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건원릉(健元陵) 지석문(誌石文)

건원릉(健元陵) 지석문(誌石文) (펌)

아베베1 2009. 11. 12. 11:12

 양촌선생문집 제39권
 묘지류(墓誌類)
건원릉(健元陵) 지석문(誌石文)


영락(永樂 명 성조(成祖)의 연호) 6년(1408, 태종8) 5월 24일 임신에 우리 태조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께서 갑자기 승하하시므로 우리 전하는 슬피 사모하며 양암(諒闇 임금의 거상(居喪)을 말한다)의 예를 마친 다음, 삼가 뭇 신하들과 함께 존호(尊號)를 올리고, 그해 9월 초9일 갑인에 도성 동쪽 양주(楊州) 검암촌(儉嵓村) 건원릉에 예장(禮葬)하였다.
삼가 선원(璿源)의 유래를 상고하니, 신라(新羅) 이후 대대로 달관(達官)이 있었고, 인덕(仁德)을 쌓아 후손의 경사를 넉넉히 하였다.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비로소 원 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고, 4대를 내리 습작(襲爵)하였으니 사졸들이 잘 따랐다. 우리 태조께서는 젊어서부터 기국을 쌓아 그 용맹과 지략이 무리에 뛰어났다. 세상을 제도할 만한 활달한 도량이 있고, 지극히 어질어 살리기 좋아하는 것은 타고난 천성이었다. 일찍이 고려 공민왕을 섬기면서 여러 벼슬을 거쳐 장상(將相)에 이르렀고, 중외에 드나들며 여러 번 큰 공을 세우고 국민을 안정시켰다. 군사를 다룸에 엄숙하여 추호도 침범함이 없으며, 1백여 차례나 크고 작은 전쟁을 겪었으니,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고 왕성(王城)을 수복한 것과 임인년(1362, 공민왕11)에 납합출(納哈出)을 쫓은 것, 경신년(1380, 우왕 6)에 운봉(雲峯)의 대첩을 거둔 것이 더욱 칭도(稱道)되는 것이다.
공민왕이 후사가 없이 갑자기 훙하니, 그의 신하 임견미(林堅味) 등이 국권을 손아귀에 넣고 전토(田土)를 탈취하며 함부로 탐색(貪索)하였다.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이를 분개하여 주륙(誅戮)을 단행할 때 우리 태조로 수시중(守侍中)을 삼았으니, 이는 물망을 따른 것이다. 무식한 최영이 또 망녕되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치려고 꾀할 때 우리 태조로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를 삼아 국경으로 보내니, 우리 태조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은 고금을 통한 이치라, 상국(上國)에 득죄하고 백성들에게 화를 끼칠 것이라면, 차라리 권신(權臣)을 제거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좋지 않으랴.” 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옳은 도리를 지켜 회군(回軍)하였다. 최영을 잡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죄를 다스린 다음, 왕씨(王氏)의 종친인 공양군(恭讓君)을 선정하여 세우고 충성을 다해 보좌하며 어질고 유능한 이를 등용하였다.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경계를 정하고, 불필요한 관리를 도태시켜 관직의 명분을 중하게 하였다. 법을 세우고 기강을 펴서 그 규모가 넓고 크니, 전조(前朝)의 나쁜 정치가 혁신되지 않은 것이 없고, 중외의 민심이 쏠리듯이 귀부하였다.
그러나 공양(恭讓)이 혼미하고 의심이 많아 장차 이롭지 못한 일을 꾀하므로,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25년(1392, 태조1) 임신 7월에, 충신과 의사들이 태조를 추대하려는 의견을 모았고, 우리 태조께서는 두세 번 사양하다가 여러 사람들의 권하는 뜻에 못 이겨 억지로 보위(寶位)에 올랐다. 밀직(密直) 조반(趙胖)을 명 나라 조정에 보내어 사실을 알리니, 고황제(高皇帝)가 성지(聖旨)를 내리기를 “국호를 고쳐 조선(朝鮮)이란 칭호를 다시 회복하라.”고 하였다. 무인년(1398, 태조7) 9월에 병이 나서 상왕(上王 정종)에게 선위하고, 경진년(1400, 정종2) 10월에 상왕 또한 병이 나서 우리 전하에게 선위한 다음, 우리 태조에게 계운신무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존호를 올렸다. 춘추 74세에 재위가 7년이요, 늙어 정사를 보살피지 아니하고 영화로운 봉양을 누린 것이 11년이라, 살아서 영화를 누림과 죽음에 고종명(考終命)을 이에 다 갖추었다.
수비(首妃) 한씨(韓氏)는 증 문하부사(贈門下府事) 휘 경(卿)의 딸로서 먼저 훙(薨)하여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추시(追諡)하였다. 6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방우(芳雨)는 진안군(鎭安君)으로 먼저 졸(卒)하였고, 둘째 아들은 상왕이요, 우리 전하는 다섯째 아들이다. 방의(芳毅)는 셋째 아들로 익안대군(益安大君)이니 역시 먼저 졸하였고, 방간(芳幹)은 넷째 아들이니 회안대군(懷安大君)이요, 방연(芳衍)은 여섯째 아들로 등과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맏딸은 경신궁주(慶愼宮主)로서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는데 동본(同本)의 이씨(李氏)가 아니요, 둘째 딸은 경선궁주(慶善宮主)로서 청원군(靑源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상왕은 적출(嫡出)의 후사가 없었고, 우리 중궁 정비(靜妃) 민씨(閔氏)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휘 제(霽)의 딸로 4남 4녀를 낳았으니, 맏아들은 세자 제(禔)요, 둘째 아들 호(祜)는 효령군(孝寧君)이요, 셋째 아들 금상(今上)의 휘 충녕군(忠寧君)이요, 넷째 아들은 어리다. 맏딸은 진신궁주(眞愼宮主)로서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으니 역시 동본의 이씨가 아니며, 둘째 딸 경진궁주(慶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주군(吉州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으며, 넷째 딸은 어리다.


 

[주D-001] 금상(今上)의 휘 : 이 글은 태종 재위시에 지어졌으나 간행되기는 세종조였으므로 태종ㆍ세자ㆍ세종에 대한 호칭이 일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