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우계 성혼 신도비문 (펌)

우계 성혼 신도비명 병서 (우계연보)펌

아베베1 2009. 11. 22. 18:50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선생은 휘가 혼(渾)이고 자가 호원(浩原)이며 성이 성씨(成氏)이니, 창녕인(昌寧人)이다. 선고 휘 수침(守琛)은 은거하고 도학(道學)을 강명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는데, 별세하자 사헌부 집의에 추증하니, 세상에서 청송(聽松) 선생이라 칭한다. 조고 휘 세순(世純)은 지중추부사로 시호가 사숙공(思肅公)이며, 증조 휘 충달(忠達)은 현령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성씨(成氏)는 고려 때 유명한 성씨(姓氏)가 되었는데, 중윤(中尹) 인보(仁輔)로부터 더욱 크게 현달하였다. 4대를 전하여 여완(汝完)에 이르러 본조(本朝)에 들어와 부원군(府院君)이 되었으며, 석인(石因)을 낳으니 예조 판서였고, 억(抑)을 낳으니 좌찬성이었고, 득식(得識)을 낳으니 한성부윤이었으니, 선생에게 고조가 되신다. 대대로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유명한 분과 덕망 있는 분을 탄생하였다. 선비(先妣)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인데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 6월 25일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천품이 독실하고 민첩하여 저절로 도에 가까웠으며 거처하는 집을 묵암(默庵)이라 호하여 스스로 경계하였다. 처음 청송이 조정암(趙靜庵)의 문하에 종유하여 올바른 학문을 얻어들었는데, 선생은 가정에서 배워 도를 들음이 매우 빨랐다. 일찍이 한 번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병환 때문에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평소 조정암과 이퇴계(李退溪)를 높이고 사모하였으며 위로 거슬러 올라가 고정(考亭)을 표준으로 삼았다. 이때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또한 도학으로 자임(自任)하여 서로 함께 의리를 강명하여 조예(造詣)가 더욱 깊으니, 한 시대의 선비들이 모두 귀의하여 우계(牛溪) 선생이라 칭하였다. 얼마 후 도신(道臣)이 학행이 탁월하다고 아뢰어 두 차례나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6품직으로 뛰어올라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배우러 와서 따르는 자들이 더욱 많으니, 선생은 이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서실의(書室儀)를 게시하여 제생들로 하여금 따라서 행할 바를 알게 하였다. 산서(散署)의 서장(署長)과 여러 시원(寺院)의 관료와 부장관, 공조의 좌랑과 정랑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며, 그 사이에 소명을 받고 한 번 경성(京城)에 갔다가 상소문을 올리고 즉시 돌아온 적도 있다. 사헌부의 관원에 제수된 것은 지평으로 부른 것이 열 번 남짓이었고 장령으로 부른 것이 두 번이었으며, 편안한 수레로 길에 오르도록 명하기까지 하였으나 모두 굳이 사양하고 봉사(封事)를 올려 선을 따르고 학문을 주장하는 방도를 아뢰었다.
선생은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하여 이렇게 관직에 제수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그 실제는 자연 엄폐할 수가 없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많이 성상께 아뢰었다. 성상은 이 문성공에게 묻기를, “성모의 어짊을 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나 다만 그의 재주가 어떠한가?” 하니, 이 문성공은 대답하기를, “홀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임무를 담당할 수 있는지는 신이 감히 알 수 없으나, 사람됨이 선(善)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도 충분합니다. 다만 병이 많아 사무가 많은 부서를 맡기기가 어려우니, 한가로운 부서에 두어서 경연(經筵)에 입시하게 하면 반드시 성상의 덕을 돕고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 종묘서 영에 임명하였는데 부르는 뜻이 정성스럽고 간곡하였다.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서울에 들어오자, 성상은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약물을 하사한 다음 편전(便殿)에서 인견하여 치도(治道)의 요체를 물었다. 이에 대답하기를, “임금은 반드시 먼저 몸과 마음을 수습하여 마음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근본이 서서 의리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함이 없어서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보필을 얻고 훌륭한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두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오늘날 조정의 인재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몸을 용납하여 지위만 보전하려는 자가 많고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자가 적으니, 이는 우려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백성을 구제할 계책을 묻자, 대답하기를,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주어야 하니, 이는 인심을 굳게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물러 나와 글을 올려 다시 이 내용을 지극히 말하였으나 상은 상소문을 오랫동안 내려 보내지 않았다. 승정원과 옥당에서 이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일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상소문 중에 학문을 논한 일 등은 내 마땅히 살펴야 하겠으나 다만 국가의 제도를 모두 변경하려 하였으니, 이는 또한 행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뒤에 인대(引對)할 때에 다시 예전의 말씀을 거듭 아뢰었다.
선생은 일찍이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이 연산군 때에 모두 파괴되고 어지러워졌는데 아직도 다 개혁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이것을 변통하여야 비로소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시세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위태로운 정국을 바꾸어 편안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요, 옛 법도를 모두 바꾸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문성공과 서로 의견이 합하여 또한 여러 번 이것을 개진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상이 선생이 녹봉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쌀과 콩을 하사하자, 선생은 간곡히 사양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휼하면 받는 것은 옛날의 도이다.” 하니, 선생은 부득이 받아서 모두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신이 선왕조(先王朝)의 고사(故事)를 따라 경연직을 겸임하게 하여 입시하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은 허락하지 않고 다시 위급함을 구원하라는 명을 내렸다. 선생은 사양하고 받지 않고는 여러 번 상소하여 물러날 것을 청하고 교외로 나가 명을 기다렸다. 상은 어찰(御札)로 소환하고 인견하여 머물 것을 권고하였으나 선생은 더욱 강력히 간청하였다. 이에 상은 비로소 잠시 돌아갔다가 겨울을 나고 서울로 올라올 것을 허락하였다. 집의와 여러 시(寺)의 정(正)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다음 해 봄에 이 문성공이 병조의 장관(長官)이 되어 선생에게 경륜하는 일을 맡길 만하다고 천거하자, 상은 특별히 병조 참지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병조 판서가 바로 그대의 친구인데 그대를 참지로 발탁하였으니, 어찌 뜻이 없겠는가. 마음을 함께하고 덕을 함께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일이다.” 하였다. 부르는 명을 여러 번 내리자, 선생은 억지로 서울에 들어갔는데 옮겨 이조 참의를 제수하고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선생이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자, 본직(本職)을 체직하도록 허락하고는 그대로 경연에 입시하고 물러나 돌아갈 계책을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 문성공이 정사를 담당하여 중외의 촉망을 받고 있어서 실로 국운을 만회할 기미가 있었으나 소인배들이 틈을 타 논죄하고 탄핵하여 지위에 편안히 있지 못하고 떠나가게 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그들의 모함과 날조를 밝히자, 소인배들은 더욱 노여워하여 선생까지 함께 탄핵하였다. 선생이 당일로 도성을 나와 파산(坡山)으로 돌아오니, 이에 태학생(太學生) 및 호남(湖南)과 해서(海西)의 유생 수백천 명이 글을 올려 구원하였다. 이에 상은 칭찬하여 답하고, 또 하교하기를, “만일 군자라면 당(黨)이 있음을 걱정하지 않으니, 나는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하고는 마침내 간당(奸黨) 중에 심한 자를 배척하여 쫓아내고 특별히 이 문성공을 총재(冢宰)로 임명한 다음 다시 선생을 이조 참의로 불렀다. 얼마 후 이조 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섯 번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선생은 들어가 사은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 1월 이 문성공이 별세하자, 선생은 도가 행해지지 못할 줄을 알고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 연달아 글을 올려 해직을 요청하니, 상은 비답하기를, “새로 어진 재상을 잃어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못하다. 현재 경과 함께 국사를 다스릴 것을 도모하니, 이 어찌 물러나겠다고 아뢸 때이겠는가.” 하였다. 몇 달 있다가 휴가를 받아 분황(焚黃)할 것을 청하자, 상은 하교하기를, “성모가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지키며 은거하여 지조를 지켰는데, 내가 여러 차례 부름으로 인하여 마음을 바꾸어 왔다. 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제 해가 저물어 가니, 마땅히 지방의 수령으로 하여금 안부를 묻게 하라.” 하였다.
다음 해에 국(局)을 설치하고 《소학(小學)》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선생을 부를 것을 청하자 이를 윤허하였다.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세 번 사은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문성공이 별세하자 세상일이 크게 변하였다. 여러 소인배들이 점점 등용되어 더욱 옛 원한을 갚으려 하였다. 이들은 선생이 다시 기용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추악한 말로 모함하여 비방하니, 선생은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겨울에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에 큰 변고가 있으니, 경(卿)이 물러나 산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선생은 마침내 조정으로 달려갔다.
상이 직언(直言)을 구하므로 마침내 상소문을 초하여 앞서 말했던 백성을 잘 길러 나라를 보전할 계책을 아뢰려 하였는데, 마침 큰 병이 나서 다음 해 여름에야 비로소 이 상소문을 올리고는 인하여 시골로 돌아갈 것을 청하고 돌아왔다. 태학의 여러 생도들이 선생을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답하지 않았다. 행상(倖相)이 궁중(宮中)과 결탁하여 유언비어를 선동하고 날조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24) 봄에 사화(士禍)가 일어났는데, 이에 관련되어 귀양 가거나 폄출(貶黜)당한 자는 모두 선생의 친구들이었다. 여러 소인배들이 이때를 틈타 기어이 선생까지 함께 몰아넣으려 하니, 선생은 더욱 스스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倭寇)가 깊이 쳐들어오자, 상이 장차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려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도성으로 들어가 국난(國難)에 달려가려 하였으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래 산야에서 일어나 붕당을 한다는 죄목을 입어서 불원간에 장차 죄를 받을 것이니, 국가에 비록 위급한 일이 있으나 의리상 감히 가볍게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 대가가 만약 서쪽으로 행차하시게 되면 마땅히 길가에서 곡하며 맞이할 것이니, 만일 성상의 고문(顧問)을 입는다면 대가를 따라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오직 물러나 구학(溝壑)에서 죽을 뿐이다.’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하룻밤 사이에 대가가 갑자기 출발하니, 선생이 거주하는 곳은 큰길과 수십 리의 거리였다. 대가가 임진 나루를 건너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강나루에 배가 끊겨 통행하지 못하였고, 왜병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선생은 마침내 통곡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산중으로 피난하였다. 광해군이 이천(伊川)에 머물면서 글을 내려 불렀으나 병환이 심하여 즉시 가지 못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군무(軍務)를 아뢰었다. 광해군이 편의대로 검찰사(檢察使)를 제수하고 말을 보내어 재촉하여 불렀다. 이때 왜적이 산골짝으로 두루 들어와 더욱 노략질과 살인을 자행하였다. 광해군이 급히 성천(成川)으로 옮기니, 선생은 어렵사리 성천에 도착하여 광해군을 뵙고 즉시 의주(義州)에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도중에 참찬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며, 다시 대사헌으로 바뀌었다.
선생은 상소하여 자신의 죄를 논열(論列)하고 인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의 계책을 아뢰었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을 전적으로 천운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 제왕들은 변고를 만나면 혹 조서(詔書)를 내려 자책하여 존호(尊號)를 삭제하고 혹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을 처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는 뜻을 분명히 알게 해서 국가의 흥복(興復)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제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히 자책하며,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과 궁인(宮人)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단서를 끊고, 정직한 선비를 등용하여 이목(耳目)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복종하여 원수인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보는 자들은 화의 싹이 이 상소문에 있을 줄을 알았다.
명나라 주사(主事)인 원황(袁黃)이 찬획(贊畫)으로 와서는 편지를 보내어 학문을 논하면서 오로지 아호(鵝湖)를 주장하고 낙민(洛閩)을 배척하였다. 그는 평소 뜻이 높고 거만하였으므로 제공(諸公)들은 그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아 답장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그리하여 선생에게 맡겨 답서를 쓰게 하자, 선생은 “소방(小邦)은 황조(皇朝)에서 반포해 준 경서 전주(經書傳註)와 성리(性理)에 관한 책들을 외고 익혀서 이 학설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원황은 다시 논란하지 못하였다. 여러 번 참찬과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산반(散班)에 나아갔다.
왜적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도굴하자, 명을 받들고 재신(宰臣)들과 봉심(奉審)하였는데, 일을 생각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결정할 적에 모두 선생을 추존하였다. 선생은 해주(海州)에 복명(復命)하였다.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선생은 병 때문에 남아서 중전(中殿)을 호위하였다. 호서(湖西)의 토적(土賊)이 크게 일어나자, 선생은 병환을 무릅쓰고 상경하여 글을 올려 대죄하였는데, 성상의 어찰(御札)에 변란(變亂)의 초기의 일을 들어, 말씀한 내용이 매우 준엄하였다. 처음 상이 서쪽으로 파천할 때에 임진 나루에 이르러서 이홍로(李弘老)에게 “성모의 집이 먼가 가까운가?” 하고 물으니, 이홍로는 본래 행상(倖相)의 문객(門客)이었는데, 길가에 있는 정자와 집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며 “저곳이 성모의 집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와서 나를 만나 보지 않는가?” 하니, 이홍로는 아뢰기를, “이런 위급한 때에 어찌 그가 기꺼이 와서 뵙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의주에 있을 적에 선생이 분조(分朝)에서 행재소로 달려온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모함하는 말을 올리기를, “성모가 이번에 오는 것은 세자를 위하여 내선(內禪)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은 이미 여러 번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므로 이때에 이러한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감히 스스로 변론하지 못하고 중한 처벌을 내리기를 원하였는데, 상은 다시 위로하여 타이르는 말씀을 내렸으나 선생이 진달(陳達)한 것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적이 영남의 10여 개 고을을 점거하고 소굴로 삼으니, 명군(明軍)은 오랜 전쟁에 지치고 피로하여 나아가 점령하지 못하였다. 일을 맡은 명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뒷일을 잘할 계책이 없으므로 왜적이 화친을 청한다고 핑계 대니, 황제에게 올린 일 중에 황제를 속이고 은폐한 사실이 많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올려 그 내용을 고발하자, 이 때문에 총독(摠督) 고양겸(顧養謙)은 크게 원한을 품고 자문(咨文)을 보내어 우리나라로 하여금 자신의 뜻에 따라 상주(上奏)하게 하였다. 상은 그들의 협박을 받고는 진실로 이미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였으나 우선 이 일을 의정부에 회부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뜻을 굽혀 고양겸의 자문을 따르려고 하여 선생과 함께 들어가 상께 대답하기로 약속하였다. 선생은 ‘우리가 국가를 회복할 수 있는 큰 계책은 오직 중국 장상(將相)들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에 달려 있으니, 그들의 뜻에 다소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상의 앞에 이르러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인데, 상이 매우 불쾌해하니, 유 정승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다가 그대로 물러 나왔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고양겸의 지시에 따라 황제에게 글을 아뢰었으나 상의 뜻은 화의를 주장했다 하여 선생을 허물하였다. 삼사에서 서로 글을 올려 화의를 배척하니, 이는 그 의도가 선생에게 있었다. 선생은 마침내 죄를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정유년(1597, 선조30) 가을에 다시 왜적이 쳐들어오니, 도성이 위급하였다. 친구들이 대부분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국난에 달려갈 것을 권하였으나 선생은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를 가지고 답하였으니, 이 내용은 본집(本集)에 자세히 보인다. 선생의 출처(出處)는 한결같이 도의(道義)를 따라 혹 부르는 명이 있어도 가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나 일찍이 부르는 명이 없이 스스로 간 적이 없었다.
무술년(1598, 선조31) 여름에 병환이 위독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유명(遺命)하기를, “내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어 마음속의 일을 밝히지 못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삼베옷을 입히고 종이 이불로 염습하여 소달구지에 싣고 고향에 돌아가 장례할 것이며, 묘 앞의 비석에 ‘창녕성모지묘(昌寧成某之墓)’라고만 써서 자손들로 하여금 나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알게 하면 된다.” 하였다. 6월 6일에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4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파산의 향양리(向陽里)에 있는 유향(酉向)의 산 청송 선생의 묘소 뒤에 장례하였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도 소인배들은 원수처럼 여기고 미워하기를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신축년에 정인홍(鄭仁弘)은 자기의 무리들을 사주하여 상소하여 선생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무함(誣陷)하고 비방하게 하였다.
경인년에 최영경은 도신(道臣)의 은밀한 장계로 인하여 체포되었는데, 이때 선생은 조정에서 이미 물러 나와 있었다. 선생이 정승 정철(鄭澈)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가 평소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니 이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자, 정 정승은 궁중에 들어가 선생의 말씀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에 성상의 뜻이 풀려 석방되었는데, 뒤에 탄핵(彈劾)하는 글을 만나 다시 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이때 여러 소인들은 도리어 선생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말하니, 선조는 어필로 ‘모함하여 죽였다[搆殺]’는 두 글자를 삭제하였으나 끝내 관작을 추탈(追奪)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유림(儒林)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오공 윤겸(吳公允謙)과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선생이 무함을 받은 내용을 아뢰었다. 상은 또한 평소에 선생이 대유(大儒)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즉시 관작을 복구하도록 명하였으며, 얼마 후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제생들은 파산에 서원을 세워 청송 선생과 함께 제향하고 있다. 나는 늦게 태어나서 비록 미처 수업하지는 못하였으나 어릴 때부터 선생을 태산처럼 우러러 사모하였다. 삼가 선배와 장자(長者)에게 들으니, 선생은 효성이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청송 선생이 일찍이 병환이 위독하자,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약에 섞어 올려서 몇 달 동안의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고 상례(喪禮)의 절문(節文)을 모두 《소학》과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다.
선생은 평소 몸을 수렴하고 단속하여 말씀과 행실이 모두 모범이 될 만하였다. 학문과 실천에 있어서는 후학들이 엿보고 측량할 수 있는 바가 아니나 기상이 장중하면서도 편안하고 온화하여 바라보면 사람들이 도덕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율곡과 사단 칠정(四端七情)의 이기(理氣) 선후(先後)에 대한 내용을 논변하여 왕복한 편지가 수천만 자에 달하는데, 선유(先儒)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내용이 많다. 율곡은 일찍이 칭찬하기를, “견해의 도달한 경지는 내 다소 나은 점이 있으나 조행(操行)의 독실하고 확고함은 내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으며, 선생 또한 말씀하기를, “율곡은 참으로 나의 스승이다.” 하였다. 선생은 평소 책을 읽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저술하고 글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집 안에 문집 약간 권이 보관되어 있으니, 행여 후세에 덕(德)을 아는 선비를 기다리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 선생은 스스로 산림(山林)을 지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우리 선조(宣祖)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 덕이 같은 현자가 서로 추존하므로 부득이 세상에 나왔는데, 평소의 포부를 펴지 못하고 여러 모함하는 말들이 집중되어 끝내 낭패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현명한 군주가 선(善)을 좋아하고 현자를 좋아하는 정성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려던 본래의 뜻이 행해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도가 장차 폐지되는 것이 천명이라는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유현(儒賢)이 훌륭한 세상을 만남은 예로부터 보기가 드물었다. 우리 조선조에 기묘년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시기였으나 간신들이 모함하여 사림의 지극한 애통함이 되었는데, 선생이 만난 환경이 불행히도 이와 같았는바, 다만 화를 당함에 다소 경중(輕重)이 있을 뿐이다. 옛말에 ‘하늘의 인자하지 못함이 심하다’ 하였는데, 이 또한 이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는가 보다. 그러나 도맥(道脈)을 잇고 올바른 학문을 전수하여 드높이 백세(百世)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으니, 등용되고 버려지며 훼방하고 칭찬함에 따라 더 보태지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군수 여량(汝樑)의 따님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문영(文泳)은 일찍 죽었고 차남 문준(文濬)은 현감이며, 장녀는 별좌(別坐)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대사간 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문잠(文潛)이다. 문준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역(櫟)이고 다음은 익(杙)과 직(㮨)이며, 딸은 세 명을 두었다. 남궁명은 2남 3녀를 두었고 윤황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내외의 손자가 매우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도가 천하에 있어 / 道在天下
드러나고 은미함이 시기가 있네 / 顯微有幾
훌륭하신 청송 선생이여 / 思皇聽松
일찍 훌륭한 스승을 얻으셨네 / 早自得師
선생은 이를 이어 / 先生接之
올바른 학문을 들었다오 / 正學是聞
마음을 가라앉히고 힘써 구하여 / 潛心力求
하늘이 사문을 도왔네 / 天與斯文
덕은 반드시 이웃이 있으니 / 德必有隣
군자와 함께하였다오 / 君子同人
정밀하고 엄격하고 치밀하며 / 精嚴縝密
고명하고 통달하였네 / 高朗洞達
이기의 묘함을 연구하고 / 妙窮理氣
사단 칠정을 논하였다오 / 商論四七
은미함을 개발하고 지극한 경지에 나아가 / 發微造極
과녁을 깨뜨리고 얼음처럼 풀렸네 / 的破氷釋
이미 선현의 밝음을 이었고 / 旣紹前明
또한 후생들의 몽매함을 열어 주었다오 / 亦啓後蒙
구고에 명성이 알려지니 / 九皐聖聞
하물며 자기가 사는 고을에 있어서랴 / 矧惟在邦
비록 맞이하여 등대함을 입었으나 / 雖被延登
때가 매우 어려웠네 / 孔艱厥時
아, 저 거짓말하는 간신들이여 / 嗟彼奸罔
참소하는 말로 비방하고 속였네 / 讒言詆欺
무릎에 올려놓을 듯 못에 빠뜨릴 듯 하니 / 加膝墜淵
옛 현자들이 탄식한 바라오 / 昔賢所歎
사람이 죽고 도가 버려지니 / 人亡道廢
어찌 천운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 孰云匪天
운수가 다하면 이치가 돌아와 / 數窮理復
고리를 따라 돌 듯하니 / 若循環然
선생의 도가 / 先生之道
이제 빛난다오 / 於今有光
소자는 뜻은 크나 소략하여 / 小子狂簡
참람하게 명문(銘文)을 지었네 / 僭述銘章
큰 묘에 비석을 세워 / 碑于大隧
무궁한 후세에 밝히노라 / 用昭無疆

[주D-001]행상(倖相) : 군주의 총애를 받는 정승이란 뜻인데,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D-002]아호(鵝湖)를 …… 배척하였다 : 아호는 산 이름으로, 강서성(江西省) 연산현(鉛山縣) 북쪽에 있다. 송나라 때 주자(朱子)가 육구연(陸九淵) 형제와 이곳의 아호사(鵝湖寺)에서 만나 서로 자신의 학문을 논변하였는바, 아호는 육상산(陸象山)을, 낙민은 정주(程朱)를 가리킨다.
[주D-003]구고(九皐) : 깊은 웅덩이를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우니 그 소리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 하였는데, 선비가 시골에서 학문을 쌓고 수행하여 명성이 임금에게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4]무릎에 …… 하니 : 사랑하여 나오게 하고자 할 때에는 장차 무릎에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미워하여 물러가게 하고자 할 때에는 장차 연못에 빠뜨릴 듯이 하여 애증(愛憎)을 마음대로 하여 법도를 넘음을 이른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위정자들은 사람을 나오게 할 때에는 장차 무릎에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사람을 물러가게 할 때에는 장차 못에 빠뜨릴 듯이 한다.[今之君子 進人若將加諸膝 退人若將隊諸淵]” 하였다.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13권
 비명(碑銘) 9수(首)
우계 선생 신도비명(牛溪先生神道碑銘) 병서


만력(萬曆) 26년(1598, 선조 31)에 우계 선생(牛溪先生)이 작고하였다. 그 뒤 4년이 지나 정인홍(鄭仁弘)이 선생에 대해 무함을 가하였는데, 또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공의(公議)가 비로소 정해지면서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역명(易名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하는 의전(儀典)이 차례로 거행되었다. 이에 군자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우세했다가 드디어는 하늘이 이기는 이치가 밝게도 징험되었도다. 사람은 세력으로 하고 하늘은 이치에 따르는 법, 세력이 행해짐은 한때이지만 이치의 밝음은 백세에 뻗치도다. 이처럼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행을 권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선생의 풍도를 사모하는 공경대부와 사인(士人)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선생의 도가 이제 크게 펴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묘도(墓道)에 아직도 드러내 새기는 일을 하지 못했으니, 이는 선생의 덕을 드러내고 후세를 인도하는 방도가 못 된다.”
하고, 마침내 서로 재물을 모아 비석을 마련한 뒤 그 명사(銘詞)를 나에게 부탁해 왔다. 이에 내가 고루(固陋)하다는 이유로 누차 사양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휘(諱)는 모(某)요 자(字)는 호원(浩原)이요 자호(自號)는 묵암(默庵)으로서, 우계(牛溪)라고 하는 호는 학자들이 선생을 일컫는 호칭이다.
성씨(成氏)는 본래 창녕(昌寧)으로부터 비롯된다. 비조(鼻祖)인 인보(仁輔)는 고려 때 중윤(中尹)의 관직에 이르렀고, 6대조 석연(石䂩)은 아조(我朝)에서 벼슬하여 예조 판서가 되었다. 증조 휘 충달(忠達)은 현령으로 판서를 증직받았고, 조부 휘 세순(世純)은 지중추부사로 시호(諡號)가 사숙(思肅)이다.
부친 휘 수침(守琛)은 유속(流俗)을 높이 초월한 절조(節操)의 소유자로서 은거하여 도를 강론하였는데, 세상에서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라고 불렸다.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죽어서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는데,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배필로 삼아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 30)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동유(童儒) 시절부터 자질이 영민하여 공부를 잘하였다. 17세에 사마(司馬) 양시(兩試 진사시와 생원시임)에 응시하였다가 병으로 복시(覆試)에 나아가지 못했는데, 마침내 과거 시험 보는 일을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온 마음을 쏟은 결과,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에 배움과 실천면에서 모두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동배들로부터 크게 추복(推服)을 받았다.
청송(聽松)이 일찍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선생이 2번이나 허벅다리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기도 하였으며, 급기야 상(喪)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묘(廬墓) 생활을 하였다.
선묘(宣廟) 초년에 방백이 탁월한 학행(學行)의 소유자로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여 2번이나 참봉을 제수받았고 잇따라 6품으로 훌쩍 뛰어올랐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또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제수받았을 때는 사은(謝恩)하는 일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시골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원근(遠近) 지역의 학자들이 날로 찾아오자 선생이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서실(書室)의 내규(內規)를 지어 제생(諸生)에게 행동 규범을 제시하였다.
그 뒤로 장원(掌苑), 사지(司紙)와 주부, 판관, 첨정과 공조의 좌랑ㆍ정랑을 차례로 제수받았으며, 대직(臺職)으로 부름을 받은 것으로 말하면 지평이 10여 차례, 장령이 2번이나 되었는데, 심지어는 마여(馬轝)를 내주면서 타고 오게까지 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고 응하지 않았다.
상이 일찍이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에게 문의하기를,
“성혼(成渾)이 어질다는 것은 내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만, 그의 재주는 어떠한가?”
하니, 문성이 대답하기를,
“그에게 독자적으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임무를 맡길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이 감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사람됨이 선(善)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면 천하를 넉넉하게 해 줄 수 있는 법입니다. 다만 그는 병이 잘 걸리는 허약한 체질이라서 복잡한 임무는 견뎌내지 못할 것이니, 한가한 부서에 놔 두고서 자주 경악(經幄)에 입시(入侍)하게 한다면 분명히 성덕(聖德)을 보익(輔益)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사년에 종묘서 영(宗廟署令)에 임명하면서 간절히 부르자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상경하였다. 이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는 동시에 약이(藥餌)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인견(引見)하여 치도(治道)의 요체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니, 선생이 답변드리기를,
“인군(人君)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렴(收斂)하여 지기(志氣)가 늘 맑아지도록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확립되면서 의리가 밝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치란(治亂)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서 단지 인주(人主)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긴 하나 반드시 훌륭하게 보좌할 수 있는 정승을 얻어서 널리 인재를 거두어 각종 직위에 배치시키도록 한 뒤에야 정치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현재 조정을 보면 무사 안일주의로 자리만 보존하려는 신하들이 많은 반면, 임금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려는 인사들은 보기 드무니 이것이 가장 걱정됩니다.”
하였다. 또 상이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과 관련하여 그 대책을 물으니, 선생이 답변드리기를,
“세입(稅入)을 헤아려 지출을 하되 위의 비용을 덜어서 아래 보태 준다면 그 은혜가 백성의 마음을 결속시켜 천명(天命)을 길이 받드는 기초가 마련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다시 봉사(封事 임금만 보도록 봉해서 올리는 상소문)를 올려 조금 전에 아뢰었던 내용을 부연하여 강력하게 개진하였다. 그런데 그 상소문을 오래도록 안에만 놔 두고 있자 정원이 선시(宣示)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소한 내용 가운데 가령 학문을 논한 대목 등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성찰을 할 것이다마는, 나라의 제도를 모조리 경장(更張)하려고 하는 것은 또한 행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 제도가 연산(燕山)에 의해서 온통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공물(貢物)의 진상(進上)을 중하게 늘렸던 일이 아직껏 다 개혁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 변통하지 않는다면 좋은 정치를 이루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상이 이 점을 상당히 난처하게 여긴 것이었다. 그 뒤에 인대(引對)하는 기회에 또다시 그 주장을 펼쳤었는데, 당시 이 문성공의 뜻도 선생과 합치되어 누차 이를 언급하곤 하였으나, 끝내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선생은 서울에 있을 때 녹봉(祿俸)을 받지 않았다. 상이 이 말을 듣고 특별히 미두(米豆)를 하사하였는데, 선생이 사양을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부족한 것을 도와줄 때는 받는 것이 옛날의 도이다.”
하였으므로, 선생이 곡물을 받은 뒤에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풍처창 수(豐儲倉守)와 전설사 수(典設司守)로 옮겨졌다. 대신이 계청(啓請)하여 직질(職秩)을 높여 주고 경연 참찬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상이 한직(閑職)에 몸담으면서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몇 차례나 상소를 올려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하면서 교외에 나가 명을 기다리자, 상이 하교하여 소환한 뒤 인견(引見)하여 극력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더욱 간절하게 퇴직을 청하자 상이 비로소 우선 돌아가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 뒤 누차 사헌부 집의와 제시(諸寺)의 정(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미년 봄에 특별히 병조 참지에 제수하면서 몇 번이나 소명(召命)을 내리자 선생이 마지못해 입경(入京)하였다. 얼마 있다가 이조 참의로 옮겨지고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선생이 3차례나 상소하여 사직한 끝에 허락을 받고 명에 의하여 경연에만 입시하였다.
문성공이 당시 조정에 있으면서 중외(中外)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는데 선묘(宣廟) 역시 바야흐로 융숭하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군소배들이 어떻게든 해치려고 들면서 하찮은 일들을 주워 모아 공을 탄핵하자 선생이 상소하여 그 무망(誣罔)을 변박(辨駁)하였는데, 군소배들이 더욱 노여워한 나머지 마침내 선생까지 싸잡아 탄핵하였으므로 선생이 그날로 파산(坡山 파주(坡州))에 돌아왔다.
이에 태학생 4백 70인과 호남 및 해서(海西)의 유생 수백 인이 서로 잇따라 항장(抗章)을 올리면서 사정(邪正)을 가려 진달드리자, 상이 포답(褒答)을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진정 군자이기만 하다면 당(黨)이 있다고 해서 걱정할 것이 없다. 나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당에 끼고 싶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군소배들을 모조리 축출한 뒤 다시 이조 참의로 선생을 불렀는데, 선생이 누차 사직하여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조정에 나와 명에 숙배(肅拜)하였다. 뒤이어 참관으로 승진되자 5차례나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문성공이 죽자 선생이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 잇따라 상소하여 물러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이제 막 어진 재상을 잃어 나의 잠자리가 편안치 못한데, 이러한 때에 나랏일을 함께 다스려 나갈 이를 찾는다면 경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나서 분황(焚黃 추증된 선조의 무덤 앞에서 관고(官誥)의 부본(副本)을 불사르는 것)하는 일로 휴가를 청해 돌아가게 되었는데, 상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리(長吏)를 보내 안부를 묻고 음식을 하사하게 하였다. 그 뒤 찬집청(纂集廳)을 설치할 때 선생을 당상으로 부르면서 3번이나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문성공이 죽고 나자 상황이 크게 변한 가운데 군소배들이 차츰 조정에 진출하면서 더욱 옛날의 원한을 심화시켜 나갔는데, 선생이 다시 기용(起用)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추악한 말로 무함하며 헐뜯자 선생이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다시 이조 참관에 임명되자 간절히 사양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자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 만큼 경이 물러나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으므로, 선생이 마침내 조정에 나아왔다.
당시 역변(逆變)이 진신(搢紳) 사이에서 나온 관계로 연루자(連累者)들이 점점 늘어만 갔는데, 선생이 평반(平反 변통을 해서 죄를 경감해 주는 것)의 의논을 극력 주장하는 한편 상소를 하여 옥사(獄事)를 완화시킬 것과 형(刑)을 신중히 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역괴(逆魁)와 같은 종족이었던 어떤 상신(相臣) 하나가 진대(進對)하다 잘못 말하자 논자들이 기망죄(欺罔罪)를 적용하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극력 말하며 변호한 결과 대죄(大罪)를 면하게 해 준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임금의 총애를 받는 정승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화(禍)를 일으킬 조짐이 명백해지자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는데, 태학의 제생(諸生)이 상소하여 만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뒤로는 선생을 부르는 명이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최영경(崔永慶)이 사람들의 입에 올라 옥에 갇히는 몸이 되자 선생이 정상철(鄭相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정상이 입대(入對)하여 영경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극력 아뢰었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조금 풀어졌다. 그 뒤 신묘사화(辛卯士禍)가 일어났을 때는 이에 연루되어 유배당한 사람들이 모두 선생의 지고(知故)들이었는데, 군소배들이 화심(禍心)을 늘 간직하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선생까지도 화망(禍網)에 몰아넣으려 하였다.
이듬해 왜구(倭寇)가 깊이 쳐들어옴에 따라 상이 장차 서쪽으로 피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선생이 뛰어들어 국난(國難)을 구하려 하다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디 산야(山野)에서 일어난 몸으로 현재 당파를 형성하고 있다는 지목을 받는 가운데 밤낮으로 죄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니, 나라가 비록 위급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의리상 감히 경솔하게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승여(乘輿)가 만약 서쪽 지방으로 떠나게 될 경우 길옆에서 곡하며 맞는 것이 마땅할 것이니, 그때 자문을 구하시는 은혜를 받게 되면 마땅히 대가(大駕)를 따를 것이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오직 물러가 구렁에 빠져 죽을 따름이다.’ 하고 자제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상이 거연(遽然)히 도성을 떠날 계책을 결정하게 되었다. 선생의 집은 관로(官路)로부터 20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거가(車駕)가 이미 임진(臨津)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는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아가려고 하였으나, 임진강 나루를 건너는 길이 이미 끊어진 데가 난병(亂兵)이 벌써 길들을 막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통곡을 하면서 병든 몸을 이끌고 산속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광해(光海)가 세자의 신분으로 이천(伊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을 내려 선생을 불렀는데, 병이 심해져 나아가지 못한 채 상차(上箚)하여 16개 조목의 일을 개진하였다. 그러자 광해가 편의대로 선생을 검찰사(檢察使)에 임명한 뒤 잇따라 2번이나 불렀으므로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소명(召命)에 응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행재(行在)에 달려가서 상소를 하며 선장(選將), 치병(治兵), 취량(聚糧) 등의 3가지 계책을 논하고, 인하여 또 말하기를,
“적국(敵國)에 의한 외환(外患)을 하늘의 운수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제왕이 변고를 당하게 되면, 혹 조서를 내려 자기의 죄로 돌리면서 존호(尊號)를 삭제해 버리기도 하였고, 혹 나라를 그르친 신하를 죄줌으로써 사방에 사과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역시 큰 뜻을 분발하여 통렬하게 자신을 경책(警責)하는 동시에 근습(近習)들이 궁중과 교통(交通)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폐단을 근절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한 인사들을 등용하여 이목(耳目)의 역할을 맡긴다면, 인심(人心)이 열복(悅服)하고 구적(仇賊)도 소멸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상소가 나오자 사람들이 이를 보고는 장차 화의 씨앗이 여기에서 비롯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명(明) 나라의 찬획(贊畫) 원황(袁黃)이 글을 보내 학문을 논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집중 공격해 왔다. 이에 제공(諸公)이 대론(對論)을 벌이는 것을 난처하게 여기면서 선생에게 답변을 작성해 주도록 부탁하였는데, 선생이 말은 겸손하면서도 이치는 바르게 논리를 전개해 나가자 원황이 다시는 논란을 벌이지 못하였다.
전후에 걸쳐 몇 차례나 참찬과 도헌(都憲)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사양하고 산반(散班)에 몸을 담았다. 왜적이 선릉(宣陵 성종(成宗)의 능)과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을 파헤치자 선생이 명을 받들고 봉심(奉審)하면서 온당하게 변고에 대처한 뒤 해주(海州)의 행궁(行宮)에서 복명(復命)하였다. 그러다가 대가가 환도(還都)할 때에는 선생이 남아서 중전(中殿)을 호위하였는데, 호서(湖西)의 적이 일어나자 선생이 마침내 도성으로 향하였다.
처음에 임진왜란을 당해 서쪽으로 피난을 떠날 때, 상이 임진(臨津)에 이르러서 하문하기를,
“성혼의 집이 여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였는데, 간인(奸人) 이홍로(李弘老)가 가까운 대안(對岸)의 자그마한 촌락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면서 대답하기를,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하문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하자, 홍로가 대답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찾아와 뵈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 선생이 분조(分朝)에서 행재(行在)로 달려오자 홍로가 또 참소하여 말하기를,
“성혼이 이곳에 온 목적은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도록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일단 그런 이야기를 누차 들어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대죄(待罪)하자, 하교를 하여 변란 초기의 일까지 소급해 거론하였는데, 그 사지(辭旨)가 준열하고 엄하였다.
이에 선생이 황공한 나머지 감히 해명하지 못한 채 무거운 처벌을 내려 줄 것을 청하자 상이 너그럽게 답하긴 하였으나, 그 뒤 참찬 겸 비국 제조로서 선생이 진달하며 건의해도 대부분 들어주지 않았다.
왜적이 영남 지방의 10여 군(郡)에다 참호를 파고는 버티고 있었는데, 중국 군대 역시 피로에 지친 나머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때 총독(摠督) 고양겸(顧養謙)이 동쪽의 일을 전담하면서, 우리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강화(講和)하자는 왜적의 요구를 우선 들어주고 뒷날을 도모하려고 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먼저 중국 조정에 상주(上奏)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묘당에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왜적을 물리칠 계책이 궁했으므로 고양겸의 자문대로 따르려 하였으나, 군의(群議)는 매우 강력하게 화의(和議)를 공격하고 나섰다.
그런 중에서도 유독 이공 정암(李公廷馣)만은 호남을 순찰하면서 건의하기를 ‘우선 강화를 허락함으로써 적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당시 나랏일을 맡고 있던 유상 성룡(柳相成龍) 역시 이 주장에 동의하여 선생과 약조를 한 뒤 함께 입대(入對)하였다.
이에 상이 고양겸의 자문을 들어줄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하문을 하자, 선생이 답변드리기를,
“우리나라가 일단 독자적으로 전수책(戰守策)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절제(節制)하는 권한이 모두 고양겸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그가 하는 말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정암으로 말하면 충의(忠義)의 대절(大節)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말한 것이 나라를 걱정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심각하게 죄를 따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엄청나게 노여워하였는데, 이때 유상(柳相)은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만 물러나오고 말았다. 이에 삼사(三司)가 번갈아 소장을 올려 화의를 배척하였는데, 그 의도가 선생에게 있었으므로 선생이 인구(引咎)하고 사직을 청한 뒤 시골로 돌아왔다.
무술년 여름에 병이 위독해지자 먼저 아들 문준(文濬)에게 명을 내리기를,
“내가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은 몸으로 심사(心事)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옷은 포의(布衣)로 하고 염(斂)은 지금(紙衾 종이 이불)으로 할 것이며, 띠풀을 엮어 관(棺)을 덮고 소가 끄는 수레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충분하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6월 6일에 이르러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의미함)하였는데, 향년 64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파주(坡州) 향양리(向陽里)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었다.
선생이 죽고 난 뒤에도 군소배들이 미워하는 감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인홍이 일단 자기 패거리를 사주하여 무함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자, 권세를 좌우하는 자가 이에 따라 멋대로 헐뜯고 짓밟은 결과 마침내 선생의 관직이 추탈(追奪)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하여 유림(儒林)의 기운이 크게 저상(沮喪)되었다.
금상(今上)께서 대위(大位)에 오르시자 오공 윤겸(吳公允謙)과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선생이 무함을 당하게 된 시말(始末)을 아뢰어 설명드렸는데, 상 역시 평소 선생이 대유(大儒)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복관(復官)을 명하고, 뒤이어 의정부 좌의정의 증직과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에 제생(諸生)이 파산(坡山)에 서원을 건립한 뒤 청송 선생을 함께 모시고 선생의 향사(享祀)를 받들게 되었다.
나는 세상에 늦게 태어나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받을 기회는 없었으나 다행히 여러 노선생들로부터 그 서론(緖論)에 대해 나름대로 들을 수가 있었다. 청송(聽松)의 학문은 대체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에게서 나왔는데 선생이 이른 나이에 가정에서 이에 대해 훈도를 받았고, 또 일찍이 퇴도(退陶 이황(李滉))를 존경하며 사숙(私淑)하였으니, 그 학문은 고정(考亭 주희(朱熹))을 준칙(準則)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도를 강명(講明)하고 실천하는 데에 모든 공력을 쏟았는데, 특히 마음의 본원(本源)을 밝혀 단속하는 데에 더욱더 독실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평소의 언동(言動)이나 집안을 다스리는 의법(儀法)으로부터 상제(喪祭)의 절문(節文)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에 있는 대로 행해 나갔다. 이렇듯 한결같이 성(誠)과 경(敬)에 근본을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닦아 기른 결과, 덕기(德器)가 확고하게 형성되었으므로 누구든 선생을 바라보기만 해도 도를 소유한 군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젊어서 율곡과 교분을 맺고서 이택(麗澤)의 도움을 주고받았다. 일찍이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선후(理氣先後)의 설을 함께 논하면서 수천 만 언(言)의 서신을 왕복하였는데, 그중에는 선유(先儒)들이 미처 드러내 밝히지 못한 내용도 많이 있었다. 율곡이 언젠가 공을 일컬어 말하기를,
“가령 견해의 심천(深淺)을 굳이 논한다면 내가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확고히 간직하고 실천하는 면에 있어서는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하였다. 선생의 문장을 보아도 경술(經術)에 본원(本源)을 둔 가운데 명쾌하고 통창(通暢)하며 전아(典雅)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 문집 몇 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본래 은거하면서 덕을 닦으려고 하였을 뿐 세상을 담당할 뜻은 당초부터 없었는데, 급기야 명성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선묘(宣廟)의 특별한 은총을 크게 입어 불차지위(不次之位 순서를 무시하고 특별히 발탁하는 것)의 대우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조정에 몸담고 있었던 시간을 모두 합쳐 보면 1년도 채 차지 않았다. 율곡을 위해서 한 번 해명해 준 것이 마침내 군소배들의 미움을 받게 된 나머지 결국은 그들의 중상모략에 걸려 지업(志業)을 제대로 펴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운명적으로 도가 폐해지려는 때였던 모양이다. 이 말이 맞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령 선생이 죽은 뒤에 포숭(褒崇)하는 일이 행해져 조금 사문(斯文)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하더라도 세도(世道)가 교상(交喪)하게 된 일에 대해서야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군수 여량(汝樑)의 딸로서 모두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문영(文泳)은 일찍 죽었고 차남 문준(文濬)은 현감이며, 장녀는 별좌(別坐)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부윤 윤황(尹煌)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의 아들로 모(某)가 있다. 문준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역(櫟)이고 차남은 익(杙)이고 그 다음은 직(㮨)이며, 딸이 세 사람 있다. 남궁명은 3남을 두었고, 윤황은 5남을 두었다. 외손으로 남녀가 매우 많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사문에 복을 내리사 / 天胙斯文
철인이 한꺼번에 나게 했도다 / 幷生哲人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 坡山石潭
유덕군자(有德君子) 반드시 지기(知己) 있는 법 / 德則有隣
송 나라 때 주회암(朱晦庵)과 장남헌(張南軒)처럼 / 擬宋朱張
서로들 인덕(仁德)으로 도와줬다오 / 相輔以仁
도와 기의 오묘한 관계 / 道器之妙
성과 정의 미묘한 속성 / 性情之微
체와 용의 근원 하나이어니 / 體用一源
둘로 나뉘면 결별이라오 / 二之則離
자세히 따져 묻고 분명히 해명하여 / 審問明辨
의심할 여지없이 회통했나니 / 會通無疑
숨겨졌던 내용들 확충시키고 / 旣擴前秘
제기될 의문점 해소했도다 / 亦徹來蔽
숨고 나온 것은 무슨 마음이었던가 / 隱見何心
오직 의리 입각한 행동이었지 / 惟義之比
근실한 우리 선생 / 釁釁先生
완덕(完德) 속에 갖추고서 정도를 걸었도다 / 含章履貞
몹시도 어려웠던 시대를 만나 / 遭時孔囏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형통했지 / 身困心亨
사람들은 내 마음 안 알아줘도 / 人莫我知
하늘만은 속일 수가 결코 없는 법 / 天不容欺
사람들이 우세하여 액운당하다 / 人勝而阨
하늘의 뜻 정해짐에 회복되었네 / 天定乃復
일단 회복되고 나자 / 亦旣復矣
발산되는 빛 / 不顯其光
백세 뒤에라도 / 百世以俟
남긴 글 휘황하리 / 遺文煒煌
도덕 군자 끝까지 왜곡된다면 / 道而終詘
선인(善人)들 어떻게 북돋우리요 / 善者曷勗
후대의 학자들 부탁하노니 / 凡厥來學
나의 이 비명(碑銘) 잘 살피시기를 / 鑑此鑱石


 

[주D-001]사람이 …… 이치 : 난세(亂世)에는 악인이 위세를 떨치다가도 천운(天運)이 순환하여 하늘이 본래의 힘을 발휘하게 되면 악인이 망하면서 정상화된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오자서전(伍子胥傳)에 “사람의 무리가 많으면 하늘을 이길 때도 있지만 하늘이 정해지면 또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이라고 하였다.
[주D-002]이택(麗澤)의 도움 : 이택은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연못이라는 뜻으로서, 붕우간에 서로 도움을 주며 학문을 토론하고 덕을 닦아 나가는 것을 말한다. 《周易 兌 象辭》
[주D-003]세도(世道)가 …… 일 : 《장자(莊子)》 선성(繕性)에 “세상은 도를 잃고 도는 세상을 잃었으니, 세상과 도가 서로 잃어버린 것이라 하겠다.[世喪道矣 道喪世矣 世與道 交相喪也]”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