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중봉(重峯) 조헌선생(趙先生) 행장

중봉(重峯) 조 헌 선생(趙先生) 행장 송자대전(宋子大全) 제207

아베베1 2009. 11. 16. 00:28

 

   

       

 조선4대의병장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조헌

 해동18현의 한분인 중봉 조 헌 선생에대한  송자대전의기록

 

 송자대전(宋子大全) 제207권

 행장(行狀)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행장


선생의 휘(諱)는 헌(憲)이요 자(字)는 여식(汝式)이요 자호(自號)는 후율(後栗)이다. 또 다른 호는 도원(陶原)이고 중봉(重峯)은 노후(老後)에 부르던 호이다. 본관(本貫)은 배천(白川)이다. 윗대에 휘 문주(文胄)라는 이가 있었는데 고려조(高麗朝)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당시 몽고(蒙古)의 군대들이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지방에 주둔해 있으면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공(公)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원(元) 나라에 가서 이런 폐단에 대해 간곡히 아뢰었더니, 원 나라 임금이 감동하여 병력을 철수시키게 하였다. 휘 천주(天柱)는 홍건적(紅巾賊)의 난리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이를 토벌하다가 안주(安州)에서 전사(戰死)하였다. 휘 공(珙)은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졌다.
본조(本朝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 환(環)은 덕이 있으면서도 숨어있는 선비라는 것으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제수되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로 벼슬은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이르렀다. 이분이 선생의 오 대조(五代祖)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황(璜)이고 할아버지의 휘는 세우(世佑)다.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휘는 응지(應祉)인데, 차순달(車順達)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갑진년(1544, 중종39)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슬피 울면서 사모하는 것이 어른 같았다. 5세 때에 아이들과 임정(林亭)에서 《천자문(千字文)》을 익히고 있었다. 이때 고관(高官)의 행차가 권마성(勸馬聲)을 외치며 지나가자 아이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가 구경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홀로 단정히 앉아 글만 읽고 있었다. 이를 본 고관은 매우 기이하게 여긴 나머지 말에서 내려와 그 까닭을 묻자 선생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오로지 글 읽기에만 마음을 두라는 아버지의 분부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고관은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어 선생의 아버지 판서공(判書公)을 만나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뒷날 틀림없이 큰 선비가 되어 세도(世道)를 뿌리박게 할 것이오. 공(公)에게 성대한 축하를 드립니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적에는 경사(經史)의 연구에 몰두하여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 공부하였다. 이때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들이 요승(妖僧) 보우(普雨)에 대해 소(疏)를 올려 논하느라 여러 달 잇달아 복합(伏閤)하였다. 시일이 오래됨에 따라 사람들은 나태해지는 기색이 있었지만, 선생은 꼼짝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굳게 버티었다. 때문에 사람들이 눈여겨보게 되었다.
정묘년(1567, 명종22)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하였고, 무진년(1568, 선조1)에 정주 교수(定州敎授)에 제수되었다. 관서 지방(關西地方)은 본디 문헌(文獻)이 없는 곳이었으나 선생이 교육시킨 지 3년 만에 유풍(儒風)이 성대하게 일었다. 곧이어 파주 교수(坡州敎授)로 전임(轉任)되었다. 이곳에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성 선생(成先生)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성 선생은 외우(畏友)로 일컬으면서 감히 사제(師弟)의 예(禮)로 대우하지 않았다.
임신년(1572, 선조5)에는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에 제수되었다. 이때 상께서 불사(佛寺)에 향(香)을 내리게 되었는데, 구례(舊例)에는 교서관 관원이 반드시 감봉(監封)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선생이 다음과 같은 소를 올려 아뢰었다.
“입으로는 성현(聖賢)의 글을 읽으면서 손으로 부처에 공궤할 향을 싸는 일은, 신으로서는 차마 못하겠습니다.”
이를 본 상께서는 크게 노하여 선생을 극형(極刑)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그러나 제공(諸公)이 극력 구제한 덕분에 관직(官職)을 삭탈(削奪)하는 데 그쳤다. 이로부터 선생의 강직한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다. 이해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찾아가 뵈었고, 이어 함께 두류산(頭流山)에 있는 처사(處士) 서기(徐起)를 찾아갔다. 여기에서 조용히 학문을 강론하니 학문이 날로 더욱 진보되었다.
계유년(1573, 선조6)에는 도로 서용(敍用)되어 교서관 저작(校書館著作)으로 승진되었다.
갑술년(1574, 선조7)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가서 예부(禮部 중국 예부)에 글을 올려 성묘(聖廟)의 위차(位次)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ㆍ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ㆍ장자(張子 장재(張載))ㆍ주자(朱子 주희(朱熹))는 모두 도학(道學)이 끊긴 뒤에 태어나서 멀리 수사(洙泗 공자(孔子))의 도통(道統)을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덕으로 논하면 진실로 공자의 칠십 제자(七十弟子)에 뒤지지 않고, 공으로 고증하여도 맹자(孟子)에 못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분들은 배향(配享)의 반열(班列)을 올려서 제사 지내야 할 것인데도 문중공(文中公 진량(陳亮)ㆍ안정공(安定公 호원(胡瑗)) 밑에 그 위차를 나란히 안치하였습니다.
구산(龜山) 양시(楊時)는 정자(程子) 문하의 수제자(首弟子)였음은 물론, 실제로 동남간(東南間)에서 도학의 조종(祖宗)이 되었습니다. 장남헌(張南軒 장식(張栻))은 오봉(五峯 호굉(胡宏))에게서 수학(受學)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봉의 아버지 문정공(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의 시호)도 구산보다 나이가 젊었으니 남헌의 자신을 위한 학문도 구산의 영향을 받아 흥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남헌의 위치가 구산의 위에 있습니다.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은 남쪽 지방 사람으로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성취하였고, 근엄하고 굳세고 청렴하고 고고하여 도체(道體)를 환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별호)이 ‘그분은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도 어질고 행실은 완전하고도 결백하였다. 본성을 광대(廣大)하게 확충시켰고 인서(仁恕)를 체득하여 실행했으므로 정심(精深)하고 미묘(微妙)함에 있어서 각각 그 극치에 이르렀다.’고 예찬하였으며, 주자(朱子) 역시 ‘깊이 생각하고, 힘써 실천해야만이 도(道)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극치에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한 사람은 오직 나공(羅公) 한 분 뿐이다.’ 하였습니다. 연평과 주자의 의논이 결단코 예장에게 사심(私心)을 둔 것이 아니라면, 종향(從享)해야 할 것 같은데도 아직껏 이에 대해 건의(建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연평(李延平)은 예장을 스승으로 섬겨 홀로 심오한 통서를 전수받았습니다. 고요히 생각하여 실천함으로써 깨달은 오묘한 진리가 성학(聖學)과 일치되었으며, 순서에 따라 이치를 연구하는 공효도 날로 새롭게 진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충양(充養)이 완전하고도 순수해졌고 도덕이 완전히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세에서는 비교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자는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었지만 연평을 만나기 전에는 역시 상당 기간 불교와 노자에 출입(出入)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연평의 한마디 선유(善誘)가 있은 뒤에 ‘창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는 감탄이 있었고 ‘점차 평실(平實)함을 이루어 간다.’는 칭찬이 있었습니다. 두 번이나 주자의 진보를 기뻐한 연평은 여러 경서(經書)의 대지(大旨)에 대해 대략 그 단서를 열어 보였으므로, 전성(前聖)을 계승하여 개발해 나가는 업(業)이 비로소 성취되었습니다. 때문에 주자가 스승으로 섬긴 사람은 셋인 것입니다. 그런데 창주(滄洲)의 사당(祠堂)에 연평만을 오성(五聖)과 육군자(六君子) 아래 모셔 놓고 제사 지낼 뿐입니다. 세상의 학자로서 누군들 주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私)를 두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종사(從祀)의 법전에서 빠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육상산(陸象山 육구연(陸九淵))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근실하였고 성품이 평온하고 욕심이 적었으므로 경복(敬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문(學問)의 강론을 다 폐기하고 자신 있게 큰소리를 쳤으므로 한때의 영재(英才)들만 오도(誤導)되었을 뿐 아니라, 그 유폐(流弊)가 더욱 커져서 타고난 지능(知能)만 지키고 가만히 앉아서 갑자기 깨닫게 되는 계기만을 기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성문(聖門)에서 전수(傳授)하는바 박약(博約)과 명성(明誠)이 서로 표리가 되어 진보하는 공부를 빼 버리고 강론하지 않았으니, 저들 스스로 이학(異學)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실제는 중국의 정도(正道)를 불교(佛敎)로 인도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도를 폐쇄시킨 죄를 따져 보면 순황(荀況)과 양주(楊朱)보다 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빼내고 육구연을 올린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입니까.
여동래(呂東萊 여조겸(呂祖謙))는 주자와 마음과 힘을 합하여 사학(斯學 유학(儒學))을 강명(講明)함으로써 선성의 도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은 배워서 안 분입니다. 동래와 서산 이 두 분은 출생 연대가 같지 않았음은 물론, 서산이 동래를 ‘공(公)이 전한 것은 중원(中原)의 문헌(文獻)이요 천명한 것은 하락(河洛 정자(程子)를 가리킴)의 미언(微言)이었다. 끊어진 도학을 부추겨 세웠으니 천재(千載)에 전해갈 공훈이 있고, 영재(英才)를 교육시켰으니 수십 세대를 흐를 은택이 있다.’ 하였으니, 우러러 사모한 것이 분명하고 감발(感發)된 바가 컸다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동래의 위차를 서산의 아래에 두었습니다. 이는 두 분의 이력(履歷)에 높낮이가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동래의 《대사기(大事紀)》가 서산의 《대학연의(大學衍義)》만 못하다고 여겨서입니까.
주자의 문인(門人) 가운데 논변(論辨)에 능한 사람이 많았으나 주자는 유독 황직경(黃直卿 황간(黃榦))만을 ‘성품이 총명하면서도 슬기롭고 행동은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조예는 순수하면서도 독실하니, 오도(吾道 유교(儒敎))의 전수가 이 사람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주자가 타계한 뒤 직경이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이런 사실을 갖추어 기록하였으니, 스승의 도에 깊이 부합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의례통해(儀禮通解)》를 계속해서 완성시켰으니, 스승의 뜻을 이루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직경은 또 서산과 쌍봉(雙峯 요로(饒魯)의 별호) 등을 얻어 함께 힘을 모아 정학(正學)을 부지하고 후세(後世)를 개도하였으니, 동씨(董氏 동수(董銖)를 가리킴)가 이른바 면재(勉齋 황간) 선생은 자양(紫陽 주자를 가리킴)의 정통을 얻었다고 한 것이 참으로 망녕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구봉(九峯 채침(蔡沈))과 공이 같은 분들과 반열을 나란히 하여 제향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상 몇몇 분의 일은 틀림없이 조정에서 상의하여 조처한 것이리니, 삼가 집사(執事)들께서는 각기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하여 성인의 도를 존중하는 예(禮)가 내외(內外)에 차이가 없게 해 주시면 비방(鄙邦)만 같은 문화의 교화를 입게 될 뿐 아니라, 신인(神人)을 다스리고 상하(上下)를 화(和)하게 하여 《춘추(春秋)》 대일통(大一統)의 법을 확립함에 있어서도 역시 집사들에게 손해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을 본 예부의 여러 관원들은 탄복하였고, 서로 왕래하면서 논란하였다. 본국에 돌아와서는 전대로 저작(著作)이 되었다.
선생은 북경(北京)에 있을 적에 중국의 문물(文物)과 제도(制度)의 성대함을 깊이 관찰하고서 개연히 중흥(中興)의 뜻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절실히 시행할 만한 일 여덟 가지를 조목조목 진달하였다.
그중에 성묘(聖廟)의 배향(配享)에 대한 소론(疏論)은 다음과 같다.
“신은 삼가 살피건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에 문선왕(文宣王)이란 호칭을 고쳐 지성선사공자위(至聖先師孔子位)라고 썼고, 안자(顔子) 이하도 모두 작명(爵名)을 고쳤습니다. 때문에 묘액(廟額)도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지 않고 선성묘(先聖廟)라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고증하여 보건대 한 평제(漢平帝) 때 왕망(王莽)이 간계(奸計)를 부려 공자를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 잘못 추시(追諡)한 일이 있었고, 당 현종(唐玄宗) 때에는 문선왕이라 추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자 이하도 품질(品秩)을 정하여 공(公)ㆍ후(侯)ㆍ백(伯)이라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공이니 왕이니 하고 일컫는 것은 부자(夫子 공자(孔子))가 이른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답게.’라는 도리에 일체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짓 성인(聖人)을 높임으로써 천하를 기만한 것입니다. 증자(曾子 증삼(曾參))가 ‘나는 계손씨(季孫氏)의 가신(家臣)이 아니니 대부(大夫)의 대자리[簀]를 바꾸라.’ 하였으니, 증자가 그 작명(爵名 성국종성공(成國宗聖公))에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자신은 황제라 일컬으면서 자기가 자기 신하들을 봉(封)하는 명칭으로 억지로 명명하였으니, 이는 성인(聖人)을 높이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가정(嘉靖) 10년(1531, 중종26)에 태학사(太學土) 장부경(張孚敬)의 건의에 따라 천재(千載)의 잘못을 일체 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것을 아직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의당 논의하여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높이는 것은 그 사람의 도(道)를 쓰려는 것인데 세상의 임금들은 외모로만 공경할 뿐 몸소 실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예나 이제나 다스려지는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 점은 성명(聖明)께서도 의당 깊이 경계하셔야 될 일입니다.
신이 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의 열위(列位)를 조사하여 보건대, 임방(林放)ㆍ거원(籧瑗)ㆍ공백료(公伯寮)ㆍ진염(秦冉)ㆍ안하(顔何)ㆍ순황(荀況)ㆍ대성(戴聖)ㆍ유향(劉向)ㆍ하휴(何休)ㆍ가규(賈逵)ㆍ마융(馬融)ㆍ정중(鄭衆)ㆍ노식(盧植)ㆍ정현(鄭玄)ㆍ복건(服虔)ㆍ범녕(范寧)ㆍ왕숙(王肅)ㆍ왕필(王弼)ㆍ두예(杜預)ㆍ오징(吳澄) 등은 열위에 들어있지 않았고, 후창(后蒼)ㆍ왕통(王通)ㆍ구양수(歐陽脩)ㆍ호원(胡瑗)ㆍ양시(楊時)ㆍ육구연(陸九淵)ㆍ설선(薛宣) 등은 모두 열위에 참여되어 있었습니다. 대개 종사(從祀)하는 법전을 만든 것은 성문(聖門)에 공이 있는 사람을 높여줌으로써 후학(後學)에게 추향(趨向)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진염과 하안은 고증할 데가 없고, 임방과 거원은 승당(升堂)의 서열에는 못 들었고, 정중ㆍ노식ㆍ복건ㆍ정현ㆍ범녕 등은 역시 순유(純儒)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종사(從祀)에 참여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임방은 예(禮)를 좋아하였고, 거원은 허물이 적었으니 스승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또 정중 등 여러 사람이 경학(經學)을 보익한 공에 대해 기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기 그들의 고향에서 향사(享祀)하고 있습니다. 공백료는 몸소 성인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였으면서도 도리어 부자(夫子)의 도를 해치려 하였고, 순황은 성(性)이 악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사(子思)와 맹자(孟子)는 천하를 혼란시키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대성은 자신이 직접 장오죄(贓汚罪)를 범하였고, 유향은 신선(神仙) 이야기를 즐겨했고, 가규는 참위설(讖緯說)을 견강부회(牽强傅會)하였고, 마융은 탐오스럽고 야비하여 세도가인 양기(梁冀)에게 빌붙어 조서(詔書)를 지어 이고(李固)를 죽이는 데 협력하였고, 하휴는 《춘추(春秋)》를 해석하면서 주(周) 나라를 내치고 노(魯) 나라를 왕(王)으로 삼았습니다. 왕필(王弼)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종지(宗旨)를 따랐고, 왕숙은 사마소(司馬昭)를 보좌하여 위(魏) 나라를 찬탈하였고, 두예는 관리로 있을 적에는 청렴하지 못하였는가 하면 장군이 되어서는 의롭지 못하였고, 오징은 출처(出處)가 바르지 못한 데다가 학문도 불교에 빠졌습니다. 이들은 의당 수사(洙泗 공자)의 반열에서 배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관(貞觀)ㆍ원풍(元豐)ㆍ정통(正統) 연간에 참된 선비가 조정에 없었기 때문으로 선택에 정밀을 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마단림(馬端臨)도 일찍이 건의한 바 있었고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연간의 신하들도 빼내자고 건의한 사람이 많았습니다만 그 의논이 끝내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명 세종(明世宗) 때 와서 장부경의 건의에 따라 단연코 개정함으로써 전대의 잘못을 말끔히 씻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종사(從祀)의 반열에 두고 있습니다. 당연히 의논하여 빼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후창이 예서(禮書)를 처음 주해(註解)함으로부터 대덕(戴德)과 대성(戴聖)의 《대대례(大戴禮)》와 《소대례(小戴禮)》가 이 때문에 세상에 전해졌고, 왕통은 학문이 정학(正學)에 가까움은 물론 격언(格言)도 순황(荀況)과 양주(楊朱)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갈파한 것이 있고, 구양수는 성도(聖道)를 부추겨 세우고 이단(異端)을 배척한 공이 있으므로 주자도 인의(仁義)로운 사람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호원은 자신의 덕을 닦고 나서 남을 다스리는 학문을 주장하여 제일 먼저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 때부터 있어 온 이(利)를 추구하는 폐습을 씻어 버렸고, 양시는 동남 지방에서 도(道)를 제창하여 위로는 정자(程子)의 통서(統緖)를 이어받고 아래로는 나예장(羅豫章)과 이연평(李延平)에 전하여 주자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설선은 학문이 끊어진 것에 분발하여 뜻을 독실히 가지고 힘써 행하였으며,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확립되어 조정에 나아가 벼슬할 적에는 고고한 풍절로 분류(奔流)의 지주(砥柱)처럼 우뚝하였음은 물론이고 물러가서 학문을 강론할 적에는 한 구절의 미언(微言)일지라도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의리가 명확하였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홍치(弘治) 연간에는 양시를 종사(從祀)하였고 가정(嘉靖) 연간에는 구양수ㆍ호원ㆍ설선을 더 종사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당연히 강구하여 따라야 할 것입니다.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은, 학문을 강론하지 않은 채 오로지 갑자기 깨닫게 되기만을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주자도 그의 설(說)이 해를 끼치게 될까 저어하였는데, 더욱 오랜 기간 유전(流傳)되어 올수록 미혹되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바람에 쓸리듯이 모두 선학(禪學)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왕수인(王守仁)은 과감하게 횡의(橫議)를 내세워 주자를 비방했는데도 오히려 종사할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강서(江西) 사람들이 그의 학에 빠진 것임은 물론 이곳 출신으로서 벼슬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상산학(象山學)을 힘써 주장하는 탓인바, 위로는 조정을 그르치고 아래로는 사학(斯學)을 그르친 처사입니다. 이런 사례를 본받아 구차히 따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이 또 살펴보건대, 성묘(聖廟) 서북쪽에 계성묘(啓聖廟)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계성공(啓聖公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임) 공씨(孔氏)는 북쪽에 위치하여 있고, 안무요(顔無繇)와 공리(孔鯉)는 동쪽에 위치하여 있고, 증석(曾晳)과 맹손(孟孫)은 서쪽에 위치하여 있었습니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또 정향(程向)ㆍ채원정(蔡元定)ㆍ주송(朱松)이 열위(列位)되어 있었습니다. 대개 학교(學校)는 인륜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는 묘당(廟堂) 안에 있고, 안로(顔路)ㆍ증점(曾點)ㆍ백어(伯魚)는 멀리 밑에 열위되어 있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의 경우에도 마음이 편치 못한 일이거든, 하물며 성현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때문에 세종황제(世宗皇帝)에 이르러 비로소 별묘(別廟)를 짓고 봄가을 석전(釋奠)드릴 때 함께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이들이 아무리 성인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먹지 않는다는 뜻에 입각한 조처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우리나라 문묘(文廟) 서쪽에 빈 땅이 있으니, 의논하여 여기에다 묘당을 세우고 봄가을로 같이 제향을 올린다면 인륜과 사리에 합당하게 되어, 온 나라의 부자(父子)간의 분수가 정해지게 될 것입니다.
신은 또 중국에서 종향(從享)하는 일을 보고 감명받은 바가 컸습니다. 대저 김굉필(金宏弼)은 맨 처음 도학(道學)을 창도하여 옛것을 잇고 뒤를 열어 준 업적이 있고, 조광조(趙光祖)는 계속하여 사도(斯道)를 밝혀 세도를 부추겨 세워 사람들을 선(善)으로 인도한 공로가 있고, 이언적(李彦迪)은 도를 체득한 것이 순수하고도 독실하여 위태함을 붙들어 세운 공적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황(李滉)은 우리나라 선비들의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한 분으로 주자의 적통(嫡統)을 이었습니다. 현재의 선비들이 조금이나마 임금을 높이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고 예의(禮義)와 염치(廉恥)가 있는 것은, 모두 이황의 덕에 감화받아 흥기한 덕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급히 이 4현(賢)을 포장하여 종사(從祀)에 열위(列位)시킨다면 포숭(褒崇)과 향용(嚮用) 이 두 가지의 의(義)를 극진히 한 것이 됨은 물론, 문왕(文王)이 백성들을 흥기시킨 것과 같이 지금 백성들도 울연(蔚然)히 흥기하게 될 것입니다.”
귀한 이와 천한 이의 의관(依冠)에 대한 소론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중국 조정의 의관에 관한 제도를 살펴본바 이러하였습니다. 관은 복두연각(㡤頭軟脚)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안시(鴈翅)라고 합니다. 홍포(紅袍)와 청포(靑袍)가 있는데 주름은 모두 도포(道袍)와 같았습니다. 정제(整齊)하고 단엄(端嚴)한 모습은 의당 본받아야 될 것 같았습니다. 유건(儒巾)의 명칭을 민자건(民字巾)이라고도 하는데, 댓가지로 얽어 검은 베로 싸서 만들기도 하고 종이로 싸 바른 다음 옻칠을 하여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양이 단정하고도 평평한 데다 그리 뾰족하거나 기울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선비들의 두건은 지극히 제도에 어긋난 것이니 이를 본받아 고치게 하소서. 그러면 보기에 적합하게 될 것입니다.
거인(擧人)과 무학(武學)의 생도들은 모두 유건(儒巾)에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있었고, 기타 중외(中外)의 생도들은 모두 난삼(襴衫)을 입고 있었습니다. 난삼은 옥색(玉色) 바탕에 푸른 비단으로 선을 둘렀는데, 우리나라 선비들이 이른바 청금(靑衿)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 크게 달랐습니다. 중국의 사내아이들은 머리를 땋지 않았습니다. 15세 이하는 머리를 가지런히 잘라 늘어뜨리고 15세 이상은 꼭 뒤에 묶어 붙이며, 20세가 된 뒤에야 관(冠)을 씁니다. 시집간 여인들은 이마 위에 머리를 묶어 올리고 그 위에다 붕계(鬅髻)를 씌웁니다. 배자(褙子)는 소매가 매우 넓었으나 긴 옷은 없었고, 긴 치마는 주름을 잡아 넓게 퍼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의관을 단장하는 데에도 오히려 이와 같이 검소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신이 길에서 귀화(歸化)한 달자(韃子)의 부인들도 보았고, 또 진공(進貢)하고 돌아가는 오랑캐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내아이들과 부인들이 땋거나 쪽진 머리 모양은 그들의 모습과 불행하게도 근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오래도록 전해 온 습속이기는 하지만, 이야말로 성상께서 한번 혁신시켜 도(道)에 이르게 할 수가 있는 계기입니다. 만약 이런 습속을 계속 답습해 간다면 뒷날 중국의 사관(史官)이 붓대를 잡고 조선(朝鮮)을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고 쓰겠습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경(卿)이나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는 혹 중국의 습속을 본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기도 하지만, 하명(下命)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사대부들에게 먼저 시행하게 하고 점차적으로 백성들도 고쳐가게 한다면 중국과 같이 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중국의 의관에 대한 제도는 간략하여 마련하기가 쉬울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은 천하가 같은 문화권에 들어 있는 때라서 운남(雲南)과 귀주(貴州)는 북경(北京)과 만여 리나 떨어진 오랑캐 지역이지만 일체 화제(華制)를 준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북경과의 거리가 4천 리도 못 되어 실제로 오복(五服)의 제후(諸侯)와 다를 게 없는데도 남녀의 의관에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전하께서 시왕(時王 당시의 황제임)의 제도를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이 일을 공조(工曹)에 내려서 양식(樣式)을 만들게 하소서.”
사대부들의 예절(禮節)에 대한 소론은 다음과 같다.
“신이 예부에 가서 그들이 출근하여 집무(執務)하는 의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예모(禮貌)는 온화하고도 정숙하였으며, 사무를 처리하는 데는 가부(可否)를 상의하여 적체(積滯)되는 일이 없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예부의 일만 보아도 다른 관사(官司)의 일은 따라서 알 수 있었습니다.
아, 중국의 관리들은 예(禮)를 좋아하고 일에 부지런한 것이 이러한데도 우리나라의 육조(六曹) 등 기타 관사에서는 예모가 엉성한 것은 물론 폐풍(弊風)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오만하고 무리한 일들이 지금은 조금 혁신되기는 했습니다만, 아직도 좌랑(佐郞)이 정랑(正郞)에게 감히 머리를 들고 함께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공사(公事)를 일체 조사(曹司)인 좌랑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좌랑이 다 처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하(啓下)된 공사에 대해서도 많은 시일이 지나도록 신복(申覆)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민(軍民)들의 송첩(訟牒)도 서리(書吏)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즉시 판결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런 폐단을 제거하지 않는 한 나랏일이 끝내 잘 다스려질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이 또 사대부들이 서로 대하는 예(禮)를 보니, 예절을 지키는 태도가 정성스럽고도 문채가 있었습니다. 신들이 중국 사람과 대할 때도 그들은 이런 예모를 갖추었습니다만, 일찍부터 익히지 못한 탓으로 아무래도 생소하여 사람들에게 웃음을 산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국가에서는 사대(事大)할 때의 예모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평일에 늘 익히지 않다가 사신으로 갈 때에야 통사(通事 통역관(通譯官))에게 익히고 있는 실정이라 어색하고 격에 맞지 않는 수치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학관(學官 이문학관(吏文學官))이나 통사 가운데 오랫동안 그 예를 익혀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선발, 계도하여 조정에서 익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여항(閭巷)에까지 전습(傳習)시킨다면, 뒷날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 예(禮)를 모른다는 비웃음을 받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을 것은 물론이고, 벼슬아치들과 서로 상대하는 예에 있어서도 구차하고 경솔한 망동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선생과 생도가 서로 접견하는 예에 대한 소론은 다음과 같다.
“신이 듣건대, 국자 좨주(國子祭酒)가 처음 부임한 날 및 정조(正朝)ㆍ동지(冬至)에는 생도들이 뜰에서 네 번 절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좨주가 요속(僚屬)과 제생(諸生)을 인솔하고 성묘(聖廟)에 배알(拜謁)합니다. 그런 다음 이륜당(彝倫堂)에 좌정하면 생도들은 월대(月臺)에서 한 번 꿇고 두 번 읍(揖)하는데, 좨주는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공(公)ㆍ후(侯)ㆍ백(伯) 및 새로 진사(進士)가 된 자로서 성묘에 배알할 경우에는 모두 처마 밖에서 네 번 절하지만, 좨주와 사업(司業)도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師道)를 높이는 뜻입니다. 보통 때에도 휴일을 제외하고는 강의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때문에 산해관(山海關) 이서(以西)에는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이 매우 많았고 거리에는 책 읽는 소리가 자자하였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 때의 올바른 배양 방법은 아닐지라도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예모(禮貌)로 구속하고 명교(名敎)로 격려시키기 때문에 한 시대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보고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중국에는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어 사방(四方)에 기용함에 있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에서는 사유(師儒)가 처음 강당(講堂)에 좌정하면 생도들은 단지 재배(再拜)만 할 뿐이고, 정조(正朝)와 동지(冬至)에도 배하(拜賀)하는 예절이 없습니다. 그리고 초하루와 보름에도 성묘에 배알하는 관원이 없는가 하면 거관 유생(居館儒生)들도 초하루에만 성묘에 배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승과 생도가 같이 성묘에 배알하는 의식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처음 관례(冠禮)를 올린 종친(宗親) 및 새로 생원(生員)ㆍ진사(進士)와 문과(文科)ㆍ무과(武科)에 합격한 사람들이 성묘에 배알하는 예(例)가 있기는 하나, 대사성(大司成)에게 인사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동몽관(童蒙官)에게는 다행히 날마다 강습시킬 생도들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모두가 거칠고 질서가 없으며, 외방 고을의 교관(校官)들은 공름(公廩 봉록(俸祿))만 허비할 뿐 성묘가 있는 줄조차 모르고 있는 형편이니, 어떻게 예교(禮敎)를 책임지울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비라는 명색을 내걸고 공부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한 자들도 예양(禮讓)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고, 몸은 향교(鄕校)에 적(籍)을 두고 있으면서도 반 줄의 글도 읽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윗사람에게 겸손하고 온순한 풍속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유(師儒)가 힘써 가르치지 않은 탓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의 우견(愚見)에는, 아마도 위에서 교육시키는 방법에 미진한 점이 있어서인가 여겨집니다.”
향려(鄕閭)의 습속(習俗)에 대한 소론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산해관 이서에는 마을마다 향약소(鄕約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가르치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과 화목하고 자손을 가르치고 농상(農桑)에 힘쓰고 불의(不義)를 행하지 않는 것 등등이었습니다. 이것은 고황제(高皇帝)가 분부하여 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목을 자세히 갖춘 점은 《여씨향약(呂氏鄕約)》만 못하지만, 그 강령이 간결하여 백성들이 깨닫기가 쉽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믿고 따릅니다. 그리고 마을마다 담벼락에 이 내용을 써서 게시해 놓고, 서로 외면서 익히고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부자와 형제간에 따로 밥을 끓여 먹는 경우가 많지만 차마 분가(分家)하지 못하고 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와 여자 동서 간에 서로 헐뜯거나 싸우지 않고, 정조(正朝)ㆍ동지(冬至)나 생일(生日)이 되면 아무리 단칸방인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가장(家長)에게 사배례(四拜禮)로 축하를 올리고 있습니다. 또 아무리 미천한 남녀들일지라도 길에서 만나면 만드시 읍(揖)을 하였고, 혼례(婚禮)는 반드시 친영(親迎)의 예(禮)에 의거하여 하였고, 친족(親族)이 상(喪)을 당하면 남녀노소가 모두가 흰옷에 흰 두건을 쓰고 복상(服喪)의 달수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네 살 먹은 어린아이도 머리 조아리며 읍(揖)할 줄 알고, 인부나 군졸들도 머리를 단정하게 걷어올리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은 물론, 서면 반드시 두 손을 모으고 발을 가지런히 하였습니다. 요동(遼東)과 계주(薊州) 지역은 수천 년 오랑캐 풍속에 젖어왔었지만 명(明) 나라가 새롭게 진작시킨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본디 예의지국(禮義之國)으로 열성조(列聖朝)에서 점차 좋은 방향으로 계도시키는 가르침을 베풀어 왔으며, 여기에다 주상(主上)께서는 거듭 유신 정치(維新政治)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근래 민심이 날로 야박해지고 강상(綱常)이 마구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위에서 가르치는 방법에 미진한 점이 있어서 이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이 고로(故老)에게서 들은 얘기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영변(寧邊)에 거주하는 백성이 너무 가난하여 아비를 봉양할 수 없게 되자 아비를 산골짜기에다 버린 일이 있었는데, 조정에서 향약(鄕約)의 글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다시 집으로 모셔다가 힘을 다하여 봉양하였다고 합니다. 아, 이렇게 해 가기를 마지않으면 어찌 좋은 풍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성명(聖明)께서 임어(臨御)하시어 국가가 태평한 때입니다. 이런 때 중국의 제도에 따라 수령(守令)과 교수(敎授)가 초하루와 보름으로 성묘에 배알할 적에는 으레 약정(約正)ㆍ교생(校生)과 마주 대하여 그 뜻을 명백하게 깨우쳐 주면 가르침도 번거롭지 않고 백성들도 쉽게 따를 것입니다. 따라서 무너진 윤리(倫理)도 다시 시행되게 할 수 있고 야박해진 풍속도 도로 순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의 뜻은 중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미개(未開)한 풍속을 일신시키고 옛 도(道)를 만회하는 것을 주로 하고 있었으며, 풍속을 순후하게 하고 교화를 도타이 하는 뜻에 더욱 간절한 정성이 담겨 있었다. 상(上)의 비답(批答)은 다음과 같다.
“풍속은 지역에 따라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풍기(風氣)와 습속(習俗)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본받으려 하다가는 한갓 백성들만 놀라게 할 뿐,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선생은 또 하나의 소(疏)를 지어 10여 가지 일을 논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살펴본바에 의하면, 황제(皇帝)가 기내(畿內)의 극심한 가뭄을 딱하게 여기시어 궁중(宮中)에 단(壇)을 모으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니, 중외(中外)의 인심이 감동하여 열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전하께서도 행하여 온 것입니다. 그리나 궁궐 안에서는 피전(避殿) 감선(減膳)하는데도 산골짜기나 강 모퉁이에서는 떼 지어 모여 기탄없이 마시며 노는가 하면, 민가(民家)에서는 굶주려 죽은 시체가 잇달았는데도 주루(州樓)와 현사(縣舍)에서는 태연히 노래 부르면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는 기강이 엄하지 못한 탓이긴 하지만,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아마도 전하의 하늘을 감동시키는 성의에 미진한 점이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근신(近臣)에게 ‘날씨가 가물기 때문에 궁중(宮中) 사람들과 다 함께 소식(素食 반찬 없는 식사)함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하였는데, 그러고 나서 큰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다시 전처럼 반찬을 갖추어 식사하라고 청하자, 고황제는 ‘극심한 가뭄의 재해는 실로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지금 비가 내리긴 했으나 타서 손실된 것이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이러니, 반찬을 갖추어 먹는다 해도 무슨 맛이 있겠는가. 민심(民心)을 얻는 것이 바로 천심(天心)을 얻는 것이다.’ 하고, 논밭의 조세(租稅)를 면제시켰습니다. 전하께서 재해를 당하여 두려워하면서 수성(修省)하는 것이 과연 이와 같으셨습니까.
옛날의 왕자(王者)는 흉년을 당하면, 취마(趣馬 말을 기르는 사람)는 말에게 곡식을 먹이지 못하게 하고 선부(膳夫 음식을 만드는 사람)는 고기반찬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대부(大夫)는 쌀밥을 먹지 못하게 하고 사(士)는 술 마시고 즐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감선(減膳)한다는 이름은 있습니다만, 사옹원(司饔院)의 어물(魚物) 진상(進上) 때문에 경기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은 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복시(司僕寺)에서는 정수(定數) 외의 풀[草]을 의당 감해 주어야 하는데도 덜어 주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더구나 곡식을 줄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먼저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극진히 함으로써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키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보통 사람의 마음이란, 어렵고 고통스러운 경우를 당하면 혹 부모님이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만, 부귀와 안락이 극진한 데 이르게 되면 낳아준 은혜를 생각하는 이가 드문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고황제는 부귀가 극진한 때를 당하여서도 선조를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 효심(孝心)에 감통(感通)하여 백성들의 자질이 순수하게 된 것입니다.
또 듣건대, 영종황제(英宗皇帝)가 태학사(太學士) 이현(李賢)에게 ‘짐(朕)은 5경(五更) 2고(二鼓)에 일어나 하늘에 절하는 예(禮)를 행하고 나서 장주(章奏)를 결재한 다음 봉선전(奉先殿)과 묘당(廟堂)에 들어가 배알한다. 이어 모후(母后)를 뵙는데 명(命)이 있으면 이틀에 한 번씩 뵙는다.’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양궁(兩宮)의 정애가 날로 깊어져 참소하는 말이 들어 먹힐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태조 고황제와 영종황제의 일을 통하여 성덕(聖德)은 외로운 것이 아님을 더욱 믿으시어 거룩한 자손(子孫)들에게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성효(誠孝)의 길을 여신다면 효(孝)로 다스리는 공효가 당년에 흥기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만세에 이르기까지 선량한 후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연간에 처음으로 황릉(皇陵)을 건립하고 능 주위에 담을 쌓게 되었는데, 이때 유사(有司)가 근처에 있는 민가와 분묘(墳墓)를 옮기자고 건의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고황제가 제지시키면서 ‘이 분묘들은 모두가 우리 집과 오랜 이웃들의 것이니 밖으로 옮길 필요가 없다.’ 하고는, 드디어 봄가을로 제사 지내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아, 죽은 사람의 해골(骸骨)도 차마 옮기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산업(産業)도 틀림없이 차마 패망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래서 효릉(孝陵)이 남경(南京) 종산(鐘山)의 남쪽에 있는데도 그 북쪽에 공신(功臣)의 장지(葬地)를 많이 하사하였습니다. 성조(成祖) 이하의 여러 능(陵)은 모두 천수산(天壽山) 남쪽에 장사 지냈는데, 능 앞의 석물(石物)은 전과 똑같이 하였고 조금도 더 사치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이 광대한 천하에 어찌 좋은 묘지를 가려서 장사 지낼 만한 땅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반드시 같은 산에다 모신 것은 역대의 황제들이 지리설(地理說)이 허망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백성의 집과 분묘를 파 옮기게 하면 저들에게 생활의 터전을 잃은 탄식이 있게 될까 저어스럽고, 역대의 능묘를 한곳에 모으면 황가(皇家)의 조손(祖孫)이 서로 편안함을 누리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래서 세대가 오래 전해 갈수록 끝없는 복을 누렸고 황손(皇孫)의 번성함이 17만에 달하고 있으니, 선한 일을 많이 하면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있다는 여재(呂才)의 말이 여기에서 증험된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습속(習俗)은 너무 지나치게 풍수설(風水說)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경(公卿)과 사민(士民)들이 일찍부터 많이 물들어 왔습니다. 열성(列聖)의 밝으심으로 여기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국상(國喪)을 당하게 되면 위를 이을 사군(嗣君)이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게 됨에 따라 묏자리를 일체 지관(地官)의 말에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공경과 보상(輔相)들도 감히 그 사이에 거론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건원릉(健元陵 조선 태조(太祖)의 능임) 곁에 좋은 묏자리가 많이 있는데도 널리 양주(楊州)ㆍ고양(高陽)ㆍ광주(廣州)ㆍ여주(驪州) 등지에서 고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죽은 자들의 머리는 옮겨졌지만 다리뼈는 빠뜨리는 참혹한 정경이 있게 되고, 산 백성들은 집이 부서지고 전지를 빼앗기는 걱정이 있게 되어, 하늘과 국가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성명(聖明)께서도 직접 보신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만세에 전하여 갈 항식(恒式)을 정하여 금석(金石)에 새기고, 한결같이 영정대왕(榮靖大王 인종(仁宗)의 시호)의 하명과 같이 선릉(先陵)의 곁에 다만 수혈(壽穴 생전에 만든 무덤임)을 정하도록 하소서. 석장(石葬)과 석물(石物)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겠으나 창업(創業) 당시보다 약간 작게 하신다면, 성효(盛孝)가 무궁할 것은 물론 겸덕(謙德)도 한(漢) 나라와 명(明) 나라의 임금에 못지않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중국에서 선조(先祖)께 제사 지내는 예(禮)를 듣건대 이러했습니다. 제사는 구묘(九廟)에 그치고, 능침(陵寢)에는 철 따라 지내는 제사가 있고, 봉선전(奉先殿)에만 초하루와 보름에 천전(薦奠)하는데 새로 난 물건이 있으면 천전하고 특별히 날마다 천전하는 곳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천하를 소유하고 있는 풍부함으로 날마다 생뢰(牲牢)를 갖추어 살아 있을 때처럼 받듦에 있어 부족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지 않는 것은, 생존시 공양하는 것과 사후에 제사 받드는 것의 방법이 다름은 물론 부당하게 제사 지내는 것이 도리어 불경(不敬)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문소전(文昭殿)에서 매일 전(奠)을 올리는 것은 예(禮)에도 번거로울 뿐더러 신(神)을 모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는 시왕(時王)의 제도에 있어서도 너무 지나친 것 같고, 효도를 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사리에 합당한 효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눈앞의 걱정으로 말한다면, 부고(府庫)의 축적도 왕년에 견주어 보면 날로 궁핍해 가고 있고 백성들의 곤궁도 전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그런데도 제사에 공궤하는 미면(米麵)의 비용이 백관(百官)의 봉록(俸祿)보다 많고, 소채(蔬菜)를 마련하는 것도 일체 곤궁한 백성에게서 염출하고 있습니다. 《주역(周易)》 췌괘(萃卦) 육이(六二)에 ‘정성이 있으면 박(薄)한 제물로 제사 지내도 된다.’ 하였습니다. 이는, 제사 지내는 도리는 정성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기에 제물은 간략하게 해도 좋다는 말입니다.
황상께서는 경연(經筵)에 근면하고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묻기를 좋아하여 끝까지 이치를 궁구하기 때문에 성학(聖學)이 날로 고명(高明)해져 가고 있습니다. 진강(進講)을 끝내고 나서 각기 시무(時務)를 진달할 적에는 온화한 얼굴로 상세히 들은 다음 대신(大臣)들과 상의하기 때문에 모든 일이 해이하거나 퇴패되는 데 이르지 않습니다. 정오(正午)에 강론을 파하고 나서는 연회와 선물을 하사하여 특은(特恩)을 표합니다. 이 때문에 강관(講官)들이 모두 스스로 면려하여 맡은 바 직분을 끝까지 잘 수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 해이함이 없이 계속 이렇게 해나간다면, 성덕의 진보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태평한 치세(治世)를 손꼽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도 이 경연(經筵)에 대하여 몸소 실천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간혹 까닭 없이 자주 정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간 경연에 나아가도 상하의 뜻이 서로 맞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혹 바른말을 진달해도 위에서는 엉뚱한 일을 묻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위에서는 바야흐로 즐겨 듣는데도 아래에서는 부복(俯伏)한 채 졸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복하는 예(禮)가 극진히 공경하는 도리는 아니기 때문에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으레 편히 앉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안색으로 사가(私家)의 부자(父子) 사이처럼 조용조용 고문(顧問)하였기 때문에 상하의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큰 계책으로 대업(大業)을 확정, 지금에 이르도록 아름다움을 누리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연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저 임금과 신하의 분별은 분명하기가 하늘과 땅 같아서 반드시 하늘의 기(氣)가 내려오고 땅의 기가 올라간 다음이라야 만물이 생육(生育)되어 음양(陰陽)이 조화(調化)하는 공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명(明) 나라의 영종(英宗)과 효종(孝宗)은 날마다 각로(閣老)들과 정사(政事)를 상의할 적에는 언제나 선생(先生)이라 불렀고, 말은 겸손하게, 예는 엄숙하게 하였으므로 각로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중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입강(立講)의 제도는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조종조의 법규처럼 편히 앉아서 강하게 하고, 큰일이 아니면 학문의 강론을 폐하지 마소서. 이렇게 하면 하늘과 땅이 잘 조화될 것은 물론이고 옛 도를 배움에 있어서도 얻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황상께서 조정에 나아가 집무(執務)하는 의식을 보건대, 이졸(吏卒)들도 모두 황상을 우러러볼 수 있고 오랑캐들도 모두 어로(御路)에서 예견(禮見)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이어 황제가 직접 ‘여반끽(與飯喫)’이라는 세 글자를 써 주었습니다. 신같이 어리석은 마음에도 감축(感祝)하는 뜻이 있었는데, 사방의 만백성들이야 누군들 ‘우리 황제께서 질병이 없으셔야 할 터인데,’ 하면서 기꺼이 떠받들 마음이 넘쳐흐르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정에도 육조(六曹)가 참현(參見)하는 예(禮)가 있기는 합니다만 유독 일을 아뢰는 의절만은 없습니다. 그리고 외방 고을의 배전(陪箋)하는 관원(官員)도 용안(龍顔)을 뵙지 못하는 실정인데 진공(進貢)하는 이졸(吏卒)들이야 더더욱 뵙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는 조정에 자주 나아가지 않으시기 때문에 공보(公輔)와 시종(侍從)들도 전하를 뵙는 일이 드뭅니다. 감사나 수령들이 임지로 떠날 때에도 면대하여 성상의 분부를 받들 때가 전혀 없고, 단지 정원(政院)에다 ‘전례대로 말하여 보내라.[依前言送]’고만 명할 따름입니다. 아, 의전언송(依前言送) 이 네 글자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중국 조정을 본받고 안으로는 조종의 법규를 준행하여, 상참(常參)에는 언제나 나아가시고 큰일은 모두 면대하여 진달하게 하고 임지로 부임하는 수령과 일 때문에 서울에 온 사람들도 모두 반열에 참여시켜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고 있는가에 대해 시문(試問)하여 보소서. 그리고 각 고을에서 진공하러 온 이민(吏民)과 신관(新官)을 맞이하고 구관(舊官)을 전송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궐정(闕庭)으로 나오게 하여 어려운 일이 있는가를 물어보시고 억울한 일도 으레 진달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백사(百司)와 열읍(列邑)이 반드시 근면하게 될 것이며, 멀리 궁벽한 곳에 사는 뭇 백성들도 성주(聖主)께서 자기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 이토록 극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감격하여 떠받들려는 마음이 영구히 해이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육과(六科)의 급사중(給事中) 및 십삼도(十三道)의 무안어사(撫按御史)가 수시로 주소(奏疏)를 올리면, 으레 해부(該部)에 내립니다. 그리하여 해부가 복주(覆奏)하면 각로들의 의견을 듣는데, 시행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천하의 일을 모두 조정의 공론(公論)에 부쳐서 처리함으로써 비록 황제일지라도 감히 털끝만 한 사의(私意)를 그 사이에 개입시키지 않게 함은 물론, 근신(近臣)에게 미혹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인 것입니다.
대저 황상께서는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간언(諫言) 듣기를 좋아하여 손수 ‘임금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간하고 좋은 말을 진달하라.[責難陳善]’는 네 글자를 써서 경연관(經筵官)에게 내림으로써 기어이 실효를 거두려고 하였기 때문에 집에서 선(善)을 말해도 천 리 밖에까지 감응합니다. 이리하여 많은 계책이 모두 진달되고 아랫사람의 마음이 윗사람에게 통하고 있습니다. 계속 이렇게 한다면 천하의 선(善)이 끝없이 오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위로는 조종(祖宗)들께서 간언을 어기지 않고 받아들이던 뜻을 유념하시고, 아래로는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의 원통함을 염두에 두시어, 스스로 퇴탁(退托)하여 간언을 물리치지 말고 스스로 훌륭하게 여겨 남의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마소서. 그리하여 비근한 말일지라도 반드시 살피고 작은 선(善)일지라도 반드시 실행한다면, 격언(格言)이 날로 들려오고 성치(聖治)가 날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중국에서는 인재를 양성하는 길이 매우 넓습니다. 재능만 있으면 문벌(門閥)은 따지지 않으므로, 손계고(孫繼皐) 같은 이는 장사(葬師 지관(地官)을 가리킴)의 아들인데도 지금 수찬(修撰)에 임명되어 있고, 성헌(成憲)은 비첩(婢妾)의 아들인데도 지금 편수관(編修官)에 임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중국에서는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문벌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옛날 신라ㆍ백제ㆍ고구려 이 삼국(三國)이 비록 작았지만 각기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기용하는 데 차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려(高麗) 중엽부터 국정(國政)을 맡은 권신(權臣)들이, 충성스런 지사(志士)가 초야에서 일어나게 되면 시정(時政)을 방해할까 저어하여 서얼(庶孼)들은 과거를 못 보게 폐기하였습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도 국정을 맡은 대신(大臣)들이 사적으로 자기의 자손들을 위한 계책만 세우고 만세(萬世)에 인재를 잃게 되는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재가(再嫁)한 사람의 자식까지도 금고(禁錮)시키는 법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려 있게 된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전적으로 재가하는 것을 막았다면 범중엄(范仲淹)의 재능이 세상에 쓰여지지 못했을 것이고, 전적으로 서얼(庶孼)을 폐고(廢錮)시켰다면 이중표(李仲彪) 같은 사람은 당세에 굶주렸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멀리는 성탕(成湯)을 추모하고 가까이는 중국을 본받아 잘 변통시킴으로써 인재(人才) 얻기를 기필한다면 상고의 성대했던 정치를 수십 년 뒤에는 이루게 되길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부부(府部)의 연리(掾吏)와 진읍(鎭邑)의 서리(胥吏)들은 모두 월급(月給)을 받고 있다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관(官)에 있으면 본가(本家)의 자제들은 모두 부역을 면제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성주(成周) 때 부사(府史)ㆍ서도(胥徒)의 월급이 하사(下士)와 같았다는 의의에서 나온 조처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서리(書吏)ㆍ조례(皁隸)ㆍ서원(書員)ㆍ사령(使令) 등은 하루도 관(官)을 떠날 수 없음은 물론 그 고역이 막심한데도 한 푼의 돈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농사지을 겨를도 없고 또 공업(工業)이나 상업(商業)에도 종사할 수가 없어 의식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관(官)을 속이고 법(法)을 우롱하면서 염치를 불고하고 백성을 협박하여 재물을 뜯어내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러니, 그들에게 의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월급을 준 다음 염치를 교육시켜 스스로 간사한 짓을 못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중국 조정의 조종(祖宗)들은 사려가 원대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조(田租)와 신역(身役) 외에는 다른 잡역(雜役)이 없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면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래서 인물이 번성하고 토지가 개척되었습니다.
아, 우리나라는 양계(兩界 함경도와 평안도임)에서부터 도성(都城) 밖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옥야(沃野)가 펼쳐져 있지만 간혹 경작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백성들이 살던 곳이 지금은 묵어서 잡초만 무성한 데가 있습니다. 아, 나라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만백성이 편안히 살아가게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상(進上)하는 일 및 각 고을 관원들의 욕심 때문에 백성들이 살 곳을 잃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라의 근본이 이렇게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으니, 반드시 긴요하지 않은 진상은 우선적으로 없애야 하겠습니다. 예컨대 연산군(燕山君) 때 더 분정(分定)한 공물(貢物)이나, 옛날에는 생산되다가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공물은 일체 폐기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수령(守令)들에게 거듭 계칙, 공물을 빙자하여 백성을 침해하지 못하게 할 것은 물론이고 지정된 부세의 공납(貢納)도 원수(元數)만을 거둘 뿐 감히 무겁게 거두어들이지 못하게 하소서. 또 관아(官衙)에서 쓰는 물품도 석수(石數)를 정하고, 사신의 공궤도 정해진 기수(器數)에 따라 쌀 한 말, 베 한 자라도 감히 백성들에게서 함부로 거두어들이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라도 이를 어기는 자는 장률(贓律)로 징계하소서. 그리고 이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면 조처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생물(生物)의 태어나고 퍼지는 근원을 막거나 끊기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에 의거 딸이 장성하였는데도 시집보내지 않는 사람은 죄주고, 일찍 과부가 되어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은 개가(改嫁)할 수 있게 허가하소서. 대저 명(明) 나라의 법은 재가(再嫁)한 이의 자식을 폐고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재가하고 싶은 사람은 재가하고 수절할 사람은 스스로 절개를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식이 있는 과부들은 자식의 앞길에 방해가 있을까 저어하여 남모르게 간통, 자식을 낳아 밤에 내다 버리는 예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재가를 금지하여 실행(失行)함으로써 풍화(風化)를 손상시키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재가를 허락하여 각기 제 곳을 얻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신은 듣건대, 중국에는 사방의 변성(邊城)이 바둑돌처럼 널리고 별처럼 벌여 있어 그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태평이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천하의 모든 백성이 사대부(士大夫) 외에는 농부나 공장이가 되거나 아니면 군인이 되는 것은 물론 농부나 공장이들의 생산품이 군대를 양성하는 데 제공된 때문이라 합니다. 삼한(三韓 신라(新羅)ㆍ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를 가리킴)이 정립(鼎立)하여 있을 때 해마다 전쟁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이 걸핏하면 1만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의 망해 가다가 그래도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비(奴婢)의 법이 세상에 널리 퍼지지 않아서 온 나라 안의 백성들이 모두 윗사람을 위하여 쓰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려 이후로 노비가 점점 많아지고 중[僧]이 날로 불어나더니 아조(我朝)에 와서는 군역(軍役)이 너무 괴로워서 아들 둔 사람들이 아들을 중으로 만들 수 없으면 사천(私賤)에게 장가보내 버렸습니다. 더구나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경우에는 피폐한 백성들이 다투어 투속(投屬)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정군(正軍)의 숫자가 20만에도 다 차지 못합니다. 연전에 노비가 너무 많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만 각기 사정(私情)에 끌려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 점 신이 실로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중국의 제도는 비록 경상(卿相)이라 할지라도 사인(私人)을 수십 명씩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서얼(庶孼)들도 수백 명의 사노(私奴)를 거느린 자가 있는가 하면 훈귀(勳貴)들은 수천 명씩 거느린 자가 있기도 합니다. 이제 위에서 먼저 제한을 두어 내수사 노비는 각각 4천 명씩만 남겨 두시고 공경(公卿) 이하도 차례대로 한계를 정한다면, 20년 뒤에는 1백만의 정병(精兵)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을 적에 자주 포(砲) 쏘는 소리를 듣고 물어봤더니 ‘중국에서는 태평한 때라도 위급할 경우를 잊지 않기 때문에 입번(入番) 군사들에게 늘 전법(戰法)을 익히게 하고 있다. 변방(邊方)의 영보(營堡)에서도 모두 이렇게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인하여 생각건대, 우리나라에서는 열무법(閱武法)을 해마다 거행하지 않는 것은 물론, 어쩌다 한번 실시할 적에도 항오(行伍)가 분명치 못하고 기고(旗鼓)가 정돈되지 않기 때문에 관람하는 사람들이 아이들 놀이 같다고 탄식하였습니다. 평상시에도 이러하니 적과 대치해 있을 때 어떻게 조처할 수 있겠습니까. 상번(上番) 군사는 활쏘기를 익히는 법규가 있습니다만, 훈련관(訓鍊官)에 임명된 자가 으레 궐지(闕紙 궐지(闕紙)에 대한 벌금의 뜻)만 받을 뿐 전혀 활 쏘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경위(京衛)가 이 모양인데 외번(外藩)이야 따져 뭣하겠습니까. 중국에서는 말ㆍ옷ㆍ갑옷ㆍ궁시(弓矢)를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기 때문에 군마(軍馬)가 잘 정돈되었고 기계(器械)도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장(馬裝)과 기계를 군사 자신이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점고(點考)할 때에는 으레 남에게 빌리기가 일쑤고, 두미(斗米)를 관리에게 주면 없는 것도 있다고 하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의 관습은 음식을 판출(辦出)하게 하는 폐단이 없는 데가 없는데, 군졸의 경우가 더욱 극심합니다. 새로 소속되는 자는 신래례(新來例)라는 것이 있어 거의 몇 마리의 소를 허비하게 되는가 하면, 상번(上番)하는 사람은 지면(知面)ㆍ향미(鄕味) 등등의 예(例)를 비롯하여 그 가짓수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약 이렇게 허비되는 비용으로 군장(軍裝)을 갖추게 한다면 관(官)에서 지급하지 않더라도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병조(兵曹)와 헌부(憲府)에서 금한 바 있어 쌓여온 폐단이 조금은 고쳐졌습니다. 그러나 훈련 권지(訓鍊權知)와 내금 예차(內禁預差) 등의 면신례(免新例)는 아직도 그 구습(舊習)이 남아 있으므로 군리(軍吏)들이 보고 본받는 실정인데, 이 때문에 전지를 팔고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러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외읍(外邑)의 군폐(軍弊)는 이보다 더 극심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중국에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변방의 원수(元帥)들이 위에 주문(奏聞)하여 알리지 않고 순무사(巡撫使)도 금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런 폐단을 먼저 혁파시킨 뒤에야 군사(軍事)의 우려가 조금은 풀릴 수 있을 것이고, 군장(軍裝)을 갖추는 데 힘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황제(皇帝)는 경외(敬畏) 2자(字)를 써서 중서성(中書省)의 각로(閣老)에게 내렸고, 정기솔려(正己率厲) 4자를 써서 육부(六部)의 상서(尙書)에게 내렸다고 합니다. 때문에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모든 명령문(命令文) 및 무안(撫按)ㆍ총독(總督)의 봉신문(奉申文)은 절대로 초서로 쓰지 않고 중자(中字)로 정서합니다. 명령문은 도시나 벽촌에 모두 명시(明示)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궁벽한 곳의 백성들일지라도 조정에서 무슨 명령이 있었고 수령(守令)이 무슨 법령을 발표하였는지 죄다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함은 물론 간사한 서리(胥吏)나 권세 있는 호족(豪族)들이 술책을 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백성을 유지하고 사방을 다스리는 기본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성주(聖主)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 중외(中外)에 분부하신 내용이 모두가 인심(仁心)과 인문(仁聞)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상사(上司)의 서리(書吏)와 감사(監司)의 영리(營吏)들은 술에 취해 난초(亂草)로 휘둘러 각사(各司)와 주현(州縣)에 전달하면, 각사와 주현의 서리들은 이를 대강 기록하여 관원(官員)에게 보입니다. 반면 관원도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은 채 급히 가져다 보관시키라고만 합니다. 혹 준봉(遵奉)하고 싶어 하리(下吏)에게 묻는 경우가 있으면 하리는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함을 우려하여 말을 꾸며서 ‘이 명(命)을 시행하게 되면 관사(官司)가 부지하기 어렵다.’고 고(告)하고, 관원도 머리를 끄덕이면서 치우라고 합니다.
아, 이제 요직에 있는 자들의 절간(折簡 촉탁 편지)은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시행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성주의 명(命)만을 이와 같이 만홀히 여겨 폐기시키고 있으니, 이는 봉행하는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전하께서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을 두려워함에 유감스러운 점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른바 천명이란 그윽하고 황홀한 데서 찾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 삼가고 백성의 일에 근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은왕(殷王) 중종(中宗)이 엄숙하고 겸손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천명을 헤아려 자신을 검속했던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천명을 두려워하는 것이 과연 중종과 같으신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대인이란 반드시 높은 지위에 었어야만 대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평민이라 할지라도 옛사람의 덕(德)을 고증할 수 있고 천리(天理)에 의거 계모(稽謀)를 내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면 대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위 무공(衛武公)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깨우치게 권고하였고 공사(工師)나 설어(暬御)의 말도 모두 유념하여 들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대인을 두려워하는 것이 과연 위 무공과 같은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성인의 말이란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모두가 두려워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다.[節用愛民]’는 이 한 구절은 임금이 해야 할 급선무인 것입니다. 때문에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가 이를 법규로 세웠고, 탐관오리들이 감히 명을 어기면서 나쁜 짓을 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성인의 말을 두려워하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조정 신하가 성인의 말을 인용하여 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를 오활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는 못합니다만, 삼가 살피건대 성현(聖賢)의 말은 모두가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요도(要道)로서 오활한 것은 한 구절도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신민(臣民)들이 법을 두려워하여 중앙에서 외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명령하면 시행되고 금지하면 중지하게 되길 바라신다면, 이 세 가지 일에 우선적으로 힘쓰고 두려워하소서. 그리하여 사람이 안 보는 곳일지라도 상제(上帝)가 환히 나타나 계신 것같이 여기시고, 나무꾼의 말이라도 항상 공자(孔子)가 목욕재계하고 노 애공(魯哀公)에게 고한 것처럼 근엄하게 여기소서. 그리고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임)을 가까이하지 말고 재리(財利)를 힘쓰지 말고 몸단속은 미처 못할 듯이 하고 허물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고 어진 이 구하기는 목마른 듯이 하고 간언(諫言) 따르기는 물 흐르듯이 하는 등등의 일을 한결같이 옛 성왕(聖王)처럼 하기를 스스로 기필하여 조금이라도 흔단의 여지를 남기지 마소서. 그런 뒤에 신하들을 불러 백성의 부모된 사람으로서의 의의를 조칙(詔勅)으로 반포하고,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남에게 부탁하듯이 거듭 고유(告諭)하고 간절히 부탁하소서. 그리고 사신(使臣)으로 다녀오면 반드시 그 허실을 분명히 묻고 난 다음에 매우 불량하여 명령을 봉행하지 않은 자는 잡아다가 통쾌하게 양관(兩觀)의 베임을 보이소서. 그리고 나서 이를 팔도(八道)에 돌려 보여 명을 어기는 자는 반드시 벤다는 뜻을 알게 한다면, 진실과 허위가 성상의 총명 앞에 분명히 드러날 것은 물론 억조창생이 명령 하나에 의하여 다 같이 소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방법이 하나라도 미진한 점이 있게 되면 혹 패도(覇道)를 사용하게 되어 치도(治道)가 순수(純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주자어류(朱子語類)》는 권질(卷秩)이 많기는 하지만 분류가 매우 정미롭습니다. 임금은 임금으로서 필요한 것이 있고 신하는 신하로서 필요한 것이 있고 감사(監司)는 감사로서 필요한 것이 있고 절진(節鎭)은 절진으로서 필요한 것이 있고 수령은 수령으로서 필요한 것이 있고 부형(父兄)과 사제(師弟) 사이에도 여기에 필요한 것이 있다 하여, 천하의 모든 일에 대해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라를 중흥(中興)시키려는 마음이 있으면 이 책을 버리고는 성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육조(六曹)ㆍ각사(各司) 및 감사(監司)ㆍ병수사(兵水使)ㆍ사장관(四長官) 등처에 반포하여 보관해 두게 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각기 자기에게 해당되는 부분을 가려서 보게 함은 물론, 이웃의 원이나 장수 및 사자(士子)로서 뜻이 있는 사람은 모두 볼 수 있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주자(朱子)가 행하지 못하여 개탄했던 일이 우리나라에서 밝혀질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틀은 모두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공자(孔子)는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을 해도 시행되지 않는다.’ 하였고, 증자(曾子)는 ‘명령하는 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위배되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하였으니, 성주(聖主)께서는 유념하소서.”
선생께서는 전의 소(疏)가 채용(採用)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가 이루어졌어도 올리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박사(博士)에 승진되었고 이어 호조(戶曹)와 예조(禮曹)의 좌랑(佐郞)ㆍ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에는 통진 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는데 여기서는 폐단을 제거하였으므로 이민(吏民)들이 편케 여겼다. 얼마 안 되어 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를 때려죽였다가 완민(頑民)이 무고하는 바람에 한 달이 넘도록 옥(獄)에 갇혔다가 끝내는 부평(富平)으로 정배(定配)되었다.
무인년(1578, 선조11)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선생의 집이 김포(金浦)에 있었으므로 배소(配所)에서 수십 리도 못 되었지만 법(法) 때문에 분상(奔喪)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경진년(1580, 선조13)에 사유(赦宥)를 받았다. 이해 여름에 해서(海西)의 석담(石潭)으로 가서 율곡(粟谷)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모셨다. 여러 달 동안 학문을 강론한 뒤 돌아왔다. 겨울에는 호서(湖西)로 가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빈소(殯所)에 곡하였고, 이어 명곡(鳴谷)의 서당(書堂)에 머물면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 봄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다가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나갔다. 여기에서 연산조(燕山朝) 때의 공안(貢案)을 혁파해야 한다는 내용의 소를 올렸다. 상이 우답(優答)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채택하여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부임하여 왔다. 선생이 이때 이발(李潑)ㆍ김우옹(金宇顒) 등과 교유하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그들이 송강을 헐뜯는 말을 믿고서 즉시 병을 핑계 대고 떠나가려 하였다. 그러자 송강이 굳이 청하였으므로 만났다. 송강이,
“공(公)이 나를 음험한 소인으로 여겨 떠나가려 한다는데 사실이오.”
하니, 선생이,
“그렇소이다.”
하였다. 송강이,
“공은 평소 나와 전혀 교분이 없었는데 어떻게 음험한 소인인 줄 알았소. 머물러서 함께 일을 해 보고 내가 참으로 소인인가를 확인한 뒤에 떠나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드디어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렇게 되자 송강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와 율곡을 가운데 넣어 함께 일하기를 청하여 왔으므로 머물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교의(交義)가 날로 두터워졌으므로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내가 밝지 못한 탓으로 하마터면 공을 잃을 뻔하였소.”
이때 율곡이 뭇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으므로 선생이 율곡에게 다음과 같은 시(詩)를 올렸다.

얼음과 불은 원래 합치기 어려워 / 氷炭元難合
군자의 도가 점차 사라질까 두렵네 / 陽道恐漸消

이로부터 김우옹ㆍ이발 등과 드디어 사이가 멀어졌다.
임오년(1582, 선조15) 종묘령(宗廟令)에 제수되었다. 이어 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으로 외직(外職)을 청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 부임한 지 수개월 만에 소를 올려 백성들의 고통과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外敵)을 막는 계책을 진달하였고, 또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 세우기와 사육신(死六臣) 정표(旌表), 왕자(王子) 제택(第宅)의 금제(禁制)에 대해서도 청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 가을 이산보(李山甫)가 경차관(敬差官)으로서 호서 지방을 안찰(按察)하고 복명(復命)하자, 상이 묻기를,
“치적(治績)을 이룬 사람이 있던가.”
하니, 이산보가 아뢰었다.
“신이 안찰한 우도(右道)에는 별로 좋은 치적을 이룬 사람이 없었습니다. 듣기로는 좌도(左道)의 보은 현감 조모(趙某)가 백성을 다스린 치적이 제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해 겨울 정언(正言) 송순(宋諄) 등이 파직시키자고 계청(啓請)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사람은 쉽게 얻을 수 없다.”
하면서, 7일간 논계(論啓)하였지만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갑신년(1584, 선조17) 겨울 간관(諫官)들이 다시 선생의 파직을 논계하였으므로 마침내 파직시켰다. 이때 율곡은 이미 작고(作故)하였는데 당론(黨論)은 더욱 격렬해져 조정의 불안이 극심하여만 갔다. 선생은, 서울에서는 다시 살 수 없다고 여겨 보은에서 옥천군(沃川郡) 안읍현(安邑縣)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은 숲과 골짜기가 그윽하였고 사람이 드물게 살았다. 선생은 날마다 종유(從遊)하는 선비들과 학문의 강론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수시로 들에 나아가 동북(僮僕)들을 권면하면서 노닐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병술년(1586, 선조19) 국가에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계수관(界首官)에 별도로 제독(提督)을 설치하고 오로지 교양(敎養)의 책임만을 맡아보게 하였다. 선생이 제독에 차임(差任)되어 공주(公州)에 부임, 선비를 양성하는 규범(規範)을 대대적으로 내걸고 그 조약(條約)을 엄하게 정한 다음 몸소 솔선하여 모범을 보였다. 그리하여 먼 곳에서도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선생은 비록 한산직(閑散職)에 있으면서도 조정의 시비(是非)가 전도된 것과 또 스승과 벗들이 무고(誣告)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였다. 그래서 늘 위망(危亡)의 환난(患難)이 곧 닥칠 것처럼 여겼으므로 다음과 같은 소를 올렸다.
“신은 듣건대 사람에게 부여된 도(道)는 누구나 똑같이 받은 것으로, 성인이라 해서 많이 받고 어리석은 이라 해서 작게 받은 것은 아니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교육을 받으면 등급을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 누구나 요순(堯舜)같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임금된 사람이 조기에 미리 배양할 줄을 알아서 어진 이를 친하고 착한 이를 벗하여 실천으로 가르친다면, 온 천하가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따라 감화될 것입니다. 당우(唐虞)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정치가 백왕(百王)의 으뜸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내려오면서는 이 학문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윗사람은 본디 가르칠 줄 몰랐고 아랫사람은 위를 속이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진번(陳蕃)과 이응(李膺)이 훌륭하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도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려 한다는 참소에 의해 당인(黨人)으로 몰아 모두 금고(禁錮)시킨 다음 섬멸하였습니다. 사마광(司馬光)과 조여우(趙汝愚)가 충신이라는 것은 태양처럼 환한 일이었는데도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비방하여 정자(程子)ㆍ주자(朱子)까지 아울러 폐기시켰습니다. 이는 진실로 학문을 강론하지 않아서 지혜가 밝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어진 이를 내쫓고 간사한 자를 사랑하기를 빨리 못할까 서두는 것은, 재변과 도적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난리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군신(君臣)ㆍ부자(父子)의 도리를 알게 되었던 것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오고서부터인데, 설총(薛聰)ㆍ우탁(禹倬)이 속해(俗解)로 강명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소학(小學)》과 《가례(家禮)》가 나왔고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가 이를 천명(闡明)하여 미개한 풍속을 일신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고려 말기의 위급한 때까지 연장시켜 왔고, 잇달아 아조(我朝)의 문명(文明)을 열었던 것입니다. 김종직(金宗直)의 설교(設敎)에 의해 의사(義士)가 구름같이 일어났고,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은 도학(道學)을 창도하였고, 조광조(趙光祖)는 등용되자 민속(民俗)을 거의 일변시켰고, 김정(金淨)ㆍ박상(朴祥)은 솔선하여 당직(讜直)한 논의를 진달하였습니다. 이들이 시기하는 자들에게 모함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대대로 선인(善人)이 뒤를 이어 다시 일어났습니다. 정광필(鄭光弼)은 힘써 어진 이들을 구제하였고, 유운(柳雲)은 뭇 소인에게 굽히지 않은 움직일 수 없는 산악(山岳)처럼 우뚝한 기상이 있었습니다. 간사함을 분변하고 충성을 바친 이언적(李彦迪)과, 위태함에 임하여 말을 끝까지 다한 권발(權撥)은 우뚝하여 대신(大臣)의 체모(體貌)가 있었습니다. 김안국(金安國)과 송인수(宋麟壽)는 각기 호남과 영남을 안찰(按察)하면서 은택을 선양하고 교화를 폈으며, 백인걸(白仁傑)과 안명세(安名世)는 바른말로 직필(直筆)하여 공의(公議)가 밝게 전하였습니다. 만약 이들을 무참하게 해친 화(禍)가 없었다면 훌륭한 인격을 갖춘 선비들이 문왕(文王) 때와 같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화(士禍)가 너무나 혹독하였습니다. 때문에 성수침(成守琛)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있을 줄 알고 성시(城市)에 숨었으며, 성운(成運)은 아우의 상을 당하여 슬픔을 안은 채 보은(報恩)에 숨었으며, 이황(李滉)은 의기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화를 당한 데 상심(傷心)하여 예안(禮安)에 물러가 은거하였으며, 임억령(林億齡)은 임백령(林百齡)이 어진 이를 해치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멀리 해남(海南)에 은거하였습니다. 또 서경덕(徐敬德)은 화담(花潭)에 은거하였고, 김인후(金麟厚)는 벼슬할 뜻을 끊어 버렸고, 조식(曺植)과 이항(李恒)은 바닷가에 은거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정지운(鄭之雲)은 김안국(金安國)에게서 배웠는데 자기의 스승이 하마터면 법망에 걸릴 뻔한 것에 징계되어 술 속에 이름을 감추었고, 성제원(成悌元)은 몸소 송인수의 참화를 보고는 말단 관리로 지내면서 회학(詼謔)으로 끝까지 몸을 보전하였고, 이지함(李之菡)은 안명세(安名世)가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는 거짓 미친 행세를 하면서 세상을 도피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조정의 큰 그릇이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고재(高才)였건만, 주살을 벗어나려는 기러기처럼 몸을 피하여 저 궁벽한 시골에서 쓸쓸히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 이하의 명류(名流)들도 귀양을 가거나 아니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외(京外)의 모든 부형(父兄)들이 자제들에게 학문하는 것을 경계하도록 가르쳤으므로, 조정에 올바른 의견을 건의하는 사람이 없게 됨에 따라 권간(權奸)들이 활개치게 되었습니다. 그 화(禍)가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또 이량(李樑)이란 자가 이기의 뒤를 이어 계속 날뛰면서 나머지 사람들을 모조리 해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명종(明宗)께서 늦게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타고난 성덕(聖德)이 훌륭하여 충신과 간신이 절로 분변된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이탁(李鐸)ㆍ박순(朴淳)ㆍ기대항(奇大恒)의 주선(周旋)이 큰 힘이 된 것입니다. 김개(金鎧)는 윤원형의 여당(餘黨)으로 이황이 진용될 것을 꺼려서 온갖 음모를 부려 저억(沮抑)하였습니다만, 정철(鄭澈)은 보잘것없는 말단 관원으로서 몸을 돌보지 않고 이에 대항하여 극력 간쟁하였습니다. 김개가 파출되고 나서 이황이 진용될 형세가 조성되었으나, 안평중(安平仲)이 중니(仲尼)를 몰라보고 장손(臧孫)이 전금(展禽)을 저억한 것과 같은 일이 되풀이되어 중흥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다시 잃고 말았습니다.
이이(李珥)의 임신년(1572, 선조5) 소(疏)에도 간인들이 준동할 조짐을 미리 내다보고 깊은 탄식을 토해 낸 것이 수만 언(數萬言)에 달했는데, 1자 1구(一字一句)가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정철은 기대승(奇大升)에게 배웠고 기대승은 이황에게 배웠습니다. 이이는 직접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또 조광조의 도덕(道德)을 사모하였으니, 그의 모유(謀猷)와 기개(氣槪)는 내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의 격렬한 정충(精忠)이 위로 임금을 감동시켜 크게 등용되었고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었습니다. 정철의 청렴하다는 명망과 강직한 절개는 일세(一世)를 격동시키고 있었으므로, 이이가 매우 중히 여겨 기어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임금을 보좌하려 했습니다. 이때 임금을 도와 만민을 편안케 할 영상의 책임이 박순(朴淳)에게 있었고, 박순이 이이와 정철을 천거한 것은 바로 정승의 직책에 있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이이는 임금을 보필함에 있어 근엄하고 자중한 선비가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자신의 친구를 극력 천거하여 임금의 좌우에 두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성혼(成渾)이었습니다. 성혼의 학문은 그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것으로 옛 도(道)를 독실하게 믿고, 문 닫고 들어앉아 경전(經傳)을 궁구하였으므로 근원이 깊고 발로가 성대하였으며, 마음을 잘 수양하여 욕심이 적었습니다. 이 사람은 임금의 공경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기국은 나라를 지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말세의 풍속을 믿지 않았고, 자신의 문하에 나오는 선비이면 현우(賢愚)를 가리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접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양외(揚畏)가 여대방(呂大防)을 배반하고 형서(邢恕)가 정자(程子)를 해치듯 하는 무리들이 마구 들끓었습니다. 아, 당(唐) 나라에 우리(牛李 우승유(牛僧孺)와 이종민(李宗閔)임)의 당(黨)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서로 해쳤으니 똑같이 허물이 있는 것은 물론 당으로 지목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송(宋) 나라에는 천락(川洛 왕안석(王安石)과 정자(程子)를 가리킴)의 당(黨)이 있었는데, 이는 천삭(川朔)의 사람들이 도학(道學)을 가리켜 당이라 지목한 것일 뿐 정자(程子)의 문하에서 어찌 이런 당을 만들었겠습니까.
성혼의 처신(處身)은 한결같이 올바름에 의거하였고 선(善)을 좋아하는 도량은 원근(遠近)이나 피차(彼此)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이이는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공평한 마음가짐으로 일을 처리하였고, 사람에게 한 가지의 선함이 있어도 자신이 가진 것같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을 공격하는 사람을 청요직(淸要職)에 임명하였으니, 유성룡(柳成龍)ㆍ김응남(金應南)ㆍ이발(李潑) 등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도 빨리 추천하여 주지 않으면, 갑자기 반기(反旗)를 세우고 계책을 내어 내쫓는가 하면 죽은 사람에게까지 질책을 가합니다. 그리하여 이이의 얼굴을 아는 자이면 끝까지 찾아내어 모두 외직(外職)으로 쫓아내고, 성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여지없이 초야(草野)로 내쳤습니다. 때문에 위로 경상(卿相)에서부터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몸 둘 곳이 없어 우왕좌왕 어쩔 줄 몰랐습니다. 군자(君子)가 정치를 하면서 한때의 충현(忠賢)들을 박해하여 모두 제 곳을 잃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한수(韓脩)와 민순(閔純)은 모두가 노성(老成)한 숙유(宿儒)로서 시의(時議)에 휘말리지 않고 초야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이준민(李俊民)ㆍ안자유(安自裕)는 뜻이 크고 기개가 기위(奇偉)하여 사심(邪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만, 이이가 어질다는 말 한마디로 인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게 만들었습니다. 김계휘(金繼輝)는 청직(淸直)하고 편당이 없어서 선조(先朝) 때부터 고충(孤忠)으로 일컬어 왔는가 하면 재능과 계모를 겸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이의 추허(推許)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살아서는 숭반(崇班)에 기용되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악명(惡名)을 가하였습니다. 구봉령(具鳳齡)은 청렴하고 공평하고, 위엄이 있어서 호서(湖西 충청도를 가리킴)의 백성들이 모두 잘 다스린다고 일컬었습니다만, 일찍이 남평(南平)을 지나다가 한 번 이발(李潑)에게 문안하지 않은 탓으로 끝내 배척당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홍성민(洪聖民)은 정직하여 아부하지 않기 때문에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모두 길인(吉人)이라 일컬었습니다만, 신응시(辛應時)가 죽었을 때 그 만장(挽章)에 ‘지하에 가서 율곡을 만나거든 오늘날의 시사(時事)가 매우 괴리된 것을 말하라.’는 것 때문에 외방으로 내쫓기고 말았습니다. 이산보(李山甫)는 충성스럽고 미더워 의지할 만한 사람으로는 온 조정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습니다만, 이이와 정철에 대한 하문을 받들어 소견을 정직하게 진달하였기 때문에 즉시 물리침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윤근수(尹根壽)와 박점(朴漸) 등은 정도(正道)를 지켜 동요하지 않은 전공(前功)이 드러나 있고, 충신을 편들고 간신을 배척한 후효(後效)가 명백하건만 모두 방붕(邦朋)이니 방무(邦誣)니 하는 것으로 지목하였는데,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해수(李海壽)는 이이를 깊이 이해하였고, 백유함(白惟咸)은 성혼을 도타이 신뢰했다는 것 때문에, 일체 탁란(濁亂)이라는 것으로 공박하였습니다. 또 신응명(辛應命)은 영변(寧邊)으로 쫓겨났고, 유공신(柳拱辰)은 평사(評事)로 좌천당하였습니다. 윤정(尹渟)ㆍ김권(金權)ㆍ김서생(金瑞生)ㆍ이항복(李恒福)ㆍ홍인상(洪麟祥)ㆍ윤섬(尹暹) 등은 한 번 이이가 훌륭하고 성혼이 옳다는 말 한마디를 했다가 모두 배척당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신진(新進)의 간택(揀擇) 또한 이발(李潑)과 허봉(許篈)의 지시만을 따랐으니, 이는 일새(一世)의 영재(英才)들을 인솔하여 불충 불효(不忠不孝)의 지역으로 몰아넣는 처사였습니다. 양사기(楊士奇)는 청렴하고 삼가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이이의 선(善)에 심복하여 자주 말을 했었기 때문에 두 번이나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빼앗겼습니다. 윤기(尹箕)는 장흥(長興)에서 칼을 짚고 일어나 충의(忠義)의 의기를 장하게 드날렸고 남의 허물을 직언(直言)한다는 것으로 정철의 추허(推許)를 받았기 때문에 일생 동안 궁벽한 곳에서 보냈습니다. 이민각(李民覺)은 일찍이 선산(善山)의 수재(守宰)로 있었는데 이때 허봉(許篈)이 아버지 병에 빨리 달려가지 않는 것을 보고 의심하여 이우(李瑀)에게 말하였더니, 그 말이 이이에게까지 들렸습니다. 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자 허봉이 진주 목사(晉州牧使)에게 은밀히 촉탁하여 공박하게 하였습니다.
서익(徐益)이 육진(六鎭)에 사명을 받들고 갈 적에 직접 이이에게 방략(方畧)을 지시받았었는데, 이 때문에 장사(將士)들에게 매우 경복(敬服)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서익은 남달리 이이의 죽음을 애도하였는데, 이를 이유로 그의 이재(吏才)까지 아울러 폐기시켰습니다. 김천일(金千鎰)은 마음속으로 이이의 선(善)함을 알고 나서는 시예(時譽 당시 요직에 있는 자들)에게 사색(辭色)을 낮추지 않았기 때문에 담양(潭陽) 백성들의 ‘한 임기 동안만 더 있게 해 달라.’는 소원을 대관(臺官)에게 촉탁하여 묵살시켰습니다. 이의건(李義健)ㆍ이희삼(李希三)ㆍ변사정(邊士楨)ㆍ정운룡(鄭雲龍) 등도 모두 이발 때문에 폐기당하였고, 이이 때문에 좌죄(坐罪)되어 중상당하였습니다. 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이 정도인데 신이 모르고 있는 사람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송익필(宋翼弼)은 송사련(宋祀連)의 아들이지만, 학문이 깊고 언행(言行)이 방정하여 아비의 허물을 충분히 덮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이와 성혼이 모두 외우(畏友)로 대우하였고, 교회(敎誨)할 때도 사람의 마음을 잘 감발시켰습니다. 때문에 송익필에게 배운 김장생(金長生)과 허우(許雨) 같은 이들의 행의(行義)가 경외(京外)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어진 이를 구함에 있어 송익필을 천거한 것은 그를 지나치게 두둔한 것이 아니었건만, 이를 탓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산해(李山海)가 송익필에게 ‘그대가 이이가 죽고 나서부터 구의(舊誼)를 끊었다면 후환(後患)이 없었을 것이다.’ 하였고, 이발(李潑)ㆍ이길(李洁)은 또 송익필이 정철과 평소 도탑게 지낸 것을 시기하여 몰래 해당 관원을 사주하여 사조(四朝)의 양적(良籍)을 모두 폐기시키고, 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환천(還賤)시켰습니다.
아, 이이 한 사람이 죽고 나자 모든 사람이 제자리를 잃게 된 그 사연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정도입니다. 이런 상태로 계속 나간다면 앞으로 이량(李樑)과 윤원형(尹元衡)을 위하여 복수하려는 자가 왕망(王莽)처럼 요직(要職)에 앉게 되어도 항의(抗議)하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이와 성혼이 심의겸(沈義謙)과 절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서인(西人)의 당(黨)이 아니고 뭔가.’ 합니다. 그러나 심의겸은 젊어서 의롭다는 소문이 있었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어서는 모든 선유(先儒)의 포시(褒諡)에 대한 일을 남보다 더욱 힘썼었습니다. 그가 호새(湖塞)를 안찰할 적에 사기(士氣)를 진작시키고 풍속을 도탑게 하였으므로 그 뜻이 숭상할 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이와 성혼이 평소 교분을 맺어온 터이니, 어찌 뜬말을 믿고서 끊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심의겸도 늘 이 두 사람을 사모하여 왔습니다만, 부론(浮論)이 일어날 적에 이이는 서로 방문하는 자취를 끊었고, 성혼은 조용히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런데도 문객(門客)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성주(聖主)를 속인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대저 이이는 타고난 천품이 고상한 데다가 오랫동안 더욱 힘써 경륜(經綸)하는 학문은 경사(經史)를 환히 궁구하였고, 효제(孝弟)의 행실은 신명(神明)에까지 통하였습니다. 또 문사(文詞)와 모려(謀慮)는 언제나 조신(朝紳) 가운데 탁월하였고, 물러가는 것은 쉽게 여기지만 나아가는 것은 어렵게 여겨 지키는 것이 확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로 명주(明主)의 포장을 받아 발탁되었으니, 어찌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와 결탁하여 요직에 올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정철은 술을 좋아하고 색을 즐기기 때문에 이이가 천거(薦擧)한 것이 부당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말하는 사람이 정철의 단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기는 하지만, 실은 정철의 심사(心事)를 모른 것입니다. 정철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장(杖)을 맞다가 죽었고 자부(姊夫) 계림군(桂林君)은 머리 깎고 중이 되었는데도 죽임을 당하였으니, 주색에 빠진 체한 것은 실로 완적(阮籍)과 같이 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호남(湖南)을 안찰할 적에 형수(兄嫂)가 순천(順天)에 살고 있었습니다. 정철의 소첩(少妾)이 형수를 따라 같이 살고 있었는데, 정철이 순천에 3일 간 머물면서 날마다 형수에게 가서 문안하고 나서는 돌아와 관사(官舍)에서 숙박, 감히 소첩과 사담(私談)을 나눌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다. 이는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공부가 다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1개월 간 술을 끊었으니, 성혼의 시(詩)에서도 이것을 증험할 수가 있습니다. 얼음 같은 결백성과 사심 없는 공평심이 있었기 때문에 시장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이이 두 대부(大夫)가 헌부(憲府)에 있을 적에만은 각사(各司)의 횡렴(橫斂)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저 동인(東人)들은 정철을 천거하면서 자신들은 뒤로하였다는 것으로, 오래도록 노여움을 품고서 임금을 미혹시키고 국시(國是)를 변경하여 어지럽혔습니다. 이것이 신이 하늘을 우러르면서 크게 탄식하는 이유입니다.
신이 이 세상에서 사사(師事)한 사람은 3인인데,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이지함(李之菡)입니다. 이 3인이 성취한 학문은 각기 다르지만 깨끗한 마음에 욕심이 적은 것과 지극한 행실로 세상에 모범을 보인 것은 같습니다. 신이 이분들의 만분의 일이나마 본받으려 했으나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독(提督)에 임명되었을 적에 자신의 옹졸함은 돌아보지 않고 이 3인이 신을 가르치던 교법(敎法)으로 두루 선비들을 가르쳤던 바 이를 비방하는 말이 강호(江湖)에 만연하여 현자(賢者)의 뜻을 손상시키고 우자(愚者)의 허물을 가중시켰습니다. 지금 신이 이이와 성혼의 무리라는 말을 듣고는, 달관(達官)은 절교(絶交)를 선언하고 공부하는 학생들도 대부분 등을 돌림은 물론 무례한 자라고 질타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떼 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이 못난 탓으로 사우(師友)까지 욕을 당하고 있으니, 실로 자신을 돌아보매 부끄럽기 짝이 없고 반면 삼가 성주(聖主)를 위해서도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러나 소(疏)를 올린 지 10일이 되어도 비답(批答)이 내리지 않았다. 선생은 또 혈성(血誠)을 기울여 상소(上疏), 다시 사정(邪正)의 분별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내용이 더욱 절실하였다. 상께서 비답하기를,
“그대가 소장(疏章)을 올린 지가 오래되었다. 근래 내 마음이 편치 못하여 읽어 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즉시 비답하지 못하였다. 그대는 임소(任所)로 돌아가든지 머물러 기다리든지 마음대로 하라.”
하고, 인하여 전교하였다.
“바른말을 구함에 따라 소(疏)를 올려 진달하였으니 진실로 가상한 일이다. 해당 관사에 내려 조처하고 나서 결과를 보고하라.”
이렇게 되자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상께서 근엄한 말로 준절하게 나무랐다. 이발ㆍ김홍민(金弘敏) 등도 뒤이어 같은 내용의 소를 올렸고, 윤탁연(尹卓然) 등도 탑전(榻前)에서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상께서는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또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정여립(鄧汝立)의 흉패(凶悖)함을 한착(寒浞)과 후예(后羿)에 견주어 논하였다. 또 글을 지어 문묘(文廟)에 고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정사(政事)를 논하지 말라.’는 분명한 훈계가 전하여 오고 ‘행실은 고상하게 하고 말은 겸손하게 하라.’는 지극한 훈계도 있습니다. 그리고 달콤한 말로 나라를 망치는 것은 공자(孔子)도 미워하였고, 자기 임금을 무능하다고 하는 자는 맹자(孟子)도 적(賊)이라 하였습니다. 헌(憲)은 지난가을 사우(師友)가 무고받은 것을 애통히 여겨 대궐(大闕) 아래 소를 올렸고, 다시 어리석은 정성을 다하여 또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현명하신 우리 임금께서 고치시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자들은 이를 엄폐시키려고 온갖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이러니 이 나라 장래의 근심이 옛날 홍수(洪水)나 맹수(猛獸)의 걱정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조정의 의논이 안정되지 않은 것을 도리어 헌(憲) 때문이라고 탓하면서 임금을 보좌하는 공보(公輔)들이 자리를 비운 지가 한 달이 넘었으며, 학사(學土)들은 모두 이론(異論)을 믿고 헌에게 배우다가는 모두 미치광이가 될까 두려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준걸(俊傑)들을 성취시키기는 기약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생의 자리에 앉아 있을 면목이 없어 이제 마음을 다 쏟아 임금께 세 번 호소하고 산골로 돌아가 주명(誅命)이 도착하기를 기다겠습니다. 아, 기용되면 나아와서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물러가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소자(小子)가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과감하게 외면하는 것은 선성(先聖)께서도 개탄한 일입니다. 명정(明庭)에 배사(拜辭)하니, 길이 사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소를 조정에 전달하여 주도록 방백(方伯)에게 요청하였다. 당시의 방백은 권공징(權公徵)이었는데, 틀림없이 큰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굳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옥천(沃川)으로 돌아와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면서 학문의 강론으로 일생을 마칠 것같이 하였다.
이때 왜추(倭酋)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자기의 임금 원씨(源氏)를 시해(弑害)하고 아울러 도주(島州)까지 죽인 다음 조정을 엿보러 사신을 보내왔다. 이렇게 되자 온 조정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면서 감히 척절(斥絶)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이 소문을 듣고 개연히 소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은 삼가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놀라 목욕재계하고 대궐을 바라보면서 소를 짓습니다.
생각건대, 문왕(文王)은 국면(國人)과의 교제에 있어 신(信)을 주로 하였고, 유자(有子)도 ‘신(信)이 의(義)에 가까우려면 말한 대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또 《역경(易經)》 송괘(訟卦)의 상(象)에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는 맨 처음을 삼가서 잘해야 한다.’ 하였고, 정자(程子)의 전(傳)에는 ‘맨 처음을 삼간다는 뜻은 교린(交隣)을 삼가고 계권(契卷)을 분명히 한다는 유(類)가 이것이다.’ 하였습니다. 역대(歷代)로 교린에 있어 신의(信義)를 주로 하지 않고 일의 맨 처음을 삼가지 않았다가 패망(敗亡)한 경우를 명백히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일본 사신은 무슨 명분이 있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계평자(季平子)가 소공(昭公)을 쫓아내고 나서 제(齊)ㆍ진(晉)과 화친을 맺고, 사마소(司馬昭)가 위주(魏主)를 시해하고 오(吳)ㆍ촉(蜀)에 위엄을 과시한 경우와 같다고 봅니다. 반드시 왜국(倭國)의 사고(事故)를 갖추어 묻고 그들의 죄를 성토(聲討)하고 나서 절교하소서. 그런 다음에 제 환공(齊桓公)이나 진 문공(晉文公)처럼 의거(義擧)를 일으킨다면, 앉아서 그들의 마음을 공벌(攻伐)함은 물론 스스로 우리나라를 강하게 하는 것도 될 것 같습니다.
아, 신하가 임금을 쫓아내는 것은 인륜(人倫)의 큰 변고인 것으로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국사(國事)를 도모(圖謀)하는 자로서 비록 무기를 들고 가서 주멸(誅滅)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차마 사신(使臣)을 교환하여 그들의 성세(聲勢)를 도울 수야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여러 날 동안 의를 창도하여 거절하자는 의논이 있었다는 말을 못 들었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대신(大臣)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저들 사신의 입국(入國)을 준절히 거절할 수가 없다면, 모름지기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국내의 사고(事故)를 갖추어 묻고 전왕(前王)을 폐출(廢出)시킨 것이 국인(國人)들이 다 같이 통분하게 여긴 데서 행해진 일이 아니라면 드러내어 그들의 사신을 거절하소서.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임금을 해치고 나라를 저버린 사람은 이웃 나라의 역관(驛館)에도 머물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서성(徐盛)의 한마디가 형정(邢貞)의 공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이지고(李知誥)의 죄가 드러나자 남당(南唐)이 진기(振起)되지 못한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가령 신왕(新王)에게 드러난 치적(治績)이 있고 구주(舊主)에게는 폐할 만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동황(東皇)이라 일컫는 것은 부당합니다. 우리나라는 명(明) 나라를 존경하고 있는 터이라서 이 사실을 주문(奏聞)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이번 기회에, 서계(書契)에 쓰여 있는 위호(僞號)를 제거한 뒤에야 관(關)을 열어 왕래하게 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覇道)를 확정하는 것이 이번 일에도 결판날 것입니다. 아, 갈백(葛伯)이 동자(童子) 하나를 죽이자 탕(湯) 임금은 이를 쳤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 신하가 임금을 쫓아냈는데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천하 후세에 전하의 명단(明斷)이 탕 임금과 같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증자(曾子)는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의 부(富)는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상대가 부를 내세우면 나는 인(仁)으로 대적할 것이고 상대가 벼슬을 내세우면 나는 의(義)로 대적하겠다. 내가 무엇 때문에 위축되겠는가.’ 하였습니다. 일개 필부(匹夫)로서도 인(仁)과 의(義)를 굳게 지키면서 오히려 진 나라와 초 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크나큰 제후(諸侯)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제후로서는 삼가 왕법(王法)을 지키면서 어진 이와 재능 있는 이를 임용(任用)하여 인(仁)으로 인심을 단결시키고 의(義)로 이웃 나라에 본을 보인다면 이는 인도(人道)를 잘 지키는 것이어서 사방(四方)이 경계하여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 경공(齊景公)은 이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끝내 제(齊) 나라의 강대함을 가지고도 눈물을 흘리면서 오(吳) 나라에 딸을 시집보냈으니, 이는 맹자(孟子)가 이른바 사방 천 리의 지역을 가지고도 남을 두려워한 것으로, 또한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에 이공 성중(李公誠中)이 관찰사(觀察使)로 있었다. 그는 풍신수길이 저희 임금을 시해하였는지의 여부를 상세히 알 수 없을 뿐더러 소(疏)의 내용에 몇몇 대신(大臣)들을 직접 배척하고 있다는 이유로, 상께 전문(轉聞)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도보로 대궐에 나아가면서 또 한 통의 소를 지어, 올리지 못했던 두 통의 소와 함께 가지고 갔다. 그 소의 대개(大槪)는 다음과 같다.
“가령 부득이하여 일본과 통호(通好)를 해야 한다면, 청컨대 세 가지 일을 가지고 왜사(倭使)에게 갖추어 물은 뒤에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천하가 명(明) 나라로 일통(一統)된 것은 하늘이 정해 준 것이니, 일본은 참호(僭號)를 급히 제거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둘째는 저들에게 잡혀간 어민(漁民)들로서 저들의 향도(向導)가 되어 도리어 우리나라를 해치는 자들은 불가불 돌려보내야 하며, 셋째는 저들은 재화(財貨)를 탐하여 욕심이 끝이 없으니, 세폐(歲幣)의 숫자를 어쩔 수 없이 줄여서 정(定)해야 합니다.”
또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쳤으니, 파출(罷出)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를 열람한 상께서는 크게 노하여 급히 불사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정원(政院)에 전교하였다.
“조헌(趙憲)의 소(疏)는 내가 차마 볼 수 없어서 이제 불살라 버렸다.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나의 나쁜 점을 크게 써서 후세에 경계시키라.”
선생(先生)은 드디어 물러가서 처사(處士) 서기(徐起)를 방문하였더니, 처사가 매우 나무라기를,
“토정 선생(土亭先生)이 공(公)을 원대(遠大)한 기국으로 여겨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기대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진소양(陳少陽)과 호담암(胡澹菴) 같은 부류가 하던 일을 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소.”
하고는, 벽을 향하여 돌아앉아 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은,
“시험 삼아 제 소(疏)를 읽어 보아 주십시오.”
하였으나, 처사는 머리를 저으면서,
“진실로 보고 싶지 않소.”
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스스로 자신의 소를 읽었다. 채 반도 못 읽었는데 처사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의관(衣冠)을 갖추고 제배(再拜)하면서 사과하였다.
“공(公)의 이 소대로 시행한다면 우리나라가 오랑캐가 되는 것을 면할 수있겠소. 공은 홍수(洪水)를 다스리고 맹수(猛獸)를 몰아낸 분들과 같소.”
기축년(1589, 선조22) 여름 선생은 또 도끼를 짏어지고 대궐(大闕)에 나아가 조정의 득실(得失)과 군소배(群小輩)들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에 대해 극론(極論)하였고, 또 성학(聖學)을 밝히고 형벌(刑罰)을 줄이고 사치(奢侈)를 경계하고 기욕(嗜欲)을 절제하고 부세(賦稅)를 덜어 주라고 청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역경》 손괘(損卦)의 정자(程子) 전(傳)에 ‘손(損)의 뜻은 지나친 것을 덜어서 중(中)을 이루어 주고, 부말(浮末)한 것을 덜어서 본실(本實)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천하의 해(害)는 모두가 부말한 데서 발생된다. 집을 크게 짓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궁실(宮室)에서 시작된 것이고 잔인하고 혹독한 것은 형벌(刑罰)에서 시작된 것이고 무력(武力)을 남용하는 것은 정토(征討)에서 시작된 것이고 지나친 인욕(人欲)은 봉양(奉養)에서 시작된 것으로, 근본 취지와 멀어지게 되면 해(害)가 되는 것이다. 선왕(先王)이 근본을 제정하여 놓은 것은 천리(天理)이고, 뒷사람이 부말한 데로 흐른 것은 인욕 때문이다. 따라서 손(損)의 뜻은 인욕을 덜어 내고 천리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 때의 왕제(王制)를 가지고 오늘날의 일과 세세히 비교하여 보소서. 천리에서 나온 것이 얼마이고 인욕에서 나온 것이 얼마입니까. 옛날 대우(大禹)는 죄인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눈물을 흘렸고, 송 인종(宋仁宗)은 구운 양고기를 먹지 않았고, 홍치황제(弘治皇帝 명 효종(明孝宗))는 닭과 양 잡는 것을 감하게 하였습니다. 고금에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몸이 병을 않는 것같이 여겨서 죄 없는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니겠으며, 검소함을 솔선하여 근원을 밝힘으로써 백관(百官)을 바꾼 것이 아니겠으며, 덕(德) 있는 이를 급급히 존경함으로써 백성들을 화합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만민(萬民)이 모두 화합하여 이로부터 천명(天命)이 연장될 것입니다.
임금이 학문 강론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까닭은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고 본성(本性)을 회복하여 실효(實效)를 나타냄으로써 일상생활의 행동거지가 모두 천리대로 올바르게 함은 물론, 동포(同胞)가 다 같이 제 곳을 얻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역경》 익괘(益卦)의 상(象)에는 ‘바람과 우레가 서로 돕는 것이 익(益)이니, 군자는 그 이치를 이용하여 선(善)을 행하고 허물을 고친다.’ 하였고, 정자(程子)는 ‘선을 행하기는 바람처럼 빨리하고 허물 고치기는 우레처럼 신속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또 손괘(損卦)의 상(象)에는 ‘산 아래 못이 있는 것이 손(損)이니, 군자는 그 이치를 이용하여 분노와 사욕을 억제한다.’ 하였고, 그 주(註)에 ‘분노를 징계하기는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하고 사욕을 억제하기는 골짜기를 메우는 것처럼 하라.’ 하였습니다. 사람이 인격을 연마하는 데 있어 가장 중대한 것은 이 두 가지만 한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바람과 우레처럼 스스로 면려하시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는 마음을 버리시고, 산이 무너져 내리고 골짜기를 메우듯이 하는 것처럼 큰 힘을 기울이소서. 그리하여 깊이 생각하고 사욕을 다스리는 것은 홍범(洪範)의 훈계를 본받으시고, 널리 어진 이를 찾는 것은 성탕(成湯)의 훈계를 본받으소서. 그렇게 하면 세상이 평강(平康)하여 정직(正直)으로 다스릴 수 있고 대대로 황극(皇極 제왕(帝王)의 대도(大道))을 지켜 가는 것이 눈앞에 놓여 있는 탄탄대로를 가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제 경공(齊景公)은 말이 천사(千駟)나 되었지만 죽는 날에 백성들이 덕이 있다는 칭송을 하지 않았으며, 백이(伯夷)ㆍ숙제(叔齊)는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지만 백성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백이ㆍ숙제가 부자이기 때문에 일컫는 것은 아니니,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생각해 보소서. 주자(朱子)는 ‘재화(財貨)는 누구나 다 같이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혼자 독점하려 한다면 백성들도 분기하여 쟁탈전을 벌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바라건대 성주(聖主)께서는 제 경공을 귀감으로 삼아 재화를 천(賤)하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겨 끝을 처음처럼 삼가소서. 그리하여 안으로는 부자(父子)의 친함을 도탑게 하시고 밖으로는 군신(君臣)의 의를 밝히시어, 후도(侯度)를 삼가고 왕제(王制)를 준행하소서. 그리고 왕손(王孫)들과 종실(宗室)들에게도 신(臣)의 진언을 환히 공개해 보이시어, 백이ㆍ숙제가 백세토록 존대받는 것이 훌륭한 궁실과 넓은 전야(田野)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효양(孝讓)의 기풍을 도타이하여 얻게 된 것임을 명백히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어진 이를 친히 하고 스승에게 나아가 염치의 기풍을 배양하고 이재(利財)를 멀리하게 하소서. 그러면 모든 관료(官僚)들도 보고 감동하여 분수를 알아 탐심을 절제하게 될 것입니다.”
또 현사(賢邪)의 분별에 대해 극론(極論)하였다.
대저 선생(先生)은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두 선생을 독신(篤信)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선생을 배척하는 사람은 모두 소인(小人)이라 하였고, 두 선생을 존숭하는 사람은 모두 군자(君子)라 하였으며, 논의가 격렬하여 때로 중도(中道)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급기야는 치죄(治罪)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여관(旅館) 주인들도 받아 주지를 않았고 친구들도 문을 닫고 만나 주지 않았으나 유독 상공(相公) 심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만이 날마다 찾아와 시(詩)로 위로하였다. 그 시에 “종이에 가득한 광언은 모두가 충정(忠情)이요, 기름 끓는 가마솥 앞에서도 성명을 떠받드는구나.[狂言滿紙皆忠膽 鼎鑊前頭戴聖明]” 하였다.
이렇게 되자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이 번갈아 가면서 소장(疏章)을 올려 귀양 보내기를 청하면서 도리를 모르는 미치광이라고 하기도 하고 음험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께서는 10일이 되어도 윤허하지 않다가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도 차자를 올려 논하는 데 이르러서야 마침내는 길주(吉州)의 영동역(嶺東驛)에 유배(流配)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금부(禁府)에 내리라고 명하니, 이졸(吏卒)들도 모두들 탄식하였다.
“조 대인(趙大人)은 충직으로도 도리어 이런 화(禍)를 당한단 말인가.”
이때 원수같이 미워하던 사람들은 고소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만은 귀양 가는 길을 뒤따라 와서 털옷을 건네주고 시(詩)로 전별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양구 한 벌을 멀리 떠나는 사람에게 부치노니, 바람결에 눈물이 갓끈을 적시려 하누나. 멱라(汨羅)의 회사부를 이어서는 안 되니, 여생을 보중(保重)하여 성명을 위로하소.[一領羊裘寄遠行 臨風只欲淚沾纓 湘潭莫續懷沙賦 重保餘生慰聖明]” 선생은 옥천(沃川)에서 도보로 영(嶺)을 넘어 2천여 리를 가느라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비록 채서산(蔡西山 채원정(蔡元定))이 귀양 갈 적에 발에서 피가 흘렀다고 하지만 선생의 경우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의 기모(氣貌)와 용색(容色)은 조금도 괴로워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철령(鐵嶺) 이북에 전염병이 매우 치성하여 죽는 사람이 10에 5, 6명이나 되었다. 선생의 장남 완기(完基)는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고, 소제(小弟) 전(典)과 노복 2명은 모두 죽었다. 선생은 매우 애통한 가운데서도 전혀 공포심이 없었고, 사방에 쌓인 시체 속에서도 밤을 낮 삼아 그치지 않고 강송(講誦)하였다. 그리고 간혹 직접 병가(病家)를 찾아가 약(藥)을 지어 주어 구활(救活)하기도 하였지만 끝내 아무 탈이 없자,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정기(正氣)가 천지에 뻗쳐서 전염병이 범하지 못한다.’ 하였다. 선생은 생일을 당하여 글을 지어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올렸다.
“못난 불효자는 선훈(先訓)을 소홀히 여기고 함부로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이곳 영동(嶺東)으로 귀양을 왔습니다. 이렇게 부모님께서 낳아 주신 날을 멀고 먼 벽지(僻地)에서 맞게 되니, 부모님의 의용(儀容)이 길이 생각나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돌아다니는 혼기(魂氣)는 못 가는 데가 없는 것으로 마음에 유념하여 정성을 들이면 나타나는 것입니다. 흠향(歆饗)하소서.”
이보다 앞서 무자년(1588, 선조21) 봄에 풍신수길이 또 사신을 보내어 화친(和親)을 요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사신을 보내어 오자 조정에서 전일 침구(侵寇)한 상황에 대해서 힐문(詰問)하였다. 그랬더니, 풍신수길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도망하여 가 향도(向導)가 된 자와, 동모(同謀)하여 노략질한 몇몇 적왜(賊倭)를 잡아 현소(玄蘇)ㆍ의지(義智) 등을 통하여 바쳐 왔다. 조정에서는 모두들 기뻐서 서로 축하하면서 통신사(通信使)로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보내어 사례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선생은 이 소문을 듣고 또 소를 올렸다.
“형인(刑人)이 세 번이나 월형(刖刑)을 당했어도 계속 진소(進訴)한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옥(玉)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준(張浚)이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열 번이나 소를 올리고도 중지하지 않은 것은 마음에 간직한 것이 충(忠)이었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듣건대, 일본 사신(使臣)이 반 년간이나 관사(館舍)에 머물러 있으면서 패려한 말로 기탄없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겠다.’고 떠들어도, 온 조정이 공포에 떨면서 이원호(李元昊)와 같은 그 간사함을 질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朝鮮)의 사기(士氣)가 이 지경으로 꺾여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더욱 신의 스승인 이이(李珥)의 죽음이 있고 나서는 글 읽는 사람이 우리 임금의 좌우에 없게 된 것을 탄식합니다.
예부터 성패(成敗)가 어찌 군사(軍士)의 강약에만 달렸을 뿐이겠습니까. 춘추(春秋) 시대(時代) 열국(列國)의 제후들 가운데 초(楚) 나라가 제일 강하였으나 제 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을 기용하여 의리에 의거하여 말을 하니, 소릉(召陵)의 전투에서 싸우지도 않고 맹약(盟約)을 이루었습니다. 항우(項羽)는 싸움을 잘하여 천하에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나 한 고조(漢高祖)가 군사를 동원하는 데는 명분(名分)이 있어야 한다는 동공(董公)의 말을 따른 결과,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패배하였고 슬픈 노래 우미인가(虞美人歌)를 부르고 나서 드디어 자살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이 시역(弑逆)의 죄를 짓게 되면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다는 산 증거입니다. 이런 사람이 살아 있을 적에는 혹 바람과 우레를 부리는 재능이 있었을지라도 인도(人道)에 어긋나게 되면 하늘이 돕지 않는 법입니다. 여기에서 도의(道義)의 기운은 만 명의 군대보다도 웅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어진 사람에게는 적(敵)이 없다는 맹자(孟子)의 훈계가 저토록 분명하게 전하여 오는 것을 증험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근래 가뭄과 노략질당하는 일로 걱정이 깊어 백성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습니다. 따라서 방어할 계책이 전혀 없기 때문에 드러내어 배척하지 못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저들은 이리 같은 탐욕을 품은 자들로 실제로는 왕래하면서 수신(修信)하는 데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천(山川)의 험이(險易)와 도로(道路)의 원근(遠近)을 알아서 우리나라를 유린하려는 계책을 세우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당당한 우리나라는 아직 자용(資用)의 은택이 끊기지 않았으니, 흩어진 병졸을 모으면 스스로 지킬 수가 있습니다. 어찌 사술(詐術)에 빠져 억지로 본의 아닌 맹약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지금 세상에서 왕손만(王孫滿) 같은 사람을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게 하소서.
즉 그대들이 통신사(通信使)를 보내기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강하여 은밀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대의 나라를 습격할까 우려해서인가, 아니면 우리나라가 약한 데다가 기근(譏饉)에 시달리는 것을 요행으로 여겨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것인가. 은밀히 군대를 이끌고 이웃 나라를 습격하는 것은, 우리 선조(先祖) 때부터 해오지 않던 일인데 내 대(代)에 와서 차마 전의 아름다움을 말살할 수 있겠는가. 남의 나라의 재변(灾變)을 요행으로 여겨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사서(史書)에서도 부도(不道)한 일이라고 기롱하여 온 것인데, 그대들이 새로 집권(執權)하여 안정되지 않은 이때에 또 이 경계를 범하려 하는가. 아비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자들은 공자와 맹자가 배척했었다. 원왕(源王)이 어떻게 종말을 맞았는지는 내가 상세히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비록 통신사를 보내려 해도 나의 경사(卿士)들이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다. 앞으로 1백 년 안에 만일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노략질을 금즙(禁戢)시킨 다음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교화를 대대적으로 편다면, 그때 가서 통신사를 보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남만(南蠻)의 월상씨(越裳氏)는 여러 나라를 거쳐 한 번 중국에 왔을 뿐이었지만 만대토록 이를 가상히 여기고 있으니 교린(交隣)의 의의에 있어 부산스럽게 왕래하는 것을 귀히 여길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보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기필코 군대를 이끌고 오겠다면, 나는 비록 부덕한 몸이지만, 우리나라의 장사(將士)들은 자못 임금을 사랑하는 의리를 알고 있고 변방에서 수자리 살고 있는 군졸들도 부모의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죽을힘을 다하여 성(城)을 굳게 지킬 것이다. 사신이 상대국의 임금을 미혹시킨 죄는 《춘추(春秋)》에 분명히 드러나 있으므로 지금 신하들이 이 사실을 명(明) 나라에 주문(秦聞)하여 주벌(誅罰)을 가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와 쟁론(爭論)하는 것은 각기 자기 임금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 용서하여 돌려보내겠다.
이런 내용으로 제도(諸島)에 두루 알리소서. 그렇게 하면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드러나게 되고 사리가 명백하여 범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때의 방백(方伯)인 권징(權徵) 공은 또 소(疏)의 사어(詞語)가 너무 준절하여 반드시 당국자(當國者)들의 무함에 빠질 것이라 여겨 글을 잘못 쓴 곳이 있다는 것을 핑계로 재삼 물리쳤다. 마침 이때 정여립(鄭汝立)이 모반(謀反)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자 자살(自殺)하였고, 그 여당(餘黨)들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호남(湖南) 생원(生員) 양천회(梁千會)ㆍ양산도(梁山璹) 등이 소를 올려 선생의 방환(放還)을 요청하였던바, 상께서는,
“당초에 귀양 보낸 것도 실은 내 뜻이 아니었다.”
하고, 즉시 방환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은 돌아올 적에 북령(北嶺)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궁궐(官闕)에는 임금님 은혜가 두텁고 / 北闕君恩重
남주(南州) 고향엔 어머님 병이 위급하네 / 南州母病深
마천령(磨天嶺) 되넘는 오늘 / 磨天有歸日
감격(感激)의 눈물 옷깃 적시네 / 感淚自盈襟

처음 선생이 정여립의 모반을 듣고 또다시 소를 지어 모반의 조짐이 싹튼 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갖추어 논(論)하고, 또 통신사를 왜국에 보내게 되면 틀림없이 교활한 오랑캐의 꾐에 빠지는 것임을 논하였다. 이 소를 권공에게 다시 올려 달라고 부탁하니, 권공이 선생에게,
“공(公)은 이미 일을 논한 것 때문에 바야흐로 귀양와 있는 몸이오. 더구나 지금 역옥(逆獄)이 크게 벌어져 있어 인심이 흉흉한 판국이오. 통신사를 보내어 우호 관계를 맺기로 조정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 소는 무익(無益)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화(禍)를 부르게 될 것이오.”
하니,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국가가 위태로워지는 기미가 눈앞에 닥쳐 있는 것을 목도하였으면 신하된 입장에서는 힘을 다하여 간쟁해야 하는 것이오. 만약 일신의 화복(禍福)만을 생각하여 주저한다면, 이것이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이겠소. 그리고 죽은 정여립을 공이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으니, 살아 있는 풍신수길이 온다면 공은 어떻게 조처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자 권공은 어쩔 수 없어 전의 소(疏)와 아울러 상달(上達)하였는데, 상께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이 다시 마천령을 넘고 싶은 모양인가.”
선생이 아직 조정에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던 홍성민(洪聖民) 공이 선생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주의(注擬)하였다. 이를 본 상은,
“이 사람은 가벼이 등용(登用)할 사람이 아니다.”
하니, 홍성민이 상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고쳐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의망하였다. 그랬더니, 상께서는 대로(大怒)하여 홍성민을 내쳐 경상 감사(慶尙監司)에 임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곧바로 달려와 대궐 아래에다 거적을 깔고 꿇어앉아 3일간을 꼼짝 않고 대죄(待罪)하였다. 도성(都城)의 사서(士庶)들이 몰려와서 구경을 하고는 선생의 충의(忠義)에 감복하여 이렇게 감탄하였다.
“하늘이 조 대인(趙大人)을 탄생시킨 것은 이 나라의 사직(社稷)을 위한 것이다.”
경인년(1590, 선조23) 12월에 영남 지방(嶺南地方)을 유람하였는데, 이때 제월당(霽月堂)에 올라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초상에 배알하고 나서 글을 지어 제사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아, 선생이시여,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한 몸에 지니셨습니다. 이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셨고 사도(斯道)가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아, 선생이시여, 만고(萬古)의 빛이로소이다.”
또 참판(參判) 박팽년(朴彭年)의 사당(祠堂)에 참배하고 조문(吊文)을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한 세상을 살면서 몸을 바쳐 임금을 섬긴 사람은 이루 열거한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 바쳐 임금을 섬기면서 죽어도 변치 않은 사람을 찾아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단지 몇 사람뿐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利)만을 추구하여 의(義)를 망각한 때문으로, 어린 임금은 끝내 부탁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成三問)) 등 여러 분과 함께 집현전(集賢殿)에서 같이 하명(下命)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인심이 옮겨 가고 천명이 고쳐졌어도 선생의 마음은 천만번을 죽을지언정 변치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군신(君臣)의 의(義)는 천지(天地) 사이에서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으니, 선생의 절개는 태양처럼 빛나고 선생의 이름은 이 세상 다하도록 끝없이 전해 갈 것입니다.
이것이, 헌(憲)이 사당(祠堂)에 참배하면서 더없이 사모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야은(冶隱 길재(吉再))이 살던 곳과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묘당(廟堂)도 모두 찾아보고 사모하는 뜻을 표하였다.
이해에 결국 통신사를 보냈다. 풍신수길은 또 현소(玄蘇) 등을 보내어 회사(回謝)하고 ‘명(明) 나라를 칠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때문에 온 조정의 상하가 허둥지둥 어떻게 조처해야 할 줄을 몰랐다. 선생은 옥천(沃川)에서 평민의 자격으로 대궐에 나아가 일본 사신의 목을 베고 이 사실을 중국에 알리자고 청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은 삼가 듣건대,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돌아오자마자 적선(賊船)이 뒤따라와 바다에 웅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저들의 꾐에 빠져서 중국을 칠 경우에는 우리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어지게 되고, 또 저들이 기회를 노려 불시에 습격하여 올 경우 맞상대하기는 우리 변방 방비가 너무도 허술합니다. 기필코 싸우자니 조충국(趙充國) 같은 경략가가 없고, 저들을 거절하는 데 있어서도 원(元) 나라의 사신을 영접하지 말자고 항의(抗議)한 정몽주(鄭夢周)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진회(秦檜)와 왕륜(王倫)이 나라를 그르치자 임안(臨安)이 거의 함몰되었고,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이 땅에 떨어지자 군부(君父)에게 화(禍)가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앞에 놓고 보니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노여움 때문에 머리카락이 곤두서서 눈물을 닦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고증하여 보건대, 《역경》 복괘(復卦)의 초구(初九)에 ‘복은 머지않아 선(善)에 돌아가는 것으로 후회가 없으리니, 크게 길(吉)하리라.’ 하였고, 정자(程子)의 전(傳)에는 ‘복(復)은 선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잘못한 지 오래지 않아 돌이킨다면 후회가 없을 것은 물론, 크게 선하고 길(吉)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비괘(比卦)의 단사(彖辭)에 ‘편안하지 못하여 왔는데도 미루면[後] 건장한 사람[夫]이라도 흉하다.’ 하였고, 정자의 전에는 ‘사람이 스스로 안녕(安寧)을 보전할 수가 없어서 바야흐로 와서 친비(親比)하기를 구하니, 이를 얻으면 안녕을 보전할 수 있다. 만약 유아독존(惟我獨尊)으로 자신만을 믿고 친비하기를 구하는 뜻을 미루면 건장한 사람일지라도 흉한 것인데, 유약(柔弱)한 사람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오늘날의 일을 헤아려 보건대, 안위(安危)와 성패(成敗)의 기미가 매우 촉박한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오직 급히 일본 사자의 목을 베고 빨리 이 사실을 중국에 알린 다음, 그 사지(四肢)를 찢어서 유구(琉球)의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어 온 천하로 하여금 노여움을 함께하게 함으로써 이 적(賊)을 대비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대로 전의 잘못을 만회하고 뒤에 올 흉(凶)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이만주(李滿住)에게 중추(中樞)의 자급(資級)을 준 임명장(任命狀) 하나 때문에 중국의 미움을 샀고, 장녕(張寧)이 와서 힐책(詰責)할 때에는 세조(世祖)가 무안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馬]을 바쳐 사죄하였고 중국이 이만주를 토벌하러 갈 적에는 1천 8백 명의 무과인(武科人)과 온 나라의 물력(物力)을 다 바쳤습니다. 더구나 풍신수길이 ‘중국을 치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는 이 악랄함은 이만주 정도가 아님은 물론, 저들의 유언비어에 말려 우리가 꾐에 빠지게 되면 이는 중추의 자급을 준 문제에 견줄 일이 아닙니다. 만일 중국에서 왜적의 간사한 꾀였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무서운 노여움을 발하여 소정방(蘇定方)과 이적(李勣)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죄를 따졌던 것처럼 토죄(討罪)하여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주(聖主)께서는 어떻게 사과하시겠으며, 백성들은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중국에서 소정방과 이적 같은 군대를 보낼 겨를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나라에 대해 ‘서로 손잡고 오랑캐가 되었다.’고 여겨 사관(史官)이 사책에 기록한다면, 당당한 예의지국(禮義之國)으로서 또한 매우 수치스럽고 욕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종조(祖宗朝) 2백 년 간의 수치를 가까스로 정성을 다 기울여 씻었는데, 전하께서는 천만년토록 전해 갈 욕(辱)을 미처 제때에 씻어 버리지 못한다면, 삼강과 오상이 이로부터 땅에 떨어질까 우려스럽습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께서도 반드시 제향이 끊길까 슬퍼하실 것이고, 반면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신민(臣民)들에게도 윗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도리를 따지기가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 이심(利心)을 품고 허물을 꾸미는 신하는 혹 팔짱을 낀 채 화(禍)를 자초하면서 ‘저들을 격노(激怒)시키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시(城市)와 초야(草野)의 백성들은 모두 입을 모아 ‘왜사(倭使)를 베지 않으면 나라가 진기되지 못한다.’ 하고 있습니다. 어찌 정당한 이치가 없는데도 공자(孔子)가 제후(諸侯)를 미혹시키는 사자(使者)는 베어야 한다고 했겠으며, 어찌 정당한 이치가 없는데도 호전(胡銓)이 싸우기도 전에 의기가 백 배나 고조된다고 했겠습니까.
아, 정강(靖康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과 건염(建炎 송 고종(宋高宗)의 연호) 연간에 금(金) 나라 오랑캐와는 화친(和親)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양시(楊時)ㆍ이강(李綱)ㆍ장준(張浚)ㆍ호안국(胡安國)이었는데 이들을 당인(黨人)으로 지목하여 기용하지 않고 내쳤습니다. 간신(姦臣)들이 나라를 그르침이 예부터 으레 이와 같았습니다. 성주(聖主)께서 사서(史書)를 읽으실 적에도 틀림없이 송(宋) 나라 임금에 대하여 분개하신 점이 있을 것입니다. 마식(馬植)이 돌아오자마자 금 나라의 군대가 하수(河水)를 건넜고, 왕륜(王倫)이 양자강(揚子江)을 건너자마자 올출(兀朮)이 남쪽으로 뒤쫓아 왔었습니다. 남의 다리를 베고 졸면서 일말의 의심도 없이 ‘오랑캐의 진정은 믿을 만하다.’ 하는 사람은 단연코 임금을 기망하는 간신인 것입니다. 아, 금 나라는 송 나라에 대하여 날마다 침탈하기 위한 계책만 세웠는데도 진회(秦檜)의 무리들은 금 나라 오랑캐의 실정을 깊이 숨기고 오직 땅을 떼어 주자는 한마디만을 주장하여 공전(攻戰)의 방비를 해이시켰습니다. 만약 장준ㆍ한세충(韓世忠)ㆍ악비(岳飛)ㆍ유광세(劉光世) 등이 죽을힘을 다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구자(龜玆) 지역도 보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풍신수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날마다 병탄(倂呑)할 계책만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살해하고 은밀히 자신의 심복(心腹)인 평의지(平義智)를 보내어 대신 대마도를 지키게 함으로써 우리의 왼팔을 꺾고 첩보(諜報)의 길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신장(信長)을 잇달아 보내어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게 함으로써 불시에 공격할 수 있는 계책을 세우게 하였으니, 불측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전율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저들의 사자를 중국 사신이나 다름없이 성대하게 대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적사(賊使)가 두 길로 나누어 올라 올 적에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각 고을에서는 수재(守宰)가 이민(吏民)을 거느리고 역원(驛院)에 나아가 문후(問候)하면서 여러 날을 머문 채 방비(防備)에 관한 일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노(倭奴)가 우리나라의 장리(將吏)를 천한 노예처럼 깔보는데도 감히 한마디도 예의(禮義)를 가지고 따지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 어찌 통곡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아, 육가(陸賈)가 정색(正色)하니 오만하게 걸터앉았던 위타(尉佗)가 굴복하였고, 범중엄(范仲淹)이 답서(答書)를 불사르자 이원호(李元昊)의 오만무례함이 꺾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수종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자기 임금의 기개를 장하게 만들었고, 이치에 의거한 한마디로 상대의 흉봉(凶鋒)을 꺾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김성일(金誠一)의 무리는 1천 석(石)의 곡식에 국악(國樂)까지 싣고 가 적(賊)을 즐겁게 했는가 하면, 헌원(軒轅)이 치우(蚩尤)를 격파시킨 도구(道具)를 모두 오랑캐가 획득하게 만들었습니다. 왜추(倭酋)의 간사함은 절대로 헤아릴 수가 없는데도 김성일 등은 본국에 돌아와서 왜적이 침략해 오지 않는다고 아뢰어 장사(將士)들의 의지를 해이하게 하였습니다. 당시에 이른바 순수한 덕을 지닌 대신(大臣)이란 사람들은, 이들이 사명을 잘 수행하고 돌아왔다며 송 나라 때 진회(秦檜)가 왕륜(王倫)을 칭찬하듯 하여 왕륜이 금 장종(金章宗)에게서 얻었던 총애를 왜추에게서 얻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나라를 욕되게 한 무례한 자라 하더라도 권세 있는 간신에게 빌붙으면 순서에 따라 높은 벼슬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공의(公義)가 격발할까 두려워하여 ‘풍신수길이 참으로 반역(叛逆)한 것은 아니다.’ 합니다만, 한착(寒浞)을 순신(純臣)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죽게 된다면, 자공(子貢)이 유세(遊說)하여 제후(諸侯)의 군대를 동원, 오(吳) 나라의 허를 찔러 노(魯) 나라를 보존시킨 것을 본받아 연(燕) 지방이나 초(楚) 지방 가는 길에서 쓰러져 죽더라도 기어이 나라를 보존시키고 싶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성주께서 신(臣)을 살려 준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겠고, 하늘이 사나이로 태어나게 한 뜻에도 절로 부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 리 남해(南海)에 사신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으면, 원컨대 신(臣)에게 일절(一節 사신 임명의 뜻)을 빌려 주시어 말단 사행(使行)에 끼워 주소서. 그러면 주야로 서쪽으로 달려가서 현소(玄蘇)와 평조신(平調信)의 두괵(頭馘)을 중국 조정에 바치고, 삼가 신포서(申包胥)가 통곡한 정성을 본받아 우리 임금님의 심사(心事)를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다행히 중국 황제가 불쌍히 여겨 남쪽 국경으로 갈 수 있는 말[馬]을 빌려 주신다면, 적왜의 사지(四肢)를 남양(南洋)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어 군대를 정돈하고 시기를 기다리게 함으로써 기어이 이 적왜로 하여금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게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신이 비록 길 위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노모(老母)가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恥辱)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다. 사나운 구름이 개지 않고 있어 날씨가 늘 음산합니다. 신은 국가(國家)에 대한 걱정으로 울분이 폭발하여 흐르는 피눈물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첩황(貼黃)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왜사(倭使)가 이미 동평관(東平館)에 들어왔으니, 신의 소장(疏章)이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임금을 현혹시키는 이 왜사의 목을 베어 달려가 중국에 고하지 못하겠으면, 반드시 감옥에 구금시키고 주문(秦聞)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중국에서 현소와 평조신을 생포하여 곡절(曲折)을 캐묻는다면,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저들은 틀림없이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반드시 우리를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열 명의 유응규(庾應奎)가 금(金) 나라의 조정에서 1백 일을 굶으면서 호소하더라도 절대로 성주를 위하여 변명할 도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모든 나라들이 보고 듣는 것은 물론, 이들이 중국의 조정으로 모두 집결되고 있는 것이 실정인 이상, 지금 숨기려고 해도 이는 국가의 과실을 드러내고 화단(禍端)을 여는 것이 될 뿐입니다. 천자의 군대(軍隊)가 출동하기 전에 혹 양국충(楊國忠) 같은 간신을 베고 이임보(李林甫) 같은 자를 죄주더라도 이 나라 사직(社稷)의 부끄러움은 실제로 깨끗이 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호전(胡銓)이 소(疏)를 올려 먼저 왕륜(王倫)과 손근(孫近)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한 것처럼 지금 조정 간신들의 목을 베어 종묘사직에 사죄해야 하고, 다음으로 공손술(公孫述)과 살리갈(撒離喝)의 사자를 베어야 한다고 한 것처럼 왜적의 사자를 목 베어 중국에 사죄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이라야 성주의 영명(令名)이 천하에 널리 전해질 것이고, 일단 유사시에도 도움을 받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성탕(成湯)의 성무(聖武)가 밝게 드러나 전포된 것은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주께서는 신(臣)의 소를 은밀한 곳에 두어 동평관 사람으로 하여금 얻어 볼 수 없게 하소서.”
이 소가 들어가자 상께서 좌우(左右)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조헌(趙憲)이 누차 망녕된 소를 올리다가 귀양까지 갔었는데도 아직도 중지할 줄 모르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로다.”
선생께서는 승정원(承政院) 문밖에 서서 3일 간이나 하명(下命)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답보(答報)가 없자, 이어 주춧돌에다 머리를 부딪쳐 얼굴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섰었는데, 어떤 사람이 고초를 스스로 감수하는 것을 기롱하자,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년에 산골짜기로 도망갈 적이면 틀림없이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를 지어 올렸고, 중국에 올릴 주문(奏文)과 유구(琉球)ㆍ대마도(對馬島)ㆍ일본(日本)의 유민(遺民)들에게 효유하는 글도 스스로 지었으며, 현소(玄蘇)를 베어야 한다는 죄목(罪目)과 영남(嶺南)ㆍ호남(湖南)에서 왜적을 대비할 방책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소에서 논진(論陳)한 내용은 전소(前疏)와 다를 것이 없었으나 말은 더욱더 절실하였다. 이때 승정원에서는 선생의 소 내용이 상서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법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날 대사간(大司諫) 홍여순(洪汝諄)이 이에 대하여 아뢰었다.
“조헌이 소를 진달하였는데도 승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소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 줄은 모르겠으나, 이렇게 하면 옹폐(壅蔽)하는 폐단이 생길 것 같습니다.색승지(色承旨)를 파직하소서.”
그러나 상께서는 그 승지를 추고(推考)하라고만 명하였다. 선생은 이로부터 국사(國事)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전리(田里)로 돌아가서 늘 하늘을 우러르며 길이 탄식하였다. 중국에 올리려고 지었던 주문(奏文)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신(臣)은 듣건대, 천자(天子)는 천하의 의주(義主)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황위(皇位)를 정(定)하셨으므로 하늘이 실로 도와주시고, 천하 만민에게 덕택을 베푸시므로 신인(神人)이 서로 돕습니다. 따라서 온 천하에 혈기(血氣)가 있는 모든 사람은 받들어 존대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고금을 통하여 하늘을 거스른 자는 반드시 망하였고 상도(常道)를 어긴 자는 반드시 멸망당하였으니, 이 이치는 태양처럼 환합니다.
신의 나라는 동쪽으로 일본(日本)과 이웃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신의 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와서 굳이 우호 관계 맺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탐문하여 본 결과, 원씨(源氏)의 권세가 쇠약해지자 그 신하 풍신수길이란 자가 칼을 들고 궁정(宮庭)으로 들어가 곧바로 왕(王)의 머리를 베고 이어 좌우의 근신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왕을 시해(弑害)하고 자리를 찬탈한 역적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臣)은 사신을 교환하였으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저들의 답서(答書) 내용이 지극히 패악(悖惡)스러웠고, 무수한 병선(兵船)을 만들어 군대를 싣고 와서 중국을 치겠으니 신의 경내(境內)의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우호 관계를 요구하다가 끝에 가서는 헤아릴 수 없는 악(惡)에 빠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이 못난 탓으로 적에게 속임을 당하였기 때문이니, 비록 중국 조정에서 극벌(極罰)을 내리더라도 감히 사양할 길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풍신수길이 자기 임금을 시해하고 중국을 침범하려 한 죄를 갖추 수죄(數罪)하여 조서(詔書)로 여러 나라에 효유(曉諭), 모두 함께 의(義)에 의거하여 저들의 죄를 성토하게 함으로써 저 추악한 무리들의 병선(兵船)이 한 조각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 주신다면, 황제의 은택이 태양처럼 밝게 비추어 끝없이 전해져 갈 것입니다. 겸하여 아뢰건대, 저들이 다시 보내온 사신 현소와 평조신 등은 간사하고도 거만하여 부도(不道)한 말을 함부로 지껄여대므로, 잠시도 천지 사이에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사람을 시켜 잡아 가두고 신문(訊問)한 다음 목 베었고, 그 수괵(首馘)을 중국 조정에 바칩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제께서는 멀리 있는 신이 하늘처럼 받들어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있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기에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본도(本島)의 유민(遺民)으로 하여금 기회를 타 역적을 토벌하게 한 다음 그대로 봉(封)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시면 해외(海外)의 창생(蒼生)들이 만세토록 길이 힘입게 될 것입니다.”
일본의 사자(使者) 현소 등을 처참(處斬)하기 위해 조정에 올리려던 글은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주역(周易)》 제사(繫辭)에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곤(乾坤)의 위치가 정하여졌고, 높고 낮은 것으로 진론(陳論)하였으니 귀천(貴賤)의 분별이 정하여졌다.’ 했다. 예부터 군신 상하(君臣上下)의 정해진 분수(分數)는 하늘과 땅처럼 분명하여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득이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반드시 걸(桀)ㆍ주(紂)ㆍ진(秦)ㆍ수(隋)처럼 극심하게 백성을 못살게 군 뒤에 탕(湯)ㆍ무(武)처럼 어질고 한 고조ㆍ당 고조처럼 사람을 죽이기를 즐기지 않는 이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혁명을 해도 백성들은 그대로 편안히 자기의 업(業)에 종사하는 상황이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만약 거짓과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아도 그대로 향유(享有)할 수가 있다면, 항적(項籍)이 어째서 자살하였고, 부견(苻堅)이 어째서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겠는가. 너희들은 풍신수길이 항적과 부견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가.
내 비록 부덕(不德)한 몸이지만 선왕(先王)의 전형(典刑)이 아직 있고, 또 윗사람을 친히 해야 하고 윗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의리를 익히 들은 곰처럼 사나운 군사와, 두 마음 품지 않는 신하가 있다. 너희들이 한 칼에 이들을 두렵게 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더구나 명(明) 나라가 만국(萬國)을 하나로 통일하여 모든 제후(諸侯)가 귀의하여 우러르고 있고, 우리는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섬겨 온 지가 이미 오랜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의리로 보면 임금과 신하 사이이고 은혜로 보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이다. 그런데 아들의 마당을 빌려 그 아버지를 치겠다고 하니,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강상(綱常)의 대역(大逆)이요, 오랑캐가 중국을 범하는 것은 천지(天地)의 대변(大變)인 것이다. 온 천하가 다 같이 분노하고 있는데 풍신수길이 현륙(顯戮 드러내어 죽이는 것)을 피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천지의 정분(定分)을 모르고 분주히 왕래하면서 남을 꾀어 악(惡)으로 빠뜨리기만을 일삼아 왔다. 일개 필부(匹夫)로서 제후를 미혹시킨 자도 공자는 목을 베어 머리와 몸뚱이를 나누어 놓았었다. 때문에 춘추법(春秋法)에 의거, 법사(法司)에 이송하여 처참(處斬)하노니, 너희들은 감히 원망하지 말라.”
대마도(對馬島) 및 일본(日本) 유민(遣民)을 효유하는 글은, 모두가 충의(忠義)를 격려(激勵)하는 내용으로 구군(舊君)을 위하여 원수를 갚게 하는 뜻이었다. 유구(琉球)에 보낸 격문(檄文)의 내용은, 미리 수군(水軍)을 정돈하여 중국에서 정토(征討)할 적에 도우라는 뜻이었다.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에서 왜적을 방비할 대책에 대해 논한 내용은, 산천(山川)의 험이(險夷)와 도로(道路)의 요해(要害)와 관방(關防) 진수(鎭戍)의 강약(强弱)과 허실(虛實)에 대해 상세히 기술(記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변장(邊將)ㆍ읍재(邑宰)와 충의(忠義)로 와서 쓸만한 사람에 대해서도 조목별로 모두 천거하였다. 그 뒤 변란이 일어나자 공(功)을 이루었거나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은 모두 선생이 천거한 사람들이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2월 부인(夫人) 신씨(辛氏)가 죽었는데 선생은 사변(事變)이 곧 닥칠 것을 짐작하고 서둘러 격식을 차리지 않고 집 뒤에다 장사 지냈다. 장사를 치르고 나서 선생은 문인(門人)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옛사람의 시(詩)에,
남들은 모두 와서 울지만 나는 노래 부르고 / 人皆來哭我來歌
그대처럼 땅에 묻힌 이보다 묻히지 못한 이가 많으리 / 似君埋少不埋多
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3월에는 김포(金浦)에 있는 선영(先塋)에 가서 참배하고 글을 지어 제사하였다. 그 내용은 앞으로 난리가 일어날 것이므로 영원히 하직한다는 것이었다. 4월 신묘일(辛卯日)에 적장(賊將) 풍신수길 등이 바다를 건너 마구 쳐들어와서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잇달아 함락하였다. 며칠 뒤에는 이미 조령(鳥嶺)을 넘었고,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다.
선생은 이런 변보(變報)를 듣고 통곡하였다. 그러고는 즉시 청주(淸州)로 달려가서 이우(李瑀)ㆍ이봉(李逢)ㆍ김경백(金敬伯) 등과 함께 의병(義兵)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태평 시대가 오래 계속되었던 탓으로 사민(士民)들이 병란에 익숙하지 못해 모두들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였다. 때문에 수습할 길이 없었다. 선생은 할 수 없이 옥천(沃川)으로 돌아와서 문인(門人) 김절(金節)ㆍ김약(金籥)ㆍ박충검(朴忠儉) 등과 함께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집하여 보은(報恩)의 차령(車嶺)을 차단하였다. 이곳에서 적과 맞부딪쳐 싸우다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문인이 힘을 다하여 싸운 끝에 적병을 퇴치하였다. 이로부터 적병이 감히 이 길을 거쳐서 서쪽으로 오지 못하였다. 이에 호남과 영남에 격서(檄書)를 보내어 의병을 모았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돌아보건대, 섬 오랑캐의 노략질이 순(舜) 임금 때 삼묘(三苗 남방의 오랑캐) 보다 더 불공(不恭)스럽다. 그래서 사람을 풀 베듯이 죽이기 때문에 원성이 온 나라에 가득하고, 임금 시해하기를 여우 사냥하듯 하여 그 죄가 하늘에까지 사무쳤다. 저들은 달콤한 말과 거짓 계책으로 처음에는 이(利)로 꾀어 사람을 속이더니, 끝내는 자취를 숨긴 채 몰래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남의 국토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파천하게 되어 민망하기 짝이 없고, 임금이 계신 변방(邊方) 하늘을 바라보니 아픈 마음 그지없다. 이런데 수십의 주현(州縣)에서 한 사람의 용감한 남아도 끝내 없을 줄은 생각 밖이다. 다행히 하늘이 우리 조선(朝鮮)을 도우시어 호남(湖南) 한 지역이 아직도 온전하니, 백성들이 조국을 생각하는 한 어찌 초(楚) 나라의 삼호(三戶)가 없을 수 있겠는가. 잔인하고 무도(無道)한 왜적을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머물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마음의 긴장을 풀지 않으면 신(神)도 감동함은 물론 사람도 따르게 되는 것이고 일을 이루려 한다면 하늘이 돕고 땅이 돕는 법이다. 맹세코 일본 오랑캐를 이 나라의 강역(疆域)에서 깨끗이 몰아내고 이씨(李氏)의 사직(社稷)을 기어이 붙들어 세우자.”
이때 순찰사(巡察使) 윤선각(尹先覺)이 여러 수령(守令)들과 함께,
“병정(兵丁)으로 나갈 만한 사람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은 의병(義兵)에 응모한 자가 많으니, 관군(官軍)에게 불리하다.”
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저지시켰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문인 전승업(全承業) 등과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 머물러 있는 곳임)를 향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공주(公州)에 들러 순찰사를 만나 보고는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역설하였다. 순찰사는 선생더러 머물러 같이 일을 도모하자고 청하였다. 선생이 순찰사와 함께 일한 지 며칠 안 되어 응모(應募)한 자가 1천 명에 가까웠다.
이때 안세헌(安世獻)이란 자가 있었는데, 본디 성품이 패악(悖惡)스럽고 행실이 좋지 못하였다. 그래서 난리가 처음 일어났을 적에 우리나라 사람을 많이 죽여 그 목을 베고 머리털을 깎아 왜적의 수급(首級)이라고 하면서 공훈(功勳)을 요구하였다. 선생이 그의 죄를 창언(倡言)하였더니, 안세헌이 이를 원망하여 순찰사에게 가서 이렇게 꾀었다.
“공(公)께서는 일도(一道)의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조그만 공로도 세우지 못하였는데, 조헌은 폐기(廢棄)되어 있다가 분기(奮起)하여 공보다 먼저 기선(機先)을 잡았습니다. 따라서 조헌이 뜻을 얻게 되면 반드시 공의 지체한 죄를 다스릴 것입니다.”
순찰사는 이 말을 옳게 여겨 각 고을에 공문(公文)을 보내어 의병(義兵)들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게 하였다. 또 청양 현감(靑陽縣監) 임순(任純)을, 군졸 1백여 명을 선생에게 예속시켜 주었다는 것을 죄목으로 삼아 공주의 옥(獄)에 잡아 가두고 군율(軍律)에 의거 다스리려 하니, 이미 모였던 의병들도 모두 흩어져 돌아갔다. 이에 선생은 글을 보내어 순찰사를 꾸짖었는데,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 물정에 소활(疎闊)한 서생(書生)으로서 적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는 있지만, 폭발하는 의분을 참을 수 없는 마음에서 백성의 원망과 울분에 따라 힘을 합쳐 토벌(討伐)한다면, 산천의 귀신도 의당 천노(天怒)를 도울 것이오. 그런데 임금의 애통한 교서(敎書)가 지척에 이르렀건만 봉행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내가 두루 군중(軍中)의 말을 듣건대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다 함께 왜적을 죽여야 한다고 하고 있소. 그런데 공은 몇 달 동안 군사를 징집하여 관(官)의 군량(軍糧)을 소비하여 가면서 수천의 군사를 양성하였으면서도, 강(江)을 경계로 스스로 방위(防衛)만 할 뿐 급급히 적을 치지도 않고 또 근왕(勤王)에도 뜻이 없는 채 못된 자의 이간질하는 말만 믿고서 충신(忠臣)과 의사(義士)의 기개를 꺾었으니, 공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이 글을 본 순찰사는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선생은 이미 주장(主將)의 마음을 거슬러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충청우도(忠淸右道)로 가니, 전 참봉(參奉) 이광륜(李光輪)과 사자(士子) 장덕개(張德蓋)ㆍ신난수(申蘭秀)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등이 모두 선생의 의(義)를 사모하여 따라왔다. 그리하여 관군(官軍)에 예속되지 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원근에서 모여 든 사람이 1천 6백여 인이었다. 그리하여 기치(旗幟)를 세우고 부서(部署)를 나눈 다음 정산(定山)과 온양(溫陽) 등지를 순무(巡撫)하면서 성세(聲勢)를 드날려 진정시키니,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드디어 홍주(洪州)를 거쳐 곧장 회덕(懷德)에 이르렀다.
이때에 왜놈들이 바야흐로 청주(淸州)를 점거(占據)하고 있었다. 방어사(防禦使) 이옥(李沃) 및 윤경기(尹慶祺)의 군대는 붕궤되었고, 오직 승장(僧將) 영규(靈圭)만이 홀로 왜적과 여러 날 대치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선생은 급급히 청주로 향하였고, 한편으로는 이옥에게 진격하도록 독촉하였다. 8월 1일에 영규의 군대와 합쳤고 드디어 성(城)의 서문(西門)으로 진격하였다. 선생은 직접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독려하였고 군사들도 모두 죽을힘을 다하였으므로, 왜적은 크게 패배하여 성안으로 퇴각하여 들어갔다. 아군(我軍)이 뒤따라 성에 오르려 할 때 갑자기 서북쪽에서 소나기가 몰려오면서 천지가 깜깜하여지니, 군사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선생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렸다고 하더니, 과연 사실이구나.”
드디어 징을 쳐서 진격을 중지시키고 조금 물러났다. 이날 밤 왜적들은 자기 군사들의 시체를 불태우고 몰래 북문(北門)으로 빠져 달아나 버렸다. 이로부터 충청좌도(忠淸左道)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도 이 소문을 듣고 모두 도주하였다.
한참 싸움이 격렬하였을 때 선생이 이옥에게 북문 밖에다 군사를 매복시키라고 하였으나 이옥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왜적들이 도주할 수가 있었다. 이래서 군중(軍中)이 모두 이옥을 원망하였다. 당시 어떤 여인(女人)이 적군이 있던 성안에서 나와 적들이 하던 말을 이렇게 전하였다.
“의병장(義兵將)의 용병법(用兵法)은 순찰사나 방어사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은 채 죽음을 무릅쓰고 곧장 전진하여 오니, 그 예봉(銳鋒)을 당해 낼 수가 없다.”
선생은 적을 격파한 뒤에 즉시 한 장의 소(疏)를 지어 아들 완도(完堵)와 전승업(全承業)을 시켜, 가지고 가서 행재소에 올리게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臣) 헌(憲)은 북쪽으로 관하(關河)를 바라보면서 사배(四拜)를 올리고 피눈물을 흘립니다.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사나운 왜적이 우리나라를 얕보고 침범하여 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잿더미로 만들고 성궐(城闕)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승여(乘輿)가 압록강 가에까지 다다랐으니, 혈기(血氣)가 있는 모든 사람은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더구나 어리석은 신은 일찍이 낭관(郞官)에 임명된 적이 있었고, 또 낮은 지위로 과격한 말을 했다가 여러 번 중죄(重罪)에 걸렸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축년(1589, 선조22) 이후로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성상(聖上)의 넓으신 자애(慈愛)를 받아 초야(草野)로 방환(放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몸소 농사지어 어머님을 봉양하게 해 주셨으니, 천지와 부모의 은혜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은 분의(分義)에 있어 으레 분골쇄신토록 성조(聖朝)의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또 신이 이미 두보(杜甫)가 봉상(鳳翔)의 행재소로 간 것처럼 못하였으니, 의리에 의당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힘을 다하여 싸워야만 대가(大駕)가 환도(還都)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외롭고 미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붙좇지 않으므로 다시 격서(檄書)를 보낸바 응모하여 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나 또 순찰사가 관군(官軍) 때문에 의병(義兵)의 응모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모였던 자들도 도로 흩어졌습니다. 신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동지(同志)들과 현역(現役)에서 빠진 사람 수백 명을 우선 모아 기치를 세우고, 군현(郡縣)으로 돌아다니면서 대중(大衆)을 초집(招集)하여 1천여 명을 모은 다음 북으로 진군(進軍)하려 했습니다.
또 신은 듣건대 당 현종(唐玄宗)은 거의 천하를 잃을 뻔하였으나 진현례(陳玄禮)의 간(諫)함을 받아들여, 갑자기 은애(恩愛)를 끊고 마외역(馬嵬驛)에서 양 귀비(楊貴妃)를 죽임으로써 법을 바로잡았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국충(楊國忠)의 목을 베어 창끝에 꽂았고, 이임보(李林甫)의 관(棺)을 쪼개고 그 시체에 매질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민심(民心)이 흡족하게 여겨 나라를 위하려는 마음이 솟구쳤고, 충신과 의사(義土)들이 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쳤습니다. 그리하여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 같은 이들이 손쉽게 공(功)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송 고종(宋高宗)은 강좌(江左 양자강 동쪽을 가리킴)에 가 있으면서도 이강(李綱)과 장준(張浚)의 말을 써 주지 않았고, 늘 왕황(汪黃)과 진회(秦檜) 등을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때문에 종택(宗澤)과 악비(岳飛)가 돌려 가면서 하북 지방(河北地方) 평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이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억제하였고, 심지어는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살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효종(孝宗)처럼 어진 임금으로서도 국토 회복의 대업(大業)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팔도(八道)에서 파괴된 고을이 몇 고을이고, 조정의 위령(威令)이 시행되는 곳이 몇 노(路)입니까. 지금 화의(和議)를 주장하면서 왜구(倭寇)를 불러들인 자들은, 간사하기는 진회보다 더 심하고, 나라를 그르치고 어진 이를 해치기는 이임보보다 더 심하고, 백성들에게 원한을 끼치기는 양국충보다 더 심합니다. 이런데도 아직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있음은 물론, 혹 자신들의 당(黨)을 요로(要路)에 앉히고 어진 이의 진로(進路)를 방해하기도 하고 있으니, 어떻게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기(士氣)를 진작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때 안세헌(安世獻)이 또 조용히 순찰사를 꾀었다.
“이제 듣건대 조헌이 소를 지어 영공(令公)을 극력 비방한다고 합니다. 만약 이 소가 상달(上達)되면 틀림없이 무거운 견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순찰사는 심복 부하를 보내어 수군(水軍)을 점검한다고 핑계 대면서, 소(疏)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을 못 가게 막아 강을 건널 수 없게 하였다. 전승업 등이 이 상황을 탐문하여 알고 소를 내어보였는데 헐뜯는 내용이 없자 겨우 배를 타도록 허가하였다.
이에 앞서 선생이 이옥을 만나 보고서, 속미(粟米) 수만 석(石)을 나누어 굶주린 백성들을 진구(賑求)하고 또 소 수백 두(頭)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일에 대비하게 함으로써 근본이 되는 기지(基地)를 만든다면, 백성들이 안집(安集)될 것은 물론 국가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도 밑받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극력 청하였다. 그러나 이옥은 자신이 공을 세우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쌓여 있는 곡식을 다 불태우고 떠나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미 순찰사와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니, 이 곡식을 남겨 두어 다시 적(敵)의 식량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선생은 드디어 근왕(勤王)하기로 결심하고 일로(一路)에 격문(檄文)을 보내고 나서 군대를 정돈하여 북쪽으로 행군, 온양(溫陽)에 이르렀다. 순찰사가, 선생이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면 자신의 비행(非行)을 낱낱이 발설할까 두려워하여 막하(幕下)의 선비를 중간에 내세워 이런 말로 선생을 설득시키려 하였다.
“네가 처음에는 공(公)과 사이가 좋았었소. 그런데 소인(小人)의 이간질하는 말 때문에 사이가 좀 좋지 않은 상태인 바, 내가 이를 이미 후회하고 있소. 그리고 청주의 전투에서 이미 공의 충의(忠義)에 감복한 바 있소. 이제는 공과 생사(生死)를 같이하기로 맹세하겠으니 작은 혐의를 풀고 큰 공을 세우기로 약속합시다. 이제 들리는 바에 의하면 금산(錦山)의 왜적이 호서 지방과 호남 지방을 침범할 기세라고 하니, 우선 후방을 교란시키고 있는 금산의 왜적을 같이 토벌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그런 다음 근왕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휘하의 장사(將士)들도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였다.
“왜적들이 유린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오직 호남과 호서의 한 조각 땅만 남았을 뿐입니다. 이곳마저 잃게 되면 나라를 회복시킬 길이 없습니다. 의당 먼저 금산과 무주(茂朱) 등에 있는 적들을 섬멸하는 것이 상책(上策) 입니다.”
선생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마침내 공주(公州)로 돌아갔다. 그러나 또 순찰사와 의논이 합치되지 않았다. 이는 순찰사가 단지 선생의 북행(北行)만을 저지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 실제로 같이 일할 뜻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많은 장사(將士)들이 순찰사에 의해 구속되었으므로 휘하(麾下)에 있던 사졸들이 점차 흩어져 가고 단지 7백 명의 의사(義士)만이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였다. 선생은 분연히 이 군사를 이끌고 8월 16일 금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때 이산겸(李山謙)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토정 선생(土亭先生)의 아들이다. 그가 수백 명의 군대를 이끌고 금산에서 패하여 퇴각해 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왜적이 을묘년에 호남 지방에서 패배당한 데 징계되어, 지금 금산에 웅거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정예병(精銳兵) 뿐입니다. 그리고 숫자도 수만 명에 달하는데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의당 병사들을 정돈하여 전세(戰勢)를 살펴 조처해야지 경솔히 대적(大敵)과 상대하지 마십시오.”
이 말을 들은 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맹세하였다.
“임금님이 지금 어떤 지경에 처하여 있는가. 이런 상황에 감히 이익과 손해를 말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욕(辱)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당연하다. 나에게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드디어 다시 영규(靈圭)의 군대와 연합하여 진군(進軍)하였다. 일찍이 호남 순찰사(湖南巡察使) 권율(權慄)과 18일에 일제히 일어나 협공(挾攻)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권율이 날짜를 바꾸자고 글을 보내왔으나 선생은 이때 이미 금산 10리 지점에 와 있었다. 왜군은 아군의 후원병(後援兵)이 없다는 것을 탐지하고 나서 미처 진(陣)을 정돈하기도 전에 역습하여 왔다. 선생은 군대를 삼대(三隊)로 나누어 교대로 나아가 공격하게 하고 나서 이렇게 영(令)을 내렸다.
“오늘은 한번의 죽음만 있을 뿐이다. 죽음과 삶과, 진격하고 후퇴함에 있어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군사들을 모두 영에 따르겠다고 맹세하고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힘을 다하여 싸운 결과 왜적을 세 번이나 물리쳐 거의 궤멸할 수가 있었는데, 아군은 화살이 떨어져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마침 해가 넘어가 양군(兩軍)이 서로 상대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자 군사들은 모두 사기를 잃은 안색이었지만, 선생은 태연한 의기(意氣)로 더욱 급하게 독전(督戰)하였다. 왜적이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드디어 장막(帳幕) 아래에까지 돌입(突入)하여 오자 부장(副將) 몇 사람이 선생을 탈출시키기 위해 극력 말에 올라 피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웃으면서 말안장을 풀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곳은 내가 순절(殉節)할 땅이다. 대장부로서 죽음이 있을 뿐, 난(亂)을 당하여 구차스럽게 모면할 수는 없다.”
그리고는 드디어 북채를 잡고 북을 두드리니, 군사들이 죽음을 한하고 다투어 나아가 심지어는 빈 활과 맨주먹으로 공방전(攻防戰)을 벌이면서도 대열(隊列)을 이탈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죽음을 면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비록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군(全軍)이 함몰되기는 했지만, 왜적의 전사자도 너무 많아서 기세(氣勢)가 크게 꺾였다. 남은 군사를 거두어 본진(本陣)으로 돌아간 왜적들의 울음소리가 들판을 진동시켰고, 자기들의 전사자를 3일 동안 운반하였으나 다 옮길 수가 없어 한군데에 쌓아 놓고 불태웠다. 그리고 나서는 무주(茂朱) 등처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들과 함께 모두 도주하였다. 이래서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이 온전할 수가 있었고 나아가서는 국가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니, 선생이 왜적을 좌절시키고 저지한 공로는 이루 열거할 수가 없다. 다음날 선생의 아우 범(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들어가 보니, 선생은 깃발 아래 쓰러져 있었고 그 곁에는 장사(將士)들의 시체가 빙둘러 서로 베고 쓰러져 있었다. 범은 선생의 시체를 등에 업고 옥천(沃川)으로 돌아와 빈소(殯所)를 차렸는데, 순절한 날로부터 4일이 되었지만 선생의 안색은 생시와 똑같이 부릅뜬 눈과 곤두선 수염에 노기(怒氣)가 등등하여 전혀 죽은 지 오랜 시체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선생의 큰아들 완기(完基)는 외모가 준수하고 성품이 남보다 뛰어나 평소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는데, 패전하게 되자 일부러 의관(衣冠)을 화려하게 차리고 선생을 대신하여 죽기를 바랐다. 그래서 왜적은 그가 주장(主將)인 줄 알고 그 시체를 난자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남보다 뛰어났고 의표(儀表)가 기이하여, 헌칠한 키와 큰 귀에 눈빛이 별처럼 빛났다. 젊어서부터 장엄하고 정중하고 의지가 굳세어서 사람들이 감히 농(弄)을 할 수가 없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릴 적부터 이미 어버이 섬기는 예(禮)를 알아서, 어버이의 명(命)이 있으면 반드시 무릎 꿇고 대답하였다. 또 어버이에게 올릴 글을 지을 때는 반드시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한 다음 썼다. 계모(繼母) 김씨(金氏)가 선생이 어렸을 적에 좀 소홀히 하였다. 어느 날 선생이 외가(外家)에 갔더니 외조모(外祖母)께서 계모 김씨의 처사를 두루 열거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너의 어미가 너를 이렇게 대하니,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
하니, 선생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가겠노라고 인사하고 돌아왔다. 그런 지 몇 달 뒤에 또 문안하러 갔더니, 외조모는,
“네가 어째서 오랫동안 오지 않았느냐.”
하니, 선생이,
“전에 왔을 적에 외조모님께서 제 어머니의 잘못을 직접 열거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로서 차마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감히 오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외조모는 매우 훌륭하게 여겼고, 이로부터 감히 다시는 김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선생이 아버지를 여읜 뒤에는 김씨가 선생을 대하는 것이 더욱 엄해져서 조금이라도 혐의스러운 점이 있으면 번번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선생은 효도하고 공경하면서 김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것으로 기약하여, 종일토록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김씨가 혹 몸이 불편할 적에는 의관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밤낮으로 침문(寢門) 밖에 부복(俯伏)하여 있었는데, 수십 일이 되어도 성의가 더욱 독실하였다. 평소에는 묵묵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였으나, 어버이의 곁에 있을 적에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하기 때문에 늘 화기가 애애하였다. 그리하여 김씨는 자기가 낳은 아들이 4인이나 되었지만, 하루도 선생의 집에 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선생이 전몰(戰歿)하자 김씨는 밤낮으로 통곡하면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을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생모(生母)는 낳았을 뿐, 참으로 내 아들이로다.”
선부군(先府君)이 임종(臨終)할 적에 쇠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가난하여 미처 사다 드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쇠고기만 보면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입에 넣지 못하였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글배우기를 즐겨하였으므로 스스로,
“하늘이 남아로 태어나게 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하였으니, 자부(自負)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한겨울 극심한 추위에도 다 해진 옷과 신발로 눈보라를 무릅쓰고 걸어서 스승에게 나아갔다. 또 아버지의 명을 받고 밭에 곡식을 해치는 새를 보러 갔을 적에도, 우선 밭두렁 머리에다 나무로 시렁을 만들고 책을 그 위에 올려놓은 다음 돌아앉아 생각하다가 의문 나면 펼쳐보곤 하였다. 서당에 가서는 자정이 넘도록 글을 읽었고 잠깐 눈을 붙인 뒤 닭울녘이면 또 일어나 글을 읽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몸소 나무를 해다가 어버이의 방에 불을 때면서 그 불빛에 글을 읽었다. 혹 들로 소 먹이러 나갈 적에도 반드시 책을 가지고 가 소를 따라다니면서 글을 읽었는데,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보면 수시로 소가 있는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였다. 선생은 밤마다 반드시 《중용(中庸)》ㆍ《대학(大學)》ㆍ《이소경(離騷經)》 출사표(出師表)를 읽었다. 읽다 보면 비분강개하여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조금 성장해서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제일 좋아하였는데 이를 모두 외었고, 나중에 익숙하게 되어서는 단지 목록(目錄)만 기록하여 가지고 길을 가거나 여관(旅館)에 묵을 적에는 차근차근 계속 생각하였고,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으면 그때마다 그 옆에 기록하여 둠으로써 스스로 참고(參考)하였는데,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였다.
선생의 공부는 한결같이 실천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늘 《대학》의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지켜야 하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읽을 적마다 세 번 되풀이하며 완미(玩味)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집에서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소학(小學)》을 근본으로 삼았고, 가르침을 청하여 오는 후생(後生)이 있으면 3, 40세에 이르렀더라도 반드시 먼저 이 《소학》을 읽혔다.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두 선생에게 《주역(周易)》을 공부하고 돌아와서는 문을 닫고 깊이 연구하였으며, 눈을 감고 생각하기도 하고 책을 펴고 읽기도 하였다. 따라서 《주역》을 읽은 횟수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점후(占候)와 추측(推測)하는 일에 대해서도 폭넓게 알았고 세밀한 부분까지 투철하게 꿰었다.
선생은 출입(出入)할 적에는 반드시 송명(松明 관솔)과 책상자를 싣고 다녔다. 일찍이 보령(保寧)의 여관(旅館)에서 이 상사(李上舍 상사는 생원이나 진사와 같은 뜻임)란 사람과 마침 같이 유숙(留宿)한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에도 선생은 종자(從子)에게 명하여 관솔불을 밝히게 하고 상자에서 책을 꺼낸 다음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꿇어앉아 간열(看閱)하였는데, 바로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이었다. 또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꺼내어 이 상사에게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책을 본 적이 있소? 행실을 수양하고 일에 대응하는 요점이 대략 여기에 갖추어져 있소이다. 선비로서는 우선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소.”
이 상사는 송구스런 마음으로 이 말을 귀담아 들었다. 선생은 행장 속에서 종이를 꺼내어 책 한 권을 만든 다음 여기에다 《격몽요결》을 옮겨 써서 건네주었다. 그러고 나니 닭울녘이 되었고, 이때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녘에 또 일어나 책을 보았다. 이 상사가 선생과 동행(同行)한 며칠 동안 잠시도 책 읽기를 중단하는 것을 못 보았고, 선생이 하는 말은 모두가 자신의 수양(修養)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과 힘써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이 후학(後學)을 권장하는 정성이 이러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양천강(陽川江)을 건너다가 중류(中流)에서 큰 바람을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어쩔 줄 모르고 아우성을 치면서 울부짖었으나 선생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움직이지 않고 의연히 앉아 있었다. 조금 있다 곧 바람이 멎었다. 배가 언덕에 닿자 배에 탔던 사람들이 성을 내면서 선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온 배의 사람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된 판국이었는데,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있었단 말이오.”
선생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運命)에 달려 있는 것이오. 아우성치면서 울부짖는다고 죽음을 면할 수 있겠소.”
선생은 잘못을 지적은 했지만 비교하여 따지지 않았고, 목소리와 얼굴빛은 더욱더 온화하게 하였다. 이때 사인(士人) 김후재(金厚載)란 자가 그 자리에 있다가 선생의 말에 크게 경복(敬服)하여 성내는 사람들을 타이른 뒤 절하고 갔다. 이때 선생의 나이 20세였다.
선생이 길주(吉州)로 귀양 갈 적에는 명(命)을 듣고 즉시 길을 떠났다. 의금부(義禁府)의 나졸이 만류하면서,
“이리로 올 적에 동료(同僚)들이 저에게 주의시키기를 ‘조 선생(趙先生)은 훌륭한 분이라서 명을 들으면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떠날 것이니, 그대는 저녁에 선생의 집에 가서 밤에 행장을 꾸리게 하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물게 왔습니다.”
하니, 선생은,
“임금의 명은 하룻밤이라도 지체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도보로 밤에 출발하면서 집안사람들에게 행장을 꾸려 뒤따라오게 하였다. 구례(舊例)에 역(驛)에 정배(定配)된 자는 반드시 역관(驛官)과 사적으로 통하여 모두 노복(奴僕)으로 자신의 신역(身役)을 대신 시켜왔으며, 또 아주 완전히 면제(免除)된 사람도 있었다. 선생이 영동(嶺東)에 정배되었을 적에는 홀로 그렇게 하지 않고 반드시 몸소 신역을 수행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조정에서 이것으로 죄진 자를 다스리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면하려 애쓴다면, 이는 임금의 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명(使命)을 띠고 이 지역을 지나는 관원(官員)들이 영동역(嶺東驛)에는 들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논자(論者)들은 모두들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의심하였다. 주자(朱子)도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다.
“만일 공문(公文)을 보내어 지시하는 일이 있으면 즉시 날마다 지팡이를 짚고 지부청(知府廳) 앞으로 가서 문안드리고, 공문을 보내어 압록(押錄)하게 하면 날마다 문안(文案)을 가지고 가 정복(呈覆)한다.”
선생이 어찌 들은 것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선생의 식견(識見)과 사려(思慮)는 반드시 올바른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에 근본 하였고, 시세(時勢)와 사위(事爲)의 변천을 참작하였다. 때문에 촛불을 밝히고 물건을 헤듯이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실로 억측(臆測)하는 것에 견줄 수는 없었다.
바야흐로 의지(義智)가 와서 우리나라를 엿볼 적에, 선생이 올린 소(疏)를 한결같이 우활하고 망녕된 것으로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 뒤 중국 조정의 장리(將吏)들이 과연 상변(上變 급변을 위에 보고하는 것)하였고, 또 우리나라에 문죄(問罪)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임진년 파천(播遷) 때에도 오히려 조선(朝鮮)이 왜적(倭賊)을 계도(啓導)하여 중국을 범(犯)하는 것이라 하였다. 만약 선생의 말이 당시에 받아들여졌더라면 어찌 이런 수욕(羞辱)을 당하였겠는가.
정유왜란(丁酉倭亂) 때 어떤 왜승(倭僧)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풍신수길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한때의 적(賊)이겠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만세(萬歲)의 적(賊)이다. 임진란 때 이웃 나라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풍신수길의 죄를 성토(聲討)하였더라면 화(禍)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선생의 말은 모두 공적인 의리(義理)에서 나온 것으로 역시 사정(事情)에 우활한 것이 아니었다.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이런 말을 하였다.
“선생께서는, 천 리(千里) 밖에서 수년(數年) 전에, 나타나지 않은 난(亂)의 조짐을 알 수 있는 분인데, 눈앞의 사정(邪正)을 분변하지 못했겠는가.”
이야말로 명언(名言)이라 할 수 있겠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혼자 대둔산(大芚山)을 유람하였는데, 어느 날 밥상을 받았다가 네 사람의 중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년에 변란이 일어나면 내가 틀림없이 싸우러 나가게 될 것이다. 오늘 이 밥을 같이 먹은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함께 일해야 할 것이다.”
중들은 괴이하게 여겨 건성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응낙하였다. 그 뒤 세 명의 중은 금산(錦山)에서 선생과 함께 죽었다. 나머지 한 명의 이름은 찬유(粲猷)인데 병이 들어 달려가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을 얘기했다고 한다.
또 연안 부사(延安府使) 신각(申恪)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권징(權徵)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년에는 틀림없이 왜란(倭亂)이 일어날 것이오. 속히 참호를 깊이 파고 성(城)을 증축하여 사수(死守)할 계책을 세우시오.”
하였으나, 권징은 편지를 보고 나서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비록 왜적이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어찌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임)에까지 침범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각은 평소 선생을 흠모해 오던 터이라서 즉시 수어(守禦)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였다. 뒤에 이공 정암(李公廷馣)이 결국 이 도구들을 가지고 연안(延安)에서 왜적을 격파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연안 백성들은 모두 신공(申公)과 이공(李公)의 공(功)을 사모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계책이 실제로 선생에게서 나온 것인 줄은 모르고 있다.
임진년 4월에 동남쪽에서 우레와 같은 거대한 소리가 들려오자 선생은 놀라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천고(天鼓 별 이름. 군려(軍旅)를 맡은 별) 소리다. 왜적(倭賊)이 반드시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의병(義兵)을 일으킬 적에는 밤에 천문(天文)을 살펴보고 나서는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한 다음 통곡하였다. 조금 있다가 또 하늘을 우러러보더니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화(禍)가 행조(行朝)에 이르렀는 줄로 여겼었는데, 다시 살펴보니 북쪽으로 들어간 두 왕자(王子)가 왜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도다.”
문인(門人)들이 이런 사실을 기록하여 두었는데, 왜적이 바다를 건넌 날짜와, 두 왕자가 사로잡힌 날짜들이 모두 들어맞았다.
선생은 사람을 대접함에 있어 귀천(貴賤)과 현우(賢愚)를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지성으로 대접하였다. 말과 행동은 매우 근엄하였으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절로 감복되었다. 때문에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들일지라도 선생을 군자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이 영동(嶺東)에 유배(流配)되었을 적에 전례(前例)에 따라 왕명(王命)을 수행하는 나졸(羅卒)에게 수고비를 주었더니, 나졸은 이를 받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에게도 양심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받는다면 어떻게 머리를 들고 사람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적소(謫所)에까지 압송하고 돌아갈 적에 그 나졸은 눈물을 홀리면서 차마 떠나질 못했었다. 또 선생의 아우의 시신(屍身)이 길주(吉州)에서 돌아올 적에는 연도(沿道)의 백성들이 모두들 탄식하면서 마음 아파하였고, 혹 인부와 말을 내어 서로 전하여 호송(護送)하기도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시체는 훌륭한 분의 아우이다.”
율곡 선생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여식(汝式 조헌)은 늘 당우(唐虞) 때의 지치(至治)를 단시일에 회복할 수 있다고 여겨, 변통(變通)할 줄 모른 채 요란이 일게 하고 있다. 그러나 숙달된 뒤에는 크게 쓰일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토정 선생이 당세의 인물을 논할 적에는 반드시 선생을 제일로 꼽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난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도(道)를 즐길 줄 알았으며, 명리(名利)의 굴레를 초연히 벗어났다. 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지성(至誠)에서 우러났다. 이런 사람은 옛사람 가운데 찾아봐도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우계 선생도 이렇게 말하였다.
“여식의 학문은 일취월장하고 있으니, 매우 큰일을 할 사람이다.”
그런데 율곡 선생은 일찍 작고(作故)하셨기 때문에 선생의 학문에 장족의 발전이 있었던 것은 못보았다. 선생의 문장(文章)은 뜻이 시원스럽게 통달하였으면서도 구비구비 곡절이 있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장중하고 근엄한 맛이 곁들여져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싫증 내는 일 없이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한다. 이제 선생의 봉사(封事) 약간 편이 인쇄되어 세상에 유행되고 있고, 집에 보관되어 있는 유고(遺稿) 또한 많다.
아, 선생은 이미 뛰어난 정기(精氣)와 강직한 성품(性品)을 지닌 데다 학문으로 연마하고 사우(師友)의 보도(輔導)를 받았으므로, 연원(淵源)이 깊고도 원대하였고 근기(根基)가 완벽하고도 근실하였다. 그리하여 조예(造詣)가 날로 고명(高明)하여졌고 실천(實踐)이 점차 순독(純篤)한 데 이르게 되었으며, 효제(孝悌)는 신명(神明)에 통하였고 충성(忠誠)은 금석(金石)을 뚫었으며, 호오(好惡)의 정당함은 흑백(黑白)을 구분하듯이 분명하였고 발용(發用)의 과단성은 강하(江河)를 터놓은 듯 줄기찼다. 출처(出處)의 분수를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이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가 없었고, 조수(操守)의 뜻이 확고하였기 때문에 도거(刀鉅)와 정확(鼎鑊)으로도 빼앗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언의(言議)와 사위(事爲)에 발현된 것이 모두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함은 물론 진실하고 정미하였으며, 요순(堯舜)ㆍ탕무(湯武)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공맹(孔孟)ㆍ정주(程朱)가 아니면 배우지 않았으니, 참으로 독실히 믿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죽음으로 선도(善道)를 지키는 군자라 하겠다.
가령 선생이 더 오래 살았고 학문에 더욱 힘써 그 양(量)을 채웠더라면, 성취(成就)한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여기에서 중지되고 말았으니, 이 슬픔 어이 견딜 수 있으랴. 난(亂)을 당하여 목숨을 바친 것은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소절(小節)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선생을,
“한 사람의 의사(義士)일 뿐이다.”
하니, 아, 덕(德)을 아는 이가 참으로 드물구나.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선생의 인품에 대해 만에 하나인들 논할 수가 있겠는가.
선생이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적에 행조(行朝)에서 이 사실을 듣고 가상하다는 하교(下敎)와 함께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미처 받아 보지 못하였다. 선생이 작고하자 이조참판(吏曹參判)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추증(追贈)하였고, 아들 완기(完基)와 함께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완도(完堵)는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임명하였고, 매달 선생의 집에 봉록(俸祿)을 지급하게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 있을 적에 선생의 중자(仲子)인 완제(完堤)를 불러 보고 음식과 베를 하사하였고, 시종관(侍從官)을 보내어 제사 지내 주었다. 또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고 조세(租稅)를 감면해 주었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선왕(先王 선조(宣祖))께서 선생과 선생의 선친(先親)에게 아울러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그 뒤에 서원(書院)을 건립하도록 윤허하였다. 서원이 건립된 뒤에는 표충(表忠)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고 봄가을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부인(夫人) 신씨(辛氏)는 본관(本貫)이 영월(寧越)이고, 사인(士人) 세함(世諴)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바로 완기(完基)이다. 완기는 무인(武人) 박표(朴彪)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후사(後嗣)가 없다. 완도(完堵)ㆍ완제(完堤)ㆍ완배(完培) 및 딸 둘은 모두 선생의 서출(庶出)이다.
금상(今上 인조(仁祖))이 즉위(卽位)한 처음 연신(筵臣)들의 의논에 따라 완도를 특별히 강음 현감(江陰縣監)에 임명하였고, 완제 역시 영숭전 참봉(永崇殿參奉)에 임명하였는데 벼슬이 전옥서 봉사(典獄署奉事)에 이르렀다.
강음 현감은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진(鎭)이고, 딸은 장응상(張應祥)에게 시집갔다.
전옥서 봉사는 권극복(權克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빈(鑌)이고, 이대춘(李大春)의 딸에게 재취(再娶)하여 2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순(錞)이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맏딸은 김추(金樞)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완배는 견대용(甄大用)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셋을 낳았는데 맏이는 박취현(朴就賢)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승담(李承聃)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외손(外孫) 김여량(金汝亮)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고, 김여옥(金汝玉)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숭정(崇禎) 19년(1646, 인조24) 8월 일에 삼가 기록한다.


[주D-001]권마성(勸馬聲) : 임금이 말이나 가교(駕轎)를 탔을 적과 봉명 고관(奉命高官)이나 수령(守令), 또는 그 부인(夫人)이 말이나 쌍교(雙轎)를 타고 행차할 때 위세(威勢)를 더하기 위하여 가늘고 길게 외치는 소리로 임금일 때는 사복시(司僕寺)의 하인(下人)이 하고 그 밖의 경우에는 역졸(驛卒)이 한다.
[주D-002]복합(伏閤) : 나라에 큰일이 있을 적에 조신(朝臣) 또는 유생(儒生)들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상소(上疏)하는 것이다.
[주D-003]명경과(明經科) : 식년 문과(式年文科) 초시(初試)의 한 분과(分科)이다. 관시(館試 성균관시)ㆍ한성시(漢城試)ㆍ향시(鄕試)에서는 4서 5경 즉 9서(書)를 고강하여 통(通)ㆍ약(略) 이상자를 입격시켰고 복시(覆試)에서는 9서 중에 7서를 통하고 2서를 약한 자를 입격시켰다. 전시(殿試)에서는 제술(製述) 등으로 시험하여 33인 이내에서 등급을 매겨 합격시켰다.
[주D-004]질정관(質正官) : 글의 음운(音韻)이나 기타의 일에 대한 의문점을 중국에 가서 질문하여 알아 오는 임무를 맡은 관원으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使臣)과 함께 갔었다.
[주D-005]창을 들고 …… 들어왔다 : 여기서는 제자가 선생보다 훌륭하다는 뜻. 후한(後漢) 때 정현(鄭玄)이 하휴(何休)를 사사(事師)하였다. 하휴는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ㆍ《좌씨고황(左氏膏肓)》ㆍ《곡량폐질(穀梁廢疾)》을 저술하였는데, 정현이 《발묵수(拔墨守)》ㆍ《침고황(鍼膏肓)》ㆍ《기폐질(起廢疾)》을 저술하여 공박하자, 하휴가 “강성(康成 정현)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창을 가지고 나를 치는구나.”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6]박약(博約)과 명성(明誠) : 박약은 사물의 이치를 널리 궁구하여 예(禮)로 절제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외표(外表)에 해당하고 《論語 雍也》, 명성은 본성(本性)을 밝히는 것으로 여기서는 내리(內裏)에 해당된다. 《中庸章句 第22章》
[주D-007]순황(荀況)과 양주(楊朱) : 순황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 사람으로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부정하고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사람이고, 양주는 역시 전국 시대 사람으로 노자(老子)의 무위독선설(無爲獨善說)에 따라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하였다.
[주D-008]나는 …… 바꾸라 :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자리를 깔고 있을 수 없다는 뜻.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曾子)의 병이 침중해 있을 때 증자가 깔고 있는 자리를 본 동자(童子)가 ‘화려하게 빛나니 대부(大夫)들의 자리인가 봅니다.’ 하니, 증자는 즉시 ‘그렇다. 내가 깔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즉시 바꾸라.’ 하고는, 자리를 바꾸자마자 운명(殞命)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9]승당(升堂)의 서열 : 공자 제자의 반열에 드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문인(門人)들이 자로(子路)를 공경하지 않자 공자는 ‘자로의 학문은 마루까지는 올라왔으나 아직 방에는 못 든 그런 경지에 있다.’ 했다.” 하였다. 승당의 뜻은 학문의 경지에 대한 척도를 나타낸 말이다.
[주D-010]정관(貞觀) …… 정통(正統) : 정관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이고, 원풍은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이고, 정통은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이다. 이 연간에 성묘 배향(聖廟配享)이 개정되어 실시되었다.
[주D-011]석전(釋奠) :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제사 지내는 의식(儀式)으로,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한다.
[주D-012]배자(褙子) :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으로 마고자같이 생겼으나 소매가 없고 양 옆구리의 귀가 겨드랑이까지 틔어 있다. 흔히 양단 천에 속에는 토끼ㆍ너구리ㆍ양 등의 털을 넣는다.
[주D-013]오복(五服) :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매복(每服) 5백 리씩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구역, 즉 전복(甸服)ㆍ후복(侯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이다.
[주D-014]조사(曹司) : 관직(官職)ㆍ계급(階級)ㆍ재능(才能) 같은 것이 말위(末位)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주D-015]친영(親迎)의 예(禮) : 신랑(新郞)이 육례(六禮)를 갖추어 신부(新婦)를 맞아들이는 것. 육례는 납채(納采)ㆍ문명(問名)ㆍ납길(納吉)ㆍ납폐(納幣)ㆍ청기(請期)ㆍ친영이다.
[주D-016]약정(約正) : 향약(鄕約) 단체의 임원(任員)으로 도약정(都約正)과 부약정(副約正)이 있다.
[주D-017]문소전(文昭殿) : 조선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혼전(魂殿)이다. 처음에는 신의왕후의 혼전으로 인소전(仁昭殿)을 두었다가 태조가 승하함에 따라 인소전을 이 이름으로 고치고 함께 모셨다.
[주D-018]상참(常參) : 의정부(議政府)의 대신(大臣)을 비롯하여 중신(重臣)과 시종신(侍從臣)들이 매일 편전(便殿)에서 임금께 국무(國務)를 아뢰던 일이다.
[주D-019]장률(贓律) :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관유물(官有物)을 사취(私取)하였을 경우와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한 경우에 가하는 율(律). 이 죄를 받게 되면 그 아들과 손자에게는 의정부(議政府)ㆍ육조(六曹)ㆍ한성부(漢城府)ㆍ사헌부(司憲府)ㆍ개성부(開城府)ㆍ승정원(承政院)ㆍ장례원(掌隸院)ㆍ사간원(司諫院)ㆍ경연관(經筵官)ㆍ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ㆍ춘추관(春秋館)ㆍ지제교(知製敎)ㆍ종부시(宗簿寺)ㆍ관찰사(觀察使)ㆍ도사(都事)ㆍ수령(守令) 등의 직책에 제수하지 않는다. 《經國大典 吏典 京官職》
[주D-020]사천(私賤) : 옛날 사인(私人)에 의하여 사역(使役) 또는 매매되었던 노예. 장정 노예 다섯 사람을 소 한 마리에, 젊은 여자 노예 한 사람을 은화(銀貸) 1만 5천 냥에 매매하였다고 한다.
[주D-021]옥하관(玉河館) :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사신(使臣) 간 사람들이 머무는 관사를 말한다.
[주D-022]신래례(新來例) : 관아(官衙)에 새로 임관되어 온 자가 고참자에게 상면(相面)이라는 명목으로 음식을 접대하던 일로, 지면(知面)이니 향미(鄕味)니 하는 등등의 수다한 명목이 있었다. 면신례(免新例)이다.
[주D-023]공자(孔子)가 …… 고한 것 : 여기서는 하찮은 말이라도 신중히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진성자(陳成子)가 제 간공(齊簡公)을 시해(弑害)하자 공자는 목욕재계하고 이 사실을 중시하여 노 애공(魯哀公)에게 고하였다.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라서 모두들 이를 큰 이변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으나, 공자는 인륜의 대변(大變)으로 여겼다. 《論語 憲問》
[주D-024]양관(兩觀)의 베임 : 법을 어기는 자는 용서 없이 처벌하여 징계를 보여야 한다는 뜻으로, 양관은 대궐문이다. 공자가 노(魯) 나라에서 섭정(攝政)할 때 다섯 가지 비위 사실을 들어 소정묘(少正卯)를 양관 앞에서 벤 일이 있다. 《孔子家語 始誅》
[주D-025]패도(覇道) : 인의(仁義)를 가볍게 여기고 무력과 권모술수로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왕도(王道)의 반대이다.
[주D-026]계수관(界首官)에 …… 제독(提督) : 계수관은 서울에서 각도(各道)에 이르는 본가도(本街道)의 연변(沿邊)이며 도계(道界)인 곳에 위치한 고을을 말하고, 제독은 교육을 감독하고 장려시키기 위해 두었던 관원이다. 각도의 계수관에 제독을 한 사람씩 두었다는 말이다.
[주D-027]안평중(安平仲)이 …… 저억한 것 : 제재를 당하여 등용되지 못하였다는 뜻. 제 경공(齊景公)이 공자를 기용하려 하였으나 안평중은 “유자(儒者)는 오만하여 스스로 잘난 체하고 겉만을 꾸미는 자들이니 쓸 수 없다.”고 진언하여 제지시켰다. 《史記 孔子世家》 전금은 유하혜(柳下惠)를 가리키는데 전은 성이고, 금은 자이다. 노(魯) 나라 대부 장문중(臧文仲)은 유하혜의 어짊을 알고도 기용하지 않았다. 《論語 衛靈公》
[주D-028]청요직(淸要職) :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임명하는 벼슬로 규장각(奎章閣)ㆍ홍문관(弘文館)ㆍ선전관청(宣傳官廳) 등의 벼슬. 지위와 봉록은 높지 않으나 이 관직에 임용되면 뒷날 고관(高官)이 될 수 있는 자리이다.
[주D-029]형이 …… 죽었고 : 형은 정자(鄭滋)를 가리킨다. 정자는 벼슬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의해 광양(光陽)에 안치(安置)되었고, 명종(明宗) 2년에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 죄가 가중되어 경원(慶源)으로 이배(移配)되던 도중 죽었다.
[주D-030]계림군(桂林君) :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 계성군 순(桂城君恂)의 양자로 이름은 유(瑠)이다.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안변(安邊)으로 도망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서울의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수(斬首)되었다.
[주D-031]한착(寒浞)과 후예(后羿) : 역적이라는 뜻이다. 모두 중국 고대 사람들로 후예는 하(夏) 나라 임금을 몰아내고 제위(帝位)를 찬탈한 사람이고, 한착은 후예를 몰아내고 제위를 찬탈한 사람이다. 《春秋左傳 襄公4年》
[주D-032]서성(徐盛)의 …… 불러일으키고 : 위(魏) 나라의 형정(邢貞)이 오(吳)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대궐 문을 들어갈 때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서성이 “우리들이 국가를 위하여 분발하지 못한 탓으로 이런 모욕을 당하게 되니, 수치스럽지 않은가.”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형정은 “강동(江東)의 장상(將相)들이 이러하니, 오래도록 남의 밑에 있을 나라가 아니다.”고 흠탄하였다 한다. 《三國志 卷55》
[주D-033]이지고(李知誥) : 남당(南唐)의 시조 이승(李昇)을 가리킨다. 처음에 오(吳) 나라를 섬기다가 찬탈하여 국호를 남당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들 경(璟)이 주(周)에 항복하였다. 《五代史 卷62》
[주D-034]갈백(葛伯)이 …… 쳤습니다 : 중국 하(夏) 나라 때 갈백이 제물로 쓸 쌀이 없다고 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자 탕(湯) 임금이 농군들을 보내어 농사지어 주었는데, 갈백이 그 농군들에게 밥을 날라다 주던 동자(童子)를 죽이고 밥을 빼앗아 먹었으므로 탕 임금이 드디어 갈백을 쳤었다. 여기서는 동자를 죽였어도 쳤는데 신하가 임금을 죽였으니 당연히 쳐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D-035]제 경공(齊景公)은 …… 시집보냈으니 : 제 나라도 강하지만 제 나라보다 더 강한 오(吳) 나라에게 어쩔 수 없이 강약의 형세에 몰려 딸을 시집보낸 일을 말한다. 《孟子 離婁上》
[주D-036]진소양(陳少陽)과 호담암(胡澹菴) : 소양은 송(宋) 나라 때 사람 진동(陳東)의 자(字)이다. 진동은 태학생 수만 명을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 이강(李綱)을 파직시키라고 상소(上疏)하였고, 나중에는 구양철(歐陽徹)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宋史 卷455》 담암은 송 나라 때 사람 호전(胡銓)의 호이다. 호전은 왕륜(王倫)ㆍ진회(秦檜)ㆍ손근(孫近)을 참수(斬首)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가 제명(除名)당한 일이 있었다. 《宋史 卷374》
[주D-037]홍수(洪水)를 …… 몰아낸 분들 : 공이 우(禹) 임금이나 주공(周公)과 같다는 뜻.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날 우 임금은 홍수를 다스렸고 주공은 이적(夷狄)을 치고 맹수를 몰아냈다.” 하였다.
[주D-038]멱라(汨羅)의 …… 안 되니 : 죽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옛날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회사부(懷沙賦)를 짓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自殺)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史記 屈原列傳》
[주D-039]이원호(李元昊) : 송(宋) 나라 때 참호(憯號)을 일컬었던 서하(西夏)의 임금 경종(景宗)을 말한다. 여기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참호를 이원호의 경우에 빗댄 것이다. 《宋史 卷485》
[주D-040]소릉(召陵)의 …… 이루었습니다 : 관중(管仲)이 군사를 이끌고 초 나라에 가서 사리를 따져 왕실(王室)에 공납(貢納)하지 않은 것을 추문하니, 초왕이 굴복하여 굴완(屈完)을 시켜 소릉에 가서 맹약하게 한 사실을 말한다. 《春秋左傳 僖公4年》
[주D-041]한 고조(漢高祖)가 …… 동공(董公)의 말 : 명분이 분명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뜻. 한 고조가 아직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낙양(洛陽)의 신성(新城)에 도착하자, 삼로(三老)인 동공이 “항우는 무도(無道)하여 의제(義帝)를 시해(弑害)하였으니, 이 사실을 내세워 항우를 치면 제후들이 도울 것이다.” 하였다. 《漢書 高帝本紀》
[주D-042]왕손만(王孫滿) : 주 정왕(周定王) 때의 대부(大夫)였다. 초(楚) 나라에 사신 갔을 적에 초왕(楚王)이 주정(周鼎)의 무게를 묻자 왕손만은 “왕이 되는 것은 덕(德)에 달린 것이지 주정의 무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주(周) 나라의 덕(德)이 쇠하기는 했으나 아직 천명(天命)이 바뀌지는 않았으니, 주정의 무게를 묻지 마시오.” 하였다. 《春秋左傳 僖公32年》
[주D-043]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적에 임명에 앞서 문관(文官)은 이조(吏曹)에서,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을 선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일이다. 삼망(三望).
[주D-044]삼강(三綱)과 오상(五常) :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로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ㆍ부위자강(父爲子綱)ㆍ부위부강(夫爲婦綱)이고, 오상은 군신유의(君臣有義)ㆍ부자유친(父子有親)ㆍ부부유별(夫婦有別)ㆍ장유유서(長幼有序)ㆍ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주D-045]이만주(李滿住) : 우리나라 북쪽에 살던 야인(野人)이다. 세조(世祖) 4년(1458)에 이만주가 자기의 아우 범찰(凡察)과 서울에 와서 공물(貢物)을 바치고 작명(爵命)을 요구하자 세조는 중추(中樞)의 품계를 내렸다. 그러나 이 때문에 중국의 사신 장녕(張寧)에게 힐책(詰責)당한 바 있다.
[주D-046]조종조(祖宗朝) …… 수치 : 명(明) 나라의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조(朝鮮朝)의 세계(世系)가 고려(高麗)의 역신(逆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기록된 사실과 고려의 네 왕을 시해(弑害)하였다고 한 일을 말한다.
[주D-047]공자(孔子)가 …… 베어야 한다 : 노 정공(魯定公)과 제 경공(齊景公)이 협곡(夾谷)에서 회맹(會盟)할 때 제 나라의 유사(有司)가 못된 춤과 저속한 유희를 베풀자 공자는 “필부(匹夫)로서 제후(諸侯)를 미혹시키는 자는 처참(處斬)해야 한다.” 하고 담당자를 목 베었다. 《史記 孔子世家》
[주D-048]호전(胡銓)이 …… 고조된다 : 송 나라 때 호전이 송 고종(宋高宗)에게 올린 상소에서 “진회(秦檜)ㆍ왕륜(王倫)ㆍ손근(孫近) 이 세 사람을 베면 적과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백 배나 고조될 것이다.” 하였다. 《宋史 卷374》
[주D-049]마식(馬植) : 송 휘종(宋徽宗) 때 동관(童貫)을 따라 송 나라로 귀의해 온 사람이다. 드디어 금(金) 나라에 사신 가서 피차 관(關)을 넘지 말자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금 나라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하수를 건너 쳐들어왔다.
[주D-050]헌원(軒轅)이 …… 도구(道具) : 무기(武器)를 가리키는 말인 것 같다. 《宋子大全隨箚 卷12》
[주D-051]자공(子貢)이 유세(遊說)하여 : 제(齊) 나라의 전상(田常)이 난을 일으키기 위하여 우선 노(魯) 나라를 치려 하자, 공자가 자공을 시켜 각국(各國)에 유세하여 난국을 타개, 노 나라를 보전하게 하였다. 유세에 나선 자공은 드디어 노 나라를 보존시키고 제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고 오(吳) 나라를 패망시키고 월(越) 나라를 제후국의 패자(覇者)로 만들었다. 《史記 仲尼弟子列傳》
[주D-052]신포서(申包胥)가 …… 정성 : 신포서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 대부(大夫)였다. 오(吳) 나라가 초 나라를 침략하여 위급한 지경에 처하자 신포서는 진(秦) 나라에 가서 칠일칠야(七日七夜)를 울면서 구원을 호소, 드디어 오 나라의 군대를 퇴치하였다. 《淮南子 修務訓》
[주D-053]첩황(貼黃) : 당(唐) 나라 때 조칙(詔勅)에 고칠 곳이 있으면 누런 종이로 찌를 붙이던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문에서는 미진한 말을 덧붙인 별지(別紙)를 뜻한다.
[주D-054]동평관(東平館) : 일본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서 머물던 객관(客館)으로, 지금 서울의 예관동(藝館洞) 자리에 있었다.
[주D-055]유응규(庾應奎) : 고려(高麗) 때의 현신(賢臣).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있은 후 의종(毅宗)이 폐위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였는데, 이 사실을 주달하기 위하여 금(金) 나라에 갔었다. 그러나 금주(金主)는 의심을 품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관복(官服)을 입은 채 7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조정 뜰에 서서 버티자, 금주는 드디어 인정하였다. 《高麗史 列傳 卷12》
[주D-056]색승지(色承旨) : 담당 승지를 말하는 것으로, 색(色)은 담당의 뜻이다.
[주D-057]초(楚) 나라의 삼호(三戶) : 기필코 나라를 다시 찾고야 말겠다는 뜻.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초 남공(楚南公)이 ‘초 나라가 세 집만 남아도 반드시 진(秦) 나라를 패망시키고야 말 것이다.’ 하였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연유한 말이다.
[주D-058]두보(杜甫)가 …… 간 것 : 당(唐)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 현종(玄宗)은 서촉(西蜀)으로 파천(播遷)하고, 숙종(肅宗)은 봉상(鳳翔)에 가 있었다. 이때 두보가 봉상으로 달려가 숙종을 배알하니, 숙종은 두보를 우습유(右拾遺)에 임명하였다. 《唐書 卷201》
[주D-059]행조(行朝) : 임금이 파천(播遷)하여 가서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을 가리킨다. 행재소(行在所)라고도 한다.
[주D-060]도거(刀鉅)와 정확(鼎鑊) : 도거는 칼과 톱으로 칼은 궁형(宮刑)할 때 쓰고 톱은 월형(刖刑)할 때 썼다. 정확은 죄인을 삶아 죽이는 가마솥이다. 여기서는 어떤 형벌을 가해도 마음을 뺏을 수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