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대전(宋子大全) 제154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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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청(十淸)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
십청 선생은 경사(京師)에 입조(入朝)하였다가 요동(遼東)에 돌아왔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보다 먼저 음애 선생(陰崖先生) 이자(李耔)ㆍ송재 선생(松齋先生) 한충(韓忠)이 남곤(南袞)과 함께 연경(燕京)에 들어가다가 남곤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송재가 말하기를,
“이놈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온 사류(士類)를 몰살시키고야 말 것이다.”
하므로, 음애가 눈짓을 하고 나서 정성껏 치료해 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화가 일어났으니, 이는 다 남곤과 심정(沈貞)의 소행이었다. 이에 선생이 흐느껴 울면서 말하기를,“남곤ㆍ심정이 과연 사류를 몰살시키고 말았으니, 효직(孝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효직은 정암(靜菴) 조광조 선생의 자(字)이며, 간당(姦黨)들은 이 말로 인하여 선생을 이미 밉게 여기고 있었다.선생이 사신 일을 마치고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상이 마침 《논어(論語)》의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란 대문을 강(講)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殿下)에게도 허물이 있습니다. 접때 조광조(趙光祖) 등이 당우(唐虞)의 치도를 본받으려 하자, 전하께서 그들을 높이고 신임하셨으므로 그들 신진이 그만 급속도로 옛것을 새것으로 혁신시키려 하다가 과연 과격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만약 전하께서 그들의 재국에 따라 적절히 조정하셨다면 반드시 성과를 거두게 되었을 터인데, 도리어 그들을 귀양 보내고 살육하였으니, 이는 전하의 허물이 큽니다. 그러나 그 허물을 알아서 속히 고치면 허물이 없는 것이요,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으면 진정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되풀이해서 진언하는데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선생이 물러난 뒤에 남곤이 좌상(左相)으로 그 도당을 모아 합계하기를,“삼가 듣건대, 경연(經筵)에서 한 재신(宰臣)이 조광조의 피죄(被罪)를 두둔하고 나섰다 하오니, 추치(推治)하시기 바랍니다.”
하므로, 양사의 장관(長官) 홍숙(洪淑)과 조방언(趙邦彦) 등이 선생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주청하고 드디어 금부(禁府)에 구금시켰는데, 그 죄상(罪狀)에,“조광조의 죄상에 대하여는 조정에서 이미 율(律)에 의거하여 처단하였는데, 김모(金某)가 재상의 서열에 있으면서 시비를 현란하여 의론을 분열시켰으니, 일이 장차 불측(不測)한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특별히 용서하여 다만 음죽현(陰竹縣) 유춘역(留春驛)에 장배(杖配)시켰다.선생이 경연에서 진언할 때 상공진(尙公震)이 한림(翰林)으로 입시하였다가 나와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바른말을 들었다.”
하고 탄복하므로, 간당들이 노하여 상공까지 아울러 탄핵하였다.임오년(1522, 중종17)에 선생은 사면(赦免)을 받아 충주(忠州) 지비천(知非川) 가에 우거(寓居)하면서 지비옹(知非翁)이라 자호하였고, 그 뒤 조정에서 당화(黨禍)에 걸렸던 사람들을 다시 기용하게 되어 선생을 추부(樞府)로서 부르므로 상경하여 사은하고는, 즉시 하향(下鄕)하여 세상을 잊고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휘는 세필(世弼), 자는 공석(公碩)으로 신라 김씨왕(金氏王)의 후예이다. 고려 때 인관(仁琯)은 검교 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였고, 자수(自粹)는 문과(文科) 장원으로 벼슬이 도관찰(都觀察)에 이르고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호는 상촌(桑村)인데, 바로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 근(根)은 본조(本朝)의 한성 소윤(漢城少尹)으로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부 영유(永儒)는 성종 때 명신(名臣)으로 벼슬은 지중추(知中樞)에 이르고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아버지 훈(薰)은 첨정(僉正)으로 판서(判書)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송씨(宋氏)는 군수(郡守) 학(翯)의 딸이다.
성종이 친림(親臨)하여 제생을 시험할 때 선생이 제1위로 합격하였는데, 그 나이 겨우 18이었다. 상이 가장 연소한 것을 사랑하여 즉시 글제를 명하고 운(韻)을 부르자, 선생이 다시 붓을 들고 즉시 시를 지어 올리므로, 상이 더욱 기특하게 여기며 매우 융숭한 상을 하사하였다.
홍치(弘治) 을묘년(1495, 연산군1)에 사마시(司馬試)에, 병진년(1496)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한림이 되었고, 옥당(玉堂)에 선입되어 정자(正字)를 거쳐 수찬(修撰)에 이르렀으며, 이조 낭관(吏曹郞官)으로서 북관(北關 함경도 지방)에 봉명사(奉命使)로 나갔다. 그때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영흥(永興)의 훈도(訓導)로 있었는데, 선생이 첫눈에 그 사람됨을 알고 돌아오는 즉시 선발시켜 마침내 명경(名卿)으로 만들었다.
연산군 갑자년에 사화(士禍)에 걸려 거제(巨濟)로 유배되었고, 병인년(1506)에 중종이 즉위하여 응교(應敎)로 소환, 문사(文士)를 선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하였는데, 그때 피선(被選)된 6, 7명 중에 선생이 제1위였고, 이어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다.
고사(故事)에,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할 적에는 전서리(典書吏)가 으레 진강할 대문에 미리 쪽지를 붙여 진강관(進講官)에게 드리면, 진강관이 그 대문의 구두(句讀)와 문의(文義)를 복습한 뒤에 진강하도록 되어 있는데, 한번은 전서리가 다른 대문에 잘못 쪽지를 붙여 왔었다. 선생이 모든 동료와 함께 경연에 나아가 보니, 미리 복습한 대문이 아니었고 어의(語義) 또한 어렵고 심오(深奧)하므로 동료들은 책을 펴 놓고 모두 쩔쩔매었으나 선생이 잠깐 사이에 독파, 시원히 이해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었으니, 이는 선생이 온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일체 낯선 문자가 없었으므로 그처럼 촉박한 시기에 맞춰 즉각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동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통정(通政) 품계에 승진되어 부제학(副提學)ㆍ승지(承旨)로 재직한 기간이 많았고, 병자년(1516, 중종11)에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나갔는데, 상이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하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어 누가 잘 아느냐고 묻자, 한 사람이 선생밖에 없다고 대답하였다. 즉시 역말(驛馬)를 놓아 선생을 불러들인바, 그 입대가 명쾌하였으므로 상이 크게 가상히 여겨 감탄하였다.
상이 일찍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청백(淸白)하고 선치(善治)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올리게 하였을 때 선생이 정성근(鄭誠謹) 등과 함께 참여되었으므로, 즉시 가선(嘉善) 품계에 승진하여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로 나갔다가 들어와 대사헌(大司憲)ㆍ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기묘년 봄에 상이 장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하기 위하여 조정암(趙靜菴)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등 11명을 특별히 선발하였을 때 선생도 그중의 일원이었으니, 그 당시 선생에 대한 상하(上下)의 추중(推重)이 이와 같았다.
선생의 생졸(生卒)은 다 계사년이었고 부인(夫人)은 부사(府使) 이탁(李鐸)의 딸이며, 장남은 숙(䃤), 차남 구()는 참봉(參奉), 3남 저(䃴)는 지평(持平)이었고, 생원(生員) 양의(楊誼)ㆍ만호(萬戶) 최필신(崔弼臣)ㆍ생원 이지(李贄)는 세 여서(女婿)이며, 내외의 증손 현손이 크게 번창하고 또 현달(顯達)한 이가 많으나 다 기록할 수 없다.
세상에서, 기묘 연간을 본조(本朝)에서 가장 융성하였던 문명 시대로 치고 있으니, 그 당시 당적(黨謫)에 연좌된 이들의 재덕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의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한 학문 논의가 반드시 많았을 터인데, 참벌(斬伐) 소삭(銷鑠)을 겪은 나머지 능히 발휘하고 전술(傳述)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아들 지평공(持平公)마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음형(淫刑 부당한 형벌) 을 입어 별세한 때문에 선생의 소장(所藏)을 수집하여 후손에게 전수하지 못하고, 그 당시 당적(黨籍)에 겨우 몇 마디 말이 보일 뿐이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지금 그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면, 선생은 천품이 매우 높고 평소의 수양이 원만하며, 학문은 격치(格致 격물(格物)과 치지(致知))ㆍ성정(誠正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선무(先務)로 삼고 문장(文章)에는 조식(藻飾 아름다운 말을 꾸미는 것)ㆍ화미(華靡 화려한 것)하는 관습을 제거하였다. 가정에 있어서는 어버이 섬기는 데 효(孝)를, 형(兄) 섬기는 데 공(恭)을, 조상 받드는 데 성(誠)을 다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일체 예법에 따랐으며, 벼슬에 있어 일을 처리하는 데 청백ㆍ정직하였고, 더욱이 도덕으로써 개제(開濟)하여 사류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였다. 아, 그 당시 정암(靜菴) 제현들의 규모와 기상(氣像)이 그러하였으니, 그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선생의 대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찌 꼭 많아야만 되겠는가.
다만 전후 화(禍)를 받았던 경중으로 논한다면, 송재(松齋)가 가장 참혹하고 음애(陰崖)가 가장 가볍고 선생이 그 중간이다. 지금 선생과 음애가 함께 충주(忠州)의 서원(書院)에 향사(享祀)되고 있는데, 선생을 존모하는 이가 이미 화를 받은 경중으로써 음애에게 간격을 두지 않거니, 송재를 존모하는 이인들 어찌 선생에게 의심을 두겠는가. 이분들의 고하ㆍ천심에 대하여는 후학으로서 감히 알 바 아니지만, 당시의 제현들이 동과(同科)로 인정한 것만은 의심이 없다. 따라서 당적서(黨籍序)에 화를 받은 경중으로써 우열을 삼은 것은 정확하지 못한 바가 있다.
모재 선생 김안국이 일찍이 선생의 행장을 찬하였으나 불행히 병화(兵火)에 의해 없어지고 그 뒤에도 그대로 인순(因循)하여, 다시는 수록하여 드러낼 수 없게 되었는데, 지금 선생의 4세손 우곤(遇坤)ㆍ종현(宗鉉) 등이 나를 찾아와서 묘문(墓文)을 청하므로 사양하다 못하여 대충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중종반정 이후로 / 中廟改玉
여러 현인 함께 나와 / 衆賢彙征
온 조정에 가득할 제 / 濟濟盈庭
요순 군민 만들 뜻으로 / 其志君民
성탕 무왕의 도와 / 其道商周
염계 정자의 학 가졌는데 / 其學周程
뉘 함께 벗이 되며 / 誰與同朋
지기 서로 같았던가 / 與同其氣
진정 선생이 / 允矣先生
군서를 섭렵해 / 博極群書
깊은 것 다 탐구하고 / 無深不鉤
먼 것 모두 통하여 / 無賾不精
경연에서의 강론에 / 經幄討論
직접 창 들고 방 안에 들어서듯 하므로 / 操戈入室
여러 선비 모두 퇴각했네 / 群彥皆傾
외군에 있을 적에도 / 雖在外郡
임금이 그 학문 그리워하여 / 上思其學
즉시 정 보내 부르니 / 亟招以旌
세상에선 그 현능 사모하고 / 世慕其賢
물여우는 모래를 머금다가 / 蜮含其沙
별안간 벌레가 글자를 형성하고 / 蟲篆忽成
밤중에 궐문이 열려 / 神武夜開
현준이 차례로 목숨을 잃으니 / 賢俊騈首
귀신도 흐느끼고 놀랐어라 / 鬼泣神驚
홍수가 하늘에 닿아 / 洪水漫天
산과 언덕 묻혔는데 / 包山駕陵
한 지주 꿋꿋이 서 있으며 / 一柱亭亭
해 저물고 음산한 날에 / 日暮天陰
솔개와 까마귀 득실거리는데 / 鴟鴉滿林
봉새만 외로이 울부짖으며 / 鸑鷟孤鳴
구금(拘禁) 장형(杖刑)에 / 牢狴桁楊
작은 역참(驛站)에 유배되니 / 對移殘馹
택반의 독성(獨醒)일세 / 澤畔之醒
이윽고 법망(法網)이 풀려 / 天網俄弛
다시 조반(朝班)에 오르니 / 置我朝籍
마치 새벽녘 별처럼 빛났으나 / 爛然晨星
이는 본시 그리던 바 아니므로 / 匪我思且
옷깃 여미고 하향(下鄕)하니 / 斂衽來歸
물고기와 새들이 서로 맞아 주었네 / 魚鳥爭迎
나의 거실(居室) 조용하고 / 我室淸幽
나의 농사 풍등(豐登)하고 / 我稼豐長
나의 호수(湖水) 환하여라 / 我湖空明
옛날 송 나라 때 / 如昔宋朝
원우당(元祐黨) 완인으론 / 元祐完人
유원성 한 사람만이 / 有劉元城
끝내 당초의 뜻 일관시켰는데 / 竟收初心
불우한 선생의 일생 / 不施以沒
저 남곤과 심정 때문 / 彼哉袞貞
온 사림 추모하여 / 士林追慕
공경스레 향사하니 / 享祀孔式
서직이 향기로운 게 아닐세 / 黍稷非馨
오는 천추에 / 有來千秋
어느 누가 선생의 무덤에 / 疇敢不式
고개 숙이지 않으랴 / 先生之塋
[주D-001]정(旌) : 옛날에 임금이 대부(大夫)를 예빙(禮聘)할 때 사용하던 기(旗).
[주D-002]물여우는 …… 머금다가 : 물여우는 이름을 사공(射工), 또는 사영(射影)이라 한다. 등에 껍질이 있고 머리에 뿔이 있으며, 세 개의 발에다가 날개가 있고 눈은 없으나 귀가 밝은 충류(蟲類)로 모래를 머금어 사람에게 쏘아 대면 사람이 즉시 창병(瘡病)에 걸린다고 하는데, 소인(小人)이 군자를 모해하는 것을 비유한다.
[주D-003]벌레가 …… 형성하고 : 조선 중종 시대에 훈구파(勳舊派) 홍경주(洪景舟)ㆍ남곤(南袞) 등이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後宮)을 움직여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新進) 사류(士類)를 무고하게 하고 대전 후원 나뭇잎에 감즙(甘汁)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주초는 조(趙)의 파자(破字)로, 조광조가 왕이 되리라는 뜻)’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그 잎을 따다가 임금에게 바쳐 임금의 의심을 조장시키는 한편,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임금을 만나서 위협에 가까운 어조로,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주D-004]지주(砥柱) : 중국 황하수(黃河水) 중류(中流)에 우뚝 서 있는 주상(柱狀)의 바위산인데, 사람의 강한 의지와 기개를 비유한다.
[주D-005]택반의 독성(獨醒) : 이는 전국 시대 초(楚)의 대부(大夫) 굴원(屈原)이 소인의 참소로 임금에게 소박을 만나 초라한 행색으로 못가를 거닐다가 어부(漁父)를 만나서 “온 세상은 다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 깨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방축(放逐)을 당했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楚辭 漁父辭》
[주D-006]원우당(元祐黨) …… 유원성 : 송 신종(宋神宗) 때 사마광(司馬光)을 위시한 문언박(文彦博)ㆍ정이(程頤) 등 구당(舊黨)이 왕안석(王安石) 등 신당(新黨)과 대립, 당쟁이 철종(哲宗) 원우(元祐) 연간까지 치열해졌는데, 휘종(徽宗) 숭녕(崇寧) 초기에 소인(小人) 증포(曾布)ㆍ채경(蔡京) 등이 휘종에게 청하여 구당 180명을 간당(奸黨)으로 지척, 단례문(端禮門)에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세웠으며, 구당 중에 원성(元城) 사람 유안세(劉安世)는 기개가 강직하여 일곱 번이나 험악한 곳에 적거(謫居)하면서도 굽힐 줄 몰랐으므로, 소식(蘇軾)이 그를 ‘철한(鐵漢)’이라 일컬었다.
[주D-007]서직이 …… 아닐세 : 서직은 제물(祭物)을 말한다. 《서경(書經)》 군진(君陳)에 “지극한 다스림은 향내가 풍기는 것과 같아 신명(神明)을 감응시키므로, 서직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밝은 덕만이 향기로운 것이다.” 하였다.
[주D-002]물여우는 …… 머금다가 : 물여우는 이름을 사공(射工), 또는 사영(射影)이라 한다. 등에 껍질이 있고 머리에 뿔이 있으며, 세 개의 발에다가 날개가 있고 눈은 없으나 귀가 밝은 충류(蟲類)로 모래를 머금어 사람에게 쏘아 대면 사람이 즉시 창병(瘡病)에 걸린다고 하는데, 소인(小人)이 군자를 모해하는 것을 비유한다.
[주D-003]벌레가 …… 형성하고 : 조선 중종 시대에 훈구파(勳舊派) 홍경주(洪景舟)ㆍ남곤(南袞) 등이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後宮)을 움직여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新進) 사류(士類)를 무고하게 하고 대전 후원 나뭇잎에 감즙(甘汁)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주초는 조(趙)의 파자(破字)로, 조광조가 왕이 되리라는 뜻)’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그 잎을 따다가 임금에게 바쳐 임금의 의심을 조장시키는 한편,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임금을 만나서 위협에 가까운 어조로,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주D-004]지주(砥柱) : 중국 황하수(黃河水) 중류(中流)에 우뚝 서 있는 주상(柱狀)의 바위산인데, 사람의 강한 의지와 기개를 비유한다.
[주D-005]택반의 독성(獨醒) : 이는 전국 시대 초(楚)의 대부(大夫) 굴원(屈原)이 소인의 참소로 임금에게 소박을 만나 초라한 행색으로 못가를 거닐다가 어부(漁父)를 만나서 “온 세상은 다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 깨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방축(放逐)을 당했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楚辭 漁父辭》
[주D-006]원우당(元祐黨) …… 유원성 : 송 신종(宋神宗) 때 사마광(司馬光)을 위시한 문언박(文彦博)ㆍ정이(程頤) 등 구당(舊黨)이 왕안석(王安石) 등 신당(新黨)과 대립, 당쟁이 철종(哲宗) 원우(元祐) 연간까지 치열해졌는데, 휘종(徽宗) 숭녕(崇寧) 초기에 소인(小人) 증포(曾布)ㆍ채경(蔡京) 등이 휘종에게 청하여 구당 180명을 간당(奸黨)으로 지척, 단례문(端禮門)에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세웠으며, 구당 중에 원성(元城) 사람 유안세(劉安世)는 기개가 강직하여 일곱 번이나 험악한 곳에 적거(謫居)하면서도 굽힐 줄 몰랐으므로, 소식(蘇軾)이 그를 ‘철한(鐵漢)’이라 일컬었다.
[주D-007]서직이 …… 아닐세 : 서직은 제물(祭物)을 말한다. 《서경(書經)》 군진(君陳)에 “지극한 다스림은 향내가 풍기는 것과 같아 신명(神明)을 감응시키므로, 서직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밝은 덕만이 향기로운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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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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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世子侍講院贊善朴弼周。撰。
先生諱世弼。字公碩。慶州之金。新羅金氏王後也。在高麗。有檢校太子太師仁琯。文科狀元都觀察號桑村自粹。以孝行旌閭。爲先生高祖。入本朝。若漢城少尹贈兵曹判書根,司憲府大司憲諡恭平永濡,僉正贈判書薰。卽曾祖考三世也。妣。 鎭川宋氏郡守翯女。成廟臨軒試諸生。先生方十八歲。而褎然居首。成廟異之。復以落霞命題呼韻。先生仍卽席製進。成廟益加奇賞。諭以非常之偉器。當老其才而大用之。命收賜第。賞賚特優。弘治乙卯。司馬。丙辰。釋褐。由槐院入翰林。爲玉堂正字。始恭平公舊第。在明禮坊。先生自少讀書矻矻。至鷄鳴不已。有巡更卒。每竊聽之。相語曰。吾輩不久。必報夜巡於此宅。至是。自喜其言之中。又相傳說云。陞修撰。以吏部郞。出使北關。識拔李聾巖賢輔於訓導凡流之中。卒爲名卿。燕山甲子。士禍橫挐。謫巨濟。丙寅。中廟踐祚。以應敎召命。極擇文士。賜長暇讀書。蓋據國朝故事。爲文衡儲養也。被選者。如李容齋荇,金慕齋安國,金沖庵淨諸賢。皆極一時之選。而先生爲之首。其屬望之重如此。授典翰。一日。當進講。典書吏適失誤。所籤非所講。不能宿習。而登筵後始覺之。句讀文義。適甚艱奧。同僚失色。而先生則倉卒當之。沛然讀下。無少窒礙。解釋通透。蓋先生博洽經史。讀難書甚易。能造次不窮如此。人皆歎服。通政後。多爲副提學,承旨。丙子。爲養爲廣州牧使。上講易學啓蒙。問誰知者。有以先生對者。承召命。入對明暢。上甚嘉歎焉。命選廉謹善治人。先生與鄭誠謹等。與焉。進嘉善階。自湖南觀察使。入爲司憲府大司憲,吏曹參判等職。上將講性理大全。又命別擇講官。先生與趙靜庵,金慕齋等十一人。又同選。時己卯春也。以使臣朝京師。還到遼東。聞北門之禍。先是。陰崖李先生耔,松齋韓先生忠。與南衮同赴京。衮道病幾殊。松齋曰。赤士類者。必是夫也。今其病死固幸。何療爲。陰崖目攝之。而至誠救活。至是禍作。衮與沈貞之爲也。先生慟曰。衮果赤士類矣。孝直何罪。孝直者。靜庵先生之字也。姦黨大銜之。旣復命。因入侍。方講論語過勿憚改。先生進曰。殿下亦不能無過。向者。趙光祖等。欲致君唐虞。殿下尊寵信任。於是。新進之士爭慕效之。必欲革舊更新。固有急遽過激之失。而其心則何罪焉。殿下苟裁抑取中。則至治可期。而乃反竄逐殺伐。一網打盡。殿下之過。豈有甚於此者乎。雖然。若知其過而亟改之。則復於無過矣。不然則非所謂勿憚改者。而其過遂不可救矣。因反覆陳說。淚隨言發。衮時爲左相。與其黨。合辭請推治。兩司長官洪淑,趙邦彥等。又請拿鞫。遂下廷尉拷問。事不測。上忽命減死。配于陰竹留春驛。尙公震以翰林。同在筵席。見先生進言狀。出而歎曰。今日幸聞讜言。姦黨怒。竝劾之。壬午。始宥還。後蒙朝廷收敍。一入京。謝樞府恩命。卽歸不復出。先生生卒。皆癸巳。墓在龍仁竹田地先兆下艮坐之原。配貞夫人固城李氏。淮陽府使鐸之女。三男。䃤,。參奉。䃴。淸明峻正。克述先軌。經翰林南床。當乙巳士禍。以持平。直言斥元衡。賜死於謫中。三女壻。生員楊誼,萬戶崔弼臣,生員李贄。曾玄甚繁。且多顯者。而繁不能盡錄。噫。先生歿後。慕齋寔述行狀。而今軼不傳。蓋經家難與兵燹故也。其後尤齋宋文正公時烈。撰出神道碑文。而類亦補苴闕漏。其於先生學問風旨。蓋無得以致其詳。是誠爲後學之遺恨矣。雖然以其世論之固爲可知。蓋惟中廟己卯之際。號稱我朝極盛。以其有靜庵諸賢也。先生寔與之彙征。其所踐之位。非長於論思風憲。則佐貳天官。可見其爲上下推重之至。而碑文中有曰。天資甚高。充養有素。爲學。以格致誠正爲先。爲文。絶去藻飾華靡之習。其居家。事親盡其孝。事兄盡其恭。奉先盡其誠。敎子弟一遵禮法。當官處事。廉潔正直。尤以道德開濟。爲士類所敬重。卽此數語。先生之所以爲先生者。固得其大略。而若言其立朝本末。則始阨於燕山亂世。久困謫籍。終値中廟聖代。亦不免於流配。豈所謂直道而行。焉往不黜者非耶。夫以先生之與靜庵同道也。當禍作之日。苟不奉使於上國。則必入群賢一網。而就使不然。亦必極力諫諍。有如鄭文翼光弼,柳大憲雲之爲矣。是則先生所處之義。其亦時焉而已。柳以事理考之。先生之進言。在於奸凶擅權。諸賢被罪之後。邦禁至嚴。頭勢極怕。視禍發之初。不啻爲尤難。而猶涕泣極言。懇懇納誨。至被栲訊。雖幸天日至明。得免殞身。而其禍則酷矣。彼以受罪輕重。妄分優劣者。是烏足以知先生哉。其爲未當。儘如尤齋之論矣。先生之學甚博。而尤好易與中庸。前後凡兩朝天。多購二書之箋註以來。非用功之篤。其如是乎。其以廣州牧承召。進講易學啓蒙者。可知其造詣超絶。有非他人所及矣。王陽明文字東來未久。人莫知其爲何等語。而先生早已覷破其爲禪學。與朴訥齋祥。有酬唱三絶句。若是者。皆足見先生所學之正矣。先生詩文散佚。所傳絶少。而澤堂李公植。稱其富蓄平鋪。矢口成章。蓋以理勝爲主。而論學之詩。意味尤盈溢。不直爲文章之高而已也。先生嘗奉使嶺南。過忠州之知非川而樂之。及自留春驛宥還。遂就其地。開荒結屋。仍自號知非翁。訥齋時以忠州倅。爲經營之。屋形如工字。中設廳堂。兩邊爲寢室。先生居其左。學徒處之右。而中廳則爲講授之所。時經己卯斬伐。以學爲諱。而惟先生與慕齋。居於忠,驪相望之地。敎誨後進。多所成就。至今彬彬。稱爲文獻之邦。仁賢作人之澤。亦可謂久而不斬矣。世傳訥齋在忠原。每以春糶累十斛。分饋二先生。至秋。又自糴。歲以爲常。二先生爲其異於祿米。皆受而不辭。前輩友道之篤厚。足令薄夫知敦矣。先生所居村之以秣馬名者。亦由訥齋於來訪先生時。每秣馬於前川茂林下而得之云。忠州多士以先生與李陰崖耔,李灘叟延慶,盧蘇齋守愼。竝享于八峯書院。近者。又因筵臣陳白。命賜先生諡。聖朝崇儒重道至此而無餘憾矣。先生七代孫墀來謁狀文於弼周。弼周老且病。謝却筆硯。而特以高山景行之思不能自已。故玆謹摭尤齋所撰碑文。參以先生後孫所記錄。而檃括之如右。以備太常氏採取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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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명(神道碑銘) | ||||
십청(十淸)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
십청 선생은 경사(京師)에 입조(入朝)하였다가 요동(遼東)에 돌아왔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보다 먼저 음애 선생(陰崖先生) 이자(李耔)ㆍ송재 선생(松齋先生) 한충(韓忠)이 남곤(南袞)과 함께 연경(燕京)에 들어가다가 남곤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송재가 말하기를,
“이놈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온 사류(士類)를 몰살시키고야 말 것이다.”
하므로, 음애가 눈짓을 하고 나서 정성껏 치료해 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화가 일어났으니, 이는 다 남곤과 심정(沈貞)의 소행이었다. 이에 선생이 흐느껴 울면서 말하기를,“남곤ㆍ심정이 과연 사류를 몰살시키고 말았으니, 효직(孝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효직은 정암(靜菴) 조광조 선생의 자(字)이며, 간당(姦黨)들은 이 말로 인하여 선생을 이미 밉게 여기고 있었다.선생이 사신 일을 마치고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상이 마침 《논어(論語)》의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란 대문을 강(講)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殿下)에게도 허물이 있습니다. 접때 조광조(趙光祖) 등이 당우(唐虞)의 치도를 본받으려 하자, 전하께서 그들을 높이고 신임하셨으므로 그들 신진이 그만 급속도로 옛것을 새것으로 혁신시키려 하다가 과연 과격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만약 전하께서 그들의 재국에 따라 적절히 조정하셨다면 반드시 성과를 거두게 되었을 터인데, 도리어 그들을 귀양 보내고 살육하였으니, 이는 전하의 허물이 큽니다. 그러나 그 허물을 알아서 속히 고치면 허물이 없는 것이요,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으면 진정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되풀이해서 진언하는데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선생이 물러난 뒤에 남곤이 좌상(左相)으로 그 도당을 모아 합계하기를,“삼가 듣건대, 경연(經筵)에서 한 재신(宰臣)이 조광조의 피죄(被罪)를 두둔하고 나섰다 하오니, 추치(推治)하시기 바랍니다.”
하므로, 양사의 장관(長官) 홍숙(洪淑)과 조방언(趙邦彦) 등이 선생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주청하고 드디어 금부(禁府)에 구금시켰는데, 그 죄상(罪狀)에,“조광조의 죄상에 대하여는 조정에서 이미 율(律)에 의거하여 처단하였는데, 김모(金某)가 재상의 서열에 있으면서 시비를 현란하여 의론을 분열시켰으니, 일이 장차 불측(不測)한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특별히 용서하여 다만 음죽현(陰竹縣) 유춘역(留春驛)에 장배(杖配)시켰다.선생이 경연에서 진언할 때 상공진(尙公震)이 한림(翰林)으로 입시하였다가 나와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바른말을 들었다.”
하고 탄복하므로, 간당들이 노하여 상공까지 아울러 탄핵하였다.임오년(1522, 중종17)에 선생은 사면(赦免)을 받아 충주(忠州) 지비천(知非川) 가에 우거(寓居)하면서 지비옹(知非翁)이라 자호하였고, 그 뒤 조정에서 당화(黨禍)에 걸렸던 사람들을 다시 기용하게 되어 선생을 추부(樞府)로서 부르므로 상경하여 사은하고는, 즉시 하향(下鄕)하여 세상을 잊고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휘는 세필(世弼), 자는 공석(公碩)으로 신라 김씨왕(金氏王)의 후예이다. 고려 때 인관(仁琯)은 검교 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였고, 자수(自粹)는 문과(文科) 장원으로 벼슬이 도관찰(都觀察)에 이르고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호는 상촌(桑村)인데, 바로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 근(根)은 본조(本朝)의 한성 소윤(漢城少尹)으로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부 영유(永儒)는 성종 때 명신(名臣)으로 벼슬은 지중추(知中樞)에 이르고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아버지 훈(薰)은 첨정(僉正)으로 판서(判書)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송씨(宋氏)는 군수(郡守) 학(翯)의 딸이다.
성종이 친림(親臨)하여 제생을 시험할 때 선생이 제1위로 합격하였는데, 그 나이 겨우 18이었다. 상이 가장 연소한 것을 사랑하여 즉시 글제를 명하고 운(韻)을 부르자, 선생이 다시 붓을 들고 즉시 시를 지어 올리므로, 상이 더욱 기특하게 여기며 매우 융숭한 상을 하사하였다.
홍치(弘治) 을묘년(1495, 연산군1)에 사마시(司馬試)에, 병진년(1496)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한림이 되었고, 옥당(玉堂)에 선입되어 정자(正字)를 거쳐 수찬(修撰)에 이르렀으며, 이조 낭관(吏曹郞官)으로서 북관(北關 함경도 지방)에 봉명사(奉命使)로 나갔다. 그때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영흥(永興)의 훈도(訓導)로 있었는데, 선생이 첫눈에 그 사람됨을 알고 돌아오는 즉시 선발시켜 마침내 명경(名卿)으로 만들었다.
연산군 갑자년에 사화(士禍)에 걸려 거제(巨濟)로 유배되었고, 병인년(1506)에 중종이 즉위하여 응교(應敎)로 소환, 문사(文士)를 선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하였는데, 그때 피선(被選)된 6, 7명 중에 선생이 제1위였고, 이어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다.
고사(故事)에,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할 적에는 전서리(典書吏)가 으레 진강할 대문에 미리 쪽지를 붙여 진강관(進講官)에게 드리면, 진강관이 그 대문의 구두(句讀)와 문의(文義)를 복습한 뒤에 진강하도록 되어 있는데, 한번은 전서리가 다른 대문에 잘못 쪽지를 붙여 왔었다. 선생이 모든 동료와 함께 경연에 나아가 보니, 미리 복습한 대문이 아니었고 어의(語義) 또한 어렵고 심오(深奧)하므로 동료들은 책을 펴 놓고 모두 쩔쩔매었으나 선생이 잠깐 사이에 독파, 시원히 이해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었으니, 이는 선생이 온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일체 낯선 문자가 없었으므로 그처럼 촉박한 시기에 맞춰 즉각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동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통정(通政) 품계에 승진되어 부제학(副提學)ㆍ승지(承旨)로 재직한 기간이 많았고, 병자년(1516, 중종11)에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나갔는데, 상이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하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어 누가 잘 아느냐고 묻자, 한 사람이 선생밖에 없다고 대답하였다. 즉시 역말(驛馬)를 놓아 선생을 불러들인바, 그 입대가 명쾌하였으므로 상이 크게 가상히 여겨 감탄하였다.
상이 일찍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청백(淸白)하고 선치(善治)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올리게 하였을 때 선생이 정성근(鄭誠謹) 등과 함께 참여되었으므로, 즉시 가선(嘉善) 품계에 승진하여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로 나갔다가 들어와 대사헌(大司憲)ㆍ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기묘년 봄에 상이 장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하기 위하여 조정암(趙靜菴)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등 11명을 특별히 선발하였을 때 선생도 그중의 일원이었으니, 그 당시 선생에 대한 상하(上下)의 추중(推重)이 이와 같았다.
선생의 생졸(生卒)은 다 계사년이었고 부인(夫人)은 부사(府使) 이탁(李鐸)의 딸이며, 장남은 숙(䃤), 차남 구()는 참봉(參奉), 3남 저(䃴)는 지평(持平)이었고, 생원(生員) 양의(楊誼)ㆍ만호(萬戶) 최필신(崔弼臣)ㆍ생원 이지(李贄)는 세 여서(女婿)이며, 내외의 증손 현손이 크게 번창하고 또 현달(顯達)한 이가 많으나 다 기록할 수 없다.
세상에서, 기묘 연간을 본조(本朝)에서 가장 융성하였던 문명 시대로 치고 있으니, 그 당시 당적(黨謫)에 연좌된 이들의 재덕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의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한 학문 논의가 반드시 많았을 터인데, 참벌(斬伐) 소삭(銷鑠)을 겪은 나머지 능히 발휘하고 전술(傳述)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아들 지평공(持平公)마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음형(淫刑 부당한 형벌) 을 입어 별세한 때문에 선생의 소장(所藏)을 수집하여 후손에게 전수하지 못하고, 그 당시 당적(黨籍)에 겨우 몇 마디 말이 보일 뿐이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지금 그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면, 선생은 천품이 매우 높고 평소의 수양이 원만하며, 학문은 격치(格致 격물(格物)과 치지(致知))ㆍ성정(誠正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선무(先務)로 삼고 문장(文章)에는 조식(藻飾 아름다운 말을 꾸미는 것)ㆍ화미(華靡 화려한 것)하는 관습을 제거하였다. 가정에 있어서는 어버이 섬기는 데 효(孝)를, 형(兄) 섬기는 데 공(恭)을, 조상 받드는 데 성(誠)을 다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일체 예법에 따랐으며, 벼슬에 있어 일을 처리하는 데 청백ㆍ정직하였고, 더욱이 도덕으로써 개제(開濟)하여 사류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였다. 아, 그 당시 정암(靜菴) 제현들의 규모와 기상(氣像)이 그러하였으니, 그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선생의 대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찌 꼭 많아야만 되겠는가.
다만 전후 화(禍)를 받았던 경중으로 논한다면, 송재(松齋)가 가장 참혹하고 음애(陰崖)가 가장 가볍고 선생이 그 중간이다. 지금 선생과 음애가 함께 충주(忠州)의 서원(書院)에 향사(享祀)되고 있는데, 선생을 존모하는 이가 이미 화를 받은 경중으로써 음애에게 간격을 두지 않거니, 송재를 존모하는 이인들 어찌 선생에게 의심을 두겠는가. 이분들의 고하ㆍ천심에 대하여는 후학으로서 감히 알 바 아니지만, 당시의 제현들이 동과(同科)로 인정한 것만은 의심이 없다. 따라서 당적서(黨籍序)에 화를 받은 경중으로써 우열을 삼은 것은 정확하지 못한 바가 있다.
모재 선생 김안국이 일찍이 선생의 행장을 찬하였으나 불행히 병화(兵火)에 의해 없어지고 그 뒤에도 그대로 인순(因循)하여, 다시는 수록하여 드러낼 수 없게 되었는데, 지금 선생의 4세손 우곤(遇坤)ㆍ종현(宗鉉) 등이 나를 찾아와서 묘문(墓文)을 청하므로 사양하다 못하여 대충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중종반정 이후로 / 中廟改玉
여러 현인 함께 나와 / 衆賢彙征
온 조정에 가득할 제 / 濟濟盈庭
요순 군민 만들 뜻으로 / 其志君民
성탕 무왕의 도와 / 其道商周
염계 정자의 학 가졌는데 / 其學周程
뉘 함께 벗이 되며 / 誰與同朋
지기 서로 같았던가 / 與同其氣
진정 선생이 / 允矣先生
군서를 섭렵해 / 博極群書
깊은 것 다 탐구하고 / 無深不鉤
먼 것 모두 통하여 / 無賾不精
경연에서의 강론에 / 經幄討論
직접 창 들고 방 안에 들어서듯 하므로 / 操戈入室
여러 선비 모두 퇴각했네 / 群彥皆傾
외군에 있을 적에도 / 雖在外郡
임금이 그 학문 그리워하여 / 上思其學
즉시 정 보내 부르니 / 亟招以旌
세상에선 그 현능 사모하고 / 世慕其賢
물여우는 모래를 머금다가 / 蜮含其沙
별안간 벌레가 글자를 형성하고 / 蟲篆忽成
밤중에 궐문이 열려 / 神武夜開
현준이 차례로 목숨을 잃으니 / 賢俊騈首
귀신도 흐느끼고 놀랐어라 / 鬼泣神驚
홍수가 하늘에 닿아 / 洪水漫天
산과 언덕 묻혔는데 / 包山駕陵
한 지주 꿋꿋이 서 있으며 / 一柱亭亭
해 저물고 음산한 날에 / 日暮天陰
솔개와 까마귀 득실거리는데 / 鴟鴉滿林
봉새만 외로이 울부짖으며 / 鸑鷟孤鳴
구금(拘禁) 장형(杖刑)에 / 牢狴桁楊
작은 역참(驛站)에 유배되니 / 對移殘馹
택반의 독성(獨醒)일세 / 澤畔之醒
이윽고 법망(法網)이 풀려 / 天網俄弛
다시 조반(朝班)에 오르니 / 置我朝籍
마치 새벽녘 별처럼 빛났으나 / 爛然晨星
이는 본시 그리던 바 아니므로 / 匪我思且
옷깃 여미고 하향(下鄕)하니 / 斂衽來歸
물고기와 새들이 서로 맞아 주었네 / 魚鳥爭迎
나의 거실(居室) 조용하고 / 我室淸幽
나의 농사 풍등(豐登)하고 / 我稼豐長
나의 호수(湖水) 환하여라 / 我湖空明
옛날 송 나라 때 / 如昔宋朝
원우당(元祐黨) 완인으론 / 元祐完人
유원성 한 사람만이 / 有劉元城
끝내 당초의 뜻 일관시켰는데 / 竟收初心
불우한 선생의 일생 / 不施以沒
저 남곤과 심정 때문 / 彼哉袞貞
온 사림 추모하여 / 士林追慕
공경스레 향사하니 / 享祀孔式
서직이 향기로운 게 아닐세 / 黍稷非馨
오는 천추에 / 有來千秋
어느 누가 선생의 무덤에 / 疇敢不式
고개 숙이지 않으랴 / 先生之塋
[주D-001]정(旌) : 옛날에 임금이 대부(大夫)를 예빙(禮聘)할 때 사용하던 기(旗).
[주D-002]물여우는 …… 머금다가 : 물여우는 이름을 사공(射工), 또는 사영(射影)이라 한다. 등에 껍질이 있고 머리에 뿔이 있으며, 세 개의 발에다가 날개가 있고 눈은 없으나 귀가 밝은 충류(蟲類)로 모래를 머금어 사람에게 쏘아 대면 사람이 즉시 창병(瘡病)에 걸린다고 하는데, 소인(小人)이 군자를 모해하는 것을 비유한다.
[주D-003]벌레가 …… 형성하고 : 조선 중종 시대에 훈구파(勳舊派) 홍경주(洪景舟)ㆍ남곤(南袞) 등이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後宮)을 움직여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新進) 사류(士類)를 무고하게 하고 대전 후원 나뭇잎에 감즙(甘汁)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주초는 조(趙)의 파자(破字)로, 조광조가 왕이 되리라는 뜻)’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그 잎을 따다가 임금에게 바쳐 임금의 의심을 조장시키는 한편,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임금을 만나서 위협에 가까운 어조로,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주D-004]지주(砥柱) : 중국 황하수(黃河水) 중류(中流)에 우뚝 서 있는 주상(柱狀)의 바위산인데, 사람의 강한 의지와 기개를 비유한다.
[주D-005]택반의 독성(獨醒) : 이는 전국 시대 초(楚)의 대부(大夫) 굴원(屈原)이 소인의 참소로 임금에게 소박을 만나 초라한 행색으로 못가를 거닐다가 어부(漁父)를 만나서 “온 세상은 다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 깨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방축(放逐)을 당했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楚辭 漁父辭》
[주D-006]원우당(元祐黨) …… 유원성 : 송 신종(宋神宗) 때 사마광(司馬光)을 위시한 문언박(文彦博)ㆍ정이(程頤) 등 구당(舊黨)이 왕안석(王安石) 등 신당(新黨)과 대립, 당쟁이 철종(哲宗) 원우(元祐) 연간까지 치열해졌는데, 휘종(徽宗) 숭녕(崇寧) 초기에 소인(小人) 증포(曾布)ㆍ채경(蔡京) 등이 휘종에게 청하여 구당 180명을 간당(奸黨)으로 지척, 단례문(端禮門)에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세웠으며, 구당 중에 원성(元城) 사람 유안세(劉安世)는 기개가 강직하여 일곱 번이나 험악한 곳에 적거(謫居)하면서도 굽힐 줄 몰랐으므로, 소식(蘇軾)이 그를 ‘철한(鐵漢)’이라 일컬었다.
[주D-007]서직이 …… 아닐세 : 서직은 제물(祭物)을 말한다. 《서경(書經)》 군진(君陳)에 “지극한 다스림은 향내가 풍기는 것과 같아 신명(神明)을 감응시키므로, 서직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밝은 덕만이 향기로운 것이다.” 하였다.
[주D-002]물여우는 …… 머금다가 : 물여우는 이름을 사공(射工), 또는 사영(射影)이라 한다. 등에 껍질이 있고 머리에 뿔이 있으며, 세 개의 발에다가 날개가 있고 눈은 없으나 귀가 밝은 충류(蟲類)로 모래를 머금어 사람에게 쏘아 대면 사람이 즉시 창병(瘡病)에 걸린다고 하는데, 소인(小人)이 군자를 모해하는 것을 비유한다.
[주D-003]벌레가 …… 형성하고 : 조선 중종 시대에 훈구파(勳舊派) 홍경주(洪景舟)ㆍ남곤(南袞) 등이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後宮)을 움직여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新進) 사류(士類)를 무고하게 하고 대전 후원 나뭇잎에 감즙(甘汁)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주초는 조(趙)의 파자(破字)로, 조광조가 왕이 되리라는 뜻)’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그 잎을 따다가 임금에게 바쳐 임금의 의심을 조장시키는 한편,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임금을 만나서 위협에 가까운 어조로,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주D-004]지주(砥柱) : 중국 황하수(黃河水) 중류(中流)에 우뚝 서 있는 주상(柱狀)의 바위산인데, 사람의 강한 의지와 기개를 비유한다.
[주D-005]택반의 독성(獨醒) : 이는 전국 시대 초(楚)의 대부(大夫) 굴원(屈原)이 소인의 참소로 임금에게 소박을 만나 초라한 행색으로 못가를 거닐다가 어부(漁父)를 만나서 “온 세상은 다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 깨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방축(放逐)을 당했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楚辭 漁父辭》
[주D-006]원우당(元祐黨) …… 유원성 : 송 신종(宋神宗) 때 사마광(司馬光)을 위시한 문언박(文彦博)ㆍ정이(程頤) 등 구당(舊黨)이 왕안석(王安石) 등 신당(新黨)과 대립, 당쟁이 철종(哲宗) 원우(元祐) 연간까지 치열해졌는데, 휘종(徽宗) 숭녕(崇寧) 초기에 소인(小人) 증포(曾布)ㆍ채경(蔡京) 등이 휘종에게 청하여 구당 180명을 간당(奸黨)으로 지척, 단례문(端禮門)에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세웠으며, 구당 중에 원성(元城) 사람 유안세(劉安世)는 기개가 강직하여 일곱 번이나 험악한 곳에 적거(謫居)하면서도 굽힐 줄 몰랐으므로, 소식(蘇軾)이 그를 ‘철한(鐵漢)’이라 일컬었다.
[주D-007]서직이 …… 아닐세 : 서직은 제물(祭物)을 말한다. 《서경(書經)》 군진(君陳)에 “지극한 다스림은 향내가 풍기는 것과 같아 신명(神明)을 감응시키므로, 서직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밝은 덕만이 향기로운 것이다.” 하였다.
십청집 ( 十淸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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