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시조공 고려문화시중 휘 아

수우당 선생 최공 행장(守遇堂先生崔公行狀) 에기록된 휘 아기록

아베베1 2009. 1. 17. 11:59

기축록 상(己丑錄上)  
수우당 선생 최공 행장(守遇堂先生崔公行狀)


공의 이름은 영경(永慶)이며 자는 효원(孝元)이고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고려 때의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후손으로 통정대부 대사성을 지낸 최사로(崔士老)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의 5대 조부이다. 고조부는 이름이 한정(漢禎)인데 통정대부 예조 참의로 가선대부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증직하였고, 증조부의 이름은 중홍(重弘)으로 증 참판 행 전라도관찰사였으며, 증조모는 현풍(玄風) 곽(郭)씨이다. 조부의 이름은 훈(壎)으로 언양 현감(彦陽縣監)이었으며 조모는 진주 강(姜)씨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세준(世俊)으로 병조 좌랑이었으며, 어머니는 평해(平海) 손(孫)씨인데 찬성 문정공(文貞公) 손순효(孫舜孝)의 손녀이며 현감 손준(孫濬)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기축년(1529, 중종 24) 7월 16일에 태어났다. 공은 날 때부터 성질이 일반 사람과 다른 데가 있어 조부 관찰공이 지극히 사랑하였다. 어렸을 때에 남의 집에서 진귀한 과실이나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문득 입에 넣지 않았는데 물어보면, “부모님과 조부님께 갖다 드리려고 생각한다.” 하였다 《사기(史記)》를 읽다가 맥수가(麥秀歌)에 이르러서는 목이 매어 소리를 내지 못하니 사람들이 평범한 아이가 아닌 것을 알았다.
조금 성장하니 입에서 상스런 말이 없어졌고 걸음걸이도 법도가 있어 엄연히 학자의 기풍이 있었다. 아버지 좌랑공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기르는 데도 역시 단정하게 하여, 노는 데도 부인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고 더러운 일도 못하게 하였다. 나이 20세가 못되어 독서를 매우 즐겼으나 이웃 사람들도 몰랐으며 약관 때에 여러 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는 낙방하였다. 아버지 좌랑공이 사망하니 공은 상례를 한결같이 옛날 예법에 따라 거행하였으며, 공의 어머니는 몸을 해쳐 병이 될까 두려워하여 함께 단식하면서 미음을 권하니 졸곡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밥을 먹었다. 탈상하자 집은 가난하고 어머니는 늙으므로 과거공부에 힘썼으나 이는 본의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낙상(落傷)을 하여 병이 위독하니 팔을 찔러 약에다 피를 섞어 드리니 소생하였는데, 그 후에 상을 당하니 슬퍼하는데 지쳐 몸을 가누지 못하였는데도 오히려 손수 준구(奠具)를 잡았고, 장사에서는 가산을 털어 유회(油灰)를 구비하여 석곽을 마련하되 기어이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하고 그 나머지 일은 계산하지 않았다. 3년 동안 여막에서 시묘하면서, 아침 저녁의 제식에는 반드시 생선과 고기를 갖추어 올렸는데 하루는 큰 비가 내려 시장과의 길이 통하지 않아 묘 앞에서 울고 있으니 호랑이가 산돼지를 물고와 서 상석(床石) 위에 놓았고, 진주에 와서는 제사는 닥쳐오는데 제전에 쓸 고기가 없어 종일토록 한탄하고 있으니 노루가 동산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 나왔고, 장막 속으로 새가 날아드는 효성에 감동한 것이다.” 하였다. 형제가 혼인을 마치고 유산을 분배할 때에 논이 척박한 것은 자기가 가지고 또 균일하게 하지 않고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소를 계산하니 감히 한 마디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그 성의가 사람과 신을 감동케 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그 행동에 감복하여 해당 관서에 아뢰어서 경주 참봉(慶州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주부로 승진시켰으나 또 부임하지 않았다. 잇달아 수령ㆍ도사ㆍ좌랑ㆍ장원 등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 간혹 불을 지피지 않을 때가 있으므로 혹자는 권하기를, “협심하여 개[浦]의 둑을 쌓아 생계를 도모하는 것도 무방하다.” 하였으나,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가난하고 부자는 미리 정해 있는 것이니, 가난한 것은 나의 분수이다.” 하였다. 몸을 가릴 온전한 옷이 없어 추위가 살갗과 뼈를 찌르고, 출입할 때에는 친구 것을 빌려 입기도 하되 개의치 않으며 구학(溝壑)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니 그 뜻은 빼앗을 수가 없었다. 사인(舍人) 오건(吳健)이 전랑 때에 김효원(金孝元)에게 말하기를, “건이 이부(吏部)에 수년 동안 있었으나 사람을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 세상에 뛰어난 인물이 있더라.” 하니, 김효원이 곧 대답하기를, “틀림없이 우리 최 선생님이다.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최 선생님을 흔들기 어려울텐데, 공이 기용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행촌(幸村) 민순(閔純)도 칭찬하여 말하기를, “기한(飢寒)이 뼈에 스며들어도 오히려 태연하고, 흉금이 쇄락(洒落)하여 항상 즐거워하니 이는 안빈락도(安貧樂道)하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언제나 존경하는 벗이라고 불렀고, 공이 사망한 후에는 공의 문하생 중에서 공에게 매우 거만한 언사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끊어 버렸다. 철원(鐵原)에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있어 그곳에서 살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진양에 선대의 옛집이 있어서 장차 늙으려 하는데 마침 사축(司畜)을 제수하니, “우리 집은 세신(世臣)인데 지금 또 은혜로운 명을 받았으니 끝내 멀리 떠나면 의(義)에 온당치 못하다.” 하고, 마침내 명을 받들었다.
장차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는데 노수신(盧守愼) 공은 친척이며 또 친구로서 여러 번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글을 보내어, “고집하는 병이 대단하다.” 하자, 답서에 말하기를, “통하는 해(害)도 적지 않다.” 하였다. 진양에 이르러 몇 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덕산동(德山洞)에 남명 조식 선생의 서원을 세우고, 진주읍 근처에 유거(幽居)하였다. 부정(不逞)한 무리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모함과 비방을 하였으나 끝내 확고히 움직이지 않고 오랜만에 안정되었다. 공이 처음으로 남명 선생을 뵐 때는 국상(國喪) 중인데 피리[箏]를 올려 폐백[䞇]을 하니 선생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세상에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허장(許獎)하였다. 홍염(弘濂)이라고 하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일찍 죽으니 마음이 상하고 아파서 식사를 못하고 오직 술로 자신을 억제하며 세상일에 생각이 없었다. 공의 성품은 엄정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악을 미워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이 또한 공의 천성이었다. 아무리 고관일지라도 탐오한 행동이 있는 자는 비록 만나자고 청해도 피했고 만약 시세에 붙어 아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진흙 묻은 도야지처럼 보았다. 한성(漢城)에 있을 때에 성혼(成渾)과 친교가 있었는데 성혼이 파산(坡山)에서 서울로 왔으므로 그를 방문하고자 가다가 길에서 성혼의 집에서 나온 친구를 만났는데, “방금 성혼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성혼이 심의겸(沈義謙)과 이야기하면서 문을 닫고 찾아오는 손님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다.” 하니, 공은 그대로 돌아서고 다시 가지 않았는데, 며칠이 못 되어 온성안의 선비들이 모르는 자가 없게 되어 이로써 공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성혼의 무리들은 깊이 미워하였다.
안민학(安敏學) 형제가 서로 싸워 얼마 있다가 죄를 얻게 되자 안민학이 공을 찾아왔는데 그 언론이 매우 강직하므로 공은 그 일을 수습하고자 하여 형을 섬기는 도를 극구 말하였는 바, 안민학이 깨달아서 형제가 모두 온전하였다. 뒤에 안민학은 이이(李珥)와 성혼 등의 명망있는 세력을 만나보고는 마침내 함께 친교를 맺었으며 또 말하기를, “나의 벗에 계함(季涵) 정철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좋은 선비입니다. 그가 선생님을 뵙고자 합니다.” 하니, 공이 불응하였고, 뒷날 또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마음을 다하여 나라 일을 보니 만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서울에 있은 지 오래 되었는데 그는 좋은 벼슬 자리에만 있을 뿐이요, 아직 훌륭한 정책을 건의했다고 들은 적이 없다.” 하였는데, 돌아가 정철에게 고하니 정철이 매우 원한을 품었고 안민학도 역시 원수로 보았다. 신사년에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니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 가운데, “지금 국시가 아직 정해지지 않고 공론이 행하여지지 않아서 붕당이 횡행하고 기강이 날로 떨어지는데, 이는 실로 성쇠와 안위에 관련된 일이오니 밝게 살피시고 위엄으로 진압하사, 편당한 무리들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이것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에게 더욱 미움을 샀다.
이이가 처음으로 조정에 올라오니 사람들이 모두, “옛 성현이 다시 나타났다.” 하였으나, 공은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니 사람들이 공을 미쳤거나 어리석다 하였다. 공은 선비들의 공론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고 명예나 이익을 다투는 것을 보고 서울 거리 가까이에 있고 싶지 않아 남쪽으로 갈 결심을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과연 이이가 인망(人望)에 차지 못하여, 식견을 갖춘 자는 벗으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공의 선견지명을 탄복했다. 그리고 이이의 무리와 안민학의 무리들의 노여움과 시새움은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그 후에 공에게 지평을 재차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대밭 속에 집을 짓고 수우당(守愚堂)이라 하였는데, 오래된 매화 나무 몇 그루와 목련(木蓮) 몇 그루와 한 쌍의 학(鶴)이 있었다.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가르치는 것은 내가 잘하는 바가 아니며 술을 마시는 것만 잘하는데 술 마시는 것을 배워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기축옥이 일어나자 성혼ㆍ정철 등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함정을 만들어 서울과 지방에서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일망타진하기로 하고 그 앞잡이 양천경ㆍ김극관ㆍ홍천경ㆍ강해 등을 시켜 길삼봉의 설을 날조하였다. 당초에는 삼봉이 실제의 인물인지 아닌지 똑똑히 모르면서도 역적이 되어 정여립과 어울려 연락한다고 칭하더니 얼마 있지 않아 최삼봉이라 일컬었으며 남몰래 조응기(趙應祺)를 사주하여 최삼봉이 언제나 만장동(萬場洞)에서 역적과 만났다는 말을 병사(兵使) 이일(李鎰)에게 고하게 하고, 경상 감사 김수(金晬)에게 비밀리 이첩(移牒)하여 진양(晉陽) 옥에 가두게 하였다. 의금부 낭관이 도착하여 칼을 벗기고자 하니 공이 임금님 있는 쪽을 향하여 재배하고 말하기를, “임금님의 명령이니 벗어서는 안 된다.” 하니, 모든 이졸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의금부의 옥에 갇혀있을 적에는 날마다 대궐을 향하여 앉는 것을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다. 공의 집의 하인 몇 사람이 또한 잡혀와서 공사(供辭)를 하게 되었는데 함께 갇혀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하인이 말을 실수하면 그 화(禍)는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공사하는 요령을 가르치소서.”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들이 스스로 할 일인데 내가 무엇을 관여하겠는가.” 하며, 끝내 가까이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민망하게 여기고 더욱 공이 동요되지 않는 점에 심복하였다.
위관(委官) 정철이 하인들의 무사(誣辭)를 공에게까지 미치게 하고자 하여, 사형(沙刑)과 단근불로 매우 참혹하게 국문하였으나 하인들은 끝내 허튼 말이 없었다. 위관이 역적 정여립의 하인을 국문하면서, “최삼봉이라는 자가 너의 역적의 집에 왕래하였느냐.” 하니, 답하기를, “전에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수염이 희끗희끗 하였습니다.” 하여, 공에게 3번이나 옷을 갈아 입히고 여러 죄수들 사이에 두고 하인으로 하여금 찾게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공은 안색이 동요되지 아니하여 두려워하지도 않고 다행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공을 반드시 죽이고자 하는 자가 말하기를, “너의 수염이 갑자기 검으니 아마도 뽑아버린 것이 아니냐.” 하니, 공이 듣고 대답하기를, “역적의 하인 말은 어제 저녁에 처음으로 들었으니, 비록 뽑아 버리고 싶어도 해가 저문 밤인데 어떻게 하겠으며, 또 누가 뽑아 주겠느냐.” 하니, 사람들이 그 도량에 감복하였다. 공은 전에 진양에서 양주(楊州)로 아들을 장사지낼 때에 이발(李潑)로 인하여 역적을 만났는데 이발 등에게 말하기를, “그는 사람됨이 교활하고 윗사람에게 교만하여 아버지도 없고 형도 없는 자이니 친하게 사귀지 말라.” 하였는데, 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끝에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이때에 그 편지가 국청(鞫廳)에 나타나자 정철이 얻어 보고 기쁜 기색을 하니 문사랑(問事郞) 이항복(李恒福)이, 공이 잊어버리고 말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일어나서 밖을 돌면서, “최아무개가 죽을 것이다. 어떤 편지 끝에 말한 것이 있으니 죽지 않겠느냐.” 하니, 공이 알아차리고 문초할 때 사실대로 말하였다. 정철이 어떻게 할 수 없어 매 한 번도 때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이항복의 힘이다. 공이 스스로 말하기를, “귀가 먹은 내가 듣게 되었으니 그 말은 반드시 큰 소리였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옥사(獄辭)를 들으니, 임금께서 무고한 것을 살피시고 특명으로 석방하였는데, 밖에서 이 소식의 편지가 들어오니 공이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방금 은혜로운 전지(傳旨)가 있었는데 태양이 편벽되게 비쳐 감격함이 망극한데 동생이 먼저 죽어 홀로 이 은혜를 입지 못하는구나. 동생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로 인해서 죽었으니 길게 통탄하는 바이다.” 하니, 듣는 자가 슬퍼하였다. 공이 옥에서 나와 친척집에 있었는데, 성혼이 그 아들 성준(成濬)을 시켜 쌀을 가져와서, “이 쌀로 고향으로 가시는 노자로 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너의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다.” 하였다. 다음 날 사간원에서 다시 가두어 국문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때 구성(具宬)이 정언으로 성혼과 정철의 무리이다. 위관 정철이 옥졸에게 명하여 움켜쥐고 끌어내어 상처를 입혀, 곤욕이 극심하였으나, 공의 사기(辭氣)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시종을 가려서 조목조목 말하니, 옥관이 나무라면서 말하기를, “국문에 대답하는 말에는 기왕에 일어났던 일을 끌어 내서 사설만 허비해서는 안 된다.” 하니, 공이 정색하여 말하기를, “죄수가 말하는 대로 쓸 뿐이지 사설을 허비한들 공에게 무슨 상관이냐.” 하니, 그 사람이 다시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 정직함이 이와 같았다. 진주에 사는 정홍조(鄭弘祚)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의 옥사에 연좌되어 체포되니 사람이 고하기를, “만약 정홍조가 무함하는 말을 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아직 그와 인사한 바도 없다. 운명이야 어떻게 하겠느냐.” 하였는데, 정홍조가 왔을 때 공은 이미 죽었었다. 정홍조가 선비 박사신(朴士信)에게 공사(供辭)의 이해(利害)를 물으니 박사신이 말하기를, “무릇 옥사는 바르게 하면 된다. 천도(天道)는 매우 밝고 귀신은 속이기 어렵다.” 하니, 정홍조가 개연히 말하기를, “최공은 운치있는 선비이다. 땅벌레와 같은 나는 사모하여 그 문에도 미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지금 나는 이미 늙었는데 속이고 살아난다 해도 장차 사람들이 욕하며 말하기를, ‘저자가 전에 최 아무개를 무고한 자이다.’ 할 것인데, 자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다.
대개 옥사가 경상도 도사(都事) 허흔(許昕)과 진주 판관 홍정서로부터 일어난 것인데, 허흔이 홍정서에게 말하기를, “역적이 최 아무개의 집에 내왕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였고, 홍정서는 말하기를, “진주 별감 정홍조가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여, 이때에 홍정서가 먼저 옥에 있기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정홍조를 협박하였으나 정홍조는 대답하지 않더니 공사에서 말하기를, “최 아무개의 집은 진주 관아에서 5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으며 홍조의 집은 40리 밖에 있사옵니다. 역적이 명사란 이름을 얻은 지 오래이라, 설사 대낮에 왕래하였다면 어찌 명사가 오는 것을 5리에 있는 판관이 모르고 40리에 있는 홍조 혼자 알겠사오며, 만약 남몰래 왕래하였다고 말한다면 판관이 모르는 바는 홍조가 더욱 모르는 바인데 어찌 홍정서에게 말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옥사를 임금에게 알리니, “홍정서를 빨리 심문하라.” 하였는데, 위관이 홍정서에게 사정을 두고 도리어, “정홍조를 심문하소서.” 하고 아뢰어서, 임금의 뜻이 다시 바뀌어 홍정서와 정홍조가 모두 한 차례씩 매를 맞고 석방되었다.
공이 옥에 있을 때에도 온 집안이 음식과 의복 등을 공의 명에 따라 하되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신(愼)씨라는 누이가 옥바라지를 하였는데 하루는 겨울 옷을 가지고 왔으나 공이 받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조상에게 죄를 지었으니 아까울 것도 없지만, 조카의 신상이 중하니 그에게 보내는 것이 좋다.” 하였는데, 억지로 권하니 띠 위에 홍로(弘路)라는 조카의 이름을 써서 돌려주며 말하기를, “누이가 경중을 모른다.” 하였다. 공과 서로 아는 사람도 옥에 갇혔는데, 공이 수박을 매우 맛있게 먹으면서 쪼개어 한 조각을 보내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공도 이 사이에 신맛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화복은 한(限)이 있는 것이니 이런 수박으로 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전에 식욕에 대하여 논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무우[蘿葍]를 매우 좋아하는데, 이번에 옥으로 송치되면서 장터에서 잔뿌리가 없는 미끈한 것이 있음을 보고 나도 모르게 침을 흘렸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니, 사람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이다.” 하였다. 공은 전부터 병이 있었는데, 위관이 와서 국문에 임하게 되자 여러 차례 의관을 보내어 문병을 하였는데, 최후에는 은대(銀帶)를 한 고관이 와서 진맥을 하자고 굳이 청하였으나 공은 천천히 팔을 오므리면서 말하기를, “이병은 위관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하면서, 끝내 거부하고 진맥을 허가하지 않았다. 공이 죽으니 대간이 말하기를, “공이 자살하였으니 금오랑(金吾郞)을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한광립(韓匡立)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소를 올려 정언신(鄭彦信)이 모반한 정상을 무고하여서 옥에 갇혀 같은 간방에 있었으나 공은 시종 상대하지 않았다. 한광립은 무고로 연좌되어 마침내 옥에서 죽었고 그 뒤 수 일만에 공도 죽으니, 박사길(朴士吉)이 공의 시체를 딴 곳으로 옮기면서 말하기를, “그 자의 시체와 가까이 있으시기를 원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비록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었으나 항상 꿇어 앉았으며 한 번도 기대어 앉은 적이 없었는데, 하루는 예전처럼 안색도 양양하더니 식후에 안색이 갑자기 나빠지면서 박사길의 무릎을 베개 삼고 누으니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집안 사람들이 정신력을 시험하고자 글자 한 자를 써서 보내 달라고 청하니 공이 서서히 일어나서 크게 정(正) 자를 한 자 썼는데 이미 자획(字劃)이 틀렸었다. 공은 박사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공은 이 글자를 알아보겠느냐.” 하더니 얼마 있다가 죽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 도(道)를 얻었다 할 것이니,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 얻지 않음이 없다함은 아마 공을 두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조사(朝士) 호남 윤광계(尹光啓) 공과 생원 박사길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시종을 갖추어 기록하고 그 끝에 공을 칭탄하여 말하기를, “정(正)을 얻어 죽었다 할만하다.” 하고, 이어 탄식하기를, “우리에게 무슨 해를 끼쳤겠는가.” 하는 말을 두 번이나 했으니, 대개 공에게 깊이 감복했기 때문이다. 임금께서 공의 집에서 압수해 온 문서를 보시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형제들간에 우애가 독실하였구나.” 하였으니, 내왕한 편지에 모두 우애가 지극하였기 때문이었다. 옥사가 엄하여서 사대부들이 모두 전전긍긍하여 혀를 깨물고 감히 한 마디도 말을 못하는데 문사랑청 이항복(李恒福) 혼자만은 공을 만나고 나서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 노인은 생사를 도외시하니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역적의 무리 중에 최삼봉의 용모를 말하는 자가 있어서 이항복이 자[尺]를 들고 공의 키를 재면서 말하기를, “이름은 들은 지 오래되었으나 만나지 못하였는데 오늘에야 손으로 피부를 만져본다. 세상에 태어나 이 노인을 보지 못하고 헛되게 일생을 지낸 것은 마치 서울 사는 아이가 종루(鍾樓)를 보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다.” 하였다. 김명원(金命元)도 또한 국정(鞫庭)으로 잡혀 와서 공을 보고 말하기를, “사람으로 하여금 늠연(凜然)히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니, 그 평생에 수양한 바를 알겠다.” 하였고, 이헌국(李憲國)이 국문하는데 참석했다가 공이 국정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마루 밑으로 내려왔다고 하니, 정신과 기백이 진실로 사람을 움직일 만했던 것이다. 평소에 몸가짐을 엄하고 굳세며 정직하게 하여, 안과 밖이 모두 꽉차고 드날리니, 여간한 시일과 공력으로는 이렇게 되지 못한다. 왜란(倭亂)이 일어나 임금님이 의주로 행차하였을 적에 참판 김우옹(金宇顒)이 성혼(成渾)을 만나 이야기하다가 역변에 미치자, 성혼이 말하기를, “ 나 같은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대들이 너무 지나치게 추앙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이지 나 혼자만의 죄가 아니다.” 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최 처사를 죽인 자가 누구냐.” 하니, 성혼이 달리 말한 것은 없고 다만, “만약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할 때는 공이 나를 조금이라도 도와 주면 다행이겠다.” 하였으니, 과연 공이 성혼의 아들에게, “너의 아버지의 미움을 샀다.”는 말과 들어 맞았다. 신묘년에 홍여순(洪汝諄)이 사헌부의 장으로써 발론하여 정철을 귀양보내고 공의 원통함을 씻었는데, 임금은 공에게 대사헌을 증직하였으며, 또 사신을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고, 그 가족을 진휼하였다. 그리고 김우옹이 대사헌으로써 정철의 관작을 삭탈하였으니 공이 돌아간 지 수년 만에 시비가 마침내 밝혀져서 마치 구름을 걷고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것 역시 근자에 없었던 일이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이 규칙에 따랐는데, 음식이나 의복으로부터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바라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 사람과 더불어 말할 적에는 심정을 토로하여 숨김이 없었고, 동지를 만나면 형세를 잊을 정도에 이르지만 그 반면 허락하는 사람이 적어서 사람들이 모두 경외하여 꺼렸지만 애모하는 사람도 역시 많았다. 글을 읽되 문자 그대로만 보아 넘기지 않고 반드시 자기에게 필요한 부문을 찾아서 힘을 썼으며, 사람들이 귀로 듣고 입으로만 중얼거리며 실천에 힘쓰지 않는 것을 보면 그 허위를 마음으로 미워하였다. 이 때문에 유속배(流俗輩)들에게 미움받게 되었는데, 아들을 잃은 후부터는 규모를 조금 달리하였다. 그러나 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고, 빈천 때문에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며 위무(威武)에 굴복하지 않았으니, 부귀 역시 어찌 조금이라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겠는가. 수양하는 바가 이와 같아 말과 행동이 세상에 존중되었다. 또 서울에서 자라서 사대부들의 마음가짐과 행실을 갖추어 알고 있었으므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나 취하고 버리는 데는 단호하고 구차하지 않으니 깨끗한 선비들은 칭찬하였으나 흉악한 무리들은 반드시 복수하고자 하였으므로 그 화가 유독 참혹하였던 것이다. 만년(晩年)에는 매우 독서를 믿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더러 작게 여겼으나 독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었고 세상에서 거짓으로 학문한다 하고는 명리(名利)를 취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기(李芑)가 《중용》으로 진출되고, 이정(李禎)ㆍ황준량(黃俊良)은 학문에 뜻을 둔 것으로 칭송되었고, 왕지망(王之望)ㆍ윤색(尹穡)의 무리는 과연 말하기에도 부족하게 여겨졌으니, 대개 당시의 폐습을 바로 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혹 말에 병통이 있지만 말 때문에 뜻을 해쳐서는 안 될 것이다. 여러 곳의 선비들이 공을 덕천 서원(德川書元)에 배향(配享)하였다. 나 유성룡은 비록 상종한 지 오래 되었으나 가깝게 살지 않았고 또 만년에야 알았으니, 공이 어렸을 때나 장성했을 때의 행적에는 이목이 미치치 못한 데가 많은데 특히 마음으로 느낀 바와 상세하게 보고 들은 바를 대강이나마 한두 가지 열거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