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휘 방언/전주최문의자랑 한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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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베1 2008. 12. 29. 19:44
한벽당 [寒碧堂]
요약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누각.
지정번호 전북유형문화재 제15호
지정연도 1971년 12월 2일
소장 사유
소재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산7-3
시대 조선시대
분류 누각
한벽당 /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본문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한벽당은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산 7-3에 있는, 승암산() 기슭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터를 만들어 세운 누각이다. 1404년(태종 4)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조선 초기의 문신 최담이 그의 별장으로 지은 것이다. 누각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건평은 7.8평이다.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 계곡의 물이 의암·은석 등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과 합류하면서 만마()·색장() 등 여러 고을 옆을 거쳐 한벽당 아래로 흘러온다. 여기서 물줄기는 계곡의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거듭 굽이틀어 남천으로 흘러간다. 옛 문인들은 이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 같다고 읊었으며,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그들이 제영()한 시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호남읍지()》에는 이경전(이경여(이기발(김진상() 등 19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실려 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처음에는 여기를 최당의 호인 월당()을 따서 월당루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한벽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벽옥한류()라는 글귀에서 한벽()이라는 어귀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벽당의 서쪽 일대는 자만동(滿) 또는 주류동()이라 불리었다. 옛날에는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가롭게 노닐던 곳이었고, 남원·구례·곡성·순천·진주로 가는 나그네들이 지금의 남천교인 호화로운 오룡교()를 건너면서 그 아름다운 풍치를 감상하던 곳이기도 하다

  한벽당 중수기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제20권  
 기(記)
한벽당 중수기(寒碧堂重修記)


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에 월당(月塘) 최공 담(崔公湛)이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오니, 공의 아들 연촌 선생(烟村先生) 휘(諱) 최덕지(崔德之)도 얼마 후 공을 뒤따라 물러났다. 그리하여 부자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강호에서 늙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청절(淸節)에 감복하여 옛날 소광(疏廣)ㆍ소수(疏受)에 비유하였다.
지금 전주부(全州府)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이곳은 월당공(月塘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鳶飛戾天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魚躍于淵
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공의 필적이라 한다.
공의 15세손 최전구(崔銓九)가 한벽당을 중수한 뒤에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기문 쓰는 문제를 상의해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선조의 집이 낡으면 자손들이 보수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이니 말할 것이 못 되며,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의 아름다움이나 풍연(風烟)과 운물(雲物)의 경치에 대한 것은 이 당에 오르는 자가 직접 목격할 것이므로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후인의 천박한 식견으로 수백 년 전의 일을 놓고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참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직 사군자(士君子)가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은퇴하는 대의(大義)는 예나 지금이 다름없는데, 그 현조(賢祖)의 자손을 대하고 어떻게 묵묵히 있겠는가.
대체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장년이 되어 벼슬하여 늙어서 물러나는 것은 예경(禮經)의 밝은 교훈이요 상물(常物)의 대정(大情)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세리(勢利)에 급급하고 높은 관작에 연연하여 물러나지를 못한다. 혹 물러났다 하더라도 맛있는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던 끝이라서 담박한 음식을 싫어하고 옛날 호화롭던 것을 회고하여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한숨 쉬며 애통하여 스스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이런 사람이 어찌 다시 물러남이 십분 시의(時義)임을 알아서 유감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벼슬에 나아가면서 나아감을 사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행할 만한 도가 있는 자요, 물러나면서 물러남을 편안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견고한 내수(內守)가 있는 자이다.
아조(我朝)의 세종(世宗)ㆍ문종(文宗) 연간은 문명한 시대로 성인이 위에 있어 만물이 모두 우러러 준량(俊良)의 등용이 이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호연히 물러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절조가 높고도 밝아서 봉황(鳳凰)이 천길을 나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세 후에 오히려 사람을 흥기시킬 만한 것이 있다. 만일 그가 자잘하게 작은 청렴이나 삼가는 데 힘써서 어치렁거리며 세속의 이목에 잘 보이려고 분주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당대에 이름이 나서 이처럼 후세까지도 무궁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본다면, 공의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이 진실로 이 당(堂)으로 해서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인들이 보고 느끼며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당이 아니고는 부칠 곳이 없으니, 이 당의 중수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 削成蒼石稜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 倒影寒潭碧
라는 시구가 있으니,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주D-001]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 : 영락은 명 성종(成宗)의 연호이며 경태(景泰)는 명 경종(景宗)의 연호인데, 서기 1403~1457년 사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한벽당은 태종 4년(1404)에 최담이 낙향하여 세웠다는 전주읍지(全州邑誌)의 기록이 있다.
[주D-002]소광(疏廣)ㆍ소수(疏受) : 소광은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으로, 태자 태부(太子太傅)가 되고, 조카인 소수는 소부(少傅)가 되었는데, 광이 수에게 말하기를 “벼슬이 높고 이름이 떨치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한다.” 하고 둘이 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漢書 卷71 雋疏于薛平彭傳》

 

25〉 寒碧堂: 參議 崔霮이 亭閣을 세웠고‚ 1683년(숙종 9)에 李師命이 層閣을 따로 세웠다. 1733년(영조 9)에 통판 具聖弼이 중건하였다. 觀察使趙顯命重修記

 

 전주읍지의 내용 1872년

전주지도 全州地圖, 전주는 지금의 전북 전주시 삼례읍, 봉동읍과 완주군 용진면?소양면?상관면?구이면?이서면, 익산시 익산 시내?오산면?왕궁면, 김제군 금산면 일부,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일부를 포함하는 호남의 大都會였다. 읍치는 전주시 경원동, 중동, 풍남도 일대에 있었다.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였고,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貫鄕이자 전라 감영의 소재지였다. 전라북도의 중앙부를 북동으로부터 남서로 뻗어있는 노령산맥의 지류인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그리고 완산 칠봉 등이 시가지의 동?남?서방에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있다. 전주 읍치는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여 남동방 전주천 변에서 북서방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주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乾止山이다. 읍치에는 석성이 축조되어 있고 4대문의 문루도 갖추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남쪽의 豊南門만 남아있다. 객사의 북쪽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造山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북문이 뚫여 있어서 객사의 안정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만든 裨補物로 해석된다. 성곽 내부에는 감사의 집무처인 宣化堂을 비롯한 각종 관청이 포진해 있다. 읍성의 남동쪽에는 慶基殿이 그려져 있는데, 태조 이성계의 御容을 奉安한 곳이다. 읍치 바깥쪽 동남쪽에는 梧木臺가 그려져 있는데, 오목대는 고려말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으로 유명하다. 읍치 오른쪽의 威鳳山城은 1675년(숙종 1)에 성을 쌓고 行宮을 설치했던 곳이다. 읍치 동남쪽의 寒碧堂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서 全州八景의 하나로 꼽았던 곳이다.

寒碧堂

在府南五里城惶山西麓石壁削立俯臨若墜臺下 有川流故參議崔霮剗去石角構成亭閣 肅廟癸亥觀察使李師命別創層閣侈以丹舟艧爲一州 之名年久頽圮英廟癸丑通判具聖弼以重修石樓李慶全詩遺墟未沒佳名久久華構俄瞻妙
 割餘影落潭雲危檻濕光搖笛月小空虛吟懷爽爽秋生後羈思依依夢覺初不是仙間留不足平 明何事重躕躇 觀察使柳穡詩完山吾本貫三世按南州玉節巡遊晚金樽醉興幽獦殘梅欲謝 春至鬢光秋悄悄羇懷苦呼朋更上樓 白江李敬與詩湖海一都會雄藩獨此州亭臺嫌壯麗水石 占淸幽盡舸波迎月雕欄雨送秋征西駐節地興在武昌樓 觀察使朴泰淳詩斜日肩輿薄頷餘 紅亭百尺近州居閑論莊叟觀魚樂笑指公孫躍馬墟山擧送寒侵晚席水光凝碧漾前除官醪數 盞仍成醉醉後吟詩信筆書 肩輿晚出城南陌獨上高樓百尺餘山雨乍晴溪水急溟雲纔捲洞 天虛孤舟長笛憑檻外紅燭淸樽待月初幽興未闌秋夜永不坊扶醉暫躕躇 觀察洪錫輔詩 一曲溪山勝知無五十州近城還靜寂得地最深幽酒重爭邀月衣輕忽似秋今吾將納節誰複護 玆樓 退魚金鎭商詩迥架溪邊石深遮樹外州碧波翻檻度層壁抻簷幽山鬱 興龍地天高送 雁秋岩城歸客盡落日獨憑樓 吏郞李鼎輔詩躍馬當年地 興龍卽此州灘殾孤枕撼山色一 簾幽世事催雙鬢羈愁屬九秋夕陽楓葉晚錦瑟醉高樓 觀察使權䙗詩竊祿二千石觀風五十 州山川元歷歷臺閣更幽幽節序當槐夏郊墟近麥秋絃歌添老興絶勝賦登樓 觀察使趙顯 命重修記寒碧堂名於國久矣己酉余以奉安使過宿豐沛館與李方伯匡德乘夜肩輿以往時初 月微明但見山色蒼然四圍欄外溪聲冷然滿聽也其後五年癸丑余又按節來乘暇往遊之槪有
 削壁臨水而止鑿其半腰而堂褄焉後楹安於壁前楹則累高石承之而檻出虛空其制作之妙殆 若鬼斧成之通判具侯聖弼以屋者傾敗捐俸構功而新之與萬化拱北諸樓一時董新不閱月咸 告訖焉所需蓋千金云夫魯縞至簿也弩不能穿者力盡故也本府近淍弊甚侯又新莅無節蓄以 徒手活數萬飢口斯已難矣然侯之力則宜其盡矣顧又穿過重革何其能也斯堂也無異觀而惟 其架鑿也見其工侯之斯擧也而非異績而惟當板蕩也故見其能夫非韓昌黎所謂因難而見巧 者耶侯本綺紈家而居官惡衣食觀其操尙所存雖山陰一錢蓋將搖手而謝之矣然則侯之淸政 當與斯堂也爭寒而競碧豈直因難見巧之爲相同而已哉是爲記

 

26〉 飛飛亭 : 1573년(선조 6)에 武人 崔永吉이 창건하였으며‚ 중간에 철거되었다가 1752년(영조 28)에 觀察使 徐命九가 중건하여 官亭으로 사용하였으나 당시에는 퇴폐해졌다. 尤庵宋時烈記‚ 觀察使徐命九重修記.

 

飛飛亭在府北三十里
 萬曆癸酉武人崔永吉創建爲別墅中間撤去 英廟壬申觀察使徐命九重建爲官亭今廢 西 歸李起浡詩南州幾處有江亭最是津山獨擅名三大水橫臺下合四長程遠眼中平春風草軟天
 兼碧秋夜沙晴月共明强策蹇驢探勝槪興酣終日暢幽情 趙汝彬詩中分大野散江湖半壁蒼 崖開別區沙霧霽餘明月小水雲飛盡遠峯孤孤龍泉鳴匣何須惜鷗忘機足自娛聞說將軍鳥不好 武每逢詞客醉胡廬 金虎益詩全州形勝冠東韓崔氏林亭最可觀水合三川臺下大山圍四面 野中寬開霽色天逾闊行送淸風夏亦寒雲何處老翁來此地興酣終日更盤桓 權瑎詩崔君亭 子俯平湖占得江南第一區大陸蒼茫山色遠碧天寒闊月輪孤三公富貴何曾換百態雲煙總可 娛籬竹園松俱有趣媿他梅橘舊湯盧 判校洪南立詩絶勝將軍舊水亭飛飛今得相公名風凰 臺迥翔如舞鸚鵡洲長掌樣平春日堵禽鳴上下夕陽霞鷔見分明追壁面西歸韻俛仰人間一愴 情 金斗明詩湖上飛亭筆亦飛客來登眺罷愁圍山川剩得千年勝風月能停四駣壯漁唱乍聞 沙浦動雁聲群帶夕陽微郵童莫怪徘徊去奇賞要須快意歸 李一相詩落日依山盡離亭傍水 斟西郊慣送客一別一傷心 李羽成詩飛飛迥出水雲間上有層巒下碧灣客裏偶逢佳節處浮 生偸得暫時閑 觀察使趙世煥詩共悅君名慕相韓飛飛取義亦堪觀昌洲始覰天莊奐羅暖仍 占世界寬大陸蒼蒼三面坼淸風灑灑四時寒惟將忠孝傅無替功利羞稱五伯桓 觀察使李師 命詩高臺斗絶欲蹇飛喬木蒼然擁千圍幾怕炎塵迷着眼每逢佳處輒停騑河呑巨野分流遠山入平蕪斷續微欲去踟躕還據石向來淸景淡忘歸 觀察使兪得一都事權持聯句崔家亭子小 江濱雨歇長堤草色新千里山河開醉眼一區煙月爽吟唇誰知落落同年友幸作飛飛半夜親君 到漢庭如有問蓮幕惟是未歸人 尤庵宋時烈記飛飛亭在全州參禮驛之南其主人崔後良也
 良嘗請記於余曰亭之作在萬曆癸酉作之者吾祖永吉也吾祖永吉以弓馬拔身官至昌州僉使吾 父完成亦以鶡冠官羅暖萬戶至吾良蓋三世也余曰武人苞苴輦載奔走權門以圖進用老死而 後止者淊淊也今昌洲獨能免此而作亭於形勝之地居處遊息遵迎淸擴能以壽終斯已難矣羅 暖上不以是賂諸貴勢下不以是易其衣食修葺塗槪棟樑如新可謂孝矣今君又愛文字旣揭扁 額又請記以示後人其繼逑之意又深矣因問名亭之義則曰因地名而名之也余曰君世世將種 也古者張翼德之信勇岳武穆之忠孝皆名以飛而曠世相感豈非武臣之所嘗勉慕者耶安知君 之後承不有張岳之倫而凡登斯者皆以三子爲心則其爲世道之敎也豈淺鮮也哉良頓首申亭 小而義大人微而語高受腸之垕無以踰馬請歸而刻之楣間也 觀察使徐命九重修記飛山 卽湖南初程第一勝地也崔姓武人作亭其上因其地而以飛飛名尤庵宋先生取義於張岳之名 而勉之書其扁記事亭以此益顯歲壬申余再拜按是藩亭已毀去爲人葬地卽令掘之輦汚穢闢 荒菑營置官亭或曰亭之名旣有主人則亭雖作矣飛飛之仍其無義意乎余曰不然尤翁以兩名 將勉之者其意深矣今吾屛翰之任而作此亭揭此篇者不特願言之思實欲風礪一道之人子之 言奚其可客曰善遂以舊額懸之後之登斯亭者尙有以知余之意而益勉於尤翁之所以勉者則 幸矣是爲記

 

 

 寒碧堂前一里許諺傅 穆祖少時與群兒遊於鉢山南麓下遇暴風雨避岩下有大虎吼
 於前 穆祖語群兒曰虎不竝噬諸人只傷一人當投衣試之群兒曰君年長先以衣投之卽如其
 言虎噬之群兒挽出 穆祖虎卽跳去崖忽崩墜群兒盡壓 穆祖得免其石至今宛在於水中
 參議井在府南五里

寒碧堂之右卽參議崔霮 舊趾東有小溪溪邊有小 井井上蓋石刻參
 議井三字

 

寒碧堂在府南五里城隍山西麓石壁削立俯臨若墜臺下有川流故參議崔霮剗去石甬構成亭閣肅廟癸亥按使李師命别創層閣侈以丹雘爲一州之名勝年久頽圮英廟癸丑通判具聖弼重修 觀察使趙顯命重修記

寒碧堂名於國久矣己酉余以奉安使過宿豐沛館與李方伯匡徳乗夜肩輿以往時初月微明但見山色蒼然四圍欄外溪聲汵然滿聼也其後五年癸丑余又按節來乘暇往遊之槪有削壁臨水而止鑿其半腰而堂拪焉後楹安於壁前楹則累高石承之而檻出虛空其制作之妙殆若鬼斧成之通判具侯聖弼以屋者傾敗捐俸構工而新之與萬化拱北諸樓一時董新不閱月咸告訖焉所需蓋千金云夫魯縞至簿也弩不能穿者力盡故也本府近凋弊甚侯又新莅無節蓄以徒手活數萬飢口斯已難矣然侯之力則宜已盡矣顧又穿過重革何其能也斯堂也無異觀而惟其架鑿也見其工侯之斯擧也而非異績而惟當板蕩也故見其能夫非韓昌黎所謂因難而見巧者耶侯本綺紈家而居官惡衣食觀其操尙所存雖山陰一錢蓋將搖手而謝之矣然則侯之淸政與斯堂也爭寒而競碧豈直因難見巧之爲相同而已哉是爲記

 

 

飛飛亭在府北三十里萬曆癸酉武人崔永吉創建爲別墅中間撤去英廟壬申按使徐命九重建爲官亭今廢 尤庵宋時烈記
飛飛亭在全州參禮驛之南其主人崔後良也良嘗請記於余曰亭之作在萬曆癸酉作之者吾祖永吉也吾祖永吉以弓馬拔身官至昌洲僉使吾父完成亦以鶡冠官羅暖萬戶至吾良蓋三世也余曰武人苞苴輦載奔走權門以圖進用老死而止者滔滔也今昌洲獨能免此而作亭於形勝之地居處游息遵迎淸曠能以壽終斯已難矣羅暖上不以是賂諸貴勢下不以是易其衣食修葺塗墍棟樑如新可謂孝矣今君又愛文字旣掲扁額又請記以示後人其繼述之意又深矣因問名亭之義則曰因地名而名之也余曰君世世將種也古者張翼徳之信勇岳武穆之忠孝皆名以飛而曠世相感豈非武臣之所當勉慕者耶安知君之後承不有張岳之倫而凡登斯者皆以三子爲心則其爲世道之敎也豈淺鮮也哉良頓首申亭小而義大人微而語高受賜之厚無以踰焉請歸而刻之楣間也
觀察使徐命九重修記飛山卽湖南初程第一勝地也崔姓武人作亭其上因其地而以飛飛名尤庵宋先生取義於
張岳之名而勉之書其扁記其事亭以此益顯歲壬申余再按是藩亭已毀去爲人葬地卽令掘之輦汚穢闢荒菑營置官亭或曰亭之名旣有主人則亭雖作矣飛飛之仍其無義意乎余曰不然尤翁以兩名將勉之者其意深矣今吾屛翰之任而作此亭掲此扁者不特願言之思實欲風礪一道之人子之言奚其可客曰善遂以舊額懸之後之登斯亭者尙有以知余之意而益勉於尤翁之所以勉者則幸矣是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