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의병 곽재우 /의병장 곽재우 장군 관련기록

국조보감 제31권(의병장 곽재우장군 관련 기록 )

아베베1 2009. 10. 31. 10:50

 
 선조조 8
25년(임진, 1592)


○ 2월.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임)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 4월.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와서 부산진(釜山鎭)을 함락시켰는데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면서 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전사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명 나라를 공경하는 길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침내 여러 섬의 군사 20만을 징발하여 직접 거느리고 일기도(一歧島)까지 이르러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平調信)ㆍ행장(行長)ㆍ현소(玄蘇)를 향도로 삼아 4~5만 척의 배로 바다를 뒤덮고 와 이달 13일 새벽 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전선(戰船)에다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砲)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다가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데리고 성에 들어가 나누어 지켰다. 병사 이각(李珏)도 병영(兵營)에서 달려왔으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핑계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쳤으므로 즉시 포위를 당하였다.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적이 마침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달무리 끼고 포위당한 외로운 성에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를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게 되었어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집안 종에게 주어 그의 아비 복흥(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갑오년(선조 27, 1594)에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 그 뒤 이조 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아들 중 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서인(庶人)인 신여로(申汝櫓)가 상현을 따랐었는데 상현이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난리를 당하여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 하고 도로 성으로 들어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대간이,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단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유성룡(柳成龍)을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고,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성룡이 신립(申砬)에게 계책을 물으니, 신립이 말하기를,
"이일이 열세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후속 병력이 없다. 체찰사가 내려간다 하더라도 전투하는 장수가 아니니 무장(武將)을 급히 먼저 보내 이일을 지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뵙기를 청하여 신립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립을 불러 하문하니 신립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신립이 떠나려 할 때에 상이 불러 보고 보검(寶劍)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
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워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김여물이 의주 목사로 있으면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었다.-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립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립이 거느린 무리는 도성의 무사(武士)ㆍ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ㆍ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십 명이었다. 조정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을 내어 돕도록 하였다. 이들이 인근 고을을 순행하며 군사를 수합 하였는데 겨우 80명이었다.
○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배하여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篪)ㆍ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이일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립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립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김여물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물은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종을 보내어 아들 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부치기를,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되고 마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하였다. 신립이 군사를 인솔하여 탄금대(彈琴臺)에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나가 주둔하여 배수진을 쳤는데, 이 달 27일에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이튿날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右軍)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신립이 여물과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에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일은 사잇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쏘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강을 건너서 치계(馳啓)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처음으로 신립이 패하여 죽은 것을 알았는데, 병조에서는 마침내 이일의 죄를 용서하였다.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을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ㆍ경기도 도순찰사로 삼아 모두 당일에 떠나도록 하였는데, 이는 장차 상이 서쪽으로 떠날 것을 의논할 때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원익은 일찍이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고 흥원은 황해 감사를 지냈는데, 모두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하여 민심이 귀의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보내 어루만져 달램으로써 순행(巡幸)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 이 달 29일 저녁에 상이 충주에서 패전한 보고를 듣고 동상(東廂)에 나아가 서쪽으로 떠날 계획을 의결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일의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잠시 상께서 평양으로 가셔서 명 나라에 군사를 청해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였다. 장령 권협(權悏)이 뵙기를 청하여 경성(京城)을 지킬 것을 청했는데, 유성룡이 아뢰기를,
"권협의 말이 무척 충성스럽기는 하나 일의 형세가 어쩔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왕자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를 따라가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 이달 그믐에 상이 서쪽으로 떠났다. 상이 일단 서쪽으로 의논을 결정하자 대궐 안의 하리와 노복들이 떠들다가 물러가더니 조금 뒤에는 위사(衛士)들도 모두 흩어졌으며,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도 끊어졌다. 밤이 깊어서야 이일(李鎰)의 장계가 비로소 도착하였는데, 적이 금명간에 도성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장계가 들어온 뒤 얼마쯤 있다가 상이 돈의문(敦義門)을 나가 서쪽으로 떠났는데, 사관(祠官)으로 하여금 종묘와 사직의 신주판[主版]을 받들고 앞서게 하고 세자가 그 뒤를 따랐으며 어가가 나간 뒤 왕자 신성군 후(信城君珝)와 정원군 부(定遠君琈)가 따랐다. 상은 융복(戎服)으로 말을 타고 왕비(王妃)는 걸어서 인화문(仁和門)을 나왔는데, 수십 명의 시녀가 따랐다.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앞을 인도하니 왕비가 성명을 물어서 알고 위로하며 권면하였다.
○ 5월. 평명(平明)에 어가가 모래재[沙峴]를 넘었다. 이날 많은 비가 내렸는데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뒤따라 와서 입고 있던 우의(雨衣)를 바쳤다. 일행이 비를 맞으며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러 윤두수(尹斗壽)를 불러 차고 있던 칼을 풀어 그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경(卿)의 형제는 나를 떠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동파관(東坡館)을 출발하였다. 이날 아침에 상이 대신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이르기를,
"이모(李某)야 유모(柳某)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
하고, 또 윤두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그에게 하문하니,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이 이항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승지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가를 의주(義州)에 머물게 했다가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 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하자, 두수가 아뢰기를,
"북도(北道)는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며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은 모두 천연적인 요새로 믿을 만하니 재를 넘어 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이 어떠한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안 됩니다. 어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으로 가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하니, 성룡이 안 된다고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신이 말한 것은 곧장 압록강을 건너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고, 성룡과 반복하여 논쟁하였는데, 성룡이 말하기를,
"지금 관동과 관북 제도(諸道)가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을 갑자기 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산해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성룡이 물러나와 항복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 자네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瓦解)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사과하였다.
상이 개성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가 백성들을 모아 타이르고 유지를 내려 각각 마음에 품은 바를 진술하도록 하였다. 부로(父老)들이 앞으로 나와 정 정승(鄭政丞)을 부르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는데, 정철(鄭澈)을 가리킨 것이었다. 상이 알았다 하고 즉시 정철을 석방하도록 명하면서 전지를 내리기를,
"경(卿)의 충효 대절을 알고 있으니 속히 행재소(行在所)로 오라."
하였다. 이로부터 기축년(선조 22, 1589)ㆍ신묘년(선조 24, 1591)에 처벌받은 사람들이 모두 석방되어 돌아와 서용(敍用)되었다.
○ 이달 3일에 왜적이 도성에 침입하자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도망갔다. 당초 적은 동래(東萊)에서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길은 중도(中道)로 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ㆍ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길은 좌도(左道)로 장기(長鬐)ㆍ기장(機張)을 거쳐 좌병영(左兵營)인 울산(蔚山), 경주(慶州)ㆍ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함락하고 용궁(龍宮)의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문경(聞慶)으로 진출해서 중로의 군사와 합류한 다음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침입하였다. 이들은 다시 충주에서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여주(驪州)로 가서 강을 건너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 경성의 동로(東路)로 진출하였고, 하나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 쪽으로 나아가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또 한 길은 김해(金海)를 경유하여 우도(右道)로 진출,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을 따라 강을 건너 지례(知禮)ㆍ금산(金山)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서 충청도 영동현(永同縣)으로 진출, 청주(淸州)로 침입하였다가 방향을 바꾸어 경기로 향했다.
왜적의 정기(旌旗)와 검극(劍戟)은 천 리에 끊이지 않고 포성(砲聲)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들은 10리나 50~60리마다 험한 곳을 점령하여 진영을 설치하고 밤이면 횃불로 서로 응하였다. 적이 한강 남쪽에 이르자 도원수 김명원이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제천정(濟川亭)에 주둔하였는데 적이 쏜 포환(砲丸)이 정자 위에 어지러이 떨어지자, 명원은 감히 적에게 항거하지 못하고 군기(軍器)를 모두 강에다 넣어버린 뒤에 행재소로 후퇴하여 도망하였는데, 적이 마침내 강을 건넜다.
○ 도원수 김명원에게 임진(臨津)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명원이 임진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적의 상황을 말하니, 상이 김명원에게 군사가 없었다는 것을 참작해서 그가 후퇴한 죄를 묻지 않고 다시 경기와 해서(海西)의 군사를 징발하여 임진을 지키도록 명한 것이다. 남병사(南兵使) 신할(申硈)이 막 체직(遞職)되어 돌아왔으므로 수어사(守禦使)로 삼아 함께 임진을 지키면서 서쪽으로 오는 길을 막도록 명하였는데, 유극량(劉克良)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예속되었다.
○ 상이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교서를 팔도에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의병(義
兵)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상이 개성에 머문 지 이틀 만에 서로(西路)로 출발하여 금교역(金郊驛)에 머물렀다. 이날 적이 이미 도성에 침입하여 서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상이 다급하여 재촉해서 떠났다. 당시 종묘 사직의 위패를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봉안(奉安)했다가 그대로 묻게 하였는데, 상이 보산참(寶山站)에 이르렀을 때 윤두수가 그 사실을 듣고 속히 예조 참의를 보내어 받들고 오도록 청하였다.
○ 상이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호종한 신하들에게 직질(職秩)을 차등 있게 올리도록 명하고, 또 하교하였다.
"이조 참판 이항복은 마음이 곧고 신의가 있으며 물외(物外)에 초연한 인물이니, 위급한 상황에서는 더욱 크게 기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어떻게 자급(資級) 때문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판서에 궐원이 생기면 발탁해서 보임하거나 다른 중책을 맡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경들은 나의 뜻을 알라."
○ 신각(申恪)은 처음에 부원수로서 김명원(金命元)을 따라 한강에서 방어했었는데, 명원의 군사가 패하자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양주(楊州)에 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였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 병사(咸鏡兵使) 이혼(李渾)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했는데, 여염(閭閻)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개재[蟹嶺]에서 요격(邀擊)하여 패배시키고 70급(級)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고무되었다. 그런데 이양원은 당시 산골짜기에 있었으므로 상황의 보고가 끊겼고, 김명원은 신각이 양원을 따른다고 핑계대고 도망쳤다는 것으로 장계를 올려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홍(兪泓)이 그대로 믿고서 선전관을 보내어 현장에서 베도록 청하였다. 선전관이 떠나고 난 뒤에 승리했다는 보고가 이르렀으므로 상이 뒤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 적이 처음 도성에 침입했을 때 궁궐은 모두 타버리고 종묘만 남아 있었으므로 왜의 대장 평수가(平秀家)가 그곳에 거처하였는데, 밤중에 괴이한 일이 많고 따르던 졸개 중에 갑자기 죽는 자도 생겼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조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다."고 하자, 평수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방(南坊)에 -바로 남별궁(南別宮)이다.- 이거(移居)하였다.
○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이 먼저 떠났다. 몽정이 성절사로 임명되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상이 서쪽으로 떠났으므로 몽정은 단지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가지고 역관(譯官) 등과 -방물(方物)은 봉하지 못했다.- 어가를 따라 평양에 이르렀다. 대신들은 고급사신(告急使臣)을 보내야 한다며 성절사는 보내지 말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응인(韓應寅)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성절사를 보내지 않으면 명 나라에서 틀림없이 의심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다시 의논하여 보냈다. 상이 몽정을 직접 대하여 유시하기를,
"연경에 이르거든 그대가 먼저 중국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몽정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우리나라가 적을 친하게 대한다고 의심하는데 만약 원조를 청하지 않고 들어가겠다고 먼저 청한다면 의혹만 더 불러일으킬 듯싶습니다. 모름지기 왜변(倭變)이 일어난 까닭을 낱낱이 열거하여 요동의 진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구원해 줄 것을 청한 다음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여기고 자문을 갖추어 보냈다.
○ 한응인(韓應寅)을 제도순찰사(諸道巡察使)로 삼아 임진(壬辰)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적이 도성에 들어와서 며칠 동안 군사를 휴식시켰는데, 도로에 와전되기를 "왜인들이 멀리서 오느라 발이 부르트고 피곤해 쓰러져 있으니 몽둥이를 가지고도 격퇴할 수 있다." 하였다. 행조(行朝)에서 이 말을 듣고 믿은 나머지 김명원(金命元)이 한강을 지키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명원을 재촉하여 임진을 건너 나아가 싸워 도성을 회복하도록 하였으나 명원이 감히 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한응인이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서 돌아왔고 서계(西界)의 토병(土兵) 1천여 명도 도착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오랑캐들을 상대해 본 정예병(精銳兵)이었으므로 마침내 응인을 장수로 삼아 거느리고 임진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기회를 보아 진격하도록 하고, 또 명원의 통제를 받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자 응인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파주(坡州)를 지나면서 명원을 만나지 않고 임진(臨津)의 입구에 달려가 진격할 것을 재촉하였다.
○ 신할(申硈) 등이 임진강을 건너 왜적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죽자 도원수 김명원과 제도순찰사 한응인 등이 임진을 버리고 달아났다.
당초 명원이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여 신할ㆍ유극량(劉克良)ㆍ이빈(李薲)ㆍ이천(李薦)ㆍ변기(邊璣) 등에게 임진의 모든 여울을 지키도록 하였으므로 방비가 점차 완비되었다. 그래서 적병이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서로 버틴 지 8~9일이 지나도록 건너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이 여막을 불태우고 퇴각하여 도망하는 모양을 보이며 아군을 유인하였다. 신할은 적이 실제로 퇴각하여 도망하는 줄로만 알고 강을 건너 추격하려고 하였다. 유극량은 나이가 많고 군사에 노련하였으므로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말하자, 신할이 그를 참하려고 하니 극량이 말하기를 "내가 소싯적부터 종군(從軍)하였는데 어찌 죽음을 피할 마음이 있겠는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국사(國事)를 그르칠까 싶어서이다." 하고, 분개해서 나가 그의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건너가서 적을 만나 순라하는 기병 몇 명을 참하였다.
신할의 군사가 모두 건넜는데 적은 먼저 산 뒤에 군사를 매복시키고는 산을 의지하여 진을 정돈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신할이 진에 나아가 핍박하니, 적이 일시에 모두 일어나 총과 칼로 접전을 벌이자 여러 군사가 마침내 허물어졌다. 극량이 신할을 부르며 진을 거두어 퇴각하려고 하였으나 신할이 응하지 않고 끝내 죽었다. 극량이 말에서 내려 땅에 앉아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활을 당기어 적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죽었다. 군사들이 달아나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뒤따르면서 시살하였다. 혹 목을 빼어 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여울을 지키던 여러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으며 명원과 응인은 물러나 행재소로 나아갔다. 마침내 적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였다.
○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바다에서 왜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戰艦)과 전구(戰具)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면서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보내 순신에게 가서 청하게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 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하니, 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어영담(魚永潭)이 수로(水路)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여 앞장서서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운룡과 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크게 깨뜨리니 남은 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노량진(鷺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도 종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전투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파내게 하니 군중(軍中)에서는 그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ㆍ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쏠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조정에서는 순신의 승리 보고를 보고 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 비변사가 요동(遼東)에 자문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도록 청하였다. 당시 상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계책을 결정하지 못했었는데, 이항복이 혼자서 극력 아뢰기를,
"지금 팔도가 무너져 수습해서 온전하기를 도모할 희망이 없습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혜로도 선주(先主) 유비(劉備)가 몸을 의탁하여 용무(用武)할 곳이 없음을 보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하여 마침내 적벽(赤壁)의 승리를 이루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명 나라에 갖추어 아뢰어 구원병을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묘당(廟堂)의 의논은 모두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서 대체로 말하기를,
"명 나라에서는 틀림없이 기꺼이 와서 구원하지 않을 것이며 가령 와서 구원한다 하더라도 요ㆍ광(遼廣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의 병마를 출동시킬 터인데 요ㆍ광의 군사는 호달(胡達)의 종류로서 반드시 횡포를 부릴 것입니다. 지금은 평안도만이 안정되었다 하겠는데 다시 중국 군사가 공사간에 침탈한다면 필시 거덜이 나고야 말 것이니, 이 계책은 너무나 오활합니다."
하였다. 이때 마침 이덕형이 뒤따라 왔는데 항복과 의견이 같았으므로 마침내 함께 조당(朝堂)에서 극력 논쟁하니. 비로소 그 말을 따라 논계(論啓)하였다. 이에 상이 그대로 따라 즉시 사람을 보내 요동에 자문을 보내어 급박함을 알리고 군사를 청하였다.
○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으로 하여금 본도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천(林川) 길을 경유해서 진격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은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礪山)의 길을 경유하여 금강(錦江)을 건넜다.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에 세 장수가 날을 정하여 진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10만 군사라고 호칭하였다.
○ 박진(朴晉)을 경상 병마절도사로 삼았다. 박진이 병사(兵使)가 되어 남은 군사를 수습하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진격도 하고 후퇴도 하며 공격하자 형세가 조금 떨쳤는데 행조(行朝)에 승리의 보고가 잇따라 이르렀다. 그러자 상이 매우 중하게 여기며 이르기를
"나는 박진이 적을 가볍게 여긴 나머지 죽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일찍이 박진을 불러다 서도(西道)로 가게 해서 부원수로 삼아 평양을 도모하려고 했었는데 조정의 의존이 불편하게 여겨 그만 두었었다."
하였다.
○ 조방장 원호(元豪)가 여강(驪江)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원호는 강원도 조방장으로 여강의 벽사(甓寺)에 주둔하여 나루를 건너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그런데 강원 감사 유영길(柳永吉)이 급히 원호를 불러 본도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원호가 떠나자 적이 비로소 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얼마 있다가 원호가 다시 와서 고을의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적이 구미포(龜尾浦)에 주둔한 것을 보고서 새벽을 틈타 습격하여 50여 급(級)을 베니 나머지는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적이 여주의 길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 6월.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이광 등이 본도로 돌아갔다.
○ 이순신(李舜臣)이 잇따라 왜병을 패배시켰다. 순신이 본영에서 사량(蛇梁)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당포(唐浦)에서 적선을 만났다. 적장이 큰 군함을 타고 층루(層樓)에 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순신이 휘하 병력을 진격시켜 통전(筒箭)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니 층루 위의 왜장이 먼저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졌는데, 마침내 엄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얼마 있다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휘하의 수군을 모두 데리고 와서 회동하여 마침내 함께 당항포(唐項浦)에 이르러 왜선을 만나 크게 싸웠다. 이때 또 선루(船樓)위의 적장을 쏘아 죽여 그의 수급(首級)을 취했으며, 왜선 30척을 밀어붙여 격파하니 적이 대패하여 육지로 올라 도망하였다. 또 영등포(永登浦)에서 싸워 모든 배를 나포하여 섬멸시키니 이로부터 수군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승리를 아뢰자, 상으로 순신을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 왜장 평행장(平行長) 등이 해서(海西)의 여러 고을을 거쳐 대동강(大同江)의 남쪽 언덕에 침범하였다. 이때 이일(李鎰)이 관동(關東)의 길로 걸어서 이르렀다. 이일은 본래 명장으로 일컬어졌으므로 비록 적에게 패하여 도망하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가 온 것을 기뻐하였다. 그가 올 때 탐지한 정보에 적이 이미 봉산(鳳山)을 불태웠다고 하였으므로, 비변사가 급히 이일에게 영을 내려 대동강 하류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일이 막 도착하였을 때 적병 수백 명이 벌써 남쪽 언덕에 도착해 있었으므로 이일이 무사(武士) 10여 명으로 하여금 강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들어가게 해서 강궁(强弓)을 쏘게 하자 적이 퇴각하였다.
○ 상이 평양을 떠나고 싶었으나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이 대부분 관북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왕비와 왕자가 먼저 떠나고 상은 평양을 떠나 영변부로 향하였다. 윤두수ㆍ김명원ㆍ이원익을 남겨 두어 평양을 지키게 하고, 대산 최흥원(崔興源)ㆍ유홍(兪泓)ㆍ정철 등은 유성룡을 수행하여 중국의 관원을 접대하기 위해 그냥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 상이 숙천(肅川)에 머물면서 이덕형을 청원사(請援使)로 삼아 요동에 거서 급박함을 알리도록 하였다. 당시 이항복과 이덕형이 야대(夜對)하여 상에게 영변에 진주(進駐)하기를 청하고, 그들이 직접 요동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겠다고 하면서 서로들 다투며 가기를 자청하였다. 이에 부제학 심충겸(沈忠謙)이 "항복은 현재 병조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파견할 수 없다."고 하자, 마침내 덕형을 파견하였다.
○ 윤두수 등이 장수를 보내어 밤에 왜군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왜병이 마침내 대동강을 건넜다.
윤두수 등이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먼저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를 내보내고, 적이 성에 가까이 오자 병기(兵器)를 강물에 가라앉힌 뒤 군사를 인솔하여 몰래 빠져 나왔는데, 더러는 배를 타고 강서(江西)로 내려갔다.
왜장이 마침내 평양을 점거하였다.
○ 왜장 청정(淸正)이 관북(關北)에 침입하였는데,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사로잡히고 병사 이혼(李渾)이 적민(賊民)에게 살해당하였다. 당초에 청정과 행장(行長) 등이 함께 임진강을 건너 상의 행차를 추격하면서 어가가 혹시라도 방향을 바꾸어 관북으로 갈 것을 염려하여 길을 나눠 군사를 진격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청정은 용맹이 적군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그가 거느리는 군사도 더욱 날래고 사나웠다. 곡산(谷山) 지역에서 노리현(老里峴)을 넘어 철령(鐵嶺)의 길로 나왔는데, 철령에 지키는 군사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치달려 들어갔다.
감사 유영립은 산골짜기로 들어갔는데 토병들이 적병을 인도하여 습격해서 사로잡았다. 병사 이혼은 도망하여 갑산(甲山)으로 들어갔는데 배반한 백성들이 추격해 오자 밭 사이의 토굴(土窟)에 숨었으나 마침내 그들과 싸우다 죽었다. 그리고 갑산 사람들은 부사의 목을 베고 투항하였다.
임해ㆍ순화 두 왕자는 적병이 바로 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북쪽을 향해 질주하여 마천령(摩天嶺)을 넘어갔다.
○ 상이 북도로 떠날 것을 의논하자, 이항복이 다시 대신들과 극력 논쟁하기를, “의주(義州)로 진주(進駐)해야만 중국 군사와 접할 수 있고, 불행하게 될 경우 중국으로 건너가서 서서히 국토를 회복해도 실계(失計)가 아니다." 했는데, 심충겸(沈忠謙) 역시 그 의견에 따랐다. 그날 저녁에 뵙기를 청하여 항복이 극구 말하기를,
"북관(北關)은 단지 한 가닥 길만 있으니 궁하게 될 경우 오랑캐 지역 외에는 갈 만한 곳이 없으니 의주로 진주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본래 중국으로 가려고 하였으니, 경의 말을 따르겠다. 다만 중전(中殿)이 이미 멀리 갔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빨리 따라가서 돌아오게 하기를 청하니,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을 보내어 달려가게 하였다. 그런데 중전의 일행도 적이 이미 북도에 침범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와 마침내 상을 박천(博川)에서 만났다. 상이 영변부에 머물렀을 때 요동의 진에서 또 임세록(林世祿)을 보내 자문(咨文)에 답하면서 구원병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 세자에게 종묘 사직을 받들고 분조(分朝)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날 박천에 머물렀다. 이튿날 걸음을 재촉하여 밤 오경에 가산(嘉山)에 도착하였다. 이날 밤에 비가 내리고 길은 어두운데 한 자루의 횃불도 없었으며 따르는 신하도 정철 등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항복과 박동량(朴東亮)이 병조의 관원을 앞장세워 길을 인도하게 했는데,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 도성에서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환관(宦官) 수십 명과 어의(御醫) 허준(許浚), 액정원(掖庭員) 4~5인, 사복원(司僕員) 3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뒷날 모두 녹공(錄功)하였는데, 끝내 직무는 맡기지 아니하였다.
○ 상이 정주(定州)에 머물렀다. 사자(使者)를 의주에 보내어, 어가가 본주(本州)에 머물고 곧바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것을 효유하여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게 하고 응교 심희수(沈喜壽)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잇따라 차관(差官)을 보내 자문(咨文)으로 요동의 진에 알리도록 하고, 이덕형에게 위급하고 박절한 상황을 극력 진달하도록 유시하였다.
○ 세자가 영변부(寧邊府)로 나아가 머물렀다. 상이 분조(分朝)한다는 뜻으로 안팎에 하교하였다.
그리고 호종하는 관사를 무군사(撫軍司)라 하고 편의(便宜)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 요동의 유격 사유(史游), 참장 곽몽징(郭夢徵)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선천의 임반관(林畔館)에 도착하였다. 상이 예복(禮服)을 갖추고 나아가 보고 재배(再拜)하며 사례하기를,
"한 나라의 존망이 대인(大人)에게 달려 있으니 오직 지휘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사유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로서는 평양을 구할 수 없으니 앞으로 조 총병(祖摠兵)이 오면 서로 모여 일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주둔하였다.
○ 상이 선천(宣川)에 머물렀다. 요동 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 이시얼(李時孽)이 지휘(指揮) 송국신(宋國臣)을 보내어 우리나라에 자문을 보냈는데 자문 내용에,
"그대 나라에서 불궤(不軌)를 도모했다."
하고, 또,
"팔도의 관찰사는 어찌하여 한마디의 말도 없는가. 팔도의 군ㆍ현에서는 어찌하여 한 사람 도 대의(大義)를 주창하는 사람이 없는가. 어느 날에 어느 진(鎭)이 함락되고 어느 날에 어느 주(州)가 함락되었는가. 누가 절의를 지키다가 죽었고 누가 적에게 빌붙었는가. 적장(賊將)은 몇 명이며 군사는 몇 만 명인가. 적장자(嫡長子)를 후계로 세우는 것은 중국과 이적(夷狄)을 따질 것 없이 공통으로 행하는 의리인데, 귀국의 장자는 어디 갔기에 둘째 아들로 세자를 삼았는가. 하나하나 조목별로 갖추어 기록하여 보고하라. 천조(天朝)에는 개산대포(開山大砲)ㆍ대장군포(大將軍砲)ㆍ산화표창(神火標槍)이 있다. 그리고 날랜 장수와 정예병이 무척 많으니 급히 달려가면 왜병이 백만이라도 따질 것이 못 된다. 더구나 지혜 있고 용감한 문무(文武)의 인사들이 있어 간사한 모의를 환히 알고 음흉한 싹을 꺾어버릴 것이니 비록 소진(蘇秦)ㆍ장의(張儀)ㆍ상앙(商鞅)ㆍ범수(范睢)의 무리가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천조의 계획을 엿볼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상이 차관(差官)을 대하고 자문을 본 뒤 송연(竦然)하여 이르기를,
"이는 대체로 우리나라가 왜적과 공모했는가 의심하여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한 것이다."
하고, 지휘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여기의 신하를 파견하여 회보(回報)하겠소."
하였다. 지휘가 나가서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순안어사(巡按御史)가 일찍이 내가 황 천사(黃天使)를 따라 나와 직접 국왕(國王)을 뵌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를 시켜 이번에 와서 정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게 한 것이다. 자문에 말한 것은 모두 가정해서 한 말이니 두려워 말라."
하였다.
○ 상이 의주에 이르렀다. - 이달 22일이었다.- 목사의 아사(衙舍)를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 주청사(奏請使) 지돈령부사 정곤수(鄭崐壽)를 파견하여 대병이 와서 구원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보낼 적에 면유(面諭)하기를,
"국가의 존망이 이 한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경은 힘쓰라."
하였다.
○ 제도(諸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三道)의 수신(帥臣)이 모두 인심을 잃은 데다가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달아났다. 그러다가 도내(道內)의 거족(巨族)과 명인(名人)이 유생(儒生) 등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倡義)하여 일어나자 듣는 사람들이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과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호남(湖南)의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영남(嶺南)의 곽재우(郭再祐)ㆍ정인홍(鄭仁弘), 호서(湖西)의 조헌(趙憲)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 현풍인(玄風人) 곽재우(郭再祐)는 본래 유생으로 일찍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무용(武勇)이 있었지만 스스로 감추었으며 집안도 제법 부유하였다. 왜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을 모두 흩어 재질이 있는 무사와 교결하였다. 그리고는 "겁탈하는 도적들은 과감하고 사납기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여, 그 무사들을 찾아 화복(禍福)으로 그들을 달래어 먼저 수십 명을 얻었는데 점점 모인 군사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적이 우도(右道)로 침입하였다. 왜장 안국사(安國司)란 자가 호남으로 향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는데 재우가 강변을 왕래하면서 동서로 무찌르자 적병이 죽은 자가 많았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자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宜寧) 등 두어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鼎津江)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下道)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에 살다가 적이 도성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고 글을 지어 도내(道內)의 백성들에게 효유하기를,
"지난번 본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금강(錦江)에서 돌아오던 날에 첫 번째로 패배했고 여러 군에서 군사를 초유(招諭)하던 때에 두 번째로 패하였다. 이는 대체로 수비 방법이 어긋나고 기율이 전혀 없으며 유언비어가 비등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흩어지고 도망한 나머지를 수습한다 하더라도 사기는 꺾였고 정예는 없어졌으니 어떻게 응급책을 세워 늦게나마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항상 생각건대 승여(乘輿)가 피난을 떠났는데도 관수(官守)는 오래도록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을 폐하였고, 종사(宗社)가 모두 타버렸는데도 왕사(王師)로서 평정시킬 시기는 아직도 지체되고 있다. 이에 대해 말을 하자니 통분함이 가슴속에 사무친다.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가르킴)께서 황산(黃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킨 공로가 있으며, 선조(先朝 고려를 가리킴)의 낭주(朗州) 전투에서는 한 척의 배도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노래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빛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춰지고 있으니 그때에 용맹을 뽐내며 적의 성벽에 먼저 오른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근년 이래로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뜻을 가다듬었으니 임금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가 강독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 의로운 소문이 사라져버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무너져버린 채 기력(氣力)을 내어 적과 교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이 서로들 제 몸만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만 하면서 혹시 뒤질세라 머리를 움켜쥐고 쥐처럼 도망하고 있다. 이는 본도의 사람으로서 국가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적의 형세가 크게 꺾이고 왕의 영위(靈威)가 날로 확장되니 이야말로 대장부가 공명을 세울 기회이고 군부(君父)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 경명은 장구(章句)나 외는 오활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단(壇)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흩어진 사졸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여 여러 동지에게 수치거리가 될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금월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원컨대 속히 결정하여 착한 일을 따르고 미혹된 나머지 스스로를 그르치지 말라."
하였다. 경명은 연로(年老)한 문관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맹주(盟主)로 추대하자 개연히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 선비와 서민이 많이 응모하여 군사 6천여 명을 얻었다. 그리고 또 격문을 여러 도에 전하였는데 문사(文辭)가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외며 전하였다.
○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인홍은 평소 시골의 선비와 주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다. 좌랑 김면(金沔), 전 현감 박성(朴惺), 유생 곽준(郭浚)ㆍ곽율(郭)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했는데,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얻어 중군(中軍)을 삼았다. 인갑은 무용(武勇)이 뛰어났는데 군진(軍陣)을 달리하면서도 인홍의 명령을 받았다. 인갑이 먼저 무계(茂溪)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군량을 태우고 돌아왔다.
○ 중국 조정에서 호군(犒軍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할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렸다. 당시 요동 사람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전하기를 "조선이 왜국과 함께 반역하여 거짓으로 가짜 왕을 삼아 인도하여 온다."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먼저 임세록(林世祿)등을 파견하여 평양에 와서 탐지하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상이 평양을 떠남에 미쳐 연달아 요진(遼鎭)에 자문을 보내 비빈(妃嬪)ㆍ자녀ㆍ배신(陪臣)을 이끌고 중국으로 가기를 청하니, 요동 순무어사 학걸(郝杰)이 주본(奏本)을 올리기를,
"총병 동양정(佟養正)이 품보(稟報)를 받았습니다. 조선이 대국(大國)이라고 일컬으면서 대대로 동번국(東藩國) 노릇을 하여 왔는데 한번 왜적의 침입을 받자 소식만 듣고서 도망쳤습니다. 혹시라도 그 나라가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달려올 경우, 수신(守臣)의 입장에서 거절하자니 그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속국의 신뢰하는 마음을 잃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자니 사체가 가볍지 않아 신하로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왜노(倭奴)들은 간사한 꾀가 비상하여 중국 사람도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가 많습니다. 만약 간사한 생각을 품고 마구 들어온다면 해를 끼치는 것이 보통이 아닐 텐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복제(覆題)하기를,
"해진(該鎭)에서 사람을 차출하여 조선으로 보내서 조정의 지극한 뜻을 선유(宣諭)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조선이 도망해 오면 나라를 회복할 기약이 없게 되어 왜적이 마침내 조선을 점거하게 될 것이고, 굳게 지키면 구원병도 기대할 수 있어 왜적이 자연 패하여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 지역의 요해처에서 머물며 천병(天兵)의 구원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본국에 유시하여 배신(陪臣)들을 많이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옛 강토를 회복할 계책을 삼아 패몰(敗沒)하지 않도록 하고 만일 해국(該國)이 위급해서 도망해 오기를 청한다면 전적으로 거절하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칙령(勅令)을 내려 받아들이되 인원이 1백 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황지(皇旨)를 받드니, 황지에,
"왜적이 조선을 함몰(陷沒)시켜 국왕이 도피하였으니, 짐(朕)은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구원병을 일단 파견하고 사람을 차견하여 그 나라 대신들에게 선유(宣諭)하되,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수호하고 각처의 병마(兵馬)를 속히 결집하여 성지(城池)를 굳게 지키며 요해처에 웅거하여 힘껏 회복을 도모하도록 하라. 어떻게 앉아서 망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지(聖旨)가 특별히 내렸는데도 요진(遼鎭)에서는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아 송국신(宋國臣)을 보내 국왕의 진위(眞僞)를 실제로 알아보게 하였다. 국신이 돌아가 확실히 진짜 임금이고 가짜 임금이 아니라고 보고하자 요진에서 비로소 믿게 되었다.
중국 조정의 의논 역시 구구했는데 석성(石星)은 구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신 신점(申點)이 당시 회동관(會同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뜰로 불러서 요동에서 변고를 보고한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자 신점이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며 아침 저녁으로 찾아가 병부(兵部)에 정문(呈文)하여 먼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유몽정(柳夢鼎)도 그 뒤를 이어 도착했는데 통곡을 하며 병부에 호소하여 구원병을 속히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석성이 그 뜻에 감동하여 모두에게 답서를 보내 위로하면서 그들을 신포서(申包胥)에 비유하였다.
석성의 뜻이 더욱 굳어져 병부가 주청하여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상이 용만관(龍灣館)에서 맞이하여 보았다. 응양이 왜의 서신을 요구하여 증험하려 하자, 이항복이 지난 신묘년(선조 24, 1591)에 통신사(通信史)가 가지고 온 왜의 서신을 미리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꺼내어 보였다. 그 중에는 이미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으로 보냈던 내용도 들어 있었는데, 황응양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선이 상국(上國)을 대신하여 침략을 당하였는데도 의로운 소문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나쁜 이름만 뒤집어 썼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돌아가 병부에 보고하니, 석성이 크게 기뻐하여 조선을 구원하는 의논이 결정되었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우 감사를 두었다.
이는 대체로 영남의 지역이 넓은 데다가 적이 중로(中路)를 따라 진영을 연결하여 좌우도가 서로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 호남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로부터 경기 안이 완전히 살륙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빌붙어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니, 상이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천일의 군사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독산고성(禿山古城)에 웅거하여 적에게 빌붙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의 사민(士民)이 많았다.
○ 7월. 전라 절제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물리쳤는데 김제 군수 정담(鄭湛)이 전사하였다. 왜병이 또 이치(梨峙)를 침범하니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패배시켰다.
이때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치를 넘어 전주(全州) 지경으로 침입하려고 했는데,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이 황박(黃璞)ㆍ정담 등과 요해지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공격하였으므로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왜적의 선봉(先鋒)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는데,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산골짜기에 가득하였고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복남 등이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한바탕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황박의 군사도 패하여 복남의 진으로 들어갔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웠는데 붉은 기 아래 백마(白馬)를 타고 있는 적장을 쏘아 죽이니 적이 와해되어 물러갔다. 조금 뒤에 나주(羅州) 군사가 퇴각하자, 정담이 고군(孤軍)으로 포위당했는데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시키기를 권하니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고 말지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꼿꼿이 서서 동요하지 않고 활을 쏘아 빠짐없이 적을 맞혔다. 이윽고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정담 혼자서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이 퇴각하여 재 아래 안진원(安鎭院)에 진을 쳤는데,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담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했다는 사실을 듣고부터 눈물을 흘리고 분격해 하며 반드시 죽음으로 국가의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잡아 사사(社詞)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를 고한 뒤 떠났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충의(忠義)에 감복하였다. 뒷날 조정에 아뢰어 관직을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웠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君)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ㆍ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 가에 묻어 몇 개의 큰 무덤을 만들고서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위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썼다.
○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였던 태조(太祖)의 수용(睟容)을, 당시 전주가 위급해지자 참봉(參奉) 홍여율(洪汝栗)이 어용을 받들고 적병을 피하여 해로(海路)를 경유해서 의주(義州)에 도달하니, 상이 행궁(行宮)에서 곡하며 제사지내고 묘향산(妙香山)의 절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여율에게 상으로 6품의 직책을 주라고 명하였다.
○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이 왜병을 무계현(茂溪縣)에서 물리쳤으며, 곽재우(郭再祐)가 또 왜병을 현풍(玄風)과 창녕(昌寧)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치니 적이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우도(右道)의 적로(賊路)가 단절되어 적병이 대구(大丘)의 중로(中路)로 왕래하였다.
○ 이순신(李舜臣)이 왜병을 고성(固城) 견내량(見乃梁)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에 왜적이 수군을 크게 출동시켜 호남(湖南)으로 향하자 순신이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각기 거느린 군사를 재촉하여 나가다가 견내량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는데, 적선이 바다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원균(元均)이 앞서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兵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令)을 내려 거짓 패하여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하였다. 이에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砲焰)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 척을 남김없이 격파하니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그들의 구원병을 역습하여 패배시키니 적이 해안으로 올라 도망하였는데 적의 배 40척을 불태웠다. 왜진(倭陣)에서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의 한산도 전투에서 죽은 왜병이 9천 명이다."라고 하였다, 이 일을 아뢰자 순신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상으로 내리고 글을 내려 칭찬하였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에게 명하여 순안현(順安縣)에 주둔하면서 적을 막도록 하였다. 적이 처음 평양(平壤)에 들어올 때 군사가 대략 6~7천 명 정도였는데, 난민(亂民)을 초유(招誘)하고 군사를 만들어 성을 지키게 하면서 다시 나와 서로(西路)를 묻지 않았다. 이는 대체로 여러 곳에 분리 주둔하여 거느린 군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군대에게 공격당할까 두려워해서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명원이 이원익과 흩어진 군졸 및 강변의 토병(土兵)을 불러모아 다시 군용(軍容)을 갖추고서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순안현으로 나아가 주둔하여 부산원(斧山院)의 현계(峴界)를 방수(防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순안현 이상의 여러 고을에 이민(吏民)이 되돌아와 모였다.
○ 요진(遼鎭)에서 총병(摠兵) 조승훈(祖承訓),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 유격(遊擊) 사유(史儒)ㆍ왕수신(王守臣)ㆍ대조변(戴朝弁) 등을 파견하여 기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한 채 사유와 대조변은 탄환에 맞아 죽었고 승훈은 퇴각하여 요동(遼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승훈이 요진(遼鎭)에 가서 무고하기를 "한창 전투할 때에 조선 군사 일진(一陣)이 적진에 투항(投降)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불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상이 사신을 파견하여 분변해서 의혹을 풀게 하였다.
○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행조(行朝)에서 묘향산(妙香山)의 옛 승관(僧官) 휴정(休靜)을 불러 그로 하여금 중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도록 하였다.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 명을 얻었는데 그의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摠攝)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제자인 관동(關東)의 유정(惟政)과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 유정은 담력과 지혜가 있어 여러 번 왜진(倭陣)에 사자로 갔는데 왜인들이 신복(信服)하였다. 승군(僧軍)은 제대로 접전(接戰)은 하지 못했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며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도에서 그들의 힘을 입었다.
○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北界)로 침입하니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 남도와 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경명이 모집한 병사 6~7천 명을 단속해서 북상하여 여산(礪山)에 주둔하였는데 왜적이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하자 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겼는데 당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동틀녘에 다시 방어사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하였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하였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진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차자(次子) 인후(因厚)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경명은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공조 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상이 직접 유시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조만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그러니 관작 제수의 명이 이르지도 않아서 경명이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예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에 광주(光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고 편액을 하사하였다.
○ 서인(庶人) 홍계남(洪季南)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계남은 양성현(陽城縣) 사람으로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의 첩의 아들이다. 담력과 용맹이 있고 말타고 활쏘는 데에 능하여 금군(禁軍)에 소속되어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었는데, 왜인들이 그가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그러자 계남이 왜진(倭陣)으로 달려들어가 그 아비의 시체를 거두어 돌아왔는데, 왜인들이 계남인 줄 알고 감히 서로 대항하지 못하였다. 계남이 아비의 군사를 거두고 높은 산꼭대기에 보루를 쌓고 양천(陽川)ㆍ안산(安山) 두어 고을의 지역을 굽어보며 군사를 주둔시키고 적의 헛점을 틈타 동서로 습격하여 많이 참살(斬殺)하였다. 그래서 적이 감히 그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경기 지역과 호서의 여러 고을이 그의 힘을 입었다. 특별히 수원판관 겸 조방장에 제수하였다.
○ 고언백(高彦伯)을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 언백은 교동(喬桐) 사람으로서 향리(鄕吏)로 무과에 올라 종군하며 모반한 호인(胡人)을 공격하여 명성이 있었다. 도원수를 따라 장령(將領)이 되어서는 적의 수급(首級)을 벤 공이 있었는데 양주(楊州)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적군을 치겠다고 자청하니, 상이 특별히 당상관의 자급을 주어 양주 목사에 임명하고 능침(陵寢)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언백이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壯士)를 모집하여 산꼭대기의 험한 곳에 모여 웅거하면서 가끔 나가 흩어진 적군을 습격하였다. 적이 많은 군사를 풀어 수색하였으나 언백이 기회를 엿보아 가며 잘 피하고 숨었으므로 적이 마침내 해치지 못하였다. 언백은 항상 여러 능(陵)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수시로 적을 쏘아 죽이곤 하였다. 적이 태릉(泰陵)을 침범한 일이 있었는데 언백이 그들을 쫓아 버렸으므로 여러 능이 온전하게 되었다. 상이 그의 공로에 상을 주고 여러 번 자급을 올려 주어 장려하였다.
○ 고경명 휘하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불러모아 화순(和順) 사람인 전 부사 최경회를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고 골(鶻) 자로 표신(標信)을 삼았다. 절의를 지키다 죽은 유팽로(柳彭老)등을 높이고 본보기로 삼아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니 도내의 사민(士民)들이 많이 추종하였다.
○ 8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순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순변사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 이원익 등은 순안(順安)에 주둔하여 천여 명의 군사를 불러 모았는데 정예군사가 제법 많았다. 방어사 김응서(金應瑞), 별장 박명현(朴命賢) 등은 용강(龍岡)ㆍ삼화(三和)ㆍ증산(甑山)ㆍ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20여 둔(屯)에 배치하고 평양의 서쪽을 압박하며 때로 영세한 적을 소탕하면서 성 밖까지 이르렀으나 적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별장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大洞江) 입구에 웅거하였고, 중화(中和)의 별장 임중량(林仲樑)은 2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보루를 쌓아 주둔하며 지켰다.
행조(行朝)에서는 평양의 적세(賊勢)가 쇠약해져 우리 군사가 충분히 진격하여 취할 수 있고 또 중국 군사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여겨 영(令)을 내려 진격하기를 재촉하였다. 이에 삼로(三路)의 군사가 함께 나가 정탐하는 적을 만나 두어 명을 쏘아 죽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크게 이르자 관군이 놀라 강가에서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에 용병(勇兵)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세 번 싸워 모두 불리하였으므로 물러나 본소(本所)에 주둔하였다.
○ 황제가 호군(犒軍)하는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리고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조승훈(祖承訓)이 이미 패배하자 행재소에서 크게 두려워하여 요진(遼鎭)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파견해서 구원해 주기를 계속 청하니, 병부(兵部)에서 주청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성지에 "조선은 본래 정성을 다 바친 우리의 속국이다. 도적의 난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요동 진무관(遼東鎭撫官) 은 즉시 정병(精兵) 2지(枝)를 보내어 구원하도록 하고 은(銀) 2만 냥을 그 나라에 보내 호군(犒軍)하게 하고 대홍저사(大紅紵絲) 두 벌을 국왕에게 내려 위로하라." 하였다.
이에 유격(遊擊) 장기공(張奇功)을 파견하여 은을 풀어 꼴과 양식을 사들인 뒤 의주(義州)로 운반해서 군향(軍餉)으로 사용하게 하고,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파견하여 남병(南兵)을 거느리고 북안(北岸)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대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낙상지는 용력이 있어 천 근(斤)을 들었으므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리웠는데 매우 위명을 떨치었다.
○ 의병장 조헌(趙憲)이 청주성(淸州城)을 회복하였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 공주 목사 허욱(許頊)이 의승(義僧) 영규(靈圭)를 얻어 그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하니, 조헌이 군사를 합쳐 곧장 청주 서문에 육박하였다. 적이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로 들어가니, 조헌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천지가 캄캄해지고 사졸들이 추워서 떨자 조헌이 탄식하기를 "옛 사람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맞은편 산봉으로 진(陣)을 퇴각시켜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
○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이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悅) 등과 군사를 합하여 사천ㆍ고성(固城)ㆍ진해(鎭海)의 적을 무찌르니 적병이 점점 철수하여 도망하였으므로 김시민이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였다.
○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불러서 위로하고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그 대략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배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나의 괴로운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후회스럽다마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천운이 어렵게 되었고 지운(地運)이 이미 다 되었으니 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이성(李晟 당 덕종(唐德宗) 때의 인물)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 송 고종(宋高宗) 때의 인물)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다. 끝 부분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듣건대, 우감사(右監司) 김수(金睟)는 용인에서 패하여 퇴각하였고 좌감사 김성일(金誠一)은 진주(晉州)에서 용사를 모집한다 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참수(斬首)당했으므로 박진(朴晉)이 충용하다 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쇠약하므로 양사준(梁士俊)으로 대신하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을 좌도 수사로 삼았는데, 모두 각기 본도로 돌아가 힘써 주선하여 경영하는지 모르겠다. 좌도의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의 진주 등 약간의 고을이 아직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래도 1성(成 사방 10리의 땅)이나 1려(旅 5백 명의 단위)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도의 백성들은 성실하고 후덕하여 본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많았다. 그대들이 진정 서로 분발하고 면려한다면 틀림없이 회복시키는 근본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이다.
듣건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율(郭?)ㆍ조종도(趙宗道)ㆍ곽재우(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어떤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도성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
하였다.
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 판관 김시민(金時敏)을 발탁하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았다. 김시민이 진주의 주민을 안정시키면서 출전(出戰)하여 누차 승첩을 거뒀으므로 금산(金山) 이하에 머물며 주둔하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이에 김시민이 도로 진주에 주둔하면서 굳게 지킬 계책을 세웠다.
○ 별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永川)의 적을 격파하고 그 성을 회복하였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을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올려 방어사를 삼았다.
○ 의병장 조헌과 의승(義僧) 영규가 금산(錦山)의 적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조헌은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홀로 진군하여 곧장 금산의 적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전라 감사 권율(權慄)과 충청 감사 허욱(許頊)이 모두 만류하면서 동시에 군사를 크게 일으킬 것을 청하고 기일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또 기일이 연기되자 조헌은 그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7백여 명만을 이끌고 재를 넘으려 하였다. 영규가 간곡한 말로 만류하기를 "반드시 관군이 뒤에서 지원을 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하였으나, 조헌은 울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어디에 계신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버려야 하니,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성패와 이해 관계를 어떻게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고 북을 치며 행군하였다. 영규도 "조공(趙公)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 하고, 이에 거느린 승려 수백 명과 진(陣)을 합하여 함께 떠나면서 문첩(文牒)을 계속 보내 관군이 이어 진군하도록 재촉하였다.
조헌의 군사가 곧장 금산성 밖 10리 되는 곳에 이르러 진을 치고 관군을 기다리는데, 적이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군사를 잠복시켜 후면을 끊은 뒤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싸웠다. 조헌이 영(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하나의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응락하였다. 한참 동안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적이 세 번 진격했다가 세 번 패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조헌은 장막 가운데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좌우에서 빠져나가기를 청하자, 조헌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죽었으면 죽었지 구차스럽게 살 수는 없다."하고, 북을 울리며 더욱 급하게 전투를 독려하였다. 군사들은 맨 주먹으로 육박전을 벌였는데,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는 자가 없이 모두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영규도 전사하였다. 적의 무리는 죽은 자가 더 많아 시체를 운반하여 성으로 들어가면서 우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이튿날 동생 조범(趙範)이 몰래 전쟁터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었는데, 조헌은 깃발 아래에서 죽었고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곁에 빙둘러 죽어 있었다. 4일 만에 빈(殯)하였는데 낯빛이 살았을 적과 같았으며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움직여 사람들은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적이 퇴각한 뒤에 제자들이 가서 7백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 하나를 만들고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이라고 표시하였다.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는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과 도량 역시 뛰어났다. 군사가 패하게 되자 일부러 관복(冠服)을 화려하게 입었으니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한 것이다. 이에 적이 그를 주장(主將)으로 오인하고 그 시체를 찢었다.
함께 전사한 자로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다. 참봉 이광륜(李光輪)은 효성스럽고 우애와 절개가 있었다. 처음에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집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에 참여하였다.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성품이 질박하고 곧았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는데, 척후(斥候)로 진(陣)밖에 있다가 조헌의 위급함을 보고 말에 채찍질하며 돌격하여 전사하였다. 사인(士人) 이려(李礪)는 이탁(李鐸)의 손자로 학문과 덕행이 있었고, 사인 김절(金節)은 맨 먼저 군사를 모집하여 전투에 참여하면서 역전(力戰)하였다. 만호 변계온(邊繼溫), 현감 양응춘(楊應春), 봉사 곽자방(郭自防), 무인(武人) 김헌(金獻)ㆍ김인남(金仁男)ㆍ이양립(李養立)ㆍ정원복(鄭元福)ㆍ강인서(姜仁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이인현(李仁賢)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은 모두 편비(褊裨)로 혈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사인(士人)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申慶一)ㆍ서응시(徐應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敬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는 모두 문인(門人)으로 종군하다가 전사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조헌에게는 이조 참판이 추증되고 그의 아들 완도(完堵)를 녹용(錄用)하였으며 그 집에 월름(月廩)을 지급하였다. 이광륜은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 해남 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이 처음에 조헌과 함께 금산(錦山)을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윽고 관군과 함께 모두 기일을 늦추었다. 조헌이 패하여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어찌하여 의병장과 약속을 하고서 위배하여 함께 죽지 못했단 말인가." 하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진군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격투(格鬪)하다가 전사하였다.
○ 금산(錦山)에 주둔했던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적이 비록 조헌 등의 군사를 패배시키기는 하였지만 죽거나 다친 군사가 매우 많았고 관군이 잇따라 이르러 피폐한 때를 이용하여 공격할까 의심하고서 무주(茂朱)와 옥천(沃川)에 주둔했던 군사들을 거두어 군영을 태워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호남이 다시 완전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조헌 등의 공이 장수양(張睢陽 당 나라의 장순(張巡))에 비교할 만하다고 하였다.
○ 이때 이순신(李舜臣)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西海)의 입구에 웅거하였으며, 김성일(金誠一) 등은 진주(晉州)의 관요(關要)를 지키고 있었다. 적이 금산(錦山)의 길을 경유하여 호남에 침입했으나 여러 번 좌절당하였으므로 도로 종래의 길로 퇴각하여 돌아가니 호서 또한 함락되는 것을 면하였다. 국가가 이 두 도를 의지하여 군수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으니, 한때의 장사들이 방수(防守)한 공이 또한 많았다고 하겠다.
○ 9월. 중국 조정에서 왜의 진영에 사자로 보낸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돌아왔다. 당초 조승훈(組承訓)이 패하고 나자 적이 더욱 교만해져 우리 군대에 글을 보내어 장차 서쪽으로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치므로 행조(行朝)에서 두려워하였다. 심유경은 본래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평소 왜국의 실정에 익숙하였으므로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유격이란 칭호를 붙여 주면서 그로 하여금 적의 사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순안(順安)에 이르러 먼저 한 사람의 가정(家丁)을 왜군의 진영에 보내어 황제의 칙지로 책망하기를 "조선이 일본에 무엇을 잘못했기에 일본이 어찌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는가?" 하니, 행장(行長)이 글을 보고는 직접 만나 일을 의논하자고 회보하였다. 심유경이 즉시 3~4명을 거느리고 가니, 행장 등이 군사를 매우 엄하게 진열하고 성 북쪽의 산 위로 나와서 만났다. 행장이 구봉(求封)과 통공(通貢)에 대한 일을 말하자, 심유경이 행장 등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바로 중국 조정의 지방이니 그대들은 물러나 주둔하면서 중국 조정의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하니, 행장이 지도(地圖)를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분명히 조선 지역이다."
하였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평상시에 여기서 조서(詔書)를 영접하는 까닭에 많은 궁실(宮室)들이 있다. 비록 여기가 조선 지역이라 하더라도 바로 중국의 지경이니 여기에 머물 수는 없다."
하니, 행장이 다시 회보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청하고 물러갔다. 심유경이 갔다가 돌아오는 기간을 50일로 정한 뒤, 그동안에는 왜군의 무리가 평양의 서북쪽 10리 밖을 나오지 못하고 조선의 군사도 10리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는 나무를 세워 금표(禁標)를 하고 돌아왔다.
○ 전 사성(司成) 우성전(禹性傳)이 의병을 일으켜 의(義)자로 군호(軍號)를 삼았는데, 경기 안의 사민(士民) 중 따르는 자가 많아 군사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얼마 있다가 강화(江華)로 들어가 김천일(金千鎰)과 군사를 연합하였다.
○ 중국 황제가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설번(薛藩)을 파견하여 조칙을 내리고 위로하며 유시하기를,
"그대 나라는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키며 평소 공손히 순종하였고, 의관 문물(衣冠文物)이 성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불려졌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왜노가 창궐하여 대거 침입해서 왕성(王城)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점거하여 생민들은 도탄에 빠져 원근이 소란하며 국왕은 서쪽의 바닷가로 피신하여 초야에 있다고 하니, 그렇게 결딴난 모습을 생각하면 짐(朕)의 마음이 서글퍼진다. 엊그제 급박함을 고하는 소식을 받고 이미 변신(邊臣)에게 조칙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도록 하였다. 이제 또 행인(行人)을 차송하여 그대 국왕에게 알리는 것이니 마땅히 그대 조종(祖宗)이 대대로 전한 기업을 생각하도록 하라. 어떻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리겠는가. 급히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해야 할 것이니 힘써 바로잡고 회복할 것을 도모하라. 그리고 다시 그대 나라의 문무 신민에게 잇따라 유시하여 각기 군주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견고히 하고 원수를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이 지금 문무 대신(大臣) 2원(員)에게 명하여 요양(遼陽)의 정병(精兵) 10만 명을 통솔하고 가서 도와 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기필코 그대 나라의 병마(兵馬)와 함께 전후에서 협공하여 흉적을 모조리 죽여 하나도 남기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이 하늘의 명명(明命)을 받아 화이(華夷)의 군주가 되어 지금 만국이 모두 편안하고 사해가 안정되어 있는데 어리석은 소추(小醜 왜적을 가리킴)가 감히 횡행하므로 다시 동남변해(東南邊海)의 여러 진(鎭)에 조칙을 내리고 아울러 유구(琉球)ㆍ섬라(暹羅) 등의 나라에 선유(宣諭)하여 군사 10만 명을 모집해서 동쪽으로 일본(日本)을 정벌하여 경예(鯨鯢 악인을 가리킴)를 주살하고 사해를 안정시키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작위(爵位)를 주고 포상하는 성대한 전례를 짐이 어찌 아끼겠는가.
대체로 선세(先世)의 강토를 회복하는 것은 곧 대효(大孝)이며 군부(君父)의 환난에 급히 달려가는 것은 곧 지극한 충성이다. 그대 나라의 군신들은 평소 예의를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짐의 마음을 잘 체득할 것이다. 옛날의 문물을 회복시켜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를 올리며 도성으로 돌아가 종묘와 사직을 굳건히 지키며 번병(藩屛)의 임무를 길이 보전하게 하라. 그리하여 먼 곳을 보살피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짐의 뜻을 위로하게 될 것이다. 부디 신중히 할지어다. 그러므로 유시하노라."
하였다.
○ 박진(朴晉)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안강현(安康縣)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 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일이 알려지자, 가선대부로 승진시켰다. - 비격진천뢰의 제도는 옛날에 없었는데,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震天雷)를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면 5~6백 보를 날아가 떨어지는데,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으나 그 뒤에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 황제의 조칙을 팔방(八方)에 선포하고 관군과 의병에게 힘을 합하여 적을 토벌하도록 유시하였다. 또 적의 계략에 빠졌던 사민(士民)들을 용서하여 귀순해서 스스로 충성을 다하도록 하고 공을 세운 자는 상을 주게 하였다.
○ 적을 토벌한 자에 대해 포상하는 규정을 중외에 반포하였다.
○ 여러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궐원인 지방관에 대해서는 모두 적임자를 가려 임시로 지키게 하고 계문하여 정식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 전라 순찰사 권율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향하였다. 권율이 한번 호령을 새롭게 하자 호남의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군사 2만 명을 징발하여 북쪽으로 올라왔다.
○ 왜적이 연안성(延安城)을 공격하니,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이 그들을 격퇴시켰다. 적장 갑비수(甲斐守)ㆍ풍신장정(豐臣長政) 등은 연안성을 굳게 지키고 떠나지 않는다 하여 해주(海州)ㆍ평산(平山)의 여러 주현(州縣)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대거 침입해 왔다.
이에 성 안에서는 모두 기가 질려 말하기를 "초토사는 성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니 이 예봉(銳鋒)을 피하여 뒷날에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니, 이정암이 울면서 달래기를 "내가 경악(經幄)에 있던 늙은 신하로 말고삐를 잡고 행재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제 왕세자의 초토하라는 명을 받았고 보면 빨리 한 성의 수비라도 맡아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 어떻게 차마 구차하게 살겠는가. 그리고 주민을 이끌어 성으로 들어오게 하였다가 적이 왔다고 해서 버리는 짓을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하고, 명령을 내리기를 "함께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마음대로 빠져 나가라." 하였다. 그리고는 노복을 시켜 섶을 쌓고 횃불을 가지고 기다리게 하면서 경계시키기를 "적이 만약 성에 오르거든 나는 여기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너는 즉시 태워서 적의 손에 내가 더럽게 죽지 않도록 하라." 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인사는 타일러서 보내니 종사관 우준민(禹俊民)이 나가서 군중에게 거듭 약속을 밝히고 마음과 힘을 합하기로 맹세하자 군중이 감동하고 분격해서 일제히 외치기를 "대장이 죽기로 결단하는 판에 우리들이 어찌 살기를 도모하랴." 하였다.
적이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한 장수가 흰 기를 등에 지고 백마를 타고는 성을 돌며 두루 살피던 중에 기가 갑자기 바람에 넘어졌다. 무사 장응기(張應祺)가 그것을 보고 화살 한 대를 쏘아 가슴을 꿰뚫어 죽였다. 이정암이 좌우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적이 패할 징조이다." 하였다. 적이 밤낮으로 공격하며 수천 개의 조총(鳥銃)으로 일제히 사격하니 연기가 자욱하고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이정암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성가퀴를 지키는 자에게 명하여 경솔히 활을 쏘지 말고 적이 성에 기어 오르거든 반드시 쏘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짝ㆍ다락 등을 뜯어 방패(防牌)로 삼고 쌓아둔 풀을 묶어 횃불을 만들고 가마솥을 벌여 두고 물을 끓이면서 늙은이ㆍ어린이ㆍ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 그 일에 달려들도록 하였다.
적이 시초를 참호에 채우고 올라오면 횃불을 던져 태우고, 적이 긴 사다리로 성에 오르거나 판자를 지고 성을 훼손시키면 나무와 돌로 부수고 끓는 물을 퍼붓게 하니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이 남산에다 높은 다락을 세워 판자 벽에 구멍을 내고 내려다보며 총을 쏘니, 성 안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흙담을 쌓아 막았다. 적이 밤 안개를 틈타 몰래 서쪽 성으로 기어 오르는 것을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가 횃불로 에워싸 40여 명을 태워 죽였다. 포위당한 지 4일 동안 밤낮으로 크게 싸웠는데 적도 탄환이 떨어져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성 안에서는 또한 승리한 기세를 틈타 환호하며 쇠북을 치자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적이 이에 시체를 모아 불을 지르고 퇴각하니,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하여 수급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정암이 승리의 보고를 하면서 단지 어느 날에 성이 포위당하고 어느 날에 풀고 떠났다고만 하였을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조정에서 모두 말하기를 "전쟁에 이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고 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더하고, 함께 지킨 장사로 공이 있는 장응기ㆍ조종남(趙宗男)ㆍ조서룡(趙瑞龍)ㆍ봉요신(奉堯臣) 등에게는 차등 있게 관직으로 포상하였다.
○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였다.
당시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토인(土人)에게 잡혀 왜장에게 넘겨졌는데, 도망하여 나온 자는 10명에 1~2명도 안 되었다. 평사 정문부는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변란이 일어난 뒤에 제자 몇 사람이 비호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교생들과 식견이 있는 무사들이 정문부가 있는 곳을 알고 모두 그에게 찾아가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토병과 장사 수백 명을 모았는데,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가 선두에서 거느리고 즉시 부(府)의 성에 이르렀다.
이때 국세필(鞠世弼)이 예백(禮伯)이라고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가지고 일을 보면서 태연히 부(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가 항거하였다. 이에 강문우 등이 화복(禍福)을 들어 위협하니 국세필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반납하였다. 정문부가 명령을 내리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남북의 주보(州堡)에 격문을 전하여 병사 3천 명을 합하고 그 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런 기마병을 뽑아 선봉으로 삼았다. 길주(吉州)의 왜적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성 서쪽에 와서 탐지하게 하였는데,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의 머리를 베니 남은 적들이 도망갔다.
○ 10월.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적이 군사를 합쳐 대대적으로 진주(晉州)를 포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크게 격파하여 진주가 포위에서 풀렸다. 당초 왜장이 군사 수만 명을 모두 동원하여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 안의 군사는 3천여 명이었다. 김시민이 여러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니 성 안이 고요하였다. 적이 기치(旗幟)와 개삽(蓋翣)을 많이 설치하고 금으로 꾸민 가면에 의복을 이상하게 차려 입어 햇빛에 번쩍이고 바람에 펄럭이니 온갖 형상이 눈이 부시고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왜장 6명이 진(陣)을 나누어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총수(銃手) 수천 명이 항상 산 위에서 성 안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니 그 형세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는 듯하였으며,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김시민은 군사들로 하여금 움직이지 말고 적들의 소리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즉시 포(砲)를 쏘고 북을 울리며 응전하게 하였다.
적이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많이 베어 엮어서 막이를 만들고 흙으로 그 속을 채워 우리 군사가 모르게 하고 대나무 사다리 수천 개를 만들었는데 한 칸 너비쯤 되는 것으로 그 위에 망석(網席)을 덮어 많은 군사가 동시에 일제히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으며, 3층의 산대(山臺)를 만들어 성첩을 내려다보게 하였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火藥)을 종이에 싸서 다발로 묶은 풀 속에 넣어두고 성 위에는 대포(大砲) 및 대석(大石)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女墻) 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적이 공격할 장비를 모두 갖추고 사면으로 육박하자, 성 안에서 현자총(玄字銃)을 쏘아 산대의 적을 맞춰 떨어뜨리고, 화약과 풀로 송장(松障)을 태웠으며, 대포로 대나무로 엮은 긴 사다리를 부수고, 끓인 물을 퍼붓기도 하고 큰 돌을 던지기도 하여 여러 가지의 공격용 장비를 격파하였다. 9월 10일 밤중에 적병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다가 몰래 되돌아와 적의 대장이 직접 전투를 독려하였다. 여러 왜적이 모두 방패로 가리고 머리를 감싸고 처음에는 동문(東門)을 공격하였는데, 앞에서 한꺼번에 올라가게 하고 뒤에서는 천 개의 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성 위에 사람이 설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오는 족족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게 모두 다 패하였다.
바야흐로 전투가 무르익을 무렵 또 하나의 대진(大陣)이 동문의 경우처럼 갑자기 북성(北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만호 최덕량(崔德良)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항해 싸우며 일사불란하게 막아 내었는데, 동녘이 밝아오자 조금 뜸해졌다. 성안의 나무와 돌, 기와, 띠풀 등이 거의 없어졌으며 김시민도 탄환에 맞아 누워 있었다. 이때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이 왜장을 쏘아 죽이니 한낮이 되어서야 적진이 비로소 퇴각하며 시체를 태우고 포위를 풀고 흩어졌다. 성이 포위당한 10여 일 동안 4~5차례 큰 전투를 벌이면서 안팎에서 힘껏 싸웠으므로 적이 먼저 도망하였다.
○ 복수(復讐)할 사람을 불러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에 고경명(高敬命)이 패한 뒤 그의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가 상복을 입고 종군하여 부친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 별군(別軍)을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체찰사 정철(鄭澈)이 조정의 뜻을 선포하며 권유하자 홍계남(洪季男)이 맨 먼저 여러 도에 편지를 보내니, 조헌의 아들 조완도(趙完堵) 등이 호응하였다. 또 고종후로 하여금 사노(寺奴)를 뽑아 군사를 삼도록 하였다.
○ 유격(遊擊) 갈봉하(葛逢夏)가 마병(馬兵) 2천 명을 거느리고 사대수(査大受)와 함께 행조를 호위하며 오랫동안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 북도 평사(北道評事) 정문부(鄭文孚)가 길주(吉州)에서 적병(賊兵)을 크게 패배시키고 성을 포위하였다.
정문부가 백성을 안집(安集)시켜 안정이 되자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적을 공격하여 충성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에 출동할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 할 즈음에 장사들이 일제히 요청하기를 "앞으로 왜적을 토벌하려 하는데 국가에 반역한 적이 아직도 진중(陣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을 잡아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돌리고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선 사람은 이 무리들뿐이며 이 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부인(府人)은 의심하지 말라."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이것은 정문부의 본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다시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맨 먼저 반란에 앞장선 자를 처벌하게 하니, 회령(會寧)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鞠景仁)의 목을 베었으며, 남은 진도 모두 수복되고 반민(叛民)들은 주벌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고참역(古站驛)으로 진출시키고 군사를 보내어 명천(明川)의 반적(叛賊) 정말수(鄭末守)를 주벌하고 성울 수복하였다. 그러자 길주의 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나와 분탕질을 쳤는데, 일지군(一枝軍)은 명천의 해창(海倉)을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길주의 남촌(南村)에 진출시켜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여 적병을 크게 깨뜨리고 6백 명의 수급을 베었다. 적의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하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돌려 공격하였다. 쌍포(雙浦)에서 전투하였는데 적병이 패주하였으므로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로부터 두 곳에 주둔한 적이 모두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나누어 포위하였다.
○ 11월. 정곤수(鄭崑壽)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중국 조정이 대병(大兵)을 출동시켜 구원할 것을 허락하고 먼저 은(銀) 3천 냥을 내려 주었다. 정곤수가 처음에 연경에 도착하여 주문(奏文)을 올리자 황제가 즉시 병부(兵部)에 내려 복의(覆議)하게 하였다. 정곤수가 병부에 글을 올려 거듭 간곡하고 절박하게 청원하고, 또 상서(尙書) 석성(石星)에게 나아가 통곡하며 애절하게 호소하는데 슬픔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니 석성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당시 중국 조정에서도 이의(異議)가 분분하여 어떤 이는 말하기를 "중국 지역만 방어하면 되지 병마(兵馬)를 많이 징발하여 중국을 먼저 피폐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지만, 석성만은 군사를 내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며 복제(覆題)하여 격동시키는 한편 자신이 동쪽의 정벌에 나서겠다고 주청하였다. 황제가 즉시 윤허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아 먼저 2만의 군사를 출발시키고 곧 이어 대군(大軍)을 조발하고 장수를 정하여 잇따라 파견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가은(馬價銀) - 마가은은 바로 중국 조정의 변방 오랑캐 방어용 자금이다.- 3천 냥을 내려 궁각(弓角)과 화약을 사서 보냈다. 정곤수가 무더운 때에 갔다가 추위를 무릅쓰고 돌아왔는데, 길에서 머물지 않고 주청하여 성사시켰으므로 상이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며 후하게 위로하였다.
○ 호남의 사민(士民)이 의곡(義穀)을 모아 해로(海路)를 따라 의주(義州)에 수송하였다.
○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여 군공을 조사하여 감정하게 하였다.
○ 전 동지사(同知事) 성혼(成渾)이 행재에 이르자 우참찬으로 승진 임명하였는데 대신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성혼이 아뢰기를,
"신이 국란 초기에 대궐에 달려가려 하였으니 조정에서 바야흐로 당인(黨人)의 지목이 있어 감히 스스로 반행(班行)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승여가 임진강을 건너는 때를 당해서는 일이 갑작스러웠고 집이 15리 밖에 있어 미처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달려와 문안하지 못하였으니, 신하로서의 도리를 전혀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동궁(東宮)이 하교하여 이정형(李廷馨)의 군중(軍中)에 나아가 군사(軍事)를 함께 맡도록 명하였습니다. 신이 병으로 폐인이 되었으니 어떻게 말을 몰아 달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부축을 받고 군대 있는 곳에 이르러 감히 죽기를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이어 동궁이 불러서 분조(分朝)로 달려갔는데, 머무른 지 열흘 만에 대조(大朝)로 들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달 말에 성천(成川)을 출발했는데, 겨울철 극심한 추위로 신은 몸이 점점 쇠약해져 한질(寒疾)이 다시 도져 도로에서 지체하느라 뒤처져 늦어진 바람에 평소의 마음을 스스로 아뢸 길이 없었으니 황공하고 두려워 죽어도 죄가 남는다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갖은 고생을 하며 여기에 도착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하며 기쁘다. 국가가 장차 경(卿)을 의지하여 회복될 것이니 대죄(待罪)하지 말라."
하였다. 성혼이 또 새로 승진된 직명(職名)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재삼 사양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문소전(文昭殿)의 위판(位版)을 처음에 전내(殿內)에 묻었는데, 김천일(金千鎰)이 사람을 모집하여 성에 들어가 몰래 가져오게 해서 강화(江華)에 봉안(奉安)하였다. 이때 응모한 사람에게도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 12월. 전라 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의 독성(禿城)으로 군사를 진출시켰다. 권율이 직산(稷山)에 이르자 체찰사 정철이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도록 경계하므로 권율이 그대로 군사를 머물게 하면서 보고하였다. 조정이 전지를 내려 정철을 책망하고 권율을 재촉하여 도성으로 진출하여 도모하도록 청하였다. 권율이 지난날 평야의 전투에서 군사가 패한 것을 징계하여 독성으로 진출하여 머물렀다. 상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달려가 내려주게 하면서 "여러 장수들 중에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고 하였다. 도성의 적이 진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왕래하면서 도전(挑戰)하였으나 권율은 성곽을 튼튼히 지키고 응하지 않으니 적이 군영을 태우고 퇴각하였다. 권율이 가끔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낙후한 적을 습격하자 기내(畿內)에 주둔했던 적이 모두 도성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서로(西路)에 행인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여러 의병들이 차례로 경기 지역에 진출하여 주둔하면서 중국 군사를 기다렸다.
황제가 대병(大兵)을 파견하여 와서 구원하게 하였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먼저 압록강을 건넜다. 황제가 우리의 주청을 허락하고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군문(經略軍門)으로,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을 제독군무(提督軍務)로 삼았다. 그리고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왕유익(王有翼), 부총병 왕유정(王維禎), 참장(參將) 이여매(李如梅), 참장 이여오(李如梧), 참장 양소선(楊紹先),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 부총병 손수렴(孫守廉), 참장 이영(李寧), 유격 갈봉하(葛逢夏) 등을 모두 양원이 통솔하게 하였다. 총병 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참장 이방춘(李芳春), 유격 고책(高策), 유격 전세정(錢世禎), 유격 척금(戚金), 유격 주홍모(周弘謨), 유격 방시휘(方時輝), 유격 고승(高昇), 유격 왕동(王洞) 등을 모두 이여백이 통솔하게 하였다.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부총병 왕필적(王必迪), 참장 조지목(趙之牧), 참장 장응충(張應忠), 참장 낙상지(駱尙志), 참장 진방철(陳邦哲), 유격 곡수(谷燧), 유격 양심(梁心) 등을 모두 장세작이 통솔하게 하였다. 참장 방시춘(方時春)을 중군 비어(中軍備禦)로, 한종공(韓宗功)을 기고관(旗鼓官)으로,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 병부 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을 찬획(贊畫)으로,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維新)을 독향(督餉)으로 삼았다. 군사는 도합 4만 3천여 명이었으며 잇따라 나온 자가 8천 명이었다. 이때 평양에 주둔한 적은 1만 수천 명 정도였는데, 우리 백성들까지 군사로 삼아 군세(軍勢)를 펼쳤다. 경략이 세 갑절의 군사로 공격할 계획을 하였다.


[주D-001]신포서(申包胥)에 비유 :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를 침략하자 초 나라 신하 신포서가 진(秦) 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가 뜰에서 7일 동안 울었더니 진 나라에서 그의 충성심에 감동되어 출병했던 고사. 《史記 卷六十六 伍子胥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