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연촌공 휘 덕지/동국여지승람에기록된(연촌공)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기록된 연촌공 기록(함양, 남원,김제 장수 영맘)

아베베1 2009. 1. 25. 15:59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


동쪽으로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37리이고, 남쪽으로 산음현(山陰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전라도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27리이고, 북쪽으로 안음현 경계까지 37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속함군(速含郡)인데 함성(含城)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이 승격시켜서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삼았으나, 현종은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하여 합주(陜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명종이 다시 강등시켜서 현으로 만들고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4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속함(速含)ㆍ함성(含城)ㆍ천령(天嶺)ㆍ허주(許州)ㆍ함양(含陽)
【성씨】 본군 여(呂)ㆍ오ㆍ박ㆍ서ㆍ조(曺), 이 속성(續姓)이다. 마천(馬淺) 조(조(曺)).
【풍속】 풍속이 근신하고 정성스러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 신숙주가 지은 제운루(齊雲樓) 기문에 있다. 백암산(白巖山)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문필봉(文筆峯) 군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지리산(智異山)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 북쪽은 온통 이 고을 지경이며, 천왕봉(天王峯)이 진주와 경계로 되었다.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 의탄소(義呑所)와 5ㆍ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천왕점(天王岾)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경계이다. 백운산(白雲山) 군 서쪽 40리 지점에 있는데 안음현 경계이다. 화장산(花長山)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산 속에 난초와 혜초(蕙草)가 많다. 취암산(鷲巖山)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상산(霜山)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여러 바위가 다투듯 빼어난데 형상이 칼날 같다. 산 밑에 골이 하나 있는데, 홍무(洪武) 경신년, 왜적을 정벌할 때에 병기를 저장했던 곳이다.
도현(桃峴)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팔량현(八良峴) 군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전라도 운봉현 경계로서 요충 지대이다. 고개 위에 신라 때 옛 진터가 있다. 수지봉(愁智峯)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안점산(鞍岾山) 군 북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산 위에 옛날 석성이 있다. 사암산(蛇巖山) 군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오도봉(悟道峯)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대고대(大孤臺) 남계(灆溪) 복판에 있다. 소고대(小孤臺) 뇌계(㵢溪) 복판에 있다. 대관림(大館林) 뇌계 동쪽 언덕에 있다.
남계(灆溪)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동천(東川)의 하류이다. 산음현 경계에 와서 임천(瀶川)과 합류한다. 뇌계(㵢溪)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백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흘러 사근역(沙斤驛) 가에 와서 남계에 들어간다. 임천(瀶川)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엄천(嚴川)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서계(西谿) 군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팔량현에서 나오는데, 제한역(蹄閑驛) 아래쪽 5리쯤에 이르러서는 두 산골 사이에 돌이 뻗쳐서 바닥이 되었으며, 갈아놓은 것처럼 미끄럽고, 물줄기가 나는 듯 흘러 물방울을 튕기며, 굽은 낭떠러지에 내리 쏟아서 댕글댕글하는 것이 패옥 소리 같다.
【토산】 대[竹]ㆍ벌[蜂蜜]ㆍ석이버섯[石蕈]ㆍ감ㆍ은어[銀口魚]ㆍ석류ㆍ잣[海松子]. 『신증』 오미자.
【성곽】 읍성 고을 관아가 옛날에는 군 동쪽 2리 지점에 있었다. 홍무 경신년에 청사(廳舍)가 왜구에게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관아를 문필봉 밑으로 옮기고 흙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다. 둘레는 7백 35척이고 나각(羅閣)이 2백 43칸이다. 문이 셋인데, 동쪽은 제운(齊雲), 남쪽은 망악(望岳), 서쪽은 청상(淸商)이다. 사근산성(沙斤山城) 군 동쪽 17리 지점, 사근역 북쪽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2천 7백 96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성안에 못이 셋이다. 경신년에 감무(監務) 장군철(張群哲)이 성을 지키지 못하여 왜구에게 함락 당한 뒤에 폐해 버리고, 수리하지 않았다가, 성종조에 다시 수축하였다.
【누정】 학사루(學士樓) 객관 서편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오르던 곳인 까닭으로 학사루라 이름하였다. 그 뒤에 왜적에게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에 누 또한 옮겨다 지었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
제운루(齊雲樓)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천순(天順) 신사년 4월에, 임금께서 신의 선대가 일찍이 관작을 추증 받았으나, 여러 해를 변방에 있었으므로, 아직 선영에 배례도 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별히 휴가를 내리고, 호남 선영에 분황(焚黃)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남원에 도착하니, 함양 원으로 있는 종형 자교(子橋) 혜옹(惠翁)도 와서, 수일 동안 환담하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함양성에 문이 있고 문에는 누가 있는데, 무너진 지 여러 해여서 사람이 올라갈 수 없으나 수축하지 못하였다. 내가 이 고을을 맡아서 한 해를 넘기고 나니 정사가 간단해서 여가가 많다. 고을에 대사(臺榭)와 누관이 없어 왕인(王人 사신 따위)을 위로하고 답답함을 풀 만한 곳이 없음을 생각하고, 이에 민중과 의논하여 문루(門樓)를 온통 새롭게 하였는데, 처마와 칸살을 넓직하게, 대마루와 서까래를 가지런하게, 단청을 빛나게 한 다음에 그만 두었다. 공사를 마치자, 상국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공(黃公 황수신)이 마침 와서 감사 성안(成安) 김공(金公)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서 낙성하였다. 이 두 분이 첫째로 시 두 편을 지었고, 여러 따르던 자들도 모두 화답하여 현판하니,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고을이 두류산 기슭에 있는데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과 천 리에 구름과 안개의 변화하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침저녁으로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이 누에 오르면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라.’ 하였다. 나는, ‘한 번도 올라서 그 시설한 것과 경치를 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여러분의 작품을 보고 대강이나마 안 다음이라야 기문을 지을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지 수일 후에 형님이 또 편지를 보내, 남원공 이하 여러분의 시 수십 편을 보게 하고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방금 여행하느라 피로했고, 또 더위에 병든 중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받아 여러분의 시를 한바탕 읽고 읊조리는 동안에, 오랜 병이 없어지고 마음이 상쾌하여 저절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감탄하기를, ‘형님과는 머리 땋은 아이 적부터 함께 글을 읽었고, 일찍이 그 옛 사람을 경모하는 진실함을 보았을 뿐, 무슨 일을 만들어내는 재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고을 원이 되어, 정사하는 데에 어짊과 용서를 우선으로 하면서 기강(紀綱)을 바로 잡아, 너그러움과 위엄을 함께 이루게 하였다.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사모하여 남들이 옛날 정사와 같음이 있다 일컬으니, 이것은 진실로 진정과 순박한 것으로 된 것이다. 또 능히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재간이 있는 자도 능히 하지 못한 것을 하였으니, 또한 괴이하다 할 만하다. 누를 읊조린 시만으로도 남의 병을 천리 밖에서 능히 낫게 하였는데, 하물며 몸소 그 누에 올라서 관람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비록 늙었으나, 만약 형님을 따라 한 번 누에 오르게 된다면, 마땅히 형님을 위해 극히 넓힐 것이요, 우선은 이것을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빗발은 점점 걷히는 듯 하건만, 은은한 우레 소리는 아직도 누를 울린다. 구름이 골에 돌아드니 발이 어둡고, 바람이 못 위에 살랑거리니 자리가 서늘하다. 연꽃 향기 속에 개구리는 개골개골, 황새 그림자 속에 벼가 윤기나네. 난간에 기대어 두류산 바라보니, 천길 봉우리는 용이 솟았는 듯하여라.” 하였다.
백사정(白沙亭)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봄 찾아 술 싣고 외로운 마을 지나니, 뻐구기 소리 들리는 대낮에 사립문 닫았네. 비 뒤에 떨어진 꽃이 물에 떠 오니, 인간 어느 곳도 도원(桃原) 아닌 곳 없다.” 하였다.

『신증』 망악루(望岳樓) 성 남쪽 문루이다.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 ○ 김종직의 시에, “작년에 내 발자취 저 멧부리를 더럽혀,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이 또 다시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하였다.
청향당(淸香堂) 객관 서쪽에 있으며 밑에 연못이 있다. 군수 조위(曺偉)가 지었다.
【학교】 향교 군 북쪽에 있으며 소소당(昭昭堂)이 있다.
【역원】 제한역(蹄閑驛)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운봉(雲峯) 고갯길이 시내 곁에 났는데, 나귀를 편하게 타고 긴 휘파람 한 번 분다. 서쪽 산이 만 길 높다 말하지 말라. 객이 여관에 들어도 석양이 못 되었네.”하였다.
사근역(沙斤驛) 군 동쪽 16리이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이 14인데, 유린(有麟)ㆍ안간(安澗)ㆍ임수(瀶水)ㆍ제한(蹄閑)ㆍ정곡(正谷)ㆍ신안(新安)ㆍ신흥(新興)ㆍ정수(正守)ㆍ횡포(橫浦)ㆍ마전(馬田)ㆍ율원(栗元)ㆍ벽계(碧溪)ㆍ소남(小南)ㆍ평사(平沙)이다.
○ 승(丞)이 1명이다.
○ 신우(辛禑) 6년에 왜선 5백 척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3도를 침략하였다. 상주(尙州) 부고(府庫)를 불태우고, 경산(京山)을 경유하여 사근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장수가 역 동쪽 3리쯤에서 싸웠으나, 패전하여 박수경(朴修敬)ㆍ배언(裵彦) 두 원수가 죽고, 군사도 5백 명이나 죽어서 냇물이 다 붉었다. 그리하여 지금 혈계(血溪)라 부른다. 이로 말미암아 왜적의 군세는 더욱 성하여, 군 성을 무찌르고 남원을 향해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에게 섬멸되었다. ○ 이첨의 시에, “운봉산 밑에는 가을 바람이 이르고, 햇살이 엷고 날씨가 추우니 나뭇잎이 마른다. 이때에 우리 군사가 왜놈에게 패하여, 피를 함양 언덕의 풀에 뿌렸네. 양부의 원수가 진 앞에서 죽었으니, 하찮은 군사들이야 신명 보전도 어려웠으리라. 슬픈 피리 두어 곡조에 장부도 눈물 지으며, 늙기 전에 국치(國恥)를 씻으리라 맹세하였네. 남쪽으로 출정한 장수 누가 군사 없으랴마는, 깃발도 천천히 갔던 길 돌아가도다.” 하였다. ○ 역 남쪽에 제법 넓게 트인 정자가 있다. 이숙번(李淑蕃)의 시에, “객의 귀 밑에 눈서리 더하여도, 흐르는 세월은 조금도 멈추지 않네. 윤음(綸音)이 금궐(金闕)에서 내려오니, 옛 벗들 우정(郵亭)에서 전송한다. 시내와 산은 집을 둘러 훌륭하고, 소나무는 구름을 스칠 듯 푸르도다. 임금의 은혜를 갚기는 어려우니, 어찌 반드시 궁궐에 가야 하리.”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가는 길 우리 고향과 가까워, 더욱 기쁘다. 말 머리가 내일에는 산음을 지나리. 사람들은 왕인(王人)이라 보지만, 재간 없는 취한 한림인 줄 어찌 알리오.”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5년에 승(丞)은 혁파하고 찰방을 두었다.

광혜원(廣惠院) 성 남쪽 2리 지점에 있는데, 다락집이 있으며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다. ○ 이항무(李恒茂)의 시에, “총총히 겨를 없어 누에 못 오르다가, 이날에야 올라보니 눈이 잠깐 트인다.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구름이 아득하고, 남으로 지리산 쳐다 보니 눈만 높이 쌓였네. 2년 동안 녹 먹으며 무슨 일 했나. 천리 밖 고을을 맡았으나 재주 없는 것 부끄러워라. 어찌하면 호탕하게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송백(松栢)이나 잘 가꾸워 볼까.”하였다. 사근원(沙斤院) 사근역 동쪽에 있다. 도현원(桃峴院) 도현(桃峴) 밑에 있다. 덕신원(德信院)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교량】 사근교(沙斤橋) 사근역 남쪽에 있다. 대교(大橋)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견불사(見佛寺) 지리산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절이 명산 속에 있으니, 창건된 때가 아주 옛날이네, 선상(禪床)엔 일월이 한가하고, 강석엔 인천(人天)을 설하는구나. 너에게 무생(無生)이라는 이치 들었고, 내 신선 못 배웠음이 한스러워라. 얘기 끝에 도리어 취미가 있으니, 눈앞에 풍경이 좋기도 하이.” 하였다.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10년 동안 떠들 적에 내 어이 견디었던가. 구름 산에 자취 감추고 한바탕 꿈 달게 여기자. 지는 해에 번쩍이는 놀 취점(鷲岾)에 비꼈고, 긴 바람은 비를 몰아 용담(龍潭)에 지난다. 흰 구름과 푸른 학은 속절 없이 아득한데, 아간(牙簡)과 경고(瓊膏)를 어찌 싫도록 참례하였나. 오늘 밤에 솔바람 창을 스치니, 가벼운 노을에 뚜렷한 달을 누워서 보리라.” 하였다.
승안사(昇安寺) 사암산(蛇巖山)에 있다. 선열암(先涅菴)ㆍ고열암(古涅菴)ㆍ신열암(新涅菴)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화장사(花長寺) 화장산에 있다. 엄천사(嚴川寺) 엄천 북쪽 언덕에 있다. 마적사(馬迹寺)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馬迹)이 살았다는 것으로 명칭을 하였다. 앞에는 유가대(瑜珈臺)가 있고, 밑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으며 탄 위는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금대암(金臺菴)ㆍ보월암(寶月菴)ㆍ안국사(安國寺)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본조 중 행호(行乎)가 창건한 것이다.
무주암(無住菴) 지리산에 있다. ○《보한집(補閑集)》에, “중 무기(無己)가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었다. 장삼 하나로 30년 동안을 지냈고, 매년 겨울과 여름이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새끼 띠로 감아 묶고서, 봄 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는데, 하루에 3ㆍ4말 밥을 먹었다. 한 곳에 앉으면 반드시 열흘이 넘었고, 일어나 걸으면서 게(偈)를 지어 크게 읊었다. 산중에 70여 개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서 한 끼씩 먹으면서 게 한 수씩 남겼다. 무주암 게에, ‘이 지경에 본래 주거하는 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집을 지었는가. 오직 무기(無己)란 자만이 남아서 가거나 머물거나 처음부터 거리낌 없다.’ 하였으니, 말이 엉성하고 쉬운 듯하나 숨긴 뜻이 깊다. 혹시 한습(寒拾)의 무리인가.” 하였다.
덕봉사(德峯寺) 천왕점 밑에 있다. 등귀사(登龜寺) 오도봉(悟道峯)에 있다.
『신증』 유호인의 시에, “두류 만첩 산아 잘있었는가. 잠깐 여가 타서 여기 올랐노라. 금당(金堂)과 옥실(玉室)의 옛 언약을 찾으니, 푸른 고개 붉은 벼랑이 모두 옛 안면일세. 해 저물어가니 기러기 북쪽으로 가고, 누런 국화 떨어질 제 객이 남쪽으로 돌아온다. 난파(鑾坡)가 멀리 운림(雲林)과 격했구나. 양(兩) 지역에서 돌아오니 귀밑머리 반백일세.” 하였다.

미타사(彌陀寺) 사근성산(沙斤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모사(聖母祠) 사당이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천왕봉 위에 있고, 하나는 군 남쪽 엄천리에 있다.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 “성모는 태조의 모친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한다.” 하였다. 성왕사 군 동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읍성 관변리(官邊里)에 있는데, 지금 고을 관아와 4리 거리이다. 공안부곡(功安部曲) 군 동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마천소(馬川所) 천(川)은 옛날에는 천(淺)으로 썼다. 군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말 방울 울리며 마천에 들어오는데, 빈종(賓從)도 또한 점잖구나. 그늘진 구렁엔 얼음이 얼려하고, 양지쪽 벼랑엔 단풍이 아직도 곱다. 눈이 신모묘(神母廟)를 덮었고, 우레가 칩룡연(蟄龍淵)에서 울려온다. 굽은 언덕엔 시참(柴慘 형벌의 일종)을 남기고, 수목 우거진 사당엔 지전(紙錢)이 걸려 있네. 나무를 깎아서 시냇가엔 자귀밥 있고, 숯을 굽느라 골짜기엔 연기가 난다. 일하는 사람은 메밀을 베고, 작은 색시는 목화를 거둔다. 그럭저럭 임기가 가까워졌으니, 이 놀이를 응당 그리워하리.” 하였다. 의탄소(義呑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소의 아전들이 지금은 군 서쪽 웅곡리(熊谷里)에 옮겨가 산다.
월명총(月明冢) 수지봉 위에 있다. 전설에는, “옛날에 동경의 장사꾼이 사근역 계집 월명을 사랑하여 며칠 동안을 머물다가 갔다. 월명이 사모하다가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여기에다 묻었다. 그 뒤에 장사꾼이 그 무덤에 가서 곡하다가 또한 죽어서 마침내 같은 무덤에 묻혔다.” 한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무덤 위에는 연리지(連理枝) 푸르구나. 길손이 그를 위해 화산기(華山畿)를 부른다. 지금도 달 없으면 여우가 우는데, 꽃다운 넋은 나비되어 날고 있겠지.” 하였다.
【명환】 신라 영충(令忠) 헌덕왕(憲德王) 14년 웅천 도독(熊川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켜서, 무진(武珍)ㆍ완산(完山) 등 주를 협박하여 제 편으로 만들었다. 완산 장사(完山長史) 최웅(崔雄)이 영충과 함께 서울에 도망쳐 와서 보고하였다. 임금이 곧 영충을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로 임명하였는데, 위계는 급찬(級湌)이었다. 최치원(崔致遠) 치원이 해인사 중 희랑(希朗)에게 보낸 시 끝에 방로태감 천령군태수(防虜太監天嶺郡太守) 알찬(遏粲) 최치원이라 적었다.
본조 송희경(宋希璟)ㆍ이차약(李次若) 숭인(崇仁)의 아들이다. 채륜(蔡倫)ㆍ최덕지(崔德之)ㆍ조상치(曺尙治)ㆍ정종소(鄭從韶) 모두 수령[知郡]이었다.
『신증』 김종직 고을 사람이 추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조위(曺偉).
【인물】 고려 박충좌(朴忠佐)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삼사사에 이르렀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하여 비록 재상이 되었으나, 사는 집과 의복은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본조 박자안(朴子安) 벼슬이 도총제에 이르렀고, 장수의 재질이 있었다. 여칭(呂稱) 벼슬이 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박실(朴實) 자안의 아들이다. 태조조에 자안이 경상ㆍ전라도 도안무사가 되어서 항복한 왜인을 응접하다가, 군사 기밀을 잘못 누설하여 죄가 참형에 해당하였다. 조정에서 베어 죽이도록 공문을 보냈으나, 저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이기에 비밀에 붙이고 선포하지 않았다. 박실이 듣고 곧 태종의 사저에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아비 목숨을 살려 주도록 청하였다. 태종께서 마음으로 슬프게 여겨서, 곧 자안의 사형을 감형하도록 계청하였다. 태조께서 처음에는 노하였으나 얼마 뒤에 중추원 녹사 심귀수(沈龜壽)에게 힘껏 빨리 달려가서 자안의 죽음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귀수가 반 넘어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역리를 시켜 명령서를 대신 보냈다. 명령서가 도착하기 전에 감형관은 이미 자안의 낯을 칠하고 옷을 벗겼으며 칼도 갖추고 있었다. 역리는 멀리 들판에서 갓을 휘둘렀다. 감형관이 바라보고 형 집행을 정지하고 기다렸다. 그리하여 자안은 죽지 않게 되었다. 박실은 본래 학술과 무예가 없었으나, 태종이 그 아비 구한 것을 어질게 여겨서 금려(禁旅)를 맡게 하였다. 직위가 총제에 이르렀다. 오응(吳凝)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신증』 여자신(呂自新) 무과에 올랐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성품이 청렴 결백하고 소탈하며 곧았다. 여운철(呂允哲) 자신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렀으며 청렴 결백한 것이 그 아비와 같았다.
【우거】 본조 유호인 과거에 올랐고 시를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성종(成宗)이 일찍이 그가 저술한 것을 베껴서 바치도록 하였다.
【효자】 본조 박안행(朴安行) 효행이 있어서 정려되었다. 박유효(朴由孝) 아버지의 무덤에 시묘하는 때를 당하여, 어미 병이 위독하였다. 변을 맛보니 맛이 달므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더니 어미가 죽자 아비의 무덤에 합장하고 6년을 여막에서 거처하였다.
【열녀】 고려 송씨 역승(驛丞) 정인(鄭寅)의 아내이다. 홍무(洪武) 연간에 왜구에게 잡혔다. 왜적이 겁탈하고자 하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복종하지 않다가 드디어 살해당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본조 김씨 이양(李陽)의 아내이다. 양이 자식도 없이 죽으니, 사직 여자근(呂自勤)이 장가들고자 하였다. 김씨는 지아비의 무덤에 달려가서 사흘 밤을 풀 속에서 잤다. 그 뒤에 박용덕(朴龍德)이란 자가 또 아내로 삼고자 하였으나, 김씨는 응하지 아니하고 목매어 죽었다. 성종 3년에 고을 원을 시켜 그 무덤에 제사하고 정문하였다.
【제영】 함양소현난산심(咸陽小縣亂山深) 이색(李穡)의 시에, “함양 작은 현은 많은 산이 깊고, 깎아지른 벼랑은 다시 만 길이나 되네.” 하였다. 함양구물단청산(咸陽舊物但靑山)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함양 옛 물건은 청산뿐이니, 몇 차례 흥망 겪으며 한 고을에 딸렸던가.” 하였다. 천극두류기반공(天極頭流倚半空)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하늘 끝 두류산은 반공에 기댔고, 호남을 한 번 채운(彩雲) 속에 바라보네. 시험삼아 누 위에서 난간에 기대보니, 천고에 푸른 얼굴 두루두루 같아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안의(安義)에 예속시켰다가 이어 나누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영조 5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정조 12년에 군으로 강등시켰다.
【정지】 읍성 영조 5년에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7천 35척이며 동ㆍ서ㆍ남 3문이 있다. 천왕봉고성(天王峯古城)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하며, 의탄(義呑)의 소재지에서 5ㆍ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고, 안에는 창고 터가 있다. 안치고성(鞍峙古城) 석축의 터가 있다.
【교량】 사근교(沙斤橋) 역 남쪽에 있다. 대교(大橋) 남쪽으로 5리이다.
【창고】 읍창ㆍ북창(北倉) 북쪽으로 30리이다. 사창(仕倉) 남쪽으로 30리이다. 역창(驛倉) 사근에 있다.
【사원】 남계서원(濫溪書院) 명종 임자년에 세우고,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정여창(鄭汝昌) 문묘 편에 보라. 정온(鄭薀) 광주(廣州) 편에 보라. 강익(姜翼) 자는 중보(仲甫), 호는 개암(介庵),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참봉이다.
○ 당주서원(溏洲書院) 선조 신사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노진(盧禛)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이며, 풍천(豐川)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방면】 읍내 끝이 5리이며, 일명 원수면(元水面)이라고도 한다. 관변(官邊)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지내(池內)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사근(沙斤)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열음계(列音界)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휴지(休知)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엄천(嚴川)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마천(馬川)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1백 리이다. 죽곡(竹谷)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광복(廣福)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백전(柏田)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북산(北山)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병곡(甁谷)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30리이다. 유등포(柳等浦)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도북(道北)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북천(北川)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상덕곡(上德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하덕곡(下德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백토(柏吐)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모수(毛首) 동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현내(縣內)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서상동(西上洞) 처음이 50리, 끝이 1백 50리이다. 서하동(西下洞)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 공안(功安) 부곡은 동남쪽으로 15리, 마천소(馬川所)는 지금 면이 되었으며, 의탄소(義呑所)는 남쪽으로 30리이다.


[주D-001]분황(焚黃) :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그 관직이 상당히 높아지면, 그 부(父)ㆍ조(祖)ㆍ증조(曾祖)의 3대에 벼슬을 추증하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었는데, 그 추증할 때에 관직을 기재한 사령장은 누런 종이에 쓴다. 그 종이를 분묘 앞에서 불사르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분황(焚黃)이라 한다.
[주D-002]인천(人天) : 사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치와 천리(天理)에 관한 것을 합하여서 인천(人天)이라 한 것이다.
[주D-003]아간(牙簡)과 경고(瓊膏) : 아간(牙簡)은 관청 문서라는 말이요, 경고(瓊膏)는 고량진미(膏梁珍味)라는 말이다.
[주D-004]한습(寒拾) : 당(唐) 나라 중엽 시대의 유명한 중 한산(寒山)ㆍ습득(習得)을 약칭한 것이다. 그들은 기행(奇行)으로 유명하고 또 시승(詩僧)으로 유명하였다.
[주D-005]금당(金堂)과 옥실(玉室) : 여기에 금당 옥실이라 함은 부처 있는 곳을 미화시켜서 한 말이다.
[주D-006]난파(鑾坡) : 난파는 한림학사가 공무 보는 곳을 말함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홍문관의 관원들이 있는 곳을 난파라고 하였다.
[주D-007]연리지(連理枝) : 두 나무가 각각 나서 가지만이 서로 얽힌 것을 연리지라 한다. 옛날 전국 시대 송 나라 강왕(康王)이 한빙(韓凭)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았다. 한빙이 자살하자 그의 아내도 자살하였으므로 어느 산기슭에 묻었더니, 두 무덤에서 각기 나무 하나씩이 나서 가지가 서로 얽히었다. 송 나라 사람들이 그 나무를 상사목(相思木)이라 하여 이들의 사랑을 가련하게 여겼다.
[주D-008]화산기(華山畿) :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 송(宋) 나라에 짝사랑하다가 죽은 남자의 상여가, 그 짝사랑하던 여자의 집 앞으로 지나갈 때에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여자가 나와서, “나를 연모하다가 죽었다면, 나도 그대를 좇을 것이니 원한다면 관을 열어 주오.” 하였더니, 관이 열리므로 그 여자가 그 관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모두가 놀래어 아무리 꺼내려 하여도 이미 죽었으므로 할 수 없이 합장하였다. 그것을 노래한 곡조가 화산기(華山畿)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동으로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10리, 북으로 여산군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까지 17리, 서쪽으로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22리, 서울로부터 4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다. 후조선(後朝鮮)의 임금 기준(箕準)은 기자의 41대 손인데,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에 떠서 남으로 내려가, 한지(韓地)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이곳을 병합하고, 이후부터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이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치고, 고려조에 와서 전주(全州)에 부속시켰다. 충혜왕(忠惠王) 뒤 5년에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寄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익주(益州)라 하였는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금마(金馬)ㆍ익주(益州).
【풍속】 생민이 후박하다. 박초(朴礎)의 시에, “생민이 후박하니 마한(馬韓)의 풍속이다.” 하였다.
【성씨】 본군 김(金)ㆍ한(韓)ㆍ송(宋)ㆍ이(李)ㆍ황(黃)ㆍ임(林)ㆍ구(仇). 흑석(黑石) 이ㆍ구ㆍ김.
【산천】 건자산(乾子山) 군(郡)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도순산(都順山) 속칭 시다산(施茶山)이라 하는데,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당산(唐山)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에는 밤이 산출되는데 1년에 세 번 열린다. 그러나 딴 곳에 옮겨 심으면 나지 않는다. 용화산(龍華山)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일명 미륵산(彌勒山)이라고도 한다. 장군봉(將軍峯) 용화산 남쪽에 있다. 바위 위에 구멍이 있는데 기름 몇 십 말을 담을 수가 있어 속칭 등잔암(燈盞巖)이라 한다. 춘포(春浦)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용화산(龍華山)에서 나와 전주의 신창진(新倉津)으로 들어간다. 왕궁정(王宮井)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이다.”라고 한다. 마룡지(馬龍池) 오금사(五金寺) 남쪽 백여 보(步)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 한다. 상시연(上矢淵) 군의 서쪽 17리에 있다.
【토산】 대[竹]ㆍ붕어[鯽魚]ㆍ생강[薑].
【누정】 청심루(淸心樓)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송을개(宋乙開)의 기문에, “금마군(金馬郡)은 옛날 무강왕(武康王)이 칭왕(稱王)한 땅이다. 산천은 그 옛날과 같고 탑과 묘(廟)가 완연하니,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웅장한 풍도가 장열하였음을 짐작할 만하도다. 국조(國朝)에 와서 병자년에 무진(茂珍) 노상군(盧相君)이 이 고을을 지켰는데, 처음으로 누각을 객관 동쪽에 세웠다. 오랜 세월에 기울고 헐었는데, 무진년 봄에 밀양(密陽) 손후(孫侯)가 군수로 와서, 노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마련하고 기와를 구워 새로 단장을 하였다. 단청(丹靑)을 칠하고 2개월 만에 완성을 보았다. 생각하니, 어진 수령 손후여, 관에서 이 역사를 하는데 백성이 모르고, 위에서 가진 마음 아래에서 서로 도와, 재력이 관청에서 나오지 않아도 일하는 사람이 배부르며, 역사는 대중이 하지 않고도 공사가 완성되니, 이 도리를 미루어 모든 일을 펴 나가면, 무슨 일인들 인(仁)에 어긋나리요.”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사원】 흑석원(黑石院) 흑석 부곡에 있다.
【불우】 미륵사(彌勒寺)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방술을 물었더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으로 못을 메워 이에 불전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백공(百工)을 보내어 도왔는데, 석탑(石塔)이 매우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창 밖 청산을 깎아 만든 것 같은데, 근심이 있을 때 눈을 들어 바라보니 더욱 분명하구나. 가을 바람이 날로 두건과 지팡이에 불어오니, 높은 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볼까 하노라.” 하였다. 사자암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려 있는데, 부여잡고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곳이다. 사원사(上院寺) 용화산에 있다. 오금사(五金寺) 보덕성(報德城)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薯童)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ㆍ여단(厲壇) 모두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고적】 쌍릉(雙陵)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의 능이라 하였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즉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금마산(金馬山) 견훤(甄萱)의 말에,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 대대로 발흥하였고, 진한과 변한이 뒤이어 일어났다.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 지 6백여 년이 된다.” 하였다. ○ 이제 생각하건대, 온조(溫祚)가 마한을 병합한 뒤 그 땅을 금마저(金馬渚)라 부르고, 금마산(金馬山)이라 부르지는 아니했다. 또 금마군은 백제의 서울이 된 일은 없다. 견훤의 말의 근거를 알 수가 없다. 기준성(箕準城)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기준(箕準)이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고 한다. 석축 둘레는 3천 9백 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시내와 우물이 있다. 보덕성(報德城)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유지(瀢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고구려가 당 나라에 망한 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은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하여 잔민을 모아 패강(浿江 대동강)에 이르러 당 나라의 관리를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西海)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종실(宗室) 안승(安勝)을 만나 그를 받들고, 한성(漢城)에 와서 임금으로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고하기를, “우리의 선왕 장왕(臧王)께서 실도(失道)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이제 신 등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맞아 군(君)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고자 하나이다.” 하였다.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에 거주하게 하고, 보덕왕(報德王)을 봉했으며 형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그 뒤 신문왕(神文王)은 안승을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반했다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무리가 관리들을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로 또 반역하였으나, 임금은 장사(將士)를 보내어 토벌하여 죽이고 그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에 옮기게 하고, 그곳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흑석부곡(黑石部曲)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석장동(石檣洞)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기슭에 고사(古寺)의 유지(遺址)가 있고, 돌 돛대가 높이 세워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된다. 속칭 그 마을을 석장동이라 한다. 전대(前代)에 주와 현에 혹 동(銅)이나 돌로 돛대의 모양을 만들어, 지기(地氣)를 누른 것이 곳곳에 있는데, 지금도 그 중에 하나이다. 사교원(蛇橋院) 군의 서쪽 19리에 있는데, 지금은 폐하고 없다.
【명환】 본조 진의귀(陳義貴) 정치를 잘하여 명망이 있었다. 노귀상(盧龜祥) 송사(訟事)를 처리하는 데에 과단성이 있었다. 최덕지(崔德之) 행실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일처리는 자상하고 분명하였다.
【인물】 고려 이주(李湊)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한림학사승지까지 지냈다. 성품이 온순하며 문장을 잘 지었고 글씨를 잘 썼다. 평생 동안 살림을 몰랐으니, 집안에는 저축이란 조금도 없었다. 이행검(李行儉) 이주의 아들인데 충렬왕(忠烈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전법랑(典法郞) 벼슬을 지냈으며 정화원주(貞和院主)가 평민을 노예로 삼았다. 그 평민이 고소를 하니, 동료가 권세가의 압력을 받고 법을 굽히려 하였지만 이행검이 한사코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마침 병에 걸려 휴가중이었는데 동료들은 다행으로 여기고 일을 처결해 버렸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니 날카로운 칼이 하늘에서 내려와 형부(刑部)의 관리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형부의 관리들은 모두 폭사하거나 병사하였는데 유독 이행검만이 무고하였다. 벼슬은 국자전주(國子典酒)까지 지냈다. 이공수(李公遂) 이행검의 손자인데,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서 과시(科試)에 수석으로 뽑히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원 나라는 임금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웠는데, 이공수가 사신으로 원 나라에 들어가 서경(西京)에 이르러서, 태조(太祖)의 원묘(原廟 정묘(正廟) 이외에 다시 세운 묘)에 배알하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다시 복위하지 않으면, 신은 죽어도 다시 돌아가지 아니하겠습니다.” 하였다.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제수받고,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별장을 덕수현(德水縣)에 마련하고 자칭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하였고, 공민왕묘(恭愍王廟)에 배향되었다.
【유우】 본조 권근(權近) 귀양살면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
【열녀】 본조 구씨(仇氏) 조민(曹敏)의 처인데 나이 15세에 조씨 가문에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다시 개가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남편의 모습을 그려 벽에 걸고 의복을 늘어놓고 밤마다 애통하였으며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告)하였고, 시식(時食)을 반드시 바쳤다. 채소와 국을 먹지 아니하였고, 좋은 옷을 입지 아니하였으며, 소복(素服)으로 일생을 마쳤다. 성종(成宗) 2년에 임금에게 알려져 쌀을 주고 정문을 세웠다. 오씨(吳氏) 지삼근(池三近)의 처인데 남편이 죽고 3년간 묘막 생활을 하였는데, 직접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며 슬피 곡(哭)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제영】 기랑자복경무성(箕郞雌伏竟無成) 성임(成任)의 시에, “기랑(箕郞)은 움츠리고 끝내 성취 없었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병합함은 이치에 분명한 일. 당시 휘하의 장사 생각해보니, 그 몇 사람이 고개 돌려 서경(西京)을 생각했으랴.” 하였다. 상마사야춘(桑麻四野春) 권근(權近)의 시에, 전쟁을 하던 곳 천년 뒤 오늘, 사방에는 뽕과 삼이 봄을 맞았네.” 하였다. 마한문물구성공(馬韓文物久成空) 송을개(宋乙開)의 시에, “완부(完府)의 판도가 통일이 되니, 마한의 문물이 오래토록 공허하네.” 하였다. 백년무어련금마(百年無語憐金馬)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남호(南湖)는 희고 흰데, 익산(益山)은 푸르구나. 지난 일은 희미한 한 자리의 꿈. 백제(百濟)의 유허(遺墟)에는 고목이 공적하고, 기준(箕準)의 옛 궁터엔 석양이 비꼈구나. 백년이나 말이 없으니 가련하다 금마(金馬)여, 만고에 다정(多情)하여 석양(石羊)을 기억하네. 백발되어 원유(遠遊)하니 강개가 많고, 등림(登臨)하니 신상(神傷)하지 않는 곳이 없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는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에 성을 쌓고,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 칭했다.
【방면】 군내(郡內) 동쪽으로 끝이 3리이다. 제석(帝釋)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춘포(春浦)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두촌(豆村)ㆍ두천(豆川)ㆍ지석(支石) 모두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사제(蛇梯)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율촌(栗村)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구문천(九文川)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미륵(彌勒)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20리이다. ○ 흑석부곡(黑石部曲) 남쪽으로 15리이다.
【교량】 상한교(上漢橋)ㆍ하한교(下漢橋) 모두 남천(南川)에 있다. 입석교(立石橋) 춘포(春浦)와 김제(金提) 길에 있다. 면천교(綿川橋) 서쪽으로 함열(咸悅)과 통하는 길에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게[蟹]ㆍ뱅어[白魚]ㆍ삼률(三栗).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 모두 문묘 편에 보인다.

 

김제군(金堤郡) 33권


동으로 금구현(金溝縣)경계까지 14리, 남으로 태인현(泰仁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부안현(扶安縣) 경계까지 26리, 만경현(萬頃縣)경계까지 13리, 북으로 만경현(萬頃縣) 경계까지 18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벽골군(碧骨郡)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인종(仁宗) 21년에는 현령을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3년에 본현 출신인 명(明) 나라 환자(宦者) 한첩목아(韓帖木兒)의 요청으로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벽골(碧骨).
【성씨】 본군 김(金)ㆍ장(張)ㆍ조(趙)ㆍ염(廉)ㆍ구(仇), 최(崔)ㆍ이(李)ㆍ조(趙)ㆍ신(申) 모두 내성(來姓)이다. 평고(平皐) 이(李)ㆍ곽(郭)ㆍ온(溫)ㆍ오(吳)ㆍ문(文)ㆍ여(呂), 김 속성(續姓)이다. 신(申) 모두 내성(來姓)이다. 마천(馬川) 윤(尹). 재남(才南) 이(李). 명랑(鳴良) 구(仇). 제견(堤見) 구(仇).
【풍속】 인심이 순후하고 농사일에 부지런하였다.
【산천】 명량산(鳴良山) 명량향(鳴良鄕)에 있는데, 고봉(孤峯)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로 동진강(東津江)이 흐른다. 승가산(僧伽山) 군의 동북쪽 10리에 있다. 오적죽산(吾赤竹山)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대평(大坪) 속칭 김제(金提) 만경평(萬頃坪)이라 한다. 동쪽은 전주(全州), 남쪽은 태인(泰仁), 북쪽은 신창진(新倉津), 서쪽은 동진(東津)과 접해 있다. 회연(廻淵) 군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옛날 병영(兵營) 터가 있다. 장신포(長信浦) 회연(廻淵) 서쪽 5리에 있다. 신창진(新倉津) 마천소(馬川所)에 있다. 전주부(全州府) 편에 보인다. 동진(東津) 군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부안현(扶安縣) 편에 자세하다. 대제(大湜)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둘레가 1만 3천 34자이다. 내소제지(乃所梯池)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토산】 마름ㆍ가시연[芡]ㆍ연(蓮)ㆍ붕어[鯽魚]ㆍ모시[苧]ㆍ순채[蓴].
【누정】 문명루(文明樓) 바로 군의 남문루(南門樓). 『신증』 자민루(字民樓)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내재역(內才驛) 군의 서남쪽 15리에 있다. 동원(東院)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불우】 흥복사(興福寺) 승가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고적】 평고 폐현(平皐廢縣)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수동산현(首冬山縣)인데, 신라가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시키었다. 고려 초에 전주(全州)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명량현(鳴良縣)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제견향(堤見鄕)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 윤회(尹淮)의 지지(地志) 및 전라도 관풍안(觀風案)에는 전주(全州)ㆍ태인(泰仁)ㆍ임피(臨陂)도 또한 제견향에 실려 있으니, 생각건대, 벽골제(碧骨堤)에 가까운 땅은 다 제견(堤見)이라 불렀으리라. 그러나 상고할 바가 없다. 마천소(馬川所)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재남소(才南所)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벽골제(碧骨堤)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물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금구현(金構縣) 무악산(毋岳山)의 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무악산의 북쪽에서 나오며, 하나는 태인현(泰仁縣)의 상두산(象頭山)에서 나와 벽골제에서 같이 만나 고부군(古阜郡)의 눌제수(訥堤水)와 동진(東津)에서 합치고,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신라 흘해왕(訖解王) 21년에 처음 둑을 쌓았는데, 길이가 1천 8백 보나 된다. 고려 시대에 와서 다시 수축하였다가 후에 폐지하였고, 본조(本朝)에서는 태종(太宗) 15년에 박희중(朴熙中)을 보내어 관찰사 박습(朴習)과 더불어 다시 중수하도록 하였는데 또한 지금은 폐지하였다. ○ 중수비(重修碑)에,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 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結) 95 복(卜)이라 하니, 고적(古籍)에 적혀 있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萬頃縣)의 남쪽에 이르고, 둘째 고랑을 장생거(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潤富)의 근원에 이르며, 셋째 도랑을 중심거(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古阜)의 북쪽 부령(扶寧)의 동쪽에 이르고,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流通渠)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하늘이 우리의 국조를 열어 성군이 태어나니, 힘써 다스려서 태평 세월을 성취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명하여 사방을 순시하고, 제방(堤防)을 완비하며 관개(灌漑)를 잘 통하게 하였다. 을미년 봄에 판상주(判尙州) 이발(李發) 공(公)을 명하여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삼으니, 이공이 처음으로 벽골(碧骨)에 와서 이것을 보수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번거롭고 바빠서 시작하지 못하였다.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함양(咸陽) 박습(朴習) 공과 경력(經歷) 권전(權專) 군(君)과, 경차관(敬差官) 희중(凞中)이 모두 여기에 와서 공사의 어렵고 쉬운 것을 고찰하여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니, 드디어 임금이 허가를 하였다. 각 군의 장정 총 1만 명과 일을 처리하는 사람 3백 명을 증발하고, 옥구진 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金訓) 군(君)과 지김제군사(知金提郡事) 김방(金倣) 군을 시켜 감독하게 하니, 이해 9월 갑인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10월 정축일에 완성하였다. 둑의 북쪽에는 대극포(大極浦)가 있는데, 조수가 몹시 격하며, 남쪽에는 양지교(楊枝橋)가 있는데, 물이 깊게 고여 있어서 공사하기가 무척 힘이 들어, 옛부터 어려운 공사였다. 이제 먼저 대극포의 조수가 치는 곳에 방축을 쌓아 그 기세를 죽이고, 다음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를 양지교(楊枝橋)의 물이 고여 웅덩이가 된 곳에 세워서 기둥을 만들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다섯 겹으로 목책(木柵)을 막아서 흙을 메우고, 또 제방 무너진 곳에 흙을 쌓아 편평하게 하며, 제방의 내외로는 버들을 두 줄로 심어서 그 기반을 단단하게 하였으니,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룡(丘壟)처럼 바라보였다. 또 장생(長生)ㆍ중심(中心)ㆍ경장(經藏)의 세 수문의 옛날 돌기둥을 보수하였고,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돌을 쪼개어 주춧돌로 삼고, 느티나무 기둥을 세웠다. 또 양쪽의 석주심(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이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또 아래의 석봉(石縫)은 쇠를 녹여 땜질을 해서 단단하게 하고, 다시 안쪽의 물을 막고 있는 언덕도 보수하였다. 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 두 수문은 파도가 치는 곳은 아니지만, 만약 물이 범람하여 이곳으로 새어 흐르면 물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두 수문의 양쪽에다 돌을 깎아 주춧돌로 삼아서, 그 위의 느티나무 판으로 다리를 만들어 왕래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永樂) 13년이다.” 하였다.

용두동(龍頭洞) 군의 남쪽 2리에 있는데, 조간(趙簡)이 살던 곳이다. 전하는 말에, “조간은 태어나면서 양쪽 어깨에 용의 비늘이 있었는데 바로 벽골제의 용정(龍精)이라고 하였다. 그가 군의 낮은 관리가 되었는데 하루는 괴수(槐樹) 나무에 올라갔더니, 읍재(邑宰)가 낮잠을 자다 꿈에 나무 위에 쌍룡이 얽혀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뒤 사람을 시켜 사실을 알아본 뒤에, 즉시 공부를 시켜 후에 과거시험에 1등으로 급제하게 되었는데, 그가 살던 곳을 용두동(龍頭洞)이라 한 것이다.” 한다. ○ 이곡(李穀)의 시에 “장원(壯元)이 난 고을을 우연히 향하니, 옛집 추녀 앞에 석양이 비꼈네. 매번 과장(科場)에서 군용(群龍)이 다투지만, 남다른 재명(才名) 뭇 새 중에 일악(一鶚)이네. 세상을 싫다 하던 공은 일찍 하늘로 돌아갔는데, 이웃에 자리잡은 나는 황정(黃精 약재)을 다듬고자 하네. 지령(地靈)에서 인걸 난다는 말을 믿을 만하구나, 공경(公卿)이 연이어 나는 것을 보라.” 하였다.
【명환】 본조 최덕지(崔德之)ㆍ전약충(全若衷)ㆍ최유종(崔有悰) 모두 정치의 명망이 있었다. 김륜(金崙) 청렴하고 간소하며 정치의 명성이 있었다. 김미(金楣) 법을 지키고 공사를 받들었다. 성종 갑진년에 교서(敎書)를 내려 포상하였다.
【인물】 고려 조간(趙簡) 어려서 한 사람이 시 구절을 읊기를, “벼루 위 검은 구름은 휘필(揮筆)한 뒤.”라 하니, 즉석에서 받기를, “뜰 앞의 붉은 비는 떨어진 꽃 시절.”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다음해에 임금이 시(詩)와 부(賦)로 친히 문신(文臣)들을 시험할 때 또한 1등을 하였다. 황패(黃牌)를 하사하였고 여러번 관직을 옮겨 보궐(補闕) 벼슬을 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기거경력(起居經歷) 벼슬을 주었다. 벼슬이 밀직부사찬성사(密直副使贊成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우거】 고려 박의중(朴宜中) 자는 자허(子虛), 초명(初名)은 실(實)인데, 밀양(密陽) 사람이다. 공민왕 때에 장원에 뽑히고, 신우(辛禑) 때에 여러 번 옮겨 벼슬이 대사성 밀직제학(大司成密直提學)에 이르렀다. 사신으로 북경에 들어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돌아올 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니, 요동호송진무(遼東護送鎭撫) 서현(徐顯)이 베를 청구하거늘, 의중이 자루 입구를 기울여 보이고 입고 있던 모시옷을 벗어 주었다. 서현이 그의 청백함에 탄복하고 예부(禮部)에 알리니, 천자가 인견하고 예를 더하여 대접하고, 예부(禮部)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대접하도록 하였는데, 원평장원사(元平章院使)의 윗자리에 앉도록 하고 그의 요청을 허락하여 주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검교참찬 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에 배수되었다. 박의중은 천품이 명민하고 학문이 독실하였으며, 청렴하고 강개하며 편할 때나 험난할 때나 절개를 한결같이 하였고, 문장은 정심(精深)하고 전아(典雅)하였다. 본조 정곤(鄭坤)ㆍ노숭(盧崇), 안지(安止) 영중추원사(嶺中樞院事)로 마을 농막에 퇴거하였다. 호는 고은(皐隱)이다. 『신증』 【열녀】 본조 동질금(同叱今) 향리(鄕吏) 이당(李堂)의 처인데 남편이 죽자 종신토록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생존할 때와 같이 올렸다. 금상 7년에 정문을 세웠다. 박씨(朴氏) 윤사임(尹師任)의 처인데 남편이 죽고 복을 벗은 뒤에도 오히려 소복으로 고기를 먹지 않고, 처음과 다름없이 애통하였다. 금상 22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마비(馬非) 서치명(徐致明)의 처인데 남편이 죽자 20여 년 동안 상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상식을 폐하지 아니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요곽하화최효우(繞郭荷花摧曉雨) 이발(李發)의 시에, “성곽 둘레의 연꽃은 비를 재촉하고, 들에 가득한 벼이삭은 가을 하늘에 상긋거리네.” 하였다. 수락어하국(水落魚鰕國) 김극기의 시에, “수위(水位)가 낮아지니 고기와 새우의 나라요, 산이 고요하니 호랑이와 들소의 고을이로다.” 하였다. 일로요련해(一路遙連海) 옛 사람의 시에, “한 길 아득히 바다에 이어있고, 천가(千家)는 반쯤이나 산에 가려 있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이 5리이다. 모촌(母村)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월산(月山)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입천(立川)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부량(扶梁)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정(大井)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개토(介吐)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홍산(洪山)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대촌(代村) 서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반산(半山)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식포(食浦)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백석(白石)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목연(木淵)ㆍ마천(馬川) 모두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본래는 마천이었다. 연산(延山)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공동(公洞)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회포(廻浦)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금굴(金堀) 위와 같다. ○ 명량향(鳴良鄕)은 서쪽으로 20리, 제견향(堤見鄕)은 남쪽으로 1리, 재남소(才南所)는 동쪽으로 30리이다.
【창고】 창(倉)이 2곳이 있다. 읍내에 있다. 두창(杜倉) 동쪽으로 20리이다. 해창(海倉) 서쪽으로 20리이다.
【진도】 동진(東津) 서쪽으로 25리, 부안(扶安) 경계의 큰 길이다. 신창진(新倉津) 북쪽으로 20리이며, 전주(全州) 땅과 통한다.
【교량】 재남교(才南橋) 동쪽으로 30리이며, 삼례(參禮)로 가는 길이다. 화교(禾橋) 서북쪽으로 15리이며 만경(萬頃) 큰 길과 통한다. 포교(浦橋) 남쪽으로 15리이다.
【토산】 게[蟹].

 

영암군(靈巖郡)


동쪽으로 나주 경계까지 14리, 북쪽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강진현 경계까지 17리, 해남현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해안까지 5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월나군(月奈郡)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에 낭주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로 고치고, 현종 9년에 다시 강등되어 영암군이 되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월나(月奈)ㆍ낭주(朗州)ㆍ낭산(郎山).
【성씨】 【본군】 최(崔)ㆍ박(朴)ㆍ주(周)ㆍ백(白)ㆍ혜(嵇)ㆍ육(陸). 곤미(昆湄) 허(許)ㆍ유(庾)ㆍ배(裵)ㆍ전(田)ㆍ종(種)ㆍ유(柳). 진남(鎭南) 혜(嵇)ㆍ오(吳)ㆍ육(陸). 북평(北平) 조(曹). 송지(松旨) 김(金)ㆍ전(全). 심정(深井) 김(金) 전(全)이라고도 한다. 회의(懷義)도 같다.
【풍속】 근엄하고 소박하며 화려함이 없다. 군승(郡乘)에, “농업에 전적으로 종사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 하였다.
【형승】 긴 내가 성을 안았다. 유관(柳觀)의 시에, “긴 내가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땅이 창해 바다와 접했다. 고려 김췌윤(金萃尹)의 시에, “땅이 창해 바다와 접하여 장한 경치가 많다.” 하였다.
【산천】 월출산(月出山)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렀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外華蓋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고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흐림과 갬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하늘이 영험한 자라로 하여금 세 개의 섬을 짊어지고, 지상으로 황홀하게 옮겨 놓게 했구나. 오정(五丁 다섯 역사)이 갑자기 촉도(蜀道)를 다시 뚫어 깊게 둘러싸인 계곡에 높은 능선이 위태롭구나. 나무꾼이 오지 않으니 속세의 번거로운 일 없고, 다만 신선이 몰래 보호할 뿐이로다. 어두운 골짜기는 연기와 아지랑이 아득하게 자리잡고, 우뚝한 봉우리는 해와 달을 가렸구나. 내가 산 아래 와서 가던 말고삐를 푸니, 서리 맞은 대의 한 가지를 부질없이 가졌어라. 댕댕이 덩굴을 더듬으며 곧장 올라가서 얼마나 알쏘냐. 기러기 등에 남은 태양이 이미 아래를 엿보누나. 서쪽 봉우리 높고 높아 우뚝 솟은 모양인데, 사나운 범이 노하여 걸터앉았고 물소가 달려가는 모양이로다. 나그네의 흥이 기이함을 탐내어 험난함을 잊고, 뱀 서리듯 몸을 굽히면서도 피로한 줄 모르겠네. 길이 막히니 큰 돌이 홀연히 눈 안에 들어온다.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 어찌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처음 보매 솥밭같이 솟아서 만 경(京)이나 되게 무겁더니 손을 따라 둘러보니 하나의 쇠꼬리만큼 가볍구나. 하늘은 새벽 놀이 퍼져 붉게 섞여 윤택하고, 땅은 저녁 아지랑이를 뿜어 내어 푸른색 진하게 떠오른다. 상사(相師)는 신선이 되어 아득하게 편안히 가버리고, 삽상한 남은 바람 천고에 길이 부는구나. 상사는 지난 날에 홀로 간 날이 있어, 소나무 아래 돌문에서 날마다 놀았구나. 돼지를 타고 숨어 노니 물질 밖[象外]의 경지요, 거마(車馬)를 비웃으니 시끄러움을 따르는 것을 낮게 여기는구나. 어느 때나 기러기 그림자를 용암(龍巖)에 머물게 할까. 교묘한 생각이 오로지 조물주를 뺏고 싶구나. 향기로운 진흙으로 만들어 낸 봉우리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오히려 다시 붓끝을 번거롭게 해야 하겠구나. 영원히 항상 오봉(五峯)이 솟을 것이니, 누가 마룻대[棟]가 부러지고 사람이 시들었다고 한탄할까. 하물며 쇠지팡이를 남겨 벽 구석에 걸어 두었으니, 호랑이를 항복받은 이상한 자취가 길이 희미해지리. 해상(海商) 백 명이 옛날에 바다를 넘어갈 때, 산 위의 신광(神光)을 아득히 바라 보았어라. 산에 올라 성인을 배알하고 마침내 집을 엮으니, 동구(洞口)의 쑥과 띠를 마구 베었네. 종신토록 다시는 옛 마을[故里] 생각하지 않고 시냇물 마시고 초목을 먹으며 바위 문에 의지하네. 푸른 벽에는 분명히 자금(紫金)의 상(像)이라, 내려와 역사를 본들 누가 다시 알 것인가. 숲 속의 중과 시골의 노인이 억지로 칭찬하니, 눈[雪]에 새기고 구름에 새겨 놓은 듯 숱한 분(枌)나무 패(牌)로다. 비바람 무정하여 상(像)이 들어 있는 누각을 무너뜨리니, 끊어진 서까래와 깨진 주초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도다. 백 척이나 되는 층층대를 홀로 밟아 멀리 가는데, 네모진 봉분을 좌우에 높이 쌓고 쌓았도다. 숨은 늙은이[逋翁] 어릿어릿 갑자기 나를 방문하니, 목 가득 학발(鶴髮)이요 몸뚱이는 닭의 가죽이었다. 멀리 북령(北嶺)으로 오르니 멋이 더욱 진진하여, 도리어 맛있는 반찬으로 아침에 주림을 해장하는 것보다도 나았다. 언덕에 의지하여 한 번 웃고 사방을 바라보니, 눈 아래 만상(萬像)이 모두 기우뚱하구나. 멀리 잠겼던 것 처음으로 오래 감추어 두었던 거울을 여니, 먼 봉우리가 반쯤 나타나고 새로 눈썹을 그린 듯하네. 물과 구름이 그윽하고 고와 완상하기에 족하니, 과거의 사적을 찾으려는 이 그 누굴까. 김막(金漠)은 생명을 경시하고 요염(妖艶)을 중히 여겨, 꽃을 꺾고 돌아가지 않으니, 아, 슬프다. 옥소봉(玉霄峯) 아래 이 징군(李徵君)은 처음에는 땅에 집을 짓고 사는 것 같더니, 갑자기 학의 편지를 받고 높은 언덕으로 나가, 아침에는 푸른 봉우리에서 자고 저녁에는 붉은 섬돌에서 자는구나. 슬프다, 두 사람이 마침내 면치 못하였으니, 다만 세상 마음 물질을 잊지 못해서였네. 어느 사람이 혜초 장막[蕙帳] 밖으로 내려가지 않아, 자취를 감추어 종산(縱山) 신령의 기롱을 면하였나. 선객(禪客)이 백운원(白雲院)에 영원히 깃드니, 세망(世網)을 깨뜨려 없애어 남은 것이 없구나. 중과 속인이 이름을 흠모하여 다투어 모임에 들어오니, 처음에는 빈손으로 갔으나 결국에는 실한 데로 돌아가도다. 나도 지금 내[川]를 건너온 코끼리를 사모하거니, 어찌 양을 잃고 갈래 길에서 길이 울 것인가. 공(公)이 아직도 시상옹(柴桑翁 도연명)을 생각하는 것에 감동하였으니, 구름은 무심히 나오고 새는 피곤하게 날도다. 준마(駿馬)를 칭찬하던 도림(道林)의 보배로운 눈을 돌려서, 나의 노둔한 재질이 고삐에 매이는 것을 용납하라. 눈살을 찌푸리며 어찌 감히 고개에서 나오기를 재촉하리요. 다섯 번 웃어도 양무위(楊無爲)를 면하지 못하도다. 푸른 측백나무 뜰 앞에서 우수수 불고, 붉은 연꽃 못 위에는 물이 찰랑찰랑하는구나. 고요한 가운데 탑(榻)을 대하니 온갖 생각 사라지고, 물고기와 새마저 와서 친하여 의심하지 않는구나. 조용히 성긴 비단으로 덮은 벽을 가리키면서, 나더러 붓 휘둘러 좋은 시를 지으라 하네. 강호(江湖)의 묘운(妙韻)을 혹시라도 빌려 준다면, 좋은 글귀 용궁시(龍宮詩)에도 양보하지 않으리.”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등불 켜고 자리 걷지 않은 채 밥 먹고 서성대는 것 괴로운데, 월출산 꼭대기에 햇빛이 비치도다. 뭉게뭉게 들구름은 동혈(洞穴)에서 걷히고, 삐죽삐죽 가을 산은 하늘에 솟았구나. 뜬 인생이 반넘어 살도록 이름 들은 지 오래면서, 절정에 올라 보지 못하였으니 세상일 바쁜 것이라. 가야산(伽倻山)과 방불한 것 참으로 기쁘니, 무단히 마상에서 고향을 생각하게 하노라.” 하였다.
구정봉(九井峯) 월출산의 최고봉이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석(動石)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백분화(白賁華)의 시에, “저 돌은 태산같이 무겁고 내 힘은 하나의 새깃처럼 가볍구나. 태산의 경중을 어찌 일찍이 저울로 달 수 있으랴. 태산을 끼고 바다를 건너 뛰는 것을 누가 다시 어렵고 쉬운 줄 알리요. 이제 이 돌에서 천지를 한 손바닥처럼 운전하는 이치를 알겠도다.” 하였다. 달마산(達摩山) 옛날 송양현(松陽縣)에 있는데, 군의 남쪽으로 1백 24리 떨어져 있다. 또 해남현(海南縣)에서도 보인다. ○ 고려 때 중 무외(無畏)의 기(記)에, “전라도 낭주(朗州)의 속현을 송양현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서 궁벽한 곳이다. 그리고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두륜산(頭輪山)에 접해 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 있다. 산 허리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하여, 모두 백여 척이나 되는 것들이 치마를 두른듯 늘어 서 있다. 그 위에 아주 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당(幢)과도 같고 벽과도 같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멀리 바라보면 쌓인 눈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 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彌陀穴)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이 앉을 만하다. 앞에는 층대가 있어 창망한 바다와 산들이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것 같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작고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며,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그 땅의 끝편에 도솔암(兜率庵)이 있는데, 그 암자가 앉은 형세가 훌륭하여 그 장관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이곳은 화엄조사(華嚴祖師) 상공(湘公)이 터잡고 지은 곳이다. 그 암자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처음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한 곳이다.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美黃寺)ㆍ통교사(通敎寺)가 있고, 북쪽에는 문수암(文殊庵)ㆍ관음굴(觀音窟)이 있는데, 그 상쾌하고 아름다움이 참으로 속세의 경치가 아니다. 또 수정굴(水精窟)이 있는데, 수정(水精)이 나온다. 지원(至元) 신사년 겨울에 남송(南宋)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 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 하였다. 이에 그 고관은 즉시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서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상주할 땅이다.” 하고 그림으로 그려 갔다.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聖跡)과 영험한 자취도 많았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았다. 그러나 먼 지방에 있어서 세상에는 등반하여 감상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만약 세상을 버리고 도를 찾는 선비로서 절정에 올라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대사(大士)가 세상 밖에서 이른바 전하지 못한 묘함을 얻은 자가 있다면, 저 소림(少林)에서 진수(眞髓)를 얻은 자 또한 어떠한 사람이라 할까.” 하였다. 갈두산(葛頭山) 군의 남쪽 1백리에 있다. 화현(火峴) 군의 남쪽 28리에 있다. 가학현(駕鶴峴)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율현(栗峴)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 영원현(嶺院峴)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동음소현(冬音所峴) 군의 동남쪽 25리에 있다. 바다 군의 서남쪽에 있다. 덕진포(德津浦)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월출산에서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노도(露島) 주위가 40리이고, 목장이 있다. 달목도(達木島) 주위가 56리이고, 목장이 있다. 보길도(甫吉島) 주위가 63리이다. 여차라도(餘次羅島) 주위가 30리이다. 화도(花島) 주위가 50리이다. 백내리도(白乃里島) 주위가 27리이다. 횡간도(橫看島) 주위가 39리이다. 감물내리도(甘勿乃里島) 주위가 44리이다. 어응포도(於應浦島) 주위가 40리이다. 고도(羔島) 주위가 29리이다. 죽청도(竹靑島) 주위가 20리이다. 계화도(界火島) 주위가 14리이다. 달도(達道) 주위가 14리이다. 말응두도(末應豆島) 주위가 53리이다. 말개도(末介島) 주위가 19리이다. 어화도(於火島) 주위가 24리이다. 거요도(居要島) 주위가 17리이다. 가지도(可知島) 주위가 18리이다. 내등도(內等島) 주위가 25리이다. 장좌도(長佐島) 주위가 27리이다. 좌지도(左只島) 주위가 36리이다. 수덕도(愁德島) 주위가 27리이다. 여작지도(餘作只島) 주위가 27리이다. 소모도(小茅島) 주위가 30리이다. ○ 이상은 군의 남쪽 90리 바다 가운데 있다.
【토산】 감ㆍ석류ㆍ유자ㆍ굴[石花]ㆍ새우[蝦]ㆍ낙지[絡締]ㆍ전복[鰒]ㆍ붕어[鯽魚]ㆍ홍합(紅蛤)ㆍ조개(蛤)ㆍ숭어[秀魚]ㆍ게[蟹]ㆍ감태(甘苔)ㆍ김ㆍ우무[牛毛]ㆍ매산(苺山)ㆍ황각(黃角)ㆍ미역ㆍ가사리(加士里)ㆍ소금ㆍ복령(茯笭)ㆍ안식향(安息香)ㆍ표고[香蕈]ㆍ생강.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4천 3백 69척이고,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달량영(達梁營)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을 두었다. 『신증』 정덕(正德) 임오년에 없애고, 강진(康津) 가리포(加里浦)로 옮겼다.
【봉수】 갈두산 봉수(葛頭山烽燧) 동쪽으로 강진현의 좌곡산(佐谷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해남현 관두산(館頭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나그네의 고향 생각 세어 보면 많은데, 역로(驛路)는 멀고 멀리 하늘 가에 있구나. 아침 안개 개니 신기루의 도시가 벌어지고, 저녁 연기 나는 곳에 어부의 집이 있구나. 밤 깊고 사람 고요한데 발 걷으니 달이 환하고, 가을 다 가고 서리 내렸는데 국화꽃 피었구나. 놀며 구경하면서도 밥 한 그릇 먹을 동안을 잊지 못하여, 매양 남두성(南斗星)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누나.” 하였다.
【누정】 양휘루(揚輝樓) 객관 동쪽에 있는데, 군수 강삼(姜參)이 세웠다. 『신증』 배회루(徘徊樓)라 개명하였다. ○ 안침(安琛)의 시에, “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는데, 나그네도 배회하니 또한 쾌하도다. 옥토끼는 몇 년 동안 선약(仙藥)을 찧었으며, 항아(姮娥)는 어느 곳에서 경대를 펼쳤는가. 흔들리는 파도에 백 동파(百東坡) 흩어지는 물이요, 그림자를 대하여 셋이 되는 태백(太白)의 잔이로다. 곧 밤이 되자 하늘은 씻은 듯한데, 서늘한 바람은 계향(桂香)을 불어 보내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영보역(永保驛) 군의 북쪽 성 밑에 있다. 청풍원(淸風院) 일명 청정원(淸淨院)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수원(燧院)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교량】 덕진교(德津橋) 덕진포에 있다.
【불우】 도갑사(道岬寺) 월출산에 있다. 도선(道詵)이 일찍이 머물렀던 곳이다.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다. 절 아래 동구(洞口)에 두 개의 입석(立石)이 있는데, 하나에는 ‘국장생(國長生)’ 3자가 새겨져 있고, 또 하나에는, ‘황장생(皇長生)’ 3자가 새겨져 있다. 통교사(通敎寺)ㆍ미황사(美黃寺)ㆍ도솔암(兜率庵)ㆍ관음굴(觀音窟)ㆍ서방굴(西方窟)ㆍ수정굴(水精窟) 모두 달마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월출산신사(月出山神祠)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 여단(厲壇)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곤미폐현(昆湄廢縣)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고미현(古彌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속현으로 만들고 고려와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고진도(古珍島) 곤미현 서쪽에 있다.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에 진도현(珍島縣)이 왜구 때문에 땅을 잃고 여기에 붙어 살다가 이제는 본토에 돌아갔으나 고을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최씨원(崔氏園)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 속설에, 신라 사람 최씨가 있었는데 정원 안에 열린 외 하나의 길이가 한 자나 넘어 온 집안 식구가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씨 집 딸이 몰래 그것을 따 먹었더니, 이상하게 임신이 되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부모는 그 애가 사람 관계없이 태어난 것이 미워 대숲에다 내 버렸다. 두어 주일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돌아와 부모께 고하니, 부모도 가서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가 길렀다. 자라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 그는 당 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산을 답사하고 물을 보는데 신명스러움이 많았다. 뒤에 그곳을 구림(鳩林) 또는 비취(飛鷲)라 했다. ○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광양(光陽)의 옥룡사비(玉龍寺碑)를 상고하건대,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최씨라고 하였으니, 누가 옳은지 모르겠다. 동석사(動石寺) 월출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 서쪽 고개 마루에 이상한 한 덩어리 바위가 있네. 지나는 길손 모두 길을 굽히고, 대개 올라서 구름 자취를 찾는다. 내가 만약 그대로 지난다면 땅의 신령이 응당 책망하리라. 산 아래에 와서 말을 멈추니, 나뭇가지에 나는 신이 멈추도다. 과연 천 길이나 되는 바위를 만나니, 높고 우뚝한 것 빈 하늘을 의지했구나. 여와씨(女媧氏)가 일찍이 하늘을 기울 때 아직도 금액(金液)을 굳히지 못하여, 날아서 백운 풀에 떨어지니 하늘에서 거리가 겨우 지척일세. 참으로 그는 낙(駱)ㆍ원(原)의 사신이라, 명승지를 사랑하여 멀리 가는 것도 잊었도다. 어떤 사람이 포금(布金)의 곁에다 처음으로 절[空王宅]을 창건했는가. 정녕 형악(衡岳)의 창름(倉廩)을 사랑하여 난간에 임하여서 등척(騰擲)하고자 하나, 혹시라도 신물(神物)의 보호가 있을까 두려워서 놀라 바라보고 썼던 모자를 바로 하였으리라. 손을 따라 바야흐로 흔들어 떨치니, 응당 먼지를 끌어 붙이는 호박(琥珀) 같으리라. 이름만 듣고 오래도록 의심만 품었는데 한 번 보자 얼음이 풀리듯 알겠도다. 흥이 다하여 깨끗한 방을 찾아 방석 깔고 비고 훤한 데에 앉으니, 잠깐 사이에 감로반(甘露飯) 한 사발이 부엌[香積]에서 왔도다. 그대로 도연명의 술잔을 잡고 해가 서산에 육박해 감을 알지 못했더니, 달빛이 사람을 비추며 오니 맑은 경치 더욱 아깝구나. 고요한 가운데 누가 반려(伴侶)가 될까? 소나무ㆍ돌까지 세 익우(益友)가 되네.” 하였다. 회의부곡(懷義部曲)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심정부곡(深井部曲) 군의 남쪽 1백 30리에 있다. 귀인부곡(貴仁部曲)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송정부곡(松井部曲) 군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진남향(鎭南鄕)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동백소(冬柏所)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명환】 고려 유광식(柳光植) 정치는 청백하고 엄격한 것을 숭상하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다.
【인물】 고려 최지몽(崔知夢) 처음 이름은 총(聰)이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복서(卜筮)에 더욱 정통했다. 태조가 그의 이름을 듣고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를 얻었다면서,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어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지몽(知夢)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었다.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경종(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열녀】 고려 최씨(崔氏) 진주 호장(晉州戶長) 정만(鄭滿)의 아내이다. 자세한 것은 진주 열녀 편을 보라. 김씨(金氏) 중랑장(中郞將) 조안정(趙安鼎)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아버지가 죽고 18세에 남편이 죽고 19세에 어머니가 죽었으나, 모두 여막에서 3년상을 치루었다. 애통해 하기를 고치지 않았고 생업(生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하였다.
【제영】 연해고연인도가(連海孤煙認島家)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격한 두어 마디 경쇠 소리가 언덕의 절을 알리고, 바다를 연한 외줄기 연기 섬의 인가를 알게 하네.” 하였다. 송황교영육칠리(松篁交影六七里) 김신윤(金莘尹)의 시에, “소나무 대나무 그림자 6, 7리에서도 얽히고, 닭과 개짖는 소리 수백 집일세.” 하였다. 수점취연죽외가(數點炊煙竹外家)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한 소리 우는 경쇠는 구름 가운데 절에서 나오고, 두어 줄기 불때는 연기는 대나무 밖의 집에서 나는도다.” 하였다. 죽림신순장룡추(竹林新筍長龍雛) 서거정(徐居正)이 이 사군(李使君)을 보내는 시에, “황원(黃原)이 바다를 진무(鎭撫)한다 말하는 것 같더니, 그대를 보내노라. 이제 다시 어부(魚符 군수의 인)를 찼도다. 덕진(德津)에는 물이 얕아도 다리가 아직 있고, 도갑(道岬)에는 비석이 남았는데 글씨가 반은 없구나. 매화나무 언덕엔 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죽림의 새 죽순은 용의 새끼가 자란 듯, 흰 머리 외로이 노는 흥취를 저버리니, 누가 호남의 색칠한 그림[着色圖]을 보내주랴.”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군시(郡始) 서쪽으로 5리이다. 군종(郡終) 동쪽으로 20리. 북일시(北一始)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일종(北一終)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북이시(北二始)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북이종(北二終) 위와 같다. 서시(西始) 끝이 15리이다. 서종(西終) 끝이 20리이다. 곤일시(昆一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일종(昆一終) 서쪽으로 끝이 90리이다. 곤이시(昆二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이종(昆二終)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옥천시(玉泉始) 남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옥천종(玉泉終) 남쪽으로 처음이 8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북평시(北平始) 옛 북평향(北平鄕)이다. 남쪽으로 처음이 1백 리이고, 끝이 1백 10리이다. 북평종(北平終) 남쪽으로 처음이 1백 2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시(松首始) 옛 송수향(松首鄕)이다. 남쪽으로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종(松首終) 남쪽으로 끝이 1백 50리이다. 위의 6면(面)은 해남(海南)의 남쪽 경계 너머에 있으며, 모두 바다와 연해 있다. 노아도(露兒島) 남쪽으로 1백 80리이다. 보길도(甫吉島) 남쪽으로 2백 리이다. 잉거도(芿巨島) 위와 같다. 소안도(所安島) 위와 같다. 추자도(楸子島) 남쪽으로 3백 리이다. 위의 다섯 섬은 모두 육지에 면(面)을 두고 있다. ○ 진남향(鎭南鄕)은 서쪽으로 20리, 회의부곡(懷義部曲)은 남쪽으로 10리이며, 귀인부곡(貴仁部曲)은 남쪽으로 90리이고, 송정부곡(松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리이며, 심정부곡(深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30리이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해변에 있다. 동백소(冬栢所)는 동쪽으로 12리이다.
【진보】 이진진(李津鎭) 남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8척이며, 우물이 둘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어란포진(於蘭浦鎭) 남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해남(海南)에서 본군으로 이속되었다. ○ 수군만호 1명이다.
【창고】 창(倉) 넷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서창(西倉)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옥천창(玉泉倉)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이창(梨倉) 이진(梨津)에 있다.
【목장】 노아도(露兒島)ㆍ소안도(所安島).
【진도】 이창진(梨倉津) 이진에 있다. 용당진(龍堂津) 무안(務安)과 목포진(木浦鎭)으로 통한다.
【교량】 쌍교(雙橋)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토산】 왕대[篁竹]ㆍ화살대[箭竹]ㆍ감ㆍ유자ㆍ옻[漆]ㆍ차[茶].
【누정】 대월루(對月樓) 읍내에 있다. 해월루(海月樓) 이진(梨津) 남쪽에 있다. 제주도로 가는 자는 여기서 배를 타며, 소안도(所安島)에서 바람을 살린다. 영보정(永保亭)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회사정(會社亭)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단묘】 월출산단(月出山壇) 신라 때에는 월나악(月奈岳)이라 부르고,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모셨으며, 본조(本朝)에서도 본읍에 제사하도록 영을 내렸다.
【사원】 녹동서원(鹿洞書院) 인조 경오년에 건립하고 숙종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최덕지(崔德之) 자는 우수(迂叟)이며, 호는 연촌(煙村)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제학(提學)이었는데 문종 때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김수항(金壽恒) 양주(楊洲) 조에 보라. 최충성(崔忠成) 자는 필경(弼卿)이며, 호는 산당(山堂)이다. 최덕지의 아버지이다. 김창협(金昌協) 양주(楊洲) 조에 보라. ○ 충절사(忠節祠) 효종 임진년에 건립하고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운(鄭運) 자는 창진(昌辰)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임진왜란 때에 녹동 만호(鹿洞萬戶)였는데, 거제(巨濟)의 옥포(玉浦)에서 전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주D-001]오정(五丁)이……뚫어 : 예전에 중국의 진 나라와 촉(蜀) 나라는 검각산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그 검각산이 원체 험악하여 교통하지 못하였다. 진 나라에서 쇠로 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밤에 그 소 뒤에다가 금을 한 덩이씩 갖다 놓고 그 쇠로 만든 소가 금똥을 눈다고 말하였다. 촉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힘이 센 역사[五丁力士]를 시켜서 산의 돌을 깨고 사닥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고, 그 소를 훔쳐 갔다. 그것이 검각산의 길이 열리게 된 시초이다.
[주D-002]사람이 시들었다 : 《예기》의 단궁(檀弓)에 “현철한 사람이 시드니, 나는 장차 누구를 따르랴[哲人其萎吾將安放].”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공자의 죽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3]이 징군(李徵君) : 징군(徵君)이라는 말은 그 자신이 벼슬하려 하지 않았으나 나라에서 먼저 부른 사람이란 말이다. 여기 이 징군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주D-004]양을 잃고……울 것인가 : 양주(楊朱)가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것을 보고,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을 탄식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5]당(幢) : 당(幢)은 절 같은 데에서 무쇠나 구리로 기둥같이 높게 세운 것인데, 원래는 여러 깃발을 달기 위하여 만들었을 것이나 깃대는 아닌 것이다.
[주D-006]저 소림……얻은 자 : 인도 불교의 28대 교조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와서 하남성 숭산 소림사(河南省嵩山少林寺)에서 선학(禪學)을 전수하였는데, 그의 수제자 혜가(彗可)가 그의 학문의 진수를 얻었다 한다.
[주D-007]흔들리는……물이요 : 소동파(蘇東坡)가 달 밝은 밤에 낚시하는데 물이 평온할 때에는 그림자가 하나이지만, 물이 출렁대면 물결마다 한 그림자가 보여서 백 동파(百東坡)가 된다고 한 말이 있다.
[주D-008]나뭇가지에……멈추도다 : 고개가 원체 높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마치 나무 끝에 있는 것 같아서 그가 신은 신 역시 나무 꼭대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주D-009]응당……같으리라 : 호박(琥珀)을 뜨겁게 문질렀다가 티끌에 대면 전기가 일어서 티끌이 호박으로 달라붙는다.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동쪽은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30리, 남쪽은 순천부 경계까지 67리, 곡성현 경계까지 33리, 서쪽은 순창군 경계까지 37리, 옥과현 경계까지 62리, 북쪽은 임실현 경계까지 43리,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70리며 서울까지는 6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다. 후한(後漢) 건안(建安) 중에는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시대에는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뒤에 당 고종(唐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백제를 멸하고 유인궤(劉仁軌)에 조서하여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조금 뒤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그 땅을 합병하였고, 신문왕(神文王) 4년에는 소경(小京)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여전히 소경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부(府)로 고쳤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대방으로 삼았다가 뒤에 남원군(南原郡)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9년에 다시 부로 승격시켰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 때에 처음으로 진(鎭)을 두었다.
【속현】 유곡부곡(楡谷部曲) 부의 남쪽 69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인데 신라 때에 구례(求禮)라 개명하여 곡성군(谷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기에 남원에 내속시켰고, 인종 21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래 태종 13년에 준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는데, 현재 주상 5년에 현의 백성 중에 배목인(裵目仁)ㆍ문빈(文彬) 등이 참언(讖言)을 조작하고 무리들을 끌어모아 반역을 꾀하였다가 복주(伏誅)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현(縣)을 폐하여 부곡(部曲)으로 삼았다가 다시 내속시켰다.
【진관】 도호부(都護府) 하나 담양(潭陽). 군 하나 순창(淳昌). 현 아홉 임실(任實)ㆍ무주(茂朱)ㆍ곡성(谷城)ㆍ진안(鎭安)ㆍ용담(龍潭)ㆍ옥과(玉果)ㆍ운봉(雲峯)ㆍ창평(昌平)ㆍ장수(長水).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대방(帶方)ㆍ고룡(古龍)ㆍ용성(龍城).
【성씨】 본부 양(梁)ㆍ정(鄭)ㆍ진(晉)ㆍ양(楊)ㆍ견(甄)ㆍ황보(皇甫)ㆍ이(李)ㆍ윤(尹)ㆍ황(黃)ㆍ염(廉)ㆍ배(裵)ㆍ류(柳), 고(高)ㆍ전(全)ㆍ임(林)ㆍ안(安)ㆍ지(池)ㆍ이(李)ㆍ송(宋)ㆍ조(曺)ㆍ최(崔) 모두 내성(來姓)이다. 거령(居寧) 백(白)ㆍ황(黃)ㆍ한(韓)ㆍ이(李)ㆍ장(張). 유곡(楡谷) 장(張)ㆍ도(陶)ㆍ손(孫)ㆍ전(全)ㆍ임(任)ㆍ진(陳), 박(朴) 속성(續姓)이다. 황(黃) 의창(義昌). 서(徐)ㆍ양(梁) 모두 내성(來姓)이다. 남전(南田) 임(林). 방광(放光) 유(劉). 사등촌(沙等村) 임(任), 정(鄭) 속성(續姓)이다.
【풍속】 땅은 넓고, 사람들은 사납다 이규보(李奎報)의 기(記)에, “땅은 넓고, 사람들은 사나워서 반역과 속임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하였다. 향음(鄕飮)과 사례(射禮)를 행한다 이 고장 사람들은 봄이 오면 용담이나 율림(栗林)에 모여 향음과 사례를 행한다.
【형승】 동쪽에는 지리산(智異山)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에는 중진(中津)을 띠었다 《부지(府志)》에, “동쪽에는 지리산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에는 중진이 띠를 두른 것처럼 흐르고 있으며, 사람과 물산이 많아 남방의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하였다. 남방에 있어 오른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지방이다 이규보의 송(頌)에, “대방(帶方)은 오래된 고을이니, 남방의 오른팔이다.” 하였다. 옥야백리천부지지(沃野百里天府之地) 황수신(黃守身)의 〈광한루기(廣寒樓記)〉에, “남원(南原)은 옛 이름이 대방(帶方)인데 산천이 수려하고 기름진 들판이 백 리에 뻗쳐 있으니 실로 천연의 부고이다.” 하였다.
【산천】 백공산(百工山) 부의 동쪽 8리에 있다. 지리산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유(流) 자는 유(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 시의 ‘방장 삼한 외(方丈三韓外)’의 주(註)와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帶方郡)의 남쪽에 있다.” 한 것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것으로 남악(南岳)을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이에 따랐다. 산을 둘러싼 고을 십 주(州)가 있는데, 북쪽은 함양(咸陽)이요, 동남쪽은 진주(晉州)요, 서쪽에는 남원이 자리잡고 있다.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동쪽의 천왕봉(天王峯)과 서쪽의 반야봉(般若峯)이 가장 높으니 산기슭에 혹 구름끼고 비가 오며 천둥치고 번개가 요란해도 그 위 산봉우리는 청명하다. 해마다 가을 하늘이 높으면 새매가 북쪽에서 몰려드는데 열군(列郡)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물을 쳐서 잡는다. 전하는 이야기에 태을(太乙 북극신(北極神))이 그 위에 거하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이 거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지리산은 창창(蒼蒼)하게 반공(半空)에 솟아 있으니 천암만학(千巖萬壑)에 물방울이 뿌리도다. 골짜기의 청학(靑鶴)이 어찌하여 마땅히 절의 종소리를 듣지 않는가 하고 조롱하리라.” 하였다. 보련산(寶連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교룡산(蛟龍山) 부의 서쪽 7리에 있는데 북쪽에는 밀덕봉(密德峯)과 복덕봉(福德峯)이 하늘을 받치고 높이 솟아 있다. 장법산(長法山)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견수산(犬首山)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오산(鼇山) 유곡(楡谷) 남쪽 15리에 있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하나 있고 바위에는 빈 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깊다. 전하는 말에, 중 도선(道詵)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고 한다. 봉성산(鳳城山) 유곡(楡谷) 서쪽 1리에 있다. 숙성현(宿星峴) 부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비홍현(飛鴻峴)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율림(栗林) 광한루(廣寒樓)의 남쪽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일말(一抹)의 가을빛이 나무 끝에 닿아서, 담황색(淡黃色)과 천록색(淺綠色)이 가만히 서로 떠오르네. 바람이 금위(金蝟)에 불어오니 규란(虯卵)이 터져 나오고, 아이들은 짝지어 좋은 놀이 하도다.” 하였다. 동장수(東帳藪)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물 유유히 흐르고 모래 사장 길게 뻗친 곳에 버들 그림자가 깔렸는데 사는 사람들 모두 그윽한 거처를 얻었구나. 꽃은 지고 방초는 무성하여 봄이 저물었는데, 천고의 풍류는 회계산(會稽山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 접했구나.” 하였다. 창활수(昌活藪)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바람에 나부끼는 표기[風帘 주막(酒幕)을 표시하는 기(旗)]는 희미하게 무성한 수풀과 격해 있고, 허물어진 역원(驛院)은 황량한데 깊은 산 속에 한 줄기 오솔길. 해는 지고 소와 양은 먼 길을 돌아오는데 반륜(半輪)같은 저녁해가 푸른 산봉우리에 걸려있네.” 하였다. 순자진(鶉子津) 진안현(鎭安縣) 중대산(中臺山)과 태인현(泰仁縣) 운주산(雲住山)의 물리 합쳐 흘러, 부의 서남쪽 40리에 이르러 순자진이 되었는데 곡성현(谷城縣)에 들어가서는 압록진(鴨綠津)이 된다. 원천(源川) 원천부곡(源川部曲)에 있다. 지리산에서 근원하여 부의 동쪽 선원사(禪院寺) 앞에 이르러서 요천(蓼川)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간다. 두가천(豆可川) 부의 남쪽 60리에 있으니, 즉 순자진의 하류가 된다. 본조(本朝)의 마천목(馬天牧)이 물을 막아 어량(魚梁)을 만들었는데, 그 후에 본부(本府)에서 이것을 고쳤다. 대모천(大母泉)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한 구멍 맑고 맑은 돌 밑의 샘이 대모(大母)라 이름 전하기 몇 천 년인고. 자손[雲仍]이 다 변하고 남은 은택만 머무르니, 젖 같은 샘물이 6월 여름 날씨에 맑고도 달더라.” 하였다. 거령천(居寧川) 거령현(居寧縣)의 개현(介縣)에서 나와서 오수역(獒樹驛)동남에 이르러 임실현의 평당원천(坪堂院川)과 합하여 남쪽으로 흘러 순창군 적성진(赤城津)으로 들어간다. 요천(蓼川) 부의 동남쪽 1리에 있는데 시내 가운데에 바위가 있어 그 모양이 소와 같으므로 우암(牛巖)이라 한다. ○ 강희맹의 시에, “한 줄기 긴 시내가 고진(古津)에 접했으니, 바람이 압록(鴨綠)을 흔들어 고기비늘 같은 물결을 이루었네. 외로운 배가 여뀌꽃 언덕에 숨었다 비쳤다 하니, 그림 속에 분명히 사람이 있는 것 같도다.” 하였다. 축천(丑川) 축(丑)은 혹 축(畜)으로도 쓴다. 부의 동북방에 시냇물이 들이치므로 마을을 설치할 때에 술자(術者)의 말을 따라서 쇠로 소를 만들어 기세를 누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축천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소는 지금도 남아있다. 연탄(淵灘) 부의 서남쪽 60리에 있으니 즉 순창군 저탄(猪灘)의 하류로서 순자진(鶉子津)으로 들어간다. 구연(九淵) 유곡(楡谷) 동남쪽 10리에 있는데 연못 위에는 천척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비스듬히 누워 있어 병풍처럼 보인다. 압록진(鴨綠津) 유곡에서 29리, 곡성현(谷城縣)의 경계에 있다. 잔수진(潺水津) 유곡 남쪽 12리, 순천부(順天府)의 경계상에 있다. 용왕연(龍王淵) 유곡 동쪽 30리, 진주(晉州) 화개현(花開縣)의 경계에 있으니 바로 잔수진 하류에 해당한다. 광양현(光陽縣) 부분에 상세히 나와 있다. 『신증』 용연(龍淵)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수원(水源)은 지리산에서 나온다.
【토산】 꿀ㆍ호두ㆍ오미자ㆍ감ㆍ닥종이ㆍ생강ㆍ표고버섯ㆍ송이ㆍ석류ㆍ석이버섯ㆍ치자ㆍ죽전ㆍ잣ㆍ산무애뱀[白花蛇]ㆍ복령ㆍ지황(地黃)ㆍ영양각ㆍ은어[銀口魚]ㆍ게.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둘레는 8천 1백 99자, 높이 13자. 안에 우물과 샘이 71개 있다. 교룡산성(蛟龍山城) 돌로 쌓았다. 둘레는 5천 7백 17자, 높이 10자,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작은 시내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 강희맹의 시에, “교룡산성이 백운 간에 솟았으니, 한 줄기 길이 겨우 꾸불꾸불 통하였네. 마치 이 한 고을의 절험(絶險)을 자랑하는 듯, 위급한 시절이면 여기 의지하여 오랑캐를 막아 내도다.” 하였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고을이 호남 산수간(山水間)에 자리하니, 산성은 우뚝 솟고 길은 꾸불꾸불, 대방(帶方)은 스스로 웅장한 번지(藩地)를 이루었으니, 팔방의 오랑캐를 공액(控扼)하고 제압하네.” 하였다.
【누정】 광한루(廣寒樓) 황수신(黃守身)의 기문에, “부의 남쪽 2리쯤 되는 곳에 지세가 높고 평평하며 넓게 트여 있는데 거기에 작은 누각이 있으니, 그 이름이 광통루(廣通樓)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니 갑인년에 부사 민공(閔恭)이 다시 새 누각을 세웠고, 정사년에 유지례(柳之禮)가 이어 단청을 더하였다. 갑자년에 정승인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가 광한루로 이름을 고쳤다. 아, 호남의 경치 좋은 곳으로 우리 고을보다 나은 곳이 없고, 내 고장 경치 좋은 곳 중에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남방의 이름난 광한루에 6월에 올라오니 가을처럼 서늘하네. 달그림자 홀연히 비치니 하늘이 가깝고, 붉은 난간 굽은 곳에 견우성이 지나가네.”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방장산(方丈山) 앞에 백척누각, 푸른 산머리에 붉은 사다리가 높이 걸렸네. 물은 들판에 연하여 이내와 햇빛이 섞였고, 구름 걷힌 먼 산봉우리엔 비 기운이 걷히었네. 물가에 임하니 천상에 앉은 듯, 바람 앞에 서니 달 가운데서 노는 듯, 인간에 절로 달세계[淸虛府]가 있는데, 하필 구구하게 세상 밖에서 구하리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상쾌한 기운이 물가 누각에 스며드니, 요천(蓼川) 머리에 광한(廣寒)의 선경(仙境)이 펼쳐지도다. 남쪽 언덕에 바람이 일어나니 더위가 멀어졌고, 서산에 주렴 걷히니 저녁 비가 그쳤네. 달은 때마침 맑은 밤에 둥근데, 은하수 다리에서 누가 옛 사람을 이어서 놀꼬. 하늘빛은 상하에 명경처럼 밝으니, 몸이 청허부(淸虛府)에 바로 드달리네.”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저녁에 풍류 잡히고 그림같은 누각에 오르니, 옥봉(玉峯)으로 지는 해가 성 머리에 걸렸구나. 시정(詩情)이 바다처럼 일렁거리니 봄이 정함이 없고, 검기(劍氣)가 하늘에 떠서 밤에도 걷히지를 아니하네. 눈처럼 춤추니 패옥을 던지며 가고, 물결을 도리어 밟고 가니 구슬을 희롱하며 노는도다. 인간에 또한 청허부가 있으니, 좋은 놀이를 세상 밖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연국루(戀國樓) 객관(客館)의 서쪽에 있는데 일명 죽루(竹樓)라고도 한다. ○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뚫은 푸른 대가 요란하게 비녀을 뽑은 듯, 홀연히 높은 루에 올라 바로 아래를 굽어봤네. 우로(雨露)가 비록 처음에 죽순을 무성케 하였으나, 얼음과 서리도 끝내 요림(瑤林)을 욕되게 하지 못하였네. 깊숙한 뿌리가 돌을 피하는 모양이 푸른 용이 숨은 듯하고, 맑은 피리소리는 바람을 맞아 푸른 봉황이 우는 듯하도다. 어떻게 하면 장안의 고관들이 그대처럼 굳은 절개에 곧은 마음 가질 수 있을까.” 하였다. ○ 윤향(尹向)의 시에, “한가한 날 백 자나 되는 누각에 오르니, 누각 지은 사람은 정오두(鄭遨頭)라네. 산은 지리산(智異山)에 연하여 천봉(千峯)이 빼어나고 물은 태량(苔梁)에서 합하여 한 줄기로 흐르도다. 주포(周浦)에는 구름이 비꼈으매 석양이 밝고, 교잠(蛟岑)에는 나뭇잎이 떨어지니 가을 기운 움직였네. 어디에서 부는 장적(長笛) 소리인가, 홀로 난간에 기대니 천리만리로 뻗친 근심일세.” 하였다.
축천정(丑川亭) 축천(丑川)의 서쪽 언덕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벼랑에 의지한 절벽 그림 병풍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높은 누각 있으니 돌로 축대를 만들었네. 만고(萬古) 세월 흐르는 시냇물 소리 그칠 줄을 모르고, 백 년 산색(山色)은 우뚝하게 둔덕이 되었네. 쇠로 만든 소는 소울음 소리내며 어느 날이나 일어날까, 황학(黃鶴)을 탄 손님 오늘 아침에 올 듯하구나. 여기가 대방(帶方)의 아름다운 곳인데, 풍류 제영(題詠)함에 재주없음이 부끄럽네.” 하였다. 봉서루(鳳棲樓) 유곡(楡谷)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현감(縣監) 오치선(吳致善)이 세운 것인데 지금은 황폐하였다. 김작(金綽)의 기문에 이르기를, “고을의 지세가 나르는 봉황의 형국이라 이것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였다.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봉성산(鳳城山) 아래 봉서루, 바람이 서늘하여 여름도 가을인 양하여라.” 하였다. 사영루(四詠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부사 이문병(李文炳)과 판관 이적(李績)이 세웠다. 휼민관(恤民舘) 즉 객관을 말한다. 부사 이문병과 판관 이적이 세웠다. 『신증』 허침의 시에, “은혜를 펴니 곳곳이 봄과 같다 세 사람의 연이어 꽃다운 이름 후세에 빼어났네. 성상의 은혜 감격하여 일신을 능히 보국(報國)하였고, 희끗희끗 양쪽 귀밑털 나니, 백성을 위해 근심함일세. 큰 고을 뛰어난 정사 대개 백성을 중히 여기니, 호협한 풍속이 점차 순화되어 가네. 나라를 요리할 수완이니 닭을 잡는 사람 노릇 오래하지 마소.” 하였다. 봉서헌(鳳棲軒) 유곡부곡(楡谷部曲)에 있다. 현감 최지성(崔智成)이 세웠다. 『신증』 월인헌(月印軒) 광한루의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부 치소(治所)의 동쪽 5리에 있다.
【역원】 오수역(獒樹驛)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 본도의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속역(屬驛)은 11개소로서 창활(昌活)ㆍ동도(東道)ㆍ응령(應嶺)ㆍ인월(引月)ㆍ잔수(潺水)ㆍ지신(知申)ㆍ양률(良栗)ㆍ낙수(洛水)ㆍ덕양(德陽)ㆍ익신(益申)ㆍ섬거(蟾居) 등이 있다. ○ 찰방 한 사람이 임명된다. ○ 김개인(金蓋仁)은 거령현(居寧縣) 사람인데 집에서 기르는 개를 몹시 사랑하였다. 하루는 개인이 출행하는데 개가 따라 왔다. 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일어나 사방에서 타들어오니, 개가 가까이 있는 내에 뛰어들어가 몸에 물을 적셔 와서는 개인이 잠들고 있는 주위를 뒹굴어 풀에 물기를 뿌렸다. 이 행동을 반복하여서 불은 껐으나 개는 기진하여 죽고 말았다. 개인이 술깬 뒤에 개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지어 슬픔을 표하고 봉분을 만들어 묻어 주고 지팡이를 꽂아 표시를 하였더니, 그 지팡이가 잎이 피는 나무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지명을 오수(獒樹)라 하였으니 악부(樂府) 중에 〈견분곡(犬墳曲)〉은 바로 이것을 읊은 것이다. ○ 이규보의 시에, “낮에 오원(烏原)을 출발하여 오수에서 잠시 머물렀다. 한가로운 사슴은 깊은 풀숲에 잠들고, 깊은 숲 속에 사는 새도 얕은 도랑에서 목욕하네. 산은 그림 같은 풍경 눈에 담뿍 보여주고, 바람이 부니 가을 바람 옷깃에 살랑거리네. 다시금 대방 땅을 밟으니 하늘은 나에게 마음껏 경치를 즐기라고 하는구나.” 하였다.
동도역(東道驛)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응령역(應嶺驛)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창활역(昌活驛) 창활수(昌活藪)의 남쪽에 있다. 잔수역(潺水驛) 잔수진(潺水津) 언덕에 있다. 안신원(安信院)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호산원(虎山院)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금천원(金川院)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비홍원(飛鴻院) 비홍현(飛鴻峴) 아래에 있다. 서림원(西林院)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순자원(鶉子院) 순자진(鶉子津) 언덕 위에 있다. 다시천원(多時川院)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운제원(雲梯院)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천원(遷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축천원(丑川院)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홍화원(弘化院)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율두천원(栗頭川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원천원(源川院) 원천의 언덕에 있다. 잔수원(潺水院) 잔수진의 언덕에 있다.
【교량】 금석교(金石橋) 부의 서남쪽 4리에 있다. ○ 강희맹의 시에, “분류(奔流) 흐르는 강 양쪽 언덕에 긴 다리가 걸려있고, 수면에는 침침(沈沈)하게 그림자 흔들리네. 천 자나 되는 무지개 다리는 허리와 등이 넓으니, 느릿느릿 돌아가는 길이 멀다고 느껴지지 않네.” 하였다.
【불우】 만복사(萬福寺) 기린산(麒麟山) 동쪽에 5층의 불전(佛典)이 있고 서쪽에 2층의 불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길이 35자의 동불(銅佛)이 있다. 고려 문종(文宗) 때 창건한 것이다. ○ 강희맹의 시에, “소나무와 계수나무 짙은 그늘 고을을 둘러싸고, 절에서 들려오는 종과 풍경 소리 달빛 속에 가득하도다. 으름덩굴과 칡덩굴 덮인 오솔길은 인간에게 부귀를 묻지 않네.” 하였다. 선원사(禪院寺) 백공산(百工山)에 있다. 파근사(波根寺) 지리산에 있다. 용천사(龍泉寺) 교룡산(蛟龍山)에 있다. 승련사(勝蓮寺) 만행산(萬行山)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남원부의 산수가 좋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컫는 바이다. 중들이 그 사이에 절을 지어 대개 경치가 뛰어난 곳을 차지하였는데 승련사는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강호문(康好文)이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고, 또 주지인 대선사(大禪寺) 각운(覺雲)이 글로써 그 시말을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좋은 산수에 대해서는 매양 가서 놀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고, 그곳에 내 이름을 걸어 두는 것이 실로 내 소원이었으며, 각운선사의 훌륭함은 내 또한 오래전부터 흠모하던 터이라, 기꺼이 서술한다.
절은 부중(府中)에서 동북편으로 30리 거리에 있고, 옛 이름은 금강사(金剛寺)였는데 어느 때에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홍혜국사(弘慧國師)이며 휘(諱)를 중긍(中亘)이라 하는 분이 원당(願堂)에 있다가 늙어서 물러나와 이곳에 살았는데, 지붕이 낮고 누추하여 증축하여 확장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가 죽고나서 대선사 졸암(拙菴), 이름을 연온(衍昷)이라 하는 분이 조계(曹溪)의 장로로서 홍혜(弘慧)의 문도들에게 추앙을 받으니 모두 계권(契券)을 만들어 주며 졸암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졸암이 곧 설계하고 비용을 헤아리고, 시주를 모으는 것은 종한(宗閑)이라는 분이 주관하였다. 그 편액을 승련사(勝蓮寺)라 고치고 공사는 을축년에 시작하여 신축년 봄에 마쳤다. 불전(佛殿)ㆍ승무(僧廡)ㆍ선당(膳堂)ㆍ선실(禪室)ㆍ객실(客室)ㆍ곳간ㆍ부엌 등 칸수를 계산하면 모두 1백 11칸이며, 불전 기구와 일상의 도구가 하나도 완비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다 졸암의 바랑에서 나온 것과 종한의 힘으로 인하여 이룩된 것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상(像)을 불전 중앙에 모셨는데, 이는 졸암이 전적으로 마련한 것이요, 대장경을 새겨서 전 좌우에 쌓아 놓은 것은 고을 사람이 다같이 낸 시주로 한 것이다. 노비 몇 명을 희사하였으니 이는 바로 졸암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무술년 가을에 그가 죽게 될 적에, 친족으로는 조카가 되고 법통으로는 후계자가 되는 각운선사에게 절 살림을 부탁하였다. 바깥 담이 아직 없어서 각운선사가 쌓으니 계묘년 여름에 절의 공사가 끝이 났다. 내 생각에 불도들은 그 거처를 분수에 넘치게 할 뿐 아니라, 그 후계자에게 전해 줄 것을 도모하는 것이 상례이다. 지금 금강(金剛)과 승련(勝蓮) 두 이름의 뜻이 어떤 것은 장중하고 어떤 것은 가벼우니 반드시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버리는도다. 그러나 졸암이 기어이 그 현판을 고친 것은 승련사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1대가 되고 다시 전하여 2대가 되어서 백천 대까지 변함이 없을 것을 보인 것이니, 그 뜻이 심원하다고 하겠다. 그가 각운선사에게 전한 것은 친족관계와 법통으로 하였으니 또한 혐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각운선사가 사람을 얻어 전함을 또한 그 스승과 같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래 전해질수록 그 뜻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다시 백천 대를 지나서 승련사(勝蓮寺)의 경내가 가시밭이 되지 않으면 족하고 친족으로 대를 잇든 법통으로 대를 잇든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다. 졸암의 성은 유(柳)씨요, 문정공(文正公) 경(璥)의 증손이며, 감찰대부(監察大夫) 정(靖)의 동복동생으로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존비(李尊庇) 공의 외손이다. 학수사선(學首四選)에 참여하여 시험에 응시하여 갑과(甲科)에 합격하였으며 명산에 두루 주석하여 불도의 명성이 높았다. 각운선사는 졸암의 조카로 학문이 깊고 행실이 고상하며 필법이 일세에 절묘하니, 사람들이, ‘청출어람(靑出於藍 스승보다 낫다는 뜻)이라.’ 하였다.” 한다.
개량사(開良寺) 견수산(犬首山)에 있는데 지금은 황폐하였다. 연관사(煙觀寺) 지리산에 있다. 보현사(寶賢寺) 마행산(馬行山)에 있다. 용담사(龍潭寺) 장벌산(長伐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여의주 물고 있는 용공(龍公)이 잠들어 돌아오지 아니하니, 음침한 집문은 잠긴 지 오래로다. 못가 절에서 독경 소리 오래전에 폐하니, 오직 물결에 석대(石臺)만이 비추누나.” 하였다. 화엄사(華嚴寺) 지리산 산록에 있다. 승려 연기(煙氣)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지었다. 그중에는 불전이 하나 있는데 네 벽에 흙을 바르지 아니한 청벽(靑壁)으로 그 위에 화엄경을 새겼는데, 세월이 오래되니 벽이 무너지고 문자는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다. 석상(石像)이 있는데 어머니를 이고 서 있다. 세속에서 이르기를, “연기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절 앞에는 큰 시내가 있고, 동편의 일류봉(日留峯) 서편에 월류봉(月留峯)이 있다. 연곡사(鷰谷寺) 지리산에 있다. 고려의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은 현각선사비(玄覺禪師碑)가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 부의 남쪽 64리 되는 소아리(小兒里)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덕음당사(德陰堂祠) 덕성향(德城鄕)에 있다.
【고적】 거령폐현(居寧廢縣) 거(居) 자는 거(巨)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인데 신라 때에 청웅현(靑雄縣)이라 고치고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시켰다. 영성(寧城)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부의 동북쪽 50리에 있다. 유인궤성(劉仁軌城) 즉 지금 부의 치소(治所)이니 둘레가 몇 리나 되는데 옛 터가 있다. ○ 강희맹의 시에, “마른 우물이 황량하게 저녁 연기에 잠겼고, 유공(劉公)의 사업은 이야기로 전해오네. 대당(大唐)이 먼 나라 포용할 계책은 구상하지 않고, 부질없이 고성(孤城)을 쌓아 뒷날의 웃음거리 되었네.” 하였다. 유곡성(楡谷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4천 6백 81자, 높이 13자, 안에 우물이 9개소, 그리고 군창(軍倉)이 있다. 정전유기(井田遺基) 당 나라 유인궤가 자사 겸 도독(刺史兼都督)으로 읍내에 정전법(井田法)을 써서 9개 구역으로 구획하였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있다. 금안부곡(金岸部曲)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원천부곡(源川部曲)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산동부곡(山東部曲)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고정부곡(古丁部曲)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덕성향(德城鄕)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도지향(道知鄕) 부의 서남쪽 5리, 속칭 돈다산(敦多山)이라 부른다. 수도향(守道鄕) 부의 동쪽 5리, 지금은 말이지(末伊旨)라고 부른다. 남안향(南安鄕) 부의 남쪽 2리, 지금은 야정지(野井池)라고 부른다. 경도향(京徒鄕) 부의 북쪽 60리, 지금은 백야곡(白也谷)이라 부른다. 보유향(寶有鄕)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거리향(居利鄕) 거령현(居寧縣)의 동남쪽, 지금은 성여이(城餘伊)라고 부른다. 백파향(白波鄕)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아인향(牙仁鄕)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미아향(未牙鄕) 부의 동쪽 9리에 있다. 성화점소(省火帖所) 부의 남쪽 50리. 두가소(豆加所) 부의 남쪽 60리. 웅음소(熊陰所) 부의 남쪽 50리. 용봉소(龍鳳所) 부의 동쪽 20리. 신내동소(申內洞所) 부의 남쪽 17리. 기오천소(岐於淺所) 부의 남쪽 30리. 양천소(陽川所) 부의 남쪽 8리. 금성소(金城所) 부의 동쪽 15리. 석주진(石柱鎭) 유곡(楡谷) 동쪽 15리, 남북쪽에 모두 큰 산이 있는데 그 가운데 큰 강이 흐른다. 고려 말기에 진(鎭)을 설치하고 왜적을 막았다.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다. 사등촌부곡(沙等村部曲) 혹은 사도(沙圖)라고도 하는데, 유곡 동쪽 5리에 있다. 남전소(南田所) 유곡 북쪽 6리에 있다. 방광소(放光所) 유곡 북쪽 10리에 있다. 토지처(吐旨處) 유곡 동쪽 10리에 있다.
【명환】 신라 김흔(金昕) 헌덕왕(憲德王)이 사람을 당(唐) 나라에 보내려 하는데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혹자가 김흔을 천거하였는데 그는 태종(太宗)의 후예로 정신이 빼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뽑힐 만하였다. 드디어 입조(入朝)하여 숙위하도록 하였던바, 세밑에 돌아오니 왕은 그가 사신의 직책을 잘 수행했다 하여 남원 태수(南原太守)를 제수하였다. 윤흥(允興) 신라인 귀금(貴金)은 옥보고(玉寶高)의 가야금을 전수받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나오지 않았다. 신라의 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걱정되어 윤흥에게 이르기를, “방편을 써서 그 금술을 터득하게 하라.” 하고, 곧 남원 공사(南原公事)에 임명하였다. 윤흥이 도임하여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두 사람을 산 중에 보내 배우도록 하여 귀금은 가르쳐 주긴 하였으나 깊은 묘리(妙理)는 전해 주지 않았다. 윤흥이 그 부인과 함께 찾아가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 나를 남원에 보낸 것은 딴 이유가 없고 선생의 재주를 세상에 전하도록 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께서는 감추시고 전해 주지 않으니 내가 무엇으로 복명하겠습니까.” 하고, 윤흥은 술을 받들고 부인은 잔을 잡고 무릎 꿇어 예를 드리니, 귀금이 그제야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전해 주었다.
고려 한문준(韓文俊) 인종(仁宗) 때에 부사(副使)가 되었다. 이보림(李寶林) 충혜왕(忠惠王) 때 지부사(知府事)로 새로이 제용재(濟用財)를 두어 비용으로 지출하고 횡령하는 것이 없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대략 이르기를, “국자 학유(國子學諭) 양이시(楊以時) 군은 남원 사람인데, 솔직하고 성실하여 말이 미더웠다. 하루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사또의 어진 정사는 사람에게 깊은 감화를 주어서 금석에 새기지 않아도 남아있겠지만, 오직 그가 설치한 제용재(渧用財)는 쉽게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진실로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경계할 줄 알게 하지 않으면, 영구히 폐단이 없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하므로, 선생께서 글을 지어 주소서.’ 하였다. 내가 양군(楊君)의 말을 따라 그 일을 상고하여 보니, 양군이 말하기를, ‘매양 사자(使者)가 와서 부세 바치기를 독촉할 때 우리 지현(支縣)에서 미처 바치지 못하면, 대충하는 까닭으로 혹 파산하는 일도 있었는데, 우리 부사가 그런 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이보다 더할 수 있으리요’라고 말하고는, 밀린 세금을 거둬모아 베 약간을 얻었고, 또 안렴사(安廉使)에게 아뢰니, 가상히 여겨 무명을 내서 보조하였고, 또 노비문제로 다투어 관아에 송사하면, 이긴 사람에게는 종 한 명당 무명 한 필씩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부사가 판결을 잘하므로 들어오는 것이 더욱 많아져서 총합 무명 6백 50필을 얻었습니다. 향교(鄕校)와 삼반(三班)에서 각 한 사람씩 뽑아서 이를 맡게 하고, 지현에서 급할 때에는 네 사람이 부관(府官)에게 아뢰어 내어 주게 하고 이자는 받지 않으며, 부의 아전들을 경계하여 감히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도록 영구히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고을이 비록 산 중에 있으나 손님이 끊임없이 왕래하여 접대비용을 거둬들이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합니다. 우리 사또가 그것을 알고, 백성을 학대함이 다시 이보다 더 하리오 라고 말하고, 또 재(財)를 설치할 의향으로 안렴사에게 아뢰어 무명과 조미(糶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둔전(屯田)을 두었는데 방자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므로 우리 사또께서 친히 그 일을 맡아 거둬들여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게 하니 총계 쌀 2백 석, 콩 1백 50석이 되었습니다. 법을 만들어 나누어주고 거둬들이어 본전은 두고 이자를 쓰게 하며, 또 새로 개간한 땅에서 72석을 거둬들여서 손님을 대접하고 또 일용가구까지 완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서 제용재(濟用財)라 이름하니, 이에 백성들에게 횡포하게 거두는 것이 없고, 지현에서는 떳떳한 부세를 지켜서 이익을 보게 하고 손해를 없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한다.
윤위(尹威) 신종(神宗) 때의 사업(司業)으로 염찰사(廉察使)가 되어 오니, 한 지방이 경외 하였다. 부의 경내에 도적이 있어 무리들을 불러모아 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윤위가 혼자 말을 타고 들어가 화복(禍福)을 들어 타이르니, 적이 감격하여 눈물 흘리며 명령에 복종하였다. 이에 괴수만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주니 경내가 편안해졌다. 이세화(李世華) 태수로서 그 치적이 가장 뛰어났다. 정국검(鄭國儉) 지부사(知府事)가 되어 하루는 속읍(屬邑)에서 행춘(行春 태수(太守)가 봄에 속읍에 다니며 농상(農桑)을 권장하는 일)할 때, 원천동(源川洞)을 지나게 되었는데 송림(松林)이 있는 좌우 벽 위에 중 정사(正思)가 한 절구를 크게 써놓기를, “고불(古佛) 바위 앞을 흐르는 물이 슬피 울고 다시 오열한다. 아마도 인간세계에 내려와 영영 운산(雲山)과 헤어지게 된 것을 슬퍼하는가.” 하였다. 다음날 노유(老儒) 양적중(梁積中)과 말을 나란히 타고 찾아가서 산수의 벗을 맺었다. 뒤에 매양 인물을 논하게 되면, 반드시 정사를 중 가운데 용이라고 칭찬하였다. 주열(朱悅) 고종(高宗) 때 판관(判官)이었다. 본조 김희(金熙) 부사로서 백성 보살피기를 자식과 같이하고, 송사를 물흐르듯 처결하니, 부사로 있는 몇 해 동안에 한 고을이 편안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병으로 순직하니, 읍인들이 매년 기일이면 잊지 않고 제사를 올린다. 최덕지(崔德之)ㆍ이효공(李孝恭) 둘 다 부사로 있었다. 『신증』 정회(鄭淮) 부사로서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폈다. 안구(安覯) 부사.
【인물】 고려 이능간(李凌幹) 거령(居寧) 사람이다. 충선왕(忠宣王)이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를 그에게 주었는데, 능간은 별실에다 따로 두고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왕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하였다. 또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있을 때 왕이 토번(吐蕃) 땅에 귀양을 갔는데 능간이 금품을 품고 역리(驛吏)에게 몰래 주어 왕께 드리도록 하였으므로 왕과 종신(從臣)이 곤란을 면하였다. 왕이 승하하자 관을 모시고 귀국하는데 울부짖으며 멀리서 오느라고 애썼고 고생스런 일을 끝까지 다하였다. 원 나라에서 본국을 중국의 성(省)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능간이 황제에게 주청하여 그 의논이 결국 중지되도록 하였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지냈다. 양서린(梁瑞麟) 부의 아전이다.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부사 이종(李悰)이 난을 피하여 가다가 말이 넘어졌는데, 서린이 자기가 탄 말을 바꾸어 타게 하고 자기가 대신 죽음을 당했다. 이 일이 알려져서 뒤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양성지(梁誠之)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들고, 남원군(南原君)에 봉작되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양순석(梁順石)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신증』 윤효손(尹孝孫)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참찬(參贊)에 이르고, 효행이 있었다. 시호는 문효(文孝), 아들 지형(止衡)도 과거에 급제하여 관찰사까지 지냈다.
【우거】 본조 유규(柳規) 유언(柳漹) 이하 몇 대가 여기서 살았는데 다 현달(顯達)하였다.
【효자】 고려 양천룡(梁天龍)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했는데 묘막에서 6년을 지냈다. 이 일이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손순흥(孫順興) 성종(成宗) 9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구례(求禮) 사람 손순흥은 그 어머니가 죽자 화상을 그려 놓고 제사를 받들며 사흘에 한 번 묘지에 찾아가 공양[饗]하기를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였으니, 벼슬을 주어서 효도를 표창하려 하노라.” 하였다. 본조 유익경(柳益涇) 어머니 현씨(玄氏)가 병에 걸리자 익경은 어머니의 똥을 맛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했다. 이 일이 왕께 보고 되니 동부 녹사(東部錄事)에 배수하였다. 조한(趙漢) 구례현(求禮縣) 사람으로 아버지가 죽자 흙을 져다가 봉분을 만들고, 흐느껴 울기를 3년, 채소 반찬에 물만 마시고 동구 밖에 나가지 아니했다. 일이 왕께 알려지니 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임옥산(林玉山)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어머니의 병에 똥을 맛보아 살아날지를 가늠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상과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라 하였고, 3년상을 지낸 뒤에도 조석 삭망을 폐하지 아니했다. 그 일이 성종(成宗) 때에 알려져서 정려문을 세우고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하였다.
【열녀】 백제 지리산녀(智異山女) 구례현의 여자이다. 자색이 아름답고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으나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백제의 왕이 그녀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들이려 하였으나 한사코 따르지 아니했다. 고려 이씨(李氏) 생원 양중수(梁仲粹)의 처다. 왜적이 범하려 하였으나 이씨가 항거하여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니 정문을 세웠다. 본조 김씨(金氏) 호장(戶長) 양전(梁田)의 처이며 나이 20세에 남편이 죽자 피눈물을 삼년간이나 흘렸다. 부모가 그의 의지를 꺾고자 했으나 김씨는 따르지 않고, 소복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친히 삭망 제사를 행하다가 죽었다. 강씨(姜氏) 최자강(崔自江)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강씨는 남편의 시체를 안고 7일간이나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문을 세웠다. 임씨(林氏) 구례현 사람으로 왕정(王淨)의 처이다. 왕정이 병이 나자, 극진히 치료하고 다짐하기를, “만일 꺼려하지 아니한다면 나는 꼭 여묘(廬墓)하리라.” 하더니, 왕정이 죽은 뒤 임씨는 71세에 장례와 제례를 가례대로 하고, 여묘를 3년동안 하면서 늘 절일(節日)을 만나면 반드시 자손들을 데리고 친히 무덤에 올랐는데 90세가 되어도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제영】 낙잔홍엽노청산(落殘紅葉露靑山) 김극기의 시에, “습하고 더운 남방에 유람하매 더위에 시달리더니, 홀연 서풍을 만나니 얼굴빛이 즉시 펴지네. 바람에 흰 연기 일어나서 푸른 들을 감싸고, 단풍잎 모두 지니 청산이 드러났네.” 하였다. 탐상풍연폐식면(貪賞風煙廢食眠) 앞사람의 시에, “흥에 겨워 눈이 머리에 가득한[盈 백발(白髮)] 것도 모르고, 풍광에 취하여 먹고 자는 일조차 잊었네. 도연명(陶淵明) 살던 골목의 버들은 여름빛이 푸른 장막에 짙었고, 육씨(陸氏) 못 속의 연은 홍방(紅房 연꽃)이 가을에 벌어지네. 미친 듯이 부르는 노래에 어찌 장단을 분간하며, 한껏 마시는 술에 어찌 청주와 탁주를 분간하리오. 멀리 바라보매 끝간 데가 어딘지 알 수 없으니, 물빛과 산그림자가 멀리 하늘과 닿았네.” 하였다. 봉강요접견훤국(封疆遙接甄萱國) 정귀진(鄭龜晉)의 시에, “경계는 멀리 견훤국에 접하였고, 풍월(風月)은 방장산(方丈山)과 이어졌네.” 하였다. 지령인걸천년색(地靈人傑千年色) 권진(權軫)의 시에, “땅이 영험하고 인물이 걸출한 천년의 고을이요,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만고(萬古)의 산이로다.” 하였다. 준령동분삼도경(峻嶺東分三道境) 안극인(安克仁)의 시에, “준령은 동으로 세 도의 경계를 나누고, 서울은 북으로 몇 주의 산으로 막혀 있는가.” 하였다. 용성원수추운외(龍城遠岫秋雲外) 안숭효(安崇孝)의 시에, “교룡산성(蛟龍山城)에서 멀리 보이는 멧부리 가을 구름 밖에 보이고, 만복사(萬福寺)의 맑은 종소리 저녁노을 사이에서 울리도다.” 하였다. 녹도홍거십리향(綠稻紅蕖十里香) 김극기(金克己)의 〈구례현(求禮縣)〉 시에, “저녁비 부슬부슬 홀연 서늘한 기운을 보내고, 시내 빛과 산 색은 점점 창망(滄茫)하여라. 강남(江南)의 빼어난 경치 실로 그림 같은데, 푸른 벼 붉은 연꽃 십 리에 향기롭네.” 하였다. 소계단정횡청천(小溪短艇橫淸淺) 백분화(白賁華)의 〈구례현〉시에, “아침에 백계산(白鷄山) 아래 길을 떠나서 저녁에 찬수역(鑽燧驛) 동편 마을에 머무네. 작은 시내 조그만 나룻배는 맑고 얕은 물을 가로지르고 해지자 외로운 마을은 어둠에 싸였구나. 절벽 위에 흩어진 구름은 은궐(銀闕 백은으로 지은 궁성의 문)이 솟아나는 듯, 먼 산에 타는 불은 장대한 화성(火城)이로다. 밤 깊어 곤한 잠자리 꿈을 깨니 벽을 등지고 희미한 등불이 침상 위를 비추네.” 하였다. 찬수(鑽燧)는 잔수(潺水)의 잘못이다. 숭악춘한설만산(嵩岳春寒雪滿山)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환해(宦海 벼슬길)에 부침(浮沈)하니 가는 곳마다 어렵다가, 남쪽에 와서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네. 창에 밤이 고요한데 바람은 대를 울리고, 숭악(崇岳)은 봄에도 차가워 눈이 산에 가득하네. 나그네 몸은 푸른 산 속에 노닐고, 어버이 생각하는 꿈 흰구름 사이에 둘렀네. 괴로운 인생 벼슬에 얽매여 물외(物外)에 한가로이 소요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조선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영종(英宗) 15년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켰다가 26년 다시 승격시켰으며, 헌종(憲宗) 10년 현(縣)으로 강등시켰다가 철종(哲宗) 4년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통한(通漢) 읍 안이다. 장흥(長興) 처음이 1리이고, 끝이 3리이다. 만복(萬福) 서쪽으로 처음이 2리이고, 끝이 5리이다. 백파(白波)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주촌(朱村) 동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내산동(內山洞) 동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외산동(外山洞) 동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소의(所義) 동쪽이 처음으로 5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중방(中方) 위와 같다. 흑성(黑城)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주포(周浦)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송내(松內) 위와 같다. 수지(水旨)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두동(豆洞) 남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금안(金岸)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대곡(大谷) 두동(豆洞)에서와 같다. 초랑(草郞)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원천(源川) 동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50리이다. 기지(機池)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생오대(生烏代) 초랑(草郞)에서와 같다. 자성(者省)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이언(伊彦)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적과(迪果) 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고절(高節) 위와 같다. 고달(古達)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덕고개(德古介)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돌고개(乭古介) 위와 같다. 지사(只沙) 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말천(末川) 북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갈치(葛峙)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15리이다. 보현(普賢)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시라산(時羅山)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산동(山東)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둔덕(屯德)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영계(靈溪) 서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사동(蛇洞)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성남(城南)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오지(吾枝)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견소곡(見所谷) 서쪽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아산(阿山)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왕지전(王之田)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매안(梅岸)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내진전(內眞田) 북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외진전(外眞田) 북쪽으로 처음이 7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상번암(上磻巖) 동북쪽으로 처음이 90리이고, 끝이 1백 리이다. 하번암(下蟠巖)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서봉(棲鳳)ㆍ백암(白巖).
【창고】 읍창(邑倉)ㆍ지혜창(紙惠倉)ㆍ진휼창(賑恤倉) 성부(城府)는 성내(城內)에 있다. 동창(東倉) 40리에 있다. 서창(西倉) 40리에 있다. 구남창(舊南倉) 40리에 있다. 신남창(新南倉) 40리에 있다. 구북창(舊北倉) 30리에 있다. 신북창(新北倉) 40리에 있다. 산창(山倉) 교룡산성(蛟龍山城)에 있다.
【진도】 순자진(鶉子津) 일명 중진(中津)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30리이고, 곡성 대로(谷城大路)로 통한다. 적성진(赤城津) 서쪽으로 30리이고, 순창 대로(淳昌大路)로 통한다.
【교량】 금석교(金石橋) 서쪽으로 5리이다. 용두정교(龍頭亭橋) 서쪽으로 10리이다. 양수정교(兩水亭橋) 남쪽으로 5리이다. 갈어구교(乫魚口橋) 동쪽으로 10리이다. 금천교(金川橋) 동쪽으로 50리이다. 율천교(栗川橋) 북쪽으로 30리이다. 월천교(月川橋) 남쪽으로 30리이다. 오작교(烏鵲橋)ㆍ승차교(乘槎橋) 모두 광한루(廣寒樓) 앞에 있다.
【토산】 밤ㆍ옻ㆍ차, 매 두 종인데, 지리산에서 난다.
【누정】 용두정(龍頭亭) 서쪽으로 10리에 있고, 기암(奇巖)이 촉립(矗立)한 모양이 마치 용머리와 같다.
【묘전】 탄보묘(誕報廟) 서문(西門) 밖에 있으며, 선조 기해년에 총병(摠兵) 유건(劉健)이 세웠고, 정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관우(關羽) 경도(京都)의 동묘를 보라. 이신방(李新芳) 총부중군(摠府中軍)이다. 장표(蔣表) 총부천총(摠府千摠)이다. 모승선(毛承先) 총부천부(摠府千夫)이다. 위 세 사람은 정유 왜란(丁酉倭亂) 때에 나가 싸워 본부에서 전사하였다. 숙종 병신년에 세 장수를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사원】 영천서원(寧川書院) 광해군 기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안처순(安處順) 자는 순지(順之), 호는 사제(思齊)이고, 순흥(順興) 사람이다. 벼슬은 봉상 판관(奉常判官)이다. 정환(丁煥) 자는 용회(用晦), 호는 회산(檜山)이며, 창원(昌原) 사람이다. 벼슬은 경상 도사(慶尙都事)이다. 정황(丁熿)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游軒)이며, 정환(丁煥)의 아우이다. 명종 경신년에 귀양가서 죽었고, 벼슬은 사인(舍人)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대유(李大甹)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이며, 경주(慶州) 사람이다. 벼슬은 형조 좌랑이다. ○ 노봉서원(露峯書院)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축년에 현액을 내렸다. 김인후(金麟厚) 문묘(文廟)를 보라. 홍순복(洪順福) 자는 자유(子裕) 호는 고암(顧庵)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중종 경진년에 사화를 입었다. 최상중(崔尙重)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재(未能齋)이며, 삭녕(朔寧) 사람이다. 벼슬은 사간(司諫)인데, 대사헌(大司憲)으로 증직되었다. 오정길(吳廷吉) 자는 형보(亨甫), 호는 해서(海西)이며, 해주 사람이다. 벼슬은 교서 정자(敎書正字)이다. 최온(崔薀)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이며, 최상중의 아들이다. 벼슬은 동부승지(同副承旨)이다. 최휘지(崔徽之)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州)이며, 최온의 조카이다.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충렬사(忠烈詞) 광해군 임자년에 세웠으며 효종 계사년에 현액을 내렸다. 이복남(李福南) 우계(羽溪) 사람으로 벼슬은 전라 병사(全羅兵使)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정기원(鄭期遠) 자는 사중(士重), 호는 견산(見山)이며, 동래(東萊) 사람이다. 양원(楊元)의 접반사로 난군(亂軍)한테 죽임을 당하였으며, 벼슬은 우부승지(右副承旨)인데 좌찬성 내성군(左贊成萊城君)으로 증직되었다. 신호(申浩) 자는 언원(彦源)이며 평산(平山) 사람이다. 벼슬은 장흥 부사(長興府使)이며,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증직되고 시호는 무장(武莊)이다. 이덕회(李德恢) 자는 경렬(景烈)이며, 용인(龍仁) 사람이다. 벼슬은 본부판관(本府判官)이며, 형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이원춘(李元春) 벼슬은 구례 현감이며 병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오흥업(吳興業) 군향유사(軍餉有司)였다. 이상의 사람들은 선조 정유년에 본부에서 전사하였다. ○ 민충사(愍忠詞) 효종 기축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현액을 내렸다. 황진(黃進) 진주(晉州)를 보라. 고득재(高得齎) 무과(武科)의 의병장(義兵將)이며, 선조 계사년에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평창 군수(平昌郡守)이며,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내렸다. 안영(安瑛) 광주(光州)를 보라.

 

장수현(長水縣)


동쪽으로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50리, 남으로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20리, 서쪽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32리,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32리, 북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까지 47리, 서울로부터는 6백 68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우평현(雨坪縣)인데 신라 시대에는 고택(高澤)이라 하여 장계군(長溪郡)에 속하였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에는 장계(長溪)를 겸임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원년에 다시 나누어 장수현으로 하고, 장계 감무(監務)를 겸하도록 하였고, 태종(太宗) 14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속현】 장계현(長溪縣)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백해군(伯海郡), 해(海)는 혹 이(伊)로 쓰기도 한다. 신라 때에 벽계군(壁溪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남원부에 속하였다가 뒤에 장수현(長水縣)에 속하였고, 별호를 장세(長世)라고 하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우평(雨坪)ㆍ장천(長川)ㆍ고택(高澤).
【성씨】 본현 이(李)ㆍ오(吳)ㆍ정(井)ㆍ고(高), 임(林)ㆍ설(薛)ㆍ조(趙)ㆍ황(黃) 모두 속성(續姓)이다. 장계(長溪) 백(白)ㆍ배(裵)ㆍ유(柳)ㆍ오(吳)ㆍ현(玄), 김(金) 속성(續姓)이다. 양악(陽岳) 이(李)ㆍ최(崔). 이방(梨方) 배(裵). 복흥(福興). 임(林)ㆍ예(芮)ㆍ조(趙)ㆍ이(李)ㆍ염(廉)ㆍ경(景)ㆍ호(扈).
【산천】 영취산(靈鷲山)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덕유산(德裕山)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성적산(聖迹山) 일명 성수(聖壽), 현의 서남방 15리에 있다. 백화산(白華山) 장계현(長溪縣)에 있다. 육십현(六十峴) 현의 북쪽 40리, 경상도 안음현(安陰縣)의 경계에 있다. 신라 시대로부터 요해지(要害地)로서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을 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다. 이것이 이름이 되었다. 수분현(水分峴)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골짜기의 물이 한 줄기는 남원(南原)으로 향하고 한 줄기는 본현으로 들어와 남천(南川)이 되었다. 이것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호천(狐川) 현의 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남천(南川)과 백화산의 물이 합류하여 호천(狐川)이 되고, 북으로 흘러 용담현(龍潭縣) 경계로 흘러간다.
【토산】 오미자ㆍ인삼ㆍ지치[紫草]ㆍ석이버섯ㆍ꿀ㆍ감.
【누정】 연사루(戀思樓) 객관(客舘)의 남쪽에 있다. 성화(成化) 갑오년에 현감 김수강(金壽康)이 세운 것인데, 연궐사친(戀闕思親 임금을 그리워하고 어버이를 사모함)의 뜻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왕중선(王仲宣 왕찬(王粲)의 자)이 세상을 근심하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여 홀로 읊조리며 먼 곳을 생각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네, 또 보지 못했는가 적회영(狄懷英 적인걸(狄仁傑)의 자)은 어버이를 그리워하나 돌아갈 길 없어 구름을 바라보며 먼 고을에 머물러 있음을 한탄하였다네. 인생이 벼슬길에 나가는 일이 실로 그릇된 것이니 충과 효를 겸전하기 끝내 어려운 일이로세. 그대는 지방관에 임명받고 나오니 부모와 임금생각 새 근심이 얽혔도다. 장안의 임금 계신 곳을 보니 오운(五雲)이 잔뜩 끼었고 부모 계신 이향(異鄕) 옛 동산이 아련히 생각난다. 일편단심(一片丹心) 본시 지녔으니, 눈에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네. 누각(樓閣)이 이루워지니 우뚝 솟아 두우성(斗牛星)에 닿고 눈은 천리에 극(極)했는데 몸만 헛되이 머물렀네. 일신을 직무에 바쳐 왕의 덕화를 이어 받드니, 백성을 대하기 자식과 같고, 아전을 대하기 원수처럼 하였네. 임금과 어버이에 보은하고 또 무엇을 구하겠느냐. 연사(戀思)란 이름을 따라 뜻을 강구하면 어찌 연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말고, 명(名)과 실(實)이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하네, 나 또한 인끈을 풀고 잠시 한가로움을 얻었도다. 가을 서리 봄이슬, 광음은 빨리도 가누나. 우연히 남방을 원유(遠遊)하였는데 두류(頭流)의 뛰어난 경개를 다 볼 수가 없고나. 누 앞의 꽃과 대는 봄의 부드러움을 희롱하고, 누아래 긴 시내는 맑기가 기름같네, 그대와 서로 술을 나누지 못하여 유감이라. 소나무와 계수나무의 가을을 기다려 다시 오겠네.” 하였다. 『신증』 응벽정(凝碧亭) 객관(客官)의 남쪽에 있는데, 그 아래에 연못[蓮塘]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원유】 득방원(得方院)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수분원(水分院)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덕안원(德安院) 현의 북쪽 31리에 있다. 홍복원(洪福院)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양선원(陽善院) 현의 북쪽 62리에 있다. 석북원(席北院)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불우】 운점사(雲岾寺) 성적산(聖迹山)에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중수하였으니 승(僧) 원효(元曉)의 도량이었다. 남북쪽에 만향점(萬香岾)이 있는데 원효와 의상(義湘)이 이곳에서 강법(講法)하였다. 이상한 향기가 풍겨 붙인 이름이다. 본조 세종(世宗)조에 중 성주(省珠)가 다시 중수하였다. 석천사(釋天寺)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구름머리에 절간은 높은 산봉우리를 차지하였는데, 비탈을 오르고 낭떠러지를 올라 찾아왔네. 바위의 대[竹]는 바람에 기대어 푸른 옥을 두드리고, 시내 소나무는 달과 어울려 황금빛을 부시네[碎]. 향로 연기 뿜어 엉키어 안개가 되고, 용(龍) 바릿대는 침을 흘려 흩어져서 임우(霖雨)가 되었네. 한밤중에 홀연히 꿈에서 깨니, 돌 끝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손끝의 거문고인양 울리네.” 하였다. 정토사(淨土寺) 덕유산(德裕山)에 있다. 장안사(長安寺)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팔공암(八功庵) 성적산(聖迹山)에 있다. 의상(義湘)이 중건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의 서북 4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장수(古長水) 지금의 치소 서쪽 7리에 있다. 양악소(陽岳所) 현의 북쪽 60리에 있다. 이방소(梨方所)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천잠소(天蠶所)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복흥소(福興所)ㆍ성적산성(聖迹山城) 석축으로 주위는 9백 70자, 높이 10자, 지금은 반이나 무너져 있다.
【명환】 본조 최덕지(崔德之)ㆍ황육(黃陸) 둘 다 청렴하고 간결하게 정치를 잘 했다.
【인물】 고려 이임간(李林幹) 벼슬은 정승에 이르고, 장천군(長天君)에 봉함.
본조 황희(黃喜) 초명(初名)은 수로(壽老) 후에 희(喜)로 고쳤다.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이다. 고려 신창(辛昌) 때에 급제하여 본조에 와서 네 임금을 섬기어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연로 걸퇴하여 나이 90에 죽었다. 의정부에 24년 근무 중 조종에서 이룩한 법도를 준수하고 분잡한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일 처리는 이치에 따르고, 규모가 원대하므로, 세종(世宗)이 아끼고 의지하기를 더욱 중히하여 비록 중궐 내부의 비밀이라 하여도 반드시 그를 불러서 상의하고, 한마디로 결정을 하되 물러나서는 상과 의논한 일을 한번도 말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논자(論者)들이 칭하기를, “우리 조정에 어진 재상으로는 틀림없이 공이 제일이니 훈업과 덕량이 북송(北宋)의 왕문정(王文正 왕증(王曾))과 한충헌(韓忠獻 한기(韓琦))에 비할 만하다.” 하였다. 시호는 익성(翼成), 세종(世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황치신(黃致身) 황희(黃喜)의 아들. 태종(太宗)이 그의 뜻과 학문을 듣고 동(董)이라 이름을 주고, 공안부 부승(恭安府副丞) 벼슬을 주었다. 뒤에 그 이름이 형제들의 이름과 맞지 않으므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고 88세에 죽으니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그 아들이 효도로 섬겼고 벼슬은 동지중추(同知中樞)를 지냈다. 황수신(黃守身) 치신의 동생. 세조조의 좌익 공신(佐翼功臣)이요,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열성(烈成).
『신증』 본조 양근(梁根) 나이 13살에 아버지가 악질(惡疾)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일이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 장영손(張永孫)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여묘 3년에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고 제찬(祭饌)을 갖추어 조석으로 곡하며 상식을 올렸다. 그 일이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 김경손(金敬孫)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집이 가난하여 남에게 빌려서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하기를 예의 정도를 넘었다. 어머니가 8년 동안 병을 앓는데 약을 다리면 먼저 맛을 보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죽을 쑤어 먹으며 묘막에서 지냈는데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으니 그때 나이가 70여 세였다. 금상 2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서리 맞은 누런 잎은 말안장에 가득하네 윤여형(尹汝衡)의 시에, “산 길에 가을바람 새벽의 찬 기운을 빚어내고, 서리맞은 누런 잎사귀는 말안장에 가득하네.” 하였다. 벼와 삼은 여름맞아 갈고 심도다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벼와 삼을 여름 만나 갈고 심는데, 초목은 가을도 되기 전에 이미 처량하도다.” 하였다. 『신증』 구름은 물빛을 옹호하여 봄에 담담하도다 허침(許琛)의 시에, “벼슬길에 노는 심서(心緖) 반이나 꺾이었는데, 지난 일을 생각하니 망연히 꿈이 희미하도다. 비단 휘장에는 금비취(金翡翠)를 수놓지 못한 것 한스럽고 술통에는 옥동서(玉東西)를 자주 가늠질 하네. 구름은 물빛을 옹호하여 봄에 담담(澹澹)하고, 이슬은 꽃에 맺혀 새벽이 차갑다. 오봉(鰲峯)의 청릉피(淸綾皮)는 잘 있느냐, 몇 번이나 바람결에 옛 보금자리를 생각하였던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장계(長溪)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백해군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에 벽명군(壁溟郡)으로 고쳤다. 영현(領縣)이 둘이니 고택(高澤)ㆍ진안(鎭安)이며, 전주에 예속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장계로 고쳤다가 현종(顯宗) 9년에 남원에 예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장수를 겸임토록 했다. 본조에서는 태조 원년에 나누어서 장수현(長水縣)에 내속(來屬)시켰다.
【방면】 읍내(邑內) 끝이 10리이다. 신남(身南)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신서(身西)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신북(身北)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수내(水內) 본읍에서 끝이 15리이다. 임현내(任縣內)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임남(任南)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5리이다. 임북(任北)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며, 우삼면(右三面)은 장택(長澤)의 고현(古縣)이다.
양악소(陽岳所)는 북쪽으로 60리이고, 천잠소(天蠶所)는 북쪽으로 15리이다. ○ 이방소(梨方所)는 북쪽으로 30리, 복흥소(福興所)는 서쪽으로 2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성수산(聖壽山)에 있으며, 둘레가 9백 70척이다. 식천고성(食川古城)ㆍ침치 고성(砧峙古城).
【창고】 읍창(邑倉) 읍내에 있다. 서창(西倉) 본읍에서 30리인 신서면(身西面)에 있다. 계창(溪倉) 본읍에서 30리인 임현(任縣) 안에 있다. 북창(北倉) 본읍에서 20리인 신북면(身北面)에 있다.
【교량】 비전교(碑前橋) 서남쪽으로 1리에 있다. 송탄교(松灘橋) 서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원월장(院越牆) 남쪽으로 4리에 있다. 홍복교(洪福橋)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완경교(翫景橋) 북쪽으로 50리에 있다. 대평교(大坪橋)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토산】 닥종이ㆍ뽕.
【누정】 응벽정(凝碧亭) 읍내(邑內)에 있다. 청심정(淸心亭)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출전  : 한국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