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논어

論語 한구절

아베베1 2009. 1. 6. 13:37

 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라.”

 “己欲立而立人하고

 己欲達而達人이니라.”

“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니라.”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세우고, 자신이 현달하고자 하면 먼저 남을 현달하게 해주어라.” ‘인(仁)’에 모아졌으니 이것이 바로 ‘

공자의 도(道)’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
고상안(高尙顔) 〈유훈(遺訓)〉 《태촌집(泰村集)》
 
작위가 낮은 것이 한스러울 때면 마땅히 백수인 자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래도 그들보다는 낫지 않은가.’라고 하고,

의식이 부족한 것이 개탄스러울 때면 마땅히 구걸하는 자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래도 저런 일은 면하지 않았나.’라고 해보라.
욕심이 스스로를 망치니
장유(張維) 바다 갈매기가 내려와 앉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설[海鷗不下說]《계곡집(谿谷集)》(이상현 역)
 

기러기가 하늘 멀리 날아가면 사냥꾼도 단념을 하고 만다.

鴻飛冥冥。弋人絶望。

<해설>
바다에서 갈매기와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아버지께서, “네가 갈매기와 친하다니 한 마리만 잡아다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바닷가로 나간 아들. 그러나 갈매기는 이미 그의 은밀한 마음을 눈치 채고는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열자(列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은미(隱微)한 것도 다 드러나는 법’이니 졸렬한 꾀로 속이려 들지 말라는 것이 보통 얘기하는 이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계곡(谿谷) 장유(1587~1638) 선생은 이 고사를 다른 각도로 바라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갈매기는 일개 미물(微物)임에도 불구하고 기미를 알아채고는 안색만 보고도 날아가 버림으로써 멀리 해를 피해 몸을 보전하는 지혜가 이처럼 밝기만 하다. 이에 반해 사람은 그야말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는 짓을 보면 종종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스스로를 망치고 만다. 갈매기만도 못한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지혜가 갈매기만도 못한 이유는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계곡선생은 다시 이번에는 기러기와 물고기가 욕심 때문에 몸을 망치는 것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합니다.

기러기가 하늘 멀리 날아가면 사냥꾼도 단념을 하고 마는데 벼이삭을 쪼아 먹을 욕심에 주살에 맞는 것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물고기가 깊은 물속에서 유영(游泳)하며 느긋하게 즐기노라면 누구도 기회를 엿볼 수가 없는데 맛있는 미끼에 끌린 나머지 낚시 바늘을 삼키면서도 후회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욕심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망치는 무리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에게 계곡선생은 이런 경고와 다짐을 주시면서 글을 마무리합니다.

바다 갈매기가 안색만 보고서도 날아가 버린 것은 오직 욕심에 동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 누가 갈매기처럼 할 수 있는가. 나는 그의 뒤를 따르고 싶다. 주살에 맞을 염려도 없고 펼쳐 놓은 그물도 소용이 없이 호호탕탕 만 리 위로 날아 올라가 그 얼마나 느긋하게 노닐겠는가.

옮긴이 / 조경구(한국고전번역원)

원형이정(元亨利貞)은 마음의 뿌리
장흥효(張興孝) <사덕잠(四德箴)>《경당집(敬堂集)》
 
뿌리가 뽑히고 나면    마음은 죽은 물건.  반복해서 해치면  선한 싹이 사라지네.
其根已拔 心是死物 牿之反覆 善端自熄

<해설>
위 글은 조선 중기 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문집에 실린 <사덕잠(四德箴)> 중 일부입니다.

저자는 아름다운 산의 나무가 땅에 뿌리내리도록 잘 심어 놓고 정성껏 길러주면 강한 생명력으로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도끼로 쳐내고 또 거기서 새로 돋는 싹을 소나 양이 뜯어먹으면 뿌리가 상하여 더 이상 살지 못하고 날마다 사라질 것이니, 그때 가서 누가 그것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뿌리인 사덕(四德)도 잘 북돋아 주고 보살피면 사단(四端)이 때에 맞게 피어나고, 그것을 넓혀 가면 온갖 이치가 드러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사로운 뜻이 일어나면 소나 양이 싹을 뜯어먹어 나무를 해치듯 우리 마음도 상해서 죽은 물건이 되고, 반복해서 해치면 선한 싹이 절로 사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덕(四德)은 우주의 순환 원리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말합니다. 사단(四端)은 우주의 순환 원리에 따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합니다. 인(仁)은 봄처럼 따스한 마음이고, 예(禮)는 여름처럼 문채 나는 마음이고, 의(義)는 가을처럼 차분히 정리하는 마음이고, 지(智)는 겨울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간직하는 마음입니다.

봄을 맞아 강한 생명력으로 꽃을 피우는 나무들을 보며, 마음의 터에도 인의예지를 뿌리로 둔 귀한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봅니다. 뿌리를 북돋아 주고 잘 가꾸고 해치지 않아,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싱그런 나무로 자라나기를 빌어 봅니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쉬어감이 좋은 경우
김귀영(金貴榮)〈행장(行狀)〉《동원선생문집(東園先生文集)》
 
재주와 덕이 노성하기를 기다리더라도 늦지 않다.

待才德老成 未晩也

<해설>
우리는 초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진보하는 기술 때문일까요? 아니면 ‘빨리빨리’라는 말로 대변될 정도로 급한 우리의 성격 때문일까요?
이제 느린 것은 곧 낙오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도 초고속이 아니면 답답해하고, 교육도 조기 교육이 아니면 불안해합니다. 심지어 갓난아기조차도 걸음마를 빨리하게 하려고 안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빠르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조기 승진이 곧 조기 퇴사를 의미하는 요즘 세태도 어쩌면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조선 선조조의 명신입니다. ‘오성과 한음’이라는 우정으로도 익히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가 30대의 젊은 나이로 한 나라의 문장을 대표하는 자리인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물망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중신(重臣)들이 조정에 모여 추천하는 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권점이 하나 적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한 표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의외의 결과에 크게 놀라 웅성거렸습니다. 사실 젊기는 하지만 뛰어난 문재(文才)와 높은 덕망으로 볼 때 한음이 적임자라는 분위기가 대세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 상락부원군 김귀영(金貴榮, 1519∼1593)이 웃으며 나섰습니다.

“내가 추천하지 않았소.”

사람들이 더욱 놀라 이유를 묻자, 그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나이도 젊고 아직 벼슬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중한 벼슬에 오르는 것은 본인에게 좋지 않은 일이지요. 재주와 덕이 더 성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중용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외다.”

그 말을 전해들은 한음은 섭섭해 하기보다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위해주는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당시 선비들은 둘 다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옮긴이 / 권경열(한국고전번역원)


나는 항상 옳은가?
허목(許穆)〈어시재기(於是齋記)〉《기언(記言)》
 
누구나 다,
‘나는 옳은 일을 능히 하고 그른 일은 하고자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의 행동을 꼼꼼히 살펴보면, 옳은 것은 적고 그른 것은 많다.

人之言莫不曰, 吾能於是而不願於非。
然考之行事, 則於是者寡, 於非者蓋衆也。

<해설>
임유후(任裕後)라는 사람이 작은 집을 짓고 ‘어시재(於是齋)’라는 이름을 붙인 뒤, 허목(許穆, 1595∼1682)에게 기문을 부탁하였습니다. 허목은 그 글을 통해 우리에게 ‘옳고 그름’에 대한 착각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하는 행동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조차도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또 남의 잘못은 대부분 잘 찾아내고 지적합니다. 눈에 잘 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남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버럭 화부터 내고 자기가 틀렸다는 걸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듭니다.

이는 세상과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락산에서 도봉산을 바라보면 도봉산이 낮아 보이고 도봉산에서 수락산을 바라보면 수락산이 낮아 보인다고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보니까 상대가 낮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니,

남이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 버럭 화부터 내지 말고, “혹시 나에게 정말 잘못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나의 어떤 모습이 잘못된 것으로 비쳤을까?” 이런 생각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반대로 남의 잘못이 보이거든 그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혹시 나에게는 저런 모습이 없을까?”, “남에게 비친 내 모습도 혹시 저렇지 않을까?” 이렇게 늘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옮긴이 / 조경구(한국고전번역원)

홀로일 때를 삼가라
장유(張維)〈신독잠(愼獨箴)〉《계곡집(谿谷集)》
 
깊숙한 방구석을 내 스승 삼아야지.

屋漏在彼 吾以爲師

<해설>
이 글의 제목에 들어 있는 ‘홀로일 때를 삼간다[愼獨]’는 말은 《대학(大學)》에 실려 있는 말입니다.

“소인은 아무 일 없을 때에 온갖 나쁜 짓을 안 하는 게 없다. 그러다가 군자를 본 뒤에는 슬그머니 저의 나쁜 짓을 감추고 좋은 면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은 그 폐와 간을 다 들여다보듯 훤하니, 무슨 도움 될 게 있겠는가. 이것을 일러 마음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일 때를 삼간다.”

조선 중기 학자 장유(張維, 1587~1638)는 《대학》의 ‘홀로일 때를 삼가라’는 뜻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잠(箴)을 지었습니다.

“깊숙한 방 안, 아무 소리 없는 곳. 듣고 보는 이 없어도 신(神)이 너에게 임하고 있다. 나태함을 경계하고 삿된 생각 막아내라. 처음에 막지 못하면 하늘까지 넘실대리니. 하늘 아래 땅 위에 누가 나를 알겠냐고 말하지 말라. 누구를 속일 수 있겠는가? 사람이 되려는가, 짐승이 되려는가? 길하려는가, 흉하려는가? 깊숙한 방구석을 내 스승 삼아야지.”

사회적으로 번듯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이는 추태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거들먹거리고, 사람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대하다가 추태가 드러나면 오리발을 내미느라 바쁩니다. 부끄러운 일인 줄은 아는 모양입니다.

세상의 눈은 속일 수 있다 해도 자기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제 양심을 속일 수 없는데 세상의 눈을 속인들 뭐하겠습니까? 세상의 눈보다 더 무서운 건 두 눈 부릅뜬 제 양심의 눈입니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전통의 올바른 계승이란
김일손(金馹孫)〈서오현배(書五絃背)〉《탁영집(濯纓集)》
 
나는 밖에서는 요즘 것을 취하고, 안에서는 옛것을 취하고자 한다.

余欲外今而內古

<해설>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할 때였습니다.

독서하는 틈틈이 당시 유행하던 6줄짜리 육현금(六絃琴)을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막역한 동료였던 권오복(權五福)이 찾아왔다가 보고는 물었습니다.

“자네는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어째서 육현금을 배우는가?”

보통 유가(儒家)에서 정통으로 인정하던 가야금은 5줄짜리 오현금(五絃琴), 7줄짜리 칠현금(七絃琴)이었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습니다.

그러자 탁영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요즘 음악도 또한 옛날의 음악에서 유래한 것이네. 소강절[邵康節 : 송(宋)나라의 철학자 소옹(邵雍)]도 요즘 사람은 요즘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도 같은 생각일세.”

그리고 집에 돌아가 오현금의 뒷면에 위와 같은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전통에 담긴 훌륭한 정신은 계승하겠지만, 형식적인 면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는 현대에 어울리지 않는 외형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효도는 뒷전이면서, 정작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유난히 소중히 합니다. 불편함을 해소한 개량품이 있는데도 굳이 옛것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물론 형식이나마 보존할 수 있다면 다행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공자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남의 이목이나 끌고, 대단한 내공이라도 지닌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진정한 전통은 현대에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우리에게 정신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미래에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전통문화는 박물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과 다를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옮긴이 / 권경열(한국고전번역원)


나를 이기면 군자. 나를 이기지 못하면 소인.
장흥효(張興孝)〈신세잠(新歲箴)〉《경당집(敬堂集)》
 
나를 이기느냐 이기지 못하느냐에 따라
군자와 소인이 판가름 난다.

克與不克 小人君子

<해설>
위 구절은 조선 중기 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문집 《경당집(敬堂集)》에 실린 <신세잠(新歲箴)> 중 일부입니다. 이 글은 저자가 68세 되던 신미년(辛未年)에 새해를 맞아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지은 잠(箴)입니다.

저자는 이 글에서 “산을 꺾을 기세로 분노를 다스리고, 구렁을 메울 기세로 욕망을 막으라. 분노와 욕망이 모두 사라지면 구름을 열치고 해가 나오리니. 문을 활짝 열고서 삿된 생각 안 먹으면, 온 세상 전 우주가 모두 내 집에 드네.”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전날 나를 이기지 못했을 때엔 욕심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 나를 이기고 나면 천리(天理)를 회복하리라. 나를 이기느냐 이기지 못하느냐에 따라 군자와 소인이 판가름 나니, 군자가 되려 하면 자신을 이겨야 하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화를 내다보면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산을 꺾을 기세가 되기 쉽고, 욕심을 내다보면 점점 불어나 구렁을 다 메울 기세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산을 꺾을 기세가 아니면 분노를 다스릴 수 없고, 구렁을 메울 기세가 아니면 욕망을 막을 수 없습니다.

분노가 자라기 전에, 욕심이 커지기 전에 그때그때 마음을 낮추고 비우는 것이 가장 좋은 수행법이라 합니다. 햇살처럼 따사로운 마음으로 분노와 욕망을 다스리기 좋은 계절, 봄이 오고 있습니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주인이 주인 노릇을 하면
성여신(成汝信) <성성재잠(惺惺齋箴)>《부사집(浮査集)》
 
주인이 주인 노릇을 하면 집이 광채가 나고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하면 집이 잡초로 덮인다네

主而爲主 光生門戶 主而失主 茅塞堂宇

<해설>
위 글은 조선 중기의 문인 성여신(1546~1632)이 아들의 나태함을 일깨우기 위해 지어준 잠(箴)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성여신은 아들이 기상도 있고 국량도 커서 제법 큰 인물이 될 그릇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의지가 약해지고 기운이 빠지더니만 어느덧 게으름뱅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썩은 나무에는 아무것도 새길 수 없다고 성인도 말씀하셨으니,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공부에 정진하겠다는 뜻을 아버지에게 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여신은 너무 기뻐서 아들에게 시문을 지을 공책을 만들어 주고 <성성재사고(惺惺齋私蒿)>라고 책제를 달아주고는 위와 같은 잠을 지어 면려하였다고 합니다.

이 잠에서 말한 주인은 바로 마음과 경(敬)입니다. 마음은 몸의 주인이고 경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몸과 마음에 주인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모든 일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자리를 지키는 방도는 오직 ‘정신이 항상 맑게 깨어 있는 것[惺惺]’이라고 성여신은 강조하였습니다. 항상 깨어 있는 것이 실로 나태함을 고치는 약이라고 본 것입니다.

옮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하수일(河受一) <효유불급설(孝有不及說)>《송정집(松亭集)》
 
군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할까를 생각하여 먼저 행하고
오래하지 못할까를 염려하여 힘을 다해야 한다

君子之事親也 思其不可及者而先施之 念其不可久者而竭力焉

<해설>
자식의 입장에서 볼 때 부모님은 그 자리에 항상 그대로 계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늘 친구와 먼저 즐기고 내 자식을 먼저 챙기면서 생각합니다.
“다음에 …… ”
“더 좋은 기회에 …… ”
그러나 ‘다음’에 부모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더 좋은 기회’에도 부모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 글의 지은이는 “자식이 봉양하려 하지만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子欲養而親不待]”는 옛말을 대하면서 그럼 어찌해야 하는지를 제시해보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봉양함에 있어서 다음 기회란 없습니다. 늘 우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할 수 있는 것이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방금 생각이 드는 것... 그것부터 실천해보면 어떨까요?

옮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하늘이 뭘 아느냐 말하지 말라
황윤석(黃胤錫) <스스로를 반성하며 지은 잠[自省箴]> 《이재유고》
 
악한 생각 한 가지도 하늘이 반드시 아니,
하늘이 뭘 아느냐 말하지 말라.

一念之惡天必識 毋或曰天奚以識

<해설>
위 글은 조선 후기 학자 황윤석(黃胤錫 1729 ~ 1791)의 문집 《이재유고》에 실린 자성잠(自省箴)의 일부입니다.

저자는 이 잠(箴)의 서(序)에서 “나쁜 줄을 알면서도 저지르는 자가 사람인가? 아니다. 고쳐야 하는 줄 알면서도 그리 하지 못하는 자가 사람인가? 아니다. 사람이면서 사람 같지 않은 자는 죽어도 편치 못할 것이요, 사람이면서 사람 노릇 못하는 자가 산들 뭐하겠는가?”라고 하여, 사람이 사는 목적은 사람 노릇을 하는 데 있다고 보며,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느냐 못하느냐를 기준으로 사람이냐 아니냐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어 “인간이 몰래 하는 말도 하늘은 천둥소리처럼 들으니, 저 높이서 뭘 아느냐 여기지 말고 오직 삼가라. 캄캄한 방에서 마음 속이는 것도 신은 번개처럼 보니, 아무것도 모른다 말하지 말고 밝게 임해 있음을 두려워하라.[人間私語 天聽若雷 毋曰高高 而惟愼哉 暗室欺心 神目如電 毋曰冥冥 而畏其顯]”라고 잠(箴)을 짓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의문을 품어 봅니다. ‘하늘은 정말 인간이 몰래 하는 말도 천둥소리 듣듯 듣는가? 신은 정말 캄캄한 방에서 마음 속이는 것도 번개처럼 환히 보는가? 「하늘이 착한 사람에겐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겐 벌을 준다.」는 단순명료한 공식이 과연 세상에 통하는가?’ 참 알기 어려운 것이 하늘의 뜻입니다.

영국 런던 시내버스에서 시작된 무신론자들의 광고와 그것에 대응하는 유신론자들의 광고가 확산되고 있다 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고 인생을 즐겨라.”라는 문구를, 유신론자들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는 문구를 적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문구는 어떨지요?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천명(天命)을 기다려라.[盡人事待天命]”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말을 하면 반드시 들어맞으니
김상헌(金尙憲)〈제영의정현헌신공문(祭領議政玄軒申公文)〉《청음선생집(淸陰先生集)》
 
말을 하면 반드시 들어맞으니
구정, 대려보다 더 귀중하였네
言發必中 九鼎大呂不足重

* 구정(九鼎), 대려(大呂) : 구정은 우(禹)임금이 구주(九州)의 금으로 주조한 솥이며, 대려는 주대(周代) 종묘의 큰 종으로, 모두 나라의 중대한 보물이다. 지위나 명망이 지중한 것에 비유한다.

<해설>
위 글은 조선조의 문신 김상헌(1570~1652)이 1628년 왕명을 받아 영의정 신흠(申欽)의 영전에 올린 제문 가운데 한 구절로, 상촌(象村) 신흠이 말을 매우 신중하게 하여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평생의 화복과 영욕은 오직 말이 자초하는 것이라고 옛 선현들은 끊임없이 경계해 왔습니다. 속담에도 ‘좋은 말 한 마디는 엄동설한도 따뜻하게 하고 나쁜 말 한 마디는 오뉴월도 얼어붙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음식은 몸을 기르고 말은 마음을 펴는 것입니다. 말을 삼가기를 음식을 조절하듯이 하면 화를 면하는데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옮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친구란
기대승(奇大升) 아버지에게 받은 교훈[過庭記訓] 《고봉집(高峯集)》
 
벗은 비록 없을 수 없지만 신중히 사귀지 않아서도 안 된다.
朋友雖不可無 亦不可不愼

* 過庭(과정) : 아버지의 가르침을 뜻함. 공자의 아들인 리(鯉)가 뜰을 지나다가 아버지인 공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데에서 유래한다.

<해설>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훈을 항상 잊지 않기 위하여 정리한 글입니다. 한때는 좋게 지내다가도 나중에는 서로 헐뜯으며 원수가 되기도 하니,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논어》에서는 이로운 벗과 해로운 벗을 각각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곧고, 신뢰할 수 있고, 많이 아는 벗은 이로우며, 용모는 그럴듯하지만 곧지 못하고, 부드럽지만 신뢰할 수 없고, 말재주는 뛰어나지만 아는 것이 없는 벗은 해롭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어떤 친구인가를 한 번쯤은 차분히 생각해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옮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 어진 사람인가
이달충(李達衷) 좋아하고 미워함에 대하여[愛惡箴] 《제정집(霽亭集)》
 
좋은 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 하면 기뻐할 일이요,
좋지 않은 사람이 나를 좋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기뻐할 일이다.

人而人吾 則可喜也 不人而不人吾 則亦可喜也

<해설>
위 글은 고려 말 문신 제정(霽亭) 이달충(李達衷 ? ~ 1385)의 《제정집(霽亭集)》에 실린 〈애오잠 병서(愛惡箴幷序)〉 중 일부를 번역한 글입니다. 저자는 유비자(有非子)와 무시옹(無是翁)의 문답을 보여주며, ‘자신에 대한 남들의 평가를 바라보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비자가 무시옹에게 “옹은 어째서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 대접을 받고,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 대접을 못 받습니까?”라고 묻자, 무시옹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대답합니다.

‘내가 어떤 평가를 받느냐는 중요치 않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나를 좋게 평가하는 그가 어떤 사람이며, 나를 나쁘게 평가하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 좋은 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 하면 기쁜 일이지만 좋지 않은 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 하면 두려워할 일이다. 또 좋은 사람이 나를 좋지 않은 사람이라 하면 두려워할 일이지만 좋지 않은 사람이 나를 좋지 않은 사람이라 하면 기뻐할 일이다.’

잘못을 지적당했을 때 스스로 반성해 보아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덕이 있는 이의 충고를 귀담아 듣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괜한 말에 상처 받지 않는 일도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노여움을 참지 못하면
안정복(安鼎福)《순암선생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
 
잠시라도 경중 파악을 못하면 순식간에 성인이 미치광이가 되네
造次失輕重 俄然判聖狂

<해설>
위 글은 조선 후기의 학자 순암 안정복이 자신의 심기(心氣)를 다스리지 못한 것을 뉘우치며 쓴 시 중의 일부입니다.

집에 종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부리기 어려울 정도로 교만 방자하였습니다. 하루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종을 심하게 꾸짖었는데, 문득 명나라 학자 진헌장(陳獻章, 1428-1500)의 경계가 떠올라 두려운 마음이 들어 이 시를 써서 스스로 반성한 것입니다.

진헌장은, 칠정(七情) 가운데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 노여움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였다고 합니다.

“노여움의 불길 타오르면 참음의 물로 꺼야 하네. 참고 또 참아도 노여움이 거세어지는데, 백 번을 참아 마침내 장공예(張公藝)처럼 하면 큰일도 이룰 수 있다네. 그러나 참지 못한다면 당장 낭패가 닥칠 것이네.”

사소한 일로 심기가 흔들려 애써 쌓은 학업이 일순에 무너지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장공예 : 당(唐) 나라 사람으로 9세(世)의 친족을 한집안에서 거느리며 화목하게 생활하였다. 고종(高宗)이 그 집을 방문하여 비결을 묻자, 그는 단지 참을 인(忍) 자만 백여 차례 써서 보여주었다고 한다.

옮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경전은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이다
최한기(崔漢綺)〈경전리심지기(經傳理心之器)〉《기측체의(氣測體義)》
 
솥은 음식물을 익혀내는 도구요
경전은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이다

釜鼎所以飪食之器 經傳所以理心之器也

<해설>
위 문장은 조선 말기 학자 혜강(惠岡) 최한기(1803~1877) 선생의 〈경전은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이다[經傳理心之器]〉라는 글 첫머리에 있는 구절입니다.

저자는 도구가 있으면 쓰임이 있어야 하는데, 쟁기를 잡고서 밭을 갈지 못하거나, 솥에 불을 때면서 음식을 익히지 못하거나, 경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쟁기건 솥이건 경전이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글을 읽는 많은 사람이 밖으로만 내달리고 마음을 다스릴 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한 말입니다.

또 약물의 효능으로 혈맥(血脈)과 기체(氣體)가 고르게 되는 것과 같이, 경전을 통해 마음을 갈고 닦아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경지로 나아가라고 권합니다.

훌륭한 성현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을 도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경전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을 읽으면서도 마음을 닦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은 경전이라도 그저 종이뭉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경전의 가치는 그 안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을 통해서 빛나는 것이 아닐까요?

기축년(己丑年) 새해 경전의 가르침과 함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속이 비어야 받아들일 수 있다
이익(李瀷) 〈권수보를 전송하는 서문[送權秀甫穎序]〉중에서 《성호집(星湖集)》
 
두곡은 용량이 정해져 있는데,
먼저 먼지와 흙으로 채운다면 아름다운 곡식을 담을 수 없다.

斗斛之量受有多少 先之以塵土之實 則嘉穀爲之不容也

<해설>
위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이 후배인 권영(權穎)을 전송하면서 써준 글로, 지식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경계한 것입니다.

성호는 자신이 한때 학문을 널리 한답시고 잡설, 패기(稗記) 등을 가리지 않고 많이 얻는 데에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나이가 든 뒤에야 전현(前賢)들의 글을 고심해서 읽게 되었는데, 하루가 안 되어 다 잊어먹기 일쑤였습니다.

그 이유를 성호는, 과거에 마음을 두었던 잡다한 지식이 마치 밭에 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좀체 없어지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였습니다. 사람의 타고난 자질도 두곡처럼 정해진 용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같은 우를 범하지 말고, ‘속이 비어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을 유념하기를 후배에게 조언한 것입니다.

옮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사물을 대하면서
이희경(李喜經) 《설수외사(雪岫外史)》중에서
 
세상의 사물은
귀하다고 지나치게 좋아해서도 안 되고
하찮다고 지나치게 버려두어도 안 된다.

天下之物 貴不可偏愛 賤不可偏棄

<해설>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제자인 설수(雪岫) 이희경(1745~1805)의 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귀한 것만을 좋아하여 일상의 물건을 만들면서도 귀한 재료를 사용한다면, 귀한 것은 더욱 귀해져 정작 꼭 필요한 데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찮고 흔한 재료를 가공하여 잘 사용할 수 있을 때 세상의 물자는 풍부해지고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얻기 힘든 금은보화보다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공기, 물, 흙이 우리에게는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사물이라도 모두 각각의 쓰임이 있습니다.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옮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백성이 새로워지면
이수광(李睟光) 〈스스로 새로워지기 위해 경계하는 글[自新箴]〉《지봉집(芝峯集)》
 
백성이 새로워지면
나라의 운명도 새로워지네

我民旣新兮 邦命亦新

<해설>
조선 중기 학자 지봉(芝峯) 이수광(1563∼1628)의 문집에 실린 자신잠(自新箴)의 한 구절입니다. 저자가 66세가 되던 무진년 새해를 맞아 지은 것으로, 노쇠함은 더욱 심해지는데 학문은 새로워지는 것이 없다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 잠을 지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새해가 밝아 만물이 다 새로워지는 때에 새로워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닦아 광채를 내듯 덕을 닦고, 나뿐만 아니라 백성과 함께 새로워지면, 나라의 운명도 새로워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길은 백성이 새로워지는 데 있고, 백성이 새로워지려면 나부터 새로워져야 하며, 내가 새로워지는 길은 덕을 닦는 데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덕을 닦아 나를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을 고치면 새로워지고 착한 일을 하면 새로워지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술이 맛은 달지만
심수경(沈守慶) 차임석천감자운(次林石川甘字韻)《청천당시집(聽天堂詩集)》
 
일찍이 들으니, 우임금은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曾聞大禹飮而甘 嗜酒全身十二三

<해설>
이 글은 조선 중기의 문신 심수경(1516~1599)이 자손들에게 술을 경계시키는 뜻으로 지은 시 중의 일부입니다.

술은 하(夏)나라 때에 의적(儀狄)이 처음 만들었다고 합니다. 맛이 좋으므로 우(禹)임금에게 바치자 우임금이 맛을 보고는 ‘후세에 반드시 술로 인해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며 의적을 멀리하고 두 번 다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우임금이 이미 술로써 나라를 망칠 사람이 있을 것을 알았다면, 처음 제조했을 때에 어찌 엄형으로 다스려 온 세상에서 근절시키지 않고 물리치기만 했단 말인가. 이는 너무 관대한 처분이 아니었던가. 후세에 주지(酒池)ㆍ조제(糟堤)가 생긴 것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여, 술을 국법으로 금지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 주지(酒池)ㆍ조제(糟堤) : 술로 만든 연못과 누룩으로 만든 언덕. 은(殷) 나라 주왕(紂王)이 총애하던 달기에게 미혹되어 주지와 조제를 만들어 온갖 향락을 누리다가 마침내 멸망하였다는 고사가 있음.

옮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