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택당 이식 시장

택당(澤堂) 이식 공(李植公) 시장(諡狀) (송자대전 203권) 펌

아베베1 2009. 11. 16. 01:02

송자대전(宋子大全) 제203권
 시장(諡狀)
택당(澤堂) 이공(李公) 시장


공의 성은 이(李), 이름은 식(植), 자는 여고(汝固), 본관은 덕수(德水)로 우리나라의 명족이다.
시조 돈(敦)은 고려 때 수중랑장(守中郞將)이요, 6세손 양(揚)은 비로소 본조(本朝)에서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었다. 5대조 사간(司諫) 의무(宜茂)는 호가 연헌(蓮軒)이고, 고조 행(荇)은 좌의정(左議政)으로 호는 용재(容齋)이고, 증조 원상(元祥)은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로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조부 섭(涉)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안성(安性)은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공조 참판으로 영의정에 증직된 옥(玉)의 딸이며, 공은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17) 10월 11일에 서울 남소문 본가에서 태어났다.
이에 앞서 찬성공이 자녀에 대해 많은 참척(慘慽)을 보았다가 공을 낳은 뒤로는 건강에 너무 신중을 기하여 항상 안방에 있게 하면서 글자도 가르치지 않았고, 임진왜란을 만나 병란을 피하기 위하여 떠돌아다니느라 입학시킬 기회마저 잃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성질이 안정되어 마음에 망상이 없었으므로 어른들이 돈점[擲錢占 돈을 던져 괘를 얻어 점치는 것]을 시켜 피란할 곳을 물으면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집에 있는 아이종이 대낮에 천지가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태양이 공의 소매 속에서 나와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었는데, 찬성공이 이 꿈이야기를 듣고 매우 이상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나이 12세에 진사 문언(文偃)에게 비로소 글을 배웠다. 하루는 남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져 땅에 가득하자, 여러 아이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밤을 주워갔으나 공은 밤을 가지고 놀다가 다시 나무 밑에 이 즉시 놓고 갔다. 또 문공(文公)이 ‘꾀꼬리[鸎]’란 제목으로 글을 지으라 하자, 공 읊기를 ‘꾀꼬리는 여름 뜻을 품고 산중에서 우누나.[鸎含夏意啼山間]’ 하였다.
일찍이 학질(瘧疾)에 걸려 4년 동안 학문을 폐지하였고, 18세에 감시(監試 감영(監營)에서 실시하는 지방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이때 문의공(文懿公) 찬성(贊成) 구사맹(具思孟)이 그 낙권(落卷 과거에 낙방한 시험 답안지)을 보고 크게 칭찬하고는 외손녀를 그 아내로 삼아 주었으니, 곧 심씨(沈氏) 부인이고 부인의 아버지는 옥과 현감(玉果縣監) 심엄(沈㤿)이다. 옥과공이 매양 공의 법도 있는 행동을 보고 속으로 칭찬하기를,
“아들을 낳으려면 마땅히 저와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 공은 이미 사서(四書)를 통달하고 이치를 탐구하는 데 마음을 기울였다. 일찍이 절구(絶句) 한 수를 읊기를,
만물은 정의 경지를 인해 통하니 / 物緣情境感能通
신묘한 마음의 근본은 다함이 없으리 / 神妙心源應不窮
정 가운데서 동의 뜻 알려거든 / 欲識靜中含動意
문 닫고 온종일 솔바람 소리 들으려무나 / 閉門終日聽松風
하므로, 아는 사람들은 이미 그 조예의 깊이를 기대하였으며, 이로부터 문장이 날로 풍부하여지고 학력이 진보되었다. 또 신의(神醫)로 알려진 채유종(蔡有終)이 공의 맥(脈)을 짚어 보고 말하기를,
“심중에 아무 사심이 없다.”
하였다. 때에 공은 과로(過勞)로 말미암아 요양(療養)에 전력하였는데,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하며, 거업(擧業)에는 뜻을 두지 않고 때때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열람하거나 또는 《퇴계문집(退溪文集)》을 보아 마음으로 기뻐한 바가 있었다.
이때에 찬성공(贊成公)이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으로 있었는데, 안기도는 안동부(安東府) 관할이며,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ㆍ백암(柏巖) 김늑(金玏)이 연이어 부사(府使)로 왔었고,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도 그 고을에 있었으므로 공이 지은 글이 제공의 격찬을 받았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여강(驪江 여주(驪州)의 옛 이름)으로 돌아왔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부모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이해 겨울에 별시(別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는데, 대간(臺諫)들이 시험관의 부정이 있다 하여 파방(罷榜 시험무효)하라고 청하므로 광해군이 부정이 현저한 두 사람만을 삭제하라고 명하여 공은 파방되지 않았다. 그런데 공은 시배(時輩)들의 모략으로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의 별칭)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소속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성균관을 부족하게 여겨서가 아니다. 본래부터 벼슬하려는 생각이 없어서이다. 내가 출신(出身)한 처음부터 남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였으니, 나의 도(道)가 이미 애로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폐(自廢)하여 나의 뜻을 밝힐 뿐이다.”
하였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찬성공(贊成公)이 남하(南下)할 때 족숙(族叔) 동악(東岳) 안눌(安訥)이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있었으므로 동악공(東岳公)을 따라 시법(時法)을 물었고, 또 석주(石洲) 권필(權韠)ㆍ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ㆍ소암(疏菴) 임숙영(任叔英)ㆍ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더불어 시를 읊고 평론하니, 석주 등 제공(諸公)이 자주 추중(推重)하며 장려하였다.
여강(驪江)에 돌아와 농사지으며 고기 낚고 독서하다가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다. 그때에 서양갑(徐羊甲)의 옥사(獄事)가 여주(驪州)에서 일어나 중외(中外)가 다 놀라 떨었고 물러 나와 있던 산관(散官 품계(品階)만 있고 실직이 없는 벼슬)들이 모두 달려와서, 어찌된 일이냐고 묻기도 하였는데, 어떤 이는 이 지방에 사는 사람으로 이런 시기를 만나서 소명(召命)을 사양할 수 없다고 하므로 공이 하는 수 없이 상경(上京)하였다가 곧 사건으로 인하여 스스로 면직하였다. 찬성공의 상(喪)을 만나 지평(砥平)에 장사 지냈고, 병진년(1616, 광해군8)에 북도 평사(北道評事)에 제수되었는데, 아주 먼 변방이다. 그러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5개월 동안 근무하자, 상관(上官)된 이가 공이 오랫동안 어머니를 떠나 먼 곳에 있는 사정을 알고 일부러 파직시켰다. 정사년(1617, 광해군9)에 무관(武官)인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어 왕명으로 해서(海西)의 말[馬]을 점검하고 돌아왔는데, 마침 폐모론(廢母論)이 발발하자, 곧 여강으로 돌아왔다. 이때 폐모론에 동조하지 않은 인사들이 많이 높은 지위에 있었고, 공과 종유(從遊)하는 사람도 다 시(詩)에 능한 명사(名士)들이었으므로 시배(時輩)들이 죄를 덮어 씌우려 하여 수상칠인(水上七人)의 유로 지목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본래 외부에 출입(出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시 짓고, 술 마시는 사람들에게 끌려 자연 술 마시고 농지거리를 하게 되었으니, 이는 나의 본래 뜻을 손상하고 공부를 방해시켰을 뿐 아니라, 화(禍) 또한 크게 되었다.”
하였다.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어떤 일로 강화(江華)에 갔는데, 마침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제수하는 명이 내렸다. 동악공(東岳公)이 공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지금 먼 곳에서 놀면서 병을 칭탁하면 안 된다.”
하므로 공이 부득이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병조에 근무하였고, 다시 영변 판관(寧邊判官)에 제수되자 즉시 나아가 사은하였다. 그런데 시배들이 이모(李某)가 국구(國舅)와 인척(姻戚)이 되어 역당(逆黨)과 결합하고 있으니, 판관으로 파견함이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국구는 곧 모후(母后)의 아버지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다.
공이 제1차 서경(署經)에 통과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2, 3차의 통과를 무시하고 그냥 진출을 꾀하라고 권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오늘날 절차를 무시하고 관료에 나가는 사람은 모두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이니, 매우 부정한 자이다. 나의 노모(老母)가 불초한 나를 불쌍히 여겨 춥고 배고픔을 달게 받고 계시니, 나는 글 읽기를 힘쓰고 수양을 쌓을 뿐이다.”
하였다. 또 계축년 옥사(癸丑年獄事)에서 화를 벗어난 자는 모(某 이식(李植)을 가리킴)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계축 옥사는 모후의 친정이 멸망한 참화이다. 또 어떤 이가 공에게 말하기를,
“조금만 본심을 굽혀서 화를 방지하는 것이 좋다.”
고 권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그들 무리에 의해 죽는 것도 영화이다. 어찌 나의 뜻을 굽혀가면서 그들의 뜻에 따르겠는가?”
하였다.
공이 출신(出身) 초기에 계곡(谿谷) 장유(張維)ㆍ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같은 이가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에 있었으나, 매번 사람을 추천할 적에는 곧 사람을 시켜 공의 의도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공은 엄숙히 본뜻을 자수(自守), 끝내 응하지 않았다.
또 왕가(王家)와 척분(戚分) 있는 친한 사람이 와서 명환(名宦)을 시켜 주겠다고 유혹하였으나 공이 준엄한 말로 사절하였고, 한찬남(韓纘男)도 공과의 세의(世誼)가 있다 하여 한 고을을 맡겨 주려고 하였으나 공이 응하지 않았다.
공이 처음 병조에 번들어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이 약방(藥房 내의원(內醫院))에 번들어 있다가 사람을 시켜 간곡히 공을 만나자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만약 직무 관계로 나를 부르면 마땅히 가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사대부(士大夫)는 서로 만나는 데 구차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이해에 찬성공의 묘하(墓下)에 택풍당(澤風堂)을 세웠다. 이때 공이 여강에 있었는데, 여강 고을에 당인(黨人)의 화(禍)가 한창이었으므로 그 화가 자신에게도 미칠세라 멀리 떠나려 하여 점을 쳐보니 불길하였다. 하는 수 없어 묘하(墓下)에 있기로 점을 쳐보니, 원괘(元卦) 대과(大過)에 변괘(變卦) 함(咸)이 나왔는데, 그 상(象)에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遯世無悶)’이라 하였다. 마침 택풍당이 준공되었으므로 현판을 ‘택풍(澤風)’이라 하고 택풍당에는 그 괘상(卦象)을 모방, 상사(象辭)를 벽(壁)에 대서 특필하였다. 그리고 서적 몇 질(帙)을 배치하고 인근 마을의 학동 몇 사람을 모아 장구(章句)를 논하고 외웠으며, 피로해지면 계곡을 나가 시냇가를 노닐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고(先考)께서 지어 주신 나의 이름과 자(字 여고(汝固))도 다 뜻을 꿋꿋이 세워 굽히지 말라는 뜻이니, 역시 택풍괘(澤風卦)의 상(象)이다. 아, 선고께서 주신 명자(名字)는 이를 애초부터 나에게 기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조석(朝夕)으로 깊이 생각하여 애써 퇴패한 도(道)를 만회시키지 않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찬성공이 공의 이름을 지을 때 목변(木邊)에 쓰인 글자 몇 개를 사당(祠堂) 향안(香案) 앞에 봉해 놓고 공으로 하여금 뽑으라 한바, 식(植) 자를 뽑았다고 한다.
경신년(1620, 광해군12)에 이 문순공(李文純公) 퇴계 선생(退溪先生)을 꿈꾸고 나서 지은 시에,
시서의 설 질절하고 / 切切詩書說
출처의 정 의의하오 / 依依出處情
고산 같은 학덕 본시 그리던 터라 / 高山餘宿願
이제부터 꾸준히 정진하리라 / 從此倘專精
하였다.
이해 가을에 이이첨(李爾瞻)이 원접사(遠接使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임시 벼슬)가 되어 막료(幕僚)를 선발하게 되자, 모두들 이모(李某)의 문장이 아니면 양상(樣相)을 이룰 수 없다 하여 공이 추천되었는데, 광해가 하교(下敎)하기를,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모르나, 꼭 재망(才望) 있는 사람을 선발하라.”
하므로, 이이첨이 사람을 시켜 공을 달래기를,
“상(上)으로부터 밀교(密敎)하기를 ‘이모(李某)는 김제남(金悌男)과 인척 관계가 있다’ 하여 논책이 준엄하시므로 내가 잘 아뢰어 상의 뜻을 풀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무 일 없이 평탄할 것이다.”
하였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광해가 이이첨에게, 공을 제술관(製述官)으로 데리고 가라 하였으나 공은 끝내 병(病)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이첨이 다시 주청하자, 광해가 다시 하교하기를,
“이모는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응하지 않으니, 마땅히 체포 구금할 일이다. 우선 중법으로 추고(推考)하라.”
하고는 공의 가동(家童)을 가두었다. 공이 하는 수 없이 이이첨을 찾아가니, 이이첨이 말하기를,
“친병(親病)으로 사양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강제로 가자고 하겠는가. 곧 물러가라.”
하므로 공이 탄식하기를,
“문자(文字)가 빌미가 되어 이이첨의 문하에 드나드는 것을 면치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다.
이해 여름에 여강(驪江)에 나가 놀면서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과 목백(牧伯 목사(牧使)) 민성휘(閔聖徽)와 같이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을 모시고 환담하다가 6일 만에 돌아왔다.
박정길(朴鼎吉)이 양 감군(梁監軍)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공에게 수행원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는데, 유천(柳川)이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또 막료가 되어 주기를 간청하였다. 현곡(玄谷) 정백창(鄭百昌)은 바로 유천의 사위인데, 유천에게 말하기를,
“강호(江湖)의 청절(淸節)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하므로 유천이 그렇다고 허락하였다.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체찰부사(體察副使) 남이공(南以恭)이 또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렀다. 대저 남이공은 시론(時論)에 따르지 않다가 귀양을 갔으므로 사론(士論)이 많이 장하게 여겼었고, 공이 해서에서 말[馬]을 점검할 때 그의 적소(謫所)에 가서 그를 만나 본 적이 있었는데, 그가 풀려나 등용되었을 때 체찰부(體察府)가 다시 개부(開府)되었기 때문이다. 공이 역시 거기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뒷날에 그가 공을 보고 노한 기색으로 말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세도(世道)를 보건대, 내가 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영공(令公)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그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사과하였다.
그해 7월 기망(旣望 음력 16일)에 소암(疎菴) 등 제공(諸公)과 더불어 적벽강(赤壁江)에 노닐던 소선(蘇仙 소식(蘇軾))의 고사에 따라 양강(楊江)에 배를 띄우고 사흘 밤을 놀다가 돌아왔다.
계해년(1623, 광해군15) 봄에 동악공(東岳公)이 전 감군(田監軍)의 접반사가 되어 공을 종사관으로 부르고 또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이모가 지금 시골에 있으니, 특별히 재촉하여 보내야 합니다.”
하므로 공을 특별히 명소(命召)하였다. 그리고 서도(西道)의 직관(職官)을 기피하는 자는 본도(本道)에 충군(充軍)한다는 새 규례가 나왔으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동악공을 직접 만나서 사정을 말하고 사퇴할 계획으로 군막(軍幕)으로 찾아가 동료 이경의(李景義)와 서로 약속, 기악(妓樂)을 가까이하지 않고 한곳에서 글을 읽은 지 3일 만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소식이 들려오고 감군의 소식은 막연하였다. 제공이, 내변(內變)이 이러하니 잠시 내지(內地 해안(海岸)이나 변지(邊地)에서 깊숙이 들어간 안쪽 지방)로 향하는 것이 옳다고 상의하고 숙천(肅川)으로 돌아와서 서울 소식을 들어본바, 공이 전랑(銓郞 이조 정랑ㆍ이조 좌랑) 후보자로 추천되었다고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除授)하였다가 다시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다. 이에 공이 상경(上京)하여 상소하기를,
“신은 혼조(昏朝 광해군을 가리킴) 때에 줄곧 물러나 있었을 뿐, 볼 만한 기절(氣節)도 없습니다. 또 신은 왕가(王家)와 척분이 있는 관계이니, 어찌 전랑(銓郞)의 자리에 앉아 인재의 현부(賢否)를 분별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조그마한 고을을 얻어 노모를 봉양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공의 지방관을 청하는 소장이 예에 따라 이조(吏曹)에 접수되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비답(批答)이 특별히 내렸으므로 하는 수 없이 취임하였고,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갔다가 6월에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올 때 글을 지어 택풍당의 영(靈)에 고별하기를,
“세상을 멀리하려는 지표(指標)는 비록 초지(初志)를 어겼으나 꿋꿋이 서려는 지조만은 거의 스스로 이룰 것이다.”
하였다.
임기가 차 전적(典籍)에 체직(遞職)되고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었는데, 동료들은 거의 숙직(宿直)을 꺼렸으나 공은 항상 주려(周廬 궁궐을 수위하는 군사가 번 들어 자는 곳)에 있으면서 우복(愚伏) 정공 경세(鄭公經世)ㆍ수몽(守夢) 정공 엽(鄭公曄)ㆍ추탄(楸灘) 오공 윤겸(吳公允謙) 등과 함께 글을 강론하였다. 시강(侍講)할 적에는 매번 그 문의(文義)를 인연하여 국사에 언급하였는데, 많이 채택되었다.
공은 벼슬을 제수받을 즈음에 번번이 정사(呈辭)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좀처럼 윤허하지 않으므로 부득이 다시 취임하곤 하였다.
공이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되었을 때 서도(西道)의 무비(武備)가 허술하다는 말을 들었고, 또 자신이 조정(朝廷)에 있은 지 5, 6개월에 아무 도움도 없고 국정(國政)이 날로 전철(前轍)만을 밟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혼란이 일 것이 뻔하다고 여기고는 소(疏)를 올려 이를 극론하고, 이어 어느 중요한 관방(關防)을 얻어 노모(老母)와 함께 필사(必死)의 각오로 부임, 무인(武人)으로서 선두에 서서 싸우겠다고 청하였다. 또 임금이 나쁜 제도를 변경하는 일들을 꺼리고 원대한 규칙을 소홀히 한다는 내용으로 소(疏)를 올리므로 많은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고 임금은 융숭한 비답을 내린 다음, 비국(備局 비변사(備邊司))에 회부하여 상의해서 처리하게 하였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말하기를,
“이는 나의 뜻이다. 해서의 어느 한 고을에 시도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으나, 모든 사람의 의논이,
“이모(李某)의 오활(迂闊)한 공론은 변방에 합당하지 않다.”
하므로 드디어 회계(回啓)하지 않았고, 임금도 그만두었다. 이어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공 귀(李公貴)가, 이 상소는 충성과 지기(志氣)가 모두 가상하다고 임금에게 아뢰어 공이 비국 낭관(郞官)에 제수되었다가 그 해를 넘어서 사직하였고, 겨울에 교리(校理)에 승진되어 호당(湖堂)에서의 제술(製述)에 장원,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갑자년(1624, 인조2) 1월에 역옥(逆獄 이괄(李适)의 난에 관련된 옥사(獄事))이 크게 일어나자, 공이 문사낭청(問事郞廳)에 제수되었다가 사소한 일로 파직되었고 이괄(李适)이 반란(叛亂)했다는 보고가 도착했을 적에는 대궐에 들어가 격문(檄文)을 초하였으며, 다시 수찬 겸 어영사종사관(修撰兼御營使從事官)에 제수되었다. 이때 연평(延平)이 장수가 되어, 적을 역습해서 싸울 것을 자청하고 공 및 부장(副將) 한교(韓嶠)ㆍ근왕별장(勤王別將) 박유명(朴惟明)과 함께 출전하니, 군병이 겨우 6백 명이었다.
공이 먼저 파주(坡州)에 도착하니, 때에 목사 박효립(朴孝立)ㆍ방어사 이흥립(李興立) 등이 임진강(臨津江)을 지키고 있었다. 공이 박효립에게 공첩(公牒)을 보내 여러 곳의 군량과 군기를 수송하여 싸울 준비를 엄중하게 하도록 했으나 박효립은 다른 뜻이 있었으므로 따르지 않았다. 해 질 무렵에 연평이 뒤따라 도착했는데, 기탄(歧灘)의 제장(諸將)은 모두 패하여 전사하고 경기 감사 이서(李曙)는 후퇴하고 적은 이미 개성에 입성하였으므로 경외(京外)가 모두 크게 진동되었다고 들렸다. 연평이, 조정에서 반드시 몽진(蒙塵) 관계로 논쟁이 벌어질 것이므로 자신이 아니면 결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던차, 최공 명길(崔公鳴吉)도 강북(江北)으로부터 돌아와서 빨리 조정으로 돌아가 일을 의논하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연평이 임진강을 순시하고 나서 돌아가려 하여 임진강에 당도해 보니, 적병이 이미 쇄도하였다. 마침 공이 후진(後陣)에 있다가 장병들에게,
“적병이 저곳에 도착하였으니, 너희는 빨리 탄구(灘口)로 진격하여 용맹을 떨치도록 하라.”
하였는데, 연평이 갑자기 기를 흔들며 산을 올라 달아나므로 공이 급히 군관(軍官)에게 동요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들으라 하였다.
이때에 군인이 길을 메워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드디어 비탈길을 타고 걸어서 달려갔는데, 연평은 이미 멀리 가 버렸다. 마침 박유명(朴惟明)을 만나서 말하기를,
“달아날 작정입니까?”
하자, 박유명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 홀로 어찌하겠는가?”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처음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한 사람이니, 남들과 같이 달아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다. 박유명이 그제야 말하기를,
“그럼 종사관(從事官)이 산봉우리에 올라서 기를 흔들면 내가 박효립의 진중으로 들어가 적과 싸우겠다.”
하므로 공이 그 말대로 하였다. 이에 박유명이 달려 내려갔으나 박효립의 군대는 이미 다 흩어지고 적병이 이미 탄구에 들어왔으며, 한교(韓嶠) 역시 교하(交河)에서 도주하였다.
공은 하는 수 없이 곧 고양(高陽) 길을 따라 달려서 상을 과천(果川)에서 만나 뵙고 박효립ㆍ한교의 죄상을 아뢰었다. 수원(水原)에 도착하여 적이 서울에 침입하였음을 들었다. 공은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함께 상에게 아뢰기를,
“먼저 삼전(三殿)부터 지름길로 대진(大津)을 건너 홍주(洪州)에 머무시게 하고, 대가(大駕)는 여러 장병과 함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지키면, 적병이 비록 쳐들어와도 반드시 저절로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용인(龍仁)에서 진위(振威)로 행차하는데, 상하의 인심이 흉흉하여 흩어질 궁리만 하였다. 제장(諸將)이 밤중을 이용하여 출발하려 하자, 공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밤에 급히 출발하다가 적병이 추격해 오면 더욱 위험합니다.”
하므로 그 말에 따랐다.
체찰부(體察府 체찰사의 주영(駐營))에서 공을 종사관으로 삼았고, 천안(天安)에 도착하여 적이 패주한 소식을 들었다.
지평(持平)에 제수되어 아뢰기를,
“군율(軍律)을 어긴 여러 장수들을 지금 차례로 논죄하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신(臣)은 이귀(李貴)를 따라 함께 군졸을 무너뜨렸으니,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을 논하겠습니까. 먼저 신의 죄부터 다스려 주소서.”
하고 다시 사양하여 사직되었다. 이로부터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연평(延平)과 한교(韓嶠)를 탄핵하자, 사론(士論)은 비록 인정하였으나 모든 공신(功臣)은 크게 노하여, 주장(主將)을 모함한다 하였고 연평도 임금에게 호소하기를, 이모(李某)가 신을 따르지 않고 도주한 것은 적에게 붙으려는 의도였다고 하면서 마구 욕지거리를 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 수찬(修撰)에 제수되었으나 또 앞일을 들어 사직하기를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임진강의 패전 후퇴는 그대의 죄가 아니니, 벼슬을 사양하지 말라.”
하였고, 환궁하여서는 다시 이조 좌랑에 제수하였다가 정랑(正郞)에 승진시켰다. 그런데 박정(朴炡) 등과 뜻이 맞지 아니하여 전조(銓曹)에 있기를 싫어하므로 전조에서도 억지로 있으라 할 수 없음을 알고,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승진시켰다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옮겼다.
때에 정언(正言) 홍호(洪鎬)가 나랏일을 말하다가 원훈(元勳 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의 뜻을 거역하여 장차 중죄에 빠지게 되었는데, 공이 구해 주었다. 다시 응교로 되돌아왔다가 전한(典翰)에 승진되어서는 소를 올려, 조그마한 고을을 지키면서 노모를 봉양하겠다고 간청하자,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그대의 지극한 효심은 가상하다. 다만 국사가 간난(艱難)하여 물러가 있을 때가 아니니, 그대는 조정에 있으면서 노모를 모셔 충효를 양전(兩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때에 조정의 신하들이 많이 공을 미워하여 장차 탄핵을 단행하려는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최완성(崔完成 완성은 최명길(崔鳴吉)의 봉호)이 듣고 공을 구해냈다.
휴가를 얻어 동으로 돌아갔었고, 9월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가 마침 역옥(逆獄)이 있어 다시 사헌부 집의로 부르므로 서울에 올라왔다. 이어 상의원 정(尙衣院正)이 되었고, 부응교(副應敎)에서 집의(執義)로 옮겨졌다. 대간(臺諫)이 말하기를,
“인성군 공(仁城君珙)이 외인과 통한다는 말이 자주 적(賊)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외지에 방치하여 성명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지친(至親)을 차마 방출시킬 수 없어 하므로, 공이 이는 임금의 미의(微意)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의론을 정지시키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가 드디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3)에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에 제수되었다. 세자(世子)의 관례(冠禮) 때에 공이 도감 도청(都監都廳)으로 찬자(贊者)까지 되었다가 그 상(賞)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진급되었다.
이때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전조(銓曹)를 맡았는데, 박정(朴炡)과 서로 사이가 나빴으므로 공이 그 당류에 들지 않는 것을 좋게 여겨 곧 부제학(副提學)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공은 기뻐하지 않고 지방관을 희망하여 전주(全州)로 추천되었으나 낙점(落點)받지 못하였다. 이는 상이 평소에 공의 문행(文行)을 중하게 여겨 외지에 보내지 않으려 한 것이고, 또 지방 행정에는 부족함이 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예조 참의(禮曹參議)로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들어갔다가 좌부승지에 전직되었다. 승정원에 재직한 지 6개월 동안에 입시(入侍)할 적에는 으레 묘의(廟議)의 득실을 논하였으므로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이모(李某)는 오랫동안 민간에 살아서 민간 사정을 잘 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재변으로 인하여 구언(求言)하였는데도 진언한 사람이 적은 것을 괴이쩍게 여기므로, 공이 후주 세종(後周世宗)의 고사에 의거하여 백관에게 각각 소견을 진술하게 하라고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왜 말하지 않는가?”
하므로 공이 물러 나와 7천여 자의 글을 초하였는데 ‘대진작 대변통(大振作大變通)’으로 제목을 삼았다. 이 소(疏)가 들어가자, 상이 융숭한 비답을 내렸으나 대신이 폐기해 버렸다.
임금이 또 대신에게 명하여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자, 현헌(玄軒) 신상흠(申相欽)이 아뢰기를,
“이모 같은 사람은 문한(文翰)에 쓰일 만합니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때에 목성선(睦性善)이 상소하여 조신(朝臣)을 맹렬히 공격하자, 임금이 마침 다른 조신(朝臣)들은 다 붕당을 만들고 있다고 의심하던 터이므로, 공의 성품이 고고(孤高)하고 강직하다 하여 융숭한 비답을 내렸고, 또 공을 논박하는 사람은 다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 하여 물리쳤다. 이에 공이 상소하기를,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서인(庶人)이 정치를 논의할 수 없는데, 지금 조정의 거조가 점차 이치에 어긋나므로 사람들의 말이 더욱 험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스스로 수칙(修飭)할 일이요, 얼굴을 붉히면서 논쟁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 일종의 의논에는, 조정을 마치 소인배의 소굴로 보고 서로 선동하여 그 위치를 안정되지 못하게 합니다. 지난번 이이첨(李爾瞻)의 시대에는 아유구용(阿諛苟容)하는 선비가 더러 있었지만, 어찌 오늘의 조정이 이첨의 시대보다 더 심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공명 정직한 사람에게 전형(銓衡)을 맡겨 이론(異論)을 진압시켜야 합니다. 신(臣)같이 용렬한 사람은 더욱 좌이(佐貳 참판ㆍ참의의 총칭)에 적임이 아니므로 사퇴하기를 청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민간에 있을 때, 붕당의 화는 충분히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 들었다. 성행(性行)이 부박(浮薄)하여 일을 좋아하는 무리는 본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경악(經幄)의 노신(老臣)도 한쪽에 치우침을 면치 못하니, 내가 통탄하는 바이다. 다 같이 협력할 책임이 모두 전조(銓曹)에 있으니, 그대는 명심하여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이는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은 차자(箚子)를 올려 목성선(睦性善)을 공격하고, 주서(注書) 황감(黃㦿)은 목성선을 적극 두둔하므로 상이 두 사람을 모두 다 그르게 여겨 전교(傳敎)를 내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다가 병인년(1626, 인조4)에는 사정에 의해 체직되어 겸 승문원 부제조(兼承文院副提調)가 되었다.
반정(反正) 초기에 공 및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ㆍ현곡(玄谷) 정백창(鄭百昌)ㆍ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ㆍ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 등을 선발하여 사대별제(事大別製 중국과의 외교문을 작성하는 것)에 대비, 승평(昇平 김류(金瑬)의 봉호)이 주관하게 하고 모든 대소 문자는 일체 공에게 위임하였다. 공도 자신이 평소에 녹(祿)만 받아 먹고 아무 도움이 없었으니, 이 기회에 한번 봉사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일체를 담당하여 직무를 기피한 적이 없었다.
형조 참의로서 특별히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하여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예조 참의에 옮겨져서는 도사 연위사(都司延慰使)로서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나가 강(姜)ㆍ왕(王) 두 조사(詔使)를 맞이하였는데, 도사연위는 원접사(遠接使)와 동행하여 시(詩)를 지어 주고받는 일을 보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때 승평(昇平)이 반상(伴相)이 되었는데, 자신의 글들을 반드시 공의 수정(修正)을 받고는 하므로 막중(幕中)에 있는 제공(諸公)의 시샘이 없지 않자, 승평이 웃으면서 공에게 말하기를,
“제공이 영공(令公 이식을 높인 말)을 동배(同輩)의 문인(文人)으로 알고 그 실력을 겨루려 하니, 그 자신들을 너무도 모르오.”
하였다.
그때 서쪽 변방에 대한 걱정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었는데, 주인과 손이 전혀 성색(聲色)으로만 서로 즐기고 그 읊는 시도 한정(閒情)을 노래하는 것뿐이었으므로 공이 다음의 시(詩)를 지어 그 뜻을 돌리게 하였다. 즉,
평안도의 도리는 전혀 빛이 없는데 / 浿西桃李渾無色
헛되이 예조의 우시랑만 앉아 있네 / 虛恭春官右侍郞
하였다. 공은 또 의주 영위사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에게,
“이번 길에는 꾀꼬리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구려. 두 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시에 ‘숲 속의 꾀꼬리가 노래하지 않는다.[林鸎遂不歌]’ 하였으니, 이는 병란(兵亂)이 일어날 조짐이오.”
하였는데, 이듬해 정묘년에 과연 호란(胡亂)이 일어났다.
그해 가을에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전시방(殿試榜)을 논파(論罷)하였다가 비방하는 중론이 마구 일어나자, 공이 불안하게 여겨 모친을 모시고 시골로 내려가려 하여, 모든 제배(除拜)에 다 나아가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5) 1월에 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장차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므로 공이 밤중에 임기응변에 관한 글을 올렸으나 모두 채택되지 못하였다. 그때 대신(大臣)ㆍ대간(臺諫)들이, 세자에게 분조(分朝 난리에 세자가 임시로 설치한 조정)하여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주청하였으나 임금이 굳이 윤허하지 않으므로 공이 아뢰기를,
“삼궁(三宮)ㆍ백관(百官)이 다 섬[島]에 들어가서 양식이 떨어지면 내부의 혼란이 오고 또 모든 도(道)에서 명령을 받을 수 없어 역적이 혹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하고는 옛날 위진(魏晉) 시대의 행대(行臺 전쟁이 있을 때 지방에 설치하여 군국(軍國)의 중대사를 관장하던 곳) 제도에 대해 언급하자, 임금이 놀라며,
“이는 매우 유리한 의견이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신들이 다시 주청하자, 임금이 비로소 주청에 따라 완평군(完平君 이원익(李元翼)의 봉호(封號))으로 분조를 맡아 처리하게 하였다. 완평군이 공에게,
“오늘의 윤허는 공의 힘이오.”
하고 공을 찬획사(贊畫使)로 삼았다. 공이 분조를 따라 공주(公州)에 도착하여서는 사민(士民)들을 선유(宣諭)하는 글을 지어 바치고 이어 속어(俗語)로 사민(士民)을 호유하니, 사민이 모두 감동하였다. 분조가 곧 호남으로 떠나려 하자 공이,
“세자께서 남하(南下)하시면 호서(湖西) 지방이 반드시 크게 동요될 것이오니, 신(臣)이 공주에 머물러 민심을 안정시키면서, 봄농사를 권장하고 또 검찰사(檢察使)와 함께 후방을 차단하여 변란을 방지하는 것이 대계(大計)입니다.”
하므로 세자가 수락, 모든 처분이 다 기의(機宜)에 맞으므로 민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어 전주(全州)에 가서 세자를 뵈니 세자가 공을 인견하고 일을 논의하였다. 공이,
“강화도(江華島)를 방위하는 군사 중에는 훈련이 되지 않은 자가 섞여 있으므로 저하(邸下)께서 날로 그곳에 구원군을 보내려 하시지만, 그곳 군사가 정예(精銳)하지 못하고 또 보급도 어렵습니다.”
하고는, 별도로 용맹스런 군사를 모집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세자가 수락, 드디어 전적으로 그 일을 관장하였다. 공이 전시방을 논파한 이후로 비방하는 소리가 들끓었는데, 이때에 와서 또 종관(從官)까지 감독하게 되니, 공을 미워하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 심지어 영무(靈武)와 같은 행사를 취할 것이라고까지 수근댔다. 호남 사인(士人)들이 종관의 사주를 받아 장차 소(疏)를 올리려 하면서,
“이모(李某)는 세자를 모시고 장차 깊은 섬에 들어가서 원대한 계획을 방해하려 한다.”
하므로,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이,
“내가 보기에는 이모가 공주에 남아 있는 것은 강령(江嶺)을 차단시키는 전략을 위해서였다. 지금 분조가 멀리 내려간 것을 이모의 죄로 삼는다면 이는 무함이다.”
하자, 상소하는 의논이 드디어 그쳤다. 이번 일에 공이 주선한 전략이 매우 많았다. 분조일기(分朝日記)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청병(淸兵)이 물러간 뒤에 분조를 따라 강화도에 들어가다가 도중에서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영무(靈武) 운운하던 설이 비로소 행조(行朝)에 들어왔으나 임금이 믿지 않았으므로 이런 제수가 있었던 것이다. 구봉서(具鳳瑞)가 공에게,
“모름지기 일찍 알아서 처신하라.”
하므로 공이, 화란이 다시 일어나 군부(君父)가 치욕을 받고 있는데, 끝내 시종(侍從)의 직책에 있다는 것은 그 죄가 더욱 크다고 생각하고 글을 올려 죄를 자청하였는데 그 대의(大意)는,
“국가에서는 문(文)만으로 인재를 발탁하여 청현(淸顯)의 자리에 앉혀 놓았습니다. 그러나 문인(文人)은 거의가 부화경박(浮華輕薄)한데 그중에서도 신이 더욱 더하오니, 마땅히 신을 먼저 내쫓고 다른 사람을 등용하여 서정(庶政)을 쇄신하소서.”
하였다. 이에 말을 지어내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공의 소에서 다른 사람 운운한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송 휘종(宋徽宗)이 아들 흠종(欽宗)에게 선위(禪位)하듯 만들려는 의도라고 하였으니, 이는 ‘영무(靈武) 운운’ 하던 모함을 사실화 시키려는 것이다. 만약 인조(仁祖)의 성명(聖明)이 아니었던들 위험할 뻔하였다.
별단(別單 주본(奏本)에 첨부하는 문서)을 올려, 용맹 있는 군인을 모집하는 제도에 대해, 자세히 논하였고 맨 끝에는,
“이 일이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 같지만, 그 규모의 발단은 실로 우연(偶然)이 아닙니다. 이미 설치해 놓은 것을 도로 철폐한다면 후일에 모군(募軍)하는 길이 막힐 듯합니다.”
고 하였다.
대가(大駕)를 따라 서울에 돌아와 휴가를 얻어 모친을 뵈러 내려갔다.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사직하였고, 다시 좌승지(左承旨)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소를 올렸다.
“금번의 화의(和議)는 협박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의리에 맞지 않으므로 앞으로 반드시 조약을 위배했다는 책망과 침략을 받을 단서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반정 이래 몇 해 동안에 조정의 신하가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이러한 전복(顚覆)의 화를 당하였습니다. 최명길(崔鳴吉)은 책임을 지고 글을 올리는데 ‘사죄(死罪)’ 두 글자면 충분할 터인데 도리어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아 마치 의리에 당연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는 이미 옳지 못한 것임에도 임금이 또 그 주장에 호응하여, 지난번의 치욕은 부득이한 최후 방책이었다고 내세워서 구차하게 치욕을 엄폐하려는 구실로 삼음으로써, 충의의 선비는 팔을 걷고 불평할 것이요, 봉강(封疆)의 신하는 사지(四肢)가 해태하여 편하기를 생각하게 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고 또,
“수령(守令)이 사람을 추천하는 데 연좌법(連坐法)을 세우지 않고, 군기(軍器) 제작하는 데는 방략(方略)에 근거하지 않고, 옛것을 인습하여 형식만을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근래에 성상(聖上)께서는 진작(振作)에 힘쓰시고 용인(用人)에 유의하시나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아 치적이 막연하고 환란이 다시 일어났으니 어찌 저마다 마음이 해이해져 나 혼자만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치란 안위(治亂安危)의 조짐입니다. 원컨대 성지(聖志)를 굳게 갖고 더욱 힘쓰시어 이르지 않은 바를 구하고 미치지 못한 바를 다지셔서 한결 진보해 나가시면 반드시 천인(天人)이 함께 호응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경연(經筵)에서의 강론이 전혀 경서(經書)만을 힘쓰고 의리만을 공론(空論)한다 하오니, 모름지기 《사기(史記)》를 아울러 보시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를 쌓아야 합니다.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춘추(春秋)》를 이어 지은 것으로서 역사를 경(經)으로 삼았고, 또 송 고종(宋高宗)이 남도(南渡 금(金) 나라를 피하여 수도를 임안(臨安)으로 옮긴 것을 이름)한 뒤에 지어졌기 때문에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배격하는 분별과 정전 사기(征戰事機)에 관한 변화가 자세히 기재되어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공의 사직은 명하였으나 소문(疏文)은 보류해 두었다.
공은 시골에 내려간 지 얼마 안 되어 충주 목사에 제수되었는데, 체부 종사(體府從事) 김육(金堉)이 계청하여 파직시켰다. 이는 비방하는 의론이 적중된 것이다. 공이 충주에 있은 지 1백 일도 못 되었으나 고을 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뒤에 김육은 공을 만나서 소문을 잘못 들어 그렇게 되었다고 사과하였고, 또 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국사(國史)를 속수(續修)하게 하면서 본직을 사퇴한 차자(箚子)에,
“이모는 총명이 뛰어나고 재주와 식견이 모두 훌륭하다.”
는 말이 있었다. 또 공의 사초(史草) 용지가 모두 호조(戶曹)의 휴지(休紙)인 것을 보고는,
“이 노인이 나라를 위하여 이처럼 비용을 아꼈다.”
고 하였다.
이해 2월에 남방을 유람하면서 한적한 터를 잡아 세상을 멀리할 계획을 세웠다. 예안(禮安)을 지나다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참배하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석채례(釋菜禮)를 올리고 원생(院生)들에게 글 읽는 공정(工程)을 일러 주었다.
이어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임금의 건강이 좋지 못하므로 문안을 위해 상경하여 사은(謝恩)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7)에 시골로 내려왔다가 좌승지(左承旨)로 부르므로 나아갔다가 다시 시골로 내려가 모친 봉양하기를 청하였으나 불허하므로 휴가를 얻어 시골로 내려갔다.
9월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몇 차례 벼슬이 체직되고 임명되다가 경오년(1630, 인조8) 6월에 병조 참의로 내직(內直)하였는데, 임금이 특명으로 호당(湖堂)으로 나가게 하고 술을 하사한 다음, 글을 지으라 하여 제2등에 들므로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때에 공이 길가에 있는 집에 우거(寓居)해 있었는데, 비방이 한창 빗발쳤다. 사람들이 여기에 부화하여 ‘이모(李某)가 고의로 길가에 우거하면서 나라를 비방하고 말을 지어낸다.’ 하므로 공이 노방택(路旁宅)이란 시(詩)를 지어 해명하였다.
이어 지방의 보직을 희망하였으나 되지 않고 체직(遞職)으로 인하여 시골에 내려왔다가 10월에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수친연(壽親宴)에 참석하였다.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ㆍ계곡(谿谷) 장유(張維) 등과 더불어 편친계(偏親契)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날 연회에 임금이 풍악과 술을 내리고 별도로 설면(雪綿)을 여러 노인에게 하사하므로 이튿날 제공(諸公)과 함께 글을 올려 은혜를 사례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9) 4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헌부(司憲府)와 함께 추숭(追崇 원종(元宗) 추존 문제를 말한다) 주청을 중지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공이 지은 계사(啓辭)가 8장이나 되었으나 엄지(嚴旨)를 받고 사체(辭遞)되었다.
가을에 전조(銓曹)에서 공의 모친 봉양을 위하여 간성 현감(杆城縣監)을 제수하였다. 공은 간성에 부임하여 교화를 급선무로 삼아 학교를 증축하고 교사(敎師)를 두어 아동교육을 권장하였으며, 매월 삭망(朔望)에는 성묘(聖廟)를 배알케 하고 학력을 시험하여 상벌을 주었다. 또 수재(秀才)를 선발하여 관(館)에 두고 몸소 가르쳤으며, 《심경(心經)》에 구결(口訣)을 달고 소서(小叙)를 써서 심학(心學)을 가르쳤다. 현리(縣吏)로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얻지 못한 자가 있으면 조정에 추천하여 같은 도(道)의 수령을 하게 하므로, 사람들이 공숙 문자(公叔文子)가 그 가신(家臣) 선(僎)과 함께 조반(朝班)에 올랐던 미사(美事)에 비교하였다.
또 수리 사업을 크게 개발하여 농업을 장구히 하였고 승려(僧侶)를 모집하여 진부령(陳富嶺)의 폐로(廢路)를 복구하였으며, 고개 밑에 원우(院宇)를 설치하여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였으므로 고을 백성이 비(碑)를 세워 공덕을 칭송한 것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공과 부인(夫人)의 상사(喪事)에 모두 재물을 가지고 와서 부조하였고, 충주 사람들도 그러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11) 봄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눈[雪]으로 길이 막혀 사직하자 임금이,
“그대의 훌륭한 논사(論思)를 발탁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는데 고갯길이 눈에 막혔으므로 늙은 몸이 잠시 지체하게 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대는 천천히 올라오도록 하라.”
는 비답이 내리므로 3월에 비로소 서울에 올라와 사은(謝恩)하고 소를 올려 관동 지방의 피폐한 상황을 논하였다. 시골로 내려가 모친을 뵙고 벼슬을 사양하면서 소를 올려 창경궁(昌慶宮) 수선의 부당함을 논하였다.
5월에 조정에 돌아와서 사직하고 하향하였으며,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장(辭職狀)을 내고 나아가지 않자, 소명(召命)이 다시 내렸다. 이에 다시 소를 올려 소회(所懷)를 진술하였다가 사국 수찬관(史局修撰官)으로 소명에 응하여 조정에 돌아왔고,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어서는 차자(箚子)를 올려 군덕(君德)과 시정(時政)의 득실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 맺음말에,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계교(計較)하거나 번잡한 설(說) 들을 물리치고 또 역행하거나 왜곡된 정사(政事)들을 제거하여 정인(正人)을 돕고 정도(正道)를 행하며, 간(奸)을 물리치고 탐(貪)을 엄치하며 도(道)를 높이고 염치(廉恥)를 숭상하는 것으로 요점을 삼아서, 위로 천시에 따르고 밑으로 민심에 화합하여 재이(災異)를 없애고 흩어진 백성을 모음으로써 다가오는 큰 우려를 극복하고 위기 일발의 형세에 대처하소서.”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이를 보류하고 옥당(玉堂)에 내리지 않았으니, 차자가 보류된 예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때에 종묘(宗廟)의 신주(神主) 개제(改題)에 대한 의론이 있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기를,
“혼조(昏朝 광해군 시대)에서 올린 존호(尊號 선조(宣祖)의 묘호(廟號)를 이름) 16자(字)는 모두 광해가 스스로 공덕을 찬양해 놓고는 선조(宣祖)께서 끼쳐 주신 경사로 미룬 것인데, 이는 당시 간신배가 윗사람을 속이고 사(私)를 감행한 소치요 사실 선조의 성덕 신공(聖德神功)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청컨대 삭제하소서.”
하였다. 공조 참의에 체배(遞拜)되었다가 이조에 옮겨졌고, 갑술년(1634, 인조12)에 휴가를 얻어 모친을 뵈었으며, 사사(史事) 관계로 급한 부름을 받고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대개 혼조(昏朝)의 기주(記注)가 병란으로 인멸되어 아무것도 없으므로 공이 모든 동료와 함께 간원(諫院)의 조보(朝報)와 금부(禁府)의 형지(刑志) 등을 수집하는 한편, 민간을 상대로 하여 유실된 기주와 사가(私家)에서 기록한 장ㆍ차(章箚)를 찾아내어 유에 따라 찬기(纂記)하여 도합 39책으로 만들었다.
부제학에 체배(遞拜)되었다가 사직하고 하향한 지 얼마 안 되어 서울에 돌아왔으며,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사직하고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을해년(1635, 인조13) 봄에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때에 부묘(祔廟 임금이 삼년상을 마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의 행사가 있었는데 삼사(三司)가 다시 논쟁을 벌이므로 공이 이전의 일을 인용하여 소를 올려 의견을 개진, 논책을 받아 체직되었다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 제수되고, 또 비변사 부제조(備邊司副提調)를 겸임하여 누차 사양하여도 윤허를 받지 못했다. 겨울에 탄핵을 받고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근일 입시(入侍)하던 날에 삼가 연신(筵臣)이 진계(陳戒)하는 말을 들으니, 모두가 근본을 맑게 하는 뜻이었고 전하께서도 여기에 뜻이 맞아 다시 하문(下問)하시므로 연신이 먼저의 말을 간곡히 되풀이해서 진달했습니다. 신의 좁은 소견으로 보건대 근본을 맑게 하자는 의론은 다시 덧붙일 것이 없으므로 성상(聖上)께서 이를 정사(政事)에 실시하여 날로 진보되기를 바란 때문에 법도를 밝히고 인재를 강론하는 등의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신이 비록 미천하고 무식하오나 어찌 이것이 격군(格君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하는 제1의 의(義)로 알고 연신의 설을 헐뜯어서 이간하였겠습니까. 이른바, 동인(東人)의 책문(策問)에 대해 말한 것은 연신의 지론(至論)을 거자(擧子 과거의 응시자)들의 상담(常談)에 비유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위로 연신의 강설(講說)에서부터 아래로 장소(章疏)ㆍ대책(對策)에 이르기까지 으레 이런 말을 올리곤 하므로, 전하께서 이미 기억하고 계시리라 여긴 때문에 창졸간에 그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물러 나왔으니 방청하는 자가 의심하고 물의가 일제히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신을 탄핵하는 소장이 비록 정지되었으나 죄상은 이미 밝혀졌는데, 전하께서 신의 자처(自處)할 길을 윤허하지 않고 사유(師儒)의 수석(首席)과 묘의(廟議)의 말석(末席)에 눌러 있게 하시니, 군덕(君德)의 누(累)와 세도(世道)의 해(害)가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하므로 신은 만번 죽어도 죄를 다 갚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때에 국가의 화란이 박두하였는데도, 상하간에 계획하는 일이 없고 연신들은 군덕(君德)을 말하면서 진담(陳談)만 자꾸 진달할 뿐이므로 공이, 금일의 병은 헛되이 그 말만을 되풀이하는 데 있다고 여긴 것인데, 대론(臺論)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가 수일이 지나 정지된 때문에 이 소를 올린 것이다.
병자년(1636, 인조14) 여름에 소를 올려 비국당상(備局堂上)을 사퇴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난 계해년(1623, 인조1) 겨울에 신이 망녕되이 서도(西道)의 군사(軍事) 문제가 매우 우려된다고 추측하고, 공신이나 명재(名宰)와 더불어 서도 방면에 나가 대성(大城)을 지켜 무인(武人)의 모범이 되겠다고 주청하였고, 또 국가와 국토를 위하여 죽은 옛사람의 일을 들어 진언한 것은, 바로 지금 정온(鄭蘊)이 올린 소의 내용과 같으며, 을축년(1625, 인조3) 겨울에 또 성상의 뜻에 응하여 지은 ‘대진작(大振作)’이란 제목은 지금 이경여(李敬輿)가 탑전(榻前)에서 논(論)한 내용과 같으며, 또 ‘대변통(大變通)’이란 제목은 지금 윤황(尹煌)이 올린 소의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그때에 과연 현철한 사람에게 위임하고 계수(計數)를 정하여 성과를 올리게 하셨다면 일기(一紀) 이내에 국세가 반드시 강화되었을 것이니, 어찌 오늘과 같이 오랑캐의 침입을 당하겠습니까. 그때 조정에서는 맥도(貊道 오랑캐의 제도)라고 비웃었고 전하께서 이미 채택할 것을 명하였으나 조정에서 끝내 복계(覆啓)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신 또한 재주가 없고 성품이 혼매하여 능히 자신도 점검하지 못함으로써 임금을 도와 일을 바르게 할 수 없는 존재인데, 한갓 말만으로 논쟁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때문에 더 이상 말을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사직하는 소에 1, 2차 언급하여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인책하였으니, 또한 성명(聖明)께서 통촉하신 바입니다. 그럼 신의 구구한 본의가 어찌 오늘날 공신(功臣)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라를 미혹시키고 임금을 오도(誤導)하려는 데에 있겠습니까. 현재 대세가 이미 기울고 백성이 모두 흩어졌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선(善)을 하시는 데 전력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대중과 함께하심으로써 안으로는 대부의 희망을 잃지 않고 밖으로는 백성의 노여움을 사지 않아야만 거의 천심을 잃지 않고 화란을 해소시킬 수 있을 터인데 도리어 용사(用舍 취사(取捨))가 방정(方正)함을 잃어 신같이 둔한 사람이 조정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게 되었으니, 신이 비록 혼미하고 어두운 사람이나 이로써 실패할 것을 압니다.”
하였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차자(箚子)를 올려 친정진주(親征進駐)에 대해 논하자, 비국(備局)에서 난점이 있다고 회계(回啓)하므로 정공이 다시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공격하였다. 이는 정공이, 비국에서는 대신과 여러 재상들이 상의하여 결정하였는데, 유사 제조(有司提調)는 문부(文簿)만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공격이 있었던 것이다. 공이 소를 올리기를,
“신이 회계(回啓)할 즈음에 여러 사람의 의론을 의심하지 않음은 다름이 아니라, 고금(古今)이 다르고 시세도 변했기 때문입니다. 무릇 서책에 전하는 것을 일일이 모방하여 행하자면 어찌 교체(膠滯)되는 폐단이 없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문약(文弱)에만 치우쳐 강한 오랑캐의 제압을 받는 것이 마치 변송(汴宋)의 말엽과 같습니다. 경덕(景德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연간 전연(澶淵)의 싸움에서 금(金) 나라 오랑캐가 비록 대거 침입하였지만 하북(河北) 지방의 모든 성(城)에서 정예한 군사로 퇴각시켰고 태원(太原) 지방의 군사가 그 뒤를 가로 차단하려 했으니, 천자(天子)가 대군으로 진격하여 그 인후(咽喉)를 조였다면, 구준(寇準)의 ‘한 대의 적 수레도 되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하던 전략이 거의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흥(紹興 남송 고종(南宋 高宗)의 연호) 초년에 촉(蜀)ㆍ형(荊)ㆍ회남(淮南)ㆍ회북(淮北) 등 5대진(大鎭)이 양자강(揚子江) 밖을 중시, 중원(中原)으로 진출하고 있는데 행도(行都 임시 조정)가 전당(錢塘) 한 모퉁이에 있었으므로 장준(張浚) 등 제신이 건강(建康 남경(南京))으로 행행(行幸)하여 중원에서의 기대를 이어 가자고 한 것은, 구준(寇準)의 친정(親征)하자는 의론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오늘 전하께서 수천 명의 위졸(衛卒)을 거느리고 서도(西道) 방면으로 향하시는 것은 겨우 6, 7개 산성(山城)의 성원(聲援)이 될 뿐이니 이 어찌 경덕(景德)ㆍ소흥(紹興)의 때와 동일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병력과 재력을 보아 별도 조치를 의논한다는 말은 진실로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야 하는 부득이한 일이니 이 어찌 붓을 잡은 하관(下官)이 이의를 제기할 바이겠습니까.”
하였다. 또 과거(科擧)의 폐단에 대해 소를 올려 논하기를,
“경유(京儒)는 경서(經書)를 배우지 않고 글짓기에만 전력하여 별시(別試) 등의 응시에 대비하는데, 그 문장 또한 경서에 근거를 두지 아니하여 한 퇴지(韓退之)ㆍ구양수(歐陽脩) 같은 이치에 가까운 글은 진부(陳腐)한 이야기로 알고 오직 《사기(史記)》ㆍ《장자(莊子)》 등의 책에만 종사하여 기이한 것을 숭상하며, 향유(鄕儒)는 경유와 아예 재주를 겨루려 하지 않기 때문에 편액(編額)에는 쉬우나 전혀 작문(作文)을 익히지 아니하여, 장차 문학이 멸렬되고 인재가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지금 고강(考講)을 실시할 때 배송(背誦)하는 방식을 관대히 하고 회시(會試) 때에 이르러 또 문장에 관한 제목을 주로 낸다면 경유(京儒)로서 경서를 근본으로 하여 문장을 한 자는 반드시 많이 합격될 것이요, 훌륭한 선비는 이를 본받아 한번 혁신될 것입니다. 이는 본조(本朝)에서 실시하고 있는 대비(大比 3년에 1회 과거를 보임) 제도인데, 지금 이를 복구한다면 문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서를 연구하고 경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문장을 연구하여 두 갈래로 나뉘어지지 않을 것이요, 성균관의 유생들도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우답(優答)을 내리고 해당 조(曹)에 명하여 회계(回啓)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대사간에 옮겨졌다가 사직하고 모친을 모시고 하향하였다. 또 대사간ㆍ대사성으로 불렀으나 다 나아가지 않고 소를 올려 시폐(時弊)를 논하기를,
“신이 비국(備局)에 내린 소장(疏章)을 두루 보니, 거의가 군덕 화민(君德化民)을 주로 말하였는데, 이는 예부터 성현들이 극언(極言)한 바로 천하의 이치가 어찌 여기에서 더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군(人君)이 심법(心法)으로써 치도(治道)를 삼는 것은 주공(周公) 이후부터였는데, 수천년 내려오면서 계승하는 이가 없으므로 요 임금이나 순 임금만 같지 못한 것을 임금들이 수치로 여기지 않고, 인신(人臣)들이 군부(君父)에게 바라는 것은 거의 축리(祝釐 신에게 제사하여 복을 비는 것)와 같은 심정이어서, 말하는 이는 고상할 뿐이요, 듣는 이는 귀에 거슬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진언하는 이가 많아도 끝내 공문(空文)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검약(儉約)ㆍ관혜(寬惠)ㆍ이신(履信)ㆍ병공(秉公)이 정치의 근본이므로 왕도(王道)하는 이만 이를 위주할 뿐 아니라, 패도(覇道)하는 이도 반드시 이를 빌어 패자가 되고 부강(富强)을 힘쓰는 이는 이를 빌어서 부강하였으며, 아래로 간웅(奸雄)이 득지(得志)하고 오랑캐가 군장(君長)노릇하는 데 이르기까지 다 이를 빌어 하였으니, 이는 정자(程子)의 ‘도적에게도 예악(禮樂)이 있다.’는 말이 바로 이 뜻입니다. 이는 바로 성패와 화복의 관건이므로 여기서 실수가 있으면 더 이상 보잘 것이 없게 되는데, 오늘의 세속으로 논하면 그렇지 않아서, 왕도란 존숭(尊崇)해야 하지만 시의(時宜)에는 맞지 않는다 하고는, 잡패(雜霸) 이하가 모두 탐사(貪詐)로써 목적을 달성시키는 것으로 능사를 삼으며, 정일(精一)한 논을 고담(高談)하고는 도리어 비루한 정치를 행하여 이득을 추구하는 근원이 날로 열리고 나라의 근본은 날로 훼손되어 패망의 화가 전혀 여기에서 연유되니 아, 이는 너무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소위 진작(振作)이란 것은 오로지 상벌(賞罰)과 진퇴(進退) 사이에 있는데, 근래에 일차 무능한 사람을 도태시키고 현재를 추천한 일이 있었으나 유사(有司)의 상례요 해조(該曹)의 사법(死法)에 지나지 않았을 뿐, 요행의 문[倖門]이 따라서 열리고 사의(私意)가 크게 행하여져 1, 2명 발탁된 사람도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탁무(卓茂)를 관직에 봉할 때와 같이 민심을 움직일 만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이미 도태된 사람보다 못한 실정입니다. 더욱이 전하께서는 좌우 대신들과 순고(詢考 일을 묻고 말을 참고하는 것)하고 강론하여 그 현부(賢否)를 정확히 보고 나서 진퇴를 결정하지 않으시니 인재를 어떻게 등용하며 서정을 어찌 다스리겠습니까. 소위 변통(變通)이라는 것은 전혀 피폐된 정사를 경장(更張)하고 간사한 좀들을 제거하여 일체 안민 수국(安民守國)을 당무(當務)로 삼는 데 있는데, 지금 다만 어공(御供)을 절감하고 비용을 절약할 뿐, 구차하고 고식적인 정치와 백성을 동요케 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법으로 일체 전례에 따라 처리하니, ‘《맹자》에 헛된 선(善)은 정치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국가의 피폐된 정사를 소상하게 들 수 없지만, 한말로 말하자면 불공평이며 그중에서 심한 것은 병재(兵財)의 행정이므로 불가불 급히 경장하여 창궐하는 오랑캐를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서쪽 변방의 10여 산성을 모두 적을 차단하는 방패로 삼고 그들을 노륙(孥戮 사로잡고 죽이는 것)할 계획을 그 쪽 장수들과 약속하고 있으니, 이는 적이 금명간 쇄도할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만약 왕현모(王玄謨)에게 베풀었던 너그러움이 없으면 반드시 봉상청(封常淸 당 나라 때 변영성(邊令誠)의 참소에 의해 죽었음)을 남주(濫誅)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패망의 위기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국가에서는 군사를 없앨 수는 있으나 이미 군대가 있다면 양성하지 않을 수 없고, 백성을 부리지 않아야 하나 이미 부린다면 한 사람에게만 괴로움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대저 고금의 병제(兵制)는 군사가 민(民)에서 분리되느냐 귀속되느냐 하는 양단(兩端)입니다. 군사와 백성이 분리되지 않으면 이정(里井)이 서로 돕고, 군사와 백성이 이미 분리되면 백성이 군사를 부양해야 하니 제도에는 비록 장단점이 있으나 그 양성하는 본의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국민개병이 아니어서 군사가 백성으로부터 부양을 받지 못하고 부양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따라서 박해까지 가하는 형편이니, 병제(兵制)의 불량(不良)함은 고금에 없는 바입니다. 군사를 일으킨 이래로 신이 안팎을 출입하여 약간의 의견을 가졌는 바, 개병주의로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여겨졌으므로 접때 회의 끝에서 과연 이를 논설하였으나 도리어 미친 계책과 헛소리로 취급되어 채택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다시 한두 가지를 들어 아뢰겠습니다.
옛날에는 국가에 대변(大變)이 있으면 국민개병의 법이 있어서 공경(公卿) 이하가 차례로 나가 장수가 되었습니다. 고려 사대부(士大夫)도 종군하여 적을 막은 예가 있으니, 이 모두가 난리를 만나 국가를 보호하고 적개심을 함께 갖게 하는 일이니, 어찌 이를 어기거나 원망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지난 병인년(1626, 인조4) 겨울에 신이 체신(體臣 체찰사(體察使)) 장만(張晩)을 따라 입시(入侍)할 때 장만이 ‘호패(號牌) 법안이 완성된 뒤에 양반이 한 군대를 만들고, 양민(良民)ㆍ천민(賤民)이 각기 한 군대를 만든다면 사세가 편리할 것이다.’ 하므로 성상(聖上)께서 가납하시고 ‘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제 호패법은 비록 폐지하였으나 이 법은 실시할 만하다.’고 하시었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수원(水原) 일부(一府)에서는 호(戶)마다 다 군대가 조직되므로 그곳 항간에는 병정(兵丁)이 되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합니다. 그러나 수원 군병도 도망치는 자가 있었으니 이는 전 국민이 다 병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근래 관서 지방에서는 유생을 군대로 조직하여 ‘유생군(儒生軍)’이라 하므로 대중들도 군대를 기피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명분이 섰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백 명의 양반에서 병정은 한둘도 없고 수십 명의 민정(民丁)에서 병정은 겨우 1, 2명뿐이며, 그들 병정은 자기가 병기를 준비하여 항상 훈련하고 출정하는 고통을 겪고 있으니, 어찌 원망하며 도망치지 않겠습니까. 지금 또 충의위(忠義衛)에서 선발하여 별도로 군호(軍號)를 조직하였는데, 전국의 양반ㆍ서천(庶賤)들은 빈둥거리며 놀고 있으니, 충의위가 국가에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처럼 홀로 고생한단 말씀입니까. 그러나 구전(口傳)의 원인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수령들이 색출하여 보고하므로 거개는 은닉하고 누락되어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도 색출하지 못하니, 이는 불공평한 중에 가장 불공평한 것입니다. 충의위의 병정이 어찌 원망하고 도망치지 않겠습니까. 남한산성(南漢山城)에는 병기가 미비하고 군량이 충분하지 못하여 수비하는 형상이 오히려 서도(西道)의 여러 성만 못한데 지금 소속된 다섯 고을의 군사로 하여금 처자를 거느리고 가자(家資)를 운반하여 일제히 입보(入保)케 하는가 하면, 또 군사를 모집해도 응하는 자가 없으므로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사민(士民)을 몰아 종군케 하니, 다른 고을의 군사에 비하면 홀로 고생이 많다 하겠습니다. 또 이 성은 본래 한강(漢江)의 방어로 마땅히 한강 남쪽 고을의 사람을 소속시켜야 하는데, 한강 북쪽 고을의 사람들이 끼어 있으니, 이는 불공평한 중에 더욱 불공평한 일입니다. 병정된 자가 어찌 원망하여 도망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그 노고를 공평히 하여 원망이 없도록 하고 장정을 잘 부양하여 국사에 애착심이 있도록 하는 이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옛 제도를 의방하고 인정을 참작하여 공경 이하 한 사람도 군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법령을 내린 뒤에 정3품 이상이면 장수로, 종6품 이상이면 장관(將官)으로, 7품 이하면 조사군(朝士軍)이라 호칭하고 유생(儒生)은 유생군, 무학(武學)은 무학군, 잡직ㆍ제위(諸衛)ㆍ시민ㆍ서리(胥吏)ㆍ전복(典僕) 등은 그 유에 따라 호칭을 하면, 공사 천인(公私賤人)ㆍ유수(遊手)ㆍ한민(閒民)이 자원하여 군대에 편입되어 숨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 재직자나 역사자(役使者)는 병역을 모면하고 부자(父子)가 함께 군대에 적을 두었으면 아비를, 형제가 적을 같이 하였으면 형을, 3인이 군대에 있으면 1인을, 6인이면 2인을 병역에서 면제해 주고, 하인이 상전을 위해 군대에 복무한 자는 연한을 정하여 삭제해 주고, 노병 폐질자도 면제해야 합니다. 또 그중에 사대부에서 서복(胥僕)ㆍ잡직의 유에 이르기까지 모병에 응하고 싶지 않는 자에게는 일정한 납물(納物)을 바치도록 하여 병역을 면해 주고 병역이 삭제된 자에게는 제정첩(除征帖)을, 병역이 면제된 자에게는 면정첩(免征帖)을 발부해 주고 그 나머지는 군대에 편입시켜야 합니다. 또 그중에서 혹 모병법을 혹은 선발법을 시행하되 양반이면 효건대(驍健隊)에, 민정(民丁)이면 어영군(御營軍)에 이송하고, 나머지 조사(朝士)로서 재직하지 않는 사람의 영도하에 병기(兵技)ㆍ진법(陣法)을 가르치게 하며, 경중(京中)이면 호종(扈從)에 대비하거나 유관(留官)에 소속시키고, 외방이면 향리를 지키는 한편 반도(叛盜)를 금지시키며, 그 편성 책임은 서울에는 한성부(漢城府)와 오부관(五部官)이 관장하고, 외방에는 감사(監司)ㆍ수령(守令)이 관장함으로써, 조국(曹局)을 별도로 설치하여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에게 기회를 주어서는 마땅치 않을 줄로 여깁니다. 편성이 이미 끝난 뒤에는 사신을 파견, 군적에 등록되지 않은 자와 면정첩(免征帖)을 휴대하지 않은 자를 색출하여 목을 베어 향리에 효시(梟示)해야 합니다. 한 도(道)에서 수삼년 만 이렇게 하면 다 따라갈 것입니다. 또 면정자(免征者)가 바친 재물은 각 부현(府縣)에서 저장해 두고 해당 관청이 그 수입 지출의 대수(大數)를 관리하여 양병(養兵)의 비용으로 삼아야 하며 어영(御營)ㆍ효대(驍隊)에서는 수만의 군사를 채워 원수(元帥)에게 소속시켜 강하(江河)ㆍ관령(關嶺)에 침입하는 적을 차단하는 계획을 세운다면 거의 쓸모 있는 군대가 될 것입니다. 이 제도는 단연 시행할 만한 것으로 순조로움은 있을망정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니, 성상께서는 명단을 내려 사방에 하교하시고 이어 일만 끝나면 바로 혁파하겠다는 뜻을 효유하시면 순월(旬月) 사이에 완안(完案)이 되어, 이미 편성된 군사와 이미 시행하는 제도가 하나도 방해가 되지 않고 저절로 강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뒤에 양도(兩都)에 진주(進駐)를 논할 수도 있고 강화도를 포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화의(和議)가 이미 끊어지고 대의(大義)가 이미 밝아졌다 하여 곧은 말하는 것을 장하게, 인화(人和)를 제일로 여기며, 이미 구축된 성지(城池)로써 적을 막을 수 있고 이미 훈련된 군병으로써 횡행(橫行)하여 오랑캐의 후방을 교란시킬 수 있고 요동(遼東)의 옛땅을 회복할 수 있다하면서 병제(兵制)를 의논하지 않아도 충분하게 여긴다면 이는 묘당(廟堂)에서만 감히 언급할 수 없는 말일 뿐 아니라 촌동(村童) 야부(野夫)들도 듣고 모두 비웃을 터인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체 무슨 확신이 있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성상께서는 다시 피아간의 상황을 더욱더 통찰하고 단연 시행하여, 어영(御營)의 용맹스런 군사만을 더 충당시키시면 군량 공급의 길이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또 신의 뜻으로는, 각 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되, 이를 오래 재직한 감사(監司)가 관장하여, 전례에 따라 포목(布木)을 걷고 군자감(軍資監)이 토산물을 준비하는가 하면, 수송원을 윤번으로 정하여 각사(各司)에 직납(直納)하도록 하시면 오늘날 수만의 재산을 좀먹는 것을 단절시키고 그 남는 것을 가지고 군비를 넉넉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조석(朝夕)으로 사변이 일어나게 된다면 불가불 별도의 조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전번 침입을 당하였을 때에는 사람의 머릿수에 따라 세금을 마구 거둬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번에는 경제를 예정하여 완급(緩急)에 따라 사용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소(疏)가 비국(備局)에 내려졌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9월에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에 화의가 이미 결렬되었다. 공이, 강이 얼어붙어 오랑캐가 쳐들어 오면 미처 국난에 참여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10월에 단기(單騎)로 입경하였다가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11월에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에 특별 추천을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에 승진하여 수대제학(守大提學)에 겸임되므로 연속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에 오랑캐들이 졸지에 쳐들어 오자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고, 명을 받아 다시 오랑캐의 군영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지었는데, 대의(大義)를 들어 책망하는 내용으로 되었으므로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또 대신들과 국서를 쓰는 방식에 대하여 쟁론이 여러 차례 있었고 기타 논의에도 의견을 거슬러 논책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우거하는 집에 물러 나와 여러 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때에 문묘(文廟) 위판(位版)이 산성(山城)으로 모셔지자 공이 정조(正朝)에 동료와 함께 분향례(焚香禮)를 올리고 물러 나와서 집 기둥에 쓰기를,
“정치에 대한 의견은 다르나 의리로는 같이 죽을 것이다. 이 마음의 도리는 선성(先聖)께서 보시리라.”
하였다. 의승(義僧)이 나가는 인편에 편지를 자제들에게 부쳤는데,
“나는 오래전부터 오늘날이 있을 줄 알았다. 너희들은 구자형(具姊兄)의 집과 고락을 같이하며 어머님의 마음을 위로하라. 나는 평소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기를 정한 바이다. 지금 양궁(兩宮)을 모시며 한성을 지키고 있으니, 성패 길흉은 일편 충심이 우러러 푸른 하늘만 믿는다. 어머님 생각 이외에는 다른 아무 괴로움도 없다.”
하였다. 임금이 출성(出城)할 때에 공은 함께 모시고 나가지 못하였다. 이는 묘당(廟堂)에서 공이 이의를 내세울까 꺼려 떼어 놓았기 때문이다.
공이 관동 지방에 오랑캐의 약탈이 심하다는 정보를 듣고 모부인의 피난지에도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하인(下人)의 명의로 감사에게 글을 올려 피난지를 옮겨 주기를 청하였다가 그대로 실현되었단 말을 듣고 곧 동쪽으로 달려가 보니, 노유(老幼)가 다 무사하였다.
이에 소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모부인을 모시고 제천(堤川)으로 옮겼다. 이윽고 대신들이, 공이 도망갔다고 상달하여 양사(兩司)에서 장차 공을 귀양 보낼 것을 논죄하리라는 소문이 들리므로 공이 입경하여 대죄하자, 나라에서는 호가(扈駕)의 공로가 있다 하여 가자(加資)가 내려졌다. 공이 스스로 탄핵하였으나 불허하였다. 각 도진(島鎭)에 보내는 자문(咨文)ㆍ게첩(揭貼)은 11건이나 지어 바쳤는데, 국가의 화패(禍敗) 정상이 갖추 진술되었다.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으나 혐의를 피하여 사직하였고 다시 제수되었으나 또 혐의를 피하여 사직하였다.
이윽고 모친이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급히 제천(堤川)으로 내려갔으나 끝내 상을 당하여 지평(砥平)으로 반장하고 여기에 토실(土室)을 짓고 살면서 택구거사(澤癯居士)라 하고 자서(自叙)하기를,
“남한산성에 포위당하여 있을 때 근심이 병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더욱 심하니,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겠다. 장혈(葬穴)을 스스로 선영(先塋) 곁에 예정해 놓고 자제들에게 장사는 한결 검소하게 하여 회(灰)를 쓰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도록 하였다. 이는 가난해서만이 아니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대부가 직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면 죽어서 장사 지낼 때 선비의 예를 적용한다 하였기 때문인데, 이 또한 나 자신은 스스로 폄(貶)하는 의의이기도 하다. 거사(居士)는 기질이 어리석고 게을러 이미 장성하여서도 인사(人事)를 알지 못하였고, 중간에는 폐질로 인하여 심심한 때는 서사(書史)를 읽어 자못 이치를 깨닫고 망녕되이 시비 득실을 말하다가 풍속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광해조에는 형벌의 함정에 빠질 뻔하였으나 오직 자취를 감춰서 무사하였고, 신정(新政)을 맞이하여서는 당시 절개가 가상하다는 칭찬을 받아 청반(淸班)에 뛰어올랐으나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크게 걱정하였다. 또 이웃 도적이 침입하고 국정이 정리되지 않았기에 한번 혁신하기 위하여 올린 의논이 상하 간의 비위를 거슬렀으므로 매양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를 희망하여 지방 관직을 구하였는가 하면, 교유(交遊)를 끊고 당색을 피하여 고립 자신(孤立自信)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의 의심을 크게 사서 오활하고 허황하다는 지목을 받았으며, 심한 자는 음흉하고 반복이 많은 사람으로 배척하여, 분조(分朝) 때에 더욱 극도에 달하였다. 그러나 성상께서 관용을 베풀었고 조정의 의논도 전적으로 버리지 아니하여 무릇 탄핵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문예(文藝)를 찬양하고 다음 잘못을 폄(貶)하였으므로 비록 과실이 날로 드러나도 문명(文名)은 날로 유여해져 문병(文柄 대제학을 가리킴)을 맡고 열경(列卿)의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이는 다 사세의 추이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실제로는 문장이 장점도 아니요 또 좋아하지도 않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군부(君父)가 치욕을 당하였는데, 사전에 극언(極言)하지도 못하고 또 기회를 보아 일찍 물러나지도 못한 채 어묵(語默)과 취사(取捨)의 사이에서 멍하니 지냈을 뿐, 스스로의 의견을 끝내 난세에 나타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거사가 자신의 죄로 여기는 바이다. 거사는 지방에 장택(庄宅)이 없고 일찍이 집터를 점치다가 택풍괘(澤風卦)를 얻고는, 선산 근처에 서각(書閣)을 짓고 ‘택풍(澤風)’이라 현판하므로 사람들이 ‘택당(澤堂)’이라 불렀던 것이요 애당초 택당이라 자칭한 것이 아니며, 만년에는 택구거사(澤癯居士)라 자호(自號)했다. ……”
하였다. 그때 협종(脇腫)을 앓아 매우 위중하자, 승정원에서 듣고 계달(啓達)하므로 임금이 즉시 의원을 보내어 약을 내렸다.
3자(三子 면하(冕夏)ㆍ신하(紳夏)ㆍ단하(端夏))에 대한 개명설(改名說)에,
“중국 사람들은 중국을 ‘태고(太古)’라 자칭하는데, 우리들도 동방에 살면서 중국에 신복(臣服)한 지 오래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夏)자를 특별히 이름으로 채택하였는가. 지금의 세대가 하(夏 중국을 말함)에 신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 하(夏)의 뜻은 이미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중국의 글을 읽고 중국의 행동을 행하고, 중국의 뜻을 뜻으로 하여야 중국에 신복한다 할 것이니, 너희는 더욱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17) 9월에 상복을 벗었다. 그때 사대부들이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공이 옛 재상으로서 의리상 퇴피(退避)해 있을 수 없다 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가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서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담월(禫月)이 다 지나지 않았다 하여 사직하였다.
병조참판 겸 비국당상(兼備局堂上)에 제수되자,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대신을 대신하여 빈청 계사(賓廳啓辭)를 지어 궁중의 저주(咀呪)를 논하고 피의자를 외정(外庭)에 붙여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광해조의 궁인(宮人)들을 모두 축출하기를 청하므로 그때 영안위(永安尉 선조의 사위 홍계원(洪桂元))의 궁인이 많이 고문을 받아 죽어 그 화(禍)가 장차 어찌 될 줄을 헤아릴 수 없었다. 공이 이를 힘써 구출하자는 의논을 내세우자, 어떤 훈척(勳戚)이 와서 말하기를,
“영안위의 궁인들은 흉한 물건을 몰래 대통[竹筒]에 넣어 궐내에 들여왔다.”
하므로 공이 노하여 꾸짖기를,
“내가 있는 날까지는 영안위를 죽이지 못한다. 너는 아무개와 협력하여 먼저 나를 죽여라.”
하자, 이로부터 공의(公議)가 누그러져 영안위가 마침내 무사하였다.
경진년(1640, 인조18)에 청 나라의 위협으로 우리나라 군사를 명 나라 토벌에 몰아세우므로 공이 이 기회에 천조(天朝 명 나라를 가리킴)와 밀통하기를 묘당에 건의하였고, 하향하는 길에 상공(相公) 홍서봉(洪瑞鳳)을 방문하여 다시 이 일을 상의하였는데, 그 뒤에 상국 이완(李浣)이 주사(舟師) 부장(副將)으로 배를 이용, 사람을 몰래 천조(天朝)에 보내어 황제의 장유(奬諭)를 받아 돌아왔다.
다시 대제학에 겸임되자, 환조(還朝)하여 사은하고 비밀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아뢰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서남 지역의 화근(禍根)은 비록 예측하기 어려우나 목전의 사세는 반드시 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냇물이 마르고 지진(地震)이 일어나고 강물이 붉고 산이 무너지는 변고가 서울 근교에서 일어났습니다. 역사를 상고하고 오늘의 세태를 참고해 보면, 백성이 궁하고 도적이 일어나는 토붕(土崩)의 환란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아군이 본의 아니게 명 나라를 치러 간 이후로 연변이 피해를 입고 필부(匹夫)가 날뛰어 이내 환란의 싹이 되어 있는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이 하향할 때에 민간 사정을 목도한 바, 열 집이면 열 집이 모두 비었고 상수리 열매로 기아를 면하고 있다가 봄에 세금을 내라는 영이 떨어지자 차례로 흩어지고 간혹 약탈이 발생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하도(下道) 일대 연해에도 텅 비어서 결코 다시 부락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해마다 한재(旱災)가 일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부역이 빈번하고 착취가 가혹한 탓입니다. 부역이 일어나는 원인을 살펴보건대, 세폐(歲幣)를 수송하고 객사(客使)를 접대하는 등의 역사(役事)는 어찌할 수 없지만 탐관오리들을 신임하고 방대한 역사를 일으켜 재력을 고갈시키고 국비를 좀먹는 폐단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전혀 묘당(廟堂)의 실책이니, 이 어찌 중단시킬 일이 아니겠습니까. 남한산성을 증축한 일은 이미 잔도(棧道)를 소각하던 지혜를 상실한 것이었는데, 지금 일이 순조롭지 못하여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산성의 역사에 한 도의 백성이 지쳐버렸으니, 이로써 왜적을 막는다면 어찌 왜병의 공격에 견고한 성이 있겠으며, 이로써 오랑캐를 막은들 오랑캐가 어찌 수천 리를 넘어서 오직 이 성만을 공격하겠습니까. 지금 또 변산(邊山)에 역사를 일으켜 큰 항구를 열어 전선(戰船)을 두게 하며, 기타 번잡한 비용이 막대하고 또 육지를 연하여 바다를 막으려 하니 이는 마치 애산(崖山)의 형세와 같습니다. 묘당에서는 이를 강력히 주장하고 책임을 맡은 신하는 빨리 완성하려 하여 이의를 내세우는 사람을 배척하니, 혹 이로 인하여 대란이 발생한들 전하께서 누구에게서 그 이유를 들으시겠습니까? 오늘날의 계획은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첫째이고, 다음은 저축, 또 다음은 군정(軍政)입니다. 그러나 사세가 이미 다급해져서, 군정을 쉽게 변경시키지 못할 것이니 전하께서는 단호한 결단을 내려서 전화위복하게 하되, 오로지 백성을 편안하고 이익되게 하는 데 큰 규모로 삼으시며, 가장 실현되기 어려운 선정(善政)을 골라 시행하고 가장 버리기 어려운 폐정을 골라 시정하여 거의 위로 천심에 보답하고 아래로 민심을 얻은 뒤에 속히 애통(哀痛)해 하는 교서를 내려 조치의 잘못을 같이 진술하고, 멀리 했던 직언(直言)하는 인재를 대각(臺閣)에 두며 청렴하고 근실한 사람을 선발하여 오로지 백성을 안집(安集)시키는 데 힘쓰신다면 백성의 해방과 안정이 오로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또 아뢰기를,
“생취(生聚 인구를 장려하고 재물을 늘리는 것)에 전력하여 점차 부강(富强)을 도모한 뒤에야 자연 구름이 일고 용이 오르는 기회가 있을 것인데, 지금 또 백성을 못살게 하며 재물을 탕진하여 병정(兵丁)을 뽑고 성을 수축하므로 마치 조석으로 반발이 일어날 것 같으니 이 또한 큰 실책입니다. 만약 뜻밖에 불측한 사변이라도 생긴다면 도성을 떠나는 안위가 오로지 인심의 향배(向背)에 달려 있습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도(道)에는 이미 행도(行都)가 있고 먼 도에는 이전에 구축한 성벽이 많은데, 어찌 날로 쓸데없는 역사를 더하여 거듭 인심을 잃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이 크게 우려하는 바가 있습니다. 즉 세자가 먼 이역(異域)에 계시므로 보도(輔導)하는 사부(師傅)가 전에 비하여 너무 소홀하며, 가까이 모시고 시책(時策)에 응하는 일이 급한데, 관소(館所)에 있는 재신(宰臣)이 다만 두 빈객(賓客)뿐으로 그들의 지위와 세력이 같아서, 논의하는 데 서로 엇갈리는 의견이 나오게 마련일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빈객은 한 사람만 보내고 다시 중신(重臣) 중에서 이사(貳師)를 선발하여 파견하면 거의 동궁(東宮)에 대한 존경이 생기고 의지해 있는 궁료(宮僚)들에게도 통솔하는 주관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어 관소(館所) 신료(臣僚)들의 의식 곤란을 감안, 별도로 조절하여 충분히 공급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또 국출신(局出身 훈련 도감(訓練都監)의 최하급 장교)들의 약탈하는 행위가 걱정된다는 것과 산포수(山砲手)의 기예(技藝)를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또 비밀 모의는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는 끝으로,
“이상 몇 가지는 신의 억측이 아니라 여론의 바라는 바입니다. 아무튼 사론(士論)이 일을 그르쳤을 때 조정에서의 징계가 너무 과격하여, 모든 논사(論事)에 약간만 어긋나면 온통 미워하고 배척하는 실정입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성상의 의견에도 편파적인 선입감이 있는 듯하온데, 이는 조그마한 차이가 천 리의 차이로 발전하여 존망이 결정되는 계기입니다.”
하였다. 세자가 귀근(歸覲)하였을 때 호행(護行)해 온 청 나라 장수가 돌아갈 길이 늦었다고 독촉하자, 공이 임금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하다고 건의하여, 늦어진 까닭을 해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동궁이 청 나라에서 사별(辭別)하고 오실 때 그들은, 국정(國情)을 탐지해 가지고 와서 고하도록 했다고 하니, 신의 생각에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나라가 참패한 뒤에 해마다 흉년이 들고 과중한 징발과 세금으로 백성이 곤궁하여 떼를 지어 도적질하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남쪽의 왜적이 일어날까 겁을 낸다.’고 말하면, 모든 구원병을 보내는 어려움과 사신을 접대하는 폐단과 도망자를 색출해 보내는 번잡이 다 그 가운데 암시되어 있으므로 이 다음 서류를 조사(措辭)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되리라 여깁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가장 어려운 일은 도망자를 색출해 내는 데 대한 답입니다. 신은 이 일은 절대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오니 아무리 심한 추궁을 받더라도 단호히 따를 수 없다는 뜻으로 대답할 것이요, 아직 미루어 두는 말로 대답해서는 안됩니다. 또 별도로 한 가지 법령을 만들어 강 연안 여러 곳에 초막(草幕)을 쳐놓고 관리를 두어, 몰래 건너가는 자를 사찰하는 뜻을 보임으로서, 동궁이 그 쪽에 가서 이 사실을 고한다면, 이로 인하여 해명이 될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한 자신이 편집한 《자훈(字訓)》을 강원(講院)에 보내면서 말하기를,
“서연(書筵)에서 강의할 때 고증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는 천루한 저술이지만, 나의 조그마한 정성을 다하려 함이다.”
하였다.
재해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신이 삼가 구언(求言 왕이 바른말을 구하는 것)의 하교를 보니, 성상의 우구(憂懼)하는 마음이 심각하신 줄을 알겠습니다. 이러한 윤음(綸音 왕의 말씀)은 역사에 많이 나타났고, 그 진달된 문자도 ‘요순(堯舜)’이란 어휘가 아니면 진달하지 않았는데, 성상의 우답(優答)에는 번번이 찬성하시었으니, 만약 이러한 기상(氣象)으로만 해결될 일이라면 재앙이 상서로 전환된 지 이미 오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전쟁과 치욕을 당하여 전복이 머지않으니 그 공언(空言)에 불과한 것이 확실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전하께서는 어찌 다시 이러한 거조로써 거듭 하늘의 노여움을 사려고 하십니까. 교서를 내려 구언하는 일은 자신을 반성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일은 행사(行事)로써 보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만약에 행사에서 보이려 하신다면 탐관오리를 축출하는 것이 곧 오늘의 병통을 제거하는 약석(藥石)입니다. 대저 탐관오리와 가혹한 정치는 어찌 성심의 증오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의 말도 많습니다. 전하께서 처음부터 이를 단행하지 못하시는 이유는, 성의(聖意)가 한쪽에 치우치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조(一朝)에 이 조처를 이완(弛緩)하여 국고가 공허하고 나라가 제구실을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럼 신이 전번에 진술한 ‘호리의 차이가 천 리의 차이로 발전한다.’는 말이 이미 여지없이 맞은 것입니다. 또 우선 최근 절박한 일을 말씀드리자면, 회란(回鑾 서울에 돌아옴)하신 이후로 의당 민심을 안정시키고 폐습을 씻었어야 될 일인데 대신들은 정돈에 급급하여 일의 선후와 경중의 순서를 잃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군사와 재정을 변통하는 정책이 국가의 급선무요 또 내외 병민(兵民)의 원하는 바인데도, 지금까지 한결같이 전철(前轍)을 밟아 개혁할 뜻이 없습니다. 공천(公賤)과 노비들의 폐단이 이미 고질이 되어 창졸간에 없애기 어렵게 되었는데, 도회(屠劊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의 우두머리와 옹졸한 재주를 발탁, 음관(陰官 조상의 덕으로 벼슬한 사람)의 최고직을 주어 쇄신 개혁하는 중임을 맡겨서 욕심대로 자행하게 하고 아무 것도 따져 묻지 않는 실정입니다. 또 어두운 밤중에 불을 놓고 도적질하는 변고가 수많은 사람 중에서 발생하니, 누가 가려내겠습니까. 지금 그러한 자를 포도청(捕盜廳)에서 다스리게 하여 음형(淫刑)을 일임 사사 감정을 풀게 하니, 비록 광해조(光海朝)의 역적을 국문하던 참상도 이 옥사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법을 맡은 사직(司直)의 신하가 ‘공정(公正)’ 두 글자를 사갈(蛇蝎) 같은 몸뚱이에 가식(假飾)하니, 인심의 몰락과 학술의 막힘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전하, 일념의 차이가 어찌 천 리의 차이뿐이겠습니까.
아, 덕을 밝혀 인기(人紀)를 세우고 정서를 세워 도리를 일으킴은 고금 인주(人主)가 바랄 만한 일인데, 전하의 인성으로 난을 다스려 평화로 돌리고 모든 일에 요순을 본받으셨으니, 당초 힘썼던 뜻을 어찌 조금인들 늦추겠습니까. 그러나 덕을 밝혀 지선(至善)에 이르지 못하면 뜻이 점차 방자해져 패덕(悖德)에 빠짐을 깨닫지 못하고 정치를 세우는데 혹 시무(時務)에 어두우면 경중에 대한 공평을 잃어 끝내 난정(亂政)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방금 상하 간에 백병 천창(百病千瘡)이 다 이로부터 나왔으니, 아무리 선한 정치를 해보려는 뜻이 있으나 결국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대저 인주(人主)는 한 마음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곧 사방에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하물며 그런 사람을 윗자리에 앉혀 놓고 사람마다 사모하고 모방케 하니, 소위 어질지 못한 사람을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은 그 악을 대중에게 전파시키는 일이라는 말이 정확하지 않습니까.
또 재정(財政)을 운영하는 정치에 있어서는 장리(掌理)를 우선하지 않고 가렴주구(苛斂誅求)에만 힘을 쓰며 용형(用刑)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높은 사람은 제쳐 놓고서 미약한 사람에게만 치우치므로 합당하지도 공평(公平)하지도 않아서 일마다 사리(事理)에 어긋납니다. 그래서 관중(管仲)이나 상앙(商鞅)이 이룩한 부국강병의 실적에는 감히 그 밑바닥도 바라볼 수 없고 상홍양(桑弘羊)공근(孔僅)도 비웃을 것입니다. 또한 혹리(酷吏)로 말하자면, 어찌 질도(郅都)장탕(張湯)처럼 날카롭고 공정하여 호족(豪族)들을 굴복시킨 자가 있겠습니까. 혹자는 이 무리들은 나라를 위하여 원망을 떠맡았으니, 사(私)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왕안석(王安石)ㆍ여혜경(呂惠卿)이 내놓은 청묘(靑苗)ㆍ교역(交易)ㆍ수실(手實) 등의 법과, 가사도(賈似道)가 은관(銀關)ㆍ공전(公田) 등의 법으로 군저(軍儲)를 핵실(覈實)한 정책이 모두 역사에 실려 있는데 지금 관찰하여 보면 그 마음이 한결 공정하고 그 일도 시행할 만한데, 어찌해서 그 사이에 이론(異論)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패망한 자취를 보면 그때의 의론이 점치는 일같이 명백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생각을 돌이켜 이러한 무리들을 내쫓지 않으면 인심이 크게 떠날 것이요 천록(天祿)이 영원히 끝날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 조정에서는 혹리(酷吏)를 등용, 누적(漏籍)을 조사하여 대옥(大獄)을 일으켰으므로 공이 극언한 것인데, 비방하는 소리가 분분하여, 사직하고 하향하였다.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다시 대사헌(大司憲)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전의 일을 들어 인피(引避)하였다가 예조 참판에 비국당상(備局堂上)을 겸임하였다.
겨울에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제공(諸公)들과 심양(瀋陽)으로 잡혀가므로 공이 사신을 보내어 구제하자고 주청하였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자, 동료가 탄핵하려 하였고 이조 판서 남이웅(南以雄)이 공과 의견이 다르므로 혐의를 피하여 사직하였다. 공이 계해년의 교명(敎命)에 의해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수보(修補)할 것에 대하며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신이 그윽이 생각건대 우리 동방에서 문물이 구비되고 인물이 번창하기는 선조 시대보다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의(義)를 지키다가 왜란(倭亂)을 만나고 이미 성하였다가 쇠하였으나 천심을 얻어 나라가 다시 안정되었으니, 이는 다 성인(聖人 선조를 이름)의 걱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시기의 응변과 외교(外交)의 성과가 다 후세에 전할 만하고 간책(簡策 역사 기록)에 기재된 사실도 이때보다 더 상세한 시기가 없는데, 불행히 광해조 때 간신들이 끼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기자헌(奇自獻)이 총재가 되고 이이첨(李爾瞻)ㆍ박건(朴楗) 등이 수찬(修撰)을 전임, 구록(舊錄)을 몰래 삭제하고 마음대로 무필(誣筆)을 가하여 시비(是非)와 명실(名實)이 일체 도치(倒置)되었습니다. 무릇 이이첨에게 가담한 자 6, 7명은 헛된 미(美)를 수식하여 그를 성현(聖賢)에 견주었고 이 밖의 명신(名臣)ㆍ석보(碩輔)와 도학 있는 선비는 평소 그들과 서로 반목하고 의견이 맞지 않은 사람들이므로 분노에 찬 언사와 흉칙스런 욕설에다가 궁기(窮奇 사흉(四兇) 중의 공공(共工)을 이름)ㆍ도올(檮杌 사흉 중의 곤(鯀)을 이름)과 같은 죄까지 더하였고 선조(宣祖) 말년에 기록된 유영경(柳永慶)ㆍ정인홍(鄭仁弘) 등의 일은 감히 일월 같은 밝음을 더럽히고 천지의 대정(大正)을 엄폐하여, 마치 송 나라 장돈(章惇)ㆍ채경(蔡京) 등이 선인후(宣仁后)의 사적을 무서(誣書)한 예와 같은 간궤(奸軌)라 하겠으니, 더욱 신자로서 차마 못할 말입니다.
사고(史庫)에 보관된 글을 외인이 비록 다 상고할 수는 없으나 전후 실록을 상고해 볼 때, 사신(史臣)이 목격하고 서로 전한 것으로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일이 있으니, 실로 천고에 있어 사가(史家)의 일대 변괴입니다. 계해년 반정 초기에 연신(筵臣) 이수광(李睟光)ㆍ임숙영(任叔英) 등이 수정하기를 주청하므로 성상께서 이미 윤허하셨고 이듬해 봄에 상신(相臣) 윤방(尹昉)ㆍ재신(宰臣) 서성(徐渻) 등이 연달아 주청하여 모두 윤허를 얻어 빨리 거행하게 하였는데, 국가에 일이 많고 담당 관리가 비용을 아끼고 관각(館閣)의 대소 신하들이 시무(時務)에 끌려 문사(文事)를 처리할 겨를이 없이 시일만 끌다가 오늘에 이르렀는데, 매번 병란을 겪고 나면 사고의 유문(遺文)과 야록(野錄)ㆍ가전(家傳) 등의 문서가 흩어져 거의 없어지고 지금 또 노성한 장고(掌故 국가의 전장(典章) 제도를 맡는 것)의 신하도 죽고 흩어졌습니다. 만약 다시 몇 년만 더 지나면 신 같은 무리도 점차 죽어갈 것이요, 듣고 보던 것이 딴 세상처럼 되어 무사(誣史)가 드디어 유행될 것입니다. 야연(野言)ㆍ가록(家錄)이 다 없어지지 않은 이 시기에 맨 먼저 사대부 집에 소장된 기록부터 탐문하고 지방에는 도사(都事)ㆍ군수ㆍ현령에게 국사(國史) 사무를 겸하여 널리 민간을 탐방, 자료를 수집하여 올려 보내게 한 다음, 대신에게 품정(稟定)하여 시비ㆍ명실(名實)에 틀리지 않은 것을 취하여 1류(類)로 하고, 또 명신ㆍ현사(賢士)의 비(碑)ㆍ지(誌)ㆍ장(狀)ㆍ전(傳) 등을 사마광(司馬光)의 백관표(百官表)와 주자(朱子)의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을 모방하어 1류로 하고, 또 선조(先朝)의 명신ㆍ대유(大儒)의 문집으로 전장(典章)에 관계된 것을 취하여 모두 사고에 보관하여 함께 권하게 하면 거의 일대의 전형(典刑)이 후세의 증거로 될 것입니다.”
하였다 조정 의논이 이를 공에게 전임시키려 하므로 공이 또 사양하기를,
“국사(國史)의 허위 사실은 마땅히 국론을 채택하여 공명정대하게 처리한 뒤에야 없어지지 않을 전장(典章)이 될 것입니다. 신은 보잘것없는 범상한 사람으로서 거취(去就)ㆍ필삭(筆削)을 전임한다면, 우리나라같이 야박한 풍속으로 대부분 붕당(朋黨)을 두둔한다고 의심할 것이니. 어느 누가 공론이라 하겠습니까.”
하여 세 번이나 사양한 뒤에 임금이 공의(公議)에 의하여 당상 낭청(堂上郞廳)에 각 3, 4인씩 두고 대신으로 하여금 총재(總裁)하게 하였다.
다시 이조 참판에 배명되었다. 이때 갑자기 통역관 정명수(鄭命壽)가 질관(質館 항복한 외국에서 온 볼모가 거처하는 곳. 여기서는 심양의 세자 관소)에 와서 말하기를,
“본국 이모(李某)가 김상헌(金尙憲) 등과 당파가 되었다.”
고 하므로 제공(諸公)들이 대답하기를,
“이모는 상(喪)을 만나 시골에 있다. 조정에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고 하자, 정명수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이조 참판도 하고 혹은 대사헌 겸 비국당상도 하였는데, 어찌 숨기려 하는가.”
하므로 조정에서 공을 해직시켜 형적을 숨기는 것이 옳다 하여, 공이 드디어 하향하게 되어 문형(文衡)과 본직을 사임하였다.
또 과거(科擧)에 관한 폐단을 논하였다. 임오년(1642, 인조20)에 또 심양(瀋陽)에서 말썽이 있으므로 조정에서 공에게, 서울로 올라와서 사변에 대처하도록 하였는데, 모든 제관(除官)을 일체 받지 않았다.
시월에 호장(胡將)이 세자를 대동하고 봉성(鳳城)에 나와 우리나라 조신(朝臣)들을 조사하는데, 공의 사건이 가장 중대하였다. 이는 공이 정축년(병자호란 이듬해)에 하성(下城 항복하는 것)하지 않은 것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잡혀 갈 때 가로막은 것과 회은군(懷恩君 인조 때 왕족으로 이름은 덕인(德仁))을 보내어 석방 운동을 벌이자고 주청한 것 등의 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고 자제(子弟)들에게 절대로 그들에게 뇌물을 주려는 계책을 쓰지 말라고 엄중히 경계하였다. 공은 상경하라는 소식을 듣고 하루를 지나서 곧 출발하였는데, 전일에 부탁받은 문자(文字)를 도중에서 지어 보냈고, 또 연로(沿路)에서 시를 지어 읊기를 중지하지 않았다.
봉성(鳳城)에 이르러서는 세자의 구제에 힘입어 문초를 받지 않고 여러 재상들과 의주로 돌아와 구금되었다. 봉성에 있을 때 세자가 모종의 유언비어로 인하여 병이 나서 식음(食飮)을 전폐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질(侍質 볼모로 간 사람을 모시고 있음)한 제공(諸公)에게 글을 보내어,
“그러한 일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렇게 말한 자는 본디 사람을 혼란시키려는 목적인데 전한 자 역시 경망하였기 때문이니, 동궁(東宮)께서는 여기에 괘념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좌우 제공들이 잘 위로해 드린다면 동궁께서 어찌 석연치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금번 봉성의 사건은 본래 조신(朝臣)을 문초함이요, 세자의 임석은 함께 모여 참증(參證)하는 데 불과한데, 무슨 혐의스런 일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일은 모두 의리가 없어지고 임기 응변에만 치중한 데서 나온 것이요, 어찌 꼭 봉성에 나가서야 딴소리가 있었겠소. 바라건대 제공들은 이 뜻을 세자에게 잘 아뢰시오.”
하였다. 그때 역적 이계(李烓)는 역률(逆律)로 죽음을 당하였고 그 아비 진영(晉英)도 연좌로 죽게 되었는데, 공이 소를 올리기를,
“신이 비록 함정에 빠지더라도 소회(所懷)를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듣건대, 역적 이계의 문서 중에 그 아비가 사건 발생 뒤에 계에게 보낸 편지 몇 장이 모두 충의를 권면하였고 결코 난언(亂言)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하는데, 듣는 사람이 다 감동하여 이 글의 내용은 진영의 평소 행동과는 같지 않으나, 이 처지에 이르러 이러한 훈계는 중간에서 종용(慫慂)하는 무리들과 비교할 수 없다면서 모두들 특별한 은전(恩典)이 내리기를 바라고 있으니, 종용히 처벌하는 것이 중도에 맞을 듯합니다.”
하였고, 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게 보낸 글에 윤의(尹齮)의 일을 인용하여,
“윤의가 역옥(逆獄)에서 그 죄를 승복하자, 그 아비 백상(百祥)도 연좌(連坐)되었다가 마침 백상이 아들을 꾸짖은 글이 발견되어 사형을 감하였소. 그때 상신(相臣)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ㆍ봉래(蓬萊 정창연(鄭昌衍))가 법률의 취지를 들어 진달하자, 의신군(義新君)도 이 전례에 따라 면좌(免坐)되었소. 죽음에 임박한 70 늙은이가 한 가지 착한 일로 죽음을 면하고 유배되었던 것은 매우 잘한 조치라고 생각하오. 나는 그와 동향(同鄕)이면서 원수로 지내왔으며, 금번에 내가 하성(下城)하지 않았다는 참소를 받은 데 대해 어떤 이는, 그쪽에서 흘러나온 유언(流言)에서 기인되었다고 의심하기도 하지만, 지금 나의 이 말은 지극히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오.”
하였는데, 의주 부윤 허적(許積)이 시의(時議)가 두려워 묵살하여 버렸다. 그러나 공은 험난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국사를 잊지 않음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조정에서는 뒤늦게 공의 소와 글을 보고 비난하는 의논이 분분했다. 공은 자제에게 회답하는 글에서,
“너의 아비는 전부터 독립하여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가 지금에 와서 저 사람들에게 추종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고, 또,
“조정의 비방은 일생토록 배부르게 먹어 왔지만 내가 이제는 이미 노쇠하였으니, 의당 그만 물러났어야 한다. 의외의 무함은 성현도 면치 못한 바이니, 나를 소라 하든 말이라 하든 나의 정신은 손상될 것이 없다. 나의 도(道)는 대개 이러하니, 너희들이 간여할 바 아니다.”
하였다. 그해 12월에 구금에서 벗어나 돌아왔다. 처음에 공이 회은군(懷恩君)을 보내자는 계책을 건의한 것은, 회은군의 딸이 청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칸(汗)의 궁희(宮姬)가 되었다가 그 공신(功臣)에게 주어졌으므로 그것을 계기로 석방 운동을 펴자는 것이었다. 통역관 정명수(鄭命壽)는 본시 본국 사람으로 청 나라에 붙어 본국과 관계되는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는데, 회은군이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지름길이 따로 생길 것을 질투하다가 이 계책이 공으로 인하여 생긴 것을 탐지한 때문에 모든 재상과 함께 구금시켰던 것이요, 처음부터 칸(汗)의 뜻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다른 재상들은 호장(胡將)의 조사를 받았으나 공만이 면했던 것이다.
계미년(1643, 인조21) 1월에 대제학(大提學)에 제수되자, 두 차례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불허하였다. 그때 태학생들이 하인(下人)의 꾐에 빠져 살인죄를 범할 뻔하자, 공이 방문(榜文)을 내걸어 훈계하였다.
공이 병자년에 소를 올려 진달한 8사(事) 중 두 가지는 수군(水軍)과 낙생(樂生 수사(水使)가 일 없이 편하게 지내는 것을 말함)에 대한 폐단을 제거하자는 내용이었는데, 이때 통신부사(通信副使) 조경(趙絅)이, 수사(水使)에게 수령(守令)을 겸임시킬 것을 주청하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의 말에 따라 수사가 군수(軍需)를 착복하는 폐단을 제거하자고 청하였고 아울러 낙생에 대한 폐단을 논하였다.
4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5월에 차자를 올려 성체(聖體)를 보양하고 인심을 수습하는 일을 강령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상이 우답(優答)을 내렸다.
6월에 명을 받아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국사(國史)를 상고하고, 7월에 복명(復命)하였다. 그때 국사를 수찬(修撰)하게 되었는데,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서울까지 운반하기 곤란하므로 이공 경증(李公景曾)이 차자를 올려 공을 파견하여 무사(誣史) 중에 의당 분변해야 할 것을 상고해 보고 오도록 주청한 때문에 이 명이 내렸던 것이다.
적상산(赤裳山)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험준한 곳으로 국사와 왕가의 족보를 함께 보존하였는데, 수직(守直)하는 번졸(番卒) 약간명과 승군(僧軍) 몇 사람이 근근이 지키고 있다가 정축년의 난리에 번졸은 다 도망가고, 사리를 아는 중 한 사람이 사궤(史櫃)를 석굴 속에 사장(私藏)하고 달아났으므로 다시는 지키는 자가 없었다.
이에 공이 돌아와서 사실대로 보고하자, 상이 감사에게 명하여 방비책을 상의하고 또 절을 지어 널리 중들을 모으게 하였다. 그래서 성을 수리하고 또 산 밑 서북 양쪽에 창고를 지어 고을의 곡식을 옮겨 저장하며, 아울러 인근 고을의 속오군(束伍軍)을 떼어다가 현감으로 하여금 급변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인읍(隣邑)을 합병하고 장수를 배치하고 진(鎭)을 개설하는 일들은 조의(朝議)에서 좀처럼 가결되지 않다가 뒤에 조정에서 무주(茂朱)를 부(府)로 승격시키고 또 인읍을 분할하여 넓혔으니, 이는 모두 공의 건의를 채택한 것이다.
또 대사헌 겸 원손보양관(大司憲兼元孫保養官)을 제수하자,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아 9월에야 본직을 사직하였다.
다시 사국(史局)을 창덕궁(昌德宮) 안에 설치하자 공이 편수(編修)를 전담하여 늘 숙직하였는데, 여러 당상관이 감히 한마디의 말도 거들지 못하고 다만 공이 수정한 것을 열람하면서 칭찬할 뿐이었다. 겨울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사직하고, 형조판서 겸 세자좌빈객(刑曹判書兼世子左賓客)에 승진되었다. 세자가 돌아왔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공의 아버지인 찬성공(贊成公)에게 증직(贈職)의 영예가 내려진 것은 공이 세 번이나 종훈(從勳)에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다시 승지(承旨)로 증직된 바 공은 마땅히 이 가증(加贈)을 받아야 하는데, 공은 말하기를,
“교지(敎旨)에 청 나라의 연호가 씌었으니, 이것으로써 선지(先志)를 더럽힐 수 없다.”
하고, 다시는 청하지 않았다. 안방준(安邦俊)이 국사 관계로 글을 보내오자, 공이 거기에 답하기를,
“나의 집안은 본시 쇠퇴한 데다가 동서 분당이 된 이후로는 부형 중에서 드러난 벼슬이 없습니다. 내가 젊어서 여주에 살 적에는 고을에 당론이 없고, 늘 들은 얘기는 하인(下人)들의 항담(巷談)뿐이었습니다. 또 돌아가신 아버님과 외숙(外叔)은 포의(布衣)로 동리(東里)에 살면서 김효원(金孝元) 등과 상종했고 나는 심씨(沈氏) 집에 장가들었으므로 이른바 ‘서인(西人)의 집’인데, 그사이에 들은 평론 시비가 시골에서 들었던 바와 큰 이동(異同)이 없었습니다. 그 뒤 출신(出身)하여 조정에 들어가서는 사람들이 ‘당목(黨目)이 없으면 출세할 수 없다.’ 하기에 비로소 조야(朝野)의 기재(紀載) 1, 2건과 이름 있는 공경(公卿)들의 행사의 시말ㆍ사정(邪正)을 보니 서로 옳다 그르다 하였으므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미진(未盡)한 때문이지, 사(私)가 마음에 집착되어서가 아닙니다.
40세 이후로는 비로소 청반(淸班)에 들어가 직접 당인(黨人)과 같이 좌우로 조정해 보니 언론의 편파(偏頗)와 교유(交遊)의 구별 등이 또 귀부(鬼簿 죽은 사람의 명부. 즉 확실한 근거가 없는 기록을 말함)에서 얻은 것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즉 한 층에서 한 층이 더 높아진 격으로, 젊었을 때 얻은 것을 회고해 보니, 동떨어진 차이가 초월(楚越)의 사이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개연(慨然)히 당론에 힘쓰거나 당인(黨人)과 친한 사람은 덕(德) 있는 군자가 아님을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이로부터 처사마다 매몰되고 억울하게 당인으로 지목받았으나 마음만은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세상의 변고가 그지없고 일신(一身)에 죄를 짊어져 만번 죽어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는데, 무슨 마음으로 와각(蝸角 부질없는 싸움의 비유)의 싸움을 벌이겠습니까.
이제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보면, 조정의 당론이 보다 더욱 험악하여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는 대개 간신들이 당목(黨目)에 끼어 가장 대중의 마음을 신복시키지 못하게 된 때문에, 악명(惡名)이 후세에 남겨질 것을 스스로 알고 감히 비밀리에 수법을 씀으로써 변수(卞隨 하대(夏代)의 현인(賢人))와 백이(伯夷)는 탐욕 많은 사람이 되고 도척(盜跖)과 장갹(莊蹻)은 도리어 청렴한 자가 되어 하늘과 사람의 강기(綱紀)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금상(今上)의 반정(反正) 초기에 윤 해창(尹海昌 윤방(尹昉)의 봉호), 이지봉(李芝峰 이수광(李睟光)) 제공(諸公)이 먼저 실록 개정을 주청하였으나 시대가 어려워 이루지 못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국사(國事)가 더욱 어려워 설국(設局) 편수(編修)의 희망이 없으므로 내가 감히 자신을 헤아리지도 않고서 야사 전집(野史傳集)을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사고(史庫)에 보존하고, 무필(誣筆)은 전혀 근거를 삼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여 준 글에 ‘후세에 죄를 얻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진실로 지론(至論)입니다. 그러나 나는 사건에 따라 기재한 것뿐, 실제로는 나의 주관으로 논단한 예는 없으므로, 나를 인정하든 죄주든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친척이 경계하고 붕우(朋友)가 비웃어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어도 일체 걱정이 없습니다. 다만 걱정하는 바는, 노숙한 이가 죽고 문헌이 없어져 마치 하(夏) 나라와 기(杞) 나라의 역사를 증거 할 수 없는 것처럼 되어 천고의 큰 유감을 남길까 걱정할 뿐입니다.”
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22)에 빈객(賓客)의 자격으로 심양(瀋陽)에 들어가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는 공이 이같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벼슬길에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경우에는 심양에 잡혀가는 고생을 남들과 함께하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대사헌에 제수되어 역옥(逆獄) 국문에 참여하였고, 4월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5월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고, 6월에 휴가를 얻어 시골로 내려갔다가 7월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때 육경(六卿)의 자식을 볼모로 심양에 보내게 되어, 사대부의 영화가 도리어 화가 된다 하고 관직을 억지로 모면하려 하다가 유배(流配)당하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감히 굳이 사양할 수 없어 환조(還朝)하여 사은(謝恩)하고 소(疏)를 올려 토역(討逆)한 뒤 징비(懲毖)할 계책을 논하였는데, 그 줄거리는 모든 군문(軍門)의 잘못된 제도를 개정하여 흉적의 미끼가 되어 난(亂)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또 아뢰기를,
“양서(兩西) 지방에서 1천 리의 것으로 심양에 바치던 것을 이제 3천 리의 것으로 연경(燕京)에 바치는 실정이니, 삼남(三南) 지방의 세금과 부역을 다 돌려서 서쪽 지방에 보급한다 해도 수개월을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경기도 동쪽 지방의 백성들도 참역(站役 각 역참(驛站)에 동원되는 노역(勞役))에 지쳤고, 산민(散民)이 따라서 선동하여 호남 지방의 사정과 같습니다. 산속에는 이따금 도적이 모여 토착화(土着化)하고, 겨우 살아가는 백성도 자칫하면 무너져 흩어질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묘당(廟堂)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헤아리지 않고 한갖 심양에 바치던 것을 연경에 바치는가 하면, 거기에 또 일절(一節)을 더하여 먼저 하사(賀使)를 보내니, 이로부터 시발이 되면 벼슬아치들이 관로(關路)에 줄을 이을 터인데, 이를 무엇으로 조달하겠습니까?”
하였고, 이어 폐단에 대한 구제책을 진언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매양 비국(備局)에 들어가 공사에 참여했지만, 오직 부서(簿書 사무처리)와 기회(期會)만 재촉하고 장점을 채택하여 수시 응변하는 대책은 막연하여 마치 호월(胡越 중국 북쪽의 호 지방과 남쪽의 월 지방)처럼 그 거리가 머니, 《시경(詩經)》 소민(小旻)의 ‘저 물길 속에 함께 휩쓸려 버리지나 않을는지.’ 한 말은 바로 지금을 말함인 듯합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자, 두 차례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공도(公道)를 크게 펴고자 하여 공과 가까운 사람 중에 결점 없는 자를 청직(淸職)에 앉혀 본보기로 삼자, 시의(時議)가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장령(掌令) 이만(李曼)이 소를 올려, 사대부 집에서 통역관(通譯官)을 사사로이 접대하는 사례를 들어 비난하였다. 이 사례가 한두 훈신(勳臣)의 집에서 시작된 것인데, 임오년(1642, 인조20) 겨울에 노사(虜使)가 오신(五臣)을 조사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을 때 역관(驛官)이 전언(傳言)하기를 ‘금번에 화를 면한 집에서는 통역관에게 사례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므로 모든 집에서 감히 어기지 못했고 공의 집에서도 대중을 따라 사례했다. 이때 공이 아직 서도(西道)에서 돌아오지 않은 참이었는데, 이만의 소가 올라간 뒤에 비로소 이 같은 사례가 있었음을 알고는, 상소를 올려 인책하고 이어 이만의 소를 칭찬하면서,
“이는 실로 오늘날 사대부의 정문 일침(頂門一針)이다. 암흑 천지에 이 전광석화(電光石火)가 있을 줄 몰랐다.”
하였다. 이만은 이로 말미암아 특별히 발탁되었다. 이때 승평(昇平) 김류(金瑬)가 다시 상신(相臣)으로 들어왔는데,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이 입시(入侍)하였다가 김류가 병자호란 때 나라를 그르친 죄는 당 나라 노기(盧杞)와 같다고 논박하였다. 때문에 민응형을 순천 부사에 보임하였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이를 취소해 주기를 주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을유년(1645, 인조23) 4월에 본직을 사체(辭遞)했다. 이는 공이, 호란(胡亂) 이후에 벼슬하는 것은, 국란이 종식되지 않았고 또 육경(六卿)이 자식을 볼모로 보내기를 기피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차마 물러나지 못하였고, 영화로운 자리도 도탄(塗炭) 위에 앉은 것같이 여겼었다. 그런데 이해 봄에 세자가 아주 돌아오고 대신의 자식을 볼모로 보내는 일도 혁파(革罷)되자, 이에 공이 전장(銓長 이조 판서)을 사양하였던 것이다. 예조 판서와 대사헌으로 전직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반시(泮試 성균관(成均館)에서 보는 시험)를 관장, 방(榜)을 걸어 제생(諸生)을 효유(曉諭)하여 과문(科文)의 폐습을 시정하고 아울러 외도(外道) 문자의 사용을 금하였다.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주청한 추천법이 시행되지 않았다 하여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불허되었다. 이로부터 수령(守令)의 추천법과 연좌법(連坐法)이 비로소 시행되었다.
효묘(孝廟)가 처음 세자에 책봉되어 그해 10월에 입학하였는데 공이 대제학으로 전례에 따라 박사(博士)를 겸임하여 입학례를 거행하였고, 과거 응시자 최욱(崔煜)의 대책(對策) 첫머리의 문장이 이치에 어긋났으나 장원에 들었으므로 공이 방(榜)을 붙여 경계하였다.
11월에 사체했는데, 이윽고 정석간(政席間)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동료와 함께 사역원(司譯院)의 계청으로 파직되고 고신(告身)도 회수되었으며, 병술년(1646, 인조24) 1월에 지곡(砥谷)으로 내려가 수운암기(峀雲菴記)를 지었다. 거기에,
“내가 여기 이 암자(庵子)에서 그윽이 회옹(晦翁 주희(朱熹)를 가리킴)의 한천(寒泉 주희의 서재(書齋) 이름)의 의의와 도연명(陶淵明)의 여사(廬社 여산(廬山)의 백련사(白蓮社))의 뜻을 취했다.”
하였고, 암자 앞에 조그마한 대(臺)를 지어 촉룡(燭龍)이라 하고는,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나의 만년 심적(心跡)의 표시이다.”
하였고, 또 학도(學徒) 박유명(朴由明)에게 준 편지에,
“촉룡의 의의가 어느 곳엔들 없겠는가.”
하였으니, 그 존심(存心)을 짐작할 수 있다.
6월에 다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서임(叙任)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불허하였고, 7월에 예조 판서ㆍ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때 공의 뜻은 영원히 물러나려는 데 있었으나 국사(國史) 편수가 미필되었으므로 드디어 환조(還朝)하였다가 다시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8월에 시관(試官)이 되어 시원(試院)에 들어갔는데, 상이 시험 문제에 역적을 옹호하는 뜻이 있다 하여 특명으로 정죄(定罪), 다만 관직을 삭탈하고 내쳤다. 공이 교외에서 수일 동안 머물면서 사국(史局)의 일을 처리하고 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석실(石室)을 방문한 다음, 하향(下鄕)하여 계산재(啓山齋)에 거처하면서 벽(壁)에 쓰기를,
택풍의 대상 지금도 예 같은데 / 澤風大象今猶昔
산골짝엔 찬 안개 스스로 봄일세 / 滿谷烟嵐自在春
하였다. 이때 공은 쇠병(衰病)이 심하였으나 기동하는 데는 이상이 없었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근자에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 인간 만사가 하나도 마음에 걸린 것이 없으나, 국가에 대한 걱정만은 한 시각도 잊을 수 없다.”
하였다.
12월에 수운암(峀雲菴)에 올라가 문생들과 함께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의, 시를 짓고 집으로 돌아와 한질(寒疾)을 얻은 데다가 지병이 더하여 신고하면서 해를 보냈으며, 아배(兒輩)를 위하여 작시준적(作詩準的)과 작문모범(作文模範)을 초하여 주었다. 또 택풍지(澤風志)와 계산지(啓山志)를 풍기(豊基)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보존하라 명하고는 말하기를,
“문자는 굳이 후인에게 많이 전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 글을 보면 나의 마음 자취를 알 것이다.”
하였다.
정해년(1647, 인조25) 3월에 이질(痢疾)이 재발하자 공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속자지(續自誌)를 초(草)한 다음 그 끝에,
“계해년부터 정묘년까지는 성상(聖上)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의심과 비방이 산적(山積)하였고, 정묘년 이후부터는 성상의 밝음으로 과연 나의 쓸모없음을 아신 때문에 견책(譴責)을 입어 항상 한직(閒職)에 있었다. 그런데 모친의 연세가 이미 80이어서 이사(移徙)하기 곤란하였으므로 혹은 봉양을 위해 녹을 받으면서 그럭저럭 지내기도 하였으며, 혹은 물러나서도 나라에 사변이 많아 영원히 산림에 묻혀 있지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의 의심을 받은 것도 당연하다. 병자년에 난리를 겪은 뒤에 조정에 사람이 없으므로 자주 나를 추천하였고 문형(文衡)을 대신 맡게 된 데 대하여는 더욱 적격자가 없었던 때였으므로 상하 간에 파벌이 없어 나의 이름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심 걱정되고 부끄러워 때없이 물러나기를 청하여 적임자가 못 되는 책임을 모면하고 스스로 국사(國史) 수찬하는 일에 기탁하여 일대의 무사(誣史)를 고쳐 불후(不朽)의 사업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공의가 어그러지고 독한 공격이 다시 전개되어 저지하는 자가 태반이나 되므로 친척들이 모두 만류하였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한 매년 봄가을에 성상께서 옥체가 편치 못하시면 항상 합문(閤門 편전(便殿)의 앞문)에서 기거하였고, 겨울ㆍ여름이 되면 한열증(寒熱症)이 대발하였으나 그 상황 속에서 혼자 국사를 편집하여 거의 이루어지다가 이 화를 만났으니, 평생 우망(愚妄)한 행동이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전지(前誌)의 유계(遺戒)에서도, 나 자신을 낮추어 검소한 장례를 집행하라 했지만, 지금 이전 신분으로 돌아오니 마치 본분을 이룬 것 같아 내 마음이 편안하다. 마땅히 이전의 경계에 따라 사서인(士庶人)의 예로 장사를 치러 나의 본래 뜻에 부응하도록 하고 죽은 사람이라고 해서 전혀 알지 못하리라고 여기지 말아라.”
하였고, 또 손수 유계(遣戒)를 써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장사(葬事)에 석회(石灰)를 쓰지 말고 제사에 유과(油果)를 쓰지 말며, 만사(挽詞)를 요구하지 말고 비표(碑表)를 세우지 말라. 무사(巫事)나 불사(佛事)를 하지 말고 관내(棺內)에는 비단 의금(衣衾)을 넣지 말고, 염(殮)에는 심의(深衣)를 사용하고 장사의 준비물은 가세의 유무에 따라서 예식만 갖춰지면 그로써 그칠 것이요, 절대로 구차하게 분수 밖의 재물을 구하지 말라. 먼 데 있는 사람에게는 장삿날을 알리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런데 모든 조항에 각각 주설(註說)을 붙였고 또 가사(家事) 처리에 있어 대소간 유루(遺漏)가 없었으며 선대(先代)를 받드는 일에는 더욱 자세히 부언하였다. 또 글을 세 아들에게 보이기를,
“나는 재품(才稟)이 천박한 데다가 병이 들어 공부할 시기를 잃고 다만 선대의 유풍에 힘입어 이름을 세웠을 뿐이다. 더욱이 그 시기에는 요행히 나와의 강적(强敵)이 없었고 세상에 안목을 갖춘 인사가 적었던 때문에 내가 헛된 명예를 취득하여 문형(文衡)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이는 모두 나의 애당초 바라던 바가 아니다. 대저 이름이 실제보다 지나치면 조물주도 시기하는 법이고, 옛사람도 후사(後嗣)가 없지 않을까 하는 꺼림이 있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 난세를 당하여 군국(軍國)의 일이 많으니, 나의 이 같은 사령(辭令)이 국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이것으로써 만족하다. 만약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문자가 거듭 식자(識者)들의 비웃음을 받아 함께 없어져 버린다면 비록 죽어도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살아서 높은 직위와 화려한 직함을 도둑질한 것은 모두 문자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공기(公器)가 나로 말미암아 남용된 것이니 이 또한 죄인데, 혹 내가 죽은 뒤에 고을을 침해하여 문집을 발행한다면 죄가 더욱 크게 된다. 그러므로 소유한 난고(亂稿)는 평일에 정돈하지 못하여 완편으로 된 것이 적기 때문에 이를 소각하고 싶으나 공연한 참소와 비방만 야기시켜 너희들에게 누(累)를 끼칠까 두려우니, 다만 상자에 넣어 두고 너희들의 사모하는 대상으로 삼으라. 비록 후세의 자손이 부귀하더라도 절대로 이를 간행하여 나의 겸손한 뜻을 저버리지 말아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하였으니, 나의 글이 세상에 진하여진들 무엇을 취할 바가 있겠느냐. 이것으로써 이름을 남기려 하는 자는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소견이다. 나의 흉중은 담담하여 하나의 티끌도 없다. 이 마음을 너희들은 알아라.”
하였다. 이에 앞서 자제들과 더불어 고금의 일을 담화하고 문자를 강론할 적에 자제들이 강의한 것을 골라 쓰기를 청하므로 공이 대충 기초(起草)하여 이름을 ‘시아대필(示兒代筆)’이라 했다.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점차 위독하여 매양 잠자리에 들면 눈을 감았다가 조금 지나서 곧 일어나 앉아 입으로 불렀는데, 성리(性理)의 연원(淵源)에서부터 고금의 학술 대략을 두루 논하여 자손의 학문 방법을 지시하였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데는 말이 더욱 간절하였다. 아울러 산록(散錄)을 추록(追錄)하여 3편으로 만들었고, 또 일찍이 가계(家誡)를 저술하였다. 그 관혼상제편에 쓰기를,
“우리 내외가(內外家)가 상제(喪祭)에 관하여는 근실히 시행하여 왔으므로 지금 《가례(家禮)》에 실린 의절(儀節)은 다시 거론하지 않고 다만 속(俗)을 버리고 예(禮)를 따르는데 큰 의리(義理)에 관계되는 것만을 취하여 논저(論著)한다.”
하였는데, 마치지 못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탈고하였다.
또 모든 종인(宗人)에게 글을 보내어 문중(門中)의 처리하기 어려운 일에 대하여 지시하였고, 5월에 계산재(啓山齋)에서 택풍당(澤風堂)으로 옮겼다. 그때 병세가 이미 악화되어 기동할 수 없었다가 단오일(端午日)이 되어 창포(菖蒲)를 물에 끓이게 하여 머리를 감고 부축을 받아 일어나서 선영(先塋)에 망배(望拜)하였다. 5월 19일에 구점(口占) 칠언 율시(七言律詩)를 입으로 불렀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 나이 예순 넷이라 / 行年六十四春秋
한평생 괴로움 끊임없었네 / 弧矢生涯苦未休
문자와 허명이 끝내 화를 불렀고 / 文字虛名終速禍
청반과 도식(徒食)이 늘 수치만 더했어라 / 淸班素廩每包羞
천지의 그지없는 일들을 보건대 / 眼看天地無窮事
군민에 대한 시름 끊임이 없네 / 心抱君民不盡愁
나야 죽어가면 아무 생각 없으련만 / 便入九原無一念
산은 영원하고 물은 동으로 흐르리 / 碧山長在水東流

이로부터 병세가 더욱 위독하여 하루에 1, 2작(勺) 정도의 물만 마셨다. 이러기를 20여 일이나 지났으나 정신은 조금도 착오가 없었다. 하루는 스스로 맥을 짚어 보고 나서 말하기를,
“이 맥이 이미 끊어졌다.”
하였는데, 6월 9일에 머리를 동쪽으로 두라 명하고, 11일 계명시(鷄鳴時)에 별세하였다. 그때 자제들이 빙 둘러 모셨고, 부인(夫人)이 들어갔을 적에는 손을 저어 물러가게 하였다. 향년은 64세였다.
이때 몇 달 동안 큰 가뭄이 계속되다가 공이 별세하자, 비가 쏟아져 산이 무너지기까지 하므로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8월 15일에 유명에 따라 선영(先塋) 옆 계좌(癸坐) 정향(丁向)에 안장하고, 계산지(啓山志)의 유계(遺誡)에 의하여 ‘택당묘(澤堂墓)’ 3자를 유혼석(遊魂石 상석 뒤에 있는 조그마한 돌)에 새겨 세웠으며, 효종 기축년(1649) 12월에 특진관(特進官) 김광욱(金光煜)의 계청으로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
공이 젊었을 적에 사서(四書)를 통습하고 시(詩)ㆍ서(書)를 연습(演習)했다고 한 말은 자지 후록(自誌後錄)에서 나온 것이나, 그때에는 공이 마음을 가라앉혀 정양하고 있었으므로 소리 내어 글을 읽을 수 없었다. 집사람들이 보고 아는 바는 오직 《논어》ㆍ《맹자》 수십 번을 읽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사서(四書)에 있어서는 정숙 관통하여 비록 노경에 이르러서도 후생(後生)들을 가르칠 때 마치 자기의 말을 외듯 하였다. 즉 《대학》과 그 소주(小註) 같은 데 있어서는 하나도 잊지 않았고 임종까지도 그러하였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시ㆍ서와 사서(四書)는 의리(義理)의 근본이니, 하루도 폐지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글 보기를 범연히 한 때문에 대부분 잊어버렸으나 오직 경서(經書)만은 심학(心學)의 공부이므로 잊어버리지 않았다.”
하였으니, 직접 몸과 마음에 체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일찍이 말하기를,
“20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글을 보아 자못 마음에 자득한 바가 있어 식견이 귀결된 데가 있으므로 처사 접물(處事接沕)에 있어 다만 의리상 어떠한가 생각하여, 의리에 합당하면 행하고 의리에 어긋하면 행하지 않았다. 일생에 허다한 환난을 겪었으나 이 지표를 잃지 않은 까닭에 일이 면전에 닥쳐도 난처한 일이 없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릇 우주 사이의 의리의 시비와 정치의 득실을 한 번 보아서 빠뜨림이 없다면 거의 이 일생의 큰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젊었을 적에 《대학》을 읽으면서 글자 연습도 하다가 문득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것도 습자하는 것과 같음을 깨달았다. 처음 습자할 적에는 허다한 점획을 어찌 다 통하겠는가 하는데, 계속하여 수백 자를 습득하고 나면 나머지는 저절로 상응하여 관통된다. 격물치지도 이와 같아서 격물 공부가 점차 많아지고 보면 자연 유(類)를 따라 관통된다. 어찌 사물마다 다 연구해서 될 것이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정자(程子)의 학설과 은연중 맞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어려서부터 방심하여 욕심을 따르다가 한번 성의 정심(誠意正心)에 대한 설(說)을 들으면 갑자기 그 방면으로 기울지만, 격물(格物) 공부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알고 있는 이치가 있으므로 굳이 격물에 종사할 나위가 없다고 하며, 그중에 민첩한 자는 자기의 총명만을 자부하여 격물을 더욱 하찮게 여긴다. 즉 글 읽어 옛것을 상고하는 것이 박학(博學)인 줄만 알고 글 읽어 옛것을 상고하는 데로부터 격물 공부를 할 줄 모르므로 결국 학문이 넓을수록 마음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이다.”
하였다. 공의 견식이 이와 같았으나 아버지 찬성공(贊成公)이 평소에 세상 사람들이 도학(道學)으로 자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공이 감히 도학으로써 스스로 과시하지 않고 다만 선대의 음덕을 이어받고 사원(詞苑)에 가탁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문장으로써 도를 깨닫는다고 한다. 그러나 공은 자품이 고명한 때문에 은연중 도에 가까워 나이 겨우 약관(弱冠)에 이치를 환히 연구하였으니, 성현의 글에서 얻은 바를 속일 수 없다. 공이 만년에 아들들에게 준 훈사(訓辭) 5조(條)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경사(經史)를 연구하여 지식을 개발하라.
그 주(注)에 ‘사서(四書)를 읽는 여가에 역사를 읽고 또 옛사람의 행신과 처사의 절차를 관찰하면 지식이 개발될 것이니, 이로써 근본을 세워 점차 박문(博文)ㆍ약례(約禮)의 공부에 나아가야 한다.’ 하였다.
2. 의명(義命)에 마음을 두고 이욕(利欲)을 버려야 한다.
그 주에 ‘언제나 모든 처사가 도리에 합당하기를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도 불평ㆍ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은 운명이니, 다만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요, 스스로 요동되거나 의혹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3. 지기(志氣)를 가다듬어 환란에 대처해야 한다.
그 주에 ‘의명(義命)에 안착하다가도 환란을 당하면 꿋꿋하기가 어려우니 모름지기 항상 격앙(激昻)하여 옛날의 지사(志士)ㆍ인인(仁人)ㆍ일민(逸民)의 일을 본받아야 한다.’ 하였다.
4. 의식(衣食)을 박하게 하여 빈천에 처해야 한다.
그 주에 ‘사람이 만약 예로써 자신을 규율(規律)하고 부녀나 습속에 구애받지 않아서 꿋꿋이 자립하면 재용(財用)에 적절하여 빈천을 우려할 나위가 없게 된다.’ 하였다.
5. 저축에 힘써 위급에 대비해야 한다.
그 주에 ‘사람에게는 혼(婚)ㆍ상(喪)의 떳떳함과 수(水)ㆍ화(火)의 재변이 있게 마련이므로 《가례(家禮)》에 「조금씩 남는 것을 저축하여 의외의 재난에 대비하라.」 했다. 그러나 예의를 넘지 말고 마땅히 절검(節儉)하면서 약간의 재력(財力)을 운용해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 맨 끝에는,
“이상 5조를 과연 준수하면 가정을 보존하고 수명을 늘일 것은 물론 명절(名節)에 흠이 없고 마음이 평탄하여 온갖 변동을 담당해 나갈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그 해는 이와 반대일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국록으로써 농사(農事)를 대신하는 일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그 거취에 있어 절대로 이것을 믿어 나의 지업(志業)을 해이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상은 다 공이 실천하여 마음에 얻은 것으로 빈말이 아니었다.
공은 경서(經書)에 이미 융회(融會) 관통(貫通)했으나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사학(史學)에 조예가 깊다고만 여긴다. 이는 공이 역대의 치란과 인물의 현부(賢否)와 흥망 성패의 시말(始末)ㆍ곡절을 환히 알아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하였고, 전곡ㆍ재부(財賦)ㆍ갑병(甲兵)ㆍ정선(征繕)과 이적(夷狄)을 방비하는 요령, 산천의 험이(險夷 험악하고 평탄한 것)한 형세를 모두 통달해서 옛것으로써 현재를 증명하여 모든 사업에 활용한 때문이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역사를 보는 방법은 심상한 곳에는 힘을 소모하여 다 기록할 것이 아니고 오직 큰 조치, 큰 거조에만 착심(着心)해서 보아 나가되, 자신이 직접 그 처지에 놓였다고 가정하고, 만약 내가 이러한 기회에 봉착했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인가를 비교 생각하여, 마치 눈앞에 전개될 일처럼 여기면 다만 오래 기억에 남을 뿐 아니라 지식에도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총명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일생 동안 책 보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자연 잊지 않은 것이다.”
하였는데, 정자(程子)의 말에도 이러한 뜻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공을 사학에만 깊었다고 말하는 자는 어찌 공을 다 알았다 하겠는가.
또 당세의 일을 논하면서 걱정하고 미리 염려한 바가 뒷날에 다 들어맞아, 마치 촛불로 비추고 거북으로 점치듯 하였다.
또 노자ㆍ장자ㆍ선도ㆍ불교의 뜻과 음양 풍수설에도 정통하였고, 근대의 사이비한 선학(禪學 육구연(陸九淵)ㆍ왕수인(王守仁) 등의 학설)에 있어 그 구별이 더욱 엄격하였다. 일찍이 ‘강서행(江西行)’을 부(賦)하여 육학(陸學)의 해독을 배척하였으니 이단(異端)을 명백하게 물리쳤다 하겠다.
대저 공은 보지 않은 글이 없었고 또 사물에 있어 연구하지 않음이 없어 마치 대지(大地)가 펼쳐 있고 바다가 출렁이는 것과 같았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 한계를 측량하지 못하고 상하간에 한갓 박학(博學)ㆍ능문(能文)한 선비로만 보아 그 큰 계책이 쓰이지 못하고 큰 사무가 맡겨지지 못하였으며, 비국 당상(備局堂上)으로 있을 적에도 그 문한(文翰)만을 취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직책을 애써 사양하였으니 ‘과분한 자리에서 물러나 국사(國史)를 다루는 일에 전심하려 한다.’는 말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문장에 있어, 시는 《시경(詩經)》 3백 편과, 《예기(禮記)》 경해(經解)의 ‘온유 돈후(溫柔敦厚)는 《시경》의 가르침이다.’라는 말과, 주자(朱子)가 취한 한자(韓子 한유(韓愈))의 ‘《시경》은 정대하면서도 화려하다.’는 등의 설(說)을 종주(宗主)로 삼았다. 이와 반대로 지취가 편벽 방탕하고 사의(詞意)가 혼탁 험괴한 것은 다 시의 외도(外道)라 하여 배척하였으며, 소선(騷選 《이소경(離騷經)》ㆍ《문선(文選)》)이래 고금 백가(百家)의 저작을 모두 소급하여 두소릉(杜少陵 두보(杜甫)를 말함)에 귀결시켰으므로 여러 문체(文體)를 모두 갖추어 각각 그 묘(妙)에 이르렀으나 한결같이 바른 성정(性情)에서 유출되었다. 그중에도 혼조(昏朝 광해조(光海朝))와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의 작품은 더욱 시속(時俗)을 상심한 것이 많아서, 혼란한 세상을 개탄한 시인(詩人)의 뜻이 일세의 풍교(風敎)를 격려하고 사람들의 착한 마음을 감동시킬 만하니, 무익한 읊음이 아니다.
문(文)은 경서(經書)와 주자의 글로 근본을 삼았고,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글을 모두 채취하되, 당(唐)ㆍ송(宋)의 대가(大家)를 모범으로 삼아 이취(理趣)를 발명하고 치도(治道)를 경위(經緯)했으니, 다 알맹이 없는 공언(空言)이 아니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한 다음, 온종일 서실(書室)에 정좌하여 마치 신명(神明)을 직접 대하듯 하였으며, 비록 병석에 있어도 엎드리는 일이 없었다. 대개 경술(經術)을 통명(通明)하는 것을 종신의 공부로 삼았다.
사물(四勿)을 써 붙이고 존심(存心)에 힘썼으므로 시청언동(視聽言勳)에 있어 예(禮)에 맞지 않음이 없었고, 젊었을 적부터 덕성이 충만한 데다가 만년에 조예(造詣)가 더욱 깊었으므로 일부러 경계하지 않아도 해이한 행동이 없었다. 글을 짓는 데는 마음에 들면 그쳤고, 거기에 빠져 위의(威儀)를 추락시킨 적이 없었다. 의식(衣食)은 항상 화려함을 경계하고, 거처는 누추 검소하여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데서도 태연하게 지냈다. 주량은 컸으나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술을 사서 마신 적이 없었다. 혹 손이 있을 때 집에서 빚은 술이 있으면 함께 대작하여 정의를 나눌 만하면 그쳤고 지나치게 취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술을 권하여 취해서 돌아오더라도 토한 적이 없었으니, 주곤(酒困)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부모를 섬기는 데는 효(孝)를 다하여, 아버지 찬성공이 초당에 거처할 적에는 종일토록 옆에서 모시고 묵묵히 서책을 읽었으며 심한 질병이 아니면 사실(私室)로 물러가지 않았다.
대부인(大夫人)이 연세는 83에 이르렀으나 기력은 일찍 쇠퇴하여 겨우 수명을 이어갔는데, 정성(定省 저녁에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아침에 문안드리는 것)ㆍ온청(溫凊 의복을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것)과 양지(養志)ㆍ양체(養體)가 아울러 극진하였다. 일이 없을 적에는 항상 모시고 앉아 온화한 얼굴과 말로써 편안히 위로해드렸고, 병이 났을 적에는 몸소 약탕을 올리고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좋은 계절이나 명절이 되면 음식을 차려 함께 즐겼다.
대부인이 여강(驪江 여주(驪州))에 있을 때 공이 지곡(砥谷)에서 오가며 문안하였는데, 혹 말이 없으면 도보로 왕래하였다. 상사(喪事)에는 반드시 성신(誠信)을 다하고 제사(祭祀)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였고, 제상(祭床)에는 책 한 권을 두어 기절(忌節)ㆍ삭망(朔望)과 시제 때 소요되는 찬품(饌品)ㆍ기수(器數) 등의 경비를 계산하여 미리 준비하였다. 심지어 향촉ㆍ자리ㆍ휘장ㆍ병풍 따위를 세밀히 기재, 부족 여부를 점검하여 다급하거나 구차한 폐단이 없게 하였다.
시골에 새로 사당(祠堂)을 지은 다음 제식(祭式)을 고쳐 초(草)하고 아울러 예(禮)에 대한 의의를 논하여 영원히 준행하였다.
조정에 있을 적에는 자제를 시켜 제사를 대행하였고, 시제(時祭) 날짜를 전해 들으면 반드시 치재(致齋), 날짜가 되면 반드시 망배(望拜)하였다.
시골에 돌아와서는 반드시 새벽에 사당을 배알, 그 처소가 조금 멀었으나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선묘(先墓)에는 다 표석(表石)을 세웠는데 모든 석물(石物)을 조성(造成)하는 데에 관군(官軍)의 힘을 빈 적이 없고 자력으로 다하였다.
두 자매(姊妹) 중에 자씨는 과부로 생활이 곤궁하므로 지극(砥谷)으로 옮겨 여강(驪江)의 옛집을 주어 살게 한 다음 항상 그 생활과 혼가(婚嫁)를 경리해 주고 또 그 소생(所生)을 가르쳐 성장시켰고, 부모가 다 돌아간 뒤 형제간이 분가할 적에는 대소과(大小科)의 속례(俗例)에 의해 받은 물건을 전부 나누어 주었다. 서제(庶弟)와 두 서매(庶妹)에게도 자애(慈愛)가 독실하여 저마다 생계를 도와주었고 친척ㆍ붕우에게도 두루 온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벼슬길에 밀어주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이 이 점을 들어 말하면, 국가의 관작은 나의 사유물이 아니라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 인륜(人倫)을 좋아하여 어른 모시기를 《소학》에 있는 훈계대로 하였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은 공의 족부(族父)가 되는 데다가 공이 시(詩)를 배웠고 또 그 밑에 막료(幕僚)로 있었으므로 엄부(嚴父)같이 섬겼다. 동악공이 연산군(燕山君)의 제사를 주관하고 있었는데, 혈손이 없으므로 평소 동종(同宗)의 조카에 뜻을 두었으나 미처 상의 재가(裁可)를 얻지 못하였다. 동악이 죽은 뒤에 공이 종인(宗人)들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동악의 후사(後嗣)를 세워 주었는데, 즉 고(故) 대사간(大司諫) 이합(李柙)이다. 공의 남을 위한 충심이 거의 다 이런 유이다.
가정에 있어서는 갖가지 살림에 대하여 아는 체하지 않았고, 또 부인(夫人)이 가사(家事)를 선처하므로 집안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항상 스스로 예법(禮法)을 지켜 가정을 거느렸고, 사치(奢侈)를 금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없애어 일정한 제도를 제정하고 수입을 보아 지출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였다.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시골의 자제와 노복(奴僕)들을 경계하여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고, 조정에서 만약 자기 뜻에 맞지 않은 점이 있으면 곧 사직하고 돌아와 미련을 두지 않았다.
조정에 있을 때 직무상 해야 할 일은 사무의 대소를 막론하고 힘을 다하였다. 또 정치 의논과 군국(軍國) 대사에 있어서는 다 기록할 수 없으나, 평소 지성으로 나라를 걱정하였고 항상 세도(世道)와 군민(君民)에 대해 염려하였다. 그래서 소장(疏章)을 군상(君上)에게 올리기도 하고, 서찰(書札)로 공경(公卿)들과 변론하기도 하고, 혹은 빈객을 상대로 담화하기도 하고, 혹은 문장으로 풍간하기도 하였으니, 충애(忠愛)와 측달(惻怛 가엾게 여기는 마음)로써 임금 보필에 연연하는 마음은 한 시각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오로지 문한(文翰)만 맡기고 정치에 대하여는 중책을 주지 않았으므로 몸소 성세(盛世)를 만났으나 끝내 크게 포부를 펴지 못했고, 또 명예와 지위가 현달하였어도 국가의 전복(顚覆)을 구하지 못하였음을 지극히 통분하게 여겼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였고, 남한산성에서 노모(老母)를 찾아 산골에 들어갔을 적에는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망국대부(亡國大夫)로서 처신을 상제(喪制)같이 하고 싶으나 노친(老親)이 계셔서 그렇게 못한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꼭 일신(一身)만 깨끗이 하자면 의당 난전(亂前)에 은퇴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즉 당시의 의리로 보아 자신 혼자만 깨끗이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단정한 때문에 드디어 조정에 돌아왔고, 또 어버이의 상(喪)을 마치고도 즉시 조정에 돌아왔던 것이다.
엄동(嚴冬)에 판자방에 멍석을 깔고 부들자리를 깐 다음 빈객을 접대하므로 자제들이 온돌방에 거처하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용재(容齋 이행(李荇)) 고조부께서는 아무리 겨울에도 온돌방에 거처하지 않고 오직 멍석을 두텁게 깔고 거처하면서 ‘사람이 온돌방에 거처하면 총명을 감소시킨다.’ 하셨다.”
하였다. 또 일찍이 흑칠(黑漆)한 폐양자(蔽陽子)를 쓰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가볍고 시원하며 사기도 쉽다.”
하였는데, 그 실제로는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총명을 감소시킨다고 했다느니 가볍고 시원하다느니 핑계한 것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부인이 항상 말하기를,
“공은 난후(亂後)에 항상 별침(別寢)하다가 종신하셨다.”
하였으니, 그 근독(謹獨)의 공력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천지 귀신만이 그 마음을 알았다.
동서로 당(黨)이 갈린 이후부터 이것이 나라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 조관(朝官)들이 당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계해년(1623, 인조1)에 벼슬길에 나간 이후로 특립독행(特立獨行)할 것을 신명에 서약, 그 뒤에 당론이 교란하는 와중에 있으면서도 의연(毅然)히 부동하여 좌우를 조정하였다. 비록 사람들의 공격과 배척을 여러 번 받았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나중에는 무사(誣史)를 바로잡아 간행하기를 자청하였는가 하면, 털끝만큼도 편파적인 것이 없었으므로 온 세상에서 모두 공정함을 일컬었으니, 이는 다만 총명 강기(聰明强記)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을 뿐이 아니다. 진실로 독립하여 편파 없는 도로써 할 마음의 자신이 없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공이 밝은 세상을 만났으나 그 지업(志業)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그 공명(公明)한 심지(心志)와 강대한 역량으로 비운(否運)을 퇴치시킬 큰 책임이 다만 여기에 그쳤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공은 장대한 키에 귀가 크고 괴위(魁偉)한 얼굴에 수염이 많았으며, 공평 정직한 기상이 면모에 넘쳐흘러서, 바라보면 곧 도덕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하루 사이에 비록 온갖 일을 처리하여도 용체(容體)가 서지(舒遲 여유 있고 침착한 것)하고 의상(意想)이 관평(寬平)하여 언제나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또 나라와 시대를 걱정하는 생각을 말이나 얼굴에 나타내는 것 이외에는 언제나 청화(淸和)한 기상이 사람을 엄습하였으며, 가끔 빈우(賓友)나 후생(後生)들과 함께 시비를 변론할 적에는 사물을 비교하고 고금(古今)을 이야기하여 그 어리석은 이를 가엾이 여기고 의혹된 것을 없애 주곤 하였다. 그런데 흉중(胸中)에서 나오는 말이 마치 강물이 쏟아지는 것 같고 음성이 금석(金石) 소리와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어떤 이는 공을 호변가(好辯家)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난세에 처하여 정도(正道)를 붙드는 데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어떤 이는 공이 농담을 잘했다고 하나 공의 농담 중에는 다 풍자의 뜻을 붙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는 바가 있도록 하였으니, 진짜 농담이 아니었다. 아무리 한집에 있는 사람들도 비열하거나 도리에 어그러진 말을 들은 적이 없었고, 때로는 조용히 생각하며 하루를 지내기도 하였다.
선배 중에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의 봉호)ㆍ연평(延平 이귀(李貴)의 봉호) 제공이 특별히 추중(推重)하였고 공 또한 이분들을 공경하였다. 혼조(昏朝) 때 물러가 있을 적에는 임소암(任疎菴 임숙영(任叔英))과 가장 친하였는데 이는 공의 문한(文翰)과 기절(氣節)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공 경의(李公景義)와는 일찍이 막료(幕僚)로 함께 있었는데 역시 허물이 없었으므로 교분(交分)이 쇠하지 않았다. 김공 세렴(金公世濂)도 공이 학식이 있는 데다가 당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여 공을 추중(推重)하였는가 하면, 공이 별세한 뒤에는 제문(祭文)을 지어 제(祭)하고 깊이 애도하였다.
임종시에는 아들들에게 삼관법(三觀法)을 써 주었는데,
“충현(忠賢)을 관찰하려면 오늘날 재상(宰相)의 모양이 없는 중에서 취하고, 호걸(豪傑)을 관찰하려면 오늘날 명사(名士)의 모양이 없는 중에서 취하고, 문장을 관찰하려면 오늘날 과문(科文)의 모양이 없는 중에서 취하라.”
하였으니, 공의 벗 사귀는 데 신중하였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종학(從學)하는 인사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정성으로 복종하였지만, 공은 자신을 선생으로 부르기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일찍이 사도(師道)로서 자처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도 공이 사문(斯文)에 큰 공로가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오직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젊어서부터 이웃에 살면서 종유(從遊)하여 항상 공의 언행(言行)을 복응(服膺 마음에 간직하는 것)하였으므로 그 행세(行世)의 절도가 공과 비슷하였다.
‘시아대필(示兒代筆)’ 중에,
“대과괘(大過卦) 전(傳)에 ‘대과괘의 의의가 매우 크다.’ 하였으니, 비상한 대사(大事)를 세우고 세상에 드문 대공(大功)을 일으키고 세속에 없는 대덕(大德)을 이루는 것 등이 모두 대과의 일이다. 또 주자가 말하기를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움이 없고 세상에서 숨어 미련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으니, 이로써 추측해보면 공에게는 바로 《예기(禮記)》의 곡례(曲禮)에 ‘의심난 일이 있어 점을 치면 아무도 그르다 할 자가 없고, 점사(占辭)에 게시된 날짜에 행사(行事)하면 길(吉)하다.’는 말이 적격이 아닌지 모르겠다.
공에게는 후생을 위한 훈계가 매우 많다. 일찍이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효유하기를,
“학문은 반드시 근소(近小)한 데서부터 원대(遠大)한 데 미쳐야 하며, 독서(讀書)는 입으로 읽고 귀로 듣는 것만을 능사로 삼지 말고 반드시 뜻을 이해해야 하며, 몸가짐은 항상 구용(九容)구사(九思)로써 강습 복행해야 한다.”
하였고, 또 청학(請學)하는 선비들에게 효유하기를,
“너희들이 지금 글을 읽어 문장을 지으려 하니 뜻은 가상하다. 그러나 선비된 자가 전혀 사장(詞章)에만 힘쓰면 실덕(實德)에 병이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경전(經傳)의 맥락을 찾은 뒤에야 비로소 시학(詩學)을 겸하여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공의 사람 가르치는 법이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의 일생 동안 저작으로는, 시고(詩稿)가 총 4천여 수, 문고(文稿)가 총 6백여 수요, 별고(別稿)로는 자지(自誌)ㆍ서후잡록(叙後雜錄)ㆍ유계(遺誡)ㆍ가계(家誡)ㆍ제식(祭式) 1책, 잡저(雜著) 1책, 계산지(啓山志)ㆍ택풍지(澤風志)ㆍ간성지(杆城志)ㆍ기천서원지(沂川書院志) 1책, 덕수이씨세계열전(德水李氏世系列傳) 1책, 자훈(字訓) 1책, 정원일기(政院日記) 1책, 경연일기(經筵日記)ㆍ서행일기(西行日記)ㆍ분조일기(分朝日記)ㆍ위성일기(圍城日記) 1책, 수사강령(修史綱領)ㆍ실록수정범례(實錄修正凡例)ㆍ실록고초(實錄考抄) 1책, 과시(科詩)ㆍ과표(科表)ㆍ서의(書疑)ㆍ경의(經義) 1책, 그리고 잡록(雜錄) 1책이 집에 간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들들이 공의 유언을 준수하여 마음대로 간행(刊行)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뒤에 이를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가 가져다가 약간 편을 간행하였다.
공의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대사헌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손녀로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면하(冕夏)는 홍문관 수찬으로 공이 돌아간 뒤에 조졸(早卒)하였다. 그러나 이는 공이 예언한 바다.
다음은 전 부사(前府使) 신하(紳夏)이고, 또 다음은 지금 우의정 단하(端夏)이고, 장녀는 군수 정진(鄭珍)에게, 다음은 좌랑(佐郞) 안광욱(安光郁)에게, 또 다음은 제용정(濟用正) 조비(趙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유(留)는 현감으로 수찬 면하(冕夏)의 소생이요, 별좌(坐別) 번(蕃)ㆍ이조 참의 여(畬)와 당(簹)은 부사 신하(紳夏)의 소생이요, 전 찰방(察訪) 심()과 축(蓄)은 우의정 단하(端夏)의 소생이다.
군수 정진은 부사(府使) 수석(洙碩)ㆍ수만(洙晩)ㆍ수성(洙成)을, 좌랑 안광욱은 현감 돈(墩)ㆍ방(埅)ㆍ장령(掌令) 규(圭)ㆍ승지(承旨) 후(垕)를, 제용정 조비는 현감 인상(麟祥)과 귀상(龜祥)을 낳았다. 손녀와 증손ㆍ현손이 모두 수십 명이다.
병인년(1686, 숙종12) 초 공의 아들 단하가 의정(議政)을 지내고 판부사(判府事)가 되었을 때 추은(推恩)으로 공에게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가 추증되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어전에서 공이 선조조(宣祖朝)의 무사(誣史)를 개수한 공적이 중대하여 한때의 공적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진달(陳達)하여 가증(加贈)과 치제(致祭)와 증시(贈諡)를 청하니, 임금이 대신의 진달이 옳다고 하고 아울러 시행할 것을 명하므로 드디어 공에게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특증, 겸직(兼職)은 예(例)에 따르게 하고, 역명(易名 임금에게 시호를 받은 은전)은 장차 시장(諡狀)을 기다려 처리하기로 하였다.
공의 위망(位望)은 실로 높았다. 나는 시골의 미천한 몸으로 비록 공의 문하에 참여하지 못했으나,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에 대한 공의 의논을 들어 보면,
“정암(靜菴)의 자품과 퇴계(退溪) 학문에다가 경제의 정책을 겸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율곡을 존경하는 사람은 사계(沙溪)의 학이요, 그 나머지는 당(黨)뿐이다.”
하였으니, 나는 우리 두 분 선생을 아는 분은 오직 공 한 사람뿐이라 생각한다. 이는 백세의 공언(公言)이 될 만하다. 만약 학식이 통명하고 마음이 공정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말을 하였겠는가.
또 나의 숙부 습정공(習靜公 송방조(宋邦祚))은 실로 광명하고 준위(俊偉)한 군자이다. 일찍이 소견을 기록하여 공을 단정하기를,
“호걸의 도량이 있고 또 호걸의 재주가 있었다.”
하였으니, 나의 생각으로는 대인(大人)이라야 능히 대인을 안다고 본다. 또 유문(儒門)의 명경(名卿)들이 논하기를,
“택당(澤堂)의 조예(造詣)와 실천은 능히 알 수 없으나 그 서책상의 논의(論議)로써 보면 진정한 유자(儒者)이다.”
하였다.
대저 공의 일생 동안 주력(主力)을 둔 곳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였으므로 그 의논이 순수하여 한결같이 바른 데서 나왔으니, 이 어찌 문인 사객(詞客)으로 논하겠는가. 지금 율곡에 대한 시비가 다시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공은 다시 환생할 수 없으므로 드디어 감개 탄식하면서 우선 위와 같이 기록하여 다음의 지언 군자(知言君子)를 기대한다.


[주D-001]서양갑(徐羊甲)의 옥사(獄事) : 서양갑은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서얼(庶孼) 출신으로 벼슬을 할 수 없는 울분을 술로 달래다가 조령(鳥嶺)에서 행상인을 죽이고 금품을 강탈한 사실이 드러나 구금되었는데, 목숨을 살려 준다는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大北派)의 사주를 받고, 한쪽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고 허위를 진술하여 큰 옥사가 일어나, 영창대군을 위시로 여러 사람이 참변을 당하였다. 《光海君日記》
[주D-002]폐모론(廢母論) : 광해군 5년(1613)에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다고 무고하여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는 존호가 박탈되고,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주D-003]수상칠인(水上七人) : 광해군 때에 서얼 출신 박응서(朴應犀)ㆍ서양갑(徐羊甲)ㆍ이경준(李耕俊)ㆍ박치인(朴致仁)ㆍ박치의(朴致義)ㆍ심우영(沈友英)ㆍ김평손(金平孫) 등 불평분자들이 모여 춘천 소양강 근처에 ‘무륜(無倫)’이란 호(號)의 집을 짓고 매일 시와 술로써 세월을 보냈는데 이들을 말한다. 이들이 처음에는 강변칠우(江邊七友)라 하다가 나중에는 진(晉) 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죽림칠우로 고쳤다. 《燃藜室記述 卷20 廢主光海朝故事本末》
[주D-004]서경(署經) : 임금이 관원(官員)을 서임(敍任)할 때 그 사람의 문벌ㆍ이력 등을 갖추 써서 대간(臺諫)에게 그 가부를 구하면, 대간에서 그 하자(瑕疵)의 유무를 조사하여 하자가 없은 뒤에야 이조(吏曹)에서 비로소 사령장을 교부한다. 세 차례 서경을 구하여 통과되지 않으면 벼슬에 임명되지 못한다.
[주D-005]충군(充軍) : 조선 시대에 범죄자를 군역에 복무시키던 형벌의 일종으로, 신분의 고하와 범죄의 경중에 따라 차등이 있다.
[주D-006]호당(湖堂)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조선 시대에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던 곳으로 세종 8년(1426)에 시작되었고, 그후 중종 10년(1515)에 동호(東湖) 북쪽 기슭, 즉 지금의 두모포(豆毛浦)에 창설하였는데, 이때부터 ‘호당’이라 일컬었다.
[주D-007]이괄(李适)이 반란(叛亂) : 인조반정 때의 공신이던 이괄이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그는 기익헌(奇益獻)ㆍ한명련(韓明璉)과 함께 인조 2년에 반란을 일으켜 정부의 토벌군과 여러 곳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고 이괄은 선조의 제10자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장만(張晩)의 반격으로 반란군은 격파당하고 이괄은 부하의 손에 죽었다.
[주D-008]영무(靈武)와 같은 행사 : 당 현종(唐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 현종은 서촉(西蜀)으로 피난하고 태자(太子)가 마외역(馬嵬驛)에 이르자, 부로(父老)들이 길을 막고 서서, 적을 토벌해 주기를 청하므로 태자가 영무에 돌아와 황제위에 즉위하고 현종을 상황천제(上皇天帝)로 높인 고사. 《舊唐書 卷10》
[주D-009]공숙 문자(公叔文子)가 …… 미사(美事) : 춘추 시대에 위(衛)의 대부(大夫) 공 문자(公文子 이름은 어(圉))가 그 가신(家臣)으로 있던 선(僎)을 대부로 추천하여 함께 조반(朝班)에 올랐던 고사. 《春秋左傳 襄公29年》
[주D-010]왕현모(王玄謨) …… 너그러움이 : 왕현모는 남송(南宋) 때 사람으로 탁발도(拓跋燾)가 침입하자 장수로 나가 싸웠는데, 군사들에게 인심을 잃어 크게 패하였다. 절도(節度) 소빈(肅斌)이 참(斬)하려 하자 심경지(沈敬之)가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주D-011]호패(號牌) : 조선 때 16세가 된 남자가 차는 길쭉한 패로, 전면에는 성명ㆍ나이ㆍ생년(生年)을 새기고 후면에는 해당 관아(官衙)의 낙인(烙印)이 찍혔으며, 신분에 따라 아패(牙牌)ㆍ각패(角牌)ㆍ황양목패(黃陽木牌)ㆍ대방목패(大方木牌)ㆍ소방목패(小方木牌) 등의 구별이 있었다.
[주D-012]잔도(棧道)를 …… 지혜 : 잔도는 험악한 산에 나무를 걸쳐서 만든 다리. 이는 초한(楚漢) 시대에 패공(沛公)이 한왕(漢王)이 되어 한중(漢中)으로 들어갈 때 장량(張良)이 항우(項羽)로 하여금, 패공이 중원(中原) 진출의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는 한편, 암암리에 병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잔도를 소각해 버린 고사. 《史記 留侯世家》
[주D-013]애산(崖山) : 지금 광동성(廣東省) 신회현(新會縣)의 남쪽 대해(大海) 가운데 있는 산 이름. 남송(南宋) 말기에 장세걸(張世傑)이 황제 병(昺)을 받들어 이 산을 지키다가 원 나라 장수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자 육수부(陸秀夫)가 황제를 업고 바다에 빠져 죽은 고사. 《元史 張弘範列傳》
[주D-014]관중(管仲) : 중국 춘추 시대 정치가로 제 환공(齊桓公)을 도와 패업(霸業)을 이루게 하였다. 여기서는 그의 부민강병(富民强兵)에 대해 서술한 《관자(管子)》를 말한다.
[주D-015]상앙(商鞅) : 중국 전국 시대 위(衛) 나라 사람.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한 법가(法家). 여기서는 그의 《상자(商子)》를 말한다.
[주D-016]상홍양(桑弘羊) : 한 나라 낙양 사람. 한 무제(漢武帝) 때 대사농 승(大司農丞)이 되어 천하의 염철(鹽鐵)을 관장하여 평준법(平準法)을 제정한 이재가(理財家).
[주D-017]공근(孔僅) : 전한(前漢) 남양(南陽) 사람. 무제(武帝) 때 대사농 승(大司農丞)이 되어 동곽함양(東郭咸陽)과 함께 염철사(鹽鐵事)를 거느리고 천하의 쇠를 거두어 그릇을 만들어 국가의 재정을 도왔다.
[주D-018]질도(郅都) : 한 나라 경제(景帝) 때 중랑장(中郞將). 직간(直諫)을 잘하고 법을 시행함에 있어 귀척(貴戚)을 피하지 않다가 후에 태후의 노여움을 받았다.
[주D-019]장탕(張湯) : 한 나라 때의 혹리(酷吏). 한 무제(漢武帝) 때 대중대부(大中大夫)가 되어 치옥(治獄)을 지나치게 엄격히 하여 많은 사람의 원망을 샀다. 뒤에 주매신(朱買臣)에게 모함을 받아 자살하였다. 《漢書 酷吏傳》
[주D-020]속오군(束伍軍) : 조선 선조 27년(1594) 임진왜란 때 지방에서 역(役)을 지지 않은 양인(良人)과 천민(賤民) 중에서 조련을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조직된 군대인데, 평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고 유사시에만 소집되었다.
[주D-021]오신(五臣)을 …… 때 : 오신은 최명길(崔鳴吉)ㆍ임경업(林慶業)ㆍ이경여(李敬輿)ㆍ신익성(申翊聖)ㆍ이명한(李明漢). 이는 인조 때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계(李烓)가 명(明) 나라 선인(船人)과 밀무역을 하다가 발각되어 청(淸) 나라에 의해 처형을 받게 되자, 목숨을 도모하기 위하여, 최명길ㆍ임경업은 명 나라와 내통하고, 이경여는 숭덕(崇德 청 태종의 연호) 연호를 쓰지 않고, 신익성ㆍ이명한은 명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지킨다는 등 조선의 비밀을 제공하였으므로 청사(淸使)가 조사하러 나온 일을 말한다.
[주D-022]촉룡(燭龍) : 한 줄기의 광명을 뜻한다. 하늘 서북쪽에 해가 없고 늘 어두컴컴한 나라가 있는데 거기에는 용이 촛불을 입에 물고 사물을 비춰 준다고 한다. 《楚辭 天問》
[주D-023]사물(四勿) : 공자가 안회(顔回)에게 가르친 비례물시(非禮勿視)ㆍ비례물청(非禮勿聽)ㆍ비례물언(非禮勿言)ㆍ비례물동(非禮勿動)을 말한다.
[주D-024]구용(九容) : 신체 각 부분의 용자(容姿)로, 족용중(足容重)ㆍ목용단(目容端)ㆍ구용지(口容止)ㆍ수용공(手容恭)ㆍ성용정(聲容靜)ㆍ두용직(頭容直)ㆍ기용숙(氣容肅)ㆍ입용덕(立容德)ㆍ색용장(色容莊)을 말한다. 《禮記 玉藻》
[주D-025]구사(九思) : 군자가 가지는 아홉 가지 생각으로, 시사명(視思明)ㆍ청사총(聽思聰)ㆍ색사온(色思溫)ㆍ모사공(貌思恭)ㆍ언사충(言思忠)ㆍ사사경(事思敬)ㆍ의사문(疑思問)ㆍ분사난(忿思難)ㆍ견득사의(見得思義)를 말한다. 《論語 季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