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신라 고승 설총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 권경상도(慶尙道) 의령현(宜寧縣)

아베베1 2009. 10. 20. 00:08

세종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의령현

◎ 의령현(宜寧縣)
본디 장함현(獐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함안군(咸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고, 신번현(新繁縣)을 이에 붙였다. 속현(屬縣)이 1이니, 신번현(新繁縣)이다. 이는 본디 신이현(神尔縣)인데,【주오(朱烏)라고도 하고, 천천(泉川)이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이름을 의상(宜桑)으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었다. 부곡(部曲)이 1이니, 정골(正骨)이요,【예전에는 곤명(昆明)에 속하였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직촌(直村)이 되었다.】 향(鄕)이 1이니, 지산(砥山)이다.【예전에는 곤명에 속하였었는데, 지금은 망하고 직촌이 되었다.】
자굴산(闍崛山)은 현 북쪽에 있고, 정암진(鼎巖津)은 현 남쪽에 있다.【진주(晉州) 남강(南江)의 하류이다. 나룻배가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초계(草溪)에 이르기 46리, 서쪽으로 삼가(三嘉)에 이르기 29리, 남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24리, 북쪽으로 합천(陜川)에 이르기 18리이다.
본현의 호수는 5백 4호, 인구가 1천 6백 29명이요, 신번(新繁)의 호수는 5백 55호, 인구가 9백 82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0명, 영진군(營鎭軍)이 70명, 선군(船軍)이 3백 27명이다.
본현의 토성(土姓)이 4이니, 남(南)·심(沈)·여(余)·옥(玉)이요, 속성(續姓)이 3이니, 임(林)·김(金)·강(姜)이며,【모두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신번(新繁)의 성이 5이니, 진(陳)·서(徐)·임(任)·석(石)·오(吳)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며,【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정골(正骨)의 성이 1이니, 옥(玉)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강(姜)·유(柳)【모두 진주(晉州)에서 왔다.】·조(趙)【함안(咸安)에서 왔다.】 이며, 지산(砥山)의 성이 1이니, 여(余)요, 없어진 소(所)인 저지(楮旨)의 성이 1이니, 박(朴)이다. 인물(人物)은 좌의정 충경공(左議政忠景公) 남재(南在)와 참찬문하부사 강무공(參贊門下府事剛武公) 남은(南誾)이다.【형제가 함께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서 본조(本朝)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3천 5백 58결이다.【논이 3분의 2에 약하다.】 토의(土宜)는 벼·조·보리·뽕나무·삼[麻]·모시[苧]·목면[木綿]·감·배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지초·가는 대·왕대·칠·종이·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이며, 약재(藥材)는 맥문동(麥門冬)·속단(續斷)·인삼이며, 토산(土産)은 은구어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본현(本縣) 동쪽 원당리(元堂里)에 있고,【하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원당리에 있다.【중품이다.】
역(驛)이 2이니, 지남(知南)【현(縣) 경계에 있다.】·신역(新驛)【신번(新繁)에 있다.】 이요, 봉화가 1곳이니, 가막산(可莫山)이 본현 동쪽에 있다.【남쪽으로 함안(咸安) 소산(所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초계(草溪) 미타산(彌陁山)에 응한다.】
월경처(越境處)는 합천(陜川)의 남촌(南村) 어등화리(於等火里)와 초계(草溪) 다호점리(多乎岾里)가 신번현(新繁縣) 서촌(西村)으로 넘어 들어왔다.
【원전】 5 집 653 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의령현(宜寧縣)

 

 


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8리이고, 남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30리이며, 서쪽으로 삼가현 경계까지 37리이고, 북쪽으로 초계군(草溪郡) 경계까지 65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장함현(獐含縣)이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함안군에 예속시켰다. 고려 현종이 진주에 이속시켰고 공민왕이 감무를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가, 그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속현】 신번현(新繁縣) 현 동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본래 신라 신이현(辛尒縣)인데 주오촌(朱烏村)이라 하기도 하고, 천천현(泉川縣)이라 하기도 한다. 경덕왕이 의상(宜桑)이라 고쳐서 강양군(江陽郡)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 합주에 이속시켰으나 공양왕 때에 내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장함(獐含)ㆍ의춘(宜春)ㆍ의산(宜山).
【성씨】
본현 남ㆍ심(沈)ㆍ여(余)ㆍ옥(玉), 임(林)ㆍ김ㆍ강(姜) 모두 아전이다. 신번(新繁) 서(徐)ㆍ진(陳)ㆍ오ㆍ석ㆍ임(任), 김 속성(續姓)이다. 저지(楮旨) 박. 정골(正骨) 옥, 강(姜)ㆍ유(柳) 진주(晉州). 조(趙) 함안(咸安). 지산(砥山) 여(余).
【풍속】 습속이 굳세고 사나움을 숭상한다 관풍안에 있다.
【형승】
푸른 강과 큰 들 하연(河演)의 기문에, “푸른 강과 큰 들, 높은 두덕 무성한 숲이다.” 하였다.
【산천】 덕산(德山)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자굴산(闍崛山)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귀룡산(龜龍山)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미타산(彌陀山) 신번현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가막산(可莫山) 현 동쪽 36리 지점에 있다. 장현(長峴) 현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대현(大峴)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정암진(鼎巖津) 현 동남쪽 9리 지점에 있으며, 진주 남강의 하류이다. 물 복판에 솥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이름이 되었다. 동쪽으로 기음강(岐音江)에 흘러든다. 기음강 현 동쪽 10링 지점에 있다. 영산현(靈山縣) 편에 보라. 검정천(黔丁川)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자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정암전에 흘러든다. 세간천(世干川) 신번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자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우질포(于叱浦)에 흘러든다. 우질포(于叱浦) 신번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세간천과 낙동강이 교차하여 흐르는 곳이다.
【토산】 산무애뱀[白花蛇]ㆍ꿀[蜂蜜]ㆍ매실ㆍ은어[銀口魚]ㆍ대[竹]ㆍ모시[苧]ㆍ옻[漆]ㆍ석류ㆍ감ㆍ붕어[鯽魚]ㆍ닥종이[楮]. 『신증』 종이.
【봉수】 가막산 봉수(可莫山烽燧) 남쪽으로 함안군 파산(巴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초계군 미타산(彌陀山)에 응한다.
【누정】 청서루(淸暑樓) 객관 동쪽에 있다. 영락(永樂) 말년에 현감 허계(許季)가 건립하였다.
【학교】 향교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신흥역(新興驛) 현 북쪽 54리 지점에 있다. 지남역(智南驛) 현 서쪽 9리 지점에 있다. 선원(禪院)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정암원(鼎巖院) 정암진 북쪽 언덕에 있다. 박계원(朴桂院)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개금원(介金院)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세우원(世于院) 현 북쪽 50리 지점에 있다. 신당원(神堂院)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말회원(末回院) 현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대현원(大峴院) 현 서쪽 13리 지점에 있다. 중제원(中梯院) 현 북쪽 27리 지점에 있다.
【불우】 보리사(菩提寺)ㆍ양천사(楊泉寺) 모두 자굴산에 있다. 청원사(靑猿寺) 귀룡산(龜龍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정골부곡(正骨部曲) 현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지산향(砥山鄕) 현 동쪽 60리 지점에 있는데 모두 곤명(昆明)에서 내속하였다. 장곡향(藏谷鄕) 신번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우물곡부곡(于勿谷部曲)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저지소(楮旨所) 신번현에 있다. 부곡소(釜谷所)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동곡소(桐谷所)ㆍ궁곡소(弓谷所) 아울러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신증』 【명환】 본조 양하(梁賀)ㆍ박윤경(朴閏卿).
【인물】 본조 남은(南誾) 신우(辛禑) 때에 왜구가 크게 성하였다. 삼척군(三陟郡)은 성이 작고 또 위태하므로, 국가에서 고을 원을 선택하기에 곤란하였는데 남은이 스스로를 천거하였다. 군에 이르자 왜적이 갑자기 닥치니, 성문을 열고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에 신우가 군사를 동원하여 요동을 공격하려 하였다. 남은은 우리 태조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하여 조인옥(趙仁沃) 등과 함께 군사를 돌이킬 계책을 올렸다. 공양왕 때에 동지밀직사로 임명되었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개국 좌명 공신이 되어 의성군(宜城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시호는 강무(剛武)이다. 남재(南在) 남은의 형이다. 개국 공신이며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의산부원군(宜山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남지(南智) 남재의 손자이다. 문음(門蔭)과 재간으로서 요직을 지냈고,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옥고(玉古)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남간(南簡) 남지의 아우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청렴개결하다는 것으로써 일컬었다. 남계영(南季瑛)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정미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신증』 남곤(南袞) 자는 사화(士華), 성품이 단중(端重)하고 영걸찼으며, 문장이 넉넉하고 화려하였다. 젊었을 때 과거에 올랐고 오랜 동안 대제학을 맡았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호는 지정(止亭)이다.
【효자】 본조 전효종(田孝終) 곤미(昆湄) 사람이다. 12살 때에 아비가 죽었는데 여막에서 거처하였다. 어미가 말렸으나 듣지 아니하고 3년을 마쳤다. 세종조에 그 일이 알려져서 명하여 장사랑(將仕郞)을 제수하였다. 최치안(崔致安) 수원부(水原府) 사람이다. 할아버지 소(沼)가 죽자 치안의 아비 흘(訖)은 평소부터 병이 있는 데에도 시묘하였다. 치안의 나이 54세였는데 아비에게 고하기를, “병중인데 거적자리에 잠자고 흙덩이를 벤다면 병이 반드시 더해질 것이니, 집에 돌아가서 치료하십시오.” 하였다. 아비가 허락하니, 치안이 아비를 대신해서 3년 동안 무덤을 지켰다. 세종조에 일이 알려져 장사랑을 제수하였다.

해동잡록 5 본조(本朝)
전효종(田孝終)


의령(宜寧) 사람이며, 나이 12살에 아버지가 죽자 묘막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말려도 듣지 않고 3년을 마쳤다. 세종(世宗)이 명을 내려 장사랑(將仕郞)을 제수하였다.

       宜寧人。年十二父歿居廬。母止之不聽終三年。我英廟命除將仕郞。

단종 3년 을해(1455,경태 6)
 3월16일 (신유)
효자 이효생·열녀 약비 등에게 복호 정문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예조(禮曹)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경기(京畿)의 죽산현(竹山縣) 학생(學生) 이효생(李孝生)은 부모(父母)를 섬기는 데 효도를 다하여 아침 저녁으로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폐하지 아니하고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이를 바쳤고, 어미가 죽자 3년 동안 비통하고 애통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아비가 병들어 소변(小便)이 통하지 않게 되자 이를 빨아서 통하게 하였습니다.
여흥부(驪興府) 유학(幼學) 송상(宋庠)은 그 아비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는데, 자라게 되자 아비의 무덤에 모두 가시나무가 덮이는 것을 보고 다른 땅을 터잡아서 천장(遷葬)하고, 추후하여 최질(衰絰)을 입고서 무덤 옆에서 여막(廬幕)살이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전(奠)을 올려 3년을 마쳤습니다. 유흥원(柳興源)은 나이 12세에 그 아비가 죽자 무덤 옆에서 여막(廬幕)살이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전(奠)을 올려 3년을 마쳤습니다. 모두 효행(孝行)이 가상(可賞)하니, 청컨대 재주에 따라 서용하소서.
가평현(加平縣) 학생(學生) 손지(孫止)의 딸 약비(若非)는 그 남편이 죽자 손수 음식을 끓여서 몸소 무덤 앞에 전(奠)드리면서 3년을 마쳤습니다. 부모(父母)가 그녀의 일찍 과부(寡婦)된 것을 불쌍히 여겨서 장차 개가(改嫁)시키고자 하였으나 죽기로 맹세하고 이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복호(復戶)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의정부에서 예조(禮曹)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경상도(慶尙道) 선산부(善山府)의 향리(鄕吏) 백동량(白同良)이 죽자, 그 아내 소사(召史)는 집 가까운 땅에다 장사지내고 아침 저녁으로 전(奠)드리는 것과 삭망제(朔望祭)를 폐하지 아니하면서 3년을 마쳤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8년 동안 어육(魚肉)과 파·마늘을 먹지 않으며, 매일 무덤 앞을 깨끗이 소제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제사를 지냅니다. 만약 절물(節物)이나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이에 전(奠)드리고 방황(彷徨)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웁니다.
진주(晉州) 우씨(禹氏)의 딸은 학생(學生) 윤지례(尹之禮)에게 시집갔는데, 윤지례가 악질(惡疾)이 있으니, 부모(父母)들이 개가(改嫁)시키고자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나이 21세에 남편이 죽고 자식이 없으니, 그 부모들이 그녀의 일찍 과부(寡婦)된 것을 불쌍히 여겨서 또 개가(改嫁)시키고자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시어미를 봉양하는 데 효도가 지극하였고, 그 시어미가 병들자 옆에서 모시고 약을 받들면서 그 곁을 떠나지 않았고, 시어미가 죽게 되자 애훼(哀毁)하여 상복(喪服)을 입었습니다.
개령(開寧)의 선군(船軍) 서문(徐文)은 집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그 어미가 죽자 머리털을 잘라서 곡식을 사서 장례(葬禮)의 비용을 마련하였고, 흙을 져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번상(番上)하게 되자, 다른 사람을 사서 이를 대신시키고 무덤 곁을 떠나지 않고, 혹은 남에게 꾸기도 하고 혹은 개걸(丐乞)하기도 하여 아침 저녁으로 전(奠)드리는 것을 폐하지 않으면서 3년을 마치었으며, 또 아비의 무덤을 옮겨서 합장(合葬)하고 또 8년을 마쳤습니다. 효행(孝行)이 가상(可賞)하니, 청컨대 정문(旌門)하고 복호(復戶)하소서.
선산부(善山府) 전 부사정(副司正) 강극지(姜克智)는 부모(父母)가 일시에 함께 죽으니, 동혈(同穴)에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하였고, 뒤에 그대로 무덤 곁에 살면서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 아침 저녁과 초하루·보름의 제사를 초상(初喪)과 같이 지내고, 일찍이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거창현(居昌縣) 유학(幼學) 이연(李淵)은 나이 8세에 어미가 병나자 그 곁을 떠나지 않았고, 나이 12세에 이르러 어미가 죽으니 무덤을 지켰는데, 할아비와 아비가 그가 나이 어리다고 하여 이를 만류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서 3년을 마쳤습니다.
유학(幼學) 최치안(崔致安)은 나이 14세에 그 할아비가 죽자 그 아비가 숙질(宿疾)이 있으니, 최치안이 그 아비에게 고(告)하기를, ‘아버지가 무덤을 지키면 병이 반드시 더할 것입니다.’ 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복을 입고 3년 동안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 효행(孝行)이 모두 포장(褒奬)할 만하니, 청컨대 재주에 따라서 서용(敍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원전】 7 집 20 면
【분류】 *윤리(倫理) / *풍속-예속(禮俗) / *의생활(衣生活) / *군사-군역(軍役) / *인사(人事) / *재정(財政)
海東雜錄[五]
 孝子
崔致安

水原府人。年十四。代病父守祖墳三年。我英廟命除將仕郞。○性至孝其父素有疾而居廬。致安告父曰。帶疫枕塊。病必加增。請還家治療。父許之。代父守墳三年。 孝子


【열녀】 본조 석씨(石氏) 심치(沈致)의 아내이다. 20세 때에 지아비가 죽었으나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다. 그 아비가 개가시키고자 하니, 사양하면서, “남편이 독자로써 일찍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만약 저의 뜻을 억지로 꺾는다면, 죽은 남편의 병든 어머님은 누가 봉양하겠습니까.” 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 시어머니를 더욱 부지런히 섬기고 시어머니가 변소에 갈 때면 몸소 업고 갔다.
【제영】 춘수정암횡련벽(春水鼎巖橫練碧) 어변갑(魚變甲)의 시에, “봄물이 흐르는 정암진은 비단을 펼친 듯 푸르고, 가을 바람이 부는 자굴산은 병풍을 펼친 듯 산뜻하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신번(新繁) 동북으로 60리, 본래 신라의 신첨(新添)인데, 주금촌(朱琴村)이라고도 하며 천천현(泉川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16년에 의상(宜桑)이라 고치고 강양군(江陽郡)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신번이라 고치고, 현종 9년에는 합천(陜川)에 예속시켰다가, 공양왕 2년에 내속시켰다.
【방면】 어대(漁大) 동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풍덕(豐德) 동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지산(芝山) 동북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만천(萬川) 남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가례(嘉禮)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상정(上井)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5리이다. 칠곡(七谷)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모아(毛兒)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5리이다. 유태(由太) 북으로 처음이 3리, 끝이 15리이다. 화곡(禾谷) 북으로 처음이 7리, 끝이 30리이다. 정곡(定谷) 북으로 처음이 5리, 끝이 40리이다. 부산(夫山) 북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55리이다. 지촌(紙村) 북으로 처음이 3리, 끝이 50리이다. 정동(正洞) 동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대곡(大谷) 서남으로 처음이 7리, 끝이 35리이다. 보림(寶林) 동북으로 처음이 5리, 끝이 50리이다. 낙서(洛西) 동북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70리이다. 내요(來要) 서북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50리이다.
○ 정골부곡(正骨部曲)은 동으로 35리, 혜물곡(兮勿谷) 부곡은 동으로 10리, 장곡향(藏谷鄕)ㆍ신번(新繁)은 남으로 15리, 지산향(砥山鄕)은 동으로 60리, 부곡소(釜谷所)는 남으로 15리, 저지소(楮旨所)는 신번에 있으며 궁곡소(弓谷所)는 동으로 15리에 있다. 상곡소(相谷所).

【성지】 읍성(邑城) 선조 22년에 쌓았는데 둘레는 1천 5백 70척이고, 우물이 두 개이다. 읍창(邑倉)ㆍ신창(新倉) 신번의 옛 현이다. 북창(北倉) 서북으로 45리에 있다.
【진도】 정암진(鼎巖津) 동남으로 9리인 함안(咸安) 경계인 대로(大路)에 있는데, 강 가운데에 바위가 있으며 그 모습이 마치 솥 위에 겹겹이 쌓인 바위 같다. 박진(朴津) 동북으로 50리에 있는데 창녕 편에 보라.
【토산】 뽕[桑].
【사원】 덕곡서원(德谷書院) 효종 병신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 편에 보라.

 

 어변갑은 함종어씨이며 함종편에서 기록되어있다

 

평안도(平安道)

함종현(咸從縣

【인물】 본조 어변갑(魚變甲) 영락(永樂) 6년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갔는데, 여러 번 직제학(直提學)에 천거되었으나 부모가 연로하여 사양하고 함안(咸安)으로 돌아가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효첨(魚孝瞻) 변갑의 아들로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가 두루 관각(館閣)의 벼슬을 지내다가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어세겸(魚世謙) 효첨의 아들로 급제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함종부원군(咸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좌의정에 이르러 문형(文衡)을 장악하였는데, 성질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조그마한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어세공(魚世恭) 세겸(世謙)의 아우로 급제하여 세조(世祖) 조에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러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숙(襄肅)이다.

○ 본관은 함종(咸從)으로 자는 자선(子先)이며 태종(太宗) 때에 급제하였다. 대제학 정이오(鄭以吾)가 고시관으로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꿈에 시 한수를 짓기를,

세 번의 바람과 천둥으로 고기는 갑 있는 것으로 변하고[魚變甲] / 三級風雷魚變甲
한 봄의 아지랑이 자욱한 풍경에 말은 소리를 드물게 하도다[馬希聲] / 一春煙景馬希聲
비록 짝으로 대함에 원래 서로 걸맞는다고 하지만 / 雖云對偶元相敵
어찌 용문에 있어서 윗자리에 이름이 미칠 줄이야 / 那及龍門上客名

하였는데, 과연 제일로 발탁되었다. 관직은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나 늙은 어머니 때문에 관직을 버리고 함안(咸安)으로 돌아가 봉양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봉양하며 산업 늘리는 일은 하지 않고 전부터 있던 식화계(殖貨契)의 문서를 전부 찾아서 불살라 버렸다.〈행장(行狀)〉
어변갑(魚變甲) 신유생이며 숙권(叔權)의 고조(高祖)이다.

어변갑은 자는 자선(子先)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태종 무자년(1408)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어머니가 늙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咸安)으로 돌아와 봉양하였다.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55세였다.
○ 공의 먼 조상 중익(重翼)의 본성은 지씨(池氏)였는데 나면서 얼굴이 기이하고 백 근 무게의 활을 사용하였으며, 겨드랑이 밑에 비늘 셋이 있었다. 자라서 고려 태조를 섬길 때 어떤 이가 비늘이 있다 하니, 태조가 보고 이르기를, “너는 비늘이 있으니 이는 곧 물고기이다.” 하고, 어(魚)씨로 사성(賜姓)하였다. 《동각잡기》
○ 공이 장차 전시(殿試)에 응하려 할 때 대제학 정이오(鄭以吾)가 우연히 꿈에 시를 얻었는데,

삼급의 풍뢰(風雷)에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고 / 三級風雷魚變甲
아지랭이 피는 봄날에 말 울음소리가 드물다 / 一春煙景馬希聲
두 이름 대(對)가 되어 서로 겨루나 / 雖云對偶元相敵
용문(龍門)의 상객(上客)에 어찌 미치리요 / 那及龍門上客名

하였더니, 공이 과연 장원에 뽑히고, 마희성(馬希聲)이 무과에 장원이 되었다. 《패관잡기》 《동각잡기》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天地門)
신라 시말(新羅始末)


삼국 시대에 신라가 제일 먼저 나라를 세웠고 제일 늦게 망하였다. 그 끝에 가서 삼국을 통일했으나 처음에는 강토가 가장 작았으며, 지금의 경상도가 신라의 옛 강토이다.
도내의 군(郡)과 현(縣)은 합계 67이었다 하나 고려의 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하건대, 그 동북쪽의 영천(榮川)ㆍ예안(禮安)ㆍ순흥(順興)ㆍ봉화(奉化)ㆍ청송(靑松)ㆍ진보(眞寶)ㆍ영해(寧海)ㆍ영덕(盈德)의 아홉 고을은 곧 고구려의 땅이며, 그 서남쪽의 진주(晉州)는 곧 백제의 땅이었다 하니, 백제가 당연히 사천(泗川)ㆍ하동(河東) 등 여러 고을을 지나 진주를 소유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지리지》에, “진주의 속군은 둘인데, 강성(江城)과 하동(河東)이다.” 했으니, 강성은 바로 지금의 단성(丹城)으로 사주(泗州)ㆍ악양(岳陽)ㆍ영선(永善)ㆍ진해(鎭海)ㆍ곤명(昆明)ㆍ반성(班城)ㆍ의령(宜寧) 등 일곱 고을이 그 속현이었다.
사주는 지금의 사천이고 악양은 하동을 거느린 현이며, 영선은 고성(固城)이 거느린 현이 되었고 곤명은 지금의 곤양(昆陽)이다.
그렇다면 의령ㆍ진해ㆍ고성ㆍ사천ㆍ곤양ㆍ단성ㆍ하동 및 진주의 여덟 고을은 신라가 소유했던 것이 아니니, 합계 67에서 17고을을 빼면 남는 것은 50고을이며, 지금의 충청도 경계의 청산(靑山)ㆍ보은(報恩)ㆍ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의 다섯 고을이 신라의 군현이라고 쳐도 합계 55고을이 될 뿐이다.
또한 신라 유리왕 18년에, 수로왕이 김해에서 일어나 육가야(六伽倻)로 나뉘니, 김해는 가야국(伽倻國)이 되고, 고령(高靈)은 대가야(大伽倻)가 되고, 고성은 소가야(小伽倻)가 되고, 성주(星州)는 벽진가야(碧珍伽倻) 혹은 성산가야(星山伽倻)라는 것이 되고, 함안(咸安)은 아나가야(阿那伽倻)가 되고, 함창(咸昌)은 고령가야(古寧伽倻)가 되어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으로 경계를 삼고, 서남쪽으로는 바다에까지 다다랐으며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쪽으로는 가야산으로 경계를 삼았다고 했는데, 지금의 가야산이란 성주의 남쪽에 있으니, 자못 의심스럽다. 생각하건대, 가야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어 금오산(金烏山)이 된 것을 예전에는 반드시 통틀어 가야산이라고 했던 것이니, 그렇다면 신라가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는 낙동강으로 경계를 삼았을 따름이므로 동쪽은 신라가 되고 서쪽은 육가야의 땅이 될 것이다.
또한 그 처음 역사에 이른바, 비지(比只)ㆍ다벌(多伐)ㆍ초팔(草八) 등은 어느 곳인지 모르겠으나 중세(中世)에 얻은 것이고, 또한 지금의 청도(淸道)가 이서국(伊西國)이었는데 유리왕이 취한 것이며, 경산(慶山)이 압량국(押梁國)이었는데 지미왕(衹味王)이 취한 것이다. 의성(義城)은 소문국(召文國)이었고 동래는 장산국(萇山國)이었다. 《지리지》에 보이는 것은 다만 이뿐일 따름이다. 날마다 점점 개척해 나가서 낙동강의 서쪽에 이르고, 육가야의 땅을 병탄(並呑)하게 되었으며, 삼국을 통일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신라가 나라를 세운 시말이다.
그러나 파사왕(婆娑王) 8년에, “서쪽으로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 가야와 접했다.” 했으니, 이때는 가야가 일어난 지 40여 년밖에 되지 않는 때이다.
생각건대, 가락(駕洛) 이외의 다섯 나라도 일어나자마자 망했거나, 혹은 신라에 부속되어 자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또한 실직(悉直)은 지금의 삼척부(三陟府)로 신라에 항복했던 것이니, 지세를 상고해 보건대, 마땅히 동북의 모든 고을을 넘어 그 땅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면 동북의 모든 고을은 그 처음에 고구려의 땅이 아니다.
고구려 태조왕 4년에,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그 땅을 얻어 읍(邑)을 삼고 국경을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에 이르렀다.” 했으니, 그렇다면 고구려가 경상도 동북쪽의 모든 고을을 취한 것은 반드시 신라가 동북 제현을 정복한 뒤일 것이다.
신라가 비록 삼국을 통일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은 끌 수가 없었고 그 말년에는 북쪽에서도 궁예(弓裔)가 죄고, 남쪽에서는 진훤(甄萱)이 죄었었으며 견훤은 또한 거창(居昌) 등 20여 성을 빼앗으니, 낙동강의 서쪽 땅은 이미 잃었었고 통할한 것은 낙동강 동쪽에 불과했다.
미약하기가 이와 같았으니, 왕씨(王氏)가 궁예와 진훤의 땅을 통합했을 때에 신라가 비록 항복하지 않았다 하나 무슨 버틸 만한 힘이 있었으랴?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자, 서북쪽의 두 변방은 발해에 병탄되었으며, 궁예가 흥할 때에도 압록강 안팎까지밖에 미칠 수 없었으니, 그 강하고 약한 것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발해가 진(震)이라는 국호를 썼기 때문에 궁예는 처음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여 분별하였다.
왕씨가 수복한 땅도 압록강 이동에 그쳤고, 요동의 옛 땅은 다 글안에게 빼앗겼다.


 

[주C-001]신라 시말(新羅始末) : 신라의 건국과 패망.
송계만록(松溪漫錄)
송계만록 상(松溪漫錄 上)

권응인(權應仁) 찬

○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은 문장으로 이름났다. 남지정(南止亭 곤〈袞)의 호)이 언제나 일컫기를,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호)의 시, 탁영의 문장’이라 하였다.
그의 문집은 세상에 성행하고 있으나 시는 드물게 전한다. 삼가현(三嘉縣) 관수루(觀水樓)의 한 율시(律詩)는 다음과 같다.
한 가닥 시내 낀 마을에 흰 연기 오르는데 / 一縷溪村生白煙
지는 해에 염소들 앞을 다퉈 내려오네 / 羔羊下佸謾爭先
높은 누에 항아리 술 동서의 나그네요 / 高樓樽酒東西客
십 리의 농촌 남북으로 뻗어 있네 / 十里桑麻南北阡
소리 있는 시구 적어 노니는 이 옹졸하나 / 句乏有聲遊子拙
일 없어 술 마시니 사또는 어질구나 / 杯斟無使君賢
난간에 기대어 다시 황혼이 지기 기다려 / 倚欄更待黃昏後
물을 보며 달이 하늘 복판에 이른 것 보네 / 觀水仍看月到天
시와 문이 어느 것이 나은지 보는 이는 자세히 살피라.
○ 옛날, 검률(檢律) 함자예(咸子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촉석루(矗石樓)에 쓴 시는 다음과 같다.
산은 둘러 있고 물은 절로 흐르는데 / 山自盤環水自流
몇몇 해에 이 강머리에 성쇠가 있었는고 / 幾年興廢此江頭
일찍이 놀던 곳에 방황하며 다시 아끼노니 / 彷徨更惜曾遊處
전에는 봄바람 불더니 이제는 가을이네 / 昨是春風今是秋
벽에 달아두어 널리 사람들의 말에 올랐다. 제삼구(第三句)는 특히나 기력이 없는데, 모두 절창(絶唱)이라 일컬음은 웬일인가? 천한 사람으로서 이만한 시를 지었으므로 대단하게 여긴 것이나 아닌가 한다.
○ 옛날 한 부인의 ‘부여회고시(扶餘懷古詩)’는 다음과 같다.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 白馬臺空經幾歲
낙화암은 선채로 많은 세월 지났네 / 落花巖立過多時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 靑山若不曾緘黙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 千古興亡問可知
어떤 사람은 어우동(於宇同)이 지은 것이라 한다. 음부(淫婦)이면서 이와 같이 시에 능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행실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다.
○ 옛날 두세 선비가 기생들을 데리고 산사(山寺)에 모여 놀았다. 술이 얼근하여 취해 누웠는데 옆에는 거문고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어떤 중이 밖으로부터 왔는데, 얼굴은 얼룩지고 검었으며 옷은 남루하였다. 그가 몰래 거문고 바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니 줄 튀김쇠로 높은 집을 흔드니 / 鵾絃鐵撥撼高堂
섬섬옥수의 요조한 아가씨라 / 玉指纖纖窈窕娘
무협에 우는 원숭이 애절한 눈물 짓고 / 巫峽啼猿哀涙濕
소상에 돌아가는 기러기 원망 소리 길구나 / 瀟湘歸雁怨聲長
얼음 깊은 창해엔 용의 읊음 웅장하고 / 凍深滄海龍吟壯
성긴 소나무에 맑음이 사무치니 학의 꿈 서늘하다 / 淸徹疏松鶴夢涼
곡이 다하니 삼성은 비끼고 달 또한 떨어지니 / 曲罷參橫仍月落
뜰 가득한 산색이 새벽에 창창하네 / 滿庭山色曉蒼蒼
그리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정허암(鄭虛菴 희량(希良)의 호)이 아니면 이렇게 지을 수 없다.’ 하였다.
○ 정승 정 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의 시호)이 김해로 귀양갈 때에 도중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비방이 산처럼 쌓였어도 마침내 용서받으니 / 積謗如山竟見原
이승에 천은을 보답할 길 없어라 / 此生無計答天恩
높은 재 열 번 넘는데 두 줄기 눈물이요 / 十登峻嶺雙垂涙
긴 강 세 번 건너니 홀로 애를 끊는구나 / 三渡長江獨斷魂
막막한 먼 산은 구름이 먹을 푼 듯 / 漠漠遠山雲潑黑
망망한 벌판 비는 물동이를 거꾸로 쏟는 듯 / 茫茫大野雨飜盆
저녁에 바다에 닿은 동성 밖에 투숙하니 / 暮投臨海東城外
초가집은 쓸쓸한데 대나무 문이로세 / 茅屋蕭蕭竹作門
덕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도 잘한다는 것이 정말이다. 그의 손자 임당 상공(林塘相公)이 시법(詩法)을 이어 전하니, 정말 두심언(杜審言)에게 두보(杜甫)가 있는 격이다. 문익공(文翼公)의 이름은 정광필이요, 임당(林塘)의 이름은 정유길(鄭惟吉)이다.
○ 진천(晉川 진천은 봉호(封號)) 강혼(姜渾)이 성주(星州) 기생 은대선(銀臺仙)에게 깊이 정이 들어 절구(絶句) 삼장(三章)을 지어주었는데, 그 제이장에,
고야산 선인 옥설같은 이 흰 살결 / 姑射仙姿玉雪肌
새벽 창 금 거울에 나비 눈썹 그리누나 / 曉窓金鏡畫蛾眉
아침 술 반쯤 취해 얼굴이 붉어지니 / 卯酒半酣紅入面
동풍에 검은 귀밑머리 흐트러지네 / 東風吹鬢綠參差
하였다. 내가 그 기생을 보았을 때는 나이 이미 80이 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검은 귀밑머리 흐트러지던 것이 이제는 흰 귀밑머리 흐트러지는 것[白參差]이 되었습니다.”
하고,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 강 진천(姜晉川)의 동래(東萊) 정변루시(靜邊樓詩)에,
대마도 푸른 산은 외기러기 밖이요 / 對馬靑山孤雁外
부상의 붉은 해는 오색 구름 끝이로다 / 扶桑紅日霱雲端
하였다. 좋기는 좋지만 어찌 ‘성주에서 비에 막히다[星州阻雨]’라는 시에서,
붉은 제비는 번갈아 나는데 바람은 버들에 스치고 / 紫燕交飛風拂柳
푸른 개구리 어지러이 우는데 비는 산에 젖었더라 / 靑蛙亂叫雨渾山
라고 한, 그림같은 시만 하겠는가?
○ 어무적(魚無迹)공의, ‘길 주서 고리(吉注書故里)’에 쓴 율시의 함련(頷聯)에,
수양산 고사리는 은 나라의 남은 풀이요 / 首陽薇蕨殷遺草
율리의 전원은 진 나라의 옛터네 / 栗里田園晉故墟
라고 하였다. 고사(故事)를 쓴 것이 매우 타당하여 고금에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연구(聯句)는 본래 길(吉) 선생이 지은 것인데 어무적이 풀어 만든 것이다.”
하는데, 상하의 구법(句法)을 살펴보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니, 이 말이 아마 그럴 듯하다. 다만, 선생의 문집 가운데 과연 이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다.
○ 안동(安東)에 청렴 결백한 선비 이효칙(李孝則)이 있었는데, 어무적과 함께 조령(鳥嶺)을 넘었다. 이효칙이 한 절구를 지었다.
추풍에 누른 잎은 우수수 떨어지는데 / 秋風黃葉落紛紛
주흘산 높이 솟아 반은 구름 속에 묻혔네 / 主屹山高半沒雲
이십사교 흐느껴 우는 물을 / 二十四橋鳴咽水
한 해 세 번 나그네 길에서 듣네 / 一年三度客中聞
어무적이 그만 붓을 놓고 말았다.
○ 적암(適菴) 조신(曺伸)이 황폐한 절에 들어가 율시 한 수를 지었다. 그 경련(頸聯)에,
길에는 올 가을 낙엽 덮였고 / 逕覆今秋葉
부엌에는 전일 불 때던 나무 남았네 / 厨餘去日樵
하였는데, 구법(句法)이 기기 절묘하여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읊었다. 그러나 적암이 스스로 자기 작품을 뽑은 것에는 이 시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젊어서 지어 만족스럽지 않아서 버린 것이나 아니겠는가?
○ 이 정승(李政丞) 용재(容齋 행(荇)의 호) 선생의 ‘제갈 무후를 읊다[詠諸葛武侯]’라는 시에,
사생을 나라에 허하여 힘을 다했는데 / 死生許國無遺力
성패로 사람을 논하는 것은 어린애지 / 成敗論人是小兒
하였다. 의논이 공정하고 글도 또한 새롭다. 중국 사신[天使] 당고(唐皐)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아득한 삼산은 솥을 엎은 것으로 보이고 / 縹緲三山看覆鼎
굽이친 한 띠의 물은 투금강에 닿았어라 / 逶迤一帶接投金
하였다. 복정은 삼각산(三角山)의 별명이요, 양화(楊花) 나루를 투금강이라 하기도 한다. 대구가 아주 잘 들어맞는다. 이 일련(一聯)은 소퇴휴(蘇退休) 상공(相公)이 지은 것이다. 소퇴휴가 말하였다. 《황화집(皇華集)》을 얻어 본 것이 기억나는데, 대(帶) 자는 수(水) 자였다. 대(帶) 자는 아마 전하는 사람들이 잘못 전한 것일 게다. 용재(容齋)의 이름은 이행(李荇)이요, 퇴휴의 이름은 소세양(蘇世讓)이다.
○ 김모재(金慕齋) 상공(相公)이 성주(星州) 기생 의침향(倚沉香)에게 준시에,
예쁘고 추한 것도 인연도 말하지 말자 / 不論姸醜不論緣
오래 거처하니 자연 사람 마음 끄는구나 / 處久令人意自牽
하였으니, 인정에 절실하다. 모재(慕齋)의 이름은 김안국(金安國)이다
○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어잠부(魚潛夫)와 교유하였다. 그의 시에,
봄꿈은 진 나라 이세보다 어지럽고 / 春夢亂於秦二世
실없는 근심은 노 나라 삼가처럼 강하다 / 閑愁强似魯三家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말로써 고금의 시인들이 이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잠부(潛夫)란 무적(無迹)의 자(字)이다. 한수(閑愁)는 다른 책에는 추회(秋懷)라 한 데가 있다.
○ 기재(企齋) 신 상공(申相公)이, ‘동지(同知) 장언양(張彦陽)이 연경(燕京)에 가는 것을 보내다’라는 시에,
오늘에 주 나라를 관광하는 오 나라 계찰이요 / 今日觀周吳季札
전에 오랑캐에게 화친하던 한 나라 장건이라 / 舊時和虜漢張騫
하니, 만좌(滿座)가 다시 붓을 대지 못하였다. 조송강(趙松岡)이 말한 것이다. 기재(企齋)의 이름은 신광한(申光漢)이요, 송강(松岡)의 이름은 조사수(趙士秀)이며, 기재의 조카이다.
○ 호음(湖陰) 정 상공(鄭相公)이 의령(宜寧)의 정진(鼎津) 언덕에 작은 집을 짓고, 그 벽에 용재(容齋)ㆍ눌재(訥齋)ㆍ적암(適菴)의 세 수만을 걸어두었으니, 이 세 분이 호음이 존경하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용재의 시 한 연(聯)에,
강호에 고기가 즐거움을 얻었으며 / 江湖魚得計
종고는 새가 좋아하지 않는다 / 鐘鼓鳥非情
하였는데, 호음이 항상 이 구를 칭찬하였다. 호음의 이름은 정사룡(鄭士龍)이다.
○ 안분(安分)이 의주(義州)의 취승정(聚勝亭) 시를 차운한 시에,
한 물은 흘러 환괘가 되었고 / 一水流成渙
세 산은 끊어져서 곤괘를 지었구나 / 三山斷作坤
라고 한 구는 정말 진기한 말인데, 아래 구가 더욱 기묘하다.
○ 조사(詔使) 공운강(龔雲岡)이 올 때, 호음(湖陰)이 원접사(遠接使)로, 안분당(安分堂)이 선위사(宣慰使)로 갔는데, 안분당이 중국 사신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일하에 떨친 이름 두성의 남북이요 / 日下高名斗南北
천애에 이별주는 옥동서 잔이로다 / 天涯別酒玉東西
하니,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이 시가 지극히 아름다우니 우리가 당연히 우대(優待)를 하여 그 시에 보답하겠다.”
하고, 안분당이 들어가 뵐 적마다 반드시 의자에서 내려와서 답하니, 안분당이 이것으로 스스로 뽐내었다. 내가 호음에게 말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고 실은 내 손에서 나왔다.”
하였다. 황산곡(黃山谷) 시에,
가인은 두성의 남북이요 / 佳人斗南北
미주는 옥동서로다 / 美酒玉東西
하였다. 이 시는 단지 그 시의 두서너 자를 고친 것인데, 이것을 감탄하고 칭찬하는 것은 막막(漠漠) 음음(陰陰)의 등류인 것이다. 공선(龔仙)이 어찌 황산곡의 시를 보지 못하였던가?
○ 서사가(徐四佳)가 조사(詔使) 기순(祈順)의 시에 차운하여,
금암은 날이 따스하여 버드나무 새로 피고 / 金巖日暖初楊柳
검수는 봄이 차서 두견 아직 멀었네 / 劍水春寒未杜鵑
하였는데,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호음에게 물으니, 곧 말하기를,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 말에 병폐가 있다.”
하였다. 한 사람은 칭찬하고 한 사람은 낮게 평가하니, 두 사람의 뜻이 같지 않다. 물러나 생각하니, 이 한 연구는 오로지 원(元) 나라 사람의 시어(詩語)를 쓴 것인데, 저것은 두 땅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초(初)ㆍ미(未) 두 자가 합당하다. 그러나 금암과 검수 사이는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어찌 날이 따스하다느니 봄이 차다느니 하는 그런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말에 병폐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호음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 사가(四佳)의 이름은 서거정(徐居正)이다.
○ 퇴휴(退休) 소 상공이 의주 취승정(聚勝亭)의 휘(暉) 자 운을 차운하면서,
맑은 강 비단 같다는 사현휘요 / 澄江如練謝玄暉
라는 구를 지어놓고 짝을 맞추지 못하고, 어숙권(魚叔權) 공에게 맞추도록 부탁하였다. 어숙권이 맞추기를,
초생달 낫을 간다는 한 이부라 / 新月磨鎌韓吏部
라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마(磨)가 사(似)만큼 온전하지 못한 것같다.
○ 호음(湖陰)이 원접사로 갔을 때, 김백순(金伯醇)이 의주 목사(義州牧使)였다. 호음이 소관(所串)의 관(館)에 이르러 시를 지어 보내었다.
누가 문무 다 갖춘 이 적다 하는고 / 誰云文武雙全少
창 비낀 오늘날에 다시 시를 짓는다 / 橫槊如今更賦詩
뱃속에 웅도 있으매 절제사를 맡았고 / 腹有雄圖專節制
손에는 어려운 일 없으매 사업을 시행하네 / 手無難事達施爲
나그네 떠나고 누에 오르는 저녁이요 / 賓筵客散登樓夕
밤 장막 남은 등잔 이별도 아까워라 / 夜帳殘燈念別時
옥문관에 지체한 것 예부터 있는 일이니 / 留滯玉關從古事
명년에 남보다 먼저 봉황지에 들 것이오 / 明年先賀鳳凰池
이것은 문집에 빠진 것이다. 내가 우연히 그 원고를 얻었다.
○ 미전(薇田) 왕학(王鶴)이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하고 시를 지었다. 호음(湖陰)이 사(師) 자 운을 짓기에 군색하여 며칠을 두고 다듬었는데, 지을수록 난삽하여 종사관(從事官)에게 부탁하자, 정랑(正郞) 이홍남(李洪男)이 즉석에서 써내려갔다.
삼인이 비록 행적은 다르지만 / 三仁雖異迹
백세에 오히려 같이 스승으로 삼는다 / 百世尙同師
하였다. 호음의 재주로도 때로는 간혹 막히는 수가 있으니,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랴?
○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백마강’ 시는 다음과 같다.
나라 망하니 산과 물이 옛날과 다른데 / 國破山河異昔時
홀로 강달이 남아 몇 번이나 차고 기울었다 / 獨留江月幾盈虧
낙화암 위의 꽃은 아직도 남았으니 / 落花巖上花猶在
비바람 그 당시에 다 불어 떨어뜨리지 못하였나 / 風雨當年不盡吹
이 사문 강남(李斯文江男)의 시는,
고국에 올라 보니 마침 달이 오를 때라 / 故國登臨月上時
백제의 왕업이 여기 이루고 망했네 / 濟王家業此成虧
용 죽고 꽃 떨어진 천 년의 원한은 / 龍亡花落千年恨
동풍에 부는 한 피리에 부쳤네 / 分付東風一笛吹
이 두 시는 당시 사람들이 서로들 우열(優劣)을 논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아래 시 첫째 구가 너무 싱거운 것같다. 동(東) 자를 혹은 서(西) 자라 하기도 한다.
○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꿈에 시 한 연구(聯句)를 얻었다.
바람은 마른 잎 나부끼어 강 언덕에 지고 / 風飄枯葉江干墮
구름은 먼 산 안고 바다 위에 솟아난다 / 雲抱遙岑海上生
그후에 관동(關東) 관찰사가 되어 삼척(三陟) 죽서루(竹西樓)에 올라보니, 보이는 것이 과연 이전의 꿈과 맞았다. 사람의 일이란 미리 정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가 제주(濟州) 목사로 나갔을 때, 임석천(林石川)이 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일찍 남악에 올라 바라보니 / 嘗登南岳望
외로운 섬 바다 가운데 있네 / 孤島海中央
뱃길은 서쪽으로 절강에 통하고 / 舟楫西通浙
말들은 천상의 방성에 응했구나 / 驊騮上應房
관원으로 오는 것이 귀양과 무엇이 다르랴 / 爲官何異謫
이번 이별이 가장 상심되네 / 此別最堪傷
진신(搢紳)들이 모두 그 시를 고인(古人) 기상이 있다 하였다. 석천(石川)은 해남(海南) 사람이니 남악(南岳)은 분명 그 현의 산일 것이다.
○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신년(1536, 중종 31)에, 호음(湖陰)이 등왕각(滕王各閣) 배율(排律) 20운(韻)을 지어 정시(庭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가선(嘉善)의 품계(品階)에 올랐다. 전편(全篇)이 웅장하고 기특 건실하여 정말 걸작이었다. 단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청강(淸江)ㆍ백석(白石)ㆍ죽색(竹色)ㆍ송성(松聲)’의 말들을 사용하였는데 노두의,
청강 백석은 마음 상하게 아름답고 / 淸江白石傷心麗
연한 꽃술 짙은 꽃 눈에 가득 아롱지네 / 嫩蕊穠花滿目斑
옛 담장은 아직도 대 빛 / 古墻猶竹色
빈 각은 스스로 소나무 소리 / 虛閣自松聲
라 한 것은, 등왕정(滕王亭)을 읊은 것이지, 등왕각을 읊은 것은 아니다. 등왕각은 홍주(洪州)에 있고, 등왕정은 낭주(閬州)에 있는데, 공(公)은 정을 두고 읊은 것을 등왕각에다 끌어썼으니, 잘못이다. 당시 보락당(保樂堂) 김 정승(金政丞 안로(安老))이 고시한 것인데, 과연 모르고 한 것인가? 알면서 이것을 밝히지 못한 것인가?
○ 이회재(李晦齋) 선생의 경산현(慶山縣) 동헌(東軒) 시에,
우는 뻐꾹새는 가지 위에 일곱이요 / 鳴鳩枝上七
나는 제비 비 속에 쌍쌍이라 / 飛燕雨中雙
하였는데, 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볼 만한 것이 매우 많다. 공은 시학(詩學)을 오로지 하지 않았으나 성정(性情)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 이러하였으니, 품성(稟性)이 고명하면 애쓰지 않아도 이런 시구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겠다. 회재(晦齋)의 이름은 이언적(李彦迪)이다.
○ 재상 최연(崔演)의 문장은 호건(豪健)하여 필한(筆翰)이 물 흐르는 것같다. 인종(仁宗)의 만시(挽詩)는 이러하다.
삼년상을 짧게 한 한 나라를 마음으로 낮추보고 / 三年短制心嫌漢
오월을 여막에 거처함은 예법이 등 나라보다 낫네 / 五月居廬禮過滕
전고(典故)를 쓴 것이 매우 적당하다. 임 사문 형수(林斯文亨秀)가 인종의 만장을 짓기를,
오늘의 눈물을 차마 가지고서 / 忍將今日淚
작년 옷을 거듭 적시랴 / 重濕去年衣
하였다. 중종(中宗)이 승하하고 1년이 되지 않아 인종(仁宗)이 승하하였으니, 말은 간략하나 뜻은 극진하였다.
○ 임 사문(林斯文 임형수(林亨秀)를 말함)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하는 한 연구(聯句)를 얻었는데, 그뒤에 황산곡(黃山谷)의 시집을 보니 거기에,
세상에 어찌 천리마가 없겠는가 / 世上豈無千里馬
사람 가운데 구방 고를 얻기 어렵도다 / 人中難得九方皐
라는 글귀가 있었다. ‘세상’이라 한 것은 나의 ‘천하’보다 못하고, 그의 ‘사람 가운데[人中]’라 한 것은 나의 ‘인간(人間)’보다 낫다.”
하였다. 생각으로는 황산곡의 이 말은 고금에 뛰어났으며, 그후로 어찌 여기에 겨룰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 우연히 합치되었다면 그는 천 년 뒤에 황산곡과 겨룬다 할 수 있다.
○ 유촌(柳村)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서울에 들어와 신기재(申企齋)에게, ‘근래에 누구의 가작(佳作)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임공 형수(林公亨秀)가 탐라(耽羅)에 목사로 나가,
산은 왕자국에 서려 있고 / 山蟠王子國
물결은 노인성을 차도다 / 波蹴老人星
라는 글귀를 얻었는데, 이것이 가장 아름답다.’ 하였소.”
하였다. 내가 호음에게 질문하였더니, 곧 말하기를,
“나는 그것이 좋은 줄 모르겠다.”
하였다.
○ 중국 사신 왕(王)씨가 올 때, 호음(湖陰)이 원접사(遠接使)로 가고, 홍재상(洪宰相) 인재(忍齋)공이 역시 원접사로 갔다. 환관(宦官) 천사도 함께 용만(龍灣)에 있었다. 호음이 홍 재상에게 주는 시의 셋째 연구에,
진지를 겨루어 기운 저상되니 의당 물러나야 하고 / 摩壘氣沮宜退舍
난초 향기 맡아 마음 꺾이니 함께 깃발 멈췄구나 / 襲蘭心折共停旄
내가 저(沮) 자가 음률[律]에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공(公)이,
“쇠(衰) 가가 어떠냐?”
물었다. 내가,
“최(摧) 자만큼 힘이 없습니다.”
하니, 공이,
“네가 옳다.”
하였다. 중국 사신에게 주는 시에,
접해와 진성 만여 리에 / 鰈海秦城餘萬里
몇 겹 구름 나무 놀을 격하였네 / 幾重雲樹隔煙微
라고, 하였다. 내가,
“운(雲) 자에 또 연(煙) 자를 붙여 온당하지 못한 것같습니다. 운(雲) 자를 춘(春) 자로 바꾸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네 말이 옳다’하였다. 공은 시를 적을 때마다 반드시 나로 하여금 붓을 쥐게 하였고, 매번 글자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생각이 나지 아니하면 나에게 하문(下問)하여, 답한 것이 뜻에 맞으면 바로 고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 내가 경성(京城)에 도착하여 춘(春) 자의 뜻을 가지고 동료들에게 품평을 청하니, 유항(柳沆)이 말하기를,
“너 역시 생각하지 못하였는가? 춘수(春樹)를 쓴 아래에는 운(雲) 자를 붙이는 것이 옳다마는 연(煙) 자는 본색어(本色語)가 아니다.”
하였다. 내가 탄복해 마지않았다. 운(雲) 자를 《황화집(皇華集)》에 적어 넣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인재(忍齋)는 이름이 홍섬(洪暹)이다.
○ 종곡(鍾谷) 성 징군(成徵君)은 다만 몸가짐이 매우 고상했을 뿐 아니라, 문장이 일세에 절묘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시를 보는 이가 드물었다. 그 시에,
한 번 종산 속에 들어오니 / 一入鍾山裏
소나무와 대 속 초가에 누웠구나 / 松筠臥草廬
하늘이 높은데 머리 어찌 구부리랴 / 天高頭宜俯
땅은 좁아도 무릎을 펼 만하네 / 地膝滕猶舒
이름난 이 어느 누가 살았는고 / 名下何人在
숲 사이 이 늙은이 남았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 손은 자연 끊어지니 / 柴門客自絶
거문고와 책을 파하는 날이 없더라 / 無日罷琴書
하였다. 이와 같은 작품은 비록 옛 사람들 시집 가운데 두더라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아깝도다.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 남명(南溟) 조 처사(曺處士 조식(曺植))가 사미정(四美亭) 호음(湖陰)의 시에 차운하였다. 첫째,
늙어서 매운지 신지 구미마저 잃었고 / 垂老辛酸口失宜
늙는 것 잊었으나 기는 잊지 못했네 / 縱然忘老未忘機
백 굽이 뚫린 깊은 골에 몸은 오히려 나그네요 / 百穿深壑身猶客
반쯤 잠든 높은 정자 꿈이 벌써 기이하다 / 半睡高亭夢已奇
병목(마을 이름)의 늦은 봄에 사람은 이미 갔고 / 竝木殘春人舊謝
사방(물이름)의 가랑비에 물 비로소 불어나네 / 舍邦微雨水初肥
장군은 유에 봉해질 계책 어찌 없겠는가 / 將軍肯少封留計
일개 서생이 또한 이곳에 있도다 / 一介書生亦在斯
하였고, 둘째에,
언덕에 날마다 즐거움 어기지 않아 / 斯干日日樂無違
이것을 버리고 하늘 이야기 한들 진기할 것 없네 / 舍此談天未是奇
지리산 삼장 사는 곳과 비슷하고 / 智異三藏居彷彿
무이 구곡(武夷九曲) 물이 비슷하구나 / 武夷九曲水依俙
담에 덮은 기와는 늙어 바람에 나부끼어 가고 / 鏝墻瓦老風飄去
돌길 갈림길 깊어도 말이 스스로 아네 / 石路歧深馬自知
흰 머리로 거듭 오니 옛 주인이 아니고 / 皓首重來非舊主
한 해 봄 다 가는데 옷 없다는 시 읊조린다 / 一年春盡咏無衣
하였다. 말은 고상하고 뜻이 깊어 얕은 식견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일 반드시 양자운(揚子雲)이 나와야 이것을 알 것이다.
○ 정승 김귀영(金貴榮)이 영남(嶺南) 관찰사로 나갔을 때 그 거제현루(巨濟縣樓)의 시는 이러하다.
붉은 단풍 가득한 만산에 자주 말을 멈추고 / 紅樹萬山頻駐馬
흰 구름 천 리에 홀로 누에 오르누나 / 白雲千里獨登樓
가을을 슬퍼함과 어버이를 생각하는 뜻이 아울러 나타나 있다.
○ 송이암(宋頣庵)이 서원(西原 청주의 옛 이름) 기생에게 주는 시에,
헤어질 때 띠를 풀어 옷 대신 남겨두니 / 臨分解帶當留衣
이것으로 가는 허리 한 둘레 둘러보라 / 敎束纖腰玉一圍
상상컨대, 단장하고서 더욱 아름다울 제 / 想得粧成增宛轉
다른 사람 끌어 비단 이불로 들어가리 / 被他牽挽入羅幃
하였다. 향렴체(香奩體)가 매우 사랑스럽다. 이암(頣菴)은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다.
○ 사암(思菴) 박 정승(朴政丞)이 젊었을 때 승방(僧房)에 자면서 시를 짓기를,
취하여 산가에 자고 깨어보매 의심되니 / 醉睡山家覺後疑
백운이 골에 가득하고 달이 잠길 때로다 / 白雲平壑月沈時
소연히 홀로 걸어 숲 밖으로 나와보니 / 翛然獨出脩林外
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는 새가 아는구나 / 石逕笻聲宿鳥知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숙조지(宿鳥知) 선생이라 하였다. 이것은 정곡(鄭谷)의 자고시(鷓鴣詩)와 조하(趙嘏)의 의루시(倚樓詩)와 같은 따위다. 박상국(朴相國)의 시는 이백(李白)에게서 나왔는데, 청신(淸新)하고 뛰어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매우 많다. 내가 가야산(伽倻山)에 노닐면서 그 찌푸림을 본떠서[効顰] 지어보았다.
세상 일은 홍교 밖이요 / 世事紅橋外
지팡이 소리는 학의 꿈속이로다 / 笻聲鶴夢中
이것은 이른바 제 능력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사암(思菴)의 이름은 박순(朴涥)이다.
○ 관원(灌園) 박계현(朴啓賢)이 조송강(趙松岡)에게 올린 시의 일련(一聯)에,
시명은 일성적을 사양하지 않고 / 詩名不讓一聲笛
정승의 사업은 아직도 반부 글에 남아 있다 / 相業猶存半部書
하였다. 전고가 매우 타당하다.
내가 학관(學官) 유이손(柳耳孫)에게 보낸 시에,
하였으니, 이것은 호랑이를 그리다가 개를 그리고 만 것이다.
○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 19) 무렵에 서울에 말이 전해지기를,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제천정(濟川亭) 벽에 붙였으니,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일찍이 전조에 오얏 심는 것을 보았는데 / 曾見前朝種李辰
동풍이 열두 번째 봄이로다 / 東風一十二回春
학은 화표의 천 년 기둥에 돌아오니 / 鶴歸華表千年柱
눈물로 청산의 한 줌 흙을 적시더라 / 涙洒靑山一掬塵
단풍 언덕 새벽종의 신륵사요 / 楓岸曉鐘神勒寺
잔디밭 저녁 피리 광나루에 울리더라 / 煙莎晩笛廣陵津
맑은 가을 노 소리는 여강을 지나가니 / 淸秋鼓枻驪江去
누 위의 어느 누가 여동빈을 알아보리 / 樓上何人識洞賓
어느 사람이 지은 것인지 이상한 말이 돌아다녔다. 어떤 사람은 신선의 시라 하였다. 내가 일찍이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과 이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청강이 말하기를,
“내가 젊을 때부터 이 시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내 친구 아무개가 지은 것이다.”
하였다. 그것을 근일에 지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정자의 벽에 걸었다는 말 역시 맹랑한 말이다.
○ 이증영(李增榮)이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있으면서 가장 잘 다스렸다. 합천사람 사문 주이(周怡)가 그에게 송별시를 지어주기를,
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소인은 사람에게 돈을 준다.”
하였으니, 이 글과 뜻이 아울러 묘한 것이다.
○ 가정(嘉靖) 병진년 무렵에 명(明) 나라 사람 유응기(劉應箕)가 왜구(倭寇)에게 잡혀 배 안에 감금되었다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혀 서울에 왔다.
그가 시를 지었다.
전쟁을 원망하지 하늘을 원망하랴 / 只怨干戈不怨天
고국 떠나 길은 천리 만리 / 離鄕去國路千千
근심에 싸인 병골은 쇠한 운명 슬프고 / 愁纒病骨哀衰運
눈물 홍안에 뿌려 젊은 나이 우노나 / 涙洒紅顔泣盛年
달 보며 고향 생각 서쪽 국경 밖이요 / 見月思歸西塞外
구름 보며 마음은 북당 앞으로 달리누나 / 看雲心逐北堂前
모구의 칡을 보니 세월 얼마 흘렀는고 / 旄丘見葛何多日
고생으로 외로운 몸 여기서 곤욕 당하네 / 尾瑣孤身因此邊
이 재상(李宰相) 아계공(鵝溪公)이 젊었을 때 이 시에 차운하여 지었다.
곤의 바다 고래 물결 하늘에 닿아 아득하고 / 鯤海鯨波杳接天
남쪽 형국(초 나라 땅) 아득하니 몇 삼천 리 되는고 / 南荊迢遞幾三千
이국 땅에 유리하니 오직 외로운 그림자만 / 流離異國惟孤影
타향에 굴러굴러 한창 어린 나이로다 / 飄泊他鄕是弱年
나비꿈 때때로 국경 밖에 전하지만 / 蝶夢有時傳塞外
기러기 편지는 집 앞에 닿을 길이 없네 / 雁書無路抵家前
알겠노라 그대의 밤마다 어버이 그리는 생각 / 知君夜夜思親處
가을비 쓸쓸히 객침가를 적셔주리 / 秋雨蕭蕭客枕邊
당시 유(劉)의 나이 15~16세요, 아계공의 나이는 17~18세여서 나이는 모두 어렸으나 시는 이미 문장을 이루었다. 자고로 일찍 현달한 사람은 반드시 숙성(夙成)하는 법이다. 아계는 지금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유응기도 역시 현달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아계(鵝溪) 상공 이산해(李山海)는 나이 7~8세도 되기 전에 능히 큰 글자를 썼고, 이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글을 다 쓰고 나면 발에 먹물을 묻혀서 종이 끝에 자국을 찍으니,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13세에 호서(湖西)의 향시(鄕試)를 보아 해원(解元 향시의 장원)이 되었으니, 천재가 아니면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그를 지목하기를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일찍 청운(靑雲)에 올라, 이름이 자자하더니, 40이 겨우 넘자 반열은 구극(九棘)에 올랐고, 수년이 못 되어 뛰어 홍화(弘化)에 오르고, 50에 정승이 되었으니, 근래에 드물게 보는 일이다. 이는 재주와 명예를 함께 가진 사람이라 할 것이다.
○ 상사(上舍) 정작(鄭碏)의 우인(友人)을 보내는 시에,
친우는 천 리에 행색이 있는데 / 故人千里有行色
늙은이는 한 봄을 좋은 회포 없어라 / 老子一春無好懷
하였으니, 만당(晩唐)의 시체(時體)를 깊이 얻었다.
○ 두보(杜甫) 시에,
하늘로부터 왔으매, 글쓴 곳이 젖었고 / 自天題處濕
여름을 당하여도 입으니 시원하다 / 當夏着來淸
라고 한 자천(自天)이나 당하(當夏) 등 글자는 경전(經傳)에서 온 말이다. 시에 경전에 있는 글을 쓰는 것은 예부터 그 법이 있는 것이다. 내가 학사 어숙권(魚叔權)에게 준 시에,
시단에선 내가 못나서 달아나면서 뒤에 섰고 / 詩壇我屈奔而殿
술자리에선 그대 높으니 술잔은 그대 먼저네 / 酒社君尊酒則先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한단(邯鄲)의 걸음을 배우는 것이다.
○ 내 친우 박지화(朴枝華)가 남의 만장(挽章)을 쓴 시에,
구만리 높은 하늘 고래 타고 날았다가 / 天高九萬騎鯨去
햇수로 삼천 년에 학이 되어 돌아오오 / 歲到三千化鶴回
하였다. 자못 시법(詩法)을 체득하였다.
○ 사문 조징(趙澄)이 영남 도사(嶺南都事)로 있으면서 제영(題詠)을 즐겨하여 판(板)에 새겨 벽에 걸었는데, 시와 부(賦)가 반반씩 되니 사람들이 기롱하였다. 사문 신의충(申義忠)은 조징과 동년(同年) 친우였다. 공해(公廨) 변소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측간에 졸구가 없는 것 보니 / 厠間無拙句
조가 아직 안 온 것을 알겠도다 / 知趙不曾來
신후(申侯 후(侯)는 원이라는 뜻)는 이것으로 이름이 났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申)의 10자가 조(趙)의 백 편을 누를 수 있다.”
하였다.
○ 학사 신응시(辛應時)가 중국 사신 구희직(歐希稷)을 이별하는 시에,
해국의 꿈은 길이 북극에 있고 / 海國夢魂長北極
초강 안개비는 또 동풍이네 / 楚江煙雨又東風
하였으니, 매우 좋다. 구공(歐公)은 초(楚) 땅의 사람이었다.
○ 정랑(正郞) 하응림(河應臨)은 매우 시명(詩名)이 있었다. 신녕현(新寧縣) 죽정(竹亭)의 시에 차운하였다.
햇빛이 이미 산빛을 어둡게 하고 / 日色已將山色瞑
나그네 마음은 대 속과 함께 비었더라 / 客心還與竹心空
그 외의 아름다운 것이 한둘이 아니다.
○ 천사(賤士) 강윤정(姜允精)은 젊을 때부터 시로 이름났다. 그의 아방궁시(阿房宮詩)에 이런 글귀가 있다.
만 백성의 힘을 허비하여 / 虛費萬民力
석 달의 붉은 불길 만들었네 / 圖爲三月紅
군산문적시(君山聞笛詩)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지는 달 아직 남아 강물은 망망한데 / 落月未落江茫茫
한 곡조 아련하니 찬 조수 소리더라 / 一曲杳隨寒潮聲
사림(士林)들이 전하며 읊어 온다.
○ 나의 친우 임필(林苾)군은 많은 책을 널리 보았고 문장도 잘 지었는데, 특히 시에 뛰어났다. 그의 낙양명원시(洛陽名園詩)에,
곡수ㆍ낙수는 깊은 해자요 / 穀洛爲深塹
숭산ㆍ망산
은 두터운 담 / 嵩邙作厚垣
경기는 삼진의 등골에 합하였고 / 畿合三晉脊
서울은 구주의 뿌리를 잡았구나 / 都扼九州根
희씨가 처음 열었던 도읍 / 姬氏初開邑
당 나라 사람이 처음 동산을 세웠네 / 唐人始立園
군주는 전성한 날을 맞이하고 / 君逢全盛日
신하는 태평의 은혜 받았네 / 臣受太平恩
갑제는 가지런히 구름과 줄을 짓고 / 甲第齊雲列
높은 누각은 물을 눌러 껑충 뛴듯 / 危樓壓水騫
낙화는 만호에 날아 있고 / 落花飛萬戶
수양버들은 천문을 가리었다 / 垂柳掩千門
이것은 30운(韻)이나 되는 긴 것으로 다 적지 못한다. 호음(湖陰)이 보고, ‘아주 좋다, 아주 좋다.’하였다. 이상 세 사람(신응시ㆍ강윤정ㆍ임필은 시학(詩學)에 뛰어난 점이 많았으나 불행히도 모두 일찍 죽었다. 만약 하늘이 그들에게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어찌 이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는가?
○ 강윤정(姜允精)의 군산문적시(君山聞笛詩)는 장단구(長短句) 30여 운(韻)으로 되었는데, 대관재(大觀齋) 심의(沈義)공이 그 시의 짧은 구는 두 자를 더 보태고 긴 구는 몇 자를 줄여서 모두 칠언(七言)으로 하여 이 글을 자기 문집에 실었다. 대관재는 일대의 거장(巨匠)이니, 어찌 남의 글을 도둑질하였겠는가? 반드시 한 창려(韓昌黎)가 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의 호)의 월식시(月蝕詩)를 모방한 것을 본딴 것이리라. 그 제목을, ‘희롱으로 군산문적시에 차운하다’ 한 것으로 보아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 《대관집(大觀集)》중의 ‘두 마리 소를 그린 부[畫二牛賦]’는 실은 그 중씨(仲氏) 정승(政丞 심정(沈貞))이 지은 것을 일부러 자기 문집에 실었고, ‘월부를 모방한 것[擬月賦]’이란, 그의 조카 승지 사순(思順) 공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편이 《대관집》에 실린 것은 잘못이다. 그의 종손(從孫)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의 호) 상공(相公)이 말한 것이다.
○ 중국 조사(詔使) 장승헌(張承憲)의 《황화집(皇華集)》의 서(序)는 조정에서 호음(湖陰)에게 짓도록 한 것인데, 마침 병이 나서 어숙권(魚叔權) 공에게 초안을 잡게 하여 자신이 수십 자를 고쳤다. 그러므로 문집에는 싣지 않았다. 친히 어예미(魚曳尾)에게 들은 것이다. 어(魚)의 헌호(軒號)다. 혹은 야족(也足)이라 하기도 한다.
○ 옛날 책사종(翟嗣宗)이 회남위(淮南尉)로 있었는데, 그때 감사(監司)에게 매우 곤욕을 당하였다. 역관(驛館)에서 거미를 제목으로 시 한 수를 지었다.
실을 짜며 왕래하니 북같이 빠른데 / 織絲來往疾如梭
늘 공중에 올라 그물 만들기 좋아하네 / 長愛騰空作網羅
남을 해칠 몸과 마음 매우 적지마는 / 害物身心雖甚少
하늘에 늘어진 그물도 또한 많지 않구나 / 漫天網紀亦無多
숲 사이 자는 새들 너를 미워하지마는 / 林間宿鳥應嫌汝
발 아래 나는 벌레 그가 가장 너를 두려워한다 / 簾下飛虫最懼汝
사마귀가 매미 잡는 것 배우지 말지어다 / 莫學螳螂捕蟬□
모름지기 알아야지. 참새가 너를 잡을 줄을 / 須知黃雀奈君何
임자중(林子中)이 그를 불러 경박한 시를 짓지 말라고 꾸짖었다.
○ 우리 동방(東方)에도 역시 무사(武士) 이장길(李長吉)이 있었는데, 그가 의흥 현감(義興縣監)으로 있을 때 백성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자하 자하 또 자하야 / 子賀子賀復子賀
관탕 민재 모두 비우고 / 官帑民財一倂空
오직 강산은 옮기지 못하여 / 惟有江山移不得
화공을 명하여 병풍 위에 그렸네 / 命工圖畫上屛風
자하(子賀)는 장길의 자(字)다..
○ 또 사문 조희(曺禧)가 성주 목사(星州牧使)였다. 어떤 사람이 역(驛)의 벽(壁)에 적었다.
하늘 위의 남궁자요 / 天上南宮子
구름 사이 이 사군이라 / 雲間李使君
조교는 키가 구 척이니 / 曺交長九尺
뉘 능히 우열을 가릴꼬 / 優劣孰能分
상공 남궁숙(南宮淑)ㆍ상공 이윤경(李潤慶)은 이 고을에 원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治績)에 명성이 있었다. 또,
백성이 비록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나 / 民雖結舌摠無言
가죽 속에는 각자의 춘추가 있다 / 皮裏春秋各自存
장초의 알음 없는 것이 정말 즐거우리 / 萇楚無知眞可樂
이 몸 어디메 도원으로 피할꼬 / 此生何處避桃源
하였다. 그는 원성을 듣게 만들었으니, 과연 좋지 못하나, 조롱하는 사람도 또한 잘한다 할 수 있겠는가?
근년에 어떤 사람이 장편을 지어 종루(鐘樓) 기둥에 걸어서 낱낱이 조정 사대부(士大夫)를 헐뜯었으니, 진실로 조정에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바로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일 것이다. 시는 비록 볼 만하였으나, 실로 책사종(翟嗣宗)의 죄인인 것이다.
○ 우리 동국(東國)에 무인(武人)으로 시에 능한 사람은 박휘겸(朴撝謙) 이후로 전혀 이름난 사람이 없다. 중묘조(中廟朝)에 중추(中樞) 이사증(李思曾)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시에 탐닉하는 버릇이 있었다. 함경 일도의 시판(詩板) 중에 상정(橡亭)이라 한 것이 그 사람이다. 그 시는 혹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근세에 함양군(咸陽郡)에 한 무사가 있는데, 성은 정(鄭)이요, 이름은 척(陟)이며, 스스로 호를 죽계(竹溪)라 한다. 그의 시에,
죽계의 늙은이는 벼슬을 마다 하고 / 竹溪窮老謝籫纓
이 누각에 누웠으니 병든 몸 가벼워라 / 臥着玆樓病骨輕
물새 한 울음에 산비도 멎을시고 / 水鳥一聲山雨歇
구름에 새어나온 저녁 놀 반쯤 밝았더라 / 漏雲殘照半邊明
하였다. 무인이라고해서 가벼이 볼 수 없다.
○ 조송강(趙松岡)이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로 나와 나에게 말하기를,
“열읍(列邑)의 제영(題詠)을 두루 보니, 서사가(徐四佳 이름은 서거정(徐居正)) 공의 울산(蔚山) 동헌(東軒) 시에,
누각은 악양루와 겨루어 천하에 제일이요 / 樓敵岳陽天下一
땅은 봉래도와 인접하여 바다 가운데 셋이로다 / 地隣蓬島海中三
한 것이 가장 기특하고 장하였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상공 안침(安琛)의 창녕(昌寧) 추월헌(秋月軒) 시에,
물결은 흩어져서 소동파의 백을 짓고 / 搖波散作東坡百
그림자 대하니 정말 이태백의 셋이로다 / 對影眞成李白三
라고 한 것과 어느 것이 낫습니까?”
하니, 공은,
“저것은 웅장하고 이것은 공교로우니, 서로 막상 막하이다.”
하였다. 내가 울산(蔚山) 남헌(南軒) 시에, 차운한 것은 이러하다.
백조 가고 난 거기에 바다 있고 / 白鳥去邊惟有海
청산 다한 곳에 다시금 마을 있다 / 靑山盡處更有村
이 역시 사가정(四佳亭)과 비슷한 뜻이다.
○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선연(嬋姸)이라는 동(洞)이 있다. 빽빽이 들어박힌 무덤은 모두 이원제자(梨園弟子)들이 묻힌 곳이다. 이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청천(聽天) 심 상공(沈相公)이 정을 쏟았던 기생도 이 안에 묻혀 있다. 공이 한 절구를 지었으니, 그 삼구와 사구에,
장부의 한 죽음을 끝내 면치 못할 바엔 / 丈夫一死終難免
원하노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었으면 / 願作嬋姸洞裏魂
하였다. 내가 홍양(洪陽)에 가서 놀았는데, 그때 공은 호서 절도사(湖西節度使)로 장차 이 읍에 부임하려 할 때 내가 교방가요(敎坊歌謠)를 짓기를,
인생의 뜻 맞은 곳 남북 구별없으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 속 혼일랑 아예 되지 마오 / 莫作嬋姸洞裏魂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몹시 웃었다.
○ 심 상공(沈相公)의 시는 평담(平澹)하고 난숙(爛熟)하여 조탁(雕琢)한 흔적이 없고, 백향산(白香山 백거이(百居易))의 기풍이 있어 세상에 풍화(風花)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중시하지 않았으나, 나 혼자 애완(愛玩)하여 버리지 못하니, 비록 영인(郢人)의 도끼 바탕[郢質]이라 하여도 좋다.
고금 중국 사신의 시를 고하(高下)에 대해 평한 이가 없었다. 내가 호음(湖陰)에게 품평을 청하니, ‘기순(祈順)이 제일이요, 예겸(倪謙)ㆍ동월(董越)이 다음이요, 김식(金湜)은 칠언 율시(七言律詩)가 극히 좋고, 장영(張寧)은 좀 미숙한 것같다.’ 하였다. 공은 일찍이 동규봉(董圭峯 동월(董越))의,
강 비 추위를 빚어 나무 끝에 오고 / 江雨釀寒來樹抄
재 구름 어둠을 나누어 바위 언덕에 떨어진다 / 嶺雲分瞑落巖阿
라는 구를 읊으면서 찬양한 적이 한번만이 아니었다.
○ 무릇 중국 사신이 평안 역관(平安驛館)에 올 때면, 동인(東人)의 시판(詩板)을 일체 떼어버리고, 단지 대동강(大同江) 선정(船亭)에 정지상(鄭知常)의,
비 갠 긴 둑에 풀빛은 짙은데 / 雨歇長堤草色多
라는 시만 남겨두었다. 호음 상공(湖陰相公)이 말하기를,
“목은공(牧隱公)의 부벽루(浮碧樓) 시에,
어제는 영명사를 지나 / 昨過永明寺
오늘 부벽루에 올랐네 / 今登浮碧樓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 城空月一片
바위는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로다 / 石老雲千秋
한 것은 절묘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중국 사신 예겸(倪謙)이 발을 구르며 칭찬하였다. 이것이 정지상의 시에 미치지 못하는가?”
하고, 이것 역시 남겨두고 떼지 않았다.
○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는 강산 풍물(江山風物)이 서로 으뜸을 겨루는데, 영남루는,
가을 깊어 큰길엔 붉은 단풍 비쳐 있고 / 秋深官道映紅樹
날 저문 어촌에는 흰 연기 난다 / 日暮漁村生白煙
한 낚시 어부는 빗소리 밖이요 / 一竿漁父雨聲外
십리길 나그네는 산 그림자 가이로세 / 十里行人山影邊
라고 한 등의 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촉석루는 전할 만한 가작이란 하나도 없다. 한 사람의 시작으로 영남에는 뛰어난 시가 있고, 촉석루에는 옹졸한 것은 촉석루의 기승(奇勝)이 영남루보다 나아서 잘 형용을 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하는데,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5~6인이 먼저 와 있었다. 땅에 글을 적어 서로 문답하고, 한 절구를 지어보였다.
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이 모였으니 / 天朝禮部風萍集
천리의 관광객은 각각이 다른 고향 / 千里觀光各異鄕
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이별하면 / 最苦明朝又分手
푸른 하늘 가을 숲이 정히 푸르리 / 碧天秋樹正蒼蒼
내가 곧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었다.
서리 바람 나무에 불어 성겨 누른 잎 떨어지니 / 霜風吹樹隕疏黃
소슬한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도다 / 蕭瑟聲寒苦憶鄕
같은 나그네로 내가 가장 먼 곳이니 / 同作旅遊吾最遠
바다 하늘 나직한데 흩어진 산 푸르구나 / 海天低襯亂山蒼
서로 끌며 몰려와 보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중국 선비들의 과분한 칭찬이 이미 감사한데, 또 선생은 무슨 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재주를 보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번 걸음에 무령현(撫寧縣) 벽에 한 율시를 지어 붙였다. 그 1 연(聯)에,
말 통하려고 땅에 글 쓰기 번거롭고 / 通言煩畫地
악을 보러 중국을 방문한 것 기쁘다 / 觀樂喜朝天
하였다. 그후 임술년간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와서 말하기를,
“어떤 현의 관사가 다 낡아 다시 지었는데, 그 시를 쓴 구벽(舊壁)은 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였다. 케케묵고 누추한 시에서 뭐 취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 나의 친우 정화(鄭和)는 문익공(文翼公)의 서자로 선천(宣川)에 살았는데, 당시 사문 유영길(柳永吉) 공이 이 군에 원으로 갔다. 정화가 해구(海鷗) 알 12개를 원에게 올리니, 원이 편지로 답하기를,
“그대가 바야흐로 바닷가에 살면서 먼저 12백구를 죽였으니, 후일에 망기(忘機)하면 누구와 벗할 것인가?”
하였다. 이래서 정화가 살풍경(殺風景)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내가 용만(龍灣) 여인에게 정을 쏟아 그를 위하여 집 한 채를 지어 주었다. 수년이 못 가 그 사람이 집을 뜯어 이사해 버렸다. 야족(也足) 어공(魚公) 야족(也足)은 어 학관(魚學官)의 호 이 용만을 19번이나 출입하였으나, 한번도 구룡연(九龍淵)을 보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나와 그도 함께 ‘살풍경’이란 별명을 얻었다. 내가 시를 지었다.
백구 죽인 늙은이는 고기 없는 연고이고 / 殺鷗病叟緣無肉
집 뜯어 간 가인은 오지 않는다 원한이네 / 撤屋佳人怨不來
만약 살풍경 등급대로 술을 마신다면 / 若第殺風浮白飮
내가 당연하게 셋째 잔을 마셔야지 / 我今當飮第三杯
다음날, 야족공이 배를 타고 구룡연을 거슬러 올랐으나 바람이 세어 밀리고 말았다. 내가 또 먼저 시에 첩운(疊韻)하여 지었다.
아홉 용이 힘을 모아 배 하나를 물리치고 / 九龍倂力排舟退
백조가 떼를 지어 문죄하러 오누나 / 白鳥成群問罪來
이것은 어(魚)와 정(鄭)을 아울러 조롱한 것이다. 내가 집을 지을 때, 목사(牧使) 유경심(柳景深)이 그 집에 편액(扁額)하면서 ‘집권(執權)’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이어 낭패를 당하니,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호) 상공이 선위사(宣慰使)로 용만에 와서 그 시에 차운하여 나를 조롱하기를,
집권한 늙은이가 권을 버리는 잔을 마시다니 / 執權翁飮釋權杯
하였으니, 고사를 잘 썼다고 할 만하다.
○ 중국 사신 왕경민(王敬民)의 ‘새벽에 출발하여 조서를 반포하러 가다[早行頒詔]’라는 시에,
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계신 듯 두터운 정으로 조서를 반포하니 / 天威咫尺頒殊渥
동국의 의관들이 모두들 절하며 조아리네 / 東國衣冠盡拜稽
하니, 원접사(遠接使) 율곡(栗谷) 이이(李珥) 상공이 그 운에 차운하여 지었다.
은은한 만세 소리 상서로운 안개 드날리니 / 殷殷呼嵩騰瑞霧
삼한의 머리들이 일시에 조아리네 / 三韓厥角一時稽
대개 계(稽) 자는 다 측성(仄聲)으로 쓰이는데, 왕공이 이미 틀린 것을 율곡이 따라 틀리게 썼으니, 어째서일까? 내가 그 시를 상공에게 평하니, 상공이 곧 운자를 바꾸었다. 그러므로 《황화집(皇華集)》에 실은 것은 초고와 다른 것이다. 율곡은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박식 다문(博識多聞)한데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이렇게 착오하여 웃음거리를 면치 못할 뻔하였는데, 하물며 재주가 율곡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 임무를 맡은 자는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중국에 나만호(羅萬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詩)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임오년(1582, 선조 15)에 황태자가 탄생하였을 때에 조서를 받들고 우리 나라에 오게 되었다가, 나이 늙었기 때문에 황홍헌(黃洪憲) 공과 바꾸게 되었다. 나(羅)의 ‘계문에서 사냥을 보다[薊門見獵]’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눈에 띄는 언덕들은 백 번 전쟁한 땅 / 滿目邱墟百戰餘
나그네 심정은 시든 풀처럼 처절하다 / 旅情衰草共悽如
차운 산 옛 토성에 가을 사냥 만났으며 / 寒山古堠逢秋獵
먼 물 외로운 등불에 밤 고기잡이 보이더라 / 遠水孤燈見夜漁
집은 소상강에 저녁 비도 많은 곳 / 家在瀟湘多暮雨
기러기 분포에서 날아오나 고향 편지 없더라 / 雁來湓浦少鄕書
친구는 한 번 이별에 삼천 리 / 故人一別三千里
슬프다 동과 서에 정처 없구나 / 惆悵東西未定居
구법(句法)이 원활하여 이른바 판자 위에 탄환(彈丸) 구르는 것같다. 이것은 전해 들은 것이고, 그의 작품을 많이 얻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 여자로서 시를 잘 짓는 사람은 예로부터 드문데, 하물며 재인(才人)을 얻기 어려운 지금에랴? 옥봉 여도사(玉峯女道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낭군이 지방의 수령이 되어 공사로 서울에 갔다. 그때 북쪽 오랑캐가 침입하였다. 여자가 시를 지어 낭군에게 부쳤다.
싸우는 것은 비록 서생의 길과 다르지만 / 干戈縱異書生道
나라 근심으로 응당 머리 셀 것이네 / 憂國唯應鬢髮蒼
적을 칠 이때 곽거병을 생각하고 / 制敵此時思去病
오늘날 산가지 놀리는 것 장량을 생각하네 / 運籌今日憶張良
원성의 싸움 피는 산하를 붉게 물들이고 / 源城戰血山河赤
아보의 요망한 기운 일월도 누르스름 / 阿堡迷氛日月黃
서울 소식은 아직 오질 않으니 / 京洛音徽尙不達
창호의 봄빛 처량하네 / 滄湖春色亦悽涼
창호란 사는 곳의 물 이름이다. 그 낭군이 집에 돌아오자 또 한 절구를 적었다.
버드나무 강 언덕에 오마의 울음 소리 듣고 / 柳外江頭五馬嘶
반을 깨고 수심에 취하여 누각을 내릴 때라 / 半醒愁醉下樓時
봄꽃 붉은 빛이 야위어져 거울 보기 부끄러우나 / 春紅欲瘐羞看鏡
시험 삼아 매창 향해 반달 눈썹 그려보네 / 試畫梅窓却月眉
두 시는 청신 원활하고 장하고 고와서, 부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여 매우 가상하다. 그는 사문 조원(趙瑗)이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 진성(晉城)에 승이교(勝二喬)라는 기생이 있었다. 어릴 때 이름은 억춘(憶春)이었으며, 마관(馬官 찰방(察訪)) 김인갑(金仁甲) 군이 사랑하였다. 그에게 시를 가르치니, 천성이 매우 영리하여 자못 시어(詩語)를 이해하였다. 작품도 간혹 맑고 고운 것이 있었으니,
강양관 안에 서풍이 이니 / 江陽館裏西風起
뒷산은 취하려 하고 앞강은 맑았어라 / 後山欲醉前江淸
사창에 달은 밝고 온갖 벌레 우짖으니 / 紗窓月白百虫咽
홀로 누운 찬 이불에 꿈조차 못 이룬다 / 孤枕衾寒夢不成

서풍은 의상에 불고 / 西風吹衣裳
세월 따라 모습도 쇠하여 가네 / 衰容傷日月
연당에 가을비 성기고 / 蓮堂秋雨疏
이슬 가지에 찬 매미는 흐느껴 울부짖네 / 露枝寒蟬咽

서리 오는 밤 기러기 날아 떨어지는 소리 / 霜雁墮飛聲
적막하게 산성을 지나간다 / 寂寞過山城
그대 생각하는 외로운 꿈 깨니 / 思君孤夢罷
가을달 창문에 밝게 비치네 / 秋月照窓明
이와 같은 작품은 매우 이소(離騷)의 운치가 있다. 나이 30이 못 되었으나, 젊고도 총민(聰敏)하였다. 만약 스스로 중단하지 않았더라면 옥봉여도사(玉峯女道士)와 같은 지경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주D-001]두심언(杜審言)에게 …… 격 : 두심언은 당(唐)의 이름난 시인인데, 그의 손자가 두보다.
[주D-002]부상(扶桑) : 해가 뜨는 동쪽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킨다.
[주D-003]길 주서 고리(吉注書故里) : 고려 말기에 길재(吉再)가 주서(注書)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善山)에 돌아가서 뒤에 조선의 벼슬을 받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주D-004]함련(頷聯) : 율시의 앞의 연구(聯句)로서 제3, 제4의 두 구.
[주D-005]수양산 …… 풀이요 : 주(周) 나라가 은(殷) 나라를 멸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그것을 불의(不義)라 하여 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주D-006]율리의 …… 옛터네 : 도연명(陶淵明)이 진(晉) 나라 신하로서 진 나라를 빼앗은 송(宋)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율리(栗里)에서 농사 짓고 살았다.
[주D-007]이십사교(二十四橋) : 주흘산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주D-008]성패로 …… 논하는 것 : 촉한(蜀漢) 제갈량(諸葛亮)이 위(魏) 나라를 토벌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여 성패(成敗)를 가지고 그의 재주를 평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D-009]봄꿈은 …… 어지럽고 : 진 시황(秦始皇)의 아들 이세(二世) 때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나라가 곧 망하였다.
[주D-010]실없는 …… 삼가 : 춘추 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의 권신 맹손(孟孫)ㆍ숙손(叔孫)ㆍ계손(季孫)을 가리킨다.
[주D-011]계찰(季札) : 춘추 시대(春秋時代) 오(吳)의 공자(公子) 계찰(季札)이 주(周) 나라에 관광(觀光)하여 각국의 음악을 들었다.
[주D-012]장건(張騫) : 한 무제(漢武帝) 때에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를 개통하였다.
[주D-013]종고는 …… 않는다 : 부귀가 자기에게 당치 않다는 뜻이다. 《장자(莊子)》에, “종고(鐘鼓)는 안(鷃 새 이름)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 하였다.
[주D-014]환괘(渙卦) : 《주역(周易)》 64괘의 하나.☰☵의 형상으로 되었음.
[주D-015]곤괘(坤卦) : 《주역(周易)》 8괘의 하나. ☷의 형상으로 되었음.
[주D-016]막막(漠漠) 음음(陰陰) : 당(唐) 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에, “막막수전비백로(漠漠水田飛白鷺), 음음하목전황리(陰陰夏木囀黃鸝)”라는 시가 있는데, 이것은 남의 오언시(五言詩)에다가 ‘막막 음음’의 글자만을 보태어 표절하여 칠언시(七言詩)를 만든 것이다.
[주D-017]맑은 …… 사현위요 : 유송(劉宋) 때 시인 사현휘(謝玄暉)의 ‘맑은 강은 깨끗하기 비단같다[澄江淨如練]’는 시가 유명하다.
[주D-018]초생달 …… 한 이부 :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새 달은 낫을 갈아놓은 것 같다[新月似磨鎌]”는 글귀가 있다. 이부(吏部)는 한퇴지의 관직이다.
[주D-019]창[槊] 비낀 …… 짓는다 : 조조(曹操)는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어 군중에서 창을 비껴들고 시를 지었다.
[주D-020]옥문관(玉門關)에 …… 일이니 : 한(漢) 나라 반초(班超)가 서역(西域)에 도호(都護)로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여, “다만 생전에 옥문관(서역과의 경계)에 들어가는 게 소원이다.” 하였다.
[주D-021]명년에 …… 들 것이오 : 금원(禁苑) 안에 있는 못의 이름이다. 곁에 중서성(中書省)이 있어서, 중서성 또는 재상을 비유해서 말한다.
[주D-022]삼인 : 은(殷) 나라 말기의 세 충신, 즉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을 가리킨다.
[주D-023]용 죽고 :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칠 때에 조룡대(釣龍臺)에서 용을 낚았다 한다.
[주D-024]말들은 …… 응했구나 : 하늘에 방성(房星)이라는 별이 있는데 말[馬]은 방성의 정기를 타고 났다 한다. 제주도에 좋은 말이 많이 난다는 뜻이다.
[주D-025]우는 …… 일곱이요 : 《시경(詩經)》에, “뻐꾹새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가 일곱이로다[鳲鳩在桑 其子七兮].” 한 구절이 있다.
[주D-026]삼년상을 …… 한(漢) 나라를 : 한 문제(漢文帝)가, “대공(大功)은 15일, 소공(小功)은 14일, 시마(緦麻)는 7일만에 복을 벗으라.”는 유조(遺詔)를 내려, 달을 날로 바꾸는[以月易日] 단상제(短喪制)가 그뒤부터 행해졌다. 《史記 漢文帝紀》
[주D-027]여막에 …… 등(滕) 나라보다 : 등 문공(滕文公)이 그의 부왕 등 정공(滕定公)의 상에 종래의 단상제(短喪制)를 무시하고 고례(古禮)의 삼년상(三年喪)을 행하면서 다섯 달 여막에 거처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주D-028]천하에 …… 어렵도다 : 진 목공(秦穆公)이 천리마를 구하려고 말을 잘 보는 백락(伯樂)의 제자 구방고(九方皐)를 보냈더니, 석 달만에 돌아와서 천리마를 구해 놓았다고 아뢰었다. “무슨 말이냐?” 물으니, “누런 암말입니다.” 하였다. 목공이 사람을 보내어 말을 몰고 오니, 검은 수말이었다. 목공이 백락에게 “자네의 제자가 수말인지 암말인지, 누른지 검은지도 모르니, 어찌 말을 알아 보았겠는가?” 하니, 백락은, “구방고는 말의 천기(天機)만 보기 때문에 속만 알고 겉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그 말이 천하에 좋은 말이었다.
[주D-029]노인성 : 옛날 제주도의 성주(星主)가 곧 왕자였다. 제주에는 남극 노인성(南極老人星)이 비친다 한다.
[주D-030]진지를 겨루어 : 시(詩)로써 서로 겨룬다는 뜻이다.
[주D-031]난초 …… 맡아 : 공자(孔子)의 말에, “어진 사람과 사귀면 난초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절로 향기가 몸에 밴다.” 하였다.
[주D-032]접해(鰈海) : 조선의 근해를 말한다. 중국에서 보는 동해, 즉 우리 나라에서 가자미가 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주D-033]황화집(皇華集) : 《시경(詩經)》에, 황황자화(皇皇者華)라는 시편은 왕명을 받은 사신(使臣)을 읊은 것이므로,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와서 지은 글과 거기에 화답한 접반사(接伴使)의 시를 편찬하여 《황화집(皇華集)》이라 하였다.
[주D-034]성 징군(成徵君) : 징군(徵君)은 학문 덕행(學問德行)이 있어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존칭이다. 징사(徵士)라고도 한다.
[주D-035]유(留)에 …… 계책 : 장량(張良)이 한(漢) 나라의 공신(功臣)으로서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주D-036]하늘 이야기 : 제(齊) 나라 추연(騶衍)이 광대(廣大)한 천지의 이치를 잘 말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하늘 이야기하는 연[談天衍]이라 하였다.
[주D-037]삼장(三臧) : 불교에는 경(經)ㆍ율(律)ㆍ논(論) 등 세 가지 불서(佛書)가 있는데, 이것을 삼장(三臧)이라 하고, 이것을 통달한 중을 또 삼장이라 부르기도 함.
[주D-038]무이 구곡(武夷九曲) : 주자(朱子)가 살던 무이산(武夷山)의 시내가 아홉 굽이였는데, 주자가 구곡시(九曲詩)를 지었다.
[주D-039]옷 …… 읊조린다 : 《시경(詩經)》에 무의편(無衣篇)이 있으므로 자기의 옷 없는 데에 인용한 것이다.
[주D-040]양자운(揚子雲) …… 알 것이다 : 한(漢)의 학자 양웅(揚雄)을 가리킨다. 자운(子雲)은 그의 자다. 그가 《주역(周易)》을 모방하여 《태현경(太玄經)》을 지었더니, 그의 친구 유흠(劉歆)이 보고, “이 책은 뒷사람 장딴지나 덮을 것이다.” 하니, 그는, “후세에 반드시 알아줄 양자운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주D-041]어버이를 생각하는 뜻 :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에 관원으로 갈 때에 그 부모는 하양(河陽)에 있었다. 그는 태항산(太行山)에 올라서 공중에 나는 흰 구름을 바라보고, “우리 부모 계신 데가 저 구름 밑에 있다.” 하고, 서서 슬피 울었다. 김귀영(金貴榮)의 시에 흰 구름을 쓴 것이 부모 생각하는 뜻을 포함하였다는 말이다.
[주D-042]헤어질 때 …… 남겨두니 : 한퇴지(韓退之)가 중 태전(太顚)과 작별할 때에 그의 옷을 남겨두게 하였다.
[주D-043]향렴체(香奩體) : 시(詩)의 한 체로 당(唐)의 한악(韓偓)에서 시작된 미인을 읊은 노래 종류이다.
[주D-044]자고시(鷓鴣詩) : 당(唐) 나라 정곡(鄭谷)이 자고새[鷓鴣]를 읊은 시가 유명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정자고라 불렀다.
[주D-045]의루시(倚樓詩) : 당(唐) 나라 조하는, “긴 피리 한 소리에 사람이 다락에 기대었네[長笛一聲人倚樓]”라는 시가 유명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조의루(趙倚樓)라 불렀다.
[주D-046]찌푸림을 본떠서[効顰] : 월(越) 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가슴 앓는 병이 있어 가슴을 움켜 쥐고 찡그리는 그 모양도 매우 어여쁘자, 이웃 여자가 그것을 보고 저도 찡그린 고사에서 나온 말로, 덩달아 흉내 냄을 뜻한다.
[주D-047]일성적(一聲笛) : 조하(趙嘏)를 말한 것임. 주 49) 참조.
[주D-048]정승의 …… 있다 : 송(宋) 나라 정승 조보(趙普)가 태종(太宗)에게 말하기를, “신이 《논어(論語)》 반부(半部)를 가지고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고, 반부를 가지고 폐하(陛下)를 보좌하여 태평의 정치를 이룩하겠습니다.” 하였다. 여기서는 송강(松岡)의 성이 조씨이므로 조하(趙嘏)ㆍ조보(趙普)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49]공권의 …… 흔들었다 : 유공권(柳公權)은 명필(名筆)이요, 유종원(柳宗元)은 문장으로 유명하였다. 유이손(柳耳孫)의 성을 따라 이 두 사람을 인용한 것이다.
[주D-050]호랑이를 …… 것이다 : 한(漢) 나라 마원(馬援)의 말에, “범을 그리려다가 도리어 강아지가 된다.” 하였다. 서투른 솜씨로 남의 언행을 흉내내려 하거나, 어려운 일을 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다는 비유이다.
[주D-051]학은 …… 돌아오니 : 한(漢) 나라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갔다가 천 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학(鶴)이 되어 화표기둥[華表柱]에 앉았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052]여동빈 : 신선 여동빈(呂洞賓)의 시에, “악양에 세 번 취하여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네[三醉岳陽人不識]”라는 글귀가 있다.
[주D-053]만 사람의 …… 쓸까 : 좋은 사적을 돌에 새기지 않고도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하는 것을 구비(口碑)라 한다.
[주D-054]한 마디 …… 무어랴 : 노자(老子)의 말에, “부자는 사람을 전송할 때에 재물로 노자를 주고, 어진 사람은 사람을 송별할 때에 좋은 말[言]을 준다.” 하였다.
[주D-055]북당(北堂) : 《시경(詩經)》에 북당(北堂)이란 말이 나왔는데, 그것은 부인의 거처하는 곳을 말한 것이다. 후세에는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56]모구(旄丘) : 《시경(詩經)》 모구편(旄丘篇)에 “모구(旄丘 앞은 높고 뒤는 낮은 언덕)의 칡은 마디가 굵어졌다. 숙이여 백이여 어찌 이리도 오랜 세월이 걸리는가?[旄丘之葛兮 何誕之節兮 叔兮伯兮 何多日也]” 하였다. 이것은 여국(黎國)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위국(衛國)에 와서 머문 지가 오래 되어도 위국에서 자기네를 원조하여 본국으로 보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여 지은 것이다.
[주D-057]나비꿈 : 《장자(莊子)》에,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았다.” 하였다.
[주D-058]구극(九棘) : 가시나무[棘] 아홉 그루를 심어서 조신(朝臣)의 반열로 삼았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주례(周禮)》에, “조정 신하들의 서는 자리에 가시[棘]로 둘렀는데, 왼편 구극(九棘)에는 고ㆍ경대부(孤卿大夫)가 자리잡고, 오른편 구극에는 공ㆍ후ㆍ백ㆍ자ㆍ남(公侯伯子男)이 자리잡는다.” 하였다. 여기서는 경(卿 판서) 줄을 말한다.
[주D-059]홍화(弘化) : 교화를 넓히는 직책을 맡은 공으로, 삼공(三公)의 다음인 삼고(三孤) 즉 소사(小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찬성(贊成)을 말한다. 《書經 周官》
[주D-060]달아나면서 …… 섰고 : 《논어(論語)》에서 나온 말인데,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나는데[奔] 뒤에 섰다[殿]는 말이다.
[주D-061]술자리에 …… 먼저네 : 《맹자(孟子)》에, “마을 사람보다 형을 공경하지마는, 술자리에서는 마을 사람에게 술잔을 먼저 준다.” 하였다.
[주D-062]한단(邯鄲)의 …… 배우는 것 : 남의 흉내를 내어 일을 행하여 그 본분을 잃어버림을 비유한 말이다. 한단(邯鄲)은 조(趙)의 도읍. 《장자(莊子)》에, “한단 사람이 걸음을 잘 걷는 것을 보고 연(燕) 나라 소년이 그곳에 가서 걷는 방법을 배웠는데, 습득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국의 걸음걸이까지도 잊어버리고 기어 나왔다.” 하였다.
[주D-063]동년(同年) : 과거(科擧)에 함께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주D-064]북극(北極) : 북극성이 모든 별 중에 가장 가운데 있고, 다른 별들이 그 주위에 있는 것과 관련하여 임금이 있는 곳을 말한다.
[주D-065]석 달의 …… 만들었네 : 진 시황(秦始皇)이 아방궁(阿房宮)을 크게 지었더니, 뒤에 항우(項羽)가 불을 질렀는데, 궁이 너무 커서 석 달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고 탔다 한다.
[주D-066]낙양명원시(洛陽名園詩) : 송(宋) 나라 사람이 《낙양명원기(洛陽名園記)》라는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오대(五代)의 전란이 있기 이전 번화한 낙양에서 유명한 정원(庭園)들을 기록한 글이다.
[주D-067]곡수(穀水) …… 망산(邙山) : 곡수ㆍ낙수, 숭산ㆍ망산은 모두 낙양에 있는 물과 산이다.
[주D-068]삼진(三晉) : 한(韓)ㆍ위(魏)ㆍ조(趙)인데, 본시 모두 진(晉)의 대부(大夫)로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삼진이라 한다.
[주D-069]희씨(姬氏) : 중국 주(周) 나라를 말한다.
[주D-070]천문(千門) : 한(漢) 나라 건장궁(建章宮)이 천문만호(千門萬戶)였다. 여기서는 큰 궁궐이란 뜻으로 썼다.
[주D-071]장단구(長短句) : 시에 오언(五言)ㆍ칠언(七言)의 일정한 제한이 없이 섞어서 짓는 시체(詩體)이다.
[주D-072]두 마리 …… 부[畫二牛賦] : 양(梁) 나라 도홍경(陶弘景)이 산중에 있었다. 양 무제(梁武帝)가 벼슬을 주겠다고 부르니, 도홍경이 소 두 마리를 그려서 바쳤는데, 한 마리는 화려한 굴레와 고삐로 꾸며 한 사람이 채찍을 들고서 몰고 있고, 한 마리는 굴레도 고삐도 없이 자유롭게 풀밭에 있었다. 그것은 부귀영화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산중에 살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는 그것을 제목으로 하여 글을 지었던 것이다.
[주D-073]월부를 모방한 것[擬月賦] : 남제(南齊) 때 사장(謝莊)이 지은 월부(月賦)가 유명한데, 여기서는 그것을 모의(摹擬)하여 지은 글이다.
[주D-074]사마귀가 매미 잡는 것 : 《오월춘추(吳越春秋)》에,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가만히 엿보느라 참새가 저를 쪼아 먹으려고 따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주D-075]자하(子賀)는 …… 자(字)다 : 당(唐) 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자가 장길(長吉)이므로 그것을 모방한 것이다.
[주D-076]구름 …… 이 사군(李使君) : 진(晉) 나라 때에 순명학(荀鳴鶴)과 육사룡(陸士龍)이 서로 처음 인사하면서, “나는 해아래[日下] 순명학이다.” 하니, “나는 구름 사이 육사룡이다.” 하였다. 이것은 높은 데 있다고 자기를 추켜서 말한 것이다. 사군(使君)은 사또란 말이다.
[주D-077]조교는 …… 구 척이니 : 《맹자(孟子)》 고자(告子) 하(下)에 “조교(曹交)는 키가 9척이나 되는데, 곡식만 먹을 뿐이다[今交九尺四寸以長 食粟而已].” 하였다. 여기서는 조희(曺禧)를 조롱한 말로 썼다.
[주D-078]가죽 …… 있다 : 진(晉) 나라 환이(桓彛)가 저계야(褚季野)를 칭찬하여, “계야는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어서, 비록 말하지 않아도 사시(四時)의 기운이 감추어져 있다.” 하였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각각 속셈과 분별력이 있음을 이른다.
[주D-079]장초의 …… 즐거우리 : 《시경(詩經)》에, “언덕에 장초(萇楚 초목 이름)가 있으니…… 너의 알음 없음이 부럽구나[隰有萇楚…… 樂子之無知].” 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정치는 까다롭고 부역은 중하여, 백성이 고통이 심하므로 차라리 초목처럼 아무것도 몰라 걱정 없는 것을 부러워한다는 뜻이다.
[주D-080]이 몸 …… 피할꼬 : 진(晉) 나라 무릉(武陵) 어부(漁父)가 우연히 산중에 숨어 사는 도원(桃源)이란 곳에 들어갔더니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옛적 진(秦) 나라 때에 포학한 정치를 피하여 깊은 산중으로 피해 와서 수백 년 바깥세상을 모르고 살아왔다 하였다.
[주D-081]바다 …… 셋이로다 : 삼신산(三神山)을 이른다.
[주D-082]물결은 …… 짓고 : 소동파(蘇東坡)가 물에 비친 달을 두고 지은 시에, “동파의 그림자가 물 따라 달 따라 백이 될 수 있다.”는 글귀가 있다.
[주D-083]이태백의 셋 : 이태백의 시에, “달 아래 춤추니 나와 달과 그림자 합쳐서 세 사람이네.” 하는 구절이 있다.
[주D-084]이원제자(梨園弟子) : 당 명황(唐明皇)이 음악하는 사람 양성하는 곳을 이원(梨園)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기생을 가리킨 것이다.
[주D-085]교방가요(敎坊歌謠) : 지방에 관원이 부임할 때에 교방(敎坊 기생 양성하는 곳)에서 새 노래를 지어 영접하기도 한다.
[주D-086]풍화(風花) : 바람이니 달이니 꽃이니 하고 실속 없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말한 것이다.
[주D-087]영인(郢人)의 …… 바탕[郢質] : 옛적에 영(郢)에 도끼질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의 코끝에다 백토(白土)를 조금 붙여두고 도끼질로 그 백토를 다 깎아내어도 코는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코를 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독 한 사람이 그의 기술을 알기 때문에 안심하고 코를 대주었다. 그뒤에 그 사람이 죽고 나자 도끼를 던지며, “이제는 나의 바탕이 죽었으니, 어디에 기술을 쓰랴.” 하였다.
[주D-088]악을 …… 기쁘다 : 계찰(季札)이 주(周) 나라에 가서 각국의 음악을 감상하였다.
[주D-089]망기(忘機) : 《열자(列子)》에, “바닷가의 한 사람이 매일 해오라기와 친하게 놀아서 해오라기가 사람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내일은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서 내가 보게 하여라.’ 하였더니, 그 이튿날에는 해오라기들이 공중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였다. 그것은 전에는 해오라기를 어떻게 하겠다는 기심(機心)을 잊었던 때문에 해오라기들도 무심하게 친해진 것이요, 뒤에는 ‘해오라기를 잡겠다.’는 기심이 있기 때문에 해오라기가 피한 것이다.
[주D-090]살풍경(殺風景) : 풍경을 해치는 것이란 뜻으로, 이상은(李商隱)의 잡찬(雜纂) 살풍경(殺風景)에, “꽃 사이에서 큰 소리로 꾸짖는 것, 꽃을 보고 눈물 흘리는 것, 이끼 위에서 자리 펴는 것, 수양을 찍어버리는 것, 꽃위에 속옷 말리는 것, 석순(石筍)에 말 매는 것, 달 아래 불 잡고 있는것, 기생과 앉은 자리에 세속 일 말하는 것, 과원(果園)에 나물 심는 것, 산 등지고 누각 짓는 것, 화가(花架) 아래 닭과 오리 기르는 것, 꽃을 대해 차 마시는 것, 거문고 태워 학(鶴) 삶는 것.”이라 하였다.
[주D-091]곽거병(霍去病) :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名將)으로 흉노(匈奴)를 쳐서 공을 세웠다.
[주D-092]장량(張良) : 한 고조(漢高祖)의 창업 공신. 한 고조가 말하기를, “장막 가운데서 산가지[籌]를 놀려서 천 리 밖에 승산(勝算)을 결정하는 것은 장자방(張子房 자방은 양의 자다)이다.” 하였다. 《漢書》
[주D-093]오마(五馬) : 수령(守令) 행차의 이칭으로 태수(太守)의 수레에는 사마(駟馬)에 말 한 필을 더 붙여준 데서 온 말이다.
[주D-094]봄꽃 붉은 빛 : 자기의 얼굴빛을 말한 것이다.
[주D-095]승이교(勝二喬) : 중국 삼국 시대(三國時代) 강동(江東)에 교공(喬公)의 두 딸이 절세미인으로, 언니는 손책(孫策)의 아내가 되고, 동생은 주유(周瑜)의 아내가 되었다. 그들을 이교(二喬)라 하였는데, 이 기생은 이교보다 낫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심리록(審理錄) 제1권
 정유년(1777) ○ 경상도
의령(宜寧) 관노(官奴) 업이(業伊)의 옥사
약천집 제2권
 시(詩)
하생 상유(河生尙瑜)에게 주다. 병서

옛날 하 문효공(河文孝公 하연(河演))이 영남(嶺南)의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나의 선조(先祖)이신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이 묘년(妙年)으로 막하에서 보좌하였는데, 문효공의 인정과 칭찬을 크게 받아 매우 친하였다. 일찍이 진양(晉陽)에 이르자, 문효공이 산천 경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니, 선조께서는 말씀하기를,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품관(品官)이 매우 나쁩니다.” 하였는바, 이는 문효공이 본래 진양 출신이므로 해학하신 것이었다. 문효공은 그 후 좌상(左相)에 임명되었는데, 선조 역시 뒤이어 정승에 올랐다. 선조께서 정승에 임명되시던 날 문효공을 찾아가서 뵙자, 문효공은 선조를 맞이하여 웃고 말씀하기를, “이 늙은 감사(監司)가 한 번 발을 헛디뎠더라면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진신(搢紳) 선배들의 풍류 화두(風流話頭)가 된 지 오래이다. 금년 여름 내가 남해(南海)로 귀양 와서 하생 상유(河生尙瑜)의 집에 우거하였는데, 그 선계(先系)를 물어보니, 바로 문효공의 후손이었다. 옛날 공융(孔融)은 이응(李膺)과 오히려 통가(通家)라고 칭하였으니, 하물며 우리 두 사람은 두 선조에게 있어서 십대(十代)가 지나지 않은 데다 귀양 와서 걱정하는 가운데에 서로 만났고 또 서로 주객(主客)이 되었으니, 선대(先代)의 우호를 돈독히 하려는 정(情)이 어찌 다만 새로 안 즐거움뿐이겠는가. 인하여 율시 한 수를 지어 자손들에게 남겨 보이려 하니, 후일 우리 두 사람의 후손 중에 또다시 서로 만나서 감동하기를 오늘날과 같이 할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두 집안의 교의 예부터 서로 통하였고 / 兩家交誼舊相通
두 선조의 높은 이름 또한 대략 같았네 / 二祖高名亦略同
촉석루의 해학은 막료로 돕던 때요 / 矗石詼諧參佐幕
의정부의 발걸음은 함께 조정에 올랐다오 / 巖廊步武並升公
내 지금 멀리 귀양 오니 교목에 부끄럽고 / 我今遠謫慙喬木
그대는 먼 지방에 있으나 고풍을 지키누나 / 君在遐鄕猶故風
다시 우연히 주인과 손님이 되었으니 / 還復偶然爲主客
선대의 우호를 생각하는 뜻 어찌 다함이 있으랴 / 緬思先好意何窮

[주D-001]품관(品官) : 품계를 가진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이 지방 출신의 높은 관원인 하연(河演)을 가리킨다.
[주D-002]이 늙은 …… 것이다 : 옛날 감사를 지냈던 자신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도사(都事)를 지낸 상대방에게 앞자리를 빼앗길 뻔했다고 말한 것이다.
[주D-003]공융(孔融)은 …… 칭하였으니 : 공융과 이응(李膺)은 모두 후한(後漢) 말기의 명사이며, 통가(通家)는 여러 대 동안 한집안처럼 친하게 지냄을 이른다. 옛날 공자(孔子)는 노자(老子)를 찾아가 예(禮)를 물었는데, 노자는 성이 이씨(李氏)이다. 공융은 공자의 후손이며 이응 또한 노자의 후손이라 한다. 공융이 이응을 보고 “우리는 통가의 자제이다.” 하자, 이응이 그 이유를 물으니 공융은 대답하기를, “우리 선조인 공자가 그대의 선조인 노자와 친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4]내 …… 부끄럽고 : 교목(喬木)은 교목세신(喬木世臣)의 줄임말인데, 교목은 높은 나무로 전통 있는 나라와 가문을 비유하며, 세신은 국가에서 오랫동안 벼슬해온 가문을 이른다. 자신이 죄를 짓고 멀리 유배와 세신에 부끄럽다고 말한 것이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8대 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 세자부 의성군(宜城君) 증시 충간공(忠簡公) 부군 신도비명

우리 남씨(南氏)는 성씨를 얻은 이래로 멀리 대를 이어 왔는바, 영의정 의령부원군 충경공(忠景公) 휘 재(在)의 비석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충경공은 2남을 두었는데, 장자 휘 경문(景文)은 병조 의랑으로 일찍 별세하여 끝내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는바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되었으며, 배위는 숙녕택주(淑寧宅主) 온양 방씨(溫陽方氏)이니 참의 방순(方恂)의 따님이다. 3남을 두었는데 공이 바로 장남으로 휘가 지(智)이며 생년과 자(字)는 상고할 수 없다.
공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풍채와 의표가 단정하고 후중하며,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고 담력과 지조가 있어 당시에 추앙과 신임을 받았다. 약관 시절에 벼슬하여 사헌부 감찰이 되었는데, 이때 충경공이 여전히 건강하였다. 공이 공청(公廳)에서 물러 나오면 충경공은 반드시 일한 것을 묻곤 하였는데, 하루는 돌아와 아뢰기를, “오늘 하리 한 사람이 창고에 들어가서 몰래 비단을 훔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다시 창고로 들어가게 하여 이와 같이 하기를 두세 번 하였더니, 하리가 비로소 그렇게 한 뜻을 알아차리고는 비단을 놓아두고 나왔습니다.” 하니, 충경공은 말하기를, “나는 네가 어린 나이에 관원이 되었기 때문에 매번 공청에서 한 일을 물어 잘잘못을 알고자 한 것이었는데 지금부터는 내가 묻지 않아도 되겠다.” 하였다.
세종 원년(1419) 기해에 충경공이 별세하니, 상은 친히 왕림하여 조문하고 치제하였다. 이때 공은 사손(嗣孫)으로 상주가 되어서 길 왼쪽에 엎드려 맞이하였으며, 제사를 올릴 때에 명을 받들어 술잔을 올렸다. 대가가 돌아갈 때에 길 왼쪽에 엎드려 곡하니, 상은 몸을 굽히고 그 앞을 지나가 예우하였다.
7년(1425) 을사에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있다가 영남의 막료로 나가 경력(經歷 도사(都事))이 되었다. 이때 경재(敬齋)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이 도의 관찰사가 되었는데, 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양반집 자제로 나이가 젊으니, 반드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내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공이 처음 들어와 뵙자, 문효공은 마침내 판별하기 어려운 공사(公事)의 서류철을 뽑아서 맡기며 말하기를, “이것을 판별해서 가지고 오라.” 하였다.
공이 물러가자 문효공은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은 한창 손님들과 장막 안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공은 다음 날 술이 깨어 일어나서 서류철을 한 번 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서 표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아무 글자는 오자이니 고쳐야 하고, 아무 일은 잘못되었으니 분별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문효공은 크게 놀라고 탄복하여 소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공무를 자문하는 이외에 때때로 농담을 주고받았으며, 허여하고 친밀하게 대해서 예로부터 사귄 친한 벗처럼 여기고 나이와 지위를 가지고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았다.
돌아와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도승지 조서로(趙瑞老)에게 유박(帷薄)의 비난거리가 있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먼저 말하지 못하였다. 공은 조참(朝參)에 나가서 소유(所由 사헌부의 이속(吏屬)) 20여 명을 거느리고 조서로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소유들로 하여금 그 구사(丘史)들을 모두 포박하게 하고 즉시 조방(朝房)에서 국문하여 법을 바로잡으니, 온 조정이 숙연하였다.
장령으로 승진하고 장단 부사(長湍府使)와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로 나갔으며 의성군(宜城君)에 습봉되었다. 17년(1435) 을묘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갔는데, 이때 서적을 내려 줄 것을 주청하였다. 21년(1439) 기미에 대사헌에 제수되고 호조 참판으로 옮겼으며, 경상도 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자 형조 판서로 발탁되고 호조 판서로 옮겼다. 공은 태평한 세상에 군주의 신임을 받는 것에 감격하여 밤낮으로 봉직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니, 군주의 신임과 조정의 명망이 공보다 더한 자가 없었다.
28년(1446) 병인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승하하니, 수릉관(守陵官)에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웠다. 이때 공은 겨우 사사로운 상(喪)을 마쳤는데, 대궐 아래에 엎드려서 수릉관이 될 것을 자청하니, 당시 공론이 대단히 훌륭하게 여겼다.
31년(1449) 기사에 판원사(判院事)로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문효공이 막 좌의정이 되었다. 공이 나와서 사은하던 날에 첫 번째로 문효공의 집을 찾아가자, 문효공은 공을 맞이하여 문에 들어오게 하고 돌아보며 말하기를, “수령관(首領官)과 늙은 감사가 한 발짝만 어긋났으면 말을 나눌 수 없을 뻔하였네.” 하였으니, 이는 옛날 막료로서 함께 의정부에 올라 벼슬해서 발자취가 서로 이어짐을 기뻐한 것이었다.
32년(1450) 경오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였는데, 2년(1452) 임신에 또다시 문종이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니, 공은 좌상으로 있으면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고명(顧命)을 받았다. 이때 국상(國喪)이 서로 이어지니, 중외의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으나 공이 바로잡고 진정시켜 대신의 도리가 있었으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공에게 의지하였다.
이해 10월에 중풍에 걸려 말을 못 하고 병환이 심하므로 정승의 직책을 해임하고 영중추원사에 옮겨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별세하였으니, 나이는 상고할 수가 없다. 진천현(鎭川縣) 남쪽 양천산(楊泉山) 이치(梨峙) 임좌(壬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부정(副正) 이문간(李文幹)의 따님인데, 출생 연도와 별세한 연월을 또한 상고할 수 없으며, 장지는 공의 묘소 뒤쪽 20여 보쯤 되는 신좌(辛坐)의 산에 있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관찰사 윤(倫)이고 차남은 부정(副正) 칭(偁)이며 다음은 군수 구(俅), 별좌(別坐) 휴(休), 참판 의(儀)이며, 장녀는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조무영(趙武英)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1남 동(仝)을 낳았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올라 지금까지도 명문거족으로 일컬어진다.
단종(端宗) 원년(1453) 계유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난이 있었는데, 사위인 이우직은 바로 이용의 아들이었다. 부자가 모두 죄로 죽었으나 공은 인척의 집안으로서 화가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병을 앓아 조정의 정사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은 별세한 뒤에도 오히려 이우직 때문에 추증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다가 세 조정을 지나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에 이르러 공의 손자인 승지 흔(忻)이 조정에 올려 청하니,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여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어린 나이에 조정에 올라 벼슬하였고, 낮은 벼슬로부터 높은 벼슬에 이르러서 명성과 공적이 날로 성하였다. 공은 스스로 성명(聖明)한 군주의 신임을 받아 마침내 정승의 지위에 올랐으며, 시작도 있고 끝마침도 있어 세상의 유명한 신하가 되었고, 별세한 뒤에 애도하고 영화롭게 함이 또한 이미 갖추어졌다. 그러나 지금 200여 년이 넘도록 아직 신도비에 새긴 비문이 없으니, 어찌 후손들의 마음에 서운함이 없겠는가.
이제 종손 반(磐)이 이것을 서글퍼하여 여러 종인들과 함께 의논하고 돌을 깎아 비문을 새겨서 후손들이 보게 하려 할 적에 구만에게 또한 후손이 된다 하여 서문을 쓰고 명문(銘文)을 짓게 하였다. 구만은 이에 대하여 비록 감당할 수 없으나 또한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그러나 공이 별세한 뒤로 공사 간에 이미 연고가 많았으며, 연대가 또 점점 멀어져서 조정의 문헌도 증빙할 만한 것이 적고 집에 보관된 옛 가승(家乘)도 병란에 모두 없어졌으며, 사적(史籍)의 비문(秘文)은 또 사사로이 볼 수가 없다.
이제 공의 덕을 기록하고자 한들 장차 무엇을 근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기회를 놓치고 도모하지 않으면 이제 겨우 들어서 알고 있는 것마저 장차 더욱 매몰됨에 이를 것이다. 이것을 두려워하여 종인들의 보첩(譜牒)과 관부(官府)의 장고(掌故) 및 세상에 전해 오는 자질구레한 기록과 여러 이야기들을 상고해서 의심스러운 것을 빼고 믿을 만한 것을 취하여 그 선후를 차례로 엮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공이 평소 조정에서 좋은 계책을 아뢰고 자손들에게 훌륭한 교훈을 남겨서 국가의 법이 되고 집안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기록하지는 못하였으니, 그 소략함이 또한 심하다. 그러나 공이 남기신 유풍과 법도로 생시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다행히 선배들의 말이 남아 있다.
내가 들으니, 공이 영남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이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공은 치관의 장관이 되어 / 惟公長豸冠
명광궁에서 상소를 올리니 / 抗疏明光宮
지존께서는 온화한 얼굴을 펴시고 / 至尊開天顔
강직한 신하의 충성 가상히 여기셨네 / 骨鯁嘉精忠
승냥이와 이리 감히 멋대로 날뛰겠는가 / 豺狼敢縱橫
송골매가 가을 하늘 높이 날고 있다오 / 鷹隼當秋空
오래된 측백나무 더욱 우뚝하니 / 古柏更亭亭
차가운 서릿발 세찬 바람을 띠고 있네 / 嚴霜帶烈風
의리를 바루고 도를 밝히니 / 正誼與明道
현하와 같은 언변 끊임이 없었다오 / 懸河辯不窮
또다시 영남의 절월(節鉞)을 잡아 / 又杖嶺南節
깃발이 남방을 가리키니 / 旌麾指祝融
이 조정의 재목을 거두어감은 / 撤此廊廟材
본래 곤궁한 백성 일으키려고 해서이네 / 本欲起疲癃
굳세고 강직하여 훌륭한 정사 이룩해서 / 行行樹佳政
융숭한 공업 기약하노라 / 功業期盛隆
하였다.
그리고 선조(宣祖) 때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상소하기를, “세종대왕은 우리 동방의 성주(聖主)이신데, 인재를 등용하시되 자신으로 생각하여 오직 현자와 유능한 자를 발탁하셨습니다. 남지(南智)는 문음 출신이었으나 젊은 나이에 삼공(三公)에 임명되었으며, 김종서(金宗瑞)는 남들의 비난을 크게 받았으나 자신의 소견대로 육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위가 그 재주에 걸맞으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았으며 하루아침에 발탁하면 계급에 제한하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옛날 성스러운 황제와 현명한 왕들이 현자에게 맡기고 유능한 자를 부린 것과 같은 법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공의 현손 언기(彦紀)는 문장을 잘하였으나 지조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는데, 공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신기하고 특이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재능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에 일곱 줄을 한꺼번에 보았으며 눈으로 한 번만 보면 잊지 않았다. 과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 한 번도 과장에 들어간 적이 없으나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공경(公卿)이 될 인물로 기대하였다. 세종의 인정을 받아 품계의 차례를 밟지 않고 특별히 발탁되니, 의지하고 맡기기를 매우 소중히 하였다. 문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고명(顧命)을 받고 어린 군주를 보필하여 건의한 일이 많았는데, 마침 병으로 집에 있다가 별세했다.” 하였다.
공의 공렬과 덕업을 지금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명신(名臣)의 많음과 인재 등용의 마땅함이 세종과 문종의 즈음보다 더 성대한 적이 없는데, 공은 이때를 당하여 백관의 위에 올라 어린 군주를 부탁받았으니, 그렇다면 그 인품을 알 수 있다. 공의 유사(遺事)를 생각해 보건대 없어진 것이 이미 많으니, 남아 있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 이 때문에 지금 이 세 가지를 인용하면서 글이 번잡한데도 줄이지 아니하여 길게 늘어놓아 부족한 뜻을 다하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나라에 세신이 있으면 / 國有世臣
이것을 오래된 나라라 이르네 / 是謂故國
군주가 어리고 나라가 의심스러울 때에는 / 主少國疑
오직 정승에게 달려 있으니 / 惟相之屬
이 중책을 맡을 자 / 任斯重者
공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 匪公其孰
대를 이어 정승이 되니 / 繼世作輔
무현(巫賢)과 이척(伊陟)과 같고
/ 若賢與陟
유지(遺旨)를 받아 어린 군주 도우니 / 受遺擁幼
단(旦)과 석(奭)과 같았다오 / 如朝及奭
세종과 문종의 현명함으로 / 二宗之明
선택을 잘하였으며 / 不失其擇
공의 충성 / 公之忠藎
또한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네 / 亦不負職
공이 병환으로 집에 계실 때에 / 臮公告病
난이 비로소 일어나니 / 難始有作
마치 집이 무너지려 함에 / 若廈將傾
높은 기둥이 먼저 기우는 것과 같았다오 / 高棟先仄
하늘이 막 딴 임금을 일으키려 하니 / 天方有興
어찌 인력으로 될 수 있겠는가 / 豈容人力
돌아가신 분을 전송하고 살아 계신 분을 섬김에 / 送往事居
공은 부끄러움이 없었네 / 公則無恧
공의 자손들은 / 公之子孫
공의 덕을 본받아 / 象公之德
후손에 이르러 / 及于雲仍
번성하고 또 훌륭하였네 / 旣蕃且碩
모두 남은 음덕을 입어 / 咸荷餘休
대대로 국록을 먹었네 / 世有祿食
홀로 생각건대 유허에 / 獨念遺墟
신도비가 없으니 / 牲繫無石
길 가는 사람들도 오히려 한탄하는데 / 行路猶嗟
하물며 우리 동족들이겠는가 / 矧我同族
이에 헤아리고 이에 물으니 / 是度是詢
그 누가 협조하지 않겠는가 / 疇有不勗
마음을 합하고 함께 일하여 / 齊心並事
큰 비석에 드러내어 새겼네 / 克蕆顯刻
그 시가 매우 아름다워 / 其詩孔好
외울 만하고 읽을 만하네 / 可誦可讀
풍성을 길이 생각하니 / 永懷風聲
이에 공의 모습 보는 듯하여라 / 於焉如覿

[주D-001]유박(帷薄)의 비난거리 : 유박은 유박불수(帷薄不修)의 준말로 안방의 장막과 발이 정돈되지 못하였다는 뜻인데, 가문에 음행(淫行)이 있을 경우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옛날에는 사대부의 죄에 대해서도 죄명을 직접 말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했다.
[주D-002]구사(丘史) : 임금이 종친과 공신에게 구종(驅從)으로 준 관노비를 이르는바, 품위(品位)에 따라 숫자가 정해져 있었다.
[주D-003]수령관(首領官) : 지방의 각 감영과 유수부에 두었던 경력과 도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주D-004]치관(豸冠)의 장관이 되어 : 치관은 옛날 어사가 쓰던 해치관(獬豸冠)으로, 어사대 즉 사헌부의 관원이 되었음을 말한다. 해치는 신양(神羊)인데, 곡직(曲直)을 잘 분별하므로 초왕(楚王)이 항상 이를 잡아다가 관을 만들었다 한다. 《後漢書 卷30 輿服志下》
[주D-005]대를 …… 같고 : 무현(巫賢)은 무함(巫咸)의 아들이고 이척(伊陟)은 이윤(伊尹)의 아들이다. 무함은 은(殷)나라 중종(中宗)의 어진 신하로, 무무(巫戊)라고도 하며, 이윤은 은나라의 탕왕(湯王)의 신하로 탕왕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
[주D-006]단(旦)과 석(奭) : 단은 원문에 조(朝)로 되어 있는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이름을 휘(諱)하여 조로 쓴 것이다. 단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로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주(周)에 봉해져 주공(周公)이라 칭하였으며, 석 또한 주나라의 종친으로 소(召)에 봉해져 소공(召公)이라 칭하였다. 주공과 소공은 뒤에 삼공(三公)이 되어 성왕(成王)을 도와 훌륭한 공을 이루었으므로 명재상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世宗朝)의 상신



이원(李原) 무신생이며, 15세에 진사가 되었다.

이원은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용헌(容軒)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고려 말 을축년에 급제하였으니, 나이가 18세였다.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 되었다. 무술년에 정승이 되어 벼슬이 좌의정 겸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헌공(襄憲公)이고, 62세에 죽었다.
○ 공은 난 지 넉 달 만에 아버지 이강(李岡) 호는 평재(平齋)니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아들이다. 이 죽고, 자부(姊夫) 권근(權近)이 가르치기를 아들과 같이 하여 학문이 날마다 진보되었다. 권근이 매양 그와 의논하였는데, 뛰어남이 짝이 없었으므로 권근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우리 장인은 영원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기해년(1419)에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에 갔을 때, 그의 풍채가 좋고 의젓하여 만인 중에서 우뚝하니, 문황제(文皇帝)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이르기를 “누런 수염 재상은 후에도 다시 오라.” 하였다. 《사가집(四佳集)》에 있는 공의 비문
○ 을사년(1425)에 명 나라 선종(宣宗)이 등극하니,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축하하였다.
○ 공을 미워하는 자가 애매한 일로 모함하였을 때에, 태종이 친히 변명하여 주었다. 태종이 돌아가신 뒤에 공을 미워하는 자가 전날의 사감을 가지고 사헌부에 사주하여 공을 죽이려 하였다. 세종은 그가 죄가 없는 줄을 아나, 사헌부의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여산(礪山)으로 귀양보냈으니, 곧 병오년(1426) 봄이었다.세종은 그의 옛 공훈을 생각하여 전과 다름없이 돌보아 주었으며, 매양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이르기를, “철성(鐵城)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되어 불러서 다시 정승을 삼으려 하였으나 그를 질투하는 자의 저해를 입었으며, 기유년(1429) 여름에 병으로 죽었다. 《사가집(四佳集)》


정탁(鄭擢)

정탁은 자는 여괴(汝魁)이며, 호는 춘곡(春谷)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개국 정사 공신(開國定社功臣)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고, 임인년(1422)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익경공(翼景公)이다.
○ 공양왕 때 병조 좌랑으로 있을 때에 김초(金貂)가 불교를 배척하다가 죄를 얻어서 장차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을 정탁이 글을 올려서 변론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면 길이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습니다.이른바 이루어 놓은 법이라는 것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지나지 않는데 불씨(佛氏)가 이에 모두 배치되니, 이것은 김초가 선왕이 세운 법을 허문 것이 아니라 곧 전하께서 스스로 허무는 것입니다.” 하였다. 대언 등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였는데, 정몽주(鄭夢周)가 글을 올려 아뢰어서 마침내 김초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유관(柳寬)

유관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처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이며, 호는 하정(夏亭)이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비서(判秘書)에 이르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형조 판서를 거쳐 갑진년(1424)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공이 죽자, 세종이 흰옷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울었다.
○ 공의 온량(溫良)하고 돈후(敦厚)한 성품은 태어날 때에 얻은 천성이었다. 공조 총랑(工曹摠郞)이 되었을 때에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이해에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운검(雲劍)의 책임을 맡아서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은 자질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풍채가 빛나 네 임금을 연달아 섬겼으되 모두 사랑을 받아서 그보다 더 사랑받은 자가 없었다. 태조가 돌아가신 뒤에는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 기축년(1409)에 길주도 안무 절제사(吉州道安撫節制使) 영길주목(領吉州牧)이 되어서 북방을 지킬 때, 야인이 침입하자 그 괴수를 죽이고 격퇴시켰으므로 그 위세가 북방에 진동하였다. 태종이 사신을 보내어 술을 내리고, 이어 그곳에 머물러 두어 교화를 펴게 하였다.
○ 공이 우의정이 되었을 때에 글을 올려서 당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태학생탄금시서(太學生彈琴詩序)>를 인용하고, 또 송 태종(宋太宗)이 대포(大酺)를 하사하던 옛일을 인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로 하여금 경치좋은 곳을 골라서 놀며 즐겨, 태평의 기상을 표현하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세종이 옳게 여겼다. 공이 나이 많아서 치사하니, 명하여 제사과(第四科)의 녹을 주어 일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청렴하고 방정하여 비록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초가집 한 간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는 후생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누구라도 와서 뵈면 고개를 끄덕일 뿐, 그들의 성명도 묻지 않았다.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때마침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설치하였으니 그 절은 성안에 있었다. 공이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편한 사모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며 수레나 말을 쓰지 않았다. 어떤 때는 어린 아이와 관자(冠者) 몇 사람을 이끌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 초가집 두어 간에 밖에는 난간도 담장도 없어,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울타리를 그의 집에 설치하여 주되 공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고, 또 어찬(御饌)을 끊이지 않게 내렸다.
○ 어느 때 장마비가 한 달 넘게 내려서 집에 새는 빗발이 삼줄기처럼 내릴 때, 공이 손에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면서 그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 하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하자, 공이 웃었다. 《필원잡기》
○ 손님을 위해서 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사발 하나로 술을 바치게 하여 각기 몇 사발을 마시고는 끝내 버렸다. 공이 비록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제자들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학도가 매우 많았다.매양 시향(時享)에는 하루 앞서 제생(諸生)을 예의를 갖추어 돌려보내고, 제삿날에는 제생을 불러 음복(飮福)을 시켰는데 소금에 저린 콩 한 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하고, 이어 질항아리에 담은 탁주를 그가 먼저 한 사발 마시고는 차례로 좌상에 한두 순배를 돌렸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공의 벼슬이 정승이 되었으나, 그의 행동은 일반 사람과 다름없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하였고,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소밭을 돌아다녔으나 괴롭게 여기지를 않았다. 《용재총화》
○ 공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평소에 한번 배운 글을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았고, 매양 밤중에 그 글을 외우며 뜻을 생각하고 항상 민생을 건질 것을 마음 먹었다.그리하여 교량(橋梁)이나 원우(院宇)를 지으려 하는 자 있으면 비록 중들에게라도 곧 돈과 베를 시주하였고, 또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였으나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남에게서 취하지는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친구 사이에는 으레 재물을 서로 나누어 쓰는 의리가 있다 하나, 아예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조연(趙涓) 갑인생

조연은 자는 여정(汝靜)이며, 처음 이름은 경(卿)이고,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한산백(漢山伯) 조인벽(趙仁璧)의 아들이고, 환조(桓祖)의 외손이다. 그는 무인이었으므로 과거에 응하지 않았는데, 13세에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졌고 병오년(1426)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시호는 양경공(良敬公)이다.
○ 공이 우상으로 있을 때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ㆍ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 등과 더불어 송사 중에 있는 노비를 받고 힘을 써서 이기게 하였더니, 사헌부에서 이를 적발하여 공 등을 모두 중도 부처(中道付處)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


황희(黃喜)

황희는 자는 구부(懼夫)이고,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였으며,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말 기사년(1389)에 급제하여 조선에 들어와 병오년(1426)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나이 여든에 치사하여 임신년(1452)에 죽으니 나이가 아흔이었다. 제사(諸司)의 이서(吏胥)와 노예들이 모두 치제하였으며 시호는 익성공(翼成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14세에 음관(蔭官)출신으로 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소년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 우보궐(拾遺右補闕)이 되었는데, 성격이 곧아서 바른 말을 과감히 하였다. 《조야첨재》
○ 고려 말에 적성훈도(積城訓導)가 되었다. 《경훈전고(警訓典故)》에 상세하다.
○ 태종조(太宗朝)에 이조 판서로서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위하는 것을 간하였더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공조 판서로 좌천시키고, 또 평안도 도순무사(平安道都巡撫使)로 내보냈다가 무술년에 양녕이 폐위되어 서인이 되자 그를 교하(交河)에 좌천시켰다. 대신과 대간들이 모두 그에게 죄를 주기를 청해 마지 않았으나,태종은 공의 생질 오치선(吳致善)을 공이 있는 교하로 보내어 이르기를, “경이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경을 공신으로 대우하여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신과 대간들이 경에게 죄 주기를 청해 마지 않으니, 양경(兩京 개성 서울) 사이에는 둘 수 없다. 경의 본관(장수(長水))에 가까운 남원(南原)으로 옮기게 할 것이니 경은 어머니를 모시고 편하게 같이 가라.” 하였고,또 사헌부에 명하여, “그가 갈 때에 관리가 압송하지 말라.” 하였다. 오치선이 복명(復命)하자, 태종이 묻기를, “황희가 무어라 하던고.” 하니, 치선이 아뢰기를, “‘살과 뼈는 부모께서 주신 것이지만, 의식이나 쓰는 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였으니, 신이 어찌 은덕을 배반하겠습니까. 실로 다른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고는 울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하였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이 명하여 공을 불렀다. 공이 이르러 통이 높은 갓을 쓰고 푸른 색 거친 베로 만든 단령(團領)을 입고 남색 조알[條兒]을 띠고 승정원에 들어왔는데, 막 시골에서 왔으므로 몸체만 큼직할 따름이어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상왕이 세종에게 이르기를, “황희의 전날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니, 이 사람을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고는 곧 예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그는 마음이 넓고 모가 나지 않았으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한결같이 예의로써 대하고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계묘년(1423)에 강원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세종이 걱정하여 특별히 공을 관찰사로 삼았는데, 정성을 다하여 구제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다. 세종이 크게 가상이 여겨서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제수하고, 을사년(1425)에는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직시켜 소환하였다. 《조야첨재》에는 이르기를, “공이 돌아온 뒤에 관동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울진(蔚珍)에서 그가 행차를 멈추었던 곳에다 대를 쌓고 소공대(召公臺)라 이름하였으며,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하였다.
○ 공이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이다. 때마침 나라에 일이 있어 공을 기복(起復)시키니,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좌상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또 기복시키니,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곧 나와 일을 보았다. 《조야첨재》 《동각잡기》에 이르기를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몇 개월이 지난 뒤에 기복되었다.” 하였다.
○ 그때에 세자가 장차 명 나라로 떠날때 공으로 수행하게 하니, 공은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명 나라에서 칙서(勅書)를 보내어 세자는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다 하니, 그는 또 글을 올리기를, “세자께서 이미 명 나라에 조회하지 않기로 되었고, 또 국가에 일이 없으니 삼년상을 마치게 해 주소서.” 하였다.세종은, “대신을 기복하는 것은 선왕 때에 이미 이룩된 법이다.” 하여 윤허하지 않고, 이어 글을 내리기를, “옛날에는 나이가 60이 되면 비록 상복을 입었어도 고기를 먹는 법인데, 이제 황희는 이미 기복도 하였으려니와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어찌 소찬을 하면서 일을 보리요. 정원에서 그를 불러 고기 먹기를 권고하라.” 하였다.
그가 빈청(賓廳)에 나아갔더니 지신사 정흠지(鄭欽之)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고기 먹기를 권하였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마침 병이 없으니 어찌 감히 고기를 먹겠습니까. 청컨대, 이 뜻을 잘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흠지가 감히 그렇게 아뢸 수 없다 하니, 공이 그제서야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었다. 《동각잡기》
○ 공이 정승이 되었을 때 김종서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일찍이 공처(公處)에 모였을 때에 종서가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주과(酒果)를 갖추어 드렸더니,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정부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접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시장하다면 의당 예빈시로 하여금 장만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인가.” 하고는, 종서를 앞에 불러 놓고 준절히 꾸짖었다.
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이 일을 경연에서 아뢰고, “대신이란 마땅히 이러해야 조정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그때에 김종서가 여러 차례 병조ㆍ호조의 판서가 되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한 것이 있을 때마다 공이 박절할 정도로 꾸지람을 하되 혹은 본인 대신 종을 매질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사(丘史)를 가두기도 하였다. 동렬(同列)들이 모두 지나친 일이라 하고 종서 역시 매우 고달펐다. 어느날 맹사성(孟思誠)이 묻기를, “김종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인데 대감은 어찌 그렇게도 허물을 잡으시오.” 하였더니,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곧 내가 종서를 아껴서 인물을 만들려는 거요.종서의 성격이 고항(高亢)하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하니 뒷날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되어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는다면 일을 허물어뜨릴 염려가 있으니,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가다듬고 무게있게 하여 혹시 일을 당해서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에게 곤란을 주려 함이 아니오.” 하니, 사성이 그제야 심복하였다. 그뒤에 공이 물러가기를 청할 때 종서를 추천하여 자기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식소록(識少錄)》
○ 형조 판서 서선(徐選)의 아우 서달(徐達)은 공의 사위이다. 서달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는데, 공과 우상 맹사성 역시 이 일에 관련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튿날 보석되어 다만 파직되었으나 후임을 내지 않았다가 열흘이 지나자 복직을 시켰다.
○ 공이 좌상이 되었을 때에 사헌부에서 공이 감목(監牧) 태석구(太石鉤)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대관(臺官) 이심(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청탁하였다 하여, 파면시켜서 앞으로 청탁을 받고 법을 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이란 가벼이 죄를 줄 수 없다.” 하다가, 뒤에는 사헌부의 청을 윤허하여 그를 파면시켰다.그러나 후임을 내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다시 복직시켰다. 사간원에서 소를 올리기를, “황희는 일찍이 의정(議政)이 되어 대체를 돌보지 않고 친한 자를 사사로이 돌봐주기 위하여 사헌부에 청탁하였으니, 다만 그 직만 파면하였음은 황희로 보아서는 큰 다행입니다. 또 교하(交河)의 둔전을 이양받으려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직부(織婦)를 내쫓고 집안에 심은 채소를 뽑아버렸던 일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런 지 한 해가 채 못되어 갑자기 백관의 수반(首班)에 제수하자, 임명을 받아 엄연히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여 이르기를, “모든 일에 대하여 시비를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국정을 맡은 대신을 너희들의 말을 듣고서 가벼이 거절할 수 없다.” 하였다.
○ 그때에 사간원에서 논박하기를, “영의정 황희가 교하수(交河守)에게 둔전을 청하여 사사로이 농장을 삼으려 하였으니, 백관의 수반인 정승의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안숭선(安崇善)에게 이르기를, “황희는 국정을 맡은 대신이고,또 태종께서 신임하시던 사람이니, 내 어찌 경솔히 끊어 버리겠는가.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양녕(讓寧)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 종수(宗秀)의 무리가 그에게 아부하여 많이들 불의를 행해서 양녕으로 하여금 도리어 어긋나게 하였을 때에,황희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리하였으면 좋을까 하였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리고 또 그의 과실이란 사냥을 좋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당시에는 황희가 중립하여 사태를 관망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 생각하니, 황희는 실로 죄가 없다.’ 하시고, 또 사단(史丹)의 일을 인용하여 해명해 주시면서, 이내 눈물지으며 말씀하던 것이 아직도 내 귀에 남아 있으니, 내 이제 어찌 함부로 신진 간신(新進諫臣)의 말을 들어서 그를 끊어 버리겠는가.” 하였다. 《국조보감》
○ 태학(太學) 유생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면박하기를, “네가 정승이 되어 일찍이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냐.” 하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공이 상부(相府)에 있은 지 27년이나 되어, 조종(祖宗)때에 이미 이룩된 법을 힘써 따르고, 변경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이치에 따라서 하고 규모는 원대하였으며,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량이 있어서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태종으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신임이 매우 두터워,세종이 매양 황희의 견식과 도량이 크고 깊어서 큰 일을 잘 판단한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점치는 시구(蓍龜)와 물건의 중량을 다는 권형(權衡)에 견주었다. 더러 옛 제도를 변경하려고 의논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신이 변통하는 재능이 부족하니, 무릇 제도의 변경에 있어서는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평시에는 의논을 너그럽게 하였으나, 큰 일을 당해서는 맞대고 그 자리에서 시비를 가려 의연(毅然)히 굽히지 않았다.
나이 팔십에 비로소 치사를 허락하였고,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 반드시 근시(近侍)로 하여금 공에게 나아가 자문한 뒤에 결정하였다. 나이가 구십이 되어서도 총명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서, 조정의 전장(典章)이나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대해 마치 촛불로 비추는 듯이 산 가지로 세는 듯이 하여, 비록 기억 잘하는 장년도 감히 따르지 못하였다.우리 조선의 어진 정승을 논할 때는 반드시 공을 제일로 삼았으며, 공의 훈업(勳業)이나 덕량을 송 나라의 왕문정(王文正)과 한충헌(韓忠獻)에 견주었었다. <묘비(墓碑)>
○ 공은 평시에 거처가 담박하였고, 비록 아손(兒孫)과 동복들이 앞에서 울부짖고 희롱하여도 조금도 꾸지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수염을 뽑는가 하면 뺨을 치는 놈까지 있어도 역시 제멋대로 하게 두었다. 일찍이 아래에 있는 신료들과 함께 일을 의논할 때, 바야흐로 붓을 풀어 글을 쓰려 하는데 종의 아이가 종이 위에 오줌을 싸도 그는 아무런 노여워하는 빛이 없이 다만 손으로 훔쳤을 뿐이었다.
공이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7년 동안을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찾아오는 손님도 맞이하지 않고 다만 운서(韻書) 한 질을 갖고 거기에만 눈을 대고 있었을 따름이더니, 그뒤 비록 나이가 많아서도 글자의 획이나 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백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었다. 《필원잡기》
○ 공은 나이가 많고 벼슬이 무거워질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가 구십여 세나 되었는데도, 늘 고요한 방에 앉아서 종일토록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글을 읽을 따름이었다. 창 밖에 늦복숭아가 무르익어서 이웃 아이들이 다 따는데, 공은 나직한 소리로,“다 따먹지 말아라. 나도 좀 맛보자.” 하고 조금 있다가 나가서 보니, 나무에 가득하던 열매가 다 없어졌다. 매양 아침 저녁으로 밥먹을 때에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그가 밥을 덜어서 주면 지껄이며 먹기를 다투곤 하였는데 공은 다만 웃을 뿐이었다. 《용재총화》
○ 공은 기쁨이나 노여움을 일찍이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종들을 은혜로 대우하여 일찍이 매를 대지 않았으며, 그가 사랑하는 여종이 작은 종과 희롱하기를 지나치게 하였으나 공은 볼 때마다 웃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노예도 역시 하늘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오.” 하고는,그 뜻으로 훈계하는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전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어느날 홀로 동산을 거닐 때, 이웃에 살고 있는 버릇없는 젊은이가 돌을 던지니, 무르익은 배가 돌에 맞아 땅에 가득 떨어졌다. 그가 큰 소리로 시동(侍童)을 부르자, 그 젊은이가 놀라 달아나 숨어서 가만히 들어본 즉, 시동을 시켜 그릇을 갖고 오게 하여 배를 담아서 그 젊은이에게 주되,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언 이석형(李石亨)이 뵈러 갔더니, 그가 《강목(綱目)》과 《통감(通鑑)》을 내어서 책 표지에 제목을 쓰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추하게 생긴 여종 한 사람이 약간의 안주를 갖고 공의 의자에 기대고 서서 이석형을 내려다 보며 공에게 묻기를, “곧 술을 올릴까요.” 하니, 공은 조용히 “조금 있다가.” 하였다.여종이 한참 기다리다가 고함을 치면서, “어쩌면 그리도 꾸물거리누.” 하니, 공은 웃으면서, “그럼 드려오렴.” 하였다. 술상을 들에오니, 아이들이 모두 남루한 차림에다 맨발로 들어와서 혹은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더러는 공의 옷을 밟고 안주를 다 집어 먹고 공을 두들기곤 하였는데 공은 “아야 아야” 하였다. 그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자식들이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그의 정자인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 하류에 있었다. 파주읍(坡州邑) 서편 15리에 있다. 자손이 그곳에 집을 짓고 이내 반구라 이름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맹사성(孟思誠)

맹사성은 자는 성지(誠之)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한성윤(漢城尹)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고, 최영(崔瑩)의 손자 사위이다. 고려 병인년(1386) 문과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1427)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치사하여 신해년(1431)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의 아버지 희도는 전교부령(典校副令)인데 공양왕 때에 효행으로 정려(旌閭)하였다. 정계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온양 오봉산(五峯山) 밑에 살면서 호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태조 때에도 역시 정려하였다.
○ 공의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고 청백하였다. 그가 살고 거처하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매양 출입할 때에 소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고아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다. 어느날 햅쌀로 밥을 지어 드렸더니, 공이 “어디에서 쌀을 얻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이 답하기를, “녹미가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 집에서 빌렸습니다.” 하니, 공은 싫어하며 말하기를, “이미 녹을 받았으니,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빌렸소.” 하였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단정하고 후중해서 상부(相府)에 있을 때에 대체를 지녔었다. 공은 경자생이면서 장난삼아 계묘계에 들었다. 어느날 세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세종이, “공은 나이가 몇이요.” 하여,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물러나온 뒤 계묘계 중에서 동갑이 아니라 하여 제명되어 한때에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은 음률을 잘 알아서 항상 피리를 갖고 다니며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었다. 문을 닫은 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지 않다가 공무에 관한 일을 여쭈러 오는 자가 있으면 문을 열고 맞이하였는데,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 안 포단(蒲團)에 앉되,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여쭌 자가 가고 나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여쭈러 오는 자는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필원잡기》
○ 공은 온양에 근친(覲親)하러 오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를 차렸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공이 하인더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이름하였다.
○ 공의 집이 매우 협착하였기 때문에, 병조 판서가 일을 여쭈러 찾아 갔다가 마침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었다. 병조 판서가 집에 돌아와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 하고는, 마침내 짓던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였다.
○ 공이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공은 한쪽 모퉁이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 의정부 녹사(錄事) 취재(取才)에 응하러 상경하는 자였다.공을 보고 불러서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공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가는공.” 하였더니, 그가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공이 묻기를 “무슨 벼슬인공.” 하니, 그가 “녹사 취재란당.” 하였다. 공이 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 하니, 그 사람은 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 하였다.뒷날 공이 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차 들어와 뵈었다. 공이 이르기를,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그 까닭을 얘기하니,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는데, 그는 공의 추천을 입어서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내게 되었다. 후인들이 이를 일러, ‘공당 문답’ 이라 하였다.


권진(權軫)

권진은 자는 희정(希正)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신해년(1431)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을묘년(1435)에 죽었는데, 나이가 일흔 아홉이었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공이 다스린 고을마다 좋은 성적을 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합주(陜州) 원으로 나갔다가, 정종(定宗) 경진년(1400)에 조박(趙璞)의 옥사에 연루되어 영해(寧海) 축산도(丑山島)에 귀양살이 갔는데 얼마 안되어 사면되어 돌아왔다.


최윤덕(崔潤德) 《해동잡록(海東雜錄)》에, ‘공의 자는 백수(伯修)요, 본관은 통천(通川)이며 양장공(襄莊公) 운해(雲海)의 아들이다.’ 하였다.

최윤덕은, 자는 여화(汝和)이며, 본관은 흡곡(歙谷)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인년(1434)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국초의 명장이었다. 그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운해는 변방을 지키느라고 《명신록(名臣錄)》에 이르기를, “공의 아버지가 합포(合浦)를 지켰다.” 하였다.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같은 이웃에 살고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맡겨져서 자라났다. 점차 자라서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센 활을 잘 쏘았는데, 때로는 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많이 잡기도 하였다. 어느날 산중에서 마소[馬牛]를 먹이다가,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뛰어나오자 마소들이 흩어졌다. 공이 말을 타고 화살 하나로 범을 쏘아 죽이고는 돌아와 수척에게 이르기를, “아롱진 무늬를 가진 큼직한 것이 무슨 짐승인지 나오기에 내가 쏘아 죽였다.” 하여 수척이 가서 보니, 큰 호랑이었다. 수척이 윤덕을 기이하게 여겼다.
서미성(徐彌性) 거정(居正)의 아버지이다. 이 나가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수척이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기려 마지 않았더니, 미성이 이르기를, “한번 시험해 보겠다.” 하였다. 함께 사냥을 할 때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구경하는 사람이 모두 칭찬하였다.미성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 애가 비록 손이 빠르긴 하나 아직 법을 모르니, 이 애의 기술은 사냥꾼의 기술에 불과하여 옳은 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 하고는 이내 활쏘기와 말달리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필원잡기》 ○ 운해(雲海)는 벼슬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승추부사(承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장공(襄莊公)이다.
○ 태조가 해주(海州)에 거둥하여 강무(講武)할 때, 가까운 길을 취해 큰 냇물을 건너고자 하였더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먼저 물의 깊이를 알아가지고 오게 해주소서.” 하고는, 말을 타고 곧 물 속에 들어가 고삐를 잡고 목을 움추리고 거짓으로 그 몸을 기울이니 물이 안장에 미쳤다.곧 돌아와서 아뢰기를,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겠으니 전하께서 이 내를 건너시려는 것은, ‘큰길로 가고 지름길로 가지 말며, 배를 타고 가고 헤엄치지 말라.’는 옛말의 뜻과 어긋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건너는 것을 중지하였다. <행장(行狀)>
○ 과거에 태안군(泰安郡)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찼던 화살통에 쇠로 장식했던 것이 헐어 떨어지자, 공인(工人)이 관가의 쇠로 기워 고쳤는데, 곧 명하여 기웠던 쇠장식을 도로 떼어 내었으니, 그 청렴함이 이러하였다. <행장>
○ 공이 이상(貳相 의정부의 좌우찬성을 달리 이르는 말)으로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판 안주 목사(判安州牧使)를 겸임하였는데, 공무가 끝나면 공청 뒤 빈 땅을 경작하여 오이를 심고 손수 매어 가꿨다. 소송하러온 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묻기를, “대감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하자, 그가 속여 말하기를, “아무 곳에 있다.” 하고는,들어가서 옷을 바꿔 입고 판결에 임하였다. 시골에 사는 한 지어미가 울면서 이르기를, “호랑이가 제 남편을 죽였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너를 위해서 원수를 갚아 주겠다.” 하고는 범의 자취를 밟아 손수 쏘아 죽인 후 그 배를 쪼개고 뼈와 고기와 사지를 꺼내어 의복으로 싸서 관을 맞추어 매장하여 주었더니, 그 지어미가 슬피 울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모하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 《청파극담》
○ 안주(安州)를 다스릴 때에 버드나무 수만 그루를 고을 남쪽에다 심어서 고을의 터를 보호하고 수해를 막으니, 사람들이 감당(甘棠)에 비하여 감히 베지를 못하였다.
○ 살고 있는 집 남쪽에 못 두 곳을 만들어 연꽃을 그 가운데다 심고 꽃나무와 아름다운 풀을 그 곁에다 심어서, 매양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 노인들을 청해 술상을 차려 놓고 그 사이에서 담소하였으니, 산야(山野)의 취미가 있었다.


노한(盧閈) 병진생

노한은 자는 유린(有鄰)이며,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민제(閔霽)의 사위이다. 16세에 벼슬하여 을묘년(1435)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계해년(1443)에 죽었는데 나이가 68세였다.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 태종 계미년(1403)에 판합문사(判閤門事)로 하삼도(下三道)에 염문사(廉問使)로 갔는데, 때마침 바닷가에 전선(戰船)을 만들기 위한 오랫 동안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복명하는 날 소대(召對)해서, 역졸(役卒)들의 괴로운 실상을 극력 진술했다. 태종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이르기를, “진시황(秦始皇)과 수양제(隨煬帝)의 포악한 것에 비해서 어떠한가.” 하였다. 공이 갓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신이 명을 받들어서 삼도를 두루 시찰하였는데, 변방 백성의 괴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한 것입니다. 또 진시황과 수양제는 배를 만든 일은 있었으나, 어찌 백성이 곤경에 빠질 것을 걱정하여서 사신을 보내어 물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더니, 태종이 웃으면서, “경은 갓을 쓰라.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 임자년(1432)에 우찬성이 되었을 때에 명 나라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창성(昌盛)과 윤봉(尹鳳) 등이 매년 연달아 나와서 청구하고 토색함이 그지 없었는데,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문득 모욕을 주었다. 세종이 공으로 하여금 관반(館伴)을 삼았더니, 공이 얼굴을 온화하게 하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한 마디 말을 할 때에도 법도가 있었으므로, 비록 미친듯이 위세를 부리던 창성과 윤봉도 망녕되이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공의 어머니 왕씨(王氏) 부원군(府院君) 수(琇)의 딸가 나이 이미 80에 병이 있으므로 공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가 봉양하기를 힘껏 청하였다. 세종이 이르기를,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경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고, 명하여 낮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밤이면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 우의정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게 되자, 민부인(閔夫人)이 들어와 사은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나의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라, 곧 태종께서 남긴 말씀에 의한 것이요.” 하였다.


허조(許稠)

허조는 자는 중통(仲通)이며, 호는 경암(敬菴)이고, 본관은 하양(河陽)이다. 고려 말 경오년(1390)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 무오년(1438)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태종조에 공이 대간으로서 일을 논하다가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좌천되었는데, 이조 정랑의 자리가 비게 되어 태종이 관안(官案)을 검열하다가 이르기를, “이 사람이 이 직에 알맞다.” 하고는 곧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대범ㆍ엄숙ㆍ방정ㆍ공평ㆍ청렴ㆍ근신하여 매양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관디를 차리고 바로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그는 정성껏 나라의 일을 생각하여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으며,국정을 의논할 때는 홀로 자기의 신념을 지켜서 남들에게 맞추어 오르내리지 않았다. 가법(家法)이 몹시 엄하여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한 다음 벌을 내리고, 노비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은 어릴 때부터 깎은 듯이 여위어서 어깨와 등이 굽은 듯하였다. 일찍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하 관원의 복색을 마련하여 제도가 분명하였으므로, 시정의 경박한 자식들이 공을 매우 미워하여 ‘수응 재상(瘦鷹宰相)’이라 별명을 지었다. 《필원잡기》
○ 공은 마음가짐이 맑고 바르며, 집 다스림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자제를 가르치되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을까 싶어 삼가게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은 음양(陰陽 부부관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음양의 일을 몰랐다면, 저 후(詡)와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하였다. 《용재총화》 ○ 창기(娼妓)에 관한 제도를 고치지 않았음은 전고(典故)에 실렸다.
○ 공은 매양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그의 모부인(母夫人)이 손수 지은 어릴 때에 입던 푸른빛 작은 단령(團領)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치재(致齋)하였다.
그의 형 허주(許周)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서 치사하였는데, 공은 매양 정부에서 합좌(合坐)할 때마다 닭이 울면 반드시 형에게 가고, 갈 적에는 반드시 하인들을 동구에 떼어 두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허주도 역시 공이 반드시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밤마다 의관을 바로 하고 등불을 켜고 자리를 베풀어 몸을 안석에 기대고 기다렸는데,공이 오면 반드시 작은 술상을 차렸다. 공이 조용히 묻기를, “오늘 정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면, 허주는 대답하기를, “내 의견에는 마땅히 이러해야 될 것 같네.” 하였다. 공은 기뻐하여 물러나와 말하기를, “옛말에 ‘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한다.’ 하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청파극담》
허주는, 시호가 간숙(簡肅)이고, 성격이 준엄하여 가법이 있었다. 제사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다.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벌을 주었다. 일찍이 병이 들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어서 동생 허조에게 대행하도록 했더니, 전의 제도를 다소 변경하였다.허주가 이르기를, “작은 아들이 종가에서 옛 제도를 함부로 변경하였으니, 이것은 종자(宗子)를 무시한 것이다.” 하고는 노하여 보지도 않고, 또 문지기로 하여금 문에서 거절하게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새벽에 그 문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도록 들어가지 못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서야 겨우 접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공이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을 때에, 밤중에 도둑이 그 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가져 가는데, 공은 졸지도 않으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도둑이 간 지 오래 되어서 집안 사람이 비로소 이를 알고 쫓아갔으나 잡지 못하여 분통해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와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바깥 도둑을 걱정하리오.” 하였다. 《정암집(靜菴集)》 ○ 선배의 극기의 공[克己之功]이 이와 같았다.
○ 조선의 어진 정승으로 황희(黃喜)와 공을 첫째로 꼽는데, 다만 두 사람은 모두 고려조에 과거에 올랐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자는 이 때문에 그들을 부족하게 여겼다. 《병진정사록》


신개(申槩) 기해생. 경오년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신개는 자는 자격(子格)이며, 호는 인재(寅齋)이고, 또 다른 호는 양졸당(養拙堂)이다. 태조 계유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기미년(143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받고 을축년(1445)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어렸을 때부터 어른과 같았으며, 일찍이 외조모 원씨(元氏)에게서 컸다. 나이 겨우 세 살이었는데, 창벽 사이에 그림을 그리고 더럽힌 자가 있거늘 외조모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힐책하니, 아이들이 다투어 변명하였으나 공은 홀로 말하지 않고 제 키를 가리키는데, 과연 키가 그림 그린 벽에 한자 남짓 미치지 못하였다. 외조모가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반드시 이 아이가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해동잡록》
○ 평소에 말을 빠르게 하지 않았고 당황한 얼굴 빛을 짓지 않았으며, 종들에게 죄가 있어도 매를 때리지 않았다. 《해동잡록》
○ 한원(翰苑)에 있을 때에 태조가 실록을 보고자 하였는데, 공이 소를 올려서 불가함을 논하니, 태조가 그만두었다. 《사가집(四佳集)》 <묘비(墓碑)>
○ 성격이 강직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려서 대신의 잘못을 꺾었으므로 시론(時論)이 갸륵하게 여겼다. 태종이 일찍이 이르기를, “신개는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다.” 하였다. 을사년(1425)에 강음(江陰)에 좌천되었다. 《사가집》 <묘비>
○ 일찍이 언충신(言忠信)ㆍ행독경(行篤敬)ㆍ소심익익(小心翼翼)ㆍ대월상제(對越上帝) 등 열네 글자를 써서 세 아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사군자(士君子)의 마음엔 마땅히 이것으로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귀령(李貴齡) 시호는 강호(康胡)이다. 《조야기문(朝野記聞)》과 <상신고(相臣攷)>에 기록되었다. 혹은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다고 하였다.


하연(河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내외 증손(曾孫)이 백여 인이나 되었다.

하연은 자는 연량(淵亮)이며, 호는 경재(敬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ㆍ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을축년(1445)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궤장을 받고 치사하였다. 단종(端宗) 계유년(1453)에 죽으니 나이는 78세였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정유년에 동부대언(同副代言)이 되었는데, 태종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경이 이 자리에 오른 이유를 아는가.” 하자, 공이 “모릅니다.” 고 대답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전일 경이 사헌부에 있을 때 능히 헌직(憲職)을 감당했으므로, 내가 그때에 경을 알았다.” 하였다.
○ 공은 평상시에 늘 검은 사모를 썼는데, 그 뿔은 빼어 버리고 향을 태우며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읊조렸다. 공의 시는 기벽(奇僻)하여 옛시의 격조에 가깝고 필법이 굳세어 체를 얻었다. 일찍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에 시를 지어 손수 쓰니,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이 시를 지어서 하문학이 썼으니, 역시 인간 보물이다.”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일찍이 경상도의 안사(按使)가 되었을 때에 남지(南智)가 아사(亞使)가 되었는데, 공이 매우 중히 여겨 하관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일찍이 진주에 이르러 아름다운 산천의 경치를 찬탄하였으니, 공이 진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지가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하기를,“산수는 비록 아름다우나, 품관(品官)은 몹시 좋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주 출신인 하연을 가리킨 것임] 하니, 공이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공의 아량에 심복하였더니, 뒤에 공은 남지와 함께 정승에 올랐다. 《필원잡기》
○ 공은 평안하고 검소하며 강직하고 명철하며 풍채가 단아하였다. 효도를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고, 종족간에 매우 화목하였으며, 옛친구를 버리지 않고 경조사에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살이에는 힘쓰지 않고 기첩(妓妾)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관을 바로하고 대궐을 향하여 앉는데 좌우에는 도서(圖書)뿐이었다. 그에게 시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흔연히 곧 붓을 잡고 쓰니 시상(詩想)이나 필법이 늙을수록 더욱 절묘하였고, 천성이 옛 도리를 좋아하여 일마다 모두 옛사람을 자기의 목표로 삼았으며, 사대부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문에서 오래 기다리는 손님이 끊일 적이 없었다.오랫동안 이조에 있었으나 사사로운 청탁을 좋아하지 않았고, 정승이 되었을 때에는 법을 좇아 흔들리지 않고 시종 여일하게 근신하였으니, 그는 태평 시대의 문치(文治)를 이룩한 재상이었다. 또 학문이 정하고 깊고 문장이 법도 있고 우아하여 일세의 우러름을 받았다. 공이 죽은 뒤, 유명(遺命)에 따라 불사(佛事)를 짓지 않았다.
○ 공은 부모를 섬기는데 몹시 효도하였다. 두 어버이의 나이가 모두 80이었는데,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구경당(具慶堂)을 짓고 설날이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잔을 들어 수(壽)를 올리니, 사대부들이 영광으로 여겨서 시를 지어 찬송하는 이들도 있었다.구경당은 초가로 지어 해마다 새로 이엉을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영모(永慕)로 편액을 고쳤다. 자질들이 기와로 바꾸기를 청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선인(先人)이 거처하시던 곳을 어떻게 고치겠는가. 역시 그대로 두어, 후대의 사람으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함을 본받게 하여라.” 하였다.


황보인(皇甫仁)

황보인은 자는 사겸(四兼) 또는 춘경(春卿) 이며, 호는 지봉(芝峯)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묘년(1447)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문종(文宗)의 유명을 받아서 단종(端宗)을 돕다가, 계유년(1453)에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죽었는데, 숙종조(肅宗朝)에 관작이 회복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 공은 일찍이 차원부(車原頫)의 원통함을 간절히 논하느라고 사모가 거꾸로 쓰여진 줄을 몰랐더니, 원부가 그로 인하여 특별히 신설(伸雪)되었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사모를 거꾸로 쓴 시종이라 일컬었다. 《해동잡록》
○ 공의 무덤이 파주(坡州) 천참(泉站) 서편 발흥(勃興) 큰 길 가에 있었는데, 그 묘표(墓表)의 글에는 커다랗게 ‘영천 황보공지묘(永川皇甫公之墓)’ 라 새겼고, 또 작은 글씨로, ‘공 휘 인 노산조 수상 경태 계유 정난시 병 이자 일손 피화(公諱仁魯山朝首相景泰癸酉靖難時幷二子一孫被禍)’ 라는 스물 두 글자를 새겼고,또 ‘정덕 기묘 이월 입석 거 피화 위 육십 칠년(正德己卯二月立石距被禍爲六十七年)’ 이라 새겼는데, 수장(收葬)한 이나 그 무덤에 표석을 세운 이의 이름은 모두 나타내지 않았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남지(南智)

남지는 자는 지숙(智叔)이며, 본관은 의녕(宜寧)이고, 영상 남재(南在)의 손자이다. 음사로서, 기사년(144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 공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담력과 뜻이 있었다. 사헌부 지평이 되었을 때에, 도승지 조서로(趙瑞老)가 간음을 하였다는 비방이 있었으나 감히 먼저 발언하는 자가 없었는데, 내가 하겠다고 공이 말하였다. 어느날 일찍 조회에 들어가면서 소유(所由 사헌부의 이속) 20여 인으로 하여금 먼저 이르러 조서로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그의 구사(丘史)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묶어오게 한 뒤,곧 조방(朝房)에서 국문하기를, “너의 주인이 아무날 어느 곳에 갔으며 어느 집에서 잤느냐.” 하니, 구사들이 모든 것을 실상대로 말하였다. 또 간음한 집의 심부름하는 노파를 잡아서 국문하였더니 숨기지 못하였다. 세종이 그때 간음법(奸淫法)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조서로를 곧 서인으로 삼았다. 《소문쇄록》
하연(河演)이 경상도 감사로 있을 때에 공이 새로 경상도 도사로 임명되어 온단 말을 듣고 걱정하기를, “이 사람은 나이 젊고 문벌이 높은 집의 자제여서 필시 직무를 옳게 보지 못할 것이니, 내 장차 어찌할꼬.” 하였다. 그가 처음 이르러서 뵈러 들어올 적에,하연이 시험삼아 판단하기 어려운 공문서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를 처결해 오라.” 하고 공이 물러간 뒤에 사람을 시켜서 엿보게 하니 그가 장중(帳中)에서 손님과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하연이 탄식하기를, “과연 나의 추측과 틀림없구나.” 하였더니, 공이 이튿날 술이 깨자 일어나 그 문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 표시를 하여 하연에게 드리면서 말하기를,“아무 글자는 빠졌으니 아마 그릇된 것 같고, 아무 일은 그릇되었으니 분변하여야겠습니다.” 하므로 하연이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뒤부터 특별히 간곡하게 대우하였다. 그뒤 하연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공도 정승이 되니, 하연이 이르기를, “감사가 발이 빠르지 못했더라면 거의 도사에게 밟힐 뻔하였구나.” 하였다. 《소문쇄록》
○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공과 더불어 혼인하기를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여식이 있으나 얼굴이 못생겨서 귀댁의 며느리가 되기엔 어려우니, 한번 간선을 해 보시오.” 한 즉, 안평이 말하기를, “신부의 선을 직접 보는 것은 궁중의 일이니, 내 어찌 감히 참람한 짓을 하리요.대감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오. 신부의 잘 나고 못난 것을 나는 개의치 않소.”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늙은 여종 하나를 보내어 내 딸을 보시오. 후회가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니, 안평이 듣지 않았다. 공은 그대로 술을 마시다가 취하자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이 있으니 다시 여쭈려 합니다.마침 하양(河陽)에 사는 소경 김학로(金鶴老)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을 잘 치는데, 우리 집의 길흉을 말한 것이 다 맞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댁의 두 딸이 다 운이 좋지 못해서 일생을 잘 지내기 어렵다.’ 하였는데, 혹 이것이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맏딸은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홀로 살고 있고, 이 딸은 둘째입니다.” 하니,안평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은 어찌 무당과 점장이의 말을 믿습니까. 대인(大人)이 요망스런 말을 물리치는 뜻에 어긋나는가 합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곧 말하기를, “그러면 승낙합니다. 우리 같은 한족(寒族)이 종실과 혼인하는 것은 실로 다행입니다. 다만 박복한 딸이고, 얼굴도 잘 생기지 못하여 뒷말이 있을까 염려했더니,이제 대군의 뜻이 확고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여 피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에 안평의 아들 우직(友直)이 공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해 임신년에 공이 풍병(風病)을 얻어 세상일에 상관을 못했다. 또 그 다음해에 안평이 죄를 입었는데, 공이 사돈이면서도 연루되지 않은 것은 병이 났기 때문이었다. 《소문쇄록》 ○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南氏)는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에 쫓겨났다.
○ 공이 죽은 후 사위 우직 때문에 시호를 얻지 못하더니, 성종(成宗) 기유년(1489)에 그의 손자 남흔(南忻)이 소를 올려서 청하자,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소문쇄록》

[주D-001]운검(雲劍) :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차고 임금의 거둥에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무사
[주D-002]대포(大酺) : 임금이 백성에게 주식(酒食)을 나누어 주고, 마음껏 놀게 하는 것.
[주D-003]소공대(召公臺) : 주(周)의 소공(召公)이 자기 관내(管內)의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의 행차가 감당(甘棠)나무 밑에서 멈추었다가 떠난 후 감당나무를 보호하고 시를 지은 일이 있다.
[주D-004]구사(丘史) : 관원이 출입할 때, 모시고 다니는 하인.
[주D-005]직부(織婦)를 내쫓고 : 노상(魯相) 공의휴(公儀休)가 자기 집에서 베를 잘 짜는 부인을 내쫓으면서 “내집에서 베를 짜면 민간의 부인이 무슨 직업을 가지겠느냐”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것.
[주D-006]사단(史丹)의 일 : 한대(漢代)의 사단(史丹)이 태자를 바꾸도록 간한 사실을 말한다.
[주D-007]양수척(楊水尺) : 사냥을 하거나 버드나무로 그릇 등을 만들어 팔았던 천민.
[주D-008]강무(講武) : 열병(閱兵)을 겸한 사냥.
어변갑(魚變甲) 신유생이며 숙권(叔權)의 고조(高祖)이다.

어변갑은 자는 자선(子先)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태종 무자년(1408)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어머니가 늙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咸安)으로 돌아와 봉양하였다.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55세였다.
○ 공의 먼 조상 중익(重翼)의 본성은 지씨(池氏)였는데 나면서 얼굴이 기이하고 백 근 무게의 활을 사용하였으며, 겨드랑이 밑에 비늘 셋이 있었다. 자라서 고려 태조를 섬길 때 어떤 이가 비늘이 있다 하니, 태조가 보고 이르기를, “너는 비늘이 있으니 이는 곧 물고기이다.” 하고, 어(魚)씨로 사성(賜姓)하였다. 《동각잡기》
○ 공이 장차 전시(殿試)에 응하려 할 때 대제학 정이오(鄭以吾)가 우연히 꿈에 시를 얻었는데,

삼급의 풍뢰(風雷)에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고 / 三級風雷魚變甲
아지랭이 피는 봄날에 말 울음소리가 드물다 / 一春煙景馬希聲
두 이름 대(對)가 되어 서로 겨루나 / 雖云對偶元相敵
용문(龍門)의 상객(上客)에 어찌 미치리요 / 那及龍門上客名

하였더니, 공이 과연 장원에 뽑히고, 마희성(馬希聲)이 무과에 장원이 되었다. 《패관잡기》 《동각잡기》
○ 공이 좌정언(左正言)에서 충주 판관(忠州判官)이 되었다. 그때에 공의 아버지 어연(魚淵)이 전 하양 감무(河陽監務)로서 한산(閑散)한 직에 있었기 때문에 공이 상소하여 자기의 직에 대신하기를 진정하였더니, 태종이 허락하고 어연에게 두 계급을 올려 본직(本職)을 제수하였다. 그뒤 공이 헌납이 되었을 때 동료가 상소하여 계림 부윤(雞林府尹) 윤상(尹祥)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일이 애매하였다.이에 공은 서명을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때에 마침 윤공(尹公)이 있는 곳에 있어서 이 사람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을 상세히 아는 바인데, 감히 없는 것을 날조하여 남을 모함하겠는가.” 하고, 곧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좌석이 흩어지고 말았다. <행장> 《동각잡기》
○ 공은 신장(申檣)과 매우 친했는데,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겨 명성을 얻게되면 모름지기 돌아가 노친을 봉양하자.” 하였다. 집현전에 들어가자 임금의 은혜가 잇달아 겹쳐서 차마 갑자기 떠나지 못하고는 늘 돌아가 부모 봉양함이 늦어짐을 한하여 매양 탄식하기를,“임금을 섬길 날은 길거니와 어버이를 봉양할 날은 짧다.” 하였다. 이에 허리 밑에 건습증(蹇濕症)이 나자, 곧 사직원(辭職願)을 내고 본가가 있는 고향에 내려가 온천에서 목욕하여 병을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 사람을 꼭 써야 할 텐데, 병을 다스려야겠다 하니, 어찌 구태여 만류하겠는가. 병이 낫는대로 빨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창녕(昌寧) 고향집에 이르러서 시를 읊기를,

병으로 돌아오니 한 집이 조용한데 / 謝病歸來一室幽
옛 연못가엔 초목들이 황량하기도 하구나 / 荒凉草樹古池頭
나 같은 이 어찌 공명을 피하는 자이겠는가 / 若余豈避功名者
다만 어버이 살아계시니 멀리 놀진 못하겠네 / 只爲慈親不遠遊

하였다.
그뒤 신장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참판에 이르렀는데, 어변갑의 아들 한림(翰林) 효첨(孝瞻)에게 이르기를, “내가 자네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남몰래 서로 약속하였는데 자네 아버지는 결단성 있게 돌아갔으나 나 혼자서 언약을 저버렸으니 매우 부끄럽네.” 하였다. 권제(權踶)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벼슬을 사양한 이가 둘이 있었을 뿐이니 판부(判府) 허주(許周)와 어변갑이다.” 하였다.
공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모든 아우가 무고하였다. 조석으로 입에 맞는 음식을 드리고 날마다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일삼았다. 조정에서 공의 행실을 높이 여겨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평생을 마쳤다. 《패관잡기》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상신으로서 궤장(几杖)을 하사받은 사람들

성석린(成石磷), 허조(許稠), 신개(申槩), 하연(河演), 한명회(韓明澮), 이극배(李克培), 노사신(盧思愼), 윤호(尹壕), 어세겸(魚世謙), 유순(柳洵), 정광필(鄭光弼), 홍언필(洪彦弼), 윤인경(尹仁鏡), 상진(尙震), 윤개(尹漑), 이준경(李浚慶), 이명(李蓂), 홍섬(洪暹), 노수신(盧守愼), 이원익(李元翼), 이경석(李景奭), 정인지(鄭麟趾), 김종서(金宗瑞), 정창손(鄭昌孫), 성봉조(成奉祖), 정유길(鄭惟吉), 권철(權轍),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허목(許穆), 홍낙성(洪樂性), 김사목(金思穆), 정원용(鄭元容)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상신으로서 치사한 사람들

이서(李舒), 권중화(權仲和), 유정현(柳廷顯), 유관(柳寬),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하연(河演), 유순(柳洵), 심수경(沈守慶), 유성룡(柳成龍), 송시열(宋時烈), 남구만(南九萬), 최규서(崔奎瑞), 이광좌(李光佐), 민진원(閔鎭遠), 이의현(李宜顯), 이태좌(李台佐), 김흥경(金興慶), 김재로(金在魯), 유척기(兪拓基), 김상로(金尙魯), 정탁(鄭琢), 홍봉한(洪鳳漢), 김치인(金致仁), 정존겸(鄭存謙), 이경일(李敬一), 남공철(南公轍), 김도희(金道喜), 김흥근(金興根), 이경재(李景在), 조두순(趙斗淳)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일찍 등과(登科)한 상신

이직(李稷)과 김종서(金宗瑞)는 16세에 등과하였고, 이원(李原)ㆍ하연(河演)ㆍ이행(李荇)은 18세에 등과하였고, 민제(閔霽)ㆍ하륜(河崙)ㆍ정인지(鄭麟趾)는 19세에 등과하였고, 성석린(成石磷)ㆍ신개(申槩)ㆍ강맹경(姜孟卿)ㆍ이극균(李克均)ㆍ황헌(黃憲)ㆍ이덕형(李德馨)ㆍ최명길(崔鳴吉)ㆍ정치화(鄭致和)ㆍ정원용(鄭元容)은 20세에 등과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배향(配享)된 상신들

조준(趙浚), 남재(南在), 하륜(河崙), 조영무(趙英茂), 정탁(鄭琢), 황희(黃喜), 최윤덕(崔潤德), 허조(許稠), 신개(申槩), 하연(河演), 권남(權擥), 한확(韓確), 한명회(韓明澮), 박원형(朴元亨), 신숙주(申叔舟), 정창손(鄭昌孫), 홍응(洪應), 이복(李復),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정광필(鄭光弼), 홍언필(洪彦弼), 심연원(沈連源), 이준경(李浚慶),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 김류(金瑬), 신경진(申景禛), 김상헌(金尙憲), 정태화(鄭太和),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 윤지완(尹趾完), 최석정(崔錫鼎), 이유(李濡), 송시열(宋時烈), 김창집(金昌集), 최규서(崔奎瑞), 조문명(趙文命), 김재로(金在魯), 민진원(閔鎭遠), 유언호(兪彦鎬), 김종수(金鍾秀), 이시수(李時秀), 김재찬(金載纉), 김이교(金履喬), 조인영(趙寅永), 이상황(李相璜), 이헌구(李憲球)이다
해동잡록 5 본조(本朝)
하우명(河友明)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영의정 하연(河演)의 아들이다. 인천(仁川) 소래산(蘇來山) 아래에 살았다. 어머니 이씨(李氏)의 생시에는 성심으로 봉양하였고 죽은 후에는 묘막에서 땔나무를 해서 3년간 상식을 올렸다. 뒤에는 영당(影堂)을 짓고 계절에 따른 음식물로 먼저 제사지냈다. 일이 알려져 정문을 세우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벼슬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겨 물이나 뭍에서 나는 맛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엇이나 원하는 것이 있는 줄 알면 반드시 구해서 바쳤다. 그물과 덫을 손수 치고, 고기잡고 수렵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아니했다. 〈정문기(旌門記)
어머니가 꿩의 간과 산새 구이를 좋아하였는데 수풀 속에 그물을 치고 꿩을 몰아 잡아다가 올리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35권
 교(敎) 6
장릉(章陵)을 전알(展謁)하는 날 내린 하교 연로(輦路)의 묘사(墓祠) 여러 곳에 사제(賜祭)하라고 한 하교 18개를 덧붙여 주냄

가을에 행행하여 삼가 장릉(章陵 원종(元宗)의 능)에 배알하는 것은 대개 우리 영고(寧考)의 갑인년(1734, 영조10)의 성스러운 행적을 우러러 이어받고자 하는 것이다. 자리에 나아가 예를 행하니 이미 슬퍼져 감회가 일어남을 감당할 수 없다. 삼가 생각건대, 매년 남전(南殿)에 전배(展拜)할 때 제3실의 수용(睟容)을 공손히 바라보면 마치 친히 옆에서 모시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와서 상설(象設) 앞에서 주선하니 오르내리는 혼령이 더욱 가까워 마치 지척에 임하신 것 같다. 간절한 소원을 조금이나마 펴게 되니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소자(小子)가 이에 더욱 느껴지는 바가 있다. 배알하는 일을 마친 뒤끝에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니 큰 강의 남쪽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높은 산이 서 있는데 용과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장막처럼 빙 둘러쳐져 빛나고 있었다. 이어지면서도 멀리 뻗었으며 험준하지 않으면서도 높으니, 아름다운 기운이 엉긴 바이고 길상(吉祥)이 발원된 바로서 억만년토록 무궁한 복을 받게 될 형세였다.
대개 우리 장릉(長陵 인조(仁祖)를 말함)의 지극한 효성이 위로 하늘에 사무쳐서 마침내 이 제왕의 능침에 알맞은 귀한 자리를 내려 주셨다. 그리하여 먼저 부장(祔葬)하는 예를 경영하고 헌석(軒舃)의 보관물을 옮겨 받듦으로써 우리 후손의 태산 반석과 같은 크나큰 터전을 열어 주게 되었다. 이날 이 땅에 이러한 감회를 적고 이러한 뜻을 표시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본릉(本陵) 국구(國舅)의 집은 공신의 집인 동시에 외척의 집이기도 하니, 대대로 우대하는 예우를 받은 것이 다른 외척의 신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과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한씨(韓氏), 평산부부인(平山府夫人) 신씨(申氏)의 묘소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그 집안의 봉사손은 조용(調用)해야 하겠지만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는데 어느 때인들 할 수 없겠는가. 직계파(直系派)인 유학(幼學) 구규석(具圭錫)을 본릉 능관의 빈자리에 단부하라. 그리고 오늘 입직(入直)하도록 하라.
본 지방의 부로(父老)들에게는 1년 동안 급복(給復)하고 환곡(還穀)과 향곡(餉穀)의 모조(耗條)를 대신 감면하도록 하라. 이 고을의 묵은 환곡이 소민(小民)들의 뼈에 사무치는 폐단임은 익히 들었다. 향곡과 환곡을 막론하고 묵은 환곡이라 이름 붙여진 것은 호방 승지(戶房承旨)가 고을 백성들을 모아 놓고 그 문서를 가져다가 불에 태움으로써 조금의 폐단이라도 제거하도록 하라. 그리고 갑인년 행행 때에 의장(儀仗)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나이 7, 8십 세 이상인 조관(朝官), 사인(士人), 서인(庶人)은 각각 한 자급씩 올려 주도록 하라.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은 도덕과 절의가 해와 달처럼 밝았으니 그 유집(遺集)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공경심이 인다. 지난해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배향할 때 어찌 혹 그 사이에서 취하고 버리며 높이고 낮춤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다만 아울러 거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까지 마음에 걸려 잊혀지지 않는다. 듣건대, 그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 이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라.
○ 고(故) 영의정 김수동(金壽童)은 중흥의 시절에 즈음하여 위아래로 두루 다스렸으니, 노성(老成)한 전형(典型)을 상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고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은 황제의 조정에서 뜻을 다 아뢰어 표창을 받기까지 하였고 중간에 중권(中權)을 맡아 일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였으니, 호종(扈從)한 공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은 동시대의 이름난 재상으로서 왕사(王事)에 부지런히 힘썼는데, 그의 묘소가 어가가 지나는 길가에 있다. 세 대신의 묘소에 예관을 보내어 술과 과일로 제사 지내도록 하라.
○ 양천(陽川)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 강을 사이에 두고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곧 고 영상 김익(金熤)의 묘소라고 한다. 비록 이 고을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연로(輦路)에 서로 바라다 보이니 제사 지내 주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가가 돌아간 뒤 그 아들인 중신(重臣)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도중에서 친히 지은 것이 있으니 이 본(本)을 쓰도록 하라.
○ 정헌공(貞獻公) 윤우신(尹又新), 문열공(文烈公) 윤섬(尹暹), 충강공(忠康公) 윤형갑(尹衡甲), 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는 한 가문의 충절을 지닌 인물들로 늘상 흠모하였다. 이제 그 묘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어찌 뜻을 보이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선조(先朝) 갑인년의 고사에 따라 치제하라.
○ 숙원(淑媛) 조씨(趙氏)의 묘소가 화유귀주(和柔貴主)의 분산(墳山)과 가깝게 있다. 옛날을 생각해 볼 때 어찌 슬픈 감회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어가가 지나갈 때 내시를 보내어 치제하라. 제문은 친히 지을 것이다.
○ 고 영의정 문간공(文簡公) 이천보(李天輔)는 수립한 바의 탁월함을 내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그의 묘소가 있는 고을을 지나게 되니 흔연히 위의를 갖춘 모습이 엄숙히 눈앞에 있는 듯하다. 멈추었던 어가가 늦게 출발하기에 치제문을 불러 주어 적도록 하였으니, 그 손자 대교(待敎) 이존수(李存秀)를 보내어 제사 지내도록 하라. 고 중신 이문원(李文源)은 곧 훌륭한 아비의 아들로서 조정에 있을 때에는 습속을 따르지 않았고 정경(正卿)의 지위에까지 올랐는데 아직까지 시호를 내리지 못하였다. 곧 본가로 하여금 속히 시장(諡狀)을 지어 홍문관으로 이송하도록 하라.
○ 어가가 동구 밖을 지나는데 상설(象設)이 눈에 들어왔다. 애초에 관원을 보내고자 하였으니 한번 절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민회빈(愍懷嬪)의 묘소에 들러 전알하고 이어 제사를 행하되, 백관(百官)이 반열에 참석하는 것은 그만두도록 하라. 집사관(執事官)은 승지나 각신(閣臣), 옥당(玉堂) 중에서 골라 차임하고, 제문은 친히 지을 것이다. 본묘에 예를 펴는 것은 실로 매우 드문 일이니 전배하고 나서는 뜻을 표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 분산(墳山)이 국내(局內)에 있는데, 연전에 송삼(松杉)이 어지러이 울창하여도 금제(禁除)할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 지방관에게 맡겨 다스리도록 하라. 지금 들러 가는 때에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는가. 고 재상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의 묘소에 친히 지은 이 제문을 가지고 제사 지내도록 하라. 헌관(獻官)으로는 승지가 나아가라. 사릉(思陵)의 규례에 의거하여 치제하고, 동시에 민회빈의 묘소에도 설행하라. 예를 행할 때에 그 봉사손을 해조로 하여금 이름을 물어 초기(草記)하도록 하고 수위관(守衛官)의 마땅한 빈자리에 차임하라.
○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은 선릉(宣陵)의 의빈(儀賓)으로서, 그 묘소가 어가가 지나는 길옆에 있다. 영신군(永新君)과 함원군(咸原君)은 모두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서 그 묘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울러 어가가 지나갈 때 치제하되, 내려 준 제문을 읽도록 하라.
○ 아조(我朝)의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로는 대대로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추대하는데, 소하(蕭何)의 율령 제도를 준행한 조참(曹參)처럼 이들을 이어받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준 이로는 고 정승 하연(河演)이 또한 그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듣건대, 그의 묘소가 연로(輦路)의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니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라. 제문은 말로 불러 필사하도록 한 본(本)을 가지고 가서 읽도록 하라.
○ 여러 해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선대왕의 건극(建極)의 통치를 받들어 펴 나가고, 욕심 없는 지조와 아량으로 성대히 훌륭한 보좌가 되었다. 양세(兩世)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것은 더욱 드물고 기이한 일이라 할 만하다. 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묘소에 승지가 가서 제사를 올리라. 이를 인하여 생각건대, 고 정승 김치인(金致仁)에게 아직까지 시호를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예우하던 마음에 어찌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홍문관으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도록 하고 똑같이 치제하라.
○ 고 영의정 홍언필(洪彥弼)은 사류(士類)로서 일세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그 아들 영의정 홍섬(洪暹)은 곧은 도와 깨끗한 인망으로 또 영의정에 올랐고 나이가 70이 넘었는데도 그 대부인(大夫人)은 아직까지 건강하다고 한다. “삼가 정경대부인(貞敬大夫人)을 생각하니, 천상(天上)은 알기 어렵지만 세상에서는 들어 보지 못했네. 순일(純一)한 덕으로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행하여 모두 태좌(台座)의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고, 100년에서 6년 제한 연세로 수성(壽星) 또한 높도다.”라는 구절이 시인의 노래에 들어가기까지 하여 지금까지도 전하여 불려지고 있다. 두 대신의 묘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라.
○ 정안옹주(貞安翁主)와 정정옹주(貞正翁主)는 모두 장릉(章陵)의 동기(同氣)이다. 정안옹주는 금양군(錦陽君)과, 정정옹주는 진안군(晉安君)과 같은 언덕에 묘를 쓰고 있다. 본릉에 전알하고 또 이곳을 지나게 되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아울러 친히 지은 제문으로 내시를 보내어 치제하라.
○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는 인조대왕을 옹립한 공과 경국제세(經國濟世)의 계책으로 성대히 중흥의 명신이 되었다. 그의 묘소가 이 고을에 있다 하니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라. 제문은 친히 지을 것이다.
○ 용백사(龍柏祠)는 곧 제갈 무후(諸葛武侯)호 문정(胡文定)을 주향(主享)으로 배향하는 곳인데, 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가 살신성인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함께 배향되어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의리는 같았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게 한다. 지방관이 승지를 지낸 바 있으니 이 제문을 가지고 가서 읽고 제사를 지내라.
○ 깨끗한 지조를 지닌 사람을 오늘날 많이 얻기 어렵다. 내각 직제학 이만수(李晩秀)는 고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의 묘소로 달려가 살피고 나서 치제하라.
신빈(愼嬪)의 묘소가 본부의 치소(治所)에서 5리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다. 내시를 보내어 치제하라.
○ 신하가 훌륭한 임금과 서로 만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 예로부터 매우 많았지만 민간에서 서로 해후하였던 경우로는 고 참찬 구종직(丘從直)보다 더 성대한 사람은 없었다. 어진 이를 등용하는 데 따로 한계를 두지 않았던 성덕(聖德)이 아직까지도 장중하게 일컬어지고 있다. 지난해에 벼슬에서 떨어진 지 가장 오래된 사람으로서 그의 사손(嗣孫) 구태후(丘泰垕)를 조용한 바 있다. 지금 그의 묘소가 이곳에서 멀지 않다고 하니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라.
○ 전에 이미 치제한 바 있는데 거둥길에 또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킴에 탄식이 절로 나오고 각별한 감회가 깊고 간절하다. 육신사(六臣祠)와 사충사(四忠祠) 및 노강서원(鷺江書院)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라. 제문은 친히 지을 것이다.


[주D-001]김응남(金應南)은 …… 대응하였으니 : 《선조실록(宣祖實錄)》 24년 10월 24일의 기록에 의하면, 김응남이 성절사(聖節使)로서 중국에 가서 왜적이 중국에 침범할 뜻을 갖고 있음을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였는데, 마침 유구(琉球)에서도 진주사(陳奏使)를 보내어 이를 보고하였다. 이에 중국에서는 양국의 보고가 비슷함을 보고 왜노의 속셈을 알게 되었으므로 황제가 김응남에게 칙서를 내려 포장하고 표리(表裏)와 은냥(銀兩)을 넉넉히 주었다.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가 되어 적절히 대응하였고, 1593년에는 이조 판서로서 왕을 호종하여 환도하였다.
[주D-002]그 아들인 중신(重臣) : 김재찬(金載瓚)을 말한다.
[주D-003]민회빈(愍懷嬪) : 소현세자(昭顯世子) 빈(嬪) 강씨(姜氏)이다.
[주D-004]강석기(姜碩期) : 소현세자 빈의 부친이다.
[주D-005]사릉(思陵) : 단종(端宗)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이다.
[주D-006]선릉(宣陵) : 성종(成宗)의 능인데, 이 글에서는 성종을 말한다.
[주D-007]제갈 무후(諸葛武侯) : 무후(武侯)는 촉한(蜀漢) 제갈량(諸葛亮)의 시호이다.
[주D-008]호 문정(胡文定) : 문정(文定)은 송(宋) 나라 호안국(胡安國)의 시호이다.
[주D-009]신빈(愼嬪) : 세종(世宗)의 후궁 김씨(金氏)이다.


敬齋先生文集卷之二
 
慶尙道地理志序地理志二卷在慶州府。壬辰之亂。府吏崔洛保全。仍納巡營 008_445a

皇明永樂二十二年甲辰冬十有二月朔日壬寅。春秋館受敎。各道府州郡縣歷代官號邑名沿革及離合。令戶曹移關各道。備細推覈。轉送本館。以憑參考。洪煕元年乙巳夏六月旁死魄庚子。禮曹受敎。008_445b各道府州郡縣歷代官號邑名沿革離合。更令本道將所上規式。推覈移文。先是。主上殿下於經筵講論之餘。命文臣等纂成本朝地理志。右二司啓目。承上旨也。其規式略曰。諸道諸邑歷代名號之沿革。府州郡縣鄕所部曲之離合。山川界域險阻關防。山城邑城周回廣挾。溫泉氷穴風穴鹽盆鹽井牧場鐵場。良馬所產。土地肥瘠。水泉深淺。風氣寒暖。民俗所尙。戶口人物土產雜物之數。租稅歲貢水陸轉運之程途。營鎭梁浦建設之地。軍丁戰艦之額。海中諸島水陸之遠近。入島農業人物之有無。煙臺烽火所008_445c在之處。本朝先王先后陵寢。前朝太祖古昔名賢之墓。土姓從仕。德藝功業出衆之人。古昔相傳靈異之跡。推覈移文。據此令知大丘郡事琴柔,仁同縣監金鑌主掌其事。馳行諮問。遵依規式。補以闕略。纂成十部。轉送于春秋館。經歷宜寧氏族南智,慶州府尹蔚山氏族吳湜,判官東萊氏族鄭介保等咸與請之。更成一部。首序其事。置于本營。辭切事順。荒蕪之學。不敢固辭。稽之經傳。夏有禹貢之書。周有大司徒,職方氏之籍。歷代所記。山海經,地理志尤致詳焉。驗之事業。簫何入奏。先收圖籍。光武披圖。始知得一。版籍008_445d之有補於國家尙矣。今我聖上發於宸衷。特降綸音。纂記本朝之地理。其爲萬世慮至矣。觀其地勢。長白之山延衰萬里。起伏而爲磨天嶺,磨雲嶺,鐵嶺,五臺,金剛,雉岳。至于慶尙之境。停畜而爲大小白。周旋而爲俗離,智異。旁海而未越。山極高而水益深。神秀英靈之氣。含弘醞釀。慶尙之爲道。經緯乎其間。土地之沃饒。人物之富庶。倍於他道。在昔三國之鼎峙也。國之新羅。歷五十六王。而享國九百九十有二年。最爲長久。定一于高麗王氏。以至于盛代。是則此道本新羅之舊居。國家之本根。忠臣孝子義夫節婦。008_446a風物之所尙。禮樂文物之所自出。盍爲之載籍。以傳其不朽。時太歲乙巳冬十有二月朔日丙寅。監司敬齋晉陽河演淵亮。識。
敬齋先生文集卷之四
 附錄
年譜 008_457a

皇明太祖高皇帝洪武九年丙辰 高麗禑二年
八月十三日乙未亥時。先生生于晉州尼丘山下餘沙村第。
尼丘在州西四十里。屹然臨水。河氏世居其下。俗傳禮義如魯闕里故名。 餘沙。今稱沙月。
十二月。王考晉山府院君苦軒公卒。
十年丁巳。先生二歲。
008_457b十一年戊午。先生三歲。十二年己未。先生四歲。
十三年庚申。先生五歲。
八月。曾王考晉川府院君松軒公卒。
○先生與群兒戲遊。躓仆傷額。母夫人戒之曰。古書云。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毀傷。孝之至也。先生聞甚惕然。憂形于色。自是行不妄動。擧止有度。手不持玩好之物。口不出鄙倍之言。
十四年辛酉。先生六歲。
秋。從皇考木翁公于豐海營。
008_457c時木翁公爲海西觀察使。
十五年壬戌。先生七歲。
秋。從木翁公自豐海還京第。
第在松京。先是。松軒公占松岳之東岡以居。晚年還鄕。及木翁公從仕于京。修葺舊第而居焉。
十六年癸亥。先生八歲。
始入小學。
木翁公敎之以孝悌忠信。先生曰。何不言敬。木翁公曰。旣行孝悌忠信。則敬在其中。
正月。祖妣貞敬夫人卒。
008_457d十七年甲子。先生九歲。
春。讀伯夷傳。
讀至於首陽採薇而食。顧謂伯兄郡事公曰。首陽周地。薇亦周物。何以隱於周地而食周物。木翁公奇之。
十八年乙丑。先生十歲。
文辭大進。筆法端正。
李牧隱穡見而奇之曰。此非鴨江以東之才。其早成。雖唐,宋諸儒。未必過此。
夏。從木翁公于淸州任所。
008_458a時木翁公服闋。拜淸州牧使。
十九年丙寅。先生十一歲。
時旭元國男女三十餘人。漂到蔚山津。路過淸州。先生於路上觀之。旭元人聚觀先生曰。偉哉眞大人氣像。女人以雜佩遺之。先生微笑曰。吾本不喜玩好之物。況女子雜佩。豈丈夫所取。遂不受。
二十年丁卯。先生十二歲。
秋。從木翁公自淸州還京第。
時木翁公自淸州還朝。拜兵曹判書。
008_458b二十一年 高麗昌元年 戊辰。先生十三歲。
二月。陪木翁公遊春塘。拜冶隱吉先生。
木翁公與冶隱暢懷于春塘。共論王室艱危。先生進曰。不事二君。是人臣之道。冶隱顧語木翁公曰。此兒一言。眞吾輩職分乎。
二十二年 恭讓王元年 己巳。先生十四歲。
受業于圃隱鄭先生。
木翁公。與圃隱道同志合。又所居隣近。昕夕相從。至是命先生就學。先生天姿近道。立志甚高。旣得賢師。益加自勉。深究性理之學。
008_458c二十三年庚午。先生十五歲。
從木翁公于淸風任所。
木翁公旣辭大司馬之命。不欲安於朝。屢乞外補。是歲除淸風郡守。
二十四年辛未。先生十六歲。
秋。從木翁公自淸風還鄕。
時麗運將訖。王室艱危。木翁公不忍宗國之亡。遂自職所。托疾歸鄕。
十月。入京謁圃隱先生。
及還。圃隱送至洞外曰。君去南。吾道南。
008_458d二十五年 我太祖大王元年 壬申。先生十七歲。
四月。哭圃隱先生。
先生早歲及門。薰炙道義。深被奬育之恩。至是在鄕承訃。驚慟不已。後挽其子宗本。有契托趨庭後。情同骨肉親之句。
二十六年癸酉。先生十八歲。
二十七年甲戌。先生十九歲。
二月。聘夫人星山李氏。
重大匡開城尹存性女。月城府院君慶州李成林外孫。○按姜通亭淮伯。卽松軒公外孫。其夫008_459a人李氏。乃先生夫人之兄也。其孫晉山君希孟撰通亭行狀。有曰。希孟生三歲。鞠於王母。王母常敎余曰。乃祖嘗器表姪河某之爲人。以吾季妹妻之。河公嘗治第晉曲。乃祖戒之曰。子當踐敭美官。爲國大相。非終老鄕曲者。勸令之京。後其言無一不中云。
二十八年乙亥。先生二十歲。
秋。中司馬鄕試兩場及文科漢城試。
二十九年丙子。先生二十一歲。
春。中司馬,覆試兩場。008_459b夏。擢文科會試。 金益精榜下三等第一人
三十年丁丑。先生二十二歲。
正月。授從仕郞奉常寺錄事。直藝文館。
秋。自晉州就居京城鑄洞。 後移居敦義門外
三十一年戊寅。先生二十三歲。
建文皇帝元年 定宗大王元年 己卯。先生二十四歲。
十二月。陞通仕郞春秋館修撰官。
二年庚辰。先生二十五歲。
十二月。陞務功郞門下注書。
按朝野記聞。是歲命先生改官制。以門下及008_459c都評議司。合爲議政府。
三年 太宗大王元年 辛巳。先生二十六歲。
四月。陞宣務郞濟用庫副使。
五月。移宣敎郞供正庫副使。
四年壬午。先生二十七歲。
五月。加承訓郞。拜司憲府監察。
先生以年少新進。初入殿中。百僚整肅。
太宗文皇帝永樂元年癸未。先生二十八歲。
五月。除承議郞典農寺主簿。
六月。移承訓郞奉常寺主簿。
008_459d閏十一月。拜承議郞。仍奉常寺主簿。兼尙瑞院錄事。
十二月。拜禮曹佐郞。兼尙瑞院直長。
子孝明生 官至副正
二年甲申。先生二十九歲。
正月。仍禮曹佐郞。兼尙瑞院主簿。
七月。遷直長。
十月。移兵曹佐郞。仍兼尙瑞院主簿。
十二月。陞奉訓郞。移刑曹佐郞。復移供正庫使。
三年乙酉。先生三十歲。
008_460a正月。加奉直郞。拜吏曹正郞。
十二月。移兵曹正郞。加通善郞。
四年丙戌。先生三十一歲。
二月。拜吏曹正郞。加通德郞。
閏七月。仍吏曹正郞。兼知製敎。
十二月。陞朝散大夫奉常寺副令。直集賢殿。
五年丁亥。先生三十二歲。
十二月。除奉列大夫知安岳郡事。兼勸農兵馬團練副使。
六年戊子。先生三十三歲。
008_460b春。乙任安岳。
先生初受郡寄。專意民事。誠於惠恤。勤於勸課。築迎春亭片月亭大樹亭魚躍亭筆峯亭。視篆之暇。登臨巡省。勸督農事。又作農謳數闋以相之。民樂趨業。治化大行。 出安岳名宦錄
七年己丑。先生三十四歲。
八年庚寅。先生三十五歲。
春。自安岳秩滿還朝。
七月。拜奉直大夫禮賓寺少尹。
九年辛卯。先生三十六歲。
008_460c春。子悌明生。 官至佐郞
十年壬辰。先生三十七歲。
七月。除奉直大夫全羅道都觀察黜陟使經歷所經歷。不赴。
八月。拜內資寺少尹。直寶文閣。加奉正大夫。
十二月。遷典祀寺副令。直集賢殿。陞世子右文學。
按筆苑雜記。先生燕居常著烏紗帽。去軟角。焚香靜坐。終日吟哦。爲詩奇古。筆法遒勁。時在春坊。作詩寫之。河浩亭崙嘆曰。河文學作而河文008_460d學寫之。亦一人間寶玩也。自是一世搢紳求詩文者。皆欲先生作而書之。
十一年癸巳。先生三十八歲。
四月。除典祀寺令。直集賢。殿陞世子左文學。
五月。子友明生。 官至同知中樞。號蓮塘。配享新川書院。
十二年甲午。先生三十九歲。
正月。移典祀寺少尹。
三月。移敬承府少尹。兼世子左文學。
九月。拜司憲府掌令。直集賢殿。
十三年乙未。先生四十歲。
008_461a二月。陞中訓大夫。除中和郡事兼平安道左翼兵馬團練副使。不赴。
三月。直寶文閣。
十四年丙申。先生四十一歲。
六月。加中直大夫。拜司憲府執義。
先生在臺。獨持風裁。言事稱旨。上心嘉之。
十五年丁酉。先生四十二歲。
四月。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代言,經筵參贊官,寶文閣直提學,知製敎,春秋館編修官兼判軍器監事,知工曹事。
008_461b先生與諸代言入謝。上執先生手曰。卿知所以在此乎。先生對以未知。上曰。曩卿在臺獨奏。克揚憲職。予於此時。已知卿矣。先生拜謝而退。
六月。陞拜右副代言。 兼如故兼判軍資監事。知戶曹事。
九月。除左副代言,集賢殿直提學。 經筵製敎,春秋幷仍。兼判司宰監事知刑曹事
十二月。除右代言。 兼如故兼判軍資監事。知戶曹事。
008_461c十六年戊戌。先生四十三歲。
七月。除左代言。 兼如故兼判司僕寺事。知兵曹事。
八月。參侍宴。陞知申事兼尙瑞尹,修文殿直提學,春秋館修撰官,判典祀寺事。知吏曹內侍茶房事。
世宗實錄曰。戊戌八月十日。上卽位。詣上王殿獻壽。孝寧大君補,領敦寧柳廷顯,領議政韓尙敬,右議政李原及宗親駙馬,六代言侍宴聯句。 聯句見本集 ◑時國家多事。策應不一。而先生周旋其間。小心謹愼。兩宮際遇交隆。賞賜稠008_461d疊。
扈從廣津。
國朝寶鑑曰。恭靖大王避暑在廣津。上王與上幸東郊臺山。邀恭靖王置酒極歡。抵暮而罷。上王乘白馬而還。中途下馬。召知申事河演。謂曰。予素愛此馬馴良。今遺主上。又顧謂演曰。吾父子之事。歷代所無。
十七年 世宗大王元年 己亥。先生四十四歲。
入侍經筵。進講大學衍義。
先生以扶正道興斯文爲已任。而職在論思。尤008_462a惓惓於勉聖學。是歲世宗新卽位。首開經筵。虛心問道。筵臣皆極一時之選。先生時以參贊官。與同僚論奏明剴。剖柝精詳。逐日賜對。竟晷而罷。◑國朝寶鑑曰。元年。始開經筵。領經筵事朴訔,李原,知經筵事柳觀,下季良,同知經筵事李乙剛,參贊官河演,金益精,李隨,尹淮,侍講官鄭招,柳穎,侍讀官成槪,檢討官金赭,副檢討官權蹈等進講大學衍義。上好學不倦。日御經筵。未嘗暫廢。
二月。陞嘉善大夫。拜江原道都觀察黜陟使。兼兵008_462b馬節制使,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提調刑獄公事。
原州卽王考苦軒公遺愛之地。先生一意爲治。克追家聲。
十月。入爲右軍都摠府同知摠制,寶文閣提學。
十八年庚子。先生四十五歲。
正月。拜禮曹參判兼寶文閣提學。以進紙箚。兼請免金銀事奉使如京。
陛辭之日。先生請曰。朝廷若問代以何物。對之如何。上王曰。國家選擇而使卿。在卿專對如008_462c何耳。
三月還。仍拜禮曹參判。 兼如故
時巨濟人民避倭流寓於居昌加祚縣。上王及上特命還徙於水內本土。仍命先生主掌施行。◑按癸酉先生寄李中樞詩序。有曰。己亥春。吾以禮曹參判。主掌施行云。而今考政案。先生於己亥春。初陞嘉善。未及拜禮參。行狀亦曰。庚子正月。拜禮參。當更攷。◑又按東國歷代編年。是歲始設集賢殿云。而先生於太宗丙戌。已有集賢之直。且太宗戊戌。始開經筵008_462d云。而先生於丁酉。已帶經筵之職。編年與政案相左。並當更攷。
十九年辛丑。先生四十六歲。
十月。拜全羅道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勸農管學事,提調刑獄公事。
二十年壬寅。先生四十七歲。
春。作高山三奇亭記。
是歲春。先生巡到高山縣。縣東數里許。有一小岡。景致殊絶。水石及老松尤奇勝。先生登臨娛玩之餘。斫木白而書之曰三奇。及還。縣監崔得008_463a之構亭其上。請先生記之。其略曰。見水之淸。則吾心本然之明德益明。見石之巖巖。則確然不拔之志益堅。見松之晚翠。則貞固之節益高。此岡三物。足以爲操心養性之機云。
巡到長興。作長寧城記。
城卽府城。以其合遂寧縣。故取長興遂寧二字而名之。
九月。到南原府遊山洞。有詩刻石。 詩見本集
後乙丑。監司韓磌憫其字刓。命工改刻。因記事曰。山洞在南原中防縣。河監司適宿縣舍。夢有008_463b老翁來告曰。吾有五孫爲君饋被捕。願勿殺。仍以詩贈之。覺而問之。果有五生鯉。卽令放之。仍遊淵上。忽雲氣晦暝。有黃龍初出左曲。次出右曲。終出首如馬頭。白髥黑角。熟視良久。欣然而逝。傳說洋洋。而不及詩中。先生德量。益可想云。○按芝峯類說。記此事言監司河某。而不言名。乃曰監司見龍怖死。蓋傳聞之誤。
十二月。以兵曹參判召還。
士民攀轅願留。至以土石遮道成阜。
二十一年癸卯。先生四十八歲。
008_463c三月。拜司憲府大司憲。上疏斥佛。
先生旣長憲府。以激濁揚淸。斥邪扶正爲已任。凡士大夫貪淫無行者。彈擊不少饒。朝著爲之肅然。時承高麗末弊。崇奉浮屠。至有試選爵秩奉養土田之規。先生慨然上疏。極言其廣立佛宇施土田納臧獲之非。仍請於京師只留二寺。諸道各止二三。永罷試選之法。勿下僧職之批。疏上。上下其議。大臣亦以爲宜。卽命並曹溪,華嚴七宗爲禪,敎兩宗。京外只留三十六寺。量給土田。餘悉罷之。○姜晉山希孟所撰先008_463d生行狀曰。時世宗銳意於治。諸大臣若贊上行之。盡如公言。則豈非吾道之幸。
撰柳忠景公墓誌。
柳公名亮。卽先生女壻。京生父。
二十二年甲辰。先生四十九歲。
四月。拜刑曹參判。
十二月。拜中軍都摠制。同日又拜慶尙道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
南忠簡智所撰先生神道碑曰。世宗勵精治道。尤致詳于庶獄庶愼。凡廷僚之可大用者。旣008_464a簡在心。必試之方岳。嶺。新羅舊疆。地踔遠。號難治。歲乙巳。命大司憲河公。旣之任。政明修擧。治成績煕云去。○按政案。先生之拜嶺伯。在甲辰十二月四日。而碑云乙巳。似以翌年莅任爲言。
仁宗昭皇帝洪煕元年乙巳。先生五十歲。
春。之任嶺營。以擇遣參佐。狀請于朝。
時先生二親。年皆望入。而先生建節本道。季弟溥又以高陽縣監。受暇同來。人皆榮之。○朝廷擇遣南智爲都事。○南公所撰碑曰。公旣之任。008_464b有決輒當。一日。閱久牒。得細大疑滯凡一笥。以狀請于朝。擇庶僚之有材幹可參決決疑。公所恢恢爾。特謙邦不自專。恐一事或致誤曠分憂也。余不佞承乏佐幕。幕禮畢。可辨者專。可質者覆。公亦不異焉。遂猥推詡器局。賜交忘年。雖公之誤知余。而余之得幸於嶺大矣。
閏七月。序本道營主題名記。 序見本集
八月。巡到禮安。作秋興亭記。
亭在縣之客館東。郡守朴潔所建。先生名以秋興。仍記其事。
008_464c到咸安。登淸範樓。
樓卽郡守禹承範所建。禹公請名於先生。命以淸範。○按洪汝方記曰。樓用郡守之名。欲其人之不忘也。加之以淸。慕其人之德也。
宜寧縣有記。
按輿地勝覽。有蒼江大野高岡茂林之語。
登密陽嶺南樓有詩。 詩見本集
登巨濟撫夷樓有詩。
先是巨濟人民之還徙也。先生以禮參主掌施行。及爲監司。親承上旨。凡本縣軍民事之未008_464d遑者。率以便宜措置。勞來撫摩。於是。縣境大蘇。
到晉州。與南都事智共登矗石樓。
樓在州之南江上。○按名臣錄。先生與南公行到晉州。嘆山川雲物之勝。南改容曰。山川雖勝。品官甚惡。先生大笑。人服其雅量。
奉敎編慶尙道地理誌。
時上敎春秋館。令各道方伯收送地理誌。先生奉旨。令大丘郡事琴柔,仁同縣監金鑌掌其事。編成十部上之。於是。道人經歷南智,判官鄭介保,東都尹吳湜請別纂一部。藏之本營。先008_465a生從之。仍作序記其事。
奉敎。以四書五經大全及性理大全等書鋟板。
一部輸校書館。一部置本營。
十二月。以吏曹參判召還。
宣宗章皇帝宣德元年丙午。先生五十一歲。
正月。拜忠淸道觀察黜陟使兼兵馬節制使。辭不赴。移拜禮曹參判。
二年丁未。先生五十二歲。
八月。除仁順府尹。同日。移拜平安道都觀察黜陟使管學勸農事兼平壤府尹。
008_465b三年戊申。先生五十三歲。
春。坐事罷。謫守天安郡。
碑文曰。天安之謫。言者過言。非公過也。公自過無幾微色云。○先生再受郡寄。四秉節鉞。爲政廉平。以革弊利民爲先。所至氏恒愛之。雖去而追思不已。
四年己酉。先生五十四歲。
春。自天安召還。
碑文曰。上察公忠諒。不一年召還。在謫亦優恤。蓋異恩數云。
008_465c四月。加嘉靖大天。拜兵曹參判。
八月。拜黃海道觀察黜陟使。不赴。移拜右軍都摠府摠制。
五年庚戌。先生五十五歲。
閏十二月。加資憲大夫。拜刑曹判書。與許相公稠奉敎纂五禮儀。
採洪武舊制及東國儀禮。參酌損益。而稟旨取裁。
六年辛亥。先生五十六歲。
二月。拜藝文館大提學。
008_465d時上在位日久。明習國家事。知先生才器。每加奬拔。際遇日隆。先生文章典雅。學問精深。爲世儒宗。至是遂典文柄。
六月。丁先妣貞敬夫人憂。秋。葬貞敬夫人于楊州豐壤之八賢洞。
先夫人以至正丁亥生。是月二十七日卒。享年八十五。
七年壬子。先生五十七歲。
八年癸丑。先生五十八歲。
八月。服闋。起拜三軍都鎭撫。掌禁府。未幾又拜大008_466a司憲。
按先生憲長之拜。政案則在於八月。而行狀曰十二月。當更攷。
十二月。丁皇考木翁公憂。
木翁公自壬申以後。謝絶世事。決意嘉遯。及諸子仕宦干京。爲便養之。方奉至于京。而木翁公義不八城。僦屋於敦義門外。先生以所居鑄洞。稍間於親側。乃移居奉侍。與諸兄弟盡誠色養。別構一堂於親側。名曰具慶。兩親康彊無恙。俱踰八耋。歲時節日。奉觴稱壽。凡所以慰悅親心008_466b者。靡所不至。一時搢紳之士。無不欽嘆。至爲詠歌其事。如國老鄭郊隱以吾首爲絶句以倡。權陽村近,崔提學興孝,趙判院末生,辛參判引孫繼而和之。尹淸香淮序以記之。木翁公以至正庚寅生。是月十二日卒。享年八十四。先生連遭巨創。年方衰暮。而前後居憂。情文備至。人皆稱孝。
九年甲寅。先生五十九歲。
春。葬木翁公于先夫人墓右。仍廬墓三年。
十年乙卯。先生六十歲。008_466c英宗睿皇帝正統元年丙辰。先生六十一歲。
二月。服闋。
三月。修葺具慶堂。改扁永慕。
先生旣外除。修葺木翁公舊堂。蓋以茅茨。而處其中。改扁永慕。以寓羹墻之思。子姪請易以瓦。先生嘆曰。先人舊居。垂之後人。以昭儉德。不亦可乎。其勿改也。○木翁公嘗仕松京。修葺松軒公舊居。改扁永慕。倩畫成障。以著先世儉約之德。且戒兒孫雖當改貫。必遵舊制。先生之改扁永慕。不許易瓦。蓋有來矣。
008_466d四月。拜刑曹判書。
六月。陞拜議政府右參贊。
洪府尹汝方以詩賀之。先生次其韻。
秋。爲義禁府提調。
與趙判院末生,皇,甫判書仁,沈判書道源同爲提調。
十一月。兼修文殿提學。
先生次金學士韻。有曰。先祖飄纓處。今吾繼踵時。蓋以王考苦軒公曾爲修文提學故也。
十二月。拜禮曹判書。仍兼修文提學。
008_467a二年丁巳。先生六十二歲。
八月。拜吏曹判書。仍兼修文提學。
十月。加正憲大夫。
十二月。以吏判兼寶文閣大提學。是歲始定兩南貢稅法。
時國法尙未一定。先生與一二執政定行貢稅年分法。地分六等。年分九等。以上下其稅。而先從兩南爲始。
三年戊午。先生六十三歲。
以詩答柳府尹思訥書。兼寄殽酒。
008_467b柳公書云。去丙辰年數大匈。申子謹聞之悲嘆。蒸霜華備美酒送慰之。能無事過了。推數者又云。今戊午亦難。閤下如申公之惠則可免。先生送以酒肉。兼寄詩戲之。有豈啻好過今戊午。敢將殽酒祝高年之句。
十月。陞拜議政府左參贊。兼修文殿大提學。
時北虜連年有警。朝廷遣崔潤德,李順蒙將兵討之。而餘患未息。上留意邊事。日與三司六卿文武大臣。講畫戎務。昕夕不輟。領相黃喜,左相孟思誠,右相權軫,判中樞河敬復,吏判許008_467c稠,兵判崔士康,戶判安純,禮判申商,工判趙啓生,贊成李孟畇,成抑,參贊申槪及先生,咸吉道觀察使鄭欽之,節制使金宗瑞或登對。或箚論商確未已。
十二月。兼世子左賓客。
四年已未。先生六十四歲。
六月。以左參贊兼判吏曹事。仍兼世子左賓客。
時上欲貸死囚。先生與相臣黃喜,申槪,贊成李孟畇等論奏輕刑害及良善之弊。仍援大叔寬縱之害。子產寬猛之喩以申之。請從律文。008_467d上從之。
行四孟朔頒祿之制。
先生與諸宰執稟旨講定。
五年庚申。先生六十五歲。
五月。陞拜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仍兼修文殿大提學。判吏曹事。
時吏判崔府誤擧人注官。上御思政殿受常參。大司憲鄭甲孫啓曰。判書崔府固失銓政。河某素知事體。而有此誤擧。請鞫之。先生與崔府入侍奏曰。臣職在判選。敢曰不知。仍自引請008_468a罪。上知其無他。遂怡顏兩解之。
六年辛酉。先生六十六歲。
五月。喪長子孝明。
宣德末。勸登武擧。至是以軍資副正卒。年三十九。後贈吏曹參判。
九月。陞左贊成。 兼如故 答李云義書。
兼寄以詩。有金風八月猶炎瘴。自愧疏慵職贊成之句。
七年壬戌。先生六十七歲。
三月。扈從伊川溫井之幸。聯和匪懈堂詩帖。
008_468b匪懈堂。安平大君瑢號也。大君於東書堂古帖室。得宋英宗宸翰八景詩。蹋其詩晝其圖。仍名其堂曰八景。請當世之善詩者賦以歌之。先生與集賢藝文諸學士成三問,崔恒,鄭麟趾,南秀文等十七人咸作詩親筆。聯成一帖。中朝人翁正春以八分書其首曰海宇奇觀云。
定各品行守法。
先生與諸宰稟旨所定也。◑時上益明治體。凡軍國大小事務。一委政府。至於銓選之政。專責吏部。先生入贊大政。出判曹務。淸白自勵。008_468c盡心奉公。重惜名器。裁抑僥倖。處事必計之於未爲之前。慮之於已行之後。由是事無過擧。敷奏之際。言語精當。動輒稱旨。眷注日隆。
八年癸亥。先生六十八歲。
三月。扈駕溫陽。
七月。以左贊成。兼判戶曹事。始改田品。
先生平時禮接士大夫。門無停客。及判銓曹前後五載。一切不受私謁。至被論斥。而不以爲意。性厭奔競。嘗有詩曰。廣迎秪爲明時輔。用捨何由獨見聞。至是改判戶部。◑先生判地部。與諸008_468d宰稟定田分五等歲分六等之法。
九年甲子。先生六十九歲。
三月。扈駕椒井。自椒井因事先還。賦賀醴泉詩。寄侍從諸友。 詩見本集
時上以風患。又幸淸安之椒井。先生與李公塏,申公叔舟,黃公守身,李公思哲,安平大君瑢侍從。有詩聯和。
閏七月。以左贊成。兼行承政院都承旨。
按行狀所載。履歷如此。而政案則是年無都承旨批目。可疑。且政案以正統八年七月爲閏。008_469a誤。
十二月。加崇祿大夫。仍左贊成。
十年乙丑。先生七十歲。
正月。加大匡輔國崇祿大夫。陞拜議政府右議政。領集賢殿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以年滿七十賜几杖。
先生於釋褐之初。已有公輔之望。至是大拜。時上以憂勤有疾。命世子參決庶務。先生與首相黃喜,左相申槪同心協輔。上傾心委任。
十一年丙寅。先生七十一歲。
008_469b贈守陵官南智詩。
二月。昭憲王后薨。因山旣成。守陵官難其人。南公闋私喪。伏闕下自請大被時議。先生首以詩解之。一時名公繼而和之。柳參議義孫作序美之。於是時議乃息。◑南公撰先生碑曰。記昔丙寅。余守昭憲聖后陵。公辱以詩。起居同朝諸公亦和之成軸。今在篋。擬以爲傳家寶。今於誌公之文。尤有所感慨云。◑按名臣錄。鄭文成麟趾傳記昭憲山陵時事。有曰。領議政河某云云。而先生領相之拜。在於後四年庚008_469c午。則名臣錄。恐字誤。
十二年丁卯。先生七十二歲。
春。爲文科讀卷官。
取李承召等三十三人。
六月。陞左議政。 兼如故
按政案。先生之陞左揆在是月。而行狀作正月。當更攷。
秋。拜殿試讀卷官。
取姜希孟等二十五人。◑姜公撰先生季子同樞公旌門記曰。丁卯秋。文孝公典貢擧。希孟釋008_469d褐爲壯元常在門下。欽仰德音。式刑動靜久矣云。
又爲重試讀卷官。
取集賢殿修撰成三問等十九人。◑慵齋䕺話曰。丁卯重試。成謹甫三問居首。金墩,李塏,申叔舟,崔恒,朴彭年,李石亨,柳誠源,李克增,李胤保,李成,鄭昌孫,金禮蒙。皆居三等云。
九月。同政府六曹大臣。會成均館明倫堂。賦詩頌御賜尊鐘。
辛判書碩祖成均館受賜尊鐘記曰。成均館。008_470a舊有靑畫鐘一事。品頗奇絶。太示命有司匣而藏之。丁卯八月。大司成鄭麟趾從容以啓。上卽賜白尊二雙白鐘畫鐘各二雙並御酒。越數日重陽。政府六曹大臣。會明倫堂課諸生。設賜器酌黃封以相慶。酒半。右議政河公某賦詩以頌。卿士繼而和之云。按行狀及政案。先生之拜左揆。已在是歲之春夏。而辛公猶云右議政。可疑。
十三年戊辰。先生七十三歲。
時國家昇平日久。先生與右相南公智同在相008_470b府。貫餙文治。世以太平良相稱。◑一日。先生顧謂南公曰。監司若非急足。幾爲都事所躡。蓋以慶尙監司時。南公爲都事。而相得甚歡故也。一時傳爲美談。
十四年己巳。先生七十四歲。
作晉州鄕校四敎堂記。
堂在州東三里。敎官姜公元亮所建。走書請記于先生。 記見本集
八月。送子友明。從軍北行。
天朝時有北虜之警。上憂之。命將往備。先生008_470c自以身在相位。義同休戚。使季子應募佐幕。作詩送行。勉以奮忠輔國毋負所生。
恭宗景皇帝景泰元年庚午。先生七十五歲。
正月。送倪侍講 謙, 司馬給事 兩詔使。
時翰林侍講錢塘倪公,給事中司馬公奉詔來宣。及還。先生與河東鄭麟趾。河陽許翊,坡平尹炯,昌寧成念祖,光山李先齊,完山李思哲,晉陽鄭陟,圖山高得宗,驪江李審,韓山李季甸,李塏,東萊鄭昌孫,丹城金鉤,鷲山辛碩祖,㠉梁崔恒,咸從魚孝瞻,延山李石亨,晉山姜孟卿,丹溪008_470d河緯地,陽城李芮,李承召,魯山李永瑞,達城徐居正,西原韓繼禧,平陽朴彭年各賦詩爲贐。高靈申叔舟爲之序。昌寧成三問爲之跋。其後有人購書燕肆。得一書。名遼海編。乃倪侍講,司馬給事在本國時。與諸公酬唱之作也。流布中國。爲絶世奇觀云。
二月。論大慈庵重修之非。
先生親見麗末崇佛之弊。故常以扶正闢邪。爲挽回世道之責。每遇佛老之事。必極力觝斥。是月世宗昇遐。文宗卽位。欲重修大慈庵。先008_471a生以爲新政之初。不可崇信左道。復修已撤之屋。固爭之。上自先生爲師傅時素敬重。故遂從之。○先生於文宗之立。身居相位。輔翊新政。故有詩敍懷曰。精一心傳授受時。手扶初日出咸池。又有德乏雖嫌違物論。年高稍幸稱朝儀之句。
秋。掌試。
取權擥等三十三人。
十月。陞拜領議政府事。領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以老病再上疏乞退。不許。008_471b傳犀帶於幸君碩祖。
按筆苑雜記。自國初相府有三公相傳犀帶一腰。傳必門生。爲中書故事。傳或失人。則爲世所譏。故不輕傳授。自黃翼成喜,許文敬稠相傳至先生。又傳辛文僖。其後帶不復傳。 傳犀帶詩。見本集。
二年 文宗大王元年 辛未。先生七十六歲。
正月。修世譜。
先生以爲先世之積累。不可以不念。宗支之親疏。不可以不知。遂修明譜系。著爲圖籍。名之曰上集下集。以遺後來。仍作序以記之。
008_471c二月。作自警箴。
先生自少爲學。從事於敬。嘗自號敬齋。書揭朱子箴干壁。以爲常目之地。日用行事。動以古人自期。不殖產業。不畜聲色。閨門之內雍雍如也。平居鷄鳴盥櫛。正衣冠。拜家廟。身爲首相。年紀篤老。而未嘗或廢。不以事務叢萃。祁寒盛暑有變也。坐必向闕。手不釋卷。左右圖書淡如也。淸素儉約。出於天性。尤以利慾之陷人爲戒。作箴以自警。其略曰。貴則近禍。富則不仁。如何雲壑。怡養精神。一片顏巷。樂在其中。三逕陶園。皓008_471d月淸風。聖賢尙然。況乎小儒。屋八九間。可容殘軀。田數十畝足。慰飢渴。我安我分。不趨利慾。其年高位。尊而淸白。自勵不懈。於律身如此。
三月。乞暇還鄕。重修凝石影堂。祔以皇考木翁公遺像。立寶藏庫。
影堂在集賢山之凝石寺。卽先生曾王考松軒公妥眞之所也。是歲。先生弟大諫公潔遞付西樞。先生與之乞暇還鄕。重修影堂。祔以木翁公像。仍出財力。以爲香火之資。名曰寶藏庫。賦詩揭壁。大諫公和之。玩易齋姜碩德,承旨姜孟卿,008_472a敦寧府事李明晨,左議政皇甫仁,贊成金宗瑞,參贊安崇善,吏曹判書鄭麟趾,都承旨李季甸,右贊成鄭苯。皆次其韻。
夏。拜文科讀卷官。
取洪應等四十人。
冬。以老疾乞解機務。不許。辭愈力。乃令致仕。
先生歷事五朝。感激恩遇。益勵淸謹。五載掌銓。七年爲相。憂國如家。終始不懈。故雖當休致之年。屢上乞退之章。而上眷彌隆。不卽賜允。至是始許。
008_472b三年壬申。先生七十七歲。
二月。作承恩亭記。
錦城大君瑜。卽世宗大王第六子也。作亭於恩賜瑞雲坊華山下。扁以承恩。請先生記之。◑先生釋負居家。年高病深。而猶日焚香靜坐。不廢吟哦。人有求詩。援筆立就。而詞致筆畫。兩臻其妙。人皆寶重。
四年 端宗大王元年 癸酉。先生七十八歲。
七月。有疾。上臨視。咨以國事。又問家中有何所恨。先生對曰。國家昇平。朝野無事。而猥蒙聖008_472c恩。榮寵已極。有何所恨。但殿下沖年嗣服。基業艱大。臣雖死不能忘耳。八月十五日辛亥。考終于城西之正寢。遺命不作佛事。訃聞。上震悼。輟朝三日。致賻賜祭。十月。葬于仁川蘇萊山負坎之原。上命官庀葬事。神道碑文成。 左議政南智撰
時長子孝明已卒。仲子悌明。季子友明。與承祀孫福山奉葬如禮。友明仍廬墓三年。
五年甲戌。
贈諡文孝公。太常獻議。勤學好問曰文。慈惠愛親曰孝。配享文宗廟庭。論師傅舊恩也。
008_472d英宗睿皇帝天順七年 世祖大王八年 癸未
九月。行狀成。 晉山君姜希孟撰
命錄淸白吏。旌忠孝門。
光廟卽阼乙初。重先生名德。特陞季子友明僉樞。召以都鎭撫。至是命錄先生於淸白吏。又命旌閭。
憲宗純皇帝成化三年丁亥
二月。建影堂。
季子友明性至孝。且善繪事。嘗手摹先生及貞敬夫人像。及大人卒。友明奉葬于先生墓左。仍008_473a廬墓。是歲喪畢。建先生影堂于墓傍。祔以夫人像。置位田以爲春秋香火之資。事載三網行實。弘治乙卯。追祔友明像。
神宗顯皇帝萬曆三十六年 宣祖大王四十一年 戊申
秋。移建影堂于陜川之冶罏縣。
先是。季子友明仍家仁川。奉守影堂。至是。其宗孫早歿無嗣。後孫洗馬渾,主簿應寶移奉眞像于所居鄕。陝川也。○曾在壬辰。仁川影堂遇兵燹。失先生影幀。亂平。渾與從姪應寶,景緯等往省舊堂。夢。先生來語曰。吾久困於蘇萊北巖石008_473b間。翌朝往驗。果得影幀。蓋賊齎去。漸覺背重不能踰嶺。大懼。還置于此。仍題其巖曰此天下名宰相像云。
四十三年 光海君七年 乙卯。
移建忠孝門于陜川冶罏影堂前。十月。賜額影堂曰妥眞。
時蘇萊旌門。歲久頹廢。一時卿士之論。皆以爲不可不重建。而宜于影堂所在處。是月十四日。全城君李準,知事李時彥,凝川君朴震元,驪城君李志完,同中樞宋英耇,前佐郞河應觀,前察008_473c訪河渾,社稷令朴綵,奉事河濂,前判官河彥楨,前主簿河應寶,前主簿河宗海,司果河震,僉知鄭震哲,前縣監柳世溫,將仕郞河應濩,前懸令李敏善,生員申命休,前參議李尙吉,前獻納曺挺立,幼學河景新,從仕郞河景咸,河岦等以移建旌門之意呈禮部,入啓允下。李準等仍以影堂宣額之意。申請于禮部。入啓蒙允。賜額曰妥眞。
熹宗哲皇帝天啓四年 仁祖大王二年 甲子
三月。陝川,新川書院成。
008_473d是歲。陜之多士齊議建祠。而以先生季子蓮塘公友明配享。○後正廟丙午。復以五世孫暮軒河渾,璞齋金紐,恥軒柳世勛配享。
毅宗皇帝崇禎十三年庚寅。
上遣官賜祭。
因相臣金瑬所啓。○是歲。嶺南觀察使具鳳瑞以先生外裔。巡到陜川。奉審妥眞堂遺像。憫其綃本剝落。捐俸改模。仍贊曰三韓眞氣。一代宗臣。經綸當日。功德在人。
肅宗大王三十四年戊子
008_474a春。文義友鹿書院成。
先是。先生嗣孫贈承旨鮐壽自京徙居文義。後孫必淸模奉眞像于鮐壽所居。士林齊議。仍作俎豆之所。
是歲。上遣官賜祭于墓所。
四十四年戊戌
二月。躋享于晉州宗川書院。
院卽先生弟大諫公潔,後孫謙齋弘度,台溪溍並享之所。至是士林以爲先生本鄕。合有崇奉之禮。遂躋享焉。
008_474b英宗大王二年丙午
春。安岳肅淸堂成。
安岳卽先生遺愛之鄕。故士民立祠。奉安遺像。
正宗大王十年丙午
冬。長淵盤谷書院成。
移建肅淸堂爲書院。
二十一年丁巳
八月。上親製祭文。遣承旨宋銓賜祭于墓所。
純祖大王十九年己卯
008_474c春。移建妥眞堂。
堂舊在書院西。址礎傾陊。士林合議。移建于院東。郡守徐鳳輔相其役。◑妥眞堂祭品。自萬曆乙卯。已有官供定式。而歲久漸減。是歲秋。禮判金魯敬移關本道。推復如古。後四年癸未。郡宰李魯俊備儀復初。
二十一年辛巳
春。茂朱柏山書院成。
湖南卽先生觀風遺愛之地。故士林建院崇奉。
二十六年丙戌
008_474d夏。文集成。
先生詩文。多失於兵燹。五世孫渾收拾。編入於晉陽聯稿刊行。 渾所撰聯稿跋。略曰。晉山姜通亭淮伯得松軒,苦軒五六絶句。誦而傳之。我敬齋聞而錄之。我先君又得木翁敬齋詩若干篇。並蓮塘遺錄精寫一通。猶恨所得不敷。往在戊子。再從弟淏遊兩湖。得敬齋詩百有餘首。封寄請入梓。余受而藏之。歲丙午。蒐輯爲一卷。名日晉陽聯稿。至是。後孫達海,達明等復搜輯而重刊焉。
憲宗大王八年壬寅
夏四月。陞友鹿影堂爲書院。
本道觀察使姜時永因文義,淸州,公州,燕岐,懷008_475a德五邑多士及後孫寅煥,箕泓,漢基之議。陞享爲院。甘結本縣。奉進享羞。且遵忠勳府成均館完議。畫定院生十七名保奴二十名。
哲宗大王八年丙辰
秋。改刊文集于友鹿書院。
後孫寅煥,在九,箕泓,在準,龜泓,萬基幹其事。○先生有箕城三十一詠。至是始搜而並刻之。前是。南判書秉喆撰安岳丘臺碑。金判書洙根,李判書明迪撰南原山洞碑。閣序亦附之。
隆煕紀元後十三年己未
008_475b冬。重刊文集于密陽之秣方山房。
後孫大永,鍵,致祚,弘基,基鎬,尙洛,錠,冀祚,箕範,潤孝,大斗,在圖,鎭贊,璣秉,鎭東,傍裔泰奭幹其事。
敬齋先生文集卷之四
靑坡集卷之二
 
遊智異山錄 013_440d

天王峯堂。有天王石像。頂上劍痕宛然。諺傳。倭寇013_441a窮蹙。以爲天王不助。不勝其憤。乃斫其頂矣。峯上。平廣可數十步。東南西三界。洞望無礙。每日初出。如金盤眼底跳躍。波濤爲之層立。[光]明[先]射[峯]頂。山後猶昏黑。尙未盡明。見四方諸山。皆爲阜陵。別無高遠地。其佗江湖之水。細如秋毫可望。不可的知何處。四面皆削成。往往繫鐵環岩木間。令人得以攀登。虎豹熊羆之屬。皆不得過。雖烏鳶亦不能至。唯鷹鶻至秋高。乃來集焉。西下二三里。有石竇當徑。往來者由之。近山之人。皆以天王爲靈。凡有疾病必禱。山內諸寺。無不建堂久祀之。上山者。亦013_441b相切戒。不得齎肉饌。皆曰犯戒。必中路昏黑。迷所之。且有不測之患云。般若峯。在全羅境上。其高與天王峯齊。遯世者多居焉。由雙谿行三日。可到。山僧云。靈神寺東壇。有迦葉石像。肩臂如火燒然。諺傳。燒盡人世當更。卽有彌勒佛住世。甚有靈驗云。後峯有奇石削立如檣。北臨萬丈。復戴小石如床。向般共峯稍低。人有攀緣而登。四向拜者。以爲根性。然其能之者。千百僅有一二。庭下有小泉。水性堅。香甚㕲。號神泉。下而爲花開川。東有石峯。如浮屠狀。013_441c居僧以爲龜社主崔文昌。不死在此云。雙谿寺。新羅文士崔致遠孤雲。嘗讀書于此。庭有老槐幾百圍。其根北度小澗。盤結如橋。寺僧因以爲橋以往來。諺傳。孤雲手植。洞口二石。如門而立。有大書雙谿石門四字。寺前有古碑。皆孤雲所書。碑又其所撰。寺近蟾津。居僧以爲寺西舊有崔公書樓。邇望津水。遺址尙存。其溪澗洞壑。極爲蕭洒。殆非煙火食者所居。佛日菴。西距雙谿十餘里。崖谷絶峻。日月爲之不能照。又無谿徑可由。鑿絶壁腰。上下皆可數百丈。013_441d可容一人行以爲路。其不可鑿。則橫木爲橋。往來者無不駭汗豎髮。菴又臨懸崖。下可百餘丈。有二池深不測。一曰龍湫。一曰鶴淵。諺傳。崔文昌讀書于此。神龍有時出聽。鶴亦爲之飛舞。公或書空作一字爲橋以往來云。又壁石小穴。流出銅液。居僧亦以爲公嘗藏銅筆于此矣。斷俗寺。自天王峯。東走幾五六十許里。有獨立峯。是爲外山。東距丹城十餘里。北距山陰十五六里。前距召南津。又十餘里。寺在峯下。凡百有餘間。中大殿曰普光。景泰中重創寺。前有創板堂。國朝所013_442a建。西南北各有古碑。忘其所立歲月。庭右有一閣。新羅所創。壁有四王畫像。金碧尙新。古傳羅僧金生。壁上寫維摩像。又畫老木一株。山鳥時時飛集。欲坐而墜。後一枝汚毀。居僧續之。自是鳥不復來。今皆亡矣。然四王眞。甚奇古。非道子畫。卽金生筆。高麗名賢金富軾,鄭襲明。嘗遊于此。有詩在壁閒。洞口壁石。有石門二字。傳者亦謂崔孤雲所書。法戒寺。距天王峯二十餘里。有大石如舡。號天王舡。向天王三四里許。又有石如屋。可庇數十人。名曰千佛菴。古來遯世者所居。䆴突尙存。013_442b五臺寺。自薩川南踰一嶺。有五峯列立。其狀如臺。寺在其中。故號五臺。諺傳。上世有鶴。嘗棲峯上云。寺有大珠如鵠卵。號如意珠。網以銀絲。寺衲相傳以爲寶。且曰水半盆。沈珠。卽盈溢云。安養寺。自蟾津東踰三大嶺六十餘里。有是寺。與五臺同稱勝刹。然無奇跡。頗與村居近。但西室壁上。有三祖眞儼然。默契寺。自安養前川。隨水西北行谿谷之間。甚險阨。四十餘里。窮水源。有地稍開曠。土又肥衍。寺在智異。最名勝境。有志之僧。前後多往居焉。013_442c牛山。智異山西南。趨至柏谷村。有形如伏牛。號牛。有房,第房兩寺。高麗將軍姜民瞻所創。茅房寺。有民瞻畫像。至今祀之。防禦山。西距智異幾七十餘里。在晉,咸安,宜寧之間。有水齧山北而東。是爲鼎巖津。山西有淸源寺。臨石澗甚有淸致。自靑源迤南二十餘里。有法輪寺。西距晉十餘里。寺僧云。是地甚有良。因晉人讀書于玆。相繼多發跡云。義林寺。在鎭海之西。後有竹林。前有磵水。出門數步。通望海門。013_442d杜椿島。在鎭海城南數里。有小山自北而來。臨海而止。上可坐數百人。三面皆絶壁。色如澮畫。有杜椿蔓結如簷廡。可庇數十人。下皆靑石。潮至便沒。潮下。石平如場。又可以坐數十百人。登望軒豁無礙。金剛社。在金海城東。前有雁塔。不知何代所立。壁上。有高麗鄭侍中記。余以天順末。南遊嶺路。讀書子斷俗寺。留一年。其年秋八月。自斷俗西行。宿薩川縣。遂登天王峯。遍歷靈神,香積諸刹。將向般若峯。會囊橐告匱。不果013_443a行。乃迤南而下。窮蟾津而止。復東踰三大嶺。還至召南津。凡周行二百餘里。然其間足所不到。目所不得見。又不知幾千萬狀。而其所錄。亦安得彷彿眞面。而山之大槩。或庶幾焉。異日。有僧稱道智異勝迹。其言與余所見。甚不相以。[不]知[吾]之[所]不[得見]。而[彼]能[見]乎。[吾]之[所]不[能]到。[而]彼[能]到[乎]。山[一也]。而[人]所[見]不[同]。何[也]。比如見獜。其見蹄者。以爲馬也。其[見尾]者。以爲牛也。其見身者。以爲麇也。三者雖所見不同。而亦不可謂不見麟。是必爲山蟠據數百里。東者不得西。南者不得北。一面之遊。動013_443b數十日。世之所謂靑鶴洞者。余固不必其果有。亦不必其果無。不得以已之見而盡廢人言。然余所登者。天王峯也。登天王峯而見。所見無智愚賢不肖。不謀而同。彼僧之見。獨與余不同。余不能不疑也。將遊之夕。謀於寺中。倩爲引路。時居僧無慮百有餘人。無一曾行。亦曰時方收穀。不可浪遊。余是以知山僧之謀生。有甚於俗子。其肯虛勞一足之投。行數百里至險至高之地乎。故有老死於山下。而足不及山上者。皆曰吾居智異也。吾見智異也。吾惡知異日之僧。審是端士。而非謀生老死之儔013_443c也耶。昔孔子登東山而小魯。余始疑而終信之。登太山而小天下。余甚怪焉。及登是山。然後知聖人之言不誣也。佗曰。有能[携]筇[杖]。上[翠]微。[倚]天[長]嘯。[披]襟[當]風[者]。當以余言而質之。雞林李伯勝,鐵城李放翁,密城朴貞父等。讀書于頭流西斷俗寺。以秋八月晦前五日。納草蹻。

湖陰雜稿卷之八
 [雜著]
水軍分三領議 025_270b

水軍分左右領。准四丁爲一戶。輪一朔相遞者。乃大典之法也。左右領分爲四領。以一戶一保作戶。間三朔相遞者。乃壬午年間輕改之法也。每戶雖未准丁。以時存人數分三領立役者。乃今訴憫者之願也。臣請條析其源委。而縷陳其弊目。當初講定大典之時。非不知左右領番遞頻數。而戶內四丁。隨缺隨補。常使完全。而又非取才軍士之例。故四丁中勿論戶保。一丁立番。三丁備助番糧。他餘進上等項責辦之物。四人亦竝力備支。025_270c故不知番數之爲苦。科納之偏重。人皆稱便。近世以來。爲守令者。不以軍政爲己任。委諸下吏。爲將領者。巧立侵刻之目。俾失樂生之心。由是。逋者相繼。故者亦多。而守令所務。專在期會辦支之間。坐視軍簿多缺。未嘗陞一戶充一保。甚者。其的望缺保者。戶首故闕者。竝奪抽其保。以定官屬。徒委兵吏。每朔受捶於兵水使。而莫之恤焉。雖有據法責補之主帥。反見謗傷而止。軍戶之消乏。凡以此也。往時議者。不究其源。謂水軍所苦在於番數。思所以變通。欲破左右領。以一戶一保。分四領以疏其番。指爲長策。廷論紛然。高荊山獨主是議。識者憂其025_270d不然。持久不決。壬午年。竟用此法。大抵人情。力專則不知萬鈞之爲重。力分則不知一毛之爲輕。四丁共一戶之役。可不謂專乎。二丁當一番之苦。可不謂分乎。四丁之中。雖缺一丁。而三丁顧存。力猶專也。二丁之中。若缺一丁。則隻身而已。力隨竭矣。其何以保存乎。不此之審。而以疏其番次。爲永行無弊之策。不亦左乎。今之欲分三番者。乃頃年欲救四領之弊。創建三領之法者也。其意依左右領四丁爲戶之法。而又立一領也。安有許多閑丁可完一領之設乎。必欲行此法。則不得已減削時存一分軍額。乃可補設一領。防戍素多。而軍額遽減。亦025_271a非細事。要非可行之策也。臣嘗寓居外鄕宜寧縣。其南面一里。乃臣所住。丙戌年。始抵其地。隣保共百有餘戶。率皆水陸軍。而水卒居二。當時分四領。未久弊已多端。接近老卒輩來言不能保存之狀。問其所以。則皆云一朔闕番。向時則徵緜布五六匹。今則增至八匹。以十三四匹補長。然後乃准納浦之尺。其餘番時雜費。亦不下五六匹。貧難小民。無臧獲可收貢布。無宿貲可補番價。一遭立番。輒賣片田若牛馬釜鼎。以至室屋。則已屬逋逃。臣初聞未敢爲信。及閱數三歲。其言果是。此無他。保單助寡之故也。況未具保者乎。且隣卒以赴番告辭而025_271b去者。過六七日。尙在家耕耘。問之則領船兵吏受賂賣閑者也。又有婦兒號哭于野者。問之則其夫准番遞回路。被領船兵吏謀替所庇之卒。竄名都目而捉去者也。臣之所見聞。非止此一二。在在皆然。守令之不親檢攝軍政類此。臣往來鄕曲幾數十年。每至。逋戶益多。問其所苦。則闕番價布。增至三四十匹。其他徵斂名目。不可枚數。割剝之酷。比舊倍蓰。安得不折產而逋亡乎。逋戶之害。延及一族隣里與夫買其田宅者。怨苦之聲。所不忍聞。邇來離鄕十有六年。問之鄕人。所存人家。不滿三十戶。而皆失業欲逋。雖非盡爲水卒之戶。而害延逋散025_271c者。多是坐此也。臣常扼腕慷慨。以爲無變此道。則水卒之錄。皆爲空簿。逋亡者不投入僧徒。則塡於溝壑。將何以能國乎。京畿,淸洪水卒所願者。破四番爲三番。則番雖較數。時存之卒。不拘具保。而自能繼其役云。此則假如四百之卒。雖缺一百。猶可竝支其役。實是悲痛之辭也。可施與否。非臣所能逆覩。臣之妄料。以爲依大典分左右領。其不准四丁者。推移截補。盡爲完戶。勿論戶保。輪流立番。其在家三丁。共助番糧。且應支之物。竝力辦納。守令不顧軍政者。摘置重律。一年內。幾戶有闕不補者。罷黜懲慢。每朔番卒。守令親執名簿點送。俾均勞逸。025_271d色吏受賂。越次番送幾名以上者。徙邊不饒。則祖宗之法。庶可復行而無礙矣。議者云。甫頒軍籍。遽改講定之法。有妨事體。姑置之。竢六年改籍之時。參究便宜。改之未晩。臣意以爲今改定籍。固是大事。然事關民隱切害。則雖易之不爲病。況非改全籍。乃改一條。今者。將四分之領合爲二領。將二丁作爲四丁而已。固非通融諸條。穿鑿毛改之比也。若必待六年改籍之時。則又經二三年。方可改頒。其紓憫之期。遠在十年之外矣。恐非聖明軫疾苦推惻隱之意也。凡言定籍不可動者。固是老練之論。而臣亦備員本兵之地。改水軍一節。尤非臣025_272a之所當言。但平昔所抱。如上所陳。則安可苟存形跡。含默而不祛乎。伏惟上裁


湖陰雜稿附錄
 [附錄]
湖陰草堂序[王鶴] 025_286b

天子二十五年。余以行人。奉使朝鮮。湖陰鄭大夫士龍。以嗣王命。逆于江上。其返也。復充遠送使。以行次平壤。共濟大同江。覽山河之美。余爲之嗟賞者久之。湖陰假譯者訊曰。大人其有意于山川乎。山川固士龍願也。龍世家宜寧。頗饒山水。有山名九龍。螺峙左右。下俯江名鼎津。凝注碧玉。澄澈可鑑。異樹奇花。遊魚啼鳥。無間于四時。固東南勝地也。龍嘗築屋其中。貯古圖畫琴書。以025_286c爲休棲之所。迺緣國恩甚厚。思所以致身者未能固。不果于退其身也。余聞而嘉之曰。君子哉。湖陰大夫乎。不溺情于廊廟。而江湖其心。不急其身。而先于國家。此古聖賢立身行道之大節。大夫有之。是可以愧獨善而無義。徇人而不知恥者也。聞大夫爲宰相矣。秉國鈞而摠百官矣。況其國有新君。正更化以善治。時也大夫行矣。其以至誠格君心。以協恭率同寅。以靖共勵庶寮。以彙征拔士類。以淳龐敦風俗。以精明起治功。從容談笑。以成光明之業。然後以爵祿歸國家。以匡濟付後人。始休其身于九龍鼎津之間。怡吾身入吾廬。展吾書而讀之025_286d曰。吾庶幾不愧于聖賢之道也。上不負其君。下不負其民也。鼓吾琴曰。吾庶幾可以解民之慍。而不愧于南風也。登吾山。覽群峯之環峙曰。吾其得重厚不遷之體。無愧于仁者也。臨吾江鑑吾水曰。吾可以彷彿其周流不滯。而無惡于智也。覽四時草木,鳥獸,鱗介之自得曰。吾庶幾樂大和之元氣。而萬物各得其所如此也。是向之所以急于國家者盡臣道。而今之所以優游者頤天和也。昔人有言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其大夫之謂歟。譯者將余命以告。湖陰子致謝。且請名其齋。余復曰。其湖陰草堂乎。軒冕之士。可以壯麗名。山林隱025_287a遁之士。則草堂其宜也。余家關中。有屋終南山麓。嘗自扁曰薇田草堂。蓋種薇以自給之意也。自叨天子恩。未有以圖萬一。固不敢有閑暇之念。而亦豈能忘情于終南也哉。大夫之志與余同。其以是名之何如。譯者再復。湖陰子再謝。余遂大書其扁以歸。
嘉靖二十五年丙午仲春三日。賜進士第。修職郞行人司行人,前試尙書春部政,賜一品服欽差副使。關中薇田王鶴。拜書。

葛川先生文集卷之三
 
登德裕山香積峯記 028_498b

德裕。吾鄕之鎭山。而吾家又於其下。余自齠齕。負笈山房者。不一其刹。而未嘗離於是山之中焉。是山之號爲上峯者有三。黃峯也。佛影峯也。香積峯也。余於少時。寓靈覺寺。因登黃峯。寓三水菴。因登佛影峯。獨香積峯。迨未嘗一登焉。以無因於其下也。三峯之中。028_498c香積爲最高而奇勝云。余雖未得一登。而未嘗忘于懷。恨余羈纏世務。二峯之登。亦必有因。而雖最勝之地。無因則未果也。歲月荏苒。人事蹉跎。年踰知命。已覺衰遲。生平一恨。將無望於一雪矣。歲壬子仲秋。舍弟彥成與孝應。作意遊頭流。邀同志四五輩。約日治行。志甚篤氣甚銳。余自悲吾衰已久。不得與其約。心自語曰。頭流之在遠。雖不敢強其衰脚。香積之在近。猶可一登。一登則可雪前日未盡之恨。乃與三水僧惠雄,性通。約以同登。且戒與他人漏洩曰。事煩則常難於必諧也。但道澄。吾所久要。其居近此峯。可邀以來。028_498d旣而彥成輩。因各有故。退期至三。而其約終解。雄來曰。彥成輩已不得遂約。澄亦有辭不來。公能無負乎。余曰。吾志已定。無虞携二。所慮脚力之衰。恐有中途之窘爾。約日會于卓谷菴。是月二十四日甲戌。携表姪李稱。往至于卓谷。雄與通果來會。乙亥。促朝餔。倩菴僧玉煕一禪。助齎行具。令通導行。策杖由菴北而登。路頗懸峻。行五里許。山脊平夷。面勢寬廣。周可一里。通曰。此所謂解印基也。昔西域佛用木牛載經。將診其所止。建寺以安之。遍歷東韓。牛止是。將建寺。牛又行。歷見巖至伽倻而止。卽今解印寺云云。語甚荒028_499a誕。不足取也。更循山脊行二三里。達于池峯之西腰。仰見香積對峙于西北。高響則可相聞矣。由壑而下。披草尋逕。往往路絶。通曾熟是路。能不失攸往。盡壑顚檜跨溪。由之以渡。卽香積之第三溪也。沿行一里。水自白岩而會。卽第二溪也。各占溪石而憩。雄進一器飯。相與手自挹溪而醊之。渡是溪遵山麓。行未一里。又渡第一溪。卽香積菴前而下者也。循溪而上。路不峻截。而石角犖确。林木森蔚。大樹仆地。或若行馬。或若臥龍。當逕者無數。或俛出其下。或跨越其上。幾二十里。有舊菴墟。垣砌井臼。埋沒林莽間。直舊基構028_499b木建宇。不蓋不壁。已爲棄屋。通曰。此所謂下香積也。吾師隱冏嘗住錫。冏之去後。久爲廢墟。往年有僧將復建。功未半而去云。後有蔓香馥郁。前有檜柏亭亭。乃冏之手植也。冏之於余。情分有厚。而乘化已久。舊迹依然。追念頗切。由西偏而上數百步。得至香積菴。當中築石如墠。卽菴基也。高可半身。廣可一畝。樹有被斫者。其根滿一圍。菴之廢不知幾歲矣。南有石井澄澈。西有香林櫛立。峯之得名以此。東有板屋數間。牕壁尙完。禪曰。吾於今年。與六士僧結夏于此。盂蘭後解去云。余指板屋曰。此屋不於舊基。何也。通曰。此有028_499c志於復古。而姑爲托人者也。山下人以建屋於此。則歲常多大風。禁不得居僧。此禪等之解去也。蓋山靈慳護勝地。惡人踐踏。故如此云。香木初作蔓。歲久揚起成木。其臥地者半身。雖至老樹。高不過數丈。大不過數拱。身葉絶類萬年松。余看冏之所植幾四十餘年。而尙爲脆蔓。以是觀之。至於成樹者。非數百年。不可矣。攬其枝葉。殊無香氣。訊之則曰。必待彌勒住世。此香乃發云。禪家說多類此。可哂。香林中有古井。環石爲甃。必舊菴時所修也。此菴西負大嶺。卽上峯也。自北而東而南。曠無所礙。諸山皆在眼底。地勢包容028_499d寬閑。殊不類絶境。眞禪家所謂福地也。丙子曉。雄起旋促余曰。盍觀日出乎。攬衣而出則群峯庚庚。紅雲如抹。自北而南。渾成一色。而修道山最明。俄見赤光如射。明星嘒然。轉成日輪。湧出峯頭。眞絶觀也。是日。携通等盤桓林麓間。掇蔬濯泉。指點群山。不知日之盡矣。至夕。雲藹紛騰。自南而北。天日黯然。禪曰。如此必雨。相與悶慮焉。丁丑朝。起視之。霧陣埋山。雨勢將作。無訃登覽矣。通等欲先雨徑下。余曰。雖曠日持久。必登峯上。吾意也。向晩。雲陰解駁。天日穿漏。余欲待明日快霽。通等曰。山日常陰。得此足矣。明日安知雲028_500a霧復作乎。遂治屩而上。令雄前導。約二里達于山脊。轉而北一里。至峯頭。岩石成堆。用小石補其罅若壇墠焉。上有鐵馬鐵牛而無其主。雄曰。此古天王堂也。天王神初住于此。鐵物。其時所奠也。以此峯頗近人寰。移住于智異上峯云。是峯平夷廣厚。盤桓布武。不知爲山頂矣。堂前。掘土爲汚池。圍以石甃。歲久埋沒。西俯安城所。田野村店。若在膝下。雄所謂天王之不住者。其以是歟。東臨大壑。昨日所渡三溪之合流也。雄曰。此所謂九千屯谷也。昔居此谷成佛功者九千人。故名之。其基不知所在。諺稱山靈祕而不見云。且其基東028_500b有池峯。南有戒祖窟。北有七佛峯。西有香積。然則不出此洞之內。而莫之見。爲可怪也。所謂戒祖窟者。在白岩之北。石广可容一大宇。必是戒祖者居之而名也。冏師居下香積。常云此必九千屯基也。今觀此洞雖邃。皆人跡所到。無可隱伏處。古說所稱四方之迹不差。冏說亦或然也。三溪以上多赤木。轉轉林立。至峯底而極焉。是木赤身檜葉。大可數圍。枝幹奇屈。平日所未見也。是峯爲此山最上。黃峯佛影等峯。皆莫與敵。倚杖而立。俯視世界。怳然茫然。莫知紀極。余曰。登覽須得其要領。盍先觀此山。次東南次西北。且詳028_500c其地乎。雄頗能歷言之。是山之根。由鳥嶺而俗離而直指而大德。至草岾西起。爲居昌之三峯。卽是山之第一峯也。自是西迤爲臺峯。又西迤爲池峯。西迤爲白巖峯。西迤爲佛影峯。西迤爲黃峯。自白岩北轉而爲此峯。此峯爲最而黃峯次之。佛影峯又次之。此是山之大槩也。自此峯北走爲曳峴。又北而爲茂朱之裳城山而窮焉。裳城。卽道澄之居也。去此峯不容半舍。恨澄沈於俗累。辭余之招。望其居而語累及焉。自曳峴西馳。至龍潭之鼓山而窮焉。又自曳峴東馳。至茂朱之川而窮焉。又自此峯東馳爲七佛峯。至橫028_500d川而窮焉。自三峯北走。至川而窮焉。其東則茂豐縣。其西則橫川所也。自池峯北走。至橫川而窮焉。此則山之北也。自臺峯南馳。爲葛川,黃山,無於里,鎭山。自無於里北南馳。爲惡遷古城峯而止焉。東爲居昌縣。西爲安陰迎送村也。自白巖南馳。至葛川紗羅峯而止焉。自佛影峯南馳爲月峯。又東馳爲金猿,黃石等山。自黃石東南馳。爲咸陽沙斤城而止焉。又自月峯南馳。爲安陰之山城。東爲尋眞洞。西爲玉山縣也。自黃峯南馳爲六十峴。南而爲咸陽白雲山。此則是山之南也。三峯之東。屬居昌。黃峯之西。屬長溪。此則028_501a是山之東西也。若其枝峯裔壑。縱橫錯戾。起作峯巒。洄爲田野。或隱襞積。或露頭角。雖更僕莫可了也。大抵是山。南則安陰專據。北則安城,橫川專據。而此峯屬安城。卽錦山地也。安城,橫川。雖屬錦山。而間有茂朱一縣隔之。無絲髮之連。是可怪也。遠而望之。則善山之冷山與金烏。大丘之公山。星州之伽倻。玄風之毗瑟。宜寧之闍窟。三嘉之黃山。居昌之紺岳環其東。而知禮之修道。在伽倻之內矣。泗川之臥龍。晉州之智異。求禮之般若峯。亘其南。而咸陽之白雲。在般若之內。笠掛山在智異之內矣。順天之大光山。鎭安之028_501b中臺。金溝之內藏。扶安之邊山。全州之於耳。臨陂之五聖與咸悅之咸悅。龍潭之珠崒。林川之普光。淸洪之聖智圍其西。而龍潭之鼓山。在珠崒之內矣。高山之大芚山與龍鷄。公州之鷄龍。沃川之西臺。報恩之俗離。尙州之寶文。金山之直指與甲長橫其北。而錦山之眞藥。在鷄龍之內。沃川之智勒。在西臺之內。黃澗之丫山。在俗離之內。知禮之大德。在直指之內矣。與雄環顧。指點如右。令稱濡筆志之。凡山之在外與內者。不啻於此。重攢疊橫。無少罅隙。而雄之所辨。如此而止。所志者僅三之一焉。遠山之外。雖復有山。而但見028_501c雲嵐橫抹。久而察之。其形輒變則曰。是果雲也。定而不變則是果山也。況復辨其名與地哉。直西而望。五聖以南。臨陂之北。雲霧平鋪。或淺或深。或靑或白。雄曰。此沃溝之海也。日斜則海色可辨云。于時雲霧高搴。乾端軒豁。地軸呈露。四方之山。皆不能蔽虧。而獨智異之天王峯。半隱於雲中。可知智異之高出於群山也。所處之高也。所望之遠也。眼力已窮。殊無所的而獨於伽倻之淸秀。金烏之偃蹇。望眼累回。瞻想久之。蓋崔學士之風槩。吉太常之節義。心常景仰者如此云。徘徊瞻眺。不覺日暮。雄曰。山路險傾。須及未黑而下。028_501d促余還下。戊寅。雲陰復作。雨點如散。余以草露之深爲憂。通曰。山氣如是。今日必不雨。有頃。有聲在池峯。通認之曰。此卓谷僧來導還也。而已僧引元志定來迎。雨果不竟。雲亦解散。還至池峯腰。仰見池峯頗峻絶。令元等先歸。率通等登池峯。前作土階一級。後有汚池如上峯。皆人力所營。殊不知所營之何意也。俯瞰葛川,減陰,迎送茅處。歷歷無隱。相與指示曰。彼乃彥直之蛇潭耶。仲仁等之鶴淵耶。彼乃嘉吉之林亭乎。子潤之月潭乎。彼雖自私其林泉。徒蹩躠塵寰中。豈知吾儕居此而唾罵之乎。蓋直與吉。常邀出遊而028_502a未果。仁與潤。又約頭流而未遂者也。向暮來于卓谷菴。余語通等曰。是山之淸高雄勝。亞於智異。而世之治芒屩竹杖者。必稱頭流,伽倻。而不及於是山。彼有先賢之遺風舊迹。使人景慕者然也。而是山未有遇焉。初非是山之不足觀也。所謂物不自貴。因人而貴者是也。然遇不遇。何關於山乎。苟有觀山之勝。而有得於心焉。則豈必賴人之遺迹乎。世之徒循人迹而遺山之勝者失矣。通曰。公言豈非茲山之一遇歟。己卯。通與雄先還三水。余與稱偕下。孝應,彥成迎勞于中山溪岩上。乘暮還家。彥成等叩其所得。余不容口說。書028_502b以示之。嘉靖壬子仲秋晦。德恩林仲成。書于葛溪自怡堂。
拙翁集卷之二
 詩○七言律詩
宜寧淸暑樓板韻 

纔看去馬又來牛。人盡奔忙我倚楼。官裏暫閑還自哂。天涯孤影爲誰留。形容勞了心爲役。身世較來名是浮。何日抛玆簪笏去。却扶衰疾托林丘
八谷先生集卷之二
 七言絶句
淸暑樓重來弟永原府使許銘。以同推來唐城。次樓韻示余。余仍次之。 040_483a

樓前紅樹綾羅豔。海上靑山劒戟雄。聞道九天張網闊。一番雲雨起蛟龍。猶子適登第在座故及之
  세종 7년 을사(1425,홍희 1)
 7월15일 (임오)
허계를 감수자도의 죄에 따라 논죄하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허계(許季)가 의령 현감(宜寧縣監)이었을 때, 관청 쌀 20말을 초계(草溪) 기생에게 준 죄는 법률상 감수 자도(監守自盜)로서 형장 80과 자자(刺字)하는 형에 해당되오며, 또 익명 문서(匿名文書)를 받아 다스린 죄는 법으로 참형(斬刑)에 해당됩니다. 두 가지 죄가 함께 발각되었으니 중한 죄를 좇아 논죄해야겠습니다.”
하니, 형을 한 등 감하고 자자는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원전】 2 집 682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秋江先生文集卷之八
 附錄
德谷書院奉安文 宜寧○趙任道 

橫流砥柱。冥途太陽。表著貞臣。昭揭綱常。瀝血叫閽。扶樹國脈。英風豎髮。千仞壁立。卓乎先生。百世高躅。凡在瞻聆。莫不欽服。矧伊貫鄕。景慕敢懈。闍山之下。舊業所在。尙稽建祠。後死之羞。晩營新廟。天作勝區。密邇文純。馨德不孤。俾無後艱。啓我群愚。
 
澗松先生文集卷之五
 祝文
德谷書院奉安退溪先生文 089_107c
惟我先生。海東程朱。折衷群言。集成諸儒。德谷之西。蘸溪之旁。一區林壑。天作地藏。故老相傳。杖屨攸及。禮合稱祀。永寓矜式。尙闕廟貌。責在後學。茲設明宮。涓吉妥靈。庶永居歆。牖我聾盲
記言別集卷之二十四
 丘墓文
承政院右承旨姜公墓碣銘 099_296b

公諱大遂。字學顏。姓姜氏。其先本晉陽人。高麗太師民瞻之後也。累世居陜川。爲陜人。曾祖仁壽。贈司憲府執義。祖世倬。贈同副承旨。父翼文。司諫院司諫贈禮曹判書。以公貴故。得推恩三世。母貞夫人陜川李氏。萬曆十九年辛卯十月三日公生。聰明嗜學。自少時。得才名甚099_296c盛。聞者多慕與之交。三十。選國子試。後年。登第。初授侍講院兼說書。尋陞司書。遷司諫院正言。明年甲寅。光海殺永昌。鄭公蘊諫而當死。公以爭論。幷得罪。時鄭仁弘方貴用。公嘗指之曰。執拗私意。喜人佞已。以故深疾之。至此。因擠陷不已。初削官。竟付處淮陽。公刻苦勵行。能得處困之正。人皆賢之。癸亥春。仁祖旣反正。釋爲寧邊府判官。卽改戶曹佐郞。秋。陞禮曹正郞。明年。以正言移司憲府持平。尋陞掌令兼編修官。丙寅。復爲掌令知製敎。丁卯。有虜亂。爲號召使099_296d鄭公經世從事。出嶺南。募諭尙慶子弟。收召義兵。三月。虜旣和親。乃罷兵。四月。陞司諫院司諫。累轉宗簿寺正。戊辰。出順天。三年。以病去。當罷。上命遞職而已。辛未。入玉堂。爲副修撰兼經筵檢討官。後年春。陞修撰。尋陞副校理兼經筵侍讀官。夏。改軍資監正兼侍講院文學。秋。出爲靈光。癸酉。復召爲修撰。甲戌。在玉堂。論追崇之失禮。凡五箚累千言。乙亥秋。由司諫。移濟用監正。冬。以繡衣。廉問湖西。去守令不用法尤甚者。丁丑春。爲副應敎。戊寅夏。復以司諫。出南原。099_297a明年。陞通政。爲東萊。辛巳。爲晉川。三年。以疾罷。甲申春。爲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至右承旨。夏。改兵曹參知。尋陞參議。論海西軍案積弊變通事。上從之。冬。出尹東都。明年冬。以副護軍。上東宮喪制疏。丁亥。由判決事。復出密陽。明年。以父憂去。孝宗元年庚寅。應旨上萬言疏。冬。復以判決事。再入政院。後年三月。爲全州大尹。一年去。此後連有召命。而以母老皆不起。丙申春。又應旨言時事。有奢侈太盛。私意橫流之戒。戊戌四月十九日卒。年六十八。葬宜寧洛099_297b西。上以禮賜祭。而遠近皆曰。賢大夫亡矣。公立朝近五十年。恪心謹愼。裨益旣多。而又賢於治郡。去後皆有遺愛。晩年自號寒沙晩隱。好讀易。日誦一卦。以潛玩焉。作石泉書齋。以待學者。同郡。作伊淵書院。宜寧。作德谷書院。眷眷於儒者緖業。而考其家狀。公重儒術。尙溫雅。恭儉謙廉。爲平生受用之大法云。公三娶而有二男三女。前夫人宗室寧堤君錫齡之女。生一男。曰徽衍。後夫人參奉李㲄之女。生一男三女。男曰徽萬。壻三人。縣令李堂揆,士人金庭翊,李時格。末099_297c娶鄭夫人。縣監暄之女。無子。又有側室子。曰徽潤。銘曰。
惟恪惟謹。惟大夫之飭也。惟儉惟恭。惟大夫之式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