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도원수 권율 장군 신도비

도원수 권공 신도비명(都元帥權公神道碑銘) 펌

아베베1 2009. 11. 13. 18:11

상촌선생집 제28권
 신도비명(神道碑銘) 11수
도원수 권공 신도비명(都元帥權公神道碑銘)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팔도도원수 권공(權公)의 묘도에 비석이 갖추어지자 우의정 신흠은 말을 다듬어 다음과 같이 새긴다.
공이 적을 쳐부순 공적은 간이(簡易) 최공 입(崔公岦)이 행주(幸州)의 비석에다 기록하였고 공의 아름다운 사적은 공의 사위 오성 상국(鰲城相國)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묘지(墓誌)에다 기록하였으므로 더 이상 추가할 것은 없겠으나, 옛날의 제도를 상고해 볼 때 공과 같이 위대한 분에 대해서는 신도비명을 짓는 것이 합당하니 마땅히 대로변에 세워 후세 사람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공의 휘는 율(慄), 자는 언신(彦愼)이다. 시조는 행(幸)으로 신라의 종성(宗姓)인데 견훤(甄萱)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고려 태조가 권씨 성을 하사하고 안동(安東)에다 봉해주어 그대로 본관이 되었다. 13대를 내려와 부(溥)는 정승을 지내고 수복(壽福)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한 가문에서 군(君)에 봉해진 자가 아홉 사람이나 되었다. 3대를 지나 근(近)은 벼슬이 찬성인데 곧 공의 6대조이다. 증조 교(僑)는 양근군수(楊根郡守)이고 조부 적(勣)은 강화 부사(江華府使)이고 선조 철(轍)은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는데 네 조정을 내리섬겨 태평 시대의 재상이 되었다. 선비 조씨(曹氏)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승현(承睍)의 따님으로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손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어릴 적에 소꿉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장성해서도 부귀 자제의 호사를 즐기는 버릇이 없자 의정공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 인재가 나왔다.” 하였다. 경학(經學)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어릴 적에 불운하여 과거에 급제를 못하다가 만력 임오년(1582, 선조1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는 46세로서 식자들 중에는 혹 장상(將相)의 그릇임을 아는 자도 있었다. 승문원의 정자ㆍ저작ㆍ박사로부터 성균관 전적으로 오른 뒤에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호조 정랑, 전라도사(全羅道事),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옮겼다. 신묘년에 다시 호조 정랑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임진년 봄에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그해 여름에 일본 괴수 수길(秀吉)이 우리나라를 정복할 심산으로 수가(秀嘉)와 행장(行長)등을 위시한 60만 대군을 보내 침략을 감행하여 온 나라가 안절부절 혼란에 빠졌다.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율의 재주는 시험해 볼 만하다 하였다.” 하고,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제수하니, 공은 그날로 임금을 하직하였다. 적이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忠州)를 함몰시키고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전사하였다. 적이 승승장구하여 경성에 바싹 다가오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와 함께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장수들에게 계책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주공(主公)께서 온 지방의 군사들을 다 쓸어 거느리고 왔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렸습니다. 이제 마땅히 대군을 거느리고 곧장 수원(水原)으로 가 통진(通津)을 거쳐서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臨津)을 차단하고 행재소에서 왕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 세력을 얻어 큰 공을 꾀할 수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광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아 적의 꼴을 보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공은 광주(光州)로 돌아가 의기에 넘쳐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주상께서 파천한 마당에 신하된 자로서 어찌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고, 주변의 고을에 격문을 돌려 군사 1천 5백 명을 모아 이치(梨峙)로 나아가 진을 치고 양남(兩南)의 목을 쥐었다. 영남의 적이 금산(錦山)의 적과 힘을 합쳐 공격해오자 공은 장검을 빼들고 뛰쳐나가 앞장서서 적의 칼날과 대항하니, 제장(諸將)이 서로 말하기를 “유자(儒者)도 이럴 수있단 말인가.” 하고, 사기가 백배하여 그들을 산기슭에서 무찔렀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거진(巨鎭)을 맡겨볼 생각으로 가을에 벼슬을 옮겨 나주(羅州)를 지키게 하였다가 임소에 부임하기 전에 승진시켜 전라관찰사 겸 순찰사를 제수하니, 공은 명을 받고 통곡하였다. 전주(全州)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아 1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올라갈 계책을 세우고서 수원(水原) 독성(禿城)을 점거, 근거지로 삼아 경성의 적을 위협하고 곧장 서로(西路)를 노리자 수가(秀嘉)는 빈틈을 찔릴까 두려워하고 행장(行長)은 후방을 공격받을까 염려하였으니, 마치 제방이 물을 막는 것처럼 앉아서 관서의 인심을 결집시켰다. 선묘께서는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보내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가운데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고, 또 여러 진영의 의병을 전부 공의 통솔을 받도록 하였다. 경성의 적은 공의 위세에 눌려 예봉이 꺾였으며 수만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세 진영으로 짜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응전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기병(奇兵)을 내보내 무찔렀다.
계사년에 독성으로부터 양천(陽川)으로 진영을 옮기고 군사를 나누어 각 지방을 지원하였으며, 곧장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성 서쪽 안현(鞍峴)으로 나아가 진을 치려고 하였으나 제장들이 극력 반대하여 고양(高陽) 행주산(幸州山)에 진을 쳤다. 경성의 적은 이때 세력이 한창 불어났는데 공이 적은 군사로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2월 12일에 그들의 정병을 전부 동원하여 두 길로 나누어서 밤중에 행주성을 공격해왔다. 공이 일어나 내려다 보니, 적의 총칼이 온 들판을 뒤덮고 성을 몇 겹으로 포의한 상황이었다. 공은 즉시 사졸들에게 주먹밥을 돌려 먹게 한 뒤에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 성가퀴에 배치시켜 화살을 빗발처럼 쏟아붓고 또 힘센 사람을 뽑아 돌을 던져 내리치며 뒤이어 차자화(車子火)를 쏘았다.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적은 아홉 번 진격해 들어왔다가 아홉 번 퇴각하였다. 급기야는 적이 풀단[束草] 가지고 불을 지르며 크게 소리치면서 성을 올라오자, 공은 상방검을 뽑아들고 서서 장수들을 독려하니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접전하여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적의 장졸은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군수 물자를 버려두고 도망갔으며 적의 머리 1백 30여 급을 거두어 베었다.
조정에 승전보가 들어가자 특지로 자헌대부에 가자하고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황조의 유격대장 사대수(査大受)가 찾아와 공을 보고 감탄하기를 “외국에도 진짜 장수가 있구나.” 하였으며,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이자(移咨)하여 칭찬하기를 “권 포정(權佈政)은 국난 속의 충신이요 중흥을 이룩한 명장이라 이를 만하다.” 하고, 채단과 백금 등 물품을 상으로 주었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아뢰기를 “배신(陪臣) 권율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막강한 적과 대항하였다.” 하였고, 천자도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전라도에서 적을 참획한 수효가 많아 그 나라의 인민이 그런대로 진작될 수 있었다.” 하였다.
공은 행주의 적을 무찌른 뒤에 진영을 파주(坡州)로 옮겼다. 파주는 곧 서쪽으로 뻗은 큰길이 있어 적이 꺼려하였다. 다시 행주에서의 패배를 갚기 위해 피를 뽑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공을 공격하려 계획하였다가 끝내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물러갔다. 4월에 경성의 적이 도망갈 때 공은 경무장한 군사로 그 뒤를 추격하려 했는데 때마침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계책을 써 적의 퇴각을 추진하는 중이라서 공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였다.
6월에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로 제배되어 영남에 머물러 있다가 겨울에 형조 판서가 되고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임되었다. 갑오년 봄에 신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선묘께서 염려한 나머지 의원을 잇달아 내보냈다. 무사 하나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피해 전주(全州)에 숨어 있으므로 공이 그를 참수하였는데 체찰사가 그 가족의 하소연을 곧이듣고 공을 문책할 것을 청하여 파직되자, 웃으며 말하기를 “몇 년 동안 장수로 있던 내가 군법으로 병졸 하나를 참수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서, 모든 일을 사절하고 고향 강화(江華)로 돌아갔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한성 판윤(漢城判尹), 호조 판서, 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비변사 당상관을 겸임하였다. 어전에 입시하였을 때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경이 아니었더라면 국가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병신년에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선묘께서 다시 특명으로 도원수를 삼고 이르기를 “경은 충성과 공로가 크게 드러나고 용맹과 지략이 세상에 뛰어나 이름이 천하에 자자하고 위세가 적국을 떨게 하였으니, 경을 놓아두고 원수의 직책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였다. 조정을 하직할 때 임금은 공을 불러 접견하고 술을 내려 마음을 달래줬으며 또다시 내구마를 하사하였다.
7월에 호서(湖西)의 사인(士人) 이몽학(李夢鶴)이 모반하여 다섯 고을을 잇달아 함몰시키자 조정에서 공에게 그들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달려가 보니 적은 이미 홍주(洪州)에서 잡혀 죽은 뒤였는데, 그 도당의 죄를 다스리고 억울한 자는 재심하는 일을 매우 분명히 하여 호서 지방이 안정을 되찾았다.
겨울에 일본에서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이, 청정(淸正)이 재차 침략하려 한다고 말을 전하여 조야가 술렁거리자 공은 말하기를 “설사 청정이 다시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그에 대처할 방도가 있게 마련인데 머리를 맞대고서 걱정만 하고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진영을 나누어 배치하여 적을 제압할 계책을 상주하였다. 정유년 가을에 과연 다시 침입하여 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을 함몰시키고 곧장 경기로 향해 올라오자 공은 일변 싸우고 일변 행군을 하면서 적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공의 힘에 의해 한강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으로 돌아온 그 이튿날 중국의 장관(將官) 팽우덕(彭友德)과 한강을 도로 건너가 직산(稷山)에서 접전하여 크게 무찔렀다.
겨울에 중국이 대군을 출동하여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보내 울산(蔚山)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공은 본국의 토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맨 앞에 돌진하며 뒤처진 자를 참수하여 조리돌리자, 모든 군사가 사기 충천하여 적의 성벽을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올라가 그 외성(外城)을 함락하니, 제독과 경리가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무술년 봄에 신병으로 면직을 청하자 선묘께서 위로하는 말로 달래주고 애써 만류하였다. 중국이 병부 상서 형개(邢玠)를 보내 세 제독을 독려하여 길을 나누어서 적을 칠 때 공은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유정은 심중에 싸울 뜻이 없어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으므로 공이 여러 번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적들은 수군도독(水軍都督) 진인(陳璘)에게 대패하고 또 그들의 괴수 수길이 죽었기 때문에 각도의 적이 모두 철수하여 돌아갔다.
기해년(1599, 선조32) 여름에 공은 병세가 위독해져 사직하니 선묘께서 윤허하여 체직되었으며 7월 6일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62세였다. 선묘는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일시 중지하고 부의를 많이 내렸으며 관원을 보내 치제하고 찬성을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9월에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 술좌(戌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이듬해 을사년에 논공(論功)할 때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과 부원군에 추증되었다.
공의 전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曹氏)로 첨정(僉正) 휘원(輝遠)의 따님인데 따뜻하고 정중하며 부드럽고 후덕하여 내간의 규범이 있었다. 향년 24세에 별세하고 정경부인에 추증되었으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곧 오성공(鰲城公)의 부인이다. 2남 1녀를 낳아 장남은 성남(星男)이고 차남은 정남(井男)인데 다 음직으로 벼슬하여 군수가 되었으며, 딸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성남은 처음에 판서 권징(權徵)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뒤에 주부 김계남(金繼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으며, 정남은 승지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윤인옥은 1남 1녀를 낳았다. 후부인 박씨(朴氏)는 죽산(竹山) 거족으로 현령 세형(世炯)의 따님인데 총명하고 자애로워 법도를 지켰으며 시어머니와 공을 잘 받들어 일체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공이 별세한 뒤에는 미망인으로 자처하고 명절과 세시(歲時)의 제사를 예법대로 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이따금 의복을 지어 제물을 차리고서 태워드렸다. 공보다 10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무신년 2월이었으며 향년은 62세였고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4월에 공의 묘역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이 없어 공은 중씨(仲氏)의 아들 익경(益慶)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는데 익경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현감이 되었다. 처음에 이광륜(李光輪)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아 집(㠎)은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이고, 다음은 입(岦)과 업(嶪)이며, 뒤에 이정(李淨)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아 아들은 헌(巘)이고 딸은 이도기(李道基)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집은 2남 1녀를 두고, 업은 1남을 두고, 도기는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팔척 장신으로 용모가 준수하였으며 풍채가 엄중하고 행실이 충직하였다.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유쾌하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고 너그러웠는가 하면 초상 때 슬퍼하고 제사 때 정성을 드리는 것이 한결같이 진정으로부터 우러나왔으며, 종족을 잘 대우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천성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집안에 귀한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주밀하고 신중히 처리하여 하는 일마다 반드시 만전을 기하였다. 적진과 대치하고 있을 때는 언행이 여유만만하였으며, 원수의 깃발을 세우고 원수부를 열고서는 재차 진영을 총괄할 때는 사졸의 선봉이 되어 위험을 무릅썼고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장사(將士)가 잘 따라주어 계책이 행해지고 공이 뒤따랐다. 큰 적을 섬멸하여 적은 군사로 수많은 적을 대적한 것은 옛날의 명장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황조의 상서 석성(石星)은 우리나라의 사자를 만나 공의 안부를 물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에 권공과 같은 사람이 몇 명만 더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으며, 왜인도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반드시 권 원수는 지금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으니, 중국과 오랑캐가 다같이 이처럼 탄복하였다. 군중에 있을때 손수 성지(聖旨) 및 천조의 자문과 게첩을 베끼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의정(李議政 이항복을 말함)이 반드시 내 묘지명을 지을 것인데 그 자료는 이것이면 충분하다.” 하였다. 큰 짐을 벗은 뒤에는 고향 강화도에 집 한 칸을 짓고 만취헌(晩翠軒)이라 자호하였으니, 은연중 자신의 뜻을 가탁한 것이다.
아, 흠은 공이 원수로 계실 때 막좌(幕佐)로 있었는데 우경(虞卿)의 백벽(白璧) 같은 사랑을 받았으나 중랑(中郞)의 황견(黃絹) 같은 문장이 없다. 삼가 공에 대해 일찍이 평하기를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龍虎)가 변화무쌍하다는 말이 공에게 적격이다. 분양(汾陽)의 공을 이루고서도 중서(中書)의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진공(晉公)의 덕을 지니고서도 녹야(綠野)의 낙을 누리지 못했으니 이 점이 한탄스럽다. 충절을 지키며 심신을 다 바쳐 한 몸에 나라의 안위를 짊어지고 단서(丹書) 철권(鐵券)에 이름이 올라 그 명성이 영원히 전해지는 점에 있어서는 충분히 저 두 공과 짝을 이룰 만하다.”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지난 과거 임진년에 / 若昔壬辰    미련한 저 생물들이 / 蠢彼介鱗    흉한 마음 지니고서 / 鞠頑裒兇    침략하여 미쳐 뛰니 / 奔突跳躑
무찌를 자 누구인가 / 孰獮孰剔    널린 것이 적들일레 / 遍我箕封    우리 임금 하문하길 / 惟上曰咨    아군을 뉘 지휘할꼬 / 疇董我師
적임자 곧 그대로다 / 繄爾其才    공은 중책 받고나서 / 公膺其重    조선 팔도 총괄하니 / 八路是總    꺼진 재에 불붙었네 / 再燃于灰
행주에서 적을 이겨 / 熸之于幸    큰 세력을 깨부수며 / 大鋤其梗    직산 울산 누비었고 / 于稷于蔚    좌우 수륙 거침없이 / 左水右陸
목을 잡고 등때리니 / 扼項批脊    우릴 감히 넘볼쏘냐 / 莫我敢越    북두 다시 높아지고 / 斗極更恢    황도 또한 트였으니 / 黃道褰開
이는 공의 업적이요 / 伊公之烈    사람 모두 동조하고 / 人謀畢凝    신도 재능 인정하니 / 鬼神與能    이는 공의 계책이요 / 伊公之籌
밝디 밝은 위광에다 / 赫赫厥靈    높디 높은 명성이란 / 巍巍其名    바로 공의 경사이고 / 伊公之休    까마득히 솟은 산과 / 有山嶻峛
헌거롭게 놓인 비석 / 有碑嵽嵲    바로 공의 무덤일세 / 伊公之藏    나는 공의 막좌로서 / 公有幕佐    공의 사적 선양하여 / 載揚載播
무덤 앞에 새긴다오 / 銘于墓陽


[주D-001]우경(虞卿)의 …… 없다 : 상촌 자신이 권율 생전에 권율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았으나 권율이 작고하여 그 비문을 짓는 지금 평생의 사적을 훌륭하게 묘사할 문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임. 전국 시대 변설가 우경이 미천한 신분으로 조 효성왕(趙孝成王)을 유세하자, 왕은 한번 만나보고 황금 백 근과 백벽 한 쌍을 하사하였다고 함. 황견은 색사(色絲)로 절(絶)자의 은어임. 한 나라 채옹(蔡邕)이 효녀 조아(曹娥)의 비문을 잘 지어 어떤 사람이 그 비문을 읽고 비석 뒷면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고 기록해 두었는데 재사(才士)인 조조(曹操)의 주부(主簿) 양수(楊修)에 의해 그곳이 ‘절묘호사(絶妙好辭)’의 은어임이 밝혀졌음.《史記 卷76 虞卿傳》《世說新語 捷悟》
[주D-002]높은 산 …… 말 : 《五百家注昌黎文集 卷33 唐故殿中少監 馬君 墓誌》에 “그 당시에 장무왕(莊武王 성명은 마수(馬燧))을 북정(北亭)에서 만났는데 마치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가 변화무쌍한 듯하였으니, 걸출한 인물이었다.” 하였음.
[주D-003]분양(汾陽)의 …… 못하고 : 분양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장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삭방절도사(蒴方節度使)로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토번(吐蕃)과 회흘(回紇)의 잦은 침입을 막아 20여 년간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으며,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권율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보전한 공이 곽자의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없는데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임. 《新唐書 卷137 郭子儀傳》
[주D-004]진공(晉公) …… 못했으니 : 진공은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배도(裵度)의 봉호. 회주(淮州)ㆍ채주(蔡州)가 조정에 반기를 들었을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각군을 지휘해 진군하여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아 그 공으로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지고 재상이 되었으나 항상 겸손하였다. 문종(文宗) 때 동도 유수(東都留守)가 되어 녹야당(綠野堂)이란 별장을 세우고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 등 명사들과 즐겁게 나날을 보냈음.《新唐書 卷173 裵度傳》
 
권율의 행주 승첩(幸州勝捷) 정담(鄭湛)의 웅령전사(熊嶺戰死)붙임. 권율(權慄)ㆍ황진(黃進)의 이티[梨峙]승첩 붙임.

처음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이 용인(龍仁)에서 돌아와 고을 안의 젊은 사람들 5백여 명을 모으고 이웃 고을에 격서를 보내어 천여명을 모았다. 전라 감사 이광은 권율이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권율을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라고 일컫고, 각 고을을 독려하여 적군이 달려드는 것을 막게 하였다.
○ 7월에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티(熊峙)를 넘어 전주 땅으로 들어오려고 하므로 권율이 도복병장(都伏兵將)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의병장(義兵將) 황박(黃璞)ㆍ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 등을 보내어 험난한 곳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쳐서 막게 하였더니,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복남은 산봉우리의 중턱에 진을 치고, 황박은 그 위를 지키고, 정담은 그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8일 새벽에 왜적 수천 명이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덤벼들어 총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을 서니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 싸웠다.적병이 조금 물러서더니 적의 대군(大軍)이 해 뜰 무렵에 다시 오는데 산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적이 육박하여 재에 올라오며 패를 나누어 교대로 싸우므로 복남 등이 적의 일진(一陣)을 무찔러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박의 군사도 힘이 다하여 무너져 나주 군사의 진으로 들어갔다. 적이 기세를 올리며 재에 오르니 나주 군사의 진 또한 무너지고 말았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우면서 붉은 기 아래 백마를 타고 있는 적병의 장수를 쏘아 죽이니 적이 바람 앞에 풀 쓰러지듯 물러갔다.그러나 이제는 정담이 고립된 군사로서 포위당하자 부하 장수들이 담에게 군진을 후퇴시키기를 권하였으나 담은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 물러나 살아서 적으로 하여금 전진하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꿋꿋이 서서 적을 쏘는데 시위소리와 함께 적은 모두 거꾸러졌다. 육박전으로 드디어 죽었으며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 등이 물러나와 안덕원(安德院)에 진치니 적이 우리 측에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멈추었다.
담이 처음에 이광을 따라 공산(公山)으로부터 파군(罷軍)하고 돌아와서는 분하고 한스럽게 생각하여 사람을 대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항상 부하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나물 한 가지 밥 한알, 그 어느 것인들 임금이 주시지 않은 것이겠는가. 임금께서는 지금 왕성을 떠나 피난하고 계시는데 오직 나와 너만이 차마 어찌, 편안하게 이 찬(饌)을 먹을 수 있으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면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자신을 억제치 못하였다.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죽여서 사사(社祠)에 제사하고, 맹세를 고유하고 떠났으며 이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이 쌓여 있는 해골 속에서 시체를 찾다가 꿰맨 옷 속에서 성명을 써놓은 것을 발견하고 그가 평일에 죽기로 결심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들 하였으며 적도 의롭게 여겨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돌을 세워, “조선의 충간의담(忠肝義膽)을 조상한다.”고 써놓았다. 조정에서 뒤에 이 사실을 듣고 벼슬을 추증하고 정려하였다. 《계갑록》 《기재잡기》 《일월록》
○ 그때 모든 군사가 오히려 진을 한군데에 합치고 물러나지 아니 하였더니, 적이 드디어 금산에 주둔하였다. 권율이 군사를 진산(珍山)에 진주시키고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 등과 더불어 험난한 곳에 의거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적병 수천여 명이 진산을 불질러 약탈하고 이티[梨峙]로 덤벼들므로 권율 등이,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더불어 군사를 독려하여 재에 의거하여 막아 싸우니 적이 낭떠러지로 기어 올라왔다. 이에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면서 활을 쏘는데 쏘면 안 맞는 것이 없었다.황진이 탄환에 맞아 다리에 부상하고 조금 물러섰더니 적이 진(陳) 속으로 뛰어 들어, 우리 군사들이 놀라 흩어져 달아나려고 하므로 권율이 물러나는 자를 베어 죽이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황진도 상처를 붙들고 다시 싸우니 군사들은 모두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낼 만큼 용감하게 종일토록 싸웠으므로 적병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다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수백 명을 목 베니 송장이 더미로 눕고 피가 흘러 시내와 골짜기가 피 비린내로 채워졌다.
적중(賊中)에서 조선의 3대 승첩을 말하는데 이티(梨峙)의 승리를 첫째로 쳤다. 논평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승리가 없었으면 왜적은 반드시 호남 전체를 유린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 8월에 권율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승진하였다가, 승첩의 보고가 들어가자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승진되었고, 황진은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승진되었다가 또 충청 조방장(忠淸助防將)으로 승진되었다. 이복남(李福男)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켜 운봉(雲峰)의 팔량신성(八良新城)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9월에 이광이 붙잡혀 와서 치죄(治罪)를 받게 되니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이 기개가 있고 도량이 있어서 장수의 재질이 있으니 전라 감사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여 드디어 권율을 감사에 임명했다. 《기재잡기》
○ 그때 적병이 전주(全州)에 육박하여 성 밖에서 무력을 과시하자 광이 도망쳐 금구(金溝)로 달아나니 여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적병은 우리 군사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저들의 배후를 습격할까 의심하여 그날 밤으로 무주ㆍ금산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 권율이 진중에서 감사 임명을 받고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이 피난하여 있는 서쪽을 향하여 우니 온 군중이 슬퍼하였다. 권율이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대신 이현(梨峴)을 지키게 하고, 친히 전주(全州)에 이르러 기율(紀律)을 일신(一新)하게 하고, 모든 장수를 불러 의논하여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陣地)가 되어 버렸지만 경성(京城)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경성을 수복하여야 한다.” 하고 군사 2만 명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갔다.
○ 전라 감사 권율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임금을 도우려 오니 각지의 수령장수들과 승장(僧將) 처영(處英) 등이 따랐다.
○ 10월에 체찰사(軆察使) 정철(鄭澈)이 아산(牙山)에 배를 정박시켰다. 권율이 지나는 길에 가보았더니 철이 권율에게 같이 전라도 지역을 지키자고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고 북으로 나아가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진을 치니, 임금이 칼을 풀어 가지고 말을 달려 보내어 권율에게 주며 이르기를,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 하였다. 그때 서울에 있던 적병이 호남(湖南)의 군사가 또 왔다는 말을 듣고 군사 수만을 출동시켜 길을 나누어 쳐들어 왔다.이에 권율이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적이 세 개의 진채(陳寨)를 오산(烏山) 등지에 만들어 놓고 날마다 와서 싸움을 돋우었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이따금 기습병(奇襲兵)을 내보내어 적병을 베어 죽이고 적의 영채(營寨)를 불사르곤 하니 적이 도로 서울로 돌아갔다. 바야흐로 적이 쳐들어 오려 할 때 권율이 날마다 체찰사(軆察使)에게 보고하면서 구원병(救援兵)을 청하니 정철이 전라 도사(全羅都使) 등에게 급히 기별을 보내어, 성화(星火)같이 군사를 전진시켜 수원성(水原城)의 위급을 구(救)하였고,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변사정(邊士貞)ㆍ임희진(任希進) 등의 의병(義兵)도 달려와 원조하였다.
○ 12월에 권율이 장계를 올렸는데, “체찰사 정철이 신에게 명하기를, ‘신에게 호남의 도적을 방어하도록 명하고, 근왕은 다른 장수를 시켜 올려보내겠다.’고 하였으나 신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이르렀더니 군사들의 마음이 호남을 지키라는 체찰사(정철)의 말을 기쁘게 생각하고 호남으로 도망간 자가 천여 명이나 됩니다.” 하였다.이에 임금이 크게 화를 내니 유영길(柳永吉)이 아뢰기를, “정철은 술에 빠져 정신이 흐리멍텅하여 기밀 사무에 어두워서 임금의 세력이 고립되고, 공론(公論)이 행하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윤두수는 나라를 회복시킬 만한 재주가 없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하지 못하여 하는 일이 마침내 실적이 없게 되었습니다. ……” 하였다. 《일월록》
○ 계사년 2월 권율이 수원(水原)에서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군사를 나누어 4천여 명을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衿川)에 머물며 성원하게 하고, 권율 자신은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천강(楊川江)을 건너서 행주(幸州)에 진을 쳤다. 한편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은 강화로부터 나와 해안에 진을 치고, 충청 감사(忠淸監司) 허욱(許頊)은 통진(通津)에 진을 치고,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 또한 응원하기로 하였다. 그때 서북(西北)에 있던 왜적이 모두 경성에 모여 있어서 기세가 더욱 치열하였는데 전라도의 군사가 강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길을 나누어서 나오는데 그 수효를 셀 수 없었다.적장 평수가(平秀家)는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발끝으로 차서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2일 새벽에 우리 척후 장교가, 적이 좌ㆍ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 붉은 기와 흰 기를 들고 온다고 보고하니 권율이 모든 군사에게 현혹(眩惑)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진영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적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이에 곧 모든 장수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고립된 군사가 깊이 들어와서 갑자기 적병을 만나니 세력이 서로 대적할 수 없다.만약 한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다.” 하고, 모든 장수에게 타일러서 대오(大悟)를 엄중히 단속하여 활을 버티고 기다리는데, 적의 선봉(先鋒)인 기병(騎兵) 백여 명이 먼저 와서 시위(示威)를 하더니 금방 대군 수만 명이 들을 덮고 우리 진영을 포위하였다. 이에 군사를 세 패로 나누어 쉬어가면서 교대로 달려드니 고함 소리는 땅을 흔들고 포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으며, 권율은 몸소 물과 미음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군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묘시(卯時)에서부터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에 적병은 세 번 달려들었다가 세 번 퇴각하였는데 번번이 적이 불리하니 적이 드디어 갈대를 가지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책(城柵)을 태우려 하므로 성안에서는 물을 끼얹어 꺼버렸다. 처음 승병(僧兵)에게 서북면(西北面)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의 군사가 크게 고함지르며 돌격하여 오자 승병이 무너져 내성(內城)으로 들어오므로 권율이 칼을 빼들고 독전(督戰)하니 모든 장수가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전을 하였다. 이에 적군이 크게 패하여, 드디어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고 불태우니 냄새가 10리에 퍼졌다.적병이 물러가자 우리 군사가 그 나머지를 수습(收拾)하여 1백 30여 명을 베고 군용 자재를 무수하게 얻었다. 《일월록》ㆍ《권원수유사(權元帥遺事)》 《자해필담(紫海筆談)》에, “날이 저물 무렵에 일본장수 평수가(平秀家)가 유시(流矢)에 맞아 드디어 병갑(兵甲)을 거두어 가지고 달아나니 행주(幸州)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길에는 거꾸러진 시체가 서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한창 싸우고 있을 때 화살이 거의 다하여 군중(軍中)이 바야흐로 위태로웠는데 정걸(丁傑)이 두 척의 배로 화살을 싣고 와서 바다 쪽에서 들여보냈으므로 계속하여 사용할 수가 있었다.
○ 어떤 이는 전해 말하기를, “권율도 또한 겁내고 미혹(迷惑)하여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그의 형 전(悛)이 와서 보고, ‘이것은 해내기 쉬운 일이다. 내가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하고 율을 대신하여 지휘하니, 율은 머리에 구리솥을 덮어쓰고 돌아다니며 모든 군사들을 타이르다가 총소리가 조금 그치면 즉시 구리솥을 벗어서 물을 담아 가지고 싸우는 군사의 입에 대어 주었으니 전(悛)의 공도 또한 많다.”고 한다.
○ 그때 이여송이 개성에 주둔하였고, 선봉(先鋒) 사대수(査大受)는 행주 승첩의 기별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싸움한 곳을 시찰하고 또 수일 후에는 권율을 청하여 서로 만나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권장군의 진은 다른 군사들과는 유별나게 다르다. 외국에 이러한 참다운 장수가 있었구나.” 하고 군사를 임진(臨津)으로 이동시켜 이빈(李薲)과 합력하여 파주산성(坡州山城)을 지키기로 하였다. 승첩의 보고가 행재소에 올라가자 권율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조경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중 처영에게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가자(加資)하고 모든 장사(將士)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는데 등차(等差)가 있었다.
○ 권율이 일찍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행주의 싸움에 공(功)이 있다고들 하지만 실상은 이티[梨峙] ‘이티[梨峙]’를 본래 ‘웅티[熊峙]’라고 썼으나 아마 이(梨)자의 잘못일 것이다. 의 싸움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고 그 다음이 행주싸움이다. 대개 이티의 싸움 전쟁의 시초부터 적의 기세는 한창 날카로운데 우리 군사는 외롭고 약할 뿐만 아니라, 또 건장한 군사도 없었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洶洶)하여 이긴다고 믿기 어려웠으나 드디어 능히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음으로서 싸웠기 때문에 천 명도 되지 않는 약한 군사를 가지고 10배나 되는 사나운 적병을 당해내고 마침내 호남을 보전하여 국가의 근본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려웠다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때는 서쪽 길은 막혀 끊어졌고 본도(本道)가 무너져 이산(離散)하였기 때문에 내가 비록 공이 있어도 드러내어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이티에서 공을 세운 뒤에 있었고, 권력과 지위가 벌써 무거웠기 때문에 군사의 마음들이 이미 내게 돌아온데다가, 호남의 정맹(精猛)한 장졸들이 다 내 수하(手下)에 예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수효도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도 또한 험하여서 적병의 수가 비록 배나 되었지마는, 그 기세가 이미 쇠약해 있었으므로 공(功)을 세우기 쉬웠던 것이며, 바로 명 나라 군사가 위압(威壓)해 있고 각도의 근왕하는 군사들이 경기내에 바둑돌처럼 깔려 있었으나, 나의 행주 싸움의 성공이 때마침 모든 군진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공이 드러나기가 쉬웠던 것이다.” 하였다. 《백사집》
○ 조경(趙儆)이 권율의 중군장(中軍將)으로서 밤에 강을 건너가서 먼저 지형을 살피다가 군사를 주둔시킬 만한 높은 언덕을 발견하니 그것이 즉 행주였다. 권율이 말하기를, “명 나라의 군사가 많이 왔으니 적병이 필시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성책(城柵)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니 경이, “외로운 군사로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 그때 체찰사(軆察使)가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율을 불러다가 일을 의논하는 동안에 경이 모든 군사를 시켜 이틀 동안에 성책을 완성한 후에, 율이 돌아왔고, 목책(木柵)을 만든 지 사흘만에 적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이에 정오(正午)가 지나도록 힘껏 싸우니, 적병은 드디어 긴 나무[長木]를 가져다가 다락같은 모양의 높다란 가마[轎]를 만들어서,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싣고 수백 명이 메어 올려 우리 진영 안을 사격하므로 조경이 지자포(地字砲)를 가져오게 하여, 큰 칼 두 개를 포(砲) 앞에 매어달고 적의 가마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포를 쏘니, 지나간 곳마다 천둥ㆍ벼락을 맞은 것 같아서 가마는 모두 부숴지고 가마 위에 있던 적병은 몸뚱이와 팔ㆍ다리가 흩어져 날아가 떨어졌으므로 적병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였다.이 싸움에서 적병은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었다. 권율과 모든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모두 공(公 조경)의 힘이요.” 하였음을 대개 그가 목책을 설치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풍양군(豐壤君) 조경(趙儆)의 비(碑)
○ 권율(權慄)은 자는 언신(彦愼)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영상 철(轍)의 아들이다. 임오년 46세 때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고 계사년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며 벼슬이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기해년에 죽으니 나이가 63세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훈(策勳)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을 봉하고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 신묘년 9월,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결원되었을 때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여 낭료(郞僚) 호조 정랑 에서 발탁되어 정규의 승진 순서를 뛰어 임명되니 그때의 세론(世論)이 영예스럽다고 하였다. 임진년 봄에 북경으로 간 역관이 유언비어를 중국에 퍼뜨려 요동(遼東) 지방을 놀라 떨게 하였다는 말이 있으므로 이들을 옥에 내려 국문하였는데 공도 그들의 공사(供辭)에 관련되어 옥에 갇혔다.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권율이라는 쓸 만한 재질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호남이나 영남의 거진(巨鎭)을 맡겨 시험해 보겠다.” 하고, 즉시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그때 그의 사위 이항복(李恒福)이 승정원(承政院)에 당직하고 있었는데 공(公)이 가서 작별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왜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하자 율이, “국가의 일이 급하니 이때야말로 신하로서 죽음을 바쳐야 할 때이다. 어찌 감히 잠시 동안인들 지체하여 아녀자(兒女子)의 슬피 우는 꼴을 흉내낼 것인가?” 하였다. 그때는 평화가 오랫 동안 계속되다가 갑자기 왜병이 온다는 기별을 들었기 때문에, 조신들은 호남과 영남은 죽으러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권율은 말과 기색이 강개(慷慨)하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여 마지않았다.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공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선봉으로 하였더니, 혹 공이 문인으로서 군대의 선봉이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가 있으면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직분이다.” 하였다. 백사가 가려 뽑은 유사
○ 송응창(宋應昌)이 본국에서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그 대략에, “왜놈들이 당신네 나라를 쳐부수고 함락시켜 조선에는 충성스런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 홀로 권모만은 고립된 성을 굳게 지켜서 많은 군사를 불러모아 자주 기묘한 꾀를 내고 때로는 큰 부대의 적을 대항하였다. 요사이는 다시 부대에 모래를 넣어 군량을 가장하여 왜놈이 와서 약탈하도록 유인하여 놓고는 습격하여 죽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야 알아볼 수 있는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라 하겠습니다. 인하여 붉은 비단 네 필과 백은(白銀) 50냥(兩)을 상으로 주어 충용(忠勇)을 권장하십시오.” 하였다. 백사가 가려 뽑은 유사
○ 명 나라 조정의 대소 문무관(大小文武官)들은 공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이 이가 전일 행주에서 승첩한 이가 아닌가.” 하였으며 왜놈의 추장(酋長)도 반드시 권 원수의 동정을 물었다고 한다. 《일월록》 ○석성(石星)이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모든 신하 가운데 만약 권율과 같은 자가 두어 사람만 있다면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 유사(遺事)
○ 한 무관(武官)이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여 달아나 전주(全州)에 숨어 있으면서 스스로 명 나라 장수에게 의탁하여 공이 여러 번 전주에 공문을 보내어 잡아 보내라고 하였으나 전주의 관리가 명 나라 장수를 두려워하여 감히 잡지 못하였는데 을미년에 공이 순시하다가 전주에 이르러 베어 죽였다. 얼마 안 되어 정승[國相]이 남방에 군사 시찰을 갔는데 처형된 무관의 집 사람들이 공을 무고하여 마침내 파면되니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대장된 지 3년에 한 사람의 도망병을 벤 것이 파면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유사
○ 병신년에 적병이 오래도록 물러가지 않으므로 조정(朝廷)에서 한창 원수(元帥)의 임명을 의논하는데 임금이 묻기를, “누가 원수가 될 만한 사람인가?” 하니,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다른 사람을 가지고 대답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권율을 원수로 삼지 않으랴.” 하고 특히 도원수(都元帥)에 임명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숙배(肅拜)하고 하직을 아뢰니 특히 내구(內廐)의 말을 하사하였다. 《조야첨재》
○ 명 나라의 장수들이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려 할 때, 유정(劉綎)과 마귀(麻貴)에게 권 원수(權元帥)가 협력하여 따라와 주기를 요망하자 두 사람이 다투기를 마지 아니하여 임금이 마침내 권율을 유정(劉綎)에게 붙여 주었다. 《조야첨재》
○ 기해년 가을에 병이 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江華)의 시골집으로 돌아왔는데 병이 위독해지자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 7월 6일에 우거(寓居)하던 집에서 죽으니 나이가 63세였다. 특별히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 권율은 인품이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 친화와 사랑으로 성심을 보이고, 엄격하기만을 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복종함으로써 위급한 때에 힘입었던 것이다. 《일월록》
공은 조정에 우뚝 서서, 일을 만나면 우레처럼 움직여서 출입하고 변통함에 막힘이 없으면서도 바른 길을 잃지 않는 권태사(權太師 권율의 조상)의 유풍과, 바라보면 의젓하고 가까이 가면 따사로워 친화로서 사람을 대하여 충심으로 심복하게 만드는 권양촌(權陽村 권율의 조상, 이름은 근(近))의 미행(美行)과, 높고 큰 띠로 풍채와 용의(容儀)를 의젓이 바로 가지며 일에 당하여서는 곧고 꿋꿋하나 질박하여 까다롭지 않은 그의 아버지인 영의정 권철의 국량이 있었다. 공은 이 세 가지를 겸하여 가졌으되 공훈과 충렬(忠烈)은 이 세 사람보다 더하였다.
○ 허 균(許筠)이 공의 제문을 지었는데, “원공(元公 영의정)의 증직은 그 아버지의 정승을 이었음이요, 길창(吉昌)부원군으로 한 것은 문충(文忠 권근)의 봉군을 승습(承襲)한 것이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공의 사위 이항복(李恒福)이 잘 지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간이집(簡易集) 제1권
 비(碑)
권 원수(權元帥)의 행주비(幸州碑)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권공 율(權公慄)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나고 나서, 공의 막료(幕僚)였던 사람들이 ‘공이 전에 거두었던 행주(幸州)의 승첩(勝捷)이야말로 그 공이 워낙 컸던 만큼 그 당시 현장의 언덕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영원히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공의 사위인 현재의 영상(領相) 이공(李公)을 찾아가 나에게 글을 보내 비문을 청하도록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진년 4월에 일본이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해 왔다. 그러고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우리의 허점을 틈타서 잇따라 우리의 군진(軍陣)과 고을을 함락시켰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크게 경악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모(權某)의 재주를 한 번 시험해 볼만하다고 하는데, 지금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이 전임(前任) 의주 목사(義州牧使)의 신분에서 바로 기용되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조정의 신하들은 호남과 영남 지방을 사지(死地)로 여기고 있었는데, 공은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단기(單騎)로 치달려 갔다. 그러나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경성(京城)을 이미 지킬 수 없게 되어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징집한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들어가 호위하려는 계책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군사 4만 명을 징발한 다음,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함께 영(嶺)을 사이에 두고 북상(北上)하면서, 공에게 방어군(防禦軍)의 중위장(中衛將)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는 서생(書生)을 무부(武夫) 취급하는 조치였으므로 혹 난색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공은 의연히 “내가 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였다. 직산(稷山)에 이르러 충청(忠淸) 군사와 합세, 수만의 군세(軍勢)를 이룬 뒤에 다시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이광이 곽영으로 하여금 용인(龍仁)에 있는 적의 진영을 먼저 공격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건의하기를 “왜적이 우리보다 먼저 험준한 지세를 점거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습격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못 된다. 그리고 지금 이것보다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경성(京城)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주공(主公)이 한 지방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오직 곧장 위로 올라가 조강(祖江)을 건넌 다음 임진(臨津)을 굳게 막아 적이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제압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전개될뿐더러, 행재소(行在所)에 품달하여 명령을 받을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될 것이니, 장차 큰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소규모의 적을 상대로 예봉(銳鋒)을 다투어서는 안 될 것이요, 그렇게 하는 일은 또 만전을 기하는 일이 못 되는 만큼 우리의 성세(聲勢)와 위신을 손상시키는 결과만 빚게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선봉장(先鋒將) 백광언(白光彦)과 조전장(助戰將) 이지시(李之詩)가 각각 정예 군사 1천 명을 직접 이끌고 갈 때에도 그들이 경솔하게 진격하려는 뜻을 보이자, 공이 또 경계시키면서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의 이 모든 말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백광언 등이 모두 전사(戰死)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는데, 이날 밤에 군중(軍中)이 지레 겁내며 놀라더니 아침에 적의 모습만 보고도 크게 무너지고 말았으므로, 제군(諸軍)이 모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공 역시 부득이 광주(光州)로 되돌아오고 나서 잠을 잘 때에도 옷을 벗지 않은 채 다시금 주장(主將)을 설득해 보려고 하였으나 오래도록 조용히 있기만 하자, 곧장 분연(奮然)히 일어나 말하기를 “지금은 신자(臣子)가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경내(境內)의 자제 5백여 인을 끌어모으는 한편 이웃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 또 1천여 인을 얻은 다음, 경상도와의 경계로 나아가 진을 쳤다.
이때 남원(南原)의 백성들이 왜적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이를 진정시키고 위무(慰撫)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찰사가 공의 보고를 접하고는 공에게 부절(符節)을 내주어 임시로 도절제(都節制)를 맡게 하면서, 열읍(列邑)의 관군(官軍)을 지휘 감독하여 영(嶺)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왜적의 길목을 차단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이치(梨峙)로 진군하여 험준한 지세를 의지하고 적을 기다렸다.
7월에 왜적의 공격을 받고 신속히 격퇴시켰으나, 군중(軍中)에서 용명(勇名)을 떨치던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적의 탄환에 맞아 퇴각하는 바람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면서,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왜적이 요새지 안으로 뛰어들어 형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칼을 빼어 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앞장서서 적의 칼날을 무릅쓰자, 전사(戰士)들이 모두 일당백(一當百)의 용맹심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왜적들이 사상자를 돌볼 틈도 없이 치중(輜重)을 낭자하게 내버려 둔 채 달아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행재소(行在所)에서 공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나주가 광주보다도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본도(本道)의 순찰사(巡察使)를 또 제수받게 되었다. 교서(敎書)가 진중(陣中)에 도착하던 날, 공이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쏟자, 그 비통한 모습에 군사들 모두가 감동되었다. 공이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이치(梨峙)를 대신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전주(全州)로 달려가 도내(道內)의 군사 1만여 명을 수습한 뒤, 9월에 근왕(勤王)의 계책을 실행에 옮기려 하였다.
당시에 여러 왜적들은 평양(平壤)과 황해(黃海)와 개성(開城)을 나누어 점거하고 있었으며, 경성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은 꽤나 큰 진영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군사들을 풀어 놓아 사방을 약탈하게 하는 바람에 서쪽 행재소로 가는 길이 끊어지자, 여러 근왕(勤王)의 부대들 역시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가서 그저 강을 사이에 두고 굳게 지키고만 있는 실정이었다.
공은 상이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왜적이 아직은 평양 이북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우선 경성에 대한 공격을 도모함으로써 서쪽에 가 있는 적들로 하여금 동쪽을 돌보느라 틈이 없게끔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방책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상에게 보고를 올리니, 상이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급히 내려 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중에 군령(軍令)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였다.
경성에 있는 왜적들로서는 공이 군사상의 요해지(要害地)에 버티고 있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병력 수만 명을 세 개의 진영으로 나눈 뒤 오산(烏山) 등 지역에 분산 배치하고는 수시로 왕래하면서 도전을 해 왔다. 그러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이따금씩 기병(奇兵)을 내보내 예봉을 꺾어 놓곤 하였으므로, 왜적이 결국에는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밤에 영채(營寨)를 불사르고 떠나갔다.
계사년 2월에 공이 휘하의 정병(精兵) 약 4천 명을 두 개의 부대로 나눈 뒤, 하나는 절도사(節度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주(衿州)의 산에 진을 치고서 성원(聲援)을 하게 하는 한편, 하나는 공이 직접 이끌고서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쳤는데, 이때의 병력이 실로 2300인에 불과하였다.
이때 중국의 대장인 이공 여송(李公如松)이 구원병을 총지휘하여 동쪽으로 내려와서는 벌써 평양을 탈환하는 등 그 위명(威名)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왜적 중에 평양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자, 황해 지방을 버리고 온 자, 개성에서 후퇴한 자, 함경도에서 풍문을 듣고 도망쳐 온 자들이 모두 경성에 모여들었으므로, 경성에 있는 왜적들은 오히려 그 형세가 더욱 치성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공이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서 경성과 근접한 지역으로 들어갔던 것인데, 왜적은 공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알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그저 한번 엿보다가 발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달 12일 여명(黎明)에 척후(斥候)하던 관리가 왜적의 출현을 보고하자, 공이 군중에 동요하지 말라고 경계시킨 뒤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성으로부터 5리(里) 떨어진 지점에 벌써 왜적이 벌판을 까맣게 뒤덮으며 밀려오고 있었다. 왜적은 먼저 1백여 기(騎)를 내보내 우리를 압박하더니, 이윽고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성 주위를 포위하고 성곽을 타고 올라왔는데, 계속 증가되는 숫자가 다시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에 아군(我軍)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화살과 바윗돌을 비 오듯 아래로 쏟아 붓자, 왜적이 병력을 셋으로 나눈 뒤에 계속 교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공격을 가해 왔다.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이어진 세 차례의 격전에서 왜적의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이제는 갈대 단을 묶어 바람결에 불을 놓기 시작하였는데, 그 불길이 목책(木柵)에까지 번져 오자 성안에서 물을 길어 와 끄기도 하였다.
그런데 다만 서북쪽의 자성(子城 성안에 설치한 또 다른 작은 성)을 지키던 승병(僧兵)의 기세가 약간 꺾인 틈을 타서 왜적이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오자 군사들 모두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무너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에 공이 칼을 빼들고 장수들을 질타하자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예봉(銳鋒)을 막아 서며 육박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왜적이 대패(大敗)한 나머지 시체를 네 곳에 쌓아 두고 불을 지른 뒤에 그곳을 빠져나갔는데, 우리 군대가 아직 남아 있는 왜적들을 붙잡아 목을 벤 것만도 130여 급(級)이나 되었으며,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개갑(鎧甲)과 도창(刀槍) 등을 노획한 것 역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시에 이 제독(李提督)이 개성(開城)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선봉(先鋒)인 유격(遊擊) 사대수(査大受)가 공의 대첩(大捷) 소식을 듣고는 다음 날 편비(褊裨)를 보내 전쟁터를 돌아보게 하였으며, 또 며칠 지난 뒤에는 공과의 면회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이 군진(軍陣)을 정돈하고서 그를 맞았는데, 그가 와서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외국에도 이런 진짜 장수가 있었구나.” 하였다.
얼마 지난 뒤에 공이 파주(坡州)의 산성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왜적이 행주에서의 패배를 기필코 보복하려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서쪽으로 향하다가, 공이 성벽 위에 서서 행주에서보다 더 엄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그곳을 공격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며 그냥 돌아간 것이 무려 세 차례나 되었다.
4월에 이 제독(李提督)이 심유경(沈惟敬)의 계책을 들어 줌에 따라, 여러 왜적들이 강화(講和)의 약속을 얻어 냈다고 일컬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공이 이 소문을 듣고는 날랜 군사들을 이끌고 경성으로 치달려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왜적이 한강(漢江)을 건넌 뒤였다.
그런데 이 제독이 유격(遊擊) 척금(戚金)을 보내 공의 동정(動靜)을 일일이 보고하게 하다가, 한강 나루에 있는 배들을 모두 거두어 추격하는 군대가 건너가지 못하게 방해하였으므로, 공이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군대를 해산시키고 본도(本道)로 돌아오게 되었다.
대체로 살펴보건대, 공은 처음부터 경성을 수복(收復)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만 전임 순찰사(巡察使)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었다. 그리하여 양호(兩湖)의 6만 병력이 집결했던 것을 계기로, 임진(臨津)으로 달려가서 기필코 지켜 낼 수 있는 그 좋은 기회를 무산시킨 채, 급기야는 수원(水原)에서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맛보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이치(梨峙)에서의 승리 같은 것은 불행을 당하고 나서 조금밖에 분풀이를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이나 봉시 장사(封豕長蛇)가 다시는 호남 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한 결과, 호남의 그 풍성한 곡물을 거두어 동쪽과 서쪽에 수송해서 충분히 공급하게 해 주었으니, 이것이 모두 누구의 덕분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그러다가 순찰사의 직책을 대신 맡게 된 뒤로부터는 일도(一道)의 군사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에 그 병력을 진작부터 쓰고 있는 자들이 많았으니, 가령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이 병력을 먼저 장악하고서 근왕(勤王)하는 대군(大軍)이라고 일컫다가 강화(江華)에서 기세가 꺾여 버린 경우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곳곳마다 의병이나 관군(官軍) 등 여러 부대들이 혹은 싸우고 혹은 지키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래서 공이 겨우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서 북상(北上)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정도의 군세(軍勢)로는 곧장 승냥이와 범의 소굴을 두들겨 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성(禿城)에서 그들의 목을 잠시 누르고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좌충우돌하는 적의 위세를 꺾어 놓음으로써 양호(兩湖)와 기우(畿右)의 길이 막힘없이 뚫리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행주(幸州)에 이르게 되어서는, 주인이 객을 맞는 유리한 위치에서 부족한 병력으로 엄청난 수의 왜적을 무찌르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중국 장수가 평양을 탈환한 그 위세도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이 행주의 대첩 역시 흉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왜적을 겁나게 하는 이런 승리가 있지 않았더라면, 심유경(沈惟敬) 같은 자가 백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왜적이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쯤 되어서는 공이 당초에 경성을 수복하려고 했던 그 뜻이 어느 정도나마 풀어지게 되었다고도 할 것이다.
6월에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영남(嶺南)의 제군(諸軍)까지 모두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도원수의 직책을 내놓기도 하고 다시 임명되기도 하다가, 정유년 겨울에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蔚山)의 전역(戰役)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무술년 가을에는 제독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전역(戰役)에 참여하였는데, 제독의 지휘를 받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건의를 올려도 채택이 되지 않고, 성곽을 먼저 타고 올라가는 용맹이 있어도 공을 세울 수가 없었으므로, 공만이 비통한 눈물을 흘렸을 뿐만이 아니라 뜻있는 인사들 모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왜적이 또다시 엿보면서 깊이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마 뒤에는 또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일단 경성을 수복하고 우리 힘으로 지켜 낼 수가 있게 되었으니, 이쯤 되어서는 공이 원래 품은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겠다. 만약에 중흥을 이룬 공적을 세운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있다고 한다면 과연 누구를 첫째로 꼽아야 하겠는가.
기해년에 공이 병으로 면직을 청하고 돌아간 뒤 도성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으나 다시 조정에 복귀하지 못한 채 7월에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63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애도하며 정사(政事)를 보지 않고 조문(弔問)과 제례(祭禮)와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하게 하였다.
아, 공의 공적에 대해서 본조(本朝)에서는 얼마나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던가. 병신년에 공이 재차 도원수의 직책을 사직하자 윤허하지 않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며 교서(敎書)를 내렸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술을 하사하는 동시에 또 내구마와 말 안장을 주면서 교서를 내렸고, 다시 무술년에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특별히 장려하며 유시(諭示)를 내렸었다. 그리고 공이 세상을 하직하자 관직을 추증(追贈)하도록 하는 한편 대신(大臣)에게 자문을 하며 시호(諡號)를 의논토록 하였다.
아, 공의 명성이 중국 조정에는 얼마나 성대하게 전파되었던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본국에 상(賞)을 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었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주문(奏文)을 올려 공의 공적을 아뢰었고, 천자의 명을 받든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은 본국에 칙지(勅旨)를 선유(宣諭)하였다.
그리고 전진(戰陣)에 임했을 당시에는 제독 마귀(麻貴)가 호령을 제대로 행한다고 칭찬하였고,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공의 장병이 역전(力戰)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세월이 흐른 뒤에도 중국 조정의 대소 관원들이 공의 이름만 듣고서도 그 사람됨이 어떠한지를 모두 가늠해 알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왜적의 여러 수령들조차도 권 원수(權元帥)의 기거가 어떠한지 꼭 안부를 묻곤 하였다. 이러한 종류에 대해서는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역사에 모두 기록해 놓을 것인데, 비문에 구체적으로 써넣을 성격의 것도 아닌 만큼 이쯤 해서 생략하기로 한다.
공의 자(字)는 언신(彦愼)이요, 관향은 안동(安東)으로서 고려(高麗)의 태사(太史) 권행(權幸)의 후예이다. 그리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찬성(贊成) 권근(權近)의 6대손이요,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이니, 그러고 보면 공이 세운 공업(功業) 역시 본디 그 유래가 있다고 하겠다.
공은 사람을 다스리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특히 성심(誠心)과 화기(和氣)로 대하였을 뿐 결코 엄의(嚴毅)를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 간에 감복을 하여 사력(死力)을 다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공은 46세 되던 해인 임오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낭관(郞官)을 거쳐 당상(堂上)에 뛰어올랐고, 급기야는 유장(儒將)으로서 현달하게 되었다. 공은 관직을 역임한 것도 그다지 많지 않고 조정의 반열에 서 있었던 적도 드물기만 하다. 그저 어렵고 힘든 시대를 만나 그 능력을 다 발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옛날 공의 대장 깃발 아래에 있었던 인사들이 공의 덕의(德誼)를 사모하면서도 이를 선양(宣揚)할 길이 없자, 다투어 출자(出資)하여 힘을 모은 다음에 공의 형인 상호군공(上護軍公)에게 이를 알리고서 이 비석 건립에 서로들 힘을 쏟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가상하다 하겠는가.
상호군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권순(權恂)이요, 영상(領相) 이공(李公)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恒福)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공의 묘소는 경성 서쪽 홍복산(洪福山)에 있다.


[주D-001]봉시 장사(封豕長蛇) : 엄청나게 큰 멧돼지와 뱀처럼 포학하고 탐욕스러운 무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왜적이 그렇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