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 금지샘 산악회 /2009.11.25. 금지샘 수락산 창립산행

재경 의령군 칠곡 금지샘 창립산행 수락산 (리딩)

아베베1 2009. 11. 28. 22:37

 

 

 

 

 

 

 

 

 

 

 

 

 

 

 

 

 

 

 

 

 

명재유고 제4권
 시(詩)
3수


수려하고 맑은 자태 달빛 속에 간직하지 / 好藏淸艶月明中
무엇 하러 드러내어 풍설과 맞섰던가
/ 何事將來鬪雪風
백 년 뒤에 다시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 更有何人百載後
유묵에 의거하여 진공을 탄식할까 / 却憑遺墨歎陳公

양 잃은 뒤 외양간을 고쳐도 늦지 않고 / 亡羊補苙未爲遲
산에 있는 돌이라도 옥 가는 데 쓸 수 있지 / 山石猶爲琢玉資
지금은 탄식해도 이미 소용없으니 / 今日嗟嗟已無及
평생 나를 알아준 이 저버린 게 부끄럽네 / 此生長愧負心知

우리 인생 참으로 하루살이 같으니 / 浮生眞箇似蜉蝣
시인이 원유를 읊은 것도 우습다네 / 堪笑騷人賦遠遊
부자와 형제 함께 영원히 돌아간 곳 / 父子弟兄歸復處
천 년토록 늠름한 정기 볼 수 있으리라 / 唯看正氣凜千秋


[주D-001]수려하고 …… 맞섰던가 : 박세당이 《사변록》을 지은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즉 박세당이 높고도 깊은 학문의 경지를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간직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엇 하러 《사변록》을 지어 주자학(朱子學)을 신봉하는 세상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느냐고 탄식한 말이다.
명재유고 제4권
 시(詩)
약천(藥泉) 남 상국(南相國) 구만(九萬) 에 대한 만사

서계의 풀 묵은 지 몇 년이나 지났던가 / 西溪宿草幾回春
공이 또 바람처럼 저승으로 떠났구려 / 公又飄然去返眞
동갑내기 늙은 몸은 아직도 죽지 않고 / 雌甲殘生猶未死
부러워서 물끄러미 하늘 바라본다오 / 不堪長羨望蒼旻

[주C-001]남 상국(南相國) : 남구만(南九萬 : 1629 〜 1711)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 또는 미재(美齋)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소론(少論)의 영수로 숙종 대에 환국(換局) 정국에서 정치적 파란을 겪기도 하였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펼쳤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약천집(藥泉集)》,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D-001]서계(西溪)의 …… 지났던가 : 서계의 풀은 박세당(朴世堂) 무덤의 풀을 가리킨다. 박세당이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서쪽 골짜기 석천동(石泉洞)으로 물러가 지내면서 자호를 서계초수(西溪醮叟)로 삼은 바 있다. 박세당은 1703년에 세상을 떠났다.
서계집 제8권
 기(記) 4수(四首)
석천동기(石泉洞記)

석천동(石泉洞)은 잠수(潛叟)가 사는 곳이다. 잠수가 조정에서 시종(侍從)으로 벼슬한 지 10년이었는데, 어느 날 병으로 물러나 선부봉(仙鳧峯) 아래에 은거하고는 사는 곳의 샘물을 ‘석천(石泉)’이라 이름하고 이어 그 골짜기를 ‘석천동(石泉洞)’이라 이름하였다. 이 지역이 도성의 동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또 그 산등성이를 ‘동강(東岡)’이라 하고, 시내를 ‘동계(東溪)’라 하였으며, 또 이곳에 잠수가 산다고 하여 그 물을 ‘잠수(潛水)’라 하고 언덕을 ‘잠구(潛丘)’라 하였다.
‘석천’이라 이름한 까닭은 산속의 뭇 샘물이 모여 이 시내가 되었고, 온 산이 모두 바위인데 시냇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바위를 따라 오르내리며 담(潭)이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석천’이라 이름한 것이다. 맑은 샘물이 바위 위로 흐르고 하얀 바위가 샘물에 씻겨 샘물은 바위 때문에 더욱 맑고 바위는 샘물 때문에 더욱 희니, 아름답고 즐겁도다. 잠수가 사는 곳이여. 잠수는 날마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아침저녁으로 수석(水石) 사이를 소요(逍遙)하는데, 질병과 우환이 있지 않으면 이곳에 거닐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즐거워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는 자라 하겠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8, 9보 떨어진 곳에 집이 있으니 곧 잠수가 거처하는 집이요, 집에서 동쪽으로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언덕이 있으니 곧 잠수의 무덤자리이다. 이 언덕을 ‘낙구(樂丘)’라 하고, 이 집을 ‘정사(精舍)’라 하였으니, 잠수가 살아서는 여기에 거처하고 죽으면 이곳에 묻힐 것이다. 비록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한 유령(劉伶)과는 다를 법하지만, 잠수의 경우 또한 자신을 위한 도모를 잘 하였다고 할 만할 것이다.
그 회일(回日)ㆍ영월(迎月)ㆍ백학(白鶴)ㆍ채운(彩雲)ㆍ선부(仙鳧) 등 봉우리들의 기이함과, 선유(仙游)ㆍ도장(道藏)ㆍ토운(吐雲)ㆍ서하(栖霞) 등 계곡들의 빼어남과, 취선대(聚仙臺)ㆍ초학대(招鶴臺)와 수옥정(漱玉亭)ㆍ난가정(爛柯亭)과, 객성기(客星磯)와 음우담(飮牛潭)과 크고 작은 폭포와 샘물의 빼어난 경치로 말하면 도성 근교에서 보기 드문 경치인데, 잠수가 골라서 이름을 붙인 곳까지 합하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선 그중에 한두 곳을 기록하여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잠수가 이곳에서 즐거워한 바를 알게 하노라.

[주D-001]잠수(潛叟) : 잠수는 박세당의 호이다. 무신년(1668, 현종 9) 1월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양주 수락산(水落山) 석천동(石泉洞)에 은거하였다.
[주D-002]삽을 …… 유령(劉伶) : 유령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성품이 남달리 술을 좋아하여 늘 녹거(鹿車)를 타고 술을 담은 호로병 하나를 가지고 다녔는데, 한 사람에게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하여 자기가 죽으면 그 자리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가 지은 주덕송(酒德頌)이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에 실려 있다. 《晉書 卷49 劉伶傳》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반남박씨세보(潘南朴氏世譜)》 서

보(譜)란 무슨 말인가. 기록함이 넓음을 말한다. 널리 그 종족(宗族)을 기록한 책을 ‘족보(族譜)’라 하니, 이 책은 박씨(朴氏)의 종족을 널리 기록한 것인데, 또 어찌하여 ‘족보’라 하지 않고 ‘세보(世譜)’라고 하는가. 세(世)로써 그 종족을 이으면 ‘세’라 하고 ‘족’이라 하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박씨는 뿌리가 신라(新羅)에서 시작되어 자손들이 널리 퍼졌다.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면서 낮게는 평민이나 종이 되기도 하고 높게는 공경(公卿)이나 대부(大夫)가 되기도 하였으니,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리하여 각각 기록할 만한 세손(世孫)을 시조(始祖)로 삼고 시조가 일어난 곳을 관적(貫籍)으로 나타냈으니, 반남으로 관적을 나타내고 호장(戶長) 응주(應珠)를 시조로 삼은 가문(家門)이 우리 종족이다. 우리 종족이 세상에 드러난 때는 고려(高麗) 말엽인데, 본조(本朝)에 와서야 창성(昌盛)하기 시작하여 3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더욱 번성하고 창대해져서 여러 성(姓) 중에 으뜸이 되었다. 고어(古語)에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장구하다.”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관면(冠冕)과 문벌(門閥)을 이르는 말이겠는가. 이는 공덕(功德)이 전대에 쌓이면 복택(福澤)이 후대에 넘친다는 뜻이니, 하늘이 장차 이로써 세상을 권면하는 징험을 삼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 종족의 번성함과 창대함이 이와 같으므로 세보를 만들 때 상세히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의 족보는 소략한 문제가 있고, 또 수십 년 전에 만들어서 뒤에 출생한 자손들이 실리지 못하였으니, 끊어진 가계(家系)를 잇고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는 것은 반드시 후대에 해야 할 일이었다.
족제(族弟) 세채(世采) 화숙(和叔)이 처음 지금의 세보를 만들다가 중간에 족질(族姪) 태징(泰徵)에게 맡겨 17년 만에 완성을 보았으니, 과거의 소략한 문제가 있던 것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늦게 출생한 후손도 이어서 모두 실리게 되었으며, 널리 오류를 바로잡은 것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체례(體例)는 분묘(墳墓)의 소재를 반드시 쓰고 어디에서 이주하였는지를 반드시 썼으니, 이는 먼 조상을 추념하고 종족을 분변하려 해서이다. 그리고 외손(外孫)은 대자(大字)로 쓴 줄에 넣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고 이성(異姓)을 분별하려 해서이다. 또 벼슬을 하였는지,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었는지, 향년(享年)이 몇인지, 모일(某日)에 졸(卒)했는지를 반드시 자세히 썼으니, 이는 소씨(蘇氏)의 족보에서 그 좋은 점을 택한 것이다.
내가 이로 인하여 느끼는 점이 있으니, 친친(親親)에 대해 박하게 한 소명윤(蘇明允 소순(蘇洵))의 인(仁)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긴다. 소명윤이 자신의 족보를 만들 적에, 위로는 고조(高祖)까지만 싣고 아래로는 아들까지만 실었으며, 방계(傍系)는 8촌인 시마(緦麻)까지만 실었다. 이와 같은데도 “우리의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길 것이다.”라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저 소명윤은 장차 천하 사람들을 모두 들어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손을 자손으로 여기지 않아, 기년복(朞年服)과 공복(功服)을 입는 가까운 종족을 남남으로 보게 만들었을 뿐이니, 그러고도 도리어 종족에 대해 후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족보를 만들어 기록하는 것은 모르거나 잊지 않고자 해서이다. 천하에 고조와 증조의 이름과 작위를 잊고 시마와 공복의 항렬(行列)을 모르는 자는 있지 않으니, 소씨처럼 싣는다면 또 족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마침내 “다행히 남남이 되기 전에 소홀히 하고 잊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였다.”라고 한단 말인가. 고조와 증조, 시마와 공복도 오히려 족보가 있어야 잊지 않는 관계라면 남남이 되는 것을 겨우 면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소씨가 친친에 대해 너무 박하지 아니한가. 옛날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지을 적에, 황제(黃帝) 이래의 씨(氏)와 성(姓)의 유래를 상세히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고 또 대부분 몇 대(代)인지를 밝혔으니, 만약 예로부터 보첩(譜牒)이 없고 또 보첩을 만드는 자들이 대다수 소씨처럼 간략하게 만들었다면 사마천이 어디에서 근거를 취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세보에 실은 것은 시조인 호장(戶長)으로부터 우리 형제까지 15세(世)가 되고, 우리 형제의 자손까지가 또 3세인데, 이보다 아래의 자손은 다만 아직 보이지 않아 기록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별도로 종통을 이룬 방계(傍系)도 모두 수록하였는데,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다만 증빙할 길이 없어서 기록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와 같이 널리 실은 까닭은 친친(親親)의 의리를 극도로 넓히기 위함이다.
아, 아들로부터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아래로 내려오는 18대 종족이 모두 부자의 친한 관계가 아님이 없다. 내 몸에 있어 이미 그러하니, 곧 내 종족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만 갈래가 한 근원임을 생각하고 천 가지가 한 뿌리임을 살핀다면, 반드시 장차 금할 수 없는 정(情)이 우러나고 차마 할 수 없는 의(義)가 생겨날 것이니, 어찌 친(親)이 다하고 복(服)이 없다고 해서 종족을 남처럼 보는 데에 이르기까지 하겠는가.
금상(今上) 9년 계해년(1683, 숙종 9) 5월 갑진일에 반남 박세당이 삼가 쓰다.

[주D-001]뿌리가 …… 장구하다 : 백거이(白居易)의 해주자사배군부인이씨묘지명(海州刺史裴君夫人李氏墓志銘)에 “근원이 먼 자는 흐름이 길며 뿌리가 깊은 자는 가지가 무성하다.〔夫源遠者流長 根深者枝茂〕”라고 한 말이 보인다.
[주D-002]소씨(蘇氏)의 족보 : 소순(蘇洵) 집안의 족보서(族譜序)를 가리킨다. 《唐宋八家文 卷17 蘇氏族譜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