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사진은 道峯山 문사동 瀑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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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최전구 선생의 생가는 지금은 흔적도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나 저의 부친한테 들은 바로는 태생지는 전북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108-1번지(추산마을)에 방 한칸짜리 삿갓집에서 태어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집이 태풍에 무너져서 동소 82번지에서 성장하다 현재 어림 마을로 이사해서 노후를 마친 걸로 알고 있습니다.따라서 위 사진은 어림 마을로 노후를 보낸 집으로 보입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의 얘기를 들은 것이고 지금도 최참봉(추산,어림주민들은 그렇게 칭함)은 추산 출신이라고 합니다. 또한 추산봉 중턱에는 고종 국상 시 한양을 향해서 곡을 했다는 망곡단이 있습니다.월당 최공 유허비〔月塘崔公遺墟碑〕전주부(全州府) 남문 바깥은 계곡과 산이 빼어난데, 발산(鉢山) 남쪽 옥류동에 월당 최공이 남긴 자취가 있다.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에서 이미 몇백 년 지났지만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아직도 선명하여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여전히 손으로 가리키며 탄식한다. 어찌 한 시대에 성대한 영화를 누렸다 해서 그렇게 되었겠는가? 공은 본관이 전주, 이름이 담(霮)으로 연촌(煙村) 선생 덕지(德之)의 아버지이다. 연촌공이 손수 공의 실제 행적을 기록하여 남에게 글을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선군은 지정(至正) 병술년(1346, 충목왕2) 5월 4일에 태어났으며 겨우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셨습니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였고 과거에 응시하여 임인년(1362, 공민왕1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내시(內侍)로 근무하였으며 참관(參官 6품의 관원)에 임명되었습니다. 또 정사년(1377, 우왕3)에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를 모시고 싶은 생각을 견딜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 자식된 도리를 지극히 다하였으며 또 은둔함하여 스스로 즐기기를 좋아하여 벼슬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병자년(1396, 태조5)에 어진 재상에게 천거받아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으로 왕명에 응하였으며, 무인년(1398, 태조7)에 중훈대부(中訓大夫)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임명되었습니다. 경진년(1400, 정종2)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꽃과 나무를 소재로 시를 지으면서 유유자적하였습니다. 병신년(1416, 태종16)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입어 검교 호조참의(檢校戶曹參議)와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을 대할 때는 겸손하고 공손하였습니다. 비할 바 없이 건강하여 팔순이 넘었는데도 말을 탈 때 남의 부축을 받지 않았고 걸어 다닐 때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마을을 두루 돌아다닐 때 손자나 조카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받았으며 마을의 경조사나 환영식과 송별연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일찍이 월당루에서 부백(府伯 부사(府使))을 전별할 때 기생 두 명을 불러 종이를 잡게 하고 즉시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조정에서 물러난 후에 기양(岐陽)으로 돌아가고자 하거든 호남의 한가로운 사람을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갑인년(1434, 세종16) 6월에 병이 들었습니다. 말과 행동거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어 몹시 고통스러운 것 같지 않았는데 그 달 25일에 홀연히 서거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이상이 공의 시종 대략이다. 이른바 정사년(1377, 우왕3)은 황명(皇明) 홍무(洪武) 10년이고, 병자년(1396, 태조5)은 우리 조선이 건국한 지 5년이 되는 해이다. 아, 공은 후한 덕이 있었고 또 맑은 복을 누렸다. 당시의 명승지를 시로 지어 찬미한 것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꾸준히 암송되었던 것은 실로 당연하다. 또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로 ‘광풍제월(光風霽月)’, ‘연비어약(鳶飛魚躍)’ 같은 것은 공의 마음에 담긴 취향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함께 교유한 사람으로는 김절재(金節齋 김종서)ㆍ권양촌(權陽村 권근)ㆍ최만육(崔晩六 최양) 등이니 ‘그 산은 보지 못했으나, 그 나무를 보기 원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이 광지(匡之), 차남이 직지(直之)인데 모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냈으며, 삼남이 득지(得之)로 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을 지냈다. 막내가 연촌으로 순후한 덕행과 고상한 절조로 세종과 문종 양조의 명신이며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증손 이하로서 문관 무관으로 현달한 자가 매우 많으며, 유문(儒門)에 종사하여 의리를 행하여 명성이 드러난 자가 또 한 둘이 아니다. 시를 찬양하는 서문에서 이른바 “적선여경(積善餘慶)의 진리”라고 한 것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유허지는 남의 소유가 된 지가 오래되어 공의 여러 후손이 힘을 합하여 다시 취하였다. 비석을 세워 기록하려고 나를 찾아와 글을 요구한 사람은 관석(觀錫)과 겸석(謙錫)이다. 나는 조상을 위하는 그들의 정성스런 마음에 감동하여 글재주가 형편없다고 사양하지 않고 대략 이와 같이 쓴다. 강제집 송치규 선생 23대 할아버지 휘 담 호조참의공 全州府南門外。溪山擅勝。鉢山之陽玉流洞。有月塘崔公遺墟。今去公之世已累百年矣。而巖臺諸刻。尙宛然。人之過之者。猶指點而咨嗟。夫豈一時繁華之盛。有以致然哉。公全州人。名霮。煙村先生德之之考也。煙村公手錄公實蹟。求文字於人。有曰。吾先君生於至正丙戌五月四日。甫九歲而孤。性好學。擧業中司馬試於壬寅。仕內侍。拜參官。又中丁巳文科。不勝將母之念。退于桑鄕。子職極修。而仍喜遯自樂。不求宦達。丙子。爲賢相所薦。以奉常少卿應命。戊寅。拜中訓知珍州事。庚辰。解組還鄕。日以花木詩句爲事。而優遊自適。丙申。蒙優老恩。陞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又曰。接人謙恭。康強無比。八旬以後。騎馬無人扶持。徒步無杖提携。而遍行鄕閭。遇孫姪輩。亦下馬受禮。而鄕中慶弔迎餞。無不與焉。嘗餞府伯于月塘樓上。呼兩妓執紙。立書一絶。有願入岐陽朝罷後。湖南須記一閒人之句。甲寅六月。得疾。言語動止。無異平日。似不極苦。以其二十五日。倏然而逝。此其始終大略。而所謂丁巳。皇明洪武十年。而丙子。我朝受命之五年也。嗚呼。公旣有厚德。復享淸福。當時名勝。多作詩讚頌之者。其爲後人之所誦說不衰。固宜矣。且巖臺諸刻。若光風霽月。鳶飛魚躍。公之襟懷意趣。有足以想像者。而所與遊。是金節齋,權陽村,崔晩六諸公。則又豈非不見其山。願見其木者耶。公有四男長匡之。次直之。皆集賢直提學。次得之。典農少尹。季卽煙村。以淳德高節。爲世文兩朝名臣。官藝文直提學。孫曾以下。以文武官顯者甚多。而從事儒門。行義著稱者。又非一二。則讚詩序所謂積善餘慶之正理者。信不誣矣。遺墟久爲他人所有。公諸後孫。合力還取之。而將立石以識之。來求余文者曰觀錫謙錫也。余感其爲先之誠意。不以蕪拙辭。而略書之如此云。 |
면암선생문집 제20권 / 기(記) 한벽당 중수기(寒碧堂重修記)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에 월당(月塘) 최공 담(崔公湛)이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오니, 공의 아들 연촌 선생(烟村先生) 휘(諱) 최덕지(崔德之)도 얼마 후 공을 뒤따라 물러났다. 그리하여 부자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강호에서 늙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청절(淸節)에 감복하여 옛날 소광(疏廣)ㆍ소수(疏受)에 비유하였다. 지금 전주부(全州府)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이곳은 월당공(月塘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鳶飛戾天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魚躍于淵 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공의 필적이라 한다. 공의 15세손 최전구(崔銓九)가 한벽당을 중수한 뒤에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기문 쓰는 문제를 상의해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선조의 집이 낡으면 자손들이 보수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이니 말할 것이 못 되며,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의 아름다움이나 풍연(風烟)과 운물(雲物)의 경치에 대한 것은 이 당에 오르는 자가 직접 목격할 것이므로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후인의 천박한 식견으로 수백 년 전의 일을 놓고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참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직 사군자(士君子)가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은퇴하는 대의(大義)는 예나 지금이 다름없는데, 그 현조(賢祖)의 자손을 대하고 어떻게 묵묵히 있겠는가. 대체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장년이 되어 벼슬하여 늙어서 물러나는 것은 예경(禮經)의 밝은 교훈이요 상물(常物)의 대정(大情)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세리(勢利)에 급급하고 높은 관작에 연연하여 물러나지를 못한다. 혹 물러났다 하더라도 맛있는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던 끝이라서 담박한 음식을 싫어하고 옛날 호화롭던 것을 회고하여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한숨 쉬며 애통하여 스스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이런 사람이 어찌 다시 물러남이 십분 시의(時義)임을 알아서 유감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벼슬에 나아가면서 나아감을 사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행할 만한 도가 있는 자요, 물러나면서 물러남을 편안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견고한 내수(內守)가 있는 자이다. 아조(我朝)의 세종(世宗)ㆍ문종(文宗) 연간은 문명한 시대로 성인이 위에 있어 만물이 모두 우러러 준량(俊良)의 등용이 이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호연히 물러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절조가 높고도 밝아서 봉황(鳳凰)이 천길을 나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세 후에 오히려 사람을 흥기시킬 만한 것이 있다. 만일 그가 자잘하게 작은 청렴이나 삼가는 데 힘써서 어치렁거리며 세속의 이목에 잘 보이려고 분주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당대에 이름이 나서 이처럼 후세까지도 무궁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본다면, 공의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이 진실로 이 당(堂)으로 해서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인들이 보고 느끼며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당이 아니고는 부칠 곳이 없으니, 이 당의 중수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 削成蒼石稜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 倒影寒潭碧 라는 시구가 있으니,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도련 (역) | 1978 寒碧堂重修記粤若永樂景泰年間。月塘崔公諱霮。以直提學。棄官而去。已而公之子烟村先生諱德之。踵公而退。父子相爲知己。而老於江湖之上。時人服其淸節。比擬二䟽。今全州府鄕校之東。石灘之上。邃密爽塏。而堂曰寒碧者。月塘公杖屨之所也。堂西北。有參議井。井傍刻鳶飛戾天魚躍于淵八大字。公之手蹟也。十五世孫銓九。以其重修有日。不余鄙夷。來謀所以記之者。余謂先人弊廬。子孫肯構之。是職耳。不足言。園林陂澤之勝。風烟雲物之景。登斯堂者。目擊焉不待言。其以後人淺見。揣摩數百年往事而軒輊低仰。又極僭易也。惟士君子出處大義。古與今無異同。則對其賢祖之雲仍。而亦安敢默然而已乎。蓋幼而學。強而仕。老而退。禮經之明訓。恒物之大情。或者怵迫勢利。睠睠於軒冕印紱之間。而不能退。或退矣而酣豢之餘。厭苦淡泊。回顧疇昔。不能忘情。方且咨嗟戚促。自以爲不得其所。復豈知退之爲十分時義而無憾乎。故進而不辭其進者。必其有可行之道者也。退而能安其退者。必其有內守之固者也。而况我朝英顯。文明之會也。聖人在上。萬物咸覩。俊良登庸。於斯爲盛。而乃公浩然斂退。不俟終日者。其微意所在。固不可知。第其亭亭皎皎。有鳳凰翔于千仞氣象。則百世之後。猶有使人興起者。若䂓䂓焉務爲小廉曲謹。翺翔徘徊以投世俗之耳目而已。則其何能名於一時。而垂無窮如此哉。然則公之淸風高節。固非有資於斯堂。而若夫後人之興慕觀感。非斯堂無所於寓矣。重修之役。又惡可已乎。朱子詩曰。削成蒼石稜。倒影寒潭碧。堂之命名。豈或有取於斯歟。 | ||||||||||||||||
병오년(1906, 광무 10) 선생 74세 2월초하루는 무술 21일(무오)에 가묘(家廟)를 하직하고 가솔들과 작별한 후 창의(倡義)할 계획을 실행하려고 호남(湖南)을 향해 출발하였다. 작년 겨울 국변(國變) 이후로 선생은 왜적에게 저지되어 상경하지 못하였는데, 얼마 후에 송연재(宋淵齋 송병선(宋秉璿)) 공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마련하여 통곡하며 이르기를, “제공(諸公)이 인기(人紀)를 부식함은 진실로 나라의 빛이 되나, 사람마다 죽기만 하면 누구를 의지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인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합치고 힘을 뭉쳐 불에서 구해 내고 물에서 건져 내는 것처럼 서둘러야지 일각도 잠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결정하고, 판서 이용원(李容元), 판서 김학진(金鶴鎭), 관찰 이도재(李道宰), 참판 이성렬(李聖烈), 참판 이남규(李南珪),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나아가 국난 구할 것을 권하였으나 모두 호응하지 않았다. 선생은, “함께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내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궁박하여 갈 곳이 없다.’는 말과 같다.” 탄식하였다. 고석진(高石鎭)이 고하기를, “태인 사람 임병찬(林炳瓚)이 일찍이 갑오년에 비적(匪賊)을 토벌한 공이 있어 충의(忠義)를 믿을 만하니, 이 사람과 함께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즉시 문인 최제학(崔濟學)을 보내어 편지로 뜻을 알렸더니, 임병찬은 선생의 뜻을 따르기를 원한다는 회답을 올렸다. 호서(湖西)의 선비 안병찬(安炳瓚)이 와서 아뢰기를, “호우(湖右 충청도)의 유신(儒紳)들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盟主)로 추대할 것을 원하고 있으니, 즉시 행차하기 바랍니다.” 하니, 선생이 승낙하였다. 얼마 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주(洪州)에서 의기(義旗)를 들었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며 말하기를, “이미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갈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의 사졸(士卒)은 훈련되지 않았고, 병기도 예리하지 못하니, 반드시 각도와 각군이 세력을 합치고 주장이 일치된 뒤라야 거사가 성공할 수가 있다. 내가 남하(南下)하여 영남ㆍ호남을 경동(警動)하여 호서와 서로 성원(聲援)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마침, 곽한일(郭漢一)ㆍ남규진(南奎振)이 칼을 갖고 와서 뵈었다. 선생이 곽한일에게 말하기를, “호서의 일은 내가 그대에게 부탁한다. 그대는 남규진과 함께 민중의 뜻을 격려하여 빨리 군사를 일으켜 영남ㆍ호남과 함께 기각(掎角)의 형세가 되도록 하다가 만일 여의치 못하면 그대도 남하하여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성명을 도장에 새겨 주어, 사방의 군사를 불러 모으고 군중에 명령하는 데에 모두 이것을 사용하게 하고, 또 격문(檄文)과 ‘존양토복(尊攘討復)’이란 기호(旗號)도 주니, 곽한일과 남규진은 자기들대로 가서 거사(擧事)하였다. 뒤에 곽한일과 민 참판이 홍주에서 합세하여 적을 베고 사로잡는 공이 있었는데 홍주가 패하자 곽한일이 선생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마침 선생도 패한 때여서 돌아가서 다시 거사를 계획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민 참판과 함께 사로잡혀 지도(智島)로 귀양 가고, 남규진도 마도(馬島)에 구금되었다가 뒤에 모두 방환(放還)되었다. 선생은 또 문인 이재윤(李載允)에게 편지를 보내어 북쪽 청 나라에 들어가 구원을 청하게 하고, 오재열(吳在烈)에게는 사졸과 병기를 수습하여 운봉(雲峰)을 지키면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최제학(崔濟學)과 출발하여 임천(林川) 남당진(南塘津)을 건너 태인(泰仁) 종석산(鍾石山)에 이르러, 임병찬의 처소에 머물렀다. 병찬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거상(居喪)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병찬에게 검은 상복으로 군무에 종사하도록 명령하여, 군사 모집과 군량(軍糧) 저장 및 군사 훈련하는 일을 모두 맡겼다. ○ 어떤 사람이 선생의 거사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국가에서 양사(養士)한 지 5백 년에 기력을 내어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의(義)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내 나이가 80에 가까우니 신자(臣子)의 직분을 다할 따름이요, 사생(死生)은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문인 이정규(李正圭)를 보내어 편지로 처의(處義)의 방법을 묻자, 선생은 남북이 서로 호응하여 힘을 모아서 적을 토벌하자는 뜻을 써서 보냈다. 문인 조재학(曺在學)ㆍ이양호(李養浩)가 영남에서 왔는데, 선생은 모두 영남으로 돌아가서 사민(士民)을 격려하여 응원하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영우(嶺右) 각처에도 편지를 보냈다. 이때에 선생은 진안(鎭安)의 촌가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거처하는 집 지붕 위에 흰 기운이 두 번이나 하늘에 뻗쳐서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윤4월초하루는 정묘 13일(기묘)에 태인(泰仁)에 머무르면서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알하고 여러 문생들을 거느리고 강회(講會)를 하고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疏)를 올렸다. 상소문의 대략에, “신이 생각건대, 옛날의 인신(人臣)으로 나라가 망하려는 때를 당하여, 나라를 떠난 사람이 있으니 상(商) 나라 미자(微子)가 그러하며, 죽은 사람이 있으니 명(明) 나라 태학사(太學士) 범경문(范景文) 등 40여 인이 그들이며, 뜻을 국권 회복에 두어 거의하여 적을 토벌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있으니, 한(漢) 나라 책의(翟義)와 송(宋) 나라의 문천상(文天祥)이 이들입니다. 신은 불행히도 오늘날까지 살아서 이러한 변을 보았는데, 이미 떠나갈 곳과 의리(義理)가 없으니, 오직 입궐하여 소를 올리고 폐하(陛下) 앞에서 머리를 부수어 스스로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니 공연한 헛소리로 떠드는 것이 다만 실상이 없는 글이 될 것이며 또 인심이 아직도 국가를 잊지 않음을 보았으니 스스로 헛되이 죽는 것도 경솔한 행동이옵기에, 참고 견디면서 약간의 동지와 함께 책의(翟義)ㆍ문천상(文天祥)이 의병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일을 계획한 지 4, 5개월이 되었습니다. 다만, 신은 본디 재능과 지모(智謀)가 없고 더구나 늙고 병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모의하는 즈음에 형세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니, 이 때문에 시일이 늦어짐을 면하지 못하여 앉은 채로 세월만 허비하였습니다. 지금 이 계획이 조금 정하여졌고 인사(人士)도 조금 모여, 이달 13일에 전(前) 낙안 군수(樂安郡守) 신(臣) 임병찬(林炳瓚)에게 먼저 의기(義旗)를 세워서 동지들을 권장하고 격려하여 차례로 북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등박문(伊藤博文)ㆍ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등의 왜적들을 부르고, 각국의 공사ㆍ영사와 우리 정부의 제신(諸臣)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하여 담판을 열어서 작년 10월의 늑약(勒約)을 거두어 취소하고, 각부(部)에 있는 고문관(顧問官)을 돌려보내고, 우리의 국권을 침탈(侵奪)하고 우리 생민(生民)을 해롭게 하는 전후의 모든 늑약은 모조리 만국의 공론에 회부하여, 제거할 것은 제거하고 고칠 것은 고쳐서 국가는 자주의 권리를 잃지 않고, 생민은 어육(魚肉)의 화를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본시 힘과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민중을 움직여서 힘센 적과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처지에서 한때의 목숨을 다투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재앙을 뉘우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에게 짓밟히는 화를 당한다면, 신도 달게 죽음을 받아 여귀(厲鬼)가 되어 원수를 말끔히 쓸어버릴 것을 기약하며, 그들과는 천지 사이에서 함께 살지 않겠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들의 노예되기를 좋아하여 대의(大義)를 원수처럼 여기고, 앞을 다투어 역도(逆徒)라는 이름을 씌워 훼방하는 자는 신이 진실로 불쌍히 여길 겨를조차 없습니다.” 하였다. ○ 선생은 남하하여 글로 영남과 호남 각처에 통고하여 모여서 거사를 논의하게 하였으나, 평소에 큰소리를 잘하고 서로 함께 약속한 사람들도 모두 두려워서 피하고 선뜻 오지 않고, 다만 문인 10여 명과 주야로 경영할 뿐이었다. 그러나 병기와 군량이 하나도 갖추어진 것이 없어서, 임병찬(林炳瓚)은 가을을 기다려 거사하려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는 데다가 국사는 날로 급하니, 이처럼 시일을 늦출 바에야 도리어 궁궐에 달려 들어가서 죽는 것이 더 낫겠소.” 라고 말하고, 마침내 즉시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날 태인(泰仁)에 도착하여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알하였다. 여러 문생들을 모아서 강(講)을 마치고, 선생이 가운데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왜적이 나라를 도둑질하고 역신(逆臣)이 장난을 하여, 5백 년 종사(宗社)와 삼천리 강토가 이미 망할 처지에 이르렀다. 임금은 우공(寓公)의 욕을 면하지 못하시고, 생민은 모두 어육의 참화에 빠졌으니, 나는 구신(舊臣)의 한 사람으로 정말로 차마 볼 수가 없소. 종사와 생민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힘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천하에 펴고자 하니 성패와 이해는 예견할 수는 없으나, 진실로 내가 전심(專心)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생각하고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천지신명이 도와서라도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소. 나와 종유(從遊)하는 제군은 나와 생사를 같이할 수 있겠소?” 하자, 문생들은 모두 좋다고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비상(非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두어야 하고, 또 군사(軍事)에 종사하는 일은 사지(死地)이므로 쉽게 말할 수가 없으니, 제군은 다시 생각을 더하여 후회하지 말도록 하오.” 하니, 문생들은 모두 죽음으로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과 한자리에 모인 사람 80여 명이 향교에 들어가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뜻을 선성(先聖)에게 고유하고, 곧이어 고을의 부로(父老)를 불러 대의를 일깨우니, 고을 안이 모두 기꺼이 호응하였다. 흥덕(興德)의 선비 고용진(高龍鎭) 석진(石鎭)의 형 은 포사(砲士) 강종회(姜鍾會) 등 30여 명을 거느리고 군세(軍勢)를 도왔다. 드디어 정읍(井邑)ㆍ순창(淳昌)ㆍ곡성(谷城)에서 군사를 모으니, 4, 5일 동안에 원근에서 부의(赴義)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고, 군량과 병기도 대략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임병찬(林炳瓚)ㆍ김기술(金箕述)ㆍ유종규(柳種奎)ㆍ김재귀(金在龜)ㆍ강종회(姜鍾會)ㆍ이동주(李東柱)ㆍ이용길(李容吉)ㆍ손종궁(孫鍾弓)ㆍ정시해(鄭時海)ㆍ임상순(林相淳)ㆍ임병인(林炳仁)ㆍ송윤성(宋允性)ㆍ임병대(林炳大)ㆍ이도순(李道淳)ㆍ최종달(崔鍾達)ㆍ신인구(申仁求)에게 명하여 여러 임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 격문(檄文)을 여러 군(郡)에 급히 보내었다. 격문에 이르기를, “난적(亂賊)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어느 것이 오늘의 역괴(逆魁)와 같았으며, 이적(夷狄)의 화가 어느 나라인들 있지 않았을까마는 어느 것이 오늘날과 같았겠는가. 즉시 거의(擧義)할 것은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건대, 우리 조선은 기자(箕子)의 옛 강토이며 요(堯)의 동쪽 번방(藩邦)으로서, 태조(太祖) 이래로 여러 성군(聖君)이 대를 이어 공자의 도를 숭상하고 여러 현인이 번갈아 나서, 임금과 신하가 그 도리를 다하여 이륜(彛倫)이 돈독하게 펴졌으며 지위가 높은 이를 높이고 귀한 이를 귀히 여겼다. 그리하여 예절과 문물이 널리 밝아져 집집마다 인의(仁義)와 효제(孝悌)를 행하여, 모두 유학을 숭상하고 도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녔다.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의(義)를 방패로 삼아서,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親愛)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을 뜻이 있어서, 민속(民俗)이 밝고 여유가 있었으니,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융성한 시대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문물(文物)이 발전하여 오랫동안 소화(小華)의 아름다움으로 불리었다. 한번 사교(邪敎)가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드디어 온 천하가 비린내로 더럽혀졌으나, 홀로 우리나라는 동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편토(片土)를 건정(乾淨)하게 보전할 수 있었으니, 박괘(剝卦)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 하겠다. 그러나 누가 장차 화가 닥쳐서 다만 머리 위의 상투가 있는 것으로써 홀로 천하의 모든 화살의 과녁이 될 것을 생각하였겠는가. 아, 저 왜적은 실로 우리나라 백세의 원수이니, 임진란에 두 능의 화[二陵之禍]를 차마 말하겠으며,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은 다만 외적이 엿보는 계기를 만들었고, 맹세한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협박의 근심이 바로 이르렀다. 우리의 궁금(宮禁)을 짓밟고, 우리의 도망자를 품에 안아 기르고, 우리의 인륜 도덕을 파괴하고, 우리의 의관을 찢어 버리고, 우리의 국모를 시해(弑害)하고, 우리 임금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우리의 대관(大官)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민중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우리의 무덤을 파고 집을 헐고, 우리의 강토를 점령하여 빼앗고, 우리 국민의 목숨이 달려 있는 자원은 무엇이든 그들이 장악(掌握)한 물건이 아닌가. 이제는 그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갈수록 욕심을 낸다. 아, 지난 10월의 소행은 진실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하룻밤 사이에 종이 조각에 도장을 억지로 찍어서 5백 년 종사(宗社)가 드디어 망하니, 천지의 신이 놀라고 조종(祖宗)의 영혼이 슬퍼한다. 나라를 들어서 원수에게 준 역적 지용(址鎔)은 실로 우리 동방의 영원한 원수요, 그 임금을 시역(弑逆)하고 남의 임금을 범한 괴수 이등(伊藤)은 천하의 열국(列國)이 함께 토벌하여야 한다. 누대(累代)의 세신(世臣)은 바로 이때가 자방(子房)처럼 원수를 갚을 때인데, 왕실의 지친(至親)은 어찌 북지왕(北地王)의 성(城)을 등지고 싸우자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가? 수실(秀實)의 홀(笏)은 마땅히 주자(朱泚)의 얼굴을 쳐야 했고, 고경(杲卿)의 지위가 어찌 녹산(祿山)이 준 것을 영광으로 여겼겠는가. 변을 만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으나, 적을 토벌하는 자가 어찌 한 사람도 없는가. 임금이 망하였는데 신하가 어찌 홀로 살 수 있으며, 나라가 패망하였는데 백성이 어찌 홀로 보전될 수 있겠는가. 불타는 대청 위의 참새와 가마솥에 든 생선은 함께 망할 뿐이니 어찌 한바탕 싸우지 않겠는가. 또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죽어서 충의(忠義)의 넋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 최익현(崔益鉉)은, 나이는 죽음이 가까웠고 병은 깊고 재능과 힘은 미약하여 작은 정성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비록 사로잡히는 수치를 당하였으나 숨이 아직 있으니 보복할 뜻을 잊기 어렵다. 그러나 큰 집[大廈]이 무너지는데 어찌 한 개의 나무가 지탱할 것이며, 맹진(孟津)이 넘치는데는 한 줌의 흙으로 막지 못한다. 시중(市中)에 들어가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라.’고 하면 반드시 시중 사람이 왕손(王孫)에게 따랐고, 서경(西京)에서 거병(擧兵)하니 누가 책의(翟義)를 도리어 쳤겠는가. 모든 우리의 종실ㆍ대신ㆍ공경(公卿)ㆍ문무(文武)ㆍ사농공상ㆍ서리ㆍ하인들까지도 무기를 가다듬고 마음과 힘을 한군데로 모아서, 역당(逆黨)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며, 원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씨를 없애고 그 소굴을 두들겨 부수자. 천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으니, 국세를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고, 위험한 고비를 바꾸어 편안하게 만들어서 인류를 도탄(塗炭)에서 건져 내자. 믿는 바는 군사(軍士)이니 다만 적이 힘이 센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히 이에 격문을 돌리니 함께 나라를 구하기에 힘쓰자.” 하였다. ○ 일본 정부에 글을 부쳐서 신의를 저버린 16가지 죄를 따졌다. 그 대략에, “아, 나라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신(信)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사람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은 다만 완고(頑固)한 늙은이의 평범한 말이 아니다. 또한 개화하여 경쟁하는 열국(列國)이라도 이것을 버리면, 아마도 세계 안에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우리 대관(大官) 신헌(申櫶)과 윤자승(尹滋承)이 귀국 사신 흑전청륭(黑田淸隆)ㆍ정상형(井上馨)과 강화부(江華府)에 모여서 약정한 제1조에 ‘조선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이 뒤 화친(和親)의 실상을 나타내려면 모름지기 피차가 서로 동등한 예로써 서로 대우해야 한다. 그러므로 추호도 침범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어야 하니, 먼저 예전부터 외교하던 실정을 저해하는 근심을 가져올 모든 예규(例規)를 모두 혁파하여 영원히 신의를 지킨다.’고 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청국(淸國) 사신 이홍장(李鴻章)과 귀국 사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마관(馬關)에 모여서 약정한 제1조에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양국이 분명히 인정하며 추호도 침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명치(明治) 37년(1904, 광무 8)의 일본과 러시아의 선전 조서(宣戰詔書)에도 ‘한청(韓淸) 양국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구절이 있다. 또 귀국이 러시아에 대하여 국제 공법을 위반하였다고 열국(列國)에 통첩한 변명서에도 ‘원래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보존하며 유지시키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사신을 서구(西歐)에 파견하여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데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후 30년 동안에 귀국의 군신(君臣)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맹세한 바와 천하에 성명(聲明)한 것이, 우리의 토지와 인민을 침범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를 해치지 않는 것을 책임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천하의 열국(列國)도 한일(韓日) 두 나라는 순치(唇齒)의 나라로 서로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서로 침해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국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흉포(凶暴)를 행하는 방법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무엇이든지 신의를 배반하였다. 전에는 ‘조선은 독립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保有)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우리를 노예로 삼는가. 전에 러시아와 전쟁을 할 때,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는데, 지금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빼앗아 가는 것은 어째서인가. 전에는 서로 간절하게 침범하거나 시기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오로지 침탈(侵奪)을 일삼아서 우리 2천만 국민의 복수심을 일으키게 하여 앉을 때 동쪽을 향하지 않게 만드는가. 전에는 조약을 변경할 필요없이 영원히 신의를 지키고 화평을 유지하는 바탕으로 삼았었는데, 지금 조약을 변경하여 신의를 저버리고 화평을 깨뜨려서 하늘을 속이고 신(神)을 속였으며, 또 천하의 열국(列國)을 속였다. 이유를 들어 증명하겠다. 갑신년(1884, 고종21)에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난을 일으켜 우리 황제를 강제로 옮기고 우리의 재상을 살육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하고 저버린 죄의 첫째이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대조규개(大鳥圭介)가 난을 일으켜 우리의 궁궐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으며 우리의 재물을 탈취하고 우리의 전장 문물(典章文物)을 훼손시켜 버리면서 우리나라를 독립시킨다고 일컫는데, 훗날에 빼앗고 점령할 터전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둘째이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삼포오루(三浦梧樓)가 변란을 일으켜 우리의 왕후를 시해하였으니 만고에 없는 대역죄가 되는데 오로지 도망하는 역적을 덮어 주고 감싸기를 일삼아 한 놈도 잡아 보내지 않았으니, 대역무도(大逆無道)하였다. 이것은 다만 신의를 배반하였을 뿐만 아니니, 죄의 셋째이다. 임권조(林權助)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우리나라에 와서 주재하면서 협박하고 겁탈한 일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각처에 철로를 부설(敷設)한 것이니, 경의선(京義線) 철로는 처음부터 통고도 없이 마음대로 한 짓이고, 어채(漁採 고기 잡이)와 삼포(蔘圃)의 이익, 광산과 항해의 권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크나큰 한 국가의 재원(財源)의 바탕인데 남김없이 빼앗아 갔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넷째이다. 군사(軍事)를 핑계하여 토지를 강점하며 인민을 침해하고, 무덤을 파내 버리며, 가옥을 헐어 버린 것은 그 수를 알지 못한다. 정부에 권고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비루(鄙陋)하고 패역(悖逆)한 무리들을 지지하여 벼슬을 주도록 강요하였고, 뇌물을 드러내 놓고 받아서 더러운 소문이 낭자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다섯째이다. 철도, 토지, 군율(軍律)이라는 것은, 용병(用兵)할 때에는 군용(軍用)을 빙자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지금 전쟁이 이미 끝났는데 철도는 어찌하여 돌려줄 생각을 않으며, 토지는 전처럼 강점하고 군율을 전처럼 시행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여섯째이다. 우리의 역적 이지용(李址鎔)을 꾀어 의정서(議定書)를 강제로 만들어서 우리의 국권을 바꾸게 하고는, 그 속에 ‘대한 독립’과 ‘영토 보전’이라 말한 것은 제쳐 놓고 논의조차 하지 않았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일곱째이다. 사대부와 유생이 전후로 상소를 올린 것은, 모두 우리 임금에게 아뢰고 우리나라에 충성한 것인데, 바로 포박(捕縛)하여 오랫동안 가두어 두었고, 심지어는 죽이거나 석방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충언(忠言)하는 입을 막고 공론(公論)을 억제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국세가 혹 떨칠까 두려워하는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여덟째이다. 우리의 동학(東學)이나 도적의 무리들과 같은 패역(悖逆)한 자를 꾀어서 일진회(一進會)라고 이름하고 그들을 창귀(倀鬼)로 만들어서 선언서(宣言書)를 만들게 해서 민론(民論)이라고 빙자하고 국민의 의로운 일로 여기며, 보안회(保安會)와 유약소(儒約所) 같은 것은 치안을 방해한다고 갖은 방법으로 저해하여 포박하고 구금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아홉째이다. 역부(役夫)를 강제로 모집하여 소에게 채찍질하고 돼지를 몰아치듯 하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면 풀이나 왕골을 베듯 죽였고 또 어리석은 국민을 꾀어 모아서 멕시코[墨西哥]로 몰래 팔아넘겨서 우리 국민의 부자 형제가 서러움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 없고, 학대를 받아 거의 죽게 되어도 돌아올 수 없게 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째이다. 전우(電郵 전보사(電報司)ㆍ우체사(郵遞司))의 두 기관을 강탈하여 통신기관을 장악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한째이다. 각부(部)에 고문관을 강제로 두고 후한 봉록을 먹으면서, 오로지 우리를 망하게 하고 우리를 전복시키기를 일삼는데, 군경(軍警)의 경비를 감액하고 재부(財賦)를 탈취함과 같은 것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둘째이다. 차관(借款)을 한두 번 억지로 쓰게 하고 명목은 재정 정리라고 하면서 새로 만든 돈의 색깔과 무게가 예전 돈과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돈의 수효만 갑절로 할 뿐이니, 스스로 많은 이익을 취하여 일국의 재정을 고갈(枯渴)시켰으며, 또 유통되지 못하는 종이 조각을 원위화(元位貨)라고 억지로 이름을 붙였다. 또 차관은 이름뿐이고 미리 이식(利息)을 취하였고, 고빙(雇聘)은 이름뿐이고 미리 후한 봉록을 먹으면서 우리의 정혈(精血)을 빨아먹고 썩은 껍질만 남기려고 힘쓰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셋째이다. 작년 10월 21일 밤에 박문(博文)ㆍ권조(權助)ㆍ호도(好道) 등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안팎으로 포위하고 정부를 위협하여 억지로 조약을 만들고, 스스로 가부(可否)를 결정하였으며 인장을 빼앗아서 마음대로 찍고는 우리나라 외교를 옮겨 통감(統監)에 설치하여 우리의 자주 독립 권리를 하루아침에 잃게 하고, 오히려 위협이라는 여론을 숨겨서 만국의 이목(耳目)을 호도(糊塗)하려고 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넷째이다. 처음에는 외교의 감독이라고만 말하더니, 마침내는 한 나라의 정법(政法)을 전담하여 관리하고 거기에 따르는 관리가 수없이 와서, 우리의 손도 까딱 못하게 하며, 걸핏하면 곧 공갈(恐喝)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다섯째이다. 요사이 또 이민 조례(移民條例)를 만들어서 승인하도록 강요하는데, 인종을 바꾸는 흉칙한 계획으로서 우리 국민을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천지도 용납하지 못할 극악한 대죄의 열여섯째이다. 아, 귀국이 신의를 저버린 죄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겠는가. 이것은 그 대강을 들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시험 삼아 이 열 대여섯 가지의 죄로써 강화(江華)ㆍ마관(馬關) 등의 조약, 열국에게 보낸 통첩과 전쟁을 설명한 여러 문서에 비추어 보면 반복 무상함이 여우와 원숭이가 속임수를 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 한국의 수천만 인심이 과연 귀국에 대하여 유감없이 이것이 우리를 지지하고 우리를 공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마음 아파하고 골치를 앓으면서 삼호(三戶)의 말을 외치며 귀국의 온 섬[全島]을 한 번 짓밟고자 맹세할 것인가. 진실로 귀국을 위한 계책은 빨리 근본을 되찾는 것밖에 없으며,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또 신(信)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밖에 없다.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히는 일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빨리 이 글을 귀황제에게 상주(上奏)하여 이상에서 열거한 열여섯 가지 큰 죄를 모두 회개할 것이니, 통감(統監)을 철수하고, 고문과 사령관을 소환하고, 다시 충신(忠信)한 사람을 파견하여 공사(公使)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 이것으로 각국에 사죄하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 양국이 진정 영원히 서로 편안하게 된다면, 귀국은 거의 안전의 복을 누릴 것이고, 동양의 대국(大局)도 유지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것이 천도(天道)의 분명한 이치인데, 지금 귀국이 하는 짓은 제 민왕(齊湣王)과 송 언왕(宋偃王)과 다를 것이 거의 없으니, 설사 이후에 화패(禍敗)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귀국이 어찌 스스로 망하는 것을 면하겠는가? 나는 시세(時勢)는 모르나 국가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며,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히는 도리를 강론함에는 익숙하다. 국가와 인민의 화가 망극한 형편에 이르렀음을 눈으로 보고 오직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 불행히 지난봄에 욕을 당하고도 죽지 못하였고, 또 작년 10월 21일의 변을 당하였으니, 타국의 노예가 되어 구차하게 천지 사이에서 생을 탐낼 의리가 없다. 그래서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죽을 것을 결의하고 병든 몸으로 상경하여 박문(博文)ㆍ호도(好道) 등과 한 번 만나서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하고 죽으려고 한다. 사민(士民)으로 함께 죽기를 원하는 자가 또 약간 있어서, 먼저 마음을 피로(披露)하여 이 글을 만들어 귀국의 공사관에 보내어 머지않아 귀국의 정부에 전달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를 위한 계획일 뿐만 아니라 귀국을 위한 계책이며, 귀국을 위한 계책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양 전국(全局)을 위한 계책이니 살피기 바란다.” 하였다. ○ 14일(경진)에 행군하여 정읍(井邑)에 도착하여 내장사(內藏寺)에서 잤다. ○ 15일(신사)에 순창(淳昌)에 도착하여 구암사(龜巖寺)에 주둔하였다. ○ 17일(계미)에 곡성(谷城)에 도착하여 글을 지어서 호남의 각 고을에 고하였다. ○ 19일(을유)에 군사를 이끌고 순창으로 돌아갔다. 이때에 첩자가 와서 왜병 10여 명이 방금 군아(軍衙)에 들어가서 외인을 물리치고 군수 이건용(李建鎔)과 밀담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선생은 임병찬(林炳瓚)에게 일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샛길로 가서 습격하도록 명하였다. 왜병이 기미를 알고 크게 놀라 빠져나가 산을 기어올라 도망쳤다. 임병찬이 뒤쫓았으나 따르지 못하고 왜병이 버린 문서를 얻었는데, 그것은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건용에게 왜병을 인도하여 의병을 모해(謀害)하라는 비밀 문서였다. 선생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들은 정말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다.” 하였다. 이건용이 마침 와서 뵈니, 선생은 그 편지를 던지면서 말하기를, “너는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러 왔느냐? 나의 거사는 다만 국가를 위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것인데, 너는 종실의 지친으로 도리어 나를 해치려고 하니 너는 왜적보다도 더한 놈이다. 나는 지금 너를 베어서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무리들을 깨우치려고 하니, 너는 죽어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 하니, 이건용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잠깐 동안 겁을 집어먹고 임시 모면을 하려고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이오니 만일 대감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용서하시면 정성을 다하여 명령을 받들어 머리가 부러져도 후회하지 않고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용서하고 자리에 앉게 한 뒤에 타이르기를, “그대는 왕족 출신이고 나는 유신(遺臣)으로서 각기 의리와 분수를 다하여 함께 왕실을 도와야 한다. 성공하면 국가의 행복이고, 실패하여도 잃을 것이 없으니, 충의의 혼이 되어서 두루 만국을 비추고 꽃다운 이름이 멀리 천추에 끼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원수들에게 아첨하여 구차하게 한때의 요행을 얻더라도, 필경은 서로 이끌고 망하는 비참한 일을 당하는 데 비하면 소득이 어느 것이 많겠는가.” 하니, 이건용은 눈물을 거두고 공손한 태도로 사죄하였다. 선생은 이건용이 지방관으로 형편을 익숙히 알고 있고, 또 그 정성을 인정하여 선봉장[前部]을 삼으니, 어떤 이가 충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건용이 본군(本郡)에 돌아가서 주둔하기를 청하므로 선생은 허락하였다. ○ 20일(병술)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 이건용(李建鎔)이 왜병을 거느리고 와서 의병을 습격하니, 의병은 마침내 무너지고 의사(義士)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였다. 새벽에 광주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사람을 시켜 칙서(勅書)와 고시(告示) 하나를 보내왔는데, 모두가 해산하라는 뜻의 명령이었다. 선생은 칙지(勅旨)를 받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이것은 오적(五賊)들이 상을 끼고 호령하는 수단이다. 설사 이것이 정말 왕명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옛사람도 왕명을 받지 아니한 의리가 있었거든 하물며 이것은 적신(賊臣)들이 속여서 만든 위명(僞命)임에랴.” 하고, 이 관찰에게 회답을 하였는데 대략은, “모(某)가 이미 상소(上疏)하여 의병을 일으킨 연유를 아뢰었다. 상소가 만일 상께 도달하면 반드시 비답(批答)을 내릴 터이니, 비답을 받들어 진퇴할 뿐이지 지방관이 지휘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해가 오시(午時)가 되지 않았는데 왜병이 군(郡)의 동북쪽으로부터 포위하여 온다고 알리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스스로 나가 싸우고자 하니, 좌우에서 번갈아가면서, “선생께 만약 불행이 있다면, 오늘날의 국가와 인민은 마침내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며 말렸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사민(士民)들이 모두 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에워싸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임병찬(林炳瓚)에게 2대의 기병(奇兵)을 설치하여 맞아 싸우도록 명하였다. 얼마 후에 또 그들이 왜병이 아니라 전주(全州)와 남원(南原) 고을의 진위대(鎭衛隊)임을 알려 왔다. 선생은 말하기를, “이들이 왜병이라면 마땅히 사전(死戰)으로 결판을 내어야 하나, 이들이 진위대군이면 우리가 우리를 서로 공격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고, 임병찬을 불러들여서 싸우지 말도록 하고, 사람을 보내어 양대에 편지를 보내어, “너희들이 왜군이라면 당연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나, 싸우지 않는 것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 없어서이니 즉시 물러가라.” 하였으나, 양 진위대군은 모두 듣지 않고, 전주병이 먼저 포를 쏘아 포환이 비 오듯 쏟아지니, 의병 1천여 명이 모두 새나 짐승처럼 흩어졌다. 이윽고 정시해(鄭時海)가 갑자기 탄환을 맞고 죽었는데 막 죽으려고 할 때에 선생을 부르면서, “시해가 왜적 한 놈도 죽이지 못하고 죽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악귀가 되어서 선생이 적을 죽이는 것을 돕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선생이 그를 붙들고 통곡하니 군중들도 역시 통곡하였다. 선생은 형세가 이미 틀어진 것을 알고 연청(掾廳)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니, 제군은 모두 가라.” 하자, 의사 중 선생을 따르고자 하는 자가 21명이 있었다. 이때에 두 대병(隊兵)은 선생이 물러나지 않을 것을 알고 합군(合軍)하여 포위하고 일제히 총을 쏘았다. 이때에 선생은 임병찬에게 명령하기를, “이제 우리들은 반드시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표지가 없이 서로 포개어 죽으면 누구가 누구인지 알겠는가? 뿔뿔이 흩어지지 말고 죽음을 명백하게 해야 하니, 성명 한 통씩을 벽에 써 붙이고 각자 자신의 이름 밑에 앉아라.” 하고, 또 말하기를, “고인은 포위된 성 안에 있으면서도 관례(冠禮)를 행하여 지하에 있는 조상을 뵈려고 하였으니, 지금 제군은 의관을 정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자, 사람들이 모두 행낭을 풀어서 도포를 꺼내어 입고, 갓끈을 다시 매고 공수(拱手)하고 벽을 등지고 꿇어앉았다. 이때에 유탄(流彈)이 어지럽게 날아들자, 여러 사람들이 유탄이 선생을 범할까 염려하여 모두 빙 둘러 무릎을 꿇고 선생을 가리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선생은 급히 말리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이럴 필요가 없다. 각각 열좌(列坐)하여 바른 자세를 하고 죽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자, 사람들이 다시 열좌로 돌아가니, 갑자기 폭풍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천둥이 요란하고 번개가 번쩍이었다. 이날 전주부 희현당(希賢堂)이 까닭없이 무너지니 전주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위하여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양대의 군사는 깜짝 놀라서 총을 버리고 땅에 엎드렸다. 이에 포성은 그쳤으나 양대병은 사면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에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깜깜한데 촛불은 없고 시신은 방 가운데에 있어서 피가 흥건한데, 여러 사람들은 피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앉아 있었다. 막하사(幕下士) 이도순(李道淳)ㆍ임상순(林相淳)이 마침 밖에 있다가 죽을 쑤고 술을 데워서 촛불을 가지고 왔다. 방 안을 점검(點檢)하니, 21명에 9명은 이미 간 곳을 몰랐고 다만 임병찬(林炳瓚)ㆍ고석진(高石鎭)ㆍ김기술(金箕述)ㆍ문달환(文達煥)ㆍ임현주(林顯周)ㆍ유종규(柳種奎)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최제학(崔濟學)ㆍ나기덕(羅基德)ㆍ이용길(李容吉)ㆍ유해용(柳海瑢) 12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유종규는 정시해의 장사 때문에 나가고, 양재해(梁在海)는 앞서 선생의 명령으로 밖에 나가 정탐하다가, 선생이 포위되었음을 듣고 달려오니 다시 12명이 되었다. 문인 고제만(高濟萬)은 시종 힘을 다하였는데, 마침 정탐하기 위하여 밖에 나가 있다가 미처 오지 못하였다. ○ 이때부터 대병(隊兵)들은 밖에서 굳게 지키고 많은 왜병이 몰려 들어와 밤이면 총칼로 위협하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 자약하게 앉아서, “옛날 사람도 배 안에서 《대학》을 읽고 옥중에서 《상서(尙書)》를 읽은 예가 있으니 각각 한 책을 외라.” 하고 다시 정제하여 앉아 먼저 《맹자(孟子)》의 호연장(浩然章)과 웅어장(熊魚章)을 외니 제생도 따라 차례로 한 편씩을 외었다. 이때에 고을 사람 임창섭(林昌燮)과 백정 경철(景哲)이 포위를 헤치고 들어와서 “대감의 충의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대감을 모시고 군무에 종사하다 죽기를 원한다.”고 아뢰었다. 고을 사람 신인구(申仁求)와 노기(老妓) 하엽(荷葉)이 각각 육미(肉糜)와 주면(酒麵)을 문지기에게 주면서 “나는 죽어도 이것을 드려야 한다.”고 하니, 문지기도 의롭게 여겼다. ○ 23일(기축)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날 전주 소대장 김가(金哥)가 와서 칙서에 서울로 압송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아뢰었다. 선생은, “이것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지령인가, 오적(五賊)의 지시인가? 역적이 속임수로 감히 칙서를 빙자하느냐?” 하고 꾸짖었다. 김가는 못 들은 척하고, 선생의 찬 칼, 염낭과 몸에 지닌 물건을 모두 끌러 내고 왜병 10여 놈이 대병과 함께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선생과 임병찬은 가마를 타고 그 나머지 11명은 함께 결박되어 가니, 이때에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렀으며 보는 사람들이 비분하여 견디지 못하였다. 선생은 노상에서 매일 밤 이소경(離騷經)ㆍ출사표(出師表)ㆍ원도(原道) 등과 《중용》ㆍ《대학》 등의 여러 책을 외며,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길에 그들이 감히 죽이지는 못하고 바다를 건너게 될 것 같다.” 하였다. 이때에 안의(安義) 사람 이완발(李完發)이 노상에서 와 뵙고 통곡하며 따라오니, 왜병이 난타하나 이완발은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 않다가 구속되어, 전주에 갇혔다가 5, 6일 만에 석방되었다. ○ 27일(계사)에 왜의 사령부(司令部)에 구금되었다. 장자 최영조(崔永祚)와 종질 최영설(崔永卨)이 순창(淳昌)의 소식을 듣고 최전구(崔銓九)ㆍ이명구(李命九)와 일가 사람 최영호(崔永晧)와 함께 달려와 진잠(鎭岑)의 길에서 뵈니, 왜병이 칼을 휘둘러 쫓으며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시(午時)에 공주(公州)에 도착하니, 대전의 왜병이 윤차(輪車)에 선생을 태우고 저녁에 숭례문(崇禮門) 밖에 도착하였다. 왜의 헌병대장 소산삼기(小山三己)가 1백여 명의 왜병과 통역 박종길(朴宗吉)을 대동하고 와서 선생을 에워싸고 사령부에 갈 것을 청하였다. 선생은 땅에 버티고 서서 말하기를, “나는 칙명에 의해서 온 줄 알았는데, 저들 왜놈은 무엇하는 놈인가. 내가 구금된다면 당연히 대한의 법관에 의하여 구금될 것이지, 대한의 최모(崔某)가 어찌 왜놈 사령부를 알겠느냐.” 하고 호통쳤다. 왜병들이 박종길에게 눈짓하여 부액(扶腋)하여 인력거(人力車)에 태우고 12명도 뒤따라서 곧바로 사령부로 향하였다. 문에 들어서자 선생은 또 땅에 주저앉아, “여기가 법부(法部)인가, 군부(軍部)인가.” 하고 호통쳤다. 헌병이 부축하여 대청 위에 올라가서 북쪽 감방에 수감하니, 을사년 봄에 구금되었을 때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늙어서 제비처럼 거듭 옛집을 찾았구나.” 하였다. 왜병이 12명을 협박하여 도포ㆍ갓ㆍ망건ㆍ버선ㆍ갓끈 등속을 모두 벗기어 차례로 구속하고, 또 선생의 갓과 망건을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꾸짖으니 왜놈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홍주(洪州) 의병 80여 명이 먼저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헌병이 머리 깎는 칼을 가지고 와서 막 강제로 깎으려고 할 때에 선생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며 최 대감이 왔다고 하면서 달아났다. 이 때문에 머리를 깎이는 곤욕을 면하여, 모두 우리들이 머리를 깎이지 않고 보전한 것은 선생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였다. 이날 저녁에 밥이 들어오자 선생은, “내가 어찌 왜놈의 음식을 먹겠느냐?” 하고 호통쳤다. 자질들이 밖에서 장만하여 음식을 드리려고 하였으나 방해를 받아 올릴 수 없었는데 사흘이 되어도 한 잔의 물도 들지 않으니, 왜가 비로소 겁이 나서 자질들이 바치는 음식을 들여보내도록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낮에는 《주역》을 보고 밤에는 반드시 글을 외니 음향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심문하는 곳에 나아가서는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뜻한 바와 일한 바는 상소(上疏)와 격문(檄文)을 너희 정부에 보낸 글에 실려 있다. 어찌 다시 묻느냐?” 하였다. 그리하여 큰소리로 박문(博文)ㆍ호도(好道) 등을 부르면서 개돼지처럼 꾸짖으며 죄역(罪逆)을 따졌고, 혹은 의자와 탁자를 들어 쳐서 부수어 집이 쩡쩡 울리니, 왜들이 모두 묵묵히 피하여 숨었다. 이같이 교접(交接)하기 전후 세 번이었고, 12인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하고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한 사람도 굴하지 않으니, 왜도 역시 선생에게 경복(敬服)하여, 때로 문밖에 와서 자물쇠를 열고 서늘한 바람도 쐬게 하며, 혹은 차를 드리거나 담배를 담아 드리기도 하였고, 선생이 거처하는 곳을 지날 때마다 꼭 절을 하고 갔다. 헌병에 가라상(柯羅祥)이란 자가 있었는데 희우시(喜雨詩)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면서, “하늘이 여러분의 충성에 감동하여 때 아닌 비를 내리니, 이것은 하늘의 눈물이다.” 하였다. 이때에 최영설(崔永卨)도 10여 일 동안 구금되어,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서 결국 무엇을 하려고 하였는가에 대하여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으나, 최영설도 상소문과 일본 정부에 보낸 글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7월초하루는 병신 8일(계묘)에 임병찬(林炳瓚)과 압송되어, 바다를 건너 대마도(對馬島) 엄원(嚴原)에 도착하여 위수영(衛戍營) 경비대 안에 구금되었다. 이에 앞서 6월 25일 왜의 두목이 선생과 임병찬 등을 이현(泥峴 진고개) 사령부(司令部)에 가게 하여 소위 선고서(宣告書)라는 것을 읽고 통역을 시켜서 설명하기를, “최모는 대마도에 감금(監禁) 3년, 임병찬은 2년, 고석진(高石鎭)ㆍ최제학(崔濟學)은 본서(本署)에서 4개월 구류, 김기술(金箕述)ㆍ문달환(文達煥)ㆍ양재해(梁在海)ㆍ임현주(林顯周)ㆍ이용길(李容吉)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나기덕(羅基德)ㆍ유해용(柳海瑢)은 곤장(棍杖) 1백 대로 방송(放送)한다.” 하였다. 읽기가 끝나자 모두 총총히 피해 버리니, 선생의 호통 소리를 꺼려서였다. 선생은 이때에 현기증이 도져서 읽는 것이 무슨 글인지를 몰랐다. 이날 새벽에 자질과 문인ㆍ빈객(賓客) 수십 인이 남대문 밖 정거장에 나왔는데, 왜 헌병 2명이 선생과 임병찬을 보호하여 이미 차를 탔다. 그래서 최영조(崔永祚)ㆍ최영설(崔永卨)ㆍ최영학(崔永學), 족손 최정식(崔貞植)ㆍ최만식(崔萬植), 최전구(崔銓九)ㆍ이승회(李承會)ㆍ최제태(崔濟泰)ㆍ임응철(林應喆)이 배행(陪行)하였고, 최영직(崔永稷)ㆍ안필호(安弼濩)ㆍ박규용(朴圭容)ㆍ윤태선(尹泰善)ㆍ윤항식(尹恒植)ㆍ이낙용(李洛用)ㆍ최봉소(崔鳳韶)ㆍ정한용(鄭瀚鎔)ㆍ조영가(趙泳嘉)ㆍ이광수(李光秀)ㆍ문달환(文達煥)ㆍ임현주(林顯周)ㆍ이용길(李容吉)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유해용(柳海瑢)은 차 앞에서 절을 하고 하직하며 실성하고 통곡하였다. 선생은 웃으면서, “남자로 태어나면 사방에 뜻을 둔다. 해 돋는 동쪽의 산천이 볼만한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다만 여전히 몸이 자유롭지 못하여 나의 마음과 몸을 다하지 못할 것이 한스럽다. 또한 내가 처음 거사할 때에 어찌 조금이라도 요행을 바랐겠는가. 국가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백 년이 되었는데, 상란(喪亂) 이후에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담당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탱해 볼 생각으로 나의 직분을 다하였다. 마음 편하게 한번 죽는 것은 정말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는 것이니, 비록 오늘 머리가 잘리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도 웃으면서 땅에 묻힐 것인데, 더구나 아직 살아 있음에랴. 제군이 나를 사랑하거든 마땅히 빨리 죽기를 바랄 것이고, 서로 한탄하고 애쓰면서 나의 부끄러운 마음을 가중시켜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은 차 안에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지쳐서 기대는 일이 없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정력(定力)이 굳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중로에 이르러 선생이 탄 차의 바퀴에서 불이 일어나서 다른 차로 옮겨 타고 동래(東萊) 초량(草梁)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어두웠다. 이윽고 헌병이 선생을 인도하여 배에 오르자 최영조 등이 부여잡고 따라가고자 했으나, 헌병은 사령부의 문서가 없다고 허락하지 않으니 모두가 통곡하면서 부두에서 하직하였다. 이때에 달빛은 희미하고 항구의 등불은 바다 위를 비추고 있었다. 기적이 한 번 울리자 배는 쏜살같이 가니, 다만 뱃머리의 등불이 물결 속에 출몰할 뿐이었다. 이튿날 초량 뒷봉우리에 올라서 대마도를 바라보니 운애(雲靄) 속에 한 조각 산 그림자가 숨은 듯 나타나는 듯하였는데 이때의 정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애간장을 끊는 듯하게 하였다고 한다. 배 안에서 헌병 가라상(柯羅祥)이 정성을 다하여 부호(扶護)하여 이튿날 진시(辰時)에 대마도에 닿아 배를 내렸다. 헌병은, 이 뱃길은 늘 풍랑으로 고생을 하는데 이번에는 이처럼 평온하게 항해하였으니, 실로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엄원(嚴原)의 잠업 교사(蠶業敎師) 집에 머무르니, 위수영(衛戍營) 경비대의 임시 관서[權署]이었다. 홍주(洪州)의 의사 9인이 이미 먼저 와서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으니, 곧 문인 이칙(李侙)ㆍ유준근(柳濬根)ㆍ안항식(安恒植)ㆍ이상두(李相斗)ㆍ최상집(崔相集)ㆍ신보균(申輔均)ㆍ신현두(申鉉斗)ㆍ남규진(南奎振)ㆍ문석환(文奭煥)이었다. ○ 입식(粒食)을 끊고 곧 유소(遺疏)를 임병찬(林炳瓚)에게 불러 주었다. 선생이 차 안에서 최영설과 대마도에 들어간 뒤의 처의(處義)할 방도를 상의하였다. 최영설이 말하기를, “소 중랑(蘇中郞)과 홍 충선(洪忠宣)은 먼 옛날의 일이고, 청음(淸陰)과 삼학사(三學士)로 말한다면 저들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로 삼지 아니하였고 후현(後賢)도 흠잡지 아니하였으니,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처의함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또 감금된 사람의 식료품은 모두 본국 정부에서 지불한다고 들었으니,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나 과연 이와 같다면 더욱 꺼릴 것이 없습니다.” 하니,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영설은 또 임병찬과도 그 의(義)를 말하였다. 경비 대장이 병정 4, 5명을 거느리고 와서 감금된 사람들을 줄 세우고, 어째서 장관(長官)에게 경례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갓을 벗게 하였으나 사람들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대개 왜는 갓을 벗는 것을 예(禮)로 삼은 것이다. 대장은 말하기를, “여러분은 일본의 음식을 먹으니, 마땅히 일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갓을 벗으라고 하면 벗고,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깎아서 오직 명령에 따라야 하는데 어찌하여 감히 거역하는가.” 하였다. 한 왜가 선생의 갓과 탕건을 벗기려고 하자, 선생이 큰소리로 꾸짖으매 왜가 칼을 쳐들고 찌르려고 하자 선생은 가슴을 헤치고 큰소리로 빨리 찌르라고 호통쳤다. 대장이 갈 때에도 선생에게 일어서도록 명하니 선생은 일부러 앉아서 일어서지 않았다. 왜가 손으로 선생을 위협하니, 여러 사람들이 급히 구해 내었다. 선생은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임병찬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저 왜와 30년 동안 서로 버티어 온 혐의가 있으니, 저들이 나를 해치는 것은 조금도 괴이하지 않다. 또한 나는 나라가 위태하여도 부지(扶持)하지 못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내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은, 헛되이 죽는 것이 국가에 무익하니 대의(大義)를 천하에 외치고자 한 것이나,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은 의병을 일으키던 날에 이미 알고 있었으니, 오늘의 흉액(凶厄)은 오히려 늦다고 하겠다. 차라리 목을 자르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는 살지 못한다는 의(義)는 이미 을미년(1895, 고종32) 겨울에 유길준(兪吉濬)에게 잡혔을 때 정해졌고, 지금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도 의(義)가 아니니, 지금부터는 다만 단식(斷食)하고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먹지 않고 굶어 죽는 것도 또한 명(命)이니, 내가 죽은 뒤에 그대는 뼈를 거두어서 우리 아이에게 보내라. 그러나 이것도 어찌 기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임금을 바로잡고 국가를 부지(扶持)하기를 마음먹었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천심(天心)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죽은 뒤에는 다시는 충언(忠言)을 우리 임금에게 드릴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내가 단소(短疏)를 그대에게 줄 것이니, 그대는 살아 돌아가서 꼭 진정(進呈)하도록 하라.” 하고 다음과 같이 유소(遺疏)를 불렀다. “죽음에 임한 신 최모는 일본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서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생각건대, 신의 거의(擧義)의 대략은 금년 윤4월 거사할 초두에 이미 자세히 아뢰었으나, 원소(原疏)가 들어갔는지 여부는 신이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신은 거사가 실효가 없어 마침내 사로잡히는 곤욕을 당하여 7월 8일에 압송되어 일본 대마도에 도착하여 현재 경비대라는 곳에 구금되었으니, 스스로 생각건대, 반드시 죽을 것이고 살아서 돌아갈 것을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이 적(賊)이 처음에는 머리를 깎는다는 것으로 신에게 가해하다가 종내는 교활한 말로 달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으니, 반드시 죽이고 말 것입니다. 생각건대, 신이 이곳으로 들어온 뒤에 한 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 것이면, 설사 적이 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차마 구복(口腹)으로써 스스로 누(累)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마침내 음식을 물리쳐 옛사람이 스스로 죽어서 선왕(先王)에 보답한 의(義)를 따를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멸망시키지 못하였으며, 국권(國權)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4천 년 동안의 화하(華夏)의 정도(正道)가 더럽혀져도 부지(扶持)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의 선왕의 적자(赤子)가 어육(魚肉)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건대, 왜적은 꼭 망할 징조가 있으니, 멀어도 4, 5년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다만 우리가 대응하는 방법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할 것이 염려됩니다. 지금 청국과 러시아는 주야로 왜적에게 이를 갈고,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도 매우 왜적과 서로 좋지 못하니, 머지않아서 반드시 서로 침공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가 함부로 전쟁을 한 나머지 백성은 궁핍하고 재정은 바닥이 나서 민중이 위정자를 원망할 것입니다. 대체로 밖에서 틈을 엿보는 적이 있고 안에는 윗사람을 원망하는 백성이 있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멀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국사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지 마시고 건강(乾剛)의 덕을 분발(奮發)하시고 성지(聖旨)를 확립하여 퇴미(頹靡)한 것을 떨치소서. 답습에서 깨어나 참을 수 없으면 참지 말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지 말며, 허위(虛威)를 지나치게 겁내지 말고, 아첨하는 말을 달게 듣지 마소서. 더욱 자주의 계획을 굳혀 영원히 의뢰하는 마음을 끊고, 더욱 와신상담하는 뜻을 굳건히 다져서 자수(自修)하는 방도를 다하소서. 영준(英俊)을 불러들이고, 군민(軍民)을 무육(撫育)하며, 세상의 형편을 살펴서 그 가운데서 할 일을 선택하소서. 그렇게 하면 이 나라 백성들은 본시 모두 존군 애국(尊君愛國)의 마음이 있고, 또 모두가 선왕의 5백 년 동안의 성덕(聖德)과 지극하신 성은을 흡족히 입었으니, 어찌 폐하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해 큰 원수를 갚고, 심한 수치를 씻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 기틀은 폐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죽음에 임하여 하는 말을 조금도 소홀히 듣지 않으시면, 신은 지하에서도 역시 손을 모아 기다리겠습니다. 신은 죽음에 임하여 정신이 아득하여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아뢰지 못하고, 그 한두 가지로 글을 만들어 같이 갇혀 있는 전 군수 신 임병찬에게 부탁하고 죽으면서 때를 기다려 상달하도록 하였습니다. 빌건대,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굽어 살피소서. 신은 눈물을 이기지 못하오며 영결하는 마당에 삼가 자진(自盡)하여 아룁니다.” 하였다. 부르고 나서 조그마한 종이를 행낭에서 꺼내어 임병찬에게 써 감추어 두도록 명하고, “내가 40년 동안 충성하려고 한 의(義)가 여기에서 끝났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사령부에 있을 때에 함께 일한 제군을 생각하여 혼자서 오언절구(五言絶句) 14수를 염격(簾格)에는 구애하지 않고 진심을 솔직하게 읊은 것이 있는데, 내가 욀 것이니 군은 돌아가는 날 각각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곧 서문을 부르니, “서생(書生)은 군려(軍旅)의 책임이 없고, 80세는 군사에 종사할 나이가 아니다. 다만 비상한 때를 만나,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초야(草野)에 이르기까지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절름발이를 제외하고, 집에 있어서 모른다고 말하는 자는 사람 마음이 없는 자이다. 다만 재앙을 스스로 만들어서 그 누(累)가 제군에게 미치니 부끄러움이 많다. 각자에게 오언 절구(五言絶句) 1수씩을 주어 뒷날 장고(掌故)에 대비한다.” 하였다. 그 하나는 자책(自責)이고, 임병찬과 고석진 등 12인에게 각각 준 것이며 또 하나는 정시해를 애도한 것이었다. 이날 저녁에 선생을 따라서 먹지 않은 사람은 임병찬(林炳瓚)ㆍ이칙(李侙)ㆍ유준근(柳濬根)ㆍ안항식(安恒植)ㆍ남규진(南奎振)이었고, 그 나머지 5인은 억지로 두어 숟가락을 들고는 그쳤다. 이튿날 대장(隊長)이 와서, “노인이 왜 식사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임병찬이 일록(日錄)을 보이니 말하기를, “통역이 분명하지 않더니, 이것을 보니 알겠습니다.” 하고, 다 보고 나서, “삭발 운운한 것은 감금된 사람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고, 대개 ‘일본에 있으면 일본의 법률에 따라야 옳다.’고 말한 것입니다. 삭발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억지로 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식사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선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령부에 있을 때에, 수인(囚人)의 식비는 우리 정부에서 부담한다고 들었기에, 어제 두 끼의 식사도 우리 정부에서 보내온 것으로 알고 먹었고, 또한 고인(古人)의 처의(處義)에도 근거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일본의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일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하니, 내가 어찌 생을 탐내어 입에 풀칠을 하고 ‘그 음식을 먹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기롱(譏弄)을 받겠는가. 나의 일은 내가 이미 단정하였으나, 제군은 그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 나를 따라서 죽겠는가.” 하였다. 여러 사람이 번갈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튿날 보병대 대장(大將)이 와서 대장(隊長)과 같은 말을 물었다. 임병찬이 선생의 처의(處義)의 연유를 상세히 말하니, 대장이 말하기를, “삭발하고 변복(變服)한다는 것은 잘못된 소문이고, 감금된 사람의 식비는 모두 한국 정부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은 감시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니, 안심하고 식사하여서 국가를 위하여 자애(自愛)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래서 임병찬과 여러 사람이 옛날의 의(義)를 들어서 여러 가지로 말씀드리면서 울어 마지않으니, 선생이 겨우 뜻을 돌려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다만 그대들을 위하여 다시 먹고 다음 기회를 보겠다.” 하였다. 대장(大將)이 간 뒤에 대장(隊長)이 또 와서, “내가 전일 삭발과 변복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다만 방 안에서 갓을 벗으라고 말하였는데 통역이 잘못 말하여 여러분이 단식한 지 사흘이 되었으니, 어찌 백이(伯夷)ㆍ숙제(叔齊) 고사(故事)를 본받으려 합니까. 나는 결코 삭발과 변복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최씨에게 말씀드려서 노체(老體)를 자애(自愛)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선생이 하루는 일찍 일어나서, “내가 평소에 꿈을 꾼 일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꿈을 꾸었으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고, 곧 다음과 같이 읊었다.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겠다는 선성의 탄식 / 乘桴先聖歎 바다에 몸을 던져 죽겠다는 노중련의 풍도 / 蹈海魯連風 이 두 가지의 같고 다름을 / 二者同不同 동쪽 늙은이에게 물어보노라 / 請詢日邊翁 ○ 같은 수인(囚人) 여러 사람 가운데 간혹 관(冠)이 없어 상투 바람으로 있어서, 선생이 치포관(緇布冠 검은 베로 만든 유생이 쓰는 관)을 만들어 쓰게 하고, 곧이어 절구 한 수를 읊고 화답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선생과 여러 사람이 혹은 글을 외어 강론(講論)하고, 혹은 시를 지어 화답하니, 만리 이역(異域)에서도 적료(寂廖)하지 않았다고 한다. 9월초하루는 을미 4일(무술)에 장자 최영조가 들어와 뵈었는데, 문인 오봉영(吳鳳泳)ㆍ임응철(林應喆)이 동행하여 왔다. 최영조와 임응철이 각기 병든 노친(老親)을 방환(放還)하고 대신 감금되겠다는 뜻을 경비 대장에게 청원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 8일(임인)에 최영조ㆍ오봉영ㆍ임응철이 귀국하였다. 최영조가 머무르면서 모시고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니, 선생이 집에 노인이 있고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을 사람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바다 빛은 창망하고 새벽 기운은 찬데 / 海色蒼茫曉氣寒 이때에 가고 머무르는 두 사람의 괴로운 심정 / 此時去住兩情難 이란 시구가 있었다. ○ 20일(갑인)에 문인 조재학(曺在學)이 들어와 뵈었다. 선생이 매우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오랜 세월 사귄 벗이 우정도 깊어서 / 契託蓬麻歲月深 배를 타고 먼 길 오니 음산한 가을일세 / 乘桴遠役趁秋陰 깊고 깊은 한 줄기 물 원천에서 솟아나니 / 淵淵一水源頭活 그 당시에 주고받던 마음 힘써 따르게 / 勉副當年援受心 조재학은 송연재(宋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도 되기 때문이다. 수일간 머무르다가 돌아갔다. 10월초하루는 갑자 16일(기묘)에 보병 경비대 안 새로 지은 건물로 옮겨 갔다. 먼저 거처하던 집으로부터 거리가 약 5리였다. ○ 19일(임오)에 병이 났다. 처음에는 감기로 편찮다가 점점 위중하게 되었다. 그곳에 우리나라 약이 없어 애쓰다가, 행낭에서 약간의 재료를 찾아서 불환금산(不換金散)과 부자산(夫子散)을 잇달아 올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대장이 군의를 보내어 진찰을 하고 약을 보냈으나, 선생은, “80세 늙은이가 병이 들었고 또 수토까지 맞지 않은 것인데 외국의 신통하지 못한 약으로 무슨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다만 이것으로써 자진(自盡)할 것이니, 일본 약물은 일체 쓰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29일에 이르러 점점 부증(浮症)과 혀가 말려들고 변비 등의 여러 증세가 있더니, 정신이 혼몽하여 다시는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다. 11월초하루는 갑오 5일(무술)에 최영조와 문인 노병희(魯炳熹)ㆍ고석진(高石鎭)ㆍ최제학(崔濟學)이 들어와서 시병하였다. 임병찬이, 선생의 병환이 날로 위중한 것을 보고 서울에 전보하여 본가에 알리게 하였다. 고석진ㆍ최제학이 마침 풀려 났고, 노병희도 서울에 있었기에 모두 최영조와 동행하였는데, 뱃길이 막혀서 여러 날 나루터에서 보내다가 5일에 이르러 비로소 들어왔다. 선생은 이미 누가 누구인지 몰랐다. 노병희는 소속명탕(小續命湯)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재료가 없어서, 고석진과 최제학에게 바다를 건너서 약을 구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배편이 몹시 힘들어서 9일에 비로소 부산에 돌아갔다. 마침 최영학(崔永學)과 최제태(崔濟泰)ㆍ최정상(崔鼎相)ㆍ강갑수(姜甲秀)의 일행을 만나서 약을 부탁하고 들어왔다. 해어탕(解語湯)과 소속명탕(小續命湯) 수 첩을 지어서 연거푸 썼다. 14일 아침에 선생의 정신이 조금 깨어나서, 모시고 있던 사람이 서로 말을 하면서 선생이 듣는지 못 듣는지를 시험해 보니, 혹 미소를 짓기도 하고 혹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임병찬의 일록(日錄)에는, “선생께서 병이 나면서부터 20여 일에 이르기까지 혹은 평좌(平坐)하시고 혹은 꿇어앉고, 혹은 구부리고 혹은 기대기도 하셨으나 한 번도 드러눕지 않으시니, 여기에서 선생의 평소 소양(所養)의 훌륭하심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가 없음을 알았다.” 하였다. ○ 17일(경술) 오전 인시(寅時)에 대마도 감방에서 별세하였다. 전날 저녁에 큰 별이 동남쪽에 떨어지며 환한 빛이 하늘에 뻗쳐서, 보는 사람이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날 새벽에 별세하였다. 이에 앞서 최영조가 염습(斂襲)할 제구(諸具)를 갖추어 가지고 왔다. 선생이 작고했다는 말을 들은 대장은 시신을 오래 이 건물에 머물게 할 수 없다 하여 시체실에 옮기도록 하였다. 시체실은 경비대 안에 있는 한 칸의 판잣집인데 땅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가운데에는 시상(尸床)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시(巳時)에 옮겨 모시고 염습하였다. 이때에 추위가 혹심하여 노시(露屍)로 밤을 지낼 수가 없어서 오후 신시(申時)에 소렴(小斂)을 하였다. 집사(執事)는 임병찬(林炳瓚)ㆍ신보균(申輔均)ㆍ남규진(南奎振), 집례(執禮)는 이칙(李侙), 호상(護喪)은 노병희(魯炳熹), 사서(司書)는 문석환(文奭煥), 사화(司貨)는 신현두(申鉉斗)였다. 이날 밤에 왜는 다만 최영조ㆍ최영학만을 시신 곁에 있기를 허락하고, 그 나머지 안에 있던 사람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밖에 있던 사람은 안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날 전보로 본가와 서울에 부고하였다. ○ 18일(신해)에 입관(入棺)하여 수선사(修善寺)에 옮겨 모셨다. 노병희가 밖에 있다가 송판을 구해 와서 대목을 불러 관을 만드는데, 대장이 정부에서 명령이 있어서 부대 안에서 관을 만들어 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관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원수의 물건이고 또 제도도 맞지 않으니 하루도 임시로 사용할 수가 없으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터이므로 꾹 참고 그것을 사용하였다. 신시(申時)에 입관하여 영구(靈柩)와 혼백 상자를 모시고 경비대 뒷문을 나와 가게 주인 해로(海老)의 집으로 갔다. 감금되어 있던 모든 사람이 모두 흰 두건에 환질(環絰)을 두르고 경비대 문안에서 통곡하면서 하직하였고, 다만 임병찬이 모시고 가게에 갔다. 해로의 아들 웅야(雄野)가 앞을 인도하여 수선사 법당에 영구를 모셨다. ○ 20일(계축)에 영구를 모시고 배를 타서 21일(갑인)에 초량(草梁) 나루에 내려 상무사(商務社)에 안치(安置)하였다. 술시(戌時)에 영구를 모시고 배를 탔다. 노병희가 초혼(招魂)하며 앞에서 인도하였고, 항구의 왜인들이 촛불을 들고 따라오면서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튿날 진시(辰時)에 초량 앞 항구에 정박하니, 최영설(崔永卨)ㆍ최만식(崔萬植)ㆍ최전구(崔銓九)ㆍ최봉소(崔鳳韶)는 서울에서, 최영복(崔永福)ㆍ곽한소(郭漢紹)는 정산(定山)에서 왔으며, 고석진(高石鎭)ㆍ최제태(崔濟泰)ㆍ최제학(崔濟學)ㆍ최정상(崔鼎相)ㆍ임응철(林應喆)과 숙소를 정하고 상무사(商務社)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무사란 본주(本州)와 영남ㆍ호남 사람들이 돈을 모아 회사를 만들어 장사하는 일을 처리하는 곳이다. 이보다 앞서 선생이 일본에 건너가는 일을 당시에 사원들이 모두 알지 못하고 뒤늦게 배행하러 왔다가 길에서 서로 붙들고, “하늘이 어찌하여 선생에게 이런 행차가 있게 하는가.” 하면서 통곡하였는데, 이때 와서 선생의 부고를 듣고는 모두 망곡(望哭)하고 애통(哀痛)해하면서 사흘 동안 철시(撤市)하고, 치상(治喪)을 담당할 것을 자청하였다. 사무장 김영규(金永圭)가 정구청(停柩廳)을 새로 만들 것을 의논하니, 사원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가 이 건물을 지어서 왕래하는 사람은 모두 묵어 갔습니다. 만일 이곳에 최 선생을 모신다면, 비록 혼령이지만 우리들의 영광입니다. 지금 꼭 새로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건물은 헐어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니, 김영규가 말하기를, “내가 제군의 뜻을 떠보았을 뿐이오.” 하였다. 이리하여 ‘면암 최 선생 호상소(勉菴崔先生護喪所)’라고 문에 크게 써 걸고, 사원에게 본분을 이미 정하여 집사(執事)로 삼았는데, 유진각(兪鎭珏)ㆍ이유명(李裕明)ㆍ권순도(權順度)는 호상, 박필채(朴苾彩)ㆍ송재석(宋在錫)은 집례, 이응덕(李應悳)ㆍ장우석(張禹錫)ㆍ안순극(安舜克)은 축(祝), 김교민(金敎玟)ㆍ손영두(孫永斗)ㆍ박봉석(朴鳳錫)은 사서(司書), 김영규ㆍ김도익(金道翊)ㆍ정시원(鄭時源)은 사화(司貨), 윤명규(尹明奎)ㆍ권상희(權爽煕)는 조빈(造殯)으로 성복(成服)과 반구(返柩)의 제구(諸具)를 모두 준비하였다. 이날 아침에 자질과 문인들이 모두 부두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원 1천여 명이 대여(大轝)와 영거(靈車)를 갖추고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日月高忠)’이란 8자를 비단에 써서 높은 장대에 달고 영구를 출영하여, 들어와서 일내헌(一乃軒)에 모셨다. 영구를 모시고 하륙할 때에 김영규와 권순도가 영구를 부여잡고 부르짖기를, “선생님, 이것은 대한 배입니다. 여기는 대한 땅입니다.” 하며 울었다. 부두의 남녀 노소 수만 명이 모두 선생을 부르니 곡성이 땅을 뒤흔들었고, 대여를 뒤따르는 사람이 5리에 이르렀다. 이때에 검은 구름이 덮여서 날이 어둡고 가랑비가 촉촉히 내려 쌍무지개가 동남쪽에 가로 걸려서 광채가 빛나더니, 영구를 안치한 뒤에 무지개는 사라지고 구름은 걷혀 비가 개니 한 점 먼지도 없었다. 항구에 가득했던 구경꾼들이 이상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이날부터 발인(發靷)할 때까지 원근의 사민들이 전물(奠物)과 제문을 가지고 와서 통곡하는 사람이 주야로 끊이지 않았고, 학교의 생도와 여학교 8, 9세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와서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혹은 만사(輓辭)로, 혹은 연설로, 혹은 조가(吊歌)로 애도하면서 모두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친척처럼 슬퍼하였다. 본부(本部)의 기생 비봉(飛鳳)ㆍ옥도(玉桃)ㆍ월매(月梅)도 언문(諺文)으로 제문을 지어 치전(致奠)하고 매우 슬프게 곡하였고, 범어사(梵魚寺)의 중 봉련(奉蓮)이 승도들을 거느리고 길가에서 치전하였다. 초량의 세 과부는 부두에서부터 대여를 모시고 따라오다가, 구포(龜浦)에 이르자 머리에 전물을 이고 도보로 40리나 걸어와서, “대감의 제수(祭需)는 왜놈 차에 실어서는 안 되고, 제기도 왜놈 물건을 쓰지 못합니다.” 하였다. ○ 22일(을묘)에 성복하였다. 원근의 사민 남녀가 와서 곡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었고, 와서 보는 외국인도 모두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고 한다. ○ 23일(병진)에 발인(發靷)하였다. 대여(大轝)ㆍ영거(靈車)와 짐꾼은 모두 상무사(商務社)에서 전담하였다. 초량에서 구포까지 40리 이내였는데, 상여를 뒤따르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고 집집마다 흰 기를 꽂아 지나는 곳마다 부녀들이 모두 곡하면서 맞이하였고, 노상에서 치전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아서 이날은 겨우 10리를 갔다. 다음날 30리를 가서 구포에 도착하였는데 여기는 동래(東萊)의 끝 경계이다. 상무사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모두 매우 슬피 곡(哭)한 뒤에 돌아가고, 유진각은 시종 호상하여 정산(定山)에 이르러 돌아갔다. ○ 선생의 상사가 처음 났을 때 엄원(嚴原) 경비 대장이 부의로 민전(緡錢) 2백을 보내와서 최영조가 여러 차례 거절하였으나, 대장이 성내면서 바다를 건너는 일을 방해하겠다는 말이 있기에 부득이 받아 간직하였다가 발인하는 날에 우편으로 돌려보냈다. 12월초하루는 계해 7일(기사)에 정산(定山) 본가(本家)에 도착하였다. ○ 10일(임진)에 대렴(大斂)하였다. ○ 13일(을해)에 성빈(成殯)하였다. 구포강(龜浦江)을 건너, 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칠원(漆原)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ㆍ개령(開寧)ㆍ김산(金山)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옥천(沃川)ㆍ회덕(懷德)ㆍ공주(公州)를 거쳐 15일이 걸려서 비로소 정산 본가에 도착하였는데, 지나온 고을에서 전물(奠物)을 가지고 와서 곡하는 사람이 동래(東萊)에서와 같았다. 창녕 사람 박지림(朴芝林)은 농부인데 선생을 추모하여 치전(致奠)하고 부의금을 내고 매우 슬프게 곡하였다. 평소에 의견을 달리하던 사람도 정성껏 슬픔을 다하여 만사(輓辭)ㆍ제문ㆍ치전ㆍ치부로 그 뜻을 극진히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구가 바다를 건넌 이래로 사녀(士女)들이 달려와 부모를 잃은 듯이 울부짖으니, 천고(千古)의 옛 기록에도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비[士子]가 존상(尊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부녀와 어린이까지도 누가 시켜서 그렇겠는가. 아마도 하늘의 밝은 도리와 사람의 떳떳한 윤리는 시세(時勢)를 따라서 타락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었다. 제물과 제기를 절대로 왜의 물건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한 것이나, 승려와 천기(賤妓)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생을 부르며 깊이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한 일은 적신(賊臣)과 교활한 원수가 듣고 맥이 풀리게 했으니, 정말 선생의 영혼을 잘 위로했다고 할 만하였다. 창원에 이르자 왜병 10여 인이 마항(馬港)에서 와서 길을 차단하고 협박하면서 상여를 기차에 싣게 하니 종자(從者)가 정색으로 거절하며 승강이를 하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으니, 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영여(靈轝)가 이르는 곳마다 사민(士民)이 무리를 이루니 왜가 혹 다른 일이 생길까 염려해서였다. 창녕읍(昌寧邑)에 이르니, 헌병 소위 평전철차랑(平田鐵次郞)이란 자는 전에 사령부에서 신문할 때에 이미 사나운 놈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이르러 또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종자(從者)가 함께 승강이를 하면서 밤새도록 팽팽히 싸우니, 평전도 이론에 굽히고 스스로 물러섰다. 곁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 “이날 밤 싸움은 10만의 군대보다도 더 강하여, 왜적이 한국을 경영한 지 30여 년에 처음으로 뜻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보았다.” 하였다. 이때부터 왜병 수십 명이 교대해 가면서 따라와서 연도에서 조상하고 치전하는 사람들을 모두 쫓고 본집에 이르러 성빈(成殯)하는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돌아갔다. 장사 때에 또 와서, 사방에서 장사에 모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다만 도포를 입은 사람은 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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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구다른 표기 언어 崔銓九 동의어 우서(禹敍), 지은(智隱)
요약 대한제국기 최익현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의병. 생애 및 활동사항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우서(禹敍), 호는 지은(智隱). 전라북도 고창 출신.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본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하였고, 1910년 왜적의 침략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붙잡혀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상훈과 추모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자 영어음역 이칭/별칭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집필자
1910년 왜적의 침략 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군왕에게 통고문을 보내려다 체포되었다. 이후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의금부순찰사로 활동하다 1917년 12월 28일 붙잡혔다. 이로 인해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1년간 유폐되었다. 1918년 고종이 죽자 단식 투쟁을 하는 등 10여 차례에 걸친 구검(拘檢)과 2차례의 유폐 생활 끝에 1936년 8월 성송면 학천리 독선재(獨鮮齋)에서 사망하였다.
최전구(崔銓九)근대사인물 대한제국기 최익현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의병.
정의 대한제국기 최익현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의병.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우서(禹敍), 호는 지은(智隱). 전라북도 고창 출신.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본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하였고, 1910년 왜적의 침략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붙잡혀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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