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헌종대왕 행장 (펌)

현종대왕 행장(顯宗大王行狀)

아베베1 2009. 11. 13. 19:09

약천집 제14권
 응제록(應製錄)
현종대왕 행장(顯宗大王行狀) 대왕대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어머니로, 최철견(崔鐵堅)의 따님이요


왕은 성(姓)이 이씨(李氏)이고 휘(諱)가 모(某)이고 자(字)가 모이니, 효종대왕(孝宗大王)의 아드님이다. 어머니는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이니, 우의정으로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인 유(維)의 따님이다. 효종이 대군(大君)으로 심양(瀋陽)의 관사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신사년(1641, 인조 19) 2월 기유일에 왕을 낳았는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두세 살 때부터 말과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
갑신년에 효종이 심양에서 연경(燕京)으로 들어가려 하시면서 왕을 보내어 조선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인조(仁祖)를 뵈올 적에 어른과 같이 예절에 맞게 응대하였다. 인조가 “요순(堯舜)과 걸주(桀紂)가 어떻게 다른가?” 하고 묻자, 이때 왕은 막 증선지(曾先之)의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읽고 있었으므로 《십팔사략》의 글을 차례로 들어 성군이 되고 폭군이 되는 이유를 자세히 증명하니, 인조가 그 대답을 듣고는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스러워 하였다.
표범 가죽을 진상한 자가 있었는데, 품질이 나쁘다 하여 물리려 하자, 이 때 왕이 곁에 있다가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반드시 사람들이 많이 다칠 것입니다.” 하니, 인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물리지 말도록 명하였다.
효종이 아직 환국(還國)하지 않았을 적에 왕은 매일 해가 처음 뜨는 것을 보면 그때마다 축원하기를 “바라건대 부모께서 속히 돌아오시어 제가 뵐 수 있게 해 주소서.” 하였으며, 새로운 음식을 대할 적마다 심양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면 번번이 어버이가 있는 곳에 보내어 바치게 한 뒤에야 비로소 음식을 맛보곤 하였다. 부모를 모실 적에 의복 등 사용하는 물품은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반드시 지극히 공경하여 감히 함부로 옮겨 놓지 않았으며, 부모가 곁에 계시지 않을 때에도 반드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부모가 바라지 않는 것이면 감히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여염집에 나가 우거(寓居)하였는데 이웃집에 크게 떠드는 자가 있었다. 모시는 자가 그를 꾸짖어 금하자 왕은 만류하기를 “사람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찌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편안하게 해 주어야지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일찍이 합문(閤門) 밖을 나가다가 수졸(守卒)의 얼굴이 검게 타고 수척한 것을 보고는 그의 헐벗고 굶주림을 가엾게 여겨 의복을 하사하라고 명하고, 또 그가 번(番)을 마칠 때까지 날마다 남은 밥을 주었다.
인조가 이미 효종을 후사로 삼고는 기축년 2월 인정전(仁政殿)에 친히 납시어 왕을 세손(世孫)으로 책봉하였는데, 왕은 자품(姿稟)이 숙성하고 의표(儀表)와 법도가 한가롭고 고상하니, 백관들이 서로 경하하였다. 강서원(講書院)을 설치하고 강관(講官)을 두어 학문을 하게 하였다. 이해 5월 인조대왕이 승하하고 효종대왕이 즉위하니, 왕은 저이(儲貳 세자)로 승격되어 보필하고 인도하는 관원이 더욱 구비되었으므로 성스러운 덕(德)이 날로 성취되었다. 효종은 왕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고자 하여 농부들로 하여금 후원(後苑)에 들어와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왕이 말하기를 “소가 사람에게 큰 공이 있구나. 사람들이 부지런히 힘써서 밥을 먹는 것이 마침내 이와 같구나.” 하고는 밥을 먹다 말고 농사짓는 자들에게 음식을 하사하였다.
왕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서 언제나 한 번 보고 들으면 곧 잊지 않았다. 일찍이 《맹자》를 읽었는데 효종께서 외워 보라고 명하시자, 《맹자》 7편을 다 외우도록 한 글자도 착오가 없으니, 효종은 크게 놀라며 기뻐하였다. 왕은 어려서부터 장성하기까지 책을 읽는 경우가 아니면 한 번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모께서 편찮을 때가 있으면 밤낮으로 부축하고 모셔서 비록 물러가서 쉬라고 명령해도 감히 물러가지 않았다.
신묘년(1651, 효종 2) 가례(嘉禮)를 행하였으니, 왕비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우명(佑明)의 따님이었다. 임진년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고 선성(先聖)을 배알하였으며 인하여 박사(博士)에게 나아가서 학업을 청하였는데, 예에 맞는 모양이 장엄하고 후중하며 글 읽는 소리가 크고 분명하니, 뜰에 가득한 보고 듣는 자들이 감탄하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기해년 5월 을축일에 효종이 승하하시니, 왕은 택종(宅宗)으로서 너무 슬퍼하여 몸을 훼손하며 곡하고 뛰는 것이 예(禮)보다 더하였다. 5일이 지난 기사일에 왕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셨는데 안색이 수척하니, 신하들이 차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이 효종의 행장을 지어 올렸는데, 왕이 간찰을 내리기를 “요순의 도(道)는 효도와 공경일 뿐이니, 요순의 훌륭한 정치를 이루고자 한다면 마땅히 요순의 도를 다해야 할 것이다. 선왕(先王)은 효도와 공경으로 몸을 닦고 교화를 이루는 근본으로 삼으셨다. 또 세상일을 통탄하시고는 준걸들과 현재(賢才)들을 예(禮)로 망라해서 마음속으로 이들에게 의탁하여 서로 도의(道義)를 닦아서 이 세상을 삼대(三代) 시대로 되돌리고 대의(大義)를 천하에 펴려고 하였는바,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선왕의 뜻으로 평소 세우신 큰 규모이고 위대한 법인데 지금 이 행장에는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것을 분명하게 써서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이 간찰이 나오자, 보는 자들은 선왕을 천양(闡揚)하려는 왕의 생각과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이어 가려는 왕의 뜻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는 무더운 여름철이었는데 여막(廬幕)이 너무 좁으므로 근신(近臣)들은 가을철이 되어 시원해질 때까지 딴 곳으로 옮겨 머물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거처를 가린단 말인가. 거처를 가려 머문다면 몸은 비록 편안하겠지만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였다.
10월 병진일에 효종대왕을 영릉(寧陵)에 장례하였는데, 삭망(朔望)의 제전(祭奠)에 심한 병이 아니면 대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능침(陵寢)에 성묘할 적에 슬퍼하는 모습이 좌우 신하들을 감동시키니, 신하들이 모두 추모하여 눈물을 훔치고 목이 메었다.
이해에 마침내 노인을 우대하고 고아들을 구휼하며,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한 자들을 표창하며, 절의(節義)가 있는 자와 청백리를 장려하고, 전투하다 죽은 자를 기록하는 은전을 시행하였으며, 형벌을 남용한 관리를 금고(禁錮)하고 아약(兒弱)으로서 군적(軍籍)에 소속된 자들에게 거두는 군포(軍布)를 모두 견감(蠲減)해 주었다. 수재(水災)를 입은 호남ㆍ경기ㆍ호서 지방에 대해서는 재해에 따라 세액을 면제해 주고 수미(收米)를 견감해 주었다. 북관(北關)에서 바치는 공물(貢物)을 줄이고 관서 지방의 유리걸식하는 자들에게 사람수를 계산하여 관향(管餉)의 미곡(米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내탕고(內帑庫)에 있는 목면(木綿) 천 필을 하사하고 상평청(常平廳)에 보관되어 있는 백금 수천 냥과 여러 도의 감영과 병영에 저축되어 있는 목면 수만 필을 내어서 세금을 견감하거나 부족한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으니, 이는 바로 왕이 처음 즉위하여 훌륭한 정사를 펴고 인정(仁政)을 베푼 단서이다.
원년(元年) 경자(1660)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단천(端川)에서 바치는 은(銀), 영동과 영서의 대동미(大同米), 여러 도의 전세(田稅)와 노비들의 공포(貢布)를 줄여 주었으며, 어사(御史)를 보내어 유리하는 북쪽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휼하여 편안히 살게 하였다. 그리고 호구 제도를 다시 엄격히 시행하여 백성들을 모두 호적에 올려 감히 누락되는 자가 없게 하고, 여정포(餘丁布)를 강원도에 내려 주어 재앙을 만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으며, 중외의 노인들에게 쌀과 삼베, 명주와 솜을 하사하고 여러 궁가(宮家)의 원당(願堂)을 혁파하였으며, 도성으로 흘러 들어온 관북ㆍ영동ㆍ영서의 굶주린 백성들을 상평창(常平倉)에 명하여 쌀과 소금으로 구휼해 주게 하였다.
7월에 큰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행하였다. 국가의 제도에 가을이 된 뒤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일이 없었는데 이때 특별히 시행한 것이다. 각 아문에서 무역(貿易)하여 이익을 내는 것을 금하였다.
영릉(寧陵)을 배알할 적에 시위(侍衛)하는 장병들에게 명하여 길가에 있는 벼와 곡식을 밟아서 상하게 하지 말도록 하였다. 팔도에 하교하여 두루 유시해서 유민들을 편안히 살게 하고 어공(御供)인 정미(精米)와 향온미(香醞米)를 줄였으며, 제도(諸道)에 명하여 각각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해서(海西) 사람 중에 고변(告變)하는 자가 있자, 왕은 한 번 묻고는 거짓임을 알아내 그 사람을 처형한 다음, 이 옥사에 관련된 자 70여 명을 석방하는 한편 그들에게 양식을 주어 돌려보냈으며, 관리와 병졸들에게 빼앗긴 가산을 모두 돌려주게 하였다.
겨울철에 사형수들을 다시 조사하게 하였는데, 대신이 도성 안에 마마가 한창 성하여 외부에 있는 신하들을 인접(引接)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정지할 것을 청하자, 왕이 간찰을 내리기를 “아, 천성(天性)은 사람들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데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여 악한 짓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시 죄를 처결하지 않고 또다시 엄히 가둔다면 죄가 비록 사형에 해당한다 할지라도 그 정상이 애처로우니, 이것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금년에 이러한 일로 시행하지 않고 명년에 또다시 저러한 일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저 죄인들은 모두 감옥에서 죽은 억울한 영혼이 되고 말 것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는 허락하지 않았다.
2년 신축에 도성 안에 있는 비구니(比丘尼)의 사원(寺院) 두 곳을 철거하였다. 처음에 왕은 승려와 비구니들이 성인의 가르침을 어지럽힌다고 미워하여 모두 없애려고 하셨는데 대신과 옥당(玉堂)이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다고 아뢰니, 마침내 먼저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두 사원을 철거하도록 명하여 나이가 젊은 자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늙은 자는 성 밖으로 내보냈으며, 사원의 목재로 학궁(學宮)과 무관(武館)을 수리하게 하고 중외의 음사(淫祀)를 금지시켰다.
가뭄이 심하므로 기우제를 친히 행하려 하였는데 연신(筵臣)이 성상의 옥체가 편치 않음을 말하자, 왕이 말하기를 “내 어찌 한 몸을 아껴 만백성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겠는가.” 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보관한 쌀을 옮겨다가 삼남(三南) 지방을 구휼하였다.
7월에 왕이 태묘(太廟)에 이르러 효묘(孝廟)를 부묘(祔廟)하는 예(禮)를 행하였는데 가뭄을 이유로 진하(陳賀)와 반교(頒敎)와 음복연(飮福宴)을 정지하였다. 이전에 수시로 도성의 양가집 딸을 뽑아서 궁녀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를 특별히 혁파하고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삼남 지방과 경기, 해서의 환자곡을 일체 감면해 주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봄에 거두는 쌀을 줄여 주었으며, 태복시(太僕寺)에서 말에게 먹일 곡식 천여 석(石)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3년 임인 봄에 진휼어사(賑恤御史)를 양남(兩南)에 보내어 편의에 따라 조처하게 하였으며, 영남 지방의 의로운 일을 행한 사람들에게 쌀과 곡식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서북 지방의 감사에게 명하여 인재를 찾아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기 지방에 양전(量田)을 시행하고 호남 지방에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정하였다.
4년 계묘에 한해(旱害)가 있다 하여 자책하는 하교를 내리고 대소 신료(臣僚)들에게 명하여 함께 공경하고 서로 화합해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게 하였다. 여러 궁가(宮家)에 대한 면세전(免稅田)의 결수(結數)를 차등 있게 정하고 시장(柴場)을 한 곳만 남겨 두어 널리 점거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어장(魚場)과 망장(網場)은 오직 선조(宣祖) 때에 사급(賜給)한 것을 남겨 두되 본인에게만 국한하게 하였다.
5년 갑진에는 무술년 이후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로서 이미 죽은 자에게 추징하던 신공(身貢)을 탕척(蕩滌)하였다. 별자리에 변고가 생기자, 대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사의 잘잘못을 자세히 아뢰게 하고 내수사의 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하였으며 상방(尙方)에서 비단을 짜는 것을 정지하였다.
6년 을사 4월에 온양온천(溫陽溫泉)에 행차하였다. 이전부터 왕이 안질(眼疾)이 생겨 오랫동안 낫지 않자 의원이 아뢰기를 “온천욕을 해야 합니다.” 하였다. 왕이 온천에 목욕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옥체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마침내 충청도 도내(道內)에 명하여 노인들을 예우하게 하고 효제(孝悌)하는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으며, 충신과 선현에게 제사하고 전조(田租)를 감면하였으며 과거를 시행하게 하였다. 궁중으로 돌아온 다음, 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연로(沿路)에 베풀었는데, 이후 여러 번 행차할 때마다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10월에 폭풍과 우레의 변고가 있자, 왕은 재야의 유신(儒臣)들에게 사실을 갖추어 봉함해 아뢰도록 명하였으며, 백성들의 전결(田結)을 몰래 궁가에 기록하여 세금을 면제 받는 것을 일체 금하게 하였다.
7년 병오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자책하는 하교를 내렸다. 영남의 곡식을 영동과 영서로 옮기고 해서의 곡식을 북관으로 옮겨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으며, 목화(木花)가 귀하다 하여 포보(砲保)의 가포(價布)와 각사(各司) 노비들이 바치는 신공(身貢)에 대해 차등을 두어 감면해 주고, 함경도 아홉 고을의 전세(田稅)와 우황(牛黃)과 표범 가죽을 진상하는 것을 면제해 주었다.
8년 정미에 한해가 있다 하여 자책하는 하교를 내리고 각사의 노비들이 바치는 신공을 반으로 줄였으며 저화가(楮貨價)를 특별히 줄여 주었다. 국가의 제도에 노비들은 신공 외에 또 저화(楮貨)를 바쳤는데, 뒤에 저화 바치는 것이 없어지고 그 값을 계산하여 베를 징수하다가, 이때에 특별히 감하고 법령으로 만들었다.
7월에 왕이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우제를 지냈으며,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재심(再審)하고 직언을 널리 구하였다. 경기 지방의 전세로 거두어들이는 대동미를 모두 견감(蠲減)하고 각사의 경비를 모두 반으로 줄였으며, 호조의 염세(鹽稅)를 감하였다. 양서(兩西)에서 거두어들이는 쌀을 견감하였으며, 북로(北路)에 포흠(逋欠)이 생긴 환자곡을 탕척해 주었다. 기내(畿內)에 명하여 상번(上番)하는 기병(騎兵)과 각 진(鎭)의 수군(水軍)을 달수를 줄여 번(番)을 서게 하고 포(布) 바치는 것은 반으로 줄였으며, 각 도(道) 노비들의 미납된 신공을 탕척해 주었다.
9년 무신에 별자리에 변고가 생기자 자책하는 하교를 내리고 신하들을 경계하여 정성을 다해 봉직하게 하였으며, 인재를 선발하고 서옥(庶獄)을 소결(疏決)하였다. 강도에 보관되어 있는 쌀 1만 석과 남한산성에 보관되어 있는 쌀 5천 석을 내어 기내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예조에서 별자리의 변고가 이미 사라졌다 하여 평상시에 드시던 수라(水剌)로 회복할 것을 청하자, 왕이 말하기를 “내 매번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마음이 서글퍼져서 음식을 먹어도 넘어가지 않으니, 무슨 심정으로 평상시의 음식을 회복하겠는가. 우선 가을에 수확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0년 기유에 영남 지방에 흉년이 들자, 왕은 명하여 각사의 노비들을 조사해서 을사년 이후 징수할 곳이 없는 신공을 면제해 주었으며, 여러 궁가에서 절수(折受)한 곳을 조사해서 주인이 있는 백성들의 토지와 절수하기 전에 백성들이 이미 기경(起耕)한 곳은 모두 돌려주게 하였다. 대신이 세시(歲時)에 진배(進排)하는 솔잎이, 기복(祈福)하고 압승(壓勝)하는 바르지 못한 행위에 해당된다 하여 파할 것을 청하자 왕은 그 말을 받아들이셨으며, 모든 도장(桃杖)과 도지(桃枝), 인승(人勝)과 채색화를 모두 파하도록 명하였다. 동성(同姓)으로 관향(貫鄕)이 다른 자의 혼인을 금하였다. 이전에는 우리나라 풍속이 성씨가 비록 같더라도 만약 관향이 다르면 으레 혼인을 맺었는데 이때에 금지하였던 것이다.
10월 초에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태묘에 부묘(祔廟)하고 휘호(徽號)를 올리며 능침을 의식과 같이 회복하였다. 신덕왕후는 태조(太祖)가 개국한 후 중전에 오른 지가 여러 해였는데 태조가 승하하시자 신하들이 잘못 의논해서 함께 부묘하는 예(禮)를 올리지 않으니, 사람과 신명(神明)이 오랫동안 답답해하였다. 이에 대한 조정의 의논이 간간이 나왔으나 열성조(列聖祖)에서 오히려 미처 행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비로소 오랫동안 하지 못하던 예전(禮典)을 거행하였다. 능에 봉분을 쌓고 제사 지내던 날 정릉 한 골짝에 소나기가 내리니, 백성들은 원통함을 씻는 비라 하여 세원우(洗冤雨)라고 칭하였다. 우레와 우박으로 인한 재앙이 있자, 중외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소결(疏決)하고 대동미를 경감해 주었다.
11년 경술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각 전(各殿)의 향온미(香醞米)를 참작하여 줄였으며, 강도에 보관되어 있는 쌀 3만 석을 운반하여 서울에 방매(放賣)하였다. 호조의 염철포(鹽鐵布)를 전라도에 떼 주어서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자금으로 충당하였으며, 어영청(御營廳) 군사들의 상번(上番)을 정지하고 그 보미(保米)를 여러 도에 남겨 두어 구휼에 사용하게 하였다. 제주(濟州)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호남 지방의 곡식과 통영(統營)에 보관되어 있는 쌀과 조곡(租穀)을 운반하여 구휼하고 본주의 노비들이 바치는 신공을 모두 감면해 주었다. 호조와 진휼청(賑恤廳)에 명하여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쌀과 곡식과 유의(襦衣)를 차등 있게 나누어 주고 각 도에서 바치는 삼베를 감면해 주도록 하였다.
12년 신해 봄에 큰 기근이 들자 왕이 하교하기를 “이런 큰 흉년에 백성들을 독촉하여 세금을 거둘 수는 없다.” 하고 삼남과 원양(原襄), 황해, 경기의 전세(田稅)를 본도에 모두 남겨 줌으로써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게 하였다. 도성 세 곳에 진청(賑廳)을 나누어 설치해서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고, 여러 도에는 거주하는 읍내와 촌락의 원근을 가늠하여 구휼하는 곳을 군데군데 설치하고는 죽을 쑤어 굶주려서 부황(浮黃)이 난 자들을 먹이고 마른 양식을 주어서 농사를 짓게 하였으며, 진휼청에 명하여 곡식값을 싸게 방출하게 해서 값이 오르는 것을 막았다. 이해 여름에 또다시 보리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하니, 왕은 중외에 명하여 부고(府庫)의 재물을 다 털어서 계속 구휼하게 하였으며, 병든 자는 치료하고 죽은 자는 장사 지내며,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길러서 자식으로 삼게 하였다. 이 때문에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관청에서 얻어 먹게 되니, 비록 고통스럽고 곤궁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서로 모여서 강도질하는 자가 없었으며, 죽는 자들은 한스러워 하는 바가 없었고 산 자들은 토지와 집을 복구하였다. 이해 가을에 여러 도에 큰 풍년이 들어서 김매지 않고도 수확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왕은 명하여 동쪽과 서쪽 교외에 단(壇)을 설치하고 나라 안에 굶어 죽은 자와 전염병으로 죽은 자를 제사하게 하였으며, 각 도의 진상을 정지시키고 다만 두 자전(慈殿)께 바치는 것만 남겨 두었다. 제주에 어사를 파견하여 세 고을의 인민들을 위로하고 면포(綿布) 4천 필과 보리 종자 2천 석, 쌀 2천 석을 실어다 주었으며, 매년 진상하는 토산물을 모두 감면해 주고 여러 도의 방물(方物)을 줄여 주되 이듬해부터 계축년까지 하였다.
13년 임자에 재신(宰臣)과 육조(六曹)의 관원에게 서로 의논해서 인재를 천거하고 중외의 사형수 이하를 석방하며, 병오년 이전의 환자에 대한 포흠(逋欠)을 모두 면제하고 각 아문에서 징수하는 세금을 모두 탕척하도록 명하였다.
14년 계축에 왕은 불쌍한 백성들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농업을 권면하는 교서를 팔도에 내렸다. 한해(旱害)가 있자, 억울한 옥사를 다스리며 피전(避殿)하고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였다. 단옷날 시첩(詩帖)을 지어 올리자, 왕이 말하기를 “한발이 이처럼 혹독하니, 이와 같은 허례허식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명하여 신해년 이전에 군졸과 노비가 도망하거나 죽어서 받지 못한 것과 임자년에 미처 상납(上納)하지 못한 것과 계축년에 납입해야 할 포를 면제해 주었다.
영릉(寧陵)의 석물(石物)에 틈이 생겨 빗물이 샐 우려가 있다 하여 9월에 옛 능을 열어서 관두(棺頭)를 살펴보았다. 10월 계묘일에 여주(驪州)의 홍제동(弘濟洞)으로 받들어 이장하였다. 흠위(廞衛)가 지나가는 다섯 고을에 대동미를 면제해 주고 경기 고을에 봄에 거두는 쌀을 감해 주되 차등이 있게 하며, 경기ㆍ황해ㆍ전라ㆍ원양(原襄) 등 네 도의 경술년에 미수된 전세를 탕척하도록 명하였다.
15년 갑인 2월에 인선왕대비(仁宣王大妃)가 승하하시니, 6월 정유일에 영릉(寧陵)에 부장(祔葬)하였다. 처음 효종의 상(喪)에 대신들은 여러 유신(儒臣)들과 함께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복(服)을 의논하여 기년복(朞年服)으로 결정하였는데, 그 후 허목(許穆)이 상소하면서 《의례(儀禮)》의 주소(注疏)를 인용하여 차장(次長)은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왕이 다시 대신들에게 묻도록 명하니, 유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은 아뢰기를 “진실로 《의례》의 주소에 이러한 내용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 주소의 내용에 또한 차자(次子)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리가 있으니, 하나를 고집하고 하나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의심스러운 주소의 내용을 경솔하게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가까이 명(明) 나라의 제도와 우리나라의 전례(典禮)를 따르는 것이 오히려 과실이 적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대신 또한 이전의 소견을 고집하여 국가의 전례를 가지고 대답하였으므로 마침내 고치지 않고 기년복을 따랐다. 이에 윤선도(尹善道)가 송시열 등이 효종을 폄하했다고 앞장서서 말하니, 그 말에 동조하는 자들이 이어서 일어났다. 왕은 말하기를 “기해년에 복제(服制)를 강론하여 결정한 것은 실로 국가의 칙령(勅令)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송시열 등 여러 사람들도 당초에 수의(收議)할 때에는 대신의 의논을 따랐었는데, 경자년 이후 여러 상소문에서 송시열을 전적으로 꾸짖자, 송시열 등 여러 사람들도 비로소 고례(古禮)를 인용하여 다투고 변론해서 한바탕 논쟁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원래 조정에서 채용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송시열 등에게 비록 효종은 차자(次子)와 중자(衆子)라는 의논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이미 그 말을 채용하지 않았으며, 허목이 비록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또한 그 말을 채용하지 않았으니, 단지 10여 년 동안 피차간에 결말도 없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공담(空談)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송시열 등을 모함하여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자들은 언제나 예론(禮論)에 의탁하였다. 그러므로 왕이 그들의 정상을 통촉하고 이러한 분부를 내렸으며, 또 말은 동쪽에 있으나 뜻은 서쪽에 있다고 배척하였다. 이때 모비(母妃)의 상을 당하였는데, 예관(禮官)이 지난번의 국상에 국가의 전례를 준용(遵用)한 본의를 알지 못하고는 먼저 품지(稟旨)하지 않고 갑자기 자의대비의 복제를 대공(大功)으로 결정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공경(公卿)과 삼사(三司)의 관원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 모이게 하여 자의대비가 인선왕비(仁宣王妃)의 상에 무슨 복을 입어야 할 것인가를 하문하였는데, 공경 이하가 대답을 잘못하여 왕의 뜻에 맞지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기해년의 국상에는 국가의 전례를 따라 아들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었을 뿐이다. 국가의 전례에 기년복은 비록 장자(長子)와 중자(衆子)의 구별이 없으나 자의대비가 선왕에 대해서 본래 장자의 기년복을 따른 것이니, 이번의 상도 장부(長婦)의 기년복을 따라야 한다.” 하고는 특명으로 대공을 고쳐 기년복으로 정하고, 먼저 품지하지 않았다 하여 예관을 처벌하였으며 물은 내용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여 수상(首相)을 견책하였다.
왕이 봄부터 병환 중에 있었는데, 대비의 상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훼손되어 병이 덧났다. 8월 7일 재신들을 불러 궁중에 들어오게 하여 일을 의논하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한질(寒疾)이 나서 결행하지 못하였으며, 이달 18일 기유에 창덕궁(昌德宮)의 재계하는 여막에서 승하하니 춘추가 겨우 34세였다. 도성의 사서인(士庶人)으로부터 궁벽한 골짝의 어리석은 백성에 이르기까지 달려와 슬피 호곡(號哭)하며 지극한 은덕을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 애통하다. 신하들은 왕의 공덕을 의논하여 순문숙무경인창효(純文肅武敬仁彰孝)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현종(顯宗)이라 하였다. 이해 12월 13일 임인에 숭릉(崇陵)에 장례하였다.
왕은 성인(聖人)의 자질을 하늘로부터 타고나 아름다운 덕이 어릴 때부터 이루어졌다. 부모에게 문안하고 음식을 살펴볼 때에 이미 희문(姬文)의 행실이 있었고, 즉위하여 예를 행함에 이르러서는 달효(達孝)의 훌륭함이 진실로 신하와 백성들의 귀와 눈에 널리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안으로 두 대비를 섬김에 있어서는 정성과 예의가 간격이 없었으며, 공손하고 유순하고 온화하여 화기(和氣)가 항상 애애(藹藹)하였다.
대왕대비가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의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해서 병환이 심해지자, 왕은 뜰 가운데 그대로 앉아서 의원을 불러 약을 문의하고 약물을 반드시 손수 가져다가 올리니, 듣는 자들이 감동하였다. 왕대비가 처음에는 통명전(通明殿)에 거처하였는데 왕의 처소와 약간 멀었다. 이에 왕은 집상전(集祥殿)을 지어 옮겨 받들어서 아침저녁으로 모심에 편리하게 하였다.
대비가 오랫동안 병환을 앓고 있었는데, 왕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그 마음을 위안하니 대비는 항상 말하기를 “왕이 언제나 내 곁에 계시니, 병이 몸에서 떠난 듯하다.” 하였다. 일찍이 대비를 모시고 온천에 행차하여 효험이 있자, 왕은 충청도 도내에 은혜를 베풀어 노인들에게 관작을 두루 하사하고, 궁궐로 돌아온 다음 또 종척(宗戚)과 조신(朝臣) 중에 연로한 자와 부모가 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중외의 선비와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다.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모친에게 효성스러웠는데 먼저 죽자, 특명으로 그 어머니에게 종신토록 녹봉을 지급하게 하였으니, 선한 사람을 권장하는 은덕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신하와 백성들이 교화에 감동되어 모두 효심을 분발하였다.
왕은 다섯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지극히 친애하여 똑같이 은혜롭게 대우하였다. 특별한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나누어 주고 질병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고 걱정해 마지않았으며,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는 것이 끊이지 않았고, 사망한 자가 있으면 애통하여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딸이 황창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시집갔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위하여 슬퍼하여 말하기를 “선왕조의 은혜가 여러 부마(駙馬)보다 못하지 않았으니 이를 추념하면 내 어떠한 마음이 들겠는가.” 하고는 특별히 후하게 비호하고 구휼하라고 명하여서 선왕이 친하게 대하던 의리를 잘 마무리하였다.
종족들과 화목하여 은혜로운 뜻이 지극하였으며, 친소를 헤아려서 보살펴 주고 돌보는 것이 변함이 없었다. 귀척(貴戚)들에 대해서는 비록 융숭하게 대하였지만 또한 일찍이 사적인 은혜로 공적인 법을 해치지 아니하여 여러 궁가(宮家)의 하인들이 조금이라도 죄를 범하면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통렬히 법으로 다스렸다.
유신(儒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은 효종 때부터 의기투합하여 매우 친하였다. 효종은 이들 두 신하로 하여금 춘궁(春宮)에서 왕을 모시면서 훈계하는 말씀을 올리고 규간(規諫)을 하며 글을 외우고 권면하게 하니 왕이 마음을 기울여 받아들여서 날로 진전되었는데, 전담하고 또 오랫동안 한 것으로 말하면 송준길이었다. 왕은 즉위하자 이들 두 신하를 더욱 융숭히 예우하여 나라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였으며, 동시대에 은둔하여 수행하는 선비로서 윤선거(尹宣擧)와 같은 사람들 또한 사방으로 초빙하여 모두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다.
기해년 겨울 송시열이 비방하는 말로 인해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왕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자 왕은 이에 내 차라리 가서 만나보겠다는 전교를 내렸으며, 송준길 또한 이어서 물러나자 왕은 이들 두 신하를 생각하고 그리워하여 소명(召命)을 내리고 그만두지 않았다. 혹은 사관(史官)을 보내고 혹은 승지를 보냈는데 내리신 편지에 말씀한 내용이 간곡하였으며, 혹은 명절에 선물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혹은 흉년에 곤궁함을 구원하였으며, 시골에 있을 때에는 또한 사람을 보내어 진귀한 음식을 하사하고 도성에 들어오면 반드시 쌀과 고기를 계속하여 대주었다. 송시열이 예론(禮論)으로 인해 사람들의 배척을 당하자, 왕은 상하간을 비방하여 이간질한다 해서 그 사람을 추방하였으며, 송시열을 끝내 대배(大拜)하였다. 송준길이 죽자 왕이 하교하시기를 “선왕조의 은혜와 예우가 천고에 뛰어나며 과인(寡人)의 몸에 이르러서는 간절히 가르쳐 줌이 감반(甘盤)보다도 더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이것을 생각하면 서글픈 감회를 스스로 그칠 수 없다.” 하고는 영의정에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왕은 학문에 유념하여 의리를 강론하고 연구하였다. 일찍이 강관(講官)들로 하여금 선유(先儒)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써서 바치게 하여 보고 살핌에 대비하였다. 참찬(參贊) 송준길이 태극음양도(太極陰陽圖)를 올리고 인하여 차자를 올려서 양(陽)이 회복하는 뜻을 아뢰자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큰 병환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경연(經筵)에 나아갔고, 또 옛날 역사책을 보기 좋아하여 군주의 덕이 닦이고 닦이지 않음과 정치의 득실과 민생의 즐겁고 고달픔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여 감계(鑑戒)로 삼았으며, 견해가 고명해서 항상 강관들의 의표(意表)를 찔렀다. 《서경》을 강하다가 ‘신내재위(愼乃在位)’에 이르러 왕이 말하기를 “임금이 군주의 지위를 잘 수행하는 도리는 신(愼) 한 글자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유기유강(惟幾惟康)’은 공력을 씀에 있어 가장 긴요한 부분을 말한 것이다. 기(幾)는 생각이 처음 나오는 곳이요 강(康)은 즐겁고 편안한 즈음이니, 더욱 삼감을 지극히 해야 한다.” 하였다. 당(唐) 나라 건성(建成)을 논하여 말하기를 “명 나라 태종조(太宗朝)에 인종(仁宗)이 태자가 되었는데, 한왕(漢王) 고후(高煦)가 인품이 불량하였으나 인종은 그를 은혜와 사랑으로 대하여 인종의 대(代)를 마치도록 그가 감히 딴 마음을 품지 못하였으니, 만일 건성이 이와 같이 태종(太宗)을 대하였다면 어찌 피를 보는 변고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송(宋) 나라 태조(太祖)가 술을 마시다가 병권(兵權)을 해임한 것에 대해 논하였는데, 강관이 아뢰기를 “이는 권모술수에 가깝습니다.” 하자, 왕이 말하기를 “어찌 나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기뻐하면서 사람을 부리는 방도이다.” 하였으며, 진종(眞宗)이 천서(天書)를 가지고 태묘(太廟)에 고한 것에 대해 논하여 말하기를 “자신을 속이는 것도 옳지 못한데, 어찌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을 속일 수 있겠는가. 진종의 초년(初年) 정사는 또한 볼 만한 것이 있으나 소인배들에게 그르침을 당하여 끝을 잘 마치지 못하였으니, 매우 경계할 만하다.” 하였다. 또 본조(本朝)의 성삼문(成三問)의 일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왕이 말하기를 “성삼문 등을 옛사람에 비교하면 명 나라 방효유(方孝孺) 등 여러 사람의 부류이다.” 하였다. 성삼문의 일은 역대 왕조 이래로 혹 탑전(榻前)에서 아뢴 자가 있었으나 군주가 그를 칭찬하고 높인 말은 이때에 처음 나왔는바, 왕이 경연에 임하여 강설하실 적에 이와 같은 경우가 매우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경연의 강학을 정지하는 날에는 또 유신들에게 역사책을 열람하고 옛일을 써서 올려 풍자하고 깨우치는 뜻을 부치게 하였으며, 근신(近臣)들을 자주 불러 야대(夜對)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백성들의 일을 묻곤 하였는데, 마음을 열고 뜻을 보여 주어서 겉과 속이 간격이 없어 집안의 부자간과 같았다. 일찍이 안질(眼疾)이 있었는데 촛불을 대하고 책을 보시자, 신료(臣僚)들이 눈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겨울밤이 매우 길고 내가 또 잠이 적으니, 책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뒤에 안질이 더욱 심해지자,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필사하여 올리되 글자를 크게 써서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니, 비록 병환 중이라도 학문에 마음을 다함이 이와 같았다.
대신들을 신임하여 체통(體統)을 존중하여 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받아들여 널리 시행하였고 질병이 있으면 의원을 보내고 약물을 하사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3년 동안 녹봉을 환수하지 않았다. 학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자에게 특별히 궤장(几杖)을 하사하여 우대하고 존경하였으며 신하들을 대함에 너그럽고 후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임금된 도리는,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아랫사람들을 대하면 아랫사람들이 반드시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게 되니, 오직 정성을 미루어 대할 뿐이다.” 하였다. 되도록 언로(言路)를 열어서 신료들 중에 비록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정직한 체하고 과격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가슴을 열어 받아들이고 넉넉히 포용해서 혹은 칭찬하여 물건을 하사하고 혹은 장려하였으며, 비록 초야에 있는 미천한 자의 말이라도 반드시 채용하여 혹은 벼슬을 시키고 혹은 상을 내렸다.
흉년이 들자, 대신들이 백관의 녹봉을 줄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선왕조(先王朝)에 흉년이 들자 신하들이 녹봉을 줄일 것을 청하였는데, 선왕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다만 어공(御供)을 적당히 헤아려 줄이도록 명하셨으니, 지금 비록 궁핍하나 백관의 녹봉을 줄일 수는 없다. 어공 가운데에 아직 줄이지 않은 것이 많으니, 다시 뽑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신하들이 죽었을 적에 훌륭한 공로와 의로운 행실이 있거나, 혹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일컬어지는 자가 있으면 규례대로 관직을 추증하는 외에 별도로 관(棺)의 재목과 역정(役丁)을 하사하고 그 처자식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함께 구제하였다. 수령과 방백(方伯)들이 조정을 하직할 때에는 질병이 있지 않으면 그때마다 인견(引見)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를 물었으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방도를 신신당부하였다.
인재를 거두어 등용할 때 먼 지역과 궁벽한 곳을 빠뜨리지 않았다. 서북 지방인 함경도와 평안도는 지역이 너무 멀어 사람들이 벼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해서 모두 중신(重臣)을 보내어 과거를 보이고 문무(文武)의 선비를 뽑게 하였으며, 제주도는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어 왕화(王化)를 입지 못한다 해서 두 번이나 근신(近臣)을 보내어 선비를 뽑게 하시니, 먼 지방 사람들이 모두 고무되었다. 충신과 어진 선비로 공렬(功烈)과 덕의(德義)가 드높은 자는 시대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혹은 사당을 세우고 관작을 추증하며 혹은 비(碑)를 세워 묘(墓)를 표창하였으며, 혹은 그 후손에게 벼슬을 내려 주고 혹은 그 집에 부역을 면제해 주어서 기리고 높이는 은전을 거의 빠뜨림이 없었다. 효자와 열부(烈婦)에게는 매번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으니, 비록 먼 지방의 천한 백성과 노예라도 또한 찾아내어 아뢰어서 두루 미치게 하였다.
고려 시대의 능침(陵寢)이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예관(禮官)을 보내어 퇴락하고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또 법령(法令)에 기록해서 3년에 한 번씩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중종대왕(中宗大王)의 폐비(廢妃)인 신씨(愼氏)의 신주(神主)가 친정의 외손에게 의탁해 있었는데 집이 몹시 가난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들으시고 가엾게 여겨서 신주를 신씨의 본종(本宗)에게 돌려보냈으며 묘지기를 두고 관청에서 제수를 공급하게 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하여 부지런히 애쓰심이 지성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언제나 기우제를 지낼 때면 비록 친히 제사하는 경우가 아니라도 반드시 궁중에서 미리 재계하고 밤새도록 한데 앉아 묵묵히 기도하여 제사가 끝날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편안히 계시곤 하였다. 재앙과 흉년을 당한 경우에는 신료들을 접견해서 구휼할 계책을 강구하여 군상(君上)의 것을 덜어 백성들에게 보태 주는 정사를 거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옥당에서 아뢴 차자로 인하여 답하기를 “내가 덕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신명에게 죄를 지어서 수재(水災)와 한해(旱害), 풍해(風害)와 상해(霜害)가 없는 해가 없어 우리 무지한 백성들로 하여금 이처럼 망극한 재앙을 입게 하는구나. 이를 생각하면 한밤중에도 놀라 일어나서 저 하늘이 내 몸에 화를 내리지 않고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화를 대신 받게 함을 서글퍼하노니, 차라리 내 빨리 죽어서 백성들의 곤궁함에 다소라도 부응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모시는 신하에게 일찍이 말하기를 “매번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생각할 적마다 내 차라리 살고 싶지 않으니, 만일 조금이라도 백성을 살릴 방도가 있다면 어찌 아까워할 만한 물건이 있겠는가.” 하였다. 신하들이 혹 굶주린 백성을 구휼할 적에 마른 양식을 주면 되지 굳이 죽을 쑤어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자, 왕이 말하기를 “만약 백성들을 장구하게 편안히 할 방도를 논한다면 참으로 마른 양식을 주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저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을 또한 어찌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이미 구휼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어사를 파견해서 수령들의 잘잘못을 염탐하여 벼슬을 올려주거나 내쳤다.
신해년(1671, 현종 12)에 이르러 팔도가 모두 흉년이 들었고 이어서 큰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왕은 정성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서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며 어렵게 곡식을 장만하여 백성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일에 이미 그 지극함을 다하였고, 또 국내에 선유(宣諭)하여 여러 해 동안 누적된 포흠(逋欠)을 모두 탕감해 주었으며,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벼슬길에서 버려진 자들을 거두어 서용(敍用)하였다. 이에 여염의 아낙네와 어린아이들까지도 이러한 내용을 언문(諺文)으로 옮겨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외우며 눈물을 흘리고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천재(天災)의 유행이 나라의 폐해가 되지 않고 도리어 나라를 견고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의 죽음이 원망이 되지 않고 도리어 은덕이 되었다. 위태로운 것을 바꾸어 편안하게 만드는 일이 실로 중흥하여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견줄 수 있는데, 그 쉽고 어려움을 논한다면 그 어려움이 후자에 있지 않고 전자에 있을 것이다.
온천에 행차하게 되면 명하여 길을 닦을 적에 멍에 맨 말이 겨우 지나갈 수 있게 하고 혹시라도 너무 넓게 하여 백성들의 전지(田地)에 손해가 있지 않게 하였으며, 행차하고 나면 벼와 농작물이 상했는가 묻고 포장(布帳)을 친 곳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힌 것이 있으면 즉시 값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는 본래 호구(戶口)에 대한 부역이 없고 오직 군사들이 바치는 포로 경비를 삼으니, 백성들이 오랫동안 이것을 괴롭게 여겼다. 왕은 폐단의 근원이 여기에 있음을 알고는 크게 변통해서 일정한 제도를 세워 영구한 계책을 도모하려 하였는데, 일을 미처 성취하지 못하였다. 각사(各司)의 노비들이 신공(身貢)으로 바치는 포가 너무 무거워 오랫동안 고질적인 병폐가 되었는데 왕은 특명으로 이것을 줄여 주었으며, 내수사(內需司)에 소속된 노비의 신공을 아울러 똑같이 줄여 주었다. 이로 인하여 탁지(度支 호조(戶曹))와 내수사의 재정이 크게 부족하였으나 왕은 이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특별히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하고 재주와 식견이 있는 재신(宰臣)을 뽑아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에게 곡식을 꾸어 주고 난 나머지는 항상 여분을 남겨서 백성들의 부역을 돕곤 하였다. 선왕조 때에 양호(兩湖)에 대동법을 시행해서 부역을 균등하게 하여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호남의 산간 고을에는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왕은 이 법이 효과를 나타냄에 따라 더욱 잘 조처해서 두루 시행하게 하였다.
왕은 가법(家法)이 매우 엄격하여 궁중이 숙연해서 안팎의 말이 나가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간관(諫官)이 외척과 궁중의 일을 말할 적에 사실이 아닌 것이 있으면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마음이 없다면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이 반드시 여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게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쓸 것이니, 말이 비록 사실이 아니라도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장번(長番)의 내관(內官)이 휴가를 받아 시골로 내려가면서 지나가는 길에 횡포를 부리자 내관을 견책하여 파면하였고, 이 사실을 위에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감사를 추고하였다.
왕은 성품이 독실하여 명예를 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궁중에서 행한 일이 매우 선하였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거나 알게 하고 싶지 아니하여 금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외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가 많다. 더욱이 검약함을 좋아하여 겉옷이 아니면 비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찍이 병환이 나 신료들을 대내(大內)에서 접견하였는데, 깔고 계신 자리가 몹시 해졌으나 바꾸지 않으니, 신료들이 물러 나와 감탄하였다.
왕은 무사할 때에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두어 군정(軍政)을 닦고 삼갔으며, 장신(將臣)들을 인견하여 함께 논설할 적에는 피곤한 줄을 몰랐다. 혹은 원유(苑囿)에 왕림하여 몸소 군대를 사열하고, 혹은 행차로 인하여 군대를 시찰하여, 행진(行陣)하는 법과 병기와 갑옷의 제도를 강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중국에서 만든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연병실기(鍊兵實紀)》 등의 여러 병서(兵書)를 올리자 왕은 즉시 간행하여 반포해서 익히게 하였으며, 정초군(精抄軍)을 설치하고 본병(本兵 병조 판서)으로 하여금 대장(大將)의 일을 겸행하게 하였으니, 이는 날래고 용맹한 군사들을 단속하고 군량과 병기를 저축해서 위급할 때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또 특별히 어사를 보내어 해방(海防)을 순찰하고 주사(舟師)를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다. 왕이 무략(武略)을 높이고 군대를 다스린 것은 비단 숙위(宿衛)를 엄하게 하고 변방을 견고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천하의 변란을 묵묵히 관찰하다가 기회를 틈타 계책을 내어서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었다. 대신(臺臣)들이 용병(冗兵)을 혁파하지 않음을 간하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전쟁을 좋아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만약 깊이 생각한다면 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국가를 위태롭게 하여 멸망할 지경에 내버려 두고 한갓 군대만을 일삼는 자가 아니다.” 하였다. 또 일찍이 모시는 신하들과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 관한 일을 말씀하였는데, 상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는 자가 있자, 왕은 한탄하며 말하기를 “교린과 사대는 형세가 똑같지 않다. 내가 비록 나이가 적고 덕이 없으나 조종조의 영원한 치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북쪽 변방의 목사와 수령들이 대부분 무관 출신이어서 탐욕스럽고 방자하였는데, 이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다시 병마 평사(兵馬評事)를 설치하되 반드시 이조의 낭관과 옥당의 관원을 차임하여 보내어서 그들을 통제하게 하였다.
형벌과 옥사에 있어서는 더욱 자세히 살피고 신중하게 처리하여 수재와 한해, 풍해와 우레의 재앙을 만날 때마다 억울한 옥사를 심리(審理)하되 친히 죄인의 명부를 열람하고 죄의 가볍고 무거움과 과실인가 고의인가를 자세히 조사해서 소결(疏決)하여 빠뜨림이 없었다. 죄수를 처리함에 있어 한 번만 문적(文籍)을 보시면 오래되어도 잊지 않아 뒤에 헌의(獻議)할 적에 형관(刑官)이 잊어버린 것을 왕은 번번이 기억하니, 신하들이 놀라고 탄복하였다. 또 오랫동안 갇혀 있는 죄수들이 추위에 떠는 것을 염려하여 사람의 수효에 따라 양식과 옷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왕은 숙환(宿患)이 있었으나 부지런히 정사를 다스려 병이 조금만 덜하면 그때마다 승지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가지고 들어와 와내(臥內)에 입시토록 하였다.
왕은 항상 어버이를 일찍 여읜 것을 애통해하였고, 모비(母妃)가 승하하자 또 오랫동안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훼손해서 거의 스스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대비가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겨 거처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창경궁(昌慶宮)으로 반우(返虞)하였다. 이에 왕이 또한 옛날 거처하던 곳에 돌아오자, 눈에 보이는 것마다 모비를 그리워하는 생각이 떠올라 마치 무엇을 찾는 듯 종일토록 말하지 않으니, 잠시도 슬픔을 잊지 못한 것이었다. 이에 옆에서 모시는 자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혼전(魂殿)에 올리는 제수는 반드시 친히 감독하여 받들어 올렸다. 승하하기 하루 전 병환으로 친히 제수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정갈한지의 여부를 물었으며, 다음 날 아침에 또 연달아 묻고 그치지 않았다. 병환이 위독해지자 창 밖의 바람 소리를 듣고 말씀하기를 “이는 곡식에 해로운 바람이니, 내 어찌 또 이러한 바람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였으니,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돈독한 마음이 돌아가실 때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 상례에 쓰는 저고리와 옷장과 옷과 이불을 모두 대내(大內)에서 구비하여 탁지로 하여금 한 자와 한 치도 시민(市民)들에게 거두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궁중에서 왕이 평소 백성들을 구휼한 지극한 뜻을 체행한 것이다.
왕비 김씨(金氏)는 1남 3녀를 탄생하였으니, 아들은 바로 우리 사왕(嗣王)인 전하이며, 장녀는 명선공주(明善公主)이고 차녀는 명혜공주(明惠公主)이고 막내는 명안공주(明安公主)이다. 사왕의 전비(前妃)는 김씨(金氏)이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따님이고, 계비(繼妃) 민씨(閔氏)는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의 따님이다.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모두 시집가기 전에 요절하였고, 명안공주는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하였다.
왕은 총명예지(聰明叡智)한 자품으로 관유(寬裕)하고 온공(溫恭)한 덕이 있어 심오하고 독실하며 관대하고 돈후(敦厚)하였다. 선왕이 전수해 준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을 계승하고 사부(師傅)의 절차탁마하는 유익함을 받아, 존귀함이 군주가 되었으나 효행이 증삼(曾參)과 민자건(閔子騫)보다 높고 부유함이 한 나라를 소유하였으나 절약함이 평민과 같았다. 궁금(宮禁)을 엄격히 단속하여 사사롭고 부정한 일을 막고 끊었으며, 조정을 바로잡아 되도록 화평한 데로 돌아가게 하였다. 헌장(憲章)을 굳게 지켰으나 폐단이 있으면 반드시 개혁하였고, 신하들을 예우하였으나 죄가 있으면 반드시 징계하였다. 비록 질병이 몸에 있어서 한 철이나 한 달도 평안하지 못하였으나 하루도 한가롭고 편안한 적이 없었으며, 비록 만기(萬幾)가 몰려왔으나 이에 대응하는 것이 조용하고 치밀해서 반복하여 살펴보았으며,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혹시라도 지나쳐 버림이 없으셨다.
관직을 제수할 때에는 벼슬 하나라도 사사로이 내린 적이 없었고 형옥(刑獄)을 내릴 때에는 한 사람도 억울하게 죽은 이가 없었으며, 안으로는 음악과 여색을 좋아함이 없었고 밖으로는 유람하고 사냥하는 즐거움이 없었다. 평소에 관디(冠帶)를 반드시 삼가서 병환이 비록 심하였으나 관을 쓰지 않고서는 신료들을 만나 보지 않으니, 병환이 위독한 중에도 오히려 그러했다. 걱정하고 애쓰고 조심함은 위로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었고, 측은히 여기며 애통해함은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결속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항상 깊은 못과 골짝에 임한 듯이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15년을 하루처럼 똑같이 하였으니, 이는 실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칭송해서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국운이 어려울 때를 당해서 하늘이 수명을 내려 주지 않으셨으나 어진 마음과 어질다는 소문이 백성들에게 깊이 전파된 것은 이미 국가의 무궁한 아름다움의 터전이 되었다.
신이 전대(前代)의 아름다운 군주를 살펴보건대, 은(殷) 나라의 삼종(三宗)과 같은 분은 덕(德)이 성대하다고 이를 만하고, 한(漢) 나라 문제(文帝)와 송(宋) 나라 인종(仁宗)은 정사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들을 찬양한 내용은 “엄숙하고 공손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와 “감히 향락에 빠지거나 편안히 지내지 않았다.”와 “감히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았다.”와 “공손하고 검소했다.”와 “형벌을 면제하고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와 “덕택(德澤)이 백성들에게 있다.”와 “사직(社稷)이 장구하여 끝내 반드시 힘입다.”라고 한 데 지나지 않는다. 아! 우리 현고(顯考)께서 백세토록 잊혀지지 않는 것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동지경연사(兵曹判書兼同知經筵事) 남구만(南九萬)은 지어 올리다.


[주D-001]택종(宅宗) : 여막을 의미하는 휼택(恤宅)의 종주(宗主)란 뜻으로 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상주(喪主)를 이른다.
[주D-002]아약(兒弱) : 14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이른다.
[주D-003]공포(貢布) : 외거(外居) 공노비(公奴婢)가 신역(身役) 대신에 매년 국가에 바치던 베를 이른다.
[주D-004]원당(願堂) :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法堂)으로 궁중에 둔 것은 내불당(內佛堂) 또는 내원당(內願堂)이라 하였다.
[주D-005]음사(淫祀) : 미신(迷信)으로 지내는 제사나 사당 따위를 이른다.
[주D-006]포보(砲保)의 가포(價布) : 조선 후기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운영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보(軍保)의 하나로 네 사람이 1보(保)가 되어 한 사람은 군역에 복무하고 세 사람은 그 보인(保人)으로 베나 쌀을 바쳤다. 가포는 역(役)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그 대신으로 바치던 베를 이른다.
[주D-007]저화가(楮貨價) : 저화를 만드는 값으로, 저화는 고려 말기 조선 전기에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돈이다. 고려 공양왕 4년(1392)에 발행하였으나 본격적으로 유통되지는 않았으며,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고 이듬해 저화 2천 장을 발행하였다. 발행 초기에는 한 장이 쌀 두 말의 값어치를 가졌으나 그 뒤 돈의 가치가 계속 떨어져 겨우 쌀 한 되의 값어치를 갖게 되었으며, 중종 7년(1512)경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주D-008]소결(疏決) : 국가에서 특별한 경우에 전국의 죄수를 다시 심리(審理)하여 너그럽게 처결하는 것을 이른다.
[주D-009]절수(折受) : 논밭이나 결세(結稅) 따위를 나라에서 떼어 받는 것을 이른다.
[주D-010]압승(壓勝) : 주술(呪術) 따위를 사용하여 재액(災厄)을 누르고 사라지게 함을 이른다.
[주D-011]인승(人勝) : 음력 정월 초이레에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 주던 머리꾸미개를 이른다. 장수와 복을 비는 뜻이 담긴 물건으로 금, 은, 동 따위를 사람 모양 또는 꽃 모양으로 만들어 자루를 달았다.
[주D-012]마른 …… 하였으며 : 흉년이 들어 곤궁한 사람들을 구호할 때에 죽을 쑤어 주지 않고 대신 곡식을 주어 파종할 수 있는 씨앗으로 사용하게 함을 이른다.
[주D-013]피전(避殿) : 나라에 큰 재앙이 들었을 때 근신하는 뜻으로 정전(正殿)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일을 이른다.
[주D-014]희문(姬文)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문왕은 세자로 있을 적에 부왕(父王)인 왕계(王季)에게 하루에 세 번씩 문안하였다. 음식을 올릴 적에도 반드시 온도가 적절한지 살펴보고 밥상을 물리면 잡수신 것을 물었으며, 선재(膳宰)에게 남은 것을 거듭 올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禮記 文王世子》
[주D-015]달효(達孝) : 누구나 공통으로 일컫는 큰 효로, 공자(孔子)는 일찍이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은 달효라 할 것이다. 효라는 것은 선친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친의 일을 잘 전하는 것이다.” 하였다. 《中庸章句 第19章》
[주D-016]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 대왕대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어머니로, 최철견(崔鐵堅)의 따님이요 한원부원군(漢源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부인이다.
[주D-017]대배(大拜) : 최고로 높은 지위에 임명되었다는 뜻으로 의정(議政)에 오름을 이른다.
[주D-018]감반(甘盤)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즉위하기 전에 수학한 스승이다. 고종은 무정(武丁)의 묘호(廟號)이다.
[주D-019]신내재위(愼乃在位) : 우(禹)가 순 임금에게 올린 내용으로 ‘황제의 지위에 있음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書經 益稷》
[주D-020]유기유강(惟幾惟康) : 이 역시 우(禹)가 순 임금에게 올린 내용으로 ‘기미를 조심하며 편안함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書經 益稷》
[주D-021]건성(建成) : 당 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큰아들로 일찍이 태자에 봉해졌으나 아우인 진왕(秦王) 세민(世民)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시기하여 그를 살해하려다가 도리어 세민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세민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태종(太宗)이다.
[주D-022]방효유(方孝孺) : 자는 정학(正學)으로 명(明) 나라 성조(成祖)가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다가 살해당한 충신(忠臣)이다.
[주D-023]반우(返虞) : 장사 지낸 뒤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돌아와 우제(虞祭)를 모심을 이른다.
[주D-024]삼종(三宗) : 은(殷) 나라의 불천위(不遷位)로 중종(中宗)인 태무(太戊), 고종(高宗)인 무정(武丁), 조갑(祖甲)을 이른다.
[주D-025]이들을 …… 않는다 : 《서경(書經)》 무일(無逸)에 은 나라의 중종(中宗)을 찬양하여 “엄숙하고 공손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천명을 스스로 따랐으며, 백성을 다스림에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향락에 빠지거나 편안히 지내지 않았다.〔嚴恭寅畏 天命自度 治民祗懼 不敢荒寧〕” 하였고, 고종(高宗)을 찬양하여 “감히 향락에 빠지거나 편안히 지내지 않았다.〔不敢荒寧〕” 하였고, 조갑(祖甲)을 찬양하여 “감히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았다.〔不敢侮鰥寡〕” 하였다. 형벌을 면제하고 조세를 감면해 준 것은 한(漢) 나라 문제(文帝)의 일이고, 그 나머지는 송(宋) 나라 인종(仁宗)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