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혜공주, 부마인 한경록에 대한 연구
부왕 앞에서도 당당한 의혜공주와 남편(한경록)의 "묘"(懿惠公主)중종은 성종의 차남으로 7세가 되던 해에 진성대군에 오르고 18세에 형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조선조 제11대 왕위에 올랐다. 또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왕위에 오른 중종은 국가가 기강을 바로 잡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당쟁은 더욱 치열했고 변방에서는 왜구와 야인의 침략이 잦아 많은 시련을 겪었다.이토록 나라 일에 걱정이 많은 중종은 평소 가족들과 오붓하게 지내는 시간조차도 갖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11명의 딸들과 모처럼 한가롭데 담소를 나누다 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중종은 슬하의 9남 11녀을 두고인종, 경원대군(명종), 복성군, 금원군, 봉성군, 영양군,덕흥군(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추존), 해안군, 덕양군효혜공주,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혜순옹주, 혜정옹주, 정신옹주, 정순용주, 효정옹주, 숙정옹주 “너희들은 누구 덕으로 궁중에서 이렇게 호의호식하고 지내는지 차례대로 말해 보도록 하여라.”중종에 이같은 물음에 다른 공주들은 모두 부왕의 덕’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둘째인 의혜공주는‘어째서 아버지의 덕이냐’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의혜공주는“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쌓은 업보대로 살아가는 것인데,오늘날 궁중생활이 편안하다고 해서 이를 어찌 아바마마의 덕이라고 할 수 있사옵니까?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한 때의 영화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고 들었사옵니다”의혜공주에 말을 들은 중종은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이튿날 새벽 동대문을 열 때 제일 먼저 들어오는 자에게 시집보내도록 명을 내렸다.당시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하는 유교사상의 흐름 속에서의혜공주의 발언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의혜공주는 당당했다.아버지 덕이 아닐 뿐더러 부귀영화는 물거품과 같다고....숯장수와 결혼한 의혜공주 한편, 의정부 다락원에서 살고 있는청주 한씨 양절공파(襄節公派)의 후손 한경록은 숯을 구워 한양에 내다 파는 숯장수였다.그는 타고난 성품이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파루종이 울리면서 동대문이 열리면 늘 첫 번째로 장안에 들어가 숯을 팔았다. 이런 부지런함으로 한경록은 임금의 사위가 됐다.자신의 생각을 당차게 말한 의혜공주는 부왕의 노여움으로 숯장수 한경록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만 한경록은 단순한 숯장수가 아니었다.의혜공주와 결혼 할 당시 그는 비록 가난한 선비였지만 영의정을 지낸 장사랑공(將仕郞公) 판중추부사의 손자이며어머니는 정경부인 창녕 조씨니 창녕군의 따님이다.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摠明)함이 뛰어나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그를 사윗감으로 탐내는 세도가(勢道家)들도 적지 않았다.의혜공주는 숯장수에게 시집가서 가난하게 살았지만,한번도 부왕이나 남편을 원망해 본 일이 없었다. 이것이 모두 팔자려니 생각하고 오로지 남편에 대한 공경과 뒷바라지를 열심히 하면서 알뜰히 살았다고 한다.그러던 어느 날, 의혜공주는 남편이 일하는 숯터에 올라갔다.비록 가난한 살림이지만 구슬땀을 뻘뻘 흘리면서일을 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본 의혜공주는 행복감을 느꼈고, 그녀 역시 남편 옆에서 구워낸 참숯은 숯섬에 차곡차곡 담아 넣는 일을 도왔다.이때 의혜공주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숯가마의 이맛돌이 누런 황금덩이였기 때문이다. 그 크기는 다듬이돌 만했다.의혜공주는 남편 한경록에 묻기를 “아니, 여보! 이게 금덩이 아니예요?”“그게 무슨 금이겠오. 몇 해전 숯가마를 수리할 때 저쪽에서 가져온 돌인데,그게 금이라면 누가 벌써 가지고 갔을게 아니오?”지금까지 남편은 이렇게 엄청나게 큰 금덩이를 한낱 예사 돌로만 여겨왔던 것이다. 그 이후 두 부부는 황금을 팔아서 논밭을 마련하고 열심히 농사지어 큰 부자가 됐으며 한평생을 해로하면서 살았다는 설화가 의정부시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또한 의혜공주와 한경록은 문정황후가 수렴청정 할 때 대왕대비의 사위로서 또는 그 당시 최고 실력자인 윤원형의 조카사위로서 영화를 맘껏 누릴 수도 있었으나, 이 부부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며 초야에 묻혀 조용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전해온다.
자료출처 : 청주한씨 참의공파
혼자서 구두를 신고 주변을 돌아본다는 것이 가다가 보니 다락 올라서 마당바위로
의정부 와 서울특별시 시계에 의정부를 홍보물이 이채롭다
다락원 입구에서 사진이 흐리다
다락원 굿당을 지나서 다락원 매표소 입구
의혜공주묘지아래 산소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 관행 통훈대부 돈녕부 판00 공 지묘 휘가있는 부분에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숙부인 경주 김씨 지묘(숙부인은 문무관의처)
의혜공주 묘지아래소재하는 비석으로 공주의 묘비와 같이 비신이 화려한듯 하다
贈 이란 것은 추증 된 벼슬을 말한다
통정대부는 당상관,통훈대부는 당하관이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움이 .. 당상관 正三品이상을 뜻한다
참으로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모습
오전에 내린 비로 인하여 냇물도 흐르고
아래에서 바라본 의혜공주 산소의 모습 부군인 숭덕대부 청원위 한공 쌍분 저멀리 선인봉이 운무속에서 내려다 보는 듯
통훈대부행 상의원판관 00지묘 숙인김씨 .. 통훈대부는 淑人으로 기록되고 같은3품이라도 통정대부와 통훈대부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숭덕대부(종1품)청원위한공지묘 의혜공주지묘 두분의 墓碑 470여년이 지나도 묘비명을 알수 있으니 .... 참으로 좋은 비석임을 증명
문인석 우측
좌측 문인석
표지판 ,성금기념비
조산 불암산과 좌측 수락터널이 의혜공주의 둘레석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듯 하고 한경록의 둘레석은 최근에 만들어 진듯 하다
청룡이 약한듯
조산에 수락의 터널이 ,,, 멀리 불암산정상이 ...
조선의 왕자와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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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6일 (경자) | ||||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사헌부가 또 아뢰기를, “영양군(永陽君)【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소생이다.】 및 의혜 공주(懿惠公主)의 가사(家舍)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비가 새는 데와 무너질 위험이 있는 곳들을 수리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들어가는 재목이 새로 짓는 효정 옹주(孝靜翁主)【숙원(淑媛) 이씨의 소생이다.】의 집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는 유사(有司)가 지나치게 수량을 마련한 때문입니다. 비록 한두 조항만 요량하여 감하더라도 민폐(民弊)를 없앰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봉산군(鳳山君)의 집은 튼튼할 뿐만 아니라 옛 재목들은 쓸만한 것이 또한 많다고 합니다. 유사에게 수리할 데를 다시 살펴보고 요량하게 해서 재목을 줄여 민폐를 없애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재목을 요량하여 줄이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원전】 17 집 117 면 【분류】 *군사-군역(軍役) / *정론-간쟁(諫諍) / *재정-역(役) / *재정-상공(上供) / *왕실-종친(宗親) |
연려실기술 제7권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중종(中宗)
중종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 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은 휘는 역(懌)이며, 자는 낙천(樂天)으로,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이다. 정현왕후(貞顯王后)가 홍치(弘治) 원년 무신년(1488) 성종 19년 3월 5일 기사일에 낳았다. 처음에는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封)해졌다가 정덕(正德) 병인년(1506) 9월 무인일에 즉위하여 가정(嘉靖) 23년 갑진년(1544) 11월 14일에 인종(仁宗)에게 전위(傳位)하였으며 15일 경술에 창경궁(昌慶宮) 환경전(歡慶殿)에서 승하하니, 재위 39년이요, 수는 57세이다.명(明) 나라에서 공희(恭僖) 공경히 위를 섬기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조심스럽고 공순함을 희(僖)라 한다. 라는 시호를 주었다. 능은 정릉(靖陵) 광주(廣州) 선릉(宣陵) 동편 건좌(乾坐 북서)이다. 을사년 2월에 처음 고양(高陽) 희릉(禧陵)에 모셨다가 명종(明宗) 17년 임술 9월 4일에 이장하였으며, 표석이 있다. 명종 때 홍춘경(洪春卿)이 지은 묘지에 정릉으로 이장한 자세한 사적이 적혀 있다. 이다.
○ 비(妃) 공소순렬단경 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 신씨(愼氏)는,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좌의정 증 영의정 익창부원군 신도공(左議政贈領議政益昌府院君信度公) 수근(守勤)의 딸이다. 성화(成化) 23년 정미년(1487) 성종 18년 1월 14일에 태어났고, 기미년에 가례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부부인(府夫人) 군호(君號)는 자세하지 않다. 에 봉해졌다가 정덕(正德) 병인년 (1506) 9월 2일에 중전이 되고, 9월 9일에 사제(私第)로 쫓겨났으며 가정 정사년(1557) 명종 12년 12월 7일 병술에 승하하였다. 본가(本家)의 기록에는 12월 5일로 되어 있으나 실록(實錄)에는 7일로 기일(忌日)을 삼고 있으므로 지금 그에 따르고 있다. 수는 71세이다. 영조(英祖) 15년 기미년(1739)에 복위(復位)되어 종묘에서 제사 지낸다. 능은 온릉(溫陵) 양주(楊州) 서쪽산 장흥면(長興面) 수회동(水回洞) 해좌(亥坐 북서)이다. 이다.
○ 계비(繼妃) 선소의숙장경 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영돈녕부사 파원부원군 정헌공(領敦寧府事坡原府院君靖憲公) 여필(汝弼)의 딸이다. 홍치 4년 신해년(1491) 성종 22년 7월 6일 경진에 호현방(好賢坊) 집에서 태어났다. 정덕 병인년(1506)에 궁중에 들어와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정묘년에 마침내 왕비로 책봉(冊封)되었다. 을해년(1515) 중종 10년 3월 2일 기미에 경복궁(景福宮) 별전(別殿)에서 승하하니, 수는 25세이다.숙신명혜(淑愼明惠) 숙(淑) 자가 겹치기 때문에 어첩(御牒)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라는 휘호(徽號)를 올렸다. 명종 정미년에 선소의숙(宣昭懿淑)이라는 휘호를 더 올렸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능은 희릉(禧陵) 고양(高陽) 남쪽 원당리(元堂里) 간좌(艮坐 북동)이다. 처음에는 을해년 윤4월에 광주(廣州) 헌릉(獻陵) 바른편 산에 모셨다. 김안로(金安老)가 묘지(墓誌)를 지었다. 중종 32년 정유에 이장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다.
○ 계비(繼妃) 성렬인명문정 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영돈녕부사 파산부원군 정평공(領敦寧府事坡山府院君靖平公) 지임(之任)의 딸이다. 홍치 14년 신유년(1501) 연산 7년 10월 22일 정묘에 태어나 정덕 정축년(1517)에 왕비로 책봉되어 태평관(太平館)에서 가례를 행하였다.명종 정미년에 성렬(聖烈)이라는 존호를 올렸고, 9월에 다시 인명(仁明)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가정 44년 을축(1565) 명종 20년 4월 7일 계유에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니, 수는 65세이다.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다. 능은 태릉(泰陵) 양주(楊州) 남쪽 노원면(蘆原面) 임좌(壬坐 북)이다. 을축년 7월 15일에 장사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이다.
○ 아들 아홉과 딸 열 하나를 두었다.
○ 신비(愼妃)가 사제로 쫓겨나자 예조 판서 송일(宋軼)과 참판 정광세(鄭光世)가 아뢰기를, “신씨가 나갔으니 처녀를 뽑아 내직(內職)을 갖추게 하고, 또 중궁을 책봉하는 일도 미리 거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 정묘년(1507) 6월에 좌의정 박원종(朴元宗) 등이 왕비를 책봉할 것을 청하니, 곧 윤 숙원(尹淑媛)을 왕비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조야기문》
○ 정묘년에 김안국(金安國)이 중시(重試)에 뽑혀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그때는 연산군(燕山君)의 혼정(昏政)의 잔재가 남아서 상례(喪禮)가 행해지지 않은 채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김안국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삼강(三綱)은 천지의 큰 도리로서 옛 사람이 ‘하늘을 떠받치는 세 기둥’이라고 하였으니 하루도 폐할 수 없습니다. 폐주(廢主 연산군)가 단상법(短喪法)을 쓴 뒤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어버이를 잊고 예를 저버려 윤리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분명하게 하교를 내려 특별히 권선징악하는 법을 보여 풍속과 교화를 세우소서.” 하였다. 《조야기문》
○ 무진년 검열 권벌(權橃)이 봉교 이희증(李希曾)ㆍ김영(金瑛), 대교 윤인경(尹仁鏡)ㆍ정웅(鄭熊), 검열 문관(文瓘)ㆍ김희수(金希壽)ㆍ소세양(蘇世讓) 등과 함께 무오 사국(戊午史局)에 관한 일을 논계(論啓)하며, 이극돈(李克墩)을 추죄(追罪)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원통함을 풀어주기를 청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 무진년에 중종이 직접 글을 써서 정원에 내리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그 허물을 듣기 좋아하는 이는 적고 듣기 싫어하는 이는 많았다. 신하로서 그 임금의 허물을 알고 과감히 간(諫)하여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는 곧 곧은 신하요, 그 임금의 잘못을 알면서도 아첨하느라 잘한다고 하는 자는 곧 아첨하는 신하이다.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이 밖으로는 바른말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었으나 안으로는 부끄러울 만한 일이 있었으니, 나는 감히 하지 못한다.만약 과실이 있다면 외정(外政)의 신하들도 모두 다 말해야 하는데, 더구나 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 있어서랴. 바야흐로 지금 나의 잘잘못에 대해 너희들이 각각 숨김 없이 말하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죄주지 않겠다.” 하였다. 이어 황모필(黃毛筆) 40자루와 먹[墨] 20홀(笏)을 정원과 보문관(寶文館)에 내려주며 이르기를, “지금 하사한 붓과 먹은 무릇 나의 과실을 숨김 없이 말하여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갑술년에 이조에 특별히 유시하여 고세보(高世輔)를 숨김없이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로 삼았다. 세보의 아들 증(曾)이 혜민서 교수로 있었는데, 이조에서 이 사실을 아뢰니 또 활인서 제조 하해종(河海宗)과 서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세보와 해종은 모두 연산조 때 음란을 일삼던 신하인데, 세보가 더욱 연산군의 음란을 부추긴 엉큼한 자였다. 반정(反正) 후에 이내 수의(首醫)가 되고 청탁질을 많이 하여 이때에 이르러 특명으로 벼슬을 준 것이다. 임금은 또 잡술(雜術)에 마음을 두어 지관(地官)과 복자(卜者)들을 모두 불러 보고 어의(御衣)를 내려주었는데, 술객(術客) 조륜(趙倫)은 궁중을 무상으로 출입하였다. 《음애일기(陰崖日記)》
○ 과거에 완성군(莞城君) 귀정(貴丁)을 정국 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승진시켜 군(君)을 봉하였는데, 3년 뒤에 간관들이 반정 때에 하찮은 공으로 높은 벼슬을 받은 이들을 논열(論列)하여 몇 달을 두고 항쟁(抗爭)하는 소(疏)를 올렸다. 이에 임금은, 완성군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이고 또 종친의 늙은이이므로 특별히 고칠 수 없다고 유시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윤허하였다. 심사순(沈思順)이 지은 완성군의 <묘표(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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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散文) | ||||
유명 조선국 소의흠숙정현왕후(昭懿欽淑貞顯王后) 선릉지(宣陵誌) |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姓)은 윤씨(尹氏)이니 파평(坡平)의 세가(世家) 출신이시다. 그 원조(遠祖)인 휘(諱) 신달(莘達)이 고려 태조를 도와서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封)해졌으며, 그 손자인 윤금강(尹金剛)은 지위가 복야(僕射)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집형(執衡)을 낳았는데 이어서 복야가 되었으며, 그 아들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윤관(尹瓘)은 숙종(肅宗)ㆍ예종(睿宗) 두 왕조를 섬기면서 출장입상(出將入相)의 국량을 발휘하여 여진(女眞)을 평정하고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는바, 영원군개국백(鈴原郡開國伯)에 봉해졌다. 문하시중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윤언이(尹彦頤)를 낳았고, 정당문학이 병부 시랑(兵部侍郞) 윤돈신(尹惇信)을 낳았으며, 증손(曾孫)인 감찰어사(監察御史) 윤순(尹純)에 이르러서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윤부(尹珤)를 낳았다. 그 후로 휘 척(陟)은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을 낳았으니, 이분이 고조이다. 증조는 본조(本朝)의 좌명공신(佐命功臣)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곤(尹坤)이고, 조부는 증(贈)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윤삼산(尹三山)이다. 부친은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이며, 모친 연안부부인(延安府夫人)은 성이 전씨(田氏)로서 증(贈)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좌명(佐命)의 따님이니 역시 연안(延安)의 망족(望族)이다. 천순(天順) 임오년(1462, 세조8) 6월 무자(戊子)에 신창현(新昌縣)의 관사(官舍)에서 후(后)가 탄생하셨다.
당초 부부인이 신녀(神女)가 채색 구름을 타고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어 임신이 되었으며 이윽고 후를 낳았기에, 부모가 기이하게 여기면서 귀인(貴人)이 될 징조임을 이미 알았다.
성화(成化) 계사년(1473, 성종4)에 후는 12세의 나이로 뽑혀서 궁(宮)에 들어가 숙의(淑儀)에 봉해지셨으니, 곧 성묘(成廟)께서 재위하신 지 5년째 되던 때이다. 후는 성품이 총민(聰敏)하고 마음가짐이 순수하고 근신(謹愼)하여, 위로 정희(貞熹)ㆍ소혜(昭惠) 두 후가 각별히 사랑하여 부도(婦道)를 가르치니 이를 잘 받들고 따라서 어김이 없으셨다. 이에 정희왕후가 매양 칭찬하기를 “윤 숙의(尹淑儀)로 시험해 보니, 궁중의 여인은 나이 어릴 때 뽑아야겠다. 그래야 가르침을 익히기가 쉽다.” 하셨다.
마침 왕비 윤씨(尹氏)가 죄로 폐출(廢出)되어 경자년(1480, 성종11) 10월에 마침내 중궁(中宮)의 자리에 오르시니, 요조숙녀(窈窕淑女)를 찾느라 오매불망 애쓸 것도 없고 갈류(葛藟)의 덕화(德化)가 본래부터 상궁들 사이에 스며 있었다. 온화한 몸가짐으로 예(禮)를 따르는 태도가 오랠수록 더욱 경건하시니, 성묘(成廟)가 매양 칭찬하기를 “부인들은 투기하지 않는 이가 드문 법인데, 어진 배필을 얻고부터는 나의 마음이 편안하다.” 하셨다. 소혜왕후(昭惠王后)도 기쁜 빛이 얼굴에 넘쳐 말하기를 “중궁으로 좋은 사람을 얻었으니, 밤낮에 무엇을 근심하리요.” 하셨다.
이듬해 신축년에 명(明)나라 헌종황제(憲宗皇帝)가 제칙(制勅)을 내려 “윤씨는 일찍부터 왕을 섬겨 능히 내치(內治)를 이루었고 오직 맡은바 직분을 수행하여 오래도록 변치 않았다. 이에 특별히 조선국왕(朝鮮國王)의 계비(繼妃)로 봉하고 고명(誥命)을 내려 그대의 영광으로 삼노니, 공경히 봉행(奉行)하여 규곤(閨閫)을 빛내도록 하라.” 하고, 아울러 관복(冠服)과 저사라(紵絲羅), 서양포(西洋布) 등을 하사하여 총애로운 은명(恩命)이 빛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영광스러워하였다.
당시 영원공(鈴原公)이 아직 생존하시어 후가 자주 친정집에 납시어 헌수(獻壽)하시니, 나라 사람들이 성사(盛事)라 여겼다.
홍치(弘治) 임자년(1492, 성종23)에는 빈(嬪)들을 거느리고 창덕궁(昌德宮)의 금원(禁苑)에서 친잠(親蠶)을 하셨으니, 근본을 도타이하는 데 힘쓰는 뜻이었다. 성묘가 이 일로 해서 사면령을 반포하셨다.
성묘가 승하하시자 울부짖고 가슴을 치면서 음식을 들지 않아 거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셨다가, 소혜왕후의 구호 덕분에 건강을 지키실 수 있었다.
연산조(燕山朝)에는 왕대비(王大妃)로 봉해지고 자순(慈順)이란 존호가 가상(加上)되었다. 소혜왕후의 상(喪)에 연산주(燕山主)가 상기(喪期)를 짧게 줄이려 하자, 후가 예(禮)에 의거하여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한편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하시니, 연산주가 매우 화를 내면서 ‘부인삼종(婦人三從)’이란 말로써 답하였다. 이에 후가 탄식하면서 “내가 소혜(昭惠)께 죄를 얻을 것이 분명하구나.” 하셨다.
연산주가 말년에 무도함이 더욱 심해지니 조야(朝野)가 위태하여 조석(朝夕)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덕(正德) 병인년(1506, 중종1) 9월에 뭇 신하들이 후의 분부를 받들고 지금의 성상(聖上)을 추대하여 대통(大統)을 잇게 하니, 중흥의 공업(功業)이 옛날에 비해 더욱 빛났다. 이후로는 국정에 하나도 간여하지 않았으나 국가를 위한 심원한 계책은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으셨고, 환심이나 사는 고식적인 은혜는 털끝만큼도 내려 준 적이 없으셨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훙서(薨逝)했을 때, 후는 어진 덕을 지녔음에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애석해하고 원자(元子)가 어미를 잃은 것을 불쌍히 여겨 통곡하며 슬퍼해 마지않으셨으며, 그 세자를 보살피신 것으로 말하자면 외간에서 다 알지 못하는 점이 있다. 궁중에 작서(灼鼠)의 변고가 있었을 때 어명으로 나인(內人)을 국문하였으나 실상을 밝혀내지 못하자, 후가 언문 서찰을 추관(推官)에게 보내시어 곧 사건을 밝히고 범인을 처벌하였다. 이에 조정의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을 모아 통쾌하다고 하였다.
오호라, 성상을 탄생시켜 중도에 끊어질 뻔한 왕통을 크게 이었고, 동궁을 잘 보호하여 만세 왕업의 바탕을 더욱 공고히 다졌으니, 비록 옛날의 현비(賢妃)라 할지라도 성대한 덕과 공(功)이 이처럼 우뚝한 이가 있지는 않았다.
후가 일찍이 질병이 심하신 적이 있었는데, 상(上)이 친히 내원(內苑)에서 기도하면서 향을 사르고 하늘에 축원하시자 병환이 나았다. 이에 사람들은 효성의 감응이라고들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또 병환이 들어 여러 달을 끌었다. 상이 늘 시약(侍藥)하면서 직접 맛을 보지 않고는 감히 약을 올리지 않으셨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경복궁(景福宮)의 정침(正寢)에서 훙서(薨逝)하시니,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8월 22일이다. 춘추는 69세이다.
상이 슬픔으로 죽을 들지 못하신 것이 3일이었고, 초빈(草殯)을 차린 뒤에도 날마다 오곡전(五哭奠)을 올리며 지극히 슬퍼하시니 좌우 사람들이 차마 듣지 못하였으며, 안으로 궁중과 밖으로 조정 사람들이 모두들 목 놓아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예관(禮官)이 재신(宰臣)들을 모아서 시호(諡號)를 의논하니 모두 “시법(諡法)을 살펴보면 ‘크게 사려하여 능히 다스림[大慮克就]을 정(貞)이라 하고 행실이 밖으로 드러남을 현(顯)이라 한다.’ 하였다. 대행대비(大行大妃)께서는 시국이 혼란하던 날에 큰 계책을 결정하여 대업(大業)이 다시 흥성하게 되었고 나라가 평안하던 때에 큰 의심을 분변하여 대본(大本)이 더욱 견고하게 되었으니, 정(貞)하지 않은가. 덕이 중궁(中宮)에서 드러나 음험하고 부정(不正)한 청탁이 없었고 교화가 외정(外庭)에서 행해져 엄숙하고 화락한 거동이 있었으니, 현(顯)하지 않은가. 삼가 ‘정현왕후(貞顯王后)’란 시호를 올린다.” 하였고, 또 ‘소의흠숙(昭懿欽淑)’이란 휘호(徽號)를 가상(加上)하였다. 그리고 이해 10월 29일 을유(乙酉)에 선릉(宣陵)의 좌측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둔덕에 안장(安葬)하였으니,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오호라, 후의 성덕(聖德)은 두루 갖춰지지 않음이 없었거니와, 효성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서 위로 자전(慈殿)을 모심에 마음을 지극히 기쁘게 해 드리고 무릇 제철에 나는 먹거리를 만나면 먼저 원묘(原廟)에 올림에 끝내 조금도 해이하지 않으셨다. 또 다른 소생(所生)의 자녀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보살피셨으니, 연산주가 세자로 있을 때에는 자기 생모가 아닌 줄 알지 못하였다.
병환이 들어서는 가진 재물을 나누어 두루 친척들에게 하사하셨으되, 일찍이 은택을 끼쳤다는 평판을 바란 적이 없었다. 또 한번은 메추라기 고기를 먹고 싶어하여 친정쪽 사람이 이를 얻어서 바친 적이 있었는데 후는 ‘바깥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경계하셨으니, 사람들이 알고서 메추라기 고기를 바치는 폐단이 생길까 우려하셨기 때문이다. 질병이 들었을 때는 사람의 정신이 흐려지기 쉬운 법인데 성심(聖心)의 근신(謹愼)하기가 이와 같기에 이르셨으니, 평상시의 성행(聖行)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호라, 후의 성덕(聖德)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바가 있거니와, 내행(內行)의 아름다움에 이르러서는 숨겨져 드러나지 않았다. 삼가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는 것들을 거두어 모아서 기록하니, 천백 분의 하나 둘일 뿐이다. 그러나 후인들이 이를 통하여 징험해 보면 비록 옛날의 도신(塗莘)이나 임사(任似)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하진 않을 터이니, 오호라, 성대하도다.
후는 금상(今上)을 탄생시켰고, 또 세 공주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금상께서는 처음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따님을 맞아서 중궁(中宮)으로 봉하셨으니, 곧 장경왕후(章敬王后)이시다. 이에 1남 1녀를 낳으셨으니, 세자는 증 의정부 우의정 박용(朴墉)의 따님을 아내로 맞으셨고, 효혜공주(孝惠公主)는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에게 하가(下嫁)하셨다. 지금의 중궁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따님으로 3녀를 낳으셨으니, 맏이인 의혜공주(懿惠公主)는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두 공주는 아직 어리다. 전 빈(嬪) 박씨(朴氏)는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드님은 전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로 전 현감(縣監) 윤인범(尹仁範)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고, 맏따님인 혜순옹주(惠順翁主)는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에게 하가하였고, 둘째 혜정옹주(惠靜翁主)는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에게 하가하였다. 귀인(貴人) 홍씨(洪氏)는 1남을 낳았으니, 금원군(錦原君) 이령(李岭)으로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 정승휴(鄭承休)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다. 숙원(淑媛) 홍씨(洪氏)는 1남을 낳았으니, 해안군(海安君) 이희(李㟓)로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 유홍(柳泓)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다. 숙원 안씨(安氏)는 1남을 낳았으니, 영양군(永陽君) 이거(李岠)이다. 숙원 이씨(李氏)는 2녀를 낳았으니, 맏이인 정순옹주(貞順翁主)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에게 하가하였고, 둘째는 아직 어리다.
[주D-002]작서(灼鼠)의 변고 : 중종(中宗) 22년 2월 25일, 세자의 생일에 누가 쥐를 잡아서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ㆍ귀ㆍ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東宮)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두고 동궁을 저주한 사건이다. 그 후 3월 초하루에도 같은 사건이 대전(大殿)의 침실 곡란(曲欄)에서 일어났다.
[주D-003]도신(塗莘) : 우(禹) 임금이 도산(塗山)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문왕(文王)이 신(莘) 땅의 여인인 태사(太似)를 아내로 맞이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4]임사(任似) :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과 무왕(武王)의 어머니인 태사를 가리킨다.
8월10일 (계유) | |||||||||||||||||||||||||||||||||||||||||||||||||||||||||||||||||||||||||||||||||||||||||||||||||||||||||||||||||||||||||||||||||||||||||||||||||||||||||||||||||||||||||||||||||||||||||||||||||||||||||||||||||||||||||||||||
선공감(繕工監)의 단자(單子)를 내리면서 일렀다.【그 단자는 다음과 같다. “영양군(永陽君)·의혜 공주(懿惠公主)·효정 옹주(孝靜翁主)의 집을 짓는 일을, 전에 가뭄으로 인하여 역사(役事)를 정지시켰었습니다. 지금은 가을이니 강원도와 충청도에 복정(卜定)된 재목을 그 도의 감사로 하여금 나무를 베어 강으로 떠내려 보낼 것을 행문(行文)함…….”.】
“재목을 베어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일은, 전에 한재(旱災) 때문에 본도와 조정에서 모두 농사철에 백성을 부리면 폐단이 있다는 것으로 역사(役事)를 정지시켰었다. 지금 가을철에 들어섰으나 9∼10월 역시 농사철입니다. 지금 이 단자의 사연대로 범연히 행문(行文)한다면 그 폐단이 백성에게 미칠 것이다. 전에 베어 놓은 나무는 적당한 때를 가려 떠내려 보내고, 아직 베지 않은 것은 금년 농한기에 베어서 명년 농한기에 떠내려 보낼 것으로 공사(公事)를 분명히 만들라.” 【원전】 17 집 143 면 【분류】 *군사-군역(軍役) / *왕실-종친(宗親) / *건설-토목(土木) / *재정-전매(專賣) / *과학-천기(天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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