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경도 상(京都上)

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상)

아베베1 2009. 10. 19. 23:39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 한성부(漢城府)

한성부(漢城府)

    
동쪽은 양주(楊州) 경계까지 10리, 남쪽은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은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10리, 북쪽은 양주 경계까지 10리.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빼앗아 성을 쌓았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盖鹵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都城)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피살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封疆]을 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군주(軍主)를 설치하고, 경덕왕(景德王)이 한양군(漢陽郡)이라 고쳤다. 《삼국사》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고,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하였는데, 지금 〈본기(本紀)〉를 상고하여 보니, “백제 시조 14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고, 성을 한강(漢江) 서북쪽에 쌓고,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으며, 38년에는 경내(境內)를 순찰ㆍ안무(按撫)하였는데, 북쪽으로 패하(浿河)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산은 온조왕 때부터 이미 백제 땅이었으며, 근초고왕이 남한산으로부터 옮겨 도읍한 것인데, 어찌 근초고왕이 빼앗았다고 할 것이겠는가.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다만 《삼국사》에 의하여 적고, 그 본말(本末)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으며, 또 장수왕을 자비왕(慈悲王)이라고 잘못 적었기 때문에, 여기서 위와 같이 분변하여 바로잡은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또 양주라 고쳤으며,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는,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이름하여 해주(海州)와 함께 왕도(王都)의 좌우 2보(輔)로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치고,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降等)하여 양광도(楊廣道)에 속하게 하였으며, 문종(文宗) 때에는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진시키고, 이웃 고을의 백성들을 옮겨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는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 밀기(密記)에 의하면,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으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옮겨 도읍하기를 청하고, 일지[日者] 문상(文象)이 거기에 따라서 함께 주장하니, 왕이 친히 와서 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남경에 도성을 경영하는 그 역사[役]를 감독하게 하여 5년 만에 완성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한양부(漢陽府)라 고치고,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속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라 고쳤으며, 판부사(判府事)ㆍ윤(尹)ㆍ소윤(小尹)ㆍ판관(判官)ㆍ참군(參軍) 등의 관원을 두었으며, 예종조(睿宗朝)에는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으로 불렀으며 소윤을 서윤(庶尹)으로 고쳤다. 판윤 1명은 정2품(正二品), 좌ㆍ우윤 각 1명은 종2품(從二品), 서윤 1명은 종4품, 판관 2명은 종5품, 참군 3명은 정7품인데, 그 중 1명은 다른 관직에서 겸하게 하였다. 경도(京都)의 호적[口帳]ㆍ시전(市廛)ㆍ가옥ㆍ전답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橋梁)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쟁투 구타[鬪歐]ㆍ낮순찰[晝巡]ㆍ검시(檢屍)ㆍ차량(車輛)ㆍ사고ㆍ잃어버린 마소의 낙계(烙契 낙인(烙印)) 등의 일을 맡아 하였다.
【군명】 남경ㆍ한양ㆍ남평양(南平壤)ㆍ북한산ㆍ양주ㆍ광릉(廣陵).
【성씨】 본부(本府) 한(韓)ㆍ조(趙)ㆍ민(閔)ㆍ신(申), 애(艾) 촌성(村姓)이다. 함(咸)ㆍ박(朴)ㆍ홍(洪)ㆍ부(夫)ㆍ최(崔)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 성씨는 모두 주관 육익(周官六翼)ㆍ윤회(尹淮)의 《지리지(地理志)》ㆍ경상ㆍ전라 두 도의 관풍안(觀風案 감사의 전임자 명부)에 의거하였다. ○ 무릇 다른 고을에서 와서 사는 자는 성 아래 다만 본적(本籍)만을 주(註)달아 둔다. 다음에도 이에 따른다.
【형승】 북쪽으로 화산(華山 삼각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漢水]에 임하였다 《고려사》에, “북쪽으로 화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는데, 토지가 평평하게 펼쳐졌으며, 백성이 많고 물산이 풍부하며, 번화(繁華)하다.” 하였다. 산하가 겹겹이 둘러 싸이고 사방으로 도로의 거리가 바르고 고르다. 박의중(朴宜中)의 시에 있다. 북악(北岳)이 뒤에 솟았으니 궁전이 빛을 더하고, 남봉(南峯)이 앞에 높이 솟았는데 성곽이 사면으로 둘렀다. 모두 예겸(倪謙)의 〈등루부(登樓賦)〉에 있다. 범이 걸터 앉고 용이 서렸으니, 금성 천부(金城天府)로다. 모두 권우(權遇)의 시에 있다. 8도가 관활되고 겹으로 된 문[重門]에 딱다기[柝]를 치네. 장영(張寧)의 〈대평관(大平館)〉이란 시에 있다. 하늘이 만든 견고(堅固)함이로다. 권근(權近)의 시에, “화산은 높이 솟고 한강수[漢水]는 철철 흐르니, 하늘이 만든 견고함이 금성탕지(金城湯池)보다 장대하도다. 우리나라 일어나 천명 받고 한양에 도읍 정하자, 점쳐 보니 길(吉)하여 길이 좋으리로다. 화산은 높이 솟고 한강수 세차게 흐르는데, 하늘이 만든 땅 평탄하게 펼쳐 넓도다. 도로와 거리 고른데 배와 수레 모두 이르니, 도읍을 여기에 정하자 원근에서 모두 기뻐하네. 흐르고 흐르는 한강수 나라 도읍 둘렀는데, 지기[風氣]가 모인 곳에 둘러 싸여 완전하도다. 왕이 와서 자리 잡자 신민들 안정되었으니, 천만 년에 길이길이 삼한(三韓) 땅 진압[鎭]하리.” 하였다. 한 물은 남쪽을 두르고, 세 산은 북쪽을 진압하였네 권근의 시에, “한 물은 남쪽을 둘러 출렁거리며 흐르고, 세 산은 북쪽을 진압하여 우뚝 솟았다. 중국의 번방(藩邦)이다 〈함허자(涵虛子)〉에, “이웃 나라가 모두 그 의(義)를 사모하여 서로 친해서 중국의 번방이 되었다.” 하였다.
【풍속】 신의(信義)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돈독하다 〈함허자〉에, “사람들이 모두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에 돈독하여, 중국의 풍속을 양성(釀成)하였다.” 하였다. 의관 제도는 모두 중국과 같다 위와 같은 글에, “의관 제도는 모두 중국과 같기 때문에, 시서 예악(詩書禮樂)의 고장이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한다.” 하였다. 천성이 유순하다 《후한서(後漢書)》에,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三方)과 다르므로 공자가 가서 살려고 하였다.” 하였다. 백성과 물산이 크게 이루어졌다 예겸의 〈등루부〉에 있다. 노(魯) 나라처럼 어진 이가 많다 장영의 〈대평관〉이 시에 있다. 집집마다 순후[淳厖]하다 김식(金湜)의 시에, “중화(中華)를 사모하여 점점 중화와 같아지니, 집집마다 순후하여 모두 봉해 줄 만하다.” 하였다. 시서(詩書)로 선비를 가르친다 김식의 시에, “폐백[玉帛]으로 천자(天子)에게 조회하니 마음이 간절하고, 시서로 선비를 가르치니 뜻이 화평하다.” 하였다. 의관으로 예양(禮讓)한다 김식의 시에, “집집마다 농사 짓고 누에[桑]치는 직업이며, 곳곳마다 의관으로 예양하는 모습이네.” 하였다. 시서(詩書)의 숲[藪]이다 진감(陳鑑)의 〈희청부(喜晴賦)〉에, “조선은 동번(東藩) 중의 한 나라가 되었는데, 예의의 구역이요, 시서의 숲이므로, 특별히 첫째로 꼽는다.” 하였다.
【산천】 삼각산(三角山) 양주(楊州) 지경에 있다.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 빙빙 둘러서 양주 서남쪽에 이르러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삼각산이 되니, 실은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ㆍ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나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
○ 고려 오순(吳洵)의 시에, “공중에 높이 솟은 세 송이의 푸른 연꽃, 아득한 구름 안개 몇만 겹인고. 전녀에 누대(樓臺)에 올랐던 곳 추억(追憶)하니, 날 저문 절간에 종 소리 두어 번 울리네.” 하였다.
○ 고려 이존오(李存吾)의 시에, “세 송이의 기이한 봉우리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 아득한 대기(大氣)에 구름 연기 쌓였네. 쳐다보니 날카로운 모습 장검(長劒)이 꽂혔는데, 가로 보니 들쭉날쭉 푸른 연꽃 솟았네. 언젠가 두어해 동안 절간에서 글 읽을 제, 2년간 한강 가에 머물렀네. 누가 있어 산천이 무정타고 말하던가. 이제 와서 서로 보니 피차에 처량하네.” 하였다.
○ 고려 이색(李穡)의 시에, “소년 시절 책을 끼고 절간에 머무를 제, 돌다리에 뿌려지는 샘물 소리 고요히 들었네. 멀리 보이는 서쪽 벼랑에 밝은 빛 반짝반짝, 두어 마디 종소리 저녁 햇빛 향해 치네.” 하였다.
○ “세 봉우리 깎아 내민 것 아득한 태고적이니, 신선의 손바닥이 하늘 가리키는 그 모습 천하에도 드물리. 소년 시절에 벌써부터 이 산의 참모습 알았거니, 사람들 하는 말이 등 뒤엔 옥환(玉環 양귀비) 살쪘다고 하네.” 하였다.

백악(白嶽) 도성(都城) 안, 궁성(宮城) 북쪽에 있다. 인왕산(仁王山) 백악 서쪽에 있다. 타락산(酡酪山) 도성 안 동쪽에 있다. 무악(毋嶽) 도성 서쪽에 있다. 사현(沙峴)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다. 녹반현(綠礬峴) 사현 북쪽에 있다. 목멱산(木覓山)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한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 남쪽에 있는 것을 큰 설마라 하고, 산 동쪽에 있는 것을 작은 설마라고 한다. 가산(假山) 도성 수구(水口) 안, 훈련원(訓練院) 동북쪽에 있다. 하나는 물 남쪽에 있고, 하나는 물 북쪽에 있는데,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지기(地氣)를 함축시키기 위하여서인 것 같다.
잠두봉(蠶頭峯) 시속에서는 가을두(加乙頭)라 부르고, 또 용두봉(龍頭峯)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용산(龍山)이라 하였는데,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서술(敍述)에, “서호(西湖)는 도성과의 거리가 10리도 못 되는데, 산이 푸르고 물이 푸르러 형승(形勝)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간다. 호수의 북쪽에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형상이 큰 자라 머리[鰲頭]같으며 혹은 잠두(蠶頭)라고 한다. 언덕이 호수 가운데 뾰족하게 바늘처럼 나왔는데, 형세가 또 높아서 호수 가운데의 승경(勝景)을 모두 볼 수 있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용두(龍頭) 제일봉에 걸어서 오르니, 풍광이 한이 없는데 흥인들 다 할 수 있으리. 사방의 산과 물은 시정(詩情) 밖인데, 만리 건곤(乾坤)은 한 눈에 들어오네. 마을 집들은 북쪽으로 연이어 성곽에 가깝고, 고깃배는 서쪽으로 가매 바다 어귀 통했네. 주인이 술자리 마련하고 손을 자주 만류하니, 저녁 해가 어느덧 붉은 빛 사라지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닻줄을 내리고 나룻가 산봉우리에 올라가니, 기이한 풍경 더욱더 많고 생각은 끝이 없네. 평생의 버릇[氣習]은 삼상(三上)에서 시 지었는데, 오늘 다시 호탕한 마음[豪狂] 술 한 번 취하게 마셨네.[酒一中] 산세(山勢)가 두루 감쌌는데 하늘은 저 멀리 높고, 강물 소리 컸다 작았다 바다의 조수와 통하였네. 자리에 앉은 이들 모두 다 신선 손인데, 지척간의 동화(東華)가 연홍(軟紅 홍진(紅塵))에 가려 있네.”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양화도 한 물굽이 겨우 지나서, 용두봉 저 위로 다시 올라가네. 높은 데 올라 장안(長安)길 바라보니, 가는 저 구름 빌려 이내 몸 싣고 돌아갈거나.” 하였다.
○ “용산에 함께 올라 저물녘 갠 풍경 바라보니, 백구(白鷗) 날아드는 저 물가에 배들 많이 매여 있네. 멀리 포구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열 두 봉우리에 저 머리에 달이 마침 밝아 오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도성 서쪽 10리 양화도(楊花渡)인데, 혹시나 기심(機心 술책(術策)을 부리는 마음)있어 갈매기를 친할 수 없으려나. 비가 오려는지 구름은 희묽게 번져 가고, 바람 소리 세찬데 물은 길게길게 흐르네. 산 위에 취해 누우니, 닭의 울음 정오를 알리고, 시 짓느라 세월도 잊었는데 또 보리가을[麥秋] 닥쳐 왔네. 반월(半月) 한가로움 오히려 즐거운데, 하물며 신세를 창주(滄洲 강호(江湖)와 같은 말)에 붙였음에랴.” 하였다.
○ 권건(權健)의 시에, “배 안에서 잠이 깨니 술기운 가시는데, 서늘한 밤 바람 이슬 옷에 스며 차구나. 우연히 흥이 나서 곤한 줄 모르고서, 달지고 연기 비낄 제, 느릿느릿 배 저어 돌아오네.” 하였다.
○ 박은(朴誾)의 시에, “사해(四海) 문장 소자첨(蘇子瞻)은, 우주(宇宙)간에 그 기개 다 용납하지 못하였네. 이름이 높으면 화(禍)가 되나니, 시구(詩句)를 헐뜯어서 모두 죄안(罪案)에 넣었네. 3년간이나 동파(東坡)에서 와력(瓦礫)을 주었는데, 그림자뿐인 외로운 신세 누가 이 몸 머물게 하려나. 촌야(村野)의 할머니가 만나서 하는 말이, 옛날의 부귀(富貴)는 봄꿈이 깨었다네. 선생은 아무 것도 개의(介意)치 않고, 높이 누워 문장만을 즐겼다네. 때로 가다 산수(山水)에 흥이 나면, 집을 나가 놀기도 자주 했네. 적벽강(赤壁江) 가을 칠월, 기망(旣望 16일) 달빛 더욱 맑았네. 일엽 편주에 흰 이슬 비꼈는데, 나는[飛] 신선을 끼고 먼 공중에 노닐꺼나. 뱃전 두드리며 노래 불러 조공(曹公 조조(曹操))에게 화답하는데, 퉁소 소리 애원(哀怨)하여 곡조가 되지 않네. 바가지 술잔 기울이며 손과 주고 받거니, 취해 누워 동방이 밝은 줄 몰랐네. 당시의 강신(江神)이 호방한 문장 도와주어, 몇 글자 우연히도 인간 세상에 남았네. 지금껏 펄펄 날아 구름 위에 오를 듯, 내 전날 읽어 보고 다시금 세 번 탄식했다네. 금년은 다행히도 같은 임술(壬戌), 좋은 놀이 고금(古今)이 일반이네. 서호(西湖)에서도 매우 기이한 누에 머리[蠶頭] 그 봉우리, 친구들아 가보지 않으려나. 우리 친구 세 사람 함께 웃는데, 따라온 두 손은 와서 같이 웃네. 마포(麻浦)로 나가서 작은 배 띄우니, 봄 강물이 처음 불어 한창일세. 가벼운 물결 일지 않고 바람 잔잔하니, 어느덧 좋은 경치 맑은 놀이 알맞았네. 사화(士華 남곤(南袞)의 자(字))의 얼굴에는 흥이 넘치는데, 좌중(座中)에 다리 뻗고 앉아[槃礴] 그 자리엔 관도 쓰지 않았네. 술 한 말 마시며 글 5백 자 쓰는데, 글자마다 용사(龍蛇)처럼 꿈틀거리니 그 누가 있어 붙들어 매리. 천 년 후에 알아주는 이 있는 줄 알면, 하늘 위의 소선(蘇仙 소동파) 응당 감탄하리. 황혼에 배를 띄워 흐르는 물빛 치며 가니, 서쪽으로 보이는 넓은 물결 끝이 없네. 사공이 돛대 멈추고 나에게 하는 말이, 잠두봉 지나면 물결 다시 사납다네. 어촌에 닻을 매고 장사배[商船]에 의지하니, 코 고는 소리만이 들리네. 저 달이 너무 밝아서 하늘이 밝은 달 아끼는 듯, 일부러 엷은 구름[微雲] 보내어 은하수에 점을 찍네. 버드나무들 저 멀리 깃발[旌纛]인 양 서 있고, 등불은 점점이 별처럼 빛나네. 시원한 비 서쪽에서 소리 내며 뿌리니, 큰 고기들 물결 가르며 모두들 도망해 숨누나. 이때에 옷을 여미고[擁褐] 술잔 돌리기 재촉하니, 그대의 좋은 글귀 폭탄 터지듯 사람을 놀라게 하네. 시령(詩令)을 지금 다시 내는데, 명은 엄하고 재주 모자라니 나는 도망치려네. 술잔 들고 달에게 물으며 소선(蘇仙)을 불러 보니, 공중에서 바람 타고 날개 돋칠 듯. 동방은 밝으려 하고 물기운 넘치니, 천지가 혼돈(混沌)해 개벽(開闢)하는 처음 같네. 돛대를 치며 다시 저어 연무(煙霧)를 뚫고 가니, 풀빛은 멀고 모래판은 긴데 까마귀 황새 어지러이 날아가네. 양화도 나룻가에 종일토록 비오니, 배 밑에서 맑은 시가 구슬처럼 빛나고 많네. 돌아와선 10일간이나 문 닫고 누웠는데, 머리 돌려 놀던 곳 생각하며 부질없이 팔을 걷네. 영웅들 흘러가고 천지는 늙었는데, 소선(蘇仙) 죽은 뒤에 해가 몇 번 바뀌었나. 옛부터 인간사가 매양 이러한 것인데, 우리 친구 벌써 백 년을 반이나 살았네. 오늘의 이 즐거움 헛되이 하지 말아, 흥이 나면 술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보세.” 하였다.
○ “성긴 비 강을 지나매 급한 소리 나는데, 작은 등불 달 대신 외로이 밝아 있네. 스스로 우습구나 천지간 하루살이[蜉蝣] 사는 듯, 만경창파에 갈대 하나[一葦] 비꼈는 듯. 이날 우연히 만나 애오라지 술을 마시나니, 옛 사람 보지 못하고 이름만 들었거니, 풍류(風流)는 천 년 만에 우리들에게 돌아왔는데, 비루하고 추솔(麤率)한 말 두서도 없어라.”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강머리에 달 솟아 오르자 물결은 밤에도 희어, 우리들로 하여금 공명(空明 고요한 물에 비치는 명월(明月)의 경치)을 치게 하네. 시를 지으니 퉁소 화답 필요 없고, 꿈을 깨니 외로운 학이 강을 질러 지나는 데 놀랬네. 세상일 지금에 우리들 늙으려고 하는데, 강물은 예로부터 소리만 남았구나. 내 어찌 짧은 글로 신선의 붓을 따르리, 응당 저 하늘 구만 리 밖에 있으리라.” 하였다.

전관(箭串 살곶이) 곧 국도(國都)의 동쪽 들[東郊]이다. 그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므로 울타리를 둘러쳐서 나라 말[國馬]을 기른다. 넓이가 34리이다. 남지(南池)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지(蓮地)라고 한다. 서지(西池) 모화관(慕華館) 남쪽에 있는데, 가물 때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개천(開川) 백악산(白岳山)ㆍ인왕산(仁王山)ㆍ목멱산(木覓山)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도성 가운데를 가로 지나서 세 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 세종 26년에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설(風水說)을 가지고 도성 안 개천에 더러운 물건을 던지는 것을 금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기를, “신이 살피건대, 《동림조담(洞林照膽)》이란 책은 범월봉(范越鳳)이 지은 것인데, 월봉은 오계(五季 오대(五代)) 때의 한 술사(術士)였습니다. 그 중에서 말한 바, ‘명당(明堂)에 냄새 나고 더러우며, 불결한 물이 있으면 패역 흉잔(悖逆凶殘)의 징조이다.’한 것은 장지(葬地)의 길흉을 말한 것이요, 도읍지의 형세에 대해서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월봉의 의견으로는, 신도(神道)는 정결함을 숭상하기 때문에 물이 불결하면 신령(神靈)이 불안하여 그러한 징조가 있다는 것이요, 국가 도읍지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도읍하는 곳을 말씀드리면, 인가(人家)가 번성해지니 이미 인가가 번성해지면 자연히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쌓이니, 반드시 통하는 개천과 넓은 내가 있어, 그 사이를 가로 세로 흘러 그 나쁜 것을 떠내려 보낸 후에라야만 맑게 할 수 있는 것이니, 도성에는 그 물이 맑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도읍지의 물을 한결같이 산간의 청정(淸淨)한 물과 같이 하려 한다면, 이것은 사세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치로 말하더라도 사생(死生)이 길이 다르고 신(神)과 사람이 처지가 다른데, 무덤[塜地]에 대한 일을 어찌 국가 도읍지에 해당시키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그 상소를 보고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효첨의 의논이 정직하다.” 하고, 드디어 이현로의 말을 쓰지 않았다.

중량포(中梁浦) 도성 동쪽 15리에 있는데, 물이 양주(楊州)에서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입석포(立石浦) 두모포(豆毛浦) 상류에 있다. 도요연(桃夭淵) 살곶이[箭串]에 있다. 두모포(豆毛浦)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다.
한강(漢江) 목멱산 남쪽에 있는데,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하였다. 신라 때에는 북독(北瀆)이라 하여 사전(祀典)에서 중사(中祀)에 실려 있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사평도(沙平渡)라 칭하고,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昌水)와 합하며,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한다. 광주(廣州) 땅에 이르러 도미진(度迷津)이 되고, 광나루[廣津]가 되며,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 나루가 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 노돌)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나가 서강(西江)이 되고,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陽川)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고,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서는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도승(渡丞) 한 명을 두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게 하였다.
○ 고려조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강이 머니 하늘이 나직이 붙었고, 배가 가니 언덕이 따라 옮기네. 엷은 구름은 흰 비단처럼 가로 질렀고, 성긴 비는 실처럼 휘날리누나. 여울이 험하니 흐르는 물 빠르고, 봉우리 많으니 산은 끝나 더디구나.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자주 머리 돌리는 것은, 바로 멀리 고향을 바라봄일세.” 하였다.
○ 고려조 중 선탄(禪坦)의 시에, “혼자 강루(江樓)에 오르니 조망(眺望)도 좋아, 모래터에서 배 기다리는데 저녁 조수[晩潮] 돌아 오누나. 외로운 돛대 지나는 밖에 청산이 끝나고, 한 쌍의 새 돌아가는 가에 흰 빗발이 오누나.” 하였다.
○ 고려조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멀리 월악(月嶽)이 중원(中原 충주(忠州))에 비꼈는데, 한강(漢江)물이 거기서 발원(發源)되었네. 도도히 흘러 남국의 강기(綱紀)로 중요한 나루터인데, 푸른 물결 천길 속에 이무기와 자라[蛟龜]도 잠겨 있다네. 오는 소 가는 말 날마다 다함 없으니, 나루터에서 간간이 사공을 걱정시키네. 내 옛날 강정(江亭)에 올랐을 때, 기둥에 기대 서서 가을 바람 읊었다네. 광성(廣城)은 동쪽에 둘러있고, 화산(華山)은 서쪽에 솟았네. 바다와의 거리 수백 리이니, 썰물ㆍ밀물 어찌 통하리. 어찌하여 섬 오랑캐[島夷 왜구[倭]]는, 나는[飛] 저 기러기처럼 빠르게도 다니나. 날뛰며 이곳 지날 땐, 지키는 군사들 긴 활 버렸다네. 지금도 부로(父老)들 눈물 길게 흘리며, 사람 만나면 태평시절 즐겁던 일 이야기하네. 예성(禮成) 항구 여기가 해문(海門)인데, 고기잡이배 장사배들 베짜는 듯 드나들었네. 아, 언제나 그 옛날이 다시 올까.” 하였다.
○ 고려조 이곡(李穀)의 〈얼음 위로 한강을 건너며〉 라는 시에, “모래판에 지나는 길손 행색이 쓸쓸하니, 몇 번이고 빈 처마 밑에서 북두성 쳐다보았는고. 한밤중 세찬 바람 불어서 집 무너뜨리고, 흐르던 그 강물 얼어서 다리가 되었네. 잠깐 사이에 사람들 조심하니, 짧은 거리에도 말 잘 걷는다 자랑 말게. 위태한 길 지나고서 도리어 스스로 웃기를, 돌아가서 고기잡고 나무하면서 늙은 것만 못하리.”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말 타고 성곽을 나가, 고삐 멈추고 낚시터로 내려가네. 긴 강엔 새 한 마리 나는데, 석양에 돛대 두어 개 오누나. 촌가 나무꾼들은 여울에 의지해 모이는데, 초가집들은 언덕 곁에 벌였네. 한평생 호해(湖海)의 마음, 물 건너고서 도리어 배회(徘徊)하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기문에, “조선 도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거리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금강(金剛)ㆍ오대(五臺) 두 산에서부터 발원(發源)한 물이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에 임하여 누(樓)가 있는데 한강루(漢江樓)이다.
때는 경태(景泰) 원년(세종 32년) 정월 14일인데, 공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와 한성부윤(漢城府尹) 김하(金何)가 나와, 황문(黃門) 사마(司馬 사마순(司馬恂)) 선생을 청하여 가서 놀았다. 이에 말을 타고 남대문으로부터 나갔는데, 지원(知院)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및 도감(都監)의 여러 분들이 함께 갔다. 구불구불 산길과 들길 사이를 지나, 날이 정오가 거의 되어서야 누 위에 이르렀는데, 국왕이 미리 보낸 좌부승지(左副承旨) 이계전(李季甸)과 예조 판서 허후(許詡)가 잔치를 벌이고 맞이하였다.
난간에 의지하여 둘러보니 강산의 좋은 경치가 모두 자리 사이에 들어왔다. 술이 돌아가기 시작한 다음, 내가 즉석에서 시 3장(章)을 지었는데, 도감에서 먼저 화려한 현판[華扁]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기다리다가, 나에게 지은 시를 써서 누 위에 걸라 하기에, 내가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였는데 한성부윤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작은 배가 누 아래 메여있으니 한 번 타고 놀아보지 않겠소.’ 하기에, 내가 곧 자리를 치우게 하고 걸어서 배 가운데로 올라갔다. 배는 3척을 연결하였고, 가운데에 작은 집[小軒]을 세우고 띠풀로 덮었는데, 아래는 6, 7명이 앉을 만하며, 걸상을 만들었는데 자못 높았다. 내가 말하기를, ‘강산이 이러한데 도리어 처마뿔[簷角]에 가리어지니, 어찌 나의 바라봄을 넓게 하지 않겠는가.’ 하며, 명하여 낮은 걸상으로 바꾸게 하고, 술잔을 씻고 다시 마시기 시작하였다. 언덕을 따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몇 리를 못 가서 다시 누 아래로 돌아왔는데, 호군(護軍) 매우(梅佑)가, ‘달이 벌써 떴습니다.’ 하기에, 그만 언덕 위로 올라와서 말을 타고 돌아왔다.
이틀이 지나서 공조 판서와 한성부윤이 다시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5리쯤 가면 멀리 나루터가 있어 양화도(楊花渡)라고 하는데, 대개 각도에서 오는 양곡[餫餉]이 와 닿는 곳입니다. 나루 어귀에 몇 묘(畝)나 되는 푸른 돌이 물가에 벽처럼 섰는데 푸르고 늙은 소나무가 많아, 높은 관을 쓰고 칼을 든 이가 뒤섞여 서서 서로 마주 향한 것 같으며, 여기에 올라가면 한없이 조망(眺望)이 좋으니, 한 번 가서 놀지 않겠소.’ 하기에, 나는 다시 황문(黃門)과 함께 갔다. 거기에 도착하니, 국왕이 미리 보낸 도승지 이사철(李思哲)과 병조 판서 민신(閔伸)이 장막을 설치하고 길가에서 맞이하였다.
말에서 내려 장막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고, 걸어서 돌 깔린 산마루로 올라가 험한 곳에서 소나무를 의지하니, 모두 나무를 얽어 난간을 만들어 기울어지고 엎어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차려 놓은 것이 매우 성대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돛단배들이 섬 사이에 나고 들며, 언덕 너머에는 좋은 전지(田地)가 많고 촌가가 총총히 있다. 먼 산이 중첩되어 푸른 병풍이 둘러 벌인 것 같은데, 긴 바람은 바다 쪽에서 불어와서 선들선들 옷에 부니, 호연(浩然)한 마음 만리의 물결을 헤치는 뜻이 있으니, 참으로 장쾌한 구경이다. 조금 있다가 자리에 앉아, 술이 몇 순배 돌아 갔는데, 공조 판서가 말하기를, “애석한 일은 퉁소 부는 손[客]이 없어 술을 권함이 없는 것이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풍악은 없지만 술 한 번 들고 시 한 번 읊는 것으로 넉넉히 그득한 정회를 풀 수 있소.’ 하니, 모두들 한 번 웃었다. 어부가 있어 그물질하여 비늘이 번쩍번쩍하는 고기를 잡아다 바치니, 꼬리가 퍼덕퍼덕하며 소반 위에서 움직였는데 빨리 삶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한성부윤이 다시 배에 오르자고 하기에, 걸어서 평탄한 산록으로 내려와 교자를 타고 물가에 이르니, 여러 사람들이 벌써 언덕을 따라 내려와서 먼저 배에 이르렀다. 배에 올라 도사려 앉아[趺坐] 술을 얼마쯤 마신 후에 물결을 따라 내려가니, 두 겨드랑이로 삿대를 젓느라 때때로 얼굴에 물이 뿌려지는데, 분주히 언덕 위에 모여 구경하는 여자들이 천 명은 되어 보였다. 황문이 ‘어째서 저렇게 모였느냐.’고 물으니 한성부윤이 말하기를, ‘먼 지방 사람이 한 번 풍경을 보고자 하여 그러는 것 뿐이요.’ 하였다.
한성부윤이 멀리 송림(松林)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안에 있는 정자를 ‘희우정(喜雨亭)’이라 하는데, 효령군(孝寧君)의 별장으로서 역시 한 번 놀 만하오.’ 하였다. 또 서로들 배에서 내려 육지로 걸어서 정자 아래에 이르니, 국왕이 벌써 술을 보내어 와 있었다. 다시 자리를 마련하고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고 구름이 어두워지며, 물결이 출렁거리고 솔바람[松風]이 물결처럼 소리가 났다. 내가 말하기를, ‘날이 벌써 저녁 때가 되고 비가 오겠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만 일어나서 교자를 타고 돌아왔는데, 관(館)에 이르니 밤 누수(漏水)가 두어 각[數刻]이 되었다.
아, 땅이란 반드시 사람이 있음으로써 승지(勝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으로도 우군(右軍 왕희지)이 없었다면, 무성한 숲 긴 대나무에 불과하였을 것이며, 황주(黃州)의 적벽(赤壁)으로도 동파(東坡 소동파)가 없었다면, 높은 산 큰 강에 불과하였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내가 어찌 감히 왕희지와 소동파에 비하리요마는, 시대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나 흥취는 한 가지이니, 어찌 글로써 기록함이 없겠는가. 또 인생의 회합(會合)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요, 아름다운 지경[佳境]도 역시 많이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조선은 바다 밖에 있으니, 비록 이 사람과 이 경치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 사람이 누가 능히 더불어 회합하고 만날 수 있겠는가.
이번에 내가 욕되게도 조정의 사명을 받고 나와서, 잠시나마 여러 군자들과 여기서 놀고 노래하게 되었는데, 며칠이 안 되어 이별하고 가게 되니, 이런 놀이를 계속하려 하여도 원래 될 수 없는 일인데, 이 곳을 다시 우리들이 한 번 구경하고자 한들 또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래서 내가 붓으로 적어 잊지 않으려 하며, 때로 한 번 펼쳐 본다면 만나 놀던 즐거움이 완연하게 항상 눈에 있을 것이니, 역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나, 산천을 구경하고 그 고장의 풍토(風土)를 기록하는 것은, 역시 사신 직책의 당연한 일이니 만일 잔치하여 노는 것만 일삼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닐 것이다. 놀이가 있은 다음날 17일에 적는다.” 하였다.
○ 예겸의 시에, “높은 누각에 올라서 기이한 경치 마음대로 보고, 누선(樓船)을 저어 푸른 강물에 떠 있네. 비단 닻줄 천천히 매어 푸른 석벽에 배 대었는데, 아로새긴 난간 사이에 옥술병[玉壺] 자주 전해 오네. 강산은 천년토록 그 옛빛 고치지 않는데, 손님과 주인 한때에 마음껏 즐기네. 저 멀리 달 밝고 사람 간 후엔, 백구만이 날아들어 거울 같은 맑은 물결 차지하리.” 하였다.
○ 기순(祁順)의 기문에, “조선국 성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물이 있어 한강이라 하는데, 근원이 오대(五臺)ㆍ금강(金剛) 두 산에서 나와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그 경치가 그윽하고 좋기로 유명하였으며, 강에 임하여 누대가 있는데 올라가 조망(眺望)할 만하기 때문에, 전인(前人)들 중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가서 놀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성종 7년) 2월에, 내가 행인사부(行人司副) 장정옥(張廷玉)과 함께 사명(使命)을 받들고 이곳에 와서 겨우 일을 마치자, 한강에서 놀자고 청하는 이가 있으므로 응낙하였다. 이달 26일에, 관반사(館伴使) 찬성(贊成) 노사신(盧思愼), 참찬(叅贊)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숭례문(崇禮門)으로 나가 산길ㆍ마을 길을 지나 강가에 이르니, 임금이 미리 도승지 유지(柳輊)와 부승지 임사홍(任士洪)을 보내어 잔치를 누대 위에 배설하였는데, 의정(議政) 윤자운(尹子雲), 의정 김수온(金守溫), 중추(中樞) 임원준(任元濬), 중추(中樞) 성임(成任), 판서(判書) 이승소(李承召)가 모두 있었다.
이때 오랜 비가 새로 개어서 산천이 맑고 아름다우며 하늘 빛과 물빛이 서로 연하여 이난(二難)사미(四美)를 겸하였다. 여기서 누대에 올라 마음대로 조망하며 술잔 들어 서로 권하는데, 참찬 서거정이 율시 두 수를 지었으므로 내가 곧 화답하고, 다시 만강홍(滿江紅 사(詞)의 이름) 한 절[一闋]을 뒤에 붙였다. 얼마 있다가 서로 잡고 배에 올라가 강물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니, 주민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앞을 다투는데, 물새ㆍ들새가 날아들어 고기잡이배와 안개 낀 수면 사이에 춤추니, 역시 호화찬란한 모습을 보기를 즐거워하여 배회하면서 차마 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잔치를 배 가운데 벌이고 생선을 삶고 사슴 고기를 구우며, 호탕하게 마시기를 한정 없이 하였다. 술이 취하여 내가 다시 가사[辭]두 장(章)과 율시 한 수를 짓고, 장정옥도 지은 것이 있기에 또 화답하였다.
몇 리쯤 가서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니 이곳은 각 도의 양곡이 모이는 곳으로서, 창고(倉庫)가 층층이 솟아 산 형세와 서로 같다. 또 몇 리쯤 가서 용두산(龍頭山)에 오르니, 산이 물가를 내려다보는데, 여러 산봉우리 중에서 특출하여 맞은편 인가와 원근 도서(島嶼)간에 나고 드는 배들의 출몰하는 것이 모두 눈앞에 들어온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산 위에는 먼저 장막을 치고 술자리를 벌였음으로, 뜻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다시 술 두어 순배를 마시고 율시 한 수를 짓고 돌아왔는데, 성중에 들어오니 누수가 초경을 알렸다.
대개 조선은 중국과의 거리가 수천 리이므로 국가[王事]가 아니면 올 수 없으니, 한강의 놀이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의 놀이가 어찌 특별히 기이한 것을 찾고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시와 술로 즐기고 노는 것뿐이겠는가. 강의 남쪽은 옛날 백제요 백제의 동쪽은 옛날 신라인데,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는 또 당(唐) 나라의 유적이다. 그 자취를 찾으며 그 시절을 생각하니, 회고(懷古)의 생각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내 이번 놀이가 항상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하면서, 혹시라도 잊을까 하여 여기에 적어 둔다.” 하였다.
○ 기순의 가사[辭]에, “저 강물이여 유유(悠悠)히 흐르는데, 거마(車馬)들 강 머리로 몰려드누나. 누선(樓船)을 타고 물결 가로질러, 잔잔한 흐름을 건너누나. 풍륭(豐隆 구름신)으로 뒤따르게 하고, 비렴(飛廉 바람신)으로 앞서 인도하게 하였네. 산은 분분(紛紛)히 와서 맞이하고, 구름은 나부끼어 나를 호위하누나. 회포를 풀어 놓고 크게 노래 부르고, 술잔을 들어 지체하네. 사람 그림자 물 가운데 감도는데, 새가 하늘가에서 나네. 동쪽 언덕에서 그윽한 난초 캐고, 남쪽 물가에서 꽃다운 지초(芷草)를 캐네. 미인을 생각함이여 오지 않으니, 패물 끈을 맺으며 멈칫거리네.” 하였다.
○ 옛 나루터 웅진(熊津)인데, 봄 물결 푸름이여 맑고 맑도다. 갓 쓰고 일산 받은 이 와서 노는데, 깃발들이 구름 같도다. 고기와 용을 불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이무기와 자라를 좌우(左右)로 모누나. 물 신령 놀라 빨리 달리는데, 하백[川伯]이 읍(揖)하고 맞이해 기다리네. 신선의 술을 잔에 따르고, 기린포[麟脯]에 문어회(文魚膾)라네. 하늘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데, 황홀하게 나는 신선세계에 오르는 듯. 저 멀리 하늘가 바라보니 아득도 하여라, 어즈버 노래 부르고 한 번 웃어보세. 날이 저물어 오래 머물 수 없으니, 배를 멈추고 길에 올라야겠네. 흰 갈매기 쌍쌍이 나누나, 어찌하면 너와 함께 세상 일 잊을꼬.” 하였다.
○ 기순의 시에, “강머리 풍경이 누선에 가득 차니, 꽃과 버들 고움을 다투는 2월 봄철일세. 돛 그림자는 나는 새와 함께 지나가고, 피리 소리 늙은 용의 잠을 깨우네. 산이 두 언덕에 잇닿으니 구름과 숲이 합쳤고, 돌이 중류에 섰으니 흰 물결 뿌리네. 동국(東國)에 와서 높이 즐긴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예사로이 시와 술에 서로 끌렸다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양화도(楊花渡) 어귀에 놀잇배 대니, 인간 세계에 별천지 있는 줄 이제야 알겠다. 하필 신선과 함께 학을 타고 놀아야 하나, 그림 그릴 것 용면(龍眠 송 나라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에게 부탁할까. 해가 자라 등에 밝으니 황금빛 물결 치는데, 바람이 용의 머리 흔드니 푸른 구슬 뿌리네. 서호(西湖)를 서자(西子)에 비하겠는데, 이 좋은 강산에 흥이 일어나는 것 어찌하리.”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명승지 찾아와 놀며 놀잇배 띄우니, 봄철 강물 새로 불어 물결이 하늘 같네. 마음껏 시 읊으며 병 가운데 경치[壺中景]인가 하였고, 몹시 취하니 물 속에서 조는 것 같네. 해 지자 산에서 내려오니 도리어 담담(淡淡)한데, 회오리 바람[橫飆] 물결을 치니 다시 옷에 뿌리네. 소동파(蘇東坡)의 풍류 이제라서 없으리. 가려다가 도리어 늦은 흥에 끌리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한강에 엷은 안개 끼어 쪽빛보다 푸른데, 그림배[畫船] 맑은 놀이 운치 있구나. 아름다운 경치 좋은 철에 해외(海外)에 머무니, 좋은 산 좋은 물이 강남(江南)에 못지 않네. 갈매기 나루 어귀에 나는데 조수는 처음 부풀고, 시가 붓 끝에 들어오니 술이 반쯤 취했네. 깊은 언덕 숲 속으로 배 저어 들어가니, 공중에 가득한 푸른 산 기운이 부슬부슬 떨어지네.” 하였다.
○ 명(明) 나라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긴 강이 아득하여 고요히 쪽빛 오르고, 양쪽 언덕에 물결 잔잔하여 거울[一鏡] 맑았네. 하늘 밖 봉우리들은 북쪽 끝까지[朔漠] 잇닿았는데, 눈앞의 그림 같은 경치 소상강 남쪽[湘南]을 상상케 하네. 미친 바람 거친 비에 배 비껴 띄워놓고, 자리를 다가앉아 술잔 권하니 손님 모두 취하였네. 희미하고 아득하니 어느 곳에 배를 댈까, 나루터의 버드나무 실처럼 드리웠네.” 하였다.
○ 고려 배중부(裵仲孚)의 시에, “산야의 정취[野情] 나그네 생각이 함께 아득하니, 마을 다리에 말 멈췄는데 해는 저물어가네. 자주 왕래한다고 저 강물도 싫어하는 듯, 일부러 풍랑(風浪) 몰아다 나그네 옷[征衣] 적시네.”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침침한 천지에 바람 비 몰려오니, 천산(千山) 만학(萬壑)에 파도가 솟아나네. 강물이 넘쳐서 가도 끝도 없으니, 사공들 나루 아전[津吏] 서로 보며 놀라네. 저기 저 작은 배 빈 언덕에 매어 있으니, 부러진 돛대 썩은 노로 어찌 의지할 것인가. 아 어찌하면 만 섬을 싣는 큰 배를 얻어, 저 풍랑 뚫고 넘어 화살처럼 빨리 달려 별안간에 건널꼬.”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강물이 깊어 굴을 이루었는데, 고기잡이 노랫소리에 탁영곡(濯纓曲) 섞였네. 해가 멈추니 고기 비늘 유난히 번쩍이는데, 바람이 스쳐가자 가는 물결 일어나네. 배는 끊어졌는데 쪽빛 물 멀리 아득하고, 조수가 돌아가니 거울처럼 맑고 반듯하네. 내 어찌 늘그막에 작은 배 얻어 타고, 흰 갈매기 벗삼아 한평생 지내 볼거나.” 하였다.
노량(露梁 노돌) 도성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도승(渡丞) 한 사람이 있다. 또 과천현(果川縣)에도 있다.
용산강(龍山江) 도성 서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곧 고양(高陽)의 부원현(富源縣) 땅이었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도 상류(上流) 지방의 세곡(稅穀)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 고려 이인로(李仁老)의 〈용산 한언국(韓彦國)의 서재에서 유숙하다〉라는 시에, “두 물은 용용(溶溶)하게 흘러 제비 꼬리처럼 갈라졌는데, 세 산은 아득하게 서서 자라 머리에 탔네. 다른 해에 만일 구장(鳩杖)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 찾아 백구(白鷗)를 벗하리.” 하였다. 그 시 서(序)에 이르기를, “산봉우리가 굽이굽이 서려서[屈盤] 형상이 푸른 이무기 같은데, 서재(書齋)가 바로 그 이마[額]에 있으며,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 두 갈래가 되고, 강 밖에는 멀리 산이 있는데 바라보면 산자(山字) 같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용산이 반쯤 한강수(漢江水)를 베개삼았는데, 푸른 솔은 산에 가득하고 마을에는 뽕나무라네. 동네엔 닭ㆍ개 소리 나는 수십 집, 초가 지붕 기울어진 데 점심 연기 일어나네.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찬 여울 건너가, 낙화(落花) 속 빈 대청에 들어 쉬누나. 아전이 와서 밥을 올리는데 들나물 섞였더니, 뒤따라 가져오는 강의 잉어가 별미(別味)로세.” 하였다.
삼전도(三田渡) 광주(廣州) 땅에 있는데 도성에서 30리요, 도승(渡丞) 1명이 있다. 마포(麻浦 삼개) 도성 서쪽에 있는데 곧 용산강의 하류이다.
○ 성간(成侃)의 시에, “검은 구름 한 조각 푸른 하늘 나직한데, 때때로 들리는 먼 물가의 외로운 학의 울음. 밤 사이 나루터에 남풍이 세차더니, 서강(西江) 물결 걷어다 빗발을 날리네. 고기 새끼들 나고 들며 다투어 거품 뿜는데, 풍이(馮夷 물귀신)는 물결치고 신령은 춤추네. 섬들[島嶼]을 휘어 싸서 홍몽(洪濛)으로 돌아가는데, 창에는 서늘한 기운 남은 더위 다 가시네. 강 기러기 어지러이 날며 끼룩끼룩 우는 소리, 마름과 연 이리저리 바람과 물결 따르네. 어옹(漁翁)이 닻줄 잃고 강에서 소리 치는데, 큰 배는 옆으로 기울고 작은 배 떠내려가네. 인간 세상 어느 곳이 지극히도 험하지 않으리, 별안간에 생애가 어찌 될지 모른다네. 낭간군자(琅玕君子 작자의 호) 한바탕 웃고 나서, 밤중에 잠 못 이루고 머리가 학(鶴)처럼 기울어지네.” 하였다.
『신증』 김수동(金壽童)의 시에, “우뚝하게 높도다, 범바위[虎巖] 깎아선 모습 몇 천 길인고. 뭇 봉우리 높이 솟음이여, 용이 나는 듯 봉새가 춤추는 듯 다투어 솟아오르네. 아래는 긴 강 있어 쉬지 않고 흐름이여, 밤낮으로 성난 조수 바다 어귀[海門]에 통한다네. 강 머리에 뭉게뭉게 잇닿은 구름은 먹을 끼얹은 듯, 강루(江樓)에 주룩주룩 뿌리는 비는 물동이를 뒤엎은 듯. 모인 물 몇 삿대[篙]나 더 깊은고, 홍수(洪水)가 세차게 흘러 하늘 땅을 뒤덮네. 얼마 안 되어 바람 불고 빗소리 끊기니, 물결 무늬 주름잡고 거울처럼 고요해, 보이는 건 외로운 안개와 지는 노을이 얼기설기 얽히는 것뿐. 좋은 시절의 즐거운 일 저버릴 수 없어, 사공을 급히 불러 중류에 배 띄우네. 배다락[柂樓]에 의지하여 밤 깊도록 혼자 수심하는데, 저 하늘에 두둥실 찬 달이 떠오르네.
한 조각 흰 그림자에 강촌 밝아지니, 희고 흰 그 빛이 물에도 숲에도 흩어지네. 물 속에 이무기 뛰놀고, 깃들었던 갈가마귀 나누나. 생선 잡아 서리 같은 칼날로 가늘게 회를 치매, 은실이 날리는 듯 뱃노래 소리 속에 맑은 술병 열었구나. 미인이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칼인데, 맑고 시원한 선궁(仙宮)으로 나를 맞이하고, 자하주(紫霞酒) 부어 나를 권하려 하니, 이 내 몸 어느 사이 신혼(神魂)이 아득하네, 신령스러운 자라 부르고 푸른 용 불러서, 흥(興)을 타고 신선 나라 바로 찾으려니, 천풍(天風)이 나를 끼고 소요(逍遙)하며 노네. 인간 세상 내려다보니 몇 겹의 티끌로 막혔으니, 소상강ㆍ동정호 좋다한들 이 경치 비길쏘냐. 소동파[蘇仙]의 적벽(赤壁)놀이 말할 것은 무엇인가. 영주(瀛洲)와 단구(丹丘) 신선의 짝이 아니면, 이런 놀이 얻을 수 없을 것을, 나같은 용렬한 인물 어찌하다 이런 은혜 입었나. 산사(山寺)에서 꿈깨자 술도 처음 깨니, 달은 지고 조수 나갔는데, 저 멀리 긴 물가에 배댔던 자리만이 보이누나.” 하였다.

서강(西江) 도성 서쪽 15리에 있는데, 황해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 하류의 조세곡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양화도(楊花渡) 곧 서강의 하류인데 도승(渡丞) 1명이 있다.
○ 예겸(倪謙)의 시에, “한강의 옛 나루터 양화라고 하는데, 좋은 경치 골라 정자 지으니 물가에 가깝네. 멀리 보면 돛단배 먼 포구(浦口)로 떠나는데, 문득 들으니 우는 기러기 모래판에서 일어나네. 숲에 가린 부엌에서 솔잎을 불때고, 자리 위 봄 소반엔 여뀌 싹이 새로 났네. 황성[神京]을 떠나매 여기서 4천 리인데, 이곳에 와서 사신(使臣)의 성사(星槎) 멈출 줄 생각지도 못했네.” 하였다.
○ 얼음 풀린 봄 강에 물이 이끼 같은데, 놀잇배 천천히 저으며 술잔 함께 드누나. 적벽(赤壁)의 황니판(黃泥坂) 겨우 지나자, 또 구당(瞿塘)의 염예퇴(灩澦堆)를 지나게 되누나. 관서(官署)에서는 쉴새 없이 좋은 술 가져오는데, 고깃배에선 다투어 생선을 보내오누나. 인생의 즐거운 놀이 많이 있기 어려우니, 입을 크게 벌려 웃지 않으리. 하였다.
○ 고윤(高閏)의 시에, “물결이 출렁출렁 큰 자라 떠 있는 듯, 비에 젖은 이끼 흔적 푸른 빛 흐를 것 같네. 눈에 가득한 좋은 경치 지금이 6월인데, 하늘 가득 바람 비에 외로운 배 위에 있네. 고래처럼 술마시니 강해(江海)도 작은 것, 용처럼 읊으니 귀신도 수심하게 하네.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하고 조정으로 돌아가면, 아침저녁 바다쪽에 정운(停雲)이리.”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양화도 옛 나루터 맑고도 그윽한데, 불쑥 나온 기이한 산봉우리 푸른 강물 베개 삼았네. 술이 취하니 몸 밖의 일 다 잊는데, 빗소리는 객의 수심 씻지 못하네. 푸른 나무에 연기 엉기니 넓은 들이 희미하고, 바람은 돛을 보내어 먼 물가로 들어가네. 이별한 후엔들 좋은 모임 잊을건가. 저 바다 동쪽 머리에 이 내 꿈 항상 왕래하리.”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경치 맑은 연기 떠 있는데, 산색은 창창(蒼蒼)하고 푸른 물 흐르네. 하늘 위의 사신 행차[使華] 옥절(玉節)이 빛나는데, 인간 세계 명승지에 놀잇배 띄웠네. 백 편의 시로 주고 받으니 재주 겨루기 어려운데, 실컷 마시매 천고의 수심을 술이 씻노라. 하늘이 뜻이 있어 시 쓰기 재촉하여, 조각 구름 비를 머금고 머리 위에 벌써 다다랐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높은 누대에서 내려와도 정(情)은 끝이 없어, 또 다시 봄빛을 이끌고 강물에 배를 띄우네. 사람은 죽엽배(竹葉盃) 속에 취하는데, 배는 양화도 향해 가누나. 동해 저 멀리 외로운 섬 보일락말락, 남산 푸른 곳에 가벼운 구름 일어나네. 강호의 노는 운치 전부터 알았지만, 오늘의 이내 마음 백 배나 맑아지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강해(江海)의 풍류는 10년의 정인데, 앉아서 강물 대하니 눈 다시 밝아지네. 산은 높은 선비 모습인양 언제나 거만하고, 물은 잘 쓰이는 붓[筆] 같아서 다시 이리저리 달리네. 배 다락[柂樓]에서 술을 드니 날이 방금 저물려는데, 나루터에서 시를 읊으니 조수 벌써 들어오네. 달 밝기 기다려 취한 몸으로 돌아가니, 살구꽃 성긴 그림자 맑기도 하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만겹의 산은 만고의 정을 머금었는데, 봄 바람에 먼 곳 나그네 두 눈이 밝아지누나. 마을에 잇닿은 버들은 천 가지가 고운데, 섬을 덮은 운연(雲煙)은 한 줄기로 비꼈네. 갈가마귀 석양에 날아드니 등에 금빛 번쩍이는데, 고기가 잔잔한 물결을 부니 푸른 무늬 생기누나. 온 세상 강호가 땅에 가득하니 이내 가슴 한껏 넓어지는데, 신선의 뗏목 타고서 하늘 나라 올라갈거나.” 하였다.
『신증』 어세겸(魚世謙)의 시에, “동쪽으로 오는 붉은 기운 강가에 뻗쳤으니, 도성[神京]이 지척인데 처소가 희미하네. 버들꽃 날아가고 실버들만 늘어졌는데, 연파(煙波) 위에 비 내리고 어부들 배 저어 가누나. 햇발이 구름 속에서 새[漏]니 붉은 빛 줄줄 나오고, 조수 휘몰아 언덕을 휘감으니 넓은 들 어딘지 모르겠네. 물결 치며 뛰놀고 노래하는 나루터 아이들이요, 언덕 위에서 그물 말리는 강변 집 딸이네. 푸른 창 붉은 난간이 누구네 집인가. 강 가까이 어른거리는 기장(奇章)의 별장이라네. 오는 소 가는 말 어느 때 끝날꼬, 배 돛대 총총한데 장사꾼 나그네들 분주하네. 해 지고 연기 잠겨 조망은 가이 없는데, 한 곡조[一聲] 뱃노래 어디서 들려오누나. 멀리 보이는 한강가에 나라의 창고인데, 조운선(漕運船) 해마다 바다에서 들어온다네. 강에 비낀 만 척 배 앞뒤 잇닿았는데, 사공이 노래하고 춤추니 용도 응당 말하리. 도읍지[神都]를 감싸서 억만 년에, 조종(朝宗 여러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어가 모임)하는 물결을 누가 막으리. 절월(節鉞)을 받들어 이곳을 지나가니, 강 건너는 친구들에게 주즙(舟楫 천자를 보좌하는 신하)의 재주 부끄럽네. 큰 소원은 이 물 기울여 기름진 은택을 이루어서, 억조 창생에게 고루 적셔 모두들 편안히 사는 것일세.”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서호(西湖) 가에서 술 들고, 시 읊으니 해[日]가 일 년만큼이나 길구나. 하늘가 저 멀리 새들 날아 지나고, 수풀 끝에 어렴풋이 밥짓는 연기 보이누나. 이 고장 신선 지경인데, 사람들은 이곽(李郭)의 신선을 그리워하네. 새벽녘 짙은 경치야, 서시(西施)인들 이보다 더 고우리.” 하였다.

저자도(楮子島)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는데,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이곳에 두었다. 우리 조정의 세종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는데,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전하여 차지하였다.
○ 한종유의 시에, “10리 평평한 호수에 가랑비 지나갔는데, 갈대꽃 너머에 긴 피리 한 소리. 금솥의 국에 간을 맞추던 그 손으로, 지금은 낚싯대 메고 저물녘에 모래사장으로 내려온다네.” 하였다.
○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가에 앉으니, 언덕 저 건너 수양버들이 저물녘 서늘함을 불어 보내네. 산보하고 돌아오니 저 산에 달 떠오르는데, 지팡이 머리엔 아직도 연꽃 향기 남아 있구나.”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대략 이르기를, “경도(京都)는 뒤에 화산(華山)을 지고, 앞으로 한강(漢江)을 마주하여 형승(形勝)이 천하에 제일간다. 중국의 사군자(士君子)들이 사신(使臣)으로 우리나라에 오면, 반드시 시를 지으면서 놀며 구경하다 돌아가는데, 동쪽 제천정(濟川亭)에서부터 서쪽으로 희우정(喜雨亭)에 이르기까지의 수십 리 사이에는, 공후귀척(公侯貴戚)들이 많이 정자를 마련하여 두어 풍경을 거두어 들였다. 동쪽 교외에는 또 토질이 좋고 물과 풀이 넉넉하여 목축에 적당한데, 준마가 만 필은 되는 듯 바라보매 구름이 뭉친 것 같았다.
그 가운데의 높은 언덕은 형상이 가마[釜]를 엎어 놓은 것 같으며, 그 위에 낙천정(樂天亭)이 있는데, 우리 태종이 선위(禪位)하신 후 편히 쉬시던 곳이다. 남쪽으로 큰 장에 임하였으며 저자도 작은 섬이 완연히 물 가운데에 있는데, 물굽이 언덕이 둘러쌌고, 흰 모래 갈대 숲에 경치가 특별히 좋다. 세종이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가 또 작은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주었다. 이에 정자를 수리하고 한가할 때 왕래하며, 화공(畫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대개 조종(祖宗)이 전하여 준 것을 빛내고 또 속세 밖에서 지내려는 본래의 뜻을 보이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니, 봄철이 되어 초목은 꽃다움을 다투고 푸른 안개 공중에 비꼈는데, 중류에서 사방으로 바라보면 돛단배 오르내리니, 무우(舞雩)와 호연(浩然)한 기운이 증점(曾點)이나 맹자(孟子)와 자리를 맞대고 함께 즐기는 것 같다. 혹 하늘과 땅이 화로처럼 더울 때에, 맑은 바람이 낯을 스쳐 오면 쾌재(快哉)를 부르던 초양왕(楚襄王)이나, 냉연(冷然)하던 열자(列子)와도 같이 역시 옷깃을 헤치고 돌아가기를 잊을 것이다. 또 누각이 맑고 별과 달은 강물에 잠겼을 제, 때마침 거문고를 타면 아아(峩峩)하고 양양(洋洋)한 곡조, 그 묘함을 알 자 없을 것이며, 다시 눈꽃이 하늘에 비껴 날며 백제(白帝)와 옥비(玉妃)가 뛰어 오르고 제압할 제는, 설령 옛날의 눈을 읊던 한퇴지(韓退之)나 나귀를 타고 가던 대씨(戴氏)도 고삐를 나란히 하여 와서 재주를 뽐내고 흥을 타고 서로 즐길 것이다. 대개 사시(四時)의 경치는 이렇게 같지 않지만 공의 즐거움은 한 가지인 것이다.
아, 누대(樓臺)와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가, 천하 고금에 회자(膾炙)되는 것은 악양루(岳陽樓)와 등왕각(滕王閣)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하늘가 수천 리 밖에 있어서 귀로만 들을 수 있을 뿐 눈으로 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가까이 도성 근처에 있어서 조석으로 가서 놀며 지극한 즐거움을 펼 수 있는 것만 같겠는가.” 하였다.

잉화도(仍火島) 서강(西江) 남쪽에 있으며 목축장이 있는데,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署)의 관원 각각 1명씩을 보내어 목축(牧畜)을 감독하였다. 율도(栗島 밤섬) 마포(麻浦) 남쪽에 있는데 약초를 심고 뽕나무를 심는다.
『신증』 백운동(白雲洞) 인왕산(仁王山) 기슭에 있는데, 추부(樞府) 이염의(李念義)가 살던 곳이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길 가는 사람은 다만 뭇 산봉우리 푸른 것만 보니, 이곳에 공후(公侯)의 집이 있는 줄 어찌 알겠는가. 등나무 덩굴 굽어져서 뱀과 구렁이 숨었고, 돌문은 높아서 지나가는 우마(牛馬) 가리울 만하네. 풍악 소리 누대엔 높은 귀인들 많이 모였는데,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성정(性情)을 수양했네. 잔치 파하고 손들 돌아가는데 저 산 위에 달 뜨니, 한 누각 아름다운 경치 무엇이라 형용하리.” 하였다.
○ “일찍이 운종가(雲從街 종로거리) 옛 집에서 뵈었는데, 일만 인가(人家) 비늘처럼 다닥다닥 소란하기도 하였네. 어느 해에 집을 옮겨 한가한 데로 돌아왔나. 오늘 와서 그대 만나니 웃음과 이야기 향기롭네. 두어 이랑 아름다운 꽃 봄 지나서 늙었는데, 연못가에 가득 늘어진 버들 비 온 뒤 길어졌네. 산야의 운치 즐겨서 조회에 참여하기 게으르나, 사람들은 장차 묘당(廟堂)에 들어갈 것이라 말하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백운동(白雲洞) 저 속엔 흰 구름이 그늘졌는데, 백운동 밖엔 홍진(紅塵)이 깊었네. 한 길이 돌고 돌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문득 도시(都市)에 산림(山林)을 감췄는데 놀랬네. 시냇물 졸졸 뜰을 따라 소리나고, 긴 솔이 반쯤 가리웠는데 바람이 읊조리네. 내겐 칡덩굴 사이에 고릉(觚棱 전당(殿堂)의 가장 높고 뾰족히 나온 모서리) 드러나는데, 화려한 집 그윽하여 언제나 침침하네. 묻노니, 그 누가 주인옹이 되었나, 전일에 높고 귀하던 장씨(張氏)나 김씨라네.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비단옷 입은 몸으로 연하(煙霞)의 마음 가졌네. 봄철이면 바위 골짜기에 산 꽃이 밝은데, 공중에 메아리치고 짹짹 산새가 우네. 황매우(黃梅雨 매실(梅實)이 익을 무렵에 오는 긴 장마) 가늘게 뿌릴 제 인가가 희미한데, 동문(洞門) 이끼 빛 푸르러 깊숙하네. 가을빛은 목욕한 듯 수풀 언덕 맑은데, 달 밝은 밤 일만 집에 다듬이 소리 맑게 들려오네. 나뭇가지에 흰 눈 쌓여 찾아오는 거마(車馬)가 끊어졌는데, 장작 불땐 따스한 기운 주단 이불 속에 생기누나. 골 가운데 풍경은 사시(四時)에 제각각인데, 물에서 갓끈 씻고 산에 오르누나. 기영(耆英 덕망이 있는 노인)들 맞이하여 높은 회합 가질 때면, 수레 타고 동구에 들어와 친구들 모이네. 아담한 노래 투호(投壺) 놀이 즐거움 다함 없는데, 몇 날 남은 기우는 해 푸른 산에 낮아지네. 제공(諸公)의 높은 기개 구름보다 높은데, 해마다 관개(冠盖)들 서로 와서 찾네. 태평풍월(太平風月)에 동부(洞府)도 넓으니, 좋은 땅과 좋은 사람 서로 만나매 사람들 부러워하네. 내가 들으니 송악산 왼쪽에 신선의 고장 있는데, 자하곡(紫霞曲) 그 노래 지금도 전해진다네. 풍류와 문아(文雅) 그 옛날 상상하니, 서로 위 될 듯 아래 될 듯, 천 년의 지음(知音)일세. 내 시가 거칠고 졸하여 곡조 이루지 못하는데, 혹시라도 거문고 곡조에 들어갈 수 있을런가. 유전(流傳)하여 한양(漢陽) 가요가 된다면, 옛 사람과 함께 회포 같이할 것을.”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송악산 5백 년에 왕기(王氣)가 다하였으니, 자하선인(紫霞仙人)이 의지할 곳 없었네. 화악(華嶽)의 태평 시대 만만세(萬萬歲)나 기약하는데, 백운동의 주인공이 자하선인의 꽃다운 자취 따르네. 왕성의 서북쪽 금잔지(金盞地)에, 소나무ㆍ상수리나무 그늘진데 좁은 길 희미하다. 바위에 걸치고 골짜기에 자리잡아 정사(精舍)를 지으니, 중화당(中華堂) 그 모습 저 멀리 보이누나. 물소리 냉랭(冷冷)하여 거문고ㆍ비파 울리는 듯, 시내 안개는 옹기종기 병풍 장막되었네. 아침에 나올 때엔 수 놓은 수레 휘장에 금어(金魚) 비치고, 저녁에 돌아와선 학창의(鶴氅衣) 긴 옷 입네. 여의(如意)를 가지고서 산호(珊瑚)를 부수지 않으며, 매[鷹] 부르며 눈 가운데 사냥도 아니하네. 가다가 좋은 날 만나 궁중에서 외척들 초대할 때엔, 특별한 은총 받아 왕궁으로 나아간다네. 기영(耆英)들 이따금 수레가 잇닿았는데, 방 휘장 열어 놓고 숲 기운 거두어 들이네. 화제(話題) 바뀌어질 땐 주미(麈尾)가 떨어지고, 술 기운 훈훈하니 초엽배(蕉葉盃 납작한 작은 술잔) 날리네. 바둑 놓고[彈碁] 장구 치며 못하는 것 없는데, 하물며 미인의 섬섬옥수로 악기를 다루는 것이랴. 마부는 말에 기대 서서 서쪽 성곽을 바라보는데, 흩어진 저녁 노을이 아침 햇빛 같네. 그윽한 사람의 이런 즐거움, 봄이고 또 가을이니, 운림(雲林)이 세상과 멀다고 누가 말하더냐. 나이 많고 지위 높은데 몸 또한 건강하니, 왜 다시 평지에서 위태로움 근심하리. 자손들 가진 홀(笏) 상 위에 가득하니, 집안의 번영 한평생에 족하네. 자하선인(紫霞仙人) 다시 올 수 있다면 응당 무릎을 꿇으리라. 아 백운동 주인 아니면 누구와 의지하리.” 하였다.

대은암(大隱巖)ㆍ만리뢰(萬里瀨) 모두 백악산(白嶽山) 기슭에 있는데, 곧 영의정 남곤(南袞)의 집 뒤이다. 박은(朴誾)이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짓기를, “주인이 산봉우리에 있는데, 우리 집 향 피우는 화로라네. 주인이 계곡에 있는데, 우리 집 낙숫물이라네. 주인이 벼슬 높아 세력이 불꽃 같으니, 문 앞에 거마(車馬)들 많이도 문안 왔네. 3년 가야 하루도 동산은 들여다보지 않으니, 만일에 산신령 있다면 응당 꾸지람을 받았으리. 손이 왔는데 다른 사람 아니고, 주인의 친구로세. 문 앞을 지나며 들어가지 않는 것도 차마 할 수 없고, 발걸음 당장 돌리는 것도 도리 아니라. 바위 사이에서 잠시 쉬니, 풍경은 참으로 뜻밖에 만났네. 물결이 감추어져 안개로 쌌다가 나를 위하여 열리니, 울던 학과 우는 원숭이 놀라지도 않누나. 주인이 금옥(金玉) 있으면, 열 겹으로 싸 두어 누구에게 함부로 주리오. 자물쇠 굳게 봉하여 밤중에도 지키나, 시내와 산에 한낮이 옮아간 줄을 모르네. 앉아 있은 지 오래매 날 저무는데, 흰 구름 먼 산에서 일어나네. 무심하기는 내가 저 구름보다 못하고, 자취 있으니 스스로 부끄럽네.” 하였다.
○ “대은암 앞에 쌓인 눈은, 봄들어 또 한 경치일세. 우연히 흥이 나서 놀러 왔고, 주인과는 기약도 없었네. 혼자 서 있으니 우는 새 가까이 오고, 길게 읊자니 붓 들기 더디어지네. 그대 집에서는 나의 방광(放曠)함을 용납하겠지만, 지금 사람들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네.”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목멱산(木覓山)에 있다. 명(明) 나라 당고(唐皐)가 우의정 이행(李荇)의 서재에 쓴 시에, “조선(朝鮮) 성 안 청학동에, 누가 이곳 찾아 높은 집 지었나. 내 지금 사절(使節) 따라 와서 처음으로 들으니, 청학선인(靑鶴仙人)의 글독[書甕]이라네. 선인이 우연히 시전(市廛)에도 나오지만, 때로 학을 타고 저 하늘 가에 논다네. 그의 의복 음식 무엇인가 물었더니, 자색 구름 의상(衣裳)에 옥처럼 맑은 산골 샘물 마신다네. 동문(洞門)이 바로 저기 구름 깊은 곳에 있으니, 책상 위 신선의 책 몇 권인지 모르겠네. 근래에 종적을 아는 사람 있어, 왕문(王門)에 데리고 들어가 수양한다네. 신선 사는 그곳이 인간 세상 같으랴, 청학이 소리내어 공중에서 울고 있다네. 밤 깊어도 저 산에 달 밝아 있고, 봄은 가도 바위 밑의 꽃은 전과 같이 붉다네. 선동(仙洞)을 그리워하며 가지는 못하니, 새 시[新詩]나 지어 마음을 표시하네. 저 멀리 황산(黃山) 66봉으로 머리 돌리니, 흰 학과 푸른 소나무가 초연한 먼 생각 일으키누나.” 하였다.
○ 명 나라 사도(史道)의 시에, “푸른 학 어느 해에 동문(洞門) 열었나, 도인이 이 곳 찾아 좋은 집 지었네. 자줏빛 언덕 붉은 절벽에 샘물 소리 섞였고, 푸른 전나무와 소나무에 새소리 끊기지 않네. 마음은 성현을 짝지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손으로 고금의 책 뒤지며 근원을 연구한다. 동국(東國)에 좋은 경치 많은 줄 내 알고 있지만, 한 번 가서 옥 술병 기울여 볼 길 없네.” 하였다.
○ 남곤의 시에, “일부러 그윽한 곳 찾아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주인이 손을 사랑하매 손은 돌아갈 줄 모르네. 그대 집에 술 떨어지면 내 집에서 가져 오세나, 남산에는 꽃이 피고 북악에는 꽃이 진다네. 청학은 벌써 신선의 골격(骨格) 알아보는데, 홍도(紅桃)는 어찌타 굳은 마음 괴롭히나. 풍류 있는 두 늙은이 조용히 노는 곳에, 아이들 보내 우리 즐거움 방해하지 말라.” 하였다.
【봉수】 목멱산 봉수(木覓山烽燧) 동쪽의 첫째 것은 양주(楊州) 아차산(峩嵯山)과 응하니, 이것은 함경도와 강원도의 봉화[烽]요, 둘째 것은 광주(廣州) 천천현(穿川峴)과 응하니, 이것은 경상도의 봉화요, 셋째 것은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와 응하니, 이것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로(陸路) 봉화요, 넷째 것은 무악 서쪽 봉우리와 응하니, 이것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해로(海路) 봉화요, 다섯째 것은 양천현(陽川縣) 개화산(開花山)과 응하니, 이것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해로 봉화이다.
무악 봉수(毋岳 烽燧) 동쪽 봉우리에서는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소질달산(所叱達山)과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세 번째 봉화에 응하며, 서쪽 봉우리에서는 서쪽으로 고양군 봉현(蜂峴)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네 번째 봉화에 응한다.
【궁실】 종루(鍾樓)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다. 태조 4년에 집을 짓고, 세종조에 고쳐 층루(層樓)를 지었는데, 동서가 5칸이고 남북이 4칸인데, 종과 북을 달아 새벽과 저녁을 알렸다.
○ 권근(權近)의 종명(鍾銘) 서문에, “조선조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운 지 3년에, 도읍을 한강 북쪽에 정하고, 그 이듬해에 비로소 궁전을 지었다. 그해 여름에 유사에게 명하여 큰 종을 만들게 하고, 완성된 다음 집을 큰 시가에 짓고 종을 달았는데, 성공한 사실을 기록하여 큰 사업을 후세에 전하려 함이었다. 옛날부터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큰 공을 세우고 큰 사업을 정하면 반드시 종과 솥에 명(銘)을 지어 새기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소리가 땡땡ㆍ둥둥[鏗鍧]하여 후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깨우치게 하며, 또 넓은 도시[通都]의 큰 고을에서 새벽과 저녁에 두드리고 쳐서, 백성들의 일하고 쉬는 시간을 엄하게 하니, 종의 용도가 큰 것이다.
우리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덕망이 날로 높아져 천명과 인심이 귀의하매 절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었으며, 여러 어진 이들이 힘써 도와서 모두 그 지혜와 힘을 다하였다. 하루 아침에 고려조를 대신하여 나라를 세우시고서는 밤낮으로 염려하시며 법을 세우고 질서를 마련하여 자손 만대의 태평을 터 닦았으니, 공을 세웠다 할 만하고 사업을 정하였다 할 만하다. 이것을 명(銘)으로 새겨 소상하게 후세에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큰 보배를 위(位)라 하는데, 무엇으로써 위(位)를 지킬 것인가. 그것은 인(仁)이라는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은 천지의 만물을 살게 하는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서 확충(擴充)하기 때문에 그 위(位)를 보전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하늘과 사람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한 가지인 것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날에,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중외(中外 중앙과 지방)가 편안하여, 포학한 정사(政事)에 고통받던 백성들이 모두 생생(生生)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저 순임금이라도 여기서 더할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더구나 명(銘)을 새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銘)에, ‘거룩할손 우리 임금, 명(命)을 받음이 크셨도다. 새 도읍 찾아오시니, 한강수 북쪽이었네. 옛날 송도(松都)에 있을 땐, 국운도 기구(崎嶇)하였지. 우리 임금 대신하시니, 포학(暴虐)을 덕으로 제거했네. 백성은 병기를 보지 않았는데, 하루 아침에 청명해졌네. 어질고 지혜로운 이들 힘 모으니 태평성대에 이르렀네. 원근(遠近)의 사람들 비로소 오니, 이미 많고도 번성해졌네. 이에 그 종(鍾)을 만들어서, 새벽과 저녁 알리게 했네. 우리의 공열(功烈)을, 이에 새기네. 신도(神都)를 진정하여, 천만 년 전하리라.’ 했다.” 하였다.

종각(鍾閣) 경복궁 광화문 밖 서쪽에 있다. 세조가 큰 종을 만들어 처음에는 사정전(思政殿)에 둘려 하다가 후에 종각을 여기에 짓고 달았다.
○ 신숙주(申叔舟)의 종명 서문에, “거룩하신 우리 주상전하께서, 태평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군비에 관한 일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큰 종을 만들어 사정전 앞 행랑에 설치하여 금군(禁軍)을 호령하여 정제하게 하였다. 우리 조정의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창업 개국하신 후로,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이 윗 대의 공업을 빛나게 이었으며, 세종 장헌대왕(世宗莊獻大王)에 이르러서는 가득 찬 것을 보전하고 이룬 것을 지키되 문화로써 정치를 하니,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병란을 보지 못한 지 30여 년이었다.
문종(文宗)께서 왕위에 계신 지 오래지 못하고 뒤를 이은 임금이 어렸는데, 권신(權臣)과 간신이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여, 조정 정사를 흐려 어지럽게 하고 종묘와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영특한 무력(武力)을 분발시키고, 충과 의를 격려하여 대란(大亂)을 평정하고 대업을 정하시니, 중흥 시기에 당하는 것이었다. 정사와 형법을 닦아서 밝히며 기강을 고치고 폐단을 제거하여 조종조의 옛 모습을 모두 회복하였는데, 먼저 군사에 관한 정치를 힘써서 이끌고 격려하기를 하지 않음이 없으니, 1년이 되지 않아서 조정과 민간이 깨끗하고 편안해졌다. 궁중의 호위가 정제ㆍ엄숙하여 중외가 편안하고 북쪽 오랑캐와 해적이 와서 알현하고 정성을 바치며 잇달아 앞을 다투니,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되 생각하는 것이 깊고 계획하는 것이 멀어서, 중흥의 사업을 이룬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대개 큰 공업을 세운 자가 반드시 그 사실을 종(鍾)과 솥에 새겨 공덕을 밝히고 충훈(忠勳)을 기록하는 것은, 큰 사업을 전해서 후세에 보여 주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 큰 그릇이 이루어지는데 어찌 명을 지어 새겨서 후세에 밝게 보여 주지 않을 것인가. 신(臣) 숙주는 삼가 손을 모아 절하고 머리를 숙입니다. 다음에 명을 붙입니다. 명에 말하기를, ‘거룩하신 우리 태조, 동쪽 나라 세우셨네. 성인과 성인 서로 계승하여, 교화 정치 더욱 높았네. 다스려도 항상 편안하지 못하니, 상제께서 경계를 보였네. 큰 운수 중간에 막혀, 나라가 편안치 못했네. 권신과 간신이 어지럽혀, 나라 정치 마음대로 하였네. 독한 연기 사나운 불길, 활활 번져 갔네. 하늘이 우리 임금 돌보아 용맹과 지혜 주었네. 신성한 위무(威武) 분발하여, 종묘와 사직 안정시켰네. 충성스럽고 어진 이 힘 다하여, 나비들이 밤 촛불에 날아들 듯 하였네. 큰 난리 평정하기를, 하루도 안 걸렸네. 나라 안이 편안하고, 노래 소리 즐겁기도 하네. 이때 우리 임금, 기강을 정돈하셨네. 우리 옛 법 회복하여, 모두 다 펼쳐 놓았네. 편안하다 맘 놓을세라, 위태로움 잊을세라. 나라 중흥 보전하려, 무비(武備)를 먼저 힘쓰셨다. 여기서 큰 종 만들어, 궁중에 달았네. 뗑뗑 둥둥 치는 소리에, 무사(武士) 벌여 섰네. 정정하고 당당한 모습, 장할손 우리 큰 사업이네. 위풍이 떨치고 빛나, 끝없이 멀리 퍼지네. 산융(山戎)과 도이(島夷)들, 위엄에 눌리고 덕에 감복하였네. 폐백 가지고 보물 바치며, 관문 밖에서 뵙네. 요사한 공기 깨끗이 가시고, 온 나라에 근심 없어졌네. 백성들 즐거워서, 아름답고 어젓하구나. 거룩하신 우리 임금, 순(舜)임금ㆍ우(禹)임금 짝 되시네. 선왕 사업이었지만, 임금의 의사로 창작하신 것일세. 충훈(忠勳)들 함께 따라 영특하신 무력 협찬하여, 큰 공적 세우니 우리 동방 은혜로세. 여기 큰 종에 명문 새기니, 협욕(陜鄏) 땅 함께 짝하네. 몇 천억 년 지내도록, 길이 전해 썩지 않으리.’ 했다.” 하였다.

대평관(大平館)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다. 중국[中朝] 사신을 대접하던 곳. 관 뒤에 누(樓)가 있다.
○ 예겸(倪謙)의 〈눈[雪] 갠 뒤 누에 오르다〉라는 부(賦)에, “내가 황문(黃門) 사마(司馬) 선생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대평관에 멈추었는데, 관 뒤에 누가 있어 전망이 좋다. 때는 경태(景泰) 원년(세종 32년) 정월 초이레이다. 아침 일찍 식사하고 산보하니, 쌓인 눈이 처음 개였다. 선생이 나와 함께 올라, 경치를 바라보다가 붓을 가져 오라 하여, 일시의 좋은 풍경을 적으니, 감히 상림(上林)과 자허(子虛)를 따를 수는 없지만, 또한 남루(南樓)의 방일(放逸)을 모방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남국(南國)의 제후(諸侯)들이 문왕(文王)의 교화를 입어서 백성을 덕으로 다스린 남은 은혜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니, 시인(詩人)이 추우(騶虞 신령한 짐승의 이름)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내가 여기서 반드시 은혜를 조정으로 돌리는 것은 옛날 시인의 끼친 뜻이니, 보는 이는 이전 뜻에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 부(賦)를 붙인다.
부에 말하기를, 성인은 임금 위에 계시며, 새 책력을 사방에 반포하였네, 동쪽나라 돌아보고 허리띠 같은 물 한하여 서로 바라보니, 어찌 충성ㆍ예절 다 하지 않으리. 때로 와서 조회하니, 특별 우대 더하는 것 마땅하여, 황실[九重]의 조서(詔書) 내리셨네. 이에 글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사신[皇華]으로 보내니, 마자(馬訾 압록강)를 건너고 낙랑(樂浪 평양)을 지났도다. 사신배 창해(蒼海)에 띄워 한양에 사절(使節)을 멈추었다. 황제 조서 선포한 다음 공당(公堂)에서 잠시 쉬노라니, 누(樓)가 있어 높기도 한데, 규모ㆍ제도 날아갈 듯, 그린 기둥 꿩 나는가. 새긴 난간 가시나무 화살 마귀도 쫓겠네. 밝은 산은 구슬 서까래에 비치고, 봄 구름 붉은 벽에 스치는 듯. 선선한 바람 거침 없이 들어오고, 높은 하늘에 도듬 놓고 홀로 섰네. 믿을 만하도다. 황학(黃鶴)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생각하면 취미(翠微 푸른 하늘)도 움키리라. 넓은 희포 시원스레 풀어놓고, 큰 물결(洪濤 높은 곳의 공기)도 깨끗하게 씻어 내네. 삼춘(三春)이 처음 오고 육화(六花 눈)가 방금 개었다데. 흐렸던 것 걷어 버리고 얼굴 드러내어 밝은 햇빛 비쳐오네. 사마(司馬) 선생 나를 이끌어 층층 섬돌 밟고 여러 기둥 붙잡고 올라가, 굽은 난간 의지하여 높은 지붕 굽어보니, 온 누리가 얼음병[氷壺]인양 바라보이고, 구슬섬[瓊島] 신선 나라[蓬瀛] 여기인 듯 여겨지네. 삼한(三韓)의 거룩한 모습 장하기도 하여, 만고의 깊은 정 활짝 열리는도다. 자리 가까이 보면 소나무 푸른 수염 늘이고, 늙은 몸 꿈틀거려 옥룡이 다투어 날아가며, 검은 여의주 잡으려 싸우는 듯. 멀리 둘린 방문과 대문들 흰 벽돌 어슷비슷, 구슬 수풀 엇갈렸는데, 맑은 일만 기와 가득 쌓이고, 하얀 일천 문은 백회가 엉겨 있다. 산을 말하면 북악이 뒤에 솟은 데다 궁전이 빛을 더하고, 남산이 앞에 높은 데다 성곽이 사면으로 둘렸으며, 높은 성벽 구불구불 서쪽으로 둘려 있고, 잇닿아 연이어서 높고 낮게 동쪽으로 뻗어 갔네. 물을 말한다면, 개천(開川)이 둘러 가는데, 은하수 내리 꽂은 것 같고, 한강수 넓게 흘러 발해(渤澥)로 들어간다. 고기들 편안하게 키워 주고, 논밭을 참으로 윤택하게 하여 준다. 그 중의 5감(監) 6시(寺) 등 여러 관청들은 종ㆍ북 소리 은은하고, 서로 다투어 높고 기이하네. 닭ㆍ개 소리 서로 들리니, 정교(政敎)의 시행 알 수 있는데, 읊조리고 감상함 끝없으니, 이내 몸 구이(九夷)에 있는 줄 모르겠어라. 선생이 웃으며 하는 말이, 경치 구경할 줄 그대 알면, 이 눈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풍년의 좋은 징조 상천(上天)이 주신 것이라네. 아, 우리 황제, 덕이 천지와 합하시고, 화기(和氣)로 평화를 이룩하시니, 맑은 기운 대지에 서리어 비 오고 개는 것 때 맞추어 만 백성 모두 기르나니, 신령한 기운 우내(宇內)에 퍼지고, 남은 물결 먼 나라에도 넘치나니, 기자(箕子)의 옛나라 백성들 많고 잘 되는 것 어느 것이 황제 은혜 아니겠는가. 내 이 말 듣고서 무릎 치며 노래하네. 층루(層樓)의 높음이여, 구조가 정밀하기도 하구나. 옷을 걷고 올라가니 눈에 가득 은세계일세. 남은 은택 점점 퍼짐이여, 우리 황제 서울부터라네. 즐거운 이 밝고 밝은 낙토로세. 백성과 물건 풍성하다 동쪽 나라의 신하됨이여, 태평 시대 이루었다 천추 만대 가도록. 황제(명황(明皇))의 변방[屛翰] 굳건히 하리라.” 하였다.
○ 기순(祁順)의 〈등루부(登樓賦)〉에,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영락(零落)함이여, 고루하여 벗 적은 것 부끄럽다. 전철(前哲)의 규범 따름이여, 아름다움을 믿고 좋아하였도다. 영해(嶺海)의 먼 지역 싫어하여, 일찍부터 중원[中州]에 노닐었다. 견문이 넓지 못하다 함이여, 멀리 나아가서 두루 놀기 소원이었도다. 이 세상 좁고 험함을 슬퍼함이여, 인생 일생[浮生]이 얼마 안 됨을 탄식했도다. 뽕나무로 만든 화살 들고 사방으로 쏘는 것이여. 어찌 남아의 처음 뜻이 아니었던가. 혼자 좋아하며 만족해 함이여, 한평생 그르치지 않을런가. 우물 안 개구리와 하루살이도 제딴은 잘난 체 한다네. 옛날 굴원(屈原)의 멀리 놂이여, 말뿐이고 실제는 아니었도다. 어찌하여 사마공(司馬公)의 많은 지식도 중국에만 그쳤는가. 생각하면 구주(九州 중국)땅이 적막하고도 넓었건만, 내 발자취 절반이나 미쳤네. 봉호(蓬壺)의 좋은 경치 들음이여, 한 번 와서 숙원(宿願)을 풀려 했도다. 천자의 은명을 받음이여, 수레 달려 동한(東韓)으로 떠났도다. 천애(天涯)를 향해 달림이여, 아득한 길 멀고 멀도다. 아침에 도성[大都]에서 떠남이여, 계문(薊門)을 지나 잠시 쉬도다. 난하(灤河) 맑은 물에 씻음이여, 갈석(碣石)의 옛 자취 찾도다. 겹겹한 관문 산해(山海)가 높음이여, 높은 누대 작은 여염에 솟았도다. 요택(遼澤)이 얼고 흐리지 않음이여, 학야(鶴野)는 멀고도 황폐하도다.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옴이여, 현도(玄菟)ㆍ낙랑(樂浪) 향하도다. 신세웅(辛世雄)을 살수(薩水)에 조상함이여, 기자(箕子)를 평양에서 뵈옵도다. 황주(黃州)의 좋은 대숲[脩竹] 찾음이여, 봉산(鳳山)의 아침 볕[朝陽] 구경하도다. 개성을 지나며 숭악(嵩岳) 쳐다봄이여, 어느 사이 새 서울에 왔도다. 넓고 깊은 황제의 은혜 선포함이여, 나라 사람들의 시청[觀聽]을 놀라게 하는도다. 물러나와 대평관에 머무름이여, 맑은 흥 끝이 없구나. 누(樓)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일만 경치 한곳에 모였도다. 왕궁은 울울(鬱鬱)하고도 빛남이여, 성곽이 저 멀리 에워쌌도다. 앞에는 남산 뾰족하게 솟았고, 뒤에는 북악산이 높도다. 긴 행장은 아홉 거리에 잇닿았고, 크고 작은 집들 사방에 벌여 있도다. 창해(蒼海)가 그 어디메뇨, 동쪽을 바라보니 물결이 하늘에 닿아 끝이 없도다. 신산(神山)이 여기 있다더니, 아, 신선들 사는 곳이로다. 불현듯 마음 동하고, 뜻이 향함이여, 수레 차려 따라가는도다. 신령이 나에게 길한 점괘 알려 줌이여, 신관(神官)이 나를 도와 의심 없게 하도다. 비렴(飛廉 풍백(風伯))을 명하여 맑은 티끌 일게 함이여, 금영(黔嬴)이 앞길 인도하도다. 봉황새 어지럽게 날아들어 모임이여, 학이 훨훨 날며 그 아래 있도다. 여덟 용[八虯]의 꿈틀거리는 것 타고서 무지개 깃발 펄렁거리도다. 보배 검[寶劍]을 함지(咸池)에 담금이여, 큰 활을 부상(扶桑)에 걸도다. 좋은 음찬 가져 서로 맞이하여 구슬가지로 음식 장만하여 드리도다. 맑은 이슬의 정액(精液)을 마심이여, 화려한 꽃을 구슬에서 캐도다. 뭇 신선들의 아름다운 모습[妁約] 모임이여, 은근한 정으로 나를 맞아 주도다. 하늘의 별들처럼 빽빽하게 빛남이여, 구름 우레처럼 빠르게 달리도다. 망서(望舒)를 시켜 서로 잇닿게 함이여, 구망(勾芒 귀신 이름)을 불러 짝하도다. 두 의사의 깊은 속[綢繆]을 통함이여, 은밀한 분부를 하녀(下女)에게 주도다. 내 마음의 고요하고 맑음을 아름답게 여김이여, 나의 모습[余骨] 비범하다 하도다. 청허(淸虛)한 마을[府]에 나를 앉힘이여, 나를 백옥(白玉) 자리에 손님으로 모시도다. 얼음 복사, 푸른 연근 모두 다 진설함이여, 용고(龍膏)를 불러 앞에 오도다. 운하(雲和) 곡조 멀리 예상(霓裳) 춤 잘도 추네. 좋은 모임 아직도 흡족하지 못한데, 저 해는 빨리도 새벽을 재촉한다. 취하여 옷을 떨치고 크게 노래 부름이여, 여러 사람 칭찬이 놀랍도다. 옛날 놀던 일 생각하며 도성을 바라봄이여, 아홉 층 저 하늘 위에 있도다. 이곳이 즐겁지만 내 나라 아니니 어쩌면 머물러 놀까. 길게 읍하고 짐짓 이별함이여, 다시 사방 돌아보며 어물어물 떠나지 못하도다. 신선 수레 앞뒤로 달림이여, 온갖 신령들 옹위하고 나가도다. 구슬같은 새 글[新篇]을 줌이여, 장생(長生)하는 진결(眞訣)도 주도다. 큰 기운[一氣]의 매우 신령함이여, 맑고 깨끗하여 모자람이 없네. 천천히 절월(節鉞) 놓고 즐거워함이여, 불현듯 옛 고향 생각나네. 이 놀이 특별도 하여, 마음속에 또렷하여 잊기 어렵네. 신선되는 그 길이 있는지, 옛 사람의 애써 찾으려던 것이었네. 이내 몸이라고 못하랴 어디 한 번 만났으면. 제일 높은 것은 덕을 세움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움이요, 또 말[言]을 세움이라. 명성과 광채[聲光]를 온 누리에 전하여, 영원한 세대에 언제나 남으리니. 이것이 나의 마음에 바라는 일이니, 또 어찌 신선의 집을 부러워 하리오.” 하였다.
○ 고윤(高潤)의 〈등루시(登樓詩)〉에, “새벽에 홀로 조선루(朝鮮樓)에 오르니, 누대 앞 경치 어찌 그리 유유한가. 손으로 황학(黃鶴)을 불러도 오래토록 오지 않고, 여러 층의 처마, 겹겹이 포개진 집에 바람만 솔솔[颼颼] 부누나. 시 잘 짓던 이적선(李謫仙),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나. 내 문득 새로 지은 시 가져다 첫 머리에 쓴다네. 꽃 구경 좋다지만 얼마 안 가서 꽃 질까 애석해 하고,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수심 먼저 생긴다네. 악양루(岳陽樓) 또렷이 갠 날 냇가의 수림(樹林), 이 누의 그림 그대로보다는 못하리. 난간 밖의 저 산은 무한히도 푸른데, 흰 구름 들보에 가득 차고, 푸른 소나무 외롭다. 궁전이 서로 빛나 단청도 휘황찬란한데, 그 중에 사는 이는 정녕 신선이리라. 태양(太陽)이 내리 비치고 붉은 대문 열어 놓으면, 비단옷, 검은 모자 어지러이 서로들 들어간다네. 뉘 집의 새댁[小婦] 짙은 단장 다했는가, 구름 같은 머리, 검은 상투[鴉髻]에 황금 빛 곁들였네. 붉은 빛[血色] 비단 치마에 난초 사향 풍기는데, 주렴을 반만 걷고 술을 드리웠네. 여섯 거리 세 저자[市]에 노는 한량 많아, 푸른 실 끝 다투어 잡고 옥병을 끄네. 높고 낮은 풍악 소리 종일토록 들리니, 천금을 다 흩으면서 갑오(놀음) 빼기 안 구하네. 머리 돌리면 저기 저 한강물 부럽기도 하니, 도도(滔滔)하게 흘러가서 넓은 바다와 통한다네. 어저께는 놀잇배 타고 놀았는데, 가벼운 돛 조용히 연파(煙波) 중에 걸려 있었네. 은실같이 가늘게 썬 것, 양화도의 생선회인데, 실버들 저 사이에선 희우정(喜雨亭) 꾀꼬리 소리 들려온다. 즐거운 놀이 마치기 전에 궂은 비 내리고, 누로 돌아오자 하늘 벌써 개였네. 엄자릉(嚴子陵)이 창주(滄洲)의 나그네인 줄 그대 알지 못하나, 어찌 일찍이 배 삼킨 고래를 낚았던가. 천자가 불러도 가려 하지 않았는데, 밤중에 자다 보니 하늘의 별이 움직였다. 맑은 기풍, 높은 절개 사치하고 화려한 사람들 압도(壓倒)했는데, 지금도 역사에서 그 이름 전해 온다네. 높은 난간에 그저 기대어 길게 웃으려 하지만, 웃으면 하늘 사람들 놀라지 않을는지. 중산(中山)의 붓과 강주(絳州)의 먹으로, 종이[楮先生] 위에 한바탕 풍운 일으킬까. 만고의 모든 일 일소(一掃)하려 하나니, 중선(仲宣)의 울울한 것이야 말할 것 무엇 있으리. 안중에 보이는 것 천지가 넓을 뿐인데, 한 쌍의 날랜 새매 가을철이라 날아드네. 내일 아침 말을 타고 조정으로 돌아가면, 이곳의 풍광은 어느 호걸이 차지할꼬.”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화려한 집 층층 누대 구조도 깊은데, 3천 리 밖 외지에서 여기 한 번 올라 보네. 웃고 말할 때, 난간에 기댄 흥취 있었지만, 느낀 회포는 임 그리운 마음이니 어이하리. 바람은 소나무 물결 몰아 만학(萬壑)에서 불어오고, 하늘은 그림 펼쳐 외로운 흥 돋우누나. 흰 구름 땅 위에 가득하고 황학(黃鶴)이 나니, 사람은 요대(瑤臺)에 있고 자리엔 녹음(綠蔭)일세.” 하였다.
○ 명 나라 장영(張寧)의 시에, “높은 다락 아득하게 푸른 공중에 솟았는데, 서쪽으로 장안(長安)을 바라보니 내 마음 이미 통하였다. 하늘과 땅이 은혜 있어 같이 덮고 실었는데, 중국과 오랑캐들 모두 다 한곳으로 모이네. 요양(遼陽)에서 동쪽으로 3천 리를 내려오니, 화악(華岳)이 서쪽으로 백이(百二) 겹이나 잇닿았네. 금 궁궐 옥 대문엔 수위(守衛)도 엄하고, 흰 깃발 누런 부월(斧鉞)로 장군들 정해졌네. 국경 남쪽 먼길엔 봉화 연기 끊어졌고, 북쪽 지역 여러 진영엔 방위도 웅장하도다. 온 누리 모든 제도 주(周) 나라 법칙인데, 강역은 모두 다 한(漢) 나라 봉역(封域)에 속하였다. 구성(九成)의 풍악 아뢰니 봉새들 모여 오고, 5색 상서 구름에 6룡이 달리누나. 상원(上苑)의 봄빛은 바다처럼 넓은데, 귀족들의 비단옷 무지개처럼 찬란하네. 옛부터 없었던 데에서 엮어 만들었고, 생민(生民)으로 아직 없었던 공업 잇달아 세웠네. 일만 나라들 수레로 배로 폐백 보내 오는데, 일천 집 가가호호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 들려온다. 교화는 구주[九服] 담장 밖까지 행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삼왕(三王) 예악 속에서 살고 있는 것, 억 년을 두고 변함 없으리. 고황제(高皇帝 명 나라를 건국한 임금) 공업 두 서울 함께 있으니, 신령의 조화로다. 황당한 말 도리어 장몽수(莊蒙叟 장자(莊子))를 웃게 하고, 부(賦)를 지으려니 좌대충(左大沖)을 기다려야겠네. 이 몸 이역(異域)에 사신 와서 생각해도 끝이 없는데, 마음은 서울에 있으나 바라보아도 다하기 어려워라. 전부터 동쪽 나라에 문화 풍속 좋으므로, 옛날부터 중국에서 대우도 융숭했네. 황실에 번병(藩屛)되어 절도(節度)를 숭상하고, 성인의 모범 형용하여 피폐한 백성 구휼하네. 안으로 경기에 접하니 백성들 편안하고, 밖으로 변방을 제어하니 요충지일세. 팔도에 병부(兵符)를 나누니 지방 풍속 좇았고, 겹문에서 딱딱이[折]를 쳐 흉한 일 있을까 방비했네. 수륙(水陸) 길 멀리 오니 시골 말씨 다르건만, 천지간에 봄 가득 차니, 풍경이야 어디나 같으리. 닭ㆍ개 소리 들리니 민가는 사방 들에 잇닿았는데, 연하(煙霞) 속의 산성(山城) 천 봉우리나 뻗었네. 흐르는 세월 또 한 번 봄철 따라 바뀌니, 미물(微物)들 모두 다 조물주(造物主)의 은택 입었네. 높고 낮은 곳 뽕나무 푸른 잎 퍼져 나니, 지정(池亭) 가의 살구나무 벌써 붉은 꽃 피었네. 빈 수풀에 땅이 좋으니 인삼(人蔘)이 자랐고, 먼 섬에 모래가 평평하니 큰 조개 많이 나네. 꽃다운 풀 돌아가는 나그네, 생각 흐리게 하는데, 푸른 이끼는 전에 놀던 자리 메꾸지 않았네. 시냇가의 남은 흰 점은 봄 오기 전 눈인데, 버들가지에 새로 난 누른 빛, 밤 사이 바람에 터졌네. 대숲 밖 서늘한 그늘에 갠 풍경 맑은데, 매화나무 곁 향기로운 아지랑이 새벽 들어 몽롱(朦朧)하네. 동산에 복사ㆍ오얏꽃 피니, 벌은 꿀을 빚고. 들판에 마른 쑥대 많으니, 사슴이 용(茸)을 기르도다. 꽃 떨어지고 피는 것 비단 오린 것 같은데,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은 날으는 쑥대같네. 흥이 오면 난간 의지하여 긴 피리 불고, 앉은 지 오래면 처마 끝 돌며 짧은 지팡이 짚는다네. 고절(高絶)한 행동은 서시(徐市) 나라 엿보려 하는데, 청허(淸虛)한 그 마음 무이궁(武夷宮)에 쉬는 것 같네. 부상(扶桑)과 석목(析木)이 가까운 듯하여, 방장(方丈)과 영주(瀛州)도 찾기 쉬운 줄 알겠네. 용처럼 뛰는 말 타고서 멀고 먼 길 가볼거나. 학처럼 늙은 나이 공동산(崆峒山)에 놀아 볼까. 향기로 둘러싸인 장막은 술로 돌려 있고, 구슬처럼 푸른 난간 비단 줄로 얽혀 있다. 좌석에 들어와 정이 있는 듯 제비는 춤추는데, 창을 지나도 말이 없으니 꾀꼬리 어찌 저리도 게으른가. 전각에 빛이 나니 황제의 필적 여기 있고, 거리에 기쁨 넘치니 채색 비단을 묶었어라. 어느 곳 시골에는 농악소리[社鼓] 들리는데, 여기저기 정원(庭院)에는 새긴 기둥 높이 섰네. 맑은 샘물 동리에는 조용한 집 아담한데, 흰 돌 세운 산문(山門)에는 옛 절이 높이 솟았어라. 있는 듯 다시 없어지는 아지랑이 들어오고, 차갑다가 잠시 더워지니 봄볕 푸근하다. 여러 층의 얼음 절벽 아래 언제나 여름철이 좋고, 높은 고개의 외로운 나무는 올해도 겨울을 견디어 내네. 사냥하러 나가면 꿩ㆍ토끼도 많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는 원래 아이들 금하지 않는다. 내와 언덕 둘러 싸였으니, 멀리 바라볼 만하다. 인물도 기특하고 많으니, 수려한 기운 모인 탓이리. 가죽 신 긴 소매는 일하러 나온 부인이요, 풀옷의 헌 패랭이는 관청에 매어 있는 품꾼일세. 부중(府中)에서 북을 치니 뭇 아전들 들어가고, 원외(苑外)에서 피리 불며 적은 군사[小戎] 훈련하네. 시골 할머니 성 안 들어 올 땐, 토산(土産) 포목 가져 오고, 흙화로에 불을 때어 동철을 주조(鑄造)하네. 월상(越裳)인양 거듭 통역하니 왕래에 편리하고, 노(魯) 나라인 양 어진 이가 많으니 선비들로 가득 찼네. 저 멀리 누선(樓船)은 바다 인 오게 하고, 비 개자 들판엔 농사짓는 이들 나가네. 바다 어귀 조수 나가니, 천마(天馬) 오르는 듯, 모래톱에 티끌 맑으니 외기러기 보이도다. 마읍(馬邑) 땅의 구릉(丘陵)은 얼마나 멀고 가깝나. 봉산(鳳山)의 풀 숲[榛莽]도 함께 아득하기만 하네. 그 옛날 임둔(臨屯)은 진번(眞番) 경계 연접했는데, 평양성 저 멀리 패수(浿水) 동쪽에 잇닿았네. 기자묘(箕子廟) 황량한 사당에 비석이 높이 섰고, 고려 시대 수자리 터엔 돌만이 험상궂네. 올라와 구경하는 이들 예나 이제나 그치지 않는데, 좋은 경치 모두 다 뇌락한 가슴속에 들어오네. 풍속을 묻는 옛일 오계자(吳季子)를 찾아볼까, 재주 없는 이내 몸 정승 주공(周公)이 부끄럽다. 묘금(卯金)을 마음대로 열람하려 천록(天祿)에 올랐고, 백옥에 글을 간직하니 사홍(射洪)에 가득 찼네. 일을 의논하다가는 스스로 양자(楊子 양웅(楊雄))의 말더듬이 부끄럽고, 시기에 통함은 중거(仲車)의 귀머거리가 부럽네. 묻혀 있는 이내 몸 개천 속의 나무가 우스운데, 세상에 드러나고 보면 뉘라서 부엌에 때는 오동[爨下桐]을 꺼리겠는가. 승지의 구경은 깊은 지경(地境) 탐하지만, 높이 올라가도 하늘엔 미치지 못한다네. 지경이 묘한 곳 당도하면 공교롭게도 서로 모이는데, 정이 극진한 곳에 이르면 짙어지기만 하여라. 이슬 묻혀 시를 쓰니 은붓대 젖는데, 석양녘에 술을 재촉하니 옥병이 다 비었네. 시 읊기를 다하니 외로운 회포 상쾌해지는데, 취한 뒤에 두 귀밑을 혐의하네. 난간을 의지해 거듭 바라본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이 좋은 풍경 좋아 시절이 태평함을 즐기노라.” 하였다.
○ 명 나라 장성(張珹)의 시에, “황명(皇明)의 기풍 한 번 떨쳐 호원(胡元) 풍속 쓸어내니, 옥이며 비단이며 육지로 해로(海路)로 만 나라들 와서 조회하네. 밝고 밝아 화락하기 반 년 동안, 곳곳에서 사람들 태평곡 노래하누나. 태평곡 들어온 지 오래니, 이 이름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하루 아침 명을 받들어 조선성(朝鮮城)에 나오니, 공관(公館)의 그 이름이 분명히 태평(太平)이네. 그 옛날 이 이름 지은 것 어찌 뜻없이 했으리, 길이길이 태평 세대 누리기 위해서리라. 내가 들으니 이 고장은 기자(箕子)의 옛 봉역(封域)인데, 순후한 그 풍속이 여러 변방 나라와 다르다네. 남자는 밭갈고 여자는 베짜며 선비는 학문에 부지런한데, 의관도 점잖은 모습 중화(中華)의 풍속이네. 정성을 다하고 힘써서 신하 직분 다하니, 천자께서 보통으로 보지 않아 기쁜 일 지으시네. 새 황제 즉위하사 정사도 새로우니, 경하(慶賀) 예식 드렸다고 사신 보내 은총 베푸시네. 황제 말씀 선포하고 비단 폐백 나눠주느라, 몇 달 동안 분주하고 이제야 비로소 한가하네. 동행의 김태복(金太僕)이 나를 이끌어 태평관의 누(樓)에 올랐는데, 누가 높고 서늘한 기운 많아 5월이지만 가을 같네. 눈앞에 펼쳐진 풍경 모두가 구경할 만한데, 게다가 어진 임금 있어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빛난 잔치 크게 벌이고 멀리 온 수고 위로하는데, 취중에 올라 보니 이내 생각 끝간 데 없네. 그림 문지방 깊은 곳에 점심 연기 희미한데, 들말[野馬]은 오지 않고 발 아래에서 울음 우네. 물결 소리인양 저 메아리 노송 있는 고개에서 들리고, 꾀꼬리 북인양 수양버들 동쪽에 드나드네. 남산ㆍ북악이 진하게도 푸른데, 비 뒤의 뽕나무ㆍ삼이 푸른 띠를 둘렀어라. 천왕(天王)은 은총 내리고 나라는 근심 없는데, 또 한 번 새로운 기개 보겠노라. 태평관에 이제 와서, 높은 누에 다시 올라 크게 한 번 웃어보노라. 황명(皇明)이 천명받아 억만 년 전하리니, 다음 날에도 다시 와서 함께 읊고 구경하오리.”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아로새긴 문지방, 비단 난간에 하늘 빛도 깊은데, 저 멀리 천상(天上)에서 사신은 부절 가지고 지금 왔네. 성주(聖主)가 은혜 베풀어 옥새 조칙 반포하는데, 국왕이 은혜 보답하여 단심(丹心)을 기울이네. 구름ㆍ연기 자리를 두르니 거문고ㆍ서책 윤(潤)이 나고, 소나무ㆍ전나무에 바람이 이니 새들 와서 지저귀네. 정원에 말 소리 없으니 봄빛이 고요한데, 발 가득 꽃 그림자 대낮에도 그늘이 생기누나.”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달빛 따라 누대에 오르니, 생각이 호연(浩然)하다. 문지방 의지하여 서 있으니, 졸음 오는 줄 모르겠네. 담장 저 건너로 등잔불 희미한데, 성곽 주위의 인가들 멀고 가깝게 잇닿았다. 전나무ㆍ잣나무 바람받아 그림자 움직이는데, 봉우리들 머리 들고 하늘을 맞이하는 것 같네. 돌아가기 재촉하는 북 소리 기다리지 말고, 술기운 어한(御寒)은 됐으니 잔 더 돌리지 말라 일렀노라.” 하였다.
○ “누에 오르니 밤 깊은 줄 모르니, 구경하려고 멀리서 온 데 참으로 비하겠네. 꽃은 아직 맺지 않았는데 봄은 벌써 눈에 가득하고, 나무에 그림자 생기니 달이 내 마음 알아주네. 경치는 보아도 다함 없으니 맑은 구경 외롭고, 시흥(詩興)은 처음 온 것을 써서 짧은 시에 붙이노라. 이 보소 이 나라 사람들 웃지를 마소, 산음(山陰)에 배질하던 옛 그림 다시 이으려네.” 하였다.

모화관(慕華館)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래는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世宗) 12년에 고쳐서 관(館)으로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봄 성에 치장한 말[珂馬] 새벽부터 들끓는데, 저 멀리 청산에 멈추고 특별한 자리 벌였네. 시와 예(禮) 오랫동안 이어받아 사람들은 학문 좋아하고, 문(文)과 무(武) 서로 함께 해서 나라에 어진 이 많다. 돌아가려는 마음 밤마다 난하(灤河) 달빛에 오가는데, 객지 생각은 새벽에 한강물 위 연기와 같이 일어나누나. 떠난 뒤의 깊은 정 추억도 많을 것인데, 비단 주머니 주옥같은 시(詩) 더구나 많다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비온 뒤에 총총히 한성(漢城)을 나갔는데, 가다가 말 세우고 돌아가는 이정(里程) 계산하네. 모화루 저 위에 쌍 술 두루미 술인데, 숭례문 그 앞엔 10대(隊)의 군사 있었네. 세자는 마음 깊이 이별하기 어려운 생각인데, 이 나라 신하들 아직도 떠나지 않으려 하네. 재삼 손들어 저으며 훈훈한 바람 따라 가는데, 저 소리 노래소리 가는 행렬 호위하네.” 하였다.

동평관(東平館)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북평관(北平館)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다. 와서 조회하는 야인(野人)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독서당(讀書堂) 옛 용산(龍山)의 폐지한 절인데, 강 북쪽 언덕에 있다. 성종이 고쳐 지어 당(堂)을 만들고, 홍문관(弘文館)의 글읽는 곳으로 삼았으며, 일찍이 궁중의 술을 하사하고 수정배(水精杯)에 부어 권하고 관원에게 맡겨 두었다. 도금(鍍金)하여 받침[臺]을 만들고 거기에 새기기를, “맑으면 흐리지 않고 비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물건을 덕으로 여겨 저버리지 말기를 생각하라.”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10년에 옮겨 지었는데,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있다.
○ 조위(曹偉)의 〈용산독서당기〉에, 큰 집을 짓는 자는 미리 편(梗)ㆍ남(楠)ㆍ기(杞)ㆍ자(梓)의 재목을 수십ㆍ백 년 전에 길러서 반드시 하늘에 높이 뻗치고 골짜기에 우뚝 솟아나기를 기다린 후에야만 취하여 기둥ㆍ들보의 재목으로 쓸 수 있으며, 만리 길을 가는 자는 미리 화(驊)ㆍ유(騮)ㆍ녹(騄)ㆍ이(駬)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그 꼴[蒭]과 콩을 풍부하게 주고 안장과 안갑[鞍鞁]을 정비한 후에야만 연(燕) 나라ㆍ초(楚) 나라의 먼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다스리는 이가 미리 어진 인재를 기르는 것 또한 무엇이 이와 다르랴. 이것이 독서당을 지은 까닭이다.
삼가 생각건대, 본조(本朝)에서는 열성(列聖)께서 서로 계승(繼承)하여 문교의 정치가 날로 성하였으며, 세종대왕께서는 신명(神明)한 생각과 밝은 지혜가 어느 임금보다도 뛰어났으며, 제작(制作)의 기묘함이 모두 신명에 합치하였다. 제도와 문화는 선비가 아니면 함께 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널리 글하는 선비를 뽑아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치도(治道)를 강습하게 하였으며, 또 의리(義理)의 오묘함을 자세히 연구하고 여러 서책의 많고 큰 것을 널리 종합하려면 전적으로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고 하여, 처음으로 집현전의 문신(文臣) 권채(權採) 등 세 명을 보내어, 특별히 장기 휴가를 주어 산간의 절에서 편할 대로 글을 읽게 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신숙주(申叔舟) 등 여섯 명을 보내어, 천천히 공부하고 편히 쉬면서 크게 그 힘을 기를 수 있게 하였다.
문종이 왕위를 계승한 뒤로는 크게 선비의 일에 뜻을 두고, 또 홍응(洪應) 등 여섯 명에게 휴가를 주어 보내니, 여기서 인재의 성함이 일시에 극진하여서 저술 제작의 공이 중국을 짝하게 되었다.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여서는 먼저 예문관(藝文館)을 개설하여 옛 집현전 제도를 회복하고,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크게 문적(文籍)에 정통하고 유술(儒術)을 높여 숭상하니, 인재의 육성(育成)이 옛보다도 더함이 있었다. 병신년에는 다시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써서 채수(蔡壽)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으며, 금년 봄에는 또 김감(金勘) 등 8명에게 휴가를 주어 장의사(藏義寺)에 가서 글을 읽게 하였으며, 음식 맡는 관리는 음식을 대고 술 맡은 관리는 술자리를 마련하며, 때때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물건 하사하기를 자주하였다.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성 밖에 땅을 선택하여 집을 지어 독서하는 장소로 삼게 하라.” 하니, 정원에서 회보하기를, “용산의 작은 암자가 지금 공청[公廨]에 속하여 폐기되었는데, 수리하면 앞이 틔어 밝으며 그윽하고도 넓어서, 공부하고 쉬는 데에는 여기가 제일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청원을 옳게 여기고, 관원을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여 두 달이 걸려 낙성되니, 집이 합하여 겨우 20칸이었다.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스하여 모두 알맞았다. 이에 ‘독서당’이라고 사액(賜額)하고, 신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시경》 〈한록장(旱麓章)〉에, “개제(愷悌)한 군자여 어찌 사람을 진작시키지 않는가.” 하였는데, 인재가 일어나는 것은 윗사람이 어떻게 작성(作成)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잘 양성한다면 선비들이 많이 있어 임금과 나라가 살 수 있지만, 잘 양성하지 못한다면 나라에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다스리기를 도모하리요. 만일 선비 기른다는 이름만 좋게 여겨서 구차히 취한다면, 닭의 울음 소리를 내고 개 도둑질하는 무리들이 그 사이에서 가만히 움직일 것이니,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에는 인재가 모두 상서(庠序)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도 주 나라의 선비 양성하는[造士] 법은 제일 자세하고 주밀하였다. 저 한(漢) 나라의 요재(翹材)와 당(唐) 나라의 등영(登瀛)은, 모두 구차스럽게 한때의 이름을 얻은 것뿐이니, 어찌 의논할 것이랴.
우리 국가에서 백 년 간 길러 오며 교화하여 열어 인도하는 방법과 장려하여 양성하는 규정이, 사실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선비 양성하는 법과 서로 안팎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궁(泮宮)ㆍ옥당(玉堂) 이외에 또 어진 이 양성하는 장소를 두어서, 선택하기를 정밀히 하고 대우하기를 후히 하니, 이것이 저 《시경》 〈권여장(權輿章)〉에, “밥 먹을 때마다 남음이 없고 권여(權輿)를 잊지 못한다.”는 것과 어떠한가. 《주역》에 이르기를, “성인이 어진 이를 양성하여 만 백성에게 미친다.” 하였는데, 전하는 이의 말이, “어진이를 양성하는 것은 만 백성을 양성하기 위하여서이다.”고 한다. 지금 집을 주고 음식을 보내는 것이 직접 다스리는 일[治道]에는 관계가 없다. 나라 정사가 번거로운데 특별히 성상의 생각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사리에 적절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날 다스리는 일을 경륜하고 왕법을 빛내게 하는 것이 반드시 이들에 의하여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태평성대를 장식하고 은택을 백성들에게 입혀서, 그 공과 이익이 멀리까지 미치게 함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편(梗)ㆍ남(楠)ㆍ기(杞)ㆍ자(梓) 등의 좋은 재목과 화(驊)ㆍ유(騮)ㆍ녹(騄)ㆍ이(駬) 등의 좋은 말을 미리 길렀다가 일시에 거두어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만 번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또 이것은 전하께서 급선무로 여기는 일이고, 멀리 전(前)의 군왕들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선발에 응하는 이는 성상의 기르기 좋아하는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성인의 도리는 모두 서책 중에 퍼져 있다. 6경(經)의 깊은 뜻과, 여러 사기(史記)의 다르고 같음과, 백가서(百家書)의 넓고 많음을 반드시 다 거두고 넓게 찾아내어, 그 흐름을 지나서 정밀한 것을 모으고 그 모임을 보아서 요긴한 것을 찾으며, 그 넓은 것을 다하여 요약한 데로 돌아오게 한 후에야 깊이 나가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황(皇)ㆍ왕(王)ㆍ제(帝)ㆍ패(霸)의 도리와 예(禮)ㆍ악(樂)ㆍ형(刑)ㆍ정(政)의 근본,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요지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사업에 시행하는 것은 힘써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자(董子 한 나라의 동중서)의 이른바, “학문을 힘써 하면 문견이 넓어지고 지혜가 더욱 밝아지며, 도를 행하는 데 힘쓰면 덕이 날로 일어나고 크게 공이 있다.”는 것으로서, 그 효험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옛 사람이 남긴 글의 찌꺼기만을 가져다 기록하고 외우는 자료로 삼으며, 비단같이 화려하게 이리저리 얽어 운(韻)을 달고 곡조를 맞추는 글만 지어서, 세상에 자랑하고 풍속을 현혹시킨다면 조정에서 선비들을 미리 양성(養成)한 본뜻이 아닌 것이다. 아! 학문의 공은 변화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오늘 한 문장을 읽고도 그대로 그 사람이고 내일 한 문장을 읽고도 역시 그대로 그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무엇을 하겠는가. 공자는 말하기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다.”고 하였다. 또 자하(子夏)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군자다운 선비가 되고 소인다운 선비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정】 제천정(濟川亭)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 예겸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한강 가에 섰는데, 시간을 내어 와 보니 정신이 상쾌해지네. 산 그림자 물 속에 잠기니 부용(芙蓉)이 푸르고, 옥 항아리에 향기 뜨니 호박(琥珀)이 봄빛이네. 날이 따스하니 일엽편주(一葉片舟) 가볍게 뜨고, 바람이 잔잔하니 봄 물결 가늘게 줄 짓네. 바다 어귀 저 물결 은하수에 닿은 듯, 신선 뗏목 타고서 하늘 나루터 찾아갈거나. ○ 도성 남쪽에 경치 제일 좋다더니, 한강 저 위에 높은 누대 서 있네. 멀리 나온 여러 재상들 좋은 잔치 마련하였는데, 가까이 내려다보니 한가한 어부 작은 배 저어가네. 만 겹이나 되는 봉우리들 여기저기서 읍하는데, 몇 쌍의 비오리 제멋대로 뜨고 잠기네. 적벽강의 옛 글이야 어찌 감히 따르랴만, 새 시(詩)나 지어서 이 좋은 놀이 적어 두려네.” 하였다.
○ 고윤(高潤)의 시에, “청신(淸新)한 시구는 먹 흔적 남겼는데, 여기 올랐던 사람들 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네. 누대에서 보는 좋은 경치 어제와 같지 않은데, 난간 밖의 긴 강물만 속절없이 절로 흘러 가네. 붉은 조서 내릴 때는 봉새 여기 멈췄는데, 놀잇배 지나가자 갈매기들 놀라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며 옛일 생각하는데, 바람이 흰 구름 보내 나무 위에 와 있구나.” 하였다.
○ “여름 날 누대에 오르니 비 지나 날씨 서늘한데, 앉으라 재촉하더니만 잔은 느리게 돌리네. 재주 없는 몸 사신으로 온 것 무어라 부끄러워하리, 글하는 이들의 이 모임 기쁘기만 하다네. 새 몇 마리 울며 오니 산은 적적하기만 한데, 외로운 돛 멀리 가니 물은 더욱더 망망하구나. 난간에 의지한 흐뭇한 흥 시(詩)로 다 거둘 수 없는데, 머리 돌리니 저 하늘가에 해 벌써 석양이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넓은 나루 내려다 보는데, 점점이 보이는 저 청산들 하나하나 참 모습이네. 화원에 향기 풍기니 춤추는 나비 날아들고, 고깃배에서 그물 드니 생선이 번득이네. 눈앞의 저 좋은 경치 누가 먼저 차지하였나. 주머니 속에서 시를 찾으니 내가 제일 가난하네. 오늘의 이 풍광이 어제 그것 아니니, 잠시 동안 서로 구경하는데 자주한들 어떠리.” 하였다.
○ 장영(張寧)의 시에, “동쪽 나라에 높은 누대있는데, 누대 앞엔 한강 물 흐르네. 광채 흔들림은 청작(靑雀) 배요, 그림자 떨어짐은 백구의 물가로다. 멀리 바라보니 저 하늘이 다한 듯하고, 공중에 솟았으니 땅이 떠 있는 것 같네. 여덟 창 열었는데 풍경ㆍ날씨 좋으니, 걸상에서 내려와서도 그대로 주춤거린다.”
○ “봄물이 오리 머리처럼 새파란데, 새벽 산은 소라뿔같이 푸르네. 조각 구름 먼 산에 걸치고, 외기러기 긴 물가로 내려오누나. 이역(異域)에서 일 아직 끝나지 않고 태평 시대에 혼자 깨어 무엇하나, 이곳에 오고 보니 시사(詩思)가 끝이 없네.”
○ “길이 머니 거마(車馬)가 적은데, 봄이 깊으니 풍경도 좋구나. 안개가 걷히니 산은 그림 같고, 바람이 맑으니 물결은 비단 같구나. 즐거운 일 좋은 철 만나니, 맑은 술 항아리에 노래도 호방(豪放)하네. 옛부터 문화[文物]의 지방이라, 가는 곳마다 잘도 지내네.”
○ “아득히 폭포가 급히 흐르는데, 저 멀리 돌 층계 평평하네. 산새는 울다 다시 멈추고, 강 포구는 흐리다가 개누나. 흥은 구름과 함께 가고, 정은 풀을 따라 함께 자라네. 양친을 볼 수 없으니, 다시금 신경(神京)을 생각하네.”
○ “좋은 구경 언제나 같으니, 아름다운 기약은 부를 것도 없다네. 올 때는 시골이 가깝다 여겼더니, 앉으니 객(客)의 회포 사라지네. 골짜기의 새 소리 서로 응하는데, 시냇가 꽃은 그림자 마주 흔들린다. 봄바람이 뜻이 있는 양, 목란(木蘭) 노를 불어 보내누나.
○ 물가는 바라봐도 끝없는데, 봉우리는 몇 층이나 되는지. 병들었을 땐 금귀약(金匱藥)을 생각하고, 목마를 땐 옥호빙(玉壺氷)을 마시고자 하네. 요해(瑤海 신선이 있는 곳)를 배질하여 건널 듯, 단구(丹丘 신선이 있는 곳)를 날아갈 것 같네. 문지방 의지하여 오래 섰으니, 고향 생각 문득 멀어지네.”
○ “흰 구름은 일지만, 황학(黃鶴)만은 오지 않네. 지경 깊으니 신선 고장 같고, 좋은 경치는 봉래산(蓬萊山) 생각나네. 취미는 원룡(元龍)의 호기인데, 시는 이태백의 재주 부끄럽네. 금곡(金谷)의 주름은 주거니 받거니, 취하여 쓰러짐을 비웃지 마라.”
○ 철은 바뀌지만, 강산은 고금에 같네. 점잖은 이들 몇 번이나 유람했나, 시와 술로 지금 다시 올라왔네. 경치 대하니 지난 일 생각나고, 풍속을 보니 내 마음에 맞네. 태평의 교화 멀리 퍼지니, 가는 곳마다 친구들 있네. ○ 네 필 말 끊임없이 달려가, 초연(超然)히 산에 앉았네. 술 향기는 춤추는 소매에 풍기고, 봄 기운 비단옷에 스미네. 돌길엔 솔꽃이 지는데, 성긴 발에 제비 나누나. 좌중이 모두 좋은 모임이라, 저물녘에도 돌아가자는 말 없네.
○ 옮기고 의지하며 아름다운 경치 다 보고, 이리저리 오가며 좋은 놀이 다 했네. 어진 임금 빈객을 좋아하고, 여러 정승 풍류에 바쁘다네. 취하고서도 그대로 마시고, 돌아가려다 다시 머무네. 내일 아침 태평관에서도, 머리 돌려 생각 끝없으리.”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손님과 함께 누대에 올라 잠시 쉬려 하니, 벼슬살이 하려는 마음, 고향 생각 모두 다 아득하구나. 산에 오랜 비 지나니 구름 안개 모이고, 강은 봄 조수 곁들여 밤낮으로 흐르네.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 조는 학을 놀라게 하고, 저물녘 고기잡이 북 소리 한가로운 갈매기 날아가게 하네. 심상하게 발 밑에서 산 안개 일어나니, 아마도 이내 몸 푸른 하늘 제일 위에 있는가 싶네.” 하였다.
○ 김식의 시에, “누대 가의 풍악 소리 훈훈한 바람 풍기는데, 누대 밖의 꽃가지는 술에 비쳐 붉구나. 구름 그림자 물결 빛 하늘 위 아래요, 흰 모래 푸른 풀 언덕의 동쪽 서쪽이네. 오대산(五臺山) 옛길에 봄 언제나 있는데, 백제(百濟) 끼친 터엔 나무도 없구나. 취한 뒤 난간에 기대서서 햇빛 바라보니, 이내 몸 수정궁에 있는 듯하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한강루 위에 올라 남풍에 의지하니, 눈 아래 산꽃 몇 점이 붉구나. 빛나는 오색 구름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넓은 강물은 절로 동쪽으로 흐르네. 안개 부슬비 자리를 스치니 시를 이루기 어렵고, 풍악이 어울리니 술잔이 잘도 비네. 취해지니 이내 몸 객지에 있는 줄 모르고, 도리어 아침 일찍 대명궁(大明宮)에 찾아뵙길 생각하네.”
○ “한강수에 배 띄우고서, 한강루에 다시 오르네. 강 꽃을 캐고 캐니 어느 새 한줌이 차고, 강 풀이 가느니 객의 수심 절로 나네. 강물 한 방울 길어다 벼루에 부으니, 먹물 구름처럼 넓게 깊게 번득이네. 검은 여의주 빛을 발하며 멀리 번져 나가니, 물 속의 용 두 마리 한낮에 굼틀거리는 듯. 한평생 별 따는 솜씨, 몇 번이나 약양루(岳陽樓)에 올랐던가. 동정호(洞庭湖) 물결 3만 8천 이랑, 푸른 산 한 점이 그 중앙에 있다네. 이 누대 역시 좋은 것이, 임 계신 서울 바라볼 수 있네. 오색 구름 저렇게 아득하니, 여기서 술이나 같이 할까. 취하여 난간 치며 황학에게 물으니, 황학은 보이지 않고 물 위에 원앙새만 나네. 나는 들었노라, 물은 깊어서만 좋지 않고, 누대는 높아서만 좋지 않다는 것을. 바다로 모여 가는 그것이 만고에 흘러 좋은 것이라네. 천하의 근심 먼저 하고 천하의 즐거움 나중한 이 범가(范哥) 늙은이 한 명뿐이랴, 후세의 사람인들 어질고 호방한 이 없을 건가. 짧은 노래 다 부르고 또 길게 휘파람 부니, 누대의 달은 밤에 찬데 강 기러기만 울고 가누나. 거듭 와서 절월(節鉞) 멈추는 일 어느 해쯤 될는지, 성주(聖主)의 은혜 깊어 하늘같이 덮여 있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누대 앞에 바람 걷히니 흰 구름 퍼지는데, 여러 산의 붉고 푸른 빛 한 자리에서 보게 되네. 백제의 지형은 강물에 와서 끝나고, 오대산 흐르는 샘물 하늘에서 오네. 시를 쓰자니 최랑(崔郞 최호(崔顆))의 글귀 못 따른 것 부끄러우나, 술을 대하여는 이태백의 잔 사양하기 어려워라. 꽃과 새 앞에 가득하고 봄 경치 좋으니, 웃고 이야기하며 더디 돌아간들 어떠리.” 하였다.
○ 봄비 처음 개고 하늘도 높은데, 한강의 새 봄물 푸른 것이 삿대로 한 길일세. 구름 가의 붉은 조서(詔書)는 한 쌍 봉새가 날아오고, 바다 위의 푸른 산은 여섯 자라 타고 있네. 성곽을 둘러싼 갠 빛은 보리 물결 흔들리고, 발 너머 은은한 메아리 소나무 파도 흩어지네. 글하는 이들 모두 모여 수창하매, 시중(詩中)의 제일 호걸은 저버리지 마세.”
○ “만강홍(滿江紅 중국 노래 곡조의 이름) 한강의 풍광(風光) 좋을시고, 사람들 모두 다 해동에서 드물다 하네. 하늘이 준 기이한 경치요, 땅이 나눠 준 신령하고 수려한 기상이네. 금마군(金馬郡) 그 성(城)인들 옛날과 같으리, 신라의 인물들 모두 다 옛 사람 아니어라. 당 나라 도독부(都督府)를 기억하노니, 그 이름 곰나루터[熊津口]에 남기기도 했다네. 갈매기 친해지고 어룡(魚龍)은 소리치며, 산은 그림 같고 강은 술 같네. 노는 사람들 여기 와서 즐기느라, 오래된 것 잊었다네. 아름다운 모임은 등왕각(滕王閣)보다 뛰어나고, 그윽한 풍경은 난정(蘭亭)보다 못지 않네. 내일 아침 한 번 이별하면, 저 구름 바라보며 고개만 돌리리라.”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오랜 비 처음 개니 갠 빛도 좋을시고, 누대 앞의 봄 물결 푸른 구름 뭉쳐 있다. 강 안개 막막하더니 바람 불어 걷히고, 산 안개[山翠] 부슬부슬 새가 가지고 오네. 배는 비단 닻줄 끌며 꽃 핀 나루터로 돌아가고, 술은 은하수 기울이듯 옥잔에 떨어지누나. 즐거운 모임 얼마인데 어찌 이별하기 쉬운가, 풍겨 다시 보려 하여 배회하고 또 배회하네.” 하였다.
○ “봄 강에 밤 비 와서 포도주처럼 넘치니, 새벽에 띄운 작은 배 절반이나 뱃전이 묻히네. 천상의 높은 모습[羽儀] 채색 봉황이 날아들고, 공중에 선 누각 신령한 자리 걸터 앉았네. 주렴을 잠깐 걷으니 산은 그림처럼 펼쳐지고, 채색 붓 한가로이 휘두르니 바다도 물결 움추리네. 웃으며 난간 의지해 마음놓고 한 번 취하니, 원룡(元龍)이 백 척인양 기개 더욱 호탕하여라.”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서호(西湖)에 봄이 들어 꽃 늦게 피려는데, 좋은 술 천 병에 고기는 백 그릇[百堆]이나 되네. 한 장의 조서[璽書] 햇빛 따라 내리는데, 아홉 겹 하늘에서 사신이 오셨네. 산하(山河)가 안팎되니 위문후(魏文侯)의 나라인데, 주빈(主賓)이 마음껏 즐기니 이태백의 술잔이로다. 높은 누각에서 잠시 떠나 서로들 읍하고서, 놀잇배 강 위에 띄우고 다시 배회하였어라.”
○ “봄물이 새로 불어 한길[一丈]은 높았는데, 고기 잡는 늙은이 지난 해의 삿대 저어 보네. 연경[燕都]의 저 손님은 두 봉새 왔는데, 용백(龍伯)은 그 누가 큰 자라 낚을 것인가. 작은 나라에 높은 손님 천 년의 경사인데, 흰 갈매기 누런 학 한 강 물결 위에 있네. 좋은 경치 가득 안고 읊조리기 오래하니, 시단(詩壇)의 제일 호걸 그대인가 하노라.”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누대 가운데 아름다운 모임[佳麗] 비단자리 펼쳤는데, 누대 밖의 푸른 산엔 비취빛 쌓이는 듯. 풍월은 옛날 황학 따라 가지 않았고, 연파(煙波)는 지금도 백구(白鷗)를 보내 오누나. 올라와서 주거니 받거니 지은 시 삼천 수요, 빈주(賓主)의 풍류는 백 잔 술이로다. 밤 깊어지기 다시 기다려 옥피리 부니, 달 떠서 두우(斗牛 북두와 견우성) 사이에 밝은데 우리도 함께 배회하네.”
○ “한강의 봄물이 푸른 포도 같은데, 비 와서 새로 불으니 몇 삿대나 더 높아졌나. 한 뱃줄 천천히 당기는데 갈매기 놀라고, 세 산이 높이 솟았는데 금자라 걸터앉았네. 은소반의 가는 회는 붉은 실이 날고, 옥잔의 향기로운 술 푸른 물결 주름지네. 사신의 문장이 자리 가득한 이 놀라게 하는데, 나 같은 사람 지은 시 다시 더 거칠기만 하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청산이 하나하나 비단 병풍 펼쳤는데, 봄물이 새로 불어 흰 물결 넘치네. 오랜 비 우연히도 오늘에야 개니, 하늘이 응당 사신 옴을 위함이리라. 읊다 바라보니 냇가 버들은 황금 실인데, 어사주 백옥 술잔에 취해서 거꾸러지네. 푸른 벽 저 아래로 긴 뱃줄 천천히 끌어 갈 제, 하늘빛 구름 그림자 다 함께 배회하누나.”
○ “금 술단지에 출렁출렁 포도주 넘치는데, 누선(樓船)으로 옮겨 타니 물결이 한 삿대나 높네. 취해가니 한 말 술을 어찌 사양하리, 흥 겨우니 삼산(三山)의 큰 자라 낚으려 하네. 뱃사람 노 저어 안개 낀 물가로 돌아오고, 아이들 그물 끌어 푸른 물결 흥청이네. 십 리 강산을 저멀리 바라보니, 봄빛이 넓고 넓어 호방한 시흥 돕누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누대 앞의 봄물이 거울처럼 열렸는데, 누대 밖의 청산은 푸른 것이 몇 더미냐. 주방[廚子]에서는 어느 새 금과일 보내 왔는데, 어부들 다투어 가며 번득이는 생선 가져 오네. 좋은 풍경 오래 봄은 시구에 의지하고, 정회를 푸는 데는 술잔이 있다네. 석양의 강가 풍경 무한히 좋아, 배 위에서 취하여 또다시 배회하네.” 하였다.
○ “비 온 뒤 저 강물 몇 자나 불었나. 삿대 깊이 들어가는 줄 아침에야 알았네. 인간 세상의 세월 나는 새 같은데, 바다 위의 구름과 안개는 큰 자라 너머에 있네. 봄철이 오니 점점 꽃이 바다 같은데, 잔을 기울이니 술에도 물결이네. 배 가운데서 한없이 담소가 길어지는데, 취중에 시를 지으니 말이 더욱 호방하여라.”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우뚝한 한 이층 누대 한강을 의지했는데, 동쪽 나라의 형승(形勝)이 어찌 이리도 좋은가. 갠 날씨 신기루 잇달아 세 섬이 희미하고, 찬 기운 조수 소리 보내 여덟 창에 들어오네. 나계(螺髻)에 구름 걷히니 산이 겹겹이 푸르고, 곤새[鵾 큰 새] 줄이 밤에 울리니 돌 위에 물 흐르네. 높은 누대 오르면 옛부터 시 지었는데, 오늘에사 필력(筆力)이 작대[杠]같지 못함이 부끄럽네.” 하였다.
○ 명(明) 나라 왕창(王敞)의 시에, “끊어진 언덕에서 백 척 누대로 천천히 오르고, 푸른 발 놀잇배로 한강에도 떠 놀았다. 술잔은 폭포 기울이듯 앵무(鸚鵡 술잔 이름)가 날고, 새가 노래 소리 보내니 꾀꼬리 소리를 듣겠네. 소동파[蘇老]의 퉁소 소리 적벽(赤壁)에서 들리고, 안기생(安期生 옛 신선)의 학 수레 단구(丹丘)로 지나가네. 모쪼록 돌을 채찍질하여 동해를 보려 하지 않으나, 운수(雲樹) 저 사이로 십주(十洲)가 희미하게 보이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푸른 물가 내려다 보는데, 견여(肩輿)로 성을 나가 함께 올라 구경하네. 먼 포구에 노을 밝으니 비단인양 얼기설기, 급한 여울에 석양 비치니 가늘게 금이 부서지네. 관악산이 푸른 빛 보내와서 자리 위에 들어오고, 양화(楊花)가 빛 물결 띄어 성 저쪽에 떨어진다. 함께 노는 여러 재상들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배 잇고 술 두루미 옮기니 흥 다시 깊어지누나.” 하였다.
○ “높은 누대 강에 임하여 청계산(淸溪山 과천(果川)에 있음) 마주 앉으니, 이 하루 함께 노는데 술 아니 가져오리. 어부들의 즐거운 마음 드리는 것 보아 알 수 있고, 시인의 호방한 흥은 써 놓은 것에서 볼 수 있다. 횃불이 환하니 돌아가는 길 늦었는데, 밤 피리 저 메아리 여관에 들자 희미해지네. 취하여 누으니 미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여, 바로 독록(獨鹿 술 그릇)으로 가서 선이주[仙梨] 찾아보네.”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큰 밧줄로 배를 끌어 얕은 물가 가르고 나가, 고관들 자리 정하고 거울 속에 앉았네. 노는 고기 물 위에 나오니 옥이 뛰는 듯, 밝은 달[好月] 산에서 엿보니 금이 솟아오르네. 술기운 넘치니 남은 추위 몸에 배어오는데, 횃불 연기 가로지르니 산이 반쯤 그늘지누나. 갠 날 보면 한강수 천 길은 깊은데, 오늘의 즐거운 마음 얼마나 깊을런지.
○ “동쪽으로 나오는 그 동안 많은 산천 지났는데, 가는 곳마다 필연(筆硯)이 소용됐네. 먼 곳 노니니 글 건장해야 하고, 좋은 곳에서 흥 나면 적어 남겨야 하는 법. 짐승 모양 화로에 향내[香煙] 풍기니 옷도 함께 향기롭고, 깊은 대문에 푸른 기운 엉기니 바라보아도 희미하네. 이 세상과 저 영주(瀛洲)는 원래 다른 것, 날아 오르매 교리(交梨 신선이 먹는 과실)를 물을 필요없네.” 하였다.

반송정(盤松亭)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소나무가 서리고 굽으며 둘러 그늘져서 수십 보(步)를 덮었는데, 고려 왕이 일찍이 남경(南京)에 거둥하다가 이곳에서 비를 피하고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본조(本朝 이조) 초기까지 있었다.
○ 고려조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푸른 솔 저 푸른 솔 길가에 났는데, 두어 그루 그늘 서로 이으니 덕있는 이에게 이웃이 있는 듯하네. 큰 줄기 올라가서 서린 모양 용인 듯, 꿈틀꿈틀 달아나고 굽혔다 다시 폈네. 가는 가지 멀리 뻗어 푸른 장막 펼쳤는데, 햇볕을 가로막아 서로 의지했네. 속에는 벽력(霹靂)을 감춘 듯 태음(太陰)을 기르고, 겉 껍질[莓蘢] 벗겨지고 떨어져 쭈글쭈글 비늘 생겼네. 태고 옛적 나고 자라 연대(年代)를 알 수 없는데, 도끼에 찍히지 않고 꺾여서 섶이 되지도 않았네. 심고 자란 것 응당 조화에 의지하였을 터이니, 지키고 보호하는데 지금은 신이 있는 줄 알겠다네. 내 지금 여기 오니 때마침 더운 날인데, 남풍이 낯을 스치고 티끌 불어 날리네. 말 안장에 기대어 맑은 그늘 아래 누우니, 어느새 찬 기운 생겨 온몸에 가득하네. 함께 앉은 나무꾼 4ㆍ5명 있는데, 그 중에는 우스개 소리하고 많이 아는 사람도 있네. 그 사람 하는 말이 먼 옛날 그 언젠가, 임금님 비 피하기 진(秦) 나라 황제 같이 했다네. 그래서 이 나무 봉(封)하여 장군으로 삼고, 지키는 이 대대로 녹봉 받아 임금 은혜 입었다네. 내 이 말 듣고서 근거 없는 일이라 웃었더니, 돌이켜 생각하면 속으로 슬프기도 하구나. 우연히도 저 곳에서 소나기를 만난 탓에, 수목이지만 오히려 특별한 대우 받았네. 그대들 부질없이 맹랑한 말 하지 마소. 이내 몸 여러 대 두고 이 왕조의 신하라네.” 하였다

화양정(華陽亭)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에, “화산(華山)의 동쪽 한수(漢水)의 북쪽에 들이 있는데, 토지가 평평하고 넓으며 길이와 넓이가 10여 리는 된다. 뭇 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둘렀다. 태조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신 처음, 이곳을 목장(牧場)으로 삼았다. 임자년에 주상전하께서 사복제조 판중추원사(司僕提調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과 이조 참판 정연(鄭淵) 등을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樂天亭) 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는데, 주부(主簿) 조순생(趙順生)이 그 일을 모두 주관하고 와서, 그 자세한 것을 나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대와 정사(亭榭)는 모두 그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정자에만 이름이 없어서 되겠는가 하고 인하여 주서(周書) 중의 말을 화산 남쪽에 돌려보낸다는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이름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하늘에 응하고 사람에 순하여, 집을 미루어 나라를 삼았으며, 열성조께서 서로 계승하여 무(武)를 쉬고 문을 닦으며, 말을 목장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놓아 먹이니, 그때에 맞게 한 것이다.” 하였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한가할 제 말이 가는 대로 홍진(紅塵) 밖에 나오니, 저 멀리 들판에 풍경이 새롭네. 하늘에 닿은 먼 산은 푸른 것이 그린 눈썹 같고, 비 온 뒤 방초(芳草)는 푸르름이 이부자리 같네. 꾀꼬리 오르락 내리락 아침 햇볕에 울고, 소와 말 부산하게 사방[四垠]으로 흩어지네. 호탕한 봄바람에 3월도 저무니, 술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경치 구경하세.” 하였다.

낙천정(樂天亭) 살곶이[箭串]에 있다.
○ 변계량(卞季良)의 기문에, “낙천정은 우리 주상전하가 때로 구경하고 놀던 곳이다. 전하(태종)께서 왕위에 있은 지 19년 가을 8월에 우리 주상전하께 선위(禪位)하고 다음 농한기를 이용하여 나와서 동교(東郊)에 유람하였다. 한 언덕이 있는데 높은 곳이 불쑥 솟아 형상이 가마 엎은 것 같으니, 대산(臺山)이라 명명하였다. 올라가 사면을 돌아보면 큰 강이 둘러 소(沼)가 되어 푸르게 물결치며 잇따른다. 연이은 봉우리와 첩첩한 멧부리가 서로 나타나고 겹겹이 나와서 언덕을 둘러싸고 마주보는데, 형세가 별들이 향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경치 좋은 곳이다.
전하께서 명하여 이궁(離宮)을 언덕 동북쪽 모퉁이에 짓게 하고, 풍우를 가리게 한 다음 드디어 정자를 언덕 위에 짓고, 좌의정 박은(朴誾)에게 명하여 정자 이름을 짓게 하였다. 박은이 《주역》 〈계사(繫辭)〉의 ‘낙천(樂天)’이란 두 글자를 취하여 드리니, 대개 전하의 한 일을 총괄하여 이것을 정자 이름에 붙이고, 또 지금의 즐거움을 뜻한 것이다.
신(臣) 계량(季良)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기록하게 하였다. 신 계량이 가만히 생각건대, 하늘이라는 것은 이치 뿐이요, 낙이라는 것은 애써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치에 맞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태극의 진리와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의 정기가 묘하게 합하고 엉기어 사람이 태어나게 되니, 천리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은 같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뭇사람들이 태어나매 기품이 박잡하고 물욕이 가리는 것이니, 힘써서 천리를 따르려 하여도 또한 될 수 없거든 하물며 자연히 이치에 맞기를 바라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신 바탕으로 만물에서 으뜸으로 태어났으며, 청명하신 몸으로 덕성(德性)을 항상 활용하시니, 이래서 그 행하시는 일은 어느 것이나 천리의 유행(流行)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일찍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는, 신의모후(神懿母后)가 돌아가심을 슬퍼하여 인사를 모두 물리치고 제릉(齊陵 신의왕후의 능) 곁에 시묘 살았으며, 전 왕조의 말년에 임금은 혼암(昏暗)하고 신하들은 서로 해치며 우리 태조를 모해하여, 화가 매우 급박하였을 때에는, 의를 주창하여 나라를 세우고 태조를 천승(千乘)의 높은 자리에 추대(推戴)하였다. 무인년에 권신(權臣)이 우리 태조의 편치 않음을 틈타서 어린이를 끼고 난을 꾸밀 때에는, 기미를 알아 섬멸하고 제거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히 하였으며, 여론이 전하를 추대하여 세우게 되었지만 상왕(上王 정종(定宗))에게 양보하였으니, 맏이를 높인 것이다.
즉위한 후로는 항상 태조를 조석으로 모시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며, 병술년(태종 6년)에는 왕위를 사퇴하려 하니,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려는 뜻을 이루려 함이었다. 군신(群臣)이 죽기를 불사하고 고집하고 태조도 힘써 중지시켰다. 그 후 3년 되는 무자(태종 8년)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니,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초상 중에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부묘(祔廟)할 때에는 장마비가 내려서 전하께서 염려하였는데 전날 저녁에 천지가 깨끗이 개었으며, 일을 끝낸 3일 만에 비가 다시 왔으니, 하늘이 전하의 효성을 도와준 것이다. 상왕께 우애와 공경을 다하되 오래도록 더욱 돈독하게 한 것은, 서책 중에 실린 옛날 사실에도 일찍이 없는 일이며, 회안군(懷安君)을 석방하고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니, 이것은 대개 순임금이 그 아우 상(象)을 살린 일을 따르고, 주공(周公)이 법대로 행한 것을 본받지 않으려 한 것이었다. 왕씨의 후손을 남겨 두어서 편안히 생활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와 국가를 공(公)으로 삼는 천지 같은 도량으로서, 곧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이 혁명하고서도 기(杞) 나라와 송(宋) 나라를 남겨둔 의리이며, 대국을 예절로 섬겨서 두 번이나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았으며, 천자가 매양 전하의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였다. 또 작은 나라를 사랑하되 인(仁)으로 하니 50년 간이나 큰 해가 되던 왜구[海寇]가 이마를 조아리고 예물을 바치며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또 궁정에 계실 때는 좋은 얼굴로 화목하고, 제사를 받들 때는 엄숙하게 공경을 다하며, 충직(忠直)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며, 간하는 말을 좇고 학문을 좋아하며, 검박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되,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겼다. 무릇 심신에 있어 행사에 나타나는 것이 순수하여 한결같이 이치를 따르니, 역시 노력하여서 된 것이 아니요, 대개 우리 전하의 천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왕위에 계신 20년 간에 사방이 한결같이 평안하고 창고가 부유하고 충실하며, 백성은 전란을 당하지 않고 하늘은 감로(甘露)를 내려서 지극히 태평스러운 것이 전고에도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천리를 따르면 자연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선위 하실 때에는 춘추 아직 늘그막에 이르지 않았고, 건강이 일을 폐지할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며, 또 형세에 의하여 부득이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소 신하들이 궁정에 서서 통곡한 것이 수일간이었지만, 마침내 마음을 돌리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왕위를 사양하기를 헌신짝 벗어 버리듯 하니, 역시 고금 제왕(帝王)에 아직 있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는 총명ㆍ효제하고 온인(溫仁)ㆍ근검하여 모든 일에 명을 받아 부탁하신 중임을 이어 받드니, 전하의 근심을 덜 만하며, 낙천정을 짓게 된 까닭이다.
신이 이 정자의 경치를 보니, 봄바람이 화기를 불어오면 아름다운 초목이 다투어 자라서 붉고 푸른 색이 깔리고 덮이며, 여름철 복중이 되어 대지가 화롯불처럼 뜨거울 때는 맑은 바람이 자리에 가득 차며, 가을이 강산에 찾아오면 밝은 거울과 비단 병풍이 좌우에 비치고 어울리며, 퍼붓던 눈이 처음으로 개는데,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면 천 리가 한 빛이다. 우리 전하께서 상왕(정종(定宗))을 모시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부탁하는데, 주상전하께서 그 사이에 주선하여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며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하여 즐거워하니, 천하의 즐거움이 다시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대개 우리 주상전하께서 즐거워하는 것은 천리(天理)요,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천위(天位)니, 저 순(舜)이나 우(禹)가 거기에 관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 관한 큰 계책이야 어찌 잠시인들 마음에 잊으랴. 그리고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 뛰논다는 것은 도의 큰 것이요, 《주역》 대축괘(大畜卦)에서 말한 산이나 감괘(坎卦)에서 말한 물은, 어진 이와 지혜 있는 이가 좋아하는 바이며, 하늘이 위에서 운행하는 것은 쉼 없는 기상이 나타남이고, 대지가 아래에서 고요한 것은 후덕한 형상이 현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는 화평한 모습으로 등람하여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잘 합하여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글이나 말로 그 만분의 1이나 형용할 수 있겠는가.
신이 글로 쓰는 것은 전하께서 천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여러 행사의 사실에 드러나는 것인데, 이러한 행사의 사실에 드러나는 것은 신하와 백성들도 함께 아는 것이다. 그러면 그 천성의 참됨을 보고 느껴 흥기하여 각기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여기고, 각기 그 어른을 어른으로 여겨서 인륜의 도를 다하여, 전하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은 풍속 교화의 아름다움이 저 우순(虞舜)이나 주(周) 나라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왕업(王業)의 영원함이 곧 높은 산 깊은 강물과 더불어 함께 하여 오래도록 다함이 없을 것이니, 아! 성대하도다.” 하였다.

칠덕정(七德亭) 곧 한강의 하류 백사정(白沙汀)에 있는데, 세조가 자주 거둥하여서 군대를 사열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
망원정(望遠亭)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데, 정자는 원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희우정(喜雨亭)이었다. 성종 갑진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고쳐 짓고 지금 이름으로 하였는데, 매해 농사를 살필 때 및 수전 연습[水戰]을 볼 때에 항상 이 정자에 거둥한다. 변계량(卞季良)의 〈희우정기(喜雨亭記)〉에, “용산의 입석(立石) 마을은 세상에서 놀기 좋은 강산이라고 말한다. 도성에서 겨우 몇 리쯤 되는데, 효령대군이 별장을 두었던 곳이다. 뒤에 한 언덕이 있으니 높고 꿈틀꿈틀하여 형상이 용이 서린 것 같은데, 그 위에 정자를 지으니 휴식하는 장소로 삼기 위하여서이다. 군후(君侯)가 계량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상전하께서 일찍 수레를 타고 농사일을 순시하며, 이 정자에 올라 신에게 주식(酒食)과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그때 한창 파종할 철에 비가 흡족하지 못하였는데, 술을 반쯤 들자 비가 와서 종일토록 좍좍 내리니, 정자 이름을 희우(喜雨)라고 하사하였다. 신이 감격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우리 성상께서 하사한 것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이미 신 부제학 장(檣)으로 하여금 희우정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쓰게 하여 집 벽에 걸었는데, 그대가 글을 지어 기록하라.’ 하였다.
하루는 군후를 모시고 가서 오르니, 정자의 제도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은데, 화악(華岳 백악산)이 뒤를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 흐르며, 서남쪽의 여러 산이 창망(蒼茫)하고 아득하여 구름과 하늘과 안개와 물 밖에 저 멀리 보일락말락하였다. 굽어보면 고기와 새우를 또렷이 셀 수 있는데, 바람 실은 돛과 모래 위에 새들은 바로 자리 아래서 왕래하며, 천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잔과 노반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풍악 소리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 황홀하기가 날개를 끼고 푸른 바다에 오르는 것 같으며, 호연하기가 바람을 모아 신선 경지에 노는 것 같아서, 눈이 아찔하고 모발이 곤두서는데 모든 생각 잊고 말없이 오래도록 있다가 돌아왔다.
일찍이 생각건대 사람과 천지는 원래 일체(一體)이다. 그러기 때문에 말하기를,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 하였으니, 한 마디 말 한 가지 생각의 미세한 데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사람이 서로 느끼는 기틀이 분명하여 속일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덕은 대소가 있고 지위는 고하가 있으며, 감통(感通)하는 효험의 넓고 좁음과 더디고 빠름이 따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감통의 묘함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제왕의 직책이요 성인(聖人)의 사업인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세상에 다시 없는 자질로 성인의 학문을 계속하여 밝혀서, 중과 화의 덕을 지극히 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하는 효험을 극진히 한 것이니, 이야말로 넓고 커서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이 일은 특히 그 중에 한가지를 나타낸 것뿐이다.
대개 우리 전하의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은 안에 깊이 쌓여 있는 것으로서, 하루 아침 교외에 나가서 농사짓는 것을 보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 생각이 일어나서 그칠 줄을 모르게 된 것이니, 하늘의 감응이 시각을 어기지 않음도 여기서 온 것이다. 전하의 지극한 어짊과 후한 은택은 바로 이 비와 함께 흘러 퍼지고 널리 넘쳐서 천지간에 충만하여 근심하던 자가 기뻐하고 병든 자가 낫는 것이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어찌 그 생생하는 본 성품을 이루지 못함이 있겠는가. 희우로 정자를 이름 지은 것은 하늘이 비를 내려줌을 감사하여 잊지 않으려 하는 까닭이다.
아! 저 진(秦) 나라 한(漢) 나라 이후로 중화의 도에 병든 자가 많아서 민물(民物)이 시들고 천지가 거칠어졌으니, 슬퍼할 만하도다.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은택을 입는 자는 금수나 초목의 미물(微物)까지도 어찌 영광이요 다행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푸른 띠를 띠고 붉은 자락을 끌면서 조정 위에 몸을 두어서 특별히 돌보아 주심을 받은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참으로 천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인 것이다. 군후는 또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높은 지위와 부귀하기가 비할 데 없고 깊이 전하의 우애를 받음에 있어서이겠는가. 더구나 전하께서 제후의 자리에 계시면서 군후에게 이 정자에서 술을 주어 조용히 주고 받기를 잠저(潛邸)에 계실 때나 다름없이 하니, 군후의 영광이야말로 붓이나 글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 전하의 우애하는 덕이 천성에 근거하고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으로, 대개 자신이 억조 신민의 주인이 됨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아! 지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후는 겸공(謙恭)하고 온후하여 부귀한 자리에 잘 거처하면서 거의 교만하고 자랑하는 기운이 없으니, 종실(宗室)에 모범이 되고 왕가(王家)를 호위하여 전하의 우애가 이렇게 지극하게 되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명승은 이것이 천지 개벽 때부터 있은 것인데, 어찌 오랜 동안을 감추어져 있다가 오늘에 와서야 알려지고 빛이 나는 것인가. 이것은 군후가 몸은 비록 명예와 부귀 중에 처해 있지만, 그 높이 세속에서 벗어난 생각이 일찍이 구학(丘壑)과 강호(江湖)의 사이를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천지의 주인이 이것을 주어서 위로하는 것이다.
산천 풍경의 아름다운 것으로 말한다면 아침 저녁과 4계절의 변화하는 모양이 병든 몸이기는 하지만 다른 날 다시 군후를 모시고 이 정자에 놀면서도 군후를 위하여 적을 수 있겠기에, 여기서는 조잡한 글로 군후께서 비루하게 여기지 않음에 대해 우러러 보답한다. 다만, 성상께서 정자에 이름을 붙인 본의에 대하여는 발명한 것이 없는데, 이것은 소라 껍데기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털끝으로 천지를 그리려 하는 일과 같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문자를 빙자하여 성명을 그 사이에 붙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을 알아줌이 아니겠는가. 반딧불의 작은 불빛이 해나 달의 빛을 의지하여 오래 있고 초목의 미미한 것이 천지에 붙어서 썩지 않음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드디어 흔연히 글을 쓰고 또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날아갈 듯한 새 정자, 붕새처럼 높이 앉았네. 누가 지었나, 어진 군후라. 임금이 서교(西郊)에 나가시니, 놀려함도 아니요 사냥함도 아니었네. 백성들 바야흐로 파종할새 밭에 가뭄 들어 염려하였네. 우리 임금 정자에 계시니, 때마침 단비 잘도 내렸네. 우리 임금 군후(君侯)에게 잔치 베푸니, 북소리도 은은하네. 정자(亭子) 이름 하사하니, 그 영광 전에 없던 일. 군후 머리 조아리며, 성덕을 하늘처럼 여기네. 군후 머리 조아리며 우리 임금 만년 살기 바라네. 문인에게 부탁하여, 영구히 전하려 하였네. 신이 절하고 글 지으니, 여러 선비들보다 앞섰네. 화악(華嶽)을 쳐다보니, 돌에 새길 만하네. 이 칭송하는 글 새겨, 천고에 밝게 전하리라.”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푸른 솔 깊은 곳에 정자 그윽한데, 배 대고 올라오니 취한 눈 밝아지네. 나루터의 풍파는 언제나 진정되려나, 바다 어귀의 집 같은 저 물결 언제 거두려나. 일만 집 촌락은 남쪽 포구에 잇닿았고, 일백 치첩(雉堞) 산성은 강 위에 버티고 있네. 이 경치에 넓은 회포 마음 놓고 한 번 취하리니, 덩굴 사이 밝은 달 물가에 비쳐도 좋으리라.”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저물녘에 높은 누대에 오르니, 좋은 풍광 오래 즐기며 웃는 소리 끊이지 않네. 언덕 위의 새 버들잎 강 나무와 함께 그늘지고, 물가 안개 가볍게 날아 들 구름 따라 뜨네. 난간에 의지해도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잡으니 이 밤의 놀이 참으로 좋구나. 돌아오는 길 도성 불빛이 점점 가까운데, 바다 저 동쪽엔 은빛 달 떠오르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응당 응거(應璩)ㆍ유정(劉楨)과 같이 즐거운 놀이 마련하고, 윤건(綸巾)과 우선(羽扇)으로 고운 물가 내려다보네. 유리빛 그림자 움직이니, 고기와 용이 희롱하고, 논이 비었으니 기러기와 따오기 도모하네. 두 언덕의 행인들은 나루터 가느라 바쁘고, 몇 척의 상선(商船)은 가을 바다에 떠 있네. 달 밝으면 소상강 신(神)의 비파 들을 것 같으니, 술집에 막수(莫愁 기생 이름) 있는 것 무엇이 부러우리.” 하였다.
○ “자라 머리에 집을 지으니 먼 형승(形勝) 들어오는데, 창에서 보이는 것 새 병풍 둘러친 듯 하여라. 난간 앞에 바다로 가는 물 양화(楊花)의 흰 물결인데, 성 밖의 하늘에 닿은 듯 모악(母嶽)의 푸른 봉우리라. 작은 저자에 사람 돌아가니 채색 배 매여 있고, 먼 하늘에서 학 내려와 굽은 물가에서 퍼덕이네. 푸른 일산(임금의 일산) 옛날에 농사일 구경하였는데, 여기가 서교(西郊)의 희우정 그곳이라네.”
○ “천지가 넓고 넓어 아득히 끝이 없는데, 한 조각 누대에 취한 늙은이 누웠네. 지경이 봉성(鳳城 서울)에 연접하였는데 연수(煙樹)가 합하였고, 강이 큰 구렁으로 들어가 바닷길 통하네. 고기 잡는 노래 처량하니 귀한 손님 슬퍼하고, 임금 글씨 휘황하니 공장이들 수고했네, 어디선가 한가한 사람 노 저어 오니, 악군(鄂君)이 향기로운 이불 달밤에 펼치네.”
○ “이내 몸 동정호(洞庭湖) 사이에서, 천원(川原)의 좋은 풍경 구경하네, 거마는 옛 나루터에 헤매고, 높이 뜬 따오기 먼 산에 닿았네. 풍경은 봄ㆍ가을이 다르고, 하늘 모습 밤낮으로 좋아라. 한공(韓公)은 옹졸한 사람, 온수(溫水)에서 속절없이 낚시만 하네.”
○ “성문 밖 지척인데, 일 없이 놀려는 것 아니네. 강물은 참으로 도도히 흐르고, 인사는 진실로 아득하구나. 날이 맑으니 소ㆍ양도 저녁 알고, 서리 내리니 초목이 가을 되었네. 굽은 난간에서 풍악 소리 나더니, 갈대꽃 물가로 퍼져가네.”
○ “서호의 유람하던 곳, 형승(形勝)은 이 정자가 제일이네. 구름은 사곡(賜谷)을 이웃했고, 풍류는 영화(永和)와 같네. 도성 사람들 절경이라 말하는데, 왕자가 별장 지었네. 이 세상의 그림 그리는 이, 저 모습 그릴 수 있는가.” 하였다.

영복정(榮福亭) 서강(西江) 북쪽 언덕에 있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장이다. 세조가 일찍이 거둥하여 손수 ‘영복(榮福)’이란 두 글자를 써서 정자의 편액으로 하고 이어 영일세 복백년(榮一世福百年 한 세상에 영화롭고 백 년에 복 받는다는 뜻)이란 여섯 글자로 그 뜻을 해석하여 하사하였다.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안국방(安國坊) 집 서쪽 동산에 지었는데, 성종이 친히 왕림하여 ‘풍월(風月)’이란 두 글자를 하사하여 편액으로 하게 하고, 시 여섯 수를 지어 문신들에게 명하여 화답하게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문물이 태평한 세월 백 년 가운데, 공후(公侯)의 집 연못 정자에 또 봄바람 불어오네. 임금 글 하사하니 성신(星辰)인양 빛나고, 어사주 자주 내리니 우로(雨露)인양 풍성하네. 작은 물결 무늬져 오리처럼 푸르렀고, 온갖 꽃 점점이 단장하여 원숭이 같이 붉게 물들었네. 누대 앞 꽃봉오리도 은혜 받아 취한 것, 조회에서 물러나 소나무와 대나무의 주인옹(主人翁) 되네.” 하였다.
○ “열두 난간이 푸른 못 대하였는데, 높이 달린 금빛 편액에서 용의 광채 움직이네.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긴 천 년 승지(勝地)에, 버들 푸르고 꽃 피니 온갖 봄빛 향기롭네. 염막(簾幕)에 바람 풍기니 더위란 간 곳 없고, 지대(地臺)에 달 뜨니 은근히 서늘한 기운 생기네. 동평왕(東平王)의 선을 즐기는 일 어느 누가 허물 하리, 보잘것없는 식객 둔 맹상군(孟嘗君)을 어찌 일찍이 헤아리리요.”
○ “유리 같은 맑은 물 정자를 서늘케 하는데, 햇빛 반짝반짝 푸른 마름 뒤척이네. 쇠채로 줄을 골라서 비단 비파 울리고, 금구(金龜)로 술을 바꾸어 은병으로 보내오네. 밤 기운 서늘하니 연꽃에 달 비쳐 차고, 하늘이 맑으니 계수나무에 바람 풍겨 향기롭네. 일대의 이름난 왕자[維城] 그 모습 옥 같은데, 하간(河澗)의 예약으로 길이길이 강녕(康寧)을 누리길.”
○ “못 위에 줄줄이 잔무늬 물결지는데, 푸른 하늘 물 같고 구름 한 점 없네. 금 술 두루미 가는 그림자는 꽃 사이로 보이고, 옥 바둑알 울리는 소리 대 숲 너머로 들려오네. 동산 안 풍류 소리에 봄놀이 흥겹고, 귀한 손님 패물에 달빛이 아롱지네. 눈썹 사이엔 누른 햇무리 보이기도 하는데, 좋은 잔치 새로 베푸니 뺨 먼저 붉어지네.”
○ “당당한 저 시절 가고 찾고 하는 동안, 아름다운 경치 좋은 날에 구경할 마음 다시 생기네. 좋은 자리 골라 잡아 자리 펴니 꽃 기운 풍기고, 서늘한데 찾아내어 자리 옮기면 버들 그늘이 깊네. 악보 새로 편성하니 청탁음(淸濁音)이 나뉘는데, 전에 사들인 도서(圖書)엔 고금(古今) 일이 섞여 있네. 맑은 흥은 풍류가 담박(淡泊)을 겸하였으니, 작은 난간에 달 뜨면 외로운 술잔 벗 삼으리.”
○ “봄을 감춘 깊은 담에 따뜻한 연기 일어나니, 중국 사신이 하사품 가져 온 것 절하고 보내네. 비단 안장 철총(鐵驄)말은 버들 사이로 지나가고, 금방울 고운 비둘기는 꽃 흔들며 우네. 구중 궁궐 은혜도 중한데, 천상의 성신(星辰)은 지척간에 벌여 있다. 진중(珍重)한 성은(聖恩)에 응당 감격하여, 남산같이 만수무강하기를 마음속 깊이 축원하노라.”

『신증』 황화정(皇華亭) 두뭇개[豆毛浦] 북쪽 언덕 위에 있다. 연산군(燕山君)이 이 정자를 지어 놀이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지금 임금 초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다.
침류당(枕流堂) 한강 언덕에 있는데 경력(經歷) 이사준(李師準)의 별장이다.
○ 강혼(姜渾)의 시에, “인간 세상에 크게 숨은 한강 남쪽 늙은이, 조용히 거처하는 곳 성 밖의 침류당이네. 강산은 길이 돌아오지 않는 손을 짝하는데, 풍월은 참으로 무진장하구나. 솔 언덕에 새벽 일찍 학 앉은 나무 보겠고, 단풍 숲엔 저녁 늦게 낚시 배 매어두네. 오직 한 번 취한 그것으로 조물주에 보답하니, 풍당(馮唐)의 늙은 낭관 뉘라서 부러워하리.”
○ “한강 남쪽의 형승은 동방에서 이름났는데, 낚시질하는 저 늙은이 그 옆에 살며 주인 노릇하네. 강에 비 내릴 때는 붉은 잉어 뛰놀고, 산바람 지나면 흰 마름이 향기롭네. 문에는 속객(俗客) 없으니 그윽한 지경 이루었고, 술이 신이(神異)한 공 있어 취한 마을 들어가게 하네. 조물주 아마도 이 늙은이 편안케 하리니, 귀밑털 흩날리며 창랑에 노닌들 어떠리.” 하였다.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한강 저 강 위 제천정(濟川亭) 곁에, 그대가 지은 집 이 당(堂) 있네. 갈매기ㆍ해오라기 시름 잊고 함께 이웃하는데, 구름ㆍ노을 서로 벗하여 같이 숨어 사노매라. 동ㆍ서문 밖엔 사람들 길 다투는데, 서쪽 변방 산 앞에 손이 배 띄우네. 헛된 명성에 분주하는 것 무엇에 소용되리, 백 년의 생애를 늙은 어부와 함께 하리라.”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그대 경치 좋은 곳 찾아 푸른 강가 정했는데, 좋은 집 새로 지으니 조망(眺望)이 탁 틔었다. 벌린 멧부리 평평한 모래사장은 진정 생동하는 그림인데, 물오리 나는 해오라기 이 역시 풍류스럽도다. 주인은 높이 누웠으니 실컷도록 볼 것이고, 지나는 손 와서 놀 제 말이 그치지 않네. 언제나 벼슬 버리고 그대 따라가서, 반 삿대 맑은 강물에 가벼운 배나 띄워 볼까.” 하였다.
【역원】 노원역(盧原驛) 흥인문(興仁門) 밖 4리 지점에 있다. 청파역(靑坡驛) 숭례문(崇禮門) 밖 3리에 있다. 이상의 두 역은 바로 병조(兵曹)에 예속되었다. 보제원(普濟院) 흥인문 밖 3리 지점에 있다. 누대가 있는데 기로(耆老)들이 여기서 모여 술 마셨으며, 조말생(趙末生)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홍제원(洪濟院) 사현(沙峴) 북쪽에 있다. 누대가 있는데, 중국 사신이 옷을 고쳐 입던 곳이다. 이태원(梨泰院) 목멱산(木覓山 남산) 남쪽에 있다. 전관원(箭串院) 살곶이 다리 서북쪽에 있다.
【교량】 혜정교(惠政橋)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쪽에 앙부일구대(仰釜日晷臺)가 있다.
○ 김돈(金暾)의 명(銘)에, “모든 시설을 하는 데에는, 시간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주조하여 그릇을 만들었는데, 형상이 가마솥 같다. 바르게 둥근 테를 설치하였는데, 자(子)와 오(午)가 마주 선 것이다. 공간이 꺾인 데를 따라 돌아오니, 분각(分刻)을 기록한 것이다. 도수(度數)를 안에 새겼는데, 주천(周天)을 절반한 것이다. 신(神)의 몸을 그렸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서이다. 각(刻)과 분(分)이 소상한데, 햇빛에 비친 것이다. 길가에 설치함은, 보는 사람들이 모이게 함이다. 지금부터는,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 것이다.” 하였다.

대광통교(大廣通橋)ㆍ소광통교(小廣通橋) 모두 종루(鍾樓) 남쪽에 있다. 통운교(通雲橋) 종루 동쪽에 있다. 연지동교(蓮池洞橋) 통운교 동쪽에 있다. 동교(東橋) 연지동교 동쪽에 있다. 광제교(廣濟橋) 광통교 동쪽에 있다. 장통교(長通橋) 광제교 동쪽에 있다. 수표교(水標橋) 장통교 동쪽에 있다. 다리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척촌(尺村)의 수를 새겼는데, 빗물이 나면 거기에 의하여 깊고 얕음을 안다. 신교(新橋) 수표교 동쪽에 있다. 영풍교(永豐橋) 신교 동쪽에 있다. 대평교(大平橋) 영풍교 동쪽에 있다. 송첨교(松簷橋) 사헌부(司憲府) 서쪽에 있다. 영도교(永渡橋) 흥인문 밖에 있는데, 곧 개천(開川)의 하류이다. 제반교(濟磐橋) 살곶이에 있다.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다. 경고교(京庫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다. 홍제교(洪濟橋) 홍제원(洪濟院) 북쪽에 있다.
【시가】 운종가(雲從街) 곧 종루 서쪽 시가이다.
【불우】 흥천사(興天寺)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조 6년)에 우리 태조께서 명하여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정릉(貞陵)에 장사지내고 절을 그 동쪽에 지으니, 선종(禪宗 참선을 위주로 하는 불교의 종파)의 절이 되었다.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이 있다. 후에 능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절은 그대로 두었다. 세조 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달았다.
○ 한계희(韓繼禧)의 명(銘)에, “성신(聖神)하신 우리 임금, 일찍부터 불법(佛法)을 받들었네. 손으로 금륜(金輪)을 잡고, 하늘 받들어 정치하셨네. 근엄하고 조심하여, 잠잘 겨를도 없으셨네. 신인(神人)이 협력하고 화합하여, 영험ㆍ은혜 함께 이르렀네. 크게 깨달음 있어, 부처 인연 널리 퍼졌네, 사리(舍利) 분신(分身) 설치하니, 희한한 사실 나타났네. 세상 이목 경동(驚動)하고, 천지에 광채 빛나네. 신령한 상서 진동하니, 억천 겁에 없는 일이네. 임금 마음 기뻐하사, 큰 맹세로 발원하였네. 높은 화상[睟容] 그려 모시고, 불경 뜻 풀이하셨네. 열성조에 복 주시고, 만백성에 미쳤네. 국사 사업 영원하여, 억만 년 가리라. 부처님의 도가 넓어서, 막힌 것 모두 뽑아주네. 우리 임금 본받으사, 큰 자비(慈悲)로 널리 구제하네. 금을 부어 종 만드니, 일체 중생 깨우쳐 주려함일세. 고생 멈추고 혼미한 것 깨우침이, 오고 오는 영원한 세상까지.” 하였다.

흥덕사(興德寺)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 교리를 위주로 하는 불교의 종파)이다.
○ 권근(權近)의 〈덕안전기(德安殿記)〉에 “건문(建文) 3년(태종 1년) 여름에 태상왕(太上王 태조)이 명하여 터를 예전 사시던 집 동쪽에 정하고, 따로 이 새집을 짓게 하였다.
가을에 공사가 끝나니 신 근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그 사가(私家)를 광명(廣明)ㆍ봉선(奉先) 두 절로 만들었으니 나라를 이롭게 하려 함이었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국가를 대신 통치하게 되어 전대(前代)의 일을 생각하여 장차 이 집으로 절을 만들어서 영원히 대대로 나라를 복되게 하는 장소를 삼으려 하니, 위로는 선조(先祖)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종묘 사직이 영구히 견고하고 왕실의 계통을 그지없도록 전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정전에는 석가모니의 출산(出山)하는 그림을 걸고, 또 북쪽 문미에는 그 위에 시렁을 만들어 가운데는 밀교대장경(密敎大藏經) 한 부를 봉안하고 동쪽에는 새로 새긴 대자능엄경(大字楞嚴經) 판본을 두며, 서쪽에는 새로 새긴 수륙의문(水陸儀文) 판본을 간직하였다. 좌우로 곁채를 지어 참선하고 강론하기에 편리하게 하며 곁에 작은 집을 지으니 네모진 못을 내려다 보게 되고 주방ㆍ곳간ㆍ문간ㆍ행랑 등이 모두 제자리에 놓여졌다. 공(功)은 금장식[側金]보다 못하지만 발원은 온 누리[轉輪]에 두루하여 모르는 가운데 보탬이 되고 분명하게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은택을 한정 없이 펴고 국가를 무궁하게 전하며 마침내는 티끌 세상을 벗어나고 바른 깨달음[正覺]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대가 기문을 지어 후세에 전하여 만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지켜서 변함이 없게 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신 근이 물러나서 명을 받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적는다.” 하였다.
○ 서거정의 〈연당시(蓮塘詩)〉에, “작은 목 찰랑찰랑 잔 물결 푸른데, 연꽃 새로 피어 깨끗도 하구나. 천손(天孫)이 운금(雲錦) 베틀에서 짜낸 듯, 붉고 붉고 희고 흰 것 서로 비쳐 빛나네. 깨끗하고 높은 모습 진흙의 더러움 받지 않으니, 좋은 꽃들 마냥 풍류롭고 아름답다. 백발의 세속 늙으니 강남(江南)을 꿈꾸다가, 여기서 언뜻 이 꽃 보고 맑은 흥에 취하였네. 향기로운 바람 불고 불어 향기로운 안개 젖었는데, 난간을 의지한 저문 날에 두 소매도 젖었어라. 내 평생 꽃과 운치 죽도록 좋아하여, 사가(四佳)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10년이라네. 서로 만나매 상긋 웃으며 친구라 이름 부르니, 내가 꽃을 저버리지 않는데 꽃 어찌 나를 저버리리. 산중의 새로 판 못이 독보다 작은데, 화신(花神)이 벌써 신령한 종자 옮겨주기 허락했네. 내년 5월에 저 꽃들 만발하면, 벽통(碧筒)에 술 따라 3백 잔 마셔보려네. 그때 그대 술병 가지고 한 번 찾아오면, 노래 부르며 두 다리로 뱃전 두드려 보세나.” 하였다.

내불당(內佛堂) 인왕산(仁王山)에 있다.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흥복(興福)이다. 태조 때에 조계종(曹溪宗) 본사(本社)가 되었으며, 후에 절을 폐지하여 관청[公廨]을 삼았다. 세조 10년에 고쳐 짓고 원각사라 이름하였는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인왕사(仁王寺) 인왕산에 있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한 구비 임천(林泉)이 좋은데, 천 그루 수목도 맑구나. 끊어진 암벽(巖壁)에 이끼 끼어 푸르고, 그윽한 시내엔 절로 난 꽃 환하여라. 겹겹의 봉우리에 구름 엉겨 그림자 지고, 절반쯤 저 고개 위에 소나무 서서 소리나네. 세상 공명 꿈인양 생각 없는데, 게으른 습성 이래서 이뤄졌네.” 하였다.

금강굴(金剛窟) 인왕사 서쪽에 있다.
복세암(福世菴) 인왕산에 있는데 세조조에 지었다.
장의사(藏義寺)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신라가 황산벌에서 백제 군사와 더불어 싸웠는데, 장춘랑(長春郞)ㆍ파랑(罷郞)이 진중에서 죽으니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두 사람을 위하여 이 절을 지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시냇물 끊어졌는데 층층이 얼음만 쌓이고, 바람소리 요란하니 일만 구멍 울리네. 산 모습 겨울 되자 더 여위고, 눈빛은 밤에도 밝구나. 외로운 탑 달빛에 그림자 지고, 성긴 종소리 구름 밖에서 들리네. 분향하자 선실(禪室)도 따스한데, 단정하게 앉으니 마음 절로 맑아지네.” 하였다.
○ “범궁(梵宮)이 계곡에 빛나는데, 목탁소리 공중에서 높이 들리네. 탑[榻]을 둘러 향연(香煙)이 푸르고, 창에 비쳐 햇빛 밝다. 눈 쌓여도 소나무 절개 안 변하고, 얼음이 합하니 물은 소리 없네. 제호(醍醐) 맛 하도 좋아서, 입안[齒頰] 절로 맑아지네.” 하였다.

연굴(演窟)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다.
향림사(香林寺) 삼각산(三角山)에 있다.
○ 고려조 현종(顯宗) 경술년 난리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이 절로 옮겼다가, 7년 병진에 현릉(顯陵)으로 환장(還葬)하였으며, 9년에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다시 여기에 이안(移安)하였다가, 10년에 다시 현릉으로 모셨다.

석적사(石積寺) 삼각산에 있다.
청량사(淸涼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이자현(李資玄)이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에 있었는데, 예종(睿宗)이 남경(南京 지금 서울)에 순행하여 그 아우 자덕(資德)을 보내어 행재(行在)에 나오게 하여, 청량사에 머물게 하였다. 일찍이 불러 보고 양성(養性)하는 요결(要訣)을 물었는데, 심요(心要) 한 편을 드리니 왕이 감탄 칭찬하며 대우가 매우 후하였다.

중흥사(重興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중 보우(普愚)가 일찍이 절 동쪽 봉우리에 집 짓고 살며 태고(太古)라고 편액하고, 영가체(永嘉體)를 모방하여 노래 한 편을 지었다. 보우가 죽자 이색(李穡)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승가사(僧伽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 이오(李䫨)의 중수기에 이런 말이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을 보면, 옛날 신라 시대의 낭적사(狼跡寺) 중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하여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그리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라에 비쳤다. 국가에서 천지의 재변과 수재ㆍ한재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게 하였는데, 언제나 즉석에서 영험이 있었다.” 하였다.
○ 고려조 유원순(兪元淳)의 시에, “구불구불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 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 밝게 빛이 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香穗]에 잇닿았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 소리 경뇌 소리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고승(高僧)의 마음, 인간 세상의 명리(名利)란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 또 덩굴 더위잡네. 처마 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 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 명 고승(高僧) 있어, 관공(觀公)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승가의 법당 높은 데 의지했는데, 예전 놀던 일 계산하니 오랜 세월 지났네. 어느 날 또다시 그 선탑(禪榻) 가에서, 등잔불 돋우고 조용히 앉아 찬 밤을 지내 볼꼬.” 하였다.

삼천사(三川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문수사(文殊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 이장용(李藏用)의 시에, “성 남쪽 10리에 평평한 모래 희기도 한데, 성 북쪽엔 두어 줄기 중첩된 봉우리 푸르구나. 늙은 원님 거칠고 게을러[疏慵] 공사 일찍 파하고, 마음대로 나가 놀며 그윽한 자취 찾네. 양주(楊州) 하늘에 학을 타고 날기도 하는데, 가다가는 나귀 타고 화산(華山) 길을 지나기도 한다네. 벼슬길 그만두려 하나 어리석어 어찌 하리, 좋은 일 가시기 쉬우니 더구나 애석하도다. 누른 소매 호통치며 인도하나 너무나 속되고, 반가운 눈빛으로 대하니 높은 격조 있는 듯하여라. 구불구불한 비탈길 더위잡고 올라가니, 으슥한 수풀 고개 차츰 막혀지네. 절벽 저 골짜기 내려다보니 까마득하기만 한데, 높은 산마루에 올라가니 더욱더 움추려지도다. 긴 해는 높은 봉우리에서 겨우 두어 길인데, 구름다리 공중에 건너질러 몇 천 자나 되나. 나는 새 까마득 초(楚) 나라 하늘에 닿았는 듯, 넓은 들 분명하여 한강의 그림이네. 안개 끼지 않은 저 서쪽에 신선 마을 보이는데, 큰 강물 남쪽은 나루터로 통해 있다. 한 번 돌아 옮겨 서서 혼자서 탄식하노니, 팔방 잠시간에 둘러 볼 수 있는 듯하여라. 매달린 돌층계 들죽날쭉 90층 되는데, 옛날의 그 자취 어슴푸레 오르내린 신 자국이런가. 기이하다 세상엔 없는 청련궁(靑蓮宮)인데, 크게 슬기로운 진인(眞人)의 집이 여기라네. 석굴(石窟)이 크게 열렸는데 돌이끼 아롱지고, 수풀 속의 감실[林龕] 빛나는데 단청이 눈부시네. 그린 모습 완연히 복성(福城) 동쪽 같은데, 보배로운 앉음 금사자 등에 높이 있다. 바라보면 길한 지역 장자(長者)의 거처인데, 법계(法界)의 현관(玄關 불법으로 들어가는 입구) 열려 있는 줄 뉘라서 알았으리. 큰 자비는 분명 세상 번뇌 제거하는데, 한 움큼 샘물 흘러 내려 영액(靈液)이 피어 있다. 노는 사람 천룡(天龍)의 꾸지람 혹시라도 두려워서, 마실까 주문 외며 물그릇 한 번 던져 본다네. 연하(煙霞) 그림자 속에 외로운 탑이 푸른데, 종소리ㆍ불경 소리에 등잔불 밝게 비치네. 의연한 좋은 모임 보광(普光)을 옮기니, 응당 묘한 공양 있어 향적(香積)으로 오리라. 옛날 선왕이 어향(御香)을 올렸다는데, 지금도 중국 사신 와서 종사(宗社 나라의 종묘와 사직단)의 안녕 기원한다네. 가을 풍경 찾아내 마침 찾아드니, 중 있어 만류하며 저녁 산색(山色) 구경하라네. 처마 의지한 여러 산봉우리 옥인 양 높이 서 있고, 난간에 닿아 있는 먼 수풀들 비단같이 펼쳐 있네. 채소 음식 즐거이 들며 맑은 향기 배불리고, 다시금 부들 자리 빌려 앉아 편한 것 찾았노라. 이야기가 길어지니 조각달 깊은 문에 들어오고, 밤이 오래니 은은한 바람 잣나무를 울어 스치네. 하도 좋을사, 선탑(禪榻)의 고요하고 적막함이여, 불현듯 웃음 나네. 인생들 무어라 허덕이나. 쉽사리 의관 벗지 못함은, 혹시라도 죽백(竹帛)에 공명 정하려는 것이어라. 맑은 잠 왼통 동자의 깨우는 대로 맡기니, 붉으스레 아침 해가 떠오르네. 천태산[台崖]에 손 흔들어 부르는 사람 따라가려 하나, 여산[盧嶽]의 눈썹 찡그리던 사람이 부끄럽네. 진세의 속된 말이 청산을 더럽히니 그대여 싫어 마소, 일찍이 임금 말씀 쓰며 궁중에 들어섰다네.” 하였다.
○ 고려조 탄연(坦然)의 시에, “한 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가 저 스님[上人]따라, 고요히 앉아 참 즐거움 배우려나.” 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삼각산에 있다.
○ 권근의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왕도 정치의 먼저 할 바이요, 물건을 이롭게 하고 창생을 구제하는 것은 불교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인(仁)한 마음의 발동으로써 사랑하고 효도하는 정성이 자연 그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전의 덕이 높은 황제와 명철한 군왕의 도는 조(祖)를 높이고 종(宗 조상(祖上))을 공경하여 그 효도를 넓히며,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그 인을 넓혀서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 지극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것이 넓다고 할 것이다.
불가[佛氏]의 말에는,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가 한 일이 선하고 악함에 따라서 바퀴처럼 돌아 태어나게 되는데, 부처님은 자비를 베풀어서 고생을 없애고 기쁨을 주며 그 빠지는 것을 건져줄 수 있으니, 살아있는 이가 만일 부처님을 섬기고 중을 대접하여 죽은 이를 좋은 길로 인도한다면 죽은 이의 혼이 아귀(餓鬼)가 되었다가도 배부를 수 있고 괴롭다가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부처가 되어 길이 돌고 도는 보응(報應)을 면하며 살아 있는 이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여기서 효자 자손(慈孫)에서 우부(愚夫) 우부(愚婦)에 이르기까지 휩쓸려서 불도로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고,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하여 온 세상이 물결처럼[滔滔] 불도를 높이고 이것을 받드는데 수륙 무차평등(水陸無遮平等)의 모임은 그 법 중에서도 제일 성대한 것이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종 6년) 정월 을묘일에 주상께서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중[沙門] 신(臣)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국가를 맡아 다스리게 된 것은 오르지 조종(祖宗)의 적선[積慶]에 의하여서이니, 조상에 대한 보답을 위하는 일이라면 힘쓰지 않는 것이 없다. 또 생각하니, 신하와 백성들이 혹은 나라 일에 죽고 혹은 스스로 운명하였는데, 주관하여 제사드릴 이가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쓰러져도 구원하지 못하니, 내가 매우 민망스럽게 여긴다. 옛 절에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베풀어서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이 가서 자리를 찾아 보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 신(臣) 상충(尙忠)ㆍ양달(陽達), 중 지상(志祥) 등과 함께 삼각산에서부터 도봉산(道峯山)까지 보고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여러 절들이 있지만 진관사(津寬寺)만큼 좋은 데가 없습니다.’ 하니, 이에 주상께서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ㆍ지상(志祥) 등에게 명하여, 중들을 소집해서 공사를 시행하게 하였는데, 내신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을 들였다. 그달 경진일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2월 신묘일에 주상이 친히 왕림하여 세단(壇)의 위치와 차례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 또 행차하여 보았다.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는데 세 단은 모두 집을 3칸씩 지었으며, 중단과 하단 좌우에는 또 각각 목욕실 3칸 있고, 하단 좌우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8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곳간이 갖추어져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모두 합하여 59칸이며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그 제도에 맞았다.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이 또 친히 보시고, 정축일에 명하여 신 근(近)을 불러, ‘그 시종을 적어서 후세에 보여 주게 하라.’ 하였다.
신 근이 가만히 들으니, 인륜의 도는 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군왕의 덕도 효보다 큰 것이 없다 하니, 조종 제사의 예의와 추모 숭봉하는 법전은, 군왕으로서 근본을 보답하는데 무엇이 효보다 더하리요. 그런데 성인의 마음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하늘을 짝하여 교(郊)에서 제사드리고 상제를 짝하여 명당(明堂)에 임하시니, 높여 받드는 일이 극진하다 할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신 자질과 인효(仁孝)하신 덕으로 천명을 받들어 국가를 창건하시니, 공은 조종조에 빛나고 은택은 만물에 덮였으며, 선조를 받드는 마음이 주야로 더욱 정성스러웠다. 하늘을 짝하는 제사가 이미 극진하고 부처에 귀의(歸依)하는 마음이 또한 간절하여 우리 조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으로 불기(佛記)를 받고 묘과(妙果)를 깨달아 얻을 수 있게 하며, 그 은택이 주인 없는 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로운 은택을 입게 하시니, 성효(誠孝)의 감동하는 바가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 물건에도 미치며 친근한 데에서 소원한 데에 이르고, 어두운 데에서 밝은 데에 나아간다면, 금일부터 무궁한 후일에 이르기까지 그 공덕의 큼과 이택(利澤)의 영원함을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푸르고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연못가의 누대 둘러쌌는데, 땅 궁벽하고 하늘 깊은 곳에 동부(洞府) 열려 있다. 시내는 옥이 둘린 것같이 굽이치고, 산은 구름 솟은 것같이 형세가 높기도 하네. 중을 도태(陶汰)한 원위(元魏)는 오히려 웃음만 자아내고, 불도에 혹한 소량(蕭梁)은 슬플 것도 못 된다네.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김이 없으면 마음 자연 바르게 되는 법, 누가 인연 깨달은 이고 누가 여래(如來)이더냐.” 하였다.

도성암(道成菴)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원찰(願刹)이다.
【사묘】 백악신사(白嶽神祠) 백악 마루에 있는데 매해 봄ㆍ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낸다.
○ 중악(中嶽) 삼각산을 여기 와서 제사 드리는데 삼각산 신은 북쪽에 있어 남향이고, 백악산 신은 동쪽에 있어 서향이다.

목멱신사(木覓神祠) 목멱산 마루에 있는데 매해 봄ㆍ가을에 초제를 지낸다.
한강단(漢江壇)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매해 봄ㆍ가을에 제사를 드린다.
【고적】 장한성(長漢城)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중요한 진영(鎭營)을 설치하였다. 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던 것을 신라에서 군사를 출동하여 회복하고 장한성 노래를 지어서 그 공적을 기념하였다.
대성락영(大星落營) 용삭(龍朔) 원년(신라 문무왕 1년) 봄에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신라의 정병이 모두 백제 가까이에 있어 안이 비었으니 공격할 만하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하여 수륙으로 함께 나아와서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서쪽에 진치고, 말갈은 동쪽에 주둔하여 공격하기 열흘이 넘으니 성안에서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는데, 문득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또 뇌우(雷雨)가 오며 번개 치니 적들이 겁내고 놀라서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신혈사(神穴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에 현종(顯宗)이 중이 되어 이 절에 거처하였는데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자주 사람을 보내어 해치려 하였다. 절에 늙은 중이 있어 방 안에 굴을 파고 숨긴 다음, 그 위에 평상을 두어서 불측한 변을 방지하였다. 하루는 왕이 우연히 시냇물 흐르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한 줄기 시냇물 백운봉(白雲峯)에서 나오니 만 리 먼 바다에 길이 절로 통하네.” 하였다. 잔잔하여 바위 아래 있단 말을 마소. 많은 시일 안 가서 용궁(龍宮)에 이른다네.” 하였다.

면악(面嶽) 고려조 숙종(肅宗) 9년에 최사취(崔思諏)ㆍ윤관(尹瓘) 등을 명하여 남경(南京)으로 삼을 장소를 찾아보게 하였다. 사취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노원역(盧原驛)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지에 가서 산수의 형편을 살펴 보았는데 도읍지를 삼기에 적당하지 않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 남쪽에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글에 부합(符合)하니, 그 주간(主幹) 중심지 임좌병향(壬坐丙向)되는 곳에 형세를 따라 도읍을 삼고, 지형에 의하여 동쪽은 대봉(大峯)에 이르고 남쪽은 사리(沙里)에 이르며, 서쪽은 기봉(岐峯)에 이르고 북쪽은 면악에 이르게 경계를 정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지금 생각하면 면악은 백악인 것 같다.

추흥정(秋興亭) 옛 터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에 “용산(龍山)은 원래부터 강산의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며, 강에는 배가 운행하고 육지에는 수레가 통행하여 이틀 밤낮이면 경도(京都)에 이를 수 있으므로 귀인들이 많이 별장을 마련하여 두었다. 전(前) 봉익(奉翊) 김공(金公)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휴양한 지 오래였는데, 우연히 사는 집 동쪽에서 한 언덕을 발견하니 높고 바르며 등이 굽어서 형상이 배를 엎어놓은 것 같았다. 드디어 정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솔 베어 서까래를 걸고 속새 베어 지붕을 덮었다. 땅이 높고 모진 것은 평평하게 하고 수목이 빽빽하고 가리운 것은 베어내니, 두루 다니며 사면으로 바라보아도 좋지 않은 것이 없다. 이에 정자 이름 지어 주기를 김비감(金秘監)에게 청하여 추흥정(秋興亭) 세 글자를 써서 현판을 달고,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므로 내가 그 한두 가지 그럴 듯한 것을 찾아서 이렇게 적는다.
천지의 운행은 다함이 없고 사시의 경치는 같지 않은데, 우리의 즐거움도 한 가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다. 내가 이 정자를 생각해보니 봄날이 따스하고 동풍이 화창하게 불어오면 숲 속의 꽃과 들판의 풀이 붉게 새로 피고 푸르게 깔리는데, 이때에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서성거리면 유연(悠然)히 공자가 ‘나는 증점(曾點)의 기상을 허여(許與)한다.’는 마음이 있으며 뜨거운 볕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쇠라도 녹이고 돌이라도 녹일 것 같으며, 천지가 이글이글 타는 화로 같아지는데, 이때에는 나무 그늘을 찾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옷깃을 풀어 헤치고 산보하면 한만(汗漫)하기가 열어구(列禦寇)의 신선놀이와도 같다. 또한 찬 기운이 엉겨서 얼고 외로운 기러기 구름 속에서 울고 가면 등륙(滕六)이 재주를 피워 강과 하늘이 한 빛이 되는데, 이때에 일엽 편주 저어 오가면 높은 생각 맑은 운치가 섬중(剡中)에 가는 것과도 방불하다. 그런데 비감(秘監)은 어찌하여 가을의 흥치[秋興]만을 취한 것인가.
대개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는 사람들이 모두 괴로워하는데, 오직 봄철의 화창함과 가을철의 맑음이 사람에게 적합하다. 그렇지만 봄철의 화창한 기운은 사람들을 게을러지게 하기 쉬운데, 무더위가 명령을 거두고 맑은 가을 소리가 음률을 맞추어 들려오게 되면 하늘 끝 땅 다한 데까지 청명하고 환하게 트이니, 그 기운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비록 공명과 부귀 같은 사람의 마음을 태우는 것이라도 변하여 청량하게 되는 것이다. 사시의 경치가 가을처럼 좋은 것이 없고, 가을 경치가 이 정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비감의 이름 지은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공은 나이 장성해서 중국에 벼슬하였으며, 교제한 이들은 모두 부하고 귀한 친구들이요, 놀고 본 곳은 모두 매우 굉장하고 사치스럽고 넓고 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마음속에 거두어 가지고 나와서 쇄락(洒落)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대개 맑은 자이다. ‘추흥’이라는 현판을 거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봄ㆍ여름ㆍ겨울철의 이 정자에서의 좋은 일은 그대가 곡진하게 말하여 숨김이 없으면서 가을 흥치의 좋은 것은 말만 하고 드러내지는 않으니 어쩐 일인가.’ 하였다. 다른 날 김비감과 함께 복건(福巾)과 청려장(靑藜杖)으로 공을 따라 이 정자에 올라서, 무릉(茂陵)의 가사를 노래하고, 안인(安仁)의 부(賦)를 화답하게 된다면, 가을 흥치의 설명은 그 좌우에서 취하여 쓰매 그 근원을 알게될 것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농가에서 고생 고생 쉬는 일 없더니, 곡식이 익게 되면 풍년을 기뻐하네. 정자 위에서 내가 이 즐거움 같이 하는데, 산 속의 사람들도 서로 함께 놀 수 있네. 들바람 쌀쌀하게 검은 모자에 불고, 강비는 부슬부슬 낚싯배에 뿌리네. 어찌하면 그대 따라 한 번 돌아가서, 정자에 올라 구경하며 10년 수심 삭여보나.” 하였다.

담담정(淡淡亭) 옛터가 삼개[麻浦] 북쪽 언덕에 있는데,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었다.
○ 이극감(李克堪)의 시에 “저녁해 서쪽으로 떨어지고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아득한 강산에 한없는 수심이어라. 천지가 다함이 있어 나도 늙었으니, 이 몸도 나중에는 백구 뜬 물가에서 지내려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찬 구름 막막하고 강물은 유유한데, 양쪽 언덕의 푸른 단풍[楓]나무 끝없는 수심일세. 외로운 등잔 마주 대한 채 밤중이 지났는데, 강에 가득한 비바람에 푸른 물가 어두워지네.” 하였다.

중흥동석성(重興洞石城)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있는데 주위가 9천 4백 17자이다. 성 안에 산이 있어 높이 솟은 것이 노적 같으므로 세상에서들 노적산(露積山)이라 한다.
『신증』 쌍계재(雙溪齋) 옛터가 성균관 반수(泮水) 동쪽에 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 강희맹(姜希孟)의 부(賦)에, “서울 왼쪽 경계요, 반궁(泮宮)의 북쪽 언덕이네. 풍운은 모여 흩어지지 않고, 동학(洞壑)은 아늑하고도 넓도다. 울창하게 많은 가지 아름다운 수목이요, 아롱지게 덮인 돌은 검푸른 이끼일세. 냇물이 갈려 흐르니 비녀 다리 인 듯, 돌에 고여 서려 있는 빗물 받으니 도는 듯. 잔잔한 소리 옥가락지 울리는 듯, 콸콸 흐를 제는 여러 사람 들레는 듯. 골 안에서 나온 지 얼마드냐. 글의 물결 윤색하여 인재를 기르도다. 범상하고 용렬한 자 흘겨보고 알지 못하여, 이 좋은 지역 풀 속에 묻혀 있게 하였네. 진정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겼음은, 어질고 준수한 이 기다려서 열어 주려 함이로세. 여기에 금헌(琴軒) 선생은, 높은 관원의 자손이요 화려한 집안의 맏이로세. 어지러운 세상 싫어하고 도를 즐기며, 정신이 명랑하고 기상이 빼어났다. 옛 책 읽기 즐겨하고, 역사를 섭렵하였네. 어찌 나이는 젊지만 그릇은 노성한가, 정말 덕이 온전하고 재주가 풍부하다. 흉금이 트였으니 개인 밤 달과 같고, 호방한 기운 뻗어나서 우주에 찼다네, 비단옷 옛 기습(氣習) 벗어나서, 천석(泉石)에 고질병 들었네, 관복을 두르고도 먼 것을 생각하며, 조시(朝市)에 젖어 있어 발길이 막혔어라. 그러므로 성중에서 살 곳을 찾아, 멀다고 여겨 찾지 않은 곳 없었다네. 반수(泮水)에 찾아보다가, 물 근원 다 가서야 이 자리 얻었다네. 남쪽을 앞으로 하고 북쪽을 등졌으니, 군자의 거처할 곳이로다. 이에 가시덤불 처 버리고 깊고 좁은 것 개척했네. 띠풀을 베고 재목을 모아, 설계하고 건축하기 시작했네. 따뜻한 방을 만드는데 밝고 맑게 하고, 바람 불어오는 격자창 성글게 사면으로 열었도다. 선생이 그 안에서 눕고 쉬며, 아침저녁 휘바람 불고 노래하네. 하늘 조화 자세히 관찰하며, 사시 변하고 바뀌는 경치 보노라. 봄철이 와서 화창한 볕이 공중에 가득하면, 언덕의 풀은 돋아나려 하고 땅은 처음으로 풀리며, 시냇가 누른 버들가지 흔들리고 동산의 복사꽃 붉게 타오른다. 풍연(風煙) 어두운 건 푸른 솔이로세. 글 읽는 소리[絃誦] 공자묘에서 들리는데 쌍계수(雙溪水) 깊고 맑게 흐름이여, 돌 여울로 내려오면서 영롱(玲瓏)하도다. 선생은 이때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예닐곱의 관(冠)을 쓴 어른과 동자를 데리고 스르릉 비파 울리어 정회를 펴면서, 기수(沂水)에 목욕하던 높은 자취를 사모하도다. 맑고 훈훈한 그 절기 되면 녹음 더욱 좋은데, 자색 제비 가벼운 바람에 날아들고, 누런 꾀꼬리 높은 언덕에서 노래한다. 어느 사이 뜨거운 햇볕 하늘에 있으면 붉은 구름 멈추고 가지 않는데, 쌍계수 맑고 차고 푸르며 구비 돌아 웅덩이지고 다시 흘러 버리도다. 선생은 이때 가는 베옷 풀어헤치고 바람을 쏘이며 서늘한 그늘 찾아 편안히 쉴 것이다. 매우(梅雨) 부슬부슬 내리고 그늘진 구름 덮여 있을 때면, 산앵도 타는 듯 붉게 익고 젖은 새는 갈 곳 없어 헤매는데, 쌍계수는 여러 골 물 받아 모아 형세 더욱 커져 공(空) 산에 메아리 치며 세차게 흐르도다. 선생은 이때면 청려장 손에 들고 짚신 발에 신고, 근본이 있으면 멈추지 않고 근원이 없으면 마르기 쉬운 이치 생각하도다. 쇠소리 나는 바람 슬슬 불고 비취 같은 하늘 맑게 개였는데, 무서리 수풀에 뿌리면 진홍빛 현란하니 취한 듯하여라. 꽃다운 국화 언덕 위에 피어 있고, 연잎은 쓰러져서 찬 못에 덮여 있다. 상쾌하고도 쓸쓸함이여, 마음대로 멀리 찾고 그윽한 경치 더듬게 하도다. 쌍계수는 맑고 밝아 거울 같으며, 푸르고 깨끗하여 쪽[藍] 같도다. 선생은 이때 향기로운 두루미 열어 놓고 흐르는 물 보며 좋은 손님 맞아 즐기도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흰 달이 광채를 더하게 되면, 밤들어 산은 적적 사람 없는 것 같은데, 귀뚜라미 울음소리 뜰 안에서 목 매인 듯 들려온다. 쌍계수는 차고 찬데 달은 더욱 빛이 밝아 은물결 사방에 흩어졌도다. 선생은 이때 거문고 어루만지며 한 곡조 연주하니 산과 물의 깊은 뜻을 줄줄이 엮어낸다. 삭풍(朔風)이 울부짖으면 긴 수풀 모두 비는데 찬 기운 몸에 해로울까 걱정하여, 나무등걸 지펴니 따뜻하게 한다. 쌍계수 얼음 얼어 새겨놓은 듯 깎아놓은 듯 거문고 소리 딩둥댕둥 울리도다. 선생은 이때 석양 주흥(酒興) 얼큰하여 붉은 털옷 걸치고서 남쪽 언덕에 서서 돌아갈 줄 모르니, 얼굴을 깎아내는 듯한 찬바람인들 아랑곳하리. 그리고 빽빽한 구름 잎사귀처럼 뭉치고 퍼붓는 눈 낙화처럼 날리는데, 공중에 흩어져서 노송나무를 덮고, 구렁을 메우고 언덕에 가득하다. 쌍계수 얼어붙어 소리는 없는데, 움틀꿈틀 은빛 뱀이 달리는 것 같아라. 선생은 이때 비단 휘장을 걷어올리며 창의 깁을 열고, 양고주(羊羖酒) 좋은 술 부어 가며 미인 시켜 거문고 뜯어 현묘(玄妙)한 곡조 들으며 즐기도다. 집안엔 봄철처럼 화창한 기운 덮이고, 사시의 차례 어지럽게 오고 가도다. 정말로 광경은 한이 없는데 세상 티끌 반걸음 저 밖이로다. 완연히 한 번 병 속에 들어간 것 같아라. 이야말로 땅의 영기가 기다렸다가 비장(祕藏)한 것 내어 준 것이냐. 가시덤불 베어내니 흙이 조강(燥剛)하도다. 뜰 안에서 말을 돌릴 만하니 객이 당에 오르도다. 집을 지어 안락하니 군자 여기서 편안하다. 군자 여기서 편안하여 천 년을 누리리라. 거듭 노래로 고하나니, 물소리 산을 두르고 산은 작은 집[蓬蓽] 가리웠네. 마음 편히 떨쳐가서 그윽하고 고독함 즐기노라. 무엇이 즐거운가, 성조(聖朝) 벗어나서, 어하(魚蝦)와 짝이 되고 미록(麋鹿)과 친구 되네. 내가 쌍계를 사랑함이여 강호도 산림도 아님일세. 몸은 비록 벼슬해도 마음만은 연하(煙霞)에 있네. 가서 따르고자 하였으나, 동부(洞府)가 깊고 깊었어라. 무엇으로 그대에게 주리오, 쌍남금(雙南金)이로다.” 하였다.
【명환】 신라 총명(聰明) 헌덕왕(憲德王) 17년에 북한산 도독(北漢山都督)이 되었다. 헌창(憲昌)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도적 수신(壽神) 등 백여 명과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여, 도읍을 북한산주(北漢山州)에 세우고자 하였는데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잡아 죽였다. 김대문(金大問) 성덕왕(聖德王) 3년에 도독이 되었다. 변품(邊品) 도둑이 되었다. 찬덕(讚德)의 아들 해론(奚論)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椵岑城)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고려 한문준(韓文俊) 인종조에 부유수(副留守)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유응규(庾應圭) 나가서 남경의 수령이 되었는데 정사를 하는 데 있어 맑고 간략함을 숭상하며 한 가지도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는 일이 없었다. 그 아내가 젖을 앓는데도 채소국만을 먹으므로 아전 한 사람이 가만히 닭 한 마리를 가져다 바쳤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그분이 평생에 선물을 받아 본 일이 없는데, 내가 어찌 잘 먹고자 하여 그 분의 맑은 덕에 누가 되게 할 것인가.” 하니, 아전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유원순(兪元淳) 희종조(熙宗朝)에 사록참군(司錄參軍)이 되었다. 오형(吳詗) 원종조(元宗朝)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왕규(王珪) 유수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홍자번(洪子藩) 유수판관(留守判官)이 되어 끼친 은혜가 있었다. 윤선좌(尹宣佐)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민부전서(民部典書)로 나가서 한양윤(漢陽尹)이 되었다. 조금 있다가 왕과 공주가 용산(龍山)에 갔는데 좌우 사람에게, “윤윤(尹尹)은 청렴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들을 돌보아 주게 한 것이다. 너희들은 조심해서 아예 소란 피우지 말라.” 하였다. 박인헌(朴仁軒) 한양윤이 되었다. 정해(鄭瑎) 충선왕조(忠宣王朝)에 남경 유수(南京留守)가 되었다. 조문발(趙文拔) 남경 사록(南京司錄)이다. 박달상(朴達祥) 공민왕조(恭愍王朝)의 한양윤이다. 민제(閔霽) 한양윤이다.
【인물】 고려 한종유(韓宗愈)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급제하고, 아홉 번째 승진하여 삼중대광 좌정승 한양부원군(三重大匡左政丞漢陽府院君)이 되었다가 그 고장으로 연로하여 물러났다. 젊었을 때, 당시의 명사들과 오가며 모여서 술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이름하여 양화도(楊花徒)라 하였다. 종유가 취하면 문득 일어나 춤추며 양화사(楊花辭)를 노래하기를, “그믐의 맑은 바람 기다려서 날아 올라 황각(黃閣 의정부(議政府)의 딴 이름) 가운데 이르리라.” 하니, 아는 이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조돈(趙暾) 처음 이름은 우(祐)이다. 쌍성총관(雙城摠管) 휘(暉)의 손자인데 대대로 동쪽 경계의 용진(龍津)에 살았으며, 약관(弱冠) 전에 충숙왕(忠蕭王)을 섬겼다. 그때 이속과 백성들이 도망하여 여진(女眞)으로 들어갔는데, 임금이 돈을 보냈는데, 해양(海陽)에 가서 백여 호를 데려오니, 임금이 가상히 여겼다. 여러 번 승진하여 예의 판서(禮儀判書)가 되었으며, 지병마사(知兵馬事)로 홍적(紅賊)을 쳐서 패주시키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용진에서 죽었다.
【본조】 조인벽(趙仁璧) 돈의 아들이다.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벼슬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이르렀다. 조인옥(趙仁沃) 인벽의 아우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니, 윤소종(尹紹宗)이 군전(軍前)에 나가 곽광전(霍光傳)을 드렸는데, 태조가 인옥에게 읽게 하고 들었다. 여기서 왕씨(王氏)를 복위(復位)하는 의논을 극구 진술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지위가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조온(趙溫) 인벽의 아들이다. 개국 정사 좌명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에 참여하였으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조연(趙涓) 인벽의 아들이다. 태조조의 개국공신이며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조영무(趙英茂) 개국공신으로,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며,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계생(趙啓生)ㆍ조말생(趙末生) 건문(建文) 신사년(태종 1년)과거에 장원하고 벼슬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조혜(趙惠) 연(涓)의 아들이다. 형조ㆍ호조 판서를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겼으며,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효자】 본조 홍계산(洪戒山) 어머니가 복병(腹病)을 얻어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계산이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성종(成宗) 무신년에 사실이 알려지니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한계련(韓繼璉) 외조모가 오래 광질(狂疾)을 앓았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왕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이식(李植) 어머니가 오래도록 앓았는데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수견(金壽堅) 어머니가 광질(狂疾)을 앓았는데 수견이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로 약을 지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석련(金石連) 어머니가 병이 났는데 석련이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후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복(服)이 끝나도 오히려 아침 저녁 상식을 폐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귀손(朴貴孫) 사가(私家)의 천인이다. 아버지가 병이 났는데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어머니 병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지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맹감(金孟監) 다섯 살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장성하여 계모의 상에 복을 다 입은 다음에는, 이어 생모를 위하여 추후로 3년복을 입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시묘에 살며 조석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10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전호손(田好孫) 갑사(甲士 군인)이다.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지성스럽게 전 올리고 제사지냈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니 손수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지냈다. 일찍이 상중에 종군하게 되었는데 돌아와서는 다시 3년상을 다하였다. 국기일(國忌日)을 만나도 역시 술ㆍ고기를 먹지 않았다. 지금 왕 10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유희(柳熙) 어머니가 악질(惡疾)을 앓았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수(金粹)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는데 삭망(朔望)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제물을 많이 차리고, 이웃 사람들을 청하여 즐겁게 하였다. 전후 시묘 살기 각각 백 일이었는데,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상사가 끝난 다음에도 소복으로 3년을 마쳤으며,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조석으로 전 올리는 일을 폐지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붕이(朋伊) 사가(私家)의 천인이다. 나이 12세에 아버지가 악질을 앓으니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조어정(趙於玎)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그 누이 막금(莫今)과 함께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다. 부모가 잇따라 별세하니 3년 간을 소금ㆍ장ㆍ채소ㆍ과일을 먹지 않고, 나무 형상을 만들어서 조석으로 전 올리며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하고, 새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올리며, 초하루마다 묘소에 올라갔다. 지금 임금 14년에 함께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소비(少非)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연산조(燕山朝) 때에, 죄인에 연루되어 길성(吉城)으로 귀양가고 어머니는 명천(明川)으로 귀양 갔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60리나 되었다. 소비가 낮에 관청에서 일하고 밤에는 가서 어머니를 모셨다. 풀려 돌아오게 되자, 밥을 빌어서 봉양하며 따뜻하고 서늘한 데에 맞추어 마음을 다하였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숙미(淑美)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나이 14세에 어머니가 악질을 앓으니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렸는데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말금(末今) 사가의 천인이다. 나이 15세에 아버지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련(朴連) 사가의 천인이다. 부모가 일찍이 불교를 진심으로 믿었으므로 죽게 되니 집안이 모여서 화장하였다. 박련이 어릴 때 상사를 당하였으나, 장성하게 되어 슬퍼하고 사모함을 마지 못하여 화상을 그려 벽에 걸어두고, 날마다 상식(上食)드리며 남긴 의복을 가져다 시신을 불 태운 곳에 합장하고 6년 간을 시묘 살며 한 번도 집에 와 보지 않았고 또 소금ㆍ장ㆍ채소ㆍ과일을 먹지 않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충의】 본조 심원(深源) 종실(宗室)인데 주계군(朱溪君)에 봉해졌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 일찍이 그 외숙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힘써 말하니, 성종이 사홍을 외지로 귀양보냈는데 연산군 말년에 와서 사홍이 세력을 얻으면서 마침내 심원을 죽였다. 지금 임금 초기에 작위를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아들 유령(幼寧)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는데 함께 살해되었다.
김동(金同) 종실 강녕부정(江寧副正) 기(祺)의 종이다. 연산군의 사랑하는 기생이 기(祺)의 집을 빼앗고, 기가 종을 시켜 자기를 욕한다고 호소하니, 연산군이 노하여 기 및 김동을 가두고 불로 지지며 심문하였는데, 동(同)이 말하기를, “죄는 나에게 있지, 주인은 모른다.” 하여 기는 벗어났지만, 동은 형벌을 받았다. 지금 임금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공신옹주(恭愼翁主) 성종대왕의 딸인데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에게 출가하였다.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연산군이 갑자년에 아산(牙山)으로 귀양가게 되니 신주를 안고 가서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유씨(柳氏) 좌의정 허침(許琛)의 아내이다. 침이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며, 아침ㆍ저녁으로 친히 재물을 장만하였다. 연산조 때에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법이 엄하였지만, 그래도 예절을 지켜서 3년상을 마쳤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씨(朴氏) 승지 강경서(姜景敍)의 아내이다. 연산조 무오년에 경서가 곤장을 맞고 귀양가게 되니, 박씨가 걱정하고 상심하여 제대로 먹지 않은 채 해를 넘겨 세상을 떠났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민씨(閔氏) 조성벽(趙成璧)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며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씨(金氏) 대사간 강형(姜詗)의 아내이다. 연산조 갑자년에 형이 살해되니 김씨는 제대로 먹지 않고 울부짖어 곡하다가 한 달이 넘어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동질비(同叱非) 관청에 매인 천인 범산(凡山)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으니 3년간 복상(服喪)하며,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하루 세 번씩 상식을 드리며 시어머니 섬기기를 매우 삼갔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남씨(南氏) 부사(府使) 최계사(崔季思)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리고, 죽을 먹으며 상기를 마쳤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도리정균통조만(道理正均通漕輓) 박의중(朴宜中)의 시에, 도리(道理)가 바르고 고른데 배와 수레[漕輓]가 통한다 “강산이 겹겹으로 막히니 금성탕지(金城湯池)보다 낫다.” 하였다. 화악최괴압한강(華嶽崔嵬壓漢江) 권우(權遇)의 시에, “화악(華嶽)이 높이 솟아 한강을 누른다 “금성(金城) 천부(天府)의 요해지는 이 이상 없는 것이다.” 하였다. 호거용반천고지(虎踞龍蟠千古地) 전인(前人)의 시에, 호랑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 천고의 지역이다. “꿩의 문채요 새 나는 듯 구중궁궐이네.” 하였다.
팔영(八詠) 기전산하(畿甸山河)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기름지고 풍요한 기전(畿甸) 천리 땅에, 안팎의 산하(山河)는 백두 겹일세. 덕과 교화로 땅의 형세까지 겸하니, 역년(歷年)이 천 년을 가리라.”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첩첩한 멧부리 기전(畿甸)을 둘렀고, 길게 흐르는 강물 도성을 둘렀네. 아름다운 이 형승(形勝) 하늘이 내린 것, 임금 도읍터 참으로 좋구나. 사방으로 거리 모두 비슷하고, 기름진 전원(田原) 농사 지을 만하네. 주민들 부유하고 많아 태평 세월 즐기니, 곳곳에 노래소리 들려오누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사방으로 나라 터도 멀고, 천년 왕조에 지리도 웅장하구나. 강산에 험요(險要)한 곳 조물주의 조화인데, 나라 세우고 여기에 경영하였네.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한 그 고장에 닭의 울음개 짖는 소리 들리누나. 우리 임금 덕을 닦아 시종 여일 조심하니, 크나큰 왕업(王業) 길이 무궁하리라.” 하였다.

도성궁원(都城宮苑) 정도전의 시에, “성은 높아 철옹(鐵瓮)인데 천 길이요, 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 해마다 상원(上苑 어원(御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 해마다 서울 사람들 놀며 즐기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하늘이 주신 큰 도읍지 장하기도 한데, 구름 걸친 저 사이로 성첩이 열렸네. 금벽(金碧)으로 단청한 추녀 성대하고 높은데, 검(劍)과 노리개 찬 이들 이 사이에 배회하누나. 상원(上苑)에서 봄을 즐기는데, 깊은 궁중엔 만수 축원 술잔 도네. 우리 임금 정사에 근면하여 조회보고, 꽃 그림자 사이 돌아 누대로 돌아가누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날아갈 듯 저 도성 웅장한데, 크고 높음 존엄함을 상징하였네. 오색 구름 좋은 기운 참으로 천지에 가득하여, 그 기운 엉겨서 태평세월 이루네. 검(劍)과 노리개 찬 이 단궐(丹闕)로 달려나가고, 큰 깃발 작은 깃대는 자문(紫門)에 번득이네. 임금 얼굴 지척간에서 온화한 말씀 하사하시는데, 머리 조아리며 성은(聖恩)에 감사하누나.” 하였다.

열서성공(列署星拱) 정도전의 시에, “여러 관청들 높이 서서 서로 향하는 것, 별들이 북두칠성[北辰] 향하듯 했네. 달 밝은 새벽 거리는 물같이 고요한데, 굴레장식 울려도 작은 티끌 일지 않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줄같이 곧은 긴 거리 넓기도 한데, 별 두른 여러 관청 나뉘었네.” 하였다. 궁문 향해 관원들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많은 사람들 밝은 임금 보좌한다네. 여러 정사 공적을 이루었고, 뛰어난 인재들 모두 특출하구나. 거리에 가득[籠街] 갈도(喝道 길 비키라는 소리) 소리 쉴 새 없이 들리니, 관리들 퇴청하느라 한창 분주하구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하늘에 가까운 저 궁궐 깊숙도 한데, 별처럼 벌여 있는 관청들 많기도 하구나. 높은 오대(烏臺 사헌부)ㆍ봉각(鳳閣 의정부) 가장 맑고 화려한데, 마주 대하여 성대하고도 높다랗다. 밤 숙직땐 촛불 켜고, 새벽 조회 길엔 굴레장식 울리누나. 빛나는 우리 임금의 교화 덕에 티 없으니, 이 백성들 은혜의 물결에 젖었어라.”하였다.

제방기포(諸坊碁布) 정도전의 시에, “큰 집들[第室] 구름 위에 높이 섰고 여염집 땅에 가득 연이었네. 아침저녁으로 연화(煙火) 끊기지 않으니, 일대의 번화한 것 태평도 하여라.” 하였다.
○ 권근의 시에, “새 서울에 하늘 관청 열었는데, 여러 동리 판 위의 바둑처럼 펄쳐 있네. 천문 만호 어슷비슷한데, 관원들 날마다 상종하누나. 저자 가게 집집마다 풍요하고, 동산 정자 곳곳마다 기이하네. 멀리 저 달 아래 노래 소리 들려 오니, 태평 시기 이때이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얼기설기 여염집 조밀하고, 이리저리 도로가 나뉘었네. 천만 수레와 말들 스스로 떼지어, 오고가기 어찌 그리도 분분한가. 저자의 장사치 온종일 모이니, 거리의 종소리 바람 속에 번화한 것 알려주네. 이 시대는 문화를 펴는 때라, 대궐에 상서로운 구름 항상 엉기누나.” 하였다.

동문교장(東門敎場) 정도전의 시에, “종고(鍾鼓) 소리 쾅쾅 땅을 흔들고, 깃발 펄럭펄럭 공중에 휘날리네.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주선함이 한결 같으니, 몰아가서 싸움 할 수 있겠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다섯 장교[五校] 그 모습 장엄한데, 세 군영엔 호령도 잘 듣는다. 동문에서 징과 북소리 울려올 제, 일만 기병들 무기를 번득이네. 햇빛이 비치니 금빛 갑옷 선명하고, 바람이 이니 그림 그려 놓은 깃발 펄럭이네. 포로를 바치고 개가(凱歌) 불러 많은 공 이루어, 사방 나라에 웅장한 이름 떨치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지세는 평평하여 손바닥 같은데, 군용(軍容)의 신속함 우레 같네. 북치면 나가고 징치면 그치기 몇 번이나 되풀이했나, 일만 기병 다시 돌아오네. 진치는 것은 정명(精明)한 기술이고, 적의 기세 꺾는 것은 용결(勇決)한 재주일세. 이만하면 적국들 스스로 항복해 오게 할 것이니, 미리 병사를 양성함 어찌 부질없다 하리.” 하였다.

서강조박(西江漕泊) 정도전의 시에, “사방의 선박들 서강으로 몰려들어, 용 그린 배 앞서 끌어 1만 섬[斛] 풀어놓네. 그대여 저 창고의 썩는 쌀 보았는가, 정사 잘하는 일은 식량 넉넉하게 하는 데 있다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남해에 풍랑 고요하니, 서강에 선박들 모여드네. 검은 돛대 총총히 서서 구름 하늘 가리웠는데, 쌓인 노적 산과 가지런하네. 일천 창고의 썩고 남는 곡식, 창생 일만 집의 밥 짓는 연기이네. 공사간에 부유하고 저마다 편안하니, 왕실의 큰 사업 길이 길이 이어지리.”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조운(漕運)은 천리 길에 통하고, 누선(樓船)은 만 척이나 겹겹이 대었네. 긴 강에 물결 넓어 물가를 감싸는데, 조수 들어오니 많은 배 돛을 내리네. 공물과 부세(賦稅) 해마다 들어오고, 창고는 날마다 받아들이네. 백성의 양식 나라의 수요 모두 다 충족하니, 춤추며 성은에 보답하자.” 하였다.

남도행인(南渡行人) 정도전의 시에, “남쪽 나루터에 물결 도도(滔滔)한데 행인들 사방에서 모여들어 분주하네. 늙은이 쉬고 젊은이 짐 지고서, 즐거운 노래 앞뒤에서 주고받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관가 나루터 잡다하게 건너려니, 번화한 서울의 문턱이라 그러하다. 거리 정자 날마다 높은 수레에 맞이하여, 오가는 술잔 향기롭게 기울이네. 들길은 강 언덕에 잇닿았고, 물가 모래엔 물 흔적 남아있네. 오가는 사람들 모두 이 속에서 분주하니, 물 건너는 은혜 뉘라서 알 것인지.”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멀리 보이느니 아득한 저 길인데, 가로 흐르는 강물 여기저기 나루터일세. 남쪽에서 오고 북쪽으로 가는 사람 몇천 명 될는지, 끊이지 않고 날마다 들어온다네. 바람이 자니 배는 조용히 건너가고, 연기 개니 물 기운 새롭구나. 제천정(濟川亭) 그 위엔 송별ㆍ영접도 잦아, 흐뭇하게 화려한 자리 베풀었네.” 하였다.

북교목마(北郊牧馬) 정도전의 시에, “저 북쪽 들 평평하기 숫돌 같은데, 봄철 되면 풀 무성하고 샘물 좋다네. 일만 말 구름처럼 몰리고 까치처럼 뛰는데, 말 기르는 사람들 마음대로 서쪽 남쪽에 서성이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무성한 풀은 긴 들 저 밖에 있고, 맑은 냇물은 끊어진 언덕 가로 흐르네. 용마[龍媒] 일만 필 다투어 높이 뛰는데, 저 멀리 오색 꽃 잇닿았네. 언덕에서 뛰놀 적에 발굽에서 번개가 생기고, 바람결에 울음 우니 갈기에서 연기 출렁이네. 사특함 없는 그 생각 앞으로 나갈 수 있나니, 《시전》의 경시(駉詩) 한 편 우리 님께 드리려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들이 넓으니 푸른 연기 덮여 있고, 봄이 깊으니 푸른 풀 가지런히 자랐네. 달리고 뛰는 말떼들 동쪽으로 서쪽으로, 번갯불 번쩍이며 가볍게 굽놀리네. 물을 건너며 무리지어 마시고 바람 향해 서서 짝을 찾아 울음 우네. 말 기르는 사람들 하루종일 긴 언덕 오르내리니, 도롱이 삿갓에 비 젖어 쓸쓸하여라.” 하였다.

십영(十詠) 장의심승(藏義尋僧) 풍월정(風月亭) 시에, “푸른 언덕 일만 겹이 푸른 옥 같은데, 그 안에 있는 절 거의 3백 곳. 나는 샘물 폭포 되어 절벽에 걸렸는데, 바위 가에 큰소리 옷감이 찢기는 듯. 노는 사람 이 좋은 경치 두고 혼자서 돌아가리, 종일토록 중을 찾아 마주앉아 말하네. 머리 돌리니 인간 세상은 꿈만 같으니, 이곳은 정녕 노닐 만한 곳이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산 아래 찬 물결 옥 같은 시냇물인데, 동구 나가선 웅덩이 이루어 몇 백이더냐. 구름 깊은 곳 저 멀리 보배로운 당간(幢竿) 보이는데, 목탁 소리 떨쳐나서 산이 찢어지는 듯. 승려와 짝하기 좋아하여 머물고 가지 않는데, 현묘(玄妙)한 말 하다가는 문득 세상 말씨[侵綺] 부끄럽네. 백발 늙은이 돌아와서 우리들 찾으니, 이곳이 저 광산(匡山)의 글 읽던 곳인줄 알겠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세 봉오리 우뚝우뚝 옥을 깎아 세웠는듯, 전조(前朝) 시대의 옛 절이 8백 곳이나 된다네. 고목이 바위를 둘렀는데 누각(樓閣)이 겹겹이고, 우는 냇물 부딪히니 산 돌이 찢어지네. 내 옛날 중을 찾아 한 번 돌아가서, 밤늦도록 밝은 달 아래서 정담을 나누었지. 새벽 종 한 소리에 깊은 반성 생기지만, 백운이 땅에 가득하여 방향을 알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절 아래 맑은 냇물 푸른 구슬 흐르는 듯, 절 안에 사는 중은 수없이 많구나. 때로 뇌성소리인양 새벽 종이 울리는데, 높은 봉 무너질 듯 푸른 언덕 찢기는 듯. 한가한 틈타 성 밖 나와 중을 찾아가, 전의 셋과 후의 셋이 어떠한가 한 번 물어봤네. 동문이 깊숙하여 연하(煙霞)도 늙었으니, 멍하니 이 몸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를레라.”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절 뒤의 산봉우리 옥처럼 모였는데, 문 앞의 높은 나무 백 년도 지났으리. 임학(林壑)이 굽이굽이 돌아 깊고도 깊은데, 범종(梵鍾) 두어 소리 산이 찢어질 듯 울려 오네. 마른 여장(藜杖) 휘두르며 연기와 덩굴 헤쳐 들어가서, 한가로이 승방 찾아 중과 이야기하네. 오손도손 주고 받는 말 해가 지는 줄도 모르니, 세상 티끌 씻을 곳 여기가 아니던가.” 하였다.

제천완월(濟川翫月) 풍월정 시에, “은하수에 바람 없어 흰 물결 고요하니, 늙은 두꺼비 저 못 속의 그림자 들이마시고 있구나. 강 머리에는 백옥 소반 굴리는 것 같은데, 구름 저 사이에는, 벌써 황금 떡이 솟아났네. 높은 다락에 한 잔 술 차갑고 깨끗도 한데, 이 맑은 광경 대하니 백발도 모르겠네. 머리 돌리니 젓대 소리 어디서 들려오나, 밤 깊으니 예상곡(霓裳曲) 듣는 것 같구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밤은 차고 강도 비어서 모든 소리 고요한데, 가는 발 반만 걷고 흰 달빛 맞이하네. 자색 연기 날아 흩어지니 하늘은 넓기만 한데, 얼음 바퀴 반쯤 나오니 금으로 떡을 만들었네. 비고 밝은 이 마음도 함께 맑고 깨끗하니, 밤 늦도록 학과 함께 흰 털을 흩날리네. 강 다락 어느 곳에서 쇠젓대 소리 들려오나, 맑은 흥 유유(悠悠)하게 강 구비에 퍼져가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가을 빛 일만 이랑 유리처럼 고요한데, 그림 기둥 구슬 발에 찬 그림자 어른거리네. 먼 하늘 구름 없어 쓸어버린 것 같은데, 앉아서 밝은 달 황금 떡 모양 나오기만 기다리네. 천지의 맑은 기운 뼈 속까지 스미는데, 밝은 광채 비쳐 털끝도 하나하나 세겠네. 밤은 깊고 깊은데 광경 더욱 기이하여서, 열두 구비 난간 모두 옮겨 의지하였다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달이 가을 강에 드니 강물이 고요한데, 백 척 다락 한가로이 누운 모습 돌탑[浮圖]과도 같구나. 달을 마주 앉으면 열 말[斗] 천 말 술 기울일 것을, 달처럼 둥근 3백 개의 떡은 해서 무얼 하나. 맑은 빛 찬 기운 위아래로 들어오니, 이 내 귀밑털 수풀처럼 일어서네. 다만 바라는 건 언제나 술 그릇 속의 술 비치는 것. 거울같이 둥글거나 갈구리 모양 굽은 것 무어라 생각하리.”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강 위에 바람 없고 가을 밤 고요한데, 가는 구름 움직이지 않으니 그림자도 없구나. 난간 의지해 수정 발 걷어올리니, 바다의 용이 금색 둥근 떡 받들고 나오네. 하늘 빛 물빛 둘 다 맑고 깨끗하니, 한끝 맑은 그 빛에 흰 머리털 더욱 밝아지네. 문득 이 내 몸 광한궁(廣寒宮)에 있는가 의심하나니, 귓가에 예상곡(霓裳曲) 들려오는 것 같구나.” 하였다.

반송송객(盤松送客) 풍월정 시에, “오늘 아침 천리 길 떠나는 손 전송하니, 나를 대해 앉아 황금 술잔 사양마소. 떠나는 길에 술을 부으니 눈물자국 젖었는데, 이별하는 마음 얼마인가 수심도 그지없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삼상(參商)과도 같아, 가고 오는 저나 내나 모두 애끊는 일이로세. 바람을 당해 서서 세 번 탄식하고 다시 슬퍼하는 것은, 그리운 그대 볼 수 없고 마음만 망연하여서라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수레 일산 구름처럼 모여 먼길 손 전송하니, 술잔 소반 흩어진 데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머나먼 길 술도 다했는데, 가고 남는 일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 나니, 소리소리 귀에 들어 창자라도 끊게 하네. 별안간에 이별하면 천리 길 떨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망(蒼茫)하기만 하구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옛 친구 나를 이별하며 원유가(遠遊歌) 부르는데, 무엇으로 전송할까나 한 쌍 은 항아리 기울여보세. 성문 밖에 버들가지 어찌 차마 꺾을쏘냐, 방초에 남은 한 끊길 날이 있으리. 지난해에도 금년에도 길이 삼상(參商)처럼 떨어졌으니, 부자로 이별하나 가난으로 이별하나 애태우긴 한 가지라네. 양관곡(陽關曲) 세 곡조 노래 이미 끝났으니, 동쪽 구름 북쪽 나무 모두 함께 망망(茫茫)하여라.”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도성 정자에 만리 길 유람하는 저 손 보낼 적에, 취한 뒤 노래 길게 부르며 옥 항아리 두드리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삶은 구르는 쑥대 같으니, 백 년간 허덕이다 언제나 그만두나. 미인은 비파를 타서 청상곡(淸商曲) 연주하니, 좌중이 침울하여 창자까지 수심일세. 이별은 많고 모임은 적으니 어이할까나, 내일 아침 서로 생각하면 길만 망망하리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내 옛 친구 관문 밖으로 유람 보낼 제, 손에 한 쌍 꽃 그린 사기 항아리 들고 왔네. 단번에 수십 잔 들어도 술 아니 취하니, 이별의 한(恨) 길고 길어 끝없어라. 잦은 가락 급한 피리 궁상(宮商) 곡조 곁들이니, 가는 말 떠나지도 않아 창자 먼저 끊기노라. 슬프게도 이별하고 동서로 헤어지니, 만 겹 구름 낀 산 앞에 놓여 아득하네.” 하였다.

양화답설(楊花踏雪) 풍월정 시에, “북풍의 성낸 소리 밤새도록 메아리치더니, 아침에 내리는 눈 크기가 손바닥만하네. 넓고 넓은 천지 끝이 없는데, 언덕과 골짜기 평평해졌으니 깊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강촌 어가(漁家) 두어 채 초가집, 울타리 아래에 수북수북 은대[銀竹]로 가득 찼네. 이곳에 오면 흥이 절로 나, 시도 읊고 술도 들며 쉴 사이 없구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강 머리에 바람 세차니 마른 나뭇잎 소리 내는데, 얼은 구름 땅에 붙으니 평평하기 손바닥 같아라. 잠시간에 눈 되어 바다를 덮어 오니, 언덕은 평평하고 골짜기 가득 차서 한 길이나 깊어졌네. 언덕에 의지한 어가(漁家) 여덟 아홉집에 술 판다는 푸른 깃발 대 끝에 휘날리니, 삼백 닢 청동전(靑銅錢) 가지고서, 바로 술청[壚頭]으로 나아가서 이내 몸 쉬어보리.”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북풍이 땅을 휩쓸고 모든 소리 메아리치는데, 강 머리의 눈조각 손바닥보다 더 크네. 망망한 은세계엔 인적 볼 수 없는데, 옥산(玉山)은 공중에 기대서서 천만 길 높았어라. 내가 이때 나귀 타고 가니 모자가 집 같은데, 은꽃은 눈을 어지럽히고 머리털 대처럼 곤두선다. 돌아오다 술 사서 청루(靑樓)에서 마시고, 취한 뒤 매화등걸 찾아가서 꽃 소식 찾아 보자.”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쌓인 눈 하얗고 북풍은 소리내니, 한(漢) 나라 궁중엔 선인(仙人)의 손바닥 얼어 부러졌네. 나귀 타고 강산에 취하여 시 읊으니, 흉중에 큰 기개 천 길 무지개처럼 펼쳐지네. 원안(袁安)이 흰 집에 누워 있던 일 우습고, 희만(姬滿)의 황죽(黃竹) 노래도 우습구나. 바로 시율(詩律)을 가지고 매우 엄함을 겨루었으니 설당(雪堂)에 높은 기풍 우러러 탄식하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강변의 갈매기 해오라기 그림자 볼 수 없는데, 하늘 위의 옥가루 신선의 손바닥에서 뿌려지네. 공중에 어지러이 흩어지며 바람따라 날리더니, 평지에 가득 차 어느 사이 한 길이나 되었네. 열 말[斗] 천 말 술집마다 가득한데, 눈에 가득한 구슬꽃 대숲을 눌렀네. 옷을 잡혀 술을 사니 흥이 팔방에 비껴있어, 백 년의 인생사가 한순간에 식어졌다.”

목멱상화(木覓賞花) 풍월정 시에, “구름 한가롭고 봄 산은 높은데, 아지랑이 은은히 시내 다리에 잇닿았네. 산에 올라 꽃을 구경하고 취하기도 하였으니, 그대와 함께 종일토록 포도주 따랐지. 벌의 소리 새 울음은 촌가 담장에서 들려오고, 꽃 기운은 늦는 봄비 빚어낸다. 돌아오니 석양은 거리에 비쳐 기우는데, 운종가(雲鍾街 종로) 큰 거리에 인경[鍾鼓] 소리 들리누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종남산 푸른 기운 구름 위에 높은데, 서울 장안 24개 다리 굽어본다. 앵무새와 꽃 한창 좋고 궁원(宮苑)도 깊으니, 옥술잔에 포도주 붓는 모임 상상한다. 구름 비단 단장하여 일만 집 담장을 이뤘는데, 한 쟁기 향기로운 비 거두네. 노끈 길다 해도 서쪽으로 지는 해 매지 못하는 법, 높은 다락 뗑뗑뗑 종고(鍾鼓)소리 나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성 남쪽 지척에 산이 정히 높은데, 푸른 구름 열두 다리 더위잡고 올라가네. 화산(華山 북악산)은 옥부용(玉芙蓉)인 양 깎아 섰고 한강수 깊고 깊어 금포도(金葡萄) 물들었네. 장안 일만 집 온갖 꽃 핀 언덕 누대에 은은히 비쳐 붉은 비 같아라. 청춘(靑春) 제철에 와서 구경하는 이 얼마나 될는지, 낮이 길고 긴데 갈고(羯鼓)로 재촉하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남산에 앉아 보니 증성(曾城)도 높아, 어구(御溝)의 버들 무지개 다리에 스치네. 상원(上苑)에 꽃이 피니 붉은 노을 무르익고, 태액(太液 비원의 못)에 물결 따스하니 포도주 넘치는 듯, 큰 집[甲第]들 구름에 닿고 봄은 언덕에 가득한데, 동풍이 우유 같은 비를 불어 보내네. 천만 가지 붉은 꽃 고운 자태 머금어, 서로 재촉하여 마루 앞의 북 치지 않게 하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인경산(引慶山 남산의 딴이름) 층층의 구름 속에 들어 높고, 공중에 백 자는 되게 무지개 다리 걸려있네.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흥이 다함 없고, 푸른 술 처음 익어 포도 빛이 진하여라. 천만가지 꽃핀 언덕이 어두운데, 어찌 즐기지 않고 풍우에 맡기리. 한강수 기울여 금빛 술동이에 더하고 일백 개 방망이로 뇌문고(雷門鼓) 마음껏 두드려 보려네.” 하였다.

전교심방(箭郊尋芳) 풍월정 시에, “봄철 교외에 가는 풀 비단자리 같은데, 봄바람에 술을 싣고 노는 사람 찾아가네. 아침엔 준마 타고 푸른 풀 밟고 나갔다가, 저물녘 취해 돌아오며 공연히 봄을 애석해 하는구나. 푸른 옷 저 소년들 누대 모퉁이 오르더니, 높은 누각의 젓대와 퉁소 소리 정히 들리네. 버들가지 한들한들 녹음도 깊었는데 명일엔 그네가 담장 가에 걸렸으리.”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따스한 기운 평야[平蕪]에 들어 푸름이 자리 같은데, 풍광이 담탕(淡蕩)하여 사람에게 좋기도 하구나. 옷을 걷고 창포 물가에 꽃을 따니, 눈에 가득 밝은 빛 온 누리가 봄이로세. 장수하고 단명함 다 같은 회계곡(會稽曲)인데, 하루살이 같은 인간 바삐도 호흡하누나. 술잔 받으면 무어라 흠뻑 취함을 사양하리, 꽃 밖에 저 멀리 석양 벌써 지려 하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평평한 들판이 손바닥 같고 풀은 자리 같은데, 개인 날 따스한 바람이 진정코 사람 죽이네. 오늘 아침 술 사려고 푸른 옷 잡히고서, 삼삼오오 떼를 지어 좋은 봄 찾아갔네. 날으는[飛] 술잔 물굽이 도는 것보다도 급하여, 맑은 술동이 쉽게도 마르니 고래처럼 마심일세. 돌아올 때 준마 타고 달빛을 밟으니, 옥피리 남은 소리 살구꽃 떨어진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방초가 온전히 비단 자리보다 좋아, 날리는 꽃 퍼지는 녹음 사람을 수심하게 하네. 사녀(士女)들 서로서로 광음을 다투는 양, 비단 휘장 수놓은 장막 청춘을 비치네. 누런 수탉 대낮에 영롱한 노래 곡조, 흐르는 세월 한 호흡 같기도 하였어라. 급히 좋은 술 불러 좋은 계절 즐기고서, 거꾸로 실려 돌아올 때 검은 모자 떨어진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동교(東郊)의 푸른 풀 겹자리 깔렸는데 성을 나가니 상춘객 여기저기 보이네. 풍광이 얼핏 지나니 헛되이 보낼 수 있겠는가, 1년 중 행락은 봄에 해야 한다네. 술동이 열고 또 다시 계곡(溪曲)에 앉으니, 백 병 술을 한 입으로 마시는 것 마다하리. 마음껏 놀다가 달 밝아 돌아가려니, 석양이야 지고말고 관여하지 마세나.” 하였다.

마포범주(麻浦泛舟) 풍월정 시에, “개포에 가득 연광(煙光)이 푸르게 퍼지는데, 은은한 바람 솔솔[嫋嫋] 찬 물결에 불어가네. 강가의 작은 풀들 물들인 것보다 푸르르고, 언덕의 버들 황금 가지 이루었네. 놀잇배에 퉁소랑 북 싣고 나루터를 건너면, 푸른 향초, 붉은 향초 꽃다운 물가에 났으리라. 이리저리 저어 석양에 돌아올 제 고개 돌리니 모래판에 갈매기 날아드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소선(蘇仙)은 영수(穎水)에 배 띄워 무엇을 하였던고, 나도 이 놀이 좋아서 물결 위에 흥청이네. 봉창을 옮겨 어기여차 연파(煙波)를 거슬러 올라가니, 배 묶을 곳에 도리어 단풍든 가지 구나. 푸른 소라 천 점은 바다 서쪽 머리인데, 갈대꽃 한 언덕은 강 가운데 모래톱일세. 물 속에 비친 달 그림자를 치면서 가는 대로 흘러가니, 넓고 넓은 만 리 물결에 갈매기 따르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서호(西湖)의 짙은 화장[濃抹] 서시(西施 중국의 미인)와도 같은데, 복사꽃 가는 비에 푸른 물결 일어나네. 흥청이며 돌아오니 물이 반 삿대나 불었는데, 날 저무니 죽지사(竹枝詞) 부를 사람 없네. 삼산(三山)은 금 자라 머리에 은은(隱隱)하고, 한강은 앵무주(鸚鵡洲)에 역력하네. 머뭇머뭇 기다려도 황학은 보이지 않는데, 날아드느니 한 쌍의 백구일세.”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호(濠)에 노는 데 반드시 혜시(惠施) 같아야 할까, 박달나무 베어서는 반드시 잔잔한 물에 두어야 할까. 아직은 서호(西湖) 향해 술을 싣고 노니는데 취해선 화정(和靖)의 매화 가지 꺾는다네. 청산은 수없이 강 머리로 나왔는데, 나무 빛은 저 멀리 창포 물가에 잇닿았네. 피리 불며 노래하기 마치지 못했는데 날 저물려 하니, 돌아와서 불현듯 한가히 조는 갈매기가 부러워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가슴 가득 청광(淸狂)한 마음 어디에 풀어보리, 놀잇배 이리저리 저어 잔잔한 물결따라 가네. 중류에서 용의 읊는 소리 들어 보는데, 언덕 저 너머로 어부의 피리 소리 한 가락 들려 오누나. 외로운 돛단배 하늘 저 끝에 가물가물, 오호(五湖)의 연파(煙波)가 창주(滄洲) 신선 있는 곳에 잇닿았네. 표연(飄然)한 이내 종적 어데다 비길꼬, 흐르는 물따라 정처없이 가는 몸 갈매기와 같구나.” 하였다.

흥덕상화(興德賞花) 풍월정 시에, “누대 그림자 겹겹이 물 속에 비치는데 누대 앞 연꽃 아침 이슬에 씻겼어라. 난간에 옮겨 의지하여 풍경을 구경하니, 6월의 맑은 향기가 모시옷에 풍겨난다. 붉은 깃대 푸른 일산 수없이 많은데, 마주앉아 때로는 총채를 휘두르네. 서늘한 기운이 뼈에 스며 구슬 자리 차가운데, 날 저물자 가벼운 바람 비를 불어오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누대 아래 모난 연못 맑기도 하여, 물 위에 뜬 붉은 연꽃 바람 이슬에 씻겼네. 난간 의지하여 구경하다가 달 밝을 때까지 이르니, 서늘한 밤 기운에 가는 모시 가벼운 옷 걸쳤어라. 묘련(妙蓮)의 꽃 열매 많기도 한데, 이내 몸 부끄러워 꼬리 아끼는 사슴 같네. 하늘 향기 찾으려해도 그곳을 알지 못하는데, 물 기운 서려서 개인 날에도 비 되어라.”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절집의 단청이 물 속에 비치는데, 연꽃 처음 피어 깨끗하게 씻은 것 같구나. 부슬부슬 붉은 안개 구슬 난간에 뿌리는데, 향기로운 바람이 불려 하여 모시 소매 나부끼네. 때로 벽통주(碧筒酒) 수없이 마시는데 대낮에 큰 소리 하다가는 파리채도 휘두르네. 중이 손을 붙들며 밝은 달 기다리자는데, 작은 누대 한밤에 서늘하기 비올 때 같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연꽃 수없이 누대 아래 가득한데, 연줄기 무어라 미인 시켜 씻나. 맑은 향기 그윽하고 바람 살짝 이는데, 한 가닥 가을 기운 흰 모시인 양 시원하네. 술 취한데 술잔 계산 어찌 셈하리, 팔 잡고 글 논란할 제 파리채 휘두르는 것 잊었더라. 붉은 옷 떨어지기 전에 참으로 구경할 만한데, 내일 아침에 미친 비바람 어찌 할까나.” 하였다.
○ 성임의 시에, “한 못의 가을 물 맑아서 밑이 없는데, 만 줄기 부용화 이슬에 새로 씻겼네. 구름 비단인 양 널리 흩어져 눈앞에 있는데, 맑은 향기 은은히 모시옷에 풍기네. 늙은 중 재치 있어 오묘함 헤아리기 어려운데, 조용히 말하다가 흰털 총채 때로 짚네. 《연화경(蓮華經)》깊은 뜻 설명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만곡(萬斛)의 구슬알 한 번 비에 떨어지네.” 하였다.

종가관등(鍾街觀燈) 풍월정 시에, “서울 10리 천만 집에 거리 등불 곳곳마다 붉은 안개 감도네. 향 수레 보배 말 길 가득 지나가니, 취한 노래 노는 여자 얼굴이 꽃 같아라. 밝은 달 휘황하여 맑기가 대낮 같은데, 옆사람 오가는 것 작은 원숭이처럼 여기네. 인간 세상 즐거운 일 여기에 많나니, 음악 소리 끝나는 곳에 새벽녘 물시계의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리누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하늘 위의 항성(恒星)이 일천 집에 떨어진 듯, 황혼에 가는 곳마다 붉은 노을 감도누나. 긴 장대에 펄럭펄럭 채색 노끈 날리고, 구슬 나무에 번화하게 금속화(金粟花) 피었네. 산하(山河) 대지가 대낮으로 변했는데, 노랫소리 북소리 들끓으니 사람도 원숭이 같네. 소리 모아 다투어가며 부처 탄신 노래하니, 물결처럼 밀려 다니며 물시계의 물 다 떨어진 줄도 모르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장안 성중 백만 집에, 하룻밤 연등 밝기가 노을 같구나. 3천 세계의 산호수(珊瑚樹)요, 24다리에 부용꽃이네. 동쪽 거리 서쪽 저자에 밝기가 대낮 같으니 아이들 놀라 달림이 원숭이보다 빠르네. 별들마냥 난간에 흩어져 그대로 있는데, 황금 누대 앞에 새벽 물시계의 물 떨어지는 소리 재촉한다.”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수없는 등불 수없는 집에 밝혔는데 붉은 빛 서로 비쳐 흐르는 노을 같구나. 옥 노끈엔 나직하게 명월주(明月珠)가 드리웠고, 구슬 가지엔 번화하여 영롱한 꽃 피어 있네. 어둔 거리 다 비쳐 밝은 낮 이루니, 구경하는 이들 기뻐 뛰며 조급하기 원숭일세. 아홉 거리의 풍악소리 태평세월 즐기는데, 어느 사이 종소리 오경 누수를 알려온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태평한 기상 일천 집에 넘치는데, 일천 집 성곽이 붉은 노을보다 밝았어라. 거리 메운 대말[竹馬] 달리며 호령하는데, 일만의 금련화 늘어진 꽃송이 다투어 구경하네. 밝은 별인양 찬란하니 밤이 대낮 같고, 높은 장대 구름 속에 드니 원숭이도 못 오르리. 좋은 말안장을 맞대고 구경하기 절반도 못 되는데, 새벽 화살이 금문(金門)의 누수 끝내기 재촉하네.” 하였다.

입석조어(立石釣魚) 풍월정 시에, “낚싯대 들고 한가로이 와서 혼자 기대섰는데, 비온 뒤 더한 물 아직도 푸르게 담겨 있네. 부령초 움직이는 곳에 물결무늬 흩어지고, 고기들 때로 뛰고 다시 잠긴다. 잠깐 동안 낚은 고기 회도 치고 국도 끓이니, 사오는 술병에 가득 차 있어라. 인생을 마음가는 대로 사는 일 옛날부터 중히 여겼으니, 엄광(嚴光)이 어찌 공후(公侯)를 부러워했겠는가.”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긴 냇물 언덕을 씻으니 돌만이 우뚝 섰는데, 벼랑 아래 맑은 소에 마름풀 푸르렀다. 깃은 가볍고 줄은 가는데, 미끼 향기로워, 큰 고기 깊숙히 잠기고 작은 고기 뛰노네. 살찐 고기 잡아 아이들 불러 빨리 국 끓이라 재촉하고, 좋은 술 따라내니 봄기운 병에 가득하여라. 비낀 바람 가는 비에 취해서 돌아오지 않고, 강호에 내 성명 모두 다 맡겼노라.”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시냇가 괴이한 돌 사람처럼 섰는데, 가을물 영롱하여 차고 푸르게 비친다. 낚싯대 들고 찾아가서 푸른 풀 위에 앉으니, 백 척 은실에 금 잉어 번뜩이네. 가늘게 썰어 회를 치고 불에 익혀 국을 끓이니, 모래사장 위에 쌍옥병(雙玉甁) 자주 넘어지네. 취하자 다리 두드리며 창랑가(滄浪歌) 노래하니, 만고에 빛나는 이름은 있어 무엇하리.”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큰 바위 우뚝우뚝 물 굽어보며 섰는데, 맑은 못물 백 이랑 유리처럼 푸르구나. 한가로이 낚싯대 들고 이끼 낀 낚싯터에 앉으니, 노는 고기 미끼를 희롱하여 잠겼다 뛰어 오른다. 금빛 양념 가는 회가 쌀가루 국보다 나으니, 좋은 술 가득가득 은술병 기울어지네. 흠뻑 취하여 머리 밝은 달빛 아래 누웠으니, 유령(劉伶)의 주성(酒聖) 이름 내가 아닐런가.
○ 성임의 시에, “천 년의 우뚝한 돌 언덕 곁에 섰는데, 일만 길 맑은 못물 푸르기도 하구나. 노는 사람 낚싯대 들고 이끼 낀 낚시터에 앉으니, 수없는 고기들 거울 속에 뛰노네. 금빛 양념 옥같은 회에 향기로운 국물 곁들이니, 죽엽주(竹葉酒) 봄 향기를 몇 병이나 기울였나. 인생이란 마음대로 지내는 그것이 즐거운 일, 삼공(三公)으로도 어초(漁樵)의 이름 바꾸지 않으리라.” 하였다.

남산팔영(南山八詠) 정이오(鄭以吾)의 시.
운횡북궐(雲橫北闕) “옥엽(玉葉)은 금궐(金闕)에 비끼고, 붉은 기와 푸른 하늘에 비치네. 뗑뗑 누수 재촉하는데, 북쪽에 상서로운 구름 일어나누나. 아름다운 기운 개인 날 서로 둘렀는데, 높은 기상 바라보니 다시 잇닿았네. 남산 같은 높은 복을 우리 임금께 드리려니, 조심조심 일만 년을 누리소서.” 하였다.
수창남강(水漲南江) “장마물 들판을 덮었는데, 저 강의 흰 기운 성곽에 잇닿았네. 모래판[平沙] 휩쓸어 가고 온갖 냇물 다 모았네. 나루터에서 언덕이 묻힌 줄 알겠는데, 저 하늘 가 가는 배 아득하게 바라본다. 저녁 때 비 개이고 둥근 달 떠오르니, 용용(溶溶)한 그 모습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암저유화(巖底幽花) “봄은 가고 꽃 이미 졌는데, 산중에 빽빽하게 녹음 무성하네. 물 건너니 그윽한 향기 풍기고, 가까운데 언덕 위 바위틈에 기이한 풀 있구나. 늦은 떨기 은일(隱逸)인 양 가련하고, 부질없는 꽃 흥망성쇠 애석하네. 이로부터 정(貞)하고 길(吉)하나니 하늘이 어찌 소나무 두었는가.” 하였다.
영상장송(嶺上長松) “집을 둘러 층층의 묏부리 솟아, 공중에 버텨 푸른 일산 되었네. 비가 개이니 구름 와서 희게 걸치고, 밤이 고요하니 달이 맑게 흥청 이네. 벽이 서 있은 지 천 년은 되어, 바람 따라 10리에 소리 들리누나. 이 모습 돌아보는 이 없고, 떠들썩 명예만 따라 경쟁하네.” 하였다.
삼춘답청(三春踏靑) 북쪽 바라보면 비록 성시(城市)이지만, 남쪽으로 오면 곧 동천(洞天)이라네. 꽃을 찾으니 바람이 맑게 불어오고, 풀은 밟으니 날씨가 따사롭다. 이런 모임 많은 사람 있으리, 고상한 정희 열선(列仙)보다 낫구나. □□□
구일등고(九日登高) 술병 차고 높은 데 오르는 날, 하늘도 맑은 9월초일세. 단풍 숲 먼 골짜기에 한창이고, 푸른 소나무 층층의 언덕 둘러쌌네. 남동(藍洞)은 시 짓던 곳이고, 용산(龍山)에 모자 떨어지던 때로다. 예나 이제나 취함은 같은 것, 마음에 맞으면 그 밖에 다른 무엇 구하리.
척헌관등(陟巘觀燈) 4월 8일 관등놀이 성대한데, 승평세월 이 얼마인가. 일만 초롱불 대낮같이 밝으니, 사방이 고요하고 티끌 하나 없네. 붉은 불길 천 길이나 서린 듯, 별 광채 북두칠성[北辰]으로 향했네. 밤을 새워도 구경 부족하여, 닭 우는 새벽에 이른 줄도 모른다네.
연계탁영(沿溪濯纓) 정절(靖節 도연명의 시호) 선생은 다만 물에 다다랐고, 종군(終軍)은 일찍이 긴 노끈 청했네. 냇물 맑으니 발 어이 씻으리, 티끌 떨고 세상 물정 잊겠네. 천천히 흐르니 시내에 이끼 끼어 미끄럽고, 굽이쳐 돌아오니 옥 물결 감도네. 떨어진 붉은 꽃 물에 떠 동구 밖으로 나가니, 봉래(蓬萊) 영주(瀛洲) 여긴가 하노라.”
[주-D001] 손바닥이……그 모습 : 
중국의 화산(華山)에는 선인장[掌]이 높이 솟았으므로, 시인이, “선인장 위에 비가 처음 개었네.” 하였다.
[주-D002] 삼상(三上) : 
마상(馬上)ㆍ침상(枕上)ㆍ측상(廁上)을 말한다.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에 있는 말인데, 시를 생각하는 데에는 말 위, 베개 위, 측간 위의 세 가지가 가장 좋다는 말이다.
[주-D003] 술……마셨네 : 
술을 한 번 잘 마셨다는 뜻이다. 중국 송(宋)대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의 시 가운데 ‘신금시부일중지(臣今時復一中之)’라는 구가 보이는데, 그것은 옛날 조조(曹操)가 서막(徐邈)을 부르니, 서막이 술에 취하여, “지금 성인(聖人)에 맞았다.”[중(中)은 중독(中毒)이란 뜻] 하였다. 당시에 금주(禁酒)하였으므로 술꾼들이 청주를 성인이라 하고, 탁주는 현인이라는 은어(隱語)를 썼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04] 동화(東華) : 
당(唐) 나라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동화문(東華門)으로 들어갔다.
[주-D005] 시구(詩句)를……넣었네 : 
장돈(章惇)ㆍ채경(蔡京) 등이 소동파(蘇東坡)를 모함하되, 그가 지은 시(詩)를 지적하여 이것은 국가의 어느 일을 비방한 시요, 저것은 어느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일일이 지적하여 죄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 한다.
[주-D006] 그림자뿐인……하려나 : 
소동파가 귀양갔을 때에 장돈(章惇)이 그곳의 주민에게, 소동파에게 집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였다.
[주-D007] 옛날의……깨었다네 : 
소동파가 귀양가 있는데, 이웃에 사는 어떤 노파가 보고 말하기를, “내한(內翰)의 어젯날 부귀가 일장춘몽이요.” 하였으므로, 동파는 그 노파를 춘몽파(春夢婆)라 하였다.
[주-D008] 적벽강(赤壁江)……노닐꺼나 : 
이상은 〈적벽부〉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주-D009] 지금껏……오를 듯 :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글을 보고 감탄하여 한 말인데, 여기서는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를 말한 것이다.
[주-D010] 시령(詩令) : 
여러 사람이 시를 지으면서 시간이라든지 기타 특수한 조건으로 제한하고 재촉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1] 명당(明堂) : 
풍수(風水)의 용어인데, 양택(陽宅)의 앞을 말한다.
[주-D012] 남국의 강기(綱紀) : 
《시경》 소아(小雅) 〈사월(四月)〉에, “도도한 강한이 남국의 강기가 되느니라.[滔滔江漢 南國之紀]” 하였다.
[주-D013] 어찌하여……버렸다네 : 
고려조 말기에는 왜구(倭寇)의 침략이 심하여,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화도 해상에까지 자주 들어왔으며, 고려 공민왕 22년 6월에는 왜선(倭船)이 양천(陽川)을 지나 한양부(漢陽府) 즉 서울에도 들어와서 약탈하였는데, 시중에 보이는 왜구의 사실은 이 일을 말한다.
[주-D014] 호연(浩然)한……뜻 : 
육조(六朝) 시대의 종각(宗慤)이 소원을 말하기를,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치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주-D015] 풍악은……있소 : 
이 구절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보인다.
[주-D016] 무성한 숲……것이며 : 
〈난정기〉에, “무성한 숲 긴 대나무[茂林脩竹]”라는 구절이 있다.
[주-D017] 이난(二難) : 
두 가지 얻기 어려운 것. 즉 어진 주인과 아름다운 손님을 말한다.
[주-D018] 사미(四美) : 
좋은 때[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완상하는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을 말한다.
[주-D019] 서호(西湖)를……비하겠는데 : 
소동파의 〈서호시(西湖詩)〉에, “만일 서호를 서자(西子)에 비하면 넓은 화장과 진한 화장이[淡粧濃抹] 모두 서로 마땅하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서자(西子)는 옛날의 미인 서시(西施)를 말한 것이다.
[주-D020] 병 가운데 경치[壺中景] : 
한(漢) 나라 여남(汝南)에 한 노인이 약방[藥肆]을 내고 있었는데, 해가 저물면 병 속으로 들어갔다. 비장방(費長旁)이 몰래 그것을 보고 그에게 간청하여 함께 병 속에 들어가니, 별천지였다고 한다.
[주-D021] 물 속에서 조는 것 :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하지장(賀知章)을 두고, “취해서 우물에 빠져 물 속에서 조네.” 하였다.
[주-D022] 구장(鳩杖) : 
비둘기 형상을 머리에 새긴 노인의 지팡이. 나라에서 공로 있는 늙은 신하에게 하사하였다. 여기에서는 한언국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D023] 성사(星槎) :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황하(黃河)의 근원을 탐사(探査)하려고 뗏목에서 자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로 올라가 견우(牽牛)ㆍ직녀(織女)를 보았다는 고사.
[주-D024] 염예퇴(灩澦堆) : 
사천성(四川省)의 구당협(瞿唐峽) 상류의 큰 암석이 있는 곳. 초(楚)ㆍ촉(蜀)의 문호이다.
[주-D025] 정운(停雲) :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진(晉)의 도연명(陶淵明)이 〈정운〉이란 시의 자서(自序)에서 “정운은 친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6] 조각 구름 : 
두보(杜甫)가 여러 사람과 야외(野外)에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지은 시에, “머리 위에 한 조각 구름이 검으니, 응당 비[雨]가 시 쓰기를 재촉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7] 기장(奇章) : 
당(唐) 나라 정승 우승유(牛僧孺)를 기장공(奇章公)이라 하였는데, 그는 특히 돌을 좋아하여 많은 기암괴석을 모았다.
[주-D028] 절월(節鉞) : 
지방에 병권(兵權)을 맡아 나가는 신하에게 임금이 절(節)과 도끼[鉞]를 주어서 보낸다.
[주-D029] 이곽(李郭) : 
한(漢) 나라 때에 명사(名士)인 이응(李膺)과 곽태(郭泰)가 낙양에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전송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배를 타고 건너가니 사람들이 바라보고 신선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高士傳》
[주-D030] 금솥의……손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서 “국에 간을 맞추는 데에 비유하면 너를 소금과 매실로 삼으리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정에서 재상으로 정치하던 솜씨란 말이다.
[주-D031] 무우(舞雩)와 호연(浩然)한 기운 : 
증점(曾點)이 무우에 나가 바람 쏘이겠다 한 것은 《논어(論語)》에 있고, 호연한 기운을 길러야 한다는 말은 《맹자》에 보인다.
[주-D032] 쾌재(快哉)를 부르던 초양왕(楚襄王) :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초양왕(楚襄王)이 높은 대(臺)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여 ‘쾌하다[快哉]’ 하였다.” 한다.
[주-D033] 냉연(冷然)하던 열자(列子) : 
《장자(莊子)》에, “열자가 바람을 타고 공중에 노니니 냉연(冷然)히 좋았다.” 하였다.
[주-D034] 아아(峩峩)하고 양양(洋洋)한 곡조 : 
지음(知音)을 뜻하는 아양곡(峩洋曲)으로 춘추 시대 백아(백아)가 타고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의 곡조이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峩峩兮若泰山]” 하였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자 “넓고 넓기가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列子 湯問》
[주-D035] 백제(白帝)와 옥비(玉妃) : 
백제와 옥비는 여기서는 눈[雪]의 신(神)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D036] 악양루(岳陽樓 남창에 있는 누각)와 등왕각(滕王閣) : 
강서성(江西省)에 있으며 당(唐) 나라 고조의 아들 원영(元嬰)이 세웠다.
[주-D037] 금어(金魚) : 
당 나라 때에 3품 이상의 벼슬아치와 특사(特賜)를 받은 사람만이 금어(金魚)를 찼다.
[주-D038] 학창의(鶴氅衣 학의 털로 만든 옷) : 
학의 털로 만든 것인데 도사(道士)가 입는 옷이다.
[주-D039] 여의(如意) : 
진(晉) 나라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이 서로 부유함을 자랑하는데, 하루는 왕개가 두어 자[尺]나 되는 산호수(珊瑚樹)를 석숭에게 자랑하자, 석숭이 방망이를 들고 때려부수고는 제 집에 있는 것을 가져다 보이는데 5, 6척이나 되는 것이 여러 나무였다.
[주-D040] 주미(麈尾) : 
육조(六朝) 시대에 명사(名士)들이 청담(淸談)을 할 때에 주미를 손에 들고 휘두르며 이야기하였으므로 주미의 털이 떨어졌다.
[주-D041] 협욕(陜鄏) : 
중국 주(周) 나라 떄의 지명인데,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 있었다. 주 나라 성왕(成王)이 보정(寶鼎)을 두어 두고 장래를 점치던 곳이다.
[주-D042] 상림(上林)과 자허(子虛) : 
상림과 자허는 모두 한(漢) 나라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부(賦) 이름이다. 처음 상여가 〈자허부〉를 지어 제후들이 유렵(遊獵)하는 모습을 말하였는데, 뒤에 한 나라 무제(武帝)의 칭찬을 받고서는, 다시 〈상림부〉를 지어 천자의 유렵하는 모습을 글로 옮겼다. 두 글이 모두 명문(名文)으로 알려졌다.
[주-D043] 방일(放逸) : 
옛날 진(晉) 나라의 유량(庾亮)이 은호(殷浩) 등 친구들과 함께, 가을밤에 남루에 올라가 호탕ㆍ방일(放逸)한 회포를 말하고, 글로도 읊은 것을 말한다.
[주-D044] 가시나무 화살 :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은 복숭아나무 활과 함께 마귀 쫓는 데에 사용하였다.
[주-D045] 뽕나무로 만든 화살 :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때, 뽕나무로 만든 활[桑弧]과 쑥대로 만든 화살[蓬矢]로 천지사방을 향하여 쏘았는데, 이는 장차 원대한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의미였다. 《禮記 內則》
[주-D046] 봉호(蓬壺) : 
봉래(蓬萊)와 방호(方壺)를 의미한 것으로 모두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주-D047] 금영(黔嬴) : 
수신(水神)의 이름이다. 금뢰(黔雷)라고도 한다.
[주-D048] 망서(望舒) : 
달을 둥근 바퀴로 생각하고 그 바퀴를 몰고 가는 신(神)을 망서(望舒)라고 한다.
[주-D049] 용고(龍膏) : 
용의 기름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등유로 하면 특히 밝아 서광(瑞光)이라 이름한다.
[주-D050] 신선의 집 : 
옛날 중국에서 불도 불사의 신선으로 전하여 오는 왕자교(王子喬)와 적송자(赤松子)를 말하는데, 장수(長壽)하는 것을 교송지수(喬松之壽)라고도 한다.
[주-D051] 중선(仲宣) : 
위(魏) 나라 문인 왕찬(王粲)의 자(字)이다. 지금 호북성(湖北城) 당양현(當陽縣) 동남쪽 장수(漳水) 위에 중선루(仲宣樓)가 있는데, 왕찬이 여기에 올라서 〈중선루부〉를 지어 유명하다.
[주-D052] 좌대충(左大沖) : 
진(晉) 나라 문인 좌사(左思). 그는 학문이 높고, 글을 잘 지었는데, 또한 부(賦)에도 능하였다. 〈제도부(齊都賦)〉ㆍ〈삼도부(三都賦)〉 등은 모두 그가 지은 명문장이다.
[주-D053] 서시(徐市) : 
진시황(秦始皇) 때의 도사(道士)로서,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려면 동남(童男 순결한 남자아이) 5백 명과 동녀(童女 순결한 처녀) 5백 명을 데리고 가야 된다고 말하여, 진시황이 그대로 하여 주었는데, 그는 배를 타고 동해(지금의 발해)로 떠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나라로 와서 영주하였다고도 한다.
[주-D054] 무이궁(武夷宮) :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산. 무이산은 옛부터 신선이 있는 곳이라 한다. 무이궁은 그 신선이 있는 궁이란 말이다.
[주-D055] 석목(析木) : 
석목은 하늘의 별의 위치이다. 그 위치는 중국 북경으로부터 우리나라까지에 해당된다.
[주-D056] 월상(越裳) : 
옛날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에 남서방에 있는 월상국에서 이중 통역을 앞세우고 와서 조회하였다 한다.
[주-D057] 마읍(馬邑) : 
중국 산서성 북방 가에 있는 땅이다. 여기서는 단지 봉산(鳳山)과 상대해서 말한 것뿐이다.
[주-D058] 봉산(鳳山) : 
황해도 봉산인데, 중국 사신이 서울 오는 도중에 지난 길의 역정 중에서 기억나는 대로 쓴 것 같다.
[주-D059] 오계자(吳季子) : 
춘추 시대 오 나라의 제후 수몽(壽夢)이라는 사람의 넷째 아들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다. 북방에 와서 여러 나라의 민요와 음악을 듣고서 각기 그 나라의 풍속과 국민성을 알았다고 한다.
[주-D060] 천록(天祿) : 
한(漢) 나라 시대에 서적을 모아서 쌓은 곳이었다. 양웅이 이 천록각에서 서적을 읽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하려고 하자,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주-D061] 중거(仲車) : 
송(宋) 나라 사람이다. 시골에 들어앉아 있었던 선비로, 귀가 절벽이어서 남의 말을 듣지 못하므로 붓으로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난 일은 가장 빨리 알았기 때문에 하나의 기적으로 여겼다.
[주-D062] 선비 양성하는[造士] : 
주 나라 학제(學制)의 하나인데, 학문이 우수한 이를 조사 또는 준사(俊士)로 하였으니, 대개 학문의 성취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3] 요재(翹材) : 
수재(秀才)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에서 요재관(翹材館)을 짓고, 어진 이들을 초청하여 거처하게 한 일이 있었다.
[주-D064] 등영(登瀛) :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올라간다는 의미의 말이다. 당(唐) 나라의 태종(太宗)이 글하는 이들을 좋아하여 문학관(文學館)을 짓고, 문장이 뛰어나고 어진 선비인 방현령(傍玄齡) 등 18학사를 초청하여 거처하게 하며 극진히 대우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등영주’라 하였다.
[주-D065] 범가(范哥) 늙은이 :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말한다. 그는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선비는 마땅히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할 것이다.” 하였다.
[주-D066] 등왕각(滕王閣) : 
중국 강서성의 수부인 남창(南昌)에 있는 정자. 당(唐) 나라 고종(高宗)의 아들 원영(元嬰)이 강주 자사(江州刺史)로 있으면서 이 누각을 세웠는데 당시에 등왕에 봉해졌던 까닭으로 등왕각이라고 일컬음. 왕발(王勃)이 이곳에 이르러 〈등왕각서(滕王閣序)〉라는 글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
[주-D067] 나계(螺髻) : 
나환(螺鬟). 머리를 묶어 올린 모습으로 산봉우리를 형용하는 말이다.
[주-D068] 돌을 채찍질하여 : 
진(秦) 나라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때에 진시황이 채찍으로 돌을 치면 그 돌이 날아가서 쌓을 자리에 놓였다 한다.
[주-D069] 임금님……했다네 :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러 갔다가 갑자기 비바람을 만나 큰 소나무 아래로 몸을 피하고, 그 소나무가 공이 있다고 하여 대부(大夫)로 봉(封)하였다. 《史記 秦始皇本紀》
[주-D070] 치첩(雉堞) : 
성(城) 쌓는 데 몇십 걸음 씩 가다가 직선 밖으로 조금씩 내어 쌓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치첩이라고 한다. 원래 성을 공격하는 사람이 성 밑에 바짝 들어오면 성 위에서 방어할 수 없으므로 이런 치첩을 만들어서 방어한 것이다.
[주-D071] 악군(鄂君) : 
춘추 시대 초왕(楚王)의 이종 아우 자석(子晳). 악군이 배를 타고 가는데, 월(越) 나라 여인이 노래로 애모하는 정을 전달하였다. 악군이 이에 비단 이불로 덮고 자리를 같이하였다고 한다.
[주-D072] 영화(永和) : 
진(晉) 나라 목제(穆帝)의 연호(年號)이다. 그 영화 9년 3월 3일에 왕희지(王羲之)가 당시의 명사(名士) 41명과 회계산 아래 난정(蘭亭)에 모여 놀았던 고사가 있고 아울러 〈난정기(蘭亭記)〉라는 글을 남겼다.
[주-D073] 동평왕(東平王) : 
한(漢) 나라 광무제의 여덟째 아들 유창(劉蒼)인데, 광무제가 집에 거처할 때에 무엇을 즐기느냐고 물으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즐겁다고 대답하였다.
[주-D074] 금구(金龜) : 
옛날 중국인들의 패물의 하나이다. 당(唐) 나라의 문장가 하지장(賀之章)이 이 금구로 술을 바꾸어 이태백과 함께 술을 마신 사실이 있다.
[주-D075] 하간(河澗) : 
중국의 한 지방인데, 이 지방의 음악은 중국의 바른 음악으로 알려졌다. 여기서는 왕국의 정악(正樂)을 의미한다.
[주-D076] 벽통(碧筒)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정공이 연잎에다 술을 빚어 넣어 그 술이 익은 뒤에 연잎 줄기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술을 빨아먹으며 그것을 벽통주라고 이름지었다.
[주-D077] 양주(楊州) : 
예전에 네 사람이 모여서 소원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10만 관(貫)의 돈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는데, 한 사람은 허리에 10만 관(貫)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 공중에 날아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으니, 다른 세 사람의 것을 모두 겸한 것이다.
[주-D078] 화산(華山) : 
송(宋) 나라 반낭(潘閬)이 화산(華山)에 가서 시를 짓기를, “삼봉(三峯)이 하늘에 높이 솟은 것을 사랑하여 처들고 읊조리며 바라보느라고 나귀를 거꾸로 탔네.” 하였더니, 다른 이가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위야(魏野)가 시를 지어 주기를, “지금부터 화산의 도적(圖籍) 위에 반낭의 나귀 거꾸로 탄 것을 보태겠다.” 하였다.
[주-D079] 교(郊)에서……제사드리고 : 
예전에는 오직 천자라야만 교(郊)에서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었다.
[주-D080] 원위(元魏) :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조(北朝)의 한 나라이다. 나라 이름은 위(魏)인데 황제의 성이 선비족(鮮卑族)의 척발씨(拓跋氏)였으므로 흔히들 척발위(拓跋魏)로 불렀는데 후에 성을 원(元)으로 고쳤으므로 원위라고도 한다.
[주-D081] 소량(蕭梁) :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南朝)의 한 나라인데 황제의 성이 소씨(蕭氏)였으므로 소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D082] 등륙(滕六) : 
눈을 내리게 하는 신이다. 등륙이 재주를 피운다는 말은 곧 눈이 왔다는 의미의 말이다.
[주-D083] 섬중(剡中) :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한 지명이다. 옛날 이곳에 대안도(戴安道)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그의 친구인 왕자유(王子猶)가 눈오는 날 밤에 방문한 일이 있어 유명하다.
[주-D084] 무릉(茂陵)의 가사 : 
무릉(茂陵)은 한 나라 무제(武帝)의 능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능으로 그(무제)의 대명사로 쓴 것이다. 그는 〈추풍사(秋風詞)〉라는 노래를 지러 불렀다.
[주-D085] 안인(安仁)의 부(賦) : 
안인(安仁)은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자(字)이다. 그는 〈추회부(秋懷賦)〉를 지었다.
[주-D086] 병 속에 들어간 것 : 
한(漢) 나라 때 호공(壺公)이라는 신선이 병 하나를 벽에 걸어두고 밤이면 그 병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는 사람 생활에 필요한 것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주-D087] 쌍남금(雙南金) : 
중국에서는 예전에 남쪽 지방에서 나는 금(金)이 품질이 좋아서 북방에서 나는 금보다 값이 배나 되었다. 그래서 보통금 두 몫 되는 남쪽 금이라고 하여 쌍남금이라고 말한다.
[주-D088] 광산(匡山) : 
중국 여산(廬山)을 말하는데, 옛날 은자(殷者) 광유(匡裕)선생이 이 여산에 숨어서 글을 읽으며 지냈기 때문에 여산을 광려산(匡廬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D089] 예상곡(霓裳曲)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꿈에 월궁(月宮)에 올라가서 들은 음악을 기억하여, 그 곡조를 인간 세상에 전했다는데, 그것을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라 한다.
[주-D090] 삼상(參商) : 
두 별의 이름이다. 삼성(參星)의 위치는 서쪽이요, 상성(商星)의 위치는 그와 반대쪽에 있으므로 이 두 별은 함께 보지 못하다. 따라서 사람이 떨어져 서로 만나지 못함을 비겨 말한다.
[주-D091] 양관곡(陽關曲) : 
예전 중국 사람들은 이별하는 자리에서 양관곡(陽關曲)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한다. 그 노래는 세 편(篇)으로 되었다.
[주-D092] 원안(袁安) : 
동한(東漢) 때에 어느 겨울날 눈이 많이 왔는데, 원안이라는 사람이 먹을 것도 없으면서 3일 동안이나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
[주-D093] 설당(雪堂) : 
소동파(蘇東坡)가 황주(黃州)에서 조그만 당(堂)을 짓고 그 네 벽에다 설경(雪景)을 그렸으므로 설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소동파는 눈오는 날 여러 친구와 눈을 제목으로 한시를 짓는데 보통 눈에 대해서 쓰는 문자나 글자는 통 쓰지 아니하고 짓는다는 법칙을 세우고 지은 일이 있다.
[주-D094] 갈고(羯鼓)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갈고라는 서방 민족 갈족의 악기를 잘 쳤다. 어느 이른 봄 아직도 꽃이 활짝 피지 아니한 때에 후원 화악루(花萼樓)에서 갈고로 한 곡조 쳤더니 후원의 꽃들이 일시에 활짝 피었다 한다.
[주-D095] 뇌문고(雷門鼓) : 
춘추 시대 월(越) 나라에 있던 북인데, 그 소리가 1백 리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주-D096] 화정(和靖) : 
화정은 송(宋) 나라의 처사 임포(林逋)의 시호이다. 그는 항주(杭州) 서호에 살면서 황제가 벼슬시키려 하여도 거절하고 일생을 깨끗하게 살았는데, 그는 매화를 매우 사랑하여 자기의 아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매화시는 유명하다.
[주-D097] 유령(劉伶) : 
진(晉) 나라 사람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그는 술을 잘 마셔 한 자리에서 한 섬 술을 마시고 다섯 말[斗]로 해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주덕송(酒德頌)〉을 지어서 술을 찬미하였다.
[주-D098] 종군(終軍) : 
한(漢) 나라 사람이다. 18세 때에 남월(南越 지금의 광동)왕이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라고 하였는데, 종군(從軍)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긴 노끈 하나를 주면 가지고 가서 남월왕의 목을 얽어 가지고 오겠다.”고 청하였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 상(京都上)
경도 상



고조선(古朝鮮)은 마한(馬韓)의 지역이다. 서울은 북으로 화산(華山)을 진산(鎭山)으로 삼아, 동과 서는 용이 서리고 범이 쭈구리고 앉은 형세이고, 남쪽은 한강(漢江)으로써 요해처(要害處)를 삼았으며, 멀리 동쪽에는 대관령이 있고 서쪽에는 발해(渤海)가 둘러싸고 있어서 그 형세의 훌륭함이 동방(東方)의 으뜸으로서, 진실로 산하(山河) 중에, 백이(百二)의 땅이다. 백제(百濟) 중엽에 한산(漢山)에서 옮겨와 살다가 얼마 후에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였다. 고려(高麗) 숙종(肅宗)이 비록 남경(南京)을 두었지만, 가끔 와서 순행하였을 뿐이니, 모두 그 형세의 훌륭함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천명(天命)을 받고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 사방에서 조정으로 오는 길의 거리를 균등하게 하고, 영원토록 뽑아 낼 수 없는 큰 터를 세우니, 동경ㆍ서경ㆍ개경의 삼경(三京)의 형세로서는 그 만분의 일도 여기에 방불할 수 없는 것이다. 아름답고 훌륭하구나.
『신증』국도명 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살펴보건대, 저 동국(東國)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로,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 한계가 되고, 동쪽은 상돈(桑暾)에 닿았으며, 천지(天池)는 거의 그 남쪽 문이 되고, 말갈(靺鞨)은 그 북쪽 문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나라는 동남쪽이 모두 바다에 닿아있고, 서북쪽은 건주(建州)이고, 정북쪽은 모련(毛憐) 해서(海西)이다. 팔도(八道)가 별처럼 벌여 있는데, 경기(京畿)가 홀로 으뜸이 되고, 충청(忠淸)ㆍ경상(慶尙)ㆍ황해(黃海)ㆍ강원(江原)을 날개로 삼았으며, 동북쪽의 명칭을 영안(永安 지금의 함경도)이라 한 것은 그 뜻이 경계를 견고히 하려는 데에 있다. 평안(平安 지금의 평안도)은 땅이 조금 척박하고, 전라(全羅)는 물산이 가장 풍부하였다. 경기ㆍ충청ㆍ경상ㆍ황해ㆍ강원ㆍ영안ㆍ평안ㆍ전라는 모두 도(道)의 이름인데, 평안은 곧 옛날 변한(弁韓)의 땅이고, 경상은 옛날 진한(辰韓)의 땅이며, 전라는 옛날 마한의 땅이다. 그 넓이는 거리가 2천 리이고, 길이는 배가 된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 리이고, 남북은 4천 리라고 〈지서(誌書)〉에 쓰여져 있다. 옛날을 살펴보면, “그 나라는 서너 나라로 봉해졌는데, 지금은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라(新羅)ㆍ백제(百濟)ㆍ탐라(耽羅)가 지금은 다 그 소유가 되었다. 생각건대, 앞 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밟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당시대의 깊은 은혜를 홀로 입었기 때문이다. 조서(詔書)로써 나라 세운 것을 허락하여 독자적으로 덕화를 펴게 하니, 본조 홍무(弘武) 2년에 고려국의 왕 왕전(王顓)이 표(表)로써 즉위(卽位)를 축하하여 조서로 독자적으로 교화를 펴도록 허락하고, 구뉴(龜紐)와 금인(金印)을 내려주었다. 시(詩)와 서(書)가 있고, 상(庠)과 교(校)가 있다. 선비가 궁하면 향(香)을 피우거나 좀을 물리고, 문장이나 꾸미는 하찮은 일을 하며, 벼슬길이 트이면 붕새를 잡거나 표범을 변하게 한다. 그 나라는 조정의 정삭(正朔)을 받들고,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년(酉年)에 행하고, 회시(會試)와 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년(未年)에 행한다. 농사를 부지런히 짓고 기술을 잘 익히며, 관청에서는 옛것을 많이 본뜨고, 봉급으로는 논밭을 주며, 형벌은 궁형(宮刑)은 쓰지 않고, 도적이라야 옥에 가두어 큰 칼을 씌운다. 환관들도 모두 궁형(宮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직 어릴 때에 다쳤거나 질환이 있는 자를 뽑아 썼기 때문에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도적은 가벼이 용서해주지 않았다. 이 일은 서너명의 통역관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들의 말이 모두 같았다. 무역은 한결같이 곡식이나 베로써 하되, 그 쌓아두는 것에 따라 이익을 남기고, 쓰는 것으로는 금이나 은은 모두 다 금하였으므로, 비록 매우 적은 양이라도 따졌다. 민간에서는 매우 적은 양의 금은이라도 쌓아두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곡식이나 베를 많이 가진 이를 부잣집이라 하였다. 무역 매매는 한결같이 이 곡식과 베로써 하였다. 그 나라에 탐관(貪官)이 적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답의 세(稅)는 결(結)로써 묘(畝)를 대신하였는데, 소로 나흘을 갈 정도라야 4두(斗)의 조세(租稅)를 내었다. 한 마리 소의 힘을 다해서 나흘 동안 가는 땅을 1결이라 한다. 태학(太學)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데에는 종류에 따라 인원을 정하는데, 두 개의 재(齋)에 기숙(寄宿)하는 자는 모두 두 때의 녹(祿)을 먹는다. 성균관(成均館)에는 항상 5백 명을 양성하는데, 3년마다 명경(明經)으로써 뽑은 자를 생원(生員)이라 하고, 시부(詩賦)로써 뽑은 자를 진사(進士)라 하며, 또 남(南)ㆍ중(中)ㆍ동(東)ㆍ서(西)의 사학(四學)에서 승보(升補)된 자를 승학(升學)이라 한다. 사학에서 북쪽을 기피하여 감히 이름짓지 못한 것은 조정을 높여서이다. 생원과 진사는 상재(上齋)에 거처하고, 승학은 하재(下齋)에 거처한다. 생원과 진사로 전시에 합격한 자들만이 식년(式年)에 과거를 보아 비로소 관리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성균관에서 양성된다. 식년은 3년마다 있는데, 33명만 뽑는다. 관리로서 삼품이 아니면 비단으로 몸을 치장하지 못한다. 낮은 관리는 모두 주포(紬布)를 입고 저사(紵絲)는 입지 않는데, 그 짙푸른 색깔의 베옷도 항상 입지 않고 잔치 때라야 입는다. 백성들은 한 전(廛)씩을 받되 벼나 삼은 모든 움을 파고 넣어둔다. 그 간직하는 것도 요(遼) 나라 사람들과 같다. 그 가장 말할 만한 것은 그 나라에 80세가 되는 노인이 있으면 그 남녀들에게 모두 나라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어 은혜를 널리 베푼다. 해마다 늦가을에 왕은 팔십 노인에게 전(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왕비는 팔십 부인에게 궁(宮)에서 잔치를 베풀어준다. 자식에게는 삼년상(三年喪)이 있어서, 비록 종이라도 그렇게 행하는 것을 허락하여 그 효를 이루게 한다. 그 나라 풍속에 상복을 입는 것은 반드시 3년이고, 또 여묘(廬墓)살이 하는 것을 숭상한다. 종에게는 보통 백일의 상기(喪期)를 허락하고, 3년상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허락한다. 왕도(王都)에는 귀후서(歸厚署)를 설치하고 관곽(棺槨)을 쌓아두었다가 빈궁한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 나라의 관곽은 소나무를 많이 쓴다. 그러나 한 도(道)에서 보면 적당한 재목이 적은 듯하기 때문에 왕도에 관청을 설치하여 편리를 보아준 것이다. 향음주례(鄕飮酒禮)에는 술잔을 드는 의식을 엄격하게 하고, 제기를 놓는 것은 질서 있게 하여 그 시끄러움을 경계한다. 의식은 중국과 같고 조정이라는 두 글자만을 고쳐서 국가라고 하였다. 혼인에는 중매하는 것을 신중히 하고 재가(再嫁)해서 난 자식은 아무리 학문이 많아도 사류(士流)에 끼이지 못한다. 그 풍속에는 재가를 부끄럽게 여겨 재가해서 낳았거나 행실이 나쁜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모두 사류의 등사판(登仕版)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벌에는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을 가장 중히 여겨, 대대로 양반(兩班)에 속한 사람이 혹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면 모두 예답지 못한 행동이라 한다. 조상 때부터 일찍이 문무(文武)의 벼슬을 겸한 사람을 양반이라 한다. 양반의 자제에게는 다만 글 읽기만 허락하고 기예(技藝)는 익히게 하지 않는다. 혹 소행이 착하지 못하면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난한다. 심지어는 집안에 도박 기구의 소장(所藏)도 허락하지 않는다. 바둑판이나 쌍륙 따위는 민간 자제들에게도 모두 익히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제사에 있어서는 모두 가묘(家廟)를 세우는데, 대부(大夫)는 삼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선비와 서민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만을 지낸다. 이것은 모두 기자(箕子)로부터 그 풍습을 전한 것이고, 또 중국에서 하는 것을 보고 본받은 것이다. 이상은 모두 관반사(館伴使) 이조 판서(吏曹判書) 허종(許琮)의 《구도풍속첩(具到風俗帖)》에 나와있다. 대개 성곽을 쌓을 때에는 모두 높은 산 앞에 쌓아서 가끔 산봉우리나 산기슭으로 나오더라도 활처럼 굽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큰 것은 날고 나는 듯한 높은 성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높고 높은 표관(豹關)처럼 웅장하다. 대개 의순(義順)에서 선천(宣川)을 지나는 곳에 의순은 객관(客館)의 이름으로 의주 압록강 동쪽에 있으며, 압록강은 바로 중국과 조선의 경계가 된다. 선천은 군(郡)의 이름으로 의주 동쪽에 있다. 그 사이에 비록 험준한 용호(龍虎)나 산 이름으로 용천군(龍川郡)의 진산(鎭山)이다. 웅골(熊骨) 산 이름으로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다 이 있지만, 곽산(郭山)이 더욱 높이 하늘에 솟아 있다. 곽산은 군의 이름으로 그 성은 산꼭대기에 있다. 《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신안(新安)에서 객관의 이름으로 정주(定州)에 있는데, 그 앞에는 누각이 있다. 대정(大定)을 지나는 곳에 강 이름으로 박천군(博川郡)에 있다. 바로 옛날 주몽(朱蒙)이 남으로 달려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래서 또 박천강(博川江)이라고도 한다. 그 산으로서 비록 천마(天馬) 산 이름으로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봉두(鳳頭)의 놓은 산이 있지만, 봉두는 곧 가산군(嘉山郡)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으로 가면 오직 가산령(嘉山嶺)이 가장 높다. 그 재에는 효성(曉星)과 망해(望海)란 곳이 있는데, 모두 사절(使節)들이 지나는 곳이다. 안주(安州)가 또 졸졸 흐르는 강물에 의지하고 있다. 안주성에서 살수(薩水)를 내려다보면 위에 백상루(百祥樓)가 있는데, 곧 수(隋) 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치다가 패한 곳이다. 이 강을 또 청천강(淸川江)이라고도 하며, 성 안에는 안흥관(安興館)이 있다. 군(郡)으로는 숙천(肅川)이 있고, 읍(邑)으로는 순안(順安)이 있는데, 지세는 모두 들판에 있지 않다. 누(樓)는 숙녕(肅寧) 숙녕관 앞에 누각이 있다 이고, 관(館)은 안정(安定) 관의 이름으로 순안현에 속해 있다. 인데 지대는 조금 널찍하고 조용한 편이다. 오직 저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만은 지대가 가장 평탄하고 넓기 때문에, 그 지세에 따라 이름을 평양(平壤)이라 하였다. 여기에 나라가 생길 때부터 이미 물을 임해서 성을 높이 쌓았는데, 얼마를 지내다가 또 가까운 북쪽 산의 험한 곳으로 옮겼다. 평양성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자가 처음 봉해질 때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또 그것이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은 것을 흠으로 여겨서, 다시 그 성 북쪽에 한 성을 쌓았는데, 동으로는 대동강(大同江)이 내려다보이고, 북으로는 금수산(錦繡山)이 닿아 있다. 기자 이후로 전승하여 동한(東漢)에 이르러, 준(準)이란 사람이 연(燕) 나라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마한 땅에 도읍을 옮겼으나, 지금은 자취조차 없어졌다. 이 밖의 여러 고을은 토질이 대부분 마르고 붉으며, 간간이 누런 흙이 있으나 또한 모래와 돌이 섞여 있다. 오직 이 성 가까이에 있는 흙만이 차져서 밭도랑이나 봇도랑의 형상이 남아 있다. 옛 성 안에 기자가 구획한 정전제(井田制)의 형상이 아직 남아 있으니, 곧은 길 같은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벼나 삼이나 콩이나 보리를 심기에 적당하며, 그 풀은 무성하고 그 나무는 키가 크다. 이때에 와서야 중국에서처럼 높은 버드나무가 있게 되었다. 나뭇잎에는 우는 매미가 있고, 풀은 빼어나고 무성하였다. 그리고 금수봉(錦繡峯)은 멀리 우뚝한 용산(龍山)에 접해 있고 용산은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하고, 또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하는데, 금수산 북쪽 20리에 있고,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이 있다. 부벽루(浮碧樓)는 아래로 도도(滔滔)히 흐르는 패수(浿水)를 굽어본다. 대동강이 바로 옛날 패수이다. 옛날의 기린(麒麟)은 아직도 석굴(石窟)에 남아 있고, 기린석은 부벽루 밑에 있는데, 대대로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갔다가, 땅속에서 조천석(朝天石 하늘에 조회하는 돌) 위로 나와 승천(昇天)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한다. 타양(駝羊)은 반쯤 산허리에 버려져 있다. 옛날의 돌말과 구리 낙타가 모두 가시덤불 속에 있다. 궁전은 옛터가 남아 있고, 소나무는 위태로운 다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으니, 석양에 지는 해처럼 그대로 머물지 않는 지난 일을 슬퍼한다. 공묘(孔廟)의 뜰에 세워져 있는 형상은 모두 면류관 쓰고 의상을 갖추고 있고, 또한 청금(靑衿 선비들)도 길가에 성대하게 늘어서 있다.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든 건과 띠는 나부끼고 날리며, 가죽으로 만든 신은 밑이 뾰족하면서 판판하다. 문후할 때는 몸을 굽히고 나아갈 때는 종종 걸음으로 걷는다. 생도들은 모두 부드러운 비단 건을 썼고, 푸른 비단 적삼에 하나의 띠를 늘어뜨렸다. 발에는 코가 뾰족하고 밑이 판판한 가죽신을 신었는데, 모두 버선을 신었다. 동쪽에는 기자의 사당이 있어 나무 신주를 예설(禮設)하고, 거기에 쓰기를, “조선 후대 시조”라 하였다. 이는 단군을 높이어 그 나라를 개창(開倉)한 이라 하였으니, 기자가 그 대를 잇고 왕통(王統)을 전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군은 요(堯) 임금 갑진년에 여기에 나라를 세웠다가, 뒤에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다. 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사당은 기자 사당의 동쪽에 있는데, 나무 신주를 세우고 쓰기를, “조선 시조 단군 신위(神位)”라 하였다. 기자묘는 토산(兔山)에 있으니, 유성(維城)의 서북방이다. 기자묘는 성의 서북쪽 토산에 있는데, 성에서 반 리도 되지 않으며 산세는 매우 높다. 두 개의 석상(石像)이 있어서, 마치 당 나라의 건거(巾裾)와 같은데, 알록달록한 이끼가 끼어 있어, 마치 무늬가 있는 비단옷을 입은 것과 같다. 좌우에는 젖을 먹이면서 꿇어앉은 석양(石羊)이 벌여 있고, 비갈(碑碣)은 머리를 든 귀부(龜趺)에 실려 있다. 둥근 정자를 지어 절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어지럽게 돌을 포개 놓아 뜰의 한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그 근본에 보답하려는 뜻은 융성하지만, 물건을 갖추는 예의로서는 소홀한 것이다. 대동강을 건너면 산이 차츰차츰 높아져서, 생양(生陽) 관의 이름 에 비로소 다다르게 되지만, 길은 더욱 꼬불꼬불하다. 영루(營壘)가 소나무 그늘 사이에 남아 있어서, 마치 겹겹이 있는 옛 무덤과 같다. 서로 전하기를, “당 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의 진터다.” 하는데, 크고 작은 것이 뒤섞여 있어서 전혀 질서가 없는 것이 너무도 기주(冀州)와 유사한 점이 있다. 내가 처음 기주에 갔을 때에 의심하여 어떤 늙은 군인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이것이 당 나라 왕이 고구려를 칠 때의 양식이라고 속인 무더기”라 하였다. 즉 그 밑에는 모두 흙을 쌓고 그 위에는 쌀을 덮어서, 마치 단도제(檀道濟)의 양사창주(量沙唱籌) 따위와 같은 것이다. 생각건대 이 곳의 영루도 그런 따위일 것이다. 바다 위에서 파도를 바라보니, 넓은 도량의 크고 넓음을 알겠다. 땅은 황해도에 속했는데, 북쪽은 모두 산이고, 그 남쪽은 바다에 접하였다. 성불(成佛) 고개 이름 의 웅장한 관문에는 버려진 돌들이 층층이 쌓였는데, 북으로는 자비(慈悲) 고개 이름 에 접하고, 남으로는 발해(勃海)에 다다랐다. 앞서 원(元) 나라에서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는데, 국조(國朝 명(明))에 이르러서는 바깥이 없음을 보였다. 성불재는 북으로는 뒤에 산이 있고, 남으로는 뒤에 바다가 있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다. 한 관문 어귀에 옛날 쳤던 추성(甃城)의 방석(方石) 두어 무더기가 있었다. 한 역관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 나라 때에는 여기를 그어 경계로 삼았으니, 이것이 곧 그 관문의 어귀이다.” 한다. 만일 그렇다면 압록강에서 동으로 평양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내지(內地)가 될 것이니, 조선이 통치하는 8도에서 이미 그 한 도 남짓을 버린 것이 된다. 우리 성조(聖祖 명태조)는 그것을 모두 경계로 삼았으니, 공손히 예를 행하는 것이 옛날에 비해서 차이를 두는 것이 당연하다. 그 고개는 황주에 속해 있다. 연진(延津) 강 이름ㆍ검수(劒水) 관의 이름ㆍ봉산(鳳山) 주(州) 이름ㆍ용천(龍川) 관의 이름 의 환취(環翠)는 으리으리하고 화려하며, 환취는 누대 이름으로 봉산주 관내(館內)에 있다. 총수(葱秀)에는 구름이 연해 있다. 산이 벽처럼 서서 물가에 임해 있는데, 높이 솟고 빼어나고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總秀)였는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일찍이 기문을 지은 일이 있다. 보산(寶山)에는 서기(瑞氣)가 날아오르고 금암(金巖)에는 고인 물이 뚫는다. 보산과 금암은 모두 관의 이름으로 평산부(平山府)에 속해 있다. 성거(聖居)ㆍ송악(松嶽)ㆍ천마(天磨)ㆍ박연(朴淵)은 성거ㆍ송악ㆍ천마는 모두 산의 이름이고, 박연은 폭포 이름이다. 송악이 그 진산이다. 성거와 천마는 동북쪽에서 뻗어나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푸른 하늘에까지 꽂혀 있고, 그 가운데 세 개의 봉우리는 마치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다. 그 중의 한 봉우리가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물러앉아 낮은 편이니, 마치 시자(侍者)의 모양과 같은데, 항상 안개와 구름 속에 쌓여서,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내 일찍 시를 지은 일이 있다. 개성(開城)으로 돌아와 머무니 유도(留都)가 있는 곳이다. 위봉(威鳳) 문의 남은 터가 있어 북쪽 기슭에 버려져 있고, 위봉은 누대의 이름인데 왕건(王建)이 앞문이다. 반룡(蟠龍 청룡(靑龍))의 옛 언덕이 있어 동쪽의 밭두둑 길로 나온다. 동쪽에 능묘(陵墓)가 있으니 바로 지금 국왕 이씨(李氏)의 선대 무덤이다. 신물(神物)은 영추(靈湫)에 엎드려 있고 폭포는 긴 내를 걸려 있다. 산꼭대기에 용추 폭포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씨가 여기에 도읍했을 때 가뭄을 만나 임금이 친히 거기에 가서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어떤 도술을 부리는 자가 용을 쳤더니, 용이 물에서 나와 왕을 뵈었다. 왕이 지팡이로 용을 쳐서 비늘 몇 개를 떨어뜨렸는데, 지금도 그 비늘이 국고(國庫)에 수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통역관 이의(李義)는 개성 사람으로 일찍이 내게 이 사실을 말하고, 또 왕에게 아뢰어 그 비늘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려 하였으나, 나는 쓸데없는 일이라 여겨 드디어 그만두게 하였다. 여염집은 만 정(井)이나 되고 곡물은 백 전(廛)이 된다. 관청은 당속(堂屬)의 높낮이를 한정하고 묘학(廟學 개성의 성균관)에는 성현의 엄중한 소상(塑像)을 안치하였다. 지금의 군학(郡學)은 바로 왕건 때의 성균관으로, 성현을 모두 소상(塑像)으로 한 것은 평양과 같다. 그 망루(望樓)는 곧 왕씨 시대의 태평관(太平館)인데, 다른 관보다 유독 빼어나 웅장하기 때문이다.미나리는 반수(泮水)에서 향기를 피우고운초(芸草)는 묵은 책 속의 좀을 물리친다.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펄럭이고 달 밝은 밤에 피리 소리 들린다. 그 생산물은 풍성하여 원래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도 밀집(密集)하여 서경(西京)이 견줄 바가 아니니, 이는 왕씨가 여기에서 왕천하한 것이 4백 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요(瑤 공양왕)가 혼미(昏迷)해서 비로소 나랏일을 이씨에게 임시로 맡기고 명목상 고려가 이곳을 통치한 것은 서너 개의 성(姓)을 바꾸었을 뿐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얻자 다시 옛날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본조 명 홍무(弘武) 25년에 고려 국왕 왕요(王瑤)가 혼미하여 사람을 많이 죽여서 민심을 잃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문하시랑 이씨인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국사를 임시로 맡기고, 그 나라의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을 보내와서 명령을 청하였다. 뒤에 우리 태조의 옛날 이름을 지금의 휘(諱)로 바꾸고, 또 국호(國號)의 개칭을 하니, 상(上 명제)이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이름 중에는 오직 ‘조선’이 가장 좋고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하고 명하여, ‘조선’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명을 받은 뒤에 드디어 지금의 한성부(漢城府)로 천도하였다. 이 때문에 개성을 유도(留都)라 한 것이라? 한다. 임진(臨津)을 건너고 임진은 강 이름으로 장단부(長湍府)에 속해 있다. 파주(坡州)에 멈추어 멀리 한성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기운이 높이 오른다. 이에 벽제(碧蹄 관의 이름)를 지나고 홍제(弘濟 관의 이름)에 오르면 여기가 왕경(王京)으로 동쪽에 우뚝 솟아 있으니, 높고 높은 삼각산(三角山)으로 자리를 정하였는데, 삼각산은 곧 왕경의 진산으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허리에 있다. 그 산마루를 바라보매 여러 높은 봉우리들이 마치 톱니와 같다. 푸르고 푸른 소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북으로는 천길이나 되는 형세가 연이어 있으니, 어찌 천 명의 군사만을 누를 뿐이랴? 서쪽으로 한 관문을 바라보면 그 길은 한 기마(騎馬)만이 다닐 만하다. 홍제에서 동으로 반 리를 못 가서 자연적으로 된 한 관문이 있어서, 북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으로는 남산에 접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한 기마가 다닐 만하니, 그렇게 험할 수가 없다. 산이 성 밖을 둘러싸매 힘차게 나르는 봉황이 빛을 내뿜는 듯하고, 동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그 형세가 모두 팔짱을 끼고 둘러 있는 듯하다. 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였으매 하얗게 쌓인 눈이 막 개인 듯하다. 삼각산에서 남산까지의 산빛이 모두 희고 희미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눈과 같다. 모화관(慕華館)은 서남쪽 산기슭에 세워졌고, 숭례문(崇禮門)은 바로 남쪽에 있다. 모화관은 성에서 8리에 있는데, 가운데는 전(殿)이고, 앞에는 문이다. 모든 명제의 조서가 이르면 왕이 나가 길 왼쪽에서 맞이한다. 숭례는 그 나라의 남문이다. 하나는 주원(周爰)의 황화(皇華)가 쉬는 것이고, 하나는 회동(會同)의 문궤(文軌)를 맞이하는 것이다. 조서가 오면 왕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고, 신하는 예복(禮服)을 차려 입고 고니처럼 반듯이 서서 모신다. 거리는 모두 늙은이 어린이들로 가득 차고, 누대는 모두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여염집들은 모두 반포하여 내려준 예제(禮制)처럼 채색 비단을 벌여 놓고 그림을 걸어 둔다. 음악 소리는 느린 듯하면서 빠르고, 차린 음식은 빛나고도 화려하다. 침단(沈檀)은 새벽해가 연기와 안개를 내뿜는 듯하고, 도리(桃李)는 봄바람에 날리는 비단처럼 아름답다. 계속해 모여드는 거마(車馬) 소리가 울리고 끝없는 어룡(魚龍) 유희가 나온다. 이하는 모두 온갖 놀이를 베풀어 조서를 맞이하는 광경을 말한 것이다. 자라는 산을 이고 봉영(蓬瀛)의 바다해를 싸고, 광화문 밖에 동서로 두 오산(鰲山)의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고흥문(高興門) 등은 지극히 교묘하다. 원숭이는 아들을 안고 무산협(巫山峽)의 물을 마신다. 사람이 양 어깨에 춤추는 두 명의 동자를 세운다.곤두박질을 하매 상국사(相國寺)의 곰은 셀 것도 없고, 긴 바람에 우니 어찌 소금 수레를 끄는 기마(驥馬)가 있겠는가? 많은 줄을 따라 내려가매 가볍기가 사뿐사뿐 걷는 미녀와 같고, 외나무다리를 밟으매 날뛰는 산귀신인가 놀라며 본다. 사자와 코끼리를 장식하는 데에는 모두 벗긴 말가죽을 뒤집어씌웠고, 원추새와 난새의 춤을 추는 데에는 들쭉날쭉한 꿩 꼬리를 모았도다. 이는 황해도나 서경(西京 평양)에서 추는 솔무(率舞)를 보아도 모두 이처럼 좋고 아름답지는 못하였다. 평양과 황주에서도 모두 오산붕(鰲山棚)을 만들어 놓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조서를 맞이하였지만, 유독 왕경이 가장 훌륭하였다. 태평관(太平館)이 있고, 숭례문 안에 있는 것으로 가운데는 전이고, 앞에는 전문(殿門)이 있으며 뒤에는 누각이 있고 동서에 곁채가 있다. 그 까닭은 그곳에서 천사(天使)를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종과 북이 있는 누대가 있어 성 안의 네거리 종로 한복판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또한 길가에 높고 높도다. 잔치하고는 쉬고 즐기며 또 논다. 와탑(臥榻)에는 여덟 폭 병풍을 둘러치고 이 나라 풍속에 그림을 거는 일은 적은데, 모든 공관(公館)에는 네 벽에 모두 병풍을 세웠다. 병풍에는 산ㆍ물ㆍ대ㆍ돌을 그리거나 혹 초서(草書)를 썼는데, 높이는 2ㆍ3척이다. 와탑도 그러하다. 성긴 주렴에는 반쯤 걷힌 향구(香鉤)를 올려 둔다. 닭이 울면 문안오는 사자(使者)를 기다리고, 날마다 일찍 왕은 그 나라의 재상 한 명과 승지 한 명을 보내어 문안한다. 말을 타고 나가면 길 곁의 망아지가 운다. 집어(緝御)가 있어서 심부름을 해 주고, 종이와 먹이 있어서 글을 주고받는 데에 이바지한다. 이는 임금을 공경함에는 반드시 그 사자에게까지 미치므로 예의상 우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궁실(宮室)의 제도는 중화와 같아서 모두 단청을 칠하고 이 나라에는 은주(銀硃)가 없기 때문에 단청으로 대신한다. 오동나무 기름도 없다. 기와를 얹는다. 문무(門廡)와 편전(便殿)에는 모두 기와를 쓰는데, 중화의 관공서의 덮개와 같다. 문은 세 겹으로 하여 배라(杯螺)의 번쩍이는 빛을 죽이고 대궐의 앞 문은 광화, 둘째 문은 홍례, 셋째 문은 근정(勤政)으로, 쇠못과 고리만을 썼다. 전(殿) 중앙에는 푸른 유리가 있다. 오직 정전(正殿)만을 근정이라 하고 푸른 유리를 쓰고, 다른 곳에는 쓰지 않는다. 당사(堂戺)는 일곱 계단의 차등이 엄격하고 계단은 모두 거칠게 간 석추(石甃)로써 하였는데, 형세가 매우 높고 위에는 자리로 덮었다. 비단창은 여덟 창문의 영롱함에 맞추었다. 전의 동서의 벽에는 모두 요격자(腰膈子)를 설치해 놓고 조서를 받을 때에는 다 갈구리로 건다. 혹은 높은 산으로 한계지어 따로 이궁(離宮)을 짓기도 한다. 근정전과 인정전에는 모두 각각 문을 만들어 들어가니, 모두 산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대개 모두 편편한 곳을 가려서 터를 잡지 않는 것은 오직 그 기세가 웅장하게 보이고자 해서이다. 조서가 전(殿)의 뜰에 이르면 임금은 몸을 굽히고, 세자(世子)와 배신(陪臣)들은 좌우에서 부축하고, 헌가(軒架 경쇠를 다는 시렁)를 섬돌 위에 설치하고, 장막을 정우(庭宇)에 둘러친다. 전의 앞과 섬돌 위에는 모두 흰 베로 만든 장막을 둘러치니,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의장(儀仗)은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음악을 연주해서 축어(祝圉)로 마친다. 소호(召虎)가 절하는 것숭산(嵩山)에서 외친 세 번의 만세 소리와 같고, 봉의춤과 사자춤으로 양반을 거느린다. 비록 음성은 알 수 없으나 그 예의는 또한 취할 것이 있다. 예는 한결같이 중화를 따르는데, 좋은 향을 세 번 피우고 머리를 세 번 두드리며, 만세를 부를 때에는 시위(侍衛)들이 모두 팔짱 끼고 응한다. 궐정(闕庭)의 설치물도 거두고 하사품도 내려지면 동서로 갈라서서 손과 주인을 나눈다. 조서를 펴기를 마친 뒤에 인례(引禮)가 천사(天使)를 인도하여 중간에서 내려와 장막이 있는 동쪽으로 간다. 왕이 옷을 갈아입기를 기다려 천사를 인도하여 중간 계단에서 동으로 전에 오르고, 왕을 인도하여 역시 중간 계단에서 서쪽으로 전에 오르게 한다. 천사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왕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자리에 앉는데, 왕의 자리는 부사(副使)의 자리와 마주 대하되 조금 아래로 반 자리에 앉는다. 서로 절하고 예를 마친 뒤에는 드디어 통역을 빌어 말을 전한다. 즉 명 나라의 울타리가 되는 것은 진실로 소국(小國)으로서 마땅한데, 베풀어 주시는 큰 은혜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물방울과 먼지를 다 없애더라도 보답할 수 없으니, 비록 죽은들 어떻게 보답하리까? 오직 날마다 하늘이 보호하신 주 나라 시를 노래하고,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듯한 황제의 도움을 빌 뿐입니다. 비로소 《시경》의 습상(隰桑) 편의 희견(喜見)을 읊고, 《춘추》의 예서(禮序)를 강합니다. 생각하건대, 여러 나라가 모두 천자의 사자를 앞세우는데, 더구나 맑은 빛이 날로 과인에게 가까움이겠습니까? 근정전에 차례로 앉은 뒤에 인삼탕 한 잔씩을 다 마시고, 왕이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 통역 장유성(張有誠)과 이승지(李承旨)를 돌아보고, 말을 전하기를, “소국의 신하로서 명 나라 조정을 높여 섬기는 것이 예의에 마땅하온데, 칙서(勅書)를 내려 이처럼 나를 격려하시니, 큰 은혜를 갚기 어렵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명 나라는 조선이 본래부터 충성과 공경으로 지키기 때문에 그 은전(恩典)이 다른 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하니, 왕이 또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연이어 말하기를,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말을 마친 뒤에 우리 두 사람을 보내어 홍례문으로 나가 가마에 타기를 기다려 물러갔다. 우리 두 사람은 태평관으로 돌아와 여러 배신들을 차례로 다 만났다. 왕이 따라와 잔치를 베풀려고 관문 밖에서 기다리며 동쪽을 향해 서서 들어오지 않았다. 집사(執事)가 나에게 알리자, 우리 둘이 나가 맞이하여 읍하고 사양하면서 들어가, 뜰에 이르러 서로 읍하고 차례로 앉아 술잔을 들어 주고받았다. 술잔을 마시려 하자, 임금이 턱으로 두 통역을 시켜 말하기를, “《시경》에, ‘습지에 뽕나무가 아름다우니 그 잎이 무성하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그 즐거움이 어떠한고.’라고 하였소이다. 나는 두 분 대인(大人)을 뵈오매 마음속의 기쁨이 끝이 없소.”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도 그의 어짊을 칭찬하고 또 지나온 길에서 후히 대접받은 것을 사례하였다. 장차 자리에 나아가려 할 때 다시 왕과 예로 사양하자, 왕이 이내 말하기를, “《춘추》의 예에 천자의 사자가 비록 미천하나 제후(諸侯)의 윗자리에 앉는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두 분의 대인은 바로 어떤 지위입니까? 모두 천자의 가까운 신하로서, “오늘 멀리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지 않겠소?” 하고, 다시 빙그레 웃으면서 두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가까운 신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그는 바로 황제 앞에서 직접 거행하는 사람이다.” 하였다. 우리도 웃으면서 통역에게 답하기를, “본래부터 왕이 글을 읽고 예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뵈오매 과연 그렇습니다.” 하니, 왕이 또 공손히 팔짱을 끼고 “황공. 황공.”이라고 잇달아 말하였다. 문무(門廡)와 전정(殿庭)에는 모두 자리를 깔고, 손과 주인이 자리를 나누면 겹으로 더 깐다. 저 자리는, 등급을 밝히기 위해서 용이 나란히 누워 있지만 비늘은 없고, 이 자리는, 무늬를 짜는데 봉황이 쌍으로 날면서 날개를 편다. 집사는 자리 세 벌을 말아 가지고 따라다니다가, 서로 절할 때에 각각 펴서 놓는다. 음식 그릇은 금ㆍ은ㆍ동ㆍ자(瓷)를 섞어 쓰고, 식품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골고루 많다. 주인이 손에게 잔을 드릴 때에는 한결같이 중화의 예를 따르므로, 손이 주인에게 잔을 드릴 때에도 중국 연회(燕會)의 의식을 따른다. 밀이(密餌)를 벌여 놓을 때에는 그 수가 다섯 겹이고, 상에 차린 음식의 높이를 재면 크기가 한 자 둘레이다. 그릇마다 모두 은과 구리로 둘레를 만들어 푸른 구슬이 이어진 줄을 붙였고, 그 위에는 모두 비단을 잘라 꽃과 잎을 만들고 아롱진 봉황의 깃으로 춤추게 한다.
그 줄은 다섯 겹인데 모두 과실을 쓰지 않고, 꿀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모나고 둥글게 만들어 떡과 유전(油煎)을 높게 낮게 맞추어, 영롱하게 첩첩이 쌓아 올리니 높이와 크기가 한 자쯤 된다. 다시 흰 은이나 흰 구리로 여덟 모가 난 둘레를 두르고 푸른 구슬로 그물을 만들어 그 위를 덮는다. 그리고 푸른 비단을 잘라 네 개의 꽃잎을 만들고 또 붉은 비단을 잘라 네 개의 꽃잎을 만드는데, 꽃잎마다에는 흰 구리를 작은 못으로 엮으니 중국의 진주화(珍珠花)의 모양 같다. 그 꼭대기에 동선(銅線)으로 다섯 빛깔의 채색실을 얹어 나는 봉이나 공작이나 혹은 나는 신선을 만들었는데, 꼬리는 치켜올리고 날개는 펴져 있으며 손님을 향해 모두 머리를 숙였다. 절조(折俎)를 보낼 때에 제거한다. 두변(豆籩)은 보기에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앞의 것은 크고 뒤의 것은 작은 것으로 차례를 삼고, 진열(陳列)하는 것은 향배(向背)를 적당히 하기 위하여 겉은 높고 안은 낮은 것으로 차별을 삼는다. 그 상은 일(一) 자 모양으로 가로 진열하니 상마다 모두 그렇다. 쌀가루를 섞어 끓인 국과 안주를 섞고 이것 또한 중화의 쌀떡과 여뀌꽃 따위를 만든다. 장조림과 젓갈을 섞으며, 술은 멥쌀로 빚는데, 수수는 쓰지 않는다. 비록 청주종사(靑州從事)로도 거의 그 우열을 다툴 수 없고, 빛과 향기가 잔에 넘치면 평원독우(平原督郵)도 감히 멀리서 그 울타리나마 바라볼 수 없다. 술맛이 뛰어나니 산동(山東)의 추로백(秋露白)도 빛깔과 향기가 같다. 일 자로 벌여 놓고 중간에는 비단으로 덮는다. 이(二) 자로 가로 벌여 놓은 상에서 복판의 한 상에만 붉은 비단으로 덮고, 그 위에 기름 종이를 깔고서 거기에 그릇을 벌여 놓는다. 좌우의 세 자리에는 모두 희뢰(餼牢)를 진열하고, 가까이 한 의자에 앉는데 착석하기를 기다려서야, 왕이 직접 들고 온다. 처음 자리에 들어 설 때에, 갖다 놓은 의자가 상에서 세 자쯤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몰랐더니, 왕이 직접 그 한 의자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은 자신이 공경하는 뜻을 펴려고 하여 그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상에 가득한 희생을 자를 때에는 신하가 반드시 친히 잡는다. 희생에는 소ㆍ양ㆍ돼지ㆍ거위의 네 종류가 있는데 모두 익힌 것이다. 최후의 한 상에는 큰 만두를 놓고 그 위에는 은으로 덮개를 만들어 덮었다. 한 대신이 칼을 잡고 그 희생을 자른 뒤에는 큰 만두 껍질을 가르는데, 그 속에는 만두가 호두처럼 큰 것이 들었는데, 맛이 그럴 듯하다. 특별히 죽였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희생은 모두 그 심장을 올리고, 살지고 맛난 것을 취하여 세 개의 창자에 창자기름을 채웠다. 양 등살 위에 세 개의 양 창자를 꿰고, 그 속에는 구운 고기와 여러 가지 과실을 넣는다.속헌(續獻)하는 데에는 동성(同姓)으로서 군(君)에 봉해진 이가 먼저 한다. 동종(同宗)의 현자는 모두 군에 봉해지는데, 모두 왕신(王臣)이라 일컫는다. 여러 신하들 중에서 무공(武功)이 있는 이도 군에 봉하고, 문직(文職)으로서 공이 있는 이를 봉하는 것도 그와 같다. 다음에는 정부의 육조(六曹)에까지 미친다. 잔을 드릴 때에는 왕이 반드시 그 자리에 나와 드리는 사람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언제나 따른다. 탕(湯)을 한 번 올릴 때에는 반드시 다섯 사발로 한다. 왕이 직접 드리지 않는다. 오직 이것만은 중국과 다르다. 아무리 그릇을 포개더라도 그 높이는 한 자를 넘지 않는다. 그 밥상이 매우 작은데 굽고 지진 음식이 너무 많으므로 여러 개를 포개게 된다. 그 상에 다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을 걷어 깔아 놓은 자리에 둔다. 안주와 탕을 두 번 올릴 때, 상 위에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그것을 걷어 자리 사이의 맨땅에 놓는다. 이것은 그 나라 풍속이다. 고기를 배불리 먹고 나면 채소를 올리는데 시종관들이 모두 안팎에 반듯이 서서 모신다. 집사(執事)들은 모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린다. 내시와 통역관들은 그 주위에 엎드리고 있다. 내시들은 모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검은 각띠를 띠고 엎드려서 왕이 앉은 의자의 발을 받들고 있으며, 통사와 승지는 좌우에 엎드려서 그 분부하는 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뒤에도 통사가 엎드려 있고, 내시만이 없다. 대개 세 번의 잔치는 태평관에서 하는데, 그 예는 모두 같고 의식을 감한 것이 없다. 한 번의 잔치는 인정전(仁政殿)에서 하는데, 정성이 더욱 지극하고 힘이 더욱 드는 것이다. 태평관에서의 처음 잔치는 말에서 내리는 잔치이고, 두 번째 잔치는 정연(正燕)이며, 세 번째 잔치는 말에 오르는 잔치이고, 인정전의 잔치는 사연(私燕)이라 한다. 처음에는 이 예가 마땅치 못한 것 같기에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는데, 이르러서야 태평관과 모화관의 제도가 모두 전(殿)으로 그것은 오로지 천조(天詔)를 맞이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며, 일이 없을 때에는 왕이 거기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매양 거기 와서 잔치를 베풀 때에는 왕이 반드시 먼저 관문 밖의 작은 전에서 기다리고서 들어온다. 비로소 고칠 필요가 없는 줄을 알았다. 내가 일을 마치고 동쪽에서 돌아오려고 수레를 빨리 재촉할 때에, 왕이 먼저 모화관에 나와 잔치를 베풀고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 말이 더욱 친절하여 싫증을 내지 않고, 예는 더욱 성의 있어 게으르지 않았다. 천작(天爵)을 닦는다는 말에 감사하기 그지없고, 좋은 말을 두 번이나 하는데 감사하였다. 귀중한 《맹자(孟子)》의 천작(天爵)이란 말을 외우기까지 하면서 우리들을 다 능하다고 하였으며, 또 안자(晏子)의 증언(贈言)을 인용하여 스스로 그 재주의 미치치 못함을 한하였다. 대개 그 뜻은 장차 우리들에게 시구(詩句)를 주려 한 것이었는데, 아깝게도 우리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날 왕은 우리 두 사람이 여러 번 선사품을 물리치자 통역을 통해 뜻을 말하기를. “우리 선대로부터 천사(天使)가 멀리서 오면 언제나 약소한 물품으로나마 뜻을 표하였는데, 지금 두 분 대인이 그처럼 하는 것을 보니, 나는 황공하여 더 할 말이 없소. 다만 내가 듣건대, 옛날 사람의 말에, ‘인자(仁者)는 작별할 적에 말을 주고, 그렇지 못한 자는 금(金)을 준다.’고 하였소. 나는 지금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고 한갓 약소한 물품만을 드리니 마음속으로 매우 황공하오. 나는 마침 또, ‘옛날 사람은 천작을 닦으면 인작이 따른다.’는 맹자 말씀이 생각나오. 지금 두 분 대인은 진실로 천작을 닦은 분이니, 이번에 돌아가면 특별한 은혜를 입을 것이오. 이것이 곧 내가 말을 주는 것이오.”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왕이 우리를 덕으로 사랑하는 데에 감사한다.”라고 답하였다. 우리가 술을 다 마시지 않자 통역을 시켜 “이 한 잔을 다 드시오. 내일이면 천연(天淵)의 거리가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통역은 그 천연을 ‘천원(天遠)’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우리가 그 말을 알기 때문에 해석해 주니, 왕은 웃고 문을 나와 전송하면서 또 술을 내어 권하고 다시 ‘원별천리(遠別千里)’라고 말하였다. 통역은 또 ‘원별’을 ‘영결(永訣)’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이는 장유성(張有誠)이 중국어는 잘하나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고, 이승지는 글은 읽었지만 중국어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양 그 말을 전할 때에 땀을 빼면서도 여전히 통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우스웠다. 이날 밤에는 벽제관에서 자면서, 허이조(許吏曹)의 왕이 시짓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뜻을 깨달았다. 산천과 길은 한 달 동안이나 지났으나, 풍물(風物)과 인정(人情)은 5일 만에 안 것이므로, 비록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기억이 난다. 국학(國學) 성균관(成均館)은 뒤에는 산 앞에는 물이 있는데, 앞뒤에는 전당(殿堂)이고 좌우에는 뜰이 있다. 성전(聖殿)은 앞에 있고 명륜당(明倫堂)은 뒤에 있으며, 사학(四學)은 동서로 갈라져 있다. 관원으로는 대소사성(大小司成)이 있고 생도들은 상ㆍ하의 기재(寄齋)에 산다. 생원과 진사가 있는 곳을 상재(上齋)라 하고, 승학(升學)들이 있는 곳을 하재(下齋)라 한다. 생원은 3년 동안 경전에 밝은 이로 뽑힌 사람이고, 진사는 시부(詩賦)로 뽑힌 사람이며, 승학은 민간의 뛰어난 사람들이니 기재(寄齋)라고도 한다. 서경(西京)에서도 견줄 수 없고, 개성에서도 짝할 수 없는 것은 제사에 소상(塑像)을 두어서 더럽히거나 어지럽히지 않으며, 생도는 공부함으로써 친구가 된다. 기내(畿內)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가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떠 있는 것 같다. 나루로는 양화도(楊花渡)가 있어서 물산이 번성한데 팔도(八道)에서 운반된 곡식이 모여, 일국의 금령(襟領)이 된다. 가장 높은 정자에서 긴 물가를 굽어보면 백제의 옛 경계에 닿아 있다. 나는 일찍이 여기서 배를 띄우고 말을 타고서 하루 동안 논 적이 있는데 저들도 그 즐거운 일과 완상하는 마음이 백년 만에 있는 다행이라고 스스로 경하하였다. 트인 골목과 통한 거리는 쪽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깎아지른 듯한 처마에 우뚝히 빛나는 집이다. 집집마다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으로 들창을 내어 더위를 피한다. 그 밖은 모두 관청에서 나누어 받으므로, 빈부에 따라 그 제도가 다르지 않고, 그 안은 자기들 마음대로 지을 수가 있다. 그 곧은 거리 양쪽에는 모두 관청으로서 동와(瓦)를 얹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으니, 밖에서 보면 누가 가난하고 부자인 지 분별할 수가 없고, 안으로 들어가 그 방과 집을 보아야 비로소 같지 않다. 관청도 제도는 다르지 않다. 모두 당침(堂寢)이 있는데 모두 모서리를 꾸미고, 누각은 난간을 날개처럼 내고 들보에는 동자 기둥을 댔다. 관사(館舍)와 전사(傳舍)의 벽 사이에는 다 수묵(水墨)의 변변찮은 그림을 바르고, 문과 들창이 합한 곳에는 모두 혼돈(混沌)이 처음으로 나누어지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것은 꼭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내가 본 것을 근거로 하여 곧장 쓴 것이다. 가난한 집의 벽은 대로 얽되 새끼를 꼬아서 튼튼하게 하고, 그 위에는 띠풀로 지붕을 이었으며, 구멍이 있는 곳에는 진흙덩이로 막았다. 그 벽은 잡목 따위를 가져다 바로 세우고 엮지 않고 다만 새끼로 얽는다. 새끼로 얽은 곳은 마치 그물 눈과 같은데, 그 한 눈금마다 진흙덩이 한 개씩으로 틀어막았다. 서울의 작은 골목은 이와 같고, 길에서 본 것으로는 모두 완전히 진흙을 발랐다. 어떤 집은 가시나무 가지가 도리어 처마 끝에까지 나왔고, 어떤 집은 겨우 동그란 소반만하다. 이것을 봉황새에 비하면, 비록 천 길을 날지는 못하지만, 뱁새에게 비하면 한 나뭇가지에 편안함을 의탁할 만한 것과 같다. 부잣집은 그 기와가 모두 동()으로서 무서(廡序)가 동서로 뻗은 것은 그 마룻대가 도리어 남북으로 솟아 있고, 모두 흙으로 벽을 바른 집으로 당침(堂寢)이 앞뒤에 있는 것은 그 등마루가 도리어 중간보다 낮다. 당침은 모두 한 칸인데 무서가 도리어 세 칸이다. 문은 모두 동서(東序)의 마룻대를 돌아 있기 때문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되 바로 걸어가야 당침으로 갈 수 있다. 그 문은 모두 남향이지만 가운데에서는 열리지 않고, 모두 동무(東廡)의 마룻대로 나아가 남쪽을 향해 열리는 것은 그 터가 매우 높아서 사다리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로 향한 것도 그와 같다. 지대는 모두 낮고 습한 것을 두려워해서 널빤지를 깔아서 습기를 막았으니, 만일 책상다리하고 앉으려면 모두 띠풀을 깔아야 한다. 그 풍속이 모두 땅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사람들은 네모진 하나의 방석을 만들거나, 베나 비단으로 하나의 큰 베개를 만드는데, 그 속에 풀을 채워 앉는 사람의 안석으로 쓴다. 관부에서는 만화좌(滿花座)로 방석을 만드는데, 그 제도 역시 네모로 만들고 녹색 모시로 초침(草枕)을 만들어 다닐 때에는 사람이 그것을 지고 따른다. 알 수 없는 일은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고 채소밭에는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끄는 데에는 오직 소나 말 외에는 쓰는 것이 없고, 말을 부리는 사람은 많고 소를 부리는 사람은 적다. 목축에는 전혀 양을 볼 수 없다. 고기를 먹으려면 산이나 바다에 그물이나 통발을 쓰고, 나물을 먹으려면 강이나 바다에 나가 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까지 오면서 본 것이 이러하였다. 촌늙은이 중에는 한 번도 돼지고기 맛을 모르다가 우연히 관청에서 베푸는 잔치에서 먹게 되면, 곧 꿈속에서 돼지가 채소밭을 망치게 되는 꿈을 꾸는 자도 있다.관청에서라야 양이나 돼지를 두었다가 향음례(鄕飮禮) 때에 더러 쓰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산마루에 장사지내고, 귀한 사람이라야 교외 언덕에 묘자리를 잡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로 오면서 멀리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성가퀴처럼 벌여 있는 것이 모두 무덤이었다. 귀한 사람은 지형을 선택하고 또 화표(華表)와 석양(石羊) 따위도 있다. 그러나 비를 세운 것은 볼 수 없었다. 이것들은 모두 특별한 지방의 이상한 풍속에서 나온 것이나, 굳이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논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총환(總環)을 드러내어 귀천을 분별한다. 그 나라에서는 머리를 싸매는 망건(網巾)은 모두 말총으로 만들었고, 환(環 관자(貫子))으로 등급을 정하였으니, 1품은 옥이고 2품은 금이며, 3품 이하는 은이고, 서인(庶人)은 뼈ㆍ각(角)ㆍ동(銅)ㆍ방(蚌) 따위로 만들었다. 아기의 어릴 때의 머리카락을 그대로 보존하여 먼저와 뒤의 구별이 없어서, 어떤 아이는 어릴 때에 머리카락이 벌써 어깨에 드리우며, 어떤 아이는 6ㆍ7세가 되면 뿔 모양으로 쌍 상투를 묶는다. 헤아려 보건대 태아 적 머리카락을 보존하려는 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모두 갓을 쓰기 전인 것이다. 백성들은 초모(草帽)를 쓰는데 턱에는 구슬을 드리우고, 정수리는 둥글거나 혹은 모나며 색깔은 모두 검다. 천한 사람은 네 잎의 푸른 적삼을 입고, 정수리에는 새 깃을 꽂는다. 보통 사람은 여러 겹의 삼베옷을 입고 걸을 때에는 긴 옷자락을 끈다. 시끄러움을 싫어할 때는 길에서 하루를 묵고, 충돌하는 것을 말리려면 뜰 끝에서 지팡이를 끈다. 천한 사람의 네 잎 적삼은 오직 평안도와 황해도의 두 도만이 이렇게 하였고 경기도는 그렇지 않다. 지팡이를 끄는 사람이란 모두 키 큰 사람을 뽑는 것이니, 큰 모자를 쓰고 누런 베옷을 입고, 둥근 깃에는 노끈을 달고 다만 정수리에 새 깃을 꽂지 않았다. 신은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진흙 속을 다니더라도 상관이 없고, 버선은 바지에 한데 묶으므로 물을 건너더라도 구애를 받지 않는다. 옷은 모두 흰색인데 굵은 베옷이 많고, 치마는 펄렁거리는데 주름도 성글며, 등에 짐을 지고서 구부리고 가는 것은 마치 거북이가 볕을 쬐는 것 같고, 그 풍속에 남자들은 모두 등에 짐을 졌다. 어른의 명이 있으면 구부리고 가는 것은 마치 오리가 뒤뚱뒤뚱 걷는 것과 같다. 그 풍속에 사람을 보면 구부리는 것으로 공경을 표하고, 어른이 부르면 구부리고 달려가서 대답한다. 가마를 멜 때에는 반드시 24명이 한 가마를 메는데, 가다가는 30리도 못 가서 또 백 사람이나 바꾼다. 이는 무거운 것은 모두 어깨로만 질 수 없으므로, 이렇게 모두 손으로 붙잡아 드는 것이 당연하다. 가마 한 채에 앞뒤에 전부 24명을 쓰고, 또 곁에서 붙드는 사람이 있다. 그 가마는 중국의 교의와 같은데, 네 발이 짧고 좌우에 두 개의 긴 가마채를 끼운 것도 중국의 제도와 같다. 자리 밑에는 나무 하나를 가로질러 그 양쪽 끝이 나왔는데 길이는 6ㆍ7척이고, 앞뒤에 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질렀는데, 길이는 자리 밑의 가로지른 나무와 같다. 들려고 할 때에는 붉은 베로 가로지른 나무 양쪽 끝에 불들어 매고, 사람은 다만 그 베를 어깨에 걸고 손으로 들고 간다. 또 가마 중간에는 뒤에서 앞까지 긴 베 두 폭을 바로 대어서 사람의 두 어깨에 나누어 걸어서, 마치 말 멍에에 가로지른 나무 모양과 같은데, 이것은 한쪽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 나머지는 10여 명을 시켜 앞에서 끌게 한다. 여자들의 귀밑털은 귀를 덮어 귀고리가 보이지 않고, 머리에는 흰 권(圈)을 써서 바로 눈썹을 내리누른다. 개성부에서 왕경으로 오는 길가에서 이런 것을 보았다. 부유하고 귀한 여자는 검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유하고 귀한 집 부인들은 머리에 한 광(匡)을 썼는데 큰 모자와 같다. 앞 채양에 검은 비단을 드리워 얼굴을 가렸다. 비록 얼굴을 가렸지만 이것도 사람을 피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울에서 보았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흰 치마가 장딴지를 가리지 못한다. 지위가 있고 존귀하여야 가마를 타고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고, 지위가 없으면 아무리 부자라도 말타는 것만을 허락한다. 이 두 글귀는 허 이조(許吏曹)가 써 준 《풍속첩[風俗帖]》에 나온다. 버선과 신은 베나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발을 묶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신은 보통 사람은 소 가죽이고, 귀한 사람은 사슴 가죽이며, 버선은 비단이 많다. 3ㆍ4명의 통사의 말이 모두 같았다. 옷은 베나 비단으로 만드는데, 소매는 넓으나 길지는 않다. 윗옷은 모두 무릎 밑에까지 내려가고 아랫도리 옷은 모두 마루에까지 닿는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볼 때에는 꿇어앉는 것을 예의로 삼고, 천한 사람이 일이 있을 때에는 머리로 이는 것이 보통이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도 손으로 붙들지 않고, 열한 말의 쌀을 지고도 그 걸음은 빠르다. 이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을 간단히 말한 것이고, 보지 못한 것은 자세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이른바 냇가에서 남자와 함께 목욕하고 역(驛)에서 심부름하는 자는 모두 과부라는 것은, 처음 전해 들을 때에는 매우 놀라웠지만, 지금은 이미 고친 것을 알았으니, 어찌 이 또한 성스런 황제의 거룩한 교화에 젖은 것으로 넓은 한수(漢水)를 뗏목으로 건널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는 모두 전하기를, ‘그 풍속에 과부들이 관역(館驛)에서 일을 한다 ’하였다. 나는 그들의 추잡함을 매우 미워하였는데, 와서 보매, 와서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그 고을 아전들이고, 부인은 역 밖의 별실(別室)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서로 전하기를 ‘이 풍속은 경태(景泰) 연간에 그 국왕이 즉위한 이후에 변하였다. ’하니, 요동(遼東)의 부총병(副摠兵) 한빈이 한 말이다. 냇가에서 남녀가 같이 목욕한다는 사실은 옛날 기록에 나오는데, 지금은 변하였다. 새로는 꿩ㆍ비둘기ㆍ참새ㆍ메추라기가 많고, 짐승으로는 고라니ㆍ사슴ㆍ노루ㆍ포(麅)가 많다. 포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나다. 산에서는 포가 나지 않는다. 해산물(海産物)로는 곤포ㆍ김ㆍ굴ㆍ조개이고, 곤포는 종려나무 잎과 같은데 녹색이다. 김은 자채(紫菜)와 같은데 크다. 생선으로는 금문(錦紋)ㆍ이항(飴項)ㆍ중순(重唇)ㆍ팔초(八稍)이다. 금문은 붕어와 비슷한데 몸이 둥글고, 이항은 피라미와 같은데 홀쭉한 것 밖에 볼 수 없다. 왕이 사람을 시켜 음식상을 차려 보내어, 중도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것들이 모두 거기 있었다. 중순은 중국의 눈이 붉은 고기와 같은데, 입술은 말코 같고 살은 매우 맛나며, 그 새끼는 조기 새끼 같은데 잘고도 많다. 팔초는 곧 절강(浙江)의 망조(望潮)인데 맛은 그다지 좋지 못하고 길이는 4ㆍ5척이 된다. 잉어와 즉어(鯽魚)는 내와 못 어디서나 모두 잡을 수 있다. 청천(淸川)ㆍ대정(大定)ㆍ임진(臨津)ㆍ한강의 여러 물에 다 있고, 즉어는 길이가 한자쯤 되는 것도 있다. 황새는 정원(庭院)에도 그 보금자리가 많이 보인다. 대합조개 같은 결명(決明)은 그 맛이 해산물에서 제일 맛나고, 석결명(石決明)은 약에 넣는 것이다. 그 살이 밖으로는 껍질에 붙고 속은 돌에 붙었는데, 복어라고도 한다. 껍질은 바닷가의 구멍이나 바다 복판에 있다. 주먹 같은 자궐(紫蕨)은 그 맛이 산채(山菜) 중에서 제일 낫다. 고사리에는 푸른빛과 자줏빛 두 가지가 있는데, 중국에서 나는 것과 같다. 그 지방 사람들은 잘 캘 줄을 모른다. 대개 그것을 캘 때에는 반드시 송곳으로 땅을 파서 흙을 제거하고서 그 뿌리 밑동을 잘라야 한다. 내가 허 이조에게 그 캐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시내나 육지에서 나는 기이한 물건에 있어서는 난초 향기를 피우는 것은 필관(筆管)ㆍ산장(酸漿)과, 필관은 싹을 먹는데 맛이 부드럽고 달다. 그 잎은 알 수 없는데 혹은 황정(黃精) 싹이라 한다. 산장의 잎은 뾰족하고 줄기는 푸르거나 붉으며 맛은 달고 시다. 자근(紫芹)과 백고(白蒿)가 있다. 왕도와 개성 사람들 집의 작은 못에는 다 미나리를 심는다. 수료(水蓼)의 싹ㆍ당귀(當歸)의 싹ㆍ송부(松膚)의 떡ㆍ산삼(山蔘)의 떡은 소나무의 겉껍질은 벗겨내고, 그 희고 부드러운 속껍질을 벗겨 멥쌀을 섞어 찧어서 떡을 만든다. 산삼이란 약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이는 손가락만 한데 형상은 무와 같다. 요동사람들은 그것을 산무라 하고, 거기에 멥쌀을 섞어 찧고 구워서 떡을 만든다. 또 3월 3일에 그 보드라운 쑥잎을 뜯어 멥쌀가루를 섞어 쪄서 떡을 만드니 그것을 쑥떡이라 한다. 그 멥쌀은 빛이 희고 맛이 향기롭다. 모두 상에 차릴 만하여 모두 술안주에 쓴다. 과실로는 배ㆍ밤ㆍ대추ㆍ감ㆍ개암ㆍ송화(松花)ㆍ살구ㆍ복숭아ㆍ감자ㆍ귤ㆍ매실ㆍ오얏ㆍ석류ㆍ포도이고, 배ㆍ대추ㆍ개암이 가장 많아서 어디에나 있고, 감자와 귤은 전라도에서 난다. 가죽으로는 범ㆍ표범ㆍ고라니ㆍ사슴ㆍ여우ㆍ담비ㆍ들고양이ㆍ돈피이니, 토인들은 담비를 돈피라 하고, 들고양이의 가죽은 알지 못한다. 그것들을 가지고 무늬 자리ㆍ겹갖옷ㆍ화살통ㆍ활집들을 만든다. 꽃으로는 장미ㆍ철쭉ㆍ작약ㆍ모란ㆍ차꽃ㆍ정향(丁香)ㆍ작미(雀眉)ㆍ산반(山礬)이 있다. 2월이 한창인데 앵두꽃은 다 지고, 늦봄이 다 가지 않았는데도 오얏꽃이 모두 시들었다. 내가 3월 8일 그 나라에서 떠날 때에 당리화(棠梨花)가 거의 떨어졌는데, 또 며칠을 걸어 압록강을 지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막 피는 것을 보았다. 이는 그 나라가 동남쪽에 가까울수록 따뜻했기 때문이다. 풀은 대부분 무성하게 우거졌으며, 나무는 대부분 동글고 고불고불하다. 산에 모래와 돌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노송은 단단하기가 잣나무와 같은데,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 등불 기름을 만들려 하나 송진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소나무의 결이 가장 단단하고 누른 빛이 잣나무와 같으나 기름이 적다. 어디를 가나 있다. 그 향기로운 꽃은 한번 봄이 지나면 모두 따고, 맺은 열매는 2년 만에라야 먹는다. 소나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열매를 맺는 것은 껍질이 그다지 거칠지 않고 가지와 잎은 위로 치솟았으며, 맺은 열매는 2년 만이라야 딸 수가 있다. 경기도에 가서야 있었다. 작은 것은 시내의 다리를 만들고, 큰 것은 묘당(廟堂)의 기둥이 된다. 대개 가는 길에 물이 있는 곳이 있으면 모두 소나무를 베어 다리를 놓고, 그 가지를 잘라서는 난간을 만들며 잎을 가지고서는 좌우의 흙을 막는다. 보산관(寶山館)에 가까운 한 시내는 저탄(猪灘)이라 하는데, 넓이가 20여 길이나 되며 소나무로 다리를 놓았다. 들보나 마룻대를 만들려면 곧은 것을 얻기가 어렵고, 만일 다락 기둥으로 쓰려면 아래 위의 두 동강으로 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 종류가 같지 않으므로 그것을 씀에는 각각 알맞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금(金)에 있어서는 그 캐는 곳을 자세히는 모르나 가장 많은 것은 구리이다. 땅에서 캐는 구리가 가장 단단하고 또 빛이 붉다. 밥그릇과 수저는 다 이것으로 만드니, 즉 중국에서 이르는 고려동(高麗銅)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 빛깔에 있어서는 각각 그 쓰이는 바를 따르는데, 금하는 것은 붉은 빛이다. 왕이 입는 옷이 모두 붉기 때문에 그것을 금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맛에 있어서는 초와 장이 많이 쓰이고, 다섯 가지 소리에 있어서는 음운(音韻)을 잘 알지 못한다. 그 나라의 소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글을 읽으면 평성(平聲)이 거성(去聲)과 같으니 이를테면 성(星)을 성(聖)이라 하고, 연(煙)을 연(燕)이라 하는 따위와 같다. 일상어는 여진(女眞)과 비슷한 것이 많다. 심지어 한 글자를 서너 자로 부르는 것은 8로써 위(爲)ㆍ야(也)ㆍ득(得)ㆍ리(理)ㆍ불(不)로 부르는 따위와 같고, 한 글자를 두 자로 만들어 부르는 것은 더욱 많으니, 부(父)를 아필(阿必)이라 하고, 모(母)를 액파(額婆)라 하는 따위와 같다. 《지(志)》에 실린 것은 이리 꼬리로 만든 붓이고, 《일통지(一統志)》에, 생산되는 것에 이리 꼬리로 만든 붓은 그 대롱은 작기가 화살 같고, 수염 길이는 한 치 남짓하며 붓 끝이 자루에 들어 둥글다고 하였다.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누런 쥐의 털로 만든 것이고 이리 꼬리가 아니었다. 무인(武人)이 숭상하는 것은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활이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베는 삼으로 짜는데 모시로 이름 지은 것은 잘못 전해들은 데서 나왔고, 종이는 닥나무로 만드는데 누에고치로 만든다고 하니, 인식하는 것은 도련(搗鍊)한 것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모두 전하기를, “그 나라에서 나는 종이는 고치로 만든다.” 하였는데, 지금 와서야 비로소 닥나무로 만드는데, 그 만든 솜씨가 교묘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찍이 불에다 시험해 보고 그런 줄을 알았다. 베의 정(精)하고 세밀하기가 고운 명주와 같고, 종이의 귀한 것은 통처럼 말 수 있는데, 기름을 먹이면 비도 막을 수 있고, 그 두꺼운 종이는 어떤 것은 네 폭으로 한 장을 만들고, 어떤 것은 여덟 폭으로 한 장을 만드는데, 통틀어서 유석(油席)이라 한다. 자기네들도 중하게 안다. 폭을 잇대면 바람도 막을 수 있다. 가는 곳마다 모두 흰 베로 장막을 만들었는데, 육지로 다닐 때에는 말에 싣고 따른다. 그리고 이른바 남자의 머리에 쓰는 건은, 당 나라 제도와 같은데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고, 아주 작은 과하마(果下馬)도 키가 3척 되는 것이 없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그 나라 사람들은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남자의 건은 당나라의 것과 같다.” 하였다. 지금 남자들은 모두 대모(大帽)를 쓰고, 오직 왕도에서 왕의 가마를 메는 자들만은 육각(六角)으로 된 흰 비단 건을 쓴다. 육각에는 다 흰 솜공을 붙였고, 자색 비단으로 깃이 둥근 옷을 입었는데, 발에는 뾰족한 코의 가죽신을 신었으니, 마치 당 나라 말을 탄 해관(奚官)을 그려 놓은 것과 같다. 생각건대, 그 때의 옷은 모두 그와 같았기 때문에 당 나라와 같다고 말한 것인 듯하다. 또 《일통지》에, “백제에서 과하마가 나는데 그 키는 석 자로써 과실나무 밑에서도 탈 수 있다.” 하였다. 지금 백제의 국경은 바로 양화도(楊花渡)의 남쪽 언덕에 있었으니, 왕경에서 2ㆍ30리 밖에 안 된다.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벌써부터 나지 않는다.” 하였다. 다만 그 나라 길에서 보이는 짐 실은 말이 비록 석 자 이상이긴 하지만 중국 말에 비하면 조금 작다. 아마 그 종류일 것이지만 우선 기록하고 다음 날을 기다린다. 오직 오엽(五葉)의 인삼과 만화석(滿花席)이 있어서 오엽의 인삼이란 즉 《본초(本草)》에서 말한 인삼이다. 만화석의 풀빛은 누르고 또 부드러워 아무리 접어도 꺾어지지 않으니, 소주(蘇州)의 것에 비하면 훨씬 좋다. 해마다 중국에 조공으로 바치고 때때로 상국(上國)에게도 공물로 바친다. 1백 20년 이래로 중국에서 내려주신 물품의 자주하고 많은 것이 비록 성명(聖明)의 주신 바에서 나왔지만, 또 그 공물의 끊이지 않음에 말미암은 것이다. 아, 육의(六義) 중에 부(賦)처럼 오직 바로 진술함을 취한 것이나 겨우 달포를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그 진상을 다 알았겠는가? 하물며 내가 말선(襪綫)의 얕은 재주로 창해(滄海)의 가는 비늘과 다르지 않음에랴? 그러나 이제 붓끝의 조화(造化)를 잘 부려 육합(六合)의 동춘(同春)을 그려 보노니, 감히 보고 들은 것을 많이 속이지 않았다면 거의 자순(諮詢)에 부끄럽지 않을까 한다. ○ 상고하건대 동월의 주석에,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있고, 회시와 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未)년에 있다.”고 한 것이나 “개성 동쪽에 능묘가 있으니 바로 지금 국왕 이씨의 선영이다.” 한 따위는 모두 진실이 아닌데, 아마 통역(通譯)이 말을 잘못 전한 것인 듯하다.

【성곽】 경성(京城) 우리 태조 5년에 돌로 쌓았고 세종 4년에 다시 수리하였다. 둘레는 9천 9백 75보(步)요, 높이는 40척 2촌이다. 여덟 개의 문을 세웠으니 정남에 있는 것은 숭례(崇禮), 정북은 숙청(肅淸), 정동은 흥인(興仁), 정서는 돈의(敦義), 동북은 혜화(惠化), 나라를 세운 처음에는 이 문을 홍화(弘化)라 하였는데, 성종 계묘년에 창경궁(昌慶宮)의 동문을 역시 홍화라 하여, 지금 왕 6년에 두 문의 이름이 혼동되기 때문에 혜화라고 고쳤다. 서북은 창의(彰義), 동남은 광희(光熙), 서남은 소덕(昭德)이다.
궁성(宮城) 경성 복판에 있다. 둘레는 1천 8백 13이고, 높이는 21척 1촌이다. 네 개의 문을 세웠으니 남쪽의 문을 광화(光化)라 하는데, 옛 이름은 정문(正門)이었다. 북쪽의 문은 신무(神武), 동쪽의 문은 건춘(建春), 서쪽의 문은 영추(迎秋)라 한다.
○ 정도전(鄭道傳)이 오문(午門)을 정문이라 이름하고, 아울러 그 이름을 지은 뜻을 써서 올리며 이르기를, “천자와 제후(諸侯)의 형세는 비록 다르나, 남쪽을 향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모두 올바름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 이치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고전(古典)을 참고해 보면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하였는데, 그 단(端)은 곧 바르다는 뜻입니다. 지금 오문을 정문이라 하는 것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을 지나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핀 뒤에 나오므로 참소하는 말이 행해지지 못하고, 거짓으로 속이는 것도 발을 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올리는 의견과 사뢰는 복명(復命)이 반드시 이 문을 지나 들어오는 것이니, 이미 자세히 살핀 뒤에 들어오므로 바르지 못하고 편벽되는 말이 저절로 나아올 수 없고 그 공적은 상고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 문을 닫아서는 괴이한 말을 하는 부정한 백성을 거절하고, 이 문을 열어서는 사방의 어진 이를 오게 할 것이니, 이것이 모두 정(正)의 큰 것입니다.”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이 광화문의 종명(鐘銘)을 짓고, 그 서문에, “지금 임금 12년 겨울 10월 7일에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종을 만들어 궁궐문에 달았으니, 그것은 옛날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거기에 공덕을 새기고 또 여러 신하들의 조회(朝會)의 시간을 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살피건대,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공훈과 덕이 이미 높았으므로 인심이 날로 따랐습니다. 그러자 거짓 참소가 들끓기 시작하여 그 화는 거의 불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막 제릉(齊陵) 곁의 여막에 계시다가 급변을 듣고 와서, 그 정세에 응해 제어한 뒤에 드디어 공훈이 있는 친척들과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추대하여 큰 기업을 세웠습니다.
그 뒤에 간사한 신하들이 다시 난리를 꾸밀 때에, 우리 전하는 곧 그것을 평정하고 종사(宗社)를 안정시켰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하였으니 그 덕이 그보다 훌륭할 수가 없고, 나라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정하였으니 그 공이 그보다 클 수가 없으니, 진실로 종과 가마솥에 새겨 만세에 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위하신 뒤로는 뜻을 이어받아 수성(守成)하여 하늘을 공경하며 대국을 섬기어 두 번이나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선대의 공덕을 빛나게 하였으며, 학문을 계승하고 넓히는 데에 극진히 하여 다스린 교화가 융성한 데에 이르렀습니다. 나아가서는 상례(喪禮)와 제사에 대한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기르는 인(仁)과, 기강(紀綱)을 세우는 넓은 규모와 큰 계략은 실로 모든 왕의 위에 뛰어났습니다. 지금 또 특별히 명하시어 종을 달아 새벽과 밤의 한계를 엄하게 하시니, 그것은 스스로 힘써 쉬지 않고 모든 정사를 부지런히 하여 만세의 태평의 터를 닦으려는 것이니 진실로 지극합니다. 끼쳐 주신 은택이 길이 전해짐과 국가의 복조가 오래감은 마땅히 이 종과 함께 영원함이 의심할 바 없습니다. 아, 훌륭하여라. 또 그 계책을 펴고 힘을 바쳐서 공훈을 세운 데에 참여한 사람들도 다 후면에 새겨 영원히 전할까 합니다. 신 계량은 삼가 손을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짓습니다.” 하였다.
그 명에, “크고 아름다워라. 성조(聖祖)께서 동토(東土)에 나셨도다. 하늘의 큰 명을 받아 비로소 큰 기업을 열었도다. 옛날 고려 말기에 정사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이반(離叛)하자, 하늘이 우리의 덕 있는 이를 돌보사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갈 곳이 있게 되었다. 그때에 음흉하고 간사한 자들이 그 무리들을 미혹시키어 우리를 해칠 꾀를 매우 급히 하여, 그 화가 아침 저녁에 절박하였다. 효성스럽도다. 거룩한 아들이여! 여막으로부터 달려왔네. 신령스런 기틀을 한번 결정하자 진실로 어려운 일이 해결됨이 마치 저 해가 높이 떠올라 큰 빛을 뚜렷이 내는 것 같았네. 또 나쁜 싹이 틈을 타서 위태롭게 하려 하자, 하늘이 태조를 돌보시어 그 후사를 번창하게 하시려고 우리 왕의 손을 빌려 더러운 무리들을 쓰러뜨렸다. 여러 어진 이들이 계획에 맞추어 돕고 도와 인륜이 바르게 되고 종묘와 사직이 영구하게 되었네. 높은 공을 두 번이나 세운 이는 실로 오직 우리 임금뿐이라네. 공이 높아도 높은 체하지 않고 덕이 꽉 찼는데도 있는 체하지 않네. 하늘의 거울이 매우 밝아서 거듭 보호하여 주셨네. 황제의 명령이 거듭 내리매 때맞추어 총애를 받들고 금보(金寶 명에서 내린 금인(金印))가 빛나매 그 크기가 말만큼이나 하였네. 황제의 사랑의 빈번함이 전대(前代)에 짝이 없어, 우리가 도읍으로 돌아와서 선대의 업적을 이어받았네. 정성스러워라. 그 효성이여! 처음부터 끝까지 어김이 없었고, 기강이 바로 서매 온갖 제도가 빛났다. 새벽과 밤을 엄하게 하려고 여기에 종을 다는 것이니, 모든 관리들은 그 직분에 힘써 감히 조금도 허물을 짓지 말라. 영원히 이어 나갈 종묘 사직은 땅과 하늘처럼 오래고 영원하리라. 신은 절하고 명을 지어서 무궁한 세대에 전합니다.” 하였다.

【궁궐】 경복궁(景福宮) 태조 3년에 세우다. 정도전에게 명하여 그 이름을 짓도록 하였으니, 그 글에 살피건대, 궁궐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이고,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이며, 신민들이 모두 나아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 제도를 웅장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고,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느끼게 하여야 한다. 한당(漢唐) 이래로 궁전의 이름이 이어지기도 하고 고쳐지기도 하였지만, 존엄함을 보이고 보고서 느끼게 한 데에 있어서는 그 뜻이 같았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시고, 먼저 종묘를 세우고 다음에 궁실을 지었다. 그 이듬해 10월 을미일에 친히 곤면(袞冕)을 입으시고,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새 사당에서 제사지낸 뒤에 여러 신하들과 새 궁전에서 잔치를 베푸셨으니, 그것은 신(神)의 은혜를 넓혀서 후일의 복을 넉넉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술잔이 세 번 돌자, 신 도전에게 명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고 종묘에 제사드렸고 새 궁전이 이루어졌으므로, 즐거이 여러 신하들과 여기에서 잔치하는 것이다. 그대는 빨리 궁전의 이름을 지어 나라와 함께 끝없이 그 경사를 같이하게 하라.” 하였다. 신이 명을 받은 뒤에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가 영원히 큰 복을 크게 하리라.’는 주아(周雅)를 외고, 청컨대, 새 궁궐 이름을 경복(景福)이라 하소서. 장차 전하와 자손들이 만년의 태평의 업을 누리시고 사방의 신민들도 영원히 보고 느끼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춘추》에, ‘백성들의 힘을 소중히 여기어 토목공사를 삼가라. ’하였으니 어찌 임금이 한갓 백성을 수고롭게 함으로써 자신을 받들게 해서야 되겠나이까? 큰 집에 편안히 계실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덮어 줄 것을 생각하고, 시원한 바람이 전각(殿閣)에 불 때에는 맑은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하셔야 거의 떠받드는 만민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근정전(勤政殿)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正殿)으로, 남쪽에는 근정문, 또 그 남쪽에는 홍례문, 동쪽에는 일화문(日華門), 서쪽에는 월화문(月華門)이 있다. 홍례문 안에는 개울이 있는데, 다리 이름은 금천(錦川)이고, 동서에 수각(水閣)이 있다.
○ 정도전의 글에, “천하의 일은 부지런히 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폐해지게 되는 것이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크나큰 정사이겠습니까? 《서경》에, ‘걱정이 없을 때에 경계하여 법도를 잃지 말라. ’하였고, 또 ‘안일과 욕심으로 제후들을 가르치지 마시어 삼가고 두려워하소서. 하루 이틀 사이에도 기미가 만 가지나 됩니다. 모든 관직을 폐하지 마소서. 하늘의 할 일을 사람이 대신한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이 부지런히 한 바입니다. 또 《서경》에,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와 해가 기울 때에 이르도록 한가히 밥 먹을 겨를도 없으시어, 만민을 모두 화합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문왕(文王)이 부지런히 한 바이니, 임금이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마음과 몸이 오랫동안 편안하면 교만과 방탕이 생기기 쉬운 것입니다. 또 어떤 아첨하는 사람이 따라서 유혹하기를, ‘천하와 국가 때문에 내 정력을 피로하게 하여 내 수명이 줄어들게 해서는 안된다. ’하며, 또 ‘이미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데, 어째서 함부로 혼자 스스로를 낮추고 굽히어 괴롭게 하겠는가? ’하면서, 이에 혹은 여자와 음악, 사냥과 놀이, 진기한 놀이개와 토목(土木) 등 모든 주색(酒色)에 빠지는 일을 가지고 유혹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임금은, ‘이것이 바로 나를 매우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자신도 모르게 태만하고 음탕함에 빠져 들어갑니다. 한당(漢唐)의 임금들이 다 삼대(三代)의 임금만 못한 까닭이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어찌 하루인들 부지런히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한갓 임금이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만을 알고, 부지런히 해야 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히 하는 것이 번잡하고 까다로운 데로 흘러 보잘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 선비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보고, 낮에는 찾아가 물으며, 저녁에는 명령을 내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이 임금이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찾는 데에 부지런히 하고 어진 이에게 맡기는 것을 편안히 여기라. ’하였으니, 청컨대, 신은 이것으로써 드립니다.” 하였다.

사정전(思政殿) 근정전 북쪽에 있다. ○ 정도전의 글에,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습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 사람 중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이와 어질고 어질지 않는 이가 섞여 있고, 만 가지 일에는 옳고 그름과 이롭고 해로움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일의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분별하여 처리할 수 있으며,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분별해서 쓰고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옛날부터 임금이 누군들 존귀함을 좋아하고 위태함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나쁜 사람과 친하게 지내어 계획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화를 당하고 실패하게 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시경》에, ‘어찌 너를 생각하지 않으리요마는 집이 멀구나. ’하였는데, 공자(孔子)가 그 시를 해석하기를, ‘생각하지 않아서이지 무엇이 멀겠는가? ’하였고, 《서경》에서는, ‘생각[思]함은 지혜롭고[睿] 지혜로움은 성스러움을 만든다. ’하였으니, 생각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전(殿)은 아침마다 여기에서 일을 보아 모든 정무가 복잡하게 되면, 모두 전하께 아뢰어 조칙(詔勅)을 내려서 지휘하게 될 것이니, 더욱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신이 청컨대, 그 이름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소서.” 하였다.
강녕전(康寧殿) 사정전 북쪽에 있다. ○ 정도전의 글에, “신이 상고해보니, 〈홍범(洪範)〉의 아홉 번째는 다섯 가지 복으로, 그 중에 셋째는 강녕(康寧)이라 하였습니다. 대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큰 표준을 세우면 강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다섯 가지 복 중에 하나로 한가운데에 있는 강녕을 들어서 그 나머지를 모두 포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두 보는 곳에서도 억지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가로이 혼자 있을 때에는 그 안일한 데에 빠지기 쉬워 경계하는 마음이 매양 게으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바루어지지 못하고 덕이 닦여지지 못하여, 큰 표준이 서지 못해서 다섯 가지 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무공(衛武公)이 스스로를 경계한 시에, ‘네가 군자(君子)를 벗함을 보건대, 네 얼굴을 환하게 하고 유순히 하여 어떤 잘못이 있지 않은가 하는구나. 네가 집에 있음을 보건대, 구석진 방에 혼자 있을 때에도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하였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삼감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나이가 90이 넘도록 큰 표준을 세워서 다섯 가지 복을 누림은 밝은 징험이 이러하니, 그 덕을 닦는 데에 힘쓰는 것은 편안히 혼자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는 무공의 시를 본받으시어 안일함을 경계하고, 경외심을 보존하여, 큰 표준이 되는 복을 누리소서. 그렇게 되면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이 대대로 이어받아 만세에 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침(燕寢)을 일컬어 ‘강녕’이라 하나이다.” 하였다.
연생전(延生殿)ㆍ경성전(慶成殿) 정도전의 글에, “천지는 만물에 대해서 봄에는 나게 하고, 가을에는 성숙하게 하며, 성인은 만백성에 대하여 인(仁)으로써 나게 하고, 의(義)로써 절제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정령(政令)과 시행하는 것은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동쪽의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延生)이라 하고, 서쪽의 작은 침전을 경성(慶成)이라 한 것은 전하가 천지의 생성(生成)을 본받아 그 정령을 밝힘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였다.
교태전(交泰殿) 강녕전 북쪽에 있다.
함원전(含元殿) 강녕전의 서북쪽에 있다.
양심당(養心堂) 강녕전의 서북쪽에 있다.
비현각(丕顯閣) 사정전 동편에 있다.
인지당(麟趾堂)ㆍ자미당(紫薇堂)ㆍ청연루(淸讌樓) 모두 교태전 동쪽에 있다.
융문루(隆文樓)ㆍ융무루(隆武樓) 근정전의 동각(東閣)의 누(樓)를 융문이라 하고, 서각의 누를 융무라 한다. ○ 정도전의 글에,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어지러움을 평정시키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마치 사람의 팔 중에 어느 하나도 없앨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개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찬란하여 볼 만하고 융병무비(戎兵武備)가 정연히 다 갖추어져, 사람을 쓰는 데에 있어서 문장을 잘 짓고 도덕이 있는 선비와 과감하고 용력이 있는 사람을 안팎에 벌려 놓는 것은 모두 융문과 융무의 지극한 것이니, 전하께서 문과 무를 아울러 써서 장구한 다스림에 이르름을 드러나게 함입니다.” 하였다.
경회루(慶會樓) 사정전 서쪽에 있다. 누(樓) 둘레에 못을 만들었는데, 못이 깊고도 넓다. 연꽃을 심었으며, 그 못 속에 두 개의 섬이 있다. ○ 하륜(河崙)의 기문(記文)에, “전하의 13년 봄 2월에, 경복궁 제거사(提擧司)가 ‘그 후전(後殿)의 서쪽 누각이 기울어져 위험하다.’고 의정부에 보고하여 아뢰니, 전하께서 놀라 탄식하기를, ‘경복궁은 나의 선고(先考)께서 처음 창업하실 때에 세운 것인데, 지금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하고, 드디어 거둥하여 보시고, 이르시기를, ‘누각이 기울어진 것은 지대가 습하여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조 판서 신 자청(子靑) 등에게 명하시기를, ‘농사철이 다가오니, 마땅히 일없이 노는 사람들을 부역시켜 빨리 수리하라. ’하셨습니다. 자청 등이 땅을 측량하여 약간 서쪽으로 옮기고, 그 터에 제도를 조금 넓혀 새롭게 만들고, 또 그 지대가 습한 것을 염려하여 누각 둘레에 못을 만들었습니다. 공사를 마치자, 다시 거둥하시어 그 누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나는 옛모습 그대로 수리하고자 하였을 뿐인데, 옛날의 제도보다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셨습니다. 자청 등이 엎드려 대답하기를, ‘신 등은 후일에 또 기울어져 위태로울까 염려하여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종친(宗親)ㆍ공신(功臣)ㆍ원로(元老)들을 불러모아 함께 즐기고, 누의 이름을 ‘경회’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신 하륜에게 명하여 기문을 쓰라 하셨는데, 신은 감히 문장이 졸렬하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공자가 애공(哀公)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임금이 정사하는 것은 인재를 얻는 데에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임금의 정사는 인재를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인재를 얻은 뒤에라야 ‘경회(慶會)’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태조 강헌대왕은 성문신무(聖文神武)의 덕으로써 한 나라를 잘 다스려서 편안하게 하시자,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내리므로 드디어 화산(華山)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마침내 궁실(宮室)을 세우고, 그 전(殿)을 ‘근정(勤政)’이라 이름짓고, 또 그것으로 문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음이 지극하십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그분의 덕을 잘 본받고 그분의 큰 기업을 계승하여 대국을 섬기기를 더욱 정성스럽게 하시자, 천자가 고명(誥命)을 내리시고, 정치 교화가 아름답고 밝아져서 경내(境內)가 더욱 편안해졌습니다. 지금 한 누를 수리하면서도 농사철이 가까운 것을 염려하셔서 일없이 노는 사람들을 부역시키도록 하시어, 며칠이 되지 않아서 준공되자 경회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대개 조용히 혼자 계시는 여가에 도덕이 있고, 다스리는 법을 아는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면회하시고, 그들의 계책을 살피어 받아들이며 도의(道義)를 강론하여 정치하는 근원을 바르게 하시니, 더욱 이로써 전하께서 참으로 정사를 부지런히 하는 근본을 아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논하건대, ‘경회’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건(乾)의 구오(九五)가 그 큰 덕으로서 구이(九二)의 큰 덕을 만남이 이로와서 뜻이 같고 기운이 합하여 그 도를 행하게 될 것 같으면, 여러 어진 이들이 함께 나아와서 국가가 밝고 창성해질 것이니, 이른바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른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덕으로써 하지 않으면 간사한 무리들이 함께 나아와서 국가가 어두워질 것이고, 가끔 덕으로써 나오는 이를 쓰더라도 그 재주를 다쓰지 못하고 간사한 무리들과 섞이게 되면 역시 어두운 상태로 같이 돌아가고야 말 것입니다. 옛일을 상고해 보면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무(文武)가 다스릴 때에 고요(皐陶)ㆍ기(夔)ㆍ익직(益稷)ㆍ이윤(伊尹)ㆍ부열(傅說)ㆍ여상(呂商)ㆍ주공(周公)ㆍ소공(召公)의 보좌가 있었으니, 이야말로 참으로 ‘경회’라 할 수 있고, 한고조(漢高祖) 때의 소조(蕭曹)와, 당태종(唐太宗) 때의 방위(房魏)와, 송조(宋祖) 때의 조보(趙普)도 경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덕에 순수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삼대(三代)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한 나라 무제(武帝)의 공손홍(公孫弘)과 송 나라 신종(神宗) 때의 왕안석(王安石) 같은 이도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을 꾸며 명예를 낚았다는 비방큰 간사함은 충성과 비슷하다는 탄핵도 면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경회이겠습니까? 또 당 나라 현종(玄宗) 때의 송경(宋璟)ㆍ장구령(張九齡)과 송 나라 진종(眞宗) 때의 구준(寇準)도 서로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임보(李林甫)가 대신하고 왕흠약(王欽若)이 섞이매 경위(涇渭)의 분별과 훈유(薰蕕)의 구별도 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경회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본다면 임금과 신하의 경회는 옛날부터 실로 그리 많이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천년 만에 한 번 만난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태조께서 이미 근정(勤政)으로 나라를 소유하는 근본으로 삼아 다스렸고, 전하는 또 경회를 근정의 근본으로 삼아 힘쓰시니, 창업의 아름다움과, 계승의 훌륭함이 아, 성하기도 합니다. 능히 삼대(三代)의 경회를 따라 삼대의 치적(治績)을 이루어 영원한 세대에 규모를 물려주고, 끝없이 큰 복을 누릴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저 산악(山岳)의 기이하고 빼어남과 동산과 연못의 그윽하고 깊음과 얼음과 눈이 자리에서 나고 강과 호수가 난간과 섬돌에 닿았으며, 소나무와 잣나무는 우거지고 꽃과 풀은 무성하며, 바람과 연기와 구름과 달이며, 아침저녁의 흐리고 개이는 경치가 모두 관람(觀覽)하는 사이에 있는 것을 감히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다만 누를 다시 짓는 것이 나라를 다스림과 비슷함이 있으니, 기울어진 것은 바르게 하고 위태로운 것은 편안하게 하는 것은 선조의 업을 보전함이고, 흙을 쌓되 튼튼히 하고 땅을 깊이 파서 습기를 없애는 것은 큰 기업을 튼튼히 하는 것이고, 들보와 마룻대와 기둥과 주춧돌을 웅장하게 함은 무거운 것을 지탱하는 것은 약해서는 안되기 때문이고, 대공과 지도리와 문설주를 모두 갖춤은 작은 재목이 큰 소임을 맡을 수 없기 때문이고, 시원스레 추년 끝이 트이게 함은 사방에서 보고 들어 총명하게 하려는 것이고, 높은 뜰에 사닥다리가 엄한 것은 등급의 차별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반드시 두려운 것은 경외심을 보존하려는 것이고, 멀리 보아 빠트리지 않는 것은 포용함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제비들이 와서 서로 하례함은 인민들이 기뻐함이고, 파리가 붙지 않음은 간사하고 참소하는 무리들이 물러감이고, 그림이 사치스럽지 않음은 제도와 문물이 중도를 얻음이고, 때를 맞추어 여기서 노는 것은 문무(文武)의 늦추었다 당겼다 함이 알맞은 것이니, 진실로 오르고 내릴 때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정치를 행하면 이 누의 유익함이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이것으로 아울러 기록하나이다.
○ 윤회(尹淮)의 시에, “화산(華山) 남쪽 한수(漢水) 머리에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리어 하늘이 구역 지었네. 성신(聖神)이 갑자기 일어나 신도(神都)를 정하매 구서(龜筮)가 함께 따라 사람 꾀에 합하도다. 묘사(廟社)를 먼저 짓고 다음에 궁실(宮室)을 짓는데 침전(寢殿) 서쪽 모퉁이에 층루를 경영한다. 조회를 마치고 조용히 혼자 올라가는 것은 수고와 편안함을 절제하려 함이지 구경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 땅이 습하여 터가 단단하지 않으며 세월이 오래되어 기울어져서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우리 임금 그 말을 듣고 당을 지으려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수리하라 했다. 옛것을 철폐하고 서쪽으로 옮겨서 높은 터를 다지고 밑으로 맑은 못을 파서 사방을 둘러쌌다. 왕이 빨리 하지 말라 해도 백성들이 다투어 와서 넓은 궁실이 얼마 안되어 하늘의 두우성(斗牛星)에 닿았네. 헌영은 시원하고 계단은 높아서 멀리 바라봄에 빠트리지 않고 다 보이네. 준공을 아뢰매 새로 ‘경회’라는 이름을 내리시고 세자는 편액(扁額)을 쓰매 은구(銀鉤)를 가로질러 놓았네. 굽어보매 남강이 천 길이나 깊은데 꿈틀거리는 용이 일어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돌아보매 북악(北岳)이 만 길이나 높은데 누워 있던 범이 휘파람 불자 바람이 우수수 부네. 하늘은 나직하고 해는 누에 걸려 있고 바람은 훈훈한데 자욱한 서기(瑞氣)가 일어난다. 빛나면서도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면서도 비루하지 않으니 진실로 군자가 여기에서 쉬리로다. 거룩하신 임금님이 정남을 향하시매 좌우에는 공후(公候)가 질서정연히 늘어섰다. 임금님은 기쁘구나. 보필하신 신하들이 일어나서 잘한다 못한다고 문답함이 얼마나 좋은가. 염매(鹽梅)로 계옥(啓沃)하여 내를 배로 건너는데 같은 소리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 서로 찾네. 때로는 악공(樂工)에게 명하여 녹명(鹿鳴)을 노래하니 술잔은 굽었고 맛난 술은 부드럽다. 비파를 타고 피리를 불고 훈지(壎篪)를 연주하니 치소각소(徵招角招)에 대한 생각이 그립다. 임금과 신하가 즐기는 데에는 예의(禮義)가 있음이 좋으니 끊임없는 많은 말이 모두 큰 계책일세. 신하들은 덕에 취해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천보(天保)에 이어서 천추(千秋)를 기원하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남은 고금에 드무니, 큰 고기가 골짜기에 놓여짐이 어찌 여기에 비하랴? 미미한 이 신하가 다행히 태평 시대에 났으매 눈을 들어 우러러 더위잡고 길이 머뭇거린다. 원컨대, 높은 데 있을수록 더욱 위태함을 생각하여 영원히 만백성으로 하여금 고루 편히 쉬게 하소서.” 하였다.

흠경각(欽敬閣) 강녕전 서쪽에 있다. ○ 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만일 제왕(帝王)이 정사를 펴고 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먼저 역법(曆法)을 밝혀 철을 알려 주어야 한다. 철을 알려주는 요긴한 방법은 실로 천문의 기상을 관찰하여야 하니, 이것이 기형(璣衡)과 의표(儀表)를 설치한 까닭이다. 그러나 고찰하고 시험하는 방법은 지극히 정밀하고 세밀하니, 한 가지 기구나 형상으로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상전하가 그 해당 관청에 명하여 온갖 상의(象儀)를 만들었으니, 대간의(大簡儀)ㆍ소간의(小簡儀)와 혼의(渾儀)ㆍ혼상(渾象)ㆍ앙부일구(仰釜日晷)ㆍ일성정시규표(日星定時圭表)ㆍ금루(禁漏) 따위의 기구는 모두 지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여 옛날 것보다 아주 월등하다. 그런데도 오히려 제도가 미진할까 염려하시고, 또 모든 기구가 후원(後苑)에 설치되어 있어서 때때로 살피기가 어렵자, 마침내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의 조그만 전각(殿閣)을 세우고, 종이를 발라 산을 만드니 높이가 7척쯤 되었다. 그것을 그 전각 안에 두고 그 안에는 옥루(玉漏)의 기륜(機輪)을 설치하고, 물로 그것을 쳐서 돌게 하고 금으로 해를 만드니 크기가 탄환만하였다. 다섯 가지 빛깔의 구름이 그것을 에워싸고 그 산허리 위로 도는데, 하루에 한 바퀴를 돌되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속으로 빠진다. 비스듬한 형세는 하늘의 운행을 본떠서 북극(北極)과 멀고 가까움과 나고 드는 분수(分數)를 각각 절기(節氣)를 따라 하늘의 해와 합하게 하였다. 그 해 밑에는 옥녀(玉女) 네 사람이 손에 금방울을 들고서, 구름을 타고 사방에 서 있다. 인(寅)ㆍ묘(卯)ㆍ진(辰)시의 처음에는 정 동쪽에 있는 사람이 매양 방울을 흔들고, 사(巳)ㆍ오(午)ㆍ미(未)시의 처음에는 정 남쪽에 있는 사람이 방울을 흔드는데, 서쪽과 북쪽도 다 그러하다. 그 밑에는 네 신(神 청룡(靑龍)ㆍ주작(朱雀)ㆍ백호(白虎)ㆍ현무(玄武))이 각각 자기의 방위에 서서 모두 산을 향해 있다. 인시(寅時)가 되면 청룡이 북쪽으로 향하고 묘시가 되면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가 되면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가 되면 도로 서쪽으로 향하는데, 주작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차례로 그 방위로 향하는 것은 앞의 것과 같다. 산의 남쪽 기슭에 높은 대(臺)가 있고, 사신(司辰) 한 사람은 붉은 공복(公服)을 입고 산을 등지고 서있으며, 무사(武士) 세 사람은 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었는데, 한 사람은 종 방망이를 들고서 서쪽을 향해 동쪽에 서 있고, 한 사람은 북채를 들고서 동쪽을 향해 서쪽에 서 있는데 북쪽에 가까우며, 한 사람은 징채를 들고서 역시 동쪽을 향해 서쪽에 서 있는데 남쪽에 가깝다. 시간이 될 때마다 사신(司辰)이 종인(鍾人)을 돌아보면 종인도 사신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고, 경(更)마다 고인(鼓人)은 북을 치며, 점(點)마다 징인(鉦人)은 징을 치는데, 그들이 서로 돌아보는 것도 그와 같으며, 경(更)ㆍ점(點)ㆍ징(鉦)ㆍ북의 수는 모두 항상 같은 법칙이다. 또 그 밑의 평지 위에는 열두 명의 신(神)이 각기 그 위치에 엎드려 있고, 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는데 항상 닫혀 있다. 자시(子時)가 되면 쥐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고, 옥녀(玉女)가 시패(時牌)를 들고 나오면 쥐가 그 앞에서 일어나며, 자시가 끝나면 옥녀는 도로 들어가고 그 구멍은 저절로 닫혀지며 쥐는 다시 엎드린다. 축시가 되면 소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고 옥녀가 나오면 소도 일어나는데, 열두 시(時)에 모두 그렇다. 오위(午位)의 앞에 또 대(臺)가 있고 대 위에는 의기(欹器)가 있으며 의기 북쪽에는 관인(官人)이 있어 금병을 들고서 물을 붓는데, 누수(漏水)의 남은 물을 계속 흘려 끊어지지 않는다. 의기가 비면 기울고 알맞으면 바르며 가득 차면 엎어지니, 모두 옛날의 제도와 같다. 또 산 동쪽에는 봄 석 달의 경치를 만들고, 남쪽에는 여름 석 달의 경치이고, 가을과 겨울도 그러하다. 빈풍(豳風)의 그림에 따라 나무에다 사람 짐승 초목의 형상을 새기고, 절후(節候)를 따라 나열하여 놓아 〈7월〉 한 편의 일이 모두 다 갖추어져 있다. 각(閣)의 이름을 ‘흠경(欽敬)’이라 한 것은 요전(堯典)의 공경히 하늘을 따라서, 공경히 백성에게 농사철을 알려준다.”는 뜻을 따온 것입니다.
대개 당우(唐虞) 시대로부터 천문이나 기상을 관측하는 기구가 그 시대에 따라 각각 제도가 있었다. 당송(唐宋) 이후로 그 법이 점점 갖추어졌으니, 이를테면 당 나라의 황도유의(黃道遊儀) ㆍ 수운혼천(水運渾天)과 송 나라의 부루(浮漏) ㆍ 표영(表影) ㆍ 혼천의상(渾天儀象)에서 원 나라의 앙의(仰儀)와 간의(簡儀)까지를 모두 정묘하다고 일컬었다. 그러나 대개 각각 한 시대의 제도가 되었으므로 모두를 상고할 수는 없으나, 그 운용하는 기틀은 사람의 힘을 많이 빌렸다. 지금은 하늘의 해의 도수와 구루(晷漏)의 시각은 저 4신과 12신과 고인ㆍ종인ㆍ사신(司辰)ㆍ옥녀와 더불어 온갖 기관이 차례차례로 함께 만들어졌으되,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가고 저절로 치는 것이 마치 귀신이 그렇게 시키는 것과 같아서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괴상히 여기면서도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는데, 위로는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그 만든 법이 참으로 교묘하다 할 만하다. 또 누수(漏水)의 남은 물로 의기(欹器)를 만들어 천도(天道)의 찼다 비었다 하는 이치를 관찰하고, 산의 사방에 빈풍(豳風)을 나열하여 백성의 농사짓기 어려움을 드러냈으니, 이것은 또 전대(前代)에 없던 아름다운 뜻이다. 이것을 항상 좌우에 두어 매양 마음에 경계하고, 또한 부지런히 정사를 해야 하는 뜻을 붙이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하는 반(盤)과 무왕(武王)의 호유(戶牖)의 명(銘)일 뿐이겠는가? 그 하늘을 본받고 시절을 따르는 흠경(欽敬)의 뜻이 지극하고 극진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소중히 여기는 어질고 후덕한 덕이 마땅히 주 나라와 함께 아름다워 무궁토록 전해질 것입니다. 각(閣)이 이미 이루어지매 신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라 하시므로 삼가 대강을 서술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올리나이다.” 하였다.

보루각(報漏閣) 경회루 남쪽에 있다. ○ 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임금님께서 옛 누기(漏器)는 그다지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기를 다시 만들라고 명하였다. 파수호(播水壺)는 서쪽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 수수호(受水壺) 두 개가 있는데, 물을 갈 때에 쓰는 것이며, 길이는 11척 2촌이고 원의 직경은 1척 8촌이며, 두 개의 화살은 길이가 10척 2촌이다. 그 면(面)은 12시(時)로 나누고, 시(時)마다 8각(刻)으로 나누어 초정(初正)의 나머지를 백 각으로 나누고 한 각을 12분(分)으로 만들었다. 야전(夜箭)은 옛날에는 21개였는데, 한갓 갈아 쓰기에 번거로워서 다시 수시력(授時曆)에 의거하여 밤과 낮에 오르고 내림으로 나누고, 대략 두 기운이 화살 한 개와 맞먹게 하였으니, 화살은 모두 13개이다. 간의와 대조해 보니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또 임금님은 때를 알리는 자가 착오를 면치 못함을 염려하여 호군(護軍) 신 장영실(蔣英實)에게 명하여, 나무인형으로 된 사신(司辰)을 만들어 때에 따라 저절로 알리게 하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그 제도는 먼저 전각 세 채를 짓고 동쪽 채 사이에 2층의 자리를 만들고, 윗 층에 세 신을 세워 하나는 시(時)를 맡아 종을 울리고, 하나는 경(更)을 맡아 북을 울리며, 하나는 점(點)을 맡아 징을 울린다. 가운데 층 아래에는 평륜(平輪)을 설치하고, 윤(輪)을 따라 12신을 배열하여 각각 쇠줄로 간(幹)을 삼아 오르내리며 각각 시패(時牌)를 잡고 번갈아가며 때를 알린다. 그 기계 운전하는 법은 가운데 채 안에 다락을 만들고, 그 다락 위에는 파수호(播水壺)를 벌여 놓고, 밑에는 수수호(受水壺)를 두었으며, 수수호 위에는 모가 난 나무를 꽂되 속도 비고 겉도 비었는데, 길이는 11척 4촌이고, 너비는 6촌이며, 두께는 8푼(分)이고, 깊이는 4촌이다. 빈 속에는 격(隔)이 있으며 면(面)에서 1촌쯤 들어가서 왼쪽에 동판(銅版)을 설치했는데, 길이는 화살과 같고 너비는 2촌이다. 판면에 구멍 열두 개를 뚫어 조그만 구리 알을 받는데, 알의 크기는 탄환과 같으며, 구멍에는 모두 기계가 장치되어 열리고 닫히게 할 수 있는데, 12시를 맡았다. 오른쪽에도 동판을 설치했는데, 길이는 화살과 같고 너비는 2촌 5푼이며, 동판 면에는 구멍 25개를 뚫어 조그만 구리 알을 받는 것을 왼쪽 동판과 같게 하고, 화살은 12개를 썼는데, 모두 12개의 동판은 절기에 따라 갈아 쓴다. 경(更)과 점(點)을 주장하는 수수호에 화살을 띄워 화살 머리에 가로지른 쇠를 받쳐 놓은 것이 젓가락 같은데, 길이가 4촌 5푼이다. 호 앞에는 구덩이가 있고 구덩이 안에는 넓은 동판을 비스듬히 설치했는데, 그 머리는 모가 나면서 속이 빈 나무 밑에 이어져 있고 꼬리는 동쪽 채에 이어졌다. 자리 밑에는 네 개의 격을 용도상(甬道狀)처럼 설치하고, 격 위에는 큰 철환(鐵丸)을 설치했는데 크기는 달걀만하며, 왼쪽의 열두 개는 시(時)를 맡고, 가운데 다섯 개는 경(更)과 경마다의 첫점을 맡았으며, 오른쪽 20개는 점을 맡고 있다. 그 철환을 설치한 곳에는 모두 고리가 있어서 열고 닫힌다. 또 횡기(橫機)를 설치하였으니, 그 기계의 모양은 숟가락 같은데, 그 한 끝은 굽어서 고리를 걸 수 있고 한 끝은 둥글어 철환을 받을 수 있으며, 가운데 허리에는 모두 둥근 축이 있어서 내리고 오르게 한다. 그 둥근 끝은 동통(銅筒)의 구멍에 당했는데, 동통은 두 개로서 비스듬히 격 위에 장치되어 있고, 왼쪽 것의 길이는 4척 5촌이고, 원의 직경은 1촌 5푼이며, 시(時)를 맡고 있다. 그 아래 면에는 12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오른쪽 것의 길이는 8척이고, 원의 직경은 왼쪽의 통과 같으며 경과 점을 맡고 있다. 하면에는 2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구멍에는 모두 기계가 있어서 처음으로 그 구멍이 모두 열려 동판의 조그만 알들이 밑으로 떨어져 기계에 닿으면, 기계는 저절로 그 구멍을 막아 다음 알이 굴러 지나가는 길을 만드는데, 차례차례로 모두 그렇게 된다. 동쪽 채 자리의 윗 층 밑의 왼쪽에는 두 개의 짧은 동통을 달아, 하나는 철환을 받고 하나는 그 안에 숟가락 같은 기계를 장치하여, 숟가락의 둥근 끝이 반쯤 나와 철환을 받게 되어 있다. 통 밑 오른쪽에는 둥근 기둥과 모난 기둥이 각각 두 개씩 있다. 둥근 기둥은 속이 비어 그 안에 기계를 장치하였는데, 모양은 숟갈과 같은데 반은 나오고 반은 들어갔다. 왼쪽 기둥에는 다섯 개이고, 오른쪽 기둥에는 열 개이다. 모난 기둥에는 비스듬히 작은 통을 꿰어 기둥마다 네 개씩 설치했는데, 한 끝은 연잎 모양이고, 한 끝은 용의 입 모양인데, 연 잎은 철환을 받고 용의 입은 철환을 토한다. 용의 입과 연잎은 위 아래로 서로 마주보고, 그 위에는 따로 짧은 통 두 개가 달려 있어서, 하나는 경(更)의 철환을 받고 하나는 점(點)의 철환을 받는다. 오른쪽 모난 기둥에는 연잎 밑마다 각각 세로로 된 짧은 통 두 개와 가로로 된 짧은 통 하나씩을 붙여, 그 가로로 된 짧은 통 한 개는 왼쪽 모난 기둥의 연잎 밑에 이어져 있고, 왼쪽 둥근 기둥의 다섯 개 숟가락과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개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각각 용의 입과 옆잎 사이에 당해 있고,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개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곧은 통 안에 반만 들어간다. 누수가 밑으로 수수호에 닿으면 떠 있던 화살이 점점 올라가, 때에 응하여 곧 왼쪽 동판의 구멍의 기계를 건드리며, 작은 철환이 밑으로 떨어져 동통으로 굴러 들어가 구멍에서 떨어지면서 그 기계를 건드리면 그 기계가 열리고, 큰 철환이 떨어져 자리 밑으로 굴러 들어가 달아 놓은 짧은 통에 떨어진다. 기계의 숟가락을 움직이면 기계의 한 끝이 통 안에서 올라와 시를 맡은 신(神)의 팔꿈치에 닿아 곧 종을 울리는데, 경과 점도 그와 같다. 다만 경의 철환은 달아 놓은 짧은 통으로 들어가 떨어지면서 기계 숟가락을 건드리면 왼쪽 둥근 기둥 속으로부터 위로 올라가 경을 맡은 신(神)의 팔꿈치에 부딪쳐 북을 울리고는 점통으로 굴러 들어가 거기서 다시 첫 점(點)의 기계를 건드리고, 오른쪽 기둥 속에서 올라와 점을 맡은 신을 부딪쳐 징을 울리고는 연잎 밑의 곧은 작은 통에서 멎는데, 그것이 굴러 들어가는 곳에 기계를 장치하였다. 처음에 경의 철환의 길과 그것이 굴러 들어가는 길을 닫으면 그것이 들어갔던 길은 닫히고 경의 길이 열리는데, 나머지 경도 다 그와 같아서 오경(五更)이 끝남을 기다려서 빗장을 빼고 낸다. 경마다 두 점 이하의 철환이 아래에 달린 짧은 통에 닿아 연잎으로 굴러 들어가서,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서 그치면 다음 점의 철환이 굴러서 또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서 멈춘다. 그 철환을 멈추게 하는 통에는 구멍이 있어서 빗장을 걸고 닫게 하고, 다섯 개의 철환이 떨어지면서 가장 밑에 있는 기계를 움직이면 기계에 연결된 쇠줄이 차례로 모든 빗장이 빠져 먼저의 세 점의 철환과 한꺼번에 내려온다. 시를 맡은 큰 철환은 달아 놓은 짧은 통에 굴러 떨어져 둥근 기둥에 붙은 통에 굴러 들어가 가로지른 나무의 북쪽 끝을 누른다. 나무 길이는 6척 6촌이고, 너비는 1촌 5푼이며, 두께는 1촌 7푼이다. 가로지른 나무 가운데에 즉 심을 맞추어 짧은 기둥을 세우고, 가로지른 나무를 끼우고 둥근 축으로 받아 아래위로 내리고 오르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의 남쪽 끝에 손가락만한 둥근 나무를 세웠으니 길이는 2척 2촌인데, 때를 알리는 신(神)의 발 밑에 해당한다. 발끝에 조그만 윤축(輪軸)이 있어서, 큰 철환이 떨어지면서 그 북쪽 끝을 누르면 남쪽 끝이 치켜 올라가 신(神)의 발을 쳐들어 자리 가운데 층의 위로 오르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의 북쪽 끝에는 조그만 판자를 세워 열고 닫게 하였으며, 판자에는 쇠줄이 있어서 위로 시를 맡은 달린 통의 기계 숟가락에 이어져 있는데, 숟가락이 움직이면 판자가 열리어 앞의 철환을 나오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의 남쪽 끝이 낮아지면 시를 알리는 신은 바퀴의 면(面)으로 돌아오고, 다음 시를 맡은 신이 곧 대신 돌아온다. 그 윤전(輪轉)의 제도는 바퀴 겉에 조그만 판자를 가로질러 놓았는데, 길이는 1척쯤 되고 그 중간은 4ㆍ5촌쯤 되며, 동판(銅板)을 그 위에 가로로 걸쳐 놓았는데 그 형세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한 끝에는 굴대를 장치하여 열리고 닫히게 하였다. 시를 알리는 발은 처음에 동판 밑으로 반치쯤 들어가 있는데, 올리면 동판을 열고서 올라오고, 올라오면 도로 닫힌다. 시가 다 되어 바퀴 면으로 돌아오면 발끝의 쇠바퀴는 순하게 동판을 굴러 내려가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 다음의 시를 맡은 신도 그와 같다. 모든 기계가 다 감추어져 있어 드러나지 않고, 보이는 것은 관(冠)과 띠를 갖춘 나무로 만든 사람뿐이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하였다.
○ 김빈(金鑌)의 명(銘)과 그 서문에, “제왕의 정사는 때를 맞게 하고 날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상고하고 실험할 것은 의상(儀象)과 구루(晷漏)에 있다. 이는 의상이 아니면 천지의 운행을 살필 수 없고, 구루가 아니면 낮과 밤의 한계를 잴 수가 없기 때문이며, 천년을 헤아림도 한 시각의 어긋나지 않는 데서 비롯하고, 모든 정무의 순조로운 것도 한 치의 세월도 허송하지 않는 데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성왕(聖王)들이 하늘에 순응하여 정치를 하는 데에 모두 여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요(堯)의 공경히 따르던 것을 보존하며, 순(舜)의 선기(璿璣)와 옥형(玉衡)으로 살피던 것을 본받아서, 해당 관청에 명하여 의상(儀象)을 만들어 천문과 기상을 관측하는 데에 도움을 받고, 다시 누기(漏器)를 새로 만들어 구각(晷刻)을 바르게 하였다. 이에 궐내의 서쪽에 전각 세 채를 세우고 호군 신 장영실에게 명하여 사신(司辰)하는 나무 사람과 3신(神)과 12신을 만들어서, 계인(鷄人)의 직분을 대신하게 하였다. 동쪽 채 안에 자리 2층을 마련하고 3신을 윗층에 두고, 한 신 앞에는 종을 두어 그것을 쳐서 시(時)를 알리게 하고, 한 신 앞에는 북을 두어 그것을 쳐서 경(更)을 알리게 하며, 한 신 앞에는 징을 두어 그것을 쳐서 점(點)을 알리게 하였다. 12신은 각기 신패(辰牌)를 잡고 평륜(平輪)에 둘러서서 가운데 층 밑에 숨었다가 때에 따라 번갈아 올라온다. 가운데 채 안에는 항아리를 두고 기계를 장치하여 철환(鐵丸)으로 그 기계를 퉁기는데, 때가 이를 때마다 여러 신들은 곧 응한다. 의상(儀象)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하늘과 조금도 틀리지 않아서 참으로 귀신이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이 모두 놀라고 감탄하니, 진실로 우리 동방에서는 과거에 일찍이 없었던 훌륭한 제도이다. 그리하여 그 전각 이름을 ‘보루(報漏)’라 하고, 이제 신 김빈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후인들에게 보여 주라 하셨다. 신은 절하고 명(銘)을 지어 올립니다.” 하였다.
그 명에, ‘음과 양이 차례를 바꾸고 밤과 낮이 엇갈린다. 천도(天道)는 묵묵히 돌아가고 신공(神功)은 자취가 없도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도와서 이룩하여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시대마다 제도가 달랐도다. 오직 우리 동토(東土)에는 옛 제도가 소홀했는데 비로소 빛나는 법을 만들었으니, 우리 임금의 깊은 지혜였다. 먼저는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고, 다음에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네 개의 파수호(播水壺)에 두 개의 수수호(受水壺)로다. 낮과 밤의 교대는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하나니, 이에 시초점을 치는 산가지를 세워서 이륙(二六)으로 나타내고, 목탁을 치고 혹은 꽹과리를 치는 것은 측후가 어긋날까 함이로다. 나무로 신(神)을 만들어 지키는 관리가 필요없네. 신을 두어 물시계를 맡기느라 높은 집을 지었도다. 동쪽 채에는 위와 아래로 자리를 설치했는데, 윗쪽에 세 신이 있어 종과 북과 징을 나누어 가졌나니, 닭을 대신해 소리를 치매 그 소리는 차례가 있다. 그 아래 열두 신은 제각기 신패(辰牌)를 갖고 평륜(平輪)의 면에 둘러섰다가 번갈아 올라와 때를 알린다. 그 기계의 움직임은 가운데 채에 징험하도다. 층층의 다락으로 칸막이를 하고, 항아리로 서로 이었도다. 구리로 두 개의 판자를 만들고 구멍을 뚫어, 화살을 끼우고 기계를 얹어서 철환을 받아 항아리 안에 쏟아 넣는다. 화살이 올라와 기계를 움직이면 철환이 떨어져 구르도다. 철환의 길은 가로로 비스듬히 신(神)의 밑에 있도다. 두 개의 갈림길이 넷으로 나뉘어져 마치 용도(甬道)와 같고, 통의 좌우에 잇대어 있어 쏟아지는 철환을 받도다. 통에는 기계와 구멍이 있어 동판의 수와 맞추었도다. 또 따로 큰 철환이 있어 통가에 벌여 있다가 번갈아 기계를 건드리니, 마치 빠른 번개와 같도다. 기계가 닿는 곳에 사신(司辰)이 그 직분을 다하도다. 귀신과도 같아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한다. 훌륭하여라. 이 큰 규모여! 천도(天道)에 순응하여 만드니 제도가 조화(造化)와 짝하여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도다. 이 한 치의 광음(光陰)을 생각하여 온갖 업적을 빛내도다. 버들가지를 꺾어 울타리를 만들어도 백성들 스스로 의혹하지 않는다. 이에 여기에 준정(準程)을 세우노니 밝게 보이어 끝이 없으리.” 하였다.
○ 김돈(金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명과 그 서문에, “의상(儀像)이 있은 지는 옛날부터이다. 요순(堯舜)으로부터 한당(漢唐)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소중히 여겼다. 그 글은 경사(經史)에 자세히 나타나지만, 지금은 그때와 시대가 매우 멀어서 그 법이 자세하지 않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신성(神聖)하여 고금에 으뜸가는 자질로써, 모든 정사를 보시는 여가에 마음을 천문법상(天文法象)의 이치에 두시어 옛날의 이른바 혼의(渾儀)ㆍ혼상(渾象)ㆍ규표(圭表)ㆍ간의(簡儀)와 자격루(自擊漏)ㆍ소간의(小簡儀)ㆍ앙부천평(仰釜天平)ㆍ현주일구(懸珠日晷) 등의 기구를 만들어 빠뜨림이 없었으니, 그 하늘에 공경히 순응하여 물건을 개발하여 실효를 거두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해가 도는 데에는 백 시각이 있어서 낮과 밤이 그 반을 차지한다. 낮에는 해 그림자를 측량하여 때를 알게 되니 그 기구는 이미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밤에 있어서는 《주례(周禮)》에, 별로 밤을 분별한다는 글이 있고, 《원사(元史)》에는, ‘별로써 밤을 측정한다.’는 말은 있어도, 그 별을 측정하여 활용하는 기술은 말하지 않았다. 이에 명하여 밤낮의 시각을 아는 기구를 만들게 하고, 그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그것을 만드는 제도는 구리를 써서 만드는데, 먼저 바퀴를 만들어 그 형세는 적도(赤道)에 표준했는데, 자루가 있고 바퀴의 직경은 2척이고, 두께는 4푼이며 너비는 3촌이다. 가운데에 십자(十字)의 거(距)가 있는데, 너비는 1촌 5푼이고, 두께는 바퀴와 같으며, 십자 속에는 축이 있는데, 길이는 5푼 반이고 직경은 2촌이다. 북쪽 면에는 그 중심을 깎아 파서 1리(厘)의 두께로 만들었으며, 가운데에는 겨자씨만한 둥근 구멍을 만들고, 축(軸)으로 계형(界衡)을 꿰고 구멍으로 별을 본다. 밑에는 서려 있는 용이 있어서 바퀴 자루를 물고 있는데, 자루의 두께는 1촌 8푼으로 용의 입에 들어간 것이 1척 1촌이고, 밖으로 나온 것이 3촌 6푼이다. 용 밑에는 대(臺)가 있는데 너비는 2척이고, 길이는 3척 2촌이다. 거기에 도랑이 있고 못이 있으니, 그 까닭은 판판하기를 취하려고 한 까닭이다. 바퀴 윗면의 대에 세 개의 고리가 있으니,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과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과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이다. 주천도분환은 밖에서 운전하는데, 두 개의 귀가 있으며 직경은 2척이고, 두께는 3푼이며 너비는 8푼이다. 일구백각환은 가운데에 있으면 돌지 않는데, 직경은 1척 8촌 4푼이고, 너비와 두께는 바깥의 고리와 같다. 성구백각환은 안에서 운전하는데, 두 개의 귀가 있으며 직경은 1척 6촌 8푼이고, 너비와 두께는 가운데와 바깥 고리와 같다. 귀를 만든 것은 운전하기 위함이다. 세 개의 고리 위에 계형(界衡)이 있는데, 길이는 2척 1촌이고, 너비는 3촌이며 두께는 5푼이다. 두 머리 속은 비었는데, 길이는 2촌 2푼이고 너비는 1촌 8푼이니, 그 때문에 세 개의 고리에 그어 놓은 것을 가리우는 것이다. 허리와 좌우에는 각각 용 한 마리씩이 있으니, 길이는 1척으로 모두 정극환(定極環)을 받치고 있다. 고리 두 개가 있는데, 바깥 고리와 안 고리 사이에는 구진대성(句陳大星)이 보이고, 안 고리의 안에는 천추성(天樞星)이 보이는데, 이는 남북과 적도를 정한 것이다. 바깥 고리는 그 직경이 2촌 3푼이고 너비는 3푼이며, 안 고리는 직경이 1촌 4푼 반이고 너비는 4리이며, 두께는 모두 2푼이 조금 모자라는데 서로 십자(十字)처럼 이어져 있다. 계형의 양쪽 끝은 비었고 안팎에는 각각 조그만 구멍이 있으며, 정극외환(定極外環) 양쪽에도 조그만 구멍이 있는데, 가는 노끈으로 여섯 개의 구멍을 꿰어 계형의 양쪽 끝에 매었는데, 그것은 위로는 해와 별을 살피고 아래로는 시각을 상고하려는 것이다. 주천환(周天環)에는 주천도(周天度)를 새겼는데, 매 도(度)를 4푼으로 만들었으며, 일구환에는 백 각을 새겼는데 매 각을 6푼으로 만들며, 성구환에도 일구환과 같이 새겼는데, 자정(子正)이 새벽 전 자정을 지나는 것이 주천의 1도를 지난 것과 같은 것이 다를 뿐이다. 주천환을 사용하는 방법은 먼저 수루(水漏)를 내리어, 동지(冬至)의 새벽 전 자정이 되면 계형으로 북극의 두 번째 별이 있는 곳을 측후해서 바퀴 옆에 기록하고 주천의 첫 도수의 시초에 맞춘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면 하늘의 해도 반드시 어긋나니, 수시력(授時曆)으로 상고하면 16년이 조금 지나면 1분이 퇴각하고, 66년이 조금 지나면 1도가 퇴각한다. 이렇게 되면 다시 측후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북극의 두 번째 별은 북극성에 가까워서 가장 붉고 밝아서 누구나 보기 쉽다. 그러므로 그것으로써 기후를 측정하는 것이다. 일구환을 쓰는 방법은 간의에 성구환을 쓰는 법과 같다. 첫해 동지 첫날 새벽 전의 밤중 자정을 처음으로 하여 주천의 첫 도수의 처음에 맞춘다. 1일에 1도, 2일에 2도, 3일에 3도, 이리하여 3백 64일이 되면 바로 3백 64도가 된다. 다음 해의 동지 첫날 자정이 3백 65도가 되는데, 1일에는 영도(零度) 3분, 2일에는 1도 3분이며, 3백 64일이 되면 바로 3백 63도 3분이 된다. 또 다음 해의 동지 첫날에 3백 64도 3분이 되면 1일은 영도 2분, 2일은 1도 2분이며, 3백 64일이 되면 바로 3백 63도 2분이 된다. 또 다음 해 동지 첫날에 3백 64도 2분이 되고, 1일은 영도 1분이고 2일은 1도 1분이며, 3백 65일이 되면 바로 3백 64도 1분이니, 이것을 일진(一盡)이라 하고, 한 바퀴가 다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대개 사람의 동정(動靜)의 기틀은 실로 해와 별의 운행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와 별의 운행은 의상 속에 밝게 나타나 있다. 옛날의 성인들은 반드시 이로써 다스리는 방법의 첫째 임무로 삼았으니, 요(堯)의 역상(曆象)과 순(舜)의 선기(璿璣)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전하의 이것을 만든 아름다운 뜻은 바로 요순과 그 규모를 같이하는 것으로, 우리 동방의 천고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훌륭한 일이다. 아, 지극하여라. 이것을 마땅히 새겨 후세에 밝게 보여 주어야 하리라. 신 김돈은 감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올리나이다.” 하였다.
그 글에 요 임금은 역상을 공경히 정하였고 순 임금은 기형(璣衡)을 사용했다. 대대로 서로 전하니 만든 솜씨가 더욱 정묘해졌다. 의(儀)이니 상(象)이니 하여 그 이름은 같지 않으나 굽어 살피고 우러러 관찰하여 백성에게 철을 알려 주었는데, 시대가 멀어지자 제도가 더욱 폐해졌다. 그것을 기록한 책이 남아 있다 하지만 누가 그 참뜻을 알리? 우리 성신(聖神) 세종대왕이 시기에 응해 요와 순 두 임금 이어받아 만들었나니, 표(表)ㆍ누(漏)ㆍ의(儀)ㆍ상(象)이 모두 옛 제도를 회복하였네. 시에는 백 각이 있어 낮과 밤으로 나누어지니, 해를 측정하는데 갖추지 못한 기계가 없다. 또 밤까지 측후하고자 하여 새로운 의(儀)를 만드니 그 이름은 무엇이던가? 그것은 바로 일성정시(日星定時)이다. 그 쓰임새는 어떠한고? 별을 보고 해 그림자를 측정한다. 그 바탕은 구리인데 만든 솜씨는 견줄 데가 없다. 먼저 둥근 바퀴를 만들고 거(距)가 서로 설치되었다. 남북이 높고 낮은 것은 적도(赤道)의 법을 본떴네. 용이 그 대에 도사리고 있어 입으로 바퀴의 자루를 물었고, 도랑이 있어 못에 잇대었으니 그 물이 지극히 수평을 이루었도다. 바퀴 위의 세 개의 고리가 스스로 서로 의지해 붙었으니, 바깥고리는 주천으로서 도(度)와 분(分)을 벌여 놓았다. 그 안에 있는 두 개의 고리는 일환과 성환이 그 길을 나누었다. 성환의 각(刻)은 하늘의 도수와 같은데, 안팎의 것은 움직이고 가운데 것만은 꼼짝하지 않는다. 저울대는 그 면(面)에 가로질러 있고 굴대는 그 가운데를 꿰었다. 굴대를 파서 구멍을 만드니 마치 바늘과 겨자씨 같은데, 속이 빈 저울대의 끝에는 도(度)와 각(刻)이 선명하고 뚜렸하도다. 한 쌍의 용이 굴대를 끼고 정극환(定極環)을 받들었고, 고리에는 거죽과 속이 있어서 별이 그 사이로 보인다. 보이는 별은 무엇인가? 구진(勾陳)과 천추(天樞)로 남쪽과 북쪽을 정하였으매 묘(卯)와 유(酉)가 서로 기다린다. 그것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선(線)으로 그것을 살펴보나니, 바로 고리의 위에 걸치고 밑으로는 저울대의 끝을 꿰었다. 해를 측량하려면 그 두 가지를 쓰고 별을 살펴보려면 한 가지를 쓴다. 제왕의 자리는 붉고 빛나서 저 북극성에 가까이 있나니 선으로 그것을 엿보면 때와 시각을 알 수 있도다. 먼저 수루(水漏)를 내려놓으면 자정을 바로 거기서 볼 수 있고, 바퀴와 고리에 기록해 표시하나니 천주(天周)가 처음 시작되는 곳이다. 밤마다 지나고 돌고 할 때에 도와 분이 함께 한다. 기계는 간단하나 정묘하며 작용은 두루하고 또 세밀하네. 몇 번이나 선철(先哲)들이 지나갔지만 그래도 이 제도 결함이 있도다. 우리 임금님 하늘을 예측하여 이 의(儀)를 일찍이 만들어서 저 천문을 맡은 관리에게 주시니 만세에 보배 되리로다.” 하였다.

간의대(簡儀臺) 궁성(宮城)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다. ○ 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선덕(宣德) 임자년 가을 7월 어느 날, 임금님께서 경연에서 역상(曆象)의 이치를 논하다가, 이내 예문관 제학 신 정인지(鄭麟趾)에게 이르시기를, ‘우리 동방은 멀리 바다 밖에 있어서 모든 하는 일이 한결같이 중화(中華)를 따르는데 오직 하늘을 관측하는 기계는 없다. 그대는 이미 역산(曆算)의 제조(提調)로 있으니, 대제학 정초(鄭招)와 고전을 상고하고 의표(儀表)를 창제(創制)하여 측험(測驗)하는 데에 쓰이도록 하라. 그러나 중요한 일은 북극성이 나온 땅에 높낮이를 정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먼저 간의(簡儀)를 만들어 올려라. ’하였다. 이리하여 신 정초와 신 정인지는 옛날 제도를 상고하는 것을 맡고, 중추원사(中樞院使) 신 이천(李蕆)은 공사를 감독하는 것을 맡았다. 먼저 목양(木樣)을 만들어 북극성이 땅에 나온 36도를 정하니, 원사(元史)의 측정한 바와 대략 부합하였다. 드디어 구리쇠로 의(儀)를 만들어 그것이 장차 이루어지려 하자, 호조 판서 신 안순(安純)에게 명하여 후원에 있는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가 31척이고 길이는 47척이며, 너비는 32척이었다. 돌 난간으로 두르고 그 꼭대기에 간의를 두고 네모 반듯한 상을 펴고, 그 남쪽 대의 서쪽에 구리로 된 표를 세우니, 높이는 8척의 얼(臬)의 다섯 배이고 푸른 돌을 깎아서 규(圭)를 만들고, 규의 면(面)에는 장(丈)ㆍ척(尺)ㆍ촌(寸)ㆍ분(分)을 새겼으며, 영부(影符)로써 한낮의 그림자를 취하여 음과 양 이기(二氣)의 차고 줄어드는 단서를 추측하여 알았다. 표의 서쪽에 조그만 집을 짓고 혼의(渾儀)와 혼상(渾象)을 두니, 의는 동쪽에 있고, 상은 서쪽에 있다. 혼의의 제도는 역대에 같지 않지만, 지금은 원 나라 오씨(吳氏 오징(吳澄))가 편찬한 글에 의해서 옻칠한 나무로 의를 만들었다. 혼상의 제도는 옻칠한 베로 본체를 만들어 둥글기가 탄환 같은데 둘레는 10척 8촌 6푼이다. 세로와 가로로 주천(周天)의 도수를 그었는데, 적도는 가운데에 있고, 황도(黃道)는 적도(赤道)의 안팎에 나왔다 들어갔다 한 것이 각각 24도가 조금 모자라고 중외(中外)의 관성(官星)을 두루 나열하였다. 하루에 한 번씩 돌아 1도를 지나는데, 노끈으로 해를 묶어 황도에 매어 두었다. 날마다 1도씩 뒤로 물러가는 것이 하늘의 운행과 부합한다. 그 물을 치는 기계의 운행은 매우 교묘하여 깊이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는 옛날 역사책에 자세히 적혀 있다.
경회루 남쪽에 집 세 채를 세우고 거기에 누기(漏器)를 두었는데,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였다. 동쪽 채 안에 2층으로 된 자리를 설치하고 그 위에 세 신이 있는데, 시를 맡은 자는 종을 치며, 경을 맡은 자는 북을 치며, 점을 맡은 자는 징을 친다. 자리 밑에 있는 열두 신은 각각 신패(辰牌)를 잡고서,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때에 따라 스스로 알린다.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조그만 집을 세우고,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하였다. 종이를 발라 산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7척쯤 된다. 그것을 그 집안에 두고 또 그 안에 기륜(機輪)을 설치하고 옥루(玉漏)의 물로 치면, 다섯 빛깔의 구름이 해를 싸고 나왔다 사라졌다 하며, 옥녀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고, 때를 맡은 무사(武士)들은 서로 돌아보며, 4신(神)과 12신은 차례로 향해 일어났다 엎드렸다 한다. 산의 4면에는 빈풍(豳風)의 네 철의 경치를 벌여 놓았으니, 백성들의 의식(衣食)의 어려움을 생각해서이다. 의기(欹器)를 두어 누수의 남은 물을 받는데, 그것은 천도의 찼다 비었다 하는 이치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간의(簡儀)가 비록 혼의(渾儀)보다는 간단하지만, 운전해 쓰기가 어렵기 때문에 작은 간의 두 개를 만들었으니, 이는 작은 간의가 비록 지극히 간략하나 그 작용은 간의와 같기 때문이다. 하나는 천추전 서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내려 주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시각에 어둡기 때문에 앙부일구(仰釜日晷) 두 개를 만들고 그 안에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이는 무지한 사람들도 그것을 굽어보고 때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곁에 두고 하나는 종묘(宗廟) 남쪽 거리에 두었으니 낮에 대한 측후기는 이미 갖추어졌다. 그러나 밤이 되면 상고하고 실험할 수 없기 때문에 밤과 낮으로 때를 알 수 있는 기구를 만들고,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모두 네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萬春殿) 동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에 내려주고, 두 개는 동서 양계(兩界) 원수영(元帥營)에 내려 주었다. 일성정시의는 무거워서 행군할 때에 불편하기 때문에 다시 작은 정시의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비슷비슷하다. 이 여섯 가지에 대해서 각각 그 서문과 명(銘)이 모두 있다. 또 현주일구(懸珠日晷)를 만들었는데 방부(方趺)의 길이는 63푼이다. 부(趺)의 북쪽에 기둥을 세우고 부의 남쪽에 못을 파고, 부의 북쪽에는 십자를 긋고 추를 기둥 꼭대기에 달아 십자와 서로 맞게 하니, 꼭 수준(水準)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평평하고 바르게 되었다. 작은 바퀴에 백 각을 그었으니 바퀴의 직경은 3촌 2푼이고, 자루가 있어서 비스듬히 기둥을 꿰고 있다. 바퀴의 중심에는 구멍이 있는데 한 개의 가는 줄로 꿰어 위로는 기둥 끝에 매고 밑으로는 부의 남쪽에 매어, 줄의 그림자가 있는 곳을 보고 곧 시각을 알게 된다. 그러나 흐린 날에는 때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행루(行漏)를 만들었으니, 몸체는 작고 제도는 간단하다. 파수호와 수수호가 각각 하나씩인데 쏟고는 갈오(渴烏)로써 물을 붓고, 물을 가는 때에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시를 쓰고, 작은 정시의와 현주행루(懸珠行漏)는 각각 몇 개씩을 만들어 양계(兩界)에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은 서운관에 두었다. 말 위에서도 시각을 알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천평일구(天平日晷)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현주일구와 대략 같다. 다만 남북에 못을 파고 부(趺)의 복판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꼭대기에 노끈을 꿰어 두어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만일 하늘을 관측하고 시를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정남침(定南針)을 써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힘을 쓰기를 면치 못하므로 정남일구(定南日晷)를 만든 것이다. 이는 비록 정남침을 쓰지 않으나 남북이 저절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부(趺)의 길이는 1척 2촌 5푼이고, 두 머리의 너비는 4촌이고, 그 길이는 2촌이며, 허리의 너비는 1촌이고, 그 길이는 8촌 5푼이다. 복판에는 둥근 못이 있으니 직경은 2촌 6푼이다. 거기에 수거(水渠)를 두어 두 머리와 통하게 하여 기둥 곁에 두었는데, 북쪽 기둥의 길이는 1척 1촌이고, 남쪽 기둥의 길이는 5촌 9푼이다. 북쪽 기둥의 1촌 1푼 아래와 남쪽 기둥의 3촌 8분 밑에는 각각 굴대가 있어서 사유환(四游環)을 받치고 있다. 동서로 운전하는데 여덟 개의 주천도(周天度)를 새겨 4분으로 만들었는데 북쪽의 16도에서 167도에 이른다. 속은 비어 쌍가락지 모양 같고 나머지는 다 온고리로 되어 있다. 안에는 중심에 한 획을 새겼고 밑에는 모난 구멍이 있는데 가로로 직거(直距)를 설치하였다. 거(距)의 중간은 6촌 7푼으로서 비어서 규형(窺衡)을 받치고 있다. 규형의 위에는 쌍고리를 꿰어 밑으로 온고리에 닿았고, 남북으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한다. 평평하게 지평환(地平環)을 설치하여 남쪽 기둥 꼭대기와 가지런한데, 오직 하지(夏至)에 해가 뜨고 지는 시각에 준하고, 반환(半環)을 지평환 밑에 가로로 설치하고 안에는 획(畫)과 각(刻)을 나누어 모난 구멍에 당하게 한다. 부의 북쪽에는 십자를 긋고 북쪽 굴대에 추를 달아 십자와 서로 당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판판함을 취하기 위해서이다. 규형으로 날마다 태양이 극(極)에서 떨어진 도분(度分)에 당하게 하여, 해의 그림자를 투입시키면 정원(正圓)이 된다. 모난 구멍에 의거하여 반환의 시각을 굽어보면 저절로 남쪽이 정해져 시를 알게 된다. 그 기구는 대략 15종인데 구리로 만든 것이 10종이다. 여러 해를 지나서야 준공하게 되니, 그것은 실로 무오년 봄이었다. 유사(有司)가 그 전말을 적어 후세에 밝게 보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신이 그 의논에 참여하였으므로 신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라 하였다. 신은 가만히 생각건대, 때를 알려주는 요점은 하늘을 측량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하늘을 측량하는 요점은 의표(儀表)에 있다. 그러므로 요(堯)는 희씨와 화씨에게 명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역상(曆象)을 밝히게 하고, 순(舜)은 기형(機衡)으로 살펴 일월오성(日月五星)인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함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당(漢唐)으로부터 여러 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그 기구가 있었으나 혹은 잘되기도 하고 혹은 잘못 되기도 하여 갑자기 다 헤아리기가 쉽지 않고, 오직 원 나라의 곽수경(郭守敬) 이 만든 간의(簡儀)ㆍ앙의(仰儀)ㆍ규표(圭表) 등의 기구는 정교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 동방에서는 그것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하늘이 아름다운 운수를 열어 문교(文敎)가 한창 일기 시작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는 신성(神聖)한 자질과 흠경(欽敬)하는 마음으로 온갖 정사를 하는 여가에 역산(曆算)의 정묘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상고하라 시키시고, 측험(測驗)의 갖추어지지 못함을 걱정하여 기구를 만들라 하셨다. 비록 요순의 마음씀인들 어찌 여기에 더할 수 있으랴? 그 제작한 기구는 한두 가지가 아니나, 몇 가지에 이르러서는 참고에 대비하였고, 그 규모는 오직 옛것만 본받은 것이 아니라 모두 임금의 마음에 헤아리시어 모두 극히 정묘하니, 비록 원 나라의 곽수경이라 하더라도 그 교묘한 기술을 베풀 수 없으리라. 아, 이미 수시(授時)의 역(曆)을 대조하고 또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드니, 위로는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일에 부지런히 하셨다. 우리 전하의 물건을 개발하여 실용을 이룩하는 지극한 인(仁)과 농사에 힘써서 근본을 소중히 여기는 지극한 뜻은 실로 우리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훌륭한 일이니, 장차 이 높은 대(臺)와 함께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하였다.
○ 정초(鄭招)의 소간의(小簡儀)에 대한 명(銘)과 그 서문에, “당요(唐堯)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 먼저 희화(羲和)에게 명하여 일구(日晷)를 바루었고, 그로부터 여러 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기구가 있었으나 원 나라에 이르러서야 갖추어졌다. 지금 임금 16년 가을에 이천(李蕆)ㆍ정초ㆍ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그만 모양의 간의를 만드니, 비록 옛날 제도를 본떴다 하나 실은 새로운 규모에서 나온 것이다. 정교한 구리로 부(趺)를 만들고 물길을 만들어 두르고 둘러서 준평(準平)을 정하였으니, 자오(子午)가 바로 자리잡았다. 적도의 한 고리의 면에 주천(周天)의 도분(度分)을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여 일곱 가지 정사를 측량하였다. 중외(中外)의 관(官)은 별의 도분에 들어가고 백 각의 고리는 적도에 있다. 고리의 내면에는 12시와 백 각으로 나누었다. 낮에는 일구(日晷)를 알고 밤에는 중성(中星)을 정한다. 사유환(四遊環)은 규형(窺衡)을 받쳤는데 동서로 운전하고 남북은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면서 규측(窺測)을 기다린다. 이에 기둥을 세우고 세 개의 고리를 꿰었으니 비스듬히 기대면 사유(四遊)는 북극을 표준하고 적도는 천복(天腹)을 표준하며, 꼿꼿이 세우면 사유는 입운(立運)이 되고 백 각은 음위(陰緯)가 된다. 공사를 마치자 여러 사람들은 그것에 명(銘)을 새겨 후세에 보이기를 청하니, 임금님은 신 정초에게 명하시므로 신은 절하고 올립니다.” 하였다.
그 명에, “하늘의 도가 생색내고 함이 없으매 기구도 간단한 것을 숭상한다. 옛날의 간의는 기둥을 가설하여 얼기설기 엮어 놓았는데 지금의 이 기구는 가까이로는 가지고 다닐 만하다. 그러나 그 작용은 간의와 같으니 대개 간단하고도 간단한 것이다.” 하였다.

동궁(東宮) 일화문(日華門) 밖에 있다.
창덕궁(昌德宮) 북부(北部)의 광화방(廣化坊)에 있다.
인정전(仁政殿) 조회를 받는 정전(正殿)이다. 남문은 인정문(仁政門), 또 서남문은 진선(進善), 또 그 남문은 돈화(敦化), 그 동문은 건양(建陽), 또 그 동문은 선인(宣仁), 서문은 금호(金虎), 북문은 광지(廣智)이다.
선정전(宣政殿) 인정전 동쪽에 있다.
보경당(寶慶堂) 인정전 서쪽에 있다.
동궁(東宮) 건양문(建陽門) 밖에 있다. 옛날 구현전(求賢殿)과 광연정(廣延亭)의 터로서 앞에는 연못이 있다. 성화(成化) 22년에 세우고, 춘궁(春宮)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창경궁(昌慶宮) 창덕궁 동쪽에 있다. 옛날 수강궁(壽康宮)의 터로서 성화 계묘년에 성종(成宗)이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와 안순왕후(安順王后) 세 분을 위해서 세웠다.
명정전(明政殿) 성종이 정월과 동지 때마다 신하들을 거느리고서 세 분에게 하례하고는 이어서 이 전에서 조회를 받았다. 동문은 명정문(明政門), 또 그 동문은 홍화문(弘化門)이다. 문 안에는 개울이 있고, 다리 이름은 옥천(玉川)이다.
문정전(文政殿) 명정전 남쪽에 있다.
인양전(仁陽殿) 명정전 서쪽에 있다.
경춘전(景春殿) 수녕전(壽寧殿) 북쪽에 있다.
통명전(通明殿) 경춘전 북쪽에 있다.
양화당(養和堂) 환경전(歡慶殿) 북쪽에 있다.
여휘당(麗暉堂) 통명전 서쪽에 있다.
환경전(歡慶殿) 경춘전 동쪽에 있다.
수녕전(壽寧殿) 인양전 북쪽에 있다.
환취정(環翠亭) 통명전 북쪽에 있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문에, “창경궁 후원에 새 정자가 있으니 이름이 환취(環翠)이다. 바로 통명전 북쪽 모퉁이에 있는데, 언덕과 멧부리의 형세는 곁으로 비끼고 옆으로 펼쳐졌고, 장송(長松) 만 그루가 뱅 둘러 서 있으며, 또 빽빽한 대나무 수천 그루를 심어 그 빈틈을 메웠다. 앞으로는 대궐에 다달았으니 결구(結構)가 들쭉날쭉한데 원앙와(鴛鴦瓦)의 비늘이 푸르게 새겨졌고, 잔디 뜰과 이끼 벽돌이 서로 도와 푸르스름한 산기운을 이루었다. 가까운 데로부터 멀리는 높은 담 밖에 시가(市街)가 있으며, 시가 밖에는 성곽이 있고 성곽 밖에는 산들이 있다. 남산(南山)의 연운(烟雲)과 동교(東郊)의 풀과 나무들은 파란 색을 모으고 녹색을 칠하여 난간 밑에 와서 서로 기이함을 다투어 바치니 그 형태가 천 가지 만 가지이다. 이것이 정자가 환취(環翠)라는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이 임금의 사사로이 쉬는 장소가 된 바는 실로 저기에 있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정자는 구중궁궐의 문턱의 막힌 것을 지나고 육침(六寢)의 그윽한 곳에 연해서 그윽하고 고요하고 깊숙하며 높고 밝으며 시원하니, 이는 그 땅이 조종(祖宗)이 여기에 별궁을 만든 이래로 상서를 모으고 복을 쌓아 비밀히 감추어 둔 지 거의 90여 년만에 마침 전하가 왕업(王業)을 계승하신[堂構] 때를 만나 갑자기 이루어졌으니, 어찌 기다림이 있어 그러했던 것이 아닌가? 조회에서 물러나와 맑고 조용한 여가에 가끔 걸으시어 이 정자에 오르실 때, 법궁의 의장(儀仗)은 일체 물리치고 하후(夏后)의 옷을 입고,광무(光武)의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서 정신을 온화하게 가지고, 생각을 맑게 하여 도(道)와 더불어 합치한다. 더구나 봄 기운이 화창하여 초목이 무성할 때에는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인(仁)을 느껴서 고달프고 병든 이와 홀아비와 과부들이 어떻게 하면 굶주림이 없으며, 훈훈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뜨거운 볕이 허공을 녹일 때에는 순 임금의 해온(解慍)의 곡조를 읊조리며, 이 가득 찬 골짜기의 시원한 그늘을 어떻게 하면 사방에 고루 베풀어 줄까 하고, 누런 나뭇잎이 떨어지는 절기에 온갖 열매가 성숙할 때에는 내 백성들의 세금을 10분의 1을 내는 세금 제도에서 지나치게 해서는 안되겠다 하시고, 눈이 내려 찬 기운이 갖옷 속으로 스며들면 내 백성들은 손발이 얼어 터지고 주리니, 다시는 더 부역으로 수고롭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하실 것이니, 모든 사시(四時)의 경치가 임금의 눈에 한번 지나면 그것을 모두 취하여 정치를 펴고 인(仁)을 베푸는 자료로 삼으실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당기기만 하고 늦추지 않는 것은 문왕 무왕도 하지 않고, 늦추기만 하고 당기지 않는 것은 문왕 무왕도 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렇다면 한번 늦추고 한번 당기는 기구는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경전(經傳)에서 뽑아내어 의심나는 것을 물으려면 위대한 학자들을 모두 부를 것이며, 활 쏘는 이를 뽑아 덕을 관찰하려 하면, 활을 쏘는 무사(武士)를 짝지어 나오게 할 것이다. 이것으로써 조용히 학자에게 묻고, 무비(武備)를 익힌다면 어느 것인들 나라에 임금 노릇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아름다운 계획과 훌륭한 규범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우리 전하가 이 정자를 지은 깊은 뜻으로 중화(中和)의 위육(位育) 의 지극한 공이 점차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송 나라 효종(孝宗)은 취한당(翠寒堂)을 대궐 안에 짓고, 일찍이 조웅(趙雄)과 왕유(王維) 등을 불러서 일을 아뢰게 하였는데, 당하(堂下)의 수십 그루 늙은 소나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히 불어왔다. 효종은 ‘소나무 바람 소리가 매우 맑아 악기 소리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 대개 효종은 송 나라의 어진 임금이다. 평상시에는 잔치 놀이나 음악과 여색의 받듦과 궁실(宮室)과 원유(苑囿)의 즐김이 없었는데, 이 당을 세우고도 안일을 꾀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재상들을 불러 물어서 옹폐(擁蔽)의 해를 방지하였으니, 그 꽃답고 아름다운 풍도가 지금까지도 역사에서 빛난다. 지금의 우리 전하는 총명(聰明)하고 인성(仁聖)하기가 효종보다 훨씬 뛰어났는데, 이 정자를 지은 것도 우연히 그와 같다. 앞뒤의 성현의 규모와 제작은 시대는 다르면서 그 부합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저 부용(芙蓉)과 쌍요(雙曜)의 높은 것이 상양궁(上陽宮)에서 장관(壯觀)이 되고, 응사(凝思)와 소방(韶芳)의 개조함이 미앙궁(未央宮)에서 거듭 빛나던 것은 다 놀이와 사냥으로 거둥하기 위함이었다. 어찌 오늘에 와서 말할 거리가 되겠는가? 진실로 원컨대, 전하께서는 게으르거나 방종하지 말고 언제나 한 마음을 가지시어, 이 정자에 오를 때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세월이 흐르기 쉬움을 깊이 두려워하여 반드시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하늘에 빌어 나라의 운명을 길게 하는 진실을 삼기를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신다면 우리 조선의 억만세의 끝없는 아름다움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나이까? 신은 감히 이것으로 올리나이다.” 하였다.

『신증』 선원전(璿源殿) 문소전(文昭殿)의 동북에 있는 것으로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수용(晬容 화상(畫像))을 봉안(奉安)한 곳이다.
비궁당(匪躬堂) 즉 창덕궁의 남빈청(南賓廳)으로 연영문(延英門) 밖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주역》의 건괘(蹇卦) 62에 이르기를, ‘임금의 신하가 어려움에 어렵게 함이 자신의 연고가 아니다[匪躬].’ 하였으니, 이는 비궁이란 임금이 있는 것만 알고, 내 몸이 있는 줄은 모른다는 말이다. 무릇 우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비궁의 도를 아는가? 이제 시험삼아 논해 보리라. 삼공(三公)은 위로는 태계(台階)를 본받고 아래로는 세 발이 있는 정상(鼎象)을 취하나니, 모든 관리의 위에 위치하고 모든 백성이 우러러보는 지위에 있어서, 높은 관면(冠冕)이고, 깊고 넓은 묘당(廟堂)이다. 우뚝히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고, 밝기는 인물의 서구(筮龜)와 같으니, 가히 임금을 보좌하는 직책과 논섭(論燮)의 도리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곤직(袞職)에 빠뜨림이 있으면 어떻게 보충하며 왕의 계획이 빛나지 못하면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도(都)’라 하고 ‘유(兪)’라 하는 문답을 어떻게 할 것이며, 좋은 꾀와 아름다운 계획을 어떻게 아뢸까를 마땅히 생각하여, 조화(造化)를 도와 만물을 양육하고, 하늘의 꾸지람[天災]을 겁내어 삼가고 두려워하여, 한 마디 말도 임금을 깨우치기를 생각하고 온갖 꾀로 임금을 협박할 것을 생각하지 말라. 약석(藥石)으로써 아뢰도록 생각하고, 짐독(鴆毒)으로써 미혹시키지 말라. 일을 도모하고 계책을 헤아려서 성심(誠心)을 열어 공정한 도(道)를 펴고, 안색을 바로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서 대체(大體)를 보존하고 하찮은 일을 생략하면 비궁(匪躬)의 뜻에 거의 가깝게 되리라. 만일 혹 지위가 아주 높아 공명(功名)이 마음에 걸리고, 녹(祿)이 많아서 부귀(富貴)가 그 뜻을 방탕하게 한다면 귄세는 독차지하고 싶고 재물을 탐내어, 나라가 위태하여도 붙들지 않고, 기울어져도 일으키지 않으며, 또는 일에 다달아서는 어름어름하여 세상과 함께 하면서 베 이불로 이름을 낚으며,상아(象牙)의 산가지로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여, 반식(伴食)의 비웃음을 받거나, 복속(覆餗)의 비방을 초래한다면 비궁이라 하겠는가? 저 삼공(三公)의 부관(副官)인 이공(貳公)은 덕화를 넓히고, 육경(六卿)은 직분을 나누고, 모든 대부와 중신들은 지위가 높고 봉록이 후하고 임무가 전일하고 책임이 크니 만나기 어려운 좋은 때를 만났고, 일할 만한 때를 마침 만났으니, 마땅히 삼가 정성을 다해 공경히 받들어 보좌하기를 어떤 도로 하며, 임금의 마음을 열어 드리며 돕기를 어떤 계책으로 할까를 생각하라. 제작하는 데에 있어서는 윤색(潤色)할 것을 생각하고, 현준(賢俊)은 추천해 등용할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형벌을 없게 하고,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재물을 풍부하게 할까 하며, 어떻게 하면 전쟁을 쉬게 하고, 어떻게 하면 토지를 개간할까 하여, 큰 계책을 의논하고 큰 의심을 결정할 때에는, 말은 국가의 중요함이 되어, 나라만 알고 집을 잊고, 공(公)만 알고 사(私)를 잊어 몸이 안위(安危)를 맡아서 충신(忠信)과 절의(節義)로 스스로를 가다듬기를 생각하고,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으로써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며,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몸과 힘을 다하면 비궁의 뜻에 거의 가까우리라. 만일 혹 대중을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서,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걱정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를 걱정하여 임금의 총애를 빙자하여 권세를 굳히고, 능력도 없으면서 지위만 차지해서 어진 이의 진출을 방해하여, 조정에 서서는 큰 절개가 없고, 세상에 도적질하는 것은 모두 헛이름뿐이며, 현실에 어두우면서 재능이 없고 고집불통이어서 스스로 옳다 하여 정사를 방해하고 다스림을 해치며, 직무를 게을리 하고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만족할 줄 아는 기미에는 어둡고시소(尸素)의 비웃음을 산다면 비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임금이 사랑하고 신임하는 신하로는 근시(近侍)만한 사람이 없고, 신하로서 임금과 친밀한 이가 근시만한 사람이 없다. 이는 근시란 것은 항상 임금의 좌우에 있으면서 홀로 요직을 맡은 사람으로 천안(天顔)이 지척에 있고 구중궁궐이 매우 가까우매 임금의 말이 간곡하고 임금이 자주 돌아본다. 근시는 귀와 눈과 같은지라 임금의 총명을 틔워 주고, 목구멍과 혀와 같은지라 임금의 명령을 대신 발표하니, 추기(樞機)는 비밀히 하지 않으면 안되고, 출납(出納)은 성실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정을 참작하여 의견을 아뢰어 조용히 선한 것은 진술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바꾸게 한다. 임금의 은택이 혹 백성에게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통하여 내려가게 하고, 백성의 마음이 임금에게로 전달되지 못함을 두려워하거든 진술하여 알릴 것이다. 넓은 집 부드러운 담요 위에서 임금을 모시고 의논하며 생각하고 장막 속에서 일을 계획한다. 위에서는 지나친 행동이 없고 밑에서는 실정을 숨김이 없이 정하고 깨끗한 한마음으로 오직 삼가 받들어야 하나니, 만일 그렇게 한다면 비궁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또 혹 임금의 성내고 기뻐함을 살피고 임금의 얼굴빛을 맞추어 교묘한 생각으로 기쁘게 하고 기이한 꾀로 유혹하여, 충성된 말은 임금의 귀에 미치지 못하고 남을 참소하고 중상하는 말을 묘하게 얽어 만들어, 말을 들이는 승지(承旨)의 직분을 폐하고 아첨을 하는 것이 풍습이 된다면 비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대간(臺諫)으로 말하면 조정의 공론(公論)을 맡은 사람이다. 임금은 건괘(乾卦) 구오(九五)의 높은 자리에서 억조(億兆) 백성의 위에 있으니, 높기는 해와 달과 같을 뿐만이 아니고, 그 위엄은 우레나 천둥 같을 뿐만이 아니다. 그렇지만 임금께 항거하고 임금을 거스르는 것은 오직 대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금문(金門)을 헤치고 들어가 대궐에서 부르짖는 것도 오직 대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의 좌우에 서서 임금과 시비를 다툴 때, 임금이 ‘옳다. ’해도, 대간은 ‘옳지 않다. ’하며, 임금이 ‘옳지 않다. ’해도, 대간은 ‘옳다. ’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꺼리지 않으며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아서 비록 머리를 부수는 것이라도 사양치 않는데, 어찌 죽음을 피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임금의 옷자락을 끌어당김도 다시 할 수가 있으니, 난간을 부러뜨림이 어찌 홀로 옛적에만 아름답겠는가. 이러하여야 비궁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또 혹 만일 겉으로는 대간인데 마음은 대간이 아니며, 말은 대간인데 행동은 대간이 아니어서 임금 앞에서는 밝게 다투고 숨김없이 간하여 그 책망을 면하고는 이세(利勢) 속에서 몰래 옮기고 묵묵히 빼앗아서 그 욕심을 채우며, 그 의논이 사사로운 비밀에서 나오고 그 논박(論駁)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에서 나오며, 일을 만나되 말하지 않기는 금인(金人)과 같고, 일을 의논하되 입을 다물기는 촉추(蜀椒)와 같으며, 또 일을 의논할 줄만 알되 그 대체는 모르며, 사람을 의논할 줄만 알되 그 장단점은 몰라서, 어지럽게 떠들고 자질구레하게 따져서 위로는 임금의 이목을 번거롭히고 아래로는 조정의 이목을 놀라게 하여, 아무개는 충성하고 아무개는 간사한 지를 알지 못한다면, 또한 누구를 헐뜯고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그렇다면 그를 비궁이라 하는 것이 옳겠는가? 또 혹은 크거나 작거나간에 요(寮)라 하고 채(寀)라 하여 밝고 거룩한 이들이 지위에 벌려 있어, 문무(文武)를 아울러 쓰되 각각 그 장점을 다하게 하고, 잘거나 굵거나 버리지 않고 오직 그 그릇에 맞도록 쓴다면 재주를 품고 기예를 가진 뛰어나고 영걸스런 선비들이 떼지어 활발히 일어나, 훌륭한 계책을 떨치고 좋은 기예를 발휘하여, 평소에 뜻한 바를 행하고 평소의 포부를 펴려고 힘써 직무에 나아가고 다스림을 도와 덕화를 받든다면 비궁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또 혹은 만일 요행히 출세하기를 바라서 시세를 엿보아 권세 있는 사람의 집에 대해서 더우면 붙고 차가우면 등져서, 비록 성문을 지키고 야경을 도는 변변치 못한 자리라도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성내어서 분주히 달려가는 것으로 출세의 길을 삼고 뇌물을 쓰는 것으로 벼슬에 나아가는 발판을 삼으면서도 낯가죽이 두꺼워 수치심이 없고, 무지해서 아는 것이 없는데도 비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 〈우서(虞書)〉에 구관(九官)을 임명한 것이나, 상훈(商訓)의 벼슬하는 이를 경계한 것이나, 〈주관(周官)〉에서 육직(六職)으로 나눈 것은 모두 안팎의 모든 벼슬을 총괄하여 정한 것이니, 위로는 이것으로써 훈계하고 인도하려 하였고, 아래로는 이것으로써 서로 깨우치고 경계하였으니, 그 상하 사이에서 권하고 경계함의 깊고 간절함이 후세에서 미칠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왕우칭(王禹稱)은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지어서 재상들만 경계하고 일반 관리에게는 미치지 않았던가? 선성(先聖)이 말하기를, ‘임금되기도 어렵고 신하되기도 쉽지 않다. ’하였으니, 임금 되기 어렵다는 것은 성상(聖上)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사하는 것을 본받아 행해야 하기 때문이고, 신하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신하들로서 그것을 아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진실로 신하되기가 쉽지 않은 줄을 안다면 비궁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비궁의 뜻을 안다면 신하된 직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써서 벼슬 자리에 있는 이들을 경계하고, 이어서 이것으로 내 자신을 경계하노라.” 하였다.

【단묘】 사직단(社稷壇) 경성(京城) 안 서쪽 인달방(仁達坊)에 있는 것으로, 사(社)는 동쪽에 있고 직(稷)은 서쪽에 있다. 두 단은 각각 둘레는 2장 5척이고, 높이는 3척이며, 사방의 섬돌은 각각 3급(級)이다. 단의 장식은 그 방위(方位)의 빛깔을 따르고 누런 흙으로 덮었다. 사(社)에는 돌로 된 신주(神主)가 있는데, 길이는 2척 5촌이고, 둘레는 1척이며, 위는 뾰족하게 하고 밑은 흙으로 복돋았는데 반이 단의 남쪽 섬돌 위에 당한다. 사방의 문은 담을 같이하고 있는데 모로는 25보(步)로 담을 두르고 있다. 국사(國社)와 국직(國稷)의 신좌(神座)는 나란히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있는데, 후토신(后土神)은 국사에 짝하였고 후직신(后稷神)은 국직에 짝하였다. 각각 바른 위치의 왼쪽에 있으면서 북쪽 가까이에 있으면서 동쪽을 향했다. ○ 《사전(祀典)》에는 대사(大祀)에 실려 있다
풍운뇌우산천성황단(風雲雷雨山川城隍壇) 남교(南郊)에 있는데, 둘레는 2장 3척이고, 높이는 2척 7촌이며, 사방에 섬돌을 놓았고, 두 낮은 담은 25보이다. 바람ㆍ구름ㆍ우레ㆍ비의 신좌(神座)는 복판에 있고, 산천은 왼쪽에 있으며, 성황은 오른쪽에 있는데, 모두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다.
악해독단(嶽海瀆壇) 남교(南郊)에 있다. 그 제도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과 같은데, 오직 낮은 담 하나가 있으며, 단은 없고 사당 세 칸이 있다. ○ 악(嶽)은, 남악(南岳)은 지리산으로 남원(南原)에 있고, 중악은 삼각산(三角山)이고, 서악은 송악(松嶽)으로 개성(開城)에 있고, 북악은 비백산(鼻白山)으로 정평(定平)에 있다. ○ 바다는, 동해(東海)는 양양(襄陽)에 있고, 남해는 나주(羅州)에 있으며, 서해(西海)는 풍천(豊川)에 있다. ○ 독(瀆)은, 남으로는 웅진(熊津)은 공주(公州)에 있고, 가야진(伽倻津)은 양산(梁山)에 있으며, 중(中)은 한강이고, 서쪽으로는 덕진(德津)은 장단(長湍)에 있고, 평양강(平壤江)은 평양에 있으며, 압록강은 의주(義州)에 있고, 북쪽으로는 두만강은 경원(慶源)에 있다.
선농단(先農壇) 동교(東郊)에 있다. 그 제도는 풍운뇌우단과 같고, 신좌는 북에서 남을 향해 있다. 성종 7년에 두 단의 남쪽 10보쯤에 관경대(觀耕臺)를 만들고, 1월에는 임금이 친히 선농단에 제사하고 적전(籍田)의 예를 행하였다.
선잠단(先蠶壇) 동교에 있다. 그 제도는 풍운뇌우단과 같고, 신좌는 북에서 남을 향해 있다. 성종 9년 봄에 또 창덕궁 후원에 단을 쌓고 왕비가 명부(命婦)들을 거느리고 친히 제사하고 친잠(親蠶)의 예를 행하였다.
우사단(雩祀壇) 동교에 있다. 그 제도는 풍운뇌우단과 같고, 오직 둘레가 4장이다. 구망(句芒)ㆍ축융(祝融)ㆍ후토(后土)와 욕수(蓐收)ㆍ현명(玄冥)ㆍ후직(后稷)의 신좌(神座)는 모두 북쪽에서 남을 향해 서쪽으로 향해 있다.
○ 이상은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영성단(靈星壇) 남교(南郊)에 있다. 둘레는 2장 1척이고, 높이는 2척 5촌이며, 사방에 섬돌이 있고, 담이 하나인데 25보이다. 신좌는 북에서 남을 향해 있다. 노인성단(老人星壇) 남교에 있다.
마조선목마사마보단(馬祖先牧馬社馬步壇) 모두 동교에 있다. 마제단(禡祭壇) 동교와 북교에 있다. 사한단(司寒壇) 남교에 있다. 그 제도는 영성단(靈星壇)과 같다.
명산대천단(名山大川壇) 제도는 영성단과 같다. 신좌는 북에서 남을 향해 있는데, 단은 없고 사당 세 칸이 있다. ○ 명산으로는 동쪽에는 치악산(雉岳山)으로 원주(原州)에 있고, 남쪽에는 계룡산(鷄龍山)으로 공주(公州)에 있으며, 죽령산(竹嶺山)은 단양(丹陽)에 있고, 우불산(亏佛山)은 울산(蔚山)에 있으며, 주흘산(主屹山)은 문경(聞慶)에 있고, 금성산(錦城山)은 나주(羅州)에 있으며, 중부(中部)는 목멱산(木覓山)이고, 서쪽에는 오관산(五冠山)은 장단(長湍)에 있고, 우이산(牛耳山)은 해주에 있으며, 북쪽에는 감악산(紺岳山)은 적성(積城)에 있고, 의관산(義館山)은 회양(淮陽)에 있다. ○ 대천(大川)으로는 남쪽에는 양진명소(楊津溟所)는 충주(忠州)에 있고, 양진은 양주(楊州)에 있으며, 서쪽에는 장산곶(長山串)은 장연(長淵)에 있고, 아사진(阿斯津) 송곶(松串)은 장련(長連)에 있으며, 청천강(淸川江)은 안주(安州)에 있으며, 구진익수(九津溺水)는 평양에 있으며, 북쪽에는 덕진명소(德津溟所)는 회양(淮陽)에 있고, 비류수(沸流水)는 영흥에 있다.
○ 만일 가뭄이 들어 기도할 때에는 북교에 악(岳)ㆍ해(海)ㆍ독(瀆) 및 모든 산천의 신위(神位)를 각각 그 방위에 설치하는데, 모두 안으로 향하게 한다.

여단(厲壇) 북교에 있는데, 그 제도는 영성단과 같다. 신좌는, 성황은 단 위의 북에서 남으로 향하였고, 제사지낼 주인이 없는 귀신은 단 아래 좌우에 두어 서로 향하게 하였다.
○ 이상은 소사(小祀)에 실려있다.

종묘(宗廟) 경성 안 동쪽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태실(太室)이 가운데에 있는데, 남쪽으로 향하였고 모두 일곱 칸이다. 앞에는 세 계단이 있고, 동서에는 각각 협실(夾室) 두 칸이 있으며, 협실 남쪽에는 각각 낭정(廊庭)이 있고, 또 동서에는 각각 세 칸의 사당이 있으며, 서쪽에는 7사(祀)의 신주를 모시고, 동쪽에는 배향(配享)하는 공신들의 신주를 모셨다. 신좌는 태조(太祖)가 1위(位) 소목(昭穆)이 각각 2위로 각각 실내(室內)에서 남쪽으로 향하였는데, 서쪽을 상(上)으로 하였다. 7사 신주의 자리는 묘정(廟庭)의 서쪽에 있어 동으로 향하였고, 공신들의 신좌는 사당 뜰에 있는데, 동서로 향하였다.
영녕전(永寧殿) 종묘의 서쪽 대실(大室)에 있다. 북에서 남을 향해 앉았는데, 모두 네 칸이다. 앞에는 세 계단이 있는데, 천주(遷主)를 봉안하였다.
○ 이상은 대사(大祀)에 실려 있다.

문소전(文昭殿) 경복궁 성 안의 동쪽에 있다. 후침(後寢)이 다섯 칸, 전전(前殿)이 세 칸으로 각각 감실(龕室)이 있고, 앞에는 세 계단이 있다. 신좌는 전전에는 태조가 중앙에 있어 남으로 향하였고, 소(昭) 2위는 동에서 서로 향해 있으며, 목(穆) 2위는 서쪽에서 동으로 향하였다. 후침에는 모두 북에서 남으로 향하였는데 서를 상(上)으로 하였다. 삭망(朔望)에는 후침에 제사지내고, 사시(四時)의 대향(大饗) 때에는 신주를 전전에 모셔 내어 합하여 제사지낸다. ○ 참봉(參奉) 두 사람이 있다.
연은전(延恩殿) 경복궁 성 안의 서북 모퉁이에 있다. 성종 때에 명 나라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덕종(德宗)을 추존하여 회간왕(懷簡王)을 삼고 종묘에 부제(祔祭)하고는 곧 이 전을 세우고 신주를 봉안하였다. 향사(享祀)는 문소전에서 지낸다. ○ 참봉 두 사람이 있다.
효사묘(孝思廟)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문묘(文廟) 성균관 명륜당의 남쪽에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북에서 남을 향해 앉았는데, 모두 다섯 칸이다. 앞에는 두 계단이 있으며, 동서에는 각각 무(廡)가 있다. 신주(神廚)는 서무(西廡)의 서북에 있고, 전사청(典祀廳)은 또 그 서쪽에 있다. ○ 신좌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은 중앙에 있어 남으로 향하였고, 그 배향(配享)으로는 곤국복성공(袞國復聖公) 안자(顔子)와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자사(子思)는 정위(正位)의 동남에 있어 서로 향하였으며,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 증자(曾子)와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맹자(孟子)는 정위(正位)의 서남에 있어 동으로 향하였는데, 모두 북으로 상(上)을 삼았다. 전(殿) 안의 종향(從享)으로는 비공(費公) 민손(閔損)ㆍ 설공(薛公) 염옹(冉雍)ㆍ여공(黎公) 단목사(端木賜)ㆍ위공(衛公) 중유(仲由)ㆍ위공(魏公) 복상(卜商)은 동쪽 벽에서 모두 서쪽으로 향하였고, 운공(鄆公) 염경(冉耕)ㆍ제공(齊公) 재여(宰予)ㆍ서공(徐公) 염구(冉求)ㆍ오공(吳公) 언언(言偃)ㆍ영천후(穎川侯)ㆍ전손사(顓孫師)는 서쪽 벽에 있어 나란히 동으로 향하였는데, 모두 북을 상으로 하였다. 동무(東廡)의 종향으로는 금향후(金鄕侯) 담대멸명(澹臺滅明)ㆍ임성후(任城侯) 원헌(原憲)ㆍ여양후(汝陽侯) 남궁괄(南宮适)ㆍ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ㆍ수창후(須昌侯) 상구(商瞿)ㆍ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雕開)ㆍ수양후(睢陽侯) 사마경(司馬耕)ㆍ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ㆍ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ㆍ양곡후(陽穀侯) 안신(顔辛)ㆍ상채후(上蔡侯) 조휼(曹卹)ㆍ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ㆍ풍익후(馮翊侯) 진상(秦商)ㆍ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ㆍ상규후(上邽侯) 양사적(壤駟赤)ㆍ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ㆍ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夏首)ㆍ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ㆍ제양후(濟陽侯) 해용잠(奚容箴)ㆍ부평후(富平侯) 안조(顔祖)ㆍ전양후(全陽侯) 구정강(句井彊)ㆍ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ㆍ즉묵후(卽墨侯) 공조구자(公祖句茲)ㆍ무성후(武城侯) 현성(縣城)ㆍ연원후(汧源侯) 연급(燕伋)ㆍ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ㆍ건성후(建城侯) 악해(樂欬)ㆍ당읍후(堂邑侯) 안하(顔何)ㆍ임려후(林慮侯) 적묵(狄墨)ㆍ운성후(鄆城侯) 공충(孔忠)ㆍ서성후(徐城侯) 공서잠(公西箴)ㆍ임복후(臨僕侯) 시지장(施之掌)ㆍ화정후(華亭侯) 진천(秦川)ㆍ문등후(文登侯) 신정(申棖)ㆍ제음후(濟陰侯) 안쾌(顔噲)ㆍ사수후(泗水侯) 공리(孔鯉)ㆍ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ㆍ수양백(睢陽伯) 곡량적(穀梁赤)ㆍ내무백(萊蕪伯) 고당생(高堂生)ㆍ약수백(藥壽伯) 모장(毛萇)ㆍ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ㆍ중모백(中牟伯) 영중(䣐衆)ㆍ후지백(緱氏伯) 두자춘(杜子春)ㆍ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ㆍ영양백(榮陽伯) 복건(服虔)ㆍ사공(司空) 왕숙(王肅)ㆍ사도(司徒) 두예(杜預)ㆍ창려후(昌黎侯) 한유(韓愈)ㆍ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ㆍ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ㆍ온국공(溫國公) 사마광(司馬光)ㆍ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ㆍ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였다. 서무(西廡)의 종향에는 선보후(單父侯) 복부제(宓不齊)ㆍ고밀후(高密侯) 공야장(公冶長)ㆍ북해후(北海侯) 공석애(公晳哀)ㆍ풍부후(豊阜侯) 안무요(顔無繇)ㆍ공성후(共城侯) 고시(高柴)ㆍ수장후(壽長侯) 공백료(公伯寮)ㆍ익도후(益都侯) 번수(樊須)ㆍ거야후(鉅野侯) 공서적(公西赤)ㆍ천승후(千乘侯) 양전(梁鱣)ㆍ임기후(臨沂侯) 염유(冉孺)ㆍ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ㆍ제성후(諸城侯) 염계(冉季)ㆍ복양후(濮陽侯) 칠조차(漆雕哆)ㆍ고원후(高苑侯) 칠조도보(漆雕徒父)ㆍ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ㆍ당양후(當陽侯) 임부제(任不齊)ㆍ모평후(牟平侯) 공량유(公良孺)ㆍ신식후(新息侯) 진염(秦冉)ㆍ양문후(梁文侯) 공견정(公肩定)ㆍ요성후(聊城侯)ㆍ효단(鄡單)ㆍ기향후(祈鄕侯) 한문묵(罕文墨)ㆍ유천후(溜川侯) 신당(申黨)ㆍ염차후(厭次侯) 영기(榮旂)ㆍ남화후(南華侯) 좌인영(左人郢)ㆍ구산후(昫山侯) 정국(鄭國)ㆍ낙평후(樂平侯) 원항(元亢)ㆍ조성후(胙城侯) 염결(廉潔)ㆍ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中會)ㆍ고당후(高堂侯) 규손(邽巽)ㆍ임구후(臨朐侯) 공서여(公西輿)ㆍ여내황후(如內黃侯) 거백옥(蘧伯玉)ㆍ장산후(長山侯) 임방(林放)ㆍ남중후(南中侯) 진항(陳亢)ㆍ양평후(陽平侯) 금장(琴張)ㆍ박창후(博昌侯) 보숙승(步叔乘)ㆍ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ㆍ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ㆍ승지백(乘氏伯) 복승(伏勝)ㆍ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ㆍ강도백(江都伯) 동중서(蕫仲舒)ㆍ곡부백(曲阜伯) 공안국(公安國)ㆍ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ㆍ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ㆍ고밀백(高密伯) 정강성(鄭康成)ㆍ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ㆍ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ㆍ신야백(新野伯) 범녕(范寗)ㆍ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ㆍ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ㆍ미백(郿伯) 장재(張載)ㆍ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ㆍ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였는데, 모두 북쪽을 상으로 삼았다. 본국(本國)의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ㆍ문창공(文昌公) 최치원(崔致遠)ㆍ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는 서무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였는데, 서쪽으로 상을 삼았다. 중사에 실려 있다.
○ 변계량(卞季良)의 비명(碑銘)에, “영락(永樂) 7년 기축년 가을 9월에 국왕 전하께서 신 계량에게 명하여 이렇게 이르기를, “우리 선고(先考)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비로소 나라를 이룩하여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서둘러 묘학(廟學)을 세웠으니, 선성(先聖)을 높이고 문교(文敎)를 소중히 여긴 까닭이다. 나는 그 큰 업을 이어 받들어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다시 묘궁(廟宮)을 중수하여 이미 이루었다. 학관(學官) 최함(崔諴) 등이 글을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기를 청하니, 그대는 붓을 들어 지으라.” 하셨다. 신 계량은 그 명을 받고 황송하여 물러나와 그 전말을 기록한다. 갑술년에 태조가 이미 도읍을 정하매, 종사(宗社)와 조시(朝市)ㆍ성곽(城廓)ㆍ궁실(宮室)이 모두 알맞게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다시 묘학(廟學)을 지으려고 도읍의 동북 모퉁이에 땅을 가리니, 산은 그치고 땅은 펀펀하며, 물은 돌아 흐르는데, 그 위치는 남쪽을 향하였다.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신 민제(閔霽)에게 명하여 경영하게 하매, 그는 목수들을 모으고 재목을 갖추어 정축년 3월에 시작하여 무인년 7월에 성철(聖哲)의 높은 집과 종사(從祀)하는 방서(旁序)의 일을 마쳤다. 태학은 종묘 뒤에 있는데, 가운데는 명륜당(明倫堂)이며, 좌우에는 협인(夾引)이 있고, 양협(兩夾)의 남쪽에는 길다란 집을 세웠다. 왼쪽 협 동쪽에 청랑(廳廊)을 두니 사생(師生)의 위치와 학정(學正)ㆍ학록(學錄)의 거처가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규모는 크고 넓으며, 그 얽고 쌓은 것이 튼튼하고 크고 작은 칸의 수는 96이다. 전토(田土)를 두어 제사에 쓸 쌀을 제공하며, 생도들을 먹이고 복호(復戶)하여 응대(應對)와 쇄소(洒掃)로 심부름 시키기에 넉넉하니 묘학(廟學)의 일이 구비되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진년 2월에 화재를 만났다. 그해 11월에 전하께서 송경(松京)에서 즉위하고 태학에 나아가 선성(先聖)을 뵙고, 맏아들을 태학에 들어가게 하였다. 기유년에 환도(還都)하여 친히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제사를 지내고, 3년을 지나 정해년 1월에 묘(廟)의 옛터에 새로 짓도록 명하였다. 성산군(星山君) 신 이직(李稷)과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신 박자청(朴子靑)이 역사의 감독을 맡아 밤낮으로 감독하고 살펴서 마음에 계획하여 지휘하니, 목수들도 힘을 다하여 4개월 만에 묘(廟)가 이루어지니, 높고 깊고 단정하고 크기가 옛것에 비해 더욱 훌륭하였다. 신주(神廚)는 묘(廟)의 서쪽에, 동서의 문은 양서(兩序)의 아래에 세우고, 전토(田土)와 노비를 더 주니, 전토는 만여 묘이고 인구(人口)는 3백 명이나 되었다. 의정부 좌의정 신 하륜(河崙)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국종성공 중자와 기국술성공 자사를 배위(配位)에 올리고, 자장(子張)을 십철(十哲)의 묘궁(廟宮)에 올리니, 더욱 유감이 없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성인의 도는 크기 때문에 칭찬할 수가 없으니, 비록 억지로 무어라 말하더라도 그것은 천지와 일월을 그리는 것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부자(夫子)께서 주 나라 말기에 태어나서 여러 성인들을 집대성하고 절충하여 모든 왕의 큰 법을 만들어 교훈을 펴시니, 그 공은 천지의 처음 생긴 조화(造化)보다도 지극하고, 그 은택은 무궁토록 흐르니, 인류가 생긴 뒤로 그처럼 훌륭한 이가 없었다. 재여(宰予)의 이른바 요순(堯舜)보다도 훌륭하다 한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다. 당 나라로부터 이후로 하늘에까지 닿고 땅에 두루하여 사당이 곳곳에 세워져 높여 제사함이 변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그 풍속이 예의를 숭상하여 기자(箕子)의 8조의 교훈과 떳떳한 윤리의 질서를 받들어 법도와 문물의 갖추어짐이 중국과 짝하였다. 우리 부자께서 일찍이 와서 살고자 하신 뜻이 있었으니, 묘학을 경영해 세우고 문교를 일으켜 숭상한 것은 원래 다른 나라에 견줄 바가 아니다. 삼가 생각건대, 태조 강헌대왕이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라서 처음으로 큰 업을 이룩하여 동방을 차지하여 도읍을 정하던 초기에 곧 먼저 성인의 제사를 높이고 유학을 일으켰으니, 이는 그 덕을 높이고 도를 즐기는 정성이 천성(天性)에서 나와 우뚝히 정치를 하는 근본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급선무로 여기는 데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손에게 규모를 끼쳐 주어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고 나라의 명맥을 길게 한 것이 아, 지극하기도 하도다. 전하는 인자하고 효도하며, 겸손하고 공손하며, 강건하고 슬기로워서 선대의 업을 빛나게 이어받았다. 정사하는 여가에 경사(經史)를 즐겨 보아 매양 밤중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문을 다하였고, 지영수성(持盈守成)의 도를 다하였으니, 그것은 옛날에 찾아 보아도 전혀 없었던 일이다. 세도(世道)가 한창 형통하고 인문(人文)이 밝아지매, 당시의 훈친(勳親) 대신들과 백관(百官)들로부터 숙위(宿衛)하는 신하에 이르기까지도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어찌 우리 태조가 문(文)을 숭상하여 교화를 일으켜 인재를 길렀고, 우리 전하가 선대의 공업을 넓히고 크게 하여 위에서 몸소 행함으로써 많은 선비들을 격려하고 이 백성들을 진작시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학업을 연마하는 데에는 학(學)이 있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는 묘(廟)가 있으니, 주선하고 오르내릴 때에 삼가 성현을 대하듯이 하여, 보고 느껴서 떨쳐 일어나 부지런히 힘써서 순서있게 문에서 당(堂)에 오르고, 당에서 방에 들어가기를 구한다면 덕을 이루고 재목을 성취하여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 자가 잇따라 나올 것이니, 점차로 삼대(三代) 때에 인재를 만들어 내던 것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그것이 오직 보는 것을 고치고 듣는 것을 바꾸어 한 때를 빛낼 뿐이겠는가? 진실로 우리 조선 종사(宗社)의 만세(萬世)의 복이다. 신 계량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드리나이다.” 하였다. 그 명에, “아, 선성(宣聖)이 때맞추어 태어나서 포희(包羲)부터 주공(周公)까지를 집대성하였도다. 인류가 생긴 이후로 누가 그 거룩함을 견주랴. 크게 빛나도다. 높여 제사지냄이 온 천하에 두루 하였네. 하물며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우리나라는 예의(禮義)를 먼저 하였음에랴? 제사지내고 읍양(揖讓)하는 것은 옛날의 법칙을 따라 그러하였네. 하늘이 태조를 내려 주시니 신(神)하고 성(聖)하고 무(武)하고 문(文)하셨네. 황제의 명을 밝게 받들어 능히 큰 공을 이루었네. 거룩한 신도(神都)는 한강의 언덕이라네. 이에 학궁(學宮)을 경영해 지으니 성묘(聖廟)가 중앙에 있도다. 제사드리고 강습(講習)하매, 많은 선비들이 그림자처럼 따르네. 밝고 밝도다. 우리 왕이여! 왕업을 이어받아 공을 더 쌓았네. 성인의 학문을 밝게 계승하매 고금에 짝할 이 드무네. 우뚝하도다. 새 학궁(學宮)이여! 새로 종사한 두 분을 제사에 올렸도다. 세자가 입학하니 나라의 근본이 중해졌도다. 내가 짓고 내가 기술하매 성인을 높이도다. 인재는 거기서 길러지고 풍속과 교화는 거기서 아름다워진다. 누군들 착한 본성이 없어 자포자기(自暴自棄)할 것인가? 사람들은 날로 학문에 나아가고 세상은 날로 태평 시대가 되어 가네. 삼왕(三王)ㆍ오제(五帝)와 같이 되기를 날짜를 정하고 기대하네. 화산(華山)은 높고 한수(漢水)는 쉴 새 없이 흘러가네. 나라와 함께 끝이 없기는 성인의 제사로다. 돌에다 글을 새기어 영원히 후세에 보이노라.” 하였다.
○ 권근(權近)이 지은 신간 〈석전의식발문(釋奠儀式跋文)〉에, 옛날에 태학에서 석전(釋奠)하는 예는 지극히 간단하고 자세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 나라의 개원례(開元禮)와 송 나라의 정화신의(政和新儀)가 있었으나, 그 또한 폐해져서 대부분 행해지지 않았다. 자양(紫陽) 주문공(朱文公)이 늘 이것을 탄식하면서 여러 번 거행하기를 청하였고, 또 그 절차를 고치는 데에 뜻을 두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영국부학(寧國府學)에서 간행한 의식(儀式)은 선유(先儒) 맹군(孟君) 지진(之縉)이 자양의 〈석전의(釋奠儀)〉와 〈호학면복도(湖學冕服圖)〉를 취해서 한 편을 만들면서 〈석전수지(釋奠須知)〉와 〈창주사채의(滄洲舍菜儀)〉도 아울러 그 뒤에 실었다. 신위(神位)의 향배(向背)와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의 제도와 저 오르내리며 잔을 드리는 의식이 모두 갖추어져 실리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른바 자양의(紫陽儀)라는 것도 개원 시대의 옛 제도를 따른 것으로 문공(文公)이 일찍이 개정하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건문(建文) 경진년에 전라도 관찰사 함공(咸公)이 주현(州縣)의 석전 의식의 잘못됨을 애석히 여겨 나라에 아뢰어 그 의식에 관한 글을 성균관에서 찾아서 장차 판목(板木)에 새기려고 전주부윤(全州府尹) 유공(柳公)에게 부탁하였더니, 그도 기꺼이 승낙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염찰사(廉察使) 조공(趙公)이 함공을 대신해 가서 그것을 이어받아 공사를 감독하는 데에 더욱 힘썼다. 이때에 판관 허군(許君)은 일찍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 예를 강구하여 매우 밝은 사람으로 그가 구한 의식에 관한 글이 완전치 못함을 보고, 마침내 조공에게 아뢰어 다시 나라에 아뢰어 비로소 영국(寧國)의 전문(全文)을 얻어 발간하였다. 또 원 나라 때의 지원의식(至元儀式)까지 거기에 덧붙였다. 이것은 그 절차의 선후가 문공이 개정하려던 것과 거의 가까웠다. 그러므로 지금 성균관에서 그것을 그대로 쓰고, 이것을 영국의 글에 덧붙였으니, 석전의 예문이 찬란히 모두 구비되어 완전한 책을 이루어 후세에 전할 만하게 된 것이다. 여러 군자들이 여기에 정성을 다한 것은 반드시 예를 다하여 선성의 제사를 지내려 해서이니, 묘학(廟學)에 공이 있고 또 풍화에 도움이 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 이숙감(李淑瑊)의 전사청(典祀廳) 기문에, “문묘가 있음으로부터 곧 이 제사지내는 법이 있게 되었다. 한 달에는 삭망에 제사지내고, 한 해에는 춘추(春秋)로 제사지내는데, 반드시 서무(西廡)의 빈방을 빌어 제물을 만드는 장소로 삼았다. 또 악기를 신문(神門) 옆의 노천(露天)에 두매, 바람과 비가 들이쳐 썩어 망가지기 쉬웠다. 사생(師生)으로서 묘정(廟庭)에 종사하는 자들은 오랫동안 이것을 근심하였다. 임진년 가을에 대사성 이극기(李克基)가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과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와 의논하고 이 일을 자세히 아뢰었더니, 임금께서는 재목과 기와와 목수를 내려 주시고, 이어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종들을 부려 짓게 하였다. 드디어 서무(西廡)의 서쪽 빈땅을 가려 동쪽에는 세 칸을 지어 악기를 보관하고, 남쪽에는 네 칸을 지어 제물을 만드는 곳으로 쓰게 하였다. 그리고 그 동서 양쪽에 담을 쌓아 튼튼하게 하였다. 이윽고 제사를 올려 그 사유를 고하고, 그 서쪽 벽에 문을 내어 출입을 편리하게 하니, 다섯 달이 걸려서 완성되었다.
나는 생각건대, 인류가 생긴 이후로 공자 같은 이가 없었으니, 그의 훌륭함은 요순(堯舜)보다도 나으니, 우뚝히 남면(南面)으로 모시어 영원토록 떳떳한 제사를 지냄이 당연하다. 노애공(魯哀公) 때부터 송원(宋元)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사지내는 예와 높이는 법이 있었던 것은 역사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상고할 수 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는 맨 먼저 문묘(文廟)를 세우매 묘(廟)가 빛났는데, 여러 임금께서 서로 이어 그 아름답게 꾸밈을 더하였다. 지금까지 70여 년 동안 선성(先聖)을 높이고 제사를 소중히 여겨 그 예문과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면서도 청사(廳舍)가 없었던 것은 어찌 오늘을 기다림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는 하늘이 내신 위대한 성인으로 태평의 운수를 누리어 몸소 묘(廟)에 알현하는 예를 행하여 문교(文敎)가 성하게 일어나고, 또 태뢰(太牢)의 제사를 거행하여 그 제사가 지극히 풍성하니, 그 근본을 복돋우고 선비들을 격려하심은 바로 주왕(周王)의 〈한록(旱麓)〉시와 그 기틀을 같이하는 것으로 여러 대에 미처 하지 못했던 전례(典禮)가 하루 아침에 거행되어 묘정(廟庭)의 일이 마쳐졌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 유도(孺道)의 하나의 큰 다행이라 하겠다. 아, 한 나라 고조(高祖)가 선비에게 거만하여 관(冠)에 오줌을 싸고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니, 시서(詩書)를 어찌 일삼으랴?’ 하였지만, 노 나라에서의 한 번 제사가 오히려 한 나라의 4백 년의 운수를 터 닦았는데, 하물며 임금님이 도를 소중히 여기고 선비를 높여 제사지내는 법을 엄하게 하고 묘(廟)의 제도를 새롭게 하는 아름다운 뜻이 이와 같으니, 우리 조선의 억만년의 무궁한 명맥과 정신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12년에 고려 시중 정몽주(鄭夢周)를 서무에 종향(從享)하였다.

독신묘(纛神廟) 예조의 서쪽에 있고, 신좌는 북에서 남으로 향하였다.
【원유】 경복궁후원(景福宮後苑) 서현정(序賢亭)ㆍ취로정(翠露亭) ㆍ관저전(關雎殿)ㆍ충순당(忠順堂)이 있다.
창덕궁후원(昌德宮後苑) 창경궁 후원과 통해 있다. 여기에는 열무정(閱武亭)이 있고, 그 정자 곁에는 우물 네 개가 있으니, 마니(摩尼)ㆍ파려(玻瓈)ㆍ유리(琉璃)ㆍ옥정(玉井)으로 세조 때에 판 것이다. ○ 최항(崔恒)의 서문에,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6년 겨울 11월에 창덕궁으로 옮겼다. 임금께서는 본시 샘물을 사랑하였는데, 하루는 영순군(永順君) 신 보(溥)에게 팔 만한 곳을 찾게 하여 광연정(廣延亭) 남쪽을 얻어서 팠더니, 그 물이 맑고 차서 먹을 만하였다. 계양군(桂陽君) 신 증(璔)이 인정전(仁政殿) 앞을 팠더니, 옛날의 도랑이었다. 그곳을 묻어 버리고, 그 뒤에 또 보 등에게 명하여 후원 서쪽과 수강궁(壽康宮) 북쪽에서 찾았으나, 모두 더럽고 낮기 때문에 버렸다. 임금께서는 열무정(閱武亭) 옆에 맛있는 샘물이 있으리라 생각하시고, 보와 오산군(烏山君) 신 주(澍) 등을 불러 좌우로 나누어 살펴보았더니, 과연 정자 옆에서 각각 두 군데씩을 찾았는데, 모두 반석 틈에서 물이 나와 깨끗하고 맛도 매우 좋았다. 임금님은 매우 기뻐하여 보 등에게 빨리 파게 하고, 고운 돌을 갈아 벽돌처럼 쌓으니, 그 모양이 쳐들고 있는 가마솥과 같으며, 겨우 물이 두어 섬쯤 있어서 사람이 엎드려 물을 뜰 만하였다. 공사가 끝나자, 임금님은 가장 좋은 우물을 마니(摩尼)라 하고, 다음은 파려(玻瓈), 다음은 유리(琉璃), 다음은 옥정(玉井)이라고 이름하여 각각 차등을 두어 불렀다. 그리고 각각 돌로 우물 위에 현판을 붙이고, 임금이 친히 〈마니정가(摩尼井歌)〉 한 편을 짓고, 또 간단히 해설하여 신하들에게 보이고 각기 우물 하나씩에 대해 시를 지어 화답하라 하셨다.


[주D-001]백이(百二) : 진 나라 서울로 들어가는 함곡관(函谷關)이 험하여 두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적의 군사 백 명을 당한다는 말이다.
[주D-002]식년(式年) :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정기적으로 대과(大科)를 보이는데, 그것을 식년 과거(式年科擧)라 한다.
[주D-003]귀후서(歸厚署) : 공자의 말에, “죽은 이를 마지막 보내는 데에 삼가고 조상을 추모(追慕)하면 백성들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오리라.[歸厚]” 하였다.
[주D-004]단도제(檀道濟)의 양사창주(量沙唱籌) : 남북조 시대에 송 나라 단도제가 적병과 대치하고 있을 때, 아군의 군량이 풍부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모래를 쌀인 양 속여 말에 담았던 고사가 있다.
[주D-005]미나리는……피우고 : 《시경》 〈노송(魯頌)〉에 “즐거운 반수(泮水)에서 잠깐 미나리[芹]를 뜯도다.” 하였는데, 후세에 생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것을 채근(采芹)이라 한다.
[주D-006]운초(芸草) : 운(芸)은 향초로 책 속에 넣어 두면 좀이 없어진다.
[주D-007]주원(周爰)의 황화(皇華) : 《시경》에 〈황황자화(皇皇者華)〉 편이 있는데, 그것은 왕의 명을 받아 사신으로 가는 것을 읊조린 시이다. 그중에, “두루 묻고 묻는다.[周爰咨詢]”란 말이 있다.
[주D-008]회동(會同)의 문궤(文軌) : 천하가 통일되면 문자가 통일되고 수레바퀴의 제도가 통일된다. 여러 나라가 모이는 것을 회동(會同)이라 한다.
[주D-009]반포하여 내려준 예제(禮制) : 명 나라 조정에서 조선에 반포하여 내려준 예법과 제도가 있었다.
[주D-010]곤두박질을 하매……곰은 셀 것도 없고 : 송 나라 서울에 상국사(相國寺)란 절이 있는데, 그 앞에 곰이 곤두박질로 재주하는 것을 구경하는 장소가 있었다.
[주D-011]소금 수레를 끄는 기마(驥馬) :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는 기마(驥馬)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여 소금 실은 수레를 끈다.”라는 옛말이 있다.
[주D-012]향구(香鉤) : 구(鉤)는 주렴을 걷어올리는 갈퀴다.
[주D-013]소호(召虎)가 절하는 것 : 《시경》에, “호(虎)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호는 주 선왕(周宣王)의 신하 소호(召虎)이다.
[주D-014]숭산(嵩山)에서 외친 세 번의 만세 소리 : 한 무제(漢武帝)가 숭산(嵩山)에 올랐는데, 사람들의 귀에 산에서 만세를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D-015]절조(折俎) : 짐승의 고기를 익혀서 그릇에 담을 때에 그것을 잘라서 토막을 내어 그릇에 담는 것으로, 《좌전(左傳)》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6]두변(豆籩) : 두(豆)는 나무로 만든 그릇이고, 변(籩)은 대[竹]로 만든 그릇이다.
[주D-017]청주종사(靑州從事)로도……평원독우(平原督郵) : 좋은 술은 청주종사(靑州從事)라고 부르는데, 청주에는 제현(齊縣)이 있는데 좋은 술은 배까지 잘 내려가므로 청주의 종사(從事)라는 벼슬에 비유한 것이고, 나쁜 술은 평원독우(平原督郵)라 부르는데, 그것은 평원에는 격현(鬲縣)이 있는데 나쁜 술을 마시면 가슴에 꽉 막히므로 평원독우의 관직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8]속헌(續獻) : 첫잔 다음에 계속하여 손님에게 잔을 드리는 것이다.
[주D-019]천작(天爵) : 《맹자(孟子)》에, “옛사람은 천작(天爵)을 닦으면 인작(人爵)이 따라온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인의(仁義)는 천작이고, 관직은 인작이다.
[주D-020]증언(贈言) : 군자는 작별할 때에 충고가 되는 좋은 말을 기념으로 준다는 말이다.
[주D-021]덕으로 사랑하는 : 《예기(禮記)》에, “군자는 남을 사랑하되 덕으로써 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을 덕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사랑함이 된다는 뜻이다.
[주D-022]천연(天淵) : 하늘은 높고 못은 낮고 깊으니, 서로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주D-023]금령(襟領) : 옷으로 비유하면 옷깃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란 말이다.
[주D-024]혼돈(混沌)이……나누어지는 : 천지가 생기기 전의 혼돈(混沌) 상태에서, 점차로 하늘은 위로 땅은 아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주D-025]이것을……것과 같다 : 대붕(大鵬) 새는 구만리나 높이 날지마는, 뱁새는 나무의 한 가지에 깃들어도 편안하다는 말이다.
[주D-026]돼지고기 맛을……꿈을 꾸는 자도 있다 : 옛날에 어떤 사람이 늘 채소만 먹다가 한번은 양고기를 먹었더니, 꿈에 오장신(五臟神)이 와서 말하기를, “양이 채소밭에 들어와서 채소를 밟아 망쳐 놓았다.” 하였다 한다.
[주D-027]향음례(鄕飮禮) : 《예기(禮記)》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예식을 말하였는데, 고을의 선비들이 향교(鄕校)에 모여서 예식을 차려 술을 마시고 활쏘기도 하는데, 이는 어진 이를 높이고 노인을 봉양하는 예식이다.
[주D-028]화표(華表) : 귀인의 무덤 앞에 나무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다 나무를 가로지르고 붉은 칠을 하여 화려하게 한 것이다.
[주D-029]넓은 한수(漢水)를……없다는 것 : 《시경》에, “한수(漢水)의 넓음이여! 뗏목으로 건널 수 없고, 강에 노는 여자가 있으나 요구할 수 없도다.”라고 한 〈한광(漢廣)〉 편이 있다. 그것은 그 지방의 여자들이 정조 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주D-030]다섯 가지 금(金) : 금ㆍ은ㆍ구리ㆍ쇠ㆍ주석(朱錫)이다.
[주D-031]말선(襪綫) : 촉 나라 한소(韓昭)가 태학사(大學士)가 되어 거문고 ㆍ 바둑 ㆍ 글씨 ㆍ 활쏘기를 모두 할 줄 아는데, 이태하(李台瑕)가 평하기를, “그 사람의 재주는 떨어진 버선의 실끝과 같으니, 한 치의 잘하는 것도 없다.” 하였다.
[주D-032]육합(六合)의 동춘(同春) : 천지와 사방을 육합(六合)이라 하는데, 육합이 봄을 같이 한다[六合同春]는 말은 천하가 태평하다는 뜻이다.
[주D-033]자순(諮詢) : 《시경》에 사신(使臣)의 행차를 읊은 〈황화〉 편에, “두루 묻고 묻는다.[周爰咨詢]”는 귀절이 있다.
[주D-034]제릉(齊陵) : 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능이다.
[주D-035]간사한 신하들 : 태조의 세자 방석(芳碩)을 비호하던 정도전(鄭道傳) 등을 말한 것이다.
[주D-036]수성(守成) : 나라를 처음 일으키는 것은 창업이고, 이루어 놓은 왕업을 계승하여 지키는 것을 수성(守成)이라 한다.
[주D-037]나쁜 싹 : 고려의 우왕(禑王)을 말한 것이다.
[주D-038]생각하면……잃습니다 : 이 일절(一節)은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주D-039]네가 군자(君子)를……없게 하라 : 《시경》〈억(抑)〉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40]연침(燕寢) : 《주례(周禮)》에, “임금의 거처에는 육침(六寢)이 있으니, 노침(路寢)은 정복(正服)으로 정치하는 곳이고, 소침(小寢)이 다섯 군데로 편복(便服)으로 사사로이 쉬는 곳이다.” 하였다.
[주D-041]건(乾)의 구오(九五) : 《주역》 건괘(乾卦)에, “구오(九五)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는 격이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임금을 말한다.
[주D-042]구이(九二) : 《주역》 건괘에, “구이(九二)는 나타난 용이 밭에 있는 격이니 대인(大人)을 만남이 이롭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어진 신하를 말한 것인 듯하다. 이 일절은 《주역》의 〈문언(文言)〉에 있는 말이다.
[주D-043]소조(蕭曹)와……방위(房魏) : 소조(蕭曹)는 소하(簫何)와 조참(曹參)이고, 방위(房魏)는 방현령(房玄齡)과 위징(魏徵)이다.
[주D-044]거짓을……비방 : 공손홍(公孫弘)이 승상(丞相)으로 있으면서 베로 만든 이불을 덮었더니, 급암(汲黯)이 말하기를, “이것은 거짓을 꾸미는 것이다.” 하였다.
[주D-045]큰 간사함은……탄핵 : 여해(呂海)가 왕안석(王安石)을 탄핵하기를. “큰 간사한 자는 충성스러움과 비슷합니다.” 하였다.
[주D-046]경위(涇渭) : 경수(涇水)는 탁하고 위수(渭水)는 맑다 한다.
[주D-047]훈유(薰蕕) : 훈(薰)은 향초이고, 유(蕕)는 나쁜 냄새가 나는 풀이다.
[주D-048]구서(龜筮)가 함께 따라 : 옛날에 국가에서 큰 일을 경영할 때에는 반드시 점을 쳤으니, 거북으로 점치는 것은 복(卜)이고, 시초(蓍草)로 점치는 것은 서(筮)이다. 《서경》에 구서협종(龜筮協從)이란 말이 있다.
[주D-049]은구(銀鉤) : 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초서(草書)를 잘 쓰니,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은 갈고리와 전갈의 꼬리[銀鉤蠆尾]라 하였다.
[주D-050]염매(鹽梅)로 계옥(啓沃)하여 : 은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서, “국을 끓이는 데 비유하면 너를 염매(鹽梅)로 삼아서 조미(調味)할 것이니, 네 마음을 열어서 나의 마음에 적셔다오.” 하였다.
[주D-051]녹명(鹿鳴) : 《시경》 〈녹명(鹿鳴)〉 편은 여러 신하와 아름다운 손을 접대하는 연회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주D-052]훈지(壎篪) : 훈(壎)은 흙으로 만든 악기(樂器)이고, 지(篪)는 대로 만든 악기이다.
[주D-053]치소각소(徵招角招) : 춘추 시대에 제 경공(齊景公)이 안자(晏子)에게 좋은 말을 듣고는 악공(樂工)에게 명하여 임금과 신하가 함께 기뻐하는 음악을 만들게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치소각소(徵招角招)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소(招)는 소(韶)와 같다.
[주D-054]기형(璣衡) : 순(舜)이 선기옥형(璿璣玉衡)리라는 천문기계(天文機械)를 만들었다.
[주D-055]빈풍(豳風) : 《시경》에 빈풍(豳風) 〈7월(七月)〉편이 있는데, 그것은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리기 위하여 읊은 시로 철 따라 초목과 짐승을 많이 인용하고 철에 맞게 농사짓는 것을 읊조린 시다.
[주D-056]〈요전(堯典)〉 : 요전(堯典)은 요(堯) 임금의 사적을 적은 것으로 《서경》의 첫 편이다.
[주D-057]의기(欹器) : 의기(欹器)는 비어 있을 때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가 물을 반쯤 부으면 반듯하게 일어서고 물을 가득 부으면 엎어져 버리는 그릇이다.
[주D-058]천도(天道)의……하는 이치 : 《주역》 겸괘(謙卦)에, “천도(天道)는 가득찬 것은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것에는 복을 준다.” 하였다.
[주D-059]성탕(成湯)의 목욕하는 반(盤) : 은 나라 임금 성탕(成湯)이 목욕하는 그릇에 글을 새기기를,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라.” 하였다.
[주D-060]계인(鷄人) : 당 나라 때에 닭이 울 때가 되면 사람에게 머리에 붉은 건을 쓰고 닭 모양으로 꾸미고서 새벽이 되었음을 외치게 하였다. 이것을 계인(鷄人)이라 하였다.
[주D-061]곽수경(郭守敬) : 곽수경(郭守敬)은 원 나라의 유명한 천문가(天文家)이다.
[주D-062]육침(六寢) : 임금의 거처는 노침(路寢)이 하나이고, 소침(小寢)이 다섯 개이다.
[주D-063]왕업(王業)을 계승하신[堂構] : 《서경》에, “아버지가 터를 잡아 놓으면 자식이 계승하여 당(堂)을 짓고, 벽이나 문을 얽어 만든다.”는 말이 있다.
[주D-064]하후(夏后)의 옷을 입고 : 《논어(論語)》에, “우(禹 하후(夏后))는 허름한 옷을 입으면서 수리(水利)와 제사에는 정성을 다했다.” 하였다.
[주D-065]광무(光武)의……쓰고서 : 한 나라 때에 외효(隗囂)의 사신(使臣) 마원(馬援)이 광무제(光武帝)를 뵈러 갔더니, 광무제는 의장(儀仗)도 하지 않고 편복(便服)으로 건을 비스듬히 쓰고 마원을 접견하니, 마원이 그의 활달한 도량에 감복하였다.
[주D-066]도(道) : 여기서 말한 도는 송 나라 학자들이 말하는 태극(太極)의 본체(本體)인 도를 말한 것이다.
[주D-067]해온(解慍) : 순(舜)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린 뒤에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노래 부르기를,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여움을 풀어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주D-068]덕을 관찰 : 《예기》에, “활 쏘는 것으로 덕을 관찰하니, 쏘아서 정곡(正鵠)을 맞추지 못하면 남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반성한다.” 하였다.
[주D-069]중화(中和)의 위육(位育) : 《중용(中庸)》에,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발육된다.[天地位焉萬物育焉]” 하였다.
[주D-070]옹폐(擁蔽) : 임금의 총명(聰明)한 이목(耳目)이 막히고 가리워짐을 말한다.
[주D-071]부용(芙蓉)과 쌍요(雙曜) : 부용과 쌍요는 당 나라 상양궁(上陽宮) 안의 집들이다.
[주D-072]임금의 신하가……연고가 아니다. : 《주역》에, “왕의 신하가 임금이나 국가의 어려움에 어렵게 함이 자신의 연고가 아니다.[匪躬之故]” 한 말이 있다.
[주D-073]삼공(三公)은……본받고 : 하늘에 삼태성(三台星 태계(臺階))이 있으므로 그것을 본받아서 삼정승(三政丞)을 둔 것이다.
[주D-074]곤직(袞職)에……보충하며 : 《시경》에, “곤직(袞職)에 빠진 것이 있으면 중산보(仲山甫)가 보충하여 들인다.” 하였는데 곤직(袞職)은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임금의 직책이란 말이다. 중산보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어진 정승이다.
[주D-075]도(都)’라 하고, ‘유(兪)’라 하는 : 《서경》에, “임금과 신하의 문답에 도(都)라 유(兪)라 하는 용어가 있는데, 도(都)는 신하가 임금의 말을 칭찬하는 것이고, 유(兪)는 임금이 신하의 말을 그렇다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76]약석(藥石) : 병을 치료하는 약과 침(鍼)으로 경계가 되는 유익한 말을 뜻한다.
[주D-077]짐독(鴆毒) : 《좌전(左傳)》에, “안일(安逸)한 것은 짐새[鴆]의 독이다.” 하였다. 짐새는 독이 있으므로 그 깃을 술에 담갔다가 먹으면 곧 죽는다. 너무 안일하고 방종하는 것은 독약과 같다는 뜻이다.
[주D-078]베 이불로 이름을 낚으며 : 공손홍(公孫弘)의 사실로 위에 주석이 있다.
[주D-079]상아(象牙)의 산가지로 이익을 도모 : 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재물을 모아 늘 상아로 만든 주판(珠板)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재물을 계산하는 비루한 짓을 하였다.
[주D-080]반식(伴食)의 비웃음 : 당 나라 노회신(盧懷愼)이 요숭(姚崇)과 함께 정승으로 있으면서 자기의 재주가 요숭보다 못한 줄을 알고, 늘 요숭이 하는 대로만 따라하니, 사람들은 그를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고 비웃었다. 반식(伴食)은 손에게 밥을 대접할 때에 함께 앉아서 짝이 되어 먹는다는 뜻이다.
[주D-081]복속(覆餗) : 《주역》에, “솥이 발이 부러져서 공상(公上)에게 바칠 음식을 엎었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정승이 능력이 없어서 직책을 이행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주D-082]윤색(潤色) : 임금이 새로 법도를 제작할 때에는 신하가 보좌하여 아름답게 꾸며야[潤色] 한다는 뜻이다.
[주D-083]만족할 줄 아는 기미에는 어둡고 :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벼슬을 그만큼 하였으면 분수에 만족한 줄을 알고 물러남을 말한 것으로, 욕심이 많은 이는 그 기미에 어둡다는 말이다.
[주D-084]시소(尸素) : 시위소찬(尸位素餐)의 준말로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녹만 타 먹는 사람을 이른다.
[주D-085]추기(樞機) :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문을 여닫는 지도리[樞]와 같다는 말이다.
[주D-086]머리를 부수는 것 : 임금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뜰 앞에 엎드려 자기 머리를 땅에 부딪혀 부수어 가며 임금을 감동시키려 하는 것이다.
[주D-087]임금의 옷자락을 끌어당김 : 위(魏) 나라 신비(辛毗)와 송 나라 구준(寇準)이 모두 임금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자기 주장을 실행시키고야 말았다.
[주D-088]난간을 부러뜨림 : 한 나라 주운(朱雲)이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니, 임금이 노하여 어사를 시켜 끌어내게 하였다. 주운은 난간을 잡고 끌려가지 않으려다 난간을 부러뜨렸다.
[주D-089]금인(金人) : 주 나라 후직(后稷)의 사당에 쇠로 사람을 만들어 바늘과 실로 그 입을 세 번 꿰매어 놓고, “옛적에 말조심하던 사람이다.”라는 글을 써서 새겼다.
[주D-090]촉추(蜀椒) : 후추[胡椒]를 많이 먹으면 입이 붙어서 말이 나오지 못한다.
[주D-091]요(寮)라 하고 채(寀)라 하여 : 동관(同官)을 요(寮)나 채(寀)라 한다.
[주D-092]〈주관(周官)〉 : 〈주관(周官)〉은 《서경》의 편명으로 주(周) 나라의 관제(官制)를 대략 기록한 것이다.
[주D-093]왕우칭(王禹稱)은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지어서 : 대루원(待漏院)은 신하들이 새벽에 조회(朝會)할 시간을 기다리는 집이다. 왕우칭(王禹稱)은 송 나라의 유명한 문인(文人)으로〈대루원기〉를 지었다.
[주D-094]《사전(祀典)》에는 대사(大祀)에 실려 있다. : 국가에서 지내는 제사는 일정한데, 그것을 《사전(祀典)》에 기재하여 두되, 대사(大祀)ㆍ중사(中祀)ㆍ소사(小祀)로 구별된다.
[주D-095]적전(籍田) : 적전(籍田)은 임금이 친히 농사지어 종묘(宗廟)에 제사지낼 쌀을 마련하고, 또 농사가 근본이라는 모범을 백성에게 보이는 것이다.
[주D-096]친잠(親蠶) : 왕비가 손수 누에치는 것을 시작하는 예식이다.
[주D-097]천주(遷主) : 종묘의 위차(位次)에서 태조는 복판에 남향으로 앉고, 다음은 왼쪽에 있는 위패를 소(昭)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위패를 목(穆)이라 하며, 또 다시 왼쪽에 소(昭)를 모시고 오른쪽에 목(穆)을 모신다.
[주D-098]복호(復戶) : 국가에 대하여 바치는 부역을 면제하여 주는 것이다.
[주D-099]부자께서……하신 뜻 : 《논어》〈자한(子罕)〉편에, “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셨다.”는 말이 있다.
[주D-100]당(堂)에 오르고……방에 들어가기 : 공자가 말하기를, “자로(子路)는 당(堂)에는 올랐고, 방에는 아직 들어오지[入室] 못했다.” 하였으니, 학문의 경지가 어느 정도 진척된 사람을 승당제자(升堂弟子)라 하고, 거의 스승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입실제자(入室弟子)라 한다.
[주D-101]개원례(開元禮) : 당 나라 개원(開元) 시대에 만든 예이다.
[주D-102]정화신의(政和新儀) : 송 나라 정화(政和) 시대에 만든 예이다.
[주D-103]〈한록(旱麓)〉시 : 《시경》의 〈한록(旱麓)〉편은 문왕(文王)이 덕이 많은 선비들을 흥기(興起)시킨 것을 읊은 시이다.
[주D-104]말 위에서……어찌 일삼으랴 :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에 육가(陸賈)가 앞에 가서 《시경》과 《서경》을 말하니, 그는 소리를 지르며 “내가 말 위[馬上]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시서(詩書)가 무슨 필요냐?” 하였다. 육가가 대답하기를, “폐하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말을 타고 하시겠습니까?” 하였다.
[주D-105]노 나라에서의……운수를 터 닦았는데 : 한 고조가 노 나라를 지나가다 공자의 사당에 태뢰(太牢)로써 제사를 지냈다. 후세의 선비들은, “한 고조의 한 번의 제사가 한 나라 4백 년의 운수를 열었다.”고 칭도하였다
 
세조 10년 갑신(1464,천순 8)
 9월7일 (정사)
풍수학 훈도 최연원이 최양선을 반박하는 상언을 올리다

풍수학 훈도(風水學訓導) 최연원(崔演元)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백악산(白岳山)의 명당(明堂)은 배임 향병(背壬向丙)이며 궁궐(宮闕)은 자좌 오향(子坐午向)입니다. 이제 최양선(崔楊善)이 억측(臆測)하여 이르기를, ‘축좌 미향(丑坐未向)에는 60세를 수(壽)하는 아버지는 있으나 60세를 수(壽)하는 어머니는 없으므로, 오래 거주(居住)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며,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는 곧 진실로 명당(明堂)이니, 그 곳의 신서(臣庶)의 집을 옮기고, 청컨대 궁실(宮室)을 지으소서.’ 하였으나, 전현(前賢)들의 논(論)한 바가 일찍이 이와 같은 것은 어찌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 처음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궁실을 지을 시초에 모두 섭리(爕理)하는 대신들이 일관(日官)들을 맡아서 거느리고 옛 서적을 정밀히 상고하여 땅의 형세(形勢)를 살피어 그 터를 점쳐 정하였고,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서도 또한 첨의(僉議)를 같이 하였고, 당시 임금께서도 친히 행행(行幸)하시어 결정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면면히 교체(交替)된 적이 없었는데, 어찌 당시의 일을 맡았던 대신(大臣)과 임무를 맡았던 일관(日官)들이 최양선의 마음만큼 같지 못하여 국가의 중대한 일을 경홀하게 다루었겠습니까?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가 진짜 명당(明堂)이라면 청오자(靑烏子)곽박(郭璞) 양균송(楊筠松)증의산(曾義山) 같은 현인(賢人)이 도리어 어리석은 술사(術師)로 되어 최양선에 미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양균송과 곽박이 천하를 횡행(橫行)하면서 그 말이 지극히 신기하여 마치 그림자와 소리의 울림같이 응하였는데, 어찌 최양선의 지리학(地理學)에 미치지 못하였을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최양선의 지리학(地理學)도 또한 날 때부터 안 것이 아니요, 반드시 청오자와 곽박을 조술(祖述)하였을 것이요, 양균송과 증의산을 종사(宗師)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최양선이 억측을 고집하고 남에게 이기기를 힘써 궤탄(詭誕)하고 괴이(怪異)한 말에 얽매어 여러 차례 상언(上言)하여 성상(聖上)의 들으심을 혼란시키므로, 신(臣) 등이 여러 지리서(地理書)를 모아 그 전현(前賢)들의 논(論)한 뜻을 읽어 보고 지형(地形)을 참고하여 조목(條目)별로 아룁니다. 《지현론(至玄論)》에 이르기를, ‘진룡(眞龍)은 우유(優游)하며, 진혈(眞穴)은 은오(隱奧)한다.’고 하였고,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천리의 내산(來山)에는 다만 한 혈(穴)이 있을 뿐인데, 정혈(正穴)인 것은 우유(優游)하고 방혈(旁穴)인 것은 미약하매, 지산(支山)에는 혈(穴)이 있어서 비록 형세를 이룰지라도 간룡(幹龍)의 주정(主精)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백악산(白岳山)이 우유(優游)하여 간룡(幹龍)이 되고 승문원(承文院)은 미약하여 지룡(支龍)이 되니, 백악산(白岳山)은 정혈(正穴)이 되고 승문원(承文院)이 방혈(傍穴)이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대개 작은 지룡(支龍)은 기맥(氣脈)이 짧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간룡(幹龍)은 길고 지룡(支龍)은 짧으니, 힘으로도 다투기가 어렵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또 큰 나무에 작은 가지가 생기는 것과 같아서 작은 가지는 피곤하기가 쉽고 큰 가지는 비대(肥大)하기가 쉬우니, 큰 가지가 전체의 기운을 나누어 빼앗아 가면 작은 가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쇠약하여진다.’고 하였으니, 백악산(白岳山)이 간룡(幹龍)으로서 특별히 크고, 승문원(承文院)은 가지[枝]로서도 또한 작으니, 백악산(白岳山)이 그 기운을 전부 빼앗으므로, 승문원(承文院)은 치지 않아도 저절로 쇠할 것을 대개 알수가 있습니다.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화혈(花穴)이 가장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迷惑)하게 하니, 후룡(後龍)이 단정하며 기묘(奇妙)하고, 조산(朝山)도 또 기이하다. 어리석은 술사(術師)들은 이 화혈(花穴)이 잘못 이해하여 진혈(眞穴)이 담 가운데[中垣]에 감추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또 화혈(花穴)이 있으나 아는 사람이 없다.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바깥으로 둘러싸고 좌우의 산이 이를 따르니, 대개 정혈(正穴)이 많이 은비(隱秘)함으로 인하여 혹은 비녀[釵]와 집계[鉗] 같이 되기도 하고, 혹은 젖[乳]과 같이 늘어지기도 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허화(虛花)의 좌우에 저절로 정(情)이 있으니, 자세히 보면 정형(正形)이 아니며, 허화(虛花)가 혈(穴)을 만드는 것이 다시 정교하지만, 자세히 보면 내맥(來脈)이 매우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는 좌우에 정(情)이 있고 혈(穴)을 만든 것이 정교하여 주산(主山)이 단정하고 기묘하며, 조산(朝山)이 또 기묘하므로, 간룡(幹龍)과 지룡(支龍)을 논(論)하지 아니하고 사신(四神)의 높낮이를 살피지 아니할 때 경험이 없는 용속(庸俗)한 사람이 도국(圖局)을 살펴보고 말을 한다면 정말 참된 것 같습니다. 전현(前賢)의 뜻을 가지고 지형(地形)을 참고하여 보면, 백악산(白岳山)의 명당(明堂)은 관평(寬平)하며 은비(隱秘)하니, 하엽(荷葉) 모양에서 연꽃술[蓮蘂]만이 홀로 높은 것인데, 앉아서 진무(鎭撫)하고 관(關)의 주(主)가 되면 백악산(白岳山)이 진혈(眞穴)이 되고 승문원(承文院)이 화혈(花穴)이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단제수언편(斷制粹言篇)》에 이르기를, ‘산형(山形)에는 귀봉(貴峰)이 나오는 것이 귀상(貴相)이니, 평평하고 작은 형상은 한 대(代)에 왕성할 뿐이다.’고 하였으며,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겹겹이 연화(蓮花)의 씨를 둘러 싸면, 정혈(正穴)은 도리어 연화(蓮花) 가운데 있는 것이요, 조산(朝山)이 맞이하여 호종(護從)하면 또한 혈이 있는 것이나, 혈의 형체가 이루기 어려워서 우열이 있는 법이다.’고 하였으니, 백악산의 뽀족한 봉우리가 귀봉으로 나와 연꽃의 말부(末部)와 같아, 명당을 겹겹이 둘러 싸서 은은(隱隱)하며 융융(隆隆)하나, 이미 귀봉이 되었으니,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는 호종하는 산(山)으로서 평평하고 작으나 천근(淺近)하여 비록 정이 있는 듯하나 어찌 화혈(花穴)이 되어 한 대(代)에만 왕성(旺盛)할 곳이 아니겠습니까? 《명산보감(明山寶鑑)》에 이르기를, ‘대저 부귀(富貴)하는 땅은 많이 기형 이혈(奇形異穴)로 되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좌회 우포(左回右抱)하여 혈(穴)의 형체가 분명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은 특히 소소한 친근한 땅이요, 족히 부귀(富貴)의 큰 땅은 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단제수언편(斷制粹言篇)》에 이르기를 ‘작은 명당(明堂)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한 조금 발복(發福)을 하면 두 세대를 미치지 못하여 또한 그치고 멸망하니, 이에 이르러 바야흐로 작은 혈(穴)은 부귀(富貴)가 대대로 끊어지지 않음을 알 만하다.’고 하였으며, 《착맥부(捉脈賦)》에 이르기를, ‘큰 벼슬과 큰 부자가 나는 혈(穴)은 관완(寬緩)하여 발복(發福)이 늦고 폐기(廢棄)하는 데에 이르면서도 또한 늦으며, 작은 벼슬과 작은 부자가 나는 혈(穴)은 긴밀히 공읍(拱揖)하여 발복(發福)이 쉽고 속(速)하며, 퇴패(退敗)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또한 쉽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또 사람의 큰 집과 같아서 침처(寢處)하는 곳이 반드시 당오(堂奧) 가운데 있으니, 혈(穴)로써 당오(堂奧)에 비유하면 당오의 밖으로부터는 모두 다 여기(餘氣)이다. ’하였으며,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대저 양택(陽宅)은 혈(穴)이 크기를 요구할 것이니, 관활(寬闊)하고 연면(連綿)하며 또 평쾌(平快)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라야 바야흐로 양택(陽宅)의 살 수 있는 것이 되니, 착소(窄小)하여 용납하기 어려운 것을 그대들은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양택(陽宅)의 땅은 관활(寬闊)하고 평쾌(平快)한 것을 귀하게 여기니, 경복궁(景福宮)의 명당(明堂)이 귀(貴)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착협(窄狹)하고 작은 것을 흉(凶)하다 하였으니,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는 흉(凶)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큰 땅은 발복(發福)이 늦고 실폐(失廢)하기도 또한 늦으며, 작은 땅은 발복(發福)이 빠르고 실폐(失廢)하기도 또한 빠른 것이니, 백악산(白岳山)의 명당(明堂)은 관대(寬大)하며 평정(平正)하므로, 이는 실폐(失廢)하는 것이 늦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는 착소(窄小)하고 국촉(局促)하니, 이는 실폐(失廢)하는데 속(速)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악산(白岳山)의 명당(明堂)은 기형 이상(奇形異象)으로 되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수레와 말을 감추고 은은(隱隱)하며 융융(隆隆)하여 당오(堂奧) 가운데 있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참된 것으로 삼으며 귀(貴)한 것으로 삼을 것이요,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는 가지[枝] 가운데에서도 또 가지이니, 형혈(形穴)이 분명하나 착소(窄小)하고 천근(淺近)하여 사람들이 모두 다 좋다 하나, 당오(堂奧) 밖에 있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이로써 꽃이며 여기(餘氣)라 할 것입니다. 《착맥부(捉脈賦)》에 이르기를, ‘청룡(靑龍)이 강(强)하면 청룡(靑龍)을 따르고, 백호(白虎)가 강하면 백호(白虎)를 따른다.’고 하였으니, 우리 도읍(都邑)의 형세가 백호(白虎)는 강하나, 청룡(靑龍)이 작으니, 경복궁(景福宮)이 참이 되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무릇 뇌정(雷霆)이 진렬(震裂)하여 용신(龍神)이 놀라서 흩어지는 것을 선현(先賢)들이 크게 꺼리는 바이니, 승문원(承文院)의 장서각(藏書閣)은 일찍이 뇌진(雷震)을 겪고, 용(龍)을 상(傷)하여 기운이 없어진 땅이니, 어찌 궁궐(宮闕)로 쓸 수 있겠습니까? 《지리문정(地理門庭)》에 이르기를, ‘아들이 어미를 떠나지 않으면 그로써 정맥(正脈)인 것을 인정(認定)한다. 건(乾)은 건(乾)으로 응(應)하고 곤(坤)은 곤(坤)으로 응(應)한다.’고 하였으며, 《이순풍소권(李淳風小卷)》에 이르기를, ‘건(乾)은 건(乾)으로 응하고 곤(坤)은 곤(坤)으로 응하며 돌[石]은 돌로 응(應)하면 이것은 정당(正當)한 응(應)이려니와, 정응(正應)이 아니면 반드시 상(相)을 볼 것도 없다. 비록 혹시 명당(明堂)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또한 작은 의식(衣食)이나 입고 먹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지남시(指南詩)》에 이르기를, ‘귀산(貴山)이 높이 귀인봉(貴人峯)을 솟아 존중(尊重)하고 당당(堂堂)하여 여러 봉 가운데 섰다.’고 하였으며, 《명산보감(明山寶鑑)》에 이르기를, ‘급히 뾰족한 봉(峰)을 일으켜 현무(玄武)를 정하니, 문득 이것이 참 용[眞龍]이면 주산(主山)이다.’라고 하였으며, 《감룡경(撼龍經)》에 이르기를, ‘또한 높은 봉(峰)이 있으면 이는 현무(玄武)이니, 현무(玄武)가 떨어지는 곳에 사신(四神)이 모이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노[棹]를 흔들고 머리를 향하여 문득 봉(峰)이 일어나면 틀림없이 참 용[眞龍]이 그 곳에 있다.’고 하였으며, 《신장경(神藏經)》에 이르기를, ‘만승(萬乘)의 높음과 같다.’【현무의 존엄함을 말한다.】고 하였으며,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청룡(靑龍)이 높이 빼어나고 시위(侍衛)가 낮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대저 큰 형세를 어떻게 단정할 것인가 하면 지존(至尊)이 명당 안에 앉은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곤감가(坤監歌)》에 이르기를, ‘명당(明堂)은 옛부터 관평(寬平)을 요(要)할 것이니, 완전하고 완전한 가운데 만병(萬病)을 세우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혈법비요(穴法秘要)》에 이르기를, ‘삼양(三陽)이 촉박하지 않아야 한다.【명당이 내양(內陽)이 되고 안산(案山)이 중양(中陽)이 되고, 뒷산이 외양(外陽)이 되니, 이것을 삼양(三陽)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이 명당은 삼각산(三角山)이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하여 내려와서 조종(祖宗)이 되고, 아래에 한 봉요(峰腰)를 지어 다시 보현(普賢)의 두 봉(峰)을 일으키니,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 음양이 서로 나타나서 부모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우익(羽翼)이 좌우(左右)로 흔들며 남쪽으로 향하여 장막(帳幕)이 거듭거듭 수렴(收斂)하고, 뒷기운이 동서(東西)로 옹포(擁抱)하고 가운데에 큰 간룡(幹龍)이 있어 흔들고 내려와서 유입수(酉入首)로 백악산이 되었으며, 조종(祖宗)이 감산(坎山)인데 입수(入首)도 또한 감산(坎山)이며, 조종(祖宗)이 석산(石山)인데 입수(入首)도 또한 석산(石山)으로 되어 아들이 어미를 떠나지 않고 모두 정응(正應)을 지었으며, 금반하엽(金盤荷葉) 모양을 만들어 연꽃의 꽃술의 뾰족하고 빼어남과 같으며, 만승(萬乘)의 지존(至尊)과도 같아 명당(明堂)을 좌진(坐鎭)하니, 이는 관란(關闌)의 주인이요, 산수(山水)가 조화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의 대간(大幹)과 정룡(正龍)을 놓고 가지 가운데서도 또 가지의 편소(偏小)하고 국촉(局促)한 땅으로써 진룡(眞龍)이며 정주(正主)라고 하면, 전현(前賢)들의 말을 한 바 정응(正應)과 현무(玄武)의 의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백호(白虎)가 높고 청룡(靑龍)이 약(弱)하여 내룡(內龍)이 조금 배반되었다.’고 하여 흠을 잡으나, 《곤감가(坤鑑歌)》에 이르기를, ‘백호(白虎)에 일어나는 봉(峰)은 장고(藏庫)를 일컫는다.’고 하였으며, 《지남시(指南詩)》에 이르기를, ‘청룡(靑龍)이 약(弱)하고 백호(白虎)가 승(勝)한 것은 모두 해(害)가 없으니, 다만 산봉(山峰)이 길(吉)한 형상에 합하는 것을 요할 뿐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청룡(靑龍)만 있고 백호(白虎)가 없으면 아주 최상(最上)이 되고, 백호(白虎)만 있고 청룡(靑龍)이 없어도 또한 흉(凶)하지 않으니, 만약 외산(外山)이 있어 연접(連接)하여 응(應)하면, 분명히 혈(穴)에 조회하여 복(福)이 서로 연면(連綿)한다.’고 하였으며,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의 배후에 옷자락[衣裾]이 있으면, 이는 관란(關闌)에 절하여 춤추는 소매이라.’고 하였으며, 《지현론(至玄論)》에 이르기를, ‘큰 기운이 이미 모였으니 지절(支節)은 해가 없다.’고 하였으니, 백악산(白安山)의 왼쪽 팔뚝 안에 또 작은 가지를 나누어 내청룡(內靑龍)을 지었고 그의 등에 또 지족(支足)이 있으니, 이른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의 등 뒤에 옷자락이 있어서 이것이 ‘관란(關闌)에 절하고 춤을 추는 소매이라.’고 한 것입니다. 오른쪽 팔뚝이 비록 강(强)하나, 봉(峰)이 궤(櫃)와 창고(倉庫)와 같아 무곡(武曲)의 길(吉)한 형상이 되면, 이른바 ‘청룡(靑龍)이 약(弱)하고 백호(白虎)가 승(勝)하여도 모두 해(害)가 없으니 다만 산봉(山峰)이 길(吉)한 형상에 합(合)함을 요한다.’고 하는 것이니, 하물며 밖의 청룡(靑龍)이 중복(重複)되어 회전(回轉)하여 목멱산(木覓山)과 더불어 수구(水口)를 섞어 가두었고, 아차산(峨嵯山)이 관문(關門)을 진색(鎭塞)하니, 비록 청룡(靑龍)이 낮고 내청룡(內靑龍)이 조금 배반한 듯하나 어찌 흉(凶)한 허물이 있겠으며, 이른바 ‘큰 기운이 이미 모였으니 지절(支節)은 해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남대문(南大門)의 내맥(來脈)이 약하고 편편한 것이 흠이 된다.’하였으나,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객산(客山)이 천리에서 와서 조회한다.’고 하였으며, 《동림조담(洞林照膽)》에 이르기를, ‘안산(案山)이 보이는 방소(方所)에 와서 조회하여 빼어난 것이 응룡(應龍)이 된다.’고 하였으며, 《지남시(指南詩)》에 이르기를, ‘안산(案山) 밖의 정조(正朝)하는 봉(峰)이 빼어나면 문장(文章)과 공업(功業)이 조정에서 떨친다.’고 하였으니, 백악산(白岳山)의 오른쪽 팔뚝이 회전(回轉)하여 준거(蹲踞)하고, 다음에 평강(平岡)을 짓고 다시 목멱산(木覓山)이 일어나, 주작(朱雀)이 되어 내려와서 수구(水口)를 회진(回鎭)하여 바로 선궁(仙宮)에 합하니, 백호(白虎)가 안산(案山)이 된 것입니다. 그 평강(平岡)의 땅을 지음에 관악산(冠岳山)이 속리산(俗離山)으로부터 멀리 뻗어 내려와서 조회하니, 이것이 이른바 ‘천리에서 와서 조회한 안산(案山) 밖의 봉(峰)이 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봉우리가 없고 목멱산(木覓山)이 가리어 밖의 조회하는 봉이 보이지 않으면 《보감(寶鑑)》에서 말한바 ‘삼양(三陽)의 오로지한 것’과 《입식가(入式歌)》에서 말한 바 ‘가까운 안(案)은 낮고 먼 안(案)이 높으면 한 거듭 안(案)이 한 거듭 손(孫)에 비(比)한다.’는 것에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명당(明堂)이 관대(寬大)하면 기운도 관대하고 안산(案山)이 핍박(逼迫)하면 사람도 흉완(兇頑)하며, 안산(案山)이 와서 나에게 항복하면 사람이 인자하며 착하고, 내가 가서 안산(案山)에 복종하면 귀인(貴人)이 천(賤)하다.’고 하였으니,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는 주산(主山)이 저하(低下)하여 안산(案山)에 복종하였으며, 안산(案山)이 고준(高峻)하고 핍박하여 밖의 조산(朝山)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는 사람이 흉완(兇頑)하며 귀인(貴人)이 천(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현(前賢)의 논(論)한 뜻을 고열(考閱)하여 보면,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는 가화(假花)가 되고 경복궁(景福宮)의 명당(明堂)은 간(幹)과 진(眞)이 되는 것을 분명히 보겠습니다.
공경스럽게 생각하니,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큰 복조(福祚)를 여시니, 하느님이 한양(漢陽)의 도읍(都邑)을 주시었으니, 산수(山水)의 조회한 바는 오직 백악산(白岳山)일 따름입니다. 중정(中正)한 큰 줄기의 용(龍)으로 그 높음을 상대할 것이 없으니, 이제 이 명당(明堂)은 지리(地利)의 적의(適宜)함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정(人情)에 합(合)한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기운이 이미 모이면 지절(支節)은 해롭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큰 기운이 모인 땅은 비록 소소한 흠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흉구(凶咎)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길(吉)한 기운에 해로움이 없을 것이니, 진실로 만세(萬世)의 큰 터입니다. 신(臣) 등이 재주가 양균송(楊筠松)과 곽박(郭璞)에 미치지 못하고 학문이 방향을 알지 못하니, 음양(陰陽)·풍수(風水)의 이치를 감히 아는 것이 아니나, 그러나 불휘(不諱)의 물으심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묵묵히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에 전현(前賢)들의 글을 들고 간간이 또한 억설(臆說)을 부쳐서 가히 진달(進達)하니, 성재(聖裁)를 감히 바랍니다.”
하였다.
【원전】 7 집 650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주D-001]배임 향병(背壬向丙) : 임방(壬方:북쪽에서 서쪽으로 15도)을 등지고 병방(丙方:남쪽에서 동쪽으로 15도)으로 향한 것. 곧 임좌 병방(壬坐丙方).
[주D-002]자좌 오향(子坐午向) : 자방(子方:정북)을 등지고 오방(午方:정남)으로 향한 것.
[주D-003]좌지(坐地) : 앉은 자리.
[주D-004]청오자(靑烏子) : 한(漢)나라 때의 지리 학자.
[주D-005]곽박(郭璞) : 진(晉)나라 때의 지리 학자.
[주D-006]양균송(楊筠松) : 당(唐)나라 때의 지리학자.
[주D-007]증의산(曾義山) : 원(元)나라 때의 음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