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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 18현 (퍼온글)

아베베1 2008. 12. 5. 02:12

제목 해동 18현
작성자 박정해     2004/08/18
1. 설총(薛  聰)
  본관  경주(慶州)
  호 우당(雨堂)
신라고승 元曉의 자로 神文王때 翰林으로 弘儒侯로 追封

2. 최치원(崔致遠)
  본관 경주(慶州) 시호 문창후(文昌侯)
  호  고운(孤雲) 신라때 당나라 수학 翰林學士

3. 안유(安  裕)
   본관 순흥(順興)   시호 문성(文成)
  호 회헌(晦軒)
고려 忠烈王때 修文館太學士

4. 정몽주(鄭夢周)
   본관 연일(延日)   시호 문충(文忠)
   호 포은(圃隱)
고려 恭愍王때 門下侍中

5. 김굉필(金宏弼)
   본관 서흥(瑞興)   시호 문경(文敬)
   호 한헌당(寒暄堂)
刑曹佐郞, 조선중종때 右議政에 추증

6. 정여창(鄭汝昌)
   본관 하동(河東)   시호 문헌(文獻)
   호 일두(一두)
縣監, 右議政에 追贈

7. 조광조(趙光祖)
   본관 한양(漢陽)   시호 문정(文正)
   호 정암(靜菴)
大司憲, 領議政에 追贈

8. 이언적(李彦迪)
   본관 여주(驪州)   시호 문원(文元)
   호 회재(晦齋)
左贊成, 領議政에 追贈

9 이황(李  滉)
  본관 진성(眞城)    시호 문순(文純)
  호 퇴계(退溪)
大提學, 領議政에 追贈

10. 김인후(金麟厚)
    본관 울산(蔚山)   시호 문정(文正)
    호 하서(河西)
弘文館 校理, 領議政에 追贈

11. 이이(李  珥)
    본관 덕수(德水)   시호 문성(文成)
    호 율곡(栗谷)
吏曹判書, 領議政에 追贈

12. 성혼(成  渾)
   본관 창녕(昌寧)    시호 문간(文簡)
   호 우계(牛溪)
左參贊, 領議政에 追贈

13. 김장생(金長生)
    본관 광산(光山)   시호 문원(文元)
    호 사계(沙溪)
刑曹參判, 領議政에 追贈

14. 조헌(趙  憲)
    본관 백천(白川)   시호 문경(文敬)
    호 중봉(重峯)
僉正, 領議政에 追贈

15. 김집(金  集)
    본관 광산(光山)    시호 문경(文敬)
    호 신독재(愼獨齋)
判中樞府事, 領議政에 追贈

16. 송시열(宋時烈)
   본관 은진(恩津)     시호 문정(文正)
   호 우암(尤菴)
左義政, 領議政에 追贈

17. 송준길(宋浚吉)
    본관 은진(恩津)     시호 문정(文正)
    호 동춘당(同春堂)
吏曹判書, 領議政에 追贈

18. 박세채(朴世采)
    본관 반남(潘南)     시호 문순(文純)
    호 현석(玄石)
左義政


▲문묘(文廟)  서울 명륜동 3가
  문묘(文廟)는 공자 이래 2000여년 유학(儒學)을 발전시켜 온 중국 및 우리 나라 대학자들의 위패(位牌)를 그곳 대성전(大成殿)에 봉안(奉安)하여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우리 나라 문묘 제도는 중앙에 성균관이 있고, 각 고을에 향교가 있으며, '대성전'에서는 공자 이하 고대 중국 이래의 성(聖) 현(賢) 제위(諸位)와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를 하여 오는데, 중앙 '성균관'에서는 5성(五聖), 공문 10철(孔門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 중국 역대제현(歷代諸賢) 94위 및 동국 18현 도합 133위를 봉향(奉享)한다. 그리고 각 고을 향교 중에서 주(州), 부(府), 군(郡) 곧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가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소위 중설위(中設位)라 하여 '5성, 공문 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등 39위를 봉향하며, 현(縣) 곧 현령(縣令), 현감(縣監)이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소설위(小設位)로 '5성, 송조 4현(周濂溪, 程明道, 程伊川, 朱晦菴), 동국 18현' 등 27위만 봉향한
* 참고 : 대성전에서 봉향하는 고대 중국 이래의 성현

1. 5성…孔子(丘, 仲尼), 顔子(回, 子淵), 曾子(參, 子輿), 子思(伋, 子思),          孟子(軻, 子車)

2. 공문10철…閔損(子騫), 염耕(伯牛), 염雍(仲弓), 宰予(子我), 端木賜(子               貢), 염求(子有), 仲由(子路), 言偃(子游), 卜商(子夏), 전孫               師(子張)

3. 송조6현…周敦이(茂叔, 濂溪), 程顥(伯淳, 明道), 程이(正淑, 伊川), 邵             雍(堯夫, 安樂), 張載(子厚, 橫渠), 朱熹(仲晦, 晦菴)

4. 중국 역대 94현…澹臺滅明, 原憲, 南宮适, 商翟, 漆雕開, 公西赤, 樊                      須, 梁전, 염孺, 伯虔, 염季, 漆雕치, 漆雕徒父, 商   澤, 任不齊, 公良孺, 秦염, 公肩定, 교單, 罕父黑, 公祖句玆, 縣成, 燕伋, 顔之僕, 樂해, 顔何, 狄黑, 孔忠, 公西점, 施之常, 秦非, 申정, 顔쾌, 左丘明, 穀梁赤, 宓(복)不齊, 公冶長, 公晳哀, 高柴, 司馬耕, 有若, 巫馬施, 顔辛, 曹술, 公孫龍, 秦商, 顔高, 壤駟赤, 石作蜀, 公夏首, 後處, 奚容점, 顔祖, 句井疆, 秦祖, 榮기, 左人영, 鄭國, 原亢, 廉潔, 叔仲會, 규巽, 公西輿如, 거瑗, 林放, 陳亢, 琴張, 步叔乘, 公羊高(이상 69명 周)/高堂生, 毛장, 劉向, 鄭衆, 盧植, 服虔, 伏勝, 戴聖, 董仲舒, 孔安國, 杜士春, 鄭玄(이상 12명 漢)/范녕(이상 1명 晉)/韓愈(이상 1명 唐)/楊時, 胡安國, 張식, 黃간, 眞德秀, 司馬光, 羅從彦, 李동, 呂祖謙, 蔡沈(이상 10명 宋)/許衡(이상 1명 元)


▲설총(薛聰,?-?)
   신라 경덕왕(景德王)때의 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 총지(聰智)     호 우당(雨堂)    빙월당(氷月堂)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  원효대사의(元曉大師)의 아들. 어머니는 요석궁 공주(瑤石宮公主). 신라십현(十賢)의 한사람. 한림(翰林)을 지냈고 주로 왕의 자문을 맡아보았다. 유학(儒學)과 문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일찍이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쳐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가 창제한 중국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은 당시 중국학문 섭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즉‘은.는’은 贊자를 썻는데 이는 ‘隱’자의 왼쪽을 딴것이며, ‘니’는 ‘니’자를 썼는데 이는 ‘尼’자의 아래에서 딴 것이다. 또 이두(吏讀)도 창제했다고 하나 그가 생존하기전인 진평왕때의 [서동요(書童謠)], 선덕여왕때의 [풍요(風謠)]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점으로 보아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신문왕(神文王)때 충고한 일화가 있으며 현종13년(1022)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최치원(崔致遠,857-?)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용현마을)
    신라시대의 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 고운(孤雲) 해운(海雲)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경문왕9년(869) 13세에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御袋)도 받았다. 헌강왕5년(879)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겸 한림학사(侍讀兼 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후 아찬(阿湌)이 되었다. 그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仁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문묘에 배향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안향(安珦,1243-1306)묘장단군 진서면 대덕산(송림현 구정리)
     고려시대 문신. 학자
     본관 순흥(順興)                시호 문성(文成)
     초명 유(裕)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밀직부사(密直府使)  부의 자.
원종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 삼별초의 난때 강화(江華)에 억류 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충렬왕1년(1275) 상주판관(尙州判官)때 미신타파에 힘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 감찰시어사(監察侍御使)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12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津)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 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里世子貳師)를 지냈다. 12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관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官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田) 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 악기(樂器).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史)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하였다.
죽은 뒤 충숙왕5년(1318)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를 초빙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때 풍기군수 주세붕(朱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명종4년(1549)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의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몽주(鄭夢周,1337-1392)묘 용인시 모현면 능내리
   고려말의 문신
   본관 : 연일(延日)                    시호 문충(文忠)
   자 달, 초명 몽랑(夢蘭) 몽룡(夢龍)     호 포은(圃隱)  
   영천(永川)출생
공민왕 6년(1357)에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 검열(藝文檢閱). 수찬.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 예조정랑 겸 성균관 박사(禮曹正郞 兼 成均館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정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우왕2년(1376)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규수(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 전법판서. 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139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창왕1년(1389) 예문관대제학.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공양왕2년(1390)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市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書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했으나 방원(芳園: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서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단심가(丹心歌)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사람으로 태종1년(1401)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김굉필(金宏弼,1454-1504)묘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 서흥(瑞興)      시호 문경(文敬)
    자 대유(大猷)        호 한훤당(寒暄堂)  사옹(蓑翁)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라 지칭하였다.
성종11년(1480)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 감찰. 형조좌랑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로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 정광필(鄭光弼)등에 의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 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 이장곤(李長坤). 김안국(金安國)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광해군2년(1610)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됨으로서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정여창(鄭汝昌,1450-1504)묘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 하동(河東)          시호 문헌(文獻)
     자 백욱(伯욱)            호 일두(一蠹)
세종32년 함양 덕곡리 개평(咸陽 德谷里 介坪)에서 태어났다. 함길도(咸吉道) 병마우후(兵馬虞侯) 증한성 좌부윤(漢城 左府尹) 육을(六乙)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학업에 전념하여 한훤당(寒暄堂)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사사했으며, 경전(慶典)을 공부하여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쳐 역행천이(力行踐履)하여 명경독행(명경독행)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성종21년(14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등용되고, 뒤에 시강원(侍講院) 설서로 옮겨져서 동궁을 보도하였으나 질시(嫉視)을 받아 안음현감으로 외임(外任) 되자 향리의 자제들을 훈도하여 많은 제자를 키웠다.
연산군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좌되어 경성으로 원찬(遠竄)되어 적소(謫所)에서 타계하였는데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중종12년(1517) 정몽주. 김굉필과 같이 동국 도학의 종(宗)으로 숭상되어 우의정에 증직되고, 뒤어 문헌(文獻)이라 시호(諡號)하였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광조(趙光祖,1482-1519)묘 용인시 상현동 서원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漢陽)    시호 문정(文正)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중종5년(1510)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먼저 힘써야 할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 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하는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녹훈반정공신들이 너무 많을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중 2등공신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얻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가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할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관계로 인한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이언적(李彦迪,1491-1553)묘 경남 포항시 연일읍 발전리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여주(驪州)        시호 문원(文元)
       자 복고(復古)          호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원래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중종9년(1514)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 장령. 밀양부사등을 거쳐 중종25년(1530)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후 지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가 홍문관 부교리. 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 형조.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에 의정부 우찬성.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등의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전에 작성해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으로서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때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요시하는 주리적 성리학을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말년까지 약20년간 그는 생애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이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조목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광해군2년(1610)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황(李滉,1501-1570)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진보(眞寶)      시호 문순(文純)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도옹(陶翁) 청량산인(淸凉山人)
경북 예안(禮安)출생.
12세때에 숙부 이우(李우)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중종18년(1523) 성균관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부정자. 박사. 호조좌랑등을 거쳐 1539년 수찬. 정언들을 거쳐 형조좌랑으로 승문원 교리를 겸직하였다.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갓다가 사인(舍人).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명종1년(1545) 을사사화때 이기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侍正)이 되고 응교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 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선조1년(1568) 우찬성을 거쳐 양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設)을 계승, 주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 기(氣) 이원(二元)으로서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당쟁은 이 두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쳣다.
스스로 도산서원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인후(金麟厚,1510-1560)묘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울산(蔚山)       시호 문정(文正)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   담재(澹齋)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35년(1540)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家讀書)하였다. 뒤에 설서. 부수찬을 거쳐 부모봉양을 위해 옥과현령으로 나갔다.
인종1년(1545) 을사사화가 일어난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하고 이황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도 정통하였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이(李珥, 1536-1584)묘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서원내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덕수(德水)         시호 문성(文成)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  석담(石潭)
강릉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명종3년(1548)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에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 이조의 좌랑등으로 육조 낭관직, 사간원 정언, 사헌부지평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 부제학등의 옥당직. 승정원 우부승지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경험까지 쌓는동안 일선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45세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 형조. 이조. 병조판서등 전보다 한층 비중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 서인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성혼(成渾, 1535-1598)묘 파주시 문산읍 향양리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창녕(昌寧)        시호 문간(文簡)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  묵암(黙庵)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현감을 제수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 정철(鄭澈)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같이 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중에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면서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 황신(黃愼). 이귀(李貴). 정엽(鄭曄)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장생(金長生,1548-1631)묘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조선 중기의 문신. 예학 사상가
        본관 광산(光山)            시호 문원(文元)
        자 희원(希元)              호 사계(沙溪)
선조때 서인의 중진인 계휘(繼輝)의 아들.
효종때의 예학사상가인 집(集)의 아버지.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선조11년(1578)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고 임진왜란중에 정산(定山)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란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다.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난 이후인 선조말과 광해군대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 남양. 양근(楊根). 안성. 익산. 철원등을 맡아 다스렸다. 철원부사로 재직한 광해군5년(1612)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위기를 맞았으나 무협의로 풀려났다.
이후 인목대비 폐모논의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속에서 더 이상의 관직을 포기, 연산으로 낙향하여 10여년간 은거하면서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인조1년(1623)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의 양주역인 김류와 이귀(李貴)에 의해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추천, 장령. 사업등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어 동지중추부사. 행호군등이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때는 노령임에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의 직함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섰다.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정식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것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서 당시 그에 찬동한 이귀. 최명길(崔鳴吉)등과는 물론 인조와도 심한 의견차이를 드러냈다. 사친의 추존을 통해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인조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1630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임명되는등 인조와 조정은 그의 출사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원종의 추숭논의 이후로는 향리에 머물면서 제자와의 강학에만 열중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그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서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장유(張維). 이후원(李厚源). 신민일(申敏一)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망라되어있다.


▲조헌(趙憲, 1544-1592)묘 충남 옥천군 안남면 도농1리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본관 백천(白川)         시호 문열(文烈)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  도원(陶原)  후율(後栗)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하생
명종22년(156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가 되고 선조5년(1572) 정자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 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종묘서령(宗廟誓令)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명을 모아 영규(靈圭)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여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영조30년(1754)영의정에 추증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집(金集,1574-1656)묘  충남 논산군 벌곡면 양산리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광산(光山)           시호 문경(文敬)
     자 사강(士剛)             호 신독재(愼獨齋)
조선 예학의 태두이신 김장생의 아들이다.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서 출생하였다.
18세에 진사가되고 광해군2년(1610)에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으로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뒤 1623년 부여현감에 이어 임피현령. 지평. 집의. 공조참의등을 지낸다음 공서파(攻西派)가 집권하자 사직하고 오직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정홍명(鄭弘溟). 윤선거(尹宣擧)등과 함께 태극설과 상례에 대하여 논의하였으며, [의례문해(疑禮問解)]를 편찬하였다.
1650년 효종이 즉위하여 공서의 김자점(金自點)이 파직되자 청서(淸西)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기용되어 동부승지. 우부승지. 공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등을 역임하였으나 곧 사임하였다.
태학생(太學生)들로 그의 덕망을 흠모하는자가 많았다.
뒤에 김상헌의 청으로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였다.
그 뒤 촤참찬을 거쳐 판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아버지 김장생과 이이의 학문을 이어받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시켰으며 예학을 체계화하였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1607-1689)묘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 은진(恩津)     시호 문정(文正)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
인조11년(1633)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때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청서파에 속한 그는 공서파의 김자점이 영의정이 되자 파직된 뒤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효종2년(1651)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서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 집의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효종9년(1658)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기년설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들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현종1년(1660)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서 실각, 제1차 복상문제때 기년설을 채택하게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귀 여러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冑)를 지지함으로서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송준길(宋浚吉,1606-1672)묘   대전시 서구 원정동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 은진(恩津)         시호 문정(文正)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인조3년(1624)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효종1년(1649) 집의(執義)로 재기용되었다. 송시열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劃)에 참여하였다가,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뒤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된 뒤 우참찬. 좌참찬 겸 제주(祭酒). 찬선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과 함께 서인에 속하여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데 힘쓰는 한편,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었을 때 남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朞年制)를 관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 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박세채(朴世采,1631-1695)묘 황해도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본관 반남(潘南)        시호 문순(文純)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  남계(南溪)
교리 영(零)의 아들. 원두추(元斗樞)의 사위. 김상헌(金尙憲)의 문인.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현석은 그가 태어난 한양의 한 지명에서, 남계는 그가 만년에 기거한 파주(坡州)의 시내 이름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성균관 유생시절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 효종의 꾸지람을 받자 과거를 포기하였다.
주로 송시열. 송준길등 서인과 학문적 교류를 가졌으며, 1659년 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나자 기년복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었으며,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집의. 동부승지등에 등용되었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자 윤증(尹拯). 최석정(崔錫鼎). 남구만(南九萬)등과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94년 갑술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좌의정에 올랐다. 소론의 힘으로 좌의정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시비명변(是非明辯)후의 탕평책(蕩平策)과 ‘벽이단(闢異端)’을 강조하는 노론의 정치. 학문적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과 초기의 문인들은 대부분 소론이지만, 죽은뒤에 김간(金幹). 김구(金構)등 문인 대부분이 노론으로 이탈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숙종 후반에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자 조정에서 산림학사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붕당간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론을 적극 개진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선조대에 이이가 주장한 조제보합설(調劑保合說)을 모범으로 한것으로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로 구체화되었으며, 영조. 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문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