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남명 조식 신도비문 (펌)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송자대전

아베베1 2009. 11. 10. 23:12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54권
 신도비명(神道碑銘)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남명 선생이 간 뒤로 선비는 더욱 구차해지고 풍속은 더욱 야박해져, 식견 있는 이는 선생을 더욱더 그리고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 의(義)를 귀하게 여기고 이(利)를 천하게 여기어, 염퇴(恬退 명예나 이권(利權)에 뜻이 없는 것)가 가상스럽고 탐모(貪冒 명예나 이권을 탐하는 것)가 수치스럽다는 것만은 알게 되었으니, 선생의 공로는 참으로 크다. 선생은 천품이 아주 뛰어나, 난 지 3세에 위중한 병에 걸리자 대뜸 모부인(母夫人)에게,
“소자(小子)가 다행히 남자로 태어난 것은 하늘이 반드시 중책을 맡기기 위해서이니, 오늘 어찌 소자가 요사(夭死)할까 걱정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겨우 15세 남짓 되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혹함을 목도하고, 그만 과거(科擧)에 뜻이 없다가 어버이의 명으로 한 차례 응시한 적이 있었으며, 문장을 구성하는 데 좌유(左柳 진(晉)의 좌사(左思)와 당(唐)의 유종원(柳宗元))를 사모하다가 하루는 주염계(周濂溪)의,
“이윤(伊尹)의 뜻하던 것을 자기의 뜻으로 하고 안연(顔淵)의 배우던 것을 자기의 배움으로 해야 한다.”
는 말을 읽고 나서 개연히 발분, 산재(山齋)에서 제생들과 작별하고 돌아와 날마다 육경(六經)ㆍ사서(四書)와 송(宋) 나라 제현의 글을 읽어 깊이 연구하고 힘써 탐색하기에 밤낮이 없었으며, 선성(先聖)과 주(周)ㆍ정(程)ㆍ주(朱) 세 선생의 상(像)을 손수 모사(摹寫)하여 놓고 앙모하는 뜻을 보였다. 규암(圭菴) 송 선생(宋先生)과 상국(相國) 이준경(李浚慶)이 《대학(大學)》ㆍ《심경(心經)》 등의 책을 증정하자 선생이 대뜸,
“이 책들을 얻고 나니, 마치 언덕이나 산을 짊어진 듯 책임이 무거워졌다.”
고 써놓고 더욱 실제(實際) 공부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에 임하고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일파)ㆍ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의 일파)이 서로 모해(謀害)하므로 선생이 더욱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 거업(擧業)을 영원히 단념, 지리산에 들어가 집을 짓고 ‘산천재(山天齋)’라 편액(扁額)한 다음, 사뭇 학문에 전력하여 그 조예가 더욱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다.
일찍이 회재 선생(晦齋先生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재랑(齋郞 조선 때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에 회재가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로 와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명종(明宗) 3년(1548)에 초서(超敍 남을 뛰어넘겨서 뽑아 쓰는 것)를 특명하여 두 차례나 주부(主簿)에 제수되자, 마침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조정에 있다가 글을 보내어 나오기를 권고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또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소(疏)를 올려 사양하였다.
21년(1566)에 판관(判官)으로 승직, 소명(召命)이 두 차례나 내리고 약이(藥餌)와 식물(食物)까지 하사하므로 선생이 할 수 없이 소명에 응하였다. 이에 상이 인견(引見)하고 치도(治道)를 묻자, 선생이 아뢰기를,
“도는 서책(書冊)에 들어 있으므로 신(臣)의 말이 새삼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은 군신(君臣) 사이에 그 정의(情義)가 교부(交孚)되어야만 치도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는, 이어 생민(生民)들의 고달픈 상황을 들어 적극 진언하였고, 상이 학문하는 방도를 묻자, 아뢰기를,
“반드시 마음으로 체득할 것이요, 한갓 남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하였고, 상이 또 제갈공명(諸葛孔明)에 대해 묻자, 아뢰기를,
“공명이 소열제(昭烈帝)와 동사(同事)한 지 10년 동안에 한실(漢室)을 일으키지 못하였으니, 신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고는, 그 이튿날 돌아와 버렸다.
선조(宣祖) 1년(1568)에도 두 차례의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이어 시폐(時弊) 열 가지를 들어 진언하였으며, 2년(1569)에 또 소명을 받자 글을 올려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임금의 명선(明善)ㆍ성신(誠身)에 있으니, 반드시 경(敬)을 주(主)로 삼아야 합니다.”
하고, 또 서리(胥吏)들의 정폐(情弊 사정에 의하여 일어나는 폐단) 상황을 들어 적극 진언(陳言)하였으며, 전첨(典籤 조선 때 종친부(宗親府)의 정4품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마침 큰 흉년이 들어 상이 곡식을 하사하자, 선생이 글을 올려 사은(謝恩)하고 이어 아뢰기를,
“여러 차례 어리석은 말을 드렸으나 실현된 바가 없습니다.”
하여, 그 사의(辭義)가 매우 절직(切直)하였다. 이윽고 상이 선생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급히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였으나 선생이 이미 별세하였으니, 바로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 임신년(1572, 선조5) 2월 8일이었다.
지난해 산천재(山天齋) 뒷산에 목가(木稼)의 이상(異常)이 있었고, 또 명 나라 일관(日官)이 본국 행인(行人 사신(使臣))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의 고인(高人)이 장차 불리하게 되었다.”
고 하였는데, 과연 그대로 들어맞았으니 아, 철인(哲人)의 생졸(生卒)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4월 6일에 산천재 뒷산에 안장되었다. 선생은 기우(氣宇)가 고일(高逸)ㆍ응중(凝重)한 데다가 엄의(嚴毅)ㆍ정대(正大)하여 장경(莊敬)한 마음을 항상 내부에 존양(存養)하고 태만(怠慢)한 기색을 일체 형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윽한 방 안에 혼자 거처할 적에도 어깨와 등이 꼿꼿하였고 일찍 일어나 조용히 앉았을 적에는 묵관(默觀)ㆍ정사(精思)에 들어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며, 학문에는 전혀 경의(敬義)를 요체(要諦)로 삼아서, 측근에 있는 집물(什物)에 명(銘)을 붙여 자경(自警)한 바가 모두 이 경의였으므로 선생의 신채(神彩)가 고결(高潔)하고 용모가 준위(俊偉)하였다. 사(私)를 퇴치하는 데는 단칼로 두 동강이를 내듯 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물[水]이 만 길 절벽을 내리쏟듯 하여, 절대로 우물쭈물하거나 구차한 예가 없었다.
평소에도 가인(家人)들이 감히 망녕되이 지껄이거나 함부로 웃지 못하여 내외가 엄격하였으며, 더욱이 효우에 독실하여, 어버이를 모실 적에는 침착하고 조심하는 선행으로써 봉양하여 어버이의 심지(心志)를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전력하였고, 친상(親喪)을 당해서는 피눈물로 애모(哀慕)하였으며, 전후상(前後喪)에 다 초막(草幕)을 짓고 시묘(侍墓)하면서 하인(下人)들에게 가사(家事) 때문에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고, 조객(吊客)이 있을 적에는 그저 엎드려 곡(哭)하면서 답배(答拜)할 뿐, 한 번도 말을 나눈 예가 없었다. 아우 환(桓)과의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언제나 말하기를,
“사람의 지체(支體)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하고, 같이 한 담장 안에 살면서 한 문으로 드나들었다. 아무리 산림(山林)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시사(時事)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유출되어 매일 밤중에 혼자 앉아 비가(悲歌 애절한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으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으며, 벗을 사귀는 데는 반드시 그 사람됨을 심리해 보아서 뜻에 맞지 않는 자는 아무리 달관(達官)ㆍ요인(要人)이라도 행여 자신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면서,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ㆍ대곡(大谷 성운(成運))ㆍ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ㆍ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ㆍ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등 제군자(諸君子)와 마치 지란(芝蘭)처럼 좋아하였고, 퇴계 선생과는 글을 왕복(往復)하면서 성리(性理)를 변론하였다. 일찍이 퇴계에게 보낸 글에,
“평생 동안 태산 북두처럼 경앙(景仰)한다.”
하였고, 퇴계는 선생을 논하기를,
“군자 출처(出處)의 의(義)에 부합된다.”
하였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 각기 그 재주에 따라 지시하였고, 질문이 있을 적에는 반드시 세밀히 분석하여 있는 대로 밝게 해석하므로 듣는 이가 환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폐단은, 고원한 데 따라가기만 좋아하고 일신에 절당한 병통은 살피지 않는 데 있다. 성현의 학문은 애당초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을 버리고 지레 심오한 성리(性理)만을 연구하려 한다면, 이는 아무리 성(性)을 다하여 명(命)에 이른다 하여도 효제(孝悌)에 근본한 것이 되지 못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미사 오지(微辭奧旨)는, 선유(先儒)가 서로 이어 천명해 놓았으니, 배우는 이는 알기 어려울까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는 실제가 없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하였으며, 글을 읽다가 요긴한 대문에 닿으면 반드시 세 번씩 되풀이하고야 넘어갔고, 이어 두 권의 책자를 만들어 이름을 《학기유편(學記類編)》이라 하였으며, 문집 몇 권이 세상에 전한다.
상이 치제(致祭)와 아울러 곡식을 부의하였고 대사간(大司諫)에 추증하였으며 뒤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진주(晉州)ㆍ삼가(三嘉)ㆍ김해(金海) 등 모든 고을의 장보(章甫 유생(儒生))가 다 사우(祠宇)를 세워 향사(享祀)하고 있다.
선생의 휘는 식(植), 자는 건중(楗仲)이다. 조씨(曺氏)는 창녕(昌寧)을 본관(本貫)으로 시조가 서(瑞)인데, 사실 고려 태조를 외조(外祖)로 하여, 이때부터 사대부가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본조에 와서 석문(錫文)은 영의정으로 부원군(府院君)에 수봉(受封)되었는데, 선생의 6대조이고 증조 안습(安習)은 생원(生員)이고 조부 영(永)은 벼슬하지 않았다. 아버지 언형(彦亨)은 과거에 급제하여 중외(中外)의 관직을 역임하고 어머니 이씨는 충의위(忠義衛) 국(菊)의 딸로서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신유년 6월 26일에 삼가(三嘉) 토동(兎洞)에서 선생을 낳았다.
부인은 조씨(曺氏)이고 아버지는 수(琇)로 본관(本貫)은 남평(南平)이다. 아들 차산(次山)은 요사(夭死)하고 딸은 만호(萬戶) 김행(金行)에게 출가하였다. 서자(庶子) 차석(次石)ㆍ차마(次磨)는 다 현감(縣監)이고 차정(次矴)은 호군(護軍)이다. 김행의 두 딸은 참판(參判) 김우옹(金宇顒)과 감사(監司) 곽재우(郭再祐)에게 출가하였다. 차석의 아들 진명(晉明)은 찰방(察訪)이고 차마의 아들은 경명(敬明)ㆍ익명(益明)ㆍ부명(復明)이고 딸은 참봉 정흥례(鄭興禮)에게 출가하였으며, 차정의 아들은 생원(生員) 준명(浚明)과 극명(克明)이고 딸은 정위(鄭頠)에게 출가하였다. 진명의 아들은 계(), 경명의 아들은 엽(曗)ㆍ원(晼)ㆍ철(㬚)ㆍ오(晤), 익명의 아들은 수(晬)ㆍ장(), 부명의 아들은 미()ㆍ단(), 준명의 아들은 진()ㆍ변(昪)ㆍ서(暑), 극명의 아들은 경(景)ㆍ안(晏)인데 진ㆍ변ㆍ안은 다 생원이고, 내외(內外) 증손(曾孫)ㆍ현손(玄孫)이 모두 수십 명에 이른다.
내가 후세에 나서 선생의 문하(門下)에 쇄소(灑掃>하지 못하였으나, 그 당시 제현(諸賢)들의 의론을 상상하고 추측해 본다면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우뚝 선 듯하고 일월(日月)과 맞서서 그 빛을 다툴 만한 선생의 기상이 지금까지 사람으로 하여금 늠연히 경외하는 마음을 일게 하니, 풍교를 수립하여 퇴패한 습속을 진작시키기에 너무도 당연하다. 심지어 손과 발을 보일 적에도 오히려 경의(敬義)로써 배우는 이들에게 친절히 말하였으니, 이 어찌 한 숨결이 남아 있는 한까지 조금의 태만함도 불허한다는 예가 아니겠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성인은 백세의 사표(師表)인데, 바로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이다.”
하였다. 주 부자(朱夫子)가 이 말을 인용하여 동계(東溪 송(宋) 나라의 고등(高登)) 고공(高公)을 일컬었는데, 만약 주 부자가 다시 난다면 선생에게도 이 말을 인용할는지, 반드시 이를 아는 이가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높은 천품으로 / 天賦之高                                       흉금에 번뇌 없어 / 襟懷無累                      쇄쇄낙락하였으며 / 灑灑落落
예를 믿고 의를 좋아해 / 信古好義                            명절로써 스스로 면려하여 / 名節自礪          횡류 속의 갈석산 되었네 / 橫流碣石
산중에 집을 짓고 / 築室山間                                   당우를 노래하면서 / 嘯咏唐虞                    걸림없이 자락하였으며 / 徜徉自樂
오직 경과 의가 / 惟敬與義                                      성사의 훈계인 바 / 聖師所訓                       벽에 붙여 놓고는 / 大揭墻壁
마음을 환성시키고 사(私)를 씻으며 / 喚醒滌濯         마치 상제를 직접 대하듯 / 對越上帝
아침저녁으로 근면하고 조심하였네 / 日乾夕惕         성상이 측석에 앉아 부르시므로 / 聖朝側席     분연히 나아갔다가 / 賁然來斯                               홀연히 되돌아왔으며 / 歘反初服                           정진에 대한 용기는 / 進修之勇                      마치 용과 범을 포박하듯 / 捕龍縛虎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여 / 老而彌篤                        그 명성 더욱 높으므로 / 聲名愈高
사림이 더욱 경앙하여 / 士林愈傾                           마치 북두와 같았는데 / 如斗在北
목가가 재변을 보이고 / 木稼徵災                           소미가 빛을 잃는 것은 / 少微藏輝
철인의 액운일세 / 哲人之厄                                  태산이 이미 무너지니 / 高山旣頹
나라에는 전형이 없어지고 / 邦無典刑                     사림에는 사표를 잃었으나 / 士靡矜式
그 풍성만은 / 惟厥風聲                                        탐 많은 자 청렴케 하고 겁 많은 자 자립케 하여 / 廉頑立懦
우리 국맥 영원해졌네 / 壽我國脈                           두류산 높이 솟았고 / 頭流倚天
한 내가 별계(別界)를 이루어 / 其川坼地                  그윽하고 아늑하니 / 奫淪磅礴
천만년 지나도록 / 有來千億                                  선생의 명성 / 先生之名                  끝없으리 / 與之無極


[주D-001]목가(木稼) : 목개(木介), 또는 수가(樹稼)라고도 하는데, 겨울에 추위가 극심하여 고드름이 나무에 열리는 현상을 말한다. 《동헌필록(東軒筆錄)》에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목가의 현상이 있었다가 영왕(寧王) 헌(憲)이 죽었으므로 그 당시에 ‘겨울 목가에는 달관(達官)이 무서워한다.’는 속담이 있었다.” 하였다.
[주D-002]쇄소(灑掃) :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제자(弟子)된 예의를 말한다.
[주D-003]손과 발을 보일 적 : 사람의 임종 시를 뜻한다. 옛날에 증자(曾子)가 임종 시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불을 걷고 나의 손과 발에 상처가 있나 없나 보아라.” 하였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온전히 보존하였다가 죽는 것을 효(孝)라 하기 때문이다.
[주D-004]측석 : 임금이 어진 이를 존대하기 위하여 상석(上席)을 비워 놓고 옆 자리에 앉는 것을 말한다.
[주D-005]소미(少微) : 처사(處士)를 상징하는 별[星]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