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육신묘비(六臣墓碑)

육신묘비명 (펌)

아베베1 2009. 11. 3. 17:45

육신묘비는 동작구 노량진동 185-2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215cm이며 폭은 80cm, 두께는 41cm로서 방형대석(方形臺石) 위에 비신을 세웠고 옥개형(屋蓋形) 개석(蓋石)을 얹은 조선 후기의 평범한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비문은 대종백태학사(大宗伯太學士) 조관빈(趙觀彬)이 찬하고 글씨는 집당안진경(集唐顔眞卿)의 글씨이다. 이 육신묘비의 건립 연대는 ‘숭정삼임인(崇禎三壬寅)’으로 조선 정조 6년(1782)이다. 육신묘비는 단종을 섬기던 충신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 등 사육신의 충성된 절개를 후세에 전하고자 정조 6년에 세웠던 것이다.
세종이 재위 32년 만에 돌아가고 문종이 즉위하였으나 문종은 재위 2년 3개월 만에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적장자 왕위계승 원칙에 의하여 문종의 장자인 단종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단종은 이 때 나이 겨우 12세였다. 문종이 유명(遺命)으로써 특히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어린 왕을 보필케 하였지만 수양대군은 무단적(武斷的)인 방법으로 3공 가운데 가장 지용(智勇)이 있어 대호(大虎)’의 칭이 있던 김종서를 제거하고자 단종 원년 10월 친히 무사를 이끌고 김종서의 자가(自家)를 습격하여 주살하였다. 이렇게 중외(中外)의 적대 세력을 제거시킨 수양대군은 일거에 실권을 장악하여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
수양대군의 위권(威權)으로 허위(虛位)를 옹하게 된 단종은 사태가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왕 3년 6월 수양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전수하였다. 이 수양대군이 곧 세조이며 이 선위(禪位)의 계획은 권람(權擥) · 정인지(鄭麟趾) 등이 극비리에 추진한 것이었다.[
] 비록 선양의 형식을 택하였다고는 하지만 계략으로써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대하여 몇몇 구신들은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세조의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의 부활에[] 대하여 집현전 출신 유신들의 즉각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이에 세조의 전제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일부 유신들은 마침내 세조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시키려 하였다. 물론 단종복위공작의 표면적인 명분에는 세조의 불의의 찬탈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는 대의가 내세워지고 있었다. 단종복위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는 승지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집현전 부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성균사예 유성원 그리고 무인 유응부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현직 또는 전직 집현전 유신들로서 일찍이 언관(言官)을 지낸 바 있었다. 따라서 유신 중에서도 가장 비판의식이 예리하고 유교주의에 철저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세조에 의하여 중용되고 특히 성삼문은 두 차례에 걸쳐 공신에도 피봉(被封)되었으나[] 세조의 전제권 강화에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집현전을 모의 장소로 택하고 여러 차례의 모의를 거듭한 끝에 세조 2년 6월에 창덕궁에서 명사신(明使臣)을 향응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세조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고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의 변심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주모자인 성삼문·박팽년 이개·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등 6인은 체포되어 형살(刑殺)되거나 또는 자살하였다. 이에 연루된 혐의로 성삼문의 아버지와 형제, 박팽년의 아버지와 3형제 그리고 권자신(權自愼), 김문기(金文起) 등 70여 명이 치죄(治罪)되었다. 이들 주동자 6인을 세칭 사육신(死六臣)이라 한다.
이 신도비는 당초 봉분 아래 큰 길가 가까이에 있었으나 사육신묘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1978년 성역화하면서 옮겨 놓은 것이다. 그 비문 속에는

「성삼문 등 6충신이 사형을 당하던 당시 서울은 형용할 수 없을 지경으로 혼란하였으므로 그들의 시체를 매장할 겨를조차 없었다. 다행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중의 차림으로 남몰래 이 산에 시체를 옮겨 묻었다. 그러하니 시체가 제대로 챙겨져 묻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라는 구절이 있듯이 사육신의 최후는 그야말로 비참하였다. 청천당(聽天堂) 심수경(沈守慶)은 그의 《유한잡록(遺閑雜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세조가 노산(魯山)으로부터 옥새를 물려받고 노산을 상왕으로 받들었는데,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및 김질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등이 상왕의 외숙되는 권자신 등과 비밀히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약속된 거사일에 그 기회를 잃자 김질이 그 일이 잘 안될 것을 알고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고 곧 함께 달려가서 세조에게 변을 아룀으로써 김질은 녹공(錄功)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니 기약한 일이 기회를 잃어 김질이 고변한 것은 이게 모두 하늘의 일이다.」

돌이켜 살펴보면 사육신의 충성된 마음과 의로운 몸가짐은 시대의 고금을 막론하고 길이 빛나는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그들의 굳은 충절과 절의를 후세에 전하고자 숙종 7년(1681)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정조 6년에 이 육신묘비를 건립하였으며, 1955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민절서원 구기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우고 영역을 수축하여 여섯 충신의 영령을 받들게 하였다.
정조 6년에 건립한 이 육신묘비의 전문 내용을[
]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有明朝鮮國六臣墓碑銘
 大宗伯太學士趙觀彬撰 集唐顔眞卿書                              維漢師칀南越露梁津向午之岸有五塚同域各樹片石只書
姓氏如婦人之表而過者皆下馬指點咨嗟曰萬古忠臣之葬      콉所謂六臣墓也六臣者參判朴公諱彭年承旨成公諱三問
校理李公諱塏司藝柳公諱誠源參判河公諱緯地都摠管兪公   諱應孚是已事 世宗 文宗被 恩遇及 端宗遜國諸公抗義以
殉事載南秋江孝溫丙子六臣列傳而朴公臨池之矢成公抱寶   之哭李公之感 顯陵松柏柳公之慟集賢絲綸河公貯祿而置室
兪公取鐵而投地此可以죏其實蹟矣 光廟後世忠臣之褒有足  以揭日星而垂宇宙 宣 孝兩朝亦有愍忠錄後之典而惟我 肅
宗大王尤致意於曠感崇報之義已未閱武露梁隔江望墓命修   其隧道因多士?請傍其墓立祠幷享辛未 幸章陵輦過又 命
復官致祭 賜祠額曰愍節戊寅修闕章쯊 端宗于 太廟又遣官    祭六臣祠於是乎端宗至德永配 列祖而諸公之危忠大節與有
光而遂無憾矣噫惟玆五墓旣表以朴兪李成姓氏則其爲六臣    中四公無疑又有一成氏此則成公之父勝同時被禍葬此云而
河公墓在嶺南善山只藏一?柳公墓則獨不聞所在盖當日禍     作家族盡夷無人收骸有僧負其屍痙之咸云梅月堂金公時習
而維時猝急事多未遑堂斧相錯햹默難辨則河柳之葬亦安      知不混於此中耶鳴呼臣爲君死大義也然其於國命無革天運
有歸則爲齊桓之管仲唐宗之魏徵者從古幾人而諸公則當其   時也不忍負 先王託幼之意能辨一死如 皇明方孝孺諸人其
所樹立可謂卓絶及有戊寅 邦禮益可見諸公之死終爲感發     天意之一大助矣碧血之藏荒쯺幾年而隨時隱顯幷與國是而
定豈不悲且奇哉六臣之後惟朴公遺腹孫幸而得免過數世始   被錄用七世孫翊贊崇古增築是墓辨其疑信今 上丁卯因 筵
臣陳白命京畿觀察使治碑立墓道愍節祠有司章甫閔百興沈   쌱等託余以紀載之文如諸先生義烈有辭於天下後世碑
有無何足輕重而 聖主表忠多士勤請屢辭而不能得則遂以託  名碑未爲榮謹序其事而系之銘銘曰 人紀有五臣節無二 聖
祖培植以遺後嗣有若六臣爲 端宗死何用諱例直筆在史露湖  之岸??其痙碑不書名傳疑幾世故老曰信此足可攷塋域久
秘衣履終保河則別阡柳無?土事在倉卒莫詳厥故無亦一公     混찘此隧四時無薦義士?淚惟我 肅考忠節是奬짔墓而感建
祠 以享皎日洞照衰草始曄追崇 魯陵神人允協於 王之德遐    不廟配君臣一體忠哉公輩昔者忌諱今則顯誦前所荒廢後乃
虔奉幷薦芬苾醉琴之裔 王命穹碑舊典是繼道臣治石士林董   役秋傳尤記正論不易大書貞珉臨江屹立江水滔滔遠通越峽
嗚呼六臣墓碑撰成在於 英考丁卯而越十有一年戊寅            콉 莊陵復位之周甲也 上命贈朴公成公李公柳公何
公職吏曹判書兪公職兵曹判書諡朴公曰忠正成公曰忠文李    公曰忠簡柳公曰忠景河公曰忠烈兪公曰忠穆乙未 上聞朴公
後裔來居京師 命?其閭當?丁酉 命嶺南道臣?表河公閭         盖 肅廟朝以公從子追定其嗣家在安東至是有是 命戊戌遣
禮官致祭于愍節祠 列聖朝表忠奬義于斯至矣諸公之大名高  節昭揭萬世顧何待乎쬞趺之有無耶然惟我 聖考特命顯刻之
盛意?未奉揚爲士林恨愍節有司李東直與其僚任經紀쾄石     朴公嗣孫前縣監基正勤誠相之工乃告訖췕亦可貴也余嘗過
露梁墓木?然非復前日之荒壟今?碑且屹人孰不知爲忠臣      之葬而益加欽歎者誠由 三朝崇報之盛德而然此宜有太史氏
之大書也今因章甫之託略픊丁卯後 恩典쨑立碑顚末如右   云爾原任右議政完山李徽之謹識
 崇禎三壬寅 月 日立

 

 

자료출처 : 서울 600년사

 

 

계유정난(癸酉靖難)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함은 단종 원년(1453,계유)에 수양대군(세조)이 실권을 잡기 위하여 단종의 복심(腹心) 대신들을 제거한 정변으로서, ‘정난(靖難)’이라 하기에는 사실과 모순되기는 하지만 역사에서 그렇게 불려 왔기 때문에 편의상 그렇게 칭하여 두는 것이다. 정난이란 뜻은 국가의 위난을 평정한다는 것이나, 수양대군이 단조의 복심 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이 안평대군 용(瑢)을 추대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것을 계유년에 봉쇄 격멸하고 국난을 평정하였다는 억지에서 붙여진 이름이 된다.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연풍(年淵)하고 경륜이 많은 종친세력이 이심(異心)을 품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단종이 즉위할 때 부왕 문종의 모제(母弟)로 7명의 숙부 중 수양대군 · 안평대군 · 임영대군 · 금성대군 · 영응대군 등 5인의 숙부가 있었다. 이들 숙부는 모두 위세를 떨치며 빈객을 맞아들여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에게는 무인이 많이 모였고 안평대군에게는 문사가 많이 모였다. 특히 수양대군은 야심과 비범한 수단의 소지자로 권람(權擥) · 한명회(韓明澮) 등 비범한 문사와 홍달손(洪達孫) · 양정(楊汀) 등 유능한 무인을 포섭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단종 원년(1453) 10월 수양대군은 친히 무사를 이끌고 지용(智勇)이 있어 ‘대호(大虎)’라는 칭이 있던 김종서를 모반한다 하여 그 집을 습격하여 부자를 추살하고 다시 황보인(皇甫仁) · 이양(李穰) · 민신(閔伸) · 조극관(趙克寬) · 윤처공(尹處恭) · 이명민(李命敏) · 원구(元矩) · 조번(趙藩) 등이 안평대군에게 당부(黨附)하여 불궤(不軌)를 도모하였다고 하여 이들 반대파 중신들을 궐문에서 추살(椎殺)하였으며, 뒤이어 안평대군을 강화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하였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은 실권을 장악하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 이 · 병조판서(吏 · 兵曹判書), 내외병마사도통사(內外兵馬使都統使)를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 손아귀에 넣었으며,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고 신숙주(申叔舟) · 권람 · 홍달손(洪達孫) 등 자기 심복을 정부 요직에 배치하였다.

육신(六臣)의 상왕 복위 모의(上王復位謀議)

3년 을해년(1455) 봄 2월에 정부ㆍ육조(六曹)ㆍ정원(政院)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화의군(和義君) 영(瓔) 세종의 아들 이 최승손(崔承孫)ㆍ김옥겸(金玉謙)과 더불어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활을 쏜 것과 또 평원대군(平原大君) 임(琳)의 첩 초요섬(楚腰纖)과 간통한 죄를 아뢰어,청하여 영(瓔)을 외지에 귀양보내고 유(瑜)의 고신을 회수하였다. 또 내시 엄자치(嚴自治)의 죄를 아뢰어, 금부에 가두었다가 제주도에 안치시켰는데, 길에서 죽었다. 그때에 혜빈(惠嬪) 양씨(楊氏) 세종의 후궁인데, 한남군(漢南君)ㆍ영풍군(永豐君)의 어머니이다. 가 임금의 신변을 보호한다 하여 궁중에 출입하여, 중하게 견책을 받았다.
영(瓔)이 귀양가니, 참판 박중손(朴仲孫)이 아뢰기를, “신의 사위 영이 죄를 지은 것은 실상 신이 미리 막지 못했기 때문이니, 황공하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해동야언(海東野言)》
○ 윤 6월 11일에 임금이 세조에게 전위하매, 임금을 높여 상왕(上王)이라 하며 창덕궁에 옮겨 거처하게 하였다. 《고사촬요(攷事撮要)》
상왕이 손위(遜位)한 것은 모신(謀臣) 권람(權擥)이 의논을 시작하여, 대신 정인지의 논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김자인(金自仁)이 그때 나이 열두 살인데, 그 의논을 보고 가슴에 불꽃이 치솟는 것 같았다고 말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 그때, 단종이 환관 전균(田鈞)을 시켜 우의정 한확(韓確) 등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어려서 안팎의 일을 알지 못하여, 간악한 무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 반란의 싹이 끊임없이 일어나니, 이제 장차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하려 하노라.” 하였다. 한확이 깜짝 놀라 아뢰기를, “지금 영상이 나라 안팎의 모든 일을 모두 총관(摠管)하는데, 다시 무슨 대임을 전한다는 말입니까” 하였다.균이 그 말대로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전날부터 이미 이 뜻이 있어서 이미 계책이 정해졌으니, 바꿀 수 없다. 빨리 모든 일을 준비하라.” 하였다. 한확 등이 동시에 아뢰면서 결정을 바꾸기를 강력하게 청하고, 세조가 또한 울며 굳게 사양하였다. 균이 들어가 아뢰니, 조금 있다가 다시 전지를 내리기를 “상서시(尙瑞寺) 관원에게 옥새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라.” 하매,여러 대신이 서로 돌아보고 실색하였다. 또 동부승지 성삼문에게 상서원에 가서 빨리 옥새를 내어오도록 명하고 균을 시켜 경회루아래로 받들고 나오라 하고, 임금이 경회루 아래에 나와서 세조를 불렀다. 세조가 들어가니, 승지와 사간이 따랐다. 임금이 일어서니, 세조가 꿇어 엎드려서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손에 옥새를 들고 세조에게 주었다.세조가 사양하다 재가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엎드려 있으니, 임금이 부축하여 나가라고 하고, 군사가 호위하였으며, 정부는 집현전 부제학 김례몽(金禮蒙) 등으로 하여금 선위ㆍ즉위하는 교서를 봉하게 하고, 유사는 의위(儀衛)를 갖추어 경복궁 근정전에 헌가(軒架)를 설치하고, 세조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가서 선위를 받았다.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에 들어가 임금을 뵈옵고 드디어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실록(實錄)》
○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에, 자기는 덕이 없다고 사양하니, 좌우에 따르는 신하들은 모두 실색하여 감히 한 마디도 내지 못하였다. 성삼문이 그때에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옥새를 안고 목놓아 통곡하니, 세조가 바야흐로 부복하여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보았다.이 날 박팽년(朴彭年)이 경회루 못에 임하여 빠져 죽으려 하매, 성삼문이 기어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왕위는 비록 옮겨졌으나, 임금께서 아직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들이 살아 있으니 아직은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다시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하매, 박팽년이 그 말을 따랐다. 《추강집(秋江集)》
○ 그때,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 이 도총관(都摠管)으로 궁내에 들어가 번들다가 선위한다는 말을 듣고 정원에 종을 보내어 자주 물었으나, 성삼문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한참 있다가 성삼문이 뒷간에 가며 하늘을 쳐다보니, 눈물이 샘처럼 쏟아졌다.성승은 곧 병이 났다고 하고 방에 드러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집 사람들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오직 성삼문이 오면 좌우를 물리치고 같이 얘기하였다. 《추강집(秋江集)》
○ 상왕(上王 단종)이 수강궁(壽康宮)으로 나올 때에는 어둔 밤에 불 밝히지 않고, 종루(鐘樓)로 내려올 때에는 좌우 행랑(行廊)에서 모두 통곡하니 막을 수가 없었다. 《추강집(秋江集)》 ○ 수강궁은 지금의 창경궁(昌慶宮)이다.
○ 세조가 경복궁에 임어하고 상왕 3년(1455)을 원년(元年)으로 삼았다. 《고사촬요》
교서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동방을 차지하셨고, 여러 성왕이 서로 잇달아 밝음을 거듭하고 화함을 거듭했다. 주상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한 이래로 불행히도 국가에 어려움이 많은데, 과인이 선왕의 모제(母弟)이며 또 조그만 공로가 있고, 장성한 임금이 아니면 어렵고 위태로운 시국을 진정시킬 수 없다 하여, 드디어 대위를 맡기시니, 내가 굳이 사양하나 들어주지 않고, 종친과 대신들이 모두 종사의 대계(大計)이니 의리상 사양해서는 안 된다 하므로, 부득이 뭇 사람이 바라던 대로 따르노라.” 하였다. 《실록》
○ 정원에 전교하기를, “매달 1일, 12일, 22일에 친히 상왕께 문안하겠고, 만일 연고가 있으면 그 다음날 가겠다.” 하였다.
○ 박팽년으로 충청 감사를 삼았다.
박팽년이 성삼문ㆍ삼문의 아버지 승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김질(金礩)ㆍ무인 유응부(兪應孚)ㆍ상왕의 외숙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였는데, 얼마 뒤에 박팽년이 충청 감사로 나갔다.
○ 이 달에 예조 판서 김하(金何)와 형조 참판 우효강(禹孝剛)을 명 나라에 보내어 왕위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데, 그 주문(奏文)에 대략, “신이 어렸을 때부터 병이 있어 기운이 항상 순하지 못하였고, 신의 아비 선신(先臣) 공순왕(恭順王)이 경태(景泰) 3년(1452)에 돌아가시매, 신의 나이 열두 살에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해야할 일을 알지 못하여 여러 서무(庶務)를 신하에게 위임하였더니,경태 4년에 이르러 간신들이 반역을 꾀하여 화기(禍機)가 임박하였다. 그래서 숙부인 배신(陪臣) 수양대군 유(瑈)가 달려와 신에게 고하고 곧 평정하였으나, 아직도 흉한 무리가 아직 다 없어지지 않고 변고가 거듭되어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신은 미약하여 이를 진정시키시기 어렵고 나라의 안위에 심히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선신(先臣)의 동모제 유가 학식은 고금을 통하고 공이 있고 덕이 있어 여러 사람들의 신망을 두텁게 받기에 경태 6년 6월 11일에 권도로 군국(軍國)의 일을 승습(承襲)하게 하였사오니, 통찰하시어 특별히 밝은 윤허를 내리소서” 하였다.
○ 이듬해 4월에 조칙(詔勅)이 나왔는데, 그 조칙에, “정성껏 중국을 섬기는 신하의 도리를 지켜 사대(事大)의 정성을 더욱 굳건히 하고, 길이 번신의 도리를 굳건히 하고, 사왕(嗣王)의 선양(禪讓)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홍위(弘暐)로 하여금 상왕(上王)의 휘(諱) 그대로 작위를 갖고 편안히 있게 하고, 모름지기 항상 우대하여 소홀함이 없을지어다.” 하였다.
○ 가을 7월 갑신일에 상왕을 추존하여 공의온문(恭懿溫文) 상왕이라 하고, 왕후 송씨를 의덕(懿德) 왕대비라 하고, 세조가 면복(冕服)으로 법가(法駕)를 갖추어 종친과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창덕궁에 가서 뵈니, 상왕과 송씨 모두 받지 않았다. 《실록》
○ 9월에 계양군(桂陽君) 증(璔) 등 41인을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녹훈하였다.
○ 세조 2년 병자년(1456) 정월 《국승(國乘)》에는 정축 정월 갑오라 하였다 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는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영의정 정인지는 육조의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신들이 전에, 상왕을 내쫓으라고 간한 일은 근일에 조정이 다사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번거롭게 아뢸 겨를이 없습니다.날로 전하가 지체 마시고 속히 결단하소서” 하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경들의 말은 옳으나, 자고로 제왕의 일어남이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인데, 나의 일도 또한 천명이라 간인이 있더라도 어찌 상왕을 의지하여 음모를 꾸밀 수 있겠는가. 진(秦) 나라를 망친 것은 호(胡)이다. 천명을 어찌 도모할 수 있으랴” 하였다.정인지 등이 다시 아뢰기를, “천명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인사(人事)를 다하여야 마땅하니, 밖으로 내보내 혐의를 피하게 하소서.” 하였다. 세조가 편지로 이르기를, “국가의 큰 일은 마땅히 선후를 따져서 깊이 생각하고 널리 의논하여 새로운 생각이 나면, 이전 생각은 버려야 하므로, 내가 두어 달을 두고 계책을 생각하고 천만 가지로 궁리하여 이제야 정하였다. 경들도 고집할 것이 아니요, 나도 독단으로 할 것이 아니다.고집이 없으면 국론에 무엇을 취하며, 독단이 없으면 한 사람에게 무엇을 계품하겠는가. 유(瑜)의 집을 다스려 방금(防禁)을 엄하게 하고, 시종을 줄여 외부로 나가 거처하게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을미에 정인지가 또 백관을 거느리고 다시 청하매, 세조가 편지로 이르기를, “어제 내 편지에 다 말했다.” 하였다. 《금석일반(金石一斑)》
○ 상왕이 금성대군 유의 집에 출거(出居)하였는데, 삼군진무(三軍鎭撫) 두 사람이 군사 열 명을 거느리고 문을 파수하여 숙직하였다. 《금석일반》
경자에 의정부가 의논하기를, 상왕전(上王殿)에 주부 환관(酒府宦官) 두 사람, 장번 환관(長番宦官) 두 사람, 차비 수구치[差備速古赤] 네 사람, 별감 네 사람을 모두 번(番)으로 나누고, 시녀 열 사람, 무수리 다섯 사람, 복기[卜只] 두 사람, 수모(水母) 두 사람, 방자(房子) 네 사람, 두 별실의 시인(侍人) 각각 두 사람, 무수리 각 한 사람,각 색장(色掌) 열두 사람을 두 번으로 나누어, 하나는 덕녕부(德寧府) 관원이 차례로 낮에 번들고, 하나는 대비 두 별실의 본댁의 환관 시녀가 본가에 통문(通問)하는 것과, 물건의 진납(進納)하는 것을 맡되, 사흘마다 덕녕부가 승정원에 고하도록 하였다. 《금석일반》
○ 6월에 명 나라 사신이 태평관(太平館)에 왔는데, 세조가 아무 날로 창덕궁 상왕 어전에서 사신을 청하여 잔치하기로 하였다. 박팽년ㆍ성삼문이 모의하여 그 날에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운검(雲劍)을 삼아서 잔치가 한창 벌어진 때에 일을 시작하여, 성문을 꼭 닫고 세조의 우익(羽翼)을 베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라 하였다.유응부가 말하기를, “임금과 세자는 내가 맡을 것이니, 나머지는 자네들이 처치하라.”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신숙주(申叔舟)는 나의 평생 친구이지만, 죄가 무거우니, 베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모두 그렇다고 말하고, 형조 정랑 윤영손(尹鈴孫) 화산 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사위이다. 을 시켜 신숙주를 죽이기로 하였다.성삼문이 김질에게 말하기를, “일이 성공하면 자네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이 수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계획이 다 정해졌는데,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이 좁고 또 찌는 듯이 더우니, 세자는 들어오지 말고, 운검(雲劍)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니, 세조가 그대로 하였다. 성승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니, 한명회가 말하기를, “이미 운검은 들이지 말라 하였다.” 하였다.성승이 물러나서 한명회 들을 쳐 죽이려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세자가 오지 않았으니, 한명회를 죽여도 소용이 없다.” 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들어가 치려 하니, 박팽년과 성삼문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또 운검을 들이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 뜻이라, 만일 여기서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성패를 알 수 없으니,다른 날에 임금과 세자가 같이 있는 때를 타서 거사하여 성공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유응부가 말하기를, “일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데, 만일 후일로 미루면 일이 누설될까 두렵다. 세자가 비록 본궁에 있지만, 모신과 적자가 모두 수양을 따라 여기에 왔으니, 오늘 이 무리를 다 죽이고 상왕을 복위시켜 호령하면서,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면 세자가 장차 어디로 도망하겠는가.비록 지혜있는 자가 있다 해도 계교를 내지 못할 것이니,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라, 놓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박팽년 등이 굳이 만전지계(萬全之計)가 아니라고 유응부를 말려 발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윤영손은, 계획이 정지된 것을 알지 못하고 신숙주가 한쪽 마루에 나가서 머리 감는 것을 틈타 칼을 가지고 앞으로 다가갔다. 성삼문이 눈짓하여 만류하니, 영손이 물러갔다. 김질이 일이 성사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정창손과 꾀하기를, “오늘 특별히 운검을 들이지 않고, 세자도 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천명이라, 먼저 고발하면 부귀를 누리리라.” 하여, 정창손이 그 말대로 김질과 함께 대궐에 달려가서 변을 고하기를, “신은 실상 알지 못하는데, 김질이 삼문의 무리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하였다. 세조가 김질을 불러들여 그 진상을 물으니, 김질이 대답하기를,“성삼문이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가 보았더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근일에 상왕께서 창덕궁 북쪽 담을 터놓고 유(瑜)의 예전 집에 왕래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 등의 헌책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런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하나, 그러나 이는 상왕을 좁은 곳에 넣어두고 한두 명 장사로 하여금 담을 넘어 들어가서 불궤(不軌) 한 일을 도모하려 함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상왕과 세자가 모두 어리니, 만일 이 뒤에 임금이 죽고 왕위에 서기를 다툰다면 상왕을 돕는 것이 옳으니, 꼭 너의 장인에게 이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곧 여러 승지를 불러들여 성삼문을 결박하고 심문하였다. 《추강집》 《해동야언(海東野言)》
○ 공조 참의 이휘(李徽)가 일이 발각됨을 듣고 정원에 나가서 성삼문 등의 음모를 고하여 아뢰기를, “신이 곧 아뢰려 하였으나, 그 실상을 알지 못하여 감히 곧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 세조가 승지 윤자운(尹子雲)을 보내어, 상왕께 고하기를, “성삼문이 심술이 좋지 않으나, 조금 학문을 알기로, 정원에 두었다가 일이 실수가 많기에 예방 승지를 공방(工房) 승지로 고쳤더니, 마음에 원망을 품고 말을 지어내기를,‘상왕을 유(瑜)의 집에 왕래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몰래 불측한 일을 하려 함이라’ 하고, 이어서 대신을 모조리 죽이려 하였다 하므로, 지금 국문하고 있다.” 하였다. 상왕이 윤자운에게 술을 주었다.
○ 세조가 편전(便殿)에 나와 좌정하니, 성삼문이 승지로 입시하였다. 무사로 하여금 끌어 내려, 김질이 고한 말로 심문하매, 성삼문이 한참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가 아뢰기를, “김질과 대질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세조가 질에게 명하여 그 실상을 말하니, 성삼문이 그치게 하고 웃으며 아뢰기를,“다 참말이다. 상왕께서 춘추가 한창 젊으신데 손위(遜位)하셨으니, 다시 세우려 함은 신하된 자가 마땅히 할 일이라, 다시 무엇을 묻는가.” 하고 김질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고한 것이 오히려 말을 둘러대어 직절(直截)하지가 못하다. 우리들의 뜻은 바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명하여 국문하니, 성삼문이 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ㆍ유성원ㆍ유응부ㆍ박정이 그 계획을 안다고 끌어대었다.세조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랏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 방언에 종친을 나으리라 한다. 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뺏으니,성삼문이 신하가 되어서 차마 군부(君父)의 폐출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나으리가 평일에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세조가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선위를 받을 때에는 어찌하여 저지하지 않고, 도리어 내게 붙었다가 이제 나를 배반하는가.” 하였다.성삼문이 말하기를, “사세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원래 그것을 저지하지 못할 바에는 물러가서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임을 알지만, 공연히 죽기만 해야 소용이 없겠으므로, 참고 지금까지 이른 것은 뒤에 일을 도모하려 함이라.” 하였다. 세조가 말하되, “네가 신이라 일컫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고 하는데, 네가 내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이다.겉으로는 상왕을 복위시킨다 하지마는, 실상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내가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일 믿지 못하거든 나의 집을 적몰(籍沒)하여 따져 보라. 나으리의 말은 모두 허망하여 취할 것이 없다.” 하였다. 세조가 극도로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쇠를 달구어 그 다리를 뚫고 그 팔을 끊으나,얼굴빛이 변하지 않고 다른 책에는 쇳조각을 달구어 배꼽에 놓으매, 기름이 지글지글 끓어 탔다 하였다. 쇠가 식기를 기다려 말하기를,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 독하다.” 하였다. 그때, 신숙주가 임금의 앞에 있었다. 성삼문이 꾸짖어 말하기를, “옛날에 너와 더불어 같이 집현전에 번들 적에 영릉(英陵 세종의 능호)께서 원손(元孫)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나의 천추만세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잊었는가. 너의 악함이 이 정도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세조가 신숙주더러 “뒤편으로 피하라.” 하였다.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하므로,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전하기를,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박팽년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며, 임금을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였다. 세조가 크게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그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 하였다. 박팽년이 말하기를, “내가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 하였다.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다. 거(巨)자로 썼다.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한 창고에 봉하여 두었다. 세조가 유응부에게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려 하였느냐.” 하니, 유응부가 말하기를, “잔칫날을 당하여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하였더니, 불행히도 간인이 고발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족하는 빨리 나를 죽이라.” 하였다.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상왕의 이름을 내걸고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구나” 하고, 무사로 하여금 살가죽을 벗기며 물으니, 유응부가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되 서생과는 같이 일을 꾀할 수 없다 하더니 과연 그렇도다. 지난번 잔치를 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하니, 너희들이 굳이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 하여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너희들은 사람이라도 꾀가 없으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하며, “만약 실정 밖의 일을 물으려거든 저 어리석은 선비에게 물으라.” 하고, 즉시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쇠를 달구어 배 아래 두 허벅지 사이에 넣으니, 지글지글 끓으며 피부와 살이 다 익었다. 유응부가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땅에 던지며,“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 끝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개(李塏)는 단근질하는 형신에 임하여 천천히 묻기를,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 하매, 세조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위지의 차례가 되자, 하위지가 말하기를, “사람이 반역이란 죄명을 쓰면 마땅히 베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다시 무엇을 묻는가.” 하매, 세조가 노여움이 풀려서 단근질하는 형신은 하지 않았다.성삼문에게 공모한 자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 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랴” 하였다. 그때에 제학 강희안(姜希顔)이 이에 관련되어 고문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묻기를, “강희안이 그 역모를 아느냐.” 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실지로 알지 못한다. 나으리가 선조(先朝)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아직 남겨 두어서 쓰게 하라.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 하여, 강희안은 마침내 죄를 면하였다. 성삼문이 나갈 때에 좌우 옛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성세를 이룩하라.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 하였다. 수레에 실릴 때에 임하여 시를 지어 이르되,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 擊鼓催人命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回頭日欲斜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하나 없으니 / 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 今夜宿誰家

하였다. 그 딸이 나이 대여섯 살쯤 되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 하였다. 그 종이 울며 술을 올리니, 몸을 굽혀서 마시고 시를 지어 이르되,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 입었으니 / 食人之食衣人衣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 所一平生莫有違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 一死固知忠義在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 속에 아른아른 / 顯陵松柏夢依依

하였다. 《추강집》에는 성 승의 시라 하였다 죽은 뒤에 그 집을 적몰하니, 을해년(1455) 이후의 녹봉을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아무 달의 녹이라 적어 놓았다. 집에는 남은 것이 없고, 침방에는 짚자리가 있을 뿐이었다. 이 개도 수레에 임하여 시를 지어 이르되,

삶[生]이 우(禹)의 구정(九鼎)처럼 중히 여겨야 할 경우에는, 삶도 또한 중요하거니와 / 禹鼎重時生亦大
죽음도 기러기 털처럼 가벼이 보아야 할 경우에는 죽음도 영화로세 / 鴻毛輕處死有榮
두 임을 생각하다가, 성문 밖을 나가노니 / 明發不寐出門去
현릉(顯陵)의 솔빛만이, 꿈속에도 푸르러라 / 顯陵松柏夢中靑

하였다. 박팽년 등의 벤 머리를 모두 달아매어 돌렸다. 《해동야언》에는 박팽년은 옥중에서 죽었다 하였다. ○ 형벌에 임하여 김명중(金命重)에게 얘기한 말로 보면, 옥중에서 죽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유성원은 그 때에 사예(司藝)로 성균관에 있었는데, 여러 선비들이 성삼문의 일을 고하니, 곧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영결하고, 사당으로 올라갔다. 그 아내가 오래 내려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가보니, 관디를 벗지 않고 반듯이 누워서 찬 칼을 빼어서 목에 대고 나뭇 조각으로 칼자루를 쳐서 목에 칼을 박았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아내는 그 까닭을 몰랐는데, 조금 있다가 관청에서 나와 시체를 가져다가 찢었다. 《추강집》 《동각잡기》
곤장을 때리면서 그 일당들을 국문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김문기(金文起)ㆍ권자신(權自愼)ㆍ송석동(宋石同)ㆍ윤영손(尹鈴孫)ㆍ이 휘(李徽) 및 우리 부자라.” 하였다. 사람을 시켜 묻기를, “상왕도 또한 아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권자신을 시켜 통지하였다.”고 말했다.이에 권자신ㆍ김문기 등 칠십여 인을 차례로 잡아 국문하고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여 하나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허조(許慥) 허후(許詡)의 아들는 이 개의 매부로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스스로 목찔러 죽었다. 《해동야언》
○ 동학사(東鶴寺) 《초혼기(招魂記)》에 말하기를, 이개(李塏) 공회(公澮)ㆍ박팽년(朴彭年) 헌(憲)ㆍ순(珣)ㆍ분(奮)ㆍ파(波)ㆍ녹대(彔大)ㆍ개동(丐同)ㆍ흔산(欣山)ㆍ금년생 여덟 사람ㆍ성삼문(成三門) 맹첨(孟瞻)ㆍ맹년(孟年)ㆍ맹종(孟終)ㆍ헌택(憲澤)ㆍ금년생 일곱 사람ㆍ하위지(河緯池) 연(璉)ㆍ반(班)ㆍ유성원(柳誠源) 귀련(貴連)ㆍ송련(松連)ㆍ박중림(朴仲林) 박팽년의 아버지ㆍ대년(大年)ㆍ기년(耆年)ㆍ영년(永年)ㆍ인년(引年) 박팽년의 아우ㆍ권자신(權自愼) 구지(仇之)ㆍ김문기(金文起) 현석(玄錫)ㆍ성 승(成勝)ㆍ삼고(三顧)ㆍ삼빙(三聘)ㆍ삼성(三省) 성삼문의 아우ㆍ유응부(兪應孚) 사수(思守)ㆍ박 정(朴崝) 숭문(崇文)ㆍ계남(季男)ㆍ즉동(則同)ㆍ윤영손(尹鈴孫)ㆍ송석동(宋石同) 창(昌)ㆍ녕(寧)ㆍ안(安)ㆍ태산(太山)네 사람ㆍ이유기(李裕基) 은산(銀山)ㆍ심신(沈愼) 올미(㐚未)ㆍ권서(權署)ㆍ권저(權著)ㆍ최사우(崔斯友)ㆍ정관(鄭冠)ㆍ봉여해(奉汝諧) 유(細)ㆍ김감(金堪) 한지(漢之)ㆍ선지(善之)ㆍ이호(李昊) 성손(成孫)ㆍ무손(茂孫)ㆍ이지영(李智英) 사이(思怡)ㆍ이의영(李義英)ㆍ장귀남(張貴南) 충(冲)ㆍ이말생(李末生)ㆍ이오(李午) 철(鐵)ㆍ금(金)ㆍ심상좌(沈上佐)ㆍ황선보(黃善寶)ㆍ조청로(趙淸老) 영서(榮緖)ㆍ이휘(李徽)ㆍ김구지(金九知)ㆍ이정상(李禎祥)ㆍ최치지(崔致地)ㆍ득지(得地)ㆍ허조(許慥) 연령(延齡)ㆍ구령(九齡)
○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부인 최씨(崔氏)는 곧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어머니인데, 그 아들 권자신 예조 판서 과 더불어 극형을 받았다. 《해평가전(海平家傳)》
○ 성희(成熺 성승의 종제이고 참판 격(檄)의 손자)는 집현전에 벼슬하였는데, 성삼문과 마음이 같았다. 열 차례나 엄하게 국문하였으나,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김해(金海)로 귀양 갔다가 3년 후에 풀려나 돌아왔는데, 슬프고 분하여 홧병으로 죽었다. 성종때에 도승지 채수(蔡壽)가 천변(天變)을 기회로 아뢰어 병자 옥사에 연좌된 수백 인을 소방(疏放)하였다. 용재집
○ 정창손과 김질의 죄를 특별히 사하여 공신을 삼아서, 정창손은 좌익(佐翼) 삼등에서 이등에 승진하고, 김질은 좌익 삼등으로 추록(追錄)하였다. 김질이 사예(司藝)로서 고변하고 군기정(軍器正)으로 칠월에 녹훈하였다.
○ 명하여 집현전을 파하고, 그곳에 있는 서책을 예문관(藝文館)으로 옮겼다.
○ 정보(鄭保)를 연일(延日)에 귀양보냈다. 정보의 성질이 방랑하여 구속을 받지 않으며, 성삼문ㆍ박팽년과 사이가 좋았다. 그 서매(庶妹)가 한명회의 첩이 되었는데, 육신의 옥이 일어날 때에, 한명회의 집에 가서 묻기를, “공이 어디 갔는가.” 하니, 누이가 말하기를, “죄인을 국문하느라고 대궐에 있습니다.” 하였다. 보가 손을 내두르며 말하기를,“그들이 무슨 죄인인가. 공이 만일 이 사람들을 죽이면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고, 곧 옷을 떨치고 가버렸다. 한명회가 집에 돌아와서 그 말을 듣고 곧 입궐하여 아뢰기를, “정보가 난언(亂言)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친히 국문하니, 아뢰기를, “항상 성삼문ㆍ박팽년을 성인 군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였다.좌우가 아뢰기를, “제가 이미 자백하였으니, 처형하소서.” 하였다. 세조가 거열형을 명하고 나서 묻기를, “이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가 아뢰기를, “이는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하였다. 급히 명하여 처형을 그치게 하고 이르기를, “충신의 후손이니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연일현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병자록(丙子錄)》
한명회가 정보의 서매를 첩으로 삼고, 노비 삼십 구(口)를 주었는데, 한명회가 생각하기를, 노비를 적게 준다고 원한을 품었나 생각하였다가 이 때에 와서 고변(告變)하였던 것이다. 원손 이규(李珪)가 격쟁(擊錚)하여 원통함을 호소하고 이어서 양사(兩司)가 그 원통함을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 사람을 죽이면 자문(子文)의 후손을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므로, 죽이는 것을 감하여 단성(丹城)으로 귀양보냈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대간이 전라 감사 이석형(李石亨)을 국문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석형이 세종조에 삼장원(三壯元)에 올라 명성이 한때에 으뜸이 되었는데, 성삼문ㆍ박팽년 등 여러 사람과 절친하였다.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 마침 내간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자,전라 감사를 제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옥사가 일어났으나, 외임인 까닭으로 연루되지 않았다. 순찰 중에 익산(益山)에 이르러 여러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 벽 위에 시를 써 이르되,

우(虞) 나라 때 이녀죽(二女竹)과 / 虞時二女竹
진(秦) 나라 때 대부송(大夫松)이로다 / 秦日大夫松
비록 그 슬픔과 영화로움의 차이는 있을망정 / 縱有哀榮異
같은 절개는 대와 솔이 염량(炎凉)이야 있을소냐 / 寧爲冷熱容

하고, 병자 6월 27일 작(作)이라고 썼다. 대간이 시의 뜻을 가지고 국문하자고 아뢰어 청하니, 세조가 시를 보고 이르기를, “시인의 뜻이란 것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니, 어찌 반드시 국문까지 하랴.” 하니, 일이 드디어 끝나고 말았다. 《해동악부(海東樂府)》 <월사집비(月沙集碑)>
○ 상왕이 별궁에 있는데, 성삼문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니, 정인지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지난번에 성삼문들의 음모를 상왕이 미리 알아서 종사에 죄를 얻었으니, 그대로 상왕의 위호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일찍 도모하여 후환을 막으소서” 하였다. 《영남야언(嶺南野言)》
○ 6월 21일 계축 《야사(野史)》에는 병자(1456) 6월이라 하였고, 《국승(國乘)》에는 정축 6월이라 하였다. 에 백성 김정수(金正水)가 제학 윤사균(尹士昀)에게 말하기를, “판돈령(判敦寧) 송현수(宋玹壽)와 판관(判官) 권완(權完)이 반역을 꾀한다.” 하였다.윤사균이 그대로 아뢰니, 세조가 정인지ㆍ정창손ㆍ신숙주ㆍ박중손(朴仲孫)ㆍ홍달손(洪達孫)ㆍ홍윤성(洪允城)ㆍ윤사로(尹師路)ㆍ이인손(李仁孫)ㆍ양정(楊汀)ㆍ권람(權擥)ㆍ구치관(具致寬)ㆍ황효원(黃孝源)ㆍ한명회(韓明澮)ㆍ조석문(曺錫文)ㆍ권지(權摯)ㆍ김질(金礩) 등을 불러들여, 송현수(玹壽)와 완(完)을 금부에 가두었다. 《금석일반》 ○ 권 완의 딸이 상왕의 후궁이었다.
○ 갑인에 혜성(彗星)이 보였다.
○ 26일 무오일에 현덕왕후를 추폐(追廢)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 교지를 내리기를, “전일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하므로, 종친 백관이 말을 합하여, ‘상왕이 종사(宗社)에 죄를 얻었으니, 서울에 편안히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내가 굳이 윤허하지 않은 것은 나의 처음 뜻을 보전하려 한 것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무리가 뒤를 이어 끝나지 않으니,내가 어찌 사사로운 정의로 큰 법을 굽히어 하늘의 명령과 종묘 사직의 중함을 돌아보지 아니하랴. 특별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영월(寧越)에 출거(出居)케 하였으며, 의식을 후하게 주어 목숨을 끝까지 보존토록 하고 나라의 인심을 진정케 하노니, 너희 정부는 안팎에 이를 깨우쳐 일러 주라.” 하였다.28일 경신일에 상왕을 강봉하여 노산군으로 봉하여 첨지 어득해(魚得海)에게 명하여 군사 50명으로 호송하고, 군자정(軍資正) 김자행(金自行)과 내시 부사(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이 따라갔다. 금성대군 유(瑜)를 순흥부(順興府)에 안치하였다. 《금석일반》
《실록》에 말하기를, 병자 12월에 영상 정인지ㆍ우상 정창손ㆍ찬성 신숙주ㆍ참찬 황수신(黃守身) 등이 아뢰기를, “지금 상왕이 임금과 명위(名位)가 서로 같으므로, 소인들이 틈을 타서 반란을 꾀하는 자가 있으니, 근일의 성삼문의 난이 그것입니다. 다른 곳에 피거(避居)하게 하여 간특한 일을 막으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전교하였다.
○ 이판 권람ㆍ호판 이인손(李仁孫)ㆍ예판 박중손ㆍ병판 홍달손ㆍ형판 성봉조ㆍ공판 김하ㆍ이참 박원형(朴元亨)ㆍ호참 어효첨(魚孝瞻) 등이 아뢰기를, “상왕으로 하여금 피거(避居)하게 하여 혐의를 끊게 하소서.” 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 정인지 등이 다시 아뢰기를, “비록 친부자간이라도 만일 혐의스러운 일이 있으면 오히려 피하는 것이오니, 신들의 청을 따라서 종사의 대계를 굳게 하소서.” 하였으나 전교하기를, “중국에 정통(正統)의 고사(故事)가 있고, 또 내 뜻이 본래 이와 같지 않으니, 경들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고 잇달아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 대사헌 안숭효(安崇孝)와 좌사간 권개(權愷) 등이 아뢰기를, “이 개의 무리가 복위를 꾀하여 상왕을 끼고서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 하였는데, 상왕도 참여하여 들었으니, 종사의 대계에 있어서 어떻게 합니까. 상왕이 마땅히 궁에서 피하여 외부로 옮기어 공론을 따라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왕이 영월을 향하여 떠나는데, 세조가 환관 안로(安潞)를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였다. 상왕이 안로에게 이르기를, “성삼문의 모의를 내가 알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금석일반》
7월에 금부도사 그 이름은 잃었다. 가 노산군을 영월 서강 청령포(淸泠浦)에 모셔다 두고 밤에 곡탄(曲灘) 언덕 위에 앉아 슬퍼서 노래를 지었는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맘 같도다. 울어 밤길 예도다.” 라 하였다. 《병자록》 ○ 김용계(金龍溪) 지남(止男)이 금강에 이르러 여랑(女娘)의 슬픈 노래를 들었는데, 대개 도사의 지은 것이었다.
○ 조금 뒤에 객사(客舍) 동헌(東軒)에 옮겨 거처하였는데 민간의 말에 전하기를 청령포(淸泠浦)는 수재(水災)를 입을 염려가 있으므로, 객사로 옮겼다 한다. 매양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앉아 밤에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매, 소리가 먼 마을까지 들렸다. 또 매죽루 아래에서 근심스럽고 적적하여 짧은 글귀를 읊기를,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딴데는 월욕저촉혼제(月欲低蜀魂啼)라 하였다. / 月白夜蜀魂啾 一作月欲低蜀魂啼
시름 못 잊어 딴 데는 상사억(相思憶)이라 하였다. 다락에 기대었네 / 含愁情 一作相思憶 倚樓頭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딴 데는 이성고 아심비라 하였다. / 爾啼悲我聞苦 一作爾聲苦我心悲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 / 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 / 寄語世上 一作爲報天下 苦勞 一作惱
춘삼월 자규루(子規樓)엘랑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 / 愼莫登春三月子規樓 一作春三月子規啼山月樓

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시를 지어 이르되,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단신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 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 청하나 잠들 길 바이 없고 / 假眠夜夜眠無假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 窮恨年年恨不窮
울음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그믐달이 비추고 / 聲斷曉岑殘月白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꽃 붉게 떨어지는구나 /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 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 天聾尙未聞哀訴
어쩌다 서러운 이 몸 귀만 홀로 밝았는고 / 胡乃愁人耳獨聰

하였다. 매양 맑은 새벽에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를 입고 걸상에 앉아 있으면 보는 자가 일어나서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내가 가물 때 향을 피워 하늘에 빌면 비가 쏟아졌다. 《병자록》 《전화적책(前火迹冊)》 《추강냉화》 《송와잡기(松窩雜記)》
○ 세조가 강원 감사 김광수(金光晬)에게 이르기를, “노산군에게 사철 과실이 나는 대로 연달아 보내주고, 원포(園圃)를 설치하여 참외ㆍ수박ㆍ채소 같은 것을 많이 준비하여 지공(支供)하며, 달마다 수령을 보내어 문안하게 하라.” 하고, 내시부 우승직(內侍府右承直) 김정(金精)을 보내어, 노산에게 문안하였다. 《장릉지(莊陵志)》
상고해 보건대, 상왕을 금성(錦城)의 집으로 내보내고, 상왕을 강봉하여 영월에 안치하자고 청한 두 일을, 《국승(國乘)》에는 모두 정축년(1457)이라고 실려 있는데, 《현덕왕후 천장지(遷葬誌)》에는 병자년(1456)이라고 하였고, 성삼문 등이 피살되고, 노산을 군으로 강봉하여 밖으로 내보냈다는 그 밑에 또 명년 정축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강봉하여 지방으로 쫓아낸 것은 실상 병자년 옥사가 이루어지던 날에 있은 것이니, 야사에 기록된 것이 《해동야언》과 《논사록(論思錄)》에는 모두 성삼문의 일이 발각된 뒤에 노산을 옮겼다고 하였다. 대개 모두 거짓말이 아니다. 《금석일반(金石一班)》에 실린 노산이 안로(安潞)에게 고한 말은, 노산의 죄를 성립시킨 것이나, 성삼문이 죽은 뒤에 영월로 옮긴 증거가 되는 것이다.또, <춘삼월 자규루> 시와 날이 가물어서 비를 빈 두 가지 일로 참작하여 보면, 영월로 옮긴 것은 이미 정축년 봄 전에 있은 것이 분명하다. 이에 《소릉지(昭陵誌)》로 증거를 삼아서 금성의 집으로 나간 것과 영월로 옮긴 사실을 병자년에 실어 둔다. 《실록》에는 두 가지 일을 모두 정축년에 실어 놓았는데, 음애(陰崖)가 말하기를,“이것은 특히 여우와 쥐 같은 무리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기록으로서 후일에 실록을 편찬한 자들이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니, 실록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하였다. 《노릉지》

[주D-001]불궤 : 반역(反逆)을 말한다.
[주D-002]격쟁 : 지극히 원통함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하소연하려 할 때, 거동하는 길가에서 꽹과리를 치며 하문(下門)을 기다리는 일.
[주D-003]진문 : 초(楚) 나라의 어진 신하인데 그의 조카가 반역하였으므로 그 일족(일족)을 멸하는데 자문의 아들도 죽게 되었더니 초왕(楚王)이 “자문이 없으면 어찌 선(善)을 권하랴” 하고 그의 아들을 용서하였다.
[주D-004]이녀죽(二女竹) : 우순(禹舜)이 남방(南方)에 놀러 갔다가 죽어 그의 두 비(妃)가 소상강(瀟湘江)에서 슬피 울어 눈물이 대숲에 뿌려져 반죽(班竹)이 되었다. 열녀(烈女)의 상징(象徵)이다.
[주D-005]대부송(大夫松) :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놀러 갔다가 도중에 비를 만나 다섯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였다. 그 소나무에게 대부(大夫)의 벼슬을 주었다.
[주D-006]자규새 : 자규(子規)는 두견새인데, 일명(一名)은 두우(杜宇)라고 한다. 전설(傳說)에 촉 나라 임금 두우가 신하에게 쫒겨나와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으므로 우는 소리가 ‘귀촉도 불여귀(歸蜀道不如歸)‘라 한다.

약천집 제19권
 비(碑)
노량진(露梁津)에 있는 육신묘비(六臣墓碑) 무자년(1708, 숙종 34)


옛날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왕위를 선양했을 적에 충신과 열사들이 단종을 위하여 전후로 목숨을 바친 자가 많았는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병자육신전(丙子六臣傳)》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그러므로 단종 때의 일을 언급할 적에 사람들이 반드시 육신이라고 칭하였다.
경성(京城)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한강 너머 노량진 강가에 다섯 기(基)의 묘소가 있으니, 각각 짧은 비갈에 박씨지묘(朴氏之墓), 유씨지묘(兪氏之墓), 이씨지묘(李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라고만 표시하고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여섯 성씨 중에 네 개만 있고 두 개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육신의 묘라고 전해온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성씨(成氏)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하씨(河氏)의 묘는 영남(嶺南)의 선산(善山)에 있고 유씨(柳氏)의 묘만 유독 소재지가 전해지지 않는다. 짐작컨대 육신이 죽을 적에 그 종족(宗族)이 망하여 없어져 의인(義人)이 시신을 거두어서 묻었으나,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주선하였으니 형편상 어렵고 쉬움이 혹 차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혹은 고향에 시신을 모셔다 장례하기도 하고, 혹은 끝내 시신을 땅에 묻지 못했는가 보다.
또 듣자하니 총관의 묘소가 또 홍주(洪州)의 고향에 있다고 하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형벌을 받은 뒤에 지체(肢體)를 각각 하나씩 묻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라고 한다. 만일 이 말이 과연 맞는다면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천추에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하다. 또 이곳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해 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어느 해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비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에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 육신이 죽을 때에 살아남은 자손들이 없고 오직 박씨만이 유복의 손자가 있어 이름이 노예에 뒤섞여서 수사(收司)를 면하였다. 몇 대가 지난 뒤에야 조정에서 비로소 충성을 가엾게 여겨 녹용하였다.
6세손 익찬(翊贊) 숭고(崇古)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노량진의 묘소는 비록 근거할 만한 문적이 없어 의심하고 있으나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있으니, 이것이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어찌 성씨만 있고 이름이 없다 하여 믿지 않고 돌보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옛 봉분을 더 쌓고 새 비갈을 세웠으며, 또 상공(相公) 허목(許穆)에게 비문을 요청하니, 이름하기를 ‘육신의총비문(六臣疑塚碑文)’이라 하였으나 미처 비석에 새기지 못하였다.
금상(今上) 5년 기미에 성상이 노량진에서 열무하실 적에 여러 공경(公卿)들의 아룀을 따라 강 건너에서 묘를 바라보시고는 한탄하고 감회를 일으키시어 묘역에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중외의 많은 선비들이 이에 분발되어서 묘소 곁에 사우를 창건하고 육신을 나란히 제향하였다. 17년 신미에 상이 장릉(章陵)에 전알(展謁)하러 가실 적에 연(輦)이 묘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성상은 또다시 관직을 회복하고 치제하게 하였으며 이어서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아, 이보다 전에는 이른바 육신의 묘라는 것이 다만 구릉의 한 줌 흙더미이고 부식된 한 조각의 빗돌이어서 강가의 늙은이와 나루터의 아전들이 오갈 적에 은밀히 이곳을 가리키며 말로 서로 전했었는데, 이제는 이 사실이 공경의 아룀에 올랐으며 성상이 두 번이나 보시고 융숭한 예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이미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으라는 은혜로운 명령이 있었고, 또 사우를 세워 제향하고 관직과 품계를 다시 회복하였으며, 제사를 특별히 내려주고 화려한 편액을 밝게 게시하였다.
조정에서 표창함이 이와 같이 빛나고 드러났는데도 마침내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유허(遺墟)에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두어서 충성스런 혼과 굳센 넋으로 하여금 황폐한 풀과 차가운 연기와 도깨비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가운데 길이 매몰되게 한다면, 당시 의사들이 봉분을 쌓고 비갈을 세운 고달픈 마음을 저버림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오늘날 성조(聖朝)에서 충신을 표창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보기 드문 은전을 헛되게 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박공(朴公)의 영혼 또한 어찌 ‘내 다행히 남은 혈손(血孫)이 있다.’고 말씀하시겠는가.
숭고의 손자인 청안 현감(淸安縣監) 경여(慶餘)가 이를 깊이 염려하고 여러 어른들과 상의하여 이 일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해서 신도(神道)에 비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와서 명문(銘文)을 부탁하므로 나는 늙고 혼몽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생각하기를, “그렇다. 노량의 묘소가 육신의 무덤이 됨은 믿을 만하고 의심할 수 없음이 참으로 그대 조고의 유의(遺意)와 같다. 저 옛날 장릉의 지위와 칭호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에는 오히려 기휘(忌諱)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끝까지 말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조정에서 육신에 대하여 흔쾌히 권장해 주어서 풍성(風聲)을 길이 세울 뿐만 아니라 장릉을 복위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노량의 묘소에 있어서만 유독 의심스러워 신빙할 수 없다 해서 단단한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옛날에 어두운 것을 제거하고 새로 드러냄을 이루어 지금에 밝혀서 장구한 후세에 분명히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그 일을 차례로 쓰고 명한다.

서호의 남쪽 강안에 / 西湖南岸
옹기종기 무덤 있는데 / 有墓纍纍
각각 표시한 글이 있어 / 各有其表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적혀 있네 / 五碣四氏
예로부터 전해 오기를 / 傳道自古
육신이 묻힌 곳이라 하는데 / 六臣所閟
성씨는 여섯이나 / 其氏有六
이곳에 네 개만 갖추어졌네 / 此具其四
화가 일어나던 때에 / 禍發之際
의를 사모하여 묻은 것이니 / 事出慕義
그 이름을 쓰지 않음은 / 不書其名
까닭 있어서임을 아노라 / 知有所以
어이하여 후세 사람들은 / 云何後人
여기에 의심을 하는가 / 有疑于是
비록 문적이 없어서이나 / 雖緣無籍
실은 기휘함을 염려해서라오 / 實慮有忌
다행히 성조를 만나 / 幸會聖朝
성상의 마음에 감동함이 있으니 / 有感天意
충절을 표창함이 / 褒忠獎節
지극하지 않음이 없네 / 靡有不至
백일의 광채가 / 白日之光
깊은 땅속까지 통하여 / 洞徹九地
넓은 도량과 큰 은덕 / 曠度大德
형용하여 말할 수 없어라 / 不可擬議
옛날에 기휘하던 것 / 昔者所諱
이제는 모두 피함이 없다오 / 今悉無避
생각건대 차례로 표시한 글 / 言念列表
저와 같이 없어지지 않았고 / 不泐如彼
또 봉분하고 나무를 심어 / 又加封植
이와 같이 훌륭하니 / 其盛若此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 人之然疑
이제는 끝낼 수 있으리라 / 汔可已已
취금헌(醉琴軒)은 후손이 있어 / 醉琴有後
함께 육신(六臣)의 제사를 주관하네 / 並主六祀
전하여 육세에 이르러서 / 傳至六世
무너진 묘소를 수리하고 / 曾修墓圮
또 비문을 기술하였으나 / 且述碑文
아직도 곧바로 쓰지 못하였는데 / 猶靳直致
지난해에 이르러 / 爰及頃年
장릉을 복위하였다오 / 莊陵復位
무덤을 높여 새로 만든 듯하고 / 崇岡若新
여러 석물을 다 구비하니 / 象設咸備
군주와 신하는 일체인데 / 一體君臣
일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 事豈有異
이곳에 묻혀 있는 넋을 받듦은 / 奉玆降魄
더욱 의심할 것이 없도다 / 尤宜無貳
분명히 글을 새겨서 / 明言顯刻
천 년에 길이 보이노니 / 用視千禩
부디 영령들이여 / 庶幾英靈
끝까지 이곳에 모이소서 / 終焉此萃


 

[주D-001]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 : 총관은 아버지인 성승(成勝), 승지는 그의 아들인 성삼문(成三問)을 가리킨다.
[주D-002]수사(收司) : 법을 맡은 기관에 체포됨을 이른다.
[주D-003]취금헌(醉琴軒) : 박팽년(朴彭年)의 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