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의병 곽재우 /용재집(容齋集) 제2권

의령(宜寧)으로 근친(覲親) 가는 정운경(鄭雲卿)을 보내며 3수(三首

아베베1 2009. 11. 10. 15:56

용재집(容齋集) 제2권   이행이 저술하신

1478~1534.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이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 교리로 등용되고, 대사간과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으로 내려갔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대사헌과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을 받아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용재집》이 있다.

 

 오언율(五言律)

 

의령(宜寧)으로 근친(覲親) 가는 정운경(鄭雲卿)을 보내며 3수(三首)

일찍이 대궐 섬돌을 밟았고 / 早展花磚步       지금은 근친 길을 떠나누나 / 今兼綵服行
옥당에서 막 하직하고 물러나 / 玉堂初下直    역마 타고 다시 장도에 오르네 / 馹騎復長程
경연에선 주상의 은총 입었고 / 經幄勤三接    유림에선 대명을 독차지하였지 / 儒林擅大名
빨리 조정에 돌아와 입대해도 / 遄歸催入對    어버이 마음 오히려 위로되리 / 猶得慰親情

흰 구름 서린 사굴산은 멀고 / 白雲闍崛遠      가을 물 맑은 낙동강 잔잔해라 / 秋水洛江平
돌아가는 노 재촉이 성화인데 / 歸棹如星火    잔을 들매 형제가 한자리로세 / 稱觴共弟兄
조정에선 시종을 추중하였고 / 朝廷推侍從     향리에선 은영인 줄 알았지 / 鄕曲識恩榮
작은 시로 증별 노래 대신하니 / 小什當歌詠   오히려 후생을 권면할 만하여라 / 猶堪勸後生

정진 나루 물 질펀히 흐르는데 / 鼎津流浩渺    나의 집은 그곳 강가에 있었지 / 吾舍在其涯
예전에 심은 대는 천 개이련만 / 舊竹應千箇    새로 옮긴 매화는 몇 가지런고 / 新梅定幾枝
옛날에 놀던 시절 꿈만 같은데 / 昔遊渾似夢    가지 못하고 그저 시만 읊노라 / 未去但吟詩
부로들이 만약 내 소식 묻거든 / 父老如相問     머리털 이미 세었다 말하지 마소 / 休言鬢已絲

 

 

 

聾巖先生文集卷之五
 附錄之二

 

次韻[鄭士龍]
分符常得近桑鄕。早判君親事短長。爲問前賢誇晝錦。何如愛日扁新堂。
安得抽簪返我鄕。庭闈百歲駐春長。半生剛被浮名縛。松菊渾蕪十玩堂。 鄭雲卿

 

 

 

 

용재집(容齋集) 제2권
 오언율(五言律)
정운경(鄭雲卿)의 시에 차운하다. 5수(五首)


이름은 마치 사굴산처럼 무겁고 / 名垂闍崛重
마음은 흡사 정진 물인 양 맑아라 / 心似鼎津淸
이별한 후 소식이 끊기었더니 / 別去音塵隔
보내온 서신 흉금을 다 쏟았구나 / 書來底裏傾
하늘과 땅이 우리를 용납하니 / 乾坤容我輩
시와 술은 전생부터 맺은 인연 / 詩酒自前生
아름다운 경치 보면 그대 생각노니 / 美景思携手
아련히 내 낀 꽃 도성에 가득해라 / 煙花滿洛城

새로 보낸 시에서 깊은 정 알고 / 新詩知繾綣
종횡으로 쓰인 가는 글자 보노라 / 細字看縱橫
지금은 머리에 온통 백발이니 / 此日頭渾白
어느 때나 반가운 눈길로 만날꼬 / 何時眼共明
강호에 물고기는 제 길 찾았것만 / 江湖魚得計
종고는 새의 마음에 맞지 않아라 / 鍾鼓鳥非情

우리 양쪽의 하염없는 상념은 / 兩地無窮思
붓끝으론 결코 그리지 못하겠네 / 毫端寫不成

헤어진 지 오래매 오늘 슬퍼하고 / 乖闊悲今日
함께 어울려 놀던 옛날 생각노라 / 遊從記昔年
악기와 노래로 만류하던 그해 / 笙歌留舊歲
가인의 붉은 분 서천에 빛났지 / 紅粉耀西天
당시의 행락이 일장춘몽 같나니 / 行樂如春夢
벼슬길은 바로 이별의 자리로세 / 名途是別筵
서로 그리워도 만나지 못하는데 / 相望不相見
쇠잔한 머리털 어느새 허옇구나 / 衰鬢坐蕭然
정주(定州)에 있을 때 제석(除夕)에 함께 놀던 것을 추억하며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재상 자리는 내 분수에 안 맞아 / 鼎台非我分
산골짜기에 있는 내 집을 생각노라 / 丘壑憶吾家
오늘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나니 / 今日知魚樂
새로 보낸 시편 말편자와 맞먹누나 / 新篇當馬撾
첩첩 산을 마주하고 높이 읊조리며 / 高吟對疊巚
날이 저물 때까지 꼿꼿이 앉았노라 / 危坐到棲鴉
어찌하면 우리 서로 반겨 만나 / 安得逢迎地
할 말 잊은 채 함께 차를 달일꼬 / 忘言共點茶
누옥(陋屋)이 또한 정수(鼎水) 가에 있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그대가 고향으로 떠난 뒤로 / 自君之出矣
누구와 더불어 다시 글을 논하리 / 誰與更論文
돌아오는 길 도리어 천리인데 / 歸路還千里
올봄은 또 반이 이미 지났구나 / 今春又半分
옛 소리 참으로 화답할 이 적고 / 古聲眞寡和
천리마는 무리가 빈 지 오래라네 / 絶足久空群
한 글자를 가벼이 놓지 말지니 / 一字休輕下
그 가치 황금 몇 근과 맞먹는다네 / 黃金直幾斤


 

[주D-001]강호에 …… 않아라 : 여기서 물고기는 고향인 의령(宜寧)에 가 있는 정운경을, 새는 조정에 몸 담고 있는 작자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장자》 지락(至樂)에,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내려앉자 노후(魯侯)가 그 새를 사당에 모셔 놓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하고 태뢰(太牢)의 성찬(盛饌)을 올리니, 새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고기 한 점 술 한 잔 먹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는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하였다.
[주D-002]물고기의 즐거움 :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강물 위 다리를 거닐다가 장자가 “피라미가 조용히 노니니 이는 물고기의 즐거움이로다.” 하니, 혜자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이에 장자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줄 어찌 아는가?” 하니, 혜자가 “나는 그대가 아니므로 진실로 그대를 알지 못하니,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므로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莊子 秋水》 여기서는 정운경의 자득한 즐거움을 뜻한다.
[주D-003]새로 …… 맞먹누나 : 정운경이 새로 보낸 시편을 받아 보니 그가 직접 말편자 소리를 울리며 찾아온 것과 같다는 뜻이다.
 
용재집(容齋集) 제3권
 칠언율(七言律)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부임하는 소언겸(蘇彦謙)을 보내며

훌륭한 아우께서 또 수령을 맡으니 / 小難今日又專城
향리 사람들 모두 근친의 영광 알리라 / 鄕里爭知彩服榮
앉아서 온 고을을 효우로 감화시키고 / 坐使一方歸孝友
장차 최상의 실적 올려 공경이 될 테지 / 行看上最入公卿
높은 벼슬 분수에 넘쳐 나는 부끄럽고 / 靑雲愧我叨非分
우뚝한 그대 큰 명성 떨치리 기약노라 / 獨步期君擅大名
무단히 눈물 흘린다 괴이쩍어 마시라 / 莫怪無端雙涕淚
부모 없는 이 몸 형제의 정에 슬프다오 / 蓼莪身事鶺鴒情
병든 아우가 죄로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포주성의 흥겹던 놀이 아직 기억나건만 / 勝遊猶記抱州城
지금은 생각노니 영욕이 서로 다르구려 / 今日相思異悴榮
알지 못하겠다 완산에 국사가 필요한지 / 未信完山須國士
사굴산에 낙향한 장경을 다시 말하노라 / 更論闍崛滯長卿
선비의 득실은 참으로 운수소관인 것 / 儒冠得失眞關數
이 늙은이 부침하며 명성만 훔칠 뿐일세 / 老子浮沈只竊名
그대의 머리털이 하얗게 센 뒤엔 / 待得吾君頭白後
지금의 내 마음을 틀림없이 아시리라 / 定應知我此時情
이때 운경(雲卿)이 벼슬을 잃고 고향 의령(宜寧)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그가 소갈병을 앓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이렇게 언급하였다.

[주D-001]훌륭한 아우 : 소세양(蘇世讓)의 자가 언겸(彦謙)으로, 역시 용재와 벗인 소세량(蘇世良)의 아우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2]알지 …… 말하노라 : 지방관인 전주 부윤 자리가 국사(國士)인 소언겸이 앉기엔 부족하며, 게다가 운경(雲卿) 정사룡(鄭士龍)처럼 훌륭한 선비가 고향인 의령의 사굴산 아래에서 낙척(落拓)한 신세로 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장경(長卿)은 한(漢)나라 때 부(賦)에 능하였던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字)로, 그가 늘 소갈병(消渴病)을 앓았다 한다.
용재집(容齋集) 제3권
 오언시(五言詩)
팔월 사일에 단계(丹溪)를 지나며

단계는 나를 전송해 주고 / 丹溪送我去
사굴산은 나를 영접해 주누나 / 闍崛迎我來
전송과 영접 모두 무심하니 / 送迎兩無心
나의 행차 바야흐로 유유해라 / 我行方悠哉
가을 국화 한창 빛깔이 고우니 / 秋花好容色
다른 꽃들 다 볼 겨를 없구나 / 細瑣莫能該
계절도 이미 저물어가는 제 / 時節亦已晩
한 번 향기 맡고 세 번 서성인다 / 一嗅三徘徊
평생 산림에 은거하리 맹세했건만 / 平生丘壑盟
앉아서 백발의 재촉만 받누나 / 坐受華髮催
사람 일은 쉬이 끝나지 않으니 / 人事未易了
탄식하매 오장이 찢어지는 듯 / 歎息腸內摧
짧은 해는 이제 곧 기울 참이라 / 短日迫將夕
보금자리 찾는 새 숲으로 나누나 / 歸鳥投林隈
말을 채찍질해 오솔길로 접어드니 / 策馬就微徑
서풍이 나를 위해 슬퍼하는 양 / 西風爲我哀

용재집(容齋集) 제7권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취원루(聚遠樓) 의령(宜寧)에 있다.

주인의 정사 처리는 참으로 능숙해 / 主人政事少全牛
여유로운 솜씨 새로 백척 누각 지었군 / 遊刃新修百尺樓
사해 문장이 여기 한 번 돌아보았으니 -누각에 강혼(姜渾)의 기(記)가 있다. / 四海文章曾一顧
천년의 명승지 틀림없이 길이 전해지리 / 千年名勝定長流
정진의 가을 물은 환히 맑아 볼만하고 / 鼎津秋水明堪翫
사굴산의 봄빛은 멀리 허공에 뜰 듯해라 / 闍窟春光遠欲浮
훗날 이 누각 오를 땐 내가 늙었을 터 / 他日登臨吾便老
옛 숲과 산은 그때까지 은근히 잘 있겠지 / 慇懃好在舊林丘
 용재집(容齋集) 제7권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강 주부(姜主簿)를 곡하다. 이름은 효정(孝貞)인데 귀가 먹어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 2수(二首)


아침에 진토의 일 사양하고 / 朝辭塵土役
저녁에 죽림의 은자 되었도다 / 晩作竹林儂
세상일 어찌 귀를 기울이랴 / 世事寧關耳
천유라 종적을 펼치지 않았지 / 天遊不布蹤
그 이름 익히 들은 지 오랜데 / 久聞名已熟
갑자기 집을 나가니 눈물 흐르오 / 遽出涕無從
사굴산 서남쪽 기슭에 / 闍窟西南麓
처량한 무덤이 서 있구나 / 凄涼馬鬣封

보계(譜系)는 공목의 후손이요 / 系惟恭穆後
집은 정암 물가에 있도다 / 宅是鼎巖濱
그 숙덕은 고을 사람 공경했고 / 宿德鄕閭敬
맑은 흉금으로 어조와 친했었지 / 淸襟魚鳥親
풍류가 이날 비어서 없고 / 風流虛此日
기구에 이 사람을 잃었도다 / 耆舊失斯人

뉘라서 다시 긴 대를 보랴 / 誰更看脩竹
술 거르던 두건에 티끌이 이누나 / 塵生漉酒巾

 

容齋先生集卷之七
 南遊錄 庚午年
姜主簿 孝貞。患耳聾。不出。二首 020_476b


020_476c早辭塵土役。晩作竹林儂。世事寧關耳。天遊不布蹤。久聞名已熟。遽出涕無從。闍崛西南麓。凄涼馬鬣封。
系惟恭穆後。宅是鼎巖濱。宿德鄕閭敬。淸襟魚鳥親。風流虛此日。耆蕉失斯人。誰更看脩竹。塵生漉酒巾。


용재집(容齋集) 제9권
 산문(散文)
의령현제명기(宜寧縣題名記) 현감(縣監) 김의종(金意從)을 대신해서 짓다.


현은 옛날 신라의 장함(獐含) 땅인데 언제 처음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그 후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사이 변혁(變革)을 겪고 부속(附屬)이 바뀐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징험할 기록이 없다. 아, 고을의 건치(建置)와 연혁은 큰일임에도 오히려 징험할 수 없다니. 게다가 이 고을에 수령이 된 이는 혹 6년, 3년 또는 1, 2년 또는 1년도 못 채우고 임기를 마쳐서 마치 나그네가 여관에 잠시 머무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훌쩍 떠나 버린다. 그리하여 옛사람은 멀어지고 새 사람은 또 옛사람이 되고 마니, 그 성명이 그대로 묻혀서 전해지지 않는 것이 괴이쩍을 것도 없다.
나는 불초한 몸으로 외람되이 수령의 직책을 맡았는데, 재주는 할계(割鷄)에 부끄럽고 직임은 제금(製錦)에 무거우니, 깊은 못가에 이른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다는 비유로도 나의 두려운 마음을 형언할 수 없다. 날이 가고 또 날이 가서 임기가 차니, 어깨의 무거운 짐을 풀어놓게 된 것은 비록 나 자신으로서는 다행스럽다. 그러나 새 사람으로부터 옛사람이 되고 옛사람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되니, 몸이 금석(金石)처럼 변치 않는 것이 아니거늘 서운한 마음이 없을 수 있으리요. 이에 생각해 보건대, 옛날에도 역시 이와 같아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령의 성명을 기억하지 못하여 늙은 아전이나 백성들조차도 죄다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이 고을의 큰 흠이 아니리요. 이제 현의 옛 장부들을 모아서 박공 습(朴公習) 이하 53원(員)의 성명을 찾아 아래에 열거함과 아울러 그들의 임기 연월(年月)을 기록하고 건치한 것이 있으면 역시 썼다. 그리고 불초의 이름을 이어 적어서 감히 스스로 겸양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이름을 적는 장부일 뿐이기 때문이지 감히 달리 의의(意義)를 둔 것은 아니다.
개벽(開闢)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땅이 있고 수령이 있은 지 몇 갑자(甲子)가 지났는지 모르지만, 기록에 보이는 것은 경오(庚午)를 두 차례 주행(周行)한 데 불과하고 이보다 이전의 것은 전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오호라, 사굴산(闍窟山)은 모습이 바뀌지 않고 정진(鼎津)은 물이 길이 흐르건만, 유유한 천고의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그 몇이런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만 앞으로 훗날은 무궁하니, 계속하여 이름을 써서 실추함이 없기를 실로 훗날의 군자에게 바라노라.


 

[주D-001]할계(割鷄) : 닭을 잡는다는 말로,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가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요.[割鷄焉用牛刀]”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陽貨》
[주D-002]제금(製錦) : 비단을 마름질한다는 말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정(鄭)나라 자피(子皮)가 나이 어린 윤향(尹向)을 시켜 읍(邑)을 다스리게 하려 하자, 자산(子産)이 이르기를 “그대에게 좋은 비단이 있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바느질하는 법을 배우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春秋左傳 襄公31年》

용재집(容齋集) 제10권
 [산문(散文)]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창원 부사(行昌原府使) 정공(鄭公) 묘갈명 병서(幷序)


공의 휘는 광보(光輔)이고 자는 운지(運之)이며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이 집안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고려 좌복야(左僕射) 휘 목(穆)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 후 8대(代)에 이르러 휘 귀령(龜齡)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벼슬을 마쳤다. 현감이 휘 사(賜)를 낳았으니, 그는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나갔다. 목사가 휘 난종(蘭宗)을 낳았으니, 그는 네 차례 과거에 급제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고, 저명한 장상(將相)이 되었고 익혜(翼惠)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필법이 당대에 으뜸이라 비록 아이들이나 하인들조차도 그 이름을 알았다. 공은 바로 그의 장남이다. 지금 영중추부사공(領中樞府事公) 광필(光弼)은 의정부 영의정의 자리를 역임하여 조야(朝野)가 바야흐로 시귀(蓍龜)인 양 의지하고 있으니, 바로 공의 아우이다.
공은 소싯적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누차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마침내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올라 공과(功課)를 쌓음으로 해서 여러 차례 승진하여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내직(內職)으로는, 먼저 와서 별제(瓦署別提)가 되었고, 주부(主簿)가 된 것이 세 곳이었으니, 사재감(司宰監)ㆍ종부시(宗簿寺)ㆍ군자감(軍資監)이다. 그리고 재차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 평시서 영(平市署令),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첨정(僉正)이 된 것이 세 곳이었으니, 장악원(掌樂院)ㆍ예빈시(禮賓寺)ㆍ제용감(濟用監)이다. 그리고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가 되었다. 외직(外職)으로는 먼저 연산 현감(連山縣監)이 되었고, 평양부 판관(平壤府判官)이 되었다. 군수가 된 것이 다섯 곳이었으니, 정선(旌善)ㆍ풍기(豐基)ㆍ금산(錦山)ㆍ순창(淳昌)ㆍ초계(草溪)이다. 부사(府使)가 된 것이 두 곳이었으니, 창원(昌原)과 연안(延安)이다. 공은 네 차례 품계가 올라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으며, 외읍(外邑)을 맡아 다스린 것이 아홉 고을에 이르렀으니, 비록 크게 현달했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달한 셈이다.
공은 천성이 방정하고 근엄하며 관직에서는 봉직(奉職)에 힘써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이로써 헐뜯었지만 그러나 공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늙은 나이에 이르지도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의령(宜寧) 사굴산(闍崛山) 아래 살면서 그렇게 여생을 마치리라 작정하였다. 부제학군(副提學君)이 매양 휴가를 내어 공을 뵈러 오는데, 경연(經筵)의 임무가 무거워 오래 슬하에서 뫼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다투어 공에게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았으며, 아우 영중추부사공도 간절한 우애로 서신을 보내어 역시 그렇게 청한 것이 전후로 이어졌으나 끝내 공의 뜻을 굽힐 수 없었으니, 그 본성을 지킴이 대개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이 병환 중일 때 부제학군이 조정에 청하여 역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시약(侍藥)하였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갑신년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8세이다. 오호라, 슬프도다. 고자(孤子)들이 그 영구(靈柩)를 모시고 광주(廣州) 성달리(省達里)로 돌아가 안장하였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의 배필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대호군(大護軍) 이격(李格)의 따님으로 공보다 26년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4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의 맏이 한룡(漢龍)은 수원 판관(水原判官)이고, 둘째 사룡(士龍)은 바로 부제학군으로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바야흐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다. 셋째 원룡(元龍)은 진사(進士)이고, 넷째 언룡(彦龍)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다. 딸의 맏이는 감찰(監察) 이희업(李煕業)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유학(幼學) 박종상(朴從庠)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부장(部將) 이윤우(李允耦)에게 출가하였고, 넷째는 평사(評事) 이응(李膺)에게 출가하였다. 판관은 참봉(參奉) 유계근(柳繼根)의 딸을 아내로 맞아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순우(純祐)ㆍ순지(純祉)ㆍ순복(純福)ㆍ순호(純祜)이다. 부제학은 부장(部將) 성렬(成烈)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진사는 호군(護軍) 박진(朴軫)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도사는 부사(府使) 이희옹(李希雍)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을 낳았으니, 순가(純嘏)이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안국(安國)과 안방(安邦)이다. 안방은 겸사복(兼司僕)이다. 딸은 남응규(南應奎)에게 출가하였다. 평사는 2남을 낳았으니, 양정(揚廷)과 빈정(賓廷)이다.
장례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제학군이 나와 지기(知己)의 친분이 있는 터라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도(墓道)에 새길 비문(碑文)을 부탁하였으니, 감히 승낙하고 명(銘)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공의 선조는 / 公之祖先
고려 때 공을 세워서 / 奮庸高麗
작위가 복야에 이르러 / 爵爲僕射
당대에 명망이 높았어라 / 望隆一時
그 단서 끊임없이 이어서 / 厥緖聯聯
베풂은 두텁되 보답은 더뎠지 / 施厚報遲
직제학은 어버이를 위하여 / 直學爲親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 棄榮若遺
먼 고을의 목사가 되어서 / 屈牧遠州
즐거운 마음으로 봉양하였네 / 色養怡怡
음덕을 쌓고 누리지 않았으니 / 積德不食
오직 후손에게 끼쳐 주었도다 / 惟後之貽
익혜공이 이를 거두었으니 / 翼惠是收
이치가 어긋남이 없구나 / 理無參差
과거에 급제하고 공신이 됨에 / 擢科策勳
마치 누군가가 도와주는 듯 / 若或相之
장수가 되고 재상이 되어서는 / 或將或相
두 직책에 모두 적임자였어라 / 出入咸宜
무엇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가 / 何以爲證
승상이 써 놓은 글이 있다네 / 丞相之辭
공은 바로 그의 맏아들이라 / 公其胄子
아버지의 복을 이을 입장이지 / 享有當菑
영추공이 바로 그 아우이고 / 領樞是弟
제학은 바로 그 아들이라 / 提學吾兒
일족이 크고 존귀해지니 / 族大以貴
보고 듣는 이 모두 감탄했지 / 觀聽嗟咨
당상관의 반열은 / 堂上之班
지위인즉 낮지 않나니 / 位則不卑
아홉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니 / 九邑之長
운수가 어찌 좋지 않았다 하리요 / 數豈云奇
늙을수록 더욱 원로가 되었건만 / 老而彌元
세상 사람들과는 배치되었지 / 與世背馳
사굴산의 기슭과 / 闍崛之麓
정진의 물가가 / 鼎津之湄
바로 낙토(樂土)이니 / 是惟樂地
이곳에 돌아감에 무얼 주저하리요 / 歸歟何疑
내가 한마을 이웃으로 살면서 / 我隣我里
더러 술도 마시고 바둑도 두었지 / 或樽或棋
땔나무 할 산들이 있고 / 採有陵丘
낚시질 할 못이 있어라 / 釣有陂池
여생 마치도록 한가히 노닐어 / 卒歲優游
오래오래 장수하리라 했더니 / 曰期曰頤
큰 운수는 머물지 않는 법 / 大運不留
한 번 병환을 치료치 못했구나 / 一疾莫醫
저 푸른 하늘이 밝다 여겼더니 / 謂蒼昭昭
어이해 갑자기 여기에 이르렀나 / 胡遽止斯
남은 경사 후손에게 돌아갔으니 / 餘慶有歸
이치가 끝내 날 속이지 않았구나 / 終不我欺
광주의 이 산기슭에는 / 廣州之原
솔과 가래나무들 무성하여라 / 松梓猗猗
어찌 새 무덤이 없으리요 / 豈無新阡
고인은 조고를 생각하였도다 / 祖考我思
이곳에 돌아와 안장하노니 / 反葬於是
선조의 무덤이 여기 있도다 / 先兆在玆
이 무덤의 비석을 새겨서 / 刻此墓石
밝게 보여 주노니 무너뜨림이 없기를 / 昭示無隳


 

[주D-001]시귀(蓍龜) : 거북과 시초이다. 옛날에 일의 시비와 길흉을 점치던 것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을 뜻하며, 나아가서 모든 의문을 판별해 주는 원로나 국사(國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2]승상이 써 놓은 글 :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의 묘갈(墓碣)을 어느 승상이 썼던 듯하다.


용재집(容齋集) 제10권
 [산문(散文)]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창원 부사(行昌原府使) 정공(鄭公) 묘갈명 병서(幷序)


공의 휘는 광보(光輔)이고 자는 운지(運之)이며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이 집안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고려 좌복야(左僕射) 휘 목(穆)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 후 8대(代)에 이르러 휘 귀령(龜齡)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벼슬을 마쳤다. 현감이 휘 사(賜)를 낳았으니, 그는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나갔다. 목사가 휘 난종(蘭宗)을 낳았으니, 그는 네 차례 과거에 급제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고, 저명한 장상(將相)이 되었고 익혜(翼惠)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필법이 당대에 으뜸이라 비록 아이들이나 하인들조차도 그 이름을 알았다. 공은 바로 그의 장남이다. 지금 영중추부사공(領中樞府事公) 광필(光弼)은 의정부 영의정의 자리를 역임하여 조야(朝野)가 바야흐로 시귀(蓍龜)인 양 의지하고 있으니, 바로 공의 아우이다.
공은 소싯적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누차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마침내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올라 공과(功課)를 쌓음으로 해서 여러 차례 승진하여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내직(內職)으로는, 먼저 와서 별제(瓦署別提)가 되었고, 주부(主簿)가 된 것이 세 곳이었으니, 사재감(司宰監)ㆍ종부시(宗簿寺)ㆍ군자감(軍資監)이다. 그리고 재차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 평시서 영(平市署令),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첨정(僉正)이 된 것이 세 곳이었으니, 장악원(掌樂院)ㆍ예빈시(禮賓寺)ㆍ제용감(濟用監)이다. 그리고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가 되었다. 외직(外職)으로는 먼저 연산 현감(連山縣監)이 되었고, 평양부 판관(平壤府判官)이 되었다. 군수가 된 것이 다섯 곳이었으니, 정선(旌善)ㆍ풍기(豐基)ㆍ금산(錦山)ㆍ순창(淳昌)ㆍ초계(草溪)이다. 부사(府使)가 된 것이 두 곳이었으니, 창원(昌原)과 연안(延安)이다. 공은 네 차례 품계가 올라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으며, 외읍(外邑)을 맡아 다스린 것이 아홉 고을에 이르렀으니, 비록 크게 현달했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달한 셈이다.
공은 천성이 방정하고 근엄하며 관직에서는 봉직(奉職)에 힘써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이로써 헐뜯었지만 그러나 공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늙은 나이에 이르지도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의령(宜寧) 사굴산(闍崛山) 아래 살면서 그렇게 여생을 마치리라 작정하였다. 부제학군(副提學君)이 매양 휴가를 내어 공을 뵈러 오는데, 경연(經筵)의 임무가 무거워 오래 슬하에서 뫼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다투어 공에게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았으며, 아우 영중추부사공도 간절한 우애로 서신을 보내어 역시 그렇게 청한 것이 전후로 이어졌으나 끝내 공의 뜻을 굽힐 수 없었으니, 그 본성을 지킴이 대개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이 병환 중일 때 부제학군이 조정에 청하여 역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시약(侍藥)하였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갑신년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8세이다. 오호라, 슬프도다. 고자(孤子)들이 그 영구(靈柩)를 모시고 광주(廣州) 성달리(省達里)로 돌아가 안장하였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의 배필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대호군(大護軍) 이격(李格)의 따님으로 공보다 26년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4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의 맏이 한룡(漢龍)은 수원 판관(水原判官)이고, 둘째 사룡(士龍)은 바로 부제학군으로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바야흐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다. 셋째 원룡(元龍)은 진사(進士)이고, 넷째 언룡(彦龍)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다. 딸의 맏이는 감찰(監察) 이희업(李煕業)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유학(幼學) 박종상(朴從庠)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부장(部將) 이윤우(李允耦)에게 출가하였고, 넷째는 평사(評事) 이응(李膺)에게 출가하였다. 판관은 참봉(參奉) 유계근(柳繼根)의 딸을 아내로 맞아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순우(純祐)ㆍ순지(純祉)ㆍ순복(純福)ㆍ순호(純祜)이다. 부제학은 부장(部將) 성렬(成烈)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진사는 호군(護軍) 박진(朴軫)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도사는 부사(府使) 이희옹(李希雍)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을 낳았으니, 순가(純嘏)이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안국(安國)과 안방(安邦)이다. 안방은 겸사복(兼司僕)이다. 딸은 남응규(南應奎)에게 출가하였다. 평사는 2남을 낳았으니, 양정(揚廷)과 빈정(賓廷)이다.
장례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제학군이 나와 지기(知己)의 친분이 있는 터라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도(墓道)에 새길 비문(碑文)을 부탁하였으니, 감히 승낙하고 명(銘)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공의 선조는 / 公之祖先
고려 때 공을 세워서 / 奮庸高麗
작위가 복야에 이르러 / 爵爲僕射
당대에 명망이 높았어라 / 望隆一時
그 단서 끊임없이 이어서 / 厥緖聯聯
베풂은 두텁되 보답은 더뎠지 / 施厚報遲
직제학은 어버이를 위하여 / 直學爲親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 棄榮若遺
먼 고을의 목사가 되어서 / 屈牧遠州
즐거운 마음으로 봉양하였네 / 色養怡怡
음덕을 쌓고 누리지 않았으니 / 積德不食
오직 후손에게 끼쳐 주었도다 / 惟後之貽
익혜공이 이를 거두었으니 / 翼惠是收
이치가 어긋남이 없구나 / 理無參差
과거에 급제하고 공신이 됨에 / 擢科策勳
마치 누군가가 도와주는 듯 / 若或相之
장수가 되고 재상이 되어서는 / 或將或相
두 직책에 모두 적임자였어라 / 出入咸宜
무엇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가 / 何以爲證
승상이 써 놓은 글이 있다네 / 丞相之辭
공은 바로 그의 맏아들이라 / 公其胄子
아버지의 복을 이을 입장이지 / 享有當菑
영추공이 바로 그 아우이고 / 領樞是弟
제학은 바로 그 아들이라 / 提學吾兒
일족이 크고 존귀해지니 / 族大以貴
보고 듣는 이 모두 감탄했지 / 觀聽嗟咨
당상관의 반열은 / 堂上之班
지위인즉 낮지 않나니 / 位則不卑
아홉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니 / 九邑之長
운수가 어찌 좋지 않았다 하리요 / 數豈云奇
늙을수록 더욱 원로가 되었건만 / 老而彌元
세상 사람들과는 배치되었지 / 與世背馳
사굴산의 기슭과 / 闍崛之麓
정진의 물가가 / 鼎津之湄
바로 낙토(樂土)이니 / 是惟樂地
이곳에 돌아감에 무얼 주저하리요 / 歸歟何疑
내가 한마을 이웃으로 살면서 / 我隣我里
더러 술도 마시고 바둑도 두었지 / 或樽或棋
땔나무 할 산들이 있고 / 採有陵丘
낚시질 할 못이 있어라 / 釣有陂池
여생 마치도록 한가히 노닐어 / 卒歲優游
오래오래 장수하리라 했더니 / 曰期曰頤
큰 운수는 머물지 않는 법 / 大運不留
한 번 병환을 치료치 못했구나 / 一疾莫醫
저 푸른 하늘이 밝다 여겼더니 / 謂蒼昭昭
어이해 갑자기 여기에 이르렀나 / 胡遽止斯
남은 경사 후손에게 돌아갔으니 / 餘慶有歸
이치가 끝내 날 속이지 않았구나 / 終不我欺
광주의 이 산기슭에는 / 廣州之原
솔과 가래나무들 무성하여라 / 松梓猗猗
어찌 새 무덤이 없으리요 / 豈無新阡
고인은 조고를 생각하였도다 / 祖考我思
이곳에 돌아와 안장하노니 / 反葬於是
선조의 무덤이 여기 있도다 / 先兆在玆
이 무덤의 비석을 새겨서 / 刻此墓石
밝게 보여 주노니 무너뜨림이 없기를 / 昭示無隳


 

[주D-001]시귀(蓍龜) : 거북과 시초이다. 옛날에 일의 시비와 길흉을 점치던 것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을 뜻하며, 나아가서 모든 의문을 판별해 주는 원로나 국사(國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2]승상이 써 놓은 글 :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의 묘갈(墓碣)을 어느 승상이 썼던 듯하다.
기언(記言) 제18권 원집(原集) 중편
 구묘문(丘墓文)
호음(湖陰)의 천장 음기(遷葬陰記)

우리나라의 문학이 융성하다는 것은 예부터 기록된 것이다. 설자(說者)가 말하기를,
“국초(國初)의 모든 저작은 옛것을 약간 변화시켜서 아담하고 화려하게 하였다. 신라 때부터 천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재주가 뛰어난 최 학사(崔學士 최치원(崔致遠))ㆍ이 상국(李相國)ㆍ이목은(李牧隱)ㆍ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같은 분들의 작품은 당송(唐宋)의 문장과 겨룰 만한데, 그중에도 이 상국이 가장 재주가 많았다.”
한다. 우리 중종(中宗)ㆍ명종(明宗) 이후로 시를 가지고 이름난 분이 백여 년 동안에 또한 많았는데, 호음(湖陰)의 시가 후세에 특히 일컬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서문에 이르기를,
“그는 남보다 뛰어난 천재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아서 매일 수천 언을 기록하였다. 문장이 일찍이 성취되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였고, 오 태사(吳太史)는 일컫기를,
“산수며 동물이며 식물이며 변태(變態)며 호흡이며 음률이며 요속(謠俗) 같은 것들을 한결같이 읊조리는 데에 붙였다. 풍(風)에 능하였으며, 시가 온후하고 화평하여 기괴하지만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사신과 수창(酬唱)한 작품이 천하에 크게 전한다.”
하였다. 지금 호음의 시로 세상에 행하는 것이 수천 편이다. 호음 당시에 재학(才學)이 많기로 일컬어지던 어숙권(魚叔權)ㆍ이붕상(李鵬翔)ㆍ임기(林芑)ㆍ노서린(盧瑞麟)ㆍ권응인(權應仁) 같은 선비들이 모두 호음의 문하에서 나와 그때에 울린 명성이 지금까지 전한다.
공은 휘가 사룡(士龍), 자가 운경(雲卿), 성이 정씨(鄭氏)이며, 호음(湖陰)은 그의 별호이다. 지금도 호음의 옛집이 의춘현(宜春縣) 정호(鼎湖) 가에 있다. 세조 때 명신 동래군(東萊君) 정난종(鄭蘭宗)의 손자요, 창원 도호(昌原都護) 정광보(鄭光輔)의 아들이며, 중종 때 정승 정광필(鄭光弼)의 종자(從子)이다. 홍치(弘治) 7년 갑인(1494, 성종25)에 출생하여 16세에 상사(上舍)에 오르고 19세에 박사과(博士科)에 뽑혔으며, 이어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높은 벼슬로 네 왕조(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를 섬기다가 선조 6년 계유(1573)에 이르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80세이다. 분묘는 양주(楊州)에 있다.
지금 3세손 정지문(鄭之問)이 곽박(郭璞)이순풍(李淳風)의 풍수설(風水說)에 통하여 그의 말대로 장사를 지내면, 자손들의 빈부(貧富)ㆍ궁달(窮達)ㆍ화복(禍福)ㆍ수요(壽夭)가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가 일찍이 영평(永平)의 용화길(龍化吉)에 장지를 잡아 두었다가 하루아침에 3대(代)의 묘소를 다 이장하니, 공의 묘소는 80여 년 만에 개장하게 된 것이라 한다.

[주D-001]곽박(郭璞) : 동진(東晉) 때 복술가(卜術家)로, 음양(陰陽)ㆍ오행(五行)ㆍ역산(曆算)에 능했다. 《晉書 卷72 郭璞列傳》
[주D-002]이순풍(李淳風) : 당(唐) 나라의 풍수가(風水家)로, 저서에 《법상서(法象書)》ㆍ《전장문물지(典章文物志)》ㆍ《기사지(己巳志)》가 있다. 《唐書 卷204 方枝》 《舊唐書 卷79 李淳風列傳》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寒竹堂涉筆下)
점필재(佔畢齋)가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다

점필재는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던 임진년(성종 2, 1471) 중추(仲秋)에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ㆍ매개(梅溪) 조위(曺偉)와 함께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였다. 이때 지은 유록(遊錄)이 있으므로 이제 간략히 옮겨 적는다.
14일(무인)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고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1리(里)쯤 가니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하였다. 그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인데 금대사(金臺寺)ㆍ홍련암(紅蓮菴)ㆍ백련암(白蓮菴) 등 여러 절들이 내려다 보인다.
선열암(先涅菴)ㆍ신열암(新涅菴)을 들러서 고열암(古涅菴)에 이르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편에 있다. 석굴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이곳에 살면서 세 사람의 승려와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돈오(頓悟)에 대해 의논했기 때문에 이를 따라 그대로 의논대라 부른 것이다. 나는 험한 곳을 걸었으므로 몹시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15일(기묘) 이른 아침에 걸어서 언덕 하나를 넘었다. 이는 아홉 고개 중 첫째 고개이다. 이런 고개 서너 개를 연거푸 넘으니 조용하고 아늑한 골짜기 하나가 나선다. 여기서 20리를 가면 의탄촌(義呑村)이다. 아홉 고개를 다 넘어 산등성이를 따라 몇 리 안 가서 다시 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청이당(淸伊堂)에 닿았다. 이 당은 판자로 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영랑재(永郞岾)까지는 길이 매우 가팔라서 해가 정오를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에 올랐다. 이곳에 이르니
청청천왕봉(天王峯)이 올려다보인다. 영랑(永郞)은 신라(新羅) 화랑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산수를 구경다니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다 해서 영랑점이라 부른다.
소소년대(少年臺)는 이 봉우리의 곁에 있는데 푸른 절벽이 만 길은 되어 보인다. 이 산의 동서 계곡에는 잡목(雜木)은 없고 모두 삼(杉)나무ㆍ회(檜)나무인데 잎은 말라 죽고 줄기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은 되었다. 산등성이에 있는 나무는 모두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와 둥치가 왼쪽으로 쏠려 굽었으며 흐트러진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해유령(蠏踰嶺)을 지났다. 길 옆에 선암(船巖)이란 바위가 있다. 중봉(中峯)에 오르니 겉이 흙으로 덮여 단정하고 중후하다.
성성모묘(聖母廟)에 이르렀다. 세 칸짜리 판자집이다. 소위 성모상(聖母像)은 석상(石像)인데 이마에 흠이 있다. 이는 태조께서 인월(引月) 싸움에서 승리하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왔다가 상(像)을 찍어 놓고 간 것을 후인이 다시 붙여 놓은 것이다. 성모는 석가(釋迦)의 생모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을 말한다. 일찍이 이승휴(李承休)가 지은《제왕운기(帝王韻記)》를 보니,
성모(聖母)가 선사(詵師)에게 명한다/聖母命詵師
한 구의 주에 '지금 있는 지리산 천왕(天王)은 고려 태조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이다.' 하였는데, 이는 고려 사람들이 선도(仙桃)와 성모(聖母)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인데, 승휴(承休)가 이를 사실로 믿고《제왕운기》에 쓴 것이다.
해가 저물자 음산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운무(雲霧)가 몰려들어 외관이 모두 젖었다. 사당 안에다 자리를 깔고 누우니 찬 기운이 뼛속까지 저려드는 듯하여 다시 솜옷을 껴입었다.
16일(경진) 먼저 종자(從者)들을 향적사(香積寺)로 보내어 음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매우 미끄러운 돌길로 몇 리쯤 가니 쇠사슬로 만든 길이 있는데 매우 위태로웠으므로 그냥 바위 구멍 사이로 빠져나와 겨우 향적사에 이르렀다.
절에는 중이 살지 않은 지 이미 2년째이다. 문 앞에 있는 반석(盤石)에 나와 앉아서 살천(薩川)이 구불구불 감돌아 여러 봉우리와 섬이 혹 제 모습을 다 드러내거나 반만 내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7일(신사) 새벽, 해가 떠오르느라고 놀빛이 눈부시다. 곧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지름길로 석문(石門)을 거쳐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갔다. 마침 갠 날씨여서 사방에 구름 한 점 없었다.
이 산맥은 북에서 뻗어내려 남원(南原)까지 이른다. 첫봉우리가 반야봉(般若峯)이고, 동으로 거의 2백 리를 뻗어 이 봉우리에 와서 다시 우뚝이 솟은 다음 북쪽으로 서리다가 끝난다.
끌리듯 둘러쳐진 성(城)은 함양성(咸陽城)이고 흰 무지개가 긋고 지나간 듯한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이며, 청라(靑蜾)가 촘촘히 서 있는 듯한 것은 남해(南海)ㆍ거제(巨濟)의 여러 섬이다. 산음(山陰)ㆍ단계(丹谿)ㆍ운봉(雲峯)ㆍ구례(求禮)ㆍ하동(河東)의 산은 모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북쪽에 있는 가까운 산으로는 안음(安陰)의 황석산(黃石山)ㆍ함양(咸陽)의 취암산(鷲岩山)이 있고, 먼 것으로는 함음(咸陰)의 덕유산(德裕山)ㆍ공주(公州)의 계룡산(鷄龍山)ㆍ금산(錦山)의 주우산(走牛山)ㆍ지례(智禮)의 수도산(修道山)ㆍ성주(星州)의 가야산(伽倻山)이 있다.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운 것에는 산음(山陰)의 황산(皇山), 삼가(三嘉)의 감악산(紺嶽山)이요, 먼 것으로는 대구의 팔공산(八公山), 안동(安東)의 청량산(淸涼山)이 있다. 동쪽에 있는 가까운 것에는 의령(宜寧)의 사굴산(闍崛山), 진주(晉州)의 집현산(集賢山)이 있고, 먼 것에는 현풍(玄風)의 비금산(毗琴山), 청도(淸島)의 운문산(雲門山), 양산(梁山)의 원적산(圓寂山)이 있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운 것에는 사천(泗川)의 와룡산(臥龍山)이 있고, 남쪽에 있는 것으로 가까운 것에는 하동(河東)의 병요산(甁要山), 광양(光陽)의 백운산(白雲山)이 있으며, 서남쪽에 있는 것으로 먼 것에는 흥양(興陽)의 팔전산(八顚山)이 있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운 것에는 운봉(雲峯)의 황산(荒山), 먼 것으로는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나주(羅州)의 금성산(錦城山), 고산(高山)의 위봉산(威鳳山), 전주(全州)의 무악산(毋岳山), 영암(靈岩)의 월출산(月出山)이 있으며, 서북쪽에 있는 것으로 먼 것에는 장수(長水)의 성수산(聖壽山)이 있다.
이런 여러 산이 혹은 작은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음식 그릇을 늘어 놓은 것 같기도 한데, 오직 동쪽의 팔공산(八公山)과 서쪽의 무등산(無等山)만이 다른 산에 비해 우뚝하다.
계립령(鷄立嶺) 이북은 푸른 기운이 하늘 가득하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에는 바다 기운이 하늘에 닿아 시력이 끝까지 미치지 못하여 더 분별할 수가 없다.
정오가 되어서야 석문(石門)을 지나 중산(中山)에 오르니 역시 흙 덮인 산이다. 이 고장 사람들이 엄천(嚴川)을 거쳐서 산정에 올라온 자는 북쪽 둘째 봉우리를 중봉(中峯)이라 하고 마천(馬川)쪽에서 올라온 자는 증봉(甑峯)을 첫째 봉우리라 하고 이 봉우리를 둘째 봉우리라 하므로 또한 중봉(中峯)이라 칭한다.
증봉을 거쳐 저여원(沮洳原)에 도착했다. 산등성이에 있는 저여원은 5~6리 가량 되게 평탄하고 넓으며 숲이 무성하고 주위에 물이 둘러 있어 농사를 지을 만하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에 올랐다. 높고 험하여 밑이 보이지 않으며 위에는 초목이 없다. 저 아래로 두원곶(荳原串)과 여수곶(麗水串), 섬진강(蟾津江)의 하류가 보인다.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은 청학사(靑鶴寺) 골짜기이고 동쪽은 쌍계사(雙溪寺) 골짜기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이 일찍이 이곳을 유람하였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잤다. 절의 북쪽에 가섭(迦葉)의 석상(石像)이 하나 있다. 세조(世祖) 때에는 항상 중사(中使 내관(內官)을 말한다)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가섭의 석상 이마에 흠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가 찍어 놓은 것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 바위 두 개가 우뚝이 솟아 있으니 바로 좌고대(坐高臺)이다. 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탱화(幀畫)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賛)에,
두타를 제일의로 함이/頭陀第一
이 바로 두수거니/是爲抖擻
외형도 이미 속세와 멀고/外已遠塵
내심도 이미 세속과 멀었어라/內已離垢
남 먼저 득도하고/得道居先
맨 뒤에 입멸(入滅)하니/入滅於後
설의 계산이/雪衣鷄山
천년토록 영원하리/千秋不朽
하였다. 그 곁에는 소전(小篆)체로 쓴 '청지(淸之)'란 낙관(落款)이 찍혀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호)의 그림이요 시요 글씨[三絶]이다.
직지사(直指寺)를 거쳐 내려왔다. 고개를 동으로 돌리니 천왕봉(天王峯)이 지척에 와 닿는다. 험한 곳을 다 내려와서 지팡이를 끌고 걸어오자니 골짜기 어귀에 야묘(野廟)가 있다.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말을 타고 실택리(實宅里)에 이르렀다. 등구재(登龜岾)를 넘어서 지름길로 군재(郡齋)에 돌아왔다.

[주D-001]태조(太祖)께서……승리하던 해 : 인월은 인월역(引月驛)을 가리키는데 이 역은 운봉(雲峯) 동쪽 16리 거리에 있다. 고려(高麗) 우왕(禑王) 6년(1380)에 왜구(倭寇)가 운봉(雲峯)을 불지르고 인월역에 주둔해 있는 것을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이두란(李豆蘭)이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둔 것을 말한다.《東史綱目 卷十六上 禑王六年·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九 雲峯縣 驛院》
[주D-002]몽산화상(蒙山和尙) : 원(元) 나라 말기의 고승이다. 그의 법어(法語)를 번역한《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 등이 전한다.
[주D-003]두타(頭陀) : 범어(梵語)로 두수(抖擻)·세완(洗浣)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번뇌의 티끌을 떨어 없애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청지(淸之) : 조선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자. 시문(詩文)에 능했다. 특히 그의 글씨는 당대 제일이었다.

[주D-001]천유(天遊) : 아무런 걸림이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로 노니는 것을 뜻하는 말로, 《장자》 외물(外物) 편에 “사람의 몸 안에는 텅 빈 공간이 있어 마음이 그 속에서 천리(天理)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닌다.” 하였다.
[주D-002]갑자기 …… 흐르오 : 제목의 원주(原註)에 보이듯이, 고인이 평소 귀가 먹어 집 밖을 나가지 않다가 이제 운명하여 시신(屍身)으로 널에 실려 밖을 나가니 슬프다는 것이다.
[주D-003]풍류(風流)가 …… 잃었도다 : 풍류스럽던 고인의 모습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고, 고을의 숙덕(宿德)이 있는 부로(父老) 한 사람을 잃었다는 것이다.
[주D-004]긴 대를 보랴 : 소식(蘇軾)의 〈정혜원해당(定惠院海棠)〉에 자신의 한가한 모습을 읊으면서 “여염집이건 절이건 묻지 않고, 지팡이 짚고 문을 두드려 긴 대를 보노라.[不問人家與僧舍 拄杖敲門看脩竹]” 하였다. 《古文眞寶 前集》
[주D-005]술 …… 이누나 : 도연명(陶淵明)이 두건을 벗어서 탁주를 걸렀다는 고사를 차용한 것으로, 이제 술 거를 일이 없어 두건에 먼지가 일겠다는 뜻이다

 

기재잡기 2(寄齋雜記二)
역대 조정의 옛 이야기 2[歷朝舊聞二]



중종

○ 평성(平城) 박원종(朴元宗)이 청성(靑城) 심순경(沈順經)과 더불어 교분이 매우 친밀하였고 정의가 간격이 없었으나, 큰 계획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적에 당해서도 오히려 감히 그 일의 단서를 발설하지 않았었는데, 평성이 청성에게 술취한 것을 틈타 종묘 사직의 위태로운 형편과 당시 정사의 난잡한 것을 말하여 그의 속을 떠보자 청성 또한 동감임을 표시하였다.
평성이 그제야 강개하여 울면서 그 누이 월산부인(月山夫人)이 죽을 때에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부탁이 있었음을 남김 없이 말하였고, 청성도 또한 그 가문의 화가 참혹하였던 일을 들어 대꾸한 다음 눈물을 거두고 의논을 결정하였다. 이때에 있어서는 비록 처자나 형제일지라도 거사를 알리지 않았는데, 거사하는 날 청성이 그 어머니에게,
“오늘은 여러 친구들과 교외에서 무예를 연습하고 활쏘기를 겨루려 하는데, 술을 마시고 얼큰한 기분에 가고 싶습니다.”
하니, 어머니가 술을 따라 주었다. 또 술을 마신 다음 꿇어 앉아 술 한 잔을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이것은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술잔입니다.”
하니, 그 어머니가 웃으면서 받았으나, 실은 그것이 영결하는 것임을 몰랐던 것이다. 그의 누님은 종실 □군(□君) 아무의 아내였는데, 그에게도 술잔을 드리고 떠나면서, 드디어 군기와 군장을 검열하여 평소에 예비해 두었던 것을 모두 가지고 갔는데, 해가 졌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집안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샐 무렵 일이 거의 실마리가 잡힌 뒤에야 그의 누님이 비로소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그의 남편과 함께 이불을 둘러쓴 채 서로 붙들고 울면서
“우리는 죄을 많이 지었으니, 장차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박정도 하지, 그 사람이 동기간으로 한 집안에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았으니.”
하였으니, 대개 종실로서 연산을 악한 데로 인도하여 요행을 얻은 사람인 것이다.
청성의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민망하게 여겨 바로 사람을 시켜 공에게 일러 두었는데, 공이 평성에게 간청하여 □군을 불러다가 일을 같이하였는데, 마침내 정국정훈(靖國正勳)에 참여하여 비단 화를 면했을 뿐만이 아니게 되었으니, 청성과 평성 두 분이 같이 지낸 교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 대장(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이 당초에 큰 계획을 의논하여 결정한 후에 이내 말하기를,
“아무 아무는 죽여야 한다.”
하였는데, 강혼(姜渾)의 이름이 두드러지게 나왔었다. 대개 그가 문장이 화려한 것으로 임금의 사랑을 받아 벼락같이 벼슬이 도승지에 올라갔고 통정대부에서 숭정대부가 되기까지 경질되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청의(請議)에 죄를 얻은 지가 오래였다.
거사하던 날 세 대장이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유순(柳洵)이 옛 정승이므로 불렀다. 문성이 드디어 달려가는데, 아직 삼경도 되지 못한 판에 길에서 벽제 소리가 들리므로 누구냐고 물었더니, 하인이 대답하기를, ‘도승지다.’고 하였으니, 필시 강혼이 시간을 잘못 알고 대궐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문성이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오늘은 너무 일러 대궐에 들어가는 시간이 아니요, 내가 가는 대로 공은 꼭 따라오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 못할 일이 있을 것이오.”
하였다. 강혼이 의아스럽게 여기면서 그의 뒤를 따라 남소문동 어귀에 당도하여 멀리 훈련원을 바라보니, 사람과 말들이 들끓고 등불이 휘황하였으나 오히려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문성이 말을 멈추면서 이르기를,
“오늘은 내 뒤를 따라 잠시도 떨어지지 마시오. 큰일이 닥쳐 왔소.”
하자, 강혼이 그제야 몹시 두려워하였고 말에서 내리자 문성에게 바짝 붙어 따라갔다.
세 대장이 문성을 보더니 일어나 재삼 자리를 사양하였고 좌정되자 평성이 눈을 부릅뜨면서 강혼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이 누구요?”
하니 문성이,
“강혼인데 이 늙은 사람이 데리고 왔소.”
하였다. 평성이 말하기를,
“전에 약속이 있는데 반드시 먼저 죽이기로 하였으니, 지금 남겨둘 수 없소.”
하니, 문성이 두려워 위축되면서 말이 없었다. 청천(菁川 유순정(柳順汀)의 봉호)이 문성의 안색을 살피며 급히 평성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어수선한 시기에 서기 할 사람이 없으니 잠시 맡아보게 했다가 뒤에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평성이 고함지르다가 그만두자, 강은 드디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붓을 잡아 이쪽 말 저쪽 말을 받아 쓰되, 기민하게 하므로 드디어 모두들 잘한다고 칭찬하였고 마침내 책훈되어 진천군(晉川君)이 되었다.
이때부터 문성을 부형과 같이 섬기어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찾아가 뵈었으며, 새로운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갖다 드렸으며, 안팎 종들에게까지도 모두 마음을 기울여 후하게 해주었다. 공이 죽은 뒤에는 그 부인 섬기기를 또한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으며, 그 상사 때에는 더욱 정성들여 일을 치렀다.
이것으로 그 위인을 생각해 보면 재주가 넘치고 아첨으로 임금의 사랑을 받은 것이니, 아마도 송조(宋朝)의 무리일 것이다.
판중추(判中樞) 구수영(具壽永)이 기괴한 기능과 교묘한 눈가림으로 임금을 종용하여 악을 유도하되 못할 것이 없이 하였으므로 조야(朝野) 옛 사람들이 흘겨보았었다.
세 대장이 거사하던 날, 광화문 밖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통곡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한 건장한 종이 말하기를,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각기 천명이 있는 것인데,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까? 급히 술과 음식을 준비하십시오. 내가 대감을 모시고 가서 요행히 모면할 데를 구하겠습니다.”
하므로, 곧 좋은 안주와 술을 잔뜩 마련하고 말과 종들을 대강 평일과 같이 하여 앞뒤에서 호위하고 나가 진을 치고 있는 군대 앞에 이르렀는데, 종이 초헌(軺軒)의 안석을 들어내어 세 대장이 앉아 있는 건너편에 앉았으나 세 대장 앞에 여러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으므로 구 수영이 와 앉아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가 바로 9월 초 이튿날로서 세 대장이 밤새도록 한데 앉았고 속이 비어 한편으로는 소름이 끼치고 한편으로는 시장하였으나 감히 말을 못하는 판이었다. 이 때에 그 종이 찬합을 가져다 차례차례 바치고 또 큰 술잔을 번갈아 올렸다. 여러 분들이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묻지도 않고 손에 닿는대로 마셔 너댓 번이나 먹고 나서야 비로소,
“이것이 뉘 집 물건이냐?”
고 물으므로, 그 종이 구 수영을 가리키면서,
“구 대감께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였다. 세 대장이 서로 돌아보면서 깜짝 놀라는 찰라, 그 종이,
“오늘의 모임에는 이것이 큰 공(功)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여러분들께서 속이 비어 어떻게 큰 일을 끝내실 것입니까?”
하였는데,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이 심히 옳다고 하였다. 구 수영이 이로 인하여 세 대장들과 말을 붙이게 되고 점차로 기회를 노려 계책을 마련하는 일이 있어, 드디어 책훈(策勳)되어 군(君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이 되었다.
구수영의 죄악이 임사홍(任士洪)보다도 더 한데, 비단 죽음을 모면했을 뿐아니라 도리어 전화위복하였으니, 그 당시 세 대장의 처사가 소홀하였던 것을 이것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세 대장이 의논하기를,
“유자광은 지혜가 넉넉하고 꾀가 많아서 창졸간에 쓰기에는 적당하나 헤아릴 수 없이 간사하고 교활하므로 또한 뜻밖의 변이 없을 수 없으니,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 것인가?”
하니, 모두들,
“역사(力士)를 보내어 불러오되, 만약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으면 죽여버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드디어 불렀더니, 과연 즉시 바깥 문에 나와 바로 말에 안장을 갖추어 타고 와서 첫마디에 말하기를,
“오늘의 종묘사직에 대한 큰 계책이 누구에게 있소.”
하였다. 세 대장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말할 것도 없이 대군(大君 진성대군(晉城大君))에게 있소.”
하자, 형조 정랑(刑曺正郞) 장정(張珽)이 칼을 안고 앞으로 다가서면서,
“대군의 저택이 경비가 극히 허술한데, 어찌 호위하는 조치가 없소.”
하므로, 세 대장이 공수(拱手)하고 말하기를,
“우리들의 실수였소.”
하고, 바로 심순경(沈順經)을 선발하여 위사(衞士)들을 거느리고 가서 호위하게 하였다.
장정이 뒤에 일등으로 책훈(策勳)되어 하성군(河城君)이 되었는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세 대장이 광화문 밖에 진을 치고 사복사(司僕寺)에 저장된 마초를 불피었는데 불빛이 대낮같아 궐안이 진동되므로 입직했던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이 모두 뿔뿔이 달아나 숨는데 어떤 사람은 수채구멍으로 빠져 나가기도 하고 혹은 대궐 담을 넘어서 도망치기도 하여 연산군이 당황하여 여러 관원을 불러 들였으나 한 사람도 응하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활과 살을 절취하여 가지고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승지 윤장(尹璋)과 이우(李堣)와 조계형(曺繼衡)이 대궐 담 위에서 군중(軍中)에게 외치기를,
“오늘 추대한 분이 누구냐?”
고 하니, 곧 응하기를,
“진성대군(晉城大君)이신데, 벌써 왕대비의 허락을 받았소.”
하자, 세 사람이 그제서야 밧줄을 타고 내려와 달려오므로 사람들이 체통을 유지하였다고 하였다.
그윽이 생각건대, 연산이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미친듯이 난폭한 짓을 한 지가 10년이 넘어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된 것을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할 것없이 모두 알고 있었는데, 후설(喉舌)과 같이 가깝고 밀접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일찍이 한 가지 일도 바로 잡는 말이 없다가, 변을 알게 되자 마자 처신할 의리를 생각지 않고 천명이 돌아간 것을 엿보아 비로소 궐문에서 나올 생각을 하였으니, 비록 활과 살을 훔치고 수채구멍으로 나온 사람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마는 역시 한 때 화를 모면하려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니, 어찌 체통을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때 세 사람이 모두 논핵당하여 파면되었다.
반정한 뒤에 귀양살이가 있던 여러 신하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몹시 기뻐서 실소(失笑)하기도 하고, 혹은 반색하면서 서로 축하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까지 하였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도 아산(牙山) 배소(配所)에서 그 소문을 듣고 한숨을 내어 쉬며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고, 또한 고기를 먹지 않으며 말하기를,
“옛 임금의 생사를 몰라 감히 먹을 수 없다.”
하였으니, 올바르게 처신하였다 하겠도다.
평성(平城)이 이미 큰 공을 성취시켜 바로 명상을 하게 되었는데, 중종이 특별히 후하게 상을 내리고 훌륭한 저택을 골라주어 살게 하고 또한 흥청(興淸) 3백을 내려 주어 장획(藏獲)과 보화가 풍족하게 되니, 의복, 거마의 모셔 받듦이 분수에 넘친 것이 많았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예조 좌랑(禮曺佐郞)으로서 공사(公事)를 가지고 찾아가 통자하였더니, 즉시 부르므로 대문을 3개나 지나서 들어가 대청 앞에 당도하니, 돌 다듬어 섬을 쌓았고 뜰에는 반송(盤松 가지가 옆으로 퍼진 키가 작은 소나무) 두어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볼 뿐이었는데, 붉은 난간 푸른 창문 안에는 비단 자리가 가득히 깔려 있는데 화려하여 눈이 부시었다. 한 대문을 더 들어서니, 날아갈 듯한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붉은 발이 땅에 닿도록 드리웠고, 말소리가 은은하여 마치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누각 동쪽에서 한 여인이 머리에는 큰머리 장식을 하고 몸에는 노란 장삼(長衫)을 입고 붉은 치마를 땅에 끌면서 나와서 상공(相公)이라고 불렀다. 호음(湖陰)이 허리를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그 여인 앞에 이르니, 또 한 대문이 조그마한 당(堂) 밖에 있었는데,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드디어 그 문을 들어서니, 평성(平城)이 연못 동쪽 평상 위에 앉았는데 수놓은 베개와 화려한 자리에 두 계집종이 파리채를 들고 좌우에 서 있었으며, 당 위 발안에 앉아 있는 시녀가 또한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평성이 일어서서 맞으면서 호음에게 앉으라고 하면서 손을 들어 서쪽 평상 위에 앉혔다. 호음이 절한 다음 꿇어 앉으면서,
“이 공사(公事)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였으니, 대개 예문(禮文)에 관한 일이었다. 공이 그 공사를 받아서 자리 오른쪽에 놓으면서,
“내가 무부(武夫)로서 무슨 의리를 아는 것이 있겠나. 종묘사직의 덕으로 때를 만나 일어났다가 이런 과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를 뿐인데, 어찌 감히 조정의 공사에 참여하여 의논 할 수 있겠나? 본조(本曺)의 판서가 있는데, 어찌 잘 처리하지 않겠나? 좌랑(佐郞)의 젊은 풍채를 보니, 앞길이 지극히 원대하겠네. 이 늙은이의 술이나 마셔주게나.”
하고, 곧 술을 올리라고 외치니, 여러 시녀들이 일제히 꿇어앉아 대답하자, 벌써 네 시녀가 술상을 받들고 나왔는데, 진수성찬이 질펀하여 어디서부터 젓가락을 대야 할지 몰랐다.
여자 악공 수십 명이 각기 관현악기를 들고 못 위에 둘러앉아 풍류를 연주하는데 맑은 소리와 묘한 가락이 흥겹게 귀를 울렸다. 공이 자주 잔을 들어 권하면서,
“무부라고 싫어하지 말게.”
하므로, 호음이 일생 동안 크게 경계하는 것이면서도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 취하게 마시고 일어서니, 공이 여러 시녀를 시켜 문 밖까지 부축하여 주게 하였다.
호음도 많은 저택을 두었고 자기 몸 봉양하기를 극히 사치스럽게 한 것이 대개 평성을 흠모했던 것이다. 말년에 가세가 대성하였는데도,
“어찌 그의 만분의 일을 따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언형(曺彦亨)이 단천군수(端川君守)였고 강혼(姜渾)은 함경감사(咸鏡監司)였는데, 조와 강이 소시적부터 죽마고우(竹馬故友)로서 성장하여서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조의 성품이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해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어울리지 않아 전랑(銓郞) 벼슬을 거쳐 집의(執義) 벼슬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미끄러지기도 하고 여러 번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찍이 강이 연산조에 있으면서 하는 짓을 보고는 분개하고 미워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는데, 정묘(丁卯 1507, 중종 2) 무진년 사이에 단천(端川)에 있으면서 강이 감사로 순시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길을 떠날 차비를 하고, 집안사람들에게 일러 막걸리 한 통을 준비하게 하였다. 아전이 와서 말하기를,
“감사가 근방에 당도하니 예의가 당연히 조심스럽게 맞이해야 합니다.”
하자, 아프다고 핑계하여 놓고, 날이 어둡자 감색(紺色) 직령(直領)에 커다란 신을 끌며 종 하나를 시켜 술통을 메고 바로 상방(上房 그 관아의 우두머리가 있는 방)으로 찾아가 밖에서 외치기를,
“혼(渾)이 어디 있는가.”
하였다. 강이 그 소리를 듣고 급히 일어나 문을 열고 맞으면서,
“나 여기 있네, 나 여기 있네.”
하여, 매우 반가운 기색을 하였다. 조가 앉으며 미처 인사도 나누지 않고 먼저,
“날씨가 찬데 자네 한 잔 하겠나?”
하고는, 손수 큰 잔을 들어 마시는데 안주가 없었고, 강도 또한 제 손으로 부어 마시는데 세 순배가 지나자, 조가,
“자네가 지난날 한 짓은 개돼지만도 못한데 누가 그 먹다 남은 것을 먹겠는가. 자네가 젊었을 적에는 총명하고 민첩해서 사귈 만하다 했었는데 어찌 조그마한 기능을 부려 처신을 형편없게 함이 이렇게 심할 줄 알았는가?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만 같지 못할 것이네, 내가 글을 보내어 절교하고 싶은 지 오래었지만 옛 친구로서 정의가 아직도 연연(戀戀)하고 또한 한 번 만나 크게 꾸짖은 뒤에 절교하려고 하던 차인데, 이제 서로 만나 보았으니, 나는 내일이면 떠나갈 것일세.”
하고는, 다시 한 잔 더 하자면서 연거푸 석 잔을 주었다. 강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시종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조가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떠나갔다가 뒤에 판교(判校) 벼슬까지 하고 돌아갔다. 이이가 곧 남명(南冥)선생의 아버지이니, 그의 의기가 과격하게 드날리던 품이 대개 타고난 데가 있었던 것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젊었을 때 생원(生員)ㆍ진사(進仕)ㆍ회시(會試)에 모두 장원을 차지하였었는데, 방을 내걸 때가 되어서 한 사람이 두 가지 장원을 할 수 없다 하여 진사에는 2등을 시키므로 이것을 평생 한스럽게 여겼었다.
공이 시관(試官)이 되자 김구(金絿)가 생원ㆍ진사에 모두 장원을 하였는데, 여러 시관들이 또 한 사람이 두 가지 장원이 될 수 있다고 하므로, 공이 분연(奮然)히 일어나,
“왕희지(王羲之)의 필법과 한퇴지(韓退之)의 문장으로 무슨 불가할 것이 있느냐.”
고 하여, 드디어 두 가지 장원이 되었다. 김 구의 문장도 이미 좋았거니와 초서(草書)는 당대가 추앙하여 제일이라 일컬었었다.
판서 한형윤(韓亨允)은 서평(西平) 계희(繼禧)의 증손자인데 헌출한 인품이 풍도가 있었다. 종족(宗族)들에게 돈독하여 널리 부모 없는 사람과 홀로된 이들에게 온정을 베풀어 그 혼례와 장사를 도와주었고, 여러 집안 자제들이 서당에 다니게 되면 멀고 가까움을 논하지 않고 매양 퇴근할 때면 반드시 몸소 나아가 글 짓는 것과 강독(講讀)하는 것을 보살피되 지성으로 하여 비록 바람 불고 눈 내릴 적에도 그만두지 아니하였으며, 종이와 붓도 많이 갖다 주어 장려하고 권면하여 기어코 성취하는 바가 있게 하였다. 그런데 전부터 농담을 몹시 좋아하여 그다지 검속(檢束)하지 않는 편이었다.
기묘(1519, 중종 14) 무렵에 항간에 「소학지(小學之)」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공이 여러 사람들이 모인 데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요즈음에 「세 가지 지〔三之〕」라는 말이 있는데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
하였다. 모두들 못 들었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소학지(小學之)ㆍ보당지(寶唐之)ㆍ좌장지(佐藏之), 이것이 즉 「세 가지 지」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만히 있기도 하였다. 속담에 여자의 음부를 「보당지(寶唐之)」라 하고, 남자의 국부를 「좌장지(佐藏之)」라 하니, 대개 당시의 소학의 도리〔小學之道〕와 향약의 가르침〔鄕約之道〕을 조롱한 것이다.
또한 정민공(貞愍公) 안 당(安塘)과 서로 좋아하였는데 안공의 여러 아들과 조카들이 모두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크게 경축연을 베풀었다. 공이 그 자리에서 정민공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어찌 성사(盛事)가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안(安)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이런 까닭으로 선류(善類)들이 크게 미워하여, “한 아무개는 연산조 때에 일찍이 부모의 3년상을 단축하여 1년으로 하였고 공공연히 고기를 먹었다.”
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며, 형조 판서가 되자 행실이 없다 하여 논박(論駁)하려 하므로 누군가가 해명하여 중지시켰었다.
공의 어머니는 공이 낳은 지 돌도 못 되어 돌아갔고 공의 아버지 부정(副正)은 병자(1518, 중종 11)에 세상을 떠났는데, 계모는 아직 탈없이 집에 살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스스로 취한 불행이라고 하였다.
무인년(1518, 중종 13) 무렵에 서당(書堂) 관원들의 큰 모임이 있었는데, 선배들도 많이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파한 뒤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과 유 운(柳雲)이 함께 자는데, 밤중에 유 운이 술이 깨지 않아 벌거벗은 채 일어나 정암을 밟고 넘어가 난간 머리에서 오줌을 누고, 돌아올 때에도 또한 그렇게 하자 정암이,
“종룡(從龍 유운의 자) 종룡, 이게 무슨 꼴인가.”
하니, 유운이
“이것이 좋은 걸세. 자네 같은 소학의 도리〔小學之道〕는 본받지 않으려 하네.”
하므로, 정암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풍채와 기골을 아껴 다만 검속(檢束)하기를 권할 뿐이었다.
정암 선생이 대사헌으로서 아문에 나가는데, 고형산(高荊山)이 호조 판서로서 앞에 서서 공이 뒤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느릿느릿 하였다. 이것은 대개 그의 거드럼을 보인 것이다. 선생이, 그를 모시고 가던 아전을 잡아 가두었다가 하루만에 놓아 주므로 사람들이 그 온당한지 않은지를 묻자, 선생이,
“그의 행동은 사대부가 길을 양보하는 미풍을 크게 잃어버린 것이니 참으로 잘못이다. 백부(栢府 사헌부)가 비록 풍속을 단속하는 것이나 그도 대신이니, 내가 감히 단속할 사람이 아니다. 그 아전을 가둔 것이 지나친 것 같기에 곧 석방한 것이다.”
하였는데, 고형산이 그 말을 듣고 지극히 옳게 여겼었다.
충암(冲庵) 김정(金淨)이 형조 판서로서 일찍이 승지 윤자임(尹自任)을 방문했었는데, 혹은 부제학 김구(金絿)라고도 하였음 그의 장인이 나와서 읍하고 말하기를,
“내 사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잠깐 들어오라.”
하고, 바로 맞아 올렸다. 앉은 다음에 그 사람의 이야기가 형조 공사(公事)에 언급하여 무슨 청탁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으므로 공이 바로 정색하고 한동안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는데 윤 자임이 돌아오자 그 사람이 사과하고 들어가 평생토록 그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공은 진실로 사사로운 것으로써 관계하지 않는 것 뿐인데, 그도 또한 조정의 관원이면서 이토록 공을 몰라 보았을까? 낭패를 당해 마땅하도다.
어느 날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이 나에게 말하기를,
“공은 심청천(沈聽天 심수경(沈守慶)) 집안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기묘년의 변 때 지정(止亭 남곤(南袞))과 여러 사람들이 서문(경복궁의 서문 연추문)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입직한 승지들이 간의대(簡儀臺 기상대)를 쳐다 보느라고 그것을 미처 몰랐던 것인데, 훗날 사람들이 그 종적을 찾아 내려고 하여 신무문(神武門 경복궁 북문)으로 들어 왔다고 하였던 것이라.”
고 하였다. 청천(聽天)은 나의 아버지 친구로서 평소에 존경하여 사모하던 분이나 이 일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젊었을 적에 정존재(靜存齋) 참의 이담(李湛)에게서 직접 들었는데,
“내가 태학(太學)에 있을 때, 지정(止亭)이 죽은 지가 얼마 안 된 판인데, 심정(沈貞)의 제문(祭文)을 베껴온 사람이 있었다. 그 속에 북문(신무문)으로 들어간 일은 우리 두 사람(남곤ㆍ심정)이 함께 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심정의 그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역력하게 남아 있으니 비록 효성스럽고, 인자한 자손일지라도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 당시에 있어서는 자신이 그것을 공으로 여겼는데, 자손이 감추고자 한들 되겠는가.”
하였고, 나도 말하기를,
“《승정원일기》에도 모두 ‘신무문으로 들어 갔다’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이오.”
하였더니, 오성이 말하기를,
“자손들이 한 말은 참으로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만약 서문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면 그 일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와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은 금석같이 굳은 교분이 있는 사이였다. 문익공이 등대(登對)하였는데 중종이,
“경에게 친구가 있느냐?”
물으므로 대답하기를,
“신은 친구가 없고 오직 신용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그 후에 문경공이 입대하였는데, 중종이 또 묻자,
“정광필이 신의 친구입니다.”
하니, 상감께서,
“경 두 사람은 ‘지기지우(知己之友)’라고 할 만하도다.”
하였었다.
기묘년의 변 때는 문경공이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사람들이,
“문경공이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반드시 가라앉혀 변이 없게 했을 것이다.”
하였고, 문익공도 또한 그가 일찍 죽어 나 혼자 이 변을 당하게 하였다고 한탄하였다.
문경공이 천품이 호탕하고 뛰어나 탁월한 큰 절개가 있었으며, 성격이 술을 좋아하여 때로는 늙은 계집종을 불러 서로 큰 잔을 기울여 취하여 쓰러져야 그만두기도 하였다. 일찍이 국화 8분(盆)을 길렀는데, 한 가을에 활짝 피므로 대청 가운데 들여 놓으니, 높이가 대들보에 닿았다. 공이 그 향기를 사랑하여 끊임 없이 완상하였다. 하루는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좋은 손님이 여덟 분 올 것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라.”
하였는데, 해가 저물어도 적적하게 손님이 오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여쭙기를,
“벌써 술상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자, 공이
“조금만 기다려라.”
하였다. 둥근 달이 떠 빛이 대청 안으로 들어와 꽃빛은 난만하고 달빛은 명랑하자 공이 그제야 술을 내오라 하며 8개의 국화분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나의 좋은 손님들이다.”
하고는, 각각 그 앞에 좋은 안주를 차려 놓고 말하기를,
“내가 은도배(銀桃杯)에 술을 따르리라.”
하고 각각 두 잔씩을 따라 주고 파하였는데, 공도 또한 취하였다.
○ 판서 고형산(高荊山)이 배가 크고 불룩해서 음식을 두 사람분을 먹었다. 사람들이 혹시 음식을 대접하면 좋고 나쁘고,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아 입이 놀 때가 없었으며, 주량은 더욱 한이 없었다. 호조에 있을 때인데, 하루는 아전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나의 아는 사람이 지방관으로 부임하는데, 내가 모화관(慕華館)에 나가서 전송할 터이니, 장막을 치며 술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라.”
하였다.
이튿날 조반이 끝난 뒤에 가마를 재촉하여 나가보니 과연 관문(館門) 밖에 장막을 치고 그 옆에 술 3동이와 안주 상자를 상 위에 벌려 놓았다. 공이 앉자 한 아전이 바삐 와서 고하기를,
“소인이 대궐 문에서 보니, 단지 대포만호(大浦萬戶)가 하직하는데 동대문을 거쳐서 나갔을 뿐입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가 내 옛 친구로서 일찍 약속이 있었는데 어찌 속였을까?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는,
“밥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목이 자못 마르니, 시험삼아 한 대접 마시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안주 상자를 열어 두어 젓가락 들고보니, 곧 그 절반이 없어졌고 연거푸 10여 잔을 마시니 한 동이가 다 비었다. 공이 말하기를,
“녹사(錄事)도 일찍 출근하여 필시 배가 고플 것이니, 한 잔을 권해야겠다.”
하고, 또,
“서리와 하인들도 여러 시간 분주히 뛰어다녔으니, 또한 마셔야 할 것이다.”
하고는, 공이 반드시 대작을 하였다. 아직 한 동이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는 공이 또한,
“어찌 주인에게 권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여, 관문의 첫째 기둥에서부터 잔을 들어 권하여 마치 대작하는 사람이 있는 것같이 하여 세 동이를 다 비우고 나서야 얼큰히 취하여 돌아갔다.
나는 생각건대 문경공의 행동은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데서 출발한 것으로 꽃을 보고 흥이 발동한 것이니, 그 기상이 진실로 치켜세울 만하나, 고형산은 주량을 채우려는데 지나지 않은 것이니, 어찌 술이나 마시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공유물과 사유물은 구분이 다른 것이니, 문경공은 호걸스럽고 고공은 거칠다 하겠도다.
○ 내가 일찍이 기묘년 사건의 당시 제현 정암(靜庵) 선생 이하 분들의 공사(供辭)를 보았는데, 불과 두어 마디의 말로서 20여 자뿐이었다.
“신이 세상에 없는 대우를 받기로 배운 것을 전개시켜 기필코 당우(唐虞)의 태평시대와 같은 정치를 이루어 보려고 하였을 뿐, 별로 괴이하고 과격하게 세상을 현혹시켜 어지럽게 한 일은 없습니다……”
하였을 뿐이었으며, 귀양가던 날 중종이 또한 승지를 보내어 금부 문밖에서 유시를 전달하였는데,
“너희들의 이번에 한 일이 그 마음이 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괴이하고 과격함이 버릇이 되어 인심을 현혹시켜 어지럽혔으니, 여러 재신들의 아룀이 또한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느냐?”
하였다. 아아! 제현들의 공사나 임금의 유시가 하늘과 땅, 해와 달이 함께 드리우고 함께 임하듯 하여 천년 후에 있어서도 진실로 남은 유감이 없게 되었건마는 여러 간신들의 여러 가지 음모가 엎치락 뒤치락 사건을 날조하여 끝내 문드러 없애 버리고야 말았으니 통탄스럽도다.
○ 의정부의 종 정막개(鄭莫介)는 간사하고 교묘한 말재주로 박승문(朴承文)ㆍ신윤무(辛尹武)를 고해 바치고 당상관까지 되었었다. 충정공(忠貞公) 권벌(權橃)이 지평으로 있으면서 단독으로 그를 죽여야 할 죄상을 임금께 아뢰었는데, 비록 임금의 윤허를 받지는 못하였으나 이로부터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막개를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사람 축에 들지 못하였다. 그의 집이 사복시 냇가에 있었는데, 붉은 띠를 띤 조복(朝服)차림으로 일하고 아침 저녁에 시장 거리에 나서면 동네 아이들이 곳곳에서 떼를 지어 기왓조각을 던져 쫓으면서 큰 소리로,
“고변한 정막개야, 붉은 띠가 가소롭구나.”
하니, 막개가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쫓기어 돌아 갔었다. 아이들이 항시 그러하였고, 사람들도 또한 침뱉아 욕하였는데, 마침내 굶어 죽었다.
○ 송당(松堂) 박 선생이 일찍이 김해 부사(金海府使)일 때에 동헌에 있다가, 동쪽 이웃 집에서 나는 계집의 울음 소리를 듣고 급히 형리를 불러 그 계집을 잡아 오게 하였다. 잡아 오자, 공이 묻기를,
“네 어찌하여 우느냐?”
대답하기를,
“제 남편이 아무 병도 없는데 갑자기 죽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재차 묻자, 또한 말하기를,
“우리 부부가 사이좋게 살아온 것은 이웃이 모두 알고 있는 일입니다.”
하였고, 뜰 아래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그렇습니다. 천만 번이라도 다른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사람을 시켜 그 계집의 남편 시체를 들고 오라 하여 안팎, 위아래를 이리저리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여인이 가슴을 치고 땅을 구르면서 통곡하기를,
“하늘이나 내 속을 알지, 사또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의심하십니까.”
하니, 하인들이 속으로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공이 힘센 군교(軍校)를 시켜 그 시체를 반듯이 눕히고 가슴에서 아랫배까지 손에 힘을 주어 누르게 하였더니, 과연 배꼽 속에서 크기가 가운데 손가락 만한 대꼬챙이가 튀어 나왔다. 공은 곧 그 계집을 결박시키면서,
“내 네가 간통하는 자가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니 빨리 말하라.”
하자, 드디어 굴복하여 말하기를,
“아무 동네의 아무개와 동거하기를 약속하고 자는 틈을 타 죽였습니다.”
하였다. 군교를 급히 보내어 그 정부를 잡아 왔는데 그 말이 부합되므로 법대로 조처하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처음에 그 울음소리를 들으니 슬퍼서 우는 소리가 아니기에 잡아 왔으며, 시체를 검사할 때 겉으로는 가슴을 치며 울지마는 실상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기 때문에 알았다.”
고 하였다.
하루는 들새가 동원 뜰 안에서 놀란 소리로 세 번 울고 남쪽을 향하여 사라졌었는데 공이 급히 가족들을 불러 행장을 꾸리도록 하였다. 짐을 미처 꾸리기도 전에 금오랑(今吾郞 금부도사)이 들이닥쳐 공이 반역을 모의하였다 하여 잡아 갔다. 옥에 이르러 심문을 받아 뼈마디가 다 부서졌는데 공이,
“누가 고발한 것이냐?”
고 외치자, 심문하는 관원이,
“아무개가 고발한 것이다.”
고 하였다. 또 외치기를,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과 원한 관계는 경주 부윤(慶州府尹) 유인숙(柳仁淑)이 나보다 더하니, 그 유인숙이 잡힌다면 나는 살아날 수 있다.”
하였다. 중종이 친히 국문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무슨 까닭이냐? 고 묻자, 공이 아뢰기를,
“그 사람이 문서를 위조하여 남의 논밭을 뺏으려고 김해(金海)에서 소송하다가 사리가 막혀 쫓겨났습니다. 경주 부윤이 그 간사하고 교활한 것에 노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여 형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원한이 신보다 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유인숙에게 묻기를,
“너는 아무개를 아느냐? 너는 아무개의 고발로 이렇게 된 것이다.”
하자, 유가 비로소 그 경위를 알아차리고, 대답이 공의 진술과 같으므로 그 사람을 국문하니, 그가 솔직히 자복하여 도리어 죄를 받게 되었다.
공의 학문이 조예가 정밀한 경지에 이르러 《주역》이치에 깊었고 또한 남의 말과 기색을 잘 살폈으며, 천문ㆍ지리ㆍ성명(性命)ㆍ산수(算數)를 달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형을 받은 뒤로는 의학 서적을 널리 보아《경험방(經驗方)》ㆍ《활인신방(活人新方)》등의 책을 저술하여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중종 때에 어떤 사람이, ‘동몽교관(童蒙敎官) 아무개가 그 제자들을 거느리고 장차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한다.’고 고변하자 명을 내려 모두 잡았는데, 겨우 갓쓸 만한 사람이 수십여 명이요, 15~16세된 사람이 또 수십명이요, 12~13세된 자가 60~70명이요, 10세 이상이 또한 수십명이었다. 금부에 있는 수갑, 차꼬, 쇠사슬 등이 반 이상 모자라므로 모두 새끼로 목을 얽어서 종루(鐘樓) 아래에 앉혀 놓았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당시 나이가 열 살이었는데, 같이 공부하는 여러 아이들을 따라 나간 지 하루가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부모들이 찾아보니 역시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문익공(文翼公)이 아뢰기를,
“신의 손자 옥수(玉壽)곧 임당(林塘)이다 가 열 살인데, 역시 죄수들 중에 끼어 있기에 감히 와서 죄를 기다립니다. 다만 이들은 모두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니, 청컨대 이 옥사를 살펴 처리하소서.”
하였다. 상감께서 추관을 시켜 조사하였더니, 여러 어린 아이들이 남산 위에서 옷을 벗어 깃발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꺾어 창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한 것이요, 다른 아무 단서가 없으므로 고변한 자를 도리어 죄주었다.
노영손(盧永孫)ㆍ정막개(鄭莫介) 이외에, 유중영(柳重榮) 이하가 고변하다가 도리어 죄를 받은 자들이 잇달아 나오는데도 오히려 시끄럽게 그치지 않으니, 그 심사를 과연 헤아릴 수 없다.
○ 중종이 경연에 임할 적에는 반드시 세자를 임금 자리 동쪽에 나와 앉게 하였는데, 하루는 경연관의 강론이 끝나고 막 글뜻을 논할 때인데 임금이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으며, 그 뜻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물었으나 좌우가 모두 잠잠하고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자를 돌아보며, ‘세자는 아느냐’고 말하자, 세자가 일어서서, ‘어느 책에서 나온 것인데 그 뜻은 이러이러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좌우 신하들이 모두 경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상감께서도 재삼 돌아보며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넘쳐 흘렀다. 이 당시의 거룩한 일이야말로 제왕가(帝王家)로서 천고에도 없는 일이었으며, 우리 나라 종묘 사직의 경사로서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일이었다.
○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이 갑자년(1504, 연산군10) 봄 강경과를 볼 때에 점장이에게 묻기를,
“금년에 내가 장원이 되겠는가?”
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장원을 어찌 감히 바라겠소. 병인년에나 급제하겠소.”
하였다. 그는 강(講)에 나아가 점수 20분을 얻고, 아직 남은 경(經)이 있었다. 급히 점장이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이미 강에 합격했으니, 네 말이 망령된 것이다.”
하자, 점장이가 한참 동안 있다가,
“비단 급제를 못할 뿐 아니라 큰 액운이 당장 올 것이니 조심하시오.”
하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를 죄인의 제자라고 하여 하옥시켰다 귀양 보냈는데, 중종이 반정하자 바로 전시를 보게 하였으니, 점을 잘 친다고 하겠다.
○ 절효선생(節孝先生) 성수종(成守琮)은 충숙공(忠肅公) 세순(世純)의 아들이다. 일찍이 기묘년의 가을 과거를 보았는데, 정암(靜庵)이 대사헌으로서 시관에 임하여 있었는데 그 시권(試券)을 보고 병과에 합격시켰다.
그 뒤에 남곤이, ‘이는 정암이 사사로운 청탁으로 합격시켰을 뿐더러, 그 대책문도 문리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그 이름을 삭제해 버렸다. 그는 드디어 그의 형 청송 선생(聽松先生) 수침(守琛)과 함께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며, 평생 다시는 과거보러 가지 않다가 일찍 죽으니, 사람들이 절효 선생이라고 불렀다. 후에 복과를 청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공의 어머니가 듣고서 말리기를,
“설령 복과가 된다 하더라도 땅속에 있는 내 아들의 넋이 반드시 부끄러워 할 것이니 그러지 말라.”
하였고, 모재 선생(慕齋先生)이 그 묘비문을 지었다. 세간에는 그가 파방(罷榜)된 뒤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한화(閑話)속에 서술해 놓은 사람까지 있으니, 그 견문이 고루하여 진실로 한번 웃을 만한 것도 되지 않는 것으로,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 옛날부터 소인이 옳은 사람들을 해칠 적에는 비밀리에 정탐하여 먼저 필승의 계획을 세우는 법이다. 그러므로 못된 책략을 다 부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 조부(祖父 박소(朴紹))는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자 사간으로서 먼저 그 안로의 칼날에 걸렸다. 뭇 소인들은 먼저 사람을 시켜 자기와 마음이 다른 사람의 집에 숨어 있다가 그 어디어디를 출입하는 것과 어떤 사람이 왕래하여 서로 통하는가를 엿보게 하였는데, 우리 할아버지와 전한(典翰) 조종경(趙宗經)이 한꺼번에 탄핵을 받았다.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밀양 부사로 있다가 대신 사간이 되어 부름을 받고 서울에 도착하던 날, 먼저 우리 할아버지를 방문한 것을 정탐하던 자가 몰래 알리어, 회재도 갑자기 탄핵을 받았다. 우리 집에서 주인으로 섬기던 사람은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이었는데, 한동네였고 또한 일찍부터 친척의 분의가 두터운 사람이었다.
김안로가 귀양갔다가 풍덕(豐德)으로 가까이 옮겨지자 바야흐로 다시 쓰이기를 도모하는데 음모와 비밀 계획이 못할 짓이 없었다. 이에 대사간 이빈(李蘋)이 동궁보호를 구실로 할 것을 교사하여 주자 기꺼이 좋은 계책이라고 하고 그의 아들 연성위(延城尉) 희(禧)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좌상 이행(李荇)의 문앞에 가 서 있게 하였다가 과연 그 교묘한 꾀를 썩먹게 되어, 안로가 조정으로 들어와 사림에 해독을 끼치고 종묘 사직을 거의 위태롭게 하였다. 소인의 난을 일으킴이 옛날부터 이러한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가 파직되어 남양(南陽)에 물러가 계시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그 가까운데 있는 것을 꺼리므로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합천(陜川)으로 돌아가니, 합천에서 서울의 거리가 아흐레 길이었다.
일찍이 이상(二相) 김광준(金光準)과 특별한 교분이 있었는데, 감광준에게 잘 달리는 종 하나가 있어 능히 3백 리를 갈 수 있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혹 할아버지에 관한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이 종을 시켜 알렸는데, 사흘이면 도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박 아무와 김숙예(金叔藝 김광준의 자)는 기질이 서로 유사하지 아니하여, 그 사이는 비단 빙탄(氷炭) 정도가 아니었는데 교분이 이렇게 좋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합천에서 5년 만에 돌아가셨는데, 아들 딸들이 어려서 울음 소리가 방에 가득하였으며, 큰아버지가 겨우 스무살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진주(晉州)에 사는 생원 이광(李光)과 절친한 사이였다. 작고하신 것을 알리자 미투리 신에 대지팡이를 짚고 20리 밖에서 산꼭대기를 넘어 찾아 왔었는데, 할아버지 댁 뒷산에 이르자 큰 소리로 큰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장사지낼 만한 곳을 얻었노라. 너의 아버지가 어질면서도 장수 못한 것을 슬퍼하여 자손을 위하여 좋은 땅을 찾으려고 하였더니 이제 과연 찾았구나.”
하고, 이내 내려 와서 통곡하고 갔는데, 지금의 무덤이 즉 그가 정해 준 곳으로서 뒤에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매우 좋다고 하여 동래(東萊) 정씨(鄭氏)의 산소에 다음 간다고 하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우리 할아버지와 다만 한 때만 좋아했을 뿐이 아니라 부고를 받자 술을 가지고 무덤에까지 와서 제사지내었다. 큰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올라갔더니 이미 끝나 돌아간 뒤였으니, 아마 연루될까 염려한 것이다. 그 문집 속에 제문 두 수가 있는데, 모두 제(祭) 지낸 뒤에 우리 집에 주지 않고 가지고 간 것이다.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이 우리 할아버지와 이성재종(異姓再從)간이었고 또 서로 친구 사이였다. 심연원이 부제학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제주 목사가 된 것은, 대개 우리 할아버지 때문에 누를 입은 것이다. 하루는 목이 메이도록 통곡하면서,
“어진 이가 죽었구나. 어진 이가 죽었구나.”
하였다. 그곳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사람 김세한(金世翰)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물어 보니 곧 우리 할아버지의 부고를 받은 것이었다.
김세한은 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힘이 세어 무사의 일인자였다. 정랑 벼슬을 하다가 우리 할아버지의 누를 입어 죄를 받고 제주에 귀양간 사람이었는데 그도 또한 슬피 울어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었고, 뒤에 병사(兵使)가 되었다.
○ 승지 민세량(閔世良)이 일찍이 수찬으로 어느 사위맞이 잔치하는 집에 갔다가 한 이름난 관원 장령(掌令)이라 하였음 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야흐로 시사에 대한 논의를 부회하고 있었으니, 김안로의 집에 드나드는 자였다. 마침 여름 햇볕이 바로 내려 쪼이는 것을 보고 자리를 당겨 내려 앉으면서 말하기를,
“당양(當陽 햇볕이 쨍쨍하다는 말인데 권력이 한창이라는 뜻)이로군.”
하니, 그가 다만 돌아다 보며 무릎을 거둬들일 뿐이었다. 자리가 파하자 곧 말이 누설되니 공이 알아차리고 드디어 현령 자리를 원하여 석성현감(石城縣監)이 되었는데, 김안로가 경차관(敬差官) 김공간(金公幹)을 교사하여 문서를 뒤져 두 가지 것을 적발해 내니, 하나는 쌀 5말과 어물 5포를 김헌윤(金獻允)에게 보낸 것이요, 또 하나는 약과 한 그릇을 심순경(沈順經)에게 보낸 것이었다.
김헌윤은 젊었을 적에 사귄 사람으로 연산(連山)에 귀양가 있었고, 심순경은 처조부로서 나이 80이 넘은 분이었는데, 죄인에게 사사로이 선물을 보냈다고 하여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문초한 끝에 곽산(郭山)으로 귀양보내었다. 소인의 마음이란 한 번 그 뜻에 거슬리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두지 않는 것이니, 어지러운 세상에서 처신할 때는 행동을 삼가고 말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어찌 지극한 교훈이 아니겠는가.
○ 영상 홍인재(洪忍齋 홍섬(洪暹)의 호)가 이조 정랑으로 있으면서 술에 취하여 이조 참판 허흡(許洽)에게 찾아 갔다가 이야기 끝에 자못 안로를 건드렸고 또 말하기를,
“〈진회전(秦檜傳)〉을 안로에게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하자, 허흡이 곧 말리면서,
“정랑이 취하였군. 무슨 말을 그렇게 경솔히 하오. 내가 비록 들었던들 어찌 차마 누설하겠소. 그러나 공이 많이 취하였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
하였는데, 홍인재가 말하기를,
“돌아가는 길에 또 계씨(季氏) 대사헌 영감을 만나볼 작정이오.”
하였다. 허흡이 깜짝 놀라면서
“나는 공의 직속 당상관이니 취중에 와 보아도 상관 없지마는 나의 아우와는 이미 교분이 없는 처지요, 또 그는 법관의 장이니, 혹시 조그마한 실례가 있게 되더라도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 부디 가지 마시오.”
하고, 이어 홍인재의 하인을 불러, ‘조심해서 집으로 모시고 돌아가지, 딴 곳에 들리지 말라’고 주의시켰다.
홍인재가 작별하고 나와 바로 허항(許沆)의 집으로 향하는데, 하인이 말릴 도리가 없었다. 허흡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과연 이미 와 있었다. 허흡이,
“내 잘못이다. 내 집 하인을 시켜 억지로라도 그 집으로 돌려 보냈더라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이제 큰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고, 급히 말을 달려 가보니, 홍인재가 이미 돌아간 뒤였다. 허흡이,
“홍 정랑이 크게 취하여 인사불성이었는데 여기 와서 무슨 말을 하던가? 영감도 보면 취한 것을 알았을 것이라.”
고 하자, 허항이 다짜고짜,
“얼굴이 백옥 같던데 무엇이 취했어요. 다만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하였다. 허흡이,
“겉은 비록 그러나 그 실상은 크게 취했으니, 비록 한 말이 있더라도 상대하여 겨룰 것이 없느니.”
하였으나, 허항이 대답하지 않으므로, 허흡이 할 수 없이 돌아 왔다.
허항이 그날 밤에 안로의 집에 갔다가 그 이튿날 일찍 단독으로 상감께 아뢰어 홍인재를 국문과 옥사를 생략하여 하루에 곤장 1백 20대를 치자, 기운과 숨이 가물가물하여 곧 끊어지려 하는데 바닷가로 귀양보냈다. 옥문을 나오기 전부터 뼈마디가 모두 부숴지고 숨쉬지 않으므로 벌써 죽었다고 하여 담 밑에 갖다 두고 거적을 덮어 두었는데, 까마귀 떼가 내려다 보다가 목을 움츠리고 도로 날아 갔었다. 그래도 가물가물하여 자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위관(委官), 위관’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나므로 판부사이하가 급히 내려가 반겼다. 공이 눈을 뜨고 보니 위관이 바로 그 허흡 공이었다. 공이 가만히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이오.”
하였다.
그 후 30년 만에 공이 재상이 되어 위관으로 금부에 앉았는데, 그 당시에 매를 잡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있었다고 하였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본래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비록 백 사람의 허항이 있었던들 한 사람 인재(忍齋)를 죽일 수 있을 것이며, 허흡이 허항을 그 노(魯)와 위(衛)로 볼 수 있었겠는가?
○ 문익공 정광필이 김해로 귀양간 뒤에 김안로가 기어코 죽이려고 대간을 교사하여 법에 따라 죄 주기로 논하게 하니, 예측할 수 없는 화가 아침 아니면 저녁에 박두하였다. 자제들은 모두 공의 적소(謫所)에 가 있고, 부인만이 혼자 집에 남아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다.
판서공 원계채(元繼蔡)가 인척간이므로 하루는 부인이 계집종을 보내어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원계채 또한 아무런 계책이 나오지 않아, 장님 김효명(金孝命)을 불러 점을 쳤더니, 대답하기를,
“아직도 10여 년 복록이 있으니, 대간의 탄핵이 비록 준엄하더라도 종국에는 반드시 무사할 것이오. 나를 믿고 안심하시오.”
하였다. 원계채가 그 계집종을 불러
“점장이의 말이 이러하니 희망이 있겠다.”
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인이 와서 고하기를,
“대간의 탄핵대로 상감께서 이미 윤허가 내렸다.”
고 하므로 계집종이 듣고 있다가 점장이를 붙들고 가슴을 치고 발을 굴러 울면서,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네 말이 웬말이냐.”
하였고, 원계채도 또한 말이 없이 어쩔 줄을 몰랐다. 점장이가 말하기를,
“내 점괘대로 본다면 뜻밖의 염려는 만무한데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난들 어떻게 하느냐.”
하고, 드디어 억지로 몸을 빼어 달아나 버렸다. 조금 있다가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대간들이 윤허를 받고 해산한 뒤에 다시, ‘죽음을 감형하고 이미 허락한 것은 도로 취소한다.’고 전교하였다.”
하였으니, 대개 감히 재론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성인의 아량은 과연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공이 정유년(1537, 중종 32)에 김안로가 죄를 받은 뒤 나라의 원로로서 임금의 지극히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세상에서 김효명이 점을 잘 친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천명이란 스스로 정해져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 정유년에 중종이 형조 판서 윤임(尹任)에게 비밀리 말하기를,
“네가 중궁을 폐하려 한다 하니 그랬는가?”
하자, 윤임이,
“이것은 반드시 안로의 흉계일 것입니다. 안로가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해치려면 반드시 동궁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웁니다. 그리하여 먼저 옥사를 일으킨 다음에 여러 사람을 그 속에 몰아 넣으려고 하니, 안로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이 화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속히 그를 제거하옵소서.”
하였더니, 상감께서,
“네가 아니면 안로를 제거할 사람이 없다.”
하였다. 드디오 대사헌 양연(梁演)과 의논하니, 양연이,
“임금의 밀지를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안 된다.”
고 하므로, 드디어 전후의 밀지를 가져다가 보여주고 다시 말하기를,
“공이 아직도 의심한다면 상감께 아뢰어 정사를 하되, 승지로 우윤을 삼고 집의로 승지를 삼아, 이것으로써 증거를 삼자.”
하였다. 약속이 결정되어 양연이 양사(兩司)의 관원들을 중학(中學)에 모아 놓고 말하기를,
“의논할 큰 일이 있다.”
고 하니, 모두들, ‘무슨 일이냐’고 하자, 양연이 말하기를,
“내가 계초(啓草)를 만들 터이니 잠시 기다리라.”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안로의 아들 지(禔)가 장가드는 날을 노린 것이니, 안로가 손님들을 모아 놓고 있으므로 달리 의심할 일이 만무하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어떤 서리가,
“오늘 정사의 어명이 내렸습니다.”
하므로, 많은 관원들이 그 계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연이 배가 아프다 핑계하고 썼다 지었다 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또 알리기를,
“승지 아무개가 특별 승진하여 우윤이 되었다.”
고 하므로, 양연이 또한 일어나 뒷간에 가는 체하여 짐짓 늦추고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또 알리기를,
“집의가 승지가 되어서 갔다.”
고 하였는데, 집의 채낙(蔡洛)은 안로의 족당이었다. 그제야 양연이 곧 주머니를 뒤져 계초를 내어 놓으면서,
“내가 망령이 나서 그런 것이니 여러분은 의심하지 마시오.”
하고, 드디어 한 차례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예로부터 소인을 제거하면서 먼저 임금의 뜻을 돌려 놓지 못하면 백 번 하여 백 번 실패한 것은 사세가 그런 것이었다. 송(宋) 나라의 왕증(王曾)과 정위(丁謂)의 일을 중론(衆論)이 통쾌하게 여겼고 당시에 옳지 않다고 하지 않았다. 양공의 한 일이 비록 왕문정(王文正)과는 차이가 있으나 자기의 한 몸을 돌보지 않고 종묘 사직의 화를 능히 제거한 사람이니, 한결같이 청의(淸議)만으로 책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정유년에 수찬 공용경(龔用卿)이 중국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오는데, 찬성 소세양(蘇世讓)이 대제학으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압록강 가에 가서 그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수찬이 연도(沿道)에서 지은 작품이 잇달아 들어오는데, 그 문장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화려하므로, 소 퇴휴(退休 세양의 호)가 명성에 흠이 날까 걱정되어, 드디어 사퇴하였다.
이조 판서 심언광(沈彦光)이 관반사(館伴使)가 되었는데, 자신이 가고 싶어 안로에게 가서 청하니 안로가 말하기를,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될 수 없소. 정운경(鄭雲卿 사룡(士龍))이 지금 기성(箕城 평양)에 있으니, 그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하고, 드디어 대신시켰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에 송별시를 심언광만이 두 수를 지어 주었으니, 대개 자신이 시에 능한 것을 과시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떠벌여 과장하는 것을 비웃었다.
○ 무술년(1538, 중종 33)의 알성과에 정임당(鄭林塘 정유길(鄭惟吉)의 호)이 장원급제하였는데, 중종이 즉시 내시를 달려 보내어 문익공에게 전유하기를,
“경의 손자가 장원이 되었으니, 내가 나라를 위하여 기뻐하며 또 경을 위하여 축하하오.”
하고, 이어 잔칫감을 내려 주며 당일로 창방(唱榜)하여 정언에 임명하고 일등 풍악을 내렸다.
임당이 사복시의 말을 타고 천동(天童)이 앞을 인도하였으며 기생 수백 명이 말머리를 둘러싸고 오니, 온 동네의 구경꾼들이 문과 길거리에 들끓었다. 문익공이 학질로 몹시 신음하고 있다가 급히 일어나 보며 크게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모인 손님들이 매우 취하였고 임금께서 내려주신 것이 마음에 흡족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학질이 나아버렸다. 임당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참 효손(孝孫)이로다.”
하니, 자리에 가득 찬 사람들도 칭찬하고 축하하였다.
임당이 총각으로 원계채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 갔는데, 계채는 문익공과 벗이었다. 문익공이 원에게 부탁하기를,
“글읽기를 권하되 부지런히 하지 않거든 종아리를 쳐도 좋네.”
하였다. 원이 공의 말대로 글읽기를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또 종아리를 치려 하면 공에게로 도망가 버리고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원계채가 언젠가 공에게 묻기를,
“요새는 글 읽는 것이 어떠하오.”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유길이 글 읽는 것은 날마다 ‘아니 불(不)’ 자요.”
하였더니, 임당이 방안에 들어 누워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곧 대꾸하기를,
“할아버님 약주 드신 것은 아침마다 ‘사나울 맹(猛) 자’랍니다.”
하였다. 공이 기뻐하면서,
“자네는 염려 말게, 나중에 꼭 큰 인물이 될 걸세.”
하였다.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은 문익공의 큰 증손이었다. 임당의 창방(唱榜) 당시에 남봉의 나이 12세였는데, 공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너는 부러워할 것 없다. 너도 급제하여 내 자리에 오를 것이다.”
하였다. 그 뒤 남봉이 임당보다 앞서 정승이 되었다. 공과 같은 큰 덕으로 이미 두 손자가 있으며 또 앞을 내다보기를, 마치 촛불을 비추고 수를 계산하듯 하였으니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는 말이 과연 미덥지 않은가.
○ 육조의 일을 해당 판서가 모두 결정하고, 그 조(曹) 안의 잡된 일은 참의가 맡아서 하는데 참판은 주관하는 일이 없었으며, 낭청은 모든 사무를 조사 좌랑 한 사람에게 책임지우고, 정랑은 행동을 제마음대로 하였다. 예조가 육조 중에서 조용하고 한가로워 일이 없으면서도 좋은 일은 가장 많았다. 출근한 날에는 음악을 검열한다 핑계하고 남루(南樓) 위에 나앉아 아리따운 기생과 좋은 음악을 마음껏 골라 종일토록 술을 마시면서 노래와 춤으로 즐기며, 때로는 조사 좌랑을 불러 벌주를 수없이 주는 짓이나 하되, 판서가 듣고서도 예사로 여겨 책망하지 않았다.
임당이 좌랑으로 있을 적에 정랑이 귀찮게 굴어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는데, 판서가 불러 계초(啓草)를 쓰라고 하였으나 정랑이 보내주지 않아 한참 만에 들어가니, 판서가 웃으면서,
“좌랑이 필시 정랑의 괴롭힘을 받는가 보군.”
하므로, 공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말하기를,
“정랑이 비단 자기가 맡은 사물를 안 볼 뿐만 아니라 좌랑도 그 맡은 사무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소인의 생각으로는 참판과 정랑을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참판이 마침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면서,
“좌랑, 좌랑,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마오. 용렬한 이 늙은이가 태평한 시절을 만나 육조의 아경(亞卿)자리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는 것도, 어찌 태평성대의 좋은 일이 아니겠소.”
하자, 판서와 참의도 모두 껄걸 웃으므로, 공이 자기가 망발했음을 알고 송구하여 재삼 사과하였다.
악군(岳君 장인)이 예조 좌랑으로서 공사를 가지고 찾아갔더니, 임당 공이 좌상으로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한 번 망발을 한 일이 있었다.”
하여, 드디어 그 이야기를 꺼내어 웃고 또 말하기를,
“나는 나이가 젊어서 경솔한 말을 했소마는 그대는 그럴 염려가 없겠지.”
하였다. 대개 악군의 나이 이미 50을 넘어 나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D-001]정국정훈(靖國正勳) :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 반정에 공이 있는 박원종ㆍ유자광(柳子光) 등 많은 신하들을 표창한 것. 뒤에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들이 이것을 남훈(濫勳)이라하여, 심정(沈貞) 등 76명을 삭제했다. 이것이 뒤에 기묘사화의 원인의 하나가 되었음.
[주D-002]송조(宋朝) : 미모만 갖춘 사람을 말한 것. 춘추시대 송(宋) 나라의 공자(公子)였는데, 미모로 이름이 났었다. 공자(孔子)의 말에, “송조와 같은 미모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면하기 어려우니라.” 하였음.
[주D-003]남명(南冥) : 조식(曺植)의 호. 수차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벼슬하지 않고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다. 상서원 판관(尙書院判官) 벼슬을 받아 명종을 뵙고,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학문하는 방법을 말한 표(表)를 올리고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 갔었다.
[주D-004]북문으로 들어간 일 : 기묘년 11월 15일 밤에 비밀 전교를 내려 신무문을 열고 남곤ㆍ심정 등을 불러들인 일.
[주D-005]노(魯)와 위(衛) : 노 나라는 주공(周共)의 후손, 위 나라는 강숙(康叔)의 후손으로서 원래 형제의 나라였는데 같이 쇠약해지고 어지러워져 정사도 흡사하였다. 어떤 일이 유사하여 분간이 없는 것을 말하는 데에 사용됨. 공자가 “노 나라와 위 나라의 정사가 형제간이로다.” 말한 것에 근원함.
[주D-006]왕증(王曾)과 정위(丁謂) : 송(宋) 나라 정위(丁謂)가 구준(寇準)을 귀양보내려 하므로 왕증(王曾)이 죄가 너무 중하다 하니, 정위가 한참 동안 쳐다 보다가 말하기를, “집을 빌려준 주인도 면하지 못할 것 같다.” 하였다. 이것은 왕증이 구준에게 집을 빌려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산릉(山陵)일로 인하여 정위를 귀양보냈다.


태조 7년 무인(1398,홍무 31)
 8월26일 (기사)
정도전·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의 졸기

정도전의 자(字)는 종지(宗之), 호(號)는 삼봉(三峰)이며, 본관(本貫)은 안동 봉화(安東奉化)이니,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 경자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짓고 상제(喪制)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宗廟)에 제향(祭享)하니, 도전이 도(圖)를 상고하여 악기(樂器)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禮儀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옮겨서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훙(薨)하여, 을묘년에 북원(北元)의 사자(使者)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先王)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明)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元)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罪名)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宰相)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會津)으로 폄직(貶職)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賀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國政)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密直提學)과 지공거(知貢擧)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十學都提調)가 되어 상명(詳明)·태일(太一) 등 여러 산법(算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겨서 《진맥도결(診脈圖訣)》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를 혁파(革罷)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中興功臣)으로써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고,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무망(誣罔)한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賞與)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羅州)로 폄직(貶職)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推戴)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功勳)을 책정(策定)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判三司事兼判三軍府事)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되어 《진도(陣圖)》·《수수도(蒐狩圖)》·《경국전(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제작하고, 또 악가(樂歌)를 지었으니,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문덕(文德)·납씨(納氏)·정동방(靖東方) 등의 곡(曲)이 있었다.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수찬(修撰)하였다.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해지고, 관계(官階)는 특별히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初場)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宣撫)하여 주군(州郡)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孔州城)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該博)하였으며, 항상 후생(後生)을 교훈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文武)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軍營)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詩)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開國)할 즈음에 왕왕 취중(醉中)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 고조(漢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撰述)한 《고려국사(高麗國史)》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加筆)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와 성산(星山) 이숭인(李崇仁)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趙浚)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外祖父) 우연(禹延)의 처부(妻父)인 김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外祖母)이었는데, 우현보(禹玄寶)의 자손이 김진(金戩)의 인척(姻戚)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遲滯)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남은은 본관이 진주 의령(晉州宜寧)이며 검교 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의 아들이다. 공민왕 갑인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폐왕(廢王) 경신년에 사직단 직(社稷壇直)에 임명되었다. 을축년에 왜구(倭寇)가 삼척군(三陟郡)에 침구(侵寇)하니, 성이 작고 또한 위태하므로 그 군수가 어렵게 여기었는데, 남은이 자천하여 가게 되었다. 이에 삼척군에 도착하니, 왜구가 창졸히 이르는지라, 남은이 성문을 열고 기병(騎兵) 10여 명을 거느리고 졸지에 쑥 나가서 공격하니, 왜구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 사실이 위에 알려져서 사복 정(司僕正)의 관직으로써 불려 돌아왔다. 무진년에 임금을 따라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군사를 돌이키려는 의논을 올렸으며, 또 비밀히 임금으로 추대(推戴)하기를 모의하였으나, 임금께서 엄숙하고 근신하신 이유로써 감히 말을 내지 못하였다. 이미 돌아와서는 비밀히 전하(殿下)에게 말하니 전하께서 말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기사년에 응양군 상호군 겸 군부 판서(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에 임명되고, 경오년에 공양왕이 참소를 믿고 의심하고 시기하여 일이 또한 예측할 수가 없게 되니, 전하께서 이에 남은을 불러 평소부터 진심으로 붙좇는 사람들과 더불어 비밀히 임금을 추대(推戴)하기를 의논하게 하였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되고 분의 좌명 개국 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의 칭호를 내리었다.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사사 우군 절도사(參贊門下府事兼判尙瑞司事右軍節度使)에까지 이르렀다. 정축년에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남은은 천성이 호탕하고 비범하여 검속(檢束)이 없었으며 어릴 때부터 기이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개국(開國)할 즈음에는 공이 상등의 반열(班列)에 있었지마는, 그러나 배운 것이 없어 식견이 우매한 때문에 강씨(康氏)가 적통(嫡統)을 빼앗으려는 계책을 찬성하여서, 드디어 정도전 등과 더불어 국권(國權)을 마음대로 하여 종친(宗親)을 제거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화(禍)에 미치어 죽게 되니, 나이 45세였다. 아들은 네 사람으로 남경수(南景壽)·남경우(南景祐)·남경복(南景福)·남경지(南景祉)이다.
심효생(沈孝生)은 본관이 순천 부유(順天富有)이며 지금주(知錦州) 심인립(沈仁立)의 아들이다. 폐왕(廢王) 경신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계해년에 을과(乙科)에 제 2인에 올라 당후관(堂後官)으로부터 관직을 오랫동안 하여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대대로 전주(全州)에 거주했던 때문에 평소부터 임금에게 마음을 두어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승(中丞)에서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상도 안무사(慶尙道按撫使)가 되었다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승진됐으며, 또 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어 병기(兵器)를 제조하니, 사람들이 그 정교함을 칭찬하였다.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 부성군(藝文館大提學富城君)에 이르고, 나이는 50세였다. 아들은 심도원(沈道源)이다.
박위(朴葳)는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처음에 공민왕에게 벼슬하여 폐왕(廢王) 때까지 이르렀는데, 중앙과 지방 관직에 두루 벼슬하여 재능(才能)으로써 칭찬을 받았으며, 김해(金海)·진주(晉州)·계림(鷄林)·영흥(永興)이 모두 그의 지내온 고을이다. 여러 번 왜구(倭寇)를 공격했으므로 국가에서 그가 장수의 지략(智略)이 있음을 알고 여러 번 천직(遷職)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으며, 나가 합포(合浦)를 지켰는데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대마도(對馬島)를 쳐부수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박중질(朴仲質) 등이 체포되어 공사(供辭)가 그에게 관련되므로, 대간(臺諫)이 연달아 소(疏)를 올려 극형(極刑)에 처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변명하여 구하므로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승진되어 금군(禁軍)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여러 왕자들이 그를 부르니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대궐 문에 나가서 어정거리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은 박기(朴耆)이다.
유만수(柳曼殊)는 본관이 문화(文化)로 우부대언(右副代言) 유총(柳總)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보마배 행수(寶馬陪行首)가 되었으며, 계묘년에 장군에 임명되어 여러 번 천직(遷職)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정사년에 임금을 따라 풍해도(豊海道)에서 왜구(倭寇)를 쳤다. 무진년에 임금을 따라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다가, 군사를 돌이키자는 의논에 참여하여 돌아와서 지문하(知門下)에 임명되니 회군 공신(回軍功臣)이라 일컬어졌다. 경오년에 문하 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고 신미년에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 겸직되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 일컫고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아들 유원지(柳源之)를 거느리고 이르렀으나 진퇴(進退)를 알지 못하여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맏아들은 곧 유원지(柳源之)이고 다음 아들은 유은지(柳隱之)와 유연지(柳衍之)이다.
【원전】 1 집 134 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육신(六臣)의 상왕 복위 모의(上王復位謀議)

3년 을해년(1455) 봄 2월에 정부ㆍ육조(六曹)ㆍ정원(政院)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화의군(和義君) 영(瓔) 세종의 아들 이 최승손(崔承孫)ㆍ김옥겸(金玉謙)과 더불어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활을 쏜 것과 또 평원대군(平原大君) 임(琳)의 첩 초요섬(楚腰纖)과 간통한 죄를 아뢰어,청하여 영(瓔)을 외지에 귀양보내고 유(瑜)의 고신을 회수하였다. 또 내시 엄자치(嚴自治)의 죄를 아뢰어, 금부에 가두었다가 제주도에 안치시켰는데, 길에서 죽었다. 그때에 혜빈(惠嬪) 양씨(楊氏) 세종의 후궁인데, 한남군(漢南君)ㆍ영풍군(永豐君)의 어머니이다. 가 임금의 신변을 보호한다 하여 궁중에 출입하여, 중하게 견책을 받았다.
영(瓔)이 귀양가니, 참판 박중손(朴仲孫)이 아뢰기를, “신의 사위 영이 죄를 지은 것은 실상 신이 미리 막지 못했기 때문이니, 황공하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해동야언(海東野言)》
○ 윤 6월 11일에 임금이 세조에게 전위하매, 임금을 높여 상왕(上王)이라 하며 창덕궁에 옮겨 거처하게 하였다. 《고사촬요(攷事撮要)》
상왕이 손위(遜位)한 것은 모신(謀臣) 권람(權擥)이 의논을 시작하여, 대신 정인지의 논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김자인(金自仁)이 그때 나이 열두 살인데, 그 의논을 보고 가슴에 불꽃이 치솟는 것 같았다고 말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 그때, 단종이 환관 전균(田鈞)을 시켜 우의정 한확(韓確) 등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어려서 안팎의 일을 알지 못하여, 간악한 무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 반란의 싹이 끊임없이 일어나니, 이제 장차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하려 하노라.” 하였다. 한확이 깜짝 놀라 아뢰기를, “지금 영상이 나라 안팎의 모든 일을 모두 총관(摠管)하는데, 다시 무슨 대임을 전한다는 말입니까” 하였다.균이 그 말대로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전날부터 이미 이 뜻이 있어서 이미 계책이 정해졌으니, 바꿀 수 없다. 빨리 모든 일을 준비하라.” 하였다. 한확 등이 동시에 아뢰면서 결정을 바꾸기를 강력하게 청하고, 세조가 또한 울며 굳게 사양하였다. 균이 들어가 아뢰니, 조금 있다가 다시 전지를 내리기를 “상서시(尙瑞寺) 관원에게 옥새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라.” 하매,여러 대신이 서로 돌아보고 실색하였다. 또 동부승지 성삼문에게 상서원에 가서 빨리 옥새를 내어오도록 명하고 균을 시켜 경회루아래로 받들고 나오라 하고, 임금이 경회루 아래에 나와서 세조를 불렀다. 세조가 들어가니, 승지와 사간이 따랐다. 임금이 일어서니, 세조가 꿇어 엎드려서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손에 옥새를 들고 세조에게 주었다.세조가 사양하다 재가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엎드려 있으니, 임금이 부축하여 나가라고 하고, 군사가 호위하였으며, 정부는 집현전 부제학 김례몽(金禮蒙) 등으로 하여금 선위ㆍ즉위하는 교서를 봉하게 하고, 유사는 의위(儀衛)를 갖추어 경복궁 근정전에 헌가(軒架)를 설치하고, 세조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가서 선위를 받았다.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에 들어가 임금을 뵈옵고 드디어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실록(實錄)》
○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에, 자기는 덕이 없다고 사양하니, 좌우에 따르는 신하들은 모두 실색하여 감히 한 마디도 내지 못하였다. 성삼문이 그때에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옥새를 안고 목놓아 통곡하니, 세조가 바야흐로 부복하여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보았다.이 날 박팽년(朴彭年)이 경회루 못에 임하여 빠져 죽으려 하매, 성삼문이 기어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왕위는 비록 옮겨졌으나, 임금께서 아직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들이 살아 있으니 아직은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다시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하매, 박팽년이 그 말을 따랐다. 《추강집(秋江集)》
○ 그때,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 이 도총관(都摠管)으로 궁내에 들어가 번들다가 선위한다는 말을 듣고 정원에 종을 보내어 자주 물었으나, 성삼문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한참 있다가 성삼문이 뒷간에 가며 하늘을 쳐다보니, 눈물이 샘처럼 쏟아졌다.성승은 곧 병이 났다고 하고 방에 드러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집 사람들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오직 성삼문이 오면 좌우를 물리치고 같이 얘기하였다. 《추강집(秋江集)》
○ 상왕(上王 단종)이 수강궁(壽康宮)으로 나올 때에는 어둔 밤에 불 밝히지 않고, 종루(鐘樓)로 내려올 때에는 좌우 행랑(行廊)에서 모두 통곡하니 막을 수가 없었다. 《추강집(秋江集)》 ○ 수강궁은 지금의 창경궁(昌慶宮)이다.
○ 세조가 경복궁에 임어하고 상왕 3년(1455)을 원년(元年)으로 삼았다. 《고사촬요》
교서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동방을 차지하셨고, 여러 성왕이 서로 잇달아 밝음을 거듭하고 화함을 거듭했다. 주상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한 이래로 불행히도 국가에 어려움이 많은데, 과인이 선왕의 모제(母弟)이며 또 조그만 공로가 있고, 장성한 임금이 아니면 어렵고 위태로운 시국을 진정시킬 수 없다 하여, 드디어 대위를 맡기시니, 내가 굳이 사양하나 들어주지 않고, 종친과 대신들이 모두 종사의 대계(大計)이니 의리상 사양해서는 안 된다 하므로, 부득이 뭇 사람이 바라던 대로 따르노라.” 하였다. 《실록》
○ 정원에 전교하기를, “매달 1일, 12일, 22일에 친히 상왕께 문안하겠고, 만일 연고가 있으면 그 다음날 가겠다.” 하였다.
○ 박팽년으로 충청 감사를 삼았다.
박팽년이 성삼문ㆍ삼문의 아버지 승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김질(金礩)ㆍ무인 유응부(兪應孚)ㆍ상왕의 외숙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였는데, 얼마 뒤에 박팽년이 충청 감사로 나갔다.
○ 이 달에 예조 판서 김하(金何)와 형조 참판 우효강(禹孝剛)을 명 나라에 보내어 왕위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데, 그 주문(奏文)에 대략, “신이 어렸을 때부터 병이 있어 기운이 항상 순하지 못하였고, 신의 아비 선신(先臣) 공순왕(恭順王)이 경태(景泰) 3년(1452)에 돌아가시매, 신의 나이 열두 살에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해야할 일을 알지 못하여 여러 서무(庶務)를 신하에게 위임하였더니,경태 4년에 이르러 간신들이 반역을 꾀하여 화기(禍機)가 임박하였다. 그래서 숙부인 배신(陪臣) 수양대군 유(瑈)가 달려와 신에게 고하고 곧 평정하였으나, 아직도 흉한 무리가 아직 다 없어지지 않고 변고가 거듭되어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신은 미약하여 이를 진정시키시기 어렵고 나라의 안위에 심히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선신(先臣)의 동모제 유가 학식은 고금을 통하고 공이 있고 덕이 있어 여러 사람들의 신망을 두텁게 받기에 경태 6년 6월 11일에 권도로 군국(軍國)의 일을 승습(承襲)하게 하였사오니, 통찰하시어 특별히 밝은 윤허를 내리소서” 하였다.
○ 이듬해 4월에 조칙(詔勅)이 나왔는데, 그 조칙에, “정성껏 중국을 섬기는 신하의 도리를 지켜 사대(事大)의 정성을 더욱 굳건히 하고, 길이 번신의 도리를 굳건히 하고, 사왕(嗣王)의 선양(禪讓)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홍위(弘暐)로 하여금 상왕(上王)의 휘(諱) 그대로 작위를 갖고 편안히 있게 하고, 모름지기 항상 우대하여 소홀함이 없을지어다.” 하였다.
○ 가을 7월 갑신일에 상왕을 추존하여 공의온문(恭懿溫文) 상왕이라 하고, 왕후 송씨를 의덕(懿德) 왕대비라 하고, 세조가 면복(冕服)으로 법가(法駕)를 갖추어 종친과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창덕궁에 가서 뵈니, 상왕과 송씨 모두 받지 않았다. 《실록》
○ 9월에 계양군(桂陽君) 증(璔) 등 41인을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녹훈하였다.
○ 세조 2년 병자년(1456) 정월 《국승(國乘)》에는 정축 정월 갑오라 하였다 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는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영의정 정인지는 육조의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신들이 전에, 상왕을 내쫓으라고 간한 일은 근일에 조정이 다사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번거롭게 아뢸 겨를이 없습니다.날로 전하가 지체 마시고 속히 결단하소서” 하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경들의 말은 옳으나, 자고로 제왕의 일어남이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인데, 나의 일도 또한 천명이라 간인이 있더라도 어찌 상왕을 의지하여 음모를 꾸밀 수 있겠는가. 진(秦) 나라를 망친 것은 호(胡)이다. 천명을 어찌 도모할 수 있으랴” 하였다.정인지 등이 다시 아뢰기를, “천명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인사(人事)를 다하여야 마땅하니, 밖으로 내보내 혐의를 피하게 하소서.” 하였다. 세조가 편지로 이르기를, “국가의 큰 일은 마땅히 선후를 따져서 깊이 생각하고 널리 의논하여 새로운 생각이 나면, 이전 생각은 버려야 하므로, 내가 두어 달을 두고 계책을 생각하고 천만 가지로 궁리하여 이제야 정하였다. 경들도 고집할 것이 아니요, 나도 독단으로 할 것이 아니다.고집이 없으면 국론에 무엇을 취하며, 독단이 없으면 한 사람에게 무엇을 계품하겠는가. 유(瑜)의 집을 다스려 방금(防禁)을 엄하게 하고, 시종을 줄여 외부로 나가 거처하게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을미에 정인지가 또 백관을 거느리고 다시 청하매, 세조가 편지로 이르기를, “어제 내 편지에 다 말했다.” 하였다. 《금석일반(金石一斑)》
○ 상왕이 금성대군 유의 집에 출거(出居)하였는데, 삼군진무(三軍鎭撫) 두 사람이 군사 열 명을 거느리고 문을 파수하여 숙직하였다. 《금석일반》
경자에 의정부가 의논하기를, 상왕전(上王殿)에 주부 환관(酒府宦官) 두 사람, 장번 환관(長番宦官) 두 사람, 차비 수구치[差備速古赤] 네 사람, 별감 네 사람을 모두 번(番)으로 나누고, 시녀 열 사람, 무수리 다섯 사람, 복기[卜只] 두 사람, 수모(水母) 두 사람, 방자(房子) 네 사람, 두 별실의 시인(侍人) 각각 두 사람, 무수리 각 한 사람,각 색장(色掌) 열두 사람을 두 번으로 나누어, 하나는 덕녕부(德寧府) 관원이 차례로 낮에 번들고, 하나는 대비 두 별실의 본댁의 환관 시녀가 본가에 통문(通問)하는 것과, 물건의 진납(進納)하는 것을 맡되, 사흘마다 덕녕부가 승정원에 고하도록 하였다. 《금석일반》
○ 6월에 명 나라 사신이 태평관(太平館)에 왔는데, 세조가 아무 날로 창덕궁 상왕 어전에서 사신을 청하여 잔치하기로 하였다. 박팽년ㆍ성삼문이 모의하여 그 날에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운검(雲劍)을 삼아서 잔치가 한창 벌어진 때에 일을 시작하여, 성문을 꼭 닫고 세조의 우익(羽翼)을 베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라 하였다.유응부가 말하기를, “임금과 세자는 내가 맡을 것이니, 나머지는 자네들이 처치하라.”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신숙주(申叔舟)는 나의 평생 친구이지만, 죄가 무거우니, 베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모두 그렇다고 말하고, 형조 정랑 윤영손(尹鈴孫) 화산 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사위이다. 을 시켜 신숙주를 죽이기로 하였다.성삼문이 김질에게 말하기를, “일이 성공하면 자네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이 수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계획이 다 정해졌는데,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이 좁고 또 찌는 듯이 더우니, 세자는 들어오지 말고, 운검(雲劍)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니, 세조가 그대로 하였다. 성승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니, 한명회가 말하기를, “이미 운검은 들이지 말라 하였다.” 하였다.성승이 물러나서 한명회 들을 쳐 죽이려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세자가 오지 않았으니, 한명회를 죽여도 소용이 없다.” 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들어가 치려 하니, 박팽년과 성삼문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또 운검을 들이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 뜻이라, 만일 여기서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성패를 알 수 없으니,다른 날에 임금과 세자가 같이 있는 때를 타서 거사하여 성공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유응부가 말하기를, “일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데, 만일 후일로 미루면 일이 누설될까 두렵다. 세자가 비록 본궁에 있지만, 모신과 적자가 모두 수양을 따라 여기에 왔으니, 오늘 이 무리를 다 죽이고 상왕을 복위시켜 호령하면서,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면 세자가 장차 어디로 도망하겠는가.비록 지혜있는 자가 있다 해도 계교를 내지 못할 것이니,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라, 놓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박팽년 등이 굳이 만전지계(萬全之計)가 아니라고 유응부를 말려 발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윤영손은, 계획이 정지된 것을 알지 못하고 신숙주가 한쪽 마루에 나가서 머리 감는 것을 틈타 칼을 가지고 앞으로 다가갔다. 성삼문이 눈짓하여 만류하니, 영손이 물러갔다. 김질이 일이 성사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정창손과 꾀하기를, “오늘 특별히 운검을 들이지 않고, 세자도 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천명이라, 먼저 고발하면 부귀를 누리리라.” 하여, 정창손이 그 말대로 김질과 함께 대궐에 달려가서 변을 고하기를, “신은 실상 알지 못하는데, 김질이 삼문의 무리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하였다. 세조가 김질을 불러들여 그 진상을 물으니, 김질이 대답하기를,“성삼문이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가 보았더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근일에 상왕께서 창덕궁 북쪽 담을 터놓고 유(瑜)의 예전 집에 왕래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 등의 헌책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런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하나, 그러나 이는 상왕을 좁은 곳에 넣어두고 한두 명 장사로 하여금 담을 넘어 들어가서 불궤(不軌) 한 일을 도모하려 함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상왕과 세자가 모두 어리니, 만일 이 뒤에 임금이 죽고 왕위에 서기를 다툰다면 상왕을 돕는 것이 옳으니, 꼭 너의 장인에게 이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곧 여러 승지를 불러들여 성삼문을 결박하고 심문하였다. 《추강집》 《해동야언(海東野言)》
○ 공조 참의 이휘(李徽)가 일이 발각됨을 듣고 정원에 나가서 성삼문 등의 음모를 고하여 아뢰기를, “신이 곧 아뢰려 하였으나, 그 실상을 알지 못하여 감히 곧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 세조가 승지 윤자운(尹子雲)을 보내어, 상왕께 고하기를, “성삼문이 심술이 좋지 않으나, 조금 학문을 알기로, 정원에 두었다가 일이 실수가 많기에 예방 승지를 공방(工房) 승지로 고쳤더니, 마음에 원망을 품고 말을 지어내기를,‘상왕을 유(瑜)의 집에 왕래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몰래 불측한 일을 하려 함이라’ 하고, 이어서 대신을 모조리 죽이려 하였다 하므로, 지금 국문하고 있다.” 하였다. 상왕이 윤자운에게 술을 주었다.
○ 세조가 편전(便殿)에 나와 좌정하니, 성삼문이 승지로 입시하였다. 무사로 하여금 끌어 내려, 김질이 고한 말로 심문하매, 성삼문이 한참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가 아뢰기를, “김질과 대질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세조가 질에게 명하여 그 실상을 말하니, 성삼문이 그치게 하고 웃으며 아뢰기를,“다 참말이다. 상왕께서 춘추가 한창 젊으신데 손위(遜位)하셨으니, 다시 세우려 함은 신하된 자가 마땅히 할 일이라, 다시 무엇을 묻는가.” 하고 김질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고한 것이 오히려 말을 둘러대어 직절(直截)하지가 못하다. 우리들의 뜻은 바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명하여 국문하니, 성삼문이 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ㆍ유성원ㆍ유응부ㆍ박정이 그 계획을 안다고 끌어대었다.세조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랏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 방언에 종친을 나으리라 한다. 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뺏으니,성삼문이 신하가 되어서 차마 군부(君父)의 폐출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나으리가 평일에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세조가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선위를 받을 때에는 어찌하여 저지하지 않고, 도리어 내게 붙었다가 이제 나를 배반하는가.” 하였다.성삼문이 말하기를, “사세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원래 그것을 저지하지 못할 바에는 물러가서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임을 알지만, 공연히 죽기만 해야 소용이 없겠으므로, 참고 지금까지 이른 것은 뒤에 일을 도모하려 함이라.” 하였다. 세조가 말하되, “네가 신이라 일컫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고 하는데, 네가 내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이다.겉으로는 상왕을 복위시킨다 하지마는, 실상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내가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일 믿지 못하거든 나의 집을 적몰(籍沒)하여 따져 보라. 나으리의 말은 모두 허망하여 취할 것이 없다.” 하였다. 세조가 극도로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쇠를 달구어 그 다리를 뚫고 그 팔을 끊으나,얼굴빛이 변하지 않고 다른 책에는 쇳조각을 달구어 배꼽에 놓으매, 기름이 지글지글 끓어 탔다 하였다. 쇠가 식기를 기다려 말하기를,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 독하다.” 하였다. 그때, 신숙주가 임금의 앞에 있었다. 성삼문이 꾸짖어 말하기를, “옛날에 너와 더불어 같이 집현전에 번들 적에 영릉(英陵 세종의 능호)께서 원손(元孫)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나의 천추만세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잊었는가. 너의 악함이 이 정도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세조가 신숙주더러 “뒤편으로 피하라.” 하였다.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하므로,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전하기를,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박팽년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며, 임금을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였다. 세조가 크게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그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 하였다. 박팽년이 말하기를, “내가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 하였다.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다. 거(巨)자로 썼다.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한 창고에 봉하여 두었다. 세조가 유응부에게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려 하였느냐.” 하니, 유응부가 말하기를, “잔칫날을 당하여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하였더니, 불행히도 간인이 고발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족하는 빨리 나를 죽이라.” 하였다.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상왕의 이름을 내걸고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구나” 하고, 무사로 하여금 살가죽을 벗기며 물으니, 유응부가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되 서생과는 같이 일을 꾀할 수 없다 하더니 과연 그렇도다. 지난번 잔치를 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하니, 너희들이 굳이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 하여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너희들은 사람이라도 꾀가 없으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하며, “만약 실정 밖의 일을 물으려거든 저 어리석은 선비에게 물으라.” 하고, 즉시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쇠를 달구어 배 아래 두 허벅지 사이에 넣으니, 지글지글 끓으며 피부와 살이 다 익었다. 유응부가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땅에 던지며,“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 끝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개(李塏)는 단근질하는 형신에 임하여 천천히 묻기를,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 하매, 세조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위지의 차례가 되자, 하위지가 말하기를, “사람이 반역이란 죄명을 쓰면 마땅히 베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다시 무엇을 묻는가.” 하매, 세조가 노여움이 풀려서 단근질하는 형신은 하지 않았다.성삼문에게 공모한 자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 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랴” 하였다. 그때에 제학 강희안(姜希顔)이 이에 관련되어 고문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묻기를, “강희안이 그 역모를 아느냐.” 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실지로 알지 못한다. 나으리가 선조(先朝)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아직 남겨 두어서 쓰게 하라.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 하여, 강희안은 마침내 죄를 면하였다. 성삼문이 나갈 때에 좌우 옛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성세를 이룩하라.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 하였다. 수레에 실릴 때에 임하여 시를 지어 이르되,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 擊鼓催人命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回頭日欲斜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하나 없으니 / 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 今夜宿誰家

하였다. 그 딸이 나이 대여섯 살쯤 되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 하였다. 그 종이 울며 술을 올리니, 몸을 굽혀서 마시고 시를 지어 이르되,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 입었으니 / 食人之食衣人衣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 所一平生莫有違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 一死固知忠義在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 속에 아른아른 / 顯陵松柏夢依依

하였다. 《추강집》에는 성 승의 시라 하였다 죽은 뒤에 그 집을 적몰하니, 을해년(1455) 이후의 녹봉을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아무 달의 녹이라 적어 놓았다. 집에는 남은 것이 없고, 침방에는 짚자리가 있을 뿐이었다. 이 개도 수레에 임하여 시를 지어 이르되,

삶[生]이 우(禹)의 구정(九鼎)처럼 중히 여겨야 할 경우에는, 삶도 또한 중요하거니와 / 禹鼎重時生亦大
죽음도 기러기 털처럼 가벼이 보아야 할 경우에는 죽음도 영화로세 / 鴻毛輕處死有榮
두 임을 생각하다가, 성문 밖을 나가노니 / 明發不寐出門去
현릉(顯陵)의 솔빛만이, 꿈속에도 푸르러라 / 顯陵松柏夢中靑

하였다. 박팽년 등의 벤 머리를 모두 달아매어 돌렸다. 《해동야언》에는 박팽년은 옥중에서 죽었다 하였다. ○ 형벌에 임하여 김명중(金命重)에게 얘기한 말로 보면, 옥중에서 죽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유성원은 그 때에 사예(司藝)로 성균관에 있었는데, 여러 선비들이 성삼문의 일을 고하니, 곧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영결하고, 사당으로 올라갔다. 그 아내가 오래 내려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가보니, 관디를 벗지 않고 반듯이 누워서 찬 칼을 빼어서 목에 대고 나뭇 조각으로 칼자루를 쳐서 목에 칼을 박았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아내는 그 까닭을 몰랐는데, 조금 있다가 관청에서 나와 시체를 가져다가 찢었다. 《추강집》 《동각잡기》
곤장을 때리면서 그 일당들을 국문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김문기(金文起)ㆍ권자신(權自愼)ㆍ송석동(宋石同)ㆍ윤영손(尹鈴孫)ㆍ이 휘(李徽) 및 우리 부자라.” 하였다. 사람을 시켜 묻기를, “상왕도 또한 아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권자신을 시켜 통지하였다.”고 말했다.이에 권자신ㆍ김문기 등 칠십여 인을 차례로 잡아 국문하고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여 하나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허조(許慥) 허후(許詡)의 아들는 이 개의 매부로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스스로 목찔러 죽었다. 《해동야언》
○ 동학사(東鶴寺) 《초혼기(招魂記)》에 말하기를, 이개(李塏) 공회(公澮)ㆍ박팽년(朴彭年) 헌(憲)ㆍ순(珣)ㆍ분(奮)ㆍ파(波)ㆍ녹대(彔大)ㆍ개동(丐同)ㆍ흔산(欣山)ㆍ금년생 여덟 사람ㆍ성삼문(成三門) 맹첨(孟瞻)ㆍ맹년(孟年)ㆍ맹종(孟終)ㆍ헌택(憲澤)ㆍ금년생 일곱 사람ㆍ하위지(河緯池) 연(璉)ㆍ반(班)ㆍ유성원(柳誠源) 귀련(貴連)ㆍ송련(松連)ㆍ박중림(朴仲林) 박팽년의 아버지ㆍ대년(大年)ㆍ기년(耆年)ㆍ영년(永年)ㆍ인년(引年) 박팽년의 아우ㆍ권자신(權自愼) 구지(仇之)ㆍ김문기(金文起) 현석(玄錫)ㆍ성 승(成勝)ㆍ삼고(三顧)ㆍ삼빙(三聘)ㆍ삼성(三省) 성삼문의 아우ㆍ유응부(兪應孚) 사수(思守)ㆍ박 정(朴崝) 숭문(崇文)ㆍ계남(季男)ㆍ즉동(則同)ㆍ윤영손(尹鈴孫)ㆍ송석동(宋石同) 창(昌)ㆍ녕(寧)ㆍ안(安)ㆍ태산(太山)네 사람ㆍ이유기(李裕基) 은산(銀山)ㆍ심신(沈愼) 올미(㐚未)ㆍ권서(權署)ㆍ권저(權著)ㆍ최사우(崔斯友)ㆍ정관(鄭冠)ㆍ봉여해(奉汝諧) 유(細)ㆍ김감(金堪) 한지(漢之)ㆍ선지(善之)ㆍ이호(李昊) 성손(成孫)ㆍ무손(茂孫)ㆍ이지영(李智英) 사이(思怡)ㆍ이의영(李義英)ㆍ장귀남(張貴南) 충(冲)ㆍ이말생(李末生)ㆍ이오(李午) 철(鐵)ㆍ금(金)ㆍ심상좌(沈上佐)ㆍ황선보(黃善寶)ㆍ조청로(趙淸老) 영서(榮緖)ㆍ이휘(李徽)ㆍ김구지(金九知)ㆍ이정상(李禎祥)ㆍ최치지(崔致地)ㆍ득지(得地)ㆍ허조(許慥) 연령(延齡)ㆍ구령(九齡)
○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부인 최씨(崔氏)는 곧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어머니인데, 그 아들 권자신 예조 판서 과 더불어 극형을 받았다. 《해평가전(海平家傳)》
○ 성희(成熺 성승의 종제이고 참판 격(檄)의 손자)는 집현전에 벼슬하였는데, 성삼문과 마음이 같았다. 열 차례나 엄하게 국문하였으나,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김해(金海)로 귀양 갔다가 3년 후에 풀려나 돌아왔는데, 슬프고 분하여 홧병으로 죽었다. 성종때에 도승지 채수(蔡壽)가 천변(天變)을 기회로 아뢰어 병자 옥사에 연좌된 수백 인을 소방(疏放)하였다. 용재집
○ 정창손과 김질의 죄를 특별히 사하여 공신을 삼아서, 정창손은 좌익(佐翼) 삼등에서 이등에 승진하고, 김질은 좌익 삼등으로 추록(追錄)하였다. 김질이 사예(司藝)로서 고변하고 군기정(軍器正)으로 칠월에 녹훈하였다.
○ 명하여 집현전을 파하고, 그곳에 있는 서책을 예문관(藝文館)으로 옮겼다.
○ 정보(鄭保)를 연일(延日)에 귀양보냈다. 정보의 성질이 방랑하여 구속을 받지 않으며, 성삼문ㆍ박팽년과 사이가 좋았다. 그 서매(庶妹)가 한명회의 첩이 되었는데, 육신의 옥이 일어날 때에, 한명회의 집에 가서 묻기를, “공이 어디 갔는가.” 하니, 누이가 말하기를, “죄인을 국문하느라고 대궐에 있습니다.” 하였다. 보가 손을 내두르며 말하기를,“그들이 무슨 죄인인가. 공이 만일 이 사람들을 죽이면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고, 곧 옷을 떨치고 가버렸다. 한명회가 집에 돌아와서 그 말을 듣고 곧 입궐하여 아뢰기를, “정보가 난언(亂言)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친히 국문하니, 아뢰기를, “항상 성삼문ㆍ박팽년을 성인 군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였다.좌우가 아뢰기를, “제가 이미 자백하였으니, 처형하소서.” 하였다. 세조가 거열형을 명하고 나서 묻기를, “이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가 아뢰기를, “이는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하였다. 급히 명하여 처형을 그치게 하고 이르기를, “충신의 후손이니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연일현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병자록(丙子錄)》
한명회가 정보의 서매를 첩으로 삼고, 노비 삼십 구(口)를 주었는데, 한명회가 생각하기를, 노비를 적게 준다고 원한을 품었나 생각하였다가 이 때에 와서 고변(告變)하였던 것이다. 원손 이규(李珪)가 격쟁(擊錚)하여 원통함을 호소하고 이어서 양사(兩司)가 그 원통함을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 사람을 죽이면 자문(子文)의 후손을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므로, 죽이는 것을 감하여 단성(丹城)으로 귀양보냈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대간이 전라 감사 이석형(李石亨)을 국문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석형이 세종조에 삼장원(三壯元)에 올라 명성이 한때에 으뜸이 되었는데, 성삼문ㆍ박팽년 등 여러 사람과 절친하였다.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 마침 내간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자,전라 감사를 제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옥사가 일어났으나, 외임인 까닭으로 연루되지 않았다. 순찰 중에 익산(益山)에 이르러 여러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 벽 위에 시를 써 이르되,

우(虞) 나라 때 이녀죽(二女竹)과 / 虞時二女竹
진(秦) 나라 때 대부송(大夫松)이로다 / 秦日大夫松
비록 그 슬픔과 영화로움의 차이는 있을망정 / 縱有哀榮異
같은 절개는 대와 솔이 염량(炎凉)이야 있을소냐 / 寧爲冷熱容

하고, 병자 6월 27일 작(作)이라고 썼다. 대간이 시의 뜻을 가지고 국문하자고 아뢰어 청하니, 세조가 시를 보고 이르기를, “시인의 뜻이란 것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니, 어찌 반드시 국문까지 하랴.” 하니, 일이 드디어 끝나고 말았다. 《해동악부(海東樂府)》 <월사집비(月沙集碑)>
○ 상왕이 별궁에 있는데, 성삼문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니, 정인지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지난번에 성삼문들의 음모를 상왕이 미리 알아서 종사에 죄를 얻었으니, 그대로 상왕의 위호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일찍 도모하여 후환을 막으소서” 하였다. 《영남야언(嶺南野言)》
○ 6월 21일 계축 《야사(野史)》에는 병자(1456) 6월이라 하였고, 《국승(國乘)》에는 정축 6월이라 하였다. 에 백성 김정수(金正水)가 제학 윤사균(尹士昀)에게 말하기를, “판돈령(判敦寧) 송현수(宋玹壽)와 판관(判官) 권완(權完)이 반역을 꾀한다.” 하였다.윤사균이 그대로 아뢰니, 세조가 정인지ㆍ정창손ㆍ신숙주ㆍ박중손(朴仲孫)ㆍ홍달손(洪達孫)ㆍ홍윤성(洪允城)ㆍ윤사로(尹師路)ㆍ이인손(李仁孫)ㆍ양정(楊汀)ㆍ권람(權擥)ㆍ구치관(具致寬)ㆍ황효원(黃孝源)ㆍ한명회(韓明澮)ㆍ조석문(曺錫文)ㆍ권지(權摯)ㆍ김질(金礩) 등을 불러들여, 송현수(玹壽)와 완(完)을 금부에 가두었다. 《금석일반》 ○ 권 완의 딸이 상왕의 후궁이었다.
○ 갑인에 혜성(彗星)이 보였다.
○ 26일 무오일에 현덕왕후를 추폐(追廢)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 교지를 내리기를, “전일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하므로, 종친 백관이 말을 합하여, ‘상왕이 종사(宗社)에 죄를 얻었으니, 서울에 편안히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내가 굳이 윤허하지 않은 것은 나의 처음 뜻을 보전하려 한 것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무리가 뒤를 이어 끝나지 않으니,내가 어찌 사사로운 정의로 큰 법을 굽히어 하늘의 명령과 종묘 사직의 중함을 돌아보지 아니하랴. 특별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영월(寧越)에 출거(出居)케 하였으며, 의식을 후하게 주어 목숨을 끝까지 보존토록 하고 나라의 인심을 진정케 하노니, 너희 정부는 안팎에 이를 깨우쳐 일러 주라.” 하였다.28일 경신일에 상왕을 강봉하여 노산군으로 봉하여 첨지 어득해(魚得海)에게 명하여 군사 50명으로 호송하고, 군자정(軍資正) 김자행(金自行)과 내시 부사(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이 따라갔다. 금성대군 유(瑜)를 순흥부(順興府)에 안치하였다. 《금석일반》
《실록》에 말하기를, 병자 12월에 영상 정인지ㆍ우상 정창손ㆍ찬성 신숙주ㆍ참찬 황수신(黃守身) 등이 아뢰기를, “지금 상왕이 임금과 명위(名位)가 서로 같으므로, 소인들이 틈을 타서 반란을 꾀하는 자가 있으니, 근일의 성삼문의 난이 그것입니다. 다른 곳에 피거(避居)하게 하여 간특한 일을 막으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전교하였다.
○ 이판 권람ㆍ호판 이인손(李仁孫)ㆍ예판 박중손ㆍ병판 홍달손ㆍ형판 성봉조ㆍ공판 김하ㆍ이참 박원형(朴元亨)ㆍ호참 어효첨(魚孝瞻) 등이 아뢰기를, “상왕으로 하여금 피거(避居)하게 하여 혐의를 끊게 하소서.” 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 정인지 등이 다시 아뢰기를, “비록 친부자간이라도 만일 혐의스러운 일이 있으면 오히려 피하는 것이오니, 신들의 청을 따라서 종사의 대계를 굳게 하소서.” 하였으나 전교하기를, “중국에 정통(正統)의 고사(故事)가 있고, 또 내 뜻이 본래 이와 같지 않으니, 경들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고 잇달아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 대사헌 안숭효(安崇孝)와 좌사간 권개(權愷) 등이 아뢰기를, “이 개의 무리가 복위를 꾀하여 상왕을 끼고서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 하였는데, 상왕도 참여하여 들었으니, 종사의 대계에 있어서 어떻게 합니까. 상왕이 마땅히 궁에서 피하여 외부로 옮기어 공론을 따라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왕이 영월을 향하여 떠나는데, 세조가 환관 안로(安潞)를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였다. 상왕이 안로에게 이르기를, “성삼문의 모의를 내가 알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금석일반》
7월에 금부도사 그 이름은 잃었다. 가 노산군을 영월 서강 청령포(淸泠浦)에 모셔다 두고 밤에 곡탄(曲灘) 언덕 위에 앉아 슬퍼서 노래를 지었는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맘 같도다. 울어 밤길 예도다.” 라 하였다. 《병자록》 ○ 김용계(金龍溪) 지남(止男)이 금강에 이르러 여랑(女娘)의 슬픈 노래를 들었는데, 대개 도사의 지은 것이었다.
○ 조금 뒤에 객사(客舍) 동헌(東軒)에 옮겨 거처하였는데 민간의 말에 전하기를 청령포(淸泠浦)는 수재(水災)를 입을 염려가 있으므로, 객사로 옮겼다 한다. 매양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앉아 밤에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매, 소리가 먼 마을까지 들렸다. 또 매죽루 아래에서 근심스럽고 적적하여 짧은 글귀를 읊기를,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딴데는 월욕저촉혼제(月欲低蜀魂啼)라 하였다. / 月白夜蜀魂啾 一作月欲低蜀魂啼
시름 못 잊어 딴 데는 상사억(相思憶)이라 하였다. 다락에 기대었네 / 含愁情 一作相思憶 倚樓頭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딴 데는 이성고 아심비라 하였다. / 爾啼悲我聞苦 一作爾聲苦我心悲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 / 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 / 寄語世上 一作爲報天下 苦勞 一作惱
춘삼월 자규루(子規樓)엘랑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 / 愼莫登春三月子規樓 一作春三月子規啼山月樓

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시를 지어 이르되,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단신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 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 청하나 잠들 길 바이 없고 / 假眠夜夜眠無假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 窮恨年年恨不窮
울음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그믐달이 비추고 / 聲斷曉岑殘月白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꽃 붉게 떨어지는구나 /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 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 天聾尙未聞哀訴
어쩌다 서러운 이 몸 귀만 홀로 밝았는고 / 胡乃愁人耳獨聰

하였다. 매양 맑은 새벽에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를 입고 걸상에 앉아 있으면 보는 자가 일어나서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내가 가물 때 향을 피워 하늘에 빌면 비가 쏟아졌다. 《병자록》 《전화적책(前火迹冊)》 《추강냉화》 《송와잡기(松窩雜記)》
○ 세조가 강원 감사 김광수(金光晬)에게 이르기를, “노산군에게 사철 과실이 나는 대로 연달아 보내주고, 원포(園圃)를 설치하여 참외ㆍ수박ㆍ채소 같은 것을 많이 준비하여 지공(支供)하며, 달마다 수령을 보내어 문안하게 하라.” 하고, 내시부 우승직(內侍府右承直) 김정(金精)을 보내어, 노산에게 문안하였다. 《장릉지(莊陵志)》
상고해 보건대, 상왕을 금성(錦城)의 집으로 내보내고, 상왕을 강봉하여 영월에 안치하자고 청한 두 일을, 《국승(國乘)》에는 모두 정축년(1457)이라고 실려 있는데, 《현덕왕후 천장지(遷葬誌)》에는 병자년(1456)이라고 하였고, 성삼문 등이 피살되고, 노산을 군으로 강봉하여 밖으로 내보냈다는 그 밑에 또 명년 정축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강봉하여 지방으로 쫓아낸 것은 실상 병자년 옥사가 이루어지던 날에 있은 것이니, 야사에 기록된 것이 《해동야언》과 《논사록(論思錄)》에는 모두 성삼문의 일이 발각된 뒤에 노산을 옮겼다고 하였다. 대개 모두 거짓말이 아니다. 《금석일반(金石一班)》에 실린 노산이 안로(安潞)에게 고한 말은, 노산의 죄를 성립시킨 것이나, 성삼문이 죽은 뒤에 영월로 옮긴 증거가 되는 것이다.또, <춘삼월 자규루> 시와 날이 가물어서 비를 빈 두 가지 일로 참작하여 보면, 영월로 옮긴 것은 이미 정축년 봄 전에 있은 것이 분명하다. 이에 《소릉지(昭陵誌)》로 증거를 삼아서 금성의 집으로 나간 것과 영월로 옮긴 사실을 병자년에 실어 둔다. 《실록》에는 두 가지 일을 모두 정축년에 실어 놓았는데, 음애(陰崖)가 말하기를,“이것은 특히 여우와 쥐 같은 무리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기록으로서 후일에 실록을 편찬한 자들이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니, 실록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하였다. 《노릉지》

[주D-001]불궤 : 반역(反逆)을 말한다.
[주D-002]격쟁 : 지극히 원통함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하소연하려 할 때, 거동하는 길가에서 꽹과리를 치며 하문(下門)을 기다리는 일.
[주D-003]진문 : 초(楚) 나라의 어진 신하인데 그의 조카가 반역하였으므로 그 일족(일족)을 멸하는데 자문의 아들도 죽게 되었더니 초왕(楚王)이 “자문이 없으면 어찌 선(善)을 권하랴” 하고 그의 아들을 용서하였다.
[주D-004]이녀죽(二女竹) : 우순(禹舜)이 남방(南方)에 놀러 갔다가 죽어 그의 두 비(妃)가 소상강(瀟湘江)에서 슬피 울어 눈물이 대숲에 뿌려져 반죽(班竹)이 되었다. 열녀(烈女)의 상징(象徵)이다.
[주D-005]대부송(大夫松) :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놀러 갔다가 도중에 비를 만나 다섯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였다. 그 소나무에게 대부(大夫)의 벼슬을 주었다.
[주D-006]자규새 : 자규(子規)는 두견새인데, 일명(一名)은 두우(杜宇)라고 한다. 전설(傳說)에 촉 나라 임금 두우가 신하에게 쫒겨나와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으므로 우는 소리가 ‘귀촉도 불여귀(歸蜀道不如歸)‘라 한다.
 용재집(容齋集) 행장(行狀)
 행장(行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세자부(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世子傅) 이공(李公) 행장 [주세붕(周世鵬) 찬(撰)]

공의 휘(諱)는 행(荇), 자(字)는 택지(擇之)이고 호는 용재(容齋)이며 세계(世系)는 덕수현(德水縣)에서 나왔으니, 그 땅이 지금은 경기도 풍덕군(豐德郡)에 속한다.
팔대조(八代祖)인 휘 소(劭)는 고려조에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자금어대(紫金魚帒)를 하사받았고 지삼사사(知三司事)가 되었으며, 칠대조(七代祖)인 휘 윤온(允蒕)은 벼슬이 민부 전서(民部典書)에 이르고 첨의정승(僉議政丞)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육대조(六代祖)인 휘 천선(千善)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기씨(奇氏)를 주벌하는 데 공을 세워 벼슬이 수사공주국(守司空柱國) 낙안백(樂安伯)에 이르고 시호는 양간(良簡)이며, 오대조(五代祖)인 휘 인범(仁範)은 벼슬이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고조인 휘 양(揚)은 벼슬이 공조 참의에 이르고 공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증조인 휘 명신(明晨)은 벼슬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조부인 휘 추(抽)는 벼슬이 지온양군사(知溫陽郡事)에 이르렀고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左贊成兼判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의무(宜茂), 자가 형지(馨之)이고 호가 연헌(蓮軒)으로, 타고난 바탕이 순정(醇正)하여 남을 성심(誠心)으로 대하고 심한 애증(愛憎)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며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고 겉모양을 꾸미지 않아 인품이 그야말로 후련히 틔었다. 정유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성묘(成廟)께서 바야흐로 예의(銳意) 문치(文治)에 힘써 대궐 뜰에서 문사(文士)를 시험하실 때 연이어 세 차례나 장원을 차지하여, 특명으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고 이조 정랑을 역임, 사헌부에 올라 집의가 되고 옥당(玉堂)을 밟아 응교가 되고 미원(薇垣 사간원(司諫院)의 별칭)에 들어가 사간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연산조(燕山朝)를 만나는 바람에 큰 그릇을 지니고도 크게 베풀지 못하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포부를 펴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겼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는 붓을 쥐면 이내 이루었고 문집(文集)을 남겼다. 벼슬이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이르러 졸(卒)하였고,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지온양군사 이하의 증직(贈職)은 공이 존귀하게 됨으로 해서 은택을 추급(推及)한 것이다. 모친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으니,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문숙공(文肅公) 휘 석용(石瑢)이 증조이고, 경기 도관찰출척사(京畿都觀察黜陟使) 휘 개(槪)가 조부이며, 교서관 교리 증 예조참판 휘 희(熺)가 부친이다. 이렇게 적선(積善)이 융숭한 내외의 두 덕문(德門)이 만나서 한 집안을 이루었으니, 여경(餘慶)의 조짐에 부합한다 하겠다. 이에 5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 중 맏이는 권(菤)으로 기유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節度使)에 이르렀고, 그다음은 기(芑)로 신유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재 좌의정이고, 그다음이 공이고, 그다음은 영(苓)으로 경오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해 군수(平海郡守)에 이르렀고, 그다음은 미(薇)로 을해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재 대사헌이다. 1녀는 곧 찬성(贊成) 조공(曺公) 계상(繼商)의 부인이다.
공은 성화(成化) 무술(戊戌) 5월 임오(壬午)에 출생했는데, 겨우 이를 갈 어린 나이 때부터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밤을 낮 삼아 공부하였으며, 놀이와 장난을 좋아하지 않아 마치 성인(成人)과도 같았다.
홍치(弘治) 을묘년에 공의 나이 열여덟이었는데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뽑혔다.
정사년 겨울,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선임되었고 다시 봉교(奉敎)로 전보되었다. 이때 선배들이 나이가 어리다고 자못 소홀히 여기다가, 공이 초고(草稿)를 작성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기미년 봄, 성묘 실록(成廟實錄)을 편수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가을에 관례에 따라 성균관전적 겸 남학교수에 제수되었다.
경신년 4월,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갔고, 가을에 홍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을 배수(拜受)하였다.
신유년에는 논사(論事)로 인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임술년 봄,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세자시강원 사서로 전보되었다.
계해년 여름, 사헌부 지평을 배수하고 9월에는 홍문관 부교리로 승진됨과 동시에 관례에 따라 겸직(兼職)을 띠었으며, 이윽고 교리로 승진되었다.
갑자년 봄,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었고 다시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이때 연산주(燕山主)가 황란(荒亂)하여,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사약을 받고 죽은 데 깊이 유감을 품고 선조(先朝)의 구신(舊臣)들을 거의 다 죽이고, 또 윤씨를 추숭(追崇)하여 그 휘호(徽號)를 극진히 높이고자 조정에 의논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윤당(允當)하다고 했으나 공만은 동료들과 함께 이의를 제기하여 “추승의 의전(儀典)이 예(禮)에 이미 극진하니, 지금에 와서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연산주가 크게 노하여 하옥(下獄)하고 국문하여 장차 논의의 주동자를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죄를 면하고자 극력 변명해 마지않았으나 오직 공만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한마디 변명도 없었다. 형제 친척들이 스스로 해명할 것을 다투어 권하자 공은 말하기를 “죽음은 명(命)이다. 어찌 차마 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구차히 삶을 훔치리오.” 하였다. 이때 응교 권공(權公) 달수(達手)가 외지에서 체포되어 아직 도성에 당도하지 않았었는데, 당도하여서는 말하기를 “의론을 주창한 자는 나이지, 이(李) 아무개가 아니다.” 하였다. 이에 권공은 죽고 공은 장형(杖刑)을 받은 다음 충주(忠州)로 유배되니, 사람들은 모두 권공을 칭찬하는 한편 죽음이 임박해도 흔들리지 않는 공의 의연한 모습에 탄복하였다.
6월에 또 수찬 박은(朴誾)의 사안(事案)에 연좌되어 재차 장형을 받고 다시 유배되었으며 관례에 따라 부역에 충원(充員)되었다.
가을 9월, 다시 조정이 전의 사안을 논의하여 뒤미처 포박하여 고문하는 통에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고, 겨울 12월에 이르러 사형에서 감면(減免)되어 장형을 받고 영남 함안군(咸安郡)의 관노(官奴)로 귀양가게 되었다.
을축년 봄 정월에야 비로소 배소(配所)에 당도하였고, 가을 8월에 또 익명서(匿名書)의 옥사로 인하여 포박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인 병인년 봄 정월에 이르러 거제도로 귀양을 떠나 2월에야 배소에 당도, 고절령(高絶嶺) 아래에서 가시 담을 두르고 살았다. 이해 가을 또 포박하여 죽을 때까지 곤장을 치라는 명이 떨어져 거의 압송 길에 오르려던 차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만나 사면되었다.
당초 연산군이 조정의 선비를 주륙(誅戮)하여 그냥 무사히 보낸 날이 없었다. 공이 전후로 체포되어 장형을 받고 유배됨에 그 형벌이 너무도 참혹하여 친척들이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한마디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모두 “필시 극형을 면치 못하리라.” 하였지만 공은 역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책 읽기를 쉬지 않았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말라고 만류하면 공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으리오.” 하였다.
병인년 9월, 중묘(中廟)가 즉위하여 공을 홍문관 교리로 소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은 승진하여 부응교가 되었으며, 또 어명을 받고 정업원(淨業院)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정묘년 가을, 어명을 받고 강원도 향시(鄕試)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강릉(江陵)으로 갔고, 9월에는 응교로 승진하였으며, 12월에는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경오년 2월, 상기(喪期)가 끝나 성균관 사예에 제수되었고 4월에는 홍문관부응교 겸 예문관응교를 배수(拜受)하였으며, 이윽고 의정부검상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다. 7월에는 승진하여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이 되었다. 구례(舊例)에 사인(舍人)은 도당 낭청(都堂郞廳)을 맡아서 반드시 당시의 이름난 미색(美色)을 뽑아 연정회(蓮亭會)를 만들게 되어 있었는데, 공이 사인이 되자 어떤 사람이 벽에 글을 써 붙이기를 “도리(桃李)가 꽃이 없나니, 이(李) 아무개가 중서당(中書堂)에 들어왔다네.” 하였으니, 이는 공이 여색(女色)을 멀리함을 말한 것이다. 사림(士林)은 이 사실을 입에서 입으로 옮기며 비웃었지만 공은 종신토록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자기를 다스림에 엄격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신미년 5월, 봉상시 부정 지제교 겸 승문원참교에 제수되었고, 9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다.
계유년 11월, 상기(喪期)가 끝나 성균관 사예 지제교에 제수되었는데, 이후로는 늘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갑술년 3월에 사성(司成)으로 승진되었고, 11월에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다.
을해년 2월에 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에 제수되었고, 6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특별히 제수되고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공은 오래도록 하급 관료에 묶여 있었던 터라, 이러한 조명(朝命)이 내렸다는 소문이 들리자 사림이 서로 경하하였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상소하여, 폐빈(廢嬪) 신씨(愼氏)로 왕비의 자리를 잇기를 청하니, 외간의 의론이 흉흉하여 모두 이에 찬동하였다. 이때 공이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홀로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이는 안 될 일이니, 응당 죽음으로써 반대하겠다.” 하고 힘써 간쟁(諫爭)하니, 그 주장이 마침내 그치게 되었다. 이에 상께서 지금의 우리 대비(大妃)를 친영(親迎)하셨던 것이다. 당시 사리를 알지 못하는 자가 공을 두고 말하기를,
“박상 등을 국문(鞫問)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사림을 모해(謀害)하려는 것이다.”
하니, 공은 말하기를,
“연산주(燕山主)가 모비(母妃)를 위하다가 도리어 우리 선왕(先王)을 원수로 삼아 조정 신료들을 도륙하여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한 지경에 빠졌었다. 신수근(愼守勤)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그 아비를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세워 패망의 전철을 밟는다면, 이 나라 사직은 어찌되겠는가. 참으로 국가 대사(大事)를 위해 그 불가함을 극언한 것일 뿐이니, 어찌 이들을 사지(死地)에 몰아넣고 싶어서이겠는가. 차라리 이러한 구설(口舌)을 내가 달게 받을지언정 종묘사직을 차마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언사(言事)로 인하여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고, 12월에 홍문관 부제학을 배수하였다.
병자년 겨울, 칭병(稱病)하여 사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으니,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정축년 봄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고, 여름에 다시 조정에 들어와 부제학이 되었으며, 6월에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사은(謝恩)하던 날 상께서 공에게 전지(傳旨)를 내리시기를 “부제학으로 있다가 대사성이 되는 것은 예전에는 이러한 예(例)가 없었는데, 다만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 중요하기에 특별히 제수한다.” 하였다. 7월에 승정원좌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제수되었고, 8월에 도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으로 승진되었으며, 이달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에 특별히 배수되었다.
당초에 신진(新進)들이 제도를 개혁하고 자기네 주장만 내세우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이 이에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 않자 이로 말미암아 이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과연 이들이 대간에게 글을 보내어, 국사(國事)를 그르쳤다고 공을 논죄(論罪)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9월에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공은 태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일신의 진퇴에 어찌 구차할 수 있겠는가. 고향으로 돌아가 살면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나의 뜻이다.” 하고는, 이튿날 필마(匹馬)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면천(沔川)의 창택촌(滄澤村)에 우거하면서 자호(自號)를 창택어수(滄澤漁叟)라 하였다. 공은 생업을 일삼지 않았는데, 처음 면천에 우거할 때 백형(伯兄)인 절도공(節度公)이 공의 군핍함을 듣고 곡식 2백 섬을 주자 공이 말하기를 “제가 만약 굶주린다면 형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곡식을 가져다 먹겠습니다.” 하고는, 끝내 한 섬도 가져가지 않았다.
이때 수원 부사(水原府使) 이성언(李誠彦)이 상소하여 공의 억울함을 변론하였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았으며, 성균관의 유생들 역시 소장을 올려 변론을 진달하려 하였으나 안처겸(安處謙)에 의해 저지되니, 식자(識者)들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공이 떠남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이조차 있었다.
무인년 정월, 병조 참지에 제수되어 애써 명에 따라 부임하였다가 곧 병으로 사직하고 면천으로 돌아왔으며, 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묘년 겨울, 조정 여론이 다소 진정되어, 12월에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됨에 소환하라는 어지(御旨)가 있었다.
경진년 정월,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수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공은 당초에 기묘년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의 배척을 받았으나 조정에 소환되어서는 말하기를 “기묘년의 과오는 재상의 허물이다. 세상일에 경험이 없는 연소한 이들에게 갑작스레 높은 자리를 주어 마음대로 분란(紛亂)을 피우도록 방임하고서 재제(裁制)를 가하지 않았으니,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도리어 재상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2월에는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고, 10월에는 세자 우부빈객을 겸임하였으며, 가을에는 증고사(證考使)가 되어 호남과 영남으로 갔다.
신사년 정월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특별히 제수되어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세자좌부빈객이 되고 나머지 직함은 이전과 같았으며, 이윽고 또 의정부 우참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황제가 즉위함에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당고(唐皐)와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사도(史道)를 보내 등극(登極)의 조서(詔書)를 반포하게 하였는데,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아 국경에서 이들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때 왕복하는 길에 중국 사신들과 수창(酬唱)하여 깊이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당시 현재의 좌상(左相)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었는데, 두 중국 사신이 공의 형수(荊樹)가 번성하단 말을 듣고 오성(五星)의 설(說)에다 지목해 찬미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우리 전하가 조서를 영접한 뒤 연(輦)을 타고 환궁(還宮)하기로 한 것을 비례(非禮)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사례에 의거하여 말하자 두 중국 사신이 대뜸 노한 기색을 띠고 말하기를,
“우리는 오로지 예(禮)를 숭상하고자 하는데, 참찬(參贊) 또한 이런 말을 하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지금 교외(郊外)에서 조서를 기다려 조정의 예를 공경히 행하고 계시니, 대인(大人)께서도 절로 보게 되실 것입니다.”
하니, 상사(上使)가 기쁜 기색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참찬의 정성과 공경으로 인하여 국왕의 정성과 공경을 이미 잘 알았소.”
하였다. 이때 중국의 상사는 천하의 정인(正人)이었는데, 매양 공의 사람됨과 시편(詩篇)에 탄복하여 시단(詩壇)의 노장(老將)이라 칭찬하고는, 경솔히 시를 지어 수작하지 말고 신중하도록 부사(副使)에게 경계하였다.
계미년에 좌참찬으로 승진하였고, 10월 25일에 왕세자가 입학(入學)하자 공을 박사관(博士官)으로 삼았다. 박사관은 곧 사부(師傅)의 직임으로 반드시 일대의 석유(碩儒)를 뽑게 되어 있었는데, 공은 강론할 때 응답하는 말이 모두 남들의 의표(意表)를 뛰어넘었다. 세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묻자, 공은 “지금 물으실 바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이어 효경(孝敬)의 도를 진달하니, 논자(論者)가 “사체(事體)를 제대로 알았다.”고 탄복하였다. 가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로 승진하였으며, 나머지 직함은 이전과 같았다.
하루는 공이 헌(軒)을 타고 대궐로 가는 길이었는데, 유생 배순(裵珣)이란 사람이 걸어가다가 경복궁 비석 모퉁이에서 공을 만났다. 배순이 몸을 숨기고 엿보니 공이 소매로 눈물을 닦아 양쪽 눈이 모두 붉어져 있기에 몹시 괴이쩍어했는데, 가다가 어떤 사람이 형(刑)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공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운 것임을 알았다. 이 사실을 들은 사람은 말하기를 “공의 이러한 마음은 곧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天地)의 마음이다. 세상에서 공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록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공을 헐뜯지만, 이 어찌 사실이겠는가.” 하였다.
갑신년 여름, 이조 판서에 특별히 제수됨에 인재 전형이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한 기준에서 나와 흠잡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언자(言者)가 “주상(主上)의 덕화를 크게 펼치는 데 궐위(闕位)가 있다.” 하여, 가을에 다시 좌찬성이 되었다.
정해년 10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무자년 봄, 만포 첨사(滿浦僉使) 심사손(沈思遜)이 야인(野人)에게 살해되었는데, 휘하의 사졸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상관을 구원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러한 자들을 주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법을 보이리오.” 하였다. 조정은 끝내 그들의 죽음을 면해 주었으나 논자(論者)들은 모두 공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중묘(中廟)께서 바야흐로 불끈 노하여 예의(銳意) 서쪽으로 오랑캐를 토벌하려 하시니, 조정 의론이 대다수 찬동하여 이에 허굉(許硡)을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공은 홀로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극간(極諫)하여 충성에서 우러나온 주장을 반복하기를 마지않았으니, 그 말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그 대요(大要)를 말하자면, 군사를 일으켜 전쟁하는 것은 흉험(凶險)하고 위태하여 만전(萬全)을 보장하기 어려우며, 설사 허굉을 장수로 삼아 비록 필승에 만전을 기한다 하더라도 이미 승리한 뒤에는 또 허굉을 시켜 지키게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렇게 되면 변방의 우환이 끝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서북쪽 변방의 창생(蒼生)들이 지금껏 어육(魚肉)이 됨을 면한 것은 실로 공의 충간(忠懇) 덕택인 것이다.
9월에 상께서 여주(驪州)로 행행(行幸)하실 때 공은 유도 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경인년 겨울, 좌의정 겸 세자부가 되고 나머지 직함은 이전과 같았다.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상(喪)이 났을 때 선릉(宣陵) 남쪽 산기슭에 묘소를 잡았는데 예조가 관례에 따라 다시 살펴서 터를 정하기로 하였다. 당시 풍수(風水)로 이름난 자가 있어, 동료들이 계청(啓請)하여 그를 데리고 가고자 하니, 공이 “불가하다.” 하였다. 동료들이 억지로 계청하려 하자, 공은 의연히 말하기를 “이러한 무리는 자기 재주를 부리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 만약 그가 지금 잡아 놓은 터를 보고 못 쓴다고 한다면 장차 터를 바꾸어 다른 곳을 잡을 것인가.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뒤에 말이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그 풍수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당시 상국(相國) 홍언필(洪彦弼)이 예조 판서였는데 그 후 중종의 상을 당했을 때 이미 정릉(靖陵)으로 터를 잡아 놓았음에도 윤림(尹霖)이 삿된 말로 조정을 선동하는 바람에 능침을 만드는 큰 역사(役事)가 장차 시작되려다 결정을 보지 못한 것이 여러 날이었다. 이에 홍 상국이 그 일에 이야기가 미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용재(容齋)의 일에 대한 요량은 참으로 따를 수 없구나. 이공(李公)이 만약 지금 있다면 필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복성군(福城君)이 세자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노부(老夫)를 죽이지 않고는 어떠한 동요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하니, 듣는 이들이 흠칫 두려워하였다.
공은 조정의 형세가 점점 위미(委靡)해 가는 것을 보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항상 근심하여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 매양 상께 진언하기를 “위력과 권세가 누구에게 있는지 살피소서.” 하였으니, 대개 지목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신묘년 10월, 김안로(金安老)를 논죄한 일로 인하여 판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로 좌천되었다. 당초에 공이 김안로와 한림원(翰林院)에 함께 있고 독서당(讀書堂)에 함께 들어가 서로 마음을 터놓는 좋은 사이로 지낸 지 오래되었다. 남문경(南文景)이 조정 신료들을 대동하고 김안로를 유배하자고 청할 때 공은 홀로 “명분 없이 재상을 쫓아내면 폐단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하면서 눈물로 전송하였는데, 남문경이 이 사실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관후(寬厚)하여 남을 너그럽게 포용하는지라 이 사람이 간사한 줄을 알지 못하니, 아무래도 필시 그에게 기만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이치상 김안로와 똑같이 문책해야 하겠지만 이공 같은 이는 흉중이 평탄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으니, 진실로 이러한 죄목으로 문책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자, 그 아들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가 연거푸 그 아비의 원통함을 상주(上奏)하여 삼공(三公)이 수의(收議)하게 되었다. 당시 공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김안로가 애초에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썼고 지금은 또 세월이 오래 흘렀으니, 응당 상께서 짐작하실 일이다.” 하였으니, 공의 생각은 대개 김안로로 하여금 그저 유배에서 벗어나 편히 살도록 하고자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김안로가 유배지에서 풀려나 조정으로 돌아와 연줄을 타고 복직한 뒤 자기편 무리와 체결하고 급속도로 승진하여 사감(私憾)을 풀게 되어서는, 그와 평소 혐원(嫌怨)이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조정에서 내쫓기었다. 공이 그제야 비로소 그 정상(情狀)을 알아차리고서 김안로를 보면 그 음사(陰私)함을 꾸짖으면서 준엄한 말로 힐책하는 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에 김안로가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말하기를, “이는 모두 대간(臺諫)이 한 짓이니,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공은 어찌하여 나를 지목해 말하시오?” 하고는, 물러나 자기편 사람들과 함께 은밀히 공을 저해(沮害)할 모책을 꾸미고 자신이 앞장서서 말하기를 “이(李) 아무개가 나를 무고한 것은 그 목적이 나를 죄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차 사림(士林)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하였다. 이에 김안로 편의 무리들은 공을 모함하고자 획책하여 매양 공과 친하고 미더운 관계에 있는 사람을 보내어 공의 의중(意中)을 탐색하였다. 대사헌 심언경(沈彦慶)이 공에게 말하기를,
“바깥세상에 떠도는, 대간이 상공(相公)을 논죄하려 한다는 말은 대간의 논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간이 자기 입장을 해명하려 합니다.”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만세(萬世)의 권신(權臣)이 되는 셈이군. 대간이 어찌 이 일로 자기 입장을 해명한단 말인가.”
하였다.
한번은 친족 모임 중에 김안로 편인 사람이 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동궁이 외로운 터에 이숙(頤叔 김안로의 자(字))이 우익(羽翼)이 되고 있으니, 그를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의 세자 자리가 이미 정해졌으니, 조정의 신하가 누군들 동궁을 위해 죽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조정에 김안로 한 사람만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 김안로가 지은 ‘견우문(遣愚文)’이란 글을 보고는 공이 탄식하기를 “소인의 정상이 모두 여기에 드러나 있구나.” 하고 결연한 뜻으로 배척하니, 자제들이 두려워 다투어 간(諫)하기를 “병을 칭탁(稱託)하고 사직(辭職)하여 문호를 보전하소서.” 하였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선견지명의 지혜가 없어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막지 못하였는데, 또 화(禍)를 피하여 성명(聖明)을 저버린단 말인가. 이 한 몸 죽고 삶은 걱정할 것이 없으나 단지 간사한 자가 뜻을 펴서 나랏일이 날로 그릇되어 갈까 두렵다.” 하고는, 드디어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김안로의 간사한 정상을 진달하고 조정에서 쫓아낼 것을 청하니, 정언 허항(許沆)이 말하기를 “이(李) 아무개가 탄핵을 받을까 겁이 나서 김안로를 탄핵한다는 명목을 빌어 사림을 모해하려 한다.” 하였다. 이에 김안로에게 빌붙은 대간과 시종(侍從)들이 무더기로 들고 일어나 도리어 공을 공격하였으나 공의 덕망이 평소 드러난 터라 감히 대뜸 죄명을 뒤집어씌우지는 못하고 단지 정부(政府)의 직함만 체탈(遞奪)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혹은 파직되고 혹은 유배되었다.
공론은 이미 막히고 사의(邪議)가 무더기로 일어나게 되자 “공이 아직도 죄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듬해인 임진년 3월에 생원 이종익(李宗翼)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득실을 말하다가 이야기가 공이 무죄하다는 데 미치는 바람에 다시 김안로의 노여움을 격발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공은 마침내 평안도 함종현(咸從縣)에 유배되어 갑오년 10월 25일 적소(謫所)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이 57세였다.
을미년 봄 3월 13일, 면천(沔川) 장자동(長者洞) 선영의 남쪽 산기슭에 안장하였다.
정유년 겨울 10월에 김안로 및 그 무리들이 죄를 받았고, 11월에 공의 옛 직함을 회복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은 10척(尺) 남짓한 신장에 얼굴은 네모지고 수염은 무성하며 거북의 등이요 기린의 이마였다. 그 기상으로 말하자면, 형옥(荊玉)을 품은 양 순박하고 화기(和氣)로 뭉쳐진 소상(塑像)과도 같았으며, 그 걸괴(傑魁)한 모습은 용호(龍虎)와도 같고 비상하는 자태는 난봉(鸞鳳)과도 같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대인군자(大人君子)임을 알 수 있었다.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 학문에 매우 부지런하였는데, 부친 연헌(蓮軒)이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사가(四佳) 서공(徐公)을 보았더니 평생토록 신고(辛苦)를 겪더구나. 그런데 너 역시 신고를 겪으려 하는구나.” 하였으니, 대개 공의 소싯적에 연헌은 이미 장차 문병(文柄)을 잡으리란 것을 알았던 것이다.
비록 만년에도 언제나 닭이 울면 일어나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으니, 그 학문을 좋아함이 참으로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을 탐내는 것과 같았다. 평상시 거처할 때는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한번도 급박한 말투나 조급한 기색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며, 아무리 심하게 노하더라도 모진 말로 사람을 욕한 적이 없었다. 음식은 육류(肉類)를 좋아하지 않았고, 옷은 겨우 몸을 가릴 정도면 그만이었다. 벼슬살이 30년 동안 살림을 돌보지 않은 탓에 집안이 흡사 빈한한 집 같아, 슬하에 가득한 자녀들이 근근이 의식(衣食)을 이어갈 뿐이었다. 혹자가 전장(田莊)을 두라고 권하자 공은 말하기를 “조정의 녹을 먹는 집이 전답을 차지하려 애쓴다면 녹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의 녹이 경작(耕作)을 대신할 만하니, 장래 자손들을 위한답시고 전장을 두는 것이 또한 수고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자제들의 복식(服飾)이 사치스러우면 공은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너희들이 진실로 선(善)에 뜻을 두기만 한다면 비록 과거에 오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전혀 여한이 없다.” 하였다.
평소 타고 다니는 말이 남들은 타지 못할 정도로 노쇠하여도 공은 개의치 않고 그 말이 죽은 뒤에야 다른 말로 바꾸었으며, 재상이 되었을 때 외사촌 형이 초헌(軺軒)을 하나 선물하였는데 그 한 대의 초헌을 십 년 동안이나 탔다. 대저 자신을 위한 것에는 이와 같이 지극히 검박하여 남들은 견딜 수 없는 정도인데도 공은 언제나 여유로웠다. 일찍이 말하기를 “녹이 친우(親友)에 미치지 못하면서 자신을 위해 사치를 부리는 짓은,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친척을 대할 적에는, 촌수의 원근(遠近)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급박한 자를 구휼하고 곤궁한 자를 위무하기를 흡사 힘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듯 정성을 다했으며, 그리하여 집안 살림이 자주 바닥이 나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지성을 다하여 안배(安排)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신복(信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포의(布衣)의 벗 한 사람이 녹사(祿仕)할 길을 구하러 찾아왔기에 공이 반갑게 맞아 매우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루는 뇌물을 가지고 찾아오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자네를 반겨 대우한 것은 친구의 의리를 생각해서였네. 그런데 이제 자네가 곤궁해서 벼슬을 구하러 왔으면서 나에게 뇌물을 주니, 그렇다면 그대는 곤궁한 것이 아니로세. 굳이 벼슬을 구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벼슬자리를 뇌물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사절하고 만나 주지 않으니, 그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떠났다.
공은 언제나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내 평생 소득이 ‘속이지 않음[不欺]’에 있다.” 하였으니,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불선(不善)을 보면 반드시 면전에서 책망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청탁을 넣을 수 없었으니, 이에 조정이 무거운 신임을 주고 의지하여, ‘뇌물이 통하지 않는다[關節不到]’는 말로 공을 지목하기까지 하였다.
또 이르기를,
“신하가 지위를 차지하고 녹을 먹으면 의당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고 국가를 저버리지 않아야지, 자기 일신을 돌보아서는 안 된다. 만약 권세를 빙자하여 사은(私恩)을 심고 재물을 갈취하여 전답을 불림으로써 자기 한 집안을 편안케 하고 자손을 위한 계책을 삼는 따위의 짓은, 나는 하지 않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면 모름지기 터럭만큼이라도 보답할 길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시의 정계(政界)에 용납되지 못하여 나의 뜻을 펼 수 없다면 의당 몸을 거두어 물러나야 할 것이다. 저 지위와 녹을 탐내어 시세(時勢)를 따라 부앙(俯仰)하는 짓을 나는 하지 않겠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배척하여 오직 자기 일신만 보전할 길을 도모하는 짓 따위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하였다.
재상을 배수(拜受)하였을 때 공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덕은 없이 지위만 높아졌으니, 어떻게 감당하리오.” 하고는 통렬히 자신을 억제하고 겸손하였다. 자제나 친족들이 벼슬자리를 청탁하면 번번이 거절하고 이르기를 “조정의 관작(官爵)이 어찌 재상의 시은(施恩)의 도구이겠는가.” 하였으며, 늘 왕증(王曾)의 은출원귀(恩出怨歸)라는 말을 재상의 체통에 맞다고 여기니, 이로 말미암아 요행을 노리는 자들이 혹 많이 원망하였다.
말년에는 조정을 근심하여 탄식하기를 “사림이 저마다 붕당을 세우니, 국가의 복(福)이 아니다. 이것이 송(宋)나라가 망한 까닭이다.” 하였으며, 한번은 경연(經筵)에서 시폐(時弊)를 극력 진달하여 “후일에 무궁한 우환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사림을 보면 반드시 간절히 책망하기를 “그대들이 스스로 분란을 일으키니, 이 때문에 간사한 무리들이 눈을 흘기고 있다. 결국에는 그대들이 배척당하고 말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집에 보배로운 기물(器物)이 있으면 누구나 아낄 줄을 알아서, 그것을 가지고 다닐 때 반드시 신중을 기하여 혹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듯이 조심한다. 그러나 국가의 일에 이르러서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좌지우지하여 실수할까 염려하는 자가 없으니, 이런 까닭에 국가의 대기(大器)가 도리어 그 집안의 소기(小器)만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치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은 일찍이 남산(南山)의 청학동(靑鶴洞)에 작은 서재를 열고, 또 자호(自號)를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재로 난 길의 양쪽에 소나무, 회나무, 복숭아나무, 버드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공이 조정에서 퇴근하여 지팡이를 끌고 소요하면 그 모습이 소연(蕭然)히 마치 야인(野人)과도 같았다.
하루는 날이 어두울 무렵 녹사(錄事)가 공무상 보고하러 공을 찾아가는데, 한 사람이 나막신을 신고 거친 베옷을 입고 작은 동자를 데리고서 동문(洞門)을 나오고 있었다. 녹사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정승께서는 계시는가?” 하고 묻자, 공이 천천히 돌아보면서 “공무상 보고하러 왔는가? 내가 여기 와 있다네.” 하니, 녹사가 놀라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졌다. 그 충후(忠厚)하고 소박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은 무릇 서리(胥吏)들을 대할 때도 반드시 공근(恭謹)하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그 관인(寬仁)함을 일컫는다.
공이 김안로의 무함(誣陷)을 입고부터 당시의 문사(文士)들이 후생을 위해 출제(出題)할 때면, 그 제목을 대다수 방예(放麑)로 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철갱(啜羹)으로 내었으니, 대개 방예는 공의 인후(仁厚)함을 가리킨 것이고 철갱은 김안로의 잔인함을 가리킨 것이다.
공이 적소(謫所)에서 숨을 거두자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반면에 김안로가 패망하게 되자 중외(中外)의 모든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아이들도 모두 기뻐 발을 구르며 뛰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안다고 저렇게 기뻐하는가.” 하자, 또 한 사람이 대뜸 그 말을 받아 말하기를 “저 아이들의 아비가 예전에 김안로의 독해를 입었으니, 그 때문에 비록 어린아이이지만 역시 기뻐할 줄 아는 것이다.”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군자와 소인이 구분되고 인심(人心)은 속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종실(宗室)인 장산 부수(璋山副守) 조(稠)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4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중 맏이는 원정(元禎)으로 면천(沔川)에 한거(閑居)하여 벼슬하길 좋아하지 않았고, 그다음은 원상(元祥)으로 현재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있고, 그다음은 원복(元福)으로 현재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으로 있고, 그다음은 원록(元祿)으로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신축년 과거에 급제하여 현재 홍문관 교리로 있다. 딸 중 맏이는 돈녕부 참봉 최세룡(崔世龍)에게 출가하고, 그다음은 유학(幼學) 유몽선(柳夢宣)에게 출가하고, 막내는 유학 유자(柳滋)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학문은 《논어》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시문(詩文)은 사실에 의거하여 곧바로 쓰고 문장 수식을 없애어 궤이(詭異)하고 험벽한 문사(文辭)를 쓰지 않아, 하늘이 이루고 귀신이 만든 듯 다듬고 꾸민 흔적이 없었으나 사람의 감정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포괄하여 어김없이 그 극치에 오묘히 나아갔기에, 우뚝이 드높아 남들이 발돋움하여 미칠 수 없었다. 일찍이 〈축야인격문(逐野人檄文)〉을 지었는데, 남지정(南止亭)이 깊이 탄복하였다. 옛날에는 주문연(主文硯)이 없었는데, 지정(止亭)이 큰 벼루를 하나 만들어 공에게 전해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사문(斯文)의 심법(心法)을 전하는 물건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 벼루를 미처 다른 사람에게 다시 전하지도 못한 채 공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의 저술은 초록(草錄)해 둔 적이 없어 수고(手稿)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적거록(謫居錄), 남천록(南遷錄), 해도록(海島錄)과 남유록(南遊錄), 남악창수집(南岳唱酬集)뿐이고, 사방에서 두루 찾아 수집하니 시(詩) 약간 권(卷)과 문(文) 약간 권이 되었다. 그리고 함종(咸從)에 우거할 때에는 다시는 시를 읊지 않고 오직 두문불출하며 책을 읽었으며,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산정(刪定)하여 완성하고 손수 베껴서 정서(淨書)하였다.
공은 쌓은 덕이 마치 높은 산과 같았기에, 밖으로 드러나 남들이 볼 수 있는 것이 구름과 비를 머금어 흘려 내는 듯 아득하여 그 끝없이 두터운 근저를 엿볼 수 없었으며, 너른 도량이 마치 큰 바다와 같았기에 밖으로 드러나 남들이 볼 수 있는 것이 고래와 곤어(鯤魚)를 품어서 기르는 듯 드넓어 그 가없이 먼 기슭을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어눌하여 마치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하고, 그 마음은 독실하여 마치 옷을 이겨내지 못할 듯하였으며, 검소하면서도 능히 편안하고 정직하면서도 작은 신의(信義)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형제간에 공경과 우애를 다하고 믿음과 의리가 붕우들 사이에 드러났다. 이렇게 한 생각이라도 삼가고 모든 행실을 갖추었으니, 어찌 천지가 정기(精氣)를 쌓아 중흥에 맞추어 세상에 탄강(誕降)시켜 국가의 상서로 삼은 이가 아니겠는가.
위태한 연산군의 조정에서 직언한 것이며, 극형을 앞두고서도 변명하지 않은 것이며, 국혼(國婚)을 바로잡은 것이며, 중국 사신을 접대하면서 예의(禮儀)를 합당하게 한 것이며, 세자가 입학했을 때 질문에 잘 대답한 것이며,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운 것이며, 서쪽으로 오랑캐를 정벌하자는 주장을 막은 것이며, 뇌물을 일절 받지 않은 것이며, 전답을 소유하지 않은 것 등에 이르러서는, 그 충성은 유향(劉向)과 같고, 그 절개는 공융(孔融)과 같고, 그 덕은 병길(丙吉)과 같고, 그 위의(威儀)는 공서적(公西赤)과 같고, 그 효성은 영고숙(潁考叔)과 같고, 그 인애(仁愛)는 자산(子産)과 같고, 그 충간(忠諫)은 위상(魏相)과 같고, 그 청렴은 양진(楊震)과 같고, 그 용기는 제갈량(諸葛亮)과 같으니, 문장은 그 여사(餘事)일 뿐이다. 백성에게 은택을 끼쳐도 백성이 알지 못하고 공(功)이 사직(社稷)에 있어도 나라에서 녹권(錄券)이 없었으니, 이른바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공이 있는 것이 공인 줄만 알고 공이 없는 것이 공이 있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공의 아들 원록(元祿)이 공의 사적을 기록해 가지고 와서 행장을 기술해 주길 청하거늘, 내가 공에게 가장 깊은 지우(知遇)을 입은 터라 감히 글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보고 들은 바를 두서없이 기록해 둔다.
삼가 행장을 쓰다.


[주D-001]기씨(奇氏) : 고려 공민왕 때 반란을 꾀하다 주살(誅殺)된 기철(奇轍)을 가리킨다.
[주D-002]여경(餘慶) :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善)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餘慶]가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장경왕후(章敬王后) :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첫째 계비(繼妃)로 인종(仁宗)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
[주D-004]신수근(愼守勤) : 폐빈(廢嬪) 신씨(愼氏)의 아버지로,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閒堂)이고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연산군의 처남이고 중종의 장인이다.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으나 중종반정에 동참하지 않아 살해되었다. 시호는 신도(信度)이다.
[주D-005]증고사(證考使) : 왕자나 왕손(王孫)의 태(胎)를 묻을 장소를 찾기 위해 파견하는 임시 관원이다.
[주D-006]형수(荊樹) : 자형화(紫荊花)라는 화초로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경조(京兆) 사람인 전진(田眞) 삼형제가 각기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마지막으로 뜰에 심은 자형화를 갈라서 나누어 가지려 하니 자형화가 곧 시들었다. 삼형제가 이에 뉘우치고 다시 재산을 합하니, 자형화가 다시 무성하게 자랐다 한다. 《續齊諧記 紫荊樹》
[주D-007]오성(五星)의 설(說) :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다섯 별이 동시에 한 방향에 나타나는 것을 매우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는데, 여기서는 용재(容齋)의 남자 형제가 다섯이었기에 비유한 듯하다.
[주D-008]복성군(福城君) : 중종의 서자(庶子)로 경빈 박씨(敬嬪朴氏) 소생이며 이름은 미(嵋)이다. 세자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어머니 박씨와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주D-009]형옥(荊玉) : 춘추 시대 초(楚)나라 변화(卞和)란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얻었다는 직경이 한 자나 되는 좋은 옥으로, 전국(傳國)의 옥새로 만들어져 전해졌다. 화씨벽(和氏璧)이라고도 일컫는다.
[주D-010]연헌(蓮軒) : 조선조 문신인 이의무(李宜茂)이다. 그의 자는 형지(馨之)이고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주D-011]사가(四佳) 서공(徐公) : 조선조 문신 서거정(徐居正)이다. 그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본관은 달설(達城)이며, 시문에 능하여 오랫동안 문병(文柄)을 잡았다.
[주D-012]왕증(王曾)의 은출원귀(恩出怨歸) : 송(宋)나라 때 재상이었던 왕증이 사류를 등용하거나 퇴출할 때 남들이 모르게 하자 범중엄(范仲淹)이 그에게 “사류를 공공연히 등용하는 것이 재상의 임무인데 공의 성덕(盛德)은 유독 이 점이 부족하다.” 하였다. 이에 왕증이 “대저 집정자는 은혜는 자기에게 돌리려 하기 마련이니, 원망은 누구에게 돌아가게 하겠는가.” 하여, 원망은 자기가 감당하고 은혜는 임금에게 돌아가게 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宋史 卷310 王曾列傳》
[주D-013]방예(放麑) : 맹손(孟孫)이 사냥을 하다 새끼 사슴을 잡아 진파서(秦巴西)를 시켜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는데, 그 어미 사슴이 따라오면서 울기에 진파서가 차마 볼 수가 없어 새끼 사슴을 돌려주었다. 《韓非子 說林上》 인덕(仁德)을 지닌 사람에 대한 전고(典故)로 쓰인다.
[주D-014]철갱(啜羹) : 악양(樂羊)이 위(魏)나라 장수가 되어 중산(中山)을 공격하였는데, 그 아들이 당시 중산에 있었기에 중산의 임금이 그 아들을 삶아서 국을 끓여 악양에게 주니 악양이 그 국을 먹었던 고사를 뜻한다. 《戰國策 中山策》 잔인한 사람에 대한 전고로 쓰인다.
[주D-015]남지정(南止亭) : 조선조 문신 남곤(南袞)의 호가 지정(止亭)이다. 그의 자는 사화(士華)이고 지정 외에도 지족당(知足堂)이란 호가 있으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문명(文名)을 떨쳤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를 숙청한 죄로 명종(明宗) 때 관작과 시호를 삭탈당하였다.
[주D-016]주문연(主文硯) : 조선조 홍문관 대제학이 가지던 벼루인데, 대제학이 바뀔 때 이 벼루를 전수하는 의식이 있었다.
[주D-017]사문(斯文)의 심법(心法) :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진리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던 것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남곤이 당대 문장의 일인자임을 허여한다는 뜻으로 용재(容齋)에게 벼루를 주면서, 이 벼루를 문장의 일인자끼리 전수하는 신표(信標)로 삼는다는 뜻이다.
[주D-018]그 말은 …… 듯하였으며 :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문자(文子)는 그 마음이 겸손하여 마치 몸이 옷을 이겨내지 못할 듯하고, 그 말이 어눌하여 그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하였다.”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몸가짐과 말투가 매우 겸손하고 진실함을 나타내고 있다.
[주D-019]유향(劉向) : 한(漢)나라 초원왕(楚元王)의 현손(玄孫)으로 초명은 갱생(更生), 자는 자정(子政)이다. 문장에 능통하고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으며, 누차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함에 그 말이 매우 통절(痛切)하였고, 외척(外戚) 왕씨(王氏)를 신랄하게 공척(攻斥)하였다.
[주D-020]공융(孔融) :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자는 문거(文擧)이다. 문장에 특히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당시 권병을 잡았던 환관들 및 동탁(董卓), 조조(曹操) 등의 비위를 거슬렸으나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결국 조조에게 대역부도(大逆不道)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주D-021]병길(丙吉) : 한 무제(漢武帝) 때 노국(魯國) 사람으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고, 특히 인품이 관대하였다.
[주D-022]공서적(公西赤) : 공자의 제자로 자는 자화(子華)이며, 제(齊)나라로 사신을 간 사실이 《논어》에 보인다.
[주D-023]영고숙(潁考叔) : 춘추(春秋) 시대 정(鄭)나라 사람으로 어머니와 결별하고 살던 장공(莊公)을 효성으로 감화시켜 지하의 수도(隧道)를 통해서 만나게 하여, 순효(純孝)란 평판을 받았다. 《春秋左傳 隱公元年》
[주D-024]자산(子産) : 전국(戰國) 시대 정(鄭)나라의 재상으로 인정을 베풀었으며, 자기가 타는 수레로 사람을 태워 물을 건너게 해 준 사실이 《맹자》에 보인다.
[주D-025]위상(魏相) : 전한(前漢) 때 사람으로 자는 약옹(弱翁)이다.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있으면서 권력에 굽히지 않고 직간을 많이 하였으며, 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고평후(高平侯)에 봉해졌다.
[주D-026]양진(楊震) :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백기(伯起)이며 성품이 매우 청렴하였다. 그가 천거하여 벼슬하게 된 왕밀(王密)이란 사람이 찾아와 금 열 근을 주면서 “밤이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받으라.”고 하자, 그는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하여 아는 이가 없다고 하는가.” 하며 물리쳤다고 한다. 《小學 善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