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만기요람의 의령기록

만기요람 군정편에 기록된 의령읍성 기록 군정편 4(軍政編四

아베베1 2009. 11. 19. 22:09

군정편 4(軍政編四)
 관방(關防)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읍성. 석축(石築) 둘레 4,075척. 영로 : 치술령(鵄述嶺) 남쪽 통로. 성령(筬嶺)ㆍ건대암(件代巖)ㆍ추령(楸嶺)ㆍ팔조령(八助嶺) 모두 동쪽 통로. 시령(柿嶺) 장기(長鬐)와의 경계. 사라현(舍羅峴). 북쪽 통로. 【울산(蔚山)】 병영성(兵營城) 석축. 둘레 9,316척. 태종(太宗) 8년 무자(1408년)에 우도(右道)의 창원부(昌原府) 합포내상(合浦內廂)에 합쳤다가, 세종 8년 병오(1426년)에 좌도의 병영을 다시 설립하여 판경주부사(判慶州府事)를 겸임케 하였다. 선조 27년 갑오(1594년)에 따로 병영을 본부내상(本府內廂)에 설치하였다. 시루성[甑城] 일명 도산성(島山城)이라고도 한다. 왜적이 여기에 성을 쌓았는데 모양이 시루와 같다 하여 시루성[甑城]이라 하였다. 바깥 시루성[外甑城]. 서생진(西生鎭)에 있으며, 역시 왜적이 쌓은 것임. 영로 : 율현(栗峴). 서쪽 통로. 【양산(梁山)】 읍성 석축. 둘레 3,710척. 성황산성(城隍山城). 석축. 둘레 4,368척. 영로 : 황산천(黃山遷). 역로. 【영천(永川)】 영로 : 유현(柳峴). 동쪽 통로. 【흥해(興海)】 읍성. 석축. 둘레 1,493척. 【청하(淸河)】 읍성. 석축. 둘레 1,353척. 【영일(迎日)】 읍성. 석축. 둘레 2,940척. 영로 : 사현(沙峴). 동쪽 통로. 【장기(長鬐)】 읍성. 석축. 둘레 2,980척. 영로 : 시령(柿嶺) 남쪽 통로. 【언양(彦陽)】 읍성. 석축 둘레. 3,064척. 영로 : 가슬현(嘉瑟峴). 서쪽 통로. 【동래(東萊)】 읍성 석축. 둘레 17,291척. 영종(英宗) 7년 신해(1731년)에 그 옛터를 개척하여 좀 넓혔다. 수영성(水營城) 석축. 둘레 9,190척. 인조 13년 을해(1635년)에 감만이포(戡蠻夷浦)에 설치했다가 효종 3년 임진(1652년)에 다시 옛터에 옮겨 설치하였음. 금정산성(金井山城) 석축. 둘레 69,570척. 영종 20년 갑자(1744년)에 이를 폐지했다가 금상 ‘순조’ 8년 무진(1808년)에 고쳐 쌓았다. 다대포성(多大浦城) 석축. 둘레 1,806척. 두모포성(豆毛浦城). 석성(石城). 둘레 1,250척. 영로 : 기비현(其比峴) 서쪽 통로. 사배야현(沙背也峴)ㆍ안령(鞍嶺). 모두 북쪽 통로. 【안동(安東)】 읍성. 석축. 둘레 2,947척. 영로 : 두모포(豆毛浦) 북쪽 통로. 이이현(耳而峴)ㆍ모현(茅峴) 모두 동쪽 통로. 구령(龜嶺)ㆍ석현(石峴)ㆍ고암현(古巖峴). 모두 남쪽 통로. 【순흥(順興)】 영로 : 죽령(竹嶺) 서쪽 통로. 마아령(馬兒嶺). 영춘(永春) 통로. 【영해(寧海)】 읍성. 석축. 둘레 1,278척. 영로 : 서읍령(西邑嶺) 영양(英陽) 통로. 오현(烏峴) 서북쪽 통로. 남면현(南眠峴) 영덕(盈德)과의 경계[界] 송현(松峴). 남쪽 통로. 【청송(靑松)】 영로 : 도현(刀峴) 영천(永川)과의 경계. 삼자현(三者峴). 남쪽 통로. 유현(柳峴) 경주와의 경계. 지현(枝峴). 안동과의 경계. 【예천(醴泉)】 영로 : 호항령(狐項嶺) 북쪽 통로. 귀모현(歸毛峴). 풍기와의 경계. 【영천(榮川)】 영로 : 백령(白嶺) 남쪽 통로. 병령(竝嶺). 동쪽 통로. 【풍기(豐基)】 등강성(登降城). 전설엔 고려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 여기서 머문 지 7일 만에 백제의 항복 문서가 도착하여 이렇게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영로 : 여현(礪峴)한령(汗嶺) 모두 남쪽 통로. 골리현(骨里峴). 서쪽 통로. 【의성(義城)】 영로 : 백장령(百丈嶺) 서남쪽 통로. 발지현(發只峴) 남쪽 통로. 계란현(鷄卵峴). 북쪽 통로. 【영덕(盈德)】 읍성. 석축. 둘레 2,397척. 영로 : 임물현(林勿峴) 북쪽 통로. 죽현(竹峴). 청송(靑松) 통로. 【예안(禮安)】 영로 : 장갈현(長葛峴). 동쪽 통로. 【용궁(龍宮)】 영로 : 대현(大峴) 동북쪽 통로. 【대구(大丘)】 읍성. 석축. 둘레 2,124보. 영로 : 팔조령(八助嶺). 청도(淸道)와의 경계[界]. 【밀양(密陽)】 읍성. 석축. 둘레 4,677척. 영로 : 나현(羅峴) 서쪽 통로. 영현(鈴峴) 서남쪽 통로. 천화령(穿火嶺). 언양(彦陽)과의 경계. 【청도(淸道)】 읍성 석축. 둘레 1,570보. 선조 20년 정해(1587년)에 왜구가 침입할 듯한 징조가 보이자 조정에서는 명령하여 동화(東華)에서부터 직로(直路) 이웃 주군(州郡)에 성지(城池)를 수리토록 하였으며 성이 없는 읍은 모두 새로 성을 쌓도록 하였다. 23년 경인(1590년)부터 착공하여 2년만에 준공하였다. 폐성(吠城). 고려 태조가 동정하여 군 경내에 들어왔을 때 산적들이 모여서 이 성은 점거하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봉성사(奉聖寺)의 중 보양(寶壤)에게 계책을 물었더니 보양이 말하기를, “개[犬]란 짐승은 밤을 지키지 낮은 지키지 아니하며, 앞은 지키나 그 뒤는 잊어 버리는 것이니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하소서.” 하였다. 태조(太祖)가 그 말대로 하자, 적은 과연 패하였다. 영로 : 갑을령(甲乙嶺) 서쪽 통로. 성현(省峴). 경산(慶山)과의 경계. 【경산(慶山)】 읍성 석축. 둘레 1,200척. 우곡성(亏谷城) 신라 시대에 3개의 성을 합쳐서 압량군(押梁郡)을 만들었는데, 3국을 통일한 뒤에 다시 3개 성을 만들었다. 【인동(仁同)】 천생산성(天生山城). 4면에 석벽이 깎아질러져 있어서 마치 성이 천연으로 된 것 같으므로 천생산성이라고 불렀다. 신라 시조왕(始祖王)이 처음 성을 쌓았으며 임진란 때 곽재우(郭再祐)가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노획한 병기ㆍ조총ㆍ창ㆍ화살ㆍ진천뢰ㆍ이름 모를 물건들이 지금까지 성중에 남아 있다. 선조 34년 신축(1601년)에 곽재우가 찰리사(察理使)로 있을 때, 아뢰어 외성을 쌓았다. 둘레 3,612척. 영로 : 월암현(月巖峴). 성주와의 경계. 【현풍(玄風)】 영로 : 대치(大峙). 창령(昌寧)과의 경계. 【의흥(義興)】 영로 : 병비현(並非峴) 선산과의 경계. 지사현(智士峴) 칠곡(漆谷)과의 경계. 토을현(吐乙峴). 남쪽 통로. 【영산(靈山)】 영로 : 건현(件峴)ㆍ이물현(尼勿峴). 모두 밀양 통로. 【창녕(昌寧)】 영로 : 마현(馬峴). 북쪽 통로. 【칠곡(漆谷)】 읍성의 내성(內城) 석축. 둘레 4,700보. 인조(仁祖) 18년 경진(1640년)에 쌓았음. 외성(外城) 석축. 둘레 3,754보. 숙종 27년 신사(1701년)에 쌓았음. 중성(中城). 석축(石築). 둘레 602보. 영종 17년 신유(1741년)에 쌓았다. 영로 : 소야현(所也峴) 인동(仁同) 통로. 정현(鼎峴) 대구 통로. 【상주(尙州)】 읍성. 석축. 둘레 3,883척. 영로 : 왜유현(倭踰峴)ㆍ죽현(竹峴) 모두 남쪽 통로. 대조현(大鳥峴)ㆍ송현(松峴). 모두 북쪽 통로. 【금산(金山)】 영로 : 좌현(左峴) 선산과의 경계. 석현(石峴) 지례(知禮)와의 경계. 전현(箭峴) 성주와의 경계. 추풍령(秋風嶺) 황간과의 경계. 괘방령(掛榜嶺). 서쪽 통로. 【지례(知禮)】 영로 : 우마현(牛馬峴) 거창(居昌)과의 경계. 부항현(釜項峴) 성주와의 경계. 병현(餅峴). 동쪽 통로. 【함창(咸昌)】 성주읍성(星州邑城) 석축. 둘레 6,052척. 독용산성(禿用山城). 석축. 둘레 4,581보. 영로 : 적현(赤峴)ㆍ화령(花嶺) 모두 서쪽 통로. 성현(星峴) 남쪽 통로. 물한령(勿閑嶺) 고령과의 경계. 월암현(月巖峴) 인동(仁同) 통로. 부상현(扶桑峴) 개령(開寧) 통로. 대야현(大也峴). 북쪽 통로. 【선산(善山)】 읍성. 석축. 둘레 1,448척. 금오산성(金烏山城) 석축. 둘레 7,644척이며, 성이 없는 절벽이 661보. 외성(外城). 둘레 4,135척. 영로 : 갈현(加乙峴) 동쪽 통로. 열현(余乙峴). 동북쪽 통로. 【문경(聞慶)】 조령성(鳥嶺城) 숙종 34년 무자(1708년)에 돌로 쌓았음. 남북 18리, 둘레 18,509보. 성이 3개소에 있는데, 하나는 새재[鳥嶺]의 꼭대기에 있어서 충청도[湖]와 경상도[嶺]를 가름하였고, 하나는 응암(鷹巖)의 북쪽에 있는데, 이는 충원(忠元)의 옛성을 고쳐 쌓은 것으로 중성(中城)이라 부르며, 하나는 초곡(草谷)에 있는데, 여기엔 군량 창고가 있다. 이 3개의 성에 모두 홍예문(虹霓門)이 있어서 큰 길[大路]로 통하는데 산 꼭대기의 것은 조령관(鳥嶺關), 중성(中城)은 조동문(鳥東門), 초곡성은 주흘관(主屹關)이라 한다. 고부성(姑夫城) 고모성(姑母城)과 마주보며, 지금도 석축이 있다. 고모성(姑母城). 석축. 둘레 990척. 영로 : 조령ㆍ이화현(伊火峴)ㆍ고모령(古毛嶺) 모두 서쪽 통로. 계립령(鷄立嶺) 북쪽 통로. 관갑천(串岬遷). 남쪽 통로. 【진주(晉州)】 병영성(兵營城)의 내성(內城) 둘레 1,930척. 외성(外城) 둘레 10,330척. 선조 36년 계묘(1603년)에 영을 본주의 촉석산성(矗石山城)으로 옮겼다. 방어산성산(防禦山城山) 동쪽에 있으며, 위에는 석성(石城)이 서쪽엔 장군대(將軍臺)가, 아래에는 마제현(馬蹄峴)이 북쪽에는 장군의 철상(鐵像)이 있다. 전설에 태종 3년 계미(1403년)에 왜구가 이 성에 올라가 울타리[柵]를 세우고 스스로를 보전했다고 한다. 동량성(東梁城) 석축. 둘레 1,182척. 지금은 첨사진(僉使鎭)이 있음. 삼천진성(三千鎭城). 석축. 둘레 2,050척. 권관(權管)을 고성(固城)에 이속(移屬)했다. 영로 : 동현(東峴) 함창과의 경계. 마치(馬峙) 북쪽 통로. 사현(沙峴). 남쪽 통로. 【합천(陜川)】 영로 : 질현(知乙峴) 동쪽 통로. 두리현(頭里峴) 서북쪽 통로. 아현(阿峴) 삼가(三嘉)와의 경계. 마현(馬峴). 북쪽 통로. 【함양(咸陽)】 읍성 영종 5년 기유(1729년)에 돌로 쌓았다. 둘레 735척. 고읍성(古邑城). 토축. 둘레 735척. 옛적에 왜구에게 점령[所奠]된 적이 있으며, 지금의 읍성으로 옮겼다. 영로 : 팔량치(八良峙) 서북쪽 통로 도현(桃峴). 동쪽 통로. 【곤양(昆陽)】 읍성. 석축. 둘레 3,765척. 영로 : 열두고개[十二峙] 동쪽 통로. 율치(栗峙). 남쪽 통로. 【남해(南海)】 읍성 석축. 둘레 2,876척. 세조(世祖) 5년 기묘(1459년)에 쌓았다. 평산포성(平山浦城) 석축. 둘레 1,558척. 성고개보(城古介堡) 석축. 둘레 760척 미조항성(彌助項城) 중종 17년 임오(1522년)에 진을 설치하였다. 석축. 둘레 2,146척. 우고개성(牛古介城) 석축. 둘레 913척. 곡포성(曲浦城). 석축. 둘레 920척. 중종 17년 임오(1522년)에 우고개성을 폐지하고 이곳에 옮겼다. 영로 : 성현(城峴). 남쪽 통로. 【거창(居昌)】 성산성(城山城) 석축. 둘레 3리(里). 건흥산성(乾興山城) 석축. 둘레 3리. 영로 : 도마현(都馬峴) 무주(茂朱)와의 경계. 적현(赤峴) 성주(星州)와의 경계. 우마현(牛馬峴). 북쪽 통로. 【사천(泗川)】 읍성. 석축. 둘레 5,015척. 영로 : 울도치(鬱道峙)ㆍ부용치(芙蓉峙). 모두 동남쪽 통로. 【삼가(三嘉)】 읍성. 석축. 둘레 3,259척. 영로 : 삼대치(三大峙) 단성(丹城)과의 경계. 도두치(都頭峙) 의령(宜寧)과의 경계. 아두치(阿豆峙). 합천과의 경계.의령(宜寧)】 읍성. 석축. 둘레 2,570척. 선조 22년 기축(1589년)에 쌓았다. 영로 : 장치(長峙) 남쪽 통로. 대현(大峴) 서쪽 통로. 월라현(月羅峴). 동쪽 통로. 【하동(河東)】 영로 : 장령(長嶺)ㆍ황령(黃嶺)ㆍ우치(牛峙) 모두 동쪽 통로. 해치(蟹峙). 동남쪽 통로. 【산청(山淸)】 영로 : 본통치(本通峙) 함양과의 경계. 고천령(古川嶺) 거창과의 경계. 밀점치(密占峙) 삼가(三嘉)와의 경계. 척지치(尺旨峙) 단성과의 경계. 백야치(白也峙). 동쪽 통로. 【안의(安義)】 영로 : 육십치(六十峙). 장수(長水)와의 경계. 【단성(丹城)】 영로 : 시치(失峙) 남쪽 통로. 신치(新峙). 서쪽 통로. 【김해(金海)】 읍성. 석축. 둘레 4,683척. 영로 : 율현(栗峴)ㆍ노현(露峴) 모두 서쪽 통로. 나전치(羅田峙)ㆍ마현(馬峴). 모두 북쪽 통로. 【창원(昌原)】 읍성 석축. 둘레 2,004척. 영로 : 안민령(安民嶺) 동남쪽 통로. 신풍현(新豐峴) 동쪽 통로. 제굴현(諸屈峴) 서쪽 통로. 남정현(南井峴). 남쪽 통로. 【함안(咸安)】 읍성. 석축. 둘레 7,003척. 영로 : 일이현(一伊峴) 동쪽 통로. 미산령(眉山嶺), 어령(於嶺) 칠원(漆原)과의 경계. 대현(大峴). 진해와의 경계. 【거제(巨濟)】 우수령성(右水嶺城) 석축. 둘레 2,620척. 선조 37년 갑진(1604년)에 고성현(固城縣) 두룡포(頭龍浦)에 옮기고, 이어서 가배만호(加背萬戶)를 두었다. 옥포성(玉浦城) 석축. 둘레 1,074척. 지세포(知世浦). 석축. 둘레 1,605척. 일본에 가는 사람은 반드시 여기서 바람이 자기를 기다려서 뱃길을 떠난다. 【고성(固城)】 읍성 석축. 둘레 3,524척. 통영성(統營城) 석축. 둘레 11,730척. 해방(海防)조(條)에 상세히 나타나[詳見] 있다. 솔비포성(所乙非浦城). 석축. 둘레 825척. 영로 : 성치(城峙) 사천(泗川)과의 경계. 감치(甘峙) 서쪽 통로. 대치(大峙). 동남쪽 통로. 【칠원(漆原)】 읍성. 석축. 둘레 1,595척. 영로 : 어령치(於嶺峙), 적현(赤峴) 창원과의 경계. 율전치(栗田峙). 진해와의 경계. 【진해(鎭海)】 읍성. 석축. 둘레 446척. 영로 : 대현(大峴). 북쪽 통로. 【웅천(熊川)】 읍성 석축. 둘레 3,514척. 제포성(薺甫城) 석축. 둘레 4,313척. 안골포성(安骨浦城). 석축. 둘레 1,714척. 영로 : 송현(松峴) 서쪽 통로. 율천현(栗川峴). 동쪽 통로.
〈유성룡 소론(柳成龍所論)〉 유성룡은 말하기를, “부산으로부터 북쪽으로 직로(直路)에 밀양부(密陽府)가 있고, 동해변(東海邊)으로 비스듬히 울산군과 절도영(節度營)이 있고, 서쪽으로 비스듬히는 김해부(金海府)인데, 이 세 길은 모두 요충지로서 꼭 지켜야 되는 곳이다. 이 3개소의 방비만 튼튼하다면, 적이 설령 다른 길로 흩어져 나오더라도 견고한 성이 뒤에 있고, 많은 군병이 앞에 있어 견제하기 때문에 함부로 내지를 침범하지 못한다[不敢輕犯內地]. ○ 의령현(宜寧縣)에 낙동강의 하류가 있는데 그 한 가닥이 위로 진주와 단성(丹城)으로 뻗치었는데 이름을 거름강[歧江]이라고 한다. 거기서 15리쯤 되는 상류에 정진(鼎津)이 있는데, 가장 요해가 되는 곳이다. 곽재우(郭再祐)가 이 강에서 지키어 적을 물리쳤다.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의 경계에는 구례(求禮)의 두치진(頭恥津)ㆍ함양(咸陽)의 팔량현(八良峴)ㆍ안음(安陰)의 육십현(六十峴)ㆍ지례(知禮)의 우두현(牛頭峴)ㆍ김산(金山)의 추풍령(秋風嶺)ㆍ문경(聞慶)의 새재[鳥嶺]ㆍ선산(善山)의 낙동강(洛東江)ㆍ풍기(豐基)의 죽령(竹嶺) 등이 산천의 험조(險阻)로서 가장 중요한 곳이어서 점거하여 지킬 만하지만, 만일 사람이 수비할 줄 모른다면 좁은 길이 다른 곳[境]으로 통하여 옆으로 나간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바다 가운데 있는 여러 섬으로 천성(天城)ㆍ가덕(加德)ㆍ거제(巨濟) 등이 모두 작은 군에 해당하는 땅이며, 김해와 웅천과의 거리는 뱃 길로 겨우 20리 정도인데, 전라도와의 경계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인다. 또한 과거에 바다에 연한 일대에서 내륙에 걸쳐[以及內地] 산성을 많이 쌓았으므로 여기저기에 요충을 점령하여 산과 물의 요해지를 질러 막았지만[控扼], 오랜 태평한 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모두 폐지하고 수리하지 않아서 위급한 경우에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대구의 산성이나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같은 따위가 그 일례다. 이 밖에 의령(宜寧)의 정진(鼎津)ㆍ삼가(三嘉)의 산성ㆍ합천(陜川)의 야로산성(冶爐山城)ㆍ성주(星州)의 가야산성(伽倻山城) 등은 모두 천연적인 험한 요새에 속하므로 순차적으로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고 군병을 주둔하여 튼튼히 지키고 움직이지 말며, 들[野]을 말끔히 비우고 적을 기다리면 앞에는 약탈할 물건이 없고 뒤로는 꺼리는 것이 있을 터이니, 국가를 보위(保衛)하고 폭도를 방어하는 데에 실로 편리할 것이다.” 하였다.
〈이경여 소론(李敬輿所論)〉 이경여(李敬輿)는 말하기를, “문경의 북쪽, 새재의 동쪽에 산성이 하나 있으니 이름을 어류(御留)라고 한다. 어느 시대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이는 고려 태조[麗祖]행차를 쉬던 곳[住駕之所]이라고 한다. 그 안의 넓이는 남한산성의 10분의 9만큼 되지마는 지세가 험하고 튼튼하기로는 남한산성이 비교가 안 된다. 동쪽과 남쪽은 만 길이나 되는 절벽이 있어서 새짐승이라도 넘어올 수 없고, 북쪽은 동쪽이나 남쪽에 비하여 약간 낮지만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통할 수가 없으니 성첩(城堞)을 조금만 만들더라도 안심할 수 있다. 그 서쪽에도 통행할 수 있는 길을 있지마는, 남한산성의 가장 험한 곳과 비교하여도 역시 몇 배 이상 힘들 뿐 아니라, 성을 쌓을 곳이 5ㆍ600파(把)에 불과하고, 크고 작은 돌들이 흙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마음대로 가져다가 튼튼히 쌓는다면 공사도 매우 간단할 것이며, 꼭 높이 쌓지 않더라도 이미 자연적인 지세가 침범하기 어렵다. 성 안에는 우물ㆍ샘ㆍ개천ㆍ시내가 수없이 흘러나오며, 수목이 울창하게 들어서서 얼마든지 쓰고도 남을 것이니, 천 칸의 큰 건물도 지을 수 있으며, 수개 년 간의 땔나무도 준비될 수 있어 천연적인 험지로 실로 동남에서 제일가는 곳이다. 가운데는 4ㆍ50,000 군병을 수용할 수 있으며, 또한 1ㆍ20,000호를 들여앉힐 수 있다. 조금만 수축하여 가옥을 건축하고 군량과 말먹이를 쌓아둔[峙置]다면 아마 영구히 함락되지 않을 터가 될 것이며, 백만의 군병이 사방에서 들어밀더라도 성 안의 사람들은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이니, 만전(萬全)을 기할 땅이란 여기를 두고는 다른 데는 없을 것이다. 이곳은 동쪽으론 태백(太白)ㆍ소백(小白)과 연(連)하였고, 북쪽은 월악(月嶽)과 통하며, 서쪽은 화산(華山)과 닿고, 따라서 내려가면 속리산(俗離山)을 향하여 바로 덕유산(德裕山)ㆍ지리산(智異山)과 연결되어 바다까지 가게 된다. 또한 북쪽에는 4군(四郡)이 있어 그대로 강원도로 통하며, 충청도는 오른쪽에 놓여 있고, 안동(安東)ㆍ풍기(豐基)ㆍ영주(榮州)는 그 왼쪽에 있으며, 낙동강은 그 남쪽으로 뻗어나갔고, 한강의 상류는 그 후면에서 흘러 나간다. 높은 언덕, 긴 재에는 구름이 덮이어 햇빛을 가리고, 험한 산길이 서로 연결되어 어디로든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견제하는 세력은 마치 목을 조르고 덜미를 잡는 것 같다. 산골짜기는 멀리 뻗치고 험한 절벽은 간 곳마다 가로걸려 100리 안쪽에서는 아무 데도 발붙일 곳이 없으니, 제 아무리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라도 포위할 도리가 없다. 성 북쪽의 월악과 그 동쪽의 작성(鵲城)ㆍ순흥(順興)과 그 서쪽의 조령ㆍ희양성(曦陽城)과 그 남쪽의 고모(姑母)ㆍ토천(兎遷)은 어떤 것은 험하디 험한 산성이고, 어떤 것은 잔도(棧道)의 첩첩 관문(關門)이어서 약간의 병력만 배치 주둔시켜 성원(聲援)이 서로 연락되면 호령이 통할 수 있을 터이니,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와 동북의 경기까지도 제어될 것이며, 산길이 사방으로 통하여 명맥이 막히는 곳이 없으니 산길로 식량을 운반하면 식량도 결핍되지 않을 것이고, 혹 서북쪽에서 사태가 돌발하면 대가(大駕)가 머무를 수가 있고, 남방에서 경보가 있을 적에는 방어진지로 될 수 있는 곳이다.” 하였다.


[주D-001]곽재우(郭再祐) : 1552년(명종 7)~1617년(광해군 9).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본관은 현풍(玄風). 무예에 뛰어났으며,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켜 천강 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워졌으며 용맹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 경상좌도방어사에 승진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한 뒤 수차에 걸쳐 경상도 병마절도사ㆍ수군통제사 등의 벼슬을 하였음.
[주D-002]권관(權管) : 각 수영(水營)이나 진(鎭)에 두었던 종 9품 벼슬.
[주D-003]이경여(李敬輿) : 1585년(선조 18)~1657년(효종 8).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또는 봉암(鳳巖), 본관은 전주(全州). 부수찬ㆍ교리를 거쳐 좌승지ㆍ전라도 관찰사를 역임. 병자호란 때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호종했다. 청나라 연호 사용을 반대하다가 심양에 억류되었고, 귀국하여 우의정ㆍ영의정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경여(李敬輿)’의 ‘敬輿’가 어느 본엔 그의 호인 ‘白江’으로 되어 있음.
[주D1-001]석축(石築) : ‘석축(石築)’의 ‘築’이 어느 본에는 ‘城’으로 되어 있음.
[주D1-002]팔조령(八助嶺) : ‘팔조령(八助嶺)’의 ‘八’이 몇몇 본에는 ‘入’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가슬현(嘉瑟峴) : ‘가슬현(嘉瑟峴)’의 ‘峴’이 어느 본엔 ‘峙’로 되어 있음.
[주D1-004]석성(石城) : ‘석성(石城)’의 ‘城’이 다른 본들엔 ‘築’으로 되어 있음.
[주D1-005]두모포(豆毛浦) : ‘두모포(豆毛浦)’의 ‘浦’가 다른 본에는 ‘峴’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남면현(南眠峴) : ‘남면현(南眠峴)’의 ‘眠’이 어느 본에는 ‘面’으로 되어 있음.
[주D1-007]경계[界] : ‘경계[界]’가 어느 본엔 ‘路’로 되어 있음.
[주D1-008]여현(礪峴) : ‘여현(礪峴)’의 ‘礪’가 원본엔 ‘峴’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09]한령(汗嶺) : ‘한령(汗嶺)’이 어느 본엔 ‘汙峴’으로 되어 있음.
[주D1-010]골리현(骨里峴) : ‘골리현(骨里峴)’의 ‘峴’이 어느 본엔 ‘峙’로 되어 있음.
[주D1-011]경계[界] : ‘경계[界]’가 어느 본에는 ‘路’로 되어 있음.
[주D1-012]4,677 : ‘4,677’이 원본의 다른 본들에는 ‘4,675’로 되어 있음.
[주D1-013]보양(寶壤) : ‘보양(寶壤)’의 ‘壤’이 원본엔 ‘穰’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14]태조(太祖) : ‘태조(太祖)’의 ‘祖’가 원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15]이물현(尼勿峴) : ‘이물현(尼勿峴)’의 ‘尼’가 어느 본엔 ‘泥’로 되어 있음.
[주D1-016]석축(石築) : ‘석축(石築)’의 ‘築’이 어느 본엔 ‘城’으로 되어 있음.
[주D1-017]화령(花嶺) : ‘화령(花嶺)’의 ‘嶺’이 어느 본엔 ‘峴’으로 되어 있음.
[주D1-018]충청도[湖] : ‘충청도[湖]’가 어떤 본엔 ‘胡’로 되어 있음.
[주D1-019]관갑천(串岬遷) : ‘관갑천(串岬遷)’의 ‘岬’이 어느 본엔 ‘鴨’으로, 어느 본엔 ‘甲’으로 되어 있음.
[주D1-020]촉석산성(矗石山城) : ‘촉석산성(矗石山城)’의 ‘矗’이 원본엔 ‘疊’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21]장군대(將軍臺) : ‘장군대(將軍臺)’의 ‘臺’가 원본엔 ‘堂’으로 되었는데, 《증보문헌비고》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22]동현(東峴) : ‘동현(東峴)’의 ‘峴’이 어느 본엔 ‘城’으로 되어 있음.
[주D1-023]사현(沙峴) : ‘사현(沙峴)’의 ‘峴’이 어느 본엔 ‘峙’로 되어 있음.
[주D1-024]점령[所奠] : ‘점령된[所奠]’의 ‘奠’이 어느 본엔 ‘典’으로 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엔 ‘焚’으로 되어 있음.
[주D1-025]세조(世祖) : ‘세조(世祖)’의 ‘祖’가 몇몇 본들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26]2,146 : ‘2,146척’이 어느 본엔 ‘7,146척’으로 되어 있음.
[주D1-027]무주(茂朱) : ‘무주(茂朱)’의 ‘朱’가 원본 및 몇몇 본들엔 ‘州’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28]우치(牛峙) : ‘우치(牛峙)’의 ‘峙’가 어느 본엔 ‘嶺’으로 되어 있음.
[주D1-029]상세히 나타나[詳見] : ‘상세히 나타나 있다[詳見]’의 ‘詳’이 원본엔 ‘佯’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본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30]적현(赤峴) : ‘적현(赤峴)’의 ‘峴’이 다른 본들에는 ‘峙’로 되어 있음.
[주D1-031]동쪽 통로 : ‘동쪽 통로[東路]’가 어느 본엔 없음.
[주D1-032]밀양부(密陽府) : ‘밀양부(密陽府)’가 어느 본엔 ‘密陽’으로 되어 있음.
[주D1-033]함부로 내지를 침범하지 못한다[不敢輕犯內地] : ‘함부로 내지를 침범하지 못한다[不敢輕犯內地]’의 ‘地’ 다음에 어느 본엔 ‘矣’가 있음.
[주D1-034]육십현(六十峴) : ‘육십현(六十峴)’의 ‘峴’이 어느 본엔 ‘峙’로 되어 있음.
[주D1-035]곳[境] : ‘곳[境]’이 어느 본엔 ‘徑’으로 되어 있음.
[주D1-036]가덕(加德) : ‘가덕(加德)’의 ‘德’이 어느 본엔 ‘悳’으로 되어 있음.
[주D1-037]내륙에 걸쳐[以及內地] : ‘내륙에 결쳐[以及內地]’의 ‘及’ 다음에 어느 본엔 ‘於’가 있음.
[주D1-038]질러 막았지만[控扼] : ‘질러 막았지만[控扼]’의 ‘扼’이 어느 본엔 ‘阨’으로 되어 있음.
[주D1-039]고려 태조[麗祖] : ‘고려 태조[麗祖]’가 원본에는 ‘麗朝’로 되었는데, 다른 본들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40]행차를 쉬던 곳[住駕之所] : ‘행차를 쉬던 곳[住駕之所]’의 ‘住’가 어느 본엔 ‘駐’로 되어 있음.
[주D1-041]성첩(城堞) : ‘성첩(城堞)’의 ‘堞’이 어느 본엔 ‘牒’으로 되어 있음.
[주D1-042]성첩(城堞) : ‘성첩(城堞)’의 ‘堞’이 어느 본엔 ‘牒’으로 되어 있음.
군정편 2(軍政編二)
 병조(兵曹)
마색(馬色)

〈총례(總例)〉 역졸(驛卒) ○ 청파(靑坡)와 노원(蘆原) 2개 역 합계 288명. 마호(馬戶) 200명, 주호(走戶) 88명. 【마필(馬匹)】 2개 역의 3등급의 말 교룡기(蛟龍旗)를 봉지(奉持)하는 말을 상등이라 하며, 승용마(乘用馬)를 중등이라 하며, 짐싣는 말을 하등이라 한다. 상등과 중등에는 매필에 역졸 2명씩을 예비하여 두며, 하등에는 매필에 1명씩을 예비하여 둔다. 합계 160필. 상등 7필, 중등 33필, 하등 120필. 【위전(位田)】 말의 준비. 상ㆍ중등의 밭과 논이 각 4결(結), 하등 각 결, 주위(走位)는 밭과 논이 각 50부(負). 【호역 면제[給復]】 마호(馬戶)ㆍ주호(走戶)에게는 매명에게 1호씩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준다.
입번(立番) 2개역의 말[馬] 각 25필이 마군영(馬軍營)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다 에 번을 서서 여러 가지 사역에 충당하도록 한다. 기마(旗馬), 독마(纛馬), 판서ㆍㆍ일ㆍ이군색의 낭청이 연습하기 위하여 마련한 말[立把馬], 비변사 낭청의 공문회람(公文回覽)에 사용하는 말, , 사양용(飼養用) 풀을 운반하는 짐 싣는 말과 의 신역대(身役代)로 탈급(頉給)하는 것이니, 매번에 가령 합하여 20필이 된다면, 실제로는 30필이 밤낮으로 대기하여 명령 전달을 거행한다.
입마(立馬) 상등마(上等馬)는 관청에서 준비하며[自官備入] 가격은 270ㆍ80냥 가량 중등마(中等馬)는 에서 준비하고 관청에서 대금을 보조한다. 보조액은 에서 지급하는 것이 50냥인데, 만일 7ㆍ80냥이 되는 것일 때에는 이군색에서 보조하여 준다. 기마(騎馬)도 마찬가지다. ○ 새로 매입한 것이 그 해에 죽게 되면 20냥을 감액하며, 1주년이면 10냥을 감액하며, 3개년이면 규례대로 지급한다.
파발마 보충[補把] 국왕이 능에 거둥할 때에는 경기의 역마 27필을 보충하여 사복시(司僕寺)의 것과 더불어 배정한다. 정종 13년 기유(1789년)에 병조와 사복시에 각 15필로 규례를 정하였는데, 영화역(迎華驛)이 화성부로 속한 뒤에는 3필을 감하였다.
매년 응봉(每年應捧) 6도(六道)의 서북(西北 :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없음. 역보(驛保)가 1,404명인데, 매명에 포(布) 1필씩을 수납 경기도 940필 강원도 69필, 경상도 131필, 전라도 128필, 공충도 100필, 황해도 36필. 합계 무명 28동 4필. ○ 균역청에서의 지급액 역보포(驛保布)는 금상 ‘순조’ 10년 경오(1810년)에 1필로 감역한 뒤부터 균역청에서 대액을 지급한다. 무명 2동 26필 20자ㆍ삼베 10필ㆍ돈 303냥. ○ 이군색에서의 지급액 시흥 등 5개 읍이 화성부로 이속된 뒤에는 5개 읍의 역보 324명의 포(布) 바칠 대액을 이군색에서 지급한다. 돈 648냥. ○ 이노(吏奴)의 공납액(貢納額) 창시(創始)된 연대는 알 수 없다. 지금 개령(開寧)ㆍ금산(金山)ㆍ거창(居昌)ㆍ의성(義城)ㆍ비안(比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ㆍ용궁(龍宮)ㆍ청도(淸道)ㆍ창녕(昌寧)ㆍ예천(醴泉)ㆍ자인(慈仁)ㆍ영산(靈山)ㆍ지례(知禮)ㆍ의령(宜寧)ㆍ상주(尙州)ㆍㆍ안동(安東)ㆍ군위(軍威)ㆍ운봉(雲峯) 등 제읍(諸邑)이다. 무명 3동 영. 증감(增減)은 매년 일치하지 않는다. ○ 관리의 사무인계비[由錢]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이 어전(御前)에 하직하는 날 수납하는 사무인계비인데, 주(州)와 부(府)는 10냥, 군과 현은 7냥, 역은 3냥, 진(鎭)은 4냥, 6진(六鎭)과 삼수(三水)ㆍ갑산(甲山)은 1냥씩. 1,000냥. 증감은 매년 일치하지 않다. ○ 이군색에서 넘겨오는 돈 1,000냥. 금상 8년 무진(1808년)에 판서 김이익(金履翼)이 본색의 예비금이 부족하다 하여 연품하여 규례를 정하였다. 합계 무명 36동 42필 포를 징수하는 방법은 무명 혹은 돈과 무명을 반반씩으로 하며, 또는 전부 돈으로 하는데, 해마다 일정하지 않으므로 여기에는 모두 본색의 으로 재록(載錄)하였다.ㆍ돈 2,648냥.
매년 응하(每年應下) 청파(靑坡)ㆍ노원(蘆原) 두 역 역졸의 보포(保布)는 2기로 나누는데, 합계 무명 40동 16필 역졸이 288명인데, 매명에 무명 7필을 겨울ㆍ봄[冬春] 양기로 나누어 전부 돈으로 지급한다.ㆍ마량용(馬糧用) 200냥 봄ㆍ가을 양기로 나누어 매기에 100냥씩. 위전(位田)이 없는 역졸 24명에게의 지급액 돈 72냥 매명에 3냥. 원역에게의 정례지급액 돈 972냥 매월에 81냥. 원역의 4철 피복대 돈 488냥 매기에 122냥. 계사(計士)ㆍ원역(員役)의 필묵대(筆墨代) 돈 448냥 춘ㆍ추 양기로 나누어 지급한다. 합계 무명 40동 16필ㆍ돈 2,180냥.

[주D-001]육진(六鎭) :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를 시켜 지금의 함경북도 북변을 개척하여 설치한 여섯 개의 진. 곧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
재용편 2(財用編二)
 조전(漕轉)
조창(漕倉)

이에 삼남(三南)에는 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상류(上流)에는 수참(水站)을 배치하여 조박(漕舶)은 바다에 떠서 이르게 되며, 참선(站船)은 강을 따라 내려오게 된다. 그러므로 조(漕)에는 조에 부속된 읍이 있고, 참(站)에는 참에 부속된 읍이 있고, 도리(道里)가 우회(迂回)하고 궁벽[僻]하여 조와 참이 부속되지 아니한 곳은 임선(賃船)을 사용하여 자납(自納)케 되므로, 6도(道)의 넓고도 천 리나 먼 데에서도 모두 한데 모이게 되어, 상통(相通)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방법은 창이 다 각각 부속된 읍이 있게 되므로 창은 반드시 바다를 낀 도회지에 설치하여 모든 읍으로 통하는 도로를 평균되게 하고, 선박을 정박시키는 항구를 편리하게 하며, 선박을 조치(造置)하며 기계를 수선하고, 사공(沙工)ㆍ격군(格軍)을 택정(擇定)하여 자량(資粮)을 지섬(支贍)한다. 매년 초봄에 호조에서 조전(漕轉)하는 사목(事目)을 갖추어 계하(啓下)해서 행회(行會)하면 각 읍의 수령은 기한 안에 곡물을 받아서 소속된 창(倉)에 납부하고, 차원(差員)감봉(監捧)하여 싣고 배를 타고 영납(領納)한다. 경강(京江 한강 일대의 총칭)에 도착 정박하면 호조(戶曹)의 당랑(堂郞)이 나가서 점검하고 각 창에 분획(分劃)한다.
전라도(全羅道) : 성당창(聖堂倉)함열(咸悅)에 있음. 세종 무신(세종 10년 1428년)에 설치하였는데 본래 용안(龍安)의 덕성창(德成倉)으로 하였다가 수로가 막혀 옮겨 설치하였음 조선(漕船) 각 배를 모두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로 표를 함. 다른 창(倉)도 같음 14척. 지금은 2척을 감하였음. 8읍(邑) 함열(咸悅)ㆍ고산(高山)ㆍ진산(珍山)ㆍ익산(益山)ㆍ금산(錦山)ㆍ용담(龍潭)ㆍ남원(南原) 의 전세(田稅)ㆍ대동(大同)을 싣는데 군산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영납(領納 영거(領去)하여 상납하는 것)하였다. 정종(正宗) 신해(정조 15년 1791년)에 관찰사의 장청(狀請)에 의하여 함열 현감으로 하여금 감봉(監捧)하여 영납케 하였다. 군산창(群山倉)옥구(沃溝)에 있음. 성종 정미(성종 18년 1487년)에 설치하였는데 조선 23척. 지금은 4척을 감하였음. 7읍 옥구(沃溝)ㆍ전주(全州)ㆍ진안(鎭安)ㆍ장수(長水)ㆍ금구(金溝)ㆍ태인(泰仁)ㆍ임실(任實) 의 전세와 대동미를 싣는데 군산의 첨절제사가 감봉 영납한다. 법성창(法聖倉)영광(靈光)에 있음. 중종 임신(중종 7년 1512년)에 설치하였는데 조선은 29척. 지금은 4척을 감하였음 12읍ㆍ1진(鎭) 영광ㆍ광주(光州)ㆍ담양(潭陽)ㆍ순창(淳昌)ㆍ옥과(玉果)ㆍ고창(高敞)ㆍ화순(和順)ㆍ곡성(谷城)ㆍ동복(同福)ㆍ정읍(井邑)ㆍ창평(昌平)ㆍ장성(長城)ㆍ법성(法聖)ㆍ법성에 납세(納稅)가 있는 까닭은 영광의 진량(陳良) 1면(面)을 본진(本鎭)에 획속(劃屬)한 까닭임 의 전세ㆍ대동미를 싣는데 법성첨사(法聖僉使)가 감봉하여 영납한다. 위 3창(倉)의 에 처음에는 800석을 싣게 하였다가 정종 경술(정조 14년, 1790년)에 주교당상(舟橋堂上)정민시(鄭民始)의 연품(筵稟)으로 인하여 영남의 예에 의해서 1,000석으로 한정하고 따라서 조강(漕舡) 10척을 감하고, 감액한 조군(漕軍)의 복호미ㆍ태(復戶米太)신포대전(身布代錢)을 조운(漕運)할 때에 첨가하여 실어 호조에 올려 보내면 호조에서는 신포대전은 주교사에 이송하고, 쌀[米]ㆍ콩[太]은 장용영(壯勇營)에 이송하였는데, 본영이 혁파된 뒤에는 쌀ㆍ콩을 호조의 노비 공급대(奴婢貢給代)에 넣었음.
공충도(公忠道 지금의 충청도) : 공진창(貢津倉)아산에 있다 은 중종 계미(중종 18년 1523년)에 설치하였는데, 조선 15척. 정종(正宗) 무진년에 3척을 임시로 감했음. 7읍 아산(牙山)ㆍ목천(木川)ㆍ연기(燕岐)ㆍ천안(天安)ㆍ온양(溫陽)ㆍ전의(全義)ㆍ서원(西原) 의 전세(田稅)를 실어 부근의 변장(邊將)이 영납하였는데, 영종 임오(영조 38년 1762년)에 아산현감(牙山縣監)으로 하여금 감봉(監捧) 영납케 하였다. 양호(兩湖)에 예전에는 해운판관(海運判官)이 있었는데 숙종 정축(숙종 23년, 1697년)에 혁파하고, 양도(兩道)의 도사(都事)로서 판관(判官)을 예겸(例兼)하게 하였다. 영종 임오년에 공진창의 조선을 아산현감으로 영납케 했었는대, 정해년에는 법성 첨사로 이력(履歷)이 있는 이름난 무인(武人)을 차송하여 이에 따라서 양호 도사(都事)가 예겸(例兼)하던 것을 임시로 감하였음.
위의 4창(倉)은 호조에서 관리한다.
경상도(慶尙道) : 좌ㆍ우조창(左右漕倉) 영종 경진(영조 36년 1760년)에 관찰사 조엄(趙曮)의 장계에 의하여 설치했다. 본도는 옛날부터 각 읍에서 지토선(地土船 : 지방 토민(土民)의 배)을 만들어서 경강선인(京江船人)에게 출급(出給)하여 운납(運納)하였으므로, 시기가 늦어서 내려가기 때문에 취재(臭載)가 잇달게 되었다. 그래서 경진년에 이르러 선가미(船價米)를 조군(漕軍)의 복호(復戶)하는 보미(保米)ㆍ격량(格粮 : 격군(格軍)의 양식)의 수량에 준하여도 오히려 남음이 있으므로 호남조창의 예에 의하여 양창을 설치하였음. 후조창(後漕倉) 영종 을유(영조 41년 1765년)에 우참찬(右參贊) 이익보(李益輔)가 건의하여 설치하였다.
마산창(馬山倉)창원(昌原)에 있으니 좌창(左倉)이 됨. 조선 20척, 8읍 창원(昌原)ㆍ함안(咸安)ㆍ칠원(漆原)ㆍ진해(鎭海)ㆍ거제(巨濟)ㆍ웅천(熊川)과 의령(宜寧)의 동북면(東北面)ㆍ고성(固城)의 동남면(東南面) 의 전세ㆍ대동을 싣되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감봉(監捧)하고, 구산 첨사(龜山僉使)가 영납한다. 감봉하는 사람을 도차원(都差員)이라 하고, 영납하는 사람을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이라 하니, 3창(倉)이 모두 같음. ○ 속창(屬倉) 견내량(見乃梁)에 있음. 은 고성(固城)ㆍ거제(巨濟) 두 읍의 곡물을 봉재(捧載)하기 위한 것인데, 그 영운차원(領運差員)이 감봉하여 원창(元倉)의 곡물을 싣고 지나갈 때를 기다려서 같이 싣고 떠나게 한다. 가산창(駕山倉)진주(晋州)에 있으니 우창(右倉)이 됨. 조선 20척, 8읍 진주(晋州)ㆍ곤양(昆陽)ㆍ하동(河東)ㆍ단성(丹城)ㆍ남해(南海)ㆍ사천(泗川)과 고성(固城)의 서북면(西北面)ㆍ의령(宜寧)의 서북면 의 전세ㆍ대동을 싣는데 진주목사(晋州牧使)가 감봉하며 적량 첨사(赤梁僉使)가 영납한다. 삼랑창(三浪倉)밀양(密陽)에 있으니 후창(後倉)이 됨. 조선 15척, 6읍 밀양(密陽)ㆍ현풍(玄風)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ㆍ김해(金海)ㆍ양산(梁山). ○ 김해는 본래 좌창(左倉)에 속하였는데 후창(後倉)이 설치된 뒤에 이속하였음 의 전세ㆍ대동을 싣는데 밀양부사(密陽府使)가 감봉하고 제포만호(薺浦萬戶)가 영납한다.
위의 3창(三倉)은 선혜청(宣惠廳)이 관리한다. 싣는 것이 대부분 대동이기 때문임.

[주D-001]조창(漕倉) : 조운창(漕運倉)의 약칭. 조운하는 세곡(稅糓)을 쌓아 두는 창고.
[주D-002]수참(水站) :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의 세곡(稅糓)을 서울로 운송하는 도중에 있는 정박지(碇泊地).
[주D-003]조박(漕舶) : 조운(漕運)하는 배.
[주D-004]참선(站船) : 수참(水站)에서 사용하는 배.
[주D-005]사목(事目) : 공사에 관하여 정한 규칙.

[주D-006]계하(啓下) : 국왕의 재가(裁可)를 받는 것.
[주D-007]행회(行會) : 조정의 명령을 알리는 것.
[주D-008]차원(差員) : 차사원(差使員)의 약칭. 중요한 사무로 임시 파견하는 직원.
[주D-009]감봉(監捧) : 수봉(收捧)하는 것을 감독하는 것.
[주D-010]대동(大同) : 전결(田結)에 준하여 미(米)ㆍ목면(木綿) 등을 상납하는 것.
[주D-011]첨절제사(僉節制使) : 각 진영(鎭營)에 속했던 종3품의 무관 벼슬, 절도사(節度使)의 아래로 병영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수영(水營)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음. 다만 목(牧)ㆍ부(府)의 소재지에는 수령이 이를 겸직하며, 각 진영 안에 전임할 경우에는 약하여 첨사(僉使)라고 일컬음.

[주D-012]주교당상(舟橋堂上) : 주교사(舟橋司)의 당상관(堂上官). 주교사는 정종 12년에 창설하였으니, 국왕이 거둥할 때에 한강에 부교(浮橋)를 가설하는 것을 맡으며, 전라도ㆍ충청도의 세곡을 서울로 수송하는 일을 맡은 관아.
[주D-013]복호미ㆍ태(復戶米太) : 복호로 말미암아 생긴 세곡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일반 세곡 가운데서 따로 모아 두어 예비하는 쌀.

[주D-014]신포대전(身布代錢) : 신역(身役)의 대신으로 바치는 면포(綿布)의 대전.
[주D-015]장용영(壯勇營) : 정조 15년에 창설하였으니 수원부에 베푼 군영(軍營)으로 부사를 유수(留守)로 올려 두었는데 다음에 총리청(摠理廳)으로 개칭하였음.
[주D-016]변장(邊將) : 첨사(僉使)ㆍ만호(萬戶)ㆍ권관(權管)의 총칭.
[주D-017]해운판관(海運判官) : 전라도ㆍ 충청도의 조운(漕運)하는 사무를 맡은 벼슬. 국초에 창설하였다가 숙종 23년에 양도 도사(都事)가 겸직하였다. 충청도 해운판관은 영조 38년에 폐지하고 전라도 해운판관은 정조 3년에 폐지하였음.
[주D-018]조엄(趙曮) :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본관은 풍양(豊壤). 영조 임신년에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익(文翼).
[주D-019]취재(臭載) : 배에 실은 짐이 상하여 못 쓰게 되는 것.
[주D-020]이익보(李益輔) : 자는 사겸(士謙), 본관은 연안(延安). 영조 기미년에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어진 재상이라는 평이 있다.
[주D-021]창원 부사(昌原府使) : 부는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는 대도호부의 으뜸가는 지방관 정3품. 도호부사는 도호부의 으뜸가는 지방관으로 종3품.
[주D-022]목사(牧使) : 지방의 목을 다스리는 정3품의 외관직.
[주D-023]만호(萬戶) : 각도의 여러 진(鎭)에 속한 무관직의 하나. 종4품.
령(富寧), 온성(穩城), 종성(鍾城), 회령(會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