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충신과 청백리의 고장, 성남(城南)-광주(廣州) 이씨(李氏)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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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남쪽에 우뚝 솟은 남한산성은 주변에 광주(廣州)를 본관으로 하는 가문을 탄생시켰다. <중정남한지>에는 이(李)·윤(尹)·석(石)·한(韓)·안(安)·김(金)·지(池)·노(盧)·장(張)·박(朴)씨 등을 대표적 성씨로 기록했다. 또 매우 드문 성씨로서 의+ㄱ(門+島)씨가 있었다고 하며, 석말(石抹)씨가 있다고 했으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중 이씨와 안씨가 경향(京鄕)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석씨는 남한산성 안에 많이 거주했고, 훗날 일제시대에 석혜환은 1930년대에는 남한노동공조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신간회 광주지회에 참여했다. 1935년 1월 광주공산당협의회를 결성하고 비서부 책임자로 활동하다 붙잡혀 1936년 4월 경성지법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 광주 이씨 문중의 청백리와 충신들 여러 문중 가운데 우선 성남지역에서 대대로 이어온 광주 이씨(廣州 李氏) 문중 청백리와 충신들을 살펴본다. 광주 이씨 문중의 인물 묘역군(墓域群)은 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이들 묘역은 인물들의 사적(史蹟)과 함께 조선전기 묘역으로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장남인 지직은 곧, 바르게 하고 곧게 해 그 떳떳한 일을 순하게 한다는 뜻이다. 지직의 자를 백평(伯平)이라 한 것도 성인이 곧은 것을 평탄하고 편안한 세상에 쓴 것을 의미한다. 둘째인 지강의 자는 중잠(仲潛)이라 했는데, 세상의 도가 점점 낮아져서 백성들이 퇴폐해지고 중(中)에서 멀어지게 되므로, 이에 이들을 돕고 쓰러져 가는 기운을 북돋워 중화(中和)에 돌아오게 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즉, 성인이 강한 것을 쇠퇴한 세상에 쓴 것을 의미한다. 셋째인 지유의 자는 숙명(叔明)이다. 세상의 도가 높아져서 백성이 고명(高明)해지면 이에 적시고 만져서 그 강하고 딱딱한 기운을 덜어주어 중화에 돌아오게 한 뒤에 그친다는 뜻이다. 즉, 성인이 부드러운 것을 세상에 쓸 것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 ‘탄천 선생’으로 불리어진 둔촌의 장남 지직 지직은 1354(공민왕 3)년 출생해 1419년(세종 1)에 생애를 마쳤는데, 생애의 말년을 성남의 탄천 가에서 유유자적 하며 지냈기에 ‘탄천 선생’이라 불렸다. 일찍이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학문이 고명(高明)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평창·충주·청주의 세 고을을 다스렸고, 관동과 호서의 관찰사를 지냈는데 일을 처리함에 엄정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덕행은 순일(純一)하고 청백(淸白)했다. 정치적 격변기에 한림, 교리를 거쳐 관동과 호서지방의 관찰사를 지내는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1398년(태조 7) 보문각 직제학 재임 시 태종이 정안대군(靖安大君=이방원)으로 있을 때, ‘소도<昭悼 : 방석(芳碩)>의 변란’(제1차 왕자의 난)이 있자 이를 극렬히 간하다가 자칫 큰 화를 당할 뻔 했으나, 이방원과 변계량이 그를 강력히 변호해 금고(禁錮)의 처벌만 받게 됐다. 이 사건 외에도 1402년(태종 2) 4월 1일 좌정언 전가식과 함께 나라 일을 논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군사와 외교에 대한 정책과제를 제시하면서 “전하께서는 의복과 어가가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매우 좋아하여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시고, 대간(臺諫)의 말이 어쩌다가 뜻에 거슬리면 엄하게 견책(譴責)을 가하시며, 매(鷹)와 개(犬)를 좋아하고 성색(聲色)을 즐겨 하심이 아직도 여전하십니다.”라고 통렬한 지적을 했다. 태종은 자존심이 상해 “나의 과실을 비밀히 아뢰어도 내 어찌 안 듣겠는가? 이제 글(狀)을 이루어 사책(史冊)을 쓰게 하니, 내 매우 가슴 아프다.”해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다음 달 파직당하게 된다. 지직이 한강 남쪽 탄천에 은거하며 독서로 소일했는데, 배우러 오는 사람이 모두 ‘탄천 선생’이라 불렀고, 벗들이 시를 보내 그의 높은 뜻을 기렸다. 그 중 정금릉(鄭金陵) 지아(之雅)는 시 첫머리에서 “훌륭하도다! 이 선생은, 영명(英名)이 어릴 때부터 알려졌다네.”했고, 계림군 이래(李來)는, 표주박의 물로 갈증을 식히고 / 몇 이랑 나물로 배를 채우며 라고 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선생의 충의와 도덕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지강(1363~1427)은 조선 건국 때 이방원 세력에 가담해 태종 즉위 후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예문관 제학, 한성부윤을 거쳐 호조와 형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성품이 단정하고 검소했으며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건국 초기 궁궐의 건축을 책임진 판선공감사가 돼 궁궐의 건설에 힘썼다. 지유는 성주목사를 지냈다. # 문과 급제한 지직의 장남 장손 지직의 장남인 장손(長孫)은 1411(태종 11)년 문과에 급제해 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냈다. 부친상을 당해 묘자리를 정할 때 지사(地師)인 조한필이 “좋은 자리는 틀림없으나 장자에게 나쁘다.”는 말을 했는데, 상을 치른 이듬해 3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 알성문과 급제한 지직의 3남 예손 지직의 셋째 아들 예손(禮孫)은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우정언에 제수됐다. 1457년(세조 3)에 첨지중추원사를 제수받고 황해도관찰사와 형조참의를 지냈다. 1459년 관압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황해도 봉산에서 사망했다. 묘는 정부인 밀양 박씨와 합장한 사각형의 봉분으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남에는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외에도 이경류 장군이나 이경석 선생 등 여러 세거 문중에서 수많은 충신과 청백리를 배출한 고장으로, 이들의 훌륭한 행적은 남한산성의 정기를 받아 면면히 이어져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차례 차례로 소개해 나가고자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