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 제9권 연촌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아베베1 2009. 11. 27. 11:32

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 제9권
 서(序)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옛날 경태(景泰 1449~1456) 연간에 아조(我朝)에 덕이 순일하고 절조(節操)가 드높았던 정학지사(正學之士)가 있었으니, 연촌(煙村) 최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서 이름을 덕지(德之)라 하였다.
일찍이 금근(禁近 시종신(侍從臣)을 말함)을 거쳐 주부(州府)의 목민관으로 나갔다가,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돌아가서는, 서루(書樓)를 지어 존양(存養)이라 편액(扁額)을 내건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었다.
그러다가 현릉(顯陵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선생에게 소명(召命)을 내리면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이르러 다시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조정에 함께 있던 현경(賢卿)과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길을 전송하면서 선생의 사적(事跡)을 높이 기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양루(存養樓)에 제(題)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또 선생의 가대인(家大人 부친)인 참의공(參議公 이름은 담(霮)임)이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을 둔 데 대해 일시에 찬송하는 작품도 많이들 내놓았다.
이 모든 시문(詩文)가 필적(筆迹)들을 최씨의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급기야 정유왜란(丁酉倭亂)을 겪는 바람에 존양루가 소실(燒失)되면서 간편(簡編)들도 함께 산일(散逸)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선생의 7대손인 전 참봉(參奉) 정(珽)이 또 타고 남은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그나마 90여 수(首) 정도를 찾아낸 뒤 영원히 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나에게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은 순실(純實)한 행동이 성유(聖諭)에 드러나게 될 정도로 순덕(純德)의 소유자였고, 중년에 봉록(俸祿)을 마다하고 산해(山海)에 자취를 숨겼으니 고절(高節)의 인사라 할 만하며,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편액(扁額)으로 내걸어 자신을 깨우쳤으니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다 해도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된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이를 모두 아울러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은 경태(景泰) 2년인 신미년(1451, 문종 1)의 일이었다. 그런데 4년 뒤인 계유년과 7년 뒤인 병자년에 국가에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진신(縉紳)들이 많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이 그야말로 이런 기미를 미리 환하게 알아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선생의 명지(明智)를 더욱 일컫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 보건대, 현릉(顯陵)이 일찍 빈천(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함)하여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갑자기 왕위를 내 주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선생의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될 줄이야 추측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세묘(世廟 세종(世宗))의 조정에서도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이름임)의 인끈을 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또 떠나야만 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었던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도는 가득 차면 무너뜨리고 겸손하면 더해 준다.[天道 虧盈而益謙]”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愷悌君子 神所勞矣]”고 하였다. 선생의 급류 용퇴(急流勇退)는 그야말로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으로서, 저절로 대란(大亂)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니, 어찌 눈치 빠르게 화(禍)의 기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자들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시문록(詩文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안평(安平)과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호임)에 대한 일은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가령 하동(河東)이나 고령(高靈) 범옹(泛翁)이나 사가(四佳)같은 제공(諸公)으로 말하면 훈명(勳名)은 비록 성대해도 정절(情節)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고,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임) 등 제인(諸人)으로 말하면 자정(自靖)한 점은 있지만 규족(葵足)처럼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맑은 복과 완전한 명성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 이 문집을 살펴보노라면, 그 시문들을 통해 선생의 심지(心志)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요, 세태(世態)를 논한 것이나 기인(其人 단종을 가리킴)을 향한 정성이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7월 보름에 덕수 후학 이식은 쓰다.


[주D-001]4년 뒤인 …… 되었다 : 단종(端宗)이 즉위한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를 강화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한 일과, 세조(世祖) 2년인 병자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사형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주D-002]천도는 …… 더해 준다 :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화락한 …… 위로해 준다 :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급류 용퇴(急流勇退) : 한창 벼슬이 높아질 때에 물러나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전약수(錢若水)에게, 어떤 노승(老僧)이 끝내 신선은 되지 못하겠지만 벼슬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是急流中勇退人”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聞見前錄 卷7》
[주D-005]하동(河東)이나 …… 사가(四佳)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면서 호가 범옹인 신숙주(申叔舟),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을 가리킨다.
[주D-006]자정(自靖) : 각자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정해서 결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스스로 뜻을 정해서 각자 선왕에게 고하라. 나는 여기를 떠나 숨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7]규족(葵足)처럼 …… 못하였다 : 몸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포견(鮑牽)이 난세(亂世)에 처하여 남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발이 끊기는 월형(刖刑)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보다도 못하구나. 해바라기는 그래도 잎사귀를 가지고 제 다리를 가려서 보호해 주는데.[鮑莊子之知不如葵 葵猶能衛其足]”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포장자는 포견을 가리킨다. 《春秋左傳 成公 17年》
 
澤堂先生集卷之九
 
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敍 

昔在景泰間。我朝有淳德高節正學之士。曰煙村崔先生名德之。嘗由禁近。出守州府。又不樂而退歸靈巖永保村。築書樓。扁以存養。若將終身。顯陵卽位。召拜藝文直提學。明年冬。又告老而歸。同朝賢卿名士。賦詠贐行。以高其事。且爲存養樓題識。又先生家大人參議公有壽有後。一時多贊頌之作。凡茲詩文筆迹。崔氏子孫。世守之甚謹。及丁酉倭亂。存養樓燬088_155b而簡編隨以散逸。今其鄕人。旣爲先生立祠祀之。先生七代孫前參奉珽。又收拾燼餘詩文。尙得九十餘首。以圖不朽之傳。乃以題跋之辭命植。植竊惟先生純實之行。著於聖諭。淳德也。中歲納祿。遯迹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是。尙可師範百世。況兼有之者乎。抑先生之退。當景泰二年辛未。越四年癸酉,七年丙子。國家禍故相繼。縉紳多及焉。則先生之擧。誠若炳幾保身者然。以此世尤稱其明智。以余攷之。顯陵賓天之促。而魯山遜位之遽。此天數也。先生雖明智。安能推測及此。且先生在088_155c世廟朝。已解帶方之印。彼時又何難之可違耶。易曰天道虧盈而益謙。詩曰愷悌君子。神所勞矣。先生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亂。豈規規焉審幾逃禍者之足儗也。今就是卷。閱其人物。則安平,節齋之事。不可言也。若河東,高靈,泛翁,四佳諸公。勳名雖盛而情節或歉。成謹甫諸人。自靖則有之而葵足莫衛。其視先生淸福完名。當何如也。噫。觀斯集者。不但据其詩文。知先生之所存。論其世尙其人。亦可以見先生之不可及矣。崇禎丙子七月之望。德水後學李植識。
頭陀草冊七
 [詩]
永濟院途中 191_308c

信馬隨秋色。馬前鴻鴈翻。夕陽在沙水。樵唱入烟村。已覺吾廬近。不愁山路昬。癡兒相候否。應是月生門。
頭陀草冊十
 詩○南行集[下]
靈岩郡 欲取道城中。閽者拒門不納。多苦狀。郡有對月樓頗勝。 191_380b

191_380c名勝人穪古朗州。月山翠色滿官樓。雪迷曠野開虛市。潮退長橋閣稅舟。文谷舊亭風玉在。烟村高節影堂留。城門忽被閽人拒。始覺今朝
 頭陀草冊十八
 [雜著]
南遊錄[二] 191_540a

十三日。往謁老峰祠。屯村亦配食焉。棟宇華整。庭戺間松竹交翠尤佳。齋任金壽岡宣晉復置酒相欵。還飯于金氏。遂行二十里。過一嶺。途中逢小雨。望山頂烟霧空濛。石峰峭如霜戟。或出或沒。亦奇觀也。至山下。磴道盤回幾六七里。長松挺立左右。翠色浮天。不知其幾萬枚。吾行楓岳俗離諸名山甚衆。未見植松如此之多也。松盡有飛閣跨溪。由閣中行十餘步。老木數十。盤屈如龍。皆二三百年物也。叢篠壽藤。蒙密交織。幽泉激激其下。復百許步至寺。殿閣雖不穹崇。191_540b 庭除甚曠朗。中有小石塔。東西僧房。隱映於脩篁間。極有幽意。世傳南方多精籃。如寶林,松廣,澄光諸大刹。雖未之見。此寺亦不負精籃之稱也。香火僧玉惠來謁。偕至香爐殿。老僧三四人亦相繼至。談山中諸名勝。開戶見數峯羅列于前。皆土山。冠以巨石。殊之劍拔千尋之勢。然石色微白。海山童赭中亦未易得也。但載聦之言太過。周覽諸佛殿。至靑雲寮。房宇頗潔。僧供夕飯。飯已登籃輿。從寺南支徑穿入深竹。綠色映人衣袂。間有山茶樹長八九丈。雖未開花。雪裡翠葉。儘奇樹也。行四五里。忽見夕陽在山。紫翠明滅。191_540c 海色微茫。如千頃白雲。群山繚繞。與水光互相映發。如點十數螺䯻於明鏡中。光景甚奇。稍上一二里。道漸巇。僧輩疲谻欲仆。籃輿往往欹側。度絶壑怖甚。或步或輿。又行數里。有大樹少息其下。仰視九精庵。尙在雲際。徐行躡磴。良久始至。庵背負大石壁。下臨濬谷。極類楓岳之普德窟。有泉冷冷出石間。味甘而冽。已而月出。諸峰忽皆聳拔奇偉。儼如羣仙相向拱揖。雪光又助發其奇。晶熒玲瓏。作爛銀色。與諸僧相顧諦視。鬚眉衣巾。亦皆皓然。如在氷壺中。境界幽森。神氣淸冷。殆不似人間世也。
191_540d十四日。日未出。籃輿僧已集。促飯行。從庵下南行約一里所。山路已陡峻。亂石橫縱。氷又滑。殆不可足。舍輿而步。脚力少谻。又騎輿。如是行六七里。始至山頂。石帆峯忽當前。狀若卓劍。號爲卓劍宜也。僧輩每以荒誕之說誑人。故曰彌勒住世時。天風當爲諸佛說法道場。世尊載八萬大藏經于石舡。送之此山。帆爲石帆峯。指峯傍一橢石曰此乃船也。其恠妄可笑如此。復西數十步。山忽陡起成峰。有石冠之。嶐然如老龍昂頭。僧稱爲九龍峰。上平廣可坐。往往石陷如臼。僧又指以爲九龍蜿蜒之跡也。通望四遠。眼界空闊。191_541a 是日適淸明。濟州了了可見。漢挐屹立天半如崇墉。雪色皓然。其南天水相接。空濛靑蒼。不見端倪。朝日下照。海色變作萬頃汞銀。島嶼點綴海面。如數百鳧鴨出沒烟浪中。眞天下壯觀也。胸次快活。便有御風破浪之志。往歲三淵金丈欲汎海入濟州。余力止之。至今思之。恨不能偕金丈南下。以一帆踔過八百里雲濤。登漢拏絶頂。飮鹿潭水。快覩南極老人光頭狀也。又東百餘步。至古塔山寺。廢已久。但有叢篠敗礎而已。有石特立亭亭。高可數十丈。卽所謂阿育王塔也。復東至坤維庵。亦廢無僧。前有危石。削立如臺。上生191_541b 紫檀木。高不盈三尺。大可合抱。枝葉四出。旁陰數畒。盖亦千餘年物也。枕根而卧。俯視南溟如杯水。漢拏又橫作几案。可以挹秀色而吸灝氣。子瞻所云飄飄乎如遺世獨立羽化登仙者。殆爲余今日而發也。塔山寺在其東十步。樓極高爽。欄楯縹緲出樹杪。觀覽之勝。無讓於坤維臺。以名庵稱者殆不虗也。復循舊道而還。過德玄,道澄二上人房。皆在竹林深處極幽凈。玄師頗通經旨能詩。是修緣大師門徒也。中年患奇疾廢學。退居是寺云。夜宿靑雲寮。月色如晝。與鄭生及房僧起步塔影中。尤覺益齋先生樓臺影重山191_541c 月上轆轤聲遠石泉深之語爲妙也。明日冬至也。身在天涯。回望故園。雲山杳然。懷思不覺悵悒也。
十五日。德玄,道澄送至山門相別。登輿下山。始騎馬約行十里過一領。名骨峙。又北三十里。爲康津縣治。山川淸麗。大抵類長興。而九十湖在縣南五里所。潮來展大明鏡。湖上諸山。娟翠可愛。漁舍浦樹。依微點綴如畫中。登聽潮樓。一覽可盡其勝。尤爲佳。主守陳翼漢來見。略飮一杯。別陳君向南塘村。館于金善連家。尹春卿澤奴也。乘月步至湖岸。烟濤渺然。星月影皆倒垂。又一奇也。船商賽神。鼓聲鼕鼕。終夜不絶。
191_541d十六日。朝飯主人煑鰒供之。味甘脆絶美。肅宗辛未。先君以御史潛行至此。欲投宿村舍。主嫗怒其主侵虐。拒門不許曰見兩班如見讎人。先君笑而之他。此說已曾聞之。金善連又道之如此。夕至海南白蓮洞。過尹孝彦家。孝彦歿已久矣。其子德煕敬伯延入相欵。夜宿綠雨堂。敬伯出示其父畫卷。是平生得意筆也。孝彦畫擧世寶之。每一紙出。輒爲人持去。家無存者。敬伯以他畫易取人家所藏。擇其佳者。合成此卷。以此無一凡筆云。又示笙簧及唐琴。制度極精巧。但與東琴少異。敬伯爲余設酒。余素不善飮。强191_542a 擧數杯。主人出家奴彈琵琶佐歡。
十七日。同敬伯往遊大芚山。去尹家二十里所。遍山冬栢樹也。每至深冬早春之際。雪中花開爛然。尤爲奇觀。以此稱爲長春洞云。未至大芚寺數里。有二老松對立如門。翠色照溪。過溪少西。有西山大師休靜及諸名僧碑。繚以垣。下馬讀之。又東轉渡危橋。古木夾植左右。復行數百步。有飛樓據溪水極寬敞。僧舍連絡。回廊曲房。迷莫知所之。居僧可萬指。䧺富甲於南方。僧輩示西山筆蹟及金線袈裟,碧玉鉢盂諸法寶。又有示寂時圓鑑圖。盖一太極圈子。筆畫圓滿如月。191_542b 可見其定力也。四溟之後。法嗣寥寥。至今藏弆寺中云。午飯已登輿。上北彌勒。磴道極險。自寺至庵約十里。坐前楹可以望海。東有巨石。刻彌勒像。仍覆椽桷。加以丹彩。規制極似楓岳之女養庵。䧺麗過之。歸路蹔憇峻極上人房。是同庚僧也。稍識文字。贈之二詩。又二十里至白浦。夜已一皷矣。
十八日。白浦。敬伯海庄也。其弟德勳,德煦居之。頗有池臺亭觀之勝。環以橘柚竹樹。不無少致。但僻在海陬。荒寂殊甚。比之富春亭南塘湖。當在下風也。飯後別敬伯行。午飯于玉泉村。登石城嶺。落日去海僅數191_542c 尺許。雲物受其餘暉。赩然如火。潮水方退。如戰敗之卒。拖甲曳兵而歸。亦奇觀也。上燈時至萬德寺宿西寮。夜深月出。湖光澹白。如橫匹練也。
十九日。寺樓扁以萬景。前臨九十湖。風景極佳。宋延淸樓觀滄海日門對浙江潮之語。殆爲此寺傳神矣。先輩稱其勝槩。極似靈隱。果非虗也。世傳金生題寺榜。而結法與白月碑不類。恐非金生眞蹟。然筆勢淸勁。亦羅麗間名筆也。僧指樓南石砌曰此亦羅時所刱也。以雜石築之面如削。至今累千年。堅緻如故。盖寺中有三絶。金生書,西院山茶樹。與此合爲三耳。樹191_542d 亦奇。其大數抱。陰滿一庭。花方半開。飯已往洗心庵。在寺後一里所。古木脩竹。幽邃可愛。開牎見湖光渺漫。直與天接。比寺樓尤奇。袁中郞盛稱鞱光之勝。遠過靈隱。余謂此庵亦然。歸路過明海房少憇。海師。嶺南人。爲人醇謹。略通經旨。方爲香火僧云。別海師至禪門外騎馬。復十里過康津北門。逢宋夏楨。班荊少話。黃昏至營村。聖章信甫自懷川昨夕至。信甫名相允。先生宗弟也。見家信。
二十日。金夏龜喪人。與其兩兄來。餽以柚子,鰒魚。金夏三亦來。今日先生生日也。只與吾輩數人。蕭然相191_543a 對於窮海之濱。回想去歲此日。人事之變幻無常如此。爲之一嘆。
二十一日。先生論古今人詩曰文人喜用經傳文字作句。如牧隱山色起予商是也。因言往歲麟坪大君赴燕。大宴于安州百祥樓。徵旁郡名妓數百人。綺羅絲管。極一時之盛。李台瑞時守安州。座上獻詩曰紅粧滿座何多楚。玉貌傾城自擇齊。息庵金公聞之曰佳句也。紅粧二字改以纖腰則尤佳矣。或以此語台瑞。台瑞方卧蹶然而起曰兵判可謂知詩矣。時息庵方判兵曹云。
191_543b二十二日。▣▣今日欲往遊寶林寺。雨下終日不果。
二十三日。早飰發行。向寶林寺。鄭夢說,趙萬瑀從焉。過大巖領五里至有恥村。文德龜所居也。德龜與其弟德麟。俱登文科。官至郡守。門臨淸溪。環以千挺鉅竹。西有奇巖特立如覆鏞。有松蔭其頂。名曰舍人巖。過栗峴。沿流而東。又過一小嶺。北折行數里。籃輿僧已來候。遂登輿徐行。洞壑窈窕。松栝幽森。溪流往往成潭。是汭陽江發源處也。左右眺賞。不覺其已至寺矣。制度極䧺麗。歷四重門。東西各有長廊。以爲飯僧之所。新舊佛殿皆層閣。高數百尺。用鉄二191_543c 千餘斤鑄毘盧像安于舊殿。僧曰新羅時所造也。其棟宇之華靚。遠過雙溪,大芚諸寺也。憇于香火僧澈閒房。時兵營鎭撫有善歌春眠曲者適來此。賜坐歌之。此乃康津進士李喜徵所作也。其聲哀甚。聞者至於涕下。南人又穪爲時調別曲。金得三夜至。以四鶉餽之。
二十四日。步至東寮。讀書聲聞于戶外。長興儒生數人方來棲云。又迤北至一院。牎壁新塗。如雪凈無一塵。主僧肅客而入。相對蒲團。意思蕭然。浮屠庵僧戒191_543d 淳適至。與語禪旨。頗有解處。年八十餘。貌亦不衰。還飯于南寮。又步至龍子閣。其東復有佛子天子二閣。繚以短垣。竹樹掩映庭除。僧皆闔扉。閴若無人。開戶視之。房宇明潔可愛。令人留連。殆不欲歸也。騎輿出寺門至土墩上。有古木數株。前鑿方池。引山泉注之。問普照禪師碑。在八相殿南。復由南寮入。又東折過一小門。門內有碑長七尺許。螭頭龜趺。制作精妙。碑云文林郞守寧邊府司馬賜緋衣袋金穎奉敎撰。儒林郞守武州昆湄縣令金薳奉敎書。皆新羅人也。羅之官制。倣李唐。故有賜緋魚袋之稱。碑東數十步有191_544a 層塔。下藏普照舍利。四面刻佛像及天王。周以石欄。亦巧匠所造也。寺記曰寺址舊爲潭九龍居之。普照投以神符。龍女自潭中出拜普照。請獻所居建寺。至今寺僧祀龍女云。觀其畫像。盖近日庸工所寫也。至浮屠庵。淳師延之入室。壁上有無字頌。淳師自製也。余反其意作頌。又留一偈曰去有去處。來有來時。無去無來。惟我與師。淳師笑曰老僧住山六十年。未遇一箇眞解人。不意今日得見龐居士。盖目余以老龐也。余又作詩解啁。有細求無字還多事。老我平生笑老玄之句。投筆徑去。淳師送至門。余戱之曰師能燒191_544b 却寶林寺。打破浮屠臺。方可參透機關。答曰老僧眞欲燒却寶林寺。打破浮屠臺。但恐寺僧阻搪不果耳。相視大笑。其爲人少帶風意。决非庸僧也。路逢南錫龜。偕行數里。指水西石壁曰諺傳普照驅龍時。白龍猛惡。以首觸壁成潭。卽此地也。壁果陷如鐵钁。鄭夢說,金得三先行獵䳺鶉。駐馬觀之。至暮而歸。
二十五日。虞侯李舜佐來。盛稱脩因寺之勝。要與同遊。盖爲余設泡有是請。其爲人欵曲多情如此。與信甫偕往。宋德成鄭夢說亦從。至山脚始騎輿。路極險峻。盤回以上。行五里許。忽回顧九十湖。已在脚底191_544c 矣。石壁削立。周回若城。上平可坐。以風勁不得登覽。至寺甚狹陋無可觀。營妓數人來待。使歌春眠曲。已而雪作。飄瞥林木間。景色極奇。步至石門庵前。有危巖對峙如門。下臨絶壑。氣象宏闊。天風萬德諸山。出沒雲際。海色微明。望之如一帶沙岸。營城團圓若月。人家撲地鱗鱗。尤可奇也。風力晩益勁。幾欲倒人。闔戶擁爐。與信甫作詩。老妓白梅善歌。每詩畢輒奏一曲。極有韵致。未知歐公遊龍門時亦有此否。
二十六日。將以明朝北歸。▣▣▣▣▣同姓人李成191_544d 夏等六七人來見。餽以柚子,民魚。李敏郁兄弟亦來。同姓也。午後虞侯來。夜與聖章,信甫燒燭賦詩。
二十七日。鄭之碩,金得三,李敏郁來別。飯已偕信甫發行。去留之際。殊覺黯然。至鎭南樓少憇。■■■■馬上見月出山。奇秀巉絶。頗似樓院途上望道峰也。行十五里至月南村。在月出之南。故曰月南。舊有月南寺頗勝。今廢民人居之。又西五里爲白雲洞。承文院正字李彦烈別業也。洞壑幽邃。其木多冬栢。方開花爛然。庭中引山泉爲曲水。盖舊日流觴之所。彦烈死亦廢久矣。南有小岡嶐然。列植長松。下191_545a 爲壇。可以坐見九井諸峰尤奇。安定洞在其西一里所。李恩津碩亨甞居之。聖章稱道其勝。以爲遠過吾家悅雲亭。其言太過。岡麓不能環抱。殊乏窈窕之趣。巖石澗溪。亦無可觀。但以竹樹粧點耳。夕至無爲寺殊荒陋。南節度亟言佛殿壁畫爲吳道玄筆。非是。然用筆頗不俗。亦非近代人所作也。靈巖士人曹潤身來。朝與約會于此。盖欲同遊月出也。寺西有元覺大師碑。太半剝蝕。竟不知誰人撰也。
二十八日。崔致完相送至此告歸。贈一詩與別。由寺西行二里。有領極峻。登巓可以望海。道岬寺僧持輿191_545b 來迎。又北六七里至寺。棟宇壯麗。前爲鍾閣。兩壁畫佛像。閣南建長廊三十餘楹。間外有四重門。大抵類寶林寺。而䂓模之齊整似勝之。主僧玄應年六十餘。爲人有智數能辨。示守眉大師袈裟及水晶琥珀數珠香木麈尾柄。又以水晶盒貯舍利。極寶重之。視之卽蚌珠也。余駁其非舍利。應頗憮然。佛殿東有守眉碑。聖聦所撰也。文字未免有僧氣。高僧堂一名旃檀林。在佛殿西。僧云道詵所刱也。房制極詭異。四周以甎築之。高二尺許。廣如之。下亦以甎築成。上下只用一堗。燃火皆溫。未知其何以如此也。飯已騎輿出寺191_545c 東門。行十許步有泉流石上。下墜爲潭。僧云石有竅通于潭。叢篁被其兩崖。與水色交映。康樂綠篠媚淸漣之語。始覺其工也。過溪有白軒所作道詵碑。下輿讀之。又沿流而東。從林杪望見。內山諸峰稍稍露其頂䯻。而奇秀峭削。終不及自外觀之。世稱月出近看不如遠看。盖此山上石下土。故自遠而望則只見峰端石矗矗耳。以是爲奇。及至內山。全體呈露。便覺氣象淺薄。坡翁詩云不識廬山眞面目。只緣身在此山中。夫內外殊觀。廬山之所不免也。又何足爲玆山之累耶。過栗領。山路險甚。往往舍輿而步。至龍巖寺。地勢191_545d 極孤絶。奇石四環。其勝無讓於天風之九精庵。聞九井峰尙餘數里。遂與信甫杖而行。磴道詰曲。氷雪又滑。十步一休。至峰底仰視。巨石陡立幾百尺。上平廣。四面削成不可上。西有一穴口。狹甚如衣縫綻。僅容人匍匐出入。一僧先入。信甫繼之。崖凍失足幾墮。方瞪目却立。龍巖僧斗相忽來牽袖苦挽。遂敗興不敢前。吾輩之迂路入山者。盖欲登九井絶頂。快看海門落照耳。終不能拚命直前。當面蹉失。彼王玄冲輩獨何人哉。南有動石。僧持小木梃搖之。石端裊裊然自動。輿地勝覽所謂一人搖之則欲墜而不墜者。信不191_546a 虗也。擎天臺亦可觀。日暮不暇往。東有孤山寺。卽文谷詩所謂雲梯平躡孤山寺者是也。今廢云。還龍巖宿。庵主坦識解經旨。性亦淳實。殊無南僧狡悍之習也。
二十九日。自龍巖循舊路而下。至栗嶺北折行數里。懸崖百仞。線路縈回極危怖。叢篠蒙密。隨開隨合。尤不可行。至上見性庵。後有石峰如植圭。庵西巨石削立爲臺。有老木數株。婆娑影布石上。信甫先至。與老僧三四人列坐樹根。望之殆不似世間人也。房宇亦極明潔。日照油牎。四壁皎然如雪洞中。蒲團禪榻香191_546b 爐經卷。種種幽澹。余南來閱過名庵。前後累十。此當爲第一。雖置之皆骨山中。决不在靈源眞佛之下也。僧慧靜爲人沈靜。類有操守。年八十餘。容貌如六十許人。自香山來。方與數僧參禪。留一詩。歸路過大寂,竹田二庵。還道岬。日已午矣。東禪堂有文谷詩板。次韵贈應師遂行。應師送至門曰老僧五十年。爲道岬寺守奴矣。明年欲以一鉢一錫。遍遊關東諸名山。歸死足矣。又笑曰古稱鳩林妓喫蝦醢。道岬僧飮冷漿。今則不獨道岬殘敗如此。鳩林亦不足觀矣。其滑稽快談多類此。又北行未二里。立石刻國長生三字。其191_546c 東又立一石。刻曰皇長生。皆道詵所爲。終未知其何意也。聖基洞在其南。世傳道詵生于此。所謂崔氏園。果此地歟。或云其母食大瓜生道詵。以爲不祥。棄之竹林中。鳩來翼之。以此名其地曰鳩林。然則崔氏園似當在鳩林也。又西一里所。有亭臨溪。殊頹敗。自此爲鳩林里。南北二岡。至湖而盡。交抱內向。如人張拱。中有淸溪。發源于月出。乍小乍大。至會社亭左。灣環渟蓄。村家分水居住。櫛比相望。古木脩竹之間。樓閣掩映。眞似畫也。登會社亭。前開平湖。月出諸峯羅其後。翠色滿簾。老松十數。離立四面。枝榦夭矯。勢若虬龍。191_546d 想炎夏尤佳也。壁有白軒,澤堂詩。餘不可勝紀。曹潤身昨自道岬先歸。聞余至。與其宗人錫恒,錫奎來見。曹斯文一龜。卽從祖叔父妻弟也。曾在都下相面。是日適迎婿。伻問不來。少選過之。延入于其弟天一齋。歡然道故。餉以茶果。別曹君。與潤身同至西湖亭。亭廢久矣。但有遺址。暮潮初上。湖光際天。西南諸山。縹緲娟秀。遠望可愛。此地形勝。大略類明聖湖。月出似靈鷲。九井峰擎天臺。仿彿南北兩高。聖基峰尤似棲霞嶺。若得香山雪堂輩作功德主。兩岸遍植桃柳。間以畫棟雕欄如六橋。護養茅亭松林作九里松。聞雙191_547a 醉亭下有大陂。夏時荷花盛開。上築長堤。種垂楊萬株。下爲閘通南湖水。居然又一湖心亭也。其勝何遽出武林下哉。然東人本不喜事。又未免寒乞兒生活。雖有佳山美水。其修治粧點。大不及中州人。及聞此等語。輒目以爲迂。可勝嘆哉。是夜宿潤身茅齋。二皷後曹錫恒偕其二弟又來。話至鷄鳴。
三十日。飯于曹氏。日高始行。至雙醉亭。陂水盡凍。野色亦極蕭條。但開牎正對月山蒼翠。此㝡勝也。壁有石川詩。文谷追書以揭。詩格筆意。翩翩可觀。曹君輩至此相送。從陂上行數里。回望諸人。猶徘徊不去。殊191_547b 覺依依。迂路過鹿洞書院。烟村崔先生俎豆之所也。先生諱德之。事獻陵英陵。官至南原府使。退居于靈岩永保村。造一樓扁曰存養。高卧不起。顯陵以藝文館直提學召之。赴朝未一年卽歸。士大夫莫不高其志。朴醉琴,成學士作詩與文贐之。其後辛未癸酉之際。國家多故。先生獨超然物外。不罹世網。實有大雅明哲之智。雖今百載之下。其淸風峻節。猶可以想見矣。配以其子山堂翁。後又配以文谷及農巖先生。兩家父子同堂腏享。亦盛事也。南廡奉眞容。開戶視之。毛髮凜然如生。盖名手所作也。所着冠制殊詭。191_547c 狹袖襖子束鞓帶亦可異也。又有文谷四十一歲像。秀眉目貌甚姣好。一見可知爲善人端士也。世稱歸溪玲瓏洞澈如水晶。文谷溫潤精粹如良玉。此特以容貌言之。然兩公之性行。盖亦如此矣。鄭夢說,趙萬瑀至是告別。客中分張。殊可悵也。又二里所至靈巖南門。閽者疑其干謁主守。拒門不納。曉諭良久始許入。穿過城內。出東門過德津橋。雪微下。午飯于扶蘓院。向晩風雪益急。渡靈山江。日已昏黑。復十里至羅州。已二皷矣。館于軍官李厚栽家。同姓人也。本牧鄭覺先道甫丈遣其子錫徽相候。餽以夕飯。靈山浦菁191_547d 根絶大。味甘多津。無减於天賜梨。南方食物之佳者。㝡稱全州之薑鬚葅,靈巖之石花炙,德津之鯔魚,南塘之鰒魚。而靈山菁根亦其一也。西瓜亦以此地産者爲佳。曹潤身爲余設鯔魚鱠石花炙。果皆珍味也。
十二月一日。入謝鄭丈。同飯于衙軒。與信甫往觀錦城館。登柳色樓。東對瑞石山。雪後尤佳。出南門西折復十五里。至會津。地形略似麻浦江面甚狹居人傅岸高下置屋類粘蠔江南一帶。種柳萬餘株。當夏月綠陰。正好聽黃鸝也。村中只有林朴兩氏居之。滄溪宅在西村。子董亦好學。能世其家。患痘疾新歿云。信191_548a 甫與林邁俱高氏婿。過其城山書齋。適往隣家。獨有兩少年在。乃其子與侄也。遂偕至永慕堂。林氏之亭也。極高爽。月出縹緲天際依然三角諸峯也。不覺分外眼明。林邁來少話。歸路謁滄溪書院水雲亭。以日暮未果往。由西門入。又飯于衙軒。與鄭丈論文至夜。此丈好讀書。老而不倦。極可欽也。其孫年方十四。甞賦詩曰秋江水落魚鱗縮。曠野霜淸鴈翼高。頗有才思。卽亡友保卿子也。具盛饌相待。數皷後還寓。
二日。本地同姓人李運植來。鄭丈又遣其子相候。作家書先送禮建入京。飯已遂行出東門。李厚栽至此191_548b 而別。復東三十里至南平。縣監李左伯聞之來見。餽以夕飯。少頃余亦往謝。團欒至夜深。絲肉競奏。肴核狼藉。亦客中勝事也。上馬欲還。忽聞水聲冷冷出篁竹間。大有幽致。盖引山泉繞除爲渠也。
三日。南平邑小。三面皆野。無可觀。縣北有十里松。翠色如雲。南有小阜如覆盂。上生叢篁。四時長靑。引城灘水浚長陂。又饒菱芡魚鼈之利。僧頭扇精巧無雙。他旁郡極力效之。終莫能及。稱之名邑者盖以此也。平朝左伯來別。路由東門。客舘前有趙英叟泰耆去思碑。鑄鉄爲之。迤南十里。少憇于松林。復東二十里191_548c 至綾州。此乃靜庵趙先生藏碧之所也。後人於其遺墟立碑識之。尤翁撰其文。同春書之也。下馬讀之。俯仰徘徊。不勝慨然。先生寓于州奴文厚從家。以此其名至今不泯。榮亦大矣。彼衮貞輩抑何心哉。牧使愼惟益汝謙聞余至。伻問再三。夕後往謝之。治酒相欵。官妓四五人以琴歌侑之。少頃還寓。汝謙又踵至。劇談而去。是日小雨霡霂。入夜始霽。
四日。信甫有事晨往和順。約會于同福縣下。汝謙來別。汝謙治郡有聲。入境居民削木爲碑。頌其政者滿道。映碧亭在州東一里所。有溪自南來。至亭下爲潭。191_548d 縹碧可愛。東對連珠山。不甚高大。形如覆敦甚娟玅。遍山皆竹。自州封爲官田有守者。此地㝡産鉅竹。其賤如蓬。過石彘領。領頗峻。酉刻至同福。信甫已來矣。
五日。主守李顯慶孝伯。亦雞林人也。聞新遭臺評。過其寓唁之。李斗慶應七亦在座。少時同里閈相善。中間不見者殆三十年。鬢鬚蒼然。幾不可辨。及知爲應七。然後各呼小字。握手道故。盖應七喪其婦。家貧無所歸。方依於孝伯。尤可念也。和順縣監沈元俊亦來。孝伯出示咏懷一絶。卽於座上次之。遂別去。甕城山在縣西五里所。三峰互峙如覆鼎。望之極奇。又東北191_549a 行十里過一領。又西一里有石峯特立。本豊末銳。色黃赤狀若刻鏤。極肖鰲山。從峰下涉溪。又北半里許至降仙臺。仰視赤壁。氣勢壯偉。拔地卓立。上入霄漢。壁面如以大斧劈之。色如浣淨。少無沙土氣。微帶黃意。又如橫展大錦屛。溪流至壁下成長潭。深可方舟。未知黃州與此果何如也。但以子瞻二賦觀之。黃州臨大江。水面極浩渺。風檣雲帆。出沒烟濤。又助其致。乃復大勝。而又觀其履巉岩披蒙茸數語。則壁勢之戌削䧺奇。反有遜於此者。造化不以全巧與物如此哉。與信甫傾壺飮數杯。相對哦詩。俄而山風振林。素191_549b 雪飄灑。有水鳥二磔磔驚起。長鳴東去。醉興勃勃。殆欲起舞松下。吾輩雖不能乘舟汎月。令客吹洞簫。扣舷而和之。如子瞻之爲。然雪中策蹇驢。不憚數百里迂道。探搜奇勝如飢渴。今世間亦幾人哉。倘令山靈有知。决不以吾輩風流置諸子瞻之下也。一笑。又五里登滄浪亭。亭廢久。但有喬木數四而已。泝流而西。奇岩往往挾溪立。皆赤壁餘氣之結聚也。又北折行至勿染亭。羅氏物也。主人居遠。亭常空。處勢幽敻。蒼壁四環。淸流映帶其下。亭前列植長松。又有古木大合抱者十數。叢竹被崖。中通小徑。抵于亭。極有幽意。191_549c 其勝大類吾家吹笛臺。而洞府之寬敞過之。但溪流甚淺。又乏白沙一帶。壁色亦枯燥不能潤如金碧。此着當輸笛臺一籌也。壁有農巖先生詩。兪岦以八分書之。由亭下北行十許步。巨石陡起爲臺。雙松在焉。下臨深潭。其上若架一茅亭。夏月來納凉尤佳。飯于羅氏之奴。日已暮矣。雪又作。促行至瑞峰寺。宿太極上人房。
六日。極公示神宗皇帝所御筆。髹管滲金爲花㨾製甚巧。松江相國盖得之燕都。歸施寺中。至今藏弆。而桑海換易之餘。雖一管之微。猶可以寓匪風下泉191_549d 之思。寧不慨哉。又示趙泰萬濟博詩。濟博前年至寺。盤桓數日而去云。東西有二峰。勢秀拔挾寺樓。淸溪橫貫其中。僧舍分水而居。極幽絶。信甫云夏月甞一過。數里行綠陰中大佳。今來非復舊觀也。盖時花佳鳥。與山水本不相關。而山水之神情氣韵。必資時花佳鳥而後方靈活。古人云冬山如睡。如睡二字可謂妙解也。瑞石山寺不過八九里。信甫曰山有奇觀三。瑞石圭峰指空礫是也。三淵嘗評南方山水。獨於赤壁華嚴窟加圈點。華嚴窟亦在山中。憚於雪深不果往。若使王冕有靈。能不竊笑矣乎。飯罷別極公。至躡191_550a 淸閣少坐。又半里許。有松橫偃如門。路由其下。僧輩指曰松門。又北十里至梁氏之園。主人梁翁與河西金先生同時。其子又先生之女婿也。翁篤於行義。文詞亦高。甞作孝賦行于世。隱居不仕。脩治園亭以自娛。卽此園也。園廣幾數畒。東南二面。繚以短垣。下通隱竇。引山泉行于岩石之上爲卧瀑。上有老松覆地。甃石爲澗道。承瀑之餘流。形如槽。名之曰槽泉。又自竇南刳竹通流。西行數十步下。鑿方池受之。環以鉅竹千餘。翠影落池。幽雅可愛。墻陰鐕着十數方。石色如漆。河西先生作絶句四十八。以粉字書之。尙不磨191_550b 滅可讀。先輩之風流好事盖如此。翁自號蕭灑翁。南人以是稱園曰蕭灑園云。今屬于翁之後孫翼龍。方居憂不出。使其族弟延入相見。梁敬之進士采之進士亦來。翼龍出示孝賦。文谷所書河西先生四十八咏三淵詩二紙。又有蕭灑園題詠卷。列書來遊者名姓詩文。余亦作一詩書其下。座人始知其爲余。相顧驚歎曰曾因三淵聞名久矣。極致欵。餉以霜柿。少頃告行。采之從至池上。指溪齋曰往歲三淵書來。有過夏園中之語。爲三淵營建。不旬日成之。如是朴陋云。湖士之愛慕三淵者。於此槩可見矣。行未二里。有石191_550c 臨溪。可坐五六。老木蔭之。皆數百年物也。西有竹塢。竹盡環碧堂在焉。自下望之。竹深密不知有堂。極有幽致。但以碎石壘爲層砌植雜卉。正如古名畫村學究以拙筆作跋尾。殊可厭也。此亦河西先生杖屨之所也。想像遺躅。不勝太息。過溪又東。至于息影亭。其勝出蕭灑,環碧下遠甚。處勢頗高。前對瑞石山。雪色皓然。亦二亭所不能有也。又西五里爲昌平縣。復東北行十里。次玉泉寺。休于釋來上人房。潭陽金八華進士來見。卽金時佐道以門人也。初時不識爲誰某。及通名。八華大驚曰童時在道以家累見面。又曰吾191_550d 子甞答吾師書云朝事日乖。歲飢民貧。足下獨何畏四月雹乎。當時愛此一句語。至今能不忘云。作一絶示之。與信甫和之。
七日。金八華又來。飯已自寺後過一領。十里至玉果縣。河西先生乞養爲是縣。及孝陵上賓。遂棄歸。終身不起。益令人懷仰其高風也。有溪北流。入于鶉子江。洲渚縈紆。沙白如雪。沿流而東數里。兩山如門。水爲山所束。奔騰慓疾。色益縹碧。江中奇石錯峙。可坐可釣。連峯矗天。雪蒙頂皓然。殊有深峽氣象。又十里有石。平廣如張大筵席。水行其上。可與巴串相伯仲。191_551a 但石理粗濁。色如灰黑。殊敗人意。不欲久坐也。午飯于鶉子院。自此爲南原界。往▣村家依山帶溪。松籬竹扉。幽澹如畫。前輩亟稱南原風土佳麗。唐人至謂之小江南。其言信不虗也。昬黑至南原府。烏鵲橋在南門外。甃石爲虹蜺狀。不甚縹緲。過橋少東爲廣寒樓。暮樹遠烟。景色亦佳。主守李齊尙渭叟新罷。內眷未及北還。其子世祿來余寓少話。復與世祿同出南城。至廣寒樓。夜將二皷。陰雲褰盡。月色皎然。憑闌四望。神思淸爽。怳如御冷風身遊玉京也。已而柳生星晉偕一黃姓人至。俱世祿客也。官妓六七人亦來。蓬191_551b 頭歷齒。狀若鳩槃茶。余戱曰此樓勝槩。無减天上。而但恐汝輩不堪作嫦娥竈下婢。此着似當大輸也。一座大笑。世祿爲具酒肴。歌舞極歡。夜深而罷。
八日。李世祿今日欲發向漢都。出宿城南民舍。飯已過其寓少坐。又至廣寒樓。制度䧺麗。頭流秀色。盡在欄楯間。蓼川屈曲於大野中。如鋪練帶。引其支流至樓下。瀦爲大池。每夏月菡萏盛開。作一雲錦海。尤奇觀。有小閣直據池心。丹雘玲瓏。顔以瀛洲閣。西小島竹林欝然。是松江所植云。風至璆然有聲。亦佳致也。又有乘槎橋在其東。與烏鵲橋相對。下有支機石。黃191_551c 守身樓記云舊有小樓。名曰廣通。府使閔恭改建。鄭相國麟趾易以今名。盖後人又以烏鵲乘槎支機等號賁餙之。以象天上廣寒殿也。或曰樓卽黃翼成公遺址也。樓記及輿地勝覽俱無是言。按翼成公家在尙州。其子孫至今尙居于尙州黃澗之間。遺址之說恐誤也。壁有古今詩文甚多。獨崔立之不恠便登天上樓。牽牛人亦河之頭一律。當壓上頭。余笑謂信甫曰黃鶴,廣寒。俱爲二崔所占取。敎太白,載大不敢更措一語。此亦千載異事也。信甫亦笑。本府有李姓盲人善唱春眠曲。邀至樓上。倚欄而歌之。聲甚哀絶。使191_551d 人不樂也。萬福寺在西門外二里所。有銅佛高三十五尺甚可觀。行色怱怱。不暇往復。由南門入。迤東一里至關帝廟。朴乃貞直卿爲府使時所建也。舊廟年久頹廢。直卿甞感異夢。遂爲之重創。殿宇頗華整。但庸工塑像極不肖。全乏神威可恨。又西數百步有忠烈祠祀。鄭判書期遠,李兵使福男以下七人。想像風烈。低佪者久之。府城周遭闊大極堅緻。俗說唐將因劉仁軌舊基築之。甞見曾大父碧梧公日記。駱雲峰尙志駐箚此地者㝡久。其後楊捴兵元又來守。未知其誰所築也。土人曰舊時城中人家櫛比。殆無隙地。191_552a 近因荐飢。又困於隣族侵徵。流亡過半。頹垣敗礎。滿目蕭條。無復昇平氣象云。此則不獨南原一處也。所過郡邑前後十數。大抵多如此。此皆隣族侵徵之害也。朝廷亦知其弊。甞議行戶布口錢等法。終格不行。民困日甚。可勝嘆哉。出西門五里。有蛟龍山城。望之極峻險。丁酉之亂。任兵使鉉方爲府使。素稱有文武才。而不據山城。據府城。終至軍敗。以身殉之。殊可慨然。又北東三十餘里。至獒樹驛。溪山明麗。頗似吾鄕。不覺心目俱開也。世傳居寧人金盖仁蓄一狗甚愛之。盖仁甞從人家飮。醉卧田間。野火延燒將及。狗以尾191_552b 濡水。奔走撲滅。氣盡乃斃。盖仁旣醒。見狗死在旁。大感慟。瘞于山坡。植杖以誌之。後忽成林。自此人稱其地曰獒樹云。余爲作一詩曰千秋尙說義獒名。微物猶存愛主誠。借問世間卿相輩。幾人爲國更捐生。是夜雨。
九日。雨聲終夜不斷。今年冬暖異常。自前月旬後更不下點雪。又聞淸皇新殂。中外繹騷。往往有荷擔而立者。天時人事如此。可爲於邑。晩後冒雨作行。又北二十里至任實縣。日已昏矣。登碧雲樓。正對高德山。峭秀可愛。館于軍官嚴姓人家。夜李世祿來。
191_552c十日。雨下濛濛。又冒雨行至梧院朝飯。復北十里許。風益急。雨雪交作。始覺凜然有冬意也。至萬馬谷。兩山對聳。中通一路。陿隘甚如由壺中行。雖古所稱井陘倒廻之險。亦不能過也。朝廷旣以雲峯兼討捕使。使守八良嶺。余意又以任實縣監兼討捕使。使守此谷。南原設重鎭。擇文武有威望者守之。互爲聲援。則控御得宜矣。又四十里至全州。過寒碧堂。自下望之。勢甚縹緲。其勝尤佳。抵子龍寓所。羅浚來卽別去。此人少學于三淵。自稱奇士。爲人詭恠好大談。人皆笑之。聞子龍言。近學行艸。至以聽松自况。尤可笑也。191_552d 本府判官李普赫聲遠亦來。話至鷄鳴而罷。
十一日。早往西門外別李世祿。同閔志洙來姜必遇家。卽去時主人也。李岱來。尹叔世觀國賓偕康津李彦謙進士來。彦謙是彦烈從弟也。自言所居去白雲洞不過十里。余之游洞之日不知。不得同遊。深以爲恨云。午刻信甫亦來。國賓爲余設肴果。與座中人共之。約明早往慶基殿。謁太祖眞容。國賓方以本殿參奉入直也。監司遣人相問。夕入謝。谷城人曹觀夏來。此人妙風鑑術。十不失一云。
十二日。同信甫朴芝秀至慶基殿。閔志洙亦來。國191_553a 賓具紗帽紅團領。典僕四人亦着紫巾朱衣。導國賓由西角門入。吾輩從之。至西閤外。典僕啓鑰。又導國賓入殿內。吾輩立閤門外少須。殿中間南向爲御室一間。雕梁丹楹。下方以石甃之。塗以白灰。奉眞容于其中。前垂朱簾。左右有紅絨索。系以金鉤。國賓鞠躬立御室之西。典僕洞開南閤。又二人引鉤捲簾。始招吾輩入。日表龍顔。神彩赫赫。不敢仰視。左眉角微覺浮起。盖糊褙歲久。綃紙不相貼。自然如此。不是變異。民間以此多訛言。殊可歎也。又東十許步至別殿。觀御輦御繖御刀。由東角門入後苑。191_553b 其木多柿漆。典僕云夏月草長如人。絶無虫蛇之屬。雖潦雨新霽。不聞蛙鳴。亦極異事也。又北數十步。脩竹造天。陰森淸冷。如造別境。前者自外望之卽去。竟不知此中乃有如許佳趣也。又觀御井。還飯于齋室。李彦謙告歸。復同國賓,信甫出南門。登會慶樓觀市。累萬人簇立。略似鍾樓街午市。雜貨山積。平凉子薄散半之。薄散油炒糯米飯和飴糖。爲之。壓以木板。匀薄如紙。切作方片稍橢。四五片疊爲一餠。公私宴祭。用以飣盤。唯全州人能之。婦人皆高䯻。或有以靑布帕首者。南俗大抵好帕首。嶺下尤甚。孝彦畫卷有191_553c 帕首村女挑菜狀極肖。余詩亦有斑巾帕頭前村女之語。盖以見南俗之如此。放翁入蜀記曰夷陵女子皆以靑斑巾帕首。然則川蜀間亦有此風也。兒童尤姣好可愛。甞聞南人有三不如之說。謂女不如男。梨不如菁。雉不如鷄。驗之果然。歸路過閔志洙。又過金用謙謫居。還至于子龍之廬。曹觀夏來。相余曰眉端有白氣如線。必有兄弟之憂。上燈時因朴龍秀書。始聞載中以是月三日得寒疾不起。氷湖一別。奄作千古。令人不覺腸摧。
十三日。別子龍,國賓。早行午飯于參禮驛。又東北四191_553d 十里宿礪山。
十四日。飯已行二十餘里。次狐谷秣馬。又東二十五里至連山。金姊詳道載中死時狀。尤覺慟絶。聞康煕死四日。秘不發喪。以遺詔立第四子爲皇帝。十四王極英勇。方統十五萬兵在西邊。人心疑惧。內亂非久將作云。李自高山來。與之同宿。
十五日。早行成服。飯已別金丈。將發君赫來。偕往縣西。觀開泰寺。舊鬵純鉄鑄之。形正圓。大可四十圍。漸下而殺。趺視口圍半之。歲旱略爲移動。輒致雷雨云。少東十里。午飯于豆歧酒店。邀金萬坦針腦癤。金萬191_554a 程亦來。卽棐弟槼之孫也。又南二十里。路逢微雪。又東北二十里至懷川。呼燈與宋妹談先生居謫狀。相對嗟惋。宋必煕文卿與其兩弟來。信甫同至梧井。先向宋村。二皷後始來同話。
十六日。宋必恒元久與其弟必觀來。宋夏時僉知亦來。飯已別宋妹。行過文卿。集仲達甫俱在。出酒相待。又東北行三十里。至渼湖謁霽月堂書院。坐前樓見江水。江西諸山。亦皆秀峭。懸雲庵在絶頂。望之縹緲。宋夏楨持柿棗來餽。過荊江。次文義縣午飯。信甫至此又別去。客懷殊作惡也。黃昏至淸州。又館于壽弘家。191_554b 顯甫來。營將亦來。話至數皷而去。是日下微雪。
十七日。所乘騾病足。留淸州。申永昇兄弟來。崔泰齊亦來。邀兵營審藥。又針腦癤。飯後營將來。爲作大篆數紙。午刻李君春茂來。夕入近民軒。與顯甫同宿。營將又來。夜分而去。
十八日。顯甫借騎。行至北門樓少坐。申永昇來別。宋鎭重亦來。是泉谷先生後孫也。又北五十里。至溪上見家信。

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 제9권
 서(序)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옛날 경태(景泰 1449~1456) 연간에 아조(我朝)에 덕이 순일하고 절조(節操)가 드높았던 정학지사(正學之士)가 있었으니, 연촌(煙村) 최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서 이름을 덕지(德之)라 하였다.
일찍이 금근(禁近 시종신(侍從臣)을 말함)을 거쳐 주부(州府)의 목민관으로 나갔다가,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돌아가서는, 서루(書樓)를 지어 존양(存養)이라 편액(扁額)을 내건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었다.
그러다가 현릉(顯陵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선생에게 소명(召命)을 내리면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이르러 다시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조정에 함께 있던 현경(賢卿)과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길을 전송하면서 선생의 사적(事跡)을 높이 기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양루(存養樓)에 제(題)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또 선생의 가대인(家大人 부친)인 참의공(參議公 이름은 담(霮)임)이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을 둔 데 대해 일시에 찬송하는 작품도 많이들 내놓았다.
이 모든 시문(詩文)가 필적(筆迹)들을 최씨의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급기야 정유왜란(丁酉倭亂)을 겪는 바람에 존양루가 소실(燒失)되면서 간편(簡編)들도 함께 산일(散逸)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선생의 7대손인 전 참봉(參奉) 정(珽)이 또 타고 남은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그나마 90여 수(首) 정도를 찾아낸 뒤 영원히 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나에게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은 순실(純實)한 행동이 성유(聖諭)에 드러나게 될 정도로 순덕(純德)의 소유자였고, 중년에 봉록(俸祿)을 마다하고 산해(山海)에 자취를 숨겼으니 고절(高節)의 인사라 할 만하며,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편액(扁額)으로 내걸어 자신을 깨우쳤으니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다 해도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된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이를 모두 아울러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은 경태(景泰) 2년인 신미년(1451, 문종 1)의 일이었다. 그런데 4년 뒤인 계유년과 7년 뒤인 병자년에 국가에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진신(縉紳)들이 많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이 그야말로 이런 기미를 미리 환하게 알아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선생의 명지(明智)를 더욱 일컫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 보건대, 현릉(顯陵)이 일찍 빈천(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함)하여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갑자기 왕위를 내 주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선생의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될 줄이야 추측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세묘(世廟 세종(世宗))의 조정에서도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이름임)의 인끈을 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또 떠나야만 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었던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도는 가득 차면 무너뜨리고 겸손하면 더해 준다.[天道 虧盈而益謙]”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愷悌君子 神所勞矣]”고 하였다. 선생의 급류 용퇴(急流勇退)는 그야말로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으로서, 저절로 대란(大亂)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니, 어찌 눈치 빠르게 화(禍)의 기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자들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시문록(詩文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안평(安平)과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호임)에 대한 일은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가령 하동(河東)이나 고령(高靈) 범옹(泛翁)이나 사가(四佳)같은 제공(諸公)으로 말하면 훈명(勳名)은 비록 성대해도 정절(情節)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고,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임) 등 제인(諸人)으로 말하면 자정(自靖)한 점은 있지만 규족(葵足)처럼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맑은 복과 완전한 명성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 이 문집을 살펴보노라면, 그 시문들을 통해 선생의 심지(心志)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요, 세태(世態)를 논한 것이나 기인(其人 단종을 가리킴)을 향한 정성이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7월 보름에 덕수 후학 이식은 쓰다.

[주D-001]4년 뒤인 …… 되었다 : 단종(端宗)이 즉위한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를 강화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한 일과, 세조(世祖) 2년인 병자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사형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주D-002]천도는 …… 더해 준다 :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화락한 …… 위로해 준다 :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급류 용퇴(急流勇退) : 한창 벼슬이 높아질 때에 물러나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전약수(錢若水)에게, 어떤 노승(老僧)이 끝내 신선은 되지 못하겠지만 벼슬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是急流中勇退人”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聞見前錄 卷7》
[주D-005]하동(河東)이나 …… 사가(四佳)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면서 호가 범옹인 신숙주(申叔舟),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을 가리킨다.
[주D-006]자정(自靖) : 각자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정해서 결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스스로 뜻을 정해서 각자 선왕에게 고하라. 나는 여기를 떠나 숨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7]규족(葵足)처럼 …… 못하였다 : 몸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포견(鮑牽)이 난세(亂世)에 처하여 남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발이 끊기는 월형(刖刑)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보다도 못하구나. 해바라기는 그래도 잎사귀를 가지고 제 다리를 가려서 보호해 주는데.[鮑莊子之知不如葵 葵猶能衛其足]”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포장자는 포견을 가리킨다. 《春秋左傳 成公 17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