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고려사절요에기록된 최유경

고려밀직부사 평도공 최 유경 관련 고려사절요 기록 (펌)

아베베1 2009. 11. 2. 12:58

고려사절요 제32권
 신우 3(辛禑三)
계해신우 9년(1383), 대명 홍무 16년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무진신우 14년(1388), 대명 홍무 21년

○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염흥방(廉興邦)이 우에게 현상금을 걸고 급히 조반(趙胖)을 잡으라는 영을 내리도록 권하였다. 정자교(鄭子喬)가 조반을 붙잡아서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때에 흥방이 순군 상만호(上萬戶)로 있었는데, 흥방과 도만호 왕복해ㆍ부만호 도길부ㆍ이광보(李光甫)ㆍ위관(委官) 윤진(尹珍)ㆍ강회백(姜淮伯)이 대간(臺諫)ㆍ전법(典法)과 함께 신문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6, 7명의 탐욕스런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풀어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백성들을 모질게 해치니 이들은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李光)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도와 인민의 적을 제거하려 하는 것뿐인데, 어째서 반란을 꾀했다고 하는가." 하였다. 종일토록 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흥방은 기어이 조반을 허위자백시키려고 매우 참혹하게 치죄(治罪)하였다. 조반은 꾸짖고 욕하며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국적인 너희들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고, 너는 나와 서로 송사하는 사람인데 어째서 나를 국문하느냐." 하였다. 흥방은 더욱 노하여 사람을 시켜 마구 그 입을 치게 하였다. 복해는 졸면서 듣지 못하는 체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좌사의 김약채(金若采)만이 불가하다 하여 고문을 그치게 하였다.
경진일에 신우가 최영의 집에 가서 좌우를 물리치고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하였는데, 대개 조반의 옥사를 의논한 것이었다. 이날 흥방은 다시 반을 국문하려고 순군에 이르러 옥간과 대간을 청하였으나 모두 나오지 않았다.
임오일에 우(禑)가 반과 그 어미와 아내를 석방하라고 명하고, 또 의약(醫藥)과 갖옷[裘]을 주고, 영을 내리기를, “재상들이 이미 부자가 되었으니 녹을 주는 것을 정지하고 우선 먹을 것이 없는 군대에 나누어 주라." 하고, 드디어 흥방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국인(國人)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은 명철하시다." 하였다.
○ 계미일에 우가 최영과 우리 태조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영삼사사 임견미와 찬성사 도길부를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사자가 견미에 집에 이르니, 견미는 명을 거역하고 노한 목소리로 사자에게 말하기를, “7일마다 녹을 주는 것은 옛 제도이다. 지금 까닭없이 폐지하니 어찌 임금의 도리인가. 옛날부터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은 신하가 있다." 하고, 드디어 난을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달려가 그 무리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을 탄 갑사(甲士)들이 이미 길을 막아 나가지 못하고 되돌아 와서 견미에게 고하였다. 견미의 집이 남산(男山) 북쪽에 있었는데 조금 뒤에 남산을 쳐다보니 기병(騎兵)이 이미 대열을 이루었다. 견미는 매우 놀라 저항을 포기하고 체포되었는데 탄식하기를, “광평군(廣平君)이 나를 그르치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견미의 흥방이 최영이 맑고 정직하며, 또 중요한 병권을 쥐고 있음을 꺼리어 항상 해치려 하였으나, 이인임이 굳이 말렸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순군이 흥방 등의 죄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니, 우가 크게 노하여 전 평리 왕안덕을 도만호로, 지문하(知門下) 이거인(李居仁)을 상만호로, 우리 공정왕(恭靖王)을 부만호로 삼아서 다시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밀직부사 임치(林㮹)는 강제로 자기 집에 돌려보내고, 찬성사 왕복해는 성(姓)을 주어 아들을 삼았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최영과 함께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복해가 다른 뜻이 있어서 돌격 기마대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순찰한다는 핑계로 최영의 군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이 갑옷을 입고 호상에 걸터앉아 부하 장수들을 지휘하여 눈을 부치지 않으니 복해가 해치지 못하였다.
을유일에 우시중(右侍中) 이성림(李成林), 대사헌 염정수(廉廷秀), 지밀직(知密直) 김영진(金永珍)ㆍ복해ㆍ치(치)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병술일에 흥방ㆍ견미ㆍ길부ㆍ성림ㆍ정수ㆍ복해ㆍ영진ㆍ치를 처형하고, 또 그 족당(族黨) 찬성사 김용휘(金用輝), 삼사우사 이존성(李存性), 판개성(判開城) 임제미(林齊味), 밀직 홍징(洪徵)ㆍ임헌(任憲)ㆍ박인귀(朴仁貴)ㆍ반덕해(潘德海)ㆍ이희번(李希蕃), 개성 윤 정각(鄭慤), 전법판서 이송(李竦), 우시중 반익순(潘益淳), 우사의 신권(辛權), 대호군 신봉생(辛鳳生), 집의 이미생(李美生), 좌랑 홍상연(洪尙淵),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김만흥(金萬興) 등을 베고, 드디어 견미 등의 집을 적몰하였다. 이에 여러 도에 찰방(察訪)을 나누어 보내어 빼앗겼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존성은 인임의 종손으로 처음에는 인임의 하는 짓을 본받았으나 뒤에는 자못 뉘우쳤다. 서경 윤(西京尹)으로 있을 때에는 치적이 제일이어서 백성들이 추모(追慕)하였다. 임헌은 집에는 한 섬의 저축도 없으므로 옥관이 면죄시키려 하였으나, 영이 임헌이 흥방의 세력을 빙자하여 대사헌이 되어도 곧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여, 드디어 베니, 당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만흥은 견미의 가신(家臣)으로 탐욕스럽고 포학하며, 간사하고 교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였다. 과거에 인임이 정권을 잡으려고 꾀하여 신우를 세우니, 한 나라의 권세가 그 손아귀 안에 있었고, 그 도당들이 이리저리 엉켰는데 견미는 그 심복이 되었다. 문신들을 미워하여 추방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흥방도 역시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뒤에 견미는 흥방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이라 하여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흥방도 역시 전날 귀양갔던 것을 징계하여 몸을 보존하려고 꾀하여 오직 인임과 견미의 말만을 좇았다. 이에 흥방의 동모형(同母兄) 이성림(李成林)을 시중(侍中)으로 삼으니 권간(權奸)의 도당이 양부(兩府)에 깔려 있고, 안팎의 요직은 그들의 사당(私黨) 아닌 것이 없어서 권세를 잡아 마음대로 방자하게 관작을 팔고, 남의 전토를 빼앗아 산과 들을 모두 점령하며, 남의 노비를 뺏은 것이 천 백으로 떼를 이루었으니, 주현(州縣)ㆍ진역(津驛)ㆍ능침(陵寢)ㆍ궁고(宮庫)의 밭이 모두 침탈을 당하였다. 주인을 배반한 노예와 부세(賦稅)를 도피한 백성들이 저자같이 모여 들어서 안렴사와 수령이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 백성은 이산하고, 도적은 성하여 공(公)과 사(私)의 재물이 고갈되었다. 그러나 최영과 우리 태조가 그들의 행위에 분격하여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우(禑)를 인도하여 그들을 제거하니, 국인(國人)이 크게 기뻐하여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으로, 이색을 판삼사사로, 우현보ㆍ윤진ㆍ안종원을 문하찬성사로, 문달한(文達漢)ㆍ송광미(宋光美)ㆍ안소(安沼)를 문하평리로, 성석린(成石璘)을 정당문학으로, 왕흥을 지문하사로, 인원보(印原寶)를 판밀직사사로 삼았다.
○ 밀직사사 조임(趙琳)을 남경에 보내어 조회를 청하기로 하였는데, 조임이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 계사일에 서성군(瑞城君) 염국보(廉國寶), 동지밀직 염치중(廉致中), 전 지밀직 전빈(全彬), 밀직부사 안사조(安思祖), 밀직제학 박중용(朴仲容), 전 법판서 김을정(金乙鼎), 대호군 김함(金涵)ㆍ신정(辛靖), 성균좨주(成均祭酒) 윤전(尹琠), 사헌장령 김조(金肇), 호군 최지(崔遲)ㆍ임맹양(林孟陽), 사복정 감성단(甘成旦), 전 강릉 부사 도희경(都希慶), 환자 조원길(趙元吉) 등 50여 명을 베었는데, 이는 모두 처형당한 임견미 등의 족당(族黨)이었다.
○ 갑오일에 비로소 백관의 녹을 주었다.
○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견미의 무리가 빼앗아 점유하였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고, 안무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견미 등의 가신과 사나운 종을 잡아서 무려 천여 명이나 베고, 재산도 모두 몰수하였다. 성림의 당인 서규(徐規)가 이천(利川)에 있었는데, 안집(安集)ㆍ이안생(李安生)이 잡으려 하니, 규가 도망갔다. 안생이 그의 아내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마침내 간통한 뒤에 그의 아내를 시켜 규를 유인하여 오게 하고, 안생이 잡아 죽였다. 뒤에 일이 발각되어 안생을 베고, 그 아내는 전객시(典客寺)에 붙여서 종으로 만들었다.
○ 종실(宗室)ㆍ기로(耆老)ㆍ대간(臺諫)ㆍ육조(六曹)를 시켜 문무(文武) 현량(賢良)을 천거하게 하였다.
○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하고, 전 문하평리 이인민(李仁敏)을 계림부(雞林府)에 귀양보내어 봉화대(烽火臺) 군사에 배치하고, 대호군 이환(李瓛)과 진사 도유(都兪)를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인임이 권세를 잡은 지가 오래되었고, 부드러운 태도로 아첨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니, 문객들이 뜰에 가득하여 각각 자신을 특별히 후대한다고 여겼다. 충성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고양이[李猫]'에 비유하였다. 최영은 인임이 자기를 두둔하여 준 것을 은덕으로 생각하여 우에게 아뢰기를 "인임이 계책을 결정하고 대국을 섬기어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공이 허물을 덮을 만합니다." 하여 마침내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하였다. 국인(國人)이 탄식하기를, “임(林)ㆍ염(廉)의 옥사에 큰 도적이 그물에서 빠졌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운 정으로 늙은 도적을 살렸다." 하였다. 환(瓛)은 인임의 얼자(孽子)인데 임견미의 사위였으며, 유(兪)는 도길부의 아들로서 우인열(禹仁烈)의 사위였다. 최영은 본래 인열과 친하였으므로 유도 죽음을 면하였다. 또 전 찬성사 박형(朴形)을 각산수(角山戍)로, 지신사 권집경(權執經)을 안동(安東)으로, 우대언 이직(李稷)을 전주로 귀양보냈다. 형은 중용의 아비이고, 집경은 인임의 첩의 사위이며, 직은 인민(仁敏)의 아들이었다. 과거에 이인복(李仁復)이 인임과 인민의 사람됨이 미워서 말하기를, “나라를 결딴내고 집안을 망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아우다." 하였는데, 그 손자 존성(存性)이 과연 연좌되었다.
○ 2월에 우가 견미ㆍ흥방 등의 악기를 화원에서 점검하니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 안숙노(安叔老)의 딸을 봉하여 현비(賢妃)로, 소매향(小梅香)을 화순옹주(和順翁主)로, 연쌍비(燕雙飛)를 명순옹주(明順翁主)로 삼았다. 이날 우리 태조와 최영이 정방에 들어갔다. 영이 임견미ㆍ염흥방이 쓴 사람들을 모두 내쫓으니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ㆍ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사대부들이 모두 그들이 등용한 사람이니, 이제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따질 뿐이다. 어찌 그 과거를 허물할 수 있는가." 하였으나 영이 듣지 않았다.
○ 우가 동강에 가서 봉천선(奉天船)을 타고 음악을 연주하며, 유숙하고는 연쌍비에게 말 두 필을 주고, 또 기생 15명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었다.
○ 최영이 여러 재상과 함께 정요위(定遼衛)를 칠까, 화친을 청할까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을 따랐다. 이때 요동 도사가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 방을 붙이기를, “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해 있던 군민(軍民)ㆍ한인(漢人)ㆍ여진ㆍ달달ㆍ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 설장수(偰長壽)가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구두로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고려가 짐의 약속을 듣기를 원하므로 해마다 말을 조공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아무데도 소용이 없고, 또 어렵다고 호소하므로 내가 명령하기를 세공(歲貢)은 하지 말고 3년에 종마(種馬) 50필씩만 바치라 하였는데, 가져온 말이 또 소용이 없어서 뒤에 5천 필을 사왔으며, 또 모두 약하고 작아서 우리 말 한 필 값이면 그 말 두세 마리는 살 수 있었고, 지금 또 의관(衣冠)을 고친 사례로 말을 가져왔는데, 발굽이 거칠고, 엉덩이 살만 풍만하였다. 기왕 바치는 것이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것은 반드시 사신이 오다가 서경(西京)에 이르러 팔아 바꿔서 온 것이다. 이미 장자온을 금의위(錦衣衛)에 가두었으니, 해가 지난 뒤에 죄를 주겠다. 네가 돌아가서 집정 대신에게 고하라. 짐이 이미 통상을 허락하였는데, 그대들 편에서는 도리어 분명한 증명서를 가지고 와서 무역하게 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시켜 대창(大倉)에 와서,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는지 배를 만들고 있는지를 엿보고, 가서 소식을 알려주는 우리편 사람에게 중한 상을 주니, 이것은 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소견이다. 지금부터는 조심하여 이와 같은 짓을 하지 말고, 또 사신을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 나라에 속하였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고, 개원ㆍ심양ㆍ신주(信州) 등처의 군사와 백성은 생업을 회복하도록 들어주라" 하였다. 황제가 또 약재를 주었다.
○ 여러 도의 양반ㆍ백성ㆍ향리(鄕吏)ㆍ역리(驛吏)의 적(籍)을 만들어 군대로 삼아 일이 없으면 농사에 힘쓰고 일이 있으면 징발하게 하였다.
○ 5도의 성을 수축하라 명하고, 여러 원수를 서북의 변방에 보내어 불의의 변에 방비하게 하였다.
○ 최영이 백관을 모아서 철령 이북을 명 나라에바칠 것인가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불가하다 하였다.
○ 우가 최영과 함께 비밀리에 요동을 치기를 의논하였다.
○ 경성 방리(坊里)의 군사를 징발하여 한양(漢陽)의 중흥성(重興城)을 수축하였다.
○ 원주 목사 서신(徐信)을 베었는데, 이성림의 동서였다. 우리 태조가 사람을 시켜 최영에게 말하기를, “죄의 괴수가 이미 멸족되고 흉한 무리가 이미 제거되었으니, 지금부터는 형벌과 살육을 그치고 포용하는 명을 반포함이 마땅하다." 하였으나, 영이 듣지 않았다.
○ 우가 복해(福海)의 준마(駿馬)를 가져다 타며 이르기를, “잘 놀라지는 않는가." 하였다. 판도판서 송빈(宋贇)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복해도 부리기 어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우가 노하여 이르기를, “네가 나에게 적의 말을 취했다고 그러느냐." 하고, 마침내 죽였다.
○ 순군(巡軍)이 견미ㆍ익순ㆍ흥방ㆍ길부의 아내를 고문하고 재산을 내놓으라고 독촉하여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뒤에 성림ㆍ복해ㆍ존성ㆍ영진ㆍ임치ㆍ신권ㆍ손중흥 등의 처를 임진강에 던져 죽였다. 이에 처형당한 자의 자손을 빠짐없이 잡아 죽였는데, 포대기 속에 있는 어린 것까지 모두 강에 던지니, 숨어서 면한 자가 거의 없었고, 그 아내와 딸로 관비(官婢)에 몰입(沒入)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다.
○ 정당문학 곽추(郭樞)를 남경에 보내어 약재를 하사한 것을 사례하고,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은 철령 이북을 돌려 주기를 청하였다.
○ 3월에 우가 호곶(壺串)에 있어 기린선(麒麟船)ㆍ봉천선 등의 배를 타고 갖은 잡된 놀이를 하였다. 칼을 잡고 좌우를 물리치고 홀로 배 가운데 앉아서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이르기를, “부왕(父王)께서 밤에 자다가 시해되었으니 내가 이를 매우 경계한다." 하였다.
○ 우가 최영의 딸을 맞아들였다. 처음에 우가 최영의 딸을 들이고자 사람을 시켜 말하니, 영이 불가하다고 여겨 이뢰기를, “신의 딸이 못생겼고, 또 정실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측실(側室)에 두고 있으니 지존(至尊)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들이고자 하신다면 노신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울며 굳이 거절하였다. 부하 정승가(鄭承可)ㆍ안소(安沼) 등이 우의 뜻에 영합하여 마침내 영의 뜻을 꺾었다. 이날 우가 상의(尙衣)에서 옷을 늦게 바쳤다 하여 별감 강의(康義)와 원윤해(元允海)를 베었다.
○ 전 전리판서 허금(許錦)이 졸하였다. 허금은 젊어서부터 병이 있어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재물을 털어 약을 지어 병이 있는 자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친히 가서 문병하고 약을 주어서 살린 것이 대단히 많았다. 불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 연안(延安) 부사 유극서(柳克恕)와 환자 김실(金實)을 베었다. 극서는 견미의 문객인데, 또 이존성의 말을 듣고 몰래 김실을 옥에서 도망가게 하였었다.
○ 최씨를 봉하여 영비(寧妃)로, 또 신아(申雅)의 딸을 봉하여 정비(正妃)로, 왕흥(王興)의 딸을 선비(善妃)로 삼았다. 이근비(李謹妃)로부터 이하 최영비(崔寧妃)ㆍ노의비(盧毅妃)ㆍ최숙비(崔淑妃)ㆍ강안비(姜安妃)ㆍ신정비(申正妃)ㆍ조덕비(趙德妃)ㆍ왕선비(王善妃)ㆍ안현비(安賢妃)와 소매향ㆍ연쌍비ㆍ칠점선(七點仙) 등 세 옹주(翁主)의 여러 궁에 공급하려는 물품은 창고가 모두 비었으므로 미리 3년 동안의 공세(貢稅)를 징수하였으나 부족하여 또 가외로 더 거두니 그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다.
○ 첨서밀직 하륜(河崙)을 양주(襄州)로,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을 순천(順天)으로, 첨서밀직 이숭인(李崇仁)을 통주(通州)로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는데, 인임의 인척이었기 때문이다.
○ 공산(公山)부원군 이자송(李子松)을 죽였다. 처음에 최영이 우에게 권하여 요동을 치려 하니, 자송이 영의 집에 가서 불가하다고 온 힘을 다해 말하였다. 영이 그를 견미와 당(黨)을 지어 붙었다 하여 곤장 1백 7대를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귀양보내기로 하였다가 조금 뒤에 죽였다. 자송이 청렴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시 정승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가 죽자 듣는 사람들이 슬피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사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여 요동(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역참(驛站) 70군데를 두었다." 하였다. 우가 동강에서 돌아오다가 말 위에서 울며 이르기를, “군신들이 요동을 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 최영이 동교(東郊)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 대명(大明)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우가 병을 칭탁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판삼사사 이색(李穡)이 백관을 거느리고 득명에게 나아가서, 돌아가 황제께 잘 아뢰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득명이 말하기를, “천자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하였다. 최영이 노하여 우에게 아뢰고,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이른 자를 죽이니, 죽은 자가 모두 21명이나 되었다. 이사경(李思敬) 등 5명만을 그 지방에 머물러 두고 단속하게 했다.
○ 경자일에 우가 경내의 죄인을 용서하고, 드디어 서해도로 가는데 영비(寧妃)와 최영이 따랐다. 세자와 여러 비를 한양산성에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에게 명하여 경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서쪽으로 해주 백사정(百沙亭)에서 사냥한다고 일컬었는데, 실상은 요동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때 전라ㆍ경상도는 왜적의 소굴이 되고, 서북면은 땅이 분할되어 빼앗길 염려가 있으며, 경기ㆍ교주ㆍ양광도는 성을 수축하기에 피곤하고, 서해도와 평양은 사신을 영접하기에 지쳤는데, 게다가 군사를 징발하니, 8도가 소요하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어 안팎에서 원망하였다.
○ 여름 4월 1일 을사일에 우가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요양(遼陽)을 치려 하니 경 등은 힘을 다하여야 한다." 하였다. 태조가 이뢰기를,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슬리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한 것이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이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왜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세 번째 불가한 것이요, 때가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는 것과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 네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하니, 우가 그럴듯하게 여겼다. 태조가 물러나와 최영에게 말하기를, “그리하겠소." 하였다. 밤에 최영이 다시 들어가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말을 받아들이지 마소서." 하였다. 다음날 우가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는 없다." 하자, 태조가 아뢰기를, “반드시 큰 계책을 성취하려거든 대가를 서경(西京)에 머물러두고 가을을 기다려 군사를 내면 곡식이 들에 널려 있어 대군의 양식을 충족할 수 있으니, 북을 울리며 전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출병할 때가 아니니 비록 요동 한 성을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한창 비가 와서 군사가 전진할 수 없으니 군사가 태만해지고, 양식이 떨어지면 화만 초래할 뿐입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하지마는, 신등은 비록 살아있으나 이미 실책을 하게 되었으니 무슨 소용입니까." 하였으나, 우는 듣지 않았다. 태조가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부하 장사들이 말하기를,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화(禍)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하였다.
○ 정미일에 우가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를 독촉하고 징집하여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데에 대호군 배구(裵矩)에게 감독하게 하고, 임견미ㆍ염흥방 등의 가재를 배로 서경에 운반하여 군사의 상(賞)에 충당하기로 하며, 또 도성 안팎의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로 만들었다. 병진일에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 도원수 심덕부와 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 도원수 왕안덕,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 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 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雞林) 원수 경의(慶儀), 안동(安東) 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ㆍ안경(安慶)ㆍ왕빈(王賓)을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를 우군도통사로 삼아서 안주도 도원수 정지(鄭地)와 상원수 지용기(池湧寄), 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 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 부원수 구성노(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ㆍ배극렴(裵克廉)ㆍ박영충ㆍ이화(李和)ㆍ이두란(李豆蘭)ㆍ김상(金賞)ㆍ윤사덕(尹師德)ㆍ경보(慶補)와 팔도도통사 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ㆍ이을진(李乙珍)ㆍ김천장(金天莊)을 예속시켰다. 좌우군이 모두 3만 8천 8백 30명이고, 심부름꾼이 1만 1천 6백 명이었다.
○ 정사일에 우가 봉천선(奉天船) 도원수 동지밀직 이광보(李光甫)에게 명하여 돌아가 개경(開京)과 서강(西江)에 주둔하여 왜적을 방비하게 했다.
○ 경신일에 우가 대동강에 가서 온갖 놀이를 베풀고, 온종일 호악(胡樂)을 연주하였다. 순군만호부 지인(知印)이 왕명을 위조하여 군사 10명을 놓아주었으므로 목을 베어 조리돌리었다.
○ 신유일에 좌우군도통사가 군사를 출발시키려 하는데, 우가 술에 취하여 날이 늦도록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직하지 못하였다. 우는 술이 깨자 석포(石浦)에서 뱃놀이를 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여러 원수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옷과 갑주(甲冑)와 궁검(弓劍)과 말을 차등 있게 주고는 새벽까지 호악을 연주하였다.
○ 임술일에 조민수는 좌군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는 우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면서 군사를 10만이라 군호(軍號)하였다.
계해일에 영이 우에게 아뢰기를, “지금 대군이 길에서 만일 한 달간이나 지체한다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신이 가서 독려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이 가면 누구와 함께 정사를 하겠는가." 하였다. 영이 굳이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도 가겠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근자에 내가 요동에 갔었는데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를 치러 가고 성중에는 다만 지휘하는 자 한 명이 있을 뿐이니, 만일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이 크게 기뻐하여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
○ 갑자일에 우가 대동강 부벽루에서 호악(胡樂)을 울리고 직접 호적(胡笛)을 불었다. 말 먹이는 사람이 벌벗고 강에서 말을 씻기니, 우가 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 하여 베었다. 이때부터 항상 대동강에 가서 즐기며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 을축일에 홍무 연호를 정지하고 백성들에게 다시 호복(胡服)을 입게 하였다.
○ 왜적이 초도(椒島)에 들어왔다. 이때 경성의 장정들이 모두 종군(從軍)하고, 오직 노약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밤마다 봉화가 여러 번 오르는데 경성이 텅 비었으니,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조석으로 안심할 수가 없었다.
○ 우가 사냥하려고 나가면서 말 한 필을 끌어내어 베며 이르기를, “이 말이 자주 나를 놀라게 하였다." 하였다. 또 길에서 도망하는 군사 2명을 보고 즉시 명하여 베었다. 우의 음란과 살육이 날로 심해졌다.
○ 무진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 문달한ㆍ김종연(金宗衍)ㆍ정승가와 환자(宦者) 조순(曹恂)ㆍ김완(金完)을 보내어 좌우도통사와 여러 장수에게 금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주고, 도진무(都鎭撫)에게는 모두 옷을 주도록 하였다.
○ 5월 1일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 우가 대동강에서 마음껏 즐기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우는 나가 놀 때마다 호악을 연주하고, 광대를 시켜서 갖은 놀이를 벌였으며,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출입하며 피리를 불었다. 왕과 신하가 음란하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 왜선 80여 척이 와서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가까운 여러 고을을 침범하였다. 우가 상호군 진여의(陳汝宜)를 전라도ㆍ양광도로 보내어 병을 핑계대고 북쪽 정벌에 나가지 않거나, 자제와 노예로 대행시킨 자는 모두 왜적을 막게 하고, 피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고 그 재산을 적몰하게 하였다.
○ 우가 영비와 함께 부벽루에 가서 활을 쏘기도 하고, 격구를 하기도 하다가, 말 기르는 사람을 죽이려 하니, 최영이 죽이지 말라고 청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당신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면서 왜 나에게는 금하는가." 하였다. 영이 아뢰기를, “신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좌우에 눈짓하여 마침내 말 기르는 사람을 베었다.
○ 경진일에 좌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둔을 쳤는데,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다. 우가 곳곳에서 베도록 명령하였으나 그치게 하지는 못하였다.
○ 최영이 우에게 청하기를, “전하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노신이 여기서 장수들을 지휘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선왕께서 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정(南征)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경과 함께 있지 않을 수 있는가." 하였다.
○ 갑신일에 대동강 물이 붉어졌다.
○ 이성(泥城) 원수 홍인계(洪仁桂)와 강계(江界) 원수 이억(李薿)이 먼저 요동 지경에 들어가서 죽이고 노략하여 돌아오니, 우가 기뻐하여 금정아(金頂兒)와 무늬 있는 비단을 내려 주었다.
○ 병술일에 좌우군 도통사가 아뢰기를, “신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니, 앞에 큰 내가 있는데 비가 내려 물이 넘쳐 첫째 여울에서 휩쓸려서 빠진 자가 수백 명이요, 둘째 여울은 더욱 깊어 섬 가운데에 머물러 둔을 치는 것은 한갓 양식을 허비할 뿐입니다. 여기서 요동성에 이르는 사이에 큰 내가 많아서 무사히 건널 것 같지 않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상황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도평의(都評議)의 지인(知印) 박순(朴淳)에게 부쳐 아뢰었는데,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황송합니다. 그러나 큰 일을 당하여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것은 불충(不忠)입니다. 어찌 감히 부월(鈇鉞)을 피하여 묵묵히 있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인데, 우리 나라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이래로 부지런히 대국을 섬겼고, 현릉(玄陵)께서 대명(大明)에 복종하고 섬겨 그 표문에 이르기를, '자손 만대가 되도록 길이 신첩(臣妾)이 되겠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이어서 해마다 조공 바치는 물건을 한결같이 조서대로 하니, 이에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의 시호를 주며 전하의 작위를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이요, 전하의 거룩한 덕입니다. 이제 유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위(衛)를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시켜서 표문을 받들어 진달하였으니 대단히 좋은 계책인데,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는 것은 종사와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무덥고 장마가 져서 활이 풀리고 갑옷이 무거워 군사와 말이 함께 지쳤으니, 몰아서 견고한 성 밑에 다다르면 싸워도 반드시 이기지 못 하고 쳐도 반드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못하고 진퇴가 곤란하게 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회군을 명령하여 삼한 백성의 기대에 맞추소서." 하였으나, 우와 최영은 듣지 않고 환자 김완(金完)을 보내어 빨리 진군하라고 독촉하였는데, 군중에서 완을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았다. 최영이 오랑캐 군사와 함께 요동을 협공하려고 배후(裵厚)를 원 나라에 보냈다. 그때 망한 원 나라의 남은 종자는 사막으로 도망가 헛칭호만 일컫고 있었는데, 최영이 그들의 응원을 받으려 하였으니, 그 계책이 허술하기가 이와 같았다.
○ 양광도 안렴사 전리(田理)가 보고하기를, “왜적이 도내 40여 군을 침범하였는데 지키는 군사의 수가 적고 약하여 사람 없는 지역을 밟는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원수 도흥(都興) ∙ 김주(金湊) ∙ 조준(趙浚) ∙ 곽선(郭璇) ∙ 김종연(金宗衍) 등을 보내어 막고, 한양에 있는 여러 비(妃)를 모두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 을미일에 우가 성주(成州) 온천에 갔다. 좌우군 도통사가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군사를 돌이키도록 허락하기를 청하였으나, 최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군중에서 헛소문이 돌기를, “태조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향하려고 이미 말에 올랐다." 하였다. 군중이 흉흉하였는데, 민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단기(單騎)로 태조에게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공은 이렇게 하지 말라." 하고,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만일 상국의 지경을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생민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다. 내가 순(順)과 역(逆)으로써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영이 또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진달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최영)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히 하지 않으랴."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의 안위가 공의 한 몸에 달려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을 건너는데 태조가 백마를 타고 붉은 활과 백우전(白羽箭)을 메고 강 건너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중에서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예부터 이와 같은 사람이 있지 않았고, 지금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하였다. 이때 장마가 며칠이 되어도 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군사가 건너고 나자, 큰물이 갑자기 닥쳐 온 섬이 잠기므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童謠)에, '목자득국(木子得國).'이란 말이 있어 군사와 백성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하였다.
정유일에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달려가 우에게 고하였다. 이날 밤에 우리 공정왕(恭靖王)이 그 형 방우(芳雨)와 이두란의 아들 화상(和尙), 상호군 유용생(柳龍生), 최고시첩목아(崔高時帖木兒)와 함께 우(禑)가 있는 성주(成州)에서 태조의 군중으로 달려왔다.
무술일에 우가 대군이 이미 안주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달려 돌아와 밤에 자주(慈州) 이성(泥城)에 이르러 영을 내리기를, “정벌하러 갔던 여러 장수가 제 마음대로 회군하였으니, 너희 대ㆍ소 군민들은 마음을 다하여 막으면 반드시 크게 상을 주겠다." 하였다. 회군하는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빨리 가면 반드시 싸울 터이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 하고, 매번 군사를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승여(乘輿)를 범하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백성의 오이 한 개라도 빼앗으면 역시 죄를 받을 것이다." 하고, 길가에서 사냥을 하며 일부러 행군을 늦추게 하였다.
기해일에 우가 평양에 이르러 재물과 보화를 거두어서 대동강을 건너 밤에 중화군(中和郡)에 닿았다.
신축일에 우가 길에서 모든 군사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 사잇길을 따라 빨리 달려 기탄(岐灘)에 이르렀다. 이튿날 아침에 서울에 돌아와 화원으로 들어가니, 따르는 자가 겨우 50여 기(騎)였다. 서경에서 경성에 이르는 동안에 우를 따르던 신하와 백성들이 술과 음료를 가지고 대군을 맞이하는 자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최영이 막아 싸우고자 백관에 명하여 병기를 가지고 호위하게 하였다.
○ 6월 초하루 계묘일에 모든 군사가 근교(近郊)에 와서 둔을 치고 왕에게 올리는 글을 김완에게 주었는데, “우리 현릉께서 지성으로 대국을 섬겨, 천자가 일찍이 우리를 공격할 뜻이 없는데, 지금 영이 총재가 되어서 조종(祖宗) 이래로 대국을 섬기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대군을 몰아 상국을 범하려고 하여 무더운 여름에 군사를 움직이니, 삼한이 농기(農期)를 잃고, 왜놈들이 빈틈을 타서 깊이 들어와 침범하여 우리 인민을 죽이고 우리 창고를 불태웠습니다. 게다가 한양에 천도하여 중외가 소요하니, 지금 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종사(宗社)를 전복시킬 것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우가 진평중(陳平仲)을 보내어 여러 장수에게 전교(傳敎)하기를, “명을 받아 국경을 나갔다가 이미 절제(節制)를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고, 또 강상(綱常)을 범하여 이런 분란의 조짐을 부른 것은 진실로 부덕한 나 때문이다. 그러나 군신의 대의는 실상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경이 글 읽기를 좋아하니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리오. 하물며 또 강토는 조종에게서 받았으니 어찌 쉽게 남(명 나라)에게 줄 수 있는가. 군사를 일으켜 막는 것이 낫겠다 하여 여러 사람에게 모의하니, 모두들 가하다 하였는데, 이제 어찌 감히 어기는가. 비록 최영을 지목하여 핑계하였지만 영이 내 몸을 호위하는 것은 경들이 아는 것이요, 우리 왕실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 역시 경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교서(敎書)가 이르는 날에 완미(頑迷)한 것을 고집하지 말 것이며, 잘못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말고 함께 부귀를 보존하여 시종(始終)을 도모하기를 내가 진실로 바라노니,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또 설장수를 보내어 군사 앞에 나가서 장수들에게 술을 주고 그 뜻을 알아보려 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나와서 도성 문 밖에 둔을 쳤다. 동북면 백성들과 여진(女眞)사람으로 본래 종군하지 않았던 자들이 태조의 회군하는 것을 듣고 앞다투어 떨쳐 일어나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오는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우가 이에 창고의 금과 비단을 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수십 명을 얻었는데, 모두 창고에 속한 노예와 시정잡배들이었다. 여러 도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원조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고, 민수 등의 관작을 삭탈하고, 최영을 문하좌시중으로, 우현보를 우시중으로 삼고, 송광미를 찬성사로, 안소를 평리로, 우홍수를 대사헌으로, 정승가를 응양군 상호군으 로, 조규(趙珪)를 밀직부사로, 김약채(金若采)를 지신사로 삼아서 거리에 방을 붙이기를, “민수 등 여러 장수를 잡는 자는 관가나 사가의 노예를 불문하고 크게 벼슬과 상을 주겠다." 했다.
을사일에 우리 태조가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둔을 치고, 유만수(柳曼殊)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최영이 막아 싸워 모두 물리쳤다.
과거에 태조가 만수를 보내면서 좌우에게 말하기를, “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하여 달아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이때 태조가 말을 들에 풀어놓았다. 만수가 쫓겨 돌아오자 좌우에서 이뢰니, 태조가 대답도 않고 그대로 장막 안에 누워 있었다. 좌우에서 두세 번 아뢴 연후에야 천천히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말을 몰고 와서 안장을 얹고 군사를 정돈하였다. 출발하려 할 때에 작은 소나무가 백 보쯤 되는 곳에 있었는데, 태조가 소나무를 쏘아 이길 조짐을 점쳐서 군사의 마음을 모으려고 하여 드디어 쏘니, 한 화살에 꺾어졌다. 여러 군사가 모두 하례하고 진무(鎭撫) 이언출(李彦出)이 꿇어앉아 말하기를, “우리 영공(令公)을 모시고 가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숭인문으로 성에 들어가 좌군과 나란히 양쪽에서 나아가니, 도성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과 음료를 가지고 군사를 맞아 위로하며, 왕이 막아놓은 수레를 끌어내어 길을 열었다. 노약한 자는 성에 올라가서 바라보고 환호성을 올리며 매우 좋아하였다. 민수가 검은 큰 기를 세우고 영의서(永義署) 다리에 이르렀는데, 최영의 군사에게 쫓기었다. 조금 뒤에 태조가 황룡을 그린 큰 기를 세우고 선죽교(善竹橋)를 거쳐 남산(男山)에 오르니, 먼지가 하늘을 덮고 북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영의 휘하 안소(安沼)가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남산에 웅거하였다가 기를 바라보고 무너져 달아났다. 최영이 형세가 궁한 것을 알고 화원으로 달려 돌아와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문지기를 창으로 콱 찌르고 들어갔다. 태조가 드디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나팔을 한 차례 부니,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크게 외쳤다. 정벌할 때마다 장수들은 나팔을 쓰지 않았는데, 태조만이 말 앞에서 나팔을 불게 하였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 태조의 군사가 이미 이른 것을 모두 기뻐하였다. 우가 영비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는데, 최영이 나가려 하지 않았다. 나팔장이 송안(宋安)이 담에 올라 나팔을 한 번 불자, 군사들이 일시에 담을 무너뜨리고 뜰로 모여들어 곽충보(郭忠輔) 등 3, 4명이 곧장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았다. 우가 영의 손을 잡고 울며 이별하니, 영이 두 번 절하고 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이러한 사변이 나의 본심은 아니오. 그러나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고, 서로 대하여 울고, 드디어 영을 고봉 현(高峰縣)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최영이 영을 내리어 정벌에 나간 장수들의 처자를 가두려 하였으나, 뒤에 일이 급박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판삼사(李判三司)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영이 듣고 매우 노하였으나 감히 말은 못하였다. 이때가 되어 탄식하기를, “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광미ㆍ소ㆍ규ㆍ승가 등은 도망가 숨었다. 두 도통사와 36명의원수들이 대궐에 나아가 절하여 사례하고, 군사를 궐문 밖으로 돌리었다. 이에 앞서 잠저(潛邸) 동네에 동요가 있어 이르기를, “서경성 밖의 불빛이요, 안주성 밖의 연기 빛이라. 그 사이에 왕래하는 이원수, 원하건대 백성을 구제하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런 변이 있었다.
○ 다시 홍무(洪武) 연호를 시행하고, 명 나라 의복을 입고, 호복(胡服)을 금하며, 우현보를 파면하고,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우시중으로, 조준을 첨서밀직삼사 겸 대사헌으로 삼고, 여러 장수를 모두 복직시켰다. 이때 명 나라 조정에서 본국에 출병하는 변고를 듣고 황제께 글을 올려 고려를 치기를 청하니, 황제가 종묘에 점을 치려고 재계(齋戒)를 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본국의 사자가 이르니 곧 재계를 그만두었다.
○ 장수들이 성에 들어가 흥국사(興國寺)에서 회의하고, 여러 도에서 성을 쌓는 것과 징병하는 것을 파하고, 안소와 정승가를 잡아서 순군옥에 가두었다. 전 교부령 윤소종(尹紹宗)이 군사 앞에 나와 정지(鄭地)를 통하여 우리 태조를 보기를 청하고 〈곽광전(霍光傳)〉을 드리었다. 태조가 조인옥(趙仁沃)에게 읽게 하고 들으니, 인옥이 극력 다시 왕씨를 세우자는 의논을 말했다.
○ 정미일에 장수들이 성에 들어가 지장사(地藏寺)에서 회의하여 최영을 합포(合浦)에 옮겨 귀양보내고, 송광미를 원주로, 안소를 안변(安邊)으로, 정승가를 영해(寧海)로, 판밀직 인원보(印原寶)를 함창(咸昌)으로, 동지밀직 안주(安柱)를 봉주(鳳州)로, 지밀직 정희계(鄭 熙啓)를 음죽(陰竹)으로 귀양보냈다.
○ 사헌부가 환자 조순ㆍ조복선(曹福善)ㆍ윤상(尹祥), 전 지신사 김약채의 죄를 탄핵하여 모두 먼 고을에 귀양보냈다.
○ 무신일에 우가 환자 80여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우리 태조와 조민수ㆍ변안열의 집에 달려 갔으나 모두 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집에 있지 않으므로 해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기유일에 제장들이 숭인문에서 회의하고, 이화(李和)ㆍ조인벽(趙仁璧)ㆍ심덕부ㆍ왕안덕을 시켜 대궐에 나아가 궁중의 병기와 안장 달린 말을 모조리 내어 놓기를 청하였다.
경술일에 우를 강화로 추방하였다. 처음에 모든 장수들이 영비를 내쫓기를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만일 영비를 내쫓는다면 나도 함께 나가겠다." 하였다. 이에 여러 원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을 지키면서 강화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우가 할 수 없이 나와서 채찍을 잡고 안장에 걸터앉으며 이르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하니, 측근들이 꿇어 엎드려 울면서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영비ㆍ연쌍비와 함께 회빈문(會賓門)을 나와서 강화로 향하였다. 백관(百官)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어 정비(定妃)에게 바쳤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진(秦) 나라의 정(政)과 진(晋) 나라의 예(睿)에 대한 일은 애매모호하지만, 여씨(呂氏)가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워서 혜제(惠帝)의 후사(後嗣)로 삼은 데 이르러서는 주문공(朱文公)이 곧은 붓으로 특별히 써서 조금도 용서가 없었으니, 그 천하 후세의 경계를 삼은 것이 엄하였다. 공민왕이 일찍이 아들이 없는 것을 근심하였으니, 마땅히 종실의 어진 자를 구하여 후사(後嗣)를 삼아야 할 것인데, 신돈의 자식을 취하여 몰래 궁중에서 길러 죽은 뒤의 계책을 하였다가 마침내 자기 몸도 보전하지 못하였고, 우도 음란하고 포학하여 몸이 망하고 왕실이 무너졌으니, 우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마는 공민왕은 또한 홀로 무슨 마음이었던가." 하였다.
신해일에 조민수가 정비의 전교로 우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태조가 회군할 때에 민수와 의논하기를,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우자." 하였다. 민수 또한 그렇게 여겼었는데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왕씨를 가려 세우려 하니, 민수가 인임이 자기를 천거해 준 은혜를 생각하여 인임의 외형제(外兄弟)인 이임(李琳)의 딸 근비(謹妃)의 소생인 창을 세우기를 꾀하나, 장수들이 자기 뜻을 어기고 왕씨를 세울까 두려워하여 한산군 이색(李穡)이 당시의 명유(名儒)이므로 그 말을 빙자하고자 비밀리에 색에게 물었다. 색 또한 창을 세우고자 하여 "당연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태조가 민수에게 말하기를, “회군할 때에 한 말은 어찌 된 것인가." 하니, 민수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원자를 세우는 것은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이미 계책을 정하였으니 어떻게 어길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창을 세었는데 나이 9세였다.
○ 창이 어머니 이씨를 높여 왕대비로 삼았다.
○ 민수가 창에게 아뢰어 이인임과 이숭인을 불렀는데, 인임은 이미 죽은 뒤였다. 나라 사람들이 처음에 인임을 부른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나라 정사를 어지럽히고, 또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문을 열어 놓을까 두려워하였는데, 조금 뒤에 인임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기를, “사람이 주벌하지 못하니 하늘이 죽였다." 하였다.
○ 조민수를 양광ㆍ전라ㆍ경상ㆍ서해ㆍ교주도 도통사로, 우리 태조를 동북면ㆍ삭방ㆍ강릉도 도통사로 삼았다.
○ 박의중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표문에 이르기를, ‘철령(鐵嶺)의 인호(人戶)에 대한 일은 조종(祖宗) 이래로 문주(文州)ㆍ화주(和州)ㆍ고주(高州)ㆍ정주(定州) 등 고을이 본래 고려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였으니, 왕의 말대로 하면 그 땅이 고려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나, 이치와 사세로 말하면 그 몇 고을의 땅을 지난날에는 원 나라에서 통치하였으니, 지금 요동에 예속되어야 마땅하고, 고려의 말하는 것을 경솔히 믿을 수 없으니, 반드시 끝까지 살피고야 말겠다. 또 고려는 큰 바다로 막히고 압록강으로 한계하여, 일찍이 옛날에는 따로 나라를 이루었으나, 중국의 역대 조정의 정벌을 자주 입은 것은 분쟁의 단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난날에 역신(逆臣)이 왕을 죽였으므로 짐이 절교를 명하였는데, 저들이 사람을 보내 약속을 따르기를 청하였다. 여러 번을 윤허하지 않고, 자주 청하여 마지않은 뒤에야 세공을 요구하여 성의를 표하게 하고, 교통을 허락하였다. 저들이 조공한다고 하였으나 해마다 올리는 공물이 약속과 같지 않았고, 얼마 후에는 사람을 보내서 어렵다고 호소하였다. 그 어렵다고 호소하는 것을 받아들여, 전일에 정한 공물을 깎아버리고 다만 해마다 종마(種馬) 50필을 바치되 모두 순종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 조공물은 그전 공물에 비교하면 만분, 백분의 일뿐인데, 그 가져오는 것을 보면 모두 윗사람에게 바치는 물건이 못 되며, 모두가 노둔하고 저급한 짐승이었다. 이것이 상국을 첫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표문에 사은(謝恩)한다 하면서 예물로 보낸 말이 왔는데 모두 얼룩진 잡색이어서 행상하는 사람들도 쓰지 않는 것이니, 두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때로는 간혹 사람을 보내어 몰래 온(溫)ㆍ태(台)ㆍ항(杭)ㆍ소(蘇)ㆍ송(松) 등 제주의 백성들을 꾀어 비밀리에 사세를 엿보다가 발각되었으니, 세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짐이 일찍이 여러 사신에게 이르기를, '이런 간계를 꾸미지 말고 백성의 생업을 금하지 말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수륙으로 공공연히 왕래하면서 무역을 하도록 허락했으니 무슨 일인들 되지 않으며, 무슨 기밀인들 얻지 못하겠는가. 몰래 간사한 꾀를 내어 백성을 유인하여, 그들이 금백(金帛)에 속아 망령되이 사세를 말하게 함으로써 공연히 소인에게 속임을 당했으니 이는 어리석은 짓이니 네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홍무 20년 봄에 짐이 면포와 비단을 요동(遼東)에 가져다 두고 고려와 말을 무역하여 오랑캐를 치게 하였는데, 저 배신(陪臣)들이 모두 나쁜 말을 가지고 와서 바꾸었다. 값으로 치면 본국의 말 한 마리 값으로 두세 마리는 살 수 있는데, 이제 본국 말 두세 마리의 값으로 한 마리를 바꾸어도 너무 노둔하여 마침내 짐에게 소용이 되지 않았으니, 다섯 번째로 무시한 것이다. 아아, 고려의 땅이 삼면은 바다로 싸이고, 일면은 산을 지고 있어 주위가 수천리니, 그 가운데 어찌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없으랴. 서로 왕래하는 데 있어서 이편에서 성의로 사귀면 저편에서 거짓으로 합하고, 장차 국교를 파하려고 하면 저들이 또 공손한 말로 청하니, 이러한 행위가 짐은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도다.
또 짐이 역대의 조정이 고려를 정벌한 것을 보면, 한(漢) 나라는 네 차례를 쳤는데, 자주 국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쳐서 멸하였고, 위(魏) 나라는 두 차례를 쳤는데 은밀히 두 마음을 품고 오(吳) 나라와 우호를 통하기 때문에 그 도성을 도륙하였고, 진(晉) 나라는 한 차례를 쳤는데 모욕하고 교만하여 예가 없기 때문에 그 궁실을 불사르고, 남녀 5만을 사로잡아 노예를 만들었고, 수(隋) 나라는 두 차례를 쳤는데 요서(遼西)를 침범하고 속국으로서의 예를 빠뜨렸기 때문에 쳐서 항복을 받았고, 당 나라는 네 차례를 정벌하였는데 왕을 죽이고 형제가 서로 왕위를 다투기 때문에 그 땅을 평정하여 아홉군데의 도독부(都督府)를 두었고, 요(遼) 나라는 네 차례를 토벌하였는데 왕을 죽이고 아울러 반복이 많으며 침범하여 난을 꾸몄기 때문에 그 궁실을 불사르고, 난신 강조(康兆) 등 수만 명을 베었고, 금(金) 나라는 한 차례를 쳤는데 사신을 죽였기 때문에 그 백성을 도륙하였고, 원 나라는 다섯 차례를 토벌하였는데 도망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자와 조정에서 보낸 관리를 죽였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쳤으며, 그 왕이 탐라(耽羅)로 도망갔으므로 잡아 죽였다. 그 분쟁의 단서를 따져 보면 모두 고려가 자초한 것이요, 중국의 제왕이 병탄을 좋아하고 토지를 욕심낸 것은 아니다. 지금 철령의 땅은 왕의 나라에서 할말이 있겠지마는, 탐라의 섬은 옛적에 원 세조가 말을 기르던 장소이다. 지금 원 나라 자손으로 짐에게 귀순한 자가 매우 많으니, 짐이 반드시 원 나라의 자손을 끊지 않으려 한다. 여러 왕을 섬 가운데 두고 군사 수만으로 지키면서, 양절(兩浙)에서 양식을 공급해 주어 원 나라의 후사를 보존하여 원 나라 자손으로 하여금 바다 가운데에서 편안히 살게 하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민왕 때부터 사신으로 가는 자가 금은과 토산물을 많이 싸가지고 가서 채색 비단과 가벼운 보화를 샀다. 비록 유식한 자라도 권세있는 자의 부탁을 못 이겨 개인의 짐이 조공으로 바치는 물건의 10분의 9를 차지하였다. 중국에서 말하기를, “고려 사람들은 사대(事大)를 빙자하여 무역을 하려고 온다." 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이 집권하니, 그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박의중(朴宜中)의 행장에는 한 물건도 없었다. 요동에서 호송하는 진무(鎭撫) 서현(徐顯)이 베를 요구하자 의중이 주머니를 털어 보이고 입고 있던 모시 옷을 벗어 주었다. 현이 그 청렴을 칭찬하고 예부에 보고하자 황제가 불러 보고 후하게 대접하였고, 또 예부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잔치하는데 전원(前元)의 평장원사(平章院使)의 위에 앉게 하고, 드디어 철령에 위(衛)를 설치하는 의논을 중지하였다.
○조민수와 우리 태조에게 충근(忠勤)ㆍ양절(亮節)ㆍ선위(宣威)ㆍ동덕(同德)ㆍ안사(安社)ㆍ공신의 호를 주고, 장사길(張思吉)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사길은 의주(義州) 사람인데, 의주는 땅이 요동과 접하여 왕래가 서로 잇달았다. 사길은 그 지방 사람으로 아비를 대신해서 만호가 되어 정상을 모두 알고 있으므로 특별히 포장(褒獎)하여 변방 사람을 위로하였다.
○ 왜적이 전주를 침범하여 관사를 불태우고, 또 김제(金堤)ㆍ만경(萬頃)ㆍ인의(仁義) 등의 현을 침범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병으로 사퇴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창(昌)이 즉위하였으므로 국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편민사의(便民事宜)를 반포하였다.
○ 가을 7월에 왜적이 광주(光州)를 함락시키니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체찰사 황보림(皇甫琳)과 양광도 부원수 도흥(都興), 전라도 부원수 김종연, 경상도 부원수 구성로(具成老) 등에게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 일본 국사(國師) 묘파(妙葩)와 관서성 탐제(關西省探題) 원요준(源了俊)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포로로 잡혀간 우리 백성 2백 50명을 돌려보내고, 이어서 장경(藏經)을 구하였다.
○ 압록강 서쪽의 초적(草賊)들이 의주 청수구자(靑水口子)를 침범하였다.
○ 최영을 잡아와서 순군옥에 가두고 요동 정벌의 죄를 국문하였다.
○ 대사헌 조준(趙浚)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국용(國用)을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며, 인재를 가려 기강을 진작시키고, 정령(政令)을 거행하는 것은 오늘날의 당연한 급선무입니다. 나라의 운수가 길고 짧은 것은 민생의 괴롭고 즐거움에 달려 있고, 민생의 괴롭고 즐거움은 전제(田制)의 고르고 고르지 못한 데 달려 있습니다. 문왕ㆍ무왕ㆍ주공이 정전(井田)을 제정하여 백성을 길렀기 때문에 주 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이 8백여 년이었고, 한 나라가 전세(田稅)를 헐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한 것이 4백여 년이었으며, 당 나라가 백성의 토지를 고르게 나누었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한 것이 거의 3백 년이었고, 진(秦) 나라는 정전을 철폐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얻은 지 2대만에 망하였습니다. 신라 말기에도 토지를 고르게 나누지 못하고 부세(賦稅)가 무거웠으므로 도적이 떼지어 일어났습니다. 태조께서 일어나 즉위한 지 34일 만에 여러 신하를 접견하고 개연(慨然)히 탄식하기를, '근세(近世)에 전세(田稅)를 너무 심하게 받아 1경(一頃)당 받는 조세가 6섬에 이르러 백성이 살 수가 없으니, 내가 매우 불쌍히 여긴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십일(什一)의 제도를 사용하여 밭 1부(一負)에 벼 서되[三升]를 내게 하라.' 하고, 마침내 백성에게 3년간의 조세(租稅)를 감면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3국이 솥발처럼 대치하고, 영웅들이 승부를 다투어 재정의 용도가 급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전공(戰功)을 뒤로하고 백성 구제하는 일을 먼저 하였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마음이요, 요(堯)ㆍ순(舜)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인정(仁政)입니다.
삼한이 통일되자 곧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신하와 백성에게 나누어 주되, 백관은 그 품질(品秩)에 따라 주어서 본인이 죽은 뒤에는 회수하고, 부(府)의 군사는 20세에 서울로 들여서 60세가 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사대부로서 전지를 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회수하니, 사람마다 자중하여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여 예의가 일어나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습니다. 부(府)ㆍ위(衛)의 군사와 주(州)ㆍ군(郡)ㆍ진(津)ㆍ역(驛)의 아전이 각각 그 전지의 소출을 먹고 그 땅에 정착하여 생업을 편안히 하니,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비록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는 요 나라와 금 나라가 우리와 땅을 접하고 있어도 감히 침노하여 덤비지 못한 것은, 우리 태조께서 삼한의 땅을 나누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그 녹을 누리고 그 생업을 후하게 하며, 그 마음을 결속시켜 국가 천만 대의 원기(元氣)가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한인(閑人)이니, 공음(功蔭)이니, 투화(投化)니, 입진(入鎭)이니, 가급(加給)이니, 보급(補給)이니, 등과(登科)니, 별사(別賜)니 하는 명칭이 대(代)마다 증가하여 토지를 담당하는 관원이 번쇄(煩瑣)한 것을 견딜 수 없고, 토지를 주고 토지를 회수하는 법이 점점 무너져 해이하게 되었습니다.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틈을 타서 속이고 숨기는 것이 한이 없어서 이미 벼슬한 자 시집간 자도 오히려 한인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그대로 먹고, 군대에 나가지 않은 자도 속여서 군전(軍田)을 받으며, 아비가 토지를 몰래 가지고 있다가 사사로이 그 자식에게 물려주고, 자식은 몰래 토지를 가로채어 나라에 돌려주지 아니하여 이미 역분전(役分田)을 받고 또 한인전(閑人田)을 받았으며, 또 군전(軍田)을 받았습니다. 토지를 주고 받는 관원은 그것이 현재의 관리로서 역분전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그 자신이 과연 부병(府兵)인가, 그 아비가 과연 변진(邊鎭)에서 수자리서는가, 그 할아비가 과연 다른 나라로부터 귀순한 사람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조종(祖宗)의 토지를 주고 회수하는 법이 무너지고, 겸병(兼幷)하는 문이 한 번 열리니, 재상이 되면 당연히 밭 3백 결(結)을 받을 자가 일찍이 송곳 세울 만한 땅도 받을 곳이 없고, 재상이 되어서 녹 3백 60석을 받을 자가 오히려 20석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군사라는 것은 왕실을 호위하고 외적을 방비하는 것이며 그 옷과 양식과 기계가 모두 밭에서 나오는 것인데, 국가에서 기름진 땅을 떼어 42도부(都府)의 갑사(甲士) 10만여 명에게 녹으로 주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병사를 기를 비용이 없습니다. 조종조의 법은 곧 삼대(三代) 때에 농업에 군사를 붙여두었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사와 토지제도가 모두 엉망이 되어 매양 급한 때를 당하면 농민을 징집해서 군대에 보충하기 때문에 군사가 약하여져 적의 먹이가 되고, 농민들의 양식을 쪼개어 군사를 기르기 때문에 호구가 줄어들어 고을이 망합니다. 조종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나누어준 토지를 한 집안 부자간의 사유물로 삼아서, 한 번도 문을 나와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은 자와, 한 번도 군문(軍門)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자가 비단옷과 쌀밥으로 하는 일도 없이 복을 누리며 공후(公侯)를 멸시하는데, 개국 공신의 후손과 밤낮으로 왕을 모시는 신하와, 여러 번 싸워 힘을 바친 장사(將士)는 도리어 1 묘(畝)의 토지나 송곳 세울 정도의 경작지조차 얻지 못해 그 부모와 처자를 봉양하지 못하니, 어떻게 충의를 권하고 일을 책임지우며 전공(戰功)을 장려하고 외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안으로 판도사(版圖司)ㆍ전법사(典法司)와, 밖으로 수령(守令)ㆍ염사(廉使)가 그 본직을 저버리고 날마다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땀을 흘리고 붓을 불어 가며 토지 송사만 판결하느라, 문권을 상고하고 증거를 조사하며, 전호(佃戶)를 신문하고 고로(故老)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 죄에 관련된 자가 옥에 가득하고 뜰에 가득하여 농사를 폐지하고 판결을 기다리니, 두어 달 밀린 문안(文案)이 산같이 쌓이고 1묘의 다툼이 수십 년간 계속되어, 침식을 잊고 판결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사전(私田)이 다툼의 실마리가 되어 송사가 번잡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에 대하여 1묘(畝)의 요구라도 혹시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원한을 품고 길가는 사람 보듯 하며, 심한 자는 상복을 벗자마자 그 시병(侍病)하던 노비를 때리며 그가 받은 토지의 공문서를 요구합니다. 부모에게 대하여도 이러한데 하물며 형제간이야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사전 때문에 인륜이 금수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조정 사대부들이 겉으로는 서로 좋아하는 체하나 속마음으로는 서로 시기하여 암암리에 중상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사전으로 함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근년에는 겸병(兼幷)하는 일이 더욱 심해져서, 간악하고 흉한 도당들이 주(州)에 걸치고 군(郡)을 포괄하여, 산과 내를 경계(境界)로 삼고서 모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라 하며, 서로 훔치고 서로 빼앗아 1묘(畝)의 주인이 5, 6명이 되고, 1년에 도조 받는 회수가 8, 9차에 이릅니다. 위로는 어분전(御分田)으로부터 종실ㆍ공신ㆍ조정ㆍ문무관의 토지와, 외역(外役)ㆍ진(津)ㆍ역(驛)ㆍ원(院)ㆍ관(館)의 토지와, 남이 여러 대 동안 심은 뽕나무와 지은 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빼앗아 차지하니, 호소할 곳 없는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조종께서 토지를 나누어 신하와 백성의 생업을 후하게 한 것이 끝내는 신하와 백성을 해치게 할 뿐이니, 이것은 사전이 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토지를 겸병하는 집안의 도조를 거두는 무리가 병마사니, 부사(副使)니, 판관이니 일컫기도 하고 별좌(別坐)라 일컫기도 하는데, 따르는 자 수십 명이 말 수십 필을 타고 다니면서 수령을 능멸하고, 안렴사를 꺾고, 음식을 진탕 먹으며 주막집에서 돈을 흥청망청 씁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떼를 지어 횡행하며 방종 포학하고 침탈 노략하는 짓이 도적보다 몇 배나 심하여 외방(外方)이 이때문에 피폐해집니다. 전호(佃戶)의 집에 들어가서는 사람은 술과 밥을 배불리 먹고, 말은 곡식을 실컷 먹고, 햅쌀을 먼저 바치게 하며 면화ㆍ삼ㆍ여비ㆍ개암ㆍ밤ㆍ대추ㆍ육포(肉脯) 등을 강제로 팔게 해서 거두는 것이 조(租)의 10배는 되어 조를 바치기 전에 재산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실지로 토지의 수확량을 조사할 때에는 부(負)와 결(結)의 고하(高下)를 마음대로 하여, 한 결의 토지를 3, 4결로 정하고, 큰 말로 벼를 거두어 한 섬 거두는 것을 두 섬 거두어들여 그 수량을 채웁니다.
조종께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10분의 1에 그쳤는데, 지금 사가(私家)에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열배 천배나 되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을 어찌 대하며 국가의 인정(仁政)이 어찌 되겠습니까. 토지는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도리어 백성을 해치니, 어찌 슬프지 않습니까. 백성이 사전(私田)의 조세를 낼 때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충당하는데 그 빚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갚을 수 없고, 부모가 굶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으니, 원통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까지 통하여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여 수재와 한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니, 호구(戶口)가 이때문에 비게 되었으며, 왜놈들이 이때문에 깊숙이 들어와 천리에 시체가 뒹굴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탐욕스럽고 욕심 많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퍼져 사직과 종묘가 알을 포개 놓은 것보다 위태합니다. 신등은 원하건대, 태조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토지를 나누어 주신 법을 준수하고, 후인이 사사로이 주고받아 겸병하는 폐단을 고쳐, 선비도 아니고 군사도 아니고 나랏일을 맡은 자가 아니면 토지를 주지 말 것이며, 죽을 때까지 사사로이 주고받고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한계를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여 국가의 재용을 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며, 조정 신하를 우대하고 군사를 넉넉하게 길러 주십시오. 그러면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하여 예의가 일어나고 염치가 행해지며, 인륜이 밝아지고 송사가 없어져 사직의 기초가 반석같이 편안하고 태산같이 튼튼하며, 국가의 위엄이 뇌성처럼 진동하고 불꽃처럼 치성하여, 비록 외적의 침노가 있더라도 그 외적은 장차 저절로 시들고 무너질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3년간 먹을 비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다.' 하였는데, 근자에 서북으로 행차한 것이 겨우 두어 달뿐인데도 오히려 공사(公私)가 지탱하지 못하고 상하가 함께 곤궁하니, 만일 2, 3년간 수재와 한재가 생긴다면 어떻게 진휼할 것이며, 많은 군사의 양식과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 것입니까. 하물며 지금 도성 안팎의 창고가 일시에 모두 비어서 군국(軍國)의 수용이 나올 곳이 없는데, 변방의 근심은 예측할 수가 없으니 만일 창졸간에 변이 생기면 집집마다 거두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양전(量田)할 때를 당해서 일정한 수(數)를 정하여 토지를 주기 전에 3년으로 한정하고 임시로 국가에서 거두어들인다면 군국의 수용을 충당할 수 있으며, 관원의 녹봉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안렴사(按廉使)의 직책은 건국 초기의 절도사(節度使)로서 군사와 백성을 총괄하고 한 지방을 도맡으므로, 수령은 직책을 받들어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히 하고, 방진(方鎭)은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힘껏 싸워서 지킨다면 권력은 한 곳으로 돌아갈 것이며, 사람들은 다른 바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이 안렴사를 한 방면의 통찰(統察)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이 주(州)ㆍ군(郡)을 공파(攻破)해도 방진(方鎭)은 거리낌이 없이 군사를 끼고 위엄만 기르며,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니, 적의 기세가 날마다 더욱 치성해집니다. 수령은 제멋대로 방자하여 공공연하게 뇌물을 주고 받으며, 음악과 여색에 빠져서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져도 구휼하지 않습니다. 안렴사가 된 자가 문서에 있는 수량과 실제 전곡(錢穀)의 차이만을 구구하게 따져 출척(黜陟)과 상벌의 법을 엄하게 하여 군민(軍民)의 행정을 진작시키지 못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안렴을 맡은 사람이 모두 정순(正順)ㆍ봉순(奉順)의 관원이고, 방진ㆍ부윤(府尹)ㆍ주목(州牧)ㆍ도호(都護)는 양부(兩部)의 대신과 봉익(奉翊)의 고관이기 때문에 대체로 왕명으로 받은 직책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품계가 낮다는 소소한 절차만 혐의를 삼아 기강을 떨치지 못하니 국사를 그르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원하건대, 조종께서 양부(兩府)에서 안렴사를 보내도록 정한 법을 본받고, 당나라에서 대신을 절도사로 보내던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양부에서 청렴하고 위엄 있고 사무에 밝은 자를 가려 도안렴출척대사(都按廉黜陟大使)로 삼아서, 주ㆍ군을 순찰하여 전야(田野)가 개간되고, 호구가 증가되며, 송사가 적어지고, 부역이 고르며, 학교가 일어난 것 등을 가지고 수령을 출척(黜陟)하고, 방진(方鎭)을 순찰하여 호령이 엄하고 군기(軍器)가 정비되며, 병졸이 훈련되고, 둔전(屯田)이 정돈되며, 해구(海寇)가 종식된 것 등을 가지고 상벌을 행하되, 군관이 싸움에 패하여 한 주ㆍ군을 함몰하게 하였거나, 탐욕스럽고 더러워서 뇌물을 받은 수령은 목을 베며, 그 다음 죄를 지은 자는 관직을 파면하여 죄를 의논하고, 그 다음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논하되 공무는 행하도록 하여 기강을 진작하고, 3년을 체임(遞任)하는 동안에 도안렴의 견책을 받지 않은 수령은 곧 서울의 벼슬을 제수하고, 도안렴사는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여 내어 보내되, 원수(元帥) 이하가 모두 교외에 나와 영접하고, 참알(參謁)할 때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5품ㆍ6품으로 염사(廉使)가 된 자도 1년 만에 서로 교대하는 기한과 출척하고 고과(考課)하는 법은 도안렴사와 같게 하여 고정된 예를 만들지 말 것이며, 도안렴으로 주ㆍ군과 방진 수령을 출척하지 못하는 자는 사헌부에서 아뢰어 그의 직책을 파면하여 통절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수령이란 백성의 편안하고 괴로운 일을 살피며, 옥사와 송사를 결단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여 이 백성의 부모노릇을 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순문사와 안렴사가 주ㆍ군에서 군사를 징발할 때에 그 수령에게 책임을 지우면 호수(戶數)의 많고 적은 것과, 정부(丁夫)의 튼튼하고 약한 것을 수령이 잘 알 것이니 반드시 정예 군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순문사와 안렴사가 매양 군사를 징발할 때면 수령들은 자기 고을을 사사로이 할까 염려하여, 남군(南郡)의 군사를 징발하려 하면 반드시 북군의 수령에게 명하고, 북군(北郡)의 수령은 남군에 가게 합니다. 북군의 수령이 남군에 가면 듣고 보는 것이 생소하기 때문에 속을까 두려워하여 먼저 때리기부터 합니다. 북군의 군사를 징발하라는 통첩이 남군에 이르면 남군의 수령은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서서 곧 북군으로 가서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먼저 사람부터 형벌을 주며 그들의 부모를 가두고 처자를 때립니다. 군사의 징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호구를 점검하는 것과 군수품을 운송하는 데에도 가지가지로 징토(徵討)하고 독촉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두 고을이 서로 원망하여 마침내는 원수가 되어 서로 보복하니,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호구가 비게 됩니다. 왕의 뜻을 받아서 아래로 유포하고 교화를 선양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하건대, 수령은 지경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어 자기 고을만을 다스리게 할 것이며,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안렴사가 곧 파직시켜 내치고 조정에 보고하여 그 결원을 보충하게 하소서.
선왕이 순문사ㆍ안렴사 이외에는 사신을 지방에 파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신중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사신의 파견이 번다하여 수레가 연이어져서 역마를 타는 자가 한 필만 쓰라는 명령을 거짓으로 고쳐서 8, 9필에 이르고, 한 명의 사신을 모시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며, 게다가 순문사ㆍ안렴사의 차사(差使), 여러 원수가 파견하는 사람이 또한 모두 역마를 타고 주ㆍ군에 횡행하며, 관(館)과 역(驛)에 돌아다닙니다. 이런 문이 한 번 열리니, 무리를 이루고 말을 사랑하는 자들의 왕래와, 서울과 지방의 한가로운 자들의 사사로운 행차가 삼대와 좁쌀같이 많은데, 교대로 들락거리며 공공연하게 국고의 공급을 받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쇠잔한 고을과 파괴된 역(驛)의 아전들은 풀이 죽어서 손을 맞잡고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한정이 있는 공급비용으로 끝도 없는 사객(使客)을 접대하니 주ㆍ군이 피폐해지고 역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주군의 여러 사무 일체를 순문사와 안렴사에게 맡겨 그 책임을 지우고, 번잡한 사신을 파견하지 마소서. 조정의 문자는 모두 현령(懸鈴)으로 전달하고, 군정(軍情)으로 긴급한 중대사가 아니면 역마를 주지 말 것이며, 역마를 탄 자가 아니면 여러 고을과 각 역(驛)에 들어가서 공급을 받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주인과 손을 모두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 것이며, 각도의 순문사와 안렴사로 하여금 한결같이 조정의 이 제도를 본받아서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엄격하게 다스리소서." 하였다.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도 잇달아 글을 올려 사전(私田)을 개혁 하기를 청하였다.
○ 정당문학 설장수에게 우(禑)가 손위(遜位)하는 표문을 가지고 남경으로 가게 했다.
○ 조민수가 이인임을 예장(禮葬)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며, 만장을 지어주고 치제(致祭)하며, 추증(追贈)하기를 청하니, 전의(典儀)들이 어렵게 여겨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부령(副令) 공부(孔俯)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내가 광평(廣平)의 시호를 의논하지 않으면 누가 감히 하겠는가." 하고, 홀로 전의(典儀)에 이르러 시호를 의논하기를, '황류(荒繆)'라 하였다. 이숭인ㆍ강회백ㆍ하륜 등이 반대하고 욕하니, 부가 농담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대간(臺諫)에서 이인임의 죄를 의논하였는데, 그것은 공부가 발론한 것이었다.
○ 최영을 충주로 귀양보내고, 정승가를 베고, 조규(趙珪)를 각산(角山)으로, 조림(趙琳)을 풍주(豐州)로 귀양보내고, 또 안소ㆍ송광미ㆍ인원보를 귀양간 곳에서 베었다.
○ 조민수를 창녕현에 귀양보냈다. 민수는 임견미ㆍ염흥방이 처형을 받을 때에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백성에게서 빼앗은 밭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 주었었는데, 다시 득세하자 차츰차츰 도로 빼앗아 다시 탐하는 버릇을 부려 사전(私田)을 개혁하는 것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조준이 논핵하여 쫓아내었다.
○ 8월에 이색을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수시중으로 삼았다.
○ 서연(書筵)을 열고 또 사헌부ㆍ중방(重房)ㆍ사관(史官)을 시켜서 한 사람씩 교대로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 이광보를 옥에 가두었다. 광보는 본래 시정의 무뢰배인데 우(禑)가 동강에서 유희를 즐기며 돌아갈 줄 몰랐으나, 광보는 우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뜻을 맞추었다. 우가 크게 기뻐하여 조석으로 곁을 떠나지 않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쳐서 죽였다.
○ 좌사의 이행 등이 상소하기를, “명기(名器)는 국가에서 어진 이를 기르고 선비를 대접하는 것으로, 벼슬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것에는 본래 정한 제도가 있으며, 전형하여 선출하고 가려서 쓰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특별한 재주나 훌륭한 공적이 있고 나서야 등용하였는데, 권신이 정사를 제 마음대로 한 이래로 오로지 뇌물로만 벼슬을 얻게 되고, 비답 교지가 내리기도 전에 아무개가 아무 벼슬을 한다 하고 거리에 떠들썩하게 전해져 명분이 흐려지니, 조종이 어진 이를 높여서 녹을 중하게 주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근자에 첨설(添設)한 벼슬은 수레로도 실을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농사하는 늙은이와 나무하는 아이들도 그것을 진흙같이 천하게 여깁니다. 이때문에 선비는 몸을 돌보지 않고 곧은 말을 하는 절개가 없으며, 무사는 의를 따라서 죽음으로 지키려는 마음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는 맑고 깨끗하게 마음을 다스려 공(公)으로써 사(私)를 없애고, 주의(注擬)하며 선택할 때를 당하면 혹시 악덕(惡德)한 인물이나 사사로이 가까운 사람에게 미침이 있을까 유념하여, 두세 명의 대신과 함께 그 공적을 상고하고 그 덕행을 살핀 연후에 벼슬을 제수하면, 아첨하는 무리가 발을 붙일 곳이 없을 것입니다. 또 첨설한 벼슬은 본래 부득이하여 한 것이니 군공(軍功)을 제외하고는 일체 금지하소서." 하였다.
○ 정지를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지휘사로 삼았다. 이때에 왜적이 3도를 침범하여 가을까지 백성을 도륙하고 민가를 불사르며 죽이고 노략질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장수와 수령 중에 막는 자가 없었는데, 정지의 위엄과 명성이 왜적이 두려워하기에 충분하므로 김백흥(金伯興)ㆍ김용균(金用均) 등과 함께 가서 치도록 명하였다. 또 자혜 윤(慈惠尹) 조언(曹彦)과 밀직부사 최칠석(崔七夕)ㆍ장사길(張思吉), 화녕 윤(和寧尹) 정요(鄭曜)를 보내어 왜적을 막았다.
○ 사헌부가 분경(奔競)의 금지를 청하였다.
○ 왜적이 거제(巨濟)를 침략하니 진무 한원철(韓元哲)이 왜선 1척을 잡아서 18명의 수급을 베었다.
○ 여러 도의 안렴사의 명칭을 고쳐서 도관찰출척사로 삼아 교서(敎書)와 부월(鈇鉞)을 주어 보냈다. 모두 대간에서 천거한 사람을 썼는데, 양광도는 정당문학 성석린이요, 경상도는 전 평양 윤 장하(張夏)요, 전라도는 전 밀직부사 최유경이요, 교주ㆍ강릉도는 전 밀직상의 김사형(金士衡)이요, 서해도는 밀직제학 조운흘(趙云仡)이었다. 각각 부사(副使)ㆍ판관을 스스로 천거하게 하여 토지를 다시 측량하게 하였다.
○ 왜적이 연산현(連山縣) 개태사(開泰寺)를 침범하였다.
○ 비로소 전선법(銓選法)을 회복하였다. 예전 제도에 문ㆍ무관의 전선을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에서 나누어 맡아 부위(府衛)는 대정(隊正) 이상, 여러 관사(官司)는 9품 이상, 또는 부사(府使)ㆍ서도(胥徒)는 모두 연월을 적어 내고 공과를 기록하여 연말마다 벼슬을 올리고 내리게 하였는데, 이것을 도목정(都目政)이라 하였다. 우가 어려서 즉위한 뒤부터 권신과 간신이 정권을 차지하여 친족과 인척을 사사로이 벼슬시키고, 뇌물을 탐하여 관직이 전부 사문(私門)에서 나와 도목정이 폐지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공로를 추록(追錄)하니 벼슬하는 자가 크게 기뻐하였다.
○ 대사헌 조준이 시무(時務)를 진술하여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가 개국하던 처음에 벼슬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어 재상을 두어서 6부(部)를 통솔하고, 감(監)ㆍ시(寺)ㆍ창(倉)ㆍ고(庫)를 두어서 6부를 뒷받침하게 하였으니 대단히 좋은 제도였습니다. 법이 오래되니 폐단이 생겨, 인사를 담당한 자가 인물을 선발할 줄을 몰라, 관직이 문란해졌으며, 군부(軍簿)를 맡은 자가 군대의 정원을 알지 못하여 무비(武備)가 해이해졌습니다. 호구가 늘고 주는 것과, 전곡의 많고 적은 것과, 옥사와 송사에 질서가 없는 것과, 도적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에 이르러서도 판도사(版圖司)와 전법사(典法司)의 관리가 된 자가 어떻게 할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의사(禮儀司)는 예(禮)에 대하여 전공사(典工司)는 주관 업무에 대하여 과연 각각 그 직책을 수행하였습니까. 대개 6부는 백관의 근본이요, 정사가 나오는 곳입니다. 근본이 어지러운데 어찌 정사가 잘 다스려지겠습니까. 이에 백료(百僚)와 여러 부서가 해체되어 흩어지고, 통솔이 없어져 여러 가지 일에 힘쓰지 않아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졌습니다. 비록 임금과 재상이 근심하고 부지런하나 정사가 잘 거행됨은 역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6전(典)의 일을 6부(部)에 돌리어, 각 관사(官司)를 6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재신(宰臣)은 시중(侍中) 이하가 차례로 판사사, 밀직 또는 차례로 겸판서(兼判書)가 되어 위에서 벼리를 잡게 하고, 봉익(奉翊)을 6부 판서로 삼아서, 여러 낭관(郞官)과 소속된 관사(官司)를 거느려 각각 그 직책을 가지고 밑에서 명령을 듣게 하여 큰 일은 6부의 낭관이, 작은 일은 여섯 색장(色掌)이 맡아 때때로 위의 명령을 받들어 공문을 발송하여 행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간략함으로 번다함을 제어하고, 낮음으로 높은 사람을 받들며, 위와 아래가 서로 연결되고,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체계가 잡혀 벼리를 들면, 그물 눈이 벌어지고 옷깃을 추켜들면 옷이 바로 잡히는 것과 같아서, 왕과 정승은 위에서 편안하고, 모든 관리들은 아래에서 분주하여 교령이 쉽게 행하여지고, 정사가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왕의 직책은 재상과 의논하는 것뿐이요, 재상의 직책은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쳐서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뿐이니, 적임자로 재상을 삼으면 천하도 다스려지거든, 하물며 한 나라의 정치이겠습니까. 본국의 제도에 중서(中書)의 영(令)이니, 시중이니, 평장이니, 참정이니, 정당(政堂)이니 하는 다섯 가지는 하늘의 오성(五星)을 본뜬 것이요, 추밀(樞密)의 일곱 관직은 하늘의 북두칠성을 본뜬 것입니다. 재상과 추밀이 합좌(合坐)하는 것은 원 나라를 섬기던 초기에 시작되었는데, 근대에 이르러서는 도당(都堂)에 앉아서 국정에 참여하는 자가 60~70명이나 되니 이렇듯 관직이 넘침은 옛날에는 없던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經綸)하여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고, 몸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할 만한 사람이 아니거나, 청백하고 충성되며, 곧고 악한 것을 미워하고 어진 것을 좋아하며, 나라만 알고 자신을 잊는 사람이 아니거나,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여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이 되고 위엄이 다른 나라에 가해질 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양부(兩府)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는 넓은 천하와 사해의 부유로도 관리의 수를 줄여 10명을 둘 곳에 1명을 두어서 중흥(中興)의 다스림을 이루었으니, 모든 급하지 않은 관원과 잡되고 쓸데없는 아전은 모두 제거하여, 조종께서 하늘을 대신하여 벼슬을 설치한 옛법을 회복하여 거룩한 조정의 유신(維新)하는 교화(敎化)를 보이소서. 6시(寺)와 7감(監)은 본래 판사(判事)가 없었습니다, 근래에는 또 통헌(通憲)ㆍ봉익(奉翊)의 품계들이 친히 일을 보지 않고, 직무를 폐하고서 녹만 허비하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통헌ㆍ봉익의 품계에 오른 자 중에 만일 재간이 있는 자가 있거든 그 계급을 내려서 그 직책을 직접 수행하게 하고, 새로 제수하는 자에게는 봉익ㆍ통헌의 품계를 주지 마소서.
《춘추(春秋)》에, '천자가 잉숙(仍叔)의 아들을 노(魯)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공자께서 주 나라에서 부형의 연고로 그 어리고 약한 자제를 벼슬시켜 녹을 허비하고 관직을 헛되이 한 것을 슬퍼한 것입니다. 우리 문종(文宗)의 38년의 정치가 태평성대(太平盛代)를 이룬 것은 모두 노성(老成)한 사람을 등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공경(公卿)ㆍ사대부의 어린 자제는 동반(東班) 9품 이상의 벼슬을 제수하지 말고, 혹시 속여서 받은 자가 있으면 그 부형에게 죄를 주소서. 규정(糾正)은 직책이 백관을 살펴서 왕의 귀와 눈이 되고, 모든 제사와 조회로부터 전곡과 출납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찰 단속하는 것이니 품계는 낮아도 책임은 중합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대간에서 천거하게 하여 그 직책을 주되 그 품계를 정언(正言)의 다음으로 올려서 기강(紀綱)을 떨치게 하소서.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니 임명을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일에 제수하는 수령은 사림(士林)이 알지 못하는 자가 간혹 있으니,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각사(各司)의 높은 품직을 역임하여 명망이 있는 자가 아니거나, 서울과 지방에서 역임하여 공적이 있는 자가 아니거든 제수하지 말며, 사냥하고 잔치하는 일은 일체 금지하소서.
감무(監務)와 현령(縣令)도 직책이 백성을 가까이 하는 것인데 근세에는 벼슬이 권문세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람들이 그 벼슬 하기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부사(府史)와 서리(胥吏) 같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무리들에게 제수하여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게 되니,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대간ㆍ6조가 천거한 재능있는 사람을 가려 보내되 품계를 참관(參官)으로 올려서 그 책임을 중하게 하소서. 안집사(安集使)는 일체 파하고, 부사ㆍ서리의 무리에게는 다만 임시대리[權務]의 직책만을 제수하소서. 공역서(供驛署)는 오직 8도의 역참을 맡은 곳인데, 근년에는 공청에 앉아 있지 않고 사가에 앉아서 공문을 보내어 권세가의 부탁과 친척과 친구의 청을 들어 주어 역마를 타고 역의 아전을 거느린 자가 그치지 않으니, 역졸이 피폐한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공역서를 군부사(軍簿司)에 소속시켜, 모든 마필(馬匹)과 역졸은 도당(都堂)의 문서에 의거하여서만 징발을 허가하소서. 사복(司僕)은 승여(乘輿)를 맡아 임금 좌우에 가까이 있으므로 그 인선(人選)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근래에 따로 내승(內乘)을 설치하여 내수(內豎 환관)의 무리가 그 직책을 독차지하니, 근일에는 횡포가 더욱 심합니다. 그 마초(馬草)를 거두어들일 때는 온갖 방법으로 빼앗고, 성에 수송하여 들일 때는 농우(農牛)가 창(瘡)이 나서 쓰러져 경기(京畿)의 고을들이 잔파(殘破)되고, 그 해독이 여러 고을에 번져 나가, 한 고을 안의 곡초(穀草) 값이 거의 베[布] 9백 필 값에 이릅니다. 주ㆍ군 모두가 이러한데 또 그 공호(貢戶)를 몰아서 구종(驅從)이라 이름하는 것이 천 명, 백 명에 이르며, 공적(公籍)에 붙이지도 않고 사사로 농장을 두어 노예같이 부려서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니 매우 애통한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상승(尙乘)을 사복시(司僕寺)에 예속시켜 내수(內豎)로 제수하지 말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는 자를 가려 맡겨서, 매일 교대로 마초(馬草)와 콩을 몸소 친히 헤아려 주고, 경기 안에 있는 마초와 볏짚은 말 수를 계산하여 분량을 정하고 달을 나누어 공급하되, 규정(糾正)을 시켜 감독하게 하고, 매양 당번 한 명에 수의(獸醫) 5명과 구종(驅從) 30명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파하여 부병(府兵)을 붙이게 하소서. 무릇 도감(都監)은 일이 있으면 두고, 일이 끝나면 파하는 것이 전례이며, 조성도감(造成都監)은 일찍이 궁궐을 짓기 위하여 두었는데, 뒤에 선공(繕工)의 직책을 곳으로 돌려서 일국의 목재(木材)와 철의 용도를 관리하게 하였더니, 관리를 보내어 역마를 번거롭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기에 그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백성으로부터 취할 때에는 살을 벗기고 골수를 빼듯이 하면서 그것을 사사로이 쓸 때에는 진흙과 모래 쓰듯 하니, 원하건대 도감을 파하여 선공시(繕工寺)에 붙이고 아울러 방어화통도감(防禦火㷁都監)을 파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붙여서 청렴 공정한 사람을 가리어 관직을 맡기고, 또 규정(糾正)을 시켜 감독하게 하소서. 호곶(壺串) 궁궐의 목재ㆍ기와와, 그리고 죄를 입어 적몰된 집과 양강(兩江)의 재목 및 여러 기와굽는 가마의 기와는 영조(營造)하는 데 쓸 것이며, 모든 나무를 베고 기와를 굽는 역사를 3년 동안 정지하여 백성을 쉬게 하소서.
도성은 근본이 되는 땅이며, 풍화(風化)가 먼저 시작되는 곳으로 그 백성들은 왕실을 호위할 뿐입니다. 근래에 교화가 제대로 되지 못하여 간사하고 속이는 것이 습속이 되었으며, 부역이 번거롭고 거듭되어 날마다 피폐해가니, 신은 원하건대 도총도감(都摠都監)을 파하여 5부(部)를 개성부에 붙이고, 한 동네마다 학식 있는 노인을 택하여 사장(社長)으로 삼아서 당서(黨序 고대의 학교)의 법에 의하여 자제를 교육하게 하소서. 천인과 공장ㆍ상인의 자제는 각각 그 업을 일삼게 하며, 거리와 골목에서 떼를 지어 장난하는 경박한 풍습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사장과 부형을 죄주소서. 도관(都官)ㆍ궁사(宮司)ㆍ창고의 노비와, 근일에 참형을 당하고 귀양간 사람의 조상 전래의 노비 및 새로 얻은 노비는 변정도감(辨正都監)으로 하여금 모두 인구를 계산하게 하여 빠짐없이 호적을 만들어서, 매양 토목ㆍ영선(營繕)의 역사와 빈객ㆍ부처ㆍ신(神)의 공양(供養)이 있을 때에는 모두 사역을 시키고, 방리(坊里)의 여러 가지 역사는 모두 면제하여 그 생활을 편안히 해서 왕실을 호위하게 하소서.
이인임은 국가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한 가지가 20년이 넘어 죄악이 가득 쌓였는데 다행히 하늘이 죽였으니, 원하건대 관작을 삭탈하고 시호를 내려 주지 말아 악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하고, 정렬공(貞烈公) 경부흥(慶復興)은 청백으로 몸을 지켰으나 인임 등에게 쫓김을 당하여 적소(謫所)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교서를 내려 그 무덤에 조상하고 제사하게 하며, 시중 이자송(李子松)은 청렴하고 근신하고 절조를 지켰으나 죄 없이 죽어 국인(國人)들이 애석하게 여기니, 원하건대 시호를 내려주고 그 집을 후하게 구휼하소서.
조종의 의관과 예악(禮樂)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었는데 원 나라 때에 이르러 당시 황제의 제도에 눌려서 중국 제도를 변경하여 몽고를 따랐으니, 위와 아래를 분별할 수 없고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현릉(玄陵)께서 상하의 분별이 없는 것을 통탄하여 몽고의 제도를 변경하여 중국을 따라서 조종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호복(胡服)을 개혁하기를 청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승하하셨습니다. 상왕(上王)이 뜻을 이어 승인을 얻었는데 중간에 집정하는 신하가 고쳐버렸습니다. 전하가 즉위하여 친히 중화의 의복을 입고 온 나라 신민과 함께 다시 새롭게 하였으나 품제(品制)에 맞지 않아 유신(維新)의 정령(政令)에 장애가 되니, 원컨대 헌부를 시켜서 날을 한정하여 그 제도를 따르게 하소서.
근년에 간흉(姦兇)이 서로 잇달아 정권을 잡아 뇌물의 양에 따라 그 벼슬을 올리고 내리며, 제 뜻을 따르고 어기는 것을 보아 그 사람을 죽이고 살렸으므로 선비의 풍습이 일변하여 조석으로 권문(權門)을 따르기에만 분주하여 관직을 비우고 있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각각 옥사를 결단하고 송사를 판결하는 일을 두 아전이 날마다 각 상사에게 올려 날마다 본사(本司)에 앉아서 일을 보게 하고, 혹시 권문만 드나들어 자기 직책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정직을 시키고 녹을 회수하소서.
형벌이 정해진 법이 없어서 안팎의 관사(官司)가 출(出)ㆍ입(入)을 자기 생각대로 하고 있는데, 지금 전교(典校)의 한 관사가 모두 문학을 아는 신하인데 다른 맡은 것이 없으니, 원하건대 형서(刑書)를 산정(刪定)하는 것을 위임하여 만세에 혜택을 주게 하고, 또 안팎의 관사가 서로 접대하는 예절과 문서의 격식을 또한 산정하게 하고 이를 반포하여 행하소서. 옛날에는 풍속이 순후하여 속이고 거짓된 일이 생기지 않아 백관의 사첩(謝牒)을 당후관(堂後官)이 서명하였는데, 세도가 나날이 떨어져 간사와 거짓이 날로 번성하여 근래에 상장군(上將軍) 이하는 군부사(軍簿司)로 하여금 도장을 찍게 하고, 봉익(奉翊) 이하는 전리사(典理司)에게 도장을 찍게 하니, 속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도평의사가 도성 안팎의 관사(官司)에 공문을 보내는 것은 모두 전곡을 출납하는 것, 생살상벌(生殺賞罰)에 관한 것, 호령을 발하는 것 등의 일이어서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한데, 녹사(錄事) 한 명에게 서명(署名)하게 하니 일을 융통성 있게 하고 간사함을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직첩에 날인하는 예에 의하여 모든 도당(都堂)의 공문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게 하소서. 예전 제도에 왕패(王牌)를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에 내릴 때에는 반드시 행신보(行信寶)를 찍었는데, 지금은 내수(內豎)가 혼자 서명하니 역시 간사함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모든 궁내에서 쓰는 것은 도평의사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고 왕패를 내리지 말아 내수의 도적질하는 근원을 막게 하소서. 모든 송사를 결단하는 관원과 전곡을 출납하는 유사와 사사로운 편지를 주고받아서, 시비를 전도시키고 관청의 물건을 훔쳐 내는 데 대해서는 그 폐단이 점점 심하니, 원하건대 일체 금지하여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청하는 자와 들어 주는 자를 모두 불렴죄(不廉罪)로 논하고, 각 관과 각 성중애마(成衆愛馬)가 요구하는 것과, 외방 관원의 선물을 주고받는 것 역시 불렴죄로 논하소서.
옛날에 백성이 16세가 되면 비로소 정부(丁夫)가 되어 나라 역사에 복역하고, 60세가 되면 늙은이로서 역사를 면하게 되었는데, 주ㆍ군에서 매년 인구를 계산하여 백성의 호구를 조사하고 장부를 정리하여 안렴사에게 바치고 안렴사가 호부(戶部)로 바치면, 조정에서 군사를 징집하고 역군을 조발하기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쉬운데, 근래에 이 법이 한 번 무너지니, 수령은 그 고을의 호구를 알지 못하고 안렴사는 한 도의 호구를 알지 못하여, 군사를 징집하고 역군을 조발하는 데에 있어서, 향리(鄕吏)가 속이고 숨겨주면 뇌물을 받아들이므로 부강한 자는 면하고, 빈약한 자는 징발되어 가니, 빈약한 집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을 하면 부강한 집이 대신 괴로움을 당하여 그집 역시 빈약해져서 도망갑니다. 징발을 맡은 관원은 향리에게 속은 것을 분하게 여겨,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귀를 베고 코를 베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니, 향리가 또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갑니다. 향리와 백성이 사방으로 도망가 흩어져 고을이 비게 되는 것은 호적 문서를 만들지 않은 데서 오는 화입니다. 원하건대, 지금 토지를 조사할 때를 당하여 그 경작하는 토지를 살펴 토지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호(戶)를 상ㆍ중ㆍ하 세 등급으로 매기고, 양민과 천인의 상황을 문서로 만들어, 수령은 안렴에게 바치고 안렴은 판도(版圖)에 바치게 하면, 조정에서 일체 징병하고 조역(調役)할 때에 근거로 삼을 것이 있어 제때에 징발하여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령과 안렴으로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다스리소서.
여러 도의 어염(魚鹽)과 목축(牧畜)의 번성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신라와 후백제를 평정하지 못하였을 때에 먼저 수군을 조련하여 친히 누선(樓船)을 타고 금성(錦城)을 항복받아 점령하니, 여러 섬의 수입이 모두 국가에 속하였고, 그 재력에 의하여 드디어 삼한을 통일하였습니다. 압록강 이남은 대개 모두 산이고 비옥한 토지는 바다에 인접한 곳에 있는데, 비옥한 들판에 있는 수천 리의 논밭이 왜적에게 함락되어 황폐하여 갈대 숲이 하늘에 닿았으니, 국가가 이미 어염ㆍ목축의 이익을 잃고, 또 기름진 들판에 있는 좋은 전지의 수입을 잃어버렸습니다. 원컨대, 한(漢) 나라에서 백성을 모집하여 변방에 채워 흉노(匈奴)를 막은 고사(故事)를 따라서, 도망한 고을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자에게는 20년을 기한하여 그 밭의 전세를 받지 말고, 그 백성을 부역시키지 말며, 수군 만호(水軍萬戶)에 전속시켜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노약한 자를 불러 모으며, 먼 곳까지 척후(斥候)를 두고 봉화(烽火)를 신중히 하며, 평소에 일이 없을 때에는 농사 짓고, 고기 잡고, 소금 굽고, 철공(鐵工)질하여 먹고 살며, 때때로 배를 만들고, 적이 이르면 들을 비우고 성보(城堡) 안으로 들어가고, 수군을 시켜 치게 하소서. 합포에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렇게 하면 몇 해가 되지 않아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백성들이 모두 고향 고을로 돌아올 것입니다. 변방 고을이 차게 되고, 여러 섬이 점차로 차서 전함이 많아지고 수군이 훈련되면, 해적이 도망가 변방 고을이 편안해지며, 수운이 편리해지고 창고가 채워질 것입니다. 수군 만호와 여러 도의 원수가 능히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전함을 수리하며, 인심을 결속하고 호령을 시행하여, 적을 멸하고 변방을 편안히 한 자에게 섬 안의 토지를 주어서 대대로 그 수입을 먹어 자손에게 전하게 하고, 한 성보를 잃고 한 주ㆍ군을 망친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여 가볍게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상벌을 보이소서.
전라ㆍ경상ㆍ양광 3도는 공부(貢賦)가 나오는 곳이며 국가의 요지인데, 지금은 왜놈들이 횡행하여 우리의 주ㆍ군을 쳐서 함락시켜 우리의 곡식을 짓밟고, 우리의 노약한 자를 살육하며 우리의 건장한 젊은이들을 노비로 삼고 있는데, 장수는 성 안에 엎드려 싸울 뜻이 없으므로 적의 형세가 날마다 성하니, 원하건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시기를 잃지 말고 소탕하게 하소서. 서북 한 방면은 국가의 울타리와 같은데, 간흉이 정권을 차지하고 주변사람을 널리 등용하여 원수와 만호가 예전의 정원보다 증가되었으므로, 주ㆍ군에서 공급하는 것이 한량이 없어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모두 도망갑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문무가 겸비하여 위엄과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난 사람을 뽑아서 각 도에 원수 한 사람, 상만호와 부만호 각각 한 사람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파하소서. 장사치들이 다투어 권문에 청탁하여 천호의 소임을 구하고서는 침탈하고 거두어들이는 데 못하는 짓이 없으니,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그 도의 원수로 하여금 위엄과 혜택이 백성의 신복을 받는 자를 가려서 제수하게 하고 자주 바꾸지 마소서.
권세 있는 집에서 다투어 외국과 무역하려고 돈피ㆍ잣ㆍ인삼ㆍ꿀ㆍ밀[蠟]ㆍ쌀ㆍ콩의 종류를 거두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백성이 매우 괴롭게 여겨서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이는 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도망가니, 통곡할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강제로 사들이는 폐단을 일체 금지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소서. 전일에 죄를 입은 간흉배들이 강제로 사들인 물건 중에, 아직 다 거두지 못하여 민간에 남아 있는 것은 마땅히 찾아 모아 관용에 충당하게 하고, 매와 돈피를 사사로이 바치는 것은 모두 엄하게 금지하소서.
수척(水尺)과 재인(才人)은 밭갈고 씨뿌리는 것을 일삼지 않고, 앉아서 백성의 곡식을 먹으며, 일정한 산업도 없고, 일정한 마음도 없으므로 서로 산골에 모여서 왜적이라 사칭하는데, 그 형세가 무시할 수 없으니 일찍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고을의 인구를 조사하여 호적을 만들어 이리저리 이동하지 못하게 하고, 빈 땅을 주어 부지런히 경작하여 평민과 같이 살게 하며,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지방의 관사(官司)가 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다. 창(昌)이 그 글을 도당에 내렸다.
○ 왜적이 청주(淸州)ㆍ유성(儒城)을 침범하고, 또 낙안군(樂安郡)ㆍ고흥(高興)ㆍ풍안(豐安) 등의 고을을 침범하여 민가를 공격하고 불태웠다.
○ 홍영통(洪永通)을 영문하부사로 삼았다. 국인(國人)이 모두 말하기를, “저렇게 탐하는 사람으로서 정월의 사변(事變)에 처형을 면하고, 이제 경화(更化 정치를 개혁하여 교화를 다시 한다는 뜻)를 시작하는 때를 만나서도 오히려 배척을 당하지 않고 또 상상(上相)의 자리에 오르니, 참 복있는 사람이다." 하였다.
○ 대간과 6조로 하여금 수령이 될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 왜적이 진주(晉州)를 침범하여, 목사 이빈(李賓)이 전사하였다.
○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朴葳)와 안동(安東) 원수 최단(崔鄲)이 왜적을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에서 쳐서 물리쳤으므로, 각각 활과 말을 주었다. 우리 태조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삼았다.
○ 왜적이 함양(咸陽)에서 운봉(雲峯)ㆍ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에 이르니, 도지휘사 정지가 도순문사 최운해(崔雲海), 부원수 김종연(金宗衍), 조전원수 김백흥(金伯興)ㆍ진원서(陳元瑞), 전주 목사 김용균(金用鈞), 양광도 상원수 도흥(都興),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등을 독려하여 쳐서 크게 물리쳐 왜적 58급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하였다. 적이 밤에 도망갔는데, 정지가 여러 군사의 양식이 없어 추격하지 못하니, 적이 배에 올랐다. 창(昌)이 정지 등에게 궁중의 술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 찬성사 왕안덕을 6도 도통찰사로 삼았다.
○ 다시 사인(士人)을 현령과 감무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예전 제도에는 현령ㆍ감무를 모두 과거에 오른 사인들로 썼었는데, 근세에는 오로지 여러 관사의 서리(胥吏)에게 시켰으므로, 탐하고 더러워서 백성에게 포학하게 하였으며, 자급이 모두 7ㆍ8품이어서 질(秩)이 낮고 사람이 미천하므로, 호강(豪强)한 자들이 가볍게 여겨 불법을 자행하여 시골 고을이 쇠잔하고 망하였다. 공민왕이 전이도(全以道)의 말을 따라서 5ㆍ6품을 안집사(安集使)로 삼아 묵은 폐단을 고치려 했으나, 안집사는 왕의 임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당시 재상이 천거한 자를 써서 백첩(白牒)으로 임소(任所)에 갔었다. 우(禑)의 때에 이르러 권간이 정치를 잡자, 오로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을 써서 저희들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출척하였다. 여러 현의 안집사 중에 글자도 모르는 자가 많아서, 남의 토지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권문에 바쳐 아첨하여 승진하는 매개로 삼으니, 탐하고 잔악한 화가 서리보다 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류(士流)를 쓰고 질(秩)을 5ㆍ6품으로 하였다.
○ 경상도 부원수 구성로(具成老)가 왜적 5급을 베어 바쳤다.
○ 왜적이 옥주(沃州)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 등의 고을을 침범하였다.
○ 창(昌)이 전교하기를, “사전(私田)의 조세를 모두 나라에서 거둔다면 조신들이 반드시 먹기에 곤란할 것이니, 그 조세를 반만 거두어 나라의 용도에 충당하라." 하였다.
○ 9월에 박위가 고령현(高靈縣)에서 왜적을 쳐서 35급을 베었다.
○ 지문하부사 유만수(柳曼殊)가 파면되었다. 간관이 이뢰기를, “만수는 문음(門蔭)으로 벼슬을 얻어 재상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 어머니에게 불효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천시합니다. 또 죽은 소윤 최수첨(崔秀瞻)의 딸을 강간하였고, 또 남이 경작하는 토지를 빼앗아 점령하여 그 주인이 원한을 품게 하였으니, 국문하여 풍속을 바로잡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헌부가 또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 우상시 허응(許應)이 상소하기를, “근자에 사헌부에서 판도사, 전법사와 함께 글을 번갈아 아뢰어 선왕의 균전(均田) 제도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윤허하시니 듣는 자로서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대가세족으로 겸병하는 자만이 홀로 불편하게 여겨 여러 말을 시끄럽게 하여 여러 듣는 사람을 현란시키니, 토지를 가진 사대부들이 일시에 같은 목소리로 호응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종묘ㆍ사직ㆍ도전(道殿)ㆍ신사(神祠)ㆍ공신ㆍ등과자(登科者)의 토지는 회수하지 않는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신등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먼저 주장하여 법을 폐지하려는 실마리를 일으킨 자가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하루도 못 되어 과연 반만 거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대개 법을 만드는 것은 폐단을 고치자는 것인데, 법을 만들고 폐단이 생기기도 전에 갑자기 중지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근래에는 나라의 재용과 군수(軍需)가 모두 부족하므로 일찍이 균전의 의논이 있었는데, 지금 만일 헛된 말을 믿고 끝까지 실행하지 못한다면, 녹봉과 군량은 어떻게 충족시키며, 비상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중국이 요동에 위를 세워 우리 강토를 엿본 지 해가 넘었고, 왜적이 깊이 들어와 난을 일으키면서 못하는 짓이 없으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가 두려운 때인데, 이런 것을 생각지 않고 국가의 공전(公田)을 공이 없이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하는 사람에게 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을 내버려 두고, 균전의 예전 제도를 회복하여 군국의 수요를 모두 여유있게 하면, 국가에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하니, 그 말대로 따랐다.
○ 서해도 관찰사 조운흘이 떠나려 할 때에 글을 올려 아뢰기를,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안팎에 일이 없을 때에도 오히려 위태한 것을 생각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바다로는 왜인의 섬에 가깝고, 육지로는 오랑캐의 땅에 연하였으니, 참으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 경계가 서해에서 양광ㆍ전라도를 거쳐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이 거의 2천여 리나 되는데, 바다 가운데 살 만한 섬은 대청(大靑)ㆍ소청(小靑)ㆍ교동(喬桐)ㆍ강화(江華)ㆍ진도(珍島)ㆍ절영(絶影)ㆍ남해(南海)ㆍ거제(巨濟) 등 큰 섬 20개가 있고, 작은 섬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모두 비옥한 땅과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었으나, 이제 황폐하여 쓰지 못하니 탄식할 일입니다.
바라건대, 5군의 장수와 8도의 군관에게 각각 호부(虎符)와 금패(金牌)를 주고, 천호ㆍ백호에게까지도 패면(牌面)을 주어 크고 작은 해도를 그들의 식읍(食邑)으로 만들어 자손에게 전하게 하면, 오직 장수 자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또한 자손 만대로 의식이 넉넉할 것이오니, 어찌 사람마다 스스로 힘껏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마다 자발적으로 싸움을 하면 전함이 저절로 갖추어지고, 군량을 몸소 준비하여 유격병이 되어 적을 무시로 공격하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여 백성이 부유하고 번성해져서, 인가가 서로 이어지고 닭소리, 개소리가 서로 들려서, 백성은 어염의 이익을 얻고 나라는 조운(漕運)의 걱정이 없어져, 조종의 토지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창이 그 글을 도당에 내렸다.
○ 우(禑)를 여흥으로 옮겨 그 고을 군사에게 숙직 호위하게 하고, 조세(租稅)로 공양하여 받들게 하였다.
○ 군기소윤(軍器少尹) 고봉례(高鳳禮)를 제주 축마 겸 안무별감(濟州畜馬兼安撫別監)으로 삼아서 보냈다.
○ 정방(政房)을 고쳐 상서사(尙瑞司)라 하였다.
○ 침원서(寢園署)에서 아뢰기를, “종묘의 제사는 나라의 큰 일입니다. 보궤(簠簋 종묘에서 쓰는 제기)ㆍ변두(籩豆 제기(祭器))를 채우는 것과 희생(犧牲 고기로 만든 제물)ㆍ자성(粢盛 곡식으로 만든 제물)을 갖추는 것은 각각 맡은 관원이 있는데,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상고하고 검사하는 일이 없어서 희생과 전물(奠物)이 풍성하고 정결하지 못하니,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도록 힘써서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고, 전교(典校)의 축판(祝版)도 장관(長官)으로 하여금 목욕 재계하고 싸서 나오게 하고, 혹시 정성스럽지 못하면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규탄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그 말대로 좇았다.
○ 문하평리 균형(鈞衡)과 밀직부사 유광우(兪光祐)를 남경에 보내어 호인(胡人)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 겨울 10월에 대사헌 조준의 무리가 글을 올려 시무(時務)를 아뢰기를,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기강을 세웠으니, 한 나라의 기강은 인체의 혈맥과 같은 것입니다. 몸에 혈맥이 없으면 기운이 통하지 않고, 나라에 기강이 없으면 명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법령이 행해지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크게 언로(言路)를 열어 상신(相臣)과 헌신(憲臣)이 각각 시무를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묵은 폐단이 겨우 고쳐지고 새 법이 아직 행해지지 않아서, 원망이 일어나고 기강이 문란해져 병이 혈맥(血脈)에서 고황(膏肓)에 미쳤으니,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 있더라도 빨리 다스리기는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판정(判定)해서 분부하는 법제를 판(板)에 새겨 시행하여 금석같이 굳게 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사시(四時)같이 믿게 하고, 감히 법을 범하거나 금령에 저촉되는 자가 있으면 일체 헌사에 맡겨서 다스리게 하소서.
침원서(寢園署)의 예문을 삼가 상고하건대, 모든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4일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훈채(葷菜)를 먹지 아니하는데, 이것을 산재(散齋)라 하고, 혹은 본사(本司)에 거처하고 혹은 상서성(尙書省)에 있으면서 옷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앉아 4일 동안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는데, 이것을 치재(致齋)라 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여러 집사자(執事者)가 산재로부터 치재하는 날에 이르기까지 각각 자기 집에서 혹 부녀자와 함께 가까이 있고, 또 예문을 익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강신(降神)하는 것, 헌작(獻爵)하는 것, 오르는 것, 내리는 것, 찬(贊)하는 것, 알(謁)하는 것, 진설하는 것, 철찬(撤饌)하는 것이 모두 법도에 부합하지 않으니, 매우 불경한 일입니다. 전하의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뜻에 어떻다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모든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산재하는 4일 동안은 그 집에 있으면 규정(糾正)에서 감찰하게 하고, 정순(正順 정3품의 상(上)) 이하는 녹사(錄事)를 시켜 살피게 하며, 치재하는 3일 동안은 공청에 모여서 예문을 익히고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되, 어기는 자는 불경죄로 논하소서.
본조(本朝)의 음악 절차가, 빈객을 위하여 잔치를 할 때에는 반드시 당악(唐樂)을 연주하고 난 다음에 우리 향악(鄕樂)을 연주하였는데, 지금 창기들의 가무와 성음(聲音)의 절조(節調)가 중(中)ㆍ화(和)에 부합되지 않아 예악의 근본을 잃었습니다. 조정의(朝廷儀)를 삼가 상고하건대, 조회를 하고 잔치를 하는 데 있어서는 다만 악공(樂工)을 시켜 음악을 연주하고 창기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원하건대, 이 법을 준수하시어 궁중의 향연(饗宴)에 당악(唐樂)만 연주하고, 창기는 앞에 가까이하게 하지 마소서.
남쪽 고을 백성들이 근래에 병란으로 인하여 혼란하고 생업을 잃었으며, 또 수재로 인하여 화곡(禾穀)이 손실되어 모두 생업을 유지할 수 없으니, 실로 마땅히 나라 근본을 배양하여 동요하지 않게 해야할 것이며, 각 도에 이미 절제사가 있고 또 관찰사가 있는데 군사를 징집하고 역군을 조발하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부산스러워서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니, 절제사와 관찰사 이외의 여러 사명을 받든 자들을 모두 소환하소서. 사대부로서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이미 몸을 바쳐 벼슬에 종사한 바에야 제 직책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래 그 본분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현관(顯官)의 직책을 맡고 있는 자가 근친(覲親)과 성묘(省墓)를 칭탁하여 왕의 구전(口傳) 허락을 받고서는 시골로 돌아가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관직(官職)을 비우고 직무를 폐하니, 몸을 바쳐 왕을 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부모 상사에 분상(奔喪)하는 일 이외에는 관문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부득이한 일이 있는 자는 반드시 사직한 뒤에 가게 하며, 어기는 자는 엄하게 다스리소서.
서울에 있으면서 그 고을의 일을 맡아 보는 주와 현의 아전을 기인(其人)이라 하는데,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므로 각 곳에 나누어 예속시켰더니, 노예같이 부리므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도망가는 자가 있습니다. 해당 관청에서 경주인(京主人)에게 독촉하여 날마다 궐포(闕布) 한 필씩을 받는데, 경주인이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 내고 갚지 못하여, 곧 고을로 내려가서 서울에서 빈 수량의 곱절이나 독촉하여 징수하고 횡포를 부려 빼앗으니, 주ㆍ군이 피폐해지는 것이 또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번 선공시(繕工寺)에서 날마다 기인의 궐포를 받아서 명분 없는 비용에 공급하니, 지극히 어질지 못한 일입니다. 이미 그 임무에 당하여 그 고을의 일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또 기인의 힘을 이용하여 나라의 역사에 이바지하지도 못하고, 한갓 백성의 고혈을 긁어서는 진흙과 모래같이 사용하여 나라의 근본을 깎으니, 전하께서 백성을 근심하는 뜻과 대단히 어긋난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기인을 파하여 향리로 돌아가게 하고, 각 대궐의 역사는 근일에 혁파한 창고의 노비로 대신하고, 사설(司設)ㆍ막사(幕士)ㆍ주선(注選) 등속을 또한 모두 혁파하여 민생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 우리 태조와 이색ㆍ문달한ㆍ안종원에게 판상서시사(判尙瑞寺事)를 겸하게 하고, 조준을 지문하부사로 삼아 대사헌을 겸하게 했다.
○ 이치(李致)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시중 이색과 첨서밀직사사 이숭인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명 나라 관원이 와서 우리나라를 감시하여 줄 것과, 또 자제를 입학하게 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현릉이 승하한 뒤로부터 천자가 매양 집정 대신을 불러 입조(入朝)하라 하였으나, 모두 두려워하여 가지 못하였다. 이색이 정승이 되자, 들어가 조회하기를 자청하였다.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마다 성하여 안팎이 마음으로 복종하므로, 이색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아들을 한 명 딸려 보내기를 청하니, 태조가 우리 태종(太宗 이방원)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명 나라로 들어가는데, 길에서 한 관인(官人)이 색에게 말하기를, “귀국의 최영이 정예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있는데도 이(李 이태조의 옛 휘(諱))가 파리 잡듯 쉽게 잡았으니 백성이 이(李)의 망극한 덕에 대하여 어떻게 갚으려 하는가." 하였다.
○ 급전도감(給田都監)을 두었다.
○ 11월에 조영길(趙英吉)이 몰래 서울에 들어왔는데, 잡아서 곤장을 때려 다시 순천(順天)에 귀양보냈다.
○ 사헌부에서, 판개성부사 문달한이 외척의 세력을 빙자하여 함부로 탐욕을 부린다고 탄핵하여 합포(合浦)에 귀양보냈더니, 도당(都堂)이 가까운 땅에 두기를 청하므로 철원(鐵原)에 옮기게 하였다. 달한은 이림(李琳)의 매부이다.
○ 왜적이 구례(求禮) 등지를 침범하니, 김종연을 원수로 삼았다.
○ 밀직사 강회백(姜淮伯), 부사 이방우(李芳雨)가 남경으로 가서 조회를 청하였다.
○ 간관이 상소하여 지밀직 이무(李茂)ㆍ이빈(李彬)을 탄핵하기를, “지난번에 조영길이 제 마음대로 적소(謫所)를 떠나 몰래 경성에 들어왔으니, 그 형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워 일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영길이 왔을 때 무와 빈의 무리는 그 정상을 자세히 알고도 곧바로 위에 아뢰지 않았으므로, 죄가 진실로 작지 않은데 오히려 중직(重職)을 맡아 좌우에 있으니, 마땅히 헌부에 명해서 엄하게 국문하여 반측(反側 두 마음으로 이리 붙고 저리 붙는 것)하는 자들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소가 올라가자 그 직책만을 파하였다. 또 상소하기를, “무와 빈은 이인임의 무리가 되어 위세를 부렸으나, 다행히 전하의 자애를 입어서 그 지위를 보전하였으니, 참으로 마땅히 조심하고 공경하여 유신(維新)의 정사를 도와야 할 것인데, 영길의 반측하는 모의에 참여하려고 이무는 말을 빌려 타고 와서 집에 있고, 이빈은 가까운 이웃에서 상종하여 간사한 모의를 성사시키려 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는데, 파직만 시키니 징계하여 다스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무는 곡주(谷州)로, 빈은 안변(安邊)으로 귀양보냈다.
○ 다시 최영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전법과 대간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영이 비록 공이 있으나 요동을 치기를 주장하여 중국에 죄를 지었으니, 공이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베어서 중국의 노여움을 풀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12월에 황제가 전원(前元)의 원사(院使) 희산(喜山)과 대경(大卿) 김려보화(金麗普化) 등을 보내어 말과 환자(宦者)를 구하였다.
○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 등이 상소하기를, “불교는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적고 세상을 떠나서 속세와 인연을 끊는 것을 종지로 삼으니, 본래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도가 아닙니다. 근세 이래로 여러 절의 중들이, 욕심을 적게 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토지의 조세와 노비의 노역(勞役)을 부처 공양에는 쓰지 않고 자신을 부유하게 하며, 과부의 집에 출입하여 풍속을 더럽히고,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쳐서 큰 절을 차지하기를 구하니, 맑고 깨끗하고 속세를 끊는 교리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도행(道行)이 있고 이욕(利慾)이 없는 자를 가려서 여러 사원에 머물게 하고, 토지의 조세와 고용된 노비는 그 지방의 관원으로 하여금 거두어 공문서에 써서 중의 수를 계산하여 공급해서 주지(住持)가 훔쳐 쓰는 것을 금하며, 모든 남의 집에 유숙하는 중들은 간음을 범한 것으로 논죄하고,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부녀자는 비록 부모상이라 하더라도 절에 가지 못하게 하여, 어기는 자는 실절(失節)한 것으로 논하며, 여승이 된 자는 실행(失行)한 것으로 논하고, 감히 부인(婦人)의 머리를 깎는 자는 중한 죄를 가하며, 향리(鄕吏)와 역리(驛吏)와 공노비, 사노비는 중이나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중으로서 항상 남의 집에 유숙하는 자는 군적에 채우게 하며, 그 주인 집도 죄를 주소서." 하였다.
○ 우사의(右司議) 윤소종(尹紹宗)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이인임은 유순하게 아첨하는 자질을 바탕으로 거짓과 간특한 마음을 품고 우리 현릉을 섬기어 외람되이 재상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영전(影殿)의 역사에 안팎이 괴롭게 여기므로, 시중 유탁(柳濯)이 농한기를 기다리기를 청하다가 왕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니, 인임이 드디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아, 정권을 잡고 뜻을 맞추어 영전의 역사를 계속해서 백성의 재력을 탕진하고 삼한을 병들게 하여, 마침내는 갑인년의 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상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으니, 인임이 나라의 권세를 제 마음대로 하여 일신의 백 년 부귀를 도모하고 삼한 만세의 사직을 돌보지 아니하며, 충성하는 어진이를 죽이고 대신을 귀양보내며, 서연(書筵)을 파하고 못된 아이들을 끌어들여 왕을 음악과 여색으로 인도하고, 왕을 놀고 사냥하는 데 빠지게 하여 상왕으로 하여금 친히 정사를 할 겨를이 없게 하였습니다. 환관ㆍ궁첩(宮妾)ㆍ옹부(饔夫)ㆍ내수(內豎)에게는 벼슬과 녹으로써 환심을 사고 뇌물로써 결탁하여 자신의 귀와 눈을 만들어 밤낮으로 왕께 자신의 칭찬하게 하였습니다. 달콤한 말과 작은 은혜로 국인(國人)을 우롱하여 환심을 사고, 임견미ㆍ염흥방을 심복으로 삼아 벼슬을 팔고 옥사를 돈으로 처리하여 문 앞이 물끓듯 하였습니다. 뇌물로써 부탁하는 자는 어진 인재가 되고, 행실과 염치가 있는 자는 불초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양부(兩府)ㆍ백사(百司)와 번진(藩鎭) 수령이 모두 그 문에서 나오고, 언관(言官)과 요직에 그와 사사로이 친한 사람을 배치하였습니다. 무한한 욕심이 끝이 없어서 남의 전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으며, 부잣집 늙은이를 봉군(封君)해 준다고 꾀었으며, 인척의 젖내나는 아이들과 공인(工人)ㆍ장사치ㆍ천인ㆍ노예가 앉아서 국록을 소모하여, 숙위(宿衛)하는 신하와 백전(百戰)의 용사는 한 말의 곡식도 얻어먹지 못하였습니다.
사방에 근심이 많아서 전쟁이 한창인데 인임은 관심도 없이 패전한 장수라도 뇌물을 바치면 묻지 않으며, 적을 깨뜨린 장수라도 뇌물을 주지 않으면 상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명리를 다투는 것을 급무로 삼고 뇌물을 공(功)으로 삼아, 인임의 사문(私門)이 있는 것만 알고 왕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임견미ㆍ염흥방의 죄악은 모두 인임이 빚어 낸 것입니다. 노씨(盧氏)는 궁첩(宮妾)이요, 최씨는 원비(院婢)인데, 왕의 뜻을 탐지하여 그들을 비(妃)로 봉해서 정궁(正宮)에 짝하게 하고, 그 내조에 의지하여 권세를 굳혔습니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그 계교가 주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제 집의 여종을 바쳐 소군(小君)으로 떠받들어 꿇어 엎드려 신이라 자칭했으니 왕실을 더럽히고, 조종께 치욕을 끼쳤습니다. 추한 소문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천자께서, '삼한에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그 죄악을 논하면 개국한 이래로 인임같이 심한 자가 없습니다.
여러 간흉들은 이미 멸족을 당하였는데, 인임은 머리를 보전하여 병으로 죽었고, 그 벼슬만 삭탈하여 그 집은 온전하니, 이것은 후세에 간적(姦賊)을 장려하는 셈이 됩니다. 원하건대, 전하는 굳건한 결단을 내리어서 인임의 죄를 따져서 관(棺)을 쪼개고, 집에 못을 파서 조종의 노여움을 풀게 할 것이며, 신민의 분통을 통쾌하게 풀어 주소서. 그 집과 노비와 재물은 일체 적몰하고, 그 자손은 멀리 귀양보내고 금고(禁錮)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간적으로 나라를 그르친 죄에는 그 몸이 비록 죽었더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악한 일을 하는 자는 두려워하고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권하여져서, 인심이 바로잡히고 나라의 운수가 길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자손을 금고하라고 명하였다.
○ 최영을 베었다. 영은 본관이 철원인데, 유청(惟淸)의 5세손(五世孫)이다. 풍신과 용모가 괴걸ㆍ위대하고,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강직하고 충성하고 청백하였다. 매양 군진에 나아가 적을 상대할 때면 신기(神氣)가 안정되고 차분하여 화살과 돌이 좌우에 날아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 한걸음이라도 퇴각하는 전사는 모두 베어서 반드시 이기도록 하였다. 그 때문에 크고 작은 여러 싸움에 향하는 곳마다 공을 세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어서, 나라가 힘입어 편안하고,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았다. 일찍이 영의 나이 16세 때에 아버지 원직(元直)이 죽으면서 훈계하기를, “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하였다. 영이 유훈(遺訓)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생업을 일삼지 않으니, 사는 집은 비습하고 좁으며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차림한 자를 보면 개돼지같이 여겼다. 비록 오랫동안 장수와 정승으로 중한 병권을 맡고 있었으나 청탁이 그에게 이르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그 청렴한 것을 탄복하였다.
대체(大體)를 지키기를 일삼고 세세한 사리를 따지지 않아서, 평생토록 병권을 맡았으나 휘하 군사 중에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좀 우직하고 학술이 없어서,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결단하고, 죽이기를 좋아하여 위엄을 세웠으며, 늙어서는 지식과 사려가 전도(顚倒)하고 착란(錯亂)되어, 공연히 요동을 치는 군사를 일으켰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이 논하기를,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 하였으니, 세간에서 명언이라 하였다. 형(刑)에 임하여 말과 얼굴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죽던 날에 도성 사람들이 저자를 파하고, 원근(遠近)에서 말을 전해들은 자와 거리의 아이와 골목의 부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시신이 길 옆에 있으니 길가는 자가 말에서 내렸다. 도당에서 쌀ㆍ콩 1백 50석과 베 2백 50필을 부의하였다.

[주D-001]이고양이[李猫] : 당 나라 이의부(李義府)가 겉으로는 부드럽고 속으로는 남을 해칠 마음을 가졌으므로, 당시에 그를 '이고양이'라 하였다.
[주D-002]군호(軍號) : 대개 출병할 때에 적에게 시위하기 위하여 군사의 실수(實數) 이외에 몇만 혹은 몇십만이라고 칭하는 것을 군호(軍號)라 한다.
[주D-003]곽광전(霍光傳) : 한 나라 곽광(霍光)이 대신으로서 무도한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주D-004]정(政) : 진 시황(秦始皇)의 이름이 정(政)인데, 실상은 진왕의 아들이 아니고,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 한다.
[주D-005]예(睿) : 진(晉) 나라 원제(元帝)의 이름이 예(睿)인데, 실상은 낭야왕(琅瑘王)의 아들이 아니고 우씨(牛氏)의 아들이라 한다.
[주D-006]혜제(惠帝)의 후사(後嗣) : 혜제(惠帝)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는데, 그의 어머니 여태후(呂太后)가 다른 사람의 아들을 몰래 데려다가 혜제의 아들이라 거짓 칭하고 황제를 삼았다.
[주D-007]주문공(朱文公)이……써서 : 주자(朱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저술하여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을 썼는데, 위에 인용한 세 가지 사실을 곧은 붓으로 썼다는 것이다.
[주D-008]분경(奔競) : 벼슬을 청탁하기 위하여 세력 있는 집에 분주히 왕래하는 것이다.
[주D-009]몸을……할 만한 : 한 나라 동중서(董仲舒)의 상소에, “임금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萬民)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정승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주D-010]조종께서……대신하여 : 《서경》에, “정치와 관직은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11]출(出)·입(入) : 법관이 죄인을 판결할 때에 중죄(重罪)를 가볍게 다스리는 것을 출(出)이라 하고, 경죄(輕罪)를 중죄로 다스리는 것을 입(入)이라 한다.
[주D-012]중(中)·화(和) : 음악은 중정(中正)과 화평(和平)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봄 정월에 해도(海道) 부원수 정지가 왜적을 쳐서 크게 격파시키자, 금대(金帶) 한 벌과 백금 50냥을 내려 주었다.
○ 나하추가 문합라불화(文哈刺不花)를 보내어, 예전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자고 청하였다.
○ 정몽주 등이 요동에 이르니, 도사(都司)가 칙명이 있다 하며 들이지 않고 바치는 예물만 받았다. 칙서에 이르기를, “하늘이 덮고 땅이 싣고 일월이 임하는 곳에 만민의 임금이 되었으니, 봉한 지역은 비록 크고 작은 것이 다르나, 백성을 다스리는 도는 모두 마찬가지다. 온 천하의 백성들을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한 임금이 두루 잘 길렀으랴. 전에 삼한의 추장이 백성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죽인 뒤에도 거듭 와서 짐에게 아뢰고 신하로서 조공하는 것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두 번 세 번 물리쳤으나 그치지 않아, 특별히 세공 문제로 그들을 곤란하게 하면 반드시 그치리라 생각하였다. 이제 그치지 않고 굳이 청하므로, 과거 수년 동안 바치지 아니한 자잘한 공물까지 모두 합하여 수효를 만들어서 그들을 암암리에 우롱하고 모욕하려 한다. 그러나 삼한의 지역이 중국의 동쪽, 창해의 밖에 있는데, 짐이 우리 중국의 서적을 보였다. 그 지방 사람들은 은혜를 생각지 않고 화를 얽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비록 잠깐 신하 노릇을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희 요동을 지키는 여러 장수들은 굳게 내 강토를 지키되, 견주거나 청구하지 말라. 이제 수년 동안의 물건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칙명과 같이 하라.' 하고, 그 뜻이 정성스럽지 못하거든 부서(符書)가 이르는 날에 전과 같이 저지하여 돌려보내어, 국경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다만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 오랑캐 발도가 와서 이성(泥城)을 노략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달아났다.
○ 요동 도사가 통첩을 보내기를, “고려가 대명을 신하로서 섬기니, 나하추와 화친을 통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이제 듣건대, '나하추가 문합라불화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자, 고려가 후하게 대접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하니, 신하로서 대명을 섬기는 의리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만일 죄를 면하고자 하거든, 문합라불화를 잡아 보내어 그 정성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후환이 있더라도 후회막급이리라." 하였다.
○ 2월에 양광도 안렴 유극서(柳克恕)와 교주도 안렴 최자(崔資)에게 나라 마구의 말을 각각 한 필씩 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간사하고 영리하며 아첨하는 사람으로, 우가 남쪽으로 순행했을 때에 백성의 고혈을 짜서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올렸고, 권세가에 뇌물을 주어 아첨하고 기쁘게 하였으므로, 이것을 하사한 것이다.
○ 우가 송경에 돌아왔다.
○ 좌사에서 의논하여 권근(權近) 등이 상소하기를, “관작이라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에게 명하고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진 자가 자리에 있고 능한 자가 직책에 있어야 하니, 공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싸움에서 승리한 공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돈과 재물이 모두 상주기에 부족하였고, 관작은 다 주기 어려웠습니다. 선왕께서는 임시로 첨직(添職)을 마련하여 일정한 수를 두어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으로 주었으며, 전공이 없으면 감히 헛되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더욱 격려되었으며, 공이 없는 자는 감히 바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지금은 첨직이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어, 공이 있고 없는 것이 서로 혼돈되고, 요행을 바라는 길이 날마다 열려, 공인ㆍ장사꾼ㆍ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부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비록 얻더라도 기뻐하지 않으며,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구하기를 그치지 않아, 관작의 천함이 진흙같이 되었으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가 의지하는 것은, 공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매는 것은 오직 관작뿐인데, 관작이 중하지 아니하여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뒤에 비록 공이 있더라도 무엇으로 상을 베풀 것입니까. 또 전장에서 싸우는 군사가 어찌 가볍고 천한 벼슬에 보태지기를 바라고 측량하기 어려운 위태 땅으로 달려가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기 위해서 첨설한 관직은 한결같이 선왕께서 정한 수에 의거하여, 싸움에 나가 공이 있는 군관(軍官)을 제외하고는 제수를 허여하지 마옵소서. 여자에게 택주(宅主)를 봉하는 것과, 중에게 제군(諸君)을 봉하고 법호(法號)를 주는 것과, 양부 외에 봉군하는 것은 모두 벼슬이 가볍고 천하게 되는 데에 관계되므로, 아울러 금지하옵소서.
국가의 안위가 주ㆍ현의 성쇠에 달려 있는데, 근년 이래로 지방 고을의 아전들이 본역을 면하기를 꾀하여 명서업(明書業)ㆍ지리업ㆍ의율업(醫律業)을 한다고 핑계대나, 모두 진정한 재능 없이 관직에 나아가 역사를 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골 아전이 날마다 줄어서 공무를 집행하기 어렵고, 수령들은 부리고 시킬 사람이 없게까지 되었으며, 여러 업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들은 고향으로 물러나 앉아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행하여도 수령이 이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ㆍ현에 약간 남아 있는 아전들도 모두 분에 넘치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 각 고을이 이로 인하여 더욱 쇠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동당(東堂)의 제업(諸業)과 감시(監試)의 명경(明鏡)을 모두 폐지하옵소서. 옛 책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재물은 백성의 마음이므로, 그 마음을 잃으면 백성이 흩어지고, 그 근본을 잃으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수재와 한재가 겹쳐서 백성들에게 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으며, 게다가 밭 하나에 주인이 두셋씩 되어서 각각 그 도조를 징수하여 백성을 괴롭혀도 그 곳 관사(官司)들이 이를 꾸짖어 금하지 못하니,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본국의 전법(田法)에 의거하여 서울 안에서는 판도사가, 지방에서는 안렴사가 판단 결정하여, 백성이 소생하여 쉬게 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거든 철저히 금지하옵소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옛 교훈을 배워야 이로써 일을 세울 수 있다.' 하였으니, 옛날부터 어진 임금이 배우지 않고서 온갖 정사를 잘 다스린 분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적에는 배움에 뜻을 두어 먼저 서연(書筵)을 개설하시니, 국인이 서로 치하하고 태평을 기대했었는데, 근년 이래로 하다가 말다가 하시어,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처음 뜻을 잊지 마시고 다시 서연을 열어, 대신에게 건의하도록 명하기도 하고, 측근의 신하로 하여금 강논하게 하기도 하여, 경학에 실린 의리의 종지를 통달하시고, 고금에 걸친 치란의 변천을 관찰하시어, 삼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 3월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아뢰기를, “본조에서는 벼슬에 복무한 기간과 노력의 실적을 가지고 자격에 따라 계급을 올려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상주는데, 근년 이래로 분주하게 경쟁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관작이 날로 천해져서, 공로가 있는 자는 승진하지 못하고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받으니, 자세히 조사고 차례에 따라 서용하여, 인사 행정의 법을 밝히소서.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니 더욱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 간사하고 아첨하며 탐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권세가에 붙어 수령이 되어 멋대로 불법을 행하므로, 주ㆍ부와 군ㆍ현이 나날이 피폐해지니, 대성(臺省)과 6조에 청렴하고 정직하며 근검한 자를 천거하게 하여 군ㆍ현에 나누어 보내고, 도순문사와 안렴사에게 어진 사람은 올리고 나쁜 사람은 내치어 상과 벌을 밝히게 하며, 만일 잘못 천거한 것이 있거든, 죄가 천거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옵소서." 하였다. 우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
○ 우가 정비의 대궐에 갔다. 이 뒤로부터 왕래가 매우 잦았는데, 어떤 때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갈 적마다 희롱하기를, “나의 궁녀들은 어쩐지 어머니의 인물만 못합니다."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상소하기를, “전하가 오로지 노는 것만 일삼고 동작에 절도가 없어, 낮이나 밤이나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을 달리시니, 백성이 용안을 바라보고 아는 자는 깜짝 놀라 실망하여, '전하가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하며, 알지 못하는 자는 난봉꾼으로 생각하여 손가락질하며 모욕하고 비웃습니다. 지금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고 흉년이 거듭 들어서, 백성의 생업이 탕진되고 나라 형세가 장차 위태롭게 될 것이니, 이때야말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히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조금도 유의하지 않고 밤늦도록 놀고 아침 늦게 일어나며, 안에서는 향락에 빠지고 밖에서는 말 달리며 돌아다니시어 작은 재미를 즐기고 장래의 걱정을 잊으시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면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시렵니까. 더구나 향락에 빠져 뜻을 방탕하게 하고, 말을 달리어 몸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보전하는 방법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한창 젊어서 혈기가 굳지 않았사오니, 이 또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는 감히 경솔히 나가서 길에서 달리지 마시고, 밤이 되거든 자고 아침이 되거든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쥐고, 대신을 가까이하시어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묻고 고금의 치란을 문의하시며, 조용히 담소하고 덕성을 함양하셔서, 법이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행하지 말아, 하루하루 더욱 조심하고 아무리 쉬고 싶더라도 쉬지 마옵소서. 그러면 전하께서는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착한 것을 좋아하시는 미덕이 생기고, 뜻을 방탕하게 하고 몸을 괴롭히는 근심이 없어져 천위(天位)는 더욱 높아지고 왕업은 더욱 오래 갈 것입니다." 하였다.
○ 문하시중 홍영통(洪永通)이 은퇴하기를 청하니, 조민수를 시중으로, 임견미를 수시중으로 삼고, 견미ㆍ도길부ㆍ우현보ㆍ이존성을 시켜 정방(政房)을 제조하게 하였다. 전례에 시중이 인사 행정을 맡았었는데, 영통과 민수가 시중이 되어도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견미가 권세를 독차지했기 때문이었다.
○ 여름 4월에 가뭄으로 이죄(二罪) 이하를 사면하였다.
○ 김한로(金漢老)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전 판사 한중보(韓仲寶), 상호군 한중량(韓仲良)에게 장형을 행하고 변방에 귀양보냈다. 중보는 일찍이 제주 안무사로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가장하고 마음대로 욕심을 부린 죄로 순군옥에 갇히었으며, 그 아우 중량은 본래 중보와 우애가 없었는데, 중보가 형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형의 죄악을 열거하여 이존성의 집에 익명으로 투서하였으므로, 아울러 중량도 옥에 가두어 죄를 주었다.
○ 해도 원수 정지가 남해현(南海縣)에서 왜적을 쳐서 크게 파하였다. 이때에 정지가 거느린 전함은 겨우 47척이었는데, 나주와 목포에 머물러 있었다.
적선 1백 20척이 크게 이르자, 경상도 바닷가의 고을들이 매우 동요하였다. 합포 원수 유만수(柳曼殊)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정지가 밤낮으로 배 몰기를 독려하여 손수 노를 젓기도 하니, 노 젓는 군사들이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에 도착하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이 이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렀는데, 형세가 대단히 성하여 사면으로 둘러싸고 전진하였다. 정지가 군사를 독려하여 나가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니, 적이 큰 배 20척마다 강한 군사 1백 40명씩을 태워 선봉으로 삼았다. 정지가 진격하여 크게 깨뜨려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뜬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병마사 윤송(尹松)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우가 몰래 호곶(壺串)에 가서 말 먹이는 것을 보았는데, 숙위하는 자들이 아무도 간 곳을 몰랐었다.
○ 6월에 교주ㆍ강릉도 수척(水尺)ㆍ재인(才人)이 가짜 왜적이 되어 평창ㆍ원주ㆍ영주ㆍ순흥 등지를 약탈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과 체찰사 최공철(崔公哲)이 50여 명을 잡아 죽이고, 그 처자를 각 고을에 나누어 귀양보냈다.
○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자 자손이 서로 계승함에 반드시 옛 일을 본받았습니다. 임금이 출입하는 것은 반드시 종묘의 제사나 국제간의 회합이나 외국 빈객의 접대 같은 일에 의하였고, 일없이 함부로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영릉(永陵 충혜왕)에 이르러 조종(祖宗)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간신(諫臣)의 말을 듣지 않고 날마다 여러 소인과 더불어 마을에 돌아다니며 놀다가, 그 소문이 상국에까지 들려 마침내 악양(岳陽)의 행차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가 놀러 다니심이 절도가 없어,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말달리며 다니시지 않는 곳이 없으니, 신민이 기대를 잃고 있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명을 두렵게 여기시고, 아래로는 조종을 본받아 출입하는 것이 절도가 있으며, 시위는 의장을 갖추어 혹시라도 가볍게 나다니지 마시어, 신민의 기대에 응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 왜적이 경상도 길안(吉安)ㆍ안강(安康)ㆍ기계(杞溪)ㆍ영주(永州)ㆍ신녕(新寧)ㆍ장수(長守)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선주(善州) 등지를 침략하고, 또 단양(丹陽)ㆍ제주(堤州)를 침략하였다. 전의령(典儀令) 우하(禹夏)를 경상도에 보내어, 원수들이 왜적을 막는 태도를 감독하고 시찰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우하가 여러 병마사를 독려하여 의성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고, 또 예안(禮安)ㆍ순흥(順興)에서 싸워 14급을 베었다.
○ 지순주사 황안신(黃安信)이 군량 운반을 감독하다가 쌀 70여 석을 절취하였다. 유사가 법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우의 인척인 관계로 관직만 삭탈하였다.
○ 왜적이 대구(大丘)ㆍ경산부(京山府)ㆍ선주(善州)ㆍ인동(仁同)ㆍ지례(知禮)ㆍ김산(金山) 등지를 침략하였다.
○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괴주(槐州)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었다.
○ 요동 심양의 비적 40여 기가 단주에 침입하니, 단주 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만호 황희석(黃希碩)과 천호 이두란(李豆蘭) 등이 추격하여 서주위(西州衛)ㆍ해양(海陽) 등지에 이르러 괴수 여섯 명을 베니,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 버렸다.
○ 교주ㆍ강릉도 도체찰사 최공철이 방림역(芳林驛)에서 왜적을 쳐서 8급을 베었다.
○ 8월에 문하찬성사 조인벽(趙仁璧)을 동북면 체찰사로, 판개성 부사 한방언(韓邦彦)을 상원수로, 문하찬성사 김용휘(金用輝)를 서북면 도순찰사로, 전 판도판서 안사조(安思祖)를 강계 만호로 삼아 변경을 방비하게 하였다.
○ 왜적이 비옥(比屋)ㆍ의성 등지를 침략하는데,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여러 번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부원수 윤가관(尹可觀)이 안동ㆍ예안 등지에서 싸워 패하였다.
○ 왜적이 거령(居寧)ㆍ장수(長水) 등의 현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침략하려 하는 것을, 부원수 황보림이 여현(礪峴)에서 싸워 물리쳤다.
○ 우가 밀직제학 조준(趙浚)을 불러 이르기를, “양광ㆍ경상도에 왜적이 매우 성한데, 원수와 도순문사가 약하고 겁내어 싸우지 못하니, 경이 가서 전쟁의 상황을 살펴야 되겠다." 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에게 두 도를 맡게 하시려면, 그 장수로서 머뭇거리거나 패전한 자는 신의 조처에 맡기셔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원수와 도순문사의 직위가 신의 위에 있는데, 어찌 신을 두려워하여 죽을 땅에 나가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장수의 족속들이 이를 꺼리어 우에게 사뢰어 그만두게 하고, 마침내 문하평리 문달한(文達漢)을 양광ㆍ경상도 도체찰사로 삼고 명령하기를, “가서 장수의 부지런함과 태만함, 사기의 왕성함과 쇠약함 것을 살피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원수는 잡아 가두고 보고하여, 그 나머지는 군율에 의하여 곧장 처단하라." 하였다.
○ 왜적 2백여 기가 괴주(槐州) 장연현(長延縣)을 침략하니, 원수 왕안덕ㆍ김사혁(金思革)ㆍ도흥(都興)이 적과 싸워 3급을 베었다.
○ 왜적 1천여 명이 춘양(春陽)ㆍ영월(寧越)ㆍ정선(旌善) 등의 군ㆍ현을 침략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여 만대에 전통을 내려 주셨고, 여러 성군이 서로 계승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며 법과 제도를 준수하여 차차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선대에서 수백 년 동안 쌓아올려 어렵게 이룬 왕업이 전하여 전하에게 이르렀으니, 물려받으신 책임이 무겁다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지위는 어려울 뿐이며,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소중하여, 한 생각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사해에 근심을 끼치기도 하고, 하루라도 삼가지 않으면 백 년의 걱정을 이루기도 하니, 비록 정치가 잘 되고 일이 없는 때라도 오히려 마땅히 두려워하며 조심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데, 하물며 국가의 위급한 시기를 당하여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수재와 한재가 잇달아 일어나고 기근과 유행병이 겹쳐, 나라에는 몇 달을 지탱할 저축이 없고, 백성은 하루저녁거리도 없어, 늙고 약한 자는 죽어서 개천과 구렁에 뒹굴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웃나라가 국경 가까이에 군사를 주둔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며, 우리의 인민을 꾀어 가고, 또 왜적이 깊이 들어와 약탈해서 각 고을이 쓸어낸 듯 버려져 적의 구혈이 되었어도, 수령이 막지 못하고 장수가 제어하지 못하니, 자고로 위란의 지극함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섶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것도 현재의 다급함에 비유하기에 부족하고, 침상을 깎아 살갗에까지 재앙이 미친다는 것도 현재의 절박함을 비유하기에 부족합니다. 시국을 구제하기가 급함이 마치 새는 물을 타는 불에 붓는 것같이 하더라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제는 참으로 전하가 두려워하여 닦고 살피며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며 분발하여 일을 하여야 할 때입니다.
지난번에 신등이 사헌부와 함께 글을 올려 미행(微行)을 간하였더니, 전하께서 영명하고 과단하신 덕으로 넉넉히 용납하여 어기지 아니하시고 곧 이를 받아들이시어, 궁중에 단정히 계시고 두어 달 동안을 나다니지 아니하셨습니다. 간하는 말을 좇으시는 덕과 허물을 고치는 아름다움이 오늘날에 빛나고 옛날보다 뛰어나서 일월이 빛을 더하니, 신하들은 조정에서 서로 경사로 여기며, 백성들은 들에서 서로 기뻐하여, 안팎이 한결같이 정치가 잘될 것을 기대한 지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태하고 어지러워 어려움 많은 시기를 당하여, 반성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하는 태도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다시 나다니심만을 일삼아 밤낮으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십니다. 높으신 왕의 몸으로 말 한 필을 타고 다니시어 자주 깊은 궁중을 떠나서 거리를 달리시니, 시위하는 신하들은 활과 칼을 끼고 빈 궁을 지키고 있으며, 공경과 백관들은 전하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틈을 엿보고 내응하는 도적이나, 첩자와 자객이 이 나라 안에 있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만일 강하고 사나운 무리가 기회를 노리고 몰래 일어난다면 창졸간에 변이 일어날까 매우 두렵습니다. 이것이 신등이 밤낮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깊이 전하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바입니다.
옛날부터 인심은 헤아리기 어렵고, 화란은 일정한 것이 없습니다. 위태로움은 반드시 편안한 데서 생기고, 변은 반드시 소홀히 여기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환란을 방비하는 도를 참으로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잘 다스릴 때에도 오히려 변이 날까 두려운데, 하물며 지금은 도적이 많은 때이므로 더욱 한심합니다. 전하께서는 선조가 쌓아올린 어려운 왕업을 계승하고 계시니, 비록 자신은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종묘 사직을 어찌 하시렵니까. 잘못인 줄 알면서 간하는 말을 좇지 않음은 허물을 늘리는 것이고, 위태한 줄을 알면서 정사를 닦지 않음은 망함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만일 나돌아 사방에 번진다면, 틈을 타려는 도적이 어찌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겠으며, 적을 막으러 간 장수가 어찌 실망을 하지 않겠으며, 백성의 마음이 어찌 더욱 분산되지 않겠으며, 나라 형세가 어찌 더욱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등이 밤이 되어도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해도 탄식하면서, 가슴을 치며 슬픔을 금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감히 안락하지만 마시 만기(萬機)의 정사를 도모하시고, 감히 놀러 나다니지 마시어 비상한 변고를 방비하시며, 간하는 말대로 반드시 행하시어, 혹시라도 신용을 잃지 마시며,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잡으시어 재신들을 가까이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계획과 도적을 막는 방책을 널리 물어 보시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꾀하며, 덕을 닦고 정사를 행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상과 벌을 엄정하게 주시어 나라의 법전을 밝히시면, 장수와 병사는 저절로 분발하고 도적은 저절로 그칠 것이며, 이웃 나라가 감히 꾀하지 못하며 강포한 자가 감히 방자하지 못하여, 조종의 업이 영원히 전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마을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면서 그래도 대간을 두려워하고 꺼렸었는데, 환관들이 말하기를, “대간도 모두 상감께서 제수한 것이온데, 만일 뜻에 거슬리면 갈아 치우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이로부터 우가 더욱 대간을 가볍게 여기어 다시 기탄 없이 노닐며 사냥하기에 쉴 날이 없었다.
○ 왜적이 임실현을 침략하였다.
○ 호발도(胡拔都)가 와서 단주를 침략하니, 부만호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이에 내응하여, 재물을 모두 차지하고 뒤에 거짓으로 붙잡혔다. 상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워 모두 패하였다. 그때에 이두란이 어머니의 상복을 입고 청주에 있었다. 이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러와서 그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여 그대가 복을 입고 집에 있을 수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르라." 하였다. 두란이 상복을 벗고, 하늘에 울면서 절하여 고하고 나서 활과 화살을 차고 따라갔다. 발도와 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나, 두란이 선봉이 되어 먼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태조가 조금 뒤에 이르니, 호발도가 세 겹이나 되는 두꺼운 갑옷에 붉은 털옷을 껴입고, 검정 암말을 탄 채 진을 가로막고 기다리고 있다가, 태조를 가볍게 생각하고 군사는 머물러 두고 칼을 뽑아서 몸을 던져 달려 나왔다. 태조 또한 단기로 칼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가서 검을 휘두르며 서로 쳤는데, 둘 다 날쌔게 비키어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리며 활을 당겨 그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곧 또 그 말을 쏘아 관통시키니, 말이 거꾸러지며 호발도가 떨어졌다. 태조가 또 쏘려 하자, 그 휘하들이 몰려들어 구원하니, 우리 군사들도 쫓아나왔다.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쳐서 깨뜨리니, 호발도는 겨우 몸만 빠져 도망갔다.
○ 찬성사 김유를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는 진정표를 올리고, 밀직부사 이자용(李子庸)은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앞서 요동을 경유하다가 번번히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유 등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간하기를, “지금 왜구가 사방을 침략하여 소란하고, 첩자와 자객이 경성에 왕래하는데, 전하께서는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거리를 달리시며 밤새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시니, 신들은 전하를 위하여 매우 위태롭게 여깁니다." 하니, 우가 말하기를, “내가 정말 이런 잘못이 있다. 경들이 아니면 누가 말하겠는가." 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변방을 편안히 하는 계책을 올렸는데, 아뢰기를, “북계(北界)는 여진ㆍ달달ㆍ요동ㆍ심양의 지역과 서로 연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중요한 땅입니다. 비록 일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하겠는데, 이제 그 곳 주민들이 매양 저 사람들과 서로 물자를 교역하여 날마다 서로 친압하여 혼인을 맺기까지 하여 저쪽에 있는 족속이 유인하여 가고, 또 앞잡이가 되어 들어와 약탈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과 같이, 이것은 동북 한 방면의 걱정일 뿐만이 아닙니다. 또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유리한 지리를 차지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쪽 군사들이 점령한 곳이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 내버려 두고 도모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중한 이익을 노려 멀리 우리 오읍초ㆍ갑주ㆍ해양의 백성들을 꾀어서 유인하여 가고, 지금 또 단주 독로올(禿魯兀)의 땅에 쳐들어와서 사람과 물건을 몰아가니, 이것으로 본다면 우리 요해의 지리 사정을 저쪽에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한 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는 터에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없어서, 삼가 국경 경비의 방책을 계획하여 보고하나이다.
도적을 막는 방법은 군사를 훈련시켜 일제히 공격하는 데 있사온데, 지금은 훈련시키지 않은 군사들을 먼 땅에 분산시켜 놓았다가 도적이 들어온 뒤에야 황급하게 불러들이는데, 군사가 올 때쯤 되면, 도적은 벌써 노략질하여 물러난 뒤입니다. 비록 시기에 이르러 싸운다 하더라도, 전술에 서투르며,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병졸을 훈련시켜 약속을 엄하게 세우고 호령을 거듭 밝혀, 변을 기다렸다가 곧 출동해서 사기(事機)를 잃지 말게 하옵소서.
군사의 생명은 양식에 달려 있으니, 비록 백만 군사가 있다 할지라도 하루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하루의 군사가 될 수 있고, 한 달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한 달의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하루도 먹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의 군사에게는 과거에는 경상ㆍ강릉ㆍ교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공급하였는데, 지금은 도내의 지세로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수재ㆍ한재로 인하여 관청과 민간이 모두 텅 비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중과 무뢰배들이 불사를 칭탁하여 함부로 권세가의 편지를 받아서, 각 고을에 간청하여 백성에게 쌀 한 말과 베 한 자를 꾼다고 하고는 섬곡식과 10여 자의 베를 거두는데, 명목을 '반동(反同)'이라 하여 징수하기를 빚받아 내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이 이때문에 기한에 시달리고, 또 여러 관청과 여러 원수(元帥)가 보낸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이집저집에서 돌려 가며 먹어서 살을 깎아 내고 뼈를 망치질하듯 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흩어지고 도망치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입니다. 그리하여 군사의 식량이 나올 데가 없으니, 모두 금하여 없애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옵소서.
또 도내의 고을들이 산과 바다에 끼어 있어서 땅이 좁고 또 척박한데, 지금 그 세를 거두는 것이 경작하는 토지가 많고 적은 것은 묻지 않고, 오직 호구가 크고 작은 것만을 보아서 책정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에서 땅이 넓고 풍요한데, 모두 아전들의 녹전이어서 그곳의 지세는 관청에서 거두지 못하므로, 백성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 고르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은 족하지 못하오니, 금후로는 도내 여러 고을과 화령을 모두 경작하는 토지의 많고 적음에 준하여 과세함으로써 관청이나 민간이 다 편하게 하옵소서.
군사와 백성은 통속이 있지 않으면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선왕의 병신년 하교에, 세 집으로 한 호(戶)를 만들고, 백 호로 통을 만들며, 통주(統主)는 원수의 영(營)에 소속시키고, 일이 없으면 세 집이 차례로 번을 서며, 일이 있으면 다 나오고, 일이 급하면 집안의 장정을 모두 징발하였으니, 진실로 훌륭한 법이었습니다. 근래에 법이 폐지되어 소속된 곳이 없어서, 징발할 때마다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로 도피하여 불러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또 한재와 기근으로 민심이 더욱 이탈되는데, 저들은 돈과 식량으로 미끼를 삼아 불러들이고, 군사를 숨기고 와서 노략질하여 돌아가기 때문에, 한 지역의 궁한 백성들이 이미 일정한 마음이 없고, 또 종족이 서로 섞여 있어서 이리저리 관망하다가 유리한 쪽으로만 따르니, 실로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병신년 하교에 의하여 다시 군호(軍戶)를 정해서 통속이 있게 하여 굳게 그 마음을 결속하게 하옵소서.
백성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군하의 용감하고 비겁함은 장수에게 달렸습니다. 지금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권세가의 문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세력을 믿고 그 직책을 삼가지 않아서, 군사는 그 수요가 부족하고 백성은 그 생업을 잃게 되어 호구가 줄고 창고가 텅 비니, 이제부터는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정직한 자를 공정하게 선발하여 백성에 게 임해서는 홀아비와 과부를 돌보아 주게 하며, 또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선택하여 군사를 거느려 국가를 방위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 왜적 1천여 명이 옥주(沃州)ㆍ보령(報令)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개태사(開泰寺)로 들어가서 계룡산에 웅거하였다. 문달한(文達漢)ㆍ왕안덕(王安德)ㆍ도흥(都興)이 나가서 공격하니, 적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공주 목사 최유경(崔有慶)과 판관 송자호(宋子浩)가 구점(仇岾)에서 싸워 자호는 패하여 죽고, 달한ㆍ김사혁(金斯革)ㆍ안덕ㆍ도흥ㆍ안경(安慶)ㆍ박수년(朴壽年) 등은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싸워 8급을 베고, 사혁은 목천(木川)ㆍ흑점(黑岾)까지 추격하여 20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지용기를 전라도 도원수로 삼았다.
○ 9월에 지문하사 이을진을 강릉도 원수로 삼았다.
○ 일본이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 1백 12명을 돌려보냈다.
○ 대호군 정승가(鄭承可)를 오도 체복사로 삼아서, 군사 진용의 허실과 접전의 근태(勤怠)를 조사하였다.
○ 사헌부가, 환관 예의 판서 조순(曹恂)이 우를 인도하여 황음한 짓을 하게 한 것을 논핵하여 전라도 내상(內廂)에 귀양보냈다.
○ 왜적이 강릉부와 김화현(金化縣)을 침략하고 또 회양부(淮陽府)와 평강현(平康縣)을 함락하니, 경성에 계엄을 실시하고 평양과 서해도의 정병을 불러들여와 호위하게 하며, 전 정당상의 남좌시(南佐時), 지밀직 안소(安紹), 밀직상의 왕승귀(王承貴)ㆍ왕승보(王承寶)ㆍ정희계(鄭熙啓)ㆍ인해(印海), 개성군 왕복명(王福命), 판개부성사 곽선(郭璇) 등을 보내어 그들을 치도록 하였으나 김화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 왜적이 홍천현(洪川縣)을 함락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ㆍ이을진(李乙珍)이 적과 싸워 5급을 베었다.
○ 진병법석(鎭兵法席)을 중앙과 지방의 사찰 도합 1백 51개소에 크게 베풀었는데, 공급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방어에 나가는 군사는 식량을 각자 준비하였다.
○ 밀직 김세덕(金世德)의 처 윤씨가 보국사의 중과 간통하니, 사언부가 적발하여 다스리려 하였으나, 세력이 강한 족속이기 때문에 면하였다.
○ 겨울 10월에 도체찰사 최공철(崔公哲)이 낭천(狼川)에 이르렀는데, 왜적이 갑자기 나와 습격하여 그 아들을 사로잡았다. 체복사 정승가가 왜적과 양구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물러가 춘주에 주둔하니, 적이 춘주까지 추격하여 함락시키고, 드디어 가평현(加平縣)에 침입하였다. 원수 박충간(朴忠幹)이 싸워서 쫓아 버리고 머리 6급을 베었는데, 적은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웅거하였다. 찬성사 상의 우인열(禹仁烈)을 도체찰사로 삼고, 전 밀직 임대광(林大匡)을 조전원수로 삼아, 가서 적을 치게 하였다.
○ 이성 만호(泥城萬戶)가 보고하기를, “요동 총병관이 아뢰기를, '달달(韃韃)이 문합라불화(文哈剌不花)를 고려에 보내어 함께 요동을 치려 하니, 군사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소서.' 하니, 황제가 손도독(孫都督)에게 명하여 전함 8천여 척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치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가 배가 떠나려 하는데, 마침 달달의 군사가 혼하구자(渾河口子)를 공격하므로, 도독의 군사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하니, 우가 변방을 방비하여 지킬 것을 명령하였다.
○ 대간이 상소하기를, “근래에 이웃 나라의 경계가 있고, 해적이 깊이 들어와 첩자가 왕래하므로 사변이 있을까 두려운데, 전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단기로 돌아다니시니, 신들은 근심하고 위태롭게 여기어 두세 번이나 간하였는데, 곧 받아들이시면서도 환관과 내수(內豎)ㆍ위사ㆍ어인(圉人 말을 기르는 사람)이 뜻을 맞추어 아첨하여 주상을 예가 아닌 길로 인도하고, 도리어 전하로 하여금 무시로 출입하게 하여 나라에서 믿음을 잃게 하였으니, 충성스럽지 못하며 도리에 어그러짐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내승별감과 속고적(速古赤)ㆍ환관ㆍ내수 등의 일을 맡고 있는 자를 국문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소서. 또 말[辭]을 맡은 자는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것이어서 그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반드시 정직하고 근신하는 자 두 사람을 선택하여 그 임무에 충당하였는데, 지금은 두 사람을 더 두었으나 도리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어 전하가 출입하는 것을 백관에게 고하지 않으니, 옛 제도에 의하여 두 사람만 선택하여 두고, 그 나머지는 도태시켜 버리소서."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니, 우가 환관 김길봉(金吉逢)에게 장형을 행하여 이산(泥山)에 귀양보내고 내수(內豎) 서양수(徐良守)를 쫓아내었으며, 내승별감 김천용(金千用)은 도망갔으므로 그를 수색하게 하였다.
○ 왜적이 안변부 흡곡현을 침략하고 사방으로 나와 무인지경을 밟듯이 노략하였다. 우가 밀직제학상의 조준(趙浚)을 강릉ㆍ교주도 도검찰사로 삼았다.
○ 이을진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 병마사 곽충보(郭忠輔)가 동산현(洞山縣)에서 왜적을 쳐서 20여 급을 베고 말 72필을 노획하니, 적은 남은 무리를 거두어 고성포에 물러가 정박하였다. 우가 을진 등에게 차등에 따라 백금을 내렸다.
○ 11월에 통역 장백(張伯)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가, 진하사 김유(金庾)ㆍ이자용(李子庸)이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다 하여 법사(法司)에 회부하였다." 하고, 예부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이르기를, “고려가 멀리 동쪽 변방으로부터 지난번에 와서 아뢰어 약속 듣기를 원하였으나, 속으로는 여러 가지로 거짓을 품어서 틈이 생기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짐이 그 때문에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허락하였는데, 그 뒤에도 자주 와서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짐은 성의가 지극하다고 생각하여 세공을 한정해서 저들의 성의를 표하게 하였던 것이다. 간 뒤에 약속대로 조공하지 않은 지가 다섯 해나 되었는데, 이제 또 경하하는 예로 왔으니 정성스럽기는하나,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으니 어찌 심한 모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신을 보낸 일로 말하면 고려 국왕과 그 신하의 잘못이 아니며, 사자가 고의로 무시하고 만홀히 하여 시기가 지나서 온 것이다. 지금 고려가 완전히 신하가 되었으니, 영구히 사대(事大)의 정성을 지킬 것이다. 온 사신은 이미 조회하는 예에 어긋났으므로 마땅히 법사에 회부하고, 바친 예물은 이미 시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받아들이지 말며, 다시 고려에 문서를 주고, 반드시 약속 듣기를 원한다면, 지난 5년 동안 바치지 않은 세공으로 말 5천 필, 금 5백 근, 은 5만 냥, 베 5만 필을 한꺼번에 가져와야만 곧 성의가 인정되며, 다른 날에 사자를 데려가기 위한 군사의 출동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을 두어 세공을 준비하였다.
○ 왜적이 청풍군(淸風郡)을 침략하니, 도순찰사 한방언(韓邦彦)이 금곡촌(金谷村)에서 그들과 싸워 8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홍상재(洪尙載)와 전공판서 주겸(周謙)을 경사로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지문하부사 정지가 여러 도에서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좇았다.
○ 12월에 정지를 해도 도원수, 양광ㆍ전라ㆍ경상ㆍ강릉도 도지휘 처치사로 삼았다.
○ 우가 노빈(盧贇)의 집에 갔다. 빈은 영수(英壽)의 아우인데, 우가 일찍이 빈의 처가 예쁜 것을 보고 이때부터 자주 갔다.
 고려사절요 제34권
 공양왕 1(恭讓王一)
기사 원년(1389), 대명(大明) 홍무 22년

○ 봄 정월에 예문춘추관 전교시에서 글을 올리기를, “예문관은 사명(詞命)을 맡고, 춘추관은 기사(記事)를 맡고, 전교시는 사전(祀典)을 맡고 축문을 수찬하니, 이 세 가지는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므로 선왕이 그 관청을 금중(禁中)에 두고 '금내(禁內)'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관(館)과 시(寺)가 밖에 있으니, 선왕이 관직을 설치한 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사한(史翰) 2명과 전교 1명에게 궐내로 들어와 숙직하게 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소서." 하니, 창(昌)이 그 말을 따랐다.
○ 2월에 창이 이인임을 장사 지내도록 허락하니, 윤소종(尹紹宗)이 또 동사(同舍) 허응(許應)ㆍ민개(閔開) 등과 다시 상소를 올려 인임의 죄를 논핵하려 했으나 날이 저물어 상소를 올리지 못하였다. 마침 윤소종이 등에 등창이 나서 휴가를 청하였으므로 허응 등이 그 글을 중지시켜 올리지 않았다. 이인임의 족당은 윤소종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소종이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겨지자 그제야 이인임을 장사지냈다.
○ 동지밀직사사 윤사덕(尹師德)을 남경에 보내어 최영(崔瑩)을 베어 죽인 것을 아뢰었다.
○ 경상도 원수 박위(朴葳)가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쳐서 왜적의 배 3백 척과 막사를 불살라 거의 없애 버렸다. 원수 김종연(金宗衍)ㆍ최칠석(崔七夕)ㆍ박자안(朴子安) 등이 잇달아 이르러 사로잡혀 갔던 백성 1백여 명을 찾아 돌아왔다. 창이 박위에게 의복과 안장 갖춘 말과 은정(銀錠)을 하사하여 권장(勸獎) 위유(慰諭)하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박위는 막사와 배만 불살랐을 뿐이고, 포로를 빼앗은 사실은 없다." 하였다.
○ 간관이 상소를 올려 부병(府兵)을 논하기를, “적이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 부병을 설치하시고 군부사(軍簿司)을 시켜서 마섭(馬攝)의 정무를 맡게 하셨는데 풍채와 무예를 구비한 자가 그 선발에 참여하게 되어, 이 때문에 장수는 그 적임자를 얻었고, 군사는 날래고 강하게 되었습니다. 근년 이후로는 벼슬로 들어오는 길이 많아져 군정(軍政)이 온통 무너져서 도목(都目)에 구애를 받거나, 청탁으로 인하여 나이나 재능을 묻지 않고 벼슬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포대기에 쌓인 어린아이나 공(工)ㆍ상(商)과 노예가 조그만 공도 없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국록을 소모하니, 한 번 급한 일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이들을 쓰겠습니까. 이는 선왕(先王)께서 군사를 설치한 뜻이 전혀 아닙니다. 용맹과 지략을 모두 갖춘 자를 정선하시어 이에 충당하시고, 항상 무예를 익히게 하여 그 능력을 조사하여 승진시키기도 하고 내쫓기도 하소서. 대호군과 상호군은 임금의 호위이며 군(軍)의 사표(師表)이오니 늙은 사람과 어린아이들에게는 이것을 시키지 말 것이며, 제색(諸色)의 공인과 장인 중에 공로가 있는 자는 돈과 곡식으로 상을 주고 일을 맡기지는 마옵소서. 선왕이 설치한 관직의 정원 외에 더 설치한 인원수는 일체 모두 삭감하소서." 하였다.
○ 3월에 사헌부에서 민중리(閔中理)가 진주에서 아버지의 상(喪)에 달려가면서 생선과 고기를 싣고 간 것과, 판도 판서가 되어서는 기복시키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무를 보고 녹을 받은 죄를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 예조에서, 조회를 받을 때에 음악을 사용하기를 청하니, 창이 그 말을 따랐다.
○ 강회백(姜淮伯)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고려는 산이 막히고 바다를 등져서 풍속이 다르니, 비록 중국과 서로 통하고 있으나 떨어지고 합함이 일정하지 않았다. 이제 신하가 그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왕으로 세워 중국에 조회하러 오기를 청하니, 이는 인륜이 크게 무너지고 왕의 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신하 노릇하지 않는 반역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 사자에게 돌아가서 동자(童子 창(昌))가 와서 조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라. 왕으로 세우는 것도 저희들에게 달렸고 폐하는 것도 저희들에게 달렸으니, 중국은 상관이 없다." 하였다.
○ 사관 최견(崔蠲) 등이 글을 올리기를, “사관의 임무는 왕의 언행ㆍ정사와 백관의 시비ㆍ득실을 모두 사실대로 써서 후세에 보여 권계(勸戒)를 남기는 까닭으로, 예로부터 국가를 가진 자는 사관의 직책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본조에서도 예문관ㆍ춘추관을 설치하여 문학과 행실을 갖춘 자 8명을 뽑아서 모두 사관과 문한(文翰)의 직책을 맡겼으며, 또 겸관을 두어 이를 통솔하게 하였으니, 그 책임을 중하게 하는 까닭입니다. 근년 이후로 사관과 문한이 나누어져 둘이 되고, 겸관도 직무를 보지 않으며, 공봉(供奉) 이하 4명만으로 이를 담당하게 하여, 사실을 기록하는 데 갖추지 못하게 되었으니, 국가에서 사관을 설치한 본뜻이 아니옵니다. 지금부터는 사한(史翰) 8명은 그 직임을 같이하게 하여 각기 사초 2본을 만들게 하고, 임기가 차서 옮기게 되면 1본은 사관(史館)에 바치고 1본은 집에 간수하여 뒷날의 상고에 대비하게 하고, 겸관과 충수찬(充修撰) 이하의 관원은 각기 보고 들은 바에 의하여 이를 기록하여 사초를 만들어 모두 사관에 보내게 하고, 또 본관(本館 사관(史館))에서는 직접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아문에 통첩하여 시행한 모든 일을 일일이 사관에 보고하게 하여 기록하는 데에 전거로 삼게 하고, 이를 영원한 제도로 삼게 하십시오." 하니, 창이 그 말을 따랐다.
○ 여름 4월에 예의사(禮儀司)에서 매월 육아일(六衙日)에 조참(朝叅)하기를 청하였다.
○ 이색(李穡)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평소부터 이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예로써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에 이르기를, “너는 원조(元朝)에 벼슬하여 한림이 되었으니 응당 중국말을 알 것이다." 하였다. 이색이 중국말로 빨리 대답하기를, “왕이 친히 조회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황제가 알아듣지 못하여 예부의 관원이 이를 전해 아뢰었다. 황제가 웃으며 이르기를, “너의 중국말이 꼭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였다. 이색이 발해에 이르러 두 객선과 같이 왔는데, 반양산(半洋山)에 이르러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서 두 객선이 모두 침몰되고, 태종(太宗)이 탄 배도 거의 구원하지 못할 뻔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자빠지고 넘어졌으나 태종은 신색이 태연하더니, 마침내 보전하여 돌아왔다. 이색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황제는 마음에 주장이 없는 임금이었다. 내가,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면 황제가 그것은 묻지 않았고 황제가 물은 것은 내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니, 그때의 의논이 이를 비난하기를, “대성인의 도량을 속된 선비가 비평할 수 있는 것이랴." 하였다.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아뢰기를, “입춘으로부터 입추에 이르기까지 사형을 정지하고, 서울에서는 다섯 번 복심해서 아뢰고, 지방에서는 세 번 복심해서 아뢴 뒤에야 죄를 결단하도록 허락하고, 군기(軍機)와 반역에 관계된 일은 이 한정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전제(田制)를 의논하였다. 이때 전제가 크게 문란하여 겸병하는 집들이 토지를 빼앗아 산과 들을 차지하였으니, 독해(毒害)가 날로 깊어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였다. 우리 태조가 대사헌 조준(趙浚)과 더불어 사전을 개혁하고자 하였는데, 이색이 옛 법을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 하며 그 의논을 고집하여 따르지 않았고, 이임(李琳)ㆍ우현보(禹玄寶)ㆍ변안열(邊安烈)도 모두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이색을 유종(儒宗)으로 여기고 그 말을 빌려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켰으므로, 개혁하여 사전을 공전으로 회복하려는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예문관 제학 정도전(鄭道傳)과 대사성 윤소종(尹紹宗)은 조준의 의논에 찬동하고, 후덕 부윤(厚德府尹) 권근(權近)과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유백유(柳伯濡)는 이색의 의논에 찬동하고, 찬성사 정몽주(鄭夢周)는 두 사이에서 어름어름하고 있었다. 이에 각 관사(官司)로 하여금 사전을 개혁하여 공전으로 회복하는 이해(利害)를 의논하게 하니, 의논한 자 53명 중에 개혁하고자 하는 자가 10에 8,9명이었는데, 개혁하지 않으려는 자는 모두 대가(大家)의 자제였다.
○ 예의 판서(禮儀判書) 민제(閔霽)가 군신(群臣)의 의종(儀從)과 일산(日傘), 부채[扇]에 차등을 두도록 다시 정하기를 청하니, 그 말에 따랐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 가뭄 때문에 죄수를 사면하였다.
○ 10학(學)에 교수(敎授)를 두었다.
○ 6월에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과 첨서밀직사사 권근을 남경에 보내어 왕이 친히 조회하기를 청하였다.
○ 심덕부(沈德符)를 판삼사사로, 안종원(安宗源)을 문하찬성사로, 정몽주를 예문관 대제학으로, 정영손(丁令孫)ㆍ이서원(李舒源)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경상도 도절제사 박위(朴葳)가 왜적의 배 1척을 잡고 32급을 베었다.
○ 안종원(安宗源)을 남경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밀직사 황보림(皇甫琳)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 경기 절제사 박자안(朴子安)이 왜적과 싸워 30급을 베었다.
○ 가을 7월에 왜적의 배 20척이 와서 해주(海州)에 정박하므로, 절제사 유만수(柳曼殊)와 우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을 보내어 이를 막았는데,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 대사성 윤소정(尹紹宗)이 글을 올리기를, “《역경》에, '어릴 때에 바름을 기름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다.' 하였습니다. 하늘이 준 성품은 본래 선하여 악이 없으니, 범인(凡人)과 요순(堯舜)은 애당초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진실로 태교(胎敎)를 받고 태어나서, 강보(襁褓)에 있을 때에는 보(保)가 있어서 그 신체를 보호하여, 마땅한 기거(起居)에 나아가고 조심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으며, 부(傅)가 있어 덕의(德義)를 가르쳐서 지나친 기호(嗜好)를 조절하고 그릇된 견문을 막게 하였는데, 특별히 행실이 바른 선비를 뽑아서 함께 출입하고 기거하게 하였으므로, 반드시 바른 일만 보고 바른 말만 들어서, 외물(外物)의 유혹이 들어올 수 없고 천성(天性)의 진실(眞實)함이 잘 길러져서, 마음속에 가르침을 받을 터전이 맑고 고요하여 물욕의 가림이 없는 까닭으로 모두 요순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臣)이 적이 보건대, 주상께서 《논어》를 읽은 지 13개월이나 되었는데 매일 새로 안 것이 많아야 서너 글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혹시 읽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주상은 총명하신 재주를 타고났으니, 배움에 있어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상께서 서연(書筵)에 잠시 납셨다가 금새 내전(內殿)에 들어가서 환관ㆍ궁녀와 가까이 지내시어, 마음이 외물에 얽매어 있고 글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일에 이르러서는 학문을 게을리 하는 흔적이 겉으로 나타나서, 사부(師傅)가 물러가기 전에 음훈(音訓)을 통하기도 전에 문득 읽다가 문득 일어나고, 조금 후에는 어선(御膳)의 때를 놓친다고 말하면서 내전에 들어가시니, 학문이 어떻게 향상되겠으며 덕이 어떻게 밝아지겠습니까. 상왕(上王)이 처음 왕위에 오르실 때에 총명하여 학문에 뜻을 두셨는데, 간신이 나라를 도둑질할 계책으로 즉시 강연을 파하여 우리 상왕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하마터면 종사(宗社)를 전복시킬 뻔하였습니다. 주상께서 왕위를 전해 받은 초기에 대신이 전조(前朝 전왕(前王))의 일을 경계로 삼아 맨 먼저 경연(經筵)을 열어 성인의 학문을 권면하여 요순 같은 성인을 주상에게 기대하였사옵니다. 만약 학문을 게을리 하신다면 종묘는 어떻게 할 것이며 생령(生靈)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지금 7월의 길한 절후인데 곡식을 손상시키는 바람이 불어, 국가 생민(生民)의 생활을 해치니, 하늘의 견책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성스러움에 제때에 바람이 부는 것이며, 몽매함에 항상 바람이 부는 것이다.' 하였는데, 주상께서 학문을 게을리 하시는 흔적이 나타나 징계하는 바람이 응한 것이니, 하늘이 몽(蒙)으로써 주상에게 경계하는 뜻이 어찌 매우 명백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10세가 되면 사부에게 나아가 생활하였습니다. 옛날에 노(魯)나라 양공(襄公)은 나이 겨우 8세인데도 나가서 천하 제후의 회합(會合)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어선(御膳)을 반드시 깊은 궁궐 안에서 먹었겠습니까. 옛날에 정자(程子)가 강관(講官)이 되어서 글을 올리기를, '임금이 하루 안에 환관과 궁첩(宮妾)을 가까이하는 때가 적고 어진 사대부와 접하는 때가 많게 되면, 자연히 기질이 변화하여 덕기(德器)가 이루어진다' 하였습니다.
주상께서는 매일 아침 태후(太后)에게 문안드린 후에는 편전(便殿)에 나가서 어선을 올리도록 명하고, 여러 간관(諫官)과 관각(館閣)의 학사(學士)에게 명하여 항상 곁에서 모시도록 하여, 조용한 말로 도리를 설명하기를 해가 기울거나 밤이 깊을 때까지도 하여, 천명이 떠나고 머무는 것과, 인심이 따르고 배반하는 것, 농사의 어렵고 고생스러움, 수자리의 괴로움, 치란의 근본, 흥망의 자취, 고금의 예악, 인물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일들을 날마다 앞에 와서 진술하게 하면, 오랫동안 들어서 저절로 통달하게 되며, 습관이 천성(天性)이 되어 덕이 요순과 같게 될 것이옵니다. 이를 항상 깊은 궁궐 안에 있어서 부인과 환관의 사특함에 물이 들어, 성(聖)이 변하여 몽(蒙)이 되는 것에 비한다면 그 유익함이 어찌 매우 크지 않겠습니까. 환관과 부인들의 버릇없는 행동은 실로 왕의 덕을 해치는데 있어 곡식을 해치는 가라지[稂莠]와 같으며, 어진 사대부의 훈도하는 이익은 곧 성덕(聖德)을 함양하는데 있어, 만물을 기르는 우로와 같습니다. 무릇 궁녀와 환관도 정자가 경연에서 아뢴 말에 따라, 모두 나이 40,50세 이상의 중후한 사람을 뽑아서 측근에 대비하고, 나이 젊은 자는 측근에 나아오지 못하도록 하여 왕을 사특하고 사사로운 데로 인도하는 근원을 끊게 하소서. 대궐에서 쓰는 기용(器用)은 주(紂)의 옥배(玉杯)와 상저(象箸)를 경계(警戒)로 삼고, 우(禹) 임금이 의복을 검소하게 하던 것을 모범으로 삼으소서.
지금의 영서연(領書筵)ㆍ지서연(知書筵)은 옛날의 태사(太師)ㆍ태부(太傅)이며, 시독은 옛날의 소사(少師)ㆍ소부(少傅)입니다. 지금부터는 정전(正殿)에서 글을 읽을 때에 지서연이 나아오면 반드시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여 경서를 배우고, 지서연이 물러가면 역시 일어날 것이오며, 시독이 나아오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자리를 피하고 얼굴빛을 고쳐 사부(師傅)를 존중하는 뜻을 극진히 하소서. 이것이 이른바,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에게 반드시 배우고 난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수고롭지 않고 왕 노릇을 하셨고,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에게 반드시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수고롭지 않고 패자(覇者)가 되었다.'(《맹자》에 있는 말)는 것이니, 성덕을 양성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위로는 태조(太祖)께서 5백 년을 전해 주신 왕통(王統)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삼한(三韓)의 억조 창생의 기대를 생각하시어, 미천한 신의 간절한 말을 죄주지 마시고 살펴 받아들여 닦고 반성하여 천만세의 태평을 이루소서." 하였다.
○ 왜적이 함양ㆍ진주를 침범하니, 절제사 김상(金賞)이 가서 구원하였으나 패하여 죽었다.
○ 문하 시중 이색(李穡)이 해직을 원하고 이임(李琳)을 천거하여 자신를 대신하게 하니, 이색을 판문하부사로, 이임을 시중(侍中)으로, 홍영통(洪永通)을 영삼사사로 삼았다. 이색이 일찍이 홍영통ㆍ이무방(李茂方) 등과 함께 남신사(南神寺)에서 백련회(白蓮會)를 설치하니, 식자들이 그 부처에게 아첨하는 것을 기롱하였다.
○ 8월에 대사헌 조준(趙浚) 등이 소를 올리기를, “적이 생각하옵건대, 사전(私田)은 사문(私門)에만 이익이 되고 나라에는 이익이 없으며, 공전은 국가에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도 매우 편합니다. 사문에 이익이 되면 겸병이 이로써 일어나게 되고, 용도가 이로 말미암아 부족하게 되며, 국가에 이익이 되면 창고가 차고 국가의 재용이 넉넉하게 되며, 송사가 그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를 가진 이는 마땅히 경계(經界)를 인정(仁政)의 시초로 삼아야 될 것이온데, 어찌 겸병의 문을 열어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전지는 본래 사람을 기르기 위한 것인데 사람을 해치는 데 알맞게 되었으니, 사전의 폐해가 이 지경으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국가를 도와서 여러 대에 쌓인 폐단을 제거하게 되었으니, 사전을 개혁하여 공전으로 회복하는 이해(利害)는 분명히 알 수 있는데도 세신(世臣)과 대가(大家)들은 오히려 폐단이 있는 풍속을 이어받아 말하기를, '본조(本朝)의 이루어진 법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개혁해서는 안 되며, 만일 이를 개혁한다면 사군자(士君子)의 생계가 날로 곤란해져서 반드시 공업과 상업에 마음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하면서, 서로 부언(浮言)을 선동하여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고 사전을 일으켜 부귀를 보전하고자 하니, 그것이 한 집의 계책으로서는 잘된 일이지마는 사직과 생민에는 어찌되겠습니까. 만약 사전을 일으키면 이는 삼한(三韓)의 백만 민중을 기름불 속에 밀어 넣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면서 도리어 백성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니, 불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이 생각하건대, 경기의 땅으로 왕실을 보위하는 사대부의 전지로 삼아 그것으로 생계를 이바지하고 업을 두텁게 하며, 나머지는 모두 개혁하고 제거하여 위에 바치거나 제사 지내는 용도에 충당하고,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여, 겸병의 문을 막고 쟁송(爭訟)의 길을 근절시키는 영원한 아름다운 법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와서 빙문하고, 우리나라에서 왜적에게 사로잡혀 간 인구(人口)를 돌려보냈다.
○ 간관 이준(李竱) 등이 사전을 다시 일으킬 수 없다고 글을 올려 간쟁하니, 좌사의(左司議) 문익점(文益漸)이 이색(李穡)ㆍ이임(李琳)ㆍ우현보(禹玄寶)에게 붙어 병을 핑계하여 서명하지 않고, 다음날 곧장 서연(書筵)으로 달려갔다. 조준이 탄핵하기를, “익점은 본래 유일(遺逸)로서 진주(晉州)의 두메에서 몸소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어질다 하여 간대부(諫大夫)로 임명하여 왕의 측근에 두고 왕의 자문(諮問)에 이바지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충언을 남김없이 올리고 치도(治道)를 진술하여 다스림을 도와야 될 것인데도, 우물쭈물하며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어 간쟁하는 절개가 없으며, 몸을 굽히고 하는 일 없이 남에게 순종만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동료 오사충(吳思忠)과 이서(李舒)가 각기 소를 올려 시사를 극력 말하였으나, 익점은 녹(祿)만 지키고 관직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마디도 언급함이 없었으며, 또 동료가 연명하여 소를 올려 전제를 극력 논하였으나, 익점은 권세에 아부하여 병을 핑계하고 참여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잘한 계책으로 생각하여, 위로는 전하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지혜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사림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이것은 마땅히 그 관작을 삭탈하고 산야(山野)에 돌려보내어, 말할 책임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자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곧 익점을 파면시켰다.
○ 창(昌)의 생일에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 양광도 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史) 성석린(成石璘)이 주ㆍ군에 의창(義倉)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정지(鄭地)를 양광 전라 경상도 도절제체찰사로 삼아서 적을 토벌하고 백성에게 전지를 경작시키며, 성곽을 수축하는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와 부령(副令) 김인용(金仁用)을 답례로 유구국(琉球國)에 보냈다.
○ 사재 부령(司宰副令) 문윤경(文允慶)이 그 아버지의 첩을 간음하고, 또 관아의 물품을 도적질하니, 법사(法司)에서 탄핵하여 윤경과 그 아버지의 첩을 목매어 죽였다.
○ 4월부터 이 달에 이르기까지 늘 비가 와서 물이 솟아오르고 산이 무너졌다.
○ 9월에 창(昌)이 중국에 친히 조회하려 하니 이색이 아뢰기를, “요동의 들판은 매우 추우니, 일찍이 떠나야 합니다." 하였다. 조금 후에 창(昌)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그의 나이 어린 것을 민망하게 여겨 도당(都堂)에 말하여 가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 영흥군(永興君) 환(環)이 일찍이 어떤 일로 무릉도(武陵島 울릉도)로 귀양갔는데, 생사를 알지 못 한 지가 19년이나 되었다. 그의 아내 신씨(辛氏)가 환이 풍파에 표류하여 일본국(日本國)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청하여 가노(家奴)를 시켜 사신을 따라가서 물색하여 찾은 것이 서너 번이었다. 이때에 와서 그 가노가 환이라고 칭하는 자와 함께 왔는데, 위인이 매우 어리석고 얼굴도 닮지 않았으며, 말도 많이 잊어버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과 성이며 마을도 알지 못하였다. 신씨의 아우 전 판사 극공(克恭)과 인친(姻親) 전 판개성부사 박천상(朴天祥), 전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 지밀직 이숭인(李崇仁)ㆍ하륜(河崙)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짜 환이 아니다." 하였으나, 신씨가 경산부(京山府)로부터 와서 보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아는 것이 어찌 아내의 아는 것만 같으랴." 하고, 드디어 사헌부에 송사하였다. 사헌부에서 종실(宗室)과 천상 등을 모아 대질하니, 환의 두 아들과 형인 중 참수(旵髓)와 종실의 여러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진짜 영흥이다." 하니, 천상 등을 탄핵하여 무고죄(誣告罪)를 주었다. 숭인이 도망하니, 옥졸(獄卒)이 숭인의 아들 차약(次若)을 두 손을 뒤로 묶고는 숭인을 찾아내라고 등을 매질하여 피가 흘렀다. 길에서 우리 태조(이성계(李成桂))를 만났는데 옥졸이 차약을 길가의 집에 숨기니, 차약이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令公 태조)은 나를 살려 주십시오." 하였다. 태조가 놀라서 불러 물어보고는 옥졸에게 이르기를, “어찌 아들에게 아버지를 찾도록 강요할 수 있느냐." 하고, 곧 석방하도록 명령하고, 또 종자 한 사람을 시켜 차약을 집에 데려다 주게 하였다. 이에 시중 이임(李琳)과 창에게 아뢰기를, “즉위한 초기에 너그러운 정사를 베풀어야 될 것이오니, 천상 등을 사면하기를 바라오며, 더구나 숭인은 서연(書筵)에서 시강하여 학문을 보좌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직무에 힘쓰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천상 등 4명을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숭인이 서연에 나아가니 사헌부에서 또 탄핵하였다. 이때 윤소종(尹紹宗)이 숭인의 높은 재능을 질투하였고, 또 이색이 숭인을 칭찬하면서 자기는 칭찬하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갖은 방법으로 참소하고 헐뜯었다.
○ 창(昌)이 이색ㆍ이임과 우리 태조는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로 전상에 오르게 하고, 찬배(贊拜)하고 이름을 칭하지 말게 하였다. 각기 은 50냥과 채단 10필과 말 1필을 하사하고, 교지를 내려 권장하고 위유하였으니, 정몽주의 청을 따른 것이다.
○ 밀직 부사 유원정(柳爰廷)을 시중 경복흥(慶復興)의 무덤으로 보내어 제사 지내게 했는데, 그 제문에, “우리 선조 공민왕(恭愍王)이 경을 헌사(憲司)에 탁용하여 경에게 기강을 바로잡기를 맡겼으며, 침실에 불러들여 밤을 새워 정사를 자문하였다. 모든 백성들의 고락과 사대부의 충간(忠姦)을 밝게 알아내어, 이익되는 일을 일으키고 해되는 일은 제거하며, 현재(賢材)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는 물리쳤으니, 드디어 안으로는 기철(奇轍)을 목 베고 밖으로는 홍건적을 섬멸하였다. 덕흥(德興)의 난리에 경과 최영(崔瑩)이 충성을 발하여 이를 쳐서 쫓아 우리 사직을 보존하였으며, 역적 신돈이 사도로 우리 선조(先朝)를 미혹시켜 영첨의사(領僉議事)가 되니, 삼한의 경대부가 어두운 밤에 달려가서 청탁하고 오직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 문정(門庭)이 물 끓듯 하였는데, 신돈도 경의 청렴과 충성을 공경하였으며, 경을 굽히게 하려고 제 집에 오게 하여 권위(權威)를 보이자고 여러 번 은근한 뜻을 통하였으나 경이 한 번도 그 문에 나아가지 않으니, 신돈이 마침내 경을 참소하였던 것이다. 이에 명이(明夷)의 행이 있자 삼한 사람이 경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가 모두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돈이 주벌을 받은 뒤에, 선조가 경을 쫓은 것을 매우 뉘우쳐서, 바로 그날에 경을 불러 좌상에 복직시켰다. 우리 상왕이 왕위를 계승하니 적신 이인임(李仁任)이 기회를 타서 제멋대로 관직을 팔고 옥을 팔았으나 경이 조정에 있었기에 5,6년 동안은 사직이 조금 안정되었다. 인임이 경을 꺼려서 한정이 없는 욕심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므로 조석으로 눈을 흘겼으나, 우리 왕모(王母) 명덕비(明德妃)가 경을 깊이 신임하였기 때문에 감히 일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명덕비가 승하함에 미쳐서 인임이 여러 흉악한 사람을 사주하여 경을 내쫓았으니, 이에 인임의 흉악함이 극도에 달하여 원통한 소리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아, 경의 관직은 신하로서 제일 높지마는 경성 근처에 한 이랑의 토지도 없고, 집 안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었으며, 대그릇 밥에 물을 마시고, 해진 갖옷과 야윈 말[馬]로써 지냈으니, 천만년(千萬年) 지나간 옛날에서 찾더라도 경과 같은 이는 몇 사람이나 되겠으랴. 경의 충성과 청렴과 의열(義烈)은 삼한에 모범이 되고 만세에 권장할 만하므로, 내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사자(使者)를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니, 이 특별한 대우를 흠향하여 길이 우리 왕가를 보우할지어다." 하였다.
○ 장하(張夏)ㆍ성석린(成石璘)을 문하 평리로, 조운흘(趙云仡)ㆍ김사형(金士衡)ㆍ최유경(崔有慶)을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로, 권주(權鑄)를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민제(閔霽)를 개성윤(開城尹)으로 삼았다.
○ 김여지(金汝知)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윤승순(尹承順)과 권근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도평의사사에 자문을 보냈는데, 그 자문에, “고려의 국내에 변고가 많아서 배신(陪臣)은 충신과 역적이 뒤섞여 하는 일이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왕위(王位)는 왕씨(王氏)가 시해를 당하여 후사(後嗣)가 끊어진 이후 비록 왕씨라고 꾸며서 이성(異姓)으로 왕을 삼았으나, 이것은 삼한이 대대로 지켜 왔던 좋은 일은 아니다. 옛날에도 임금을 시해한 적(賊)이 있었으나 임금의 죄악이 지극한 데서 생겼던 것이며, 무릇 임금을 시해한 자는 비록 난신적자이기는 하나, 또한 인정을 베풀어 천의를 돌이키고 많은 백성을 편안하게 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고려의 배신들은 음모에 간사함까지 겹쳐서 지금까지 편안하지 못하였고, 설혹 역으로써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역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 될 일인가. 만약 역을 떳떳한 일이라고 한다면 역신이 잇달아 이를 일삼을 것인데, 모두 맨 먼저 역(逆)을 한 자가 이를 가르친 것이니, 또 무엇을 원망할 것이랴. 전에 예부에서 '동자(童子)는 서울에 올 필요가 없다'고 이문(移文)하였으니, 과연 어질고 지혜로운 배신이 보필하는 지위에 있어 위에서 군신의 분의(分義)를 정하고 나라에서 백성을 편안히 할 계책을 만든다면, 비록 수십 년을 조회하지 않더라고 무엇을 걱정할 것이며, 해마다 와서 조회하더라도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하였다. 권근이 도중에서 사사로이 열어 보고 돌아와서는 이림(李琳)의 집에 먼저 보이고 난 후에 도당으로 보냈다.
○ 겨울 10월에 왜적이 양광도의 도둔곶(都屯串)을 침범하였는데, 도체찰사 왕안덕(王安德)이 왜적과 싸워 크게 패하였다.
○ 찬성사 배극렴(裴克廉)과 밀직 부사 박경(朴涇)을 남경으로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간관 오사충(吳思忠) 등이 예문관 제학 이숭인을 탄핵하기를, “숭인은 성품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며 언행이 사특하고 아첨하며,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주도 없고, 원대(遠大)한 생각을 할 만한 계책도 없는데, 문묵(文墨)의 말기만으로 출세하여 분수에 넘치는 명예를 얻어 중요한 관직에 오래 있었습니다. 이인임이 권세를 부릴 때에는 이 사람이 아첨하여 붙었으며, 임견미(林堅味)가 정권을 희롱할 때에는 또 그의 심복이 되어 자못 세력을 부리고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부모의 상에 3년의 상기를 마치기 전에는 과거의 시관이 될 수 없는 것이 국가의 제도입니다. 그런데 숭인이 산기 상시로 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도 감시(監試)의 시관을 요구하여 시관이 되었으나, 조복을 입고 시관노릇을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상시(常侍)의 높은 관직을 강등하고 상호군의 낮은 관직을 요구하여 과거 시험을 맡았으며, 더구나 어머니가 죽은 지 겨우 백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태연히 고기를 먹어 사람의 도리를 허물었으니 이는 불효입니다.
근래에 상국에서, 간흉들이 탐욕을 부린다 하여 우리나라를 절교하였는데, 간흉들이 처형되고 주상께서 중흥하여 시중 이색(李穡)이 중국에 들어가 조회할 때에 숭인이 따라갔는데, 전일의 탐욕의 마음을 고치지 못하고 몸소 물건을 팔고 사고 하기를 상인과 같이하여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삼한 사대부의 면목에 침을 뱉게 하였으니, 비록 시를 칠보(七步)에 짓고, 입으로 요순의 말을 외울지라도 실로 개와 돼지보다도 못하니, 참으로 이른바 '소인유(小人儒)'인 것 입니다. 어찌 시독(侍讀)으로 삼아 왕의 측근에 두겠습니까.
근일에 와서는 그 간사한 꾀를 마음대로 부려 종친(宗親 영흥군(永興君) 환(環))을 무함하여 부자ㆍ형제ㆍ부부의 대륜을 무너뜨리고자 하였으나, 진상이 드러나자 말이 궁하여 명을 어기고 숨었는데, 주상께서 그를 시독이라 하여 특별히 죄를 사면하고 묻지 않았사오며, 또 선마(宣麻)를 내려 후한 예로써 대우하였는데도, 숭인은 천지의 포용하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순월(旬月) 동안이나 지체하고 즉시 나와 사은하지 않았으니, 주상을 업신여기고 예를 무너뜨림이 심하였습니다. 그 불경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헌사를 시켜서 죄를 추궁하여 엄하게 다스려 멀리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불효하고 불경함과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징계하여 인륜을 바로잡고 선비의 절개를 권려(勸勵)하소서." 하였다. 창(昌)이 그 소를 헌부에 내려 그 죄를 추궁하니, 숭인이 또 도망하였으나 찾아 잡아서 경산부(京山府)로 귀양보냈다.
또 헌부에서 박돈지(朴惇之)가 일찍이 그 장모를 간음하였고, 이제 또 이색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서 조회할 때에 몸소 물건을 팔고 샀다 하여 탄핵하니,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었다. 돈지는 숭인과 평소부터 친한 까닭으로 죄를 받게 된 것이다.
○첨서밀직사사 권근이 숭인을 구원하는 글을 올리기를 "숭인을 불효하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가 죽고 난 후 3년 안에 시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의 아버지 원구(元具)는 이미 늙고 병들어 금방 죽을 목숨으로 매우 급박하였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에 아들이 감시(監試)를 맡는 영화(榮華)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숭인의 재주를 중히 여기고 원구의 뜻을 가련하게 여겨 그로 하여금 감시를 맡게 하였습니다. 만약 숭인이 구차스럽게 사양하였다면 이는 죽은 어머니만 알고 살아 있는 아버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 되며, 그가 후일의 비방을 면하고자 한다면 그 아버지의 뜻을 돌보지 않게 되기 때문에, 비록 마음속으로는 편안하지 못하였으나 힘써 직무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허물이 있지만 공자의 이른바, '허물을 보고서 그 사람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효자의 불행이니, 불효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관직에 있는 자 중에도 혹은 부모가 모두 죽고 난 후 3년 안에 왕의 구전(口傳)을 받았다 사칭하여 시험을 보고 과거에 오른 자가, 중요한 관직에 올라 헌부(憲府)에 앉아서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으니, 그 사람들은 부모가 모두 죽었으니 누구를 위한 영화이겠습니까. 오직 자기 몸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어머니에게는 미안한 일을 한 것이 불효가 된다면, 제 몸을 위하여 부모를 잊은 것이 참 효도가 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이 3년상을 행하는 사람은 만 명에 혹시 한 명이 있을 정도이며, 국가에서 기복의 법을 만들어 거상하려는 뜻을 빼앗는데, 만약 숭인에게 죄를 주고 반드시 3년상을 행한 사람을 구하여 이를 쓰려고 한다면, 이는 만 명을 버리고 한 명을 얻는 것이므로 신은 주상께서 사람을 얻어 쓸 수 없을까 염려합니다. 숭인이 아버지를 사랑한 심정은 살피지 않고 불효하다는 명목으로써 허물을 씌우니 어찌 너무 가석하지 않습니까.
숭인을 불충이라고 한 것은 영흥(永興 환(環))의 진위를 대질할 때에 이미 왕의 명을 받았으면 마땅히 즉시 스스로 나아갈 것이온데, 미루면서 나아가지 않고 숨어 피하기까지 한 그것입니다. 그러나 숭인은 대신이요, 영흥의 진위에 대한 분별은 말을 잘못한 사소한 실수인 것입니다. 국가의 옛날 법으로써 이를 처리한다면 한 장의 공함(公緘)을 보내어 이를 묻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하물며, 전일에 헌사(憲司)에서 글을 올리기를, '대신은 법을 범하였더라도 형리에게 보내어 욕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니, 주상께서 옳게 여겨 판격(判格)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숭인이 국가의 구법을 믿고 주상의 판지(判旨)를 믿어서 즉시 나아가서 변명하지 않았던 것인데, 헌사에서 노발하여 잡아 오게 한 후에야 구법을 의지할 것이 못 되며, 판지를 믿을 것이 못 됨을 알았습니다. 형세가 궁하고 일이 박하여 숨어 피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비록 겁이 많고 유약한 일이지만, 또한 조정의 처리가 도리를 잃어 그로 하여금 놀라고 두려워하게 한 것이며, 숭인이 마음에 불충한 생각을 품고 감히 왕의 명을 거역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영흥의 진위에 간섭한 일은, 그의 천성이 인자하고, 붕우를 매우 사랑하였기 때문인데, 마침 가흥(可興)의 무리와 서로 이웃이라 친하게 되어, 그의 말을 듣게 된 것이오며, 숭인이 거짓으로 이 말을 꺼낸 것은 아닙니다. 작위를 회복하고 난 후에 즉시 나아가서 사은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헌사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지, 왕의 명을 공경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몸소 물건을 팔고 사고 하였다는 일로 그가 비난을 받게 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지휘(指揮 관명(官名))이며 성이 진씨(陳氏)인 자는 그 아내가 곧 숭인의 아내의 종족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집에 가게 되어 시항(市巷)을 지나갔으며, 또 구경을 하려고 길을 지나갔는데, 숭인과 사이가 좋지 못한 자가 이것으로 말을 만들어 무함하고 헐뜯으니, 이 말을 들은 자는 내용을 살피지도 않고 사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과연 물건을 팔고 사고 하여 국가를 욕되게 하였다면, 신이 사신으로 간 것이 마침 숭인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이니, 마땅히 이를 들었을 것이온데, 신이 중국에 있을 때에 일찍이 숭인이 물건을 팔고 사고 하여 왕의 명을 욕되게 하였다는 일을 한번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을 의논하는 자는 그의 발이 일찍이 중국의 국경을 밟아보지도 못했는데, 그의 귀가 어떻게 이 일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헐뜯는 자가 과연 숭인보다 어질겠습니까. 한갓 헐뜯는 자의 말만 믿고 숭인의 행실은 믿지 않으시니, 어찌 그렇게 한 쪽으로만 치우치십니까.
우리 국가가 대명(大明)을 섬긴 후로 표전의 사명(詞命)은 대부분 숭인의 손으로 지어졌으니, 공민왕(恭愍王)이 시호를 얻고, 상왕이 부조(父祖)의 봉작을 이어받게 된 것은 모두 숭인의 문장(文章)의 힘이며, 세공에 금ㆍ은ㆍ말ㆍ베를 면제 받은 것도 역시 숭인의 힘이며, 황제께서 여러 번 문장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말한 것도 역시 이것이 숭인의 공이었습니다. 숭인의 문장은 간결하고 고고(高古)하여 세상에 드물게 뛰어났고 중국에서도 드물게 있사오니, 국가의 사명(詞命)은 이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는 이를 살피지 않고 도리어 소인의 헐뜯는 말만 믿고서 감히 대악의 죄를 씌우니, 어찌 너무 가석하지 않습니까.
종실(宗室)을 친히 하고 어진이를 높이는 것의 두 가지는 천하 국가의 대경(大經)입니다. 주상께서 종실을 친히 하고 중하게 여겨 그 치욕을 씻으려고 맡은 관원에게 특별히 명하여 영흥의 진위를 밝히게 하였으니, 친족을 친히 하는 도리에는 잘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숭인은 오랫동안 시독의 관직에 있었으니 주상께서 가르침을 받은 신하입니다. 그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생기자마자 그것을 잘 분별하여 처리하지 않고서 곧 내쫓으라고 명하시니,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에는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이 주상을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또한 마땅히 그를 위하여 맡은 관원에게 특별히 명하여 그를 헐뜯는 말이 나온 이유를 추궁하여 밝혀야 할 것이옵니다. 헐뜯은 자는 과연 중국에서 한 터럭의 물건도 사지 않은 사람이겠습니까. 숭인이 화물을 운반할 때에 반드시 귀신이 운반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수레 몇 채와 짐 싣는 말 몇 필을 사용하였을 것이오니, 그 수레에 실린 것이 과연 모두 숭인의 화물이며 그 말이 과연 다른 사람들의 예(例)에 배였겠습니까. 일일이 추궁해 밝힌다면 헐뜯은 자는 참으로 한 터럭의 물건도 산 것이 없었겠습니까. 수레에 실은 것이 모두 숭인의 화물이고, 말이 다른 사람의 예에 배나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숭인의 죄를 밝힌다면 숭인도 자백ㆍ복종할 것이오며, 만세토록 주상이 공평하였다고 일컬을 것입니다. 만약 헐뜯는 자도 역시 판매한 물건이 있고, 그 수레가 모두 숭인의 화물이 아니고, 그 말이 다른 사람의 예에 배가 되지 않았다면 헐뜯은 자는 참으로 군자를 무함한 소인이오니, 마땅히 헐뜯은 자의 무함한 죄를 밝히시어 현신(賢臣)이 억울함을 당한 치욕을 씻어 준다면,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도 얻게 되고 만세토록 모두 주상의 밝으심을 일컫게 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숭인은 글을 읽어 이치를 통달하여 평소에 중한 명망이 있으므로 다른 무지한 사람과 같이하기는 어렵다. 범한 죄가 비록 작더라도 극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하니, 또 어찌 생각하지 못함이 이와 같이 심합니까. 의리를 알지 못하여 국가에 도움이 없는 자가 죄를 범함이 있으면 들추어 낼 만한 것이 못 된다 하면서 항상 용납하여 이를 보전하게 하고, 문장에 통달하여 나라에 이익이 있는 자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조사하여 죄에 빠지게 한다면, 이는 후진(後進)의 선비가 모두 구차하게 형벌만 면하고 수치를 갖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할 것이니, 누가 애써 마음과 힘을 쏟아 경서를 궁구하고 이치를 통달하여 헛된 명예만 얻고 실지로는 화를 받는 짓을 하겠습니까. 의논하는 자의 말대로 하면 인심과 사풍(士風)을 무너뜨리고 후학을 그르침이 심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어진 자를 의논하고, 재능 있는 자를 의논하고, 공이 있는 자를 의논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어진 자와 재능 있는 자는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그 어진 것과 재능 있는 것을 의논하여 형벌을 감하여 사람마다 모두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의논하는 자는 도리어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의 죄를 중하게 하니, 이는 후세의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 뜻을 막는 것입니다. 가령 숭인에게 진실로 죄가 있다. 하더라도 문장의 공을 의논하여 특별히 용서하여 주신다면 후진의 선비가 모두 학문하는 데 힘쓸 것이온데, 하물며 지금 숭인의 죄는 신이 진술한 바와 같이 모두 의논할 여지가 있는 데이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신의 이 글을 도평의사(都評議使)ㆍ문하부ㆍ사헌부에 내리시어 숭인을 헐뜯은 자를 추궁ㆍ힐문하시어 그 곡직을 밝혀서 그 치욕을 씻어 주고, 그의 어짊을 기리고, 사유(師儒)를 높여 주며, 후학을 권장하소서."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대사헌 조준이 이때 기복(起復)했었는데 권근의 상소 가운데 부모가 모두 죽은 3년 이내에 현달한 자리에 올라 부사(府司)에 앉았다는 등의 말이 자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 하여 깊이 감정을 품었다. 숭인은 진실로 재주는 있지마는 행실은 실수가 역시 많았으니, 그를 구하는 권근의 말도 지극히 공평한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 판 문하부사 이색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색이 또 전(箋)을 올리기를, “신이 지난해에 경사에 가서 신정을 하례하였는데 부사로 갔던 이숭인이 지금 탄핵을 당하여 귀양갔사오니, 신이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없으므로 맡은 일을 사면하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교지와 술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 간관 오사충(吳思忠) 등이 소를 올려 권근이 숭인에게 편당한 죄를 논핵하니, 권근을 우봉현(牛峯縣)으로 귀양보냈다가, 또 영해부(寧海府)로 옮겼다.
○ 이색이 장단(長湍)의 별업(別業)으로 돌아가니, 창(昌)이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을 보내어 술을 하사하여 위유하고 그에게 정무를 보게 하였으나 이색은 나오지 않았다.
○ 11월 갑술일에 지진이 있었다.
○ 전 대호군 김저(金佇)와 전 부령(副令) 정득후(鄭得厚)가 몰래 황려(黃驪 여주)에 가서 우(禑)를 알현하였다. 김저는 최영(崔瑩)의 생질인데 최영을 따른 지 오래되어 자못 권세를 부렸으며, 정득후도 역시 최영의 먼 인척이었다. 우가 울면서 말하기를, “답답하게 이곳에 있으면서 손을 묶고 앉아 죽음을 받을 수는 없다. 역사(力士) 한 사람만 얻어 이시중(李侍中 이성계)만 해친다면 내 뜻은 성취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예의 판서(禮儀判書) 곽충보(郭忠輔)를 좋아하였으니 네가 가서 보고 이 일을 도모하라." 하고는 칼 한 자루를 충보에게 전해 주게 하면서, “일이 이루어지면 비(妃)의 동생을 처로 삼고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다. 이번 팔관일(八關日)에 일을 일으키라." 하였다. 김저가 충보에게 알리니 충보가 겉으로 승낙하고는 달려와서 우리 태조에게 알렸다. 김저와 정득후는 밤에 태조의 사저로 갔다가 문객에게 잡혔는데, 정득후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정축일에 김저를 순군옥에 가두고 대간과 더불어 번갈아 문초하니, 진술한 말이 전 판서 조방흥(趙方興)에게 관련되므로 모두 옥에 가두었다. 김저가 말하기를, “변안열(邊安烈)ㆍ이임(李琳)ㆍ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우홍수(禹洪壽)가 공모하여 여흥왕(驪興王)을 맞이하는데 내응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무인일에 우를 강릉부(江陵府)로 옮겼다.
우리 태조가 판삼사사 심덕부(沈德符), 찬성사 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 정당문학 설장수(偰長壽), 평리 성석린(成石璘), 지문하부사 조준(趙浚),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박위(朴葳), 밀직 부사 정도전(鄭道傳) 등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삼엄한 군사의 호위 속에서 의논하기를, “우(禑)와 창(昌)은 본래 왕씨(王氏)가 아니니 종사(宗祀)를 받들게 할 수 없으며, 또 천자의 명도 있으니 마땅히 가왕을 폐위시키고 진왕을 세워야 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요(瑤)는 신왕(神王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하니, 조준이 말하기를, “정창군은 부귀한 집에서 나고 자라서 자기의 재산을 다스릴 줄만 알고 나라를 다스릴 줄은 알지 못하므로 왕으로 세울 수 없다." 하였으며, 성석린은 말하기를, “임금을 세우는 데는 마땅히 어진이를 가려야 될 것이고, 그 족속이 가까운지 먼지는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에 종실(宗室)의 몇 사람의 이름을 써서 심덕부ㆍ성석린ㆍ조준을 보내어 계명전(啓明殿)에 가서 태조(고려 태조)에게 고하고 제비를 뽑았더니 정창군의 이름이 뽑혔다.
○ 기묘일에 우리 태조가 심덕부 등 8명과 공민왕(恭愍王)의 정비(定妃) 궁에 나아가서 군사로 호위하게 하였는데, 종친과 백관이 모두 이에 따랐다. 비의 교지를 받들어 창(昌)을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교지에, “우리 태조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종묘와 사직을 받들었는데, 불행히도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니 후사가 없었다. 당시에 종척(宗戚)과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실의 어진이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권신 이인임(李仁任)이 오랫동안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불의한 일을 많이 행하여 남(새 임금)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기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역적 신돈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거짓으로 꾸며서 그를 낳은 어미를 죽여 입을 봉하고, 질녀를 시집보내어 그 총애을 굳게 하였으니, 신(神)과 사람의 분노가 쌓인 지 15년이나 되었다. 우(禑)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국인에게 원망을 사고,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었다. 지금은 마땅히 왕씨(王氏)가 종사(宗祀)를 회복할 시기인데도 대장 조민수(曹敏修)가 이인임의 친척으로써 상상(上相)이 되어 이인임의 간사한 꾀를 이어받아 우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워 악으로써 악을 계승하였는데, 권병이 그 손에 돌아가니 형세가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워졌다. 지난번에 윤승순(尹承順) 등이 경사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이성으로 왕을 삼은 것을 꾸짖었다. 이에 나라 안의 여론과 종척(宗戚), 대소 신료들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는 곧 태조의 직계 신왕(神王 신종(神宗))의 7대(代)손으로서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공민왕의 후사가 될 것이다.' 하여, 요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해서 종묘와 사직을 받들게 하고, 우와 창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 아아, 자홍(子弘)을 폐하고 대왕(代王)이 한가(漢家)의 종사(宗祀)를 회복하여 4백 년 동안 태평스러운 업(業)의 터전을 잡았으니, 지금의 일을 옛날과 비교하면 그 이치는 한가지이다." 하였다. 이날 요(瑤)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라 우와 창을 낮추어 서인으로 삼고, 이임(李琳)과 그 아들 귀생(貴生), 유염(柳琰)ㆍ최염(崔濂)ㆍ노귀산(盧龜山)ㆍ이근(李懃)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정양군(定陽君) 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장단(長湍)에 가서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 병진일에 왕이 정전(正殿)에 나가서 조회를 받고 정사를 청단하였다. 어머니 왕씨(王氏)를 높여 복녕궁주(福寧宮主)라 하고, 비(妃) 노씨(盧氏)를 순비(順妃)로 삼으며, 아들 정성군(定城君) 석(奭)을 책봉하여 세자(世子)로 삼고 경내(境內)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 이색이 장단으로부터 대궐에 나아와서 하례하니, 왕이 내전으로 불러들이고 용상에서 내려와 기다렸다. 이어서 이르기를, “나는 평생을 한가로이 놀고 있었는데 오늘날에 이 자리를 얻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경은 나를 도와 달라." 하였다. 다시 이색을 판문하부사로, 변안열(邊安烈)을 영삼사사로, 심덕부(沈德符)를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이성계)를 수문하시중으로, 정도전(鄭道傳)을 삼사우사로 삼고, 집의 송문중(宋文仲)을 파면시켰다. 송문중은 일찍이 나주 목사로 있을 적에 청렴하지 못했다는 평판이 있으므로, 대간이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아 드디어 파면되었다.
○ 갑신일에 왕이 친히 태묘(大廟)에 제사지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고하였다. 유사가 우(禑)의 어머니 신주(神主)를 철거할 것을 청하니, 이색이 말하기를, “이 일은 그 종말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아직 천천히 하라."고 하였다.
○ 김저(金佇)가 옥 안에서 갑자기 죽으니, 저자에서 송장을 베었다. 김저가 진술한 말이 순군부의 관원과 많이 관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의심하였다. 이에 문하평리 정지(鄭地)ㆍ이거인(李居仁), 전 판후덕부사(前判厚德府事) 유혜손(柳惠孫)ㆍ이을진(李乙珍), 전 밀직 이유인(李惟仁)ㆍ유번(柳蕃)ㆍ조호(趙瑚)ㆍ안주(安柱) 등 27명을 귀양 보냈으니, 김저의 모의에 참여한 까닭이었다. 또 조방흥(趙方興)을 목베었다.
○ 왕이 즉위한 날 저녁에 왕의 사위 강회(姜淮)의 계부(季父) 시(蓍)가 내전에 들어와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장상들이 전하를 왕으로 세운 것은 다만 자기의 화를 면하기 위한 것이지 왕씨(王氏)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시고 친신(親信)하지 마시어 스스로 보전할 것을 생각하소서." 하였다. 왕의 사위 우성범(禹成範)이 곁에 시립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그 어머니 윤씨(尹氏)에게 알리니, 윤씨의 종형(從兄) 소종(紹宗)이 전해 듣고 9공신에게 알렸다. 공신들이 왕에게 의견을 아뢰기를, “전하께서 겨우 왕위에 오르자마자 참소하는 말이 갑자기 들어오니, 신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참소하는 말을 믿으신다면 곧 신들에게 죄를 주시고, 만약 신들이 위성(僞姓)을 내쫓고 다시 왕씨를 세운 공이 있다고 여기신다면, 참소하는 사람에게 죄주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틈이 없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측근 신하를 돌아보고 잠잠히 말이 없었다.
○ 순안군(順安君) 방(昉)과 동지밀직사사 조반(趙胖)을 남경으로 보내어 왕의 즉위를 알렸다.
○ 12월에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 문하사인 조박(趙璞) 등이 소를 올리기를, “판문하부사 이색이 우리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벼슬이 보상(輔相)에 이르렀는데, 현릉이 훙하고 후사가 없으므로, 많은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실의 어진이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니, 권신 이인임이 스스로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위주(僞主)를 기어이 세우려고 하니, 이색이 의논을 도와 우(禑)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씨를 세우려고 의논할 무렵에, 인임의 친척인 대장 조민수(曹敏修)가 우의 아들 창(昌)을 세워 그 간사한 꾀를 계승하고자 하여 계책을 이색에게 물었는데, 이색도 역시 일찍이 창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의논을 정하여 창을 세웠습니다. 그 아들 조종학(曹種學)이 외척(外戚)에게 선언하기를, '많은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실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마침내 세자(世子 창(昌))를 세우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의 힘이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천자께서 명하시기를, '이성(異姓)을 왕씨라 꾸며서 왕으로 삼았으니, 이는 삼한을 대대로 지킬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충신과 의사들이 왕씨를 회복시켜 천자의 명에 따르려고 하였는데, 적신 변안열(邊安烈)이 기이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으려고 이색과 우(禑)의 외숙 이임(李琳)과 김저(金佇)ㆍ정득후(鄭得厚) 등과 더불어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다시 세우려는 의논을 저지하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색은 대대로 왕씨에게 봉직하여 공민왕의 더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는데, 이인임에게 붙어서 신우를 세우고 왕씨의 종사를 끊으며, 장수들이 왕씨를 세우려고 하자 조민수에게 붙어서 우를 내쫓고 창(昌)을 세웠으며, 충신과 의사가 왕씨를 회복하려고 하자 변안열에게 붙어서 창을 내쫓고 우를 맞이하여, 다시 왕씨의 종사를 끊으려 하였으니, 우와 창에 있어서도 모반하는 신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족히 논할 것도 못 됩니다. 대대로 왕씨의 신하이면서도 적신에게 아첨하여 왕씨의 종사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였으니, 그의 죄악은 천지ㆍ종사(宗社)가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색은 이인임에게 중하게 여겨져서 그 부귀를 보전하였습니다. 이인임은 그 무리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과 더불어 탐욕을 마음대로 부려 관직을 팔고 옥(獄)을 팔아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차지했으니, 원망이 쌓이고 죄가 많아져서 마침내 패망을 초래하였는데도, 이색은 그 그른 점을 말하지 않았으며, 우의 사부가 되어 여러 번 상사(賞賜)를 받고 젖내 나는 어린 자제들을 모두 높은 과거에 뽑아서 요직에 늘어놓았고, 우가 포학을 부려 죄 없는 사람을 죽였는데도 이색은 그 허물을 바로잡지 않았으며, 또 우(禑)가 망녕되게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경계를 침범하여 동방의 무궁한 화를 만드는데도 이색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에서 사전(私田)으로 공가(公家)를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해치며 송사를 일으키고 풍속을 무너뜨리므로, 이를 개혁하여 전법을 바로잡고자 하였는데도 이색은 상상(上相)으로서 불가하다고 고집하였으며, 이임(李琳)이 탐하고 못났음은 국인들이 아는 바인데도 이색이 또 외척(外戚)에 붙어서 지위를 보전하고자 하여, 이임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또 유종(儒宗)으로서 부처에 아첨하여 사람들의 심술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혔습니다. 왔다갔다 간사함이 심하여 이숭인이 탄핵당한 것을 핑계하여 장단(長湍)으로 돌아가서 일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가,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자 공공연히 와서 판문하의 관직을 받고, 백관의 위에 서 있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며,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고, 거짓을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 짓을 하더니, 마침내 또 다시 반복하여 큰 죄를 짓기에 이르렀습니다. 맡은 관사(官司)에 내리어 이색의 부자와 조민수의 죄를 다스려서 후세의 신하가 되어 불충한 자를 경계하소서. 이인임의 죄도 전하께서 친히 본 바이오니 헌사에 맡겨서 관(棺)을 베고, 집을 헐어 못을 파서 그 죄를 드러내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사우사 김속명(金續命)이 우(禑)의 어머니를 분별할 수 없다는 말을 처음 꺼낸 이유로 내쫓겨서 죽었으며,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은 우(禑)가 군사를 일으킨 것을 간하다가 드디어 죽음을 당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그 무덤에 치제(致祭)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여 충혼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명하여 이색의 부자를 파면하고, 조민수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권근이 사사로이 명나라 예부의 자문(咨文)을 열어 본 죄를 논핵하기를, “이 자문은 본국 종사(宗社)의 존망에 관계된 것이니, 마땅히 바로 도당에 보내어 재상들을 모아서 열어 보아야 될 것인데, 권근이 여러 날 동안 사사로이 간수해 두었다가 사사로이 열어 보고 은밀히 모의하여 천기를 누설시켰으니, 음모가 헤아리기 어렵고, 이보다 더 심한 불충이 없으니, 잡아다 신문하여 형률에 의거해서 죄를 결정하여 후세의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였다. 왕이 명하여 죄를 신문하지는 않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리기를, “지금은 전하께서는 위로는 천자의 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신민의 기대에 응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시켜 우리 조성(祖聖)의 끊어졌던 대통을 계승하셨고, 신우(辛禑) 부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명분을 바로잡고 백성의 뜻을 정한 것으로, 만세의 태평을 열 시기입니다. 옛날에 위(衛) 나라 임금이 공자를 보시고 정사를 하려 하니, 공자는 먼저 명분을 바로잡고자 하여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하였습니다. 한(漢) 나라 여후(呂后)가 궁첩의 아들 홍(弘)을 데려와서 혜제(惠帝)의 후사로 삼으니, 태위(太尉) 주발(周勃)이, 홍이 혜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목 베고, 대왕(代王)을 맞이하여 세워서 백성의 뜻을 정하고 4백 년의 태평을 열었습니다.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그 아들 중종(中宗)을 폐위하고 이성(異姓)인 무삼사(武三思)를 세워 태자로 삼으려하니, 승상 장간지(張柬之)가 측천후의 무리 장역지(張易之)ㆍ장창종(張昌宗) 등을 목 베고 다시 중종(中宗)을 세웠는데, 무삼사만은 남겨두어 중종이 스스로 베어 죽이기를 기다렸더니, 설계창(薛季昶) 등이 장간지에게 말하기를, '풀을 제거하면서 뿌리를 뽑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삼흉(三凶)은 비록 목베었으나 무삼자가 아직 살아 있으니, 공들은 마침내 장사지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일찍이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하니, 장간지 등이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큰 일이 정하여졌으니 저 무삼사 한 사람은 도마 위의 고기와 같을 뿐이다.' 하더니, 후에 무삼자가 과연 장간지 등을 죽이고 중종도 시해를 당하였습니다. 군자가 이를 논하기를, '측천후는 이미 당나라의 종묘에 죄를 지었으니, 중종이 그 어머니에게 사정(私情)을 둘 수 없으며, 장간지 등이 이미 중종을 세웠으니 측천후를 사사하여도 중종이 대의로써 그 의논에 간여하지 않는다면 조종의 노여움을 풀게 될 것이며 천지의 떳떳한 법도가 서게 될 것이다.' 하였으니, 역시 공자의 명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한둘의 대신이 전하를 추대하여 공민왕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 신우(辛禑)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것을 바로잡아 조정과 백성에게 포고하니, 삼한 억조의 백성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 평생에 다시 태조의 손자를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 홍륜(洪倫)의 난의 근원과 우(禑)의 어미 반야(般若)의 말과 죽음도 주상께서 명백히 알고 계시오며 성천자(聖天子)께서도 이미 들으신 바이옵니다. 지금 이색은 마음속으로 그른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인임(李仁任)이 신씨(辛氏)를 왕으로 세울 때에도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고, 조민수(曹敏修)가 창을 세울 때에도 제일 먼저 주창하여 국가의 계책을 정하였으며, 금년에 또 다시 신우(辛禑)를 세우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전에 올린 소(疏)에서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미 정통을 이었는데, 이종학(李種學)이 홀로 사람들에게 선창하여 말하기를, '현릉(玄陵)께서 이미 우를 강녕군(江寧君)으로 책봉하고 부(府)를 세웠으며, 또 천자(天子)께서도 우(禑)에게 작위를 주었는데, 이(李 태조의 옛 이름)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현릉의 명을 어기고 우리 여흥왕(驪興王)을 폐하느냐.'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우의 부자의 죄를 다스려 태묘에 고하여 백성의 뜻을 정하지 않으시고, 또 이색 부자가 우의 부자에 붙었던 죄를 다스려 수많은 소인들의 음모를 근절시키지 않으신다면, 전하께서도 하루도 왕위에 편안히 계실 수 없을 것입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우(禑)의 부자는 천자께서 아는 바이니 천자의 명이 내림을 기다려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천자께서 이미 삼한의 배신(陪臣)에게 이성을 왕으로 삼은 것을 꾸짖었으니, 또 어찌 두 가지의 명이 있겠습니까. 또 혹시 상국에서 신우를 보존하고자 하신다면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왜 이를 보존해 두고 백성의 뜻을 정하지 않으십니까.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ㆍ적자는 누구나 이를 벨 수 있으니, 먼저 일을 행하고 뒤에 알려도 될 것인데, 또 어찌 천자의 명이 내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인임이 신씨(辛氏)를 추대한 죄는 곧 하늘에 계신 태조와 열성의 영이 다 베고자 하는 것이온데, 어찌하여 신등의 청을 따르지 않으십니까. 이를 베지 않으신다면 이는 만세에 난적(亂賊)의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유사를 시켜서 관(棺)을 베고, 집을 헐어 못을 파고 가산을 적몰하도록 해야 하옵니다. 이종학(李種學)의 부자는 관직을 파면시키는 데만 그친다면 만세에 간적(姦賊)을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맡은 관사(官司)에게 명을 내려 그 죄를 밝게 다스려야 될 것입니다. 이숭인(李崇仁)과 하륜(河崙)은 전에는 이인임의 심복이 되었다가 후에는 이색의 간사한 꾀에 따라 신창(辛昌)을 독촉하여 중국에 조회하도록 하고, 신우(辛禑)를 세워서 열성의 제사를 영원히 끊고자 하였으니, 죄가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역시 맡은 관사로 하여금 논죄하여야 될 것입니다. 또 이종학이 창을 세운 것은 그 아버지의 공이라고 환관 이분(李芬)에게 말하니, 이분이 이임(李琳)의 딸에게 말하여 종학이 이임에게 편당하고 아부하여 간사한 꾀를 이루고자 하였으니, 이분을 맡은 관사에 내려 정상을 추국하여 그 죄를 다스리소서.
권근은 황제의 명을 사사로이 열어 보고는 먼저 이임에게 보이고 또 이색에게 보였으니, 그 마음이 왕씨에게 있지 않음이 명백합니다. 조금 후에 이숭인의 일로써 글을 올렸다가 탄핵을 당하였는데, 그들 사이의 일은 역시 알 수 없는 바이니, 먼 지방에 귀양보내는 데만 그치고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뒷세상의 불충한 신하를 징계하겠습니까. 전 한양윤(漢陽尹) 문달한이 이임의 인척이라 하여 궁중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리고 불의를 자행하였는데, 이임의 족속은 이미 모두 귀양갔는데도 문달한만은 홀로 서울에 있사오니, 직첩을 거두고 외방으로 추방하소서. 또 거짓 조정의 환관을 추방하여 뜻밖의 환란을 방비할 것이오며, 또 문종의 제도에 따라서 10여 명만 남겨 놓고 궁내의 소제하는 데만 충당하고, 또 충렬왕(忠烈王)의 고사에 의거하여 육품 벼슬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이에 이인임의 집을 헐고 못을 팠으며, 이색의 부자와 이숭인ㆍ하륜ㆍ이분ㆍ문달한을 귀양보내고, 조민수를 삼척(三陟)으로 옮기고, 환관은 그전대로 직무를 보게 하였다.
○ 임인일에 우의 어머니 의릉(懿陵)을 철거하였다.
○ 사헌 규정(司憲糾正) 전시(田時)를 창녕(昌寧)에 보내어 조민수를 국문하였다. 전시는 조민수가 창(昌)을 세운 계책이 이색(李穡)에게서 나온 것으로 진술 받고자 하였는데, 조민수가 자복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창을 세운 죄는 진실로 나 혼자 한 것이요, 이색은 실로 관여함이 없다." 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핍박하니 드디어 자복하였다.
○ 사재 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소를 올려 우와 창을 베기를 청하였다. 왕이 여러 재상에게 차례로 물으니 모두 잠잠히 말이 없었는데, 홀로 우리 태조가 아뢰기를, “이 일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이미 강릉(江陵)에 안치시켰다고 중국 조정에 알렸으니 중도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 등이 있사오니, 우가 비록 난을 일으키고자 한들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우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스스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명하여 교서를 내리고, 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을 강릉(江陵)으로 보내어 우를 베며, 예문관 대제학 유구(柳玽)를 강화(江華)로 보내어 창을 베도록 하였다. 우의 아내 최씨(崔氏)가 크게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 최영의 허물이다." 하였다. 10여 일 동안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며 밤에는 반드시 시체를 안고 자며, 쌀을 얻으면 번번이 정하게 찧어서 전(奠)을 드리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불쌍하게 여겼다.
○ 좌사의 오사충(吳思忠)과 문하사인 조박(趙璞) 등이 소를 올리기를, “환시(宦寺)는 본래 궁궐 안을 소제하는 것을 직무로 삼고 그 밖의 일은 간여하지 않았는데, 진(秦) 나라에 이르러 옛 제도를 무너뜨리고 조고(趙高)를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 삼아서 2세(世)가 그 손에 죽었으며, 서한(西漢)에서는 홍공(弘恭)을 중서령으로 삼아 충량(忠良)을 죽여서, 왕망(王莽)에게 찬탈 당했고, 조절(曹節) 등이 권세를 부리더니 동한(東漢)이 멸망하였으며, 당(唐) 나라에서는 구사량(仇士良)을 중위(中尉)로 삼았다가 임금을 폐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였으며, 송(宋) 나라에서는 동관(童貫)을 장수로 삼았다가 두 황제(휘종(徽宗) 흠종(欽宗))를 여진(女眞)에게 붙들려 가게 하였으며, 전의 원(元) 나라에서는 원사(院使)가 권세를 부리자 드디어 천하를 잃게 되었으니, 이는 고금(古今)의 밝은 본보기입니다. 우리나라의 조정의 제도에 있어서도 심부름하는 환관이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녹(祿)을 먹은 적이 없었는데, 현릉(玄陵)에 이르러 환자들을 조반(朝班)에 포열(布列)시켰다가, 마침내 최만생(崔萬生)의 변고를 초래하였으니, 이 또한 주상께서 친히 본 바입니다. 주상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다시 내시부(內侍府)를 세우셨는데 관계(官階)가 3품이나 되오니, 이는 주상께서 중흥한 임금으로서 다시 나라를 망쳤던 전철을 밟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궁중의 일 보는 환관에게는 다만 의식만 주고 내시부를 폐지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교지를 내리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후로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능히 종사(宗祀)를 받들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불행히도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적신 이인임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나이 어린 얼자(孼子)를 기어이 세워 신우를 왕씨라고 거짓으로 일컬어 왕으로 삼았었다. 우가 완악하고 패악스러워서 장차 요양(遼陽)을 침범하려고 하므로, 시중 이(李 태조의 옛 이름) 등이 사직의 큰 계책으로 많은 사람을 타일러 회군하여 왕씨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주장 조민수(曹敏修)가 이인임의 당으로서 다시 권병을 마음대로 하여, 그 간사한 꾀를 계승해서 마침내 여러 사람의 의논을 저지하고, 우의 아들 창을 세우니, 왕씨의 종사가 끊어져 신(神)과 사람이 다 같이 분노한 지 16년이 되었다. 시중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충성을 분발하고 대의를 주장하여 마침내 심덕부(沈德符)ㆍ정몽주(鄭夢周)ㆍ지용기(池湧奇)ㆍ설장수(偰長壽)ㆍ성석린(成石璘)ㆍ박위(朴葳)ㆍ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위로는 천자의 밝은 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종친ㆍ기로ㆍ문무 신료와 의논하여, 공민왕의 정비(定妃)의 명을 받들어 우와 창 부자를 폐하고, 내가 왕씨로서 가장 촌수가 가깝다 하여 나로 하여금 조종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비록 내가 덕이 적어서 책임을 감내하지 못하지마는 이(李 태조의 그전 이름) 등이 명분을 바로잡고 회복시켜 왕실을 다시 세웠으니, 그 공이 실로 태조의 개국공신들보다 적지 않다. 대려(帶礪)의 맹세로 잊을 수 없고, 벽상(壁上)에 얼굴을 그려 공신으로 남기며, 그 부모와 아내에게는 봉작(封爵)하고, 그 자손에게는 음직을 주며, 10세까지 죄를 사면하노라." 하였다.
○ 대사헌 조준(趙浚) 등이 소를 올리기를, “「경(敬)」이란 한 글자는 제왕이 성인(聖人)이 되는 기초이고, 「공(公)」이란 한 글자는 제왕이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입니다. 청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황천(皇天)의 굽어보심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억조 백성의 우러러봄을 두려워하여, 한 사람을 상 주더라도 상제(上帝)의 착한 자를 복 주는 마음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한 사람을 벌주더라도 상제의 음란한 자를 죄주는 뜻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이 기뻐한 후에야 상을 주고, 여러 사람이 버린 후에야 형벌을 더하시옵소서. 자문(咨問)을 부지런히 하여 총명을 넓히고, 학문을 좋아하여 덕업을 높이며, 많은 신하를 예로써 대하고, 모후를 효도로써 받들며, 간사한 사람을 제거할 때에는 의심하지 말고, 영을 내리면 반드시 행하시옵소서. 궁궐에 거처할 때에는 백성의 집이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진수성찬을 드실 때에는 백성이 거친 음식도 넉넉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가볍고 따스한 의복을 입을 때에는 잠부(蠶婦)의 헐벗은 것을 생각하여, 대우(大禹)의 의복을 검소하게 한 것을 본받고, 연향(宴享)에 임해서는 농부의 굶주려 죽는 것을 생각하여, 수문제(隋文帝)의 한 가지 고기만 먹던 것을 본받으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특함을 경계하며, 재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시옵소서.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왕이 당연히 알아야 될 것입니다. 안색을 엄숙하게 하여 조정에 서서 남김없이 말하고 숨기지 않으며, 우뚝하게 뛰어나서 조금도 회피함이 없는 것이 군자이니, 주상께서 이를 가까이하고 이를 믿으시면 요순의 다스림도 앉아서 이루게 되고, 태조의 업을 계승하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아(姻婭)는 반드시 천거하고자 하고, 은원(恩怨)는 반드시 갚고자 하며, 백성의 고통스러움을 듣거나 왕의 과실을 보고도 잠잠하게 있으며, 거리낌 없이 말하지 않으면서 '입은 화(禍)의 문이다.' 하며 아첨만을 행하여 부귀를 도둑질하는 자는 소인이오니, 주상께서 기뻐하여 이를 용납하신다면 걸주(桀紂)의 멸망을 서서 기다리게 될 것이오며, 태조의 공렬이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원하건대 주상께서는 경사를 통달하고 심술이 바른 큰 선비를 가려서 날을 번갈아 입직하게 하며, 경사를 토론하고 치도를 토론하여 넓고 밝은 학문을 이룰 것이오며, 또 사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곁에서 모시게 하여 좌사(左史)는 말을 우사는 사실을 모두 기록하게 하여 만세에 전하시옵소서. 또 세자(世子)를 위하여 특별히 서연(書筵)을 열어서 당세의 대유를 사부로 삼고, 경의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를 요좌(僚佐)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경적(經籍)을 강론하고 밝혀서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는 학문을 밝히게 하소서.
부병(府兵)은 8위(衛)에 영속되고, 위는 군부사(軍簿司)에 통속되어, 42도부(都府)의 군사가 12만 명이나 되는데, 대(隊)에는 정(正)이 있고, 오(伍)에는 위(尉)가 있어 상장에 이르기까지 서로 통속되어 있으니, 금위(禁衛)를 엄하게 하고 외적을 막는 것입니다. 원(元) 나라를 섬긴 이후로 태평이 오래 계속되니 문관이나 무관이 모두 안일하고 태만하여 금위(禁衛)에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근시와 충용에 모두 호군 이하의 관직을 설치하여, 금위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 이들에게 녹을 주니, 이에 조종의 8위의 제도가 모두 소용이 없는 제도가 되어 한갓 국록만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우달치(亏達赤)ㆍ속고치(速古赤)ㆍ별보(別保) 등의 모든 애마(愛馬 고려 말의 병제(兵制))가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이른 아침이나 깊은 밤에 수고로움이 심하였으나, 한 되, 한 말의 녹도 먹지 못하였고, 42도부(都府)의 5원(圓)ㆍ10장(將)ㆍ위(尉)ㆍ정(正)의 녹을 먹는 자는 어리고 약한 자제가 아니면 곧 공상과 천예(賤隸)들이어서, 녹을 먹고도 그 직책을 비워두거나, 국사에 부지런하고도 녹을 먹지 못하기도 하였으니, 어찌 조종께서 성의(誠意)로 대우하고 후하게 녹을 주는 뜻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근시(近侍)를 좌우위에 합하고, 사문(司門)을 감문위(監門衛)에 합하고, 사순(司楯)을 비순위(備巡衛)에 합하고, 충용(忠勇)을 신호위(神虎衛)에 합하며, 그 나머지 각 애마는 종류별로 여러 위에 합하여, 이들로 하여금 날을 번갈아 입직하게 하여, 그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상고하여 각기 그 위(衛) 안의 호군 이하에서 위ㆍ정의 관직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녹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녹을 먹고 그 직무에 부지런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즐거이 일을 보고 국록이 덜어질 것이며, 금위가 엄해지고 무비가 신장될 것입니다.
사막(司幕)은 옛날의 상사(尙舍)이고 지금의 사설(司設)이며, 사옹(司饔)은 옛날의 상식(尙食)이고 지금의 사선(司膳)인데, 지금은 사설은 그 녹을 먹고도 그 직무를 폐하며, 사막은 그 일에 근실하고도 그 녹은 먹지 않으며, 사옹 이하의 관직도 역시 그러하오니, 사막과 사옹 등 애마를 6국(局)에 합하여 선왕의 옛날 제도를 회복하고 근대의 폐해를 개혁한다면 명칭과 실상이 서로 맞고 맡은 일이 확립될 것입니다.
공(功)이 있는 이가 아니면 후(侯)를 봉하지 않는 것은 우리 조정의 법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은 참란(僭亂)을 제거하고 서도(西都)를 평정하고서 낙랑후(樂浪侯)로 봉해졌고, 김방경(金方慶)은 탐라의 반란을 토벌하고 동쪽의 왜국을 문죄하고서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해졌으니, 지금부터는 재상(宰相)으로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거나 변방을 평정한 공신이 아니면 군(君)으로 봉하지 마소서.
환관은 국초부터 경릉(慶陵) 때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근래에는 궁중에서 명을 전달하는 직임으로서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宰相)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조정을 높이는 방법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환관의 제수는 경릉의 제도를 따라서 조관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군기시와 선공(繕工)은 사무는 번거롭고 인원은 적으니, 상장군ㆍ대장군ㆍ낭장ㆍ별장을 겸판사ㆍ주부 등 관직에 임명하면 녹이 허비되지 않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무가 번잡한 시(寺)ㆍ감(監)도 이를 본받아 겸섭하게 하면 공무에 편리할 것입니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니, 국가의 치란과 정치의 득실이 이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요사이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학교가 폐지되었거나 해이하여 무성한 풀밭이 되었는데, 향원(鄕愿)으로 유명(儒名)을 핑계하여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여름 5, 6월 사이에 동자들을 모아 당(唐)ㆍ송(宋)의 절구를 읽고, 50일이 되면 파하고서 이를 '여름 공부[夏課]'라고 하는데, 수령이 된 자들도 이를 보고 범연히 여겨 일찍이 마음에 두지도 않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경의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를 얻어서 국가의 다스림에 도움을 주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근실하고 민첩하여 학식이 넓은 사람을 교수관으로 삼아 5도에 각기 1명씩 나누어 보내어 군ㆍ현을 두루 다니게 하고, 그 마필과 접대는 모두 향교에 맡겨서 이를 주관하도록 하소서. 또 주ㆍ군에 한가로이 있으면서 유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본 고을의 교도로 삼고, 자제로 하여금 항상 사서 오경만 읽고 사장은 읽지 못하게 하며, 교수관은 쉬지 않고 항상 돌아다니면서 과정을 엄격히 세우고, 몸소 어려운 문제를 논의하여 그 통하고 통하지 못한 것을 상고하여 이름을 올려 명부에 쓰고, 인도하고 권장하여 진실한 이재를 이루게 하되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효과를 거둔 자는 계급을 거치지 않고 뽑아 쓸 것이며, 만약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효과를 거두지 못한 자는 벌을 논하도록 하시옵소서.
맹자가 이르기를,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가 없는 것이 그 중에 큰 것이다' 하였으니, 그것은 제사를 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들에 장사하고 나서 우제(虞祭)를 지내어 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에 모시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은 죽은 부모 섬기기를 살아 있는 부모 섬기는 것과 같이 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동방에 가묘의 법이 오랫동안 폐해졌는데, 지금은 서울로부터 군ㆍ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이 있는 자는 반드시 신사(神祠)를 세워 이를 '위호(衛護)'라고 이르니, 이것이 가묘의 유법(遺法)입니다. 아아, 부모의 시체를 땅밑에 묻어 두고 가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부모의 영이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이것은 자식의 마음이 아닌데, 습관이 떳떳한 일로 여겨 일찍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 뿐입니다. 지금부터는 일체《주자가례(朱子家禮)》를 좇아서, 대부 이상은 3세(世)까지 제사를 지내고, 육품 이상은 2세까지 제사를 지내며, 칠품 이하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는 그 부모만 제사를 지내도록 하며, 깨끗한 방 한 칸을 가려서 각기 한 감실(龕室)을 만들어, 그 신주를 간수하되 서쪽을 윗자리로 삼을 것이며,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전(奠)을 드리고, 밖에 나가고 집에 들어올 때에 반드시 고하며, 철을 따라 새로 나는 음식물은 반드시 올리며, 기일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고, 기일을 당하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빈객을 대접할 때에 상중(喪中)의 예절과 같이하며, 그 무덤에 성묘하는 예절은 풍속에 따르되 매년 삼명절(三名節)과 한식(寒食)으로 정하여 조상을 추모하는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며, 이를 어기는 자는 불효로 논죄하시옵소서.
《중용》에 말하기를, '성의로 대우하고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사(士)를 권장함이다.'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옛날에는 위로는 공경으로부터 아래로 서리에 이르기까지 녹을 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모든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데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공무에만 마음을 쏟았던 것입니다. 세력 있는 자들이 겸병한 이후로는 조세가 날로 줄고 녹질(祿秩)이 해마다 부족하여, 선왕이 정하신 녹의 숫자는 한갓 형식이 되었을 뿐이니, 유사로 하여금 옛 제도를 참작하여 그 녹질을 풍족하게 한다면 사(士)가 항심(恒心)이 있어 염치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경기(京畿)의 8현은 요역이 매우 번거로운데 그것은 정관(正官)이 통할하고 관찰사가 다스릴 것이 아닙니다. 또 수령이 교화를 펴는 일도 없기 때문에, 과세가 고르지 못하고 부역이 제한이 없어서 백성이 의지해 살 수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각 도의 예에 따라서 현에 5,6품의 관원을 두고 개성부(開城府)를 시켜서 공적을 상고하여 무능한 사람은 깎아내리고 유능한 사람은 승진시키는 법을 밝히소서.
근년 이후로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은 그 재주는 묻지도 않고 재상(宰相)의 자리에만 있으면 경솔하게 명하여 이를 보냈으니, 지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적의 기세가 더욱 강해져서 침략을 초래하여 군ㆍ현이 황폐해졌습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 장수를 가리지 않으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되고, 장수가 병법을 알지 못하면 그 임금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장수를 가려 왜적(倭賊)을 제어하는 것은 진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도평의사와 대간을 시켜 각기 위엄과 덕이 일찍부터 드러난 사람을 천거토록 하여, 이들에게 명하여 장수로 삼아 군정을 다스리게 하시옵소서.
또 군정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 지휘가 엄숙하지 않게 되니, 지금 한 도에 세 사람의 절제사(節制使)를 두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동북면과 서북면 외에는 한 도에 한 사람의 절제사만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시옵소서.
병이란 것은 백성의 생명을 맡은 것이요 나라의 큰 정사이니, 왕실을 호위하고 화란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본조 5군 42도부(都府)는 대개 한(漢) 나라의 남북군과 당(唐) 나라의 부위병(府衛兵)에 해당됩니다. 요(遼) 나라와 금(金) 나라가 양계(兩界)에 접경하였는데, 요 나라가 진제(晉帝)를 세워 이를 자식으로 대우하고 천하를 노려보면서, 우리나라에 화친을 구하였으나 태조께서 국교를 끊었으며, 금 나라가 요 나라와 송 나라의 세 황제를 사로잡아 위엄이 사해에 떨쳤는데도 감히 옆의 우리를 엿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은, 조종의 군정이 그 규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근세에는 병제가 크게 무너져서 전쟁을 한 지 30여 년이 되도록 군정의 통솔이 없었습니다. 전술이 없는 장수로서 가르침을 받지 않은 백성을 거느리고 싸우게 되어, 멀리 바라보고 놀라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서 천리에 해골이 널렸습니다. 조그만 왜놈들이 나라의 걱정이 되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전임 사품 이상의 관원은 3군에 소속시켜 군에 장수의 보좌로 두고, 오품 이하의 관원은 부위(府衛)에 소속시켜 군부사(軍簿司)에 통속되게 하여서, 위와 아래가 서로 매이고 체통이 서로 연결되어 군정이 한곳에서 처리되고,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곳에 통일된 후에 군령을 거듭 밝히고 사졸을 훈련한다면, 백만의 군사도 몸이 팔을 쓰는 것과 같고 팔이 손가락을 쓰는 것과 같이 쉬울 것이니, 어디를 지킨들 견고하지 않으며, 어디를 공격한들 빼앗지 못하겠습니까.
근세에는 간신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여, 장수가 될 만한 인재가 아닌데도 중방(重房)에 늘어섰고, 온갖 전쟁에 수고로운 자는 겨우 첨설직(添設職)에 임명되니, 상벌의 규정이 없어 군사들이 해이해져서 이르는 곳마다 공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견고한 적진을 깨뜨리고 적을 함락시킨 공과, 장수의 목을 베고 기를 빼앗은 용맹과, 수많은 전쟁에서 수고한 공적이 있는 자로 공이 큰 자는 상호군(上護軍), 다음은 호군, 중랑장에서 별장, 산원(散員)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절히 임명하여, 적을 깨뜨린 공을 장려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여 그를 위해서 죽을 것입니다. 또 근일에 의병을 일으켜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할 때에 군에 종사한 자에게도 관직과 상을 주어서 후세 사람을 권장하시옵소서.
국가에서 관찰사를 뽑고 수령을 가려 임명하여 5도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였는데, 동북면ㆍ서북면만이 아직도 옛날의 습속을 따르고 왕의 교화를 입지 못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여러 도의 예에 의거하여 관찰사를 두어서 군ㆍ현을 순행(巡行)하여, 군과 민의 관원 중에 무능한 자는 깎아 내치고 유능한 자는 승진시키게 하시옵소서.
근래에 역호(驛戶)가 피폐해져서 모든 포마(鋪馬 역말)ㆍ전체(傳遞)ㆍ지로(知路)ㆍ지로(指路)의 역(役)을 주ㆍ군에서 대신 맡아, 그 고통이 심해서 백성들이 흩어져서 도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런 주ㆍ현을 회복시키고자 한다면 마땅히 역호를 우선으로 돌보아야 될 것입니다. 국가에서 비록 정역별감(程驛別監)을 두어 여러 역(驛)을 편안하도록 하였지마는,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어서 역마다 사속(私屬)을 두어 이목(耳目)을 삼았으나 도당(都堂)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므로, 사람마다 이를 업신여기기 때문에 편안하지 못합니다. 지금부터는 역마다 5품, 6품의 역승(驛丞) 한 사람을 두어 그 보거(保擧)는 수령의 예와 같이 하고, 또 반인(半印)을 주어 보낼 것이며, 역호를 풍족하게 하고 역마를 번성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가 도당에 보고하여 수령이 결원된 곳에 보충하고, 또 경관(京官)에 임명하여 포상할 것이며, 변방과 먼 곳의 역승은 관찰사로 하여금 천거하여 보충하게 하시옵소서.
상평창(常平倉)과 의창(義倉)의 법은 흉년을 구제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한(漢) 나라 경수창(耿壽昌)의 의창에 대한 상소(上疏)와 당(唐) 나라 장손평(長孫平)의 사창(社倉)에 대한 건의는, 그 법이 주관(周官)ㆍ위인(委人)의 직책에서 나온 것이오니, 국가를 가진 자는 마땅히 먼저 해야 될 일입니다. 지난해 한여름에 군사를 일으키고 게다가 왜구(倭寇)까지 침범하여 농사짓는 시기를 어기고 수확이 때를 놓치게 되었으며, 금년에는 또 수재를 입어 동남방의 주ㆍ군이 쓸쓸히 헐벗게 되었으니, 흉년을 구제하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이미 사전(私田)을 개혁하여 이르는 곳마다 모두 축적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군ㆍ현에 모두 상평창을 두고, 풍년에 거두었다가 흉년에 흩어 주는 법은 일체 근일에 도평의사에서 아뢴 바에 의해서 행하소서. 적이 듣건대, 양광도(楊廣道)에서는 상평창을 설치하였다고 하니, 각 도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되, 법대로 하지 않는 수령이 있으면 이를 벌주소서.
먹는 것은 백성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되고 곡식은 소[牛]로 인하여 생산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에는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도감[禁殺都監]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달단(韃靼)의 수척(水尺)은 소를 잡는 것으로써 농사를 짓는 것에 대신하니,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ㆍ군의 각 참(站)마다 모두 소를 잡아서 손님을 먹여도 이를 금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금살도감과 주ㆍ군의 수령으로 하여금 금령을 신칙ㆍ시행하게 하되, 법을 위반하는 자를 잡아서 관(官)에 알리는 자가 있으면 범인의 가산을 상으로 주고, 금령을 범한 자는 살인죄로 논죄하시옵소서.
주ㆍ군에서 위에 바치는 삭선(朔膳)과 사객(使客)을 대접하는 등의 일로 인하여, 비록 한창 바쁜 농사철이라도 농민을 모아서 가시숲 속을 쫓아다니면서 한 달 동안이나 사냥하니, 농사가 시기를 놓쳐서 백성의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이 일 때문입니다. 닭과 돼지 같은 가축이라면 우리 안에서 이를 취할 수 있으니 백성에게 소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경기에 계돈장(鷄豚場) 두 곳을 만들어 한 곳은 전구서(典廐署)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종묘와 제사의 쓰임에 이바지하게 하고, 한 곳은 사재시(司宰寺)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어주(御廚)에 바치는 것과 빈객의 쓰임에 공급하게 할 것이며, 주ㆍ군과 각 역(驛)에도 모두 이를 기르게 하여 수용을 절약하고 잘 기르며 새끼 가진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면, 수년이 못 되어서 공상(供上)ㆍ제사ㆍ빈객의 쓰임에 충당되고 우리 백성들의 먹을 것도 풍족하게 될 것이며, 사냥함으로 인하여 농사를 망칠 걱정도 없게 될 것입니다.
사옹시(司饔寺)에서는 해마다 각 도에 사람을 보내어 대궐에서 쓰일 자기(瓷器)의 제조를 감독하는데, 1년에 한 번씩 하게 되오나 공사(公事)를 빙자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해서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여 한 도에서 짐을 싣고 오는 것이 소 8ㆍ90바리나 됩니다. 지나오는 곳은 떠들썩하지만, 서울에 이르러서 바치는 것은 백 분의 일 정도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사사로이 차지하니, 폐해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또 새의 깃[羽]과 수의 힘줄[筋]과 화살대[箭竹] 등의 차견(差遣)이 있어서 백성을 소란하게 함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각 관사의 애마(愛馬)를 외방에 보내는 것은 일체 이를 금하되, 모든 이와 같은 일은 모두 도당에 아뢰게 하고, 도당에서는 관찰사에게 내려보내며, 관찰사는 물품이 있는 주ㆍ현에 배정하여 문서에 따라서 직접 바치게 한다면 백성에게 편리할 것입니다.
군사가 왜놈들과 싸워서 빼앗은 말과 무기와, 모든 백성들이 적을 죽이고 빼앗은 물건은, 그 곳의 관원이 경내에 통첩하여 도적같이 국문해서, 모두 서울로 실어 보내어 후한 상(賞)을 바라니, 윗사람을 속이고 백성을 해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들은 해이해지고 적의 세력은 더욱 강하게 되니, 매우 나쁜 계책입니다. 지금부터는 여러 도의 장수 중에 적을 깨뜨린 자는 벤 적의 머리만 바치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빼앗은 왜적의 물건은 추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기록하여 영전(令典)으로 한다면, 사람들이 그 이익을 즐거워하여 싸움에 용감할 것이오며, 이를 범한 자는 불렴죄(不廉罪)로 논죄하소서.
재상은 임금의 보좌이니, 더 불어 천위(天位)를 함께 누리고 천공(天工)을 대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높음이 비할 데가 없으니, 불행히 죄가 있으면 이를 폐하여도 될 것이며 이를 물리쳐도 될 것이며, 이를 사사하여도 될 것이온데, 마침내 법리(法吏)에게 내려서 포승으로 몸을 결박하고 칼을 씌우며 머리를 베어 달고 몸뚱이를 드러내어 버려두고 장사하지 못하게 하니 심한 일입니다. 한(漢) 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의(賈誼)가 소(疏)를 올려 대부 이상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아야 한다고 하니, 문제가 이 말을 깊이 받아들여 이로부터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모두 죽음을 내리되, 모욕은 주지 않았고,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우한 까닭으로 그 당시에 사대부들이 남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한 나라 4백 년의 예속(禮俗)을 이루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양부(兩府 문하부ㆍ밀직사)의 대신에게 비록 죽을죄가 있더라도 그 대역부도(大逆不道) 외에는 한 문제의 옛일을 본받아 죄인을 죽여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형벌은 쓰지 말아, 국가에서 대신을 후하게 대우하는 은전(恩典)을 이루소서.
《서경(書經)》에, '벌(罰)은 후사(後嗣)에게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며, 《맹자》에, '죄인은 형벌이 처자(妻子)에게는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순(舜)은 곤(鯀)을 형벌에 처하고도 그 아들 우(禹)를 재상으로 삼았으며, 무왕(武王)은 주(紂)를 목베고도 그 아들 무경(武庚)을 봉작하였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마음입니다. 근세에 와서는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남을 멸족하는 데는 오히려 그 후사가 남아 있을까 두려워하니 매우 불인한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모든 죄가 있는 자는 3대의 거룩한 임금들의 제도를 본받아 처자가 연좌(連坐)되는 일이 없게 하여, 거룩한 우리 조정의 인자한 정사를 보이소서.
모든 옥사와 모든 금계(禁戒)를 문왕(文王)이 감히 이를 간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이 주 나라가 다스림을 이루었던 것이며, 진평(陳平)이 전곡(錢穀)의 숫자를 알지 못하여, 군자가, '진평은 재상의 체통을 아는 사람이다.' 하였으니, 그가 다른 관청의 직무를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조의 제도는 도당(都堂)이 백규(百揆 백관)를 통솔하고 호령을 반포하며, 헌사(憲司)가 백관을 살피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전법도관(典法都官)이 곡직을 분별하고 옥송을 결단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근래에는 요행을 바라고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대궐 안을 속이고 도당을 업신여겨 송사의 문서가 많이 쌓이고, 문서를 발송하는 사이에 고식적이고 구차스러워 그 번잡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게 한 본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송사하는 자로 하여금 각기 맡은 관사(官司)에 송사를 하게 하고, 바로 대궐 안과 도당에 올리는 것은 일절 이를 금지시켜 대궐 안을 높이고 도당을 엄하게 하소서. 모든 공사(公私)의 재물을 불려서 늘리는 것은 본전이 1냥이면 이자도 1냥일 뿐이온데, 요사이 재물을 늘리는 무리들은 이익만 보게 되어 본전 1냥의 이자가 10배까지 이르기도 하니, 빌려 쓴 무리들이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마침내 갚지 못하므로, 국가에서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습니다. 지금 공판도감(供辦都監)의 보미(寶米 보(寶)의 미곡(米穀))는 불리고 늘리는 데 한이 없어서 빌린 사람으로 하여금 집을 잃고 생업을 잃게까지 만들었으니, 국가에서 백성을 구휼하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본전 1냥에 이자도 1냥을 받고 더 취하지 못하게 하소서.
삼사(三司)와 육부(六部)의 관원은 때로 친히 소속 각 관사(官司)에 이르러 그 보고된 것을 가지고 문서를 살펴 조사하고, 회계를 점고하여 사무가 점점 해이함이 없도록 할 것이니, 만약 법을 받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헌사로 하여금 이를 살펴 다스리게 하여, 큰 죄는 강등시켜 별도로 쓰기도 하고 제명시켜 서용하지 않기도 하여, 죄에 따라서 이를 논죄하고, 작은 죄는 순군부(巡軍府)에 문서를 내려보내어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을 쓰고 관직을 회수하소서.
서울과 지방의 모든 관리가 제목(除目)이 내려간 지 여러 날이 지나도 즉시 취임하지 않으므로, 공사(公事)를 지체시켜 그 문서와 전곡(錢穀)이 모두 간사한 아전에게 숨김을 당하니, 이것은 폐해의 큰 것이며, 또 신하가 성심으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대성과 정조(政曹)를 제외한 그 경관(京官)의 모든 원리(員吏)는 임명이 내린 후, 경관은 3일, 외관(外官)은 10일로 한정하여, 대궐에 나아가서 사은하고 즉시 상관(上官)으로 가서 취임하게 하소서. 권지행사(權知行事)라고 일컫는 것은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서로 마주 대하여, 문서와 전곡 관계를 명백하게 계약서로 만들어, 손수 서로 교부하여 고과에 증빙하게 하고 사은 후에 정식으로 관직에 취임하게 하되, 법대로 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법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소서.
근년 이후로 기강이 점점 해이하여 향리가 군공이라 일컬어 관직을 부당하게 받기도 하고, 잡과(雜科)를 빙자하여 본역(本役)을 피하려고 꾀하기도 하며, 권세 있는 사람과 결탁하여 외람되이 관질(官秩)이 올라가기도 한 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주ㆍ군이 텅 비고 8도(道)가 피폐해졌습니다. 지금부터는 비록 3정(丁)에 1자(子)로써 3ㆍ4대(代) 향리의 역(役)을 면하였으나, 확실한 증명서가 없는 자와 군공(軍功)으로 향리의 역을 면하였으나, 특별히 기특한 공을 세워 공패(功牌)를 받은 일이 없는 자와, 잡과라도 성균관의 전교(典校)ㆍ전법(典法)ㆍ전의(典醫) 출신이 아닌 자와, 첨설직(添設職)의 봉익(奉翊)과 참관직의 3품 이하는 강제로 본역에 따르게 하여 주ㆍ군을 채우고, 지금부터는 향리에게 명경과와 잡과 출신의 향리라도 역을 면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 사헌부에서 소(疏)를 올려 전제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하늘이 화란(禍亂)을 뉘우쳐서 흉악한 사람들이 이미 멸망되고 신씨(辛氏 우 창)도 이미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사전을 일체 개혁하여 백성을 부유하고 오래 살도록 하셔야 하는데, 이때가 그 기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신과 대가들은 사직의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폐단이 있는 풍속을 이어받아 서로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여 사전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주상께서 중흥하여 왕위에 오른 지 열흘 만에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생각하시고, 여러 해나 된 큰 폐해를 깊이 징계하여 멀리는 성주(成周)의 규전(圭田 경대부(卿大夫)의 제전(祭典))ㆍ채지(采地)의 법을 계승하고, 가까이는 문종(文宗)이 경기(京畿)를 넓히고 개척하였던 제도에 따르소서. 경기는 서울에 있는 시위하는 자의 전지로 주어서 사족(士族)을 우대하셨으니, 곧 문왕(文王)이 벼슬한 자에게 대대로 녹을 주던 아름다운 뜻이요, 여러 도(道)에는 군전(軍田)만 주어서 군사를 구휼하셨으니, 곧 조종이 선발한 자에게 전지를 주던 좋은 법입니다. 이에 서울과 지방의 전지의 경계가 확실하여져 서로 엉클어지지 않게 하였고, 겸병의 문을 막고 쟁송하는 길을 막았으니, 진실로 성인의 제도입니다. 그러나 경기에서 전지를 받았는데도 수량이 차지 않는 자에게는 외방(外方)에서 이를 주고자 하는데, 이것은 전하께서 다시 겸병의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신등은 전하의 성하게 중흥하는 정치를 위하여 이를 심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전제을 먼저 바로잡지 않고서 중흥의 정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신등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6도의 관찰사가 보고한 개간된 전지의 수량은 50만 결(結)도 되지 않는데, 상부에 바치는 것은 풍족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10만 결을 우창(右倉)에 속하게 하고, 3만 결을 사고(四庫)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녹봉은 후하게 주지 않을 수 없으므로 1만 결을 좌창(左倉)에 속하게 하였으며, 조관(朝官)를 우대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기(京畿)의 10만 결을 나누어 주니, 그 나머지는 17만 결뿐입니다. 6도의 군사와, 진(津)ㆍ원(院)ㆍ역(驛)ㆍ시(寺)의 전지와, 향리(鄕吏)ㆍ사객(使客)ㆍ아록(衙祿)ㆍ늠급(廩給)의 쓰임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하고, 군수(軍需)가 나올 곳도 없는데, 지금 또 사전을 외방에서 주려고 하니,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마는, 공상(供上)ㆍ녹봉의 비용과 진ㆍ원ㆍ역ㆍ시의 각종 전지는 어디서 오겠으며, 방진(方鎭)의 병졸과 해도의 군졸은 무엇으로써 먹이겠습니까. 만일 3, 4년 동안 수재와 한재가 있게 되면 무엇으로써 이를 진휼하겠으며, 수천 수만 명의 군사를 먹이는 비용은 무엇으로써 공급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위로는 태조의 큰 업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중흥의 무궁한 터전을 여는 이때에 나라의 재용을 저축하여 제사와 빈객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녹봉을 풍족하게 하여 백관을 후하게 대우하고, 군량을 넉넉하게 하여 삼군을 기르지 않고서, 이에 도리어 대가들이 근거 없이 퍼뜨린 소문을 두려워하여, 생민의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외방에다 사전을 일으켜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겸병하는 문을 열고자 하시니, 삼군을 굶게 하여 6도의 변방 도적을 기르게 하고, 녹봉을 박하게 하여 백관의 염치를 무너뜨리고, 나라의 재용을 부족하게 하여 제사와 빈객의 비용을 모자라게 함이, 어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모든 서울에 있는 자에게는 경기 안의 전지만 주고, 외방에서 전지를 주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심을 일정한 법으로 삼아, 백성과 더불어 혁신하여 나라의 재용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고 조정의 선비를 우대하고, 군량을 풍족하게 하소서." 하였다.
○ 왕이 아우 우(瑀)를 영삼사 영삼사종부시사(領三司宗簿寺事)로 삼고, 조준(趙浚)을 문하평리 판상서시사(門下評理判尙瑞寺事)로, 성석린(成石璘)을 사헌부 대사헌을 겸하게 하였다.
○ 관제를 고쳤다.
○ 계해일에 왕이 효사관(孝思觀)에 나아가서 우와 창을 벤 일을 태조에게 고하기를, “조선(朝鮮)의 말기에는 나라가 아주 작게 나누어져서 78개나 되었는데 약한 나라를 강한 나라가 합하여 모두 세 큰 나라[三雄]가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조(聖祖 태조)께서 일어나니 왕사(王師)가 가는 곳에 많은 도적들이 평정되었습니다. 김부(金傅 경순왕(敬順王))가 와서 의탁하고, 견훤(甄萱)이 와서 항복하고, 신검(神劍)이 항복하여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손이 4백 57년을 서로 이었는데, 공민왕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니, 적신 이인임이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이에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반야(般若)가 낳은 우(禑)를 세워 왕으로 삼고, 족제(族制) 이임(李琳)의 딸을 시집 보내어 사내아이를 낳으니 창(昌)이었는데, 그를 부자가 서로 왕위를 계승하여 국운이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근년에 창이 중국에 친히 조회하기를 청하니, 예부에서 자문을 보내어 이성(異姓)이 왕이 되었음을 꾸짖었습니다. 자문이 도착되니 이임(李琳)이 상상(上相)으로서 이를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시중 이(李 태조의 그전 이름)가 충성을 분발하고 대의를 주창하여 왕씨(王氏)를 흥복시키려고 하니, 덕부(德符)ㆍ몽주(夢周)ㆍ용기(湧奇)ㆍ장수(長壽)ㆍ석린(石璘)ㆍ박위(朴葳)ㆍ조준(趙浚)ㆍ도전(道傳) 등 여덟 명의 장상(將相)이 그 계책을 돕고 정하여, 종친ㆍ백료와 함께 공민왕의 정비(定妃)의 궁에 나아가서, 모두 비의 교지를 받들고 천자의 명을 선포하였습니다. 우(禑)의 부자를 폐하고 신이 태조의 후손이고 신왕(神王)의 7대 손자라 하여 정통을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백관을 거느리고 조상의 묘(廟)에 반정한 것을 고합니다.
우와 창을 남겨 두어 천자의 명을 기다리려 하였는데, 간신(諫臣) 사충(思忠) 등이 우와 창을 베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춘추의 법에 난신ㆍ적자는 누구나 이를 목 벨 수 있으니, 먼저 일을 행하고 후에 알려도 될 것이므로, 반드시 사사(士師 법관)가 아니라도 처형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잇달아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말을 올리기를, '두 흉인은 조종의 죄인이니, 왕씨 신하들과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므로 하루라도 왕씨의 땅 위에는 둘 수 없습니다.' 하므로, 신이 그 말에 감동하여 그 글을 도당에 내려보냈더니, 모두 청하는 것이 간신들의 의논과 같으므로, 드디어 우와 창을 베었습니다. 이미 그 죄를 다스렸으니 재계하고 길일을 가려서 감히 성조의 어진(御眞) 앞에 고합니다.
일찍이 우가 왕위에 오르자, 재상 속명(續命)이, '그는 참다운 왕자가 아니다.' 하여, 인임(仁任)이 이를 내쫓았으며, 신돈의 첩 반야(般若)가 스스로 말하기를, '우는 바로 내가 낳은 것이다.' 하니, 인임이 이를 죽였습니다. 김유(金庾)와 최원(崔源)이 황제에게, '우는 왕씨가 아닙니다.'라고 하다가, 인임에게 모두 도륙을 당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아버지가 감히 그 아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남편이 감히 그 아내에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이를 아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또 그 인친들이 조정과 외방에 뿌리박고 있어서 뽑아 없앨 수가 없었는데, 이제 흥복된 것은 실로 우리 성조께서 가만히 도와주신 공 때문입니다. 아아, 이성이 제거되고 종사가 계승되었으니, 어기지도 않고 잊지도 않아 성조께서 이룬 법을 따르는 일이 곧 신이 마음을 다할 바입니다. 우러러 생각하옵건대, 성조께서는 공신에게 성의를 다하여 시종토록 보전해 주시고 이를 국사에 써서 만세에 귀감이 되게 하였사오니, 한 가지라도 따르지 않는 것이 있으면 신은 효성스러운 손자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원하옵건대, 하늘에 계신 영은 신의 성심을 살피시고 신의 뜻을 도와서 실추함이 없이, 큰 왕업을 계승하여 만세의 태평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또 공신에게 상을 주는 것을 고하는 글에,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을 기용하여 우왕(禹王)의 옛 업적을 계승하였고 태갑(太甲)이 끝까지 정치를 잘한 것은 이윤의 훈계에 힘입었으며, 이척(伊陟)은 태무(太戊)를 도왔는데 그 정성이 상제에게 감동되었고, 태공(太公)는 용맹스럽게 은(殷) 나라를 쳐서 천하가 주(周) 나라를 높였는데, 주공(周公)과 더불어 왕실을 보좌하여 제(齊) 나라에 봉함을 받아 그 책명이 맹부(盟府)에 간수되어 있으며, 그 후손 환공(桓公)은 천하를 바로잡아 주 나라를 높였습니다. 탕왕(湯王)은 6백 년이나 전해 내려갔고 주 나라는 그 보다 더 오래갔으니 국운의 장구함은 뒷세상에서 이에 미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이윤ㆍ태공이 보필했던 공로를 잊지 아니하여서 그 자손이 선인의 훌륭함을 본받는 충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한(漢) 나라는 삼걸(三傑)에 힘입었으며, 장량은 황제의 스승이 되었으나 그를 정승에 임명하지 않았고 벽곡(辟穀)하는 것을 들어 주었으며 소하(蕭何)는 도필리(刀筆吏)로서 정승이 되었으나 또한 옥에 갇히었으며, 한신(韓信)은 멸족되었고, 경포(黥布)는 배반하여 화살이 고제(高帝)의 몸에 맞았습니다. 나라에 사람이 없어 그 대를 전하자 중간에 끊어져서 유씨(劉氏 한(韓) 나라)가 2대 만에 망한 진(秦) 나라와 같이 될 뻔하였으니, 그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가 나라를 세운 공신인 이윤과 태공으로 하여금 후사를 보좌하게 하여 잘 다스렸던 것에 비교한다면 하나같이 어찌 그렇게 떨어집니까. 성조께서 공에 보답하여 배현경(裵玄慶)ㆍ홍유(洪儒)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ㆍ유검필(庾黔弼)ㆍ최응(崔凝) 6공(公)의 얼굴을 그려 어진과 마주 대하게 하고, 태묘(大廟)에 배향하여 춘추로 같이 제사 하였습니다.
31대까지 전하다가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훙하여 국운이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공민왕을 장사지낼 때에 무지개가 해를 거듭 둘러쌌으며, 우(禑)가 처음 제사[蒸]를 지낼 때에 올빼미가 태실(太室 종묘에 태조의 신주를 모신 방)에서 우니 천지가 진동하였습니다. 다음 해 3월의 의능(毅陵)의 기일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왔으며 천둥이 치고 또 우박이 왔습니다. 우가 작(爵)을 물려받을 때에 큰바람이 조묘(祧廟)에서 일어나 북쪽으로 향해 부니, 태실의 망새[鷲頭]가 부러지고 묘의 문이 넘어졌으며, 조묘 침원(寢園)의 소나무가 거의 반이나 뽑히고, 쥐가 태실의 신주 밑자리를 뜯어먹었으며, 이듬해에는 어름(御廩)에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지난해 6월에는 창(昌)이 세워 둔 말이 전국보(傳國寶)의 갑(匣)을 발길로 차서 자물쇠를 부수고 어보를 부러뜨리고 뛰어나가 달아났습니다. 조종께서 이성을 노하여 그가 받드는 제사를 흠향하지 않으며, 위엄을 보여 이를 끊으시니, 비록 면전에서 가르치고 귀를 당겨 일러 주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 하겠습니까. 인임이 우를 세우고 나서 우(禑)의 생모 반야를 죽여 입을 봉하니, 사평문(司平門)이 무너졌습니다. 뼈를 장사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공민왕의 궁인인데 실상 우의 어머니다' 하였는데, 관(棺)의 휘장에 불이 나서 이를 바꾸었더니 또 불이 났습니다. 재상 속명(續命)을 내쫓고 김유(金庾)ㆍ최원(崔源)을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기운이 꺾이어 말이 신씨(辛氏)에게 관계되면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며 멸족 당할까 서로 경계하였습니다. 우와 창의 인친(姻親)이 심복과 조아(爪牙)가 되어 조정과 민간에 뿌리박고 있어, 이를 제거하기 어렵기가 산을 뽑기와 같았습니다. 시중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충성을 다하고 대의를 분발하여 제일 먼저 흥복(興復)을 주창하여, 덕부(德符) 등 8장상이 따라 이를 도와 드디어 두 흉인(兇人 우ㆍ창(禑昌))을 제거하였으니, 우리 조종(祖宗) 31대의 하늘에 배향(配享)된 제사를 다시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문왕(文王)은 4명의 신하가 아니었다면 주(周) 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며, 무왕(武王)은 9명의 신하가 있었으므로 큰 공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이 흥복은 진실로 성조께서 가만히 도와주신 데 말미암은 것이지만, 또한 이(李 태조의 옛 이름) 등의 충성은 일월을 꿰뚫었고 공정은 삼한에 드러났으니, 크게 천도를 따랐기에 하늘이 위에서 도왔으며, 크게 미덥게 하였기에 사람이 아래에서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임과 우ㆍ창이 길렀던 자들로 하여금 갑자기 순종하도록 하여 저자는 가게를 바꾸지 않고, 사람들은 얼굴빛도 변함이 없이, 새벽에 시작하여 아침이 되기 전에 나라가 왕씨에게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에 성조(聖祖)의 어진에 나아와서 공을 아뢰고 상을 시행합니다. 이(李 태조의 그 전 이름)에게는 식읍을 주고 군(君)에 봉하여 대대로 물려받게 하고, 덕부(德符) 이하는 충의군(忠義君)에 봉하고 모두 세습하게 하여 그 녹을 대대로 주게 할 것입니다. 얼굴을 그리고 공적을 새겨서 영구히 전할 것을 맹서하고 이를 종묘에 간수합니다.
성조(聖祖)께서는 후사왕과 9명의 후손을 도와 마음과 덕을 같이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생령을 보전하여 천록(天祿)을 같이 누리고 영원한 세대까지 전하도록 하여 주소서. 9명의 자손은 비록 대역을 범하더라도 재량하여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하고, 다시 그 후사를 구하여 작(爵)을 물려받고 제사를 받들게 하며, 대대로 끊어짐이 없게 하여 9명의 공에 보답할 것입니다. 후사왕이 중흥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9명의 후손으로 하여금 혹시 그 작과 식읍을 잃게 한다면 성조(聖祖)께서 죄를 주어서 나라를 누리지 못하게 할 것이며, 9명의 후손이 그 조부의 충성을 잊고 간사한 꾀를 품거나 교만하고 사치하여 집에 재앙를 끼치고 나라에 해를 끼친다면, 성조께서 이를 죄주어 그 작과 식읍을 다른 후손에게 주어, 9명으로 하여금 영원한 세대까지 제사를 받게 하소서. 이는 신이 9명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이 아니고 실로 9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사직에 몸을 바쳐 왕씨(王氏)를 흥복시켜, 우리 조종의 종사로 하여금 하늘과 더불어 무한히 전하게 함을 가상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종친ㆍ문무 기로ㆍ신료(臣僚)들은 중흥ㆍ반정할 때에 위주(僞主)를 버리고 진주에게 돌아와, 어려운 지경에 있는 나를 호위하였으니, 신이 매우 이를 가상하게 여깁니다. 성조께서는 그 후손을 길이 도와서 우리 왕실을 호위하게 하소서." 하였다.
9공신의 녹권을 내려 주었는데, 우리 태조로 분충 정난 광복 섭리 좌명공신 화령군 개국충의백(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和寧郡開國忠義伯)으로 삼고,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 전 2백 결, 노비 20구(口)를 주었으며, 심덕부를 청성군 충의백(靑城郡忠義伯)으로 삼고, 전 1백 50결, 노비 15구를 주었으며, 정몽주ㆍ설장수 등 7명은 모두 충의군으로 삼고 각기 전 1백 결, 노비 10구를 주었다.

[주D-001]사명(詞命) : 문신(文臣)이 왕을 대신하여 교서(敎書) 및 외교 문장을 제술(製述)하는 것이다.
[주D-002]옥배(玉杯)와 상저(象箸) : 상(商) 나라 주(紂)가 사치하여 처음으로 옥배(玉杯)와 상저(象箸)를 만드니, 기자(箕子)가 탄식하기를, “장차 경궁(瓊宮)과 요대(瑤臺)를 지어 사치가 한이 없을 징조로다." 하였다.
[주D-003]백련회(白蓮會) : 서방(西方) 극락 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원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예경(禮敬)하는 것으로, 진(晉) 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寺)를 만들어 염불하였는데, 그 절의 연못에 흰 연꽃을 심은 데서 유래했다.
[주D-004]찬배(贊拜) : 절할 때에 옆에서 홀기(笏記)를 불러 주는 것이다.
[주D-005]명이(明夷) : 《주역》의 명이괘(明夷卦)는 어진 사람이 참소를 당하는 괘이니, 여기서는 참소를 당하여 귀양간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06]칠보(七步) : 위(魏) 나라 조식(曹植)이 글재주가 민첩하여, 걸음을 걸으면서 7보(步) 안에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지었다.
[주D-007]소인유(小人儒) : 《논어》에, 공자가 자하(子夏)에게 이르기를,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고, 소인유(小人儒)가 디지 말라." 하였으니, 유(儒)에도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주D-008]허물을……안다 : 예를 들면, 후한(後漢) 때 오우(吳祐)의 속관(屬官) 손성(孫性)이 사사로이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어 아비의 옷을 해드리다가 죄를 받자, 오우가 "아전 손성이 오명을 받았으니 이른바 허물을 보고 사람을 안다는 것이로구나." 하고 돌려보낸 일이 있다. 이 말은 허물의 종류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뜻으로 《논어》에도 보인다.
[주D-009]어진……법 : 주관(周官)의 제도에, 형벌을 쓰는 데 팔의(八議)가 있으니, 그 중에 의현(議賢)·의능(議能)·의공(議功)의 조목이 있다. 이것은 같은 죄를 지어도, 현인이나 재능이 있는 이나 공(功)이 있는 이에게는 참작하여 감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D-010]자홍(子弘)을 폐하고 : 한 나라 혜제(惠帝)가 죽은 뒤에, 여태후(呂太后)가 자홍(子弘)을 혜제의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여태후가 죽은 뒤에 자홍은 혜제의 참아들이 아니라 하여 대신들이 폐하고, 고제(高帝)의 아들인 대왕(代王) 항(恒)을 맞아 세웠다.
[주D-011]위(衛)……명분 : 당시에, 위(衛) 나라 임금이 출공(出公) 첩(輒)인데, 그보다 먼저 그의 아버지 괴외(蒯聵)가 태자 때에 그의 아버지 영공(靈公)에게 죄를 얻어 망명하고, 영공이 죽은 뒤에 출공이 유명(遺命)으로 즉위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괴외가 국내로 들어오므로 출공이 이를 막았다. 공자가 말한 명분은 위 나라 부자간의 명분을 말한 것이다.
[주D-012]측천후는……대의 : 무후(武后)는 중종(中宗)의 어머니인데, 신하들이 무후를 당 나라 황실에 대한 역적으로 처단하게 될 때에 중종이 말려야 할 것이나, 사정(私情)보다 대의(大義)로 모르는 척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주D-013]향원(鄕愿) : 한 고을 사람이 모두 그를 점잖다[愿] 칭하는 것인데, 이것은 지적할 허물도 없고 겉으로 점잖은 것 같으나 실상은 어름어름하게 처세하는 사람으로, 공자와 맹자가 모두 이런 종류의 사람을 덕(德)의 적(賊)이라 하였다.
[주D-014]항심(恒心) : 맹자가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일정한 산업[恒産]이 있어야 일정한 마음[恒心]이 있다." 하였다.
[주D-015]요……대우하고 : 중국 오대(五代) 시대에, 후진(後晉)의 황제 석경당 (石敬瑭)이 글안의 덕으로 임금이 되어, 글안을 아버지로 섬기었다.
[주D-016]보거(保擧) : 천거하는 사람이 그의 신분을 보증하여, 후일에 천거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천거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주D-017]모든……않는다 : 《서경》입정편(立政篇)에 있는 말인데, 문왕(文王)은 대체(大體)만을 살피고, 모든 옥사(獄事) 같은 것은 해당 관청에 맡겨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주D-018]채지(采地) : 경대부(卿大夫)의 봉읍(封邑)인데, 그 조세의 수입으로 녹봉을 삼는 것이다.
[주D-019]삼걸(三傑) :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을 보좌한 인걸이 3명인데, 소하·장량·한신이다.
[주D-020]벽곡(辟穀) : 장량이 벼슬을 사양하고 인간 일을 버리고 벽곡하여 신선을 배우겠다고 한 고조에게 하직하고 갔다.
[주D-021]신하 : 태공망(太公望)·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을 말한다.
 
【성 명】 최유경(崔有慶)
【생몰년】 1343(충혜왕 복위 4)∼1413(태종 13)
【본 관】 전주(全州) 최(崔)
【자·호】 경지(慶之), 죽정(竹亭)
【시 호】 평도(平度)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343(충혜왕 복위 4)∼1413(태종 1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으로 아버지는
감찰 대부(監察大夫) 최재(崔栽)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공민왕 21년(1372) 판도
좌랑(版圖佐郞)이 되고, 이어 장령(掌令)을 거쳐 1375년 전법 총랑(典法摠郞), 1388년 양광도 안렴사(楊廣道安廉使)가 되었으며, 이 해 요동정벌이 있게 되자 서북면 전운사(轉運使) 겸 찰방(察訪)이 되고, 최영(崔瑩)이 실각한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92년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 원종 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고, 도성축성 때 성문 제조(城門提調)로 활동하였다. 1397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개성 유후(開城留後)에 올랐다. 1401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溟)나라에 다녀왔으며, 1403년 8월 20일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취임하여 그해 11월 27일까지 재임하였다. 태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고, 청주(淸州) 고택(古宅)에 효(孝)로서 정각(旌閣)이 세워졌으며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人物考,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
【관련항목】
최사강(崔士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