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한글고비(한글古碑)

명 칭】 한글고비(한글古碑) (펌)

아베베1 2009. 11. 3. 17:18

 한글고비(한글古碑)

【명 칭】 한글고비(한글古碑)
【분 류】 비
【지정사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산12-2


  노원구 하계동에 소재하고 있는 영비(靈碑)라고도 불리는 한글고비는 승문원 종9품 부정자(副正字)의 벼슬을 지낸 이윤탁(李允濯)의 묘에 세운
묘갈(墓碣)로, 이수귀부는 없고 회갈색의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방부(方趺)와 비신으로만 되어 있다.[註] 비신의 높이는 142cm, 폭은 63cm, 두께는 18cm로 중종 31년(1536)에 세웠다. 방부(方趺)는 가로 95cm, 세로 48cm로 장방형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아무런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받침돌이다.
비의 전면에는 일반 묘표석(墓表石)과 같이

「權知承文院副正字李公諱允濯
安 人 申 氏 籍 高 靈
合葬之墓」

라 비양(碑陽) 중앙에 종서하였고, 글자 크기는 가로 4∼4.5cm×세로 6.5∼7cm이며 해서체이다.
비음(碑陰)은 상단에 가로 5.5∼6cm×세로 6∼6.5cm의 해서를 가로로 쓴 ‘고비묘갈음지(考쯼墓碣陰誌)’의 제액(題額)이 있고 그 아래에 종행으로 쓴 음지(陰誌)가 총 19행 711자(1행 38자)가 있는데, 글씨 크기는 가로 2∼2.5cm×세로 2.5∼3cm의 해서이다.
비의 동측면은 위에 ‘불인갈(不忍碣)’ 3자를 가로 6cm×세로 6.5cm의 한자 해서로 쓰고 그 아래에 다시 85cm까지 가로 3cm×세로 3.5cm의 세자(細字)로 한자 해서를 쌍행 종서하였다.
비의 서측면은 이 평범한
묘갈을 소위 영비가 되게 하고 한글 금석문의 효시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게 한 문제의 비면이다. 위의‘영비(靈碑)’두 자는 가로 4cm×세로 4.5cm의 한자 해서이고 그 아래 65cm까지 한글이 쌍행 종서되어 있다. 글자는 모두 30자이며, 크기는 가로 2cm×세로 3cm로 한글 비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영한 비라 지운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이는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이 한글로 서각(書刻)된 비문의 별기(別記)가 훈민정음 창제 이래 최초로 한글이 서각된 금석물(金石物)이다. 더구나 수백 수천의 한자 금석문 속에서 완전한 우리글이 서각된 현존 최고(最古)의 금석문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인 가치가 지대하다. 그리고 15C 고어의 모습을 보여 주는 국어학의 학술 자료로서,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국문서예 연구 자료로서도 매우 귀중한 것이다.
[註] 한글비에 대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일본의 천엽현(千葉縣) 관산시(館山市)에 조선시대 한글 비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의 무덤에 세운 묘비로서 건립 연대는 원화(元和) 10년(1624)으로 본비보다 88년 뒤에 세워진 것이다. 표기법 또한 ‘남뭉항밍땅불’이라고 써서 ‘南無阿彌陀佛’의 한자음을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에 따라 쓴 것이라 한다.[註] 그러니 이 일본에 있는 한글비는 본비가 우리말 우리글의 표기가 완전하게 되어진 점에 비해 한자음의 한글 표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입석 연대도 본비보다 훨씬 후대이다. 또 국외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국내에서는 오직 본비만이 유일한 조선시대 국문고비(國文古碑)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지대하다. 이 한글고비의 전문 내용[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權知承文院副正字李公諱允濯
  安人申氏籍高靈
  合葬之墓
  考쯼朝鮮國 啓功郞 權知承文院副正字 李公府君 安人   高靈申氏夫人墓碣 孤哀子 文楗書
  府君 諱允濯 字濯之 本星山 考贈嘉善行僉知中樞府事   諱叔生 쯼貞夫人金氏 郡守日知女 始祖쫿西公長庚 生兆
年 任高麗好直諫嗚於世 謚文烈 生侍中褒 生仁敏是生諱  稷 佐我朝策開國功 官至領議政 謚文景 生漢城府尹師厚
府尹 生諱咸寧 登文魁 授集賢殿校里 是先君祖考 僉知中  樞有三子 允浣 允湜 次先君 以天順 壬午十月庚寅生 天
資端嚴 敢孝弟 尙志節 守己以正 接物以誼 歲癸卯 與二  兄聯 中司馬 人稱之 好讀書 攻若食姿 所與遊皆英俊 士
林推仰 自覲省外 未嘗旬日 燕息于私 篤志勵行如此云     文 華才敏 運不落魄 丁巳秋丁丙喪 至弘治辛酉春 登文科 承
文院權如期以遠大 不幸無命 癸卯秋冬 二六日 以疾終于   家 享年四十 平生抱懷未有所施而歿 人皆惜之 先쯼之考
諱檜漢城叛官쯼淑人金氏 監司自行女 祖知淳昌郡事仲舟   曾祖左副賓客檣 叛官有三子 承濬 承操 以癸未三月丁酉
生쯼於京 歲戊戌合짥內二四載 無違先志 生二女三子 三 十九乃賓 天性謹潔 不容私僞 奉祭以誠 慈受天至 而訓誨
甚肅 飮食服亦必整 而苟즒勞辛勤 婚嫁已畢皆逝凡五人  病殃煎逼且用 弧哀罪酷 嘉靖乙未正月五日 乃至不救享年
七十三 嗚呼 以我考쯼之賢 不得亨壽福 慟哉 同年四月四  日定于楊州?原栗伊岾 四趾甲坐庚向之原 以先瑩近於國
用 翌年春 奉移合葬于此 妹氏適禁火司別提李瀣而? 次妹歸士人朴夭早 伯氏弘楗 性孝友 癸酉進士 氷庫別提 쿸
僉使權澄女 生煇 쿸進士金錫女 女在室 仲氏忠楗 英敏篤 學 庚午進士乙亥登第 歷픊淸要 己卯士禍以厭納羅 쿸吏
曹正郞李孝彦女生焰 쿸及第金憲胤女 女適金孝誠 辛巳伯氏夫婦仲氏皆亡 李文楗癸酉司馬 戊子秋及第 以侍院司丁
憂 쿸士人金彦默女 女?女幼 敢稽首痛哭 以銘曰父德母 恩 天高地厚 旣弧且哀 天?地叩 宅兆固安 天長地久 哀
祝此已 後人其負 嘉靖十五年 丙申五月 立    爲父母立此誰無父母何忍毁之石不忍
不忍碑     犯則墓不忍凌明矣萬世之下可知免夫
      영한 비라 지운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靈碑
      이는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자료출처 : 서울 60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