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의병 곽재우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은 곽재우

1592년 임진년 (再祐)는 4월 24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토벌하였다

아베베1 2009. 11. 1. 09:55

재우(再祐)는 4월 24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토벌하였다. 김천일(金千鎰) 등이 뒤에 비록 창의사(倡義使)로 이름하였지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실제로는 재우이며 왜적들이 감히 정암진(鼎巖津)을 건너 호남(湖南)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재우의 공이다. 재우가 김수가 싸우지 않고 점차 퇴각하는 것에 분격하여, 당초 의병을 일으킬 적에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수의 죄를 일일이 따져 책망하고 수를 베려고 하자 수가 매우 두려워하여 심지어 치계까지 하여 변명하면서 재우의 일을 마치 역적처럼 말하니 비변사의 여러 사람들도 재우의 심사(心事)를 모르고 의심하였다. 그러자 재우도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뜻을 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기와 친한 사람을 의주로 보내 상소하기로 하고 수의 죄를 따져 책망한 말을 모두 열거하여 상소문을 만들고 ‘그는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여 불충 불효하며 패전을 기뻐하고 왜적을 맞아들였다.’고 하였다. 또 금관자(金貫子)를 잃어버리고 달아났으니 머리없는 시체 귀신이라고 수를 욕하니, 수가 마침내 성(城)을 지키면서 재우를 피하고 김성일(金誠一)로 하여금 그를 타이르게 하였다. 성일이 힘껏 저지하지 않았다면 수가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수가 산음현(山陰縣)에 있다가 재우의 선봉이 이미 바싹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함양으로 도망갈 때에는 심지어 말을 거꾸로 타고 달아나니, 좌·우도(左右道) 사람들이 수가 왜적에게 겁먹고 또 재우에게 겁먹은 것을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수가 전현룡(田見龍)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럴 리가 없을 터인데, 지금 성일의 치계에 ‘김수도 역시 전현룡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좋은 말로 아뢰어 서로를 화해시키려는 것인가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곽재우(郭再祐) 제일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기재갑기》에 그를 승지(承旨) 규(赳)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조야첨재》에는 감사 월(越)의 아들이라 하였다.


임진년 4월 27일에 곽재우(郭再祐)가 군사를 일으켜 적병을 토벌하였다.
재우는 목사(牧使) 월(越)의 아들로서, 군사를 일으킬 때 그 아버지의 무덤에 가서 울며 하직하기를, “아버지께서 만약 살아 계셨다면 왜놈들의 창궐(猖獗)이 어찌 걱정되겠습니까.” 하였다.
○ 재우는, 자는 계수(季綏)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의령(宜寧)에 살았으며, 나이 40이 넘자 과거보기를 단념하고 낚시질로 스스로 즐기더니, 이때에 이르러 각 고을의 성(城)이 잇달아 함락된다는 말을 듣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타이르기를, “적병이 이미 박두하였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는 장차 적병의 포로가 될 것이다. 이에 우리 동네에 나이 젊어 싸울 수 있는 자가 수백 명은 될 것이니 만약 마음을 같이 하여 정암나루[鼎岩津]에 의거하여 지킨다면 우리 고장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 하고 드디어 자기 집 재물을 처분하여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자기 옷을 벗어 싸움할 군사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 군사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용감한 장사 심대승(沈大升) 등 십여 명을 얻자 사생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하였다. 장사(壯士) 50여 명을 모아 가지고 의령(宜寧)ㆍ초계(草溪)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끌어내고, 또 거름강[岐江]에 버려져 있는 배에 실려 있는 세미(稅米)를 가져다가 군사에게 먹이니,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 하고 어떤 이는 그가 도적노릇을 한다고 하였으며, 합천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은 그를 육지의 도둑이라고 보고하기에 이르렀다.김성일이 그의 이름을 듣고 격려하며 일어나기를 권하니 군사들이 도로 모여들었다. 재우는 적병의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앞으로 달려들었다. 재우는 싸울 때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첩리[帖裏]를 입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을 갖추고 스스로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이라 일컬으면서 말을 달려 적진을 스쳐 지나가곤 하였는데, 숨었다 나타났다 종작이 없이 하여 적이 그 단서를 잡을 수 없게 한 뒤에,말을 돌려 돌아와서 북을 치며 천천히 행진하니 적은 그 병력의 많고 적은 것을 알지 못하여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조차 못하였으며, 잇달아 척후(斥候)를 두었으므로 적이 백리밖에 이르면 우리의 진중에서 먼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대처하기에 편하고 수고스럽지 않았다. 또 사람을 시켜 적이 바라볼 수 있는 산 위에서 다섯 가지[枝]로 된 횃불을 들고 밤새도록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게 하니, 천만 명이나 있는 것 같았으므로 적의 무리가 바라보고 곧 도망쳤으며, 정예한 군사를 뽑아 요해처에 숨겨 두었다가 적이 이르기만 하면 문득 쏴 죽이니, 적이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언덕에 올라오지 못하였다.또 군중에 약속하기를, “적의 머리를 베어 공을 자랑하는 것은 성심(誠心)이 아니다. 적을 죽일 뿐이다.” 하였으므로 끝까지 적의 머리를 조정에 바치는 일이 없었다. 김수(金睟)의 진영에 있는 무사(武士) 김경로(金敬老)등이 재우를 죄로 얽으려 하고 재우 또한 도망 다니는 감사 김수의 하는 짓을 통분하게 여기니 드디어 틈이 생기게 되었다. 성일이 삼가(三嘉) 고을의 군사를 재우에게 예속시켜 주니 재우는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이에 그는 윤탁(尹鐸)을 대장(代將)으로 삼고 전 부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으니, 고을의 부자들이 차례로 쌀을 내고 소를 잡아 날마다 군사를 먹여 군사의 명성이 크게 떨쳐서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 등 세 고을을 수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평일과 같이 농사를 지울 수 있었다.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적병이 거의 물러가자 재우는 정암나루에 진을 치고 강 상하의 적병을 수비하였다. 《일월록》
○ 또 태평소(太平簫) 불 줄 아는 사람을 많이 모아 붉은 옷을 입히고 산꼭대기 사방에 벌여 배치하였다가 적병이 이르면 태평소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게 하고, 언덕 뒤에서는 복병을 시켜 어지럽게 활을 쏘게 하였다. 《기재잡기》
○ 6월에 왜적이 배 열 여덟 척이 쌍산역(雙山驛)으로부터 정암나루에 이르러 “왜국의 정승(政丞) 안국사(安國寺)의 행차다.”라고 칭하였는데, 재우가 이에 항거하여 물리쳤더니 적이 영산(靈山)ㆍ창녕으로부터 거름강[岐江]을 건느려고 하므로 재우가 달려가서 막았다. 《기재잡기》 기재가 말하기를, “임진년 9월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조방장(助防將)에 발탁되었다.” 하였다.
○ 재우가, “김수(金睟)가 달아났다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치고자 하니 김성일이 준엄하게 책망하여 중지시켰다. 재우는 드디어 격서(檄書)를 보내어 수의 일곱 가지 죄목을 지적하면서 “내 장차 너의 머리를 베어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풀겠다.” 하였다. 그때 수(晬)는 산음(山陰)에 머물러 있다가 재우의 격서를 보자 놀라고 분하게 생각하여 군관 김경눌(金敬訥)을 시켜 격서로 답하면서 재우를 도적으로 지목하였다. 재우는 그때 막 진주(晉州)를 구원하려 달려가다가 말에 기대서서 회답을 쓰되, “의사와 도적의 구분은 하늘과 땅이 알며, 옳고 그른 것의 판단에는 공론이 있다.” 하였다.일찍이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재우의 성공을 시기하여 조정에 올린 계사(啓辭) 가운데, ‘재우가 의심스럽다.’고 한 일이 있고 또한 수의 계사에도 재우를 헐뜯으니 재우도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고, 수의 허물을 극력으로 말하였다. 이에 이르러 삼가(三嘉) 고을의 진사 윤언례(尹彦禮) 등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재우가 무고당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자, 수가 또 소를 올려 스스로 변호하고 또 재우가 와서 저를 칠까 염려하여 성일과 김면(金沔)을 시켜 서한을 재우에게 보내게 하여 화해하려 하니 재우가 마지못해 따랐다.성일이 말하기를, “조정의 처치를 알 수 없으나 마땅히 재우의 이 위태한 목숨을 구해야 한다.” 하고 거듭 조목을 들어 설명하고 피차를 미봉하였더니 임금이 특히 온정(溫情)있는 유시(諭示)를 내렸기 때문에 무사할 수가 있었다. 《명신록》 《일월록》
○ 수(晬)는 처사(處事)가 조급하고 각박하여 인심을 매우 잃더니 왜변을 당한 시초에 계책을 세워 대처하지 못하고 적병을 피하여 전라도로 갔기 때문에 지방 사람들의 나무람을 많이 받았다. 재우가 이미 세력을 쥔 후로는 법도를 따르지 않는 일이 많으므로 수가 그것을 곧 바로잡으려 하였더니 재우가 심히 성을 내고 드디어는 격서(檄書)를 보냈다고 한다. 《기재잡기》
○ 수(晬)가 소환되고 성일이 대신 감사가 되자 재우가 또 소를 올려 수를 베어 죽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함부로 감사를 죽이고자 하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없애버리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이에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그 사람의 하는 짓은 한 미친 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베어 능히 향리(鄕里)를 보전하였으며, 동ㆍ서로 쫓아다니면서 달려가 백성을 구원하며 험난한 것을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의사라 하고 있습니다.오늘의 상소 또한 반드시 의기(義氣)의 격동하는 바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실은 스스로 죽을 죄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총칼이 어수선한 날에 어찌 사람마다 모두 예법으로써 책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드디어 더 묻지 아니하였다. 《기재잡기》
○ 재우는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향리에서는 효행(孝行)이 있다고 일컬었다. 왜란이 처음 일어나자 재물을 흩어서 군사를 모집하니 그의 아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소용없는 죽음을 당할 계획을 하시오.” 하니 재우가 매우 성을 내며 칼을 빼어 베고자 하였다. 저절로 들어온 좋은 말이 있어 잡아 타고 전진(戰陣)에 나아가 나는 듯이 달리자 여러 사람들이, “귀신이 도운 것이라” 하니 더욱 믿고서 왜적을 두려워함이 없었다.
○ 재우가 낙동강에 있는 적의 배를 얻었는데 실려 있는 것이 모두 궁궐의 보물로서 태조가 신었던 신도 있었으므로 즉시 초유사(招諭使)에게 보냈다. 《일월록》
○ 영산(靈山) 사람 공위겸(孔撝謙)이 왜란의 시초에 적병에 부역하여 적들과 함께 서울에 들어가 제 집에 편지를 보내어, “내가 마땅히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될 것이고, 못 되어도 밀양 부사(密陽府使)는 될 것이다.” 하였고 또한 임금에게 범(犯)한 말도 있었다. 하루는 제 집에 돌아온 것을 재우가 묶어다가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그때 종들 중에 이런 때를 틈타서 주인을 죽이는 자가 많았고, 혹은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고 또 혹은 서로 음탕하고 더럽게 굴었으므로 재우가 듣고 곧 그런 자들을 잡아 죽이었다. 《일월록》
○ 처음에 현풍(玄風)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에 둔치고 있는 적병이 몹시 성(盛)하여서 잇달아 성주(星州)에까지 진을 치더니, 현풍ㆍ창녕의 적병이 먼저 도망쳐 가고 영산에 주둔한 적병은 강한 것을 믿고 움직이지 아니하였는데, 재우가 윤탁(尹鐸)과 더불어 세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물리치니, 이때부터 창녕 한 길에는 적병의 발자취가 없어져 경상우도는 모두 평정되었고 오직 중간 길인 밀양ㆍ대구로부터 인동(仁同)ㆍ선산(善山)이 적병의 왕래하는 길이 되었다. 《순영록(巡營錄)》 《일월록》
○ 재우는 천성이 효도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기개와 도량이 크고 심원(深遠)하며, 호걸스럽고 의협심이 있어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용맹은 삼군의 위세를 압도할 만하였다. 소년 때 조식(曹植)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조식이 자기의 외손녀를 재우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명신록》 《조야첨재》
○ 적이 물러가니 재우가 말하기를,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쥐를 잡기 위해서이다. 이제 적이 이미 평정되어 나의 할 일이 없으니 가는 것일 옳다.” 하고 드디어 신선되는 술법을 배워 산중에 들어가 곡기를 끊었는데, 어떤 때는 해[年]가 넘도록 먹지 않아도 몸이 가볍고 건강하였다. 오직 날마다 조그맣게 뭉친 송화(松花)가루 한 조각을 먹을 뿐이었다. 《지봉유설》 《명신록》 《소대기문》
그는 일찌기 이름이 높았는데 또 유달리 특별한 공로를 이루었으므로 조정에서 은밀히 중사(내시)를 파견하여 순검한다 칭탁하고 그의 집에 들어가 그의 동정을 살피니, 재우가 스스로 의심스럽게 생각하였으며, 또 김덕령(金德齡)의 죽음을 보고는 일할 수 없는 때임을 알고 드디어 신선 되는 도를 배우고 도가(道家)에 종적을 의탁하였다고 한다. 《일월록》
○ 계사년 8월에 통정대부에 승진되어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임명되고, 갑오년 8월에 진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며, 병신년 겨울에는 판결사(判決事)로서 경상방어사에 임명되었다. 병사ㆍ통제사ㆍ함경감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좌윤(左尹)에 이르렀다. 자세한 것은 다음에 있는 경자년의 상소 아래에 적었다. 매번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 이호민(李好閔)이 시를 지어 보냈는데,

듣건대 홍의장군은 / 聞道紅衣將
왜놈들을 노루 쫓듯하였다네 / 逐倭如逐獐
권하노니 끝까지 힘을 다하여 / 爲言終戮力
모름지기 곽분양(郭汾陽)과 같이 되소서 / 須似郭汾陽

하였다. 《명신록》
○ 처음에는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서 솔잎을 씹으며 곡식을 안 먹더니, 광해조(光海朝) 때 역적(逆賊)의 공사(供辭)에 걸려들었다가 석방되어 돌아오자, 취산(鷲山 설산(雪山)) 창암(滄巖)에 가서 거처할 곳을 정하고, 정자 이름을 ‘망우(忘憂)’라 하고 영원히 속세와의 인연을 끊어버렸다.일찌기 광해 때 선산(善山)사람 박수홍(朴守弘) 승지(承旨) 이 과거보러 가다가 지나는 길에 찾았더니 재우가 말하기를, “이런 때 과거(科擧)는 보아서 무엇 하려는가?” 하고 곧 술을 가져다 4, 5잔 마시더니 조금 뒤에 말하기를, “술을 마셨더니 괴로워서 기분이 심히 편하지 못하다.” 하고는 그릇을 가져오게 하여 귀를 기울여 쏟으니 술이 귓구멍으로부터 모두 나와 버렸다고 한다. 《명신록》
○ 정사년 6월에 하늘이 갑자기 크게 천둥을 하고 비가 내려 그 집이 진동하더니 재우가 이미 죽었는데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으니, 나이 66세였다.
○ 곽월(郭越)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재우는 셋째였다. 월은 병이 위독하게 되었을 때 관복(官服)을 재우에게 주며 말하기를, “가업을 이을 자는 반드시 너다.” 하였다.
○ 정유년 가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하여 왔다. 재우가 방어사로서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면서 사수할 뜻을 보이니 온 군중이 벌벌 떨었다. 적병이 이미 성에 다가왔는데도 재우는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하고, 다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며 말하기를, “제놈들도 병법을 알테니 어찌 경솔하게 덤벼들기를 좋아하겠는가.” 하더니 과연 1주야를 지나자 적이 싸우지 아니하고 강을 건너갔다. 적이 황석(黃石)을 무찌르고 남원(南原)을 함락시켜 각 진이 모두 무너지니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공에게 군사를 철수시킬 것을 명령하니, 공이 사람을 달려 보내 보고하기를 “제(齊) 나라의 72성(城) 중에 즉묵성(卽墨城)만은 홀로 보전되었으며, 당(唐) 나라의 군사가 백만 명이었으나 안시성(安市城)은 능히 당해내었는데 비록 모든 성이 격파되었더라도 홀로 지켜 내지 못할 것입니까.” 하였다. 그때 공의 계모 허씨(許氏)가 성중에서 병으로 죽으니 공은 상주로서 성을 나와 울진(蔚珍)에 들어가 상주노릇을 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자질(子姪)들과 함께 패랭이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었다. 여러 번 기복출사(起復出仕)할 것을 명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아니하였다. 《명신록》
○ 찰리사(察理使)로서 남방 변경을 살펴보고 또 울주(蔚州 울산(蔚山)) 방어사(防禦使)로 가서, “도산성(島山城)은 반드시 군사를 두어 수비할 곳이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아니하자 공은 항의하는 소장(疏章)을 올리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대관(臺官) 홍여순(洪汝諄)이 공을 거만하다고 탄핵하여 드디어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놓여나와 도로 비슬산(琵瑟山)으로 들어갔다.
○ 경자년 2월에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곽재우가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의 지극히 어리석은 소견으로 오늘날 나라의 형세를 살펴본다면 매우 위태롭습니다. 종묘와 사직은 차가운 재[灰]로 되어 버리고 백성은 죽고 없어져 열에 한두 명 안 남았습니다. 이런 때에는 대개 중흥의 사업을 재건하는 일 또한 어려운 것이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뉘우치고 깨닫고 분발하시어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여 중흥을 도모하신다면 신도 또한 마땅히 마음을 같이 하고, 있는 힘을 다 바치어 중흥의 일을 돕겠습니다.그러나 조정에는 동인이니, 서인이니, 남인이니, 북인이니 하는 붕당이 있어서 그 패에 들어가는 자는 끌어올리고 나가는 자는 배척하여 제 각기 사사로운 패를 만들어가지고 서로 옳다 그르다 하면서 날마다 비방하고 헐뜯기만을 일삼고 국세의 위태로움도, 민생의 이해도, 사직의 존망도 생각지 아니하니 장차 전하의 나라로 하여금 반드시 위망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제 신은 신이 물러가야 할 한두 가지를 진술하겠습니다. 안시성(安市城)이 지탱되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망하지 아니하였고 즉묵(卽墨)이 홀로 보전되었기 때문에 제(齊) 나라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지금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수군(水軍)에만 전력(專力)하고 성(城)을 지키는 일은 폐기하는 것을 성산(成算)으로 하고 있는 모양인데, 수군은 진실로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수군에만 전력한다고 해서 적병으로 하여금 육지에 내리지 못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신은 믿지 않습니다. 장차 적병이 육지에 내린 뒤에는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신이 물러가야 할 이유 중의 한 가지입니다. 송(宋) 나라가 망(亡)한 것은 ‘금(金)과 화친(和親)하자.’는 의논이 나랏일을 그르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화친을 말하는 자는 바로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같은 자입니다. 그러나 군사(軍事)상의 일에는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어서, 정백(鄭伯)은 양(羊)을 몰아 마침내 그 나라를 보전하였고, 구천(句踐)은 자신은 적(敵)의 신하가 되고 아내는 적의 첩이 되어서 마침내 패업(霸業)을 이루었으니 때에 따라 권모(權謀)로 쓰는 꾀도 진실로 버릴 수 없는 것으로서 남에게 굽히지 못하는 것은 필부(匹夫)의 용기인 것입니다. 무릇 화(和)라는 말은 한 가지이나 화를 하는 목표는 같지 않습니다. 화친을 믿고 준비를 하지 않는 자는 망하고, 화친을 말하면서 자기의 할 일을 다 하는 자는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국(敵國)에 굴레를 씌워 얽어매는 데는 화친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분한 것을 풀고 화변(禍變)을 늦추는 데도 화친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적을 게으르게 만들고 그르치도록 만들어 우리 군사를 쉬게 하고 우리 백성을 안식(安息)하게 하는 것도 화친하는 수단보다 나은 것이 못 됩니다.속으로는 결코 화친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화친하고자 한다.’ 하는 것이 무엇이 의리에 불가합니까. 지금 들으니 왜의 사자(使者)가 붙잡혀 갇혔다고 하는데 신은 이것으로 강한 왜구(倭寇)의 원한을 도발시켜 위태하고 어려운 화란을 부르게 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런데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이 신이 물러가야 할 이유 중의 둘째입니다. 어진 정승이 있다는 것은 나랏일에 관계되는 바가 심히 큰 것으로써 이원익(李元翼)은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오고, 공평하고 청렴하고 근신하는 행동이 천성에서 근본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나라를 위해서라면 태연한 모습으로 죽음에 나아갈 수 있는 나라의 운명을 맡을 중신입니다.전하께서는 이 사람을 신임하지 않으시고 친애하지도 않으시어 그로 하여금 조정에 안정하여 있을 수 없게 하시니 이것이 신이 물러가야 할 이유 중의 셋째입니다. 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세상 사람과 더불어 사귀기를 끊었더니 불행하게 왜란을 만나 은혜를 입고 감격한 나머지 변성(邊城)을 지키기를 원하여 티끌 만큼이라도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였으나 도산성을 수비하자는 어리석은 계획이 헛되게 되었으므로 다시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손을 묶고 앉았다가 적이 이르면 퇴각하는 일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되므로, 차라리 강호(江湖)에 물러가겠습니다.만약 위급한 변란을 만나게 된다면 감히 목숨을 아껴 구차스럽게 살지는 않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진영(鎭營)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니 명령을 내려 서울의 옥으로 잡아왔다가 영암(靈巖)으로 귀양 보냈다. 1년 만에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때로부터 길이 속세와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곡식을 먹지 않고 도인법(導引法)을 행하였다. 여러 번 함경ㆍ전라 감사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방장산(方丈山)의 솔잎이 시퍼렇게 무성하여 다함이 없으니 이것으로써 생(生)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인ㆍ무신년 사이에 누차 나랏일로 소를 올렸으며,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어떤 때는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양하기도 하였다. 《일월록》
○ 공(公)은 가야산(伽倻山)ㆍ방장산(方丈山) 등의 산중에 들어가 10여 년간을 한 낱의 쌀도 먹지 않았다. 누가 억지로 권하면 잠깐 숟가락을 대기는 하였으나 곧 귀와 코로 토해 버렸다.


 

[주D-001]제(齊) 나라의 …… 보전되었으며 : 연(燕) 나라가 제(齊) 나라를 쳐서 점령하였을 대 72성 중에 오직 즉묵성(卽墨城)만이 보전되었음을 말한다.
[주D-002]정백(鄭伯)은 양(羊)을 몰아 : 춘추(春秋) 때에 초(楚) 나라가 정(鄭) 나라를 쳐서 항복을 받았는데, 정백(鄭伯)이 죄인의 복색(服色)으로 양을 몰고 (천한 사람이란 표시) 초왕을 영접하였더니 초왕이 그 나라를 다시 복구시켜 주었다.
[주D-003]구천(句踐)은 …… 이루었으니 :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 나라에 패하여 강화(講和)를 청하기를, “남자는 신하가 되고 여자는 첩이 되겠다.” 고 하였다가 뒤에 국력을 길러서 마침내 오 나라를 멸하고 패업(覇業)을 이룩하였다.
[주D-004]도인법(導引法) : 신선(神仙)이 되고 오래 사는 양생(養生)법 중의 하나로, 신체의 운동과 호흡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