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점필제 김종직의두류기행록

자굴산은 도굴산이라는 두류 기행록(頭流記行錄) 기록

아베베1 2009. 11. 19. 22:00

속동문선 제21권
 녹(錄)
두류 기행록(頭流記行錄)


김종직(金宗直)

아무는 영남(嶺南)에 생장하였으니 두류산(頭流山)은 바로 고장 산이다. 그런데도 남ㆍ북으로 벼슬살이하여 티끌 속에 골몰하다보니, 나이는 벌써 40이건만 아직까지 한 번도 구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신묘년 봄에 함양(咸陽) 고을 원이 되니 두류산은 그 경내에 있어 높다랗고 새파래서 고개만 쳐들면 바로 보이는데, 흉년이 들고 또 백성이 일로 사무가 바빠서 자못 두 돌이 되었으나 감히 한 번 구경할 생각을 못했다.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더불어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일찍이 섭섭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금년 여름에 조태허(趙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와서 나와 함께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이 되자 장차 부모 슬하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이 산을 구경하자고 청하므로, 나 역시 허약한 증세는 날로 더하고 다리 힘은 갈수록 쇠하매, 금년에 구경을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우며, 게다가 때는 바야흐로 중추절이라 습한 기운은 이미 걷혔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구경하고, 닭이 울면 해가 뜨는 것을 구경하고, 밝은 아침에 또 사방을 두루 볼 수 있을 것이니, 일거양득(一擧兩得)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떠나기로 작정하고 이에 극기를 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적혀있는 산행(山行)에 대한 기구를 상고하여 대강 준비를 갖추었다.
14일 무인에 덕봉사(德峯寺) 중 해공(解空)이 와서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한백원(韓百源)이 따라 나섰다. 드디어 엄천(嚴川)을 지나서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미행(尾行)하여 왔기로 역로(歷路)를 물은 즉, 자못 소상하여 역시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지장사(地藏寺)에 당도하니, 길이 가닥이 났으므로 말에 내려 짚신을 신고 죽장을 짚고 올라가니, 임학(林壑)이 맑고 깊숙하여 벌써 승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마장쯤 가니 바위가 있어 환희대(歡喜臺)라 칭하는데, 태허(太虛)와 백원(百源)은 그 마루턱에 오르고,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金臺)ㆍ홍연암(紅蓮庵)ㆍ백련암(白蓮庵) 등 여러 절이 굽어보였다. 먼저 선열암(先涅庵)을 찾으니, 암자가 높은 벼랑을 지고 있으며 두 샘이 벼랑 밑에 있어 극히 청렬(淸冽)하고 담장 밖에 물이 부스러진 바위골로부터 물방울이 되어 반석 위로 떨어져, 조금 오목한 곳에는 깨끗한 못처럼 멈춰 있고,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나서 다 몇 치쯤 된다. 곁으로 등로(磴路)가 있어 등넝쿨 한 가닥을 나무에 매고, 더위잡아 오르내리며 묘정암(妙貞庵)과 지장암(地藏庵)에 내왕한다. 법종이 이르기를, “한 비구승이 결하(結夏)하여 우란분(盂蘭盆)을 만들고 파한 후에 구름처럼 노닐어 방향을 알 수 없다.” 하는데 채과(菜苽)와 나복(蘿葍)이 돌 위에 심어져 있고 조그마한 절구통이 두어 되 곡식을 찔 만한 것이 있을 뿐이다. 신열암(新涅庵)을 찾으니, 중은 없고 역시 치솟은 벼랑을 지고 있으며, 암자 동북에 바위가 있는데, 이들이 독녀암(獨女巖)이며 다섯 가닥으로 나누어 서고 높이는 다 천여 자가 된다. 법종이 이르기를, “전설에, 한 부인이 바위 사이에 돌을 포개서 집을 만들고 홀로 그 가운데서 살며 도를 닦아 공중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름이 되었다.” 한다.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있으며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어 올라가려면 사다리 놓고 그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 등과 배가 모두 뭉개진 연후에야 그 정상(頂上)에 도달한다. 그러나 목숨을 내거는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는데, 따라간 아전, 옥곤(玉崑)ㆍ용산(聳山)은 벌써 올라가서 발을 구르고 손을 휘두른다. 나는 일찍이 산기슭에 왕래할 때 바라보니, 이 바위가 뭇 봉우리와 더불어 함께 솟아서 하늘을 고일 듯하였는데, 지금 몸이 이곳에 와 앉았으니 모공(毛骨)이 송연하여 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점점 서쪽으로 돌아 나가서 고열암(古涅庵)에 당도하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의론대(議論臺)가 그 서쪽 멧뿌리에 있는데, 극기(克己) 등은 뒤에 처지고, 나만 홀로 세 반석에 막대를 짚고서니 향로봉(香爐峯)ㆍ미타봉(彌陀峯)이 다 다리 밑에 있어 보인다. 법공이 이르기를, “단애 아래 석굴(石窟)이 있어, 노숙(老宿)ㆍ우타(優陁)가 살았는데 일찍이 세 열승(涅僧)과 더불어 이 돌에 앉아서 대소승(大小乘)을 논하다가 문득 도를 깨쳤기로 따라서 의론대라는 이름이 되었다.” 한다. 조금 뒤에 요주(寮主) 중 하랍(荷衲)이 와서 합장하며, “듣자니 원님이 구경을 왔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 법공은 그 중에게 눈짓을 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중은 낯이 붉어지므로 나는 장자(莊子)의 말을 들어 위로하여 이르기를, “불을 쪼이고자 하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 쉬고자 하는 자는 자리를 다툰다는데, 지금 요주(寮主)가 한 야옹(野翁)을 만난 것이니, 그가 원님되는 줄을 어찌 알랴.” 하니 법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날에 나는 처음으로 험한 걸음을 시험하여, 거의 20리를 걸었기로 몹시 노곤하여 실컷 자고 밤중에 깨서 보니, 달빛이 여러 봉우리를 삼키락 뱉드락 하고, 구름 기운이 솟아오르므로 나는 묵념을 했다.
기묘일 새벽에는 더욱 음침하였다. 요주(寮主)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이 산에서 오래 살면서 구름의 형상으로 점을 쳐 보았는데,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하므로, 나는 기뻐하여 짐꾼을 갈라서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즉시로 떠나가니, 푸른 등덩굴과 깊은 대숲 속에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시내 길에 넘어져 있어, 그대로 약작(略彴 다리의 다른 말)이 되고 그 중 절반이나 썩은 것도 가지가 오히려 땅을 막고 있어 말을 탄 것 같았다. 머리를 숙이고 그 아래로 나와서 한 묏부리를 지나니, 법공(法空)이 이르기를, “여기는 아홉 고개의 첫째 고개라.” 한다. 연달아 서너너덧 고개를 지나서야 하나의 동부(洞府)가 보이는데, 주위가 넓고 깊숙하며 수목이 햇볕을 가리고 다래덩굴이 여기저기 얽히고, 시냇물이 돌에 부딪쳐 구비치는 소리가 들리며 그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과히 험준하지 않고, 그 서쪽에는 지세가 점점 나직한데 20리를 걸어 나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약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이끌고 들어와서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하여, 서속ㆍ지장ㆍ삼[麻]ㆍ콩 등속을 심으면 저 무릉도원(武陵桃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겠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克己)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볼꺼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갉아 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서 산등성을 따라 걸어가니, 지나가는 구름이 나직이 삿갓을 스쳐가지 않고, 풀과 나무는 비가 오지 안 했는데도 젖어 있어 비로소 하늘과 거리가 멀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어 마장을 못가서 능선을 타고 남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연기와 안개가 자욱하여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청이당(淸伊堂)에 당도하니 판자로써 당을 만들었다. 네 사람이 각각 당 앞에 있는 계석(溪石) 위에 앉아 조금 쉬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가기까지는 길이 극히 위급하게 매달려,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만 보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인다.”는 것으로 나무뿌리를 더위잡아야 비로소 능히 오르내릴 수가 있다. 해가 벌써 오정이 지났는데, 비로소 재마루에 오르니 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이 가장 높은데 여기 오니 다시 천왕봉이 쳐다보인다. 영랑(永郞)이란 이는 신라 화랑의 두령인데, 삼천 문도를 거느리고 산수가에 노닐며 일찍이 이 봉에 올랐기로 이름이 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벼랑이 만 길이나 되니, 소년이란 것은 혹시 영랑의 문도인가. 나는 석각(石角)을 안고 그 밑을 내려다보니 꼭 떨어질 것만 같아서 종자(從者)를 경계하여 그 곁에 가까이 말게 하였다. 이때에 구름과 안개가 흩어지고 해가 아래로 드리우니 산의 동쪽과 서쪽에는 계곡이 광활한데, 바라보니 잡목(雜木)은 없고 모두 삼(杉)ㆍ회(檜)ㆍ송(松)ㆍ남(枏)의 종류로 말라 죽어 뼈만 섰는 것이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간간이 단풍이 끼어서 정히 그림과 같으며, 그 산 능선에 있는 것은 바람과 안개에 지쳐서, 가지가 모두 왼편으로 쓰러지고 굽어 앙상하여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해송(海松)이 더욱 많으므로 지방민이 매년 가을이면 따서 공물(貢物)의 액수에 충당한다고 하는데, 금년에는 한 나무도 열매를 맺는 것이 없으니, 억지로 그 액수를 채우게 한다면 우리 백성은 어찌하랴. 수령이 마침 보았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서대초(書帶草)와 유사한 풀이 있어 부드럽고 미끄러워 깔고 앉았다 누웠다 할만하며 곳곳이 다 그러하다. 청이당(淸伊堂) 이하에는 오미자(五味子)가 많아서 밀림(密林)을 이루었는데, 여기 오니 하나도 없고 다만 독활(獨活)과 당귀(當歸)만이 보일 뿐이다. 해유령(蠏踰嶺)을 지나니 곁에 배바위[船巖]가 있다. 법종이 이르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범람할 적에, 배를 이 바위에 매고 방해(螃蠏 게의 일종)가 지나갔기 때문에 이름이 되었다.”고 하니,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네 말을 믿는다면 그때의 인류는 다 하늘을 더위잡고 살았을 것이 아니냐.” 하였다. 또 일행을 모아가지고 남으로 중봉(中峯)에 오르니 산 중에서 무릇 우뚝이 솟아 봉우리가 된 것은 다 돌인데 유독 이 봉우리는 흙으로 되고 또 단정하고 중후하여 말굽을 돌이킬 만하기로 조금 걷고 말을 쉬게 하는데, 바위에 샘이 있어 맑고 시원하여 가히 마실 만하다. 해가 가물면 사람으로 하여금 이 바위에 올라 발을 구르며 한 바퀴를 돌게 하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 나는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보내어 시험해 보니, 자못 증험이 된다. 오후에 천왕봉(天王峯)을 오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산천이 다 어둡고, 중봉(中峯)도 역시 보이지 아니한다. 해공(解空)과 법종(法宗)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나아가 조그마한 부처를 받들어 날이 개게 해 달라고 놀리[弄]기로 나는 처음에 희롱으로 여겨 물으니 이르기를, “속설(俗說)에 이렇게 하면 하늘이 갠다.” 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관대(冠帶)를 갖추고 세수하고 돌길을 더듬어 사당에 들어가 술과 과일로써 성묘에게 고하기를, “모(某)는 일찍이 선니(宣尼 공자(孔子))가 태산에 올라 구경함과, 한자(韓子 퇴지(退之))가 형산(衡山)에 노닐던 뜻을 사모하였으나 직무에 매인 몸이라서 소원을 이루지 못했는데 금년 8월에 남쪽 경내(境內)에서 벼 곡식을 살펴보고 높은 봉우리를 우러르니, 정성이 막히지 아니하여 드디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ㆍ유호인(兪好仁)ㆍ조위(曺偉) 등으로 더불어 운제(雲梯)를 밟고 와서 사당 아래 나아가니, 병예(屛翳 비를 맡은 귀신 이름)가 마술을 부려 운물(雲物)이 훈김이 오르고 있으니 좋은 때를 저버릴까 저허하여 황황하고 답답합니다. 엎드려 비오니 성모(聖母)께서 이 술을 흠향하시고 신공(神功)을 베풀어서 오늘 저녁으로 하늘이 청명하여 달빛이 대낮과 같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가 툭 트여 산과 바다가 저절로 분간되게 해 주시면 우리들이 좋은 구경을 얻게 될 것이니 감히 큰 은혜를 잊으리까.” 하였다. 제사를 끝마치고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 두어 순배를 나누고 파했다. 사당은 단지 3칸으로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인데, 역시 판자집에 못질을 심히 견고하게 하였다. 이렇게 아니 하면 바람에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 벽에는 두 중이 그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고, 이른바 성모(聖母)는 바로 석상(石像)인데, 미목(眉目)이나 머리구비에 모두 분대(粉貸)를 발랐다. 그 이마에 이지러진 금이 있기로 물으니 말하기를,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인월(引月)에서 승전하시던 해에 왜놈이 이 봉우리에 올라와 칼로 처 버리고 갔는데 뒷사람이 풀로 다시 붙여 놓았다.” 한다. 동편의 오목한 돌무더기에 해공 등이 희롱하던 부처가 있어 이는 국사(國師)를 일컬었는데 속설(俗說)에, “성모의 음부(淫夫)라.” 전한다. 또 묻기를, “성모(聖母)는 세상에서 어떤 신이라 이르느냐.” 하니 대답이,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한다.” 한다. 아, 이럴 수가 있느냐. 서축(西竺)이 동진(東震)과 더불어 천백 세계가 가로막혔는데, 가유국(迦維國)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신이 되겠는가. 나는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에게 명하는 주[聖母命詵師註]에 이르기를, “지금의 것 지이천왕(智異天王)은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 위숙왕후(威肅王后)를 이르는 것이다. 고려 사람이 선도(仙桃) 성모(聖母)의 이야기를 익히 들었기로 그 임금의 계통을 신성화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하였다. 승휴가 믿고서 운기(韻紀)에 적어 놓았으나 이도 또한 증빙할 수 없거늘 하물며 승려들의 허무맹랑한 말에 있어서랴. 또 기왕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하면서 국사(國師)로서 더러운 욕을 먹이고 있으니, 그 불경(不敬)이 이보다 심할 수가 있겠는가. 이 일은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음풍(陰風)이 몹시 거세어 동서로 마구 불어 마치 지붕을 걷어가고 산악을 우러르는 듯하며 운무가 몰려들어 의관이 다 젖었다. 네 사람이 모두 사당 안에서 자리를 깔고 누웠는데, 찬 기운이 뼈에 사무쳐서 다시 두꺼운 솜옷으로 갈아입고 종자들은 모두 온몸을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기로 큰 나무 서너 그루를 불 피우게 하여 덥게 만들었다. 밤이 깊은데 달빛이 어렴풋이 비치기로 반가워서 일어나 보니, 문득 구름에 가려진다. 흙벽에 기대어 사방을 바라보니 천지가 아득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 하나의 조그마한 배를 탄 채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하여 장차 파도에 빠지는 것 같으므로 웃고 세 사람에게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지미(知微)의 도술이 없을지라도 다행히 그대들과 더불어 함께 기모(氣母)를 타고 혼돈(混沌)의 원시(元始)에 떠 노니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하냐.” 하였다.
경진일에 풍우 오히려 노호(怒號)하므로 먼저 종자(從者)를 향적사(香積寺)에 보내어 음식을 마련해 놓고 오솔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여 가게 하였다. 오정이 지나서 비가 조금 그쳤는데, 돌길이 몹시 미끄러워 사람으로 하여금 붙잡게 하고 밀치고 궁굴며 두어 마장쯤 내려가니, 철쇠로(鐵鎖路)가 있어 심히 위태로웠다. 그래서 그냥 돌구멍을 뚫고 나가 힘을 다하여 걸어서 향적사에 당도하니 중이 없는 지가 이미 2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 틈의 물은 오히려 쪼개진 나무를 타고 좔좔 흘러내리어 나무통에 떨어지고 문창에는 잠겨진 자물쇠와 향반(香槃)에는 불유(佛油)가 모두 완연히 있으므로, 명하여 깨끗이 쓸고 향을 피우고 들어가 앉았었다. 어둘 녘에 운애(雲靄)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어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에 다 흩어지고, 먼 하늘에서 지는 햇빛이 비치기도 하였다. 나는 손을 들어 몹시 기뻐하며 문 앞에 있는 반석에 나가 바라보니 살천(薩川)이 구물거리고 여러 산과 바다 섬이 혹은 전부 드러나고, 혹은 반만 드러나고, 혹은 이마만 드러나서 마치 사람이 장막 속에 있고 그 상투[髻]만 보이는 것 같다. 절정(絶頂)을 쳐다보니 봉우리 몇 겹으로 쌓여 지난날 길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성모사(聖母祠) 근방에서 흰 기가 남쪽을 가리키며 나부끼니 대개 그림 그리던 중이 나에게 그곳을 알게 하자는 것이다. 남ㆍ북의 두 바위를 실컷 보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리는데, 이때에 동쪽이 다 밝지는 못했으니 다시 한기가 나서 지탱할 수 없어서 관솔불[榾柮]을 피워 방안을 말리게 하고서야 잠자리에 나아갔다. 밤중이 되자 별과 달이 환히 밝았다.
신사일 새벽 해가 동쪽에서 올라오니 놀빛이 눈을 부시게 하였다. 좌우에서는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해서 반드시 두 번째 오르지는 못할 것으로 여기는데, 나는 생각하기를 여러 날 동안 음우(陰雨)가 있다가 갑자기 개는 것을 보면 하늘이 나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것인데, 지금 지척에 두고 능히 힘써 구경을 못한다면 평생의 막혔든 가슴을 끝내 탕척(蕩滌)할 날이 없을 것이다. 드디어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옷자락을 걷고 지름길로 석문(石門)을 경유하여 올라가는데, 발에 밟히는 풀과 나무가 다 얼음이 맺혔었다.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 다시 잔을 올려 감사를 드리기를, “오늘 천지가 맑게 개여 산천이 통활한 것은 실로 신의 도움으로 힘입은 것이니, 진실로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 하였다. 이에 극기(克己)하고 해공(解空)과 더불어 북루(北壘)에 오르니, 태허(太虛)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랐다. 비록 날아가는 홍곡(鴻鵠)이라도 내 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때마침 비가 막 개어 사방에 구름 한 점 없고 다만 창창하고 망망하여 그치는 데를 알 수 없으므로 나는 말하기를, “무릇 멀리 바라보면서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보는 바와 무엇이 다르랴. 먼저 북쪽을 바라보고 다음은 동쪽으로, 다음은 남쪽으로, 다음은 서쪽으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가까운 데로부터 먼데로 미뤄가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니, 해공이 자못 능히 지시한다. 이 산이 북으로부터 달려 남원에 와서 처음으로 솟아나 반야봉(般若峯)이 되고 동으로 몇 백리를 뻗어서 이 봉우리에 와서는 다시 높이 솟아나 북으로 서려서 그쳤다. 그 4면에 곁 봉우리가 시새워 빼어나고 뭇 골짝이 다투어 흘러, 제 아무리 수를 잘 놓는[巧曆] 자라도 능히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이 끌어서 올려놓은 듯한 것은 함양(咸陽)의 성인가, 청황(靑黃)의 빛이 엉겨 붙어서 흰 무지개가 가로 꿴 것은 진주(晉州)의 물인가, 청라(靑螺 물고동)가 점을 찍은 듯이 벌리어 가로 비끼고 곧장 솟은 것은 남해(南海) 거제(巨濟)의 뭇 섬인가. 산음(山陰)ㆍ단계(丹豀)ㆍ운봉(雲峯)ㆍ구례(求禮)ㆍ하동(河東) 등 고을은 모두 겹겹 싸인 속에 숨었으니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한다. 산이 북쪽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황석산(黃石山) 안음(安陰)ㆍ축암산(鷲巖山) 함양(咸陽) 이요, 먼 것으로는 덕유산(德裕山) 함음(咸陰)ㆍ계룡산(鷄龍山) 공주(公州)ㆍ주우산(走牛山 ) 금산(錦山)ㆍ수도산(修道山) 지례(知禮)ㆍ가야산(伽倻山) 성주(星州) 이요, 동ㆍ북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황산(皇山) 산음(山陰) 감악산(紺嶽山) 삼가(三嘉) 이요, 먼 것으로는 팔공산(八公山) 대구(大邱)ㆍ청량산(淸涼山) 안동(安東) 이요, 동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도굴산(闍堀山) 의령(宜寧)ㆍ집현산(集賢山) 진주(晉州) 이요, 먼 것으로는 비슬산(毗瑟山) 현풍(玄風)ㆍ운문산(雲門山) 청도(淸道)ㆍ원적산(圓寂山) 양산(梁山) 이요, 동ㆍ남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와룡산(臥龍山) 사천(泗川) 이요, 남쪽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병요산(甁要山) 하동(河東)ㆍ백운산(白雲山) 광양(光陽) 이요, 서ㆍ남에 있어 먼 것으로는 팔전산(八顚山) 흥양(興陽) 이요, 서쪽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황산(荒山) 운봉(雲峯) 이요, 먼 것으로는 무등산(無等山) 광주(光州)ㆍ변산(邊山) 부안(扶安)ㆍ금성산(錦城山) 나주(羅州)ㆍ위봉산(威鳳山) 고산(高山)ㆍ무악산(毋岳山) 전주(全州)ㆍ월출산(月出山) 영암(靈岩) 이요, 서ㆍ북에 먼 것으로는 성수산(聖壽山) 장수(長水) 인데, 혹은 배루(培塿)도 같고 혹은 용호(龍虎)도 같고 혹은 정두(飣鋀)도 같고 혹은 검망(劍鋩)도 같으며 오직 동으로 팔공산과 서로 무등산이 여러 산에 비하여 자못 우뚝하다. 계립령(鷄立嶺) 이북에는 푸른 기운이 공중에 가득하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에는 바다 기운이 하늘에 대어 안계(眼界)가 이미 궁극하매 다시 뚜렷이 분별할 수 없으므로 극기(克己)로 하여금 기록할 수 있는 것만은 위와 같이 기록하게 하고 서로 돌아보며 자축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을 오른 자가 있을 터이지만 어찌 우리들의 오늘날같이 상쾌한 것이야 있었으랴.” 하였다. 봉루(峯壘)를 내려가 석등(石磴)에 걸터 앉아 두어 잔 술을 수작하니 해가 벌써 오전이었다. 영신(靈神)의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요원하므로 빠른 걸음으로 석문(石門)을 뚫고 내려가 중봉(中峯)에 오르니, 역시 토산(土山)이다. 이고을 사람이 엄천(嚴川)으로 말미암아 오르게 되면 북의 제2봉으로 중봉을 삼고, 마천(馬川)으로부터 오르게 되면 증봉(甑峯)이 제1이 되고, 이것이 제2가 되는 고로 역시 중봉이라 부른다. 이로부터는 다 산등성을 타고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는 십여 개의 기특한 봉우리가 있어 모두 올라 구경할 만하며, 상봉과 더불어 서로 상등할 만한데 명칭이 없다. 극기(克己)는 말하기를, “증빙이 없어 믿지 않을 것을 어찌하랴.” 하였다.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아서 지팡이를 만들 만하기에 종자로 하여금 미끈하고 곧은 것만 가려서 베어 오게 하니, 잠깐 사이에 한 묶음이 가득하였다. 증봉(甑峯)을 지나서 저여원(沮汝原)에 당도하니, 단풍나무가 길을 막고 있어 구부러진 형상이 장얼(棖闑)과 같으니, 경유하여 나가는 자가 모두 등을 굽히지 아니하며 벌[原]이 산등성에 있는데, 평탄하고 광활하여 5ㆍ6리 가량 되는데, 수풀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서 능히 농사지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시내 위에 두어 칸 되는 초막이 보이는데, 가시 울을 두르고 흙으로 만든 아궁이가 있으니, 바로 매[鷹]를 잡는 막사다. 나는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강만(岡巒)의 곳곳마다 매 잡는 기구를 설치해 둔 것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깊은 가을이 아니어서 아직 잡아들이는 자는 없다. 매는 구름 사이로 날아다니는 물건이라 어찌 이처럼 험준한 땅에 기개를 가지고 깊숙이 방에 들어 앉아 노리는 자가 있는 줄로 알리오. 입감을 보고 탐내다가 마침내 그물에 걸려들어 조선(條鏇)의 제압을 받게 되니 또한 이를 들어 사람을 경계할 만하다. 더구나 진상(進上)하는 것은 한두 쌍에 불과한데, 완롱물에 충당하기 위하여 떨어진 옷과 죽만 먹는 나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디어 가면서 천 길의 산봉우리에 엎드려 있게 하니 어진 마음이 있는 자라면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에 오르니, 높고 험하고 동떨어져서 아래는 밑바닥이 없고 위에는 초목이 없으며 다만 척촉(躑躅) 두어 떨기와 산양(山羊)의 똥이 있을 뿐이다. 두원관(荳原串) 여수관(麗水串)과 섬진(蟾津)의 끝을 바라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겹쳐 더욱 기절(奇絶)도 하다. 해공(解空)이 뭇 골짜기에 모인 데를 가리키며 이르기를, “저기는 신흥사(新興寺) 골짝인데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적(湖南賊) 장영기(張永己)와 더불어 싸우던 데라.” 한다. 영기는 구서(狗鼠)의 종류인데도 천험(天險)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공(李公)의 지용으로도 능히 그 날뛰는 것을 금단하지 못하고, 마침내 장흥 군수가 잡아 없애게 되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저기는 청학사(靑鶴寺) 골짝이라.” 한다. 어허, 이는 옛날의 이른바 신선(神仙)의 지역이라는 것인가. 인간과 더불어 서로 과히 멀지 않은데 이미수(李眉叟)는 어찌하여 찾다 못찾았는가. 일을 좋아하는 자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지어 명칭을 붙인 것이 아닌가.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저기는 쌍계사(雙溪寺) 골짝인데, 최고운(崔孤雲)이 일찍이 이곳에 노닐면서 돌에 새긴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다. 최고운은 활달한 인물이다. 기개를 자부한 채 어지러운 세대를 만나니, 중국에서만 불우한 것이 아니라 또한 동방에서도 용납되지 못하여 드디어 물(物)의 밖에 은둔하였기로, 산수의 깊숙하고 고요한 땅은 다 그가 놀다갔으니 세상에 신선이라 칭하는 것이 부끄러울 바 없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다만 중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절의 북쪽 비탈에 가섭(迦葉)의 석상(石像) 하나가 있는데, “세조대왕 때에 매양 내관을 보내어 향화(香火)를 올렸다.”고 하며, 그 이마가 이지러졌는데, 그도 또한, “왜놈이 깎아 버렸다.” 한다. 아, 왜놈이란 참으로 잔인한 도적이라 생명을 남김 없이 도살하고, 성모(聖母)와 가섭(迦葉)의 머리까지도 또 베어 끊었으니, 비록 완고한 돌일망정 사람의 형을 새겼대서 어려움을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바른 팔에 반흔(瘢痕)이 있어 불에 탄 것 같은데 역시, “겁화(劫火)에 타서 그렇게 된 것이니 차츰 더 타면 미륵세부(彌勒世夫)가 된다.” 한다. 석흔(石痕)이 본시 그러한데 무단히 황당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어 내세(來世)의 이익을 구하는 자로 하여금 다투어 전포(錢布)를 시주하게 하니 진실로 가능한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 두 바위가 우뚝이 서 있으니,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다. 그 하나는 아래가 반듯하고 위는 뾰족하여 머리에 모난 돌을 이고 있는데, 넓이는 겨우 한 자쯤 된다. 중들의 말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하는 자가 있으면 효과를 얻는다.” 하니, 종자(從者) 옥곤(玉昆)과 염정(廉丁)이 거리낌 없이 올라가서 절을 하므로 나는 절에서 바라보고 빨리 사람을 보내어 꾸짖어 제지하였다. 이것들이 둔하고 어리석어 거의 숙맥(菽麥)을 구별 못할 정도인데, 능히 스스로 목숨을 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중들이 백성을 속이는 수단은 이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법당에 몽산(蒙山)의 화정(畵幀)이 있고 그 위에 찬이 있는데, “두타(頭陀) 제일이 바로 두수(抖擻)가 된다. 외형도 이미 티끌과 멀고, 내심도 이미 예를 벗었도다. 남 먼저 도를 얻고 맨 뒤에 입멸(入滅)하였다. 설의(雪衣) 계산(鷄山)이, 천추에 썩지 않도다.” [頭陀第一 是爲抖擻 外己遠塵 內己離垢 得道居先 入滅於後 雪衣鷄山 千秋不朽] 하였고, 곁에 인장(印章)에는 청지소전(淸之小篆)이라 하였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 시ㆍ서ㆍ화(詩書畵))이다. 동쪽 섬돌 아래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아주 달아서 그 물로 차를 달여 마시면, 중냉천(中冷泉)ㆍ혜산천(惠山泉)도 이보다 낫지 못할 듯하다. 샘의 서쪽에 무너져 가는 절이 우뚝하니 이는 옛날의 영신사(靈神寺)이다. 그 서ㆍ북의 단봉(斷峯)에 작은 탑(塔)이 있어 석리(石理)가 가늘고 기름진데 역시 왜놈이 넘어뜨리었다. 뒤에 다시 포개 올리고 철근(鐵筋)으로 그 속을 꿰었는데 두어층이 없어졌다.
임오일에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섬진강(蟾津江)을 바라보니 밀물이 넘실대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바로 안개가 깔려서 그러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절의 서ㆍ북쪽으로 나가 재마루에 쉬면서 반야봉(般若峯)을 바라보니, 약 60리가량 될 듯한데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 빠져서 비록 가보고 싶지만 강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름길로 직지(直旨)를 거쳐 내려가는데, 길이 더욱 매달리고 위태로워 나무뿌리를 더위잡고 석각(石角)을 밟아야 하며, 수십 리가 모두 이런 형태였다. 동으로 얼굴을 돌려 천왕봉(天王峯)을 바라보니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대나무 가지에 혹 열매가 있기도 한데 사람들이 모두 따냈고, 솔의 큰 것은 백 아람이 될듯한데 바위틈에 즐비하게 서 있으니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 험준한 곳을 다 내려오니 두 골짜기에 물이 합치는 곳이라서 그 소리가 굉장하여 야산을 울리고 백 척의 맑은 못에 노는 고기가 구물구물한다. 일행 네 사람이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양치질하고 비탈을 따라서 막대를 끌고 걷는데 몹시도 즐거웠다. 골짝 입구에 야묘(野廟)가 있는데, 마부(馬夫)가 말을 가지고 먼저 와서 등대하고 있으므로 드디어 옷을 바꾸어 입고 말을 타고 실택리(實宅里)에 당도하니 늙은이 여러 사람이 마중 나와 길가에서 절을 하며, “원님께서 탈 없이 구경하고 오시니 감히 치하하옵니다.” 한다.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나더러 일을 철폐하고 실컷 노니기만 하는 것으로써 허물하지 않는 것을 기뻐했다.
해공(解空)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法宗)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太虛)와 극기(克己)와 백원(百源)은 용유담(龍遊潭)으로 구경가고, 나는 등구(登龜) 재를 넘어 지름길로 군재(郡齋)로 돌아왔다. 나가서 노닌 것이 겨우 5일밖에 되지 않은데, 완전히 가슴속에 개운하고 신관이 맑아진 감각이 든다. 비록 처자나 서리(胥吏)들도 나를 보면 역시 전날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아, 두류산(頭流山)의 숭고하고 웅장한 품은, 중국에 있어도 반드시 숭산(嵩山)ㆍ대산(岱山)에 앞서 천자가 올라 봉(封)하여, 금니(金泥) 옥첩(玉牒)의 검(檢 문서(文書))을 옥황상제에게 승중(升中)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岳)에 견주어 한창려(韓昌黎)ㆍ주회암(朱晦庵)ㆍ채서산(蔡西山) 같은 박아(博雅)와, 손흥공(孫興公)ㆍ여동빈(呂洞賓)ㆍ백옥섬(白玉蟾) 같은 수련(修煉)이 옷자락을 이어 발치를 맞대어 그 가운데 배회(徘徊)하고 휴식할 것인데, 지금은 유독 용부(庸夫)와 도예(逃隸)의 숨어서 불도(佛道)를 배우는 자들의 덤불이 되었고, 비록 우리들이 오늘에 한 번 등람하는 기회를 얻어 겨우 평소의 숙원을 풀었지만, 공무에 매인 몸이라 감히 청학동(靑鶴洞)을 찾고 오대(五臺)를 거쳐서 그윽하고 기절한 경치를 두루 구경하지 못했으니, 어찌 이 산의 불우한 것만이랴. 길이 두자미(杜子美)의, “방장(方丈)은 삼한의 밖이라.” [方丈三韓外]는 글귀를 읊으며 저도 모르게 혼이 날아간다. 임진 8월 5일 씀.


[주D-001]결하(結夏) : 불가(佛家)의 용어인데 여름에 편안히 들어앉아 쉰다는 뜻이다. 또한 결제(結制)라고도 한다.《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천하의 승니(僧尼)가 4월 15일에 선찰(禪刹)로 나아가 의발(衣鉢)을 벽에 걸고 참선하는 것을 결하(結夏)라고 한다.” 하였음.
[주D-002]우란분(盂蘭盆) : 불가(佛家)의 말인데 또한 오람파라(烏藍婆拏)라고도 함. 의역(義譯)에 이르기를, “거꾸로 매단다는 뜻으로 심한 고통을 비유한 것이다.”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이는 불제자(佛弟子)가 매년 7월 15일에 항상 효도와 자애로써 소생 부모를 생각하여 우란분을 만들어 부처와 및 스님에 시주하여 부모가 자기를 길러준 은혜를 보답한다.” 하였다. 생각건대 7월 15일은 여러 중이 결하(結夏)의 기간을 마지막 채우는 날이다. 구십 일 동안 참여하여 도를 얻은 자가 많은 고로 이날에 공양을 받들면 그 공로가 백배나 더하다. 그래서 부처가 사람을 가리켜 이달에는 우란분을 만들어 부처와 중에게 시주하여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게 한 것이다.
[주D-003]빈도(貧道) : 불가의 말이다. 《석림연어(石林燕語)》에 “진(晉)ㆍ송(宋) 시대에 불교가 처음으로 행세하게 되어 중에 대한 칭호가 없었다. 그래서 도인(道人)이라 하고 자기는 빈도(貧道)라 칭하였다.” 하였음.
[주D-004]장얼(棖闑) : 《예기》 옥조(玉藻)에 “대부(大夫)는 장(棖)과 얼(闑)의 중간에 선다[大夫中棖與闑之間].” 라 하였고, 그 주에 “장(棖)은 문턱이요, 얼(闑)은 문설주다.” 하였음.
[주D-005]조선(條鏇) : 매[鷹]를 장식하는 끈과 방울을 칭함.
[주D-006]두타(頭陀) : 범어(梵語)인데 또는 두다(杜多)라고도 함. 역(譯)에, 두수(抖擻) 수치(修治) 세완(洗浣) 등의 뜻이라 하였음. 세속에서 중이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 고행(苦行)을 닦는 것을 두타(頭陀)라 칭함.
[주D-007]두수(抖擻) : 불가의 용어인데 번뇌를 떨어버린다는 뜻임. 맹교(孟郊)의 시에, “두수진애의(抖擻塵埃衣).” 라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