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양촌 권근의 묘

조선의 초대 대제학인 양촌 권근의 묘(펌)

아베베1 2009. 11. 7. 23:00

.조선 왕조가 들어서 초대 대제학을 지낸 대학자 양촌 권근 선생의 묘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마을있다. 서울에서 가자면 중부고속도로 일죽에서 38번 국도로 장호원으로 가거나, 3번 도로로 광주, 이천,여주가남을 지나면 장호원이 나온다. 장호원에서 금왕, 음성, 충주 방향으로 21번, 37번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감곡면 주천리 원당 삼거리를 지나 생극면 소재지 못 미처 좌측에 `양촌 선생 묘역 입구`라는 표지판이 나온다.이 길을 따라 마을을 지나 계속 시냇물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저수지와 사당이 나오는데 묘지는 그 위에 있다. 1500평이 넘는 산등성 묘역에는 제일 위로부터 양촌(陽村) 권근(權近), 그의 둘째 아들 권제(權嗇), 또 손자 권람(權擥)의 묘가 순서대로 있다.

안동 권씨(安東 權氏)는 고려 태조의 개국 공신인 권행(權幸)을 시조로 하는데 권행은 본래 김씨(金氏)였다고한다. 후삼국 시대에 지금의 안동인 고창(古昌)지역은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후삼국의 세력 변화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 있었는데 왕건이 열세에 있었다. 이때 왕건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세력이 안동의 호족이었던 권행이었다. 왕건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권행을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과 태사(太師)에 제수 하였는데 "능히 기미(낌새)에 밝고 권도(일의 대소사를 분별함)에 통달하였다<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하여 권씨(權氏) 성을 하사하였다. 안동 권씨의 분파는 10세조를 파조(派祖)로 하여 14개 파(派)로 나누어진다. 양촌 권근은 고려 중기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은 권수평(權守平)의 후손 추밀공파(樞密公派)다.

유명한 묘지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양촌 선생 묘에도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양촌 선생이 58세로 운명하자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에 안장하였다가 당시 한양에서 유명한 지관의 소개로 31년 후인 세종 22년(1440년)에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이장 당시 상주는 좌찬성을 지낸 아들 권제와 좌의정을 지낸 손자 권람이었다. 상주가 권세가들이고 보니 지방 수령과 현감 등 벼슬아치를 비롯해서 권근 문하의 수많은 유생들이 이장 행렬에 참가하여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관의 지시에 따라 권근의 유골을 안장할 광중을 파자 사람들 사이를 뚫고 한 동자 승이 손에 바가지를 들고나타나 "지금 파는 땅에 물이 나오면 물 한바가지만 얻어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상주를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감히 어느 앞인데 광중에 물이 나온다고 물을 얻으러 왔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동자 승은 태연하게 "저의 스승님께서 그러시는데 아마 조금 있으면 물이 펑펑 솟아 날것이니 그 때 물을 얻어 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길 건너편 나무 밑에 앉아있는 노승을 가르쳤다.

화가 난 상주와 유생들은 곧 노승을 붙들어 끌고 왔다. 상주인 좌찬성 권제가 서슬 퍼렇게 물었다. "노승은 광중에 물이 난다고 요상스럽게 말을 하여 우리 자손들을 불효 막급하게 하려 하오!" 그러자 노승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하였다. "길을 가다가 갈증이 심하던 차에 땅을 파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산세와 혈맥을 보니 틀림없이 물이 나올 자리이므로 소승은 우물을 파는 줄 알고 물을 얻으러 보낸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기가 막힐 일이었다. 대 혈지에 물이 나온다니 아마도 실성한 중이라고 수근 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광중에서 수맥이 터지면서 물이 펑펑 솟는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 실색을 하고 소란이 일어났다. 권제는 노승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자문을 요청하였다. "대사께서 광중에 수맥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 그대책도 아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부디 불효를 면할 수 있도록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노승은 앞에 있는산을 가르치며 "이 자리의 혈은 저 앞에 있는 수리산에서 내려온 용맥으로 수맥 또한 같이 이어진 것이니 산정상에 우물을 파면 물길이 끊겨 물이 나지 않을 것이요."라고 하면서 부적을 하나 써주면서 "먼저 이 부적을묻고 장사를 지내라"고 일러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곧 인부들이 수리산 정상에 달려가 우물을 파자 노승이 써준 부적이 나왔다고 하며 노승의 말대로 수맥이 차단되어 더 이상 광중에는 물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권근 묘의 주산은 전설에 나오는 수리산이다. 한문으로는 물이 옮겼다 하여 수리산(水利山)으로 쓰기도 하고연못을 파서 산을 고쳤다하여 수리산(修理山)이라고 쓰기도 한다. 수리산은 백두대간룡이 속리산에서 분맥하여 한남금북정맥을 만든 다음 좌구산(657m), 두타산(598m), 소속리산을 거쳐 죽산 칠현산과 칠장산으로가는 도중 소속리산(432m)에서 동쪽으로 다시 분맥하여 음성 부용산(644.3m)과 수레의산(679.4m)을 거쳐기봉한 산이다.

주산인 수리산의 중출로 출맥한 용은 오야골 고개에서 크게 과협한 다음 다시 방축리 능안까지 기복, 개장, 천심 등 수 많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행룡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박환 한 다음 용진처에 다다라서는 탐랑체의 현무봉을 삼중으로 일으키고 주산인 수리산을 바라보고 혈을 결지하였다. 이를 용이 출발한 조종산(소조산)을 바라보고 혈을 결지 하였다 하여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라고 한다.

회룡고조혈에는 대혈이 많은데 이것은 용이 방향을 회전하여 자신이 출발한 조종산을 바라 보려면 그만큼 변화를 많이 해야 하며 또한 용이 기세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현무봉에서 중출맥(中出脈)으로 내려온 용은 기를 정제하고 모으기 위해서 결인속기(結咽束氣)하는데 마치 호랑이 허리처럼 잘록하면서도 힘이 있어 보인다. 결인처의 잘록한 부분이 바람의 침해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 현무봉에서 개장한 능선이 송사(送砂)가되어 보호해주고 있으며 반대쪽에서는 영사(迎砂)가 되어 받아 주고 있다. 이를 합하여 영송사(迎送砂)라 하는데 과협처(過峽處)나 결인속기처에서는 반드시 있어야 진혈을 결지 할 수 있다. 결인속기처에서 땅을 조금파보면 밝고 홍황자윤(紅黃紫潤)한 혈토(穴土)가 보이는데 이것은 혈에도 이와 같은 혈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결인속기한 주룡은 몇번 좌우로 몸을 흔들어 위이( )한 다음 자룡(子龍)으로 입수하여 권근 묘의 혈을 결지하고, 다시 그 남은 기(氣)가 변화하여 혈을 결지하니 중간에 있는 권제 묘의 혈을 결지 한다. 그리고도 남은여기(餘氣)가 한번 더 변화하여 혈을 결지 하는데 제일 아래에 있는 권람 묘의 혈이다. 대개 대혈은 단장지지(單葬之地)가 원칙인데 이곳은 3개의 혈이 결지 하였다. 그만큼 용의 기세가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혈의 기세는 위에 있는 권근 선생 묘가 제일 크다.

3개의 묘 모두 입수도두(入首到頭)가 단단하게 뭉쳐있고 선익(蟬翼)이 두텁고 후덕하여 자손이 크게 번창 할자리다. 묘 앞에 있는 연못은 지금은 제방을 막아 저수지로 만들었지만 본래 주룡의 생기를 양쪽에서 보호하면서 따라온 물이 혈장 위에서 분수(分水)하였다가 혈 아래에서 다시 합수(合水)하여 생긴 진응수(眞應水)다.혈 앞이나 옆에 진응수가 있으면 진결 대지의 증거이며, 대부현귀(大富顯貴)가 기약되는 길수(吉水)가 된다.

청룡 백호는 혈 뒤 현무봉에서 개장한 능선이 가깝고도 주밀하게 혈을 감싸주고 있는데 삼중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청룡은 혈 앞으로 돌아 감아주니 본신 안산(案山)이 된다. 제일 앞에 있는 안산은 정승이 나온다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이다. 그 뒤로 중중(重重)하게 귀한 봉우리들이 삼중 안산을 이룬다. 혈 뒤로 삼중 현무고혈 앞으로 삼중 안산이니 등과급제(登科及第)와 삼공육경(三公六卿)이 연출한다는 매우 귀한 형국이다. 특히제일 뒤의 안산은 수리산으로 이 혈의 소조산인 주산이다. 대개 안산이 너무 높거나 크면 혈을 누르므로 흉한 것인데 회룡고조혈에서는 예외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아무리 지위가 높고 엄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손자에게만은 자상한 법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 산소에 결함이 있다면 용과 혈에 비해 명당(明堂)이 좁다. 명당이란 용어는 길지 진혈을 보통 말하지만 풍수지리학에서는 용과 혈 앞에 있는 마당으로 청룡 백호가 감싸고 있는 공간을 말한다. 명당에는 여러 산에서발원한 물이 모여 용혈과 음양교합을 하여 생기를 융화하는 곳이다. 부(富)를 관장하는 명당은 평정하고 원만해야 하며 용혈과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국세에 비해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또 하나는 진손사(辰巽巳) 방향에 마치 뱀과 같은 규산(窺山) 탐봉(探峰)이 보인다. 규산 탐봉은 아주 작은 산이 큰 산 뒤에 숨어 산두(山頭)만을 살짝 드러 내놓은 것으로 마치 도적이 담장 밖에서 고개만 살짝 들어 집안을 살피는 모습이다. 주택이나 묘지에 규산이 보이면 도적으로 인해 큰 손해를 보거나 도적 자손이 나온다. 용과 뱀을 상징하는 진방(辰方)과 사방(巳方)에 뱀과 같은 규산이 엿보거나 우물이 있으면 광중에 사렴(蛇 )이 들어 뱀이나 지렁이가 들어가 괴질과 흉사가 따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무기력하고 허한 비혈지 땅에서 있는 일이고 용진혈적(龍盡穴的)한 곳에서는 불가능하다. 혹 진혈지에 규산 탐봉이 보이더라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고관대작이나 거부재벌의 주변에는 항시 그 부귀를 탐하고 시기하는 무리들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용혈 역시 이와 다름이 없다. 즉 용혈이 기세가 있고 강하면 웬만한 살(煞)은 감히 침해할 수 없는 것이 지리의 이치다. 따라서 이 묘지에서 사두(蛇頭) 규산 탐봉이 보인다하여 두려워 할 일은 아니다.

수구(水口)는 병파(丙破)이며 혈 앞을 흐르는 물은 좌측에서 나와 우측으로 흐르는 좌수도우(左水到右)이니모두 해좌사향(亥坐巳向)을 하여 팔십 팔향법(八十八向法)으로 문고소수(文庫消水)의 향을 하였다. 용진혈적(龍盡穴的)에 문고소수는 이른바 녹존유진(祿存流盡)이면 패금어(佩金魚)라 하여 필히 총명한 수재가 출생하고 문장이 특출하여 부귀를 함께 하는 길향(吉向)이다.

권근(權近, 1352-1409)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인 권근은 공민왕 원년(1352년) 안동 권씨 가문에서 검교 정승 벼슬을 한 희(僖)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고 18세에 문과 전시에 급제하여 춘추검열에 제수되는 등 일찍 터득한 학문과 함께 벼슬길에도 발빠르게 나가기 시작했다. 일화에 의하면 당시 공민왕은 18세의 어린 나이의 권근을 전시에 급제시켰다 하여 노여워하였는데 스승인 이색이 장차 크게 될 사람임을 적극 변호하여 등용했다고 한다.

그는 34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올라 성균관 시험을 관장하는 등 학자로서 현실 정치인으로 크게 활약을 했다.창왕 때 좌대언, 지신사를 거쳐 밀직사첨서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정책을 주창했고, 우왕 원년에는 원나라에서 오는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성품이 곧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는데 모함을 받아 여러 곳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경학에 몰두하여 전라도 익산에서는 우리 나라 처음으로 경서를 그림으로 풀어가며 해석을 붙인 당대의 명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후일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장형광 등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익산에서 귀양살이가 풀리자마자 다시 충주 양촌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경학사상을 정립하여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하였다. 후일 퇴계 선생은 "양촌의 학문이 깊고 넓음은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을 저술한 것으로 증거 된다"고 퇴계집에서 밝혔다.

이성계가 정몽주 등 고려의 유신들을 제거하고 조선을 개국하자 권근도 고려에 대한 충절이냐, 새 역사의 흐름에 동참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에 행차하는 길에 양촌에 묻혀 사는 권근을 불러 정도전과 함께 조선 왕조를 개국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삼았다. 평소 존경하던 정몽주, 이색 등과길을 달리하여 두 왕조를 섬기게 된 권근을 두고 후세에도 평가를 달리하였는데 일화에 의하면 조선 중종 때이름 높은 송인수, 김안국 두 학자가 어느 집에서 권근의 초상을 보게 되었는데 송인수는 "절의를 꺾은 사람"
이라고 절을 하지 않았고, 김안국은 "이 나라 도학에 크게 공헌한 분"이라고 절을 했다 한다.

그는 태종 1년 좌면공신 1등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세자좌빈객 세자이사 등을 역임하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찬하였다. 권근은 당대의 우뚝한 학자로서 900수가 넘는 시를 지었으며, 금강산, 탐라 등 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동문선에는 그의 시문이170편이나 실려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경학과 시문으로 한 시대를 만든 권근이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조선조선비들은 그가 절의를 굽혔다고 하여 서원(書院) 하나 짓지 않았고 향사(享祀)에도 모시지 않았다. 지금 묘소아래에 있는 추원재(追遠齋)는 1985년 후손들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다. 추원재 입구 마당에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는 태조 4년에 권근이 만든 천문도로 국보 228호로 지정된 것의 모조품이다.

권제(權嗇, 1387-1445)
고려말 조선 초의 학자로 호는 지재(止齋)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권근의 아들로 태종 14년(1414)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우헌납, 병조좌랑, 사예, 사인 등을 지냈다. 세종 초에는 집현전부제학, 대사헌, 한성부윤을지내고,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35년에 이조판서에 승진되고 37년에 예조판서에 전임되어 이듬해 계품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39년 중추원지사로 춘추관지인사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고려사>의 수찬에 참여하였으며, 좌참찬을 거쳐 45년 우찬성이 되어 정인지, 안지 등과 <용비어천가>를지어 바쳤다.

권람(權擥, 1416-146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소한당(所閑堂) 시호는 익평공(翼平公)이다. 문종 원년에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수양대군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되어 양정 등 무장을 포섭하고 한명회를 수양대군의 장자방으로 추천하였다. 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정난공신 1등으로 우부승지에 특진하였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발탁되었다. 이어서 좌익공신 1등으로 예문관 대재학이 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우찬성과 좌찬성,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고 부원군으로 진봉하였다. 활을 잘 쏘고 문장에 뛰어났으나 횡포가 심하고 축재를 좋아하여 여러번 탄핵을 받았다. 문집에 <소한당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