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관련/조선시대 명신록

조선 문형록 (펌)

아베베1 2009. 11. 1. 16:11

조선조 문형록

                             조선조 문형록

왕조

성   명

본관

관  직

아 호

시호

태조

권 근(權 近)

안동

대제학

양촌(陽村)

文忠

태종

변계량(卞季良)

밀양

대제학

춘정(春亭)

文肅

세종

윤 회(尹 淮) 

권 제(權  踶)

 정인지(鄭麟趾) 

안 지(安 止)

무송 

 안동 

 하동 

강진

 찬  성 

 대제학 

영의정 

영중추

 청향당 

지재(止齋)  

 학역재 

고은(皐隱)

文度 

文景 

文成 

文靖

세조

 신숙주(申叔舟) 

최 항(崔 恒)

 고령 

삭녕

 영의정 

영의정

 보한재 

태허정

文忠 

文靖

예종 

서거정(徐居正)

달성

대제학

사가정

文忠

성종

 어세겸(魚世謙) 

홍귀달(洪貴達)

 함종 

부계

 좌의정 

이 판

 서천(西川) 

허백정

文貞 

文匡

연산

 성 현(成 俔) 

김 감(金 勘)

 창녕 

연안

 예 판 

대제학

 용재(慵齋) 

선동(仙洞)

文戴 

文敬

중종

 신용개(申用漑) 

 남 곤(南 袞) 

 이 행(李 荇) 

 김안로(金安老) 

 성세창(成世昌) 

 소세양(蘇世讓) 

김안국(金安國)

 고령 

 의령 

 덕수 

 연안 

 창녕 

 진주 

의성

 영의정 

 영의정 

 좌의정 

 영의정 

 좌의정 

찬 성 

찬 성

이락정  

 지정(止亭) 

 용재(容齋) 

희락당  

 돈재(遯齋) 

 양곡(陽谷) 

모재(慕齋)

文景 

文敬 

文獻 

文莊 

文靖 

文敬 

 

인종

신광한(申光漢)

고령

형 판

기재(企齋)

文簡

명종

 정사룡(鄭士龍) 

 홍 섬(洪 暹) 

 정유길(鄭惟吉) 

박충원(朴忠元)

 동래 

 남양 

 동래 

밀양

 판중추 

 영의정 

 좌의정 

이 판

 호음(湖陰) 

 인재(忍齋) 

 임당(林塘) 

낙촌(駱村)

-  

景憲 

-  

文景

선조

 박 순(朴 淳) 

 이 황(李 滉) 

 이 이(李 珥) 

 이산해(李山海) 

 류성룡(柳成龍) 

 이양원(李陽元) 

 황정욱(黃廷彧) 

 이덕형(李德馨) 

 홍성민(洪聖民) 

 윤근수(尹根壽) 

 이항복(李恒福) 

 심희수(沈喜壽) 

 이정구(李廷龜) 

 노수신(盧守愼) 

 김귀영(金貴榮) 

 류 근(柳 根) 

이호민(李好閔)

 충주 

 진보 

 덕수 

 한산 

 풍산 

 전주 

 장수 

 광주 

 남양 

 해평 

 경주 

 청송 

 연안 

 광주 

 상주 

 진주 

연안

 영의정 

 찬 성 

 찬 성 

 영의정 

 우의정 

 영의정 

 판 서 

 영의정 

 판 서 

 좌찬성 

 좌의정 

 좌의정 

 좌의정 

 영의정 

 우의정 

 좌찬성 

예 판

 사암(思庵) 

 퇴계(退溪) 

 율곡(栗谷) 

 아계(鵝溪) 

 서애(西崖) 

 노저(鷺渚) 

 지천(芝川) 

 한음(漢陰) 

 졸옹(拙翁) 

 월정(月汀) 

 백사(白沙) 

 일송(一松) 

 월사(月沙) 

 소재(蘇齋) 

 동원(東園) 

 서경(西坰) 

오봉(五峯)

文忠 

文純 

文成 

-  

文忠 

文憲 

文貞 

文貞 

文翼 

文貞 

文忠 

文貞 

文忠 

文簡 

-  

文靖 

文僖

광해

이이첨(李爾瞻)

광주

예 판

관송(觀松)

-

        

왕조

성  명

본관

관  직

아 호

시호

인조

신  흠(申 欽)

김  유(金 瑬)

장  유(張 維)

 정경세(鄭經世)  

 최명길(崔鳴吉)  

 홍서봉(洪瑞鳳)  

 김상헌(金尙憲) 

 평산  

 순천  

 덕수  

 진주  

 전주  

 남양  

안동

 영의정  

 영의정  

 우의정  

 대제학  

 영의정  

 영의정  

좌의정

 상촌(象村) 

 북저(北渚) 

 계곡(谿谷) 

 우복(愚伏) 

 지천(遲川) 

 학곡(鶴谷)  

청음(淸陰)

文貞 

文忠 

文忠 

文莊 

文忠 

文靖 

文正

 이경석(李景奭)  

 이 식(李 植)  

 이명한(李明漢)  

 정홍명(鄭弘溟)  

조 경(趙 絅)

 전주  

 덕수  

 연안  

 연일  

한양

 영의정  

 이 판  

 대제학  

 대사헌  

판중추

 백헌(白軒) 

 택당(澤堂) 

 백주(白洲) 

 기암(畸庵) 

용주(龍洲)

文忠 

文靖 

文靖 

文貞 

文簡

효종

 조석윤(趙錫胤)  

 윤순지(尹順之)  

 채유후(蔡裕後)  

 김익희(金益熙)  

이일상(李一相)

 배천  

 해평  

 평강  

 광산  

연안

 대사헌  

 판중추  

 이 판  

 이 판  

판 서

 낙정(樂靜) 

 행명(涬溟) 

 호주(湖洲) 

 창주(滄洲) 

청호(靑湖)

文孝 

-   

文惠 

文貞 

文肅

현종

 김수항(金壽恒)  

 조복양(趙復陽)  

김만기(金萬基)

 안동  

 풍양  

광산

 영의정  

 이 판  

영돈령

 문곡(文谷) 

 송곡(松谷) 

서석(瑞石)

文忠 

文簡 

文忠

숙종

 이단하(李端夏)  

 김석주(金錫胄)  

 민 점(閔 點)  

 남구만(南九萬)  

 이민서(李敏叙)  

 김만중(金萬重)  

 남용익(南龍翼)  

 민 암(閔 黯)  

 권 유(權 愈)  

 박태상(朴泰尙)  

 최석정(崔錫鼎)  

 최규서(崔奎瑞)  

 오도일(吳道一)  

 이 여(李 畬)  

 서종태(徐宗泰)  

 송상기(宋相琦)  

 김창협(金昌協)  

 이인엽(李寅燁)  

 강 현(姜 鋧)  

 김진규(金鎭圭)  

김 유(金 楺) 

이관명(李觀命)

 덕수  

 청풍  

 여흥  

 의령  

 전주  

 광산  

 의령  

 여흥  

 안동  

 반남  

 전주  

 해주  

 해주  

 덕수  

 달성  

 은진  

 안동  

 경주  

 진주  

 광산  

 청풍  

전주

 좌의정  

 이 판  

 찬 성  

 영의정  

 이 판  

 판 서  

 이 판  

 좌의정  

 판 서  

 참 판  

 영의정  

 영의정  

 판 서  

 영의정  

 영의정  

 판 서  

 대사성  

 대제학  

 판 서  

 좌찬성  

 참 판  

좌의정

 외재(畏齋) 

 은암(恩庵) 

 쌍오(雙梧) 

 약천(藥泉) 

 서하(西河) 

 서포(西浦) 

 호곡(壺谷) 

 차호(叉湖) 

 하계(霞溪) 

 만휴(晩休) 

 명곡(明谷) 

 간재(艮齋) 

 서파(西坡) 

 수곡(睡谷) 

 만정(晩靜) 

옥오재  

 농암(農巖) 

 회와(晦窩) 

 백각(白閣) 

 죽천(竹泉) 

 검재(儉齋) 

병산(屛山)

文忠 

文忠 

 -  

文忠 

文簡 

文孝 

文憲 

 -  

-  

文孝 

文貞 

忠貞 

 -  

文敬 

文孝 

文貞 

文簡 

 - 

文安 

文淸 

文敬 

文靖

경종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경주  

양주

 영의정  

좌의정

 운곡(雲谷) 

겸재(謙齋)

-  

文忠

 

왕조

성  명

본관

관 직

아 호

시호

영조

이 재(李 縡)  

윤 순(尹 淳)  

이의현(李宜顯) 

이진망(李眞望) 

조문명(趙文命) 

우봉  

파평  

용인  

전주 

풍양  

대제학  

이 판  

영의정  

이 판 

좌의정 

도암(陶庵)  

백하(白下)  

도산(陶山)  

도운(陶雲) 

학암(鶴巖)

文正 

 -  

文簡 

-  

文忠

영조

오 원(吳 瑗)  

이덕수(李德壽) 

조관빈(趙觀彬)  

이광덕(李匡德)  

윤봉조(尹鳳朝)  

남유용(南有容)  

김양택(金陽澤)  

정휘량(鄭翬良)  

이정보(李鼎輔)  

정 실(鄭 實)  

황경원(黃景源)  

서명응(徐命膺)  

이복원(李福源)  

이휘지(李徽之)  

이병상(李秉常)

해주  

전의 

양주  

전주  

파평  

의령  

광산  

연일  

연안  

연일  

장수  

달성  

연안  

전주  

한산

참 판 

이 판 

대제학  

참 판  

참 판  

판 서  

영의정  

좌의정  

판중추  

판 서  

판 서  

판 서  

좌의정  

우의정  

이 판

월곡(月谷)  

서당(西堂) 

회헌(晦軒)  

관양(冠陽)  

포암(圃巖)  

뇌연(雷淵)  

건암(建菴)  

남애(南崖)  

삼주(三洲)  

염재(念齋)  

강한(江漢)  

보만재  

쌍계(雙溪)  

노포(老圃)  

삼산(三山)

文貞 

文貞 

文簡 

文穆 

 - 

文淸 

文簡 

文憲 

文簡 

文靖 

文景 

文靖 

文貞 

文憲 

文淸

정조

홍낙순(洪樂純)  

김종수(金鍾秀)  

오재순(吳載純) 

풍산  

청풍  

해주 

좌의정  

우의정  

판중추 

대릉(大陵)  

몽오(夢梧)  

순암(醇庵) 

文憲 

文忠 

文靖

순조

김조순(金祖淳)  

윤행임(尹幸恁)  

이만수(李晩秀)  

서영보(徐榮輔)  

남공철(南公轍)  

심상규(沈象奎)  

김이교(金履喬)  

홍석주(洪奭周)

안동  

남원  

연안  

달성  

의령  

청송  

안동  

풍산

대제학  

이 판  

이 판  

이 판  

영의정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풍고(楓皐)  

석재(碩齋)  

극옹(屐翁)  

죽석(竹石)  

금릉(金陵)  

두실(斗室)  

죽리(竹里)  

연천(淵泉)

文忠 

文獻 

文獻 

文憲 

文獻 

文肅 

文貞 

文簡

헌종

신재식(申在植)  

조인영(趙寅永)  

조병현(趙秉鉉)

평산 

풍양 

풍양

이 판  

영의정 

판 서

취미(翠微)  

운석(雲石) 

성재(成齋)

文淸 

文忠 

-

철종

조두순(趙斗淳)  

서기순(徐箕淳)  

김병학(金炳學)  

남병철(南秉哲)

양주  

달성  

안동  

의령

영의정  

이 판  

영의정  

이 판

심암(心菴)  

매원(梅園)  

영초(穎樵)  

규재(圭齋)

文獻 

文淸 

文獻 

文貞

고종

박규수(朴珪壽)  

조성교(趙性敎)  

김상현(金尙鉉)  

민태호(閔台鎬)  

한장석(韓章錫)   김영수(金永壽)

반남  

한양  

광산  

여흥  

청주  

광산

우의정  

대제학  

이 판  

대제학  

대제학  

대제학

환재(瓛齋)  

소정(昭亭)  

경대(經臺)  

표정(杓庭)  

미산(眉山)  

하정(荷亭)

文翼 

文憲 

文憲 

文忠 

文孝 

文獻

 

                                                       합 계  133 명, 

 

광산김씨 8, 연안이씨 7, 전주이씨 7, 안동김씨 6, 달성서씨 6,

의령남씨 6, 덕수이씨 5, 등 7씨족이며, 2명 이상을 배출한 씨족은

모두 29씨족이다 

 

.

최명길 (조선 문신)  [崔鳴吉]
 
1586(선조 19)~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질을 중시하는 양명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청(淸)나라의 침입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강화를 담당했으며, 인조대 후반에 국정을 담당하면서 정치사회개혁을 추진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아버지는 영흥부사를 지낸 기남(起南)이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의 문인이다.
 1602년(선조 35)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며 16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폐모론(廢母論)의 기밀을 누설했다 하여 파직당했다. 그뒤 가평으로 내려가 조익(趙翼)·장유(張維)·이시백(李時白) 등과 교유하며 양명학 연구에 힘썼다. 1623년 김유(金瑬)·이귀(李貴)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이조참의·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620년대 중반 후금(後金)의 위협에 대해 척화론(斥和論)이 조정의 다수세력을 차지했는데 그는 이에 반대하여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는 군대를 양성하여 명(明)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주화론을 주장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고 강화를 주장하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도록 했다. 이듬해 경기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우참찬·판의금부사·이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했다.
 1636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홍익한(洪翼漢) 등의 척화론·주전론에 대해 다시금 주화론을 주장하여 청나라와 강화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항복문서를 초안했다.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영의정을 지내며 포로석방과 척화신(斥和臣)의 귀환을 교섭했으며 명나라 공격을 위한 청나라의 원병 요구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한 조선의 처지를 변명했다. 1642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앞서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이 밝혀져 그 관련자로 선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1645년 풀려나 귀국하여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그뒤 현직에서 물러나 저술에 몰두하다가 죽었다.
그는 인조대 후반에 국정을 주도하면서 양난으로 피폐해진 농촌경제와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하기 위해 양전(量田)의 실시와 부세제도 및 군제의 개혁을 주장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는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 재론되자 그 선행조건으로 호패법(號牌法)의 실시를 주장하고 호패청당상이 되어 이를 관장했다.
 한편 당시 붕당정치의 폐단이 이조낭관(吏曹郎官)의 자천권(自薦權)과 삼사(三司)의 서사법(署事法) 및 피혐(避嫌)에서 온다고 인식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낭관의 권한을 제한하며 양사에서의 쟁단을 막아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지천집〉<·지천주차 遲川奏箚〉 등이 있다. 박천의 지천사우(遲川祠宇)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최명길(崔鳴吉)

> 인물 > 조선중기 > 문신 > 최명길(崔鳴吉)
 

【성 명】 최명길(崔鳴吉)
【생몰년】 1586(선조 19)∼1647(인조 25)
【본 관】 전주(全州) 최(崔)
【자·호】 자겸(子謙), 지천(遲川), 창랑(滄浪)
【시 호】 문충(文忠)
【저서·작품】 《지천집(遲川集)》, 《경서기의(經書記疑)》, 《병자봉사(丙子封事)》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86(선조 19)∼1647(인조 2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 창랑(滄浪)으로 아버지는 영흥 부사(永興府使)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는 전주(全州) 유씨(柳氏)로 관찰사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항복(李恒福) · 신흠(申欽)의 문인이며, 선조 35년(1602) 성균관 유생이 되고, 1605년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으며, 이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 한림원에 기용되었다. 이후 전적(典籍) ·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냈으며, 1614년 폐모론(廢母論)을 누설하였다 하여 파직되어 가평(加平)에 내려가 학문을 닦았다. 특히 당시 이단시하던 양명학(陽明學) 연구에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625년 제학(副提學)이 되어 대동법(大同法) 시행의 선행조건으로 호패법(號牌法) 실시를 주장하여 호패청 당상(堂上)이 되어 이를 관장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江華)로 호종하고 강화(講和)를 주장하였으며,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우참찬(右參贊) · 호조 판서(戶曹判書)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1636년 9월 5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해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병자호란을 맞았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고, 항서(降書)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1637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심양(瀋陽)에 가서 포로의 석방과 척화신(斥和臣)의 귀환을 교섭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1643년 재차 영의정이 되었으나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었다가 1645년에 풀려나 귀국하였으며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진봉되고 어영청 제조(御營廳都提調)를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고 동기창체(董其昌體)를 잘썼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박천(博川)의 지천사(遲川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지천집(遲川集)》 · 《경서기의(經書記疑)》 · 《병자봉사(丙子封事)》 등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藥泉集, 明谷集, 昆侖集, 西溪集,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 國朝榜目, 서울六百年史 第1卷(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77)
【관련항목】 강유(姜癒) 김상헌(金尙憲) 김자점(金自點) 심광수(沈光洙) 심기원(沈器遠)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이경여(李敬輿) 이귀(李貴) 이성구(李聖求) 임한백(任翰伯) 최혜길(崔惠吉) 최후량(崔後亮) 한준겸(韓浚謙) 홍서봉(洪瑞鳳) 홍익한(洪翼漢) 홍처후(洪處厚) 김장생(金長生) 신경진(申景) 이완(李浣) 정충신(鄭忠信) 최석정(崔錫鼎) 이긍익(李肯翊)



최명길(崔鳴吉)

> 인물 > 조선중기 > 문신 > 최명길(崔鳴吉)
 

【성 명】 최명길(崔鳴吉)
【생몰년】 1586(선조 19)∼1647(인조 25)
【본 관】 전주(全州) 최(崔)
【자·호】 자겸(子謙), 지천(遲川), 창랑(滄浪)
【시 호】 문충(文忠)
【저서·작품】 《지천집(遲川集)》, 《경서기의(經書記疑)》, 《병자봉사(丙子封事)》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86(선조 19)∼1647(인조 2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 창랑(滄浪)으로 아버지는 영흥 부사(永興府使)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는 전주(全州) 유씨(柳氏)로 관찰사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항복(李恒福) · 신흠(申欽)의 문인이며, 선조 35년(1602) 성균관 유생이 되고, 1605년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으며, 이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 한림원에 기용되었다. 이후 전적(典籍) ·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냈으며, 1614년 폐모론(廢母論)을 누설하였다 하여 파직되어 가평(加平)에 내려가 학문을 닦았다. 특히 당시 이단시하던 양명학(陽明學) 연구에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625년 제학(副提學)이 되어 대동법(大同法) 시행의 선행조건으로 호패법(號牌法) 실시를 주장하여 호패청 당상(堂上)이 되어 이를 관장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江華)로 호종하고 강화(講和)를 주장하였으며,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우참찬(右參贊) · 호조 판서(戶曹判書)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1636년 9월 5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해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병자호란을 맞았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고, 항서(降書)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1637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심양(瀋陽)에 가서 포로의 석방과 척화신(斥和臣)의 귀환을 교섭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1643년 재차 영의정이 되었으나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었다가 1645년에 풀려나 귀국하였으며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진봉되고 어영청 제조(御營廳都提調)를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고 동기창체(董其昌體)를 잘썼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박천(博川)의 지천사(遲川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지천집(遲川集)》 · 《경서기의(經書記疑)》 · 《병자봉사(丙子封事)》 등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藥泉集, 明谷集, 昆侖集, 西溪集,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 國朝榜目, 서울六百年史 第1卷(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77)
【관련항목】 강유(姜癒) 김상헌(金尙憲) 김자점(金自點) 심광수(沈光洙) 심기원(沈器遠)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이경여(李敬輿) 이귀(李貴) 이성구(李聖求) 임한백(任翰伯) 최혜길(崔惠吉) 최후량(崔後亮) 한준겸(韓浚謙) 홍서봉(洪瑞鳳) 홍익한(洪翼漢) 홍처후(洪處厚) 김장생(金長生) 신경진(申景) 이완(李浣) 정충신(鄭忠信) 최석정(崔錫鼎) 이긍익(李肯翊)


 


 

【성 명】 최석정(崔錫鼎)/최석만(崔錫萬)
【생몰년】 1646(인조 24)∼1715(숙종 41)
【본 관】 전주(全州) 최(崔)
【자·호】 여시(汝時), 여화(汝和), 명곡(明谷), 존와(存窩)
【시 호】 문정(文貞)
【저서·작품】《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 《명곡집(明谷集)》, 《좌씨집선(左氏輯選)》, 《운회전요(韻會箋要)》, 《전록통고(典錄通考)》, 〈영상유상운묘갈(領相柳尙運墓碣)〉(글씨), 〈영상최명길비(領相崔鳴吉碑)〉(글씨), 〈형판장운익비(刑判張雲翼碑)〉(글씨), 〈형판김우석비(刑判金禹錫碑)〉(글씨), 〈예판조형비(禮判趙珩碑)〉(글씨)
【시 대】 조선 후기 】 문신

1646(인조 24)∼1715(숙종 41).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初名)은 최석만(崔錫萬), 자는 여시(汝時) 또는 여화(汝和), 호는 명곡(明谷) 또는 존와(存窩)로서 한성부 좌윤 최후량(崔後亮)의 아들이다. 응교(應敎)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남구만(南九萬) · 박세채(朴世采)의 문인(門人)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현종 7년(1666)에 진사(進士)가 되고 1671년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 설서(說書) · 봉교(奉敎) · 교리(校理) 등을 역임했다.
숙종 11년(1685) 부제학으로 소론인 윤증(尹拯)을 신구(伸救)하고 영의정(領議政)인 노론(老論) 김수항(金壽恒)을 논척(論斥)하다가 한때 파직되었으나 논척당한 김수항의 요청에 의하여 곧 부제학으로 복귀했다. 이어 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다시 부제학으로 있을 때 현종 때 이민철(李敏哲)이 만든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璿璣玉衡)의 개수(改修)를 청하여 이듬해에 이를 수리하여 희정당(熙政堂) 남쪽인 제정각(齊政閣)에 두게 했다. 이어 도승지 · 대사성을 거쳐 다시 부제학이 되었을 때 숙종에게 단잠(短箴) 6편(篇)을 올려 왕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下賜)받는 등 남인(南人) · 서인(西人) · 노론(老論) · 소론(少論)의 다툼 속에서도 국왕의 신임을 잃지 않았다. 1688년에는 그의 스승 박세채(朴世采)가 소차(疏箚)문제로 파직되자 그도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복귀하고 홍문관 제학 · 부수찬 · 안동 부사(安東府使) · 부호군(副護軍) ·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696년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특서되었으며 뒤이어 대사헌(大司憲) ·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1687년에는 우의정(右議政)으로 상직(相職)에 승임되고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 왔다.
1699년에는 좌의정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하여 정병(政柄)과 문형(文衡)을 장악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속편(續編)과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증보(增補)를 청하여 이루게 했다. 이듬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전임되었다가 1701년 장희빈(張禧嬪)의 처형에 반대하여 진천(鎭川)으로 부처(付剔8되었다. 이듬해 풀려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했다. 이후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정국을 주도했으며 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이 심했으나 전후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숙종 36년(1710) 영의정으로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하다 왕의 병환 때 시약(侍藥)을 잘못한 책임으로 삭직(削職)되었으나 이듬해 복관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재임중에 사망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조부 최명길(崔鳴吉)의 학문을 계승하고 당시 배척을 받던 양명학(陽明學)을 정제두(鄭齊斗)와 함께 발전시켜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을 저술했다.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숙종 묘정(肅宗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진천(鎭川)의 지산서원(芝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명곡집(明谷集)》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좌씨집선(左氏輯選)》 · 《운회전요(韻會箋要)》 · 《전록통고(典錄通考)》 등이 있다. 글씨로는 〈영상유상운묘갈(領相柳尙運墓碣)(양주, 楊州)〉 · 〈영상최명길비(領相崔鳴吉碑)(청주, 淸州)〉 · 〈형판장운익비(刑判張雲翼碑)(과천, 果川)〉 · 〈형판김우석비(刑判金禹錫碑)(장단, 長湍)〉 · 〈예판조형비(禮判趙珩碑)(충주, 忠州)〉 등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昆倫集, 國朝人物志, 朝鮮金石總覽
【관련항목】 김덕기(金德基) 김보택(金普澤) 김주신(金柱臣) 박사정(朴師正) 박태보(朴泰輔) 유상운(柳尙運) 이교악(李喬岳) 이만성(李晩成) 이집(李쏥) 이태좌(李台座) 정제두(鄭齊斗) 조태억(趙泰億) 박세당(朴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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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世宗朝)의 상신

이원(李原) 무신생이며, 15세에 진사가 되었다.
이원은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용헌(容軒)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고려 말 을축년에 급제하였으니, 나이가 18세였다.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 되었다. 무술년에 정승이 되어 벼슬이 좌의정 겸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헌공(襄憲公)이고, 62세에 죽었다.
○ 공은 난 지 넉 달 만에 아버지 이강(李岡) 호는 평재(平齋)니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아들이다. 이 죽고, 자부(姊夫) 권근(權近)이 가르치기를 아들과 같이 하여 학문이 날마다 진보되었다. 권근이 매양 그와 의논하였는데, 뛰어남이 짝이 없었으므로 권근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우리 장인은 영원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기해년(1419)에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에 갔을 때, 그의 풍채가 좋고 의젓하여 만인 중에서 우뚝하니, 문황제(文皇帝)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이르기를 “누런 수염 재상은 후에도 다시 오라.” 하였다. 《사가집(四佳集)》에 있는 공의 비문
○ 을사년(1425)에 명 나라 선종(宣宗)이 등극하니,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축하하였다.
○ 공을 미워하는 자가 애매한 일로 모함하였을 때에, 태종이 친히 변명하여 주었다. 태종이 돌아가신 뒤에 공을 미워하는 자가 전날의 사감을 가지고 사헌부에 사주하여 공을 죽이려 하였다. 세종은 그가 죄가 없는 줄을 아나, 사헌부의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여산(礪山)으로 귀양보냈으니, 곧 병오년(1426) 봄이었다.세종은 그의 옛 공훈을 생각하여 전과 다름없이 돌보아 주었으며, 매양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이르기를, “철성(鐵城)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되어 불러서 다시 정승을 삼으려 하였으나 그를 질투하는 자의 저해를 입었으며, 기유년(1429) 여름에 병으로 죽었다. 《사가집(四佳集)》

정탁(鄭擢)
정탁은 자는 여괴(汝魁)이며, 호는 춘곡(春谷)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개국 정사 공신(開國定社功臣)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고, 임인년(1422)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익경공(翼景公)이다.
○ 공양왕 때 병조 좌랑으로 있을 때에 김초(金貂)가 불교를 배척하다가 죄를 얻어서 장차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을 정탁이 글을 올려서 변론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면 길이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습니다.이른바 이루어 놓은 법이라는 것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지나지 않는데 불씨(佛氏)가 이에 모두 배치되니, 이것은 김초가 선왕이 세운 법을 허문 것이 아니라 곧 전하께서 스스로 허무는 것입니다.” 하였다. 대언 등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였는데, 정몽주(鄭夢周)가 글을 올려 아뢰어서 마침내 김초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유관(柳寬)
유관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처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이며, 호는 하정(夏亭)이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비서(判秘書)에 이르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형조 판서를 거쳐 갑진년(1424)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공이 죽자, 세종이 흰옷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울었다.
○ 공의 온량(溫良)하고 돈후(敦厚)한 성품은 태어날 때에 얻은 천성이었다. 공조 총랑(工曹摠郞)이 되었을 때에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이해에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운검(雲劍)의 책임을 맡아서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은 자질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풍채가 빛나 네 임금을 연달아 섬겼으되 모두 사랑을 받아서 그보다 더 사랑받은 자가 없었다. 태조가 돌아가신 뒤에는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 기축년(1409)에 길주도 안무 절제사(吉州道安撫節制使) 영길주목(領吉州牧)이 되어서 북방을 지킬 때, 야인이 침입하자 그 괴수를 죽이고 격퇴시켰으므로 그 위세가 북방에 진동하였다. 태종이 사신을 보내어 술을 내리고, 이어 그곳에 머물러 두어 교화를 펴게 하였다.
○ 공이 우의정이 되었을 때에 글을 올려서 당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태학생탄금시서(太學生彈琴詩序)>를 인용하고, 또 송 태종(宋太宗)이 대포(大酺)를 하사하던 옛일을 인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로 하여금 경치좋은 곳을 골라서 놀며 즐겨, 태평의 기상을 표현하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세종이 옳게 여겼다. 공이 나이 많아서 치사하니, 명하여 제사과(第四科)의 녹을 주어 일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청렴하고 방정하여 비록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초가집 한 간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는 후생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누구라도 와서 뵈면 고개를 끄덕일 뿐, 그들의 성명도 묻지 않았다.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때마침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설치하였으니 그 절은 성안에 있었다. 공이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편한 사모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며 수레나 말을 쓰지 않았다. 어떤 때는 어린 아이와 관자(冠者) 몇 사람을 이끌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 초가집 두어 간에 밖에는 난간도 담장도 없어,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울타리를 그의 집에 설치하여 주되 공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고, 또 어찬(御饌)을 끊이지 않게 내렸다.
○ 어느 때 장마비가 한 달 넘게 내려서 집에 새는 빗발이 삼줄기처럼 내릴 때, 공이 손에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면서 그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 하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하자, 공이 웃었다. 《필원잡기》
○ 손님을 위해서 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사발 하나로 술을 바치게 하여 각기 몇 사발을 마시고는 끝내 버렸다. 공이 비록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제자들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학도가 매우 많았다.매양 시향(時享)에는 하루 앞서 제생(諸生)을 예의를 갖추어 돌려보내고, 제삿날에는 제생을 불러 음복(飮福)을 시켰는데 소금에 저린 콩 한 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하고, 이어 질항아리에 담은 탁주를 그가 먼저 한 사발 마시고는 차례로 좌상에 한두 순배를 돌렸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공의 벼슬이 정승이 되었으나, 그의 행동은 일반 사람과 다름없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하였고,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소밭을 돌아다녔으나 괴롭게 여기지를 않았다. 《용재총화》
○ 공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평소에 한번 배운 글을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았고, 매양 밤중에 그 글을 외우며 뜻을 생각하고 항상 민생을 건질 것을 마음 먹었다.그리하여 교량(橋梁)이나 원우(院宇)를 지으려 하는 자 있으면 비록 중들에게라도 곧 돈과 베를 시주하였고, 또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였으나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남에게서 취하지는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친구 사이에는 으레 재물을 서로 나누어 쓰는 의리가 있다 하나, 아예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조연(趙涓) 갑인생
조연은 자는 여정(汝靜)이며, 처음 이름은 경(卿)이고,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한산백(漢山伯) 조인벽(趙仁璧)의 아들이고, 환조(桓祖)의 외손이다. 그는 무인이었으므로 과거에 응하지 않았는데, 13세에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졌고 병오년(1426)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시호는 양경공(良敬公)이다.
○ 공이 우상으로 있을 때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ㆍ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 등과 더불어 송사 중에 있는 노비를 받고 힘을 써서 이기게 하였더니, 사헌부에서 이를 적발하여 공 등을 모두 중도 부처(中道付處)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

황희(黃喜)
황희는 자는 구부(懼夫)이고,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였으며,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말 기사년(1389)에 급제하여 조선에 들어와 병오년(1426)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나이 여든에 치사하여 임신년(1452)에 죽으니 나이가 아흔이었다. 제사(諸司)의 이서(吏胥)와 노예들이 모두 치제하였으며 시호는 익성공(翼成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14세에 음관(蔭官)출신으로 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소년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 우보궐(拾遺右補闕)이 되었는데, 성격이 곧아서 바른 말을 과감히 하였다. 《조야첨재》
○ 고려 말에 적성훈도(積城訓導)가 되었다. 《경훈전고(警訓典故)》에 상세하다.
○ 태종조(太宗朝)에 이조 판서로서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위하는 것을 간하였더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공조 판서로 좌천시키고, 또 평안도 도순무사(平安道都巡撫使)로 내보냈다가 무술년에 양녕이 폐위되어 서인이 되자 그를 교하(交河)에 좌천시켰다. 대신과 대간들이 모두 그에게 죄를 주기를 청해 마지 않았으나,태종은 공의 생질 오치선(吳致善)을 공이 있는 교하로 보내어 이르기를, “경이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경을 공신으로 대우하여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신과 대간들이 경에게 죄 주기를 청해 마지 않으니, 양경(兩京 개성 서울) 사이에는 둘 수 없다. 경의 본관(장수(長水))에 가까운 남원(南原)으로 옮기게 할 것이니 경은 어머니를 모시고 편하게 같이 가라.” 하였고,또 사헌부에 명하여, “그가 갈 때에 관리가 압송하지 말라.” 하였다. 오치선이 복명(復命)하자, 태종이 묻기를, “황희가 무어라 하던고.” 하니, 치선이 아뢰기를, “‘살과 뼈는 부모께서 주신 것이지만, 의식이나 쓰는 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였으니, 신이 어찌 은덕을 배반하겠습니까. 실로 다른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고는 울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하였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이 명하여 공을 불렀다. 공이 이르러 통이 높은 갓을 쓰고 푸른 색 거친 베로 만든 단령(團領)을 입고 남색 조알[條兒]을 띠고 승정원에 들어왔는데, 막 시골에서 왔으므로 몸체만 큼직할 따름이어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상왕이 세종에게 이르기를, “황희의 전날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니, 이 사람을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고는 곧 예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그는 마음이 넓고 모가 나지 않았으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한결같이 예의로써 대하고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계묘년(1423)에 강원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세종이 걱정하여 특별히 공을 관찰사로 삼았는데, 정성을 다하여 구제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다. 세종이 크게 가상이 여겨서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제수하고, 을사년(1425)에는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직시켜 소환하였다. 《조야첨재》에는 이르기를, “공이 돌아온 뒤에 관동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울진(蔚珍)에서 그가 행차를 멈추었던 곳에다 대를 쌓고 소공대(召公臺)라 이름하였으며,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하였다.
○ 공이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이다. 때마침 나라에 일이 있어 공을 기복(起復)시키니,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좌상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또 기복시키니,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곧 나와 일을 보았다. 《조야첨재》 《동각잡기》에 이르기를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몇 개월이 지난 뒤에 기복되었다.” 하였다.
○ 그때에 세자가 장차 명 나라로 떠날때 공으로 수행하게 하니, 공은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명 나라에서 칙서(勅書)를 보내어 세자는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다 하니, 그는 또 글을 올리기를, “세자께서 이미 명 나라에 조회하지 않기로 되었고, 또 국가에 일이 없으니 삼년상을 마치게 해 주소서.” 하였다.세종은, “대신을 기복하는 것은 선왕 때에 이미 이룩된 법이다.” 하여 윤허하지 않고, 이어 글을 내리기를, “옛날에는 나이가 60이 되면 비록 상복을 입었어도 고기를 먹는 법인데, 이제 황희는 이미 기복도 하였으려니와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어찌 소찬을 하면서 일을 보리요. 정원에서 그를 불러 고기 먹기를 권고하라.” 하였다.
그가 빈청(賓廳)에 나아갔더니 지신사 정흠지(鄭欽之)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고기 먹기를 권하였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마침 병이 없으니 어찌 감히 고기를 먹겠습니까. 청컨대, 이 뜻을 잘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흠지가 감히 그렇게 아뢸 수 없다 하니, 공이 그제서야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었다. 《동각잡기》
○ 공이 정승이 되었을 때 김종서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일찍이 공처(公處)에 모였을 때에 종서가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주과(酒果)를 갖추어 드렸더니,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정부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접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시장하다면 의당 예빈시로 하여금 장만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인가.” 하고는, 종서를 앞에 불러 놓고 준절히 꾸짖었다.
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이 일을 경연에서 아뢰고, “대신이란 마땅히 이러해야 조정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그때에 김종서가 여러 차례 병조ㆍ호조의 판서가 되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한 것이 있을 때마다 공이 박절할 정도로 꾸지람을 하되 혹은 본인 대신 종을 매질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사(丘史)를 가두기도 하였다. 동렬(同列)들이 모두 지나친 일이라 하고 종서 역시 매우 고달펐다. 어느날 맹사성(孟思誠)이 묻기를, “김종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인데 대감은 어찌 그렇게도 허물을 잡으시오.” 하였더니,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곧 내가 종서를 아껴서 인물을 만들려는 거요.종서의 성격이 고항(高亢)하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하니 뒷날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되어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는다면 일을 허물어뜨릴 염려가 있으니,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가다듬고 무게있게 하여 혹시 일을 당해서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에게 곤란을 주려 함이 아니오.” 하니, 사성이 그제야 심복하였다. 그뒤에 공이 물러가기를 청할 때 종서를 추천하여 자기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식소록(識少錄)》
○ 형조 판서 서선(徐選)의 아우 서달(徐達)은 공의 사위이다. 서달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는데, 공과 우상 맹사성 역시 이 일에 관련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튿날 보석되어 다만 파직되었으나 후임을 내지 않았다가 열흘이 지나자 복직을 시켰다.
○ 공이 좌상이 되었을 때에 사헌부에서 공이 감목(監牧) 태석구(太石鉤)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대관(臺官) 이심(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청탁하였다 하여, 파면시켜서 앞으로 청탁을 받고 법을 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이란 가벼이 죄를 줄 수 없다.” 하다가, 뒤에는 사헌부의 청을 윤허하여 그를 파면시켰다.그러나 후임을 내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다시 복직시켰다. 사간원에서 소를 올리기를, “황희는 일찍이 의정(議政)이 되어 대체를 돌보지 않고 친한 자를 사사로이 돌봐주기 위하여 사헌부에 청탁하였으니, 다만 그 직만 파면하였음은 황희로 보아서는 큰 다행입니다. 또 교하(交河)의 둔전을 이양받으려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직부(織婦)를 내쫓고 집안에 심은 채소를 뽑아버렸던 일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런 지 한 해가 채 못되어 갑자기 백관의 수반(首班)에 제수하자, 임명을 받아 엄연히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여 이르기를, “모든 일에 대하여 시비를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국정을 맡은 대신을 너희들의 말을 듣고서 가벼이 거절할 수 없다.” 하였다.
○ 그때에 사간원에서 논박하기를, “영의정 황희가 교하수(交河守)에게 둔전을 청하여 사사로이 농장을 삼으려 하였으니, 백관의 수반인 정승의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안숭선(安崇善)에게 이르기를, “황희는 국정을 맡은 대신이고,또 태종께서 신임하시던 사람이니, 내 어찌 경솔히 끊어 버리겠는가.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양녕(讓寧)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 종수(宗秀)의 무리가 그에게 아부하여 많이들 불의를 행해서 양녕으로 하여금 도리어 어긋나게 하였을 때에,황희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리하였으면 좋을까 하였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리고 또 그의 과실이란 사냥을 좋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당시에는 황희가 중립하여 사태를 관망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 생각하니, 황희는 실로 죄가 없다.’ 하시고, 또 사단(史丹)의 일을 인용하여 해명해 주시면서, 이내 눈물지으며 말씀하던 것이 아직도 내 귀에 남아 있으니, 내 이제 어찌 함부로 신진 간신(新進諫臣)의 말을 들어서 그를 끊어 버리겠는가.” 하였다. 《국조보감》
○ 태학(太學) 유생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면박하기를, “네가 정승이 되어 일찍이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냐.” 하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공이 상부(相府)에 있은 지 27년이나 되어, 조종(祖宗)때에 이미 이룩된 법을 힘써 따르고, 변경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이치에 따라서 하고 규모는 원대하였으며,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량이 있어서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태종으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신임이 매우 두터워,세종이 매양 황희의 견식과 도량이 크고 깊어서 큰 일을 잘 판단한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점치는 시구(蓍龜)와 물건의 중량을 다는 권형(權衡)에 견주었다. 더러 옛 제도를 변경하려고 의논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신이 변통하는 재능이 부족하니, 무릇 제도의 변경에 있어서는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평시에는 의논을 너그럽게 하였으나, 큰 일을 당해서는 맞대고 그 자리에서 시비를 가려 의연(毅然)히 굽히지 않았다.
나이 팔십에 비로소 치사를 허락하였고,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 반드시 근시(近侍)로 하여금 공에게 나아가 자문한 뒤에 결정하였다. 나이가 구십이 되어서도 총명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서, 조정의 전장(典章)이나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대해 마치 촛불로 비추는 듯이 산 가지로 세는 듯이 하여, 비록 기억 잘하는 장년도 감히 따르지 못하였다.우리 조선의 어진 정승을 논할 때는 반드시 공을 제일로 삼았으며, 공의 훈업(勳業)이나 덕량을 송 나라의 왕문정(王文正)과 한충헌(韓忠獻)에 견주었었다. <묘비(墓碑)>
○ 공은 평시에 거처가 담박하였고, 비록 아손(兒孫)과 동복들이 앞에서 울부짖고 희롱하여도 조금도 꾸지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수염을 뽑는가 하면 뺨을 치는 놈까지 있어도 역시 제멋대로 하게 두었다. 일찍이 아래에 있는 신료들과 함께 일을 의논할 때, 바야흐로 붓을 풀어 글을 쓰려 하는데 종의 아이가 종이 위에 오줌을 싸도 그는 아무런 노여워하는 빛이 없이 다만 손으로 훔쳤을 뿐이었다.
공이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7년 동안을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찾아오는 손님도 맞이하지 않고 다만 운서(韻書) 한 질을 갖고 거기에만 눈을 대고 있었을 따름이더니, 그뒤 비록 나이가 많아서도 글자의 획이나 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백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었다. 《필원잡기》
○ 공은 나이가 많고 벼슬이 무거워질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가 구십여 세나 되었는데도, 늘 고요한 방에 앉아서 종일토록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글을 읽을 따름이었다. 창 밖에 늦복숭아가 무르익어서 이웃 아이들이 다 따는데, 공은 나직한 소리로,“다 따먹지 말아라. 나도 좀 맛보자.” 하고 조금 있다가 나가서 보니, 나무에 가득하던 열매가 다 없어졌다. 매양 아침 저녁으로 밥먹을 때에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그가 밥을 덜어서 주면 지껄이며 먹기를 다투곤 하였는데 공은 다만 웃을 뿐이었다. 《용재총화》
○ 공은 기쁨이나 노여움을 일찍이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종들을 은혜로 대우하여 일찍이 매를 대지 않았으며, 그가 사랑하는 여종이 작은 종과 희롱하기를 지나치게 하였으나 공은 볼 때마다 웃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노예도 역시 하늘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오.” 하고는,그 뜻으로 훈계하는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전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어느날 홀로 동산을 거닐 때, 이웃에 살고 있는 버릇없는 젊은이가 돌을 던지니, 무르익은 배가 돌에 맞아 땅에 가득 떨어졌다. 그가 큰 소리로 시동(侍童)을 부르자, 그 젊은이가 놀라 달아나 숨어서 가만히 들어본 즉, 시동을 시켜 그릇을 갖고 오게 하여 배를 담아서 그 젊은이에게 주되,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언 이석형(李石亨)이 뵈러 갔더니, 그가 《강목(綱目)》과 《통감(通鑑)》을 내어서 책 표지에 제목을 쓰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추하게 생긴 여종 한 사람이 약간의 안주를 갖고 공의 의자에 기대고 서서 이석형을 내려다 보며 공에게 묻기를, “곧 술을 올릴까요.” 하니, 공은 조용히 “조금 있다가.” 하였다.여종이 한참 기다리다가 고함을 치면서, “어쩌면 그리도 꾸물거리누.” 하니, 공은 웃으면서, “그럼 드려오렴.” 하였다. 술상을 들에오니, 아이들이 모두 남루한 차림에다 맨발로 들어와서 혹은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더러는 공의 옷을 밟고 안주를 다 집어 먹고 공을 두들기곤 하였는데 공은 “아야 아야” 하였다. 그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자식들이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그의 정자인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 하류에 있었다. 파주읍(坡州邑) 서편 15리에 있다. 자손이 그곳에 집을 짓고 이내 반구라 이름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맹사성(孟思誠)

맹사성은 자는 성지(誠之)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한성윤(漢城尹)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고, 최영(崔瑩)의 손자 사위이다. 고려 병인년(1386) 문과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1427)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치사하여 신해년(1431)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의 아버지 희도는 전교부령(典校副令)인데 공양왕 때에 효행으로 정려(旌閭)하였다. 정계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온양 오봉산(五峯山) 밑에 살면서 호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태조 때에도 역시 정려하였다.
○ 공의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고 청백하였다. 그가 살고 거처하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매양 출입할 때에 소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고아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다. 어느날 햅쌀로 밥을 지어 드렸더니, 공이 “어디에서 쌀을 얻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이 답하기를, “녹미가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 집에서 빌렸습니다.” 하니, 공은 싫어하며 말하기를, “이미 녹을 받았으니,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빌렸소.” 하였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단정하고 후중해서 상부(相府)에 있을 때에 대체를 지녔었다. 공은 경자생이면서 장난삼아 계묘계에 들었다. 어느날 세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세종이, “공은 나이가 몇이요.” 하여,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물러나온 뒤 계묘계 중에서 동갑이 아니라 하여 제명되어 한때에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은 음률을 잘 알아서 항상 피리를 갖고 다니며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었다. 문을 닫은 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지 않다가 공무에 관한 일을 여쭈러 오는 자가 있으면 문을 열고 맞이하였는데,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 안 포단(蒲團)에 앉되,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여쭌 자가 가고 나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여쭈러 오는 자는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필원잡기》
○ 공은 온양에 근친(覲親)하러 오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를 차렸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공이 하인더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이름하였다.
○ 공의 집이 매우 협착하였기 때문에, 병조 판서가 일을 여쭈러 찾아 갔다가 마침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었다. 병조 판서가 집에 돌아와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 하고는, 마침내 짓던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였다.
○ 공이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공은 한쪽 모퉁이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 의정부 녹사(錄事) 취재(取才)에 응하러 상경하는 자였다.공을 보고 불러서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공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가는공.” 하였더니, 그가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공이 묻기를 “무슨 벼슬인공.” 하니, 그가 “녹사 취재란당.” 하였다. 공이 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 하니, 그 사람은 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 하였다.뒷날 공이 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차 들어와 뵈었다. 공이 이르기를,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그 까닭을 얘기하니,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는데, 그는 공의 추천을 입어서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내게 되었다. 후인들이 이를 일러, ‘공당 문답’ 이라 하였다.


권진(權軫)

권진은 자는 희정(希正)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신해년(1431)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을묘년(1435)에 죽었는데, 나이가 일흔 아홉이었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공이 다스린 고을마다 좋은 성적을 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합주(陜州) 원으로 나갔다가, 정종(定宗) 경진년(1400)에 조박(趙璞)의 옥사에 연루되어 영해(寧海) 축산도(丑山島)에 귀양살이 갔는데 얼마 안되어 사면되어 돌아왔다.


최윤덕(崔潤德) 《해동잡록(海東雜錄)》에, ‘공의 자는 백수(伯修)요, 본관은 통천(通川)이며 양장공(襄莊公) 운해(雲海)의 아들이다.’ 하였다.

최윤덕은, 자는 여화(汝和)이며, 본관은 흡곡(歙谷)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인년(1434)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국초의 명장이었다. 그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운해는 변방을 지키느라고 《명신록(名臣錄)》에 이르기를, “공의 아버지가 합포(合浦)를 지켰다.” 하였다.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같은 이웃에 살고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맡겨져서 자라났다. 점차 자라서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센 활을 잘 쏘았는데, 때로는 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많이 잡기도 하였다. 어느날 산중에서 마소[馬牛]를 먹이다가,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뛰어나오자 마소들이 흩어졌다. 공이 말을 타고 화살 하나로 범을 쏘아 죽이고는 돌아와 수척에게 이르기를, “아롱진 무늬를 가진 큼직한 것이 무슨 짐승인지 나오기에 내가 쏘아 죽였다.” 하여 수척이 가서 보니, 큰 호랑이었다. 수척이 윤덕을 기이하게 여겼다.
서미성(徐彌性) 거정(居正)의 아버지이다. 이 나가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수척이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기려 마지 않았더니, 미성이 이르기를, “한번 시험해 보겠다.” 하였다. 함께 사냥을 할 때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구경하는 사람이 모두 칭찬하였다.미성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 애가 비록 손이 빠르긴 하나 아직 법을 모르니, 이 애의 기술은 사냥꾼의 기술에 불과하여 옳은 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 하고는 이내 활쏘기와 말달리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필원잡기》 ○ 운해(雲海)는 벼슬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승추부사(承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장공(襄莊公)이다.
○ 태조가 해주(海州)에 거둥하여 강무(講武)할 때, 가까운 길을 취해 큰 냇물을 건너고자 하였더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먼저 물의 깊이를 알아가지고 오게 해주소서.” 하고는, 말을 타고 곧 물 속에 들어가 고삐를 잡고 목을 움추리고 거짓으로 그 몸을 기울이니 물이 안장에 미쳤다.곧 돌아와서 아뢰기를,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겠으니 전하께서 이 내를 건너시려는 것은, ‘큰길로 가고 지름길로 가지 말며, 배를 타고 가고 헤엄치지 말라.’는 옛말의 뜻과 어긋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건너는 것을 중지하였다. <행장(行狀)>
○ 과거에 태안군(泰安郡)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찼던 화살통에 쇠로 장식했던 것이 헐어 떨어지자, 공인(工人)이 관가의 쇠로 기워 고쳤는데, 곧 명하여 기웠던 쇠장식을 도로 떼어 내었으니, 그 청렴함이 이러하였다. <행장>
○ 공이 이상(貳相 의정부의 좌우찬성을 달리 이르는 말)으로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판 안주 목사(判安州牧使)를 겸임하였는데, 공무가 끝나면 공청 뒤 빈 땅을 경작하여 오이를 심고 손수 매어 가꿨다. 소송하러온 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묻기를, “대감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하자, 그가 속여 말하기를, “아무 곳에 있다.” 하고는,들어가서 옷을 바꿔 입고 판결에 임하였다. 시골에 사는 한 지어미가 울면서 이르기를, “호랑이가 제 남편을 죽였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너를 위해서 원수를 갚아 주겠다.” 하고는 범의 자취를 밟아 손수 쏘아 죽인 후 그 배를 쪼개고 뼈와 고기와 사지를 꺼내어 의복으로 싸서 관을 맞추어 매장하여 주었더니, 그 지어미가 슬피 울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모하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 《청파극담》
○ 안주(安州)를 다스릴 때에 버드나무 수만 그루를 고을 남쪽에다 심어서 고을의 터를 보호하고 수해를 막으니, 사람들이 감당(甘棠)에 비하여 감히 베지를 못하였다.
○ 살고 있는 집 남쪽에 못 두 곳을 만들어 연꽃을 그 가운데다 심고 꽃나무와 아름다운 풀을 그 곁에다 심어서, 매양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 노인들을 청해 술상을 차려 놓고 그 사이에서 담소하였으니, 산야(山野)의 취미가 있었다.


노한(盧閈) 병진생

노한은 자는 유린(有鄰)이며,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민제(閔霽)의 사위이다. 16세에 벼슬하여 을묘년(1435)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계해년(1443)에 죽었는데 나이가 68세였다.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 태종 계미년(1403)에 판합문사(判閤門事)로 하삼도(下三道)에 염문사(廉問使)로 갔는데, 때마침 바닷가에 전선(戰船)을 만들기 위한 오랫 동안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복명하는 날 소대(召對)해서, 역졸(役卒)들의 괴로운 실상을 극력 진술했다. 태종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이르기를, “진시황(秦始皇)과 수양제(隨煬帝)의 포악한 것에 비해서 어떠한가.” 하였다. 공이 갓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신이 명을 받들어서 삼도를 두루 시찰하였는데, 변방 백성의 괴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한 것입니다. 또 진시황과 수양제는 배를 만든 일은 있었으나, 어찌 백성이 곤경에 빠질 것을 걱정하여서 사신을 보내어 물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더니, 태종이 웃으면서, “경은 갓을 쓰라.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 임자년(1432)에 우찬성이 되었을 때에 명 나라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창성(昌盛)과 윤봉(尹鳳) 등이 매년 연달아 나와서 청구하고 토색함이 그지 없었는데,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문득 모욕을 주었다. 세종이 공으로 하여금 관반(館伴)을 삼았더니, 공이 얼굴을 온화하게 하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한 마디 말을 할 때에도 법도가 있었으므로, 비록 미친듯이 위세를 부리던 창성과 윤봉도 망녕되이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공의 어머니 왕씨(王氏) 부원군(府院君) 수(琇)의 딸가 나이 이미 80에 병이 있으므로 공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가 봉양하기를 힘껏 청하였다. 세종이 이르기를,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경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고, 명하여 낮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밤이면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 우의정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게 되자, 민부인(閔夫人)이 들어와 사은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나의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라, 곧 태종께서 남긴 말씀에 의한 것이요.” 하였다.


허조(許稠)

허조는 자는 중통(仲通)이며, 호는 경암(敬菴)이고, 본관은 하양(河陽)이다. 고려 말 경오년(1390)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 무오년(1438)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태종조에 공이 대간으로서 일을 논하다가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좌천되었는데, 이조 정랑의 자리가 비게 되어 태종이 관안(官案)을 검열하다가 이르기를, “이 사람이 이 직에 알맞다.” 하고는 곧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대범ㆍ엄숙ㆍ방정ㆍ공평ㆍ청렴ㆍ근신하여 매양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관디를 차리고 바로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그는 정성껏 나라의 일을 생각하여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으며,국정을 의논할 때는 홀로 자기의 신념을 지켜서 남들에게 맞추어 오르내리지 않았다. 가법(家法)이 몹시 엄하여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한 다음 벌을 내리고, 노비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은 어릴 때부터 깎은 듯이 여위어서 어깨와 등이 굽은 듯하였다. 일찍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하 관원의 복색을 마련하여 제도가 분명하였으므로, 시정의 경박한 자식들이 공을 매우 미워하여 ‘수응 재상(瘦鷹宰相)’이라 별명을 지었다. 《필원잡기》
○ 공은 마음가짐이 맑고 바르며, 집 다스림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자제를 가르치되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을까 싶어 삼가게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은 음양(陰陽 부부관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음양의 일을 몰랐다면, 저 후(詡)와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하였다. 《용재총화》 ○ 창기(娼妓)에 관한 제도를 고치지 않았음은 전고(典故)에 실렸다.
○ 공은 매양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그의 모부인(母夫人)이 손수 지은 어릴 때에 입던 푸른빛 작은 단령(團領)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치재(致齋)하였다.
그의 형 허주(許周)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서 치사하였는데, 공은 매양 정부에서 합좌(合坐)할 때마다 닭이 울면 반드시 형에게 가고, 갈 적에는 반드시 하인들을 동구에 떼어 두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허주도 역시 공이 반드시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밤마다 의관을 바로 하고 등불을 켜고 자리를 베풀어 몸을 안석에 기대고 기다렸는데,공이 오면 반드시 작은 술상을 차렸다. 공이 조용히 묻기를, “오늘 정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면, 허주는 대답하기를, “내 의견에는 마땅히 이러해야 될 것 같네.” 하였다. 공은 기뻐하여 물러나와 말하기를, “옛말에 ‘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한다.’ 하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청파극담》
허주는, 시호가 간숙(簡肅)이고, 성격이 준엄하여 가법이 있었다. 제사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다.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벌을 주었다. 일찍이 병이 들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어서 동생 허조에게 대행하도록 했더니, 전의 제도를 다소 변경하였다.허주가 이르기를, “작은 아들이 종가에서 옛 제도를 함부로 변경하였으니, 이것은 종자(宗子)를 무시한 것이다.” 하고는 노하여 보지도 않고, 또 문지기로 하여금 문에서 거절하게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새벽에 그 문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도록 들어가지 못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서야 겨우 접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공이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을 때에, 밤중에 도둑이 그 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가져 가는데, 공은 졸지도 않으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도둑이 간 지 오래 되어서 집안 사람이 비로소 이를 알고 쫓아갔으나 잡지 못하여 분통해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와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바깥 도둑을 걱정하리오.” 하였다. 《정암집(靜菴集)》 ○ 선배의 극기의 공[克己之功]이 이와 같았다.
○ 조선의 어진 정승으로 황희(黃喜)와 공을 첫째로 꼽는데, 다만 두 사람은 모두 고려조에 과거에 올랐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자는 이 때문에 그들을 부족하게 여겼다. 《병진정사록》


신개(申槩) 기해생. 경오년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신개는 자는 자격(子格)이며, 호는 인재(寅齋)이고, 또 다른 호는 양졸당(養拙堂)이다. 태조 계유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기미년(143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받고 을축년(1445)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어렸을 때부터 어른과 같았으며, 일찍이 외조모 원씨(元氏)에게서 컸다. 나이 겨우 세 살이었는데, 창벽 사이에 그림을 그리고 더럽힌 자가 있거늘 외조모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힐책하니, 아이들이 다투어 변명하였으나 공은 홀로 말하지 않고 제 키를 가리키는데, 과연 키가 그림 그린 벽에 한자 남짓 미치지 못하였다. 외조모가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반드시 이 아이가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해동잡록》
○ 평소에 말을 빠르게 하지 않았고 당황한 얼굴 빛을 짓지 않았으며, 종들에게 죄가 있어도 매를 때리지 않았다. 《해동잡록》
○ 한원(翰苑)에 있을 때에 태조가 실록을 보고자 하였는데, 공이 소를 올려서 불가함을 논하니, 태조가 그만두었다. 《사가집(四佳集)》 <묘비(墓碑)>
○ 성격이 강직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려서 대신의 잘못을 꺾었으므로 시론(時論)이 갸륵하게 여겼다. 태종이 일찍이 이르기를, “신개는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다.” 하였다. 을사년(1425)에 강음(江陰)에 좌천되었다. 《사가집》 <묘비>
○ 일찍이 언충신(言忠信)ㆍ행독경(行篤敬)ㆍ소심익익(小心翼翼)ㆍ대월상제(對越上帝) 등 열네 글자를 써서 세 아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사군자(士君子)의 마음엔 마땅히 이것으로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귀령(李貴齡) 시호는 강호(康胡)이다. 《조야기문(朝野記聞)》과 <상신고(相臣攷)>에 기록되었다. 혹은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다고 하였다.


하연(河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내외 증손(曾孫)이 백여 인이나 되었다.

하연은 자는 연량(淵亮)이며, 호는 경재(敬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ㆍ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을축년(1445)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궤장을 받고 치사하였다. 단종(端宗) 계유년(1453)에 죽으니 나이는 78세였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정유년에 동부대언(同副代言)이 되었는데, 태종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경이 이 자리에 오른 이유를 아는가.” 하자, 공이 “모릅니다.” 고 대답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전일 경이 사헌부에 있을 때 능히 헌직(憲職)을 감당했으므로, 내가 그때에 경을 알았다.” 하였다.
○ 공은 평상시에 늘 검은 사모를 썼는데, 그 뿔은 빼어 버리고 향을 태우며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읊조렸다. 공의 시는 기벽(奇僻)하여 옛시의 격조에 가깝고 필법이 굳세어 체를 얻었다. 일찍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에 시를 지어 손수 쓰니,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이 시를 지어서 하문학이 썼으니, 역시 인간 보물이다.”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일찍이 경상도의 안사(按使)가 되었을 때에 남지(南智)가 아사(亞使)가 되었는데, 공이 매우 중히 여겨 하관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일찍이 진주에 이르러 아름다운 산천의 경치를 찬탄하였으니, 공이 진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지가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하기를,“산수는 비록 아름다우나, 품관(品官)은 몹시 좋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주 출신인 하연을 가리킨 것임] 하니, 공이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공의 아량에 심복하였더니, 뒤에 공은 남지와 함께 정승에 올랐다. 《필원잡기》
○ 공은 평안하고 검소하며 강직하고 명철하며 풍채가 단아하였다. 효도를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고, 종족간에 매우 화목하였으며, 옛친구를 버리지 않고 경조사에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살이에는 힘쓰지 않고 기첩(妓妾)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관을 바로하고 대궐을 향하여 앉는데 좌우에는 도서(圖書)뿐이었다. 그에게 시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흔연히 곧 붓을 잡고 쓰니 시상(詩想)이나 필법이 늙을수록 더욱 절묘하였고, 천성이 옛 도리를 좋아하여 일마다 모두 옛사람을 자기의 목표로 삼았으며, 사대부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문에서 오래 기다리는 손님이 끊일 적이 없었다.오랫동안 이조에 있었으나 사사로운 청탁을 좋아하지 않았고, 정승이 되었을 때에는 법을 좇아 흔들리지 않고 시종 여일하게 근신하였으니, 그는 태평 시대의 문치(文治)를 이룩한 재상이었다. 또 학문이 정하고 깊고 문장이 법도 있고 우아하여 일세의 우러름을 받았다. 공이 죽은 뒤, 유명(遺命)에 따라 불사(佛事)를 짓지 않았다.
○ 공은 부모를 섬기는데 몹시 효도하였다. 두 어버이의 나이가 모두 80이었는데,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구경당(具慶堂)을 짓고 설날이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잔을 들어 수(壽)를 올리니, 사대부들이 영광으로 여겨서 시를 지어 찬송하는 이들도 있었다.구경당은 초가로 지어 해마다 새로 이엉을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영모(永慕)로 편액을 고쳤다. 자질들이 기와로 바꾸기를 청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선인(先人)이 거처하시던 곳을 어떻게 고치겠는가. 역시 그대로 두어, 후대의 사람으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함을 본받게 하여라.” 하였다.


황보인(皇甫仁)

황보인은 자는 사겸(四兼) 또는 춘경(春卿) 이며, 호는 지봉(芝峯)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묘년(1447)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문종(文宗)의 유명을 받아서 단종(端宗)을 돕다가, 계유년(1453)에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죽었는데, 숙종조(肅宗朝)에 관작이 회복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 공은 일찍이 차원부(車原頫)의 원통함을 간절히 논하느라고 사모가 거꾸로 쓰여진 줄을 몰랐더니, 원부가 그로 인하여 특별히 신설(伸雪)되었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사모를 거꾸로 쓴 시종이라 일컬었다. 《해동잡록》
○ 공의 무덤이 파주(坡州) 천참(泉站) 서편 발흥(勃興) 큰 길 가에 있었는데, 그 묘표(墓表)의 글에는 커다랗게 ‘영천 황보공지묘(永川皇甫公之墓)’ 라 새겼고, 또 작은 글씨로, ‘공 휘 인 노산조 수상 경태 계유 정난시 병 이자 일손 피화(公諱仁魯山朝首相景泰癸酉靖難時幷二子一孫被禍)’ 라는 스물 두 글자를 새겼고,또 ‘정덕 기묘 이월 입석 거 피화 위 육십 칠년(正德己卯二月立石距被禍爲六十七年)’ 이라 새겼는데, 수장(收葬)한 이나 그 무덤에 표석을 세운 이의 이름은 모두 나타내지 않았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남지(南智)

남지는 자는 지숙(智叔)이며, 본관은 의녕(宜寧)이고, 영상 남재(南在)의 손자이다. 음사로서, 기사년(144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 공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담력과 뜻이 있었다. 사헌부 지평이 되었을 때에, 도승지 조서로(趙瑞老)가 간음을 하였다는 비방이 있었으나 감히 먼저 발언하는 자가 없었는데, 내가 하겠다고 공이 말하였다. 어느날 일찍 조회에 들어가면서 소유(所由 사헌부의 이속) 20여 인으로 하여금 먼저 이르러 조서로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그의 구사(丘史)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묶어오게 한 뒤,곧 조방(朝房)에서 국문하기를, “너의 주인이 아무날 어느 곳에 갔으며 어느 집에서 잤느냐.” 하니, 구사들이 모든 것을 실상대로 말하였다. 또 간음한 집의 심부름하는 노파를 잡아서 국문하였더니 숨기지 못하였다. 세종이 그때 간음법(奸淫法)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조서로를 곧 서인으로 삼았다. 《소문쇄록》
○ 하연(河演)이 경상도 감사로 있을 때에 공이 새로 경상도 도사로 임명되어 온단 말을 듣고 걱정하기를, “이 사람은 나이 젊고 문벌이 높은 집의 자제여서 필시 직무를 옳게 보지 못할 것이니, 내 장차 어찌할꼬.” 하였다. 그가 처음 이르러서 뵈러 들어올 적에,하연이 시험삼아 판단하기 어려운 공문서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를 처결해 오라.” 하고 공이 물러간 뒤에 사람을 시켜서 엿보게 하니 그가 장중(帳中)에서 손님과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하연이 탄식하기를, “과연 나의 추측과 틀림없구나.” 하였더니, 공이 이튿날 술이 깨자 일어나 그 문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 표시를 하여 하연에게 드리면서 말하기를,“아무 글자는 빠졌으니 아마 그릇된 것 같고, 아무 일은 그릇되었으니 분변하여야겠습니다.” 하므로 하연이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뒤부터 특별히 간곡하게 대우하였다. 그뒤 하연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공도 정승이 되니, 하연이 이르기를, “감사가 발이 빠르지 못했더라면 거의 도사에게 밟힐 뻔하였구나.” 하였다. 《소문쇄록》
○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공과 더불어 혼인하기를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여식이 있으나 얼굴이 못생겨서 귀댁의 며느리가 되기엔 어려우니, 한번 간선을 해 보시오.” 한 즉, 안평이 말하기를, “신부의 선을 직접 보는 것은 궁중의 일이니, 내 어찌 감히 참람한 짓을 하리요.대감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오. 신부의 잘 나고 못난 것을 나는 개의치 않소.”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늙은 여종 하나를 보내어 내 딸을 보시오. 후회가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니, 안평이 듣지 않았다. 공은 그대로 술을 마시다가 취하자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이 있으니 다시 여쭈려 합니다.마침 하양(河陽)에 사는 소경 김학로(金鶴老)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을 잘 치는데, 우리 집의 길흉을 말한 것이 다 맞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댁의 두 딸이 다 운이 좋지 못해서 일생을 잘 지내기 어렵다.’ 하였는데, 혹 이것이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맏딸은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홀로 살고 있고, 이 딸은 둘째입니다.” 하니,안평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은 어찌 무당과 점장이의 말을 믿습니까. 대인(大人)이 요망스런 말을 물리치는 뜻에 어긋나는가 합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곧 말하기를, “그러면 승낙합니다. 우리 같은 한족(寒族)이 종실과 혼인하는 것은 실로 다행입니다. 다만 박복한 딸이고, 얼굴도 잘 생기지 못하여 뒷말이 있을까 염려했더니,이제 대군의 뜻이 확고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여 피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에 안평의 아들 우직(友直)이 공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해 임신년에 공이 풍병(風病)을 얻어 세상일에 상관을 못했다. 또 그 다음해에 안평이 죄를 입었는데, 공이 사돈이면서도 연루되지 않은 것은 병이 났기 때문이었다. 《소문쇄록》 ○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南氏)는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에 쫓겨났다.
○ 공이 죽은 후 사위 우직 때문에 시호를 얻지 못하더니, 성종(成宗) 기유년(1489)에 그의 손자 남흔(南忻)이 소를 올려서 청하자,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소문쇄록》

[주D-001]운검(雲劍) :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차고 임금의 거둥에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무사
[주D-002]대포(大酺) : 임금이 백성에게 주식(酒食)을 나누어 주고, 마음껏 놀게 하는 것.
[주D-003]소공대(召公臺) : 주(周)의 소공(召公)이 자기 관내(管內)의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의 행차가 감당(甘棠)나무 밑에서 멈추었다가 떠난 후 감당나무를 보호하고 시를 지은 일이 있다.
[주D-004]구사(丘史) : 관원이 출입할 때, 모시고 다니는 하인.
[주D-005]직부(織婦)를 내쫓고 : 노상(魯相) 공의휴(公儀休)가 자기 집에서 베를 잘 짜는 부인을 내쫓으면서 “내집에서 베를 짜면 민간의 부인이 무슨 직업을 가지겠느냐”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것.
[주D-006]사단(史丹)의 일 : 한대(漢代)의 사단(史丹)이 태자를 바꾸도록 간한 사실을 말한다.
[주D-007]양수척(楊水尺) : 사냥을 하거나 버드나무로 그릇 등을 만들어 팔았던 천민.
[주D-008]강무(講武) : 열병(閱兵)을 겸한 사냥.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世宗朝)의 문형(文衡)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世宗朝)의 문형(文衡)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世宗朝)의 문형(文衡)




윤회(尹淮)

윤회는 자는 청경(淸卿)이며, 호는 청향당(淸香堂)이고,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소종(紹宗)의 아들이다. 태종 신사년(140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시호는 문도공(文度公)이다.
○ 공이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잔치할 때, 태종이 불러서 몸소 기대면서 이르기를, “경은 나의 주석(柱石)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공과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으나 술을 좋아하여 늘 과도하게 마셨다. 세종이 그들의 재주를 사랑하여 술을 마셔도 석 잔 이상 마시지 말 것을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연회에서 술을 마실 때면 두 공은 꼭 커다란 그릇으로 석 잔을 마셨는데 말은 비록 석 잔이라 하였으나,실은 다른 사람보다 배나 되었다. 임금이 듣고 웃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 도리어 더 마시기를 권한 것이 되었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의 문장이 그 시대에 으뜸이 되어 홀로 부름을 받을 때가 있었다. 공은 술을 몹시 좋아하여 지나치게 마셨는데 어느날 집에서 많이 취했더니, 임금이 내시를 시켜 급히 불렀다. 좌우 사람들이 붙들어 일으켜 말에 태우는데 술이 아직 깨지 않았으므로 모두 두려워하였더니,임금 앞에 이르러서는 조용히 대답하되, 조금도 취한 빛이 없었다. 임금이 명하여 교서(敎書)를 초하게 하니, 나는 듯 붓을 휘둘렀으나 모두 임금의 뜻에 맞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참, 천재로군.”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글별[文星]과 술별[酒星]이 한곳에 모여서 한 어진이를 낳았다.”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젊었을 때, 시골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었는데, 주인이 유숙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뜰에 앉아 있는데, 주인의 아이가 커다란 진주(眞珠)를 가지고 놀다가 뜰 가운데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곧 삼켜 버렸다. 얼마 안되어 주인이 구슬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윤회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여 묶어 두었다가 날이 새면 장차 관에 고발하려 하였다.그러나 그는 변명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저 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구슬이 거위 뒷 구멍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주인이 부끄러운 빛으로 말하기를,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 하고 사과하니, 공은, “만일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필시 거위의 배를 째어 구슬을 찾았을 것이오. 그래서 욕됨을 참으면서 기다렸소.” 하였다.


권제(權踶)

권제는 처음 이름은 도(蹈)이고, 자는 중안(仲安)이며, 호는 지재(止齋)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태종 갑오년에 친히 시험을 보아 선비를 뽑을 때, 독권관(讀券官)하륜(河崙)이 우등에 든 세 거자(擧子)의 시권(試券)을 들이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태우고 장원을 뽑던 옛 일에 의할 것이다.” 하고는, 손 가는 대로 뽑고 보니, 권제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이르기를,“내가 권근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는데, 이제 장원에 뽑힌 그 아들을 얻고 보니, 저으기 위안된다.” 하고, 하륜을 돌아보며, “이 방(榜)은 나의 문생(門生)이니, 경들은 자기의 문생으로 보지 못할 거요.” 하였다. 그리하여 하륜 등이 감히 신방(新榜)의 인사를 받지 못하였다.
○ 공은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일찍이 <세년가(世年歌)>를 지었다.


안지(安止) 선생안(先生案)에는 들지 않았다.

안지는 자는 자행(子行)이며, 호는 고은(皐隱)이고, 본관은 탐진(耽津)이니, 찬성 안 사종(安士宗)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생원ㆍ문과를 거쳐 병신년(1416)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 권제가 문형에서 체직될 때 공이 대신하였다가 곧 그만 두었다.
○ 그때 문사들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따랐으나, 대군도 공에게만은 가까이 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청하기도 하고, 혹은 병풍이나 족자에 글씨를 써서 보내면 공은 이르기를, “대군의 편지를 어찌 앉아서 답하겠습니까. 마땅히 몸소 가서 뵙겠습니다.” 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어느 날 안평대군 처소에서 여러 문사가 글짓기를 다툴 때에 이르기를, “그 늙은이가 잘 알 것이니 그에게 물어 보자.” 하였는데, 그는 일부러 글이 높은 것을 낮다 하고 낮은 것을 높다 하였다. 모든 선비들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 늙은이가 나이 많아서 정신이 없으니 교계할 것이 못된다.” 하고는 드디어 청하기를 중지하였다.
세조가 공을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민수(閔粹)의 사옥(史獄)에 공이 당시의 제조로 있었기 때문에 연루되어 강진현(康津縣)에 좌천되었다. 세조는 글을 감사에게 내려 이르기를, “매양 음식물을 위에 진상할 적에, 봉한 나머지는 반드시 그에게 주고 그의 답례하는 글을 받아서 아뢰라.” 하였다.
○ 어느날 조회에 신숙주(申叔舟)와 한명회(韓明澮) 등 여러 공들이 늦게 와서 조반(朝班)에 미처 참여하지 못하고는 사죄의 말씀을 드리기를, “마침 옛벗이 먼 곳에서 왔으므로 찾아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늦게 되는 줄 몰랐으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하였다.성종(成宗)이, “그 이가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안지(安止)입니다.” 하였다. 성종이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나 역시 그를 보고자 하니 빨리 불러 오라.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 것이다.” 하고 종일토록 즐기고는 명하여 숭정대부에 승진시켰다. 《소문쇄록》


정인지(鄭麟趾) 단종조(端宗朝)의 상신(相臣)에 들어 있다.


 

[주D-001]독권관(讀券官) : 과거(科擧)에서 답안을 읽는 고시관.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의 유종(儒宗)




윤상(尹祥)

윤상은 자는 실부(實夫)이며, 처음 이름은 철(哲)이고, 호는 별동(別洞)이다. 본관은 예천(醴泉)이고, 조용(趙庸)의 문인이다. 태조 임신년에 나이가 20세 진사에 올랐고 다음 해에 생원(生員)을 거쳐 병자년(1396)에 문과에 올랐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16년이나 있었고, 벼슬이 예문제학에 이르렀다. 을해년에 죽으니 나이가 83세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은 자질이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나게 태어났다. 향리로서 고을 일을 맡아 볼 적에 고된 사무를 보면서도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오고갈 때 반드시 관솔[松明]을 따서 관사 은밀한 곳에 두었다가 밤에 글 읽을 때 썼다.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善山)ㆍ상주(尙州) 등지의 교수(敎授)가 되었다.
○ 원손(元孫)이 성균관에 입학하자, 대사성으로 특명을 받아 원손의 입학을 지도하는 박사(博士)가 되니, 선비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 문종(文宗) 초년에 치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의 관아로 하여금 달마다 음식물을 주게 하였으니, 퇴로(退老)한 재신(宰臣)에게 음식물을 내리는 일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공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그 학문이 세 김씨 아래에 쓰였다. (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에 비하여 더욱 뛰어 났으므로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서 그에게 배웠다. 공은 실오리처럼 올올이 가늘게 분석하여 일러 주되 종일토록 근면하여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시대의 달관(達官)과 문인(聞人)이 모두 그의 제자였으니, 조선 개국 이래 사범(師範)으로서 제일이었다.


김구(金鉤) 과보(科譜)에는 이름을 균(鈞)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김구는 자는 직지(直之)이며, 본관은 아산(牙山)이고,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태종 병신년에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장공(文長公)이다. 죄를 얻어 벼슬이 삭탈되었는데, 죽은 뒤에 도로 주었다.
○ 사람됨이 순실하고 근신하며 경사(經史)에 정통하였으므로 윤상의 뒤를 이어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널리 들은 것은 윤상보다 나았다.
○ 공과 김말(金末)ㆍ김반(金泮)은 모두 경사(經史)에 널리 통했으나 성리학(性理學)에 더욱 깊었다. 동시에 대사성이 되어 학도를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 인재를 이룩하는데 효과를 거두었으니, 사람들이 삼김(三金)이라 일컬었다.김반이 먼저 죽고 두 김씨는 나이 80세가 넘어서 벼슬이 일품(一品)에 올랐으며, 시호를 문장(文長)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람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장(長)이라 한다. 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 시호를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필원잡기》


김말(金末)

김말은 자는 간지(幹之)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태종 을미년(141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장공(文長公)이고, 갑신년(1464)에 죽었다.
○ 공은 경학(經學)에 밝아서 윤상ㆍ김반과 함께 성균관에 있었는데, 경서의 뜻에 대하여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 공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듣건대, ‘천 사람의 눈을 열어 준 자는 하늘의 갚음을 얻는다.’ 하였다.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 동안 일찍이 학관(學官)의 직을 띠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가르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나이 90에 아들이 없으니 이 어찌 나의 황잡한 거짓 학문이 남에게 덕을 입히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공이 임종할 때에 목욕한 뒤 관디를 하고 홀(笏)을 잡고 단정히 앉으니, 집사람들이 통곡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나는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으니 현달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수가 높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떳떳한 이치인데 바르게 죽는 것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내 죽었다. 《필원잡기》


김반(金泮)

김반은 자는 사원(詞源)이며, 호는 송정(松亭)이고, 본관은 강서(江西)이며,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정종(定宗) 을묘년(139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으나, 강서에 돌아가 늙었는데 조석 끼니를 잇지 못하다가 죽었다.
○ 공은 경서(經書)에 정통하여 성균관 직에 있은 지 40여년 동안 명사가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과거에 사신으로 명 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물고기와 용을 그린 족자에다 시 쓰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쓰기를,

뉘라서 이 가벼운 비단에 / 誰畵經綃幅
바람 물결 운무를 그렸던고 / 風濤雲霧濛
고기는 깊은 바다에 뛰놀고 / 錦鱗翻碧海
용은 푸른 하늘에 솟아오르네 / 神物上靑空
형상은 비록 다르나 / 潛見形雖異
날아오르려는 뜻 같으리니 / 飛騰志則同
행여 꼬리타서 끊는 날엔 / 若爲燒斷尾
하늘에 있는 용을 따르리라 / 攀附在天龍

하였더니, 중국 사람들이 그를 ‘소단미선생(燒斷尾先生)’ 이라고 불렀다.


김숙자(金淑滋)

김숙자는 자는 자배(子培)이며, 호는 강호(江湖)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세종 기해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세조 원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밀양(密陽)으로 돌아가 병자년(1456)에 죽으니 나이가 68세였다.
○ 윤상(尹祥)이 황간(黃澗) 원이 되었을 때에 그가 걸어 가서 《주역》을 배워 역학에 정통하였다. 《이준록(彝尊錄)》
○ 일찍이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학문의 조예가 깊어서 당대의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남으로 돌아가 응천강(凝川江) 뒤에 초당(草堂)을 짓고 산수에 취미를 붙여 스스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일컬었다.성품이 본시부터 염담(恬淡)하여 사물에 급급하지 않았으므로 혹자들은 그를 우활하다 하였으나, 대절(大節)에 있어서는 굳세어 흔들림이 없었으며, 세상에 있은 지 60여년에 한 가지 행실도 허술한 데가 없었다. 《이준록》
○ 임금이 명을 내려 경학에 밝고 행검이 있어서 사유(師儒)가 될만한 자를 추천하라 하였는데, 그가 수천(首薦)이 되어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고 나가서는 선산 교수(善山敎授)가 되었다.그뒤에 개녕 현감(開寧縣監)으로 있을 때에 세종이 승하하였는데, 최질(衰絰 굴건 제복)로 대궐을 향하여 슬퍼하였고, 또 문종(文宗)의 상사를 만나서는 더욱 슬피 울면서, “아아, 가엾다. 사군(嗣君 단종)이시여.” 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감동하였다. 《명현록(明賢錄)》
○ 공은 학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반드시 상세히 이것 저것 인증하여 가르쳤으므로 매를 때리지 않아도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였다.상제로 봉암(鳳巖)에 여막(廬幕)을 짓고 있을 때, 그 고을 자제들이 그 곁에 서재(書齋)를 짓고 모여 오므로 조석전(朝夕奠)이 끝난 뒤에는 글을 강의하였으며, 매양 ‘산 부모를 섬기고 죽은 부모를 장송(葬送)한다.’ 는 구절을 볼 때마다 문득 흐느끼면서 울었다.


 

[주C-001]유종(儒宗) : 유림(儒林)의 종장(宗匠)
[주D-001]꼬리타서 끊는 날 : 고기가 용이 될 때에는 반드시 우레가 그 꼬리를 태워 버린다는 옛 얘기가 있다.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의 명신(名臣)



이수(李隨)

이수는 본관이 봉산(鳳山)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生員)에 장원하였고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세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사부(師傅)였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여지승람》


이변(李邊) 오대손(五代孫)이 순신(舜臣)이다.

이변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다. 나이 30이 지나서 비로소 글을 읽었으며, 기해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대제학 영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계사년(1473)에 죽으니 나이가 83세였고, 시호는 정정공(貞靖公)이다.
○ 공은 성품이 엄하고 곧았으며 남을 경계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조 참의가 되어 매양 사람을 뽑을 때에는 장관(長官)이 한 일을 많이 반박하였으므로 서로간에 조화가 되지 않았다. 어느날 외관(外官) 한 사람이 생선과 맛있는 고기를 선사한 것을 공은 받지 않았으나 장관(판서)은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 그날 장관이 그에게 맛있는 고기로 대접하자 공은 젓가락을 들고, “이것이 이른바 꽥꽥 우는 고기입니까.” 하였으므로 장관이 깊이 원혐(怨嫌)을 가졌다. 《필원잡기》
○ 공은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바르고 곧기로 자부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남을 속인 일도 없었거니와 벼슬한 뒤로 한 번도 거짓병으로 결근을 한 적도 없었다.” 하였다.김종직(金宗直)이 말하기를, “실로 이 말씀과 같았다면 옛날 벼슬하는 이로서 임금 앞에서 병을 칭탁한 이가 전후에 많이 있었으니, 상공(相公)의 덕이 진실하고 돈독하긴 하나 이 말씀은 너무 지나친 듯 합니다.” 하였다.
○ 공은 중국말을 잘 하였다.


허척(許倜)

허척은 본관이 하양(河陽)이며, 허조(許稠)의 아우이다. 음관 출신으로 벼슬이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 일찍이 지평으로 있을 때, 세종이 만년에 불교를 좋아하여 기일(忌日)을 당하여 절에서 친히 제사하려 하였다. 공이 이를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곧 아전과 노속을 거느리고 제사에 쓸 물건들을 쳐부수어 그 행차를 막고는 피하여 숨었다가 임금의 노여움이 풀린 뒤에야 나왔다.


허성(許誠)

허성은 자가 맹명(孟明)이니 허주(許周)의 아들이다. 태종 임오년(140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工)이다.
○ 공은 성격이 고집스러웠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직무에 충실하고 올바름을 지켰으므로 청탁이 이르지 않았으며,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청탁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와 반대로 일을 행하였다.어떤 한 조관(朝官)이 예천(例遷)하여 외직을 맡아야 했는데, 남도 벼슬을 청탁해 왔으므로 일부러 평안도의 변방 군수로 제수하였고, 한 문사(文士)가 서울의 벼슬을 청탁했을 때는 반대로 외군의 교수(敎授)로 제수하였다.
흥덕사(興德寺) 중 일운(一雲)이 간사하고 꾀가 많아 단속사(斷俗寺)의 주지가 되고자 하여 공을 속이기를, “듣자오니 평양 영명사(永明寺)는 산수가 매우 좋다 하는데 가서 살고 싶습니다. 만일 단속사라면 내 일은 틀리는 것입니다.” 하였더니, 며칠 뒤에 일운을 단속사의 주지로 삼았다. 일운이 크게 웃으면서, “그가 내 꾀에 넘어갔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매양 말하기를, “벼슬을 탐내며 녹에 애착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심해져서 남에게 조소거리가 되어도 반성할 줄을 모르게 된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리라.” 하였다.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제가 되어 3년상을 끝내고 복직되었을 때, 어느날 별안간 거울을 보다가 슬픈 기색을 짓더니 이내 거울을 던지면서, “나는 늙음이 이 지경에 이른 줄을 몰랐구나.” 하고 곧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으니 나이가 60여세였다. 《청파극담》


정척(鄭陟) 경오생이요, 무자년 사마(司馬)이다.

정척은 자는 명지(明之)이며, 호는 정암(整菴)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의 조상은 모두 진주의 이속(吏屬)이었는데, 공에 이르러서 크게 현달하여 벼슬이 정헌대부(正憲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을미년(1475)에 죽었으니 시호는 공대공(恭戴公)이다.
○ 교서 정자(校書正字)로서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를 겸했는데, 세종이 특명을 내려서 태상왕 대비의 인보(印寶)와 일본통신(日本通信) 도서를 전자(篆字)로 새겨서 바치게 하였다.
○ 정통(正統) 기사년(1449)에 야선(也先)이 북경(北京)을 침범하였으므로 광녕(廣寧)ㆍ요동(遼東) 등지를 거쳐서 조공바치러 가는 길이 막혀 사람들이 사신 가기를 꺼렸다. 그런데 공은 지원사(知院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었으나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다.하직하고 떠나는 날에 임금이 세자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였는데, 도중에 황제가 이미 야선에게 사로잡히고 북경이 포위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들 두려워하며 머뭇거렸으나 공은 전진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북경에 이르니, 새 황제가 이미 즉위하였으므로 공은 새 황제를 뵌 뒤 다시 북을 향하여 사로잡힌 황제의 성절의 축하례를 의식대로 하였다. 《동각잡기》
○ 계축년(1433)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전에는 국상에 쓰는 관곽(棺槨)을 때에 임하여 만들었는데, 공이 청해서 관곽을 미리 만들어 놓기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옳게 여겨 비로소 장생전(長生殿) 국상의 관곽을 준비하는 곳 을 세우고, 이어 그를 시켜 널리 황장목(黃腸木)을 구해서 관곽을 만들게 하니, 국상에 아무런 군색함이 없게 되었다.
○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일찍이 세조가 그를 불러 보고 이르기를, “부왕께서 일찍이 ‘청직(淸直)’ 두 글자를 경에게 허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나의 귀에 남아 있다.” 하였다.


어변갑(魚變甲) 신유생이며 숙권(叔權)의 고조(高祖)이다.

어변갑은 자는 자선(子先)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태종 무자년(1408)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어머니가 늙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咸安)으로 돌아와 봉양하였다.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55세였다.
○ 공의 먼 조상 중익(重翼)의 본성은 지씨(池氏)였는데 나면서 얼굴이 기이하고 백 근 무게의 활을 사용하였으며, 겨드랑이 밑에 비늘 셋이 있었다. 자라서 고려 태조를 섬길 때 어떤 이가 비늘이 있다 하니, 태조가 보고 이르기를, “너는 비늘이 있으니 이는 곧 물고기이다.” 하고, 어(魚)씨로 사성(賜姓)하였다. 《동각잡기》
○ 공이 장차 전시(殿試)에 응하려 할 때 대제학 정이오(鄭以吾)가 우연히 꿈에 시를 얻었는데,

삼급의 풍뢰(風雷)에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고 / 三級風雷魚變甲
아지랭이 피는 봄날에 말 울음소리가 드물다 / 一春煙景馬希聲
두 이름 대(對)가 되어 서로 겨루나 / 雖云對偶元相敵
용문(龍門)의 상객(上客)에 어찌 미치리요 / 那及龍門上客名

하였더니, 공이 과연 장원에 뽑히고, 마희성(馬希聲)이 무과에 장원이 되었다. 《패관잡기》 《동각잡기》
○ 공이 좌정언(左正言)에서 충주 판관(忠州判官)이 되었다. 그때에 공의 아버지 어연(魚淵)이 전 하양 감무(河陽監務)로서 한산(閑散)한 직에 있었기 때문에 공이 상소하여 자기의 직에 대신하기를 진정하였더니, 태종이 허락하고 어연에게 두 계급을 올려 본직(本職)을 제수하였다. 그뒤 공이 헌납이 되었을 때 동료가 상소하여 계림 부윤(雞林府尹) 윤상(尹祥)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일이 애매하였다.이에 공은 서명을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때에 마침 윤공(尹公)이 있는 곳에 있어서 이 사람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을 상세히 아는 바인데, 감히 없는 것을 날조하여 남을 모함하겠는가.” 하고, 곧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좌석이 흩어지고 말았다. <행장> 《동각잡기》
○ 공은 신장(申檣)과 매우 친했는데,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겨 명성을 얻게되면 모름지기 돌아가 노친을 봉양하자.” 하였다. 집현전에 들어가자 임금의 은혜가 잇달아 겹쳐서 차마 갑자기 떠나지 못하고는 늘 돌아가 부모 봉양함이 늦어짐을 한하여 매양 탄식하기를,“임금을 섬길 날은 길거니와 어버이를 봉양할 날은 짧다.” 하였다. 이에 허리 밑에 건습증(蹇濕症)이 나자, 곧 사직원(辭職願)을 내고 본가가 있는 고향에 내려가 온천에서 목욕하여 병을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 사람을 꼭 써야 할 텐데, 병을 다스려야겠다 하니, 어찌 구태여 만류하겠는가. 병이 낫는대로 빨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창녕(昌寧) 고향집에 이르러서 시를 읊기를,

병으로 돌아오니 한 집이 조용한데 / 謝病歸來一室幽
옛 연못가엔 초목들이 황량하기도 하구나 / 荒凉草樹古池頭
나 같은 이 어찌 공명을 피하는 자이겠는가 / 若余豈避功名者
다만 어버이 살아계시니 멀리 놀진 못하겠네 / 只爲慈親不遠遊

하였다.
그뒤 신장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참판에 이르렀는데, 어변갑의 아들 한림(翰林) 효첨(孝瞻)에게 이르기를, “내가 자네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남몰래 서로 약속하였는데 자네 아버지는 결단성 있게 돌아갔으나 나 혼자서 언약을 저버렸으니 매우 부끄럽네.” 하였다. 권제(權踶)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벼슬을 사양한 이가 둘이 있었을 뿐이니 판부(判府) 허주(許周)와 어변갑이다.” 하였다.
공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모든 아우가 무고하였다. 조석으로 입에 맞는 음식을 드리고 날마다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일삼았다. 조정에서 공의 행실을 높이 여겨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평생을 마쳤다. 《패관잡기》


강석덕(姜碩德)

강석덕은 자는 자명(子明)이며, 호는 완역재(玩易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회백(淮伯)의 아들이다. 음관 출신으로 벼슬이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가 죽으니, 나이가 65세였고, 시호는 대민공(戴敏公)이다.
○ 공은 성격이 드높고 과격하여 한번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자 물러나며 탄식하기를, “사내가 세상에 나서 진실로 뇌락(磊落)하게 살 것이어늘 《명신록(名臣錄)》에는 스스로 즐길만한 도의(道義)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찌 과거 공부를 하여 하늘 아래서 재주를 다투어 평생 출세할 매개를 삼으리오.” 하고는 다시 응시하지 않았다. 《청파극담》
○ 음관 출신으로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보(補)했는데 임금이 공의 학문과 행실을 알아 양근 군수(楊根郡守)를 삼았다가 여러 차례 승진시켜 집의와 승지가 되었다. 그때 세종이 문교를 숭상하여 《오례(五禮)》를 편수하는데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예조의 일을 맡겨 모든 길흉에 관한 큰 예식을 한결같이 공에게 위임하였다.
○ 공은 천성이 호탕하고 정직하고 의기가 넘쳤으며, 어머니 섬기기를 지극한 효도로 하고 형제 사이에 처하는 일과 친구에 대한 접대가 한결같이 성심에서 우러나왔다. 항상 두 아들 희안(希顔)과 희맹(希孟)에게 경계하기를,“사람의 부귀와 영달은 하늘에 달려있으니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은 효제(孝弟)ㆍ충신(忠信)ㆍ예의(禮義)ㆍ염치(廉恥)가 있을 따름이니, 만일 여기에 부끄럼이 있다면 그 나머지는 보잘 것이 없다.” 하였다.


박연(朴堧)

박연은 자는 탄부(坦夫)이며, 호는 난계(蘭溪)이고, 처음 이름은 연(然)이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삼사 좌사(三司左使) 박천석(朴天錫)의 아들이다. 효행으로 정려되었고, 태종 신묘년(1411)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원사 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 공은 영동(永同)의 유생(儒生)으로 젊었을 때 우연히 피리를 익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선수(善手)라 일컬었다. 그뒤 서울에 왔을 때 어떤 광대가 보고서 웃기를, “음절이 야비하여 가락에 맞지 않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고치기도 어렵겠다.” 하니, 공이 굳이 배우기를 청하였다. 며칠만에 광대가 말하기를, “선배님은 가르칠 만합니다.” 하였다.또 며칠 지나서 말하기를, “규범(規範)이 이미 이룩되었습니다.” 하고, 또 며칠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나로서는 미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 급제한 뒤에 또 거문고와 비파 등 모든 악기를 연습하여 정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공의 아들이 계유년 사변에 관계되었으므로 그 역시 이로 인하여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강가에 나가서 전송할 때, 그는 말 한 필과 종 하나를 데리고 나와 행장이 초라하였다. 친구들이 함께 배 가운데에 앉아서 술잔을 베풀다가 손을 잡고 하직할 때 그가 주머니에서 피리를 뽑아 세 곡조를 분 뒤에 떠나니, 그 소리를 듣고 처량하게 느껴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용재총화》


정갑손(鄭甲孫)

정갑손은 자는 인중(仁仲)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니,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공은 얼굴이 잘 생기고 키가 크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기량이 넓었다. 공은 비록 여러 대 재상이었으나 집에 저축한 바 없었으며 베 이불과 부들 자리로 만족히 처하였다. 성품이 강개하여 곧은 말을 잘해 권세 있는 이를 피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탐하는 자들이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들이 자립할 줄을 알았으므로 조정에서 그를 중하게 여겼다.일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조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제수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을 받을 때, 하연(河演)은 겸판서로서, 최부(崔府)는 이조 판서로서 입시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최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연은 다소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온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다.조회가 끝난 뒤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 흐르듯 할 때,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 하였다. 곧 녹사(錄事)를 불러서, “두 분이 매우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 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곧은 도리로 흔들리지 않아 풍절이 늠름하니, 사람들이 홀로 치는 새매에 견주었다.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그의 아우 창손(昌孫)의 비문
○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곧으며 엄준하여 자제가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된 것을 보니, 그의 아들 정오(鄭烏)가 방에 들어 있었다.이에 그는 수염이 꼿꼿하여지며 노하여 시관(試官)을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정오는 학업이 정밀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마침내 시관을 파면시켜 버렸다. 《필원잡기》
○ 공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에 악을 제거하고 선을 드날렸기 때문에 조정의 기강이 크게 진작되었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를 지녔다. 전례에 공회(公會)가 열리면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막차(幕次)를 이웃하였으므로 혹 휘장을 걷고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서 권장음(捲帳飮)이라 하였다. 만일 주금(酒禁)을 만나면 사헌부에서는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마시지 않으나 사간원에서는 마시고 취함이 전과 다름없었다.
어느 날 간관이 술잔을 가득 부어서 희롱하느라 휘장 틈으로 대장(臺長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 역시 희롱하느라 옷소매로 밀어냈는데, 술잔이 휘장틈으로부터 떨어져 굴러서 헌장(憲長 대사헌)의 책상 앞에 가서 멈췄다.모든 대장(臺長)들이 황공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대리(臺吏 사간원과 사헌부의 이속(吏屬)) 역시 서로 쳐다 보면서 감히 얼른 치우지도 못한 채 종일토록 책상 앞에 있었으니, 대중(臺中)에서 혹시나 일이 날까 걱정하였다. 퇴근할 무렵에 공이 아전에게 말하기를, “저 거위알처럼 생긴 것이 무엇인고. 수정구슬이 몇 개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하니, 아전이, “백 알은 들어갈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그가 말하기를, “그 들어왔던 틈으로 던져 버려라.” 하니,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사간원에 아란배(鵝卵杯)가 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들어갔으니, 이는 금령(禁令)을 범하여 만든 것이었다. 《필원잡기》


신석조(辛碩祖)

신석조는 자는 찬지(贊之)이며, 처음 이름은 석견(石堅)이고, 호는 연빙당(淵氷堂)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이고, 병조 판서 신인손(辛引孫)의 아들이다. 병오년(1426)에 생원과에서 장원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 참판 개성 유수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 공의 조부 신유정(辛有定) 평안도 안무사(平安道按撫使)이고, 시호는 무절공(武節公)이다. 이 일찍이 왜적에게 잡혀서 꿇어 앉히고 베이려 할 때, 유정이 왜적의 두 다리 사이에 신낭(腎囊)이 늘어져 있음을 보고는 갑자기 손으로 잡아당겨서 땅에 넘어뜨리고는 칼을 빼어 벴다.그뒤 변방에 장수로서 무공을 세웠으나 성격이 지나치게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반드시 극구 꾸짖은 뒤에야 그쳤다. 공이 매양 말하기를, “할아버지의 급하신 성질을 거울삼아 가죽을 차서 스스로 경계한다.” 하였다.
일찍이 춘추관(春秋館)에서 역사를 편찬할 때 한 하관(下官)과 글씨를 같이 썼는데, 그 사람이 엉겁결에 서리(書吏)를 돌아보며 큰 목소리로, “신석조야, 벼룻물을 가져 오라.” 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여 쳐다보지를 못하였다.공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우리들이 젊었을 때 선생이나 어른 앞에서 실언한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하고, 곧 술을 차려오라 하여 잔 가득히 부어 마주 앉아서 마시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ㆍ남수문(南秀文) 등과 함께 집현전(集賢殿)에서 일시에 문장으로 이름이 날렸으나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안숭선(安崇善)

안숭선은 자는 중지(仲止)이며, 호는 옹재(雍齋)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경자년(1420)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 공은 준수하고 호걸스럽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동부승지가 되었을 때 스스로 나라를 경륜할 만한 재주와 학문이 있다고 믿고 도승지 자리를, 마치 턱에 있는 수염을 뽑듯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도승지 황보인(皇甫仁)이 갈려 갈 때, 공이 후임으로 발탁되었다.임명을 받고 승정원에 이르러 중문에 들어오자 곧 도승지의 자리에 앉으면서 말하기를, “이 자리에 앉아야지.” 하니, 좌승지 김종서(金宗瑞)가 얼굴빛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둘의 사이에 금이 갔는데, 그뒤 공이 병조 판서로 죄를 얻어서 멀리 귀양살이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김종서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 하였다. 《용재총화》


최치운(崔致雲) 경오생이며, 무자년에 사마(司馬)에 올랐다.

최치운은 자는 백경(伯卿)이며, 호는 조은(釣隱)이고,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문과에 급제하여 최윤덕(崔潤德)의 종사(從事)가 되었으며,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고, 다섯 차례 명 나라에 다녀왔다. 경신년(1440)에 죽으니, 나이가 51세였다.
○ 세종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겨 가끔 불러 보고는 국정을 의논하고, 큰일이 있을 때엔 반드시 그와 의논하였다. 그의 천성이 술을 즐겼으므로 세종이 걱정하여 매양 친필로 서찰을 내려서 경계하였는데, 결국 그것을 벽 위에다 붙여 두고 출입할 때마다 보면서 반성하였다. 어떤 때에 바깥에서 많이 마시고 크게 취해서 돌아오면 그 부인이 반드시 그의 머리를 들게 하여 벽을 가리켜 보게 하였다.그러면 그는 정신없이 취한 중에도 머리를 책상에 두드리면서 마치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는 시늉을 하였다. 술이 깨면 곧 말하기를, “나는 임금의 은혜에 감동하여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갑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였다. 마침내 술 때문에 병이 나 마흔이 겨우 넘어서 죽었다. 《소문쇄록》
○ 세종이 일찍이 그에게 명하여 《무원록(無冤錄)》을 주석하게 하였고, 또 명하여 율문(律文)을 강해(講解)하게 하였으며, 판결하기 어려운 형옥(刑獄)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를 불러서 의논하여 억울하지 않게 된 것이 많았다.


김담(金淡)

김담은, 자는 거원(巨源)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을묘년(143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 공은 역수(曆數)와 관상(觀象)에 밝았으므로 일영대(日影臺)와 천문지(天文誌)ㆍ전세(田稅)ㆍ구등(九等)에 관한 법을 모두 어명을 받아 찬정(撰定)하였다. 《영천지(榮川誌)》
○ 공이 기사년(1449)에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명하여 기복(起復)시켜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삼고 천담복(淺淡服)을 내렸다. 공은 여섯 차례나 소를 올려서 사직하였고, 사간원에서도 역시 기복하여 벼슬을 줌이 타당치 않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 집에 있을 때에는 상복을 입고 조정에 와서는 담복(淡服)을 입는 것이 어찌 자식의 애통한 정을 아주 빼앗아 기복시키는 예와 같으리요. 하물며 김담과 같은 재주는 세상에 드물기 때문에 위에서 쓰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하리요.” 하였다. 《김문절유고(金文節遺稿)》 《기복전고(起復典故)》에 상세하다.


김조(金銚)

김조는 호는 졸재(拙齋)이며, 처음 이름은 빈(鑌)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태종 신묘년(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公)이다.
○ 공은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세종이 어느날 잔치를 베풀었을 때 신하가 모두 취하자 세종이 이르기를, “오늘 제군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진술하라.”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하고 부복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이르기를, “신들의 소원도 김조의 것에 넘지 않습니다.” 하여 세종이 웃었다. 《필원잡기》


김돈(金墩)

김돈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참의 김후(金厚)의 손자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인순 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 공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힘을 썼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그의 명성을 듣고 불렀으나 공이 사양하였다. 문과에 오르니 세종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내가 경을 보고자 했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젠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였다.
○ 공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외직을 구하였고, 특별히 역말을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서 봉양에 편하게 하니, 선비들이 그를 영광으로 여겼다.
○ 공은 의상(儀象)에 정통하여 세종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 참여하였다.
○ 공은 오랫 동안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말로 아뢰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승지의 직에 7년이나 있었다.


김하(金何)

김하는 본관이 연안이니, 유후(留後) 김자지(金自知)의 아들이다. 계묘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선공(靖宣公)이다.
○ 공은 중국말 통역을 잘 하였으므로 세종이 특히 사랑하였다. 공은 판사(判事)가 되었을 때 녹명아(鹿鳴兒)라는 기생을 가까이 했는데, 한 종실(宗室)과 도승지 성(姓)이 안(安)이란 자가 모두 그 기생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서로 다투게 되었다. 종실이 자기가 먼저 가까이 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세종이 사람을 시켜 종실에게 이르기를, “나라에 너 한 사람 있고 없는 것은 별 관계가 없지만, 김하는 남이 못하는 일을 하여 중국과 교제하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또 김하는 아들이 없으니, 마땅히 그 기생을 첩으로 삼게 할 것이다. 네가 만일 다툰다면 죄를 주리라.” 하고는, 도승지로 하여금 그에게 이르기를,“너는 이 기생을 첩으로 삼겠는가.” 하니, 공은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그뒤에 그가 상중에 있으면서 기생의 집에 출입하여 사헌부에서 적발하였으나 세종은 이르기를, “내가 준 것이니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주었으니, 비록 하찮은 기술이라도 애석하게 여겨 정려함이 이러하였다. 《소문쇄록》


이맹균(李孟畇)

이맹균은 자는 사원(士原)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장손이다. 나이 13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이다.
○ 공은 세업(世業)을 이어 받아 문명(文名)이 높았다. 일찍이 송도(松都)를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오백년 왕기가 끝나고 말았으니 / 五百年來王氣終
계림(鷄林)을 차지하고 압록강을 차지한 것은 누구의 공이었나 / 操鷄博鴨龍何功
영웅은 간 곳 없고 산천만 의구한데 / 英雄已逝山河在
인물은 옮겨가고 빈 터만 남았구나 / 人物南遷井市空
상원(上苑)엔 가는비 내린 뒤 꽃피고 꾀꼬리 지저귀며 / 上苑鶯花微雨後
여러 능엔 석양 속에 초목이 서 있네 / 諸陵草樹夕陽中
내가 온 이 날에 느낌이 하도 많아 / 我來此日偏多感
지난 일 아득한데 물만 동으로 흐르는구나 / 往事悠悠水自東

하였고, 그는 또 아들이 없음을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사람이 생긴 때로부터 / 自從人道起於寅
아비 자식대를 전해와 이 몸까지 이르렀네 / 父子相傳到此身
내 무슨 죄로 하늘이 돕지 않아 / 我罪伊何天不弔
아비 소리 못들은 채 귀 밑에 흰털만 새로운가 / 未爲人父鬢絲新

하였다.
그뒤 부인이 질투하고 사나와서 가화(家禍)를 일으키자,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귀양살이하다가 죽었다. 《용재총화》


정초(鄭招)

정초는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태종 을유년(1405)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해년(1407)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공은 총명이 뛰어나서 어떤 서적이고 한 번만 보면 외웠으므로, 과거가 이미 박두했으나 허랑하게 놀기를 조금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육경(六經)을 뽑아서 한번 보고는 책을 덮고 다시 읽지 않았으나, 강석(講席)에 이르러서는 오묘한 뜻을 다 설명하여 응답함이 메아리치듯 하였다.일찍이 원수(元帥)의 막부(幕府)에 있을 때 군졸 몇백 명을 한번 보고는 그 얼굴을 다 기억하며 이름까지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인양 심복하였다. 젊었을 때에 어떤 중이 《금강경(金剛經)》 읽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그 경(經)은 한 번 보고 외울 수 있겠노라.” 하니, 중이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외우면 내 성찬을 차릴 것이요, 그대가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대가 성찬을 차리시오.” 하였다. 서로 약속한 뒤 공이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면서 외기를 물 흐르듯이 하니, 반질(半帙)을 채 못외어서 중이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신상(申商)

신상은 자는 득지(得止)이며, 본관은 은풍(殷豐)이다. 나이 13세에 진사가 되고, 15세에 생원을 거쳐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숭정대부 예조 판서에 이르렀고,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64세였고, 시호는 공도공(恭度公)이다.
○ 공이 예조 판서로 있었을 때 허조(許稠)가 이조 판서로 있었다. 공은 해가 중천에 뜬 뒤에 나갔다가 해가 기울면 곧 돌아오는데, 허조는 새벽에 나가서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어느날 허조가 먼저 가서 이조에 앉았다가, 공이 예조에 나왔다가는 얼마 안되어서 도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전갈하기를, “어째서 늦게 왔다가 일찍 나가시오.” 하였더니,공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이 일찍 출근하였으나 무슨 유익한 일이 있으며 내가 비록 늦게 출근하였으나 무슨 해로운 일이 있으리요. 각기 손바닥이나 비빌 뿐이지요.” 하였다. 공은 일을 당하면 그때그때 처리를 잘하였으며, 허조는 부지런하고 충실하였으니 성격이 같지 않았던 것이다. 《용재총화》


권홍(權弘)

권홍은 호는 송설헌(松雪軒)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서 벼슬이 영돈녕 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이고, 저서에 《쌍당집(雙塘集)》이 있다.
○ 공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매우 잘 썼다.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고 향년(享年)이 87세였다.일찍이 남산(南山) 기슭에 집을 세우고 못 두 곳을 파서 연꽃을 심고 폭건(幅巾)과 청려장(靑藜杖)으로 소요하며 거닐어 맑은 운치가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이 쓴 <헌릉비(獻陵碑)>와 <성균관비(成均館碑)>의 전서는 매우 좋은 글씨였다. 한성 판윤으로 있을 때 글을 올려서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울 것을 청했는데, 그 말이 자못 사체에 맞았으므로 세종이 허락하였다.


김문(金汶)

김문은 호는 서헌(西軒)이며,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경자년(1420)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일찍 죽었다.
○ 공은 남보다 총명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더욱이 사학(史學)에 밝았으므로 역대의 고사를 묻는 자 있으면 곧, “아무 책 몇째 장에 있어.” 하고 대답하였는데, 백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세종이 선비들에게 명하여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했을 때에 그의 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총애가 높았으나, 한스럽게도 일찍 죽었다.
공은 천성이 술을 잘 마셨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송조(宋朝)에서 다품(茶品)을 논할 때는 자소탕(紫蘇湯)을 제일로 삼았고, 《사림광기(事林廣記)》에는 궁중의 아름다운 음식으로 찐닭을 제일로 삼았어.” 하니, 공이 미소를 지으면서, “자소탕이 항아리 속의 새로 익은 술에 비해서 어떠하며, 찐닭이 소간적[牛心炙]에 비해서 어떤 것이 나을까.” 하여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필원잡기》


하경복(河敬復)

하경복은,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무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 중추 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정공(襄靖公)이다.
○ 공은 최고의 용장(勇將)으로 당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용재총화》
○ 어머니 꿈에 자라가 품 속으로 들더니 이에 잉태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아명(兒名)이 왕빠[王八]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기운이 남보다 세었다. 갑사(甲士)로 궁문에서 숙직할 때, 마침 동짓날이어서 상림원(上林苑)의 온실에서 기르던 매화 몇 분을 장차 궁문 곁에 두려 할 때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맡은 자가 크게 놀라서 꾸짖으니,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진주에 살고 있었다. 울타리 가에 마소를 맨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를 삼는 것도 이 나무이니,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요.”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거친 것에 대해 웃었으나 기개는 장하게 여겼다. 《필원잡기》
○ 일찍이 장수가 되어 동북면을 지킬 때 야인이 삼백 근 짜리 센 활을 가지고 와서 공에게 당겨 보라고 청하였다. 공은 그들을 위해서 술을 차려 마시게 한 뒤 말하기를, “이 활의 제도가 매우 묘하다.” 하고,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대로 만들게 하고는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불에 구어 힘을 풀리게 하였다. 이에 조용히 당기어 한도대로 버티니, 야인들이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함길도 도절제(咸吉道都節制)가 되어서 변방을 지킬 때, 야인이 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세종이 듣고 중히 여겨 공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오래도록 맡아 보게 하고, 후히 그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이어 호군 홍사석(洪師錫)으로 하여금 편지를 주어 칭찬하기를, “내가 경을 믿기를 은연히 장성(長城)처럼 하였는데,어머니의 아들 기다림과 아들의 모친 그리워함이 이미 5년이나 되었다. 이제 경의 후임을 물색해 보았으나 실로 그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이에 특별히 경의 어머니를 위문하고 도와주노니, 경은 스스로 마음을 풀라. 이제 홍사석을 보내어 경에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의관(衣冠)과 말을 내리노라.” 하였다. 《국조보감》
○ 공이 항상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힘으로 화를 면한 것이 세 번이었다. 태종이 내란(內亂)을 평정하실 때 우연히 대궐에서 숙직하는 친구에게 들어갔는데, 문이 닫쳐서 나올 수 없어 방황하면서 사방을 돌아보다가 군졸에게 끌려 가서 장차 목이 베어지게 되었을 때,팔을 뿌리치고 달아나서 바로 어전에 이르러서 고함치기를, ‘이 같은 장사를 죽이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태종께서 듣고 놓아 주셨다. 또 일찍이 깊은 산중에서 사냥하다가 별안간 사나운 범을 만났는데,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고, 나는 범의 턱밑을 잡아 쥔 채 왔다갔다하며 맨 손으로 싸우다가 굽어 보니, 벼랑 밑에 물이 괸 소(沼)가 있었다.이에 범을 떠밀어서 물 밑에 떨어뜨려 범이 물을 마시고 배가 불러서 힘을 잘 못쓸 때 이를 이용하여 박살하였다. 또 일찍이 국경에서 적을 방어할 때 적의 기병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데, 마침 그 앞 몇십 보쯤 가서 커다란 나무가 있기에 몸을 솟구쳐 재빨리 달아나 먼저 그 나무에 의거하였더니 적이 따라오다가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싸움에 이겼다. 이때에 모두 힘이 없었으면 꼭 죽었을 것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이종무(李從茂)
이종무는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무과에 급제하였고 익대 공신(翊戴功臣)으로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보국대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후공(襄厚公)이다.
○ 기해년(1419) 5월에 왜적이 비인(庇仁)에 침입하고, 또 절제사(節制使) 이사검(李思儉)을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였다.세종이 유정현(柳廷顯)ㆍ박은(朴訔)ㆍ조말생(趙末生) 등을 불러서 적이 비어 있는 틈을 타 가서 대마도(對馬島)를 무찔러 되돌아오는 적을 맞아 싸울 것을 의논하였으나, 모두들, “불가합니다.” 하였는데, 조말생만이 홀로 아뢰기를, “가능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종무를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로 삼아서 세 도의 군함 2백 척을 거느리게 하고, 영상 유정현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았다. 세종이 한강에 거둥하여 그들을 전송하였다.
○ 공이 아홉 절도(節度)의 배 227척과 군사 1만 8천 명을 거느리고 65일 동안 먹을 군량을 싸 가지고 대마도에 이르러서 배 백여 척을 빼앗고 머리 백여 급을 베었으며, 또 적의 집 2천여 호를 불사르고 중국인 백여 명과 왜인 2십여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순몽(李順蒙)

이순몽은 본관은 영천(永川)이니 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의 아들이다. 음관으로 무과에 올라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위양공(威襄公)이다.
○ 공은 여주(驪州)와 이천(利川) 사이에 살면서 농사에 힘썼다. 어느날 들에서 김을 맬 때,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바람이 크게 일면서 커다란 독처럼 생긴 불덩이가 멀리서부터 바퀴처럼 굴러 오는데, 그 소리가 웅장하여 마소가 놀라 뒤로 물러섰다.공이 호미로 그 불덩이를 쳤더니, 작은 아이가 누런 털이 이마를 덮고 파란 눈이 번쩍거리고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데 반이 부러져 마치 짧은 낫과 같았으며, 거꾸로 땅 위에 거꾸러져 있어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였다. 공이 호미로 흔들어 일으켰더니, 하늘이 또 캄캄해지며 비바람이 치더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기재잡기》
김효성(金孝誠)

김효성은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정난 공신(靖難功臣)으로 연산군(延山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숭정대부 병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효양공(孝襄公)이다.
○ 공은 김남수(金南秀) 장양공(莊襄公) 의 아들이다. 남수는 아내 길씨(吉氏)와 따로 살았다. 공의 나이가 네댓 살이 되었을 때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별안간 쌍 비둘기가 모여드니, 공이 말하기를, “저 쌍 비둘기를 보면 암놈 숫놈이 나란히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각기 동쪽과 서쪽에 계시니 어쩐 일인고.” 하고는 이내 울었다.종이 이상히 여겨서 길씨에게 고하니, 그도 역시 울어 동리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공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그의 나이가 57세에 길씨가 죽자, 시묘살이와 초상과 제사에 한결같이 정성껏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갸륵하게 여겼다. 《필원잡기》

조수(趙須) 유방선(柳方善)을 붙였다.
조수는 자는 형보(亨父)이며, 호는 송월당(松月堂)이고, 또는 만취정(晩翠亭)이라 하며,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태종 신사년(140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으며, 저서에는 《만취정집(晩翠亭集)》이 있는데, 죽을 때에 그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 공이 관동(關東)에서 유랑 생활을 한 지 30여 년에 학문에 크게 힘써서 어느 책이고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자못 시명(詩名)이 있어 세종이 매우 사랑하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일찍이 그에게 《이백집(李白集)》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는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면서 굳이 거절하여 받지 않고, “이 속에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이 있습니다.” 하였다. 《청파극담》
○ 공이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서 금고(禁錮)를 당한 지 30여 년이나 되자, 세종이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서 만년에 불러 썼다. 《필원잡기》
○ 세종이 내시로 하여금 족자를 싸서 보내어 그에게 시를 쓰기를 명하였더니, 그가 붓을 뽑아 한번 휘두르니 글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웠다. 한편으로는 읊고, 한편으로는 말면서 말하기를, “늙은이의 서법이 새끼 가진 범의 할퀴는 발톱과 같구나.” 하고 곧 돌려 드리니, 그의 탄솔(坦率)함이 이와 같았다. 《청파극담》
○ 한윤(韓閏)이 당호(堂號)를 공에게 청했더니, 공이 삼외(三畏)라고 편액(扁額)을 써 주었다. 한윤이 묻기를, “선생께서도 세 가지의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세 가지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돈이 있어 술을 마시고 취하여 곧 길게 누워서 코를 골면 벼락도 두렵지 않는 것이 첫째요, 겨울에는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으며,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으며, 독에는 남은 식량이 없고 상자에는 남은 옷이 없어 도둑이 두렵지 않은 것이 둘째요, 10년 동안 벼슬길에 있었으나 한 치만큼 전진하면 한 자만큼 물러서서 부귀는 뜬 구름인 듯 공명은 헌 신짝인 듯 하였으니, 재상도 두렵지 않은 것이 그 셋째일세.” 하였다. 《해동잡록(海東雜錄)》
주부(主簿) 유방선(柳方善) 역시 금고를 당하여 등용되지 않았는데, 학문과 문장이 조수(趙須)와 더불어 서로 백중(伯仲)이었다. 세종이 집현전 선비로 하여금 두 공에게 왕복하여 질문하게 하였고, 서거정(徐居正)ㆍ권람(權擥)ㆍ한명회(韓明澮)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으며, 저서에는 《태재집(泰齋集)》이 있다. 《필원잡기》


조오(趙峿) 《과보(科譜)》에는 오(峿)가 오(珸)로 되어 있다.

조오는, 본관이 횡성(橫城)이다. 계묘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굳세어 맑은 절개가 견줄 자 없었으며, 집이 극도로 가난하였다. 일찍이 예랑(禮郞)이 되었을 때 무슨 금기하는 일로 방위를 피해서 셋집에 거처하였는데 땔나무와 식량이 이어지지 못하여 동료들이 백미 서 말로 위문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그뒤 공석상에서 그것을 자랑하니, 어떤 이가 그를 기롱하였다. 일찍이 합천군(陜川郡)의 원이 되었을 때,그 고을에서 나오는 은어(銀魚)가 여름철이라 흔하여 부패할 지경이었으나 처자들에게 먹지 못하게 하였으며, 아들ㆍ사위나 노복들이 오고 갈 때에도 모두 자기 양식을 싸 가지고 다니게 하였다.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집에 있을 때에 집에 아무 것도 없었으나 조금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독실한 군자였다. 《필원잡기》

[주D-001]꽥꽥 우는 고기입니까 : 제국(齊國)의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였는데, 그의 형은 제국의 재상이었다.중자가 어머니를 뵈러 형의 집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거위를 선사했는데 형이 받으니, 중자가 형에게 “꽥꽥우는 것을 왜 받으시오.”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어머니가 국을 끓였다. 중자는 모르고 먹는데 형이 들어와 “이것은 꽥꽥 우는 고기이다.” 하니, 중자는 씹던 고기를 토하였다.
[주D-002]무원록(無冤錄) :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법례(法例)를 해석한 글.
[주D-003]익대 공신(翊戴功臣) : 예종(睿宗) 때 남이(南怡)를 죽인 공로로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38인에게 내린 훈호(勳號).
[주D-004]삼외(三畏) : 《논어》에 “군자(君子)가 두려워하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하늘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두려워하며, 성인(聖人)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