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 호조참의공 휘 담/조선호조참의 월당공 유허비문

전주 최문 문성공 4세손 호조참의공 휘 담 할아버지 한벽당 신문시가

아베베1 2019. 8. 5. 11:18


         

          이미지사진은  道峯山 문사동 瀑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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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道 정자기행(212)-벽옥한류 한벽루(寒碧樓).요월대(邀月臺)
전라북도 전주시 전주천을 따라 시내로 진입하는 한벽교 주변으로 자리하는 정자는 그 모습이 운치 있다.

발산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 위 절벽을 깎아 만든 자리에 기둥을 세우고 물결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워진 전주 한벽루(寒碧樓)라는 정자는 남원의 광한루(廣寒樓), 무주의 한풍루(寒風樓)와 함께 호남삼한(湖南三寒)으로 불렀다. 모두 빼어난 경치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들이다.

조선시대 정승에 제수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던 송시열(宋時烈)과 그 학통을 이은 조선후기의 학자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 1721)의 시에서는

그윽한 살이 탈없이 동산에 붙여 살 때, 강 누각에 가을 만나 옛 벗을 그렸는데
한벽루에 늙어감을 오늘날에 또 어기니, 돌아가는 배 강가에 차마 보내지 못할레
幽棲無恙寄東丘 江閣逢秋憶舊遊 今日又違寒碧老 不堪臨水送歸舟


지금의 정명 한벽당(寒碧堂)은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산 7-3에 있는, 승암산(僧岩山) 기슭 발산(鉢山) 머리의 절벽을 깎아 터를 만들어 세운 누각이다.

지금의 모습은 한벽교에 가려 옛 멋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지만 정자에 앉아 마음의 눈으로 다리를 지우고 주변 경관을 살펴본다면 가히 천하의 절경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곳은 1404년(태종 4) 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암출신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조선 초기 태종~세조 때의 문신 최덕지(崔德之 1384 ~1455)의 부친인 월당(月塘) 최담(崔湛)이 자신의 집 근처에 지은 별장인 이곳은 한벽당(寒碧堂)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옛 문인들은 이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 壁玉寒流) 같다고 읊었으며,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멋진 별칭과 함께 전주팔경의 첫손에 꼽힌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그의 필적이라 한다.

이 의미는 세상 만물의 본성, 순리문화를 의미한다. 鳶天魚淵之活潑에서 ‘鳶天魚淵’은 시경 한록(旱麓)의 “솔개는 하늘에서 빙빙 날고, 물고기는 깊은 물에서 뛰노네" 즉 鳶飛戾天 魚躍於淵”에서 따온 말로, 세상 만물이 본성대로 즐겁게 살아간다는 뜻이고, ‘活潑’은 본성대로 사는 생기 있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이 문구를 줄여 '鳶飛魚躍'이라고 사장성어로 불리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자 꾀할 때 크게 상심하여 백의항소(白衣抗訴)로 간곡히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은거한 옥담(玉潭) 이응희(李應禧 1579 선조 12∼1651 효종 2)이 생애 어느날 한벽루에 올라 만감을 풀애낸다.

누차 여윈 말 채찍질해 먼 길 나서 / 저물녘 한벽루에 올라 경관을 조망하노라
물결 거슬러 오르는 외로운 돛단배 어선을 보고 / 바람 따라 나는 만 점의 옥 같은 백구가 보이네
屢策羸驂作遠遊 晩登寒碧騁雙眸 孤帆逆浪看漁艇 萬玉隨風見水鷗

십리 고운 백사장에는 낙조가 환하고 / 천 겹 푸른 산봉우리는 맑고 그윽하여라
막걸리 열 잔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으니 / 바로 어진 주인이 손님 대접하는 때 만났구나
十里瓊沙明落照 千重翠峀挹淸幽 黃流十酌難成醉 正値賢東禮客秋

400여년 전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끼다 벼승을 등지고 고향땅 해남을 가는 찹찹한 일에 들린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 1671)의 이곳에서의 소감은 이랬다.

천 가지 경치에 사람 눈 번쩍 뜨이고 / 아침에 창을 열면 저녁까지 안개로세.
누가 알았으랴 천지의 맑은 기운을 / 산천이 가져다 여기에 전해 줄 줄을
千般景象醒人眼 晨啓軒窓至暝煙 誰識二儀淸淑意 山川持向此間傳....

월담 유허비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한벽당과 작은 별채처럼 자리하는 당을 부른다는 정자 요월대(邀月臺)가 어우러지는 경관이 나타난다. 바위에 부서지는 하얀 물결의 포말을 보며 전국의 수많은 음유시인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과 어울리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한다. 콘크리트 어두운 빛의 다리와 줄어든 수량으로 개울이 되어버린 전주천의 모습이 못내 아쉽지만 도시화로 그나마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곳은 전주 옥류동(玉流洞), 지금의 한옥마을이 있는 교동염수당(念修堂)에서 최병심( 1874(고종 11)∼1957)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등 그의 생애 전체가 역사적 상황의 불안정과 격변 속에서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 정신을 지켜 가면서, 많은 영재를 배출하면서 유학자의 역활을 했던 인물로 1925년  전라선의 철교 개설로 한벽당이 철거 위기에 처하자 항의하여, 터널로 개통하도록 하는 우여곡적 끝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저녁시간 색색의 조명이 주변의 어둠을 지우면 정자의 아름다움과 오래된 기둥 사이로 배어 있는 옛 풍류의 멋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달밤에 배 안에서 한벽루(寒碧樓)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감상하며 율시 한 수를 짓다.'제목으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1688년(숙종14) 6월(음) 권상하(權尙夏),이희조(李喜朝)와 함께 한벽당에 오르고 감흥을 풀어낸다.

누 위의 피리소리 격이 높은데 / 배 안에서 듣노라니 더욱 시원해
텅 빈 강 그 울림이 자연스럽고 / 먼 안개 아스라이 끝이 없는 듯
樓上吹初好 舟中度更寒  江空易成響 煙遠似無端

맑은 소리 강변의 풍혈에 닿고 / 흐르는 음 월탄까지 울려 퍼진다
뜻이 통한 아양곡 여기 있으니 / 거문고 굳이 애써 탈 것이 없네
淸籟連風穴  流音溯月灘 峨洋今在此 綠綺未須彈

서울 출신인 김창협이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이 진도로 유배된 아버지 예조판서, 좌의정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 ~ 1689)을 안부차 뵙고 상경하면서 찹찹한 마음을 쓸어 내리며 읊었던 시가 많이 남아 있다.

기슭 누운 수양버들 금빛으로 단장하고 / 긴긴 가지 나날이 강 빛 함께 푸르러 가
뱃머리에 펼쳐진 봄빛 지금 이러하니 / 한벽루 어귀에도 봄을 막지 못하리라
臥岸垂楊黃嚲金  長條日與綠江深 舟前春色今如此 寒碧樓頭恐不禁

원래 한벽당은  전주의 초입에 세워졌으나 월당이 이곳에 누정을 세운 이래로 수차례 중수를 거쳐 서북에서 흘러온 옥류천이 발산과 마주치는 부근 절벽위에 세워져 있다.

누각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건평은 7.8평이다. 정내에는  이경전(李慶全)·이경여(李慶與)·이기발(李起渤)·김진상(金鎭商) 등 19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실려 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중에 전라감찰사(全羅觀察使) 서초(瑞草) 이경전(李慶全 1561~1621)이 남긴를 감상해 보면

최월당의 남긴 옛터 아름다운 이름 오래도록 전해져/화려한 구조 잠깐 바라보니 깎아낸 듯 기묘해.
그림자는 못에 지고 구름은 높은 난간을 휘감고/피리 소리 달빛을 흔들어 하늘도 작아진 듯
遺墟未沒佳名久 久華構俄瞻妙割 餘影落潭雲危檻 濕光搖笛月小空

회포를 크게 읊으니 상쾌한 가을 기운이 생기고/나그네 생각 헤어지기 섭섭해 꿈 깬 뒤에도 아련하네.
이 신선의 시간을 머물기가 부족한데/동이 틀 때 무슨 일로 거듭거듭 망설이나?
虛吟懷爽爽秋生 後羈思依依夢覺 初不是仙間留足 平明何事重躕躇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우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를 역임하다  1651년 전주부윤이 되어 1년 동안 지낸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임금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관도에 오르지 않았던  한사(寒沙)·강대수(姜大遂 1591 선조 24∼1658 효종 9)도 비오는 날 오르고 시(寒碧堂雨中)를 남겼다.

颯爽雨鳴江 依微雲抹嶺 沈吟覓句遲 思在溪橋暝 / 寒沙先生文集卷之二

 
1897년, 전주 최씨문중에서 한벽당을 중수할 때 순국지사 면암() 최익현(1833 순조 33 ~ 1906) 선생이 쓴 한벽당 중수기(寒碧堂重修記)도 있다.

중수기에서는 "아조(我朝)의 세종(世宗)ㆍ문종(文宗) 연간은 문명한 시대로 성인이 위에 있어 만물이 모두 우러러 준량(俊良)의 등용이 이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호연히 물러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절조가 높고도 밝아서 봉황(鳳凰)이 천길을 나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세 후에 오히려 사람을 흥기시킬 만한 것이 있다.만일 그가 자잘하게 작은 청렴이나 삼가는 데 힘써서 어치렁거리며 세속의 이목에 잘 보이려고 분주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당대에 이름이 나서 이처럼 후세까지도 무궁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본다면, 공의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이 진실로 이 당(堂)으로 해서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인들이 보고 느끼며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당이 아니고는 부칠 곳이 없으니, 이 당의 중수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削成蒼石稜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倒影寒潭碧"
라는 시구가 있으니,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한벽루 처음에는 여기를 최담의 호인 월당(月塘)을 따서 월당루(月塘樓), 한벽루, 한별당이라고도  불렀다."고 적고 있다. 면암선생문집 제20권 

정리하면 한벽당은 세 차례의 큰 변화를 겪으면서 긴 생명력을 지켜내고 있다. 처음에는  월당루라는 개인정자로 지어지면서 강학과 연희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생산된 제영시들은 월당을 찬양하고 경관을 감상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월당루가 사라지고 전주관아에서 중수하면서 한벽당으로 명칭이 둔갑한다. 이 시기 한벽당은 주로 사대부들과 관찰사들의 연희의 공간으로  잔치자리에서 시주로 많은 사연과 시를 양생하게 된 명소로 또다른 탈바꿈으로 전의 명소로 자리했다.

우리 나라의 과학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이곳에 들려 선비다운 운치를 담아 오늘에 전하고 있다.

깊은 골 푸른 그늘 자리 옮기니 / 높은 누각 햇살이 차갑구나
서리 하늘 석벽만 높이 섰는데 / 가을물은 물결만 절로 이누나
絶峽蒼陰轉  飛樓白日寒 霜天唯石壁 秋水自波瀾

바야흐로 배 타고 지나려면서 / 한가로이 말 세워 구경한다네
사군이여 당신이 부럽구려 / 여기가 다름아닌 선관이로세
正欲乘舟過 聊成立馬看 使君吾羨汝 卽此已仙官

한벽당의 돌계단의 편액은 작가 미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최담 선생의 글씨라고도 했다. 큰 길에서 보이는 편액은 강암(剛菴) 송성룡(宋成鏞 1013~1999) 선생이 예서로, 요월대 편액은 황욱(黃旭 1898∼1993) 선생이 행초서로 썼다, 그리고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창암 이삼만(1770-1847), 전주 금재 최병심(1874~1957)의 흔적이 남아 있다.

누각 아래로 사시사철 맑은물이 흐르는데,바위에 부딪쳐 흰 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 하여 <한벽당>이라!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 계곡의 물이 의암·은석 등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과 합류하면서 만마(萬馬)·색장(色長) 등 여러 고을 옆을 거쳐 한벽당 아래로 흘러온다. 여기서 물줄기는 계곡의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거듭 굽이틀어 남천으로 흘러간다.

조선후기의 명인이요 정약용의 제자였던  초의선사가 서울을 가다 이곳 한벽당 아름다움에 빠져 등한벽당을 지었다는 시가 전한다.

시골 사람 옷차림으로 물가의 정자에 다다르니/이곳은 옛날 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지
고요한 계곡 새소리 은근하고/맑은 계곡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그윽하기도 하여라
田衣當水? 云是故王州 谷靜禽聲遠 溪澄樹影幽

바쁜 장사치는 저문 길을 재촉하고/쫙쫙 내린 비에 씻긴 산뜻한 기운
정말로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누각에 올랐으나 어찌 노래하랴
遞商催晩日 積雨洗新秋 信美皆吾土  登臨寧賦樓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寒碧)이라는 어귀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벽당의 서쪽 일대는 자만동(滋滿洞) 또는 옥류동(玉流洞)이라 불리었다. 한벽당서의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削成蒼石稜 倒影寒潭碧"했던 시가 떠오르게 하는 절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던 명재상 사암(思菴) 박순( 朴淳 1523 중종 18∼1589 선조 22)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다시 관직으로 복귀하기 싫어서 눌러 앉았으면 하는 배램이 깊다.

나그네 마음 외로워 아련히 시름이느니 / 앉아서 강물 소리 들으며 누대를 떠나지 않네
내일 또 관로올라 떠나려니 / 흰 구름 붉은 나무 누굴 위한 가을인가
客心孤廻自生愁 坐廳江聲不下樓 明日又登官路去 白雲紅樹爲維秋
정자는 엄격히 말하면 주인이 없다. 그것은 시에서 계속이지고 있기 때문에 머무는 동안 그가 곧 주인이다. 그것이 우리만이 갖는 독특한 문화였다. 눌제 박순(朴淳 1523∼1589) →구원(九畹) 이춘원(李春元 1571~1634 寒碧樓次思庵韻, 寒碧樓嘲二友 寒碧樓別玄洲)→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 1721)로 이어지며 차운했듯이.....

창상의 묵은 자취 흰 구름이 시름한 듯 / 천상 세계 어느 해 옥루 놀이 기억하리
신선 고을 남은 건 오직 물색 그뿐인데 / 청산이라 붉은 잎들 고금 가을 마찬가지
滄桑陳迹白雲愁 上界何年記玉樓 獨有仙鄕餘物色 靑山紅葉古今秋

그리고 풍양 조씨 세도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밝힌  영의정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1782 ~ 1850)이 전라도관찰사를 지낼 때  들리고 시를 남겼다.

寒碧堂消暑。謾次板上韻。時方陳章乞解

碧山環一曲 何似醉翁州 地復臨流勝 人兼出郭幽
控章聊自暇 橫篴澹將秋 歸計空遐矚 斜暉漸入樓

龜姪共黃庭諸幕賓。游寒碧堂。余方憫旱未偕。忡悵無聊。走次板上韻。邀和

湖外遊觀少 玆區擅一州 賓僚皆曠達 水木足淸幽
民食正憂旱 官樽獨負秋 元䂓那可及 猶得上南樓
雲石遺稿卷之二

이렇듯 한벽루는 600여년 동안에 숱한 사연과 애환을 품고있다. 그중에 일화가 전한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에 일부러 창암을 한벽당에서 만나 운필로 서로 화답하는 가운데 “과연 소문대로 명필이시군요(名不虛傳)”라고 하며 감탄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 한번 그를 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되었으므로 창암의 묘비와 비문을 지어 주어 현재 완주군 구이면 잣골의 묘비에 흔적이 남아 있다. 

또  “어느 날 조선 후기 명필로 유명했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 선생이 한벽당에 오르자 부채 장사가 태연히 잠을 자고 있었다. 창암은 부채 장사가 잠들어 있는 동안 모든 부채에 일필휘지로 글을 써 놓았다 한다.

부채 장사가 잠에서 깨 화를 내자 창암이 흐뭇하게 미소를 띠고 당장 남문거리에 가서 부채를 팔아보라고 했다. 부채 장사는 창암의 말대로 남문거리로 나갔고, 부채는 불티나게 팔렸다. 부채 장사가 다시 한벽당에 돌아와 사례를 하려 하자 창암은 한벽당에 머문 바람을 모두 가졌으니 부질없다며 거절했다.” 한다.

그의 필체는 전주 한벽당 옆 참의정의 월당 연못 바위에 새긴 연비어약(鳶飛魚躍) 등 많은 암각서가 있었는데,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매몰되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도 "청풍 한벽루에 올라(登淸風寒碧樓)" 시를 읊은다.

깊은 골 푸른 그늘 자리 옮기니 / 높은 누각 햇살이 차갑구나.
서리 하늘 석벽만 높이 섰는데 / 가을물은 물결만 절로 이누나.
絶峽蒼陰轉 飛樓白日寒 霜天唯石壁 秋水自波瀾

바야흐로 배 타고 지나려면서 / 한가로이 말 세워 구경한다네
사군이여 당신이 부럽구려 / 여기가 다름아닌 선관이로세
正欲乘舟過 聊成立馬看 使君吾羨汝 卽此已仙官

옛날에는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가롭게 노닐던 곳, 각시바우, 서방바우에서는 아이들이 고기잡고 멱감기로도 많이 이용했던 곳, 남원·구례·곡성·순천·진주로 가는 나그네들이 지금의 남천교인 호화로운 오룡교(五龍橋)를 건너면서 그 아름다운 풍치를 감상하던 곳이기도 하다.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강기슭에 물결을 스치는 수양버들이 있어 지나가는 배를 덮었다.'에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기슭 누운 수양버들 금빛으로 단장하고 / 긴긴 가지 나날이 강 빛 함께 푸르러 가
뱃머리에 펼쳐진 봄빛 지금 이러하니 / 한벽루 어귀에도 봄을 막지 못하리라
臥岸垂楊黃嚲金 長條日與綠江深 舟前春色今如此 寒碧樓頭恐不禁

고산 윤선도도 관직생활이 파란했다. 어느날 한벽루에 들려 벽 위의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문신인 주열(朱悅, ?~1287)의 시에 차운하고(次寒碧樓壁上朱文節韻) 떠났다.

천 가지 경치에 사람 눈 번쩍 뜨이고 / 아침에 창을 열면 저녁까지 안개로세.
누가 알았으랴 천지의 맑은 기운을 / 산천이 가져다 여기에 전해 줄 줄을
千般景象醒人眼 晨啓軒窓至暝煙 誰識二儀淸淑意 山川持向此間傳

이렇듯 한벽에 묻힌 사연의 대들보는 무겁기만 하다.

游寒碧堂。謝巡相柳子有 穡 令公。 -조위한(趙緯韓)
留滯周南歲屢更。萍蹤隨處愧身名。偶登寒閣開愁眼。多謝明公慰客情
爛熳笙歌雲欲逗。參差江檻月初生。淸歡此地應須罄。陳迹他年夢一驚

● 過寒碧堂口占。二首。 -이은상(李殷相)
平野連天闊。長川抱郭流。憑軺開睡睫。遙見夕陽樓
豐沛千年境。鸎花萬井春。孤臣歸去路。物色爲誰新

● 寒碧堂三首 在完山南城外 -오시수(吳始壽)
古城東麓訪仙區。細路緣溪步步幽。綺席晴臨平楚闊。丹甍迥出白雲浮
藤蘿咫尺人間隔。嵐靄尋常袖上收。乘興不嫌春日暮。更將殘酒月中遊

何來巨石壓神鼇。上有飛甍百尺高。雲捲暮山濃活畫。雨增春水聽新濤
琴樽月照芳筵靜。簾箔風輕鐵笛豪。八九胸中淸賞愜。却疑塵界接仙曹

豐沛千秋獨此亭。薄陰芳草蘸沙汀。浮榮老去全知幻。遊興春來豈願醒
雨洗鷗波千頃白。雲開螺黛萬重靑。小筵歌吹寬羈抱。莫向樽前歎鬢零

● 寒碧堂。次白江韻。 -이현석(李玄錫)
湖南形勝地。從古說全州。野闊山逾麗。川廻境卽幽
使華將命日。騷士賞心秋。無限羈遊客。斜陽獨倚樓

● 自寒碧堂醉歸燈下。次太學士送寄韻二首。 -이현석(李玄錫)
羈懷宜望遠。醉興不禁狂。仙李分璜派。完山卽故鄕。欲鳴宗國盛 先詑侍臣光。來去渾榮寵。雖勞未足傷。
柳暗桃殘送歲華 一春消息惱詩家 孤吟莫恨芳菲盡 幸是騷仙筆有花

● 寒碧堂。次徵兒韻。 -이해조(李海朝)
觀風衙罷有餘閒。紅燭紗籠倚碧欄。三月欲闌新物色。十年重領舊江山
舞衫掠取花陰轉。歌扇偸來月影團。堪笑東村饞酒客。白頭携妓醉忘還

● 寒碧堂。設酌送人。有賦。 -이해조(李海朝)
風閣難偸半日閒。碧樓絲竹始開顔。興龍舊迹空流水。躍馬遺墟有斷山
四野秋濃霜露後。十年人老去來間。羇懷憭慄猶多感。何况登臨送爾還

● 寒碧堂次壁上韵 -이하곤(李夏坤)
玆亭元勝地。危搆擅雄州。氷薄潭光淨。天陰野色幽
登臨還此日。割據自千秋。醉後開襟好。歸時更北樓

● 次仲容寒碧堂韻 -남극관(南克寬)
鑿翠開朱檻。春風共一憑。回潭偏背郭。石逕好尋僧
秪少漁舟著。何來獨鳥增。且欣諧笑地。京洛舊親朋

● 寒碧堂觀漲。寄湖西伯。조현명(趙顯命)
久旱甘霖趁晩秧。崇朝快注未渠央。晴當載酒行靑野。閒便乘輿上碧堂
積浸南亭橋沒頂。奔濤萬馬洞飜膓。知君觀漲同吾興。拱北樓前錦水長

● 寒碧堂復用回字 -조현명(趙顯命)寒碧千年古。成虧閱幾回。淸流瀉峽出。危堞入雲來。禹斧巉巖斲。垂斤曲折裁。天敎留勝地。詩酒待吾開。再疊高亭臨水逈。細路入林回。峻級攀躋盡。危欄徙倚來。衿紳渾舊識。羅綺捴新裁。數斗榴花釀。今朝許撥開。三疊溪心魚隊出。簷角燕飛回。妙句賓筵得。微香妓席來。巖危從水嚙。雲弱被風裁。最愛欄邊樹。紅將百日開。四疊爲有溪亭約。寧敎五馬回。我方便服出。君莫禮容來。烏帽權宜脫。靑袍准備裁。平生故人酒。襟抱正堪開。五疊檻外游鱗躍。漁磯逐水回。諸君騎馬至。刺史打魚來。吹雪羹驚沸。如絲膾細裁。陶然成一醉。强喜病脾開。右魚獵六疊出沒層潭裡。殆同陸往回。正如投杵落。應欲摘珠來。動植乾坤育。飛潛造物裁。漁僮獨底性。徒手劈波開。右觀潛水七疊叔世無平路。羊膓九曲回。何如拂袖去。深悔按藩來。嚬笑皆招謗。經綸動見裁。人生須一醉。心事對樽開。八疊荊榛塞大道。側逕揔紆回。本欲由心得。云胡出脚來。行藏君子重。狂簡聖人裁。陶老中年退。終能任繼開。九疊投矢壺喉窄。分曺妓陣回。儀從涑水備。聲自竹樓來。遠近宜詳度。高低合妙裁。何由觀揖讓。須向序庠開。右投壺十疊正好臨溪飮。徐當對月回。如斯三日會。無我百年來。逢便詩牋溢。歸頻尺素裁。京華那得此。要路眼難開。十一疊初逢李氏宅。花落小塘回。蓮榜吾同選。蟾宮子後來。蚊山慚弱擔。鷄刃有餘裁。不有萍逢會。那能笑口開。
● 寒碧堂重修記 -조현명(趙顯命)寒碧堂之名於國久矣。己酉。余以奉安使。過宿豊沛館。與李方伯匡德。乘夜肩輿以往。時初月微明。但見山色蒼然四圍。檻外溪聲。泠然滿聽也。其後七年癸丑。余又按節來。乘暇往遊之。槩有削壁臨水而止。○其半腰而堂棲焉。後楹安於壁。前楹則壘高石承之。而檻出虗空。其制作之妙。殆若鬼斧成之。通判具侯聖弼。以屋老傾敗。捐俸鳩工而新之。與萬化,拱辰諸樓。一時董始。不閱月咸告訖焉。所需盖千金云。夫魯縞至薄也。弩不能穿者。力盡故也。本府近凋弊甚。侯又新莅無節蓄。以徒手活數萬飢口。斯已難矣。然侯之力則宜已盡矣。顧又穿過重革。何其能也。斯堂也無異觀。而惟其架○也。故見其工。侯之斯擧也非異績。而惟堂板蕩也。故見其能。夫非韓昌黎所謂因難而見巧者耶。侯本綺紈家。而居官惡衣食。觀其操尙所存。雖山陰一錢。盖將搖手而謝之矣。然則侯之淸政。當與斯堂也爭寒而競碧。豈直因難見巧之爲。相同而已也哉。

● 寒碧堂 -신광수(申光洙)
寒碧堂前水。全州西北來。文章人代異。歌舞送迎催
懷抱憑欄遠。風烟盡野開。浮生情自勝。未免更徘徊

● 寒碧堂十二曲 -신광수(申光洙)
今日不留來日至。來日又去花滿地。人生幾何非百年。寒碧堂中每日醉
一曲
全羅使道上營新。寒碧堂中別看春。借問敎坊誰第一。錦屛紅燭夜來人
二曲
全州兒女學男裝。寒碧堂中劒舞長。轉到瀏漓看不見。滿堂回首氣如霜。
三曲
春城聯袂踏輕埃。寒碧堂中習樂回。齊唱完山新別曲。判官來日壽筵開。
四曲
輭色紅綾時體宜。裁成裙㨾學京師。綺筵催上多羞澁。寒碧堂中對舞遲
五曲
寒碧堂中各官行。現身依例帖子呈。花押着成紅踏印。錢文叄兩作人情
六曲
寒碧堂中夜宴歸。松都估客到多時。又被案前催入直。背人燈下著羅衣
七曲
韓山白苧梨花白。削作雙針衫袖窄。寒碧堂中五月時。風多力弱不堪着
八曲
二十衙客面如玉。奪取銀釵多戱劇。寒碧堂中不肯歸。滿堂明月要人宿
九曲
中營令監夾袖綠。寒碧堂中賭雙陸。少年豪氣勝文官。拋擲粧刀百金直
十曲寒碧堂前曲曲水。闌干臨照如花人。無端打起䲶鴦隊。賺得使君回首嗔。
十一曲
寒碧堂中罷宴曲。黃花亭北春草綠。此地年年多別離。送郞迎郞日不足。
十二曲

● 寒碧堂。觀劒舞。 -남공철(南公轍)
紅粧輕快舞回旋。氊笠風吹罥玉鈿。來去春蛾迷彩燭。浮沉秋燕掠華筵
遲廻下手晴潛電。倐忽回腰霧罷天。共說公孫傳劒器。尙思張旭學書年

● 寒碧堂。與湖南伯拈韻 -윤행임(尹行恁)
輒因名勝少停車。山水由來一部書。澗抱曲城虹飮宛。堂懸走壁鷰巢如
春風澹宕生花際。游子登臨倚酒初。未答君恩成晼晩。不然吾不戀金魚

● 登寒碧堂。次板上韻。 -박윤묵(朴允默)
飛簷出千尺。水榭擅南州。落落中天近。層層特地幽
人間今日酒。溪上四時秋。莫向黃岡問。此中有竹樓
● 寒碧堂歸路。步薑山李尙書壁上韻。癸未。 -홍석주(洪奭周)
塵紱謝久縻。春物集遐想。騶呼雖如雲。神境諒獨往
曾軒倚翠壁水木交淸爽。盈耳滌坌囂。縱目忻散朗
禽聲報天晴。麥苗占歲穰民憂尙在懷。未敢恣勝賞
歸程轉平疇。農謳答遠響。殷勤後來彦。樹政先休養

● 寒碧堂消暑。謾次板上韻。時方陳章乞解。-조인영(趙寅永)
碧山環一曲。何似醉翁州。地復臨流勝。人兼出郭幽
控章聊自暇。橫篴澹將秋。歸計空遐矚。斜暉漸入樓
● 龜姪共黃庭諸幕賓。游寒碧堂。余方憫旱未偕。忡悵無聊。走次板上韻。邀和。 -조인영(趙寅永)
湖外遊觀少。玆區擅一州。賓僚皆曠達。水木足淸幽。民食正憂旱。官樽獨負秋。元䂓那可及。猶得上南樓。
● 寒碧堂聯句 -박영원(朴永元)
城會仍樓集。辰風下客鷰。梧墅。 野瀨灌淸駛。山翠儵昏晛 雲槐。趙秉常。 時靄滁亭樽。座高山陰硯。德隱。尹公圭。 層閣到縈紆。林椒復回戀。秋山。金裕憲。 離俗波堪聽。思詩月顧眄。海夫。卞持淳。 焜晃燭搖紗。丁東漏催箭。梧。 爽朗虗白生。流暎金碧眩。槐。 物態好供眼。形勝此半面。德。 淸漪漾天光。脩薄帶雲片。秋。 角聲魚龍動。村容草樹遍。海。 馬可深谷量。鶯宜崇樹囀。梧。 溪山此爲最。亭障莫或先。槐。吹帽夕風輕。展袖紅娥倩。德。 盃到不自辭。詩成許人擅。秋。 白髮還捫釰。紅妓誰通線。海。 芝蘭席留香。糠粃句慚弁。梧。 樓閣通寒水。笙歌歸夜浣。槐。 燈光塡街纈。嵐氣入袖濺。德。 芳草望逾迷。輕寒睡難倦。秋。 吾伯攬轡夕。且開楊仁扇。海。
● 寒碧堂 -한장석(韓章錫)
驛亭楊柳離思長。落日驅車寒碧堂。馬上送春爲客久。江南幹事索遊忙
綠灣夾澗峰雙角。紅結飛樓水一方。直北鄕關愁不見。白雲回首漢之陽

● 寒碧堂集跋 -곽종석(郭鍾錫)詩文者。心之聲音也。讀其辭而其人可知也。余讀寒碧堂郭公遺藁。而知公之爲恬靖通達忠厚篤實之君子者也。其詩不事雕鏤。直寫性情。辭澹而旨腴。響踈而調高。有若淸廟之瑟。一唱三歎而有餘韻也。其文紆徐容與。不規規於步驟之節。而引物比類。屬意深遠。卒歸之於醇正中和之域。其安宅有誌。四方有解。又皆本之於心學圖象之奧。非苟焉掇拾摹擬以瞞人者。要之是皆爲吉人之辭而大雅之文也。盖公蚤擢科第。歷試郞署。若將大展於亨衢者。而爲親老之不可曠省也。解紱歸養。竭力於溫凊甘毳之職。壬丁之燹。倡義敵愾。勳績頗著。而斂然不伐于色。迨昏朝紊紀。閉門掃跡。簞瓢經籍。囂囂然樂之不倦。苟非明志寡慾。審乎內外之分趣舍之判者。其能此乎。惟如是。故心平志閑。神泰氣舒。而發之聲音。無往不裕如矣。何其偉哉。今去公已三百年所。繁音冗辭。溢于百家。而公之巾衍。十不二三存。惜也。後孫宗昇,仁燮懼其愈久而愈不保也。將繕寫而沐之梨。俾余覈陶陰已。兼求一言于編尾。是不可辭也。謹書此冀世之業詩文者。毋汲汲於辭。而先其心而已也。

● 憶完山寒碧堂 -이의건(李義健)
架岩飛閣壓淸流。滿眼雲山散不收。水色映簷寒闘月。竹凉侵榻颯生秋
綺羅叢裡忘羇旅。絃管聲中任去留。華構亦隨兵燹盡。憶來惆悵卄年遊

● 追憶寒碧堂高會 -구치용(具致用)
仙妓凌波秋水香。畫船歌吹動高蒼。樓頭盡是長纓侶。座上還容短褐行
已任廵觥傳百罰。那妨問月笑千塲。丹梯一下雲重隔。回首奇遊更杳茫

乙亥九月十三夜。陪從舅趙大尹令公。登寒碧堂。坐次近北深處。未見月色
因問人月已出否 滿座笑其昏醉 通判請罰深盃 令公笑而頷之故云

● 寒碧堂雨中 -강대수(姜大遂)
颯爽雨鳴江 依微雲抹嶺 沈吟覓句遲 思在溪橋暝

● 寒碧堂。與府伯叙話。府尹吳汝擴。 -김남중(金南重)
絶岸依山郭 雲端聳畵堂 牎虛涵竹影 楹靜帶川光
魚並銀蓴美 醪兼白飯香 淸遊日日穩 忘却在他鄕

● 寒碧堂。次板上韻。 -홍주세(洪柱世)
百代興王地 山河抱大州 舊聞江閣勝 今見洞天幽
曲檻雲陰夕 虗舟水氣秋 猶嫌未奇絶 更上一層樓

● 題寒碧堂 -박태순(朴泰淳)
斜日肩輿簿領餘 紅亭百尺近州居 閒論莊叟觀魚樂 笑指公孫躍馬墟
山氣送寒侵晩席 水光凝碧漾前除 官醪數盞仍成醉 醉後吟詩信筆書

● 淸明日。題寄寒碧堂。 -조유수(趙裕壽)
北門藩節何時納 南國城功幾月停 縱使王家再修稧 無由徽獻會蘭亭

● 寒碧堂用裌兒韻 -권헌(權攇)
樓舘雄南紀。衣冠盡北州。祥雲眞殿古。壞壁石堂幽
城斷完山樹。天空百濟秋。長安何處在。中夜更依樓

● 寒碧堂全州 -김근행(金謹行)
百尺畫樓蜃噓成 千甍張翼入雲靑 工開石髓山根動 影落潭心水府明
原野平分甄國壘 巖臺指點捴戎城 凮流太守閒無事 盡日笙歌戛畫欞

● 寒碧堂 -김상정(金相定)
谷水應千折 山樓恰五重 梯平承穩步 檻峻豁煩胷
亂樹村容瘦 幽泉壑勢慵 那將巨靈斧 劈此眼中峯

● 全州道中 -김종정(金鍾正)
陰雲垂野鳥喃喃。得雨山光欲放藍。流水浮雲二千里。春風匹馬向天南
其二
全州四月雜花香。燈火家家似漢陽。拾翠佳人爭約伴。水頭屛帳賽龍王 州俗四月八日。設屛帳於水上。相與飮食遊嬉。以祭龍王云。
其三
寒碧堂高流水長。賞春太守綺筵張。貢花自是風流政。却恐村民穡事妨。路逢負花者甚多。以官令採納云。故末句及之。
其四
烏原驛路枕長川。渚草茸茸嶺樹圓。數戶孤村臨野靜。竹扉斜掩落花天。

● 晩上寒碧堂 次板上韵 -임득명(林得明)
倦遊探勝觀。憑檻起遐想。問酒村釀好。一傾氣怡蕩
蒼竹繞畵樓。颼颼集淸爽。長川帶叢薄。吟眸轉昭朗
民物宛京華。秋事亦云穰。風流餘老興。雲山得幽賞
俯聽巖下水。淙潺佩玉響。倘得栖於此。平生足引養

참고문헌=고전번역서. 다산집. 면암집(勉菴集)

참조:현존하는 문학대:효자동 3가 산334 이문정(1357/1824), 오목대 교동의 본산 기슭(1988), 요월정 완산구 교동 전주천가 최유(崔濡) (1404/1986), 아장정 완산구 다가공원 1712/1830, 추천대 덕진구 팔복동 3가 이정호 1899, 취향정 덕진구 덕진공원 박기순 1917, 완산구 동완산동 2가 1970, 풍남문루 완산구 정동 2가 최유경 1734, 풍남정 완산구 동서학동산152 1973,한벽당 완산구 교동 전주천가 1404, 승금정 덕진구 덕진1가 1321-8, 완주군 삼기정 고산면 삼기리 최덕지 1430/1990, 덕진구 덕진동1가 산28 : 조경단<시조 사공공/시조비 경주김씨>덕진구 팔복동 3가 26 : 추천대 완산구 교동 105외4필지 ; 학인당, 완산구 동서학동 2가 210 : 반곡서원,완산구 중화산 1동 196 : 천양정,완산구 평화2동 평화동2가 산 51 : 학소암,완산구 풍남동 3가 102 : 예종태실,완산구 효자4동 3가 295-3 : 황강서원

참조: ►조선의 학자(99명)

계덕해 고형산 곽율 권근 권우 (1363년) 권철신 김건순 김만증 김반 김복한 김성동 (1452년) 김수손 김수온 김숭겸 김시습 김윤식 (1835년) 김조순  김질 (1422년)김질 (1496년) 김창업 김춘택 김충갑 남사고 노사신 민진원 민태호 (1834년) 박성원 (1697년) 박순 (조선) 박은식 박장원 박지화 박태보 박항한 백광홍 서거정 서명응 설순 소혜왕후 송치규 신채호 신호 (여말선초) 심수경 심열 원호 (조선) 유득공 유발 유방선 유신환 유우 (조선) 유자미 유홍기 윤기견 윤동규 윤문거 윤백원 윤순거 윤원거 윤전 윤추 윤효정 이거 (조선 중기) 이극감 이득윤 이사질 이상의 (1560년) 이영 (1493년) 이자 (1480년) 이즙 (1503년) 이지번 이진상  이천 (조선) 이충익 이항복 이행 (조선) 장하 전봉준 정극인 정두경 정렴 정차양 (1424년) 정환덕 정효상 조려 조문명 조성기 (1638년) 조위 (1454년) 조정만 주세붕 진극원 최광옥 최항 (조선) 하홍도 한백겸 허균 허성 허엽 홍경모 (조선) 홍만종 효령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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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최전구 선생의 생가는 지금은 흔적도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나 저의 부친한테 들은 바로는 태생지는 전북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108-1번지(추산마을)에 방 한칸짜리 삿갓집에서 태어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집이 태풍에 무너져서 동소 82번지에서 성장하다 현재 어림 마을로 이사해서 노후를 마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 사진은 어림 마을로 노후를 보낸 집으로 보입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의 얘기를 들은 것이고 지금도 최참봉(추산,어림주민들은 그렇게 칭함)은 추산 출신이라고 합니다. 또한 추산봉 중턱에는 고종 국상 시 한양을 향해서 곡을 했다는 망곡단이 있습니다.





월당 최공 유허비〔月塘崔公遺墟碑〕

      

     
전주부(全州府) 남문 바깥은 계곡과 산이 빼어난데, 발산(鉢山) 남쪽 옥류동에 월당 최공이 남긴 자취가 있다.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에서 이미 몇백 년 지났지만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아직도 선명하여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여전히 손으로 가리키며 탄식한다. 어찌 한 시대에 성대한 영화를 누렸다 해서 그렇게 되었겠는가? 공은 본관이 전주, 이름이 담(霮)으로 연촌(煙村) 선생 덕지(德之)의 아버지이다. 연촌공이 손수 공의 실제 행적을 기록하여 남에게 글을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선군은 지정(至正) 병술년(1346, 충목왕2) 5월 4일에 태어났으며 겨우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셨습니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였고 과거에 응시하여 임인년(1362, 공민왕1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내시(內侍)로 근무하였으며 참관(參官 6품의 관원)에 임명되었습니다. 또 정사년(1377, 우왕3)에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를 모시고 싶은 생각을 견딜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 자식된 도리를 지극히 다하였으며 또 은둔함하여 스스로 즐기기를 좋아하여 벼슬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병자년(1396, 태조5)에 어진 재상에게 천거받아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으로 왕명에 응하였으며, 무인년(1398, 태조7)에 중훈대부(中訓大夫)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임명되었습니다. 경진년(1400, 정종2)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꽃과 나무를 소재로 시를 지으면서 유유자적하였습니다. 병신년(1416, 태종16)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입어 검교 호조참의(檢校戶曹參議)와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을 대할 때는 겸손하고 공손하였습니다. 비할 바 없이 건강하여 팔순이 넘었는데도 말을 탈 때 남의 부축을 받지 않았고 걸어 다닐 때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마을을 두루 돌아다닐 때 손자나 조카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받았으며 마을의 경조사나 환영식과 송별연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일찍이 월당루에서 부백(府伯 부사(府使))을 전별할 때 기생 두 명을 불러 종이를 잡게 하고 즉시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조정에서 물러난 후에 기양(岐陽)으로 돌아가고자 하거든 호남의 한가로운 사람을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갑인년(1434, 세종16) 6월에 병이 들었습니다. 말과 행동거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어 몹시 고통스러운 것 같지 않았는데 그 달 25일에 홀연히 서거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이상이 공의 시종 대략이다. 이른바 정사년(1377, 우왕3)은 황명(皇明) 홍무(洪武) 10년이고, 병자년(1396, 태조5)은 우리 조선이 건국한 지 5년이 되는 해이다.
아, 공은 후한 덕이 있었고 또 맑은 복을 누렸다. 당시의 명승지를 시로 지어 찬미한 것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꾸준히 암송되었던 것은 실로 당연하다. 또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로 ‘광풍제월(光風霽月)’, ‘연비어약(鳶飛魚躍)’ 같은 것은 공의 마음에 담긴 취향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함께 교유한 사람으로는 김절재(金節齋 김종서)ㆍ권양촌(權陽村 권근)ㆍ최만육(崔晩六 최양) 등이니 ‘그 산은 보지 못했으나, 그 나무를 보기 원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이 광지(匡之), 차남이 직지(直之)인데 모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냈으며, 삼남이 득지(得之)로 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을 지냈다. 막내가 연촌으로 순후한 덕행과 고상한 절조로 세종과 문종 양조의 명신이며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증손 이하로서 문관 무관으로 현달한 자가 매우 많으며, 유문(儒門)에 종사하여 의리를 행하여 명성이 드러난 자가 또 한 둘이 아니다. 시를 찬양하는 서문에서 이른바 “적선여경(積善餘慶)의 진리”라고 한 것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유허지는 남의 소유가 된 지가 오래되어 공의 여러 후손이 힘을 합하여 다시 취하였다. 비석을 세워 기록하려고 나를 찾아와 글을 요구한 사람은 관석(觀錫)과 겸석(謙錫)이다. 나는 조상을 위하는 그들의 정성스런 마음에 감동하여 글재주가 형편없다고 사양하지 않고 대략 이와 같이 쓴다.

강제집 송치규 선생
 23대 할아버지 휘 담  호조참의공
全州府南門外。溪山擅勝。鉢山之陽玉流洞。有月塘崔公遺墟。今去公之世已累百年矣。而巖臺諸刻。尙宛然。人之過之者。猶指點而咨嗟。夫豈一時繁華之盛。有以致然哉。公全州人。名霮。煙村先生德之之考也。煙村公手錄公實蹟。求文字於人。有曰。吾先君生於至正丙戌五月四日。甫九歲而孤。性好學。擧業中司馬試於壬寅。仕內侍。拜參官。又中丁巳文科。不勝將母之念。退于桑鄕。子職極修。而仍喜遯自樂。不求宦達。丙子。爲賢相所薦。以奉常少卿應命。戊寅。拜中訓知珍州事。庚辰。解組還鄕。日以花木詩句爲事。而優遊自適。丙申。蒙優老恩。陞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又曰。接人謙恭。康強無比。八旬以後。騎馬無人扶持。徒步無杖提携。而遍行鄕閭。遇孫姪輩。亦下馬受禮。而鄕中慶弔迎餞。無不與焉。嘗餞府伯于月塘樓上。呼兩妓執紙。立書一絶。有願入岐陽朝罷後。湖南須記一閒人之句。甲寅六月。得疾。言語動止。無異平日。似不極苦。以其二十五日。倏然而逝。此其始終大略。而所謂丁巳。皇明洪武十年。而丙子。我朝受命之五年也。嗚呼。公旣有厚德。復享淸福。當時名勝。多作詩讚頌之者。其爲後人之所誦說不衰。固宜矣。且巖臺諸刻。若光風霽月。鳶飛魚躍。公之襟懷意趣。有足以想像者。而所與遊。是金節齋,權陽村,崔晩六諸公。則又豈非不見其山。願見其木者耶。公有四男長匡之。次直之。皆集賢直提學。次得之。典農少尹。季卽煙村。以淳德高節。爲世文兩朝名臣。官藝文直提學。孫曾以下。以文武官顯者甚多。而從事儒門。行義著稱者。又非一二。則讚詩序所謂積善餘慶之正理者。信不誣矣。遺墟久爲他人所有。公諸後孫。合力還取之。而將立石以識之。來求余文者曰觀錫謙錫也。余感其爲先之誠意。不以蕪拙辭。而略書之如此云。




면암선생문집 제20권 / 기(記)

한벽당 중수기(寒碧堂重修記)

      
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에 월당(月塘) 최공 담(崔公湛)이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오니, 공의 아들 연촌 선생(烟村先生) 휘(諱) 최덕지(崔德之)도 얼마 후 공을 뒤따라 물러났다. 그리하여 부자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강호에서 늙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청절(淸節)에 감복하여 옛날 소광(疏廣)ㆍ소수(疏受)에 비유하였다.
지금 전주부(全州府)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이곳은 월당공(月塘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鳶飛戾天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魚躍于淵
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공의 필적이라 한다.
공의 15세손 최전구(崔銓九)가 한벽당을 중수한 뒤에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기문 쓰는 문제를 상의해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선조의 집이 낡으면 자손들이 보수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이니 말할 것이 못 되며,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의 아름다움이나 풍연(風烟)과 운물(雲物)의 경치에 대한 것은 이 당에 오르는 자가 직접 목격할 것이므로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후인의 천박한 식견으로 수백 년 전의 일을 놓고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참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직 사군자(士君子)가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은퇴하는 대의(大義)는 예나 지금이 다름없는데, 그 현조(賢祖)의 자손을 대하고 어떻게 묵묵히 있겠는가.
대체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장년이 되어 벼슬하여 늙어서 물러나는 것은 예경(禮經)의 밝은 교훈이요 상물(常物)의 대정(大情)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세리(勢利)에 급급하고 높은 관작에 연연하여 물러나지를 못한다. 혹 물러났다 하더라도 맛있는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던 끝이라서 담박한 음식을 싫어하고 옛날 호화롭던 것을 회고하여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한숨 쉬며 애통하여 스스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이런 사람이 어찌 다시 물러남이 십분 시의(時義)임을 알아서 유감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벼슬에 나아가면서 나아감을 사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행할 만한 도가 있는 자요, 물러나면서 물러남을 편안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견고한 내수(內守)가 있는 자이다.
아조(我朝)의 세종(世宗)ㆍ문종(文宗) 연간은 문명한 시대로 성인이 위에 있어 만물이 모두 우러러 준량(俊良)의 등용이 이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호연히 물러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절조가 높고도 밝아서 봉황(鳳凰)이 천길을 나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세 후에 오히려 사람을 흥기시킬 만한 것이 있다. 만일 그가 자잘하게 작은 청렴이나 삼가는 데 힘써서 어치렁거리며 세속의 이목에 잘 보이려고 분주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당대에 이름이 나서 이처럼 후세까지도 무궁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본다면, 공의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이 진실로 이 당(堂)으로 해서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인들이 보고 느끼며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당이 아니고는 부칠 곳이 없으니, 이 당의 중수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 削成蒼石稜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 倒影寒潭碧
라는 시구가 있으니,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주-D001] 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 : 
영락은 명 성종(成宗)의 연호이며 경태(景泰)는 명 경종(景宗)의 연호인데, 서기 1403~1457년 사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한벽당은 태종 4년(1404)에 최담이 낙향하여 세웠다는 전주읍지(全州邑誌)의 기록이 있다.
[주-D002] 소광(疏廣)ㆍ소수(疏受) : 
소광은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으로, 태자 태부(太子太傅)가 되고, 조카인 소수는 소부(少傅)가 되었는데, 광이 수에게 말하기를 “벼슬이 높고 이름이 떨치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한다.” 하고 둘이 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漢書 卷71 雋疏于薛平彭傳》


병오년(1906, 광무 10) 선생 7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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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초하루는 무술 21일(무오)에 가묘(家廟)를 하직하고 가솔들과 작별한 후 창의(倡義)할 계획을 실행하려고 호남(湖南)을 향해 출발하였다.
작년 겨울 국변(國變) 이후로 선생은 왜적에게 저지되어 상경하지 못하였는데, 얼마 후에 송연재(宋淵齋 송병선(宋秉璿)) 공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마련하여 통곡하며 이르기를,
“제공(諸公)이 인기(人紀)를 부식함은 진실로 나라의 빛이 되나, 사람마다 죽기만 하면 누구를 의지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인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합치고 힘을 뭉쳐 불에서 구해 내고 물에서 건져 내는 것처럼 서둘러야지 일각도 잠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결정하고, 판서 이용원(李容元), 판서 김학진(金鶴鎭), 관찰 이도재(李道宰), 참판 이성렬(李聖烈), 참판 이남규(李南珪),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나아가 국난 구할 것을 권하였으나 모두 호응하지 않았다. 선생은,
“함께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내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궁박하여 갈 곳이 없다.’는 말과 같다.”
탄식하였다. 고석진(高石鎭)이 고하기를,
“태인 사람 임병찬(林炳瓚)이 일찍이 갑오년에 비적(匪賊)을 토벌한 공이 있어 충의(忠義)를 믿을 만하니, 이 사람과 함께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즉시 문인 최제학(崔濟學)을 보내어 편지로 뜻을 알렸더니, 임병찬은 선생의 뜻을 따르기를 원한다는 회답을 올렸다.
호서(湖西)의 선비 안병찬(安炳瓚)이 와서 아뢰기를,
“호우(湖右 충청도)의 유신(儒紳)들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盟主)로 추대할 것을 원하고 있으니, 즉시 행차하기 바랍니다.”
하니, 선생이 승낙하였다. 얼마 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주(洪州)에서 의기(義旗)를 들었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며 말하기를,
“이미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갈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의 사졸(士卒)은 훈련되지 않았고, 병기도 예리하지 못하니, 반드시 각도와 각군이 세력을 합치고 주장이 일치된 뒤라야 거사가 성공할 수가 있다. 내가 남하(南下)하여 영남ㆍ호남을 경동(警動)하여 호서와 서로 성원(聲援)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마침, 곽한일(郭漢一)ㆍ남규진(南奎振)이 칼을 갖고 와서 뵈었다. 선생이 곽한일에게 말하기를,
“호서의 일은 내가 그대에게 부탁한다. 그대는 남규진과 함께 민중의 뜻을 격려하여 빨리 군사를 일으켜 영남ㆍ호남과 함께 기각(掎角)의 형세가 되도록 하다가 만일 여의치 못하면 그대도 남하하여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성명을 도장에 새겨 주어, 사방의 군사를 불러 모으고 군중에 명령하는 데에 모두 이것을 사용하게 하고, 또 격문(檄文)과 ‘존양토복(尊攘討復)’이란 기호(旗號)도 주니, 곽한일과 남규진은 자기들대로 가서 거사(擧事)하였다. 뒤에 곽한일과 민 참판이 홍주에서 합세하여 적을 베고 사로잡는 공이 있었는데 홍주가 패하자 곽한일이 선생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마침 선생도 패한 때여서 돌아가서 다시 거사를 계획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민 참판과 함께 사로잡혀 지도(智島)로 귀양 가고, 남규진도 마도(馬島)에 구금되었다가 뒤에 모두 방환(放還)되었다.
선생은 또 문인 이재윤(李載允)에게 편지를 보내어 북쪽 청 나라에 들어가 구원을 청하게 하고, 오재열(吳在烈)에게는 사졸과 병기를 수습하여 운봉(雲峰)을 지키면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최제학(崔濟學)과 출발하여 임천(林川) 남당진(南塘津)을 건너 태인(泰仁) 종석산(鍾石山)에 이르러, 임병찬의 처소에 머물렀다. 병찬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거상(居喪)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병찬에게 검은 상복으로 군무에 종사하도록 명령하여, 군사 모집과 군량(軍糧) 저장 및 군사 훈련하는 일을 모두 맡겼다.
○ 어떤 사람이 선생의 거사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국가에서 양사(養士)한 지 5백 년에 기력을 내어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의(義)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내 나이가 80에 가까우니 신자(臣子)의 직분을 다할 따름이요, 사생(死生)은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문인 이정규(李正圭)를 보내어 편지로 처의(處義)의 방법을 묻자, 선생은 남북이 서로 호응하여 힘을 모아서 적을 토벌하자는 뜻을 써서 보냈다.
문인 조재학(曺在學)ㆍ이양호(李養浩)가 영남에서 왔는데, 선생은 모두 영남으로 돌아가서 사민(士民)을 격려하여 응원하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영우(嶺右) 각처에도 편지를 보냈다.
이때에 선생은 진안(鎭安)의 촌가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거처하는 집 지붕 위에 흰 기운이 두 번이나 하늘에 뻗쳐서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윤4월초하루는 정묘 13일(기묘)에 태인(泰仁)에 머무르면서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알하고 여러 문생들을 거느리고 강회(講會)를 하고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疏)를 올렸다.
상소문의 대략에,
“신이 생각건대, 옛날의 인신(人臣)으로 나라가 망하려는 때를 당하여, 나라를 떠난 사람이 있으니 상(商) 나라 미자(微子)가 그러하며, 죽은 사람이 있으니 명(明) 나라 태학사(太學士) 범경문(范景文) 등 40여 인이 그들이며, 뜻을 국권 회복에 두어 거의하여 적을 토벌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있으니, 한(漢) 나라 책의(翟義)와 송(宋) 나라의 문천상(文天祥)이 이들입니다.
신은 불행히도 오늘날까지 살아서 이러한 변을 보았는데, 이미 떠나갈 곳과 의리(義理)가 없으니, 오직 입궐하여 소를 올리고 폐하(陛下) 앞에서 머리를 부수어 스스로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니 공연한 헛소리로 떠드는 것이 다만 실상이 없는 글이 될 것이며 또 인심이 아직도 국가를 잊지 않음을 보았으니 스스로 헛되이 죽는 것도 경솔한 행동이옵기에, 참고 견디면서 약간의 동지와 함께 책의(翟義)ㆍ문천상(文天祥)이 의병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일을 계획한 지 4, 5개월이 되었습니다.
다만, 신은 본디 재능과 지모(智謀)가 없고 더구나 늙고 병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모의하는 즈음에 형세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니, 이 때문에 시일이 늦어짐을 면하지 못하여 앉은 채로 세월만 허비하였습니다. 지금 이 계획이 조금 정하여졌고 인사(人士)도 조금 모여, 이달 13일에 전(前) 낙안 군수(樂安郡守) 신(臣) 임병찬(林炳瓚)에게 먼저 의기(義旗)를 세워서 동지들을 권장하고 격려하여 차례로 북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등박문(伊藤博文)ㆍ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등의 왜적들을 부르고, 각국의 공사ㆍ영사와 우리 정부의 제신(諸臣)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하여 담판을 열어서 작년 10월의 늑약(勒約)을 거두어 취소하고, 각부(部)에 있는 고문관(顧問官)을 돌려보내고, 우리의 국권을 침탈(侵奪)하고 우리 생민(生民)을 해롭게 하는 전후의 모든 늑약은 모조리 만국의 공론에 회부하여, 제거할 것은 제거하고 고칠 것은 고쳐서 국가는 자주의 권리를 잃지 않고, 생민은 어육(魚肉)의 화를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본시 힘과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민중을 움직여서 힘센 적과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처지에서 한때의 목숨을 다투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재앙을 뉘우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에게 짓밟히는 화를 당한다면, 신도 달게 죽음을 받아 여귀(厲鬼)가 되어 원수를 말끔히 쓸어버릴 것을 기약하며, 그들과는 천지 사이에서 함께 살지 않겠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들의 노예되기를 좋아하여 대의(大義)를 원수처럼 여기고, 앞을 다투어 역도(逆徒)라는 이름을 씌워 훼방하는 자는 신이 진실로 불쌍히 여길 겨를조차 없습니다.”
하였다.
○ 선생은 남하하여 글로 영남과 호남 각처에 통고하여 모여서 거사를 논의하게 하였으나, 평소에 큰소리를 잘하고 서로 함께 약속한 사람들도 모두 두려워서 피하고 선뜻 오지 않고, 다만 문인 10여 명과 주야로 경영할 뿐이었다. 그러나 병기와 군량이 하나도 갖추어진 것이 없어서, 임병찬(林炳瓚)은 가을을 기다려 거사하려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는 데다가 국사는 날로 급하니, 이처럼 시일을 늦출 바에야 도리어 궁궐에 달려 들어가서 죽는 것이 더 낫겠소.”
라고 말하고, 마침내 즉시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날 태인(泰仁)에 도착하여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알하였다. 여러 문생들을 모아서 강(講)을 마치고, 선생이 가운데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왜적이 나라를 도둑질하고 역신(逆臣)이 장난을 하여, 5백 년 종사(宗社)와 삼천리 강토가 이미 망할 처지에 이르렀다. 임금은 우공(寓公)의 욕을 면하지 못하시고, 생민은 모두 어육의 참화에 빠졌으니, 나는 구신(舊臣)의 한 사람으로 정말로 차마 볼 수가 없소. 종사와 생민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힘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천하에 펴고자 하니 성패와 이해는 예견할 수는 없으나, 진실로 내가 전심(專心)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생각하고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천지신명이 도와서라도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소. 나와 종유(從遊)하는 제군은 나와 생사를 같이할 수 있겠소?”
하자, 문생들은 모두 좋다고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비상(非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두어야 하고, 또 군사(軍事)에 종사하는 일은 사지(死地)이므로 쉽게 말할 수가 없으니, 제군은 다시 생각을 더하여 후회하지 말도록 하오.”
하니, 문생들은 모두 죽음으로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과 한자리에 모인 사람 80여 명이 향교에 들어가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뜻을 선성(先聖)에게 고유하고, 곧이어 고을의 부로(父老)를 불러 대의를 일깨우니, 고을 안이 모두 기꺼이 호응하였다. 흥덕(興德)의 선비 고용진(高龍鎭) 석진(石鎭)의 형 은 포사(砲士) 강종회(姜鍾會) 등 30여 명을 거느리고 군세(軍勢)를 도왔다.
드디어 정읍(井邑)ㆍ순창(淳昌)ㆍ곡성(谷城)에서 군사를 모으니, 4, 5일 동안에 원근에서 부의(赴義)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고, 군량과 병기도 대략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임병찬(林炳瓚)ㆍ김기술(金箕述)ㆍ유종규(柳種奎)ㆍ김재귀(金在龜)ㆍ강종회(姜鍾會)ㆍ이동주(李東柱)ㆍ이용길(李容吉)ㆍ손종궁(孫鍾弓)ㆍ정시해(鄭時海)ㆍ임상순(林相淳)ㆍ임병인(林炳仁)ㆍ송윤성(宋允性)ㆍ임병대(林炳大)ㆍ이도순(李道淳)ㆍ최종달(崔鍾達)ㆍ신인구(申仁求)에게 명하여 여러 임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 격문(檄文)을 여러 군(郡)에 급히 보내었다.
격문에 이르기를,
“난적(亂賊)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어느 것이 오늘의 역괴(逆魁)와 같았으며, 이적(夷狄)의 화가 어느 나라인들 있지 않았을까마는 어느 것이 오늘날과 같았겠는가. 즉시 거의(擧義)할 것은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건대, 우리 조선은 기자(箕子)의 옛 강토이며 요(堯)의 동쪽 번방(藩邦)으로서, 태조(太祖) 이래로 여러 성군(聖君)이 대를 이어 공자의 도를 숭상하고 여러 현인이 번갈아 나서, 임금과 신하가 그 도리를 다하여 이륜(彛倫)이 돈독하게 펴졌으며 지위가 높은 이를 높이고 귀한 이를 귀히 여겼다. 그리하여 예절과 문물이 널리 밝아져 집집마다 인의(仁義)와 효제(孝悌)를 행하여, 모두 유학을 숭상하고 도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녔다.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의(義)를 방패로 삼아서,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親愛)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을 뜻이 있어서, 민속(民俗)이 밝고 여유가 있었으니,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융성한 시대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문물(文物)이 발전하여 오랫동안 소화(小華)의 아름다움으로 불리었다.
한번 사교(邪敎)가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드디어 온 천하가 비린내로 더럽혀졌으나, 홀로 우리나라는 동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편토(片土)를 건정(乾淨)하게 보전할 수 있었으니, 박괘(剝卦)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 하겠다. 그러나 누가 장차 화가 닥쳐서 다만 머리 위의 상투가 있는 것으로써 홀로 천하의 모든 화살의 과녁이 될 것을 생각하였겠는가.
아, 저 왜적은 실로 우리나라 백세의 원수이니, 임진란에 두 능의 화[二陵之禍]를 차마 말하겠으며,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은 다만 외적이 엿보는 계기를 만들었고, 맹세한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협박의 근심이 바로 이르렀다.
우리의 궁금(宮禁)을 짓밟고, 우리의 도망자를 품에 안아 기르고, 우리의 인륜 도덕을 파괴하고, 우리의 의관을 찢어 버리고, 우리의 국모를 시해(弑害)하고, 우리 임금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우리의 대관(大官)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민중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우리의 무덤을 파고 집을 헐고, 우리의 강토를 점령하여 빼앗고, 우리 국민의 목숨이 달려 있는 자원은 무엇이든 그들이 장악(掌握)한 물건이 아닌가. 이제는 그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갈수록 욕심을 낸다.
아, 지난 10월의 소행은 진실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하룻밤 사이에 종이 조각에 도장을 억지로 찍어서 5백 년 종사(宗社)가 드디어 망하니, 천지의 신이 놀라고 조종(祖宗)의 영혼이 슬퍼한다.
나라를 들어서 원수에게 준 역적 지용(址鎔)은 실로 우리 동방의 영원한 원수요, 그 임금을 시역(弑逆)하고 남의 임금을 범한 괴수 이등(伊藤)은 천하의 열국(列國)이 함께 토벌하여야 한다. 누대(累代)의 세신(世臣)은 바로 이때가 자방(子房)처럼 원수를 갚을 때인데, 왕실의 지친(至親)은 어찌 북지왕(北地王)의 성(城)을 등지고 싸우자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가? 수실(秀實)의 홀(笏)은 마땅히 주자(朱泚)의 얼굴을 쳐야 했고, 고경(杲卿)의 지위가 어찌 녹산(祿山)이 준 것을 영광으로 여겼겠는가.
변을 만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으나, 적을 토벌하는 자가 어찌 한 사람도 없는가. 임금이 망하였는데 신하가 어찌 홀로 살 수 있으며, 나라가 패망하였는데 백성이 어찌 홀로 보전될 수 있겠는가. 불타는 대청 위의 참새와 가마솥에 든 생선은 함께 망할 뿐이니 어찌 한바탕 싸우지 않겠는가.
또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죽어서 충의(忠義)의 넋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
최익현(崔益鉉)은, 나이는 죽음이 가까웠고 병은 깊고 재능과 힘은 미약하여 작은 정성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비록 사로잡히는 수치를 당하였으나 숨이 아직 있으니 보복할 뜻을 잊기 어렵다.
그러나 큰 집[大廈]이 무너지는데 어찌 한 개의 나무가 지탱할 것이며, 맹진(孟津)이 넘치는데는 한 줌의 흙으로 막지 못한다. 시중(市中)에 들어가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라.’고 하면 반드시 시중 사람이 왕손(王孫)에게 따랐고, 서경(西京)에서 거병(擧兵)하니 누가 책의(翟義)를 도리어 쳤겠는가.
모든 우리의 종실ㆍ대신ㆍ공경(公卿)ㆍ문무(文武)ㆍ사농공상ㆍ서리ㆍ하인들까지도 무기를 가다듬고 마음과 힘을 한군데로 모아서, 역당(逆黨)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며, 원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씨를 없애고 그 소굴을 두들겨 부수자.
천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으니, 국세를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고, 위험한 고비를 바꾸어 편안하게 만들어서 인류를 도탄(塗炭)에서 건져 내자. 믿는 바는 군사(軍士)이니 다만 적이 힘이 센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히 이에 격문을 돌리니 함께 나라를 구하기에 힘쓰자.”
하였다.
○ 일본 정부에 글을 부쳐서 신의를 저버린 16가지 죄를 따졌다.
그 대략에,
“아, 나라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신(信)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사람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은 다만 완고(頑固)한 늙은이의 평범한 말이 아니다. 또한 개화하여 경쟁하는 열국(列國)이라도 이것을 버리면, 아마도 세계 안에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우리 대관(大官) 신헌(申櫶)과 윤자승(尹滋承)이 귀국 사신 흑전청륭(黑田淸隆)ㆍ정상형(井上馨)과 강화부(江華府)에 모여서 약정한 제1조에 ‘조선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이 뒤 화친(和親)의 실상을 나타내려면 모름지기 피차가 서로 동등한 예로써 서로 대우해야 한다. 그러므로 추호도 침범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어야 하니, 먼저 예전부터 외교하던 실정을 저해하는 근심을 가져올 모든 예규(例規)를 모두 혁파하여 영원히 신의를 지킨다.’고 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청국(淸國) 사신 이홍장(李鴻章)과 귀국 사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마관(馬關)에 모여서 약정한 제1조에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양국이 분명히 인정하며 추호도 침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명치(明治) 37년(1904, 광무 8)의 일본과 러시아의 선전 조서(宣戰詔書)에도 ‘한청(韓淸) 양국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구절이 있다. 또 귀국이 러시아에 대하여 국제 공법을 위반하였다고 열국(列國)에 통첩한 변명서에도 ‘원래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보존하며 유지시키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사신을 서구(西歐)에 파견하여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데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후 30년 동안에 귀국의 군신(君臣)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맹세한 바와 천하에 성명(聲明)한 것이, 우리의 토지와 인민을 침범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를 해치지 않는 것을 책임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천하의 열국(列國)도 한일(韓日) 두 나라는 순치(唇齒)의 나라로 서로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서로 침해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국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흉포(凶暴)를 행하는 방법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무엇이든지 신의를 배반하였다. 전에는 ‘조선은 독립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保有)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우리를 노예로 삼는가. 전에 러시아와 전쟁을 할 때,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는데, 지금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빼앗아 가는 것은 어째서인가. 전에는 서로 간절하게 침범하거나 시기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오로지 침탈(侵奪)을 일삼아서 우리 2천만 국민의 복수심을 일으키게 하여 앉을 때 동쪽을 향하지 않게 만드는가. 전에는 조약을 변경할 필요없이 영원히 신의를 지키고 화평을 유지하는 바탕으로 삼았었는데, 지금 조약을 변경하여 신의를 저버리고 화평을 깨뜨려서 하늘을 속이고 신(神)을 속였으며, 또 천하의 열국(列國)을 속였다. 이유를 들어 증명하겠다.
갑신년(1884, 고종21)에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난을 일으켜 우리 황제를 강제로 옮기고 우리의 재상을 살육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하고 저버린 죄의 첫째이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대조규개(大鳥圭介)가 난을 일으켜 우리의 궁궐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으며 우리의 재물을 탈취하고 우리의 전장 문물(典章文物)을 훼손시켜 버리면서 우리나라를 독립시킨다고 일컫는데, 훗날에 빼앗고 점령할 터전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둘째이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삼포오루(三浦梧樓)가 변란을 일으켜 우리의 왕후를 시해하였으니 만고에 없는 대역죄가 되는데 오로지 도망하는 역적을 덮어 주고 감싸기를 일삼아 한 놈도 잡아 보내지 않았으니, 대역무도(大逆無道)하였다. 이것은 다만 신의를 배반하였을 뿐만 아니니, 죄의 셋째이다.
임권조(林權助)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우리나라에 와서 주재하면서 협박하고 겁탈한 일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각처에 철로를 부설(敷設)한 것이니, 경의선(京義線) 철로는 처음부터 통고도 없이 마음대로 한 짓이고, 어채(漁採 고기 잡이)와 삼포(蔘圃)의 이익, 광산과 항해의 권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크나큰 한 국가의 재원(財源)의 바탕인데 남김없이 빼앗아 갔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넷째이다.
군사(軍事)를 핑계하여 토지를 강점하며 인민을 침해하고, 무덤을 파내 버리며, 가옥을 헐어 버린 것은 그 수를 알지 못한다. 정부에 권고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비루(鄙陋)하고 패역(悖逆)한 무리들을 지지하여 벼슬을 주도록 강요하였고, 뇌물을 드러내 놓고 받아서 더러운 소문이 낭자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다섯째이다.
철도, 토지, 군율(軍律)이라는 것은, 용병(用兵)할 때에는 군용(軍用)을 빙자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지금 전쟁이 이미 끝났는데 철도는 어찌하여 돌려줄 생각을 않으며, 토지는 전처럼 강점하고 군율을 전처럼 시행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여섯째이다.
우리의 역적 이지용(李址鎔)을 꾀어 의정서(議定書)를 강제로 만들어서 우리의 국권을 바꾸게 하고는, 그 속에 ‘대한 독립’과 ‘영토 보전’이라 말한 것은 제쳐 놓고 논의조차 하지 않았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일곱째이다.
사대부와 유생이 전후로 상소를 올린 것은, 모두 우리 임금에게 아뢰고 우리나라에 충성한 것인데, 바로 포박(捕縛)하여 오랫동안 가두어 두었고, 심지어는 죽이거나 석방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충언(忠言)하는 입을 막고 공론(公論)을 억제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국세가 혹 떨칠까 두려워하는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여덟째이다.
우리의 동학(東學)이나 도적의 무리들과 같은 패역(悖逆)한 자를 꾀어서 일진회(一進會)라고 이름하고 그들을 창귀(倀鬼)로 만들어서 선언서(宣言書)를 만들게 해서 민론(民論)이라고 빙자하고 국민의 의로운 일로 여기며, 보안회(保安會)와 유약소(儒約所) 같은 것은 치안을 방해한다고 갖은 방법으로 저해하여 포박하고 구금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아홉째이다.
역부(役夫)를 강제로 모집하여 소에게 채찍질하고 돼지를 몰아치듯 하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면 풀이나 왕골을 베듯 죽였고 또 어리석은 국민을 꾀어 모아서 멕시코[墨西哥]로 몰래 팔아넘겨서 우리 국민의 부자 형제가 서러움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 없고, 학대를 받아 거의 죽게 되어도 돌아올 수 없게 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째이다.
전우(電郵 전보사(電報司)ㆍ우체사(郵遞司))의 두 기관을 강탈하여 통신기관을 장악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한째이다.
각부(部)에 고문관을 강제로 두고 후한 봉록을 먹으면서, 오로지 우리를 망하게 하고 우리를 전복시키기를 일삼는데, 군경(軍警)의 경비를 감액하고 재부(財賦)를 탈취함과 같은 것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둘째이다.
차관(借款)을 한두 번 억지로 쓰게 하고 명목은 재정 정리라고 하면서 새로 만든 돈의 색깔과 무게가 예전 돈과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돈의 수효만 갑절로 할 뿐이니, 스스로 많은 이익을 취하여 일국의 재정을 고갈(枯渴)시켰으며, 또 유통되지 못하는 종이 조각을 원위화(元位貨)라고 억지로 이름을 붙였다. 또 차관은 이름뿐이고 미리 이식(利息)을 취하였고, 고빙(雇聘)은 이름뿐이고 미리 후한 봉록을 먹으면서 우리의 정혈(精血)을 빨아먹고 썩은 껍질만 남기려고 힘쓰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셋째이다.
작년 10월 21일 밤에 박문(博文)ㆍ권조(權助)ㆍ호도(好道) 등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안팎으로 포위하고 정부를 위협하여 억지로 조약을 만들고, 스스로 가부(可否)를 결정하였으며 인장을 빼앗아서 마음대로 찍고는 우리나라 외교를 옮겨 통감(統監)에 설치하여 우리의 자주 독립 권리를 하루아침에 잃게 하고, 오히려 위협이라는 여론을 숨겨서 만국의 이목(耳目)을 호도(糊塗)하려고 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넷째이다.
처음에는 외교의 감독이라고만 말하더니, 마침내는 한 나라의 정법(政法)을 전담하여 관리하고 거기에 따르는 관리가 수없이 와서, 우리의 손도 까딱 못하게 하며, 걸핏하면 곧 공갈(恐喝)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다섯째이다.
요사이 또 이민 조례(移民條例)를 만들어서 승인하도록 강요하는데, 인종을 바꾸는 흉칙한 계획으로서 우리 국민을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천지도 용납하지 못할 극악한 대죄의 열여섯째이다.
아, 귀국이 신의를 저버린 죄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겠는가. 이것은 그 대강을 들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시험 삼아 이 열 대여섯 가지의 죄로써 강화(江華)ㆍ마관(馬關) 등의 조약, 열국에게 보낸 통첩과 전쟁을 설명한 여러 문서에 비추어 보면 반복 무상함이 여우와 원숭이가 속임수를 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 한국의 수천만 인심이 과연 귀국에 대하여 유감없이 이것이 우리를 지지하고 우리를 공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마음 아파하고 골치를 앓으면서 삼호(三戶)의 말을 외치며 귀국의 온 섬[全島]을 한 번 짓밟고자 맹세할 것인가. 진실로 귀국을 위한 계책은 빨리 근본을 되찾는 것밖에 없으며,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또 신(信)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밖에 없다.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히는 일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빨리 이 글을 귀황제에게 상주(上奏)하여 이상에서 열거한 열여섯 가지 큰 죄를 모두 회개할 것이니, 통감(統監)을 철수하고, 고문과 사령관을 소환하고, 다시 충신(忠信)한 사람을 파견하여 공사(公使)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 이것으로 각국에 사죄하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 양국이 진정 영원히 서로 편안하게 된다면, 귀국은 거의 안전의 복을 누릴 것이고, 동양의 대국(大局)도 유지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것이 천도(天道)의 분명한 이치인데, 지금 귀국이 하는 짓은 제 민왕(齊湣王)과 송 언왕(宋偃王)과 다를 것이 거의 없으니, 설사 이후에 화패(禍敗)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귀국이 어찌 스스로 망하는 것을 면하겠는가?
나는 시세(時勢)는 모르나 국가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며,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히는 도리를 강론함에는 익숙하다. 국가와 인민의 화가 망극한 형편에 이르렀음을 눈으로 보고 오직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 불행히 지난봄에 욕을 당하고도 죽지 못하였고, 또 작년 10월 21일의 변을 당하였으니, 타국의 노예가 되어 구차하게 천지 사이에서 생을 탐낼 의리가 없다.
그래서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죽을 것을 결의하고 병든 몸으로 상경하여 박문(博文)ㆍ호도(好道) 등과 한 번 만나서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하고 죽으려고 한다. 사민(士民)으로 함께 죽기를 원하는 자가 또 약간 있어서, 먼저 마음을 피로(披露)하여 이 글을 만들어 귀국의 공사관에 보내어 머지않아 귀국의 정부에 전달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를 위한 계획일 뿐만 아니라 귀국을 위한 계책이며, 귀국을 위한 계책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양 전국(全局)을 위한 계책이니 살피기 바란다.”
하였다.
○ 14일(경진)에 행군하여 정읍(井邑)에 도착하여 내장사(內藏寺)에서 잤다.
○ 15일(신사)에 순창(淳昌)에 도착하여 구암사(龜巖寺)에 주둔하였다.
○ 17일(계미)에 곡성(谷城)에 도착하여 글을 지어서 호남의 각 고을에 고하였다.
○ 19일(을유)에 군사를 이끌고 순창으로 돌아갔다.
이때에 첩자가 와서 왜병 10여 명이 방금 군아(軍衙)에 들어가서 외인을 물리치고 군수 이건용(李建鎔)과 밀담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선생은 임병찬(林炳瓚)에게 일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샛길로 가서 습격하도록 명하였다. 왜병이 기미를 알고 크게 놀라 빠져나가 산을 기어올라 도망쳤다. 임병찬이 뒤쫓았으나 따르지 못하고 왜병이 버린 문서를 얻었는데, 그것은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건용에게 왜병을 인도하여 의병을 모해(謀害)하라는 비밀 문서였다.
선생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들은 정말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다.”
하였다.
이건용이 마침 와서 뵈니, 선생은 그 편지를 던지면서 말하기를,
“너는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러 왔느냐? 나의 거사는 다만 국가를 위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것인데, 너는 종실의 지친으로 도리어 나를 해치려고 하니 너는 왜적보다도 더한 놈이다. 나는 지금 너를 베어서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무리들을 깨우치려고 하니, 너는 죽어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
하니, 이건용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잠깐 동안 겁을 집어먹고 임시 모면을 하려고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이오니 만일 대감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용서하시면 정성을 다하여 명령을 받들어 머리가 부러져도 후회하지 않고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용서하고 자리에 앉게 한 뒤에 타이르기를,
“그대는 왕족 출신이고 나는 유신(遺臣)으로서 각기 의리와 분수를 다하여 함께 왕실을 도와야 한다. 성공하면 국가의 행복이고, 실패하여도 잃을 것이 없으니, 충의의 혼이 되어서 두루 만국을 비추고 꽃다운 이름이 멀리 천추에 끼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원수들에게 아첨하여 구차하게 한때의 요행을 얻더라도, 필경은 서로 이끌고 망하는 비참한 일을 당하는 데 비하면 소득이 어느 것이 많겠는가.”
하니, 이건용은 눈물을 거두고 공손한 태도로 사죄하였다. 선생은 이건용이 지방관으로 형편을 익숙히 알고 있고, 또 그 정성을 인정하여 선봉장[前部]을 삼으니, 어떤 이가 충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건용이 본군(本郡)에 돌아가서 주둔하기를 청하므로 선생은 허락하였다.
○ 20일(병술)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 이건용(李建鎔)이 왜병을 거느리고 와서 의병을 습격하니, 의병은 마침내 무너지고 의사(義士)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였다.
새벽에 광주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사람을 시켜 칙서(勅書)와 고시(告示) 하나를 보내왔는데, 모두가 해산하라는 뜻의 명령이었다. 선생은 칙지(勅旨)를 받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이것은 오적(五賊)들이 상을 끼고 호령하는 수단이다. 설사 이것이 정말 왕명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옛사람도 왕명을 받지 아니한 의리가 있었거든 하물며 이것은 적신(賊臣)들이 속여서 만든 위명(僞命)임에랴.”
하고, 이 관찰에게 회답을 하였는데 대략은,
“모(某)가 이미 상소(上疏)하여 의병을 일으킨 연유를 아뢰었다. 상소가 만일 상께 도달하면 반드시 비답(批答)을 내릴 터이니, 비답을 받들어 진퇴할 뿐이지 지방관이 지휘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해가 오시(午時)가 되지 않았는데 왜병이 군(郡)의 동북쪽으로부터 포위하여 온다고 알리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스스로 나가 싸우고자 하니, 좌우에서 번갈아가면서,
“선생께 만약 불행이 있다면, 오늘날의 국가와 인민은 마침내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며 말렸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사민(士民)들이 모두 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에워싸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임병찬(林炳瓚)에게 2대의 기병(奇兵)을 설치하여 맞아 싸우도록 명하였다. 얼마 후에 또 그들이 왜병이 아니라 전주(全州)와 남원(南原) 고을의 진위대(鎭衛隊)임을 알려 왔다. 선생은 말하기를,
“이들이 왜병이라면 마땅히 사전(死戰)으로 결판을 내어야 하나, 이들이 진위대군이면 우리가 우리를 서로 공격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고, 임병찬을 불러들여서 싸우지 말도록 하고, 사람을 보내어 양대에 편지를 보내어,
“너희들이 왜군이라면 당연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나, 싸우지 않는 것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 없어서이니 즉시 물러가라.”
하였으나, 양 진위대군은 모두 듣지 않고, 전주병이 먼저 포를 쏘아 포환이 비 오듯 쏟아지니, 의병 1천여 명이 모두 새나 짐승처럼 흩어졌다. 이윽고 정시해(鄭時海)가 갑자기 탄환을 맞고 죽었는데 막 죽으려고 할 때에 선생을 부르면서,
“시해가 왜적 한 놈도 죽이지 못하고 죽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악귀가 되어서 선생이 적을 죽이는 것을 돕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선생이 그를 붙들고 통곡하니 군중들도 역시 통곡하였다. 선생은 형세가 이미 틀어진 것을 알고 연청(掾廳)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니, 제군은 모두 가라.”
하자, 의사 중 선생을 따르고자 하는 자가 21명이 있었다. 이때에 두 대병(隊兵)은 선생이 물러나지 않을 것을 알고 합군(合軍)하여 포위하고 일제히 총을 쏘았다.
이때에 선생은 임병찬에게 명령하기를,
“이제 우리들은 반드시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표지가 없이 서로 포개어 죽으면 누구가 누구인지 알겠는가? 뿔뿔이 흩어지지 말고 죽음을 명백하게 해야 하니, 성명 한 통씩을 벽에 써 붙이고 각자 자신의 이름 밑에 앉아라.”
하고, 또 말하기를,
“고인은 포위된 성 안에 있으면서도 관례(冠禮)를 행하여 지하에 있는 조상을 뵈려고 하였으니, 지금 제군은 의관을 정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자, 사람들이 모두 행낭을 풀어서 도포를 꺼내어 입고, 갓끈을 다시 매고 공수(拱手)하고 벽을 등지고 꿇어앉았다. 이때에 유탄(流彈)이 어지럽게 날아들자, 여러 사람들이 유탄이 선생을 범할까 염려하여 모두 빙 둘러 무릎을 꿇고 선생을 가리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선생은 급히 말리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이럴 필요가 없다. 각각 열좌(列坐)하여 바른 자세를 하고 죽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자, 사람들이 다시 열좌로 돌아가니, 갑자기 폭풍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천둥이 요란하고 번개가 번쩍이었다. 이날 전주부 희현당(希賢堂)이 까닭없이 무너지니 전주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위하여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양대의 군사는 깜짝 놀라서 총을 버리고 땅에 엎드렸다. 이에 포성은 그쳤으나 양대병은 사면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에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깜깜한데 촛불은 없고 시신은 방 가운데에 있어서 피가 흥건한데, 여러 사람들은 피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앉아 있었다.
막하사(幕下士) 이도순(李道淳)ㆍ임상순(林相淳)이 마침 밖에 있다가 죽을 쑤고 술을 데워서 촛불을 가지고 왔다. 방 안을 점검(點檢)하니, 21명에 9명은 이미 간 곳을 몰랐고 다만 임병찬(林炳瓚)ㆍ고석진(高石鎭)ㆍ김기술(金箕述)ㆍ문달환(文達煥)ㆍ임현주(林顯周)ㆍ유종규(柳種奎)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최제학(崔濟學)ㆍ나기덕(羅基德)ㆍ이용길(李容吉)ㆍ유해용(柳海瑢) 12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유종규는 정시해의 장사 때문에 나가고, 양재해(梁在海)는 앞서 선생의 명령으로 밖에 나가 정탐하다가, 선생이 포위되었음을 듣고 달려오니 다시 12명이 되었다. 문인 고제만(高濟萬)은 시종 힘을 다하였는데, 마침 정탐하기 위하여 밖에 나가 있다가 미처 오지 못하였다.
○ 이때부터 대병(隊兵)들은 밖에서 굳게 지키고 많은 왜병이 몰려 들어와 밤이면 총칼로 위협하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 자약하게 앉아서,
“옛날 사람도 배 안에서 《대학》을 읽고 옥중에서 《상서(尙書)》를 읽은 예가 있으니 각각 한 책을 외라.”
하고 다시 정제하여 앉아 먼저 《맹자(孟子)》의 호연장(浩然章)과 웅어장(熊魚章)을 외니 제생도 따라 차례로 한 편씩을 외었다. 이때에 고을 사람 임창섭(林昌燮)과 백정 경철(景哲)이 포위를 헤치고 들어와서 “대감의 충의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대감을 모시고 군무에 종사하다 죽기를 원한다.”고 아뢰었다. 고을 사람 신인구(申仁求)와 노기(老妓) 하엽(荷葉)이 각각 육미(肉糜)와 주면(酒麵)을 문지기에게 주면서 “나는 죽어도 이것을 드려야 한다.”고 하니, 문지기도 의롭게 여겼다.
○ 23일(기축)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날 전주 소대장 김가(金哥)가 와서 칙서에 서울로 압송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아뢰었다. 선생은,
“이것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지령인가, 오적(五賊)의 지시인가? 역적이 속임수로 감히 칙서를 빙자하느냐?”
하고 꾸짖었다.
김가는 못 들은 척하고, 선생의 찬 칼, 염낭과 몸에 지닌 물건을 모두 끌러 내고 왜병 10여 놈이 대병과 함께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선생과 임병찬은 가마를 타고 그 나머지 11명은 함께 결박되어 가니, 이때에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렀으며 보는 사람들이 비분하여 견디지 못하였다.
선생은 노상에서 매일 밤 이소경(離騷經)ㆍ출사표(出師表)ㆍ원도(原道) 등과 《중용》ㆍ《대학》 등의 여러 책을 외며,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길에 그들이 감히 죽이지는 못하고 바다를 건너게 될 것 같다.”
하였다. 이때에 안의(安義) 사람 이완발(李完發)이 노상에서 와 뵙고 통곡하며 따라오니, 왜병이 난타하나 이완발은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 않다가 구속되어, 전주에 갇혔다가 5, 6일 만에 석방되었다.
○ 27일(계사)에 왜의 사령부(司令部)에 구금되었다.
장자 최영조(崔永祚)와 종질 최영설(崔永卨)이 순창(淳昌)의 소식을 듣고 최전구(崔銓九)ㆍ이명구(李命九)와 일가 사람 최영호(崔永晧)와 함께 달려와 진잠(鎭岑)의 길에서 뵈니, 왜병이 칼을 휘둘러 쫓으며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시(午時)에 공주(公州)에 도착하니, 대전의 왜병이 윤차(輪車)에 선생을 태우고 저녁에 숭례문(崇禮門) 밖에 도착하였다. 왜의 헌병대장 소산삼기(小山三己)가 1백여 명의 왜병과 통역 박종길(朴宗吉)을 대동하고 와서 선생을 에워싸고 사령부에 갈 것을 청하였다. 선생은 땅에 버티고 서서 말하기를,
“나는 칙명에 의해서 온 줄 알았는데, 저들 왜놈은 무엇하는 놈인가. 내가 구금된다면 당연히 대한의 법관에 의하여 구금될 것이지, 대한의 최모(崔某)가 어찌 왜놈 사령부를 알겠느냐.”
하고 호통쳤다. 왜병들이 박종길에게 눈짓하여 부액(扶腋)하여 인력거(人力車)에 태우고 12명도 뒤따라서 곧바로 사령부로 향하였다. 문에 들어서자 선생은 또 땅에 주저앉아,
“여기가 법부(法部)인가, 군부(軍部)인가.”
하고 호통쳤다. 헌병이 부축하여 대청 위에 올라가서 북쪽 감방에 수감하니, 을사년 봄에 구금되었을 때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늙어서 제비처럼 거듭 옛집을 찾았구나.”
하였다. 왜병이 12명을 협박하여 도포ㆍ갓ㆍ망건ㆍ버선ㆍ갓끈 등속을 모두 벗기어 차례로 구속하고, 또 선생의 갓과 망건을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꾸짖으니 왜놈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홍주(洪州) 의병 80여 명이 먼저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헌병이 머리 깎는 칼을 가지고 와서 막 강제로 깎으려고 할 때에 선생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며 최 대감이 왔다고 하면서 달아났다. 이 때문에 머리를 깎이는 곤욕을 면하여, 모두 우리들이 머리를 깎이지 않고 보전한 것은 선생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였다.
이날 저녁에 밥이 들어오자 선생은,
“내가 어찌 왜놈의 음식을 먹겠느냐?”
하고 호통쳤다. 자질들이 밖에서 장만하여 음식을 드리려고 하였으나 방해를 받아 올릴 수 없었는데 사흘이 되어도 한 잔의 물도 들지 않으니, 왜가 비로소 겁이 나서 자질들이 바치는 음식을 들여보내도록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낮에는 《주역》을 보고 밤에는 반드시 글을 외니 음향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심문하는 곳에 나아가서는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뜻한 바와 일한 바는 상소(上疏)와 격문(檄文)을 너희 정부에 보낸 글에 실려 있다. 어찌 다시 묻느냐?”
하였다. 그리하여 큰소리로 박문(博文)ㆍ호도(好道) 등을 부르면서 개돼지처럼 꾸짖으며 죄역(罪逆)을 따졌고, 혹은 의자와 탁자를 들어 쳐서 부수어 집이 쩡쩡 울리니, 왜들이 모두 묵묵히 피하여 숨었다. 이같이 교접(交接)하기 전후 세 번이었고, 12인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하고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한 사람도 굴하지 않으니, 왜도 역시 선생에게 경복(敬服)하여, 때로 문밖에 와서 자물쇠를 열고 서늘한 바람도 쐬게 하며, 혹은 차를 드리거나 담배를 담아 드리기도 하였고, 선생이 거처하는 곳을 지날 때마다 꼭 절을 하고 갔다.
헌병에 가라상(柯羅祥)이란 자가 있었는데 희우시(喜雨詩)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면서,
“하늘이 여러분의 충성에 감동하여 때 아닌 비를 내리니, 이것은 하늘의 눈물이다.”
하였다.
이때에 최영설(崔永卨)도 10여 일 동안 구금되어,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서 결국 무엇을 하려고 하였는가에 대하여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으나, 최영설도 상소문과 일본 정부에 보낸 글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7월초하루는 병신 8일(계묘)에 임병찬(林炳瓚)과 압송되어, 바다를 건너 대마도(對馬島) 엄원(嚴原)에 도착하여 위수영(衛戍營) 경비대 안에 구금되었다.
이에 앞서 6월 25일 왜의 두목이 선생과 임병찬 등을 이현(泥峴 진고개) 사령부(司令部)에 가게 하여 소위 선고서(宣告書)라는 것을 읽고 통역을 시켜서 설명하기를,
“최모는 대마도에 감금(監禁) 3년, 임병찬은 2년, 고석진(高石鎭)ㆍ최제학(崔濟學)은 본서(本署)에서 4개월 구류, 김기술(金箕述)ㆍ문달환(文達煥)ㆍ양재해(梁在海)ㆍ임현주(林顯周)ㆍ이용길(李容吉)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나기덕(羅基德)ㆍ유해용(柳海瑢)은 곤장(棍杖) 1백 대로 방송(放送)한다.”
하였다. 읽기가 끝나자 모두 총총히 피해 버리니, 선생의 호통 소리를 꺼려서였다. 선생은 이때에 현기증이 도져서 읽는 것이 무슨 글인지를 몰랐다.
이날 새벽에 자질과 문인ㆍ빈객(賓客) 수십 인이 남대문 밖 정거장에 나왔는데, 왜 헌병 2명이 선생과 임병찬을 보호하여 이미 차를 탔다. 그래서 최영조(崔永祚)ㆍ최영설(崔永卨)ㆍ최영학(崔永學), 족손 최정식(崔貞植)ㆍ최만식(崔萬植), 최전구(崔銓九)ㆍ이승회(李承會)ㆍ최제태(崔濟泰)ㆍ임응철(林應喆)이 배행(陪行)하였고, 최영직(崔永稷)ㆍ안필호(安弼濩)ㆍ박규용(朴圭容)ㆍ윤태선(尹泰善)ㆍ윤항식(尹恒植)ㆍ이낙용(李洛用)ㆍ최봉소(崔鳳韶)ㆍ정한용(鄭瀚鎔)ㆍ조영가(趙泳嘉)ㆍ이광수(李光秀)ㆍ문달환(文達煥)ㆍ임현주(林顯周)ㆍ이용길(李容吉)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유해용(柳海瑢)은 차 앞에서 절을 하고 하직하며 실성하고 통곡하였다. 선생은 웃으면서,
“남자로 태어나면 사방에 뜻을 둔다. 해 돋는 동쪽의 산천이 볼만한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다만 여전히 몸이 자유롭지 못하여 나의 마음과 몸을 다하지 못할 것이 한스럽다. 또한 내가 처음 거사할 때에 어찌 조금이라도 요행을 바랐겠는가. 국가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백 년이 되었는데, 상란(喪亂) 이후에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담당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탱해 볼 생각으로 나의 직분을 다하였다. 마음 편하게 한번 죽는 것은 정말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는 것이니, 비록 오늘 머리가 잘리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도 웃으면서 땅에 묻힐 것인데, 더구나 아직 살아 있음에랴. 제군이 나를 사랑하거든 마땅히 빨리 죽기를 바랄 것이고, 서로 한탄하고 애쓰면서 나의 부끄러운 마음을 가중시켜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은 차 안에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지쳐서 기대는 일이 없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정력(定力)이 굳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중로에 이르러 선생이 탄 차의 바퀴에서 불이 일어나서 다른 차로 옮겨 타고 동래(東萊) 초량(草梁)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어두웠다.
이윽고 헌병이 선생을 인도하여 배에 오르자 최영조 등이 부여잡고 따라가고자 했으나, 헌병은 사령부의 문서가 없다고 허락하지 않으니 모두가 통곡하면서 부두에서 하직하였다. 이때에 달빛은 희미하고 항구의 등불은 바다 위를 비추고 있었다. 기적이 한 번 울리자 배는 쏜살같이 가니, 다만 뱃머리의 등불이 물결 속에 출몰할 뿐이었다. 이튿날 초량 뒷봉우리에 올라서 대마도를 바라보니 운애(雲靄) 속에 한 조각 산 그림자가 숨은 듯 나타나는 듯하였는데 이때의 정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애간장을 끊는 듯하게 하였다고 한다.
배 안에서 헌병 가라상(柯羅祥)이 정성을 다하여 부호(扶護)하여 이튿날 진시(辰時)에 대마도에 닿아 배를 내렸다. 헌병은, 이 뱃길은 늘 풍랑으로 고생을 하는데 이번에는 이처럼 평온하게 항해하였으니, 실로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엄원(嚴原)의 잠업 교사(蠶業敎師) 집에 머무르니, 위수영(衛戍營) 경비대의 임시 관서[權署]이었다. 홍주(洪州)의 의사 9인이 이미 먼저 와서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으니, 곧 문인 이칙(李侙)ㆍ유준근(柳濬根)ㆍ안항식(安恒植)ㆍ이상두(李相斗)ㆍ최상집(崔相集)ㆍ신보균(申輔均)ㆍ신현두(申鉉斗)ㆍ남규진(南奎振)ㆍ문석환(文奭煥)이었다.
○ 입식(粒食)을 끊고 곧 유소(遺疏)를 임병찬(林炳瓚)에게 불러 주었다.
선생이 차 안에서 최영설과 대마도에 들어간 뒤의 처의(處義)할 방도를 상의하였다. 최영설이 말하기를,
“소 중랑(蘇中郞)과 홍 충선(洪忠宣)은 먼 옛날의 일이고, 청음(淸陰)과 삼학사(三學士)로 말한다면 저들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로 삼지 아니하였고 후현(後賢)도 흠잡지 아니하였으니,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처의함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또 감금된 사람의 식료품은 모두 본국 정부에서 지불한다고 들었으니,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나 과연 이와 같다면 더욱 꺼릴 것이 없습니다.”
하니,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영설은 또 임병찬과도 그 의(義)를 말하였다.
경비 대장이 병정 4, 5명을 거느리고 와서 감금된 사람들을 줄 세우고, 어째서 장관(長官)에게 경례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갓을 벗게 하였으나 사람들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대개 왜는 갓을 벗는 것을 예(禮)로 삼은 것이다. 대장은 말하기를,
“여러분은 일본의 음식을 먹으니, 마땅히 일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갓을 벗으라고 하면 벗고,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깎아서 오직 명령에 따라야 하는데 어찌하여 감히 거역하는가.”
하였다. 한 왜가 선생의 갓과 탕건을 벗기려고 하자, 선생이 큰소리로 꾸짖으매 왜가 칼을 쳐들고 찌르려고 하자 선생은 가슴을 헤치고 큰소리로 빨리 찌르라고 호통쳤다. 대장이 갈 때에도 선생에게 일어서도록 명하니 선생은 일부러 앉아서 일어서지 않았다. 왜가 손으로 선생을 위협하니, 여러 사람들이 급히 구해 내었다. 선생은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임병찬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저 왜와 30년 동안 서로 버티어 온 혐의가 있으니, 저들이 나를 해치는 것은 조금도 괴이하지 않다. 또한 나는 나라가 위태하여도 부지(扶持)하지 못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내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은, 헛되이 죽는 것이 국가에 무익하니 대의(大義)를 천하에 외치고자 한 것이나,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은 의병을 일으키던 날에 이미 알고 있었으니, 오늘의 흉액(凶厄)은 오히려 늦다고 하겠다.
차라리 목을 자르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는 살지 못한다는 의(義)는 이미 을미년(1895, 고종32) 겨울에 유길준(兪吉濬)에게 잡혔을 때 정해졌고, 지금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도 의(義)가 아니니, 지금부터는 다만 단식(斷食)하고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먹지 않고 굶어 죽는 것도 또한 명(命)이니, 내가 죽은 뒤에 그대는 뼈를 거두어서 우리 아이에게 보내라. 그러나 이것도 어찌 기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임금을 바로잡고 국가를 부지(扶持)하기를 마음먹었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천심(天心)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죽은 뒤에는 다시는 충언(忠言)을 우리 임금에게 드릴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내가 단소(短疏)를 그대에게 줄 것이니, 그대는 살아 돌아가서 꼭 진정(進呈)하도록 하라.”
하고 다음과 같이 유소(遺疏)를 불렀다.
“죽음에 임한 신 최모는 일본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서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생각건대, 신의 거의(擧義)의 대략은 금년 윤4월 거사할 초두에 이미 자세히 아뢰었으나, 원소(原疏)가 들어갔는지 여부는 신이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신은 거사가 실효가 없어 마침내 사로잡히는 곤욕을 당하여 7월 8일에 압송되어 일본 대마도에 도착하여 현재 경비대라는 곳에 구금되었으니, 스스로 생각건대, 반드시 죽을 것이고 살아서 돌아갈 것을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이 적(賊)이 처음에는 머리를 깎는다는 것으로 신에게 가해하다가 종내는 교활한 말로 달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으니, 반드시 죽이고 말 것입니다.
생각건대, 신이 이곳으로 들어온 뒤에 한 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 것이면, 설사 적이 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차마 구복(口腹)으로써 스스로 누(累)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마침내 음식을 물리쳐 옛사람이 스스로 죽어서 선왕(先王)에 보답한 의(義)를 따를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멸망시키지 못하였으며, 국권(國權)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4천 년 동안의 화하(華夏)의 정도(正道)가 더럽혀져도 부지(扶持)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의 선왕의 적자(赤子)가 어육(魚肉)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건대, 왜적은 꼭 망할 징조가 있으니, 멀어도 4, 5년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다만 우리가 대응하는 방법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할 것이 염려됩니다. 지금 청국과 러시아는 주야로 왜적에게 이를 갈고,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도 매우 왜적과 서로 좋지 못하니, 머지않아서 반드시 서로 침공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가 함부로 전쟁을 한 나머지 백성은 궁핍하고 재정은 바닥이 나서 민중이 위정자를 원망할 것입니다. 대체로 밖에서 틈을 엿보는 적이 있고 안에는 윗사람을 원망하는 백성이 있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멀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국사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지 마시고 건강(乾剛)의 덕을 분발(奮發)하시고 성지(聖旨)를 확립하여 퇴미(頹靡)한 것을 떨치소서. 답습에서 깨어나 참을 수 없으면 참지 말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지 말며, 허위(虛威)를 지나치게 겁내지 말고, 아첨하는 말을 달게 듣지 마소서. 더욱 자주의 계획을 굳혀 영원히 의뢰하는 마음을 끊고, 더욱 와신상담하는 뜻을 굳건히 다져서 자수(自修)하는 방도를 다하소서. 영준(英俊)을 불러들이고, 군민(軍民)을 무육(撫育)하며, 세상의 형편을 살펴서 그 가운데서 할 일을 선택하소서. 그렇게 하면 이 나라 백성들은 본시 모두 존군 애국(尊君愛國)의 마음이 있고, 또 모두가 선왕의 5백 년 동안의 성덕(聖德)과 지극하신 성은을 흡족히 입었으니, 어찌 폐하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해 큰 원수를 갚고, 심한 수치를 씻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 기틀은 폐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죽음에 임하여 하는 말을 조금도 소홀히 듣지 않으시면, 신은 지하에서도 역시 손을 모아 기다리겠습니다.
신은 죽음에 임하여 정신이 아득하여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아뢰지 못하고, 그 한두 가지로 글을 만들어 같이 갇혀 있는 전 군수 신 임병찬에게 부탁하고 죽으면서 때를 기다려 상달하도록 하였습니다.
빌건대,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굽어 살피소서. 신은 눈물을 이기지 못하오며 영결하는 마당에 삼가 자진(自盡)하여 아룁니다.”
하였다. 부르고 나서 조그마한 종이를 행낭에서 꺼내어 임병찬에게 써 감추어 두도록 명하고,
“내가 40년 동안 충성하려고 한 의(義)가 여기에서 끝났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사령부에 있을 때에 함께 일한 제군을 생각하여 혼자서 오언절구(五言絶句) 14수를 염격(簾格)에는 구애하지 않고 진심을 솔직하게 읊은 것이 있는데, 내가 욀 것이니 군은 돌아가는 날 각각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곧 서문을 부르니,
“서생(書生)은 군려(軍旅)의 책임이 없고, 80세는 군사에 종사할 나이가 아니다. 다만 비상한 때를 만나,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초야(草野)에 이르기까지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절름발이를 제외하고, 집에 있어서 모른다고 말하는 자는 사람 마음이 없는 자이다. 다만 재앙을 스스로 만들어서 그 누(累)가 제군에게 미치니 부끄러움이 많다. 각자에게 오언 절구(五言絶句) 1수씩을 주어 뒷날 장고(掌故)에 대비한다.”
하였다. 그 하나는 자책(自責)이고, 임병찬과 고석진 등 12인에게 각각 준 것이며 또 하나는 정시해를 애도한 것이었다.
이날 저녁에 선생을 따라서 먹지 않은 사람은 임병찬(林炳瓚)ㆍ이칙(李侙)ㆍ유준근(柳濬根)ㆍ안항식(安恒植)ㆍ남규진(南奎振)이었고, 그 나머지 5인은 억지로 두어 숟가락을 들고는 그쳤다. 이튿날 대장(隊長)이 와서,
“노인이 왜 식사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임병찬이 일록(日錄)을 보이니 말하기를,
“통역이 분명하지 않더니, 이것을 보니 알겠습니다.”
하고, 다 보고 나서,
“삭발 운운한 것은 감금된 사람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고, 대개 ‘일본에 있으면 일본의 법률에 따라야 옳다.’고 말한 것입니다. 삭발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억지로 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식사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선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령부에 있을 때에, 수인(囚人)의 식비는 우리 정부에서 부담한다고 들었기에, 어제 두 끼의 식사도 우리 정부에서 보내온 것으로 알고 먹었고, 또한 고인(古人)의 처의(處義)에도 근거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일본의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일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하니, 내가 어찌 생을 탐내어 입에 풀칠을 하고 ‘그 음식을 먹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기롱(譏弄)을 받겠는가. 나의 일은 내가 이미 단정하였으나, 제군은 그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 나를 따라서 죽겠는가.”
하였다. 여러 사람이 번갈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튿날 보병대 대장(大將)이 와서 대장(隊長)과 같은 말을 물었다. 임병찬이 선생의 처의(處義)의 연유를 상세히 말하니, 대장이 말하기를,
“삭발하고 변복(變服)한다는 것은 잘못된 소문이고, 감금된 사람의 식비는 모두 한국 정부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은 감시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니, 안심하고 식사하여서 국가를 위하여 자애(自愛)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래서 임병찬과 여러 사람이 옛날의 의(義)를 들어서 여러 가지로 말씀드리면서 울어 마지않으니, 선생이 겨우 뜻을 돌려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다만 그대들을 위하여 다시 먹고 다음 기회를 보겠다.”
하였다.
대장(大將)이 간 뒤에 대장(隊長)이 또 와서,
“내가 전일 삭발과 변복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다만 방 안에서 갓을 벗으라고 말하였는데 통역이 잘못 말하여 여러분이 단식한 지 사흘이 되었으니, 어찌 백이(伯夷)ㆍ숙제(叔齊) 고사(故事)를 본받으려 합니까. 나는 결코 삭발과 변복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최씨에게 말씀드려서 노체(老體)를 자애(自愛)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선생이 하루는 일찍 일어나서,
“내가 평소에 꿈을 꾼 일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꿈을 꾸었으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고, 곧 다음과 같이 읊었다.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겠다는 선성의 탄식 / 乘桴先聖歎
바다에 몸을 던져 죽겠다는 노중련의 풍도 / 蹈海魯連風
이 두 가지의 같고 다름을 / 二者同不同
동쪽 늙은이에게 물어보노라 / 請詢日邊翁

○ 같은 수인(囚人) 여러 사람 가운데 간혹 관(冠)이 없어 상투 바람으로 있어서, 선생이 치포관(緇布冠 검은 베로 만든 유생이 쓰는 관)을 만들어 쓰게 하고, 곧이어 절구 한 수를 읊고 화답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선생과 여러 사람이 혹은 글을 외어 강론(講論)하고, 혹은 시를 지어 화답하니, 만리 이역(異域)에서도 적료(寂廖)하지 않았다고 한다.

9월초하루는 을미 4일(무술)에 장자 최영조가 들어와 뵈었는데, 문인 오봉영(吳鳳泳)ㆍ임응철(林應喆)이 동행하여 왔다.
최영조와 임응철이 각기 병든 노친(老親)을 방환(放還)하고 대신 감금되겠다는 뜻을 경비 대장에게 청원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 8일(임인)에 최영조ㆍ오봉영ㆍ임응철이 귀국하였다.
최영조가 머무르면서 모시고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니, 선생이 집에 노인이 있고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을 사람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바다 빛은 창망하고 새벽 기운은 찬데 / 海色蒼茫曉氣寒
이때에 가고 머무르는 두 사람의 괴로운 심정 / 此時去住兩情難
이란 시구가 있었다.
○ 20일(갑인)에 문인 조재학(曺在學)이 들어와 뵈었다.
선생이 매우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오랜 세월 사귄 벗이 우정도 깊어서 / 契託蓬麻歲月深
배를 타고 먼 길 오니 음산한 가을일세 / 乘桴遠役趁秋陰
깊고 깊은 한 줄기 물 원천에서 솟아나니 / 淵淵一水源頭活
그 당시에 주고받던 마음 힘써 따르게 / 勉副當年援受心

조재학은 송연재(宋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도 되기 때문이다. 수일간 머무르다가 돌아갔다.

10월초하루는 갑자 16일(기묘)에 보병 경비대 안 새로 지은 건물로 옮겨 갔다.
먼저 거처하던 집으로부터 거리가 약 5리였다.
○ 19일(임오)에 병이 났다.
처음에는 감기로 편찮다가 점점 위중하게 되었다. 그곳에 우리나라 약이 없어 애쓰다가, 행낭에서 약간의 재료를 찾아서 불환금산(不換金散)과 부자산(夫子散)을 잇달아 올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대장이 군의를 보내어 진찰을 하고 약을 보냈으나, 선생은,
“80세 늙은이가 병이 들었고 또 수토까지 맞지 않은 것인데 외국의 신통하지 못한 약으로 무슨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다만 이것으로써 자진(自盡)할 것이니, 일본 약물은 일체 쓰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29일에 이르러 점점 부증(浮症)과 혀가 말려들고 변비 등의 여러 증세가 있더니, 정신이 혼몽하여 다시는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다.

11월초하루는 갑오 5일(무술)에 최영조와 문인 노병희(魯炳熹)ㆍ고석진(高石鎭)ㆍ최제학(崔濟學)이 들어와서 시병하였다.
임병찬이, 선생의 병환이 날로 위중한 것을 보고 서울에 전보하여 본가에 알리게 하였다. 고석진ㆍ최제학이 마침 풀려 났고, 노병희도 서울에 있었기에 모두 최영조와 동행하였는데, 뱃길이 막혀서 여러 날 나루터에서 보내다가 5일에 이르러 비로소 들어왔다. 선생은 이미 누가 누구인지 몰랐다. 노병희는 소속명탕(小續命湯)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재료가 없어서, 고석진과 최제학에게 바다를 건너서 약을 구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배편이 몹시 힘들어서 9일에 비로소 부산에 돌아갔다. 마침 최영학(崔永學)과 최제태(崔濟泰)ㆍ최정상(崔鼎相)ㆍ강갑수(姜甲秀)의 일행을 만나서 약을 부탁하고 들어왔다. 해어탕(解語湯)과 소속명탕(小續命湯) 수 첩을 지어서 연거푸 썼다.
14일 아침에 선생의 정신이 조금 깨어나서, 모시고 있던 사람이 서로 말을 하면서 선생이 듣는지 못 듣는지를 시험해 보니, 혹 미소를 짓기도 하고 혹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임병찬의 일록(日錄)에는,
“선생께서 병이 나면서부터 20여 일에 이르기까지 혹은 평좌(平坐)하시고 혹은 꿇어앉고, 혹은 구부리고 혹은 기대기도 하셨으나 한 번도 드러눕지 않으시니, 여기에서 선생의 평소 소양(所養)의 훌륭하심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가 없음을 알았다.”
하였다.
○ 17일(경술) 오전 인시(寅時)에 대마도 감방에서 별세하였다.
전날 저녁에 큰 별이 동남쪽에 떨어지며 환한 빛이 하늘에 뻗쳐서, 보는 사람이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날 새벽에 별세하였다. 이에 앞서 최영조가 염습(斂襲)할 제구(諸具)를 갖추어 가지고 왔다.
선생이 작고했다는 말을 들은 대장은 시신을 오래 이 건물에 머물게 할 수 없다 하여 시체실에 옮기도록 하였다. 시체실은 경비대 안에 있는 한 칸의 판잣집인데 땅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가운데에는 시상(尸床)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시(巳時)에 옮겨 모시고 염습하였다. 이때에 추위가 혹심하여 노시(露屍)로 밤을 지낼 수가 없어서 오후 신시(申時)에 소렴(小斂)을 하였다.
집사(執事)는 임병찬(林炳瓚)ㆍ신보균(申輔均)ㆍ남규진(南奎振), 집례(執禮)는 이칙(李侙), 호상(護喪)은 노병희(魯炳熹), 사서(司書)는 문석환(文奭煥), 사화(司貨)는 신현두(申鉉斗)였다.
이날 밤에 왜는 다만 최영조ㆍ최영학만을 시신 곁에 있기를 허락하고, 그 나머지 안에 있던 사람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밖에 있던 사람은 안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날 전보로 본가와 서울에 부고하였다.
○ 18일(신해)에 입관(入棺)하여 수선사(修善寺)에 옮겨 모셨다.
노병희가 밖에 있다가 송판을 구해 와서 대목을 불러 관을 만드는데, 대장이 정부에서 명령이 있어서 부대 안에서 관을 만들어 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관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원수의 물건이고 또 제도도 맞지 않으니 하루도 임시로 사용할 수가 없으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터이므로 꾹 참고 그것을 사용하였다.
신시(申時)에 입관하여 영구(靈柩)와 혼백 상자를 모시고 경비대 뒷문을 나와 가게 주인 해로(海老)의 집으로 갔다. 감금되어 있던 모든 사람이 모두 흰 두건에 환질(環絰)을 두르고 경비대 문안에서 통곡하면서 하직하였고, 다만 임병찬이 모시고 가게에 갔다. 해로의 아들 웅야(雄野)가 앞을 인도하여 수선사 법당에 영구를 모셨다.
○ 20일(계축)에 영구를 모시고 배를 타서 21일(갑인)에 초량(草梁) 나루에 내려 상무사(商務社)에 안치(安置)하였다.
술시(戌時)에 영구를 모시고 배를 탔다. 노병희가 초혼(招魂)하며 앞에서 인도하였고, 항구의 왜인들이 촛불을 들고 따라오면서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튿날 진시(辰時)에 초량 앞 항구에 정박하니, 최영설(崔永卨)ㆍ최만식(崔萬植)ㆍ최전구(崔銓九)ㆍ최봉소(崔鳳韶)는 서울에서, 최영복(崔永福)ㆍ곽한소(郭漢紹)는 정산(定山)에서 왔으며, 고석진(高石鎭)ㆍ최제태(崔濟泰)ㆍ최제학(崔濟學)ㆍ최정상(崔鼎相)ㆍ임응철(林應喆)과 숙소를 정하고 상무사(商務社)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무사란 본주(本州)와 영남ㆍ호남 사람들이 돈을 모아 회사를 만들어 장사하는 일을 처리하는 곳이다.
이보다 앞서 선생이 일본에 건너가는 일을 당시에 사원들이 모두 알지 못하고 뒤늦게 배행하러 왔다가 길에서 서로 붙들고,
“하늘이 어찌하여 선생에게 이런 행차가 있게 하는가.”
하면서 통곡하였는데, 이때 와서 선생의 부고를 듣고는 모두 망곡(望哭)하고 애통(哀痛)해하면서 사흘 동안 철시(撤市)하고, 치상(治喪)을 담당할 것을 자청하였다. 사무장 김영규(金永圭)가 정구청(停柩廳)을 새로 만들 것을 의논하니, 사원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가 이 건물을 지어서 왕래하는 사람은 모두 묵어 갔습니다. 만일 이곳에 최 선생을 모신다면, 비록 혼령이지만 우리들의 영광입니다. 지금 꼭 새로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건물은 헐어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니, 김영규가 말하기를,
“내가 제군의 뜻을 떠보았을 뿐이오.”
하였다. 이리하여 ‘면암 최 선생 호상소(勉菴崔先生護喪所)’라고 문에 크게 써 걸고, 사원에게 본분을 이미 정하여 집사(執事)로 삼았는데, 유진각(兪鎭珏)ㆍ이유명(李裕明)ㆍ권순도(權順度)는 호상, 박필채(朴苾彩)ㆍ송재석(宋在錫)은 집례, 이응덕(李應悳)ㆍ장우석(張禹錫)ㆍ안순극(安舜克)은 축(祝), 김교민(金敎玟)ㆍ손영두(孫永斗)ㆍ박봉석(朴鳳錫)은 사서(司書), 김영규ㆍ김도익(金道翊)ㆍ정시원(鄭時源)은 사화(司貨), 윤명규(尹明奎)ㆍ권상희(權爽煕)는 조빈(造殯)으로 성복(成服)과 반구(返柩)의 제구(諸具)를 모두 준비하였다.
이날 아침에 자질과 문인들이 모두 부두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원 1천여 명이 대여(大轝)와 영거(靈車)를 갖추고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日月高忠)’이란 8자를 비단에 써서 높은 장대에 달고 영구를 출영하여, 들어와서 일내헌(一乃軒)에 모셨다. 영구를 모시고 하륙할 때에 김영규와 권순도가 영구를 부여잡고 부르짖기를,
“선생님, 이것은 대한 배입니다. 여기는 대한 땅입니다.”
하며 울었다. 부두의 남녀 노소 수만 명이 모두 선생을 부르니 곡성이 땅을 뒤흔들었고, 대여를 뒤따르는 사람이 5리에 이르렀다. 이때에 검은 구름이 덮여서 날이 어둡고 가랑비가 촉촉히 내려 쌍무지개가 동남쪽에 가로 걸려서 광채가 빛나더니, 영구를 안치한 뒤에 무지개는 사라지고 구름은 걷혀 비가 개니 한 점 먼지도 없었다. 항구에 가득했던 구경꾼들이 이상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이날부터 발인(發靷)할 때까지 원근의 사민들이 전물(奠物)과 제문을 가지고 와서 통곡하는 사람이 주야로 끊이지 않았고, 학교의 생도와 여학교 8, 9세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와서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혹은 만사(輓辭)로, 혹은 연설로, 혹은 조가(吊歌)로 애도하면서 모두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친척처럼 슬퍼하였다. 본부(本部)의 기생 비봉(飛鳳)ㆍ옥도(玉桃)ㆍ월매(月梅)도 언문(諺文)으로 제문을 지어 치전(致奠)하고 매우 슬프게 곡하였고, 범어사(梵魚寺)의 중 봉련(奉蓮)이 승도들을 거느리고 길가에서 치전하였다.
초량의 세 과부는 부두에서부터 대여를 모시고 따라오다가, 구포(龜浦)에 이르자 머리에 전물을 이고 도보로 40리나 걸어와서,
“대감의 제수(祭需)는 왜놈 차에 실어서는 안 되고, 제기도 왜놈 물건을 쓰지 못합니다.”
하였다.
○ 22일(을묘)에 성복하였다.
원근의 사민 남녀가 와서 곡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었고, 와서 보는 외국인도 모두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고 한다.
○ 23일(병진)에 발인(發靷)하였다.
대여(大轝)ㆍ영거(靈車)와 짐꾼은 모두 상무사(商務社)에서 전담하였다. 초량에서 구포까지 40리 이내였는데, 상여를 뒤따르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고 집집마다 흰 기를 꽂아 지나는 곳마다 부녀들이 모두 곡하면서 맞이하였고, 노상에서 치전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아서 이날은 겨우 10리를 갔다. 다음날 30리를 가서 구포에 도착하였는데 여기는 동래(東萊)의 끝 경계이다. 상무사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모두 매우 슬피 곡(哭)한 뒤에 돌아가고, 유진각은 시종 호상하여 정산(定山)에 이르러 돌아갔다.
○ 선생의 상사가 처음 났을 때 엄원(嚴原) 경비 대장이 부의로 민전(緡錢) 2백을 보내와서 최영조가 여러 차례 거절하였으나, 대장이 성내면서 바다를 건너는 일을 방해하겠다는 말이 있기에 부득이 받아 간직하였다가 발인하는 날에 우편으로 돌려보냈다.

12월초하루는 계해 7일(기사)에 정산(定山) 본가(本家)에 도착하였다.
○ 10일(임진)에 대렴(大斂)하였다.
○ 13일(을해)에 성빈(成殯)하였다.
구포강(龜浦江)을 건너, 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칠원(漆原)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ㆍ개령(開寧)ㆍ김산(金山)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옥천(沃川)ㆍ회덕(懷德)ㆍ공주(公州)를 거쳐 15일이 걸려서 비로소 정산 본가에 도착하였는데, 지나온 고을에서 전물(奠物)을 가지고 와서 곡하는 사람이 동래(東萊)에서와 같았다. 창녕 사람 박지림(朴芝林)은 농부인데 선생을 추모하여 치전(致奠)하고 부의금을 내고 매우 슬프게 곡하였다. 평소에 의견을 달리하던 사람도 정성껏 슬픔을 다하여 만사(輓辭)ㆍ제문ㆍ치전ㆍ치부로 그 뜻을 극진히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구가 바다를 건넌 이래로 사녀(士女)들이 달려와 부모를 잃은 듯이 울부짖으니, 천고(千古)의 옛 기록에도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비[士子]가 존상(尊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부녀와 어린이까지도 누가 시켜서 그렇겠는가. 아마도 하늘의 밝은 도리와 사람의 떳떳한 윤리는 시세(時勢)를 따라서 타락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었다. 제물과 제기를 절대로 왜의 물건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한 것이나, 승려와 천기(賤妓)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생을 부르며 깊이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한 일은 적신(賊臣)과 교활한 원수가 듣고 맥이 풀리게 했으니, 정말 선생의 영혼을 잘 위로했다고 할 만하였다.
창원에 이르자 왜병 10여 인이 마항(馬港)에서 와서 길을 차단하고 협박하면서 상여를 기차에 싣게 하니 종자(從者)가 정색으로 거절하며 승강이를 하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으니, 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영여(靈轝)가 이르는 곳마다 사민(士民)이 무리를 이루니 왜가 혹 다른 일이 생길까 염려해서였다.
창녕읍(昌寧邑)에 이르니, 헌병 소위 평전철차랑(平田鐵次郞)이란 자는 전에 사령부에서 신문할 때에 이미 사나운 놈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이르러 또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종자(從者)가 함께 승강이를 하면서 밤새도록 팽팽히 싸우니, 평전도 이론에 굽히고 스스로 물러섰다. 곁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
“이날 밤 싸움은 10만의 군대보다도 더 강하여, 왜적이 한국을 경영한 지 30여 년에 처음으로 뜻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보았다.”
하였다.
이때부터 왜병 수십 명이 교대해 가면서 따라와서 연도에서 조상하고 치전하는 사람들을 모두 쫓고 본집에 이르러 성빈(成殯)하는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돌아갔다. 장사 때에 또 와서, 사방에서 장사에 모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다만 도포를 입은 사람은 금하지 않았다.
[주-D001] 내가 사방을 …… 갈 곳이 없다 : 
《시경(詩經)》 소아(小雅) 절남산(節南山)에 있는 말로, 사방이 다 혼란하여 갈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2] 임병찬(林炳瓚)이 …… 토벌한 공 : 
1894년(고종31) 동학란(東學亂) 때에 임병찬이 낙안 군수(樂安郡守)로 있으면서 동학교도 수백 명을 잡아 벌하거나 귀순시킨 일을 가리킨다.
[주-D003] 상(商) 나라 미자(微子) : 
미자는 상, 즉 은(殷) 나라 주(紂)의 서형(庶兄)으로, 주의 무도함을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은 나라를 떠났다.
[주-D004] 명(明) 나라 …… 40여 인 : 
명 나라 숭정(崇禎 의종(毅宗)의 연호) 말엽에 이자성(李自成)이 서안(西安)에서 왕을 칭하여 대순(大順)이라 참람하게 호(號)하며 여러 성을 깨뜨리고 드디어 경사(京師)를 함락하자, 장렬제(莊烈帝) 즉 의종(毅宗)과 범경문 등 수십 인이 순국한 일을 말한다. 《明史 卷24 莊烈帝紀2》
[주-D005] 책의(翟義)와 …… 문천상(文天祥) : 
책의는 왕망이 섭정을 할 때에 유신(劉信)을 세워 천자를 삼고 스스로 대사마(大司馬)라 칭하며 기병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漢書 卷84 翟義傳》 문천상은 원병(元兵)과 싸우다가 패하여 3년간 구금 생활을 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주-D006] 우공(寓公)의 욕 :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 우거(寓居)하는 천자나 제후가 겪는 곤욕.
[주-D007] 두 능의 화 :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선릉(宣陵 성종 및 그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과 정릉(靖陵 중종의 능)을 파헤친 일.
[주-D008] 자방(子房)처럼 원수를 갚을 때 : 
자방(子房)은 장량(張良)의 자. 장량은 그 조상이 여러 대에 걸쳐 한(漢) 나라를 섬겨 왔는데, 진(秦)이 한 나라를 멸망시키자 창해(倉海)의 역사(力士)를 얻어서 박랑사(博狼沙)에서 철퇴로 진왕의 수레를 쳤으나 실패하였다. 《漢書 卷40 張良傳》
[주-D009] 북지왕(北地王)의 …… 의리 : 
북지왕(北地王)은 촉한(蜀漢)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 유심(劉諶). 후주 염흥(炎興) 1년(263) 위(魏)가 대거 침입하자, 후주는 광록대부(光祿大夫) 초주(譙周)의 말을 듣고 항복하려 하였다. 이때 유심은 화를 내며 “만약 힘이 모자라 패하게 되면 부자와 군신이 힘을 합하여 성을 등지고 싸우다가 사직과 함께 죽어 선제(先帝)를 뵙는 것이 옳다.”고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심은 처자를 죽인 후 자살하였다. 《三國志 蜀書 卷3 後主傳3 註》
[주-D010] 수실(秀實)의 …… 쳐야 했고 : 
당(唐) 나라 덕종(德宗) 때에 주자가 배반하여 참위(僭位)하려고 하자 단수실(段秀實)이 원휴(源休)의 상홀(象笏)로 주자의 머리를 쳤다. 《唐書 卷153 段秀實列傳》
[주-D011] 고경(杲卿)의 …… 여겼겠는가 : 
상산 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杲卿)은 안녹산(安祿山)이 반란하자 그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혀 사지를 찢기면서도 큰소리로 녹산을 꾸짖었다. 그때 안녹산은 하북ㆍ하동의 채방사였고, 상산은 안녹산의 지배 하에 있었다. 《唐書 卷192 顔杲卿列傳》
[주-D012] 시중(市中)에 …… 따랐고 : 
왕손가(王孫賈)는 제(齊) 나라 민왕(湣王)을 섬기고 있었는데, 초장(楚將) 요치(淖齒)가 민왕을 죽였다. 그래서 왕손가는 시중에 들어가서, 나와 함께 요치를 치고자 하는 사람은 우단(右袒)하라고 외치면서 동조자 4백 명을 얻어 그를 토벌하였다. 《戰國策 卷13》
[주-D013] 서경(西京)에서 …… 쳤겠는가 : 
왕망이 섭정할 때에 유신(劉信)을 천자로 세우고 책의는 대사마가 되어 기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漢書》
[주-D014] 삼호(三戶)의 …… 외치며 : 
복수할 일념을 뜻한다. 초(楚)의 범증(范增)이 항량(項梁)을 찾아가서 진(秦)에 원수를 갚기 위하여 기병할 것을 권유한 말 가운데에, 남공(南公 음양가)의 말을 인용하여 “초 나라가 비록 삼호(三戶)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는 것은 초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주-D015] 제 민왕(齊湣王)과 송 언왕(宋偃王) : 
제 민왕은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하다가 초장(楚將) 요치(淖齒)에게 살해되었다. 송 언왕은 노(魯) 나라 사람 남궁만(南宮萬)의 감정을 사서 그에게 살해되었다.
[주-D016] 지난봄에 욕 : 
토적소를 올렸다가 을사년(1905) 2월에 일본 사령부와 헌병대에 각각 한 번씩 구금된 일을 말한다.
[주-D017] 인(仁)을 …… 얻는 것 :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뉘우칠 것이 없다는 뜻. 자공(子貢)이 백이ㆍ숙제가 어떤 사람이냐고 공자에게 묻자,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論語 述而》
[주-D018] 소 중랑(蘇中郞)과 홍 충선(洪忠宣) : 
한(漢) 나라 소무(蘇武)가 중랑장(中郞將)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유폐되어, 눈과 전모(旃毛)를 씹으며 연명하였고, 북해(北海)로 옮겨진 뒤에는 들쥐와 풀 열매로 연명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왔다. 홍 충선은 송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皓), 충선은 시호인데 금(金)에 사신으로 갔다가 15년간 유폐당하였다.
[주-D019] 청음(淸陰)과 삼학사(三學士) : 
청음은 김상헌(金尙憲)의 호.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간 일이 있다. 삼학사는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세 사람으로 병자호란에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으로 붙잡혀 가서 끝내 굴하지 않고 처형되었다.
[주-D020] 뗏목을 …… 탄식 : 
공자가 도의가 날로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한탄하기를 “도가 행하여지지 못할 것이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뜰 것이다.[道不行 乘桴浮于海]” 하였다. 《論語 公冶長》
[주-D021] 바다에 …… 노중련의 풍도 : 
전국 시대 제 나라의 노중련(魯仲連)은 “진(秦)이 황제가 되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지 않겠다.”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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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崔銓九 동의어 우서(禹敍), 지은(智隱)


요약 테이블
시대 근대/개항기
출생1850년(철종 1)
사망1938년
유형 인물
직업 의병
성별
분야 역사/근대사
본관 전주(全 )

요약 대한제국기 최익현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의병.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우서(禹敍), 호는 지은(智隱). 전라북도 고창 출신.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본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하였고, 1910년 왜적의 침략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붙잡혀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자
崔銓九

영어음역
Choe Jeongu

이칭/별칭
우서(禹敍),지은(智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169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정성미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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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우서(禹敍), 호는 지은(智隱)이다. 1850년 6월 5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169번지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최전구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여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전라북도 태인[현 정읍 지역]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이후 최익현 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도 항거를 계속하였다.

1910년 왜적의 침략 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군왕에게 통고문을 보내려다 체포되었다. 이후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의금부순찰사로 활동하다 1917년 12월 28일 붙잡혔다. 이로 인해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1년간 유폐되었다. 1918년 고종이 죽자 단식 투쟁을 하는 등 10여 차례에 걸친 구검(拘檢)과 2차례의 유폐 생활 끝에 1936년 8월 성송면 학천리 독선재(獨鮮齋)에서 사망하였다.


[저서]
저서로 『남정록(南征錄)』과 『유고(遺稿)』 4권을 남겼다.


[상훈과 추모]
성송면 학천리에 최전구 추모비가 있고,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최전구(崔銓九)

근대사인물

 대한제국기 최익현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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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우서(禹敍), 지은(智隱)
분야   근대사
유형   인물
성격
의병
성별
출생일
1850년(철종 1)
사망일
1938년
본관
전주(全州)
경력
의병
시대  근대-개항기
성격   의병
성별   남
출생일 1850년(철종 1)
사망일 1938년
본관 전주(全州)
경력 의병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대한제국기 최익현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의병.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우서(禹敍), 호는 지은(智隱). 전라북도 고창 출신.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본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하였고, 1910년 왜적의 침략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붙잡혀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이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