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수락산 산행/박세당 관련 기록

박세당(朴世堂) 관련기록 박세당은 수락산아래 묘지가 있다. (펌)

아베베1 2009. 11. 4. 16:43

【성 명】 박세당(朴世堂)
【생몰년】 1629(인조 7)∼1703(숙종 29)
【본 관】 반남(潘南) 박(朴)
【자·호】 계긍(季肯), 서계(西溪), 잠수(潛馬)
【시 호】 문절(文節)
【저서·작가】《<사록(思辨錄)》,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색경(穡經)》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학자

1629(인조 7)∼1703(숙종 29).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 · 잠수(潛馬)이며 이조
참판 박정(朴炡)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남원에서 태어났으며, 현종 1년(1660) 증광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예조 좌랑 · 병조 좌랑 · 정언 · 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 · 북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수찬을 거쳐 이듬해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아 장형을 받고 이 해 동지사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그만두고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 : 도봉산하(道峰山下) 다락원)으로 물러났다. 그뒤 숙종 23년(1697) 4월에 한성부 판윤 등 수차례 관직이 주어졌지만 거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연구와 저술에 힘쓰는 한편 문도들을 강학(講學)하는데 주력하였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송시열(宋時烈)을 축으로 한
노론계(老論系)가 정국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입장에 섰던 그로서는 정치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가 정치적 박해를 받게된 계기를 살펴보면, 1702년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 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을 비판한데서 비롯되었다. 이어 1703년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밝힘으로써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그가 죽으면서 그의 아들(박태유(朴泰維) · 박태보(朴泰輔))에게 남긴 유언이 “장후물설조석상식(葬後勿設朝夕上食)”으로 당시 예론(禮論)을 이데올로기로서 이용하던 정치세력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입장은 당대의 정통 해석인 주자설(朱子說)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당대의 조선조
유학을 지배하던 주자설의 절대화된 권위에 대해 다각적인 회의를 가졌고, 따라서 주자가 혹심하게 비판한 구설들에 상당한 가치를 인정하였다. 다시 말해 정주학적(程朱學的) 학풍과 사상이 강요되던 테두리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태도로 고전의 본뜻을 찾아보고자 한 점에서 이후 진보적인 학문을 촉진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少論系)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 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그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원(伸老)되었으나 20년 정도가 지나서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재 수락산(水落山) 중턱(노원구 상계동) 석림사(石林寺) 옆에 그의 묘소가 있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 《사변록(思辨錄)》,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책 및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6책과 《색경(穡經)》이 전한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景宗實錄, 朝野輯要, 朴西溪와 反朱子學的 思想(李丙燾, 大東文化硏究 3, 1960), 西溪 朴世堂의 詩經論(金興圭, 韓國學報 20, 1980)
【관련항목】
권상유(權尙游) 남취명(南就溟) 이제(李濟)

 

반남인 서계선생은 전주인 문정공  영의정  최석정 선조님과의 관련기록을 찾을수 있다

 

최석정(崔錫鼎;1646-17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 17세에 감시 (監試)초시에 장원을 하였고, 1666년(현종7년)진사시에 장원하였으며 동시에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올라 홍문관원이 되었고, 응제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병조정랑·승정원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양부모의 상을 당하여 일단 관직에서 물러났다. 기사환국 이후에는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안동부사·연안부사를 역임하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물러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한성판윤·사헌부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장희재(張禧載)를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홍문관대제학·이조판서에 임명된 뒤에는 서얼출신을 삼조(三曹)에 소통하자는 건의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7년 우의정에 올랐고,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1699년 좌의정을 거쳐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붕당문제보다 도학(道學)이 쇠퇴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이유로 파직, 유배의 명령이 내려졌다가 다음해 석방되어 진천에 거주하였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1710년까지 모두 열 차례 입상(入相)하였다. 그의 저서 예기유편(禮記類篇)은 주자의 주와 다르다고 비판받기도 하는 등 노론의 집중공격을 받자 1711년 이후 미사(渼沙)에 은퇴하였다. 1715년 기사(耆社)에 들어갔고, 이해 사망하였다. 청주 대율리(大栗里)에 장례지냈으며, 뒤에 숙종묘에 배향되었다. 성격이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하였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업적 관료의 성격이 강하여 의리·명분론에 집착하지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하였던 행정가였으며, 당쟁의 화를 가능한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1687년(숙종 13년)에 璇璣玉衡을 보수하였다. 편저에 전록통고하(典錄通考)가 있고, 저서로 예기유편과 명곡집(名谷集) 36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종가기행 ⑪] 西溪 朴世堂
조선 후기 대학자… 후생 가르치다 이단으로 몰리기도

반남 박씨 서계 박세당
1629 (인조7) - 1703 (숙종29) 자 季肯, 호 西溪, 시호 文節

▲ 박세당 영정

박세당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고려 시대 학자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의 10대손이며, 좌참찬 박동선의 손자요 이조참판 박정(朴炡)의 네째아들이다.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을 배필로 맞아 태유(泰維)와 태보(泰輔), 태한(泰翰)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629년(인조7년) 8월 10일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부친상을 당했다. 소년 시절 고모부인 교관 남사무에게 글을 배운 뒤 처남인 남구만, 처숙부인 남이성(南二星) 등과 경서를 강론했다. 32세에 증광문과를 장원 급제했다. 그의 둘째아들 역시 문과에 장원 급제했으니 이처럼 부자가 겹경사를 한 것은 조선 시대에 드물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1세에 모친상, 22세에 셋째 형 사망, 38세에 부인 사망, 55세에 중형(仲兄)사망, 58세에 장자 사망, 61세에 둘째아들의 사망이 이어졌다.

서계 박세당의 글을 읽다보면 그는 시대를 초월해 정신적으로 폭넓게 사유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40의 불혹(不惑) 나이에 말 그대로 세상의 부러움을 떨쳐버리고 자아 성찰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락산 석천동은 부친인 금주군(錦洲君)의 유업이 있던 곳이며 먼저 간 아내 의령 남씨가 잠든 곳이다. 채소밭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밤이면 삼간초옥에서 성현의 경전을 고증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 태도로 완성한 '사변록' 책은 왕명으로 조목조목 비판 받아 끝내 사문난적이라는 극단적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실록에 나타난 서계에 대한 인물평은 극단적이다. 숙종26년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박세당은 벼슬이 낮은 때부터 성밖 교외에 살면서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후생들을 가르치면서 사서를 주석하였다. 그는 주자와 다르게 해석한 것이 많았으니 이를 두고 이단(異端)이라고 말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서계는 한갓 문사(文士)이지 이단자는 아니다.

▲ 문과급제 교지

삭탈관직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그가 이인엽(李寅燁)이 상소하여 풀려나 석천동 정침에서 임종한 것은 그나마 천행이다. 숙종 실록에 박세당과 관련된 글이 115건, 사변록 글이 18건에 달하며, 숙종29년에만 10여 건이 실려 있다.

비난의 포문은 홍계적(洪啓迪:1680-1722)이 유생 108명과 함께 열었다. 이들은 박세당의 글이 성인을 업신여겼으며 정인(正人)을 욕했다고 단정한 뒤, 이경석 비문과 사변록을 거두어 불태움과 동시에 엄중한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해 국왕의 조치는 신속했다. 즉시 삭탈관직과 함께 문 밖에 내치게 했고 유신(儒臣)들에게 조목조목 따져 잘못을 지적한 글을 올리게 했다.

김창흡 등이 가장 먼저 팔을 걷고 서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李坦)과 이인엽(李仁燁) 등이 구명소를 올려 반박했다. 이탄은 후일 서계의 연보를 작성한 사람이며 이인엽은 상소로 서계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한 이다.

서계는 1703년 (숙종 29년) 75세로 5월 21일 세상을 떠나 수락산 서편의 장자골에 잠들었다. 아들 박태보의 주선으로 그린 영정을 통해 62세 때의 생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사변록(思辨錄)에 얽힌 이야기
사서·시경·서경 새로 해석… '사문난적' 낙인

사변록은 박세당의 주요 저술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은 사서와 시경과 서경의 본문을 주석한 것으로 모두 14책 분량이다. 특히 그가 역점을 둔 것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즉 사서인데 그중에도 대학과 중용을 중시했다.

그는 기존의 금과옥조로 받들던 주자의 견해라 할지라도 다시 천착해 자신이 이해한 내용으로 새로 주석을 달았는데 경전의 이러한 해석은 조정과 학계에 큰 문제를 야기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극단의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사문난적이란 성현의 학문과 상반된 해괴한 논리를 펼쳐 정도를 해치는 도적(盜賊)이라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사문난적이라는 극단적 공격을 받았던 인물로 윤휴와 박세당 그리고 허균을 들 수 있다.

윤휴는 서계보다 12년 선배로 서로 학문적인 교감이 있었다. 국왕으로부터 조목조목 사변록의 잘못을 지적해 올리라는 명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 일을 맏은 이는 응교 권상유(權尙游: 1656-1724)와 교리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이었다. 이들은 공동 작업 형식으로 진행했다.

권상유는 우암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의 아우로 이조판서까지 이르렀던 학자요 정치가다. 권상유는 왕명에 따라 부담은 가지면서도 변파록(辨破錄)을 지어 올렸는데 이를 본 농암 김창협은 "나는 그의 학식은 따를 수 없다"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이관명은 양관 대제학과 우의정에 까지 이른 학자요 정치가였다. 그의 아우인 이건명(李健命) 역시 우의정을 지낸 혁혁한 전주 이씨 밀성군파(密城君派) 출신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로 이조좌랑 직에 있었다.

결국 변파록은 두 신하의 사퇴로 우여곡절을 겪은 뒤 1703년(숙종29) 8월에 결국 이관명이 완성해 올렸고 이를 홍문관에 보관했다.

수찬 남취명은 사변록을 불태워 없애라는 왕명에 대해 중국에서도 유가에 반대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그리고 불가(佛家)의 글을 그렇게 하지 않은 사실을 들어 조정을 설득했다.

후손들에게 남긴 처세의 글
타고난 "명운을 잘 지켜라"

누구나 자신이 죽은 뒤 후손들이 반듯하게 잘 살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있을 때 당쟁의 격류에 휘말린 두 아들이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면 남은 자손들에 대한 감정이 보다 더 애틋할 것이다.

서계는 남은 아들과 두 손자 등 자손들에게 경계함(戒子孫文)이라는 글을 남겼다. 1696년(68세)에 쓴 이 글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보존해 타고난 명운을 잘 지키는 법(保身全命之道)'으로 요약된다.

모두 네 편으로 나누어진 이 글에서는 줄곧 '조심(愼)'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삼년 상식(上食)은 예가 아니다. 옛날에는 없던 것이다"라고 하면서 내 자손들은 남이 괴이하게 여길지라도 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인 가르침보다 강한 어투다.

매사에 조심해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되 그것이 진리와 어긋난다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 외에 독서의 중요성과 그 방법, 형제 간의 우애 등을 가르쳤다. 서계공파 종중에서는 이 글을 별본으로 인쇄 배포해 후손들이 읽고 실천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저술
문집 22권 11책 목판본으로 간행

문집 22권 11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사변록 외에 농서(農書)인 색경(穡經) 2권 2책 등이 있다. 문집에는 시가 약 800여 수, 상소와 차자(箚子)가 56편, 편지 60여 편, 변론 4편, 서문 13편, 기문 4편, 제발(題跋) 14편 등이 실려 있다. 묘지와 묘갈 등 묘도(墓道) 문자(文字)도 70여 편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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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朴世堂, 1629년 음력 8월 10일~1703년)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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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1629년(인조7년) 음력 8월 10일 아버지의 부임지인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났다. 당대의 명문가였으나 박세당이 4살 때 부친이 병사한 이후로 가세가 기울어 10세가 되어서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데 힘썼다.

1660년(현종 1년) 32세의 나이로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664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았다. 그 해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갑술옥사에 승지가 되고 공조판서를 거쳐 1700년(숙종 26년) 음력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박세당은 소론 출신으로 노론계의 송시열과 대립 관계였다. 이러한 연유로 노론에게 여러 번 비난을 받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1702년(숙종 28년)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비문 속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있어, 노론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삭탈관직 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다. 일설에는 1703년(숙종 29년)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적인 학풍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고 한다.[1]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李坦)· 이인엽(李寅燁) 등의 소청으로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주요 저서 [편집]

  • 《색경(穡經)》
  • 《중용주해(中庸註解)》
  • 사변록(思辨錄)》

가족 관계 [편집]

  • 할아버지 : 좌참찬 박동선
  • 아버지 : 이조참판 박정(朴炡)
  • 처남 : 남구만
  • 처숙부 : 남인성
  • 아들 : 박태유(朴泰維), 박태보(朴泰輔), 박태한(朴泰翰)
  • 딸 2명.

출처 및 관련 자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