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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우암 송시열의 학덕을 기리는 도봉서원 서울유일의 서원

아베베1 2009. 6. 26. 11:50

 

 명수대 모습

 

  이병주 詩 碑 북한산 찬가

 김수영  시비

 

 高山仰止

 

 

 도봉서원

 

 

 

 

 

 

 

 

 

 

 

경서(經書)에 밝은 양명학자로 지평현감, 양주목사, 여주목사를 지냈다. 양주목사 재임시 1573년(선조 6) 도봉산 영국사 절터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창건하였다.

중종(中宗)때 도학자이며 진보적 정치가.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관직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선 중종(中宗) 때 성리학자(性理學者)요, 대유학자(大儒學者)이다. 삼사(三司)를 두루 거쳐 훈구세력의 부정을 척결하는 혁신 정치이념으로 유교적 도덕국가, 요순시대의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도학(道學)에 의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요, 정암 조광조의 학통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이어받았다.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등 다수가 간행되었으며, 사후(死後)의 문집으로는 『우암집』, 『송자대전』등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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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무형

17

2

1

3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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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별 및 지정번호

문화재명

소  재  지

국가
지정문화재
국가사적 제362호 연산군묘 방학동 산 77번지
국가사적 제440호 초안산 조선시대분묘군 창동 산202-1외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 칠장 창동 삼성아파트 108-906
서울시
지정문화재
유형문화재 제 50호 양효안공신도비부묘소 방학 4동 산63-1호
유형문화재 제106호 이인신도비 도봉동 산81-1호
유형문화재 제121호 만월암석불좌상 도봉동 산121호
무형문화재 제23호 궁장 창1동 664-24
서울시보호수 제1호 방학동은행나무 방학 4동 546번지
서원 및 전통사찰 도봉서원 도봉동 512번지
원통사 도봉1동 546번지
천축사 도봉1동 549번지
향토문화유적 누원점 (다락원 터) 도봉산역 맞은편
창동리석조이정표 창5동 동사무소
원당천 방학동 547번지
조대비별장 터 도봉1동 394-1(현,금득사)
박물관 옹기민속박물관

자료 출처 : 도봉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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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봉10대명소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12번지
□ 교 통 편 : 지하철 7호선 도봉산역 하차 산행 60분 정도 소요
                  초록(지선) 1018,1019번,1139,1148,1151
                  파랑(간선) 100,106,107,140,150,160,161번
                  버스종점 하차 산행 55분정도 소요

□ 입 장 료 : 무료
□ 문     의 : 도봉문화원 (905-4026)
 
 도봉서원은 서울에 소재한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1573년(선조6)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선생의 학문적 사상과 덕행을 추모하고 도학(道學)을 강의하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창건해서 다음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1696년(숙종22)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을 병향(竝享:위패를 나란하게 모심)하고, 1755년(영조51) 영조대왕의 친필현판을 받아 어필사액서원(御筆賜額書院)이 되었다.

이곳은 본래 양주군 도봉산 계곡에 있는 영국동(寧國洞)으로 영국사(寧國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주변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났으며 일찍이 시인 묵객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었다. 정암 조광조선생은 한양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이곳의 자연경관을 매우 사랑하여 자주 왕래하면서 심신을 가다듬었는데, 청년기에는 제자들과 함께 와서 학문을 토론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벼슬을 할 때에도 휴가때면 찾아와서 사색하며 쉬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유배지인 능주(綾州)에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1573년(선조6) 계유(癸酉)에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지역주민의 청원에 따라 이곳을 탐방하고 정암선생의 유적을 더듬어 보고는 감개하여 마을 선비들과 더불어 서원을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암선생이 사약을 받은지 55년만에 이곳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서원을 설립하게 되니, 이듬해 여름에 낙성식을 하고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매년 봄 2월과 가을 8원의 중정일에 정암선생을 기리는 석채례(釋菜禮)를 봉행하였다.

서원 본건물은 남언경 목사 재임중에 대부분 완공되었으나 식당과 장서각 그리고 제수용 주방등은 후임목사로 온 이제민, 이정복이 계속 추진하여 6년만에 모든 공사가 끝났다. 공사의 비용은 사문(斯文)의 선후배가 공동으로 찬조금을 모아서 충당했는데 당시 부제학 허엽공이 중심이 되었고, 우참찬(右參贊) 백인걸과 이조참판(吏曹參判) 박소립의 공로도 적지 않았다. 도봉서원의 학규와 학령은 부제학 허엽이 제정하였는데 원장(院長) 1인과 교수 약간명을 두며 하재생(下齋生, 기숙생)의 정원은 20명이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의 방화로 서원은 20년만에 모든 건물이 소실되어 이후 16년간 폐교되었다가. 1608년(선조41)에 사우(祠宇)와 서원을 다시 세워서 옛날의 모습을 복원하여 서원의 학풍을 다시 일으켰으며, 1610년(광해군 2)에 정암 조광조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事)하니 도봉서원은 문묘에 종사한 유현(儒賢)의 서원이 되어 하재생이 30명으로 증원되어 더욱 번창하였다.

1668년(현종 9)에는 우암(尤庵) 송시열선생이 62세의 나이로 도봉서원에 와서 정암선생의 사당에 참배하고 시를 지어 남겼는데, 이러한 일로 인하여 도봉서원의 학생들은 큰 감명을 받고 도학(道學)을 계승하는 사명을 스스로 자부하였다. 그러다가 1689년(숙종 15) 왕자위호(王子位號)사건으로 우암선생은 정읍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83년의 생을 마치게 되었다. 우암선생이 서거한지 7년 뒤인 1696년(숙종 22)에 재학생들의 건의에 의하여 우암 송시열선생을 도봉서원에 병향하게 되었다.

1723년(경종 3)에 김범갑과 최탁등의 상소로 인해 우암선생을 도봉서원에서 출향했으나 1726년(영조 원)에 복향되었으며, 1756년(영조 32)에 이르러 우암 송시열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하게 되니 도봉서원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1775년(영조 51)에는 영조대왕이 친필로 ‘도봉서원(道峯書院)’네 글자의 현판을 사액(賜額)하게 되었으니, 이제 도봉서원은 양현(兩賢)을 모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 어필사액서원(御筆賜額書院)이 되어 세상에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에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첩설(疊設)한 서원은 모두 훼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정암선생은 용인의 심곡서원에 독향하고, 우암선생은 여주 대로사에 독향하였고, 3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유서깊은 도봉서원은 훼철되고 말았다.

1903년(광무 7)에 양주, 포천, 파주 등지 유림들의 주도로 도봉서원의 옛터에 제단을 모아 봄, 가을로 정암선생과 우암선생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1970년 양주향교 전교 남궁 복씨의 발의로 도봉서원재건위원회를 창립해서 경향유지의 찬조를 받아 서원 경내의 동북쪽에 서향으로 사우(祠宇)를 다시 세워서 정암 조광조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위패를 병향하여 춘추향제을 받들고 있다. 그러나 서원은 아직 완전복원되지 않았다.

율곡 이이선생의「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에 의하면, 창건 당시의 도봉서원의 건물배치는 북쪽에 남향으로 사우가 있어 정암선생의 위판을 모셨고, 사우양편에 재학생이 기숙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었으며, 서원은 남쪽에 위치했는데 중앙에 강당을 건설하였으며 강당의 양쪽에 협실을 붙여지어 날개처럼 만들었고, 전면에 있는 지형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김석신의 「도봉첩」이나 작자미상의 「도봉서원도」에 나타나는 도봉서원의 모습이 위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는 도봉서원 인근의 계곡바위에 우암선생의 친필을 새긴 ‘도봉동문(道峯洞門)’과 역시 주자의 시를 우암선생이 대자로 써서 새긴 ‘제월광풍갱별전(霽月光風更別傳) 료장현송답잔원(聊蔣絃誦答潺湲)’이란 암각문을 비롯하여, 김수항, 권상하, 이재 등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남긴 여러 암각문들이 계곡 주변에 남아 있다.
도봉도
도봉도는 조선 후기 화가 김석신이 도봉산을 소재로 하여 그린 실경산수화. 종이 바탕에 수묵과 담채로 그려져 있다.
세로36.3cm, 가로 53.7cm의 크기로 표지의 내용에 의하면, 이 그림은 당대명류인 이재학, 서용보등이 도봉산에서 산책하며 시호를 가진 기념으로 제작했으며 도봉첩에 실려있다.
화면의 원경에 인수봉 도봉산의 계곡 전경을 조감도 형식으로 담았는데 산만한 대각선 구도와 소나무의 묘법, 암석 봉우리와 바위의 표현등에서 정선의 화풍을 계승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수파묘법이나 주변의 각이 진 바위 처리는 김홍도의 영향으로 보인다.

 침류대
도봉동 511번지 도봉서원 앞 계곡을 따라 약간 올라가면 유희경이 시를 지으면 풍류를 즐기던 침류대가 있었다.
이곳은 도봉산 계곡 중에서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났던 곳으로 바위와 바위 사이에 겹쳐있던 침류대 이름 그대로 맑은 시냇물을 베개 삼아 누워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하겠다.
그 위에는 누각이 있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어 도봉서원을 찾는 사람들의 정취를 더해주었다.
지금은 그 옛자리를 알아보기조차 힘드나, 이 부근은 시냇물과 春珠潭,東岩 第一洞天, 洞中卽仙境 洞中是挑源 萬石臺, 鍾丹窟등 음각된 바위들이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상케 한다. 
 

 

 

퇴계선생문집 제48권
 행장(行狀)
정암 조선생 행장(靜庵趙先生行狀)


선생의 성은 조씨(趙氏)이고, 이름은 광조(光祖)이며, 자는 효직(孝直)이고, 스스로 정암(靜菴)이라 호(號)하였다. 조씨는 한양(漢陽)의 이름 난 성인데, 7대조인 양기(良琪)가 고려에 벼슬하여 총관(摠管)이 되었고, 원 세조(元世祖) 때에, 부수(副帥)로서 합단(哈丹) 군대를 쳐부수고 포로를 바치니, 황제가 도포와 띠를 주어 격려하였다. 고조의 이름은 온(溫)인데, 본조(本朝)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이 되어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으로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양절(良節)이었다. 한천이 의영고 사(義盈庫使) 육(育)을 낳으니 뒤에 이조 참판으로 증직되었고, 참판이 성균관 사예 충손(衷孫)을 낳으니,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증직되었다. 판서가 원강(元綱)을 낳으니, 벼슬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고, 뒤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되니, 이가 선생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현감(縣監) 권의(權誼)의 따님인데, 성화(成化) 임인년(1482, 성종13) 8월 10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이 좋은 자질을 타고나, 어렸을 때에도 장난치며 놀지 않아 이미 장성한 사람의 풍도가 있었고, 조금이라도 남의 잘못을 보면 즉시 지적해서 말하였다. 성장하여 글을 읽고 학문을 닦을 줄 알면서부터는 의연하게 큰 뜻이 있으나 오직 과거 보는 글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현의 위풍(威風)을 사모하여 넓게 배우고 힘써 행하여서 이룩함이 있기를 기약하였다. 19세에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있으면서 지성으로 안색을 살펴 봉양하여 효성스럽다는 칭찬이 나라에 드러났다. 정덕(正德) 경오년(1510, 중종5)에,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신미년(1511)에 모친상[內艱]을 당하였다. 을해년(1515) 여름에 조정의 신하가 효렴(孝廉)으로 천거하여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제수되었고, 이해 가을에 중종이 실시한 알성별시(謁聖別試)에 응시하여 을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얼마 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예조 좌랑(禮曹佐郞)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다.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상(喪)에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함께 상소하여, 신씨(愼氏)의 왕후의 위를 회복시킬 것을 청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이들이 말할 사안이 아니라고 여겨 체포해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선생만이 극력 간쟁하기를, “신씨는 실로 복위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에서 논한 것 또한 일리가 있으니, 죄를 주어서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두 공(公)은 이로 말미암아 죄를 면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가서 수찬(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한(典翰)을 지냈다. 정축년(1517) 여름 5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다. 모두들, “옥당(玉堂)의 장(長)이 되어 임금의 덕을 기르는 데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여 겨울에 옥당으로 돌아와서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주상께서 평소 유학을 숭상하고, 문치(文治)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우(唐虞) 삼대처럼 번성하기를 바랐으므로, 더욱 선생을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선생은 이에 세상에 보기 드문 대우에 감격하여서, 임금을 존경받게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유학을 번성하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서, “임금의 마음은 다스리는 근본이 되므로, 그 근본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의지하여 서지를 못하고, 교화가 이로 인해 행해지지를 못한다.” 하여 입대(入對)할 때마다 반드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엄숙히 하여 신명(神明)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해서, 아는 것은 다 말하였고, 말할 때에는 충직(忠直)하게 하였다. 주상께 경계할 것을 진언한 말에,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천지와 같이 크고 사시(四時)와 더불어 운행합니다. 그런데 그 이(理)가 욕심에 가려짐으로 해서 큰 것이 작아지고, 기(氣)가 사욕(私慾)에 얽혀짐으로 해서 운행하는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 있어서도 그 피해를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임금은 지위가 높아 교만하고 방탕하기가 쉬워서 아름다운 소리와 여색(女色)의 유혹이 보통 사람보다 만 배나 더한 데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마음이 한 번 바르지 못하고 기운이 한 번 순하지 못하면 재앙의 징조가 어두운 중에서 상응(相應)하고 재앙의 싹이 밝은 곳에서 일어나서 인륜은 막히고 만물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대개 이러하니, 주상께서 하늘을 섬기는 데 마음을 두어서 마땅히 중화(中和)의 지극한 공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정의와 사리(私利), 왕도와 패도(霸道)의 구별과 고금의 성쇠하는 징조와 군자ㆍ소인의 거취와 성패에 관한 경계(警戒)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속에 품은 것을 상세히 논의하고 극진히 말하여서, 어떤 때는 해가 기울어질 때까지 하였다. 임금이 겸허한 마음으로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고, 날마다 더욱 장려하였다. 무인년(1518) 봄에 조정에서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얻고자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주상께서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있으나 오랫동안 성과를 보지 못한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만약에 이 법을 행하면 인재를 얻지 못할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옥당(玉堂)과 함께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도 임금이 여러 달을 허락하지 않자, 선생이 정원(政院)에 나아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허락을 얻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다.” 하고는, 저녁이 되어 대간(臺諫)은 다 물러갔는데도 옥당은 그대로 머물러서 논계(論啓)하여 허락을 얻은 후에야 나왔다. 전에 회령부(會寧府) 성 주변에 살던 야인(野人) 속고내(速古乃)가 몰래 깊은 산중에 있는 야인과 공모하여, 갑산부(甲山府)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도 병사(南道兵使)가 올린 비밀 장계에 따라 먼저 밀지(密旨)를 보내 함경도[本道]에 유시하고, 이지방(李之芳)을 파견하여 틈을 엿보아 덮쳐서 법에 따라 처치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파견하려던 때 장상(將相)과 모든 신하가 둘러 모셨는데, 선생이 밖에서 들어와 임금을 면대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도적이 교활하게 속이는 꾀와 똑같으니, 왕으로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도리가 아니고, 또 당당한 큰 나라로서 한 조그마한 오랑캐를 사로잡는 데 도적의 꾀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신을 훼손하는 것이니, 신은 내심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즉시 다시 의논하도록 명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병가(兵家)에는 모략과 정도(正道)가 있고,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에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가 있습니다. 중의(衆意)가 이미 같은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밭 가는 것은 마땅히 남종에게 묻고, 베 짜는 것은 마땅히 여종에게 묻습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정상을 실로 다 압니다. 신의 말을 들으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하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선생을 대우한 것과 선생이 임금의 마음에 든 것이 다 지극하다고 하겠다. 당시에 선류(善類)로서 같이 선발되어 임금의 우대를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서로 함께 협력해서 사업을 일으켜, 오래된 폐해를 없애고 교화(敎化)를 닦고 밝혀서 옛날 현철한 왕의 법도를 차례로 거행하였고, 《소학(小學)》을 인재를 기르는 근본으로 삼고, 향약(鄕約)을 풍속을 교화하는 법도로 삼으니, 모든 관리가 자각하여 힘쓰고, 모든 사람들이 분발하였다. 그러나 여러 공(公)들이 너무 조급하게 효과를 보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여, 모든 건의하고 시설하는 데 있어 날카로움이 너무 드러났는가 하면 장황하고 과격하였다. 또한 젊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유리한 기회를 노려 시세에 영합하는 분란을 부추기는 자들이 그 사이에 많이 끼여 있었고, 구신(舊臣)들 중에는 시대의 의론에 용납되지 못해 이로 인해 공격을 받게 되자 원한이 골수(骨髓)에 사무쳤다. 선생이 일찍부터 이미 그렇게 될 조짐을 보고 도(道)가 행해지기 어려울 것을 알아서 오래전부터 직위를 사퇴하고자 하였다. 이해 겨울에 임금이 특명으로 선생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리고,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좌빈객 동지성균관사에 제수하였다. 선생은 관직이 너무 빨리 오르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여 극렬 간절하게 사양했으나, 임금의 신임은 갈수록 융숭해져서 더욱 허락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선생이 끝내 사양을 허락받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얼굴 가득 근심스러운 빛을 띠고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고 운운하였다. 기묘년(1519) 봄에 김우증(金友曾)이란 자가 사림(士林)을 무함한 일이 있었다. 일이 발생하자 조정에서 심문하는데, 선생이 사헌부의 장(長)으로 거기에 참여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선생이 김우증을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고 논박하여 파직시켰으나, 곧 정부가 아뢰어서 다시 유임되었다. 그 후에 조정의 의논이 정국 공신(靖國功臣) 중에 공이 없는 자에게 함부로 주었던 녹권(錄券 공을 기록한 문서)을 추탈하게 되었는데, 선생이 또한 그 의논에 동참하였다. 이때에 선생이 이미 물러갈 수도 없게 되었으니, 기강을 세워 탐욕한 자를 물리치고 깨끗한 이를 드러내며, 명령하면 시행되고 금지하면 그치게 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나, 돌이켜 보건대 시세(時勢)를 돌아볼 때 그때는 크게 근심될 만한 일이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일에 임하여는 조금 조화하려는 뜻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상(申鏛), 이자(李耔), 권벌(權橃)의 의견이 다 그러하였으니, 이것은 곧 시대를 따르는 의리로서 중도(中道)가 아님이 없었다. 그런데도 저 과격하고 경솔한 무리들은 도리어 선생이 정도에 어긋난 것을 따라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여 그 자취가 간사한 무리들과 같다고 하여 여러 번 배척하고 탄핵하였다. 전날 원망하던 모든 사람들이 곁에서 이를 갈고 입술을 깨물며 날마다 틈을 노리는 것을 알지 못하여, 큰 화가 갑자기 신무문(神武門)을 여는 변으로까지 되었으니, 슬프다,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그날의 일은 당연히 국가 문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수상(首相)이 울면서 임금의 옷깃에 매달려 간해서 그 정성이 하늘에 감동되어 다행히 벼락 같은 위엄을 조금 그치게 하였다. 그러나 유도들이 궐문을 지키고 울부짖으면서 다투어 의금부에 갇히고자 한 것은, 참소하는 자들에게 더욱 구실을 주었을 뿐이니, 이것은 소식(蘇軾)이 자기를 구제하려는 장방평(張方平)의 소(疏)를 보고 놀라서 탄식한 것과 같다. 선생은 10월 어느 날 능성(綾城)으로 귀양 갔고, 후명(後命 최후에 죽음을 내리는 명)이 이른 것은 12월 20일이었다. 선생이 곧 목욕하고서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도사(都事)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에게 죽음을 내리시니 마땅히 죄명이 있을 것이다. 청하건대, 죄명을 공손히 듣고 죽겠노라.” 하니, 도사의 대답이 없었다. 선생이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와 같이 하였으니, 하늘의 해가 나의 속마음을 비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8세이었다. 이듬해 모월 어느 날에 용인현(龍仁縣) 어느 동리 선인(先人)의 묘소에 장사 지냈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특이하여 동류 중에서 뛰어나니, 마치 화려한 난새가 머무르고 고상한 고니가 우뚝 선 것과 같고, 옥같이 윤택하며 금같이 순수하고, 또 무성한 난초가 향기를 풍기고 밝은 달이 빛나는 것과 같았다. 17, 8세에 분연히 도학을 공부할 뜻을 가졌다. 그때에 참판공(參判公 아버지)이 어천 찰방(魚川察訪)이 되었는데, 때마침 한훤(寒暄) 김 선생이 희천(熙川)에 귀양 가 있었다. 선생이 본래 한훤의 학문이 근원[淵源]이 있음을 들었으므로, 그곳으로 가서 부친을 모시고 있으면서 어천[彼]에서 어버이를 모셨기 때문에 한훤에게 찾아가 종유하며 학문하는 큰 방법을 들었다. 대개 우리 동국의 선현(先賢) 중에 도학에는 비록 문왕(文王) 같은 성군을 기다리지 않고도 창시한 자가 있었으나, 결국에는 절의(節義)ㆍ장구(章句)ㆍ문사(文詞)를 닦는 데 그쳤고, 진실로 실천하는 것으로써 학문의 근본을 삼은 이는 오직 한훤이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능히 험난함을 무릅쓰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비록 그 당시 강론하고 주고받은 뜻은 직접 듣지 못했으나, 선생이 그 후에 그처럼 도학을 공부하는 정성과 업적이 탁월한 것을 보면 그 발단(發端)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선 볼 수 있는 실정만으로 말하면,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소학(小學)》을 독실히 믿고 《근사록(近思錄)》을 존숭하여 모든 경전(經傳)에 적용하였다.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는 밤낮으로 몸가짐을 살피고 삼가서 의젓하고 엄숙하여 의복과 태도가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았고, 말씀을 하실 때나 행동을 하실 때는 반드시 옛 훈계에 따랐으니 아마도 지경(持敬)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언젠가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갔고, 또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갔는데, 공부하는 여가에 꼿꼿이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혀 상제(上帝)를 대하는 것과 같이 해서 본심을 함양(涵養)하기를 힘쓰는 것이 남이 미칠 수 없었으니, 아마도 꿋꿋하게 애써 정(靜)을 주로하는 학문을 하였기 때문이리라.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어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날마다 가묘(家廟)에 절하고, 어버이를 봉양하고 뜻을 어김 없이 받드는데 모두 곡진하였다. 집을 바르게 다스려서 안과 밖의 분별이 엄하였고 사랑과 훈계를 같이 베풀었다. 깨끗한 절조(節操)로 자신을 갈고 닦고 몸가짐을 빈한한 선비와 같이 하였다. 언젠가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랏일을 전심하여 집안일은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하고는 가정 살림에 신경쓰지 않았으며, 청탁이 통하지 않았고, 거마비(車馬費)를 받지 않았다. 자신을 살피고 사욕을 이겨내는 데에는 항상 남이 따르지 못할 점이 있었다. 젊은 날 우연히 여색(女色)을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곧 물리쳐 피하였고, 더욱 술이 성품을 해친다는 경계를 지켜서, 친구가 술을 마시고 체통을 잃는 것을 보면 준절하게 책망하였다. 상중에는 지극히 슬퍼하고 제사에는 정성껏 공경을 다하였으며, 후생(後生)은 각각 그 재질을 따라 장려하여 이끌고, 이단을 물리칠 것을 논하되, 먼저 근본을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 평소의 행동이 널리 알려진 데다 재주가 세상을 영도하기에 충분하였고, 영특한 기품이 밖에 드러나니, 풍모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일찍이 하련대(下輦臺)에 임금이 앉았을 적에, 선생이 대사헌(大司憲)으로 시종하다가 일이 생겨서 몸을 빼어 나가기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몸을 구부리고 앞으로 지나기도 하였는데, 그 몸가짐을 바라보고 백관이 다 주목하였으며, 교문(橋門)에 둘러섰던 자가 감탄하며 말로 표현할 바를 몰랐으니, 한 시대의 존경을 받음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스스로 무거운 책임을 지워 우리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 우리 백성을 어질고 편하게 사는 지경에 오르게 하리라고 생각하였으니, 그 충성은 금석을 뚫고, 그 용맹은 분육(賁育)보다 뛰어났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왕의 일만을 생각하는 신하로서 착한 임금의 성대한 시대를 만나, 조정에 나아가서는 날마다 세 번씩 알현하고, 물러 나서는 사람들이 다투어 손을 올려서 존경하였으니, 이는 상하가 서로 기뻐하여 천년에 한번 있을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서 하늘이 그 사이에 마(魔)가 들게 하여 위로는 그 뜻이 크게 행하여지지 못하고, 아래로는 그 혜택이 넓게 미치지 못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시대의 운수와 나라의 액운과도 관계되니 천지에 유감된 일이며, 귀신이 농간을 부린 것이니, 선생인들 어찌하리오. 더욱이 선생은 언젠가 상사(上舍) 허백기(許伯琦)와 함께 “철없는 젊은이들이 세속을 놀라게 한다.”라고 말하였고, 또 수재(秀才) 성수침(成守琛)을 만나서는 향약의 실행하기 어려운 점을 근심하였으니, 스스로의 맡은 일은 비록 중대하였지만, 고집해서 반드시 하려는 뜻은 없었다. 그가 사헌부의 대사헌 자리를 극력 사양하다가 허락받지 못했을 때 그처럼 깊이 근심하였고, 기준(奇遵)이 언젠가 산림에 홀로 갔으면 하는 탄식을 하니 자주 칭찬하며 마음에 들어 하신 것을 보면, 물러서기 어려운 때에 용감하게 물러서는 것은 평소 선생의 뜻이었다. 그러나 근세에는 사대부를 대우함이 예전 의리를 따르지 않아서, 물러가기를 구하여 허락을 얻은 예가 없고, 신하가 벼슬에서 물러가는 길이 끊겨, 한 번 조정에 서면 병으로 폐하거나 죄로 물러나는 것 외에는 국사를 떠날 방도가 없으니, 비록 선생이 화합하지 못하여 물러가기를 도모하고, 기미를 보아 일어나고자 했으나, 어찌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미 선생이 물러나려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또 어찌 화가 오는 것을 지혜와 꾀로써 면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선생의 더욱 어려웠던 점이다. 그러나 일월의 빛은 전처럼 가렸던 구름이 사라지면 밝아지고, 의리의 감정(感情)은 오래될수록 더욱 시비의 판단이 명백해지기 마련이다. 중종이 말년(末年)에 하늘의 뜻을 통찰하고 여론도 선생의 누명을 벗겨주고자 하여, 실로 이미 은택을 내릴 뜻이 있었고, 인종이 즉위하자 묘당(廟堂)의 거듭된 논의와 유생의 호소로 말미암아 마침내 중종의 뜻을 따라서 선생의 관작을 예전처럼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아아, 천도는 본래 바르고 인심은 진실로 속이기 어려운 것이니, 요 임금이 뜻했던 바를 순 임금이 이어받아 실행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선비의 학문은 방향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세상의 다스림은 이로 인해 거듭 밝아질 수 있었으며, 도학은 이에 힘입어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나라의 기맥도 이에 힘입어 무궁해질 수 있었으니, 이러한 사실로 본다면, 당대의 사림(士林)의 화(禍)는 비록 슬프다 하겠으나, 선생이 도를 높이고 학문을 창도한 업적은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또 한 가지의 말이 있으니, 주(周)나라가 쇠망한 이래로 성현의 도가 그 당대에는 행해지지 못했으나, 만세(萬世)에는 행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개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덕(德)과 재주는 그것을 써서 왕도(王道)를 일으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인데도 결국에 성취된 것은 교훈을 세워서 후세에 남기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늘에 있는 것은 본래 알 수 없지마는, 사람에게 있는 것도 역시 일괄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선생이 추구한 도를 이미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도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세상에서 큰 일을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고, 다만 벼슬길에서 물러나 그 도의 실상을 크게 천명하여 우리 동방의 후세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 하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또 대개 하늘이 큰 임무를 사람에게 내리려 할 적에 어찌 젊을 때에 한 번 이룬 것만으로 대번에 만족하게 여기겠는가. 필시 중년과 말년에 풍족하게 공을 쌓은 후라야 자격이 크게 갖추어지는 것이다. 가령 선생이 애초에 성세(聖世)에 갑자기 등용되지 않고 집에서 한가히 지내며 궁벽한 마을에 숨어 살며 더욱 이 학문에 힘을 다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깊이 연구했더라면 연마한 것이 관철되어 더욱 고명해지고, 수양한 것이 높고 깊어 더욱 넓고 해박해져서 환하게 낙건(洛建)의 근원을 찾고, 수사(洙泗)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이와 같이 되었더라면 당대에 받는 지우(知遇)는 받아도 좋고 못 받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믿는 것은 이 도와 도학자를 위하는 길은 교훈을 세워 후세에 전하는 한 가지 일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선생은 그렇지 못하였으니, 첫째 불행은 등용되어 발탁된 것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는 것이고, 둘째 불행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셋째 불행은 귀양 가서 일생을 마친 것이어서 앞에 말한 중년ㆍ말년에 풍족하게 공부할 만한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교훈을 세워 후세에 전하는 일은 더더군다나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이 사람에게 큰 책임을 내린 뜻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이 때문에 오늘날 선생이 남긴 것을 찾아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하고 바른 학문을 열어 주는 방법으로 삼으려 하여도, 의거할 만한 단서가 거의 없었다. 헐뜯는 무리의 끝없는 담론이 화복과 성패의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여 세도(世道)가 더욱 투박(偸薄)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멋대로 지목하여 서로 헐뜯자, 몸조심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꺼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자는 이를 경계로 삼았으며, 선량한 이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게 되어서 더욱 우리 도에 병폐가 되었다. 아아, 이것이 어찌 실로 요 임금의 유지(遺志)를 순 임금[重華]이 계승하여 이 도학을 보호하고 나라의 기맥을 길이 이어가게 하는 장한 뜻이겠는가. 이것은 또 뒤에 오는 어진 임금과 현명한 재상 및 무릇 세상을 다스릴 책임을 진 자가 마땅히 깊이 근심하고 영구히 거울삼아서 힘써 구제할 점이다.
그러므로 몇 년 전부터 태도를 바꾸어서 새롭게 혁신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하게 보인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다. 세상의 선비 된 자가 여전히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술(霸術)을 천하게 여길 줄 알며, 바른 학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며, 정치하는 도리를 반드시 몸을 닦는 데에 근본을 두어서, 모시고 심부름하는 것으로부터 이치와 성(性)을 연구하는 데 이르게 되어서 점차로 분발해 일어나서 하고자 하는 것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이며, 누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는가. 하늘의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고, 성조(聖朝)의 교화가 여기에서 무궁하게 될 것이다. 선생의 아내는 첨사(僉使) 이윤형(李允泂)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정(定)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는 용(容)인데 지금 전주의 판관(判官)이다. 선생이 돌아가실 때 두 아들이 다 어렸고 또 세상을 두려워하여 피해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선생의 뜻과 행적을 기술하는 일을 오랫동안 부탁한 일이 없어서, 사람의 이목에 남을 사적(事蹟)이 점차로 인멸되기에 이르렀다. 중간에 상사(上舍) 홍인우(洪仁祐)가 행장 하나를 지었는데, 지난해에 판관 아들 이 그 종질인 충남(忠男)을 보내와서 홍 상사가 지은 행장을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비석(碑石)은 이미 마련되었으니, 명문(銘文)을 지어 묘 앞에 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문장을 못한다고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비문을 짓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행장을 구하여야 할 것인데, 홍 상사가 지은 행장을 보니 너무 간략합니다. 반드시 다시 널리 방문하여 많은 사적을 찾아내고 당대의 훌륭한 문장가를 구하여 행장을 보완(補完)한 후에 천천히 비문을 만들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근래에 판관이 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고, 아울러 《음애일록(陰崖日錄)》 등 두 가지 서적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사적을 더 찾을 수가 없고, 사방으로 돌아보아도 저의 선인을 위하여 기꺼이 붓을 잡을 자가 없으므로 감히 두 번 세 번 번거롭게 청합니다.” 하였는데 사정이 매우 애처로웠다. 내가 혼자,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에게 받은 영향은 많은데, 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 또 행장을 짓지 않는다면, 어찌 정이 지극하면 일이 따른다 하겠으며, 또 홍 상사는 학문에 뜻을 둔 선비요, 또 선생과 한 동리 사람이니, 그 행장이 비록 간략하더라도 필시 증거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적은 것을 바탕으로 하고 나중에 얻은 서적을 참작해서 가감(加減)하여 이 글을 지었으니, 이는 우선 조금이라도 판관의 효성에 보답하고자 해서요, 또 이어서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행장을 완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해서이다. 만약 이것이 뒷날 사필(史筆)을 잡는 자의 참고가 될지라도, 선생의 학문과 사업, 언론과 풍모가 사책(史册)에 실려 있고, 추모하는 노래에 스며 있는 것이 더욱 많을 것이니, 어찌 이 행장에만 국한되겠는가. 가정(嘉靖) 43년 갑자(1564) ○월 ○일에 진성 이황이 삼가 적다.


[주D-001]합단(哈丹) : 원나라 태조의 아우인 합적온(哈赤溫)의 5세손으로, 내안(乃顔)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원나라 관군에게 패하였다. 충렬왕 때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해 왔으나 연기(燕岐)에서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D-002]장방평(張方平) : 송나라 사람으로, 신종(神宗) 때 참지정사, 지진주령(知陳州令) 등을 역임했다. 강개하여 왕안석(王安石)이 정권을 잡았을 때 의연하게 조금도 굽히지 않은 것으로 명망이 높았다. 소식이 어사에게 탄핵받았을 때 그를 위해 힘써 주었다.
[주D-003]하련대(下輦臺) : 성균관 앞 왕의 수레를 멈추는 자리이다.
[주D-004]분육(賁育) : 진 무왕(秦武王) 때의 이름 난 역사(力士)이었던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두 사람을 가리킨다.
[주D-005]낙건(洛建) :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한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자는 건양(建陽), 즉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사람이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주D-006]수사(洙泗) :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의 사수(泗水)와 그 지류인 수수(洙水)를 말한다. 공자가 사수와 수수 사이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뒤에 공자의 사상과 학통을 가리키는 호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