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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과 청백리의 고장, 성남(城南)-광주(廣州) 이씨(李氏 (펌)

아베베1 2009. 7. 2. 10:42

13)충신과 청백리의 고장, 성남(城南)-광주(廣州) 이씨(李氏)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2009년 06월 29일 (월) 16:50:52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한강 남쪽에 우뚝 솟은 남한산성은 주변에 광주(廣州)를 본관으로 하는 가문을 탄생시켰다. <중정남한지>에는 이(李)·윤(尹)·석(石)·한(韓)·안(安)·김(金)·지(池)·노(盧)·장(張)·박(朴)씨 등을 대표적 성씨로 기록했다. 또 매우 드문 성씨로서 의+ㄱ(門+島)씨가 있었다고 하며, 석말(石抹)씨가 있다고 했으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중 이씨와 안씨가 경향(京鄕)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다.
광주 안씨 시조는 방걸(邦傑)인데, 그는 고려 태조 때 광주지방에서 관리로 뛰어났던 사람으로 광주의 일부 사람들이 지방 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다. 그 공적으로 대장군에 오르며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를 본관으로 했다. 광주 안씨는 성(省)을 비롯해 그의 손자인 팽명(彭命), 증손 윤손(潤孫) 등의 청백리를 배출했고, 실학자 가운데 유명한 순암 안정복 또한 광주 안씨다.

   
 


석씨는 남한산성 안에 많이 거주했고, 훗날 일제시대에 석혜환은 1930년대에는 남한노동공조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신간회 광주지회에 참여했다. 1935년 1월 광주공산당협의회를 결성하고 비서부 책임자로 활동하다 붙잡혀 1936년 4월 경성지법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 광주 이씨 문중의 청백리와 충신들

여러 문중 가운데 우선 성남지역에서 대대로 이어온 광주 이씨(廣州 李氏) 문중 청백리와 충신들을 살펴본다. 광주 이씨 문중의 인물 묘역군(墓域群)은 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이들 묘역은 인물들의 사적(史蹟)과 함께 조선전기 묘역으로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원구 하대원동 산3-1에는 둔촌 이 집(遁村 李集) 선생의 아들로서 여러 벼슬을 거친 후 청백리에 뽑힌 지직(之直)과 부인 경주 이씨, 둔촌의 증손으로 좌찬성을 지낸 광원군 극돈(克墩, 1435~1503)과 그의 아들 감사공 세정(世貞, 1461~1529)의 묘소가 있다.

하대원동 산7-1 외 묘역에는 둔촌 선생의 손자 사인공 장손(長孫, 1390~1429), 증손 참의공 극규(克圭), 6대손이며 임진왜란 때 관서부원수로서 왜군과 싸운 장렬공 윤덕(潤德, 1529~1611), 8대손으로 강계부사를 지냈고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전사해 안주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된 상안(尙安, 1575~1627)의 묘가 있다.

하대원동 산 18번에는 둔촌의 막내 손자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예손(禮孫, ?~1459)과 산33-3에 그의 아들 참판공 극기(克基, 1426~1491)의 묘소가 있다. 
 

   
 
둔촌 이집은 지직(之直), 지강(之剛), 지유(之柔)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인(聖人)이 삼덕(三德 : 直, 剛, 柔)을 명목으로 해 세상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것으로서 이름을 지었다.

장남인 지직은 곧, 바르게 하고 곧게 해 그 떳떳한 일을 순하게 한다는 뜻이다. 지직의 자를 백평(伯平)이라 한 것도 성인이 곧은 것을 평탄하고 편안한 세상에 쓴 것을 의미한다. 둘째인 지강의 자는 중잠(仲潛)이라 했는데, 세상의 도가 점점 낮아져서 백성들이 퇴폐해지고 중(中)에서 멀어지게 되므로, 이에 이들을 돕고 쓰러져 가는 기운을 북돋워 중화(中和)에 돌아오게 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즉, 성인이 강한 것을 쇠퇴한 세상에 쓴 것을 의미한다. 셋째인 지유의 자는 숙명(叔明)이다. 세상의 도가 높아져서 백성이 고명(高明)해지면 이에 적시고 만져서 그 강하고 딱딱한 기운을 덜어주어 중화에 돌아오게 한 뒤에 그친다는 뜻이다. 즉, 성인이 부드러운 것을 세상에 쓸 것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 ‘탄천 선생’으로 불리어진 둔촌의 장남 지직

지직은 1354(공민왕 3)년 출생해 1419년(세종 1)에 생애를 마쳤는데, 생애의 말년을 성남의 탄천 가에서 유유자적 하며 지냈기에 ‘탄천 선생’이라 불렸다. 일찍이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학문이 고명(高明)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평창·충주·청주의 세 고을을 다스렸고, 관동과 호서의 관찰사를 지냈는데 일을 처리함에 엄정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덕행은 순일(純一)하고 청백(淸白)했다. 정치적 격변기에 한림, 교리를 거쳐 관동과 호서지방의 관찰사를 지내는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1398년(태조 7) 보문각 직제학 재임 시 태종이 정안대군(靖安大君=이방원)으로 있을 때, ‘소도<昭悼 : 방석(芳碩)>의 변란’(제1차 왕자의 난)이 있자 이를 극렬히 간하다가 자칫 큰 화를 당할 뻔 했으나, 이방원과 변계량이 그를 강력히 변호해 금고(禁錮)의 처벌만 받게 됐다.

정안대군이 병사를 지휘해 나설 즈음 탄천 선생이 길을 막고 읍간(泣諫)하기를 “백일(白日)이 중천(中天)

   
 
한데 부왕(父王) 앞에서 아우를 죽여 어떻게 하시렵니까? 순리대로 받아들이십시오.”하니 좌우에서 선생을 해치려 했다. 그러자 정안대군이 “이모(李某)는 나의 옛 친구인데 그가 어찌 소도에 아부하여 그랬겠느냐?”하고 마침내 금고하게 하니, 변계량이 홀로 구원하기를 “李某는 청간(淸澗), 강직(剛直)하고 그의 말은 가히 믿을 만하니 백이 숙제와 다름이 없으므로 다만, 그 직책만 파하고 문 밖으로 내치소서”해 그 말에 따랐다.

이 사건 외에도 1402년(태종 2) 4월 1일 좌정언 전가식과 함께 나라 일을 논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군사와 외교에 대한 정책과제를 제시하면서 “전하께서는 의복과 어가가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매우 좋아하여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시고, 대간(臺諫)의 말이 어쩌다가 뜻에 거슬리면 엄하게 견책(譴責)을 가하시며, 매(鷹)와 개(犬)를 좋아하고 성색(聲色)을 즐겨 하심이 아직도 여전하십니다.”라고 통렬한 지적을 했다. 태종은 자존심이 상해 “나의 과실을 비밀히 아뢰어도 내 어찌 안 듣겠는가? 이제 글(狀)을 이루어 사책(史冊)을 쓰게 하니, 내 매우 가슴 아프다.”해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다음 달 파직당하게 된다.

지직이 한강 남쪽 탄천에 은거하며 독서로 소일했는데, 배우러 오는 사람이 모두 ‘탄천 선생’이라 불렀고, 벗들이 시를 보내 그의 높은 뜻을 기렸다. 그 중 정금릉(鄭金陵) 지아(之雅)는 시 첫머리에서 “훌륭하도다! 이 선생은, 영명(英名)이 어릴 때부터 알려졌다네.”했고, 계림군 이래(李來)는,

  표주박의 물로 갈증을 식히고 /  몇 이랑 나물로 배를 채우며
  담담히 사물에 얽매임 없이 /  처지에 안도(安堵)하며 그래 저래 산다네.

라고 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선생의 충의와 도덕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태종이 말년에 세종에게 다시 등용하라고 당부해 말하니, 세종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형조 우참의에 등용하고자 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후일 청백리에 올랐으며 영의정에 추증됐다.

    
  # 이방원 세력에 가담한 둔촌의 2남 지강

지강(1363~1427)은 조선 건국 때 이방원 세력에 가담해 태종 즉위 후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예문관 제학, 한성부윤을 거쳐 호조와 형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성품이 단정하고 검소했으며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건국 초기 궁궐의 건축을 책임진 판선공감사가 돼 궁궐의 건설에 힘썼다. 지유는 성주목사를 지냈다.

 # 문과 급제한 지직의 장남 장손

지직의 장남인 장손(長孫)은 1411(태종 11)년 문과에 급제해 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냈다. 부친상을 당해 묘자리를 정할 때 지사(地師)인 조한필이 “좋은 자리는 틀림없으나 장자에게 나쁘다.”는 말을 했는데, 상을 치른 이듬해 3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의정 황희(黃喜)의 졸기(卒記)에 보면, 황희가 “평안도의 순문사가 되었을 적에 행대(行臺) 이장손이 대등한 예(禮)로써 황희를 모욕하고, 황희와 더불어 서로 글장을 올려 논핵(論?)하므로 태종이 양편을 화해시켰었는데, 후에 황희가 정권을 잡으니 이장손은 통진 수령으로서 교대를 당하게 되었다.” 황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관직에 있으면서 명성(名聲)이 있었다.”하고는, 천거해 헌납(獻納)으로 삼았고, 또 천거

   
 
해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 알성문과 급제한 지직의 3남 예손

지직의 셋째 아들 예손(禮孫)은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우정언에 제수됐다. 1457년(세조 3)에 첨지중추원사를 제수받고 황해도관찰사와 형조참의를 지냈다. 1459년 관압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황해도 봉산에서 사망했다. 묘는 정부인 밀양 박씨와 합장한 사각형의 봉분으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남에는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외에도 이경류 장군이나 이경석 선생 등 여러 세거 문중에서 수많은 충신과 청백리를 배출한 고장으로, 이들의 훌륭한 행적은 남한산성의 정기를 받아 면면히 이어져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차례 차례로 소개해 나가고자 한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14편에서는 ‘분당 중앙공원의 문화유산과 한산 이씨(韓山 李氏)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