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전라 영암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영암군(靈巖郡)

아베베1 2009. 11. 23. 10:13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全羅道)
영암군(靈巖郡)


동쪽으로 나주 경계까지 14리, 북쪽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강진현 경계까지 17리, 해남현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해안까지 5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월나군(月奈郡)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에 낭주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로 고치고, 현종 9년에 다시 강등되어 영암군이 되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월나(月奈)ㆍ낭주(朗州)ㆍ낭산(郎山).
【성씨】 【본군】 최(崔)ㆍ박(朴)ㆍ주(周)ㆍ백(白)ㆍ혜(嵇)ㆍ육(陸). 곤미(昆湄) 허(許)ㆍ유(庾)ㆍ배(裵)ㆍ전(田)ㆍ종(種)ㆍ유(柳). 진남(鎭南) 혜(嵇)ㆍ오(吳)ㆍ육(陸). 북평(北平) 조(曹). 송지(松旨) 김(金)ㆍ전(全). 심정(深井) 김(金) 전(全)이라고도 한다. 회의(懷義)도 같다.
【풍속】 근엄하고 소박하며 화려함이 없다. 군승(郡乘)에, “농업에 전적으로 종사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 하였다.
【형승】 긴 내가 성을 안았다. 유관(柳觀)의 시에, “긴 내가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땅이 창해 바다와 접했다. 고려 김췌윤(金萃尹)의 시에, “땅이 창해 바다와 접하여 장한 경치가 많다.” 하였다.
【산천】 월출산(月出山)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렀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外華蓋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고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흐림과 갬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하늘이 영험한 자라로 하여금 세 개의 섬을 짊어지고, 지상으로 황홀하게 옮겨 놓게 했구나. 오정(五丁 다섯 역사)이 갑자기 촉도(蜀道)를 다시 뚫어 깊게 둘러싸인 계곡에 높은 능선이 위태롭구나. 나무꾼이 오지 않으니 속세의 번거로운 일 없고, 다만 신선이 몰래 보호할 뿐이로다. 어두운 골짜기는 연기와 아지랑이 아득하게 자리잡고, 우뚝한 봉우리는 해와 달을 가렸구나. 내가 산 아래 와서 가던 말고삐를 푸니, 서리 맞은 대의 한 가지를 부질없이 가졌어라. 댕댕이 덩굴을 더듬으며 곧장 올라가서 얼마나 알쏘냐. 기러기 등에 남은 태양이 이미 아래를 엿보누나. 서쪽 봉우리 높고 높아 우뚝 솟은 모양인데, 사나운 범이 노하여 걸터앉았고 물소가 달려가는 모양이로다. 나그네의 흥이 기이함을 탐내어 험난함을 잊고, 뱀 서리듯 몸을 굽히면서도 피로한 줄 모르겠네. 길이 막히니 큰 돌이 홀연히 눈 안에 들어온다.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 어찌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처음 보매 솥밭같이 솟아서 만 경(京)이나 되게 무겁더니 손을 따라 둘러보니 하나의 쇠꼬리만큼 가볍구나. 하늘은 새벽 놀이 퍼져 붉게 섞여 윤택하고, 땅은 저녁 아지랑이를 뿜어 내어 푸른색 진하게 떠오른다. 상사(相師)는 신선이 되어 아득하게 편안히 가버리고, 삽상한 남은 바람 천고에 길이 부는구나. 상사는 지난 날에 홀로 간 날이 있어, 소나무 아래 돌문에서 날마다 놀았구나. 돼지를 타고 숨어 노니 물질 밖[象外]의 경지요, 거마(車馬)를 비웃으니 시끄러움을 따르는 것을 낮게 여기는구나. 어느 때나 기러기 그림자를 용암(龍巖)에 머물게 할까. 교묘한 생각이 오로지 조물주를 뺏고 싶구나. 향기로운 진흙으로 만들어 낸 봉우리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오히려 다시 붓끝을 번거롭게 해야 하겠구나. 영원히 항상 오봉(五峯)이 솟을 것이니, 누가 마룻대[棟]가 부러지고 사람이 시들었다고 한탄할까. 하물며 쇠지팡이를 남겨 벽 구석에 걸어 두었으니, 호랑이를 항복받은 이상한 자취가 길이 희미해지리. 해상(海商) 백 명이 옛날에 바다를 넘어갈 때, 산 위의 신광(神光)을 아득히 바라 보았어라. 산에 올라 성인을 배알하고 마침내 집을 엮으니, 동구(洞口)의 쑥과 띠를 마구 베었네. 종신토록 다시는 옛 마을[故里] 생각하지 않고 시냇물 마시고 초목을 먹으며 바위 문에 의지하네. 푸른 벽에는 분명히 자금(紫金)의 상(像)이라, 내려와 역사를 본들 누가 다시 알 것인가. 숲 속의 중과 시골의 노인이 억지로 칭찬하니, 눈[雪]에 새기고 구름에 새겨 놓은 듯 숱한 분(枌)나무 패(牌)로다. 비바람 무정하여 상(像)이 들어 있는 누각을 무너뜨리니, 끊어진 서까래와 깨진 주초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도다. 백 척이나 되는 층층대를 홀로 밟아 멀리 가는데, 네모진 봉분을 좌우에 높이 쌓고 쌓았도다. 숨은 늙은이[逋翁] 어릿어릿 갑자기 나를 방문하니, 목 가득 학발(鶴髮)이요 몸뚱이는 닭의 가죽이었다. 멀리 북령(北嶺)으로 오르니 멋이 더욱 진진하여, 도리어 맛있는 반찬으로 아침에 주림을 해장하는 것보다도 나았다. 언덕에 의지하여 한 번 웃고 사방을 바라보니, 눈 아래 만상(萬像)이 모두 기우뚱하구나. 멀리 잠겼던 것 처음으로 오래 감추어 두었던 거울을 여니, 먼 봉우리가 반쯤 나타나고 새로 눈썹을 그린 듯하네. 물과 구름이 그윽하고 고와 완상하기에 족하니, 과거의 사적을 찾으려는 이 그 누굴까. 김막(金漠)은 생명을 경시하고 요염(妖艶)을 중히 여겨, 꽃을 꺾고 돌아가지 않으니, 아, 슬프다. 옥소봉(玉霄峯) 아래 이 징군(李徵君)은 처음에는 땅에 집을 짓고 사는 것 같더니, 갑자기 학의 편지를 받고 높은 언덕으로 나가, 아침에는 푸른 봉우리에서 자고 저녁에는 붉은 섬돌에서 자는구나. 슬프다, 두 사람이 마침내 면치 못하였으니, 다만 세상 마음 물질을 잊지 못해서였네. 어느 사람이 혜초 장막[蕙帳] 밖으로 내려가지 않아, 자취를 감추어 종산(縱山) 신령의 기롱을 면하였나. 선객(禪客)이 백운원(白雲院)에 영원히 깃드니, 세망(世網)을 깨뜨려 없애어 남은 것이 없구나. 중과 속인이 이름을 흠모하여 다투어 모임에 들어오니, 처음에는 빈손으로 갔으나 결국에는 실한 데로 돌아가도다. 나도 지금 내[川]를 건너온 코끼리를 사모하거니, 어찌 양을 잃고 갈래 길에서 길이 울 것인가. 공(公)이 아직도 시상옹(柴桑翁 도연명)을 생각하는 것에 감동하였으니, 구름은 무심히 나오고 새는 피곤하게 날도다. 준마(駿馬)를 칭찬하던 도림(道林)의 보배로운 눈을 돌려서, 나의 노둔한 재질이 고삐에 매이는 것을 용납하라. 눈살을 찌푸리며 어찌 감히 고개에서 나오기를 재촉하리요. 다섯 번 웃어도 양무위(楊無爲)를 면하지 못하도다. 푸른 측백나무 뜰 앞에서 우수수 불고, 붉은 연꽃 못 위에는 물이 찰랑찰랑하는구나. 고요한 가운데 탑(榻)을 대하니 온갖 생각 사라지고, 물고기와 새마저 와서 친하여 의심하지 않는구나. 조용히 성긴 비단으로 덮은 벽을 가리키면서, 나더러 붓 휘둘러 좋은 시를 지으라 하네. 강호(江湖)의 묘운(妙韻)을 혹시라도 빌려 준다면, 좋은 글귀 용궁시(龍宮詩)에도 양보하지 않으리.”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등불 켜고 자리 걷지 않은 채 밥 먹고 서성대는 것 괴로운데, 월출산 꼭대기에 햇빛이 비치도다. 뭉게뭉게 들구름은 동혈(洞穴)에서 걷히고, 삐죽삐죽 가을 산은 하늘에 솟았구나. 뜬 인생이 반넘어 살도록 이름 들은 지 오래면서, 절정에 올라 보지 못하였으니 세상일 바쁜 것이라. 가야산(伽倻山)과 방불한 것 참으로 기쁘니, 무단히 마상에서 고향을 생각하게 하노라.” 하였다.
구정봉(九井峯) 월출산의 최고봉이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석(動石)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백분화(白賁華)의 시에, “저 돌은 태산같이 무겁고 내 힘은 하나의 새깃처럼 가볍구나. 태산의 경중을 어찌 일찍이 저울로 달 수 있으랴. 태산을 끼고 바다를 건너 뛰는 것을 누가 다시 어렵고 쉬운 줄 알리요. 이제 이 돌에서 천지를 한 손바닥처럼 운전하는 이치를 알겠도다.” 하였다. 달마산(達摩山) 옛날 송양현(松陽縣)에 있는데, 군의 남쪽으로 1백 24리 떨어져 있다. 또 해남현(海南縣)에서도 보인다. ○ 고려 때 중 무외(無畏)의 기(記)에, “전라도 낭주(朗州)의 속현을 송양현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서 궁벽한 곳이다. 그리고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두륜산(頭輪山)에 접해 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 있다. 산 허리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하여, 모두 백여 척이나 되는 것들이 치마를 두른듯 늘어 서 있다. 그 위에 아주 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당(幢)과도 같고 벽과도 같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멀리 바라보면 쌓인 눈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 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彌陀穴)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이 앉을 만하다. 앞에는 층대가 있어 창망한 바다와 산들이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것 같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작고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며,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그 땅의 끝편에 도솔암(兜率庵)이 있는데, 그 암자가 앉은 형세가 훌륭하여 그 장관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이곳은 화엄조사(華嚴祖師) 상공(湘公)이 터잡고 지은 곳이다. 그 암자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처음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한 곳이다.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美黃寺)ㆍ통교사(通敎寺)가 있고, 북쪽에는 문수암(文殊庵)ㆍ관음굴(觀音窟)이 있는데, 그 상쾌하고 아름다움이 참으로 속세의 경치가 아니다. 또 수정굴(水精窟)이 있는데, 수정(水精)이 나온다. 지원(至元) 신사년 겨울에 남송(南宋)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 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 하였다. 이에 그 고관은 즉시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서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상주할 땅이다.” 하고 그림으로 그려 갔다.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聖跡)과 영험한 자취도 많았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았다. 그러나 먼 지방에 있어서 세상에는 등반하여 감상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만약 세상을 버리고 도를 찾는 선비로서 절정에 올라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대사(大士)가 세상 밖에서 이른바 전하지 못한 묘함을 얻은 자가 있다면, 저 소림(少林)에서 진수(眞髓)를 얻은 자 또한 어떠한 사람이라 할까.” 하였다. 갈두산(葛頭山) 군의 남쪽 1백리에 있다. 화현(火峴) 군의 남쪽 28리에 있다. 가학현(駕鶴峴)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율현(栗峴)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 영원현(嶺院峴)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동음소현(冬音所峴) 군의 동남쪽 25리에 있다. 바다 군의 서남쪽에 있다. 덕진포(德津浦)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월출산에서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노도(露島) 주위가 40리이고, 목장이 있다. 달목도(達木島) 주위가 56리이고, 목장이 있다. 보길도(甫吉島) 주위가 63리이다. 여차라도(餘次羅島) 주위가 30리이다. 화도(花島) 주위가 50리이다. 백내리도(白乃里島) 주위가 27리이다. 횡간도(橫看島) 주위가 39리이다. 감물내리도(甘勿乃里島) 주위가 44리이다. 어응포도(於應浦島) 주위가 40리이다. 고도(羔島) 주위가 29리이다. 죽청도(竹靑島) 주위가 20리이다. 계화도(界火島) 주위가 14리이다. 달도(達道) 주위가 14리이다. 말응두도(末應豆島) 주위가 53리이다. 말개도(末介島) 주위가 19리이다. 어화도(於火島) 주위가 24리이다. 거요도(居要島) 주위가 17리이다. 가지도(可知島) 주위가 18리이다. 내등도(內等島) 주위가 25리이다. 장좌도(長佐島) 주위가 27리이다. 좌지도(左只島) 주위가 36리이다. 수덕도(愁德島) 주위가 27리이다. 여작지도(餘作只島) 주위가 27리이다. 소모도(小茅島) 주위가 30리이다. ○ 이상은 군의 남쪽 90리 바다 가운데 있다.
【토산】 감ㆍ석류ㆍ유자ㆍ굴[石花]ㆍ새우[蝦]ㆍ낙지[絡締]ㆍ전복[鰒]ㆍ붕어[鯽魚]ㆍ홍합(紅蛤)ㆍ조개(蛤)ㆍ숭어[秀魚]ㆍ게[蟹]ㆍ감태(甘苔)ㆍ김ㆍ우무[牛毛]ㆍ매산(苺山)ㆍ황각(黃角)ㆍ미역ㆍ가사리(加士里)ㆍ소금ㆍ복령(茯笭)ㆍ안식향(安息香)ㆍ표고[香蕈]ㆍ생강.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4천 3백 69척이고,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달량영(達梁營)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을 두었다. 『신증』 정덕(正德) 임오년에 없애고, 강진(康津) 가리포(加里浦)로 옮겼다.
【봉수】 갈두산 봉수(葛頭山烽燧) 동쪽으로 강진현의 좌곡산(佐谷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해남현 관두산(館頭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나그네의 고향 생각 세어 보면 많은데, 역로(驛路)는 멀고 멀리 하늘 가에 있구나. 아침 안개 개니 신기루의 도시가 벌어지고, 저녁 연기 나는 곳에 어부의 집이 있구나. 밤 깊고 사람 고요한데 발 걷으니 달이 환하고, 가을 다 가고 서리 내렸는데 국화꽃 피었구나. 놀며 구경하면서도 밥 한 그릇 먹을 동안을 잊지 못하여, 매양 남두성(南斗星)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누나.” 하였다.
【누정】 양휘루(揚輝樓) 객관 동쪽에 있는데, 군수 강삼(姜參)이 세웠다. 『신증』 배회루(徘徊樓)라 개명하였다. ○ 안침(安琛)의 시에, “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는데, 나그네도 배회하니 또한 쾌하도다. 옥토끼는 몇 년 동안 선약(仙藥)을 찧었으며, 항아(姮娥)는 어느 곳에서 경대를 펼쳤는가. 흔들리는 파도에 백 동파(百東坡) 흩어지는 물이요, 그림자를 대하여 셋이 되는 태백(太白)의 잔이로다. 곧 밤이 되자 하늘은 씻은 듯한데, 서늘한 바람은 계향(桂香)을 불어 보내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영보역(永保驛) 군의 북쪽 성 밑에 있다. 청풍원(淸風院) 일명 청정원(淸淨院)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수원(燧院)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교량】 덕진교(德津橋) 덕진포에 있다.
【불우】 도갑사(道岬寺) 월출산에 있다. 도선(道詵)이 일찍이 머물렀던 곳이다.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다. 절 아래 동구(洞口)에 두 개의 입석(立石)이 있는데, 하나에는 ‘국장생(國長生)’ 3자가 새겨져 있고, 또 하나에는, ‘황장생(皇長生)’ 3자가 새겨져 있다. 통교사(通敎寺)ㆍ미황사(美黃寺)ㆍ도솔암(兜率庵)ㆍ관음굴(觀音窟)ㆍ서방굴(西方窟)ㆍ수정굴(水精窟) 모두 달마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월출산신사(月出山神祠)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 여단(厲壇)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곤미폐현(昆湄廢縣)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고미현(古彌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속현으로 만들고 고려와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고진도(古珍島) 곤미현 서쪽에 있다.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에 진도현(珍島縣)이 왜구 때문에 땅을 잃고 여기에 붙어 살다가 이제는 본토에 돌아갔으나 고을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최씨원(崔氏園)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 속설에, 신라 사람 최씨가 있었는데 정원 안에 열린 외 하나의 길이가 한 자나 넘어 온 집안 식구가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씨 집 딸이 몰래 그것을 따 먹었더니, 이상하게 임신이 되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부모는 그 애가 사람 관계없이 태어난 것이 미워 대숲에다 내 버렸다. 두어 주일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돌아와 부모께 고하니, 부모도 가서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가 길렀다. 자라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 그는 당 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산을 답사하고 물을 보는데 신명스러움이 많았다. 뒤에 그곳을 구림(鳩林) 또는 비취(飛鷲)라 했다. ○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광양(光陽)의 옥룡사비(玉龍寺碑)를 상고하건대,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최씨라고 하였으니, 누가 옳은지 모르겠다. 동석사(動石寺) 월출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 서쪽 고개 마루에 이상한 한 덩어리 바위가 있네. 지나는 길손 모두 길을 굽히고, 대개 올라서 구름 자취를 찾는다. 내가 만약 그대로 지난다면 땅의 신령이 응당 책망하리라. 산 아래에 와서 말을 멈추니, 나뭇가지에 나는 신이 멈추도다. 과연 천 길이나 되는 바위를 만나니, 높고 우뚝한 것 빈 하늘을 의지했구나. 여와씨(女媧氏)가 일찍이 하늘을 기울 때 아직도 금액(金液)을 굳히지 못하여, 날아서 백운 풀에 떨어지니 하늘에서 거리가 겨우 지척일세. 참으로 그는 낙(駱)ㆍ원(原)의 사신이라, 명승지를 사랑하여 멀리 가는 것도 잊었도다. 어떤 사람이 포금(布金)의 곁에다 처음으로 절[空王宅]을 창건했는가. 정녕 형악(衡岳)의 창름(倉廩)을 사랑하여 난간에 임하여서 등척(騰擲)하고자 하나, 혹시라도 신물(神物)의 보호가 있을까 두려워서 놀라 바라보고 썼던 모자를 바로 하였으리라. 손을 따라 바야흐로 흔들어 떨치니, 응당 먼지를 끌어 붙이는 호박(琥珀) 같으리라. 이름만 듣고 오래도록 의심만 품었는데 한 번 보자 얼음이 풀리듯 알겠도다. 흥이 다하여 깨끗한 방을 찾아 방석 깔고 비고 훤한 데에 앉으니, 잠깐 사이에 감로반(甘露飯) 한 사발이 부엌[香積]에서 왔도다. 그대로 도연명의 술잔을 잡고 해가 서산에 육박해 감을 알지 못했더니, 달빛이 사람을 비추며 오니 맑은 경치 더욱 아깝구나. 고요한 가운데 누가 반려(伴侶)가 될까? 소나무ㆍ돌까지 세 익우(益友)가 되네.” 하였다. 회의부곡(懷義部曲)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심정부곡(深井部曲) 군의 남쪽 1백 30리에 있다. 귀인부곡(貴仁部曲)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송정부곡(松井部曲) 군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진남향(鎭南鄕)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동백소(冬柏所)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명환】 고려 유광식(柳光植) 정치는 청백하고 엄격한 것을 숭상하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다.
【인물】 고려 최지몽(崔知夢) 처음 이름은 총(聰)이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복서(卜筮)에 더욱 정통했다. 태조가 그의 이름을 듣고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를 얻었다면서,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어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지몽(知夢)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었다.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경종(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열녀】 고려 최씨(崔氏) 진주 호장(晉州戶長) 정만(鄭滿)의 아내이다. 자세한 것은 진주 열녀 편을 보라. 김씨(金氏) 중랑장(中郞將) 조안정(趙安鼎)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아버지가 죽고 18세에 남편이 죽고 19세에 어머니가 죽었으나, 모두 여막에서 3년상을 치루었다. 애통해 하기를 고치지 않았고 생업(生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하였다.
【제영】 연해고연인도가(連海孤煙認島家)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격한 두어 마디 경쇠 소리가 언덕의 절을 알리고, 바다를 연한 외줄기 연기 섬의 인가를 알게 하네.” 하였다. 송황교영육칠리(松篁交影六七里) 김신윤(金莘尹)의 시에, “소나무 대나무 그림자 6, 7리에서도 얽히고, 닭과 개짖는 소리 수백 집일세.” 하였다. 수점취연죽외가(數點炊煙竹外家)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한 소리 우는 경쇠는 구름 가운데 절에서 나오고, 두어 줄기 불때는 연기는 대나무 밖의 집에서 나는도다.” 하였다. 죽림신순장룡추(竹林新筍長龍雛) 서거정(徐居正)이 이 사군(李使君)을 보내는 시에, “황원(黃原)이 바다를 진무(鎭撫)한다 말하는 것 같더니, 그대를 보내노라. 이제 다시 어부(魚符 군수의 인)를 찼도다. 덕진(德津)에는 물이 얕아도 다리가 아직 있고, 도갑(道岬)에는 비석이 남았는데 글씨가 반은 없구나. 매화나무 언덕엔 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죽림의 새 죽순은 용의 새끼가 자란 듯, 흰 머리 외로이 노는 흥취를 저버리니, 누가 호남의 색칠한 그림[着色圖]을 보내주랴.”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군시(郡始) 서쪽으로 5리이다. 군종(郡終) 동쪽으로 20리. 북일시(北一始)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일종(北一終)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북이시(北二始)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북이종(北二終) 위와 같다. 서시(西始) 끝이 15리이다. 서종(西終) 끝이 20리이다. 곤일시(昆一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일종(昆一終) 서쪽으로 끝이 90리이다. 곤이시(昆二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이종(昆二終)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옥천시(玉泉始) 남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옥천종(玉泉終) 남쪽으로 처음이 8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북평시(北平始) 옛 북평향(北平鄕)이다. 남쪽으로 처음이 1백 리이고, 끝이 1백 10리이다. 북평종(北平終) 남쪽으로 처음이 1백 2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시(松首始) 옛 송수향(松首鄕)이다. 남쪽으로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종(松首終) 남쪽으로 끝이 1백 50리이다. 위의 6면(面)은 해남(海南)의 남쪽 경계 너머에 있으며, 모두 바다와 연해 있다. 노아도(露兒島) 남쪽으로 1백 80리이다. 보길도(甫吉島) 남쪽으로 2백 리이다. 잉거도(芿巨島) 위와 같다. 소안도(所安島) 위와 같다. 추자도(楸子島) 남쪽으로 3백 리이다. 위의 다섯 섬은 모두 육지에 면(面)을 두고 있다. ○ 진남향(鎭南鄕)은 서쪽으로 20리, 회의부곡(懷義部曲)은 남쪽으로 10리이며, 귀인부곡(貴仁部曲)은 남쪽으로 90리이고, 송정부곡(松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리이며, 심정부곡(深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30리이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해변에 있다. 동백소(冬栢所)는 동쪽으로 12리이다.
【진보】 이진진(李津鎭) 남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8척이며, 우물이 둘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어란포진(於蘭浦鎭) 남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해남(海南)에서 본군으로 이속되었다. ○ 수군만호 1명이다.
【창고】 창(倉) 넷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서창(西倉)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옥천창(玉泉倉)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이창(梨倉) 이진(梨津)에 있다.
【목장】 노아도(露兒島)ㆍ소안도(所安島).
【진도】 이창진(梨倉津) 이진에 있다. 용당진(龍堂津) 무안(務安)과 목포진(木浦鎭)으로 통한다.
【교량】 쌍교(雙橋)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토산】 왕대[篁竹]ㆍ화살대[箭竹]ㆍ감ㆍ유자ㆍ옻[漆]ㆍ차[茶].
【누정】 대월루(對月樓) 읍내에 있다. 해월루(海月樓) 이진(梨津) 남쪽에 있다. 제주도로 가는 자는 여기서 배를 타며, 소안도(所安島)에서 바람을 살린다. 영보정(永保亭)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회사정(會社亭)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단묘】 월출산단(月出山壇) 신라 때에는 월나악(月奈岳)이라 부르고,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모셨으며, 본조(本朝)에서도 본읍에 제사하도록 영을 내렸다.
【사원】 녹동서원(鹿洞書院) 인조 경오년에 건립하고 숙종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최덕지(崔德之) 자는 우수(迂叟)이며, 호는 연촌(煙村)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제학(提學)이었는데 문종 때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김수항(金壽恒) 양주(楊洲) 조에 보라. 최충성(崔忠成) 자는 필경(弼卿)이며, 호는 산당(山堂)이다. 최덕지의 아버지이다. 김창협(金昌協) 양주(楊洲) 조에 보라. ○ 충절사(忠節祠) 효종 임진년에 건립하고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운(鄭運) 자는 창진(昌辰)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임진왜란 때에 녹동 만호(鹿洞萬戶)였는데, 거제(巨濟)의 옥포(玉浦)에서 전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주D-001]오정(五丁)이……뚫어 : 예전에 중국의 진 나라와 촉(蜀) 나라는 검각산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그 검각산이 원체 험악하여 교통하지 못하였다. 진 나라에서 쇠로 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밤에 그 소 뒤에다가 금을 한 덩이씩 갖다 놓고 그 쇠로 만든 소가 금똥을 눈다고 말하였다. 촉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힘이 센 역사[五丁力士]를 시켜서 산의 돌을 깨고 사닥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고, 그 소를 훔쳐 갔다. 그것이 검각산의 길이 열리게 된 시초이다.
[주D-002]사람이 시들었다 : 《예기》의 단궁(檀弓)에 “현철한 사람이 시드니, 나는 장차 누구를 따르랴[哲人其萎吾將安放].”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공자의 죽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3]이 징군(李徵君) : 징군(徵君)이라는 말은 그 자신이 벼슬하려 하지 않았으나 나라에서 먼저 부른 사람이란 말이다. 여기 이 징군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주D-004]양을 잃고……울 것인가 : 양주(楊朱)가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것을 보고,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을 탄식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5]당(幢) : 당(幢)은 절 같은 데에서 무쇠나 구리로 기둥같이 높게 세운 것인데, 원래는 여러 깃발을 달기 위하여 만들었을 것이나 깃대는 아닌 것이다.
[주D-006]저 소림……얻은 자 : 인도 불교의 28대 교조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와서 하남성 숭산 소림사(河南省嵩山少林寺)에서 선학(禪學)을 전수하였는데, 그의 수제자 혜가(彗可)가 그의 학문의 진수를 얻었다 한다.
[주D-007]흔들리는……물이요 : 소동파(蘇東坡)가 달 밝은 밤에 낚시하는데 물이 평온할 때에는 그림자가 하나이지만, 물이 출렁대면 물결마다 한 그림자가 보여서 백 동파(百東坡)가 된다고 한 말이 있다.
[주D-008]나뭇가지에……멈추도다 : 고개가 원체 높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마치 나무 끝에 있는 것 같아서 그가 신은 신 역시 나무 꼭대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주D-009]응당……같으리라 : 호박(琥珀)을 뜨겁게 문질렀다가 티끌에 대면 전기가 일어서 티끌이 호박으로 달라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