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병자호란의 굴육 삼전도비

병자호란의 굴욕 삼전도비(三田渡碑) 관련 역사적 기록 (펌) 참으로 중요

아베베1 2009. 11. 3. 17:31
廣州 淸太宗功德碑
(裏面)
大淸皇帝功德碑(篆 題)
大淸皇帝功德碑
大淸崇德元年冬十有二月」
寬溫仁聖皇帝以壞和自我始赫然怒以武臨之直擣而東莫敢有抗者時我寡君棲于南漢凜凜若履春氷而待白日者殆五旬東南諸道兵相繼崩潰西北帥逗撓峽內不能進一步城中食且盡當此之時以大兵薄城如霜風之卷秋籜」
爐火之燎鴻毛而」
皇帝以不殺爲武惟 布德是先乃  降勅諭之曰來朕全爾否屠之有若英馬諸大將承 皇命相屬於道於是我寡君集文武諸臣謂曰予托和好于大邦十年于兹矣由予惛惑自速 天討萬姓魚肉罪在予一人」
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予曷敢不欽承以上全我宗社下保我生靈乎大臣協贊之遂從數十騎詣軍前請罪」
皇帝乃 優之以禮 拊之以恩一見而 推心腹 錫賚之恩遍及從臣禮罷卽還我寡君于都城立召兵之南下者振旅而西 撫民勸農遠近之雉鳥散者咸復厥居詎非大幸歟小邦之獲罪 上國久矣己未之役都元帥姜弘立助兵明朝兵敗被擒」
太祖武皇帝只留弘立等數人餘悉放囘 恩莫大焉而小邦迷不知悟丁卯歲今」
皇帝命將東征本國君臣避入海島遣使請成」
皇帝允之視爲兄弟國疆土復完弘立亦還矣自兹以往 禮遇不替冠盖交跡不幸浮議扇動搆成亂梯小邦申飭邊臣言涉不遜而其文爲▨臣所得」
皇帝猶寬貸之不卽加兵乃先 降明旨諭以師期丁寧反覆不翅若提耳面命而終未免焉則小邦羣臣之罪益無所逃矣」
皇帝旣以大兵圍南漢而又 命偏師先陷江都宮嬪王子曁卿士家小俱被俘獲」
皇帝戒諸將不得擾害 命從官及內侍看護旣而 大霈恩典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復歸於舊霜雪變爲陽春枯旱轉爲時雨區宇旣亡而復存宗社己絶而還續環東土數千里咸囿於 生成之澤此實古昔簡策所稀觀也」
於戱盛哉漢水上流三田渡之南卽」
皇帝駐蹕之所也壇場在焉我寡君爰命水部就壇所增而高大之又伐石以碑之埀諸永久以彰夫」
皇帝之功之德直與造化而同流也豈特我小邦世世而永賴抑亦 大朝之仁聲武誼無遠不服者未始不基于兹也顧摹天地之大畵日月之明不足以彷彿其萬一謹載其大略銘曰」
天降霜露載肅載育惟 帝則之竝布 威德」
皇帝東征十萬其師殷殷轟轟如虎如豼西蕃窮髮曁夫北落執殳前驅厥靈赫赫」
皇帝孔仁誕降恩言十行昭囘旣嚴且溫始迷不知自貽伊感 帝有明命如寐之覺我后祇服相率而歸匪惟怛  威惟德之依」
皇帝嘉之澤洽禮優載色載笑爰束戈矛何以 錫之駿馬輕裘都人士女乃歌乃謳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活我赤子哀我蕩析勸我穡事金甌依舊翠壇維新枯骨再肉塞荄復春有石巍然大江之頭萬載三韓」
皇帝之休
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臣呂爾徴奉 敎篆
資憲大夫漢城府判尹臣吳竣奉 敎書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臣李景奭奉 敎撰
崇德四年十二月初八日立
(高十三尺幅四尺六寸(左)蒙文(右)滿文(裏面) 漢文字經七分(楷書)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우리가 먼저 화약(和約)을 깬 까닭에 처음으로 진노(震怒)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곧바로 동쪽으로 공격하여 오니 아무도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에 얼음을 밟고 햇빛을 기다리는 듯이 하였다. 거의 50일이 지나자 동남쪽 여러 지방의 군사들은 서로 연달아 무너지고, 서북쪽의 장수들은 골짜기에 머무른 채 한걸음도 나오지 못하니, 성 안의 양식도 거의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많은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기를 마치 서리 바람이 가을 풀을 말듯하고 화롯불에 깃털을 태우듯이 하였으나, 황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무예(武藝)의 근본으로 삼고 또 덕을 펼치는 것을 우선으로 하셔서 항복하라는 칙령으로 달래어 말하기를 “항복하여 내게 오면 너희가 모두 온전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도륙(屠戮)할 것이다.”하였다.
영마(英馬)
와 같은 여러 대장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서로 길을 오가니 이에 우리 임금이 문무(文武)의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내가 큰 나라에 의탁하여 화친을 맺은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나의 어리석고 미혹(迷惑)됨으로 말미암아 윗나라 군대의 토벌을 자초(自招)하여 만백성이 도륙을 당하게 되었으니 죄는 나 한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께서는 오히려 차마 이들을 도륙하지 못하시고 이와 같이 타이르시니 내 어찌 감히 그 말을 받들어 위로는 우리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대신들도 모두 찬성하였다.
드디어 수십 기(騎)를 이끌고 군영 앞으로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예로서 대접하고 은혜로 어루만지며, 한번 보고는 심복(心腹)으로 인정하여 재물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온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곧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려보내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군대를 불러들여 서쪽으로 물러났다. 백성들을 위로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원근(遠近)에 도망친 백성들을 모두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커다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작은 나라가 상국(上國)에 죄를 얻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己未; 1619, 광해군 12)년의 군역(軍役)에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이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를 돕다가 패하여 사로잡혔을 때에, 태조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을 비롯한 몇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보내주었으니 그 은혜가 막대(莫大)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작은 나라가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니, 정묘년(인조 5, 1627년)에 지금의 황제가 장군들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임금과 신하가 섬으로 피난하고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니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고 형제의 나라로 간주하니, 강토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고 강홍립(姜弘立)장군도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예우가 한결같고 관리들이 서로 오갔는데, 불행하게도 뜬소문이 생겨나 퍼져 나가면서 작은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거듭 변방의 신하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언어가 불손하고 또 그 글이 ~ 결 ~ 신(~ 결 ~ 臣)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황제께서는 오히려 너그럽게 대하시어 곧바로 군대를 내보내지 않고, 먼저 조서(詔書)를 보내어 군대를 보낼 시기로써 거듭 깨우치기를 마치 귀를 잡고 끌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듯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으니 작은 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죄가 더욱 무거워졌던 것이다.
황제께서 이미 대병(大兵)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고는, 또 한 무리의 군대에게 명하여 강화도(江華島)를 함락시켜 궁빈(宮嬪)과 왕자(王子) 및 여러 신하들의 가족들을 모두 포로로 붙잡았는데, 황제께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해를 입히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시종하는 관리와 내시들로 하여금 간호(看護)하게 하셨다. 이윽고 크게 은전(恩典)을 베풀어 작은 나라의 임금과 신하 및 그 사로잡혔던 권속(眷屬)들이 모두 옛 장소로 돌아가게 되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 햇볕이 되고 가뭄이 단비가 된 듯, 나라가 거의 망했다가 다시 살아나고 종사(宗社)가 거의 끊어졌다가 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모든 동쪽의 땅 수천리가 모두 살려주는 은택(恩澤)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예로부터 드물게 보는 일이라 하겠다. 아아, 훌륭하도다.
한강의 상류 삼전도(三田渡)의 남쪽은 황제께서 머무시던 곳으로 제단이 있다. 우리 임금이 수부(水部=工曹)에 명하여 단을 더 쌓아 높고 크게 만들고 또 돌을 잘라서 비를 세우게 하였다. 황제의 공덕이 천지의 조화와 같이 흘러갈 것임을 후세에 길이 현창(顯彰)함이니, 어찌 우리 작은 나라만이 대대로 힘을 입을 뿐이겠는가? 또한 큰 나라의 인자한 성문(聲門)과 올바른 무위(武威)에 멀리서도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음이 모두 여기에 근본하는 것이다. 커다란 천지(天地)를 베껴내고 밝은 일월(日月)을 그리자니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기에 부족하나, 삼가 그 대략을 기록하는 바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고 기르는데,
오직 황제께서 이를 본받아 위엄과 덕을 함께 펴시네.
황제께서 동쪽으로 정벌하심에 그 군사는 10만이요,
은은한 수레소리 호랑이 같고 표범과 같네.
서쪽 변방의 터럭하나 없는 벌판과 북쪽 부락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창 들고 앞서 진격하니 그 위세 혁혁(赫赫)하도다.
황제께서 크게 인자하심으로 은혜로운 말씀 내리시니,
10 줄의 밝은 회답 엄하고도 따뜻하였네.
처음에는 미혹되어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근심을 끼쳤지만,
황제의 밝은 명령이 있어 비로소 깨달았네.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고 함께 이끌고 귀복(歸復)하니,
단지 위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를 가납(嘉納)하시어 은택(恩澤)과 예우(禮遇)가 넉넉하니,
얼굴빛을 고치고 웃으며 병장기를 거두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駿馬)와 가벼운 갓옷,
도회의 남녀들이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서울로 돌아가신 것은 황제의 선물이요,
황제께서 군대를 돌이키니 백성들이 살아났네.
유랑하고 헤어진 이들 불쌍히 여겨 농사에 힘쓰게 하시고,
금구(金甌)
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제단은 더욱 새로우니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언 풀뿌리에 봄이 돌아온 듯하네.
커다란 강가에 솟은 비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덕을 이어가리.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 同知義禁府事) 신(臣) 여이징(呂爾徴)
이 왕명을 받들어 전액(篆額)을 씀.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신(臣) 오준(吳竣)
이 왕명을 받들어 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兼 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신(臣)이경석(李景奭) 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숭덕(崇德) 4년(인조 17, 1639년) 12월 초 8일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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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삼전도비(三田渡碑)
【분 류】 비
【지정사항】 사적 제101호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동 187

사적 제101호로 지정된 이 비는 송파구 송파동 187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이수(賂首)와 비신이 하나로 되어 있는 통비(通碑)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귀부(龜趺)는 방형좌대 위에 놓여 있으며 귀부의 등에는 사각문(四角紋)을 조각하고 그 위에 와운문(渦雲紋)으로 장식하였다. 이수는 서로 엉킨 운룡문(雲龍紋)을 조각하였다.
비의 높이는 323cm, 폭은 145cm, 두께는 39cm로 비의 전면우반(前面右半)은 만주문 20행, 좌반은 몽고문 20행, 좌반상부에는 횡서로 만주문 비제(碑題) 8자와 몽고문 비제 7자 그리고 이면에는 한문으로 상부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고 7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7분해서(七分楷書)로 한 비 안에 3개국 문자가 들어 있는 국내에 있어서 유일한 비이다.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여 삼전도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서울을 점령한 다음, 남한산성에서 농성(籠城)하였던 인조를 항복시킨 사실을 각기(刻記)한 비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 2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후금왕 홍타시(弘他時)는 황제로 군림하면서 연호도 숭덕(崇德)이라 정하였다. 그 해 3월에 승하한 인조왕비 인열왕후 한씨 영전에 조상차 내조했던 용골대(龍骨大), 마보대(馬保大) 등이 귀로 중에 변장(邊將)들에게 내렸던 배청(排淸)하라는 유문(諭文)을 입수하고 돌아가 청태종에게 고하자 청태종은 대노하여 그 해 12월에 재침(再侵)하니 이것이 곧 병자호란이다. 청군 선발대가 서울에 돌아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난하여 항쟁을 꾀하였다. 이에 청군은 산성을 포위하고 지원병과 군량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왕의 출항(出降)을 요구하였다. 인조는 할 수 없이 이듬해 1월 청국측의 항복 조건을 수락하고 먼저 소위 척화삼학사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 홍익한(洪翼漢)의 3인을 청진으로 보내고 그들이 마련해 놓은 삼전도 수항단에 무릎을 꿇고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은 것이다. 그 뒤 인조 17년 이 자리에 청의 강권으로 이 사실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
]
이 비는 340여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두 차례나 매몰되어 영구히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질 뻔하였다가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 첫번째는 일제 때의 일로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게 되면서 조선민족의 모일모화사상(侮日慕華思想)을 조장하는 것이 된다 하여 이 비를 땅 속에 매몰하였던 것이고, 두번째는 1956년 당시 문교부에서 이를 국치(國恥)의 기록이라 하여 또다시 파묻었는데 [
] 그 뒤 장마비로 흙이 흘러 내려가면서 비신이 드러나게 되어 강 언덕 비탈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것을 다시 원위치보다 송파쪽으로 조금 옮긴 현위치에 세우게 된 것이다.
「비변사에서 삼전도비석은 이미 준비되었으니 사신이 들어가는 때에 비문을 얻어다가 새기게 되면 오해도 받지 않고 우리의 성의를 넉넉히 보여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아뢰었더니 아직 천천히 하라고 전교(傳敎)가 내렸다.」

라고 한 기사로 볼 때 비를 세우는 문제는 정축년 3월 12일 이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이 비의 내용은 청이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과 항복한 뒤에 청황제는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했다는 것을 기술하였다. 문장은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씨는 당시의 명가인 오준(吳竣)이, 전(篆)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장유(張維) · 이경전(李慶全) · 조희일(趙希逸) · 이경석(李景奭)에 명하여 삼전도비문을 찬출(撰出)토록 하였는데 장유 등이 상소하여 사퇴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음으로 세 사람이 할 수 없이 지어 바치게 되었다. 조희일은 채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일부러 그 문사를 졸렬하게 지었고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짓지 않고 있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경석의 글을 채용하게 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또한 동서 권36 인조 16년 무인 2월조 중에는

「장유와 이경석이 지은 삼전도비문을 청국으로 보내 이를 선택토록 하였다. 이에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것을 보고 장유의 글은 문구 중에 마땅하지 않은 것이 있고 이경석의 글은 쓸 만하나 좀더 첨입(添入)해야 할 말이 있다 하여 다시 개찬(改撰)하여 쓰라고 하였으므로 인조가 이경석에게 명하여 개찬케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비문을 찬하도록 피천(被薦)된 사람은 장유 · 이경전 · 조희일 · 이경석 네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이들은 항복비문 쓰는 것을 민족적 치욕이라 하여 거부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할 수 없이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경전은 끝내 병을 핑계로 쓰지 않고 세상을 떠났고 그 밖에 세 사람은 다 썼는데 조희일은 일부러 쓰이지 못할 글을 썼고, 장유의 글은 비유한 문구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채택되지 못하였고 이경석의 글을 다시 고쳐 짓도록 하여 쓰게 한 것이 현재 전하여 내려오는 비문인 것이다.
이 비는 부여 정림사 탑신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과 함께 국치의 유적임에는 틀림없으나 이수와 귀부의 조각이 웅혼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우수한 석공예술로서, 3개국문이 기입된 유일한 비로서 또한 국난의 고사(苦事)로서 오늘을 훈계하는 유적이라 하겠다.
이 비의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 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 글자, 오른쪽에는 만주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자료출처 : 서울600년사.  한국 관광공사 자료

 

인조 16년 무인(1638,숭정 11)
 2월8일 (임인)
장유와 이경석이 지어 청나라에 보낸 삼전도 비문

장유(張維)와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지어 쓰라고 하였다. 상이 경석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 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법받아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원전】 35 집 7 면
【분류】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주D-001]숭덕(崇德) : 청 태종의 연호.
[주D-002]원년 : 1636 인조 14년.
[주D-003]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주D-004]정묘년 : 1627 인조 5년.

 

인조 15년 정축(1637,숭정 10)

 11월25일 (기축)
장유 등에게 명하여 삼전도비의 글을 짓게 하고 이경석의 글을 택하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
【원전】 34 집 710 면
【분류】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

인조 16년 무인(1638,숭정 11)
 3월17일 (경진)
신풍 부원군 장유의 졸기

신풍 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가 졸하였다. 장유의 자는 지국(持國)이고, 호는 계곡(谿谷)으로, 판서 장운익(張雲翼)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순후하고 깨끗하였으며, 문장을 지으면 기운이 완전하고 이치가 통창하여 세상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정사(靖社)의 공훈에 참여하여 신풍군에 봉해졌다. 두 번이나 문형을 맡았는데, 공사(公私)의 제작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오래도록 이조 판서에 있었는데도 문정(門庭)이 쓸쓸하기가 마치 한사(寒士)의 집과 같았다. 중망(衆望)이 흡족히 여겨 흠잡거나 거론하는 자가 없었다. 산성에 있을 때는 힘껏 화친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거상(居喪) 중에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는데, 사론이 그 점을 단점으로 여겼다. 그 뒤에 기복(起復)되어 정승에 제수되었으나, 소를 열여덟 번이나 올리면서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체직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저술한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삼전비비를 지은 장유의 신도비명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56권
 신도비명(神道碑銘)
계곡(谿谷) 장공(張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본조의 문헌(文獻)은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완비되었고 혼조(昏朝)에 침체되었다가 인조조(仁祖朝)에 다시 신장되었다. 그러나 일대의 우두머리로 고려ㆍ신라를 능가하고 조송(趙宋)의 세대까지 젖어든 이를 논한다면, 오직 계곡 문충공(文忠公)이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의 휘는 유(維), 자는 지국(持國)이다. 덕수 장씨(德水張氏)는 본시 중국 원(元) 나라 때 순룡(舜龍)이 고려에 와서 벼슬하여 찬성사(賛成事)에 이르고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수봉된 때부터 비롯되었다.
고조 옥(玉)은 장원으로 급제하고 증조 임중(任重)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이고 조부 일(逸)은 현감이고 부친 운익(雲翼)은 형조 판서인데, 고조로부터 판서공에 이르기까지 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판서공이 판윤(判尹) 박숭원(朴崇元)의 딸을 맞았는데, 박 부인이, 아침 해가 몸을 비추다가 이윽고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공이 만력(萬曆) 정해년 12월 25일에 선천부(宣川府) 내아(內衙)에서 출생하였다. 판서공이 장공(長公 장유의 형)을 가르칠 때 공이 겨우 5세의 나이로 옆에서 듣고도 뜻을 해득하였고 10세에 경서(經書)를 죄다 외었으며, 15세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에게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고 또 문원공 김 선생 장생을 따라 배웠다. 김 선생이 일찍이 공에 대하여,
“총예 역학(聰睿力學)하고 견해가 뛰어나니, 그 성취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고 말하면서 사문(斯文)의 책임으로 기대 권면하였다.
16세에 제사 자집(諸史子集)을 두루 통하였고 19세에 과장(科場)에 나갔다. 이때 공의 문명이 이미 자자하여 거자(擧子)들이 연달아 찾아와서 문의하였으나, 공이 끊임없이 대답하였고 또 숨김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 식견과 도량을 크게 탄복하였다. 드디어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공은 어릴 적부터 문예에만 국한되는 것을 옹졸하게 여기고는, 송 나라 현인들의 글을 읽어 의리의 오묘함을 추구하였고 《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를 지어 제가(諸家)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광해 기유년(1609)에 문과에 합격하고 승문원에 소속되어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겸하였다. 괴원(槐院)에서 신진을 선발할 때 공이 동지(同志)들과 함께 권귀(權貴)의 자제를 척거(斥去)했는데, 마침 감정을 품은 자가 공의 사관천(史館薦)을 저해하여, 3년 만에 비로소 사관(史館)의 직무가 제수되었고 그사이에 주서(注書)가 되기도 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무옥(誣獄)에 걸려 파직되었다. 공은 13세 때에 판서공을 여의었는데, 그제야 모부인을 모시고 안산(安山) 시골집에 내려가 경전(經傳)을 즐기면서 걱정을 잊었다. 이때 모후(母后)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 이륜(彛倫)이 무너졌으므로 제공이 반정(反正)을 모의하는데 공이 계책을 협찬하였고 인조가 즉위하여서는 다시 사관(史館)에 들어와 전적(典籍)으로 승진되고 예조랑(禮曹郞)에서 이조(吏曹)로 전임되었는데, 모든 처사가 여론에 크게 부합되었다.
호당독서(湖堂讀書)를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와서는 명을 받들어 호남(湖南)을 순찰, 성심껏 추구하여 묵은 병폐를 말끔히 씻었으므로 정랑(正郞)에 승진, 이등훈(二等勳)에 책록되었으며, 정공 경세(鄭公經世)가 경연(經筵)에서 공의 문학과 재식(才識)이 당세의 으뜸이라고 아뢰었으므로 상이 특별히 통정(通政) 품계를 더하고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공은 애당초 강상(綱常)이 침체된 시기에 사람된 도리를 바로잡으려 하였던 것뿐이요, 공명에 대하여는 그 본의가 아니었다. 복명을 마치고 본직을 극력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주사 당상(籌司堂上)에 임명하였다.
이괄(李适)의 반란 때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하하는 도중 대사헌에 제수되어서는 아무리 훈귀(勳貴)라 해도 범죄 사실이 있으면 가차없이 논핵하였다. 호종 공로로 가선(嘉善) 품계에 승진, 신풍군(新豐君)에 봉하고 간직(諫職 대사간)은 그대로 띠게 하였다. 차자를 올려서, 자주 경연(經筵)에 임할 것과 세자(世子)를 보도(輔導)하는 도를 진달하였다.
대사헌에 전임되었다가 병으로 사면하였고 대사성(大司成)에서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참판에 전임되었다. 이때 신정(新政)이 얼마 안 되고 옛것만을 그대로 인습하여 치효(治效)가 막연하므로 공이 소(疏)를 올려 아뢰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도는 그 뜻이 있는 뒤에야 그 일이 있고 그 일이 있는 뒤에야 그 성과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제왕(帝王)에게는 각기 일대(一代)의 규모가 있어서, 삼왕(三王 우(禹)ㆍ탕(湯)ㆍ문무(文武))은 인의(仁義)를 행하였고 오패(五覇)는 인의를 가탁하였는데, 그 성쇠는 비록 다르나 다 실심(實心)으로써 실사(實事)를 행하였으니,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전철을 고수하고 구습을 답습하여, 총명은 문부(文簿)에 맡겨지고 지려(智慮)는 규례에 국한되어, 사람을 쓰는 데 현사(賢邪)를 구분하지 않고 일을 만드는 데 원대한 경륜을 생각지 않으시니, 과연 유독(幽獨 은미(隱微)하고 혼자 있는 곳)에서의 경건하고 해태하는 갈림길과 본원(本源 마음의 자리)에서의 간직하고 방치하는 사이에서 능히 실심(實心)으로써 실공(實功)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의지를 확장하고 규모를 수립하여 옛적의 철왕(哲王)을 표준으로 삼고 수제(修齊)ㆍ치평(治平)을 자신의 임무를 삼으소서. 대저 상의 한 번 기뻐하고 성내는 것과 한 번 주고 빼앗는 것에 만물의 영욕(榮辱)과 생사(生死)가 달려 있으니, 만약, 확장된 도량이 없다면 어떻게 높은 지위에 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좌전(左傳)》에 ‘산수(山藪)는 나쁜 것을 감춰 주고 천택(川澤)은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국군(國君)은 치욕을 참는다.’ 하였으니, 이는 지극한 말입니다. 전하께서 임어하신 초기에 간언(諫言)을 간격없이 받아들이시어 모든 일이 거의 잘 전환되어 갔으나, 식자(識者)들은 오히려 혹 억지에서 나오시지 않았는가 염려하였는데, 근자에 와서는 이이(訑訑 스스로 만족하고 과시하는 모습)한 기색으로 대하여, 심지어 정외(情外)의 죄명(罪名)으로써 부가하거나 과당(過當)한 엄명(嚴命)으로써 억누르고 계십니다. 대저 신하로서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는 자는 마치 하늘을 더위잡고 뇌정(雷霆)을 들이받는 것과 같아서, 그 일이 참으로 어렵고 그 뜻이 가상한 것인데, 도리어 이를 경시(輕視)하여 장단(長短)을 따지고 곡직(曲直)을 다투어 기어이 자신을 내세우고 상대를 꺾으려 하시니 도량이 어찌 그처럼 넓지 못하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마음을 비워 놓고 기색을 온화하게 하시어 진언(盡言)을 받아들여 중미(衆美)가 모두 모여 하나로 돌아오게 하소서. 대저 임금으로서 미워하는 바는 붕당(朋黨)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더욱이 금세에는 붕당이 나라를 망치는 고황(膏肓)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붕당을 제거하는 요체는 오직 정명(正明)과 공평 두 가지이니, 정명하면 곡직에 가리움이 없고 공평하면 거조에 실책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에 능하다면 어찌 제거하기 어려울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윽이 보건대, 성상(聖上)께서는 붕당에 대해, 너무 심하게 미워하므로 지나친 의심이 생기게 되고 너무 급하게 꺾으려 하므로 그 본정을 살피지 못하게 됩니다. 이 한 생각이 한번 치우치게 되면 허명(虛明)하였던 마음속에 장애가 있게 되므로, 일에 발로되는 데 거의 공평을 잃게 마련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마음을 물[水]과 같이 가져 만물을 허명(虛明)하게 관찰하심으로써 한쪽에만 치우침이 없이 대중(大衆)에 화합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논하는 이들이, 중흥의 으뜸가는 소(疏)라 하였다. 이후부터 대사간ㆍ대사헌ㆍ홍문관 부제학ㆍ성균관 대사성에 연이어 제수되었고 혹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전임되기도 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에 상이 사친(私親 인조의 생모 구씨(具氏))의 상(喪)을 만나자, 정공 경세(鄭公經世)가 《예기(禮記)》의, ‘임금의 어머니가 적부인(適夫人)이 아닐 경우에는, 임금이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말을 들어서 금상(今上)이 입을 복을 시마(緦麻)로 정해야 한다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예기》의 그 말은, 아버지의 첩(妾)일 경우를 이른 것이오.”
하자, 정공이 그제야 자신의 오판을 크게 깨달았다. 이때 연평(延平) 이공 귀(李公貴)와 완성(完城) 최공 명길(崔公鳴吉)이 말하기를,
“주상은 지금 조종의 뒤를 이은 것이요 개인의 뒤만을 이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부자(父子)’의 호칭이 있으니, 마땅히 삼년복으로 정해야 하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부자로 호칭하는 것은 옳다 하겠지만, 아버지가 생존하였을 적에는 어머니를 위하여 장기(杖朞)를 입는 법인데, 더욱이 금상(今上)은 이미 대통(大統)을 이어 조종(祖宗)과 체(體)가 되었으니, 마땅히 아버지가 생존하였을 적의 예를 따라서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해야 하오.”
하자, 조정 의논이 그대로 결정되었다. 장사가 끝난 뒤에 또 묘(墓)를 원(園)으로 호칭해야 한다고 하므로 공이 다시 차자를 올려서 잘못을 논하였다. 처음에 문원공(文元公)이, 부모로 호칭하는 것을 적극 그르다 하면서,
“이미 부모로 호칭할 바에는 의당 삼년복을 입어야 하고 또 신주도 종묘(宗廟)에 모셔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공도 이 점에 대해 문원공에게 글로써 왕복 변론하여 끝내 자신의 주견을 세웠던 것이다. 겨울에 천둥의 재변이 있자, 공이 또 차자를 올려서,
“천둥이란 하나의 위노(威怒)인데, 순음(純陰)이 용사(用事)하는 10월에 천둥이 발동하였으니, 이는 시기를 잃고 망동(妄動)한 것입니다. 그 효상(爻象)을 추구해 보면, 전하의 호령이 정당하지 못하였거나, 위노(威怒)가 중도(中道)에서 벗어난 듯합니다. 바라건대, 매사를 깊이 성찰(省察)하소서.”
하였다.
정묘년에 청 나라 오랑캐가 들어오므로 대가(大駕)를 따라 강도(江都 강화도)로 들어갔다. 때에 국력이 부진하여 오랑캐에게 화친 체결을 강요받았는데, 오랑캐 사신 유해(劉海)는 본시 중국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또 교활한 위인이었다. 그가 진현(進見)할 때에 상이 용탑(龍榻) 위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유해가 노기 띤 표정으로 꿋꿋이 서서 앞으로 나아오지 않자 좌우가 해괴하게 여겼다. 공이 나아가서,
“저 자가 너무 무례하니, 바라건대 밖으로 내쫓으소서.”
하므로, 유해가 그제야 풀이 꺾인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예식을 갖추고 물러갔다.
이어 화친 체결이 약정된 뒤에 유해가 상에게 맹약 장소에 친림하기를 청하자 의논하는 이들이, 당 태종(唐太宗)이 위수(渭水)의 편교(便橋)에 나가서 힐리(頡利)와 맹약하던 일을 인용하여 그대로 수락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이 상에게 수락하지 말기를 청하고 나서 유해를 만나 극력 투쟁하여 마침내 대신(大臣)이 대신 나가 주관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해가 조약을 체결할 때 명 나라와 단절할 것을 제1조로 내세우므로 공이 큰소리로 단호히 배격하자, 유해가 《논어(論語)》의, 관중(管仲)이 자규(子糾)를 위해 죽지 않은 것을 공자(孔子)가 관중더러, 인(仁)한 사람이라고 일컬은 말을 들어 달래고 위협하였다. 통역(通譯)이 이를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공이 그 자음(字音)과 어맥(語脈)을 살펴 그 뜻을 체득하고 즉시 《논어》의 ‘사람이란 누구나 다 한 번은 죽게 마련이지만, 사람에게 신(信)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는 말을 들어 꺾어 버렸다.
뒤에 유해가 다시 바른 데로 돌아서서, 매번 본국더러 사체(事體)를 얻었다고 말하였고, 도독(都督) 원숭환(袁崇煥)도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매번 본국의 사신을 만날 적마다 맨 먼저 당시의 일부터 말하면서, 으레 장 시랑(張侍郞)은 지금 어느 직책에 있으며, 안부는 어떠냐고 물었다.
오랑캐가 물러간 뒤에 다시 본국에게 명 나라의 연호를 쓰지 못하도록 하므로, 조정에서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공이 개연히 나서서,
“저들과 화의(和議)를 체결하던 첫날에, 명 나라에 관련되는 일에 대해 죽어도 따를 수 없다고 한 사실은, 온 국민이 다 알았고 또 성의(聖意)도 그대로 확정하신 바인데, 어찌 경솔히 스스로 서둘러서 그 소수(所守)를 상실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사대(事大)하는 도리에는 연호를 받드는 것이 가장 중대하므로 이를 한 번 실수하면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자, 상이 마침내 공의 말에 따랐다. 상이 환궁하여 특별히 이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공이 사퇴하는 차자를 세 번이나 올렸으나 상이 이르기를,
“경(卿)에게는 재(才)와 학(學)이 있고 또 덕(德)과 행(行)이 있으니, 참으로 여정(輿情)에 부합되는 자이다.”
하고 비답을 내리므로 공이 드디어 세도(世道)로써 자임(自任)하여 공도(公道)를 확장하고 사로(仕路)를 숙청시켰다. 명 나라 조사(詔使)가 온다 하여, 특별히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문형(文衡)이 아닌 사람으로서 이 임무를 맡은 예는 이전에 없었던 바인데, 결국 조사가 오지 않고 말았다.
무진년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하였다. 흥양 현감(興陽縣監) 정홍임(鄭弘任)이 내수사(內需司)에 소속된 사람을 수치(囚治)하였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 파직 심문을 당하게 되므로, 공이 임금은 사재(私財)를 소유할 수도 사인(私人)을 비호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이어 초 영왕(楚靈王)이 신무우(申無宇)를 용서하던 고사를 말하자,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때에 오랑캐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온 자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오랑캐의 공갈을 무서워하여 그를 잡아 보내려 하므로 공이 바로 차자를 올려 불가한 것을 진언하기를,
“이는 천리와 인정으로 보아 차마 못할 일입니다. 옛날에 평원군(平原君)은 하나의 공자(公子)로서 자신이 진(秦) 나라에 잡혀 있으면서도 위제(魏齊)를 선뜻 내어 주지 않았는데, 지금 당당한 국가로서 어찌 차마 추로(醜虜)의 한마디 말을 두려워하여 우리의 백성을 호랑이의 입속에 던져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이를 옳지 못하다 하므로 공이 다시 여섯 가지 조목을 열거하고 자신의 거취(去就) 문제까지 들어 논쟁하였으며 심지어,
“이러고서야 이 다음 오랑캐가 들이닥치면 무슨 면목으로 호령을 내려, 간과(干戈)를 잡고 오랑캐와 대항하도록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공이 시의(時議)와 불합하여 벼슬을 사체(辭遞)하였다가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마침 가뭄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전하께서는 옛것만을 인습 고수하고 한번 해보려는 큰 뜻을 분발하지 않으면서, 규례를 삼가 지키고 부서(簿書)를 세밀히 다루어 큰 실수만 없애고 큰 간특(奸慝)만 없앤다면 소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태평한 시대에서도 오히려, 진전하지 않으면 퇴각하고 마는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처지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시기입니까. 각고(刻苦)하기를 월 구천(越句踐)과 같이 하고 절검(節儉)하기를 위 문공(衛文公)과 같이 하고 영웅들을 포섭하기를 한 광무(漢光武)와 같이 하고 정력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기를 당 태종(唐太宗)과 같이 하시더라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어찌 답답한 데 가깝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제왕(帝王)의 학문은 《대학(大學)》의 강조(綱條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와 《중용(中庸)》의 구경(九經 수신(修身)ㆍ존현(尊賢) 등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도(大道))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한번 해보려는 뜻만 확립된다면 바로 이를 들어서 시행하여도 충분합니다. 그렇지 않고 글[書]은 글대로, 도(道)는 도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각기 배치된다면, 이는 속유(俗儒)들이 입으로 읽고 귀로 듣는 것에 다름이 없습니다. 또 성인(聖人)의 말에 ‘적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균등하지 못할까를 걱정해야 한다.’ 하였으니, 균등이란 바로 공평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사재(私財)를 축적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내수사(內需司)는 사재를 축적하는 부고(府庫)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는 반드시 이조(吏曹)의 관여하에 운영되었습니다. 즉 내수사는 주대(周代)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총재(冢宰)로 하여금 임금의 재용(財用)을 관여하게 해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본시 일체라는 의미를 알리고자 한 것인데, 지금 내수사의 관속은 모두 환시(宦侍)나 하례(下隷)가 맡고 있습니다. 본원이 한번 어긋나면 말류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반드시 이조로 하여금 서명(署名)하게 하고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출납하게 하여 정명 공평한 다스림을 보이소서. 속담에 ‘나라의 언로는 사람의 혈맥과 같다.’고 하였으니, 혈맥이 막히면 사람이 병들고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임어하신 이후로 직언을 하다가 죄를 입은 이가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전하에게 거슬리면 전하가 싫어하고 집정(執政)에게 거슬리면 집정이 싫어하기 때문에 대각(臺閣) 위에 직신(直臣)이 소삭(消削)되고 직언이 좌절되었습니다. 이를 전환시키는 관건은 다만 전하에게 있으니, 전하께서 굽은 것을 펴고 막힌 것을 소통시키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국맥(國脈)이 영원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대사헌으로서 차자를 올려, 성학(聖學)을 힘쓰고 직언을 받아들여 백성을 편안케 하는 도에 대해 극론하였다. 그 성학설(聖學說)에,
“임금의 도는 체(體)와 용(用)이 있으니, 곧 자신을 닦는 것과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입니다. 임금은 묘연(䏚然)한 한 몸으로 만민의 위에 처하여 표준이 되었으므로 그 정당함을 다한 뒤에야 남의 부정을 책할 수 있고 그 공평을 다한 뒤에야 남의 불공평을 책할 수 있으니, 《서경(書經)》 홍범(洪範)의 ‘건극(建極)’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는 데는 학문이 있을 뿐입니다. 제왕(帝王)의 학문은 포의(布衣)와 같지 않지만, 입지(立志)를 진절(眞切)하게, 궁리(窮理)를 정밀하게, 실천을 독실하게 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는데, 임금은 안으로는 갖은 욕심이 협공하고 밖으로는 만 가지 일이 답지하여, 그 마음이 흔들리기 쉽고 그 일이 전일하기 어려우므로, 강마(講磨)ㆍ계옥(啓沃 흉금을 털어놓고 일러 주는 일)하는 도움이 다만 경연(經筵)에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 태만하면 가망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처음부터 경연을 열고 학문을 강마하는 바가 조종(祖宗)의 고사와 같지 못하였고, 근자에 와서는 그 회수마저 점차 드문 데다가 경연에 임할 적에는 간묵(簡默)한 것만을 힘쓸 뿐, 종용히 자문하신 적이 없었으며, 강을 마치고 환궁하면 함께 대하시는 바가 환시(宦侍)나 궁첩(宮妾)뿐입니다. 이러고서야 진덕 수업(進德修業)을 바란다면 너무 소루하지 않겠습니까. 그 병통의 원인을 따져 본다면 도무지 성지(聖志)가 확립되지 못하신 데 있습니다. 뜻이 확립되지 못하면 학문이 진취되지 못하고 학문이 진취되지 못하면 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덕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 심술(心術)과 정령(政令)에 발로되는 바가 모두 치우치고 어그러져 그 정당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번연(翻然)히 개도(改圖)하고 분연히 발분하여, 성현도 반드시 배울 수 있고 삼대(三代)를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확신, 자주 경연에 나오시어 전일하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마음에 존양(存養)하고 몸에 체험하고 일에 미루되, 쉬지 않고 수지(守持)하고 성실로써 시행하신다면, 덕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스림이 어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공의 전후 권계(勸戒)가 모두 이상 두 차자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기사년(1629, 인조7)에 나공 만갑(羅公萬甲)이 직언(直言)으로 상의 뜻에 거슬려 찬축(竄逐)을 당하게 되자, 공이 그를 매우 강력히 구하려 하니 상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좌천시키매 대신ㆍ경재(卿宰)와 삼사(三司)가 합계(合啓)로써 논쟁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주는 본시 인구가 많고 지역이 넓은 데다가 왕화(王化)가 제대로 미치지 못한 고을인데, 공이 백성들을 가엾이 여겨 덕(德)으로써 유도하고 예(禮)로써 다스려 풍속이 크게 달라졌다.
때에 사대 교린(事大交隣)에 관한 사명(辭命)이 빈번하였다. 상이, 장모(張某)의 문장이 그립다고 하므로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김공 반(金公槃)이,
“장모의 문장은 경학(經學)에서 체득한 때문에 말과 이치가 함께 닿고 또 식견이 명확 심오하여 저절로 기의(機宜)에 적중되므로 성인(聖人)의 ‘초창(草創)ㆍ윤색(潤色)’이란 말은 진정 그를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경오년에 형조 판서로 들어왔는데, 역시 폐기된 정무가 없었다.
상이 장차 장릉(章陵 원종(元宗))을 추존(追尊)하려 하므로 공이 마침 대사헌(大司憲)으로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條)를 지어 차자와 아울러 올렸으나 반응이 없었다. 때에 상의 뜻이 더욱 굳어져 있었다. 공이 다시 종백(宗伯 예조 판서의 별칭)에 제수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는데, 장릉 추존 문제는 다 예조의 소관이므로, 자신의 마음을 어겨 가면서 그대로 봉행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이를 항론(抗論)하다가 체직되었다. 일찍이 입시(入侍)하여 이에 관한 시비를 매우 자세하게 진변(陳辨)하므로 상이 비록 말로는 근간(謹懇)하였으나 뜻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들도 이를 논쟁하다가 관학을 그만두고 나가므로 공이 상에게, 몸을 굽혀 유생들을 위유(慰諭)하여 사도(斯道)의 원기(元氣)를 붙잡아야 한다고 청하였다. 명 나라 장수 황룡(黃龍)이 섬 백성들에게 구금되므로, 조정에서 순역(順逆)의 사리를 들어 효유하자, 섬 사람들이 감동하여 뉘우쳤는데 그 격문(檄文)은 공이 지은 것이었다.
임신년에 상이 끝내 장릉을 추존하므로 공이 글을 올려 스스로 탄핵하기를,
“송 나라 복의(濮議) 때 여회(呂誨)ㆍ범진(范鎭) 등이 차례로 좌천되었는데,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조정의 시비를 논정하고 사대부의 진퇴를 밝힐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지금에 와서는 대례(大禮 원종 추존 하는 의식)를 거행할 때 거기에 해당되는 문자(文字)가 반드시 신(臣)의 손에서 지어질 것이니, 이를 사양하고 받들지 않는다면 직무를 유기하게 되고 억지로 따른다면 뜻을 굽히게 됩니다. 직무를 유기하는 것은 충실하지 못하게 되고 뜻을 굽히는 것은 곧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본직(本職) 사면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승하하므로 애책(哀冊)과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자, 전례에 따라 품계를 더하였다. 대사헌에서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때에 예송(禮訟)을 치른 뒤라 위아래 관료들 사이가 서로 의심하고 또 어수선하므로 공이 이를 조정하기 위하여 공평ㆍ진실한 마음을 다하다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사체(辭遞)된 후로는 다시 세도(世道)로써 자임하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은 공이 포부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여겼다.
병자년에 남한산성으로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군부(君父)의 화(禍)를 구하는 데 온갖 힘을 다하다가 대가를 따라 환도하여서야, 모부인이 강도(江都)에서 별세한 소식을 들었다. 장사를 마치고 반곡(返哭)한 뒤에 상이 기복(起復)을 명하고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하므로 공이 너무 놀라고 황공하여 진심으로 사면을 청하였으나 상이 기어이 공을 기복시키기 위하여 공에게 가한 융숭한 예의가 고금에 없었다. 공이 드디어 가마에 실려 모부인의 무덤 옆에 나와서 전후 18차의 소를 올리자, 비로소 공의 사면을 윤허하였다. 공은 노쇠(老衰)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집상(執喪)하는 데 조금도 해태함이 없다가 병이 점차 악화되어 무인년(1638, 인조16) 3월 17일에 별세하였다.
공은 천품이 저절로 도(道)에 가까웠고 영예(英睿)가 어려서부터 성취되었으며, 청명 온수(淸明溫粹)하고 관후 화평(寬厚和平)하였다. 그러나 절제가 있어 지나치지 않고 또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일찍부터 현유(賢儒)를 따라 학문하는 방향을 듣고 나서, 글 읽는 것으로써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요체를 삼았는데, 그 글 읽는 방법은, 억지로 탐구하여 관통하려 하거나 괜히 천착하여 합리화시키려 하지 않고, 우선 정당한 문의(文義)부터 탐구해서 적절한 이취(理趣)를 체득하여, 고인(古人)의 본의를 마치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만들었으므로, 문자(文字)가 자연스러워서 각기 제구실을 다하고 자신의 식견이 소명 통철(昭明洞澈)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을 말함)이 일찍이,
“지국(持國)의 견해는 아무리 옛날 유현(儒賢)이라도 미치기 어렵다.”
고 말하고, 매번 의심난 곳이 있으면 으레 글로써 왕복하였는데, 공의 시원스런 논설은 별로 마음을 쓰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조사(措辭)와 이치가 아울러 적절하였으므로 김 선생이 흔히 자신의 소견을 버리고 따르곤 하였다. 공은 모든 글을 모두 관통하여, 수용하는 데 그 본원을 연구하는 자료로 삼았으므로 체험이 저절로 깊고 실천이 저절로 독실하였다. 때문에 내행(內行)도 순무(純茂)하여 모부인을 섬기는 데 조금도 그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고 백씨(伯氏)를 공경하는 데 마치 엄부(嚴父)를 받들 듯하였는가 하면, 병이 들었을 적에는 탕약을 먼저 맛보고 나서 드렸으며, 그윽한 규문(閨門) 안에서도 신독(愼獨)하는 공부를 버리지 않았다. 하인을 거느리는 데는 인자를 다하고 사람을 접하는 데는 공손을 다하였으며, 제사를 드리는 예절에 조금만 위배되는 바가 있어도 온종일 불안해하였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유출되어, 가사(家事)는 일절 묻지 않고 생각이 온통 조정에 있었다. 언제나 재능을 겸양(謙讓)하여 마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같으면서도, 의리에 정당한 일에는 직접 뇌정(雷霆 임금의 진노(震怒))에 저항(抵抗)하여 아무리 맹분(孟賁)ㆍ하육(夏育)과 같은 용맹으로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고, 사수(辭受)의 절차가 매우 엄격하여, 사람들이 감히 비의(非義)로써 시험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훈로(勳勞)가 높은 경상(卿相)에다 왕실의 인척(姻戚)까지 겸하였어도 생활이 쓸쓸하여 마치 한사(寒士)의 집과 같았으며, 세상의 부귀 환락을 누리는 자 보기를 자신을 더럽힐 것같이 여겼을 뿐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료 사이에서 미워한 이가 없었던 것은, 공이 본시 심후 혼융(深厚渾融)하여 스스로 잘난 척하지 않은 때문이다.
일찍이 천하의 큰 본심은 임금의 한 마음에 있다 하고, 또 하늘의 도(道)와 임금의 덕은 그 요체가 신독(愼獨)하는 공부에 있다 하여, 매번 임금을 위하여 되풀이해서 진계(陳戒)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아 드리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지 않고, 한갓 행사(行事)에만 국한하는 자는 다 구차할 뿐입니다.’ 하였으므로, 정심(正心)ㆍ성의(誠意)ㆍ수기(修己)ㆍ안민(安民) 등에 관한 말이 진강(進講)하는 때에 끊임이 없었어도, 독고(瀆告 재삼 되풀이해서 고하는 것)한다는 혐의를 받지 않았다. 일의 가부(可否)를 논하는 데는 마치 시귀(蓍龜 옛날에 점칠 때 사용하던 시초와 거북이)와도 같았으니, 이는 글을 관통함으로써 이치가 저절로 밝아진 것이다. 즉 이치 밖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 문(文)과 도(道)를 두 가지로 보는 것을 말학(末學)의 누습(陋習)으로 단정하였는데, 이는 한구(韓歐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바이며, 주자(朱子)가 깊이 배척한 바이다. 어떤 이는 공을 보고, 유도(儒道)에만 전주(專主)하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혹 공이 워낙 고명(高明)한 때문에 선도(禪道)의 공허 정일(空虛靜一)을 좋아한 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만년까지도 끝내 대중(大衆)에 화합되지 못해서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공을 보고, 모문자(某文字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를 의진(擬進)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하는데, 공은 정묘년 변고가 있은 뒤부터 존주(尊周)하는 의리가 해와 별처럼 뚜렷했기에 이 문자(文字)에도 정전(鄭甸)ㆍ초이(楚夷)의 고사(故事)를 들어 스스로 호소하였다가 하마터면 사건이 발생할 뻔하였어도 이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은 이 일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죄주어도 할 수 없고 자신을 알아주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니 아, 그 또한 슬픈 일이다. 또 어떤 이는 공을 보고, 한자(韓子 한유(韓愈))처럼 문장을 인하여 도(道)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역시 잘못된 말이다. 공은 어려서 선사(先師 김장생(金長生)을 말함)를 따라 학문에 관한 본말(本末)ㆍ빈주(賓主)의 결과를 배웠으므로, 스스로 순서를 따라 공부를 힘쓰는 방향을 알았다. 다만 공의, 《중용(中庸)》에 대한 논설이 주자(朱子)의 장구(章句)와 약간 다른 점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공이 여기에 대해 우연의 의문이 있었으나 감히 우길 수는 없으므로, 연구하는 도중 다소 이의를 제기한 바가 있었을 뿐, 그 말이 겸손하고 그 예절이 공손하였으니, 이 점은 사실 주자(朱子)도 일찍이 허여(許與)한 바이다. 어찌 온릉(溫陵)이나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무리처럼 억지로 이설(異說)을 내세워 함께 맞서려는 자와 비하겠는가. 다만 고금의 글을 다 읽고 난 자라야 거의 공을 논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을 논하자면, 혼연(渾然), 또는 호연(浩然)히 유전(流轉)하다가 담연히 마무리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만물이 포장(包藏)되어 그 변화가 그지없다. 그러나 반드시 경훈(經訓)에 의거하여 이치가 앞서고 의의가 정당하였고, 빈말[空言]이 아니었으니, 명 나라 대가(大家)들의, 화려하고 장대하여 마한(馬韓 사마천(司馬遷)과 한유(韓愈))과 맞설 수 있다고 장담하여도 그 실속이 없는 문장에 비한다면 훨씬 뛰어난데도 공은 아마 대수롭잖게 여겼을 것이다. 공은 위로 한구(韓歐 한유와 구양수(歐陽脩))를 넘겨다보았으면서도, 그 의리(義理)는 정(程子)ㆍ주(朱子)를 주장한 때문에 상하(上下) 5, 6백 년 사이에 공과 그 경중을 겨룰 이가 없다. 아, 참으로 성대하다. 대저 구양공(歐陽公 구양수)의 박흡(博洽)으로도 유원보(劉原父 송 나라 유창(劉敞))에게서 글을 읽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공도 가끔 구양공의 실수를 논하곤 하였으니, 가사 유공(劉公)이 공을 논한다면 어떠한 말이 나올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변방에 나서 중국 문헌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 개탄스런 일이다.
부인 김씨는 문충공(文忠公) 선원 상국(仙源相國 김상용(金尙容))의 딸로 단수 정정(端粹貞靜)하고 겸공 신외(謙恭愼畏)하며 부도(婦道)가 원만하여 도타운 덕행이 공과 아름다움을 짝하였다. 아들 선징(善澂)은 문과 출신으로 판서(判書)에 이르고 한 딸은 바로 우리 인선 성모(仁宣聖母 효종비(孝宗妃))이다.
공이 별세할 때 수십 길[丈]의 청홍(晴虹)이 옥상(屋上)에 가로 뻗쳐서, 공이 걸림없이 왔다가 걸림없이 떠나는 듯한 감응을 보였으니, 어찌 그만한 감응이 없었겠는가. 문집이 세상에 유행되고, 연역(演繹)하던 연주(連珠) 수십 편은 임종 하루 전에 절필(絶筆)하였다. 상이 영의정에 추증,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墓)는 안산(安山) 월곡리(月谷里) 앞에 안장되었고 어제(御題) 표액(表額)이 있다. 다만 신도비(神道碑)가 오래도록 건립되지 못하였다가 금년 봄에 성모(聖母)가 승하하기에 임하여 현종대왕과 함께 선징(善澂)에게 명하여, 공의 비명(碑銘)을 천신(賤臣) 시열에게 청하도록 하였다. 시열은 천박한 견문으로 너무도 황공하여 감히 이 소임을 감당할 수 없으나 감히 사양할 수도 없어, 삼가 위와 같이 서술하였을 뿐, 공의 선미(善美)를 찬양하는 데는 그 자격이 아니므로, 삼가 일시(一時) 명공 거경(名公鉅卿)들의 논평을 열거하였다. 즉 백사(白沙) 이공 항복(李公恒福)의 한창 시절에 공의 나이가 매우 적었으나 백사는 ‘모(某)의 문장 덕행은, 아무리 성문(聖門) 제자(諸子)의 서열에 두어도 서로 백중(伯仲)이 될 만하다.’ 하였고,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말하기를 ‘탄탕 명백(坦蕩明白)하여 표리(表裏)가 통연(洞然)하였으니, 문장이 도리어 사람만 못하다.’ 하였으며, 상촌(象村) 신흠(申欽)ㆍ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ㆍ수몽(守夢) 정엽(鄭曄) 등 제공도 모두 나이를 생각 않고 서로 교유하면서 ‘상린(祥麟) 서봉(瑞鳳)과 같다.’ 하였고, 혹은 ‘어렸을 때의 본심을 상실하지 않은 이는, 다만 모가 거의 가깝다.’ 하였고, 혹은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하다.’ 하였고, 혹은 ‘마땅히 삼대(三代) 시대의 인물과 똑같이 논해야 한다.’ 하였다. 이 몇 마디의 말은, 후세의 상론(尙論)하는 이들도 거의 이를 모두 적절한 논평이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송 나라 구양공(歐陽公)이 / 有宋歐陽                   한공(韓公)의 뒤 이었는데 / 繼昌黎賢
이공(二公)이 태어남은 / 而二子生                       정주 이전에 있었네 / 在程朱先
공은 맨 나중에 나서 / 惟公則後                          그 글 탐구 토론하고 / 探討其書
또 이로부터 소급해서 / 因茲沿溯                        그 여서 정리한 뒤 / 遂理緖餘
세상에 범람한 / 然後汎濫                                  구류 백가(百家)를 / 九流百氏
은미한 이 마음으로 / 以一心微                           천고의 은비(隱秘)한 데 쌓아 / 函千古祕
땅이 만물을 싣고 바다가 포용하듯 / 地負海涵       광대하고 충만하였네 / 溥博浩瀰
그 말과 그 행에 / 之言之行                                그 본원(本原) 얻었으니 / 其原寔逢
집에 있거나 나라에 있거나 / 在家在邦                  원망하는 이 뉘 있으랴 / 孰有怨恫
옛날 송 나라 사람이 / 維昔宋人                          회옹에게 위협하기를 / 要晦翁云
정심이니 성의이니 하는 말 / 正心誠意                 임금이 이미 싫어한다 하므로 / 上所厭聞
회옹이 개탄하면서 / 晦翁曰咨                            이것 말고 또 뭐가 있겠나 했는데 / 捨此伊何
공의 보도(輔導)만이 / 惟公啓沃                         시종 변함없었으니 / 諒亦靡他
아무리 이를 사법이라 하지만 / 雖云死法              만한 활법(活法) 없고 / 莫如斯活
아무리 이를 상담이라 하지만 / 縱曰常談              그 묘리 뉘 맞설쏜가 / 其妙孰埒
아무리 한 구 이공(二公)의 설이 / 雖韓歐說          고금에 화려했지만 / 震耀今古
실제의 이치 따져 보면 / 原其實理                      어찌 빈과 주 없을쏜가 / 豈無賓主
공의 학문만이 / 惟公所學                                 본과 말 있었으므로 / 寔有本末
문원 김 선생도 / 所以文元                                공과의 토론 마지않았네 / 不厭商確
이것 저것 다 거둬들이는 데 / 俱收並蓄              그이 진정 그 사람이지만 / 公固有之
어찌 한갓 많은 걸 탐냈으랴 / 而豈徒多              의심난 건 사실 보류했거든 / 實闕殆疑
하물며 초학(初學) 후배들이야 / 況其初晩          어찌 그 이동 없을쏜가 / 不無異同
다만 먼 후세에 / 惟百世人                               공의 시종 알게 되리 / 究厥始終

[주D-001]오패(五覇) : 춘추 시대에 제후(諸侯)의 맹주(盟主)로서 패업(覇業)을 이룩한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 진 목공(秦穆公), 송 양왕(宋襄王), 초 장왕(楚莊王)을 말한다.
[주D-002]초 영왕(楚靈王)이 …… 고사 : 춘추 시대 초 영왕이 장화궁(章華宮)을 지어 놓고는, 꾀를 내어 도망쳐 오는 자들을 받아들이므로 신무우(申無宇)의 한 문지기도 그곳으로 도망쳐 갔다. 이에 무우가 곧장 장화궁으로 들어가 문지기를 잡아냈는데 그곳의 유사(有司)가 왕궁(王宮)에서 사람을 잡아갔다 하여 그를 잡아다가 왕에게 바치자, 그가 법(法)의 정당성을 들어 말하므로 왕이 그를 석방한 일을 말한다. 《春秋左傳 昭公7年》
[주D-003]평원군(平原君)은 …… 않았는데 : 평원군은 전국 시대에 조 혜문왕(趙惠文王)의 아우 조승(趙勝). 위(魏)의 공자(公子) 위제(魏齊)가 범수(范睢)를 때려 그의 갈비뼈와 이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 뒤에 범수가 진(秦)의 재상이 되자, 위제가 그를 두려워하여 평원군의 집에 망명(亡命)해 있었다. 이에 진왕(秦王)이 범수의 원수를 갚아 주기 위하여 위제의 머리를 요구해 오자, 조왕(趙王)이 군사를 풀어 평원군의 집을 포위하고 위제를 잡으려 하였으나 평원군이 그를 내주지 않고, 그냥 도망치도록 내버려 둔 고사.
[주D-004]초창(草創)ㆍ윤색(潤色) :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정(鄭) 나라에서 외교 문서를 작성할 적에 비심(裨諶)이 초창(草創)하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자우(子羽)가 수정하고 자산(子産)이 윤색(潤色)한다.”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한 것.
[주D-005]복의(濮議) : 송 영종(宋英宗)의 생부(生父) 복안의왕(濮安懿王)을 추존하는 전례(典禮)를 의논할 때 그에 대한 호칭으로 황백(皇伯), 또는 황친(皇親) 두 가지가 거론되었는데, 여회(呂誨)ㆍ여대방(呂大防)ㆍ범순인(范純仁) 등이 전자(前者)를 주장하다가 파직당한 일을 말한다. 《宋史 傅堯兪列傳》
[주D-006]정전(鄭甸)ㆍ초이(楚夷) : 춘추 시대에 정(鄭)은 왕성(王城)에 가까운 전복(甸服 주대(周代) 구복(九服)의 하나. 즉 사방 1천 리로 하는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 5백 리씩을 하나의 복(服)으로 하는 후복(侯服)ㆍ전복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ㆍ이복(夷服)ㆍ진복(鎭服)ㆍ번복(藩服) 등이 있음)에, 초(楚)는 융적(戎狄)에 가까운 이복(夷服)에 속하는 제후(諸侯)인데, 초 장왕(楚莊王)이 도리어 정백(鄭伯)을 침략하였다. 여기서는 장유(張維)가 의진(擬進)한 삼전도 비문(三田道碑文) 전체의 뜻이,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당하였던 일을 정ㆍ초의 고사에 비유한 것을 말한다.
[주D-007]온릉(溫陵) : 천주(泉州)의 별호(別號). 송(宋) 나라 때 주희(朱熹)의 학설을 배격한 지천 주사(知泉州事) 임률(林栗)을 가리킨다.

 

서계집 제12권
 비명(碑銘) 5수(五首)    이경석의 신도비  서계 박세당 서계집 12권 기록
영의정 백헌(白軒) 이공(李公) 신도비명


《시경》에 이르기를, “비록 노성(老成)한 사람은 없으나 그래도 전형(典刑)은 남아 있다.” 하였으니, 전형의 유무에 국가의 치란과 존망이 달려 있고 전형은 또 노성한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노성한 사람을 지금 다시 볼 수는 없으나 다행히 전형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까닭에 능히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니, 아, 노성한 사람이 국가에 관계됨이 또한 크다 하겠다. 그리고 《서경》에 이르기를,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으니, 노성한 사람의 중요함이 이와 같다.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일 가운데 이보다 더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없고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데에 과감한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은 휘는 경석(景奭),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니, 정종(定宗)의 열째 아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6대손이다. 증조는 함풍군(咸豐君) 휘 계수(繼壽)이고, 조부는 증 좌찬성 휘 수광(秀光)이고,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증 영의정 휘 유간(惟侃)이고, 모친은 개성 고씨(開城高氏)로 대호군 한량(漢良)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 28년인 을미년(1595) 1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형 효민공(孝敏公 이경직(李景稷))에게 배웠는데 매양 영창(映窓) 앞에서 글을 읽었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 흉년이 들어 아침에 나가서 배고픔을 참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조모가 밥상을 대하고 계시므로 잠시 몸을 숨기고서 다 드실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으니, 그 지극한 효심이 이와 같았다. 13세에 부친이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로 있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경력으로 있었는데 청음이 공을 매우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광해 5년(1613)에 진사가 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해에 등제(登第)하여 괴원(槐院)에 분관(分館)되었고 사국(史局)에 들어가 검열(檢閱)과 봉교(奉敎)가 되었다.
갑자년(1624)에 주서로 옮겼다. 이괄(李适)의 난에 상이 남쪽으로 파천하였는데, 백관이 다 도망하여 숨고 어가를 호종(扈從)한 자는 승지 한효중(韓孝仲) 및 공과 내관(內官) 2인뿐이었다. 당시 나루에는 배가 한 척도 없고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효민공이 전라 병사를 맡아 아직 부임하기 전이었는데 남쪽 강안에서 배 한 척을 찾아내어 어가를 맞이하였다. 강을 건넌 뒤에 상이 승상(繩床)에 앉아 밤을 지새웠는데 공 형제가 시립하여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도보로 수가(隨駕)하여 공주(公州)에 이르렀다. 어가가 환궁한 뒤 전적(典籍)으로 천전되었고 정언을 거쳐 수찬이 되었다.
을축년(1625, 인조3)에 정언이 되어 경연을 열 때에 면대하여 아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양사가 연석(筵席)에 들어간 것은 이때에 시작되었다. 헌납과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병인년(1626) 가을에 이조 좌랑으로 천전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중시(重試)에 1등으로 등제하였다.
정묘년(1627)에 청군(淸軍)이 쳐들어오자 체찰사 장만(張晩)의 자벽(自辟)으로 군대를 따라 서도(西道)로 나갔다. 이어 관동(關東)에서 군량의 운반을 감독하고 3월에 행조(行朝)로 돌아왔다. 처음 군대가 출동할 때에 싸울 군사가 적고 또 큰비까지 내려 중론이 잠시 머물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필시 3일 동안 행군하고도 임진(臨津)을 건너지 않은 것으로 죄를 줄 것이니, 우선 진군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이튿날 저보(邸報)를 받아 보니 과연 공의 말과 같았다. 수찬, 직강을 역임하였다. 김원(金垣)이란 자가 남의 사주를 받아 상소하여 명류(名流)를 무고하였는데 공도 포함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으므로 고향의 장원(莊園)으로 물러나 있다가 몇 달 만에 돌아왔다.
무진년(1628)에 이조 낭관에 배수되었다.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이귀(李貴))이 패장(敗將)인 이일원(李一元)을 서변(西邊)의 수령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적들이 필시 우리에게 인물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여 마침내 중지되었다. 유효립(柳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었고 그 공로로 통정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가을에 승지에 배수되었고 좌부승지로 천전되었다. 종성(鍾城)의 토착민인 박중남(朴仲男)이 오랑캐에 투항하였는데 기사년(1629) 봄에 오랑캐 사신과 함께 나왔다. 전상(殿上)에 앉는 것을 허락하려고 하자 공이 안 된다고 하였고 차(茶)를 내리는 순서도 뒤로 미루니, 중남의 기세가 꺾였다. 3월에 정시(庭試)에 2등으로 입격하였고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는데 특명으로 직임을 그대로 띠었다. 가을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지방관을 청하여 외직으로 나가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다.
경오년(1630, 인조8) 가을에 어버이의 병환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양주에 있을 때에 서리가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누적된 미납 세금을 모두 견감(蠲減)해 주었는데 그 결과 격례(格例)에 구애되어 오랫동안 파산(罷散)된 상태로 있었다.
신미년(1631)에 위장(衛將)이 되었다. 위장은 으레 견여(肩輿)를 탔는데 공은 유독 걸어서 다녔다.
임신년(1632) 봄에 은대로 돌아왔다. 상이 감귤을 하사하여 어버이에게 주게 하자 공이 감격하여 시를 지었는데, 진신(搢紳)들이 이 시를 전송(傳誦)하여 화운(和韻)하였다. 4월에 우승지로 승진하였다. 공은 오랫동안 후설(喉舌)의 직임에 있으면서 내지(內旨)를 받들지 않고 반박하여 바로잡은 것이 많았다. 여름에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였는데 그 공로로 가선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부친과 맏형이 이미 2품에 올라 부자와 형제가 모두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게 되니, 사람들이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6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갑술년(1634)에 또 부친상을 당하였다.
병자년(1636)에 복제(服制)가 끝나 부제학과 도헌(都憲)에 연이어 배수되었다. 이해 봄에 청인(淸人)이 칭호(稱號) 문제로 사신을 보내왔다. 당시의 의논이 사신을 참하여 화친을 끊고자 하였는데 사신이 달아나 조야가 흉흉하였다. 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시세(時勢)를 돌아보지 않고 함부로 강한 도적을 건드린다면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권경기(權儆己)가 장오죄(贓汚罪)에 걸려 참수를 당하게 되자 공이 그 억울함을 논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12월에 청병(淸兵)이 대거 침입해 왔다.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하려고 남문(南門)을 나서니, 적기(敵騎)가 이미 사령(沙嶺)에 들이닥쳤다. 이에 공이 급히 어가 앞으로 나아가니, 상이 문루(門樓)에 임하여 공을 나아오게 하고 물었다. 이에 공은 아뢰기를, “사세가 급박하니, 남한산성으로 가셔야 합니다.” 하였고 상이 김류(金瑬)에게 물으니, 김류는 강도로 행행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한사코 다투니, 상이 공의 의견을 좇았다. 공이 장수를 보내 미리 적을 막을 것을 청하니, 상이 또 따랐다. 당시 일이 창졸간에 터졌으므로 공은 도보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부제학에 배수되었다. 성이 포위되자 삼사(三司)의 명류(名流)를 모두 독전어사(督戰御使)로 삼아 대오를 편성하고 주야로 경계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심사숙고한 뒤에 좋은 계책이라고 하였다. 큰 눈이 내렸는데 사졸들이 그 눈을 그대로 맞자 공이 또 대소의 관원으로 하여금 옷을 벗어 병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여 그것으로 눈비를 막게 하니, 군사들이 솜옷을 입은 것처럼 감격해하였다. 공은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계곡(溪谷 장유(張維))과 함께 개원사(開元寺)에 거처하였다. 공은 밤마다 한두 차례 일어나 행궁(行宮)까지 걸어가서 문안하였고, 물러 나와서는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서로 충의(忠義)로써 권면하였다. 상이 성을 나오게 되었을 때에 공이 줄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자 상이 측은히 여겨 수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에 어가를 호종하고 돌아와 지신사(知申事)에 배수되고 부제학과 도헌으로 이배되었으며 다시 지신사가 되었다. 종묘의 신주를 고쳐 쓰게 되었는데 처소를 정하지 못하자 공이 묘내(廟內)로 나아가 행할 것을 청하였고, 또 시사(視事)를 행하여 신료들을 자주 접견할 것과 제사(諸司)가 매일 개좌(開坐)하여 군읍(郡邑)의 서리와 차인들이 오랫동안 서울에서 지체하는 일이 없게끔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부제학, 대사헌, 공조 참판을 역임하였고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상차(上箚)하여 예닐곱 가지 일을 진달하고 또 윤황(尹煌)이 척화로 인해 정배되었으니 풀어 주어야 마땅하다고 아뢰었는데, 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당시 청인(淸人)이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세우고자 하여 그 비문을 요구하였다. 상이 장유(張維), 조희일(趙希逸)에게 명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지만 두 사람이 지은 비문이 모두 저들의 뜻에 차지 않아 더욱 거칠게 으르렁대자 상이 마침내 공을 면대하여 명하기를, “구천(句踐)은 신첩(臣妾)이 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강(自强)을 도모하였으니, 지금은 다만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지 혹시라도 격노를 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이 마지못해 명을 받들고 석문공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합니다.” 하였고, 또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도다.”라는 시구가 있으니, 공의 뜻을 알 수 있다.
무인년(1638, 인조16)에 상차하여 백성의 힘을 덜어줄 수 있도록 강도를 보수할 때에 남쪽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며,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 너무 넓고 크게 하지 말며, 포를 거두고 쌀을 운반하게 할 때에 모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필 것을 청하였다. 대제학에 배수되었다. 7월에 이조 참판에 배수되었다. 경연에서 강할 때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고 백성의 원망을 풀어 주고 세금과 부역을 경감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이날 《시경》을 진강하였는데 “화락한 군자여, 천자의 나라를 안정시킬 것이로다.〔樂只君子 殿天子之邦〕”라는 대목에 이르자 상이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공이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니, 보는 자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당시 유석(柳碩), 박계영(朴啓榮), 이계(李烓) 등이 청음을 헐뜯었는데 상이 평소 동계(桐溪 정온(鄭蘊))와 청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라 그 말이 제법 먹혀들었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김상헌과 정온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되니, 현혹되지 마소서.” 하였다. 사직하여 이조 참판에서 체차되었다.
기묘년(1639) 봄에 이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경진년(1640) 봄에 밀소(密疏)를 올렸다. 당시 승려 독보(獨步)를 중국에 들여보냈는데 공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과 은밀히 상의한 것이었다. 공은 독보를 밀실로 불러들여서는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3월에 사직하여 문형(文衡)에서 해직되었다. 청인이 다른 사람을 대신 볼모로 보낸 것을 힐책하였는데 공 또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겨울에 특별히 서용되어 이식(李植)과 함께 논의하여 국서(國書)를 지었다. 도헌에 배수되었다. 당시 조석윤(趙錫胤)이 일을 논하다가 파직되었고 허계(許啓) 등이 청음이 심양에 들어가 죄를 받는 것을 늦추고자 하였다. 공이 이 두 가지 일을 말하니, 상이 즉시 따랐다.
신사년(1641, 인조19) 봄에 우참찬에 배수되었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판결이 마땅함을 잃어 억울함을 풀 수가 없음을 말하였는데 상이 공을 소견하고 사수(死囚) 4인을 석방하였다. 가뭄이 더 심해지자 또 죄수를 소결(疏決)하여 풀어 주고 중외에 신칙하여 형옥(刑獄)을 남용하지 말게 하며, 내옥(內獄)을 혁파하고 내공(內貢)을 없애고 집을 짓는 것을 중지할 것이며, 신료들을 접견하고 백성의 고통을 조사하여 상하의 마음이 통하게 하며, 남한산성의 치욕을 잊지 말아서 더욱 경계하고 삼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가을에 수 이사(守貳師)가 되어 심양에 갈 때 상이 인견하여 세자를 잘 보도할 것을 권면하였다. 공은 심양에 도착하여 날마다 서연을 열어서 빈객(賓客)으로 하여금 교대로 진강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일에 따라 직언으로 극간(極諫)하니, 세자도 공을 공경하고 예우하였다. 일찍이 비밀히 글을 올려 세자의 잘못을 극론하였으나 원본을 폐기한 탓에 전하지 않는다. 청인이 식량의 공급을 꺼려 여러 볼모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어 자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농정(農丁)을 데려올 것을 재촉하자 공은 불가하다고 극력 다투어 말하기를, “내가 직임을 받고 왔다. 진실로 국가에 유익하다면 감히 일신을 돌아보겠는가.” 하니, 청인도 감히 억지로 하지 못하였다. 청인이 또 갖은 방법으로 힐책하였는데 주선하여 무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청음이 박황(朴潢), 조한영(曺漢英)과 오래도록 갇혀서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공이 심양에 들어가고 나서 3일째 되는 날 은밀히 세자에게 아뢰어 처벌의 화를 늦추도록 도모하였다. 세자가 공과 함께 모의하여 당로자에게 뇌물을 주니 청주(淸主)가 세자를 불러서 묻고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하고 이사(貳師)로 하여금 함께 나가게 하였다. 제공이 끝내 아무 탈이 없었던 것은 모두 공이 힘쓴 덕분이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임오년(1642, 인조20) 3월에 다시 심양에 들어갔다가 여름에 조정으로 돌아왔고 7월에 다시 들어갔다. 이에 앞서 중국의 선척이 선천(宣川)에 이르렀는데 방백 정태화(鄭太和)가 그대로 돌려보낸 일이 있었는데 청인이 뒤늦게 이를 알고 공을 보내 핵문(覈問)하게 하였다. 8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그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공으로 하여금 남아서 조사하게 하고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감사 심연(沈演)과 병사 김응해(金應海)만 파직하고 공에게 돌아가 보고하도록 재촉하니, 공은 어쩔 도리가 없어 9월에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 보고하였다. 청인이 노하여 변방 수령과 장령(將領)들을 두루 잡아다가 심양에서 조사하려고 하자 공이 극력 변호하여 선천의 수령만 조사에 응하게 하였다. 청인이 또 공이 중도에서 지레 돌아왔다고 하면서 자주 와서 힐책하자 공은 조정이 허물을 입게 될까 봐 그 실상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 청주가 마침내 명을 전달하지도, 왕을 만나지도 않고 돌아왔다고 하여 동관(東館)에 가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황성(鳳凰城)으로 보내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가두었다. 당시 세자가 청의 장수를 따라서 먼저 봉황성에 도착하여 그 일을 조사하고 있었기에 공이 도착하여 세자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대신 이하로 구금되어 있는 자가 많았다. 각자 재물을 기부하고 화를 늦추고자 하였으나 공만 홀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필시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세자의 스승이 뇌물을 쓰는 것이 나로부터 시작될 수는 없다. 냉산(冷山)과 북해(北海)는 본디 달게 여겼던 바이다.” 하였다. 뒤에 제공들이 모두 돌아왔으나 공만 홀로 가장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12월에 풀려나 우리나라로 돌아왔지만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계미년(1643, 인조21)에 참찬에 배수되었다.
갑신년(1644)에 우상 이경여(李敬輿)가 심양에 들어갔다가 금고(禁錮)된 여러 사람들을 멋대로 서용했다는 이유로 구금되었다. 이에 공이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세 번 소장을 올린 뒤에야 해면(解免)될 수 있었다. 이식, 이명한(李明漢)과 함께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하였다. 세자가 금고된 여러 신하들을 등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을유년(1645) 봄에 사신이 와서 비로소 서용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대사헌에 배수되었다. 4월에 이조 판서에 배수되어 전형에 공정함을 다하고 요행과 남발을 막았으며 능력이 있는데도 적체되어 있는 자들을 발탁하였다. 두루 인재를 찾아내어 이름을 명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결원이 생기는 대로 보충하였으며, 초야에 숨어 있는 인재에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를테면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권시(權諰), 이유태(李惟泰) 등의 사람들이 비로소 현직(顯職)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은 실로 공이 전형을 맡고 있던 때의 일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졸하게 되어 군신(群臣)이 입는 복(服)을 논의하였는데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이식, 이목(李楘)과 함께 상소하여 백포(白袍)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졸곡(卒哭) 뒤에 복을 벗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에 승진하여 우상에 배수되었다.
10월에 뇌변(雷變)이 생기자 면직을 청하면서 덕을 닦아 재이(災異)를 막을 것이며, 자주 공경 이하 신료들을 인견(引見)하여 정사의 득실을 묻고 인물의 현사(賢邪)를 살필 것이며, 김집(金集) 등을 예로써 부를 것이며, 유백증(兪伯曾), 홍무적(洪茂績) 등을 언관(言官)으로 등용할 것을 진달하고, 또 옛날 잠계(箴戒)의 말과 《주례(周禮)》의 12가지 황정(荒政)유향(劉向)의 육정(六正)과 육사(六邪)를 써서 좌우에 걸어 두고, 아울러 내외의 관서와 군읍(郡邑)도 벽에 걸어 두고서 출입할 때에 이를 보고 반성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이해에 한발로 기근이 들었는데 공이 진휼하는 일을 전적으로 맡아 구제해 살린 사람이 많았다. 진휼을 마치고도 남은 곡식이 많자 기내(畿內)에 나누어 주어 조적(糶糴)에 보태게 하였고, 또 수시로 곡식을 비축해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상평법(常平法)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병술년(1646, 인조24) 봄에 강씨(姜氏)의 옥(獄)이 일어나자 공이 대신들과 함께 쟁론하였다. 성상이 매우 진노하여 심지어 공과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을 거론하여 이르기를, “두 사람을 내가 매우 후하게 대하였다. 그러니 나를 이렇게까지 저버릴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였다. 강문성(姜文星) 등이 옥에 갇히게 되자 공은 아뢰기를, “발고한 자도 없고 공사(供辭)에 관련된 것도 아니니, 이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3월에 사신으로서 연경(燕京)에 가게 되어 재상에서 해면되었다. 6월에 돌아왔다.
정해년(1647) 2월에 좌상에 배수되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면직을 청하고 인하여 하정(下情)이 통하게 하며, 언로(言路)를 열며, 백성의 고통을 보살필 것을 청하였다. 8월에 병이 심해 면직되었다.
무자년(1648) 여름에 다시 좌상이 되었다. 당시 상이 춘추가 높아 편찮으신 때가 많았으므로 군신들이 진현(進見)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공은 전후로, 신하들을 인견하여 자문을 구할 것을 청하였고, 또 한나라 문제(文帝)와 당나라 태종(太宗)의 일 및 〈우서(虞書)〉의 몇 장(章)을 취해 〈무일편(無逸篇)〉과 함께 한 책으로 엮어 올리고 한가할 때에 이를 보고 성찰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이어 바람이 맑고 날씨가 화창한 날에 자주 유신(儒臣)을 불러 경사(經史)를 논하고 왕정(王政)에 대해 토론할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 입대(入對)하여 재이에 대해 극언하였고, 관학(館學)의 교육이 무너졌으니 의당 사업(司業)을 두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선우협(鮮于浹)이 경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행실이 독실하다고 천거하였고, 또 교관을 선발하여 동몽(童蒙)을 가르치며, 향약(鄕約)을 정비해 시행하여 속습(俗習)을 바로잡으며, 중앙과 지방의 관원을 소견(召見)하여 폐막(弊瘼)을 물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공은 항상 교육이 무너지고 습속이 경박한 것을 근심하여 진작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정비하여 조목을 간략하게 한 뒤에 중외에 배포하고 예조와 관찰사로 하여금 주관하여 시행하게 하였는데 공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 법이 폐기되었다. 박서(朴遾)가 상의 뜻을 거슬러 좌천되자, 공은 대간(臺諫)을 너그럽게 대하고 총명을 아랫사람을 의심하는 데에 쓰지 말 것을 청하였고, 또 “김집, 송시열 등을 지성으로 부른다면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또 “송나라 효종(孝宗)은 비빈(妃嬪)에게 주옥(珠玉)을 차지 못하게 하였고, 최유원(崔有源)은 집의(執義)가 되어 임해군(臨海君)의 말안장을 불태웠습니다. 사치를 없애는 것을 궁금(宮禁)으로부터 하고 법을 시행하는 것을 근귀(近貴)로부터 한다면 기강이 세워지지 않음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 2월에 입대하여 “민생이 날로 곤고해지고 있으니, 신하들로 하여금 정사의 잘못을 다 말하게 하고 이를 성심으로 개납(開納)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고, 또 “직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경여, 홍무적 같은 이는 결단코 다른 뜻이 없고 이응시(李應蓍), 심노(沈)는 죄를 받은 지 이미 오래이니, 모두 수록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근귀(近貴)가 사사로이 산택(山澤)을 점유하여 백성이 생업을 잃게 만들었으니,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 하였다. 여름에 세손을 책봉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불러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맡겨야 합니다.” 하였고, 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수리하고 강도(江都)에 봉수(烽燧)를 설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매우 옳게 여겼다.
5월에 인조(仁祖)가 승하하자 초종(初終), 역복(易服), 복(復), 습(襲)을 한결같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대로 하였는데 차분하고 신중히 하여 창졸간에도 예법을 잃지 않았다. 세자가 공제(公除) 뒤에 왕위를 이어받으려고 하였는데 공이 군신들을 거느리고 누차 즉위할 것을 권하니, 세자가 비로소 마지못해 따랐다. 당시 김상헌이 들어와 임종하였는데 성빈(成殯)한 뒤에 돌아가려고 하자 공이 아뢰어 머물러 있게 하고 김집, 송준길, 송시열, 권시, 이유태 등을 일소(馹召)하게 하니, 사방의 명사(名士)가 모두 조정에 모이게 되었다. 대행왕(大行王)의 행장을 지어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산릉의 퇴광(退壙)을 덮는 개석(蓋石)이 너무 크자 쪼개어 둘로 나눌 것을 청하고 여련(轝輦)에 비단을 사용하지 말아 선왕의 검소함이 빛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김집이 《상례고금이동의(喪禮古今異同議)》를 올렸는데 공이 그 가부를 분변하여 올렸다.
6월에 청대하였는데 상이 최복(衰服)을 입고 인견하였다. 공은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바로 경연을 열고 이언적(李彦迪)이 맨 먼저 학문을 권한 것을 인용하여, 신료들을 인견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또 성심으로 어진 자를 임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장릉(長陵 인조의 능호)을 정할 때에 이견이 있어 조익(趙翼)이 널리 의견을 물을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고 말하니, 부의(浮議)가 마침내 가라앉았다. 8월에 영상에 올랐다. 좌의정 김상헌에게 양보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반곡(反哭)할 때 성문(城門)과 교량(橋梁)에 제사하는 것을 정지하게 하여 전례(典例)를 바로잡았다. 김상헌이 이조 판서 심액(沈詻)의 일을 논하여 대간이 들고일어나자 상이 언관을 견책하려 하였고 교리 김홍욱(金弘郁)이 만사(挽詞)로 인해 장차 죄를 받게 되었다. 공이 이들을 위해 말을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10월에 입대하였는데 상이 재이를 걱정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비단 재이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고 교화도 밝지 못합니다. 허조(許稠)는 세종에게 상하의 분별을 엄격히 할 것을 권하였고 선조(先朝) 때에는 정엽(鄭曄)과 김육(金堉)에게 대사성을 겸하게 하여 공효를 이룰 책임을 맡겼습니다.” 하였고, 또 상벌이 제대로 시행되어야 인심이 열복한다고 말하고, 이어 왕숙문(王叔文)의 일을 언급하였으니, 당시 김자점(金自點)이 막 실각하여 그의 동당들이 죄를 입은 것이 혹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산릉의 역사(役事)가 끝나 해면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당시 우상 김육이 대동법의 시행을 청하였고 좌상 조익이 강경(講經)의 방법을 바꾸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대동법은 우선 호서(湖西)에서 시험해 보는 것이 마땅하고 강경하는 방법에 관한 의견은 그 뜻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좋은 의견이라고 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헌부와 은대는 백사(百司)의 강기(綱紀)이니, 승지를 구임(久任)시키고 대관(臺官)을 엄선하여 백사로 하여금 직무에 부지런히 힘쓰게 하소서.” 하였고, 또 학문은 이치를 밝혀야 하고 정치는 대체(大體)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덕을 닦고 형벌을 줄이는 것을 그 조목으로 열거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1) 2월에 청사(淸使) 6명이 나왔다. 상이 새로 즉위하여 마음을 다잡고 발분하였으므로 청인이 우리를 의심하였다. 사신이 나온다는 소식이 이르자 조야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공이 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살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공이 가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공이 아뢰기를,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던지는 것은 신하의 도리입니다.” 하여 그 말이 매우 격절하니, 상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공이 이경여(李敬輿)를 기복(起復)시켜 국사(國事)를 논의하고 또 정태화(鄭太和)를 집으로 찾아가 자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좋은 의견이라고 하였다. 공이 만상(灣上)에 이르렀을 때에 청사가 막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는데 공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갈하는 소리가 다소 줄어들었다. 공은 조정에 치문(馳聞)하고 그날로 돌아왔다. 이 사행을 처음에는 대부분 위태롭게 여겼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인심이 다소 안정되었다. 상 또한 기뻐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모두 대궐에 모여 공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고, 공이 들어오자 즉시 인대(引對)하고 황감(黃柑)을 하사하였다.
청사가 서울에 이르렀을 때에 두 통의 글을 가져왔는데 하나는 구왕(九王)의 글이고 하나는 황제의 칙서(勅書)로, 왜(倭)를 빌미로 성지(城池)의 수리를 청한 일을 책망하는 것이었다. 인조 말엽에 동래 부사(東萊府使) 노협(盧協)과 경상 감사 이만(李曼)이 왜의 정세를 아뢴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사신이 갔을 때 성지와 갑병을 수선하여 남쪽 왜구에 대비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여 청인의 의심을 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를 트집 잡아 이 일을 맡았던 당사자를 저들 뜻대로 하고자 하였다. 공이 만상에 있을 때에 역관 이형장(李馨長)이 당사자는 어떤 화를 입을지 예측할 수 없다고 은밀히 고하였으나 공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는데 돌아온 뒤에는 조당(朝堂)에서 유숙하면서 제공(諸公)과 함께 전석(前席)에 출입하여 은밀히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청사가 공경(公卿)과 양사(兩司)의 관원을 모아 놓고 뜰에서 몇 가지 일을 질책하였는데, 걸핏하면 상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말을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잘못은 신에게 있습니다. 왕께서는 모릅니다.” 하였다. 표문(表文)을 누가 지었느냐고 힐문하였는데 조경(趙絅)이 묘당의 지휘를 받았다고 대답하니, 공은 말하기를, “내가 수상(首相)이니, 모든 일이 내 책임입니다.” 하였다. 맨 나중에 노협과 이만에게 왜의 정세가 수상하다고 보고한 일을 힐난하였는데 모두 끝까지 숨기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청사가 크게 노하였다. 이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왜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이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잘못 대답한 것입니다.” 하였다. 청사가 목청을 높여 말하기를, “누가 주문(奏文)을 지었습니까? 필시 왕께서 지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 일을 한 사람은 나입니다.” 하였다. 역관 정명수(鄭命壽)가 말하기를, “공이 홀로 했습니까?” 하니, 공이 그렇다고 말하였다.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말을 하니, 정명수가 큰소리로 묻기를, “영상께서 혼자 하시고 나머지는 간여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침묵하였는데 이기조(李基祚)가 홀로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 수상 혼자서 했겠습니까. 우리들이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경 및 이만과 노협은 물러가게 하고 공만 남게 하여 기망한 잘못을 추궁하고 한참 있다가 내보냈다. 이날 모두 화가 경각에 달려 있다고 여겨 두려움에 사색이 되었고 공의 가인(家人)이 흉구(凶具 관(棺))를 가지고 밖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공이 유독 편안하고 한가로운 태도로 거침없이 응대하니, 이를 본 사람들치고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고, 청인도 서로 눈짓하며 동국(東國)에는 이상(李相)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영상이 나라를 위해 일신을 잊는 것이 본디 이와 같다. 이기조는 아예 참여도 하지 않았는데 홀로 능히 대답하였으니, 빛나는 일이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였다. 공이 즉시 법리(法吏)에게 나아가 대죄하니, 상이 위로하여 유시하기를, “경의 충성은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으니, 마음을 편히 갖고 염려하지 말라.” 하였고, 밤에 천금을 내어 공을 위해 주선하는 데에 쓰게 하였다. 이튿날 어가가 임하자 청인들이 관사(館使)를 시켜 공과 조경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상이 반복하여 극력 공을 위해 변호하니, 마침내 돌아가 황상에게 여쭐 것이라고 말하고 우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圍籬)하게 하였다. 상이 공에게 수찰(手札)을 내려 이르기를, “머지않아 다시 만날 것이니, 자중 자애해야 한다.” 하였다. 종실의 딸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호칭하고 구왕(九王)에게 보냈다. 원두표(元斗杓)와 신익전(申翊全)이 호송하여 연경에 이르니, 구왕이 기뻐하면서도 공 등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이시백(李時白)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연경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그 마음이 또한 깊이 노여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가을에 청사가 또 이르자 상이 교외에 나가 위로하고 자주 공을 위해 말을 하였고, 연양군(延陽君) 이시백 대신에 인평대군을 보내고 이기조를 부사로 삼았으며, 위리를 제거하고 공을 위문하였다. 인평대군이 연경에 도착하자 청나라가 여러 사람을 연경으로 데려가 다시 조사하려고 하였는데 사신이 극력 청하자 비로소 방귀전리(放歸田里)하는 것을 들어주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경여 역시 금고되었으나 이만, 노협만은 곧이 대답하였다고 하여 용서를 받았다. 상이 사람을 보내 공에게 황감을 하사하고 임금의 뜻을 전하게 하였다.
신묘년(1651, 효종2) 2월에 공이 도성 밖에 이르니, 근시로 하여금 맞이하여 위로하게 하고 이튿날 소견하였으며, 월봉(月俸)을 하사하였다. 공은 백마산성에 있을 적에 위화(危禍)가 코앞에 닥쳤으나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직 경서를 음미하고 〈자경시(自警詩)〉와 〈자경잠(自警箴)〉, 〈주일잠(主一箴)〉을 지었다. 때로 용주(龍洲 조경(趙絅))와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주고받거나 혹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골짜기를 찾기도 하였다. 돌아온 뒤에는 대부분 교외의 강가에 머물면서 이따금 친구들과 더불어 술잔을 대하고 시를 읊었다. 가을에 관동(關東)의 바닷가 고을을 유람하였는데 상이 역말을 타는 것을 허락하였다. 겨울에 돌아와 상소로 조석윤(趙錫胤), 유철(兪㯙), 이경억(李慶億) 등의 일을 논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 봄에 또 죄수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 죄가 죽일 정도는 아니라고 하여 상의 뜻을 거슬렀는데 덕을 숭상하고 형벌을 느슨히 해야 한다고 상소로 진달하니, 마침내 상의 노여움이 풀렸다. 가을에 영돈녕부사에 배수되었는데 두 차례 사직하고서야 윤허를 받았다.
계사년(1653) 봄에 성지(聖旨)에 응하여 차자로 16개 조목을 아뢰니, 모두 논의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특별히 영돈녕부사에 배수되었다.
갑오년(1654) 봄에 효심을 미루어 인정(仁政)을 베풀며,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함을 제거할 것을 차자로 청하니, 이튿날 상이 인대(引對)하여 온화하고 간곡한 말씀을 내렸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재이가 자주 생기니, 덕을 닦아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조석윤과 박장원(朴長遠)이 서원리(徐元履)를 논핵하다가 견책을 받자 공이 쟁론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에 상이 친히 교외에서 열무(閱武)하였는데 교리 남용익(南龍翼)이 나아와 간쟁하니 상이 노하였다. 이에 정언 유창(兪瑒), 승지 윤득열(尹得說), 대사간 민응협(閔應協)이 이를 쟁집하자 상이 더욱 노하였는데 공이 극력 아뢴 뒤에야 상의 노여움이 풀릴 수 있었다. 여름에 수재가 나자 차자를 올려 군비보다 백성이 우선이니 지엽이 근본을 해치게 하지 말 것이며, 시녀(侍女)를 선발하는 것을 혁파하고 내공(內貢) 및 토목(土木)과 비단의 직조(織造)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말한 것이 대부분 시행되었다. 가을에 청인이 공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것에 대해 화를 내자 해면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월봉(越俸)을 그대로 지급받았다. 9월에 남쪽 지방을 유람하였다. 돌아와 백성의 폐막을 진달하니, 상이 시행을 허락하였다. 당시 의견을 낸 자의 말을 써서 무비(武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여워하니, 길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아 환난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12월에 북사(北使)가 이르러 더욱 심하게 책망하였다. 당시 공의 아들이 안협(安峽)의 수령으로 있었으므로 공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동교(東郊)에서 주찬(酒饌)과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고을에 이른 지 두 달 만에 철원(鐵原)으로 옮겼고, 청평(淸平)과 소양(昭陽)을 유람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이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을미년(1655, 효종6) 여름에 경사에 이르러 분수에 맞게 한가롭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청하니, 매우 간곡하게 위로하고 권면하였고 심지어 월봉을 지급하게 하였다. 이튿날 상이 소견(召見)하여 술을 하사하였다. 공이 백성의 폐막을 진달하니, 상이 시행을 허락하였다. 공이 상과 대면한 자리에서 벼슬에서 물러나 지낼 것을 청하고 월봉을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7월에 가뭄이 들자 공이 아뢰기를, “대신을 공경하고 덕교(德敎)를 우선하소서. 김홍욱(金弘郁)의 친속(親屬)은 금고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부분 따랐다. 호당(湖堂)을 선발할 때 공에게 가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병신년(1656) 5월에 유철(兪㯙)이 일을 논하다가 국문을 당하게 되자 공은 울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소장을 작성하였다. 당시에 상이 매우 노하였으나 공의 소장이 들어가고 이어 여러 대신이 말을 하였으므로 유철이 감사(減死)될 수 있었다. 한재로 인하여 죄수를 소결(疏決)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이 입시하여 이징(李澂)과 이숙(李潚) 및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셋째 아들을 석방할 것을 건의하고, 공이 또 유철의 죄를 감면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유년(1657)에 재이로 인하여 궁금(宮禁)을 엄격히 하고 사치를 제거할 것이며, 포흠을 견면(蠲免)하고 원옥(寃獄)을 바로잡을 것이며, 풍교(風敎)를 돈독히 하고 형벌을 줄일 것이며, 경계하는 글을 지어 중외(中外)에 반포할 것을 청하였고, 또 아뢰기를, “눈앞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분발해서 큰일을 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겨울에 입대하였는데 상이 호남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 묻자, 세입(歲入)을 계산하고 물가를 헤아려 가부를 정해야 한다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무술년(1658, 효종9) 여름에 특별히 다시 중추부에 배수되었다. 입대하여 아뢰기를, “말이 과격한 자를 포용해야 너그럽게 포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북(西北)은 풍속이 비루하고 경박하여 골육끼리 서로 해치니, 북병사(北兵使) 및 강계(江界), 만포(滿浦)의 수령을 문사(文士)를 섞어서 써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에 입대하였는데 상의 말이 교화에 미치자, 궁행(躬行)할 것이며 또 종백(宗伯), 도헌(都憲), 경조윤(京兆尹), 방백(方伯)에게 풍교의 책임을 맡기고 대사성을 선발하여 선(善)을 장려할 것을 청하였다. 11월에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기해년(1659) 봄에 입대하여 아뢰기를, “진대(賑貸)하는 일을 조정에서 총괄하여 도신과 수령을 선택하여 위임할 것이며, 군사의 정원을 줄여 고아와 과부로 하여금 원망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5월에 효종이 승하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복(服)을 논의하였다. 예관(禮官)이 ‘아들의 상에는 기년복(朞年服)을 입는다.’라는 것을 원용하였는데, 혹자는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고 송시열 등은 기년복을 주장하면서 가공언(賈公彦)의 사종설(四種說)을 인용하였다. 공은 오늘날의 예법으로 볼 때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의 의견도 같았고 심지원(沈之源), 이시백(李時白), 이후원(李厚源), 원두표(元斗杓)가 연명(聯名)으로 헌의(獻議)하니, 세자가 따랐다. 언관이 군신(群臣)은 질장(絰杖)의 복제를 쓰기를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옛 제도를 바꾸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고, 계빈(啓殯) 때에 언관이 또 새삼 최복(衰服)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주자(朱子) 때와는 경우가 다르니, 중간에 바꾸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면서 반복하여 진변(陳辨)하니,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행장을 지어 올려 안마를 하사받았다. 산릉(山陵)을 수원(水原)으로 정했으나 민가를 많이 헐어야 하겠기에 다시 건원릉(健元陵) 안으로 정하였는데 상의 뜻은 수원에 있었다. 이에 공이 세 차례 상차하여 쟁론하니, 마침내 상이 따랐다. 여름에 경성 판관(鏡城判官) 홍여하(洪汝河)가 상소로 이후원을 비난하여 여러 신하들이 홍여하를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이해에 북로(北路)에 기근이 들고 겨울에 우레가 치자 공이 아뢰기를, “은혜를 베풀어 창고를 열어 구휼하고 역을 견면해 주되 유사에게 이끌리지 말고 전해 내려오는 규례에 구애되지 마소서.” 하였다.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강원도 백성들이 굶주리자 또 창고를 열어 구휼하기를 청하고 박장원이 충직하고 신실하여 이 일을 맡길 만하다고 하였는데 모두 가납하였다. 당로자가 유계(兪棨)를 춘추(春秋)의 직임에서 해임시키고 그 아들 유명윤(兪命胤)을 사관(史官)에 앉히고자 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공이 내국(內局)을 맡았을 때 양전(兩殿)의 병이 회복되었으므로 안마를 하사받고 자제가 벼슬을 받았다. 《효종실록(孝宗實錄)》을 찬수할 때에 공에게 총재(摠裁)하도록 명하였다. 가을에 크게 흉황이 들자 또 진대(賑貸)한 것을 견면해 주고 재용을 아끼며 형벌을 느슨히 할 것을 청하였다. 송도(松都)에 옥사(獄事)가 생겨 유생이 장사치와 함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유수 남노성(南老星)이 유생을 끝까지 다스리자 공이 유생을 두둔하였는데 남노성이 화가 나서 공이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하고 눈먼 점쟁이를 보내 서울에서 중상하는 말을 퍼뜨리게 하였다. 공이 소장을 올리고 교외로 나가니, 이민적(李敏迪) 등이 남노성이 원로를 무고하여 비방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에 박세모(朴世模) 등이 남노성을 논핵하였다. 상이 누차 승지를 보내어 타이르니, 공이 마침내 들어와 사례하였다.
신축년(1661) 여름에 참찬 송준길이 윤선도(尹善道)의 유배지를 가까운 곳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7월에 실록을 편수하는 일이 끝났는데 공이 한재(旱災)를 이유로 세초연(洗草宴)을 그만두기를 청하였다. 장령 허목(許穆)이 일찌감치 국본(國本)을 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하여 태묘(太廟)에 고하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으니, 이것으로 국본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도 공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임인년(1662, 현종3) 봄에 호남 진휼어사(湖南賑恤御史)가 세금을 납부하는 기한을 미루고 가을에 신곡으로 받기를 청하자, 공이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아뢰기를, “혹자는 이를 폐습이라고 하고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두고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학대하는 데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하고, 이어 선조(先朝) 때에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爲國爲民〕’라는 논의가 있었음을 거론하였다. 공이 일찍이 진언하기를, “원칙을 어겨가며 칭찬을 구하는 것은 진실로 가증스러운 일이지만 원칙을 어겨가며 백성을 학대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백성을 위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위하는 것이니, 어찌 둘로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이 논의가 만약 시행된다면 백성들이 그 명령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인조가 매우 옳게 여겼고, 효종 때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세 번째로 상을 위해 말씀드린 것이다. 여름에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였는데 공을 침해하는 말이 있었다. 이에 공이 물러나기를 청한 다음 교외로 나갔는데 상이 누차 면유(勉諭)하여 마침내 돌아왔다. 서공(徐公)이 뒤에 스스로 후회하고 공에게 와서 사죄하여 교분이 더욱 깊어졌으니, 이는 자기를 용납한 공의 아량에 심복한 것이다.
계묘년(1663)에 인종(仁宗)을 영녕전(永寧殿)으로 조천(祧遷)하게 되었다. 묘실(廟室)이 협소하여 개수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그 일을 총괄하였다. 상이 좌우의 익실(翼室)을 크게 늘려 정전(正殿)처럼 하고자 하였는데 공이 불가함을 극력 말하여 일이 중지될 수 있었다. 기내(畿內)를 양전(量田)하였는데 군현(郡縣)의 전지(田地)가 축소되었다고 하여 수령들이 형장(刑杖)을 받게 되었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그 등급을 내리고서 많은 전결을 요구하는 것은 균전(均田)의 본뜻이 아니고, 수령에 대해서는 형장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갑진년(1664, 현종5)에 공의 나이가 일흔이었다. 치사(致仕)를 청하는 소장을 일곱 차례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입대하여 다시 간곡히 청하였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겨울에 인대(引對)하는 자리에서 말이 교화에 미치게 되자 정태화가, 공이 지위에 있으면서 시행한 것이 자못 많으니 공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이튿날 종백이 공에게 와서 상의하고 중외에 반포하였으니, 그 규모와 절목(節目)은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의 것과 같았다. 재이로 인해 입현(入見)하여 여러 사람의 말을 채납할 것이며, 공주의 사치스러운 집을 훼철할 것이며, 상방(尙方)의 직조(織造)를 그만두고 내옥(內獄)의 죄수를 석방할 것이며, 박장원을 수용(收用)할 것을 청하였다.
을사년(1665) 가을에 상이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에 공이 유도(留都)의 책임을 맡았다. 어가가 돌아왔을 때에 다시 안마를 하사받고 자제가 벼슬을 받았다. 겨울에 재이로 인해 경계하도록 진달하였는데 모두 여덟 가지 일이었다.
병오년(1666) 봄에 또 네 가지 일을 말하였다. 3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에 공이 유도하였고 은사(恩賜)가 이전과 같았다.
정미년(1667) 봄에 조성보(趙聖輔)와 이후(李垕)가 찬축(竄逐)되고, 승지가 법리(法吏)에게 심문을 받아 하옥되었고 이숙(李䎘) 등 7인이 또 견책을 받았다. 이에 공이 간쟁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에 청대(請對)하여 다시 이를 말하였고, 이어 홍만용(洪萬容)과 남이성(南二星)을 좌천한 것은 잘못 죄준 것임을 언급하여 두 사람이 좌천되지 않게 되었다. 상이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에 공이 또다시 유도하였다. 행재소에 있던 대신이 다시 찬축된 여러 사람들을 언급하였는데 상이 공의 말을 생각하고 양이(量移)를 허락하였다.
무신년(1668)에 재이로 인해 여섯 가지 경계할 일을 아뢰었는데, 성학(聖學), 교화, 형옥, 수령, 부역(賦役), 사치에 관한 것이었다. 봄에 미백(米帛)을 하사하자 공이 사양하고 이어 창고를 열어 기근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다. 8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 공이 또다시 유도하였다. 10월에 공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누차 사양하였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기로연(耆老宴)을 설행하려고 하자 또 극력 사양하였다. 그러나 종당엔 유사가 예를 갖추어 궤장을 가져오고 음악을 하사하였으며, 내선온(內宣醞)과 외선온(外宣醞)을 베풀었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이후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온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감탄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 3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하면서 공이 늙었다 하여 유도의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공은 차자로 서둘러 환가(還駕)할 것을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평소 조정에는 떠나가는 사람이 줄을 잇고 오늘날 행재소에는 달려가 문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만해하는 성색(聲色)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막는 법이니, 오늘날도 이에 가까운 것입니까. 전하께서 유념하셔야 할 바입니다.” 하니, 가납하였다. 이에 앞서, 송시열이 천하의 중망을 받고 있었기에 공이 인조조(仁祖朝) 때에 누차 천거하였고, 송시열이 서울에 이르러 포의(布衣)에 짚신 차림으로 문에 이르자 공은 대등하게 보아 예를 다하였으며, 효종 초에 또 맨 먼저 그를 부를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송시열이 명망과 지위가 이미 높아진 뒤에도 공을 존경하고 숭앙하였으니, 이는 서독(書牘)에 드러나 있다. 그런데 공의 차자를 보고는 노하여 공을 추하게 비방하니, 공이 놀라 차자로 진달하기를, “송시열이 상소로 신을 배척하니, 신은 매우 부끄럽습니다. 신이 짧은 차자에서 아뢴 내용을 감히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회천(懷川 송시열)은 유림의 영수였으므로 그의 언론과 시비를 감히 논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문하의 선비조차도 모두 의아해하였고 동춘(同春) 역시 공을 만났을 때에 놀라워하고 탄식하였다. 공이 기해예송(己亥禮訟) 때 사종설(四種說)을 따르지 않았고, 회천이 영릉(寧陵)의 지문(誌文)을 지으면서 《시경》의 〈비풍(匪風)〉 편과 〈하천(下泉)〉 편을 인용하였는데 공이 그 말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하여 산정(刪定)할 것을 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춘의 말로 인해 윤선도의 위리(圍籬)를 철거하기를 청하였고, 회천이 공의 집안과 혼인하고자 하였으나 또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의심과 노여움을 쌓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은 담담하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 평소 그의 장단(長短)에 대해 거론한 적이 없었다.
여름에 병이 심해져 세 차례 상소하여 해면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강가에 나가 거주하자 근시(近侍)가 와서 면유(勉諭)하였고, 7월에 비로소 돌아오니 또 근시를 보내어 면유하였다. 당시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둘째 비 강씨(康氏))를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공이 백료를 거느리고 한 달이 넘게 정청(庭請)한 뒤에야 상이 비로소 따랐는데 의식과 예법이 대부분 공에게서 나왔다. 공과 부인이 모두 80세 가까운 나이에도 무양(無恙)하였다. 경술년(1670, 현종11) 정월 합근례(合巹禮)를 치른 지 60년이 되는 날에 자손이 축수(祝壽)하여 술을 올렸는데, 이때 학발(鶴髮)의 양친이 마주한 상태에서 술잔을 교대로 올리니, 구경하는 자들이 부러움에 탄식하였다. 김징(金澄)이 이은상(李殷相)과 오정위(吳挺緯)의 죄를 탄핵하였는데 공이 두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김징이 상소를 올려 공을 비난하였다. 그런데 뒤에 김징이 장오(贓汚)에 걸려 하옥되자 공은 아뢰기를, “김징이 어미를 위해 축수한 것이니, 그 죄를 용서할 만합니다.” 하였고, 김징이 형신(刑訊)을 받게 되자 공이 또 불가하다고 말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신해년(1671) 봄에 장령 조세환(趙世煥)이 일을 논하다가 죄를 받게 되자 공은 병중에 상차하여 간쟁하였다. 9월에 병이 위독해져 24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 77세였다. 이날 백기(白氣)가 정침의 지붕 위에서 일어나 한참 있다가 사라졌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슬퍼해 마지않았고, 조제(弔祭)와 치부(致賻)를 모두 전례(典禮)보다 넉넉하게 하였다. 경대부로부터 소민(小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와서 조문하였고 지방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의를 보내왔으며, 유사(有司)는 예법대로 제반 장례 절차를 마련하였다. 11월에 광주(廣州) 서쪽 낙생면(樂生面)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은 용모가 수려하고 헌걸찼으며 천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자애롭고 정직하며 화락하고 평이하였으며, 평온하고 조용하며 맑고 담박하여 일찍이 모나게 행동하지도 괴팍하게 굴지도 않았으며 겉을 꾸미거나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충후하고 화순한 성품이 얼굴에 환하게 드러나고 노여움과 사나움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으나 바라보면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감히 쉽게 대하지 못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양친이 고령이 되도록 무양하였는데 공이 시중들고 말하고 웃을 때에 모두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었다. 어버이가 아플 때에는 밤중에도 의관을 벗지 않았고 상을 당해서는 매우 슬퍼하였고 장례 및 제사에 정성과 예를 다하여 전후 6년 동안 거의 죽게 될 만큼 몸이 수척해졌다. 삭망(朔望) 때에는 사당에 참배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기일에는 마치 초상이 났을 때처럼 슬퍼하여 그달이 다 갈 때까지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묘소에 올라갈 때마다 목 놓아 통곡하였다. 조상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위답(位沓)을 마련하였으며, 묘역을 수리하고 묘지기를 두었다. 비록 외가라 하더라도 그 제사를 챙겨서 주관하였다. 모든 제사에 있어 늙어서도 목욕재계하는 것을 폐하지 않았고 자손에게 감히 태만히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며, 혹 자신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때에도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서 공경을 다하였다. 장형(長兄)을 섬기기를 엄부(嚴父)를 섬기듯이 하였고, 중형(仲兄)이 일찍 죽어 후사도 없이 늙어가는 형수에게 의복과 봉양을 떨어지거나 모자라지 않게끔 하였으며, 생신과 명절에는 음식을 장만하고 술잔을 올렸다. 자손을 가르칠 때에 먼저 《소학》을 가르친 다음에야 다른 책을 가르쳤다. 평소 자손이 조정의 일을 언급하고 남의 장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오직 몸을 검칙(檢飭)하고 행실을 닦도록 하였다. 여러 친족들이 대부분 가난하였는데 반드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의약으로 구제하였으며 혼인과 상사에 힘을 다해 두루 보살피고 몸소 먼저 찾아가서 위문하니, 젊은 사람들이 감히 공보다 뒤처져 있을 수가 없었고 내외의 종족이 모두 우러러 의지하였다. 그리고 또 마을 사람들과 동계(洞契)를 조직하여 간략하게 몇 가지 조목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공은 급제하면서부터 명성이 선배를 능가하였는데 20년 만에 드디어 삼정승의 반열에 올라 위로는 임금의 관심과 사랑이 깊고 아래로는 조야(朝野)가 앙모하였다. 효종조에 이르러서는 더욱 전적으로 위임하였고 공도 또한 정성을 다하였는데 갑자기 경인년(1650, 효종1)의 일이 있게 되었다. 비록 강대한 이웃나라의 압력을 받았으나 은례(恩禮)의 융숭함은 다른 정승으로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으니,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공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공을 말할 때에 원로로 일컬었다. 이에 공은 매양 경전을 인용하고 의리에 근거하여 넌지시 간하고 분명하게 논의하되 반드시 인후(仁厚)와 측달(惻怛)을 위주로 하여 간혹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니, 상이 번번이 태도를 바꾸었다. 재이를 경계하여 구언(求言)하면 반드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희로(喜怒)를 삼가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며,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형옥을 신중히 할 것을 말하였는데 간곡하게 되풀이하여 하는 말이 모두 정성스러웠으므로 상이 마음을 비우고 모두 가납하였다. 10년 동안에 제우(際遇)가 한결같았는데 현종조에 이르러서는 지위와 명망이 더욱 커지고 중외가 크게 의지하여 먼 시골의 아녀자도 백헌(白軒)이란 이름을 욀 수 있었다. 조정의 대우가 이미 남달랐고 공도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반드시 정성을 다하니, 상이 공의 지성을 알고 고령이 되었음에도 대사를 공에게 물었고 존경과 예우가 한결같았다. 금상(今上 숙종(肅宗))이 어렸을 때에 공의 명망과 덕행을 듣고 한번 만나보고자 하니, 현종이 특별히 들어와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삼가서 조정에 나아갈 때에 반드시 먼저 나아갔으며, 명을 받고 기우제를 지낼 때에 반드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하였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공복(公服)을 벗지 않고 뜰에 부복해 있다가 비가 내린 뒤에야 일어났다. 공이 기도하여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가뭄을 만나 공이 기우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들으면 도성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제 비가 내릴 것이다.” 하였다. 평소 조정에 훌륭한 정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재이가 생기거나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근심이 얼굴에 드러났다. 봉사(封事)를 올리는 일이 있으면 조복(朝服) 차림으로 절하고 보냈고 비답을 받을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어가가 거둥하는데 호종(扈從)하지 못하면 반드시 엎드린 채 어가를 기다렸고, 하사품은 비록 작은 물건일지라도 조복 차림으로 뜰에서 받았고 사당에 올릴 만한 것이면 사당에 올렸다. 자신의 처신과 남을 대함에 있어 한결같이 정성스럽게 하고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공은 늘 말하기를, “선비는 정직과 충후를 근본으로 삼으니, 정직하되 충후하지 않으면 각박하고 충후하되 정직하지 않으면 나약하다.” 하였다. 인물을 논할 때에 장점은 거론하고 단점은 덮어주었으며, 글을 볼 때에 대의를 구하고 미세한 부분은 무시하였다. 죄수를 논하여 언의(讞議)할 때에 살리기를 우선하고 죽이기를 뒤로 하였으며 억울한 죄는 반드시 신구(伸救)하고자 하였으니,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기를 좋아한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 대체(大體)를 견지하는 데에 힘썼으며, 남을 위해 일을 꾀할 때에는 매우 주도면밀하게 하였으며, 특히 친구에 대한 우정이 독실하여 상사(喪事)와 병환에 위로하고 그 자손을 보살펴 주었으며, 종 같은 하천(下賤)에게도 살 자리를 잃는 일이 없게끔 하였으며, 곤충이나 초목도 차마 밟거나 꺾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질건 어리석건, 귀하건 천하건 간에 모두 진심으로 감복하여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그렇지만 체모와 위엄은 매우 엄절하였으며 규모와 법도는 그 지킴이 매우 확고하였다. 대사(大事)에 임하여 대의(大疑)를 결단할 때에는 반드시 고의(古誼)에 의거하였으며, 늙어서도 걸음걸이가 흐트러지지 않고 의용(儀容)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조회 때마다 행동거지가 법도에 맞으니, 백료들이 매우 공경하였다.
공은 평소 몸가짐을 반드시 《소학》의 가르침대로 하였고 《논어》에서 득력(得力)한 것이 더욱 많았다. 늙어서는 서안(書案)에 항상 《근사록(近思錄)》과 《주서(朱書)》를 놓아두었으며, 늘 “장중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락하고 방사(放肆)하면 날로 구차해진다.〔莊敬日强 安肆日偸〕”는 말을 암송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큰 추위와 한더위에도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의복은 누추하고 음식은 담박하였으며, 사는 집이 협소하고 누추하였으나 늘리거나 치장하는 일이 없었다. 공은 평소 좋아하거나 즐기는 취미가 없었다. 혹자가 공도 몹시 좋아하는 것이 있느냐고 묻자 말하기를, “없습니다. 오직 문자를 즐길 뿐이니, 취미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였다. 성색(聲色)을 깊이 경계하고 천하고 상스러운 것을 끊었으며, 술잔을 잡고 시를 읊조릴 때에 간혹 담소와 해학을 섞기도 하여 풍류가 넘치고 화기(和氣)가 사람들에게 미쳤지만 법도에 어긋나지는 않았다. 천성적으로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나이 일흔에도 일과를 세워 놓고 《호씨춘추(胡氏春秋)》를 익혔다. 한 창려(韓昌黎 한유(韓愈))의 문장을 좋아하고 두보(杜甫)의 시를 애호하였으며 노장(老莊) 등의 이단은 읽지 않았다.
공은 젊어서 조찬한(趙纘韓)에게서 고문(古文)을 배웠다. 문장의 원천이 무궁무진하여 붓을 잡는 즉시 글이 이루어졌는데 문사가 현란하고 농염하였으며, 허탄하고 기이하며 난삽한 글을 짓지 않았다. 연치와 덕망이 이미 높은 데다 문장은 더욱 세상의 추중을 받았으므로 비갈(碑碣)과 행장, 제영(題詠)과 기발(記跋)을 부탁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 차 넘쳤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지어주었다. 누차 과거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뽑은 자들이 대부분 이름이 난 사람이었고 공경(公卿)이 되거나 저명하게 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필법은 유려하고 아름다웠는데 글씨를 구하러 오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지은 시문이 매우 많았으나 대부분 산일(散逸)되고 간행된 것이 50권뿐이다.
금상(今上) 경신년(1680, 숙종6)에 김석주(金錫冑),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등이 상에게 아뢰어 공의 손자 우성(羽成)을 발탁하여 6품관에 제수하게 하여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하였다. 부인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관찰사 색(穡)의 따님으로 성품이 자애롭고 몸가짐이 단정하고 맑아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는데 공이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갑인년(1674, 숙종 즉위년) 9월 14일에 졸하여 공의 무덤에 부좌(祔左)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세 임금을 섬긴 나라의 원로요 / 三朝元老
한 시대의 지성스러운 신하였으니 / 一代忱臣
나라를 위해 집안일은 잊었고 / 國忘其家
임금을 위해 일신은 내팽개쳤네 / 主不顧身
붉디붉은 정성은 하늘의 해처럼 빛나고 / 丹誠炳日
깨끗한 절개는 서릿발처럼 매서웠으므로 / 素節凌霜
험하고 어려운 일을 / 險阻艱難
또한 두루 겪었다네 / 亦旣備嘗
지극한 믿음은 신뢰를 사 / 至信所孚
돈어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고 / 能感豚魚
덕이 온전하고 행실이 높아 / 德全行高
사책에 누차 기록되었네 / 彤管屢書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 / 恣僞肆誕
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 / 世有聞人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 / 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 君子何病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 人其來敬


 

[주D-001]구천(句踐)은……않고 : 오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왕에게 화의를 청하면서 신첩(臣妾)이 되겠다고 애걸하였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주D-002]부끄럽게도……저버렸도다 : 임금의 공덕을 찬양해 오계(浯溪)의 바위에 새겼던 원결(元結)처럼 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한 사실을 비문으로 짓게 된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당나라 안사(安史)의 난이 평정된 뒤에 원결이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을 짓고 안진경(顔眞卿)이 글씨를 써서 오계의 절벽에 새겨 숙종(肅宗)의 공덕을 찬양하였다. 《古文眞寶大全 卷2 大唐中興頌》
[주D-003]냉산(冷山)과……바이다 : 소무(蘇武)가 북해에 19년 동안 잡혀 있었고 홍호(洪晧)가 냉산에 15년 동안 억류되어 있었듯이 자신도 충절을 위해서라면 오랑캐 땅에 억류되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소무는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중랑장(中郞將)으로 흉노(匈奴)에 사신 갔다가 북해 가에 억류되었다. 흉노가 그에게 음식도 주지 않으므로 들쥐를 잡아먹고 풀 열매를 따 먹으며 갖은 고생을 하다가 억류된 지 19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왔다. 홍호는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의 충신으로 금나라에 사신 갔다가 냉산에 억류되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들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절조를 지키다가 억류된 지 15년 만에 송나라로 돌아오니, 당시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소무에 비교하였다. 《漢書 卷54 蘇武傳》《宋史 卷473 洪皓列傳》
[주D-004]주례(周禮)의 12가지 황정(荒政) : 흉년이 들었을 때 시행하는 12가지 조항의 구황(救荒) 정사로, 첫째 곡식 종자와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散利〕, 둘째 조세를 적게 거두는 것〔薄征〕, 셋째 형벌을 완화하는 것〔緩刑〕, 넷째 요역(繇役)을 없애는 것〔弛力〕, 다섯째 금령(禁令)을 폐지하는 것〔舍禁〕, 여섯째 관시(關市)를 기찰(譏察)하지 않는 것〔去幾〕, 일곱째 길례(吉禮)를 줄여서 하는 것〔眚禮〕, 여덟째 상례를 간략하게 치르는 것〔殺哀〕, 아홉째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蕃樂〕, 열째 혼인할 때 예의 일부를 생략하고 치르도록 하는 것〔多昏〕, 열한째 모든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索鬼神〕, 열두째 형벌을 엄하게 하여 도적을 제거하는 것〔除盜賊〕을 말한다. 《周禮 地官 大司徒》
[주D-005]유향(劉向)의 육정(六正)과 육사(六邪) : 유향이 《설원(說苑)》〈신술(臣術)〉에서 분류한 정도(正道)를 밟는 6가지 유형의 신하와 사술(邪術)을 쓰는 6가지 유형의 신하를 말한다. 육정은 성신(聖臣), 양신(良臣), 충신(忠臣), 지신(智臣), 정신(貞臣), 직신(直臣)이고, 육사는 구신(具臣), 유신(諛臣), 간신(姦臣), 참신(讒臣), 적신(賊臣), 망국신(亡國臣)이다.
[주D-006]왕숙문(王叔文) : 당나라 순종(順宗) 때 사람으로 순종이 무능하자 왕비(王丕) 등과 동당이 되어 국권을 농락하였는데 결국 태자가 국사를 대리할 때 사사(賜死)되었다. 《舊唐書 卷135 王叔文列傳》
[주D-007]송시열……인용하였다 : 《의례주소(儀禮注疏)》 권29〈상복(喪服) 부위장자조(父爲長子條)〉에서 가공언(賈公彦)은 “비록 승중(承重)하였다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체(正體)이나 전중(傳重)하지 못한 것이니 적자(嫡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의 주사(主祀)를 감당하지 못함을 이르고, 둘째는 전중하였으나 정체가 아닌 것이니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셋째는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닌 것이니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넷째는 정통이기는 하나 체가 아닌 것이니 적손(適孫)을 세워 후사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 하였는데, 송시열은 효종의 경우는 서자가 뒤를 이은 것이므로 자의대비가 삼년복을 입지 못하고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성무, 조선시대당쟁사1, 동방미디어, 2001, 267~269쪽》
[주D-008]선조(先朝)……논의 : 인조 때에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자를 두고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하고 조세를 감면해 주는 자를 두고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는 논의가 있었는데 진신들 사이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白軒集 附錄 卷1 白軒先生年譜, 韓國文集叢刊 96輯》
[주D-009]장중하고……구차해진다 : 《예기(禮記)》〈표기(表記)〉에 보인다.
 
 
잡저(雜著)    영의정 남구만
백헌(白軒), 회곡(晦谷), 서계(西溪)를 논함 신묘년(1711, 숙종37) 3월 4일 입으로 불러 주다.

백헌의 묘표(墓表)와 서계의 지문(誌文)과 회곡(晦谷)의 비문 추기(追記)를 내가 모두 짓고자 하였으나 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제 장차 죽게 되었다. 후일에 만약 내가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있어서 짓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나의 본의가 아니다. 지금 비록 산정(刪定)하지는 못하나 일단(一段)의 문자를 지어서 나의 뜻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일에 보게 하는 바이다.

사람들이 선대를 위해 선생과 장자(長者)의 한마디 말씀과 한 글자의 칭찬을 얻으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감격해서 금석(金石)의 소리로 받들어 모신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사람이 한 글자라도 감히 함부로 다른 사람에 대해 쓰지 못하는 것이니, 이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비록 장열(張說)과 같은 간사한 소인으로서도 이미 요숭(姚崇)을 위해 “팔주승천(八柱承天)”이라고 말하고 나서는 그 뒤에 감히 다시 요숭의 단점을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인 사람이 마침내 감히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백헌을 찬양한 말씀을 번복하여 이르기를 “마음속으로는 본래 그르다고 여겼으면서 입으로는 마침내 이러한 빈말을 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장열 같은 소인도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을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행한 것이다. 백헌의 옳고 그름은 우선 제쳐 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어찌 인도(人道)의 큰 변고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저가 증거로 삼아 중요하게 의탁한 근거가 율곡(栗谷)에게 있으니, 그렇다면 율곡도 잘못한 것인가? 이는 그렇지 않다. 앞뒤의 말이 때로 서로 맞지 않음이 있는 것은 비록 성현이라도 혹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마치 과거 보는 선비의 사서의(四書疑) 제목에 “성현의 앞뒤 말씀도 같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입을 열어 말할 때에 그 옳지 않음을 미리 스스로 알았으면서도 우선 이러한 말을 하고는 후일에 와서야 비로소 그 뜻을 나타낸 것이니, 어두운 곳에 숨겨 두었다가 실상이 드러날 때에 기회를 엿보아 일어남은 진실로 간사한 소인의 정상이다. 어찌 율곡이 사람의 잘잘못을 말함에 있어 때로 혹 맞지 않은 것이 있으나 마음의 본체는 본래 광명한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또 저 사람 김창흡은 자기 아버지를 어떠한 사람으로 보았기에 자기가 도리어 흔쾌히 원수의 노예가 되어서 눈썹을 치켜뜨고 눈을 부릅뜨면서 한 사람의 손바닥을 펴서 온 세상의 눈을 가리려고 한단 말인가. 아첨하는 병통이 너무도 심하다. 이 밖에 무엇을 더 꾸짖겠는가.
또 사람을 평론할 때에 혹 추켜세우고 깎아내림이 없지 못하나 임금께 아뢸 때와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을 때에는 충효의 큰 절개라느니, 상서로운 기린과 위엄스러운 봉황과 같다느니 하면서 극구 칭찬하고, 그 후에 별다른 잘못이 없었는데도 마침내 늙어서 죽지 않은 손 종신(孫從臣)에게 견주었으니, 충성과 효도를 하고 기린과 봉황이 된 뒤에 다시 따로 죄를 지은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백헌의 처지와 사세를 가지고 말한다면 삼전도 비문(三田島碑文)을 지은 것은 원래 불가할 것이 없으며, 혹 실수가 없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계곡(谿谷) 장유(張維)에게 비하면 훨씬 가볍다. 그런데 송 정승 시열은 마침내 장기(長鬐)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중에 계곡의 비문을 지으면서 극구 칭찬하였으며, 그 비문이 궁중에 흘러 들어가기까지 하였다. 송 정승은 어찌하여 백헌은 마땅히 용서해야 하는데도 용서하지 않고 도리어 이와 같이 폄하하고 박대하였으며, 어찌하여 계곡은 마땅히 죄주어야 하는데도 죄주지 않고 도리어 이와 같이 받들어 높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일의 저의는 본래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 사심(私心)대로 조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계곡을 옳다 하고 백헌을 그르다 한 것도 생각은 각각 딴 데 있으면서 이것을 빌려서 이야깃거리로 삼은 것일 뿐이니, 시비의 근본이 된 근원에야 어찌 털끝만큼인들 생각이 미쳤겠는가.
또 문곡(文谷)의 본의는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는데, 그 아들이 그 아버지를 훼방한 자인 송시열에게 잘 보이고자 해서, 후손들의 생각에 저 송시열의 말이 이와 같이 망극한데도 도리어 사제 간의 훈계라고 핑계 대면서 얼굴에 침을 뱉으면 닦지 않아도 저절로 마르는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겨 감히 조금도 거역하려고 하지 않으니, 실로 다른 사람이 차마 들을 수가 없다. 김창흡이 이러한 말을 한 뜻은 본래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한때의 졸렬함을 감추고자 해서 구변으로 사람들의 말을 막다가 차츰차츰 옮겨가 그 아버지를 우롱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을 혼미하게 하는 죄과에 이르러서도 꺼리지 않는 바가 있었으니, 어찌 몹시 애통하고 깊이 슬퍼할 만하지 않겠는가.
양반 가문은 온 나라가 함께 사모하는 바인데, 이치를 거스르고 상도를 저버림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양반의 가문이 이와 같다면 온 나라가 끝내 서로 함께 죄에 빠지는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
송 정승이 평소에 주장한 것은 윤휴(尹鑴)를 배척하는 것을 큰 절목으로 삼고 명나라 조정을 높이는 것을 큰 의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일이 혹 윤휴를 배척하는 것에 관계되기라도 하면 비록 세상에서 유림의 종장(宗匠)이라고 칭하고 평소에 도의지교(道義之交)로 허여한 집의(執義) 윤선거(尹宣擧)와 같은 자에게도 엄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하여 조금도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았다. 회곡(晦谷)이 윤휴를 배척한 것이 송 정승 당사자보다 더하였으니, 사리로 따져 본다면 진실로 가시나무 회초리를 짊어지고 회곡의 집에 가서 회곡에게 죄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송 정승은 회곡을 용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사로운 원수보다 더 심하게 미워하였다.
그리고 송 정승은 일이 혹 명나라 조정을 높이는 것에 관계되기라도 하면 비록 서서 오줌 누는 것을 금했다가 웃음거리가 된 민여로(閔汝老)일지라도 한 번 도목정(都目政)에 올리지 않았다 해서 이조 판서인 이경징(李慶徵)을 물리쳤다. 회곡이 3년간 설교(雪窖)에서 생활한 것을 민여로의 쓸쓸한 한마디의 척화(斥和)하는 글에 비한다면 태산과 작은 티끌의 차이일 뿐만이 아닌데, 회곡은 또한 이것으로써 송 정승에게 털끝만큼도 용납받지 못하였다. 이로써 논한다면 송 정승이 평소 주장하여 사랑하고 미워한 것은 본래 윤휴를 배척하였느냐 배척하지 않았느냐, 명나라 조정을 높였느냐 높이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서계(西溪)의 일은 이 형의 평소 행위가 높은 곳은 지나치게 높고 낮은 곳은 지나치게 낮아서, 비록 이처럼 좋은 정직한 마음을 부여받았으나 이른바 너무 지나친 곳은 비록 형을 친애하고 형을 소중히 여기며 형을 사랑하고 형을 높이는 이 아우의 마음으로도 끝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사변록(思辨錄)》 중에 선유(先儒)들이 성(性)만 논하고 기(氣)를 논하지 않은 것을 구비되지 않았다 하고 옳지 않다 하며, 함양(涵養) 공부와 성찰(省察) 공부 가운데 함양 공부 한 가지는 폐지해도 된다고 말한 것은 모두 옳지 않다. “마음과 뜻이 곧바로 성(性)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은 비록 사리에는 그르다 하더라도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러한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의 깊고 넓은 근원에 대해서는 진실로 용이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이제 잘못된 것을 들어 그르다 하고 옳은 것을 들어 옳다 하려고 한다면 그 형세가 혹 뛰어난 점과 좋은 점까지도 아울러 깎아 없애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형 박세당이 말년에 뜻을 다해 연구하여 스스로 깊이 얻은 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그 시비와 득실을 논하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말하고 지나가는 것은 또한 우리 형을 위하여 묘지문을 짓는 본의가 아닐 것이다.
다만 이 아우는 평소 우리 형의 정직한 마음에 깊이 감복할 뿐이다. 이로써 또한 형이 정직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을 가지고 말씀하여 실로 한 점의 깨끗하지 못한 사심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알 뿐이다. 이로써 말한다면 형에게서 나온 말씀이 설령 다소 사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고, 설령 선유의 말과 다른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른바 정직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지나치게 신복하는 근본이 되었으므로 또한 일찍이 허물로 삼지 않은 것이다. 형과 같이 정직한 사람이 어찌 고금 천하에 다시 있겠는가. 비록 고금 천하에 오직 형 한 사람뿐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또 서계 형이 요로에 있는 송시열에게 죄를 얻은 것은 완전히 백헌의 비문과 그 아들 태보(泰輔)의 문집에 연유한 것이다. 이른바 《사변록》이라는 것은 상자 속에 넣어 둔, 남몰래 지은 초고에 지나지 않으니, 죄를 얻은 근원은 본래 여기에 있지 않다. 그중에 설혹 문자의 잘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말할 것이 못 된다. 만약 후세 사람이 이전 사람의 말을 함부로 옮기고 바꾸었다 해서 죄로 삼는다면 구양공(歐陽公)은 〈계사전(繫辭傳)〉을 공자의 말이 아니라고 하였고, 사마광(司馬光)은 《맹자》를 의심하였으니, 성인(聖人)의 문하에 죄를 얻음이 《사변록》 가운데 한두 구절이 다른 정도에 그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구양공과 사마공 두 분은 당시에 죄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묘(文廟)의 배향에 참여하기까지 하였으며, 후세의 공론이 또한 허물로 삼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서계의 잘잘못을 논하려면 다만 백헌의 비문으로 결정해야 할 것이니, 《사변록》은 본래 공중을 지나가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죄로 삼고자 하는 것이 여기 백헌의 비문에 있으면서 칭탁하여 말하는 것은 저 사변록에 있으니, 이는 진실로 뜻은 동쪽에 있으면서 말은 서쪽을 한다는 것이어서 마음과 말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무릇 이러한 언론과 의도는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내력이 있으니, 어찌 다만 한때 한 사람의 죄이겠는가. 만약 본심이 다소 밝아 세도(世道)에 물들지 않은 자가 이것을 본다면 이른바 《사변록》의 시비에 관한 문제는 본래 한번 웃고 말 정도일 뿐이니, 어찌 여러 말로 변론할 것이 있겠는가.

이 글은 《사기(史記)》에 두영(竇嬰), 관부(灌夫), 전분(田蚡) 세 사람을 합하여 한 전(傳)을 만든 것과 비슷하다. 내가 병이 심하여 죽게 되어서 세 분에 대해 각각 따로 글을 짓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 이 세 분 집안의 일은 서로 시(始)와 종(終)이 되고 서로 관통하니, 무릇 오늘날 조정의 시비가 전도되고 당론(黨論)이 멋대로 분열되며 곡직(曲直)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모두 여기에 연유한다. 후인들이 만약 오늘날 조정의 분란을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이 세 전을 합하여 보면 그 전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내가 죽은 뒤에 이 글을 세 분 집안에 보내어 만약 사용하려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사용하려고 한다면 한계를 정해 피차간의 항목을 나누기 어려우므로 본가(本家)를 위하여 말한 내용만을 뽑아내어 사용하기 어려울 것이니, 사용하려면 전문(全文)을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으려면 또한 전문을 다 버리기 바란다.
회곡의 집에서 청한 것은 바로 비문 후기인데, 설교(雪窖)에서 절개를 세운 것과 시호를 내린 은전을 미처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 글을 가지고 비문 뒤의 추기(追記)로 삼을 수는 없다. 또 평소의 문장의 고하를 논하지 않았으니, 문집의 서문으로 쓰기에도 격식이 맞지 않다. 그러나 자벌레처럼 굽혔다가 용처럼 펴는 것은 그 일이 본래 중요한 법이니, 문장의 잘잘못은 다만 천고에 안목이 있는 자를 기다리면 또한 충분하다. 지금 세세히 논하지 않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어떠할지 모르겠다.

이는 비록 사사로운 글이라고 하나 세도(世道)가 위태롭고 혼란해지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나는 30년 동안 대신의 지위에 있었으면서 끝내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세도를 위했다고 하나 내가 신하로서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고 있어 이미 이것을 조정에서 드러내 놓고 말하고 공공연히 논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은 뒤에 사사로운 글을 급급히 남에게 보이는 것은 또한 삼가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아니다. 그러하니 반드시 나의 상(喪)을 마친 뒤에 비로소 글을 청한 세 집에 보여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록 헌 빗자루라 하더라도 천금처럼 귀하게 여겼으니, 내가 죽은 뒤에 세도가 설령 중간에 크게 바뀌어 문자에 설령 분명히 잘못된 부분이 있더라도 나의 자식 된 자는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C-001]백헌(白軒) : 이경석(李景奭 : 1595~1671)의 호이다. 병자호란에 청나라가 삼전도(三田島)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비문을 요구하자, 인조가 장유(張維)와 조희일(趙希逸) 등이 쓴 글을 보냈으나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다시 요구하였다. 인조가 직접 이경석에게 비문을 쓰게 하니, 그는 할 수 없이 써서 바치고는 그 형에게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며 개탄하였다.
[주C-002]회곡(晦谷) : 조한영(曺漢英 : 1608~1670)의 호이다. 1640년(인조18) 청나라에 구원병과 원손(元孫)을 보내는 것을 반대하다가 김상헌(金尙憲), 최명길(崔鳴吉), 함창(咸昌)의 유생 채이항(蔡以恒)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잡혀가 용골대(龍骨大)에게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심양의 옥에 갇혀 김상헌과 함께 《설교집(雪窖集)》을 지었으며, 3년 만에 의주(義州)로 이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효종 때 승지로서 윤휴(尹鑴)의 등용을 적극 반대하다가 전직(銓職)에서 물러났다.
[주C-003]서계(西溪) : 박세당(朴世堂 : 1629~1703)의 호이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어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였고,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종래의 경설(經說)을 개작하여 한때 물의를 일으켰는데, 1703년(숙종29) 그의 《사서집주(四書集註)》가 주자(朱子)의 학설을 비방하였다 하여 추방되었다.
[주D-001]장열(張說)과……못하였다 : 당나라의 장열과 요숭(姚崇)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요숭이 죽을 때 그의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의 비문을 장열에게 맡겨라.” 하였다. 그의 아들이 꾀를 써서 장열에게 비문을 맡기니, 장열이 비문의 첫 줄에 “여덟 개의 기둥으로 하늘을 떠받들었다.〔八柱承天〕”는 등의 칭찬하는 문구를 써 놓고 뒤에 후회하였으나 이미 칭찬하는 글을 지어 주었으므로 요숭의 단점을 말하지 못하였다. 《太平廣記 卷170 知人2》
[주D-002]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인 사람 : 김창흡(金昌翕) 형제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D-003]원수의 노예 : 우암 송시열이 일찍이 김창흡의 아버지인 김수항(金壽恒)을 비판하였는데, 김창흡 형제가 송시열을 사사하였으므로 김창흡의 원수인 송시열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주D-004]손 종신(孫從臣) : 종신(從臣)은 시종하는 신하로, 송나라 때 흠종(欽宗)을 시종하고서 금나라에 잡혀가 흠종 대신 항복문을 지은 손적(孫覿)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삼전도 비문을 쓴 이경석을 비유한 것이다. 흠종이 정강(靖康)의 난리에 금나라에 잡혀 있을 적에 금나라 사람들이 항복하는 글을 받으려 하므로 흠종은 부득이 종신인 손적에게 짓게 하였는데, 손적이 항복문을 지으면서 지나치게 송나라를 깎아내려 금나라에 아첨하였다.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천명을 따르는 자는 보존되고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고 말하므로 어떤 이가 조롱하기를 “그대가 오랑캐 진영에 있을 적에 천명을 따른 것이 매우 심하였으니, 수(壽)하고 강녕(康寧)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니, 손적이 부끄러워 응답하지 못했다 한다. 《朱子大全 卷71 雜著 記孫覿事》
[주D-005]민여로(閔汝老) : 1598〜1671. 현종 때의 문관으로 젊었을 때에 척화(斥和)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청요직에 올라 대간(臺諫)이 되었는데, 서서 오줌 누는 것을 금하였다가 한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 후 이조 판서 이경징(李慶徵)이 이것을 흠으로 여겨 그를 도목정(都目政)에 올리지 않자, 송시열은 이경징이 의리를 몰라 기절(氣節)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크게 비판하였다. 이경징은 이로 말미암아 결국 물러나 번뇌하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는바, 이에 대한 내용은 《약천집》 제34권 〈가아에게 부침〉에 자세히 보인다.
[주D-006]도목정(都目政) : 이조와 병조에서 매년 6월과 12월에 벼슬아치의 성적을 평가하여 면직하거나 승진시키는 일을 이른다.
[주D-007]회곡이……것 : 설교(雪窖)는 눈 쌓인 움막을 이르는바, 소무(蘇武)와 같은 굳은 절개를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 소무가 흉노에 사신 가니 선우(單于)가 억류하고 항복시키려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자, 큰 움 속에다 감금하고 음식을 주지 않았다. 소무는 눈과 털방석을 섞어 먹고 살았으며, 뒤에 북해(北海)의 무인지경에 옮겨졌는데, 흉노에 억류된 지 19년 만에 흉노와의 화친으로 귀국하였다. 《漢書 卷54 蘇武傳》 여기서는 조한영(曺漢英)이 병자호란에 청나라에 잡혀가 지조를 변치 않고 추운 지방에서 고생한 것을 소무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8]자벌레처럼……것 : 현재는 송시열 등의 비난으로 매몰당하지만 뒤에 반드시 크게 인정받을 날이 있음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주D-009]헌 빗자루라……여겼으니 : 분수를 알지 못하고 자기 것은 무조건 최고로 여김을 비유한 것이다. 《문선(文選)》〈전론 논문(典論論文) 위 문제(魏文帝)〉에 “속담에 ‘집안에 못 쓰게 된 빗자루가 있는데 천금을 호가(呼價)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탓이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31권
 현종조 고사본말(顯宗朝故事本末)
임금이 온천에 갔을 때 이경석이 차자로 송시열과 틀어지다


기유년(1669) 3월, 임금이 온천에 행차하였을 때에, 영부사 이경석이 차자를 행재(行在)에 올려 빨리 돌아오기를 청하였는데, 차자의 대략에, “때는 바야흐로 늦은 봄 화창한 계절이요, 여름철이 다가왔지만, 찬 기운이 쌀쌀할 뿐만 아니라 된서리가 날마다 지붕을 덮어 하늘이 재변을 나타내 보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남쪽 지방에서는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병선(兵船)이 침몰되어 죽은 사람의 수효가 백 명에 가깝습니다. 또 들으니 질병이 없는 곳이 없어서 행차하시는 데에 따라간 군사들 중에서도 간혹 누워 앓는 사람이 있으니, 예방하고 피함을 주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또 깊이 염려한 것은 평소에 조정에서 걸핏하면 신을 들메고[納覆] 가는 것이 서로 연달았고, 오늘의 행재소에는 달려가서 문안하는 이가 있다는 기별은 들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그런 사실이 있었는데도 신이 듣지 못한 것인지요. 전하께서 병환으로 멀리 임시 처소에 가 계시니, 사고가 있다든가 늙고 병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아니면, 신하된 직분이나 의리로 보아서 이럴 수 없습니다.이것은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니 신이 매우 걱정하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옛말에, ‘자기가 잘난 척하는 기색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는데, 지금 그와 근사한 것인지요. 이 점이 전하께서 조심하고 염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였다. 《백헌집》
○ 이때 판부사 송시열이 마침 혐의되는 일이 있어서 감히 행재소에 나아가 뵈지 못하고, 다만 전의(全義)에 나가서 머물러 있다가 이경석이 차자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곧 차자를 올려서 대죄하였다. 《강상문답(江上問答)》 송시열의 상소 끝에, “적이 생각하건대, 옛날 손종신(孫從臣)같이 오래 살고 편안하여 크게 한 세상의 존중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하였다고 일컬음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그 당시에 너무도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어서 처신하는 것이 보잘것없었으므로 도리어 손종신 같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다면 여러 사람들이 얼마나 낮춰 보고 비웃었겠습니까. 지금 신의 당한 경우가 불행하게도 그런 경우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암집》
○ 이경석이 또 차자를 올려서 전일 상소에 대죄하였는데, 그 차자의 대략에 “신이 망령되이 올린 차자를 가지고 시열이 자기를 논란하고 배척한 것으로 잘못 인식한 모양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송시열과는 전부터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지목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신이 믿음을 받지 못하였고, 차자의 사연이 명백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신이 차자 중에서 말한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고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아니면 신의 직분과 의리로서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정말 송 판부사를 지목 배척한 말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그가 슬픔을 당하고 또 병환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혹시 곧 달려가 뵈지 못할 것으로 짐작하였고, 또 어떻게 그가 끝내 오지 않을 것으로 단정하고, 먼저 가서 배척하였겠습니까.설혹 배척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자의 교제는 서로 의로써 권면하는 것인데 어떻게 차마 전일에 서로 좋아하던 정의를 배반하고서 심하게 배척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마음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야말로 불행이 심한 것입니다.” 하였다. 《백헌집》
○ 과거에, 송시열은 세상에 명망이 중하니, 이경석이 인조조 때부터 여러 번 천거하여 언제든지 불러오기를 청하였다. 시열과 송준길이 경석을 주인으로 삼아서 서울에 들어오면, 베옷과 짚신의 초라한 차림으로 경석의 집을 찾아갔으며, 경석은 반드시 자기와 평등한 지위로 대접하여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예를 다하였다.그리고 효종이 새로 들어선 때에도 경석이 먼저 시열을 불러다가 나라 일을 같이 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그가 사퇴한다는 말을 들으면 곧 임금께 글을 올려서 만류하기를 청하고, 반드시 사사로운 편지를 보내어서 머물기를 권고하였다. 따라서 시열이 명망과 지위가 높아진 다음에도 경석을 공경하여 존중하는 뜻이 항상 말이나 서신 중에 나타났다.그런데 이때에 와서 갑작스럽게 한 장의 글을 올려, 손적(孫覿)의 일을 인용하여 극도로 욕하고 훼방하니 대체로 경석의 차자 중의, ‘신을 들멘다.[納覆]’는 등의 말이 자기를 지목한 것으로 오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시열은 유림의 영수로 당세에 추앙을 받고 있어, 그가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을 선비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터였다. 그런데 그의 경석을 비난하는 상소가 한번 나오니, 온 세상이 떠들썩하여 비록 그 문하에 출입하고 높여서 사모하거나 친밀하던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준길이 역시 경석을 대하여서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청야만집》
○ 이때 시열이 송규렴(宋奎濂) 판서 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 나의 상소를 보고 그(경석)를 존경하여 높이고 기뻐하며 따르던 사람들이 화내어 나를 꾸짖고 분하게 여겨 배척하는 것은 본래 괴이할 것이 없거니와 온 세상이 모두 떠들어대며 사사 원수 보듯 한다. 동춘(同春 송준길의 호)까지도 역시, ‘놀랍고 한탄스럽다.’고 말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대체로 그 사람(경석)은 향원(鄕愿)의 마음가짐으로 청인(淸人)의 세력을 끼고서 일생을 행세하는 방법으로 삼는다. 만일 경인년의 일이 아니라면, 개도 그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경인년)에 죽지 않고 살아오게 된 것은 어찌 대종성 노획부(大宗城鹵獲婦)의 선물이 아니겠는가.”고 하였다.
○ 이때 이단상(李端相)이 박세채(朴世采)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우암장(尤菴丈)이 지금 공론이 백헌(白軒) 정승을 따르고 당신을 비방한다고 하며, 심지어는 동춘장(同春丈)까지도 역시 크게 의심한다고 말한다 하니, 이것이야말로 불행도 심한 일이오. 천천히 우암장에게 글을 보내서, 그 상소에서 말한 의사를 물어 보려 하오.” 하더니, 수개월 후에 단상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백헌연보>
○ 일찍이 무신년 10월에 임금이, 경연관 이규령(李奎齡)의 아룀과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의 고사에 의하여, 이경석에게 궤장을 내려주고 또 1등 풍악과 술을 내리니, 경석이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 뜻을 시로 적어 읊고, 좌중의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여 화답하게 하였는데, 송시열이 그 서문(序文)을 지어서 말하기를, “공이 조정에 있어서의 시종(始終)은 임금께서 내리신 교서에 이미 갖추어 있다. 그러나 경인년 2월의 일은 나타내지 않으셨다.대체로 그때에는 종묘 사직의 존망이 당장 결정되는 판인데, 비록 미봉할 길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해에 영리한 자들은 모두 팔짱을 끼고 물러서서, 월(越)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의 수척한 것을 보듯 하였다. 이때에 오직 공만이 한 몸을 내어 놓아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아서 나라가 결국 무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임금의 알아주심이 더욱 융숭하고 선비들의 마음도 더욱 따랐다. 하늘의 보우를 받아 수(壽)하고 강녕하여 마침내 우리 임금의 은혜로운 사급과 예우를 받았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하였다. 《우암집》
○ 《강상문답(江上問答)》에서 말하기를, “옛날 백헌 정승이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 말한 것은 실로 사람들의 마음에 부끄럽게 여길 만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또 경인년에 한 일의 한 가지가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당시에 청음(淸陰 김상헌) 등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그와 더불어 벗하고 잘 지냈다.그런데 이때 우암(尤菴)의 상소 끝에, ‘손종신……’이라고 한 것이 있었는데, 백헌 정승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의 말인지를 몰랐다가 나중에 허적이 그것은 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것을, 옛날 손적의 사실에 비유한 것임을 알고서 백헌 정승에게 일러 주니, 백헌 정승이 크게 노하여 이 우암의 소를 동춘(同春)에게 보이니, 동춘이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하였다.
○ 경석이 조정에서 벼슬한 지 50년 동안, 일찍이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다툰 일이 없었는데, 이때에 와서 다만 한 장의 상소로써 그 본심을 진술하였을 뿐, 평상시에 자제들에 대하여서도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들어서 말한 적이 없었다. <백헌연보>
○ 숙종 -원문 빠짐- 연간에 김창흡(金昌翕)이 이덕수(李德壽)에게 준 편지에, “누가 와서 말하기를,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가, 옛날 노 나라의 문인(聞人)으로써 우암옹(右菴翁)에 비하였다.’ 한다.대체로 우암옹이 백헌 정승에게 대한 것은 스스로 할 말이 있었다. 그 기개와 절조가 못나고 약한 것으로 말하면 삼전도 비에서는 청인을 극력 칭찬하였으며, 그 의견이 허술한 것으로 말하면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자는 의논에 굳이 이의를 하였으니, 이런 것이 원래 사람들의 마음에 불만을 가져왔고, 또 흠도 없고 칭찬할 것도 없어서 향원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우암이 공격하기를 더욱 힘주어 하고, 말이나 기색으로 용서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 성균관 사학의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전 판서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고 상신 이경석의 비문을 보니 송시열을 여지없이 꾸짖고 욕하였는데, 그 중에는 시열이 노성인(老成人)을 업신여기고, ‘상서롭지 못한 행실이 있으므로 상서롭지 못한 보응을 받았다.’하였으며, 또 그 비명(碑銘)에는, ‘거짓말이면서도 구변을 잘하며, 괴벽한 행실이면서도 고집하며 그른 것을 옳은 것처럼 매끈하게 꾸미는 것은 이미 세상에 문인(聞人)이 있다. 즉 올빼미와 봉황새는 성질이 달라서 성내고 꾸짖는데, 불선한 사람이 군자를 미워하는 것이 군자에게 무슨 관계이리오.’ 하였습니다.아아, 시열이 경석을 풍자한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 존명배청(尊明排淸))를 밝힌 것인데, 《상서(商書)》의 이른바, 노성한 이를 업신여긴다든가 《맹자》의 이른바, 상서롭지 못하다는 것을 과연 여기에 견주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그리고 만일 현인군자가 불행하게 화에 걸린 것으로써 상서롭지 못한 보응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주자(朱子)가 위학(僞學)으로 화를 받은 것도, 손적을 비난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옛날에 공자가 정사를 어지럽히는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베려하니, 자공(子貢)이 나와서 말하기를, ‘소정묘는 노 나라의 이름난 사람입니다.’하였는데, 이때 공자는 소정묘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거짓을 말하면서 박식이요, 그른 것을 꾸미면서 미끈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박세당이 인용한 것이 실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옛날에 어진 사람을 해치고 나라에 화를 입힌 소인인들 어떻게 군자로서 소정묘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시열더러, 정사를 어지럽힌 신하라고 한다면, 이것은 효종의 정사가 어지러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효종께서 10년간 왕위에 계셨는데 어지러운 것이 무슨 정사였습니까. 세당이 시열을 무함하는 것이 어찌 결국 위로 효종을 무함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이하성(李厦成)이 그 조부(경석)를 위하여 무함임을 변명하는 소를 올리기를, “아아, 정축년의 일이야 무엇이라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 인조대왕께서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신 것은, 종묘 사직을 위하고 만백성을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저들 청인이 의심하고 성냄이 점점 심했기 때문에 먼저 기회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 편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려고 비(碑)를 세우게 하고 비문을 지어 바치라는 독촉이 심하니, 이것이 그해 12월이었습니다.인조께서 처음에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ㆍ전 부사 조희일(趙希逸) 및 신의 조부에게 함께 의논하여 하룻밤 사이에 지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때 대제학은 결원이었으며, 신의 조부가 마침 예문관 제학의 직위에 있었는데, 소를 올려서 끝까지 사양하였지만 사세가 급박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어서 바쳤던 것입니다.
세 사람의 글을 청국으로 들여보냈더니, 마침 명(明) 나라 학사(學士)로서 청국에 항복한 자가 있다가 글을 보고서 신풍의 글에서 인용한, ‘정백이 양을 이끌었다.’는 말은 원래가 제후들이 서로 침공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서 이 비문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하며, 또 신의 조부가 지은 것은 매우 소략하고 전혀 포장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청인들이 더욱 의심하고 노하여 고쳐 짓기를 독촉하였으며, 으르렁거림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걱정하고 무서워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 때에 신풍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전하께서 신의 조부만을 불러다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입장을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하여 판가름나는 것이다.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에서 신첩(臣妾) 노릇을 하다가도 끝내는 오 나라를 멸하는 공을 이루었다.후일에 나라가 다시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으며, 오늘의 할 일은 다만 문자에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도록 하여 사세가 더욱 격화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다.’ 하였으므로, 신의 조부가 역시 생각하기를, 임금의 욕됨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한 몸을 돌아볼 수 없다 하여 꾹 참고 명을 받들었습니다. 이것이 정축년에 신의 조부가 비문을 짓게 된 실상입니다.
그 후에 신의 조부가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항상 산림에 숨어 있는 어진 선비를 끌어서 등용하는 데에 힘썼습니다. 시열은 이때 전 참봉으로서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추천하여 좋은 벼슬을 시켰으며, 그 후로 글을 올리거나 경연에 나오면 항상 시열을 불러 올려 예로써 대우하시라는 뜻으로 아뢰었습니다.효종대왕께서 왕위를 이으시고 신의 조부가 영상이 되었을 때도, 시열과 당시의 명사들을 등용하여, 새 정치를 힘을 모아 돕도록 하였으며, 시열 역시 신의 조부를 주인으로 섬겨 서울에 들어오면 예고 없이 베옷과 짚신으로 신의 집을 찾았습니다. 신의 조부 역시 대등하게 대우하여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예를 다하였습니다.
그 후 신의 조부는 청국의 압력으로 벼슬에서 떠났기 때문에 조정에서 같이 일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두터운 정의는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시열이 사퇴한다는 말을 들으면 신의 조부는 곧 전하께 글을 올려서 만류하기를 청하였으며, 또한 반드시 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정에 머물러 있기를 권고하며 선대왕의 은혜를 갚기를 의리로써 책망하였습니다.시열이 명망과 지위가 높아진 다음에도 신의 조부에 대하여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음을 평소의 말이나 기색과 서신 속에서 언제나 찾아볼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주공 구역이란 말을 인용하여, 칭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해년에 상례를 의논할 때에, 신의 조부는 시왕(時王)의 제도를 주장하고, 시열은 《의례(儀禮)》에 있는 네 가지의 설을 주장하여 비로소 의견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축년 여름에 억울한 죄인들을 심리할 때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이 윤선도의 위리안치를 너그럽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신의 조부가 아뢰기를, ‘봄 하늘의 우로는 초목의 아름답고 악함을 가리지 않는 것이니, 위에서는 마땅히 유신(송준길(宋浚吉))의 말을 들어서, 죽을 나이가 다 된 사람을 먼 곳의 귀신이 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니, 드디어 그렇게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시열이 이 소식을 듣고서 분하게 여겼습니다.
그 뒤에 또 그 아들을 보내어 혼인하기를 청하였으나 일이 성취되지 않으니, 시열은 그것이 신의 조부가 자기에게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인 줄 잘못 알고 편지에까지 그런 말을 나타내고 또한 편지를 친한 사람에게 보내어서 뚜렷이 유감과 원망의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조부는 시열을 대접하기를 처음과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무신년에 선대왕께서 신의 조부를 원로(元老)라고 하여 궤장(几杖)을 내려 주실 때에, 신의 조부가 전하의 은혜를 빛내게 하는 글을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에게 요청하였는데 시열에게도 청하니, 시열이 사양하지 않고 지었습니다. 거기에는, ‘공이 조정에 있어서의 모든 것은 임금의 교서 중에서 모두 말하였지만, 경인년 2월의 일만은 은미하게 하여 드러내지 않으셨다.이때는 나라의 존망이 당장에 결정지어지게 되었지만, 이해에는 영리한 자들이 팔짱을 끼고 물러서서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의 수척함을 보듯 하였다. 여기서 오직 공이 홀로 한 몸으로 사생을 돌보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동요하지도 않아 청인들과 담판하여 국가가 결국 무사하게 되었다.이로부터 임금의 알아주심이 더욱 융숭하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따랐다.’ 하였으며, 그 아래 다시 계속하여, ‘하늘의 보우를 받아서 수하고 강녕하여 끝내 임금의 은혜로 대우하심을 받았으니, 어찌 다만 우연한 일이리오. 아아, 여기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깊은 정리를 볼 수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송시열의 글에서 말한 바 경인년의 일이란 곧 신의 조부가 청인들에게 항쟁하여 담판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금 그 글을 보면 신의 조부의 충절을 칭송한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그 편말(篇末)의 한 구절, ‘수하고 강녕하여……’라는 말을 인용하여 견준 것이 애매하여 자못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뒤 기유년 봄에 선대왕께서는 온천에 행차하시고, 신의 조부가 명을 받아 서울을 지키고 있던 중에, 차자를 행재소에 올려서 먼저 군왕으로서 재화를 만나 수신하고 반성하는 도리를 말하고, 뒤이어서 말하기를, ‘평소 조정에서는 납리(納履)하는 기색이 서로 잇달았는데 오늘날 행재소에는 달려가서 문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전하께서 불행하게도 병환이 있어 멀리 임시 처소에 나가 계시는데, 만일 늙고 병들고 사고가 있는 자가 아니면 신하된 직분과 의리상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신이 매우 염려하는 일입니다.또 생각하면, 옛사람이 말하기를, 스스로 잘난 척하는 기색은 사람을 천 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는데, 오늘의 일이 역시 그것에 가까운 듯합니다. 따라서 이 일은 전하께서 깊이 깨쳐 생각하고 처리하여야 할 일인가 하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시열이 마침 병이 나서 시골집에 있으면서 미처 행재소에 나아가서 문후하지 못하였다가, 신의 조부의 차자를 보고서 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오인하고 곧 한 장의 소를 올렸는데, 그 첫머리에는 공손히 사죄하는 말을 하고 나중에는 ‘옛날 손종신(孫從臣)과 같이 수하고 강녕하여 비록 크게 당대의 높이는 바가 되었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고 일컬어지지 않아서 혹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그런데 당시에 매우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있어서, 그 처신이 보잘것없는데 도리어 그 사람에게서 비난을 받았다면 여러 사람이 낮춰 보고 비웃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신이 당한 경우가 불행하게도 그와 비슷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의 조부는 다시 짧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이 망령되이 말씀드린 차자로써 시열이 자기를 논란 배척한 것으로 잘못 인식한 모양이지만, 신의 본심은 결코 그렇게 할 의사가 없었음을 천지신명에게 증명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겠습니다.그러나 유감인 것은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보통 처지도 아니었는데, 뜻밖에도 신이 믿음을 받지 못하여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마음으로 매우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설령 배척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자의 교제는 서로 의(義)로써 권면하는 것인데, 어찌 차마 전일에 좋아하던 사이를 배반하고 심하게 배척할 수가 있겠습니까.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아아, 여기서 시열이 신의 조부를 공격한 것과, 신의 조부가 시열을 대우한 것만 보아도, 또한 시열의 분노하는 -원문 빠짐- 기색과 신의 조부의 화평스러운 말을 한번에 환하게 분간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의 조부와 시열이 교제한 모든 내막입니다.
아아, 홍계적(洪啓廸) 등은 말하기를, 시열이 신의 조부에게 처음에는 은혜도 원한도 없었다고 하였으나 도리어 은혜가 원한이 된 경위는 신이 위에서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계적이, 시열이 한 말을 여러 번 이어받아서 말하기를, 신의 조부가 지은 <삼전도 비문>의 글이, 저 손적(孫覿)이 지은 어느 글과 서로 유사하다고 하였습니다.대체로 송(宋) 나라 흠종(欽宗)이 금(金) 나라 오랑캐에게 잡혀 있으면서 비록 금인이 글을 지어 오라고 시킴에 손적에게 글을 지으라 하기는 하였지만 흠종의 마음으로는 손적이 그대로 시행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인데, 그것을 어찌 감히 인조대왕이 종묘 사직을 위해서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면서 신의 조부를 면대하여 은근히 분부하시니, 그 말씀이 침통 절박하고 구천(句踐)의 고사를 인용하여 타이르기까지 한 데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또 손적은 그 임금의 본뜻에는 따르지 않고 금인들이 후하게 주는 물건만을 탐내어서 사양할 만한데에도 사양하지 않았으나, 신의 조부는 위험한 정세가 더욱 격화되는 시기에 성조(聖祖)의 간절하고 측은한 말씀을 따라, 부득이한 정세에 핍박되어서 한 일인데 어떻게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를 당해서 신의 조부 혼자 예문관에 있었는데 끝내 모면하려고 하였다면 조정에서는 장차 추한 오랑캐의 핍박과 곤욕을 받게 되었는데도 한 문신의 손을 빌려서 그 위태로운 형편을 해결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혹은 청인들이 그 글을 지을 사람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고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만일 신의 조부가 세속을 떠나서 일찍 은둔 생활을 하였다면 모르지만, 이미 높은 벼슬을 지내고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며 모든 험난한 일을 벌써 이것저것 많이 경험한 터인지라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을 혼자만 달리할 수가 없는 일인데, 한 편의 글을 짓는 일에 스스로 그 이름을 결백하게 하기 위하여 임금의 핍박과 곤욕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일시 높은 의논이나 하는 선비들의 칭찬은 받을 수는 있었겠지만, 임금을 섬겨서 몸을 바치는 신하의 도리상으로 볼 때에는 과연 어떠하겠습니까.그런데 신의 조부가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였으니, 과연 나라를 위하여 한 일이겠습니까. 몸을 위하여 한 일이겠습니까. 그 명백한 충심은 백 세 후에도 증명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슬픈 일이니, 계적의 말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계적 등은 또 말하기를, ‘시열이 손적의 일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풍자하고 비방한 것은, 시열의 사사로운 뜻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실은 주자(朱子)의 끼친 뜻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시열이 신의 조부가 <삼전도 비문>을 지은 그때에 벌써 비평과 논란을 하고 서로 사귀어 놀지 않았다면, 비록 신의 조부를 비방한 그것이 정확한 의논은 못 되더라도 산림 처사로서의 고결한 의논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보다 수년 후에 신의 조부의 천거를 받고 서로 사모하고 좋아하였으며 더구나 그가 자기의 몸을 얼마나 신중히 하였으면서도 몸소 베옷 입은 선비의 차림으로 대신의 집을 찾아 왕래가 잦은 것이 어떻게 도를 즐겨하여 남의 세력을 잊고, 선배를 스스로 따른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또 이때 시열이 신의 조부에 대하여 높여서 예의로 대우하는 의사와 칭찬하는 말이 또 저러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본래 심복되어 따랐던 것입니다.그러다가 그의 명망과 지위가 신의 조부와 서로 같게 되고 기세가 더욱 성하여지게 되니 서로 논란할 때에 감정이 생기고, 서로 알력되는 곳에서 틈이 일어나 점점 의심하고 갈려지게 되었으며, 투기하고 미워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신의 조부의 한평생 명예와 절조는 한 점의 더러움도 들어서 말할 것이 없었는데, 흠을 30년 전에서 찾으려 하여 처음에는 가만히 옛말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칭송하고 찬미하는 글에서 비추었다가, 나중에는 드러내 놓고 욕설과 비방을 하며 위에 올리는 소장(疏章)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시열이 신의 조부를 높여서 사모한 것이, 신의 조부가 <삼전도 비문>을 짓기 전이 아니었습니다. 또 시열이 신의 조부를 욕하고 비방한 것이 역시 그 글을 지은 사실을 들은 날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한 사람인데 전에는 존모하고 경복하여 주공(周公)에 비하기까지 하였으며, 나중에는 업신여기고 꾸짖고 욕하여 그만 손적에게 비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마음가짐이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마음가짐이겠습니까.
만일 시열이 과연 주자의 뜻을 좇았다고 한다면, 주자도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있어서 공경하여 사모하다가 비방하여 욕설하는 것이 이렇게 앞뒤가 다른 일이 있었습니까. 또 <삼전도 비문> 지은 일로 말한다면 신풍부원군이 비문을 지을 때에는, 마침 상복을 입고서 부득이 왕명을 좇았으며, 그 진술한 문구가 세상에 전파하여 선정(先正)이 외우기도 하였습니다.그리고 희일(希逸)은 면관(免官)당하였다가 불려 나와서 명에 응하였던 것인데, 글을 지은 다음 왕명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또 고 판서 이식(李植)은 남한산성에 피난하여 따라가서 여러 번 화친을 청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 수치스러운 문구와 뜻을 선배들의 기록 중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갑신년 교서 중에는, ‘또 다행히 천하가 하나가 되는[청국이 통일한 것] 기회를 만나서 다행히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어 낳아주고 자라게 하여 주는 청국의 은혜를 입었다.’라든가, ‘마땅히 천자의 주신 말씀의 사랑을 좇아서’라는 등의 말도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저들 세 신하인들 어찌 이런 것을 좋아서 지었겠습니까.다만 국가가 지탱하나 망하나 할 즈음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날에 국가의 큰 계책에 따르고, 군부의 고심을 받들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그들의 깨끗한 명예와 맑은 덕명이 원래 이것으로 하여 더하고 손상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의 조부의 경우에 있어서는, 처지의 곤란한 것이 앞에 말한 세 신하의 경우보다 배나 더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글이 사용되고 되지 못하는 데에는 행[쓰이지 않는 것]과 불행[쓰인 것]이 있는 것이지, 그 글을 지은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지금 만일 시열이 스스로 주자의 끼친 뜻에 의하여서 신의 조부를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면 저들 세 신하는 마땅히 먼저 시열의 배척을 받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열이 신풍부원군(장유)의 비문을 지으면서, ‘대의를 높인 것이 해나 별처럼 빛났다.’ 하였고 또, ‘대개 공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이 일로써 죄줄 사람도 있고 알아줄 사람도 있다 하였다.’고 하였으며, 그(장유)의 문장을 논평하는 데에 있어서는, 의리가 정주(程朱)를 위주하였다고까지 하였습니다.그리고 이식의 문집에 서문을 짓는 데에서는, ‘의리의 정밀함과 의논의 바른 것이 유학을 보호하고 세도에 이바지하였다.’고 하였으며, 갑자년에 몸소 이식의 묘소에 가서 제사드리는 글에서는, ‘맨 먼저 도를 깨달았다.’고 칭찬하고, 또 ‘의논과 문장이 시종 주자 문풍(門風)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였으며, 또한 ‘이 글로써 평생 우러러 사모하던 성심을 표시한다.’고 하였습니다.그리고 조희일(趙希逸)의 비문을 짓는 데 있어서는 바로, ‘<삼전도 비문> 지을 사람을 신중히 선택하였는데 공이 병 때문에 사면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모문(某文) 짓는 것을 사퇴한 것으로 보면 그 지조가 확고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칭찬할 만한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아아, 글을 지어서 청인에게 보낸 사실은 처음부터 피차가 다를 것이 없는데, 어떤 사람에 대하여서는 혹 그 대의를 높여 칭찬하며 그 심사를 드러내어 밝히고(장유에 관한 것) 혹은 참 선비로 ‘죄아지아(罪我知我)라고’ 대우하며 우러러 사모하기에 겨를이 없으며(이식에 관한 것) 심지어는 실지 사실을 고치고 바꾸어서 도리어 그를 찬양하는 장본을 삼았습니다(조희일에 관한 것).무릇 이렇게 그 말을 음으로 변하다가 양으로 변하다가 하고 그 의논을 다르게 했다가 같게 했다가 하는 것은 모두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시열이 신의 조부에 대해서만 비난과 훼방을 하는 것이 과연 사사로운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처음부터 신의 조부에게 은혜도 원한도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나라의 정축년의 일과, 송 나라 정강(靖康)연간의 일은 그때와 형세가 벌써 다릅니다. 인조대왕이 신의 조부에 대하여 타이르시기를 간곡하게 하신 것이, 저 송 나라 흠종과 손적이 그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던 사실과 형편이 서로 반대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털끝만치 비슷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사실에 의지하여 바른대로 쓰고,그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주자의 이른바 말을 세워 뒤에 남겨서 세상의 도의를 위하여 생각하는 것인데, 이와 반대로 글을 지어 칭송하고 찬미하면서 가만히 비방을 하는 것은 시열이 어떤 일로 인하여 감정을 푸는 것이기 때문에 명백하고 솔직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열을 주자에게 비한다면 그 마음가짐과 행사하는 데에 있어서 서로 배치됨을 잘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 계적이 말한, ‘실로 주자의 끼친 뜻을 좇았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될 수 있습니까.
시열이 신의 조부를 욕할 때에는 시열이 한창 사림의 영수로 있을 때이니만큼, 그의 말과 의논이 옳고 그른 것을 일세의 선비들이 감히 논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조부를 비난하는 상소가 한번 알려지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였으며, 비록 그 문하에 출입하면서 그를 높여 사모하고 또 친밀한 사람이라도 그르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선정신 송준길도 신의 조부를 대하여 놀라고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처음 산림에서 나오게 된 것이 공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주인이 없어졌소.”라고 하였습니다. 동춘이 이단상(李端相)에게 글을 보낸 사실과 단상이 박세채(朴世采)에게 글을 보낸 사실은 이미 위에서 나왔다. 고(故) 감사 조세환(趙世煥)이 일찍이 시열을 장기(長鬐)의 적소(謫所)에서 방문하였을 때에, 시열 자신도 그 일을 말하면서, ‘지금 와서는 후회한다.’고 하였다 합니다.준길은 시열의 친구로서 그때의 정의가 형제 같았으며, 단상은 시열을 스승처럼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시열에 대하여 의심한 것이 개탄하고 애석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으며 시열 자신이 세환에게 말한 것으로 보더라도, 그가 위급하고 곤궁할 때에 본심이 속에서 우러나온 것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대체로 준길의 공정한 마음과 단상의 정밀한 지식으로도 그 말이 이러하였으니, 그 밖의 당시 항간의 여론도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수십 년간이나 그를 높여 받들던 사람이 수 없이 많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끝내 한 마디의 시열을 두둔하는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며, 시열도 역시 스스로 자기가 옳다고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시열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반드시 시열이 자기의 그른 것을 알고 잘 후회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비록 세월이 가고 세상이 변하였으며,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하더라도 그때의 정해진 의논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그런데 계적 등 하찮은 후생이 애당초 그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던 터인데, 지금 와서 도리어 시열이 원한을 풀이하던 자취를 덮으려 하여 말하기를, ‘처음에는 은혜도 원한도 없었다.’고 하며, 그의 사심을 부리던 계교를 숨기려 하여, ‘경석의 잘못은 스스로 공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아, 과연 계적의 무리로서 참으로 시열을 높이고 사랑할 줄을 안다면, 그의 은밀히 남을 비방하는 습성을 덮어주고, 그가 자신의 그른 것을 깨닫고 허물을 뉘우칠 줄 아는 은미한 의사를 드러내서 찬양하여 스스로 백 년 후에 해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비길 수 없는 곳(주자(朱子))에 비하고, 감히 인용할 수 없는 시대의 사실(송 나라 일)을 인용하여 요사하게 떠벌려서 전하의 귀를 현혹하려고만 하니, 이것은 주자를 무함하고 시열을 그르치는 것이 심하다고 하겠습니다.계적 등이 말하는 시열이 신의 조부를 풍자하여 경고하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과실이 있으면 조용히 책망하여 그 사람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게 하여야 되겠는데, 시열은 그렇지 않아서 서로 틈이 벌어질 초기에 벌써 은밀히 남모르는 비장을 하여 놓고, 한 가지의 말이 자기의 뜻에 거슬리면 그만 더러운 욕설이 낭자하여졌으니, 계적의 이른바, ‘풍자하여 경고한다.’는 것은 아무리 찾아보려 하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릉(寧陵 효종의 능) 지문(誌文)의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릇됨이 심한 것입니다. 왕릉의 지명(誌銘)은 무덤 속에 간직하여 후일의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하여서만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그 성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금석에 새겨서 칭송하여 가깝고 먼 후세에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시열이 명을 받들어 영릉의 지문을 지을 때에는, 글의 뜻이 오로지 대행대왕의 항상 부지런히 큰 일[北伐]을 위하여 준비하던 계책을 밝히는 데 있었으니, 실지를 위주하고 소문을 뒤로 한다는 원칙에서 볼 때에 이미 너무 노골적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우리 효종대왕께서는 10년간이나 근심하고 근면하면서 큰 뜻을 분발하여 장차 대의를 천하에 펴 보려 하던 것인데, 하늘이 돕지 않아서 중도에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따라서 비록 대왕의 크신 생각과 신묘한 계책이 미처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거룩하신 뜻은 빛나기가 일월과도 광채를 같이하는 것으로서 일국의 충신ㆍ의사가 모두 소리 없이 울고 마음 속으로 알고 있는 것이니, 시열이 지은 지문(誌文)에 한두 마디 말을 더 적어 넣기를 기다린 뒤에야만 후세에 널리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물며 이때에 있어서는 나라의 큰 상사가 있어 걱정되고 위태로움이 한창 심하고, 청국이 말썽을 부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언어나 문자 중에 번거롭고 누설함이 있을까 경계하여야 할 때이니, 붓 끝의 실없는 말이 앉아서 실지의 화를 초래하게 될 것으로서, 깊고 먼 식견을 가진 이의 할 짓이 아닙니다.
신의 조부는 이때 한산한 처지에 있었는데, 현종이 내시를 시켜 시열이 지은 글 초고를 가지고 신의 조부에게 와서 수정하게 하였습니다. 신의 조부가 이미 일일이 정정(訂正)하고, 비풍ㆍ하천 등의 문구에 이르러서는, ‘없어도 좋겠다.’는 뜻으로 부전(附箋)을 붙여서 아뢰었는데, 영의정 정태화 등이 그 말을 따르기를 청하니, 현종께서 깊이 옳게 여겨 곧 명하여 그 말들을 빼고 고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시열이 좋아하지 않으며 그 글을 전부 버리고 다시 짓기를 청하니, 전하께서 다시 명하여 그 문구들을 빼지 말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계적 등이 신이 조부가 저들 청인의 비위 거슬릴 것을 무서워하여 사실대로 기록한 어구를 빼려 하였다고 하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만일 계적 등의 말과 같다면 시열은 마땅히 저들 청인에게 미움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야 할 듯합니다.그런데 시열이 이 지문을 지어 올리는 차자에서는, ‘벽두에서 무서워하고 꺼려서 될 수 있는대로 완곡하게 하였다.’고 하고, 위정(魏挺)의 묘비명을 인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외인에게 쓰기를 부탁하여 더욱 말이 많게 할 수 없어서 다만 세상일을 모르는 천식(賤息 자기의 자녀)을 시켜 병풍 사이에 숨어서 쓰게 하였다.’고 한 것은 웬일이며, 또 허적의 말을 따라서 인쇄하여 내지 않게 하기를 청한다고 하고, 전하께서 보실 것을 한 권도 찍어 드리지 않는 것은 웬일입니까.이것으로써 시열이, 청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은 원래부터 깊었으나, 다만 그 말이 자기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논의할 것을 싫어하였던 것이니, 여기서도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조부의 경우에 있어서는 당시 몸이 국외(局外)에 있었으며, 또 그 글이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니 설령 다른 날 말썽 생기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화복(禍福)과 이해(利害)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관계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반드시 그것을 적당히 재량하여 잘하도록 하려고 한 것은 실로 노신의 나라를 근심하는 지성에서 나온 것이요, 차마 새로 들어선 임금의 은근하게 부탁하는 뜻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런데 지금 신의 조부의 한 일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청인들의 비위 거슬릴 것을 두려워하여서 한 것이라.’고 하니, 아아, 허물없는 것에서 허물을 찾으려 하여도 끝내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춘추의 대의를 시열만이 알고, 신의 조부는 몰랐다고 한다면, 신의 조부가 저들을 결코 청 나라라고 칭할 수 없다고 아뢴 글이 어찌하여 병자년 전에 있었겠습니까. 윤황(尹煌)등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놓아 주고 김상헌과 정온의 기개를 북돋워야 한다는 요청은 어찌하여 정축년 후에 있었겠습니까. 명 나라 조정에 연락하여야 한다는 상소는 어찌하여 경진년 봄에 있었겠습니까.하물며 경인년의 변란으로 온 나라가 모두 물 끓듯 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이 경각에 있었는데, 신의 조부가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청인에게 항변하며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을 곳에 나가기를 즐거운 곳에 들어가듯 하였으니, 어찌 이런 경우에는 두려워하지 않고 시열이 지은 영릉 지문의 두 어구 말을 두려워하였겠습니까. 시세가 서로 같지 않고 처지가 각각 달랐다는 것은, 원래 변명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계적 등이 말하기를, ‘효종대왕의 큰 뜻과 거룩한 사업이 거의 희미하여져서 후세에 분명히 드러나지 못할 뻔하였다.’ 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시열의 글이 완성된 다음에도 그것은 다만 돌에 새기고 묘실(廟室)에 비장되었을 뿐이요, 일찍이 나라 안에 알려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서 대왕의 그 넓은 뜻과 큰 사업을 천한 사람과 부녀ㆍ아동들까지도 누구나 다 입으로 외우고 마음속에 간직하게 한 일이 없었는데,효종대왕의 큰 계획과 사업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과연 시열이 지은 지문의 두어 글귀의 말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까. 전일에 이런 문구를 끝내 뽑아버렸더라면 이 일로 인해서 효종대왕의 큰 사업이 장차 어두워져서 끝내 드러날 수 없게 될 것이겠습니까.
계적 등이 말하기를, ‘시열이 손적의 일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풍자하여 경고한 것은 신의 조부로 하여금 참회하고 깨우치게 하려 한 것으로서 역시 효종대왕 당일의 끼친 교훈을 실천한 것이다.’ 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적어도 이 능지(陵誌)의 일만은 만약 시열이 신의 조부에 대하여 감정을 품어 오던 사실의 일단이라고 한다면 가하거니와, 이것으로 하여 신의 조부를 풍자하여 경고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같지 않은 말입니다.시열은 그 감정으로 다른 사람의 흠집을 찾고, 분한 김에 되는대로 꾸짖는 버릇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만은 애당초 한 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었으니, 여기서 그 자신으로서도 감히 이것으로써 신의 조부를 허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신의 조부는 여기에 대하여 원래부터 양심으로써 반성하여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니, 다시 무슨 부끄럽고 뉘우침이 있을 것이겠습니까.
지금 시열이 죽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는데 계적 등이 여기서 다시 시열도 끄집어 내지 않았던 의사를 거슬러 생각하여 그것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근거를 삼으려 하니, 이 역시 거듭 시열을 그르치게 하는 일이 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더군다나 오늘 와서 효종대왕이 끼친 교훈 등의 말을 한다는 것은 어찌 오늘의 신자(臣子)로서 감히 끌어다 붙이고 주워 모아서 그 당파를 비호하는 말로 쓸 수 있겠습니까. 아아, 무엄하기도 심하고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계적 등은 또 말하기를, ‘남한산성에서 화친이 이루어진 후로 온 세상의 기개와 절조는 없어지고, 춘추 대일통의 의리에 어두웠는데, 시열이 춘추대의에 충실하여 효종대왕의 뜻에 보답하였기 때문에 신의 조부와 의사가 불합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의 어그러지고 망령되기 이를데 없는 것이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아마도 인조대왕이 부득이하여 우선 오랑캐를 덤비지 않게 얽어 매어둔 것은 장차 다시 힘을 기르기를 도모한 것이요, 효종대왕이 개연히 분발하여 장차 대의를 펴 보려 한 것은 곧 인조대왕의 의사를 잘 계승한 것으로서 전성(前聖)이나 후성(後聖)은 그 계획이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춘추 대일통의 의리가 어떻게 전에는 어둡고 후에는 밝은 것이며, 신하된 자로서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신의 조부는 효종대왕에 대하여 서로 마음으로 통한 것은 이미 효종대왕께서 심양에 가 계실 때에 볼 수 있으며, 군신의 친밀한 정의가 합한 것은 효종대왕께서 국정을 맡던 당시에 더욱 현저하였습니다.따라서 비록 강한 이웃 나라에게 핍박당하는 큰 책임을 맡았지만 효종대왕 재위 10년간에 예로 대우하기를 날로 융숭히 하여 다른 정승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에 있은, ‘충성이 해를 뚫는데 내가 바야흐로 믿는다.’ 하는 □ 유시나, ‘충성되고 바른 마음은 천지신명도 증명할 것이다.’라는 포장(褒獎)은 더욱 신의 조부가 효종대왕에게 특별한 인정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아, 아침 해가 처음 올라오니(효종의 즉위) 만백성이 모두 눈을 씻고 보는데, 효종대왕의 어진 덕을 열어 넓히고 새 정치를 빛내어서 사방 초야에 있는 선비들에게도 모두 갓을 털고 옷끈을 매고 효종의 크게 일을 도모하려는 뜻에 도움을 이바지하려고 생각하게 한 것이 누구의 공이었습니까.이렇게 본다면 시열도 신의 조부가 아니었으면 역시 어떻게 춘추대의의 말로써 효종대왕께 아뢸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효종대왕께서 춘추대의를 밝혀서 선대왕의 뜻을 받아 선대왕이 사업을 계승한 것이 실은, 신의 조부가 그 시초에서 협찬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신의 조부가 효종대왕께 대하여 군ㆍ신의 의기가 서로 잘 합한 것이 시열보다 먼저였으며, 문무의 계책을 협찬하여 왔으며, 그때 그때의 일마다 진력한 사람은 신의 조부만이었습니다. 송시열처럼 편안하고 한가한 때에 담론하는 것과 신의 조부처럼 위급한 때에 진력하는 일은, 벌써 경우가 다르고 정신과 행사도 같지 않은 것이니, 그 의기가 그와 서로 합하지 않은 것은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아, 춘추의 대의는 원래 시열이 자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춘추의 대의명분은 그 중한 점이 오랑캐를 물리치는 데에 있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대의를 붙들고 대의 아닌 것을 억누르는 도리가 마땅히 근엄하여야 할 것인데, 지난 경인년의 변이 있을 때에 이만(李曼)이 청인의 위협에 겁내어서 스스로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리는 죄에 빠졌으니, 왕법으로 처단하는 것이 마땅히 먼저 이 사람에게 실시되었어야 할 것입니다.그렇지만 청인이 정직하다고 칭찬하면서 우리에게 그를 쓰라 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엄한 형벌을 주지 못하고 우선 목숨을 유지하게 하였는데, 시열이 이미 신의 조부와 대립하려고 하여서 다시 이만의 벼슬길을 열어 주고, 좌우로 주선하여 주었습니다.아아, 시열이 청인들이 이만을 정직하다고 칭찬한 말을 받들어 따른 것이 지극하였으니, 춘추의 대의가 원래 이럴 수가 있습니까. 계적 등이 걸핏하면 춘추를 들고 나와서 신의 조부를 비방하는 것이 더욱 한 번의 냉소꺼리도 되지 않습니다.
계적은 또 세당(世堂)이 지은 비문 중의 말을 끄집어 내서 시열의 무함당한 것을 송사하고, 신의 조부를 무함할 꾀를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행위순비(行僞順非)’ 네 글자는 처음부터 세당의 글이 아니었는데, 계적 등이 어디서 얻어 가지고서 전하께 아뢰는 말에서, ‘그 글을 보옵건대’라고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계적 등의 상소 중에서 진(眞)이 되느니, 시(是)가 되느니, 하는 말들이 매우 어그러지나 행위니 순비니 하는 것이 벌써 근거 없는 것을 지어 낸 것이니 가소로운 일이요, 변명할 것도 못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누가 올빼미고 누가 봉황이며 누가 군자요, 누가 불선한 사람 등의 말로 반복하여 가며 마구 비방하여 다시 말할 여지가 없는 데에는 통탄할 일입니다.
대체로 음흉하고 사나우며, 다른 짐승을 쳐서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은 올빼미의 성질이요, 평화스럽고 상서로워 썩은 쥐를 노리는 솔개와 다투지 않는 것은 봉황의 덕입니다. 물건을 끌어다 사람에 비유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 성질에 따라서 평론하여야 하는 것이니, 올빼미와 봉황의 분별이 제각기 돌아갈 데가(올빼미는 시열에게, 봉황은 경석에게) 있을 것인데, 이른바, 누가 불선인(不善人)이요, 누가 군자라는 것도 역시 미루어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은 백세 후의 공정한 의논만을 기다릴 것이요, 신들이 애써 변명할 것도 아니겠습니다.
처음 시열이 일찍 도덕 있는 이를 친하여 갑자기 중한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신의 조부가 천거 선발하여 끌어들인 것은 참으로 선비를 사랑하고 어진 이를 진출시키는 성심에서 나왔던 것입니다.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배반을 당하여 업신여김을 적지 않게 받았으며, 그 남은 감정의 영향으로 끼친 화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시 시열의 지위와 세력이 한창 성하였을 때에는 온 세상을 거느려서 자기를 따르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옆으로 살피고 엿보면서 그 의심과 성냄을 쌓았으나, 신의 조부는 언제나 허심탄회로 일찍 시열의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라를 위하는 충성된 말이 여러 번 그의 칼날을 범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그런데 오늘에 와서 신의 조부를 의논하는 자가 만일 신의 조부가 사람을 아는 데에 실수하고, 처세에 소루하였다고 한다면 혹 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계적 등의 상소에서, 종이 위에 가득 찬 그 능멸하고 업신여기는 말은 이것이 어떻게도 그렇게 실지와는 너무나 동떨어지는 것입니까. 아아, 평생을 통하여 사모하다가 나중에 가서 버리는 것은 옛사람이 깊이 수치스럽게 생각한 바입니다. 세상에서 시열의 심술을 의심하는 것도 대다수가 이런 일들 때문입니다.
기유년의 시열의 상소도 실은 그 중의 하나인데, 무릇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야 누가 시열의 그런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계적 등이 시열을, 순수하고 조그만 흠도 없는 지위에 끌어올리면서 신의 조부를 무함하고 욕설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전하를 속일 수야 있겠습니까. 공정한 의논을 막을 수야 있겠습니까.아아, 전에 시열과 좋아하다가 끝까지 잘 보전한 이가 몇 사람이나 됩니까. 오늘의 사대부들 중에서도 그에게 욕을 먹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만 다만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혹 시열의 욕한 일이 전의 선대에게 관련되더라도 오히려 분주하게 따라다니면서 성낼 줄을 모르는 것은 단지 편당되어 붙기에만 급하여 경(편당)ㆍ중(선대의 욕)이 거꾸로 되는 줄을 모르고 있으니, 아아, 얼마나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세당이 글을 지은 것은 사실 금년 봄의 일로서 아직도 탈고가 되지 못하였으나, 사대부들간에는 차츰차츰 비문 내용에 대하여 말이 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시열을 따르는 자들이 듣고서는 감정을 품고, 상소하려고 의논하는 자도 있었으나 좀 지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옳지 않다고 하기 때문에 마침내 중지되었던 것입니다.그런데 뜻밖에도 전 주부 김창흡(金昌翕)이라는 자가 극성스럽게 시열을 옹호하기 위하여 장문의 편지를 써서 세당의 제자에게 보냈는데, 그 말이 어그러지고 흉악하여 신의 조부를 꾸짖어 욕한 것은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편지의 한 통의 등본이 먼저 태학으로 들어갔는데, 태학생 중의 경박한 무리들이 그 의사를 받아서 따르고, 잠잠해지던 말을 다시 선동하여서 끝내는 전하를 속이려고 한 데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그런데 지금 계적 등의 상소를 보면 그 맥락과 기관이 모두 창흡의 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계적과 창흡 사이에 한 꼬지로 꿴 것은 빤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 등이 창흡의 한 사사로운 편지를 가지고서 사사로이 서로 반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창흡의 집안 의논을 가지고서 증거 대겠습니다.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은 신의 조부의 연배보다 훨씬 앞서지만 신의 조부에 대해서는 추천하여 권장함이 특별히 후하였으며, 그의 상소 중에서 칭찬하여 말한 것으로 보더라도 사문(斯文)의 큰 종장(宗匠)이라고까지 높였습니다. 그리고 고(故) 정승 김수항(金壽恒) 같은 이도 신의 조부 섬기기를 매우 공경하였으며, 신의 조부를 조상하는 글을 지을 때에는 벽두에서 선생으로 칭호하고, 그 글에서는, ‘하늘의 정기를 받고 낳아서 나라의 으뜸 신하가 되었도다.마음은 적자심(赤子心) 그대로 보전하였고, 행실은 온전히 인륜을 극진히 하였도다. 효도와 우애에 근본하고 나아가서는 충성을 온전히 하였도다.조정에 상서로움이 봉황 같고 기린 같았도다. 한 절개로 세 조정을 섬겼는데 조금도 흠점이 없었도다. 위태로움을 당하여 말로 항쟁하니 나라를 위하여 한 몸을 잊었도다. 우뚝한 그 인격, 우리 국민을 든든케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가 지은 만시(輓詩)에서는, ‘몸ㆍ이름ㆍ출신ㆍ은퇴 모두 허물이 없는데, 충효와 문장ㆍ덕업도 온전하네’라고 하였습니다.
아아, 우리나라에서 큰 절개를 세우고 맑은 의논을 유지한 사람으로서 상헌의 위에 오를 사람이 없으며, 밝은 식견으로 좀처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상헌 이상 없을 것인데, 사문의 큰 종장이라는 칭도가 정축년 10년 후에 있었으니, 그가 일찍이 <삼전도 비문> 지은 일로 흠잡지 않고 시종일관 공경하고 중히 여겼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수항인들 역시, 어찌 좋아하는 이에게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겠습니까마는 그가 신의 조부에 대하여 덕행을 높여 받들고 명절(名節)을 찬양한 것이 또한 이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창흡의 편지 중에서 이른바, 기절이 못나고 약하며 의견이 허무하여 향원(鄕愿)의 규모와 같은 점이 있다는 말은 어찌도 그렇게 일일이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까. 상헌은 창흡의 할아버지요, 수항은 창흡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도 창흡이 오만하게 스스로 높은 체하며, 저의 선인들을 없는 것처럼 보고 삿된 의론을 지어내어 시열을 높이기에만 급급하여 그 패륜 무례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그런데 저 계적의 무리는 그의 턱짓만 따르고 그의 입의 거품을 우러러 받아먹는 자이니, 이에 또 무엇이라고 말할 것이겠습니까. 하물며 수항의 글에서 이미, ‘봉황 같고 기린 같다.’고 하였으며, 선왕조에서 하사하신 제문(祭文)에서도, ‘백관의 모범으로 상서의 봉황과 상서의 기린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 상ㆍ하에서 신의 조부의 미덕을 이렇게 형용하여 말한 것은 자연히 정론이 있었던 것이요, 오늘 박세당의 비문에서 일컬은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봉(鳳)이라는 한 글자에 노하여 나쁜 말로 도로 꾸짖는 것은 도대체 또 무엇입니까.
창흡이 처음에는 신의 조부가 정릉(貞陵) 부묘(祔廟)의 의논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였다고 하면서 한 큰 흠으로 지목하였는데,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서 그것이 사실과 다름을 공격하였으므로 계적의 상소에서는 그것을 감히 다시 들어 말하지 못하고, 여기서 영릉(寧陵) 지문(誌文)에 대한 것을 가지고 날조하여 말을 만들었으니, 그들의 거짓으로 만든 자취가 이에 이르러 더욱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아아, 오늘의 이 일은 전하의 밝으심으로 이것을 공정하다고 하십니까. 태학은 공론이 있는 곳인데, 소가 태학에서 올라왔으니 마땅히 공정하다고 할 것입니다.다만 신 등이 적이 들으니, 창흡이 그 말을 선동하자 한두 귀족의 서로 잘 지내는 자들이 따라서 찬동하여, 이에 그 몇 집에서 그들의 20세 이상의 자제들과 또 그들의 이웃과 인척 친척들을 권유하며, 시골 선비들 중의 성균관ㆍ사학에 붙어 있는 자들을 위협하여 그 수효를 늘인 것입니다. 또한 그 상소도 실상은 그들 개인의 집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실지가 몇 집의 부자 형제들이 사사로이 주장한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태학의 공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누구나 자기 조상에 대해서는 비록 정말 과오가 있더라도 그것을 지적하여 훼방하는 자가 있으면 그 통절한 마음이란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신의 조부는 전후의 하신 일이 순전히 충심으로 애국하는 데에 있었고, 처음부터 털끝만치도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흡과 계적 등이 전에 시열이 감정풀이 하던 말을 부연하여 더러운 욕설이 도리어 시열보다도 더한 점이 있으니, 남의 자손된 처지에 하루아침에 이런 일을 당할 때에 그 가슴 아프고 뼈가 쑤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생각하오면 밝으신 전하께서 위에 계신 것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 같아서, 인간의 한 남자나 한 여자의 원통한 일이라도 불쌍히 여기고 살피시어 쾌히 풀어 주시는 터이온데, 신의 조부는 두 조정에서 사보(師保)의 중한 지위와 당대에 태산 교악 같은 인망을 지니고 있었는데, 돌아간 후 30년 오늘에 와서 졸지에 조그만 더벅머리 아이들에게 무한한 더러운 욕을 당하여 실상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생각하오면 전하의 생각도 여기에 미치시면 역시 조금 슬프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일찍이 어렸을 때에 신의 조부의 명망과 덕행을 들으시고 한번 보려고 하시니, 선대왕께서 특별히 명하여 진알하게 하였는데, 그때의 조용한 문답이 이미 군신간의 서로 허락하는 정의를 이루었던 것이니, 오늘에 있어서도 항상 생각하시는 마음이 역시 그 사람을 언어나 용모 밖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점은 세 분 대왕이 신의 조부를 예법으로 대우한 데에만 그칠 정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신 등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믿는 바는 오직 밝으신 전하뿐이오니 어찌 피눈물을 뿌려 소리 없이 울면서 급한 소리로 전하께 크게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또 생각하옵니다. 신의 조부가 평소에 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으로 가르치고 무도한 사람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는 것으로 자처하여 그 넓은 도량과 후한 덕이 더욱 다른 사람들의 탄복하는 바가 되었습니다.그리고 신 등이 아직도 기억하는 바이지만, 신의 조부가 기유년의 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다만 한 장의 상소로써 그 본의를 밝혔을 뿐, 곧 다시 평탄한 마음으로 애당초 그런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하였으며, 자손들을 대하여서도 일찍이 한 번이라도 무고하여 온 그 사람의 장ㆍ단점을 들어서 말한 적이 없었으니, 이 일은 신 등이 두고두고 마음속에 간직하여 잊지 못하옵니다.그런데 지금 와서 만약 털끝만치라도 실지에서 벗어난 말과 다른 사람을 탄핵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것은 아래로 신의 조부를 저버리고, 위로 밝으신 전하를 속이는 일이옵니다. 신 등이 비록 매우 보잘것없지만 결코 감히 이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김창흡의 소의 대략은, “신의 증조부는 경석(景奭)과 대대로 교분이 보통 사이가 아니었으며, 신의 부친은 또 경석을 기구(耆舊)의 대신이라 하여 항상 존경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증조가 경석을 칭찬한 글 가운데에 이른바, ‘사문의 종장’이라 한 것은 글짓는 사람들을 높여 칭찬하는 데에 보통 쓰는 말입니다.어떻게 그 말이 그를 도덕과 명절(名節)이 순수하고 흠이 없어서 참으로 유림의 대종사가 된다고 말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하성(厦成) 등이 이 한 구절의 말을 들어서, 드디어는 신의 증조부에게 경석의 <삼전도 비문> 지은 일을 흠으로 삼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 심히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증조부가 비문 지은 일에 대해서는 비록 일찍이 분명히 지적하여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그 의사가 어디에 있었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의 일로 미루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의 증조부가 일찍이 상신 이정귀(李廷龜)의 비문을 짓고서 그 집 자제들에게 부탁하기를 ‘부디 <삼전도 비문> 글씨를 쓴 사람에게는 이 비문 글씨를 쓰이지 말라.’ 하였습니다.이렇듯 그 비문의 글씨를 쓴 사람에게 대해서도 남의 묘비를 더럽히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비문을 지은 사람에게 대해서야 어찌 흠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그 후 이씨 집에서 경석에게 그 비문을 쓰게 하니, 신의 부친 형제가 일찍이 탄식하기를, ‘선조의 뜻이 저러하였는데도 도리어 비문 지은 사람에게 글씨를 쓰게 하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성 등이 인용한 바, 신의 증조부가 지은 만장ㆍ제문 등에서 경석을 칭찬했다는 말은 실지로 있었습니다만, 만장 제문 등의 자체가 주로 그 몸가짐을 칭찬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평상시에 남이 논한 일을 평하며 일에 따라서는 비난하고 깎아 말하던 것과는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신의 부친이 경석에게 대하여 일컬은 바, ‘세 조정을 한결같은 절개로 받들어 몸과 명예에 허물이 없었다.’는 것도 역시 그가 집에서는 효도하고 삼가며, 조정에 나가서는 충성하고 정성을 다하여 한때 어진 재상이 되었다는 것뿐입니다.그런데도 하성 등은 이것으로써, ‘신의 부친이 경석을 높여 받들고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며 아주 흡족하여 서로 막힘이 없었다.’ 하면서, 후세의 사람들에게 감히 경석의 말이나 행실의 잘잘못을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하니 역시 지나친 것입니다.” 하였다. 《농암집(農岩集)》


[주D-001]조정에서 …… 것 : 선비가 조정에 뜻이 맞지 않으면 신끈을 졸라매고 조정을 떠나서 돌아간다는 것이다.
[주D-002]향원(鄕愿) : 향원은 온 고을 사람이 모두 점잖다[愿]고 칭찬하여 흠잡을 것은 없는 사람이나,이럭저럭 처세나 하고 착한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D-003]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 : 병자호란 뒤에 청 나라에서 우리 조정을 협박하여 자기네를 칭송하는 비문을 삼전도(三田渡)에 세우게 하였는데, 당시의 이름 있는 문사(文士)들이 글짓기를 싫어하였으나 이경석은 나라를 위하여 부득이 글을 지었는데, 송시열은 그것을 가지고 후일에 경석을 비방하였다.
[주D-004]노 나라의 문인 : 공자가 집정한 지 7일 만에 노(魯) 나라의 문인(聞人 名士)인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는데, 그의 죄목(罪目)이, ‘행위순비(行僞順非)’ 등이었다.
[주D-005]상서롭지 …… 받았다 : 《맹자》에, “상서롭지 못한 실상(보복)은 어진 사람을 가리는(蔽賢) 것이다.” 하였다.
[주D-006]신풍의 글 : 신풍부원군 장유도 처음에 <삼전도 비문>을 지었는데, 청 나라 사람의 비위에 맞지 않아 쓰지 못하였다.
[주D-007]정백이 …… 이끌었다 : 초왕(楚王)이 정(鄭) 나라를 쳐서 점령할 때에 정백(鄭伯)이 항복하고 죄인의 차림으로 양을 몰고 초왕을 맞이하였다 한다.
[주D-008]주공 구역 : 구역(九罭)은 《시경》의 편명인데 주공(周公)을 칭찬한 말이다.
[주D-009]수하고 강녕하여 : 이것은 송 나라의 손적(孫覿)을 칭찬한 글에 나온 말인데,여기서는 송시열이 이경석의 수(壽)하고 강녕한 것을 칭송하는 척하면서 암암리에 금 나라 사람을 위하여 글을 지은 손적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0]비풍ㆍ하천 : 비풍(匪風)ㆍ하천(下泉)은 《시경》의 편명인데, 주(周) 나라의 천자가 미약하여진 것을 슬퍼하여 지은 시다.
[주D-011]적자심(赤子心) : 《맹자》에, “대인(大人)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하였는데, 적자심은 순진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우계연보보유(牛溪年譜補遺) 제2권
잡록(雜錄) 상 선배(先輩)의 문자 중에 비록 위의 세 조항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선생의 사우(師友) 간의 교제(交際)와 언행(言行)과 출처(出處)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별도로 뽑아 잡록을 만들었다.

율곡(栗谷)이 장차 대사간(大司諫)으로 부르는 명에 달려가려 할 적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소를 타고 우계(牛溪)를 방문하여 작별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해는 저무는데 백설이 산에 가득하니 / 歲云暮矣雪滿山
들 오솔길 교목 사이로 가늘게 나뉘어져 있네 / 野逕細分喬林間
소를 탄 채 어깨 움츠리고 어느 곳으로 가는가 / 騎牛聳肩向何之
나는 우계 가의 친구를 그리워한다오 / 我懷美人牛溪灣
사립문 저녁에 두드리며 청순(淸純)한 분에게 읍하니 / 柴扉晚叩揖淸癯
작은 방에 누더기 걸치고 포단에 의지해 있네 / 小室擁褐依蒲團
고요한 긴긴밤 잠 못 이루고 앉아 있으니 / 寥寥永夜坐無寐
반벽에 붉은 등불 그림자 가물거리노라 / 半壁淸熒燈影殘
인하여 반생에 이별이 많음 슬퍼하고 / 因悲半生別離足
다시 천산에 행로가 어려움 생각하노라 / 更念千山行路難
담소한 뒤에 뒤척이다가 새벽닭이 우니 / 談餘展轉曉雞鳴
고개 들어 바라보매 창문에는 차가운 달빛 가득하네 / 擧目滿窓霜月寒
하였다. -《율곡집(栗谷集)》-

임진년(1592, 선조25) 10월 24일에 나는 동궁(東宮)을 뵙고 물러 나와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서생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날 언제인가 / 書生報國知何日
난세에 표류하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노라 / 亂世飄零淚濕巾
빙설이 하늘에 가득한데 돌아갈 길 머니 / 氷雪滿天歸路遠
몸 굽혀 수고로움 다하며 이내 몸 잊는다오 / 鞠躬盡瘁且忘身
하였다. -《임계일기(壬癸日記)》. 이하 같음-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7)에 내 일찍이 은산현(殷山縣)을 지나갔었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 10월에 이르러 성천(成川)에서 행조(行朝)로 달려갈 적에 다시 이 고을을 지나게 되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사십일 년이 참으로 한바탕 꿈 같으니 / 四十一年眞一夢
쇠잔한 목숨 표류하여 지금 다시 이곳에 이르렀네 / 殘生飄泊又如今
태평한 어느 날 파산 아래에 누워 / 太平何日坡山下
시냇물 소리 들으며 깊은 밤에 이를는지 / 臥聽溪聲到夜深
하였다.

석담(石潭)에 있을 때에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외로운 소나무 스스로 세한과 같기를 기약하니 / 孤松自與歲寒期
드높은 풍미 어찌 봄철에 우로가 내릴 때를 논할까 / 風味寧論雨露時
우뚝이 서서 여러 초목과 다름 혐의치 않으니 / 獨立不嫌違衆卉
동산에 가득한 도리화들 서로 시기하지 마오 / 滿園桃李莫相疑
하였다.

석담에서 어떤 사람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지인의 마음 본래 하늘과 같은데 / 至人心跡本同天
작은 지혜 구구하게 한쪽에 집착하네 / 小智區區滯一邊
높은 벼슬에 질곡당한다고 부질없이 말하니 / 謾說軒裳爲桎梏
성시가 바로 임천임을 그 누가 알까 / 誰知城市卽林泉
배는 급한 물살 만나면 노를 돌리기 어렵고 / 舟逢急水難回棹
말은 먼 길을 달리려면 채찍을 맞아야 하네 / 馬在長塗合受鞭
정성과 공경 참으로 용이하게 할 수 없으니 / 誠敬固非容易做
그대의 아름다운 시구 외며 그러한가 묻노라 / 誦君佳句問其然
하였다. -선생이 친필로 원운(元韻)을 쓰고 그 아래에 이 율시(律詩)를 썼는데, 마지막 구(句)에 말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히 화답한 시이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한관(韓瓘)에게 답한 편지의 끝에 손수 절구(絶句) 한 수를 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상제는 낳아주기를 좋아하여 만민을 기르니 / 上帝好生育萬民
우리나라에 태평한 봄이 돌아왔단 말 들었노라 / 新聞東國太平春
봄바람에 반갑게 향리로 돌아와 / 春風好與還鄕里
밭 갈고 우물 파며 장차 풍년을 즐기는 사람 되리라 / 耕鑿將爲樂歲人
하였다. -이해에 선생이 연안(延安)에서 파산(坡山)으로 돌아왔다.

성우계(成牛溪)가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위해 지은 만시(挽詩)에 이르기를,
세상 밖 구름 낀 산 깊고 또 깊으니 /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 초가집 이미 찾기 어렵네 /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 위에 삼경의 달빛 / 拜鵑窩上三更月
응당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
하였으니, 이는 사암을 잘 애도했다고 이를 만하다. -《상촌집(象村集)》 ○ 살펴보건대, 허균(許筠) 또한 이 시를 평하여 당(唐)나라 시인(詩人)의 격조(格調)가 있다고 말하였으나, 허균의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성우계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한 지역 물 맑고 구름 낀 가운데에 밭 갈고 우물 파니 / 一區耕鑿水雲中
만사에 무심한 백발의 늙은이라오 / 萬事無心白髮翁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잠 깨어 / 睡起數聲山鳥語
청려장 짚고 산보하며 꽃들 구경하네 / 杖藜閑步遶花叢
하였는데, 시인의 체제(體制)와 격조가 매우 높으니, 이는 이른바 ‘글을 통해 도(道)를 깨달았다’는 것일 것이다. -《시평(詩評)》 ○ 살펴보건대, ‘글을 통해 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뒤집어 말한 것으로, ‘도를 통해 시(詩)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만사(挽詞)에 이르기를,
급히 용만으로 달려가던 날에 / 急赴龍灣日
치안을 위하여 몇 번이나 글을 올렸던가 / 治安幾抗章
소금과 매실처럼 처음에는 합하였는데 / 鹽梅初有契
패금에 끝내 손상당하였다오 / 貝錦竟成傷

다만 용납되기 어려웠으나 / 只是難容與
어찌 마음에 물러가 은둔할 것을 결단하였겠는가 / 何心決退藏
이제 모두 영원히 끝났으니 / 于今長已矣
세도가 자연 황량하여라 / 世道自荒涼
창생들 참으로 복이 없으니 / 蒼生也無福
대낮에도 산문(山門)이 닫혀 있네 / 白日閉山扃
시례는 가학을 전수받았고 / 詩禮傳家學
풍류는 참으로 모범이 되었다네 / 風流極典刑
간당들의 공격으로 이름이 빛났었고 / 光華奸黨籍
소미성 나타났다 다시 숨었네 / 隱見少微星
원숭이와 학 이제 누구를 주인 삼을까 / 猿鶴今誰主
빈 산속에 깊이 슬퍼하노라 / 深悲虛翠屛
하였다. -《오음집(梧陰集)》-

우계를 아득히 생각하여 두 수(首)의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운림에 한가로이 사시는 분 볼 수 없으니 / 雲林不見考槃人
안개 속의 달 적막한 물가에 아득하네 / 煙月蒼蒼寂寞濱
무숙의 뜰 앞에 풀 묵어 있고 / 茂叔庭前惟沒草
자릉의 대 위에 누가 낚싯줄 드리우나 / 子陵臺上孰垂綸
순후한 풍도는 이미 높은 종적을 따라 떠나갔고 / 淳風已逐高蹤去
야박한 풍속은 다시 난세를 따라 새롭구나 / 薄俗還隨亂世新
구정과 일사 그 누가 우러르고 사모하는가 / 九鼎一絲誰景仰
길이 늙은이의 눈물 흘러 수건 적시게 하네 / 長令老淚漫沾巾
하였고, 또,
해내에 평생 동안 친한 벗 / 海內平生友
덕스러운 음성 구천(九泉)에 막혔네 / 泉臺阻德音
우계에 깨끗한 달 아름답고 / 牛溪淸月好
파산에 저녁 구름 깊어라 / 坡岫暮雲深
지난날의 좋은 말씀 이젠 길이 들을 수 없고 / 永訣他時語
오늘날의 이 마음 막다른 길목에 서 있는 듯하네 / 窮途此日心
산림이 다시금 적막하니 / 山林還寂寞
일을 회상함에 홀로 옷깃 적시노라 / 撫事獨沾襟
하였다. -《동은집(峒隱集)》 ○ 선생이 산월(山月)의 시(詩)를 읊어 동로(峒老)와 작별하였다.

성우계를 추억하여 지은 시에 이르기를,
신야가 있은 지 천년의 뒤에 / 莘野千年後
산림의 처사(處士) 몇 사람이나 있었던가 / 山林有幾人
봉황의 새끼는 원래 오색을 갖추고 / 鳳雛元五色
형산의 박옥은 작은 하자도 없다오 / 荊璞絶纖塵

순주는 사람을 만나면 취하게 하고 / 醇酒逢人醉
지란이 있는 곳은 절로 향기롭네 / 芝蘭在處薰
파산은 곡구와 같고 / 坡山猶谷口
우포는 바로 하수의 근원이라오 / 牛浦卽河源

문도(門徒)는 삼천 명이나 되고 / 徒弟三千盛
명성은 일대에 높았도다 / 聲名一代尊
국가의 위태로운 일 추념하니 / 追思邦杌隉
말하려 함에 코가 시큰해지누나 / 欲說鼻酸辛
세상의 의논은 사견을 따르는데 / 世議循私見
공정한 마음으로 윤리(倫理)를 바로잡았네 / 公心急正倫
조정에 간쟁하여 큰 노여움 돌리고 / 廷爭回盛怒
정직한 도로 어진 군주 섬겼다오 / 直道事仁君
밝은 태양에 정성이 통하고 / 白日精誠貫
깨끗한 가을처럼 기상이 새로워라 / 淸秋氣像新
한마디 말로 사직을 붙들고 / 一言扶社稷
필마로 산중의 집에 돌아왔네 / 匹馬返山門
문 밖에는 솔바람 세차게 불어오고 / 戶外松風急
뜰 앞에는 들 사슴들 뛰노누나 / 階前野鹿馴
한가로이 지내며 세월을 보내니 / 優游聊卒歲
적막하게 봄을 몇번 보냈는가 / 寂寞幾經春
훼방과 칭찬은 타년의 일인데 / 毁譽他年了
부침(浮沈)하는 말로는 그대로 이어지네 / 升沈末路因
푸른 꼴 가지고 배우러 가려는 뜻 저버렸고 / 靑篘孤負笈
백수에 서글피 흰 구름 바라보노라 / 白首悵停雲
미천한 이 몸 한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우니 / 並世慚微末
평소에 의논을 나누지 못했다네 / 平生阻惠論
이제 유명을 달리하니 / 幽明今已矣
오직 뼈에 사무치도록 은혜를 생각하노라 / 鏤骨但含恩
하였다. -《사류재집(四留齋集)》 ○ 이정암(李廷馣)이 일본(日本)과 화의(和議)할 것을 요청하였다가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탄핵을 받아 장차 중한 형벌을 입게 되었는데, 선생이 구원하였기 때문에 시와 제문에 언급한 것이다.

파주(坡州)를 지나면서 선생을 그리워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몸을 굽혀 나오니 사람들 다투어 비웃었고 / 跡屈人爭笑
의리가 높으니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 義高誰得知
인심은 저 지경에 들어가고 / 人心入于彼
천도는 여기에 이르렀네 / 天道至於斯
계당의 길 적막하고 / 寂寞溪堂路
산월의 시 처량해라 / 凄涼山月詩
가을바람에 눈물 줄줄 흘리니 / 秋風滿眼淚
비단 나의 사사로운 정 때문이 아니라오 / 不獨爲吾私
하였다. -《석주집(石洲集)》-

만취(晚翠) 오억령(吳億齡) 형제의 선부인(先夫人)은 우계 선생의 재종매(再從妹)였다. 선부인이 언문 간찰(諺文簡札)을 선생에게 올려 파산에 가르침을 청하자, 선생은 이들을 한집안의 자제로 대하여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과 똑같이 여기고 간격이 없었으므로, 만취 형제 또한 독실한 마음으로 선생을 사모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만취가 작은 배를 타고 시냇가 옛집으로 창랑을 방문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초가집 옛터 남았으나 / 白屋遺基在
청산은 옛 자취 아니로세 / 靑山舊迹非
작은 배로 눈물 뿌리며 방문하니 / 扁舟揮淚過
강 비는 저녁에 부슬부슬 내리누나 / 江雨暮霏霏
하였으니, 무한히 서글퍼 하고 사모하는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신명규(申命圭)의 기록 ○ 《파문록(坡門錄)》에 만취 형제를 기록했었는데,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가 기록한 글에는 처음에는 썼다가 마침내 삭제하였으니, 뜻이 있는 듯하므로 이것을 그대로 따랐다.

명재(明齋 윤증(尹拯))가 파산서원(坡山書院)에서 자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적벽에 배 띄워 화석정 바라보고 / 浮舟赤壁望花亭
우포에 돌아오니 산 달 밝게 비추네 / 牛浦歸來山月晴
옥 같은 빛과 금 같은 소리 어제 일과 같으니 / 玉色金聲如昨日
진세의 혼 아직도 한때나마 깨어 있네 / 塵魂猶得片時醒
하였다. 또 서실(書室)에서 자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계산에 오대를 내려온 가업이요 / 溪山五世業
백년 동안 거문고 타고 글 읽은 고향이라오 / 絃誦百年鄕
옛집 아직도 훼손됨이 없으니 / 舊屋猶無恙
어진 손자 유업을 잘 계승하네 / 賢孫乃肯堂
시서는 서가에 가득하고 / 詩書瞻滿架
관동들 엄연히 행렬을 이루었네 / 童冠儼成行
올바른 학문 이제 힘써야 하니 / 正學今當勉
안정의 마지막 장 음미하노라 / 顔亭味卒章
하였다. -《명재집(明齋集)》-

계사년(1593, 선조26) 5월 20일에 선생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봉심(奉審)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말을 듣고 시냇가에 가서 기다렸다가 뵈었는데, 선생의 얼굴빛은 전과 같았으나 수염과 귀밑머리는 휠씬 더 센 모습이셨다.
강진승 자소(姜晉昇子昭)가 선생을 모시고 왔다. 이날 선생은 신주(神主)를 꺼내어 서실(書室)에 봉안하고 제사하였다. 또 병란(兵亂)에 죽은 친구 등 서로 아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동안 타향에 표류하느라 아직까지 신위(神位)를 만들어 곡하지 못했으나 이제 옛집으로 돌아왔으니 그들을 위하여 곡할 만하다 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분의(分義)의 경중과 교제한 정의(情誼)의 친소에 따라 신위의 고하(高下)를 정하고 각기 지방(紙牓)을 쓴 다음 간략히 술과 떡을 장만하여 올리고 곡하였으니, 첫 번째 자리는 바로 나랏일을 위해 죽어 충절을 다한 조여식(趙汝式 조헌(趙憲))이었다. -남궁명(南宮蓂)의 일기(日記)-

계사년 12월에 내가 석담(石潭)에 머물고 있었는데, 윤 해평(尹海平 윤근수(尹根壽))이 요동(遼東)에 들어가면서 해주(海州)를 지나다가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뜻이 간곡하였으며, 재령(載寧)에 도착하여 또다시 편지를 보내오고 목면(木綿) 몇 필과 종이 몇 묶음을 보내왔다.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매우 중요한 사명(使命)을 받았고, 또 자신에 대한 걱정이 많아 친구에게까지 마음을 쓸 여가가 없었을 듯한데도 성의가 이와 같으니, 그의 지극한 마음에 감탄하는 바이다. -《임계일기(壬癸日記)》. 이하 같음-

문학(文學) 유응문(柳應文)이 멀리서 찾아와 방문하였다. 유군은 마음이 바르고 한결같으며 어지럽지 않아 말이 간략하고 온당하였으며, 세속의 부화(浮華)함을 숭상하지 않았다. 또 내가 늙고 병든 몸으로 타향에 나그네 신세가 되어 산골짝에 외로이 사는 것을 염려하여 매우 지극히 돌보아 주었으니, 참으로 감사하다.

갑오년(1594, 선조27) 9월에 용산(龍山)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니, 승지(承旨) 오대년(吳大年)과 세마(洗馬) 오백령(吳百齡)이 찾아와 작별하였다. 오 승지는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10리가 넘는 거리를 두 번이나 찾아왔으니, 참으로 지극한 마음씨이다.

을미년(1595, 선조28) 1월 18일에 오음(梧陰) 윤 정승이 교동(喬桐)에서 각산(角山)까지 배를 타고 온 다음 찾아와서 밤새도록 담소하고, 다음 날 아침 또다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작별할 때에 돌아보고 그리워하는 정이 지극하였다. 상사(上舍) 윤훤(尹暄)이 모시고 와서 조용히 문장을 논하고 떠나갔다.

난리 중에 가지고 간 서책은 《청송선생사실(聽松先生事實)》, 《청송당시권(聽松堂詩卷)》, 《청송당서법(聽松堂書法)》, 《선우첩(鮮于帖)》,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왕형공절구첩(王荊公絶句帖)》, 《두율오언첩(杜律五言帖)》 -모두 청송이 손수 쓴 것이다.- 및 《율곡야사(栗谷野史)》 네 책뿐이었다. -《율곡야사》는 몇 본(本)이 있었는데, 하나는 직접 가지고 갔고, 하나는 파산(坡山)의 땅속에 묻었고, 하나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에게 주었다. ○ 《두율오언백수(杜律五言百首)》는 바로 조백운(曺白雲)의 집안에서 맡긴 것이니, 속집(續集)의 제첩문(題帖文)에 이 내용이 보인다.

우계서실(牛溪書室)은 바로 우리 묵암(默庵)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다. 선생이 30세가 되기 이전부터 선생의 훌륭한 풍모(風貌)를 들은 자들이 이미 배울 만한 스승임을 알고는 원근을 막론하고 앞 다투어 배우러 찾아왔는데, 선생은 기꺼이 이들을 가르치시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주하시는 집 동쪽 귀퉁이에 서실을 지어 배우러 오는 자들을 대하니, 방이 겨우 세 칸이었다. 서실이 완성되자 ‘우계서실’이라 편액(扁額)하고, 또 손수 서실의 규칙 22개 조항을 만들어 서실의 의칙(儀則)으로 삼았으니, 지금 문집 가운데에 보이는 것이 이것이다.
서실을 지을 적에 선생은 직접 규모를 만드셨고, 이곳에서 시서(詩書)를 익히고 예악(禮樂)을 강론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지가 지금 24년이 되었다. 임진왜란 뒤에 또 병자호란을 겪었으나 훼손됨이 없이 우뚝이 솟아 있어서 신명(神明)이 수호하여 지키는 듯하니,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명재집(明齋集)》의 서실중수기(書室重修記)-

명재(明齋)가 남계(南溪)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우계 선생에 대한 기록 중 책을 보신 내용과 비단옷에 관한 말씀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니, 마땅히 삭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남계가 답하기를, “두 조항은 보존해도 무방할 듯한데, 만약 잘못 전해진 것으로 의심된다면 삭제하는 것도 좋겠다.” 하였다. -《남계집(南溪集)》-
《율곡별집(栗谷別集)》을 살펴보면, “율곡이 선생에게 묻기를 ‘형이 책을 보실 때에 몇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7, 8행(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나 역시 10여 행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였다. 또 율곡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어서 의주(義州)를 향해 서쪽으로 갈 때에 선생을 방문하자, 선생이 율곡에게 이르기를 ‘형의 비단옷이 어쩌면 이리도 화려합니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감히 사치하려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 사신을 예우함에 있어 이처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두 분이 밤에 함께 잠을 잤는데, 선생이 율곡의 이불도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는 농담하기를 ‘이것도 명나라 사신을 예우하는 도구입니까?’ 하니, 율곡이 웃고 사례하였다.” 하였다. 남계가 이 두 조항을 기록하였는데, 명재가 삭제하도록 한 것이다.

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옛날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이 찬(撰)한 것이 있었는데, 뒤에 사림(士林)들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사론(士論)은 계곡이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지은 것을 하자로 여겨 쓰지 않았으니, 회천(懷川) 송시열(宋時烈)이 특히 이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다시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에게 청하여 고쳐서 짓고 김신재(金愼齋 김집(金集))가 썼으며, 또 묘표(墓表)는 신재가 짓고 외손인 윤동토(尹童土 윤순거(尹舜擧))가 썼다. -글은 모두 원보(元譜)에 보인다.- 부인 신씨(申氏)는 별도로 장단(長湍)에 장례하였는데, 묘표는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짓고 판서(判書) 김좌명(金佐明)이 썼다. -글은 아래에 부록(附錄)한다.

명(明)나라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31) 무술에 우계 선생이 파주의 우계에서 별세하자, 이해 8월 모일에 향양리(向陽里)에 있는 청송 선생의 묘소 뒤에 장례하였으며, 18년 뒤인 을묘년(1615, 광해군7)에 부인 신씨(申氏)가 별세하니 향년이 85세였다. 풍수가(風水家)들이 연운(年運)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므로, 위재(韋齋)와 축씨(祝氏)의 고사(故事)를 따라 장단의 성탄(城灘) 남쪽에 장례하니, 향양리와 수십 리의 거리였다.
신씨는 고령(高靈)의 망족(望族)으로, 좌의정 용개(用漑)의 증손이고 판결사(判決事) 한(瀚)의 손녀이고 첨정(僉正) 여량(汝樑)의 따님이며, 비(妣)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영의정 광필(光弼)의 손녀이고 주부(主簿) 노겸(勞謙)의 따님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에 출생하였는데, 선생의 배필이 되어 예법을 어김이 없었다. 선생의 관작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자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고, 좌의정에 추증되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사림들이 재물을 모아 비석을 마련해서 선생의 신도비를 향양리에 있는 묘소 밖에 세웠는데, 부인의 묘소는 다른 지역에 별도로 있기 때문에 자손의 이름을 표석(表石) 뒤에 기록하였다.

우계 선생의 연보는 옛날 창랑공(滄浪公)이 지은 초본(草本)이 있었으나 소략하여 구비되지 못했는데, 선생이 서적을 널리 참고하고 첨삭(添削)을 가하여 책을 이루었으며, 또 묘비(墓碑), 묘지(墓誌)와 행장, 제문과 축문 등을 모아 부록을 만들고, 또 변무(辨誣)하고 신원(伸冤)하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원하는 등의 상소문을 모아 후록(後錄)을 만들어서 율곡 선생 연보와 합하여 한 질(帙)로 만들었다. 뒤에 이것을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서 간행하였고, 또 연보후설(年譜後說)을 만들어 우계 선생의 출처(出處)와 어묵(語默), 진퇴(進退)의 대절(大節)을 밝혔다. -노서연보(魯西年譜)-

광해군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사림들이 선생의 유문(遺文)을 간행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장계곡(張谿谷)이 중외에 통문(通文)을 돌렸는데, 머리말에 이르기를, “아래의 글은 재력을 모아 우계 성 선생의 문집을 간행해서 도맥(道脈)을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호서(湖西) 지방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를 유사(有司)로 삼고, 호남(湖南) 지방은 안우산(安牛山 안방준(安邦俊))을 유사로 삼는다. 음기(陰氣)가 쌓여 비색(否塞)한 때를 당하여 이미 율곡을 위해 묘비를 경영하여 세웠고, 또 선생을 위해 유집을 간행하려 하니, 당시 선비들의 기개가 늠름하여 꺾을 수 없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는바, 이는 몇 년이 안 되어 양(陽)이 다시 회복될 조짐일 것이다.” 하였다. 그 후 문집을 호남의 임실현(任實縣)에서 간행하였고 속집(續集)을 충청 감영에서 간행한 다음 판각(板刻)을 이산(尼山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보관하였다. -문집은 창랑공(滄浪公)이 문하의 여러분들과 편집하였고, 속집은 노서공(魯西公)이 누락된 문자들을 수습하여 편집하였다.

[주C-001]세 조항 : 우계연보보유 권1의 내용을 덕행(德行), 출처(出處), 답문(答問)으로 분류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1]행조(行朝) : 행재소(行在所)의 조정을 이른다. 행재소는 임금이 멀리 거둥하여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인데, 당시 선조(宣祖)는 의주(義州) 즉 용만(龍灣)에 피난해 있었다.
[주D-002]외로운 …… 기약하니 : 세한(歲寒)은 한 해가 저물어 추워지는 것으로, 공자(孔子)는 “한 해가 저물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하였는데, 이는 곤궁함을 당하여도 변치 않는 지사(志士)의 지조를 비유한 것이다.
[주D-003]지인(至人) : 성인(聖人)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인물을 말한다.
[주D-004]배견와(拜鵑窩) : 영평(永平)에 있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서실 이름이다.
[주D-005]만사(挽詞) :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가 우계를 위하여 지은 만사이다.
[주D-006]소금과 …… 손상당하였다오 : 소금과 매실은 모두 양념으로, 옛날 은(殷)나라의 고종(高宗)인 무정(武丁)이 현신(賢臣)인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훈계한 글에 “내가 국을 조리하거든 너는 소금과 매실이 되어라.[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인데, 이후로 군주와 신하가 서로 뜻이 합함을 비유하게 되었다. 패금(貝錦)은 자개 무늬의 비단으로, 비슷한 것을 부연하여 남을 모함함을 뜻하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조금 문채가 나는 것으로 자개 무늬의 비단을 이루도다. 저 남을 모함하는 자여 또한 너무 심하구나.[萋兮斐兮 成是貝錦 彼譖人者 亦已太甚]”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7]소미성(少微星) …… 숨었네 : 소미성은 처사성(處士星)으로, 이 별이 희미해지면 처사가 죽는다 하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8]무숙(茂叔)의 …… 있고 : 무숙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자(字)로, 일찍이 뜰 앞에 자라는 풀도 생의(生意)가 있다 하여 제거하지 않았는바, 우계를 염계에 비유하고 우계가 별세한 뒤로는 풀을 돌보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한 말이다.
[주D-009]자릉(子陵)의 …… 드리우나 : 자릉은 후한(後漢) 초기의 고사(高士)인 엄광(嚴光)의 자로, 소년 시절 동문수학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황제가 되어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불렀으나 끝내 세상에 나가 벼슬하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은둔하여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는바, 이 역시 우계를 엄광에 비유하여 다시 낚시질할 은사가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주D-010]구정(九鼎)과 일사(一絲) : 구정은 옛날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주조한 솥으로 매우 귀중함을 뜻하고, 일사는 실 한 오라기로 매우 하찮음을 뜻하는바, 곧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가볍게 여김을 말한 것이다.
[주D-011]신야(莘野) : 신(莘)나라의 뜰로, 옛날 여기에서 농사지으며 살았던 이윤(伊尹)을 가리킨 것이다.
[주D-012]봉황(鳳凰)의 …… 없다오 : 형산(荊山)은 초(楚)나라에 있는 산이며, 박옥(璞玉)은 돌 속에 들어 있는 옥으로 춘추 시대 변화(卞和)가 발견한 화씨벽(和氏璧)을 이르는바, 청송(聽松)의 아들인 우계가 원래 봉황새나 화씨벽처럼 아름다운 자질과 깨끗함을 갖추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3]파산(坡山)은 …… 근원이라오 : 곡구(谷口)는 중국의 지명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순화현(淳化縣) 서북쪽에 있었는데, 전한(前漢) 말기 고사(高士)인 정박(鄭朴)이 일찍이 이곳에 은거(隱居)하였으며, 하수(河水)는 하분(河汾)을 가리킨 것으로 보이는데, 수(隋)나라 말기 문중자(文中子)인 왕통(王通)이 은거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여기서는 우계가 살던 파산(坡山)은 곧 정박이 은거한 곡구와 같고, 우포(牛浦) 곧 우계(牛溪) 역시 왕통이 강학한 하분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4]푸른 꼴[靑蒭] : 생추(生蒭)와 같은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생추 한 묶음 가지고 가니, 그분 옥처럼 아름답네.[生蒭一束 其人如玉]” 하였다. 이는 현자(賢者)가 타고 다니는 흰 망아지를 먹이는 신선한 풀을 말한 것인데, 후세에는 현자를 사모하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주D-015]안정(顔亭)의 마지막 장(章) : 안정은 북송(北宋)의 정이천(程伊川)이 지은 안락정명(安樂亭銘)을 가리킨다. 안락정은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던 옛터에 지은 정자인데, 그 명(銘)의 마지막 장에 “우물을 차마 버려둘 수 없으며 땅을 차마 황폐하게 내버려 둘 수 없네. 아, 올바른 그의 학문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水不忍廢 地不忍荒 嗚呼正學 其何可忘]” 하였다. 당시 윤증(尹拯)이 파산(坡山)에 이르러 우계서당(牛溪書堂)에 유숙하였는데, 때마침 서당의 중수(重修)가 끝나자 시를 지어 “올바른 학문 이제 힘써야 하니 안정의 마지막 장 깊이 음미하네.[正學今當勉 顔亭味卒章]”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주D-016]선릉(宣陵)과 정릉(靖陵) : 선릉은 성종(成宗)과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고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인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25년(1592) 4월에 왜적에 의하여 파헤쳐지고 재궁(梓宮)이 불탔으며, 일부 유골과 수의(壽衣)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유골에 대하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등은 능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으나, 우계 등은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하여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주D-017]제첩문(題帖文) : 이 글은 《국역우계집》 권2에 ‘선고의 서첩 뒤에 쓰다[書先考書帖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18]위재(韋齋)와 축씨(祝氏)의 고사(故事) : 위재는 주자(朱子)의 부친인 주송(朱松)의 호이고 축씨는 주자의 모친인데, 주자가 두 분을 따로따로 장례한 일을 말한 것이다.
연보(年譜)
연보(年譜) [신작(申綽)]

선생의 성은 정씨(鄭氏)요, 휘(諱)는 제두(齊斗)이며 자(字)는 사앙(士仰)인데, 세계(世系)는 영일(迎日)에서 나왔다. 고려(高麗) 때의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인 습명(襲明)의 후손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익양백(益陽伯) 문충공(文忠公) 몽주(夢周)의 11대 손(孫)이다. 고(考)는 성균진사(成均進士)이며, 증직(贈職)이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인 상징(尙徵)이며 조(祖)는 의정부 우의정인 충정공(忠貞公) 유성(維城)이고 증조(曾祖)는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이며 증직이 의정부 영의정인 근(謹)이다.
인조 대왕(仁祖大王) 27년 기축 (서기 1649년)
6월 을묘 27일 유시(酉時) 선생은 한성부 반석방(漢城府盤石坊) 저택에서 태어났다.
효종 대왕(孝宗大王) 원년(元年). 경인 (서기 1650년)
2년 신묘
3년 임진
4년 계사 ○ 선생 5세
○ 9월에 황고(皇考)가 서거(逝去)하였다. 안산(安山) 추곡(楸谷)에 장사하였다.
5년 갑오
6년 을미
7년 병신
8년 정유
9년 무술
○ 선생은 겨우 스승[傅]에게 나가 배울 만한 나이가 되자 교관(敎官) 이상익(李商翼)을 따라서 배웠다. 때마침 동춘(同春) 송공(宋公 이름은 준길(浚吉))이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들렀다가 이공(李公)을 보고서 묻기를, “수학(授學)하는 아동(兒童) 중에 재주가 영특한 자가 있는가?” 하였더니, 이공은 선생을 가리키며 답하기를, “상익(商翼)으로서는 그의 스승이 되기에 부족합니다.”라고 대하였다. 뒤에 동춘은 선생을 보고 놀라면서 이르기를, “참으로 호련기(瑚璉器)로다!” 하였다.
10년 기해
현종 대왕(顯宗大王) 원년(元年) 경자 (서기 1660년)
2년 신축
3년 임인
4년 계묘
5년 갑진 ○ 선생 16세
○ 봄에 관례(冠禮)를 올렸다. 춘전(春田)이 판서(李判書) 경휘(慶徽)가 빈(賓)이 되었다.
11월에 황조(皇祖 돌아가신 조부) 충정공(忠貞公)이 서거(逝去)하였다. 호는 도촌(陶村)이고 관은 우의정이다. 이때 백부(伯父) 고양군(高陽君) 창징(昌徵)과 종형(從兄) 인평위(寅平尉) 제현(齊賢)이 모두 졸거(卒去)하였고, 종손(宗孫)은 어리고 약(弱)하였으므로 선생이 초상과 장례(葬禮)를 주관하여 치루었는데 예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면서부터는 충정공이 길러 주어서 자랐으므로 마음을 재계(齋戒)하고 맨밥을 먹어 가며 기년복(朞年服)을 마쳤다.
6년 을사 ○ 선생 17세
○ 정월 모갑(某甲)에 강화 진강(江華鎭江 뒤에 하곡이 이거한 곳이다)에 장사하였다.
○ 겨울에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부사(府使) 홍거(鴻擧)의 딸이며 서윤(庶尹) 흡(熻)의 손녀이고 문정공(文貞公) 황(煌)의 질손녀(姪孫女)이며 최 판서(催判書) 내길(來吉)의 외손녀이다.
7년 병오
8년 정미
9년 무신 ○ 선생 20세
○ 겨울에 별시(別試)로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성기책(聲氣策)이란 책문(策文)으로 시험을 치루었다.
10년 기유
11년 경술
12년 신해 ○ 선생 23세
○ 2월 정해 춘 5일 아들 후일(厚一)이 탄생하였다. 벼슬은 부평 부사(富平府使)였다.
○ 11월 정사(5일)에 부인 윤씨가 졸거하였다. 안산(安山) 추곡(楸谷)에 장사하였다.
13년 임자 ○ 선생 24세
○ 가을에 별시(別試)로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병려문(騈驪文)의 대책문으로 응시하였다가 전시(殿試)에서 낙제(落第)하였다. 처음에 선생은 모 부인의 분부로 외삼촌 이 서윤(李庶尹) 성령(星齡)을 따라서 과거 공부를 하여 여러 번 초시(初試)에 합격[發解]했는데 이때에 와서는 아우인 광주군(廣州君 이름은 제태(齊泰))이 과장(科場)에서 명성(名聲)이 높았으므로 선생은 어머님께 아뢰기를, “이제 제태(齊泰)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할 것이온대 형제가 모두 함께 이록(利祿)만을 일삼는다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과거 공부를 폐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였더니, 어머님은 허락하셨다. 드디어 문을 닫고 바깥일을 사절한 채 분적(墳籍)에 잠겨 생각하였고 육경(六經)을 정(精)하게 연구하였으며, 항상 무엇을 하면 하고야 마는 뜻을 가졌었다. 성품이 총명하고 기억력이 강하여 위로는 요ㆍ순(堯舜)의 때로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을 온통 속에다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이밖에도 백가(百家)의 여러 유파(流派)의 서적과 음양(陰陽)ㆍ성력(星曆)의 수(數)와 병사(兵事)ㆍ농업(農業)ㆍ의술(醫術)ㆍ약재(藥材)의 이론과 감여(堪輿)ㆍ복서(卜筮)의 기술에서부터 패관소설(稗官小說)과 자집(子集), 전고(典故)에 이르기까지 무릇 책에 기록된 것은 한 번 눈이 지나가면 곧 종신(終身)토록 잊지를 아니하여 항시 몸에 흠뻑 젖게 쌓아 두었다가 묻는 자가 있으면 곧 응답하였으나, 마침내 귀착하여 머무른 곳은 시서(詩書)와 육예(六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경전(經傳)의 전주(箋注)와 선유(先儒)의 의소(義疏)에도 세밀하게 털끝까지 분석하였으므로, 그 뜻은 은미하고 세밀하여 깊숙이 찾고 끄집어내어 그윽한 뜻을 발휘하였고 회통(會通)하여 막힘이 없었다. 독로(篤老) 이후에 이르러 서적을 오래 보지 않고서도 그 총명은 전날보다 감손(減損)되지 않았으며 글 뜻에 의심이 있어서 쫓아와서 묻는 이가 있으면 곧 경문(經文)을 입으로 외워 줄 뿐만 아니라 비록 제가(諸家)의 조그만 전주(箋註)까지에도 또한 암기(暗記)하여 외우며 조리 있게 답변하여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였다. 소릉(少陵) 최 상공(崔相公 이름은 규서(奎瑞))은 늘 선생을 보고 탄복하여 이르기를, “모공(某公)의 가죽 속에는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글로 꽉 차 있으니 또 무슨 책을 볼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14년 계축
15년 갑인 ○ 선생 26세
○ 봄에 남양 서씨(南陽徐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군수(郡守) 한주(漢柱)의 따님이며 유 익위(柳翊衛) 충걸(忠傑)의 외손녀(外孫女)이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 원년 을묘 ○ 선생 27세 (서기 1675년)
2년 병진 ○ 선생 28세
영동(嶺東)에 갔다.
3년 정사 ○ 선생 29세
○ 3월에 다시 영동에 갔다. 선생은 오래 전부터 세상을 멀리하고 숨어 살 뜻이 있었는데 때마침 사람들이 북방의 변보[北報]가 염려된다고 함에 따라서 이형(姨兄)인 김 참판(參判) 몽신(夢臣)과 함께 강릉부 우계역(江陵府羽溪驛)에 이르렀다가 그곳의 그윽하고 조용한 것을 사랑하여 거주하고자 하였으나 후에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년 무오
5년 기미
6년 경신 ○ 선생 32세
○ 여름에 영의정 김공(金公) 수항(壽恒)이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상께서 조정에 선비를 천거하라고 분부하자 김공은 선생을 경명행수(經明行修)로서 맨 먼젓번의 천망(薦望)으로 선정하여 올렸다.
○ 5월 갑진(16일)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는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김공의 천거로 이 직책에 제수되었는데 때마침 선생은 학업을 닦는 데 너무 애를 쓰고 밤낮이 다하도록 그칠 줄을 모르다가 드디어는 기(氣)가 허(虛)하여 병이 생겼으므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7년 신유
8년 임술 ○ 선생 34세
○ 12월 경자(27일)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임명되었는데 나가지 않았다. 이 해에 선생은 갑자기 병이 더욱 심하여 여러 번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손수 글을 써서 일신(一身)의 뒷일을 아우인 광주군(廣州君)에게 맡겼다. 그리고 남계 선생(南溪先生)에게 편지까지 올려서 고결(告訣)하였다. 어머니는 자주 탄식하시며 이르기를, “모(某)의 병은 실로 각고(刻苦)하며 공부하기를 숭상하다가 생겼다. 인정(人情)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그러한 학업은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선생은 몹시 어머님의 염려하시는데 근심이 되어 자못 스스로 몸을 아꼈으므로 드디어 점차로 온전하게 회복되었으며, 중년 이후부터는 근력(筋力)이 건강하여 소장(少壯) 시절보다 더 나아졌으며 드디어 대질(大耋 80세가 넘은 노인)을 누리게 되었다.
9년 계해 ○ 선생 35세
이 해 조의(朝議)에서는 대직(臺職)을 가지고 선생을 처우(處遇)하려고 했으나 이형(姨兄) 심 응교(沈應敎) 유(濡)가 때마침 삼사(三司)에 있었기에 선생은 병이 있고 또한 어머님이 늙으시어 봉양하여야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벼슬하는 것이 불안함을 염려하여 제공(諸公)에게 애써 부탁하여 중지케 하였다.
○ 딸이 이징성(李徵成)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전의인(全義人)이며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겸(廷謙)의 아들이었고 벼슬은 성천 부사(成川府使)였다.
10년 갑자 ○ 선생 36세
○ 3월 갑술(8일)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 벼슬한 지 며칠 만에 병으로 체직(遞職)되었다.
11년 을축
12년 병인 ○ 선생 38세
○ 11월에 아들 후일(厚一)이 이씨(李氏)의 딸을 부인으로 취(娶)하였다. 연안인(延安人)이며 부제학(副提學) 정관재(靜觀齋) 단상(端相)의 따님이었다.
13년 정묘
14년 무진 ○ 선생 40세
○ 4월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여공(呂公) 성제(聖齊)와 호조 판서(戶曹判書) 유공(柳公) 상운(尙運)이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 겨울에 어머님을 모시고 장성 현아(長城縣衙)에 갔다. 광주군이 때마침 장성 현감(長城縣監)이 되었었다.
○ 12월 병인(27일)에 평택 현감(平澤縣監)에 임명되었다.
15년 기사 ○ 선생 41세
○ 2월에 부임하였다. 이때 모 부인의 분부 때문에 서울에 들어와서 임금께 사은(謝恩)한 다음 부임하였다.
○ 4월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관리에게 문초(問招)를 받았다. 이때에 이 문성(李文成 율곡)과 성 문간(成文簡 우계) 두 선생이 문묘(文廟)의 배향(配享)에서 쫓겨나게 되자, 선생은 벼슬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벼슬을 버리고 안산(安山) 추곡(楸谷)으로 돌아왔는데 안사(按使)가 직무 이탈[擅離]을 이유로 삼아 문죄하게 되었다.
○ 7월에는 죄가 용서되었으므로[赦罪] 안산(安山)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따라서 추곡에 집을 짓고서 살았던 것이다.
○ 겨울에 모 부인을 뵈러 장성(長城)에 갔다.
16년 경오 ○ 선생 42세
○ 정월에 어머님을 뵙고서 그곳에서 돌아왔다. 어머님의 회갑(回甲)을 현아(縣衙)에서 차리고 돌아왔다.
17년 신미 ○ 선생 43세
○ 황고(皇考 돌아가신 아버님)를 강화(江華)로 옮겨 장사하였다. 진강산(鎭江山)의 충정공(忠貞公 조부)의 묘(墓) 동쪽인데 장사 지낸 달[月]은 모른다.
○ 윤 부인의 묘를 천안(天安)으로 옮겨 장사하였다. 천안군 북쪽 부토리(富土里)인데 옮긴 달은 모른다.
○ 겨울에 어머님을 뵈러 장성(長城)에 갔다.
18년 임신 ○ 선생 44세
○ 어머님을 모시고 돌아왔다. 어머님이 장성에서 돌아와서 서울 집[京邸]에 계셨는데 이때에 모시고 추곡(楸谷)으로 돌아왔다.
19년 계유
20년 갑술 ○ 선생 46세
○ 정월 무진에 황비(皇妣 돌아가신 어머님) 이씨(李氏)가 졸거하였다. 한산인(韓山人)이며 예조 판서(禮曹判書) 정간공(貞簡公) 호암(浩庵) 기조(基祥)의 따님이었고, 이조 판서 대제학(大提學) 창곡(蒼谷) 현영(顯英)의 손녀였으며, 승지(承旨) 신응구(申應榘)의 외손이었는데 뒤에 선생이 귀(貴)하게 되어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다.
○ 4월 모갑(某甲)에 추곡(楸谷)에 장사하였다. 세운(歲運)이 좋지 못하여 진강(鎭江)에 합장(合葬)하지 못하였다. 이때 아우인 부윤공(府尹公 제태를 말함)이 관서(關西)로 귀양 갔으므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4월에야 비로소 장사하였다.
21년 을해 ○ 선생 47세
○ 2월에 남계(南溪) 박 선생에게 조곡[哭]하였다. 이름은 세채(世采), 자는 화숙(和叔), 벼슬은 좌의정, 시호는 문순(文純)이었다. 선생이 종유(從遊)하기를 가장 오래하였으므로 부음(訃音)이 이르자 위(位)를 만들어 곡(哭)하고 시마복을 입었으며, 장사 때에 또한 가서 회장하였다.
22년 병자 ○ 선생 48세
○ 6월 임진(8일)에 서연관(書筵官)에 뽑혔다. 이때 동궁의 나이가 열 살이어서 공부가 날로 진취하기 시작하자 조의(朝議)에서는 이름난 선비를 초대하여 출입하며 근강(勤講)케 하였는데 무릇 선출된 8명은 전 정언(正言) 이세필(李世弼) 전 현감 - 즉 선생 - 인천 현감(仁川縣監) 이희조(李喜朝), 영평 현감(永平縣監) 민이승(閔以升) 전 주부(主簿) 이기주(李箕疇), 공조 좌랑(工曹佐郞) 박담(朴鐔), 전 주부 김창흡(金昌翕), 예산 현감(禮山縣監) 이세귀(李世龜) 등이었는데 선생은 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상소문은 문집에 보인다. [A본 4책 소(疏) 1. (以下同) 사서연관소, 병자 참조. 재소와 비는 일(逸)]
○ 이조판서 최공(崔公) 석정(錫鼎)이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최공이 통용(通用)과 탁용(擢用)의 두 가지 조목으로 선비들을 천거하였는데 선생도 이에 끼었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들은 평생 글을 읽었으나 나라에는 척촌(尺寸)만큼도 보답한 것이 없었으니 오직 서연관 직만은 직무 때문에 분주(奔走) 할 것도 없고 또한 당론(黨論)으로 다투며 싸울 처지도 아니니 분수를 다하여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거늘 만약에 소명이 있으면 의리상으로도 굳이 사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후에 대신(臺臣) 신임(申銋)은 최공이 천거한 조목이 잘못이라고 배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께서는 도리어 임(銋)의 협잡을 미워하시어 엄한 교지[嚴旨]로서 해변 가의 고을[海邑]로 좌천시켰다. 선생은 소를 올려 의리를 말하고[引義] 끝내 나가지 않았다. 소는 빠뜨렸다.
○ 성재(誠齋) 민공(閔公)에게 곡(哭)하였다. 민공의 이름은 이승(以升), 자는 언휘(彦暉), 천관(薦官)으로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선생과 더불어 가장 우의(友誼)가 돈독하였으며 글 뜻에 의심나는 곳이 있을 때에는 곧 자상하고 확실하게 강론하여 각기 정미로웠고 마음을 털어놓았으며 비록 의견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반드시 극론(劇論)하므로서 한 군데로 돌아간 뒤에야 끝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참판(參判) 이세필(李世弼)에게 준 글에서 “성대하고 빛나도다. 당세(當世)의 군자여! 이승(以升)은, 다행이도 여화(汝和)의 박흡(博洽)과 덕함(德涵)의 전섬(典贍)과 중화(仲和)의 정약(精約)을 주선할 수 있었고 청명(淸明)하고 강수(剛粹)한 자질로써 이를 겸하였으며 반궁(反躬)과 실천(實踐)으로 이를 구했던[濟之] 학자는 저 정사앙(鄭士仰)뿐이던가!”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추곡(楸谷)의 학문에서 만약 범위의 넓은 곳을 가지고 논한다면 혹 옛사람에게는 조금은 손색이 있으나 밝게 나아가고 스스로 얻으려던[自得] 지취(旨趣)에서는 이 세상에서 뒤따라갈 이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의 학문을 박문순(朴文純)에게 헐뜯는 자가 있었는데 공(민공을 말함)이 마침 자리에 있다가 정색(正色)하며 이르기를, “사앙(士仰)이 어찌 일찍 격치(格致)ㆍ성정(誠正)ㆍ효제(孝弟)ㆍ충신(忠信)의 학문을 아니하였던가?”라고 반문하였으며, 임종할 때에는 세 아들에게 유언하여 선생께 수학하기를 명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그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었으며 제문을 지어 제사하였는데 문집에 보이며, 선생은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를 자기의 자식이나 조카처럼 하였다.
○ 11월 계유(20일)에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23년 정축 ○ 선생 49세
○ 8월 모갑(某甲)에 황비(皇妣 돌아가신 어머니)를 진강(鎭江)으로 옮겨 장사하였다. 찬성공(賛成公)의 묘(墓)에 부장(附葬)하였다.
○ 남계 선생(南溪先生)의 묘에 제사하였다. 제문은 문집에 보인다.
24년 무인 ○ 선생 50세
3월에 광주군에게 곡하였다. 이름은 제태(齊泰), 자는 사첨(士瞻), 벼슬은 광주 부윤(廣州府尹)이었다.
○ 11월 경인(19일)에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賛)에 임명되었는데 사임하였다.
25년 기묘
26년 경진 ○ 선생 52세
○ 정월 계해(29일)에 부인 서씨(徐氏)가 졸거하였다. 안산 추곡에 권조(權厝 임시로 장사함)하였다.
○ 경자에 삭녕 군수(朔寧郡守)에 임명되었는데 사임하였다.
○ 10월에 여주(驪州)에 갔다. 자형 민 판서(判書) 진주(鎭周)의 장례식에 회장(會葬)하였고 광주군을 지평(砥平)에 옮겨서 장사하였다
27년 신사 ○ 선생 53세
○ 8월 기사(15일) ○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昇遐)하여 분곡(奔哭)하였다. 대궐 밖에 달려가 산반(散班)에서 곡하였다.
28년 임오 ○ 선생 54세
○ 12월 병오(30일)에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에 임명되었다.
29년 계미 ○ 선생 55세
정월에 충정공의 시호가 내린 데 대하여 사은(謝恩)하였고 얼마 후에 주부직(主簿職)을 사임하였다.
30년 갑신
31년 을유 ○ 선생 57세
○ 2월 계사(29일)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임명되었는데 사임하였다.
32년 병술 ○ 선생 58세
○ 봄에 판부사(判府事) 윤공(尹公) 지완(趾完)이 선생을 조정에 추천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별도로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령이 있자 윤공(尹公)이 소를 올려 선생을 천거하여 대략 이르기를, “전의 도사(都事) 정모(鄭某)로 말하면 명문(名門)의 집에 태어나서 일찍이 과거 보는 일을 버리고 글을 읽고 뜻을 구하였으므로 명성이 크게 드러나서 일찍이 천섬(薦剡)에 들었사온데 한 번 관리에 임용[奉撽]되었으나 후에는 벼슬에 뜻을 끊고 초야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품을 논한다면 금옥(金玉) 같은 군자(君子)이오며 재주로 말한다면 고금(古今)을 넓게 통달하였으므로 신은 항시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정성으로 감복되었던 바입니다. 이 나라의 큰일을 잘 꾸려 나갈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으로 생각되오니, 진실로 원하옵건대, 조정에서는 선비를 수용하는 상례(常例)만을 따르지 마시옵고 먼저 관찰사[方岳]의 직무를 주어서 시험해 보시었다가 그로 하여금 조정의 일[廟謨]을 돕게 하오면 세상을 건질 만한 좋은 그릇이며 나라를 편안케 할 어진 보필(輔弼)이 될 만하옵니다.” 하였다. 윤공의 호는 동산(東山), 벼슬은 우의정, 시호는 충정(忠正)이었다.
○ 7월 정묘(12일)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는데 세 번 상소를 올려서 체직되었다. 소는 문집에 보이나 비(批)는 빠졌다.
33년 정해 ○ 선생 59세
○ 10월 무술(20일)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는데 사임하였다.
34년 무자 ○ 선생 60세
○ 봄에 지포(芝浦) 박공(朴公)에게 곡하였다. 이름은 심(鐔) 자는 대숙(大叔) 천관으로 자의(諮議)를 지냈는데 선생이 추곡에 거주하자 박공(朴公)도 또한 지포에 와서 살았다. 지포는 같은 고을 땅이다. 자주 강회(講會)가 있어 우의(友誼)가 심히 돈독하였다. 박공이 서거하자 시마복을 입고 곡하였으며 제문을 지었는데 문집에 보인다.
3월 을미( 일)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소를 올려서 체직되었다. 소는 문집에 보이고 비는 빠졌다.
○ 4월에 죽산(竹山)에 갔다. 외조부 호암공(浩庵公)을 개장하는데 개장(改葬)하였다.
○ 7월 을유(11일)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는데 세 번 소를 올려서 체직되었다. 1, 2의 소는 본문에 보이나 3소는 빠졌으며 비도 모두 빠졌다.
35년 기축 ○ 선생 61세
2월에 요사(夭死)한 장손(長孫)을 곡하였다.
○ 7월 을미(26일)에 세자익위사 익위(世子翊衛司翊衛)에 임명되었다.
○ 8월에 강화(江華) 하곡(霞谷)으로 옮겨서 살았다. 선생은 장손이 요사하는 변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였으며 따라서 선묘(先墓) 가까운 곳에 살고자 하여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 선생은 깊이 외물(外物)에 힘쓰거나 명예를 숭상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학도(學徒)들이 배우고자 하여 찾아오는 것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문하(門下)에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약간 있었는데 그 뒤 안산(安山)에서 섬중[島中]으로 옮겨 살게 된 뒤로는 거의 세상 사람과 상종이 끊겼고 비록 더러 사모(思慕)하여 종유(從遊)하려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왕래하기가 험악하여 쉽사리 오갈 수가 없었으므로 선생의 문장(文墻)에 출입하는 이는 더욱 적었던 것이다. 선생의 뜻은 다만 스승의 도를 자처(自處)하고자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말세(末世)에는, 쉽게 높아지고 명실(名實)은 분변하기가 어렵게 되니 세도(世道)의 폐단을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 9월 신사(14일)에 집의(執義)로 천직(遷職)되었는데 두 번 소를 올려서 사퇴하였다. 소는 모두 문집에 보인다.
○ 10월 계묘(6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호조 참의(戶曹參議)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는데 세 번 소를 올려서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이때 대신들이 모두 임금께 아뢰었고 또한 윤공의 천거한 글[薦章]을 인용하여 발탁해서 승진시키기를 청했던 까닭에 이 명령이 있었다. 선생의 상소문에 대략 이르기를, “신의 집안은 대대로 은총을 받음이 가장 무거웠으므로 참으로 옛사람과 같이 나라에 생명을 바칠 의리가 있습니다만 재분(才分)이 둔하고 용렬하여 여러 번 과거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천장(薦章)까지 있게 된 것은 더욱이 부끄럽고 송구한 바이옵니다. 더욱이 또한 외람되게 낭서(郞署)의 명을 받았고 시골[下邑]에서 직무를 받들었는데 비록 사의(私義)의 만 분의 일도 보답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천한 분수로서는 이미 과분했던 것입니다. 재주도 없는 것이 게다가 병이 많아서 직책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옵기에 스스로 달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온데, 벼슬에 뜻을 끊고 초야에 숨어서 살겠다고 하온 것은 신이 벼슬을 않음으로써 고고(孤高)하다고 생각하고 물러남으로써 뒤에 벼슬에 나아가는 기연으로 삼는 것은 옛사람도 두려워했던 바이옵니다.”라고 하였다. 계속 세 번 소를 올렸는데 상께서는 우악(優渥)한 비지(批旨)를 내리시고 모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소는 모두 문집에 보인다.
○ 상께서 몸이 미령(未寧)하시어 강교(江郊)에 나아가서 문안을 드렸다.
36년 경인 ○ 선생 62세
○ 2월에 다시 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이며 비는 빠졌다.
○ 9월 경자(9일)에 강원도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다가 얼마 후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37년 신묘 ○ 선생 63세
7월 무자(1일)에 회양도호부사(准陽都護府使)에 임명되었다. 8월에 부임하였다. 왕명이 있었는데도 곧 사양만 하는 것이 분수가 아니므로 애써 부임하였던 것이다.
○ 9월에 금강산(金剛山)을 유람(遊覽)하였다.
○ 10월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선생이 정사(政事)를 한 지 3개월 만에 교화(敎化)가 크게 행하여졌다. 때마침 흉년(凶年)이었으므로 편의에 따라서 골고루 구제하고 유망민(流亡民)을 구출하여 모두 회복시켰는데 안렴사(按廉使)는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르기를, “청백(淸白)한 것이 옥호(玉壺)와 같고 은혜는 봄바람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올 때에는 술안주를 가지고 따라 나와 전송하는 이가 수십 리 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철비(鐵碑)을 세워서 내내 추모하였다.
심경집의(心經集義)를 편찬하였다. 일찍이 《심경부주(心經附註 정황돈(程篁墩)의 저작)》의 번무(繁茂)함을 병통으로 여겼으므로 이 편찬이 있었다.
38년 임진
39년 계사
40년 갑오 ○ 선생 66세
《정문유훈(程門遺訓)》을 편찬하였고 《정성서(定性書)》를 주해(註解)하였다.선생은 평소 정명도(程明道)의 말을 외우고 음미하였으므로 그 말을 채취(採取)하여 문목(門目)을 나누어 세 편의 책으로 만들고 《정문유훈》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정성서(定性書)》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절실하되 강론하는 자가 많이 그 취지를 잃으므로 드디어 주해(註解)한 것이다. 하곡은 대체로 정백자(程伯子)를 흠모하고 좋아하기를 깊게 했던 까닭에 그의 언동(言動) 사이에는 저절로 많이 부합되었고 마음에 즐기고 마음 갖기를 높고 밝게 하였으며 문자(文字)의 밖에서 초월하여 깊이 들어갔으니[深造] 스스로 얻으려던 지취와 신묘한 도리와 정미한 의(義)의 발단이 자연히 남몰래 모이고 묵묵히 이루어졌으며 힘쓰기를 오래하여 더욱 드러내려는 징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만년(晚年)에는 기상(氣象)이 화수(和粹)하고 고랑(高朗)하였으며 표리(表裏)가 명백하였으니 이는 명도에게서 얻어서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문자에 있어서도 또한 같아서 수미(首尾)와 체단(體段)에는 법규(法規)를 쓰지 않아도 서독(書讀)과 장소(章疏) 따위가 마음 가는 대로 쏟아져 나왔는데 다만 그 본뜻을 볼 수 있게 하였을 뿐인 까닭에서였다. 사람들이 혹 그의 잘잘못을 허물하였으나 오직 명곡(明谷) 최공(崔公)만은 깊이 칭찬을 가(加)하였으니 대체로 그가 한 언어(言語)에는 저절로 본(本末)과 곡절이 있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41년 을미
42년 병신 ○ 선생 68세
○ 명곡(明谷) 최공(崔公)에게 곡하였다. 이름은 석정(錫鼎) 자는 여화(汝和),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었다. 최공은 선생과 함께 죽마의 교분[竹馬交]을 맺고 뜻이 합치되어 서로 허락[契許]하기를 매우 돈독(敦篤)히 하였는데 최공은 이르기를, “내가 여러 공(公)들과 함께 강설(講說)할 적에는 항상 신을 신고 그 위에서 긁는 것[隔搔] 같았는데 사앙(士仰)의 한마디 말만 듣고서도 나도 모르게 구름이 흩어지고 안개가 거쳤으며 매양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글을 보내어 묻고 의논하여 그의 답변을 얻었는데, 곧 이르기를, “이는 이른바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도(道)이며 명체(明體)와 적용(適用)의 학문이다.” 하였다. 부음(訃音)이 오자 위(位)를 만들어 곡(哭)하였다.
43년 정유 ○ 선생 69세
○ 3월 무오(9일)에 상께서 온양(溫陽)에 납시게 되자 강상(江上)에 나아가서 경건하게 전송하였다. 상께서 온천에 순행하시려 하매 3월(본문 2월은 3월의 잘못임) 을묘(6일)에 선생은 강상(江上)에 이르러 잠시 잠실촌(蠶室村)에 머물렀다가 무오 9일에 전송하였으며, 경신(5일)에는 동호(銅湖)에 가서 귀천(龜川) 이공(李公) 세필(世弼)을 방문하였고, 임술(7일)에는 용인(龍仁)으로 가서 선조(先祖) 문충공(文忠公)의 묘(墓)에 참배하였으며, 이어 산 아래에 머물면서 일가(一家)인 정 산음(鄭山陰) 찬휘(纘輝)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서원(書院)을 옮겨 세우고 제의(祭儀)와 족보(族譜)를 수정(修整)하였으며, 갑신(甲申) 그믐날에 다시 잠실(蠶室)로 돌아왔다.
○ 4월 정해(3일)에 어가(御駕)가 돌아옴에 전송하였다. 기축(5일)에 고양(高陽)으로 가서 백부(伯父) 찬성공(贊成公)의 묘소에 참배하였으며 하곡촌(霞谷村)에 악질(惡疾)이 전염하였으므로 계속 산소 아래에서 머물렀다.
○ 5월 병진(3일)에 서울 집에 들어왔다가 기묘(26일)에 서강(西江)에 나아가 있었다. 선생은 나라에 큰 일이 있지 않으면 일찍이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서울에 들어왔더라도 언제나 여관[旅舍]에 머물렀는데 이때는 학질(虐疾) 때문에 서울 집에 있었으나 병이 나은 후에는 곧 강사(江舍)를 빌어서 나가 있었다고 한다.
○ 7월 을묘(3일)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44년 무술 ○ 선생 70세
○ 2월에 단의빈(端懿嬪)이 서거하자 시사복(視事服)과 연거복(燕居服)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시사복과 연거복의 복제(服制)가 다른가의 여부를 가지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은 대답하기를, “옛날 인군(人君)의 예(禮)에는 수시로 길흉(吉凶)에 따라서 각각 그 복제를 다르게 하였으니 주(周) 나라 강왕(康王)이 면류관을 벗고 상복(喪服)을 입었던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였다. 의대(議對)는 문집에 상세하다.
○ 10월에 단의빈에 대한 복제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대전(大殿)께서는 마땅히 빈궁(嬪宮)을 위하여 기년복(期年服)과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는 것과 동궁(東宮)은 마땅히 기년복을 입는데 장기(杖期), 부장기(不杖期)를 입는 것을 가지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나와서 수의(收議)하였는데, 선생은 대답하기를, “큰 자부(子婦)에 대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은 개원(開元 당 나라의 현종의 연호) 이래로 이미 정해진 제도가 되었으며 우리나라도 이를 따랐던 것인데 임금의 세자나 대부(大夫)의 맏아들이 아내를 위하여 부장기(不杖期)의 복을 입는 것은 고례(古禮)에도 명문(明文)이 있사오니 청컨대 대전(大殿)께서는 후왕(後王)의 제도를 따라서 기년복(朞年服)을 입으시고 동궁께서는 압강(壓降)의 의(義)를 좇아서 부장기(不杖期) 의를 입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의대는 문집에 상세하다.
45년 기해 ○ 선생 71세
○ 2월 병진(13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昇進)되었다. 이때 상께서는 태조(太祖)의 고사(故事)를 따라서 기사(耆社)에 들게 하셨는데 사대부(士大夫)는 71세 이상이면 모두 은전(恩典)을 베푸는 까닭에 이번 명령이 있었다.
○ 8월 기사(29일)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 10월에 가묘(家廟)가 신계(新溪)로 갔었는데 배종하여 경상(境上)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7월에 부평군(富平君)이 신계 현령(新溪縣令)에 임명되었다. 이에 이르러 가묘를 모시고 선생이 배종하여 승천포(昇天浦)까지 갔다가 배례하고 돌아왔다.
○ 11월 경신(9일)에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이며 비(批)는 빠졌다.
46년 경자 ○ 선생 72세
○ 12월에 체직(遞職)되었다.
○ 정월에 상께서 미령(未寧)하시자 임오(3일)에 서울에 들어와 문안을 드리고 곧 통진(通津)으로 물러나갔다가 신묘(12일)에 돌아왔다.
○ 3월 갑술(7일)에 통진에 나가서 문안을 드리고 병술(19일)에 돌아왔다.
○ 4월 임술(26일)에 서울에 들어가 문안을 드리고 갑자(28일)에는 통진으로 물러나와 있었다.
○ 6월 무술(3일)에 서울에 들렀다가 예궐(詣闕)하여 문안을 드렸는데 계묘(8일)에는 상께서 승하(昇遐)하셨고 무신(13일)에 성복(成服)을 하였으며 이튿날에 돌아왔다. 계묘(8일)에 외반(外班)에 나가서 조곡(吊哭)하였고 기유(14일)에는 돌아왔다.
○ 7월 정묘(2일)에는 조석(朝夕) 상식(上食)에 곡(哭)할 때 지팡이를 잡는 의식[朝晡哭臨受杖儀]에 대하여 의논을 모았는데 사양하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나왔다.
○ 경인(25일)에 군신(群臣)들의 연거대(燕居帶)에 대한 의논에 대답[對]하였다. 조정 관원[朝官]들의 연거 때의 착용할 띠와 유생들이 어떤 띠를 착용해야 할 것인가를 예조 좌랑이 나와서 의견을 모았는데 선생은 대답하기를 모두 같이 포대(布帶)를 착용하여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상세하다.
○ 8월 정미(13일)에 대한 의논[新授職人追服當否議]에 대답하였다. 예조 좌랑이 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은 상(喪)을 들은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추복(追服)이 부당하다고 대답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자세하다.
○ 10월 갑인(21일)에 명릉(明陵)에 나아가서, 하관하는[下玄宮] 곡반(哭班)에 참례하였다. 정미(14일)에 서울에 들어왔다. 계축(20일)에 발인(發靷)하였는데 상여를 길에서 맞아 곡하였으며 능소(陵所)까지 따라가서 갑인(21일)에 현궁의 하관식(下棺式)의 곡반에 참례(參禮)하고 을묘(22일)에 돌아왔다.
○ 11월 병인(3일)에 대행(大行 돌아가신 왕을 말함) 졸곡(卒哭)에 부(府)에 나아가 망곡(望哭)하였다.
○ 《중용설(中庸說)》을 저작(著作)하였다.
경종 대왕(景宗大王) 원년(元年) 신축(辛丑) ○ 선생 73세. (서기 1721년)
○ 4월 을묘(25일)에 배천(白川)에 가서 선조(先祖)의 묘에 성묘하였다. 7대 조(祖) 감찰공(監察公)의 묘(墓)가 배천우점(白川牛岾)에 있었으므로 가서 성묘하였다. 개성부(開城府)를 거쳐 송양서원(崧陽書院)에 참배[參謁]하였으며 장단(長湍)에 이르러 외가의 선대 묘소에 참배하였고 이어서 막내 외숙모와 내제(內弟) 명필(明弼)의 묘에 곡하였다.
○ 5월 임술(2일)에 돌아왔다.
○ 6월에는 국연(國練 나라의 소상을 말함)으로 서울에 들어와 밖의 곡반에 참례하였는데 상께서는 머물러 달라고 돈유(敦諭)하였으나 곧 사양하고 돌아와서 소를 올려 죄를 청하였다. 병신(6일)에 서울에 들어갔다가 무술(8일)에 연반(練班)에 나갔는데 정원(政院)에서 계(啓)를 올려 머물기를 청하였으므로 상께서는 별유를 내리어 꼭 머무르도록 하였으나 선생은 사양하고 이날로 돌아와서 소를 올려 죄를 청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 을사(15일)에 연대(練帶)에 대한 수의(收議)가 있었는데 사양하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 8월 기미(1일)에 윤 부인을 천안군(天安郡)으로 옮겨 장사하였다. 그전 묘소(墓所) 가까이에 개장하였다.
《경학집요(經學集要)》를 편찬하였다. 학자가 전소(箋疏)에 애를 쓰다가 도리어 경문(經文)을 경홀하게 하는 것을 염려하여 경전(經傳)의 요지를 엮어서 이 책을 만들었다.
○ 8월 정미(13일)에 새로 직첩을 내린 자에 대한 추가 복제의 당부(當否)
2년 임인 ○ 선생 74세
○ 3월 정유(12일)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다. 소를 올려 사퇴하였는데 허락되지 아니하였으며 소는 문집에 보인다.
○ 7월 갑오(11일)에 세제시강원 찬선(世弟侍講院贊善)에 임명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본직(本職)인 대사헌에다 겸임(兼任)케 되었는데 초소(初疏)는 문집에 보이고 재소(再疏)와 삼소(三疏)는 빠졌다.
○ 9월 경자(18일)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옮겨 임명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3년 계묘 ○ 선생 75세
○ 2월에 외방(外方)에 있는 탓으로 체직(遞職)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었는데 네 번 상소하여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 12월에 이르러 체직되었다.
4년 갑진 ○ 선생 76세
○ 윤사월(閏四月)에 명릉(明陵)의 지문(誌文)에 대한 의논을 모았는데 사양하고 답변하지 않았다. 예조 좌랑이 나왔다.
○ 6월 병신(25일)에 상께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불렀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사관 이수익(李壽益)이 와서 선유(宣諭)하였으며 이후부터는 별유(別諭)와 비지(批旨)는 모두 사관이 가지고 와서 알렸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며 소는 문집에 보인다.
○ 7월 계묘(2일)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에 임명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이며 비(批)는 빠졌다.
○ 8월 을미(25일)에 상께서 승하(昇遐)하시어 분곡(奔哭)하였고 복제의절(服制儀節)에 대한 의논에 대답하였다. 선생이 분곡(奔哭) 하고자 서울에 들어와서 대궐 아래 반(班)에 나가 있었는데 간원(諫院)이 복제의절에 대하여 유신(儒臣)들에게 묻기를 청함에 예관(禮官)이 곡반(哭班)에 나와서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마땅히 오례의(五禮儀)와 선조(先朝) 때 증수(增修)한 정제(定制)를 지켜야 하되 다만 생원과 진사 생도(生從)가 백의관(白衣冠)으로 3년 복을 입는 제도는 옛날의 예(禮)의 제최 3월(齊衰三月)임을 보면 백의립(白衣笠)을 입는 것은 너무 가볍고 3월의 기복(期服)이면 3년을 마치는 것이 너무 과한 것이어서 전에도 여러 선비들이 이 때문에 의심하였거늘 지금 만약 생포대(生布帶)로 성복(成服)을 하고 졸곡(卒哭)에 이르면 백립(白笠)과 백의대(白衣帶)를 입고 그대로 삼년상(三年喪)을 마치는 것이니 고례(古禮)를 참작하고 현행을 참고하는 의(宜)에 합당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자세하다.
○ 왕대비(王大妃)의 복제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이인복(李仁復)이 소를 올려 일컫기를 “숙종은 단의빈을 위하여 이미 장부(長婦)에 대한 기년복을 입었으니 왕대비는 대행(大行)을 위하여 마땅히 장자복(長子服)으로 3년을 입으셔야 한다.”고 하매, 선생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예에 장부에는 모두 기년복을 입는 것이니 선조(先朝)에서 기년복을 입은 것은 우리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인데 지금 만약 이것을 증거 삼아 3년의 의(義)를 이룬다는 것은 심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였다. 의대는 문집에 자세하다. 경자(30일)에 성복하였다.
○ 9월 임인(2일)에 돌아왔다.
○ 을사(5일)에 사관을 보내어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선생이 돌아온 지 수일 만에 상께서 사관을 보내어 별유(別諭)로 부르며 이르기를, “경이 도성(都城)에 들어온 것은 알았으나 복상(服喪)중이어서 애써 머물게 하지 못하였는데 막상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보니 몹시 허전함을 이기지 못하여 좌사(左史)를 보내서 나의 속마음을 가지고 타이르니 모름지기 양조(兩朝)의 은고(恩顧)를 깊이 생각해서라도 곧 사관과 함께 생각을 돌려 길을 떠나기 바라오.”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서계(書啓)로 아뢰어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겠다는 뜻을 아뢰었다. 끝으로 인군(人君)이 극(極)을 세우는 도리와 성왕(聖王)의 질경(疾敬)의 덕(德)을 권면(勸勉)하였다. 계는 문집에 보인다.
○ 영휘전(永徽殿)에 축문(祝文)을 고(告)할 때의 속칭(屬稱)에 대한 의논에 대답하였다. 상께서 새로 위(位)에 오르시자 마땅히 단의왕후(端懿王后)의 사당에 축문(祝文)을 고해야 하였는데 좨주명칭(祭主名稱)이 어려워서 대신이 선생께 문의하기를 청하였다. 예관(禮官)이 나와서 의견을 모았는데, 선생은 대답하기를, “마땅히 《두씨통전(杜氏通典 두우(杜佑)》의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말함)에 따라서 애사(哀嗣)라고 칭해야 합니다.” 하였더니, 상께서는 이에 따랐다. 의대는 문집에 상세하다.
○ 정미(7일)에 사관을 보내서 회유(回諭)를 내리고 같이 오라고 명하였는데 사양하고 통진(通津)에 나아가서 죄를 청하였다. 사관에게 명하여 회유(回諭)를 내려서 돈소(敦召)하자 서계를 부쳐서 아뢰었고 다음날 통진에 나가 있었는데 사관이 머물렀다. 계는 문집에 보인다.
○ 경술(10일)에 사관이 찾아와 돈소(敦召)하였고 갑인(14일)에 다시 선소(宣召)하였는데 모두 사퇴하였다. 상께서 다시 사관을 보내어 회유(回諭)하였고 또 돈소(敦召)하였는데 서계(書啓)를 부쳐서 아뢰었다. 계(啓)는 문집에 보인다. 사관이 머물렀으며 갑인(14일)에 다시 유지(諭旨)를 내려 불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한(東漢)의 주당(周黨)은 비록 소박한 뜻을 지녔더라도 역시 한 번은 서울에 이르러 왕을 찾아보았는데 하물며 경의 처지로서는 이 사람에게 비유할 수야 있겠는가? 경이 만약 자기 뜻을 굳게만 지킨다면 포의(布衣)로 입대(入對)하여도 또한 무엇이 방해가 되겠는가?” 하니 선생은 계(啓)를 부탁하여 올렸다. 계는 문집에 보인다.
○ 정사(17일)에 별유(別諭)로 다시 불렀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고 경자 복제(庚子服制)의 일에 대하여도 논하였다. 선생이 소를 올려 사관을 수환(收還)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경자 복제의 잘못을 논하여 이르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서인 남녀(庶人男女)와 승도(僧徒)는 백의(白衣)와 백립(白笠)과 백대(白帶)를 쓰되 졸곡 때에 벗는다.” 하였다. 이것은 예경(禮經)의, 백성이 임금의 복을 입는 뜻[義]이온대 경자(庚子) 대상(大喪) 때에는 갑자기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임금을 위하여 3년복을 입는다는 설(說)이 있었으며 지금 또 그릇된 것을 이어받음으로 인하여 이미 고례(古禮)를 어겼고 또한 우리나라의 제도를 그르쳤습니다. 청컨대, 다시 해조(該曹)에 명하여 품의(稟議) 하옵소서.” 하였다. 소는 문집에 자세하다.
○ 계해(23일)에 비지(批旨)를 내려 사관을 철환(輟還)하라고 명하였다. 비지에 대략 이르기를, “경의 정녕(丁寧)한 말을 듣고 다시 돈면(敦勉)하는 것은 예로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사관을 철환(輟還)하기를 허락하며 아뢰는 바는 곧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稟處]하게 하였으니 경은 돌아가서 잘 조리하면서 틈을 보아 올라와서 나의 뜻을 따라 주기를 지극하게 바라오.”라고 하였다.
○ 을축(25일)에 돌아왔다.
○ 10월 정축(7일)에 궁중(宮中)의 사람을 보내어 낙죽(酪粥)을 하사(下賜)하시고 안부를 물으셨다.
○ 경진(10일)에는 계성사(啓聖祠)에서 절하는 논의[拜議]에 대해 대답하였다. 성균관(成均館)이 계(啓)하기를, “계성사의 제사 때에는 마땅히 4배 하여야 하는가의 여부를 대신들에게 문의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영상(領相) 이광좌(李光佐) 등이 의논하여 이르기를, “성묘(聖廟)는 왕작(王爵)인 까닭에 4배를 하는 것이오나 계성사만은 4배가 부당하옵니다.” 하니, 상께서는 유신들에게 문의하도록 명하시자, 겸춘추(兼春秋) 정재춘(鄭再春)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이 답변하기를, “절하는 예[拜禮]는 비록 적은 제사[小祀]일지라도 모두 4배를 하는 것이요, 작위(爵位)는 논할 바가 아니오니 이것도 역시 4배가 타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의대는 문집에 상세하다.
○ 12월 을유(16일)에 의능(懿陵)에 나가서 현궁(玄宮)에 하관(下棺)하는 곡반(哭班)에 참석하였고, 병술(17일)에는 반우(返虞)하는 곡반에 참석하였다. 소를 올리고 곧 돌아오니 사관이 와서 비지를 내렸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 정유(28일), 대행(大行)의 졸곡(卒哭)이므로 부(府 여기서는 강화부를 말한다.)에 나아가서 망곡(望哭)하였다.
영종 대왕(英宗大王) 원년(元年 1725년 을사 ○ 선생 77세)
○ 8월 경인(25일), 대행 소상(小祥)에 부에 나아가서 망곡(望哭)하였다.
○ 9월에 종묘(宗廟)에 이안(移安)하는 데 대하여 수의(收義)하였는데, 사양하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종묘에 이안(移安)할 때에 일실(一室)의 신주를 한 수레에 같이 모시느냐 2차로 나누어 이안하느냐의 여부를 가지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찾아와서 의론(議論)을 거두었었다.
○ 10월 을유(21일)에 사현사(四賢祠)에 대하여 의론을 수렴하였는데 사양하고 답변하지 아니하였다. 사현사를 합향(合享 같이 배향하는 것)의 여부를 가지고 예조 좌랑이 의논을 거두었다.
2년 병오 ○ 선생 78세
7월에 지평(持平) 이정박(李廷樸)이 계(啓)를 올려 선생을 헐뜯었다. 기유(19일)에 이정박이 계(啓)하기를, “정모(鄭某)의 학문은 신건(新建 왕양명의 학문을 말함)의 학문을 주장하므로 빈사(賓師)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대우할 수 없사오니, 청컨대, 유일(遺逸)을 깎아 없애소서.” 하매, 상께서 답하기를, “유현(儒賢)을 무고하며 헐뜯으니 세상의 도(道)가 분통스럽도다.” 하시었다. 또한 이르기를, “동강(桐江)의 뜻과 세상을 건지는 덕을 장차 시행할 데가 없게 되었구나.” 하였다. 정박은 이에 따라서 몸을 피하여 물러가서 죄를 기다렸으며 여러 문인(門人)들은 기어이 조정에 진술하여 변무하려고 하였는데, 선생은 천천히 이르기를, “내버려 두어라. 비교하여 분변하는 것이 수고스럽지가 않으냐. 또한 선비들의 상소(上疏)가 분운(紛紜)한 것은 성세(盛世)의 일이 아니며 역시 조용히 지키는[靜守] 도리(道理)도 아닌 것이다.”라고 하시었고, 두세 번이나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문인(門人) 윤순(尹淳)은 이를 듣고 이르기를, “선생의 덕은 무아(無我)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8월에 이정박이 벼슬에서 물러나갔으므로 계를 멈추었다. 선생은 성품이 너그러워서 남을 깎지 않았으며 남의 과실(過失)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옛사람에게 대하여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비록 아언(雅言)과 시례(詩禮)일지라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돈독하게 받들었으며 그것은 제가(諸家)의 설(說)에 있어서도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썼을 뿐이며 어느 것에도 항상 애증(愛憎)으로 부억(扶抑 부축하고 억제함)하지 아니하였다. 세상에서 양명(陽明)을 배척하는 자는 그의 설(說)을 모두 알아보지도 못하고서 졸지에 이단(異端)이라고만 그를 지목함으로써 이를 금지하여 말도 못하게 하였으나 선생의 뜻은 자못 그렇지가 않았으니 이르기를, “저들도 공자(孔子)를 배운 자들이 아니겠는가? 진실로 취할 수 있으면 취할 것이고 취할 수 없으면 취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오직 나의 권도(權度)에 있을 뿐인 것이다. 어찌 전말(顚末)을 묻지 않고 세상을 따라서 뇌동(雷同)할 것인가? 주자도 육상산(陸象山)을 칭하기를 또한 좋은 곳은 스스로 감출 수가 없다 한 것은 대체로 이러한 뜻에서일 것이다. 세상에서는 혹 선생의 취지에 달하지 못하고 이를 변론함이 넓지 못한 때문에 이를 신건(新建)의 학문으로 돌리는 자는 이것 또한 망령된 인간일 뿐이니 어찌 족히 이것으로 선생을 가볍다 무겁다 할 것인가?” 하였다.
○ 8월 갑신(25일)에 대행 대상(大行大祥)에 부(府)에 나아가 망곡(望哭)하였다. 10월 을축(7일)의 담제(禫祭) 때에도 또한 같이 하였다.
3년 정미 ○ 선생 79세
○ 7월 신미(17일)에 이조 참판에 배명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소문은 문집에 보이며 상께서 사관 남위로(南渭老)를 보내어 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며, 8월 정유(14일)에 비로소 면부(勉副 의정(議政)의 해임을 허락함)하기를 허락하였다.
○ 8월에 가묘(家廟)를 가평(加平)으로 모시게 되어 배종(陪從)하여 경계(境界)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에 부평군(富平君)이 가평 군수(加平郡守)에 제수(除授)되었으므로 가묘(家廟)를 모시게 되니 선생이 모시고 나와 광성진(廣城津)에 이르렀다.
○ 병오(23일)에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에 천직(遷職)되어, 사관이 와서 소명을 내렸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때는 세자의 관례(冠禮)를 행하려고 하였으므로 이런 배명이 있었으며 사관을 보내어 별유(別諭)를 내리고 같이 오도록 하였는데 서계(書啓)를 부쳐서 아뢰었고, 또한 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소는 없어졌다. 9월 신유(8일)에 사관에게 머물도록 명하였고, 비지를 내려서 대략 이르기를, “전번에 경이 무고(誣告)를 당한 것은 실로 내가 정성이 얕아서 그렇게 되었으니 다만 스스로 부끄러우며 다시 무어라 이르겠소. 바야흐로 별유(別諭)를 내려 경을 위로하고자 하였는데 경의 소가 먼저 이르러 겸손하고 사양함이 이와 같으니 더욱이 부끄러움을 더하게 하오. 슬프도다! 경이 무고를 당한 것은 이미 풀려서 남음이 없으니 경은 어찌 다시 혐의스러운 끝이 있겠소. 경은 선조(先朝)에서도 은혜를 입어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원량(元良)이 삼가(三加)하는 때에 어찌 훌쩍 뜻을 돌려서 올 생각이 없는가? 경은 이 지극한 뜻을 받들고 마음을 편히 하여 사양하지 말고 곧 당일로 올라와 주오.”라고 하였다.
○ 10월 무자(6일)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으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11월 경진(庚辰)에 또 두 번째 소를 올렸는데 사양하였다. 상소문은 문집에 보인다.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집의(集義 심경집의를 말함)》와 집록(集錄 경학집록을 말함)》 두 책을 수정(修正)하였다.
4년 무신 ○ 선생 80세
○ 정월 기미(8일)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급(昇級)하였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대신들이 아뢰어서 이 직(職)에 승진시켰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고, 또한 헌직(憲職)을 해직하기를 빌었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2월에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헌직(憲職)을 해직하도록 허락하였고 이어 선소(宣召)하였는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2월 갑신(3일)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임명되었으며 연달아 사관을 보내어 선소(宣召)하였으나 계속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갑신에 상께서 사관을 보내어 별유를 내리고 선소(宣召)하였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다시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이어서 머물러서라도 함께 올라올 것을 명하였는데 3월 계축 3일에 두 번째로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이어서 머물러서라도 같이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 3월에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에서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분문(奔問)하러 서울에 들어왔는데, 계유(3일)에 다시 별유(別諭)를 내려 입대(入對)하라는 명을 받들고 대궐에 나갔다가 희정당(熙政堂)에서 사대(賜對)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일찍이 경을 불러 쓰지 않아서 오늘날의 변이 있게 되었으니 내 실로 부끄러울 뿐이오. 이러한 어렵고 걱정스러운 때를 당하여 어찌하면 민심을 가라앉힐 수 있겠는지, 경은 모름지기 마음에 간직한 바를 모두 말해 주오.” 하니, 선생은 대답하여 아뢰기를, “지금의 이 적변(賊變)은 전고(前古)에도 드문 바이오나 지금 토적(討賊)이 시작되었으므로 남은 무리는 저절로 멸망(滅亡)하게 될 것이옵니다. 반드시 오래도록 성상의 걱정을 번거롭게 하게 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신이 근심하는 바는 문초하는 옥사(獄事)가 만연되어 수습하기가 쉽지 않고 또한 파종(播種)할 시기를 잃어서 백성의 일이 염려되옵니다. 대개 농사가 때를 잃지 않은 후에야 백성이 부지될 것이오, 백성이 살게 된 후에야 나라가 나라답게 될 수 있사오니 여러 도(道)에 각별히 타일러서 이들로 하여금 편안히 모여 살고 농사를 권면하여 그때를 잃지 않도록 하옵소서. 이것이 오늘의 급한 일이옵니다.”라고 하니, 상께서는 옳은 말이라 칭찬하였다. 선생은 다시 이르기를, “문왕(文王)은 다섯 나라를 평정하였고 주공(周公)은 사국(四國)을 평정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학문 중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더욱더 성상의 덕망에 힘쓰시어서 난리를 평정하시고 태평한 정치를 도모할 근본으로 삼으시면 공드린 보람이 어찌 크다 아니하겠습니까?” 하더니, 상께서 이르기를, “아뢰는 바가 절실하니 꼭 각별히 마음에 간직하겠소.” 하였다. 입대가 끝나자 배궤례(拜跪禮)를 하지 말라고 분부하시였다.[연주 헌의 3월 25일, 소Ⅰ, 삼소(적변으로 올리지 못함) 적변을 듣고 올리는 소 3월, 답 사관 박필재(朴弼載) 참조.]
○ 4월 신사삭(辛巳朔) 음식물과 땔감을 하사(下賜)하였으며, 계미(3일)에는 사관을 보내어 선소(宣召)하였으나 대궐에 나아가 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소는 문집에 보인다 [소Ⅰ. 사특사식물소(辭特賜食物疏) 4월 답, 진하잉귀소(陳賀仍歸疏) 4월, 전(傳)회대, 별유 등 참조.] 소명을 받들어 입대(入隊)하였다. 들어가서 대답한 것은 주자의 경자봉사(庚子封事)에 대하여 강론한 것이었다.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주자는 효종(孝宗)이 태평한 정치를 도모하는 날을 만나서 충곤(忠悃)을 다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극히 논하였으되 기강(紀綱)이 근본이 된다는 말을 가지고 이를 끝내었습니다. 대체로 천하의 만 가지 일이 기강이 없으면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그 근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正心] 있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근본은 또한 홀로를 삼가는 데[愼獨]에 있으며, 천리(天理)와 사의(私意)를 팔자로 타개[八字打開]하는 것은 홀로를 삼가하는 공부에 있고, 천도(天道)와 왕도(王道)의 공효(功效)가 넓어지는 것은 홀로를 삼가하는 공부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대학》의 성의 정심(誠意正心)과 《중용(中庸)》의 계신 공구(戒愼恐懼)의 공부가 홀로를 삼가하는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맨 처음에 손을 댈 곳이 여기에 있사오며, 철두철미(徹頭徹尾)한 곳도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과 힘을 굳게 하여 줄기를 찾아간다면 큰 근본은 스스로 서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한 아뢰기를, “깊은 근심은 성스러움[聖]을 열어 주고, 어려움이 많음은 나라를 흥하게 하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신은 앞서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일을 가지고 대략 말씀드린 바 있사옵니다. 문왕은 밖으로 밀인(密人)과 숭호(崇虎)가 있어서 시사(時事)가 매우 어려웠으나 시인(詩人)은 찬송하기를, ‘또한 명예를 떨구치 않았다.[亦不隕厥問]’고 하였는데, 만약에 그 난리를 평정할 근본을 논한다면 그윽한 문왕의 덕이 계속 빛나서 공경하는 데 그친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공은 안으로 사국(四國)이 있어 이를 토멸하느라 커다란 무기를 썼으나, 시인은 찬미하기를, ‘덕 있는 소문에는 흠이 없더라.[德音不瑕]’ 하였는데, 만약 변고(變故)에 대처하는 도리(道理)를 말한다면 또한 ‘붉은 신이 궤궤(几几)하다.’고 한 데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환란에 대처하는 도리가 이러한 까닭에 능히 그 성스러움을 잃지 않고 마침내 태평한 정치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던 것이니, 지금의 조그마한 도적이 난을 일으켜 우환이 가시지 않고 있사오나, 만약 먼저 근본만 올바로 세우신다면 저절로 안정하게 될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전날의 성인을 따라 더욱 원대(遠大)한 계책에 힘쓰시어 종사의 무궁한 복을 이루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은 이르기를, “전날에 말한 것은 나도 역시 생각하였는데, 이제 또 부연(敷衍)하여 아뢰는 바가 좋으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소.” 하였다. 연신(筵臣)들이 말하기를, “우참찬(즉 선생)은 병가(兵家)의 일에 대해서도 또한 널리 통한다 하니, 청컨대 찾아가서 묻게 하옵소서.” 하니, 선생은 사양하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신이, 벼슬을 파는 일에 대하여 말하자, 선생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아뢰니, 이를 옳다 하였다. 선생은 돌아갈 것을 빌었으나 상은 간곡히 머물러서 난리가 평정될 때를 기다리게 하였다. 드디어 물러 나왔다.
○ 갑신(4일)에 음식물을 내리시었다. 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소와 비지는 아울러 문집에 보인다.
○ 신묘(11일)에 소를 올려 돌아갈 것을 고(告)하고 도성(都城)에서 떠나왔다. 이때에 영남의 군사(軍師)가 승리를 거두고 모든 도적들이 평정되었으므로 선생은 드디어 소를 올려 집으로 돌아갈 것을 고하였다. 따라서 진계(陳戒)하여 아뢰기를, “지금의 깊은 근심이 성스러움을 열어 주었으니[啓聖] 실로 나라가 다시 회복될 시기(時期)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어진 이를 친하게 하시고 일에 능한 이를 등용하시어 공사(公事)를 열게 하며 사사(私事)를 막으시며 백성을 구휼(救恤)하시고 군사를 다스려서 맨 처음에 하시려던 정치를 이룩하시옵고 원자(元子)를 잘 보도(輔導)하심으로써 연익(燕翼)의 계책을 남겨 주옵소서.” 하였다. 이어 성(城) 밖에 나와서 묵었다.
○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어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들에게 같이 올라오게 하였다. 임진(12일)에 또다시 사관(史官)을 보내어 별유(別諭)를 내리어 불렀으며, 이들에게 같이 올라오게 하시었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별유를 내려 이르기를, “어제 두 번째의 별유에서 내 뜻을 모두 말하였는데 이제 서계(書啓)를 보매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내 평상시에 유현(儒賢)을 대접하는 성의가 이르지를 못하였소. 재차 자리에 나와서 직접 경을 면대(面對)하여 말하기를 간곡하게 했거늘 돌아갈 것을 청하는 것이 이처럼 빠르단 말인가? 오직 부끄럽기만 할 뿐 더할 말이 없오. 이제 경에게 한마디 말할 것이 있으니 경은 양해해 주오. 경이 비록 고도(高蹈)한 선비일지라도 세록(世祿)을 먹는 신하인데, 이미 성 안에 들어왔다가 나를 만나서 돌아가겠다는 인사말도 없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인가? 옛날에 한(漢) 나라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직하고 돌아갈 때에, 선유들은 말하기를, ‘광무가 아니었다면 자릉(子陵)의 높은 것을 이룰 수 없었고, 자릉이 아니었다면 광무의 큰 것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 비록 덕이 없어서 본래 한당(漢唐)의 시대에 대하여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경은 어찌 한(漢) 나라 이후의 일을 가지고 나를 대(待)하려는 것인가? 연석(筵席)에 종용(從容)하며 간곡히 돌아갈 것을 청하는데 내 또한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서 돌아가는 길을 찾기에 급급(汲汲)하니, 이것이 내 몹시 부끄러워하는 바이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몸소 깨닫고 다시는 상소하는 글귀[章]를 찾지 말고 곧 같이 들어와서 나의 타는 듯한 소원에 따라 주기를 바라오.” 하였다.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다시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왕세자(王世子)가 관원을 보내어 머무르도록 권면하므로 계사(13일)에 도성에 들어간다. 정유(17일)에 소명(召命)을 받들고 입대(入對)하였다. 상은 직접 면대하며 유시(諭示)하기를, “전일의 비지(批旨)에서는 경의 뜻을 이루게 하고자 하여 광무의 이야기에 언급(言及)하였오. 광무제가 자릉(子陵)의 뜻을 펴게 하여 준 것은 비록 착한 일이나 마침내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를 도와주게 한 것만 같지 못하였으니, 나는 그렇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오. 오늘날 경을 머물도록 한 것은 모두가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경은 어찌 깊이 생각하지를 못하오.” 하였으나 선생은 굳이 사양하였다.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크게 하시고자 함이 계시어 한ㆍ당(漢唐) 때처럼 되기를 기원하시며 부끄럽게 생각하시는데, 신이 구구하게 바라는 것도 또한 어찌 요ㆍ순(堯舜)으로 기대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 정치의 효능은 도리어 한ㆍ당(漢唐) 아래에 있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요ㆍ순의 정치에서도 홀로는 행할 수 없었으므로 반드시 고(皐)ㆍ기(夔)와 같은 신하의 도움을 기다렸던 것인데, 지금에 있어서는 임금은 있어도 신하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임금이 그 극(極)을 세우면 무릇 그 백성에게는 음사(淫邪)한 편당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에 있어서는 그 극을 잘 세우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옵니까? 전하께서는 이때야말로 바로 개창기(開創期)의 처음인 듯하오며 진실로 유신(維新)하실 시기(時期)이옵니다. 진실로 원하옵건대, 먼저 근본을 다스리시어 성인의 도를 밝게 하신다면 신은 비록 돌아가서 죽더라도 한(恨)이 없겠사옵니다.” 하니, 상은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고 이어 유시하여 이르기를, “경이 가는 것은 내 비록 억지로는 말리지 못하겠으나 이달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이달이나 지나서 떠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날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하였다. 입대를 끝내고 다시 동궁(東宮)에 나아가서 입시(入侍)하여 조감(祖鑑)을 강(講)하였다. 기해(19일)에 상께서 숭례문(崇禮門)에 납시어 목 벤 도적의 머리를 받는데, 길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인(22일)에 하반(賀班)에 참석하였다. 갑진(24일)에 소대(召對)되어 입대(入對)하였다. 주자의 무신봉사(戊申封事)를 강하였는데,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주자는 먼저 인주(人主)의 본원(本源)이 되는 곳을 간곡하게 주장하였고, 다음으로는 궁궐의 근습(近習)에 이르기까지 각각 바르게 해야 할 도리를 말하였으며, 공사(公私)와 의리(義理)의 분별을 깊이 밝혔으며, 끝으로는 제갈량(諸葛亮)의 말을 가지고 이를 끝맺었으니, 그 뜻의 깊고 간절하며 뚜렷하게 밝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습이 용사(用事)하는 것을 주자(朱子)는 오히려 깊이 염려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는데 하물며 지금은 나라에 당론(黨論)의 폐단이 극도에 이르렀사오니, 이와 같이 되면 화란(禍亂)이 어찌 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항상 탕평(蕩平)하시는 데 힘쓰시니, 성상(聖上)의 뜻이 계신 바를 누군들 우러러 흠모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탕평을 하고자 하시면 극(極)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다만 시중(時中)의 의(義)는 쉽게 말할 수 없으나 정일(精一)의 중(中)은 천하의 대중(大中)이옵고 자막(子莫)의 중은 집일(執一)의 중이옵니다. 대중(大中)의 중을 강구하심을 근본으로 삼으시고 또한 반드시 제갈량이 이른바 어진 신하를 친하게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라 하던 것을 법으로 삼은 뒤에야 바야흐로 탕평이라 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 병오(26일)에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하였다.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 정미(27일)에 다시 서연에 입시하였다. 조감(祖鑑)을 강하였다.
○ 무신(28일)에 소명이 내려 입대(入對)하였었다. 주자(朱子)의 무신봉사(戊申封事)를 강하였는데, 선생은 글 뜻에 따라서 동궁(東宮)을 보양(輔養)하는 도리를 아뢰되, 자주 서연을 열어 궁료(宮僚)들을 인접(引接)하여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촉할 때는 적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친하게 할 때가 많은 것을 깊이 경계로 삼으시기를 청하였다. 상은 좋게 받아들였다. 또 이르기를, “송(宋) 나라 효종(孝宗) 때에는 근습(近習)이 용사(用事)하여 대신(大臣)을 잘 임명하지 않았던 까닭에 주자가 이를 걱정하여 특히 궁중부중일체(宮中府中一體)의 설(說)을 끌어서 반복하여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하였는데, 임금이 되어서 대신을 잘 임용하지 않으면 비록 어진 이를 구하는 데 힘쓰더라도 어진 사람을 반드시 쓸 수 없을 것이며, 비록 정치를 하는 데 근면하더라도 좋은 정치는 꼭 세울 수 없을 것이옵니다. 등용되는 자가 혹 용렬하고 간교한 사람이거나 행하는 바가 모두 아사(阿私)하고 구차한 정치라면 기강(紀綱)은 위에서부터 무너지고 풍속은 아래에서 허물어져서 백성은 근심하고 병사(兵士)는 원망하며 나라의 형세가 날로 기울어질 것이오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른바 기뻐할 것을 구하지 말고 두려워할 것을 구할 것이며, 나의 뜻에 잘 맞는 것을 구하지 말고 나의 덕을 도울 수 있는 것을 구하라고 한 것이 더욱 절실하고 긴요한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만약 생각해 두시어서 반드시 대신을 잘 임용하실 것을 기하시는 것은 오늘을 당하여 급히 힘쓰실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효종은 처음에 정력을 다하여 다스림을 구하였으나 말년(末年)에는 어질고 사특한 것을 분변하지 아니하고 이를 혼합하여 등용하였으며 나머지 백 가지 일을 많이 포용(包容)하는 데 힘썼고, 곡직(曲直)과 시비(是非)를 둘 다 묻지를 않으며 이것을 평균(平均)하는 도(道)를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주자는 주역(周易)에 있는 사물(事物)을 저울질하여 평등하게 베푼다는 것과 악한 것을 막고 선한 것을 드러낸다는 것으로써 누누이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대체로 주역의 평(平)이란 한 글자는 임금이 되는 이가 범연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공평하게 하려는 자는 많은 것을 덜고 적은 것을 보태 주어서 물건이 많고 적음을 저울질하여 고루 베풀어 주었으므로 이들에게 공평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시비와 곡직을 묻지 않고 한결같이 대한다면 착한 자는 항시 펼 수 없을 것이며, 악한 자는 도리어 요행으로 면할 것이오니, 이것은 크게 불공평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요순의 정치일지라도 팔원 팔개(八元八凱)를 거용(擧用)하여 반드시 공도(共兜 공공과 환도)를 물리친 것은 주역의 상(象)에 이른바, ‘악을 막고 선을 드러내며, 하늘에 순종하여 명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도는 선한 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주며, 또한 상벌의 권력을 사목(司牧)에게 맡김으로써 그로 하여금 이를 돕게 하는 것이니, 인군(人君)이 되는 자는 그 권병(權柄)을 삼가서 쥐고 받들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은 이르기를 “아뢰는 바가 모두 좋으니 마땅히 각별히 유의하겠소.” 하였다.
○ 경술(30일)에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하였다.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 5월 신해(1일)에 입시하고 돌아갈 것을 빌었다. 선생이 조참(朝參)으로 인하여 인정전(仁政殿)에서 입대하고서 돌아갈 것을 빌었는데, 상이 이를 허락하시고 입대하여 사직하기를 분부하였다. 다음날 사퇴(辭退)를 고하자 상은 술을 주시고 수찰(手札)을 하사(下賜)하였다.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소명을 내리고 그로 하여금 만나서 인사하도록 하였다. 상이 유시하여 이르기를, “이번의 진퇴(進退)는 경의 소원대로 굽혀서 좇겠으며, 이 뒤에는 직사(職事)로서 경을 번거롭게 하지는 않겠소마는, 만약 나라에 큰 일이 있어서 상의할 것이 있으면 마땅히 사관을 보낼 것이니, 경은 반드시 올라 와서 이 뜻에 따라 주어야 하오. 전날에는 단지 글의 뜻만을 강론케 하였는데, 오늘은 학문하는 공부를 묻고자 한 것이오.” 하니, 선생은 사양하여 아뢰기를, “경(經)에 이르기를, ‘날로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한다.’고 하였는데, 주자의 봉사(封事)에는 조목으로 의논한 것이 많기는 하오나 커다란 근본은 반드시 임금의 덕[君德]에 귀결시켰고, 긴요한 것은 반드시 성학(聖學)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진강(進講)하는 규모는 날마다 과정을 두어서 비로소 진실로 그 뜻을 얻는 것이오니 한 구(句)에는 한 구의 공을 드린 보람이 있고 한 편(篇)에는 한 편의 공을 드린 보람이 있는 것이오며,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바야흐로 실용(實用)이 있는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성학(聖學)에 마음을 두시고, 자주 경연(經筵)을 여신다 하더라도 마침내 외우는 것만을 주로 하시온데, 과정이 너무 많으면 문자를 기록한 것이 비록 많더라도 몸에 돌이켜 실천하는 요점에는 부족할 것이오니, 반드시 날로 새롭게 하시고 또 새롭게 하신 뒤에야 학문의 빛이 계속 밝아질 것이옵니다. 풀과 나무는 뿌리가 있어서 나날이 자라듯이 학문도 근본이 되어야만 바야흐로 의거할 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이 이미 서고 공부가 계속되는 것은 천운(天運)이 쉬지 않는 것과 해와 달이 계속 빛나는 것과 같이 한 뒤에야 바야흐로 독실한 공부가 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인은 하늘과 같아서, 깊고 멀어서 그치지 아니하니 어느 곳엔들 공리(功利)의 사사로운 뜻이 끼고 섞이게[挾雜] 할 수 있사오리까? 정자(程子)는 공부하는 방법을 펼 때에는 반드시 홀로를 삼가는 것[愼獨]을 주장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곧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 곳이며, 이것이 곧 중화(中和)하는 공부를 이루는 곳입니다. 천지가 자리잡고 만물이 자라나며 이 속에서 좇아 점점 변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이를 이루는 외에 또다시 별다른 방법이 없사옵니다.” 하니, 상은 이르기를, “이 말은 간략하되 극진한 것이니, 내 마땅히 명심하여 잊지 않겠소.” 하였다. 상께서 묻기를, “정치하는 데 바꾸고 변통하는 데는 옳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선생은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삼가 성상께서 조감(祖鑑)의 서문 쓰신 것을 보았더니 그중에는 요순을 법으로 하자면 먼저 조종(祖宗)을 법으로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성상의 이 말씀은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오직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예를 마련하시고 악(樂)을 만드시어 동방(東方)의 성인(聖人)이 되시었는데 그 법제(法制)는《경세육전(經世六典)》에 갖추어졌고 예문(禮文)은 《오례의(五禮儀)》에 갖추어져서 명백하고 행할 만한데 후세의 사람으로서는 조종의 법을 세우신 뜻에 도달[達]하지 못하고 각자의 소견대로 어떤 일을 행해야 하고 어떤 예를 써야 한다고 하니, 오늘날 정치를 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모름지기 뜬 의론을 그치게 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며 먼저 성학(聖學)을 가지고 본령(本領)을 세우고 조종(祖宗)의 옛 정치를 전적으로 닦으며 힘써 행하여 마지않는다면 어찌 능히 치평(治平)을 이룩할 수 없겠사옵니까? 조종께서는 이를 전일에 이미 쓰셨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뒤에서 이를 쓰지 못하시겠습니까? 이 백성[斯民]은 삼대(三代)에서 바른 도(道)로 행하였던 것이니 다만 옛 법을 닦고 밝히면 이를 다하는 것이옵니다.” 하니, 상은 옳은 말이라 칭찬하시고, 이어 술을 내오라 분부하시고 손수 쓴 글 한 봉(封)을 내리었는데, 이르기를, “내가 이미 경의 마음을 깊이 알고 있는데 경은 어찌 내 뜻을 몰라주는고? 이제 시골집으로 돌아가 잘 조섭(調攝)하였다가 내가 만약 부르거든 경은 마땅히 다시 올라와 내 오늘날 경에게 권권(眷眷)하고 순순(諄諄)한 지극한 뜻을 몸 받아 주오. 면계(勉戒)하여 준 말은 마음에 새기겠소.” 하니, 선생은 다만 황공하게 절을 하고 사퇴하였다. 상께서는 다시 앞에 가까이 나오라 하시고 악수하시며 내시에게 부축하여 뜰아래 내려가도록 하시었다.
○ 동궁(東宮)께 절하고 물러나자 왕세자(王世子)는 또한 주식(酒食)을 내리시었다. 을묘(5일)에 돌아왔다. 갑인(4일)에 강을 건넜고 이튿날 돌아왔다. 경신(10일)에 소를 올려 사직(辭職)하였다. 상소문 끝에는 옥사(獄事)가 만연(蔓延)하고 민심이 소란한 것이 근심할 일입니다.”라고 아뢰었는데, 문집에 자세하게 보인다.
○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렸다. 사퇴를 허락하지 않고 유시하기를, “아뢴 바는 내 뜻에 꼭 합치되어 깊이 감탄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비지는 문집에 자상하게 보인다.
○ 9월 신미(24일)에 안산(安山)에 가서 선조묘소[先墓]에 성묘하였다. 길을 돌려서 과천(果川)으로 향하여 외조부[外王考] 호암(浩庵 이름은 이기조) 이공(李公)의 산소에 성묘(省墓)하였다.
○ 11월에 왕세자가 몸이 미령(未寧)하시자 기미(13일)에 양천(陽川)에 나가서 문안을 드렸다. 임술(16일)에 왕세자가 훙거(薨去)하매, 분곡(奔哭)하였다. 임자(6일)에 동궁이 몸이 불편함을 듣고 소를 올려 안부를 물었으며, 소는 문집에 보인다. 정사(11일)에는 세자의 병환이 몹시 중함을 들었다. 기미(13일)에는 김포(金浦)에 나아가 있었는데, 사관이 와서 비지를 내렸으며 양천(陽川)에 나가서 안부를 드렸다. 임술(16일)에는 세자가 훙거(薨去)하시었으므로 도성(都城)으로 달려가서 외반(外班)에 나아가 곡하였다.
○ 갑자(18일)에 소명을 받고 입대(入對)하였다가 양전(兩殿)의 복제를 의논하였다. 이날에 궁정(宮庭)의 곡반(哭班)에 나아갔다가 소명에 따라 입대하였다. 이때 예관(禮官)이 나와서 왕세자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의논하였는데, 대왕대비(大王大妃)는 손복(孫服)을 입어야 하며 왕대비(王大妃)는 형제의 아들복[子服]을 입어야 한다고 하매, 상이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아뢰기를, “옛날 명종(明宗)께서 돌아가셨을 때 의논하는 자는 모두 말하기를, 공의전(恭懿殿 인종왕후를 말함)께서는 수숙(嫂叔)이 되므로 마땅히 복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기대승(奇大升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퇴계와 4칠론(四七論)을 폄)의 계체(繼體)를 중히 해야 한다는 의논을 듣게 되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은 크게 그렇다고 하여 이르기를, ‘우리들은 하마터면 천고(千古)의 죄인 됨을 면치 못할 뻔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복제도 역시 계체를 중히 하는 것이므로, 대왕대비전은 마땅히 증손복(曾孫服)을 입으셔야 하고, 왕대비는 손복(孫服)을 입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적자(嫡子)가 있으면 적손(嫡孫)은 없는 것이니, 대왕대비전께서는 마땅히 시복(緦服)을 입으셔야 하며 왕대비전께서는 마땅히 대공복(大功服)을 입으셔야 하옵니다.” 하였더니, 상께서는 이를 따랐다. 을축(19일)에 성복(成服)하고, 다음날 돌아왔는데, 사관이 뒤따라와서 소명을 내리자, 소를 올려 사양하고 끝내 돌아왔었는데, 사관이 또 와서 비지를 내려 머무르게 하였다. 사관이 뒤따라 양천(陽川)에 이르러 인견(引見)한 뒤에 내려가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다고 전하니, 회대(回對)를 덧붙여 올렸다. 신미(25일)에 소를 올려 소명을 사양하였는데 상소문은 문집에 보인다. 상이 사관을 보내 비지를 내려 사명(辭命)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머물렀다가 함께 오라 하시었으므로 회대(回對)를 덧붙여 올렸다. 임신(26일)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겨졌는데 소를 올려 배명(拜命)을 사양하였더니, 사관을 머무르게 하여 비지를 내리시었다. 이때 마침 동궁의 공제(公除)가 겨우 지났는지라 상하(上下)가 모두 애통하였으므로, 선생은 사소(辭疏)에 따라서 덧붙여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정(四情) 중에서 애(哀)의 정이 가장 억누르기 어렵고 깊숙한 궁 안은 적막하기 쉬울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날로 신하[臣隣]를 대하시고 아름다운 말씀을 받아들이시면 반드시 성상의 마음은 넓게 정치하는 도에 도달(導達)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문은 문집에 자세하다. 상은 사관을 명하여 비지를 내려 사양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르기를, “알뜰하게 돌보며 위로하여 힘쓰게 한 데 대하여 깊이 감탄하였소. 이때에 내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 자는 경과 원로(元老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를 말함)뿐이었소. 권면하고 경계하여 준 것이 비록 간절하나 내 친히 그 격언(格言)을 듣는 것과는 어찌 같겠소.” 하였다.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을해(29일)에 세자의 장사 전에 사가(私家)의 제사를 행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사관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이 대답하기를, “기제(忌祭)와 삭망(朔望)은 지금 조령(朝令)에서도 역시 허락[裁許]하고 있는 중에 있지만 묘제(墓祭)만은 행할 수 없으니 무릇 우제(虞祭)ㆍ졸곡(卒哭)ㆍ대ㆍ소상(大小祥)도 행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며, 의대(議對)는 문집에 상세하다.
○ 12월 경진(4일)에 장사 전의 삭망의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의대(議對)는 문집에 상세함. 신사(5일)에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을 내리고 병을 물었다. 기축(13일)에 빈궁(嬪宮)의 제례의(祭禮議)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의대(議對)는 문집에 보인다. 기해(23일)에 소를 올려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갑진(28일)에 사관을 머물게 하고 비지를 내렸다. 상소문은 문집에 보인다. 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는데 비지는 문집에 나온다. 임인(26일)에 세자의 졸곡(卒哭) 전후의 복색(服色)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예조 좌랑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의대는 빠졌다.
5년 기유 ○ 선생 81세
○ 정월 정미(2일)에 부문(府門) 밖에서 명을 기다렸다. 사관이 오래도록 머무르고 은례(恩禮)는 더욱 높았으므로 황공하여 부문(府門) 밖에 나아가서 죄를 기다렸다. 신해(6일)에 대명(待命)하지 말라는 전지(傳旨)가 있고 사관을 돌아오라고 허락하시었다. 전화(錢貨)의 편부의(便否議)에 대답하였다. 이때 대신과 여러 재신[諸宰]이 조정에서 전화(錢貨)의 폐단에 대해 논하였는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마땅히 빚 주는 것을 금지시켜야 하옵니다.” 하였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돈을 더 만들어서 넉넉하게 쓰게 하여야 하옵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은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서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돈 대신 곡포(穀布)를 가지고 물건을 교환하였으나 심히 일[事]을 해치지는 않았는데 돈이 나돌던 뒤부터는 인심(人心)이 날로 간교하여지고 민생은 달로 시들어져서 백 가지 폐단이 일어난 것이 모두 돈[錢]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만약에 끝내 이것을 그만두지 않으신다면 나라는 지탱하지 못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헌의(獻議)하여 그 폐단을 극진하게 말씀드리어 그 근본을 막기를 청하니, 상도 또한 이를 그만두려는 뜻이었으나 의논이 같지 않았으므로 그만두었는데, 의논은 문집에 보인다.
○ 신미(26일)에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하관식(下棺式)에 달려가서 반에서 곡하였다. 기사(24일)에는 상여를 길가에서 맞이하여 곡하였고, 신미(26일)에는 묘소에 나아가서 하관례(下棺禮)하는 곡반에 참석하였다. 임신(27일)에는 길에서 반우(返虞)를 곡하며 전송하였다. 이때 부평군(富平君)은 고양 군수(高陽郡守)로 제수되어 가묘(家廟)를 모시고 임소(任所)에 있었으므로 선생이 군아(郡牙)에 이르렀었으며 을해(30일)에는 어머니의 기제(忌祭)를 행하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 3월 갑자(20일)에 소를 올려 헌직(憲職)의 해임을 애걸하니, 허락하였다. 병인(10일)에 상이 사관을 보내어 선유(宣諭)하고 이어서 소에 답하는 비지를 내렸는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회대(回對)를 덧붙여 올렸다.
○ 11월에 혼궁(魂宮) 향관(享官)의 연후(練後 소상을 연(練)이라 함) 복색의(服色議)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 병술(16일)에는 효장 세자의 소상(小祥)에 강화부(江華府)에 나아가 망곡(望哭)하였다.
6년 경술 ○ 선생 82세
○ 3월 신미(3일)에 소를 올려 겸직(兼職)을 사양하였다. 선생은 좨주(祭酒)와 찬선(贊善)을 겸하였는데, 효장 세자가 훙거(薨去)함에 이르러 찬선은 예에 따라서 파(罷)하였고, 좨주(祭酒)의 직은 그대로 맡았다가, 이에 이르러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상소문은 문집에 보인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렸는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무자(20일)에 역녀(逆女)의 지아비 및 아비가 연좌(緣坐)되는 법률의에 대답하였다. 처형[正法]된 역녀의 지아비와 그를 낳은 아비가 연좌(緣坐)되는 것의 옳고 그른 것을 가지고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은 답변하기를, “지아비가 아내를 좇아서 연좌되고 아비가 딸을 좇아서 연좌되는 것이 비록 상례(常例)는 아니더라도 이 역녀(逆女)가 멋대로 흉독한 짓을 행하여도 지아비가 끊지를 않은 것이요, 아비는 막지를 않은 것이니, 마땅히 예(例)의 없이 법으로 의논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의대는 문집에 자세하다.
○ 5월에는 역변(逆變)으로 소를 올려 진위(陳慰)하였는데, 사관이 와서 비지를 내렸다. 상소문이 문집에 보이고 비지도 문집에 보인다.
경서집(經書集)이 이루어졌다. 학자가 자기 몸에 절실한 것을 살피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서 이 책이 있게 되었다.
○ 6월 병인(29일)에 선의 대비(宣懿大妃)가 승하하시어 달려가서 외반(外班)에 나아가 곡하고 성복하였다. 7월 신미(4일)에 명을 받고 입대하였다. 을해(8일)에 소를 올려 돌아갈 것을 고하였더니, 상은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약(藥)을 내리고 수행(隨行)케 하였다. 병자(9일)에 서강(西江)에서 자고 다음날 돌아왔다. 을해(8일)에 정원(政院)에서 돌아갈 것을 청하자, 의원이 약을 가지고 따라왔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서강창(西江倉) 앞 마을에서 자고 배로 진강(鎭江)에 돌아왔다.
8월 경술(14일)에 덕종실(德宗室) 축사(祝辭)의 속칭의(屬稱議)에 대답하였다. 예조 좌랑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은 대답하기를, “마땅히 성묘조(成廟朝)의 옛 예(例)에 의거하여 질손(姪孫)이라 칭하고 백조고(伯祖考)라고 칭하여야 합니다.”고 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상세하다.
○ 10월 병신 삭(朔 1일)에 다시 덕종실 속칭의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옥당(玉堂)이가정(嘉靖 명 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그는 본생 부모를 추존하여 예론을 크게 일으켰다.)의 고사(故事)를 고진(考進)함에 따라서 다시 문의하라는 명이 있어 예조 좌랑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은 답변하기를, “이것은 장총(張璁)과 계악(桂萼)의 의론(議論)이온데, 장(張)ㆍ계(桂)는 이것을 가지고 한 세상을 떠들어 댔으니, 어찌 정ㆍ주(程朱)의 바르고 고정된 주장[論]과 조종(祖宗)에서 이미 행하던 법을 버리고 회전(會典)의 그릇된 예(禮)를 취하겠습니까?” 하였다.
○ 재변(災變)으로 인하여 사관을 보내어 별유(別諭)하여 구언(求言)하고 돈소(敦召)하였으므로, 주에 부쳐서 서계를 올렸다. 이때에 뇌이(雷異)가 있자 상은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구언(求言)하였는데, 선생의 진계(陳戒)에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한결같이 계구(戒懼)를 생각하신 것은 곧 나에게 있는 하늘이오니, 바라옵건대, 이에 따라서 게을리 마시옵고 항상 스스로 천지신명(天地神明)에 대하시어 받들고 흠모하고 존중하는 도를 다하시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계(啓)는 문집에 보인다. 상은 다시 사관을 보내어 회유(回諭)하여 이르기를, “면계(勉戒)한 말은 마땅히 유중(留中)하고 아침저녁으로 깊이 간직하겠소.” 하였다.
○ 궁중에 있는 사람을 보내어 낙죽(酪粥)을 하사하고 안부를 물었다.
○ 천원설(天元說)을 저작하였다. 선생이 역법(曆法)의 그릇되고 없어진 것을 병통으로 생각하여 설(說)을 지으시어 이를 바로잡았으니 이름은 또한 선원고(璇元故 선원경학통고(璇元經學通故)를 말함.)라고 하였다.
7년 신해 ○ 선생 83세
○ 2월 계축(20일)에 안산(安山)에 갔다. 추곡(楸谷)에 있는 증조비(曾祖妣)의 묘가 지세(地勢)가 기울어져서 곧 무너질까 염려되어 다른 곳으로 이장(移葬)하려 하였는데, 종손(宗孫)이 병이 나서 일을 잘 주장할 수 없는지라 선생이 몸소 가서 경기(經紀 잘 다스리는 것)하였다.
○ 3월 임진(29일)에 장릉(長陵)을 천봉(遷奉)하는 의(議)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천봉하는 일의 옳음을 예관이 내려와서 의논을 모아 갔다.
○ 5월 을축(3일)에 진강(進講)하는 책자의(冊子議)에 대하여 물으심에 대답하였다. 상이 《상서(尙書)》의 강을 마치고 장차 《시경(詩經)》을 강하려 하자 혹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상제(喪制)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시를 강하여서는 아니 될까 의심하여 유신 이현모(李顯謨)가 명을 받들고 와서 물으니, 선생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먼저 예를 강하여야 할 것이며 복이 끝난 후[待制畢]에 시(詩)를 강하옵소서.” 하였더니, 상은 그 말에 좇았다. 의대는 문집에 자세하다.
○ 6월 정유(6일)에 사관을 보내어 부르다. 상은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돈소하였으므로 서계를 덧붙여서 아뢰었다.
○ 병오(15일)에 능(陵)을 옮기는 의주의(儀注議)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사관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으며 의대는 문집에 보인다.
○ 3월에 장릉(長陵)을 옮겼으며 계묘(13일)에는 능(陵) 아래 갔다가 신해(21일)에 돌아왔다. 계묘에 교하(交河)의 신릉(新陵)에서 파주(坡州) 구릉(舊陵)으로 갔으며 병오(丙午)에는 구릉을 파묘하고 성복(成服)하였다. 정미(17일)에는 상이 행차하시자 길 왼쪽에서 지영(祗迎)하였는데, 상은 수레를 멈추어 노문(勞問)하였으며 배종하여 구릉을 참배하였다. 무신(18일)에 행재소(行在所)에서 사대(賜對)하였다. 기유(19일)에 능 위의 장전(帳殿)에 입시하여 명을 받들고 구광(舊壙)을 봉심(奉審)하였으며, 상이 현궁(玄宮)을 여는 당부(當否)를 물으시매 선생은 여는 것이 합당하다고 대답하여 아뢰었다. 신해(21일)에 어가(御駕)를 배종(陪從)하여 회가(回駕)를 지송(祗送)하였다. 상은 또한 수레를 멈추고 위안하였으며 선생은 사퇴하고 배로 하곡(霞谷)에 돌아왔다. 경신(30일)에 장릉의 하관할 때 망곡(望哭)하였다.
○ 10월에 고양(高陽)으로 갔다. 백부(伯父) 찬성공(賛成公)을 개장(改葬)하는데 선생이 몸소 가서 일을 치루었으며[經紀], 11월에 이르러서 개장하고 돌아왔다.
○ 11월 경신삭(庚申朔 초하루)에 군(郡)에 들어가서 장릉(長陵)에 개장하는 시복(緦服)을 벗었다. 병인(30일)에 돌아왔다.
8년 임자(壬子) ○ 선생 84세
○ 2월 임인(14일)에 쌀과 고기를 하사하였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상소문은 문집에 보이며 사양을 허락하지 않았다. 궁인(宮人)을 보내 낙죽을 하사하고 안부를 물었다[存問].
○ 10월에 수기(壽器 시체를 안치하는 관, 널을 말함)를 만들었다[治].
○ 11월에 궁인을 보내어 낙죽(酪粥)을 하사하고 안부를 물었다.
9년 계축(癸丑) ○ 선생 85세
○ 2월에 상이 장차 태학관(太學館)에 납시어 선사(先師)에게 석채(釋菜 희생(犧牲)을 생략하고 소채(蔬菜) 따위로 간소하게 제사 지내는 것)를 올리고 시학(視學)하고자 하여 별유(別諭)를 내리시어 선소(宣召)하였다. 상이 장차 선사(先師)에게 석채(釋菜)를 올리고 이어 시학(視學)하려 하여 사관을 보내어 선유(宣諭)하여 돈소(敦召)하였다.
○ 신유(9일)에 친제(親祭)의 의절(儀節)과 시학(視學)할 때의 강할 책자의(冊子議)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예조 좌랑 최성대(崔成大)가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이 대답하기를 “이전(二典) 삼모(三謨) 및 중용(中庸) 등의 책을 강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며, 의대는 문집에 자세하다.
○ 2월 쌀ㆍ콩과 어육(魚肉)을 하사하였다. 소를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10년 갑인(甲寅) ○ 선생 86세
○ 정월에 간재(艮齋) 최공(崔公)을 곡하였다. 최공의 휘는 규서(奎瑞)요, 호는 간재이고 벼슬은 영의정이며 선생보다 한 살 아래인데 교의(交誼)가 본래 두터웠으며 무신(戊申)에 이르러서는 훈권(勳券)을 애써 사양하였고 드디어는 선생을 따라 인거(隣居)하여 살면서 자주 서로 만났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곧 함께 나가기를 무릇 6년이었는데 최공이 서울로 돌아갔다가 이어 부음(訃音)이 왔던 것이다. 위(位)를 만들고 곡하였다.
○ 3월 기묘(3일)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비지를 내려서[宣批] 사퇴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병신(20일)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진배(進拜)되고 사관을 보내어 선소(宣召)하였는데 계속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별유(別諭)를 내려 이르기를, “이제 발탁하여 승급(陞級)시키는 것은 하나는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이요, 하나는 늙은이를 공경하는 것[敬老]이니 모름지기 소자(小子)의 생각이 진실로 그 문식(文飾)이 아닌 것을 알아주오.” 하였다, 올해에 소를 올려 사양했는데 그 소에 대략 아뢰기를, “가령 신이 오래 벼슬하여 승진하였더라도 이미 예경(禮經)에 이른바 퇴직할 나이[休致之歲 일흔 살이면 치사(致仕)한다.]가 지난 지 16년째이온데 어찌 용사(用捨)와 진퇴(進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주관(周官) 삼고(三孤 소부(少傅), 소사(少師), 소보(少保)를 말함)의 위(位)를 죽지 않은 시체에 이를 더하시면서도 조금도 의심하고 비난하시지 않는 것은 웬일입니까? 이것은 아직 죽지 않은 때에 그 몸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온데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성조(聖朝)에서 천작(天爵)을 아끼지 않으신 일단을 볼 수 있거니와, 이것이 신이 근심하여 탄식하고 억울하여 눈을 감고 죽을 수 없는 바이옵니다.” 하였다. 소는 문집에 자세하다. 상은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5월 갑신(甲申)에 소를 올려 해직할 것을 빌었는데 상은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소2. 사지중추소 일 3월. 답 사관 김계일(金啓日) 별유. 사관 김종태(金宗台) 회대 참조]
○ 9월에 상이 장릉(章陵)에 납시었다. 무자(16일)에 통진(通津)에 나아가서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을미(23일)에 선비(宣批)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관에 명하여 같이 나오라 하였다. 통진에 나아가서 현도(縣道)로부터 세 번째 행재소에 소를 올렸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사관이 선비하였는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10월 병오(4일)에 또 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사관들에게 머물게 하여 비(批)를 내려서 돌아오도록[輟還] 명하였다. 네 번 소를 올렸다. 소는 문집에 보이며 비를 내렸는데 비는 문집에 보인다.
11년을묘 ○ 선생 87세
○ 7월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임명되었고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선소하였다. 정월 임진(21일)에 원자(元子)가 탄강(誕降)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호를 정하고 돌아왔다. 먼저 선생에게 보양(輔養)의 명을 내렸으므로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선소하였다.
○ 8월 기사(3일)에 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상은 사관을 보내어 수찰(手札)을 가지고 선소(宣召)하고 이어서 의원(醫員)을 보내어 병을 간호케 하였다. 선생이 소를 올려 늙고 병든 것을 가지고 사양하였고 아울러 감히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아뢰었는데, 상은 사관을 보내어 수찰(手札)을 가지고 선유하여 이르기를, “절목(節目)을 거행하는 것은 자연히 서울 가까이도 보양관(輔養官)을 맡을 자가 있겠지만 소자는 황구(黃耈 머리가 누런 늙은 사람을 말함)의 오래도록 쌓은 덕망을 바라는 것이 마음에 갑절이었으니 모름지기 선양(善養)을 더하여 즉일로 나와 주오.” 하였다. 신묘(25일)에 소명을 받들고 통진(通津)에 갔었으며 계사(27일)에 상이 궁인(宮人)을 보내어 반찬을 하사하고 도중 안부를 물었다. 병신(30일)에 서강촌(西江村)에 머물러 소를 올려 찬성의 직을 사양하였는데 사관이 와서 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않고 함께 나올 것을 명하였다. 찬성직을 해직할 것을 빌었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사관이 비지를 내렸다.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회대(回對)하여 사관을 불러올리고 며칠 쉬었다가 나가기를 비니 허락하였다.
○ 9월 기해 (3일)에 대궐 앞에 나아갔다. 강상(江上)으로부터 곧바로 대궐 밖에 나아가서 머물러 있었다. 쌀ㆍ고기와 땔감을 하사하였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정미(11일)에 사은(謝恩)하고 원자(元子)의 상견례(相見禮)를 경극당(敬極堂)에서 행하였는데, 예가 끝나자 이어서 입대(入對)하도록 명을 내렸다. 처음에 희정당(熙政堂)에서 인대(引對)할 것을 명하였는데 선생이 나이가 늙었으므로 오르내리기와 나들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명령을 고쳐 경극당(敬極堂)에서 사대(賜對)하게 하였다. 상이 경극당에 납시자 내시(內侍)가 원자(元子)를 안고 우측에 서니 선생은 나아가 뵙고 난 다음에 아뢰기를, “하늘이 동방(東方)을 열어서 편안한 운수를 다시 되돌아오게 하였으니, 이것은 정히 나라가 처음 시작되는 기회라고 할 것이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만약 아들을 낳는 것은 궐초(厥初)에서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스스로 철명(哲命)을 준다고 하였는데 모두가 처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자(元子)께서는 오늘 비로소 상견(相見)의 예를 행하였사오니, 만약 두어 해만 더 지나면 점점 아시는 것이 있게 될 것이오니 반드시 성취(成就)하는 방법을 극진히 한 후에 비기(丕基 왕업(王業)의 바탕)를 전해 주어야 할 것이옵니다.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아버지는 짓고[作] 아들은 잇는다.[述]’고 하였사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진작하시는[作] 도리를 극진히 한 연후에야 원자로 하여금 잇게[述] 하여 만세(萬世)의 업(業)을 삼게 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원자가 잘 잇는 책임은 오로지 전하가 일찍이 깨우쳐 주시는데 있사온데 신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장차 무슨 일을 가르치려 하십니까?” 하니, 상은 이르기를, “아버지가 진작[作]하면 자식은 잇는다[述]고 한 것은 왕계(王季)와 문왕(文王)의 일인데 내 어찌 바라겠소.” 하매, 선생은 아뢰기를, “무릇 사람이 아버지의 도리를 다한 후에야 바야흐로 아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옛날 성왕(聖王)께서도 자손을 위한 법에는 모두 전수(傳授)하는 데가 있었던 것이니, 요ㆍ순ㆍ우(堯舜禹)가 정일집중(精一執中)하라 한 것과 성탕(成湯)이 모두 함께 한 가지 덕을 간직하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옵니다. 그런데 문왕의 모훈(謨訓)에 이르러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시경》의 대아 문왕편(大雅文王篇))에 갖추어져 보이며, 집희경지(緝熙敬止)는 곧 그 근본되는 강령(綱領)이며 종지(宗旨)이옵고 사제시(思齊詩) 가운데 ‘싫다 않고서 또한 도리를 지키셨네.[無斁亦保]’라고 한 장은 문왕의 성덕대본(聖德大本)을 그대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 극진한 것을 미루어 말한다면 ‘듣지 않아도 또한 굽히고 간(諫)하지 않아도 귀에 들어간다.’ 하였으며, 하장(下章)에 계속하여 이르기를, ‘그렇기에 성인(成人)이 덕을 지니면 소자(小子)도 훌륭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만들려는 성(盛)함이 이미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자손을 가르치는데 마땅히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지금 성상께서 연익(燕翼)하실 계획은 반드시 이와 같이 성덕(盛德)의 큰 근본이 있은 후에야 원자가 이어받아 작성(作成)케 하실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으신다면 원자가 무엇을 좇아서 이를 이루겠습니까? 하늘이 내려주신 덕은 그 아름다운 바탕이 이와 같사온데 만약에 다만 거짓된 버릇[僞習]만을 내내 기르신다면 어찌 마음속에 한(恨)이 됨이 깊지 않겠사옵니까?” 하니, 상은 이르기를 “꼭 각별히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겠소. 특히 위습(僞習)으로 양성(養成)한다는 말은 더욱 절실한 것이요.” 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옛날 사람이 어찌 ‘아버지가 지은 집은 그 아들이 살게 되고 아버지가 짓던 밭도 역시 그 아들이 짓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도 오늘을 비추어 보신다면 또한 마땅히 처음과 같이해서 먼저 스스로 진발(振發)하신다면 원자께서도 어찌 성취하시는 데 부족한 곳이 있겠사옵니까? 그 음덕(陰德)은 장차 원자에게로 돌아가 스스로 철명(哲命)의 도를 주시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아니하신다면 오늘날의 아뢰었던 바가 다만 한 자리에 하는 말에 그치고 말 것이옵니다. 성인이 주역(周易)에서 그 도를 미루어 말한 것은 덕행(德行)에 돌아갈 것을 요점으로 하고 말하기를, ‘묵묵하여서[黙] 이루고 말하지 않아도 믿는다.’고 하였으니, 오늘날 논하는 바가 비록 천 마디의 말과 만 마디의 말일지라도 만약 실덕(實德)에 힘쓰지 않으신다면 모두 이 문구(文具)가 됩니다. 오직 잠잠히 하여 이루고 말하지 않아도 믿는데 있을 뿐이오니, 전하께서는 다만 자신의 일뿐만이 아니라 장차 원자에게는 어떻게 하시겠사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것을 항상 마음속에 깊이 깨우치시고 조심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하니, 상은 이르기를, “아뢰는 말이 모두 절실하니 꼭 각별히 명심하겠소.” 하였다. 선생은 따라서 돌아갈 것을 청하자, 상이 손을 잡으시며 몹시 쓸쓸한 표정으로 이르기를, “이제는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되었으니 허전함을 이길 수 없소.” 하더니, 조금 있다가 악수(握手)했던 손을 놓으며 이르기를, “경은 돌아가서 몸조리 잘하고 있다가 원자 때문에 다시 경(卿)을 보게 될 것이라.” 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잘 부축해 주도록 하고, 무릎을 꿇고 절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튿날 신무(12일)에 돌아왔다. 대궐 밖으로 나와 정동(貞洞) 가묘(家廟)에 배례하고 강교(江郊)로 나와서 배를 타고 양천(陽川)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맨 처음에 선생이 임금의 부르심을 받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들 선생의 대질(大耋) 때문에 마땅히 못 나갈 것이라고 하더니 이에 미쳐서 선생에게 청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딴 사람들은 선생의 이와 같은 행동을 모두 의혹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이 강상(江上)으로부터 떠나시면 곧바로 대궐로만 나아가실 뿐 자제들의 집을 지나시면서도 들르지 않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하니, 선생은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아흔의 나이로서 죽는 것을 참아 가며 명령에 따르는 것은 무슨 다른 뜻이 있겠소. 온 나라에서 크게 바라는 가운데 하늘의 신령(神靈)하심에 힘입어 종사(宗社)가 부탁함이 있었는데 늙은 것이 죽지 않은 탓으로 이런 경사를 보게 된 것이요, 또한 이와 같은 명령을 받게 된 것인데 무릇 직명(職名)에도 부당하고 늙고 병들어 불가하였으나 억지로 맡았을 뿐이며 나의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었소. 오직 바라는 것은 임금의 기억(岐嶷)한 거동을 한 번이라도 뵙고 돌아왔다면 물러오다가 구렁에 빠지더라도 한(恨)이 없겠습니다. 이번 걸음에서 어찌 종종 인사를 차리겠으며 다시 아이들 사는 집에 머무를 여가가 있겠소.” 하였다.
○ 기미(23일)에 소를 올려 모든 직책을 해직할 것을 빌었는데 사관을 보내어 선비(宣批)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 겨울에 두 번 소를 올려 모든 직책을 해직할 것을 빌었는데 허락되지 않았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이때에 선생의 조카 준일(俊一)이 새로 은혜를 입어서[新思] 입시(入侍)하였는데, 상은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시고 또한 면부(勉副)하시던 뜻이 불가함을 유시하였으므로 회대(回對)하여 사은(謝恩)하였다.
12년 병진 ○ 선생 88세
○ 정월 병신(1일)에 세자 이사(世子貳師)를 겸하여 배명되었다. 3월에 장차 왕세자를 책봉(冊封)하려는 까닭에 이 명령이 있었다. 액정(掖庭)의 사람을 보내어 낙죽(酪粥)을 하사하고 안부를 물었다[存問].
○ 3월에 소를 올려 모든 직책을 해직할 것을 빌었는데 허락되지 않았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사관이 나와서 비지를 내렸다.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왕세자 책봉례(冊封禮)가 끝나자 소를 올려 진계(陳戒)하고 이어서 모든 직책을 해직할 것을 빌었는데 허락되지 않았고, 소에 대략 이르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오직 아름다운 데 다함이 없으며 또한 오직 구휼(救恤)하는 데 다함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이 경사는 경사중의 지극한 것이옵니다. 진실로 오직 아름다운 데 다함이 없고 오직 구휼만 하신다면 또한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여기에서 반드시 천지(天地)의 신명(神明)을 하늘에 두시고 정일(精一)로서 중(中) 집(執)하시고 백성이 극(極)을 세워 만대(萬代)토록 터전을 닦아 두신다면 성사(聖嗣 왕세자)께서 이어받으시고[述] 대효(大孝)를 이룩하실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스스로 철명(哲命)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렸다.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쌀ㆍ콩과 어육(魚肉)을 하사하였다. 을묘(21일)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급되었다. 4월에 소를 올려 음식물을 하사한 것과 벼슬의 승급에 대하여 사례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상은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내렸다.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8월 갑자(3일)에 초정(初亭)으로 옮겨 머물렀다. 선생은 항시 선묘(先墓) 곁인 하곡별당(霞谷別堂)에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약간 설사병이 있어서 초정(初亭)으로 도로 나아갔다.
○ 임신 11일에 선생은 정침에서 서거하였다. 이날에 대청에 나아가 단정하게 앉으시자 여러 자질(子姪)들이 모두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선생은 집에 있을 때나 처세(處世)할 때에 거울이 되고 경계될 만한 것과 자신의 뒷일에 대한 약간의 일을 말씀하는데 정신이 보통때와 다름이 없으므로 모시고 앉아 있는 자가 모두 깊게 염려하지도 않았는데 밤이 되자 방 가운데 평상(平床)을 펴고 그 위에 요를 깔고 베개를 놓아두라 명하더니, 남쪽으로 머리를 둔 채 손수 모도(摸度)로 몸을 정중하게 눕히고 손을 모아 단묵(端黙)하더니 조금 후에 졸거(卒去)하셨다. 이날 밤에 흰 무지개 한 가닥이 초정(初亭)의 서쪽 우물에서부터 시작하여 하곡별당(霞谷別堂) 남쪽 우물에 멈추었다가 다시 없어지자 운기(雲氣)가 장막과 집 위에 자욱하더니 날이 밝아지자 흩어졌다. 부음이 들리자 예장(禮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며칠 전에 선생의 병을 말씀하는 이가 있으니 상은 어의(御醫)를 보내어 간호하게 하였는데, 선생이 이미 졸거하여 부음이 들리자 상께서는 몹시 슬퍼하고 부의(賻儀)와 장사는 대신과 같이 하게 하였다.
○ 10월 을축(5일)에 제(祭)를 하사하였다. 숭종제사(崇終諸事)의 별구(別具)는 고집(誥集)에서 말하였다.
○ 문인 윤순(尹淳)이 글을 지어 제사하였다. 제문에 이르기를, “슬프다! 이 마음을 간직하여 만리(萬里)를 정하게 하고 이 마음을 실(實)하게 하여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은 선생의 학문이 밝게 통하고[明通] 연색(淵塞)하여 마침내는 탄태(坦泰)하고 안리(安履)한 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처신(處身)할 때에 침묵하여 이를 이루고 그 본연(本然)의 하늘을 즐기되 말이 많거나[辨博] 꾸미고 과장하여서[榮華] 남에게 빛을 내지 않았으며, 그 세상에 나아갔을 때에는 예로써 행동하고 세신(世臣)으로서의 절의(節義)를 지키는 데 공손하여서 도덕(道德)과 빈사(賓師)로 그 몸을 높게 하지 않았다. 비록 밖을 힘쓰는 자가 의혹하고 높기를 좋아하는 자가 의심하더라도 선생이 스스로 믿고 뉘우치지 않은 것은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나의 스승이라 하였는데 또한 더욱이 수(壽)가 대질(大耋)에 오른 것은 자못 옛 현인(賢人)들에게서는 거의 있지 않았던 것에서랴! 예가 융성하여 황구(黃耈) 같던 것은 밝은 군주[明主]가 존상(尊尙)한 바 되었다. 선생의 인덕(仁德)이 하늘에서 누린 것이 오래인데 또한 어찌 족히 남의 알고 모르는 것으로써 더하고 덜하고[加損] 길고 짧음[長短]이 되었는가? 슬프도다! 소자는 어리석고 못나서 백규(白圭)의 삼복(三復)을 가지지 못하여 일찍이 욕되이 남용(南容)의 권시(眷視)를 받게 되었으며 문장(門墻)에 드나든 지 40여 년에 찬견(鑽堅)과 앙고(仰高)를 하여 그 한 둘도 엿보아 측량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 부앙(俯仰)하고 굴신(屈伸)해서 명교(名敎 삼강(三綱) 오륜(五倫)) 안에 있는 것은 모두가 선생의 풍지(風旨)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어찌 백 년엔들 다함이 있겠으며 이 세상을 돌아보건대 뉘가 돌봐 주리까? 슬프도다! 당ㆍ우(唐虞)의 큰 법이 희미하고 어두우며, 조종(祖宗)의 육전(六典)이 거칠고 땅에 떨어졌어도 선생이 생존하실 때는 멀리 의합[遠契]하고 가까이서 이음으로써[近述] 힘써 행하고 유위(有爲)함이 있었는데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는 한갓 세상이 쇠하고 운이 막혔으며 학문이 끊어져서 이어지지 않음을 보니 이는 진실로 온 나라 사람이 복이 없는 탓이요 어찌 홀로 소자의 사적(私的)인 분통이겠습니까?” 하였다. 문인(門人) 심육(沈錥)이 글을 지어 제사하였다. 제문에 대략 이르기를, “선생은 천성(天性)이 세상에 뛰어났고 충양(充養)하는 데에는 도(道)가 있어서 맑고 통하고[淸通] 꿋꿋하고 크나큰[剛大] 기질을 받았으며 박약(博約)과 정미(精微)의 학문으로 이를 이루었으므로 밤낮으로 힘쓰고 힘써 무엇을 하면 꼭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미 황ㆍ왕(皇王) 제ㆍ패(帝伯)를 가리는데 깊었으며, 또한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연구하여 체용(體用)이 모두 갖추어졌고 품조(品條)가 자세하고 정밀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시위(施爲)하는 데 발단(發端)할 수 있고 사업(事業)에서 볼 수 있었는데 선생은 돌이켜 보건대 뜻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선생이 과연 세상을 잊어버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그 몸을 나타내어 도가 행하지 못한 것보다는 차라리 본심을 지키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었을까? 이것은 실로 선생이 처세하는 뜻이요 그 우위(憂違)의 아름다운 뜻을 즐겨 행하는 데 있어서는 일찍 옛사람과 같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널리 배워 모[方]가 없고 흡족하게[沛然] 행하는 것은 제가(諸家)의 소수(少數)가 육예(六藝) 가운데에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그 말을 연구하여서 온축(蘊蓄)을 다하였으니, 사람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는 대체로 모르는 것이 없어, 말만 하면 곧 응답하되 혼혼하여 끊임이 없었으니 진실로 그것을 발휘하는 데 뜻이 있어 넓게 하였다면 장차 그 넓고 푸짐함[浩穰]을 이루 다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도리어 깨끗하게 감기지 않았던 것이다. 대저 선생의 부(富)에는 다른 사람도 더러 할 수 있지만 선생의 있고 없는 것 같이 해서 민연(泯然)히 칭할 수 없던 것은 탁월하여 미칠 수 없었다. 세상의 군자(君子)가 아는 바와 배운 바에는 다소의 분수(分數)가 있어서 각각 스스로 높다고 자랑하고[矜高] 주장을 세움이 분운(紛紜)하였으나 그 득실의 어떤가를 논하지 않더라. 나를 위하고 남을 위하는 분변(分辨)을 알겠으니 선생의 학문 같은 것은 그 귀신에게 질정(質正)하고 백세의 성인(聖人)을 기다려도 부끄럽지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갑(某甲)에 선생을 선조(先兆)의 묘소(墓所) 서쪽에 장사하였다. 충정공(忠貞公)의 묘소 서록(西麓)이었다.
13년 정사
○ 모월(某月) 모갑(某甲)에 선생을 선조(先兆)의 묘소 동쪽에 개장(改葬)하였다. 황고(皇考)의 묘소 동쪽에서 두어 걸음이다.
19년 임술
○ 모월(某月) 계해(癸亥)에 문강공(文康公)의 시호를 내렸다. 선생이 졸거(卒去)한 지 7년 만에 임금의 명령으로 장(狀)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諡號)를 내리었다. 태상시(太常寺)에서 문강(文康), 문정(文靖), 정헌(正獻) 등의 시호를 의논하였는데 문강으로 비답(批答)을 내리었다. 도덕(道德)이 넓게 퍼지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연원(淵源)이 쉬지 않고 통한 것을 강(康)이라 한다.

[주C-001]연보(年譜) : 하곡 연보는 그에 대한 전기(傳記)로서는 가장 늦게 된 것이다. 《석천유고(石泉遺稿)》에 실린 일승(日乘)에 의하면 석천 신작(申綽)이 순조(純祖) 2년 9월에 찬한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 완구(宛丘) 신대우(申大羽)가 이미 엮은 하곡 신도표(霞谷神道表)와 하곡유문(霞谷遺聞)을 대작(代作)하거나 혹은 완성하였으므로 이에 의하면 정조(正祖) 20년 10월에 유문(遺聞)을 완성하였고 이어 연보를 찬술했을 것이다. 이 국역은 A본에 수록된 연보에 의하되 필요한 사항을 B, C본의 수록된 연보와 대교하였고, 《실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및 관계 인물의 문집에 의하여 보충하였다.
[주D-001]선생의 성은 …… 영의정인 근(謹)이다. : 하곡의 세계에 관하여서는 본 역본에 소록한 부집(附集) 하곡의 전기류(傳記類) 외에도 본 국역본 상권에 수록된 충정공 묘표, 선고비 행장 및 미 국역 부분인 전기류가 있으며 세계(世系)나 연혼(連婚) 관계에 관한 개관표는 역자의 《하곡집 해제》(《국회도서관보 72년 4월호》) 주 14에 상세하다.
[주D-002]6월 을묘 …… 저택에서 태어났다. : 이때 그의 조부 정유성은 같은 4월에 좌승지였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곧 평안 감사가 되었으며 4년에는 형조 판서가 되었었다. 《실록 조》.
[주D-003]선생은 겨우 …… 따라서 배웠다. : 하곡유사에는 하곡이 이상익에게 수학하기 전에 연천(連川) 이찬한(李燦漢)에게 배웠음을 말하고 있으며 거자업(擧子業)은 춘파(春坡) 이성령(李星齡)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유사》ㆍ《행장》 참조.
[주D-004]호련기(瑚璉器) : 서직(黍稷)을 담아 종묘(宗廟)에 제사하는 그릇, 귀중하고 화사한 인품을 가진 인재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5]춘전(春田) 이 판서(李判書) 경휘(慶徽) : 이경휘는 자가 군미(君美), 호는 묵호(黙好), 뒤의 호는 춘전(春田)이며 벽오(碧悟) 이시발(李時發)의 아들이고 이상익(李商翼)과 같은 경주인(慶州人)이었다.
[주D-006]11월에 황조 …… 서거(逝去)하였다 : 현종실록 5년 11월 정미(丁未) 조 및 본 구역본 상권 소록 충정공묘표 참조.
[주D-007]부사(府使) 홍거(鴻擧)의 …… 내길(來吉)의 외손녀이다 : 하곡의 양명학 수용의 계보는 분명치 않으나 우선 부인이 최내길의 외손녀(外孫女)가 되므로 그의 아우이며 초기의 왕학 수용자였던 최명길(崔鳴吉)과 연결되었으며, 이어 그 손자 최석정(崔錫鼎)과도 동문지우(同門知友)였던 것으로 보아서 최지천과 연결될 것 같다.
[주D-008]후일(厚一) : 후일(厚一)의 행장은 그의 여서(女壻)인 신대우(申大羽)가 찬한 바 《완구유집(宛丘遺集) 8권》에 수록되었다. 하곡의 학문은 우선 그에 의하여 가학화(家學化)하였고 그를 통하여 신완구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 연결되었던 것이나 그도 하곡 몰 후 5년 되던 영조 17년에 졸거하였다. 《유사(遺事), 문집의 일로 왕복한 서독》 참조.
[주D-009]감여(堪輿) : 천지, 건곤의 뜻이며 감여가(堪輿家)는 묘지선정 때 지질 방위에 따라 길흉을 판단하는 풍수가(風水家)나 역상(曆象)을 맡고 점성(占星)을 맡은 자 등을 말한다.
[주D-010]영동(嶺東)에 갔다 : 10책 본에는 현종 15년 조에 2월에 영동에 갔다가 8월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주D-011]경명행수(經明行修) : 경명해수는 과거제에 의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를 천용하는 인재 등용 과목의 하나이다.
[주D-012]여화(汝和)의 박흡(博洽)과 …… 중화(仲和)의 정약(精約) : 여화(汝和는 최석정(崔錫鼎)의 자(字)이고 덕함은 임영(林泳 호는 滄溪)의 자이며 중화는 (화중은 잘못) 김창협(金昌協)의 자이고 이들은 모두 당대의 명류(名流)들이다.
[주D-013]3월에 광주군에게 …… 광주 부윤(廣州府尹)이었다. : 광주 부윤 제태의 묘지(墓誌)는 그의 여서(女壻)인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썼다. 그는 서거 전년에 광주 부윤이 되어 치적(治績)을 올렸으므로 유상운(柳尙運), 윤지선(尹趾善), 최석정(崔錫鼎) 등의 현임 대신들에게 칭찬을 받았으나 무인 3월 11일에 47세로 서거하였다. 백하집 7권 소록 「광주부윤(廣州府尹) 정공 묘지명(鄭公墓地銘)」 참조.
[주D-014]정월에 충정공의 …… 사임하였다. : 이 해에 노론 김창흡(金昌翕) 등이 박세당(朴世堂)의 《사변록(思辨錄)》과 이경석(李景奭)의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배척하였고 최명곡(崔明谷)도 논척되던 때였으며, 이 무렵에 하곡은 명곡과 논학한 왕복 서간이 많았다. 본 연보와 상권소록 서(書) 및 《명곡집》 서(書) 부분 등 참조.
[주D-015]3월 을미( 일) : 34년 3월엔 을미일이 없음.
[주D-016]2월에 요사(夭死)한 장손(長孫)을 곡하였다. : ‘종백질을 제사하는 글’(본 역본 상책 소수)에서도 이미 종가의 적손(嫡孫)으로서 그에게 기대했던 하곡의 심정이 잘 토로되고 있다. 이때에 벌써 그의 부친, 백부, 계씨, 조부가 모두 몰하셨으며 남은 것은 그의 부자와 조카뿐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의 유교(遺敎)와 가법(家法)이 저술되었거니와 이때 또 장손을 잃고 강화 이거(移居)를 결심하였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이때는 명곡(明谷)의 예기류편(禮記類篇)이 논척되고 드디어 해판되던 때이기도 하였었던 만큼 소론가(小論家)의 입장에서도 이유는 있었을 것 같다.
[주D-017]7월 무자(1일)에 …… 부임하였던 것이다. : 신대우 찬 ‘정 선생의 회양치사(淮陽治事)를 기록함’은 완구 유집(宛丘遺集)에도 수록되었다.
[주D-018]심경집의(心經集義)를 …… 편찬이 있었다. : 《심경》은 송 나라 진덕수(眞德秀)의 찬이며 명 나라 정민정(程敏政 호황돈)이 부주를 달았었다. 퇴계는 일찍 이에 심취하였으나 부주에 대하여는 이를 비판하던 끝에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썼던 것이다. 하곡은 정의 《부주》조차 지리(支離) 번잡(煩雜)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하곡의 심경집의는 이보다 6년 전인 을유(乙酉)에 최명곡에 준 글에서도 심경례(心經例)에 따라서 책을 만들고자 한다는 뜻을 말하였음을 보아 이것도 학변ㆍ존언 등에 이어서 이때 완성된 것 같다.
[주D-019]《정문유훈(程門遺訓)》을 …… 주해(註解)하였다. : 《정성서(定性書)》는 ‘정명도가 장횡거(張橫渠)에게 준 글’에서 수학의 방법[修學之方]을 말한 것이며 장의 서명(西銘)과 같이 송학의 사변화(思辨化)의 기초가 된 것이다. 하곡의 정성서해ㆍ정성문 등 참조.
[주D-020]압강(壓降) : 하위자(下位者)는 상위자(上位者) 앞에서 낮추고 내리는 것이니 예법에는 상위자가 있으면 장기(杖期)가 불가하므로 여기서는 숙종 앞에서 경종(곧 세자)이 장기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가례》는 장기(杖期)를 할 수 있다 하고 《의례(儀禮)》에는 부장기이므로 하곡은 《주례》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주D-021]《경학집요(經學集要)》를 …… 책을 만들었다. : 현존 《하곡집》에는 경학집록(經學集錄)과 경설(經說 본역본에는 삼경차록(三經箚錄)으로 됨)이 있을 뿐이며 이밖에 경설의 장귀(章句)를 집철한 집록(集錄), BㆍC본이 있는데 이 기록은 아마도 경학집록일 것이며 이것이 완성된 것은 영조 6년 집경서성(集經書成)이란 것이 이에 해당할 것으로 보며 찬집의 시작이 이때일 것 같다.
[주D-022]소는 문집에 보이며 비(批)는 빠졌다. : 문집에는 사 소명 급찬선소 7월 비일, 사 찬선 겸임국자소 7월 별유 9월, 사관 윤상백(尹尙伯), 서계(書啓) 회유(回諭) 9월, 서계 회유 9월, 사관 신유언(申幼言), 서계 회유 9월, 서계 등이 있으나 연보에는 이에 대한 기사가 없거나 소략하다.
[주D-023]계성사(啓聖祠) : 계성사는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 안자 아버지 안유(顔由), 증자 아버지 증점(曾點), 자사의 아버지 공이(孔鯉) 및 맹자 아버지 격공의(激公宜)를 제사하는 곳이다.
[주D-024]사현사(四賢祠) : 현사는 후한(後漢)의 절의사(節義士)를 제사한 곳으로 여기서는 노론의 효장(驍將) 윤지술(尹志述)을 합향하려던 의논이며, 윤지술은 그 후 배향되었다가 출향(黜享)되었는데 다시 순조(純祖) 때 배향되었다.
[주D-025]7월에 지평(持平) …… 헐뜯었다. : 영조실록 10권 해당 조에, “헌부(憲府)가 앞의 계를 아뢰었더니 번거로운 짓을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고, 정제두를 개정(改正)하는 일은 정계(停啓)하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7월 16일에 이정박이 계하기를, “정제두는 정주의 학문에 전적으로 배치하였고 대략 육ㆍ왕(陸王)의 학설을 답습하였으며, 감히 말하기를, ‘육ㆍ왕ㆍ정ㆍ주(陸王程朱)가 비록 모두 대도(大道)에 들어왔다고 할지라도 육ㆍ왕의 학은 숭례문(崇禮門)과 같고 정주의 학문은 돈의문(敦義門)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육ㆍ왕학을 정도(正道)로 삼고 정주학을 방계로 갈라놓은 것이라고 하였사오니 그가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고 두뇌가 전적으로 어두운 것은 이와 같이 심하옵니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주D-026]육상산(陸象山) : 이름은 구연(九淵), 주자와는 달리 심즉리(心卽理)설을 내세우고 간이직절을 주장하였다.
[주D-027][연주 헌의 …… 박필재(朴弼載) 참조.] : 이밖에, 문집에는 견 사관명소회대(遣史官命召回對) 사관 권 사집(權士集), 등연퇴출후선유회대(登筵退出後宣諭回對), 예궐하 사소명소(詣闕下辭召命疏) 4월 초 3일, 답 등이 있고, 이는 연주(筵奏)에도 4월 초 3일 조에 그 내용이 수록되었다.
[주D-028][사특사식물소(辭特賜食物疏) …… 별유 등 참조.] : 이밖에, 문집에는 청수해래사관소(請收偕來史官疏) 4월, 답, 전유회대(傳諭回對), 회계 왕세자 하령(下令) 설서 이윤신(說書 李潤身) 회대 등이 있다.
[주D-029]경세육전(經世六典) : BㆍC본에는 《경세대전(經世大全)》으로 되었다. 이는 《경제육전(經濟六典 정도전 저)》, 《경국대전(經國大典)》, 《경세대전(經世大全 원(元)의 법전(法典))》 등의 어느 것인데 문의로 보아 이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맞다.
[주D-030]경서집(經書集) : BㆍC본에는 경서집성(經書集成)이라고 되었는데 이는 경학집록(經學集錄)이어야 할 것이다.
[주D-031]8월 경술(14일)에 …… 대답하였다. : 이밖에 사어의수왕지명잉진계소(辭御醫隨往之命仍陳戒疏), 답(사관 김시위(金時煒)) 문집에 수록되었다.
[주D-032]가정(嘉靖 …… 고사(故事) : 명의 가정제가 무종의 뒤를 이어 세종이 되었는데 장총ㆍ계악 등이 세종(가정제)의 뜻에 영합하여 본생 부모의 추존에 찬성하고 조신들은 이에 반대하였으며, 장총 등 세종의 추존의에 찬성한 파에는 왕학(王學)파에 관련이 짙었는데 이때의 일대 논의를 “가정의 대례의”라 한다.
[주D-033][사지중추소 …… 회대 참조] : 3월~10월간에 사 우찬성 초(初) 소. 3월, 답, 사관 이광제(李光濟) 재소, 5월, 답, 사관 홍첨(洪瞻), 서계, 삼소 9월, 답, 사관 허심(許鐔) 4소, 10월 답 등이 문집(A本)에 보인다.
[주D-034]을묘 ○ 선생 87세 : 문집에는 사 식물제급명소(辭食物題給命疏) 을묘 정월 비일, 회대, 회유, 회대 등이 보인다.
[주D-035]남용(南容) : 남용(南容)은 공자 제자이며 조카사위이다. 남용이 매일 시경 백규(白圭)편을 세 번씩 읽으매 공자가 조카사위로 삼았음.
한수재선생문집(寒水齋先生文集) 제2권
 소(疏)
우암 선생(尤菴先生)께서 무함을 받은 일을 변론하는 소 계미년 6월

삼가 아룁니다. 신이 띠고 있는 강직(講職)과 반직(泮職)은 천만 부당한 것이므로 그 직에 제수된 뒤로 여러 번 면직해 주실 것을 빌며 있는 정성을 다해 호소하였으나 임금께서는 모두 들어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릇된 은총을 더 추가하시어 한층 더 일이 낭패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계속 귀찮게 해 드릴 수 없어 잠자코 죄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벌책이 내리지 않아 황폐한 초야에서 빛나는 직함을 욕되게 하였으니, 조정으로서는 사체가 해괴하고 신의 일신으로서는 염치와 의리가 전혀 상실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을 바라보는 남들도 모두 민망하게 여겨 걱정하는데 하물며 신 본인의 마음이야 어찌 감히 하루라도 편히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신이 스스로 호소하지 않으면 달리 변통할 기약이 없으므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절박한 충정을 진달하오니, 삼가 빌건대 성자께서는 빨리 직명을 삭제하여 공사가 다 편하게 해 주신다면 다행스럽기 그지없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구구하게 내심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신이 요즘 이른바 이하성(李廈成)의 소장이란 것을 보았는데, 신의 스승인 문정공(文正公) 신 송시열을 무함하고 욕을 한 정도가 너무도 심하였으니, 이 또한 세도의 한 변괴입니다. 삼가 듣건대 그 소장은 성상께서 이미 도로 내려 주게 하셨다 하니, 신은 성상의 깊이 미워하고 통절하게 끊으시는 뜻을 볼 수가 있어 감격하고 경하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그 글이 이미 전파되어 오늘날과 후세의 의혹이 없을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이 이에 어찌 한마디 말로나마 그 무망의 정상을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하성의 소장에, 그의 조부가 전형(銓衡)을 잡고 있을 때 초야의 인재를 발탁하는 일을 힘써 추진하였는데 송시열이 전직 참봉으로 한창 학행의 명망이 있기 때문에 맨 먼저 천거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경석(李景奭)이 이조 판서가 된 것은 계미년(1643, 인조21)이었고 신의 스승은 을해년(1635, 인조13) 겨울에 이미 대군(大君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며 기묘년(1639, 인조17) 가을에 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제수되었으니, 그 이른바 참봉 운운한 것은 무망(誣罔)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하성의 소장에, 영릉(寧陵 효종의 능호)이 즉위하셨을 때 그의 조부가 영의정에 올라서는 또 송시열 등 한때의 명사들을 천거하여 새로운 정치를 보좌하게 하였고 송시열 또한 그로 인해 그를 흠모하여 도성에 들어갈 때마다 베옷에 짚신 차림으로 그의 집을 찾아갔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스승은 난리 뒤에 시골로 돌아와 발길이 도성에 접근한 적이 없고 기축년(1649, 인조27) 대상(大喪 인조의 죽음을 뜻함) 때 비로소 문경공(文敬公) 신 김집(金集), 문정공(文正公) 신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부름을 받고 도성으로 들어가 곡림(哭臨)한 다음 입대를 청하였으나 인견하겠다는 명이 없으셨기 때문에 즉시 소장을 남겨 두고 남쪽으로 돌아왔으니, 어느 틈에 이경석을 찾아가 보았겠습니까. 설사 한 번 찾아가 보았다 하더라도 그때에는 이미 대간의 직명을 띠고 있어 반드시 한사(寒士)의 옷차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이른바 ‘도성에 들어갈 때마다’라느니, ‘베옷에 짚신 차림으로’라느니 하는 말들은 전부 터무니없이 만들어 낸 것이니, 이 또한 무망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체로 신의 스승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고제(高弟)입니다. 소년 시절부터 당대에 이름이 나 당대의 제현(諸賢)이 모두 추천하고 인정하였으며 효묘(孝廟)께서 즉위하신 뒤로는 사부로 모셨던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시어 마침내 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뜻이 맞는 관계가 되었으니, 이는 온 나라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하성이 한 말은 마치 신의 스승이 벼슬에 오른 것은 오로지 그 조부의 천거를 힘입었기 때문에 신의 스승이 그 사적인 은혜를 고맙게 여겨 각별히 흠모했던 것처럼 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이하성의 소장에 또, 기해년 복제(服制)에 관한 예를 논할 때 그의 조부는 시왕(時王)의 제도를 주장하고 송시열은 사종설(四種說)을 주장하여 의견이 비로소 갈라졌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종설이라 한 것은 본디 윤휴와 허목의 설을 시비를 가려 깨뜨리기 위해 한 말일 뿐입니다. 신의 스승은 당초에 헌의하기를 “고금의 예법은 이미 서로 틀리는 경우가 있고 제왕의 예제(禮制)는 더욱 함부로 논의하기 어려운 것인데, 여러 대신이 이미 시왕의 제도로 하자고 논의하였으니, 신은 감히 다른 말을 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고, 경자년에 헌의할 때는 “당초에 사실 이와 같은 의례소(儀禮疏)의 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 소의 설이 전혀 의심이 없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의심스러운 소의 설을 적용하여 막중한 변례(變禮)를 단정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까이 대명(大明)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오히려 허물이 적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경석과 신의 스승이 주장한 것은 모두 다 시왕의 제도였는데 어찌하여 의견이 비로소 갈렸다고 말한단 말입니까. 이는 지난날 흉당(凶黨)이 사종설을 가지고 신의 스승에 대한 죄안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하성은 필시 신의 스승이 본디 사종설을 주장한 것이라 생각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니, 이 또한 무망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혼(求婚) 운운한 말에 있어서는 그 사실 여부를 신은 진정 모르긴 하나 대체로 그 종이에 가득 지껄여 놓은 말은 모두가 제 스스로 이러쿵저러쿵 만들어 낸 것이니, 어찌 이 일 또한 무망한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이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세간에서 혼사를 의논할 때 한마디로 즉각 허락하는 경우는 열 가운데 한둘도 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하성의 말대로라면 세간에 서로의 우호관계를 온전히 유지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이처럼 노기에 찬 말이 어찌 말이나 되겠습니까.
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의 경우는 사실 알기 어려운 사리가 아닙니다. 사세의 완급과 본심이 기꺼워했는지의 여부는 우선 제쳐 두고 일단 이 글을 지은 뒤에는 공론에 환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제 이하성은 사사로운 정에 마음이 가려져 구차한 의리를 만들어서 그의 조부가 했던 행위를 시의에 맞게 정당하게 한 도리라 하고 반면에 그 일을 비난하고 공격한 자를 옳지 않다고 하였으니, 어찌 도리에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춘추대일통(春秋大一統)은 천지의 법칙으로 만세토록 소멸될 수 없는 공통된 의리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어긋나면 중국이 오랑캐로 빠져 버리고 인류가 금수로 들어가고 마는 것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병자ㆍ정묘년의 변란 때 국력이 허약하여 굴욕적인 조약을 맺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고의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효종대왕께서 성고(聖考 인조를 말함)께서 당하신 위험과 치욕을 가슴 아파하고 상하의 질서가 도치된 것을 분개하시어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지극한 치욕을 씻으려고 생각하셨습니다. 비록 하늘이 이 나라를 돕지 않아 큰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은 공으로 보면 장차 만세를 기다리더라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니, 종묘사직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실로 이에 기인한 것입니다.
신의 스승은 효종과 덕을 함께 하는 신하로 일찍이 세도(世道)를 책임지라는 부탁을 받고, 항상 이 춘추의 의리를 붙잡아 세워 한 세상의 인심으로 하여금 완전히 무무한 데로 빠져 들지 않게 함으로써 선왕(先王)의 지극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였으니, 일찍이 말씀하기를 “만약 이 도가 나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신장될 수만 있다면 비록 이 몸이 천만번을 죽더라도 후회가 없겠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평소에 지닌 마음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이 의리에 배치되는 행위를 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구체적인 사정을 근거로 하여 여지없이 배척하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그 사이에 사사로운 기쁨과 노여움이 개재되었겠습니까.
이하성은 또 한 사람의 몸을 가지고 과거에는 존경하여 승복하고 나중에는 침해하고 모욕하였다 하였으며, 또 하는 말이, 주자가 남들과 교제할 때 앞뒤가 서로 어긋나는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느냐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경석은 신의 스승과 비교해 볼 때 나이며 지위가 다 높으니 문자상의 언사가 공손하고 정중한 것은 자연 교제할 때의 관례적인 일인데 이것을 가지고 존경하고 승복한 것이라 말한다면 또한 구차스럽지 않습니까. 그 과실을 논란함에 이르러서는 선배라는 이유 때문에 망설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이 또한 시비의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어찌 고의로 침해하고 모욕을 주려는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옛날에 여희철(呂希哲)은 송 나라의 어진 경대부로서 주 부자(朱夫子)께서는 그 가법(家法)이 바른 것을 자주 칭송하고 《소학(小學)》과 《연원록(淵源錄)》에 편집해 넣기까지 하였으나 그의 학문을 논할 때에는 괴벽하여 이치에 어긋난다는 말로 배척하였으며, 소식(蘇軾)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린 죽석첩(竹石帖)에 쓰기를 “동파노인(東坡老人)의 빼어나고 늘 변함없는 절조와 단단하고 확고하여 옮기지 않는 자태는 죽군(竹君) 석우(石友)와 거의 비슷하다.” 하였으니, 그 높이고 인정해 준 정도가 얕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나 왕응신(汪應辰)에게 보낸 서찰에서는 그 학술의 어긋나고 어지러움을 사정없이 논하여 말하기를 “만약 그가 뜻을 얻었더라면 보통 채경(蔡京)이 했던 행위를 몸소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그 일을 본다면 이 또한 앞뒤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대현의 억누르고 추켜세움과 주고 빼앗고 하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권도(權度)가 있는 것입니다. 신의 스승이 이경석에 대해 대처한 의리 또한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체로 이하성이 그의 조부를 위해 신변(伸辨)한 것이 수천 자 이상이지만 전편의 정신은 전부 삼전도의 일 한 가지에 있습니다. 대체로 그 조부의 행위가 한 세상의 공론에 환영을 받지 못하고 신의 스승이 논박한 것이 엄격하고 정당하여 거기에 대항해 다툴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은원(恩怨)의 설을 꺼내 교묘하게 꾸며 글을 지었는데, 이미 죽은 사람까지 끌어대어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서 신의 스승을 잘못된 쪽으로 내몰고 그 조부를 과실이 없는 데로 들여 넣음으로써 성상의 귀를 혼란시키고 한 세상을 크게 속여 볼 심산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마음의 소재를 이로써 확실히 볼 수 있으니, 위험하고 험악한 인심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리고 신은 듣건대 이하성이 무함한 말은 모두가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지문(誌文)에 근거를 두었다 합니다. 아, 박세당과 같은 자는 실로 주자의 죄인입니다. 주자는 공자 이후 한 사람인데도 오히려 높이고 믿을 줄은 모르고 그처럼 함부로 대하고 업신여겼으니, 그가 신의 스승을 무함하고 욕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이미 관학(館學) 유생들의 신변으로 인해 박세당을 처분하신 것이 극히 명백하고 통쾌하였으니, 비록 그 늙고 병든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변방으로 내쫓으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는 하였으나 충분히 온 사방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성상의 도를 감싸고 현인을 존중하시는 거룩한 뜻을 흠앙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이에 그와 서로 시비를 가릴 것은 없으나 이하성의 소장은 그 허무맹랑하게 무함한 정도가 박세당에 비해 더한층 심하니, 만약 선사께서 무함을 받은 상황을 환히 드러내어 이하성 등의 간사한 심사를 깨뜨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올바른 사람을 욕하는 무리가 장차 반드시 꼬리를 물고 일어나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계책을 늘려나갈 것이기 때문에 이에 부득불 있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조목별로 변론한 것입니다. 엎드려 빌건대 성명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호오(好惡)를 분명히 내보여 사문과 세도로 하여금 끝내 무사하게 해 주소서. 신은 뛰는 가슴으로 기원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은 일찍이 주자의 소차(疏箚)를 보니, 남들의 이목에 곤란한 점이 있을 때는 첩황(貼黃)을 사용하여 그것이 밖으로 누설되는 것을 예방하였습니다. 이제 신 또한 외람되이 그 사례를 본떴으니, 이 점 아울러 양찰하시길 빕니다.

[주D-001]사종설(四種說) : 《의례(儀禮)》 권29 상복(喪服) 소(疏)에 나온 것으로, 상주(喪主)가 승중(承重 상제(喪祭)와 종묘의 중책을 이어받는 것)을 하였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경우에 대한 설을 가리킨다. 첫째, 정체(正體 종통을 이어받은 적장자(嫡長子))이지만 전중(傳重 상제의 중책을 손자에게 전해 주는 것)하지 못한 것으로 적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를 맡지 못하는 경우이고, 둘째, 전중을 하였지만 정체가 아닌 것으로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경우이고, 셋째, 체(體 아들)이나 정(正 적통)이 아닌 것으로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이고, 넷째, 정(正)이나 체가 아닌 것으로 적손(嫡孫)을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이다.
[주D-002]첩황(貼黃) : 송 나라 때 신하들이 주장(奏狀)이나 차자를 올릴 때 흰 종이를 사용하였고 미진한 점이 있을 경우에는 요점을 간추려 노란 종이에 별도로 써서 본문의 뒤에 첨부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陔餘叢考 卷27 貼黃》
한수재선생문집(寒水齋先生文集) 제9권
 서(書)
이경화(李景和)에게 줌 - 갑신년 6월

누암서원(樓巖書院)의 일은 진실로 하나의 세변(世變)입니다. 그런데 이하성(李廈成)의 소(疏)가 나와 무함과 패려(悖戾)가 더욱 심하니 통탄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변명하는 소가 없을 수 없는데도 서울 안이 조용하다 하므로 매우 분개스러워 천한 분수로 편히 여기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생각지 않고 근자에 한 장의 소를 현도(縣道)에 부쳤는데, 어제쯤 정원(政院)에 당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마는 끝내 결과가 어떻게 나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수재(水災)의 참혹함이 다른 고을에 비해 특별히 심하여 산이 무너져 골짜기가 막히고 사찰(寺刹)이 떠내려가고 압사한 인물(人物)이 무수하며, 심지어 무덤이 파괴되어 관(棺)을 잃은 것이 열여섯이나 되니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전지(田地)의 파손도 이루 말할 수 없어 산골 백성들이 앞으로 생활할 가망이 없는데, 국가에서는 어떻게 구제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근심스러운 염려가 그지없습니다. 듣건대 그곳의 재황(災荒)도 가볍지 않다 하니 자목(字牧 수령)의 근심이 백성들보다 갑절이나 되리라 생각됩니다.

[주D-001]이하성(李廈成)의 소(疏) : 박세당(朴世堂)이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으면서 송시열(宋時烈)을 헐뜯자, 홍계적(洪啓迪)이 상소하여 《사변록》을 지어 주자(朱子)를 무욕(誣辱)한 박세당의 죄를 논하고, 이어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을 지으면서 오랑캐에게 아첨하여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일을 논하니, 이경석의 손자 이하성이 그 조부를 변무(辨誣)하기 위해 올린 상소이다. 《肅宗實錄 29年 5月 乙丑條》
[주D-002]현도(縣道) : 직접 상소를 올리지 아니하고 지방 관서(官署)를 통하여 올린 것이다.
 한수재선생문집(寒水齋先生文集) 제18권
 서(書)
송조경(宋調卿) 화원(和源) 에게 답함 - 갑신년 1월

화양동(華陽洞)에 있을 때에 서로 회포를 풀지 못하여 지금까지 연연해 오다가 혜찰(惠札)을 받으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복인(服人)은 산중에서 돌아온 이후로 감기가 중하게 들어 아직도 완쾌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대체로 노쇠한 소치이니, 스스로 가련하게 여긴들 어찌하겠습니까.
회덕(懷德)의 일은 매우 불행합니다. 내가 일찍이 진정(鎭靜)시킬 뜻으로 양문(兩門)의 자제들을 모두 권면하였는데, 그들은 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나를 불만스럽게 여겼으므로 내가 평소에 남에게 신용을 얻지 못했음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해 준 말씀을 보니 명백하기가 마치 안개를 헤쳐 버린 듯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양문 자제들의 마음이 모두 좌우(左右)와 같지 못한 것이 애석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다만 이목구비를 꽉 막아버리고자 합니다. 이는 나의 정성이 박해서가 아니라 사세상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초하게 사례드리고 다 말하지 않습니다.

[주D-001]복인(服人) : 기년(朞年) 이하의 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즉 권상하(權尙夏) 자신을 가리킨 것이다.
[주D-002]회덕(懷德)의 일 : 기유년(1669, 현종10) 현종(顯宗)이 온천(溫泉)에 가 있을 적에 송시열(宋時烈)은 마침 혐의스러운 일이 있어 행재소(行在所)를 가지 못했는데, 이경석(李景奭)이 갑자기 상소를 하여 ‘한 사람도 행재소에 문안 온 자가 없다.’는 등 무례한 말을 많이 하였다. 그러자 송시열은 그 말을 듣고 즉시 대죄(待罪)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그 소 끝에 ‘손 종신(孫從臣 송 흠종(宋欽宗)이 금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적에 흠종을 따라갔던 손적(孫覿)을 말함. 이때 손적이 항복서(降伏書)를 지으면서 지나치게 송 나라를 폄손(貶損)시켜 금 나라에게 아첨을 했었다)이 장수와 강녕(康寧)을 누렸다.’고 하였는바, 이는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던 이경석을 손적에게 비유한 것이었다. 그러자 이경석이 크게 노하여 송시열의 상소문을 송준길(宋浚吉)에게 보이니, 송준길도 이를 보고 크게 놀라 탄식하였었다. 그러던 뒤에 이경석의 손자 이하성(李厦成)이 자기 할아버지를 위해 변무소(辨誣疏)를 올릴 적에 일찍이 송준길이 송시열의 상소문을 보고 놀라 탄식했던 일을 끌어댐으로 인하여 마침내 송준길과 송시열 두 집안의 자손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 서로 불화(不和)하게 되었던 사실을 가리킨다. 《寒水齋集 黃江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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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재선생문집(寒水齋先生文集) 부록(附錄)
 [잡저(雜著)]
황강문답(黃江問答) [한홍조(韓弘祚)] 영숙(永叔)은 바로 한홍조인데 예산(禮山)에 살았다.

영숙(永叔)이 이산(尼山)의 일에 관한 시말(始末)을 묻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는 이산(尼山)의 일이 아니라 곧 국사이다. 그 시초를 파헤쳐 말하겠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 제복(諸福) 복창군 정(福昌君楨) 복선군 남(福善君柟) 등이 본래 교만하고 거세었으며, 금상은 숙묘(肅廟) 초년에 병환이 잦았다. 이에 제복이 속으로 불측한 마음을 품고 감히 바라지 못할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이 정권을 잡고 있는 때라서 목적을 이루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드디어 남인에게 투합(投合)하여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을 스승으로 삼고 서인을 몰아낼 계책을 세우고 있었으나 틈을 탈 방법이 없었다. 이에 서로 모여 은밀히 모의하기를 ‘송모(宋某)야말로 서인의 영수(領袖)이니 만약 송모를 몰아내면 모든 서인들이 필시 함께 들고 일어나 송모를 비호할 것이다. 이때 두호하는 사람마다 차례로 몰아내면 서인을 모두 쫓아낼 수 있다. 그런데 송모를 쫓아낼 죄목을 만들 때 무슨 일로 꼬투리를 잡아야 하겠는가?’ 하고, 또 모의하기를 ‘기해년에 있었던 예론(禮論)이 끝내는 인정에 거슬렸으니, 이것으로 죄목을 만들면 송모를 제거하는 일은 손바닥을 뒤집듯 쉬울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안팎으로 참소하고 이간하여 갑인년의 화를 부추겼다. 당시 허적이 영상으로 있었는데, 제복이 은밀히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에게 부탁하기를 ‘금상이 만약 불행하게 되면 너의 아비가 나를 후계자로 삼게 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병판(兵判)으로 삼겠다.’ 하니, 허견이 몹시 즐거워하여 드디어 하늘에 기도하며 맹세하였다.
이때 청성(淸城 김석주(金錫胄))이 은밀히 그 기미를 알고 마침내 세밀히 밝혀내어 경신년의 옥사를 이루었다. 대개 남인들은 생각하기를 ‘이 옥사는 오로지 제복과 허견이 바라지 못할 자리를 넘본 소치이니 필시 그들 당사자만 죄를 받으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해를 범한 역적과는 다르다.’ 하였는데, 흑수배(黑水輩 여강(麗江)에 살던 윤휴의 일파)는 윤휴가 사화를 입었다 하여 청성을 보기를 마치 남곤(南袞)ㆍ심정(沈貞)처럼 하였다. 이것이 남인들이 경신옥사(庚申獄事)를 원통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윤증은 권시(權諰)의 사위이고 윤증의 아우 추(推)는 이유(李)의 사위인데, 권시와 이유는 남인의 거두(巨頭)이며, 권시의 아들 기(愭)와 이유의 아들 삼달(三達)은 또 남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윤증과 윤추는 자연 권기ㆍ이삼달과 어울릴 때가 많았다. 대체로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진심을 토로하는 경우는 처남 매부 간이 제일인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신년의 옥사에 대해 들은 것도 모두 권기와 이삼달의 말을 통해서였으며, 청성의 사실을 들은 것도 모두 권기와 이삼달의 말이었다. 그런데 윤증은 원래 허약한 사람이라서 드디어 그 말을 누설하여 청성이 훗날 큰 화의 원흉이 되게끔 만들었다. 윤증은 또 생각하기를 ‘우암이 거제(巨濟)에서 돌아와 만약 청성의 사실을 듣게 되면 필시 청성과 다른 입장을 취할 것이다.’ 하였는데, 급기야 우암이 올라와 옥사를 듣고는 말하기를 ‘청성은 사직을 보호한 공로가 없지 않다.’ 하였다. 이에 윤증이 크게 놀라 낙담하면서 말하기를 ‘이 어른의 소견이 어찌 이와 같을까. 만약 이 어른을 따르다가는 끝내 함정에 빠져 마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버티고 대립할 생각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후원자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급기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을 얻은 후에 비로소 배반의 뜻을 보였는데, 현석을 얻는데도 곡절이 있었다.
과거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내가 당로(當路)하게 되면 반드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ㆍ율곡(栗谷 이이(李珥)) 두 선생께서 시행하지 못한 사업을 이룩할 것이다.’ 하였는데, 경신옥사(庚申獄事)를 치른 후,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영상(領相)이 되고, 노봉(老峯)이 좌상이 되고, 청성(淸城)이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노봉은 평소 청성과 뜻이 맞지 않았고, 또 외척(外戚)들끼리 어울려 일을 같이한다는 비난도 듣기 싫어하였다. 이때 마침 청성이 사은사가 되어 청 나라로 떠나자, 노봉은 드디어 자신의 뜻을 시행하고자 하여 문곡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문곡이 머리를 저으면서 그 불가함을 말하기를 ‘지금 대옥을 막 치른 상황인데 임금이 어리고 백성들이 의심하여 잘 따르지 않는다. 이런 때에는 오직 조용히 진압하여 국맥을 유지해야 할 것이요, 분란을 일으켜 전복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노봉이 손을 쓰지 못하였다. 그런데 사류가 말하기를 ‘민상(閔相)이 전일에 한 말은 모두가 헛된 과장이었다. 지금 당로(當路)했는데, 왜 한 가지 일도 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서 공격과 비난을 집중하였다.
이에 노봉이 몹시 민망해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이는 문곡이다. 산림(山林) 출신이 조정에 있게만 되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하고, 드디어 문곡을 탄핵하여 제거하고 우암을 불러들이고자 하여 즉시 임금에게 아뢰고 승지를 보내 우암을 불렀으나, 우암은 오지 않았다. 또 현석을 부르자, 현석이 말하기를 ‘내가 들어가고 싶기는 하다. 그러나 산림 출신이라서 주인이 없으면 일을 성취시킬 수 없다.’ 하니, 노봉이 말하기를 ‘내가 주인이 되겠다.’ 하였다. 현석이 말하기를 ‘산림 출신이 척신(戚臣)에 의지하여 제대로 국사를 다스린 자가 어디 있는가.’ 하니, 노봉이 더욱 민망해하면서 말하기를 ‘우암을 여기에 있게 하면 들어오겠는가?’ 하자, 현석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이에 노봉이 상에게 아뢰고 승지를 보내면서 우암에게 글을 보내기를 ‘당로(當路)하고 싶지 않더라도 잠시 상경하여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내 비록 혐의 때문에 현직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으나, 나를 화숙의 주인으로 삼는다면 내가 어찌 나가지 않겠는가. 또 내가 태묘(太廟)의 휘호(徽號)를 주청할 일이 있는데, 화숙이 후원자가 되어야 하겠다.’ 하고, 드디어 여주(驪州)로부터 부름에 달려왔다. 경강(京江)에 이르러 현석을 맞아 함께 입경할 뜻으로 권유하자, 현석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현석이 드디어 입경하여 날마다 우암 곁을 떠나지 않으며 제자의 도리를 행하며 몹시 공손하였다. 현석이 말하기를 ‘윤자인(尹子仁 윤증)을 부르면 좋겠습니다.’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자인이 오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현석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소자와 함께 여기에 있는데 그가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한번 불러 보라.’ 하였다. 현석이 즉시 상에게 아뢰고 윤증을 불렀다.
이에 윤증이 상경하다가 과천(果川) 나양좌(羅良佐)의 집에 머물러 사직하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현석이 말하기를 ‘내가 가서 만나 보고 그와 함께 입경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윤증을 만나 보았다. 이에 윤증이 그를 머물게 하고 함께 유숙하면서 현석에게 말하기를 ‘추가로 녹훈(錄勳)한 것을 삭제한 후에야 일을 할 수 있을텐데, 형이 녹훈을 삭제할 수 있겠는가?’ 하니, 현석이 말하기를 ‘불가능하다.’ 하였다. 윤증이 말하기를 ‘외척의 흉악한 무리를 물리친 후에야 일을 할 것인데, 형이 외척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니, 현석이 말하기를 ‘불가능하다.’ 하였다. 윤증이 말하기를 ‘오늘날 행태를 보건대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는 비호한다. 이 풍조를 제거한 후에야 일을 할 것인데, 형이 이 풍습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하니, 현석이 말하기를 ‘불가능하다.’ 하였다. 대개 추가로 녹훈되었다고 한 것은 김익훈(金益勳)ㆍ이사명(李師命)의 무리를 가리킨 것이고, 외척은 청성ㆍ광성(光城 김익훈)ㆍ노봉을 가리킨 것이고, 오늘날의 행태라고 한 것은 우암을 가리킨 것이었다. 윤증이 말하기를 ‘이 세 가지를 제거하지 않는 한 내가 들어갈 길은 없다.’ 하고, 현석을 3일 동안 머물게 하면서 권기(權愭)와 이삼달(李三達)에게 들은 말을 다 말해준 뒤 말하기를 ‘만약 우암을 따르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하였다. 현석이 드디어 크게 놀라 풀이 죽어 돌아오자, 우암은 이미 윤증에게 당한 줄 알았다. 현석은 우암에게 고하지 않고 바로 어전에 들어가 우암이 건의한 휘호(徽號)의 의논을 극력 반대하고 파주(坡州)로 돌아가 버렸다. 우암은 일이 와해됨을 보고 고양(高陽)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다가 화양동(華陽洞)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서울의 연소배가 현석을 따르게 되었는데, 현석이 윤증과 가까이 지내게 되어 윤증의 무리가 점차 성대해졌다. 이에 곧 그 아비의 묘문(墓文) 및 이른바 목천(木川)의 사건으로 인해 마침내 우암을 배반하였는데, 실상은 윤증이 본래 서인 출신으로서 남인 속으로 깊이 들어가 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묘문의 일은 단지 우암과 대립하기 위한 제목일 뿐이었다. 이 사실의 곡절에 대해서는 맥락을 간추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아는 사람이 드물다.”

영숙(永叔)이 광남(光南) 김익훈(金益勳)의 일에 대해 묻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일의 전말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해 줄 것이니 그대는 후인에게 전하라. 신유년 감시(監試) 때 빈 피봉의 시권(試卷) 한 장이 있었는데, 고관(考官)이 보니 바로 고변한 것으로서 내용은 오인(午人 남인을 달리 부르는 말) 13대가(大家)에 관한 것이었다. 고관이 말하기를 ‘익명서를 여는 것은 법률에 저촉되니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하니, 한 고관이 말하기를 ‘태워 버려야 할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의 경우이다. 이것이 만약 허언이 아니라면 국가의 화란을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이에 드디어 단단히 봉함하여 남몰래 들였다. 상이 즉시 청성(淸城)을 몰래 불러 이 일을 위임하여 은밀히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고발한 여러 사람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청성이 은밀히 부탁을 받았으나 살필 길이 없었다.
이때 김환(金煥)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서인으로서 무예를 닦다가 오인(午人)의 손에 등과(登科)한 사람이었다. 청성이 남몰래 김환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라에 대변이 생겼는데 이를 알아낼 길이 없다. 네가 은밀히 잘 살펴 알리도록 하라.’ 하니, 김환은 불가능하다고 사양하였다. 이에 청성이 위협하기를 ‘만약 명을 따르지 않으면 너를 참(斬)할 것이다.’ 하니, 김환이 ‘지시하는 대로 하겠으나 은밀히 살필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였다. 청성이 이르기를 ‘허새(許璽)와 허영(許瑛)이 지금 용산(龍山)에 있으니, 네가 피접(避接)한다고 핑계하고 그 이웃집에 가서 깊이 사귄 후에 그들과 어울려 장기를 두도록 하라 그러다가 그들을 이길 때에 네가 넌지시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해 보라. 그러면 그들의 기색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만약 괴이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거든 그대로 함께 유숙하면서 은밀히 함께 모반할 것을 의논하라. 그렇게 하면 그 진위(眞僞)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환이 말하기를 ‘그가 그런 뜻이 없이 도리어 나를 모반한다고 하면 어찌합니까?’ 하였다. 이에 청성이 이르기를 ‘그것은 모두 내 손에 달린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김환에게 은전(銀錢)을 주어 교제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김환이 한결같이 그 말대로 실행한 결과 허새와 허영이 과연 호응해 왔다.
김환이 이를 청성에게 고하자, 청성은 또 유명견(柳命堅)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유명견에게는 김환이 접근하지 못하고 다만 명견의 친척인 전익대(全翊戴)와 사귀면서 명견의 동정을 탐지했는데, 미처 자세히 탐지하기도 전에 청성이 부득이한 일로 청 나라에 사신을 가게 되어 김환에게 시킨 일을 광남(光南)에게 맡겼다. 이에 광남이 김환으로 하여금 속히 명견의 소식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김환은 늘 남몰래 익대에게 묻곤 하였다. 익대는 단지 수상한 일을 갑옷과 활을 만드는 등의 일이었다 알릴 뿐, 실제로 확실한 제보는 없었다.
또 고변한 내용 중에 이덕주(李德周)가 바로 괴수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세밀히 살피게 하였는데, 미처 살피기도 전에 갑자기 물의가 일어 말들을 하기를 ‘김환이 은밀히 살피는 체하면서 실은 반역을 꾀한다.’ 하며, 내외가 떠들썩했다. 광남이 즉시 김환을 불러 그런 사실을 알리고 시급히 고변하게 하니, 김환이 몹시 두려워하여 군뢰(軍牢 죄인을 호송하는 병졸)를 청하며 이르기를 ‘익대를 잡아 같이 고변했으면 한다.’ 하자, 광남이 즉시 군뢰 1쌍(雙)을 주었다. 김환이 밤을 틈타 익대의 집에 가서 급히 익대를 불러내 군뢰를 시켜 잡아 집으로 돌아온 뒤 내실에 감금하고 협박하기를 ‘네가 나와 함께 급히 고변해야 큰 화를 면할 수 있다.’ 하니, 익대가 말하기를 ‘유(柳)가 본래 모반한 일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무고하겠는가.’ 하고, 굳이 거절하며 듣지 않았다. 김환이 곧 광남에게 고하여 의금부에 가두게 하고, 이어 광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당장 들어가 고변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하게 한 뒤에는 즉시 익대를 불러 그 사실을 문초할 것이니, 단단히 가두고 기다리라.’ 하니, 광남이 드디어 가두었다.
이에 김환이 고변하니 즉시 국청이 설치되어, 허새와 허영을 잡아들였는데, 이들은 한 차례 장(杖)을 내리기도 전에 모두 자복(自服)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환이 바로 훈신(勳臣)이 되어 중계(中階)에 올라앉게 되었다. 김환은 익대가 어지러이 말하여 진실성이 없게 될 경우 자신의 일에 방해될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 끝내 익대를 잡아들이지 않았다.
광남은 익대를 잡아갈 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끝내 소식이 없자, 몹시 걱정되고 난처하여 직접 국청에 나아가 사실을 고하였다. 이때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위관(委官)이었는데, 국청의 일은 어명으로 나온 것이나 죄인의 초사(招辭)가 아니면 감히 거론하지 못한다고 하자, 광남이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마침 청성이 청 나라에서 귀국하여 함께 위관(委官)이 되었는데, 광남에게 이르기를 ‘아방(兒房 대궐 안 장신들이 기숙하는 곳)에 나아가 밀계(密啓)하라. 사건을 국청에 회부한 후에야 조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광남이 문장을 구사할 줄 몰라 계사를 초할 수 없다고 하자, 청성이 종이 쪽지를 가져오게 하여 대략 계사를 초잡아 준 뒤 아뢰게 함으로써 사건이 국청에 회부되었다. 이에 즉시 익대를 불러 문초하였는데, 익대는 김환이 이미 훈신(勳臣)이 되어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고변하면 저와 같이 될 것이라고 여겨, 곧 유명견의 모반을 무고하였다. 이에 즉시 유명견을 잡아들여 익대와 대질시켰지만 끝내 혐의를 찾지 못하자 익대를 참하였다. 이것이 곧 광남의 일의 전말이다.
대개 처음에 고시관이 시권(試卷)을 밀계한 것과 상이 은밀히 그 일을 청성에게 부탁한 사실, 그리고 청성이 또다시 광남에게 위임한 일이 모두 철저하게 비밀리에 이루어져 당시 연소배들은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연소배들은 광남이 김환에게 자금을 주어 허새와 허영을 유인하게 하고는 끝내 역모로 몰아 죽게 했다는 말만을 듣고는 마침내 광남을 몹시 옳지 못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익훈(益勳)이 남을 반역으로 유도한 것은 그 마음씨가 자신이 직접 반역을 꾀한 것보다 심하다…….’ 하며 장차 처벌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 우암이 여강(驪江)에 있었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 함께 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승지 조지겸(趙持謙)이 여러 날 동안 모시고 묵으면서 광남이 역모를 유도한 그 형편없는 마음씨를 자세히 말하니, 우암이 이 말을 듣고는 역시 형편없는 짓이라고 하면서 비록 죽는다 해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연소배들이 드디어 크게 기뻐하면서 어른의 소견도 자기네의 뜻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급기야 우암이 입경하자, 문곡(文谷)ㆍ노봉(老峯)ㆍ청성(淸城)이 그 사건의 본말을 다 알리고, 또 광성(光城 김익훈(金益勳))의 가족이 찾아와 그 곡절을 호소하였다. 이에 우암이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고 말하기를 ‘일이 과연 이러하다면 익훈은 죄가 없다.’ 하였는데, 연소배들이 몹시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장자(長者)도 편애하여 그 초지를 달리하는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지겸(趙持謙)ㆍ한태동(韓泰東)이 마침내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수없이 많았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효종 당시의 군신이 복수를 꾀하던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지금까지 오활하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일이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오활하지 않기가 효종과 우암만한 이가 없다고 본다. 효종께서 청 나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이 남쪽에서 싸울 때나 북쪽에서 싸울 때 모두 수행하였기 때문에, 오랑캐의 무기와 전술 그리고 장수들의 능력 여부를 모두 체험하여 익히 알고 있었다. 오직 용골대(龍骨大)ㆍ마부대(馬夫大)ㆍ팔왕(八王)ㆍ구왕(九王) 이 네 장수만이 당해 낼 수 없는 영웅이었는데, 효종께서 그곳에 있을 당시 용골대ㆍ마부대ㆍ팔왕은 이미 모두 죽었고 구왕만이 남아 있었다. 대개 효종께서 즉위한 지 10년이 가깝도록 북벌(北伐)의 계획을 감행하지 않았던 것은 대적하기 어려운 구왕을 꺼려해서였다. 그런데 병신년(1656, 효종7)에 구왕마저 죽었기 때문에 효종께서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무술년에 우암과 더불어 은밀히 계획했던 것인데, 1년도 채 못 되어 효종께서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이것이 천운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대개 효종의 생각 역시 중과부적으로 장구(長驅)하지 못할 줄 알아 군사를 기르고 군비를 비축하며 관문을 닫고 관계를 끊으려고 생각하였으며, 만약 이것도 불가능하면 안으로는 내정(內政)을 닦으며 외적을 물리칠 계책을 세우고 밖으로는 기미책(羈縻策)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저들의 결점을 노리고 있다가 큰 정벌을 감행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성지(聖旨)가 분명한데, 어찌 오활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영숙(永叔)이 강빈(姜嬪)의 일에 대해 묻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궁중에 관계된 일이니 어찌 자세히 알겠는가. 다만 우암이 등대(登對)했을 때 조용히 이 일을 아뢰자, 효종이 답하기를 ‘이는 우리 집 일이라서 내가 자세히 안다. 경은 내 말을 믿어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단지 김홍욱(金弘郁)의 자손을 등용할 것을 아뢰었는데, 효종이 그 말을 따르겠다고 답하였다. 처음 인묘(仁廟)가 강빈(姜嬪)을 죄주려 할 때 그 죄목을 얻지 못하였다. 이때 조경(趙絅)이 신구소(伸救疏)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아뢰기를 ‘신하가 난역(亂逆)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난역을 일으키면 주벌(誅罰)해야 하겠습니다만, 이 일은 애매합니다…….’ 하였다.
인조는 드디어 조경을 축출하고 그 상소문 중에서 난역을 일으키려 한 유장(有將) 두 글자를 취하여 강빈의 죄목을 삼았는데, 우암이 이 일로 일찍이 조경을 그르게 여겼다고 한다. 조경은 그래도 약과다. 윤휴와 홍우원(洪于遠)이야말로 이첨(爾瞻)의 무리이다. 그 당시 조관(照管 감시하여 단속함)이란 어맥(語脈)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윤휴에게서 나온 줄만 알고 홍우원에게서 나온 줄은 모르는데, 그 곡절을 말해 주겠다.
대개 갑인년(1674, 현종15) 이후로 제복(諸福 복창군 정(福昌君楨)ㆍ복선군 남(福善君柟)이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 및 여러 남인(南人)들과 날이 갈수록 깊이 사귀면서 남몰래 궁녀를 간음하기까지 하는 등 장차 이롭지 못하게 될 조짐이 보였다. 이런 사실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알고 있었으나 청풍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이때 허정(許珽)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인조 잠저 때의 친구 허계(許啓)의 아들로서 장안의 대협객이었다. 하루는 느닷없이 청풍의 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겉은 남인이지만 속은 서인이고, 공은 겉은 서인이지만 속은 남인이다. 오늘날 내가 공과 더불어 편론(偏論)을 해보려 하는데 좋은가?’ 하였다. 이에 청풍이 어찌 편론이라고 하는지 묻자, 허정이 말하기를 ‘인조께선 우리 아버지와 자별한 교우 관계를 맺으셨다. 그러고 보면 인조의 자손과 우리 아버지의 자손은 곧 세교(世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세교 집 자손이 이처럼 미약하여 조석을 보전하지 못하니, 내가 이 때문에 걱정이 되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청풍이 그 말을 듣고 홀연히 생각하기를 ‘성상이 유약한 데다 질병이 많고 또 형제와 친자식도 없으며 보호해 줄 만한 친숙한 대신도 없는데, 저들 제복과 남인들이 갈수록 서로 결탁하고 있다.’ 하면서, 크게 마음속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에 입궐하여 정(楨)과 남(柟)이 궁중과 교통(交通)한 정상을 아뢴 다음, 이어 정과 남을 가두고 궁녀를 곤장치니, 궁녀가 마침내 각각 자백하였다. 그러자 남인들은 청풍이 궁녀를 거짓 자백하게 하여 왕손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면서 도리어 청풍에게 죄를 전가시킬 뜻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허적(許積)이 영상의 신분으로 들어가 제복(諸福)의 애매함과 청풍의 무함을 고하였다. 이때 명성왕후가 장막 뒤에 있다가 대성통곡하면서 허적을 질책하기를 ‘그대가 여러 조정을 섬겨온 구신(舊臣)으로서 국은을 입은 것이 얼마나 큰데,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감히 내가 목격한 일을 애매하다고 하는가.’ 하니, 허적이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며 바로 제복을 처벌할 것을 청하고 나왔다. 그런데 그 이튿날 윤휴와 홍우원이 아뢰기를 ‘자전(慈殿)을 관속(管束)하여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관속(管束)이란 두 글자가 흉참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세간에 나온 문자는 조관동정(照管動靜 동정을 살피고 단속함)으로 고쳤다. 이것이야말로 이첨과 같은 무리의 심술이 아니겠는가. 적신(賊臣) 조사기(趙嗣基)는 문정왕후(文定王后)에 비교하기까지 하였는데, 가령 이들 무리가 시간을 좀 더 얻었더라면 어찌 유폐하는 일을 자행하지 않았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영숙(永叔)이 묻기를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가 갑인년 이후에 행한 데 대한 일을 사람들이 많이 의심합니다. 그 상세한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연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들은 대로 말해 주겠다. 갑인년에 영릉(寧陵)을 옮겨 모신 후 우암(尤菴)이 초려(草廬)와 함께 화양동(華陽洞)에서 《사계집(沙溪集)》을 편찬하려 하여 여강(驪江)에서 함께 배를 타고 충주(忠州)에 이르러 내렸다. 우암이 도중에서 초려에게 말하기를 ‘형은 어찌하여 자제를 선도하지 못하고 남의 말을 듣게 하는가?” 하니, 초려가 크게 노하여 그 자리에서 되받아 우암에게 말하기를 ‘형의 자손은 어떠한가?’ 하였다. - 대개 도정(都正) 송기태(宋基泰)의 부인은 바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증손녀이다. 부인의 친모가 말하기를 “우리 집이 부유하긴 하나 이는 모두 대원(大院)의 제전(祭田)이므로 나눌 수가 없다.” 하고 은(銀) 2백 냥을 주었는데, 부인이 받아서 간직해 두었다. 부인이 죽은 후 도정 집의 서족(庶族)인 송가(宋哥)란 자가 어느 날 찾아와 여산(礪山)에 있는 자기 전답을 팔고자 한다고 말하자, 도정의 아들들이 그 모부인이 간직해 둔 은으로 사들였는데, 이것이 드디어 비난거리가 되었으므로 초려가 이를 지적한 것이다. - 이에 우암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는데, 그후 우암이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친구의 도리로 그 자제들이 남들로부터 비난받는다는 말을 듣고 바로 충고하여 그로 하여금 선도하게 하려 하였다. 따라서 그의 도리로서는 의당 놀라운 마음으로 감수하면서 과연 그런 일이 있다면 의당 경계시켜야 하겠다고 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차분하게 나에게 일러 형의 자손 역시 남의 비난을 받으니 경계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찌 상선(相善)하는 방법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노기를 띠고 내 말을 들으면서 마치 서로 대립하는 태도를 보였으니, 상선의 도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인일(仁一 송순석(宋純錫))의 형제와 초려의 아들들이 서로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또 계축년(1673, 현종14)에 우암은 만의(萬義)에 있고 초려는 궁촌(宮村)에 있었는데, 하루는 한 장의 서찰을 우암에게 보내 이르기를 ‘서울 사람들이 매양 찾아와 기해년의 예설을 묻는데 이를 응수할 겨를이 없다. 이 글을 만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니, 검토하고 고쳐서 보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한 글자 한 글자 보아가며 글자와 말에 병통이 있는 곳을 가려 손수 수정을 가하였는데, 그 하단에 ‘탕(湯) 임금과 무왕(武王)이 제후로 천자가 되었으니, 제후로 대접해야 하는가?’고 말한 대목이 있었다. 우암이 이에 대해 답서를 보내기를 ‘오늘날 세상에 처하여 자꾸 여러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킨 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고, 그 예설을 돌려보냈다.
그 뒤 갑인년에 우암은 장기(長鬐)로 귀양 가고 초려(草廬)는 영변(寧邊)으로 귀양 갔다. 이때 김지(金潪)가 이순악(季舜岳)의 집에 갔는데 이옹(李顒)의 아들도 와서 자리를 같이 하였다. 대개 김지는 이순악의 사위이고 순악과 이옹은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의 사위이다. 이런 연유로 마침 한 집에 모이게 되었는데, 잠시 후에 순악의 매부 이하진(李夏鎭)도 와서 참석했다. 김지와 이옹의 아들은 재신(宰臣 이하진)이 들어오자 자리를 피해 밖에 나가 들었는데, 하진이 순악에게 이르기를 ‘요즘 보니 이유태(李惟泰)가 가장 착한 사람이다.’ 하였다. 순악이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니, 하진이 말하기를 ‘그의 새로운 예설(禮說)을 보지 않았는가? 그 예설을 보니 전일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 대개 군자의 도란 허물을 고치는 것이 미덕인데 지금 유태가 능히 이렇게 하니, 내가 위에 아뢰어 석방시켜 등용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른바 예설이란 곧 계축년에 우암에게 보내온 예설을 말하고, 이른바 전일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하는 것은 탕 임금ㆍ무왕 운운한 한 조목을 가리킨 것이었다. 김지가 그 말을 듣고 바로 장기(長鬐)로 가서 우암에게 고하니, 우암은 초려의 저번 예설이 양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특별히 새로운 예설이 있는가 의심하였다. 그러던 차에 윤증이 마침 장기로 왔다. 우암이 윤증에게 묻기를 ‘요즘 들으니 초려가 새로운 예설을 냈다고 하는데 그대가 들었는가?’ 하니, 윤증은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윤증이 떠나올 때 서구(敍九 송주석(宋疇錫))에게 초려의 예설이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서구는 송자신(宋子愼)이 가져갔다고 말하였다. 윤증이 자신을 찾아가 그 예설을 가져다 보고 서신으로 초려를 책망하였다. 이에 초려가 곧 우암이 수정한 예설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는 나 혼자 한 것이 아니고 우암과 상의하여 한 것이다. 그런데 우암이 본래 음험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모르는 척하고 나의 비방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였다. 윤증이 그 예설을 가져다가 수정한 곳을 보니 과연 우암의 필적이었다. 이에 윤증 또한 우암이 과연 초려가 말한 것과 같다고 의심하였다.
그리고 초려가 적소(謫所)에서 말하기를 ‘내가 한번 입을 열면 우암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를 초려의 생질 김모가 듣고 윤휴의 아들 의제(義齊)에게 말하자, 의제가 다시 권유(權惟)에게 말하였다. 권유는 곧 권시(權諰)의 아들이며 우암의 사위이다. 권유가 이를 우암에게 알리자, 우암 집 자제가 초려에게 상당히 언짢은 말을 하였다. 초려 또한 이 말을 듣고 권유를 책망하기를 ‘그대가 과연 헛된 말을 우암에게 하였느냐?’ 하자, 권유는 말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우암이 이 말을 듣고 또 권유를 책망하기를 ‘그대는 지난날 어찌하여 어른의 말을 허투로 하였느냐?’ 하니, 권유가 대답하기를 ‘초려 어른의 말씀은 틀림없는 초려 어른의 말씀이나, 그 어른께서 말이 밖으로 나간 것을 몹시 민망히 여겼기 때문에 소자는 자연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또 초려가 귀양 가는 길에 이담(李橝)이 거리에 나가 전별하였는데, 이때 초려는 앞뒤로 일관성이 없는 망언을 하였다. 그러자 이담이 마침내 이 말을 서울에 전파하여 그 소문이 퍼지자 모두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전에는 그렇게도 기세가 등등하더니 뒤에 와서는 어찌 그리도 겁을 내는가.’ 하였는데, 초려가 그 말을 듣고 드디어 우암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형의 문도들이 나를 공격하며 조롱한다고 하는데, 금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우암이 그 위인을 비열하게 여기어 다만 답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떠드는 말은 웃어 넘기는 것이 좋다.’ 하였는데, 초려는 끝내 우암 역시 자기를 공격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상국(相國) 이숙(李䎘)이 장기(長鬐)로 가서 우암을 보고 말하기를 ‘앞서 초려의 편지를 보니, 우암 편에서는 인조(仁祖) 통서(統緖)까지 끊으려 한다고 하였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그때 송자신(宋子愼)이 말하기를 ‘대체로 복제(服制)에 있어 장자(長子)에 대해 3년으로 하는 것은 적자와 적자가 계승하여 3대를 이은 연후에야 가하다.’ 하였는데, 이는 본래 자신이 상복의 제도를 통론(通論)한 말이었다. 그런데 초려는 곧 이 말을 부회(傅會)하여 생각하기를 ‘인조 역시 지손(支孫)으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기 때문에 우암 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고, 이른바 인조의 통서(統緖)까지 끊으려 한다는 말을 입 밖에 냈던 것이다. 이에 송 장성 시도(宋長城時燾 장성은 택호)가 듣고 크게 노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남인도 하지 않은 말인데 초려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 집에 멸족의 화가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는데, 초려가 그 말을 듣고 또 서신을 보내 극구 해명하였다. 얼마 후에 초려가 석방되어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상소하기를 ‘신의 소견은 전과 다름이 없으니 석방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광성(光城)이 승지에게 말하여 그 상소를 되돌려 주게 하였다. 그후 경신년(1680, 숙종6)에 초려가 또 상소하기를 ‘효종을 적자(嫡子)로 간주하는 것은 신의 견해일 뿐 아니라 송모(宋某)의 견해 역시 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송모 또한 죄가 없다.’ 하고, 드디어 우암을 석방하여 청풍(淸風)에 부처(付處)하였다. 이에 우암이 아뢰기를 ‘신의 죄는 전과 변함이 없는데 상께서 그릇 남의 말을 들으시고 뜻밖에 감형을 해 주시니, 의리상 편안치 못합니다.’ 하고, 그대로 장기에 머물며 올라오려 하지 않았다. 이에 금오랑(金吾郞)이 말하기를 ‘상께서 이미 중도부처하였으니 마음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므로, 부득이 길을 떠났는데, 조령(烏嶺)에 이르기 전에 또 방면(放免)되어 화양(華陽)으로 돌아갔다. 대저 우암이 끝내 초려의 일을 말하여 공격하지 않았던 것은, 이 일이 자기에게만 관계될 뿐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의 일처럼 세도(世道)와 사문(斯文)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이 윤증과 갈라서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영숙(永叔)에게 말해 주었다.
“대개 현석이 휘호(徽號)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세운 이후 《향동문답(香洞問答)》을 얻어 보고는 마음속으로 자못 편치 못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옥천(沃川) 유생이 상소하기를 ‘박모(朴某)가 본조의 신자(臣子)로서 어찌 감히 휘호에 대해 이론을 제기한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현석에게 말하기를 ‘이 상소는 그들 자신의 뜻이 아니라, 곧 송주석(宋疇錫)이 은밀히 사주하여 영공(令公)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현석은 몹시 놀라고 의아해 하면서도 오랫동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후 내가 서구(敍九)와 함께 우암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문득 한 통의 봉서(封書)를 전하는 자가 있기에 살펴보니 곧 현석의 서간이었다. 그 서간에 말하기를 ‘혹자들의 말이 이러이러한데 사실이 그렇습니까? 이 말을 듣고는 즉시 편지를 써 놓고 여러 차례 망설이다가 지금에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대개 그 날짜를 상고해 보니 정월에 써 놓았다가 6월에 비로소 부친 것이었다. 우암이 몹시 놀라고 서구 또한 안색을 변하면서 이것이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 우암이 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는 필시 중간에서 이루어진 말들일 것이다. 어떻게 답서를 하면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의 의혹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송강(松江)이 율곡(栗谷)을 의심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뜻밖에 모두 숙헌(叔獻 이이(李珥))의 손에 죽게 되었다.’고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는 사화를 입고 죽는데 불과하지만, 나는 사림을 해친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증거로 삼아 회답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이 말로 답하고 그 하단에 또 말하기를 ‘내가 전에 화숙과 함께 선조(先祖)가 금주위(錦州衛)에서 조병(助兵)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휘호의 논쟁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현석이 답서를 보고 마침내 감동을 받고는 우암의 말을 경청하면서 점차 연소배가 희재(希載) 등과 결탁하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다.
또 그때 최신(崔愼)이 현석을 배척하는 소를 올리려 하자 문곡(文谷)과 노봉(老峯)이 말려서 소를 올리지 못하였는데, 송인일(宋仁一 송순석(宋純錫))이 마침 서울에 있다가 서신으로 그 일을 우암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우암이 즉시 최신에게 책망하는 서간을 보내 이르기를 ‘현석은 나와 도의로 사귀는 친구이다. 네가 나를 사문(師門)이라고 칭하면서 감히 나의 도의의 교우(交友)를 배척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와 같이 하려거든 다시는 나를 보지 말라.’ 하고는, 그 편지를 봉함하지 않고 인일(仁一)에게 보내 그로 하여금 읽어보고 최신에게 전하게 하였다. 인일이 그 서신을 볼 때 이 운촌 동보(李芸村同甫)가 한 자리에 있다가 옆에서 그 서간을 보고는 나가서 현석에게 보였다. 현석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그 자손 또한 모두 감격하면서 말하기를 ‘우암의 본의가 실로 이와 같은데, 지난날 망녕되이 비난했으니 우리들의 잘못이다.’ 하였다. 이후부터 현석과 우암의 집안은 전과 같이 화평하게 지냈다. 대개 현석이 윤증의 유혹을 받긴 하였으나 실은 연로배들이 척신(戚臣)에게 빌붙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들과 더불어 화합하려 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물러났던 것이다. 그리고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 자기를 따르는 연소배들이 점차 희재(希載)의 무리와 서로 가까이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크게 깨닫고는, 자신이 우암과 불화하게 된 것은 본래 자인(子仁 윤증)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윤증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그런데 윤증 자신은 생각하기를 ‘갑자년 이후로는 우암이 실로 고립되어 서인들도 따르는 사람이 없다.’ 하였는데, 급기야 기사년에 우암이 배소(配所)로 떠날 때 경향의 선비들이 모두 구제하는 소를 올리고 또 그 배소로 수행한 자가 무려 수백 명이며 자기와 사이가 좋던 자들도 모두 분주하게 주선한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의심하여 말하기를 ‘어찌 인심의 경향이 이와 같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다가 우암이 세상을 떠난 후 현석이 복(服)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인심이 이렇게 기울어진 것은 화숙의 소행 때문이다.’ 하고는, 서신으로 현석을 책망하기를 ‘이미 스승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데 왜 복을 입었는가?’ 하니, 현석이 답하기를 ‘율곡이 퇴계에 대하여 석 달 복을 입었기에 나 역시 이를 본받아 복을 입었다.’ 하였다. 이에 윤증이 또 우암을 퇴계에 비교하는 것이 의심스러워 서신으로 묻기를 ‘형은 율곡이 아니고 송모는 퇴계가 아닌데 어째서 꼭 복을 입는 것인가?’ 하자, 현석이 이로 인해 더욱 불쾌하게 여겼는데, 윤증이 남인들에게 추대되어 우암을 그토록 배척하는 것을 보고는 윤증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 그때 남인들이 현석을 귀양 보내려 하면서 정유악(鄭維岳)으로 하여금 윤증에게 그 가부를 묻게 하니, 윤증이 대답하기를 ‘조정의 일을 내가 어찌 논하겠는가.’ 하였는데, 현석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면서 그 심술을 통탄하였다. 이것이 현석이 윤증과 갈라서게 된 곡절이다.
이에 앞서 우암이 언젠가 이르기를 ‘사람들이 이렇게 화숙을 공격하지만 화숙은 끝내 나를 잡을 사람이 아니다. 다만 견해가 서로 다른 곳이 있기 때문에 때로 나를 의심하지만 그의 심술이 잘못되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두려운 자는 윤증이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현석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자인(子仁)이야말로 자제와 같은 사람입니다. 선생께 유고가 있다 하더라도 자인이 어찌 감히 배반하겠습니까.’ 하니, 우암이 이르기를 ‘그대가 자인을 아는 것이 나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그후 우암의 말이 부절(符節)을 합한 듯 꼭 맞았으니, 우암이야말로 성인(聖人)이시라 하겠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최신(崔愼)이 우암에게 올린 제문에 ‘사람들 모두가 윤증이 우리 선생을 죽였다고 말하는데, 그 자취는 비록 미세하나 그 일은 몹시 뚜렷하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하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신이 무슨 일을 지적하여 말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다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말할 만한 것이 있다. 송이석(宋彝錫)의 생질은 곧 윤충교(尹忠敎)의 처질(妻姪)이다. 이석의 생질이 그 고모에게 문안드리기 위해 이산(尼山)으로 갔던 때가 대개 무진년(1688, 숙종14)이었는데, 윤증의 집안이 마침 한 자리에 모여 술자리를 벌였으므로 이석의 생질이 또한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조금 있다가 윤증이 말하기를 ‘김익훈(金益勳)의 운명이 여기에서 끝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송모(宋某) 또한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좌중에 있던 한 윤가가 팔로 윤증을 말리면서 가만히 말하기를 ‘좌중에 낮선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하자, 윤증이 돌아보고 말을 돌려 말하기를 ‘남인의 세력이 크게 떨치고 있으니 우암께서도 사화(士禍)를 면치 못할 것 같아 염려된다.’ 하였다. 이석의 생질이 즉시 돌아와 우암에게 고하자, 우암이 이르기를 ‘다시는 믿지 못할 망언을 하지 말라.’ 하였다.
그후 김 군평 만준(金君平萬峻)이 또 이산(尼山)에서 찌푸린 얼굴로 우암에게 와 고하기를 ‘윤증이 소생의 집과 선생의 집을 모두 죽이려 합니다.’ 하니, 우암이 또 책망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내가 들은 하나의 묘맥(苗脈)이다. 또 박태회(朴泰晦)에게 들으니, 그 말에 이르기를 ‘이원정(李元楨)의 아들 담명(聃命)이 기사년 초에 대사간으로 올라와 그들에게 말하기를 ‘김수항(金壽恒)은 곧 우리의 원수이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송모는 석주(錫胄)가 경신년(1680, 숙종6) 사화를 일으킬 때 거제(巨濟)에 있었으니, 수항이나 석주배와 서로 모의할 수 있었겠는가. 또 이 두 사람은 송모를 영수로 삼고 있으니 지금 만약 율을 가하면 반드시 사화라고 이를 것인데, 이것 또한 고민이다. 따라서 그곳에 그대로 안치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자, 한 남인이 말하기를 ‘서로 모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담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탐지해내는가.’ 하니, 한 남인이 ‘만약 권기(權愭)를 시켜 윤증에게 묻게 하면 윤증은 필시 숨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권기로 하여금 윤증에게 물어보게 하니, 윤증이 말하기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 당시 석주와 두 차례 서신을 왕래한 적이 있었다.’ 하였다. 그러자 남인들이 마침내 두 차례의 서신이 필시 모의한 것이라고 여겨 기사사화(己巳士禍)를 빚어냈다.’ 하였다.
이것이 태회가 전한 말인데, 태회는 본래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니 이것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두 차례 서신을 했다는 것은 또한 묘맥(苗脈)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태회가 알 수 있는 일이 못 되니 이것으로 말하면 믿을 수 있을 듯하다.”

영숙이 어째서 묘맥이라고 말하느냐고 묻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우암이 거제에 있을 때 조병(爪病)이 있어 그 병록(病錄)을 윤 체원 이건(尹體元以建)에게 보내 그로 하여금 약을 물어 내려 보내게 했다. 체원이 정유악(鄭維岳)에게 물으니, 유악이 말하기를 ‘이는 중병이니 혼자 판단할 수 없다.’ 하고, 청성(淸城)에게 가서 의논하였다. 청성이 약 30첩을 지어 서신과 함께 황윤(黃允)의 집으로 보내 체원에게 전하여 우암에게 보내게 하였는데, 우암이 그 약을 복용하고 효과를 보았다. 이에 우암이 사례하는 편지를 써서 체원에게 보내 청성에게 전하게 하였는데, 청성이 그 사례의 서신을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고 한다. 또 청성이 큰일을 처리하려 했으나 사림이 불쾌하게 생각할까 염려되어 곧 서신을 써 납촉(臘燭)과 함께 우암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들으니, 대감이 배소에서 밤마다 글을 본다고 하는데, 어유(魚油)가 안질(眼疾)을 일으킬까 염려되기에 감히 납촉으로 어유를 대신케 해드릴까 합니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또 답서를 보냈으니, 이것이 소위 두 차례의 서신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태회가 필시 얻어 들은 것일 것이다. 대개 나는 처음에 윤증이 너무도 유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후 그 아비의 기유의서(己酉擬書)를 가보(家譜)에 실어 우암에게 바친 것을 보면 참으로 혼암한 사람이다. 또 그후에 이와 같은 일을 들으니 참으로 아첨하는 소인의 정상이었다. 사람을 쉽게 볼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이산(尼山) 윤증의 서간에 ‘동춘(同春)이 도시기관(都是機關)이라고 하였다.’고 한 것도 묘맥(苗脈)이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가소로운 일이다. 옛날 기유년에 동춘의 손자 병원(炳遠)과 노봉(老峯)의 아들이 같은 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노봉이 동춘에게 말하기를 ‘선생 댁에서 희연(喜宴)을 베풀기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선생이 신은(新恩 새로 과거에 오른 사람)을 데리고 저희 집에 오셔서 한바탕 즐겁게 지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동춘이 허락하였다. 노봉이 또 우암을 초대하였는데, 이때 우암은 관직을 갖고 서울에 있었으나 산림(山林)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떠날 날짜를 미리 정하면 위로는 주상으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필시 모두 만류하여 몹시 불편할 것 같으므로 날짜를 예정하지 않고 기회를 보아 떠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동춘이 은밀히 그 뜻을 알고 취중에 연석에서 농담으로 우암에게 말하기를 ‘어느 날 행장을 재촉하겠는가?’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행장을 재촉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동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도시기관(都是機關)이로군.’ 하니, 우암 역시 웃어버렸다. 이것은 연석에서 있었던 하나의 희담(戱談)이었는데, 윤증이 이 말을 끌어다가 우암을 공격하는 단서로 삼았으니, 이 어찌 너무도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선생이 우암ㆍ동춘 두 선생의 묘의(廟議)에 관한 일을 들었느냐고 묻기에, 영숙이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더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옛날에 위원성(韋元成)은 이르기를 ‘묘제(廟制)는 2소(二昭)ㆍ2목(二穆)에 태조(太祖)와 문세실(文世室)ㆍ무세실(武世室)을 합쳐 7묘(七廟)가 되니, 주(周) 나라의 이른바 「7세(七世) 사당에서 덕의를 볼 수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고, 유흠(劉欽)은 이르기를 ‘3소ㆍ3목에 태조를 합쳐 7묘가 된다. 세실은(世室)은 이 수에 들지 않는데, 오직 공덕이 있는 자는 대수(代數)에 관계없이 모두 세실이다.’ 하였는데, 그후 주자는 유흠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래서 영종(寧宗)에게 묘의(廟議)를 드리기를 ‘우리 송 나라의 기업이 백 년 동안 공덕을 쌓아 오다가 태조 때에 나타났고 보면, 우리 송 나라의 희조(僖祖)야말로 주(周) 나라의 후직(后稷)입니다. 그리고 태조ㆍ태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천명을 받은 것은 또한 마치 주 나라가 문왕ㆍ무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천명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 나라가 이미 후직으로 태조를 삼아 백세토록 불천(不遷)하고 문왕ㆍ무왕으로 세실(世室)을 삼은 이상, 우리 송 나라 역시 희조로 태조를 삼아 백세토록 불천하고 태조ㆍ태종으로 세실을 삼아야 한다…….’ 하였다.
옛날에 우리나라 인조ㆍ명종 두 묘위(廟位)를 체천할 때 우암은 또한 주자의 논을 위주하여 말하기를 ‘아조(我朝)의 목조(穆祖)는 또한 송 나라의 희조(僖祖)와 같고, 아조의 태조와 태종은 또한 송 나라의 태조ㆍ태종과 같다. 그렇다면 아조의 목조는 마땅히 태조가 되어 백세토록 불천하고 태조와 태종은 세실을 삼아야 한다. 또 아조의 영녕전(永寧殷)은 옛 법이 아니다. 묘제(廟制)로 논하건대 세실을 두지 않고 태조만을 둔다면 조주(祧主 체천된 신주)를 모두 태조의 협실(夾室)에 보관해야 한다. 지금 강헌(康獻 태조(太祖)의 휘호)으로 세실을 삼지 않고 목조(穆祖)를 조주로 삼는다면 그 조주를 강헌의 협실로 내려 보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상의 신주를 자손의 협실에 보관하는 것은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이것이 주자가 반드시 희조를 태조(太祖)로 삼으려 했던 이유이니, 아조도 이를 준행해야 마땅하다.’ 하고, 동춘은 말하기를 ‘주자는 체제(禘祭)와 협제(祫祭)를 의논하면서 또한 제후는 2종(二宗)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본묘(本廟)는 2소ㆍ2목 외에 오직 태조를 포함하여 5묘가 될 뿐이니, 세실을 세우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일단 세실을 세우지 않고 태조 1묘만 세웠고 보면, 역시 강헌을 태조로 삼고 목조는 체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제후의 임금은 처음 봉해진 임금으로 시조를 삼는 예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말하기를 ‘이것 또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주자가 2종이 없다고 말한 것이 경(經)에는 보이지 않는데,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른바 처음 봉해진 임금을 시조로 삼는 것이 예라고 한 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주공(周公)으로 말하면, 주공 이상은 모두 천자이므로 노(魯) 나라가 제사할 수 없기 때문에 노 나라에서 주공을 시조로 삼은 것은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제(齊) 나라에 봉해진 태공(太公)의 경우, 태공이 어찌 그 조상의 5묘를 세우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미 5묘를 세웠다면 또한 그중 가장 높은 이를 태묘(太廟)로 삼지 않았겠는가.’ 하였는데, 두 선생의 의견이 끝내 합치되지 않았다. 우암이 동춘의 묘지에 이르기를 ‘억지로 의견을 같이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공의 고매한 점이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의논은 실로 우리나라의 대 거조이며 두 선생의 대 주장이니, 후세의 학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산해(李山海)와 송강(松江)이 세자를 세우기를 청한 곡절을 아는가? 기축역옥(己丑逆獄)을 치른 후 우계(牛溪)ㆍ송강ㆍ사계(沙溪) 및 이희삼(李希三)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희삼은 곧 스스로 서인ㆍ남인 사이에서 중립을 취한다는 자로서 이상 세 분 현인과 친한 사이였다. 송강이 말하기를 ‘여립(汝立)의 무리를 황해도와 김제(金堤)에서 많이 잡았으니, 그 당시 여립을 황해 도사(黃海都事)와 김제 현감에 추천한 자도 죄가 없을 수 없다.’ 하니, 사계(沙溪)가 말하기를 ‘여립이 본래 세상을 기만하고 이름을 도둑질하였으니, 그 당시 이조에서 의망한 것도 예사였을 것이다. 어찌 저 흉도가 역적이 될 줄 미리 알았겠는가. 꼭 처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하자, 우계가 말하기를 ‘여립이 집에 있었는데도 오히려 황해도와 김제 사람으로 하여금 이처럼 많이 향응하도록 하였는데, 만약 과연 도사가 되고 현감이 되어 그 형세를 힘입었다면 종사의 환란이 또한 어떠하였겠는가. 그 당시 전조(銓曹)는 분명 죄가 없지 않다.’ 하였다.
그러고 각각 헤어져 돌아갔는데, 희삼이 곧바로 산해의 집에 가서 그 말을 고하였다. 산해가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던 차에 마침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이 이르렀다. 산해가 구봉에게 고하기를 ‘어른께서 나를 죽이려 하니 나는 분명 죽을 것이다.’ 하였다. 대개 산해는 여립을 추천한 전장(銓長)이었고 어른이란 우계를 가리킨 것이다. 이로부터 산해는 우계와 송강에게 앙심을 품고 항상 중상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산해가 영상이 되고 서애(西涯)가 우상이 되고 송강이 좌상이 되었다.
이때 선조(宣祖)에게 적사(適嗣)는 없었으나 왕자(王子)는 많았다. 조신(朝臣)들의 생각은 일찍부터 김 숙의(金淑儀)의 소생 광해군에게 있었고 선조의 뜻은 곧 김 인빈(金仁嬪)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에게 있었다. 산해가 유(柳)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정승이 된 지 오래인데도 건의한 일이 없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금 좌상이 새로 정승의 자리에 들어왔으니, 필시 건의할 만한 급선무가 있을 것이다. 우상이 그와 함께 계책을 물어 함께 아뢰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유상(柳相)이 드디어 송강을 보고 산해의 의도를 고하였다. 이에 송강이 말하기를 ‘성상의 연세가 이미 지긋한데 후사를 세우지 못하였으니 세자를 세우는 한 가지 일이야 말로 오늘날의 급선무일 듯하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유상이 대단히 옳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산해도 드디어 두 정승과 함께 들어가 계청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이틀 전에 산해가 은밀히 인빈(仁嬪)의 남동생 김공량(金公諒)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새 정승이 광해군을 세워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려 하는데, 인빈을 제거하지 않으면 불편하므로 인빈을 제거하려 한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가? 인빈이 해를 입으면 화가 반드시 그대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였는데, 공량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즉시 인빈에게 들어가 고하였다. 인빈이 울면서 상에게 호소하기를 ‘소인의 집에 돌아가 죽기를 원합니다.’ 하자, 상이 괴이하게 여겨 사실을 물었다. 인빈이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새 정승이 광해를 세워 세자를 삼으면서 소인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말을 들었는가? 그런 일은 만무하다.’ 하였다.
이튿날 산해가 복통을 핑계로 오지 않자 송강이 유상과만 어전에 입시하였다. 송강이 먼저 건저(建儲)가 시급한 일임을 아뢰니, 상은 이미 인빈의 말을 듣고 의심을 품고 있던 차라, 이를 듣고 몹시 노하며 이르기를 ‘아직 내가 있는데 건저를 청해서 무엇하려는가.’ 하며 노발대발하였다. 이에 송강이 그만 물러 나와 대죄하였는데, 유상은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산해가 송강을 제거하려는 교묘한 술책이었는데, 유상은 실로 산해의 계책을 알지 못하고 그에게 이용만 당했을 뿐이었다. 이때 서인 측에서 공량의 소행이라는 것을 은밀히 알아채고 궁중을 선동한 그 행동에 노하여 양사(兩司)가 합계(合啓)로 청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이 말하기를 ‘공량 때문에 합계하려 하다니, 어찌 그리도 피폐해졌는가. 내가 지금 서전(西銓)에 있으니, 공량을 부하로 삼아 죄로 얽어 죽여도 늦지 않다.’ 하고, 즉시 공량을 막하로 삼았다. 산해가 그런 의논을 알고 공량에게 말하니, 공량이 두려워하여 인빈에게 고하자, 인빈이 즉시 상에게 호소하였다. 상이 노하였으나 달리 구제할 방법이 없자,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손자 윤신지(尹新之)를 부마(駙馬)로 간택하여 인빈의 사위를 삼음으로써 그 아우로 하여금 차마 공량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산해가 간사한 술책을 부린 정상인데, 또한 선조가 서인을 미워하게 된 곡절이다.
그런데 산해가 송강에 대해 유감을 품은 일이 또 한 가지 있다. 이때 연회가 있어 온 조정의 백관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산해만 일이 있어 가지 못하고 시(詩)를 지어 보내면서 연월 밑에 이름은 쓰지 않고 아옹(鵝翁 산해)이라고만 썼다. 송강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대감이 오늘 참으로 자기의 소리를 낸다.’ 하였는데, 산해가 듣고 몹시 언짢아 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급기야 광해가 즉위하여 산해를 몹시 싫어하자 산해 또한 크게 두려워 하여 그만 인홍(仁弘)ㆍ이첨(爾瞻)의 무리와 결탁하였는데, 폐모(廢母)에 관한 모든 일은 실제로 산해가 앞에서 음모하고 인홍이 뒤에서 그 흉억을 행한 것이었다.”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 청양(沈靑陽 심의겸(沈義謙))의 일은 또 사람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대개 선조가 처음 즉위할 때 나이가 16세였다. 청양이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의겸의 누이동생)에게 아뢰기를 ‘성상께서 아직 어려 사려가 깊지 못하니, 완호(玩好)와 기욕(嗜欲)을 억제하여 종묘사직과 민생의 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본래 엄격하고 법도가 있던 인순왕후가 이에 더욱 금지시켰으므로 선조가 완호 등의 일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울면서 꾸짖기를 ‘내가 하성(河城 잠저(潛邸) 때의 봉호)의 녹을 먹던 때가 그래도 부귀했다. 어찌 이토록까지 초야의 늙은이에게 제약을 받게 되었는가.’ 하였는데, 이는 곧 청양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로부터 선조가 청양을 몹시 미워하였는데, 동인(東人)들이 은밀히 상의 뜻을 탐지하고 드디어 청양을 물리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오직 정송강과 김황강(金黃岡 이름은 계휘(繼輝)ㆍ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부)만이 그 기미를 알았기 때문에 곧바로 동인을 소인이라고 공격하였는데, 율곡 선생이 그 일을 알지 못하고 동ㆍ서의 분당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모두가 편론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초 서인이 과격했던 것은 아니었다.”

영숙이, 송강과 황강이 왜 그 까닭을 율곡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황강과 송강이 율곡에게 고할 줄 모른 것이 아니다. 단지 율곡은 공리(功利)를 꾀하지 않는 분이라서 만약 그 말을 들을 경우 필시 들어가 직간(直諫)하여 도리어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끝내 고하지 않았던 것일 뿐이라고 한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율곡 선생은 윤임(尹任)이 무죄라 하고, 퇴계 선생은 사직(社稷)의 죄가 없지 않다고 하였는데, 두 선생의 소견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당시의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율곡이 처음 삭훈(削勳)을 의논할 때 기고봉(奇高峯)이 따르지 않았다. 삼사(三司)가 이에 탄핵하는 의논을 하자 고봉은 부제학(副提學)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서 종기병으로 죽었는데, 혹은 말하기를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명언(明彦 고봉의 자(字))이 죽었다.’ 한 데 반하여 율곡은 말하기를 ‘사문이 다행하여 명언이 죽었다.’ 하였다.
대개 퇴계는 항상 산림에 있었고 고봉은 벼슬하여 서울에 있었는데, 퇴계가 들은 것은 모두가 고봉의 말이었다. 그런데 고봉이 이미 삭훈(削勳)을 불가하게 여겼고 보면, 퇴계가 윤임에 대해 사직의 죄가 없지 않다고 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대개 윤임은 무부(武夫)로 유악(帷幄)에 있었다. 그래서 퇴계는 생각하기를 ‘그가 본래 무지한 사람으로 높은 자리에 있었으니 어찌 그 마음가짐이 단정한 선비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기 때문에 의심하게 된 것이고, 율곡은 생각하기를 ‘윤임이 무부이긴 하나 드러난 죄가 없고 당시의 제현(諸賢)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윤원형(尹元衡)과 윤원로(尹元老)는 본래 불측한 소인이고,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인종(仁宗)의 죽음 또한 후세의 의혹이 없지 않다. 따라서 단연코 윤임이 죄가 있다고 한다면 제현도 죄가 있는 것이 되고, 제현이 죄가 없다면 윤임 역시 죄가 없다. 이미 죄가 없다고 한다면 윤원형의 녹훈을 깎지 않고 어찌하랴.’ 한 것이니, 이것이 율곡 선생이 극력 삭훈을 주장하게 된 이유로서 후세의 큰 공안(公案)이 된 것이다.”

영숙이 묻기를 “율곡 선생은 일찍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이 충신은 될지언정 유자(儒者)의 기상은 없다고 하였고, 우암 선생은 신도비(神道碑)를 지으면서 ‘우왕(禑王)ㆍ창왕(昌王) 때의 역사가 많이 궐실되었다. 어떤 사람이 퇴계에게 물으니, 퇴계는 「허물이 있는 중에서도 허물이 없음을 구해야 하고 허물이 없는 중에서 허물이 있음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참으로 지론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곡절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당시 포은(圃隱)과 우리 태조는 각각 분당되어 있었다. 포은 편에서는 포은이 영수가 되어 태조의 당을 소인이라 하고, 태조 편에서는 태조가 영수가 되어 포은의 당을 소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태조의 당이 점점 성대해지자 포은도 태조에 대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태조의 우익인 정도전(鄭道傳)의 무리를 제거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역시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신우(辛禑)가 죽자 조신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후계자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목은이 의당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우왕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이는 포은과 목은은 우왕과 창왕이 신씨(辛氏)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후에 권근(權近)이 중국에 봉명사신으로 갔을 때 명 태조(明太祖)는 고려조가 혼란하여 왕씨(王氏)를 신씨(辛氏)로 변경하였음을 듣고 권근을 보고는 그 사실을 힐책하며 책망하는 조서까지 내렸다. 권근이 그 조서를 가지고 귀국하였으나 감히 내보일 수가 없었다. 이때 창왕도 명 나라가 자기를 의심한다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원한을 품었는데, 이에 최영(崔瑩)과 함께 상국(上國)을 범하려고 하여 태조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태조가 요동(遼東)으로 행군하던 도중에 돌이켜 생각하기를 ‘고려는 본래 왕씨의 나라요 신창(辛昌)의 나라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왕씨를 세워야 한다는 선언을 하고 회군(回軍)하여 돌아왔다. 돌아오는 즉시 최영을 죽이고 신창을 폐위한 다음 공양왕(恭讓王)을 영입하여 임금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드디어 녹훈(錄勳)하였는데 포은도 그 녹훈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포은이 일단 신창을 왕창(王昌)으로 여겨 몸소 그를 섬겼고 보면 어찌하여 왕창을 부지하지 못하고 폐립(廢立)의 공훈에 참여하였단 말인가. 그리고 포은이 만일 태조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창을 신창으로 여기었다면 어찌하며 애당초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겼단 말인가.”

영숙이 묻기를,
“퇴계(退溪)가 일찍이 말하기를 ‘포은과 우ㆍ창의 관계는 왕도(王導)와 진 원제(晉元帝)의 관계와 같다. 원제가 사마씨(司馬氏)는 아니나 사마씨의 종사가 그래도 존속되었고, 우ㆍ창이 왕씨는 아니나 왕씨의 종사가 그래도 존속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이는 목은이 이른바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인데, 포은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대개 포은의 뜻은 단연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창을 신창으로 여겼거나, 또 창을 폐위할 때 항쟁할 줄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태조가 회군한 후에 민심이 두려워하며 모두 태조의 위엄에 굴복하였다. 포은이 만약 척수 고장(隻手孤掌)으로 창의 폐위론에 항쟁하였다면 태조는 필시 이르기를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신창이라 하는데 그대만 왕창이라 하는가. 신을 왕이라 하면 이는 왕씨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포은은 변명할 여지가 없고 당장 호흡간에 피해를 당했을 것이다. 포은이 죽임을 당하는 날이 곧 고려가 망하는 날이다. 포은은 필시 이런 것을 헤아리고 우선 녹훈에 참여하여 종사를 보호하다가 기회를 보아 태조의 당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 태조가 세자를 맞기 위하여 황주(黃州)로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쳐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포은이 그 기회를 틈타 공양왕에게 아뢰어 정도전 등을 내쫓고 이어 태조의 가문도 함께 제거하려 하였다. 태종(太宗)이 그 기미를 알고 급히 평산(平山)으로 달려가 태조를 모시고 돌아와 공양왕에게 아뢰고 도전 등을 석방하게 하였다. 포은은 일이 순조롭지 못함을 알고 태종의 집에 가서 그 동태를 살피려 하다가 선죽교(善竹橋)의 변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그 당시 일의 곡절이다. 대개 율곡은 생각하기를 ‘나라는 언제고 망하는 법이나 자신의 행동은 어긋나게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포은의 죽음은 의당 창왕을 폐위할 때 있었어야 하고, 공양왕을 세운 공훈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한다.’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충의만을 허여하고 그 유자의 기상은 허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암(尤菴)의 말이 참으로 적절하다.”
하니, 영숙이 말하기를,
“8척을 펴기 위해 1척이라도 굽혀서는 안 된다고 한 맹자(孟子)의 경계야말로 법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과연 그렇다고 하며 말하기를,
“그럴까, 그럴 것이다.”
하였다.

영숙이 묻기를,
“퇴계 선생이 떠나간 뒤에 다시 봉성군(鳳城君) 찬축(竄逐)의 계(啓)에 참여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어찌 감히 알랴마는, 권석주(權石洲)의 시에,
지난 무오 기사년에 낙담하였는데 / 從來戊己可傷魂
을사년간에 일이 다시 어려워졌네 / 乙巳年間事更屯
천추에 이름 남긴 이는 두 학사이고 / 千古留名兩學士
구천에서 통분하는 이는 한 왕손일세 / 九泉含痛一王孫
시비는 계속되어 끝내 진정시키기 어렵고 / 是非滾滾終難定
훼예는 분분하여 논하기 쉽지 않네 / 毁譽紛紛未易論
어떻게 세찬 바람 얻어 음산한 구름을 걷어버리고 / 安得長風掃陰翳
해 달을 높이 드러내 천지를 밝힐까 / 高懸日月照乾坤
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두 학사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 선생이다. 지난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석주(石洲)의 별집(別集)을 초(抄)할 때 이 시를 별집 중에 실었는데, 우암이 그 위에 찌를 붙여 이르기를 ‘이 시의 지적한 것이 이러이러한 것인데 공이 아는가?’ 하자, 문곡이 깜짝 놀라 즉시 그 시를 별집의 판(板)에서 뽑아버렸다고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계(沙溪)가 율곡에게 묻기를 ‘회재와 퇴계 두 선생께서 모두 기생첩을 둔 일이 있었는데, 선생은 두 선생 보기를 달리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퇴계는 학문을 하기 전의 일이고 회재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달리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이 사계의 어록(語錄)에 있다.”
하였다.

영숙이 최명길(崔鳴吉)의 일을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우암이 일찍이 말하기를 ‘병자년의 일은 그의 큰 죄가 될 수 없으나, 원종(元宗)을 추숭한 일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을 비방한 일은 나쁘다. 그러나 영안위(永安尉 선조(宣祖)의 부마(駙馬) 홍주원(洪柱元)의 봉호)를 구제한 그 한 가지 일이 족히 추숭을 도모한 죄를 속죄할 수 있고 독보(獨步 조선 중기의 승려ㆍ초명은 중헐(中歇))를 보낸 그 한 가지 일이 또한 청음을 비방한 것을 속죄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였다. 영숙이 추숭의 일은 무엇을 말하느냐고 묻자, 선생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하여 그 당시 사계(沙溪) 일파에서는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최상(崔相 최명길)이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남몰래 사신으로 하여금 은밀히 예부 상서(禮部尙書)에게 품하여 그의 허락을 받게 한 뒤에, 사사로이 밀계(密啓)하여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은 중국에 품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 이의를 제기하는 제신들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인조(仁祖)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그 말대로 하여 원종을 추숭하였으니, 이는 공명정대하지 못한 소인의 행태였다.”
하였다. 영숙이 영안위를 구제한 일은 무엇인지 물었더니, 선생이 이러저러하다고 하였다. 영숙이 독보를 보낸 일은 무엇인지 물으니, 선생이 답하기를,
“최상이 장군 임경업과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내면서 주문(奏文)을 지어 병자년의 만부득이한 사정을 호소하고 본조 군신(君臣)의 심적(心迹)을 극구 변명하자 황제가 비로소 우리나라의 무죄함을 알게 되었고, 또 도독(都督) 주종예(朱宗藝)로 하여금 자문을 보내 그 미덕을 극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최상의 심적이 근본적으로 금(金) 나라를 위하여 송(宋) 나라를 꾀어 금 나라와 화친하도록 한 진회(秦檜 송(宋) 나라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때의 간신)의 본심과 다른 점이다.
또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낸 사실이 청 나라에 발각되자 청 나라가 우리를 책망하며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낸 신하를 잡아 보내도록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부득이 임 장군(林將軍)을 잡아 보냈는데, 임 장군이 평산(平山)에 이르러 도망쳤다. 일이 장차 난처하게 되자 최상이 곧 말하기를, ‘당시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낸 일은 임모(林某)와 신이 실제로 그 묘책을 주장하였으니 신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상에게 아뢰고는 그 아들 후량(後亮)과 함께 스스로 청 나라에 갔다. 대개 이 걸음이 생사에 관계된 연유로 해서 최상의 집에서는 초종(初終)의 모든 기구를 갖추어 가지고 떠났으며 여러 관리와 친우들도 전송하면서 은자(銀子) 수천 냥을 마련해 주었다.
그 당시 청음도 청 나라로 잡혀가 최상과 한 집에 갇혔는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후량이 은자를 써서 그 아비를 구출하려 하였으나 청음이 혹시라도 그 일을 알까 염려되었다. 이에 청음을 찾아가 산의생(散宜生 주(紂)에게 뇌물을 주어 유리옥(羑里獄)에 갇힌 주 문왕(周文王)을 구했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청음이 옛날의 현인(賢人)이라고 대답하였다. 후량이 또 그렇다면 산의생의 한 일이 부당한 것이 없느냐고 묻자, 청음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후량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드디어 그 은자를 정명수(鄭命壽)에게 주어 그 화를 늦추게 하였다.
또 최상은 처음에 청음이 진심으로 춘추대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구하려는 심산이 있었다고 의심하였는데, 급기야 함께 청 나라에 갇혀 사생이 박두하되 꿋꿋이 변함없는 마음을 보고서야 그 의기심을 믿고 감복하였다. 그러고 청음도 처음에는 최상이 진회(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여기었는데, 급기야 청 나라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오랑캐에게 굴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그 본심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에 함께 벽을 사이에 두고 갇혀 있는 상황에서 서로 시(詩)를 지어 화답하였는데, 그중 청음의 시에 ‘끝내 두 대(代)의 우호를 닦으니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네.[終修兩世好 頓釋百年疑]’라 하고, 최상의 시에 ‘그대의 마음 돌이 아니니 끝내 굴리기 어려우나 나의 도는 고리와 같아 이르는 곳마다 자유롭네.[君心非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라 하였다. 이것이 서로의 유감을 해소한 한 가지 일이다.
그후 최상 집 자손들은 청음이 자기의 조상과 서로 조그마한 원한도 없다고 생각하여 정의(情誼)가 몹시 두터웠는데, 청음 집 자손은 별로 대단히 좋게 여기지 않고 그저 서로의 안부나 끊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청음의 연보(年譜)를 작성할 때 이 사실 전부를 빼 버렸는데, 우암이 이를 보고 문곡에게 서신으로 이르기를 ‘본말을 갖추어 기록하는 것이 연보의 체재이다. 하물며 서로의 유감을 해소한 일은 본래 선생의 성대한 덕에 손색이 없는 것이니 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하였으나, 문곡은 끝내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또 우암이 일찍이 이르기를 ‘요즈음 사람들은 명길이 강화(講和)한 일은 책망하면서 감히 후인이 척화하지 않은 것은 비난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명길이 강화를 주장한 것은 사세가 위급하여 만부득해서였으니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후세의 명류(名流)들은 평안한 때에 한 사람도 척화의 계책을 낸 사람이 없이 오랑캐들에게 굽히기를 달갑게 여기기만 했으니 이런 자들이야말로 죄를 받아야 한다. 위급한 때 강화를 주장한 자만 유독 죄가 있고 평안한 때 강화를 주장한 자는 또 죄가 없다면 어찌 말이 되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명길을 마음속으로부터 복종시키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선생이 《삼신전(三臣傳)》을 우암이 개정한 곡절을 들은 적이 있냐고 묻기에, 영숙이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상(崔相 최명길(崔鳴吉))의 아들 후량(後亮)이 《삼신전》을 얻어 보고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의 병자년 강화(講和)의 일에 대한 후인의 논단(論斷)이 망극하기 그지없지만 내가 어찌 감히 원망을 하고 미워하겠는가. 그러나 그때 우리 아버지가 일을 조처하지 않았다면 실제로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삼신전》을 보건대, 윤집(尹集)과 오달제(吳達濟) 두 사람을 오랑캐의 진영으로 보낼 즈음에 우리 아버지가 윤ㆍ오와 함께 양파(陽坡)로 가면서 윤ㆍ오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이 내 말대로 하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윤ㆍ오가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우리 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만약 과거의 척화신(斥和臣)을 끌어대면 저들 오랑캐 또한 다 죽일 수 없을 것이니 그대들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윤ㆍ오가 이르기를 「불가하다. 어찌 우리 두 사람의 삶을 도모하여 다른 사람들을 모두 불측한 곳으로 빠뜨리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 무근한 일이니,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당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서자(庶子) 기남(箕男)이 체찰사(體察使)의 막하(幕下)로서 그 일을 목도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내가 체찰사의 품의하는 일로 어전에 있을 때, 최 판서(崔判書)가 두 신하를 인솔하고 함께 오랑캐의 진중으로 가려 하였다. 이에 상이, 식후에 두 신하를 인견하고 보내겠다고 하니, 최 판서가, 오랑캐의 독촉이 몹시 급하니, 만약 인견한 후에 보내려면 자신이 먼저 가서 그들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를 허락하자 최 판서가 드디어 식전에 오랑캐의 진중으로 갔는데, 두 신하는 식후에 과연 인견하고 군관으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양파로 함께 갔다는 것이 어찌 그릇된 기록이 아니겠는가.’ 하니, 우암이 듣고 말하기를 ‘이는 내가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대개 삼신(三臣)의 본가의 기록에 있기 때문에 실었던 것이다. 과연 사실이 아니라면 어찌 산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기남에게 물으니, 그의 대답이 한결같았으므로 이에 양파(陽坡)의 한 대목을 산삭하였다. 당시 후량은 청풍(淸風)에 있었고 우암은 여주(驪州)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내가 서신으로 그 사실을 청풍에게 통지하니, 청풍이 듣고 몹시 기뻐하며 드디어 배를 타고 우암을 찾아와 뵙고 사례하여 마지않았다. 그리고 한 대목의 개정을 또 청하였는데, 이는 ‘최상이 두 신하의 손을 뒤로 묶고 오랑캐의 진영에 이르자, 오랑캐가 크게 좋아하면서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이 죄인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하며 최상에게 큰 상을 내리니, 최상이 이를 받았다.’고 한 것이었다. 우암이 말하기를 ‘이 사실 또한 양파와 같은 증거가 있다면 고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감히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이 밖에 또 한 대목을 청하였는데, 이는 최상이 잡혀 오랑캐 땅으로 갈 때에 지은 절구시(絶句詩) 한 수로,
내 비록 삼학사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 我雖不殺三學士
한밤중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하네 / 中夜思之心自驚
천도는 본래 순환하는 것이런가 / 天道由來好回還
흰머리로 오늘날 또다시 서쪽으로 가네 / 白頭今日又西行
라고 한 내용이었다. 우암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시는 선상공(先相公)의 작품이 아니란 말인가?’ 하니, 후량이 말하기를 ‘시는 과연 선인의 시이다.’ 하였다. 이에 우암은 그렇다면 감히 고칠 수 없다고 하고 끝내 그가 청한 대목을 고치지 않았다. 후량은 자기의 요청을 다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이에 말하기를 ‘저희 집이 대감에게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저희 집 자손이 어찌 감히 문하를 어기겠습니까?’ 하였는데, 그후에 자손이 마침내 그와 같이 하였다.”

영숙이 대규모(大規模)와 엄심법(嚴心法)을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천지를 소유한 듯이 널리 마음을 가져 만세의 태평을 연다면 이것이 어찌 이른바 대규모가 아니겠는가. 상제(上帝)가 너에게 임한 듯이 하여 은밀한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이른바 엄심법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영숙이 묻기를,
“정자(程子)가 ‘국량은 배워서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이 타고난 좁은 도량을 배워서 넓힐 수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세상에 무슨 일인들 배워서 능치 못하겠는가. 사람의 국량도 더욱 배워서 넓힐 수 있다. 예컨대, 사람들이 처음에는 과거를 보는데 골몰하여 다른 일을 돌보지 못하는데, 이는 그 국량이 과거의 밖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성현의 글을 보고 사우(師友)의 말을 듣게 되면 과거 밖에 또다시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아 여기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는 국량이 이미 과거의 밖을 벗어난 것이다. 또 예컨대, 사람들이 칭찬을 들으면 기뻐하고 비방을 들으면 노하는데, 이는 그 국량이 칭찬과 비방의 안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칭찬과 비방이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비방해도 노하지 않고 칭찬해도 기뻐하지 않으니, 이는 그 국량이 비방과 칭찬 속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무한한 도량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는 내가 시험해 본 일이다.”
하였다. 영숙이 또 묻기를,
“정자(程子)가 한 위공(韓魏公)의 도량은 간기(間氣 여러 세대 만에 있는 기량)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간기란 무엇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우암을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우암을 흠잡는데, 그들은 우암의 어떤 점을 지적하여 말한다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하였다. 영숙이 대답하기를,
“너무 과격하고 너무 고집스런 것을 가지고 말한다고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렇다. 대개 우암을 배우기 어렵고 또 마땅히 배워야 할 점은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너무 과격하고 너무 고집스럽다고 하는 데에 있다. 대개 남의 잘못을 보고도 바르게 말해 주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온 세상의 풍조인데, 이는 남을 거스르기만 하면서 자신에게는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암은 그렇지 않다. 혹 약간이라도 심술에 잘못됨을 보이거나 속임수의 작태를 보여 의리를 해치는 것이 있으면, 평소 대단히 존경하고 친밀하게 지내는 자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부정을 그대로 두지 않았으니, 이윤(尼尹 이산(尼山)에 사는 윤증(尹拯)의 집안)에 대한 일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대개 우암은 윤씨 집에 대하여 팔송공(八松公 미촌(美村)의 부(父) 황(惶))때부터 교분이 그처럼 두터울 수 없었고,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등도 외우(畏友)로 섬겼으며, 윤증(尹拯) 또한 우암에 대해 당세의 망사(望士)로 극진히 섬겼다. 따라서 우암의 입장에서는 옳지 못한 곳이 보이더라도 묵묵히 참고 칭찬이나 하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었다. 그랬다면 당후(唐後 지명. 곧 윤증 가문)를 추복(趍服)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암을 섬겼을 것이며, 또 훗날 대화(大禍)의 조짐도 없었을 것이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었겠는가. 우암이 이를 모른 것은 아니었다. 오직 효종(孝宗)으로부터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중책을 받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천리에 관계되거나 사설(邪說)에 관련되는 일이 있으면 화복과 이해를 일체 돌아보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성내어 극언하기를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당후(唐後)의 일에 대하여 내가 서구(叙九 송주석(宋疇錫))와 함께 여러 차례 너무 과격하여 뒷날의 화를 부르게 될까 염려됨을 말씀드렸고, 회석(晦錫 우암의 손자)은 때로 울면서 간하기를 ‘어찌 자손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하였으나, 우암은 다만 미소를 지으면서 서서히 말하기를 ‘나로 말미암아 천리와 인심은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자손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과, 남을 따라 오염되어 사행(邪行)에 휩쓸려 자손을 보전하게 되는 것을 후세로 하여금 평가하도록 하였을 때, 그 어느 것이 낫겠는가.’ 하였다. 이것이 우암의 도량으로서 화복과 이해에 집착하지 않고 존경과 친밀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소위 간기의 도량으로서 바로 배우기 어려운 점이다. 위공의 도량 또한 화복과 이해에 일체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자가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우암의 이 일에 대하여 선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배워야 할 줄은 절실히 알아 마음속에 간직하였으나 끝내 배우기 어려웠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암의 위대한 곳을 후학이 끝내 배울 수 없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다만 내가 능히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우암을 배운다고 하면서 이러한 점을 배우지 못하면 이는 우암을 배운 것이 아니다.”
하였다. 영숙이 우암의 도에 대한 경지를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찌 다 알 수 있으며 또 어찌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겠는가. 대개 그 세밀한 곳은 빠뜨림없이 모두 세밀의 극치를 이루었는지 알 수 없으나, 활대(闊大)한 곳에 이르러서는 빠뜨림없이 모두 그 활대의 극치를 이루었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하늘 같이 높고 바다 같이 넓으며 명주실 같이 은미하고 쇠털 같이 섬세한 도학의 경지를 우암이 당할 수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른바 명주실과 쇠털 같은 경지는 주자와 더불어 결국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높고 넓은 경지에 이르러서는 감히 그 누가 우열이 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내가 일찍이 노선생의 화상찬(畫像贊)을 지었는데, 그중에 ‘군유(群儒)를 합쳐 대성(大成)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김중화(金仲和 중화는 김창협(金昌協)의 자(字))가 이 귀절을 보고 말하기를 ‘대성 두 글자는, 본래 백이(伯夷)의 청(淸)과 유하혜(柳下惠)의 화(和)가 모두 한 쪽에 치우쳤기 때문에 오직 부자(夫子 공자(孔子))만이 합쳐서 대성했다고 하는 뜻이다 그런데 부자의 제목을 우암에게 쓴다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하였다. 이 말이 어떠한가?”
하기에, 영숙이 대답하기를,
“글쎄요.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주자가 일찍이 공자(孔子)를 일컬을 때 군성(群聖)을 합쳐 대성하였다고 하였고, 주자 문하가 주자를 일컬을 때 군현(群賢)을 합쳐 대성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뜻은 이제(二帝) 삼왕(三王)의 시서예악(詩書禮樂)이 공자의 절충을 말미암아 대성하였음을 이름이며, 주정장소(周程張邵)의 학설이 또한 주자의 절충을 말미암아 대성하였음을 이름입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군유(群儒)를 합쳐 대성하였다는 것이야말로 노선생의 제목으로 미안한 점이 없습니다.”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실로 그렇다. 내 뜻 역시 그와 같았기 때문에 감히 그 구절을 고치지 않았다.”
고 하였다. 영숙이 삼주(三洲 김창협(金昌協))가 우암을 아는 것이 어느 정도냐고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일찍이 그와 더불어 조용히 강론해 보지 못해서 어떠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암에 대한 제문에 ‘임금이 알아보고 함께 대인(大人)이 되었다.’는 말로 보면 우암의 경지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은밀한 곳에 이르러서는 간혹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앞서 여상(驪相 이여(李畬))이 나에게 ‘중화(仲和)를 급히 보고 강론을 귀일시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삼주 어른이 왜 지금까지 우암의 행장을 쓰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서구(叙九)가 있을 때 지문(誌文)은 여상(驪相)에게, 묘표(墓表)는 나에게, 행장(行狀)은 중화에게 부탁하였는데, 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 뒤에 사람들이 서구의 부탁을 어길 수 없을 것 같아 중화로 하여금 그 행장을 쓰게 하였는데 중화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고, 또 가장(家狀)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그로 하여금 지으라고 강권할 수도 없었다.”
하였다. 영숙이 말하기를,
“가장은 왜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곡절이 있다. 서구가 가장을 절반 이상 써 놓고 세상을 떴기 때문에 내가 백순(伯純 송일원(宋一源))으로 하여금 속히 가장을 마치게 하여 행장을 받으려 하자, 백순은 문장력이 부족하다고 사양하며 신백겸(申伯謙 신유(申愈))과 함께 써서 완성할 것을 청해 왔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러면 서로 의논해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는데, 그후에 보니 백겸에게 전담시켰고 또 그 글의 문장이 가장의 문체에 크게 위배되어 손을 보아야 할 곳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이런 뜻으로 백겸에게 말하니 백겸 역시 인정하고 손을 보아 보내 주겠다고 하였는데, 백겸이 갑자기 불행하게 되어 아직까지 보내오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 선생이 또 백겸에게 말하기를 “글이 그대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의당 본가의 자손 이름으로 대술(代述)해야 할 것이다.” 하니, 백겸이 말하기를 “의당 백순(伯純)의 이름으로 써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또한 소식이 없었다.
영숙이 백겸(伯謙)의 앞서 있었던 일의 전말을 물으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야기를 하자면 몹시 장황하나, 다 말해 주겠다. 앞서 헌상(軒相 백헌(伯軒) 이경석(李景奭)) 경석(景奭)이 삼전비문(三田碑文)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 이른 말이 실로 사람들의 마음에 부끄러운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청백했고 을유년의 일이 칭찬할 만하였기 때문에 당시 청음(淸陰) 같은 제현들이 모두 그와 교유하였다. 그후 기유년에 현종(顯宗)이 온천(溫泉)으로 거둥할 때 헌상이 유도상(留都相)이 되고,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또한 세자보양관(世子輔養官)으로 서울에 있었다. 이때 우암(尤菴)은 마침 피혐할 일이 있어 감히 행재(行在 임금이 임시 머무는 곳)에 나아가지 못하고 단지 전의(全義)에 나아가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헌상이 문득 상소하기를 ‘원근의 제신들로서 달려와 문안하는 자가 없다.’ 하고 또 무례한 말을 하였으므로, 우암이 듣고 즉시 대죄소(待罪疏)를 올렸는데, 그 끝에 손 종신(孫從臣) 금인(金人)을 위해 제문(祭文)을 지은 송(宋) 나라 손적(孫覿) 운운한 말이 있었다. 헌상이 처음에는 손신(孫臣)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허적(許積)이 곧 마비(麻碑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찬한 것으로 손적(孫覿)의 일에 비유한 것임을 알고 헌상에게 알리니, 헌상이 몹시 노하여 우암의 상소문을 동춘에게 내보이자 동춘이 해탄(駭歎)하였다고 한다. 그후에 판서 송규염(宋奎濂)이 서신으로 우암에게 물으니, 우암은 춘형(春兄 동춘)도 해탄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데 타인이야 어찌 기대할 수 있느냐고 답하였다 한다.
급기야 지난해 이하성(李廈成)이 그 조부를 위해 자칭 변무소(卞誣疏)를 올리면서, 동춘의 해탄을 인용하여 우암을 공격하는 자료로 삼았다. 그러므로 문인들의 변무의(辨誣議)가 서울에서 일어났고, 정경유(鄭慶由) 곧 병() 그 소본(疏本)을 나에게 보내 가부를 가리게 하였다. 내가 이때가 마침 병이 있어 손자 아이를 시켜 읽히고 그 내용을 들었다. 처음에는 누가 초안한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 문세를 듣고 나서야 백겸(伯謙)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중간에 동춘의 사실에 이르러 말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받들어 순종하는데 모(某)만이 유독 배척하니 그 화연(譁然)할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송모(宋某)가 모(某)에 대하여 해탄한 것은 무슨 일인가? 옛날에 명도(明道)와 이천(伊川)은…….’이라고 한 대목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생각하기를 ‘모에 대하여 해탄한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한 말은 위의 화연(譁然)의 말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하였기 때문에, 경유(慶由)에게 답하기를 ‘모(某)는 한결같이 두 선생을 섬겼는데 폄의(貶議)하는 것 같아 듣고 싶지 않다.’ 하였다. 그런데 그후에 백겸의 말을 들으니, 그 본의가, 화연이라고 한 것은 다만 온 세상 사람만을 말한 것이고, 모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단지 명도 운운의 말머리로 삼은 것이라고 하였다. 백겸의 본의야 과연 이와 같았다 할지라도 송모의 해탄 구절 뒤에 차부지어(且夫至於) 등의 문자를 붙이지 않고 바로 화연의 밑에 접속시켰고 보면, 사람들이 보기에 나의 처음 본 의사와 같을 것이 괴이하지 않다. 이것이 백겸이 글자를 제대로 안배해 쓰지 못한 곳이다.
또 두 가문이 서로 시끄럽게 된 원인에 대해 할 말이 있다. 그 당시 내 손자가 그 소본의 이 대목을 등서하여 그 장인 송병익(宋炳翼 동춘의 손자)에게 보냈더니, 병익이 백순(伯純)에게 보였다. 백순은 처음부터 또한 백겸이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회중(懐中 송씨(宋氏)의 세거지 회덕(懷德))의 박정채(朴廷采)ㆍ송하적(宋夏績) 등이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면서 백겸을 비난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까지 하고, 또 세제(世濟)의 무함이 조상에까지 미쳤으니 자손된 백겸이 그 어찌 통분스럽지 않겠는가. 대개 하적이란 자는 본래 백겸의 집과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화로 그 사사로운 원한을 풀려고 하였으니, 그 마음씨가 형편없다 하겠다. 이로부터 백순 또한 격노하여 말하기를 ‘우암을 변무한 사람이 난적이 된다면 이는 우암으로 난적을 삼는 것이다.’ 하니, 회중의 무리가 그 말을 듣고 백순 또한 백겸과 함께 동춘을 무함한다고 하면서 백순까지 아울러 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집의 자손이 서로 패를 갈라 버티게 되었다. 얼마 후에 회중 사람 7, 8명이 연명하여 나에게 백겸을 징벌할 일을 물어 왔기에, 내가 답하기를 ‘신모(申某)의 일은 실로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남의 문장력을 흠잡아 징벌할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그후 내가 화양동(華陽洞)으로 가니 백순ㆍ백겸도 와서 함께 모였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망(謬妄)’ 두 자를 풀어 말하며 백겸을 책망하니, 백겸이 말하기를 ‘이는 말을 다하기 전에 승복할 일이다.’ 하였다. 내가 이어 백겸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이번 일이 또한 실수가 없는 것이 아닌데, 지금 만약 한 번 사과하면 허다한 분란이 모두 없는 일로 될 것이다. 어찌 이처럼 고집하는가?’ 하니, 백겸이 말하기를 ‘저들이 소생을 무고할 뿐 아니라 선조까지 무함하니, 사과하고 싶어도 어떻게 사과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사과하는 글을 대략 몇 구절 만들어 나에게 서신을 보내라. 그러면 내가 회중 사람들에게 보여 일이 없도록 하겠다.’ 하니, 백겸은 충고해 준 대로 하겠다고 하였는데 끝내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또 을유년 4월에 백겸이 여기에 왔을 때 9일 동안 상대하면서 사과할 것을 역설하자, 그때도 돌아가면 충고해 준 대로 하겠다고 하였으나, 역시 실행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인데 고집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이것이 백겸의 병통인 것이다.
두 집 자손에게 내가 항상 이르기를 ‘우암과 동춘 두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계(沙溪)의 문하에 함께 노닐며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그리고 춘당(春堂)이 임종할 때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와 일조청빙(一條淸氷)으로 서로 인정하였고, 세인들 또한 매양 사문(沙門)의 양송(兩宋)으로 일컫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두 집 자손이 서로 불화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그 흐름의 폐단은 끝내 동춘 자손이 우암을 헐뜯게 되고 우암 자손이 동춘을 헐뜯는 일까지도 있을지 모른다. 삼분오열(三分五裂)된 이때를 당하여 어찌 사소한 일로 이처럼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가? 왜 급급히 서로 사과하여 구의(舊誼)를 되찾지 않는가?’ 하였는데, 송병익은 말하기를 ‘일원(一源)이 사과하면 내가 유감을 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원이 사과하지 않으니, 내가 차마 먼저 굽힐 수는 없다.’ 하고, 송백순은 말하기를 ‘그들은 이미 내가 춘당(春堂)을 모욕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내가 먼저 사과하면 나는 과연 춘당을 모욕한 사람이 된다. 내가 이미 모욕한 일이 없는데 내가 먼저 사과할 의리가 없다.’ 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버티며 세월이 갈수록 격렬해져 내 말을 듣기를 진월(秦越)같이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백순은 나를 책망하여 왜 사정(邪正)을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하고, 병익은 나를 책망하여 왜 백순과 백겸을 배척하지 않느냐고 한다. 이것이 무슨 의리이며 무슨 처사인가. 이것이 근래 일의 줄거리이다.”

선생이 《의례(儀禮)》에 구고(舅姑)의 복(服)을 기년(期年)으로 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묻기에, 영숙이 예의 뜻을 감히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더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개 인륜(人倫)으로는 삼강(三綱)보다 더 중한 것이 없으니,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 되고, 아비는 아들의 근본이 되고, 남편은 아내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비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고,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참최복을 입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다. 대개 신하ㆍ아들ㆍ아내의 중히 여기는 바가 아비ㆍ임금ㆍ남편보다 더 중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들은 아비의 부모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고, 신하는 임금의 부모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고, 아내는 남편의 부모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제정한 예로서 반드시 삼강을 근본으로 하여 만세의 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위인포(魏仁浦 송(宋) 나라 학자)가 성인의 본의를 모르고 망녕되이 후하게 하여 후세에 바꾸지 못할 전례를 만들었다.”

[주D-001]이산(尼山)의 일 : 이산은 노성(魯城)의 옛 이름으로 지금의 논산군(論山郡) 노성면(魯城面)임. 노성에서 대대로 살아 온 윤증(尹拯)이 그의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함으로써 소위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립된 사건을 말함.
[주D-002]기해년에 …… 예론(禮論) : 효종(孝宗)의 승하에 따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문제로, 서인 송시열 등의 기년설(期年說)과 남인 윤휴 등의 3년설(三年說)이 대립되었던 예론을 말함.
[주D-003]갑인년의 화 : 숙종 즉위년 효종의 승하에 따른 자의대비의 상복을 기년(期年)으로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삭탈관직하고 그 일파를 추죄(推罪)한 사건을 가리킴.
[주D-004]경신년의 옥사 : 숙종 6년에 있었던 소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말함. 허적ㆍ윤휴 등 남인이 대거 실각하고 송시열 등이 다시 등용됨으로써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주D-005]점필재(佔畢齋) …… 것이다 :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史草) 문제로 점필재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을 때, 그의 제자였던 한훤당까지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일을 말함.
[주D-006]태묘(太廟)의 …… 일 : 태조의 휘호인 “太祖康憲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이 세조의 휘호인 “世祖惠莊承天軆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나 선조의 휘호인 “宣祖昭敬正倫立極成德洪烈至誠大義格天煕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보다도 적다는 이유로 태조의 존호를 추가할 것을 주청하려 한 일. 숙종 9년 송시열이 이를 건의했으나, 박세채(朴世采)의 저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D-007]그 아비의 묘문(墓文) : 윤증이 송시열에게 부탁한 윤선거(尹宣擧)의 묘문임. 송시열이 부탁을 받고는 앞서 윤선거가 윤휴를 천거한 점을 불쾌하게 여기어 “행장(行狀 박세채(朴世采)가 씀)에 이미 다 말하였다.”고 기피하면서 일축하였는데, 이것이 절교를 하게 된 명분이 되었다.
[주D-008]목천(木川)의 사건 : 목천 사람 허황(許璜)이란 자가 윤선거를 강도 부노(江都浮奴)라고 하더라는 말을 송시열이 전파하였다 하여 윤증이 송시열을 의심하게 된 사건이다. 뒤에 허언(虛言)임이 밝혀졌다.
[주D-009]강빈(姜嬪) :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으로 병자호란 때 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했다. 뒤에 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죽은 후, 어선(御膳)에 독약을 넣었다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 소행의 장본인으로 무고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숙종 44년(1718)에 신원(伸冤)되었다.
[주D-010]김홍욱(金弘郁) : 효종 5년(1654)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강빈(姜嬪)의 사사(賜死)가 억울하다고 상소한 죄로 친국(親鞫)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는데, 뒤에 신원되었다.
[주D-011]현석이 …… 의견 : 태조(太祖)의 휘호가 후대 임금보다 적을 수 없다는 이유로 태조의 휘호를 추가할 것을 송시열이 건의한 데 대해 박세채가 반대한 것을 말함.
[주D-012]향동문답(香洞問答) : 송주석(宋疇錫)의 편서로, 송시열이 박세채ㆍ이단하(李端夏) 등과 문답한 시사(時事)를 기록한 책.
[주D-013]선조(先祖)가 …… 일 : 효종이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 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뒤 청 나라의 정서(征西) 전투에 참여한 일을 가리킴.
[주D-014]왕도(王導)와 진 원제(晉元帝)의 관계 : 원제는 원래 공왕(恭王)의 비(妃) 하후씨(夏侯氏)가 소리(小吏)인 우씨(牛氏)와 간통해 낳아 진의 중흥주가 되었으므로 우계마후(牛繼馬後)란 말이 전한다. 그런데 왕도는 원제의 기량을 알고 세자 때부터 보좌하다가 원제가 즉위하자 승상(丞相)이 되었다. 《晉書 帝記6 元帝》
[주D-015]봉성군(鳳城君) 찬축(竄逐) : 봉성군은 중종의 아들로 이름은 완(岏), 자는 자첨(子瞻). 명종이 즉위한 뒤 윤원형(尹元衡) 일파로부터 계림군(桂林君)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입고 찬축되고 사사(賜死)되었다.
[주D-016]삼신전(三臣傳) : 삼학사(三學士), 즉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가 피살된 홍익한(洪翼漢)ㆍ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의 전기(傳記)를 말한다.
[주D-017]을유년의 일 : 이경석(李景奭)이 인조 23년(1645)에 이조 판서가 되어 인사의 행정을 쇄신하고 숨은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당시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이유태(李惟泰) 등이 요직에 오르게 된 일.
 홍재전서(弘齋全書) 제23권
 제문(祭文) 5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정숙옹주(貞淑翁主) 치제문

이만한 기량과 식견에다 / 如許器識
뛰어난 문장이 있었으나 / 曁厥文章
부마(駙馬)라는 신분에 국한되었으니 / 以地而局
애석하도다 동양위여 / 惜哉東陽
그러나 진실로 큰 것이 있어 / 然有大者
밝디밝게 드러났으니 / 赫赫顯顯
혼연히 가득한 기운을 타고났으면서 / 氣鍾磅礴
소탈하여 부마임을 드러내지 않았네 / 脫略禁臠
혼탁한 세상을 만나 / 値世昏濁
공은 밝은 별이 되었고 / 公作明星
남한산성이 포위당한 위기에 처하여 / 圍城風雨
공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고수했네 / 公抱麟經
칼은 책장을 따라 번득이고 / 劒隨書飜
붓은 삼전도비(三田渡碑)에 이름 오르는 것을 더럽게 여겼으니 / 筆浼碣名
동해에 빠져 죽으려 했던 노중련(魯仲連)이고 / 蹈海魯連
오랑캐 감옥에서 눈을 씹었던 소경이었네 / 齧雪蘇卿
현옹이 전형(典型)을 남겼고 / 玄翁留型
석실산인(石室山人)과 덕을 같이하였으니 / 石室同德
목릉의 가법으로 / 穆陵家法
정숙옹주를 시집보냈네 / 釐降貞淑
발 그림자가 땅에 드리우니 / 簾影垂地
그 공경이 손님을 대하는 듯했고 / 其敬如賓
한밤중의 한 잔 술은 / 中宵一巵
부식한 바가 떳떳한 인륜이었네 / 所扶彝倫
백대에 향기로운 자취를 남겨 / 百載遺芬
나의 강개를 더하게 하니 / 增予慨慷
자허부에서 재능을 징험하고 / 徵子虛賦
위공의 전장(田庄)을 내려 주었네 / 贖魏公庄
성남의 교목에 / 城南喬木
곁가지가 빽빽이 떨기를 이루어 / 孫枝蔚叢
나의 경사를 빛내고 / 賁我卿士
나의 법종에 참여하였네 / 齒我法從
가장 특별한 것은 갑과(甲科)에 급제함인데 / 最奇魁甲
앞의 을묘와 뒤의 을묘가 / 前乙後乙
나라와 함께 경사를 같이하니 / 與國同慶
하늘이 도와 길상(吉祥)이 이르렀네 / 自天祐吉
이에 참배할 것을 생각하여 / 思庸展親
술이 술 그릇에 가득하니 / 有酒盈尊
길이 잊지 못하리라 / 永言不忘
충신과 석원을 / 忠臣碩媛

[주D-001]소경(蘇卿) : 한 나라 두릉(杜陵) 사람 소무(蘇武)로, 그의 자는 자경(子卿)이다. 무제(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서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잡혀서 19년 동안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에 흉노가 소무를 큰 움집[大窖]에 유폐하고 음식을 주지 않았는데 눈이 내리자 소무가 누워서 눈을 씹고 전모(氈毛)와 함께 삼켜서 죽지 않고 지냈다. 소제(昭帝) 때 화친이 되어 돌아왔는데, 선제(宣帝)가 즉위하여 기린각(麒麟閣)을 세우고 그 형상을 그리게 하였다. 《漢書 卷54 李廣蘇建傳 蘇武》
[주D-002]법종(法從) : 임금의 거가(車駕)를 따르는 신하 또는 임금의 좌우 신하를 말한다.
 
夢經堂日史編[五]
 丙辰正月
十三日。 庚午

晴。風寒。抵宿孤家子。下處少乾淨。與韓主簿聯枕。韓謂余曰。曾見三田渡碑文乎。淸太宗載石東來。歸時豎之云。何以知戰之必勝耶。余曰。余亦傳聞如此。及見開國方略載碑文。始知前聞之誤也。其文曰。 庚戌。朝鮮樹碑三田渡。頌功德。錄其碑文進呈。
大淸崇德元年冬十有二月。寬溫仁聖皇帝以敗和自我始。赫然怒。以武臨之。直擣而東。莫敢有抗者。時我寡君。棲於南漢。凜然若履春氷。而待白日者殆五旬。東南諸道兵。相繼奔潰。西北帥逗撓峽內。不能進一步。城中食且盡。當此之時。以大兵薄城。如霜風之捲秋蘀。罏火之燎鴻毛。而皇帝以不殺爲武。惟布德是先。乃降勑諭之曰。來朕全爾。否則屠之。有若瑛,瑪諸大將承皇命。相屬於道。於是我寡君集文武諸臣謂曰。予托和好於大邦。十年於玆矣。由予昏惑。自速天討。萬姓魚肉。罪在予一人。皇帝猶不忍屠戮。諭之如此。予何敢不欽承。以上全我宗社。下保我生靈乎。大臣協贊之。遂從數十騎。詣軍前請罪。皇帝乃優之以禮。拊之以恩。一見而推心腹。賜賚之恩。遍及從臣。禮罷。卽還我寡君於都城。立招兵之南下者。振旅而西。撫民勸農。遠近之雉擧鳥散者。咸復厥居。詎非大幸歟。小邦之獲罪上國久矣。己未之役。都元帥姜功烈助兵明國。兵敗被擒。太祖武皇帝止留功烈等數人。餘悉放回。恩莫大焉。而小邦迷不知悟。丁卯歲。今皇帝命將東征。本國君臣。避入海島。遣使請成。皇帝允之。視爲兄弟國。疆土復完。功烈亦還矣。自玆以往。禮遇不替。冠蓋交迹。不幸浮議煽動。搆成亂梯。小邦申飭邊臣。言涉不遜。而其文爲使臣所得。皇帝猶寬貸之。不卽加兵。乃先降明旨。諭以師期。丁寧反復。不翅耳提面命。而終未免焉。則小邦君臣之罪。益無所逃矣。皇帝旣以大兵圍南漢。而又命偏師。先陷江都。宮嬪王子曁卿士眷屬。俱被俘獲。皇帝戒諸將不得擾害。令從官及內侍看護。旣而大沛恩典。小邦君臣及被獲眷屬。咸歸於舊。霜雪變爲陽春。枯旱轉爲時雨。區宇旣亡而復存。宗社已絶而還續。環東土數千里。咸囿於生成之澤。此實古昔簡策所希覯也。於戲盛哉。漢水上游三田渡之南。卽皇帝駐蹕之所也。壇場在焉。我寡君爰命水部就其所。增而高大之。又伐石而碑之。垂諸永久。以彰夫皇帝之功之德。直與造化而同流也。豈特我小邦世世永賴。抑亦大朝之仁聲武誼。無遠不服者。未嘗不基於玆也。顧摹天地之大。日月之明。不足彷彿於萬一。謹載其大略。銘曰。
天降霜露。載肅載育。惟帝則之。並布威德。皇帝東征。十萬其師。殷殷轟轟。如虎如貔。西番窮髮。曁夫北貉。執旻前驅。厥靈赫濯。皇帝孔仁。誕降恩言。十行昭回。旣嚴且溫。始迷不知。伊戚自貽。帝有明命。如寐覺之。我后祗服。相率而歸。匪惟殫威。惟德之依。皇帝嘉之。澤洽禮優。載色載笑。爰戢干矛。何以錫之。駿馬輕裘。都人士女。乃歌乃謳。我后言旋。皇帝之賜。皇帝班師。活我赤子。哀我蕩析。勸我穡事。金甌依舊。翠壇維新。枯骨再肉。寒荄復春。有石巍然。大江之頭。萬載三韓。皇帝之庥。
余曰。古人過三田渡。有詩曰。將帥無籌策。文章有是非。人至今傳誦。文章疵累。千古難洗矣。

 

明谷集卷之三十一    영의정 명곡공 휘 석정 전주최씨  저의방조   

 諡狀
白軒先生李公諡狀 154_489a


公諱景奭。字尙輔。號雙溪。晩號白軒。系出璿源。定宗恭靖大王第十子德泉君諱厚生之六代孫。德泉生新宗君諱孝伯。新宗生莞城君。是公之高祖也。贊成公早卒不顯。而議政公早從師友。以操行風誼稱。歷典郡邑。以大耋陞同知中樞。妣開城高氏。靖國功臣開城君守謙之曾孫。大護軍漢良之女。贈貞敬夫人。萬曆乙未十一月十八日。生公于議政公任所堤154_489b川縣衙。生而英秀。年近就傅。伯氏石門公諱景稷敎以書史。不煩程督。克自勤勵。未幾文理驟進。甫踰十歲。器度端重。擧止異凡兒。十三歲。議政公爲開城都事。公隨往。淸陰金公尙憲適爲經歷。一見公奇之。令賦伯夷叔齊優劣論。公卽席製進。金公大加歎賞。以爲他日成就。未有量。嘗赴庠序課試。輒冠多士。癸丑。中進士。藝業夙茂。華問日播。月沙李相公見公文。謂白洲。汝雖已決科。不及遠矣。前輩所期許如此。戊午。中增廣初試。時廢論大起。名在試榜者。皆驅使呈疏。公不參。遂被儒罰。癸亥。仁祖反正。首謁文廟取士。154_489c公登丙科。選補槐院。旋入史局爲檢閱。遷奉敎。甲子。移注書。二月。賊适叛。大駕出城向公州。百官奔竄失次。陪從者。只公與承旨韓孝仲及內官二人而已。到漢江。江上無船。夜黑如漆。石門公以全羅兵使。屯兵岸上。覓一船以迎駕。回望京城。火焰已漲天矣。上終夜坐繩床。天明始進發。公兄弟不知父母所往。而不敢爲尋省計。到果川。幸得相逢。仍抵水原。議政公老病轉甚。不能扈駕。公輟乘。護送他所。公旣舍所騎。或步或騎。從駕達于公州。未幾。賊兵敗授首。駕還。陞典籍。歷監察,正言,禮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除154_489d弘文館修撰。奉命試士于平壤。乙丑。以正言啓請臺諫之陳啓者。若値開筵。宜入面啓。從之。兩司之入侍筵中始此。夏。以京試官赴嶺南。以正言還朝。累拜兵曹佐郞,獻納,直講,副校理。丙寅春在玉堂。與同僚陳啓論日食。親祭魂宮之非禮。又上箚爭啓運宮稱園之不可。秋。遷吏曹佐郞。兼知製敎。賜暇讀書。擢重試壯元。故事當陞品。而銓曹重公不許遷。丁卯春。湖堂宣醞。應製居首。賜虎皮。金兵之入也。體察使張公晩辟公爲從事。西出未幾。督餫關東。移檄一道。激以忠義。應募者相續。三月。體相疾甚。公詣行在。陳其病狀。154_490a得遞。公亦遞從事。公在體幕。料事懸斷。動中機宜。張公嘗稱曰。德量寬厚。必爲遠大器。夏。臺議持張公甚。公疏乞同罪。仍遞見職。歷修撰,直講。復拜銓郞。冬。有李仁居獄。公爲問事郞。獄竟。錄昭武從勳一等。戊辰。陞正郞。兼漢學敎授,校書校理。公累處郞席。如遇注擬不愜者。輒停筆爭之。長官多從其言。柳孝立獄起。公爲問事郞。獄畢。陞通政階。錄從勳。公前後參鞫。達夜案治。文書旁午。而左酬右應。毫無錯漏。見者嘖歎。秋。拜承旨轉左副。己巳春。朴仲男以金差來。仲男卽鍾城土民之投虜者。朝廷將賜坐於殿上。公再啓爭154_490b之。其賜茶亦後於正差。仲男頗心折焉。三月。中文臣庭試。賜廏馬。未幾遞。時改選書堂。特命公以堂上仍帶。九月。復入銀臺。拜疏乞養。出爲楊州牧使。明年秋。以親病辭罷。辛未。江陵影幀火。上率百官擧哀。責己求言。公應旨陳疏。批旨褒以至論。皆許施行。兼內局提調。西壁之兼藥院。異數也。上令司謁傳黃柑十枚曰。聞有老親。玆以賜給。翌日。公上箋稱謝。議政公亦陳疏以謝。上答曰。卿年老。二子亦皆可用。故如是念及。公感激恩私。爲之歌詠。薦紳傳和。一時稱爲盛事。夏。轉右承旨。嘗於筵中。請令知館事以下。每154_490c於朔望。與多士講論四書心經近思錄。取其學識優異者用之。又請令童蒙敎官選蒙士。十五歲以下則講小學。使先明本源之地。命着實擧行。公久在喉司。內旨有不可者。輒封還。多所匡益。五月。以章陵追崇時禮房承旨。陞嘉善階。拜左承旨。時議政公曁石門公。皆已躋二品。而公又超秩。一家三父子。並居宰列。人皆榮之。六月。以大諫遭內艱。甲戌秋服闋。除副提學。又遭外艱。丙子冬外除。還拜副學。移都憲。是年春。淸差以稱號事來。時議欲斬使絶和。淸差聞而跳去。朝野汹汹。有朝夕召戎之憂。而朝論紛挐。久未底154_490d定。公心切憂憤。筵中啓曰。斥和一事。豈不正大且明快。而國事民心。無一可恃。不顧時勢。橫挑強寇。非計也。賊兵之來必以冬。渡鴨江不數日。直薄京城。則所恃惟有江都。而一日之間。三軍百僚。豈能畢渡乎。氷江在前。而勢如風雨。則將置君父於何地乎。三韓之一草一木。皆皇朝之賜也。大義所在。人孰不知。事有緩急。不可不深思善處。但淸者帝之號也。我若淸之。是與其帝也。稱淸決不可也。谿谷張公聞之歎曰。此所謂披雲霧覩靑天。時兵端已形。國力方弱。而三司斥和之論甚峻。長老咸憂之而不敢發。獨公言154_491a之。故張公之言如此云。十二月。淸兵大入。大駕將向江都。纔出城門。賊鋒已迫。公趨詣駕前。請達所懷。上駐駕崇禮門樓。進而問之。公陳事勢已急。江都斷不可往。宜向南漢。上顧問體察使金瑬。金公請仍往江都。不佞先祖遲川公以吏判進曰。虜騎已迫。臣請馳往賊陣。詰其動兵之由。願上以間改路入南漢。公亦復陳前說。上意乃決。公仍請分與都監軍。令體察使遣將逆擊前鋒。從之。時變出倉皇。公所乘不備。杖劍徒步。追入南漢。拜副學。城旣受圍。上進群下問策。公請以三司名官。多定督戰御史。以寓154_491b編行伍之意。亦以警宵晝。上稱善。天大雨雪。士卒暴露。公請令大小官各解上服。分給而張覆之。則士心必多感動。望之亦助軍容。他日還都。漢官威儀。自可復也。上嘉奬之。於是城上列幕。周匝師人。如挾纊焉。丁丑正月晦。定城下之盟。扈還。拜都承旨。兼藝文提學。俄而病甚。特命內局給藥物。移副學,大憲。以扈從勞。加嘉義階。兼同知經筵。自此屢帶焉。遞憲職。復拜都承旨。江都之變。廟主不幸多傷汚。將新造改題。而題主處所未定。公上箚請倣先正臣李滉之言。就廟中行之。公又承命題主。夏。因朝講。引越王154_491c抱火握氷之義。言伏熱雖迫。不可停筵。視事亦宜頻數。上嘉納。又請依大典。各司逐日開坐。又歷副學,都憲,工曹參判。還副學。兼備局提調。與玉堂諸僚上箚請儆動災異。大加修省。優納言者。勿尙淵默。謹用刑賞。以順天時。申明薦法。以廣賢路。引接外官。諮詢民瘼。重廟禮以崇聖孝。寬民役以蘇邦本。嘗因晝講言大司諫尹煌以斥和事。久在編管。宜加原醳。又請減王妃嘉禮時銀器。以昭儉德。上皆嘉納。冬。承命撰三田渡。時淸使來。使我豎碑勒戰功。徵文甚急。上命張公維,趙公希逸及公。張公文用鄭154_491d伯牽羊語。淸人旣發怒。而又謂公文全不鋪張。咆喝益甚。公時帶藝苑。上面諭公曰。彼以此文。欲驗向背。此政存亡所判。句踐臣妾會稽。終致沼吳之績。他日自強。惟在於予。今日之計。但當於文字務中其心。毋致事機轉激。公念主辱之日。義有不暇他顧。承命改撰而貽書。石門公有悔學文字之語。戊寅元日。直玉堂。述箴陳戒。辭甚切至。在備局上箚。極陳紓民之道。以爲南憂雖深。其形未著。不可以防禦之具先擾民。且言江都修理。勿發南民。南漢增築。勿務闊大。潰卒收布之怨。山城運米之勞。皆可矜察。上皆優154_492a納。三月。進拜守大提學。歷禮參,大諫。秋。拜吏曹參判。因晝講。極論敬天怒消民怨蠲征役之方。是日上講詩。至樂只君子殿天子之邦。太息泣下。公與延陽君李時白。流涕以對。左右莫不感動。時臺官柳碩等。齮齕淸陰金公甚。上已不抉於金公及鄭公蘊。至是頗入其說。公於筵中。請以明好惡正是非擇人才。爲中興先務。仍言尙憲等所執。乃堂堂正論。不可不扶植。上稱柳碩之言。至比鳳鳴朝陽。公又明其不然。乞平心公聽。勿使偏蔽。俄拜禮參移大諫。己卯正月。陞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庚辰正月。進祕154_492b疏。藁削不傳。蓋是時。朝廷募僧獨步爲名者。扮作船商。由海路入皇京。公實與先祖遲川公密議而爲此疏云。是年四月十七日。公杜門謝客。終日悲咤。家人莫知所以。卽西船發去之日也。三月。辭遞文衡。未幾淸人詰諸宰代質。臺章繼發。公亦以此被譴。屛居畿莊。冬。爲撰國書。特敍拜槐院提調。入京卽引見。令與大提學李公植相議撰進。仍拜都憲。辛巳正月。拜右參贊。三月還大憲。夏。因旱上箚請發倉賑飢。存恤陣亡。仍言省躬圖新。以來忠諫。主敬涵養。以勉聖學。尤以平讞失宜。冤鬱莫伸爲言。上特賜引見。議154_492c放死囚。旣而旱益甚。公又與諸僚應旨極論。請益加戒謹。以爲祈天永命之基。優批嘉納。八月。以守貳師入瀋。辭陛之日。上引見。諭以簡拔之意。仍勖善導之道。公到瀋。首請亟開書筵。毋廢晨夕。兼講近思錄。仍乞勿拘例。與賓客迭進侍講。世子皆從之。隨事切諫。多所匡正。世子亦敬禮之。淸人憚於餼牽。使在質諸人自耕而食。日督農丁之調遣。公力言國事之凋弊。事理之不可。彼亦不敢脅。如物產之徵求。俘虜之刷還。詰責多端。公一面馳聞。一面曉諭。得以彌縫者甚多。時淸陰與朴公潢,曺公漢英。久被幽辱。禍154_492d殆不測。公入瀋三日。密陳春宮。請百計善圖。必令生還。世子許以盡力。仍令密密相議。一日虜主招世子問金某病甚。當何處之。世子善辭應之。卽許放還。而令貳師領出。諸公之卒得無他。皆公之力。而他日未嘗自言。故人無知者。壬午三月還入瀋。夏還朝。七月復入。先是有漢船來泊宣川。方伯鄭公太和便宜解送。至是淸人覺之。使本國査問。八月。公承世子令東出。而廟堂令勿入京留。以同査事未完。備局促令公還報。公不得已九月還入。淸人怒。復欲廣致邊將邊倅於瀋。公極力辨明。事得已。而謂公欲154_493a自擔當。中途徑返。鎖之東館。薪水不通累日。出送鳳凰城。與諸人一處拘幽。危辱訹喝。無所不至。公處之晏如。或勸公捐金以圖緩禍。公曰。雖被訹喝。必不至死。況宮師用金。自我開路。決不忍爲。冷山北海。固所甘心。聞者歎服。後仍出灣上。諸公盡還。而公獨被拘最久。十二月。蒙放東歸。而彼令永勿敍用。癸未。拜參贊。兼知經筵春秋摠管等任。辭不許。甲申秋。拜知春秋。同大提學李明漢改修宣廟實錄。公引被錮事辭之。不許。乙酉春。淸使來。始許甄敍。三月。拜大憲。時沈煕世,金益煕等。以事被流竄。公率同僚陳箚。諫其154_493b摧折太過。公累處臺閣。未嘗輕劾一人。微官庶品。尤必致詳。同僚嘗欲有所論。公曰。吾輩一筆句斷雖易。當之者得無冤乎。後同僚求得其實。乃服。四月。拜吏曹判書。公前後處銓。務盡公正。痛戒僥濫。尤以引進善類。甄拔淹滯爲急。與佐貳郞僚會坐。文蔭武之才績已著者。各擧所知。錄爲公簿。每於諸曹庶司州邑字牧之缺。取以注擬。由是內外崇庳。各稱其職。又每逢中外人士。輒訪問人才。隨聞箚錄文學行誼武才吏能。以類調用。尤加意於巖穴幽隱。如宋公時烈,宋公浚吉,權公諰,李公惟泰諸人。始通顯路。皆出公手。154_493c公常謂今日痼弊。最在黨論。立朝論事。與人交遊。每以此自戒。東西南北之稱。未嘗發口。及當銓地。尤痛去偏係。絶無左右之意。故國人同辭推服。昭顯世子卒。朝臣議所服未決。公與護軍李植,大司憲李楘上疏請百官白袍烏帽。卒哭而除。以應齊衰三月之制。上從之。九月。進拜右議政。兼世子傅。十月。雷變再作。累箚乞策免。仍極陳修德弭災之方。優批嘉納。是年失稔。中外開賑。公專管賑事。悉心區畫。多所濟活。及賑畢。餘穀尙多。分給畿道。以添糶糴。京中則別設一局。隨時積著。以備水旱。常平廳之立始此。丙154_493d戌春。姜獄起。公與諸大臣連章爭論。引唐承乾事。請加善處。天威震疊。嚴批屢降。至擧李公敬輿及公而言曰。二人吾嘗待之甚厚。豈意負我至此。及李公被竄。公疏請同罰。旣而姜文星等就獄。公又上疏極陳冤枉之狀。三月。以謝恩使赴燕。在途辭遞相職。拜領中樞。六月復命。丁亥二月。拜左議政。八月。病甚辭遞。拜領中樞。戊子五月。復拜左相。時上春秋已高。違豫時多。講筵久輟。公憂之。乃取漢文帝唐太宗紀。採其要語。又鈔取虞書之切要者數章及周書無逸。纂成一冊。名曰燕閑要覽。具箚投進。仍請玉候少154_494a間時。數召儒臣。論難經史。商確政事。以爲振委靡消災沴之道。十月。入對極言災異可懼。國事日非。仍陳時政數事。請行鄕約。以正俗習。上皆嘉納。大司憲朴遾言事忤旨。斥補慶州。公入陳優容臺諫之意。己丑五月。仁祖大王大漸。公與公卿近臣入侍白世子。禁斷宮人之雜亂啼號者。以嚴正終之禮。令注書書扈衛二字。臨復。出授訓鍊大將。初終易服及復襲等節。一依五禮儀行之。倉卒之際。從容審愼。一無違失。世子不忍嗣位。欲行於公除之後。公率二品以上。累啓勸進。世子不得已從之。時領敦寧金公154_494b尙憲自郊入臨。旣殯將歸。公以爲新服之初。宜延訪耆舊。啓請勉留。仍請馹召前參議金集,前持平宋時烈,宋浚吉,前諮議權諰,前師傅李惟泰等。於是四方名士。咸萃朝廷。人皆想望風采。承命撰大行大王行狀。賜鞍馬。山陵退壙蓋石。體大難運。而禮無明據。公以摠護使。箚引程子論昭陵疏及我太宗命剖獻陵石槨事。請以其石剖而二之。轝輦被飾等物。請依五禮儀。勿用錦段。以昭先王儉德。大司憲金集進喪禮古今異同論辨冊子。上命議大臣。公亦上一冊。辨其可否。長陵有異議。大司憲趙公翼154_494c上箚。援朱子山陵議狀。請博詢改卜。有旨集議。公詣賓廳。陳朱子所奏與今日異。以明不可。浮議乃定。院相有故。公代之。八月。進拜領相。時淸陰金公爲左相。臺議有因事侵逼金公者。上欲罪之。公於筵中啓曰。臺閣之事。雖甚不美。然此人何可盡棄。惟在聖上虛心澄省。大明乎是非公私耳。校理金弘郁製進大行挽詞。有口緘臣罪大之語。上下嚴敎。公力救。引宋時詩案以爲言。上皆納之。金公集乞歸。公以爲賢士去就。所關甚大。請溫諭留之。公久有辭避之意。因山旣畢。亟欲釋負。嘗於前席自陳。上不154_494d許曰。卿忠誠貫日。予方恃卿。公退上辭單。一向固辭。溫諭屢降。至曰卿若不出。予將疇依。不得已復起視事。肅謝之日。賜以黃柑。時右議政金公堉請行大同法。左議政趙公翼請變講經法爲臨講。上問兩事便否。公對曰。大同之法。在先朝。與諸大臣欲行而竟不行。必有深思而然也。凡法之變。必先使擧國民心洽然無異辭然後。行之無弊。今宜先施湖西一路。驗其便否。乃可均之八方。講經之法。意非不好。而若使考官皆如左相則可矣。或主試者不得其人。則安知不如背講之爲愈也。詩云不愆不忘。率由舊章。154_495a上稱善。庚寅二月。淸使六人並出。以査事爲名。上聞之大驚憂。達夜不寐。引諸臣議之。公首對。今其所幹。雖未知某事。臣受國厚恩。敢不以身當之。上曰。卿若自當。得以無事則幸矣。如或轉輾。有所難言則奈何。公曰。事機固不可預料。第欲自當以觀之。國家因得無事。則微臣一身。何足惜乎。時上初卽位。慨然厲志。頗有密勿之猷。而或慮事泄致疑怒。國人固已憂之。及六使並來。又不知按査之爲何事。人情震懼。或云。大兵將至。不免被髮之辱。或云。淸陰諸公。將有不測之禍。朝野汹汹。翌日。公入對請自往灣上。以154_495b察事機。仍請用左相趙翼言。起李敬輿與議國事。鄭太和雖在草土。使備局往詢。上稱善。公卽西出。自淸人到鳳城。大肆咆喝。火色日急。及聞公來。喜形于色。凡百亦多從便。三月。淸使入城。傳敕二道。一則九王私書求昏者也。一則乃所謂皇敕。而嘖我以挾倭恐喝者也。先是仁廟末年。自點爲首相。鄭公太和爲左相。趙公翼,元公斗杓,李公時白爲備局諸宰。因東萊府使盧協,慶尙監司李曼狀聞。有倭情可疑之語。因赴燕使臣。請修繕城池甲兵。蓋講和時約條所禁也。至是彼積疑於我。欲執此生釁。甘心主事之臣。154_495c公在灣時。譯官李馨長密傳此事於公。且曰。當之者禍必不測。宜引釜山小譯爲證。公曰。彼雖末流。渠實不與。則何忍擠人於死。以規自免。生死命也。自復命之夕。留宿朝堂。日與諸宰。出入前席。密講辨對之道。過數日。淸使會公卿兩司于南別宮。令列立庭中。初言皇帝及攝王致祭而不謝。攝王處無文書。不稱號之事。次言弔祭時不哭事。而語輒歸責于上躬。咆哱轉甚。公對曰。皆吾之失。吾王不知也。又問作表者誰。趙公絅以其時禮判太學士。被詰而入。後乃言倭情事。招李曼,盧協問之。協言倭情無可疑。吾無狀154_495d聞。傍人擧當時事狀以證之。始曰似有可疑之端。曼曰。吾爲道臣。以邊將所申轉聞而已。淸使大怒曰。然則爾國與倭皆反矣。何敢欺謾大國。公徐曰。倭情誠叵測。而此輩恇怯失對耳。淸使厲聲曰。奏文措語誰爲之。必國王之爲也。公曰。吾實爲之。豈有國王自製之理。鄭命壽曰。此中同參者幾人。領相果獨爲耶。諸宰皆默然。獨李公基祚在末席應之曰。此豈首相獨爲。吾亦與焉。淸人叱退趙公及曼協。獨留公責之曰。爾今欺罔大國。其罪如何。良久令出。是日擧朝遑遑。以爲罔測之禍。在於呼吸。滿庭諸臣。咸惴惴無154_496a人色。家人治凶具。待於館門外。公神思整暇。無一毫危懼色。應對從容。不少錯。左右觀者。莫不灑然。淸人亦相語曰。東國獨有李相一人耳。上引見曰。領相爲國自當。人所難及。李基祚初不與焉。而獨能開口。可謂賢矣。諸公有媿色。公卽胥命于金吾。仍上箚請亟下司敗。毋令國事轉輾難處。且言惟聖明追記前日之言。用人聽言。益盡誠意。期臻治泰。則死日生年。受賜多矣。上答曰。卿不避患難。以身自當。忠正之心。可質神明。孰不感動。卿其安心勿慮。命以千金與鄭譯。俾致意於北使。翌日。駕幸館所。彼言李相154_496b欺罔大國。趙絅撰表文。皆當極刑。上爲之救解。反復懇至。至於數四。始許歸稟皇上。當更有敕令。姑令栫棘於白馬山城。當其往來之衝也。上別遣掖庭人。賜以手札。有曰寡昧不能爲國。致有今日。予極痛歎。關河杳杳。戀思雖切。天道昭昭。相見有日。卿須自愛。箚中之辭。予當體念。仍賜豹皮臘藥。東宮亦遣人賜以藥餌。旣而朝廷以宗室女義順公主。資送于九王。元斗杓,申翊全爲護行使。令圖緩禍機。旣到。九王頗有喜色。他日罷臘而歸。詰責使臣曰。歸告國王。將二臣置極刑。不然。爾任其責。使臣大懼而歸。154_496c上大驚憂。必欲曲爲之地。以右議政李公時白爲陳奏使。將發。或言不從彼言。必有干戈之禍。或云曼,協可誅。亦或有救曼協者。時議紛紛久未定。時麟坪大君使北還言。臣以新服之初。不忍殘先朝大臣爲言。而幸無咆哮。上喜甚。秋。淸使又至。上爲公丐命。靡所不至。麟坪東還未數月。而卽又起復。以代延陽。以李基祚爲副而遣之。勖以必圖曲全。又命撤圍籬。別遣掖庭人賜問。冬。敎曰。白馬兩臣。久處羈縶。當此嚴冬。寒苦必倍。其令本道優給食物。陳奏使旣入。淸人欲致二臣及曼協。更査於衙門。使臣力爲陳乞。154_496d始許並釋二臣。而永勿敍用。歸之田里。又謂李敬輿曾無敍用之令。而方爲首相。擔當伸冤之事。亦永勿敍用。時李公代公當軸。辨公事甚力。故有此云。上卽遣人下敎曰。白馬兩臣好在耶。北京之報。幸莫大焉。喜不可言。仍賜黃柑。辛卯二月東還。白馬城在義州南。卽我國之絶塞也。地危峻荒寒。非人所居。北耗益急。危禍日迫。而公處之晏然。惟日讀經史。晨夜孜孜。絶無憂悒之色。自是國人益敬之。及歸。沿路士民。塡咽車下。爭願一瞻儀容。還到城外。陳疏告還。上遣近侍傳敎曰。曩者邦運艱危。事屬不測。日夜焦慮。154_497a默禱于天。幸賴先王垂佑之靈。以有今日。寡昧之喜幸。固已難量。而其爲國家之福。可勝言哉。卿其善攝調養。以慰予懷。明日引見。上命近前。勞問甚至。公感激嗚咽。仍陳西土及沿路民事。並卽嘉納。仍賜黃柑。又賜月俸。顧自以危蹤。不可常處輦轂。多以江郊爲歸。婆娑觴詠於湖山林壑之間。蕭然有出塵之想。十月。臺官趙公錫胤,兪公㯙,李公慶億等言事獲譴。上疏切諫。以爲肅朝綱理國事。惟在人主擧措之得宜。嚴急督責。決非治世之象。壬辰秋。大臣言公久無職名不可。遂拜領敦寧府事。公再疏辭遞。癸巳春。154_497b因災求言。公上箚極論君道時政五千餘言。批曰。箚進已多日矣。每覽亹亹。不知其厭。是知忠赤之言。出於肺腑。敢不服膺。仍許所陳之事。皆令議行。是月。拜領敦寧。辭不許。時因災異。有親耕之議。公對以此非第一件事。仍陳應天以實之道。甲午歲首。上箚敷陳日新之義。仍獻克己致知。推孝施仁。尙儉去侈之說。時掌令徐元履上疏言事。大司憲趙錫胤,承旨朴長遠論其非。皆被譴謫。公以妨言路傷大度爲言。且陳長遠有老母。請使歸見。三月。扈親閱於鷺江。時校理南龍翼諫親閱。上怒。正言兪㻛,承旨尹得說,大諫154_497c閔應協爭之。上益怒。公進言待臺諫如此。大失和平。上爲之霽威。六月有水災。應旨陳箚。仍言侍女選入之不當。內司供進之宜減。又言停土木罷織錦。以昭儉德。優批嘉納。仍許凡所興作。一切停止。諸事亦令攸司擧行。秋。淸人謂公住近京輦。將有嘖言。公乞解職名。上許之。仍給月俸。時上方厲精爲治。議者頗垂意武備。旣不能泯迹。又多妨民。十一月。公應旨陳箚。以爲民怨則天怒。怨消則災息。宜長慮却顧。無使防患者反爲招患之歸。仍極論宮闈戚畹奢侈之害。十二月。淸使且至。譙讓益急。上命公及李154_497d相敬輿先避于朝。以示絶迹朝端。上又念公素乏田園。無以爲歸。使承旨諭意。令往安峽胤子任所。公感激承命。乙未二月。移棲鐵原村舍。已而上下諭促還。四月入京。翌日上謁。賜酒從容。勞苦甚至。所陳民瘼。皆許採施。七月旱。應旨陳箚。請從諫弗咈。優禮臺臣。言行必謹。喜怒必愼。毋替緇衣之誠。毋崇言利之臣。敬大臣而尊國體。先德敎而敬刑罰。且言金弘郁親屬不宜錮。皆許議處。及有司覆奏。又皆允之。而獨因弘郁事。命推覆奏之官。大司憲洪命夏,應敎李端相面陳元老大臣之言。宜敬不宜咈。遂寢推考之154_498a命。時選湖堂。上特命大學士就議于公。丙申夏。大司諫兪㯙言事忤旨受刑。公聞之涕泣曰。此亡國之擧也。卽秉燭草疏。達宵不寐。待曉以上。時天怒方震。人莫敢言。上乃答以予當體念。遂得減死。閏日因旱疏決。公入侍議。釋王子澂,潚及昭顯第三兒。又請減兪㯙及二死囚之罪。從之。戊戌春。箚陳進學待倭蠲征三條。命卽議行。四月。以特命付西樞。十二月。移領敦寧。己亥五月。孝宗昇遐。該曹議慈懿大妃服制。引國制子朞之文。或言當用古禮爲三年。儒臣宋時烈等又引賈公彥四種之說。謂當服朞。154_498b王世子命議大臣。公對曰。考之時王之制。似當爲朞年。領議政鄭太和意與公同。於是左議政沈之源等諸公。皆與聯名獻議。世子遂從之。臺臣言群臣當依古禮。爲絰杖之制。命議大臣。公以爲平居無事之時。從容講定。無所參差可也。倉皇罔極之時。遽改列聖已行之制。則其能無舛差耶。及啓殯。言者又請追成衰服。公再獻議。引己丑所陳喪禮辨說中追服於啓殯。與朱子所遇之時及所議之不同。又引朱子答李繼善服已成而中改未安之說。反復陳辨。事遂寢。承命撰進先王行狀。賜鞍馬。山陵新卜於水154_498c原。而民舍多撤。輿論不便。又占於健元陵內。而上意堅定於水原。衆不敢言。公三上箚爭之。遂定於健元陵內。庚子正月。聞東民阻飢。進箚言與其失萬民之心。寧捐數千石之穀。且曰。監司朴長遠爲人忠信。宜委任之。令及時救活。上納之。時將修孝廟實錄。特拜公摠裁官。兼領春秋。三辭不許。工曹參議李惟泰請行五家統鄕約。備局仍請行戶牌。公承詢言敎化不明。鄕約必可行。版籍多漏。五家統亦可行。獨戶牌事。引故相臣李元翼言。以明其不可行。仍及祀典不謹。松都等處。尤宜勅勵之意。秋。八路阻飢。154_498d上疏請急散貨蠲役。節用緩刑。且言松都獄事無現狀。而留守南老星執疑搆罪。酷用刑杖。時松都儒生。與賈人相辨就獄。本府窮治儒生。公知其冤以爲言。老星大恚。遂以醜語詆公。公上章待罪。批旨勤摯。仍敎南老星所爲。殊極無狀。姑先從重推考。公不自安。出伏江郊。上遣近侍。累賜溫諭。十月。玉堂官李敏迪,洪柱三等陳箚言老星敢以一朝之忿。遽誣白首一節之元老。而朝廷視爲薄眚。兩司終無一言。國綱若在。豈容如是。於是兩司引避見遞。憲府朴世模等請罷老星職不敍。十一月。上屢遣承旨。諭以史事154_499a方急。宜速視事。公乃入謝。命賜黃柑。旣而南老星踵公門。公待之如初。辛丑三月。又聞彼中有微以公事爲言者。公卽累箚乞退。不許。四月。因旱疏決。右參贊宋公浚吉請量移尹善道。公繼陳宜納其言。七月。史事告完。命設洗草宴。時猶閔雨。上箚引周禮眚禮,春秋君不兼味之說。請罷之。掌令許穆請早定國本。以繫人心。命詢大臣。公議曰。元子誕生之初。告于宗廟。百僚進賀。八路同慶。設科取士。擧國人心。莫不欣戴。卽是國本自定之日也。領議政鄭太和亦從公議。士論韙之。壬寅六月。大司成徐必遠疏言執義崔154_499b攸之因姻婭之力。得與玉堂之選。蓋以崔是公妹壻之弟也。公三上章乞退。仍出江郊。又連章乞免。上累遣近侍慰諭備至。使之入城。徐公後自悟。詣門摧謝。情分益厚。蓋知公初無是事。又服其不校之量也。癸卯。孝宗旣祔廟。仁宗遷于祧廟。永寧殿狹小不可容。將改修。公受都提調之命。上意欲起左右翼室。並倣正殿。公以爲此便是二宗廟也。請對極言聖祖建正殿。以奉四祖。而遷祧主於左右翼室。厥有意義。且皇朝故制。亦可考也。今不可變。上納之。甲辰。公年已七十。入耆社例也。歲初。上154_499c疏引年乞致仕。上慰諭不許。一月疏七上。二月命召入對。申陳懇至。上曰。當今元老。只卿一人。卿可留以鎭定。予缺然。卿豈退去。仍詢于三公。皆對以元老進退。關係國家。不可輕許。乙巳秋。上幸溫泉。公承命留都。駕還。命賜鞍馬。官子弟。丙午秋。上又有溫幸。公留都。及還恩典如前。丁未正月。聞趙聖輔,李垕等竄逐。承旨拿鞫。箚請還收。二月。又請寢李䎘等七人之譴。三月。陳情請屛退。仍及八竄事。四月。請對復陳之。答以思量處之。時吏郞洪萬容,南二星。以事亦斥補郵官。公明其非罪。卽命還收。有溫幸。公又154_499d留都。行朝大臣。又有以諸竄爲言者。上敎以領府事嘗有所達。特命量移。公於留直中有微恙。內殿遣醫饋藥。上聞之。有旨退家調攝。公辭不敢。戊申春。賜紬羅米豆。異數也。時有文衡薦望之命。上聞公病。令在家薦聞。公辭以不敢。詣待漏院書進。自初至此。凡四擧文衡矣。八月有溫幸。又承命居留。十月。命依完平府院君李元翼故事。賜几杖。公累辭。優批不許。禮官引例。將設耆老宴。公又三疏得停。遂以十一月。有司具禮致几杖于公第。命賜樂。宣內外醞。公感激恩私。爲之歌詠。屬座上和之。蓋完平後五十年154_500a所未有也。敎書有曰。司馬光一箇誠字。可行終身。李文正兩入中書。未嘗害物。時以爲實際語。己酉三月。上將有溫幸。諭以卿老病。使他大臣留都。有事則卿宜在家相議。公對以不敢。遂進住闕下。上箚行朝。言沐浴過多。宜加審愼。燠寒失序。天災可畏。宜早回鑾。以慰都民。且言平昔朝端。納履之色相繼。今日帳殿。未聞有奔問之人。抑有之而臣未之聞耶。君父有疾。遠臨草次。如非老臣遠在。有事故者。不當如是。此係國綱義理。臣甚憂焉。抑古所謂訑訑之聲色。拒人於千里之外者。亦近之耶。此殿下所當惕念處154_500b也。優批嘉納。初宋相公時烈名重一世。公自在仁廟朝。屢加尉薦。每請召致。宋公與同春宋公。亦因以爲宗。其入洛。輒以布衣造門。公必待以均敵。以盡下士之禮。及孝廟新服。又首乞招徠。以共國事。公雖遇變屛居。不克協濟國事。契誼益厚。如聞其辭退。則輒陳疏請挽。又以私書勉以追報之義。宋公亦名位旣崇。而敬重尊尙之意。屢形於辭氣書牘之間。至是遽上一箚。引從臣孫覿事以詆公。蓋誤認公箚中納履等語指己而發也。公恥與相校。乃陳箚引咎。上慰諭之。時宋公以儒林領袖。見重於一世。其所言議154_500c是非。士類莫敢難之。而其疏一出。擧世譁然。親密如骨肉者。莫不疑之。同春公亦對公駭歎。公立朝五十年。未嘗與人爭校。及遭是事。旣以一疏陳其本意。卽坦然。若未始有聞者然。平居對子弟。未嘗一論其長短。夏。公病甚。三上疏乞免。不許。六月。出寓東湖。上聞之。屢遣承旨史官。諭命入城。公入來。上諭以聞卿入來。予甚喜悅。仍令俟病間入見。時有神德王后祔廟之議。公以班首。率百僚閱月庭請。始擧縟典。事無前據。禮多妨礙。儀度節目。多從公議。庚戌正月。卽公合卺回日也。公與夫人。俱大耋而無恙。諸孫爲154_500d設重牢之禮。而公不許。只令進壽。桮觴迭獻。觀者艶歎。公曾以李殷相,吳挺緯雖有罪犯。不可終棄之意陳達。至是金澄陳疏。頗侵公。公上箚乞罷。答以顚妄之言。不足與較。四月。因旱疏決。時金澄以全羅監司。被劾久囚。公爲言爲母壽酌。罪在可恕。及有刑推之命。又箚言金澄所爲。誠有過濫。聖度推仁。矜其母而減其罪。則何必加刑然後知其罪哉。上從之。八月有天變。又上箚陳戒。答以卿之至誠。老而彌篤。十月。聞畿民大同米明春當捧者。並徵於今秋。又上箚言之。辛亥九月。患泄轉谻。以二十四日。易簀于聚賢154_501a洞第正寢。享年七十七。訃聞。上震悼輟朝市如例。弔祭賵賻。皆從優典。自卿大夫章甫及都下庶民。皆弔哭咨嗟曰。賢相亡矣。書院儒生操文致酹者。十餘所。有司治喪具。十一月。禮葬于廣州樂生面先塋近麓壬坐之原。領相鄭公太和白上曰。李某在時。家甚貧。宜有優恤。命祿俸限三年仍給。大臣喪後給祿。自公始。今上庚申。領議政金公壽恒,左議政閔公鼎重,兵曹判書金公錫胄合辭言李某有勞國家。素稱賢宰相。其後嗣宜別有收祿。命以公之冡孫參奉羽成。超授六品職。俾奉香火。公天性仁恕。器宇秀偉。154_501b有近道之資。輔以學力。子諒豈弟。恬靜淸修。平生無崖異之行矜飾之色。忠厚和順。睟於面目。人不見忿厲嚴猛之容。而自不敢以狎進。少時已負士友重望。遭遇明時。聲聞藹蔚。遍歷淸華。恩顧甚渥。二十年間。遂登台鼎。國家之眷注。朝野之想望。固已隆至。而受孝廟特遇。嗣服之初。首膺元輔。委任益專。公又殫竭忱誠。盡其所學。謨猷設施。將以有爲。而遽遭庚寅之變。自是身處散班。不得復任彌綸之責。以展其平生之志業。豈非天哉。當其禍機之危迫也。上所以救解者。靡不用極。卒以無他。及其栫棘放還之後。恩禮154_501c之重。倚毗之篤。他相莫敢望焉。常稱以元老。使之頻數入侍。事無大小。靡不咨詢。公感激殊私。不以處散爲嫌。每當筵對。引經據義。所論說必主乎仁厚惻怛。語及國計民憂。或至流涕。上輒爲之動容。若値上天示警。朝政有闕。則必封疏極論。要以敬天愛民。勤學好賢。戒喜怒納諫諍。崇節儉恤刑獄爲言。聯牋疊牘。勤勤懇懇。知無不言。言無不盡。上皆虛心嘉納。時或有不槪於心者。亦念其至誠。多屈意從之。國有大事。輒遣重臣就問。十年之間。際遇如一。顯廟卽祚。公名德益崇。中外倚以爲重。至於遐鄕孺婦。不識154_501d姓名。而能誦白軒。當宁在春宮。聞公名德。思欲一見。蓋大臣非見帶師傳。無進見之例。而顯廟特令入見。曠世異數也。自幼事親有卓行。爲宗黨所服。旣貴。議政公與夫人大耋無恙。非公事賓客。未嘗一日離側。執事左右。如在童稚。祗栗侍護。罔或有違。閨庭之內。喜氣融融。一世艶歎。咸以爲質行。無讓萬石家。親疾則夜不解帶。藥必親嘗。扶擁抑搔。益篤誠謹。廁牏之滌。亦必手執。及遭憂。哀戚之容。人不忍見。葬祭一遵家禮。衰絰未嘗暫釋。諱日哀臨。若在袒括。必疏食水飮盡其月。不赴宴樂。其遇壽辰。終日愴然。不許154_502a進觴。年至五十。常服素衣。蓋其至誠。與孺子日無異也。鄕䣊嘗擧石門公孝行。以請旌閭。議欲並擧公。而以公不可。故遂不敢發云。事石門公。友恭兼至。及老而愛敬益篤。事之如嚴父。人謂春津之後。所罕有也。立朝事君。一於誠而無苟。每以不欺君。爲第一義。每誦羅豫章之言以自勖曰。士大夫立朝。當以正直忠厚爲本。正直則朝廷無過誤。忠厚則天下無怨嗟。一於正直而不忠厚則近於刻。一於忠厚而不正直則流於懦。尤以勤謹爲務。趨朝未嘗後於人。凡有封事。必具朝服。拜送于庭。批回。亦具服拜受。如遇動駕154_502b及廟主移奉之時。或處散或病甚。不得陪扈。則必出伏庭下。以致祗敬之意。其有宣賜。必具服拜受。俯伏而嘗。如在上前。其可薦者。必以手撫之。或嗅之訖。輒褁送于宗家。每受命承祭。必預加澡浴。凡係祀具。無不親檢。申戒官屬。必敬必誠。其禱雨也。尤致其愨。旣祭歸家。輒不解公服。伏於庭中。烈日下暴而不少休。必待雨下衣濕然後起。蓋公禱。未嘗不雨。故都民遇旱。必言何不令某公禱之。公於小學。熟讀深味。用工眞積。平生律己。必以爲準。及居憂。博觀禮書及性理諸書。尤致意於心經,近思綠。沈潛玩賾。深有會154_502c焉。而於論語。得力尤多。嘗以先儒說切於心者。箚爲小冊。目曰矯警錄。以資日間觀省。蓋取伊川所謂矯輕警惰之意也。旣老而近思錄一帙。不離案上。朱子大全節要等書。尋常繙閱。座側遍寫古人格言。常目在之。甚愛表記莊敬日強安肆日偸之語。每誦以自警。亦擧以詔子弟門人。耋老而步履不愆。容儀莊肅。每廊廟會朝。風範映人。登降進止。一循規矩。百僚竦敬而儀刑焉。素養旣厚。應事有裕。雖急遽蒼皇之中。常自持從容。臨大事決大疑。鑿鑿中窾。未嘗少錯。發言措事。必傳古誼。以至小節。曲謹未嘗放過焉。聞人154_502d才美。必加稱述。欲其導達。如忠臣孝子之行。尤致惓惓。必以旌表風厲建于朝。前後進言。每以審克爲務。其論囚讞獄。必先曲意求活。不得而後已。常曰。理獄不以公。殃必及後。家素貧。無一畝一指之資。雖官尊祿厚。皆歸恤施之用。故室如懸罄。而處之晏如。家無珠玉錦繡之飾。雖婚嫁大禮。一切從約。人或笑其朴陋。平生口不及財產之事。身不着華靡之服。飮食雖菲薄。未嘗揀擇。亦未嘗以口體之奉。責及婢使。人謂有王文正不問娭塵之風。所居第。五十年間無所增飾。門關不設。垣蔽不修。於文章。天才甚高。聰記過人。154_503a而旣博綜經傳。誦讀或至千遍。如胡氏春秋。用工亦深。旁探史書及古今文章諸大家。最好昌黎氏。亦喜長蘇之豪逸。而惟不喜異端書。當世詞垣。皆重漆園。而公獨不肯讀曰。聖賢書中。自有型範。何必乃爾。早從玄洲趙公纘韓。受古文。多蓄厚積。詞源滂沛。左酬右應。未嘗少滯。操筆立就。若不經意。而爲文。氣力雄渾。藻采絢爛。其歸又未嘗不以道義名理爲準。詩亦圓活條鬯。自成一家。崔公有海嘗朝天。與長洲文學士評品文章。長洲問方今東國文章士。何人爲最。崔公擧公名爲對。仍誦公長律一篇錄示之。長洲大加154_503b歎賞。手自批曰妙絶。又謂曰。可謂文章士矣。賞鑑之明。高出常見。每當考試。又必用盡心力。無一篇泛過。前後主司十七榜。所取士。卒爲賢宰名流者甚多。故得人之盛。世稱無比。筆法穠艶道逸。尤善行草。翩翩有飛動意。人得片楮。莫不藏去爲寶。所著詩文甚富。而散軼居多。蓋公不欲以撰述自居也。公孫正郞公衰聚數十年。始成一帙。詩凡五六千餘。文凡八百餘。正郞之胤眞養兄弟。屬錫鼎略加鈔定印出。詩一千八百有奇。文五百有奇。夫人全州柳氏。觀察使贈領議政諱穡之女。仁莊淑哲。事父母以孝。及歸于公。上154_503c事舅姑。傍接妯娌。咸得歡心。公歷踐顯要。或有由旁蹊而進者。夫人一切嚴斥。惟恐淸德之或累。公旣篤於奉先惇族。夫人體其意。至心斤斤。人謂公之友睦淸愼著於世者。亦有夫人之助云。夫人生於壬辰。卒於甲寅。壽八十三。有一男哲英。生員平市署令。女適觀察使趙遠期。平市公有二男。長羽成進士壯元。刑曹二郞。次廈成今軍資判官。四女適縣監宋掞,縣監黃鎰一士人趙鴻紀,柳鳳庭。趙觀察生二男。正誼縣令。正倫通德。四女適領議政申琓,主簿申琢參奉愼爾憲,佐郞金盛後。內外曾玄摠百餘人。不盡記。公之婦154_503d翁柳觀察。於不佞先祖遲川公。爲內舅。公卽先祖之內從妹夫也。雖年輩稍差。而契好不淺。公自少留意於學問。沈淹儒家書。工甚篤至。先祖在亞卿時。箚薦學行士。而搢紳中學問。推浦渚趙公翼,白江李公敬輿及公數人。不佞先君子年未弱冠。先祖貽書于公。請敎以近思錄。書辭甚懇。此可見推許之深也。丁丑初。太學士缺。谿谷張公維其代。先祖曰。李尙輔當代文望。實合持衡。谿谷以爲然。遂從之。錫鼎幼少時納拜於公。公或在內。則與夫人並坐見之。童子無所識知。每仰其風範之雅重。器量之宏厚。而於公立朝大154_504a節。奉親純行。有未及詳聞。旣長。得於公卿位著之公論。始識公忠孝節行。卓然爲一世之範則。當北使咆哱。事變橫生。禍機迫於呼吸。人心洶駭。擧國遑遑。公以眇然一身。不懾不挫。位在元輔。毅然自當。其視刀鉅鼎鑊。如袵席康莊。然非夫精忠諒節。冠絶乎等夷。卓見高識。素講乎平昔。其孰能與於此。上之三十二年丙戌夏。錫鼎以大臣登對言公事親至行。無讓於古之萊石。與其兄故判書景稷。同奉大耋兩親。行義俱表著。景稷則沒後。朝家因公論旌閭。獨某未蒙並擧褒典。其在聖朝表章風勸之方。實爲欠缺。大154_504b臣諸宰同辭仰陳。遂命旌表其門閭。公與石門公。俱是昭代名臣。旌孝之典。先後擧行。觀聽爲之聳動。允爲希曠之盛事。不亦懿哉。公之棄世。已近四十年。易名之章。闕而未擧。公之曾孫眞養兄弟。述其官歷事行。請文於錫鼎。不敢以文拙辭。謹撰次如右。敬告于太常。謀所以節惠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