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문형록
광산김씨 8, 연안이씨 7, 전주이씨 7, 안동김씨 6, 달성서씨 6, 의령남씨 6, 덕수이씨 5, 등 7씨족이며, 2명 이상을 배출한 씨족은 모두 29씨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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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최명길(崔鳴吉)
【성 명】 최명길(崔鳴吉)
【성 명】 최석정(崔錫鼎)/최석만(崔錫萬) [
[주D-001]운검(雲劍) :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차고 임금의 거둥에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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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 ||||
세종조의 유종(儒宗) |
윤상(尹祥)
윤상은 자는 실부(實夫)이며, 처음 이름은 철(哲)이고, 호는 별동(別洞)이다. 본관은 예천(醴泉)이고, 조용(趙庸)의 문인이다. 태조 임신년에 나이가 20세 진사에 올랐고 다음 해에 생원(生員)을 거쳐 병자년(1396)에 문과에 올랐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16년이나 있었고, 벼슬이 예문제학에 이르렀다. 을해년에 죽으니 나이가 83세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은 자질이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나게 태어났다. 향리로서 고을 일을 맡아 볼 적에 고된 사무를 보면서도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오고갈 때 반드시 관솔[松明]을 따서 관사 은밀한 곳에 두었다가 밤에 글 읽을 때 썼다.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善山)ㆍ상주(尙州) 등지의 교수(敎授)가 되었다.
○ 원손(元孫)이 성균관에 입학하자, 대사성으로 특명을 받아 원손의 입학을 지도하는 박사(博士)가 되니, 선비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 문종(文宗) 초년에 치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의 관아로 하여금 달마다 음식물을 주게 하였으니, 퇴로(退老)한 재신(宰臣)에게 음식물을 내리는 일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공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그 학문이 세 김씨 아래에 쓰였다. (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에 비하여 더욱 뛰어 났으므로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서 그에게 배웠다. 공은 실오리처럼 올올이 가늘게 분석하여 일러 주되 종일토록 근면하여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시대의 달관(達官)과 문인(聞人)이 모두 그의 제자였으니, 조선 개국 이래 사범(師範)으로서 제일이었다.
김구(金鉤) 과보(科譜)에는 이름을 균(鈞)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김구는 자는 직지(直之)이며, 본관은 아산(牙山)이고,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태종 병신년에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장공(文長公)이다. 죄를 얻어 벼슬이 삭탈되었는데, 죽은 뒤에 도로 주었다.
○ 사람됨이 순실하고 근신하며 경사(經史)에 정통하였으므로 윤상의 뒤를 이어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널리 들은 것은 윤상보다 나았다.
○ 공과 김말(金末)ㆍ김반(金泮)은 모두 경사(經史)에 널리 통했으나 성리학(性理學)에 더욱 깊었다. 동시에 대사성이 되어 학도를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 인재를 이룩하는데 효과를 거두었으니, 사람들이 삼김(三金)이라 일컬었다.김반이 먼저 죽고 두 김씨는 나이 80세가 넘어서 벼슬이 일품(一品)에 올랐으며, 시호를 문장(文長)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람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장(長)이라 한다. 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 시호를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필원잡기》
김말(金末)
김말은 자는 간지(幹之)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태종 을미년(141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장공(文長公)이고, 갑신년(1464)에 죽었다.
○ 공은 경학(經學)에 밝아서 윤상ㆍ김반과 함께 성균관에 있었는데, 경서의 뜻에 대하여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 공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듣건대, ‘천 사람의 눈을 열어 준 자는 하늘의 갚음을 얻는다.’ 하였다.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 동안 일찍이 학관(學官)의 직을 띠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가르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나이 90에 아들이 없으니 이 어찌 나의 황잡한 거짓 학문이 남에게 덕을 입히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공이 임종할 때에 목욕한 뒤 관디를 하고 홀(笏)을 잡고 단정히 앉으니, 집사람들이 통곡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나는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으니 현달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수가 높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떳떳한 이치인데 바르게 죽는 것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내 죽었다. 《필원잡기》
김반(金泮)
김반은 자는 사원(詞源)이며, 호는 송정(松亭)이고, 본관은 강서(江西)이며,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정종(定宗) 을묘년(139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으나, 강서에 돌아가 늙었는데 조석 끼니를 잇지 못하다가 죽었다.
○ 공은 경서(經書)에 정통하여 성균관 직에 있은 지 40여년 동안 명사가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과거에 사신으로 명 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물고기와 용을 그린 족자에다 시 쓰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쓰기를,
뉘라서 이 가벼운 비단에 / 誰畵經綃幅
바람 물결 운무를 그렸던고 / 風濤雲霧濛
고기는 깊은 바다에 뛰놀고 / 錦鱗翻碧海
용은 푸른 하늘에 솟아오르네 / 神物上靑空
형상은 비록 다르나 / 潛見形雖異
날아오르려는 뜻 같으리니 / 飛騰志則同
행여 꼬리타서 끊는 날엔 / 若爲燒斷尾
하늘에 있는 용을 따르리라 / 攀附在天龍
하였더니, 중국 사람들이 그를 ‘소단미선생(燒斷尾先生)’ 이라고 불렀다.
김숙자(金淑滋)
김숙자는 자는 자배(子培)이며, 호는 강호(江湖)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세종 기해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세조 원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밀양(密陽)으로 돌아가 병자년(1456)에 죽으니 나이가 68세였다.
○ 윤상(尹祥)이 황간(黃澗) 원이 되었을 때에 그가 걸어 가서 《주역》을 배워 역학에 정통하였다. 《이준록(彝尊錄)》
○ 일찍이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학문의 조예가 깊어서 당대의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남으로 돌아가 응천강(凝川江) 뒤에 초당(草堂)을 짓고 산수에 취미를 붙여 스스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일컬었다.성품이 본시부터 염담(恬淡)하여 사물에 급급하지 않았으므로 혹자들은 그를 우활하다 하였으나, 대절(大節)에 있어서는 굳세어 흔들림이 없었으며, 세상에 있은 지 60여년에 한 가지 행실도 허술한 데가 없었다. 《이준록》
○ 임금이 명을 내려 경학에 밝고 행검이 있어서 사유(師儒)가 될만한 자를 추천하라 하였는데, 그가 수천(首薦)이 되어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고 나가서는 선산 교수(善山敎授)가 되었다.그뒤에 개녕 현감(開寧縣監)으로 있을 때에 세종이 승하하였는데, 최질(衰絰 굴건 제복)로 대궐을 향하여 슬퍼하였고, 또 문종(文宗)의 상사를 만나서는 더욱 슬피 울면서, “아아, 가엾다. 사군(嗣君 단종)이시여.” 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감동하였다. 《명현록(明賢錄)》
○ 공은 학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반드시 상세히 이것 저것 인증하여 가르쳤으므로 매를 때리지 않아도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였다.상제로 봉암(鳳巖)에 여막(廬幕)을 짓고 있을 때, 그 고을 자제들이 그 곁에 서재(書齋)를 짓고 모여 오므로 조석전(朝夕奠)이 끝난 뒤에는 글을 강의하였으며, 매양 ‘산 부모를 섬기고 죽은 부모를 장송(葬送)한다.’ 는 구절을 볼 때마다 문득 흐느끼면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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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 ||||
세종조의 명신(名臣) |
이수(李隨)
이수는 본관이 봉산(鳳山)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生員)에 장원하였고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세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사부(師傅)였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여지승람》
이변(李邊) 오대손(五代孫)이 순신(舜臣)이다.
이변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다. 나이 30이 지나서 비로소 글을 읽었으며, 기해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대제학 영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계사년(1473)에 죽으니 나이가 83세였고, 시호는 정정공(貞靖公)이다.
○ 공은 성품이 엄하고 곧았으며 남을 경계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조 참의가 되어 매양 사람을 뽑을 때에는 장관(長官)이 한 일을 많이 반박하였으므로 서로간에 조화가 되지 않았다. 어느날 외관(外官) 한 사람이 생선과 맛있는 고기를 선사한 것을 공은 받지 않았으나 장관(판서)은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 그날 장관이 그에게 맛있는 고기로 대접하자 공은 젓가락을 들고, “이것이 이른바 꽥꽥 우는 고기입니까.” 하였으므로 장관이 깊이 원혐(怨嫌)을 가졌다. 《필원잡기》
○ 공은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바르고 곧기로 자부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남을 속인 일도 없었거니와 벼슬한 뒤로 한 번도 거짓병으로 결근을 한 적도 없었다.” 하였다.김종직(金宗直)이 말하기를, “실로 이 말씀과 같았다면 옛날 벼슬하는 이로서 임금 앞에서 병을 칭탁한 이가 전후에 많이 있었으니, 상공(相公)의 덕이 진실하고 돈독하긴 하나 이 말씀은 너무 지나친 듯 합니다.” 하였다.
○ 공은 중국말을 잘 하였다.
허척(許倜)
허척은 본관이 하양(河陽)이며, 허조(許稠)의 아우이다. 음관 출신으로 벼슬이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 일찍이 지평으로 있을 때, 세종이 만년에 불교를 좋아하여 기일(忌日)을 당하여 절에서 친히 제사하려 하였다. 공이 이를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곧 아전과 노속을 거느리고 제사에 쓸 물건들을 쳐부수어 그 행차를 막고는 피하여 숨었다가 임금의 노여움이 풀린 뒤에야 나왔다.
허성(許誠)
허성은 자가 맹명(孟明)이니 허주(許周)의 아들이다. 태종 임오년(140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工)이다.
○ 공은 성격이 고집스러웠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직무에 충실하고 올바름을 지켰으므로 청탁이 이르지 않았으며,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청탁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와 반대로 일을 행하였다.어떤 한 조관(朝官)이 예천(例遷)하여 외직을 맡아야 했는데, 남도 벼슬을 청탁해 왔으므로 일부러 평안도의 변방 군수로 제수하였고, 한 문사(文士)가 서울의 벼슬을 청탁했을 때는 반대로 외군의 교수(敎授)로 제수하였다.
흥덕사(興德寺) 중 일운(一雲)이 간사하고 꾀가 많아 단속사(斷俗寺)의 주지가 되고자 하여 공을 속이기를, “듣자오니 평양 영명사(永明寺)는 산수가 매우 좋다 하는데 가서 살고 싶습니다. 만일 단속사라면 내 일은 틀리는 것입니다.” 하였더니, 며칠 뒤에 일운을 단속사의 주지로 삼았다. 일운이 크게 웃으면서, “그가 내 꾀에 넘어갔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매양 말하기를, “벼슬을 탐내며 녹에 애착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심해져서 남에게 조소거리가 되어도 반성할 줄을 모르게 된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리라.” 하였다.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제가 되어 3년상을 끝내고 복직되었을 때, 어느날 별안간 거울을 보다가 슬픈 기색을 짓더니 이내 거울을 던지면서, “나는 늙음이 이 지경에 이른 줄을 몰랐구나.” 하고 곧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으니 나이가 60여세였다. 《청파극담》
정척(鄭陟) 경오생이요, 무자년 사마(司馬)이다.
정척은 자는 명지(明之)이며, 호는 정암(整菴)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의 조상은 모두 진주의 이속(吏屬)이었는데, 공에 이르러서 크게 현달하여 벼슬이 정헌대부(正憲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을미년(1475)에 죽었으니 시호는 공대공(恭戴公)이다.
○ 교서 정자(校書正字)로서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를 겸했는데, 세종이 특명을 내려서 태상왕 대비의 인보(印寶)와 일본통신(日本通信) 도서를 전자(篆字)로 새겨서 바치게 하였다.
○ 정통(正統) 기사년(1449)에 야선(也先)이 북경(北京)을 침범하였으므로 광녕(廣寧)ㆍ요동(遼東) 등지를 거쳐서 조공바치러 가는 길이 막혀 사람들이 사신 가기를 꺼렸다. 그런데 공은 지원사(知院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었으나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다.하직하고 떠나는 날에 임금이 세자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였는데, 도중에 황제가 이미 야선에게 사로잡히고 북경이 포위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들 두려워하며 머뭇거렸으나 공은 전진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북경에 이르니, 새 황제가 이미 즉위하였으므로 공은 새 황제를 뵌 뒤 다시 북을 향하여 사로잡힌 황제의 성절의 축하례를 의식대로 하였다. 《동각잡기》
○ 계축년(1433)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전에는 국상에 쓰는 관곽(棺槨)을 때에 임하여 만들었는데, 공이 청해서 관곽을 미리 만들어 놓기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옳게 여겨 비로소 장생전(長生殿) 국상의 관곽을 준비하는 곳 을 세우고, 이어 그를 시켜 널리 황장목(黃腸木)을 구해서 관곽을 만들게 하니, 국상에 아무런 군색함이 없게 되었다.
○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일찍이 세조가 그를 불러 보고 이르기를, “부왕께서 일찍이 ‘청직(淸直)’ 두 글자를 경에게 허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나의 귀에 남아 있다.” 하였다.
어변갑(魚變甲) 신유생이며 숙권(叔權)의 고조(高祖)이다.
어변갑은 자는 자선(子先)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태종 무자년(1408)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어머니가 늙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咸安)으로 돌아와 봉양하였다.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55세였다.
○ 공의 먼 조상 중익(重翼)의 본성은 지씨(池氏)였는데 나면서 얼굴이 기이하고 백 근 무게의 활을 사용하였으며, 겨드랑이 밑에 비늘 셋이 있었다. 자라서 고려 태조를 섬길 때 어떤 이가 비늘이 있다 하니, 태조가 보고 이르기를, “너는 비늘이 있으니 이는 곧 물고기이다.” 하고, 어(魚)씨로 사성(賜姓)하였다. 《동각잡기》
○ 공이 장차 전시(殿試)에 응하려 할 때 대제학 정이오(鄭以吾)가 우연히 꿈에 시를 얻었는데,
삼급의 풍뢰(風雷)에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고 / 三級風雷魚變甲
아지랭이 피는 봄날에 말 울음소리가 드물다 / 一春煙景馬希聲
두 이름 대(對)가 되어 서로 겨루나 / 雖云對偶元相敵
용문(龍門)의 상객(上客)에 어찌 미치리요 / 那及龍門上客名
하였더니, 공이 과연 장원에 뽑히고, 마희성(馬希聲)이 무과에 장원이 되었다. 《패관잡기》 《동각잡기》
○ 공이 좌정언(左正言)에서 충주 판관(忠州判官)이 되었다. 그때에 공의 아버지 어연(魚淵)이 전 하양 감무(河陽監務)로서 한산(閑散)한 직에 있었기 때문에 공이 상소하여 자기의 직에 대신하기를 진정하였더니, 태종이 허락하고 어연에게 두 계급을 올려 본직(本職)을 제수하였다. 그뒤 공이 헌납이 되었을 때 동료가 상소하여 계림 부윤(雞林府尹) 윤상(尹祥)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일이 애매하였다.이에 공은 서명을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때에 마침 윤공(尹公)이 있는 곳에 있어서 이 사람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을 상세히 아는 바인데, 감히 없는 것을 날조하여 남을 모함하겠는가.” 하고, 곧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좌석이 흩어지고 말았다. <행장> 《동각잡기》
○ 공은 신장(申檣)과 매우 친했는데,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겨 명성을 얻게되면 모름지기 돌아가 노친을 봉양하자.” 하였다. 집현전에 들어가자 임금의 은혜가 잇달아 겹쳐서 차마 갑자기 떠나지 못하고는 늘 돌아가 부모 봉양함이 늦어짐을 한하여 매양 탄식하기를,“임금을 섬길 날은 길거니와 어버이를 봉양할 날은 짧다.” 하였다. 이에 허리 밑에 건습증(蹇濕症)이 나자, 곧 사직원(辭職願)을 내고 본가가 있는 고향에 내려가 온천에서 목욕하여 병을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 사람을 꼭 써야 할 텐데, 병을 다스려야겠다 하니, 어찌 구태여 만류하겠는가. 병이 낫는대로 빨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창녕(昌寧) 고향집에 이르러서 시를 읊기를,
병으로 돌아오니 한 집이 조용한데 / 謝病歸來一室幽
옛 연못가엔 초목들이 황량하기도 하구나 / 荒凉草樹古池頭
나 같은 이 어찌 공명을 피하는 자이겠는가 / 若余豈避功名者
다만 어버이 살아계시니 멀리 놀진 못하겠네 / 只爲慈親不遠遊
하였다.
그뒤 신장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참판에 이르렀는데, 어변갑의 아들 한림(翰林) 효첨(孝瞻)에게 이르기를, “내가 자네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남몰래 서로 약속하였는데 자네 아버지는 결단성 있게 돌아갔으나 나 혼자서 언약을 저버렸으니 매우 부끄럽네.” 하였다. 권제(權踶)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벼슬을 사양한 이가 둘이 있었을 뿐이니 판부(判府) 허주(許周)와 어변갑이다.” 하였다.
공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모든 아우가 무고하였다. 조석으로 입에 맞는 음식을 드리고 날마다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일삼았다. 조정에서 공의 행실을 높이 여겨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평생을 마쳤다. 《패관잡기》
강석덕(姜碩德)
강석덕은 자는 자명(子明)이며, 호는 완역재(玩易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회백(淮伯)의 아들이다. 음관 출신으로 벼슬이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가 죽으니, 나이가 65세였고, 시호는 대민공(戴敏公)이다.
○ 공은 성격이 드높고 과격하여 한번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자 물러나며 탄식하기를, “사내가 세상에 나서 진실로 뇌락(磊落)하게 살 것이어늘 《명신록(名臣錄)》에는 스스로 즐길만한 도의(道義)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찌 과거 공부를 하여 하늘 아래서 재주를 다투어 평생 출세할 매개를 삼으리오.” 하고는 다시 응시하지 않았다. 《청파극담》
○ 음관 출신으로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보(補)했는데 임금이 공의 학문과 행실을 알아 양근 군수(楊根郡守)를 삼았다가 여러 차례 승진시켜 집의와 승지가 되었다. 그때 세종이 문교를 숭상하여 《오례(五禮)》를 편수하는데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예조의 일을 맡겨 모든 길흉에 관한 큰 예식을 한결같이 공에게 위임하였다.
○ 공은 천성이 호탕하고 정직하고 의기가 넘쳤으며, 어머니 섬기기를 지극한 효도로 하고 형제 사이에 처하는 일과 친구에 대한 접대가 한결같이 성심에서 우러나왔다. 항상 두 아들 희안(希顔)과 희맹(希孟)에게 경계하기를,“사람의 부귀와 영달은 하늘에 달려있으니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은 효제(孝弟)ㆍ충신(忠信)ㆍ예의(禮義)ㆍ염치(廉恥)가 있을 따름이니, 만일 여기에 부끄럼이 있다면 그 나머지는 보잘 것이 없다.” 하였다.
박연(朴堧)
박연은 자는 탄부(坦夫)이며, 호는 난계(蘭溪)이고, 처음 이름은 연(然)이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삼사 좌사(三司左使) 박천석(朴天錫)의 아들이다. 효행으로 정려되었고, 태종 신묘년(1411)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원사 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 공은 영동(永同)의 유생(儒生)으로 젊었을 때 우연히 피리를 익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선수(善手)라 일컬었다. 그뒤 서울에 왔을 때 어떤 광대가 보고서 웃기를, “음절이 야비하여 가락에 맞지 않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고치기도 어렵겠다.” 하니, 공이 굳이 배우기를 청하였다. 며칠만에 광대가 말하기를, “선배님은 가르칠 만합니다.” 하였다.또 며칠 지나서 말하기를, “규범(規範)이 이미 이룩되었습니다.” 하고, 또 며칠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나로서는 미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 급제한 뒤에 또 거문고와 비파 등 모든 악기를 연습하여 정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공의 아들이 계유년 사변에 관계되었으므로 그 역시 이로 인하여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강가에 나가서 전송할 때, 그는 말 한 필과 종 하나를 데리고 나와 행장이 초라하였다. 친구들이 함께 배 가운데에 앉아서 술잔을 베풀다가 손을 잡고 하직할 때 그가 주머니에서 피리를 뽑아 세 곡조를 분 뒤에 떠나니, 그 소리를 듣고 처량하게 느껴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용재총화》
정갑손(鄭甲孫)
정갑손은 자는 인중(仁仲)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니,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공은 얼굴이 잘 생기고 키가 크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기량이 넓었다. 공은 비록 여러 대 재상이었으나 집에 저축한 바 없었으며 베 이불과 부들 자리로 만족히 처하였다. 성품이 강개하여 곧은 말을 잘해 권세 있는 이를 피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탐하는 자들이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들이 자립할 줄을 알았으므로 조정에서 그를 중하게 여겼다.일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조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제수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을 받을 때, 하연(河演)은 겸판서로서, 최부(崔府)는 이조 판서로서 입시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최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연은 다소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온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다.조회가 끝난 뒤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 흐르듯 할 때,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 하였다. 곧 녹사(錄事)를 불러서, “두 분이 매우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 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곧은 도리로 흔들리지 않아 풍절이 늠름하니, 사람들이 홀로 치는 새매에 견주었다.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그의 아우 창손(昌孫)의 비문
○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곧으며 엄준하여 자제가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된 것을 보니, 그의 아들 정오(鄭烏)가 방에 들어 있었다.이에 그는 수염이 꼿꼿하여지며 노하여 시관(試官)을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정오는 학업이 정밀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마침내 시관을 파면시켜 버렸다. 《필원잡기》
○ 공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에 악을 제거하고 선을 드날렸기 때문에 조정의 기강이 크게 진작되었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를 지녔다. 전례에 공회(公會)가 열리면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막차(幕次)를 이웃하였으므로 혹 휘장을 걷고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서 권장음(捲帳飮)이라 하였다. 만일 주금(酒禁)을 만나면 사헌부에서는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마시지 않으나 사간원에서는 마시고 취함이 전과 다름없었다.
어느 날 간관이 술잔을 가득 부어서 희롱하느라 휘장 틈으로 대장(臺長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 역시 희롱하느라 옷소매로 밀어냈는데, 술잔이 휘장틈으로부터 떨어져 굴러서 헌장(憲長 대사헌)의 책상 앞에 가서 멈췄다.모든 대장(臺長)들이 황공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대리(臺吏 사간원과 사헌부의 이속(吏屬)) 역시 서로 쳐다 보면서 감히 얼른 치우지도 못한 채 종일토록 책상 앞에 있었으니, 대중(臺中)에서 혹시나 일이 날까 걱정하였다. 퇴근할 무렵에 공이 아전에게 말하기를, “저 거위알처럼 생긴 것이 무엇인고. 수정구슬이 몇 개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하니, 아전이, “백 알은 들어갈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그가 말하기를, “그 들어왔던 틈으로 던져 버려라.” 하니,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사간원에 아란배(鵝卵杯)가 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들어갔으니, 이는 금령(禁令)을 범하여 만든 것이었다. 《필원잡기》
신석조(辛碩祖)
신석조는 자는 찬지(贊之)이며, 처음 이름은 석견(石堅)이고, 호는 연빙당(淵氷堂)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이고, 병조 판서 신인손(辛引孫)의 아들이다. 병오년(1426)에 생원과에서 장원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 참판 개성 유수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 공의 조부 신유정(辛有定) 평안도 안무사(平安道按撫使)이고, 시호는 무절공(武節公)이다. 이 일찍이 왜적에게 잡혀서 꿇어 앉히고 베이려 할 때, 유정이 왜적의 두 다리 사이에 신낭(腎囊)이 늘어져 있음을 보고는 갑자기 손으로 잡아당겨서 땅에 넘어뜨리고는 칼을 빼어 벴다.그뒤 변방에 장수로서 무공을 세웠으나 성격이 지나치게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반드시 극구 꾸짖은 뒤에야 그쳤다. 공이 매양 말하기를, “할아버지의 급하신 성질을 거울삼아 가죽을 차서 스스로 경계한다.” 하였다.
일찍이 춘추관(春秋館)에서 역사를 편찬할 때 한 하관(下官)과 글씨를 같이 썼는데, 그 사람이 엉겁결에 서리(書吏)를 돌아보며 큰 목소리로, “신석조야, 벼룻물을 가져 오라.” 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여 쳐다보지를 못하였다.공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우리들이 젊었을 때 선생이나 어른 앞에서 실언한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하고, 곧 술을 차려오라 하여 잔 가득히 부어 마주 앉아서 마시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ㆍ남수문(南秀文) 등과 함께 집현전(集賢殿)에서 일시에 문장으로 이름이 날렸으나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안숭선(安崇善)
안숭선은 자는 중지(仲止)이며, 호는 옹재(雍齋)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경자년(1420)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 공은 준수하고 호걸스럽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동부승지가 되었을 때 스스로 나라를 경륜할 만한 재주와 학문이 있다고 믿고 도승지 자리를, 마치 턱에 있는 수염을 뽑듯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도승지 황보인(皇甫仁)이 갈려 갈 때, 공이 후임으로 발탁되었다.임명을 받고 승정원에 이르러 중문에 들어오자 곧 도승지의 자리에 앉으면서 말하기를, “이 자리에 앉아야지.” 하니, 좌승지 김종서(金宗瑞)가 얼굴빛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둘의 사이에 금이 갔는데, 그뒤 공이 병조 판서로 죄를 얻어서 멀리 귀양살이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김종서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 하였다. 《용재총화》
최치운(崔致雲) 경오생이며, 무자년에 사마(司馬)에 올랐다.
최치운은 자는 백경(伯卿)이며, 호는 조은(釣隱)이고,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문과에 급제하여 최윤덕(崔潤德)의 종사(從事)가 되었으며,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고, 다섯 차례 명 나라에 다녀왔다. 경신년(1440)에 죽으니, 나이가 51세였다.
○ 세종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겨 가끔 불러 보고는 국정을 의논하고, 큰일이 있을 때엔 반드시 그와 의논하였다. 그의 천성이 술을 즐겼으므로 세종이 걱정하여 매양 친필로 서찰을 내려서 경계하였는데, 결국 그것을 벽 위에다 붙여 두고 출입할 때마다 보면서 반성하였다. 어떤 때에 바깥에서 많이 마시고 크게 취해서 돌아오면 그 부인이 반드시 그의 머리를 들게 하여 벽을 가리켜 보게 하였다.그러면 그는 정신없이 취한 중에도 머리를 책상에 두드리면서 마치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는 시늉을 하였다. 술이 깨면 곧 말하기를, “나는 임금의 은혜에 감동하여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갑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였다. 마침내 술 때문에 병이 나 마흔이 겨우 넘어서 죽었다. 《소문쇄록》
○ 세종이 일찍이 그에게 명하여 《무원록(無冤錄)》을 주석하게 하였고, 또 명하여 율문(律文)을 강해(講解)하게 하였으며, 판결하기 어려운 형옥(刑獄)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를 불러서 의논하여 억울하지 않게 된 것이 많았다.
김담(金淡)
김담은, 자는 거원(巨源)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을묘년(143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 공은 역수(曆數)와 관상(觀象)에 밝았으므로 일영대(日影臺)와 천문지(天文誌)ㆍ전세(田稅)ㆍ구등(九等)에 관한 법을 모두 어명을 받아 찬정(撰定)하였다. 《영천지(榮川誌)》
○ 공이 기사년(1449)에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명하여 기복(起復)시켜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삼고 천담복(淺淡服)을 내렸다. 공은 여섯 차례나 소를 올려서 사직하였고, 사간원에서도 역시 기복하여 벼슬을 줌이 타당치 않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 집에 있을 때에는 상복을 입고 조정에 와서는 담복(淡服)을 입는 것이 어찌 자식의 애통한 정을 아주 빼앗아 기복시키는 예와 같으리요. 하물며 김담과 같은 재주는 세상에 드물기 때문에 위에서 쓰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하리요.” 하였다. 《김문절유고(金文節遺稿)》 《기복전고(起復典故)》에 상세하다.
김조(金銚)
김조는 호는 졸재(拙齋)이며, 처음 이름은 빈(鑌)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태종 신묘년(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公)이다.
○ 공은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세종이 어느날 잔치를 베풀었을 때 신하가 모두 취하자 세종이 이르기를, “오늘 제군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진술하라.”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하고 부복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이르기를, “신들의 소원도 김조의 것에 넘지 않습니다.” 하여 세종이 웃었다. 《필원잡기》
김돈(金墩)
김돈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참의 김후(金厚)의 손자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인순 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 공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힘을 썼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그의 명성을 듣고 불렀으나 공이 사양하였다. 문과에 오르니 세종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내가 경을 보고자 했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젠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였다.
○ 공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외직을 구하였고, 특별히 역말을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서 봉양에 편하게 하니, 선비들이 그를 영광으로 여겼다.
○ 공은 의상(儀象)에 정통하여 세종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 참여하였다.
○ 공은 오랫 동안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말로 아뢰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승지의 직에 7년이나 있었다.
김하(金何)
김하는 본관이 연안이니, 유후(留後) 김자지(金自知)의 아들이다. 계묘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선공(靖宣公)이다.
○ 공은 중국말 통역을 잘 하였으므로 세종이 특히 사랑하였다. 공은 판사(判事)가 되었을 때 녹명아(鹿鳴兒)라는 기생을 가까이 했는데, 한 종실(宗室)과 도승지 성(姓)이 안(安)이란 자가 모두 그 기생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서로 다투게 되었다. 종실이 자기가 먼저 가까이 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세종이 사람을 시켜 종실에게 이르기를, “나라에 너 한 사람 있고 없는 것은 별 관계가 없지만, 김하는 남이 못하는 일을 하여 중국과 교제하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또 김하는 아들이 없으니, 마땅히 그 기생을 첩으로 삼게 할 것이다. 네가 만일 다툰다면 죄를 주리라.” 하고는, 도승지로 하여금 그에게 이르기를,“너는 이 기생을 첩으로 삼겠는가.” 하니, 공은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그뒤에 그가 상중에 있으면서 기생의 집에 출입하여 사헌부에서 적발하였으나 세종은 이르기를, “내가 준 것이니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주었으니, 비록 하찮은 기술이라도 애석하게 여겨 정려함이 이러하였다. 《소문쇄록》
이맹균(李孟畇)
이맹균은 자는 사원(士原)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장손이다. 나이 13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이다.
○ 공은 세업(世業)을 이어 받아 문명(文名)이 높았다. 일찍이 송도(松都)를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오백년 왕기가 끝나고 말았으니 / 五百年來王氣終
계림(鷄林)을 차지하고 압록강을 차지한 것은 누구의 공이었나 / 操鷄博鴨龍何功
영웅은 간 곳 없고 산천만 의구한데 / 英雄已逝山河在
인물은 옮겨가고 빈 터만 남았구나 / 人物南遷井市空
상원(上苑)엔 가는비 내린 뒤 꽃피고 꾀꼬리 지저귀며 / 上苑鶯花微雨後
여러 능엔 석양 속에 초목이 서 있네 / 諸陵草樹夕陽中
내가 온 이 날에 느낌이 하도 많아 / 我來此日偏多感
지난 일 아득한데 물만 동으로 흐르는구나 / 往事悠悠水自東
하였고, 그는 또 아들이 없음을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사람이 생긴 때로부터 / 自從人道起於寅
아비 자식대를 전해와 이 몸까지 이르렀네 / 父子相傳到此身
내 무슨 죄로 하늘이 돕지 않아 / 我罪伊何天不弔
아비 소리 못들은 채 귀 밑에 흰털만 새로운가 / 未爲人父鬢絲新
하였다. 그뒤 부인이 질투하고 사나와서 가화(家禍)를 일으키자,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귀양살이하다가 죽었다. 《용재총화》
정초(鄭招)
정초는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태종 을유년(1405)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해년(1407)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공은 총명이 뛰어나서 어떤 서적이고 한 번만 보면 외웠으므로, 과거가 이미 박두했으나 허랑하게 놀기를 조금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육경(六經)을 뽑아서 한번 보고는 책을 덮고 다시 읽지 않았으나, 강석(講席)에 이르러서는 오묘한 뜻을 다 설명하여 응답함이 메아리치듯 하였다.일찍이 원수(元帥)의 막부(幕府)에 있을 때 군졸 몇백 명을 한번 보고는 그 얼굴을 다 기억하며 이름까지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인양 심복하였다. 젊었을 때에 어떤 중이 《금강경(金剛經)》 읽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그 경(經)은 한 번 보고 외울 수 있겠노라.” 하니, 중이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외우면 내 성찬을 차릴 것이요, 그대가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대가 성찬을 차리시오.” 하였다. 서로 약속한 뒤 공이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면서 외기를 물 흐르듯이 하니, 반질(半帙)을 채 못외어서 중이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신상(申商)
신상은 자는 득지(得止)이며, 본관은 은풍(殷豐)이다. 나이 13세에 진사가 되고, 15세에 생원을 거쳐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숭정대부 예조 판서에 이르렀고,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64세였고, 시호는 공도공(恭度公)이다.
○ 공이 예조 판서로 있었을 때 허조(許稠)가 이조 판서로 있었다. 공은 해가 중천에 뜬 뒤에 나갔다가 해가 기울면 곧 돌아오는데, 허조는 새벽에 나가서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어느날 허조가 먼저 가서 이조에 앉았다가, 공이 예조에 나왔다가는 얼마 안되어서 도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전갈하기를, “어째서 늦게 왔다가 일찍 나가시오.” 하였더니,공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이 일찍 출근하였으나 무슨 유익한 일이 있으며 내가 비록 늦게 출근하였으나 무슨 해로운 일이 있으리요. 각기 손바닥이나 비빌 뿐이지요.” 하였다. 공은 일을 당하면 그때그때 처리를 잘하였으며, 허조는 부지런하고 충실하였으니 성격이 같지 않았던 것이다. 《용재총화》
권홍(權弘)
권홍은 호는 송설헌(松雪軒)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서 벼슬이 영돈녕 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이고, 저서에 《쌍당집(雙塘集)》이 있다.
○ 공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매우 잘 썼다.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고 향년(享年)이 87세였다.일찍이 남산(南山) 기슭에 집을 세우고 못 두 곳을 파서 연꽃을 심고 폭건(幅巾)과 청려장(靑藜杖)으로 소요하며 거닐어 맑은 운치가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이 쓴 <헌릉비(獻陵碑)>와 <성균관비(成均館碑)>의 전서는 매우 좋은 글씨였다. 한성 판윤으로 있을 때 글을 올려서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울 것을 청했는데, 그 말이 자못 사체에 맞았으므로 세종이 허락하였다.
김문(金汶)
김문은 호는 서헌(西軒)이며,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경자년(1420)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일찍 죽었다.
○ 공은 남보다 총명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더욱이 사학(史學)에 밝았으므로 역대의 고사를 묻는 자 있으면 곧, “아무 책 몇째 장에 있어.” 하고 대답하였는데, 백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세종이 선비들에게 명하여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했을 때에 그의 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총애가 높았으나, 한스럽게도 일찍 죽었다.
공은 천성이 술을 잘 마셨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송조(宋朝)에서 다품(茶品)을 논할 때는 자소탕(紫蘇湯)을 제일로 삼았고, 《사림광기(事林廣記)》에는 궁중의 아름다운 음식으로 찐닭을 제일로 삼았어.” 하니, 공이 미소를 지으면서, “자소탕이 항아리 속의 새로 익은 술에 비해서 어떠하며, 찐닭이 소간적[牛心炙]에 비해서 어떤 것이 나을까.” 하여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필원잡기》
하경복(河敬復)
하경복은,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무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 중추 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정공(襄靖公)이다.
○ 공은 최고의 용장(勇將)으로 당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용재총화》
○ 어머니 꿈에 자라가 품 속으로 들더니 이에 잉태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아명(兒名)이 왕빠[王八]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기운이 남보다 세었다. 갑사(甲士)로 궁문에서 숙직할 때, 마침 동짓날이어서 상림원(上林苑)의 온실에서 기르던 매화 몇 분을 장차 궁문 곁에 두려 할 때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맡은 자가 크게 놀라서 꾸짖으니,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진주에 살고 있었다. 울타리 가에 마소를 맨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를 삼는 것도 이 나무이니,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요.”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거친 것에 대해 웃었으나 기개는 장하게 여겼다. 《필원잡기》
○ 일찍이 장수가 되어 동북면을 지킬 때 야인이 삼백 근 짜리 센 활을 가지고 와서 공에게 당겨 보라고 청하였다. 공은 그들을 위해서 술을 차려 마시게 한 뒤 말하기를, “이 활의 제도가 매우 묘하다.” 하고,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대로 만들게 하고는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불에 구어 힘을 풀리게 하였다. 이에 조용히 당기어 한도대로 버티니, 야인들이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함길도 도절제(咸吉道都節制)가 되어서 변방을 지킬 때, 야인이 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세종이 듣고 중히 여겨 공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오래도록 맡아 보게 하고, 후히 그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이어 호군 홍사석(洪師錫)으로 하여금 편지를 주어 칭찬하기를, “내가 경을 믿기를 은연히 장성(長城)처럼 하였는데,어머니의 아들 기다림과 아들의 모친 그리워함이 이미 5년이나 되었다. 이제 경의 후임을 물색해 보았으나 실로 그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이에 특별히 경의 어머니를 위문하고 도와주노니, 경은 스스로 마음을 풀라. 이제 홍사석을 보내어 경에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의관(衣冠)과 말을 내리노라.” 하였다. 《국조보감》
○ 공이 항상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힘으로 화를 면한 것이 세 번이었다. 태종이 내란(內亂)을 평정하실 때 우연히 대궐에서 숙직하는 친구에게 들어갔는데, 문이 닫쳐서 나올 수 없어 방황하면서 사방을 돌아보다가 군졸에게 끌려 가서 장차 목이 베어지게 되었을 때,팔을 뿌리치고 달아나서 바로 어전에 이르러서 고함치기를, ‘이 같은 장사를 죽이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태종께서 듣고 놓아 주셨다. 또 일찍이 깊은 산중에서 사냥하다가 별안간 사나운 범을 만났는데,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고, 나는 범의 턱밑을 잡아 쥔 채 왔다갔다하며 맨 손으로 싸우다가 굽어 보니, 벼랑 밑에 물이 괸 소(沼)가 있었다.이에 범을 떠밀어서 물 밑에 떨어뜨려 범이 물을 마시고 배가 불러서 힘을 잘 못쓸 때 이를 이용하여 박살하였다. 또 일찍이 국경에서 적을 방어할 때 적의 기병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데, 마침 그 앞 몇십 보쯤 가서 커다란 나무가 있기에 몸을 솟구쳐 재빨리 달아나 먼저 그 나무에 의거하였더니 적이 따라오다가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싸움에 이겼다. 이때에 모두 힘이 없었으면 꼭 죽었을 것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이종무(李從茂)
이종무는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무과에 급제하였고 익대 공신(翊戴功臣)으로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보국대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후공(襄厚公)이다.
○ 기해년(1419) 5월에 왜적이 비인(庇仁)에 침입하고, 또 절제사(節制使) 이사검(李思儉)을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였다.세종이 유정현(柳廷顯)ㆍ박은(朴訔)ㆍ조말생(趙末生) 등을 불러서 적이 비어 있는 틈을 타 가서 대마도(對馬島)를 무찔러 되돌아오는 적을 맞아 싸울 것을 의논하였으나, 모두들, “불가합니다.” 하였는데, 조말생만이 홀로 아뢰기를, “가능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종무를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로 삼아서 세 도의 군함 2백 척을 거느리게 하고, 영상 유정현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았다. 세종이 한강에 거둥하여 그들을 전송하였다.
○ 공이 아홉 절도(節度)의 배 227척과 군사 1만 8천 명을 거느리고 65일 동안 먹을 군량을 싸 가지고 대마도에 이르러서 배 백여 척을 빼앗고 머리 백여 급을 베었으며, 또 적의 집 2천여 호를 불사르고 중국인 백여 명과 왜인 2십여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순몽(李順蒙)
이순몽은 본관은 영천(永川)이니 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의 아들이다. 음관으로 무과에 올라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위양공(威襄公)이다.
○ 공은 여주(驪州)와 이천(利川) 사이에 살면서 농사에 힘썼다. 어느날 들에서 김을 맬 때,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바람이 크게 일면서 커다란 독처럼 생긴 불덩이가 멀리서부터 바퀴처럼 굴러 오는데, 그 소리가 웅장하여 마소가 놀라 뒤로 물러섰다.공이 호미로 그 불덩이를 쳤더니, 작은 아이가 누런 털이 이마를 덮고 파란 눈이 번쩍거리고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데 반이 부러져 마치 짧은 낫과 같았으며, 거꾸로 땅 위에 거꾸러져 있어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였다. 공이 호미로 흔들어 일으켰더니, 하늘이 또 캄캄해지며 비바람이 치더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기재잡기》
김효성(金孝誠)
김효성은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정난 공신(靖難功臣)으로 연산군(延山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숭정대부 병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효양공(孝襄公)이다.
○ 공은 김남수(金南秀) 장양공(莊襄公) 의 아들이다. 남수는 아내 길씨(吉氏)와 따로 살았다. 공의 나이가 네댓 살이 되었을 때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별안간 쌍 비둘기가 모여드니, 공이 말하기를, “저 쌍 비둘기를 보면 암놈 숫놈이 나란히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각기 동쪽과 서쪽에 계시니 어쩐 일인고.” 하고는 이내 울었다.종이 이상히 여겨서 길씨에게 고하니, 그도 역시 울어 동리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공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그의 나이가 57세에 길씨가 죽자, 시묘살이와 초상과 제사에 한결같이 정성껏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갸륵하게 여겼다. 《필원잡기》
조수(趙須) 유방선(柳方善)을 붙였다.
조수는 자는 형보(亨父)이며, 호는 송월당(松月堂)이고, 또는 만취정(晩翠亭)이라 하며,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태종 신사년(140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으며, 저서에는 《만취정집(晩翠亭集)》이 있는데, 죽을 때에 그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 공이 관동(關東)에서 유랑 생활을 한 지 30여 년에 학문에 크게 힘써서 어느 책이고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자못 시명(詩名)이 있어 세종이 매우 사랑하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일찍이 그에게 《이백집(李白集)》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는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면서 굳이 거절하여 받지 않고, “이 속에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이 있습니다.” 하였다. 《청파극담》
○ 공이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서 금고(禁錮)를 당한 지 30여 년이나 되자, 세종이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서 만년에 불러 썼다. 《필원잡기》
○ 세종이 내시로 하여금 족자를 싸서 보내어 그에게 시를 쓰기를 명하였더니, 그가 붓을 뽑아 한번 휘두르니 글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웠다. 한편으로는 읊고, 한편으로는 말면서 말하기를, “늙은이의 서법이 새끼 가진 범의 할퀴는 발톱과 같구나.” 하고 곧 돌려 드리니, 그의 탄솔(坦率)함이 이와 같았다. 《청파극담》
○ 한윤(韓閏)이 당호(堂號)를 공에게 청했더니, 공이 삼외(三畏)라고 편액(扁額)을 써 주었다. 한윤이 묻기를, “선생께서도 세 가지의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세 가지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돈이 있어 술을 마시고 취하여 곧 길게 누워서 코를 골면 벼락도 두렵지 않는 것이 첫째요, 겨울에는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으며,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으며, 독에는 남은 식량이 없고 상자에는 남은 옷이 없어 도둑이 두렵지 않은 것이 둘째요, 10년 동안 벼슬길에 있었으나 한 치만큼 전진하면 한 자만큼 물러서서 부귀는 뜬 구름인 듯 공명은 헌 신짝인 듯 하였으니, 재상도 두렵지 않은 것이 그 셋째일세.” 하였다. 《해동잡록(海東雜錄)》
조오(趙峿) 《과보(科譜)》에는 오(峿)가 오(珸)로 되어 있다.
조오는, 본관이 횡성(橫城)이다. 계묘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굳세어 맑은 절개가 견줄 자 없었으며, 집이 극도로 가난하였다. 일찍이 예랑(禮郞)이 되었을 때 무슨 금기하는 일로 방위를 피해서 셋집에 거처하였는데 땔나무와 식량이 이어지지 못하여 동료들이 백미 서 말로 위문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그뒤 공석상에서 그것을 자랑하니, 어떤 이가 그를 기롱하였다. 일찍이 합천군(陜川郡)의 원이 되었을 때,그 고을에서 나오는 은어(銀魚)가 여름철이라 흔하여 부패할 지경이었으나 처자들에게 먹지 못하게 하였으며, 아들ㆍ사위나 노복들이 오고 갈 때에도 모두 자기 양식을 싸 가지고 다니게 하였다.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집에 있을 때에 집에 아무 것도 없었으나 조금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독실한 군자였다. 《필원잡기》
[주D-002]무원록(無冤錄) :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법례(法例)를 해석한 글.
[주D-003]익대 공신(翊戴功臣) : 예종(睿宗) 때 남이(南怡)를 죽인 공로로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38인에게 내린 훈호(勳號).
[주D-004]삼외(三畏) : 《논어》에 “군자(君子)가 두려워하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하늘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두려워하며, 성인(聖人)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