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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최씨 중랑장공파 파조 - 고려 중랑장공 최용봉

아베베1 2009. 2. 1. 21:16

 

 

 

 

 전주최씨 중랑장공파 파조 - 고려 중랑장공 최용봉

 

중랑장공(中郞將公)은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始祖) 문성공 최아(文成公 崔阿)의 막내아들로 휘(諱)는 용봉(龍鳳)이며 고려 충정왕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전주최씨 연원지"에는 ; "공의 휘는 용봉이니 당시 막내아들로 태어나 집안의 보살핌과 총애를 혼자 차지하면서 성장하였기로 벼슬에 큰 뜻이 없어 벼슬이 중랑장(서기관급)에 머물렀으나 본래 영민하여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재질과 정기는 후손들에게 유전되어 최씨 문중의 찬란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된다.


 

공께서는 7형제를 두셨으나 불행히도 셋째 아들 휘 서(瑞), 넷째 아들 휘 익(翊), 다섯째 아들 휘 중거(仲車), 여섯째 아들 휘 안복(安福), 일곱째 아들 휘 안수(安壽) 다섯 형제는 후손이 없어 대를 이어오지 못하였으니 안타깝고 다만 위로 두 분 형제만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으니

큰아들 휘 을인(乙仁)은 사온서 직장 동정을 지내시어 한 계파를 이루고 둘째아들 휘 의(立義)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도승지와 행검한성을 지내시어 또한 계파를 이루어 대를 이어오고 있다."고 적고 있다.

옛날 노인들 간에 이야기로 전해 오기를 중랑장공의 산소가 전북 완주군 소양면 분토동 주덕산에 있다고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으므로 1815년 3월 2일에 제단을 쌓고 매년 음력 3월 3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중랑장공의 후손을 전주최씨 중랑장공파라고 부르며 중랑장공파는 다시 한성공파, 송애공파, 송파공파, 소윤공파, 연촌공파로 나누지고 전주최씨 문성공계 중에서 가장 후손이 왕성하다.

 

해 설 :

휘(諱)
돌아가신 분의 이름. 살아 계신 분의 이름은 함(銜)이라 한다.

고려 충정왕(忠定王)
고려 30대 왕. 1348년에서 1351년까지 재위하였다.

중랑장(中郞將)
고려시대 정5품 무관, 각 영(營)에 2명씩 있었다. 소령이나 중령 정도 계급의 장교.

사온서(司 署)
궁중에서 사용하는 술을 만드는 관청. 고려 문종 때의 양온서를 1308년(충렬왕 34년) 사온감으로 바꾸어 부르고 다시 1356년 양온감으로 바꾸어 부르고 다시 1362년부터는 사온감으로 부르다가 또다시 1369년에는 양온서로 바꾸는 등 여러 번 그 이름이 바뀌었으나 1372년부터 사온서로 불리었다.

직장(直長)
고려시대 벼슬이름. 전의시, 사복시, 사온서, 군기감, 사선서, 상약국, 상사국, 상승국, 잡작국, 전약서, 영조국, 직염국, 의영고, 상서사, 상만고 등에 있었다. 품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6품에서 9품까지 있었다. 현재의 전문 기술직 공무원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조선시대 종7품 관직으로 의금부, 상서원을 비롯한 30개 중앙 부서에 있었다.

승정원(承政院)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 조선 초기에는 중추원에서 이 직책을 맡아보았으나 1400년(조선 정종 2년)부터 이 업무를 분리하여 승정원이 설치되었다.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지 6명을 두었으며 도승지가 책임자다. 지금의 대통령비서실.

도승지(都承旨)
조선시대 승정원에 있던 6명의 승지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로 정3품이다. 6명의 승지는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았는데 도승지는 6방중에서 이방을 맡아보았다.

1815년.
조선 순조 15년, 중국 청나라 인종 가경 20년, 을해년.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別集) 제7권
 묘갈(墓碣)
최 직장(崔直長)의 묘갈명 병서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멀리 고려 때부터 유래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서 향족(鄕族)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시조(始祖)인 시중(侍中) 최아(崔阿)가 최용봉(崔龍鳳)을 낳고 최용봉이 최을생(崔乙生)을 낳았는데, 모두 관위(官位)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직학사(直學士) 최담(崔湛)과 소윤(少尹) 최득지(崔得之)를 거쳐 현감인 최자목(崔自睦)의 때에 이르러서 고부(古阜)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상장군(上將軍) 최분(崔汾)과 군수 휘(諱) 명손(命孫)과 휘 희윤(希潤)과 휘 진하(鎭河)를 거쳐서, 휘 여호(汝浩)가 김약우(金若愚)의 딸인 강진 김씨(康津金氏)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사년(1545, 인종 1)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안(安)이요, 자(字)는 모(某)이다. 공은 자질이 총명하였고 행동거지 또한 바르고 성실하였다. 전후에 걸쳐 어버이 상을 당했을 적에도 모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며 건강을 해칠 정도로 슬퍼하였고, 비갈(碑碣)을 세워 선인(先人)의 덕을 기리고 사우(祠宇)를 세워 돈독하게 제사 드리는 일에 대해서 집안이 빈궁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우인 최부(崔富), 최인(崔寅), 최용(崔容)과 더불어 40년 동안이나 동거하면서 의식(衣食)을 함께하는 가운데, 선(善)을 권면하고 잘못된 점을 경계하여 윤리(倫理)와 기강이 가지런해지게 하였다. 이는 대체로 효성과 우애에 대한 공의 정성이 천성적으로 뿌리를 내린 위에 예법에 통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바로 그런 까닭에 사랑하면서도 외설스럽게 되지 않고 시간이 오래 흐르면 흐를수록 서로 공경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제들이 받들어 일을 행할 때에도 마치 관부(官府)와 같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므로, 고향 사람 모두가 존경하며 중히 여길 수밖에 없었는데, 설혹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감히 침해하며 모욕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공은 소싯적에 박사(博士)가 되기 위한 학업에 매진해 본 적도 있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담박한 경지를 지키면서 자신의 몸을 닦아 나갔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찍이 왜란(倭亂)이 일어났을 때 고향 사람들의 앞장에 서서 군대에 대한 비용을 도와 준 공을 세워 선공감 직장(繕工監直長)의 직책을 상으로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공은 부안 김씨(扶安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고려 문정공(文貞公)의 후예로 김효순(金孝純)의 딸이다.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최경승(崔敬承)이고, 차남은 최경행(崔敬行)으로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측실 소생으로 1남 2녀가 있으니, 아들은 최경직(崔敬直)이고, 사위는 정섬(鄭暹)과 이비응(李匪鷹)이다. 최경승은 4녀 1남을 두었으니, 아들은 최천급(崔天及)이고, 사위는 이해(李海)와 김지간(金地干)과 문홍망(文弘望)과 정동일(鄭東一)이다. 최경행은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최천용(崔天聳)과 최천통(崔天通)이고, 사위는 방명도(房明燾)이며,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최천급은 아들 최유(崔裕)를 두었다. 그 밖에 내외손이 많은데 다 기재하지 못한다.
공은 만력(萬曆) 을묘년(1615, 광해군 7) 12월 19일에 죽었다. 묘지는 선영에 있는데, 군의 관아 동쪽 모곡(某谷) 묘위(卯位)의 혈(穴)에 묻혀 있다. 의인(宜人)은 공보다 31년 앞선 을해년(1575, 선조 8)에 죽어, 봉분만 달리한 채 같은 묘역에 묻혀 있다. 나는 일찍이 동향(同鄕)의 자제로 공의 행업(行業)에 대해서 상세히 들어 익히 알고 있었는데, 미처 가서 배우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공의 전형(典刑)을 추억하여 그 행적을 서술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명하는 바이다.

나라는 글만 화려하면 재질이 있다 하고 / 國尙詞華以爲材
선비는 청담(淸談)을 얘기하면 통달했다 일컫나니 / 士談名理以爲通
최공이 본성 지키려고 전원으로 돌아가서 / 宜乎崔公守拙田園
덕 감추고 살았던 것도 당연했다 하리로다 / 潛德以終者乎
하지만 자신의 한 몸에서 한집안으로 / 然自身而家
다시 향리까지 그 풍도(風度) 흠모하였나니 / 鄕里欽風
만약 공의 성품을 살펴본다면 / 揆厥所性
낮출 자 누구이며 높일 자 누구일까 / 孰卑孰隆
나의 이 비명(碑銘)은 결코 아첨 아니요 / 我銘非諛
공심(公心)에서 우러나온 정당한 평가로세 / 尙論之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