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망우당 곽재우 장군 신도비

최초의 의병장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아베베1 2009. 11. 19. 22:22

 기언 별집(記言別集) 제16권
 구묘문(丘墓文)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공의 휘는 재우(再祐)이고, 자는 계유(季綏)이다. 성은 곽씨(郭氏)이며, 관향은 현풍(玄風)이다. 성균관 사성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모친은 진양 강씨(晉陽姜氏)인데, 가정(嘉靖) 31년(1552, 명종7) 8월 21일에 공이 출생하였다. 공은 기량과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고 독서를 즐겼다. 27세에 부친을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왔는데, 관상 보는 사람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
하였다. 34세에 정시(庭試) 문과 을과(文科乙科)에 발탁되었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전부 파방(罷榜)되었다. 다음해 부친이 돌아가자, 상사(喪事)를 마친 뒤에는 과거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강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임진년의 난리에 왜적이 모든 성을 연이어 함락하고 그 기세를 몰아 한 달만에 서울을 침범하니, 상은 서쪽으로 행차하였다. 공은 사재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하고 의령(宜寧)에서 기병(起兵)하였다. 우선 신번(新繁 경상북도 의령 동북)의 곡식을 점거하여 요해처를 지켜 연전 연승하였고, 참괵(斬䤋 전쟁에서 적의 귀나 머리를 벰)하는 것으로 공을 삼지 않았다.
공이 처음 기병할 때 병사가 적고 적은 강하므로 기병(奇兵)을 두고 용사 몇 사람을 얻어 그들과 함께 강의(絳衣 진홍색으로 장군이 입었던 옷)를 입고 백마를 타고서 적이 아군을 쫓도록 유도하고 산기슭에 숨은 뒤에, 사람마다 각각 산위에서 출몰(出沒)하게 하여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여, 적을 의혹(疑惑)케 하고는 꾸며서 말하기를,
“하늘에서 강의 장군을 내려 주셨다.”
하며, 복병으로 하여금 활을 마구 쏘아대게 하니, 적이 크게 놀라 비장군(飛將軍)이라 하고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공이 거느리는 병사는 모두가 향병(鄕兵)과 오합지졸(烏合之卒 까마귀 떼가 모인 것처럼 규칙도 없고 통일성도 없는 병졸)로 병사(兵事)를 익히지 못하여 싸움에 겁을 먹고 있으므로, 공은 싸울 때마다 반드시 사졸에 앞서 모든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므로 군졸들은 모두가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기 때문에 열 번 싸워 열 번 이겼으며, 원근이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당시 순찰사의 군사가 항상 후퇴하여 지기만 하므로 공은 크게 불쾌하게 여겼는데, 양호(兩湖)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장수와 근왕병(勤王兵 임금을 위해 싸우는 병사)들이 흩어져 다시 병사를 소집하자, 모든 군과 현이 소란하고 인심은 더욱 불쾌하고 의병은 흩어지려 하였다. 공이 분개하여 꾸짖기를,
수(睟)를 베어야 한다.”
하고 그의 여덟 가지 죄목을 열거하여 군사를 옮겨 먼저 치려 하니, 순찰사가 병졸을 엄중히 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한편으로 ‘반역한다’고 보고하고, 한편으로는 초유 아문(招諭衙門)에 이첩(移牒)하여 체포하여 상에게 아뢰고자 하였다. 그러자 김성일(金誠一 당시에 초유사였음)이 답하기를,
“모(某)가 과연 반역을 꾀했다면 그가 현재 병졸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역사(力士)의 힘으로 잡을 수 없는 일이요, 만일 반역할 마음이 없다면 편지 한 장으로 충분히 깨우칠 수 있는 것이오.”
하고, 편지를 보내 공을 책망하고 반역과 순종의 의의를 깨우쳐 주었다. 의병장 김면(金沔)도 간곡한 비유로 깨우쳐 주니, 공은 글을 보내어 사과하기를,
“공은 상께서 보내신 분이니, 공의 말씀은 곧 상의 말씀입니다. 감히 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초유 아문(招諭衙門)에서 곧 상에게 이뢰기를,
“모(某)는 나라를 위한 것뿐이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고 이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진상을 진술하니, 상이 추궁하지 않고 교서를 내려 충의(忠義)를 포상하였다.
양군(兩軍)의 대립이 해소되자 공은 눈물을 뿌리고 병졸을 격려하여 날로 적을 공격하니 병세가 더욱 불어났다. 이에 현풍(玄風), 고령(高靈), 창녕(昌寧)에 주둔한 적이 창고의 양곡을 모두 태우고 도망갔으나, 강(江) 오른쪽의 농상(農桑)은 무사하였다. 상이 영남 지방 사민(士民)들에게 유서(諭書)를 내리고 공을 뒤늦게야 알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공으로 처음으로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으로 상을 주고, 뒤에 형조 정랑으로 직책을 바꾸었다. 얼마 뒤에 절충장군에 승급되고, 연이어 성주(星州), 진주(晉州)의 목사(牧使)로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했으며, 다시 방어사로 승급하여 모든 의병을 공의 휘하에 예속시켰다. 그 당시 적은 해상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체상(體相) 이원익(李元翼)이 산악을 다스려 석문(石門)을 튼튼하게 구축하고, 군졸을 이끌어 한바탕 싸우려고 양원(楊元)의 군사에게 위세를 떨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오늘의 형세는 성과 해자를 정비하고 비축하는 데에 힘쓰다가 그들의 동향을 기다려 움직여야 합니다. 맹호(猛虎)가 산에 있으면 위세를 떨치고 들에 있으면 겁을 먹는 것이니, 천병(天兵 명 나라 군대)이 호로(湖路)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맹호가 산에 있는 형세입니다.”
하였다. 그해 가을에 적이 크게 밀어닥쳤는데 석문이 미처 구축되지 못하여 화왕산(火旺山)으로 옮겨 지키고 모든 장사에게 명령하기를,
“삼가서 싸우려 하지 말고 굳게 지키기만 하라.”
하였다. 적이 싸울 수 없게 되자, 하룻밤 하루낮을 서로 대치하며 지키다가 마침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무찌르고 진격하여 남원(南原)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들이 모두 무너졌다. 체상(體相) 이원익이 병졸이 적어 성을 지키기 위태로움을 염려하여, 군사를 철수할 것을 명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고 더욱 굳게 성을 지켰다. 얼마 뒤에 모친의 상을 당해 관직을 떠났다. 상중에 상이 여러 차례 출사(出仕)하도록 불렀으나 끝내 나서지 않았다.
다음해 적의 추장(酋長) 수길(秀吉)이 죽자 모든 적병이 철수하여 돌아갔다. 공은 동계(東界)의 울진으로 피난하여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부자(父子)가 물건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였다. 상을 마치자 다시 불러들여 찰리사(察理使)로 삼아 남쪽 지방을 안찰(按察)하게 하였고, 이어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계(啓)를 올려 도산성(島山城)을 수리할 것을 간청하고 성의 수비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하였으나, 조정에서 들어주지 않자, 공은 상소하여 시국(時局)을 말하고 바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대사헌 홍여순(洪汝諄 자는 사신(士信))이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탄핵하여 영암(靈巖)에 부처(付處 관원을 형벌할 때 어떤 땅을 지정하여 머물게 함)되었는데, 1년 만에 상이 석방하였다.
공은 드디어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기를 끊고 도인(導引 호흡 및 운동에 의해 전신의 관절을 조정하는 법)하는 사람으로부터 신선술(神仙術)을 배웠다. 상이 다시 불러들여 찰리사(察理使)를 삼고, 천생성(天生城)을 축성케 하고, 이어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삼았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으며,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임명하였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에 승급되었으며, 뒤에 다시 찰리사에서 동중추부사로 바꾸고 우윤(右尹)에 옮겼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영남 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가 되었으며, 다음해(1610, 광해군2)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계속 소명이 있어서 여름에 서울에 가서 부총관에서 좌윤으로 옮기고 곧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때 이 상국(李相國 오리(梧里) 이원익)이 병을 핑계 대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자, 공은 곧 상국을 찾아가서,
“장수와 재상이 화목하면 내외(內外)가 모두 일체가 되는 것인데 이제 상국께서 두문불출하시니 저 또한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세 번 소를 올리고 드디어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광해군이 재차 선유(宣諭)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광해 4년(1612)에 호남 절도사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 선조의 아들. 어머니는 인목왕후. 유일한 정비(正妃) 소생임)을 살해하자, 공은 상소하기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그 뒤 5년이 지나 만력(萬曆) 45년(1617) 4월 10일에 공이 별세하니, 나이는 66세였다. 광해군이 부의(賻儀)를 보냈으며 의식대로 조상(吊喪)하고 제사 지내고 전기(傳記)를 기록하게 하였다. 그해 8월 모일(某日)에 현풍현(玄風縣) 남쪽 구지산(仇知山) 곽씨 족장 터에 장사하였다. 다음해(1618, 광해군10)에 향인(鄕人)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웠다.
정부인(貞夫人)은 상산 김씨(商山金氏)인데, 조남명(曺南冥 남명은 조식(曺植)의 호. 자는 건중(楗仲)) 선생의 외손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곽형(郭瀅)과 곽활(郭活)이고 사위는 신응(辛膺)과 성이도(成以道)이다.
곽형(郭瀅)은 곽여로(郭汝櫓)와 곽여집(郭汝楫)을 낳았으며, 곽활은 곽여식(郭汝植), 곽여재(郭汝梓), 곽여추(郭汝樞), 곽여송(郭汝松)을 낳고, 신응은 신동망(辛東望), 신시망(辛時望)을 낳았으며, 성이도는 성만강(成萬江), 성만하(成萬河)를 낳았다.
또한 측실자(側室子) 두 사람이 있는데, 곽탄(郭灘)과 곽목(郭沐)이다.
공은 평생에 신(信)이 아니면 실천하지 않았으며, 의(義)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다. 큰 난을 만나자 솔선하여 의병을 격려하고 적을 토벌할 것을 마음속 깊이 맹세하였으니, 그의 충의가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난이 평정되고 나서는 공명을 자처하지 않고 세상을 버리고 물러가 살았으니, 성대한 명성에서 오는 우환과 해(害)가 미치지 않았다. 공이 살던 곳은 취산(鷲山), 창암(倉碞)이고, 그곳에 망우정(忘憂亭)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명분은 지키기 어렵고 / 處名難居
공은 이룩하기 더욱 힘들다 / 成功尤難
기미를 앎이여 / 知微知幾
철인은 멀리 떠나 은거하는 것이니 / 哲人高蹈
확고하고 안일하도다 / 確而安


[주D-001]수(睟) :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수(金睟)를 말한다. 서로 전략상 의견이 맞지 않았다.
[주D-002]김면(金沔) :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으로 퇴계의 문인이다. 그는 당시에 금산(金山)ㆍ거창(居昌)ㆍ고령(高靈)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금산ㆍ개령(開寧) 간에 주둔한 적병과 싸워 승전하였다.
[주D-003]양원(楊元) : 명 나라 장군이다. 이여송(李汝松)의 휘하에서 좌협(左協) 대원으로 참전했다.
[주D-004]부자(父子)가 …… 생활하였다 : 전기(傳記)에 의하면, 자질(子姪)과 함께 패랭이를 만들어 팔았으며, 사람들이 여소(廬所)를 방어점(防禦店)이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