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유명 조선국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

유명 조선국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 병서(幷序) (펌)

아베베1 2009. 11. 12. 10:58

양촌선생문집 제37권
 비명류(碑銘類)
유명 조선국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 병서(幷序)


상이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 봄 2월 기해일에, 회암사(檜巖寺)에 행차하여 근(近)에게 명하기를,
“수국사(脩國師)가 전조(前朝)에서 그 도덕과 행검이 한 세상을 압도하였는데, 내가 즉위하자 죽으므로 몹시 슬퍼하였다. 이제 승도(僧徒)들이 석탑을 쌓아 사리를 안치하고 또 비(碑)를 새겨 후세에 보이고자 하니, 그대는 마땅히 명(銘)을 지으라.”
하였다. 근은 명을 받고 두려워 감히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선사(先師)의 휘(諱)는 혼수(混脩)요, 자는 무작(無作)이요, 호는 환암(幻菴)이요, 본성은 조씨(趙氏)로서 광주(廣州) 풍양현(豊壤縣)이 그 본관이다. 아버지의 휘는 숙령(叔鴒)으로 헌부(憲府)의 산랑(散郞)이요, 어머니는 경씨(慶氏)로서 본관이 청주(淸州)이니, 모두 사족(士族)이다. 헌부가 용주(龍州)의 원으로 나가,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경신년(1320, 충숙왕7) 3월 13일에 선사를 관사에서 낳았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사슴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우뚝 서 두 번씩이나 뒤돌아보는 것을 보고 활을 당기려 하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돌아보니, 사슴 새끼가 그 어미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헌부는 곧 “짐승이 새끼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무엇이 다르랴.” 하고 탄식하면서 곧 사냥을 그만두었는데, 몇 달 안 되어 임소인 용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 어머니는 상(喪)을 받들고 그 어린아이와 함께 귀향하였다. 선사께서 어렸을 때 병을 앓아 점을 친 일이 있는데, 그 점쟁이의 말이 “이 아이가 집을 나가면 병도 없을 것이요, 위대한 화상(和尙)이 되리라.”고 하였다. 나이 겨우 12세가 되자 그 어머니께서 선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갓 태어났을 때 너의 아버지가 몹시 귀여워하였다. 그리하여 사슴의 모정(母情)에 감동되어 곧 사냥을 그만두었으니, 이는 너의 살리기 좋아하는 인자한 도의가 이미 강보(襁褓)에 있을 때부터 나타난 것이다. 하물며 점쟁이의 말이 그러함에랴.” 하고, 대선사(大禪師)인 계송(繼松)에게 보내 머리 깎고 내외 경전(經典)을 익히게 하였는데, 특이한 총명과 지혜가 달로 열리고 날로 더하여져 높은 명성을 떨쳤으며, 드디어 그 스승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신사년(1341, 충혜왕2)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 유생과 석문의 친구들이 날로 붙좇았으나, 자신은 항상 생명의 환화(幻化)가 일정하지 못함을 탄식하며 초연히 명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두었다. 그러자 갑자기 외가 동네에 비명에 죽은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비감(悲感)한 생각이 들어 입산하기로 결심하였다. 어머니를 하직하고 떠나갈 무렵에 둥근 해가 선사의 얼굴을 비치는 꿈을 꾸었다. 이미 경사로운 징조임을 깨닫고 곧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으니, 지정 8년 무자(1348, 충목왕4) 가을로 이때 선사의 나이는 29세였다. 마음을 다잡고 잠도 자지 않으며 잠시도 몸을 눕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공부를 2년 동안 정진한 후, 그 어머니가 애태우며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즉시 돌아와 어머니를 뵙고는 경산(京山)에 우거하면서 멀리 나가지 않았다. 5~6년 동안 이와 같이 지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람을 시켜《대자법화경(大字法華經)》을 써서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선원사(禪源寺)에 가서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배알하고, 그에게《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깊이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작고한 재상 조공 쌍중(趙公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수릉(首楞)》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는데, 청아하게 뽑아내는 말재주가 있어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었다. 여기에 3년 동안 머물다가 충주(忠州) 청룡사(靑龍寺)로 갔다. 청룡사 서쪽 산기슭에서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봉우리가 사방에 둘러있고 주위가 고요한 옛 집터가 있는데, 선사께서 몸소 목재와 돌을 날라다가 기탄없이 경영하여 일이 완성되자 연회암(宴晦菴)이란 편액을 걸었으니, 대개 그 자신의 심적(心迹)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현릉(玄陵)이 선사의 행적이 바른 것을 높이 여겨 회암사(檜巖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가지 않고, 곧 금오산(金鰲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신성암(神聖菴)에 거처하였다. 이때 나옹(懶翁) 혜근화상(惠勤和尙) 또한 고운암(孤雲菴)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접견하여 도(道)의 요지를 질의하였는데, 나옹은 뒤에 금란가사(金襴袈裟)ㆍ상아불(象牙拂)ㆍ산형장(山形杖)을 선사에게 주어 표신을 삼았다.
신축년(1361, 공민왕10) 가을에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에게 명하여 선사를 모셔다 대궐에 나가 강단(講壇)의 자리를 주장하게 하니, 선사는 도중에 도망쳐 산수(山水) 속에 자취를 감추고 명산을 편력하여 그 지조가 더욱 굳어졌다. 기유년(1369, 공민왕18)에는 백성군(白城郡) 사람 김황(金璜)이 원찰(願刹) 서운사(瑞雲寺)에 선사를 맞이하였는데, 선사께서 이르자 승당(僧堂)을 열고 낭무(廊廡)를 수리하여 선회(禪會)를 크게 여니, 사방의 승려들이 소문을 듣고 와 배알하는 자가 많았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3년 경술(1370, 공민왕19) 가을 7월에, 상이 공부선장(功夫選場)을 열어 선교(禪敎)의 여러 승려를 모아 나옹을 명하여 그들을 시험하게 한 다음, 상이 친히 이를 지켜보았다. 나옹이 한 마디 말을 내어 묻자 여러 승려들은 한 사람도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상은 그만 불쾌하여 자리를 파하려 하였는데, 선사께서 맨 뒤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堂門) 섬돌 아래 서 있었다. 나옹이 “무엇이 당문구(當門句)냐?” 고 물으니, 선사께서 즉시 섬돌에 올라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앙 한복판에 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입문구(入門句)를 물으니, “들어오니 도리어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다.”고 대답하고, 또 문내구(門內句)를 물으니 “안과 밖이 본래 공(空)인데 중(中)이 어떻게 성립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또 삼관(三關)으로 묻기를 “산은 어찌하여 멧부리에서 그치는가?” 하니, “높으면 곧 낮아지고 낮아지면 곧 그치게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물은 어찌하여 개울을 이루는가?” 하니, “바다가 숨어 흐르는 곳마다 개울이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밥은 어찌하여 백미로 짓는가?” 하니, “만약 모래를 찐다면 어떻게 좋은 음식이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곧 고개를 끄덕이자, 상이 유사(攸司)를 명하여 문답한 구절을 입격문(入格文)으로 만들어 쓰게 하고 종문(宗門)에 머물게 하였는데, 선사께서는 상이 내원(內院)에 머물게 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남몰래 도성을 빠져나가 위봉산(圍鳳山)에 숨어 있었다.
5년 임자(1372, 공민왕21)에는 상의 명에 못 이겨 불호사(佛護寺)에 머물렀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으로 내불당(內佛堂)에 불려 들어갔으나, 선사께서는 깊은 밤을 이용하여 남몰래 빠져 나와 곧바로 평해(平海) 서산(西山)으로 갔다. 조정에서 팔도에 칙명을 내려 찾기를 마지아니하므로 곧 나와서 왕명에 응하였다. 갑인년(1374, 공민왕23) 정월에 비로소 내원에 들어 갔는데, 상이 자주 법요(法要)를 물었고 왕대비(王大妃)가 더욱 존경하였다. 9월에 상이 승하하자 강선군(康宣君)이 계승하여 광통무애 원묘대지보제(廣通無礙圓妙大智普濟)의 존호를 내렸다. 을묘년(1375, 우왕1) 가을에는 송광사(松廣社)에 이주하였고, 병진년 3월에는 글을 올려 내원을 떠나서 서운사(瑞雲寺)로 돌아갔다. 무오년(1378, 우왕4)에 치악산(雉岳山)으로부터 연회암(宴晦菴)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문 앞에 손이 찾아오자 선사께서는 곧 침실로 들어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 손은 과연 중사(中使 내시(內侍))였다. 선사에게 광암사(光巖寺)를 맡아 달라고 청하였는데, 선사가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끝내 나왔다. 겨우 3년을 지내고 나서 다시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회보가 없자, 선사께선 즉시 밤에 도망쳐 원주(原州) 백운암(白雲菴)으로 갔다. 이후부터 용문(龍門)ㆍ청평(淸平)ㆍ치악산(雉岳山) 등을 편력하면서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계해년(1383, 우왕9) 2월에 조정의 의논이 옛 제도에 따라 석문(釋門)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을 골라 세워서 사범을 삼고자 하였는데, 당시 물망이 모두 선사에게로 주목되었다. 선사께서 이 말을 듣고 은퇴하기를 꾀하니, 문인 감로 장로(甘露長老) 경관(慶觀)이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안정하려는 계책뿐입니다. 지금 나라 임금이 불법(佛法)을 존숭하는 의미에서 이 일을 거행하려는 것이니, 그 취지가 매우 훌륭합니다. 선사께서는 사범이 되어 다소나마 안정하여 함부로 움직임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선사께서 끝내 가지 않자, 여름 4월 초1일 갑술에 왕이 상신(相臣) 우인열(禹仁烈) 등에게 어서(御書)ㆍ인장(印章)ㆍ법복(法服)ㆍ예폐(禮幣)를 받들어 보내 선사가 계신 연회암에 나와서 국사(國師)로 책봉하는 동시,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변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리게 하고, 충주의 개천사(開天寺)로 상주하는 곳을 삼았다. 그해 가을에 서운산(瑞雲山)으로 가니, 왕은 또 정랑(正郞) 박원소(朴元素)에게 안마(鞍馬)를 주어 보내 모셔 오게 하였다.
이듬해 갑자년에 해적(海賊)이 깊이 들어와 충주를 침범하므로, 조정에서는 걱정하기를 “개천사 주위가 해적의 소굴이 될 터인데 선사께서 거기에 머무니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여, 왕에게 아뢰어 사람을 보내 광암사(光巖寺)로 맞아 왔다. 광암사에 이르자 상언(上言)하기를,
“노승(老僧)이 개천사를 사양하지 못하고, 또 광암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절 하나를 맡는 것도 노승의 본뜻에는 어긋나는데 둘을 겸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노승으로 하여금 선군(先君)의 명복을 비는 데 전심하게 하시려면 개천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개천사는 선사께서 끝까지 머물러 있어 그 음덕을 입을 곳이요, 광암사는 내가 청하여 연법(演法)하게 한 곳이니, 둘 다 겸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므로, 선사께서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을축년(1385, 우왕11) 가을에 50일 동안의 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을 설치하여 온갖 재변을 물리치게 하였는데, 명망 높은 유생들과 학식 있는 승려들이 많이 와서 청강하였고, 마지막에는 임금까지 행차하여 예를 베풀었다. 병인년에는 대비(大妃) 안씨(安氏)가 현릉(玄陵)을 좋은 곳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보국사(輔國寺)에 불정회(佛頂會)를 베풀고 선사를 초청하였으며, 왕은 또 수창궁(壽昌宮)에 초대하여 소재석(消災席 재앙의 소멸을 비는 자리)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돌아갈 때에는 대언(代言) 이직(李稷)을 딸려보내 존경을 표하였다. 무진년(1388, 우왕14) 여름에 왕이 외지에서 손위하고 어린 임금(창왕을 가리킴)이 그 뒤를 계승하자, 선사께서 개천사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창왕이 특별히 사람을 시켜 호행(護行)하게 하였고, 기사년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표문(表文)을 올리며 인(印)을 봉하여 조정에 드리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는데, 몇 달 안 되어 다시 국사(國師)로 봉하고 사람을 보내 개천사로 도로 모셔오게 하였다. 지금의 주상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 선사와 함께 대장경(大藏經)의 완성을 염원하였는데, 신미년(1391, 공양왕3) 가을에 장정과 교정의 일이 끝나므로 서운사에 두고 크게 경회(慶會)를 베풀었다. 이때 공양군은 내신(內臣)을 명하여 향(香)을 내리고 선사를 맞아 증사(證師)를 삼게 하였다.
임신년(1392, 태조1) 가을 7월에 우리 주상께서 혁명하여 왕업을 열자 선사께서는 즉시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얼마 뒤에 노병으로 그 직위와 절[寺]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전문(牋文)과 함께 인(印)을 보낸 다음 청룡사로 행장을 옮겼다. 시자(侍者) 담원(湛圓)이 전문과 인을 받들고 대궐에 나가니, 상의 뜻이 전과 같이 스스로 섬기고자 해서 곧 인을 되돌려 보냈다. 담원이 선사에게 와 아뢰니, 선사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내 늙고 또한 병들어 오래 지탱할 수 없거늘, 명철한 주상께선 어찌하여 나의 소원을 막느냐.”고 말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질(痢疾)에 걸려 10여 일 동안 낫지 않았다.
용변이 잦았으나 남에게 부축을 받지 않았으며, 피곤하여도 편히 눕지 않고 언제나 꼿꼿이 앉아 있었다. 9월 18일 병신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8일 동안 상(床)에 앉았으되 얼굴이 평시와 같았다.
25일 계묘에 문인들이 연회암 북쪽 산기슭에 섶을 쌓고 다비(茶毗) 하였는데, 전날 밤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아침까지 그치지 않다가 다비를 시작할 무렵에 구름이 걷히고 맑게 개므로 신명의 도움이 있는 듯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뼈를 모으니 그 빛이 눈[雪]과 같이 희었는데, 정골(頂骨 이마 뼈)이 더욱 두텁고 정결하였다. 문인 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 상이 애도하는 심정에서 유사를 명하여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내신(內臣)을 보내 그의 유골을 수장(收藏)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는 한편, 공인들에게 명하여 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그해 연말 12월 갑신일에 청룡사 북쪽 봉우리에 하관하는데, 전날 밤 청명하여 별빛이 빛나더니 계명(鷄鳴) 때부터 비가 내리다가 돌을 쌓아올릴 무렵에 이르러 그치므로, 뭇사람들은 기이한 일이라고들 말하였다. 춘추가 73세에 하랍(夏臘)이 60세였다.
선사께서는 청수한 얼굴에다 맑고 온화한 기상으로 예절이 바르고 말씨가 간절하므로 사람들은 모두 친애하고 공경하였다. 계율(戒律)을 가짐에 굳건하였고 도(道)를 지킴에 조심하였다.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겸허하였고, 연세가 높을수록 행동은 더욱 굳세었다. 선교(禪敎)의 모든 경전(經典)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거의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자통(自通)하였다. 남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고 강해(講解) 또한 자상하고 밝음으로 이르는 곳마다 제자가 많았고,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석덕(碩德)들이 많았다. 글짓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붓만 들면 그 말이 정미하게 내려갔으며, 더욱 간독(簡牘 편지)에 능하여 식자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碑)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撰)하게 하고, 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상에게 알림으로써 근(近)에게 이 명이 내려졌다.
조용히 생각하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선(禪)보다 더 높은 것이 없으나, 그 말이 기괴하여 측량할 수 없는 것이 많으니, 마삼근(麻三斤)ㆍ간시궐(乾屎橛)
같은 유가 더욱 해괴하다. 그 전통이 멀어갈수록 말이 더욱 허황하되 조계(曹溪)의 대감(大鑑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시호) 선사가 말한 심평(心平)ㆍ행직(行直) 등이 이치에 맞고 평이하며, 도가 더욱 높아 모든 조사(祖師) 중에 뛰어나서 요즈음 선(禪)을 배우는 자가 모두 그를 높인다. 지금 선사께서 선장(選場)에서 대답한 말을 보니 사리가 뚜렷하고 분명하고 절실하며, 또 평소 학자들을 반드시 진상(眞常)으로 훈도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알아듣기 쉽도록 하였으니, 그 교법(敎法)이 대감과 같은 분이라 해괴하고 허황함을 말하는 다른 파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이 참으로 도의 근본이 평탄하고 진실하며 선사의 조예가 심원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선사께서는 이미 아름다운 자품(資稟)을 지녔고, 또 공력의 근실함을 더하여 그의 소득이 다른 이들과 특이하니, 또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이 참으로 명(銘)할 만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성해(性海)는 미묘하고 담담하여 마치 물거품처럼 저절로 생겼다 사라졌다 해도 그 자취가 없이 항상 깊고 맑도다. 우리 선사는 덕을 제대로 대성(大成)하였으니 그 깨달음이 출중하여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도다. 감탄하고 분발하여 어머니를 하직하고 집을 떠났으며, 마음을 다잡고 힘을 다하며 기대거나 눕지도 않았도다. 좌우에 치우치지 않아 중도(中道)를 잡았으며, 속세를 멀리해 자비의 햇빛이 항상 밝았도다. 궁벽한 산중에 자취를 감출 땐 병(甁) 하나 석장(錫杖) 하나이지만, 문답이 서로 부합될 땐 임금도 기뻐하였도다. 많은 승려들이 그 기풍을 따랐고 온 나라가 그 덕을 추앙했으니, 나가면 사빈(師賓)이 되었고, 들어오면 종단이 활기를 얻었도다. 처음에 둥근 해를 꿈꾸어 그 영험이 빛났으며, 마침내 죽어서는 징험이 있어 법우(法雨)가 널리 흡족하였도다. 왕명으로 비(碑)를 만들어 거기에 이 글을 새기나니, 무궁한 내세(來世)에 모두 보각(普覺)을 스승 삼으리.


[주D-001]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 : 오불정(五佛頂)의 하나. 결백 청정한 자비로써 널리 법계 중생에게 두루 덮어 주는 것이, 마치 일산이 사람을 덮는 것과 같다 하여 백산개라 한다.
[주D-002]증사(證師) : 법회(法會)를 증명할 임무를 맡은 법사(法師).
[주D-003]게(偈) : 산문체로 된 경전의 1절의 끝이나, 맨 끝에 4자로 된 글귀로 묘한 뜻을 읊어 놓은 운문(韻文).
[주D-004]하랍(夏臘) : 중이 된 해부터 세는 나이. 납(臘)은 세말(歲末)을 일컫는 말인데, 비구는 해마다 여름 90일 동안을 한 곳에 머물러 수행하고, 이것을 하안거(夏安居)라 하여 나이를 세기 때문에 하랍이라 한다.
[주D-005]마삼근(麻三斤)ㆍ간시궐(乾屎橛) : 선문답(禪問答)에서의 화두(話頭). 어떤 중이 동산 수초(洞山守初)에게 “부처가 어떤 것이냐?” 고 묻자 “마삼근”이라 대답하였고, 또 어떤 중이 운문(雲門)에게 “어떤 것이 부처냐?”고 묻자 “간시궐이니라.”고 대답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