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점필제 김종직 신도비문 (펌)

점필재집 문집 부록 신도비명(神道碑銘)병서(幷序)

아베베1 2009. 11. 17. 14:13

점필재집 문집 부록
 [신도비명(神道碑銘)]
신도비명(神道碑銘)병서(幷序)


덕행(德行), 문장(文章), 정사(政事)는 공문(孔門)의 고제(高弟)로서도 겸한 이가 있지 않았으니, 더구나 그 밖의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재주가 우수한 사람은 행실에 결점이 있고, 성품이 소박한 사람은 다스림이 졸렬한 것이 바로 일반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 문간공(文簡公) 같은 이는 그렇지 않다. 행실은 남의 표본이 되고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되었으며, 생존시에는 상(上)이 후히 대우하였고 작고한 뒤에는 뭇 사람들이 슬퍼하며 사모하였으니, 어쩌면 공의 한 몸이 경중(輕重)에 그토록 관계될 수 있었단 말인가.
공의 휘는 종직(宗直)이고 자는 계온(季昷)이며 선산인(善山人)으로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상하여 총각 때부터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고 날마다 수만언(數萬言)씩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약관(弱冠) 이전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경태(景泰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계유년 방(榜)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기묘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 정자(承文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이 때 어공 세겸(魚公世謙)은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본원(本院)의 선진(先進)이 되어 공의 시를 보고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에게 채찍을 잡고 노예 노릇을 하게 하더라도 의당 달게 받겠다.”
고 하였다.
본원의 검교(檢校)에 승진되었다가 감찰(監察)에 전임되었는데, 마침 입대(入對)했다가 상의 뜻에 거슬리어 파면되었다. 다시 기용되어 영남 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가 되었다가 들어가서 교리(校理)가 되었다. 상이 즉위한 처음에 경연(經筵)을 열고 문학(文學)하는 선비들을 특별히 선발했는데, 선발된 사람 십수인(十數人) 가운데서 공이 가장 뛰어났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나갔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학문을 진흥시켜 인재를 양성하고, 백성을 편케 하고 민중과 화합하는 것을 힘썼으므로, 정사의 성적이 제일(第一)이었다. 그리하여 상이 이르기를, “종직은 고을을 잘 다스려 명성이 있으니, 승천(陞遷)시키라.” 하고, 마침내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에 임명하였다. 이 해에 마침 중시(重試)가 있었는데, 모두 공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중시는 문사(文士)가 속히 진취하는 계제가 된다.”
고 하였으나, 끝내 응시하지 않으니, 물론(物論)이 고상하게 여겼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선산 부사(善山府使)가 되었다가, 모친이 작고하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喪禮)를 일체 주 문공(朱文公)의 예대로 준행하고, 너무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진 것이 예에 지나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성효(誠孝)에 감복하였다. 복(服)을 마치고는 금산(金山)에 서당(書堂)을 짓고 그 곁에는 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어놓고서 그 당(堂)의 편액(扁額)을 경렴(景濂)이라 써서 걸었으니, 대체로 무극옹(無極翁)을 사모하는 뜻에서였다. 그리고는 날마다 그 안에서 읊조리며 세상일에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부름을 받고는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일어나 부임하였다.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서는 말은 간략하면서도 뜻이 통창하였고, 강독(講讀)을 가장 잘했기 때문에 은총이 공에게 치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치올려 임명되었다. 이어 도승지(都承旨) 자리에 결원이 생기어 특명으로 공에게 도승지를 제수하자, 공이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경(卿)의 문장(文章)과 정사(政事)가 충분히 감당할 만하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이윽고 이조 참판(吏曹參判)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전임되어서는 금대(金帶) 하나를 특별히 하사하였으니, 특별한 대우가 이러하였다.
뒤에 호남(湖南)을 관찰(觀察)할 적에는 성색(聲色)을 동요하지 않고도 일로(一路)가 숙연해졌다. 다시 들어와서 한성 윤(漢城尹),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초탁되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하였다.
홍치(弘治) 기유년 가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지중추(知中樞)에 옮겨 제수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기 위하여 하루는 동래(東萊)의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은 그대로 밀양(密陽)의 전장(田庄)으로 가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상이 특별히 전직(前職)을 체직하지 말도록 허락하였다. 그러자 혹자가 녹봉을 받기를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세 번이나 사양하였지만, 윤허하지 않고 심지어 두 차례나 친히 비답(批答)을 지어 내리기까지 하였는데, 그 비답에는 “마음이 바르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고, 학문에 연원이 있다.[端慤無僞 學問淵源]”는 등의 말이 있었다. 그리고 공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듣고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쌀 70석을 보내주게 하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다.
임자년 8월 19일에 작고하니, 향년이 6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2일 동안 철조(掇朝)하였고,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의정하였다. 공의 고(考) 숙자(叔滋)는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인 성균 진사(成均進士) 관(琯)과 증조(曾祖)인 사재령(司宰令) 은유(恩宥)에게도 모두 봉작(封爵)이 추증되었다.
공은 울진 현령(蔚珍縣令) 조계문(曺繼門)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곤(緄)은 해평인(海平人) 홍문 수찬(弘文修撰) 김맹성(金孟性)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모두 요절하였으며, 큰 딸은 생원(生員) 유세미(柳世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생원 이핵(李翮)에게 시집갔다. 뒤에는 남평인(南平人) 첨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숭년(嵩年)이고, 딸은 직장(直長) 신용계(申用啓)에게 시집갔으나 후사가 없다.
공은 평소 집에 있을 적에는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처자(妻子)의 사이라 하더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 소싯적에는 사예공이 병들어 수척해지자 공이 이를 매우 걱정하여 유천부(籲天賦)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부인(大夫人)이 생존한 당시에는 공이 항상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고 외직을 요청하여 세 번이나 지방관으로 나가서 대부인을 봉양하였다. 공의 백씨(伯氏)가 악창[癰]을 앓을 적에는, 의원이 지렁이의 즙[蚯蚓汁]이 좋다고 말하자, 공이 그 지렁이의 즙을 먼저 맛보고 백씨에게 먹였는데, 과연 효험이 있었다. 뒤에 백씨가 서울에서 객사(客死)했을 적에는 공이 널[柩]을 받들고 고향에 반장(返葬)하였고, 백씨의 아이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어루만져 돌보고 가르쳐서 성립(成立)하게 하였으니, 그 타고난 효우(孝友)의 지극하기가 이러하였다.
그리고 관직에 거하여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간략함을 따르고 번거로움을 막았으며, 정(靜)을 주로 삼고 동(動)을 제재하였으므로, 있는 곳마다 형적을 드러내지 않고도 일이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평상시에는 사람을 접대하는 데 있어 온통 화기(和氣)뿐이었으나, 의리가 아닌 것이면 일개(一介)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오직 경사(經史)를 탐독하여 늘그막에 이르러서도 게으를 줄을 몰랐으므로, 얻은 것이 호박(浩博)하였다. 그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각각 그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마음에 만족하게 얻어 돌아갔는데, 한번 공의 품제(品題)를 거치면 문득 훌륭한 선비가 되어서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지금 호조 참판(戶曹參判)인 조공 위(曺公偉)는 공의 처남이고,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강공 백진(康公伯珍)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강공 중진(康公仲珍)은 공의 생질들이니, 어쩌면 공의 문에 명사들이 이렇게 모였단 말인가. 세상에서 이 때문에 더욱 기이하게 여긴다.
공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공이 작고한 뒤에는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이 더욱 귀중하게 여겨져서 문도(門徒)들이 본집(本集)과 《이준록(彝尊錄)》을 편집해 놓았는데, 상이 대궐로 들여오도록 명하여 조석 사이에 간행하기를 명할 것이다. 내가 평생에 공과 가장 서로 의분(義分)이 있는 사이라 하여, 조태허(曺太虛)가 나에게 글을 지어서 비석에 새기게 해주기를 요청하니, 내 글이 졸렬하다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산은 하도 높고 / 烏山崇崇                  낙수는 도도히 흘러서 / 洛水溶溶              빼어난 기운이 여기에 모였네 / 秀氣斯鍾
일월의 밝은 빛이 쌓이고 / 日月委明        규벽의 정기가 여기에 잠겨 / 奎壁淪精       문인이 이에 태어났도다 / 文人乃生
옛 서적을 널리 읽어 알았고 / 博洽丘墳    시문은 기이하고 고아하여 / 奇古詩文        조정에 올라서 명성을 발휘하였네 / 陞立揚芬
당에 올라 의심난 뜻 강의하니 / 登堂講疑  문하에 와서 기자를 물어라 / 過門問奇      후학들의 시귀가 되었도다/ 後學蓍龜
부모에게는 효도를 하고 / 父焉孝乎          형에게는 우애를 하니 / 兄焉友于             가정이 모두 화락하였네 / 家庭怡愉
백성을 인자함으로 다스리니 / 臨民以慈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사모하여 / 去後餘思
향리에 사당이 세워졌도다 / 鄕有遺祠       경악에서 담론하고 사려하며 / 論思經幄     주상과 직접 면대하여서는 / 面對日角
큰 은총을 혼자 받았네 / 獨膺寵渥           높은 반열 높은 작급을 / 崇班峻級              계단 따라 오르듯이 하여 / 如階而躡
인망이 진실로 화합했는데 / 人望允協      하늘이 왜 그리 속히 빼앗는고 / 天奪何速    백성이 실로 복이 없음이라 / 民實無祿
구중궁궐에서 걱정을 품는도다 / 九重含戚  공은 만류할 수가 없으나 / 公不可留         좋은 명성은 천추에 전할 게고 / 令名千秋
유고는 한우 충동에 이르리라 / 遺稿汗牛   공은 명성과 실상이 많은지라 / 公多名實    이것이 묻히게 둘 수 없어 / 其令泯沒
내가 이제 붓 잡아 기록하노라 / 我今載筆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지성균관사 홍귀달(洪貴達)은 찬한다.
통훈대부 창원대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 오여발(吳汝撥)은 비문을 쓴다.
통훈대부 행 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지제교 김세렴(金世濂)은 전(篆)을 쓴다.

이상의 서(序)를 갖춘 명(銘)은 홍 상공 귀달(洪相公貴達)이 찬한 것인데, 선생(先生)의 사업(事業)과 문장(文章)이 그 대개가 모두 그 가운데 기재되었으니, 어찌 후인의 문자(文字)로 군더더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본부(本府) 사람들이 선생의 덕업(德業)을 사모하여 옛 여리(閭里) 앞에 비문을 새겨 세웠었는데, 임진년의 병란(兵亂)에 보전되지 못했으므로,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향인(鄕人)들이 모두 중건(重建)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틈을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부백(府伯)인 이 사문 유달(李斯文惟達)이 부유(府儒)들이 일제히 간청함에 따라 구문(舊文)을 가져다 새겨서 옛 길에 세웠는데, 본부 사람들이 인하여 그 수말(首末)을 진술해서 명(銘) 밑에 아울러 기록하려고 하므로, 이것을 써서 주는 바이다.
아, 선생이 작고한 뒤에 불행하게도 혼조(昏朝)가 정사를 어지럽히고 권간(權奸)이 화(禍)를 선동함으로써 그 참혹함이 화가 천양(泉壤)에까지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선생의 도야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삼가 듣건대 당시에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명인 준사(名人俊士)가 십수(十數)에만 그치지 않았고, 한훤(寒暄), 일두(一蠹) 양현(兩賢)도 모두 선생이 권장 계발시킨 바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본부 사람들이 선생을 끝없이 사모하고 존상해 오다가, 난리를 겪은 뒤에 마침 어진 부사(府使)가 부임해옴을 만나서 그 숙원(宿願)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또 좋은 땅에 묘원(廟院)을 옮겨 세워서 스승으로 받들어 높이는 곳으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 대체로 또한 사문(斯文)의 현통한 운수를 만난 것이다. 그러니 끝내 본부에서 배출되는 인재가 또한 옛날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유(諸儒)보다 못하지 않을 것을 기필하겠다.
숭정(崇禎) 7년(1634, 인조12) 9월 일에 자헌대부 공조 판서 옥산 후인(玉山後人) 장현광(張顯光)은 삼가 기록한다.


[주D-001]무극옹(無極翁) :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킨다.
[주D-002]규벽 : 문장(文章)을 주관한다는 규성(奎星)과 벽성(壁星)을 합칭한 말이다.
[주D-003]후학들의 시귀가 되었도다 : 한(漢) 나라 때 양웅(揚雄)이 고문(古文)의 기이한 글자[奇字]를 많이 알았으므로, 호사자(好事者)들이 술을 가지고 그를 찾아가서 기이한 글자를 물었던 데서 온 말로, 즉 스승이 되어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