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백사 이항복 신도비

오성부원군 이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백사 이항복 신도비(펌

아베베1 2009. 11. 4. 17:45

신도비명
유명 조선국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오성부원군 이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선조 대왕(宣祖大王) 25년에 일본(日本)의 추장(酋長) 수길(秀吉)이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옴으로써 경도(京都)가 함락되고 거가(車駕)가 파천하였다. 오직 이때 신하가 있어 천조(天朝)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재차 종사(宗社)를 회복시켰으니, 그가 바로 백사(白沙) 이공(李公)이다. 폐주(廢主)가 즉위하여서는 동기(同氣)를 죽이고 자전(慈殿)을 폐하려고 꾀하자, 간신(奸臣) 이이첨(李爾瞻)ㆍ정조(鄭造) 등이 그 일을 더욱 종용함으로써 천상(天常)이 절멸되어 조선 삼천리 강토가 거의 요괴(妖怪)의 지역으로 빠지게 되었다. 오직 이때 신하가 있어 항거하여 말하고 바르게 고해서 이륜(彝倫)을 붙들어 세웠으니, 그가 바로 백사 이공이었다. 그래서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중흥(中興)의 업적은 해동(海東)에만 입혀졌을 뿐이지만, 백성의 윤기(倫紀)를 세운 것은 곧 만세의 효순(孝順)을 수립한 것이니, 이 도리는 천하에 널리 입혀질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 때문에 죄를 얻어 북쪽 변방에 유찬되었을 적에는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공은 진실로 죽을 곳을 얻었으나, 나라는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윽고 공은 배소에서 작고하였는데, 금상(今上)이 계해년에 반정(反正)하여 공을 복관(復官)시키고 사제(賜祭)함에 이르러서는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거의 잘 되어 가는구나. 나라에 교화가 있게 되었다.” 하였으니, 대체로 공의 존망(存亡)과 영췌(榮悴)로써 세운(世運)의 흥상(興喪)을 점친 것이었다. 동양(東陽) 신흠(申欽)이 온 나라의 담론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사실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이 여정(輿情)이요 이것이 공의(公議)이니, 이것이 어찌 천명(天命)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그 사업과 공렬을 차례로 엮어서 신도(神道)의 빗돌에 다음과 같이 기재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항복(恒福)이고, 자는 자상(子常)이며, 씨족(氏族)은 계림(鷄林)에서 나왔다. 그 처음에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 알평(謁平)이란 분이 있어 신라(新羅) 시조(始祖)를 도와 종신(宗臣)이 되었는데, 그의 주손(冑孫)과 지손(支孫)이 마침내 면면히 이어져 오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더욱 성해졌으니, 그 중에 드러난 이가 바로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으로,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 일컫는 분이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낸 휘 연손(延孫)이 있어 이분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숭수(崇壽)를 낳았는데, 숭수는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 성무(成茂)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 예신(禮臣)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공은 은덕(隱德)이 있어 일찍이 포천(抱川)에 묘역(墓域)을 가려 정하고 말하기를, “내 뒤에 반드시 이세(二世)가 연하여 현달(顯達)할 것이다.” 하였는데, 공의 고(考) 참찬공(參贊公)이 과연 그 예언에 부응하였다. 참찬공의 휘는 몽량(夢亮)인데, 삼조(三朝)를 내리섬기면서 청검(淸儉)과 충효(忠孝)로 명성이 있었고, 영의정(領議政), 시림부원군(始林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 현감(結成縣監) 최륜(崔崙)의 딸이며 눌헌(訥軒) 이공 사균(李公思鈞)의 외손(外孫)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규범(閨範)이 있었다.
가정(嘉靖) 병진년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막 태어나서 젖을 빨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므로, 가인(家人)들이 놀라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마침 고사(瞽師)가 문에 이르자, 참찬공이 그에게 아이의 점을 쳐 보게 하였다. 점을 다 쳐 보고는 축하하며 말하기를, “삼공(三公)에 관한 점사(占辭)를 보니, 공보다 이급(二級)이 높습니다.” 하였다. 겨우 두어 돌이 지나서는 뛰어나게 영리하여 장난하고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조금 자라서는 마음이 침착하고 도량이 있어 행동거지가 기특하고 어묵(語黙)이 구차하지 않았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이 하늘 높이 치솟는 재목이 될 줄을 알았다. 8세 때에는 시(詩)를 지었는데, 말을 내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9세 때에는 참찬공이 작고하자, 너무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예(禮)와 같이 하였다.
14, 5세 때에는 이미 재물을 아끼지 않고 의리를 좋아했으며, 웅건(雄健)하여 어디에도 속박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씨름과 공차기를 잘하여 길거리에서 용맹을 뽐내곤 하면 여러 소년들이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대부인(大夫人)이 그 사실을 듣고 경계하여 이르기를, “미망인(未亡人)은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인데, 네가 무뢰한 자제(子弟)들과 종유를 하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니, 공이 울면서 가르침을 받아 호탕한 습성을 닦아 없애고 신실한 태도를 지녔다.
신미년에 대부인이 작고하자, 죽(粥)만 마시면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복(服)을 마치고는 민씨(閔氏)의 아내가 된 자씨(姉氏)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경서(經書)의 의리를 분석하고 학습의 취향을 변별하여 학업을 마침내 독실히 함으로써 문사(文思)가 방일하여 차츰 고인(古人)의 문사에 가까워지자,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공의 얼굴을 알기를 원하였다. 상국(相國) 권철(權轍)이 그 명성을 듣고 손녀를 공에게 시집보냈으니, 바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소생이었다. 상국이 공을 한 번 보고는 공보(公輔)의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만력(萬曆) 경진년에는 알성 문과(謁聖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보임되었다. 신사년에는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계미년에는 선묘(宣廟)가 장차 《주자강목(朱子綱目)》을 강(講)하려고 재신(才臣)을 미리 간선하여 궁중에 비장된 《주자강목》을 내려 익히게 하였는데, 이 간선에 응한 사람 5인 가운데 공이 참예되었으니, 율곡(栗谷) 이공 이(李公珥)가 실로 공을 천거했던 것이다. 율곡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온 세상을 압도했는데, 공이 한 번 만나 보고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계합(契合)된 바가 있었다. 그 후 이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에 천거되어 정자, 저작, 박사를 역임하였다.
을유년 봄에는 예문관의 대교ㆍ봉교,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지제교, 고공랑을 제수받았다. 이상의 관직을 세상에서 열관(熱官)이라 일컬었는데, 공은 이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에 담박하기가 마치 한산한 관서(官署)와 같아서, 관청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좌중에는 낯선 빈객이 없었으며, 날마다 같은 마을 사람들과 종유하여 조촐하게 앉아서 서로 만나 보곤 하였다. 한 번은 두 현관(顯官)이 한때의 명망을 믿고 공에게 천거해 주기를 요구하여 공이 이미 전조(銓曹)에 들어간 뒤에는 중간에서 공을 꾀는 짓을 수없이 하였으나, 공이 그 행위를 증오하여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므로, 두 현관이 서로 공에게 앙심을 품었다. 이어 수찬, 정언, 교리, 이조 정랑,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기축년 겨울에는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참국(參鞫)하였다. 이 때 선묘(宣廟)께서 친히 임어하여 죄수를 논죄하였는데, 공의 응대(應對)가 주도하고 민첩하며, 임금 앞에서 총총걸음하는 것이 절도에 맞았으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기록하곤 하니, 동료 관원들은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이서(吏胥)들이 모두 눈여겨보고 놀라면서 공을 신(神)처럼 여겼다. 선조는 자주 공의 재주를 칭찬하고 매사를 반드시 공에게 맡겼다. 공은 연루된 죄수가 많은데다 조속히 판결을 하지 못함으로써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자들의 흉심을 발단시키게 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정의(亭疑)를 당해서는 힘써 평번(平反)하여 생의(生議)를 붙여 주고, 죄안(罪案)의 문서(文書)를 상세히 검토하여 혹 불분명한 사실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당사자(當事者)에게 정밀히 조사해서 처리하였으니, 한갓 붓대를 잡고 옥안(獄案)만 작성할 뿐만이 아니었다.
경인년 여름에는 응교에서 의정부의 검상, 사인에 전임되었다. 가을에는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책록되었는데, 이는 공이 문사랑으로 노고가 많았었기 때문에 관례대로 삼등훈(三等勳)에 책록되었던 것이다. 이어 전한에 전임되었는데, 일찍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했을 적에 선조가 공을 앞으로 가까이 불러 놓고 공의 국옥(鞫獄) 때의 일을 말하면서 수십 마디를 연해서 고재(高才)라 칭찬하고 작질(爵秩)을 올려서 권장하였는바, 직제학으로 승진시켰다가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를 특별히 더하였으니, 장차 공을 크게 쓰려는 것이었다.
신묘년 봄에는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호조의 일을 본 지 겨우 한 달 만에 조무(曹務)가 막힌 것이 없게 되고, 창고의 비축도 부족함이 없게 되자, 당시 호조 판서로 있던 상국(相國) 윤두수(尹斗壽)가 공(公)을 드러내서 존중하여 말하기를, “문한(文翰)을 다루는 선비가 다시 전곡(錢穀)도 잘 다스린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얼신(孼臣) 홍여순(洪汝諄)이란 자가 온 세상 선비들을 모조리 그물질하여 장차 다 죽이려고 하는 바람에 공 또한 승지로서 그 파급(波及)을 입어 파면되었다. 이해 여름에 서용되어 다시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공을 해코지하는 자들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전에 공에게 앙심을 품었던 두 관원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나 공을 중죄(重罪)에 빠뜨리려고 꾀하였는데,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마침 대사헌이 되어 몸소 친히 쟁론을 벌임으로써 이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임진년 4월에는 왜구(倭寇)가 갑자기 이르자, 공은 지신사(知申事)로서 매우 분개하여 몸소 순절(徇節)하려고 작정하였다. 그래서 적보(賊報)를 듣고부터는 퇴청하여 사제(私第)로 가서 안집과 통행을 금하고 집안 일로 자신을 혼란시키지 못하도록 경계하였으며, 측실(側室)은 한 번만이라도 대면(對面)하기를 요구했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나갈 때에 미쳐서는 백관이 다 흩어져서 궁중(宮中)은 텅 비어 사람이 없고 비는 쏟아지고 밤은 칠흑 같았는데, 밤 4경에 중전(中殿)이 홀로 여사(女史) 10여 인을 데리고 인화문(仁和門)으로 걸어서 나갔다. 이때 공이 홀로 촛불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니, 중전이 돌아보면서 물어 보고 위로와 면려가 갖추 지극하였다. 대가가 임진(臨津)에 다다라서는 상하(上下)가 서로 분열되었으므로, 공이 병조랑(兵曹郞)과 함께 도보(徒步)로 가면서 진창 가운데에서 도중(徒衆)을 불러모았다.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러서는 상이 대신(大臣) 및 윤두수를 불러 계책을 물었는데, 공이 맨 먼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병력(兵力)으로는 이 적을 당해 낼 수 없으니, 오직 서쪽으로 달려가서 부모(父母)의 나라에 우러러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송경(松京)에 이르러서는 이조 참판 오성군에 제배하고 가선대부를 더하였다. 그리고 공에게 왕자(王子)를 호위하고 먼저 평양(平壤)으로 가게 하였다. 대가가 평양에 이르러서는 형조판서 겸 도총관을 임명하고 자헌대부를 더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적이 이미 경성(京城)을 크게 유린하고는 급히 양서(兩西)를 짓밟아 치면서 노략질을 하려고 할 적에 조정의 의논이 정해진 계책이 없어 허둥지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공이 한음(漢陰)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함께 계책을 협찬하여 사신을 보내어 천조(天朝)의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건의하였고, 또 삼도(三道)에 조도사(調度使)를 파견하여 군흥(軍興)을 관장하도록 하였으니, 마침내 재조(再造)의 공렬을 이룬 데에는 이것이 그 조짐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 병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에 제배되었다.
임진(臨津)이 함락되자, 혹자는 평양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혹자는 함흥(咸興)이 의거할 만하다고 말하므로, 공이 좌상 윤두수와 함께 함흥으로 가는 것은 계책이 아니라는 뜻을 강력히 진술하고 영변(寧邊)으로 행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뭇 사람들의 의논은 굳이 함흥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중전과 세자빈(世子嬪)이 먼저 덕천(德川)을 향하여 함흥의 길을 취하였는데, 적들은 이미 대동강을 핍박해 왔다. 그러자 한음공이 자기가 나가서 적장(賊將)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직접 만나서 군대의 진격을 늦추도록 꾀하겠다는 뜻으로 청하여 말하기를, “군대를 만일 늦추어 주지 않으면 의당 두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하니, 공이 그리 하지 못하게 말리면서 말하기를, “당당한 국가에서 어찌 도적의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가가 평양을 떠난 뒤에는 공이 한음과 함께 영변으로 가서 머물 것을 거듭 청하고, 또 요동(遼東)에 가서 구원병을 요구하겠다고 자청하여 양공(兩公)이 서로 다투어 자신이 가려고 했는데, 밤중에 이르러서야 선조가 심충겸(沈忠謙)의 말을 받아들여 한음을 요동에 보내기로 하였다. 공은 한음을 남문(南門)까지 전송하고 자신이 타던 말을 한음에게 풀어 주면서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그대는 의당 나를 중획(重獲)에서 찾아야 할 것이네.” 하니, 한음이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나의 시체는 의당 노룡산(盧龍山)에 버려질 것이네.” 하고, 서로 눈물을 뿌리며 작별하니, 듣는 이들이 얼굴빛을 고쳤다.
적을 수비하던 여러 관군(官軍)이 또 무너지자, 선조가 밤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중국에 내부(內附)할 일을 의논하여 이르기를, “부자(父子)가 함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 버리면 국사가 가망이 없게 되니, 세자(世子)는 의당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길을 나누어 가야겠다. 나는 약간의 신료(臣僚)를 대동하고 의주(義州)로 들어갈 터이니, 누가 나를 따르려는고?” 하니, 뭇 신하들이 아무도 대답을 못했는데, 공이 울면서 대답하여 따르기를 청하였다. 대가가 박천(博川)에 머무르자, 중전이 덕천(德川)으로부터 와서 서로 회합하였는데, 이어서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렀다. 그러자 선조가 대가를 재촉하여 밤에 출발하였는데, 호종(扈從)하던 자들이 대부분 길에서 도망가 버린 가운데 비는 내리고 길은 좁고 하므로, 공이 갑작스런 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연속(椽屬)에게 말하기를, “전군(前軍)이 매우 허술한데, 우리들은 모두 병관(兵官)이니, 앞에서 인도할 수 있다.” 하고, 말을 속히 몰아서 앞으로 나가니, 선조가 물어 보고 공인 줄을 알고는 공을 더욱 중히 여겼다. 대가가 의주에 들어서자, 공이 말하기를, “한성(漢城) 남쪽의 제도(諸道)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이미 요동(遼東)으로 건너갔으리라고 여길 터이니, 급히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호남, 영남에 유시(諭示)해서 군대를 일으켜 근왕(勤王)하도록 하고, 또 행재소(行在所)를 모두 알도록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조정의 명령이 사방에 통해져서 근왕병(勤王兵)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요좌(遼左)에, ‘조선(朝鮮)이 왜(倭)를 인도하여 입구(入寇)하게 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자, 병부(兵部)에서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은밀히 우리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그런데 공은 조정에 있을 때에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신묘년에 접수한 왜서(倭書)를 찾아 가지고 와 있다가 그것을 황응양에게 보이니, 황응양의 의심이 크게 풀리어 그가 황조(皇朝)에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비로소 구원병을 내보낼 일을 의결하였다. 그 후 조승훈(祖承訓), 사유(史儒) 등이 3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자, 조야(朝野)가 모두 반드시 승첩(勝捷)을 거둘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조 장군(祖將軍)은 경조(輕躁)하고 지모(智謀)가 적으니, 그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크게 패하였다. 그런데 조승훈은 황조에 돌아가서 심지어 우리 군대가 도리어 왜적을 돕는다고 속여 말하였으므로, 공이 대신(大臣)을 보내어 신변(伸辨)할 것을 청하고, 또 사신을 보내어 대군(大軍)을 보내 주도록 요구할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4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동으로 나오자, 공이 그의 군대 지휘하는 것을 보고 상께 아뢰기를, “반드시 공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막하(幕下)에 정 동지(鄭同知), 조 지현(趙知縣) 두 사람이 용사(用事)를 하므로, 좌절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그런데 계사년에 대첩(大捷)을 거두어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하였으나, 이윽고 화의(和議)에 이끌리어 다시 전쟁을 하지 않았으니, 실로 정 동지, 조 지현 두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경사(京師)가 수복되자 환궁(還宮)할 것을 강력히 청하여, 10월에 선조가 구도(舊都)로 돌아왔다.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나왔는데, 선성(先聲)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갑자기 그 사실을 알고 공에게 원접사(遠接使)를 맡기자, 공은 명을 받은 즉시 떠났다. 행인이 이틀 길을 하루로 줄여 급히 달려오므로, 행인이 지나는 군읍(郡邑)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이 앞뒤에서 도와줌을 힘입어 관소(館所)의 접대에 흠결이 없었다. 황조(皇朝)의 칙서에, 세자에게 호관(戶官), 병관(兵官)을 대동하고 나가서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의 군무(軍務)를 다스리도록 하였으므로, 공은 병관이었기 때문에 접반사의 직임을 해면하고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갑오년 봄에는 호서(湖西)의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분조(分朝)에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받들고 대조(大朝)에 회합하여 역적을 피하려고 하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그리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윽고 적이 평정되었다. 이해 가을에 소명을 받고 돌아와서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주함(舟艦)을 계획하고 어염(魚鹽)을 자본 삼아 재물을 불려서 면포(綿布) 3만 필을 준비하여 호조(戶曹)로 실어 보냈다.
을미년에는 이조 판서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병신년에는 황조에서 일본(日本)을 책봉(冊封)하는 일로 인하여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이 나와서 공을 자기의 접반사로 삼고자 하므로, 선조께서 이를 윤허하였다. 공이 조정에 하직을 하고 나서는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해면을 요청하여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양방형이 공을 존경하여 말하기를, “동국(東國)에 이런 사람이 있으니, 어찌 외국(外國)이라 하여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을 가리켜 말하기를, “한갓 부귀한 집의 자제로 문묵(文墨)이나 다룰 뿐이니, 반드시 왕명(王命)을 욕되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러하였다. 겨울에는 양 부사를 전송하였다.
정유년 봄에는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 때 경략(經略) 양호(楊鎬)가 대군을 거느리고 동으로 나왔는데, 적합한 접반사를 신중히 고른 끝에 공을 추천하자, 공이 사양해도 되지 않으므로, 호관(戶官), 공관(工官)을 대동하고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 경략을 만났는바, 그때에 조목조목 열거한 문답(問答)은 모두가 찬란하게 나라를 빛낸 것들이었다.
이해 9월에 병으로 해면되었다가 11월에 다시 제수되었다. 공은 병조 판서를 모두 다섯 번, 이조 판서를 한 번 역임했는데, 마음씀이 곧고 신실하여 부정한 청탁이 미치지 못했고, 인재를 의용(擬用)하고 제탁(除擢)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그 재능만을 보아서 일체 공의(公義)를 따랐으므로, 감히 다른 길로 진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방(官方)이 질서가 잡히고 사도(仕道)가 이 때문에 맑아졌으니, 조정에 근근이나마 범할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하고 사대부(士大夫)들이 조금이나마 염치를 알게 된 것은 공이 전석(銓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부(兵部)를 관장했을 적에는 수륙(水陸)으로 천병(天兵)이 모여드는 때를 당하여, 본병(本兵)에 관계된 일의 경우 큰 것은 맹렬한 천둥처럼 화급하였고 잗단 것은 쇠털처럼 번잡하였으나, 공은 이를 자유자재로 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일이 많이 쌓여도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양 경략이 매양 긴요한 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이 상서(李尙書)와 의논하리라.” 고 말하였다. 공이 병부를 떠난 뒤에도 항용수(恒用數) 이외에 만 필(匹)의 면포(綿布)가 넘쳐 있었으므로, 부중(部中)에서는 이 상서가 비축한 것이라고 서로 전하면서 오래도록 이를 지켜 간직하였다. 근세에 유능한 병부의 장관을 일컬을 때 율곡(栗谷) 이공(李公)을 말하는데, 공은 충분히 율곡과 맞설 만하거니와, 시기의 몹시 바쁘거나 수월한 점으로 말하자면 공이 더 우월하였다.
무술년 가을에는 황조의 찬획사(贊畫使) 정응태(丁應泰)가 우리 나라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상주(上奏)하였으므로, 선조께서 크게 놀라 공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를 더하여 부원군을 봉하고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 공이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밤중에 출발해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서 황제께 진주(進奏)하고, 다음으로는 날마다 내각(內閣)과 예부(禮部), 병부(兵部)에 나아가 정문(呈文)을 올려 사실을 진술하였는데, 말이 분명 적절하였고 예절에 맞는 거동이 우아하였으므로, 여러 관원(官員)들이 경의를 표하며 승낙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수치는 절로 씻어질 것이니, 공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황제가 마침내 칙서를 내려 우리를 칭찬하고 정응태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기해년에 복명하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여 공에게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해서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의논이 정응태가 무주(誣奏)한 일을 가지고 그 죄를 정응태의 접반사였던 백유함(白惟咸)에게 돌려 그를 하옥(下獄)시키고 처벌하려 하였는데, 공이 위관(委官)이 되어 마음속으로 그의 억울함을 알고는 평의(評議)를 매우 분명하게 아뢰니, 선조가 그를 용서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일로 인하여 관직을 해면하였다.
경자년에는 도체찰사 겸 도원수에 임명되어 남쪽 지방의 군대를 시찰하면서 백성을 편안히 할 것[安民]과 해상을 방어할 것[防海] 등 십육책(十六策)을 올렸다. 여름에 영의정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6월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였는데, 당시 전쟁을 치른 뒤라서 의궤(儀軌)에 관한 전적(典籍)들이 남김없이 불타 없어졌으나, 공이 지시해 주고 재량한 것이 예문에 어긋나지 않았다. 재궁(梓宮)이 산릉(山陵)에 내려졌을 때 한밤중에 잘못 화재가 나서 상하(上下)가 몹시 당황하였는데, 공은 변(變)을 당하여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처리하는 데에 방도가 있어 마침내 이날 장사를 치르고 반우제(反虞祭)까지 마쳤다.
신축년에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공이 다시 나와서 경비를 절약하고[節經費], 전제를 바로잡고[正田制], 성심을 열고[開誠心], 공도를 펴고[布公道], 염치를 면려할[礪廉恥] 일로 청하니, 선조께서 가납하였다. 가을에 노추(奴酋)가 글을 보내 와서 강화(講和)를 요청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 노추는 천조(天朝)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니, 인신(人臣)의 의리상 사사로이 사귈 수 없거니와, 또 후세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청컨대 그 사자(使者)를 거절하소서.” 하였다.
임인년 봄에는 삼사(三司)가 서로 소장(疏章)을 올려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논박하므로, 공이 소장을 올려 그를 구하려고 했는데, 소장을 미처 올리기 전에 어떤 사람이 권신(權臣)의 사주를 받고 지레 소장을 올려 공을 오로지 공격하였으므로, 공이 인책하여 사직하자, 공을 흔드는 자가 더욱 많아져서 끝내 이 때문에 자리를 떠났다.
갑진년 원조(元朝)에는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변이 있어 선조가 구언(求言)의 전교를 내리자, 공이 천인(天人)의 사이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성심을 전하는 것은 의당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공평함을 갖는 것은 의당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세상에서 말을 제대로 안다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호성공(扈聖功)을 책록하였는데, 공이 원훈(元勳)이 되자,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자, 또한 사직을 고하여 해면하였다.
병오년 가을에는 대마도(對馬島)의 오랑캐 의지(義智)가 임진년에 우리 능(陵)을 침범한 적이라고 거짓으로 칭하면서 두 사수(死囚)를 결박하여 바쳐 와서 강화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당시 유영경(柳永慶)이 영상으로서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하여 장차 종묘(宗廟)에 헌부례(獻俘禮)를 행해서 자기의 공을 과시하려 하므로, 공이 그 두 사수를 부산(釜山)에서 죽여 왜사(倭使)에게 보이고자 하니, 유영경이 짐짓 잡아다가 신문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정미년 10월에 선조(宣祖)의 병환이 위독하자, 공이 명을 받고 종묘에 기도를 드렸더니, 그 이튿날에 병환이 조금 나아졌다. 그랬다가 무신년 2월 1일에 선조가 승하하였고, 2일에 폐주(廢主)가 즉위하였다. 선조는 일월(日月) 같은 밝음으로 건강(乾剛)의 덕을 간직하여 일찍부터 신기(神器)를 이끌어 오다가 폐주에게 기탁하였는데, 폐주는 17년 동안이나 동궁(東宮)에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선조가 여러 해를 병석에 누워 있다 보니, 남의 불행을 즐기고 공을 탐하는 자들이 남의 마음을 추측하는 술책을 가지고서 깊은 속내를 틀어막고 단서를 숨긴 채 불의를 선동하여 종횡 무진한 논변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미혹시켰는데, 마침내 정인홍(鄭仁弘)의 봉소(封疏)가 들어가고 나서는 인정이 더욱 현란해져서 화(禍)의 단서가 끝없게 되었다. 그런데 맨 먼저 임해군(臨海君)을 요주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중외(中外)가 몹시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위사(衛士)들은 갑옷을 입고 대궐을 수비하고, 궁문(宮門)은 대낮에도 열지 않은 지가 여러 달이었다. 이때 한 간관(諫官)이 임해군의 일로 공에게 와서 묻는 자가 있자, 공이 말하기를, “복상(服喪) 중인 왕자(王子)에게 아무런 형적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처벌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 후 삼사(三司)가 ‘임해군이 모반을 꾀하니 절도(絶島)에 유찬해야 한다’고 밀고(密告)하자, 공은 사은(私恩)을 온전히 할 것을 청하였는데, 논자(論者)들이 역적을 비호한다고 공을 지목함으로써, 사은을 온전히 하라는 말이 끝내 선류(善流)들의 화근(禍根)이 되고 말았다.
4월에는 좌의정이 되어 도체찰사를 겸하고 총호사(摠護使)가 되었다. 6월에는 목릉(穆陵)의 봉분(封墳)을 마치자마자 삼사가 임해군을 죽이기를 청하고 또 상부(相府)가 정쟁(廷爭)하지 않은 것을 허물하였으며, 정인홍은 이를 이어서 사은을 온전히 하라고 한 잘못을 배척하였다. 그러자 공이 차자를 올려 두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해년에는 정인홍이 봉소(封疏)를 올려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해서는 안 된다고 대단히 헐뜯었으므로,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그것을 변명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러자 정인홍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폐주에게 고자질하여 아뢰니, 폐주가 정인홍의 삭적(削籍)에 대한 의논을 수창한 자를 조사해 내어 금고(禁錮)시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공이 경악하여 망국적인 거조라고 말하고, 밤새도록 차자를 작성하여 새벽에 올렸다. 제생(諸生)들은 이때 폐주의 명을 듣고 일제히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 버렸으므로, 공이 또 차자를 올려 그 사실을 진술하였다. 그 후 인대(引對)할 때에 미쳐서는 회재에 관한 일을 네 조목으로 갖추 기록하여 올렸는데, 정인홍이 이로 말미암아 공에게 대단히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돌발적인 화의 조짐이 점차 일어남으로써 명경 선사(名卿善士)들이 발을 포개고 숨을 죽이는 가운데 참소가 고슴도치 털처럼 수없이 모여들어 공을 밀어내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서, 이에 체찰부(體察府)의 병권(兵權)이 너무 중하다는 말을 제창하여 기필코 공을 사지(死地)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날마다 떠나기를 요청하는 것만 일삼았는데, 마침내 임자년에 이르러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폐주는 날마다 국청(鞫廳)에 나가서 털끝만한 것 이상의 일은 모두 몸소 결단하였으므로, 공이 일에 따라 억울한 사연들을 바로잡아 구원하였다. 이때 시인(詩人) 권필(權鞸)은 시(詩)로 죄를 얻어 함께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공이 자리를 옮겨서 간절히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 술관(術官)이 천도(遷都)의 설(說)을 올린 자가 있어, 재신(宰臣)들이 대부분 그 설에 부화뇌동하여 상의 뜻에 영합하였는데, 공이 직언(直言)으로 그 설을 거절하였다.
이해 4월에는 박응서(朴應犀)가 상변(上變)하였는데, 일을 차마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무신년의 일보다 혹렬하였다. 그 피고(被告) 가운데 무인(武人) 정협(鄭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공은 평소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른 대신(大臣)이 그를 천거함에 따라 공이 그를 변방의 수령에 의용(擬用)했을 뿐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련(辭連)으로 연좌되자, 공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 삼사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정부(政府)에서는 정청(廷請)의 거조가 없었으므로, 재신(宰臣) 두 사람이 잇달아 밤낮으로 공의 처소에 찾아와서 화복(禍福)으로 달래었는바, 그 협박적인 말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곤두서게 하였다. 그리하여 자제(子弟)들이 울면서 서로 번갈아 간하자, 공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연히 말하기를, “나는 양조(兩朝)에서 은혜를 입어 재상 지위에 오른 지 16년이 되었는데, 어찌 거의 죽게 된 나이에 스스로 더러운 이름을 취하여 양조의 은혜를 깊이 저버릴 수 있겠느냐.” 하니, 그 재신이 공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한음(漢陰)에게로 가서 또한 공에게 말한 것처럼 하였다. 후일에 공이 한음과 함께 국청(鞫廳)에 있을 적에, 대관(臺官)이, 대신(大臣)이 복합(伏閤)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드러내어 배척하자, 한음이 공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의 의논은 무신년의 의논에 있네.” 하였다. 옥사(獄事)가 날로 급해지고 화염(禍燄)이 날로 일어나서 대관 정조(鄭造), 윤인(尹訒) 등이 앞장서서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자, 공이 한음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을 곳을 얻었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위해서 죽는다면 용맹을 손상할 것이거니와, 모후(母后)를 위해서 죽지 않는다면 의리를 손상하게 될 것이네. 어찌 차마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정조, 윤인에게 가리운 바가 되어 천하 후세에 누(累)를 끼치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이미 《춘추(春秋)》를 속여 인용하고 있는데, 나도 《춘추》를 조금은 익혔으니, 의당 경(經)을 인용하여 의리에 의거해서 그들의 사설(邪說)을 깨뜨려야겠네. 그들이 말하는 역적에 대해서는 참으로 역적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신하를 토벌하지 못하고 임금의 어머니를 폐하려는 것이니, 그들이 참으로 역신(逆臣)일세. 혹 헌의(獻議)를 하게 되면 한 장의 차자를 올려야겠네.” 하고, 이날 저녁에는 집에 가서 조의(朝衣)도 벗지 않고 외랑(外廊)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절멸되었는데, 나는 불세(不世)의 지우(知遇)를 입은 대신(大臣)으로서 어찌 남은 목숨을 아끼어 이 광경을 차마 볼 수 있겠느냐. 의당 들것에 실린 시신(尸身)으로 돌아오기를 기할 뿐이다.” 하였다.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와서 공을 만나자, 공이 말하기를, “만대(萬代)에 숭앙(崇仰) 받는 일이 이번 거조에 달려 있다.” 하였는데, 최유원은 본디 공을 존경해 왔던 터라, 이에 의논을 결정하여 2, 3인의 동료와 함께 정조, 윤인과 의논을 달리하였으니, 그 즉시 모후를 폐하지 않은 것은 바로 공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이 소(疏)를 작성하여 한음에게 보여서 다듬어 놓고 기다리던 중에 공이 일찍이 정협(鄭浹)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떠남으로써 일을 이미 이룰 수 없게 되었다. 폐주가 마침내 공의 상직(相職)을 체직시키고 서추(西樞)에 임명하였다.
을묘년에는 공의 장자 성남(星男)이 적노(賊奴)의 고발로 인하여 하옥(下獄)되자, 가인(家人)이 세속을 따라 뇌물을 쓰자고 청하니, 공이 정색을 하면서 그리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옥사가 이윽고 변백(辨白)되었다. 겨울에는 정인홍이 상소하여 공의 죄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하자, 삼사가 공을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상소문은 궁중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공은 동쪽 교외에 셋집을 얻어 우거하다가 망우리(忘憂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그 곳으로 옮겨 가 살았는데, 얼굴에 조금도 근심스런 빛이 없이 산수(山水) 사이를 배회하였고, 거친 음식도 넉넉지 못했으나 마음 편히 지냈다. 한번은 청평(淸平)의 수석(水石)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노새[騾]를 타고 가서 완상하면서 전부 야로(田夫野老)들과 섞여 놀았는데, 아무도 공이 귀인(貴人)인 줄을 알지 못했다.
정사년 11월에는 폐모론(廢母論)이 마침내 결정되어 이이첨(李爾瞻), 김개(金闓), 허균(許筠) 등이 역적 무리들을 불러서 상소문을 들고 대궐로 들어갔는데, 외람되이 태학생(太學生)이라 칭하는 자들 또한 사주(使嗾)를 받고 모여들어 날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온 나라 안이 물끓듯 소란하고 생명을 가진 자마다 모두가 기(氣)를 잃어버렸다. 이때 공은 침식(寢食)을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비분 강개해 마지않았는데, 갑자기 큰 천둥 소리가 집을 흔들자, 공이 말하기를, “하늘이 경계하여 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추부랑(樞府郞)이 상지(上旨)를 가지고 와서 헌의(獻議)를 하게 하므로, 공이 한창 병을 앓던 중이라, 시자(侍者)가 붙들어 일으키니, 공이 붓을 휘둘러 다음과 같이 썼다.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 계책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임금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날의 밝은 교훈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완악한 아비와 어리석은 어미가 항상 우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파게 하고 창고를 수리하게 하였으니, 위태롭기가 또한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순은 부르짖어 울고 원망하면서도 사모하여 부모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아비는 비록 인자하지 않을지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춘추》의 의리가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기(禮記)》에 의하면 “공급(孔伋)의 아내가 된 사람은 분명히 공백(孔白)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였으니, 성효(誠孝)가 중한 곳에 어찌 간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에 장차 점차로 교화될 희망이 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전하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에 하실 도리로 말씀드리자면, 우순의 덕을 본받아서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여움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이 의논이 들어가자, 보는 이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심지어는 몰래 서로 눈물을 닦는 이도 있었다. 삼사가 공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하기를 청하여 무릇 네 번이나 배소(配所)를 바꾸어 삼수(三水)로 결정하였는데, 폐주가 명하여 북청(北靑)으로 옮기게 하였다. 무오년 정월에 배소에 도착하였다. 3월에 병을 얻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고 말하기를, “내가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또 노추(奴酋)가 요광(遼廣) 지방을 침범하므로, 황조(皇朝)에서 우리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구했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다시는 경쟁(競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작고하니, 이달 13일이었고 향년이 63세였다. 공이 일찍이 가인(家人)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잘못 섬겨 이런 견책을 입었으니, 내가 죽거든 조의(朝衣)로 염(殮)을 하지 말고 입고 있는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사용하라.” 하였다. 7월에 포천(抱川)의 선영(先塋)으로 운구(運柩)해 두었다가 8월에 참찬공(參贊公)의 묘(墓) 왼쪽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앞서 도하(都下)의 인민들은 공이 유배된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는 조신(朝臣)으로부터 아래로는 여러 조(曹)의 고리(故吏), 시대(廝臺), 여졸(輿卒)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뵙기를 요청하였고, 일로(一路)의 촌민(村民)이나 여염집 부인들도 서로 다투어 와서 우러러 절하였으며, 선비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공의 풍의(風儀)를 사모하여 존경해서 본보기로 삼았다.
공이 작고함에 이르러 원근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회곡(會哭)한 사람들로 말하자면, 부의(賻儀)를 가지고 와서 조문한 수재(守宰), 변장(邊將)과 제문(祭文)을 지어 가지고 와서 술잔을 부어 제사한 시골 사부(士夫)들이 그 얼마였는지 알 수 없었고, 초종(初終) 때부터 문 밖에 와서 지키고 있다가 빈소(殯所)를 마련한 뒤에야 돌아간 사람들 또한 그 얼마였는지 알 수 없었으며, 영남(嶺南)의 선비 중에는 평소 공과 서로 알지 못한 처지인데도 천리 길을 와서 부의한 이가 있었다. 장사를 마친 뒤에는 손수 술 한 잔, 고기 한 접시를 갖추어 3수(首)의 시(詩)와 제문(祭文)을 가지고 묘하(墓下)에 와서 곡(哭)하고 상주(喪主)도 만나지 않은 채 떠난 이가 있었는데, 그 또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청과 포천의 제생(諸生)들은 재목을 모아서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공을 향사(享祀)하였는데, 조정에서 여기에 대해 금령(禁令)까지 내렸으나 끝내 저지할 수가 없었다. 아, 공이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이런 존경을 받았던가. 의열(義烈)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기에 인심을 깊이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 공론(公論)이 후세에 있다고 말하였던가.
공은 풍채가 엄중하고 도량이 활달하였으며, 널찍한 이마와 우뚝한 코에 뺨은 두툼하고 살결은 희었으며, 긴 수염은 이리저리 휘날렸다.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기개는 온 세상을 덮었고, 행실은 외면적인 것을 꾸미지 않았으나 동작마다 규칙이 있었다. 월등하게 세속을 초월하였고, 여유 있게 사물에 잘 대처하였으며, 광명(光明)하여 잗단 일에 얽매이지 않았고, 정대(正大)하여 특별히 뛰어났으며, 마음이 안온하여 순리대로 처신하였고, 정취가 담박하여 때가 끼지 않았다.
그리고 선영을 받듦에 있어서는 의절(儀節)이 물(物)보다 돈독했고, 꾸밈은 정성에 가리워졌다.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범하면서 숨김이 없었고, 꺾이어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동기간에 우애함에 있어서는 큰형 받들기를 마치 어버이 섬기듯 하였고, 중형과 숙형을 마치 한몸처럼 대우하였다. 종족들과 서로 친함에 있어서는 빈궁한 이나 현달한 이에게 각각 도리를 다하였고, 소원하거나 친근함에 서로 간격이 없었다.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친구와의 사귀는 정을 변치 않았고, 지우(智愚) 간에 모두 원만하게 대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깊은 방구석을 마치 번화한 대로(大路)처럼 여기고, 침실(寢室)을 마치 조정처럼 여기어 매우 근신하였다. 관직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마치 포정(庖丁)이 자유자재로 쇠고기를 바르듯, 편작(扁鵲)이 담장 너머에 있는 사람을 환히 보듯, 능란한 솜씨와 밝은 안목으로 여유 있게 처리하였다. 교제(交際)를 함에 있어서는 신의(信義)를 두터이 부지하고, 승낙(承諾)하는 것을 반드시 신중하게 하였다. 남에게 물건을 주거나 취함에 있어서는 청렴하면서도 명예를 취하려 하지 않았고, 구분을 하되 이견(異見)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집안을 위함에 있어서는 수묘(數畝)의 토지도 없고, 바구니에 남겨 준 돈도 없었다. 남의 시비(是非)를 논함에 있어서는, 선(善)을 좋게 여기는 데는 넉넉하고 악(惡)을 증오하는 데는 부족하였다. 훼예(毁譽)의 사이에 처신함에 있어서는 고운 것이나 추한 것이 밝은 거울에 거짓 없이 제대로 비치듯 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갖추고 대절(大節)로 이것을 통괄하였으므로, 벼슬을 처음 시작한 때부터 선조(宣祖)에게 알아줌을 입었던 것이다.
임진년의 난리 때에는 분골쇄신토록 충성을 다하였으니, 첫째도 공심(公心)이요 둘째도 공심으로, 중병(中兵)을 총괄해서 거느리고 참혹한 난리를 평정해 내었다. 들어와서는 사류(士流)의 으뜸이 되고, 나가서는 사방 변방의 울타리가 되어, 마침내 왕운(王運)이 거듭 밝아지게 하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중흥(中興)의 원공(元功)이 되었으니, 그 위대한 사업(事業)은 충분히 당(唐) 나라 초기의 명상(名相)인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와 서로 오르내릴 만하거니와, 정사년의 한 마디 말은 천지(天地)를 지탱시키고 일성(日星)처럼 빛나서, 몸은 비록 꺾이어 패했으나 인도(人道)가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되었으니, 임진년의 공에 비하면 또한 더욱 훌륭하지 않겠는가.
공이 소싯적에는 기개와 의리로써 자부하다가 늦게야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기해년에 상직(相職)을 해면한 이후로는 세상일을 끊어 버리고 경사(經史)에만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학문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전모수사(典謨洙泗)로부터 염락관민(濂洛關閩)에 이르렀고, 문장(文章)을 하는 데 있어서는 《좌전(左傳)》과 《국어(國語)》로부터 진한(秦漢) 시대의 문장까지 연구하여, 20년 동안을 일찍이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자품이 고상하기 때문에 견해 또한 고상하였고, 욕심이 적기 때문에 이치가 절로 밝아졌다. 도(道)의 오묘함으로 말하자면 밝고 광대한 근원을 홀로 깨달았고, 실천한 것을 관찰해 보면 털끝만큼의 세세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조복(朝服)을 입고 묘당(廟堂)에 앉아 있으면 구정 대려(九鼎大呂)와 같은 존재였고, 옷깃을 풀어 헤치고 편히 쉬던 곳은 구학 운수(丘壑雲水)의 사이였다.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세속 밖에 뛰어났으니, 칼 차고 신 신은 채로 황각(黃閣)에 오르는 영광이나 영원토록 국가의 운명과 함께하는 공신(功臣)의 책록 같은 것들은 다만 공에게는 하나의 뜬구름일 뿐이었다. 그런데 세속의 천박한 자들이야 공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겠으나, 비록 공을 안다고 칭하는 자들도 또한 공을 고작 세상 따라서 명성이나 세운 사람의 반열에 놓아 버리니, 사람을 알기가 참으로 쉽지 않도다.
조정이 당파(黨派)를 만들어 서로 다툰 지 40여 년 동안에 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누구나 어느 한쪽을 표방(標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홀로 중립(中立)하여 한쪽으로 기울지 않아서 우뚝하기가 마치 태산 교악(泰山喬岳)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공을 헐뜯지 못하였다. 그런데 임인년 이후로는 시사(時事)가 날로 어그러져서 뭇 정인(正人)들이 자취를 감춤으로 인하여 공이 비로소 조정에서 편치 못하게 되었다. 그 후 비록 재차 상위(相位)에 오르긴 하였으나, 사양하고 떠나 버렸다. 그리고 폐주(廢主)의 초정(初政) 때에 다시 중서(中書)에 들어간 것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인 까닭에 마지못해서 다시 나갔던 것인데, 세도(世道)는 이미 크게 어긋나 버린 뒤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공은 문장(文章)에 대해서는 본래 하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법을 취한 것은 고아(古雅)하여 웅건하고 뛰어나서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래서 장차(章箚) 등의 글은 품격이 높아서 위로 서한(西漢), 동한(東漢)의 문장에 근접하고 간혹 강좌(江左)의 기풍도 섞였으며, 척독(尺牘)은 명쾌하여 일정한 법식을 초월하였고, 필적(筆跡)은 호방하면서도 법칙이 있었다. 그리고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현방(玄放)함과 선도(仙道), 불도(佛道)의 묘오(妙悟)에 대해서는 그 본지(本旨)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 없고, 천문 지리(天文地理)의 이론과 서화 의술(書畵醫術)의 기예까지도 모두 통효(通曉)하였으나, 더 끝까지 연구하지는 않았다. 일찍이 함양명(涵養銘)과 치욕(恥辱), 서상(書床), 양야(養夜), 계주(戒晝), 경석(警夕) 등 다섯 편의 잠(箴)을 지어서 스스로 일과(日課)의 수양 공부로 삼았다. 시문(詩文) 약간권(若干卷)과 조천창수(朝天唱酬) 1권, 주의(奏議) 2권, 계사(啓辭) 2권,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소싯적의 호는 필운(弼雲)이고 혹은 청화진인(淸化眞人)이라고도 칭하였는데, 만년에는 백사(白沙)라 호칭하였고 또는 동강(東岡)이라고도 불렀다.
아들이 두 명인데, 큰아들 성남(星男)은 음보(蔭補)로 벼슬하여 광흥창 수(廣興倉守)가 되었고, 다음 정남(井男)은 임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또한 군수(郡守)가 되었다. 딸 한 명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이 두 명인데, 큰아들 규남(奎男)은 계축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기남(箕男)이다. 딸이 두 명인데, 하나는 학관(學官) 권칙(權侙)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어리다. 성남의 초취(初娶)는 판서 권징(權徵)의 딸로서 1녀 1남을 낳았는데, 딸은 진사(進士) 최욱(崔煜)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시중(時中)이다. 계취(繼娶)는 판관(判官) 김계남(金季男)의 딸로서 4녀 3남을 낳았는데, 아들은 시정(時挺)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정남은 참의(參議)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술(時術)이고 딸은 어리다. 규남은 권대순(權大純)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행(時行)이다. 기남은 박제남(朴悌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내가 소싯적에 청강(淸江)의 문하(門下)에서 공을 만났는데, 한 번 보고 즉시 망년교(忘年交)가 되었고, 그 후로 공과 한 골목에 마주하여 30년을 살았다. 생각건대, 공은 남을 쉽사리 허여하지 않았고, 나 또한 세인(世人)들과 잘 부합하지 못했는데, 공과는 형해(形骸)를 초월하여 서로 허여하여 정취와 의향이 간혹 말하지 않고도 서로 똑같을 때가 있었고, 만년에는 더욱 서로 계합(契合)하였다.
공은 매양 고금(古今)을 담론할 때마다 논의가 넘쳐나왔는데, 전인(前人)의 법칙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가슴속에 주관을 세워서, 고명(高明)하고 투철(透徹)하면서도 처음부터 고현(古賢)에 위배된 적이 없었으니, 그 호쾌(豪快)한 자품은 근대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항상 세상에 나를 알아줄 이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었는데, 공이 떠남으로써 나 혼자 외롭게 될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일찍이 공을 논하기를, “공이 추로(鄒魯)에서 났더라면 조만(操縵)의 무리를 벗어났을 것이고, 열국(列國) 시대에 났더라면 거의 정(鄭) 나라 동리(東里) 자산(子産)의 정사(政事)를 했을 것이다. 문정공(文靖公) 사안(謝安) 같은 인품을 지녔으나 시대와 서로 맞지 않았고, 충헌공(忠獻公) 한기(韓琦) 같은 덕량(德量)이 있었으나 화(禍)의 그물에 걸렸다. 그렇다면 공보다 뒤에 나온 사람은 또한 조석간에 좋은 시대를 만나는 이도 있을 법하다.” 하였다. 인하여 기억하건대, 공이 유배되어 갈 때에 글에 이르기를, “오늘에야 요동공(遼東公) 적흑자(翟黑子)를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한음(漢陰)을 가리킨 것이었으므로, 나는 여기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의 문장은 돈사(惇史)를 지을 수 없는 게 부끄러우니, 어떻게 공의 행적을 영원히 전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그 옛날 우리 선조 대왕께서 / 昔我宣祖       훌륭한 덕으로 왕위에 올라 / 秉德當乾
영재를 기르고 축적하기를 / 毓才貯英         밭에서 곡식 가꾸듯이 하여 / 若苗藝田
제철에 비 내려 적시어 주고 / 時雨膏之       따스한 바람으로 잎 피우니 / 條風發之
오직 이때 뛰어난 선비들이 / 惟時髦俊        배출하여 창성한 시대 이뤘네 / 蔚乎昌期
이때에 누가 그 으뜸이었던고 / 孰爲其宗     바로 우리 이공이었다네 / 曰我李公
아, 왕께서 공에게 명을 내리되 / 繄王有命   군신 간에 우리 서로 계합하니 / 契合昭融
동관의 빛나는 저 서적들을 / 煌煌東觀        너는 모두 융회 관통할 것이요 / 汝其會通
나에게
화려한 곤룡포 있으니 / 我有華袞     네가 분미를 수놓아 꾸미어라 / 汝其粉米
국운이 큰 재액을 만났으니 / 邦運百六             홍수를 누가 건네 줄꼬 하였네 / 滔天疇濟
그래서 공은 배와 노가 되어 / 公爲舟楫           해진 옷으로 물 샌 틈을 막으니 / 繻有衣袽
임금의 자리가 다시 안정되고 / 斗極天奠         국운이 처음같이 되었도다 / 國步如初
왕이 이르되 네가 가상하구나 / 王曰汝嘉         너는 나의 팔이요 다리로다 / 汝我股肱
무슨 직임을 너에게 줄거나 / 畀之伊何            영상의 직임을 받아라 하고 / 元輔是膺
공을 맨 뒤에까지 남겨 두어 / 遺之于後           국가의 원대한 계책 돕게 했네 / 卑贊洪圖
옛날의 인재를 이미 거두어서는 / 故劍旣收      큰 계책을 거의 펴게 되었는데 / 庶展訏謨
일이 그렇지 못한 게 있었으니 / 事有不然        세상은 창날이요 공은 방패였네 / 世矛公盾
그래서 지주가 중간에 꺾어지고 / 砥柱中摧      정승의 별이 밤중에 떨어졌도다 / 台階宵隕
그 변론한 말은 하도 당당하여 / 其說堂堂        소인들의 예봉을 꺾었거니와 / 折彼之角
그 절의는 이와 같이 우뚝하니 / 其節卓卓         사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 何有謠諑
아, 훌륭하신 선조 대왕이여 / 於皇宣祖            선조 대왕께는 신하가 있었도다 / 宣祖有臣
금석은 혹 부스러지기도 하련만 / 金石或泐       해와 달은 영원히 새로우리라 / 日月長新
삼대를 추존하고 제사를 내리니 / 貤官賜祭       성대한 예가 이에 두루 미쳤네 / 殷禮斯溥
천도는 본디 미리 정해진 것이라 / 天固有定      은혜가 실로 특별한 대우였도다 / 恩實異數
영화가 공에게 무슨 상관이며 / 榮於公何           욕됨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리요 / 辱於公何
영화와 욕됨이 가거나 오거나 / 榮辱去來           공에게는 좋고 나쁠 게 없어라 / 公不少多
천지간에 하나의 참다운 것 / 一味眞腴              신령한 성정은 온전히 지니었고 / 靈性則全
탁세에 남은 쓸모 없는 공명은 / 濁世粃糠          섶 다 타도 불은 전하듯 할 뿐이네 / 火盡薪傳
공은 서쪽 바다로 동쪽 바다로 / 咸池扶桑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다니리 / 乘風飄然
후일에도 백세가 돌아올 게고 / 百世在後           이전에도 백세가 지나갔는데 / 百世在前
공은 그 사이에 있어 / 公在其間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도다 / 不愧不怍
내가 명을 지어 후세에 알리노니 / 我銘詔之       사리에 어두운 자들이 진작하리라 / 昧者其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신흠(申欽)은 찬(撰)하다.


[주D-001]정의(亭疑) : 의법(疑法)에 대해서는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균평하게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생의(生議) : 미결수(未決囚)에 대하여 되도록 죽이지 않기 위해서 사죄(死罪) 이하로 논죄(論罪)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D-003]중획(重獲) : 원래의 뜻은 거듭 찾는다는 의미인데,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진(晉) 나라 대부(大夫) 봉씨(逢氏)가 패전(敗戰)하여 두 아들을 전차(戰車)에 태우고 도망하다가, 두 아들이 다른 사람을 구하고자 차에서 내리려고 하므로, 봉씨가 말하기를, “내가 저 나무 밑에서 너희들의 시체를 거듭 찾으리라[重獲在木下].” 하고, 두 아들을 내려 주었는데, 과연 두 아들이 다음날 그 나무 밑에 죽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반드시 죽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左傳 宣公 十二年》
[주D-004]조만(操縵)의 무리 : 조만은 거문고의 줄을 조정해서 음색(音色)을 고르게 타는 것을 이른다. 옛날 태학(太學)의 교육에서, 가령 거문고를 배울 경우에는 거문고의 줄을 조정해서 음색을 고르게 하지 못하면 거문고를 자유자재로 탈 수 없다고 하였다. 조만의 무리를 벗어난다는 말은 곧 도학(道學)의 경지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禮記 學記》
[주D-005]요동공(遼東公) …… 되었다 : 위 태무제(魏太武帝) 때에 요동공 적흑자(翟黑子)가 포(布) 천 필을 뇌물로 받았는데, 그 사실이 발각되자, 적흑자가 저작랑(著作郞) 고윤(高允)에게 꾀하여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물으시면 사실대로 고해야겠는가, 숨겨야겠는가?” 하니, 고윤이 말하기를, “공은 유악(帷幄)의 총신(寵臣)으로서 죄가 있으면 사실대로 고할 경우 혹 용서를 받을 수도 있겠거니와, 거듭 주상을 속여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적흑자는 끝내 사실대로 고하지 않아서 죽고 말았다. 그 후 고윤이 사초(史草)에 관한 일로 최호(崔浩)와 함께 잡혀 죽게 되자, 태자(太子)가 고윤을 살리고자 하여, 고윤에게 최호에게만 덮어씌우고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도록 권하였으나, 고윤은 임금 앞에 불려 가서 자기가 관여한 것을 사실대로 말하니, 임금이 신의 있고 정직한 사람이라 하여 죄를 용서해 주었는데, 고윤이 물러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궁(東宮)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적흑자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해서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6]돈사(惇史) : 덕행(德行) 있는 이의 언행(言行)을 기록하여 후인(後人)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7]화려한 …… 꾸미어라 : 신하가 임금을 지성으로 보좌하는 것을 이른다.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이르기를, “신하는 바로 나의 팔다리요 귀와 눈이다 …… 내가 옛사람의 모습을 보아서, 해[日]와 달[月]과 별[星辰]과 산(山)과 용(龍)과 꿩[華蟲]을 무늬로 만들고, 종묘의 술그릇[宗彛]과 물풀[藻]과 불[火]과 흰쌀[粉米]과 보[黼]와 불[黻]을 수놓아 옷을 만들고자 하니, 네가 그것을 만들어다오.” 한 데서 온 말인데, 특히 흰쌀은 백성을 기르는 의미를 취한 것이라 한다. 《書經 益稷》
배과사전의 이항복 관련자료

이항복(李恒福;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고, 특히 죽마고우인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허다한 이야기로 더욱 알려진 인물이다. 1571년(선조 4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1575년에 진사초시에 오르고 158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綱目) 강연(講筵)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고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李珥)에 의하여 이덕형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內藏庫)의 강목 한질씩을 하사받고 옥당에 들어갔으며, 1583년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 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증지를 거쳐 1590년에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정철(鄭澈)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그 동안 그는 이조참관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총관을 겸하였으며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면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1598년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는데,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같은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왔다. 1600년에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했다는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는 성혼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 사퇴하였다.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1613년(광해군 5년)에 인재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북이파의 공격을 받도 물러나와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는데,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처벌의 요구를 누루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8년에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奏疏啓議)2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이 있다. 1601년에 의상(간의·혼상·물시계)을 제작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부정(李副正)의 묘표

공(公)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모이고 자는 모이며, 그 선대는 평창인(平昌人)이다. 대대로 후손 중에 보록(譜錄)할 만한 이는 다음과 같다. 육대조 천기(天驥)는 여조(麗朝)에서 벼슬하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영서(永瑞)에 이르러서는 우리 영묘(英廟)를 섬기면서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가 되고 문행(文行)으로 한 세상에 명성이 높았다. 이분이 휘 계남(季南)을 낳았는데, 계남은 정국(靖國)ㆍ정난(定難)의 즈음에 두 번이나 책훈(策勳)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이조판서(吏曹判書) 평원군(平原君)이 되었고 시호는 익평공(翼平公)이다. 이분이 성균관 진사 휘 양(亮)을 낳았는데, 진사가 종실(宗室)인 남천군(南川君) 쟁(崝)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덕(正德) 임신년 6월 2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음보로 선릉(宣陵)ㆍ광릉(光陵)ㆍ선원전(璿源殿)의 참봉(參奉)을 역임하고,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를 거쳐 예빈시 직장(禮賓寺直長)에 전임되었다가 인하여 주부(主簿)에 승진되었으며, 그 후로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장례원(掌隷院)의 사평(司評)과 사의(司議), 충훈부(忠勳府)의 도사(都事)와 경력(經歷), 사복시(司僕寺)와 한성부(漢城府) 등의 판관(判官), 종묘서 영(宗廟署令),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 돈녕부 첨정(敦寧府僉正), 풍저창 수(豐儲倉守), 사도시(司䆃寺)ㆍ사재감(司宰監)ㆍ내섬시(內贍寺) 등의 부정(副正), 제용감 정(濟用監正)을 역임하였다.
뭇 관료들 사이에서의 처신한 것으로 말하자면, 다른 이들은 모두 방자하게 혼란을 일으키면서 매우 사소한 재능을 낱낱이 들추어 내고 서로 다투어 바삐 서둘고 법을 가혹하게 하는 것으로 자기 재능을 과시하였으나, 공은 유독 움츠러들어서 마치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일을 만났을 적에는 태연하게 순서에 따라서 하여 반론을 세우지 않고도 직무는 곧잘 다스렸다. 그래서 비록 날로 절근(切近)한 보람을 가지는 것은 볼 수 없어도 1년 통계를 놓고 보면 성적이 유여하였다. 그리고 과천(果川)ㆍ산음(山陰)ㆍ죽산(竹山)ㆍ정선(旌善)ㆍ양양(襄陽)ㆍ강화(江華)ㆍ안산(安山)ㆍ광주(廣州)ㆍ청주(淸州) 등 고을을 다스릴 적에는 항상 자신은 검약하게 하고 아랫사람을 풍후하게 하고 점차적으로 시설(施設)을 추진하였으며, 성기(聲氣)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것이 두터웠으므로, 백성들은 공에게 마치 포대기에 싸인 어린애와 같았고, 공은 백성들에 대하여 마치 인자한 어머니나 엄한 스승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기뻐서 춤추고 노래하였다. 경진년 3월에 정침(正寢)에서 병으로 작고하니 향년이 69세였다. 인천부(仁川府)의 동쪽 초곡(草谷)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온화하고 중후하여 희로(喜怒)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고, 행실이 검약하여 부화(浮華)한 것을 물리쳤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한번 만나 보면 후덕장자(厚德長者)로 인정하였다. 측실에서 3녀를 두었고 끝내 아들이 없었으므로, 형의 아들인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 옥(沃)을 후사로 삼았다. 옥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딸에게 장가들어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정직(廷直)을 낳았다. 별제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숙(琡)은 내시 교관(內侍敎官)이고, 큰딸은 유학(幼學) 박언홍(朴彦弘)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생원 이경방(李經邦)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유학 권진기(權盡己)에게 시집갔다. 숙은 2남 1녀를 낳았고, 언홍은 1남 1녀를 낳았으며, 진기는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장인인 결성 현감(結城縣監) 최륜(崔崙)이 3녀를 두었는데, 큰딸은 바로 공의 배(配)로서 공보다 6년 뒤에 작고하였고, 그 다음으로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진 분이 실로 우리 어머니이다.
공이 작고한 지 26년이 된 오늘에 공의 손자인 숙(琡)이 행장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선생께서 친하고 또 자상히 아시니, 의당 명(銘)을 하셔야겠습니다.”
하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쓰는 바이다.
아, 선비가 도(道)를 배우는 것은 장차 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간혹은 만 권의 글을 읽고도 정사를 행함에 미쳐 그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그런 경우는 아무리 많은들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 그러나 공의 경우는 처음부터 학문을 말미암지 않았는데도 그 몸을 가지는 것과 남을 다스리는 일이 왕왕 옛사람과 부합되는 것이 많았으니, 어찌 타고난 바탕이 아름다워서가 아니겠는가.
옛날에 한 선제(漢宣帝)는 양리(良吏)를 높이 등용하여 혹은 재상으로 발탁하기도 하였고, 광무제(光武帝)는 맨 먼저 밀령(密令)을 찾아서 후(侯)에 봉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논자(論者)가 이것을 일러 힘쓸 바를 알았다고 하였으므로, 태사씨(太史氏)가 열전(列傳)을 편찬하면서 순리전(循吏傳)을 유림전(儒林傳)의 서열에 놓아서, 문장(文章)과 정사(政事)가 서로 이어져서 아름다움을 나란히 하여 조금도 서로 경중(輕重)을 이루지 않게 한 것이 진실로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는 사람을 쓰는 데 있어 예능을 우선으로 하고 이도(吏道)를 뒷전으로 치기 때문에 간혹 기재(奇才)를 품은 이가 있더라도 진사(進士)를 하지 못하면 자기 재능을 펼 수가 없고, 조금 재능을 편다 하더라도 또 과제(科第)에 국한되어 추천을 받아 공경(公卿)에 이를 수 없으므로, 아랫자리에만 맴돌다가 재능을 크게 쓰지 못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유를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이전에 만일 공을 원강(元康)ㆍ건무(建武)의 연간에 두어 공수형(龔水衡)ㆍ탁포덕(卓褒德)의 무리와 함께 분주히 노력하여 성적을 드러내게 했더라면 그 성취한 바가 또 어떠했겠는가. 그리고 물(物)에 미친 공리(功利)가 반드시 지금처럼 사소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은 의당 옛것을 숭상하는 선비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길이 탄식할 바이다.

[주D-001]광무제(光武帝)는 …… 하였다. : 후한(後漢) 때 탁무(卓茂)가 밀현 영(密縣令)이 되어 선정(善政)을 폄으로 인하여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졌으므로, 광무제가 즉위한 즉시 탁무를 찾아 들여서 태부(太傅)로 삼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해 주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2]만일 …… 했더라면 : 원강(元康)은 한 선제(漢宣帝)의 연호이고, 건무(建武)는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연호이며, 공 수형(龔水衡)은 한 선제 때에 발해 태수(渤海太守)가 되어 선정(善政)을 크게 편 공으로 특별히 수형도위(水衡都尉)로 발탁되었던 공수(龔遂)를 가리키고, 탁 포덕(卓褒德)은 광무제 때에 포덕후에 봉해진 탁무(卓茂)를 가리키는데, 탁무에 관한 고사는 앞의 주석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간이집(簡易集) 제2권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증(贈) 영의정(領議政) 이공(李公)의 신도비명

영남(嶺南) 지방에는 당초 모든 지역을 관장하는 군장(君長)이 없었다. 이알평(李謁平)이라는 분이 경주(慶州) 호암(瓠巖) 아래에서 태어나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으로 있었는데, 당시에 동등한 부(部)의 대인(大人)이 모두 여섯 명이었다. 이에 이들이 서로 신이(神異)한 인물을 물색하여 임금으로 세우니, 이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이다. 그리하여 이씨(李氏)가 마침내 신라의 원훈(元勳)으로서 거족(巨族)이 되었다.
그 뒤로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대관(大官)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문(斯文)에 명성을 떨쳐 지금까지 전해 오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익재 선생(益齋先生)인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휘 연손(延孫)이 공조 판서를 지냈는데, 공은 그분의 4세손이다. 증조고인 휘 숭수(崇壽)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이고, 조고인 휘 성무(成茂)는 안동부 판관(安東府判官)이며, 고(考)인 휘 예신(禮臣)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다.
진사는 은덕(隱德)의 소유자로 의취(意趣)가 또한 고아(高雅)하여 고사전(高士傳)에 들어가고도 남을 분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당대에 그 덕을 모두 보답받으려 하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주었는데, 나중에 공과 그 자손이 귀하게 됨에 따라 누차 증직(贈職)된 결과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배필인 전주 최씨(全州崔氏) 역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이르렀으며, 위로 3세(世)까지 차등 있게 추증을 받았다.
공은 휘가 몽량(夢亮)이요, 자가 언명(彦明)으로, 홍치(弘治) 기미년(1499, 연산군5)에 태어났다. 유년기와 소년기를 거쳐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을 쏟은 결과, 가정(嘉靖) 임오년(1522, 중종17)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무자년(1528, 중종23)에 형인 이몽윤(李夢尹)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분속(分屬)되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더욱 이름을 날려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을 거친 뒤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전직(轉職)되었으며 다시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형조와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고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으로 나갔다.
얼마 있다가 사헌부 지평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에 언관(言官)이 ‘너무 빨리 불러올리는 것은 일단 엄선해 보내어 공을 세우도록 권면하는 뜻이 못 된다’고 하였으나, 상은 이르기를, “북로(北路)는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장리(將吏)들이 대부분 법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지방에서 사람을 불러다 이목지관(耳目之官)으로 기용하는 것도 북로를 중하게 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마자 상(喪)을 당했다. 상복을 벗은 다음에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과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역임한 뒤,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집의로 승진하였으며, 또 선공감(繕工監)과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갑진년(1544, 중종39)에 중묘(中廟)의 상을 당해 빈전도감(殯殿都監)의 도청(都廳)으로 일을 마무리하였다.
을사년에 관례에 따라 당상(堂上)으로 품계가 오른 뒤 곧이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갔다. 명묘(明廟)가 처음 정사를 행할 때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부름을 받고 돌아와 우부승지와 좌부승지로 승진하였으며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였다. 그 뒤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고 또 병조의 참지(參知)와 참의(參議)를 거치고 나서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기유년(1549, 명종4)에 동지사(冬至使)로 경사에 갔다. 신해년에 도승지에서 특별히 가선대부의 품계로 오른 뒤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계축년(1553, 명종8)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조정에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한성부(漢城府)의 우윤(右尹)과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을묘년(1555)에 전라도가 왜구의 환란을 당해 피해가 막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방백(方伯)의 선임을 의논하게 되었다. 이때 이조 판서 윤춘년(尹春年)이 아뢰기를, “오늘날 재능으로 보나 기국(器局)으로 보나 이모(李某)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사실은 공을 밀어내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임당공(林塘公) 정유길(鄭惟吉)이 마침 그 당시에 이조 참판으로 있다가, 공이 몇 년 동안 계속 혼자서만 고생을 하고 있다고 난색을 표했으므로, 마침내 그 일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해에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가 판결사(判決事)로 바뀌었다. 정사년(1557)에 경기 관찰사로 나갔다. 기미년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고, 병조와 예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경신년에 다시 도승지로 임명되었으며, 신유년에 다시 예조 참판을 거쳐 특별히 자헌대부로 가자(加資)된 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임술년에 형조 판서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다.
계해년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어떤 사건과 관련되어 파면을 당한 뒤 선영이 있는 시골로 돌아가 거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용되어 의정부 우참찬과 지의금부사 및 오위 도총관(五衛都摠管)을 역임하고는, 갑자년 겨울에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66세였다.
상이 부음을 듣고는 조회(朝會)를 일시 중지하고 조문(弔問)과 제사를 의례(儀禮)대로 행하게 하였다. 을축년 봄에 포천현(抱川縣) 화산리(花山里)에 안장(安葬)하였다.
전부인(前夫人)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참봉(參奉) 이보(李保)의 딸이다. 그 소생인 아들 이운복(李雲福)은 영평 현령(永平縣令)이고,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김익충(金益忠)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진보 현감(眞寶縣監) 홍우익(洪友益)에게 출가하였다.
후부인(後夫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결성 현감(結城縣監) 최윤(崔崙)의 딸이다. 그 소생인 아들 이산복(李山福)은 수성금화사 별제(修城禁火司別提)이고, 이송복(李松福)은 선공감 감역관(繕工監監役官)이고, 이항복(李恒福)은 원임(原任) 의정부 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다. 딸은 승정원 좌승지인 민선(閔善)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원임 호조참의 행 고성군수(行高城郡守) 유사원(柳思瑗)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內外孫)의 남녀는 다음과 같다. 삼등 현령(三登縣令)인 이계남(李桂男)과 청단도 찰방(靑丹道察訪)인 이탁남(李擢男)과 직장 유사경(柳思璟)의 처는 영평(永平)의 소생이고, 사인(士人)인 이성남(李星男)과 이정남(李井男)은 오성부원군의 소생이고, 형조 참판 박동량(朴東亮)의 처는 승지(承旨)의 소생이고, 사인(士人)인 유부(柳薂)는 참의(參議)의 소생이다.
만력 무술년(1598, 선조31)에 공에게 영의정과 시림부원군(始林府院君)의 증직이 명해지고, 전부인과 후부인에게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명이 내려졌다.
공은 마음가짐이 소탈하고 평이하였으며, 청렴과 검약으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였다. 사람들과 사적(私的)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정성과 성의를 다하였으며, 일단 일에 임하였을 때에는 위엄을 갖추고 안색을 엄숙하게 하여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인륜지사(人倫之事)는 한결같이 지성에서 우러나와 행하였다. 일찍이 거상(居喪)을 잘 한다는 것으로 일컬어졌으며, 먼 지방에서 형의 상을 당해 통곡할 때에는 그 애통해하는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종족(宗族)에 대해서도 후덕스럽기 이를 데 없어, 생활이 빈한하여 살아가기 어려운 이를 만날 때에는 반드시 구휼해 주곤 하였다. 그리고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자금을 대주어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친소(親疎)를 막론하고 마치 자기 집처럼 여겨 공의 집을 드나들었는가 하면, 밥상을 이어 놓고 먹는 광경이 벌어지면서 날마다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공은 평생토록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직 심하다 할 정도로 좋아했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는데,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한 번도 옆에서 이를 떼어 놓으려고 하지를 않았으니, 그 천품(天品)이 고매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이 공무를 처리하는 솜씨로 말하면 넉넉하게 여유가 있고 또 민첩하기만 하였다. 또 공이 문서를 열람할 때에는 한꺼번에 몇 줄씩 읽어 내려가곤 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모두들 공을 따라갈 수 없다면서 추앙하였다.
영남에 있을 당시, 개인적인 상사(喪事) 때문에 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열흘 동안 관아를 비운 적이 있었는데,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부첩(簿牒)들이 계속 쌓여만 갔으므로 늙은 아전들이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해직을 허락받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공이 한번 일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상 위에 쌓인 부첩들이 한꺼번에 말끔히 처리되었으므로, 이를 보고서 탄복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호서(湖西)에 있을 당시, 어떤 사인(士人) 하나가 절도와 약탈을 당했다면서 도적을 붙잡은 뒤 현(縣)에서 작성한 문서를 가지고 공에게 왔는데, 공이 보니 도옥(盜獄)의 성립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공이 먼저 본인의 가산(家産)과 도적이 소지한 기물(器物) 및 의복 등을 물어 본 결과, 그 사람은 바로 남의 종으로서 나중에 부자가 된 사람이고 도적으로 몰린 사람은 그저 몰락한 사인(士人)일 뿐이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사인(士人)이 강퍅한 종을 혼내 주려고 왔다가 거꾸로 봉변을 당하고 붙잡힌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변변치 못한 관리가 그의 말만 듣고서 도옥(盜獄)으로 단정지은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심문하여 그 실정을 알아낸 뒤 그에 따른 죄를 주니, 도 전체가 공의 신령스럽고 밝은 식견에 탄복하였다.
이에 앞서 금성(錦城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어떤 토호의 집안에서 일으킨 송사(訟事)를 처리하면서 그 송사의 내용이 도리에 어긋난다[非理]는 것을 알고는 패소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와 있을 적에, 형조가 본도(本道)의 첩문(牒文)에 의거하여 계청(啓請)을 한 뒤 판결을 내린 것을 보니, 바로 예전의 비리(非理)에 해당되는 송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에 공이 동료들에게 논의를 꺼내기를, “가령 송관(訟官)이 판결을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감사(監司)까지 편들어 주었을 리는 만무하다.” 하자, 모두 말하기를, “문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공이 다시 그 직인(職印)의 흔적을 살펴본 결과 간사하게 위조한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그 사건이 마침내 바르게 귀결되었는데, 대개 이런 종류의 일들이 매우 많았다.
재차 어사대(御史臺 사헌부)의 어른이 되었을 적에, 상신(相臣) 심통원(沈通源)의 아들인 심뇌(沈鐳)가 겨우 서른 살의 나이에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로 나가는 일이 있게 되었다. 공은 심상(沈相)과 오랜 친구 사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대석(臺席)에서 그 일을 맨 먼저 꺼내어 말하기를, “서쪽 지방의 중진(重鎭)을 어찌 경력도 없는 연소한 사람에게 맡겨서야 되겠는가.” 하였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면서 다시 의논해 보도록 하자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심가(沈家)에 남몰래 알려 주자, 심(沈)이 간원(諫院)을 부추겨서 공이 대리시(大理寺)에 있을 때의 일을 주워 모아 탄핵을 하여 파직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조야(朝野)가 경악을 하고 통분하게 여기는 가운데, 대신(大臣)이 나서서 구해 주려고까지 하였으나, 결국에는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판서(判書) 김개(金鎧)가 찾아와서 공을 위로하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심(沈)은 원래 뒤끝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원한을 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는 김(金)이 말하기를, “공은 그저 그가 억지로 웃어 주는 모습만 보았을 따름이다.” 하였다.
최 부인(崔夫人)의 외조부는 판서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이다. 이에 앞서 눌헌이 태학생(太學生)을 대상으로 시험을 주관하고는 집에 돌아와 부인 황씨(黃氏)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뛰어난 선비를 얻어보게 되었다.” 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포천(抱川) 출신의 이모(李某)라는 유생은 뒷날 국가의 중한 그릇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였으므로, 황 부인이 마음속에 기억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10여 년이 지나 눌헌(訥軒)이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그때에는 최 부인도 이미 장성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공이 첫부인과 사별(死別)하게 되었는데, 황씨 가문의 서족(庶族)이 지나가는 말로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황 부인이 이를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이가 바로 선부자(先夫子)께서 기특하다고 일컬었던 사람이다. 나의 손녀 역시 뛰어난 여성이니, 반드시 그의 배필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하였다. 이에 일가친척이 내외(內外)를 막론하고 모두들 나이가 서로 맞지 않는다면서 반대하였으나, 황 부인은 그런 말을 귀 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 역시 이미 편방(偏房 첩실(妾室))을 두어 어린 자식들을 양육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으므로 재혼하여 가정을 꾸릴 의사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있던 공의 형이, 명가(名家)의 훌륭한 여성을 잃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강력히 권고한 결과, 마침내 결혼이 성사되었다.
최 부인이 일단 공에게 출가한 뒤로는 온유하고 화순한 태도로 부도(婦道)를 견지하면서 오직 공의 뜻을 따라 순종하였다. 당시에 공의 누이가 일찍 과부가 된 몸으로 아들 넷을 두었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제대로 기를 수가 없었고, 족질(族姪 종형제의 아들) 몇 사람이 또 집안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전 부인(前夫人) 소생의 세 자녀도 모두 미혼이었고, 부인의 소생 역시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인이 한결같이 성의를 다하여 양육하면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집안의 친족들이 볼 때에도 털끝만큼이라도 차이를 두어 대하는 점을 부인에게서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뒤에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하며 거하게 되었을 때에는 삼 년(三年)의 상기(喪期)가 지난 뒤에도 검소한 가운데 슬퍼하는 빛이 여전하였다. 또 오직 거친 명주 옷에만 감소(紺素)의 표리(表裏)를 대었을 뿐, 내의(內衣)와 치마는 반드시 무명과 베로 해 입었으며, 일문(一門)에 혼사나 경사가 있어 크게 모일 때에도 절대로 참석하는 일이 없었다.
자녀에 대한 교육은 무척 엄한 편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옷을 걷어올려 몸을 드러낸다거나 한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다거나 관잠(冠簪)을 갖추지 않고 대하는 일 등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외(內外)를 엄격히 구별하여 앉거나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할 때에 법도를 지키게 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서로들 장난을 치면서 웃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꾸짖어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였다. 부인의 오빠인 안음(安陰) 최정수(崔廷秀)가 부인보다 약간 위의 나이로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노년에 이르도록 누구보다도 가장 빈번하게 만나곤 하였지만, 시비(侍婢)가 있지 않으면 만난 적이 한 번도 있지 않았다.
부인이 죽어 장례를 치른 것은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 겨울의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공을 장사 지낸 지 39년이 되는 해요, 부인의 장례로부터는 33년이 되는 해라고 하겠다. 그러던 어느 날,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임) 상공(相公)이 직접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선인(先人)에게 불효가 막심한데, 분에 넘치게 너무나도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국가가 다사다난(多事多難)하게 된 이래로 또 빈 자리를 메우며 급속도로 승진하는 등 천지(天地)보다도 더 큰 은총을 받아 인신(人臣)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가장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지금 평상시처럼 예법을 모두 갖추어 사당에 모실 수는 없다 하더라도, 묘소에 비석을 세워 행적을 기록함으로써 불후하게 되시기를 도모해 보는 것이 구구한 나의 소원이다. 그러나 나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선공(先公)을 여의었고, 선부인(先夫人) 역시 내 나이 겨우 열다섯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서 생전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것들만을 정리해 놓았을 뿐이다. 또 나 자신이 직접 글을 지을 수도 없는 만큼 문학(文學)에 노성(老成)한 이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 선생이 벼슬살이에 싫증을 느껴 장차 외딴 고을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려 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더 이상 다행한 일이 없겠다.” 하였다. 이에 내가 행장을 받들어 읽고 나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승낙하였는데, 이와 함께 공과 관련되어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태학(太學)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공이 석전(釋奠)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임명되어 의식을 집행한 적이 있었다. 이윽고 제례(祭禮)를 다 마친 뒤에 명륜당(明倫堂)에서 음복(飮福)을 행하였는데, 당시에 정부의 백관들이 일 때문에 오지 못하고 오직 향관(享官)들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도, 공이 좌중을 압도하면서 행사를 진행하자 오히려 원수(員數)가 성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음복을 끝내고 나서는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연음(燕飮)을 하였는데, 이때에도 반드시 술잔을 잡고 자리에 있는 관원에게 전해 줄 적에 공이 술잔을 들고는 항상 좌우(左右)에 읍(揖)을 하였으며, 좌우에서 술잔을 건네 주어 받게 되었을 때에도 땅에 엎드려 사례를 한 뒤에 마시곤 하였다. 이렇듯 공이 끝까지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술을 마셨으므로 사람들 역시 함께 읍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공에게 권해도 공은 조금도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이, 겸허하면서도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온몸에서 우러나오곤 하였다. 그런데 다른 헌관(獻官)들은 공처럼 그렇게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진(先進)들이 보여 주는 행동거지에 대해서 작은 일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런 광경을 한번 목도하여 공이 장후(長厚)한 군자라는 것을 알고는 항상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그 뒤에 또 듣건대, 조정에서 문형(文衡)을 맡을 인물을 추대할 적에, 정임당(鄭林塘 임당은 정유길(鄭惟吉)의 호임)과 이량(李樑)이 선발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상으로 꼽히고 있었는데, 여러 재신(宰臣)들이 누구에게 더 권점(圈點)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이량의 권세(權勢)가 비록 한 시대를 압도하고 있긴 하였지만, 문망(文望)으로 보면 정임당을 능가할 수 없었으므로, 이량이 정임당에게 윗자리를 양보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명성을 높일 기회로 삼으려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두 헤아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이 종이를 앞에 두고는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권점하는 일에 끝내 참여하지를 않았었다. 대체로 보건대 공은 정임당과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면서도, 일이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 대해서 어쩌면 수치스러운 생각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이 또 이렇듯 확고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여 준 것에 대해서 더욱 탄복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상공(相公)을 우러러 살펴보건대, 풍채(風采)와 신태(神態)가 중후하고 원대한 데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손쉽게 처리하는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상공은 낭관(郞官)과 학사(學士)로 있을 때부터 당시 동류들보다 월등하게 출중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지극히 위태롭고 혼란한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을 적에도 목소리나 안색 한번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치 일만 마리의 소를 동원해도 어찌할 수 없어 그 나무의 무게에 머리를 돌려 버리고, 마치 일천 길 두레박 줄을 드리워야 물을 퍼올릴 수 있는 우물처럼 그 깊이를 잴 수가 없었으니, 우리 상공이 이런 그릇을 이룰 수 있었던 그 소이연(所以然)을 우리가 몰라서야 되겠는가.
과거에 공이 재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었고, 그리하여 눌헌(訥軒)의 선견지명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우리 어진 상공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고 보면, 하늘이 이 사이에 당초부터 간여하지 않았다고 또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일단 행장에 근거하여 대략 공의 본말(本末)을 서술하고 나서, 다시 말미에 나의 소견(所見)의 일단을 피력하여 붙이게 되었다. 그러고는 또 다음과 같이 명하는 바이다.

사람이 일백 가지 선행에 대해 / 人於百善
마음속으로 본받으며 노력할 순 있겠지만 / 可慕而力
도량과 절제를 겸비한 이는 / 惟量惟節
하늘이 반드시 점지하게 마련이니 / 必其天得
도량이 없으면 어찌 여유가 있겠으며 / 非量焉裕
절제 없이 어찌 탁월할 수가 있겠는가 / 非節焉卓
덕행과 정사에 드러난 일을 보더라도 / 德行政事
범속한 경지를 똑같이 초월하였나니 / 同歸拔俗
우리 공이 남긴 자취야말로 / 如公之爲
옛사람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으리라 / 求諸古人
직위는 상서(尙書)요 나이는 겨우 육십 대 / 八座六袠
공의 당대에는 이 정도로 그쳤지만 / 而止公身
융숭한 증직과 우악한 추숭 / 寵贈優崇
남겨 놓은 물건을 되찾듯 하였나니 / 若收遺餘
이는 대개 공에게 아들이 있어 / 蓋公有子
공과 같지 않은 점이 없었기 때문이라 / 無所不如
그 아들이 과연 어느 분인고 / 有子伊何
성스러운 임금님 도와 드리는 우리 상공 / 相我聖后
공이 후세에 남긴 은택을 / 維公之澤
실제로 우리들이 받고 있도다 / 我人實受

[주D-001]검소한 …… 여전하였다 : 시종일관 정성을 다해 예법을 준수하였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예를 행할 때에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해야 하고, 상을 당했을 때에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우러나와야 한다.[禮與其奢也寧儉 喪與其易也寧戚]”라는 말이 있다.
[주D-002]감소(紺素)의 표리(表裏) : 감색의 겉감과 흰색의 안감을 말한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자공(子貢)이 멋진 말을 타고서, 안감은 감색 겉감은 흰색의 옷[中紺而表素]을 입은 복장으로 원헌(原憲)을 찾아 왔다.”는 말이 있다.
[주D-003]일만 마리의 …… 돌려 버리고 :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에 “가령 고대광실이 기울어져 들보와 기둥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언덕이나 산처럼 무거운 이 나무를 끌고 가려면 일만 마리의 소도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 것이다.[大廈如傾要梁棟 萬牛回首丘山重]”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5 古柏行》
계곡선생집 제15권
행장(行狀) 5수(首)
추충분의평난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오성부원군 이공 행장(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鰲城府院君李公行狀)

공의 휘(諱)는 항복(恒福)이요, 자(字)는 자상(子常)이요, 그 선조는 경주(慶州) 사람이다. 원대(遠代)의 선조인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은 문장과 덕업(德業)으로 고려의 명상(名相)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으로 일컬어져 오고 있다.
부친 몽량(夢亮)은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 3조(朝)를 잇따라 섬기면서 관직이 참찬에 이르렀는데, 최 부인(崔夫人)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병진년 10월 경자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이틀 동안 젖을 먹지 않고 사흘이나 울지 않았으므로 가인(家人)이 걱정을 하였는데, 참찬공이 점쟁이로 하여금 점을 쳐보게 하였더니, 점쟁이가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귀한 자리에 오를 괘(卦)입니다.”
하였다. 그 뒤로 차츰 자라나면서 재기가 번뜩이고 준걸스러워짐은 물론 식견과 도량이 보통 아이들을 훨씬 뛰어넘었으므로 참찬공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가 필시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다.”
하였다.
8세 때에 이르러 처음 글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월등하게 총명한 자질을 보였다. 한번은 참찬공이 검(劍)과 금(琴) 두 글자를 내주며 대구(對句)를 지어 보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시를 짓기를,
“칼에는 장부의 기상이 서려 있고, 거문고엔 천고의 소리가 감추어져 있다.[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
하였으므로, 이를 들은 사람들이 장차 대성(大成)할 그릇이라는 것을 감지하였다.
9세 때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애훼(哀毁)하기를 성인(成人)처럼 하였고 소식(素食)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그리고 12, 13세 무렵에 벌써 의기(義氣)를 자부하는 행동을 곧잘 발휘하면서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다른 이들을 구해 주려는 뜻을 펼쳐 보이곤 하였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새로 지어 준 솜옷을 입고 나갔다가 해진 옷을 입은 이웃집 아이가 이를 보고서 입고 싶어하자 공이 즉시 벗어서 준 적도 있었고, 또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남에게 주고는 맨발로 집에 돌아온 일도 있었다. 이에 최 부인이 공의 뜻을 시험해 볼 목적으로 짐짓 성내며 꾸짖었더니, 공이 대답하기를,
“다른 이가 갖고 싶어하는데 차마 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최 부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하기도 하였다.
15세 무렵에 이미 건장하고 씩씩한 면모를 과시하며 용기를 뽐내기를 좋아하여 각저(角抵 소처럼 머리를 맞대고 힘을 겨루는 것)나 축국(蹴踘 발로 공을 차는 것) 같은 소년의 놀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곤 하였는데, 최 부인이 듣고서 준절하게 책망하자 공이 하고 싶은 마음을 통렬히 끊어 버리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6세에 최 부인이 죽었는데 거상(居喪)하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학궁(學宮)에서 노닐게 되었는데 학문이 갈수록 이루어져 성예(聲譽)가 드높았다.
25세 때 경진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지(權知)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
선조(宣祖)가 장차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講)할 목적으로 태학사(太學士)에게 명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한 재신(材臣)을 미리 뽑아 두도록 하였다. 이에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다섯 사람을 추천해 올렸는데, 이때 공이 실로 거기에 참여되었다. 그러자 상이 대내(大內)에 소장하고 있던 《강목》 1질(帙)을 하사하는 한편, 이문(吏文), 한어(漢語)나 시사(試射)와 같은 잡다한 기예(技藝)로 번거롭히지 말도록 명하고, 이어 장가독서(長暇讀書)의 은사(恩賜)를 내린 뒤 옥당으로 선발해 들여 정자(正字)에 임명하였다.
갑신년에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대사간 이발(李潑)에 대해 붕당(朋黨)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체직시킬 것을 논했다가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크게 거슬리게 되자 마침내 병을 핑계 대고 3번이나 정고(呈告)하였는데, 선조가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를 옥당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다시는 소장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이어 박사(博士)로 승진했으며, 을유년 봄에 예문관 봉교로 옮겨 제수되었다. 그리고 차서(次序)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한 다음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천거를 통해 이조 좌랑과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전랑(銓郞)은 세상에서 열관(熱官 위세 있는 관직)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공은 마치 한사(寒士)처럼 숙연하게 그 자리에 임하였다. 이때 조사(朝士) 두 사람이 관각(館閣)의 직책에 몸담고 있으면서 은밀히 전조(銓曹)에 들어오려고 획책하여 공에게 빈객(賓客)을 보내 많이 유세(游說)를 벌이곤 하였는데, 공이 평소에 그들의 사람됨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듣고도 전혀 못 들은 것처럼 일관하였다.
그 뒤에 곧바로 수찬이 되었다가 병술년에 또 정언으로 임명되었으며, 정해년에 교리로 승진하였다. 그 뒤 무자년에 다시 이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고, 기축년에 여기에서 체직되어 예조 정랑이 되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자 상이 친림(親臨)하여 죄수들을 국문(鞫問)하였는데, 이때 공이 문사낭청(問事朗廳)으로 입시하면서 상의 뜻에 걸맞게 일 처리를 명민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늘 공을 호명(呼名)하며 이르기를,
“이모(李某)에게 말을 전달하게 하라.”
하곤 하였는데, 다른 동료들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있기만 할 뿐 감히 상의 그러한 총애를 기대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대신이 헌의(獻議 죄수를 재심리(再審理)하여 평의(評議)하는 것)할 때마다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가능한 한 평반(平反 관대한 쪽으로 율(律)을 적용하는 것)이 되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경인년에 응교로 승진한 다음 의정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거쳐 전한(典翰)으로 다시 승진하였다. 언젠가 강연(講筵)에 입시하였을 때, 선조가 특별히 공을 앞으로 부르고 나서 문사낭청 당시의 일을 거론하며 공을 고재(高才)라고 거듭 일컬으면서 극구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 뒤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는 동시에 승정원 동부승지의 제수를 받았다. 또 문신(文臣)을 대상으로 한 정시(庭試)에서 공이 수석을 차지하여 구마(廐馬)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신묘년 봄에 체직되어 호조 참의가 되었는데, 요회(要會 월말 및 연말의 회계 결산)를 정밀하게 따져 쓸데없는 비용을 감축한 결과 겨우 한 달이 지나는 사이에 부고(府庫)가 충실해졌다. 그러자 판서로 있던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대기(大器)라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문한(文翰)을 전공한 인사가 이렇듯 전곡(錢穀)에 관한 일까지 능란하게 처리하다니 참으로 통재(通才)이다.”
라고 하였다.
역적을 다스린 공으로 책훈(策勳)되어 공에게 추충분의평난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의 호가 하사되었다.
그때 마침 사화(士禍)가 일어났는데 정 상공 철(鄭相公澈)을 화수(禍首)로 삼아 삼사(三司)가 법문(法文)을 농간부리면서 장차 부도(不道) 이상의 죄를 적용하려고 하였으므로 정공(鄭公)이 강변에 나가 처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화기(禍機)가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자 문생(門生)이나 친척, 고구(古舊)들 모두가 겁에 질린 나머지 감히 문안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만은 홀로 차례로 방문하면서 조용히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태롭게 여겼다.
얼마 안 있어 공이 승지로 임명되었는데, 정철의 죄안(罪案)을 조당(朝堂)에 게시하도록 했는데도 공이 봉행(奉行)하는 일을 완만하게 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다.
당시 명류(名流)로서 시의(時議)를 거역한 인사들은 일체 당인(黨人)이라는 지목을 받은 나머지 거의 대부분 차례차례 관직이 떨어지는가 하면 귀양가는 신세가 되곤 하였다. 그리하여 공에 대해서도 예전부터 유감을 품어온 대관(臺官) 하나가 귀양보내는 대상에 포함시키려 하였는데, 대사헌으로 있던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극력 구해 준 덕택에 공이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나서 공이 차서에 따라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임진년 4월에 왜노(倭奴)가 대거 침입해 들어왔는데, 신립(申砬)의 패보(敗報)가 전해지자 중외(中外)가 경악하여 마지않았다. 상이 서쪽으로 피신갈 계책을 이미 굳히고 나서 좌상(左相) 유성룡(柳成龍)을 책명(策命)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았다. 이에 공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좌상을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한들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태로 볼 때 장차 상국(上國)에 들어가 구원을 호소해야 할 텐데, 그때의 사명(辭命 외교 문서의 작성 및 전달)에는 반드시 그의 솜씨가 필요할 것이다.”
하고는, 명을 개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적보(賊報)가 날로 급해지자 공 스스로 나라에 몸바칠 각오를 단단히 하고는, 공무를 파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외사(外舍)에 거처하면서 안쪽 문을 걸어 잠근 채 집안일로 자신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엄금하였다. 그리고 형과 누이와도 서로 결별(訣別)을 하였는데, 측실(側室)이 울면서 한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달 그믐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백관들도 미처 모이지 못한 상황에서 칠흑 같은 밤에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전(中殿)은 독자적으로 시녀(侍女) 10여 인과 함께 도보(徒步)로 인화문(仁和門)을 빠져 나갔다. 공이 촛불을 들고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거가(車駕)가 밤에 임진(臨津)을 건넜다.
이튿날 상이 따라온 재신(宰臣)들을 불러 모은 뒤 채찍으로 땅을 두드리며 하문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하겠는가?”
하였는데, 재신들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공이 맨 먼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병력만으로는 적을 막기에 부족하니, 서쪽으로 나아가서 중국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좋은 의견이라고 수긍하였다.
송도(松都)에 도착하고 나서 공을 특별히 이조 참판에 승진시키고 오성군(鰲城君)에 봉(封)한 뒤 두 왕자를 보호해 먼저 평양(平壤)으로 가도록 명하였다. 얼마 뒤에 거가도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는 오래도록 근시(近侍)에 있었던 신분으로 뜻이 굳세고 사려가 깊으니 승진시켜 발탁하여 중책을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는, 뒤이어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제수하고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당시에 공이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입대(入對)하여 빨리 구원병을 청하는 주본(奏本)을 올리자고 청하였는데, 대신이 처음에는 공과 의견을 달리하였으나 공이 강력하게 쟁집(爭執)하자 그렇게 하기로 의논이 정해졌다. 그리고 조도사(調度使)를 세 곳으로 나눠 보내어 군량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끝내 국가를 재건하는 공을 이룩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바로 공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병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그리고 지경연, 춘추관, 동지성균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에 임명되었다.
임진(臨津)의 수비가 무너지면서 적이 패강(浿江 대동강(大同江))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그러자 이공 덕형이 자진하여 청하기를,
“내가 배를 타고 가서 적장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만나 왜적의 진격을 늦춰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두 적의 머리를 베어 오겠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두 적으로 말하면 매우 미미한 존재이니 그들을 죽인다 해도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에 부족하다. 단지 우리가 먼저 의롭지 못했다는 소문만 날 것이니, 온당한 계책이 못 된다.”
하여,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상이 따라온 신하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갈 곳을 의논하게 하자, 더러 아뢰기를,
“함흥(咸興)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궁벽진 곳이긴 하나 병량(兵糧)이 많으니 지켜 낼 만합니다.”
하였는데, 공과 이공 덕형이 누차 쟁집하여 아뢰기를,
“함흥은 상국(上國)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곳에 가시면 안 됩니다. 영변(寧邊)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공과 이공이 각각 자진해서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구원병을 요청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상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병조 판서가 멀리 나가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이공에게 가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자신의 참마(驂馬)를 수레에서 풀어 이공에게 주면서 눈물로 작별하였다.
적병은 점차 거리를 좁혀 오는데 관군이 잇따라 패하여 무너지자, 상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 의논하기를,
“일이 급하게 된 만큼 내가 내부(內附)해야 하겠다. 다만 부자(父子)가 함께 압강(鴨江)을 건너게 되면 나라에 주인이 없게 되니, 세자는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다. 경들 중에 누가 나를 따라서 서쪽으로 건너가겠는가?”
하였는데, 신하들이 미처 응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이 눈물을 흘리며 답변드리기를,
“신은 몸이 건강한 데다 부모도 안 계시니 목숨을 바쳐 전하를 따라가고자 합니다.”
하였다.
거가가 박천(博川)에 머무르고 있을 때 급보(急報)가 이르렀으므로 상이 재촉하며 출발하도록 명하였는데 시간은 벌써 밤 2고(鼓)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마침 비가 내리면서 가는 길이 험하기만 하였는데, 시위(侍衛)하는 자들이라야 10명의 숫자도 채우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공이 관속(官屬)들에게 이르기를,
“전위(前衛)가 무척 허술하니 우리들이 거가 뒤에 있으면 안 되겠다.”
하고는, 마침내 말에 채찍질하여 앞장서서 인도하였다. 거가가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성안에 거주하고 있던 백성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다. 이에 공이 해사(廨舍)를 수리하여 오래 머물 뜻을 보여 주자고 청하였는데, 그렇게 하자 이민(吏民)이 과연 조금씩 돌아와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공이 또 건의하기를,
“호(湖)ㆍ영(嶺) 등 3로(路)에서 행재(行在)가 어디에 머물고 계신지 모르고 있으니, 급히 사신을 보내 선유(宣諭)함으로써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라 윤승훈(尹承勳)을 해로(海路)로 호남에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조정의 명이 비로소 통하면서 제도(諸道)의 근왕병이 점차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금여(琴旅)의 형세가 단약(單弱)한 것을 염려한 나머지 전사(戰士)들을 나누어 입위(入衛)케 하자고 청하였는데, 공이 이를 물리치면서 아뢰기를,
“전투 부대의 군졸들은 적을 격파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하고, 별도로 민정(民丁)을 뽑아 금위(禁衛)를 보완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요좌(遼左)에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우리나라가 왜적을 인도하여 중국에 쳐들어온다고 하였으므로,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지휘(指揮) 화응양(黃應暘)을 보내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응양이 처음에 우리나라를 상당히 의심하면서 왜서(倭書)를 한번 보자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공이 도성(都城)에 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서 신묘년에 왜추(倭酋)가 보낸 모욕적인 서신을 직접 싸가지고 왔다가 이때에 이르러 응양에게 보여 주니, 응양의 의심이 완전히 풀리면서 심지어는 가슴을 치고 큰소리로 통곡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돌아간 다음 사유를 갖추어 사실대로 보고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보내는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명 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과 사유(史儒)가 7천 병력을 이끌고 먼저 도착하였다. 이때 공이 말하기를,
“조장(祖將)을 보건대 조급하게 굴기만 할 뿐 계책이 없으니 군대가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다.”
하였는데, 평양(平壤)으로 진격하다가 과연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사유가 전사하고 승훈은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는데, 돌아가서는 거꾸로 우리나라가 왜구를 도왔다고 무함을 하였다. 이에 공이 대신을 파견하여 광녕(廣寧)에 가서 그 무함을 해명하게 할 것을 청하는 한편, 또 사신을 보내 상주(上奏)하여 대군의 출발을 재촉하자고 청하였다.
12월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5만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공이 군사 행동에 기율(紀律)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상에게 아뢰기를,
“군사 작전이 반드시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다만 막하(幕下)에서 정 동지(鄭同知 정문빈(鄭文彬))와 조 지현(趙知縣 조여매(趙如梅))이 모든 일을 좌우하고 있는데, 뒷날 큰 계책을 저지할 자들은 필시 이자들일 것입니다.”
하였다. 계사년 정월에 제독이 평양에 진격하여 적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적을 추격하다가 벽제(碧蹄)에 이르렀을 때, 적의 복병을 만나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제독의 기가 꺾이면서 마침내 화의(和議)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는데, 이때 정(鄭)과 조(趙) 두 사람이 실로 그 모의를 주도하였으니, 공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하겠다.
경성의 적이 일단 퇴각을 하자 공이 대가(大駕)를 돌릴 것을 강력히 청하여 10월에 대가가 서울로 돌아왔다.
11월에 명 나라의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조칙(詔勅)을 받들고 오자 공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가 영접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왕세자로 하여금 호조 및 병조의 관원과 함께 전라ㆍ경상 지방에 먼저 내려가 군대의 일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병조의 장관 신분이라서 마침내 원접사의 임무를 그만두고 세자를 배행(陪行)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갑오년 봄에 호서(湖西)의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반란을 일으키자 분조(分朝)의 신하들이 세자를 모시고 조정에 돌아가 적을 피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온당한 계책이 못 된다고 반박하니, 세자가 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역적의 무리 역시 평정되었다.
세자가 홍주(洪州)에 있을 적에 보령(保寧)의 수영(水營)으로 옮겨 머물려고 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이 다녀와서는 머물 수 없는 곳이라고 속임수로 대답하였다. 이에 더러 의심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영보정(永保亭)은 그 경치가 호중(湖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 따라서 소주(少主)께서 이곳에 머무르시면 뒷날 방탕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식자들이 그 원대한 식견에 탄복하였다.
을미년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병신년에 중국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일본의 추장(酋長)을 책봉(冊封)하려 하였는데,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이 공을 접반사(接伴使)로 삼게 해 달라고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공이 사조(辭朝)한 다음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직책을 해면(解免)시켜 줄 것을 청하니,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하였다. 양 부사가 공을 그지없이 공경하고 중히 여기면서 늘 말하기를,
“동방에 이런 인물이 있으니, 어찌 외국(外國)이라고 해서 경시해서야 되겠는가.”
하곤 하였다.
왜영(倭營)에 들어가 있을 때에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이 장차 적이 무도(無道)한 짓을 저지르려 한다는 소문을 잘못 듣고는 자기 혼자 빠져 나와 야간 도주를 하였으므로 원근(遠近)이 크게 경악하였다. 이에 양사(楊使)가 급히 공으로 하여금 조정에 달려가 보고하게 하자, 공이 이틀 밤낮을 전속력으로 말을 치달려 도착하고 보니 이사(李使)가 이미 거기에 와 있었다. 그런데 적들 또한 끝까지 그런 행동을 취하려 하지를 않았다. 처음에 공이 이사(李使)를 보고 나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귀한 집 자제로 문묵(文墨)만 일삼아 왔으니 분명히 명(命)을 욕되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지나고 보니 과연 공의 말대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감식안(鑑識眼)이 있다고 일컬었다. 겨울에 양사(楊使)가 본국에 돌아가자 공이 국경까지 그를 전송하였다.
정유년에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중국 조정에서 재차 군대를 일으켜 왜적을 정벌할 때, 양 어사 호(楊御使鎬)가 군무(軍務)를 경리(經理)하였는데, 격문(檄文)으로 호조ㆍ병조ㆍ공조의 관원을 불러 국경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이에 공이 구연성(九連城)으로 나아가 영접한 뒤 모두 기의(機宜)에 맞게 응대하였다.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뒤이어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로 공이 병조 판서를 맡은 것이 모두 5번이었다. 당시 대적(大賊)이 나라 안에 그득하고 중국 군대가 수륙(水陸)으로 건너와 집결하는 상황에서 군사에 관한 일치고 병조 판서의 책임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이 이에 매사를 온당하게 조처하며 시원스럽게 너끈히 처리함은 물론 항상 포목(布木) 1만 필을 남겨 비축해 둠으로써 급할 때 쓸 수 있도록 대비를 하였는데, 양 경리(楊經理)도 이런 공의 일처리에 탄복한 나머지 어려운 일을 당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 상서(李尙書)를 찾아보라고 하곤 하였다.
무술년 가을에 명 나라의 찬획(贊畫) 정응태(丁應泰)가 양 경리를 무함하여 탄핵하자, 우리나라에서 경략을 변호하는 주문(奏文)을 올려 유임시켰는데, 응태가 이 일로 우리나라에 대해서 유감을 품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끝에 이번에는 우리나라를 무함하는 주본(奏本)을 올리면서 그지없이 참혹하게 지껄여 대었다. 이에 선조(宣祖)가 크게 놀라 장차 대신을 보내 해명하려고 하면서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을 의중에 두고 있었는데, 유공(柳公)이 자진해서 가겠다고 제때에 청하지 않자 서노작 노여워하였다. 그리하여 유공이 탄핵을 받고 정승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마침내 공이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작위가 올라가면서 진주사(陳奏使)가 되었다. 이때 공이 2번이나 차자를 올려 극력 사양하면서 가짜로 임시 직함을 띠고 사명(使命)을 수행하고자 하였으나, 상이 이르기를,
“무함을 해명하려고 하면서 먼저 임금을 기만하면 되겠는가.”
하였으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명에 숙배(肅拜)하였다. 공이 이틀 길을 하루에 달릴 정도로 급히 북경(北京)에 달려가서 일단 주문(奏文)을 올린 다음, 두루 각부(閣部)를 찾아다니며 정문(呈文)으로 통쾌하게 변박(辨駁)을 하였는데, 각부의 제공(諸公)이 공의 의표(儀表)에 이미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었던 터에, 문장의 논리 또한 명쾌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더욱 칭찬하고 탄복하며 경쟁적으로 다주(茶酒)를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치욕은 자연히 씻어질 것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천자가 마침내 정응태를 혁직(革職)시키는 동시에 위유(慰諭)하는 조칙(詔勅)을 내려 주기까지 하였는데, 이듬해에 공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선조가 크게 기뻐하며 공에게 전답과 노복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그 뒤에 논하는 이들이 정응태 사건에 대한 죄를 당시 접반사(接伴使)였던 백유함(白惟咸)의 탓으로 돌려 그를 하옥시켰는데, 삼성회국(三省會鞫 의정부ㆍ사헌부ㆍ의금부의 관원이 연석(連席)하여 죄인을 국문하는 것)을 벌일 때 공이 위관(委官 재판장)으로 상헌(上讞 죄의 경중을 재심리하여 위에 보고하는 것)하면서 그의 억울한 정상을 아뢰자, 선조가 용서해 주었다.
이때 조정의 의논이 더욱 강력하게 유상(柳相)을 공격하고 나섰는데, 그 명분이 갑오년에 화의(和議)를 주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공이 소장을 올려, 자신도 일찍이 화의에 찬동했던 만큼 감히 요행수로 면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병을 핑계로 면직되고 말았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이 일과 관련하여 선조가 하교하기를,
“어떤 일을 다른 사람과 함께하다가 끝에 가서 그만 태도를 바꿔 버리는 자는 바로 이모(李某)의 죄인이라 할 것이다.”
하였다.
경자년에 도체찰사(都體察使) 겸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호(湖)ㆍ영(嶺) 등 제로(諸路)를 선무(宣撫)하였다. 이때 호남 지방의 역역(力役)을 관대하게 해 줄 것을 청하는 한편 백성을 안정시키고 해로(海路)를 방어할 16개 조목의 계책을 올렸는데, 상이 그 주장을 많이 채택하였으므로 남쪽 백성들이 그 은덕을 많이 입었다. 여름에 영의정으로 임명되어 소환되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상승(上昇)하자 공이 장례 행렬을 따라 산릉(山陵)에 갔는데, 궁인(宮人)이 실화(失火)하는 바람에 영악전(靈幄殿)에까지 불길이 옮겨 붙었다. 창졸간에 일어난 변이라서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공이 조용히 지휘하며 불을 끄고 나서 예관(禮官)을 불러 속히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재궁(梓宮)을 받들고 의례(儀禮)대로 장례일을 마치게 하였는데,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한편으로는 거행하고 한편으로는 치계(馳啓)하면서 끝내는 이날 돌아와 우제(虞祭)를 지낼 수 있게 하였으므로, 이를 듣고는 사람들이 변고에 대처하는 공의 능력에 대해서 탄복하였다.
공이 누차 사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매우 간절하게 돈유(敦諭)하자 공이 이에 일어나 정사를 보기 시작하였다. 상이 학행(學行)을 소유한 인사들을 천거하라고 명하자, 공이 김장생(金長生), 신응구(申應榘), 이기설(李基卨) 등을 추천하여 유지(有旨)에 응하였다. 또 언젠가는 입대(入對)하여 치도(治道)를 논하면서 아뢰기를,
“위에서는 마음을 활짝 열어 주며 공도(公道)가 펼쳐지게 하고, 아래에서는 붕당(朋黨)을 깨뜨리고 염치있게 행동하는 이것보다 오늘날 더 급히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이때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추장이 글을 보내 우호 관계의 수립을 청하였는데, 공이 의논드리기를,
“이 추장이 중국 조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있는 만큼 의리로 볼 때 우리나라가 사적(私的)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뿐더러 뒷날 걱정을 끼치게 될 것이 또한 분명하니 사신을 사절(謝絶)토록 하소서.”
하였다.
임인년 봄에 이르러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삼사(三司)가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를 논핵하면서 장차 그의 죄를 추가하려고 하자, 공이 ‘성혼은 유림(儒林)으로부터 중망(重望)을 받고 있는 만큼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차자(箚子)를 작성하였는데, 그때 마침 권신(權臣)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공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공이 정상 철(鄭相澈)의 패거리라고 몰아세웠으므로, 공이 마침내 인고(引告)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차자도 결국 올리지 못한 채 마침내는 이 일 때문에 정승에서 해면(解免)되기에 이르렀다.
일단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자 공은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사양한 채 경전(經傳)과 염락(濂洛 성리학자(性理學者))의 서적들을 두루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課程)을 설치한 것이 매우 엄격하였다. 공은 또 본래부터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성품이라서 젊었을 적에 중흥동(中興洞) 계곡을 찾아 많이 노닐곤 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화창한 날을 맞게 되면 문득 한두 명의 자질(子姪)을 따라 필마(匹馬)로 가 노닐면서 밤새도록 읊조리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선조는 평소 공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공이 지위를 떠나 있었어도 은례(恩禮)는 여전히 쇠하지 않았다. 갑진년 원일(元日)에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이변이 일어나자 상이 신하들에게 구언(求言)하였다. 이에 공이 유지(有旨)에 응해 차자를 올려 잘못된 일들을 극론(極論)하면서 아뢰기를,
“성의(誠意)를 미루어 나가는 것은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셔야 할 것이요, 공도(公道)를 확립하는 것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개절(剴切)함에 탄복하였다.
호종(扈從)한 공을 책훈(策勳)할 적에 공이 원훈(元勳)으로서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도적이 재신(宰臣) 유희서(柳煕緖)를 죽였는데, 그 도적을 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포도대장 변양걸(邊良傑)이 그 사건을 끝까지 캐내며 수사하다가 유배를 당하는가 하면 희서의 아들까지도 장류(杖流)되는 사태에 이르자, 수상(首相) 이덕형(李德馨)이 상소하여 이를 논하였는데, 상의 뜻을 거스른 나머지 마침내 정승의 직책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에 공이 이공 대신 다시 정승이 되었는데, 누차 사직소를 올리면서 아뢰기를,
“양걸이 폄적(貶謫)된 것에 대해서는 신도 그야말로 내심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는데 단지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덕형은 이미 말씀드린 신하요, 신은 아직 말씀드리지 못한 덕형일 따름입니다. 그러니 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신의 속마음이야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런 내용의 소장이 8차례나 올라간 끝에야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병오년에 대마도(對馬島)의 오랑캐 의지(義智)가 사신을 보내 화의(和議)를 청하였다. 유영경(柳永慶)이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위에 건의하여 임진왜란 때 능(陵)을 범한 적들을 잡아 보내게 하였다. 이에 의지가 속임수로 사형수 2명을 잡아와 바쳤는데, 모두 나이가 어려 임진년 당시에는 7, 8세의 나이에도 미치지 않았을 그런 자들이었다. 그런데 영경은 이를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고 그들을 종묘에 장차 바친 뒤 용서해 주자고 하였고, 공은 그들을 변경에서 주륙(誅戮)함으로써 왜사(倭使)에게 조정의 태도를 보여 주자고 하였으나, 조정에서 결국은 영경의 의논을 채택하였다.
김계(金稽)라는 자가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宣祖)의 생부)을 추존(追尊)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영경이 귀뜸해 준 결과였다. 상이 그 일을 의논하도록 아래에 내려보내자 비위를 맞춰 요행수를 바라는 무리들이 서로 앞다투어 견강부회하였는데, 공이 의논드리기를,
“이러한 일을 위에서 이미 행한 임금들이 있으니, 애ㆍ안ㆍ환ㆍ영(哀安桓靈 한(漢) 나라의 애제와 후한(後漢)의 안제, 환제, 영제를 가리킴)이 바로 그들이요, 아래에서 이를 비난한 인사들이 있으니 주ㆍ장ㆍ정ㆍ주(周張程朱 송(宋) 나라의 학자인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이(程頤), 주희(朱熹)를 가리킴)가 바로 그들입니다.”
하자, 군의(群議)가 결정되면서 그 일이 잠잠해지게 되었다.
처음에 선조(宣祖)가 적사(嫡嗣)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광해(光海)가 오래도록 저위(儲位 세자의 위치)에 있었는데 실덕(失德)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당시에 선조가 장기간 병석에 누워 있게 되자, 국가를 위태롭게 하며 화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자들이 헛소문을 퍼뜨려 동요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인홍(鄭仁弘)의 소(疏)가 들어가자 인심이 의혹에 잠기고 중외(中外)가 온통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조가 승하하고, 그 이튿날 광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임해군(臨海君)이 나이가 가장 많아 몰리는 입장에 놓여 있었는데, 평소부터 잘못을 많이 범해 오면서 집에다 불량한 사나이들을 모아 놓고 있었다. 이에 광해가 의심을 해 오던 나머지 병력을 집결시켜 궐문(闕門)을 호위하도록 명하였는데, 대낮에도 궁문(宮門)을 열지 못하게 한 지가 한 달이 넘었다. 이때 어떤 관원이 공을 찾아와 임해군에 대한 일을 의논하자, 공이 말하기를,
“왕자가 현재 상차(喪次)에 있고, 또 모반한 정상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무턱대고 형벌을 가한단 말인가.”
하였는데, 며칠 뒤에 삼사(三司)에서 임해가 불궤(不軌)를 꾀한다고 밀계(密啓)를 올린 결과 교동(喬桐)으로 유배보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이 다른 사태가 벌어질까 미리 염려하여 임해의 목숨을 온전히 보전케 해 줄 것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수상(首相)인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도헌(都憲)인 정공 구(鄭公逑)가 논한 것도 공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자 논하는 자들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역적을 변호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마침내 진신(搢紳)을 화망(禍網)에 빠뜨릴 계제(階梯)로 삼았다.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 날짜가 확정된 상태에서 기자헌(奇自獻)이 좌도(左道)의 말을 믿고 다른 의논을 내어 동요시켰는데, 공이 상차(上箚)하여 그 망녕된 주장을 변박(辨駁)하였으므로 마침내 처음 정한 날짜에 따라 거행하게 되었다.
또 창원 부사(昌原府使) 정경세(鄭經世)가 상소하여 외척(外戚)이 정권을 잡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논하자, 광해가 노하여 선조(先朝)와 관련된 말이라고 하면서 장차 금부에 내려 다스리게 하려 하였는데, 공이 2번이나 아뢰어 극력 구해 준 덕분에 경세가 화를 면하고 단지 삭직(削職)만 당하였다.
4월에 좌상 겸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총호사(摠護使)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목릉(穆陵 선조의 능) 공사가 일단 마무리되자 삼사가 임해를 복주(伏誅)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공은 예전의 주장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이에 정인홍이 상차하여, 목숨을 온전히 보전케 해 줄 것을 주장하는 이들을 공박하였으므로, 공이 2차례나 상차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신해년 여름에 인홍이 상소하여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과 문순(文純 이황(李滉)) 두 선정(先正)을 헐뜯으면서 문묘(文廟)의 향사(享祀)에 참여케 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태학(太學)의 제생(諸生)이 상서(上書)하여 반박하고 해명하는 한편 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러자 인홍의 패거리인 지평 박여량(朴汝樑)이 이 사실을 고자질해 위에 아뢰자, 광해가 노하여 창의(倡議)한 유생을 찾아내 금고(禁錮)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제생이 이 명을 듣고서 권당(捲堂 동맹 휴학)을 하고는 태학을 떠났다. 이에 공이 재차 차자를 올려 ‘인홍이 사감(私感)을 품고 선현(先賢)을 헐뜯고 있기 때문에 다사(多士)가 모두 분개하고 있는 것이니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말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으로 잇따라 말하는 이들이 더욱 불어났으므로, 광해가 마지못해 그 의논을 따르게 되었다.
이에 앞서 거인(擧人 과거 응시자) 임숙영(任叔英)이 책문(策文)을 작성하면서 궁금(宮禁)의 행위를 비난하며 배척했는데, 이를 고관(考官)이 급제자 명단에 포함시켜 위에 올렸다. 그런데 광해가 명을 내려 그의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으므로 공이 간언(諫言)을 하였으나 광해가 따르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입대(入對)해서, 두 선정(先正)에 대해서는 의논할 만한 점이 없다는 것과 임숙영 역시 과거 급제를 취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차례로 개진하자, 광해의 마음이 풀리면서 임숙영의 급제를 원상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공이 정인홍의 뜻에 거슬리는 일을 계속 행하자 인홍이 어떻게 해서든 공을 중상모략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헐뜯는 내용의 소장을 올린 그의 무리들이 전후에 걸쳐 무려 수십백 인에 이르렀으므로 공이 더욱 강력하게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이 체부(體府)를 개설한 이후로 광해 역시 공의 덕망(德望)을 중시하여 공을 자못 믿고 일을 맡기곤 하였는데,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에 차견(差遣)하는 일은 일체 공에게 위임할 정도였다. 그래서 공이 사직할 때마다 허락을 받지 못하곤 하였는데, 이 때문에 군소배들이 더더욱 모질게 공을 해치려 들었다.
인홍이 다시 사람을 사주하여 상소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체부(體府)의 병권(兵權)이 너무나 무거우니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이 또 매우 위박(危迫)한 심정을 표현하면서 면직을 청하는 소장을 모두 20차례나 올렸지만 여전히 허락받지 못하였다.
임자년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시인(詩人) 권필(權韠)이 시어(詩語)로 걸려들어 체포된 뒤 고신(考訊)을 당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공식적인 자리를 벗어나 울면서 간(諫)하기까지 하였는데도 광해가 들어주지 않은 결과 결국 권필이 장사(杖死)되고 말았으므로 공이 통한(痛恨)해 마지않았다.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욤아한 말을 지껄여 대며 교하(交河)로 도성을 옮길 것을 청하자 광해가 그 설에 꽤나 솔깃하게 빠져 들었는데, 공이 이를 통렬하게 반박하여 물리쳤다.
계축년에 위성(衛聖)ㆍ익사(翼社)ㆍ형난(亨難) 등 3공신(功臣)에 책훈(策勳)되었는데, 이는 공의 뜻이 아니었다.
얼마 뒤에 사수(死囚) 박응서(朴應犀)가 간인(奸人)의 사주를 받고 상변(上變)하였는데, 이 일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집안이 온통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공은 사소한 허물 때문에 성곽 밖에 나가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광해가 명소(命召)하여 국청(鞫廳)에 나아오게 하였다.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겨우 8세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는데 삼사(三司)가 역적의 괴수라고 지목하고는 차례로 소장을 올리며 죽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정부(政府)에서만은 유독 정청(庭請)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군소배들이 기고만장하여 계속 날뛰는 바람에 무슨 화가 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2명의 재신(宰臣)이 밤에 공을 찾아와 화복(禍福)의 설을 가지고 위협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였으나 공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질배(子姪輩)가 눈물을 흘리면서 많은 식구들의 처지도 생각해 달라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는데, 공은 의연히 수염을 떨치면서 말하기를,
“내가 선조(先朝)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지위가 태정(台鼎 정승)에 이르렀다. 지금 늙어서 장차 죽을 나이에 어찌 차마 소신을 바꿔 임금을 저버리며 스스로 명의(名義)를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하여 양사(兩司)가 날마다 상신(相臣)들을 윽박질렀으나 공은 예전의 주장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장령 정조(鄭造)ㆍ윤인(尹訒) 등이 위의 뜻에 영합하여 비위를 맞추려는 목적으로 앞장서서 말하면서, 대비(大妃)는 어미로서의 도리를 잃었으니 폐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이상 덕형(李相德馨)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 이자들이 사람들을 짓이기면서 걸핏하면 역적을 토죄(討罪)한다고 말하고, 또 《춘추(春秋)》를 함부로 인용하여 위에서 듣고서 의혹을 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대저 신하가 임금의 어미를 폐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역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식이 된 도리에서는 어미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춘추》의 대의(大義)가 아니겠는가. 우리들이 경(經)을 인용하고 그 의리에 입각하여 하나의 소(疏)를 올림으로써 사설(邪說)을 통렬하게 격파해 버려야 하겠다.”
하니, 이상이 흔쾌히 동조하며 말하기를,
“공이 한번 초안을 작성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공이 집에 돌아와서는 조의(朝衣)도 벗지 않은 채 외당(外堂)에 앉아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제들이 들어가 그 연유를 묻자, 공이 장탄식을 하면서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무너졌으니 나라 구실을 할 수가 있겠느냐. 나는 의리상 차마 앉아서 볼 수만은 없으니, 목숨을 바쳐 죽는 한이 있어도 할 말을 다하고 나서 시체가 되어 돌아올 작정이다.”
하였다. 당시 대사헌으로 있던 최유원(崔有源)이 평소 공을 공경하였는데, 공이 의리를 가지고 복돋아 주자, 유원이 공이 말해 준 내용에 따라 마침내 정조와 윤인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주장이 행해지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공의 힘이었다고 하겠다.
공이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해서 이상에게 보여 주니, 이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공이 정협(鄭浹)을 잘못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물러났기 때문에 그 상소문은 실제로 올려지지 못하였다.
공이 탄핵을 당하고 나서는 동복(僮僕) 한 명에 말을 타고서 동쪽 교외로 빠져 나가 강가에서 우거(寓居)하다가 가을철이 되자 노원(蘆原) 촌가(村家)에서 잠시 기거하였는데, 볼품없는 오두막집에서 변변찮은 식사마저 충분치 못한 상황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거처하면서 오직 독서하는 데에 침잠하였으며, 한가할 때면 지팡이를 짚고 산과 계곡 사이를 소요하며 회포를 풀곤 하였다. 언젠가 미복(微服) 차림으로 노새를 타고 청평산(淸平山)에 가서 노닌 적이 있었는데, 혹 만나는 사람이 있어도 공인 줄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장남인 성남(星男)이 적노(賊奴)의 무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자 가인(家人)이 뇌물을 주고서라도 화를 면하게 하고자 했었는데, 공이 통렬하게 이를 제지하였다. 정인홍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공을 미워한 나머지 양사(兩司)를 충동질하여 공을 삭출(削黜)시키도록 청하게 하였으나, 광해가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병진년에 망우리(忘憂里)에다 자그마한 집을 짓고는 노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이듬해 겨울철에 이르러 폐모론(廢母論)이 또 일어났다. 이이첨(李爾瞻)과 허균(許筠) 등이 불량한 작자들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면서 자전(慈殿)의 죄상(罪狀)을 열거하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이 패역(悖逆)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광해가 그 소장을 아래에 내려 백관들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이때 공은 말질(末疾 손과 발이 마비되는 증세)에 걸려 있었는데, 홀연히 천둥 소리가 크게 들리자 공이 경악하여 말하기를,
“아마도 하늘이 나에게 알려 줘 경계시키려고 하는가 보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추부(樞府)의 낭관(郞官)이 의논을 수렴하려고 찾아오자, 공이 부축을 받고 일어나 붓을 떨쳐 자신의 의견을 써 내려갔는데, 그 대략에,
“모르겠습니다만, 그 누가 전하에게 이러한 계책을 꾸며 올렸단 말입니까. 우순(虞舜)은 불행히도 완악한 아비와 무지몽매한 어미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늘 순을 죽이려 하면서 우물을 파게 하고 창고에 올라가 흙을 바르게 하였으니, 위태로운 상황이 또한 극에 달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은 호읍(號泣)하고 원모(怨慕)하기만 하였을 뿐 부모의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는 개의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이는 아비가 아무리 자애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자식된 도리에서는 효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춘추(春秋)》에서도 자식의 도리상 어미를 원수로 삼을 수 없는 의리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급(伋)의 처(妻)는 바로 백(白)의 어미가 되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정성과 효성을 바쳐야 하는 중대한 인륜 관계에 있어 어찌 그 사이에 간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마땅히 효에 입각하여 나라를 다스려야 할 때이니, 그렇게만 하면 나라 전체가 점차적으로 교화될 희망이 앞으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이야기를 숨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에 듣게 되었단 말입니까. 오늘날 행할 도리로 말하면, 순(舜) 임금과 같은 덕성을 몸받으시어 효성을 바쳐 화기롭게 하시고 날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스스로 다스려 나가면서 노여움을 자애로움으로 전환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신의 소망입니다.”
하였다. 공의 이 의논이 이르자, 조야(朝野)에서 듣고는 머리칼이 모두 곤두섰으며, 더러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저리(邸吏)가 공의 의논을 기록하려고 왔다가 손이 떨려 제대로 써 내려가지 못하기도 하였다.
삼사(三司)가 절변(絶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멀리 귀양보내라고만 명하였다. 금부가 배소(配所)를 의논하는 과정에서 모두 6차례나 지역을 바꾼 끝에 비로소 북청(北靑)으로 배소가 확정되었다.
무오년 정월에 이르러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공 스스로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짐작하고는 가인(家人)에게 명하여 의금(衣衾)과 염습(斂襲)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챙겨 가지고 따라오게 하였다. 그리고 자제들을 경계시키기를,
“나라를 섬기는 일을 형편없이 하여 이런 죄를 얻게 되었으니, 내가 죽더라도 조의(朝衣)로 염(斂)을 하지 말고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만 쓰도록 하라.”
하였다.
배소에 도착하고 나서 예전에 앓던 풍질(風疾)이 다시 발작하여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5월에 이르러 공이 꿈을 꾸었는데, 선조가 평대(平臺)에 임어(臨御)하고 유상 성룡(柳相成龍)과 김상 명원(金相命元)과 이상 덕형(李相德馨)이 모두 시립(侍立)해 있는 가운데 이상이 공을 불러오자고 청하는 내용이었다. 공이 꿈을 깨고 나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제 세상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였는데, 며칠 뒤에 병세가 마침내 위급해지더니 이달 13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의 나이 63세였다.
이웃 고을의 사민(士民)들이 부음을 듣고 달려와 통곡을 하였는데 그 숫자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함흥(咸興)의 전(前) 정랑(正郞) 한인록(韓仁祿) 등과 정평(定平)의 사인(士人) 장응시(張應時) 등과 영흥(永興)의 사인 주사룡(朱士龍) 등과 안변(安邊)의 사인 장응정(張應井) 등이 각각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영남의 사인 정심(鄭杺) 등이 천릿길에 사람을 보내 부의(賻儀)를 전하였는데, 이들 모두 평소에 공과는 면식(面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의 자제들이 상구(喪柩)를 모시고 돌아와 이해 8월 4일에 포천(抱川)의 선영에다 공을 안장(安葬)하였다. 그 뒤 북청과 포천의 인사들이 공을 위해 사당을 세우기까지 하였는데, 나라에서 금해도 이를 막을 수가 없었으니, 공의(公議)가 바로 인심(人心)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어찌 속일 수가 있겠는가.
공은 천부적으로 자질이 매우 뛰어난 데다 활달한 성품에 대인의 도량을 지니고 있었다. 신장은 중간 정도를 넘지 못했지만 의모(儀貌)가 괴위(魁偉)하고 풍신(風神)이 심원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으며, 청백(淸白)하고 효우(孝友)에 독실한 품성은 천성적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종족(宗族)을 잘 보살피며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함에 있어서는 옛사람의 가법(家法)을 연상케 하였다.
젊었을 때 호탕한 성격에 관기(官妓) 하나를 좋아한 적이 있었는데, 정(情)이 한 곳에 쏠리면 반드시 심신(身心)을 해칠 것이라는 생각이 스스로 홀연히 들자, 마침내 통렬하게 끊어 버리고 그 뒤로는 결코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 임금의 말고삐를 잡고 야숙(野宿)하면서 어떤 상황이 닥쳐오든 제대로 일처리를 하며 온갖 계책을 짜내어 있는 힘을 모두 다 바쳤는데, 중흥(中興)을 이룩하게 된 모유(謀猷)를 살펴보면 대체로 공에게서 나온 것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조정에 몸담은 39년 동안에 총재(冢宰 이조 판서)를 1번, 사마(司馬 병조 판서)를 5번, 의정(議政)을 4번, 원수(元帥)를 1번, 체찰(體察)을 2번 역임하였는데, 출장입상(出將入相)한 20여 년 동안 공이 계획을 세우고 건의를 드린 것으로서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혁혁히 남아 있는 것들을 거론해 보면 한두 가지만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공이 이룩한 공적이야말로 사직(社稷)을 보존케 한 것이었고 그 은택으로 말하면 생민(生民)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두루 끼쳐 준 것이었다. 게다가 공의 청렴함은 빙옥(冰玉)과 같았고 그 중망(重望)은 교악(喬岳)과 같았으니, 공이야말로 국가의 주석(柱石)이요 사류(士流)의 관면(冠冕)이었다. 그리고 정사년에 이르러 올린 하나의 소(疏)로 말하면, 윤기(倫紀)를 일으켜 세우고 정기(正氣)를 수립한 것으로서 그 드높은 기상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찼으나, 비록 일월(日月)과 빛을 다툰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할 것이다.
공이 처음 벼슬길에 나섰을 때 언젠가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이때 문성공이 국기(國器)임을 알아보고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시골로 돌아갈 생각을 갖고 있으니, 그대는 석담(石潭)으로 나를 한번 찾아오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는 당시에 문성공이 바야흐로 전조(銓曹)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공을 중용(重用)하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었다. 그런데 공이 형적(形跡)에 혐의를 느낀 나머지 자주 함장(函丈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성공이 하세(下世)하였으므로 공이 종신토록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만년에 접어들어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장구(章句)나 도수(度數) 같은 데에 세심하게 관심을 쏟는 대신 독자적으로 본원(本源)에 계합(契合)하려고 노력하였다. 언젠가 공이 지은 《함양명(涵養銘)》을 보면 사의(詞意)가 범속(凡俗)한 경지를 멀리 뛰어넘으면서 자득(自得)한 지취(志趣)를 느끼게끔 하고 있다. 이 밖에 또 공은 치욕(恥辱), 서상(書床), 양야(養夜), 계주(戒晝), 경석(警夕) 등 5잠(箴)을 지어 자신을 성찰하는 자료로 삼기도 하였다.
공의 문장에는 기위(奇偉)한 기운이 흘러넘쳤는데 호방하고 준걸스러우면서도 언제나 대도(大道)에 입각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필적 또한 호탕한 가운데 법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젊어서 단청(丹靑 회화)의 경지에 눈을 떠 오묘한 운치를 느끼게 하는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이윽고 손을 떼고 다시는 그일을 하지 않았다.
공의 저술로는 시문집(詩文集) 몇 권과 《조천창수록(朝天唱酬錄)》 1권과 《주의(奏議)》 2권과 《계사(啓辭)》 2권과 《예경(禮經)》의 중요한 내용을 분류해서 편집한 《사례훈몽(四禮訓蒙)》 몇 권과 《좌씨전(左氏傳)》 및 《내외전(內外傳)》을 비교 검토한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공이 죽자 광해 역시 슬픔을 감추지 못하면서 공의 관작을 원상으로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러다가 금상(今上)께서 즉위하고 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아, 하늘이 만약 공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어 오늘날과 같은 성대한 시대를 만나게 하였더라면, 중흥을 이루도록 보좌한 그 빛나는 공렬(功烈)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공의 별호(別號)는 필운(弼雲)이요, 만년에 들어서는 백사(白沙)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견책을 받고 야외(野外)에서 거할 때에도 또 동강(東岡)이라고 칭하였다.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권씨(權氏)와의 사이에 성남(星男), 정남(井男) 등 두 아들을 두었고, 측실 소생으로 규남(奎男), 기남(箕男)의 두 아들이 있다.
내가 그윽히 생각건대, 공의 아름다운 덕업(德業)과 상세한 이력(履歷)은 국사(國史)에 기재되어 있는 동시에 만인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헛된 말로 거양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에 삼가 잘 알려진 사실만을 뽑아 이상과 같이 찬술하면서 지언군자(知言君子)가 채택해 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주D-001]도적이 …… 죽였는데 : 전 참판 유희서의 첩이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그 첩을 비밀리에 불러들인 후 도적을 시켜 유희서를 암살하였다 한다. 《燃黎室記述 卷18 盜殺柳煕緖條》
[주D-002]우순(虞舜)은 …… 만났습니다 :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순을 …… 하였으니 : 순에게 우물을 파게 한 뒤 흙을 덮어 버리고, 창고 위에 올라가게 한 뒤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나온다.
[주D-004]호읍(號泣)하고 …… 않았으니 :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5]급(伋)의 …… 무엇하겠습니까 : 선조(先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는 엄연히 광해(光海)의 어미가 되는데, 폐위시키는 일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급(伋)은 자사(子思)의 이름이고 백(白)은 자사의 아들인데 “나의 아내가 된 사람은 내 아들의 어미가 되고, 내 아내가 아닌 사람은 내 아들의 어미가 아니다.[爲伋也妻者 是爲白也母 不爲伋也妻者 是不爲白也母]”라는 자사의 말이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