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 (능원 사찰 향교 묘지등/제25대 철종 관련자료

조선 25대 임금이신 철종의 모친은 유명조선국완양부대부인전주최씨지묘(有明朝鮮國完陽府大夫人全州崔氏之墓

아베베1 2016. 10. 12. 04:38


> 유형분류 > 완양부대부인묘비(完陽府大夫人墓碑)


분류
형식분류고서-금석문
내용분류교육/문화-예술-금석문
소장처유형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인명최씨(崔氏)
인명김좌근(金左根)
인명이하응(李昰應)
인명미상
작성지역
지역 경기도 양주 중흥 (현재주소 :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산11)
작성시기
연도 1851
형태사항
유형묘비문(墓碑文)
크기(cm) 세로 : 200.5, 가로 : 86.4
판본권자본(卷子本)
장정
탁본형태습탁(濕拓)
탁본서체 비액 : , 비신 : 해서(楷書)
수량1면
판식
재질
표기문자한자
인장
개수형태색깔크기(cm)인문
비고
[청구기호]

2-5335

[건립/중립 연대]

1851년(건립)

소장정보
원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현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철종(哲宗)의 모친 완양부대부인(完陽府大夫人)의 묘비석(墓碑石) 탁본.


원자료제목
표제완양부대부인묘비(完陽府大夫人墓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5대 국왕 철종(哲宗)의 모친 완양부대부인 최씨(崔氏)의 묘비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족자는 모란문 비단에 천리(天裏), 지리(地裏), 사양(四鑲)의 구분 없이 전면과 음기를 합본하여 장황하였다. 탁면(拓面)의 글씨에 부분적으로 호분으로 가필한 흔적이 나타난다. 장서각 유일본이다. 1851년(철종 2) 양주(楊州), 중흥(重興)에 세웠다.
전면에는 “유명조선국완양부대부인전주최씨지묘(有明朝鮮國完陽府大夫人全州崔氏之墓)”라는 대자해서(大字楷書)가 있고, 음기는 완양부대부인 최씨의 가계, 성품, 소생 등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완양부대부인 최씨(1804~1837)는 본관이 전주, 아버지는 학생(學生) 최수창(崔秀昌)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봉의(李鳳儀)의 딸이다. 어릴 적 부모님이 병이 들자 음식도 끊은 채 손수 병수발을 들 정도로 효성이 남달랐다. 전계대원군에게 출가한 이후로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늘 평안히 여겼다. 아들 원경(元慶)을 두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묘는 양주(楊州) 증흥(重興) 병좌지원(丙坐之原)이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완양부대부인으로 봉해지고 묘비를 세웠다. 비문은 김좌근(金左根)이 짓고, 이하응(李昰應)이 썼다.
비문을 지은 김좌근(1797~1869)의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838년(헌종 4)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실직에서 물러났다가 기로소에 들었다.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의 핵심인물로서 당시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비문의 글씨를 쓴 이하응(1820~1898)은 본관이 전주,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다. 고종의 아버지이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낙척한 왕손으로 불우한 시기를 지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 연계함으로써 자신의 아들을 철종의 후계자로 만들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命福)을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하응은 12세의 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고,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서예와 그림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그림이 유명하다.
완양부대부인의 묘비와 함께 장서각에는 철종의 생모 영원부대부인(鈴原府大夫人) 염씨(廉氏)의 묘비 탁본도 소장되어 있다. 완양부대부인의 묘비와 같이 철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851년(철종 2)에 세워졌다. 탁본은 묘비석의 전면과 음기를 하나의 족자로 합본(合本)하여 장황하였다. 우측의 전면 탁본에는 예서로 “유명조선국영원부대부인영평염씨지묘(有明朝鮮國鈴原府大夫人鈴平廉氏之墓)”를 대자(大字)로 썼다. 좌측 음기의 탁본은 해서로 영원부대부인의 가계, 성품, 소생 등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어려운 중에 성인을 생산하여 국가의 명운을 크게 열어준 공덕을 칭송하였다. 음기의 말미에는 이 금석문을 짓고 쓴 인물의 관직과 이름이 있다. 찬자는 김좌근(金左根), 서자는 이하응(李昰應)이다.
한편 장서각에는 철종의 생부(生父)이자 영원부대부인의 부군(夫君)이 되는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신도비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비액(碑額)은 대자전서(大字篆書)로 ‘어필(御筆) 대원군지비(大院君之碑)’라 쓰였다. 서(序)와 명(銘)은 조두순(趙斗淳)이 지었다. 영조의 증손, 장헌세자의 손자임을 강조하여 전계대원군의 아들인 철종의 정통성을 부각한 내용이다. 글씨는 비액과 본문 모두 철종의 어필이다. 전계대원군(1785~1841)은 은언군(恩彦君)의 다섯째 아들이다. 곧 장헌세자(사도세자, 莊祖로 추존)의 손자이며, 영조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이씨(李氏)이다. 1779년(정조 3) 아버지 은언군이 홍국영(洪國榮)과 역모하였다는 벽파(僻派)의 무고에 의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 아버지와 함께 농사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처음 전계군(全溪君)에 봉해졌다가 아들인 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철종의 조부 은언군(《은언군신도비명(恩彦君神道碑銘)》)과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명이 동시기인 1851년(철종 2)에 세워졌는데, 모두 철종이 직접 글씨를 썼다. 철종 즉위 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서 즉위 초 왕권을 확립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들이다.
[자료적 가치]
완양부대부인의 생애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 왕실의 정통성을 둘러싼 이해관계 및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대원군의 해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 『철종실록(哲宗實錄)』 / /
집필  
성인근




朝鮮完陽府大夫人全州崔氏之墓(題額)
我 主上殿下踐祚之初 追封 本生親 曰 全溪大院君崔氏曰完陽府大夫人 廉氏曰鈴原府大夫人 所以毖邦禮而伸私恩者 咸有秩有則 國人誦之 按 崔氏 貫全州 有諱 爵仕前朝 上將軍有諱有慶 左叅贊爲顯祖焉 考學生諱秀昌廣州李氏 嘉善大夫鳳儀府大夫人 孝且惠 與晜季嬉不折 萌植囑家人 勿棄湯水于地 恐螻蟻之爛也 甫齔 父母有疾 輒泣不食 躬自摒擋藥餌 大院君聞其德 迎以歸主 中饋執婦道 慤祀儀 盡誠敬 乃安處艱巇晏如 生一男元慶 早卒未有室 次永平君昱 李氏出 承 殿下命 奉祠尸事如禮 鈴原府大夫人 寔誕我 殿下 序居第三 府大夫人純宗甲子生 卒于 憲宗丁酉 墓在楊州重興洞丙坐之原 殿下命臣 爲載述之役 謀所以顯刻 詔諸後 不敢以言之不文辭 謹撰次之如左
崇禎紀元後四辛亥 月 日立
崇祿大夫行工曹判書兼 奎章閣提學臣金左根奉 敎撰
顯祿大夫興寅君臣最應奉 敎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