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정암 조광조 신도비문 (펌)

휴암(休菴) 백공(白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아베베1 2009. 11. 10. 23:27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54권
 신도비명(神道碑銘)
휴암(休菴) 백공(白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정암 조 선생이 성현의 학(學)으로 치택(致澤 요순(堯舜)의 군민(君民)으로 만드는 것)의 치도(治道)를 시도하다가 바로 뜻밖의 화를 당하고 말았으니, 세상의 법칙이 될 만한 그 언행을 온 세상이 쉬쉬하여, 그 도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만약 그 지결(旨訣)을 직접 전수받아 독실히 믿고 죽기로 고수하는 한편, 군소(群小)가 지껄이는 가운데서 이를 공송(公誦)하여 다시 세상에 밝혀 놓은 이가 없었다면, 사도(斯道)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휴암(休菴) 충숙(忠肅) 백공(白公) 휘 인걸(仁傑), 자 사위(士偉)가 바로 그분이다.
대저 우리 중종 성세에 여러 현인(賢人)이 배출되여, 김공 식(金公湜)은 높은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공은 개연히 구도(求道)에 마음을 두어, 매번 제생들이 규례에 따라 강학(講學)한 이외에도 홀로 책을 들고 문의하여 바른 의리를 터득한 뒤에야 그만두곤 하였으며, 더욱 조 선생(趙先生)을 존신하여 몸을 맡겨 사사(師事), 그 집 옆에 집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윽고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우(師友)가 섬멸되자, 공이 너무 비통한 나머지 바로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있다가 오랜 뒤에 돌아와서 가끔 태학(太學)에 나가 교유했고, 그 언행(言行)에 있어 사문(師門)의 옛 법을 고치지 않았는데, 그때 여러 사람들이 모두, 문망(文網 사화(士禍))이 장차 공에게 가해질 것이라고 지적하므로 규각(圭角 말과 행동이 모난 것)을 약간 삼갔다.
이어 연로한 모부인을 위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시배(時輩)들이 조 선생의 일당으로 배격하여 성균관에 예속되었다가 오랜 뒤에야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 고사에, 이조나 병조의 전관(銓官)이 정청(政廳)을 열면, 예문관의 한 직원이 정청에 나아가 그 득실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는데, 공이 묘연한 신진으로서 이미 폐지된 제도를 부활시켜 붓을 들고 신중히 기록하므로, 전관들이 매우 꺼렸다.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승진되었다가 모부인 봉양을 위하여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나아가서는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가려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직접 나가서 구두(句讀)를 시정해 주기를 마치 정명도(程明道)가 진성(晉城)에서와 같이 하였고, 균등한 부역과 적은 수렴(收斂)으로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퇴락된 창고와 관사를 모두 수축하였으며, 뇌물을 쓰거나 법을 교란시키는 자는 일체 배격하였다. 일등 치적으로 특별히 품계를 올리고 헌납(獻納)으로 불렀는데, 공을 꺼리어 참소하는 자가 있어 이전 직책에 그대로 있다가 마침내 지평(持平)에 제수되었고 다시 호조 정랑(戶曹正郞)에 전임되어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을사년(1545)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윤원형(尹元衡)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인종의 외숙 윤임(尹任)과 대신 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을 빨리 제거하게 하였다. 그때 공이 다시 헌납으로 있었는데, 주모자가 공을 꺼린 나머지 허자(許磁)를 시켜 공을 설득하게 하였으니, 이는 허자를 공의 구의(舊誼)로 지적한 때문이다. 이에 허자가 공을 갖가지로 달래었으나 공이 거절하고는 듣지 않으므로 허자가 노하여 말하기를,
“이처럼 사전에 타협하는 것은 그대에게 노모가 있기 때문이요, 사소한 사정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어떤 이가, 신병을 들어 사양하면 모면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일에 임하여 어려움을 회피하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
하였다. 그 이튿날 대간(臺諫)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중의(衆議)가 거의 공에게 추종하여 일이 거론되지 못하므로, 정순붕(鄭順朋)ㆍ이기(李芑)ㆍ임백령(林百齡)ㆍ허자가 지레 입궐하여 윤임 등 세 사람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회재 이언적이 원상(院相)으로 있었으나 감히 구제하지 못하므로 공이 장차 동료와 함께 논쟁하려 하였는데, 동료가 고개를 숙이고 감히 나서는 자가 없으므로 공이 홀로 아뢰기를,
“국가의 일은 마땅히 광명정대한 데서 나와야 하는데, 지금 세 사람을 죄주는 데 있어 정의(廷議)도 거치지 않고 죄명을 열거하지도 않은 채 후제(后弟 문성왕후의 친정 동생인 윤원형을 이름)가 밀지를 받들어 행사하니, 어떻게 후세에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간인(奸人)을 시켜 남몰래 선동하여 미워하는 사람을 모함하게 하니, 그 말류(末流)의 해독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원형(元衡)은 내지(內旨)를 받들어 그 악성을 마구 부리고 대사헌(大司憲) 민제인(閔齊仁)은 내지가 내렸음을 듣고는 모든 재상가(宰相家)에 사후(伺候)하기를 마치 전령(傳令)하는 군졸과 같이 하니, 모두 죄주기를 바랍니다.”
하고, 또 양사(兩司)의 언책(言責)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논박하자, 문정대비가 크게 노하여 공을 형리(刑吏)에게 내리며 말하기를,
“윤임 등이 종묘사직을 모위(謀危)하였는데, 이 사람이 공정을 가탁하여 역적을 두둔하니, 일이 장차 불측한 데 이르게 되었다.”
하였다. 북창(北窓) 정공 염(鄭公Ꜿ)은 순붕(順朋)의 아들인데 순붕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諫)하기를,
“백공(白公)은 충직(忠直)한 사람입니다. 이번에 만약 그가 죽음을 당한다면, 아버님은 장차 만세(萬世)에 죄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자, 순붕이 이에 소(疏)를 올려,
“백모(白某)가 국가의 중대사를 알지 못하고, 한갓 밀지가 잘못이라는 것을 말하였으니, 우망(愚妄)한 발언을 깊이 죄줄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므로,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노여움을 거두고 체직만 시켜 파주(坡州)로 보냈으며, 유관(柳灌) 등 세 사람은 다 역률(逆律)로 사형이 논단되었다. 그 뒤 3년째 되는 정미년(1547, 명종2)에 정언각(鄭彦慤)이 고변(告變)한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으로 을사사화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죄가 추가되어 혹은 죽음을, 혹은 유배(流配)를 당하였고 공도 안변(安邊)으로 유배된 지 얼마 안 되어 모부인이 별세하자, 마음대로 분상(奔喪)할 수 없어 가슴을 치며 통곡하기를 갑절 더하였고, 5년째 되는 해에 비로소 대사령(大赦令)이 내려 향리로 돌아왔다. 공은 본시 빈한한 데다가 이에 이르러 생계가 더욱 쓸쓸해졌으나 그저 태연하였다.
이보다 먼저 기유년(1549, 명종4)에 간인(奸人)이 또 고변(告變)하여, 을사사화 때 벗어난 사람들이 거의 다 걸려들었으나 공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손[客]이 찾아오면 술잔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담론이 자약할 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표정을 엿볼 수 없었으며, 매일 밤에는 으레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외었고 정자ㆍ주자의 글이 언제나 좌우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20여 년이 지나 윤원형이 패하여 죽고 공의(公議)가 점차 확장되자, 공이 다시 기용되어 네 관직을 역임하고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나가서 백성을 위하여 복리(福利)를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하여 미세한 정사까지 빠뜨림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현준(賢俊)을 구하는 데 힘쓰자, 공이 조야의 무거운 명망으로 두어 달 사이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서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지(承旨)로 승진되었다가 이조 참의(吏曹參議)ㆍ대사간(大司諫)에 전임되었다.
그때 인순대비(仁順大妃)가 수렴청정에 임하자 공이 진언하기를,
“사군(嗣君)의 춘추가 어리지 않으시니, 여주(女主)께서 오래도록 국정에 임하실 수 없습니다.”
하므로, 인순대비가 언짢아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수렴을 철수하였다. 공이 상을 위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옛날 성왕(聖王)은 그 마음부터 먼저 바르게 하여 그 근본을 세웠으니, 요순(堯舜)의 ‘정일(精一 마음이 자세하고 한결같은 것)로써 그 중도(中道)를 잡는다.’는 말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전하께서도 이를 체득하여 그 극(極 인륜(人倫)의 모범과 표준)을 세우시면, 군하(群下)가 모두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크게 호응하여, 전하의 뜻을 미리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여염(閭閻)에서 생장하시었으니, 이는 상왕(商王 은 고종(殷高宗))이 즉위하기 전에 외지에서 수고하여 민생(民生)의 어려움을 알았던 예와 같습니다. 진정 능히 학문에 시종 종사하여 뜻을 겸손히 하고 때없이 힘쓰시면, 마음과 도리가 하나로 되어 정사와 학문이 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고, 또,
“이른바 경(敬)이란, 학문의 시(始)를 이루고 종(終)을 이루는 것이니, 전하의 생각이 늘 여기에 있어 동정(動靜)하는 사이에 상실하지 않으시면 이른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경(敬)을 독실히 함으로써 천하가 평치(平治)된다.’는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또,
“우리 동방의 도학은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로부터 연원(淵源)이 시작되었고, 조광조(趙光祖)는 걸출한 재주로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학을 천명(闡明), 규구(規矩)를 준수하여 예(禮)가 아닌 데 움직이지 않고 명절(名節)을 크게 격려하여 사도(斯道)를 일으켰으니, 이제(二帝 요(堯)ㆍ순(舜))ㆍ삼왕(三王 우(禹)ㆍ탕(湯)ㆍ문무(文武))의 성세를 거의 다시 보게 되었는데, 남곤ㆍ심정의 무리가 귀역(鬼蜮)과 같이 음해를 자행하여 끝내 억울하게 죽고 말았으므로 조야의 원통해하는 마음이 오랠수록 더욱 깊어져 ‘마땅히 진유(眞儒 조광조)를 표창하여 높은 관작을 추증하고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는 한편, 문묘에 배향시킨다면 천리가 밝게 되고 인심이 시정되고 도덕이 일치되어 풍속이 순박해질 것이다.’고 합니다.”
하였다. 공조 참의로 체직되었다가 바로 전직(前職)으로 환원되었다. 상이 사친(私親)에게 치제(致祭)하기를 의논하므로 공이 아뢰기를,
“국통(國統)을 계승하는 의리가 아무리 엄중하나 사친의 은혜를 아주 단절할 수 없으니, 제관(祭官)을 보내어 지극한 정리를 펴시는 것은 불가하지 않습니다.”
하자, 말하는 이들이 이를 그르다 하여 공의 체직을 논박하므로, 공이 다시 공조 참의가 되었다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전임되었는데, 드디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상이 공의 풍절(風節)을 생각하여 누차 병조 참지(兵曹參知)와 대사간으로 불렀으나 모두 굳이 사양하였고, 이윽고 가선(嘉善) 품계에 특진시켜 대사헌(大司憲)을 제수하였으나 세 차례나 사양하자, 상이 수찰(手札)을 내려 이르기를,
“군자란, 세상에 나서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이 옳다. 경(卿)은 충성이 일월을 관통하고 절의가 빙상(氷霜)을 능가하니, 마땅히 속히 부름에 응해 달라.”
하였다. 이에 공이 입조한 지 얼마 안 가서 체직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병조ㆍ공조의 참판(參判)에 누차 제수되어 경연관(經筵官)ㆍ의금부사(義禁府事)를 겸임하였으며, 다시 두 번씩이나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일찍이 가뭄으로 인하여 소(疏)를 올리기를,
“옛날 한(漢) 나라 신하가 ‘천재(天災)는 피부(皮膚)에 통증(痛症)이 없고 진식(震食 지진(地震)과 일월식(日月蝕))은 성체(聖體)에 손상이 없으므로, 으레 삼광(三光 일(日)ㆍ월(月)ㆍ성신(星辰))의 착오를 무시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가벼이 여기게 됩니다.’ 하였으니, 이 말은 참으로 오늘의 약석(藥石)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척연(惕然)히 스스로 반성하고 폐습을 통쾌히 씻어, 진상하는 공물(貢物)에는 적절히 참작하여 절감해 주고 모든 부서의 하례(下隷)들에게는 고통스럽고 편함을 평등하게 해 주며, 족징(族徵)하는 침해를 없애고 이름 없는 세(稅)를 금지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시행되기를 기하시면, 아직도 천재(天災)를 만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억울한 죽음들이 이미 신설(伸雪)되었지만, 사실 을사년 기유년 사건보다 더 억울한 사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바라건대, 환연히 뇌우(雷雨)를 내리어, 당시에 피죄(被罪)한 이들에게 모두 관작을 복구해 주고 적몰된 가산(家産)을 속히 되돌려 주소서. 그럼 충혼(忠魂)이 감읍(感泣)하고 사림이 진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황(李滉)은 학문을 몹시 좋아하고 성리(性理)를 강명(講明)하였으니, 만약 치도(治道)를 도모하려 한다면 이 사람을 위임하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고, 또 정암을 문묘(文廟)에 배향시킬 것을 주청하자, 상이 많이 채택하였다. 또 정의(廷義)에서, 을사사화에서 받은 위훈(僞勳)들을 삭제하려 하자, 한 권신(權臣)이 달갑게 여기지 않으므로 공이 면책(面責)하기를,
“이 정의가 시행되지 않으면, 공의 죄는 장차 회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다시 병조에서 형조를 거쳐 대사헌에 전임되었을 때 공이 장차 조정의 권귀(權貴) 약간 명을 논핵(論劾)하리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도하(都下)가 온통 떠들썩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의 심사는 저 청천백일과도 같다. 다만 일찍 물러나지 못한 것이 유감일 뿐이다.”
하고는, 즉시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그 뒤에 한 사람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백모(白某)는 사림을 모해하려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그만 물러났습니다.”
하므로 상이 노하여,
“백모의 정충(精忠)은 해[日]를 관통할 수 있다.”
하고는, 그 사람을 구치(究治)하려고까지 하였다.
공은 관직에 있을 때 추치(騶直)를 받지 않았고, 소득(所得)이 있으면 대뜸 모든 친족에게 나눠 주었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침저녁 끓일 것조차 없었다. 본도(本道)의 감사(監司) 윤공 근수(尹公根壽)가 사실을 들어 아뢰자, 상이 다시 미두(米豆)를 주도록 명하므로 글을 올려 사은(謝恩)하고, 이어 조광조를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다시 주청하였다.
이보다 먼저 공이 조 선생의 묘액(廟額)을 청하기 위하여 병(病)을 참고 상경하였다가 원생(院生)이 이미 주청하였으므로 그만두고 즉시 하향하였는데, 상이 특지(特旨)를 내려 참찬(參贊)으로 승진 제수하고 교서(敎書)를 내려 부르므로 두 차례나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입조(入朝)하여 탄식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천안(天顔)을 다시 뵙고 싶다.”
하고 어전에 입시하자, 상이 간곡히 위로하였다. 공이 수만 언(數萬言)을 진대(進對)한 바, 모두 치도의 요점들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노혼(老昏)하여 십분의 하나도 다하지 못한 것을 깊이 개탄하고는, 다시 실봉(實封 봉하여 올리는 소장)을 올리려 하여 깊은 사색에 잠긴 지 여러 달만에 소를 올렸는데, 그 줄거리는, 전후 재변이 일어나게 된 까닭과 상심(上心) 병통의 근원을 다루었고, 또 동서(東西) 분당(分黨)의 폐단과 우계(牛溪)ㆍ율곡(栗谷) 양현의 도덕과 정암(靜菴)의 아름다운 도덕ㆍ학문ㆍ공로로도 묘액의 인가가 인색하다는 것을 극론하였으며, 맨 끝에는 남북 만이(蠻夷)의 사세로 보아 군정(軍政) 닦기를 바란다고 진언하였으므로 상이 융숭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 소를 선사(繕寫)해서 들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배(時輩)가, 공의 소에서 논한 붕당이란 어휘가 자기네들에게 불리하다 하여 양사(兩司)에서 합동으로 글을 올려 논핵하였고, 또 공의 소본(疏本)이 율곡 이 선생에 의해 수정되었다 하여 말하는 자들이,
“이이(李珥)가 스스로 소를 초(草)해 놓고는, 백모(白某)를 달래어 올리게 하여 장차 문자(文字)로써 사람을 모함하려 한다.”
하므로, 공이 소를 올리기를,
“신은 본시 문장이 부족하여 이이에게 수정을 부탁한 것입니다. 옛날에 정자(程子)도 여공저(呂公著)를 대신하여 응조봉사(應詔封事)를 짓고 부필(富弼)을 위하여 산릉소(山陵疏)를 초(草)해 주었는데, 신도 평소 남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숨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므로, 상이 사실을 알고 위로해 주었다. 이로부터 공은 시배와 더욱 서로 어그러지게 되었다. 일찍이 수레를 타고 정암의 서원에 가서 지난 자취를 위아래로 살펴보며 차마 떠나오지 못하다가 그 녹봉을 몽땅 서원 창고에 귀속시켰다.
기묘년(1579, 선조12) 9월 29일에 83세를 일기로 경제(京第)에서 별세하였다. 병이 나서 장사 지낼 때까지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료하고 관원을 보내 문병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치제(致祭)를 명하며, 은상(恩賞)을 더하고 하교하기를,
“현재(賢宰)가 가 버리니, 마음이 몹시 아프다.”
하였다. 그해 겨울에 양주(楊州) 적석리(積石里)에 안장되었다.
공은 천품이 고매 활달하고 강개한 기절이 있었으며, 젊어서부터 도(道)에 뜻을 두고 현인이 되기를 희망하여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아간 뒤에도 더욱 스스로 정진하여 아무리 폐척(廢斥)을 당하여도 좌절하지 않았고, 을사사화 때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항언(抗言)하여 곧장 한 손으로 세도를 붙잡고 인기(人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확립시켰으니, 그 고충(孤忠)과 정기(正氣)가 산악을 뒤흔들고 성두(星斗)를 어루만질 만하므로, 명성이 일세에 충만하고 사론이 하나로 돌아왔으며, 계사(啓事)를 초할 적에는 유공 희춘(柳公希春)이 보고 혀를 내두르면서 장(壯)하다 하였고, 공을 미워하는 소인(小人)들도 탄복, 또는 부끄러워하였으니, 아, 이 어찌 세리(勢利)로써 유혹하고 위무(威武)로써 굴복시킬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조금의 풍상(風霜)만 겪어도 모두 꺾이게 마련인데, 공은 험난한 고비가 많을수록 분발하는 의지가 더욱 강하였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헌신하는 마음이 연로(年老)해서도 변하지 아니하여, 일이 있어 진언할 때 반드시 그 소신을 다하고야 말았다. 말년에 소를 올릴 적에는 몸에 이미 병이 있었으나 사색에 열중하여 조금도 쉬지 않으므로, 자질(子姪)들이 나서서 간하였으나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 마음이 마치 온갖 물이 필경 동해(東海)로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도저히 저지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대저 듣건대, 정암도 조정에 있을 때 의를 다하고 충을 기원하는 정성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공은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에 모부인을 섬기는 데 반드시 그 뜻을 받들었고 형을 엄부(嚴父) 섬기듯 하였으며, 연산주가 혼학(昏虐)하여 민가(民家)를 철수하고 놀이터를 만들려 할 적에는 겨우 8세의 나이로 중사(中使)를 직접 만나서 주선과 응대를 잘하므로, 중사가 기이하게 여기어 그 집이 헐리지 않게 되었으며, 가세가 몹시 빈한하여 모부인이 밤새도록 길쌈할 적에는 공이 밤새도록 시좌(侍坐)하였다가 모부인이 취침한 뒤에야 잠자리에 들므로, 모부인이 안타깝게 여기어 매번 등불을 감춰 놓고 거짓 자는 체하다가 공이 잠든 뒤에야 다시 일어나곤 하였다. 하루는 ‘구용 구사(九容九思)’를 좌우에 써 붙인 다음,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앉은 지 3개월 만에 동배(同輩)들이 보고는 말하기를,
“그대의 용모와 사기(辭氣)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하였다. 진유(眞儒 조광조)를 사사(師事)하여 대도(大道)의 요체를 체득하여서는 소견이 더욱 높아지고 소양이 더욱 정대하여, 이해ㆍ우락 따위가 일절 그 마음에 집착됨이 없었으며, 만년에 덕기(德器)가 완성되어서는 너그럽고 평탄하고 간격을 두지 아니하여 남과 접촉할 적에는 폐부가 환히 보였고 남의 선(善)을 들을 적에는 지성으로 칭모(稱慕)하였으며, 남이 횡역(橫逆 횡포하여 상리(常理)에 어긋난 행위)으로 대해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지지 않았으며, 아무리 비소(卑少)한 이라도 자신의 허물을 말하면 반드시 기뻐하면서 바로 고쳤다. 평소 생활에 기호(嗜好)하는 바가 없어 의복ㆍ음식이 변변치 않았으며, 먼지가 방 안에 가득하였어도 소제하지 않고 늙도록 오직 성리학(性理學)만을 즐거워하여 낮에는 외고 밤에는 사색하다가 터득한 바가 있으면 바로 기록해 두었으며, 동지들이 찾아오면 흔연히 함께 강론하여 밤낮없이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학문에만 근면하여 나이가 늙어가는 줄도 몰랐다. 대저 공은 정암 선생에게 지성으로 신복하고 마음으로 도취하여 종신토록 경앙하였는데, 정암의 전체는 다 체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암과 비슷한 것으로써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 모든 행사에 드러났고 또 이를 후학에게 알렸으니, 그 공로가 진정 적지 않다. 만약 하늘이 사도(斯道)를 도와서 사화가 일어나지 않고 공이 그 재주를 사문(師門)에 다하게 되었다면 그 성취가 어찌 여기에만 그쳤겠으며, 장년(壯年)에 실의(失意)에 빠지지 않고 그 포부를 펴게 되었다면 그 사업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 안타까운 일이다. 선조(宣祖)가 일찍이 염근(廉謹)으로 표창하였고 인조(仁祖) 때에 역명(易名 시호(諡號)를 받는 것)의 특전이 추서되었다. 우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휴암은 이 다음에 마땅히 ‘근학 호문(勤學好問 학문에 근면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에 해당하는 문(文)자 시호를 받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세상에 공의가 없어 그 말대로 실현되지 아니하여, 아는 이들이 유감스럽게 여긴다. 남평(南平) 사민(士民)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봉산(逢山)으로 사액(賜額)하였고 파산(坡山) 사람들도 율곡의 사우 옆에 제사를 드린다.
공은 본관(本貫)이 수원(水原)이다. 상조(上祖) 경신(景臣)은 고려 때 시중(侍中)이고, 증조 효참(效參)은 지평(持平), 조부 사수(思粹)는 참교(參校), 아버지 익견(益堅)은 왕자 사부(王子師傅)인데, 공의 영귀(榮貴)에 의해 다 관작이 추증되고, 어머니는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사직(司直) 종은(從殷)의 딸이다.
공의 초취(初娶)는 평택 임씨(平澤林氏)로 아들 유공(惟恭)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후취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만호(萬戶) 찬(璨)의 딸이요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예로 부덕(婦德)이 매우 높았고 모든 아들에게 늘 급류용퇴(急流勇退 벼슬길에서 기회를 보아 용기 있게 물러나는 것)를 가르쳤으며, 두 아들 중에 유항(惟恒)은 현령(縣令), 유함(惟咸)은 승지(承旨)이고, 주부(注簿) 조감(趙堪)ㆍ안수기(安守基)ㆍ진사(進士) 신세영(辛世英)ㆍ의령 현감(宜寧縣監) 이윤조(李胤祖)ㆍ현감(縣監) 임색(任穡)은 다섯 여서(女婿)이다.
유항은 2남 5녀로 아들 효민(孝民)은 현감, 제민(悌民)은 생원(生員)이고, 여서는 첨정(僉正) 김기원(金期遠)ㆍ이상(李詳)ㆍ최흥운(崔興蕓)ㆍ유신붕(柳信朋)ㆍ이극(李)이다. 유함은 5남 1녀로 아들은 해민(海民)ㆍ현감 선민(善民)ㆍ도사(都事) 신민(信民)ㆍ첨지(僉知) 현민(賢民)ㆍ헌민(憲民)이고, 여서는 김흥록(金興祿)이다.
조감은 1남 1녀로 아들 의도(毅道)는 첨정(僉正), 여서 성문준(成文濬)은 현감이다. 안수기는 1남 1녀로 아들은 건(鍵), 여서는 이경진(李景震)이다. 신세영은 후사(後嗣)가 없고, 의령 현감은 1남 1녀로 아들은 첨정(僉正) 춘영(春英), 여서는 조대굉(趙大宏)이다. 임색은 1녀를 두어 현령 이중기(李重基)에게 출가시켰다.
효민의 아들은 봉사(奉事) 홍명(弘命)ㆍ첨지(僉知) 홍성(弘性)ㆍ홍중(弘中)ㆍ군수(郡守) 홍일(弘一)이고, 제민의 아들은 좌랑(佐郞) 홍우(弘祐)ㆍ참봉(參奉) 홍적(弘績)이고, 선민의 아들은 홍망(弘望)ㆍ홍기(弘基)ㆍ홍유(弘猷)이고, 신민의 아들은 홍규(弘規)ㆍ홍겸(弘兼)이고, 현민의 아들은 홍제(弘濟)ㆍ홍윤(弘胤)ㆍ홍원(弘源)이다. 지금까지 4, 5세(世)가 내려오는 동안에 내외 자손이 매우 많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그 외손으로 가장 드러난 이로는, 영(令) 조일(趙鎰), 좌랑(佐郞) 조익(趙釴), 첨정(僉正) 성역(成櫟), 첨지(僉知) 성직(成㮨)과 이시재(李時材), 동지(同知), 이행건(李行健), 우의정(右議政) 이행원(李行遠), 참판(參判) 이시해(李時楷)와 이시매(李時楳), 통정(通政) 신상(申恦), 감사(監司) 이만웅(李萬雄), 장령(掌令) 정시성(鄭始成), 군수 정시대(鄭始大), 현령(縣令) 조봉원(趙逢源), 정언(正言) 최상익(崔商翼) 등이다.
처음에 공이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성공(成公)과 동문우(同門友)이므로 우계 선생이 공을 매우 공경스럽게 섬겼고, 또 일찍이 공의 시종을 기록하여 행장을 만들었는데, 이번에 홍일(弘一)ㆍ홍우(弘祐)가 장차 묘도(墓道)의 비를 세우기 위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건대, 공의 성덕 대업을 나 같은 후생 말학이 감히 표현할 바 아니므로 삼가 우계가 찬(撰)한 장절록(狀節錄)에 의거하여 대충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기자의 교화 멀어져 / 箕條邈焉                     문도 쇠하고 지언이 없어졌다가 / 文弊言堙
정암이 갑자기 나서 / 眞儒勃興                     도가 넓어지고 학이 순수해졌는데 / 道宏學醇
누가 그 업적이었던가 / 孰承其緖                  위대한 휴암이 / 偉哉休菴
마치 정자 문하의 / 如在程門                        남쪽의 양씨와도 같았네 / 楊氏于南
기린이 노교에서 죽고 / 麟死魯郊                  통곡 소리 강당에 가득하니 / 慟纏鱣堂
저 으슥한 빈 골짜기에 / 閟彼空谷                 나의 패물 깨끗하네 / 我佩潔芳
천리(天理)에 순환(循環) 있어 / 理有伸屈      묘당(廟堂)에 진출된 바 / 乃進王庭
원우 시대의 남은 자취로 / 元祐餘蹤             외로이 떠돌기도 하였지만 / 羈旅孤惸
중류가 한 데 휩쓸린 가운데 / 衆流靡靡         지주(砥柱)처럼 우뚝 서 있었네 / 一柱亭亭
갑진 을사 두 해 사이에 / 時當辰巳               중종 인종 이어 승하하니 / 二聖繼陟
소인의 그지없는 흉계로 / 小人究凶              많은 군자 어육(魚肉)되어 / 君子爲肉
명신(名臣) 구신(舊臣)이 / 厖臣舊弼             입 봉하고 손 움츠릴 제 / 口緘手縮
공이 그 충의 뽐내어 / 公奮其忠                   맹분(孟賁) 하육(夏育)도 꺾을 수 없었고 / 賁育莫奪
방랑하고 곤궁한 중에서도 / 流離困㞃           그 마음 더욱 결백하였네 / 我心彌白
선조가 즉위 초에 / 宣廟之初                       영재(英才)를 그리다가 / 寤寐豪英
단호히 공을 기용하여 / 起公于廢                 그 대우 날로 더하였네 / 日加恩榮
연로할수록 장한 마음 / 暮年壯心                 돌이 아니거니 뉘라서 굴릴쏜가 / 匪石誰轉
그러나 일에는 뒤틀림이 많아 / 事喜乖張       끝내 그 포부 펴지 못하였네 / 卒莫我展
다만 사문을 숭앙(崇仰)하는 마음 / 惟有師門  아홉 번 죽은들 어이 잊으랴 / 九死可忘
마치 높은 산 큰길과 / 高山景行                    맑은 물 가을 햇볕에 비하였네 / 江漢秋陽
끼친 향기 찾아내고 / 尋其賸馥                    남은 광채 발양하여 / 發其餘光
사문을 이었으니 / 斯文不絶                        이게 누구의 공로인가 / 繄誰之功
참다운 근원 소통되어 / 眞源旣導                 온 냇물이 동해(東海)로 흐르듯 하니 / 百川其東
이를 무엇으로 신빙할까 / 曷徵其信              우계(牛溪)의 정확한 글 있네 / 有覺坡翁
지금 이 명 지어 / 我作銘辭                         먼 후세에 알리는 바 / 以告無窮
어이 감히 지었다 하겠는가 / 豈敢作之          우계의 말 따랐을 뿐일세 / 坡翁是宗


[주D-001]원상(院相) : 왕이 죽은 뒤 세자(世子)가 즉위는 하였으나 아직 상중(喪中)이므로 졸곡(卒哭)까지의 26일 동안, 명망이 있는 원로(元老) 재상(宰相), 또는 원임자(原任者)가 임시로 맡아서 정무를 집행하던 벼슬.
[주D-002]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 : 명종 2년(1547)에 부제학(副提學) 정언각(鄭彦慤)ㆍ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광주의 양재역 벽상(壁上)에 붙은 불온한 내용의 벽서를 발견, 이를 조정에 밀계(密啓)하여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이 사사(賜死)되는 등, 많은 사류(士類)가 화를 당한 옥사(獄事)를 말하는데, 이는 원래 을사사화(1545) 당시 대윤(大尹)을 숙청한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芑) 등이 대윤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집권층인 자기네들을 비방하는 내용의 벽서를 조작, 그 혐의를 사류들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주D-003]족징(族徵) : 지방의 이속(吏屬)들이 공금(公金)이나 관곡(官穀)을 축내거나 군정(軍丁)이 도망 또는 사망하여 군포세(軍布稅)가 축났을 때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그 일족(一族)에게서 억지로 추징(追徵)하는 것.
[주D-004]추치(騶直) : 관원(官員)에게 따로 주는 마부(馬夫)의 급료이다.
[주D-005]선사(繕寫) : 글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 정서(淨書)하는 것이다.
[주D-006]구용 구사(九容九思) : 구용은 족용중(足容重)ㆍ수용공(手容恭)ㆍ목용단(目容端)ㆍ구용지(口容止) 등, 신체 아홉 부분의 용태를 단속하는 일이며, 구사(九思)는 시사명(視思明)ㆍ청사총(聽思聰)ㆍ색사온(色思溫)ㆍ모사공(貌思恭) 등, 사물에 관하여 생각하는 아홉 가지의 일.
[주D-007]남쪽의 양씨 : 양씨는 송 나라 정이(程頤)의 고제(高弟) 양시(楊時)를 말한다. 그는 당시 동남방 학자들에게 정씨(程氏)의 정종(正宗)으로 추대, 구산 선생(龜山先生)으로 불렸으며, 그 뒤 주희(朱熹)ㆍ장식(張栻)의 학문이 다 그에게서 연원(淵源)되었다.
[주D-008]기린이 …… 죽고 : 노 애공(魯哀公) 14년에 애공이 서교(西郊)에 나가 사냥할 때, 계손씨(季孫氏)의 가신(家臣) 자서상(子鉏商)이 기린을 잡았는데, 군중들은 그것이 기린인지를 모르고,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내버렸다. 뒤에 공자가 이를 보고 흐느끼며 “나는 짐승 가운데 기린과 같다. 지금 기린이 나왔다가 그냥 죽었으니, 나의 도(道)가 궁해졌다.” 한 데서 온 말로, 세도(世道)가 쇠퇴한 것을 말한다. 《孔叢子 記問》
[주D-009]나의 …… 깨끗하네 : 초(楚)의 굴원(屈原)이 소인(小人)의 참소를 입고 울분을 참지 못해 지은 《이소경(離騷經)》의 “깨끗하고 꽃다운 추란(秋蘭)을 나의 패물로 삼았네.” 한 구절을 인용한 말. 여기서는 백인걸(白仁傑)이 한때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던 일을 뜻한다.
 퇴계선생문집 제48권
 행장(行狀)
정암 조선생 행장(靜庵趙先生行狀)

선생의 성은 조씨(趙氏)이고, 이름은 광조(光祖)이며, 자는 효직(孝直)이고, 스스로 정암(靜菴)이라 호(號)하였다. 조씨는 한양(漢陽)의 이름 난 성인데, 7대조인 양기(良琪)가 고려에 벼슬하여 총관(摠管)이 되었고, 원 세조(元世祖) 때에, 부수(副帥)로서 합단(哈丹) 군대를 쳐부수고 포로를 바치니, 황제가 도포와 띠를 주어 격려하였다. 고조의 이름은 온(溫)인데, 본조(本朝)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이 되어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으로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양절(良節)이었다. 한천이 의영고 사(義盈庫使) 육(育)을 낳으니 뒤에 이조 참판으로 증직되었고, 참판이 성균관 사예 충손(衷孫)을 낳으니,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증직되었다. 판서가 원강(元綱)을 낳으니, 벼슬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고, 뒤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되니, 이가 선생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현감(縣監) 권의(權誼)의 따님인데, 성화(成化) 임인년(1482, 성종13) 8월 10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이 좋은 자질을 타고나, 어렸을 때에도 장난치며 놀지 않아 이미 장성한 사람의 풍도가 있었고, 조금이라도 남의 잘못을 보면 즉시 지적해서 말하였다. 성장하여 글을 읽고 학문을 닦을 줄 알면서부터는 의연하게 큰 뜻이 있으나 오직 과거 보는 글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현의 위풍(威風)을 사모하여 넓게 배우고 힘써 행하여서 이룩함이 있기를 기약하였다. 19세에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있으면서 지성으로 안색을 살펴 봉양하여 효성스럽다는 칭찬이 나라에 드러났다. 정덕(正德) 경오년(1510, 중종5)에,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신미년(1511)에 모친상[內艱]을 당하였다. 을해년(1515) 여름에 조정의 신하가 효렴(孝廉)으로 천거하여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제수되었고, 이해 가을에 중종이 실시한 알성별시(謁聖別試)에 응시하여 을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얼마 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예조 좌랑(禮曹佐郞)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다.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상(喪)에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함께 상소하여, 신씨(愼氏)의 왕후의 위를 회복시킬 것을 청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이들이 말할 사안이 아니라고 여겨 체포해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선생만이 극력 간쟁하기를, “신씨는 실로 복위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에서 논한 것 또한 일리가 있으니, 죄를 주어서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두 공(公)은 이로 말미암아 죄를 면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가서 수찬(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한(典翰)을 지냈다. 정축년(1517) 여름 5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다. 모두들, “옥당(玉堂)의 장(長)이 되어 임금의 덕을 기르는 데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여 겨울에 옥당으로 돌아와서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주상께서 평소 유학을 숭상하고, 문치(文治)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우(唐虞) 삼대처럼 번성하기를 바랐으므로, 더욱 선생을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선생은 이에 세상에 보기 드문 대우에 감격하여서, 임금을 존경받게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유학을 번성하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서, “임금의 마음은 다스리는 근본이 되므로, 그 근본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의지하여 서지를 못하고, 교화가 이로 인해 행해지지를 못한다.” 하여 입대(入對)할 때마다 반드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엄숙히 하여 신명(神明)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해서, 아는 것은 다 말하였고, 말할 때에는 충직(忠直)하게 하였다. 주상께 경계할 것을 진언한 말에,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천지와 같이 크고 사시(四時)와 더불어 운행합니다. 그런데 그 이(理)가 욕심에 가려짐으로 해서 큰 것이 작아지고, 기(氣)가 사욕(私慾)에 얽혀짐으로 해서 운행하는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 있어서도 그 피해를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임금은 지위가 높아 교만하고 방탕하기가 쉬워서 아름다운 소리와 여색(女色)의 유혹이 보통 사람보다 만 배나 더한 데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마음이 한 번 바르지 못하고 기운이 한 번 순하지 못하면 재앙의 징조가 어두운 중에서 상응(相應)하고 재앙의 싹이 밝은 곳에서 일어나서 인륜은 막히고 만물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대개 이러하니, 주상께서 하늘을 섬기는 데 마음을 두어서 마땅히 중화(中和)의 지극한 공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정의와 사리(私利), 왕도와 패도(霸道)의 구별과 고금의 성쇠하는 징조와 군자ㆍ소인의 거취와 성패에 관한 경계(警戒)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속에 품은 것을 상세히 논의하고 극진히 말하여서, 어떤 때는 해가 기울어질 때까지 하였다. 임금이 겸허한 마음으로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고, 날마다 더욱 장려하였다. 무인년(1518) 봄에 조정에서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얻고자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주상께서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있으나 오랫동안 성과를 보지 못한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만약에 이 법을 행하면 인재를 얻지 못할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옥당(玉堂)과 함께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도 임금이 여러 달을 허락하지 않자, 선생이 정원(政院)에 나아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허락을 얻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다.” 하고는, 저녁이 되어 대간(臺諫)은 다 물러갔는데도 옥당은 그대로 머물러서 논계(論啓)하여 허락을 얻은 후에야 나왔다. 전에 회령부(會寧府) 성 주변에 살던 야인(野人) 속고내(速古乃)가 몰래 깊은 산중에 있는 야인과 공모하여, 갑산부(甲山府)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도 병사(南道兵使)가 올린 비밀 장계에 따라 먼저 밀지(密旨)를 보내 함경도[本道]에 유시하고, 이지방(李之芳)을 파견하여 틈을 엿보아 덮쳐서 법에 따라 처치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파견하려던 때 장상(將相)과 모든 신하가 둘러 모셨는데, 선생이 밖에서 들어와 임금을 면대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도적이 교활하게 속이는 꾀와 똑같으니, 왕으로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도리가 아니고, 또 당당한 큰 나라로서 한 조그마한 오랑캐를 사로잡는 데 도적의 꾀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신을 훼손하는 것이니, 신은 내심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즉시 다시 의논하도록 명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병가(兵家)에는 모략과 정도(正道)가 있고,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에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가 있습니다. 중의(衆意)가 이미 같은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밭 가는 것은 마땅히 남종에게 묻고, 베 짜는 것은 마땅히 여종에게 묻습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정상을 실로 다 압니다. 신의 말을 들으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하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선생을 대우한 것과 선생이 임금의 마음에 든 것이 다 지극하다고 하겠다. 당시에 선류(善類)로서 같이 선발되어 임금의 우대를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서로 함께 협력해서 사업을 일으켜, 오래된 폐해를 없애고 교화(敎化)를 닦고 밝혀서 옛날 현철한 왕의 법도를 차례로 거행하였고, 《소학(小學)》을 인재를 기르는 근본으로 삼고, 향약(鄕約)을 풍속을 교화하는 법도로 삼으니, 모든 관리가 자각하여 힘쓰고, 모든 사람들이 분발하였다. 그러나 여러 공(公)들이 너무 조급하게 효과를 보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여, 모든 건의하고 시설하는 데 있어 날카로움이 너무 드러났는가 하면 장황하고 과격하였다. 또한 젊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유리한 기회를 노려 시세에 영합하는 분란을 부추기는 자들이 그 사이에 많이 끼여 있었고, 구신(舊臣)들 중에는 시대의 의론에 용납되지 못해 이로 인해 공격을 받게 되자 원한이 골수(骨髓)에 사무쳤다. 선생이 일찍부터 이미 그렇게 될 조짐을 보고 도(道)가 행해지기 어려울 것을 알아서 오래전부터 직위를 사퇴하고자 하였다. 이해 겨울에 임금이 특명으로 선생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리고,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좌빈객 동지성균관사에 제수하였다. 선생은 관직이 너무 빨리 오르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여 극렬 간절하게 사양했으나, 임금의 신임은 갈수록 융숭해져서 더욱 허락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선생이 끝내 사양을 허락받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얼굴 가득 근심스러운 빛을 띠고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고 운운하였다. 기묘년(1519) 봄에 김우증(金友曾)이란 자가 사림(士林)을 무함한 일이 있었다. 일이 발생하자 조정에서 심문하는데, 선생이 사헌부의 장(長)으로 거기에 참여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선생이 김우증을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고 논박하여 파직시켰으나, 곧 정부가 아뢰어서 다시 유임되었다. 그 후에 조정의 의논이 정국 공신(靖國功臣) 중에 공이 없는 자에게 함부로 주었던 녹권(錄券 공을 기록한 문서)을 추탈하게 되었는데, 선생이 또한 그 의논에 동참하였다. 이때에 선생이 이미 물러갈 수도 없게 되었으니, 기강을 세워 탐욕한 자를 물리치고 깨끗한 이를 드러내며, 명령하면 시행되고 금지하면 그치게 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나, 돌이켜 보건대 시세(時勢)를 돌아볼 때 그때는 크게 근심될 만한 일이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일에 임하여는 조금 조화하려는 뜻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상(申鏛), 이자(李耔), 권벌(權橃)의 의견이 다 그러하였으니, 이것은 곧 시대를 따르는 의리로서 중도(中道)가 아님이 없었다. 그런데도 저 과격하고 경솔한 무리들은 도리어 선생이 정도에 어긋난 것을 따라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여 그 자취가 간사한 무리들과 같다고 하여 여러 번 배척하고 탄핵하였다. 전날 원망하던 모든 사람들이 곁에서 이를 갈고 입술을 깨물며 날마다 틈을 노리는 것을 알지 못하여, 큰 화가 갑자기 신무문(神武門)을 여는 변으로까지 되었으니, 슬프다,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그날의 일은 당연히 국가 문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수상(首相)이 울면서 임금의 옷깃에 매달려 간해서 그 정성이 하늘에 감동되어 다행히 벼락 같은 위엄을 조금 그치게 하였다. 그러나 유도들이 궐문을 지키고 울부짖으면서 다투어 의금부에 갇히고자 한 것은, 참소하는 자들에게 더욱 구실을 주었을 뿐이니, 이것은 소식(蘇軾)이 자기를 구제하려는 장방평(張方平)의 소(疏)를 보고 놀라서 탄식한 것과 같다. 선생은 10월 어느 날 능성(綾城)으로 귀양 갔고, 후명(後命 최후에 죽음을 내리는 명)이 이른 것은 12월 20일이었다. 선생이 곧 목욕하고서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도사(都事)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에게 죽음을 내리시니 마땅히 죄명이 있을 것이다. 청하건대, 죄명을 공손히 듣고 죽겠노라.” 하니, 도사의 대답이 없었다. 선생이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와 같이 하였으니, 하늘의 해가 나의 속마음을 비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8세이었다. 이듬해 모월 어느 날에 용인현(龍仁縣) 어느 동리 선인(先人)의 묘소에 장사 지냈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특이하여 동류 중에서 뛰어나니, 마치 화려한 난새가 머무르고 고상한 고니가 우뚝 선 것과 같고, 옥같이 윤택하며 금같이 순수하고, 또 무성한 난초가 향기를 풍기고 밝은 달이 빛나는 것과 같았다. 17, 8세에 분연히 도학을 공부할 뜻을 가졌다. 그때에 참판공(參判公 아버지)이 어천 찰방(魚川察訪)이 되었는데, 때마침 한훤(寒暄) 김 선생이 희천(熙川)에 귀양 가 있었다. 선생이 본래 한훤의 학문이 근원[淵源]이 있음을 들었으므로, 그곳으로 가서 부친을 모시고 있으면서 어천[彼]에서 어버이를 모셨기 때문에 한훤에게 찾아가 종유하며 학문하는 큰 방법을 들었다. 대개 우리 동국의 선현(先賢) 중에 도학에는 비록 문왕(文王) 같은 성군을 기다리지 않고도 창시한 자가 있었으나, 결국에는 절의(節義)ㆍ장구(章句)ㆍ문사(文詞)를 닦는 데 그쳤고, 진실로 실천하는 것으로써 학문의 근본을 삼은 이는 오직 한훤이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능히 험난함을 무릅쓰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비록 그 당시 강론하고 주고받은 뜻은 직접 듣지 못했으나, 선생이 그 후에 그처럼 도학을 공부하는 정성과 업적이 탁월한 것을 보면 그 발단(發端)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선 볼 수 있는 실정만으로 말하면,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소학(小學)》을 독실히 믿고 《근사록(近思錄)》을 존숭하여 모든 경전(經傳)에 적용하였다.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는 밤낮으로 몸가짐을 살피고 삼가서 의젓하고 엄숙하여 의복과 태도가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았고, 말씀을 하실 때나 행동을 하실 때는 반드시 옛 훈계에 따랐으니 아마도 지경(持敬)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언젠가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갔고, 또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갔는데, 공부하는 여가에 꼿꼿이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혀 상제(上帝)를 대하는 것과 같이 해서 본심을 함양(涵養)하기를 힘쓰는 것이 남이 미칠 수 없었으니, 아마도 꿋꿋하게 애써 정(靜)을 주로하는 학문을 하였기 때문이리라.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어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날마다 가묘(家廟)에 절하고, 어버이를 봉양하고 뜻을 어김 없이 받드는데 모두 곡진하였다. 집을 바르게 다스려서 안과 밖의 분별이 엄하였고 사랑과 훈계를 같이 베풀었다. 깨끗한 절조(節操)로 자신을 갈고 닦고 몸가짐을 빈한한 선비와 같이 하였다. 언젠가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랏일을 전심하여 집안일은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하고는 가정 살림에 신경쓰지 않았으며, 청탁이 통하지 않았고, 거마비(車馬費)를 받지 않았다. 자신을 살피고 사욕을 이겨내는 데에는 항상 남이 따르지 못할 점이 있었다. 젊은 날 우연히 여색(女色)을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곧 물리쳐 피하였고, 더욱 술이 성품을 해친다는 경계를 지켜서, 친구가 술을 마시고 체통을 잃는 것을 보면 준절하게 책망하였다. 상중에는 지극히 슬퍼하고 제사에는 정성껏 공경을 다하였으며, 후생(後生)은 각각 그 재질을 따라 장려하여 이끌고, 이단을 물리칠 것을 논하되, 먼저 근본을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 평소의 행동이 널리 알려진 데다 재주가 세상을 영도하기에 충분하였고, 영특한 기품이 밖에 드러나니, 풍모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일찍이 하련대(下輦臺)에 임금이 앉았을 적에, 선생이 대사헌(大司憲)으로 시종하다가 일이 생겨서 몸을 빼어 나가기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몸을 구부리고 앞으로 지나기도 하였는데, 그 몸가짐을 바라보고 백관이 다 주목하였으며, 교문(橋門)에 둘러섰던 자가 감탄하며 말로 표현할 바를 몰랐으니, 한 시대의 존경을 받음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스스로 무거운 책임을 지워 우리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 우리 백성을 어질고 편하게 사는 지경에 오르게 하리라고 생각하였으니, 그 충성은 금석을 뚫고, 그 용맹은 분육(賁育)보다 뛰어났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왕의 일만을 생각하는 신하로서 착한 임금의 성대한 시대를 만나, 조정에 나아가서는 날마다 세 번씩 알현하고, 물러 나서는 사람들이 다투어 손을 올려서 존경하였으니, 이는 상하가 서로 기뻐하여 천년에 한번 있을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서 하늘이 그 사이에 마(魔)가 들게 하여 위로는 그 뜻이 크게 행하여지지 못하고, 아래로는 그 혜택이 넓게 미치지 못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시대의 운수와 나라의 액운과도 관계되니 천지에 유감된 일이며, 귀신이 농간을 부린 것이니, 선생인들 어찌하리오. 더욱이 선생은 언젠가 상사(上舍) 허백기(許伯琦)와 함께 “철없는 젊은이들이 세속을 놀라게 한다.”라고 말하였고, 또 수재(秀才) 성수침(成守琛)을 만나서는 향약의 실행하기 어려운 점을 근심하였으니, 스스로의 맡은 일은 비록 중대하였지만, 고집해서 반드시 하려는 뜻은 없었다. 그가 사헌부의 대사헌 자리를 극력 사양하다가 허락받지 못했을 때 그처럼 깊이 근심하였고, 기준(奇遵)이 언젠가 산림에 홀로 갔으면 하는 탄식을 하니 자주 칭찬하며 마음에 들어 하신 것을 보면, 물러서기 어려운 때에 용감하게 물러서는 것은 평소 선생의 뜻이었다. 그러나 근세에는 사대부를 대우함이 예전 의리를 따르지 않아서, 물러가기를 구하여 허락을 얻은 예가 없고, 신하가 벼슬에서 물러가는 길이 끊겨, 한 번 조정에 서면 병으로 폐하거나 죄로 물러나는 것 외에는 국사를 떠날 방도가 없으니, 비록 선생이 화합하지 못하여 물러가기를 도모하고, 기미를 보아 일어나고자 했으나, 어찌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미 선생이 물러나려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또 어찌 화가 오는 것을 지혜와 꾀로써 면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선생의 더욱 어려웠던 점이다. 그러나 일월의 빛은 전처럼 가렸던 구름이 사라지면 밝아지고, 의리의 감정(感情)은 오래될수록 더욱 시비의 판단이 명백해지기 마련이다. 중종이 말년(末年)에 하늘의 뜻을 통찰하고 여론도 선생의 누명을 벗겨주고자 하여, 실로 이미 은택을 내릴 뜻이 있었고, 인종이 즉위하자 묘당(廟堂)의 거듭된 논의와 유생의 호소로 말미암아 마침내 중종의 뜻을 따라서 선생의 관작을 예전처럼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아아, 천도는 본래 바르고 인심은 진실로 속이기 어려운 것이니, 요 임금이 뜻했던 바를 순 임금이 이어받아 실행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선비의 학문은 방향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세상의 다스림은 이로 인해 거듭 밝아질 수 있었으며, 도학은 이에 힘입어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나라의 기맥도 이에 힘입어 무궁해질 수 있었으니, 이러한 사실로 본다면, 당대의 사림(士林)의 화(禍)는 비록 슬프다 하겠으나, 선생이 도를 높이고 학문을 창도한 업적은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또 한 가지의 말이 있으니, 주(周)나라가 쇠망한 이래로 성현의 도가 그 당대에는 행해지지 못했으나, 만세(萬世)에는 행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개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덕(德)과 재주는 그것을 써서 왕도(王道)를 일으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인데도 결국에 성취된 것은 교훈을 세워서 후세에 남기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늘에 있는 것은 본래 알 수 없지마는, 사람에게 있는 것도 역시 일괄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선생이 추구한 도를 이미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도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세상에서 큰 일을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고, 다만 벼슬길에서 물러나 그 도의 실상을 크게 천명하여 우리 동방의 후세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 하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또 대개 하늘이 큰 임무를 사람에게 내리려 할 적에 어찌 젊을 때에 한 번 이룬 것만으로 대번에 만족하게 여기겠는가. 필시 중년과 말년에 풍족하게 공을 쌓은 후라야 자격이 크게 갖추어지는 것이다. 가령 선생이 애초에 성세(聖世)에 갑자기 등용되지 않고 집에서 한가히 지내며 궁벽한 마을에 숨어 살며 더욱 이 학문에 힘을 다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깊이 연구했더라면 연마한 것이 관철되어 더욱 고명해지고, 수양한 것이 높고 깊어 더욱 넓고 해박해져서 환하게 낙건(洛建)의 근원을 찾고, 수사(洙泗)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이와 같이 되었더라면 당대에 받는 지우(知遇)는 받아도 좋고 못 받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믿는 것은 이 도와 도학자를 위하는 길은 교훈을 세워 후세에 전하는 한 가지 일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선생은 그렇지 못하였으니, 첫째 불행은 등용되어 발탁된 것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는 것이고, 둘째 불행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셋째 불행은 귀양 가서 일생을 마친 것이어서 앞에 말한 중년ㆍ말년에 풍족하게 공부할 만한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교훈을 세워 후세에 전하는 일은 더더군다나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이 사람에게 큰 책임을 내린 뜻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이 때문에 오늘날 선생이 남긴 것을 찾아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하고 바른 학문을 열어 주는 방법으로 삼으려 하여도, 의거할 만한 단서가 거의 없었다. 헐뜯는 무리의 끝없는 담론이 화복과 성패의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여 세도(世道)가 더욱 투박(偸薄)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멋대로 지목하여 서로 헐뜯자, 몸조심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꺼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자는 이를 경계로 삼았으며, 선량한 이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게 되어서 더욱 우리 도에 병폐가 되었다. 아아, 이것이 어찌 실로 요 임금의 유지(遺志)를 순 임금[重華]이 계승하여 이 도학을 보호하고 나라의 기맥을 길이 이어가게 하는 장한 뜻이겠는가. 이것은 또 뒤에 오는 어진 임금과 현명한 재상 및 무릇 세상을 다스릴 책임을 진 자가 마땅히 깊이 근심하고 영구히 거울삼아서 힘써 구제할 점이다.
그러므로 몇 년 전부터 태도를 바꾸어서 새롭게 혁신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하게 보인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다. 세상의 선비 된 자가 여전히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술(霸術)을 천하게 여길 줄 알며, 바른 학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며, 정치하는 도리를 반드시 몸을 닦는 데에 근본을 두어서, 모시고 심부름하는 것으로부터 이치와 성(性)을 연구하는 데 이르게 되어서 점차로 분발해 일어나서 하고자 하는 것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이며, 누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는가. 하늘의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고, 성조(聖朝)의 교화가 여기에서 무궁하게 될 것이다. 선생의 아내는 첨사(僉使) 이윤형(李允泂)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정(定)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는 용(容)인데 지금 전주의 판관(判官)이다. 선생이 돌아가실 때 두 아들이 다 어렸고 또 세상을 두려워하여 피해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선생의 뜻과 행적을 기술하는 일을 오랫동안 부탁한 일이 없어서, 사람의 이목에 남을 사적(事蹟)이 점차로 인멸되기에 이르렀다. 중간에 상사(上舍) 홍인우(洪仁祐)가 행장 하나를 지었는데, 지난해에 판관 아들 이 그 종질인 충남(忠男)을 보내와서 홍 상사가 지은 행장을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비석(碑石)은 이미 마련되었으니, 명문(銘文)을 지어 묘 앞에 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문장을 못한다고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비문을 짓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행장을 구하여야 할 것인데, 홍 상사가 지은 행장을 보니 너무 간략합니다. 반드시 다시 널리 방문하여 많은 사적을 찾아내고 당대의 훌륭한 문장가를 구하여 행장을 보완(補完)한 후에 천천히 비문을 만들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근래에 판관이 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고, 아울러 《음애일록(陰崖日錄)》 등 두 가지 서적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사적을 더 찾을 수가 없고, 사방으로 돌아보아도 저의 선인을 위하여 기꺼이 붓을 잡을 자가 없으므로 감히 두 번 세 번 번거롭게 청합니다.” 하였는데 사정이 매우 애처로웠다. 내가 혼자,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에게 받은 영향은 많은데, 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 또 행장을 짓지 않는다면, 어찌 정이 지극하면 일이 따른다 하겠으며, 또 홍 상사는 학문에 뜻을 둔 선비요, 또 선생과 한 동리 사람이니, 그 행장이 비록 간략하더라도 필시 증거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적은 것을 바탕으로 하고 나중에 얻은 서적을 참작해서 가감(加減)하여 이 글을 지었으니, 이는 우선 조금이라도 판관의 효성에 보답하고자 해서요, 또 이어서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행장을 완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해서이다. 만약 이것이 뒷날 사필(史筆)을 잡는 자의 참고가 될지라도, 선생의 학문과 사업, 언론과 풍모가 사책(史册)에 실려 있고, 추모하는 노래에 스며 있는 것이 더욱 많을 것이니, 어찌 이 행장에만 국한되겠는가. 가정(嘉靖) 43년 갑자(1564) ○월 ○일에 진성 이황이 삼가 적다.


[주D-001]합단(哈丹) : 원나라 태조의 아우인 합적온(哈赤溫)의 5세손으로, 내안(乃顔)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원나라 관군에게 패하였다. 충렬왕 때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해 왔으나 연기(燕岐)에서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D-002]장방평(張方平) : 송나라 사람으로, 신종(神宗) 때 참지정사, 지진주령(知陳州令) 등을 역임했다. 강개하여 왕안석(王安石)이 정권을 잡았을 때 의연하게 조금도 굽히지 않은 것으로 명망이 높았다. 소식이 어사에게 탄핵받았을 때 그를 위해 힘써 주었다.
[주D-003]하련대(下輦臺) : 성균관 앞 왕의 수레를 멈추는 자리이다.
[주D-004]분육(賁育) : 진 무왕(秦武王) 때의 이름 난 역사(力士)이었던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두 사람을 가리킨다.
[주D-005]낙건(洛建) :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한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자는 건양(建陽), 즉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사람이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주D-006]수사(洙泗) :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의 사수(泗水)와 그 지류인 수수(洙水)를 말한다. 공자가 사수와 수수 사이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뒤에 공자의 사상과 학통을 가리키는 호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