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 금지샘 산악회 /재경 칠곡면 금지샘산악회

재경 칠곡면 금지샘 산악회 창립 산행 (수락산) 2009.11,28,

아베베1 2009. 11. 28. 21:35

그동안 추진하여 오던 재경 의령군 칠곡면 산악회 창립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악회 명칭은 재경 칠곡면 금지샘 산악회 라고 명칭을 정하였다

금지샘은 자굴산 정상부 아래 약800미터 쯤에 위치한 샘의 명칭이다

 

 초대 회장은

 칠곡초등학교40회 강신길 님

 총무

  칠곡초등학교 54회 하윤옥 님

 산대장은

 칠곡초등학교 43회 허재도님

산행은 수락산역 1번출구를 시작하여 수락고등학교앞 능선으로  - 철탑능선 -매월정(곰바우) - 깔딱고개 - 수락산 후사면 -쫄쫄이 약수터

슬랩지역 - 수락산 정상(주봉 637미터)- 헬기장 -홈통바위(기차바위, 치마바위)- 도정봉 능선 -궤산정- 장암역  

참석자 명단은

 총12명, 의령신문사 사장님이신 박해헌 님이 참석하였다

 

  매월정에서

  곰바위 능선으로 가는 도중에서

  곰바위 모습

 

   매월당  김시습의 고시

 

 

  공바위에서 바라본 수락의정상부 암릉

 매월정에서 선후배님

 

 

 

 

 

  쫄쫄이 약수터 주변 슬랩지역

 

  선배님은 회갑을 지낸 이지만 산행에 열성적이다

  칠곡초교 54회선배님

 

 수락산 표석 주봉 637미터

 

고봉집 제1권
 [시(詩)]
근현의 조그만 암자에서 묵으며 현책 상인에게 써 주다〔宿根峴小菴 書示玄策上人〕


소나무 그늘 삼라하여 하늘도 가렸는데 / 松櫪陰森擁小天
쓸쓸한 띳집 세 칸쯤 얽어 있네 / 蕭蕭茅屋構三椽
흰 구름 그림자 창 안으로 들어오고 / 白雲影透晴窓裏
차가운 물소리 의자에서 듣누나 / 寒澗聲侵淨几邊
동봉 시권의 글자를 점검도 하고 / 點檢東峯詩卷字
서축 불법의 인연도 이야기하였네 / 談諧西竺法輪緣
뜬 인생 참으로 돌아갈 곳 있으니 / 浮生定有歸棲地
이제부터 한가론 삶이 늘그막에 알맞도다 / 從此閑居契暮年

계곡만필(谿谷漫筆) 제1권
 [만필(漫筆)]
[명천연과 김시습이 머리는 깎고 수염은 남겨 두었다[明天淵金時習剃髮而留鬚]]


명천연(明天淵)은 원(元) 나라 사람으로, 원 나라 말기에 한림 학사를 지내었다. 원 나라가 망하자 머리를 깎고 승려(僧侶)가 된 뒤 이름을 내복(來復)이라 하고 자(字)를 견심(見心)이라 하였는데 수염만은 옛날 그대로 놔 두었다.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가 그를 불러 보고는 괴이하게 여겨 물어 보니, 그가 대답하기를, “머리를 깎은 것은 번뇌를 없애기 위함이요, 수염을 남겨 둔 것은 장부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였는데, 뒤에 그의 시가 풍자하며 기롱하는 뜻을 담았다 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그런데 아조(我朝)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역시 승려가 되고서도 수염을 깎지 않고 말하기를, “머리를 깎은 것은 이 세상을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을 남겨 둔 것은 장부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다.”고 하였다. 모르겠다마는, 내복(來復)을 흠모한 나머지 그를 본받으려고 했던 것인가, 아니면 은연중에 그 뜻이 서로 부합되었던 것인가. 두 공(公)의 절조(節操)와 기개(氣槪)를 보아도 대략 서로들 비슷하니, 정말 기이한 일이라고 할 만하다.

속동문선 제7권
 칠언율시(七言律詩)
담상 유감(潭上有感)


김시습(金時習)

봉우리 위의 푸른 단풍나무는 천만 가지인데 / 峯上靑楓千萬枝
봄을 슬퍼하는 정서는 어지럽기 실과 같도다 / 傷春情緖亂如絲
바위 곁에 핀 꽃 울긋불긋하여도 응당 주인은 없으리니 / 岩花灼灼應無主
나는 나비 쌍쌍으로 가는 것 슬퍼할 만도 하여라 / 胡蝶雙雙亦可悲
어떻게 하면 사람의 일이 수경같을꼬 / 人事那能如水鏡
까마귀 새끼의 수컷 암컷을 그 누가 분별하리 / 烏雛誰復識雄雌
진 나라의 구덩이와 한 나라의 금고가 다 이러하거니 / 奏坑漢錮皆如此
부는 것 어느 것이 참이요 어느 것이 거짓인가 / 孰是眞吹孰竊吹


 

 물은 가만히 있으면 맑아지고 거울도 닦으면 밝아지므로 그같이 맑고 밝을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진(秦) 나라에서는 선비들이 소용없이 떠들기만 한다 하여 큰 구덩이를 파고 460여 명의 선비들을 산채로 쓸어 묻었었다. 한 나라 말년에는 선비들이 나라의 정치를 논평한다고 수백명의 명사들을 모두 금고형(禁錮刑)에 처하였었다.

오언율시(五言律詩)
효행(曉行)


김시습(金時習)

새벽 빛은 수풀 언덕을 비추는데 / 曉色照林墩
닭 소리는 강 마을에 시끄럽다 / 鷄聲鬧水村
연기 빛깔은 들 밖에 어리었고 / 煙光凝野外
이슬 빛은 들판에 둘렀다 / 露色遍郊原
호탕하게도 건곤은 너르나니 / 浩蕩乾坤濶
미끄러지는 듯 세월은 내달린다 / 蹉跎歲月奔
사람들 모두 의탁할 데 있거니 / 衆人皆有托
무슨 일로 나 혼자 높이 들려 있나 / 底事獨高鶱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 1435~1493)의 별호이다.

속동문선 제6권
 오언율시(五言律詩)
등루(登樓)


김시습(金時習)

해질녘 되어 산빛 좋은데 / 向晩山光好
옛 역 누각에 올라 가노라 / 登臨古驛樓
말이 울면서 사람은 멀리 가고 / 馬嘶人去遠
물결이 고요하매 놋소리 부드럽다 / 波靜棹聲柔
유공의 흥취가 옅지 않으매 / 不淺庾公興
왕찬의 근심을 녹일 만하다 / 堪消王粲憂
내일 아침이면 관 밖으로 건너리니 / 明朝度關外
구름 끝에 봉우리들 겹쳐 있구나 / 雲際衆峯稠

유공(庾公) : 진(晉)나라의 유량(庾亮)이란 사람이다. 그는 무창(武昌)의 총독으로 그 곳 남루(南樓)에 올라 놀기를 좋아하였다.
왕찬(王粲) : 한(漢)나라 말년 사람으로 그에게는 악양루(岳陽樓)에 올라서 지은 등루부(登樓賦)가 있다.

속동문선 제6권
 오언율시(五言律詩)
고류(古柳)


김시습(金時習)

늙은 버드나무에 매미 소리 급하거니 / 古柳蟬聲急
타향에 나온 오늘의 심정이구려 / 他鄕此日情긴 하늘에 벌여선 산은 푸르고 / 長天列岫碧
성긴 빗발에 강은 반쯤 밝구나 / 疏雨半江明
낮이 길어서 책상을 옮겨 놓고 / 晝永移書榻
샘물이 맑아 술 뒤웅박을 씻는다 / 泉淸洗酒罌
요즘에 와서 찾는 이가 적거니 / 邇來來訪少
뇌락하여 갈수록 경영할 일이 없구나 / 牢落轉無營

속동문선 제9권
 칠언절구(七言絕句)
주경(晝景)

오언고시(五言古詩)
산재(山齋)

김시습(金時習)

산재 어젯밤에 비가 / 山齋昨夜雨
뚝뚝 빈 섬돌에 떨어지니 / 滴滴落空階
내가 시름에 겨워 잠 못 이루어 / 愁人臥不寐
밤새도록 회포가 많았네 / 達旦終永懷
대장부 굳센 뜻이 / 丈夫倔彊志
한 칼에 창애를 무찌르리니 / 一劒夷蒼崖
어찌 녹녹히 진흙 속에 서리어 / 豈可終泥蟠
한도 있는 인생을 처량하게 보낼 것인가 / 戚戚生有涯
한 번 건져 곤과 고래를 모조리 잡고 / 一摝盡鯤鯨
한 낚시에 육오를 연하여 잡고 / 一釣連六鷔
한 발로 봉래ㆍ영주를 거더차면 / 一足踼蓬瀛
대지가 가을 터럭만큼 모이련마는 / 大地如秋毫
아, 세상일 맘대로 안 되어 / 吁嗟事不諧
세상과 내 신세가 서로 어긋나누나 / 世與身相乖
오경에 닭의 울음소리에 강개롭게 차고 일어나노니 / 五更慷慨蹴雞聲
이 불평한 회포가 언제 풀어질꼬 / 崢嶸懷抱何時平

어찌 …… 서리어 : 용에 비유한 말이다.
육오(六鰲) : 《열자(列子)》에, “용백국(龍伯國)의 대인(大人)이 한 낚시로 〈바다에서〉 육오(六鰲)를 낚아서 합해서 지고 돌아왔다.” 하였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남효온(南孝溫) 찬(撰)

○ 김굉필(金宏弼)은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점필재(佔畢齋)에게 수업하여 경자년에 생원이 되었다.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玄風)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밖에는 일찍이 읍(邑) 근처에도 나가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小學)》을 놓아본 적이 없었고, 파루를 친 뒤에야 침소에 들었으며,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소학》읽는 아이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글공부가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나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글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는 곧 성인될 바탕이 됨직하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리오.” 하였으니, 그를 추중(推重)함이 이와 같았다.
그는 나이 30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으며 후진을 가르침에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현손(李賢孫)ㆍ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공(朴漢恭)ㆍ윤신(尹信)과 같은 이는 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이들로, 그들의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은 그의 스승과 같았다. 그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도의 만회하지 못할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나서는 빛을 감추고 종적을 흐려버렸으나,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어 바른 일을 건의함이 없으매,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도는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 시원한 것을 마시는 데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
비를 걷고 홍수를 멈추게 함을 어찌 다 잘할 수 있으리오 /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세속에 심으면 결국은 변질되니 / 蘭加從俗終當變
뉘라서 소는 밭을 갈고 말은 타고 다니는 짐승임을 믿어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
하였는데, 선생이 시로써 이에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게 되어 경대부 자리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 내 어찌 할 수 있겠는가 / 匡君救俗我豈能
교육에 종사하는 후배가 우졸하다고 조롱하지만 / 從敎後輩嘲迂拙
세도와 권리가 구구한 벼슬길은 탈 만한 것이 못 되는구나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다. 이는 유쾌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친 상(喪)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고 너무 슬피 울던 나머지 졸도하였다가 깨어난 일도 있었다.
○ 안우(安遇)는 자(字)가 시숙(時叔)이다. 효행이 그 고을에서 으뜸이었다. 아버지 상중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점필재에게 학업을 닦았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 비로소 점필재와 틈이 났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혀 서울로 와서 회시(會試)에 응하려 하였는데, 사관소(四館所)의 연소한 자들이 오만하여, 나이든 지방 학생들을 때리려 하니, 시숙이 말하기를, “어찌 부모께서 물려준 몸을 죄없이 스스로 훼상시키면서까지 명예와 이익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장중에 들어가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 지조와 절개는 가히 동한(東漢)의 절의에 비할 만하다고 하겠다.
○ 권안(權晏)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자는 화청(和淸)이니, 나이는 나보다 20여 세나 위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죽지 아니하고 말년에 세 익우(益友)를 만났다.” 하였는데, 이는 나와 정중(正中)과 극창(克昌)을 지칭한 것이다. 젊어서 무술에 능하여 별시위(別侍衛)에 소속된 일도 있었다. 사람됨이 청백하여 오능중자(於陵仲子)와 같았고, 산수를 좋아하고 도학과 진리를 좋아하며, 효제충신에 있어서는 그 이상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집이 헐어도 비바람을 가리지 않았고 혹 양식이 떨어져도 그 즐거움은 여전하였으며 짧은 베옷에도 소연하였다. 말년에는 불도(佛道)를 좋아하였다.
○ 정여창(鄭汝昌)은 자가 자욱(自勗)이다.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이나 나오지 않고 오경을 닦아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하여 체(體)와 용(用)의 근원은 한 가지이지만 갈린 끝이 다른 것을 알았고, 선(善)과 악(惡)의 성(性)은 같으나 기질이 다른 것을 알았고, 유(儒)와 불(佛)의 도(道)는 같으나, 자취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성리학은 성광(醒狂 이심원(李深源)의 호)이 존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하교하여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유생을 구하였는데, 성균관에서는 자욱이 제일이라 하여 천거하였고,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은 자욱을 경연에 추천하려고 하였으나 자욱이 이를 사양하였다. 계묘년에는 진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이때 자욱의 나이가 적었으나 거상하는 데 결함이 없었고, 모상(母喪)에도 전례(典禮)의 수(數)나 죽을 먹는 일등을 일체 《가례》에 따랐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문은 사림 중에 으뜸이라고 천거하여 특별히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시켜서 불렀으나 자욱은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여 그를 포상하니, 명성이 더욱 높았다. 자욱은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며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소와 말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항상 담담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대단히 영리하였다. 젊을 때 성균관에 유생으로 있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코를 골며 졸았으나 누워 자지는 않았다. 남들이 이것을 모르다가 어느 날 밤 최진국(崔鎭國)의 눈에 띄어서 성균관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기를, “정모(鄭某)는 참선을 하고 자지 않는다.” 하였다.
○ 이정은(李貞恩)은 자가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혹은 설창(雪窓)이라고도 하였다. 수천 부정(秀川副正)에 배수되었으며, 음를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슬프게 연주하면 지나가던 행인도 꼭 눈물지을 정도였다. 사람됨이 독실하고 돈후하며 스스로 겸손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여 학문을 하는 데도 그 이치를 먼저 터득한 후에 문사를 다루어 스승을 수고롭히지 않았고, 시를 지을 때도 그 격식을 먼저 다룬 후에 수사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고, 덕을 닦는 데 있어서도 마음을 먼저하고 외모를 다음에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고, 행실에 있어서는 그 지위가 높다고 남을 위압하지 아니하고 가장 가난한 선비와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 이분(李坌)은 자가 자야(子野)며, 장안(長安)에 살았다. 어진이와 착한 이를 좋아하고 세력과 이욕에 담백하였으며 시를 잘하였다. 그의 심원한 기틀에 대해서 대유(大猷 김굉필)도 탄복하였다.
○ 노조동(盧祖同)은 자가 공서(公緖)이다. 《소학》 읽기를 좋아하였고, 순서를 밟지 않은 공부나 조롱하는 글이나 과거의 재능 등은 좋아하지 않았다. 법도에 맞는 몸가짐은 거의 대유와 같았으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 3년 동안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시숙(時叔 안우(安遇))과 함께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다.
○ 정세린(鄭世麟)은 자가 창부(昌符) 이며, 영남에 살았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그 학문은 공서(公緖 노조동)와 같으나, 시에 대한 재주가 월등하였다.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는데, 병오년에 죽었으니, 나이 22세였다.
○ 양준(楊浚)은 자가 징원(澄源)이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속이 깊고 침착하며 도량이 커서 가난하여도 걱정이 없이 도를 즐기기를 담담히 하였다. 또 국량이 웅장하고 깊었으며 외형에 나타나지 않도록 수양을 닦아 총명이 날로 진전하였다. 유림들은 그를 가장 낮게 보았으나 오직 여경(餘慶 홍유손(洪裕孫))만이 그의 인품을 잘 알았다.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으로, 신라(新羅) 왕족의 후예이다. 나이는 나보다 20세 위로,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를 동봉(東峯), 또는 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 했다. 세종 을묘에 태어났는데, 나이 5세에 문장을 엮을 줄 알았다.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들여 시를 짓게 하시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그 아버지를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세조(世祖)가 정권을 잡게 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산(水落山)의 절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수련하였으나, 유생을 보면 말마다 공맹을 칭송하고 불법에 대하여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도 닦는 것을 물으면 그는 또한 말하려 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앉아 죽은 일을 들어 말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대답하기를, “앉아 죽는다는 것은 예(禮)에서 귀히 여기지 않는다. 나는 단지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을 귀한 것으로 알 뿐이요, 그 외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1481, 성종 12) 연간에는 육식을 하고 머리를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 제사하며 말하기를, “삼가 아뢰옵건대, 순제(舜帝)는 오교(五敎)를 펴는 데 유친(有親)을 첫머리에 두었고, 죄를 3천으로 나열하되 불효함을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겠나이까. 그러므로 악독한 짐승에는 범과 늑대보다 더함이 없고, 미물의 충성으로는 승냥이와 수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다 능히 제 어버이를 사랑하는 품성을 온전히 가졌으며 또한 근본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삼가 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리의 원래 그러한 것이요, 물욕이 이를 덮기 어려운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미련한 소자도 근본과 지염의 계통을 이어받았으되 젊을 때 이단에 빠져 어리석게도 배우지 아니하였음을 슬퍼하여 장차 도(道)를 닦아 뛰어나보려고 하였으나, 윤회설과 같이 황당함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년(壯年)에는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뉘우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으며 먼 조상을 추모하는 넓은 의례를 정하고, 가난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소하고 깨끗함에 힘쓰고 제수를 차림에 정성으로서 하였나이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 때에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다고 하오며, 원(元) 나라 덕공(德公)은 백 세가 되어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에 감화했다고 하나이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것을 느끼고 세월의 지나감을 근심하니, 놀라웁고 황공함이 끝이 없어, 한탄함이 자못 많사옵니다. 만일 지난 허물을 씻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된다면 행여 면목을 세워서 구천에서 조종을 뵙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는 세상이 쇠하여감을 보고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남과 더불어 장예원(掌隷院)에서 송사를 한 일도 있었고, 어느 날에는 술을 먹고 시가를 자나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말하기를, “너 같은 놈은 그만두어야 마땅하다.” 하니, 정은 못 들은 척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하게 여겨 전에 서로 사귀어 놀던 사람들도 다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홀로 시정배의 미치광이 같은 아이나 만나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고 늘 어리석은 척하며 늘 웃고 지냈다. 뒤에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 춘천산(春川山)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이 무상하니, 사람들은 그의 정처를 알지 못하였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정중(正中)ㆍ자용(子容)ㆍ자정(子挺)과 나였다. 그가 지은 시문은 수만여 편이나 되었는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선배들이 혹 그의 글을 절취하여 마치 자기의 작품인양 하기도 하였다.
○ 홍유손(洪裕孫)은 자가 여경(餘慶)이요, 호는 조총(篠叢), 또 광진자(狂眞子)라고도 하였다. 남양(南陽) 아전 순치(順致)의 아들로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겨우 몸만 감싸고 혹 속옷도 입지 못하고 다녔다.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탐독하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하였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향리를 면할 계획도 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양 부사 채신보(蔡申甫)가 여경이 글 잘하는 것을 이유로 그 향역(鄕役)을 면제해 주었더니, 그는 곧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가 점필재(佔畢齋)를 뵙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그때 점필재 선생은, “이 사람은 벌써 안자(顔子)의 즐겨한 바를 본 사람이다.” 하였고, 학자들도 다 그를 존경하였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들어가 학업을 닦고 서울에 올라와 점필재 선생이 시사(時事)를 건의하지 못함을 간하여, “무엇 때문에 남의 벼슬과 녹을 헛되이 받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학자들은 불교나 노장학을 미워하지 않은 바 없으나, 실행에 있어서 불노학을 벗어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을 둥글게 하고 모난 것을 싫어하는 것이 노자학이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구휼하지 못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여경(餘慶)을 대단히 미워하여 이로부터 항시, “여경은 속이는 자이다.” 하였으니, 여경 역시 그 행동을 감추고 호화스런 가정에서 의식을 하였을 뿐이었다. 사람됨이 문(文)에는 칠원(漆園 장자)과 같고, 시에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과 비길 만하고 재주는 공명(孔明)을 지녔으며 행실은 만청(曼倩 동방삭(東方朔))과 같았다.
○ 유종선(柳從善)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字)는 여등(如登)이다.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감추어서 그 친구와 친척들도 그 얼굴 보기가 드물었었다.
○ 우선언(禹善言)은 처음의 자는 덕부(德父)이고, 호는 풍애(風崖)이다.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로 사람됨이 뛰어나서 외물에 구애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으로 영남에 내려가서 점필재(佔畢齋) 선생을 여막(盧幕)에서 뵈었는데, 선생이 그의 자를 자용(子容)이라고 지어주었다.
○ 김물(金勿)은 자가 개중(介重)이다. 강진(康津) 사람으로 감사(監司) 반()의 아들이다. 단정하고 묵중하며 결백함을 좋아했다.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거듭 과거에 급제하였다.
○ 최하임(崔河臨)은 자가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였으며,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이해 여름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무리인 설의(雪義)를 시켜서 불상을 몰래 숨겨 돌리며 부처가 저절로 다닌다 하고, 곡식과 비단과 베 등을 매일 천여 건씩 거둬들였다. 태학생들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 요망한 중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무려 다섯 번이나 글을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지만, 이 상소문은 다 진국의 손에서 된 것이었다. 병오년 7월에 죽으니, 나이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거두지 못하자, 그 친구들이 부의를 보내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저술한 책으로는 《안택기(安宅記)》가 있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이달선(李達善)은 자가 겸지(兼之)이다. 성품이 착한 것을 좋아했다. 병오년에 셋째로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을 지냈다.
○ 권경유(權景裕)는 자가 군요(君饒)니,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성질이 굳세고 대체를 알며 꾸밈이 없어서 강공직(姜公直 강응정(姜應貞)의 자)을 심히 미워하여 그이는 인정(人情)에 멀다고 하였으나, 늦게서야 그의 행실을 듣고 매우 사랑하였다. 계묘년에 진사가 되고 병오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지냈다.
○ 이윤종(李尹宗)은 자가 극창(克昌)이요, 호는 차군당(此軍堂), 또는 죽계(竹溪)라고도 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사람됨이 어진이를 좋아하며 공직(公直)ㆍ자욱(自勗 정여창의 자)ㆍ백연(伯淵)ㆍ화정(和情 권안(權晏)의 자) 등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벗들이다.
○ 고순(高淳)은 자가 희지(熙之), 또는 태진(太眞)ㆍ진진(眞眞)이라고도 하였으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귀머거리가 되어서 사람들은 땅에 글자를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무술년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시정을 논하는 글월을 올렸는데, 망령된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누가 이 소리를 전하니 희지는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스스로 호를 망인(妄人)이라고 하였다. 희지가 처음으로 신덕우(辛德優 신영희(辛永禧)의 자)를 유림들 가운데서 보았을 때, 유림들은 서로 조심스럽게 말들을 하고 있는데, 희지는 한 조각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조그마한 누각에 봄바람이 고요한데 / 小閣春風靜
담담히 오고가는 말들은 모두 여유 있어 보이도다 / 淡談摠有餘
귀머거리인 이 사람은 아무 느낌이 없어서 / 聾人無一味
머리를 숙이고 홀로 책만 보고 있도다 / 垂首獨看書
하였다. 덕우(德優)는 기꺼워하며 그 글에 화답하기를,
세상 모든 소리는 귀가 시끄럽도록 혼탁하고 / 世聲聒溷濁
더러운 흙의 냄새는 아직도 코에 스쳐 남아 있도다 / 糞壤嗟鼻餘
부럽다. 그대여 방에 있는 누구보다도 나을세라 / 羨君勝房老
낮에도 가만히 천 권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 晝隱千卷書
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을 알아주는 교우로 여겼다. 무□년에 생원을 하였다.
○ 신영희(辛永禧)는 자가 덕우(德優)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으로, 재상인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도량이 커서 구애됨이 없고 활달하여 정의심이 많았다. 과거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시(詩)의 명성은 온 나라에 파다하였다. 참의(參議) 성현(成俔)은, “그의 시는 소(蘇 소식)ㆍ황(黃 황정견)의 경지에 출입하고 있다.” 하였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으나, 그후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 호는 부휴자(浮休子), 또는 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ㆍ장륙거사(藏六居士)ㆍ용헌거사(慵軒居士)라고도 하는데,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고 병오년에 제2등으로 급제하여 지금은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이다. 그는 젊어서 군요(君饒)의 집을 몰라, 나와 정중(正中)과 더불어 달밤을 타고 꽃을 완상하면서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나는 거짓말로 군요에게, “호현방(好賢坊) 살구꽃 아래에 이상한 사람이 글을 읊고 있기에 같이 데리고 왔는데, 그 말을 들으니 도량이 넓어 구애됨이 없으며, 그 시를 보니 맑고 차서 세상 티끌을 벗어나 있고 화식(火食)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바가 아니니, 세상에 선인(仙人)이 있다 하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닌가.” 하였다. 군요는 황급히 신을 거꾸로 신고 맞아들이며 서로 달 아래 자리잡고 앉았다. 중균이 글을 짓는데, 일부러 청수한 시태로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무릎을 꿇고, “누추하고 궁벽한 곳까지 뛰어난 선비가 어떻게 나의 친구와 함께 오셨습니까. 천행이 아니오니까. 하룻밤 묵고 가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중균은 굳이 가려고 하였다. 군요는 꿇고서 옷 뒷자락을 붙잡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담소로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에 사는 진사 이종준(李宗準)임을 알고 서로 손을 붙잡고 크게 웃었다.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허락하는 친우가 되었다.
○ 김응기(金應箕)는 자가 백봉(伯奉)이다. 정유년에 급제하고 지금은 예조 정랑이다. 신라의 왕족 계통인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 김응규(金應奎)는 자가 중성(仲聖)이다. 응기의 아우로서 의분심이 강하고 절개를 중히 여겼는데, 아버지 방경이 이를 매우 사랑했다. 정유년 나이 20세에 평안도의 향공(鄕貢) 시험에 세 번 연거푸 장원을 했다. 진사 회시(會試)에 들어가 시장(試場)에서 죽으니, 그때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아들 하나가 있다.
○ 총(摠) 종실은 자가 백원(百源)이다. 무풍 부정(茂豐副正)을 지냈는다. 태종(太宗)의 증손(曾孫)이니, 거문고의 재주는 정중(正中 정은(貞恩)의 자)과 비슷했으나, 그의 넓은 도량은 정중을 능가했다. 양화진(楊花津) 입구에 집을 짓고 손수 고기잡이 배를 저었으며 자호하여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고 했다.
○ 현손(賢孫 종실)은 자가 세창(世昌)이요, 신요(神饒)의 아들이다. 벼슬은 명양 부정(鳴陽副正)에 이르렀다. 나이는 나보다 13세나 적다. 매양 법도에 따라 몸을 자제하였으며, 독실한 몸가짐은 대유(大猷 김굉필의 자)의 다음이었다. 일찍이 관례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대유가 이것을 저지시켰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 윤신(尹信 종실)은 자가 임지(任之)다. 파주(坡州)에서 대대로 내려온 집으로 문숙공(文肅公)의 후예다. 몸가짐은 세창(世昌 현손(賢孫)의 자)과 비슷하였으나, 침착하고 원만한 것은 세창을 능가할 정도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 이적(李勣)은 자가 중율(仲栗)이다. 시를 공부한 후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공부하여 그 도(道)를 맛보고서부터는 시를 공부하지 않고 도에 뜻을 두었는데 오히려 시보다 경지가 심원하였다. 형식적인 일을 힘쓰지 않고 오히려 옛 사람을 벗삼았으며, 보통 때도 꼭 관대(冠帶)를 하고 당당한 행동을 하였다. 대유와 백연(伯淵)에게 사사하였다.
○ 허반(許盤)은 자가 문병(文炳)이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고 출세에 급급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대유를 사우(師友)로 삼았다. 대유는 그의 단아함이 천성에서 나왔음을 경복하였다. 음직으로 사직 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提調)로 있었다. 문병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입니다. 훗날 동방 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몸이온데 지금 내시와 더불어 거처하고, 서연(書筵)에 나갈 때가 적고 잡된 것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때가 많사오니, 청하건대…….” 하였다.
○ 민구손(閔龜孫)은 자가 서경(瑞卿)이다. 본관이 여주(驪州)로 죽은 첨정 수(粹)의 아들이요, 자정(子挺)의 처남이다. 일찍이 자정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얼마 아니하여 능하게 되자 또한 정중(正中 이정은(李貞恩)의 자)ㆍ정지(貞之 심정(沈貞)의 자)ㆍ중율(仲栗 이적(李勣)의 자) 등에 종유하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위인이 단정하고 우아하여 더러움이 없었다.
○ 신용개(申用漑)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자는 개지(漑之)이다. 대단히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시와 문에 능하였다. 숙주(叔舟)는 바로 그의 할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 면(沔)은 시애(施愛)의 난에 죽었다.
○ 이주(李冑)는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자는 주지(冑之)이다. 어질고 문에 능하였다. 용헌선생(容軒先生 이원(李原))의 증손이다.
○ 이원구(李元龜)는 낭옹(浪翁)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요, 참판 박팽년(朴彭年)은 바로 그의 외조부다. 두 집의 현능함이 이원구 한 사람에게로 모였다.
○ 이계맹(李繼孟)은 자가 희순(希醇)이다. 점필재(佔畢齋)가 그의 시문을 취택하였다. 전주(全州)에 살았는데 청수한 행동이 출중하였다.
○ 이세칙(李世則)은 자가 효옹(效翁)이다. 연안군(延安君) 숙기(叔琦)의 아들로 기개가 있었고 곧은 것을 좋아하였으며, 맑은 지조가 출중하였으며 시문에 능숙하였다.
○ 장세필(張世弼)은 자가 언경(彦卿)이다. 고양(高陽)에서 살았는데, 가난한 살림에도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어머니를 섬겼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여 겨우 성명(姓名)을 기록할 정도였다 한다.
○ 최세명(崔世明)은 자가 보광(葆光)이다.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감을 싫어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였다.
○ 안계송(安繼宋)은 자가 우윤(于胤)이요, 호는 박전(薄田)이다. 사람됨이 어리석어 시와 술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 박전이라 하여 비웃었다. 그러나 박전은 그런 것도 몰랐다. 음직(蔭職)으로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을 배명 받은 후 지금까지 17년이 되었으나, 승진을 못하고 있으니, 세리(勢利)에 담담함을 알 수 있다.
○ 신포(申誧)는 자가 지정(持正)이요, 호는 허주(虛舟)이다. 시와 그림에 조예가 있고, 집이 가난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장륙(莊六)이라 호하였는데, 중균(仲鈞)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바꾸자고 청하니 지정은 허락하였다.
○ 구영안(丘永安)은 본관이 강릉으로 자가 중인(仲仁)이요, 호는 호은(壺隱)이니, 문장의 명성이 있었고 기축년에 생원 시험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벼슬과 공리를 싫어하였다. 또한 음양ㆍ추보(推步)ㆍ풍수ㆍ의술ㆍ선도ㆍ불도ㆍ승제(乘除 산술)의 법까지 섭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 심원(深源 종실)은 자가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또는 묵재(黙齋), 혹은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 하기도 하였다. 태종(太宗)의 현손(玄孫)으로 나와 동년생이나, 달과 날이 나보다 늦다. 경학에 밝고 조행(操行)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도 통하였다. 사람됨이 충효하고 무술(巫術)이나 불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관대를 하였으며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았다. 전강(殿講) 때는 사서와 오경에 통달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서 주계 부정(朱溪副正)으로 진급하였다. 나이 25세에 전후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다스리는 도를 논하였는데, 혹은 윤허를 받기도 하고 혹은 윤허를 얻지 못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숙모부(叔母夫) 임사홍(任士洪)이 무도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논난하다가 조부의 눈밖에 나서 장단(長湍)으로 귀양갔다. 또 이천(伊川)에서 임금께 글을 올려 병중의 부모를 가뵙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들이 간곡하고 지극하여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 종친들만 보는 과거[宗親科]에서 경(經)ㆍ사(史)ㆍ강독에 제1등으로 뽑히어서, 임금께서는 약과 술을 내리셨고 계급은 2품으로 높아졌으나, 군(君)은 봉하지 않았으니 이전에 조부(祖父)에게 거스른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 강응정(姜應貞)은 자가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齋)이다. 나보다 10여 세 위이다. 은진(恩津)에서 살았으며 효행으로 칭송을 받았다. 일찍이 어머니의 병에 3년 동안이나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은 반드시 몸소 맛보고 바쳤다. 하루는 꿈에 천신(天神)이 마당에 내려와 공직에게 이르기를, “내일 오는 손님은 반드시 의술가이니, 너의 어머니 병을 그에게 물어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과연 한 소년이 왔는데, 이름은 원(元)이라 하며 스스로 윤왕동(輪王洞)에서 산다고 하며, 공직에게서 숙박하기를 청하므로 머무르게 하였다. 어머니의 병에 대하여 물어보니, 한 마디 말에 과연 의약자(醫藥者)임을 알게 되어 소년의 말대로 시험해 본 결과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뒤에 부모상에 있어 한결같이 가례를 좇아 행하여서 겨울에도 맨발로 지내니,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그 문에 효자의 정표(旌表)를 달았었고 집안의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공직의 사람됨은 경서를 잘 외우며 사주ㆍ관상 등으로 인명(人命)을 예언하며, 또한 의술서를 섭렵하고 겸하여 지리 서적까지도 보았다. 젊어서는 태학에 노닐면서 장안의 준걸한 재사들과 더불어 주문공(朱文公)의 고사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짓기도 하고, 혹 월삭(月朔)에는 《소학》도 강론하였다. 그때 뽑힌 이는 다 한때의 명사들로서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요, 신종호(申從護)는 자가 차소(次韶)요, 박연(朴演)은 자가 문숙(文叔)이요, 손효조(孫孝祖)는 자가 무첨(無忝)이요, 정경조(鄭敬祖)는 자가 효곤(孝昆)이요, 권주(權柱)는 자가 지경(支卿)이요, 정석형(丁碩亨)은 자가 가회(嘉會)요,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요, 김윤제(金允濟)는 자가 자주(子舟)인데 이들은 그 중에서 뛰어난 자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그들을 비방하여 혹은 소학계(小學契)라고 지목하기도 하고, 혹은 효자계(孝子契)로 지목하기도 하였으며, 공자(孔子)ㆍ사성(四聖)ㆍ십철(十哲)이라는 기롱도 있었다. 시골서 불우하게 지내며 늙도록 과거 시험을 보지 않다가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훈도(訓導)가 되었다.
○ 안응세(安應世)는 본관이 죽산(竹山)으로,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인데, 또는 구로지인(鷗鷺至人) 또는 연파조도(煙波釣徒),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도 하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담담하고 상쾌하며 가난한 생활에도 태연자약하여 분수를 달게 여겼으며,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선불(仙佛)의 도(道)를 배우지 않고 장기와 바둑을 즐겨하고, 시를 잘하는데 악부(樂府)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그는, “의롭지 못한 재물을 집안에 보태두는 것이라든지, 의롭지 못한 음식으로 오장(五臟)을 보(補)한다는 것은 더욱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체로 이와 같았는데, 흰 옥에 흠이 있는 격으로, 그는 주색(酒色)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는데 그해 9월에 죽으니, 나이가 26세였다. 그를 알고 모르고 간에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채순(蔡恂)은 자가 숙부(叔孚)니, 양천(陽川)에 살았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사람됨이 과거를 중시하였다.
○ 한훈(韓訓)은 자가 사고(師古)요, 아명은 학이(學而)이다. 본관은 청주(淸州)로 서울에 살았으며, 시에 조예가 있고 병오년에 진사를 하였다.
○ 강흔(姜訢)은 자가 시가(時可)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관찰사(觀察使)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처음에는 밀양(密陽)에서 여경(餘慶)에게서 배웠고, 점필재(佔畢齋)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웠으며, 다음에는 덕우(德優)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다음에 대유(大猷)에게서 《소학》을 공부하였고, 그 다음에는 시숙(時叔)과 공서(公緖)에게서 배웠으며 유극기(兪克己)의 여막에까지 가서 글을 읽었다.
○ 조자지(趙自知)는 본관이 평양(平壤)으로 자는 성지(性之)이다.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진이를 좋아하며, 산수를 좋아하고 유희를 좋아하였으며, 공명을 좋아하지 않고 침울하여 말이 적었다. 여경에게서 배웠는데, 시에 능하였다.
○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우온(于韞)이다.
○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다.
○ 이장길(李長吉)
○ 최충성(崔忠誠)은 자가 필경(弼卿)이다.
○ 노섭(盧燮)
○ 유방(劉房)
○ 조원기(趙元紀)
○ 조광림(趙廣臨)
○ 정붕(鄭鵬)

[주D-001]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는 임종시에 대부의 대자리를 거두고 딴 자리를 바꾸어 깔고 죽었다.
[주D-002]자로(子路)가 결영(結纓) : 위(衛) 나라의 싸움에서 자로가 창에 맞아 관끈이 끊어졌는데, 자로는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어서는 안 된다.” 하고, 관끈을 매고 죽었다.
서계집 제8권
 기(記) 4수(四首)
석림암기(石林庵記)

수락산(水落山) 석림암(石林庵)은 승려 석현(錫賢)과 그 문도 치흠(致欽)이 세운 암자로, 이름은 내가 지었다. 수락산은 경성(京城)에서 30리 동쪽에 자리하여 삼각산(三角山), 도봉산(道峯山)과 더불어 솥발처럼 솟아 있다. 비록 깎아지른 형세는 두 산보다 조금 못하지만 수석(水石)의 경치는 수락산이 으뜸이니, 이 산의 명칭은 이 때문에 얻어진 듯하다. 그러나 이름이 도리어 두 산에 가려져 세상에서 이 산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또한 이 산에 유람하러 오지 않는다.
수락산 동쪽에는 예전에 매월당(梅月堂)과 흥국사(興國寺), 은선암(隱仙庵) 등 몇 개의 절이 있었다. 매월당은 곧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이 거처하던 곳인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미 없어졌다. 열경은 이 산을 매우 좋아하여 ‘동봉(東峯)’이라 자호(自號)하였을 정도이다. 흥국사가 아주 컸으나 지금은 역시 없어지고, 단지 ‘성전(聖殿)’이란 곳만 무너지지 아니하여 승려 두셋이 살고 있을 뿐이다. 은선암은 후대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런대로 온전하여 지금 16, 7명의 승려가 살고 있다. 그러나 산 서쪽에는 유독 하나의 절도 없다. 서북쪽 봉우리 아래에 절터가 남아 있기는 하나 또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며 지금은 절이 없다.
내가 석천(石泉)에 거처를 잡고 보니, 산 서쪽에 해당된다. 바위와 골짝이 그윽하고 시내와 폭포가 기이하여 경성으로부터 3, 4십 리 사이 삼각산과 도봉산 안팎에 있으면서, 세상에 명성을 독차지하여 사람들이 사모하고 구경하는 여러 샘과 골짝도 이곳에는 견줄 수 없으니, 이는 수락산만의 가장 빼어난 경치가 될 뿐만이 아니다. 내가 홀로 이곳의 경치가 몹시 빼어나다고 여겨 왔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산을 빛내는 이름나고 아름다운 가람이 없다. 그리하여 일찍이 은선암에 이르러 노승(老僧)들과 얘기를 나누며 이를 매우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때 마침 석현이 곁에 있다가 묵묵히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였으니, 이미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듯하다.
오래 뒤에 그 문도 치흠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지난날 선생의 말씀에서 석현 스님도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병이 많아 몸소 할 수 없어서 저로 하여금 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단지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몇 달 뒤 치흠이 또 와서 말하기를, “절터를 찾았습니다. 채운봉(彩雲峯) 서남쪽 산속으로, 직소봉(直小峯)과 향로봉(香爐峯)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명년에 재목(材木)을 모아 일을 시작할 터이니, 선생께서는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그해 가을 내가 통진 현감(通津縣監)을 사직하고 떠날 때 남은 녹봉으로 그 비용을 조금 보태 주었는데, 한 해 뒤에 돌아오니 암자가 완성되었다. 두세 칸 띳집이 바위를 등지고 골짝을 향해 있어 한적하게 진속(塵俗)을 벗어난 정취를 자아내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하여 즉시 이름하기를 ‘석림암’이라 하였다.
아, 이 산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니, 그 승경이 애당초 옛날이라 해서 더 낫고 지금이라 해서 더 못하지 않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사랑할 줄 모르고 이 산을 좋아한 자는 오직 열경 한 사람일 뿐이었는데, 열경이 죽은 지가 또 300년이나 되니 열경을 이어 다시 이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암자를 지은 것이 열경과 비교하여 그 뜻이 어떠한가. 석현과 치흠은 혹 알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또 옛날 혜원법사(惠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머물 때, 종유(從遊)한 이가 도연명(陶淵明)이었다. 혜원이 결사(結社)할 때 연명이 그 모임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데, 혜원이 계율을 지키느라 객을 만날 적에 술상을 차린 적이 없었으나 유독 연명을 위해서만은 술상을 차렸으며, 전송할 적에 자신도 모르게 함께 호계(虎溪)를 넘었으니, 그 행적이 또한 몹시 기이하다 하겠다. 형해(形骸)의 굴레를 벗어나 서로 교유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러할 수 있었겠는가. 석현의 청담(淸談)과 운치(韻致)는 비록 혜원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진실무위하여 속진에 물들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유사하다. 비루한 나로 말하면 어찌 감히 망녕되이 고인(古人)에 견주겠는가. 다만 석현과 서로 기약하는 것이 또한 연명과 혜원 사이의 교유와 같기를 바랄 뿐이다.

[주D-001]혜원법사(惠遠法師)가 …… 넘었으니 : 혜원법사는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이다. 혜원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흰 연꽃을 심고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18명과 백련사(白蓮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사영운(謝靈運)ㆍ도잠(陶潛)ㆍ육수정(陸修靜) 등도 참여하였다. 호계(虎溪)는 동림사 앞에 있는 시내로, 혜원법사가 손님을 전송할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호랑이가 울었다 한다. 하루는 도잠ㆍ육수정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지나 호랑이가 울자,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수락산(水落山)을 유람하며 지은 시의 후서


삼각산(三角山)과 도봉산(道峯山)은 도성 근교의 우뚝한 산으로 수락산(水落山)과 더불어 솥발처럼 높이 솟아 있다. 그리하여 사방의 여러 산이 옷깃을 여미고 빙 둘러 향하고 있으니, 크고 작은 산들이 모인 형상이 마치 아들 손자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다. 우뚝 솟은 형세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갑을(甲乙)을 다투고 유심(幽深)하고 기이(奇異)함으로는 동봉(東峯)이 으뜸이다. 비록 함양(咸陽)을 누르고 있는 저 종남산(終南山)과 태화산(太華山)이나 낙양(洛陽)에 짝하고 있는 숭산(嵩山)과 소실산(少室山)인들 그 장엄하고 수려함으로 말하면 수락산만 못할 것이다.
일찍이 몇몇 사람들과 수락산 정상에 올랐었는데, 초입에서는 구불구불 깊숙이 들어가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거나 무덤 속에 떨어진 듯하고, 정상에 오르자 온 사방이 훤하게 트여 마치 바람을 타고 신선이 된 듯하였으니, 그야말로 인간사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성곽은 아련하고 집집마다 저녁연기 피어나며 강물은 구불구불 천 리를 달려 바다로 흐르며, 서남쪽으로는 운해가 자욱하고 동북쪽으로는 이내가 아득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경광이 발길을 따라 다른 것으로 말하면, 심목(心目)으로 그 요체를 잡을 수 없고 그림으로 그 절경을 그려 낼 수 없으니, 또 어찌 우내(宇內)의 아름다운 볼거리가 아니겠는가.
때는 마침 가을 경치가 저물어 강산(江山)이 맑고 쓸쓸한데 벼랑에는 붉은 단풍 시들고 연못에는 누런 국화 떨어지니, 오싹하여 감회를 자아내고 처량하여 감상(感傷)에 젖어든다. 더구나 청한자(淸寒子 김시습(金時習))의 구서(舊棲)에는 등나무가 늙고 수목이 시들며 사람은 가서 자취가 없는데, 서글프게 홀로 와 만 길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천고(千古)에 남긴 자취를 생각하노라니,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개연히 서글픈 감회에 젖어들게 한다. 밤에 선원(禪院)에서 묵은 다음 아침에 부지(鳧池)에서 물을 마시고 아쉬운 마음에 서성이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 듯이 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산천(山川)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하산하여 시 약간 수를 지었다.
정사년(1677, 숙종 3) 9월 그믐에 후서(後序)를 쓰노라. 서계초수(西溪樵叟).


수당집 제7권
 발(跋)
김동봉(金東峯)의 삼각산시(三角山詩) 뒤에 쓰다.


매죽당(梅竹堂) 성공(成公 성삼문(成三問))이 취금헌(醉琴軒) 박공(朴公 박팽년(朴彭年)), 단계(丹溪) 하공(河公 하위지(河緯地)), 백옥헌(白玉軒) 이공(李公 이개(李塏)) 및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와 더불어 삼각산(三角山)을 읊은 연구(聯句)를 남겼는데, 그 우람하고 준정(峻整)한 형상과 위태롭고 굴곡(屈曲)한 모습들이 실로 온 산의 정신을 전하였다 하겠으니, 이를 통해서 제공(諸公)들의 서로 같지 않은 기상(氣像)들을 또한 상상하여 볼 수 있다.
그런데 김동봉(金東峯 김시습(金時習))이 5세 때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읊은 삼각산에 대한 시가 맑고 기이하면서도 드높고 빼어나서, 그 우뚝하고 굳건한 뜻이 가히 위의 박(朴)‘성(成) 제공들의 것과 더불어 막상막하라 하겠다. 그래서 그 시를 기록하여 이 연구(聯句)의 끝에다 덧붙여 둔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60권
 잡저(雜著) 7
장릉배식록(莊陵配食錄) 신해년(1791)


신해년(1791, 정조15) 정월 17일에 처음으로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에 거둥하려고 노량진을 지나다가 승지를 보내어 육신사(六臣祠)에 치제(致祭)하는데, 그때 경기 유생 황묵(黃默) 등이 상언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을 창절사(彰節祠 영월(寧越)에 있음)에 추가로 배향할 것을 간청하자, 이 문건을 예조에 내려 보냈다. 이에 예조에서,
“추가 배향은 국가의 금지령이 있어서 아니 됩니다. 시행하지 마소서.”
하였기에, 판하하기를,
“화의군을 그곳의 사당에 추가 배향하는 것은 신리(神理)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다 같이 잘 들어맞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추가로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또한 어찌 화의군 한 사람뿐이겠는가. 일전 행차가 노량을 지날 적에 길이 육신묘 곁으로 나 있어서 한참 행차를 멈추고 바라보며 오래도록 탄식하였으므로, 행전(行殿)에 묵으면서 친히 120구절의 제문을 지었던 것이다. 이처럼 감개한 마음으로 그처럼 정중한 전례(典禮)를 거행하였으니, 육신의 빛나고 우뚝한 절의는 진실로 사람들의 눈과 귀에 선하여질 것이다.
이를테면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화의군 등은 이같이 빛나는 절의가 종영(宗英 왕족 중의 걸출한 인물)에서 나왔으니, 어찌 더더욱 기이하고 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두 종영 이외에도 절의가 뛰어나서 육신 못지않은데도 이 사당에 배향되지 못한 사람임에랴. 이번 추가 배향 때에는 일체 시행하는 것이 실로 절의를 권장하고 충의를 포장하는 정사에 합치된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내각은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한남군(漢南君) 이어(李), 화의군 이영, 영풍군(永豐君) 이천(李瑔), 처사 김시습(金時習), 진사 남효온(南孝溫), 정언 이맹전(李孟專), 진사 조려(趙旅), 직제학 원호(元昊), 진사 성담수(成聃壽), 좌참찬 허후(許詡), 판서 권자신(權自愼), 장신(將臣) 송석동(宋石仝), 부사 이보흠(李甫欽), 교리 권절(權節), 감찰 정보(鄭保), 부제학 조상치(曺尙治) 등을 열록하여 올리고, 홍문관은 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苯), 판서 박중림(朴仲林), 도총관 성승(成勝), 판서 김문기(金文起),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 교리 성희(成熺) 등 여러 사람을 더 보태어 올렸는데, 그 설이 서로 맞지 않아서 사당에 배향하기에는 취사(取舍)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사실을 마땅히 국사(國史)에 고증하여야 되므로, 이에 사관을 사고(史庫)에 파견하여 단종과 세조 때의 실록을 참고하여 오도록 하여, 그들이 돌아오자 그 상세한 사실을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몸은 죽고 이름은 없어져서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약간 명 있어서 참작하여 취사하되 모두 근엄히 하여, 비록 의리를 지키며 자결하여 뛰어나게 일컬을 만한 자일지라도 그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면 모두 신중을 기하여 제외시켰다. 의리는 동학사(東鶴寺) 삼은각(三隱閣)의 제사를 취하고 제례는 달천(撻川)에 있는 단(壇)의 제도를 따라 본릉(陵 장릉을 가리킴) 곁에다 단을 설치하여 모두 함께 제사를 받들되, 그중 행적이 아주 드러난 사람은 정단(正壇)에 배향하고 사적이 자세하지 않은 자와 수사(收司 당시 역모 가담자의 처벌 기관임)에 연좌된 자는 별단에 배향한 다음, 아래와 같이 차례로 기록하였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60권
 잡저(雜著) 7
배향할 여러 신하를 취사할 적의 수의(收議)에 대한 비답 수의(收議) 내용도 붙임


지난날 우리 성조(聖祖)의 전교에 육신의 사당을 본릉의 홍살문 안에 그대로 두라고 하셨으니, 어찌 거룩한 일이 아니랴. 이에 배향의 예전(禮典)을 거론하여 삼가 조종(祖宗)의 뜻을 계승하는 일단에 붙이고자 하노라. 대저 제단의 제사와 묘정(廟庭)의 배향은 진실로 차이가 있으나, 제향을 하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두 대신(大臣)의 의계(議啓)에서 어떤 이는 단출한 것이 고귀한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이루 다 시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데, 다들 정중을 기하자는 뜻에서 나온 주장들이므로, 지금 취사하는 과정에 있어서 당연히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자로서 그 행적이 국승(國乘)과 《능지(陵志)》에 나타난 자로 귀결 지어야 한다. 이를테면 육종영(六宗英)과 오의척(五懿戚)과 삼상신(三相臣)과 삼중신(三重臣)과 양운검(兩雲劍)과 육신(六臣) 및 그들의 아버지 또는 아들 중 아주 뛰어난 자와 허후(許詡) 및 허조(許慥), 박계우(朴季愚), 문경공(文敬公), 문헌공(文獻公)의 아들 및 손자로서 아주 남다른 자와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등이다. 이상 31인을 배향의 대상으로 정하여 제사 의식에 축문을 넣을 것이며, 이 밖에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채 수사(收司)에 연좌된 사람은 다시금 참작하여 따로이 제단을 설치하는 조처가 있어야 옳은바, 대신들의 의견이 참으로 그럴듯하다. 유(壝)는 같이 하고 선(墠)은 따로 한 민충단(愍忠壇) 등의 여러 제단의 사례가 바로 이것이라고 하니, 이를테면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 조수량(趙遂良) 등 12인과 수사에 연좌된 의춘군(宜春君) 등 224인은 별단(別壇)에 제사 지내도록 하라.
아, 죽음을 무릅쓰고 의리를 다하여 송종(送終)의 일에 진력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뿐이다. 절의로 죽은 사람의 대열에 들어 있지 않다 하여 어찌 차마 이 사람만을 배향에서 빠뜨릴 수 있겠는가. 김 문정공(金文正公), 송 문정공(宋文正公)을 묘정(廟庭)에 추가로 올린 것도 바로 확실한 전거를 원용하여서인 만큼, 증 참판 엄흥도(嚴興道)는 31인의 위차(位次) 다음에 넣도록 하라. 또 이를테면 고(故) 처사 김시습(金時習), 태학생 남효온(南孝溫)은 세속을 떠나 자정(自靖)하여 몸을 맑혀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들의 청표(淸標)와 고수(苦守)는 백세(百世)를 감화시키고 권려할 만한데도, 모두 이 사당의 제향 대상에서 빠졌으니, 이는 미처 생각지 못한 아주 큰 결례이다. 두 신(臣)을 일체로 창절사에 배향할 것을 예조에 알리라.

부(附) 원임 제학(原任提學) 판부사(判府事) 이복원(李福源)의 의계(議啓)
단종 때 절의를 지키다 죽은 여러 신하들을 제단을 설치하여 제향하라는 분부는 바로 위로 영혼을 위로하고 아래로 인륜을 부지하려는 거룩하신 성덕(聖德)과 지극하신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므로, 성인(聖人)이 의리를 일으켜 세웠던 그 예(禮)는 백세를 두고 영원히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의 절의 역시 모두 해와 별같이 환히 드러난 이상 그에 대한 취사(取捨)야말로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만, 배향의 예전(禮典)은 지극히 엄격하고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이번의 분부가 비록 묘정(廟庭)의 배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나, 증직과 시호를 내려 사원(祠院)에 배향하는 일과 비교하여 볼 때 그 의의나 일의 성격이 본래부터 같지는 않습니다. 조정에 나온 적도 없고 작명(爵名)도 받은 적이 없는 자는 아무리 그 행적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다시금 더 헤아려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엄흥도 한 사람으로 말한다면 절의를 다하여 매장한 일은 조정에 나온 사람과 다를 것이 없고, 가족을 돌아보지 않고 모험을 한 일은 작명을 받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육신의 대열에 넣는다 하여도 조금의 손색이 없습니다만, 대저 세상에 보기 드문 예전이란 단출한 것이 고귀한 법입니다. 충성을 다하여 절의에 죽는 것이 최상이고, 몸을 맑혀 의리를 지키는 것이 그다음이며, 수사(收司)에 연좌되어 함께 죽은 것이 또 그다음이므로, 단출하면 그것이 더욱 빛나게 되고 확대되면 간혹 근엄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을 따로 한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일은 그 의리가 표창이나 다름없고, 은전이 측은히 여김에서 나온 것인 데다 또 이미 배향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사람의 많고 적음은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부(附) 원임 제학(原任提學) 좌의정(左議政) 채제공(蔡濟恭)의 의계(議啓)
성상의 마음이 육신의 충절에 흥감하신 나머지 당시 절의를 지킨 여러 신하들에게 인정이 하도 끌리시어 능소(陵所)의 홍살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한식(寒食) 때에 일체로 제사를 올리라고 특별히 분부하신 일은, 그 예전(禮典)으로 본다면 그저 한때 의리를 일으켜 세우는 예라고 하겠으나, 사안으로 본다면 백대의 풍성(風聲)을 심을 수 있어 간책(簡冊)에 실려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어찌 신들의 마음으로만 흠송하며 찬탄하고 말 일이겠습니까. 내려 주신 세 권의 책을 신이 상세히 검토한 바, 그중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은 성상께서 친히 초록하시어 마치 금 저울로 물건을 달아 나눈 것과 같이 조금의 편차도 없어서, 되풀이하여 참고하여 보아도 꼭 들어가야 할 사람으로서 들어가지 않았다거나 들어가지 않아야 할 사람으로서 들어간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어떻게 의견을 내어 가부를 논할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까. 그 밖의 사람들을 하단(下壇)을 따로 설치하는 일의 질문에서는 측은히 여기고 포장을 함에 있어 혹시라도 누락될 것을 두려워하신 성상의 마음을 우러를 수 있을뿐더러, 세 책에 기록된 내용을 보니 여러 사람들이 전왕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죽음도 달게 받아들인 자취가 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백세의 뒤에 그 누가 측은히 여길 만하고 우러를 만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수효는 많고 그 자취는 소략하여 만약 일례로 상항(上項)의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배향한다면 혹시 예(禮)가 번쇄하게 되는 혐의가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일찍이 영남을 오가며 선배의 유적을 대략 알게 되었습니다만, 대개 금성대군이 화를 당한 일이 순흥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당시 인근 고을의 예법을 잘 지킨 사람으로서 종신토록 저절로 금고되어 북으로 대궐을 향할 길이 막히어 동으로만 머리를 돌린 자가 이따금씩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서 시행하는 희대의 은전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뒷날 연로(輦路)의 상언(上言)은 갈수록 더 분분하여질 것이고, 시행을 하려 하여도 이루 다 시행할 수가 없게 될 것이 적이 걱정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번에 초록한 것으로 잘라서 한계를 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