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국조보감의 의령기록

국조보감 제76권 2년(임술, 1802) 의령현에 화재발생 (펌)

아베베1 2009. 11. 19. 21:47

국조보감 제76권
 순조조 1
2년(임술, 1802)


○ 1월. 장용영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용영을 장차 혁파하려 한다.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하고, 이어 군교(軍校)나 이례(吏隷)로서 장용영의 재화를 축낸 자가 있으면 모두 탕감해주라고 명하였다. 대왕대비가 장용영의 재화를 내탕고에 붙이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용영을 이미 혁파한 마당에 창고의 저축을 어찌 반드시 내부(內府)에 유치해 두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이에 모든 저축을 호조로 귀속시킬 것을 명하였다.
2월. 영남 관찰사가 의령현(宜寧縣)의 창고와 민가가 불탔다고 치계하니, 상이 비변사 낭관을 보내어 위유하고, 구휼할 방도를 마련하여 농사철을 만난 백성들이 머물러 살 수 있게 하라고 감사에게 신칙하였다. 상이, 타고 남은 곡식을 민호(民戶)에 방출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탕감하도록 명하면서 이르기를,
"가련하구나, 백성들의 실정이여."
하였다.
○ 4월. 소대(召對)를 정지한 때에는 옛 규례에 따라 고사(故事)를 조목별로 써서 올리도록 명하고, 강연에서 물러간 후에 미진한 뜻을 거듭 아뢸 것이 있는 경우에도 아울러 적어 올리게 하였다.
○ 고 상신 홍명하(洪命夏)를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配享)하도록 명하였다.
○ 임인년(경종 2, 1722)에 화를 당해 죽은 김용택(金龍澤)ㆍ이희지(李喜之)ㆍ이천기(李天紀)ㆍ심상길(沈尙吉)ㆍ정인중(鄭麟重)에게 특별히 증직을 내리고 그 후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으며,궁인(宮人) 묵세(黙世)의 옛 집을 돌려주고 정문(旌門)을 옮겨 세우도록 하였다.
○ 5월. 정종대왕을 장차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려 하였는데, 대신이 옛 전례에 따라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였다. 상도 누누이 우러러 청하였으나, 왕대비는 선조께서 존호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음식을 물리치고 울기까지 하였다. 대왕대비도 받지 않으려 하면서 언문 교지를 내리고 연석에서 신하들을 타일렀는데, 그 말뜻이 간절하였다. 대신이, 전례가 비록 중하지만 뜻을 따르는 것이 더 큰 일이라고 하여,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만을 올렸다.
○ 6월. 관상감 및 여러 도의 감사와 외방의 사관에게 신칙하여, 재이(災異)에 속하는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말고 그 즉시 보고하게 하였다.
○ 8월. 각신(閣臣)과 승지와 사관이 매년 사맹삭(四孟朔)에 봉모당(奉謨堂)을 봉심할 것을 명하였다.
○ 태묘에 부묘하였다. 예가 이루어지고 나서 하교하기를,
"하례 의식을 이미 거행하였으니, 계술하는 도리로 보아 의당 지난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던 거룩한 덕을 몸 받아야 하겠다."
하고, 이어 팔도의 묵은 환자곡 및 공인(貢人)의 묵은 유재(遺在), 시민(市民)의 요역(徭役), 푸줏간의 속전(贖錢)을 모두 무술년의 예대로 견감하라고 명하였다.
○ 9월. 고 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四賢祠)에 배향하라고 명하였다.
○ 10월. 뇌변이 있었다. 3일 동안 반찬수를 줄이고, 대신(大臣)과 언책(言責)의 신하로 하여금 수성(修省)의 요지를 남김없이 진달하게 하였다.
○ 김씨(金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인정전에 나아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공인의 묵은 유재 및 여러 도의 증렬미(拯劣米)를 기묘년의 예대로 탕감하고 시민의 요역과 푸줏간의 속전을 경신년의 예대로 감해주도록 명하였다.
○ 승지를 보내어 고 상신 김창집(金昌集)의 사판(祠版)에 치제하였는데, 자교(慈敎)를 받든 것이었다.
○ 11월. 인정전에서 하례(賀禮)를 행하였는데, 진후(疹候)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국조보감 제84권
 헌종조 2
6년(경자, 1840)

○ 1월.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주상의 춘추가 14세가 되었으니 종사(宗社)의 경사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 그래서 묻겠는데, 산림(山林)의 선비들 중에 누구를 먼저 불러야 하겠는가?"
하니 조인영(趙寅永)이 아뢰기를,
"네 유현(儒賢)을 모두 초빙해야 합니다. 만일 정성과 예(禮)를 다한다면 결코 오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열성조 이래로 연석에 산림이 참석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하유하여 좨주 송계간(宋啓榦) 및 경연관 김인근(金仁根)ㆍ성근묵(成近黙)ㆍ송내희(宋來熙)를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았다.
○ 조인영이, 영남의 곡식을 양서(兩西)에 운반하여 진자(賑資)에 보탤 것을 청하였다. 하교하기를,
"관서의 소문이 놀랍고 안타까워 잠들기 전에는 잠시라도 잊지 못했는데, 지금 주청하는 바를 들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하였다.
○ 2월. 조인영이 아뢰기를,
"전부터 포세(浦稅)는 늘 쉽게 소요가 일고 궁차(宮差)들 중에 더러는 여러 모로 구실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 품달해서 단속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설사 금년에 철저히 간민(奸民)을 적발해 낸다 하더라도 내년에는 어김없이 또 생길 것입니다. 이익이 있는 곳에 그 근원을 갑자기 금절(禁絶)할 수는 없는 법이니, 차라리 세액(稅額)을 헤아려 정해서 당해 고을로 하여금 전적으로 수납을 맡아 보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궁세(宮稅)의 수납은 아무 탈없이 이루어지면서 포세의 폐단은 절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이에 따랐다.
○ 이전에 춘천 부사(春川府使) 이시원(李是遠)이 삼밭의 세금을 정하는 문제로 도신의 논핵을 받아 연풍현(延豐縣)에 도배되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그 본심을 헤아려본다면 문제의 발단은 사실 폐단을 구제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노모는 팔순이 다 된 나이로 오랜 기간 노환을 앓아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법적으로는 응당 속죄받을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만일 불쌍히 여겨 굽어살펴 주는 국은을 입는다면, 이는 실로 효도를 표방하는 정치 이념에 합당한 처사가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 본심이 폐단을 구제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니 용서할 만하다."
하고, 사면을 명하였다.
○ 상이 진강을 행하였다. 각신 박기수(朴綺壽)가 강독하는 글의 뜻과 관련하여 아뢰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절개를 지켜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를 구하려거든 반드시 임금이 싫은 안색을 하더라도 바른 말로 간하는 자를 취하라.' 하였습니다. 평소에 범간(犯諫)을 하지 못한다면, 환난을 당한 때에 어찌 그에게 절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만일 태평 시절에 이와 같은 사람을 취하여 쓸 수 있다면, 환난 또한 일어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인재를 거두어 쓰시어 환난이 있기 전에 잘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 3월. 앞서 함경 감사 박기수(朴岐壽)가 장계하여 장진(長津)의 백성으로 강계(江界)의 칠평(七坪)에 이접(移接)한 자들이 장진에서 부역에 응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묘당에 내려 수의하게 하고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평안 감사에게 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평안 감사 김난순(金蘭淳)이 장계하기를,
"옮겨온 자들은 3백여 호로 수년간 이곳에서 즐겨 해오고 있는 생업이 있으며, 이곳에 집을 짓고 호적을 올려 여기서 세금을 바치며 환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이들의 부역을 옮겨간다면 빠지게 된 장정들을 추가로 배정해 채울 길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땅을 나누는 일은 있어도 백성을 나누는 일은 없었습니다. 땅은 강계에 속하는데 백성은 장진에 속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치에 벗어나는 일입니다."
하니, 평안 감사의 말을 따랐다.
○ 전조에 명하여 도천(道薦) 중에서 경행(經行)이 더욱 뛰어난 자를 선발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신이 청하기를,
"도에서 천거하는 사람을 더욱 정밀토록 힘써 천거를 의무화하고 있는 본래의 법에 별도로 천거하는 의미도 부여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각 도에서 천거한 조희승(曹熙承) 등 15인이 모두 재행(才行)으로 소문이 난 자들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아뢰기를,
"각 도에서 천거한 자들의 전체 숫자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조로 하여금 널리 공의(公議)를 채택하여 그 중에서 경행(經行)이 더욱 뛰어난 자들을 다시 뽑아서 아뢰게 하고, 그 나머지는 도천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전조가 하교에 응하여 이광로(李光老)ㆍ송달수(宋達洙)ㆍ성치묵(成致黙)ㆍ최림(崔琳)ㆍ이병곤(李秉坤)ㆍ엄익현(嚴翼鉉)을 선발하였다.
○ 이때 해를 거듭하여 흉년이 들어 거지가 길에 가득하였다. 이에 경조(京兆)의 오부(五部)로 하여금 거지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조사하게 하고, 다시 묘당에 지시하여 이들의 위급함을 구제하게 하고 이르기를,
"근간에 듣자하니 서울에 거지가 매우 많아 그 광경이 몹시 참담하다고 하니, 이를 생각할 때마다 비할 데 없이 불쌍하고 비통한 마음이 든다."
하였다.
○ 4월. 예조가 아뢰기를,
"영변(寧邊)의 고 판윤 이응거(李膺擧)는 그 참된 행실과 바른 지조가 변방의 모범이 되어 양 성조(兩聖朝)의 은유(恩諭)를 입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를 표장(表章)하는 도리에 있어 의당 숭장(崇獎)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증시(贈諡)할 것을 명하였다.
○ 이때 가뭄이 들었다. 상이 문득 깊은 밤에 곤의(袞衣)를 입고 후원(後苑)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친히 기도를 올렸다.
○ 5월. 조인영(趙寅永)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고락은 전적으로 수령의 선정 여부에 달려 있는데, 수령을 다스리는 요체는 그들에 대한 출척(黜陟)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외도(外道)에 대해서는 이미 신칙한 바 있으나, 서울 각 관사(官司)의 포폄(褒貶)이 대개가 상(上)으로 고과된 것은 법제를 마련한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더구나 후일 수령이 될 자들이 바로 오늘의 낭료(郞僚)들이니 어찌 먼저 서울의 각 관사에서부터 그 평가를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상을 밝히는 정사의 원칙상 의당 거듭 엄중히 하는 조치가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사의 포폄에 본래부터 중(中)과 하(下)가 없는데, 이것이 어찌 모두가 잘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대신의 말이 과연 옳다."
하였다.
○ 조인영이 또 아뢰기를,
"나라의 제도에 모든 쓰고 남은 전곡(錢穀)은 모두 별도로 저축해서 이를 '봉부동(封不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오면서 쓰고 남은 별도의 저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종전의 봉부동까지도 모조리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연유를 거슬러서 따져보면 전적으로 세입은 매년 줄어들고 용도는 날로 증가한 데 있습니다. 만일 그 불요불급한 낭비를 줄이고 출입을 절약한다면, 매년 약간씩 남겨서 봉장(封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매해의 과제로 삼아서 이름을 '별치(別置)'라 하고, 군국(軍國)에 관한 대사가 아니면 절대로 못쓰게 하되, 만일 출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면, 해사(該司)가 먼저 주사(籌司)에 보고하여 품달해서 시행하게 한다면, 후일에 반드시 그 효험을 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비록 재물이 넉넉한 때라도 용도를 절약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물며 지금같이 나라의 재정이 궁핍한 때이겠는가? 만일 이런 저축을 할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
하였다.
○ 이때 굶어 죽은 거지들이 많았다. 대신(大臣)이 인책하여 사직(辭職)하며 아뢰기를,
"한(漢) 나라 때의 대신들 중에는 재해로 인하여 파직된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재해로 말하자면 어찌 지금과 같이 저렇게 굶어 죽는 경우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옛 사람은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삶의 안정을 얻지 못하면 마치 저자거리에서 매를 맞은 것처럼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그래도 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지금 나라의 상하가 믿는 바는 오로지 대신에게 있다. 그 거지들의 죽음으로 말한다면 어찌 하필 대신에게만 그 책임이 있겠는가. 주상이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여 신하들의 말을 들어서 시행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경은 더욱 진력할 것을 생각하여 지치(至治)를 이루도록 하라.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 조인영이 아뢰기를,
"환곡의 포흠(逋欠)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 대해서는 거기에 따른 정률(定律)이 있습니다. 가령 10분(分)의 포흠에 대해 9분을 받아들이고 1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법부(法府)가 그 형량(刑量)을 논할 때는, 겨우 1분만 받아들이고 9분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와 같은 율로 판결합니다. 왜냐하면 엄연히 법전에 실려 있어서 융통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흠이 있는 고을의 수령을 모두 싫어하여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포(還逋)를 못 받은 데 대한 율을, 수량(收糧)의 기한을 어겼을 때에 등급을 나누어서 감죄(勘罪)하는 예에 따라 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죄의 경중이 있으면 그에 따라 율도 분별을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 각 도에 지시하여 진전(陳田)을 개간하게 했다. 이때 기름진 땅들이 많이 묵었으나, 사람들이 이를 개간할 생각을 못해서, 백성들의 생산이 날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대신이, 각 도에 지시를 내려 널리 권해서 3년 동안 세금 2분을 면제하고 경작해 먹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런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 7월. 대사헌 김홍근(金弘根)이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고, 이어서 성학(聖學)을 진면(陳勉)하기를,
"등대(登對)한 지 조금만 오래되면 벌써 그만 물러갔으면 하는 뜻을 보이고, 글의 내용이 조금만 길면 현저히 싫증을 내는 기색을 보입니다. 스스로 자만하여 사람을 천리 밖으로 쫓아버린다는 말이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이 때문에, 아직 서툴고 익숙하지 못한 신진(新進)이나, 두려워서 우선 겁부터 먹는 친근하지 못한 자들이, 자연 소신을 모두 펼쳐서 자신이 터득한 견해를 다 말하지 못하고, 위축되어 머뭇거리면서 모호하고 불분명한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면 전하께서는 어김없이 이들을 거칠고 천박해서 들을 만한 말이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깔보고 비웃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거칠고 천박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혹시라도 전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불러서 부드러운 얼굴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하신다면, 그들은 오히려 충분히 선현(先賢)이 훈고(訓詁)한 취지를 설명하고 선현이 토론한 내용을 해설하여, 성심(聖心)을 계옥(啓沃)하고 성총(聖聰)을 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완전히 현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역시 현자(賢者)의 무리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려 가납하고 치사를 윤허하지 않았다.
○ 9월. 남문 밖의 염상(鹽商)이 의궁(義宮)에 의탁하여 주인(主人)의 명목을 새로 만들어서 체지(帖紙)를 발급하여 구문(口文)을 모조리 거두어서 그 이익을 독점하였다. 향민(鄕民)이 그 원통함을 호소하므로, 형조에 명하여 궁속(宮屬)과 체지를 받은 자를 형배(刑配)하게 하고 대신에게 이르기를,
"이는 내가 평소에 가장 가증스러워하던 바이다. 염상(鹽商)과 결탁하여 이익을 다투는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좌경(坐更)에 대한 구식(舊式)을 다시 분명히 하여 실시하였다.
○ 조인영이 아뢰기를,
"고명(誥命)의 체례(體例)는 본래 간결하고 엄밀함을 위주로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오로지 번문 욕례만을 일삼아, 지금 대찬(大撰)하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전례를 갖추어 이를 모방하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받는 이가 이를 부족하게 여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글의 체재가 너절함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어찌 고명이 간결하고 엄밀해야 하는 본래의 뜻이겠습니까. 만일 이러한 관례를 고치게 된다면, 그 순박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도리에 있어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대찬하는 고명을 10구(句)를 넘지 않게 하여 이를 정식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형조 판서 권돈인(權敦仁)이 아뢰기를,
"의령현(宜寧縣)의 여인이 억울함이 있다 하여 남산에 불을 놓았으니 죄가 사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사정을 알아보니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 것이므로 법전에서 말하는 방화자(放火者)와는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사체를 모르는 시골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할 경우 금산(禁山)에 불을 지르는 예가 흔히 있음을 생각할 때, 전적으로 방화율(放火律)로 감단(勘斷)하게 되면 법 적용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한탄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대신에게 물으니, 조인영이 아뢰기를,
"이것은 시골 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이 법률을 몰라서 생긴 일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여인인 경우이겠습니까? 곧장 형조에서 형징(刑懲)한 뒤 효유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에 따랐다. 이와 관련하여 권돈인이 율문(律文)을 개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신이 율문은 가벼이 고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범행할 염려가 있다 하여 중지되었다.
○ 상이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 이정리(李正履)가 아뢰기를,
"여러 해 흉년이 들다가 이제 다행이 풍년을 만나게 되어 백성들이 장차 태평세월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향리의 민정을 들어보니 백성들은 풍년을 당하여 그 고통이 도리어 흉년보다 심하다고들 합니다. 여러 해 동안 밀린 환곡과 미납된 신포(身布), 그리고 유망(流亡)한 이웃의 세역(稅役)까지 한꺼번에 몰아쳐서 성화같이 독촉하니, 한 해 동안 지은 농사를 모조리 관에 바치고 채 한 달 먹을 양식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 흉년에 지친 농민들이 장차 무슨 방법으로 그 생명을 보존하여 태평세월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관장(官長)이라고 하는 자는, 그저 기한에 대도록 독촉만 하여, 혹시라도 상공(上供)이 뒤처질까 두려워하는 것이 그 직분입니다. 조금이라도 이를 감면하거나 연기하고 늦추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백성들의 부모이신 임금에게 달린 일이니, 백성들의 형편을 깊이 살펴서 법에 정한 바 이외에 항상 이를 너그럽게 하고 늦추어 주어서, 감면의 혜택을 베풀기도 하고 납기를 연기하는 조처도 내리고 한다면, 백성들이 생명을 보전하여 풍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1분(分)을 너그럽게 하면 백성들이 그 1분의 혜택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전하께서 의당 깊이 유념하셔야 할 말로서 신이 삼가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 10월. 천둥이 있었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이것은 재변이다. 하늘이 경고하는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인바, 전적으로 이 미망인이 정령(政令)을 진려(振勵)하지 못하는 데 연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부터 3일 간 감선하여 조금이라도 화를 두려워하는 성의를 표하겠다."
하였으며, 상은 정전을 피하고 3일 간 감선하고 이르기를,
"수성(修省)하는 도리에 있어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조처가 있어야겠다."
하였다. 대신ㆍ정원ㆍ삼사가 글을 올려 진면(陳勉)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 상이 소대를 행하였다.《사략(史略)》의 노중련(魯仲蓮)의 이야기를 강하였는데, 이정리(李正履)가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노중련을 능가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인가?"
하니 이정리가 대답하기를,
"삼학사(三學士)와 선정신(先正臣) 김상헌(金尙憲)은 심양(瀋陽)에서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시종 오랑캐에게 굽히지 않았으며, 이확(李廓)과 나덕헌(羅德憲)은 청인(淸人)이 개원(改元)하는 날에 절개를 세웠는데, 중국 사람들이《조선사신불굴도(朝鮮史臣不屈圖)》를 그림으로 새겨서 이를 천하에 퍼뜨렸습니다. 노중련은 진(秦) 나라를 황제로 받들려고 할 당시에 한 마디 말로 신원연(新垣衍)과 변론하여 힐책한 것뿐이지만, 지금 말한 몇몇 신하는 도거(刀鋸)와 정확(鼎鑊)을 앞에 하고 시호(豺虎)와 낭웅(狼熊)의 무리 속에서도 능히 이와 같은 대절(大節)을 세웠으니, 그만하면 노중련을 능가한다고 말할 만합니다."
하였다.
○ 전결(田結)을 농간하는 자는 원래의 율(律) 이외에 금고(禁錮)를 추가하여 실시할 것을 명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았다.
○ 11월. 강릉부(江陵府)에 명하여 영서(嶺西)의 허결(虛結)에 대해 3년 간 세금을 정지하였다. 부사 이원조(李源祚)의 소청(疏請)에 따른 것이다.
○ 상이 소대를 행하였다.《강목(綱目)》을 읽다가 제(齊) 나라 위왕(威王)이 아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인 사건에 이르러, 옥당 이정리(李正履)가 아뢰기를,
"신은 제 나라의 국운이 오래가지 못한 것은 실로 아대부를 삶아 죽인 일에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정리가 아뢰기를,
"옛날의 성왕(聖王)은 오형(五刑)의 제도를 만들어서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차마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를 시행하여 법외(法外)의 형벌을 만들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나라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대부가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었다면 법을 적용하여 사형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떻게 법외(法外)의 형벌을 써서 솥에다 삶는단 말입니까?
사람이 짐승의 고기를 먹음에 있어서도 차마 그 비명소리를 듣고는 그 고기를 먹을 수가 없으므로, 푸줏간을 멀리하여 그 비명소리를 듣지 않음으로써 그 차마 못하는 마음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仁)의 도리입니다. 이제 아대부를 솥에다 삶았으니 비록 그 고기를 먹지 않았더라도 사람을 소나 양처럼 본 것입니다. 사람을 짐승처럼 본다면 인도(人道)는 멸망하고 천리(天理)는 손상을 입습니다. 어찌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탐악(貪惡)을 징치(懲治)함에는 잔혹한 형벌이 아니더라도 적절한 법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어떤 것인가?"
하니 이정리가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원래 인후(仁厚)의 도리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교화를 우선으로 하고 형벌은 뒤로 합니다. 세상에 혹시 탐관오리가 있어서 청의(淸議)의 용납을 받지 못하게 되면 대헌(臺憲)의 관원이 공의(公議)를 자세히 살펴서 먹으로 그 사람이 집에 가서 그 문에다 칠을 합니다. 그러면 그 집안은 마침내 벼슬길이 막혀 문을 걸어 잠그고 감히 바깥에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 법이 어찌 형벌보다 엄하지 않겠습니까. 이 칠문(漆門)하는 법이 시행되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사헌부의 하속(下屬)을 아직도 '묵척(墨尺)'이란 이름으로 부릅니다. 묵척은 먹병을 들고 대관(臺官)을 따라다니면서 먹칠을 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의 법을 세우고 풍속을 교화하는 아름다움은 삼대(三代)와 더불어 함께 일컬을 만한 것으로서 한당(漢唐) 이후와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저포전(苧布廛)에 불이 나서 진사전(眞絲廛)ㆍ망문(望門)ㆍ상전(床廛) 및 입전(立廛)이 연달아 타버렸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이들을 안도(安堵)시킬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고 공화(公貨)를 빌려 주어 10년 동안 분할 상환하게 했으며 요역(徭役)과 세공(歲貢)을 탕감해 주고 이르기를,
"저자의 백성들은 서울 백성들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진휼함에 있어서 더욱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강릉(江陵)ㆍ삼척(三陟)ㆍ양양(襄陽)ㆍ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정선(旌善)ㆍ울진(蔚珍) 등의 고을에 홍수가 나서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가 3백 7호였다. 강원 감사 이광정(李光正)이 장계를 올려 그 실상을 보고하니, 하교하기를,
"때 아닌 비로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가 이처럼 많으니 참으로 너무나 놀랍고 안타깝다. 원래의 구제 조치 외에 별도로 도와주어 즉시 집을 지어 주거를 정할 수 있도록 해서,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살 곳을 잃고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내년 신축년은 바로 대왕대비가 왕비에 책봉된 지 40년이 되는 해이므로, 옥책(玉冊)을 올리고 헌수하는 잔치를 열고자 했으나, 대왕대비가 겸양의 뜻을 굽히지 않으며 끝내 따르지 않았다. 대신과 예조 당상이 번갈아 청하였지만 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자성(慈聖)께서 겸양하시는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더없이 큰 경사이니 포고하는 의식만은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대왕대비가 시임 및 원임 대신과 국구(國舅)를 불러서 이르기를,
"오늘 수렴청정을 그만두기로 한 조치는 당초 마지못해 시작했던 날에 이미 마음에 결정을 보았던 것으로, 오늘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하루가 마치 1년과도 같았소. 이제 주상은 춘추가 한창이고 성학(聖學)이 숙성하여 번거로운 만기(萬機)에 응하여 나의 당초의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되었소."
하고, 언교(諺敎)를 내리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학문에 힘쓰고 어진이를 친히 하여 우리 선왕(先王)의 가법(家法)을 지켜가도록 주상은 힘쓰시오. 신하들은 서로 공경하고 도와서 임금이 과실이 없도록 인도하여 우리의 영원한 왕업(王業)을 보필해 줄 것을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마음속 깊이 바라며 오늘부터 수렴청정을 그만두겠소."
하였다. 상이 발 앞에서 사양하기를,
"신이 아직 어린데 어떻게 모든 국사를 친히 총괄하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데, 더구나 이와 같은 대경대법(大經大法)에 관한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내가 주상에게 바라는 것이 어찌 별다른 것이 있겠소? 다만 요임금이 되고 순임금이 되어 주는 것일 뿐이오. 주상이 나를 받들어 따르는 일 또한 별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요임금이 되고 순임금이 되어 주는 것일 뿐이오.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나는 장차 여한이 없을 것이니, 이로써 권면하는 바이오."
하고 이어서 대신에게 이르기를,
"오늘부터 수렴청정을 그만둔 뒤로는 다시 경들을 대할 수가 없을 것이니, 성궁(聖躬)을 보도하는 모든 도리에 있어 경들은 반드시 더욱더 삼가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주D-001]좌경(座更) : 궁중의 보루각(報漏閣)에서 북과 징을 쳐서 시각을 알리던 일. 하룻밤을 5경(更)으로 나누고 초경과 5경은 3점(點), 2·3·4경은 5점으로 나누어, 경에는 북을 점에는 징을 그 숫자만큼 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