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상식 관련/삼전도비

병자호란의 치욕 삼전도 비문 전문

아베베1 2009. 1. 12. 01:48
 夢經堂日史編[五] 達城徐慶淳公善著
 
 丙辰正月
十三日。 庚午

晴。風寒。抵宿孤家子。下處少乾淨。與韓主簿聯枕。韓謂余曰。曾見三田渡碑文乎。淸太宗載石東來。歸時豎之云。何以知戰之必勝耶。余曰。余亦傳聞如此。及見開國方略載碑文。始知前聞之誤也。其文曰。 庚戌。朝鮮樹碑三田渡。頌功德。錄其碑文進呈。
大淸崇德元年冬十有二月。寬溫仁聖皇帝以敗和自我始。赫然怒。以武臨之。直擣而東。莫敢有抗者。時我寡君。棲於南漢。凜然若履春氷。而待白日者殆五旬。東南諸道兵。相繼奔潰。西北帥逗撓峽內。不能進一步。城中食且盡。當此之時。以大兵薄城。如霜風之捲秋蘀。罏火之燎鴻毛。而皇帝以不殺爲武。惟布德是先。乃降勑諭之曰。來朕全爾。否則屠之。有若瑛,瑪諸大將承皇命。相屬於道。於是我寡君集文武諸臣謂曰。予托和好於大邦。十年於玆矣。由予昏惑。自速天討。萬姓魚肉。罪在予一人。皇帝猶不忍屠戮。諭之如此。予何敢不欽承。以上全我宗社。下保我生靈乎。大臣協贊之。遂從數十騎。詣軍前請罪。皇帝乃優之以禮。拊之以恩。一見而推心腹。賜賚之恩。遍及從臣。禮罷。卽還我寡君於都城。立招兵之南下者。振旅而西。撫民勸農。遠近之雉擧鳥散者。咸復厥居。詎非大幸歟。小邦之獲罪上國久矣。己未之役。都元帥姜功烈助兵明國。兵敗被擒。太祖武皇帝止留功烈等數人。餘悉放回。恩莫大焉。而小邦迷不知悟。丁卯歲。今皇帝命將東征。本國君臣。避入海島。遣使請成。皇帝允之。視爲兄弟國。疆土復完。功烈亦還矣。自玆以往。禮遇不替。冠蓋交迹。不幸浮議煽動。搆成亂梯。小邦申飭邊臣。言涉不遜。而其文爲使臣所得。皇帝猶寬貸之。不卽加兵。乃先降明旨。諭以師期。丁寧反復。不翅耳提面命。而終未免焉。則小邦君臣之罪。益無所逃矣。皇帝旣以大兵圍南漢。而又命偏師。先陷江都。宮嬪王子曁卿士眷屬。俱被俘獲。皇帝戒諸將不得擾害。令從官及內侍看護。旣而大沛恩典。小邦君臣及被獲眷屬。咸歸於舊。霜雪變爲陽春。枯旱轉爲時雨。區宇旣亡而復存。宗社已絶而還續。環東土數千里。咸囿於生成之澤。此實古昔簡策所希覯也。於戲盛哉。漢水上游三田渡之南。卽皇帝駐蹕之所也。壇場在焉。我寡君爰命水部就其所。增而高大之。又伐石而碑之。垂諸永久。以彰夫皇帝之功之德。直與造化而同流也。豈特我小邦世世永賴。抑亦大朝之仁聲武誼。無遠不服者。未嘗不基於玆也。顧摹天地之大。日月之明。不足彷彿於萬一。謹載其大略。銘曰。
天降霜露。載肅載育。惟帝則之。並布威德。皇帝東征。十萬其師。殷殷轟轟。如虎如貔。西番窮髮。曁夫北貉。執旻前驅。厥靈赫濯。皇帝孔仁。誕降恩言。十行昭回。旣嚴且溫。始迷不知。伊戚自貽。帝有明命。如寐覺之。我后祗服。相率而歸。匪惟殫威。惟德之依。皇帝嘉之。澤洽禮優。載色載笑。爰戢干矛。何以錫之。駿馬輕裘。都人士女。乃歌乃謳。我后言旋。皇帝之賜。皇帝班師。活我赤子。哀我蕩析。勸我穡事。金甌依舊。翠壇維新。枯骨再肉。寒荄復春。有石巍然。大江之頭。萬載三韓。皇帝之庥。
余曰。古人過三田渡。有詩曰。將帥無籌策。文章有是非。人至今傳誦。文章疵累。千古難洗矣。

 

    廣州 淸太宗功德碑
(裏面)
大淸皇帝功德碑(篆 題)
大淸皇帝功德碑
大淸崇德元年冬十有二月」
寬溫仁聖皇帝以壞和自我始赫然怒以武臨之直擣而東莫敢有抗者時我寡君棲于南漢凜凜若履春氷而待白日者殆五旬東南諸道兵相繼崩潰西北帥逗撓峽內不能進一步城中食且盡當此之時以大兵薄城如霜風之卷秋籜」
爐火之燎鴻毛而」皇帝以不殺爲武惟 布德是先乃  降勅諭之曰來朕全爾否屠之有若英馬諸大將承 皇命相屬於道於是我寡君集文武諸臣謂曰予托和好于大邦十年于兹矣由予惛惑自速 天討萬姓魚肉罪在予一人」
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予曷敢不欽承以上全我宗社下保我生靈乎大臣協贊之遂從數十騎詣軍前請罪」
皇帝乃 優之以禮 拊之以恩一見而 推心腹 錫賚之恩遍及從臣禮罷卽還我寡君于都城立召兵之南下者振旅而西 撫民勸農遠近之雉鳥散者咸復厥居詎非大幸歟小邦之獲罪 上國久矣己未之役都元帥姜弘立助兵明朝兵敗被擒」太祖武皇帝只留弘立等數人餘悉放囘 恩莫大焉而小邦迷不知悟丁卯歲今」
皇帝命將東征本國君臣避入海島遣使請成」
皇帝允之視爲兄弟國疆土復完弘立亦還矣自兹以往 禮遇不替冠盖交跡不幸浮議扇動搆成亂梯小邦申飭邊臣言涉不遜而其文爲▨臣所得」 皇帝猶寬貸之不卽加兵乃先 降明旨諭以師期丁寧反覆不翅若提耳面命而終未免焉則小邦羣臣之罪益無所逃矣」皇帝旣以大兵圍南漢而又 命偏師先陷江都宮嬪王子曁卿士家小俱被俘獲」
皇帝戒諸將不得擾害 命從官及內侍看護旣而 大霈恩典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復歸於舊霜雪變爲陽春枯旱轉爲時雨區宇旣亡而復存宗社己絶而還續環東土數千里咸囿於 生成之澤此實古昔簡策所稀觀也」
於戱盛哉漢水上流三田渡之南卽」 皇帝駐蹕之所也壇場在焉我寡君爰命水部就壇所增而高大之又伐石以碑之埀諸永久以彰夫」 皇帝之功之德直與造化而同流也豈特我小邦世世而永賴抑亦 大朝之仁聲武誼無遠不服者未始不基于兹也顧摹天地之大畵日月之明不足以彷彿其萬一謹載其大略銘曰」 天降霜露載肅載育惟 帝則之竝布 威德」 皇帝東征十萬其師殷殷轟轟如虎如豼西蕃窮髮曁夫北落執殳前驅厥靈赫赫」
皇帝孔仁誕降恩言十行昭囘旣嚴且溫始迷不知自貽伊感 帝有明命如寐之覺我后祇服相率而歸匪惟怛  威惟德之依」皇帝嘉之澤洽禮優載色載笑爰束戈矛何以 錫之駿馬輕裘都人士女乃歌乃謳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活我赤子哀我蕩析勸我穡事金甌依舊翠壇維新枯骨再肉塞荄復春有石巍然大江之頭萬載三韓」皇帝之休 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臣呂爾徴奉 敎篆
資憲大夫漢城府判尹臣吳竣奉 敎書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臣李景奭奉 敎撰
崇德四年十二月初八日立
(高十三尺幅四尺六寸(左)蒙文(右)滿文(裏面) 漢文字經七分(楷書)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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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우리가 먼저 화약(和約)을 깬 까닭에 처음으로 진노(震怒)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곧바로 동쪽으로 공격하여 오니 아무도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에 얼음을 밟고 햇빛을 기다리는 듯이 하였다. 거의 50일이 지나자 동남쪽 여러 지방의 군사들은 서로 연달아 무너지고, 서북쪽의 장수들은 골짜기에 머무른 채 한걸음도 나오지 못하니, 성 안의 양식도 거의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많은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기를 마치 서리 바람이 가을 풀을 말듯하고 화롯불에 깃털을 태우듯이 하였으나, 황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무예(武藝)의 근본으로 삼고 또 덕을 펼치는 것을 우선으로 하셔서 항복하라는 칙령으로 달래어 말하기를 “항복하여 내게 오면 너희가 모두 온전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도륙(屠戮)할 것이다.”하였다. 영마(英馬)
와 같은 여러 대장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서로 길을 오가니 이에 우리 임금이 문무(文武)의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내가 큰 나라에 의탁하여 화친을 맺은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나의 어리석고 미혹(迷惑)됨으로 말미암아 윗나라 군대의 토벌을 자초(自招)하여 만백성이 도륙을 당하게 되었으니 죄는 나 한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께서는 오히려 차마 이들을 도륙하지 못하시고 이와 같이 타이르시니 내 어찌 감히 그 말을 받들어 위로는 우리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대신들도 모두 찬성하였다.
드디어 수십 기(騎)를 이끌고 군영 앞으로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예로서 대접하고 은혜로 어루만지며, 한번 보고는 심복(心腹)으로 인정하여 재물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온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곧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려보내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군대를 불러들여 서쪽으로 물러났다. 백성들을 위로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원근(遠近)에 도망친 백성들을 모두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커다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작은 나라가 상국(上國)에 죄를 얻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己未; 1619, 광해군 12)년의 군역(軍役)에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이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를 돕다가 패하여 사로잡혔을 때에, 태조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을 비롯한 몇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보내주었으니 그 은혜가 막대(莫大)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작은 나라가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니, 정묘년(인조 5, 1627년)에 지금의 황제가 장군들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임금과 신하가 섬으로 피난하고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니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고 형제의 나라로 간주하니, 강토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고 강홍립(姜弘立)장군도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예우가 한결같고 관리들이 서로 오갔는데, 불행하게도 뜬소문이 생겨나 퍼져 나가면서 작은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거듭 변방의 신하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언어가 불손하고 또 그 글이 ~ 결 ~ 신(~ 결 ~ 臣)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황제께서는 오히려 너그럽게 대하시어 곧바로 군대를 내보내지 않고, 먼저 조서(詔書)를 보내어 군대를 보낼 시기로써 거듭 깨우치기를 마치 귀를 잡고 끌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듯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으니 작은 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죄가 더욱 무거워졌던 것이다.
황제께서 이미 대병(大兵)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고는, 또 한 무리의 군대에게 명하여 강화도(江華島)를 함락시켜 궁빈(宮嬪)과 왕자(王子) 및 여러 신하들의 가족들을 모두 포로로 붙잡았는데, 황제께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해를 입히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시종하는 관리와 내시들로 하여금 간호(看護)하게 하셨다. 이윽고 크게 은전(恩典)을 베풀어 작은 나라의 임금과 신하 및 그 사로잡혔던 권속(眷屬)들이 모두 옛 장소로 돌아가게 되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 햇볕이 되고 가뭄이 단비가 된 듯, 나라가 거의 망했다가 다시 살아나고 종사(宗社)가 거의 끊어졌다가 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모든 동쪽의 땅 수천리가 모두 살려주는 은택(恩澤)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예로부터 드물게 보는 일이라 하겠다. 아아, 훌륭하도다.
한강의 상류 삼전도(三田渡)의 남쪽은 황제께서 머무시던 곳으로 제단이 있다. 우리 임금이 수부(水部=工曹)에 명하여 단을 더 쌓아 높고 크게 만들고 또 돌을 잘라서 비를 세우게 하였다. 황제의 공덕이 천지의 조화와 같이 흘러갈 것임을 후세에 길이 현창(顯彰)함이니, 어찌 우리 작은 나라만이 대대로 힘을 입을 뿐이겠는가? 또한 큰 나라의 인자한 성문(聲門)과 올바른 무위(武威)에 멀리서도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음이 모두 여기에 근본하는 것이다. 커다란 천지(天地)를 베껴내고 밝은 일월(日月)을 그리자니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기에 부족하나, 삼가 그 대략을 기록하는 바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고 기르는데,오직 황제께서 이를 본받아 위엄과 덕을 함께 펴시네. 황제께서 동쪽으로 정벌하심에 그 군사는 10만이요,은은한 수레소리 호랑이 같고 표범과 같네.
서쪽 변방의 터럭하나 없는 벌판과 북쪽 부락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창 들고 앞서 진격하니 그 위세 혁혁(赫赫)하도다.
황제께서 크게 인자하심으로 은혜로운 말씀 내리시니,
10 줄의 밝은 회답 엄하고도 따뜻하였네.
처음에는 미혹되어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근심을 끼쳤지만,
황제의 밝은 명령이 있어 비로소 깨달았네.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고 함께 이끌고 귀복(歸復)하니,
단지 위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를 가납(嘉納)하시어 은택(恩澤)과 예우(禮遇)가 넉넉하니,
얼굴빛을 고치고 웃으며 병장기를 거두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駿馬)와 가벼운 갓옷,
도회의 남녀들이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서울로 돌아가신 것은 황제의 선물이요,
황제께서 군대를 돌이키니 백성들이 살아났네.
유랑하고 헤어진 이들 불쌍히 여겨 농사에 힘쓰게 하시고,
금구(金甌)
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제단은 더욱 새로우니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언 풀뿌리에 봄이 돌아온 듯하네.
커다란 강가에 솟은 비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덕을 이어가리.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 同知義禁府事) 신(臣) 여이징(呂爾徴)
이 왕명을 받들어 전액(篆額)을 씀.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신(臣) 오준(吳竣)
이 왕명을 받들어 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兼 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신(臣)이경석(李景奭) 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숭덕(崇德) 4년(인조 17, 1639년) 12월 초 8일에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