名家)가 될 것이다. 그 화려하고 곱고 밝고 맑음이, 삼한의 궁벽하고 고루한 누습(陋習)을 활짝 벗어 버렸으나, 이즈음 사람들은 딱하게도 익재가 곧 이제현임을 알지 못하고, 고군협(顧君俠 미상)이 《원백가시선(元百家詩選)》을 엮을 때도 고려 사람의 시는 한 수도 뽑히지 않았으며, 당시의 목암(牧菴)요공(姚公)과 염자정(閻子靜 원(元) 문학가 염복(閻復). 자정은 자)ㆍ장양호(張養浩 원(元) 문학가. 자는 희맹(希孟)) 등도 모두 익재의 시를 칭찬하였으나, 역시 한 수도 뽑힌 것이 없으니 이는 실로 괴이한 일이다.”
고 운운하였다. 익재의 무덤은 금천(金川) 지금리(只錦里) 도리촌(桃李村 개성(開城))에 있고, 그 밑에는 곧 익재의 구택(舊宅)이요, 구택에다 서원(書院)을 세워서 향례를 치르게 되었다. 나의 연암별업(燕巖別業)이 그 서원에서 십 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나도 일찍이 한두 번 서원에 가서 그 유집(遺集 《익재난고(益齋亂藁)》)을 읽고서, 더욱이 《청비록(淸脾錄)》의 논평한 말이 철론(鐵論)임을 믿었다. 그의 〈사귀(思歸)〉에는,
늦은 가을 청신(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 숲은 비 속에 잠겨 있고 / 窮秋雨鎖靑神樹
해 저물녘 백제성(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엔 구름이 비꼈구나 / 落日雲橫白帝城
하였고, 〈이릉조발(二陵早發)〉에는,
주사(이이(李耳)의 벼슬 이름)의 약 솥에는 구름만 감돌고 / 雲迷柱史燒丹竈
문왕(주(周) 문왕) 비 피했던 능엔 눈마저 덮여 있네 / 雪壓文王避雨陵
하였고, 〈주행아미(舟行峨眉)〉에는
비에 쫓긴 송아지는 어점으로 돌아오고 / 雨催寒犢歸漁店
물결에 밀린 해오라기 손님 배를 따르더라 / 波送輕鷗近客舟
하였고, 〈다경루(多景樓)〉에는,
밤들어 풍경 울 제 포구에 밀물 들고 / 風鐸夜喧潮入浦
도롱이채 우뚝 서니 비 새는 그 다락을 / 煙簑暝立雨侵樓
하였고, 〈함곡관(函谷關)〉에는,
흙 주머니 그 입을랑 황하 북에 묶어두고 / 土囊約住黃河北
땅덩어리 둥글둥글 백일 서편 둘렀구나 / 地軸句連白日西
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이 중국의 고사를 쓸 때, 멋대로 차용하기는 했으나,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서 체험한 이는, 오직 익재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내 이제, 한 번 고북구(古北口)를 나오자 스스로 옛사람보다 낫다고 생각되었으나, 다만 익재에 비한다면 참으로 모자라는 것이 많음을 깨달았다.
《감구집(感舊集 왕사진(王士稹) 저)》에 청음 선생(淸陰先生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시가 실려 있었다. 대개 왕이상(王貽上 왕사진. 이상은 호)의 전처(前妻) 추평(鄒平) 장씨(張氏)는 강남(江南) 진강부(鎭江府)추관(推官) 만종(萬鍾)의 딸이요, 도찰원(都察院)좌도어사(左都御史) 충정공(忠定公) 연등(延登)의 손녀이다. 숭정(崇禎) 말년에 선생이 뱃길로 중국을 향하매, 길이 제남(濟南)을 거치게 되었다. 그때 장충정(張忠定)이 한 번 보고 곧 기뻐하여 엿새를 만류하고, 선생의 ‘조천록(朝天錄)’ 1권에 서(序)를 썼다. 이상이 선생을 익숙히 알게 된 것은 대개 그 처가를 통해서이다. 그가 선생의 시를 초록하여 실은 것은 다음과 같다.
늦은 가을 바닷가엔 기러기 처음 오고 / 三秋海岸初賓雁
깊은 밤 천문에는 객성 하나 번뜩인다 / 五夜天文一客星
폭군의 모진 손에 돌다리는 끊어졌고 / 橋石已從秦帝斷
은하성 높은 배에 사신 오길 허락했네 / 星槎猶許漢臣通
조각달 오경 깊어 수역의 성 머리에 / 五更殘月水城頭
외로이 역사 읊어 배 닿은 이 누구런고 / 咏史何人獨艤舟
동쪽 바다 향해 서서 돌아갈 길 찾지 않고 / 不向東溟覓歸路
북두성 의지하여 신주(중국의 별칭)를 바라보네 / 還依北斗望神州
남쪽 장수 북쪽 손님 모래톱에 모여 들어 / 南商北客簇沙頭
그림 새 푸른 주렴 몇 군데나 배 떴던고 / 畫鷁靑簾幾處舟
죽지사 함께 불러 팔 겨르고 지나가니 / 齊唱竹枝聯袂過
성 속에 연월 가득 이곳도 양주(양자강 운화가 통하는 곳)인 듯 / 滿城煙月似揚州
이들은 모두 이상이 이른바, 맑고 완순하여 가히 읊을 만하다는 작품이다. 이상은 당시 해내의 시종(詩宗)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은 그의 척자(隻字)ㆍ편언(片言)에 대하여 다반(茶飯)처럼 입에서 떠나지 못하므로, 청음의 성명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천고 대절(大節)은 아는 이가 없었다. 학지정(郝志亭) 성(成)이 김숙도(金叔度 김상헌. 숙도는 자)의 몇 편 가작(佳作)을 들었으면 하고 청하기에, 나는 답하기를,
“저는 애초부터 그의 시를 외는 것이 없고, 다만 이번 걸음에 청음 선생의 6대손(代孫) 이도(履度)의 별장(別章)이 있습니다.”
한즉, 지정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 역시 기이한 일이군요.”
하기에, 나는 그 시를 내어 보였다. 지정이 두세 번 읊더니 그 뒤에 이 일을 그의 초록한 《용재소사(榕齋小史)》중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화산(華山 김이도의 호) 김이도(金履度)는 조선 사신 김청음 상헌의 6세손인데, 그의 〈봉별연암조경(奉別燕巖朝京)〉 원고(原稿)에는 ‘부연(赴燕)’으로 된 것을 지정이 ‘조경(朝京)’이라고 고쳤다. 이란 시에,
넓디넓은 저 연산은 사면에 벌여 있고 / 四面燕山濶
높다란 이 장성은 만 리를 뻗쳤구나 / 萬里秦城高
그 중에 말 달리며 가시는 임이시여 / 中有垂鞭者
백발이 성성하시니 먼 길에 수고할사 / 白髮行邁勞
그 둘째다.
경개하신 담헌(홍대용(洪大容)의 호)이요 / 耿介湛軒子
척당할사 연암님을 / 倜儻燕巖叟
사해가 넓건마는 그의 성명 다 알리라 / 海內知姓名
앞 가고 뒤따르니 높은 바람 한 가지라 / 高風屬前後
하고, 그 뒤를 이어서, ‘건륭(乾隆) 경자년 5월 23일에 화산 김이도는 쓰다.’라고 하였다. 그의 자(字)는 계근(季謹)이요, 글씨는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으니 동국(東國)의 문장 기사(奇士)이다. 그의 벗 박연암(朴燕巖)ㆍ한석호(韓錫祜)와 함께 시주로써 막역의 친구를 삼았더니, 이해 8월에 박연암이 공사(貢使)를 따라 북경에 와서 나와 함께 만나 서로 기뻐하였다. 이에 나는 화산의 증행시(贈行詩) 석 장을 얻어 읽은즉, 그는 사모(四牡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 황화(皇華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의 끼친 뜻을 깊이 지니었다. 나는 그 중 두 마디를 뽑아서 기록하였다.” 원시(原詩)에는, ‘수방지성명(殊方知姓名)’과 ‘고풍계전후(高風繼前後)’라 했던 것을 지정이 수방(殊方)을 ‘사해(四海)’로, 계(繼)를 ‘속(屬)’으로 고쳤다.
지정은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암의 족손(族孫) 남수(南壽)의 자는 산여(山如)요, 호는 금성(錦城)이니, 그는 얼굴이 아름답기가 관옥(冠玉 옥으로 꾸민 갓)과 같다 한다. 그의 〈증행(贈行)〉에,
머리가 세었다고 임은 슬퍼하지 마오 / 莫云頭已白
이 하늘 이 땅이란 잠깐인 듯 가 없어라 / 天地忽無窮
요동성 넓은 들에 필마로 돌아 들면 / 匹馬遼東野
한 번 채찍 휘두르매 만리의 바람 부네 / 一鞭萬里風
라고 하였다.” 금성(錦城)은 우리 관형이므로 남수가 금성 박남수 산여라고 썼던 것을 지정은 그릇 호인줄 알았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나라의 고사(高士) 이재성(李在誠) 중존(仲存 이재성의 자)의 호는 지계(芝溪)인데, 연암의 부제(婦弟)이다. 그의 〈증행(贈行)〉에는,
압록강 두른 물은 띠처럼 되어 있고 / 鴨綠衣帶水
만 리라 저 장성은 묵어서 가올 것을 원고(原稿)에는 ‘연성(燕城)’이라 되었던 것을 지정이 ‘장성(長城)’이라 고쳤다. / 長城宿舂之
머나먼 이 길 떠나 오가는 나그네여 원고에는 ‘고래경유객(古來經遊客)’이라 되어 있었다. / 悠悠遠行客
역력히 알고파라 묻노니 누구누구 / 歷歷知是誰
라고 하였고, 또,
열 해나 지나도록 바위 틈에 숨은 선비 / 十載巖棲客
새벽에 행장 묶어 먼 길을 떠난다니 / 晨裝告遠遊
반생을 글만 읽고 본 적이 없던 것을 / 半生方冊裏
이제야 구경하니 제왕의 거룩한 고을 / 今日帝王州
이라 하였고, 또,
뽕나무 활 다북 살은 일찍 품은 뜻이언만 / 宿昔桑蓬志
사슴 떼와 함께 놀아 불우한 지 몇 해런고 / 沈冥鹿豕群
오히려 두 눈 있으니 이 구경이 재미로서 / 猶被雙眼役
헝클어진 백발 시름 잊어나 보올까나 / 可忘白頭紛
라고 하였고, 또,
여름 비 끓는 곳에 강물은 부풀고 / 雨熱關河漲
구름은 찌는 듯이 계문 숲이 낮게 뵈네 / 雲蒸薊樹低
청컨대 임이시여 먼 길에 조심하오 / 請君愼行李
임은 떠나 가시거다 부디 평안 하옵소서 원고에는 ‘면전신행역(勉旃愼行役)’이라 되어 있다. / 去矣莫棲棲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한석호(韓錫祜) 혜당(惠堂 한석호의 호)과 양상회(梁尙晦) 백후(伯厚 양상회의 자)와 이행작(李行綽) 유재(裕齋 이행작의 자)는 모두 개성(開城)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개성은 여씨(麗氏)의 옛 도읍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송경(松京)이라 부른다. 이는 옛 개주(開州)이며 옛 이름은 촉막군(蜀莫郡)이다. 이곳에는 신숭(神嵩 개성(開城)의 진산(鎭山))ㆍ자하(紫霞 개성의 동명(洞名))의 좋은 경치가 있고, 문인(文人)과 운사(韻士)들은 오히려 을지생(乙支生)ㆍ정인지(鄭麟趾)가 끼친 풍채를 지녔다. 이는 우리 성조(聖朝)의 문교(文敎)가 널리 먼 나라에까지 미친 보람이었다. 혜당의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에,
우연히 방향 몰라 이 몸을 붙인 곳이 / 偶爾無方住著身
한 하늘 아래건만 바다 동쪽 가이라네 / 一天之下海東濱
가까운 곳 먼 지역을 평등으로 본다 하면 / 如將遠邇看平等
문밖으로 안 나와도 만리 사람 되오리라 / 不出門時萬里人
새벽 달 뫼에 걸려 시냇집 창이 밝고 / 曉月依山磵戶明
목련화 나무 밑에 남은 정서 이끌리네 / 木蓮花下藹餘情
중국의 아름다움 꾀꼬리는 모르고서 / 黃鸝不識中州好
이별이 서러 우냐 소리소리 울더라 / 啼作陽關惜別聲
푸른 하늘 들을 덮어 사면을 둘렀는데 / 靑天蓋野四周環
동남쪽 솟은 뫼는 한점 두점 사라지네 / 漸失東南點點山
요양에 들어서는 무엇이 보이던고 / 行到遼陽何所見
햇바퀴 빙글 굴러 고국 산천 가리키네 / 日輪回指海雲間
만리 배에 몸을 싣고 바람에 저어가서 / 常願風漂萬里舟
천하 명루 곳곳마다 두루 올라 보고져라
 / 遍登天下有名樓
유유히 필마로써 금대 길 달려 본들 / 悠悠匹馬金臺路
가을 바다 외로운 돛에 설렁임과 어떻더니 / 何似孤帆碧海秋
장성이 무너지자 나라도 그렇건만 / 長城自壞國隨之
도시와 인물이야 갑자기 변탄말가 / 朝市人煙遂不移
공자문 사당에는 돌북이 상기 있어 / 夫子廟庭周石鼓
인간 세상 몇 번이나 석양을 겪었던고 / 人間幾度夕陽時
라고 하였고, 또 그의 〈춘원세우(春院細雨)〉에는,
이슬이 방울짐을 오동잎이 먼저 듣고 / 露重梧先聞
우레 소리 가벼우니 새들도 놀라지 않네 / 雷輕鳥不疑
고운 풀 깊어가니 꿈이런가 의심하고 / 嫩草深疑夢
짙어가는 꽃봉오리 흡사히 어린 듯이 / 濃花恰欲痴
검정 개미 섬돌 위에 미끄럼을 타는 듯이 / 玄蟻緣階滑
파랑 벌레 잎을 안아 그 재주 위태롭네 / 靑蟲抱葉危
물 속에 솟아 선 건 쌍무지개 멀리 뵈고 / 水立雙虹遠
연기를 뚫고 가니 외론 새 더디고나 / 煙穿獨鳥遲
시름에 잠긴 채로 홀로 앉은 나그네 / 悄悄孤客坐
그리운 님 생각에 깊이깊이 잠겼구나 / 湛湛美人思
라고 하였고, 백후(伯厚)의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에는,
눈이 닿도록 바라보니 갈 길이 실이라네 / 極目山河路一絲
마음이 얽혔다면 따라갈 수 없단말가 / 心如相約未相隨
떠나려는 이 자리에 한잔 술 거듭 권하니 / 離筵更進一杯酒
때마침 석양이라 양류만 그저 청청 / 楊柳靑靑斜日時
이라 하였고, 이행작(李行綽)의 〈송별(送別)〉에는,
바닷가에 떠나는 임은 채찍 하나 믿을 뿐 / 濱海行人信一鞭
먼 하늘 유월 철에 빗줄기 길이 달려 / 遼天六月雨長懸
노정을 헤어보니 이에서 삼천 리를 / 計程從此三千里
묻노니 어느 때에 연경에 이를꼬 / 借問幾時可到燕
라”
하였다.
중국 사람들의 기록이 대체로 이와 같다. 이는 비단 원시(原詩)를 많이 점화(點化)하였을뿐더러, 그가 이른바 을지생(乙支生)과 정인지(鄭麟趾)의 끼친 바람이라는 말은 더욱 허리를 잡을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을지생이란 사람이 없은즉, 이는 아마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이름일 것이다. 을(乙)ㆍ정(鄭)은 실로 수천 년이나 멀리 떨어진 인물인데, 이제 그들을 나란히 열거하였으니, 이는 아마 을(乙)은 《수서(隋書)》에 나타났고, 정(鄭)은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한 까닭으로 특히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의 기록 중에 계근(季謹)이 한석호(韓錫祜)와 더불어 술로써 막역한 벗이라 하였으니, 가장 가소로운 일이다. 이 둘은 비단 서로 얼굴을 모를 뿐 아니라, 비록 같은 때에 살고 있었으나, 이름자도 통하지 못하였은즉 어찌 시주로써 막역한 벗이 되었겠는가. 더군다나 둘 다 평생에 술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를 어찌할꼬. 명일 내 별안간 길을 떠나게 되었기에, 그 그릇됨을 지적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불(李紱 청 문학가. 자는 거래(巨來))의 《목당집(穆堂集)》 중 〈경인원조조조시(庚寅元朝早朝詩)〉에,
조선 사람 멀리 천자국에 통래한 지 오래되니 / 朝鮮內屬來王久
의관이 속될망정 괴이할 것 무엇 있나 / 肯怪衣冠太俗生
사모 쓰며 관복 입고 봄 들어서 공 바치니 / 紗帽版袍春入貢
바닷가 해돋이에 태평시절 누리고녀 / 海隅日出最昇平
하였으니, 아침 날 산장(山莊) 밖에 천관(千官)들의 퇴근하는 모습을 구경한즉, 붉은 벙거지에 마제수(馬蹄袖)를 입은 차림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기 짝이 없음에 비하여, 우리나라 사신들의 의관이야말로 신선처럼 빛이 찬란하였다. 그러나 그 거리에 노는 아이들까지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서 우리를 도리어 연극하는 배우 같다고 하니, 아아, 서글프다.
이익재(李益齋)의 자는 중사(仲思)요, 또 하나의 호는 역옹(櫟翁)이며, 관(貫)은 경주(慶州)이고, 나이 15세에 급제에 올랐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의 수도에 머물 때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동으로 돌아올 의사가 없어서 익재를 불러 부중(府中)에 두고 중국의 명류(名流) 조자앙(趙子昻 원(元)의 문학가,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자앙은 자)ㆍ원복초(元復初 원의 문학가 원명선(元明善). 복초는 자) 등과 함께 창수하였으며, 그는 또 서촉(西蜀)에까지 사신으로 간 적도 있거니와, 강남(江南)에도 강향(降香)하여 이르는 곳마다 제영(題詠)한 작품이 남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그가 동으로 돌아오자, 다섯 임금을 섬겨 네 번이나 재상이 되었다. 충선왕이 고자질에 얽혀서 토번(吐蕃)에 귀양살이 갔을 때, 만 리를 달려가서 위문하되 충분(忠憤)의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 뒤에 김해후(金海侯)에 봉했더니 나이 81세에 졸하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시는 화려하고 곱고도 밝고 맑아서 우리나라 사람의 궁벽하고 고루한 기습에서 쾌히 탈피하였다. 그의 〈노상(路上)〉에,
말 위에 끄덕끄덕 촉도난을 읊으면서 / 馬上行吟蜀道難
다시금 오늘 아침 진관(감숙성에 있는 관문(關門))으로 들어갈 제 / 今朝始復入秦關
푸른 구름 저문 날에 어부수(감숙성에 있는 수명) 막혀 있고 / 碧雲暮隔魚鳧水
붉은 나무 아침 숲은 조서산(감숙성에 있는 산명)이 여기라네 / 紅樹朝連鳥鼠山
문자는 남아 있어 천고 한을 더하였고 / 文字賸添千古恨
명리에 지친 몸은 언제나 한가할꼬 / 利名誰博一身閒
나의 생각 잠긴 곳은 안화사 옛 길에서 / 令人最憶安和路
죽장 망혜 짚고 신고 오가던 그 일뿐을 / 竹杖芒鞋自往還
하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연암(燕巖) 뒷산 기슭에서 한 재 마루턱을 격하여 안화사(安和寺)의 옛 터가 있으므로 익재의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가 죽장 망혜로 이 사이에 서성이던 것을 연상하기도 하려니와 저 촉도(蜀道)ㆍ진관(秦關)ㆍ어부(魚鳧)ㆍ조서(鳥鼠)의 이야기를 듣고서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은 듯이 멍하였거든, 하물며 나의 이번 걸음은 또 익재가 이르지 못한 곳일까보냐.
송(宋) 원풍(元豐) 7년(1084년)에 경동(京東) 회남(淮南) 고을에 조서를 내려 고려(高麗) 정관(亭館)을 세우게 하였으므로 밀(密)ㆍ해(海) 두 고을에 시소(時騷)가 일어 백성이 도망한 자가 있었다. 그 이듬해에 소식(蘇軾)이 그곳을 지나다가 제도의 웅장 화려함에 감탄하여 시 한 수를 읊었으되,
처마 끝 높이 솟아 담장 밖에 나르는 듯 / 簷楹飛舞垣墻外
농가 숲은 쓸쓸하여 도끼 자취 뿐이고나 / 桑柘蕭條斤斧餘
오랑캐의 종으로서 다 내주고 보니 / 盡賜昆耶作奴婢
내 몰라라 그들에게 얻은 것이 무에런고 / 不知償得此人無
하였으며, 동파(東坡)가 고려를 미워함이 이르는 곳마다 이러하니, 만일 그로 하여금 강희(康熙)가 세운 33참(站)의 찰원(察院 조선 사신의 내왕을 위해 설치한 숙소)을 보았던들, 그는 또 무어라 하였겠는가.
황산곡(黃山谷 송(宋) 문학가 황정견(黃庭堅). 산곡은 호)의 〈차운목보증고려송선(次韻穆父贈高麗松扇)〉에,
은 마구리 옥 물리고 깨끗한 고치 종이 / 銀鉤玉唾明繭紙
솔 부채 가벼운 바람 한꺼번에 보내 주네 / 松箑輕涼幷送似
가애롭다 이 부채가 책구루고려의 성(城) 이름 를 멀리 건너 / 可憐遠度幘溝漊
더위에 알맞음이 내대자(피서립(避暑笠))와 어떠한고 / 適堪今時褦襶子
라 하였고, 또
옥보다 결백한 문인 기운이 높고 차고 / 文人玉立氣高寒
삼한에 사신 가서 삼신산을 보았다네 / 三韓持節見神山
안기생(중국 신선의 이름)의 불사약을 의당코 얻어다가 / 合得安期不死藥
티끌 속 이내 몸에 옛 껍질을 벗겨 주리 / 使我蟬蛻塵埃間
하였으니, 이제 와서는 고려의 송선(松扇)이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내 일찍이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의 좌상(座上)에서 반정균(潘庭筠)의 〈차왕추사한류시(次王秋史寒柳詩)〉를 외었더니 한자리에 앉았던 손들이 모두 좋다고 칭찬한다. 나는 이내,
“왕추사(王秋史)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풍명재(馮明齋) 병건(秉健)은,
“이는 곧 역성(歷城) 왕 진사(王進士)인데, 이름은 평(苹)이요, 자는 추사(秋史)이며, 자호(自號)를 칠십이천주인(七十二泉主人)이라 하였으니, 반(潘)의 시에,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는 곧 이를 두고 이른 것이랍니다.”
하고, 능사헌(凌蓑軒 사헌은 능야의 호) 야(野)는,
“국조(國朝)의 시인으로서는 많이들 추사를 추앙합니다. 그는 일찍이,
어지런 폭포 속에 나막신 소리 누구던고 / 亂泉聲裏誰通屐
누른 잎 숲 사이에 스스로 글을 쓰네 / 黃葉林間自著書
라는 글귀를 읊었고, 그는 또,
누른 잎 떨어질 제 황소 등에 해 늦었고 / 黃葉下時牛背晩
푸른 뫼 이지러진 곳 술 취한 손님 지나가네 / 靑山缺處酒人行
를 읊었으므로, 한때 사람들은 그를 왕황엽(王黃葉)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한다.
고 태사 역생 풍승기(馮乘驥 풍병건. 승기는 자) 등 모든 사람과 더불어 명성당(鳴盛堂)에서 이야기하다가 도보(道甫 이조 때의 문학가ㆍ서예가 이광사(李匡師)의 자)가 쓴 글씨첩 하나를 내어 보였다. 그들은 서로 살펴보더니, 이윽고 나에게,
“이 글씨는 동한(東韓)에 있어서 어떤 등류(等流)에 속합니까.”
한다. 나는 이에 대하여 멍하니 무엇이라 대답하기 어렵기에 다만,
“우연히 행장(行裝) 속에 들어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스스로 옛날 조자(趙資)의 말처럼 슬쩍 피해버렸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주이준(朱彝尊) 저)》에 《동국사략(東國史略 저자 미상)》과 《고려사(高麗史 정인지(鄭麟趾) 등의 저)》 열전(列傳)의 말을 실었는데, 그 글에,
“고려 세자(世子)가 원(元)에 들어가서 원제(元帝)를 편전(便殿)에서 만날 제, 그가 무슨 글을 읽느냐고 물으니, ‘세자는 선비 정가신(鄭可臣 고려 때의 정치가. 자는 헌지(獻之))ㆍ민지(閔漬 고려 때의 문학가. 자는 용연(龍涎))가 따라왔으며 시위하는 여가를 타서 그들에게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질문합니다.’ 하였더니, 원제가 기뻐하여 세자에게 명하여 그들과 함께 들어오게 하고 자리를 주고서, ‘본국(本國)의 세대(世代)가 서로 전해온 순서와 치란(治亂)의 자취와 풍속의 아름다움을 말하라.’ 하여 조금도 지루하게 여기지 않고 들었다. 그 뒤 공경에게 명하여 교지(交趾 월남(越南))를 치려고 할 때 그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의론하니, 그 진술한 것이 뜻에 맞기에 정가신에게는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주고, 민지에겐 직학사(直學士)를 제수하였다.”
하고, 열전(列傳)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제(元帝)가 세자를 자단전(紫檀殿)에서 불러 볼 때 가신이 뒤를 따랐더니, 원제가 명하여 앉게 하고 이내 명하여, ‘갓을 벗기되 수재(秀才)는 머리를 묶을 필요가 없으니 의당 건(巾)을 써야 될 것이야.’ 하였다. 그리고 어안(御案) 앞에 어떤 물건이 있는데, 둥글면서도 조금 뾰죽하고 빛은 깨끗하며, 높이는 한 자 다섯 치며, 그 안은 술 댓 말쯤 수용될 만하다. 이는 마하발국(摩訶鉢國 미상)에서 바친 낙타조(駱駝鳥)의 알이라 한다. 원제가 세자에게 구경시키면서 이내 세자와 종신(從臣)들에게 술을 내리고 가신으로 하여금 시를 읊게 하였다. 가신이 시를 드리되,
알이라 했지마는 크기는 항아리라 / 有卵大如甕
그 속에 간직한 건 늙지 않는 봄이리다 / 中藏不老春
원컨대 천세 수를 임이 먼저 누리시고 / 願將千歲壽
남은 은택 나누어다 해동에도 미치소서 / 醺及海東人
라 하니, 원제가 기뻐하여 자기의 식탁에서 국을 하사하였다.”

[주D-001]우양도 …… 썼더라는군요 : 여기서 ‘우양도 …… 것이니’는 《맹자》 만장 상(萬章上), ‘우리는 …… 지키자’는 《맹자》 이루 상(離婁上), ‘보물도 …… 생기니’는 《중용》 26장, ‘이것이 …… 보냐’는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엮은 것이다.
[주D-002]하였다. : ‘그 뒤에 연경 …… 하였다’는 ‘수택본’에는 소주(小註)로 되었으나, 여기서는 여러 본에 의하여 대문(大文)으로 하였다.
[주D-003]우회암(尤悔菴) 동(侗) : 청의 문학가. 회암은 호요, 동은 이름. 자는 전성(展成).
[주D-004]〈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 : 외국의 지방 풍속을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읊은 것.
[주D-005]비경(飛瓊) : 중국 여도사의 이름. 여기서는 허초희를 그에게 비한 것이다.
[주D-006]나는 …… 것을 : 허경번은 본시 여도사 번 부인(樊夫人)을 경모(景慕)하여서 지은 것인데, 번천(樊川) 두목(杜牧)의 아름다운 풍모를 연모하여 지었다는 그릇된 것을 변명하였다.
[주D-007]목사(牧使) 아무 : 김려(金鑪)의 《유구왕세자외전(琉球王世子外傳)》에는 이난(李灤)이라 하였다.
[주D-008]삼량(三良) : 어진 세 사람. 춘추시대 때 진 목공(秦穆公)이 죽으매 순장(殉葬)시킨 엄식(奄息)ㆍ중행(仲行)ㆍ겸호(鎌虎)를 가리킨 말이다.
[주D-009]두 아들 …… 잔폭하오 : 전국 때 위 선공(衛宣公)의 두 아들 급(伋)과 수(壽)가 계모의 흉계에 의하여 배에서 피살된 일을 말한 것. 《左傳 桓公 16年》
[주D-010]모수(毛遂) : 전국 때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문하에 있던 변사(辯士).
[주D-011]분양(汾陽) : 당의 정치가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자도 역시 자의(子儀).
[주D-012]상간(桑間) : 하남성에 있는 지명. 음탕한 남녀들이 모여드는 곳.
[주D-013]백설(白雪)의 곡조 : 백설은 곡조 이름. 백아(伯牙)가 저속한 하리(下俚)를 탈 때에는 듣는 이가 많았는데, 백설을 타니 화답하는 자가 적었다 한다.
[주D-014]《태평광기(太平廣記)》 : 송의 이방(李昉) 등이 어명을 받들어 엮은 책.
[주D-015]왕벽지(王闢之) : 송 철종(宋哲宗) 때 학자. 벽지는 이름이요, 자는 성도(聖塗).
[주D-016]정원(定遠) : 후한의 명장 반초(班超). 정원은 봉호요, 자는 중승(仲升).
[주D-017]그러나 …… 일은 : 위의 네 장수는 모두 무식하다는 이름을 얻은 자들이다.
[주D-018]문로(文潞) : 송 인종(宋仁宗) 때 명상 문언박(文彦博). 노는 봉호. 자는 관부(寬夫).
[주D-019]사이(四彝) : 사이(四夷). 연암과 필담하였기 때문에 이(夷)를 이(彝)로 하였다.
[주D-020]그들이 …… 모습 : 전국 때 조(趙)의 장수 염파(廉頗)를 늙었다고 등용하지 않기에 그는 말에 올라서 자기는 늙었어도 전장에 나갈 수 있음을 과시하였다.
[주D-021]농사일은 …… 의당하다 : 이 몇 구절은 한(漢) 진평(陳平)의 말인데, 심경지가 빌려 썼던 것이다.
[주D-022]원(元) : 현(玄)이다. 청 나라 사람은 강희의 이름이 현엽(玄曄)이었으므로 ‘현(玄)’ 자를 피하여 ‘원(元)’ 자로 대신 썼다.
[주D-023]이 장군 : 이광(李廣)
[주D-024]돈 벽 : 화교(和嶠)가 그 가멸기가 왕자에 비길 만하였으나 오히려 돈을 아꼈으므로 그를 전벽(錢癖)이라 하였다.
[주D-025]서음(書淫) : 황보밀(皇甫謐)이 글 읽기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침식을 잊으므로 그를 서음(書淫)이라 하였다.
[주D-026]《치청전집》 : 청 이개(李鍇) 저. 치청은 그의 호. 치청산인(豸靑山人).
[주D-027]종인부(宗人府) : 황족(皇族)의 관계 사무를 보는 관부.
[주D-028]기량을 울었다네 : 전국 제(齊)의 사람. 그가 전쟁에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무덤에 가서 우는 소리가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제인(齊人)은 그것을 노래로 불렀다 한다.
[주D-029]봉규(圭) : 어떤 본에는 봉규(封圭)로 되었으나 잘못된 것이다.
[주D-030]담원팔영(澹園八詠) : 담원의 주위에 벌여 있는 팔경(八景)을 읊어서 축하하는 시.
[주D-031]절만 하네 : 송(宋) 서예가 미불(米芾)이 무위(無爲)라는 고을에서 커다란 괴석(怪石)을 발견하고는 의관을 갖추어 절하여 형(兄)이라 일컬었다.
[주D-032]백 동파 : 소식(蘇軾)이 미피(渼陂)에서 놀 때의 고사.
[주D-033]나부산 : 매화가 많이 난 고장.
[주D-034]적성(赤城) : 천태산(天台山) 부근에 있다.
[주D-035]화예부인 : 오대 때 촉왕(蜀王) 맹창(孟昶)의 부인으로 절색에 문장을 겸하였다.
[주D-036]아름다운 …… 같으리 : 이 시는 벌써 《망양록(忘羊錄)》 중에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주석은 생략하였다.
[주D-037]진서라네 : 당시에는 국문을 언문이라 하고 한자를 진서(眞書)라 하였다.
[주D-038]구주(九疇) :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홍범편(洪範篇)〉에 실린 정치 이론.
[주D-039]육부(六部) : 신라 초기에 그 서울인 경주를 중심으로 설치한 행정 구역.
[주D-040]약을 …… 가고 : 진 시황이 서시(徐市)로 하여금 동남(童男) 동녀(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바다 섬으로 보내어 불사약(不死藥)을 구했다.
[주D-041]박랑의 모래벌 : 장량(張良)이 창해 역사(滄海力士)를 시켜 박랑 모래벌에서 매복하였다가 철퇴로써 진 시황을 쳤으나 잘못되어 다음 수레가 맞았다.
[주D-042]구정은 아직 잠기고 : 구정은 하우(夏禹) 때부터 내려오던 신기(神器)였으므로 나라가 망한 것을 구정이 잠겼다 한다. 여기서는 주(周)가 망했다는 말.
[주D-043]삼호들은 일어섰네 : 초(楚)의 항적(項籍)을 말한다.
[주D-044]여섯 왕이 쓰러지자 : 당시의 한(韓)ㆍ조(趙)ㆍ위(魏)ㆍ연(燕)ㆍ제(齊)ㆍ초(楚)의 6국이 망했음을 말한다.
[주D-045]손을 마침 떼었다네 : 진 시황이 저격한 범인을 열흘 동안을 찾았으나 잡지 못했다.
[주D-046]호가의 슬픈 박자 : 한말 채문희(蔡文姬)가 되놈에게 몸이 팔리어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어서 스스로 슬퍼하였다.
[주D-047]채문희를 속할쏘냐 : 조조(曹操)가 천금으로 채문희를 속환하였다.
[주D-048]대숙륜(戴叔倫) : 당 현종(唐玄宗) 때 문학가. 자는 유공(幼公).
[주D-049]제용작가(帝庸作歌) : 《시경》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한 구절.
[주D-050]관관저구(關關雎鳩) : 《시경》 관저장(關雎章)의 첫 구절.
[주D-051]양백화 : 음탕한 일을 풍자한 패곡(牌曲)의 이름인 듯하나 출전 미상.
[주D-052]점필재(佔畢齋) : 이조 때의 문학가 김종직(金宗直)의 호. 자는 계온(季昷).
[주D-053]생추(生蒭) : 《시경》 소아(小雅) 백구장(白駒章)에 나오는 말로서 예물(禮物)이라는 뜻.
[주D-054]기 귀주(奇貴州) : 기풍액(奇豐額). 귀주는 그가 그 고을을 맡고 있었다.
[주D-055]최두기 …… 일쑤이다 : 최두기는 멋모르고 변절한 오삼계가 상투를 보고 명(明)을 생각해서 울었다 하고, 또 전겸익이 청(淸)에 벼슬까지 한 것을 지사인 듯 칭찬하였는데, 이는 모두 ‘몽롱춘추’라는 것이다. 최두기는 조선 정조(正祖) 때 문학가로, 두기는 호요, 성대는 이름이며, 자는 사집(士集)이다.
[주D-056]주의(周顗) : 진(晉)의 지사(志士). 자는 백인(伯仁). 신정에서 고국이 망하였음을 슬퍼하였다.
[주D-057]나라 …… 있네 : 국(國)자 속에 과(戈) 자를 떼고 일(一) 자와 인(人) 자를 더 넣은 듯하나 무슨 글자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주D-058]김모재(金慕齋) : 조선 때 유학자 김안국(金安國)의 호. 자는 국경(國卿).
[주D-059]화홍산(華鴻山) 찰(察) : 명(明)의 관리이면서 문학가. 홍산은 호요, 찰은 이름이며, 자는 자잠(子潜).
[주D-060]최간이(崔簡易) :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학가 최립(崔岦). 간이는 호요, 자는 입지(立之).
[주D-061]사흘을 바장이곤 : 국선(國仙)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안상(安詳)ㆍ남석(南石) 네 사람이 사흘을 놀았다 해서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주D-062]심백수(沈伯修) : 조선 영조(英祖) 때 관리이며, 문학가인 심염조(沈念祖). 백수는 자.
[주D-063]왕감주(王弇州) : 명의 문학가 왕세정(王世貞). 감주는 호.
[주D-064]만나러 갔더니 : 최립은 일찍이 이정귀(李廷龜)의 사행을 따라서 명에 갔다.
[주D-065]획린해(獲麟解) : 불과 2백 자도 차지 않는 단편이지마는 논리의 정연함과 조직의 체계로 보아서 전형적인 고문장의 궤범이 된다.
[주D-066]허균(許筠) :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의 저명한 문학가ㆍ사상가. 자는 단보(端甫).
[주D-067]주태사(朱太史) 지번(之蕃) : 명의 정치가요, 문학가. 자는 원개(元介) 또는 원승(元升).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일이 있다.
[주D-068]빈공(賓貢) : 당(唐)에 외국 학생을 받기 위해 설치한 학과(學科). 곧 빈공과.
[주D-069]한무외(韓无畏) : 조선 선조(宣祖) 때 신선이 되었다는데 방술에 저명하였다.
[주D-070]최승우(崔承祐) : 신라 진성왕(眞聖王) 때 문학가. 일찍이 당에 유학하였다.
[주D-071]종리 장군(鍾離將軍) : 한 고조(漢高祖) 때 장군 종리매(鍾離昧). 한신(韓信)을 위해서 자살하였다.
[주D-072]예학명(瘞鶴銘) : 육조(六朝) 때 양(梁)의 은사 도홍경(陶弘景)이 초산(焦山) 석벽 위에 지어 새긴 글의 탑본(搨本).
[주D-073]사운(思運) : 자는 형중(亨仲). 어떤 본에는 ‘사운(思運)’이란 두 글자는 소주로 되어있다.
[주D-074]칠십천 : 왕추사가 살고 있던 성수천(聖水泉)은 원(元)의 우흠(于欽)이 품정(品定)한 72 천(泉) 중의 24천이었으므로, 그는 《이십사 천초당집(二十四泉草堂集)》이 있었다.
[주D-075]왕랑의 …… 얼굴 : 진(晉)의 왕공(王恭)의 얼굴이 아름다우므로 사람들이 탁탁한 봄 버들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왕추사가 서로 견준 것이다.
[주D-076]남약천 구만(九萬) : 조선 숙종(肅宗) 때 문학가며 정치가. 약천은 호요, 구만은 이름이며, 자는 운로(雲路).
[주D-077]선생안(先生案) : 그 고을 장관을 지낸 이의 성명과 약력을 기록한 책.
[주D-078]윤형성(尹衡聖) :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자는 경임(景任). 당시의 진주 목사(晉州牧使).
[주D-079]곽재우(郭再祐) : 조선 선조(宣祖) 때 저명한 장수. 자는 계수(季綬)요, 호는 망우당(忘憂堂).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다.
[주D-080]웅해 …… 정진(鼎津) : 모두 경상도에 있는 작은 지명들이다.
[주D-081]음릉 …… 것이 : 항적이 한 고조(漢高祖)와 싸우다가 해성(海城)에서 패하여 음릉으로 도망할 때, 어떤 노부의 말을 들어 길을 잃었고, 오강에 이르러서는 강동(江東) 사람들을 대하기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주D-082]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 : 조선 중종(中宗) 때 문학가. 호음은 호요, 사룡은 이름이며, 자는 운경(雲卿).
[주D-083]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 : 조선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중종을 맞아들인 훈신. 평성은 봉호요, 원종은 이름이며, 자는 백윤(伯胤).
[주D-084]금계군(錦溪君) : 조선 문학가 박동량(朴東亮). 금계는 봉호요, 자는 자룡(子龍).
[주D-085]호백구 …… 수단 : 전국 제(齊)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이 진(秦)에서 붙들려 있을 때에, 그의 문객이 개구멍 도적질을 잘하여 진왕(秦王)의 흰 여우 갖옷을 훔쳐서 진왕의 애희(愛姬)에게 바치고 면했다.
[주D-086]거원(蘧瑗) : 전국 때 위(衛)의 현인으로서, 나이 50이 되어서 49세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
[주D-087]설부 …… 계림유사(鷄林類事) : 설부는 명의 도종의(陶宗儀)가 엮은 것이요, 계림유사는 손목(孫穆)이 지었다.
[주D-088]파촉 …… 관중(關中)이랍니다 : 파촉은 중국 사천 지방이요, 관중은 섬서 지방으로서 한 고조 유방과 초 패왕 항적이 서로 먼저 관중을 점령하려고 경쟁을 할 때 생긴 말. 꿩 대신에 닭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주D-089]시(詩)에 …… 있으니 : 정형은 하북성정형산 위에 있는 요새지. 예양교는 전국 때 절사(節士) 예양이 지백(智伯)을 위해서 조양자(趙襄子)를 저격하려고 숨었던 다리. 촉도는 사천성에서 섬서성으로 통하는 험로(險路). 아미는 사천성에 있는 산명. 공명사당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공명은 그의 자. 함곡관은 하남성 서북부 황하의 계곡에 있는 요해의 관문. 민지는 하남성에 있는 호수명. 이릉은 하남성 효(殽)에 있는 명소. 맹진은 하남성에 있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칠 때 제후를 모았던 곳. 비간묘는 은의 충신 비간의 무덤. 금산사는 강소성 진강부에 있는 명소. 초산은 강소성 단도현(丹徒縣)에 있는 명소. 다경루는 강소성감로사(甘露寺)에 있는 명소. 고소대는 강소성 오현(吳縣)에 있는 명소. 도량산은 강소성에 있는 명소이며, 호구사도 같다. 표모묘는 강소성 회음(淮陰)에 있는데, 한신(韓信)에게 밥을 먹인 표모의 무덤. 탁군은 하북성에 있는 지명. 백구는 위와 같음. 업성은 하남성에 있으며 담화도 같다. 왕상비는 하남성에 있으며 왕상은 진(晉)의 효자. 효릉은 하남성에 있는 명소. 장안은 섬서성에 있는 도시. 정장공묘는 전국 때 정장공의 무덤. 허문정공묘는 원의 유학자 허형(許衡)의 무덤. 문정은 시호. 관용방묘는 하(夏)의 충신 관용방의 무덤. 망사대는 한 무제(漢武帝)가 그의 아들 여 태자(戾太子)를 죽이고 후회하여 쌓은 대. 무측천릉은 당의 황후 무조(武曌)의 무덤. 숙종릉은 당 숙종의 무덤. 빈주는 섬서성에 있는 지명. 경주는 안휘성에 있는 지명. 보타굴은 절강성에 있는 명소. 월지사자헌마는 중앙 아시아 지방에 있던 월지국 사자가 헌납한 말을 보고 읊었다.
[주D-090]요공(姚公) : 원(元)의 문학가 요수(姚燧). 목암은 호요, 자는 단보(端甫).
[주D-091]주행아미(舟行峨眉) : 원제(原題)는 〈8월 17일 방주향아미산(八月十七日放舟向峨眉山)〉.
[주D-092]다경루(多景樓) : 원제에는 〈다경루배권일재용고인운동부(多景樓陪權一齋用古人韻同賦)〉.
[주D-093]깊은 …… 번뜩인다 : 한 나라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배 위에 발을 올렸을 때 태사(太史)가 여쭙기를 객성이 제좌(帝座)를 범했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김상헌이 자기가 사신으로 왔음을 말한 것이다.
[주D-094]은하성 …… 허락했네 : 한(漢)의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으로 사신 가던 고사.
[주D-095]만리 …… 보고져라 : 연암의 아들 종간(宗侃)의 주(注)에, “삼가 상고하옵건대 이 두 글귀는 원집(原集) 중에 있는 것을 혜당(惠堂)이 이용한 것이다.”
[주D-096]강향(降香) : 유명한 사원(寺院)이나 묘우(廟宇)에 내리는 치전(致奠).
[주D-097]촉도난(蜀道難) : 촉도의 험준함을 읊은 이백(李白)의 시가 있다.
[주D-098]조자(趙資) : 삼국 때 오(吳)의 변사. 자는 덕도(德度). 조위(曹魏)에 사신 갔을 때 임기응변이 많았다.
[주D-099]슬쩍 피해버렸다 : ‘고 태사 역생 …… 피해버렸다’ 까지의 이 한 절은 다른 본에 없던 것을 이에 ‘일재본’에 의하여 넣었다.

 
동사강목 제5하
확대원래대로축소
무오년 효공왕 2년(당 소종 광화(光化) 원년, 898)

춘정월 어머니 김씨를 추존하여 의명 태후(義明太后)라 하였다.
○ 준흥(俊興)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계강(繼康)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월 궁예가 왕건(王建)을 정기 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았다.

추7월 궁예가 송악군(松嶽郡)에 도읍하였다.
이에 앞서, 양길(梁吉)이 북원(北原)에 있으면서 국원(國原) 등 30여 성을 취하여 차지하였는데, 자기에게 궁예가 두 마음 품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엄습하려고 하였으나, 궁예가 이를 알고 먼저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이에 궁예는 병세(兵勢)가 날로 융성하여져서 드디어 패서도(浿西道) 및 한산주(漢山州) 관내의 30여 성을 취하였다. 궁예는, ‘송악군(松嶽郡)은 한수 북쪽의 이름난 고을로서 산수가 기이하고 수려하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이곳을 정하여 도읍을 삼고 공암(孔巖)지금의 양천(陽川)ㆍ검포(黔浦)지금의 김포(金浦)ㆍ혈구(穴口)지금의 강화(江華) 등 30여 성을 쳐서 깨뜨렸다.

동11월 궁예가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 아찬(阿飡) 최치원(崔致遠)이 죄가 있어 면직되었다.
치원이 서쪽으로 당나라를 섬기면서부터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와서도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자, 스스로 불우함을 상심하여 다시 벼슬하여 출세할 뜻을 버리고 스스로 산수 사이를 방랑하였는데, 대사(臺榭 누대와 정자)를 마련하며 송죽(松竹)을 심고 서사(書史)를 탐독하며 풍월을 읊조렸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인간의 요로 통진(要路通津 현달한 벼슬길)에는 눈을 떠 볼 만한 곳이 없고, 물외(物外 속세 밖의 세계)의 청산녹수(靑山綠水)는 꿈에라도 돌아갈 때가 있으리라.”
한 것이 있었다. 왕건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울 것을 알아보고 편지를 보냈는데,
계림에는 나뭇잎이 노랗고 / 鷄林黃葉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 / 鵠嶺靑松
라고 한 구절이 있었다. 뒷사람이 그곳을 이름하여 상서장(上書庄)이라 하였는데 지금 경주 금오산(金鰲山) 북쪽에 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꺼려하자, 치원은 곧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여, 모형(母兄 동복형)인 중 현준(賢俊)ㆍ정현사(定玄師)와 더불어 도우(道友)를 삼고 함께 기거하면서 노래(老來)를 마쳤다. 저술한 문집(文集) 30권이 세상에 전한다. 이규보(李奎報)는 이렇게 적었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또 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실었고, 자주(自註)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으로 빈공 급제(賓貢及第 외국인으로 중국 과거에 급제한 것)하여 고병(高騈)의 회남종사(淮南從事)가 되었다.’ 하였는데, 나는 이를 읽고 중국 사람의 도량이 끝없이 넓어서 외국 사람이라 하여 경중을 두지 않은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무용(武勇)에 있어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모두 고려 사람인데도 각기 열전에 나열하여 그들의 사적을 갖추 기록하였으나, 문예에 있어서는 유독 고운(孤雲 최치원의 호)을 위하여 전을 두지 않았다. 생각하건대, 옛날 사람들이 문장에 있어서 서로 혐기(嫌忌)하였거늘, 하물며 치원은 외국의 고독한 유생으로 중국에 들어가 그 고장의 이름난 무리들을 짓눌러 버렸으니, 이는 중국 사람들이 혐기할 만한 것이다. 만약 전을 세워 그 사실을 곧바로 기록하면 그 혐기에 관계될까 하여 일부러 생략한 것인가?”
【안】 선비가 불행히도 쇠란(衰亂)한 세상에 처하여, 만약 지위가 높고 책임이 무거워서 형세가 조정을 떠나지 못할 때에는, 나라가 있으면 함께 있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하여 그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멀리 빠져나가서 임천(林泉)에 자취를 숨기고 인간의 일에 간여함이 없거나, 오직 이 두 가지 길뿐이다. 고운은 신라 때에 4조(四朝)를 내리 섬겼고 지위가 아찬에 이르렀으니, 사서에는 비록 ‘때를 만나지 못하여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하였더라도 또한 총애(籠愛)가 지극하였다고 할 만하다. 궁예는 신라 왕실의 반적(叛賊)이 되고, 고려 태조는 그 도당이 되었으니 그도 또한 반적이다. 비록 그 용 같은 모습과 봉 같은 자질에, 웅대한 도략과 심원한 계책으로 제왕이 될 만한 기상과 나라를 개창할 조짐이 있더라도 나의 마음 가운데 더욱 개탄하는 바가 있었다면 어찌 차마 글을 올리고 교제를 청하여 선견지명을 자랑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 태조는 신라의 유민(遺民)으로 혼란을 틈타서 굴기(倔起)한 사람이다. 고운이 당세의 명망을 등에 지고서 만약 환ㆍ문(桓文)의 사업을 본받아서 왕실을 부흥할 것을 면려하였더라면, 고려 태조의 명달(明達)하고 관인(寬仁)한 도량으로 혹 생각하는 바가 있었을 터인데,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후일 고려 현종(顯宗)이, 고운이 태조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시호를 추증하고 포장(褒獎)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고운에게 영광이었겠는가?
아아, 양웅(揚雄)은 머리가 세도록 경서를 연구하였으되 마침내는 왕망의 대부(大夫)가 되었고, 고운은 문장이 세상을 경동시켰으되 마침내 고려 왕조의 공신이 되었으니, 선비가 글을 읽음에는 의리를 아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데, 의리가 이에 이르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고운의 평생 동안 발자취는 어린 나이에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약관이 못 되어 과제(科第)에 올랐고, 그가 귀국함에 미쳐서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렸으니, 공명을 위하여 의지를 가다듬어 입신 양명에 마음을 두었음을 가히 알겠다. 그러나 당에서나 신라에서나 기족(驥足 뛰어난 재질)을 펴보지 못한 채 침체하고 좌절되었으며, 숨은 재기를 누르기 어려워 조금 재주 있음을 자랑하였으되 큰 도리를 깨닫지 못하였고, 자중(自重)하지 못하여 마침내 경솔한 데 빠지고 말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문사(文士)는 절조를 지키는 자가 적다.’ 하였는데 그것은 고운을 두고 한 말인가? 그러나 최승우(崔承祐)는 일찍이 적(賊) 진훤(甄萱)을 위하여 격문을 초하였고, 최언위(崔彦撝)도 또한 고려 태조의 총신(寵臣)이 되었으되, 고운은 여기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은둔으로 세상을 마친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주D-001]환ㆍ문(桓文)의 사업 : 중국 춘추 시대 오패(五覇)의 우두머리인 제(齊) 환공(桓公)과 진(晋) 문공(文公)을 가리킨 말. 이들은 당시 쇠미해진 주(周) 왕실을 받들고, 이적(夷狄)의 침입을 막았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2 - 도장류 1
확대원래대로축소
 도장총설(道藏總說)
도교(道敎)의 선서(仙書)와 도경(道經)에 대한 변증설 부(附) 도가 잡용(道家雜用)(고전간행회본 권 39)


총설(總說)
도가(道家)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황제씨(黃帝氏)가 공동산(崆峒山)에서 도(道)를 물었다는 것을 인하여 칭하게 되었나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도(道)란 요점과 근본을 잡아 청허(淸虛)로써 자신을 지키고 겸양으로써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니, 이는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요(堯) 임금의 극양(克讓)과 《주역(周易)》의 겸겸(謙謙)으로, 한번 겸손하여 네 가지 유익을 받는 것에 합하니 이것이 그 장점이다. 그러나 방탕한 자가 이것을 하게 되면 예학(禮學)을 끊어버리고 인의(仁義)까지 버리려고 하면서 ‘오직 청허대로만 하여도 법이 될 만하다.’ 한다.” 하였다.
또한 신선(神仙)에 대하여 “신선이란 성명(性命)의 진(眞)을 보전하여 세상 밖에서 한가히 구하는 것으로 애오라지 의욕을 씻어버리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사(死)ㆍ생(生)의 경지를 초월해서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혹자들은 오로지 이것만을 힘써 허탄하고 괴이한 글이 점점 더욱 많아졌으니, 이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아니다.” 하였다.
도교(道敎)란 이런 것에 불과한데, 그 서적은 매우 많다. 이제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를 인용하여 그 자세한 전말(顚末)을 밝히려 한다.
《수서》경적지에 “상고 시대로부터 황제(黃帝)ㆍ제곡(帝嚳)ㆍ하우(夏禹)의 황제들이 모두 신인(神人)을 만나서 부록(符籙 미래의 일을 미리 짐작하여 적어 놓은 글)을 받았는데, 연대가 이미 멀어서 경(經)ㆍ사(史)에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사적을 자세히 미루어 보면 《한서(漢書)》 제자(諸子)에 도서(道書)의 부류가 37가(家)인데 큰 종지(宗旨)는 모두 건선(健羨 끝없는 탐욕을 말한다)을 버리고 충허(沖虛 마음이 담박하고 공허한 것)에 처할 뿐이고, 상원천관(上元天官)이니 부록(符籙)이니 하는 따위의 일이 없다. 이 중 《황제(黃帝)》4편과 《노자(老子)》2편은 가장 깊은 뜻을 얻었다. 옛말에 도홍경(陶弘景)이란 자가 구용(句容)에 은거하여 음양 오행(陰陽五行)을 좋아하고 풍각(風角)ㆍ성산(星算)을 잘 했으며 벽곡(辟穀)ㆍ도인(導引)의 법을 이수하여 도경(道經)과 부록을 받았다.
무제(武帝 양(梁) 나라 소연(蕭衍)의 묘호)가 본래 그와 교유했었는데, 선대(禪代)할 즈음에 미쳐 홍경이 도참의 글을 모아 ‘경량(景梁 하늘이 양 나라를 도와 준다는 뜻)’이란 글자를 합성(合成)하여 바쳤다. 이 때문에 무제의 은총이 더욱 두터웠다. 또 《등진은결(登眞隱訣)》을 편찬하여 옛날에 신선의 일이 있었음을 증명했으며, 또 ‘신단(神丹 단약(丹藥))을 만들 수 있는데 이것을 먹으면 장생(長生)하여 천지와 함께 영원히 산다.’고 하자, 무제는 홍경으로 하여금 시험삼아 신단을 만들게 했으나 끝내 성취되지 못하였다. 이에 중원(中原)은 너무 거리가 멀어 약재가 정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니, 무제는 그렇게 생각하여 더욱더 공경하였다.
그러나 무제가 소년 시절에 일을 좋아하여 먼저 도법(道法)을 수학했었는데, 즉위한 뒤에까지도, 오히려 조사(朝士)로서 스스로 글을 올려 도법을 수학한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삼오(三吳) 지방과 해변 가에서 더욱 심히 신봉하였으며, 진 무제(陳武帝) 역시 대대로 오흥(吳興)에서 살았기 때문에 또한 신봉하였다.
후위(後魏) 때에 숭산(嵩山)의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가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진인(眞人) 성공흥(成公興)을 만났으며, 뒤에 태상노군(太上老君)을 만나 겸지에게 수여하여 천사(天師)를 삼고 또 《운중음송과계(雲中音誦科誡)》20권을 주었으며, 다시 기(氣)를 마시고 도인(導引)하는 법을 전수하여 마침내 벽곡(辟穀)하는 방법을 얻었다. 그리하여 기운이 성하고 신체가 가쁜하여 안색이 고왔는데, 제자 10여 명이 모두 그 술(術)을 터득하였다. 그후 또 신인(神人) 이보문(李譜文)을 만났는데, 그는 바로 노군(老君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노자(老子)의 존칭)의 현손(玄孫)으로 도록(圖籙)ㆍ진경(眞經) 등 백신(百神)을 부르는 책 60여 권과 금단(金丹)ㆍ운영(雲英)ㆍ팔석(八石)ㆍ옥장(玉漿)을 녹여 만드는 법을 전수받았다.’하였다.
태무제(太武帝) 시광(始光) 초기에 이에 대한 책을 받들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는 알자(謁者)로 하여금 옥백(玉帛)과 희생(犧牲)을 받들어 숭악(嵩岳)에 제사하고 나머지 제자들을 불러다가 대도(代都)의 동남쪽에다가 단우(壇宇)를 세운 다음, 도사 1백 20여 명을 두어 그 법을 선양해서 천하에 펴게 하고는 태무제가 친히 법가(法駕)를 갖추어 부록(符籙)을 받게 하였다.
이로부터 도업(道業)이 크게 행해져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반드시 부록을 받아 고사(故事)가 되었으며, 천존상과 여러 신선의 상을 새겨서 공양하였다.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뒤에는 남교(南郊)의 곁에 도량(道場)을 설치하니, 사방이 2백 보(步)였는데 정월과 시월의 보름에 아울러 도사ㆍ가인(哥人) 1백 6명을 두어 절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그후 후제(後齊)의 무제(武帝)가 업(鄴) 땅으로 천도한 다음 마침내 폐지되었다가, 문양(文襄) 때에 다시 관우(館宇)를 설치하고 정통한 자를 뽑아 거처하게 하였다.
후주(後周)가 위(魏) 나라를 이어 도법(道法)을 숭봉하여 황제마다 부록을 받기를 옛날 위 나라처럼 하였는데, 얼마 후 불법(佛法)과 함께 멸망했다가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 초기에 다시 일어났다. 고종(高宗)은 본래 불법을 믿었으므로 도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대업(大業 수 양제(隋煬帝)의 연호) 때에 도술로써 등용된 자가 매우 많았는데, 강습하는 도경(道經)은 모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근본으로 하고, 다음에 《장자(莊子)》와 《영보(靈寶)》ㆍ《승현(昇玄)》 따위를 강습했다. 기타 여러 경(經)은 혹자들이 말하기를, ‘신인(神人)에게 전수받았다’ 하나 권수가 똑같지 않다.
도가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천존(天尊)의 성은 악(樂)이고 이름은 정신(靜信)이다’하는데, 대부분 모두 천박하고 저속하므로 세상에서 심히 의심한다. 그 술업(術業)이 우수한 자가 부적과 주금(呪禁)을 행하는 것에 왕왕 신비한 증험이 있으나, 금단(金丹)ㆍ옥액(玉液)으로 장생불사한다는 일은 역대에서 비용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허비했을 뿐, 끝내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하였다.
《속박물지(續博物志)》에 “한 순제(漢順帝) 때에 낭야궁(瑯琊宮)에서 그 스승을 높였으며, 우길(于吉)이 곡양(曲陽)의 우물가에서 신서(神書) 1백 70권을 얻었는데 이름은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라 하였다. 이 책에서 말한 것은 음양 오행을 종지(宗旨)로 삼았으나 무당들의 잡된 말이 많다. 뒤에 장각(張角)이 이 책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송(宋) 나라 때 숭산(嵩山)의 구겸지(寇謙之)가 장도릉(張道陵)의 도술을 배웠는데, 일찍이 노자를 만나 명을 받아 도릉을 계승해서 천사(天師)가 된 다음, 벽곡 경신(辟穀輕身)하는 방법을 전수받아 도교를 정돈하게 했다. 또 신인 이보문(李譜文)을 만났는데 그는 바로 노자의 현손으로 도록(圖籙)ㆍ진경(眞經)을 전수하여 북방 태평진군(北方太平眞君)을 보좌하여 천궁(天宮)이 고요히 움직이는 법을 만들어냈으며, 최호(崔浩)는 이 도술을 전수받았다.” 하였으니, 도교의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다.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중 선도록(仙道錄)은 첫째 경계(經戒), 둘째 복이(服餌), 셋째 방중(房中), 넷째 부록(符籙)으로 모두 1천 1백 38권이며, 호응서(胡應瑞)의 선도록은 2천 5백 95질이다. 방중이란 바로 소녀(少女) 용성(容成)의 술(術)로 음정(陰精)을 채취하는 방법이다. 반고(班固)의 《한서》 예문지에 황제(黃帝) 삼왕(三王)의 방중술 20권, 요(堯)ㆍ순(舜)의 방중술 22권, 탕왕(湯王)ㆍ반경(盤庚)의 방중술 20권이 실려 있는데 모두 몹시 저속하고 음설하다.
왕의(王禕)의 《청암총록(靑巖叢錄)》에 “노자의 도(道)는 청정(淸靜)에 근본하여 무위(無爲)로써 체(體)를 삼고, 무위이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써 용(用)을 삼는다. 《도덕경》은 모두 5천여 자이고 81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이것을 넘지 않는다. 임금으로는 한 문제(漢文帝)와 신하로는 조참(曹參)이 항상 이 도를 써서 정치를 하여 백성이 안정하게 되었으니, 이 도를 국가와 천하에 사용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학문이 한번 변하여 신선 방기(神仙方技)의 술이 되었고 두 번 변하여 미무 좨주(米巫祭酒)의 교가 된 뒤로부터 마침내 이단이 되었다. 그러나 신선 방기의 술도 두 가지가 있는바, 연양(鍊養)과 복식(服食)으로 이 두 가지는 지금의 전진교(全眞敎)가 바로 이것이며, 미무 좨주의 교도 두 가지가 있는바, 부록(符籙)과 과교(科敎)로 이 두 가지는 지금의 정일교(正一敎)가 바로 이것이다.
연양의 일은 황제의 책에 비록 언급하였지만 이는 모두 후세에서 모방하여 가탁(假託)한 것이며, 적송자(赤松子)와 위백양(魏伯陽)이 나오고부터 비로소 본종(本宗)이 되었다. 노생(盧生)ㆍ이소군(李少君)ㆍ난대(欒大)의 무리로 말하면 또 연양을 변하여 복식이 되었으니, 그 술이 더욱 편벽되다. 부록의 일은 황제의 책에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장도릉(張道陵)ㆍ구겸지(寇謙之) 등이 실로 이 법을 제창하였으며, 두광정(杜光庭)과 임영소(林靈素)의 무리에 미쳐서는 또 부록을 변하여 경건(經典) 과교가 되었으니, 그 일이 더욱 비루하다.
그러나 한번 논한건대, 연양의 말에 대해서는 구양자(歐陽子 구양수(歐陽脩)를 가리킨다)가 일찍이 《황정경(黃庭經)》을 산정(刪正)하였으며, 주자(朱子)도 일찍이 《참동계(參同契)》를 고쳐 주달았다. 이 두 분은 큰 유학자인데도 모두 그 학설을 나쁘다 하지 않았으니,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홀로 수행하는 선비가 이것을 써서 양생(養生)을 하여 천명을 온전히 하는 것은 진실로 명교(名敎)에 죄를 짓는 것이 되지 않는다.
과교(科文)의 설은 비루하여 떳떳지 못한 것으로 황관(黃冠 도사(道士)를 가리킨다)이 이것을 빌어 밥먹는 도구로 삼는바, 세상의 좀이 되었으나 피해가 그리 심하지는 않다. 다만 복식ㆍ부록 두 가지 학설은 본래 사벽(邪僻)하고 무망(繆妄)한 것으로 여기에 혹하는 자들은 화를 당하지 않는 자가 적다. 난대ㆍ이소군ㆍ우길(于吉)ㆍ장진(張津)의 무리는 이 때문에 몸이 죽었고, 유필(柳泌)ㆍ조귀진(趙歸眞)의 무리는 이것으로 남에게 화를 입혔다가 자신도 끝내 죽임을 당했으며, 장각(張角)ㆍ손은(孫恩)ㆍ여용(呂用)의 무리는 마침내 이것으로 천하와 국가를 패망하게 만들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연양과 복식 두 가지 술이 함께 전해오는데 전진교(全眞敎)에서는 이것을 겸용한다. 전진이란 명칭은 금(金) 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남종(南宗)ㆍ북종(北宗) 두 가지가 있는데, 남종은 성(性)을 우선으로 하고 북종은 명(命)을 우선으로 한다.
근세에 또 진우 도교(眞又道敎)가 있으며 칠조 강선(七祖康禪)의 교가 있는바, 이 학설이 각기 서로 모순된다. 부록ㆍ과교로 말하면 함께 서적이 있는바, 정일교를 믿는 종파에서 사실상 이 업술(業術)을 관장한다. 현재 정일교에서는 또 천사(天師)ㆍ종사(宗師)가 있어서 남종ㆍ북종의 일을 나누어 관장하고 있는데, 강남(江南)의 용호각(龍虎閣)과 조모산(皂茅山)의 삼종부록(三宗符籙)이 또 각기 같지 않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도가의 학설이 잡되어 여러 갈래다’ 하였는데, 참으로 그렇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도가의 서적이 모두 한 환제(漢桓帝) 때에 시작된바, 지금 그들의 경전(經典)에 ‘천사가 영수(永壽 한 환제의 연호) 때에 노군(老君)에게서 전수 받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태평경(太平經)》이 가장 오래 되었고 또 많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국가를 일으키고 자손을 널리 퍼지게 한다’는 말은 방중술의 음담패설에 지나지 않는다. 《대동경(大洞經)》등으로 말하면 대부분 육조(六朝) 이후의 문사(文士)가 기술한 것으로서 그 문장이 볼 만하나, 왕왕 천근하고 비루하여 그리 고상한 의론이 없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불교에서는 노자의 좋은 점만을 절취(竊取)했는데, 뒤에 도가에서는 또한 불가의 나쁜 점만을 절취했다’하였으니, 이 말씀을 가지고 연구해 본다면 도가의 본말을 말할 수 있다.” 하였다.
도가의 남ㆍ북종은 전수한 것이 근거가 있다. 동화(東華 신선이 사는 곳)의 소양군(少陽君)이 노담(老聃)의 도(道)를 얻어 한 나라 종리권(鍾離權)에게 전수하였고, 종리권은 당 나라 여암(呂巖)과 요(遼) 나라 유조(劉操)에게 전수하였으며, 유조는 송 나라 장백단(張伯湍)에게 전수하였고, 장백단은 석태(石泰)에게 전수하였으며, 석태는 설도광(薛道光)에게, 설도광은 진남(陳枏)에게, 진남은 백옥섬(白玉蟾)에게, 백옥섬은 팽상(彭相)에게 전수하였으니, 이것이 남종이다. 여암은 금(金) 나라 왕철(왕嚞)에게 전수하였고, 왕철은 일곱 제자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하나가 구장춘(丘長春)이며, 구장춘이 송도안(宋道安)ㆍ담처단(譚處端)ㆍ유처현(劉處玄)ㆍ왕처일(王處一)ㆍ학대통(郝大通)ㆍ마처옥(馬處鈺)ㆍ손불이(孫不二)에게 전수하였으니, 이것이 북종이다.
진(秦)ㆍ한(漢) 이후로 마침내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올라가 변화하는 도술이 있어서, 황정(黃庭) 대동(大同)의 법과 태상(太上)ㆍ천진(天眞)ㆍ목공(木公)ㆍ금모(金母)의 칭호와 단약(丹藥)ㆍ기기(奇技)ㆍ부주(符呪)ㆍ법록(法籙)으로 귀신을 잡고 부리는 것을 모두 도가로 돌리니, 이는 학자들이 그르친 것이다. 황로(黃老 황제와 노자)는 도가의 근본이고 방기(方技)는 도가의 말류이다. 노자 《도덕경》의 본뜻은 원래 육신을 단련하여 신선을 구하는 술이 아니었는데, 세상의 신선을 배우는 자들이 노자에게 가탁한 것이다. 이는 마치 선비가 글을 읽어 과거(科擧)에 응시하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유학의 가르침이다.’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잡도(雜道) 중에 시해(尸解)하는 한 법이 있다. ‘시해란 육신을 단련하여 마치 매미가 껍질을 벗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집선전(集仙傳)》에 “육신이 산 사람과 똑같은 것이 시해이며, 발이 푸르게 변하지 않고 살가죽이 쭈그러지지 않는 것이 시해이며, 안광(眼光)이 여전하여 산 사람과 똑같은 것이 시해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도 있고 염(斂)하기도 전에 시체를 잃어버린 자도 있으며 터럭이 벗겨지고 육신이 날라간 자도 있으니, 이것이 모두 시해이다. 한낮에 시해된 자가 최상이고 한밤중에 시해된 자가 최하이며 새벽에나 저녁에 시해된 자는 지하(地下)의 주(主)가 된다.” 하였다.
도서(道書)에 “시해가 다섯 가지이니, 금ㆍ목ㆍ수ㆍ화ㆍ토이다.” 하였다. 도경에 《시경해(尸解經)》이 있고 또 금단(金丹)을 만드는 학(學)이 있다.
도경에 《황백요경(黃白要經)》ㆍ《팔공황백경(八公黃白經)》과 《침중황백경(枕中黃白經)》5권이 있다. 헌원(軒轅 황제씨(黃帝氏))의 《술보장론(述寶藏論)》에는 20종의 금(金)이 있으며, 그후의 황백술은 《황정경》의 구전팔경단(九轉八瓊丹)인바, 곧 단가(丹家) 외단(外丹)의 비법(祕法)이다. 한(漢) 나라 회남자(淮南子)는 팔공(八公)과 함께 금약(金藥)을 점화(點化)했다는 말이 있는데, 유향(劉向)이 그 책을 얻어 시험하여 만들다가 이루지 못하고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면하였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오리(五利 방사(方士) 소옹(少翁)의 봉호)ㆍ문성(文成 방사 난대(欒大)의 봉호) 무리가 단사(丹砂)를 변화하여 수은(水銀)으로 만들고 수은을 변화하여 황금을 만든다는 말을 제창했으며, 또 부엌에 제사하여 약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했으나 이것 역시 효험이 없었다.
그후 포박자(抱朴子)와 도홍경(陶弘景)도 시험하였으나 끝내지 못하였고 오직 위백양(魏伯陽)이 시험한 결과 효험이 있어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 문득 금단의 조종(朝宗)이 되었다. 그러나 그 술(術)을 얻을 수 없어, 당(唐) 나라 유필(柳泌)은 시험하여 만들어서 복용했다가 피를 흘리고 죽었다. 임금으로 도사 파사매(婆娑寐)를 믿었던 당 태종(唐太宗)과 유필ㆍ경무(敬武)를 믿었던 헌종(憲宗)이 있는바, 이 두 임금은 모두 단약을 복용했다가 조갈증이 나서 숨졌는데, 백거이(白居易)에 이르러 깨진 화롯불을 보았다. 송(宋) 나라 반소요(潘逍遙 소요는 반낭(潘閬)의 호)가 방법을 올렸다가 태종(太宗)이 죽자, 벰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정자(程子)는 불복(佛腹)의 글을 얻어 화로를 시험해 보았고, 소자유(蘇子由 자유는 소철(蘇轍)의 자)도 시험해 보았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진희량(陳希良)의 부자는 부풍(扶風)에 사는 중에게 방법을 배워 크게 연단하는 화로를 만들었다가 대번에 화를 당하여 죽었으며, 부필(富弼)은 황백술(黃白術)을 적은 책을 쌓아 두었다가 뒤에 불에 넣어 태워버리고 크게 깨우쳤다. 양해(楊偕)ㆍ두순경(杜舜卿)ㆍ호숙(胡宿)에 이르러도 아울러 기이한 전수가 있었지만 하지 않았으며, 범중엄(范仲淹)은 동사생(同舍生 태학에 함께 있는 생도)에게 방법을 얻었고,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은 부풍의 중에게 방술을 얻었으나 끝내 시험하지 않았다. 근세에 청 성조(淸聖祖)가 남쪽 지방을 순행할 적에 강남(江南)에 사는 백성 왕구웅(王求熊)이 연금(鍊金)ㆍ양신(養身)하는 비서(祕書) 한 책을 바쳤으나 받지 않고 돌려 주었으니, 이것이 금단의 대략이다.
전설에 “금단을 만들 수 없고 생명은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이군실(李君實 군실은 이일화(李日華)의 자)은 말하기를 “세상에서 방사로써 금ㆍ은을 점화(點化)해서 세상에 오래 살고 소녀에게서 약을 취해 장생한다 하나, 이미 기욕(嗜慾)을 채우고 또 신선이 된다면 어찌 이처럼 편리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아! 옳은 말이다. 연단에도 위조(僞造)가 있으니, 좌자(左慈)의 행금단(杏金丹)과 허탄한 전진교(全眞敎)의 점묘(點茆) 따위를 세속에서는 제수(提手)라고도 하고 혹은 대강(臺扛)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이 술을 한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방사(方士)가 없기 때문이다.
또 교문(敎門)이 있는바, 게문(偈文)과 경(經)을 말하며 남녀가 뒤섞여 있는데, 그 조목은 백련(白蓮)ㆍ분향(焚香)ㆍ문향(聞香)ㆍ혼원(混元)ㆍ용원(龍元)ㆍ홍양(洪陽)ㆍ원통(圓通)ㆍ대승(大乘)이 있다. 산동(山東) 지방에는 분향ㆍ백련이 있으며 강남(江南)에는 장생(長生)ㆍ성모(聖母)ㆍ무위(無爲)ㆍ자단(糍團)ㆍ원과(圓果) 등 약 수십여 파가 있어서 각기 문호를 세워 서로 전수해 온다. 그 근원은 진인(眞人) 장도릉(張道陵)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장각(張角)을 시조로 삼는다. 앉아서 운기(運氣)를 공부하고 표문(表文)으로 하늘에 기도하는 것은 모두 도교의 「과의(科義)」로서, 이른바 성모(聖母)란 바로 두모(斗母)이고, 자단(糍團)이란 것은 바로 허정(虛靜)으로 천사(天師 장도릉의 존칭)가 즐기던 것이다. 용호산(龍虎山) 제사에 반드시 인절미[糍]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명(明) 나라 때에 노생(盧生)이란 자가 망령되게 위경(僞經)을 편찬하고는 《오부육책(五部六冊)》이라고 이름했었는데 근세에 그를 높여 노조(盧祖)라 하였다. 또 교비(敎匪)라는 것이 있는데 팔괘(八卦)로 표호(標號)를 지으니, 백련교(白蓮敎) 같은 따위이다. 백련교는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때에 난리를 일으킨바,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느라 온 국내가 소모되었으나 오히려 뿌리를 뽑지 못하였다.
현재 요도(妖道)에서 불식법(不食法)은 벽곡환(辟穀丸)을 말하고, 미리 일을 아는 것은 도우인(桃偶人 복숭아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을 말하고, 소단법(燒丹法)은 방중약(房中藥)을 말하고 점금술(點金術)은 축은법(縮銀法)을 말하고, 입명법(入冥法)은 말리근(茉莉根)이고, 신선을 부르는 것은 영귀(靈鬼)를 빌린 것이고, 반혼법(返魂法)은 여우와 도깨비를 부리는 것이고, 물건을 운반하는 것은 오귀(五鬼)의 술이고, 병인(兵刃)을 피하는 것은 철포삼(鐵布衫)이고, 사람을 유혹하여 나를 따르게 하는 것은 호선(狐仙)과 기이한 향(香)과 고수(蠱水)이다.
도가 외에 또 도가 같으면서 아닌 것이 있으니 곧 비건국(毗騫國)의 왕으로, 청(淸) 나라에서는 동객이사호이 파파왕(董喀爾寺乎爾把把王)이라고 칭한다. 《남사(南史)》ㆍ《북사(北史)》에 이르기를 “왕의 머리 길이가 3척이며 예부터 죽지 않았다. 저서가 있는데 불경과 같은 것으로 3천 자가 되며, 사람의 선악과 장래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한다. 남쪽 지방에서는 장경왕(長頸王)이라 호하며 그 자손의 수명은 일반인과 같다.” 하였다.
비건국에 대하여 《남사》에 이르기를 “이 나라는 양(梁) 나라 때에 알려진바, 돈손(頓遜)의 밖 큰 바다 섬 가운데에 있는데, 부남(扶南)에서 8천 리나 된다. 그 왕의 신장은 두 길이나 되며 목 길이가 3척이다. 예부터 죽지 않아 그 나이를 알지 못한다. 왕이 신성(神聖)하여 나랏사람의 선악과 장래의 일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속이는 자가 없다. 남쪽 지방에서 장경왕이라 호하며, 왕은 항상 누대에 거처하고 혈식(血食)하지 않으며 귀신을 섬기지 않는다. 그 자손의 수명은 일반인과 같고 오직 왕만이 죽지 않는다. 왕은 또한 천축(天竺)의 책을 만들었는데 3천 자가 되는바, 숙명(宿命)의 원인을 말한 것으로 불경과 비슷하며 아울러 선한 일을 논했다.” 하였다.
우리나라 도교도 연혁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도교가 없었던바, 《북사》에서 이미 말하였다. 그 처음 시작된 것은 고구려부터였으며 승조(勝朝 고려를 가리킨다)와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본조의 중엽에 이르러 혁파되어 영영 없어졌다.
《삼국사기》를 상고해 보면, 고구려 영류왕(榮留王)이 수 공제(隋恭帝) 의령(義寧) 2년(무인)에 즉위하여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16년(임인)에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시해되었다. 그 해에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이 왕에게 이르기를 “유(儒)ㆍ불(佛)ㆍ선(仙) 삼교(三敎)는 비유하면 마치 솥발과 같은 것인데, 지금 유교와 불교는 아울러 일어났으나 도교는 성하지 못하오니, 청하옵건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해 오소서.” 하니, 왕은 그 말을 따랐다. 영류왕 7년(갑신) 2월에 당 나라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어 왕을 책봉(冊封)하고 또 도사를 명하여 천존상(天尊像)과 도교를 보내와 노자의 《도덕경》을 강했으며, 8년(을유)에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어 불(佛)ㆍ노(老)의 교법을 배우게 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년(계묘)에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자, 황제는 도사 숙달(叔達)등 8명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의 《도덕경》을 하사하였다.
고려에 이르러는 이중약(李仲若)이 산에 들어가 선학(禪學)을 좋아하였다. 뒤에 항해하여 송(宋) 나라에 들어가서 황대충(黃大忠)을 따라 친히 도교의 요점을 전수받고 본국에 돌아와 상소하여 현관(玄觀 도관(道觀)의 별칭)을 설치하여 국가의 재초(齋醮)하는 곳을 삼으니, 복원궁(福源宮)이 바로 그것이다.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면, 고려에는 도관이 없었는데 휘종(徽宗)의 대관(大觀) 때에 조정에서 도사를 보내어 고려에 가서 마침내 복원궁을 세우고 도사 70여 명을 두니, 이는 예종(睿宗) 때 무자년(1108, 예종 3)ㆍ기축년(1109, 예종 4) 사이였다. 고려 인종(仁宗) 신해년(1131, 인종 9)에 노장(老莊)의 학을 배우는 것을 금지했으며, 신라와 백제에 있어서는 역사 책에 나오지 않는다.
본조에 들어와《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을 보면, 10가지의 도류(道流)를 뽑는데, 금단(禁檀)을 외고 《영보경(靈寶經)》ㆍ《과의(科義)》ㆍ《연생경(延生經)》ㆍ《태일경(太一經)》ㆍ《옥추경(玉樞經)》ㆍ《진무경(眞武經)》ㆍ《용왕경(龍王經)》중에서 세 경을 읽었다. 소격서(昭格署)를 서울의 삼청동(三淸洞)에 두고 삼청(三淸)의 초제(醮祭)를 관장하게 하고 제조(提調)ㆍ영(令)ㆍ별제(別提)ㆍ참봉(參奉)을 두었으며, 또 자수궁(慈壽宮)을 설치하고 여도사(女道士)가 거주하였다. 중종(中宗) 기묘년(1519, 중종 14)에 삼사(三司 홍문관(弘文館)ㆍ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에서 간하여 폐지하였다가 을유년(1525, 종종 20)에 다시 세웠으며, 임진 왜란 이후에 영영 폐지되었다.
또 태일전(太一殿)이 의성현(義城縣) 동쪽 빙산(氷山)에 있는바, 매년 상월(上元 정월 보름)에 강향(降香)하여 제사하다가 성종(成宗) 기해년(1479, 성종 10)에 태안(泰安)의 백화산(白華山)에 옮기고는 인하여 강향을 폐지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 도교의 전말이다.
또 수련(修鍊)에 대한 한 가지 말이 《전도록(傳道錄)》에 실려 있는바, 신돈복(辛敦復)이 그 일을 기록하였다. 인조(仁祖) 때에 한 중이 관동(關東 강원도(江原道) 지방에 놀러 갔다가 구류되어 관청에게 수색을 당한 결과 책 한권을 내놓았는데 제목을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이라 하였다. 고을 원이 이 책을 택당(澤堂) 이식(李植)에게 보내자 택당은 위하여 한 글을 붙여 세상에 전하였다. 여기에 말하기를 “당 문종(唐文宗) 개성(開成) 때에 신라의 최승우(崔承祐)ㆍ김가기(金可紀)와 중인 자혜(慈惠) 등이 당 나라로 유학가서 종남 천사(終南天師) 신원지(申元之)와 교분을 맺었다. 신원지는 선인(仙人) 종리 장군(鍾離將軍)에게 소개하니, 그는 말하기를 ‘신라에는 도교의 인연이 없어서 다시 8백 년을 지난 다음에야 마땅히 환반(還反)의 지결(旨訣)이 있어서 저들에게 선양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도교가 더욱 성하여 지선(地仙) 2백이 나와 온집이 하늘로 올라가서 신선이 되어 도교를 크게 할 것이다.’ 하고는 세 사람에게 도법을 전수해 주니, 《청화비문(靑華祕文)》ㆍ《영보필법(靈寶畢法)》ㆍ《팔두오악결(八頭五岳訣)》ㆍ《금고(金誥)》ㆍ《내관(內觀)》ㆍ《옥문보록(玉文寶籙)》ㆍ《천둔(天遁)》ㆍ《연마법(鍊魔法)》등의 책과 구결(口訣)이 있었으며, 또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와 《황정경(黃庭經)》ㆍ《용호경(龍虎經)》ㆍ《청정심인경(淸淨心印經)》과 연등(燃燈)이 있는데 서로 전수하여 명맥을 전한다.” 하였다.
최고운(崔孤雲 고운은 최치원(崔致遠)의 호)도 당 나라에 들어가 환반(還反)하는 학설을 얻어 전하여 아울러 우리나라 단학(丹學)의 시조가 되었으니, 그 가장 뛰어난 것은 《참동계》의 16가지 구결이다. 단학파 중에 저서하여 전수한 것으로 정염(鄭)의 《단가요결(丹家要訣)》, 권극중(權克中)의 《참동계주해(參同契注解)》, 이지함(李之菡)의 《복기문답(服氣問答)》, 곽재우(郭再祐)의 《복기조식진결(服氣調息眞訣)》이 그 관건이며, 근세에 허미(許米)가 단학에 대한 공부를 깊이 깨달아 도교의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니, 이는 단학의 시말(始末)이다.
또 시해(尸解) 한 파가 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시해가 다섯 가지인바, 곧 금ㆍ목ㆍ수ㆍ화ㆍ토 다섯 가지의 시해이다. 신라의 석현준(釋玄俊)이 당 나라에 들어가 그 법을 배워 보사 유인(步舍游引)하는 술을 저술하였다. 최고운 역시 중국에 유학하여 그 법을 얻었으나 우리나라에 돌아온 다음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현준(玄俊)에게 배우니, 현준은 바로 그의 외삼촌으로 가야 보인법(伽倻步引法)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 또 양수 시해(量水尸解)와 송엽 시해(松葉尸解)가 있는바, 이 법 역시 4, 5가지로 나뉘었으니, 이는 모두 도가의 지말(枝末)이다.
그 전도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 종리권(鍾離權)이 신라 사람 최승우ㆍ김가기와 중 자혜에게 전수하였으며, 최승우는 최고운과 이청(李淸)에게 전수하였고, 이청은 명법(明法)에게 전수하였으며, 명법은 다시 자혜에게 전수하여 그 요점을 모두 얻었다. 자혜는 권청(權淸)에게 전수하였고, 권청은 원(元) 나라 설현(偰賢)에게 전수하였으며, 설현은 김시습(金時習)에게 전수하였고, 김시습은 홍유손(洪裕孫)에게 《천둔검법(天遁劍法)》과 《연마진결(鍊魔眞訣)》을 전수하였으며, 또 옥함(玉函)에다가 단약을 만드는 요점을 기록하여 정희량(鄭希良)에게 전수하였고, 《참동계》ㆍ《용호경》의 비지(祕旨)를 윤군평(尹君平)에게 전수하였다. 윤군평은 곽치허(郭致虛)에게 전수하였고, 정희량은 중 대주(大珠)에게 전수하였으며, 대주는 정염(鄭)과 박지화(朴枝華)에게 전수하였다. 홍유손은 밀양(密陽)에 사는 과부 박씨(朴氏) 묘관(妙觀)에게 전수하였고, 묘관은 강귀천(姜貴千)과 장도관(張道觀)에게 전수하였으며, 곽치허는 한무외(韓無畏)에게 전수하였다. 권 청은 남궁두(南宮斗)에게 전수하고 또 조운흘(趙云仡)에게 전수하였다.
스승의 전수없이 여러 책에 흩어져 나오는 것으로는 남추(南趎)ㆍ최탕(崔湯)ㆍ장세미(張世美)ㆍ강귀천과 단양(丹陽)의 이인(異人), 이광호(李光浩)ㆍ갑사(岬寺)에 사는 중과, 김세마(金世麻)ㆍ문유채(文有彩)ㆍ정지승(鄭之升)ㆍ이정해(李廷楷)ㆍ곽재우ㆍ김덕량(金德良)ㆍ이지함ㆍ정두(鄭斗) 등 여러 사람인데, 듣고 보는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산만하여 차서가 없다.
도가가 당초에는 선도(仙道)가 아니고 구류(九流)에 나열된 것이었는데, 후세에는 마침내 신선을 도교라 하여 점차 방기(方技)의 유(流)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변증이 없을 수 없다. 신선도 다섯 종류가 있으며 도사도 다섯 등급으로 나뉘어진다.
천선(天仙)이란 여러 겁(劫)을 수행하여 일찍부터 영근(靈根)과 혜성(慧性)을 간직하고 선(善)한 가문에 의탁하여 태어나서 천진 그대로 도(道)에 들어간다. 지인(至人)이 무상(無上)한 한 가지 방편을 전해 주어, 하늘과 땅을 화로와 솥으로 삼고 해와 달을 물과 불로 삼아 청정(淸靜)하고 자연스러워 내외가 지극히 순수하며 삼계(三界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뛰어나 우리[樊籠]를 타파하니, 이는 바로 하늘을 의지하여 하늘에서 나온 자이다.
지선(地仙)이란 올바른 행실을 반드시 실천하고 뜻은 세속을 떠날 결심이 굳어 장년기에 도를 배워서 조화의 기이한 것을 환히 알고 생물의 이치를 안다. 단약을 연단하고 약을 먹어 장생해서 육신을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러 두어 육지에서 신선을 행하니, 이는 바로 땅을 의뢰하여 땅을 얻은 자이다.
신선(神仙)이란 날 때부터 선풍 도골(仙風道骨)이 있어 크게 충성하고 크게 효도하여 공을 많이 쌓고 행실을 닦는다. 소년에 도를 사모하여 진세(塵世)에서 살기를 싫어하고 명산 복지(名山福地)에 들어가 정(精)을 연마하여 기(氣)로 만들고 기를 연마하여 신(神)으로 만들고 신을 연마하여 허(虛)로 만들어, 먼저 옥액(玉液)을 수련하고 뒤에 금단(金丹)을 연단하여 음이 다하고 순전히 양만 있어, 범인(凡人)을 초월하여 성인에 들어간다. 형(形)ㆍ기(氣)를 분화하여 유유자적하게 소요(逍遙)하니, 이는 바로 신을 연마하여 신으로 돌아온 자이다.
인선(人仙)이란 겸손하고 공경하는 것으로 자기를 지키고 사람과 함께 하기를 잘한다. 중년과 말년에 명리(名利)에 대한 기심(機心)이 없어서 환경을 대하면 정욕을 잊어 운기(運氣)로 명을 접속시킨다. 납[鉛]을 뽑아 내고 수은을 더하여 감(坎)을 취하여 이(离)를 메운다. 토해내고 들이마시는 것을 때에 따라하고 도인(導引)으로 뼈마디를 단련해서 심신이 안락하여 병을 물리치고 수명을 연장하니, 이는 사람을 빌어 사람을 구제하는 자이다.
귀선(鬼仙)이란 성품이 본래 용렬하여 대도(大道)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한 가지 화두(話頭)를 갖고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여 식신(識神)이 깨치는 것을 한 경지로 삼으며, 혹은 재계(齋戒)를 잘 지켜 육신은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꺼진 재와 같아서 선정(禪定)할 때에는 음신(陰神)이 나올 수 있고 죽은 뒤에는 정령(精靈)이 흩어지지 않아 능히 투태(投胎)하고 탈사(奪舍)하니, 이는 바로 순전히 음뿐이고 양이 없어 끝내 귀신의 기미를 떠나지 못한 자이다.
이것이 바로 선도의 다섯 가지 종류로서 천선ㆍ지선ㆍ신선ㆍ인선ㆍ귀선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 천선과 지선은 절대로 배우기 어렵고 신선이나 인선에 이르면 약간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범속하고 고루한 것을 뛰어넘고 벗어나지 않으면 결코 바랄 수 없으니, 《참동계》의 환반하는 지결을 자세히 읽으면 반드시 할 수 있다. 귀선으로 말하면 끝내 귀신의 기미에 들고 마니, 이것은 비록 각각 다섯 신선 가운데 나열되긴 하지만 어찌 할 만한 것이겠는가.
예로부터 신선이 신을 내는 것에 대해서는 딴 특별한 말이 없다. 신은 이미 나의 원신(元神)이니 금액(金液)을 점화해서 따뜻하게 10개월을 기르면 기(氣)가 충족하고 신이 신령스러워 환골 탈태를 하고 스스로 나와, 몸 밖의 몸을 가져서 빛이 구천(九天)에 비추니, 이는 존상법(存想法 나의 신을 보존하여 나의 몸을 생각하는 것)에 비할 수 없는 것으로 실로 양신(陽神)의 광(光)이다. 귀신은 볼 수도 없는 것이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귀신을 만일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이는 음신과 같은 것이요 양신이 아니다. 10개월의 공이 완전하여 불 온도가 어그러지지 않으면 기가 충족하고 신이 온전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자유로이 한다. 몸 밖의 몸이란 바로 법신(法身)으로, 모이면 형체가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기가 이루어진다. 음신은 능히 분신(分身)하거나 화형(化形)하지 못하지만 양신은 한 몸으로 백만 개의 몸이 되어 각기 음식할 수도 있고 사물을 응접할 수도 있으며, 사람이 그를 합치면 다시 하나가 되니, 이른바 ‘성스러워서 알 수 없는 것을 신이라 한다.[聖而不可知之之謂神]’는 것이다. 은현(隱顯)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변화가 무쌍하여 해와 달 아래서 걸어도 그림자가 없고 쇠나 돌에 들어갈 때에도 장애가 없으며 천리 만리를 순식간에 도달하고 과거와 미래를 일일이 모두 알아야만 바야흐로 양신이 될 수 있다. 양신은 출입할 때에 모두 정문(頂門)을 말미암으니, 아, 훌륭하다. 반환(反還)의 도여! 천지와 똑같이 훌륭한데 사람만이 능하니, 천지 사이에 무엇이 사람보다 신령스러운 것이 있겠는가.
도사에 있어서도 다섯 가지 등급이 있다. 《삼동도과(三洞道科)》에 이르기를 “도사가 다섯 가지이니, 첫째는 천진도사(天眞道士)로 고현(高玄)ㆍ황인(黃人)의 따위이고, 둘째는 신선도사(神仙道士)로 두충(杜沖)ㆍ윤궤(尹軌)의 예이고, 셋째는 산거도사(山居道士)로 허유(許由)ㆍ소보(巢父)의 무리이고, 넷째는 출가도사(出家道士)로 송윤(宋倫)ㆍ팽심(彭諶)의 무리이고, 다섯째는 재가도사(在家道士)로 황경(黃瓊)ㆍ전갱(籛鏗)의 무리이다.” 하였다.
도가에서 이미 노자를 높여 조종으로 삼았으니, 노군의 내력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여러 말을 수집하여 중복되는 것을 따지지 않고 그 기록한 바를 따라서 근본 학설을 보존하려 한다.
노자에 대하여 진(晉) 나라 이석(李石)의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노군의 어머니가 일찍이 태양의 정기가 유성(流星)처럼 낙하하여 입 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이때부터 임신하여 72년 만에 진(陳) 나라 와수(渦水)의 오얏나무 아래에서 낳았는데, 왼쪽 겨드랑을 찢고 나왔으며 몸 길이가 12척이었다.” 하였다.
주 정왕(周定王) 3년(정사)에 노자가 출생하였는데, 《유서(類書)》에 이르기를 “노자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耳)이며 또는 담(聃)이라고도 하고 또는 백양(伯陽)이라고도 하는바, 초(楚) 나라 고현(苦縣) 뇌향(瀨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가 밤에 오색 진주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진주를 삼켜 임신해서 뱃속에 있은 지 81년 만에 오얏나무 아래에 소요하다가 그를 해산하게 되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왼쪽 겨드랑을 찢고 나와서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나의 성이다.’ 하였다. 신장이 8척 8촌이며 살갗이 황색이고 눈썹이 아름다우며 귀가 길고 눈이 크며 이마가 넓고 이빨이 성기며 입이 네모지고 입술이 두터우며 이마에는 삼오(三五)의 달리(達理)가 있고 일월각(日月角)이 또렷하며 코에는 쌍주(雙柱)가 있고 귀에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발로는 이오(二五)를 밟고 손에는 십문(十文)을 잡고 있었다.” 하였다.
노담이 산림에 있을 적에 공자(孔子)가 보고는 “유신(游神 정신을 쓰고 있는 것)하는 바를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노담은 “나는 현재 물건의 태초(太初)에 유신하고 있다.” 하였다. 공자는 “나는 새는 화살로 잡을 수 있고, 달아나는 짐승은 그물로 잡을 수 있으며,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로 잡을 수 있지만, 용에 있어서는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어쩔 수가 없으니, 노자는 그 용과 같다.” 하였다.
노자는 주(周) 나라가 쇠망하는 것을 보고는 푸른 소를 타고 관(關)을 나가니 자주빛 기운이 떠 올랐다. 윤희(尹喜)를 위하여 《도덕경》을 지었다. 양읍(襄邑)의 남쪽 뇌향(瀨鄕)에 노자의 사당이 있으며 사당 안에 아홉 개의 우물이 있는데, 능히 청결하게 재계하고 이 골짝에 들어오는 자는 더운 물과 시원한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며, 한 우물에 물을 뜨면 아홉 개의 우물이 모두 움직인다 한다.
윤희는 주 나라 대부(大夫)로 관을 맡았다. 그의 어머니가 낮 꿈에 하늘에서 붉은 비단을 내려 자기 몸을 감싸는 꿈을 꾸었다. 진인(眞人 윤희를 가리킨다)이 태어날 때에 육지에 있던 그 집에서 즉시 연꽃이 나왔는데 빛깔이 몹시 고왔다. 눈에는 태양의 정기가 있었으며 키가 크고 모습이 단아하며 팔이 무릎 아래까지 드리워서 당당히 천인(天人)의 용모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수많은 서적을 관장하고 있었으며, 천문(天文)과 비위(祕緯 비밀스러운 위서(緯書))를 잘 알아 위로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를 살펴서 모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비록 귀신도 그 참모습을 숨길 수 없으므로 노자가 감탄하였다 한다.
진강(陳剛)의 자는 무욕(無欲)이며 별호는 진무귀(陳无鬼)이다. 그의 말에 “노자는 주 나라 말기에 출생하였는바, 바로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영보현(靈寶縣) 지방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광(廣)으로 시골의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잣집에서 품팔이하며 나이가 70이 넘도록 아직 아내가 없었으며, 노자의 어머니 역시 시골 어리석은 부인으로 나이가 40이넘도록 아직 남편이 없었다. 이들은 우연히 산중에 있다가 구차히 결합하였는데, 천지의 영기를 얻어 노자를 밴 지 80개월이나 되었다. 그의 주인은 임신 기간이 오랜 것을 미워하여 집에 있지 못하게 하므로 부득이 들판의 큰 오얏나무 아래에 달려가서 머리털이 희고 눈썹이 흰 한 아들을 낳았다. 그 어머니는 남편인 광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곧 오얏나무[李]를 가리켜 성을 하였으며 귀가 큰 것을 보고는 마침내 이(耳)라 이름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의 머리털이 흰 것을 보고 노자(老子)라 불렀다. 장성하자 주 나라 천자가 관람하는 장서각의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는데, 고사와 고례(古禮)를 많이 알고 있었던 까닭에 공자가 그에게 예를 묻고 벼슬을 물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이가 들자 주 나라 황실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보고는 마침내 푸른 소를 타고 서쪽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 관문을 지키는 윤희를 만나 스승이 되어 《도덕경》 5천 자를 짓고는 마침내 진천(秦川) 주질현(盩厔縣)에서 죽어, 그 무덤이 이곳에 있으니, 이것이 노자의 본말이다. 생전에 능히 주 나라 황실의 혼란을 구원하지 못하고 또 터럭끝 만한 공업을 세상에 세우지 못했는데, 죽어서는 마침내 도리어 천상의 삼청(三淸)이 되었다 하니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현묘내편(玄妙內篇)》에 “노자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다.” 하였다. 《노사(路史)》소호기지(少昊紀志)에 “노자의 아버지는 건원고(乾元杲)로 나이가 72세였으나 아내가 없었는데, 이웃 사람 익수(益壽)와 야합(野合)하여 임신한 지 10년 만에 노자를 낳았다.” 하였다. 위(魏) 나라 최홍(崔鴻) 이 지은《전량기(前涼記)》에는 “노자의 아버지는 이름이 건(乾)이고 자가 원고(元杲)로 배안의 발병신에 귀가 없으며 한쪽 눈은 밝지 못하고 고단하여 나이 72세가 되도록 아내가 없었는데, 이웃 사람 익수씨(益壽氏)의 늙은 여자와 야합하여 임신한 지 80년 만에 마침내 노자를 낳았다.” 하였다. 《현묘내편》에 “노자가 처음 낳았을 때의 이름은 현록(玄祿)이다” 하였고, 하상공(河上公)은 이르기를 “노자의 일명은 중이(重耳)이다.” 하였으며, 《사기》에 “노자의 자는 담(聃)이다.” 하였다.
《원화지(元和志)》에 “노자의 어머니 사당이 진원현(眞元縣) 동쪽 14리에 있다. 건봉(乾封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원년에 책봉하여 선천태후(先天太后)라 호하였으니, 노자의 어머니이다.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으로 위(魏) 나라 장수가 되었다. 종의 아들은 주(注)이고 주의 아들은 관(官)이며 현손 가(假)는 한 문제(漢文帝)에게 벼슬하였다.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膠西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자손들이 대대로 현달하였으며 모두 충효(忠孝)로 가문을 계승했다. 박주(亳州)에 노군의 비(碑)가 있다.
노군(老君) 뒤에 장도릉(張道陵)이란 자가 있었는데, 호가 천사(天師)로 도교의 괴수가 되었으니, 이 역시 그 사실을 간략히 기재하지 않을 수 없다.
장천사 도릉의 자(字)는 보한(輔漢)으로 장량(張良)의 자손이라 하기도 하며, 아니라고도 한다. 이응(李膺)의 촉서(蜀書)에 “장도릉이 뱀에게 먹히어 상승(上昇)하였다는 설은 잘못이다. 도릉 이후 대대로 부첩(符牒)과 기초(祈醮)를 맡아 일삼아 왔으며, 또 송(宋)ㆍ원(元) 시대로부터는 천사라는 직호(職號)를 수여했다가 명(明) 나라 초기에 진인(眞人)으로 호를 고쳤는데, 품계(品階)가 정2품(品)이다. 공자(孔子)의 자손에게 대대로 연성공(衍聖公)을 수여한 것과 같으나, 반열(班列)이 연성공의 위에 있어서 도교를 높이는 것이 성인(聖人 공자를 말한다)을 높이는 것보다 중히 했다.” 하였다.
청(淸)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때 강서(江西)의 수신(守臣 지방을 맡은 관원)이 말하기를 ‘장씨에게 직함과 인장(印章)을 주는 것이 법전에 실려 있지 않으니, 길이 폐지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따라 조칙으로 진인이라는 호를 버리고 상청관 제점(上淸觀提點)이라 했었는데,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초기에 다시 회복하여 지금까지 내려온다.” 하였다.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12년(정묘)에 복준(覆準)하기를 “강남(江南)의 장씨가 용호산(龍虎山)에 세거(世居)하는바, 진인이란 칭호는 조관(朝官)의 경(卿)이나 윤(尹)의 칭호가 아닙니다. 그 옛 명칭을 그대로 두는 것은 바로 유품(流品 품계가 있는 일반 관리)과 구분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진실로 상고할 만한 옛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특별한 은혜를 받아 품계가 광록대부(光祿大夫)에까지 이르고 3대(代)나 봉해 준 것은 너무 분수에 지나친 영광이므로 의리상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정일 진인(正一眞人)으로 말하면 용호산의 상청궁(上淸宮)에 있는 도교의 신도를 통솔할 책임이 있으니, 도법을 전하는 제점(提點)보다는 약간 낫습니다. 상고하옵건대, 태의원 사(太醫院使)의 품계가 정5품이니, 의원이나 무당은 본래 서로 비등합니다. 그러니 정일 진인 역시 당연히 정5품을 수여해야 합니다. 조근(朝覲)이나 연회에 참예하는 것 역시 불편하니, 도류(道流)들을 이 사이에 참예하게 하는 것도 일체 정지해야 합니다.” 하였다.
1행
자고로 황로(黃老)와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한 연 소왕(燕昭王)ㆍ제 선왕(齊宣王)ㆍ진 시황(秦始皇)ㆍ한 무제(漢武帝) 같은 역대의 제왕은 먼 옛날이니 말할 것 없고, 도교를 높인 것은 당 현종(唐玄宗)보다 심한 자가 있지 않다. 당 현종 천보(天寶) 원년에 황제는 친히 노자에 제향하고 현원황제(玄元皇帝)로 봉했으며, 몸소 어버이 사당에 제향하고는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 문자(文子)를 통현진인(通玄眞人), 열자(列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에, 경상자(庚桑子)를 동허진인(洞虛眞人)에 봉하여 배향하였다. 처음에 태청궁(太淸宮)이 완성되자 기술자를 명하여 태백산(太白山)에서 흰 돌을 캐다가 현원황제의 상(像)을 만들어 남향하고 좌우에 현종과 숙종(肅宗 현종의 아들)의 상이 모시고 서 있게 하였다.
송 진종(宋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무신)에 천서(天書)를 얻었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신인(神人)이 성관(星冠 도사가 쓰는 관)과 붉은 옷을 입고 나에게 고하기를 ‘마땅히 천서를 내릴 것이니, 정전(正殿)에다가 황록도량(黃籙道場)를 베풀라.’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조원전(朝元殿)에서 재계하고 신의 주문(呪文)을 저장해 두었다. 그런데 마침 황성사(皇城司)에서 아뢰기를 ‘왼쪽 승천문(承天門) 지붕의 남쪽 귀퉁이에 황색 비단이 치미(鴟尾)위에 내려져 있다.’ 하므로 궁중의 사신을 시켜서 가보게 하였더니, 비단 길이가 두 길쯤 되는데 푸른 끈으로 묶여져 있으며 은은히 글자가 있었다.” 하였다. 재상인 왕단(王旦) 등이 재배하고 축하하니, 황제는 도보로 승천문에 이르러 우러러보고 재배한 다음, 진극수(陳克叟)를 시켜 읽게 하였다. 이 천서는 황색 글자로 3폭에 씌어져 있었는데 황금 궤에 넣었다가, 25년인 건흥(乾興) 원년(임술)에 황제가 붕(崩)하자 천서를 순장(殉葬)하였으니, 이 역시 도교를 높인 것의 하나이다.
휘종(徽宗) 중화(重和) 원년(무술)에 태학(太學)과 벽옹(辟雍 학궁(學宮)의 하나)에 각각 《황제내경(黃帝內經)》ㆍ《도덕경》ㆍ《장자》ㆍ《열자》에 대한 박사(博士) 1명을 두게 하였다. 채경(蔡京)이 “고금의 도교에 관한 일을 모아 기지(紀志)를 만들자.” 하니, 이에《도사(道史)》라는 명칭을 하사하고는, 장주(莊周)를 봉하여 미묘원통진군(微妙圓通眞君)을 삼고, 열어구(列禦寇)를 치허관묘진군(致虛觀妙眞君)에 봉하여 책명(冊命)을 행하고 혼원 황제(노자)에 배향하였다. 이때 임영소(林靈素)라는 도사가 있어서 존숭하는 일을 맡았다.
《송사(宋史)》 영소전(靈素傳)에 “본명은 영악(靈蘁)이었는데 선화(宣和 송 휘종의 연호) 때에 지금의 이름인 영소로 사명(賜名)하였다. 영소는 채경을 북부육동(北部六洞)의 마왕(魔王)과 제이동(第二洞)의 대귀두(大鬼頭)라 하고 동관(童貫)을 비천대귀모(飛天大鬼母)라 하여 황제에게 벨 것을 권하였다. 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를 보고는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시를 지어 올렸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소와 황이 문장가가 되지 못하고 / 蘇黃不作文章客
동과 채가 도리어 사직신 되었구려 / 童蔡飜爲社稷臣
삼십 년 동안 정론이 없었으니 / 三十年來無定論
간당이 누구인지 알 수 없네 / 不知姦黨是何人
그 다음날 황제는 이것을 채경에게 보이니, 채경은 황공해서 밖으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그의 관직은 ‘고상신소옥청부 우극서대선경 뇌정옥추원명 보화천사 동명문일계원응진전도보교종사 금문우객 충화전시신 행시진태재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 노군 개국공(高上神宵玉淸府右極西臺仙卿雷霆玉樞元明普化天師洞明文逸契元應眞傳道輔敎宗師金門羽客沖和殿侍宸行時進太宰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魯郡開國公)’이며 봉읍(封邑)이 8천 7백 호로서 실봉이 3천 호였고, 자옥방부통진달령원묘호국선생(紫玉方符通眞達靈元妙護國先生)이란 호를 하사하였다. 정화(政和) 7년(정유)에 휘종은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라 존칭했다.” 하였다. 원 성종(元成宗)은 방사(方士) 장여재(張與材)를 태소응신광도진인(太素應神廣道眞人)으로 삼아 강남 여러 도(道)의 도교를 통솔하게 하였다.
무릇 역대의 여러 임금들이 도교를 존숭하기는 쉬웠고 도교를 배척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불교를 높이고 도교를 배척하는 것을, 이단(異端)을 물리친 것이라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몽고(蒙古)의 헌종 몽가(憲宗蒙哥) 때에 북지(北地) 장춘궁(長春宮)의 도사가 번승(番僧)과 혐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번승은 달단(韃靼)의 임금을 달래면서 말하기를 “도경(道經)은 위작이고 황당한 말들입니다. 몽가 때에 도사가 불교를 배척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머리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도경을 불살라야 합니다.” 하였다. 달단의 임금은 과연 남군(南郡)ㆍ북군(北郡)에 있는 도장경(道藏經)을 불살라버리고 다만 노자의 《도덕경》을 허락했으며, 거의 도사를 멸하여 머리 깎고 중을 만들었다. 명 성조(明成祖)는 금단(金丹)과 도경의 책을 훼손하였다.
도교의 시초는 천전 도서(天篆道書)가 있는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그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수서》경적지에 “도경이란 맨 처음에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있었는데, 태원(太元)보다는 먼저 태어났고 자연의 기(氣)를 부여받아 충허(沖虛 회포가 담박하고 공허한 것)하고 응정(凝定) 원대하여 궁극을 알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지느니 겁수(劫數)가 끝나느니 하는 말은 대략 불경과 같다. 그들은 말하기를 ‘천존의 체(體)가 언제나 존재하고 불멸하여 매양 천지가 처음 개벽하게 되면 혹은 옥경(玉京)의 위, 또는 궁상(窮桑)의 들에 있어서 비도(祕道)를 전하는데 이를 개겁(開劫)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다.’ 한다. 그러나 이 개겁은 한 차례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연강(延康)ㆍ적명(赤明)ㆍ용한(龍漢)ㆍ개황(開皇)이 있는바, 이것이 그 연호이다. 이 사이의 거리는 41억만 년이다.
구제해 주는 대상은 모두 여러 천선(天仙)의 상품(上品)으로서 태상노군(太上老君)ㆍ태상장인(太上丈人)ㆍ천진황인(天眞皇人)과 오방(五方)의 천제(天帝) 및 여러 선관(仙官)이 있어서 서로서로 전수해 받는데 일반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 끼지 못한다. 이들이 말한 경(經) 역시 원일(元一)의 기(氣)를 받고 자연히 생긴 것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어서 이것도 천존과 같이 항상 존재하고 불멸한다. 그리하여 천지가 파괴되지 않으면 깊이 쌓여 있어 세상에 전하지 않다가 만일 겁운(劫運)이 열리게 되면 그 글이 스스로 나타난다.
이 글은 모두 여덟 글자로서 도체(道體)의 심오한 이치를 묘사한 것인데, 이를 천서라 한다. 글자는 크기가 사방 한 길쯤 되는데 8각에서 빛이 나와 광채가 휘황찬란한바, 자연히 마음이 놀라고 눈이 현황하여 비록 여러 천선(天仙)이라 하더라도 능히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천선이 개겁할 때에야 천진황인을 명하여 천음(天音)으로 고쳐 읽어 분석한 다음, 천진황인으로부터 여러 신선에 이르기까지 서로서로 계급을 두고 순서에 따라 전수해 준다. 그리하여 여러 신선이 전수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에 전수된다.” 하였다. 이는 바로 도교의 본말인바, 세속의 선비들이야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
1행
도가의 글씨는 32종이 있다. 명 나라 진계유(陳繼儒)의 《미공비급(眉公祕笈)》에 도가의 글씨를 기록하고는 “도가의 자학(字學)은 삼동경(三洞經) 교부(敎部)에 나온다.” 하였는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본부(本部) 운전(雲篆) 팔체육서문(八體六書文) 부자(符字) 팔현(八顯) 옥자결(玉字訣) 황문제서(皇文帝書) 천서(天書) 용장(龍章) 봉문(鳳文) 옥첩금서(玉牒金書) 석자(石字) 제소(題素) 옥자(玉字) 옥록(玉籙) 옥편(玉篇) 문생동(文生東) 옥찰(玉札) 단서(丹書) 옥책(玉策) 복운지서(福運之書) 낭규경문(琅虯璚文) 백은지륜(白銀之綸) 적서(赤書) 화련진문(火鍊眞文) 금호묵집자(金壺墨汁字) 경찰(瓊札) 자자(紫字) 자연지자(自然之字) 사회성자(四會成字) 낭간예서(琅簡蕊書) 석공(石碽).
보유(補遺)로는 무광(務光)의 도해서(倒薤書)와 석상선전(石上仙篆)이 있다.
《집고록(集古錄)》에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선전(仙篆)을 논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복주(福州)의 영태현(永泰縣)에 무명의 전서(篆書)가 관음원(觀音院) 뒷산 위에 있는데, 세속에서는 선전이라고 전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조금도 전각한 흔적이 없어서 마치 사람이 손가락으로 진흙에 글자를 만든 것 같으며, 둥근 돌 모양을 따라 수레 바퀴처럼 원형으로 씌어져 있어서 머리와 끝을 알지 못한다.”

도경(道經)
도가의 경(經)은 권질(卷帙)이 매우 많아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할 만하다.
송 나라《삼조국사지(三朝國史志)》에는 반고(班固)의 《한서》 예문지의 도가(道家) 외에 다시 신선을 열거해 놓고는 방기(方技)에 넣었다. 동한(東漢) 이후에 도가가 비로소 나타났는데, 진선(眞仙)의 경고(經誥)가 특별히 나왔다. 당 나라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때에 이 책들을 열거하여 도장(道藏)의 서목을 만들고 삼동경망(三洞瓊網)이라 한바, 총 3천 7백 44권이었다. 그 후 난리통에 혹은 파손되고 없어지기도 했었는데, 송 나라에서 다시 관원을 보내어 대조한바, 이 사실이 《노석지(老釋志)》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일찍이 이 서적을 구하여 7천여 권을 얻은 다음, 서현(徐鉉) 등을 명하여 교수(校讐)하게 하여 이 중에 중복된 것을 버리고 3천 7백 37권으로 만들었다. 송 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때에 왕흠약(王欽若) 등을 명하여 옛 서목을 대조해서 삭제도 하고 보충도 하니 모두 4천 3백 59권이었다. 동진부(洞眞部)가 6백 20권, 동원부(洞元部)가 1천 13권, 동신부(洞神部)가 1백 72권, 태진부(太眞部)가 1천 4백 7권, 태평부(太平部)가 1백 92권, 태청부(太淸部)가 5백 76권, 정일부(正一部)가 3백 70권인데, 이를 합하여 신록(新錄)을 만드니, 총 4천 3백 59권이며, 6부(部)가 3백 11가지였다. 또 편목(篇目)을 찬하여 올리니, 《보문통록(寶文統錄)》이라 사명(賜名)하였다.
《수서》 경적지에는 도경의 서목을 사부(四部)의 끝에 넣었으며, 당 나라 관소록(毋昭錄)에는 을부(乙部)와 병부(丙部)에 산재해 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도가에서 말하기를 삼동(三洞)과 삼태(三太)가 모두 옥경(玉京 옥황상제가 살고 있다는 선경)에 있다 하는데, 상진(上眞)만은 구해 볼 수가 없으며, 장군방(張君房)이 수집한 도서는 모두 4천 5백 65권이었는데, 숭관(崇觀 송 휘종의 연호인 숭녕(崇寧)ㆍ대관(大觀)) 사이에 증가되어 5천 3백 87권에 이르렀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도서(道書)에 1권을 규(㢧)로 쓰는데 《진고(眞誥)》에는 권(卷)과 같이 쓴다 하였다. 혹은 규()로도 쓰는데 《정자통(正字通)》에 “음은 주(周)이다. 도서에 1권을 1규()라고 하는바, 도구성(陶九成 구성은 도 종의 (陶宗儀)의 자)의 《설부(說郛)》에 썼다.” 하였다. 구본(舊本) 《자휘보(字彙補)》의 일설(一說)에는 규()는 곧 권(券)자라고 하였으며, 《자전(字典)》에는 양신(楊愼)의 《전주고운(轉注古韻)》을 인용하여 “규()는 음이 규(樛)이니 곧 도경(道經)에서 이를 빌려 권질(券帙)의 권(卷)자로 쓴다.” 하였다. 《설문(說文)》에 의하면 “규(糾)는 마땅히 규()로 해야 한다. 규(糾)는 두르는 것[繞]이다. 도경에 있는 규(㢧)는 마땅히 규()로 써야 한다.” 하였다. 《동관시론(東觀詩論)》에 “소송(小宋 송기(松祈)를 가리킨다)의 태을궁시(太乙宮詩)에,
고목은 천 길이나 높고 / 古木千尋竦
신선 그림은 몇 폭이나 열렸는가 / 仙圖幾弔開
했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진고》에 1권을 1조(弔)라고 했다.” 하였다. 《진고》에 “규()는 곧 권(卷)자이다.” 한 것은 글자를 약자로 쓴 것이니, 조(弔)자가 아닌데, 이것을 모른 것이다. 벽허자(碧虛子) 진경원(陳景元)은 《진고》를 근거로 하여 이 글자를 편(篇)자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틀린 것이다.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도서에는 1권을 규()라고 하였고, 《속설부(續說郛)》에는 포형(包衡)이 말하기를 ‘도서에 1권을 1규(㢧)라고 하는데 음은 주(周)이다. 규(㢧)는 규()로도 쓰는데 축(軸)과 같다’ 했다.” 하였다. 제가(諸家)의 해석이 대동소이한바, 대개 권(卷)과 같다.
진(晉) 나라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도경의 총목이 모두 6백 70여 종인데,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삼황내문(三皇內文)》 천ㆍ지ㆍ인 3권ㆍ《미언(微言)》3권ㆍ《원문(元文)》상ㆍ중ㆍ하 3권ㆍ《내시경(內視經)》ㆍ《혼성경(混成經)》2권ㆍ《문시선생경(文始先生經)》ㆍ《현록(玄錄)》2권ㆍ《역장연년경(曆藏延年經)》ㆍ《구생경(九生經)》ㆍ《남궐기(南闕記)》ㆍ《이십사생경(二十四生經)》ㆍ《협룡자기(協龍子記)》7권ㆍ《구선경(九仙經)》ㆍ《구궁경(九宮經)》5권ㆍ《영복선경(靈卜仙經)》ㆍ《삼오중경(三五中經)》ㆍ《십이화경(十二化經)》ㆍ《선상경(宣常經)》ㆍ《구변경(九變經)》ㆍ《절해경(節解經)》ㆍ《노군옥력진경(老君玉曆眞經)》ㆍ《추양자경(鄒陽子經)》ㆍ《묵자침중오행기(墨子枕中五行記)》5권ㆍ《일보경(溢寶經)》ㆍ《현동경(玄洞經)》10권ㆍ《식민경(息民經)》ㆍ《학명경(鶴鳴經)》ㆍ《기산경(箕山經)》10권ㆍ《원시경(元示經)》10권ㆍ《녹대경(鹿臺經)》ㆍ《자연경(自然經)》ㆍ《소동경(小僮經)》ㆍ《음양경(陰陽經)》ㆍ《하락내기(河洛內紀)》7권ㆍ《양생서(養生書)》1백 5권ㆍ《거형도성경(擧形道成經)》5권ㆍ《태평경(太平經)》50권ㆍ《도기경(道機經)》5권ㆍ《구경경(九敬經)》ㆍ《견귀기(見鬼記)》ㆍ《갑을경(甲乙經)》1백 70권ㆍ《무극경(無極經)》ㆍ《청룡경(靑龍經)》ㆍ《관씨경(官氏經)》ㆍ《중황경(中黃經)》ㆍ《진인옥태경(眞人玉胎經)》ㆍ《태청경(太淸經)》ㆍ《도근경(道根經)》ㆍ《통명경(通明經)》ㆍ《후명도(候命圖)》ㆍ《안마경(按摩經)》ㆍ《반태포경(反胎胞經)》ㆍ《도인경(導引經)》10권ㆍ《침중청기(枕中淸記)》ㆍ《원양자경(元陽子經)》ㆍ《환화경(幻化經)》ㆍ《현녀경(玄女經)》ㆍ《순화경(詢化經)》ㆍ《소녀경(素女經)》ㆍ《금화산경(金華山經)》ㆍ《팽조경(彭祖經)》ㆍ《봉망경(鳳網經)》ㆍ《진사경(陳赦經)》ㆍ《소명경(召命經)》ㆍ《자도경(子都經)》ㆍ《보신기(保神記)》ㆍ《장허경(張虛經)》ㆍ《귀곡경(鬼谷經)》ㆍ《천문자경(天門子經)》ㆍ《능소자안신기(凌霄子安神記)》ㆍ《용성경(容成經)》ㆍ《거구자황산공기(去丘子黃山公記)》ㆍ《입산내경(入山內經)》ㆍ《왕자오행요진경(王子五行要眞經)》ㆍ《내보경(內寶經)》ㆍ《소이경(小餌經)》ㆍ《사규경(四規經)》ㆍ《홍보경(鴻寶經)》ㆍ《명경경(明鏡經)》ㆍ《추생연명경(鄒生延命經)》ㆍ《일월임경경(日月臨鏡經)》ㆍ《안혼기(安魂記)》ㆍ《오언경(五言經)》ㆍ《황도경(皇道經)》ㆍ《주중경(柱中經)》ㆍ《구음경(九陰經)》ㆍ《영보황자심경(靈寶皇子心經)》ㆍ《잡집(雜集)》ㆍ《서록(書錄)》ㆍ《용교경(龍蹻經)》ㆍ《은함옥궤기(銀函玉匱記)》ㆍ《정기경(正機經)》ㆍ《금판경(金版經)》ㆍ《평형경(平衡經)》ㆍ《황로선록(黃老仙錄)》ㆍ《비구진경(飛龜振經)》ㆍ《원도경(原都經)》ㆍ《녹로교경(鹿盧蹻經)》ㆍ《현원경(玄元經)》ㆍ《도형기(蹈形記)》ㆍ《일정경(日精經)》ㆍ《수형도(守形圖)》ㆍ《혼성경(渾成經)》ㆍ《좌칠도(坐七圖)》ㆍ《삼시집(三尸集)》ㆍ《관와인도(觀臥引圖)》ㆍ《호신신치백병경(呼身神治百病經)》ㆍ《함경도(含景圖)》ㆍ《수산귀로매치사정경(收山鬼老魅治邪精經)》3권ㆍ《관천도(觀天圖)》ㆍ《입오독중기(入五毒中記)》ㆍ《목지도(木芝圖)》ㆍ《휴량경(休粮經)》3권ㆍ《균지도(菌芝圖)》ㆍ《채신약치작비법(採神藥治作祕法)》3권ㆍ《육지도(肉芝圖)》ㆍ《등명산도강해칙지신법(登名山渡江海勅地神法)》3권ㆍ《석지도(石芝圖)》ㆍ《조태백낭중요(趙太白囊中要)》5권ㆍ《대백잡지도(大魄雜芝圖)》ㆍ《입온기역병대금(入瘟氣疫病大禁)》7권ㆍ《오악경(五岳經)》5권ㆍ《수치백귀소오악승태산주자기(收治百鬼召五岳承太山主者記)》3권ㆍ《은수기(隱守記)》ㆍ《흥리궁택궁사법(興利宮宅宮舍法)》5권ㆍ《동정도(東井圖)》ㆍ《단호랑금산림기(斷虎狼禁山林記)》ㆍ《허원경(虛元經)》ㆍ《소백리충사기(召百里虫蛇記)》ㆍ《견우중경(牽牛中經)》ㆍ《만필고구선생법(萬畢高丘先生法)》3권ㆍ《왕미기(王彌記)》ㆍ《왕교양성치신경(王喬養性治身經)》3권ㆍ《납성기(臘成記)》ㆍ《복식금기경(服食禁忌經)》ㆍ《육안기(六安記)》ㆍ《입공익산경(立功益算經)》ㆍ《평도기(平道記)》ㆍ《도사탈산율(道士奪算律)》3권ㆍ《정심기(定心記)》ㆍ《이문자기(移門子記)》ㆍ《귀문경(龜文經)》ㆍ《귀병병(鬼兵法)》ㆍ《산양기(山陽記)》ㆍ《입망술(立亡術)》ㆍ《옥책기(玉策記)》ㆍ《연형기(鍊形記)》5권ㆍ《팔사도(八史圖)》ㆍ《극공도요(郄公道要)》ㆍ《입실경(入室經)》ㆍ《녹리선생장생집(甪里先生長生集)》ㆍ《좌우계(左右契)》ㆍ《소군도의(少君道意)》10권ㆍ《옥력경(玉曆經)》ㆍ《번영석벽문(樊英石壁文)》3권ㆍ《승천의(昇天儀)》ㆍ《사령경(思靈經)》3권ㆍ《구기경(九奇經)》ㆍ《용수경(龍首經)》ㆍ《갱생경(更生經)》ㆍ《형산기(荊山記)》ㆍ《사금경(四衿經)》10권ㆍ《공안선연적부자대람(孔安仙淵赤斧子大覽)》7권ㆍ《식일월정경(食日月精經)》ㆍ《동군지선각로요기(董君地仙却老要記)》ㆍ《식육기경(食六氣經)》ㆍ《이선생구결주후경(李先生口訣肘後經)》2권ㆍ《단일경(丹一經)》ㆍ《태식경(胎息經)》ㆍ《행기치병경(行氣治病經)》ㆍ《승중경(勝中經)》10권ㆍ《백수섭제경(百守攝提經)》ㆍ《단호경(丹壺經)》ㆍ《민산경(岷山經)》ㆍ《위백양내경(魏伯陽內經)》ㆍ《일월주식경(日月廚食經)》ㆍ《보삼강육기경(步三罡六紀經)》ㆍ《입군경(入軍經)》ㆍ《육음옥녀경(六陰玉女經)》ㆍ《사군요용경(四君要用經)》ㆍ《금안경(金雁經)》ㆍ《삼십육수경(三十六水經)》ㆍ《백호칠변경(白虎七變經)》ㆍ《도가지행선경(道家地行仙經)》ㆍ《황백요경(黃白要經)》ㆍ《팔공황백경(八公黃白經)》ㆍ《천사신기경(天師神器經)》ㆍ《침중황백경(枕中黃白經)》5권ㆍ《백자변화경(白子變化經)》ㆍ《이재경(移災經)》ㆍ《압화경(厭禍經)》ㆍ《중황경(中黃經)》ㆍ《문인경(文人經)》ㆍ《연자천지인경(涓子天地人經)》ㆍ《최문자주후경(崔文子肘後經)》ㆍ《신광점방래경(神光占方來經)》ㆍ《수선경(水仙經)》ㆍ《시해경(尸解經)》ㆍ《중둔경(中遁經)》ㆍ《이군포천경(李君包天經)》ㆍ《포원경(包元經)》ㆍ《황정경(黃庭經)》ㆍ《연체경(淵體經)》ㆍ《태소경(太素經)》ㆍ《화개경(華蓋經)》ㆍ《행주경(行廚經)》ㆍ《자래부(自來符)》ㆍ《금광부(金光符)》ㆍ《태현부(太玄符)》3권ㆍ《통천부(通天符)》ㆍ《오정부(五精符)》ㆍ《석실부(石室符)》ㆍ《옥책부(玉策符)》ㆍ《침중부(枕中符)》ㆍ《소동부(小童符)》ㆍ《구령부(九靈符)》ㆍ《육군부(六君符)》ㆍ《현도부(玄都符)》ㆍ《황제부(黃帝符)》ㆍ《소천삼십육장군(少千三十六將軍符)》ㆍ《연명신부(延命神符)》ㆍ《천수신부(天水神符)》ㆍ《사십구진부(四十九眞符)》ㆍ《천수부(天水符)》ㆍ《청룡부(靑龍符)》ㆍ《백호부(白虎符)》ㆍ《주작부(朱雀符)》ㆍ《현무부(玄武符)》ㆍ《주태부(朱胎符)》ㆍ《칠기부(七機符)》ㆍ《구천발병부(九天發兵符)》ㆍ《구천부(九天符)》ㆍ《노경부(老經符)》ㆍ《칠부(七符)》ㆍ《대한액부(大捍厄符)》ㆍ《현자부(玄子符)》ㆍ《무효경(武孝經)》ㆍ《연군용호삼낭벽병부(燕君龍號三囊辟兵符)》ㆍ《포원부(包元符)》ㆍ《침희부(沈羲符)》ㆍ《우교부(禹蹻符)》ㆍ《소재부(消災符)》ㆍ《팔괘부(八卦符)》ㆍ《감건부(監乾符)》ㆍ《뇌전부(雷電符)》ㆍ《위희부(威喜符)》ㆍ《현정부(玄精符)》ㆍ《음양대진부(陰陽大鎭符)》ㆍ《압괴부(壓怪符)》10권ㆍ《육갑통령부(六甲通靈符)》10권ㆍ《옥부부(玉斧符)》10권ㆍ《만필부(萬畢符)》ㆍ《거승부(巨勝符)》ㆍ《옥력부(玉曆符)》ㆍ《침중부(枕中符)》ㆍ《호공부(壺公符)》20권ㆍ《육음행주용태석실삼금오목방종부(六陰行廚龍胎石室三金五木防終符)》합5백권ㆍ《팔위오승부(八威五勝符)》ㆍ《북대부(北臺符)》ㆍ《치백병부(治百病符)》10권ㆍ《구대부(九臺符)》9권ㆍ《군화소치부(軍火召治符)》ㆍ《채녀부(採女符)》.
당(唐) 나라 단성식(段成式)의《유양잡조(酉陽雜俎)》에 선경(仙經)의 도서가 모두 24종인데,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자일왕검(雌一王檢)》ㆍ《사규명경(四規明經)》ㆍ《오주중경비귀질(五柱中經飛龜帙)》ㆍ《비황자경(飛皇子經)》ㆍ《함경도(含景圖)》ㆍ《와인도(臥引圖)》ㆍ《원지도(園芝圖)》ㆍ《대외신지도(大隗新芝圖)》ㆍ《견우경(牽牛經)》ㆍ《옥진기(玉珍記)》ㆍ《단대경(丹臺經)》ㆍ《금루경(金樓經)》ㆍ《중황장인경(中黃丈人經)》ㆍ《협룡자녹대경(協龍子鹿臺經)》ㆍ《옥태경(玉胎經)》ㆍ《관씨경(官氏經)》ㆍ《봉망경(鳳網經)》ㆍ《육음옥녀경(六陰玉女經)》ㆍ《백호칠변경(白虎七變經)》ㆍ《등중유수섭제경(縢中有首攝提經)》ㆍ《적갑경(赤甲經)》ㆍ《금강팔첩록(金剛八疊錄)》.
이상 기록한 것 중에는 《포박자》의 도경 이름과 같은 것도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기록하였다.
【보유(補遺)】 무릇 48종인바,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옥추경(玉樞經)》 《포박자》와 단 성식의 도경 목록에 《옥추경》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는 두광정(杜光庭) 등의 위작(僞作)이라는 설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나 보다.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책에는 “《옥추경》을 뇌성보화천존법어(雷聲普化天尊法語)라 칭하는데, 두광정 등이 위찬(僞撰)한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 또 도가와 석가의 이본(異本)이 있다.ㆍ《참동계(參同契)》ㆍ《청화비문(靑華祕文)》ㆍ《영보필법(靈寶畢法)》ㆍ《금고(金誥)》ㆍ《입두악결(入頭嶽訣)》ㆍ《내관옥문보록(內觀玉文寶籙)》ㆍ《천둔련마법(天遁鍊魔法)》ㆍ《용호경(龍虎經)》ㆍ《청정심인경(淸淨心印經)》ㆍ《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ㆍ《십대동천령보본원경(十大洞天靈寶本元經)》ㆍ《태소랑서(太霄琅書)》ㆍ《상방대동진원묘경(上方大洞眞元妙經)》ㆍ《사십구장경(四十九章經)》ㆍ《사마자미(司馬子微)》ㆍ《천은자(天隱子)》ㆍ《장춘자(張春子)》의 수첩외단비요(手帖外丹祕要)》ㆍ《단방감원(丹房鑑源)》ㆍ《금단경(禁壇經)》ㆍ《영보경(靈寶經)》ㆍ《과의연생경(科義延生經)》ㆍ《태일경(太一經)》ㆍ《진무경(眞武經)》ㆍ《용왕경(龍王經)》ㆍ《중왕경(中王經)》ㆍ《호명경(護命經)》ㆍ《노자력장중경(老子歷藏中經)》ㆍ《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ㆍ《삼존보록(三尊譜錄)》ㆍ《태청금액신기경(太淸金液神氣經)》ㆍ《오악진형도(五岳眞形圖)》황제(黃帝)가 산에 가서 몸소 형상을 그린 것이다.ㆍ《동령진경(洞靈眞經)》ㆍ동방삭(東方朔)의《매귀서(罵鬼書)》,《도서(道書)》20권, 위백양(魏伯陽)의《참동계(參同契)》《삼상류(三相類)》《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성명규지(性命圭旨)》ㆍ《수양총서(壽養叢書)》, 여구방(閭丘方)의 《태평경(太平經)》13편ㆍ《동소지(洞霄志)》,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10권ㆍ《포박자(抱朴子)》내편(內篇)ㆍ외편(外篇) 1백 16편, 도홍경(陶弘景)의 《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ㆍ하(夏) 나라 무광(務光)이 염교를 거꾸로 해서 쓴《태상긴진경(太上緊眞經)》3권ㆍ 왕문록(王文錄)의 《태식경소(胎息經疏)》ㆍ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雲笈七籤)》.
【노자도덕경】 1권으로 주(周) 나라 이이(李耳)가 찬한 것이다. 도덕경을 찬하여 주 나라 관문(關門)을 지키던 윤희(尹喜)에게 주니, 바로 주 평왕(周平王) 42년이었다. 모두 5천 7백 48자이며 81장으로 되어 있다. 한 경제(漢景帝)는 《황자(黃子)》와 《노자(老子)》는 의미가 더욱 깊다 하여, 자(子)를 경(經)으로 고치고는 비로소 도학(道學 도교의 학)을 세워 조야(朝野)로 하여금 모두 외게 하였다. 조위(曹魏 삼국 시대의 위(魏) 나라) 때 산양(山陽)의 왕필(王弼)이 주(注)했고, 남조(南朝) 때 송(宋) 나라의 범양(范陽) 사람 조충지(祖沖之)가 해석하였으며, 휴령(休寧) 사람 김안절(金安節)이 《역로통언(易老通言)》과 《노군실록(老君實錄)》을 저술하였다.
관복고사(觀復高士) 사수호(謝守灝)는 말하기를 “《도덕경》은 당 나라 부혁(傅奕)이 여러 본(本)을 상고하여 그 글자를 낱낱이 교감하였다. 항우첩본(項羽妾本)이 있는데, 제(齊) 나라 무평(武平 북제(北齊) 후주(後主)의 연호) 5년에 팽성(彭城) 사람이 항우의 첩 무덤을 발굴하여 얻은 것이며, 안구망지본(安丘望之本)이 있는데, 위(魏) 나라 태화(太和 북위(北魏) 효 문제(孝文帝)의 연호) 때에 도사 구겸지(寇謙之)가 찾아낸 것이며, 하상장인본(河上丈人本)이 있는데 이것은 제(齊) 나라 처사 구미(仇微)가 전한 것이다. 이 삼가(三家)의 본은 5천 7백 22자로서 한비(韓非)의 《유로(喩老)》와 서로 맞지 않는다. 또 낙양(洛陽)에 관본(官本)이 있는데 5천 6백 35자이고, 왕필본(王弼本)은 5천 6백 83자, 또는 5천 6백 10자이며, 하상공본(河上公本)은 5천 3백 55자, 또는 5천 5백 90자로서 여러 본이 서로 틀린다.” 하였다. 석 적지(釋適之)의 《금호기(金壺記)》에 “주 나라 뇌향(瀨鄕)의 석실(石室) 가운데에 전서(篆書)로 쓴 《노자도덕경》이 있는데 채옹(蔡邕)이 예서(隸書)로 증거했다.” 하였다.
제가경해(諸家經解) 엄군평(嚴君平)의 《노자지귀(老子指歸)》, 양호(羊祜)의 《노자주(老子注)》2권, 나중(羅仲)의 《노자주》2권, 종회(鍾會)의 《노자주》2권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본조(本朝)에 박세당(朴世堂)의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2권과 홍석주(洪奭周)의 《노자도덕경주(老子道德經注)》2권이 있다. 초굉(焦竑)의 《노자익(老子翼)》 초굉이 여러 주가(注家)를 모아 《노자익》을 만들었다. 주가는 모두 65이다. 에 “도경에 《노자력장중경(老子歷藏中經)》이 있는데 어쩌면 노자가 지은 것일 것이다.” 하였다. 우선 여기에 기록하여 후일 밝게 변별할 자를 기다리는 바이다.
【장자남화경(莊子南華經)】 3권으로 주 나라 장주(莊周)가 찬한 것이다. 모두 30편(篇)으로 수십만 자(字)에 이르는데 편은 다시 내편(內篇) 7편과 외편(外篇)ㆍ잡편(雜篇) 셋으로 나뉜다. 진(晉) 나라 탁군(涿郡) 사람 노심(盧諶) 이 주(注) 했으며, 남조 때 송 나라 범양(范陽) 사람 조충지(祖沖之)가 해석하였다. 진(晉) 나라 초군(譙郡) 사람 대옹(戴顒)은 《장주대지(莊周大旨)》를 저술했고, 무명씨(無名氏 즉 저자미상)는 《장자궐의(莊子闕疑)》를 지었으며, 곽상(郭象)은 《익장(翼莊)》을 지었고, 명(明) 나라 원숭도(袁崇道)는 《도장(導莊)》을 지었고, 원굉도(袁宏道)는 《광장(廣莊)》을 지었다.
곽자현(郭子玄 자현은 곽상의 자)은 이르기를 “시골 선비들이 망령되이 기괴한 말을 지어냈으니, 알혁의수지수위언유부자서지편(閼奕意修之首危言游鳧子胥之篇)은 모두 교묘하고 잡된 것으로 10분의 3을 차지한다.” 하였다. 엄군평(嚴君平)은 《노자지귀(老子指歸)》를 지으면서 《장자》를 인용한 것이 모두 수십 조항인데, 한결같이 《장자》에 들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임운명(林雲銘)은 《독장자법(讀莊子法)》을 지었는데 마치 패(貝)를 보는 것과 같다.
《장자》를 경(經)이라고 한 것은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원년에 있었던 것으로, 노자를 높여 현원황제(玄元皇帝)라 하고 장자를 높여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 하고 그의 저서를 높여 《남화경(南華經)》이라 한바, 남화란 장자가 살던 마을 이름이다.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때에 《천록임랑서목(天祿琳琅書目)》에 실려 있는 송판(宋版) 《남화경》에 노자의 상(像)이 있다. 명 나라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때에 사인(舍人) 왕불(王紱)이 칙명을 받들고 찬(贊)을 지었다. 혜시(惠施)는 장자의 제자이다.
제가경해 진 나라 곽상(郭象)의 《장자주(莊子注)》, 진 나라 상수(尙秀)의 《장자주》, 초 굉(焦竤)의 《장자익(莊子翼)》 초굉이 여러 주가를 모아 《장자익》을 만들었다. 주가는 모두 49이다.
【열자(列子)】 8편으로 주 나라 열어구(列禦寇)가 찬한 것이다. 열자의 이름은 어구로 정(鄭) 나라 사람이다. 그의 저서는 모두 8편으로 되어 있는데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의 《사기(史記)》에는 열자를 전(傳)에 넣지 않았다. 이 책은 비록 유향(劉向)의 《교수략(校讐略)》에 실려 있는 숫자와 합하긴 하지만 사실인즉 전오씨(典午氏)가 남도(南渡)한 이후에 바야흐로 제가(諸家)에서 섞여나왔을 것이니 진본(眞本)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당 현종 천보 원년에 열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을 삼고 현원황제에 배향했으며, 송 휘종(宋徽宗) 중화(重和) 원년에 열자를 치허관묘진군(致虛觀妙眞君)으로 봉한 다음 책명(冊命)을 행하고 혼원황제(混元皇帝 노자. 현원황제와 같음)에 배향하는 한편, 태학(太學)과 벽옹(辟雍)에 《내경(內經)》ㆍ《도덕경》ㆍ《장자》ㆍ《열자》에 대한 박사(博士)를 2명씩 두었다.
【문자(文子)】 노자의 제자로 이 책에는 평왕문도(平王問道)가 있다. 당 현종 천보 원년에 문자를 통현진인(通玄眞人)으로 봉하고 현원황제에 배향하였다.
【경상자(庚桑子)】 이름은 초(楚)로 주 나라 때 사람이다. 당 현종 천보 원년에 경상자를 통허진인(通虛眞人)으로 봉하고 현원황제에 배향하였다.
【석각도경(石刻道經)】 도경도 석각(石刻)한 것이 있어 마치 유가(儒家)의 석경(石經)이 있는 것과 같으므로 아울러 기록한다.
석각도덕경(石刻道德經) 명 나라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이 《도덕경》에 쓰기를 “《진사(晉史)》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가 산음(山陰)의 담양촌(曇村)에 사는 도사를 위하여 《도덕경》을 써주고는 거위를 채롱에 넣고 돌아갔다 하는데, 《광금석운부고(廣金石韻府考)》를 상고해 보면 여기에 《도덕경》이 실려 있은즉, 후인들이 돌에 새겼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하였다.
또 청 성조(淸聖祖)의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畫譜)》 서변증(書辨證)을 상고해 보면 여기에 《왕씨법서원(王氏法書苑)》을 인용하였는데, 이백(李白)이 우군(右軍)의 글씨에 대하여 쓴 것이 두 편이 있다. 하나는 《황정경(黃庭經)》을 써주고 거위와 바꾼 일이며, 하나는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와 바꾼 일이다. 그 첫편에,
우군이 본래 청진하니 / 石軍本淸眞
소쇄하게 풍진을 벗어났네 / 瀟灑出風塵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 / 山陰遇羽客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맞이하였네 / 要此好鵝賓
흰 비단에 도경을 쓰니 / 掃素寫道經
필법의 정묘함 신과 같았네 / 筆精妙入神
글씨 다 쓰자 거위 채롱에 넣고 가니 / 書罷籠鵝去
언제 주인과 작별한 적 있었나 / 何曾別主人
하였는데, 이는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를 얻은 일을 말한 것이다.
일찍이 송 나라 하송(夏竦)의 《고문사성운해(古文四聲韻解)》를 상고해 보니, 여기에 《고노자(古老子)》를 인용하였다. 그렇다면 《노자》는 고본(古本) 전각(篆刻)이 있는 것이다.

석각황정경(石刻黃庭經) 고사기(高士奇)의 《천록지여(天祿識餘)》에 “진(晉) 나라 왕우군이 33세에 난정서(蘭亭敍)를 썼고, 37세에 《황정경》을 썼는데, 후세 사람들이 돌에 새겨 전한다.” 하였다. 《동관여론(東觀餘論)》을 상고해 보면 “《황정경》을 세상에서는 일소(逸少 왕희지의 자)가 썼다고 전하는데, 내가 일찍이 상고해 보니 틀린 말이다.” 하였다. 《왕씨법서원(王氏法書苑)》에는 “황백사(黃伯思《동관여론》의 저자)의 말이 틀렸다. 《황정경》을 써주고 거위를 바꾼 것과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를 바꾼 것은 각기 두 일이다. 이태백(李太白)은 이것이 두 가지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왕우군의 글씨에 대하여 쓴 것이 2편이다. 그 1편인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경호의 맑은 물결 일렁이는데 / 鏡湖淸水漾淸波
광객이 배타고 돌아가니 고상한 흥취 많고야 / 狂客歸舟逸興多
만일 산음의 도사를 만난다면 / 山陰道士如相見
응당 황정경 써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 / 應寫黃庭換白鵝
하였는데, 이는 《황정경》을 써주고 거위를 얻은 일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광금석운부고(廣金石韻府考)》를 상고해 보면 왕유공(王維恭)의 《황정경》이 있으니, 어쩌면 왕유공이 쓴 것이 석각본인지 모르겠다.

천태경당(天台經幢) 이것은 《광금석운부고》에 보이는데, 석각 도경인 듯하다. 아직 뒤에 참고하기로 한다.

고노자(古老子) 《광금석운부고》를 상고해보면 여기에 《고노자》가 있는바, 이것도 후세에서 돌에 새겨 전한 것이다. 또 하송(夏竦)의 《고문사성운해(古文四聲韻解)》에 보인다.
【도가사첩(道家史牒)】 도가에도 실기(實紀)가 있어 사첩(史牒)과 같다. 그러므로 도사(道史)ㆍ선사(仙史)라는 명칭이 있으니, 지난 일을 가지고 장래 일을 알 수 있다. 여러 서적에서 널리 뽑아 대략 수록을 하나, 짐작건대 반드시 누락이 있을 것이다.
도가 사첩(道家史牒)은 한(漢) 나라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72인, 진(晉) 나라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송 나라 채경(蔡京)의 《도사(道史)》, 등목(鄧牧)의 《장천우모산지(張天雨茅山志)》, 두광정(杜光庭)의 《동천복지기(洞天福地記)》, 장송여(張松如)의 《귀대완염문(龜臺琬琰文)》에 신선 72인, 왕언(王言)의 《서화선록(西華仙籙)》에 여선(女仙) 36인, 부운도사(浮雲道士)의 《선사(仙史)》에 고금의 진인(眞人)과 열선(列仙) 47인, 증조(曾慥)의 《집선전(集仙傳)》, 심분(沈份)의 《속신선전(續神仙傳)》, 우리나라 본조(本朝)에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 불초(不肖)가 찬한 《속보해동이적(續補海東異蹟)》, 무명씨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일본(日本) 사람의 《신선전(神仙傳)》이 있다.
【도가화첩(道家畫牒)】 옛사람들이 선도(仙道)의 유적을 회화(繪畫)한 것이 있는바, 이 역시 민멸(泯滅)하기 어려우므로 간략히 도가 사첩의 끝에 부록한다.
도가화첩은 곽충서(郭忠恕)의 누거선도(樓居仙圖), 당 나라 관동(關仝)의 선유도(仙遊圖), 촉(蜀) 나라 석각(石恪)의 옥황조회도(玉皇朝會圖), 주량(朱梁 오대(五代) 시대 주전충(朱全忠)의 후량(梁後)) 장도(張圖)의 자미조회도(紫微朝會圖), 무명씨의 황정경도(黃庭經圖), 육황(陸晃)의 장생보명진군(長生保命眞君)ㆍ구천정명진군(九天定命眞君)ㆍ천조강액진군(天曹降厄眞君)ㆍ천조익산진군(天曹益算眞君)ㆍ천조장록진군(天曹掌祿眞君)ㆍ구천사명진군(九天司命眞君)ㆍ천조사복진군(天曹賜福眞君)과 이팔백(李八百)의 누이가 《황정경》을 생산해 내는 상(像), 임지미(林知微)의 팽조예북두도(彭祖禮北斗圖), 진(晉) 나라 위협(衛協)의 목천자겸요지도(穆天子謙瑤池圖).

선약설(仙藥說)
도교 이외에 다시 일종의 선약(仙藥)에 대한 학설이 있는바, 바로 복이술(服餌術)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약물이란 것이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진실로 황당하다. 굳이 취하여 기록한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 나오는 선약(仙藥)은 다음과 같다. 종산백교(鍾山白膠)ㆍ낭풍석뇌(閬風石腦)ㆍ태미자마(太微紫麻)ㆍ태극정천(太極井泉)ㆍ야진일초(夜津日艸)ㆍ청진벽적(靑津碧荻)ㆍ원구자내(圓丘紫柰)ㆍ백수령합(白水靈蛤)ㆍ팔천적해(八天赤薤)ㆍ창랑청전(凔浪靑錢)ㆍ삼십육지(三十六芝)ㆍ용태예천(龍胎禮泉)ㆍ붕악전류(崩岳電柳)ㆍ현곽기총(玄郭綺蔥)ㆍ회수옥정(佪水玉精)ㆍ백랑상(白琅霜)ㆍ월례(月醴)ㆍ홍단(虹丹)ㆍ홍단(鴻丹)ㆍ청요여령화(靑腰女靈華)ㆍ북제현주(北帝玄珠)ㆍ오정금(五精金)ㆍ백호탈치(白虎脫齒)

도관(道觀)
【도관(道觀)】 한 원제(漢元帝)가 병에 걸리자 방사(方士)를 구하니, 한중(漢中)에서 도사 왕중도(王仲都)를 보내왔으므로 곤명관(昆明觀)에 처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후세에서 도사가 거처하는 곳을 모두 관(觀)이라 하였다.
【정사(精舍)】《삼국지(三國志)》강표전(江表傳)에 “도사 우길(于吉)이 오회(吳會) 지방을 왕래하면서 정사를 세우고 향을 사르고 도서(道書)를 읽었다. 손책(孫策)은 그를 베면서 말하기를 ‘옛날 남양(南陽) 사람 장진(張津)이 교주 자사(交州刺使)가 되어 항상 붉은 파두(帕頭 머리를 싸매는 것)를 쓰고 거문고를 타며 향을 사르고 사속(邪俗)한 도서를 읽었는데 만이(蠻夷)에게 살해되고 말았은즉, 이는 매우 무익(無益)하다.’ 했다.” 하였다. 그렇다면 도사가 거처하는 곳 역시 정사라 하는 것이다.
당 나라 《혼원육전(混元六典)》에는 천하의 관(觀)이 1천 6백 87곳이라 하였으며, 청(淸) 나라 《회전(會典)》에는 성조(聖祖) 강희(康熙) 4년 직성(直省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성(省))에 칙명으로 세운 것을 통계해 보니, 큰 사묘(寺廟)가 총 6천 73곳이며 작은 사묘가 총 5만 8천 6백 82곳이며, 도사가 총 2만 1천 2백 86명이라 한바, 석교(釋敎) 하(下)에 자세히 보인다.

상설(像設)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도가의 학설은 노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른바 삼청(三淸)이란 대체로 불가의 삼신(三身)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삼신에 법신(法身)은 석가(釋家)의 본성이고, 보신(報身)은 석가의 덕업(德業)이며, 육신(肉身)은 석가의 진신(眞身)으로 실지로 존재한 인물이다. 그런데 지금에 이 교를 믿는 자들이 마침내 나누어 삼상(三像)을 만들고 아울러 진열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본지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도가의 무리들이 저 불가의 짓을 모방하고자 하여 마침내 노자를 높여 삼청인 원시천존(元始天尊)ㆍ태상도군(太上道君)ㆍ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하고 호천(昊天) 상제(上帝)는 도리어 그 밑에 앉게 되었으니, 패려(悖戾)하고 참역(僣逆)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또 옥청원시천존(玉淸元始天尊)은 이미 노자의 법신이 아니고 상청태상도군(上淸太上道君)은 또 노자의 보신이 아니다. 가령 두 상이 있다 하더라도 노자와 하나가 될 수는 없으며, 노자는 또 상청태상군(上淸太上老君)이 되니, 이는 불가의 잘못을 따른 것으로 더욱 잘못된 것이다. 노자의 학파들은 다만 자기의 교주인 노자ㆍ관윤(關尹)ㆍ열자ㆍ장자 등을 제사하고 안기생(安期生)ㆍ위백양(魏伯陽) 등에게까지 미칠 뿐, 천지(天地)와 백사(白祀)는 당연히 천자(天子)의 사관(祀官)에 소속시켜서 도가로 하여금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진무(眞武)는 본래 현무(玄武)였는데 청 성조(淸聖祖)의 휘(諱)를 피하기 때문에 진무라 하는 것이다. 현(玄)은 거북이고 무(武)는 뱀이니, 이는 본래 허성(虛星)과 위성(危星)의 형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인하여 북방(北方)을 이름하여 현무 칠성(玄武七星)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현무를 진성(眞聖)이라 하여 그 아래에 진짜 거북과 뱀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인데 또 천봉(天蓬)ㆍ천유(天猷) 및 익성진군(翊聖眞君)을 보태어 사성(四聖)이라 하니 더욱 의의가 없는 짓이다.
이른바 익성이란 바로 지금에 말하는 효자(曉子)란 것인데 진종(眞宗) 때에 이 신(神)이 내려왔다. 그러므로 마침내 신군(神君)으로 봉하였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진무상제벽하원군(眞武上帝碧霞元君)은 향화(香火)가 끊기지 않고 내려온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예종(睿宗) 때에 복원궁(福源宮)을 세우고 우류(羽流 도사) 10여 명을 두고 재초(齋醮)와 과의(科義)를 한결같이 송(宋) 나라와 같이 하였다. 인종(仁宗) 때에는 정 지상(鄭知常)이 왕에게 청하여 팔성당(八聖堂)을 궁중에 두고 모두 상을 수놓아 만드니, 이는 진 시황(秦始皇)이 임오년(시황 28, 서기전 220)에 산천의 여덟 신에게 제사한 따위이다. 첫째는 백두악(白頭岳) 태백선인(太白仙人)이고, 둘째는 용원악(龍圓岳) 육존자(六尊者)이고, 셋째는 월성악(月城岳) 천선(天仙)이고, 넷째는 구려(駒驪) 평양선인(平壤仙人)이고, 다섯째는 구려 목멱선인(木覓仙人)이고, 여섯째는 송악(松岳) 진거사(震居士)이고 일곱째는 증성악(甑城岳) 신인(神人)이고, 여덟째는 두악(頭岳) 선녀(仙女)이다. 곡령(鵠嶺 송악산)은 여덟 신선이 거주하는 곳이라 하여 송악산에 팔선궁(八仙宮)을 짓고 정지상이 팔성문(八聖文)을 찬했는데, 여기에 ‘이 사이에 팔선을 모시되 백두를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았다.’ 한바, 팔선이란 곧 팔성이다.
또 한 가지 증거가 있다. 신라(新羅) 진흥황(眞興王) 신미년(551, 진흥왕 12) 에 비로소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였으니, 이는 비록 불가의 일이긴 하지만 도가의 재초(齋醮)를 겸한 것이다. 상국(相國) 신흠(申欽)의 《승국유사(勝國遺事)》에 “팔관회는 매년 11월 15일 하는데 이는 복을 비는 것이다. 둥근 뜰에다가 윤등(輪燈) 한 자리를 만들어 놓고 사방에 향등(香燈)을 나열해 놓으며, 또 채붕(綵棚)을 맺되 각각 높이가 다섯 길이 넘게 하고, 온갖 유희와 가무(歌舞)를 하며 앞에는 사선 악부(四仙樂部)와 용(龍)ㆍ봉(鳳)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배를 베푸니, 이는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를 쓴 것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법은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를 베풀라는 말을 따라 행한 것이다. 국조(國朝 조선조)에 들어와 소격서(昭格署)를 설치하니, 중국의 태일전(太一殿)에 초사(醮祀)하고 칠성(七星)의 여러 별에게 제사하는 의식을 따른 것으로, 그 상(像)은 모두 머리를 산발한 여자의 모습이다. 삼청전(三淸殿)에서는 옥황상제(玉皇上帝)ㆍ태상노군(太上老君)ㆍ보화천존(普化天尊)ㆍ재동제군(梓潼帝君) 등 10여 위(位)를 제사하는데 여기는 모두 남자의 상이다. 기타 여러 단(壇)에는 사해(四海)의 용왕(龍王)과 신장(神將), 명부(冥府)의 시왕(十王), 수부(水府)의 여러 신을 만들어 놓았는데, 위판(位版)에 이름을 써 붙인 것이 무려 수백 개나 된다.
이 초사(醮祀)에 참가하는 헌관(獻官)과 서원(署員)들은 모두 흰 옷과 검은 건을 쓰고 치재(致齋)하며, 관을 쓰고 홀(笏)을 꽂고 예복(禮服)을 입고 제사를 지낸다. 여러 과일과 밥ㆍ떡ㆍ다(茶)ㆍ탕(湯)과 술을 올리고 분향백배(焚香百拜)하며, 도사들은 머리에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몸에는 아롱진 검은 옷을 입고 경쇠를 24번 울린 다음에 두 사람이 도경을 외며, 또 축사(祝辭)를 푸른 종이에 썼다가 불사른다. 청사(靑詞)에는 소격서 기우청사(昭格署祈雨靑詞), 마니산 참성초 삼헌 청사(摩尼山塹城醮三獻靑詞), 소격서 진무초 청사(昭格署眞武醮靑詞), 수성초청사(壽星醮 靑詞), 분야성초 삼헌 청사(分野星醮三獻靑詞), 태일초 삼헌 청사(太一醮三獻靑詞)가 있다.
대저 도가에서 상(像)을 만들어 놓은 것은 허무하고 황당한 것 같은데, 여러 돌ㆍ나무ㆍ뼈ㆍ뿔ㆍ자개ㆍ껍질에도 간혹 천연적으로 그려진 신선과 부처의 상이 있고 보면 실지로 있는 듯도 하다. 《잠운루잡기(簪雲樓雜記)》에 “대흥(大興)에 사는 시랑(侍郞) 이석당(李奭堂)의 아우 아무개가 농막을 헐다가 주모(珠母) 한 개가 나왔는데, 크기가 5~6촌쯤 된다. 이 안에 진무상(眞武狀)이 있는데,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오른 손으로 의자를 잡고 왼손으로는 …… (원문 1자 빠짐) …… 거북과 뱀이 발을 받들고 영관(靈官)이 창을 메고 모시고 있는데, 눈을 부릅뜬 모습을 했으며 구름이 에워싸고 네 신장이 나타나 있는데 황홀하여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바, 모두 모습을 갖춘 사람의 상이다. 그 등에 ‘고려의 국왕이 바친 것’이라고 새겼으며, 자금(紫金)으로 만든 궤에 넣어져 있었다. 이는 아마도 궁중의 물건이었는데 민간에 흘러 들어간 것일 것이다. 이씨는 열 꿰미의 돈을 주고 샀는데, 수 문제(隋文帝)의 합리불(蛤蜊佛)이나 송 나라 조무구(晁無咎)의 저치백불(猪齒白佛)보다도 더 기이하다.” 하였다. 주모(珠母)란 진주 조개이니, 조화는 참으로 공교하다 하겠다.
《묵장만록(墨莊漫錄)》에 “통천서(通天犀) 가운데 해ㆍ달ㆍ별ㆍ구름ㆍ꽃봉오리ㆍ산ㆍ물ㆍ새ㆍ물고기ㆍ용ㆍ신선ㆍ귀신ㆍ궁전ㆍ의관(衣冠)과 미목(眉目)이 완연히 이 뿔 속에 나타나 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신선과 귀신은 예부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모방해서 상을 만든 것으로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 이미 천연적인 상이 있으니, 어찌 인위로 만든 상이 없겠는가.

부록(符籙)과 재초(齋醮)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여러 신선이 천서(天書)를 맨 처음 얻어서 인간에게 전수하는 것도 연한(年限)이 있는바, 상품(上品)은 연한이 오래고 하품(下品)은 연한이 짧다. 그러므로 현재 도(道)를 전수받은 자들은 49년을 경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인간에게 전수할 수 있다. 그 대지(大旨)를 미루어 보면 이 역시 인애(仁愛)하고 청정(淸靜)하여 많은 수양을 쌓아서 점차 장생(長生)하여 자연히 신화(神化)하게 되는 것이다.
도를 전수받는 법은 맨 처음에 오천문록(五千文籙)을 받고 다음에 삼동록(三洞籙)을 받고 다음에 동현록(洞玄籙)을 받고 다음에 상청록(上淸籙)을 받는데, 녹(籙)은 모두 흰 비단에 씌어 있는바, 천조(天曹 하늘에 있다는 여러 관서)의 관속(官屬)과 좌사(佐使)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 여러 신부(神符)가 이 사이에 섞여 있다. 이것을 받는 자는 반드시 먼저 깨끗이 재계(齋戒)한 다음에 금환(金環) 하나를 나누어 각기 반을 갖고 약속을 한다. 재계하는 방법은 황록(黃籙)ㆍ옥록(玉籙)ㆍ금록(金籙)ㆍ도탄(塗炭) 등의 재계가 있는데, 세 층의 단을 만들고 층마다 면절(綿蕝 띠풀을 묶어 위치를 품시하는 것)을 두어 한계를 만들고 옆에는 각각 문을 열어 이 면절의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런 다음 고기 꿰미처럼 나란히 열(列)을 이루어 면박(面縛 두 손을 뒤에 묶고 얼굴을 내밀어 죽을 각오를 하는 것)하고 자신의 과오를 낱낱이 말하여 신명이 고백하되 밤낮을 쉬지 않고 혹은 칠일 또는 이칠일(二七日 즉 14일)에 끝난다.
또 재액(災厄)을 없애는 법이 있다. 음양 오행의 술수(術數)에 의하여 사람의 수명을 추수(推數)하여 마치 장표(章表)를 올리는 의식처럼 쓰고는 아울러 폐백을 갖추어 향을 사르고 읽기를 ‘천조에게 아뢰노니 부디 제액해주옵소서[奏上天曹 請爲除厄]’ 하는데, 이것을 상장(上章)이라 한다. 한밤중 여러 성신(星辰)의 아래에 술ㆍ포ㆍ면ㆍ음식ㆍ폐백을 진설해 놓고 천황(天皇)과 태일(太一)에게 낱낱이 제사하고 오성(五星)과 여러 별에게 제사하며 상장하는 의식과 같이 글을 만들어 아뢰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초(醮)라 한다. 또 복이(服餌)ㆍ벽곡(辟穀)으로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루 기록할 수가 없다.” 하였다. 초제(醮祭)의 축원문(祝願文)을 청사(靑詞)라 한다.

도가 잡용(道家雜用)
《수서》경적지에 “도가의 재초(齋醮) 이외에 또 나무로 인(印)을 만들어 성신(星辰)과 일(日)ㆍ월(月)을 그 위에 새기고 기(氣)를 마셔 붙게 한 다음 병을 앓는 자에게 찍으면 병이 낫는 자가 많다. 또 칼 위에 올라가고 불속에 들어간 다음 불사르고 찌르게 하여도 칼날이 상해를 입히지 못하고 불꽃이 뜨겁게 하지 못하는 방법도 있으며, 또 복이(服餌)ㆍ벽곡(辟穀)ㆍ금단(金丹)ㆍ옥장(玉漿)ㆍ운영(雲英)으로 찌꺼기를 제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루 기록할 수 없다.” 하였다.
【타발(佗髮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도사들이 머리 풀어 헤치는 것은 한 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사기(史記)》귀책전(龜策傳)에 “술로 초사하고 머리를 풀어 헤친다.[醮酒佗髮]” 하였는데, 색은주(索隱注)에 “타(佗)의 음은 도아절(徒我切)이니,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이다. 현재 도류(道流)들이 법석(法席)을 베풀고 부주(符呪)할 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을 한다.” 하였다.
【도사의 영패(令牌)와 인(印)】 도사들은 영패와 인이 있다. 《물리소지(物理小識)》에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를 사용하여 인패(印牌)를 만드는데, 이는 대추나무 속이 붉고 단단하며 벼락을 맞아 신통함을 취한 것이다. 《당육전(唐六典)》의 연문식법(羡門式法)에도 대추나무 속으로 만든다 하였다. 구양현(歐陽玄)의 《규거지(睽車志)》에는 ‘귀신은 백옥(白玉)을 두려워하니 백옥으로 만든 인을 차되 웅정낭(雄精囊)에 넣어야 한다.’ 했다.” 하였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는 “단풍나무와 대추나무 이 두 나무는 모두 신령을 통하기 때문에 점괘를 치는 자들이 많이 취하여 식반(式盤)과 식국(式局)을 만드는데, 단풍나무가 제일 좋고 대추나무는 나쁘다.” 하였다. 《당육전》의 삼식(三式)에는 “육임(六壬)으로 점치는 국(局)은 단풍나무를 하늘로, 대추나무 속을 땅으로 삼는다.” 하였다. 이 때문에 장문성(張文成)의 태복판(太卜判)에 “단풍나무는 하늘이고 대추나무는 땅이다.[楓天棗地]”란 말이 있으며, 《영기경(靈棋經)》의 법에는 ‘반드시 벼락맞아 쪼개진 대추나무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더욱 신기하게 맞는다.’ 하였다. 병법(兵法)에는 “단풍나무와 대추나무로 말을 매 놓은 말뚝을 만들면 말이 놀라고, 수레바퀴를 만들면 수레가 엎어진다.” 하였다. 이는 아마도 신(神)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니, 마치 귀(鬼)가 예장나무와 버드나무 뿌리에 깃들여 있는 것과 같다.
【천사(天師)의 법검(法劍)】도목(都穆)의 《철망산호(鐵網珊瑚)》에 “광미(廣微) 장여재(張與材)가 법검 한 자루를 소장하고 있는데 칼자루는 옥으로 되어 있다. 칼자루 위 양 면에는 각각 2행의 전문(篆文)이 있는데 1행에 10여 자씩이며 칼 길이는 4척 남짓하다. 양면에는 모두 자금(紫金)으로 가늘게 법전(法篆)이 씌어져 있으니, 그 일면을 대략 기록해 보면 ●ㆍ●ㆍ●ㆍ●ㆍ目ㆍ內ㆍ有ㆍ免ㆍ春ㆍ夏ㆍ秋ㆍ冬이 있고, 그 아래에는 삼태성(三台星)과 북두성(北斗星)이 있으며, 그 일면에 있는 글자는 능히 분변할 수는 없으나 맨 아래에 뇌(雷)ㆍ전(電)ㆍ운(雲) 세 자가 씌어 있다. 칼 양면에 모두 칼날이 있어 이지러지지 않았으며, 또 한 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1천 7백년 동안 여러 대에 걸쳐 이 법검을 의뢰하여 교를 펴고 있다.” 하였다.
【헌원경(軒轅鏡)】 도가에서는 오래된 고경(古鏡)을 사용하는데 이는 사마(邪魔)를 물리치는 방술이다. 헌원경이란 주사(硃砂)로 끈을 바르고 네 거울을 둘러 놓아 서로 비추게 하는 것인데 사(邪 잡귀)를 물리친다. 방이지(方以智)는 “능엄단(楞嚴壇)에 16개의 거울이 위아래에서 비춘다.”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이다.
【환실(寰室)】 곧 수련하는 정사(精舍)이다. 무릇 타좌(打坐 불교에서 가부좌(跏趺坐)하는 것을 말한다)할 때에 실내를 너무 높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높으면 양이 성하고 밝음이 많아서 백(魄)을 상하게 된다. 지붕은 너무 낮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너무 낮으면 음이 성하고 어둠이 많아서 혼(魂)을 상하게 된다. 음ㆍ양이 적중하고 밝음과 어둠이 서로 반씩 되게 하며 사방 벽에는 모두 여러 개의 창문을 내어 일ㆍ월ㆍ성두(星斗 두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통하게 한다.
【통기(通氣)하는 탁약(橐籥 쇠를 불리는데 쓰이는 기구)】 단가(丹家)의 비결에 금ㆍ은으로 탁약을 만들되 안에는 입과 코의 세 구멍이 통하는 숨통을 만들고 겉에는 비단으로써 방식대로 싼 다음 목 뒤에 띠를 묶어 매어 그 입과 코를 고정시켜 진기(眞氣)가 흩어지지 않게 한다. 이것은 환실(寰室)에 들어가 잘 때에 사용하는 것으로 곧 호흡통인 것이다.
【유목 의자(楡木椅子)】 느릅나무로 만드는데 그래야만 독이 없다. 수양하는 도가가 앉는 것이다.
【동화제군상(東華帝君像)】 동화제군상을 그려 뒷방에 받들고 장등(長燈)과 향수(香水)로 제사한다.
【천전(天篆)】 환실(寰室)의 사방 벽에 천전을 붙여 놓는다.
【조기(祖氣)】 무릇 도가의 서부(書符)에는 조기가 있다. 그 법은 동쪽을 향하여 기(氣)를 취해서 한입으로 마셔 뱃속으로 넣되 배꼽 밑 한치 세푼까지 이르게 했다가 그치고는 다시 배 위에서 입으로 올라오게 한 다음 붓을 들고 한 번 불어서 점선이 부권(符圈)의 안에 있게 하는데, 이것을 조기라 이름한다. 또 한 가지 법에는 조기란 곧 신(腎) 밑에 있는 수기(水氣)이다. 뇌국(雷局)을 사용하여 수(水)ㆍ화(火)를 화합하게 하여 미추골(尾椎骨) 밑에 이른다. 미추골 밑이란 바로 미려혈(尾閭穴)로서 위로 이환(泥丸 단전)에서부터 함께 나와 작용한다 한다. 도결(道訣) 주(注)에 자세히 보인다.
【도수결(搯手訣)】 염결(捻訣)이라고도 하며 또 겹결(恰訣)이라고 한다. 겹(恰)은 《광운(廣韻)》에는 고흡절(苦洽切)이라 하였고 《집운(集韻)》에는 걸흡절(乞洽切)이라 하였는데 음은 모두 겹이다. 《설문(說文)》에는 “마음을 쓰는 것이며 또 적당하게 한다는 말이다.” 하였다. 도(搯)는 자서(字書)에 음은 도(叨)라고 하였다. 《지북우담(池北偶談)》에 “도수결은 왼손 중지(中指) 셋째 마디에 가로로 그어져 있는 지문을 큰 손가락 손톱으로 두드리는 것인데, 주문(呪文)을 욀 때에 두드린다.” 하였다. 도(搯)는 자서에 보면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라 했을 뿐, 특별한 깊은 뜻이 없다. 주전공(朱錢功)의 《담산잡지(澹山雜識)》에 “사보문(謝寶文)이 옥관(獄官)으로 있을 때에 어떤 죄수 하나가 이 법을 잘하여 스스로 형틀을 벗곤 했는데, 늙은 하인이 ‘붓뚜껑을 가지고 양손의 중지를 두드리라.’ 하므로 그 말을 따르니 죄수가 그 술을 쓰지 못했다.” 했다. 도가와 불가에는 여러 가지 결(訣)이 있다.
【보두 답강(步斗踏罡)】 도가에 보두 답강하는 법이 있는데, 이는 소위 북두성(北斗星)의 괴성(魁星)과 천강성(天罡星)을 밟는다는 것이다.
【우보(禹步)】 세상에서 말하기를, 우(禹)는 짐승 이름인데 너풀너풀 걸으며 귀신을 잡아먹기 때문에 귀신들이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도가에서 그 걸음을 흉내내는 것이라 한다. 일설에는 하우씨(夏禹氏)가 홍수를 다스릴 때에 걸음을 절둑거리니 귀신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보라 하게 되었다 한다. 갈홍(葛洪)의 《등섭부록(登涉符籙)》을 상고해보면 우보법이 있는데, 반듯이 서서 오른쪽 발을 앞에 놓고 왼쪽 발을 뒤에 놓으며 다음에 다시 오른쪽 발을 앞에 놓고 왼쪽 발은 오른쪽 발의 뒤에 놓는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일보(一步)라 하며, 다음에 다시 오른쪽 발을 앞에 놓고 다음에 왼쪽 발을 앞에 놓아 왼쪽 발을 오른쪽 발에 따른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삼보(三步)라 한다. 이처럼 하면 우보가 끝나니, 곧 삼보에 발자국이 아홉 개인 것이다.
【어고간자(漁鼓簡子)】어고간자는 무시로 치는 악기이다. 대나무를 잘라 돼지의 새끼보를 양쪽 끝에 붙이고 대쪽을 쪼개어 마치 제비꼬리처럼 만들어 대통을 치면 쨍하고 소리가 난다. 도사들이 이 어고간자를 갖고 다니기 때문에 선인(仙人)인 한상자(韓湘子)를 그릴 때에는 반드시 이 기구를 안고 있으니, 이것이 맨 처음 잘못된 것이다. 한상자는 당 나라 사람이다.
【신선골(神仙骨)】 《명사(明史)》에 “예부(禮部)에서 말하기를 ‘대서양(大西洋) 사람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가 갖고 온 것이라 하며 또 신선골이 있다 하는데 이미 신선이라고 칭한다면 스스로 하늘로 날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어찌 뼈가 있겠습니까?’ 했다.” 하였다. 이는 당 나라 때의 불골(佛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장한웅(張漢雄)이 수련하여 도(道)를 얻었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소요산(逍遙山)에 들어갔다가 적에게 잡혀 작살(斫殺)되자 흰 기름과 같은 피가 나왔다. 다비(茶毗 화장(火葬))하였더니 삼주야(三晝夜) 동안 서광(瑞光)이 하늘에 비치었다. 사리(舍利) 72알을 얻었는데 크기가 감실(芡實)만하고 색깔이 감벽색(紺碧色)이었다. 이것을 탑 속에 보관해 두었다.” 하였다. 도가에도 사리가 있다면 이것은 신선골이라 하는가 보다.

총론(總論)
신선술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비록 천상(天上)에서 닭이 우느니 구름 속에서 개가 짖느니 하는 말은 있지만, 녹비공(鹿皮公)은 옥화(玉華)를 삼켰으나 시체에서 벌레가 생겨 문 밖으로 나왔고, 가계자(賈季子)는 금액(金液)을 마셨으나 시체 썩는 냄새가 백 리까지 풍겼으며, 황제(黃帝)는 형산(荊山)에서 아홉 개의 솥을 가지고 선약(仙藥)을 만들었다고 하나 교령(喬嶺)에는 묘가 남아 있으며, 이옥(李玉)은 운산(雲散)을 복용하여 남몰래 신선이 되었다고 하나 피살되어 머리와 발이 각각 있었다. 묵적(墨狄)은 홍단(虹丹)을 마시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영생(甯生)은 석뇌(石腦)를 복용하다가 불에 타 죽었으며 무광(務光)은 부추를 베다가 청령천(淸泠泉)에 빠졌고, 백성(柏成)은 기(氣)를 마시다가 창자와 위(胃)가 썩었다. 경액(瓊液 선약)을 두번 먹고 관(棺)에 들어간 자도 있으며, 도규(刀圭 약물(藥物))를 한 번 먹고 시체가 된 자도 있으니, 신선이란 실제가 없는 헛 말일 뿐이다.
먼저 도사가 되었다가 뒤에 벼슬한 자는 당 나라 시중(侍中) 위징(魏徵)과 승상(丞相) 노정(盧程)이며, 먼저 벼슬을 했다가 뒤에 도사가 된 자는 당 나라 예부 시랑(禮部侍郞) 하지장(賀知章)과 하남 참군(河南參軍) 정선(鄭銑)이며, 주양승(朱陽丞) 곽선주(郭僊舟)는 시를 지어 바쳤다가 파직되고 도첩(度牒)을 받아 도사가 되었다.

별론(別論)

세상에 전하기를 장생 불사하는 것을 신선이라 한다. 그러나 공동자(空同子)는 말하기를 “신선도 죽는 수가 있으니, 기(氣)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였다. 기에는 사라지고 불어나는 것이 있는데, 기가 불어나면 썩어 냄새가 풍기는 육신도 신선이 되고, 기가 사라지면 정령(精靈)도 말라빠지게 된다. 신선이란 천지와 일월의 정기를 훔쳐 비록 매미가 껍질을 벗듯 육신을 벗어나 신이 된다고 하지만, 원회(元會)의 수가 다하면 천지와 일월도 파괴되고 없어지는데 하물며 그 힘을 빌려쓰는 자이겠는가. 또 《황극경세(皇極經世)》를 보면 대화(大化 천지)가 장차 끝날 적에는 유회(酉會)에서 6천 년을 경과한 후에는 신선도 모두 없어져 남지 않는다 하였다. 또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완위여편(宛委餘編)》을 보면 신선은 파두(巴豆)를 먹으면 즉시 죽는데 쥐는 먹으면 자란다 하였으니, 신선이 도리어 쥐만도 못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신선을 부러워할 것이 뭐 있겠는가.

[주D-001]요(堯) 임금의 …… 받는 것 : 극양(克讓)은 능히 겸양하는 것.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요 임금의 덕(德)을 열거하면서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했다.[允恭克讓]” 한 말이 있다. 겸겸(謙謙)은 겸손하고 또 겸손한 것. 《주역(周易)》 겸괘(謙卦) 초육 효사(初六爻辭)에 “초육은 겸손하고 또 겸손하니 군자가 이 상(象)을 취하여 큰 내를 건너는 것이 길하다.[初六謙謙 君子用 涉大川 吉]” 하였다. 이는 음효(陰爻)인 초육효는 본래 유순한데다 또 맨 밑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 한다. 겸괘 단사(彖辭)에는 “천도는 가득한 것을 덜어내고 겸손한 것을 더해 주며, 지도는 가득한 것을 변하여 겸손한 데로 보내주고, 귀신은 가득한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을 복주며, 인도는 가득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 하였는데, 한번 겸손하여 네 가지 유익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 말이다.
[주D-002]풍각(風角)ㆍ성산(星算) : 풍각은 고대의 점후법(占候法)으로 사방 즉 동ㆍ서ㆍ남ㆍ북의 바람과 사우(四隅) 즉 동남ㆍ동북ㆍ서남ㆍ서북의 바람을 살펴 길흉을 점치는 것이며, 성산은 천문(天文)과 산수(算數)를 가리킨다.
[주D-003]금단(金丹) …… 옥장(玉漿) : 금단은 신선이나 도사들이 조제하여 만든 불로(不老)ㆍ불사(不死)의 약으로, 곧 황금액(黃金液)의 단사(丹砂)로 구워 만든 환단(還丹)을 말한다. 도가에서는 특히 이 단(丹)을 중요시하는바, 내단(內丹)ㆍ외단(外丹)의 분별이 있다. 내단이란 자기 몸에 있는 단전(丹田)의 정기를 수련하여 이룬 것이며, 외단이란 바로 단사로 구워 만든 단약(丹藥)이라 한다. 운영(雲英)은 운모(雲母)의 별칭. 팔석(八石)은 도가에서 복용하는 여덟 가지의 석약(石藥)으로, 주사(朱砂)ㆍ웅황(雄黃)ㆍ운모ㆍ공청(空靑)ㆍ유황(硫黃)ㆍ융염(戎鹽)ㆍ초석(硝石)ㆍ자황(雌黃)이다. 옥장은 옥이 녹은 물로 일명 옥천(玉泉)이라 하는데 맛좋은 음료로 복용하면 불로 장생한다는 것이다.
[주D-004]알자(謁者) : 궁중에서 빈객(賓客)을 안내하는 일을 맡아보며 또 임금의 명을 받아서 사방에 사자(使者)로 나가던 관리의 이름.
[주D-005]미무 좨주(米巫祭酒)의 교 : 후한(後漢) 말기 장도릉(張道陵)의 손자인 장노(張魯)가 스스로 칭한 명호(名號). 장도릉은 촉중(蜀中)의 명학산(鳴鶴山)에서 도술을 배웠는데, 환자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다섯 말의 쌀을 받았으므로 오두미도(五斗米道)라 칭하게 되었다. 그후 장노는 이것을 계승한 다음 관명(官名)인 좨주(祭酒)를 따서 미무 좨주라 하였다. 이 교는 장각(張角)으로 이어져 결국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후한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주D-006]전진교(全眞敎) : 금(金) 나라의 도사 왕철(王喆)은 삼교평등회(三敎平等會)를 만들어 유교의 충효(忠孝)와 불교의 계율(戒律)과 도교의 단정(丹鼎 : 단약을 만드는 솥)을, 한 화로에서 도야된 것이라 하여 전진교라 하였으며, 스스로 중양자(重陽子)라 호하고 전진암(全眞菴)에 거주하였으므로 전진도사(全眞道士)라 칭하게 되었다.
[주D-007]백옥섬(白玉蟾) : 원명은 갈장경(葛長庚). 남송(南宋) 사람으로 경주(瓊州)에 살았으며, 자(字)는 여회(如晦)이고 호(號)는 해경자(海瓊子). 처음에는 뇌주(雷州)에 이르러 백씨(白氏)의 양자(養子)가 된 다음 옥섬이라 이름하였다. 무이산(武夷山)에서 도(道)를 배워 태일궁(太一宮)에 거주하고 자청명도진인(紫淸明道眞人)에 봉해져 도교 남종(南宗) 오조(五祖)의 하나가 되었다.
[주D-008]삼청(三淸)의 초제(醮祭) : 삼청은 도교의 삼신(三神)으로 옥청 원시천존(王淸元始天尊)ㆍ상청 영보도군(上淸靈寶道君)ㆍ태청 태상로군(太淸太上老君)인데, 이 옥청ㆍ상청ㆍ태청은 또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한다.
[주D-009]구류(九流) : 아홉 가지의 학파로 유가류(儒家流)ㆍ도가류(道家流)ㆍ음양가류(陰陽家流)ㆍ법가류(法家流)ㆍ명가류(名家流)ㆍ묵가류(墨家流)ㆍ종횡가류(縱橫家流)ㆍ잡가류(雜家流)ㆍ농가류(農家流)를 말한다. 《漢書 藝文志》
[주D-010]영근(靈根)과 혜성(慧性) : 원래 불가의 말로 사람이 태어날 때 영특하고 훌륭한 근기(根機)를 받은 것을 말한다.
[주D-011]감(坎)을 취하여 이(离)를 메운다 : 감은 북방으로 물에 해당하는데 정(靜)을 의미하며, 이는 남방으로 불에 해당하는데 동(動)을 의미한다. 동은 욕정(慾情), 정은 수양(修養). 곧 수양으로 욕정을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주D-012]투태(投胎)하고 탈사(奪舍)하니 : 투태는 영혼이 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탈사는 도가에서 남의 시신(屍身)을 빌려 화신하는 법. 건강(建康)에 진 도인(陳道人)이 있었는데 항상 오인(仵人: 시체를 검사하는 사람)과 왕래하며 술을 마시곤 하여 매우 친하였다. 도인은 그에게 “나는 17~18세의 건강한 남자 시신을 얻고 싶다.” 하였다. 하루는 유 태위(劉太尉)가 한 소년을 매질하여 죽자 오인이 갖다 주었더니, 도인은 그 시체를 목욕시킨 다음 자기의 옷과 관을 입혀 한 탑자(榻子) 위에 가부좌(跏趺坐 : 발등을 포개고 앉는 좌법〈坐法〉)시키고 자기도 그 앞에 가부좌하였다. 다음날 아침 보니, 도인은 시체로 화하고 소년의 시체는 살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탈사법이라 한다. 《癸辛雜誌》
[주D-013]삼오(三五)의 달리(達里) : 도(道)를 통달할 수 있는 상징의 주름이라 한다.
[주D-014]복준(覆准) : 복의(覆議)를 거쳐 비준(批准)하는 것.
[주D-015]치미(鴟尾) : 일명 치미(蚩尾)라고도 하는데 지붕의 등마루에 기와로 만들어 놓은 짐승의 모습. 이는 원래 한(漢) 나라 궁전에 화재가 많았는데, 하늘에 있는 어미성(魚尾星)의 상(像)을 만들어 지붕 위에 놓으면 화재를 방지할 수 있다는 술자(術者)의 말을 따른 것이라 하기도 하며, 또는 치(蚩)는 해수(海獸)이기 때문에 화재를 막을 수 있다 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주D-016]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 : 원우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원우간당이란 사마 광(司馬光)을 위시하여 여문저(呂文著)ㆍ문언박(文彦博)ㆍ소식(蘇軾)ㆍ정이(程頤)ㆍ황정견(黃庭堅) 등 당시의 문인(文人)과 학자 1백 19명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신종(神宗) 때 구파(舊派)인 사마광은 신파(新派)인 왕안석과 격렬한 당쟁을 벌였는데 신종의 뒤를 이은 철종은 구파를 등용하였다. 그러다가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숭녕(崇寧) 원년 간신인 신파의 증포(曾布)ㆍ채경(蔡京) 등은 휘종에게 구파의 2백 20명을 간당이라 하고 비석에 새겨 단례문(端禮門)에 세울 것을 주청하여 그 다음 해에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원우간당비이다.
[주D-017]소(蘇)ㆍ황(黃) : 문장가인 동파(東坡) 소식(蘇軾)과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을 가리킨다.
[주D-018]동(童)ㆍ채(蔡) : 소인인 동관과 채경을 가리킨다.
[주D-019]한우충동(汗牛充棟) : 서적이 많아 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하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아 올리면 마룻보에 가득함을 말한다.
[주D-020]《유양잡조(酉陽雜俎)》에 …… 다음과 같다 : 현재 《유양잡조》에는 24종에 그치지 않고 35종에 이르며 그 순서도 다른 바, 참고하기 위하여 적는다. 《자일왕검》ㆍ《사규명경》ㆍ《오주중경비귀질》ㆍ《비황자경》ㆍ《녹로교경(鹿盧蹻經)》ㆍ《함경도》ㆍ《와인도》ㆍ《원지도》ㆍ《목지도》ㆍ《대외신지도》ㆍ《견우경》ㆍ《옥진기》ㆍ《납성기(臘成記)》ㆍ《옥안기(玉案記)》ㆍ《단대경》ㆍ《일월주식경(日月廚食經)》ㆍ《금루경》ㆍ《삼십륙수경(三十六水經)》ㆍ《중황장인경》ㆍ《협룡자녹대경》ㆍ《옥태경》ㆍ《관씨경》ㆍ《봉망경》ㆍ《육음옥녀경》ㆍ《백호칠변경》ㆍ《구선경(九仙經)》ㆍ《십상화경(十上化經)》ㆍ《등중유수섭제경》ㆍ《삼강육기경(三綱六紀經)》ㆍ《백자변화경(白子變化經)》ㆍ《은수경(隱首經)》ㆍ《입군경(入軍經)》ㆍ《천추경(泉樞經)》ㆍ《적갑경》ㆍ《금강팔첩록》.
[주D-021]전오씨(典午氏)가 남도(南渡)한 이후 : 동진(東晉) 시대를 가리킨다. 전오(典午)는 진(晉) 나라의 성인 사마씨(司馬氏)를 가리키는데, 진 나라는 원래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으나 오호(五胡)의 난리 때문에 강동(江東)인 건강(建康)으로 천도(遷都)하였으니, 이 이전을 서진(西晉), 이 이후를 동진이라 칭한다.
[주D-022]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 하 빈객은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낸 하지장(賀知章)을 가리킨다.
[주D-023]《삼국지(三國志)》 강표전(江表傳) : 강표전은 원래 진(晉) 나라 우부(虞溥)가 찬한 것인데, 현재 전하지 않고 오직 《삼국지》의 주(注)에 만이 인용된 바, 이 말은 오지(吳志) 손책전(孫策傳) 주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4]채붕(綵棚) : 그늘을 지게 하기 위하여 나무로 시렁을 만들고 채색 비단으로 꾸미는 것인데, 불교의 행사 때에 많이 사용한다.
[주D-025]녹비공(鹿皮公)은 …… 나왔고 : 녹비공은 곧 녹비옹(鹿皮翁)으로 한(漢) 나라 사람인데 재주가 있어 손으로 기계를 만들었으며 사슴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산에 들어가 은거하여 선술을 익혔다. 옥화(玉華)는 아름다운 옥으로, 도가에서는 옥을 복용하면 장생 불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먹었던 녹비공도 결국 죽어 시체에서 벌레가 나왔으므로 한 말이다.
[주D-026]원회(元會)의 수 : 역학가(易學家)인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보면 천지의 시종수(始終數)는 12만 9천 6백 년인데 이것을 1원(元)이라 한다. 이것은 다시 달의 수인 12지지(地支)로 나뉘어져 1회(會)는 1만 8백 년이 된다 한다. 그리하여 하늘은 자회(子會)에서 개벽되고 땅은 축회(丑會)에서 개벽하였으며 사람과 물건은 인회(寅會)에서 비로소 태어났다. 미회(未會)의 3~4천 년을 경과하고 나면 사람이 50세가 넘어 혈기가 쇠하는 것처럼 천지도 늙는다. 다시 유회(酉會)의 6천 년을 경과한 뒤에는 유도(儒道)가 쇠하고 신선이 모두 없어져 남지 않으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소위 우물에서 연기가 나오고 나무에서 불이 난다는 시기이다. 술회(戌會)와 해회(亥會)를 경과하면 현재의 천지가 완전히 파괴되고 다시 새로운 천지가 개벽된다 하였다.

 

졸고천백 제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다가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중보(李中父)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한림(翰林) 이중보(李中父)가 사명을 받들고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하면서 나에게 들러 하직 인사를 하기에,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진사(進士)로 인재를 뽑는 것은 본래 당(唐)나라 때 성행하여, 장경(長慶) 초에 김운경(金雲卿)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신라(新羅)의 빈공(賓貢)으로서 두사례(杜師禮)가 주관한 시험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천우(天祐) 말년까지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사람이 모두 58명이며, 오대(五代)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때에 또 32명이 있는데, 발해(渤海) 출신 1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우리 고려에 와서도 일찍이 송(宋)나라에 선비를 보내어, 순화(淳化) 연간에 손하(孫何)가 주관하는 시험에 왕빈(王彬)과 최한(崔罕)이 합격하였고, 함평(咸平) 연간에 손근(孫僅)이 주관하는 시험에 김성적(金成績)이 합격하였고, 경우(景祐) 연간에 장당경(張唐卿)이 주관하는 시험에 강무민(康撫民)이 합격하였고, 정화(政和) 연간에 또 친시(親試)를 시행하여 권적(權適), 김단(金端) 등 4명에게 특별히 상사급제(上舍及第)를 내렸으니,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 대대로 인재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賓貢科)라는 것은 정식 과거시험 때에 매번 별도로 시험을 치러 방목(榜目) 끄트머리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서 정식 과거의 급제자들과는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수받는 관직도 대부분 낮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관직들이고, 더러는 곧바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원(元)나라에 와서 온 천하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여 인재를 등용할 때에 출신 지역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중원(中原)의 수재(秀才)들과 나란히 응시하여 금방(金牓)에 이름이 오른 자가 이미 여섯 명이나 된다. 중보는 비록 이들보다 뒤에 나오기는 하였으나 과거에서 높은 등급으로 발탁되어 황궁(皇宮)의 관직에 제수되었고, 그 은택이 양친(兩親)에게 미쳐 모두 은명(恩命)을 입었다. 그리고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고국에 사신으로 와서 모친(母親)을 고당(高堂)에서 알현하고 선영(先塋)에 분황(焚黃)하여 살아 계신 분이나 돌아가신 분 모두에게 영예를 안겼으니, 뜻을 성취하여 고향으로 돌아옴이 장경(長卿)과 옹자(翁子)가 촉(蜀)과 월(越)에서 출세를 과시했던 정도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문의 문창공(文昌公)은 나이 12세에 서쪽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에 함통(咸通) 15년의 과거에 등제하였고, 중산위(中山尉)를 거쳐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의 막하에서 보좌하여 관직이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에 이르렀다. 28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귀국하니, 고향 사람들 사이에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오고 있다. 당시는 당나라 말기에 속하여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공은 객지살이하는 외로운 몸으로 번진(藩鎭)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비록 헌질(憲秩)을 제수받기는 하였으나 실직(實職)이 아니었다. 본국으로 귀국하였으나 나라가 또 크게 어지러워 길이 막혀서 복명(復命)도 하지 못하였다. 평생을 논해볼 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영화는 그다지 누리지 못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어찌 우리 중보(中父)가 좋은 세상을 만나 화근직(華近職)에 오르고 게다가 한창 강장(强壯)한 나이에 뜻까지 더욱 겸손하여 그 전도(前途)를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겠는가. 그러니 가문과 국가를 드러내 영광되게 하는 것이 어찌 이 한때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부귀로 몸을 감싸고 공명을 천하 가득 떨치고 주금당(晝錦堂)을 우리나라에 크게 짓는 것을 보게 되리니, 후대 사람들이 중보를 우리나라의 옛 인물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평가할는지 모르겠다.
다시 기억하건대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 8)에 나 또한 외람되이 원나라에서 시행되는 회시(會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해에 응시자가 정원을 채우지 못해 좌방(左牓)에 오른 자가 겨우 43명이었다. 그 가운데 나는 요행히 제 21 명에 들어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여 고향 마을로 물러나 살아온 지 이제 13년이 되었다. 그동안 젊을 때의 웅장한 포부도 날이 갈수록 사그라져 더 이상 날고 뛰는 기세가 없어지고 말았다. 근래에 중보를 보고 나서는 내가 끝내 자포자기에 안주하여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음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니, 성명(聖明)하신 임금님을 저버린 부끄러움을 또 어찌 다 말하겠는가.
중부는 부디 노력하여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서 아홉 길의 높은 산을 완성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도록 하게나. 나는 중보와 절친한 사이인지라 먼저 그의 행실을 칭찬하고 또 과거 나의 어리석음을 질타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는 바이다.
원통(元統)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 3월 초길(初吉)에 쓰다.


 

[주C-001]이중보(李中父) : 중보는 이곡(李穀 : 1298 〜 1351)의 자이다. 이곡의 초명은 운백(雲白), 호는 가정(稼亭),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이자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20년(충숙왕 7)에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참군(福州司錄參軍)이 되었고,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제 1 등으로 합격한 뒤 이듬해인 1333년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제 2 갑(第二甲)으로 급제하였다. 원나라 재상의 추천으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었고, 1335년에 흥학(興學)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고려에 환국하였다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그 후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이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에게 건의하여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지하게 하였다. 고려에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3대의 실록(實錄)을 편수하였다.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문집으로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이 글은 1335년 이곡(李穀)이 흥학(興學)의 조서를 가지고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왔다가 돌아갈 때 지어준 것이다.
[주D-001]장경(長慶) : 당나라 목종(穆宗)의 연호로, 821년 〜 824년이다.
[주D-002]빈공(賓貢) : 외국에서 중국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한 선비를 이른다. 《송사(宋史)》 권487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조에, “선비를 바치는 것〔貢士〕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왕성(王城)에서 바친 선비를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 바친 선비를 향공(鄕貢)이라 하고, 타국(他國)에서 바친 선비를 빈공(賓貢)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3]천우(天祐) : 당나라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의 연호로, 904년 〜 907년이다.
[주D-004]빈공과(賓貢科) : 《동사강목(東史綱目)》 당(唐)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889, 진성여주〈眞聖女主〉 3년) 조에, “장경(長慶) 초에 김운경(金雲卿)이 처음으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빈공과는 과거가 있을 때마다 외국인을 위하여 보이는 별시(別試)로서 과거의 방(榜) 끝에 그 이름을 붙인다. 김운경으로부터 당 말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자가 58인이며, 오대(五代)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때에도 32인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나타낸 자는 최이정(崔利貞), 김숙정(金叔貞), 박계업(朴季業), 김윤부(金允夫), 김입지(金立之), 박양지(朴亮之), 이동(李同), 최영(崔霙), 김무선(金茂先), 양영(楊潁), 최환(崔渙), 최광유(崔匡裕), 최치원(崔致遠), 최신지(崔愼之), 김소유(金紹游), 박인범(朴仁範), 김악(金渥), 최승우(崔承祐), 김문울(金文蔚) 등으로 모두 성재(成材)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박인범은 시(詩)로 명성을 날렸고, 김악은 예(禮)로 일컬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최치원, 최신지, 최승우가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 원걸(元傑), 왕거인(王巨仁), 김수훈(金垂訓) 등은 모두 문장으로 저명하나 사서(史書)에 빠져 있어 전하지 않는다.” 하였다.
[주D-005]순화(淳化) : 송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990년 〜 994년이다.
[주D-006]왕빈(王彬)과 최한(崔罕) :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 제과(制科) 조에, “성종(成宗) 5년(986)에 최한(崔罕)과 왕림(王琳)을 송나라에 보내어 국자감에 입학시켰는데, 11년(992)에 최한과 왕림이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여 비서랑(秘書郞)에 제수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송사(宋史)》 권487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조에는 “순화 3년에 상(上)이 각 도의 공거인(貢擧人)들을 친히 시험하여 고려(高麗)의 빈공(賓貢)인 진사(進士) 왕빈(王彬)과 최한(崔罕) 등에게 급제를 주고 관직을 제수한 다음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왕빈(王彬)의 경우 그 이름이 《고려사》에는 왕림(王琳)으로 되어 있고 《송사》에는 왕빈(王彬)으로 되어 있다.
[주D-007]함평(咸平) : 송나라 진종(眞宗)의 연호로, 998년 〜 1003년이다.
[주D-008]김성적(金成績)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목종(穆宗) 원년(998)에 김성적(金成績)이 송나라에 들어가 등제(登第)하였다.” 하였다.
[주D-009]경우(景祐) :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로, 1034년 〜 1037년이다.
[주D-010]정화(政和) :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로, 1111년 〜 1117년이다.
[주D-011]권적(權適), 김단(金端) 등 4명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예종(睿宗) 10년(1115) 7월에 김단(金端), 견유저(甄惟底), 조석(趙奭), 강취정(康就正), 권적(權迪)을 송나라 태학(太學)에 보내었고, 12년(1117)에 권적, 조석, 김단이 상사급제(上舍及第)로 등제(登第)하였다.” 하였다. 《고려사》에는 권적(權適)이 권적(權迪)으로 되어 있으며, 급제자 수는 4명이 아니라 3명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고려사》 세가(世家) 예종(睿宗) 12년 5월 조에는 “황제가 처음으로 권적(權適) 등을 집영전(集英殿)에서 몸소 시험을 보여 권적 등 4인에게 상사급제를 하사하고 권적에게는 특별히 화요직(華要職)을 제수하였다.”라 하여 본문과 일치한다.
[주D-012]금방(金牓) : 과거 급제자의 이름을 써서 걸어두는 방문(榜文)으로 금방(金榜)이라고도 한다.
[주D-013]여섯 명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의하면, 충숙왕 5년(1318)에 안진(安震)이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8년(1321)에는 최해(崔瀣)가, 11년(1324)에는 안축(安軸)이 각각 합격하였다. 나머지 세 명은 미상이다. 이곡은 충숙왕 복위 2년(1333)에 합격하였다.
[주D-014]높은 등급 : 이곡이 1333년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제 2 갑(第二甲)으로 급제한 것을 말한다.
[주D-015]황궁(皇宮)의 관직 : 이곡이 제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 재상의 추천으로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된 것을 말한다.
[주D-016]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追贈)될 때에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 나아가 이를 고하고 사령장의 부본(副本)인 누런 종이를 불태우던 일을 말한다.
[주D-017]장경(長卿)과 …… 정도 : 장경은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사마상여가 고향인 촉(蜀)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면서, 승선교(昇仙橋)를 지나다가 다리 기둥에 쓰기를, “높은 수레와 사마(駟馬)를 타지 않고는 이 다리 밑을 지나지 않으리라.〔不乘高車駟馬 不過汝下〕” 하였다. 그 뒤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를 읽은 한 무제(漢武帝)가 그를 등용하여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한 후 촉 땅에 사신으로 파견하자, 태수(太守) 이하 관원들과 그동안 자신을 박대하던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輿地廣記 卷29》《漢書 卷57 司馬相如傳》 옹자(翁子)는 주매신(朱買臣)의 자(字)이다. 주매신은 한 무제 때 엄조(嚴助)의 천거를 받아 고향인 오월(吳越)의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었는데, 부임하는 길에 수년 전 가난하게 지낼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옛 아내가 개가(改嫁)한 새 남편과 함께 부역에 나가 길을 닦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 부부를 뒷수레에 싣고 가서 마소를 먹이는 심부름을 시켰다. 또 주매신은 예전에 회계군(會稽郡)의 수저승(守邸丞)에게 기식(寄食)을 한 적이 있었는데, 회계 태수가 된 뒤 일부러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인끈을 품속에 감추고서 도보로 군저(郡邸)에 부임하여 관아의 아전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漢書 卷64 朱買臣傳》
[주D-018]문창공(文昌公) :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을 이른다.
[주D-019]함통(咸通) 15년 : 이규경(李圭景)의 ‘최문창(崔文昌) 사적(事蹟)에 대한 변증설〔崔文昌事蹟辨證說〕’에 의하면, 최치원이 배찬(裵瓚)이 주관한 과거에 합격한 것은 18세이며,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원년(874)으로 신라 경문왕(景文王) 14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함통 14년(873) 7월에 의종(懿宗)이 죽고 이듬해에도 함통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다가 11월에 가서야 건부로 개원(改元)을 했기 때문에 함통 15년과 건부 원년은 실제 같은 해를 가리킨다.
[주D-020]고 시중(高侍中) : 당나라 장수 고변(高騈)을 가리킨다. 황소(黃巢)의 난 때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로 난을 진압하다 최치원이 떠나고 3년 뒤인 887년에 부장(部將) 필사탁(畢師鐸)에게 살해당했다.
[주D-021]헌질(憲秩) : 어사(御史)의 직위를 가리킨다.
[주D-022]화근직(華近職) :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화려한 직임을 이른다. 이 역시 이곡이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된 것을 가리킨다.
[주D-023]주금당(晝錦堂) : 위국공(魏國公) 한기(韓琦)가 출세를 한 후 고향인 상주(相州)에 세운 건물로서, 동시대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한기를 위해 지은 상주주금당기(相州晝錦堂記)가 있다. 《古文眞寶 後集 卷6》 주금(晝錦)은 의금주행(衣錦晝行)의 준말로서 반대어인 의금야행(衣錦夜行)에서 나온 말이다. 즉 진(秦)나라 말기에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에 입성하여 진나라 서울인 함양(咸陽)을 도륙할 때, 어떤 이가 항우에게 관중에 그대로 머물 것을 권유하였는데, 진나라 궁궐이 이미 파괴된 것을 본 항우는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부귀를 얻고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富貴不歸故鄕 如衣錦夜行〕”고 대답하였다. 이 고사에서 연유하여 후대에 부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금주행(衣錦晝行), 줄여서 주금(晝錦)이라 한 것이다. 《漢書 卷31 項籍傳》
[주D-024]다시 기억하건대 : 국역 대본에는 ‘復記’로 되어 있는데,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잡록(雜錄)에 수록된 동일 작품에는 ‘復’ 자가 ‘因’ 자로 되어 있다. 《韓國文集叢刊 第3輯 232쪽》
[주D-025]나 또한 …… 있었는데 : 《고려사》 선거지(選擧志) 제과(制科) 조에, “충숙왕 7년(1320) 10월에 안축(安軸), 최해(崔瀣), 이연종(李衍宗)을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8년(1321)에 최해가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황제가 칙명(勅命)으로 요양개주판관(遼陽盖州判官)을 제수하였다.” 하였다.
[주D-026]좌방(左牓) : 《원사(元史)》 선거지(選擧志)에 의하면, 원나라 때에 과거 합격자의 방을 게시하면서 좌우로 두 개의 방을 붙였는데, 지배층인 몽고인(蒙古人)과 터키ㆍ이란ㆍ유럽 등의 색목인(色目人)을 우대하여 우방(右牓)에 게시하고 금(金)나라 유민인 화북(華北)의 한인(漢人)과 남송(南宋)의 유민인 강남(江南)의 남인(南人)은 좌방(左牓)에 게시하였다. 고려인이 좌방에 게시된 것으로 보아,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우대를 받는다는 최해의 형식적인 표현과 달리 실제로는 중하등의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일 작품에는 ‘용방(龍牓)’으로 되어 있다.
[주D-027]한 삼태기의 …… 못하는 :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밤낮으로 모든 일에 부지런하소서. 사소한 일이라 하여 신중히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니, 아홉 길의 산을 쌓으면서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夙夜 罔或不勤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 하였다.
[주D-028]초길(初吉) : 초하루를 이른다.


 

 

 

 

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12)
확대원래대로축소
  9월 13일(무오) 맑음
좌목
 10-09-13[09] 자경전에 강관 이승보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하였다
○ 사시(巳時).
상이 자경전에 나아가 진강하였다. 이때 입시한 강관 이승보(李承輔), 참찬관 심순택(沈舜澤), 검토관 박제성(朴齊晟), 가주서 김홍집, 기사관 김유, 별겸춘추 박용대가 각각 《시전》 제7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상이 전번에 배운 부분을 음으로 한 번 외우고 나서 책을 폈다. 이승보가 ‘고종우궁(鼓鍾于宮)’부터 ‘백화팔장(白華八章)’까지 읽고 이어 뜻풀이를 하였다. 상이 서산(書算)을 이승보에게 주도록 명하였다. 상이 새로 배운 내용을 음으로 열 번 읽고 나니, 이승보가 서산을 반납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장(章)으로 보건대, 신후(申后)는 높은 적후(嫡后)로서 도리어 비천(卑賤)하게 되어 존비(尊卑)가 차서를 잃게 되었으니, 그 스스로 슬퍼하는 말들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천운이 열리지 않아 시세가 험란한 때를 당하여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유왕(幽王)이 그 나쁜 시호를 얻게 된 것이 마땅하다. 왕이 비록 이와 같았으나 신후는 이와 같이 생각할 수 있었으니, 그 어짊을 알 수 있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군자의 도는 부부(夫婦)에게서 그 단서가 만들어지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도 규문(閨門)에서 근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에게 본보기를 보여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실로 이 때문입니다. 비록 민간의 보통 사람이라 하더라도 첩을 사랑하고 처를 소홀히 하면 그 집안을 보전할 수 없는데, 더구나 지존한 천자로서 비(妃)와 첩(妾)이 이처럼 차서를 잃었으니 어찌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나쁜 시호는 그래도 몸이 죽은 뒤의 일에 속하지만, 유왕은 생전에 몸소 국난(國亂)으로 욕을 입어 다시는 남은 땅이 없어 만세토록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분수를 나누는 것은 엄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비와 첩에 있어 등급을 분명히 엄하게 나누어야 하는 것이 어떠한 일인데, 유왕의 처사가 이와 같아 그 외의 정치가 따라서 어그러졌으니, 이 때문에 상난(喪亂)이 없는 날이 없던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유왕이 집안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 정치를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견융(犬戎)의 난이 있게 된 것이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부부의 도는 바로 집안을 바로잡는 일의 시초인데 비와 첩에 대해 이와 같이 일을 처리하였으니 견융의 난이 있게 된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견융이 중국을 침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유왕이 불러들인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 군자가 조정에 있었다면 어찌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포사(褒姒)가 안에서 멋대로 권력을 부렸으니, 자연 소인이 등용되고 군자가 소원해졌을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이 형세에 있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이 때문에 근본이 어지러운데도 말단이 다스려진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하고, 박제성이 아뢰기를,
“부부의 도는 비유하자면 천지(天地)와 같습니다. 천지의 기운이 교감하여야 만물이 이루어지듯이 부부의 위치가 바르게 되어야 가도(家道)가 이루어지니, 이것이 떳떳한 이치입니다. 지금 이 신후는 어진데도 지위를 잃고 포사가 농염하게 차지하고 있어 존비의 차서가 정해지지 않고 비첩의 분별이 명확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나라를 위태롭지 않게 하고자 한들 될 일이겠습니까. 《중용》에,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단서가 만들어진다.’ 하였으니, 규문 안에서 항상 경계를 하여 덕행으로 서로 도우면 집안은 반드시 가지런하게 되고 나라는 반드시 다스려져 영장(靈長)의 복이 자연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고, 심순택이 아뢰기를,
“강관과 유신들이 이미 갖추어 진달하였습니다만, 이 시의 여덟 장은 모두 비체(比體)입니다. 대개 유왕이 착하지 못하여 그 덕을 이랬다저랬다 하여 진실로 원앙(鴛鴦)만도 못하였는데, 두루미를 기르고 학(鶴)을 버리는 데 비유하였으니, 그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이승보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가에서 훌륭한 정치를 이루고 나라를 일으킨 것은 또한 후비(后妃)의 현성(賢聖)함에 연유하였습니다. 주(周) 나라를 놓고 말한다면, 태임(太任)과 태사(太姒), 읍강(邑姜)이 안에서 정치를 도왔기 때문에 주 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읍강의 아비가 누구였으며, 무왕(武王)이 읍강을 처로 삼은 것이 왕업을 일으키기 전이었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읍강의 아비가 강태공(姜太公)입니다. 무왕이 배필로 맞은 것은 과연 왕업을 일으키기 전이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태사와 태임, 읍강은 과연 삼세(三世)의 현성한 후비였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주 나라 800년의 기업(基業)이 실로 이에 근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책을 덮었다. 이승보가 아뢰기를,
“종친부에서 《선원보략(璿源譜略)》 및 《속보(續譜)》를 쓰는 일이 매우 많고 번잡한데 사자관(寫字官)이 매번 부족한 상태입니다. 변통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으니, 내각과 옥당의 예에 의거하여 글씨 잘 쓰는 사람 몇을 골라 종친부 대령(宗親府待令)의 단자(單子)로 거행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사람으로 숫자를 정해야겠는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액수를 마련해야 할 것인데, 20인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자관이 본래 40인인데 차비 대령(差備待令)을 하는 자는 실로 내각(內閣)의 소속이 아니다. 이번에도 망단자(望單子)에 차비 대령으로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승보가 아뢰기를,
“차비 대령의 숫자가 지금 20원(員)인데, 올봄 취재(取才) 때 20인으로 뽑아 취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친부에서도 취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취재를 해야 할지의 여부는 아직 의논하여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쓰는 일을 위하여 설치된 것인 이상 잘 쓰는 사람을 골라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종친부에서 의논하여 정하라.”
하였다. 이승보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선파(璿派) 가운데 왕사(王事)에 죽었거나 억울하게 죄명을 입게 된 사람들의 후사(後嗣)를 이어주는 일에 관한 추가 별단(別單) 가운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5대 손 원진(元軫)이 후사가 없어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 정현(廷賢)으로 후사를 세워주도록 하여 계하받았습니다. 그런데 보책(譜冊)과 종친부에 있는 자손록(子孫錄)을 상고해 보니, 양녕대군 5대 손의 항렬에는 애당초 원진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그의 후손이 없는 것으로 계본을 만들게 되었으니, 너무도 송구스럽습니다.
듣건대, 신과 같은 파(派)의 사람 가운데 한 종인(宗人)이 신의 말이라 가탁하고는 도보소(都譜所)의 유사에게 거짓으로 전함에 유사가 그 말만을 듣고 다시 의심하지 않고 별단을 수정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실상이 없는 이름이었으니, 그냥둘 수 없습니다. 원래의 별단(別單)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 보책 가운데 과연 그런 이름이 없는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친부에 과연 예전의 자손록이 있는데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연조(年條)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숙종조 때 수합한 것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의 별단 가운데 원진의 후사를 세우는 조항에 부표(付標)하여 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런데 어찌 거짓으로 전하는 일까지 있단 말인가. 거짓으로 전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필시 어리석고 협잡스러운 마음으로 이러한 어그러진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듣건대, 그 사람은 시골에 있는 종인인데 즉시 시골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금 불러오도록 하였으니, 조사해 물어본 뒤 종벌(宗罰)을 시행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벌은 어떻게 실시하는 것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같은 파의 종인들이 모두 모여 혹 사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등의 벌로 시행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보첩(譜牒)을 더럽게 어지럽히는 무리이다. 듣건대, 선파의 후예 가운데 상천(常賤)이 많은데 양녕대군의 파 가운데 더욱 많다고 한다. 어찌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른 것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중엽에 이르러 선파의 후예들이 영락하여 크게 변하고 빈궁해져 배우지 못하여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상천과 비슷하게 되어버린 자가 그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양녕대군 파의 인원이 조금 많아 영락한 바가 더욱 심하였기 때문에 상천을 면치 못한 자가 더욱 많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의 전교를 보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선정의 자손이 영락한 것이 염려스럽기 때문에 이렇게 전교한 것이다. 사손(祀孫)으로서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가 몇 사람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성덕(聖德)이 보기 드물게 훌륭하시니 신은 흠앙해 마지않습니다. 문묘(文廟)에 합사(合祀)한 선정의 사손 가운데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는 조금 전 반차(班次)에서 들으니 6, 7가(家)가 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암(靜菴), 율곡(栗谷), 우계(牛溪), 우암(尤菴)의 사손은 모두 관직이 있는데, 퇴계(退溪), 회재(晦齋), 사계(沙溪), 동춘(同春), 현석(玄石)의 집안에는 없다고 하지 않는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사손도 아직 벼슬길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서(河西)에게 사손이 있는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하서의 자손이 대부분 호남에 살고 있는데, 사손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지난해 듣건대, 사손의 일로 서로 다투고 있다고 하였는데, 언제 올바르게 결말이 났는지 또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파(宗派)가 어찌하여 서로 다투는 것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필시 중간의 사단(事端)을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일텐데, 정도전(鄭道傳)의 사손이 서로 다투었던 일과 비슷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도전의 사손은 연전에 과연 새로 정하였으니, 이미 음직(蔭職)으로 보임되었을 듯하다.”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포은(圃隱)의 사손은 작년에 송도(松都)로 행행(幸行)하였을 때 거두어 서용하였는데, 안 문성공(安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손은 바로 안기영(安驥泳)의 집이다. 최 고운(崔孤雲)과 설 홍유(薛弘儒)의 후손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은 해주(海州)에 많이 살고 있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퇴계의 사손은 그 이름을 무엇이라 하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이중의(李中懿)라 하는데,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암(靜菴)의 사손은 일찍이 전 문형(文衡)이라 알고 있었는데, 지난번 들으니 사손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조성교(趙性敎)의 재종질(再從侄) 조종순(趙鍾純)이 바로 그 사손인데, 이번에 음사(蔭仕)로 보임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선정(先正)은 12인인가?”
하니, 박제성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세화(李世華), 이동표(李東標), 연최적(延最績)은 충절이 가상한데, 연최적의 자손들은 어디에 있는가? 지난번에 경연에서 물으니, 이계로(李啓魯)는 충청도 땅에 있다고 한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도 그날 경연 석상에 나와 들었습니다. 청안(淸安) 땅에 연씨(延氏) 성을 가진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 신하 이외에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형제,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는 모두 같은 때 사람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김만중(金萬重)은 판의금부사로 죄를 입은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암도 비록 예송(禮訟)으로 화를 입긴 하였지만 그가 죽은 것도 같은 때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과연 기사년 4월에 화를 받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용익(南龍翼)은 찬배(竄配)만 된 것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끝내 적소(謫所)에서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후손으로서 조정에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전 승지 남일우(南一祐)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서포의 사손은 누구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전 현감 김관수(金觀洙)가 있는데, 종손(宗孫)은 아닌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곡의 사손은 바로 이조 판서의 생가(生家)인데, 퇴우당(退憂堂)의 후손은 누구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김수흥(金壽興)의 후손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혹 차자(次子)가 제사를 계승하기도 하고 또 출계(出系)한 자도 있기 때문에 상세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곡(暘谷 오두인(吳斗寅))과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의 사손은 모두 외임(外任)이라 하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박제만(朴齊萬)은 전임 군수이고, 오달선(吳達善)은 이번에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쌍백당(雙栢堂 이세화(李世華))의 사손은 그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이헌경(李軒卿)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하로서 마땅히 죽어야 할 처지에서 죽었으니, 그 충절이 살아 있는 듯 늠름하다. 그 집안에 있어서는 이름있는 조상이 되는데, 조정에서 반드시 그 후손을 거두어 등용한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그 당시 소인에게 만세토록 용서받기 어려운 죄악이 있었는데, 그 후손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알고자 하지 않으니, 이는 거울삼아 경계할 만한 것이다. 《시경》에도 이렇게 소인이 군자와 배치(背馳)되어 반드시 사지(死地)로 모함하고자 하는 내용이 많으니, 그 형세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인은 비록 한때의 이끗은 있을지라도 만년토록 악취를 남기며, 군자는 비록 당시의 원통함은 있을지라도 백세토록 향기를 발산하니, 그 장단을 비교해 보면 댓 갑절 정도뿐만이 아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여 해를 끼치는 것은 정암(靜菴) 때 남곤(南袞)이나 심정(沈貞)의 일과 같으니, 지금 와서 보아도 너무나 통탄스럽다.”
하자, 심순택이 아뢰기를,
“군자와 소인의 일은 백대가 지난 뒤에도 상상해 볼 수 있는데, 그 호오(好惡)의 공변됨은 바로 타고난 떳떳한 양심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정원일기(政院日記)》를 보니, 기사 환국 때 충성을 지키다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숙묘(肅廟)께서 비록 미처 통촉하지는 못하셨지만 그 후에 다시 새롭게 교화하여 소인을 내쫓고 군자를 등용하였다.”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 당시 어진 신하들이 과연 배출되었습니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는 실로 나라에서 배양한 공입니다. 소장(消長)의 이치는 예로부터 그러하였으니, 소인이 비록 잠시 때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 형세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치와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천도(天道)는 양(陽)이 많고 음(陰)이 적어야 세공(歲功)을 이룰 수 있으니, 사람의 몸으로 말하면, 편안할 때가 많고 아플 때가 적어야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니, 박제성이 아뢰기를,
“이것도 기수(氣數)입니다. 군자와 소인이 비록 혹 나란히 나아간다 하더라도 그 충(忠)과 역(逆)의 판별은 백년이 지나기도 전에 정해지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기수가 그러한데, 충과 역의 판정이 어찌 백년까지 갈 것이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물이 혹 때로 막혔다가도 툭 트이게 되면 끊임없이 흘러가게 되는 것과 같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행하게 됨에 미쳐서는 강하(江河)가 트인 것처럼 줄기차게 된다고 한 것이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자,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는 뜬구름이 하늘을 가렸다가도 이내 구름이 걷히면 예전처럼 청천 백일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자와 소인의 분별을 엄하고 밝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위정 척사(衛正斥邪)의 공에 보탬이 있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군자가 정(正)이고, 소인이 사(邪)니, 이것이 바로 사와 정의 구분입니다.”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군자는 참언(讒言)을 만나고 난(亂)을 겪을 때마다 탁월한 충절과 꼿꼿한 절개가 더욱 스스로 드러나니, 그렇다면 소인이 정(正)을 해치는 것은 다만 군자가 성취해 나가는 데 한 단서가 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관의 말이 참으로 그러하다. 소인의 화(禍)가 과연 군자의 이름을 이루게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고 이어 강관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옥담유고
확대원래대로축소
경신년(1620) 겨울에 관서로 가는 길에 송도를 지나며 2수 [庚申冬往關西過松都 二首]

한수에서 용이 일어나던 날 / 漢水龍興日
신왕이 대전에서 내려왔지 / 辛王下殿初
백성들은 옛 터전에 살고 있건만 / 殷民留舊宅
고려 사직은 폐허가 되었어라 / 秦社但遺墟
왕업이 있던 황량한 성은 저물고 / 覇業荒城晩
당시 벼슬아치들은 들판에 묻혔네 / 衣冠野草餘
존망의 역사란 으레 이와 같나니 / 存亡類若此
깊이 탄식하며 홀로 서성이노라 / 沈嘆獨躊躇

서쪽으로 가서 옛 도성에 들어서니 / 西行入故國
흥망의 사적을 누구에게 물을거나 / 興廢問因誰
곡령에 왕의 기운이 그치자 / 鵠嶺休王氣
용만에서 의로운 군사 돌렸지 / 龍灣返義師
높은 대에는 우거진 풀이 덮였고 / 高臺荒草遍
사직단 터는 무너진 담장만 남았네 / 殘社敗垣遺
해 저무는 청산에 홀로 섰노라니 / 獨立靑山暮
차가운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온다 / 寒風自北吹

[주D-001]한수(漢水)에서 …… 날 :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왕업(王業)을 일으킨 때를 가리킨다. 용이 일어났다는 것은 제왕의 등극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D-002]신왕(辛王)이 대전에서 내려왔지 : 신왕은 신돈(辛旽)의 아들로 몰려 폐위(廢位)된 우왕(禑王)을 가리킨다.
[주D-003]곡령(鵠嶺)에 …… 그치자 : 고려의 국운이 끝났음을 뜻한다. 곡령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開城) 송악산(松嶽山)의 이칭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여 “계림은 누른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고 한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주D-004]용만(龍灣)에서 …… 돌렸지 : 용만은 의주(義州)의 이칭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을 가리킨다.

 

高麗史節要 卷之三
확대원래대로축소
 顯宗元文大王
[癸亥十四年 宋 仁宗 天聖元年,契丹 太平三年]


春正月,宴宰樞于內殿。○以蔡忠順,爲太子少師,徐訥,參知政事,郭元,爲中樞使,庾方,爲西北面行營都統使。○契丹,焦福等十一戶,來投。○以晉舍祚,朱德明,爲尙書左右僕射。○黑水靺鞨,烏沙弗等八十人,來獻土物,各賜布帛。○二月,以李龔,爲西京留守。○追封崔致遠,爲文昌侯。○東女眞,酋長阿盧弗,西女眞那閼蓋,來朝。○三月,遣秘書監劉徵弼,如契丹。○夏四月,契丹,遣左散騎常侍武白,耶律克恭,來,冊太子欽,爲輔國大將軍,檢校太師,守太保,兼侍中,高麗國公。○女眞靺鞨,群豆等七十餘人,來獻馬。○五月乙亥,金州,地震。○契丹,麻許底等十三戶,來投。○司憲臺奏,百官於朝會,跪膝私語,或單拜起居,搪揬班行,殊失朝儀,請加嚴禁,從之。○宴文武參官於天福殿,賜馬人一匹。○契丹,大世奴,齊化那等八人,來投。○女眞,酋長尼于弗,來朝。○六月,以旱,慮囚。○賜張喬等四人,明經二人,及第。○秋七月,契丹,遣太保黃信,來賀生辰。○吏部,奏,前大常齋郞全彥,追服母喪,以孝聞,請加次第職,用勸將來,從之。○九月,靺鞨,首領阿令朱,來朝。○閏月,契丹,使栗守常,來聘。○契丹,東京使高仁壽,來。○敎諸州縣義倉,本以救急,毋得濫費。○冬十一月,黑水,酋長耶肸羅等,來朝。○宋,泉州人陳億,來投。○十二月,宴宰樞,及上將軍於乾德殿。○以庾方,爲太子太保,李龔,爲內史侍郞,平章事,監修國史,李元,檢校太子太保。


 

 

 불우헌집 제2권
확대원래대로축소
 문(文)
동중향음주서(洞中鄕飮酒序)



향음주례(鄕飮酒禮)는 그 유래가 오래이다. 고을에서 서로 친목하게 되면 능범(凌犯)과 쟁송(爭訟)의 기풍이 그친다. 옛적 주(周)나라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군자(士君子)의 행실이 있었던 것은 이 예를 강론하여 밝혔기 때문이다.
모(某) 등은 다행히 태평한 세상에 태어나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도록 인접하여 사는 사람들이 모두 30여 가구이다. 어린아이들이 계속 태어나 자라는데 안일하게 지내기만 하고 가르침이 없으면 장차 행실이 어긋나 감당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게 되는 까닭으로 먼저 서당을 열어서 어린이를 깨우치는 법을 엄하게 하고 또 향음주례를 정하여 이웃 간에 화목한 규정을 세웠다.
예(禮)의 문(文), 기(器), 용(用)을 비록 다 고법(古法)에 합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경을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치어 염결(廉潔)하고, 효도하고, 공손하고, 겸손한 것은 준수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이며, 사치함을 가르치고 음란함을 가르치어 욕심을 방자하게 하는 것은 경계하고 삼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즉 어찌 다만 고을에만 서로 친목할 뿐이겠는가. 그 공효가 천리가 얻어지고 인심이 바로잡히기에 이르러 충신이 나오고 효자가 나오고 사람들과 사귀기를 잘함이 계속 이어져서 다하지 않아 주나라의 풍화를 오늘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밖의 약속한 조목을 다음에 열거한다.
성화(成化) 11년 을미년(1475, 성종6) 10월 일 동로(洞老) 정언(正言) 정극인(丁克仁)이 서문을 적다.

불우헌 정 선생은 오직 우리 고을에 덕이 높은 어른일 뿐 아니라 곧 문종조의 일민(逸民)이었다. 지금 향음주례 서문을 읽고 또 고을의 기풍을 보니, 실로 선생이 조정에서는 유일(遺逸)이 되고 고을에서는 빛남이 우뚝하여 미칠 수 없음을 알겠다.
우리 고을은 고운 선자(孤雲仙子 최치원(崔致遠))가 수령으로 부임했던 곳이다. 산천이 구불구불하고 문호가 즐비하여 큰 재덕을 갖춘 이들이 빛나게 배출되었으니, 실로 남방의 기경(奇境)이다. 부모, 자손, 형제, 붕우가 한 마을에 살면서 온화하고 기쁘게 지냄이 마치 훈지(塤篪)와 같은 것은 모두 선생이 남기신 약속으로부터 이른 것이니, 그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더구나 선생이 서문을 썼을 때는 집이 겨우 30가구였으나 지금은 이미 50여 가구가 넘는데, 무릇 관자(冠者)와 동자(童子)가 선생의 서문과 약조를 외워 음미하기를 기름진 고기를 씹듯이 하여 입에 익고 마음에 젖어 장차 불목과 불의를 행할 겨를이 없다. 뜻밖에 약조를 벗어나는 자가 있으면 드러난 책망은 비록 작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벌이 두려워할 만하다.
세림(世琳)은 30년 뒤에 태어나 한스럽게도 선생의 얼굴을 못 뵙고 친히 선생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지금 옛 좌목(座目)이 더럽게 훼손된 것을 우려하여 장차 새롭게 하려고 하는데, 어떤 이가 세상을 떠난 사람의 이름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 세림이 굳게 만류하여 말하기를, “크게는 국사(國史)가 있고 작게는 야사(野史)가 있는데, 요는 모두 후세로 하여금 그 사람이 행한 바가 어떠한지 알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 좌목이 비록 행한 바를 적지는 않았으나, 혹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면 후세의 사람이 그 이름을 가리키며 두루 헤아리기를 ‘누구는 정직하고 누구는 사특하며 누구는 선하고 누구는 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 현손(玄孫), 운손(雲孫), 내손(來孫), 잉손(仍孫)이 된 이들이 혹 낯을 들기도 하고 혹 얼굴을 붉히기도 할 것이니, 장차 사특하고 악함을 버리고 정직하고 선함을 이루려는 이에게 어찌 하나의 귀감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옳다.”라고 하기에,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둔다. 아, 후세의 사람이 가리키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정덕(正德) 5년 경오년(1510, 중종5) 8월 하한(下澣)에 동중 말학 전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송세림(宋世琳)이 삼가 발문을 적다. -송세림은 문과에 장원을 하여 옥당(玉堂)의 직책을 역임하고 능성(綾城)의 수령이 되었다. 호는 눌암(訥庵)이고 취은(醉隱)이라고도 한다.-


 

[주D-001]좌목(座目) : 계첩(契帖)에 계원의 성명을 차례로 적은 것을 말한다.


 

 

不憂軒集卷二
확대원래대로축소
 
洞中鄕飮酒序 a_009_033b
  



鄕飮酒之禮。尙矣。鄕閭親睦。則凌犯爭訟之風息矣。成周之世。人人皆有士君子之行者。由其講明是禮009_033c也。某等幸生太平之世。雞鳴狗吠。相聞而居者。凡三十餘家。童蒙之出。兟兟振振。逸居而無敎。則將有扞格不勝之患。故旣設家塾。以嚴開蒙之法。又設鄕飮。以立睦隣之規。禮之文。禮之器。禮之用。雖未能盡合於古。敎敬也。敎禮也。潔也孝也悌也遜也。則遵而勿失。敎侈也。誨淫也。恣慾也。戒之愼之。則豈但親睦鄕閭而已哉。其效至於天理得人心正。而忠臣也孝子也善與人交也。源源而不竭。周之風化。復見於今日矣。可不勉哉。其他約束之目。列之如左。成化十一年乙未十月日。洞老正言丁克仁。序。
009_033d不憂軒丁先生。非惟吾洞中耆德。卽文廟朝逸民。今讀序約。又覩洞風。信先生逸於朝而光於洞。卓乎不可及已。吾洞中。是孤雲仙子所莅地。山川蜿蜒。門棟鱗錯。宏材碩德。彬然輩出。實南方奇境。而父若母子若孫。昆而季朋而閈。雍雍愉愉。塤如篪如者。並從先生垂約中來。夫豈偶然哉。況先生序約時。家僅三十。今已逾五十餘。凡冠者髫者。誦先生之序之約。咀嚼如膏肉。口染心浸。將不暇爲不睦不義也。脫有凌駕約外者。顯責雖微。陰罰可懼。世琳生三十載之後。恨不得見先生面。親炙先009_034a生訓也。今慮舊座目汚毀。將新之。或有欲去謝世名者。世琳牢止曰。大有國乘。小有野史。要皆令後世知人所行如何耳。這一目雖不記所行。倘有名傳後。則後之人。指點而歷數曰。某也正。某也邪。某也善。某也惡。爲其玄雲來仍者。或揚顏。或赧面。將圖去其邪惡。就其正善者。豈非一鑑。僉曰是。俱錄如左。噫。後之人之指點。盍懼諸。正德五年庚午八月下澣。洞中末學。前禮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宋世琳。謹跋。世琳文科壯元。歷玉堂。守綾城。號訥庵。亦曰醉隱。


 

         

 

계원필경집 서
확대원래대로축소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서유구(徐有榘)]



《계원필경집》 20권은 신라의 고운(孤雲) 최공(崔公)이 당나라 회남(淮南) 막부(幕府)에 있을 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응수하여 지은 것으로서,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직접 편집하여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려 바친 것이다.
공의 이름은 치원(致遠)이요, 자(字)는 해부(海夫)요, 고운은 그의 호(號)이다. 호남(湖南) 옥구(沃溝)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타고 중국에 들어가서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한참 뒤에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그만두었다.
그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는데,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 고변(高騈)이 회남에 막부를 열고는 공을 불러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표(表)ㆍ장(狀)ㆍ문(文)ㆍ고(告) 등 모든 글이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황소의 죄를 성토한 격문(檄文)은 천하에 전송(傳誦)되었다. 공의 공적이 조정에 보고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국신사(國信使)에 충원되어 동방으로 돌아와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을 섬기며 한림 학사(翰林學士)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외방으로 나가 무성 태수(武城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가족을 이끌고 강양군(江陽郡)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는데, 그의 묘소는 호서(湖西)의 홍산(鴻山)에 있다. 어떤 이는 공이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나, 이는 허망한 말이다.
대저 바닷가의 외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하는 것을 마치 지푸라기 줍듯이 하였으며, 끝내는 문장으로 한 세상을 울리면서 동시(同時)에 빈공(賓貢)한 사람들이 아무도 앞을 다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으로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막부에 몇 년 동안 거하면서 고변이 뜻있는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과 여용지(呂用之)와 제갈은(諸葛殷) 등이 허탄하고 망녕되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초연히 인혐(引嫌)하며 떠나갔는데, 떠나간 뒤 3년 만에 회남 지역에서 난리가 일어났고 보면, 공이야말로 또 기미(幾微)를 미리 알고 대처하는 명철한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그 인격으로 보나 그 문장으로 보나 후세에 전해지도록 해야만 할 것이요 절대로 그대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왕에게 올린 표문에 의거하면, 이 문집 이외에 금체부(今體賦) 1권, 금체시(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등이 또 있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계원필경》 20권과 문집 30권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다른 것들은 모두 전하지 않고 오직 이 《계원필경집》만 여러 차례 인행(印行)되었는데, 판각(板刻)은 오래전에 잃어버렸고 탑본(搨本) 또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계사년(1833, 순조33) 가을에 내가 호남을 안찰하며 순시하다가 무성(武城)에 이르러 공의 서원을 배알(拜謁)하고는 석귀(石龜)와 유상대(流觴臺) 사이를 배회하면서 유적을 둘러보노라니 감개가 새로웠다. 그때 마침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홍공(洪公)이 이 문집을 부쳐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 년 가까이 끊어지지 않고 실처럼 이어져 온 문헌이다. 그대는 옛글을 유통시킬 생각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기쁜 한편으로,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커질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얼른 교정을 하여 취진자(聚珍字)로 인쇄한 뒤에 태인현(泰仁縣)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합천군(陝川郡)의 가야사(伽倻寺)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아, 명주(名酒)가 있는 동네에는 반드시 두강(杜康)의 이름을 내걸고, 명검(名劍)의 칼날에는 반드시 구야(歐冶)의 이름을 표기하니, 이는 그 근본과 시초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해 오는 우리 동방의 시문집들은 이 문집을 개산(開山) 비조(鼻祖)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문집이 또한 동방 예원(藝苑)의 근본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니, 어찌 이 문집이 닳아 없어지는 대로 그냥 놔두고서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아서야 될 일이겠는가.
공이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저작한 글은 흩어져 없어져서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범궁(梵宮)과 사묘(祠廟) 사이에서 수풀을 헤치고 이끼를 긁어내면 그래도 십여 편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을 분류해 원집(原集)에 붙여서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인쇄해 보고 싶은 생각을 내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당 희종(唐僖宗) 중화(中和) 2년(882, 헌강왕8) 정월에 왕탁(王鐸)이 고변을 대신하여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이 되었고, 5월에는 고변을 시중(侍中)으로 올리고서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를 파직하였는데, 고변이 병권(兵權)을 잃은 데다가 이권(利權)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표문을 올려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言辭)가 불손하였으므로, 상이 정전(鄭畋)에게 명하여 조서(詔書)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문집에 나오는 〈시중에 올려 준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加侍中表〕〉을 보면, 겸손한 말로 인구(引咎)했을 뿐이요, 격분하거나 발만(勃謾)한 언사는 한마디도 없다. 또 〈선위하는 조서를 내린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賜宣慰表〕〉을 보면 “우러러 윤음을 살펴 보건대, 신의 부족한 정사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시어 군사들이 단합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고 하시면서〔仰睹綸音 深嘉秕政 師徒輯睦 黎庶安寧〕”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해하고 위로하며 장려해 준 것이 이처럼 은근하고 진지하기만 하였으니, 그렇다면 역사에서 말한 바 “조서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草詔切責〕”라고 한 것은, 당시의 실록(實錄)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상고해 보건대, 중화(中和)의 기년(紀年)은 4년으로 끝나는데, 공이 신라왕에게 표문을 올린 연월(年月)을 보면 중화 6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공이 중화 4년 10월에 배를 타고 항해하여 이듬해 봄에 비로소 신라에 도착하였고, 또 그 이듬해에 이 문집을 엮어 올렸던 사정을 감안할 때, 그 1년 전에 광계(光啓)로 개원(改元)한 사실을 어쩌면 듣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갑오년(1834, 순조34) 7월 보름날에 달성(達城) 서유구(徐有榘)는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쓰다.


 

[주D-001]두강(杜康) : 주(周)나라 때에 술을 최초로 빚었다는 사람의 이름이다.
[주D-002]구야(歐冶) : 명검을 잘 만들었던 춘추 시대 월(越)나라 사람으로, 월왕(越王)을 위해 담로(湛盧)ㆍ거궐(巨闕)ㆍ승사(勝邪)ㆍ어장(魚腸)ㆍ순구(純鉤)라는 다섯 자루의 칼을 만들고, 초왕(楚王)을 위해 용연(龍淵)ㆍ태아(泰阿)ㆍ공포(工布)라는 세 자루의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D-003]당 희종(唐僖宗) …… 한다 : 《구당서(舊唐書)》 권182 〈고변열전(高騈列傳)〉과 《신당서(新唐書)》 권224 하(下) 〈고변열전〉에 이 내용이 나온다.
[주D-004]황제가 …… 않겠는가 : 당 희종이 정전(鄭畋)에게 조서를 작성하여 질책하도록 한 것은 사실은 고운(孤雲)이 지어 올린 표문 때문이 아니라, 고변의 다른 막료인 고운(顧雲)이 올린 표문이 불손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55 〈당기(唐紀) 71 희종(僖宗)〉 중화(中和) 2년 5월 조에 보면 “회남 절도사 고변의 직위를 올려 시중을 겸하게 하고 염철전운사를 파직하였다. 고변이 이미 병권을 잃은 데다가 다시 이권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그의 막료인 고운으로 하여금 표문을 작성하게 하여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가 불손하였다.〔加淮南節度使高騈兼侍中 罷其鹽鐵轉運使 騈旣失兵柄 又解利權 攘袂大詬 遣其幕僚顧雲草表自訴 言辭不遜〕”라고 하고는 그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계원필경집 서

확대원래대로축소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서유구(徐有榘)]



《계원필경집》 20권은 신라의 고운(孤雲) 최공(崔公)이 당나라 회남(淮南) 막부(幕府)에 있을 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응수하여 지은 것으로서,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직접 편집하여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려 바친 것이다.
공의 이름은 치원(致遠)이요, 자(字)는 해부(海夫)요, 고운은 그의 호(號)이다. 호남(湖南) 옥구(沃溝)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타고 중국에 들어가서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한참 뒤에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그만두었다.
그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는데,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 고변(高騈)이 회남에 막부를 열고는 공을 불러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표(表)ㆍ장(狀)ㆍ문(文)ㆍ고(告) 등 모든 글이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황소의 죄를 성토한 격문(檄文)은 천하에 전송(傳誦)되었다. 공의 공적이 조정에 보고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국신사(國信使)에 충원되어 동방으로 돌아와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을 섬기며 한림 학사(翰林學士)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외방으로 나가 무성 태수(武城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가족을 이끌고 강양군(江陽郡)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는데, 그의 묘소는 호서(湖西)의 홍산(鴻山)에 있다. 어떤 이는 공이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나, 이는 허망한 말이다.
대저 바닷가의 외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하는 것을 마치 지푸라기 줍듯이 하였으며, 끝내는 문장으로 한 세상을 울리면서 동시(同時)에 빈공(賓貢)한 사람들이 아무도 앞을 다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으로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막부에 몇 년 동안 거하면서 고변이 뜻있는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과 여용지(呂用之)와 제갈은(諸葛殷) 등이 허탄하고 망녕되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초연히 인혐(引嫌)하며 떠나갔는데, 떠나간 뒤 3년 만에 회남 지역에서 난리가 일어났고 보면, 공이야말로 또 기미(幾微)를 미리 알고 대처하는 명철한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그 인격으로 보나 그 문장으로 보나 후세에 전해지도록 해야만 할 것이요 절대로 그대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왕에게 올린 표문에 의거하면, 이 문집 이외에 금체부(今體賦) 1권, 금체시(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등이 또 있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계원필경》 20권과 문집 30권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다른 것들은 모두 전하지 않고 오직 이 《계원필경집》만 여러 차례 인행(印行)되었는데, 판각(板刻)은 오래전에 잃어버렸고 탑본(搨本) 또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계사년(1833, 순조33) 가을에 내가 호남을 안찰하며 순시하다가 무성(武城)에 이르러 공의 서원을 배알(拜謁)하고는 석귀(石龜)와 유상대(流觴臺) 사이를 배회하면서 유적을 둘러보노라니 감개가 새로웠다. 그때 마침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홍공(洪公)이 이 문집을 부쳐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 년 가까이 끊어지지 않고 실처럼 이어져 온 문헌이다. 그대는 옛글을 유통시킬 생각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기쁜 한편으로,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커질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얼른 교정을 하여 취진자(聚珍字)로 인쇄한 뒤에 태인현(泰仁縣)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합천군(陝川郡)의 가야사(伽倻寺)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아, 명주(名酒)가 있는 동네에는 반드시 두강(杜康)의 이름을 내걸고, 명검(名劍)의 칼날에는 반드시 구야(歐冶)의 이름을 표기하니, 이는 그 근본과 시초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해 오는 우리 동방의 시문집들은 이 문집을 개산(開山) 비조(鼻祖)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문집이 또한 동방 예원(藝苑)의 근본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니, 어찌 이 문집이 닳아 없어지는 대로 그냥 놔두고서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아서야 될 일이겠는가.
공이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저작한 글은 흩어져 없어져서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범궁(梵宮)과 사묘(祠廟) 사이에서 수풀을 헤치고 이끼를 긁어내면 그래도 십여 편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을 분류해 원집(原集)에 붙여서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인쇄해 보고 싶은 생각을 내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당 희종(唐僖宗) 중화(中和) 2년(882, 헌강왕8) 정월에 왕탁(王鐸)이 고변을 대신하여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이 되었고, 5월에는 고변을 시중(侍中)으로 올리고서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를 파직하였는데, 고변이 병권(兵權)을 잃은 데다가 이권(利權)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표문을 올려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言辭)가 불손하였으므로, 상이 정전(鄭畋)에게 명하여 조서(詔書)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문집에 나오는 〈시중에 올려 준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加侍中表〕〉을 보면, 겸손한 말로 인구(引咎)했을 뿐이요, 격분하거나 발만(勃謾)한 언사는 한마디도 없다. 또 〈선위하는 조서를 내린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賜宣慰表〕〉을 보면 “우러러 윤음을 살펴 보건대, 신의 부족한 정사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시어 군사들이 단합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고 하시면서〔仰睹綸音 深嘉秕政 師徒輯睦 黎庶安寧〕”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해하고 위로하며 장려해 준 것이 이처럼 은근하고 진지하기만 하였으니, 그렇다면 역사에서 말한 바 “조서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草詔切責〕”라고 한 것은, 당시의 실록(實錄)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상고해 보건대, 중화(中和)의 기년(紀年)은 4년으로 끝나는데, 공이 신라왕에게 표문을 올린 연월(年月)을 보면 중화 6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공이 중화 4년 10월에 배를 타고 항해하여 이듬해 봄에 비로소 신라에 도착하였고, 또 그 이듬해에 이 문집을 엮어 올렸던 사정을 감안할 때, 그 1년 전에 광계(光啓)로 개원(改元)한 사실을 어쩌면 듣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갑오년(1834, 순조34) 7월 보름날에 달성(達城) 서유구(徐有榘)는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쓰다.


 

[주D-001]두강(杜康) : 주(周)나라 때에 술을 최초로 빚었다는 사람의 이름이다.
[주D-002]구야(歐冶) : 명검을 잘 만들었던 춘추 시대 월(越)나라 사람으로, 월왕(越王)을 위해 담로(湛盧)ㆍ거궐(巨闕)ㆍ승사(勝邪)ㆍ어장(魚腸)ㆍ순구(純鉤)라는 다섯 자루의 칼을 만들고, 초왕(楚王)을 위해 용연(龍淵)ㆍ태아(泰阿)ㆍ공포(工布)라는 세 자루의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D-003]당 희종(唐僖宗) …… 한다 : 《구당서(舊唐書)》 권182 〈고변열전(高騈列傳)〉과 《신당서(新唐書)》 권224 하(下) 〈고변열전〉에 이 내용이 나온다.
[주D-004]황제가 …… 않겠는가 : 당 희종이 정전(鄭畋)에게 조서를 작성하여 질책하도록 한 것은 사실은 고운(孤雲)이 지어 올린 표문 때문이 아니라, 고변의 다른 막료인 고운(顧雲)이 올린 표문이 불손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55 〈당기(唐紀) 71 희종(僖宗)〉 중화(中和) 2년 5월 조에 보면 “회남 절도사 고변의 직위를 올려 시중을 겸하게 하고 염철전운사를 파직하였다. 고변이 이미 병권을 잃은 데다가 다시 이권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그의 막료인 고운으로 하여금 표문을 작성하게 하여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가 불손하였다.〔加淮南節度使高騈兼侍中 罷其鹽鐵轉運使 騈旣失兵柄 又解利權 攘袂大詬 遣其幕僚顧雲草表自訴 言辭不遜〕”라고 하고는 그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계원필경집 서
확대원래대로축소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회남(淮南)에서 본국에 들어오면서 조서(詔書) 등을 보내는 사신을 겸한,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저술한 잡시부(雜詩賦) 및 표주집(表奏集) 28권을 올립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5수(首) 1권
오언칠언 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部) 5권
《계원필경집》 1부 20권

신은 나이 12세에 집을 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배를 타고 떠날 즈음에 망부(亡父)가 훈계하기를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기울여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엄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망각하지 않고서 겨를 없이 현자(懸刺)하며 양지(養志)에 걸맞게 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실로 인백기천(人百己千)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중국의 문물(文物)을 구경한 지 6년 만에 금방(金榜 과거 급제자 명단)의 끝에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정성(情性)을 노래하여 읊고 사물에 뜻을 부쳐 한 편씩 지으면서 부(賦)라고 하기도 하고 시(詩)라고 하기도 한 것들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만, 이것들은 동자(童子)가 전각(篆刻)하는 것과 같아 장부(壯夫)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라서 급기야 외람되게 득어(得魚)하고 나서는 모두 기물(棄物)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뒤이어 동도(東都 낙양(洛陽))에 유랑하며 붓으로 먹고살게 되어서는 마침내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雜詩賦) 30수 등을 지어 모두 3편(篇)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뒤 선주(宣州)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는데, 봉록은 후하고 관직은 한가하여 배부르게 먹고 하루해를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마는〔飽食終日〕,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해야 한다〔仕優則學〕는 생각에 촌음(寸陰)도 허비하지 않으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지은 것들을 모아 문집 5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산을 만들 뜻을 더욱 분발하여 복궤(覆簣)의 이름을 내걸고는 마침내 그 지역의 명칭인 중산(中山)을 맨 앞에 얹었습니다.
급기야 미관(微官)을 그만두고 회남의 군직을 맡으면서부터 고 시중(高侍中)의 필연(筆硯)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군서(軍書)가 폭주하는 속에서 있는 힘껏 담당하며 4년 동안 마음을 써서 이룬 작품이 1만 수(首)도 넘었습니다만, 이를 도태(淘汰)하며 정리하고 보니 열에 한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찌 모래를 파헤치고 보배를 발견하는 것〔披沙見寶〕에 비유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기왓장을 깨뜨리고 벽토를 긁어 놓은 것〔毁瓦畫墁〕보다는 나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계원집》 20권을 우겨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신은 마침 난리를 당하여 군막에 기식(寄食)하면서 이른바 여기에 미음을 끓여 먹고 여기에 죽을 끓여 먹는〔饘於是粥於是〕 신세가 되었으므로, 문득 필경(筆耕)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왕소(王韶)의 말을 가지고 예전의 일을 고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몸을 움츠린 채 돌아와서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이들에게 부끄럽긴 합니다만, 일단 밭을 갈고 김을 매듯 정성(情性)의 밭을 파헤친 만큼, 하찮은 수고나마 스스로 아깝게 여겨져서 위에 바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시(詩)ㆍ부(賦)ㆍ표(表)ㆍ장(狀) 등 문집 28권을 소장(疏狀)과 함께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중화(中和) 6년 정월 일에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소장을 올려 아룁니다.

《계원필경집》 1부 20권
도통순관 시어사 내공봉 최치원 지음


 

[주D-001]현자(懸刺) : 현두자고(懸頭刺股)의 준말로, 졸음을 쫓기 위해 한(漢)나라 손경(孫敬)이 상투를 끈으로 묶어 대들보에 걸어 매고,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송곳으로 정강이를 찔러 가며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002]양지(養志) :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효도라는 뜻으로,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는 등 육신만을 위해서 봉양하는 구체(口體)의 봉양과 상대되는 말인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3]인백기천(人百己千) : 남이 백 번 하면 자기는 천 번 한다는 뜻으로,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때의 결의를 표현하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20장의 “남이 한 번에 잘 하면 나는 그것을 백 번이라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 하면 나는 그것을 천 번이라도 할 것이다. 과연 이 방법대로 잘 행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밝아지고, 아무리 유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라는 말을 전용(轉用)한 것이다.
[주D-004]동자가 …… 일이라서 : 전각(篆刻)은 조충 전각(雕蟲篆刻)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처럼,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기예라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권2 〈오자(吾子)〉에, “동자(童子)의 조충전각과 같은 일을……장부는 하지 않는다.〔童子雕蟲篆刻……壯夫不爲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급기야 …… 여겼습니다 : 과거 급제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그동안 예행 연습으로 지었던 시문들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생각하지 않게 되고……토끼를 잡고 나면 그물을 잊게 마련이다.〔得魚而忘筌……得兔而忘蹄〕”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배부르게 …… 있었습니다마는 : 《논어》 〈양화(陽貨)〉에 “배부르게 먹고 하루해를 마치면서 마음을 쓰는 곳이 없다면 딱한 일이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벼슬하면서 …… 한다 : 《논어》 〈자장(子張)〉에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고서 여가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복궤(覆簣) :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말로 적소성대(積小成大)의 뜻과 같다. 《논어》 〈자한(子罕)〉의 “비유하자면, 산을 만들 적에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못 이루고서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과 같으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해서 점점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내가 해 나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9]모래를 …… 것 : 남조(南朝) 양(梁)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권1에 “반악(潘岳)의 시는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찬란해서 좋지 않은 대목이 없고, 육기(陸機)의 글은 모래를 파헤치고 금을 가려내는 것과 같아서 왕왕 보배가 보인다.〔潘詩爛若舒錦 無處不佳 陸文如披沙簡金 往往見寶〕”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기왓장을 …… 것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11]여기에 …… 먹는 : 공자(孔子)의 선조인 정고보(正考父)의 솥〔鼎〕에 “대부 때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하경(下卿) 때에는 등을 구부리고, 상경(上卿) 때에는 몸을 굽히고서, 길 한복판을 피해 담장을 따라 빨리 걸어간다면, 아무도 나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나는 여기에 미음을 끓여 먹고 여기에 죽을 끓여 먹어 내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아가리라.〔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 循牆而走 亦莫余敢侮 饘於是 鬻於是 以餬余口〕”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7年》
[주D-012]왕소(王韶)의 …… 것입니다 : 전거 미상이다.
[주D-013]중화(中和) 6년 : 이는 고운(孤雲)의 착오로, 서유구(徐有榘)의 〈서문〉 마지막 부분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계원필경집 제1권
확대원래대로축소
 표(表) 10수
연호의 개정을 하례한 표문〔賀改年號表〕

신(臣) 모(某)는 아룁니다.
금월(今月) 모일(某日)에 진주원(進奏院)의 장보(狀報)를 얻어서 11일에 선하(宣下)된 내용을 살펴보건대, 광명(廣明) 원년(元年)을 고쳐 중화(中和) 원년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대의(大義)를 귀성(龜城)에서 펼치시면서 봉기(鳳紀 봉력(鳳曆))의 이름을 바꾸셨으므로, 미호(美號)가 역상(曆象)에 이미 새롭게 된 가운데 환성이 온 누리에 널리 퍼지고 있으니, 신 모는 참으로 뛸 듯이 기뻐하면서 머리를 조아려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신이 삼가 《예기》 〈왕제(王制)〉를 살펴보건대, 천자가 서쪽으로 순수(巡狩)할 적에 “예를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사계절과 달의 크고 작음을 상고하여 일수(日數)를 바르게 정하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게 한다.〔命典禮 考時月定日同律〕”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삼추(三秋)의 절후(節候)가 열릴 적에는 만승 천자(萬乘天子)가 지방을 순행하게 마련인데, 지금 서쪽 교외(郊外)에 숙살(肅殺)의 가을바람이 일어나 옥루(玉壘) 지방을 순유(巡遊)하시는 때에 마침내 정삭(正朔)을 거행하는 법도에 따라 개원(改元)의 명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또 《대대례(大戴禮)》에 이르기를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리이니,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中也者 天下之大本 和也者 天下之達道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익주 자사(益州刺史) 왕양(王襄)이 촉(蜀)의 사인(詞人)인 왕포(王褒)로 하여금 중화(中和)와 악직(樂職)과 선포(宣布)의 시를 지어서 임금의 덕을 노래하게 하였으므로 기구(耆舊)가 지금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 성조(聖朝)에서 일찍이 만든 신악(新樂)으로 말하면, 화창한 2월의 절후를 거양(擧揚)하고 조화된 팔풍(八風)의 음악을 퍼뜨려서, 아름다운 이야깃거리를 길이 남기며 창성한 국운(國運)에 걸맞게 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성신(聖神) 총예(聰睿)하고 인철(仁哲) 명효(明孝)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보위(寶位)를 계승하여 황유(皇猷)를 떨치는 가운데, 장차 유묘(有苗)를 감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잠시 적인(狄人)을 피하는 수고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바람이 땅 위에 불기 시작하는 《주역(周易)》의 상사(象辭)를 징험할 수 있게 되었고, 태양이 다시 하늘 복판에 빛나는 아름다운 상서를 여기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년(紀年)에 여유가 있고 현법(懸法)에 결함이 없게 되었으니, 제업(帝業)의 중흥은 멀리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시대를 뛰어넘을 것이요, 민심의 안정은 가까이 원화(元和 당 헌종(唐憲宗)의 연호)와 태화(太和 당 문종(唐文宗)의 연호)의 연대를 이을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이 소생하고 중국과 오랑캐가 열복할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하니, 신작(神雀)과 황룡(黃龍)이 나타나는 상서를 압도하게 될 것은 물론이요, 황하(黃河)가 맑아지고 바다가 평온해지는 태평시대의 기대에도 부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 조무래기 반도(叛徒)가 패거리를 지어 소란을 피우고 있으나, 잠시 연진(煙塵)의 환란을 일으키다가 곧바로 원야(原野)의 복주(伏誅)를 당하게 될 것이니, 머지않아 서쪽에 행행했던 의장(儀仗)을 되돌리시어 동쪽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는 예(禮)를 바로 거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금 이미 일개 부대를 편성하여 나왔으니〔成師以出〕, 반드시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제대로 행할 것입니다. 몸은 비록 병선(兵船)에 매여 있으나 마음만은 항상 검각(劍閣)을 향해 치달리면서, 승첩(勝捷)을 아뢸 날을 기다리며 태평성대를 길이 축원드리고자 합니다. 초수(楚水)를 굽어보면서 혼이 날아갈 듯하여 조정에 조회(朝會)할 기대를 품고, 진운(秦雲)을 바라보면서 한껏 눈을 들어 태양을 받들 기약을 하고 있습니다만, 영광스럽게 조반(朝班)에 참여하여 행재(行在)에 경하하지도 못한 채 기쁘면서도 떨리고 황공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기에, 삼가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는 바입니다. 신 모는 참으로 환희하면서 머리를 조아려 삼가 아룁니다.

[주D-001]귀성(龜城) : 사천(四川) 성도(成都)의 별칭이다. 진 혜왕(秦惠王)의 명을 받들고 장의(張儀)가 성도의 축성 작업을 할 적에 성곽이 자주 무너지곤 하였는데, 무당의 말을 듣고서 강에 올라온 대귀(大龜)의 이동 경로를 따라 축조하여 공사를 완료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귀화성(龜化城)이라고도 한다. 《搜神記 卷13》
[주D-002]옥루(玉壘) : 사천성(四川省) 이현(理縣)의 동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성도(成都)의 대칭으로 흔히 쓰인다.
[주D-003]중은 …… 길러진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1장에 나오는 말이다. 《중용》이 예전에는 《예기(禮記)》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대대례(大戴禮)》는 한(漢)나라 대덕(戴德)이 전한, 85편의 《예기》이다.
[주D-004]장차 …… 계십니다 :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당 희종(唐僖宗)이 서촉(西蜀) 지역으로 파천(播遷)한 것을 말한다. 유묘(有苗)와 적인(狄人)은 모두 황소를 비유한 것이다. 순(舜) 임금이 복종하지 않는 남방의 유묘씨(有苗氏)를 무력으로 정벌하는 대신에, 문교(文敎)를 펼치면서 방패와 도끼〔干戚〕를 들고 춤을 추자 3년 만에 유묘씨가 귀의했다는 이야기가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나온다. 또 주(周)나라 태왕(大王)이, 적인(狄人)이 침입해 왔을 적에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혼자서 빈(邠) 땅을 떠나 기산(岐山)의 아래에 도읍을 정하고 거주하자, 빈 땅 사람들이 인자한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모두 그곳으로 따라가 살았다는 고사가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주D-005]바람이 …… 상사(象辭) : 《주역》 〈관괘(觀卦) 상(象)〉에 “바람이 땅 위에 부는 것이 관괘이다. 선왕은 이 관괘를 보고서, 사방을 순행하며 두루 살피고 백성의 풍속을 관찰하여 교화를 베풀었다.〔風行地上 觀 先王以 省方觀民 設敎〕”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신이 …… 나왔으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 조에 “일개 부대를 편성하여 나왔다가 적이 강하다는 말을 듣고 물러선다면 대장부가 아니다.〔成師以出 聞敵彊而退 非夫也〕”라는 말이 나온다.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泰仁流觴臺碑記[趙持謙] a_001_146a
URL복사



泰仁流觴臺碑。趙持謙記。泰仁郡卽新羅之泰山郡。文昌侯崔公舊所莅也。郡南七里許。巖石盤陀。巖下流水環廻。文昌每觴詠於斯。倣逸少故事。至今父老相傳焉。臺歲久荒廢。余友趙使君子直。視篆之暇。逍001_146b遙乎臺上。悠然有曠世之感。累石增築。立小碑以識之。屬余爲記。頃年余爲吏楓岳下。地稱神仙窟宅。思一修飾。而未暇及。子直其多乎哉。余惟先生生星一周。涉海萬里。未弱冠。擢大唐巍科。踐霜臺。入金門。天下已爭知之。及其從事轅門。磨墨楯頭。使販鹽老賊魄褫膽落。眞所謂賢於百萬師矣。以其高才盛名。捲而東還。推出緖餘。亦足以維持一邦。顧乃沈淪銅墨若梅子眞。終焉浮遊方外。自託於羨門之屬。何也。噫。公之生世不辰。入中華則亂離瘼矣。歸故國則危亡兆矣。道不可行。身且難容。以此飄然遐擧。蟬蛻棼濁。001_146c誦紅流一絶。未嘗不三復歎憐其志焉。想其婆娑徜徉於是地也。感慨繼之者。豈但俛仰間陳迹而已哉。公之淸風逸韻。溢於宇宙之間。而知公志者蓋亦尠矣。夫地之重與輕顯與晦。未嘗不由於人。古人有言。蘭亭茂林。不遇逸少則不傳。余亦云是臺水石。得文昌而始彰。而千有餘年。又得子直增修而表揭焉。玆豈非有待於其人歟。不知是後繼子直而修者又誰也。

 

연꽃 향기 정자에 가득 연못가 거닐며 선비의 삶을 만나다
[전북 현판의 숨결을 찾아서]⑶호남제일정이라 불리는 태인의 피향정
2012년 04월 02일 (월)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APSUN@sjbnews.com
   
 
  ▲ 피향정 전경  
 

호남의 정자 중 가장 역사깊은 곳은 바로 태인의 피향정으로
고운 최치원이 상하에 연지를 만들고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연향이 나는 연못이 있어 피향정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그 향기 때문에 시인묵객들이 머물며 글을 지었던 곳이다
내부에는 피향정 편액 등 많은 편액과 현판들이 걸려있기도
피향정 서쪽에는 연못 가운데 한벽루라는 정자가 있다
동쪽엔 시인묵객들이 시를 짓고 음풍농월하던 읍원정이 있고
넓은 대청마루에는 많은 편액과 주련들이 빽빽이 걸려있다

   
  ▲ 피향정 편액 (조항진 글씨)  
 
호남의 정자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은 바로 태인의 피향정으로, 고운 최치원이 이곳 태산태수로 있으면서 상하에 연지(蓮池)를 만들고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태인지를 보면 상연지의 둘레가 1,444척이며 깊이가 2척이고, 하연지는 둘레가 1,026척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비슷한 크기의 연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상연지는 없어지고 하연지만 남아 함벽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태인연꽃축제를 하고 있다.

   
  ▲ 함벽루 편액 (김돈희 글씨)  
 
피향정은 조선 중기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기와지붕이다. 4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으며 주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고, 바로 아래에는 연향(蓮香)이 나는 연못이 있어 피향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즉 피향정(披香亭)에는 연꽃의 향기 때문에 시인묵객들이 머물면서 글을 지었던 곳이다.

피향정 동쪽에는 서자가 알려지지 않은 피향정편액이 있고 서쪽에도 호남제일정이라 쓴 편액이 있다. 내부에는 많은 편액과 현판들이 걸려 있는데, 그중 피향정이라 쓴 편액이 있어 낙관을 살펴보니 풍성(豊城) 조항진(趙恒鎭)으로 되어 있다.

조항진은 태인현감을 1794년에 1799년까지 6년동안 했는데 그는 1799년(기미)에 이 편액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기록을 보면 태인향교 만화루 편액도 썼는데 초서의 필획은 활달한 생기가 넘친다. 조항진은 장령과 헌납을 했지만 나중에는 창령으로 귀향을 가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태인에서 있는 현감생활이 전성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 호남제일정 편액  
 
현재 서예가로 이름이 크게 날린 분은 아니지만 태인에 만화루와 피향정이란 2점의 작품을 남긴 것은 중요하다 하겠다. 정자 주변에는 관찰사와 현감의 공적비가 있으며 동학혁명의 중심인물인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비도 눈에 들어온다.

피향정에서 남쪽으로 약 30m 지점에는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 해서로 쓴 전북에서 가장 오래된 신잠선정비가 있다.

태인현감인 신잠은 조선 초기의 명신으로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라 했다. 그는 1543년에 태인 현감으로 취임하여 6년(1543-1549)동안 있으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학당을 세우고 유학을 권장하여 선정을 베풀었는데 간성군수로 떠나자 이 지역 유림인 김원, 백삼귀 등의 발의로 선정비를 세우고, 또 주민들이 생사당을 만들어 조각상을 모시니 그의 선정은 가름할 수 있다.

피향정 서쪽에는 연못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함벽루이다. 함벽루를 가려면 예전에는 돌로 만든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지금은 현대식으로 주변환경을 정비하여 옛 정취가 덜하다.

함벽루 편액은 성당 김돈희가 장중(莊重)하게 눌러서 썼는데, 이 글씨는 아마도 태인의 명필인 몽연(夢蓮) 김진민(金鎭珉)을 가르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써 준 것일 것이다. 연못가에는 풍수지리적 차원에서 도로를 옮기면서 기록을 남기 이로비(移路碑)가 서 있다.

피향정 동쪽인 항가산 중턱에는 시인묵객들이 시를 짓고 국화주로 음풍농월하던 읍원정이 있다. 넓은 대청마루에는 정말로 많은 편액과 주련들이 빽빽이 걸려있고 현감과 학자들의 읍원정중수기도 있다.

읍원정 안에는 49명의 계원들 편액이 있는데, 다양한 서체와 모양들은 좋은 감상거리가 되고 있다. 김진민의 스승인 성당 김돈희는 가끔 태인에 내려와서 이 고장의 문인묵객들과 교유하였고, 읍원정에도 그의 글씨를 남겼으니 호상소유(湖上小游)편액이다.

태인갑부 김수곤은 일명 사찰거사로 불러졌으며 그의 딸 몽연 김진민을 서예가로 우뚝서게 하였고, 또 전국의 명산과 사찰 등에 암각서를 남긴 동초 김석곤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지금도 성황산에 오르면 많은 암각서가 존재한다. 일제시대 정읍 육리마을에는 고종황제 어진을 그린 초상화가 석지 채용신이 거주하면서 항일운동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피향정은 전주의 한벽당, 남원 광한루, 무주의 한풍루와 비견되고 있다. 피향정을 중심으로 태인동헌과 태인향교 그리고 읍원정과 항가산 주변에는 많은 암각서와 편액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고장은 고운 최치원의 유풍이 대대로 고을에 남아 선비정신을 키워가고 있으며, 선비들이 많이 보는 태인 방각본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많은 목판을 찍어낸 곳이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전주문화원 사무국장




 

 

고운 선생 사적
확대원래대로축소
태인 유상대의 비기〔泰仁流觴臺碑記〕[조지겸(趙持謙)]



태인군(泰仁郡)은 바로 신라의 태산군(泰山郡)이다. 이곳은 문창후(文昌侯) 최공(崔公)이 옛날에 태수로 재직한 곳이다.
관아의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울퉁불퉁한 바윗돌이 있고 그 바위 아래로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데, 문창이 매번 여기에서 술잔을 띄우고 노래하며 일소(逸少)의 고사를 흉내 냈다고 지금도 부로(父老)들이 전한다.
그 누대도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황폐해지고 말았는데, 나의 벗인 조 사군 자직(趙使君子直 조상우(趙相愚))이 정사를 행하는 여가에 그 누대 위에서 소요하다가 먼 과거의 일에 대한 감회가 뭉클 솟아오르자 바위를 쌓아 증축한 뒤에 작은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왕년에 내가 풍악(楓岳) 아래 고을에서 재직할 적에 신선의 굴택(窟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지역을 한번 수식(修飾)해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미처 그렇게 할 틈을 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자직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하다고 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선생은 태어나서 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에 바닷길로 만리 멀리 중국에 건너갔다. 그리하여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대당(大唐)의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에 상대(霜臺 어사대(御史臺))를 밟고 금문(金門 금마문(金馬門))에 들어갔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선생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원문(轅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는 방패에 먹을 갈아 소금 장수인 노적(老賊)으로 하여금 넋이 달아나고 담이 떨어지게 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100만 군사보다도 낫다는 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는 뛰어난 재질과 성대한 명성을 지니고서 몸을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왔으니, 쓰고 남은 찌꺼기만 끄집어내어 활용했어도 한 나라를 유지시키기에는 충분했을 것인데, 그만 매자진(梅子眞)처럼 동묵(銅墨)의 지위에 침륜(沈淪)했는가 하면 끝내 세상 밖에서 떠돌면서 연문(羨門)의 무리에 자신을 의탁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 공이 세상에 태어난 그 시운이 불우해서 중국에 들어가서는 난리에 휩싸였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위망의 조짐이 보였으므로, 도를 행할 수 없을 뿐더러 자기 한 몸도 보전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표연히 멀리 떠나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혼란한 탁세를 벗어났던 것이었으니, 홍류(紅流) 한 절구(絶句)를 읊다 보면 미상불 두 번 세 번 탄식하면서 그의 뜻을 동정하게도 되는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그가 이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하곤 했을 것이니, 계속 감개(感慨)하여 마지않게 되는 것이 어찌 다만 면앙(俛仰) 간의 묵은 자취뿐이겠는가. 공의 청풍(淸風)과 일운(逸韻)이 온 우주 사이에 흘러넘친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공의 지취(志趣)를 아는 자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대저 어떤 지역이 중하게 되고 유명해지는 것은 미상불 그곳의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난정(蘭亭)의 무림(茂林)도 일소(逸少)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나 역시 “이 유상대의 수석(水石)도 문창(文昌)을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말하련다. 그리고 다시 1천여 년이 지나서 또 자직(子直)을 만나 증수(增修)하고 표시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 일을 행할 적임자를 지금까지 기다려서 된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르겠다마는, 앞으로 자직의 뒤를 이어서 증수할 적임자가 또 누가 될는지.


 

[주C-001]조지겸(趙持謙) : 1639~1685.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주(廣州) 출신이다. 소론의 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저서로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편서로 《송곡연보(松谷年譜)》가 있다.
[주D-001]일소(逸少)의 고사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주D-002]풍악(楓岳) 아래 고을 : 강원도 고성(高城)을 가리킨다. 조지겸은 1681년(숙종7)에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풍악은 금강산(金剛山)의 별칭이다.
[주D-003]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 : 12세 때를 말한다. 별은 세성(歲星), 즉 목성(木星)으로, 옛사람들은 세성이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돈다고 여겼다.
[주D-004]소금 장수인 노적(老賊) : 황소(黃巢)를 가리킨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소금을 파는 일에 종사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舊唐書 卷200下 黃巢列傳》
[주D-005]매자진(梅子眞)처럼 …… 하면 : 고운이 외방에 나가 고을 수령이 된 것을 말한다. 자진은 한(漢)나라 매복(梅福)의 자이고, 동묵(銅墨)은 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를 말한다. 매복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D-006]연문(羨門) : 고대 선인이었던 연문자고(羨門子高)를 가리킨다. 진 시황(秦始皇)이 일찍이 동해(東海) 가를 유람하면서 연문자고 등의 선인을 찾았다고 한다.
[주D-007]홍류(紅流) 한 절구(絶句) : 가야산(伽倻山)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을 읊은 절구에 “미친 듯 바위에 부딪치며 산을 보고 포효하니, 지척 간의 사람의 말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저어해서,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감싸게 하였다네.〔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는 말이 나온다. 《고운집》 권1에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題伽倻山讀書堂〕〉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주D-008]난정(蘭亭)의 …… 것이다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고운 선생 사적
확대원래대로축소
청학동의 비명〔靑鶴洞碑銘〕[정두경(鄭斗卿)]



고려와 백제와 신라로 말하면, 나라는 비록 한 지역에 속한다고 하겠지만 봉래(蓬萊)와 영주(瀛洲)와 방장(方丈)이 있어서 산으로는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다고 할 것인데, 그 기운이 부상(扶桑)에 한데 모여서 기걸한 인물을 특별히 태어나게 하였도다.
아, 단목(檀木)의 진인(眞人)이 한번 떠나자 태백산(太白山)만 허전하게 남게 되었고, 동명(東明)의 인마(麟馬)가 돌아오지 않자 조천석(朝天石)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상고(上古)의 현풍(玄風)은 이미 멀어지게 되었고, 장생(長生)의 비결은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나라에서는 한갓 간과(干戈)와 전쟁만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시(詩)를 논하거나 부(賦)를 짓는 인사는 들을 수 없이 적요하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도덕과 문장을 알지 못한 채 말 달리며 활 당기는 무리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해동(海東)에 장보(章甫 유자(儒者)의 관)를 쓴 선비가 없었다면 우리는 좌임(左袵)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남(嶺南)에서 호련(瑚璉 종묘의 제기)의 그릇이 탄강하였으니, 사문(斯文)이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학해(學海)에서 망인(鋩刃)을 숫돌에 갈게 되었고, 사림(詞林)에 기치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공의 성은 최(崔)요, 휘(諱)는 치원(致遠)이요, 호는 고운(孤雲)이다. 천명을 받고 태어남에 집안에 상서가 있었고, 육가(陸家)의 연화(蓮花)가 나옴에 사해(四海)와 오악(五嶽)의 자질을 품부받았다.
진(秦)과 한(漢)의 재질을 능가하여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의 문장을 배웠으며, 제(齊)와 양(梁)의 시체(詩體)를 바꾸어서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아송(雅頌)을 진작시켰다.
만장(萬丈)의 광염(光焰)을 토할 때는 마치 명월주(明月珠)를 배열한 것과 같았고, 율려(律呂)가 서로 조화되는 것은 흡사 균천악(鈞天樂)을 연주하는 것과 같았나니, 종이 위에서 교룡(蛟龍)이 움직이는 듯, 붓끝에서 풍우(風雨)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발해(渤海)의 파도가 건필(健筆) 덕분에 더욱 장하게 되었음은 물론이요, 부상(扶桑)의 일월이 고명(高名)의 힘을 얻어 거듭 빛나게 되었다.
구석진 삼한(三韓) 땅에 처하여 산하가 비좁은 것을 매번 탄식하였나니, 무한대한 공간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드넓은 우주를 끝까지 파헤쳐 보고자 하였다. 어찌 누항의 시문(柴門)에 거하면서 상호봉시(桑弧蓬矢)의 뜻을 장차 펼 수가 있겠는가. 창해에 배를 띄우고 문득 한(漢)나라 사신의 뗏목을 좇아, 중국으로 유학하여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도를 다시 즐기게 되었다.
기주(冀州) 고을에 준마(駿馬)가 남아 있음을 처음 알았나니, 진(秦)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될 것이로다. 노(魯)나라의 뜰을 지날 적에는 계찰(季札)이 음악을 평한 것을 사모하였고, 촉(蜀) 땅의 다리를 건널 적에는 상여(相如)가 다리에 써넣은 것을 본받았다.
연치(年齒)는 비록 약관에 불과했지만, 재질은 다사(多士)의 위에 군림하였다. 그리하여 천문(天門)에서 책문(策文)을 쏘아 맞추자 자극(紫極)의 황제가 공의 이름을 알았고, 막부(幕府)에서 사부(詞賦)를 지어 날리자 녹림(綠林)의 도적이 무릎을 꿇었다.
사해에 명성이 널리 퍼짐에 석우(石友)는 유종(儒宗)의 노래를 지어 증정하였으며, 구천(九天)에 날아오름에 김승(金丞)은 한림(翰林)의 관직으로 승진시켰다.
돌아보면 왕중선(王仲宣)의 땅이 아니라서 초(楚)나라 집규(執圭)의 노랫가락을 읊조렸는데, 신선 같은 풍골(風骨)이 진세(塵世)를 벗어났으매 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이 하강하였고, 비단옷을 입고 신라로 돌아오매 노담(老聃)의 자기(紫氣)가 동쪽으로 옮겨왔다. 나라 사람들이 기걸한 인재가 없는 것을 탄식하는 가운데 여주(女主 진성여왕(眞聖女王))가 공에게 귀한 직책을 제수하였다.
국조(國朝)에 어려움이 많은 시대를 당하여, 나의 생이 때에 맞지 않음을 한탄하였나니, 오도(吾道)를 어떻게 펼 수 있었겠으며, 가슴에 온축한 뜻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었겠는가.
무협 고봉(巫峽高峯)의 해에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돌아와서 계림(雞林)에는 누런 잎이 지고 곡령(鵠嶺)에는 소나무가 푸르다고 탄식하였다.
뜬구름 떠 있는 대궐을 바라보며 속절없이 가생(賈生)의 눈물을 흘렸나니, 이 풍진세상에서 그 누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었겠는가.
등불 앞에는 만리(萬里)의 마음이요, 세상 밖에는 천산(千山)의 꿈이로다. 홍진이 눈에 들어와 앞을 볼 수 없자 의관을 걸어 놓고 영원히 돌아갔고, 자지(紫芝)로 배고픔을 달래며 임천(林泉)을 향해 높이 드러누웠다.
한 시내의 송죽(松竹)에 반쯤 닫힌 월영대(月影臺)요, 1만 골의 연하(煙霞)에 멀리 이어진 청학동(靑鶴洞)이라. 문득 물아(物我)를 잊으니 정녕 복희(伏羲) 시대의 백성이요, 사생(死生)을 아랑곳하지 않으니 화서(華胥)의 들판과 방불하였다.
높은 언덕에 올라 맑게 휘파람 불고, 푸른 강물 굽어보며 길게 노래했나니, 저분이 어떤 분이신가, 내가 나를 잊은 분이로다. 현빈(玄牝)에 통하여 중묘(衆妙)의 문을 스스로 얻었고, 약(藥)은 금단(金丹)을 단련하여 참동(參同)의 계(契)를 다시금 이었다. 물외(物外)에서 형신(形身)을 길러 곰처럼 매달리고 새처럼 폈으며, 인간 세상의 구각(軀殼)을 벗어 매미처럼 허물 벗고 용처럼 변하였다. 오곡을 먹지 않으면서 바람과 이슬을 들이켜고 경화(瓊華)를 씹었으며, 팔구(八區)를 떨쳐 버리고서 구름과 기운을 타고 일월(日月)을 잡아탔다. 구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 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成子)를 방문하였다. 지극한 사람이라 이를 수가 없어서 만상(萬象)에 뒤섞여 같은 몸이 되었으며, 신령한 기운이라 변하지 않아 천년이 지나서도 오히려 존재하였다. 들고 남에 있어서는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었으며, 변화함에 있어서는 처음과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운산(雲山)의 옛 자취여, 상서장(上書莊)은 없어지지 않았고, 악부(樂府)의 남은 음악이여, 아직도 〈가야곡(伽倻曲)〉에 전하도다.
아, 위로는 공경(公卿)과 재상(宰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사서(士庶)와 아동(兒童)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성명을 외우지 않은 자가 없고, 선생의 풍채를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다. 남보다 뛰어난 도덕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경모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요갈(遼羯)과 국경을 접한 관계로 옛날부터 문학에 뛰어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박제상(朴堤上)이 충성스럽기는 하였지만 열사일 따름이요, 김유신(金庾信)이 영걸스럽기는 하였지만 - 원문 빠짐 - 그런 인물은 있지 않았다.
오직 우리 선생이 옹색한 사원(詞源)을 개통하고, 황량한 학해(學海)를 개척하였나니, 이는 마치 진(秦)나라의 거울을 궁전에 걸자 오장(五臟)이 모두 보이고, 신우(神禹)의 도끼를 산천에 휘두르자 구주(九州)가 비로소 안정된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동방의 기습(氣習)이 한꺼번에 변하여 나라가 그 덕분에 부지되었나니, 북극의 성신(星辰)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사람들 모두가 선생을 우러러보았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사당에 공을 배향하고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공에게 내렸나니, 천년만년토록 명성이 전해지는 가운데 70명의 고제(高弟)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선성(先聖)의 덕을 사모하여 지금도 제사를 올리게 하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알게끔 한 것은 그 누구의 공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추수(秋水)의 호량(濠梁)을 통해 장생(莊生)의 흉금을 떠올리고, 영천(穎川)의 청풍(淸風)을 통해 허유(許由)의 기상을 꿈꾼다. 나는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을 읽고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외우면서 높고 험한 석문(石門)에서 고금을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하고, 맑고 얕은 쌍계(雙溪)에서 은일(隱逸)의 남은 자취를 찾아본다. 아, 선생의 풍도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고 하리로다.


 

[주C-001]청학동(靑鶴洞)의 비명(碑銘) : 이 비명의 작자에 대해서 대본에는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 비명은 정두경(鄭斗卿)의 문집인 중간본 《동명집(東溟集)》 권10에 〈최학사고운비서(崔學士孤雲碑序)〉라는 제목으로 전재(全載)되어 있는바, 바로 정두경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정두경의 호가 동명(東溟)이므로, 편찬자가 ‘정동명(鄭東溟)’을 ‘정홍명(鄭弘溟)’으로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다. 《고운집》과 《동명집》에 나오는 글을 서로 비교해 보면 글자의 출입이 아주 많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동명이 뒤에 비석에 글을 새길 적에 글을 수정하거나 글자 수를 증감한 것인 듯하다. 또한 대본에는 중간 중간에 빠진 부분이 있어 ‘缺’로 처리되어 있다. 번역을 하면서 글자의 출입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교감하지 않고, 단지 ‘缺’로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동명집》에 나오는 글에서 보충하여 번역하되, 글자의 색깔을 달리하여 구분해 주었다.
[주D-001]단목(檀木)의 …… 되었고 : 단목은 신단수(神檀樹), 진인(眞人)은 단군(檀君), 태백산(太白山)은 묘향산(妙香山)을 가리킨다.
[주D-002]동명(東明)의 …… 되었다 : 조천석(朝天石)은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 곁에 있던 바위 이름이다. 옛날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부벽루 아래 기린굴(麒麟窟)에서 기린마(麒麟馬)를 길러 이 말을 타고 기린굴에서 조천석으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주D-003]좌임(左袵) : 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 위로 여미는 오랑캐의 의복 제도를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孔子)가 관중(管仲)의 공을 찬양하면서 “만약에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머리를 풀고 좌임하는 오랑캐의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4]사문(斯文)이 …… 않겠는가 : 고운이 유가(儒家)의 도통을 계승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광(匡) 땅에서 횡포를 부렸던 양호(陽虎)로 오인받아 그곳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위태로웠을 때 “문왕이 돌아가신 지금에는 사문이 나에게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늘이 사문을 망칠 작정이라면 나와 같은 자가 사문에 참여하지 못했겠지만, 하늘이 사문을 망치지 않으려 한다면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강한 자부심을 표명한 대목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주D-005]육가(陸家)의 연화(蓮花) : 세상에서 보기 드문 명산(名産)이라는 뜻으로, 특출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남조 양(梁) 임방(任昉)의 《술이기(述異記)》 권상에 명산품을 열거하면서, 왕씨(王氏)의 귤원(橘園)과 육가의 백련(白蓮)과 고가(顧家)의 반죽(斑竹)을 거론하였다.
[주D-006]제(齊)와 양(梁)의 시체(詩體) : 남조(南朝)의 제와 양의 시대에는 시를 지을 때에 대부분 음률(音律)과 대우(對偶)를 중시하여 사조(詞藻)가 화려한 대신 내용은 결여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를 문학사상 제량체(齊梁體)라고 부른다.
[주D-007]균천악(鈞天樂) : 균천광악(鈞天廣樂)의 준말로, 중국의 궁중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균천은 천제(天帝)의 거소인데, 춘추 시대에 조간자(趙簡子)가 5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균천에 올라가서 광악을 듣고 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43 趙世家》
[주D-008]상호봉시(桑弧蓬矢)의 뜻 : 천지 사방을 경륜할 큰 뜻을 말한다.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상목(桑木)으로 활을 만들어 문 왼쪽에 걸고 봉초(蓬草)로 화살을 만들어 사방에 쏘는 시늉을 하며 장차 이처럼 웅비할 것을 기대했던 풍습이 있었다. 《禮記 內則》
[주D-009]창해에 …… 좇아 : 고운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 당나라에 들어간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사신은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그가 한 무제(漢武帝)의 명을 받고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았는데, 이때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나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天中記 卷2》 중국이 천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뗏목을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주D-010]기주(冀州) …… 것이로다 : 천리마처럼 뛰어난 인재가 아직도 조정에 선발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고운을 보고서 비로소 알았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에 “백락이 기주 북쪽의 들판을 한 번 지나가자 말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伯樂一過冀北之野 而馬群遂空〕”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백락은 천리마를 잘 알아보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또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 사회(士會)가 진(秦)나라에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할 적에, 진(秦)나라 요조(繞朝)가 채찍을 증정하면서 사회의 진짜 의도를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그대는 진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라. 나의 계책이 마침 채용되지 않았을 뿐이다.〔子無謂秦無人 吾謀適不用也〕”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 여기에서 진나라는 변방의 신라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D-011]계찰(季札)이 …… 것 : 춘추 시대 오(吳)나라 공자 계찰이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周)나라의 음악을 듣고 열국(列國)의 치란과 흥망을 아는 등 정확하게 비평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주D-012]상여(相如)가 …… 것 :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촉군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에 성도의 성(城) 북쪽에 있는 승선교(昇仙橋)에 이르러 그 다리 기둥에 “고거사마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不乘駟馬高車 不復過此橋〕”라고 써서 기필코 공명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는데, 뒤에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을 한 무제(漢武帝)에게 인정받고 출세한 고사가 진(晉)나라 상거(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전한다.
[주D-013]석우(石友)는 …… 증정하였으며 : 고운과 동년(同年)인 중국인 고운(顧雲)이 고운이 귀국할 때 송별시를 지어 준 것을 말하는데, 《고운집》 〈고운 선생 사적(孤雲先生事蹟)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그 시가 소개되어 나온다. 석우는 금석(金石)처럼 정의(情誼)가 굳건한 벗이라는 뜻이다.
[주D-014]김승(金丞)은 …… 승진시켰다 : 신라 헌강왕(憲康王)이 고운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한 것을 가리킨다. 김승은 김씨(金氏)인 승(丞)이라는 뜻이다. 승은 관직 이름으로, 고대에 천자를 보필하는 4인 중의 하나였다.
[주D-015]돌아보면 …… 읊조렸는데 : 선진 문명의 중국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고국이 너무도 그리워서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가 중선(仲宣)인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후한(後漢) 말 동란 때에 형주(荊州)의 누대에 올라 고향 생각을 하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는데, 그중에 “아름답긴 하다마는 우리의 땅이 아님이여, 어찌 잠깐이라도 머무를 수 있으리오.〔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고 탄식한 구절이 나온다. 《文選 卷11》 또 전국 시대 월(越)나라 사람 장석(莊舃)이 초(楚)나라에 와서 벼슬하며 집규(執圭)라는 직책의 고관이 되었다가 병에 걸렸는데, 초왕(楚王)이 “누구를 막론하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고향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한번 시험해 보라.”라는 혹자의 말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장석이 무의식적으로 월나라 노랫가락을 읊조리고 있더라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70 張儀列傳》
[주D-016]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 : 동방삭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청(曼淸)이다. 해학과 직언을 잘하였고 선술(仙術)을 좋아하였는데, 하늘나라의 반도(蟠桃) 3개를 훔쳐 먹어 3천 년을 살았다고 한다. 성정은 별의 영기(靈氣)를 말한다.
[주D-017]노담(老聃)의 자기(紫氣) : 노담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노자가 일찍이 주(周)나라에서 사관(史官)으로 있다가 주나라가 쇠해진 것을 보고는 주나라를 떠나갔는데, 노자가 서쪽으로 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관의 영(令)으로 있던 윤희(尹喜)가 이에 앞서 함곡관 위에 자색 기운이 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얼마 뒤에 노자가 동쪽에서 푸른 소를 타고 왔다고 한다. 《列仙傳》
[주D-018]신선 …… 옮겨왔다 : 대본에는 ‘缺’로 되어 있는데, 정두경의 《동명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 부분의 원문은 ‘仙骨出塵 方朔之星精下降 錦衣還國 老聃之紫氣東來’이다.
[주D-019]무협 고봉(巫峽高峯)의 …… 돌아와서 : 고운이 12세에 중국에 들어가서 28세에 금의환향했다는 말이다. 무협에 12봉이 있고 하늘에 28수가 있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주D-020]계림(雞林)에는 …… 탄식하였다 : 신라는 쇠망하고 고려는 흥성한다고 고운이 비유했다는 것이다. 곡령은 개경(開京)의 송악(松嶽)을 가리킨다.
[주D-021]뜬구름 …… 흘렸나니 : 고운이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시무(時務) 10여 책을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올렸으나 허사로 돌아간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을 올리면서 “삼가 일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요, 장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 가지이다.〔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전제한 뒤에 하나하나 설명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48 賈誼傳》
[주D-022]이 …… 알아주었겠는가 : 당시 세상에 지기(知己)가 없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친구인 종자기(鍾子期)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다.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였는데, 종자기가 죽고 나서는 백아가 더 이상 세상에 지음(知音)이 없다고 탄식하며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린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呂氏春秋 本味》
[주D-023]홍진이 …… 돌아갔고 : 혼란한 세상에서 벼슬하는 일을 그만두고 산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서 유유자적했다는 말이다. 매복(梅福)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D-024]자지(紫芝) : 자줏빛의 영지(靈芝)를 가리킨다. 진(秦)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은거한 네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등 사호(四皓)가 자지를 캐 먹고 배고픔을 달래면서 〈자지가(紫芝歌)〉를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주D-025]화서(華胥) : 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이상 국가의 이름이다. 황제가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무위자연의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는 꿈을 꾸고는, 여기에서 계발되어 천하에 크게 덕화를 펼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列子 黃帝》
[주D-026]내가 …… 분이로다 : 대본은 ‘吾喪我’이다. 《장자》 〈제물론〉 첫머리에 나오는 말인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고 일체 물아(物我)의 경계를 떠난 자유로운 경지를 뜻하는 표현이다.
[주D-027]현빈(玄牝) : 만물을 생성하고 기르는 본원(本源)을 뜻하는 말로, 《노자(老子)》 제6장에 이르기를, “곡신은 죽지 않는데, 이것을 일러 현빈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하였다.
[주D-028]참동(參同)의 계(契) : 한나라 때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책인 《참동계》로, 《주역》의 효상(爻象)을 빌려 금(金)을 단련하는 법을 논하였다.
[주D-029]곰처럼 …… 폈으며 : 옛날에 행하던 일종의 양생법(養生法)으로, 곰과 같이 나뭇가지를 기어오르고 새처럼 다리를 쭉 뻗는 것을 말한다. 《장자》 〈각의(刻意)〉에 이르기를,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여 심호흡을 하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다리를 쭉 뻗듯 체조를 하는 것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30]경화(瓊華) : 전설 속에 나오는 경수(瓊樹)의 꽃으로, 옥가루와 비슷하다고 한다.
[주D-031]팔구(八區) : 팔방(八方)과 같은 말로, 천하를 가리킨다.
[주D-032]구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 :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는 뜻이다. 자진은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이다. 도가(道家)의 고사에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이 칠월 칠석날에 흰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구산(緱山)의 마루에 머물러 있다가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하였다. 《後漢書 卷82 方術列傳上 王喬》
[주D-033]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成子)를 방문하였다 : 공동산(崆峒山)은 계주(薊州)에 있는 산이고, 광성자는 중국 상고 시대의 선인(仙人)이다. 광성자가 공동산의 석실(石室)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황제 헌원씨(皇帝軒轅氏)가 그를 찾아가 함께 노닐면서 수신법(修身法)을 물었다고 한다.
[주D-034]현빈(玄牝)에 …… 없었다 : 대본에는 ‘缺’로 되어 있는데, 정두경의 《동명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 부분의 원문은 ‘玄牝 自得衆妙之門 藥鍊金丹 更續參同之契 養形神於物外 熊經鳥伸 脫軀殼於人間 蟬蛻龍變 不食五穀 吸風露而嘰瓊華 揮斥八區 乘雲氣而騎日月 揖子晉於緱嶺 訪廣成於崆峒 至人無名 混萬象而同體 神氣不變 曠千載而猶存 出入不知端倪 變化難窮終始’이다.
[주D-035]진(秦)나라의 …… 보이고 : 진 시황(秦始皇)이 네모진 거울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거울에 비춰 보면 몸속의 오장이 다 보임은 물론이요, 마음속의 선악까지도 모두 밖으로 드러났다는 전설이 진(晉)나라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 권3에 나온다.
[주D-036]신우(神禹)의 …… 것 : 하우(夏禹)가 치산치수를 하며 범람하는 홍수를 막으려고 8년 동안 분주히 돌아다닌 끝에 중국을 구주(九州)로 나누고 안정시킨 고사를 말한다.
[주D-037]70명의 고제(高弟) : 공자(孔子)의 뛰어난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시서예악을 교재로 가르쳤는데, 제자가 대개 3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서 육예를 몸으로 통달한 사람은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8]나는 …… 떠올리고 : 장자(莊子) 자신이 물고기가 아닌데도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던 것처럼, 정두경 역시 고운은 아니지만 고운의 심회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장자가 친구인 혜시(惠施)와 함께 호량(濠梁)을 거닐다가 피라미가 한가롭게 노니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다.〔是魚之樂也〕”라고 하자, 혜시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子非魚 安知魚之樂〕”라고 반박하면서 벌어지는 호량의 토론이 《장자》 〈추수(秋水)〉 맨 마지막에 나온다.
[주D-039]영천(穎川)의 …… 꿈꾼다 : 고운이 세상의 영화 따위는 돌아보지 않고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기 뜻에 맞게 생활한 것을 가리킨다. 요(堯) 임금 때의 은사(隱士)인 허유(許由)가 일찍이 기산(箕山) 아래 영수(穎水) 북쪽에 은거하였는데, 요 임금이 제위를 맡기려 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귀를 씻었고, 또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자 어떤 사람이 표주박 하나를 주니 그것을 나무에 걸어 두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그 표주박까지도 번거롭다고 하며 내버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서유구(徐有榘)]



《계원필경집》 20권은 신라의 고운(孤雲) 최공(崔公)이 당나라 회남(淮南) 막부(幕府)에 있을 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응수하여 지은 것으로서,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직접 편집하여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려 바친 것이다.
공의 이름은 치원(致遠)이요, 자(字)는 해부(海夫)요, 고운은 그의 호(號)이다. 호남(湖南) 옥구(沃溝)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타고 중국에 들어가서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한참 뒤에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그만두었다.
그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는데,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 고변(高騈)이 회남에 막부를 열고는 공을 불러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표(表)ㆍ장(狀)ㆍ문(文)ㆍ고(告) 등 모든 글이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황소의 죄를 성토한 격문(檄文)은 천하에 전송(傳誦)되었다. 공의 공적이 조정에 보고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국신사(國信使)에 충원되어 동방으로 돌아와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을 섬기며 한림 학사(翰林學士)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외방으로 나가 무성 태수(武城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가족을 이끌고 강양군(江陽郡)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는데, 그의 묘소는 호서(湖西)의 홍산(鴻山)에 있다. 어떤 이는 공이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나, 이는 허망한 말이다.
대저 바닷가의 외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하는 것을 마치 지푸라기 줍듯이 하였으며, 끝내는 문장으로 한 세상을 울리면서 동시(同時)에 빈공(賓貢)한 사람들이 아무도 앞을 다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으로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막부에 몇 년 동안 거하면서 고변이 뜻있는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과 여용지(呂用之)와 제갈은(諸葛殷) 등이 허탄하고 망녕되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초연히 인혐(引嫌)하며 떠나갔는데, 떠나간 뒤 3년 만에 회남 지역에서 난리가 일어났고 보면, 공이야말로 또 기미(幾微)를 미리 알고 대처하는 명철한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그 인격으로 보나 그 문장으로 보나 후세에 전해지도록 해야만 할 것이요 절대로 그대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왕에게 올린 표문에 의거하면, 이 문집 이외에 금체부(今體賦) 1권, 금체시(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등이 또 있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계원필경》 20권과 문집 30권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다른 것들은 모두 전하지 않고 오직 이 《계원필경집》만 여러 차례 인행(印行)되었는데, 판각(板刻)은 오래전에 잃어버렸고 탑본(搨本) 또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계사년(1833, 순조33) 가을에 내가 호남을 안찰하며 순시하다가 무성(武城)에 이르러 공의 서원을 배알(拜謁)하고는 석귀(石龜)와 유상대(流觴臺) 사이를 배회하면서 유적을 둘러보노라니 감개가 새로웠다. 그때 마침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홍공(洪公)이 이 문집을 부쳐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 년 가까이 끊어지지 않고 실처럼 이어져 온 문헌이다. 그대는 옛글을 유통시킬 생각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기쁜 한편으로,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커질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얼른 교정을 하여 취진자(聚珍字)로 인쇄한 뒤에 태인현(泰仁縣)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합천군(陝川郡)의 가야사(伽倻寺)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아, 명주(名酒)가 있는 동네에는 반드시 두강(杜康)의 이름을 내걸고, 명검(名劍)의 칼날에는 반드시 구야(歐冶)의 이름을 표기하니, 이는 그 근본과 시초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해 오는 우리 동방의 시문집들은 이 문집을 개산(開山) 비조(鼻祖)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문집이 또한 동방 예원(藝苑)의 근본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니, 어찌 이 문집이 닳아 없어지는 대로 그냥 놔두고서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아서야 될 일이겠는가.
공이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저작한 글은 흩어져 없어져서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범궁(梵宮)과 사묘(祠廟) 사이에서 수풀을 헤치고 이끼를 긁어내면 그래도 십여 편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을 분류해 원집(原集)에 붙여서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인쇄해 보고 싶은 생각을 내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당 희종(唐僖宗) 중화(中和) 2년(882, 헌강왕8) 정월에 왕탁(王鐸)이 고변을 대신하여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이 되었고, 5월에는 고변을 시중(侍中)으로 올리고서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를 파직하였는데, 고변이 병권(兵權)을 잃은 데다가 이권(利權)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표문을 올려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言辭)가 불손하였으므로, 상이 정전(鄭畋)에게 명하여 조서(詔書)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문집에 나오는 〈시중에 올려 준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加侍中表〕〉을 보면, 겸손한 말로 인구(引咎)했을 뿐이요, 격분하거나 발만(勃謾)한 언사는 한마디도 없다. 또 〈선위하는 조서를 내린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賜宣慰表〕〉을 보면 “우러러 윤음을 살펴 보건대, 신의 부족한 정사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시어 군사들이 단합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고 하시면서〔仰睹綸音 深嘉秕政 師徒輯睦 黎庶安寧〕”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해하고 위로하며 장려해 준 것이 이처럼 은근하고 진지하기만 하였으니, 그렇다면 역사에서 말한 바 “조서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草詔切責〕”라고 한 것은, 당시의 실록(實錄)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상고해 보건대, 중화(中和)의 기년(紀年)은 4년으로 끝나는데, 공이 신라왕에게 표문을 올린 연월(年月)을 보면 중화 6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공이 중화 4년 10월에 배를 타고 항해하여 이듬해 봄에 비로소 신라에 도착하였고, 또 그 이듬해에 이 문집을 엮어 올렸던 사정을 감안할 때, 그 1년 전에 광계(光啓)로 개원(改元)한 사실을 어쩌면 듣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갑오년(1834, 순조34) 7월 보름날에 달성(達城) 서유구(徐有榘)는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쓰다.


 

[주D-001]두강(杜康) : 주(周)나라 때에 술을 최초로 빚었다는 사람의 이름이다.
[주D-002]구야(歐冶) : 명검을 잘 만들었던 춘추 시대 월(越)나라 사람으로, 월왕(越王)을 위해 담로(湛盧)ㆍ거궐(巨闕)ㆍ승사(勝邪)ㆍ어장(魚腸)ㆍ순구(純鉤)라는 다섯 자루의 칼을 만들고, 초왕(楚王)을 위해 용연(龍淵)ㆍ태아(泰阿)ㆍ공포(工布)라는 세 자루의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D-003]당 희종(唐僖宗) …… 한다 : 《구당서(舊唐書)》 권182 〈고변열전(高騈列傳)〉과 《신당서(新唐書)》 권224 하(下) 〈고변열전〉에 이 내용이 나온다.
[주D-004]황제가 …… 않겠는가 : 당 희종이 정전(鄭畋)에게 조서를 작성하여 질책하도록 한 것은 사실은 고운(孤雲)이 지어 올린 표문 때문이 아니라, 고변의 다른 막료인 고운(顧雲)이 올린 표문이 불손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55 〈당기(唐紀) 71 희종(僖宗)〉 중화(中和) 2년 5월 조에 보면 “회남 절도사 고변의 직위를 올려 시중을 겸하게 하고 염철전운사를 파직하였다. 고변이 이미 병권을 잃은 데다가 다시 이권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그의 막료인 고운으로 하여금 표문을 작성하게 하여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가 불손하였다.〔加淮南節度使高騈兼侍中 罷其鹽鐵轉運使 騈旣失兵柄 又解利權 攘袂大詬 遣其幕僚顧雲草表自訴 言辭不遜〕”라고 하고는 그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진감선사 비문

 

 

 

 

 

 

 

 

 

 

 

 

 

 

 

 

 

 

 

 

 

 

 

 

 

 

 

 

 

 

 

 

 

 

 

 

 

 

 

 

 

 

 

 

 

 

 

 

 

 

 

 

 

 

 

 

 

 

 

 

 

 

 

 

 

 

 

 

 

 

 

 

 

 

 

 

 

 

 

 

 

東文選卷之三十九
확대원래대로축소
 表箋
百濟遣使朝北魏表[崔致遠]


臣立國東極。豺狼隔路。雖世承靈化。莫由奉藩。瞻望雲闕。馳情罔極。涼風微應。伏惟皇帝陛下。協和天休。不勝係仰之情。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龍驤將軍帶方大守司馬張茂等。設舫波阻。搜徑玄津。託命自然之運。遣進萬一之誠。兾神祗垂感。皇靈洪覆。克達天庭。宣暢臣志。雖旦聞夕歿。永無餘恨。


 

 

숙종 30권, 22년(1696 병자 / 청 강희(康熙) 35년) 1월 1일(무오) 6번째기사
태인현에 최치원을 향사하고 정극인 등을 배향하게 하다


전라도의 유생(儒生) 유지춘(柳之春) 등이 태인현(泰仁縣)최치원(崔致遠)을 향사(享祀)하고 신잠(申潛)을 합향(合享)하며, 정극인(丁克仁)·송세림(宋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김관(金灌)을 배향(配享)하고, 은액(恩額)을 내려 원우(院宇)를 꾸미게 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소(疏)를 예조(禮曹)에 내리자, 예조에서 거듭 설치하는 유례가 아니므로 사액(賜額)을 윤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윤허하였다. 대개 최치원·신잠은 이 고을의 수령(守令)이었기 때문이고, 정극인 이하 5인은 이 고장의 어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논할 만한 학문은 없으나, 이미 공자(孔子)의 사당의 곁에 배향되는 데에 끼었으니, 숭상하여 보답하는 사전(祀典)이 혹 외람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잠에 이르러서는 기묘년8883) 현량과(賢良科)의 천거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학문과 행실이 매우 현저하지는 못하였으며, 정극인 이하는 명성(名聲)이 더욱 부족하였다. 만약 사향(祠享)하려면 다만 향선생(鄕先生)을 제사(祭社)하는 뜻으로 사사로이 숭봉(崇奉)하는 것이 가할 따름인데, 이로써 조정에 은액을 내려 주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외람되다. 더구나 그 소사(疏辭)에 신잠 등 여러 사람에 대하여 선정신(先正臣)이라 칭하기까지 한 것은 더욱 지극히 우스운데, 정원(政院)에서 흐릿하게 봉입(捧入)하였고, 해조(該曹)에서는 또 그 말에 굽혀 따라서 사전(祀典)이 엄하지 않게 하였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2책 30권 3장 A면
【영인본】 39책 407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三國史本傳] a_001_137a
  



三國史本傳。崔致遠字孤雲。一字海雲。新羅沙梁部人也。公美風儀。少精敏好學。至年十二。將隨海舶。入唐求學。其父謂曰。十年不第。卽非吾兒也。行矣勉之。公至唐。尋師力學。以唐僖宗乾符元年甲午。禮部侍郞裵瓚下一擧及第。時年十八。調授宣州漂水縣尉。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時黃巢叛。高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辟公爲從事巡官。委以書記之任。其表狀書啓徵兵告檄。皆出其手。其檄黃巢。有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001_137b之鬼已議陰誅之語。巢不覺下牀。由是名振天下。及年二十八。僖宗知公有歸寧之志。使將詔書來聘本國。憲康王留公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公自以西學多所得。及來欲展所蘊。而衰季多疑忌。出爲太山郡 今泰仁 太守。唐昭宗景福二年。卽眞聖王之七年。公時爲富城郡 今瑞山 太守。祇召爲賀正使。將入唐。以比歲饑荒。盜賊交午。道梗不果行。其後亦嘗奉使如唐。眞聖王八年。公進時務十餘條。王嘉納之。以爲阿飡。公自西仕大唐。及至東歸故國。皆遭亂屯邅蹇連。動輒得咎。自傷不遇。無復仕進意。001_137c逍遙自放。山林之下。江海之濱。營臺榭植松竹。枕藉書史。嘯詠風月。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川淸涼寺,智異山雙溪寺,合浦月影臺。皆公遊焉之所。最後帶家隱伽倻山。棲遲偃仰以終老焉。始西遊時。與江東詩人羅隱相知。隱負自高。不輕許可人。人示以公所製歌詩五軸。隱乃歎賞。又與同年顧雲友。善將歸。顧雲以詩送別。我聞海上三金鰲。金鰲頭戴山高高。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傍邊一點鷄林碧。鰲山孕秀生奇特。十二乘船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十八橫行戰詞苑。一箭射破001_137d金門策。蓋心有所服云。新唐書藝文志。載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註云。崔致遠。高麗人。賓貢及第。其名顯上國如此。又有文集三十卷行於世。高麗顯宗時。從祀文廟。諡文昌侯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東國通鑑] a_001_137d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02: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東國通鑑。新羅憲康王乙巳十一年 唐光啓元年 春三月。崔致遠奉帝詔還自唐。致遠沙梁部人。精敏好學。年十二。隨海舶入唐求學。其父謂曰。十年不第。非吾子也。致遠至唐。尋師力學。十八。登第。調宣州漂水縣尉。遷侍御史,內供奉。時黃巢反。高騈爲兵馬都統以討之。辟致遠爲從事。以委書記之任。其表狀書啓。多出001_138a其手。其檄黃巢。有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之語。巢不覺下牀。由是名振天下。又上大師侍中狀云。伏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弁韓,辰韓。馬韓則高句麗。弁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句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御。由於征遼。貞觀中。我太宗皇帝親統六軍。渡海恭行天討。高句麗畏威請和。文皇受降回蹕。我武烈大王請以犬馬之誠。助定一方之難。入唐朝謁。自此而始。後以高句麗,百濟踵前造惡。武烈入朝。請爲鄕導。至高宗皇帝顯慶001_138b五年。勑蘇定方統十道强兵樓船萬隻。大破百濟。乃於其地。置扶餘都督府。招輯遺氓。以漢官。以臭味不同。屢聞離叛。遂徙其人於河南。摠章元年。命英公李勣破高句麗。置安東都督府。至儀鳳三年。徙其人於河南隴右。高句麗殘孽類聚。北依太白山下。國號爲渤海。開元二十年。怨恨天朝。將兵掩襲登州。殺刺史韋俊。於是帝大怒。命內史高品,何行成。太僕郞金思蘭發兵。過海攻討。仍就加我王金某爲正太尉。持節充寧海郡事,鷄林州大都督。以冬深雪厚。蕃漢苦寒勑命回軍。至今三百餘年。一方無事。滄海晏然。此001_138c乃我武烈大王之功也。今致遠儒門末學。海外凡材。謬奉表章。來朝樂土。凡有誠懇。禮合披陳。伏見元和十二年。本國王子金張廉飄風至明州下岸。浙東某官。發送入京。中和二年。入朝使金直諒爲叛臣作亂。道路不通。遂於楚州下岸。邐迤至楊州。得知聖駕幸蜀。高太尉差都頭張儉監押。送至西川。已前事例分明。伏乞太師侍中俯降台恩。特賜水陸券牒。令所在供給舟船熟食及長行驢馬草料。並差軍將監。送至駕前。幸甚。及還。王留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致遠自以西學多所得。欲展所蘊。而001_138d衰季多疑忌不能容。出爲太山郡太守。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東史纂要] a_001_138d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03: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東史纂要。曺偉曰。或者疑其以孤雲大才。卷而東歸。盡力就列。遇事匡救。䌤縫其闕失。粉飾其文治。則國勢不至於捏卼。萱,裔何遽於猖獗。而顧乃棲遲偃仰。不屑仕宦。國之危亡。視若越人之肥瘠。無乃幾於潔身而亂倫。懷寶而迷邦者耶。是不然。公以童穉之年。遠涉溟海。不憚險艱。未弱冠。取科第如摘髭。其心豈欲效向子平,臺孝威者耶。其勵志功名而有志於立揚者。蓋無疑也。惟其欲仕唐也。則宦寺擅於內。藩鎭橫於外。朱梁簒代之兆已萌。欲仕本國也。則昏主委001_139a政於非人。女后淫瀆而亂紀。嬖幸盈朝。翕翕訿訿。此固不暇容吾身。而望其行吾道乎。況公之明識。已炳於靑松黃葉之句。大廈將傾。非一木可支。滄海橫流。非隻手可遏。尋深山而友麋鹿。攀薜蘿而弄明月者。豈公之本心哉。嗚呼。自三國以來。文人才士。世不乏人。而公之名獨光前掩後。膾炙人口。平生足迹所及之處。至今樵人牧竪皆指之曰。崔公所遊之地。至於閭閻細人。鄕曲愚婦。皆知誦公之姓名。慕公之文章。則其所以得於一身者。必有不可名言。而人與時不偶。命與才不諧。豈非千古之恨耶。余少時。嘗讀人間001_139b之要路通津。眼無開處。物外之靑山綠水。夢有歸時之句。想公之襟抱飄飄然非塵寰中人。及觀公之平生。名區勝地之在國內者。足迹殆將遍焉。則靑山綠水之句。本非寓言。而益歎公雅意之所存也。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三國遺事] a_001_139b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04: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三國遺事。孤雲舊宅。在新羅本彼部皇龍寺南味呑寺北。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家乘] a_001_139b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05: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家乘。先生父諱肩逸。
新羅憲安王元年丁丑。唐宣宗大中十一年 先生生。
景文王八年戊子。唐懿宗咸通九年 入唐。
十四年甲午。唐僖宗乾符元年 登第。禮部侍郞裵瓚榜 調宣州漂 一作001_139c 水縣尉。考績爲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及黃巢叛。爲都統高騈從事巡官。
憲康王十年甲辰 唐僖宗中和四年 八月。奉帝詔來聘本國。侯風海浦。淹滯經冬。
十一年乙巳 唐僖宗光啓元年 三月。始到國。有年狀曰。巫重峯之歲。絲入中原。銀河列宿之年。錦還東土。 王留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十二年丙午 唐僖宗光啓二年 七月。王薨。朝廷多疑忌。出爲太山郡太守。
眞聖主七年甲寅。唐昭宗乾寧元年 爲富城郡太守。祇召爲001_139d賀正使。以道多盜賊不果行。二月。進時務十餘條。主嘉納之。以爲阿飡。自傷遭値亂世。不復仕進。自放於山水之間。惟以嘯詠爲事。
高麗顯宗十一年庚申。宋眞宗天禧四年 追贈內史令。從師先聖廟庭。
愼齋周世鵬上李晦齋書。崔文昌之文藻神異。其所見所行。眞可謂百世之師。而至於誠正之說。槩乎其未聞也。然其生一隅倡文學。功莫大焉。則配享先聖。非斯人而誰歟。
十四年癸亥 宋仁宗天聖元年 五月。贈諡文昌侯。
001_140a國朝明宗七年壬子。明肅宗嘉靖三十一年傳曰。先賢文昌侯崔致遠。卽吾東方理學之宗也。其子孫中勿論賤孼。雖在遐荒。世世勿侵軍役事。
十六年辛酉。明肅宗嘉靖四十年 建書院于慶州西岳。東京志。府尹龜巖李公楨。稟於退溪李先生。歲癸亥奉安。退溪先生命名曰西岳精舍。講堂曰時習。東齋曰進修。西齋曰誠敬。東下齋曰切磋。西下齋曰澡雪。前樓曰詠歸。門曰道東。樓楣間揭先生筆。而俱燬于壬辰。位版則移藏于山谷中。萬曆庚子。府尹李時發時。構草舍于舊址。還安位版。壬寅。府尹李時彥時。重新祠宇001_140b而猶未盡復。庚戌。府尹崔沂時。重創講堂,齋舍及典祀廳,藏書室。天啓癸亥。府尹呂祐吉時。府儒進士崔東彥等陳疏請額。賜額曰西岳書院。扁額則元振海筆也。丙戌。府尹李民寏時。重建詠歸樓。廟制東向。弘儒侯,開國公,文昌公以次並享。龜巖李公楨西岳精舍詩。虞家數語相傳後。萬古斯文白日明。一唯參乎心默契。再賢回也道重亨。光風東洛從容意。秋月西林感慨情。會友琢磨今有地。丁寧無負此堂名。退溪先生次。箕敎吾東曾善國。至今天步屬文明。多材聖作非無本。至道人行詎自亨。寥落塵篇尋寶訣。奮001_140c興豪傑出常情。儒宮好闢仙山境。老我增思實趁名。八溪鄭宗榮詩。大東文敎自箕殷。羅代名賢濟濟羣。興亡百變餘山海。治亂千秋混臭薰。旌別終歸人正表。指麾重見士如雲。藏修可託西山下。鄒魯曾多外議紛。金鶴峯謁西岳示諸生詩。西兄精舍舊聞名。遠客初回萬里程。誰識龜翁開院意。鷄林葉葉盡風聲。宣祖六年癸酉。明神宗萬曆元年傳曰。文昌侯道德文章。我東方第一人也。其後孫雖殘微賤孼。勿侵軍役事。光海乙卯。建書院于泰仁武城。泰仁有蓮池。先生宰本郡時所鑿。池種蓮云。佔畢齋金先生詩。割鷄當日001_140d播淸芬。枳棘棲鸞衆所云。千載吟魂何處覓。芙蕖萬柄萬孤雲。
仁祖四年丙寅。明章宗天啓四年傳曰。文昌侯後裔。雖支庶賤孼。勿爲軍丁事。
顯宗十一年庚戌。淸聖祖康熙九年 建書院于咸陽柏淵。
肅宗二十二年丙子。淸聖祖康熙三十五年賜額武城書院。
英祖三十一年乙亥。淸高宗乾隆二十年 建桂林祠于大丘解顏縣。奉安影幀。今移建于九會堂後
正祖二十年丙辰。淸仁宗嘉慶元年傳曰。文昌侯子孫。雖支庶勿侵軍役。勿入汰講之例。○列聖朝受敎道來。001_141a果能遵行乎。令該曹嚴飭擧行。而其有犯守令。亦爲隨現勘處事。以上幷家乘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輿地勝覽] a_001_141a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06: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輿地勝覽略。陜川海印寺在伽倻山西。新羅時所創。有崔致遠書巖碁閣。題詩石。海印寺之洞。俗云紅流洞。洞口有武陵橋。自橋循寺而行五六里。有崔致遠題詩石。後人名其石曰致遠臺。讀書堂。世傳崔致遠隱伽倻山。一朝早起出戶。遺冠屨於林間。不知所歸。海印寺僧。以其日薦冥冠,禧舃,寫眞留讀書堂。堂之遺址在寺西。昌原月影臺。在會原縣西海邊。崔致遠所遊處。有石刻剝落。咸陽名宦崔致遠。致001_141b遠寄海印寺僧希朗詩下。題防虜太監,天嶺郡太守遏粲崔致遠。瑞山名宦崔致遠。眞聖時爲太守。王召爲賀正使。盜賊交午。道梗不行。泰仁名宦崔致遠。致遠自以西學多所得。及東還。將行己志。而衰季多疑忌不能容。遂出爲大山郡太守。
上書庄。在慶州金鰲山北蚊川上。眞聖主八年。先生上書陳時務十餘條。此其所也。州人今建屋守護。李鍾祥詩。西遊高幕憶書庄。漠漠東還意更長。一入伽倻消息遠。浮雲落照古都忙。
讀書堂。在慶州狼山西麓。先生讀書之所。古井尙存。001_141c後人因其舊礎而堂之。肄業其中。竪遺墟碑。
月影臺。月影在海中。積九十七億三萬八千尺有奇。 高麗鄭知常詩。碧波浩渺石崔嵬。中有蓬萊學士臺。松老壇邊荒草合。雲低天末片帆來。百年文雅新詩句。萬里江山一酒桮。回首雞林人不見。月華空照海門廻。蔡洪哲詩。文章氣習轉崔嵬。忽憶崔侯一上臺。風月不隨黃鶴去。烟波相逐白鷗來。雨晴山色濃低檻。春盡松花亂入桮。更有琴心隔塵土。佗時好與雨雲廻。眉叟許穆記略新羅史。眞聖時有崔致遠。初事唐僖宗。知天下亂。去歸國。又新羅政衰。遂遺世逃隱。於是有操雞搏001_141d鴨之語。傳稱致遠遊月影臺云。其傍海上有孤雲臺。
臺有老柹木。傳謂先生手植。
雙溪寺在智異山。世傳先生讀書于此。庭有老槐。根渡北澗而盤結。寺僧因以爲橋。乃先生手植云。洞口二石對峙如門。先生手書曰雙溪石門。東刻雙溪。西刻石門。 又有先生所撰碑。寺內有靈神庵。佔畢齋詩。雙溪寺裏憶孤雲。時事紛紛不可聞。東海歸來還浪迹。祇緣野鶴在雞羣。濯纓金馹孫遊頭流錄。自丹城西行十五里。歷盡阻折得寬原。緣崖而北。三四里有谷口。入口有削巖。面刻廣濟巖門四字。字畫硬古。世傳崔001_142a孤雲手迹也。由石門一里。有龜龍古碑。篆其額曰雙溪寺故眞鑑禪師碑九字。傍書前西國都巡官,承務郞,侍御史,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光啓三年建。光啓唐僖宗年也。甲子至今六百餘年。亦古矣。人物存亡。大運興廢。相尋於無窮。而此頑然者獨立不朽。可發一歎。所見碑碣多矣。斷俗神行之碑在於元和。則先於光啓矣。五臺水精之記撰於權適。則亦一世之文士也。而獨於此興懷不已者。豈孤雲手澤尙存。而孤雲所以徜徉山水間者。其襟懷有契於百世之後歟。使某生於孤雲之時。當執杖屨而從。不使孤001_142b雲踽踽與學佛者爲徒。使孤雲生於今日。亦必居可爲之地。摛華國之文。賁飾太平。某亦得以奉筆硯於門下矣。摩挲苔石。多小感慨。寺北有孤雲所登八詠樓遺址。居僧義空欲鳩材而起樓云。
淸凉山在安東府才山縣西。有致遠峯,致遠庵。先生嘗讀書于此。故名之。周愼齋遊淸凉山錄。孤雲入大唐檄黃巢。名動天下。遂爲東方文章之祖。至於配食文廟。然負大名東歸。東人望之若神仙中人。其平生所歷一水一石。至今猶稱道不衰。誠使孤雲昌言排之。則五百年高麗。未必陸沈於佛若是之酷也。風001_142c穴在克 一作極 一庵後。穴口有二板。傳云崔致遠所坐圍碁之板。板在窟中免雨。故能千載不腐。遂訪致遠庵。飮聰明水。水在崖泐滿石坳。瀅若明鏡。冽如氷雪。入其庵。躡其臺。益有感於孤雲。噫。使時君遠奸回近賢人。則雞林之葉。未必遽爲黃落也。斯人嘉遯。名與日月爭光。而東都諸陵。未免耕種。尤可悲也。致遠臺詩。金塔峯前致遠臺。遙看十一寺門開。高低翠壁斜陽裏。誰倩龍眠圖畫來。又西行不遇復東行。竟餓空山恨孰平。武烈陵中金椀出。伽倻嶺上月輪明。又衆峯爭露金生法。孤月猶懸致遠心。三宿山中人001_142d不見。千秋臺上獨霑襟。
學士樓在咸陽客館西。先生爲太守時所登賞故名。後爲兵燹所燬。移邑時。樓亦移構而因名。又有手植林木連亘十餘里。郡人立碑而記事。玉溪盧禛詩。山水縈廻別一天。樓居此地怳遊仙。村連碧篠凉侵席。烟暝長林影蘸筵。佔畢風流年過百。孤雲陳迹歲垂千。人間俯仰空延佇。嘯詠欄楯憶少年。
臨鏡臺。一云崔公臺。在梁山黃山江絶壁上。先生嘗遊賞有詩。
靑龍臺在金海。石刻先生手筆。左傍書先生姓諱。
001_143a海雲臺在東萊東十八里。有山陡入海中若蠶頭。先生嘗築臺。而手痕尙存。周愼齋詩。臺下無涯是大洋。儒仙一去鶴茫茫。搏搖九萬欲生羽。滌蕩古今呼滿觴。目極片雲看馬島。心飛何處是扶桑。玆遊奇絶平生冠。滿袖天風吹不妨。
伽倻山在陜川冶罏縣北三十里。先生嘗帶家隱於此。至今有致遠村。後人敬其名。改呼以治仁村。 佔畢齋用先生韻。題題詩石。以有先生詩。世稱題詩石。 淸詩光燄射蒼巒。墨漬餘痕闕泐間。世上但云尸解去。那知馬鬣在空山。又和海印板上韻。孤雲嘉遯客。白日大名聞。巾屨同蟬蛻。風001_143b標混鶴羣。碁盤空剝落。詩石半刳分。細履徜徉地。追懷祇自勤。周愼齋詩。爲躡煙霞理屐來。楓崖九月正佳哉。含悽半日哀莊寺。灑淚千秋致遠臺。萬事無心寧喜芋。百年有酒卽銜桮。濯纓終老紅流洞。泚筆慚非鮑謝才。寒岡鄭逑遊伽倻山錄。斷崖盤巖。設名深刻。字畫宛然。紅流洞,泚筆巖,吹篴峯,光風瀨,霽月潭,噴玉瀑,宛在巖。皆所名也。可經久不剜。以供遊人之玩也。又刻崔孤雲詩一絶於瀑㳍石面。而每年霖漲。狂瀾盪磨。今不可復認。摩挲久之。依俙僅辨得一兩字矣。眉叟伽倻山記略。海印。新羅古寺。有八001_143c萬大藏經。南巖崖。傳說新羅崔學士巖居。川石間有紅流洞,吹篴峯,光風瀨,吟風臺,宛在巖,噴玉瀑,落花潭,疊石臺,會仙巖。出洞有武陵橋,七星臺。皆石刻學士大字。學士臺在海印寺西。邊有百尺老檜。腰大三丈餘。是孤雲手植。故築而名之。臺尙嵬然。籠山亭在紅流洞。孤雲有故敎流水盡籠山之詩。故名焉。亭後數武地。有孤雲影堂。亭前方營立碑。月留峯。乃伽倻一枝西出南廻者也。峯下有淸凉寺。孤雲遊處。武陵十二曲。伽倻山入口也。自武陵橋至致遠里十餘里。白石淸川。穿過丹崖翠壑。眞奇境也。孤雲有曲曲品題。左右峯001_143d壑。並有品名。申維翰慕先生。築景雲齋。有詩。
碧松亭在高靈縣西三十里平林中。孤雲遊息處。今爲水破。移建于山阿。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檀典要義] a_001_143d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07: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檀典要義。太白山有檀君篆碑。佶倔難讀。孤雲譯之。其文曰。一始无始一。碩三極无盡本。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愧化三。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一杳演。萬往萬來。用變不同本。本心本太陽。仰明人中。天中一。一終无終一。崔孤雲鸞郞碑序及三國史曰。國有玄妙之道。實乃合包三敎。入則孝於親。出則忠於君。魯001_144a司寇之旨也。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周柱史之宗也。諸惡莫作。諸善奉行。筑乾太子之化也。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東史補遺] a_001_144a
  



東史補遺。按馬韓爲高句麗。辰韓爲新羅。弁韓爲百濟。崔致遠已有定論。此非致遠創爲之說。自三國相傳之說也。金富軾地理誌。亦以致遠之論爲是。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徐有편001桂苑筆耕序] a_001_144a
  



徐有矩桂苑筆耕序。墓在鴻山。或云鴻山是伽倻一麓之名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西岳誌] a_001_144a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10: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西岳誌。生乎東國。而其文章事業。至於驅駕中原。暎曜後世者。千古一人而已。此其可以從祀聖廟也。以靑松黃葉之句。爲密贊麗業。則必史傳之陋耳。見幾001_144b高蹈。終於隱晦。迹不染麗代之世。其特立獨行之義。又可謂百世之師。書院請額疏。文昌侯崔致遠。非但文章卓絶。其見幾不仕之志。亦可以立懦而廉頑矣。位版改題時告由祝文。鰲山毓秀。蚊水載靈。淑氣所鍾。哲人乃生。竗齡乘桴。北學中國。射策金門。蜚英桂籍。佐成蓮幕。職專翰墨。羽檄朝飛。狂巢褫魄。天子有命。錦還萊庭。抱負任重。庶幾治平。已矣其衰。隻手難支。物外靑山。夢有歸時。斂而藏蹤。知幾其神。名區勝境。遺迹空陳。思人不見。但深景慕。念我先生。文學之祖。旣躋聖廡。又建賢祠。俎豆蘋蘩。百年于玆。位001_144c題名諱。恐近不敬。今而改是。美號是正。神人俱安。福祿來拜。左右洋洋。鑑此丹誠。位版改題後祭文。倡文東邦。振雅中國。遂光儒苑。永享芬苾。亦旣改書。其舊維新。時維仲秋。薦此明禋。常享祝文。文振夷夏。澤及後學。靑邱永世。式報先覺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肅廟丙子武城書院致祭文] a_001_144c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11: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肅廟丙子武城書院致祭文。粤惟文昌。挺生羅季。歷敭中朝。蔚爲國瑞。文章學術。輝暎千祀。腏食將聖。斯文未墜。我東儒敎。實自公始。厭世混濁。韜光就閒。鸞棲枳棘。于彼泰山。流風餘韻。赫赫耳目。邑人追思。報祀靡忒。常享祝文。北學莫先。與道俱東。倡我後學。001_144d萬古英風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學士堂常享祝文[崔國述] a_001_144d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12: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學士堂常享祝文。后孫國述。惟我先生。東國儒宗。與世不遇。此山甘終。遺像在堂。舊廢新崇。敢以吉辰。黍稷是恭。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正祖御製華城校宮致祭時文昌公祝文] a_001_144d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13: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正祖御製華城校宮致祭時文昌公祝文。鳳巖秀精。北學中原。廣拓藩牆。舌耕翰垣。東文之倡。公實爲宗。始觀于華。先侑盎鍾。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桂林祠移建時告由祝文[崔鍾奭] a_001_144d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14: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桂林祠移建時告由祝文。后孫鍾奭。惟我東方。僻在海外。檀箕世遠。人文貿貿。先生乃降。首闢鴻濛。星斗文章。華夏令名。炳幾高蹈。心閒義精。七分遺像。載高001_145a載淸。瞻者起敬。矧爾雲仍。久奉塵龕。每懷凜悚。載建新廟。于達之洞。宮牆蕭灑。山水麗明。卜吉虔奉。襟珮。其始自今。是妥是安。惠我文明。於千萬年。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狼山讀書堂遺墟碑識[李源祚] a_001_145a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15: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狼山讀書堂遺墟碑。李源祚識。先生羅代人。世遠無得以詳。尙論者曰。先生以學則躋聖廟。以文則主詞盟。以生則伯夷之避世。以迹則子房之託仙。先生果何如人也。嗚呼。先生嘗入中國登制科。與晩唐諸匠相頡頏。黃巢檄一句。至傳頌口碑。及東還。値羅運訖。見幾高蹈。雲遊物外。凡域內之以名山稱者。皆得先生而著焉。先生眞天下士也。一隅東國。尙不足囿先001_145b生。况區區一州一里之小乎。雖然。立鄭公之鄕。起顏樂之亭。必於其所生長之地。按州志。先生古宅在本彼部味呑寺南。上書庄在金鰲山北蚊水上。東都地靈之鍾。果不偶也。矧聲明之所肇基。雲仍之所傳守。豈可泯沒乎哉。州東狼山。有讀書堂遺址。古井尙存。仍舊礎而堂。爲肄業之所。後孫思衎甫始圖立石以表之。諸宗人合議而成其志。請余識。余惟先生之大。天下而國。國而州。州而里。里而堂。誠不足有無焉。而自堂而里而州而國而天下。則先生之事業文章。未必非發迹於是。爲先生後者。其敢不勉諸。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泰仁流觴臺碑記[趙持謙] a_001_146a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17: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泰仁流觴臺碑。趙持謙記。泰仁郡卽新羅之泰山郡。文昌侯崔公舊所莅也。郡南七里許。巖石盤陀。巖下流水環廻。文昌每觴詠於斯。倣逸少故事。至今父老相傳焉。臺歲久荒廢。余友趙使君子直。視篆之暇。逍001_146b遙乎臺上。悠然有曠世之感。累石增築。立小碑以識之。屬余爲記。頃年余爲吏楓岳下。地稱神仙窟宅。思一修飾。而未暇及。子直其多乎哉。余惟先生生星一周。涉海萬里。未弱冠。擢大唐巍科。踐霜臺。入金門。天下已爭知之。及其從事轅門。磨墨楯頭。使販鹽老賊魄褫膽落。眞所謂賢於百萬師矣。以其高才盛名。捲而東還。推出緖餘。亦足以維持一邦。顧乃沈淪銅墨若梅子眞。終焉浮遊方外。自託於羨門之屬。何也。噫。公之生世不辰。入中華則亂離瘼矣。歸故國則危亡兆矣。道不可行。身且難容。以此飄然遐擧。蟬蛻棼濁。001_146c誦紅流一絶。未嘗不三復歎憐其志焉。想其婆娑徜徉於是地也。感慨繼之者。豈但俛仰間陳迹而已哉。公之淸風逸韻。溢於宇宙之間。而知公志者蓋亦尠矣。夫地之重與輕顯與晦。未嘗不由於人。古人有言。蘭亭茂林。不遇逸少則不傳。余亦云是臺水石。得文昌而始彰。而千有餘年。又得子直增修而表揭焉。玆豈非有待於其人歟。不知是後繼子直而修者又誰也。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柏淵祠記[黃景源] a_001_145c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16: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001_145c柏淵祠。黃景源記。翰林侍讀學士,兵部侍郞,知瑞書監事文昌崔公孤雲。廟在咸陽柏淵之上。世傳公嘗守天嶺。有遺愛。天嶺於今爲咸陽。故府人立公之廟以祀之。公諱致遠。幼入唐。擧乾符元年及第。爲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黃巢叛。都統高騈辟從事。光啓元年。充詔使歸事金氏。爲翰林侍讀學士,兵部侍郞,知瑞書監事。乾寧元年。上十事。主不能用。乃棄官入伽倻山以終。按國史。公歸本國二十一年。左僕射裵樞等三十八人。坐淸流死白馬驛。唐遂亡。又二十九年。金氏國滅。蓋此時公旣隱矣。豈見天下之將亂。001_145d知宗國之必亡。超然遠去。避世而不返耶。豈其心不臣於梁。又不臣於王氏。遂逃於深山之中耶。方高騈之擊黃巢也。公慷慨爲騈草檄。徵諸道兵。名聞天下。巢旣滅。奉詔東歸。使公終身仕於唐。則惡能免淸流之禍乎。雖不免。必不屈志辱身而朝梁庭矣。慶州南有上書庄。世稱公上書王氏。然王氏始興之際。公誠上書陰贊之。則何故避世獨行。終老於山澤之間而不肯仕也。王氏中贈文昌侯祀國學。世以爲榮。而不知公之高節不事王氏也。可勝歎哉。孔子曰。伯夷,叔齊餓於首陽之下。民到今稱之。使殷不亡。則二子不001_146a餓而死矣。餓而死者。潔其身也。故天下稱之不衰。自公之去。以時考之。則金氏蓋已亡矣。此其志亦潔其身。與二子無以異也。今上二十一年。某侯出守咸陽府。拜公之廟。爲率府人。因其遺址而改修之。屬余爲記。夫國學祀公久矣。於府治何必立廟。然旣有公之遺蹟。亦可以百世不廢矣。於是乎書。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靑鶴洞碑銘[鄭弘溟] a_001_146c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18: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靑鶴洞碑。鄭弘溟銘曰。若高麗,百濟,新羅。國雖一域。粤有蓬萊,瀛洲,方丈。山則三神。積氣扶桑。篤生奇異。001_146d嗚呼。檀木之眞人一去。空餘太白之山。東明之麟馬不返。只有朝天之石。上古之玄風已遠。長生之秘計無傳。而况國徒尙干戈戰爭。論詩作賦之士。寥寥不聞。人不知道德文章。走馬控弦之輩。滔滔皆是。吾其左袵矣。海東無章甫之儒。文不在茲乎。嶺南降瑚璉之器。勵鋩刃於學海。樹旗幟於詞林。公姓崔。諱致遠。號孤雲。生應天命。家有祥瑞。陸出蓮花。質稟海嶽。才超秦漢。學堯典,舜典之文章。禮變齊,梁。振周南,召南之雅頌。光焰萬丈。若列明月之珠。律呂相和。似奏勻天之樂。動蛟龍於紙上。集風雨於毫端。渤海波濤。仍001_147a健筆而益壯。扶桑日月。得高名而重光。僻處三韓。每歎山河之隘。仰視八極。欲窮宇宙之寬。豈居陋巷柴門。將展桑弧蓬矢。東浮滄海。卻逐漢使之槎。北學中原。更悅周召之道。始知冀郡有馬。莫謂秦國無人。魯庭經過。慕季札之觀樂。蜀橋來渡。學相如之題名。齒雖弱冠。才雄多士。天門射策。紫極之皇帝知名。幕府飛賦。綠林之盜賊屈膝。聲聞四海。石友贈儒宗之歌。飛上九天。金丞遷翰林之職。顧非王仲宣之土。仍奏楚執圭之吟。 國人歎無奇才。女主授以貴職。値國朝之多艱。恨我生之不辰。吾道未展。所蘊難伸。列宿001_147b高峯。往來於銀河巫。靑松黃葉。歎息於鵠嶺雞林。閶閤浮雲。空流賈生之涕。風塵世俗。誰知伯牙之音。燈前萬里之心。物外千山之夢。紅塵眯目。挂衣冠而長歸。紫芝療飢。向林泉而高臥。一溪松竹。半掩月影之臺。萬壑烟霞。遙連靑鶴之洞。卻忘物我。正如伏羲之民。不知死生。怳在華胥之野。登高邱而淸嘯。臨碧流而長歌。彼何人斯。吾喪我也。心通 。 雲山古迹。不沒上書之庄。樂府遺音。尙傳伽倻之曲。嗚呼。上自公卿宰相。下至士庶兒童。莫不誦先生之姓名。想先生之風彩。若非道德過人者。安能景慕如是乎。惟我國001_147c家。接于遼羯。若稽自古。爲文幾人。朴堤上之忠誠。烈士而已。金庾信之英傑。 則無。惟先生。通塞遏之詞源。闢荒昧之學海。掛秦鏡於宮殿。五臟皆見。揮禹斧於山川。九州始定。東方之氣習一變。國以扶持。北極之星辰爲宗。人皆瞻仰。是以。配公于聖人廟。諡公以文昌侯。流聲千萬餘年。比肩七十高弟。慕先聖德。至今祀之。使後世知。其誰功也。余。濠梁秋水。憶莊生之胷襟。穎川淸風。夢許由之氣像。讀劉向傳。誦屈原辭。石門嵯峨。撫古今而長歎。雙溪淸淺。訪隱逸之遺蹤。先生之風。山高水長。


 

 

 

孤雲先生事蹟
확대원래대로축소
 [事蹟]
淸道影堂記[盧相稷] a_001_148d
[UCI] G001+KR03-KC.121115.D0.kc_mm_a002_as003_01_020: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淸道影堂。盧相稷記。先生以新羅憲安王二年丁丑生。十二歲。隨商舶入唐。唐僖宗乾符元年甲午。登制科。時年十八。調宣州漂水縣尉。遷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己亥。黃巢作亂。淮南節度使高騈爲兵馬都統以討之。辟先生爲從事。委以書記之任。先生作檄文。巢讀至人思顯戮。鬼議陰誅之句。不覺墜牀下。由是名震天下。年二十八。有歸寧之志。帝命充詔使東還。新羅憲康王。留拜侍讀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時羅政日衰。先生不樂登朝。乞外爲太山富城等郡太守。眞聖主七年癸丑。命以賀正使如001_149a唐。道梗不得行。又出守天嶺,義昌等郡。尋挈妻子入伽倻山以終。此則先生顚末之載史牒者也。慶州有上書庄。禮安有讀書庵。咸陽有學士樓。昌原有月影臺。陜川有紅流洞。此則遺躅之所宛然也。從享夫子廟。賜額西岳,武城之院。咸陽永平之士亦皆尸祝。此則精靈之所如在也。倡文學之功。武陵書告于晦齋。尋寶訣之詠。退陶增思于儒宮。萬古白日。龜巖誦斯文相傳。葉葉風聲。鶴峯示諸生有作。此則公論之所不衰也。世之慕先生者。有不待眞像而覿其彷彿。然苟欲仰其風儀之美。則眞固不爲無助也。海印有先001_149b生眞像。緇徒守之謹。一幅生綃。閱千載而淨完。鰲山之奇氣不沫。桂苑之筆花相暎。紅流若有響而耳不到是非。焚香竦瞻。塵慮自消。丙辰秋。後孫監察翰龍氏。移奉于道州之日谷。粤四年庚申。諸宗人閣而妥之。監察之子相秀。要余記其事。余問之曰。先生大賢也。海印巨刹也。子之先人。亡國之一孤臣也。彼諸僧何所畏於孤臣。讓寺中第一眞幀而使之輿歸乎。相秀曰。唯唯否否。先人自庚戌以來。屢有書于督府。屢拘幽于酋獄。僧或義之。而俾有以盡其追遠之誠者歟。余又問曰。先生嗜山水。生死不離名區。一朝就遠001_149c孫之養。而捨伽倻形勝。眞或無不悅色耶。若然。有一道焉。峯曰吹篴。瀨曰吟風。臺曰遊仙。皆先生所愛而在海印洞口。須摹揭閣壁。且須收聚四六集,桂苑筆耕,經學隊仗及文集三十卷。藏于閣中。使諸子孫及後進之來拜者。知先生爲學之方。然後方能知先生所嗜不專在於山水也。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전라도(全羅道)
옥구현(沃溝縣)

동쪽으로 임피현(臨陂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5리, 남쪽으로 같은 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북쪽으로 충청도 서천군(舒川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9리, 서쪽으로 해안에 이르기까지 27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마서량현(馬西良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임피군에 붙였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하였다. 본조 태조 6년에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로써 현의 일을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병마사를 고치어 첨절제사로 만들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마서량ㆍ옥산(玉山).
【성씨】 본현 임(林)ㆍ고(高)ㆍ송(宋)ㆍ임(任)ㆍ문(文)ㆍ이(李)ㆍ은(殷)ㆍ배(裴)ㆍ백(白), 김. 속성(續姓)이다. 회미(澮尾) 장(張)ㆍ전(全)ㆍ송(宋)ㆍ섭(葉)ㆍ신(申).
【산천】 발이산(鉢伊山) 현의 북쪽 3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사자암산(獅子巖山) 현의 서쪽 11리에 있다. 박지산(朴只山)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옛 성이 있고 지세가 험하면서 좁다. 화산(花山)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점방산(占方山)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도진산(刀津山)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바다 현의 서쪽 27리에 있다. 진포(鎭浦) 현의 북쪽 16리에 있는데, 어량(魚梁)이 있다. 함개도(含介島) 현의 서쪽 44리에 있다. 오식도(筽食島) 현의 서쪽 40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고, 목우장(牧牛場)이 있다. 고사포(古沙浦)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빙도(冰島)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미제지(米堤池) 현의 서북쪽 10리에 있는데, 둘레가 1만 9백 10척이다.
【토산】 대하(大蝦)ㆍ대게[大蟹]ㆍ곤쟁이(紫蝦)ㆍ조기[石首魚]ㆍ조개[蛤]ㆍ토화(土花)ㆍ굴[石花]ㆍ전어(錢魚)ㆍ홍어ㆍ숭어[秀魚]ㆍ준치[眞魚]ㆍ붕어[鯽魚]ㆍ부레[魚鰾]ㆍ웅어[葦魚]ㆍ차ㆍ생강.
【성곽】 읍성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8척이고 높이가 8척이다. 『신증』 가정(嘉靖) 갑신년에 다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4백 90척이고 높이가 12척이다.
【관방】 군산포영(群山浦營) 현의 북쪽 22리에 있다. ○ 수군 만호가 1인.
【봉수】 사자암 봉수(獅子巖烽燧) 남쪽으로 만경현 길곶(吉串)에 응하고, 서쪽으로 화산(花山)에 응한다. 화산 봉수 동쪽으로 사자암에 응하고, 북쪽으로 점방산(占方山)에 응한다. 점방산봉수 동쪽으로 임피현 오성산(五聖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화산에 응하며, 북쪽으로 충청도 서천군 운은산(雲銀山)에 응한다.
【누정】 자천대(紫遷臺) 서쪽 해안에 있는데, 지세가 넓고 펀펀하며, 샘과 돌이 좋아 즐길 만하다. 세상에 전하기는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라 한다.
【학교】 향교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기어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신증』 【창고】 군산창(群山倉) 군산포(群山浦)에 있다. 옛날에는 용안현(龍安縣)에 있었으며, 득성창(得成倉)이라 하였는데, 지금 여기로 옮겼다.
【불우】 천방사(千房寺) 천방산(千房山)에 있고, 이응정(李膺梃)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전하는 말에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제를 치려고 당(唐) 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는데, 당 나라에서는 소정방(蘇定方)을 시켜 배로 군사 12만명을 거느리고 천방산 아래에 정박하게 하였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천지가 캄캄하였다. 김유신이 산신령한테 기도하기를, “만일 안개를 활짝 개게 해 주시면 마땅히 절 1천 채를 세워 부처님을 받들겠습니다.” 하니, 그날로 천지가 맑고 밝아졌다. 그리하여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니, 지세가 너무 협착하여 절 천 채를 도저히 세울 수 없으므로, 다만 돌 1천 개를 배치하여 절의 형태만 만들고, 절 한 채를 세워 천방사라고 부르다가 후에 선림사(禪林寺)라 고쳐 불렀다. 고려 숙종(肅宗) 때 근신(近臣)을 보내어 중수하고, 불상(佛像)을 안치(安置)하였으며, 지금은 다시 천방사라 부른다. 길상사(吉祥寺) 천방산에 있다. 강림사(江臨寺) 오봉산(五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객관 뒤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회미폐현(澮尾廢縣) 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연강(連江)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 부부리현(夫夫里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임피현에 붙였고, 고려 때는 그대로 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종 3년에 이 고을로 붙였다.
【인물】 고려 임개(林槪) 맑고 곧으며 청렴하고 조심하여 대신(大臣)의 위엄이 있었고, 순종(順宗)ㆍ선종(宣宗)ㆍ헌종(獻宗)ㆍ숙종(肅宗)ㆍ예종(睿宗)의 다섯 조정을 대대로 섬기어,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원경(元敬)이다. 임유문(林有文) 임개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고형중(高瑩中) 의종(毅宗) 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이르렀다.
『신증』 【효자】 본조 양성윤(梁成允) 현감 양전(梁甸)의 아들이다. 양전이 일찍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몇 년이 되었는데, 밤낮으로 옷과 띠를 풀지 않았고, 어머니가 10여 년을 앓았는데, 옆에서 모시고 받들기를 또한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죽자, 모두 묘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마쳤다. 지금 임금 7년에 정문을 세웠다. 두세준(杜世俊) 어머니가 병이 들어 앓았는데, 옷을 벗지 않았다. 죽자 몸소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을 장만하여 전(奠)을 드리고, 매우 슬퍼하면서 예를 다하였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수고와변성(戍鼓臥邊城) 정구(鄭矩)의 시에, “고기잡이 등불은 먼 포구에서 돌아오는데, 수자리 북은 변방 성에 누워 있도다.” 하였다. 장강경면평(長江鏡面平) 허주(許周)의 시에, “옛 현은 산세가 화려하고, 긴 강은 거울면(面)처럼 편평하다.” 하였다. 지궁삼면착(地窮三面窄) 박경(朴景)의 시에, “땅이 다하니 3면이 좁고, 호수가 머니 양쪽 벼랑이 편평하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동면(東面) 끝이 10리. 서면(西面) 끝이 10리.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20리. 장제(長梯)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정지산(定只山) 남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20리. 박지산(朴只山)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 풍촌(豐村)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미제(米堤)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성지】 회미고현성(澮尾古縣城) 둘레가 3천 4백 90척이다. 박지산고성(朴只山古城) 동쪽으로 10리인데, 땅이 험하고 깊다.
【진보】 군산포진(群山浦鎭) 북쪽으로 20리이며 진포(鎭浦) 가에 있다. 만경(萬頃)에 군산진(群山鎭)이 있었는데, 전에 해적의 침략을 당해 이곳으로 옮기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 숙종 26년에 첨사(僉使)로 올리고, 성지(城池)를 지금의 이곳으로 정했다. ○ 수군첨제사(水軍僉制使) 1명인.
【창고】 창(倉) 3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군산포(群山浦)에 있다. 군산창(群山倉) 군산진 곁에 있다. 성종 18년에 용안(龍安)의 득성창(得成倉)을 나누어 이곳으로 옮겼다. ○ 옥구ㆍ전주ㆍ진안ㆍ장수ㆍ김구ㆍ태인ㆍ임실 등, 7읍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계량(計量)하여 서울로 운송한다. ○ 군산첨사(群山僉使)가 계량을 감독하고 수납한다.
【진도】 용당진(龍堂津) 북쪽으로 20리. 강 너비는 10여 리이며, 서천(舒川)으로 통한다.
【교량】 경장리교(京場里橋) 북쪽으로 15리이다.
【토산】 모시[苧]ㆍ대[竹].


 
淸臺先生文集卷之一
확대원래대로축소
 
杜山下一道八咏 b_061_227d
[UCI] G001+KR03-KC.121115.D0.kc_mm_b321_av001_01_117: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大野西將盡。崔巍有鳳山。秪分白沙渚。不見滄溟端。舟遠看如蟻。島孤望似鬟。塵胷元自小。今日十分寬。
進鳳山
小阜因山麓。名菴載地經。北通天際峀。西眺日沉溟。帆影落階石。濤聲振戶欞。居僧無一事。朝暮見潮生。
望海寺
待潮潮未至。展席坐前欞。浦渚俄然沒。波濤何處生。往061_228a來期不失。呼吸理難明。隨類消長應。今辰月正盈。
潮汐水
突兀通西海。遙看落照明。懸空仍水沒。下地亦天行。積氣消難得。羣陰讓莫爭。回環有一理。將曉復東生。
落明臺
廢縣草因沒。荒臺石累層。孤雲曾有跡。輿地豈無徵。花木春空發。雲煙暮自興。何時理小艇。吊古一遊登。
恠底滄溟裏。開成平漫原。嵯峨十二峀。迢遞兩三村。漁子舟爲屋。戎軒海作門。風煙正奇絶。遙望獨銷魂。
061_228b古羣山
小村留古號。地誌載分明。細路惟通陸。淳氓尙務耕。煙生近塩幕。雲鎖舊烽城。却訝桃源是。漁舟且莫迎。
吉串村
天際渾溟海。茫茫不見頭。溪湖呑納水。郡國往來舟。日月雙輪浴。乾坤一氣浮。椉槎欲遠去。隨意快周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