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역사적 과거시험에 대한기록

역대 과거제도 관련기록

아베베1 2009. 12. 5. 23:21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Ⅰ 중국의 과거에 응시한 일. 자제의 중국 유학을 중국에서 허락하지 않은 일


당 나라 장경(長慶) 초년에 김운경(金雲卿)이란 자가 처음으로 신라의 빈공(賓貢)으로서 두사례(杜師禮)의 방(榜)에 이름이 올랐으며, 당 나라 말기까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자는 58명이었고 오대(五代) 시대에 후량(後梁)ㆍ후당(後唐)에 가서 또 31명이 급제하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역시 송 나라에 빈공을 보내었는데, 김행성(金行成)ㆍ왕림(王琳)ㆍ최한(崔罕)ㆍ김성적(金成績)ㆍ강무민(康撫民)ㆍ권적(權適)ㆍ김단(金端)ㆍ조석(趙奭)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라는 것은 매양 따로 시험을 보여 그 이름을 방(榜) 끝에 붙였는데, 원(元) 나라 이후에는 중국인과 함께 시험을 보아 금방(金榜)에 이름을 같이 썼다고 한다. 최해(崔瀣)의 기록
○ 신라 때에 당 나라에 가서 급제한 사람으로 성명을 알 수 있는 자는, 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치원(崔致遠)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뿐이다. 최해(崔瀣)의 기록
○ 고려 시대에 원(元) 나라 과거에 급제한 자는 안진(安震)ㆍ최해(崔瀣)ㆍ안축(安軸)ㆍ이곡(李穀)ㆍ이인복(李仁復)ㆍ안보(安輔)ㆍ윤안지(尹安之)ㆍ이색(李穡)이었다. 《문헌비고》
○ 공민왕(恭愍王) 19년 경술 홍무(洪武) 3년 에 명(明) 나라 태조가 시의사인(侍儀舍人) 복겸(卜謙)을 보내어 과거 격식(格式)을 반포하는 조칙(詔勅)을 가져왔으므로 중서성(中書省)에서 이자(移咨)하였더니,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 뽑힌 사람에게 공거(公據 증명(證明))를 내주어 남경(南京)에 가서 회시(會試)를 보게 하였다. 이에 향시에 합격한 자인 박실(朴實)ㆍ김도(金濤)ㆍ유백유(柳伯濡) 등을 보내어 남경에 가서 회시에 응시케 하였더니 신해년에 김도가 제삼갑(第三甲)에 합격하였다. 《고사촬요》
○ 21년 임자에 홍사범(洪師範)을 명 나라에 보내어 자제들을 명 나라에 유학시킬 것을 청하였더니 허락하였다. 계축년 향시(鄕試)에 합격한 김잠(金潛)ㆍ송문준(宋文中)ㆍ조신(曺信) 등을 보내어 남경에 가서 회시에 응시케 하였는데, 바닷길에서 태풍을 만나 김잠과 조신이 빠져 죽었다. 재차 송문중을 보내어 응시케 하였으나 시험 기간 내에 도착하지 못하여 되돌아 왔다. 《고사촬요》
○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36세 때에 원(元) 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 이갑(二甲)에 합격하였는데, 이전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갑에 합격한 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인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의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27세의 나이로 제과(制科)에 응시하였는데, 고시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크게 칭찬하고 그를 수석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당시 의논이 외국 사람이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여 낮추어 제이갑으로 합격시켰다. 《송와잡기》
○ 세종 15년 계축에 사신 박안신(朴安臣)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올 때, 조칙(詔勅)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주문(奏文)을 받아 보니 자제들을 보내어 북경의 국학(國學)이나 혹은 요동(遼東)의 향학(鄕學)에서 공부시키고자 하니, 착함에 힘쓰고 도(道)를 구하는 마음을 잘 알겠으나 다만 산천이 멀리 떨어져 있고 기후가 달라서 자제들이 와도 혹시 오래 객지에 있지 못할 듯하며, 혹은 부모와 자식이 생각하는 정(情)을 양쪽 다 참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이제 왕(王)에게 《오경사서대전(五經四書大全)》 한 부(部)를 주어 자제를 가르치는 데 쓰게 한다.” 하였다. 《고사촬요》
○ 세조 을유년에 사신 김예몽(金禮蒙)이 돌아올 때, 칙유(勅諭)를 가지고 왔는데, 그 칙유에 “이제 왕의 주문(奏文)을 받아보고, 나라가 해외에 있어서 문학이 정(精)하지 못하고, 이문(吏文)과 한음(漢音 중국 음운(音韻))에 밝지 못하므로 역대의 전례에 따라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키고 싶다고 한 것은 잘 알았다. 전대(前代)의 제도에 혹 8 재자(才子)를 보내어 가서 가르치게 하거나, 혹은 자제를 파견하여 입학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왕림(王琳) 등이 과거에 합격하고 돌아간 것이라든가 한방(韓昉)의 무리가 일이 있어 잠깐 머무른 것 같은 예는 대개 전에는 그곳의 문학이 성하지 못하였고, 또 중국의 과장(誇張)하기를 좋아하는 임금들이 그것을 가지고 미관(美觀)을 삼으려는 것뿐이었다. 우리 조정에서는 조종조 이래로 이런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고, 더욱이 지금 왕의 나라는 시(詩)ㆍ서(書)ㆍ예의(禮儀)의 교(敎)를 익혀 온 전통이 있어서, 표(表)ㆍ전(箋)ㆍ장주(章奏)와 이첩[行移]하는 이문(吏文)이 모두 예식(禮式)에 맞는다.그래서 비록 한음(漢音)에 다 통하지 못하더라도 통사(通事)가 번역하여 알지 못할 것이 없으니, 하필 자제들이 와서 배운 후에야 틀림이 없게 되랴. 짐(朕)은 조종의 제도를 따르고 헛된 미관을 본뜨고 싶지 않으니, 왕도 역시 각별히 옛 법을 지켜서 나라 안의 자제를 통솔하여 교육시켜 경적(經籍)에 뜻을 돈독히 하면 저절로 여사(餘師)가 있어 인재를 성취하기에 어려울 염려도 없고, 사대(事大)하는 데 장애가 있을 걱정도 없으리라.” 하였다. 《패관잡기》
○ 우리나라 선비가 중국에 가서 응시하지 못하게 된 것은 고려 말년에 홍윤(洪倫)이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김의(金義)가 중국 사신을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진실로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만약 이런 사정을 들어 청한다면 중국에서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이 좁고 옹졸하여 기특한 기질이 없어서 멀리 유학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지금에 이르도록 이 악명(惡名)을 입어서 빈공과(賓貢科)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탄스럽다. 허균(許筠)이 일찍이 낭중(郞中) 가유약(賈維鑰)에게 물었더니 그의 말이, “안남(安南)과 유구(琉球)에서는 모두 응시하고 있는데, 안남인 진유(陳儒)는 정덕(正德) 연간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도 어사(右都御史)이며, 완악(玩鶚)은 가정(嘉靖) 연간에 급제하여 공부 우시랑(工部右侍郞)이 되었고, 손응오(孫應鰲)는 도망하여 광서성(廣西省)에 살았는데, 역시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 시랑이 되었으며, 지금도 역시 빈공과를 본 사람으로 주현관(州縣官)이 된 자가 5명이나 된다.” 하였다. 《지봉유설》


[주D-001]빈공(賓貢) : 외국에서 선비를 중국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경적(經籍)에 …… 있어 : 맹자가 자기에게 배우러 온 사람에게 “나한테 배울 것 없이 돌아가서 구하면 스승이 얼마든지 있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Ⅱ 과거제도

신라 때에는 다만 활쏘기로 사람을 뽑다가 원성왕(元聖王) 때에 비로소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제정하였다.
○ 고려 광종(光宗)은 한림학사(翰林學士) 쌍기(雙冀)를 지공거(知貢擧)에 임명하여, 시(詩)ㆍ부(賦)ㆍ송(頌) 및 시무책(時務策 당시의 정무(政務)에 대한 논문(論文))으로 시험을 보아 진사(進士)를 뽑았고, 겸하여 의과(醫科)ㆍ복과(卜科)도 뽑았다. 이로부터 해마다 뽑았는데 일정한 수가 없었다. 그 법은 모두 당 나라 제도를 모방하였다. 쌍기는 후주(後周)사람으로 책봉사(冊封使)를 따라 왔다.
○ 경종(景宗) 때, 왕융(王融)을 독권관(讀券官 답안지를 읽는 사람)으로 삼았다.
우리나라는 우(虞)ㆍ하(夏) 시대에는 역사가 전해지지 않아서 고찰할 수 없으나, 주(周) 나라 때, 기자(箕子)를 우리나라의 태사(太師)로 봉(封)하였으니, 우리나라 사람을 교화한 것이 깊었으니, 어찌 쌍기와 왕융의 천박함이 우리 문풍(文風)의 시초가 되겠는가. 그러나 쌍씨와 왕씨가 후배를 이끌어 지도한 것 또한 지극하였으니, 영화(榮華)와 광채[夸耀]로 한 시대를 용동(聳動)시켜 일반 백성[愚夫愚婦]들은 모두 과거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여 그 자제들을 반드시 합격하도록 권면하는 것은 반드시 이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다. 이로써 교화가 점점 젖어들어 집집마다 책을 읽어 과거를 보게 되어 한 집에서 세 아들 혹은 다섯 아들이 모두 합격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쌍씨와 왕씨의 공이 크다. 《목은집》
○ 덕종(德宗) 때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설치하여 부(賦) 및 육운시(六韻詩)ㆍ십운시(十韻詩)로 시험을 보았다. 혹은 성균시(成均試)라고도 하며 혹은 남성시(南省試)라고도 하였는데, 정공지(鄭公志) 등 60명을 뽑았다. 감시(監試)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른바, 홍분방(紅粉榜)이란 것도 감시이다. 《지봉유설》
우왕(禑王) 10년에 성균시를 ‘홍분방’이라 불렀다.
○ 처음에 광종이 쌍기의 말을 채용하여 과거로 관리를 뽑았는데, 부화(浮華)한 글을 짓기 시작하여 드디어 폐습이 되었다. 제술(製述)ㆍ명경(明經)의 과(科)와 의(醫)ㆍ복(卜)ㆍ율(律)ㆍ서(書)ㆍ산(算)ㆍ삼례(三禮 《예기(禮記)》 《의례(儀禮)》 《주례(周禮)》)ㆍ삼전(三傳 《춘추(春秋)》의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하론》(何論 책명인데, 《하박사비론(何博士備論)》인 듯하다.)ㆍ지리(地理) 등의 잡과(雜科)가 있었다. 충숙왕(忠肅王) 때, 이제현(李齊賢)과 박효수(朴孝修) 등이 시(詩)와 부(賦)의 시험을 개혁하여 책문(策問) 시험을 보기를 아뢰었으나 채용되지 못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처음으로 원(元) 나라의 향시(鄕試)ㆍ회시(會試)ㆍ전시(殿試)의 제도를 채용하여 상용(常用)의 법으로 삼았다. 덕종(德宗) 때에 진사시(進士試)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충선왕(忠宣王) 때에 폐지하였고, 충숙왕 때에 구재삭시(九齋朔試)로 대치하였다가 공민왕 때에 폐지하였는데, 우왕 때에 다시 설치하였다. 《반계수록》
○ 예종(睿宗)의 명(命)으로 동당시(東堂試)에 처음으로 경의(經義)를 시험보였다.
○ 의종(毅宗)은 승보시(升補試)에서 임유공(任裕公) 등 55명을 뽑아 국학(國學)에 넣었는데, 곧 생원시(生員試)는 선발 인원에 일정한 제도가 없었으며, 시(詩)ㆍ부(賦)와 경의로 뽑았으니, 승보시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문종(文宗) 때에 중서사인(中書舍人) 정유산(鄭惟産)이 ‘호명취사법(糊名取士法)’을 세웠다. 무릇 응시하는 모든 사람은 시험지에 성명과 본관과 4대조(四代祖)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여 시험보기 수일 전에 시원(試院)에 제출한다. 시험 시작하기 하루 전날 오후에 주문(主文 지공거(知貢擧))이 장(狀)에게 제각(題脚)을 갖추어 자문(紫門)에 나아가 봉하여 바치면 임금이 스스로 봉한 것을 뜯어 보고 각각 제목 위에 낙점(落點)하여 봉하고 압인(押印)하여 내보낸다. 주문(主文)이 받아 받들고 시원에 이르러 그 다음 날 새벽에 봉한 것을 뜯어서 제목을 발표한다. 당직 승선(承宣)이 금인(金印)을 받들고 시원에 가서 주문(主文)과 함께 앉아 거자(擧子 과거 응시자)의 권봉(卷封)에 일일이 도장을 찍는다.임금은 또 내시(內侍) 두 사람을 보내어 술과 음식을 내려 위로하고 주문 역시 연석(筵席)을 차려 위로한다. 하루 있다가 당직 승선이 시원에 와서 봉한 것을 뜯어 방(榜)을 발표한다. 제2장(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제3장(場)은 2경(二更)이 되면 제목을 발표하며 나머지 의식(儀式)은 같다. 이틀 후에 주문이 합격한 권자(卷子) 뒤에다 하나하나 등수를 적어서 황지(黃紙)로 붙여 함(函)에 넣고 봉한 다음 자문(紫門)에 가지고 가면 임금이 편전(便殿)에 앉아 있고, 승선 2명이 함(函)을 받들고 가서 임금 앞에서 봉한 것을 뜯으면 문학에 능한 승선이 읽은 뒤에 등수 차례는 모두 주문의 의견대로 정하여 방(榜)을 발표한다. 그 후에는 이대로 답습하여 대개가 이와 같았다.
○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식년시(式年試)로 33명을 뽑았는데, 을과(乙科)에 3명, 병과(兵科)에 7명, 동진사(同進士)에 23명이었다.
○ 태조 원년에 과거법을 제정하였다. 중앙은 성균관 정록소(正錄所)에서, 지방은 각 도 안렴사가 경(經)에 밝고 행실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연령ㆍ본관ㆍ삼대조(三代祖) 및 정통한 경서(經書)를 적어서 성균관장ㆍ가(張貳 장관(長官)과 차관(次官))에게 올리면, 이소(貳所)에서 사서오경과 《통감》 이상을 시강하여 경서 암송의 많고 적음과 이치를 해득하는 것의 정(精)하고 조(粗)함에 따라 그 등차를 정하여 제1장(場)의 합격자를 정해 예조에 보내어, 표장(表章)ㆍ고부(古賦)로 시험 보이는 것을 중장(中場)으로 하고, 책문(策問)을 시험 보이는 것을 종장(終場)으로 하였다. 이 3장에 모두 합격한 자 33명은 이조에 보내어 재주에 따라 임용케 하였다.
○ 권근(權近)이 소(疏)를 올리기를, “초장(初場)에서 의의(疑義) 시험을 폐지하고 강론(講論)을 시험보는 것은 사장(詞章)을 답습하는 폐단을 막고 경서를 깊이 연구한 실학(實學)의 선비를 얻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을 행한 후 이제까지 여러 번 과거를 보였어도 경학(經學)에 뛰어난 재사(才士)가 없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건대, 배우는 사람이 기억과 암송에 만 전력하면 의리(義理)의 함축과 문장의 법에는 힘쓸 겨를이 없으니, 글재주와 기질과 습관이 일제히 잡되고 자질구레하게 된 이유인가 합니다.바라옵건대, 앞으로는 강론 시험을 폐지하고 다시 의의(疑義)를 시험보아 전조의 예대로 하되, 오경의(五經疑) 1통만 내어 여러 경서에서 각각 내지 못하게 하고 마땅히 사서의(四書疑)의 예(例)대로 한 경서에서만 출제하든지, 혹은 다른 경서를 병합하여 편의에 따라 문제를 설정하고, 중장(中場)에서의 고부(古賦)는 초학자는 능히 짓지 못하는 것이니, 바라옵건대 고부를 폐지하고 논(論)과 표(表) 각각 한 통씩과 판(判) 한 통으로 시험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중국 이문(吏文)은 사대(事大) 외교의 요무(要務)여서 소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현재 의(醫)ㆍ역(譯)ㆍ음양(陰陽)ㆍ율학(律學)은 모두 과거를 보이면서 이것만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 왕조의 명경과(明經科)의 예(例)대로 문과 시험날에 이문(吏文)하는 자를 함께 시험보여 정과(正科)에 동방(同榜)으로 이름을 부르게 하소서.” 하였다.
○ 태종 원년 신사에 즉위의 경축으로 증광시(增廣試)를 베풀었으니, 증광시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7년 정해에 임금이 친히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문신(文臣)에게 시험을 보이고 인정전(仁政殿)에서 방(榜)을 발표하고 나서 중시은영연(重試恩榮宴)을 의정부에 베풀어 주었다. 문신 중시(重試)가 이때에 시작되었다.
매 10년에 한 번씩 이를 베풀어 당하 정삼품(正三品) 이하가 응시하였다.
○ 14년 갑오 친시(親試)에 독권관(讀券官) 하륜(河崙) 등이 거자(擧子) 3명의 시권을 뽑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옛날의 분향하고 장원(壯元)을 뽑던 고사(故事)대로 하라.” 하고 손가는 대로 뽑으니, 바로 권도(權蹈 후에 제(踶)라 이름을 고쳤다.)의 답안지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내가 도(蹈)의 아버지 근(近)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했는데, 이제 도의 아들이 장원이 되었으니 위로가 된다.” 하고, 하륜 등을 돌아다보며 이르기를, “이 방은, 곧 나의 문생(門生)이다. 경들은 자가(自家)의 도리(桃李)로 삼지 말라.” 하였으므로 하륜 등이 끝내 예알(禮謁)을 받지 못하였다. 《필원잡기》 《조야기문》
문종 경오년 방(榜)에 권남(權擥)이 애초에는 제4등이었다. 임금이 좌우에게 명하여 모든 시권을 올리게 하여 읽었는데, 제4등에 이르러, “이것이 진실로 장원이다.” 하고 친히 1등으로 올렸다. 부자(父子)의 장원이 모두 임금이 준 것이었다.
○ 세종조에 과거 제도를 개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조의 과거에서는 지공거(知貢擧)를 미리 정하였으므로, 젖냄새 나는 홍방(紅榜)이라는 비방이 있었는데, 국초에도 오히려 옛 폐습을 따르다가 이때 격식을 개정하여 모두 원(元) 나라 제도를 썼다. 이조(吏曹)에서 시관으로 합당한 사람을 적어서 임시(臨時)하여 들어가 아뢰어 낙점을 받는다. 시관이 된 사람은 명령을 받아 시험장에 나누어 들어가서 삼관(三館)에다가 응시자를 모아 새벽에 일일이 이름을 불러 극위(棘圍 출입을 금지한 고시장)에 들여보내는데, 수협관(搜挾官)이 문 밖에 서서 옷 속과 상자 속에 문서가 들었는가를 수색한다. 문서를 소지한 자가 있으면 잡아서 순작관(巡綽官)에게 회부하여 묶었다. 시장 밖에서 발견되면 한 식년의 응시 자격이 정지되고, 시장 안에서의 경우는 두 번의 식년시에 응시 자격이 정지된다.날이 밝기도 전에 시관이 대청에 나가 촛불을 켜고 앉는데 엄숙하기가 신선과 같았으며, 삼관에서 옥상에 올라가 큰 종(鐘)을 들고 선생이 뜰에 이르러 신래(新來)를 부른다고 외치고, 또 허방(虛榜)을 써서 부르는데 모두가 옛 풍습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 북을 울려 재촉한다. 거자들의 글이 수권관(收卷官)에게 제출되면 등록관(謄錄官)에게 넘겨 시권 양 끝에 자호(字號 시험 번호를 천자(千字)의 자순(字順)으로 매긴 것)를 쓰고, 또 감합(勘合)을 써서 잘라 가른다. 하나는 이름을 봉한 것이고 하나는 지은 글이다. 봉미관(封彌官)이 이름을 봉한 것을 받아 다른 곳에 가 있고, 등록관이 글씨 베끼는 사람을 모아서 붉은색으로 시권을 옮겨 적어, 사동관(査同官)이 원본을 읽고 지동관(枝同官)이 대조하여 시관에게 바치면 등급의 상하를 정한 후 봉미관으로 하여금 봉한 이름을 뜯어서 방(榜)을 쓰게 한다. 《용재총화》
경서를 강론시키는 법은 자호(字號)를 적어서 사서오경에 붙이고, 또 첨(籤)에 써서 통에 넣고 거자가 자기의 강(講)할 자호에 서명(書名)을 써서 들이면 시관이 첨을 뽑는데, 만약 ‘천(天)’ 자(字) 번호가 뽑혔으면, 경서에 붙인 천(天) 자를 찾아서 다만 원문만 적어 준다. 거자는 원문을 읽고 해석하고, 시관은 주(註)ㆍ소(疏)를 강론하게 하여 서리(胥吏)가 통(通)ㆍ약(略)ㆍ조(粗)ㆍ불(不)의 네 자(字)로 등급을 매겨서 강첨(講籤)을 삼는다. 각각 시관 앞에 놓고 한 경을 강하여 끝나 서리가 빈 접시를 가지고 아래로부터 올라가면 시관(試官)이 점수를 매기되, 강첨의 많은 것을 취하고 서로 같으면 하등(下等)을 따른다. 초장에서의 강경(講經) 분수(分數)와 중ㆍ종ㆍ장의 제술 분수를 합쳐 계산하니, 한 사람이 뽑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 손만을 거치는 것이 아니므로 국가의 공도(公道)는 오직 과거뿐이었다. 《용재총화》
○ 세종조에 명 나라 선종황제(宣宗皇帝)가 등극하여 조칙(詔勅)을 반포하였으므로, 9년 정미에 그 경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시(重試)에 대거(對擧)하여 과거를 보였다.
9년 정미에 문과(文科)ㆍ무과(武科) 중시(重試)의 신시은영연(新試恩榮宴)을 예조에 내렸는데, 부원군 조연찬(趙涓贊)과 찬성(賛成) 권진(權軫)으로 압연관(押宴官)을 삼으며, 병조 판서 황상(黃象)을 부연관(赴宴官)으로 삼고, 좌대언(左代言) 김맹성(金孟誠)과 우대언(右代言) 김자(金赭)에게 명하여 선온(宣醞 임금이 내려주는 술)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신은(新恩 합격자)들은 다음 날 전(箋)을 올려 은혜에 감사하였다. 《동각잡기》
○ 11년 기유에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알성(謁聖 문묘에 참배하는 것)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친시(親試)로 3명을 뽑으니, 알성시(謁聖試)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임금이 일찍이 영의정 황희(黃憙)와 판중추부사 허조(許稠)를 불러 시학(視學)할 때 시험보여 뽑을 절차를 의논하였는데, 희(憙) 등이 아뢰기를, “시험보여 뽑기 위해 시학하는 것은 옛 제도에 합당치 않으니, 시학이 경시(輕視)됩니다.” 하였더니, 이르기를, “경들의 말이 옳다.” 하였다. 《동각잡기》
우리나라의 과거 제도는 삼국 시대에 있어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고려왕조 5백 년의 그 시말(始末)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중엽 이후에는 다만 3년에 한 번씩 33명을 뽑을 뿐, 다른 시험이 없었다. 본조(本朝)에 있어서도 전조의 예대로 식년(式年)에 과거 보이는 규정이 있으나, 임시로 혹 기일을 앞당기기도 하고 물리기도 하여 일정한 시기가 없었는데, 세종이 학문을 숭상하고 학교를 일으켜 처음으로 성균관에 행차하여 글짓기 시험을 보이고 몇 명에게 홍패(紅牌)를 주었다. 이로부터 마침내 별도 규정이 되어, 나중에는 급분(給分)하여 응시하는 법규가 있어서 혹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하기도 하고, 혹은 전시(殿試)에 혹은 별시(別試) 혹은 정시(庭試)에 바로 응시하기도 하며, 혹은 어떤 일을 계기로 베풀고 혹은 관례에 따라 베풀어져서, 3년 만에 대비(大比 식년과거(式年科擧))로 통경(通經)과 제술(製述)을 시험하는 법이 점차 이전과 같지 않았다. 과거의 횟수가 매우 잦으니 의당 현재(賢才)가 배출되어야 할 터인데 재주 있고 덕 있는 선비가 매우 드물어 인재가 점점 낮아져 가고 있다. 《송와잡기》
○ 20년 무오에 생원(生員)ㆍ진사(進士)의 시(試)를 아울러 설치하였다.
처음 정종(定宗) 원년 과(科)를 설치할 때에 생원시ㆍ진사시를 병설(幷設)하였다. 태종 원년에는 생원시만 보였는데, 이에 이르러 임금(세종)이 비로소 생원ㆍ진사의 양시(兩試)를 설치하여 한성부와 남학(南學)에 장소를 나누어 고부(古賦) 십운시(十韻詩)로 초시(初試)ㆍ회시(會試)를 시행하였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서 방(榜)을 발표하고, 백패(白牌)를 주었으니 생원ㆍ진사의 백패가 이때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려 그때부터는 진사시험에 연령을 제한하여 25세 이상이어야 응시를 허락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응시자 중 함부로 법을 위반하는 자가 생겨 계해년에 정영통(鄭永通)의 일로 말미암아 갑자년(세종 26년) 식년(式年)에서 진사시를 정지시키고 병인년(정묘년 식년)에는 생원 2백 명을 시험보아 뽑았다.
개국 이래 사학(詞學)이 모두 폐하여졌는데, 무오년에 처음으로 진사과를 설치하여 중장(中場)에서 사부(詞賦)를 시험보였다. 이로부터 시학(詩學)이 비로소 성하여졌으니, 모든 것이 유방선(柳方善)과 조수(趙須)가 가르친 힘이다. 《필원잡기》
○ 무오년 식년 과거에서 동진사(同進事)를 정과(丁科)로 개정하였다.
처음 정종이 과(科)를 설치할 때, 을과ㆍ병과 등이 있었는데, 태종 갑오년에 개정하여 을과(乙科) 1ㆍ2ㆍ3등을 두었었다. 후에 다시 옛 제도로 돌아갔다가 이때에 동진사를 고쳐서 정과(丁科)라 하였다. 이후, 혹 을과(乙科) 1ㆍ2ㆍ3등이라고도 하고, 혹은 을ㆍ병ㆍ정 3등이라고도 하였다.
○ 23년 신유에 이석형(李石亨)이 생원ㆍ진사의 두 시험에서 모두 장원하였는데, 전례로는 생원ㆍ진사의 방을 발표할 때, 궁궐 문에 이르러, 생원은 좌협문(左挾門)을 거쳐 들어가고, 진사는 우협문(右挾門)을 통하여 들어가는데, 각각 합격 차례로 들어갔으므로, 이때 생원ㆍ진사가 장원(壯元)한 자를 자기 편에 세우려고 다투어 서로 끌어 막고 하여 날이 저물도록 들어가지 못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광화문(光化門)을 열도록 하여 장원은 광화문으로, 그 나머지 생원ㆍ진사는 각각 좌ㆍ우 협문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문헌비고》
○ 24년 임술에 처음으로 과거 응시자로 하여금 경서를 강(講)하게 하였다. 어효첨(魚孝瞻)이 집현전에 당번으로 들어가서 과거의 강경(講經) 시험의 가부(可否)를 의논하여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각 잘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만약 오로지 강경(講經)만을 본다면 비록 제술(製述)은 잘하나 강경(講經)에는 부족한 자는 반드시 희망이 끊어져 다른 방면으로 갈 것이니, 마땅히 그때 그때 제술ㆍ강경을 번갈아 하되, 강경이 많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문헌비고》
경서 강경이 폐하여지고 제술(製述)로 뽑은 이래 과거 공부를 하는 자는 한갓 병려문(騈儷文)만 일삼고 경서는 반 줄도 읽지 않았으므로, 강경을 하자는 의논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임술년 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친히 나와 경서를 강문(講問)하는데, 한 선비가 《서경(書經)》을 강하다가 ‘혁상(衋傷)’의 ‘혁(衋)’ 자를 ‘진(盡)’ 자라 하였고, 한 선비는 《시경(詩經)》을 강하다가 ‘전히(殿屎)’의 ‘히(屎)’ 자를 ‘미(尾)’ 자라 하였으며, 한 선비는 《춘추(春秋)》의 ‘정돌(鄭突)’이란 사람의 ‘돌(突)’ 자를 돌연으로 해석하였고, 한 선비는 《예기(禮記)》 단궁(檀弓 인명)을 해석하기를 단목(檀木)의 활[弓]이라 하였다. 그래서 경서를 강독하자는 의논이 드디어 정하여지자 제생(諸生)이 서로 원망하기를, “‘혁(衋)’ 자와 ‘히(屎)’ 자는 음이 변하였고, ‘궁(弓)’ 자와 ‘돌(突)’ 자는 이름이 바뀌었으니, 제술의 삼장(三場)은 오히려 가하나, 강경은 어렵도다. 오경(五經)이여.” 하였다. 《태평한화(太平閒話)》
○ 단종 원년에 진사시를 다시 설치하여 십운시(十韻詩)를 고시(古詩)로 바꾸고, 시와 부(賦)를 합쳐서 일장(一場)으로 하였으며 연령 제한법은 폐지하였다.
○ 세조 정축년에 세조 3년 별시(別試)를 보였는데, 초시에 두 장소를 설치하여 《주역(周易)》의 도설(圖說)을 강하게 하였으니 별시가 이때에 생겼다.
○ 4년 무인에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황수신(黃守身)으로 하여금 도하(都夏) 등 5명을 뽑게 하였다. 수신(守身)은 문관이 아닌데도 시험을 맡았다.
○ 5년 기묘 식년시(式年試)에는 명 나라 사신의 입경(入京) 날짜가 임박하였으므로, 회시(會試) 3장에 다만 전시(殿試)의 대책(對策) 1통만을 시험보였다. 《방목(榜目)》
○ 6년 경진에 임금이 평양에 행차하여 친히 부벽루(浮碧樓)에서 선비를 뽑았다. 세조 조에 상세하다.
○ 12년 병술 봄에 임금이 오대산(五臺山)에 행차하여 시험을 보여 18명을 뽑았다.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시험을 보여 뽑는데, 특명으로 병조 참지(兵曹參知) 신승선(愼承善)을 응시하게 하였더니 승선이 1등을 차지하였으므로, 참판에 임명하였다.
5월에 발영시(拔英試)를 설치하고 문관 정2품 이하로 하여금 응시하게 하였는데, 김수온(金守溫)이 정헌(正憲)의 관계(官階)로서 1등을 차지하자, 즉시 판중추원부사에 임명하였다. 수온의 아들 화(澕) 역시 바로 그 시험에 3등으로 합격하였으므로, 임금이 친히 짧은 시를 지어 주기를,

어진 이를 구하기 목마름같이 하였더니 / 求賢如渴
한 번 봄에 친구와 같도다 / 一見如舊

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즉석에서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또 임금이 공경(公卿)의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유품(流品)의 문관까지를 궁궐 안으로 불러서 친히 대책(對策) 제목을 내었으니, 이 시험을 등준시(登俊試)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과거에 뜻이 있는 자는 비록 종친이거나 부마(駙馬)이거나 모두 응시하게 한다. 경(卿)들은 스스로 벼슬이 높고 녹(祿)이 후(厚)한 것을 믿고서 다시는 학문에 유의하지 않아 문풍(文風)이 떨치지 못하므로, 내가 이 시험을 시작하여 경들로 하여금 다시 옛 공부를 가다듬게 하려 한다.” 하였다. 우참참 김질(金礩)이 시권(試卷)을 거두었는데, 응시한 자가 30여 명이었다. 임금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와서 정인지(鄭麟趾)ㆍ정창손(鄭昌孫)ㆍ신숙주(申叔舟)들로 하여금 시권을 읽게 하여 김수온(金守溫) 등을 뽑았다. 방을 발표할 때에 백관이 진하(陳賀)하였고, 임금은 은영연(恩榮宴)을 의정부에 베풀어 주어 승지 신면(申㴐)으로 하여금 선온(宣醞)을 가져다주게 하였으며, 장원(壯元) 이하에 홍패와 안마(鞍馬)를 내려 주었고, 날을 가려 풍정연(豐呈宴)를 바치게 하였다. 《명신록》
영순군(永順君) 보(溥)가 선발에 들었다.
임금이 등준시에 뽑힌 자 13명을 내전(內殿)으로 불러 이르기를, “옛날 좌주(座主) 문생(門生)의 호칭이 있었는데, 이번의 과거는 내가 친히 대책(對策) 문제를 냈으므로 내가 마땅히 은문(恩門 좌주(座主))이 되므로 이 전(殿)을 은정전(恩政殿)이라 불러야겠다.” 하니, 모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며칠이 지난 뒤 임금 내외분이 은정전에 앉고 여러 사람이 잔을 드려 한결같이 문생과 좌주의 관례대로 하였으니, 우리나라에 전에 없었던 아름다운 일이다. 《필원잡기》. 서거정(徐居正)이 3등을 하였다.
영순군 보는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아들이다. 세조조에 정1품의 군(君)으로서 등준시(登俊試)에 5등을 하였다. 온양에 행차하였을 때, 과거를 베풀고 아울러 중시(重試)를 베풀었는데, 영순군이 1등에 뽑혀서 유가(遊街)를 하루 더 연장해 주었으니, 특이한 대우였다. 영순군은 네 임금을 내리 섬겼고, 두 번이나 녹훈(錄勳)되었으며, 《명황계감(明皇誡鑑)》과 《육전(六典)》의 편찬을 맡았다. 성종조에 죽으니 나이 72세였다. 《지봉유설》
○ 14년 무자에 온양에 행차하여 별시를 시행하여 5명을 뽑았는데, 영순군 보가 1등이 되었고,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가 선발에 들었다.
임금이 영순군의 집에 행차하여 쌀 50석과 창옹(唱翁) 두 명, 천동(天童) 2백 명을 내려 주었는데, 창옹에게는 각각 면포(棉布) 10필씩을 주고 천동에게도 모두 포(布)를 주고, 유가(遊街)의 의물(儀物)을 갖추어 수레를 따라 강녕전(康寧殿)에 들어가고 다시 하루를 더 유가(遊街)케 하였다. 《명신록》
전례(典例)에 관직이 정3품(正三品)에 이르는 자는 문ㆍ무과에 응시하지 못하였고, 6품 이상은 생원ㆍ진사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였는데 당상관으로서 응시한 것은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종친의 높은 품계(品階)로서 응시한 것은 영순군 보에서 시작되었는데, 부마(駙馬)로서 응시한 것은 정현조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모두 세조 때의 일로 곧 폐지되었다. 《필원잡기》
온양의 중시(重試)에서 최호원(崔灝元)의 대책(對策)이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이르기를, “대책문 가운데 음양서(陰陽書)의 말이 많으니 반드시 임원준(任元濬)이 뽑았을 것이다.” 하고, 두 사람을 모두 술로 벌을 주면서 세자를 돌아다보고, “지금 호원(灝元)이 세자의 은택을 입는다.” 하고는 마침내 4등으로 하였다.
○ 식년시에서 처음으로 갑과(甲科)를 베풀고 정(丁)과를 폐지하여 갑ㆍ를ㆍ병 등으로 과차(科次)를 삼았다.
○ 예종 기축년 증광시(增廣試)에 표(表)와 책(策) 두 가지를 겸하여 지을 수 있는 자에게는 두 가지 다 짓기를 허락하였다.
○ 성종 2년 신묘 별시 때에 어떤 거자(擧子)가 향시(鄕試)의 대책(對策)에서 부처에게 불공을 드려 재변을 물리칠 것을 말한 자가 있었으므로 시관(試官)이 쫓아냈다. 임금이 손수 써서 하교하기를, “유생(儒生)의 대책 가운데의 말에 내가 심히 분개한다. 불교의 해독을 누구인들 모르겠는가. 하물며 공(孔)ㆍ맹(孟)을 배우는 자이랴. 마땅히 법에 부쳐 먼 변두리에 귀양 보내어 국가의 좋아함과 미워함을 분명히 보여 주어야겠다. 국조(國祖) 이래 문체가 온평(穩平)하더니, 한두 선비가 괴이하고 험한 글로써 과거의 장원에 뽑혔으므로 5, 년래로 문체가 완전히 변하여 서곤체(西崑體)가 되었다. 이제 구양수(歐陽修)가 유기(劉幾)를 내쳤던 고사(故事)에 따라 그 심한 자를 내쳐 문체가 조금 전으로 돌아가고 있으나, 능히 완전히 변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 8년에 성균관에 행차하여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진하(陳賀)할 때, 교문(橋門)을 둘러싸고 관청(觀聽)하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와 선비에게 과거를 보이고 바로 방(榜)을 발표하였다. 방을 당일로 발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 13년 임인에 임금이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 석채(釋菜)를 행하고 명륜당(明倫堂)에 나와 책문을 내어 선비에게 시험을 보였다. 진현시 대거(進賢試對擧)
수일이 지나서 11명을 뽑았는데, 김일손(金馹孫) 형제가 같이 합격하였다. 중형(仲兄) 기손(驥孫) 이 장원을 하였고, 백형(伯兄) 준손(駿孫)이 2등을 하였다. 임금이 친히 시권(試卷)을 보고 갑과(甲科)를 올리고 특별히 공당(公堂)에서 연회를 베풀 것을 허락하여 구경(具慶 양친이 다 살아 계신 것)을 축하하게 하였다.
○ 겨울 진현시(進賢試)를 베풀었다.
○ 17년 병오에 중시(重試)에 강귀손(姜龜孫)이 응시하였는데, 그 장인의 동생 성현(成俔)이 지신(知申)으로서 시원(試院)에 있었고, 그의 아버지 강희맹(姜希孟)이 총관(摠管)으로서 입직하여 있었는데, 희맹이 현에게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서 연달아 1등을 하면 좋은 일이니, 그대와 함께 귀손(龜孫)의 대책을 대신 짓자.” 하여 처음 시작부터 조목으로 대답하는 데까지는 희맹(希孟)이 짓고, 구폐(救弊)를 말하는 데서부터 끝까지는 현(俔)이 지어서 베껴 내게 하였더니, 고시관(考試官)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가 무릎을 치며 탄복하여, “마땅히 1등이 되어야 한다.” 하였으나, 김수온(金守溫)은 상시관(上試官)으로서 거짓 조는 체하면서 유의하여 듣지 않았다.새벽에 이르러 다시 읽고 결정을 구하였더니 수온이 말하기를, “차상(次上)이 적당하다.” 하자, 모두 괴이하게 여겨서 묻기를, “이 글은 대단히 좋은데 어찌하여 합격에 들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하였다. 수온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작품이 성(成)ㆍ강(姜) 두 가문의 자제(子弟)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장원이 된다.” 하였다. 곧 봉한 것을 뜯어 살펴보았더니, 과연 귀손(龜孫)의 것이었다. 수온이 말하기를, “내 강(姜)과는 공부를 같이 하였고, 성현은 나에게 배웠으므로, 내가 그들의 문장을 분별해 낼 수 있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강(姜)의 글이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성(成)이 지은 것이다. 어찌 그들에게 속아서 국가의 시험을 문란케 하리오.” 하니, 모두 탄복하여 드디어 쫓아내고 신종호(申從濩)가 1등이 되었다. 《지소록》
○ 18년 정미에 종친과(宗親科)를 시행하여 경사(經史)를 강(講)하게 하였는데,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이 1등으로 뽑혔다. 술과 음악과 2품계의 품계를 내려 주었다.
○ 연산군 12년 병인에 별시에서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시험보여 김안로(金安老) 등 17명을 뽑았다.
조종조(祖宗祖)에서는 혹 사운시(四韻詩)로서 시험을 보았는데, 김안로가 ‘그네시[鞦韆詩]’로서 장원을 하였다. 그 시에,

동풍이 처음 작은 복숭아 꽃봉오리를 벌어뜨리니 / 東風初破小桃腮
절후가 추천절에 임박하였는데 비가 먼지를 씻었네 / 節迫秋千雨洗埃
비단 신이 꽃을 스치니 붉은 이슬이 젖고 / 繡舃掠花紅露濕
섬섬(纖纖)한 팔ㆍ다리가 버들가지를 헤치니 푸른 연기 갈라지네 / 纖肢劈柳綠烟開
처음엔 농옥이 퉁소를 불며 가는가 하였더니 / 初疑弄玉吹簫去
다시 보니 비경(飛瓊)이 학(鶴)을 타고 오는가 싶도다 / 還訝飛瓊御鶴來
우습도다 반선(半仙 그네[鞦韆]의 별칭)놀이 진실로 희극(戱劇)이라 / 堪笑半仙眞戱劇
경양(景陽)의 병화(兵禍)가 여기에서 움텃다네 / 景陽兵禍是成胎

하였다. 《호음집(湖陰集)》에는 중종 때라 하였으나 별시는 4월이고 반정은 9월에 있었으니 잘못된 것이다.
○ 중종 2년 정묘에 김대유(金大有)가 전정과시(殿庭科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자 곧장 진사시에 응시하게 하였다.
○ 8년 계유에 친경(親耕)할 때에 보인 별시에서 경서를 강하게 하였다. 별시에서의 강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14년 기묘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였다. 중종조 기묘록(己卯錄)에 상세하다.
○ 기묘년 별시에서 성수침(成守琛)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국조 이래 범죄자로 공신적(功臣籍)에서 삭제되거나 선원(璿源)에서 삭제된 자이거나, 공정하지 못한 과거는 파방(罷榜)을 하였으나 한 사람의 이름을 삭제하는 예는 없었다. 이때 수침이 급제하였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대책문(對策文)의 문리(文理)가 맞지 않는다고 아뢰어서 방목(榜目)에서 이름을 삭제하였으니, 전에는 없던 일이다. 《사재척언》. 중종조에 상세하다.
○ 16년 신사에 별시에서 강경(講經)을 정지토록 하였다.
본국의 과거 제도에 전일에는 강경(講經)의 제도가 없었다. 비록 식년시라 하더라도 다만 양장(兩場)의 제술(製述)로서 33명을 뽑았는데, 그 후에는 식년시마다 그때 형편에 따라 혹 강경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였으나 강경한 때가 많았다. 성종조에 비로소 식년시에 강경하는 법이 제정되었으나, 별시에는 일정한 규정이 없어서 강경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였으며, 강경할 때에도 다만 경서 가운데 두 가지 경서만을 강하여 혹 약(略 강론 성적 등급의 둘째 등급) 이상을 뽑기도 하고, 혹은 조(粗 강론 성적 등급의 세 번째 등급) 이상을 뽑기도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강경(講經)을 정지하고 조세영(趙世英) 등 18명을 뽑았다.이때 합격자에 유학(幼學 과거하지 못한 선비)이 많았고 또 나이가 어렸으므로 집의(執義) 어득강(魚得江)이 아뢰기를, “사람을 뽑는 법으로는 경서에 대한 학술이 첫째인데, 이번 별시의 합격자는 모두 나이 어린 사람들이니, 청컨대 앞으로는 비록 별시의 경우라 하여도 강경은 하게 하소서.” 하였다. 6, 년이 지난 뒤에는 그때 합격된 자 중에 재주로 세상에 이름이 날리는 자가 많았으니, 득강(得江)이 강경(講經)을 고집한 것은 역시 좁은 소견이라 할 수 있다. 《패관잡기》
○ 18년 계미에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정시(廷試)를 베풀었다. 정번(鄭蕃)이 2등으로 합격하여 이미 청포(靑袍)를 입었으므로, 곧 홍패(紅牌)를 내려주려 하자, 대사간 서후(徐厚)가 그의 세계(世系)가 자못 한미(寒微)함을 논하여 드디어 청포를 벗기고 쫓아내었다. 번(蕃)이 소(疏)를 올려 원통함을 호소하여 그 사건이 예조로 내려왔으나 끝내 풀지 못하였다. 그 후에 남곤(南袞)이 아뢰어서 이문학관(吏文學官)에 보직(補職)시켰다. 《패관잡기》
○ 23년 무자에 임금이 친히 영릉(英陵 세종릉(世宗陵))에 제사를 지내고 여주(驪州) 청심루(淸心樓)에서 선비에게 시험보여 3명을 뽑았다.
○ 28년 계사에 성균관과 4학의 도기(到記 식당에 참석한 명부(名簿)) 유생(儒生)을 뽑아서 응시하게 하였는데, 초시(初試)에서 3경(經) 중 어느 경을 자원(自願)하고 4서(書)는 그 중에서 2서(書)를 추첨(抽籤)하여 2서를 강경한 후 제술(製述)의 전시(殿試)를 보여 14명을 뽑았다. 도기(到記)로 시험보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 31년 병신에 경회루(慶會樓)에서 친시(親試)하여 각촉(刻燭 초에 글을 새겨 놓고 타기 전에 짓는 시)으로 짓게 하여 4명을 뽑았다.
○ 33년 무술에 탁영시(擢英試)를 설치하였다.
○ 34년 기해에 김안국(金安國)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선비를 뽑는데 반드시 사서 삼경을 강하게 하니 노력이 분산되어 거두는 성과가 적습니다. 만약 주자(朱子)의 이론에 따라 식년마다 1경(經)씩을 바꿔 가며 시험보이면 현재 중국의 경서별로 전공하는 제도에 비하여 훨씬 상세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시험삼아 시행하소서.” 하였다. 《호음집》
김안국이 매양 시관으로 시장에 들어가면 고시를 정밀(精密)하게 하여 인재를 얻기에 힘써서 15일을 경과하여서야 방(榜)을 발표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칭찬한다. 《지봉유설》
○ 명종 8년 계축에 친경 별시(親耕別試)에서 특명으로 차중(次中) 이상은 모두 급제시키게 하여 39명을 뽑았다. 이에 대간(臺諫)이 아뢰어 다투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신희복(愼希復)에게 배웠는데, 이때 희복이 전시(殿試)에 응시하였다. 시관이 채점을 마치고 합격한 시권(試券)을 올리는데 희복의 이름이 있지 않았으므로 특명을 내려 차중(次中) 이상을 모두 뽑게 하였더니 희복이 듣게 되었다. 《기재잡기》 ○ 희복은 곧 계축년 과(科)이다. 《기재잡기》에 무오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오년 방(榜)에서는 노(老)ㆍ미(微)ㆍ약(弱)자와 공(公)ㆍ사(私)ㆍ천(賤)이 모두 합격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신사헌(愼思獻)은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노(老)요, 유조순(柳祖詢)은 문벌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미(微)요, 윤근수(尹根壽)는 나이가 22세이니 약(弱)이며, 강문우(姜文佑)는 속량(贖良)한 지 얼마 안 되니 천인(賤人)이었다.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신희복(愼希復)이 노인이라 하였다. 상고하여 보니 희복은 계축년 합격자이니 무오년 방에는 신사헌(愼思獻)이다. 《휘언(彙言)》에는 신사헌이라 하였으니 반드시 상고한 데가 있을 것이다.
당시 유조순이 그의 동생 조인(祖認)과 시권을 바꾸어 썼는데, 조인이 급제하자 글을 올려 형에게 급제를 돌릴 것을 원하였더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 조종조에서 사대부가 중시(重試)를 가장 중히 여겼다. 김안국(金安國)이 중시 공부를 하면서 표(表)와 책(策)을 많이 지어 연습하였다. 응시함에 미쳐 권홍(權弘)이 본시 책을 잘하였으므로 안국이 말하기를, “내가 1등을 하고자 하였더니 이 노인이 응시하니 그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하더니, 방이 발표되자 과연 권(權)이 1등이고 김(金)이 2등이었다. 중종 2년 정묘 중시 명종조 병신년에 11년 김홍도(金弘度)가 중시에 들어가서 책(策)을 짓지 않고 술을 마시며 말하기를,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 적이 두 번이었으나, 이제 양응정(梁應鼎)이 응시하니 내가 이연성(李延城 석형(石亨)) 격(格)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하더니, 과연 양(梁)이 1등을 하였다. 선조조(宣祖朝) 이래 이름 있는 명관(名官)은 통례(通例)로 시권을 지어 바치지 않고 이를 좋은 일로 여겨왔으니 자못 이해할 수 없다. 《식소록》. 김홍도는 진사와 문과에서 모두 1등을 하였다.
○ 16년 신유에 전강(殿講) 유생(儒生) 심화(沈鏵)ㆍ김규(金戣)ㆍ홍성민(洪聖民)ㆍ허사흠(許思欽)ㆍ이윤희(李胤禧) 등 5명에게 낙점하여 합격시키고, 다시 제술(製述) 시험을 보게 하였는데, 홍성민이 1등을 하고, 심화와 김규가 합격되어 급제시켰더니, 대간(臺諫)에서 그 불가함을 논하였다. 그것은 대개 뽑은 3명 중 화(鏵)와 규(戣)가 모두 후비(后妃)의 친척이었으므로 낙점하여 시험으로 뽑은 것이 사람들의 의혹을 풀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발표하는 날에 이르러 임금이 친히 임하려고 의장(儀仗)이 모두 준비되었는데, 이날 새벽에 큰비가 오고 대둑(大纛 임금의 기)에 벼락이 맞았으므로 임금이 곧 그 합격을 철회하도록 하였다. 《동각잡기》
유생이 과시(課試)나 혹 전시(殿試)에 합격된 자는 곧장 문과의 회시에 응시하게 하였으며, 혹 초시(初試)에 급분(給分)하였는데, 소위 ‘급분’이라는 것은 3장(場)에서 지은 글이 비록 합격에 들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얻은 분수(分數 점수)를 헤아려 합격자의 것과 다소(多少)를 비교하여서 합격자 명단에 넣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초시(初試)에 급분하는 것이고 보면 그것을 회시(會試)에 쓸 수 없는 것인데, 가정(嘉靖) 갑자년에 명종 19년 심화(沈鏵)가 강경에서 입격(入格)은 되었으나 분수(分數)가 적었다.심화가 초시에서 합격한 후에 다시 분수를 은사(恩賜)받았는데 화가 이를 회시에서 쓰려 하여 승정원에 소(疏)를 바쳤다. 당시 화의 아버지 통원(通源)이 바야흐로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또 왕비의 친정ㆍ친족이라는 것을 빙자하니 승지들이 소의 뜻이 참람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모두 소를 임금께 바치고자 하였다. 오직 안방경(安方慶)만이 극력 저지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동각잡기》
○ 선조 5년 임신에 춘당대(春塘臺)에서 과거를 보여 다음 날 발표하였다. 춘당대시(春塘臺試)가 이때에 시작되었다.
○ 13년 경진에 별시에서 시험 기간이 이미 끝났으나 응시자 황혁(黃赫)이 미처 시권을 제출하지 못하였으므로 고시관이 아뢰기를, “황혁이 아직 시권을 내지 않았는데 시험 시간은 이미 다 되었습니다. 청컨대 시간을 조금 더 주어 재주를 완전히 발휘하게 하소서.” 하여, 임금이 승낙하였다. 방이 발표되니 과연 혁(赫)이 장원이었다.
○ 17년 갑신에 임금이 서총대(瑞葱臺)에 나와서 성균관과 4학의 원점(圓點) 유생에게 시험을 보여 4명을 뽑았다. 원점으로 시험보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 19년 병술에 알성시(謁聖試)에서, ‘이필(李泌)이 형산(衡山)에 돌아가기를 빌다.[李泌乞還衡山]’ 라는 제목으로 표(表)를 짓게 하였는데, 그때 차천로(車天輅)가 사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원(承文院)ㆍ교서원(校書院))을 위하여 글을 지어서 응시자 여계선(呂繼先)에게 주어 1등이 되었으나, 방을 내걸자 일이 발각되어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임금이 크게 노하니 사람들이, “일이 장차 불칙하리라.” 하였지만, 귀양만 보내게 하였다. 후에 경연에서 임금이 시신(侍臣)들에게, “차천로는 진실로 기재(奇才)이다.” 하더니, 오래지 않아 석방되어 돌아왔다. 《지봉유설》
○ 29년 병신에 정시에서 합격한 이사눌(李士訥)의 겉봉에 쓴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았으므로 특명으로 이름을 삭제하게 하였다.
○ 기해년 별시에서 이수광(李睟光)과 이충원(李忠元)이 함께 고시관이 되었는데, 충원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선비를 뽑는 권한을 우리에게 맡겼는데 어찌 감히 성의를 다하지 않겠는가? 만약 권태를 느껴 고교(考校)하는 데 정확하지 않아서 인재를 잃어버리면 반드시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다.” 하고 무릇 시권 가운데 비록 매우 거칠고 지저분하여 읽을 수 없는 것이라도 반드시 끝까지 읽어 보느라고 10일이 지나서야 방을 발표하였으니 고시관의 체통을 잘 얻었다. 《지봉유설》
○ 임금이 당시의 문장이 가볍고 화려함을 깊이 염려하여, “과거 응시자 중에서 노장(老莊)의 문자를 쓴 자는 일체 뽑지 말라.” 하였다. 경자년 33년 과거에 이함(李涵)이 《장자(莊子)》의 말을 썼으므로, 특명으로 삭과(削科)하고 하교하기를, “제술(製述)을 시험보는데 노장의 말을 쓴 자가 있으니, 3분(三墳 고대의 책으로 삼황(三皇)의 글)ㆍ8색(八索 팔괘(八卦)에 관한 글) 이하 법받을 만한 문장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어찌 《장자》의 부정한 말을 인용할 것이냐. 마땅히 금지하라.” 하여 이로부터 관례가 되었다. 《지봉유설》. 이함(李涵)은 기유년에 다시 급제하였다.
임금이 전교를 내려 학자들이 《장자(莊子)》를 대단히 좋아하여 혹 그 말을 쓰기도 하는데, 더러 그 문법이 그에 흡사하므로 학자들이 이를 읽고 거기에 빠질까 두려워하여 명을 내려 과거에서 금하여 쓰지 못하게 하였다. 《식소록》
병조 판서 황정욱(黃廷彧)이 당시 대제학으로 있었는데, 경연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 선비로 문학을 공부한다는 자들이 담반 구절을 따서 기억하고 인용하는 것만을 일삼아, 여러 책을 널리 읽는데 힘쓰지 않으므로 노장(老莊) 등의 책을 보는 자가 더욱 적습니다. 노장의 말이 여러 책에 많이 섞여 나오므로 선비들이 그것이 노장의 것인지를 모르고 쓰고 있으니, 아마 하나하나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도 그것을 많이 썼으니 그 글을 일일이 금할 것은 없고 그 도(道)를 숭상하는 것만을 금하소서.” 하였다. 《기재잡기》
○ 갑오 정유년은 전쟁으로 과거를 폐지하였다가 신축년 34년 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경자년 식년시를 연기 시행하였다. 당시 책이 없어져서 서울과 지방의 과거 볼 사람이 책 읽을 겨를이 없어 정원 미달이 될 것 같으므로 다만 사서(四書) 한 경(一經)만으로 강시(講試)를 보였다.
그때 진사시에서 조희일(趙希逸)은 ‘용문상설부(龍門賞雪賦 용문에서 눈을 구경하다)’를 지어 올렸고, 목대흠(睦大欽)은 ‘추야문고객영사시(秋夜聞沽客詠詞詩 가을밤에 장사꾼이 사(詞) 읊는 것을 듣다.)’를 지어 올렸는데, 두 고시장의 고시관이 대궐에 들어가 시와 부를 가지고 장원을 다투어 날이 저물도록 결정나지 않으므로 임금이 두 시권을 들여오게 하여 조희일의 시권 구절 중에 있는 ‘한성모긴(寒聲暮緊) 설의방호(雪意方豪)’라는 구절에 비점(批點)을 찍어 드디어 희일을 장원으로 정하였다.
○ 35년 임인에 전교하기를, “정시의 시권을 보니 아마 대리로 글씨를 쓴 자가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 수위(首位)를 한 사람의 것은 분명히 하인의 글씨이니 어찌 된 것인가.” 하니, 시관이 아뢰기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유생(儒生)의 글씨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정시에 임하여 시권은 마땅히 자신이 써야 할 것인데 어찌 타인에게 대서(代書)시켰느냐. 수위를 차지한 사람의 시권은 분명히 하인의 글씨였고 다시 한 장을 뜯어 보았더니 역시 자신의 글씨가 아니었다. 마땅히 그 제술(製述)은 취할 만하나 이처럼 대서하면 뒷날에 폐단이 있을까 걱정이다.” 하니 회계(回啓)하기를, “대서는 금지되어 있사오나 동당(東堂 식년과)에서는 바꾸어 쓰므로 간혹 친구에게 대필시킬 수 있습니다. 두 장이 합격되었으니 만약 이들을 뽑는다면 진실로 전하께서 전교에 말씀하신 바 뒷폐단이 있을 것인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후에는 금하라.” 하였다. 《임인일기(壬寅日記)》
○ 임인년에 호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알성시의 기일이 임박하여 서울과 지방의 거자(擧子)들이 모여 들고 있으므로 성안에 반드시 초주지(草注紙) 5, 6백 권을 갖추어야 허다한 선비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물력(物力)으로는 마련해 낼 길이 없으니, 전일 정시 때의 예에 따라 각자 준비하도록 하는 한편, 예조에 명을 내려 4관(館)의 별색지(別色紙) 및 두미(頭尾)를 끊어 내지 않은 종이[不剪紙]를 쓰지 못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임인일기》
○ 38년 을사에 박흥립(朴興立) 후에 자흥(自興)이라 고쳤다. 의 시권 가운데의 휘호(徽號)를 차비관(差備官) 정조(鄭造)가 대신 보충하여 써 넣어 합격되었다가 발각되어 흥립은 과거에서 제거되고 차비관은 처벌되었다. 《조야기문》
○ 을사년 겨울 황감제술과(黃柑製述科)에서 이경직(李景稷)이 1등에 뽑혀 바로 전시에 응하였다. 감제(柑製)에서 급제를 시킨 것은 이때 시작되었다. 《언행록(言行錄)》
○ 41년 무신에 김계휘(金繼輝)가 정시와 과시(課試)에서 연달아 1등을 하였으므로 특별히 바로 전시에 응하게 하였더니, 대관(臺官)이 그런 전례가 없음을 논하였다. 다음 해 봄에 또 정시에서 1등을 하였으므로 전시에 바로 응하게 하였다. 《묘지(墓誌)》
○ 옛 규례에는 성균관에서 유생에게 제술 시험을 보일 때 정부와 관각(館閣)의 당상관이 일제히 모여 모두 의자에 앉으면 모든 유생이 뜰에 들어와 절을 한다. 노수신(盧守愼)이 성균관사(成均館事)가 되어 처음으로 참석한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뜰에서 절하는 것은 곧 신하가 임금을 뵈일 때 하는 예인데, 교화의 모범이 되는 성균관에서 유생 대접하기를 이렇듯 거만하게 할 수 있는가. 이제부터는 마땅히 유생들에게 읍(揖)하게 하고 여러 재상은 서서 인사를 받음으로써 선비를 예로 대하는 뜻을 보이자.” 하니 좌우가 모두 찬성하여 드디어 일정한 규칙이 되었다. 반시(泮試)에서 정읍(庭揖)하는 것도 이때 시작되었다. 《죽창한화》 ○ 우복룡(禹伏龍)이 절하지 않고 홀로 읍하고 성균관에 들어 갔다.
○ 광해군 무신년에 병오년의 중시와 별시를 연기하여 이때 실시하였다.
○ 6년 갑인에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 태조의 영정(影幀)을 안치한 곳)이 중건되었으므로 승지를 시켜 시제(試題)를 가지고 가서 전주에서 별시를 베풀어 본도(本道 전라도)의 유생에게만 시험보였는데, 수령과 그들의 자제는 일체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동시에 승지가 시권을 걷어 봉하여 가지고 오면 대신(大臣)ㆍ주문(主文)ㆍ대독관(對讀官) 3명이 등급을 정하여 발표하게 하였다.
○ 2년 경술에 기유년의 식년시를 소급하여 시행하였다. 합계(合啓)하기를, “감시(監試)에서 시(詩)ㆍ잠(箴)ㆍ명(銘)ㆍ송(頌) 중의 한 가지 시험으로 진사를 뽑고, 부(賦)와 의(疑)로써 생원을 뽑으소서.” 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아뢰기를, “선비의 습성을 개혁하지 않고 구제(舊制)를 개정함은 불가합니다.” 하여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응천일록》
○ 10년 무오 식년시는 7대문(七大門)을 가지고 비방하므로 전시(殿試)를 베풀지 않았다.
○ 12년 경신에 친경(親耕)ㆍ친잠(親蠶)의 별시는 7월에 초시를 보였었으나 국가에 일이 많으므로 신유년 겨울에야 전시를 행하였다. 그러나 거듭 연기되어 발표는 하지 않았다.
○ 인조 계해에 즉위(卽位)한 경사로 증광시(增廣試)를 보였는데, 초시에서 고시관이 조심스럽지 못하였다는 비방을 샀으므로, 지평 임숙영(任叔英)이 이 기회에 폐습을 혁파하고자 하여 파방(罷榜)하기를 청하였다. 잇달아 수십 번 아뢰어 임금이 드디어 이에 좇았다.
○ 당시 의논이 반정(反正)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하여 별도로 한 과(科)를 베풀려 하였으나 정경세(鄭經世)가 입대(入對)하여 그것이 구차스럽고 사사로움을 논하므로 임금이 이에 좇았다. 《행장》
○ 앞서 광해군 무오년 식년시의 문과(文科)와 경신년의 별시는 모두 방(榜)을 미처 발표하지 못하였었는데, 반정 후에 그 시험에 부정을 한 자가 많았으므로 두 시험을 합쳐 한 시험으로 하고 시험을 고쳐 회시(會試)라 하였다. 그 규정은, 식년시에 참여했던 자는 사서(四書) 일경(一經)을 강(講)하게 하여 조(粗) 이상을 뽑고, 별시에 참가하였던 자는 전시(殿試)의 대책(對策)으로 다시 시험보여 24명을 뽑았으며, 무과는 당초 입격되었던 숫자대로 하되 다만 전시를 보여 그 등급을 정하였다. 무오년 생원ㆍ진사시는 이미 방(榜)을 발표하였으므로 파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술이》. 정사년의 허적(許積)의 아룀에 좇았다.
○ 4년 병인 7월 별시 때에 정경세(鄭經世) 등이 아뢰기를, “이번 전시는 이름을 뜯어 본 후에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고사장이 엄하지 않았고 해가 진 후에 고시관의 하인이 선비들과 서로 섞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경(二更)이 넘어서야 비로소 고시장이 파(罷)하였고 수권관(收卷官)이 나온 후에도 시권을 가지고 와서 여러 번 고사(考査 관청에서 사무 처리상 백성이나 관리의 진상(眞狀)을 조사하는 것)하여 주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사오니 진실로 삼가지 못한 허물입니다. 조희일(趙希逸) 이하 승지를 함께 파직시키소서. 공정하지 못했다는 비방이 조야(朝野)에 떠들썩하여 구차히 그대로 두었다가는 뒷날에 폐단이 더욱 많아질 것이니 전시는 파방하고, 이제부터는 고시관을 엄격히 채택하며, 또 해가 진 후에는 수권관을 나가게 하여 어두운 밤에 부정을 하는 폐단을 방지하소서.” 하니 아뢴대로 허락하였다.명관(命官) 신흠(申欽)이 소를 올리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경신년 별시 때에 거자(擧子) 황혁(黃赫) 등 수십 명이 밤이 깊도록 시권을 제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고시관이 황혁의 이름을 들어 아뢰었더니, 특명으로 시간을 더 주어 다 지어서 바치게 하였으므로, 황혁이 장원이 되고, 이영(李榮)이 3등이 되었었습니다. 이번 경우가 어찌 그때 황혁의 경우와 다르겠습니까마는, 불행히도 시관(試官)의 아들이 끼어 있었고 가까운 친속이 방에 참여한 것은 그 중에서 신(申)이 가장 대표적이니 속히 면직(免職)을 명하소서.” 하였다. 《문집》
그때 늦게 제출한 시권이 55장이었다. 조업(趙)과 목대흠(睦大欽)이 시험관이 되었는데, 조업의 아들 조전소(趙全素)와 목대흠의 질서(姪婿) 조형(趙珩)이 합격되었고, 조전소와 신익전(申翊全)ㆍ신면(申冕) 등이 다같이 늦게 제출하였는데 합격되었다.
드디어 파방(罷榜)하고 시험관도 아울러 파직하였다. 명관(命官)은 대신이었으므로 파직하지 않았다.
○ 13년 을해에 성균관 유생에게 베풀어진 증광시(增廣試)는 유생들이 소를 올리노라고 분요(紛擾)를 일으키므로 명하여 파하게 하였다.
을해년 증광시에 양사(兩司)에서 파방(罷榜)의 논의가 있었으므로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파방이란 것은 천하에 없는 바로서, 우리나라의 폐습(弊習)입니다. 선조(先朝) 때에 과거를 설치한 이후 매양 파방의 논의가 있어서 선비의 습성이 날로 변하여 그 폐단 역시 적지 않습니다. 예조의 건의를 좇아 중국처럼 비록 고시장에서 변고가 있더라도 시험관 중 응당 파면할 자는 파면하고, 응시자 중 제명(除名)할 자는 제명하며, 영원히 파방하지 말 것을 법으로 정하소서. 비록 이번 과장(科場)에서 변고가 많았으나 그 원인은 시험관과 응시자의 잘못에 불과합니다. 다만 파면할 자는 파면하고 제명할 자는 제명할 것이지 어찌 파방할 논의를 하여 선왕(先王)이 이미 제정한 명을 폐하여 후일에 끝없는 폐단의 길을 열어 놓겠습니까. 이번에만 파방하지 말 것이 아니고, 이후 옛 명을 밝혀서 파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선비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폐습을 영원히 근절하소서.” 하였다.
○ 선조(先朝)에서는 증광과(增廣科)는 즉위 원년에만 시행하였으므로, 성종이 덕종(德宗)을 추숭(追崇)하였으나 과거를 베풀지 않았다. 선조(宣祖) 기축년에 종계(宗系)를 개정하여, 종묘에 고하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릴 때, 조정의 의논이 개국과 같은 경사(慶事)라 하여 과거를 보였다. 경인년 평난공신(平難功臣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평정한 공신)을 책봉하고 존호(尊號)를 올릴 때에는 재상들이 즉위와 같은 경사라 하여 또 과거를 보였는데, 조종조의 구제(舊制)는 아니었다.갑진년에 호종(扈從)ㆍ선무(宣武) 등의 공훈(功勳)을 책봉하고 존호를 올릴 때 경인년의 예를 따라 또 과거를 보였고, 병오년에는 당시 정승 유영경(柳永慶)이 즉위한 지 40년이니 즉위한 것과 같은 경사라 하여 또 과거를 보였으며, 광해군 때에는 경사를 칭하고 과거 보인 것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인조 을축년에 조사(詔使) 호양보(胡良輔) 등이 책봉(冊封)하러 왔을 때에, 이정귀(李廷龜)가 당시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큰 경사라 하여 과거 보이기를 청하니, 식자(識者) 중에 이미 즉위 증광시를 시행하였으므로 여러 번 과거를 보일 수 없다고 하는 자가 많으므로, 정귀가 이름을 고쳐 별시로 할 것을 청하였다. 계유년 원종(元宗)을 추숭할 때에 과거를 보였는데 덕종을 추숭할 때 과거를 보이지 않는 것이 구례가 아니었다. 을해년에 원종이 부묘(祔廟)할 때에 또 과거를 보였다.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7년 기사년에 영정(影幀)을 다시 그린 후 시관을 보내어 강릉(江陵)에서 5명을 뽑고, 영흥(永興)에서 1명을 뽑았으며, 평양에서 1명을 뽑아 모두 명 나라 황태자 탄생을 경축하는 별시에 장원한 정두경(鄭斗卿)의 방(榜) 아래에 붙였다.
○ 14년 병자 감시(監試)때에 정두경이 제2시험장의 시관이 되었는데, 거자(擧子)들의 분란으로 파장(罷場)하니, 김상헌이 차자를 올려 제1시험장에서 더 뽑아 두 시험에 각 백 명으로 두 곳의 수를 보충하기를 청하였다.
○ 무인년 16년 정시에서 거자 이정상(李廷相)의 시권(試卷)에 목조(穆祖)의 어휘(御諱) 자(字)를 썼으므로 표를 하여 대신에게 내리어 제명(除名) 여부를 의논하게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방을 발표한 후에 비로소 의논하여 처치하는 것은 심히 드문 일입니다. 고(故) 군수 강혹(姜翯)이 선조(宣祖) 잠저(潛邸) 때의 휘자(諱字)를 범하였으므로 직부(直赴)하라는 명령이 차점자에게 넘어가니, 전교하기를, ‘강혹 등의 일은 즉위한 후에 고쳤으므로 그 휘자를 선왕이 중외(中外)에 명하여 휘하지 말라.’고 전교하였으므로, 그냥 두었습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정상의 일은 강혹의 경우와 달라서 그냥 두기 어려울 것 같사오니 명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조야기문》
○ 21년 계미에 하교하기를, “평안도 일대는 혹심한 전화(戰火)를 겪었고, 그로 말미암아 군사와 운수(運輸)하는 역(役)을 치렀으므로 특별히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선비에게 과거를 보여 시권을 모아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 등급을 정하게 하라.” 하였다. 관서도과(關西道科)가 이때 시작되었다.
○ 22년 갑신에 역신(逆臣) 심기원(沈器遠) 등을 토평(討平)하고 별시를 시행하였다. 토역과(討逆科)가 이때 시작되었다.
○ 효종 원년에 임담(林墰)이 고시장의 엄하지 못한 폐단을 진술하고 근봉(謹封) 두 자[二字]를 글씨로 쓰지 못하게 하고 도장을 새겨 4관(館)으로 하여금 과거 현장에 나와서 겉봉에 답인(踏印)하게 하여 폐단의 근원을 막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는 전에 시권의 피봉(皮封) 호명(糊名)한 겉에다가 ‘근봉(謹封)’이라고 세 군데 쓰고, 응시자들이 서울의 재상이나 명사(名士)에게 ‘근봉’ 두 글자를 청하는 일이 많아서 고시관이 그 필적을 알아보고 사정(私情)을 쓸 염려가 있으므로 임담이 아뢰어서 그 제도를 개정한 것이다.
○ 2년 신묘에 과장할봉법(科場割封法)을 시행하였다.
그때 한 응시자가 잘못하여 국휘(國諱)의 글자를 써서 삭과(削科)된 일이 있었다. 무릇 과거 규정에 국휘의 글자를 범하면 삭과하는 것이 법전에 있으나, 연신(筵臣)이 그 가석(可惜)함을 아뢰므로 임금이 복과(復科)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 10년 기해에 송준길(宋浚吉)의 차자에, “사학(四學)과 동재(東齋 성균관)의 원점(圓點)은 일찍이 연신의 아룀으로 말미암아 정파(停罷)하도록 하였으나, 24순 제술(二十四巡製述) 규정 역시 심히 번쇄하여 한갓 선비들의 습성을 퇴폐시킬 뿐이므로 의당히 규정도 아울러 철폐하고, 다만 정자(程子)의 시(試)를 개정하여 ‘과(課)’로 하는 뜻에 따라 매 네 계절에 각각 한 번씩 학생들을 모아 놓고 강송(講誦)으로 10명을 뽑고 제술(製述)로 5명을 뽑으면 네 계절을 통하여 각 학에서 강송으로 뽑힌 자는 도합 40명이고, 제술로 뽑힌 자는 도합 20명이 됩니다. 연말에 가서 성균관 관원과 4학의 관원이 성균관에 합좌(合坐)하여 4학에서 뽑힌 자를 모아 놓고, 강경으로 16명을 뽑고, 제술로 8명을 뽑아서 생원ㆍ진사 시험의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소학고강조흘(小學考講照訖)’의 규정을 밝히어 반드시 시험 기일 한 달 전에 강송 시험을 열어 4책 중에서 추첨하여 시험에 임하면, 글 뜻을 물어서 반드시 거기에 밝은 자를 뽑아 생원ㆍ진사 시험의 초시(初試)에 응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에 좇았다.
헌종 5년 갑진에 예조의 아룀으로 사학을 합하여 제술 시험으로 16명을 뽑고 강경(講經)으로 8명을 뽑게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4학에 입재(入齋)한 유생에게 부정이 있나 없나를 조사한 후, 논제(論題)를 내어 제술 시험을 보여 이에 합격한 자는 바로 진사 시험의 회시에 응시하게 하였다. 《조야기문》
○ 현종 2년 신축에 문묘(文廟)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후 즉시 궁으로 돌아올 때, 시제를 내어 두어 유생들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여 삼중(三中) 이상은 모두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심백(沈栢)ㆍ윤계(尹堦)ㆍ김석주(金錫冑)ㆍ윤빈(尹彬)이 이에 들었는데 모두 급제시켰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사람을 뽑지 않기로 결정하였었는데, 은사(恩賜)가 너무 많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드디어 장원(壯元) 심백 외에는 모두 급분(級分)하게 하여 증광시에 응시하게 하였던 바 김석주와 윤계가 합격하였다 《조야기문》
○ 3년 임인에 증광시를 보였다. 이전의 규정으로는 증광시의 초시(初試)는 세 곳으로 나누었고, 그 중에 성균관 시험은 원점(圓點)으로 응시를 허락하였는데, 이때 와서 이경석(李景奭)이 건의하기를, “국가 비용이 궁핍하여 식당에서 음식 제공이 매우 어려우니, 성균관 시험의 합격자 수를 두 곳에 합쳐서 개최해야 합니다.” 하여 드디어 관례가 되었다. 초시는 두 곳에서 각각 80명을 뽑고, 향시(鄕試)는 그 도의 크기에 따라 인원수를 증감하였다.
○ 5년 갑진에 중신(重臣)을 함경도에 보내어 과거를 보였다. 이는 민유중(閔維重)의 ‘북방 인심을 수습하라.’ 는 말을 좇은 것이다. 또 어사(御史)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북도(北道)및 제주도과(濟州道科)가 이때에 시작되었다.
○ 6년 을사에 온천(溫泉) 별시에서 임유(林濡)가 본 읍인(邑人)이 아니라 하여 합격에서 제명(除名)되었다.
그때 4월 17일 어가(御駕)가 거동하여 21일 온정(溫井)에 도착했다. 8일에 과거를 보여 다만 도내에 원래부터 살아오던 사람만 응시하게 하고, 호종한 사람과 도내 수령들도 아울러 응시하게 하였다. 처음 6명을 뽑았는데 임금이 본읍 사람이 한 사람도 들지 않았다 하여, 온양 사람으로는 등급이 차상(次上)인 자 5명을 뽑아서 모두 급제를 주었다.이에 대신이 너무 많다고 반대하므로 임금이 친히 조이병(趙爾炳)ㆍ선약봉(宣若奉)ㆍ임유(林濡) 세 사람을 골라 급제시키고, 조명한(趙鳴漢)과 신한선(申翰宣) 두 사람은 즉석에서 참봉(叅奉)에 임명하였다. 방을 발표한 후에 온천 사람들이 임유는 본읍에 살지 않는다고 진달하였으므로 그는 제명되고, 5월 11일 방을 발표하고 5월 12일 행차가 돌아왔다.
9년 무신에 정시(庭試)를 보였는데, 사헌부에서 반시(泮試 성균관시)에 출제되었던 제목을 다시 내었다고 아뢰어 대제학 조복양(趙復陽)을 파직시킬 것과 파방(罷榜)할 것을 청하였더니, 허락하였다.
그때 감시(監試) 응시자 중에 경전(經傳)에 있는 말이라고 거짓 인용하기도 하고, 고금(古今)에 없는 선유(先儒)의 이름을 거짓 인용한 자가 있었으므로, 김징(金澄)의 아뢴 바로 말미암아 금하게 하고 모든 방(榜)을 파(罷)하였다. 《조야기문》
○ 11년 경술에 정시에서 응시자 권규(權珪)의 시권 가운데 붉은 글씨로 여덟자를 옆에 써 넣고, 다른 낙폭지(落幅紙) 중에 인(印)을 찍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차비관(差備官)과 승지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죄를 입게 되었다. 이담명(李聃命)의 답안 등급을 정할 때에, “그의 아버지 원정(元楨)이 고관(考官)으로서 실정을 안 형적이 있었으므로, 그의 아버지를 파직시키고 그 아들은 제명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달이 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박천영(朴千榮)의 시권 가운데 두 자의 붉은 글씨로 고친 부정이 있었으므로, 발표된 후에 적발하여 제명하기를 논하여 마침내 임금이 다시 들여다 본 후에 곧 허락하여 그 홍패(紅牌)를 거둬 들여 태웠다. 과장(科場)이 난잡하였다고 파방하자는 논의가 양사(兩司)에서 다시 나왔으나, 홍문관에서 곧 저지시켰으니, 대개 영의정의 처족으로 전에 파방(罷榜)되었던 자가 합격에 들었기 때문이다. 계축년 가을에 장선징(張善澂)이 대관(臺官)이 논의하였던 붉은 글씨로 써 넣은 두 자는 당락(當落)에 관계되지 않습니다.”고 마침 임금이 침을 맞을 때에 아뢰어 박천영을 복과(復科)시키도록 하였다. 《조야기문》
○ 숙종 3년 정사에 일곱 가지 경사를 합쳐 증광시(增廣試)를 보였는데, 2월 회시(會試)에 대리로 글짓는 자가 고시장에 많이 들어왔으므로 파방하고 현장에서 잡힌 자는 모두 충군(充軍)하였다. 10월에 다시 회시를 열었는데, 시험 제목이, “미진(美疢)이 악석(惡石)만 못하다.[美疢不如惡石]”는 것으로서 거자(擧子)들의 거의 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에 시관이 시제(試題)를 고치자는 뜻을 아뢰었다. 우의정 허목(許穆)의 차자(箚子) 및 사간원의 아룀으로 인하여 시관은 잡히어 국문(鞫問)받고 귀양갔으며 회시는 중지되었다.
4년 무오에 초시와 회시를 다시 보였다. 생원ㆍ진사시와 무과(武科)는 파방하지 않았다.
2월에 다시 과거를 보였다. 그때 경상도 도사(都事) 박태소(朴泰素)가 낸 대책(對策) 문제가 시국을 비방하였다 하여, 많은 선비들이 글을 짓지 않아 거둬 들인 시권수가 적었으므로, 감사가 박태소를 파면할 것을 장계(狀啓)로 아뢰고 사헌부에서는 소를 올려 처벌을 청하였다.
○ 8년 임술에 증광시의 초시(初試)에서 거자로 합격된 자의 대책문(對策文) 중에 색목(色目 당파)에 관한 말을 쓴 자가 있었다. 대신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한 쪽을 올리고 한 쪽을 내리는 데에 형적이 저절로 드러나니 이로써 뽑거나 버리거나 하면 반드시 사람들의 말썽이 있게 될 것입니다.”고 아뢰어 엄금하기를 청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과거 응시자들의 문제가 전에 비해 크게 변하여 무릇 보통 쓰는 문자를 신기(神奇)한 자로 쓰려고 힘쓰고 있사오니, 예를 들면 ‘천연(天淵 하늘과 연못)’이라고 할 것을 ‘성연(星淵)’, ‘말세(末世)’를 ‘해세(亥世)’, ‘계차이후(繼此以後 이 다음부터)’는 ‘윤자이예(胤玆以裔)’, ‘공유(恭惟 삼가 생각하건대)’를 ‘장유(莊惟)’라 하고, 또 어려운 글자와 편벽된 말을 엮어 문장을 만들며, 어록(語錄)을 섞어 넣은 것이 많습니다. 문체의 변천은 실로 세도(世道)의 성쇠에 관계되오니 통렬히 배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10년 갑자에 구례(舊例)로는 절일제(節日製)에서는 급제를 내려 주지 않은 적이 많았으므로 시관의 상피법(相避法)이 없었다. 이때 대제학 이민서(李敏叙)의 조카 이정명(李鼎命)이 국제(菊製 9월 9일의 절일제(節日製))에서 장원을 하였으므로 대간이 방에서 제명할 것을 아뢰었다. 이에 절일제(節日製)의 주문(主文)과 응시자와 상피(相避)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 병인년에 함경도에서 선비들에게 과거를 보이고 이어서 시험 본 장소에서 방을 발표하도록 명하였다. 도과(道科)의 시장(試場)에 가서 방을 발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 19년 계유에 임금이 제릉(齊陵 태조의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을 성묘하고, 만월대(滿月臺)에 돌아와 선비들에게 과거를 보였다.
○ 을해년 별시에서 비로소 예조를 제일 시험장으로 삼게 하였다.
○ 25년 기묘 증광시에 정언(正言) 이탄(李坦)이 아뢰어 겉봉투를 바꾸는 폐단을 조사하고 차비관(差備官) 및 모든 범인을 잡아 신문하기를 청하여 과거 옥사(獄事)가 일어나 파방되었다. 신사년 여름에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의 기우제에 친히 참석하여 몸소 의금부에 나가서 죄수들을 심리할 때에 과거 옥사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경인년에 사간 이덕영(李德英)이 소를 올려 복과(復科)를 청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고 과적(科賊) 8명 이외에는 모두 복과시켰다.
○ 을유년 감시(監試)에서 순자(荀子)의 말을 인용하여 높은 등수에 든 자가 있었다. 참찬관(叅贊官)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사서의(四書疑 과거 시험 과목의 일종)에 유교 이외의 외가(外家)의 문자를 인용함은 크게 법도에 어긋나며 관계되는 바가 적은 일이 아니오니, 법을 제정하여 엄금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 경인년의 증광시 대책(對策)에서 불교의 말을 인용한 자가 있었는데 사헌부 관원이 아뢰어 빼어 버렸다.
○ 임진년에 정시(庭試)를 보였다.
○ 계사년의 증광시에 김우항(金宇杭)이 청하기를, “시지(試紙)에 도장을 찍는 것은 반드시 시권을 거둬들여 철(綴)한 뒤를 기다려 함으로써 시장의 난잡한 폐단을 막고,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의 비편(裨篇)을 초서로 난잡하게 쓰는 것은 위에 바치는데 경건(敬虔)함이 부족하오니 모두 없애소서.” 하였다.
○ 경기도 유생(儒生)들이 소를 올려, “대과와 소과의 초시(初試)를 서울과 지방으로 나누어 합격자 수를 정하여서 뽑는 것은 곧 조종(祖宗)의 불변의 법이었습니다. 임진란 후에 경기도의 과거 정원[科額]을 서울에 합쳤더니, 이제 군현(郡縣)들이 다시 소생되어 저축한 것도 넉넉하니 의당 구제(舊制)를 복구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예조에서 서울 유생으로 경기도의 각 고을에 입적(入籍)한 자가 많아서 반드시 혼잡의 폐단이 있을 것이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 43년 정유에 온양(溫陽)의 별과(別科)를 흉년으로 인해서 시기를 늦추어 시행하였는데, 또 장소가 좁았으므로 청주(淸州)로 옮겨서 시행하였다. 이유춘(李囿春)이 1등을 차지하고 그의 아버지 성채(星彩)가 2등을 하였는데, 사헌부에서 아뢰어 유춘을 제명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28년 임오에 알성시(謁聖試)의 방을 발표한 후에 충주 사람 최세일(崔世鎰)이 소(疏)를 올려 한 방(榜) 중의 7명이 모두 7명이 모두 시관의 지친(至親)이라고 말하면서, 고려 말기의 홍분방(紅粉榜)에 비하였으므로 승정원에서 아뢰어 특명으로 세일(世鎰)을 귀양보낼 것과, 박두상(朴斗相) 역시 소(疏)의 글을 상의하였다 하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다. 을유년 31년 에 헌납 권첨(權詹)과 정언(正言) 강이상(姜履相)이 아뢰어 7명을 방에서 뺄 것을 청하였는데, 그 아룀 중에 20명의 시관이 단지 22명만을 합동으로 고사할 때 명관(命官 이세백(李世白))과 제학(提學 이여(李畬)) 이외에는 타인의 참여를 불허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한 번 아뢰자 엄한 비답(批答)을 받았다.
○ 영종 을사년에 임인년 정시(庭試)의 방을 파하였다. 정미년 7월에 승지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과거로만 사람을 뽑기 때문에 일생이 영화냐, 아니면 곤욕(困辱)이냐가 모두 이에 관계됩니다.나라에서 이미 과거를 베풀었으면 문(文)ㆍ무(武)의 공부를 하는 자가 어찌 응시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 죄가 없는데 한결같이 모두 합격을 파(罷)한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숙종조에 영을 내리기를, ‘영원히 파방(罷榜)하지 말라.’ 하여 일정한 법으로 삼았는데, 단지 일시의 원한을 풀 생각으로 선조(先朝)의 명령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는데 경연(經筵) 신하들이 고집하여서 드디어 파방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공훈(功勳)은 비록 삭탈하여도 과거 합격은 그냥 둔 것이 과연 전례가 있는가.” 하였다. 이에 인명(寅明)이 아뢰기를, “경신년 토역(討逆) 때 과거의 경우는 기사년 공훈을 삭탈한 후에 이르러도 파방한 일이 없었으며, 인조조 계해년에도 광해 때의 어떤 과거도 파방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행호일기(杏湖日記)》
○ 영종 정묘년에 생원ㆍ진사시의 장원(壯元)의 법을 혁파토록 명하였다. 구례(舊例)에는 장원은 반드시 당시의 명망 있고 글 잘하는 사람으로 장원을 시키므로 온 세상이 다투어 서로 흠모하고 시관이 된 자 역시 꼭 일류 인물로 뽑으려 하며, 생원시에 3명, 진사시에 6명을 뽑고 또한 문벌이 낮고 글이 조금 우수한 자로 하므로 밀봉한 봉투를 살짝 뜯어 보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울러 혁파하게 하였다.
○ 영종 경오년에 명하여 문과(文科)에서 대리 시험을 보아 글을 모르는 자로서 합격되는 자는 한결같이 무과의 대사율(代射律 대리로 활을 쏜 자를 처벌하는 법률)대로 처벌을 시행하게 하였다.
○ 전조(前朝)의 과거에는 시관이 단지 지공거(知貢擧)와 동지공거(同知貢擧) 2명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응시자들이 미리 문신(文臣)으로 명망(名望)이 있는 자를 은문(恩門)으로 삼았다. 은문은 문생(門生) 보기를 자제와 같이 하였고, 문생도 은문 보기를 부모와 같이 하여 사위는 내실(內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도, 문생은 특별히 내실에서 서로 보기를 허락하였으니 문생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한 과거의 합격자가 은문의 집에 모여 연회를 베풀 때면 술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기를 친 자제처럼 하였고, 혹은 오래 머물러 놀기도 하였다.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집이 호부(豪富)여서 신은(新恩 새로 과거의 합격된 자) 30명에게 모두 초모(貂毛)로 만든 이불을 주었으며, 또한 각각 앞에 만루 은배(萬縷銀杯)를 놓았다. 본조에서는 비록 지공거의 제도를 폐지하였으나 오히려 문생과 좌주(座主)의 명칭이 남아서 술을 차려 가지고 찾아가 뵙기도 하고, 좌주가 죽으면 그의 집에서나 혹은 행상(行喪)하는 길가에서 다 같이 음식을 차려서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문생과 좌주가 서로 보기를 호(胡)ㆍ월(越)처럼 하여 도리어 서로 배격하니, 이것으로 역시 세상이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용재총화》
○ 구례(舊例)로는 모든 과거의 회시에서 제삼장(第三場)의 날에는 언제나 예조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또 별도로 궁중으로부터 술과 음식을 내려 주어서 시관들이 기쁘게 마시며 영예로 생각하였고, 모든 응시자에게도 맑은 죽과 맑은 술 수십 동이를 차려 놓아, 마른 목을 축이게 하였었다. 식년(式年) 제도가 생기면서부터 모두 폐지되었는데, 근래 시원(試院)에서 한 참시관(叅試官)이 희롱으로 시 한 귀를 지었는데,

좌주는 향긋한 술 한 잔을 마시지 못했는데 / 座主不飮香醪一盞
어찌 그 머리가 정신 없으며 / 何烘其頭
제생(諸生)은 먹물 두어 되를 달게 마셔 / 諸生甘吸黑水數升
모두 그 목구멍이 검구나 / 皆黔其吻

하였다.
서거정(徐巨正)도 지은 글귀가 있으니,

찻잔은 오늘부터 비로소 크고 / 茶椀始從今日大
술잔은 전년의 깊었던 것이 생각난다 / 酒杯仍憶去年深

하여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다.
○ 구례(舊例)로는 방의 발표가 있던 그 다음 날 문무(文武) 양과의 합격자가 모두 문과 장원의 집에 모여서 같이 대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고, 다시 그 이튿날에는 모두 무과 장원의 집에 모여서 같이 문묘(文廟)에 배알하였다.
○ 항간에서 하는 말에, “우리나라의 공도(公道)는 오직 과거에 있다.” 하였는데, 세상의 도의가 날로 떨어지자 간사한 계책이 점점 많아져 불공(不公)과 부정이 근래 더욱 심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의 과거처럼 시장(試場)을 집[屋]으로 설치한다면 이런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나, 진실로 공도(公道)가 없다면 시장을 집으로 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구한 말단의 법제(法制)가 족히 간사한 부정을 막지 못한다.송 나라 원풍(元豐) 연간에 예부(禮部)의 공원(貢院 시장(試場))에 불이 나서 거자(擧子)가 모두 죽었고, 명 나라 천순(天順) 7년 회시(會試) 때도 화재가 발생하여 타 죽은 거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으니 이것 또한 염려가 된다. 또 말하기를, “고려 말기처럼 과거를 폐지하는 것이 옳다.” 하니, 이는 격분하여서 하는 말일 것이다. 《필원잡기》
○ 생원ㆍ진사시의 방을 발표할 때는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만나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揖)하지 못한다. 급제 역시 이러하니 이는 고풍(古風)이다. 생(生)ㆍ진(進)과를 연방(蓮榜) 또는 사마(司馬)라고도 칭하며, 한 방에 합격한 자[同榜]는 서로 형제라 부르고, 정의(情義)가 두터워 춘추로 모임을 열고 즐겨 놀다가 해가 오래되면 폐지된다. 《청천견한록(聽天遣閑錄)》
○ 유학(幼學)으로 급제한 자를 세상에서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을 상세히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생(生)ㆍ진(進)이 되지 못하고 급제한 자는 세상에 희귀하다 하는 것은 그들이 유가(遊街)할 때 인사(人家)에서 발[簾]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청천견한록》
○ 왕제(王制) 《예기(禮記)》의 편명(篇名))에, “대악정(大樂正)이 양성한 선비[造士]중의 우수한 자를 논하여 임금에게 고하고 사마(司馬)에게 올린다.” 하였는데, 그 글을 해석하는 이가, “사마(司馬)는 작록(爵祿)을 관장하므로 들어와 벼슬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 사마가 맡았다.” 하였다.지금 생원ㆍ진사를 사마라 하는 것은 본래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주(周) 나라 조사(造士)는 향학(鄕學)으로부터 국학(國學)에 오르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생원ㆍ진사와 같은 것이요, 소위 사마에 올린다는 것은 국학으로부터 등용되는 것이니, 금일의 대과(大科) 합격자와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생원ㆍ진사를 사마라 칭하는 것은 대개 옛것을 모방한 것으로 자세히 상고하지 않은 것이다. 《계곡집》
○《 경제육전(經濟六典)》에는 한리과(漢吏科)가 있었으나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 그 조항을 삭제해 버렸다. 가정(嘉靖) 신축년 김안국(金安國)의 건의로 한리과가 다시 설치되었다가 《경국대전후속록(經國大典後續錄)》을 편찬할 때에 또 삭제되어 실리지 않았다. 《지봉유설》
○ 우리나라 과거의 글은 그 폐단이 심하다. 사륙체(四六體)는 쓸데없이 길어 전혀 행문(行文)과 같고, 이른바 행문은 또 공사장(公事場)의 문자와 같았다. 시부(詩賦)에는 입제(入題)와 포서(鋪叙)ㆍ회제(回題) 등의 격식이 있는데, 더욱 문장가의 문체 양식과는 완전히 다르므로 비록 과거를 하였다 하여도 마침내 글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마니 어찌 세상에 유용함이 있겠는가. 반드시 크게 문체를 변경한 후에라야 옳게 된 것이다.
사서의(四書疑)의 문체 양식은 매우 말이 안 된다. 일찍이 중국 서적 중에 사서의(四書疑) 한 편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곧 원 나라 때 절강(浙江) 향시(鄕試)에서 지은 것으로 금일의 시장에서 짓는 것과 꼭 같다. 우리나라 과거(科擧) 문장의 폐단은 대개 여기에 근원한 것이다. 《지봉유설》
○ 우리나라 식년 과거(式年科擧)의 급제는 강경(講經)으로만 뽑는데, 그 취지는 심히 아름다우나 경서만을 강한 사람은 실제에는 쓸 수도 없고, 또 혹은 글을 짓지도 못하므로, 세속에서 쓸 데도 없으면서 거드름만 피우는 것을 말할 때에는, ‘실학(實學) 급제’라 하니, 대개 그런 말을 듣는 까닭을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국처럼 오로지 한 가지 경서로만 뽑으면 좋다.” 한다. 《지봉유설》
○ 식년시에서 경서를 강하게 하는 것은 처음 취지로는 그 의리(義理)를 밝게 알도록 하고자 한 것인데, 근래 선비들이 다만 구절만을 외우기를 익히므로 그 뜻을 전연 이해하지 못한다. 경서의 장(章)이 많아 기억하기 어려우므로 암호(暗號)로 표시하느라고 음란하고 희롱하는 말을 암호로 성현들의 글 위에 지저분하게 쓰고 있는데, 이는 선성(先聖)에게 욕되는 것이니 심히 한탄스럽다. 《지소록》
○ 문예(文藝)로 사람을 뽑는 것은 말세의 폐습(弊習)이다. 기송(記誦)과 사장(詞章)을 옛사람들은 이단(異端)에 견주었으니, 그것의 정치에 해됨을 가히 알 수 있다. 본조에서 사람을 쓰는 데 오로지 문사(文士)만을 뽑으므로 한 번 그 길을 거쳐 그대로 순순이 지속만 하여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한림(翰林)과 주서(注書)로부터 공경(公卿)에 이르기까지 사다리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아서 발을 옮김에 장애됨이 없다. 비록 성현이나 호걸이 이때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그 사이에서 특별히 드러나기는 진실로 어렵다. 《택당집》
○ “본조(本朝)에서는 현량(賢良)ㆍ명경(明經) 등의 과거가 겨우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어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단지 과거 한 가지에만 의존하여 처음 《소학(小學)》을 강하고 감시(監試)를 치르고 다음 성균관에서 원점(圓點)이 만점(滿點)에 이르러야 응시합니다. 그 취지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나, 《소학》을 배운 자 중 편명(篇名)을 알지 못하는 자까지 있으며, 원점(圓點)이 1백 일로 기록된 자 중에 성균관 문조차 모르는 자가 많았습니다.그러므로 이이(李珥)가 일찍이 석담서당(石潭書堂)에서 학생들에게 과문초집(科文抄集 과거 글을 뽑아 모은 책)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고, 오직 《소학》과 《근사록(近思錄)》을 먼저 장려하여 가르치고 점차 사서오경을 읽게 하였으며, 경학에 밝지 못하고 문리(文理)에 통달하지 못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신(臣)이 일찍이 제독(提督 지방의 장학관(獎學官))의 임명을 받았을 때, 과거에 관한 법규를 엄히 하여 먼저 실학(實學)을 중시하고, 다음으로 사서(四書)와 제자(諸子)와 문집(文集) 순으로 하되, 주자(朱子)의 38일에 출제하여 49일에 시험보는 규정에 따라서 문체는 비약(卑弱)한 것을 숭상하지 말고 내용이 절실한 것을 뽑을 것이며, 유학(幼學)으로서 사서에 통하지 못하고 시부(詩賦)를 짓는데, 조리가 없는 자는 감시(監試)를 보지 못하게 하고, 생원ㆍ진사로 《근사록》과 경서ㆍ사서(史書)에 통하지 못하고 글을 짓는데 의리(義理)를 주로 하지 않은 자는 성균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수령이 서명 날인한 후에야 응시와 입학을 허락할 것과, 또 건주(虔州)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개봉(開封)의 호적에 끼지 못하게 하여 사환(謝還)의 무리가 채주(蔡州)에서의 과거에 새치기를 못하게 하면 대리를 시켜 짓고 대신 강하는 폐단을 혁파할 수 있으며, 함부로 파방하는 일도 영원히 근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봉집(重峯集)》 소(疏)
○ “조종조에 등준(登俊)ㆍ현량(賢良) 등의 과(科)가 모두 점차 시행되어 대체로 한(漢) 나라 때의 효렴(孝廉)ㆍ현량(賢良)ㆍ무재(茂才)ㆍ명경(明經)의 법제에 따라 과명(科名)을 만들고 재신(宰臣)과 시종(侍從) 이상과 드러난 이나 숨은 이 중에 재주가 뛰어난 자를 서울에 모이게 하여 대책(對策)의 시험에 임금이 친히 임하여 불러보고, 문답함에 대답하는 것이 뜻에 맞아 적당한 자가 있으면 혹 출신(出身)을 내려 주기도 하고, 혹은 관직으로서 그의 재주를 시험하기도 하며 생원ㆍ진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재(下齋) 및 사학(四學)에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지방에서는 모두 향교에 들어가게 하되, 처음 입학시킬 때 제생(諸生) 10명이 그가 학문에 뜻이 있다고 천거한 후에 시강(試講)을 시켜 입학을 허락하며, 학교에 적(籍)을 두지 않은 자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하고, 사학의 관원 및 수령(守令)ㆍ교관(敎官) 등이 매년 생도 중에 학행(學行)이 있는 자를 천거하여 성균관에 올려 경학과 행동이 드러난 자를 뽑아 연말에 아뢰며,매년 임금이 친히 학교에 시학(視學)할 때 대제학ㆍ중신(重臣) 및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유생과 함께 경서를 가지고 문난(問難)하여 경학에 통하고 기국(器局)과 학식이 있는 자를 뽑아 급제를 내려주며, 혹은 책문(策問)을 내어 선비에게 시험을 보여 논의가 조리 있고 이치가 맞는 자는 뽑으며, 헛되고 괴벽한 자는 쫓아내고 과거를 볼 때마다 성균관의 장ㆍ이(長貳)는 기일 전에 명륜당에 모여서 상ㆍ하재(上下齋)의 명부를 모두 갖다가 행동에 흠이 없고 학문에 뜻이 있는 자를 가려낸 연후에야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가하게 하소서.” 《동강집(東岡集)》 김우옹(金宇顒)의 소(疏)
○ “순제(旬製 열흘마다 글짓기를 하는 것), 윤차(輪次), 절일제(節日製) 및 과시(課試)는 모두 말단인 문예(文藝)를 장려하는 것으로, 실(實)을 힘쓰고 본(本)을 돈독케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근래는 조정에 일이 많아서 이 규정조차 폐지되었으니, 하물며 선비들을 진작시켜 경학에 밝고 행실을 닦는 실(實)을 기대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특별히 규정을 제정하여 한 달에 2, 점(點)으로 1년에 2, 0점으로 원점(圓點)을 정한 후에 절일ㆍ과시ㆍ정시(庭試)ㆍ전강(殿講)에 모두 몇 점 이상에게만 응시를 허가하되, 식년시 이외에는 극히 드문 큰 경사가 아니면 절대로 과거를 베풀지 말 것입니다.오직 때때로 성균관에 근신(近臣)을 파견하거나 혹은 많은 선비를 대궐 뜰에 불러 모아놓고 혹 글을 짓게 한다든가 혹은 경서를 강하게 하여 거기서 우수한 자 한두 명에게 과거에 곧장 응시하게 특별히 허락하되, 1년에 3, 번씩 하기를 3년 동안 하여 식년시에서 아울러 은혜와 영광을 베풀어 준다면 재주 있는 이와 학문 있는 자가 모두 모여들 것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니, 조정의 인재 선택도 반드시 정(精)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문관(文官)ㆍ음관(蔭官)을 논하지 말고 학행(學行)이 있는 자를 가려서 제독관(提督官)으로 임명하여, 8도의 큰 부(府)에 나눠 보내어 생원ㆍ진사와 학생 중 문학과 행실이 있는 자를 찾아내어 근실한가 태만한가를 고찰하여 성균관에 보고하고, 그들을 성균관에 모아서 재주를 시험보고 학문을 강론하게 하여 과연 그 중에 뛰어난 자가 있으면 상(賞)을 줍니다.매 3년 마다 중앙 관리를 각도(各道)의 부(府)ㆍ목(牧)에 보내어 많은 선비를 강(講)으로 시험보아 경서의 대의(大義)에 능히 통하는 자를 뽑아 향교의 유적(儒籍)에 넣어 교적(校籍)을 성균관 및 예조에 나눠 보내어 이름이 명단에 들어 있지 않은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면, 선비가 통솔받는 데가 있어 각자 힘써야 되겠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수몽집(守夢集)》 정엽(鄭曄)의 소(疏)
○ 속담에 말하기를, “정시(庭試)ㆍ알성시(謁聖試)에서는 맹인(盲人)도 합격을 기대할 수 있다.” 한다. 각촉(刻燭)으로 시험보여 뽑히는 자는 거의 모두 경솔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이며, 표문(表文)의 공허한 말은 더욱 문체(文體)에 해가 되며 사람들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림이 특히 더욱 심하다.임금이 시학(視學)할 때에 마땅히 학식 있는 선비를 접견하여 도(道)와 정치를 강론하여 발탁해 쓸 준비를 할 것이요, 부당히 부박(浮薄)하고 염치가 없는 풍조로 인도하지 말 것이다. 국가에 경사가 있으면 으레 별과를 보이나 대개 선비를 뽑는 뜻이 장차 인재를 얻어 나라를 다스리려는 데 있다면 어찌 경사가 있고 없는 것에 구애되랴. 《반계수록》
○ 중국인들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시(會試)의 장원은 천하의 재주요, 전시(殿試)의 장원은 천하의 복(福)이다.” 하는데, 재주와 복을 겸하여 가진 자는 적다. 중국처럼 인재가 많은 데서도 세 번 장원을 한 자는 명 나라에서 오직 상로(商輅)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근세에 오직 이이(李珥)가 생원시ㆍ회시ㆍ전시(殿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아홉 번 장원이라 한다., 이민구(李敏求)는 회시와 전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지봉유설》
○ 부자(父子)가 장원으로 급제한 자는 김흔(金訢)ㆍ김전(金銓) 형제와 아들 안로(安老)이며, 3대가 장원을 한 자는 김천령(金千齡)ㆍ김만균(金萬均)ㆍ김경원(金慶元)으로, 천령은 또 사마시에서 장원하였으니 과거 제도를 설치한 이래 없던 일이다. 경원의 아우 명원(命元)은 갑과(甲科)에 올라 정승이 되었다. 《지봉유설》 《사재척언(思齋摭言)》 합록(合錄)
○ 이석형(李石亨)이 생원시, 진사시, 문과 초시(文科初試)에서 모두 1등을 하였고, 다음 해 신유년에 또 삼장(三場)에서 연달아 1등을 하였으니, 1년에 세 번 장원을 함은 과거 제도를 설치한 이래 없던 일이므로, 바로 정언(正言) 지제교(知製敎)에 임명하고 산관(三館)에 명하여 대궐 문 밖에 연회를 베풀어 주게 하였다.일찍이 궁중 연회에서 궁녀를 시켜 ‘삼장원(三壯元) 노래’를 지어 술을 권하게 하였다. 그 후 신종호(申從濩)가 사마시ㆍ전시ㆍ중시(重試)에 모두 1등을 하였으나, 한 사람이 세 번 장원함도 그 뒤에는 이을 사람이 없다가 그 다음으로 정인지(鄭麟趾)와 정윤희(丁胤禧)가 전시와 중시에서 1등을 하였고, 이승소(李承召)ㆍ권남(權擥)ㆍ윤기(尹箕)가 초시ㆍ회시ㆍ전시의 3장에서 1등을 하였다. 《동각잡기》 《저헌비》 합록(合錄)
홍우명(洪禹命)이 생원시와 진사시의 초시ㆍ중시에서 모두 1등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과 김흔(金訢)이 사마시와 문과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신차소(申次韶)가 진사시와 문과 초시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이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1등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이 생원시와 문과에서 모두 1등을 하였으며, 강신(姜紳)이 진사시 급제에서 모두 1등을 하였다. 선조 기묘년 한준겸(韓浚謙)이 사마시의 초시, 생원시의 복시(覆試), 문과 초시에서 모두 1등을 하였다.
○ 채수(蔡壽)가 문과 장원을 하였는데, 사위 김안로(金安老)와 이자(李耔)가 다 같이 장원이었다. 어느 날 용두회(龍頭會 장원들의 모임)를 하는데, 가운데 사위 연창군(延昌君) 김감(金勘)이 역시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장원이 아니라는 것으로 거절당했는데, 감(勘)이 자기 아내를 시켜 가서 고하기를, “저도 35세에 대제학이 되었으니 이로써 참여시켜 주기를 빕니다.” 하였더니, 채수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러니 참여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드디어 불러 함께 즐기었다.
○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장원한 사람은 이석형(李石亨), 배맹후(裴孟厚), 김구(金絿)이다.
나라 풍속에 문과 장원은 중히 여기지 않아도 사마시 장원은 중히 여겨 함께 합격한 자들이 평생 존경한다. 석형과 맹후가 생원ㆍ진사시에 모두 1등을 하였으므로 김안국(金安國)이 일찍이 흠모하였더니, 시험을 보러 들어가 두 시험에 모두 장원을 하게 되었는데, 시관이 한 쪽 시험의 등급을 낮추어 제2등으로 하므로 마음으로 항상 분히 여겼다. 자기가 시관이 되었을 때 김구(金絿)가 두 시장에서 모두 1등이었는데 김안국이 극력 다투어 양쪽의 장원으로 하였다.
○ 문과 전시(殿試)에서 제3등 한 자를 담화랑(擔花郞)이라 한다. 합격자를 발표할 때 담화랑이 임금 앞에서 모자에 꽂을 꽃을 모두 받아다가 합격자에게 나누어 꽂아 준다. 《용재총화》
○ 지방 사람으로 생원ㆍ진사가 된 자들은 각각 그 고을 관청문 가까운 곳에 사마소(司馬所)를 세워서 엄연한 한 관청으로 유향소(留鄕所)를 압도하고, 그것을 빙자하고 세력을 펴서 수령들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호남과 영남이 더욱 심하였는데, 선조 계유년에 유성룡(柳成龍)이 경연에서 아뢰어 그것을 혁파하였다. 《후청쇄어》
○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부모가 없으면 증직(贈職)을 내리고, 부모가 살아 있으면 매년 쌀 20석(石)을 내려 주었는데, 전조(前朝) 때에는 우현보(禹玄寶)의 아들 홍수(洪壽)ㆍ홍부(洪富)ㆍ홍강(洪康)ㆍ홍덕(洪德)ㆍ홍명(洪命)뿐이고, 본조에서는 이예장(李禮長)ㆍ지장(智長)ㆍ함장(諴長)ㆍ효장(孝長)ㆍ서장(恕長)과 안중후(安重厚)ㆍ근후(謹厚)ㆍ관후(寬厚)ㆍ돈후(敦厚)ㆍ인후(仁厚)가 모두 과거에 올랐다. 《용재총화》 ○ 예장(禮長)은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의 손자요, 부윤 사관(士寬)의 아들이니, 그의 형 의장(義長)은 무과에 급제하였다. ○ 관후(寬厚)와 인후(仁厚)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권(李菤)ㆍ기(芑)ㆍ행(荇)ㆍ영(苓)ㆍ미(薇)가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권과 영은 무과였다. 윤순(尹㫬)ㆍ길()ㆍ서(曙)ㆍ철(㬚)ㆍ탁(晫)이 4년 내에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은 모두 현달(顯達)하지 못했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아들 윤방(尹昉)ㆍ흔(昕)ㆍ휘(暉)ㆍ훤(暄)이 모두 높이 벼슬하여 재상에 이르렀으며, 서자 간(旰)은 무과에 급제하여 당상관에 이르렀다. 《지봉유설》 ○ 기(芑)의 아버지 의무(宜茂)는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에 이르렀다. 병자년에 임금이 관원을 보내어 의무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 심연원(沈連源)ㆍ달원(達源)ㆍ봉원(逢源)ㆍ통원(通源) 및 달원의 아들 전(銓)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연원 및 전은 중시(重試)에, 봉원은 탁영시(擢英試)에 합격하였다.
○ 박형린(朴亨鱗)ㆍ홍린(洪鱗)ㆍ종린(從鱗)ㆍ붕린(鵬鱗)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황위(黃瑋)ㆍ성(珹)ㆍ진(璡)ㆍ찬(璨)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수(琇)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주D-001]홍분방 : 고려 말기에 과거에서 부정한 청탁으로 어린 사람들이 많이 합격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조롱하여 ‘홍분방’이라 하였다.
[주D-002]자가(自家)의 도리(桃李) : 당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주시관(主試官)이 되어 많은 인재를 뽑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도리(桃李)가 모두 공(公)의 문하(門下)에 있다.” 하였다.
[주D-003]유가(遊街) : 과거에 합격한 후, 3일 동안 거리에 다니며 놀기를 허락하는 것인데, 머리에는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손에는 임금이 준 일산(日傘)을 들고 음악을 울리며 노닌다.
[주D-004]서곤체(西崑體) : 송 나라 때에 양억(楊億) 등이 주창한 괴벽스런 문체(文體)이다.
[주D-005]구양수(歐陽修)가 …… 고사(故事) : 송 나라 때에 유기가 글을 괴벽하게 쓰기로 유명하므로, 구양수가 그것을 미워하여 과거의 시관이 되어서는 유기의 시권(試卷)에 빨갛게 그어서 내쳤다 한다.
[주D-006]조목으로 …… 끝까지는 : 대책문(對策文)을 짓는데는 먼저 조목으로 대답하여 쓰고, 다음에 구폐(救弊)를 말하는 대목이 있다.
[주D-007]농옥이 …… 하였더니 : 진(秦) 나라 목공(穆公)의 딸 농옥(弄玉)은 피리를 잘 부는 소사(簫史)와 배필이 되어 퉁소를 불며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주D-008]비경(飛瓊) : 선녀인 서왕모(西王母)의 시녀 허비경(許飛瓊)을 말한다.
[주D-009]양응정(梁應鼎)이 …… 두렵다 : 세종 때에 《팔준도(八駿圖)》란 시제(試題)로 문신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모두 이석형이 장원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이석형이 전(箋)을 짓는데, 첫 구절에, ‘천명작지군(天命作之君)’과 ‘지용막여마(地用莫如馬)’를 대구로 하니, 성삼문이 옆에서 보다가, “‘군(君)’ 자와 ‘마(馬)’ 자를 대(對)로 한 것은 부당하다.” 하니, 석형이 그 말을 듣고 그것을 버리고 다시 지어 시를 바쳤다. 성삼문이 이석형이 버린 첫 구절을 표절하여 글을 지어 장원하였다. 이에 이석형이 웃으며, “나의 이 무릎이 남에게 굽혀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굽히게 되었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Ⅲ 등과 총목(登科摠目)

태조 2년 계유 봄에 송개신(宋介臣) 등 33명을 뽑았다. 을과(乙科)에 3명, 병과(丙科)에 7명, 동진사에 23명, 다음은 모두 같다. ○ 지공거(知貢擧) : 설장수(偰長壽). 동지공거(同知貢擧) : 원굉(元紘)
동년(同年)에 감시(監試)에서 생원 안신(朴安信) 등을 뽑았다.
5년 병자에 김익정(金益精)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조준(趙浚). 동지공거 : 판삼사(判三司) 정도전(鄭道傳). 고시관(考試官) : 우승지(右承旨) 정탁(鄭擢). 좌산기(左散騎) : 이황(李滉). 대사성(大司成) : 함부림(咸傅霖). 판교서(判校書) : 유관(柳觀). 사헌중승(司憲中丞) : 이원(李原). 성균관 좨주(祭酒) : 장덕량(張德良). 전부(典簿) : 강사경(姜思敬)
동년에 생원 유학(幼學) 이수(李隨) 등을 뽑았다.
정종 원년 기묘에 전가식(田可植)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
동년 생원 유학 서미성(徐彌性)과 진사 의금부 진무 서진 등을 뽑았다.
태종 원년 신사에 즉위 증광시(增廣試)에서 조말생(趙末生)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영삼사(領三司) 하륜(河崙)
동년 생원 조종생(趙從生)을 뽑았다.
2년 임오에 신효(申曉)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권근(權近). 동지공거 : 이첨(李詹)
동년에 생원 민무회(閔無悔) 등을 뽑았다.
5년 을유에 유면(兪勉)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별장(別將) 조서로(趙瑞老) 등을 뽑았다.
7년 정해에 중시(重試)에서 예문관 직제(藝文館直提) 변계량(卞季良) 등을 뽑았다. 독권관(讀卷官) : 권근(權近) 등 10명
8년 무자에 어변갑(魚變甲)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이조 판서 이직(李穆). 동지공거 : 병조 판서 유량(柳亮). 고시관 : 변계량ㆍ김여지(金汝知)ㆍ장자숭(張子崇)ㆍ박안신(朴安信)ㆍ장이(張弛). 대독관(對讀官) : 이간(李簡)ㆍ이안유(李安柔). 전시(殿試) 독권관 : 황희(黃喜)ㆍ이조(李慥)
동년에 생원 별장 윤수(尹粹) 등을 뽑았다.
11년 신묘년에 권극중(權克中)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시제(試題) : 치도(治道)의 본말(本末) ○ 지공거 : 하륜(河崙). 동지공거 : 성석린(成石磷). 고시관 : 양수(梁需)ㆍ윤회탁(尹會卓)ㆍ신유의(愼柳顗)ㆍ박서생(朴瑞生). 대독관 : 진준(陳遵)ㆍ양여공(梁汝恭). 전시(殿試) 독권관(讀卷官) : 유백순(柳伯淳)ㆍ김여지(金汝知)
동년에 생원 유학 권극화(權克和) 등을 뽑았다.
14년 갑오에 정인지(鄭麟趾) 등 33명을 뽑았다. 처음으로 1등 3명, 2등 7명, 3등 23명이라 했다. ○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도리[天人相感之道]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조서강(趙瑞康)을 뽑았다.
친시 알성시(親試謁聖試)에서 권제(權踶) 등 25명을 뽑고, 정상(鄭常) 1명에게 급제를 은사(恩賜)하였다. 성균관에 행차하여 임금이 친히 시무ㆍ지인ㆍ임인(時務知人任人)을 시제(試題)로 내었다. 지인ㆍ임인(知人任人)은 사람을 알아 보는 것과 쓰는 것
16년 병신 친시(親試)에서 정지담(鄭之澹) 등 9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시제 : 충효(忠孝)
임금이 친히 중시(重試)에 임하여 김자(金赭)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는 위와 같다.
17년 정유에 식년시(式年試)를 식년 제도가 이해부터 시작되었다. 친시하여 한혜(韓惠)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권채(權採) 등을 뽑았다.
세종 원년 기해 즉위 증광시(增廣試)에서 조상치(趙尙治)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유관(柳觀)ㆍ변계량(卞季良). 고시관 : 허조(許稠)ㆍ박은(朴訔)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성이검(成以儉) 등을 뽑았다.
2년 경자 식년시에서 안숭선(安崇善)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의 대책 시제 : 무농(務農)ㆍ예양(禮讓)ㆍ성곽(城郭)ㆍ수군(水軍) ○ 명관(命官) : 우의정 이원(李原). 고시관(考試官) : 예조 판서 허조(許稠)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민원(閔瑗)을 뽑았다.
5년 계묘에 식년시에서 정집(鄭楫) 등 32명을 뽑았다. 김시석(金視石)이 전시(殿試) 전에 고향에 내려갔으므로 점수가 차지 않아 병오년 식년시에 추가하여 보게 하였다.
동년에 생원 유학 남계영(南季瑛)을 뽑았다.
8년 병오에 식년시에서 황보량(皇甫良) 등 34명을 뽑았다. 김시석(金視石)이 추가되어 붙었다.
동년에 생원 유학(幼學) 신석견(辛石堅)을 뽑았다.
9년 정미에 등극 친시(登極親試) 명 나라 선종(宣宗)이 등극(登極)한 경축겸 중시(重試)로 식년시에 당(當)하였다. 에서 남계영(南季瑛) 등 20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금ㆍ은의 방물(方物)을 면제해 주기를 청하다.[請免金銀方物] 대책 시제 : 토지 제도[制田之法]
중시 병오년 식년시를 연기하여 실시하다. 에서 정인지(鄭麟趾) 등 12명을 뽑았다. 1등 3명ㆍ2등 9명
11년 기유 식년시에서 허사문(許斯文) 등 33명을 뽑았다. 주문(主文) :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회(尹淮)
동년에 생원 유지(柳智) 등을 뽑았다.
친시 알성(親試謁聖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에서 조주(趙注) 등 3명을 뽑았다. 시제 : 본조(本朝)의 찬성(贊成) 권근(權近)이 7월 편도전[七月篇圖箋]을 바치다.
14년 임자 식년시에서 김길통(金吉通)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녹사(錄事) 정창(鄭昌)을 뽑았다.
16년 갑인 알성ㆍ친시에서 최항(崔恒) 등 25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 □
17년 을묘 식년시에서 이함녕(李咸寧)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종학(宗學)ㆍ호구패(戶口牌)ㆍ병농(兵農)
동년에 생원 유학 남지(南輊)를 뽑았다.
18년 병진에 친시 명 나라 영종의 등극 경축 겸 중시로 식년시에 당하였다. 에서 윤사균(尹士昀) 등 9명을 뽑았다.
중시(重試)에서 남수문(南秀文) 등 12명을 뽑았다. 이 시험 합격자는 국적(國籍)에 있지 않다.
20년 무오 식년시에서 하위지(河緯地) 등 33명을 뽑았다. 처음 진사시(進士試)를 설치하였다. 동진사(同進事)를 정과(丁科)로 개정 ○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왕정(王政)의 손익(損益) ○ 시관(試官) : 판중추(判中樞) 허조(許稠)
동년에 생원시에서 유학 최청강(崔淸江) 등을, 진사(進士)시에서 유학 신숙주(申叔舟) 등을 뽑았다.
21년 기미 친시에서 최경신(崔敬身) 등 10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우의정 신개(申槩)
23년 신유 식년시에서 이석형(李石亨) 등 33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신개(申槩)ㆍ대제학(大提學) 권제(權踶)
동년에 생원 사정(司正) 이석형(李石亨) 등과 진사시(進士試)에서 사정(司正) 이석형 등을 뽑았다.
24년 임술 친시에서 이교연(李皎然) 등 8명을 뽑았다.
26년 갑자 식년시에서 황효원(黃孝源)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한백륜(韓伯倫) 등을 뽑았다. 무오년에 법을 정하여 연령을 25세로 한정하여 응시하게 하였다. 계해년에 법도에 어긋나게 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진사시를 정지시키고 개혁하였다. 병인년에 생원 2백 명을 시험보아 뽑았다.
29년 정묘 식년시에서 이승소(李承召)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탁중(卓中)을 뽑았다.
추과(秋科) 중시에서 성삼문(成三問) 등 19명을 뽑았다. 고관(考官) : 좌의정 하연(河演])ㆍ이조 판서 정인지ㆍ예조 판서 허조(許稠)ㆍ도승지(都承旨) 이사철(李思哲)
친시 중시(重試) 대거(對擧) 에서 강희맹(姜希孟) 등 26명을 뽑았다.
32년 경오 식년시 명 나라 문종이 등극한 때이므로 실시했다. 에서 권남(權擥) 등 33명을 뽑았다. 임금이 낸 대책 시제 : 어진 이를 구하고 간(諫)하는 것을 따르며, 욕심을 적게 하고 정치를 부지런히 함[求賢從諫寡慾勤政] ○ 시관(試官) : 안지(安止)
동년에 생원 충순위(忠順衛) 홍숙부(洪叔阜)를 뽑았다.
문종 원년 신미 즉위 증광시(增廣試)에서 홍응(洪應) 등 40명을 뽑았다.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학문의 요령과 정치하는 방법. 시관(試官) : 영의정 하연(河演). 예조 판서 김양몽(金陽蒙). 이조 참판 이사철(李思哲)
동년에 생원 유학 손순효(孫舜孝) 등을 뽑았다.
단종 원년 계유 즉위 증광시에서 이숭원(李崇元) 등 40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유학 김상(金湘), 진사 유학 최한보(崔漢輔) 등을 뽑았다. 연령 제한 법을 폐지했다. 십운시(十韻詩)를 고시(古詩)로 개정했다.
가을 식년시에서 김수녕(金壽寧)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수성난(守成難)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김성원(金性源)과 진사 유학에 윤탁(尹濯)을 뽑았다.
2년 갑술 증광시에서 정효상(鄭孝常)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군사의 식량[兵食] ○ 시관(試官) : 신숙주(申叔舟)
세조 2년 병자 식년시에서 임원준(任元濬)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현재(賢才)ㆍ용관(冗官)ㆍ성곽(城郭) ○ 시관 : 박중손(朴仲孫)
동년에 생원 민수(閔粹)와 진사시에서 박순(朴詢)을 뽑았다.
3년 정축 친시 명 나라 영종(英宗) 복위 경축 겸 중시 대거 알성시를 치른 후 대궐로 돌아와 시권을 거두었다. 에서 강자평(姜子平) 등 13명을 뽑았다. 시관 : 신숙주(申叔舟)
중시에서 이영은(李永垠) 등 21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도적(盜賊)ㆍ육축(六畜)ㆍ군기(軍器) ○ 시관 : 영중추(領中樞) 이변(李邊)
별시에서 오응(吳凝) 등 13명을 뽑았다.
4년 무인 알성 별시에서 도하(都夏) 등 5명을 뽑았다.
5년 기묘 식년시에서 고태정(高台鼎) 등 33명을 뽑았다. 사신이 입경할 날짜가 박두하였으므로 회시(會試) 제3장에서 단지 전책(殿策)은 1도만을 보였다. ○ 시관 : 박중손(朴仲孫)
동년 생원시에서 유순(柳洵)과 진사에서 이복선(李復善)을 뽑았다.
6년 경진 춘장(春場)에서 임금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와 초시 유생에게 강(講)을 시켰다. 이맹현(李孟賢) 등 4명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최경지(崔敬止) 등 20명을 뽑았다. 무과(武科)에서 1천 8백 명을 뽑았다.
겨울 평양(平壤) 별시 임금이 친히 부벽루(浮碧樓)에 임하였다. 에서 유자한(柳自漢) 등 22명을 뽑았다. 무과(武科) 1천 8백 명을 뽑았다.
7년 신사 별시에서 하숙산 등 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우리나라 사방의 허실[我國四方虛實]
8년 임오 가을 식년과에서 유자빈(柳自濱) 등 33명을 뽑았다. 강경(講經)을 면제함. 전시 대책 시제 : 문무(文武) ○ 명관 : 신숙주
동년에 생원 배맹후(裵孟厚)와 진사 배맹후를 뽑았다.
가을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에서 강안중(姜安重) 등 9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예악(禮樂) 용인(用人) ○ 이 시험 합격자 명단은 국적(國籍)에 실리지 않았다.
10년 갑신 춘시(春試)에서 온양 온천에서 과거를 보였다. 이육(李陸) 등 13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신숙주(申叔舟)
11년 을유 식년시에서 성진(成晉) 등 33명을 뽑았다. 강경(講經)을 면제하다. ○ 판관(判官) 현득리(玄得利)가 끝자리에 앉았다가 누이 아들 유양춘(柳陽春)의 시권을 몰래 바꾸어서 합격시켰다. 양춘이 주범으로 파면되자 제명되었다.
동년 생원 이창신(李昌臣)과 진사 정지(鄭摯)를 뽑았다.
7월 알성시에서 이봉(李封) 등 3명을 뽑았다.
12년 병술 봄에 고성(高城)에서 오대산에 행차하였다. 시험보여 진지(陳祉) 등 18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순성(巡省) 명관 : 신숙주
봄 알성시에서 임금이 친히 문묘에 제사를 지내고 선비를 뽑았다. 참지(叅知) 신승선(愼承善) 등 17명을 뽑았다. 명관 : 신숙주
3월 중시에서 김극검(金克儉) 등 9명을 뽑았다. 명관 : 신숙주
5월 10일 발영시(拔英試)에서 지사(知事) 김수온(金守溫) 등 4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치세(治世)에 유능한 신하요, 난세(亂世)에 간활한 영웅[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 ○ 명관 : 신숙주
등준시(登俊試)에서 판중추(判中樞) 김수온 등 12명을 뽑았다.
14년 무자 봄 식년시에서 이인형(李仁亨) 등 33명을 뽑았다. 강경(講經)을 면제하였다. ○ 시관 : 영순군(永順君) 보(溥)ㆍ판중추(判中樞) 정창손(鄭昌孫)ㆍ신숙주ㆍ김수온ㆍ지중추(知中樞) 어효첨(魚孝瞻)ㆍ홍응(洪應)ㆍ송처관(宋處寬)ㆍ서거정(徐居正)ㆍ이석형(李石亨)ㆍ대사성 김예몽(金禮蒙)ㆍ참의(叅議) 신후갑(愼後甲)ㆍ대간 상□(尙□)ㆍ승지(承旨) 이극증(李克增)
동년에 생원 조형문(趙亨門)과 진사 김흔(金訢)을 뽑았다.
2월 중시에서 영순군 보(溥) 등 5명을 뽑았다. 임금이 전시 대책을 출제하다. ○ 명관 : 신숙주. 온천 행차시
온양(溫陽) 별시에서 유자광(柳子光) 등 4명을 뽑았다.
예종 원년 기축 가을에 즉위 경축 채수(蔡壽) 등 33명을 뽑았다. 표(表)와 대책을 시험하고, 겸하여 글을 지을 수 있는 자에게는 이를 허락하였다. 명관 : 신숙주ㆍ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
동년 생원시에서 김괴(金瑰)와 진사시에서 한언(韓堰)을 뽑았다.
성종 원년 경인에 별시에서 신준(申浚) 등 16명을 뽑았다.
2년 신묘에 봄 별시에서 김흔(金訢) 등 9명을 뽑았다.
3년 임진 봄 식년시에서 계묘년 식년시에서 사고가 있었으므로 연기 시행했다. 안양생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이승언(李承彦)과 진사시에서 유인종(柳麟種)을 뽑았다.
5년 갑오 식년시에서 최관(崔灌)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조지서(趙之瑞)와 진사시에서 신종호(申從濩)를 뽑았다.
6년 을미 친시에서 성균관에 거동하여 석채(釋菜)를 하였다. 박형문(朴衡文) 등 20명을 뽑았다.
7년 병신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윤희손(尹喜孫) 등 13명을 뽑았다.
중시에서 정회(鄭淮) 등 10명을 뽑았다.
8년 정유 봄 식년시에서 신계거(辛季琚) 등 33명을 뽑았다. 명관 : 판추(判樞) 김국광(金國光)
동년에 생원 남궁찬(南宮璨)과 진사 남세철(南世聃)을 뽑았다.
8월 친시에서 반궁(泮宮)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권건(權健) 등 4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본조(本朝)에서 중국의 궁각(弓角)을 사들이는 것을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다. ○ 명관 : 윤자운(尹子雲)
9년 무술 겨울 친시에서 권경희(權景禧) 등 5명을 뽑았다.
10년 기해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정광세(鄭光世) 등 10명을 뽑았다.
중시에서 조지서(趙之瑞) 등 5명을 뽑았다.
11년 경자 친시에서 최서(崔湑) 등 3명을 뽑았다. 석전(釋奠)을 친히 행하였다. ○ 표(表)의 시제 : 당(唐) 재상이 한유(韓愈)를 조주(潮州)에 귀양 보내는 것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다.
봄 식년시에서 신종호(申從濩)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최연손(崔連孫)과 진사시에서 이오(李鰲)를 뽑았다.
12년 신축 친시에서 윤달신(尹達莘) 등 13명을 뽑았다.
13년 임인 친시에서 진현시(進賢試) 대거(對擧). 성균관에 거동하여 석채(釋菜)를 행했다. 김기손(金驥孫) 등 11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정통(正統)
진현시(進賢試)에서 이승건(李承健) 등을 뽑았다.
14년 계묘 봄 식년시에서 이문좌(李文佐)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강혼(姜渾)과 진사 이상(李瑺)을 뽑았다.
16년 을사 별시에서 정희왕후(貞熹王后)를 태묘(太廟)에 합부(合祔)하고 6월에 알성한 후 시험을 보여 뽑았다. 송영(宋瑛) 등 16명을 뽑았다.
17년 병오 겨울 식년시에서 민이(閔頤)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일손(金馹孫)과 진사 임희재(任熙載) 등을 뽑았다.
중시에서 신종호 등 8명을 뽑았다.
18년 정미 3월 별시에서 유순정(柳順汀) 등 5명을 뽑았다.
19년 무신 4월 별시에서 명 나라 효종(孝宗) 등극 경축 이수공(李守恭) 등 4명을 뽑았다.
20년 기유에 식년시에서 김전(金詮)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김언평(金彦平)과 진사시에서 김천령(金千齡)을 뽑았다.
21년 경술 12월 별시에서 명 나라 태자의 탄생 송일(宋軼) 등 10명을 뽑았다.
22년 신해 4월 별시에서 권세형(權世衡) 등 6명을 뽑았다.
23년 임자 식년시에서 강숙돌(姜叔突)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정희량(鄭希良)과 진사 윤효빙(尹孝聘) 등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명 나라 황태자 책봉 경축 이희맹(李希孟) 등 40명을 뽑았다.
25년 갑인 별시에서 한훈(韓訓) 등 22명을 뽑았다.
연산군 원년 을묘에 즉위 별시에서 이목(李穆)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이장곤(李長坤)과 진사 조계형(曺繼衡) 등을 뽑았다.
2년 병진 식년시에서 을묘년 식년시를 연기 시행하였다. 김천령(金千齡)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극성(金克成)과 진사 김우서(金禹瑞) 등을 뽑았다.
3년 정사 9월 별시에서 성종을 태묘(太廟)에 합부(合祔)한 경사 겸 중시 대거 권홍 등 13명을 뽑았다.
9월 중시에서 윤장(尹璋) 등 10명을 뽑았다.
4년 무오 식년시에서 정인인(鄭麟仁)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세충(金世忠)과 진사 이광조(李光祖) 등을 뽑았다.
별시에서 김극성 등 6명을 뽑았다.
7년 신유 식년시에서 이부(李頫)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에 이수정(李守貞)과 진사 김안국(金安國) 등을 뽑았다.
8년 임술 별시에서 알성한 후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송세림(宋世琳) 등 14명을 뽑았다.
9년 계해 별시에서 세자 책봉(世子冊封) 경사 권복(權福) 등 8명을 뽑았다.
10년 갑자 별시에서 윤은필(尹殷弼) 등 9명을 뽑았다.
식년시에서 이자(李耔) 등 31명을 뽑았다. 합격권에 들은 이세홍(李世弘)이 전시(殿試)를 보기에 앞서 집안 화를 당하였으므로 정묘년 증광시에 추가로 붙였다.
동년에 생원 유예신(柳禮臣)과 진사 정백붕(鄭百朋)을 뽑았다.
11월 별시에서 최세절(崔世節) 등 19명을 뽑았다.
12년 병인 4월 별시에서 김안로 등 17명을 뽑았다. 칠률추천시(七律鞦韆詩) ○ 4등까지로 구분하였다.
중종 원년 병인 9월 별시에서 진식(陳植) 등 15명을 뽑았다.
2년 정묘 즉위 별시에서 김정(金淨) 등 36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유돈(柳墩)과 진사 박우(朴祐) 등을 뽑았다.
식년시에서 유옥(柳沃)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구(金絿)와 진사 김구(金絿)를 뽑았다.
중시에서 권홍(權弘) 등 6명을 뽑았다.
3년 무진 알성시에서 권성(權晟) 등 3명을 뽑았다.
4년 기사 별시에서 김정국(金正國) 등 18명을 뽑았다.
5년 경오 식년시에서 이려(李膂)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취정(金就精)과 진사 조광조(趙光祖)를 뽑았다.
6년 신미 별시에서 강태수 등 16명을 뽑았다. 명관 : 김수동(金壽童)ㆍ문형 신용개(申用漑) ○ 강경이 있었다.
8년 계유 2월 친경(親耕)하고 별시에서 한충(韓忠) 등 10명을 뽑았다. 강경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위징(魏徵)이 인정(仁政)을 행할 것을 청하다. 송(頌)의 시제 : 상제가 좋은 보필을 주다.[帝賚弼良] 대책 시제 : 주화(酒禍)
가을 식년시에서 표빙(表憑)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이약빙(李若氷)과 진사 신잠(申潛)을 뽑았다.
9년 갑술 5월 명경별시(明經別試)에서 최호(崔灝) 등 4명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박세희(朴世熹) 등 20명을 뽑았다.
10년 을해 8월 별시에서 장옥(張玉) 등 15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홍범(洪範)
11년 병자 식년시에서 김유신(金庾信)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심연원(沈連源)과 진사 조연(趙連)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심희전(沈希佺) 등 11명을 뽑았다. 중시로 식년시를 대신하였다.
중시에서 정사룡(鄭士龍) 등 3명을 뽑았다.
12년 정축 10월 별시에서 허관(許寬) 등 18명을 뽑았다.
14년 기묘 봄 식년시에서 박소(朴紹) 등 29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이원휘(李元徽)와 진사 권연(權璉)을 뽑았다.
4월 현량과에 김식(金湜) 등 28명을 천거하였다.
10월 별시에서 김필(金珌) 등 19명을 뽑았다.
15년 경진 9월 별시에서 세자를 책봉 송염(宋㻩) 등 11명을 뽑았다.
16년 신사 12월 별시에서 명 나라 세종(世宗) 등극 경축 조세영 등 18명을 뽑았다. 명관 : 좌의정 남곤(南袞)
17년 임오 식년시에서 강전(姜銓)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채무일(蔡無逸)과 진사 이거(李璖)를 뽑았다.
11월 별시에서 세자관례(世子冠禮) 경축 강숭덕(姜崇德) 등 7명을 뽑았다.
18년 계미 3월 알성시에서 신영(申瑛) 등 4명을 뽑았다.
19년 갑신 별시에서 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한 것을 경축 이효충(李效忠) 등 30명을 뽑았다.
20년 을유 식년시에서 심광언(沈光彥) 등 33명을 뽑았다 명관 : 영중추(領中樞) 정광필(鄭光弼)
동년 생원 신억령(申億齡), 진사 김개(金鎧)를 뽑았다.
21년 병술 9월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김홍윤(金弘胤) 등 13명을 뽑았다. 초시(初試)에서 3백 명
중시에서 박상(朴祥) 등 8명을 뽑았다.
23년 무자 식년시에서 정희안(鄭希顔)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박충원(朴忠元), 진사 윤심(尹沈)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김만균(金萬鈞) 등 19명을 뽑았다.
10월 여주별시(驪州別試)에서 임금이 영릉(英陵)에 가서 친히 제사지내고 청심루(淸心樓)에 가서 선비에게 시험보임. 신석간(申石澗) 등 3명을 뽑았다.
26년 신묘 식년시에서 김충렬(金忠烈)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추(李樞), 진사 이윤경(李潤慶)을 뽑았다.
27년 임진 2월 별시에서 성균관과 4학의 도기(到記) 유생에게 시험보여 뽑았다. 초시(初試)가 있었다. 정대년(鄭大年) 등 5명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정현왕후(貞顯王后)를 태묘에 합부하였다. 이현당(李賢讜) 등 8명을 뽑았다.
28년 계사 5월 별시에서 이현충(李顯忠) 등 14명을 뽑았다.
29년 갑오 식년시에서 김희성(金希聖) 등 2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채승선(蔡承先), 진사 진우(陳宇)를 뽑았다.
9월 별시에서 임금이 친히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이존인(李遵仁) 등 8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왕도론(王道論)
30년 을미 별시에서 이출(李秫) 등 11명을 뽑았다.
9월 임금이 시학(視學)한 별시에서 이을규(李乙奎) 등 7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우리나라 우백익(虞伯益)이 현인을 임용하거던 의심하지 말 것을 청하다. ○ 민전(閔荃) 이하 3명이 같은 등수로 합격하였다.
9월 송도(松都) 별시에서 임금이 친히 제릉(齊陵)에 제사지내고 개성에서 선비에게 시험을 보임 진복창(陳復昌) 등 3명을 뽑았다.
31년 병신 별시에서 중시 대거(重試對擧) 이정(李楨) 등 7명을 뽑았다.
3월 중시에서 홍춘경(洪春卿) 등 5명을 뽑았다.
8월 경회루 친시에서 각촉시(刻燭試) 허경(許坰) 등 4명을 뽑았다.
32년 정유 식년시에서 윤현(尹鉉) 등 27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송찬(宋贊), 진사 최계훈(崔繼勳)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명 나라 황태자 탄생 심통원(沈通源) 등 8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좌의정 김안로
33년 무술년 별시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함. 정유길(鄭惟吉) 등 8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목 : 본조 예조에서 우리나라 명신 언행록 편찬을 청하다. ○ 즉일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9월 별시에서 탁영시(擢英試)로 대거(對擧)함. 이만영(李萬榮) 등 15명을 뽑았다.
탁영시(擢英試)에서 나세찬(羅世纘) 등 12명을 뽑았다.
34년 기해 별시에서 성몽설(成夢說) 등 12명을 뽑았다.
11월 임금이 친히 광화문(光化門)에 나와 앉아서 별시 김주(金澍) 등 6명을 뽑았다.
35년 경자 식년시에서 김윤정(金胤鼎)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양응정(梁應鼎), 진사 김범(金範)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윤희성(尹希聖) 등 19명을 뽑았다.
36년 신축년 성균관에 거동한 별시에서 유혼(柳渾) 등 5명을 뽑았다.
37년 임인 정시(庭試)에서 도기유생(到記儒生)에게 보임 이건(李楗) 등 4명을 뽑았다.
38년 계묘 9월 식년시에서 노수신(盧守愼)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광전(李光前), 진사 김균(金鈞)을 뽑았다.
39년 갑진 9월 별시에서 권용(權容) 등 23명을 뽑았다.
명종 원년 병오 즉위 증광시에서 최응룡(崔應龍)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박민헌(朴民獻), 진사 김경운(金慶雲)을 뽑았다.
10월 식년시에서 심수경(沈守慶)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비(尹棐), 진사 김홍도(金弘度)를 뽑았다.
10월 중시에서 유경심(柳景深) 등 10명을 뽑았다.
2년 정미 윤9월(閏九月) 알성시에서 이수철(李壽鐵) 등 6명을 뽑았다. 즉일로 방을 발표하였다.
3년 무신 중종을 태묘에 합부(合祔)하였다. 별시에서 김홍도 등 22명을 뽑았다.
4년 기유 민시중(閔時中)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홍부(洪溥), 진사 이형(李泂)을 뽑았다.
6년 신해 별시에서 문묘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김충(金沖)등 5명을 뽑았다.
7년 임자 식년시에서 황서(黃瑞) 등 3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정엄(鄭淹), 진사 김우굉(金宇宏)을 뽑았다.
8년 계축 3월 별시에서 친경(親耕) 김경원(金慶元) 등 39명을 뽑았다. 특명으로 차중(次中) 이상은 모두 급제를 내려 주게 하였는데, 사헌부에서 아뢰어 고집하였으나 허락지 않았다. 명관 : 좌의정 상진(尙震) ○ 전시의 대책 시제 : 치효(治效)
9월 명정전(明政殿) 친시에서 경서로써 선비에게 시험을 보였다. 박순 등 4명을 뽑았다.
10년 을묘 식년시에서 한복(韓輹)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두수(尹斗壽), 진사 서엄(徐崦)을 뽑았다.
11년 병진 2월 중시에서 양응정(梁應鼎) 등 9명을 뽑았다.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이민각(李民覺) 등 12명을 뽑았다.
7월 알성시에서 정윤희(丁胤禧) 등 6명을 뽑았다.
13년 무오 8월 별시에서 세자 책봉(世子冊封) 오운기 등 11명을 뽑았다. 대제학 정사룡(鄭士龍)
10월 식년시에서 고경명(高敬命) 등 35명을 뽑았다. 명관 : 우의정 이준경(李浚慶)
동년 생원 주박(周博), 진사 이중립(李中立)을 뽑았다.
14년 기미 9월 경회루 정시(庭試)에서 유영길(柳永吉) 등 12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순창(順昌)에서 승리를 얻음을 송축하다.
15년 경신 9월 별시에서 세자가 관례(冠禮)를 행하고 입학하였다. 민덕봉(閔德鳳) 등 18명을 뽑았다. 초시(初試)에 6백명 ○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목 : 용인(用人)
16년 신유 식년시에서 최립(崔岦) 등 3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조정기(趙廷機), 진사 홍성민(洪聖民)을 뽑았다.
17년 계해 3월 알성시에 이정빈(李廷賓) 등 4명을 뽑았다. 즉일로 방을 발표하였다.
19년 갑자 식년시에서 이이(李珥)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이(李珥), 진사 조원(趙瑗)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종계(宗系)가 변무(辨誣)되었다. 이광헌(李光軒) 등 12명을 뽑았다.
20년 을축 3월 알성시에서 김효원(金孝元) 등 4명을 뽑았다. 표제 : 주(周) 나라 태보(太保)가 여오표(旅獒表)를 받지 말 것을 청하다.
21년 병인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이충원(李忠元) 등 17명을 뽑았다.
윤10월 중시에서 정윤희(丁胤禧) 등 6명을 뽑았다.
선조 정묘 11월 식년시에서 권수(權燧)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에 조휘(趙徽), 진사에 강신(姜紳)을 뽑았다. 또는 진(縉)이라고도 한다.
원년 무진 즉위 증광시에서 정희적(鄭熙績)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에 허봉(許篈), 진사에 하락(河洛)을 뽑았다.
2년 9월 알성시에서 노진(盧稹)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목 : 주(周) 나라 군신(群臣)들의 두 노인을 얻은 것을 축하한다. ○ 명관 : 우의정 홍섬(洪暹). 대제학 박순(朴淳)
10월 별시에서 명종을 태묘에 합부함. 윤담휴(尹覃休) 등 1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宋)의 조개(趙槪)가 《간림(諫林)》을 바치다.
3년 경오 식년시에서 김대명(金大鳴)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윤정(尹渟), 진사시에서 정안(鄭安)을 뽑았다.
5년 임신 3월 춘당대(春塘臺) 친시에서 심충겸(沈忠謙) 등 15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宋)의 강주(江州) 지사(知使) 주술(周述)이 백록동(白鹿洞) 서원에 구경(九經)을 내려주기를 청하다. ○ 이튿날 합격자 발표를 하였다.
3월 친경(親耕) 별시에서 유근(柳根) 등 16명을 뽑았다.
12월 별시에서 신종(神宗)이 등극함. 임영로(壬榮老) 등 2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인(仁)ㆍ명(明)ㆍ무(武)의 도를 다하기를 청하다. ○ 시관 : 유희춘(柳希春)
6년 계유 식년시에서 주덕원(朱德元)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이산악(李山岳), 진사시에서 김굉(金鋐)을 뽑았다.
9월 알성시에서 이발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사호(四皓)가 태자를 도와 보호하라는 명을 감사하다
7년 갑술 별시에서 종계(宗系)가 변무(辨誣)됨 정상(鄭詳)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고려에서 송(宋)에 여진(女眞)에 통하지 말기를 청하다.
9년 병자 식년시에서 윤기(尹箕) 기(祈) 자로 고침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국(李), 진사 윤형(尹泂)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정곤수(鄭昆壽) 등 1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唐)의 사문박사(四門博士) 한유(韓愈)가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를 지어 올리다.
중시(重試)에서 조광익(曹光益)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唐) 나라 두보(杜甫)가 묵제(墨制)로 휴가주어 집에 가보게 한 것을 감사하다.
10년 정축 알성시에서 김여물(金汝岉)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제목 : 송(宋)의 팽사영(彭思永)이 벼슬의 계자(階資)를 내지(內旨)로 올려주지 말 것을 청하다.
9월 별시에서 인순왕후를 종묘에 합부하였다. 강신(姜紳) 등 17명을 뽑았다.
12년 기묘 식년시에 홍인상 이름을 이(履)로 고쳤다.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여섯 가지 폐단
동년 생원 한준겸(韓浚謙), 진사 이호민(李好閔)을 뽑았다.
13년 경진 2월 알성시에서 황치성(黃致誠) 등 12명을 뽑았다. 송(宋) 나라 정이(程頤) 등이 수정학제(修正學制)를 바치다.
3월 별시에서 종묘에 합부함 황혁(黃赫) 등 27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재용(財用)과 사람을 임용하다.
15년 임오 식년시에서 장운익(張雲翼)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조익(趙翊), 진사시에서 우홍익(禹弘翼)을 뽑았다.
16년 계미 4월 알성시에서 차운로(車雲輅) 등 12명을 뽑았다.
8월 별시에서 명 나라 황태자 탄생 심우정(沈友正)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군사ㆍ식량[兵食]
12월 정시(廷試)에서 이홍로(李弘老)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제치보방(制治保邦)
17년 갑신 서총대(瑞葱臺) 친시에서 원점(圓點)이 규정에 달한 유생에게 시험을 보임. 그날 합격 발표 박호(朴箎) 등 4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목 : 송(宋)의 장제현(張齊賢)이 10가지 대책을 조목조목 진술하여 바치다. ○ 명관 : 영의정 박순(朴淳)
8월 별시에서 민인백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이 마음을 미루어 이런 정치를 행하소서[推是心行是政]
18년 을유 식년시에서 고한운(高翰雲)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상의(李尙毅), 진사 정협(鄭恊)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 최철견(崔鐵堅) 등 12명을 뽑았다. 초시(初試)에 3백 명. 경서 강독이 있었음. ○ 주문(主文) 이산해(李山海)
19년 병술 9월 알성시에 여계선 등 9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이필(李泌)이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다.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남근(南瑾) 등 14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육경(六經)
중시에서 이장영(李長榮) 등 6명을 뽑았다.
21년 무자 식년시에서 김시헌(金時獻)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영현(尹英賢), 진사 김의원(金義元)을 뽑았다.
5월 알성시에서 황신 등 11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漢) 나라 정중(鄭衆)이 군사마(軍司馬)에 임명을 사양하다.
22년 기축 증광시에서 명 나라 《회전(會典)》에 종계(宗系)를 고쳐 반포하였다. 유몽인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황근중(黃謹中), 진사 이성길(李成吉)을 뽑았다.
23년 경인 증광시에서 정여립(鄭汝立)을 토벌한 후 존호(尊號)를 올림. 남이공(南以恭) 등 40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宋) 나라 조보(趙普)가 태원(太原)을 먼저 치지 말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김광엽(金光燁), 진사 윤선(尹暄)을 뽑았다.
24년 신묘 식년시에서 민유부(閔有孚)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성순(成恂), 진사 민여임(閔汝任)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이유함(李惟緘) 등 15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홍범(洪範)
25년 임진 7월 용만(龍灣) 별시에서 정종명(鄭宗溟) 증 4명을 뽑았다.
26년 계사 12월 전주(全州) 별시에서 세자가 분조(分朝)하였다. 윤길(尹) 등 9명을 뽑았다.
27년 갑오 2월 정시(庭試)에서 박동열(朴東說) 등 13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명(明) 나라 한취선(韓取善)이 식량을 운반하여 조선을 구하기를 청하다.
10월 정시(庭試)에서 이때 임금이 정동(貞洞)에 머무름. 유담(柳潭) 등 10명을 뽑았다. 하(夏)의 군신(群臣)이 임금이 나쁜 옷을 입고 거친 식사함을 치하하다.
28년 을미 11월 별시에서 중전(中殿)이 오랜 동안 해주(海州)에 머물렀으므로 승지 기자헌(奇自獻)을 보내어 선비에게 시험보임. 조정견 등 3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宋) 나라 장준(張浚)이 임금으로 하여금 친히 건강(建康)에 나와 머물러서 중원(中原)의 인심을 움직이기를 청하다.
12월 별시에서 성이민(成以敏) 등 15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宋) 나라 범진(范鎭)이 중서(中書)ㆍ추밀(樞密)ㆍ삼사(三司)로 민정(民政)ㆍ군정(軍政)ㆍ재정(財政)을 아울러 맡게 하여 국가 비용을 조절하기를 청하다.
29년 병신 11월 정시(庭試)에서 안종록(安宗祿) 등 19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이필(李泌)이 한고(韓皐)에 명하여 돌아가 아버지를 보게 하기를 청하다.
30년 정유 3월 별시에서 중시 대거 조수인(趙守寅) 등 19명을 뽑았다. 초시에 3백 명 응시, 두 곳으로 나눠 봄.
동월 모화관(慕華館) 정시(庭試)에서 북방 군사에게 친시를 보여 대거(對擧)함. 이호의(李好義) 등 9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唐) 나라 동천 절도사(東川節度使) 고숭문(高崇文)이, 조서(詔書)를 주어 촉(蜀)을 정벌하는데 모든 군대를 감사하다.
동월 알성시에서 윤계선 등 8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 나라 반초(班超)가 서울로 돌아오게 한 것을 사례하다.
32년 기해 3월 정시에서 참두(斬頭) 대거(對擧) 이재영(李再榮) 등 10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이필(李泌)이 봉래원(蓬萊院)을 지으라는 명령에 감사하다.
7월 별시에서 세자가 입학하고 맏손자가 태어났다. 조탁(曺倬) 등 16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인재(人才)○ 명관 : 영중추 이산해(李山海)
33년 경사 4월 별시에서 이시정(李時楨) 등 16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백성을 두려워하다.[畏民]
34년 신축 4월 식년시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갑오년 정유년의 두 식년시와 경자년 식년시가 이때 비로소 추후하여 시행되었는데 경서와 기타 책이 탕진되어 사서(四書)는 모두 강하게 하고 3경은 1경만을 자원하게 하였다. 이사경(李士慶)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김지선(金止善), 진사 조희일(趙希逸)을 뽑았다.
35년 임인 9월 알성시에서 문묘(文廟)가 중건(重建)된 후이므로 작헌례(酌獻禮)로 행하였다. 안욱(安旭) 등 5명을 뽑았다. 한 나라 문제(文帝)가 흉노와 화친(和親)한 것을 논하라.
10월 별시에서 명 나라 황태자 책봉 김수현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9경 8조(九經八條) ○ 대제학 이호민(李好閔)
36년 계묘 정월 정시에서 주사(舟師) 별시로 대거(對擧) 이명준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제사(祭祀)
10월 식년시에서 이언영(李彦英)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안위치란(安危治亂)
동년 생원 유업(柳), 진사 이구(李久)를 뽑았다.
38년 을사 4월 존호를 올린 경사로 증광시에서 이식립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최명길(崔鳴吉), 진사 고용후(高用厚)를 뽑았다.
6월 정시에서 무사(武士)로 북변을 방위시키고 정시(庭試)로 대거(對擧) 전유형(全有亨)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태종이 위징(魏徵)의 쓰러진 비(碑)를 다시 세우도록 한 조칙(詔勅) ○ 조칙을 시제(試題)로 내는 것이 나라 법전에 실려 있는 바이나, 오랫동안 폐하여 쓰지 않았다가 이때 전교로 말미암아 비로소 썼다.
12월 별시에 임금이 건강이 3년 동안 편치 못하다가 이때 비로소 회복되었으므로 다시 경연을 열었다. 이은로 등 12명을 뽑았다.
39년 병오 증광시에서 즉위 40년 양응락(梁應洛) 등 3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사호(李士浩), 진사 오환(吳煥)을 뽑았다.
식년시에서 임기(林)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유달(李惟達), 진사 남이웅(南以雄)을 뽑았다.
광해군(光海君) 무신년 중시에서 병오년 중시를 왕실에 일이 많아서 이때 비로소 실시하였다. 이이첨(李爾瞻)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곽자의(郭子儀)가 분양왕(汾陽王)에 봉함을 감사하다.
별시에서 중시 대거 정호서(丁好恕) 등 14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술ㆍ사치[酒ㆍ侈]
원년 기유 10월 즉위 증광시에서 홍천경(洪千璟)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끝을 잘 맺기 위해 시초부터 신중을 기하다.[愼終于始] ○ 대제학 : 이정귀(李廷龜)
동년 생원 김시주(金是柱), 진사 이민구(李敏求)를 뽑았다.
2년 경술 5월 식년시에서 기유년 식년시가 연기되어 시행됨. 권득기(權得己)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시제 : 화폐[錢幣]
동년 생원 최충운(崔冲雲), 진사 유진(柳袗)을 뽑았다.
9월 알성시에서 오현(五賢)을 문묘에 배향(配享)한 후 석채(釋菜)를 행하다. 김개(金闓)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宋) 나라 한림학사 구양수(歐陽修)가 태평(太平)이란 글자가 나타난 감나무를 발표하지 말기를 청하다.
12월 별시에서 선조를 종묘에 합부한 것. 세자의 책봉과 입학, 그리고 관례(冠禮)를 행한 것의 4가지 경사를 별시로 함. 신광엽(申光葉) 등 2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도학을 숭상할 것.[崇道學] ○ 명관(命官) : 좌의정 이항복(李恒福)ㆍ대제학 이정귀(李廷龜). 시관(試官) : 박승종(朴承宗). 대독관(對讀官) : 조탁(曺倬)ㆍ이이첨(李爾瞻)ㆍ홍서봉(洪瑞鳳)ㆍ허균(許筠)ㆍ이덕형(李德泂). ○ 변헌(卞獻)이 삭과(削科)되었다. ○ 6백 명이 초시에 응시하였다.
3년 신해 별시에서 세자책봉(世子冊封) 정문익(鄭文翼) 등 1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시조(時措) ○ 명관 : 우의정 심희수(沈憙壽)
4년 임자 식년시에 홍명형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풍속을 숭상하는 것 ○ 문형(文衡) 이정귀(李廷龜)
동년 생원 남호학(南好學), 진사 이대엽(李大燁)을 뽑았다.
9월 증광시에서 창덕궁이 중건되어 전년에 이곳으로 이어(移御)한 것과 동궁(東宮)의 가례(嘉禮)의 두 경사를 합쳤다. 이민구(李敏求)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사기(史記)
동년 생원 정두원(鄭斗源), 진사 정택뢰(鄭澤雷)를 뽑았다.
5년 계축 4월 알성시에서 존호를 올린 후 친히 종묘 남별전(南別殿)에 제사지내고 문묘에서 작헌례를 행하였으며, 선비에게 각촉시(刻燭詩)를 보이다. 신해익(愼海翊) 등 6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전연(澶淵)에서 오랑캐를 물리친 송(頌) ○ 그날 합격자 발표
10월 증광시에서 존호를 올리고 세자가 면류관과 의복을 받음. 임성지(任性之) 등 42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관제(官制) ○ 시관 : 유근(柳根)
동년 생원 이제(李穧), 진사 나만갑(羅萬甲)을 뽑았다.
6년 갑인 11월 전주(全州) 별시에서 경기전(慶基殿)이 중건되었으므로 본도 유생에게 시험을 보여 시권을 봉하여 가지고 와서 등급을 정하였다. 양곡(梁穀) 등 4명을 뽑았다.
7년 을묘 식년시에서 이상빈(李尙馪)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심지청(沈之淸), 진사 기수격(奇秀格)을 뽑았다.
8년 병진 증광시에서 중국 조정에서 비(妃)를 추숭(追崇)하는 고명(誥命)을 내려 주었다. 김세렴(金世濂) 등 41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적전(籍田)
동년 생원 우방(禹舫), 진사 임기지(任器之)를 뽑았다.
8월 알성시에서 공성후(恭聖后)를 종묘에 합부한 후 기준격(奇俊格) 등 1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군신(群臣)이 유유화(楡柳火)를 내려준 것을 감사하다. ○ 주문(主文) : 이이첨(李爾瞻)
10월 별시에서 중시 대거 공성후(恭聖后)를 종묘에 합부한 경사. 정흔(鄭昕) 등 27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공(功)을 포상하다.[褒功]
중시에서 이대엽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교위(校尉) 습륭(習隆)이 제갈량의 묘(廟)를 면양(沔陽)에 세우기를 청하다.
9년 정사 9월 알성시에서 공성비(恭聖妃)의 관복(冠服)이 추후에 중국으로부터 주어졌으므로 종묘에 고하고 문묘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허직(許稷)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예조에서 평안도 사민(士民)의 원함에 따라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 비를 건립하여 인현(仁賢)의 교화를 표창하여 주기를 청하다.
10년 무오 7월 정시에서 중국에서 건주(建州) 오랑캐를 징벌하기 위해 군사를 징발하고 무사(武士)를 널리 뽑으므로 대거(對擧)함. 이직(李稙)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중서령(中書令) 이성(李晟)이 임금이 근신(近臣)을 시켜 자기를 부축하여 붙들어 말[馬]에 올려 주게 함을 감사하다.
10월 증광시에서 공성비(恭聖妃)의 면류관과 의복이 도착하고, 또 종계변무(宗系辨誣)된 경축 김기종(金起宗) 등 40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녹(祿)을 제정하는 법식
동년에 생원 이영구(李榮久), 진사 조석형(趙碩亨)을 뽑았다. 조석형은 조익형(趙益亨)으로도 되어 있다.
10월 식년시 칠대문(七大文)의 비방이 있었으므로 전시를 베풀지 않았다. 계해 반정 후에 재시험을 보여 12명이 합격되었는데 한 사람을 추가하여 정묘 식년시에 부쳤다.
동년 생원 이기숙(李基肅)과 진사 유명립(柳命立)을 뽑았다.
11년 기미 9월 수원(水原)과 개성부(開城府) 별시 영숭전(永崇殿)의 태조 영정(影幀)과 봉선전(奉先殿)의 세조 영정을 난후에 잃어버렸으므로 당시 그려 올려 왔는데 국가에 일이 많아서 수원과 개성에 두어 모시게 하였다가 금년 9월 비로소 중사(中使)와 승지와 예조 참의를 보내어 받들어 와서 함께 봉자전(奉慈殿)에 모셨다. 지난 8월 26일 두 곳에서 과거를 베풀고 한림을 나눠 책문의 제목을 가지고 가게 하고 거둔 시권을 봉하여 가지고 왔다. 에서 유성증(兪省曾) 등 4명을 뽑았다.
10월 알성시에서 홍명구(洪命耈) 등 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평안도에서 오랑캐가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해 돌아온 군사들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오랑캐의 소굴을 즉시 공격하기를 청하다.
12월 정시에서 함경도 무과(武科) 대거(對擧) 이경의(李景義) 등 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육지(陸贄)가 고공 낭중(考功郞中)을 사양하다.
12년 경신 7월 정시에서 방수병(防戍兵)이 적어서 광취무과(廣取武科)를 여는데 대거함. 김우진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군신(群臣)이 갑옷을 쌓은 것이 산과 같음을 칭하하다.
13년 신유 9월 정시 서변(西邊)의 방위가 급하여 전년의 만과(萬科)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에 떨어진 자 또 전시를 행하기 전에 죽은 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뽑았다. 정시(庭試) 대거(對擧) 에서 박안제(朴安悌) 등 1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충렬록(忠烈錄)》을 바치다. ○ 명관(命官) :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대제학 이이첨(李爾瞻)
10월 알성시 요계(遼薊)의 유언(流言)에 명 나라 조정에서 변무(辨誣)되고 또 은사물(恩賜物)이 있다고 하므로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고 종묘에 고한 다음 알성하였다. 에서 선세휘(宣世徽)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강굉(姜肱)이 그 형(形)을 그리라는 조칙을 사양하다.
12월 별시 전년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을 행하고 7월에 육백관시(六百館試)를 베풀었는데 국가에 일이 많았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전시를 행하였다. 경인년 증광시의 예(例)에 따라 40명을 뽑았는데 합격 발표를 연기하였다가 계해년 반정 후에 다시 시험보아 단지 11명을 뽑았다. 에 최유연 등 40명을 뽑았다.
인조 원년 계해 5월 알성시에서 홍보 등 10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끝을 잘 맺기위해 시초부터 신중을 기하라.
5월 정시 명 나라 희종(憙宗)의 등극을 축하하는 과거가 지금까지 연기되었다가 비로소 행함. 에서 신달도(申達道) 등 4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시제 : 기강(紀綱)
8월 개시(改試)와 전시(殿試) 무오년의 식년시에 칠대문(七大文)이 비방이 있었고 신유년 별시에 오류(五柳)의 말이 있었으므로 방을 발표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두 시험을 합쳐 한 시험으로 하고 다시 시험을 보아 회시(會試)라 하였다. 에서 채유휴 등 24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이기숙(李基肅)과 진사 유명립(柳命立)을 뽑았다.
2년 갑자 2월 공주(公州) 정시 이괄(李适)의 변(變)에서 승리를 얻자, 호남ㆍ호서와 경기도 유생에게 시험보여 뽑음. 에서 홍습(洪霫) 뒤에 익한(翼漢)으로 고침.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이강(李綱)이 장방창(張邦昌)의 참역(僭逆)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다.
4월 별시에서 역적 이괄을 토벌하고 환도하였다. 김주우(金柱宇) 등 11명을 뽑았다.
9월 즉위 증광시에서 김육(金堉) 등 38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하늘은 말하지 않는 성인[天者不言之聖人]
동년 생원 윤형지(尹衡志), 진사 조석형(趙錫馨)을 뽑았다.
10월 알성시에서 이경증(李景曾) 등 4명을 뽑았다.
11월 식년시에서 조빈(趙贇)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신면(申冕), 진사 조수익(趙壽益) 등을 뽑았다.
3년 을축 8월 별시 세자를 책봉하고 호량보(胡良輔)가 와서 조칙을 반포하였다. 에서 김종일(金宗一) 등 12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뉘우침[悔]
4년 병인 7월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세자가 입학하였다. 심연(沈演) 등 17명을 뽑았다. 사헌부에서 파방(罷榜)하기를 아뢰었다. 위의 과제(科制) 조에 상세함.
8월 정시(庭試)에서 별시를 파방한 후 과거 응시자가 서울에 많이 모였으므로 별도로 이 시험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였다. 조경(趙絅) 등 4명을 뽑았다. 잠의 시제 : 수성(守成)
5년 정묘 3월 강도(江都) 정시 임금이 강도(江都)에서 적병을 피하였으므로 강도와 교동(喬桐)ㆍ통진(通津)의 3읍에서 시험을 보임. 에서 허색(許穡) 등 4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간우(干羽)춤을 양계에서 춤[舞干羽于兩堦]
전주(全州) 정시 동궁(東宮)이 분조(分朝)하였으므로 호서와 호남의 선비에게 시험을 보임. 에서 김상빈(金尙賓) 등 4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걱정이 성(聖)을 열어줌[殷憂啓聖]
7월 정시 강도(江都)에 호종(扈從)하였던 무사(武士)에게 환도 후에 무과를 뽑는데 대거(對擧)하고 세자 입학을 겸함. 에서 임득열(林得悅) 등 7명을 뽑았다. 논(論頌의 시제 : 산삭한 후 시(詩)가 없다[刪後無詩]
9월 식년시에서 김호(金灝)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전(戰)ㆍ수(守)ㆍ화(和)
동년 생원 서원리(徐元履)와 진사 유념(柳淰)을 뽑았다.
6년 무진 4월 별시 세자가 가례를 행하였다. 에서 조석윤(趙錫胤) 등 11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천심에 순응하다.[順天心] 주문(主文) : 장유(張維)
9월 별시에서 명 나라 의종(毅宗)이 등극 이방(李㬅) 등 1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수신(修身)ㆍ안민(安民)ㆍ제적(制敵) 대제학 : 장유. 초시에 6백 명이 응시하였다.
7년 기사년 별시에서 황태자의 탄생 정두경(鄭斗卿) 등 25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천도(天道)를 본받다.[體天道]
12월 정시 임금이 김포(金浦) 원릉(園陵)에서 성묘한 후 에서 이상질(李尙質) 등 5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치우(蚩尤)를 토평(討平)하다.
8년 경오 3월 식년시에서 정시망(鄭時望)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안민(安民)
동년 생원시에서 이시해(李時楷)를, 진사시에서 홍명일(洪命一)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황태자를 책봉하다. 정뇌경(鄭雷卿)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복수하여 수치를 씻다. ○ 명관 : 좌의정 김류(金瑬)ㆍ대제학 : 정경세(鄭經世)
9년 신미 9월 별시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에서 민우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성지(城池)
10년 임신 3월 알성시에서 김시번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禹)의 정명(鼎銘) ○ 대제학 : 장유
11년 계유 4월 증광시에서 원종(元宗)을 추송함. 이조(李稠)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육경의 대의[六經宗旨]
동년 생원시에서 박종부(朴宗阜)를, 진사에서 김진표(金震標)를 뽑았다.
11월 식년시에서 목행선(睦行善) 등 33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영의정 윤방(尹昉)
동년 생원 송시열(宋時烈)과 진사 이명식(李命式)을 뽑았다.
12년 갑술 3월 별시에서 원종 추숭에 대한 명 나라의 고명(誥命)이 반포됨. 오달제(吳達濟) 등 12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君臣相與] ○ 초시에 6백명 응시. 서울과 지방으로 나눴고 강경(講經)이 있었다.
13년 을해 9월 알성시에서 이만영 등 8명을 뽑았다. 잠 시제 :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게 되기를 생각하다.
10월 증광시 성종(成宗)을 세실(世室)에 모시고, 인목대비(仁穆大妃)와 원종(元宗)을 종묘에 합부하며, 세자를 봉하다. 에서 이이송(李爾松) 등 43명을 뽑았다. 시관 : 김신국(金藎國) ○ 관시(館試)는 소(疏)에 대한 유생(儒生)들의 분쟁으로 응시하지 않으므로 취소했다.
동년 생원 김익겸(金益兼)과 진사 홍중보(洪重普)를 뽑았다.
14년 병자 11월 별시에서 맏손자 탄생 겸 중시 대거(重試對擧) 신유(申濡) 등 11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시무(時務)를 아는 것 ○ 대제학 : 이식(李植) ○ 초시에 5백명이 응시하였으나 호란(胡亂)으로 합격 발표를 못하다가 정축년 8월에 비로소 발표하다.
12월 중시에서 신희계(申喜季) 등 6명을 뽑았다.
15년 정축 8월 정시에서 환도 후 종묘에 친히 제사지내고 장차 알성하고 과거를 보이려 하였는데 마침 임금의 건강이 좋지 못하여 정시로 변경하여 보였다.
조한영(曺漢英) 등 1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문제(文帝)가 현량(賢良)ㆍ방정(方正)ㆍ직언(直言)ㆍ극간(極諫)할 선비를 구하다.
동월 정시 남한산성에 호종한 사람에게 무과를 특설하고 대거(對擧)하다. 에서 정지화(鄭知和) 등 10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위태로운 자가 그 지위를 안전하게 하다.
16년 무인 3월 정시에서 장차 알성하여 과거를 보이려 하였는데 마침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정시로 변경하였다. 황위(黃暐) 등 15명을 뽑았다.
17년 기묘 3월 알성시에서 권집(權諿)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에서 금ㆍ은의 그릇과 완구를 부셔, 군기(軍器)에 보태도록 한 명령을 치하하다.
9월 별시에서 계비(繼妃)가 가례를 행하였다. 이이존(李以存) 등 16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장수와 정승[將相] ○ 대제학 : 이경석(李景奭)
10월 식년시에서 김운장(金雲長) 등 33명을 뽑았다. 임금이 이경전(李慶全)에게 시험을 보였다.
동년 생원 권지(權趾)와 진사 박세견(朴世堅)을 뽑았다.
19년 신사 9월 정시에서 식년시의 초시에 거자들이 모두 모였으므로 정시를 별도로 보여 위로하고 기쁘게 해 주었다. 홍석기(洪錫箕)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악숙(樂叔)이 화성군(華城君)으로 봉해 줌을 감사하다.
20년 임오 3월 임한백(任翰伯)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조현양(趙顯陽)과 진사 이면하(李冕夏)를 뽑았다.
9월 정시에서 경연관이 아뢰어 전시를 파하고 제술(製述)로 등급을 매겨 급제시키려 하였는데 비변사의 아룀으로 이내 과거를 보였다. 심찬(沈譔) 등 5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숨은 것보다 더 들어남이 없음[莫見乎隱]
21년 계미 2월 평안도(平安道) 별시 관서 지방이 전쟁의 피해를 혹심히 입었으므로 이조 낭관 심대부(沈大孚)를 보내어 시험보여 시권을 가지고 올라와 등급을 정하였다. 에서 김여욱(金汝旭) 등 4명을 뽑았다. 대제학 이식(李植)
22년 갑신 9월 정시에서 역적을 토벌하고, 별시를 보였는데 거자들이 모두 모여들므로 전시를 보기 전에 정시를 특별히 보여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었다. 이경억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시중(侍中) 김일제(金日磾)가 타후(柁侯)에 봉함을 사양하다. ○ 명관(命官) : 영의정 김류(金瑬)
9월 별시 역적 심기원(沈器遠)을 토벌하다. 에서 최후현(崔後賢) 뒤에 ‘현’ 자를 윤(胤) 자로 고쳤다. 등 19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변통(變通). 초시에 6백 명이 응시하다.
23년 을유 11월 별시에서 세자가 책봉되고 입학하였다. 권오(權悟) 등 15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관작(官爵) ○ 명관(命官) 우의정 : 이경석(李景奭)
24년 병술 식년시에서 4월 정승명(鄭承明)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책(尹策)과 진사 김수항(金壽恒)을 뽑았다.
10월 정시 중시 대거(對擧) 별시의 초시 합격자를 발표한 후에 두 시장 중 한 고시장의 시제가 시휘(時諱)를 범하였으므로 시관을 제명하고 그 방을 파하며 별도로 정시를 보였다. 세자가 가례를 행한 경사를 합하여 정시를 베풀었다. 에서 오격(吳翮)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백성은 물과 같다.[民猶水]
26년 무자 8월 정시에서 이정기(李廷蘷)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의 공우(貢禹)가 시중(侍中) 이하 관리는 사사로이 매매하여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다.
11월 식년시에서 조정(曹烶)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한오상(韓五相)과 진사 이단상(李端相)을 뽑았다.
27년 기축 3월 별시에서 세손(世孫)이 책봉되다. 오두인(吳斗寅) 등 13명을 뽑았다. 초시 3백 명
4월 정시 거자(擧子)가 서울에 많이 모여 들었으므로 특별히 정시를 열어 위로하여 기쁘게 하였다. 에서 민정중(閔鼎重) 등 7명을 뽑았다.
효종 원년 경인 12월 즉위 증광시에서 이운근(李雲根)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민시중(閔蓍重)과 진사 한성열(韓聖悅)을 뽑았다.
2년 신묘 3월 정시에서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었다. 이창현(李昌炫)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옛날의 정치는 사람을 사랑함을 큰 것으로 삼았다.
9월 식년시에서 이익한(李翊漢)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원록(李元祿)과 진사 이익상(李翊相)을 뽑았다.
동월 알성시에서 김수항(金壽恒) 등 7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남훈금(南薰琴)
11월 별시 인조를 세실(世室)에 합부하고 휘호(徽號)를 올렸으며, 대비에게 존호를 드렸고, 중전(中殿)의 책례(冊禮)ㆍ세자의 책례(冊禮)와 관례(冠禮) 등 7가지 경사를 합치다. 초시에 6백 명, 고시장을 세 곳으로 나눴다. 에서 정시대(鄭始大) 등 17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8폐(弊)
3년 임진 10월 증광시에서 세자의 가례와 입학. 역적 김자점(金自點) 토벌의 3경사 여증제(呂曾齊)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별의 변괴[星變]
동년 생원 송도창(宋道昌)과 진사 정유악(鄭維岳)을 뽑았다.
4년 계사 8월 알성시에서 민주면(閔周冕)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에서 임금이 태상박사(太常博士) 및 여러 유자(儒者)를 백호관(白虎觀)에 모이게 하여 오경 동이(五經同異)를 의논케 하고 친히 임하여 결제하였음을 치하하다.
11월 별시에서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김진표(金震標) 등 15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시 제목 : 일자(一字) ○ 명관(命官) : 이경석(李景奭). 함경도에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부(賦)의 시제목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거둔 시권지 1백 50장이 서울에 올라왔는데 8장 이외는 모두 임금 뜻에 어긋났으므로 단지 2명을 뽑아 방에 붙였다.
5년 갑오 3월 춘당대(春塘臺) 정시에서 박세모(朴世模)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에서 제위(諸衛)의 장수와 병졸로 하여금 현덕전(顯德殿) 뜰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도록 하고 5년에 임금의 친유(親諭)가 내렸음을 감사하다.
10월 식년시에서 유경립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뜻(志)은 만사의 근본이다.[志者萬事之根柢]
동년 생원 박빈(朴鑌)과 진사 이혜(李嵆)를 뽑았다.
6년 을미 4월 춘당대(春塘臺) 정시에서 유경(柳炅)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재계하고 일을 처결하다.[齋居決事]
7년 병신 8월 별시에서 중시 대거 이민적(李敏迪)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말[言]을 구하고, 인재를 기르며 욕심을 막는다.
9월 중시에서 남용익(南龍翼)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제목 : 부열(傅說)이 좌우에 있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드리게 해 줌을 감사하다.
8년 정유년 9월 식년시에서 민중노(閔重魯)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형(李泂)과 진사 김석주(金錫冑)를 뽑았다.
9월 알성시에서 최준형(崔俊衡)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태위(太尉) 장우(張禹)가 임금에게 모험으로 멀리가 놀지 말 것을 청하다.
현종 원년 경자년 4월 소두산(蘇斗山)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희택(李憙澤)과 진사 김하진(金夏振)을 뽑았다.
11월 즉위 증광시에서 박세당(朴世堂) 등 3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양염(楊炎)이 천하의 재부(財賦)를 모두 좌장(左藏)에 돌릴 것을 청하다.
동년 생원 오시대(吳始大)와 진사 유명필(兪命弼)을 뽑았다.
3년 임인 3월 대증광시(大增廣試)에서 효종을 종묘에 합부하고, 두 대비의 존호를 올리며, 왕후의 책례(冊禮)와 원자 탄생의 5가지 경사. 김석주(金錫冑) 등 4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노(魯) 나라 장손진(藏孫辰)이 제(齊) 나라에 가서 쌀을 사들이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이만정(李萬程)과 진사 이우성(李羽成)을 뽑았다.
10월 춘당대(春塘臺) 대정시(大庭試)에서 대왕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홍만용(洪萬容) 등 1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장준(張浚)이 천심(天心)에 합치하려 함을 학문하는 근본으로 삼을 것을 청하다.
4년 계묘 4월 권진한(權震翰) 등 33명을 뽑았다. 잠의 시제 :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뜻 두기를 생각하다.
동년 생원 이적(李積) 이름을 석(䄷)으로 고침 과 진사 홍석보(洪碩普)를 뽑았다.
5년 갑진 춘당대 정시에서 민시중(閔蓍重) 등 8명을 뽑았다. 명의 시제 : 토계명(土堦銘)
8월 함경도 별시에서 한기백 등 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용흥강(龍興江) ○ 시관 : 대제학 김수항(金壽恒)
6년 을사 4월 정시에서 김만중(金萬重) 등 1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육상선(陸象先)이 겨울의 소나무와 잣나무 같다고 포창함을 감사하다.
동월 온양(溫陽) 정시에서 홍우기(洪宇紀) 등 9명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임금의 건강이 회복하다. 임상원(任相元) 등 12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수성(守成)이 창업(創業)보다 어렵다.[成難於創業]
7년 병오 식년시에서 이후징(李厚徵) 등 3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周) 나라 소공이 무익(無益)한 것을 지어서 유익을 해하지 말기를 청하다.[無益害有益] ○ 제주도(濟州道)에서 직접 응시함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동년 생원 임영(林泳)과 진사 최석만(崔錫萬)을 뽑았다. 후에 만(萬) 자를 정(鼎) 자로 고쳤다.
4월 온양 별시에서 임금이 왕대비(王大妃)를 모시고 온양으로 행차하였다. 권열(權說) 등 3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순수(巡狩) ○ 대제학 : 김수항(金壽恒)
9월 별시에서 왕대비(王大妃) 건강의 회복겸 중시 대거 윤진(尹搢)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체통(體統)
중시에서 홍중용(洪重容)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태상(太常) 환영(桓榮)이 임금이 수레에서 내려 경(經)을 가지고 친히 문안한 것을 사례하다.
9년 무신 11월 별시에서 정미년 세자 책봉의 경축이 흉년으로 연기되어 이해에 시행되다. 민홍도(閔弘道) 등 13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3대를 법삼으라.[爲治必法三代]
12월 정시에서 세자의 병환이 회복되다. 정수준(鄭壽俊) 등 9명을 뽑았다. 제고(制誥)의 시제 : 당 나라에서 배도(裵度)를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임명하다. ○ 시험 제목이 일찍이 성균관 제술(製述) 시험에 나왔던 것이므로 사헌부에서 아뢰어 파방(罷榜)하고 무과(武科)도 아울러 파방하였다. 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2년 전에 대사성으로서 이 시제를 과시(課試)에 내었다.
10년 기유 3월 평안도 별시 중신(重臣)을 보내어 안주(安州)에서 보았다. 에서 양현망(楊顯望) 등 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단군의 사당[檀君祠] ○ 시관 : 판윤(判尹) 정지화(鄭知和)
식년시 6월에서 이덕령(李德齡)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시 제목 : 경학을 선비에게 시험보이다.[經術試士]
동년 생원 한성좌(韓聖佐)와 진사 신엽(申曅)을 뽑았다.
10월 정시에서 한태동 등 12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기형(璣衡)으로써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다.[璣衡齊七政]
11년 경술 11월 별시에서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종묘에 합부하고, 세자의 입학과 관례(冠禮)의 경사 정도성(鄭道成)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의 대책 시제 : 미리 준비하다.[備豫]
12년 신해 11월 정시에서 박태상(朴泰尙) 등 8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동지(冬至)에 관문(關門)을 닫음[至日閉關]
13년 임자 10월 별시에서 왕대비(王大妃) 병환이 회복됨. 세자의 가례(嘉禮) 유명천(柳命天) 등 21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인재(人才)의 성쇠(盛衰) ○ 초시에 6백 명 응시. 서울과 지방으로 나눠 봄.
14년 계축 춘당대 정시에서 유명현(柳命賢) 등 10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양심각명(養心閣銘) ○ 대제학 : 김만기(金萬基)
4월 식년시에서 이익(李榏) 등 3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대풍가(大風歌)는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다.[大風安不忘危]
동년 생원 이현기(李玄紀), 진사 이사명(李師命)을 뽑았다.
숙종 원년 을묘 5월 식년시에서 조지석(趙祉錫) 등 34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질경덕(疾敬德) 기천영명(祈天永命)을 청하다.
동년 생원 서종태(徐宗泰), 진사 강현(姜鋧)을 뽑았다.
11월 즉위 증광시에서 이봉징(李鳳徵) 등 34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임금의 덕을 성취시킬 책임이 경연(經筵)에 있다.
동년 생원 권흠(權歆), 진사 목림중(睦林重)을 뽑았다.
2년 병지 정월 정시(庭試)에서 만과(萬科) : 무사(武士) 만명의 과거ㆍ대거(對擧) 오시만(吳始萬) 등 11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 나라 처사(處士) 뇌차종(雷次宗)이 임금이 친히 그의 집에 행차하여 건구(巾褠)를 착용한 채로 시강(侍講)하게 하고 상품을 심히 후히 내려 준 것을 사례하다.
3월 알성시에서 박태보(朴泰輔) 등 7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탕반명(湯盤銘)
4년 무오 3월 증광시 인선왕후(仁宣王后)와 현종을 종묘에 합부(合祔)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며 두 대비에게 존호를 드리고, 왕비의 책례(冊禮)와 선조의 세실(世實)등 7가지 경사를 합쳤다. 에서 이진은(李震殷) 등 42명을 뽑았다. 정사년 2월에 보였으나 파방하고 이때 비로소 시행하였다.
동년 생원 이현명(李顯命)과 진사 이윤문(李允文)을 뽑았다.
윤3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 에서 조효창(曺孝昌) 등 10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천지가 조절되어 4시가 이루어진다.[天地節而四時成]
5년 기미 4월 정시 중시 대거. 연달아 흉년을 당하여 금년에서야 시행하다. 에서 김석(金晢) 등 10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 나라 영포(英布)가 거처와 음식이 모두 임금의 처소의 것과 같음을 감사하다.
10월 중시(重試)에서 강세귀(姜世龜)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고공낭중(考功郞中) 육지(陸贄)가 대사서(大赦書)에서의 조서(詔書)는 피하거나 기(忌)함이 없도록 하기를 청하다.
12월 식년시 흉년으로 인하여 연기되어 시행하다. 에서 이인징(李麟徵) 등 3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虞)의 백익(伯益)이 백성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면서 자신의 욕심에 따르지 말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채시익(蔡時益)과 진사 이현령(李玄齡)을 뽑았다.
6년 경신 6월 춘당대 정시(庭試)에서 이사명(李師命) 등 4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안일함이 없어야 한다.[所其無逸] ○ 임금이 갑인년에 송시열(宋時烈)을 구(救)하려다가 과거 자격이 정지된 자들을 위로하여 기쁘게 해주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소두(疏頭)를 석방하고 특별히, 승지 이익(李翊)ㆍ제학(提學) 이민서(李敏叙)ㆍ김만중(金萬重)을 보내어 성균관에 가서 시험을 보여 주게 하고, 3명에게 전시에 바로 응시할 특권을 주었으며 아울러 전에 바로 응시하게 한 사람 중에서 1명을 등용하였다. 임금이 친히 춘당대에 나가 시험을 보여 등수를 정하고 성종 때의 고사(故事)에 따라 별시에 앞서 그날로 방을 발표하였다.
9월 정시에서 서문중(徐文重)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대장(大將) 위청(衛靑)이 그의 아들을 봉해 후(侯)로 삼은 것을 사양하다. ○ 대신이 아뢰기를, “인조 갑신년 역적 토벌 기념 별시 때에 사방의 거자(擧子)가 모두 서울로 모여 들었으므로 따로 정시를 보여 위로하고 기쁘게 하였는데, 지금도 이제 참하(參下)의 등급에 인원이 부족하니 역시 갑신년의 예에 따라 정시를 별도로 열어서 많은 선비를 위로하고 기쁘게 하소서.” 하여 시행하였다.
동월 별시에서 조형기(趙亨期) 등 20명을 뽑았다. 역적 남견(柟堅) 등의 토벌을 경하하였다. 초시 6백 명. ○ 전시의 대책 시제 : 옛것을 본받다.[法古] ○ 대제학 : 이민서(李敏敍)
7년 신유 9월 알성시에서 김성시(金盛始)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한신(韓信)이 의병(義兵)으로 동방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있는 장사들을 따를 것을 청하다.
12월 식년시에서 이태동(李泰東)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재이(災異)
동년 생원 민진후(閔鎭厚)와 진사 조정만(趙正萬)을 뽑았다.
8년 임술 4월 춘당대 정시에서 김구(金構) 등 1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낭서장(郞署長) 풍당(馮唐)이 망언(妄言)으로 임금에게 저촉된 죄를 다스리지 않고 다시 불러 장수를 논함을 감사하다.
11월 증광시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에게 존호를 올림. 왕비의 책례(冊禮)의 세 가지 경사 기념 에서 김창협(金昌協)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박태순(朴泰淳)ㆍ진사 김진규(金鎭圭) 등을 뽑았다.
9년 계해 11월 증광시 태조와 태종에게 시호를 더 올리는 것과 인조와 효종의 세실(世室)을 정한 네 가지 경사의 기념 에서 허윤(許玧) 등 3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경덕(敬德) 기명(祈命)
동년 생원 윤시교(尹峕敎)와 진사 홍만적(洪萬迪)을 뽑았다.
10년 갑자 9월 정시 계해년 겨울,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어 장차 증광시를 열려고 하였는데 곧 명성대비(名聖大妃)의 국상(國喪)을 당하였으므로 시행을 연기하였다. 금년에 증광시를 정시로 변경하였다. 에서 신필청(申必淸) 등 2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수(隋) 나라 태상경(太常卿) 우홍(牛弘)이 중국의 구음(舊音)을 정리하고 위(魏)ㆍ주(周)의 변방음을 사용함을 정지시키기를 청하다.
11월 식년시에서 홍수점(洪受漸) 등 3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반풍기화(反風起禾) ○ 대정시(大庭試)를 본 후에 시골 선비들 중에 병려(騈驪)에 익숙하지 못하여 백지 제출한 것이 많았으므로 별도로 대제학 이민서(李敏叙)를 보내어 부(賦)의 시제를 내어 시골 선비에게 시험을 보여 손덕승(孫德升) 등 3명을 뽑아 전시(殿試) 등에 응시케 하였다.
동년 생원 한배주(韓配周)와 진사 유봉서(柳鳳瑞)를 뽑았다.
12년 병인 4월 춘당대 정시(庭試) 문묘에서 작헌례(酌獻禮)를 마친 후, 이어서 성균관에서 과거를 볼 응시자들이 다투어 문을 들어 가다가 밟혀서 목숨을 잃은 자가 8명이나 되었다.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아뢰어 과거를 정지시키고, 하루를 지나서 춘당대에서 과거를 보였다. 에서 조식(趙湜)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상(商) 나라 이윤(伊尹)이 함유일덕(咸有一德) 편을 바치다.
8월 별시 명성왕후(明聖王后)를 종묘에 합부한 기념과 겸하여 중시 대거 에서 민진장(閔鎭長)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필(李泌)이 안서(安西)와 북정(北庭)의 두 진(鎭)을 토번(吐蕃)에게 넘겨주지 말기를 청하다.
동월 중시에서 신계화(申啓華)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저무량(褚無量)이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충성된 말을 받아들이며 아첨을 멀리하고 빨리 동도(東都)의 행차를 정지하기를 청하다.
9월 함경도 별시에서 한항(韓沆) 등 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
10월 정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회갑 경사 정시가 명성왕후(明聖王后)의 국상(國喪)으로 인하여 연기되었다가 이때 시행되다. 에서 김진규(金鎭圭)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조변(趙抃)이 필마(匹馬)로 촉(蜀)에 들어가 정치를 간이(簡易)하게 하였다고 임금이 칭찬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한 것을 감사하다.
13년 정묘 9월 알성시 친히 종묘에 가을 제사를 올리고, 계사년 예(例)에 따라 성균관에 시학(視學)하고 과거를 보이다. 에서 권성(權)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漢) 나라 제갈량(諸葛亮)이 전한(前漢)의 흥륭을 본받고 후한의 쇠퇴로 경계를 삼기를 청하다. ○ 명관 : 영의정 남구만(南九萬)ㆍ대제학 남용익(南龍翼)
10월 식년시에서 이극형(李克亨) 등 38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의 대책 시제 : 때[時]가 가면 불가(不可)함이 있다.
동년 생원 이세면(李世勉)과 진사 김진화(金鎭華)를 뽑았다.
15년 기사 4월 증광시 원자(元子)의 호를 정하였다. 에서 이사상(李師尙) 등 3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회서(淮西) 백성들에게 2년간 납세와 부역을 면제해 준 것을 감사하다.
동년 생원 이협(李浹)과 진사 조백붕(趙百朋)를 뽑았다.
16년 경오 3월 식년시에서 조덕순(趙德純) 등 40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신(尹鋠)과 진사 이의홍(李儀鴻)를 뽑았다.
11월 정시 정묘년 봄, 태조의 영정(影幀)을 다시 그려 남별전(南別殿)에 모셨는데 장렬대비(莊烈大妃)의 국상(國喪)으로 임금이 보지 못하다가 이때에 뵙고 이름을 고쳐 영희전(永僖殿)이라 하였다. 에서 한명상(韓命相)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우상(右相) 왕회(王淮)가 주희(朱憙)의 황정(荒政)은 그의 학문을 시행한 것이니 마땅히 관직을 승급시켜 부르기를 청하다.
17년 신미 3월 증광시 장렬왕후의 종묘 합부, 세자의 책봉, 장희빈(張禧嬪)의 왕후 승진 등 세 경사 합동 기념 에서 송래백(宋來栢) 등 42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진정(賑政)
동년 생원 홍상민(洪相民)과 진사 이만근(李萬根)를 뽑았다.
8월 알성시에서 이야(李壄)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본조(本朝) 유생들이 승지로 하여금 비망기(備忘記)를 낭독하게 하고, 특별히 말씀을 내려준 데 감사하다. ○ 명관 :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18년 임신 8월 춘당대 정시에서 신이익(愼爾益) 등 6명을 뽑았다.
19년 계유 4월 식년시에서 나만영(羅萬榮) 등 40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의 시제 : 학교를 설치하여 선비를 양성하다.
동년 생원 장대방(張大方)과 진사 노하정(盧夏鼎)를 뽑았다.
8월 알성시에서 이인병(李寅炳)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에서 소장(疏章)에 부사(浮辭)를 금지한 것을 치하하다.
9월 개성부(開城府) 정시 임금이 후릉(厚陵)에 행차한 길에 개성에 가서 친히 만월대(滿月臺)에 임석하고 그날 방을 발표하였다. 에서 허보(許溥) 등 3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백성에게 금년 전조(田租)의 반을 준 것에 대하여.
20년 갑술 8월 알성시에서 오명준(吳命俊)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동평장사(同平章事) 송경(宋璟)이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 구제(舊制)를 복구하여 제사(諸司)로 하여금 대장(對仗)하여 일을 아뢰게 하기를 청하다. ○ 명관 : 영의정 남구만(南九萬)ㆍ대제학 박태상(朴泰尙)
10월 별시 중전(中殿)이 복위되다. 에서 이광좌(李光佐) 등 26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편의(便宜) ○ 초시 6백 명
21년 을해 2월 평안도 별시에서 전처경(田處坰)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임금 된 자 세 가지의 사사로움이 없음을 따라야 한다.[王者奉三無私] ○ 시관(試官) : 우참찬(右參贊) 이세백(李世白)ㆍ안주(安州)에서 보였다.
9월 별시 세자의 입학과 관례(冠禮) 기념 에서 이탄(李坦) 등 1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대전(大典) ○ 명관(命官) : 유상운(柳尙運)ㆍ대제학 박태상(朴泰尙)
22년 병자 8월 정시(庭試) 임금의 건강이 회복된 기념 과거인데 흉년으로 연기되어 이때 시행하다. 에서 이만성(李晩成)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참지정사(參知政事) 범중엄(范仲淹)과 추밀부사(樞密副使) 부필(富弼) 등이 서북변의 일을 나누어 맡도록 한 명령을 감사하다. ○ 대제학 겸 명관 : 최석정(崔錫鼎)
11월 식년시에서 강영(姜楧) 등 35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현규(玄圭)로 성공을 고하다.
동년 생원 이진망(李眞望)과 진사 박양한(朴亮漢)을 뽑았다.
23년 정축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중전(中殿)의 묘현(廟見) 세자의 가례(嘉禮) 세 경사를 합쳐 기념하고 겸하여 중시(重試) 대거(對擧) 에서 엄경운(嚴慶運)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촉한(蜀漢)에서 유비(劉備)가 황제의 위에 즉위, 제갈량(諸葛亮)으로 승상(丞相)을 삼은 것을 치하하다. ○ 명관 : 유상운(柳尙運)ㆍ대제학 오도일(吳道一) ○ 당초에는 증광시로 정하였으나 흉년이라 사헌부에서 아뢰어 정시로 바꾸다.
10월 중시에서 정사효(鄭思孝)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동평장사(同平章事) 이필(李泌)이 천명(天命)을 말하지 말기를 청하다. ○ 명관 : 영부사(領府事) 남구만(南九萬)
24년 무인 9월 춘당대시(春塘臺試) 알성한 후 에서 윤헌주(尹憲柱)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리나라에서 강토를 개척하고 6진(鎭)을 설치한 것을 치하하다. ○ 명관 : 우의정 이세백(李世白)ㆍ대제학 서종태(徐宗泰)
25년 기묘 4월 정시 세자의 천연두가 낫다. 에서 정식(鄭栻) 등 1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소식(蘇軾)이 절강(浙江) 지방의 꽃 등(燈)을 사들이라는 명령을 회수하고 장차 정월 보름날 꽃 등을 걸 때에는 다만 전례(前例)대로만 하고 모든 놀이와 연회를 검약(儉約)하기에 힘쓰기를 청하다. ○ 명관 : 최석정(崔錫鼎)ㆍ홍문관 제학 강현(姜鋧)
4월 식년시에서 이제(李濟) 등 40명을 뽑았다. 조칙(詔勅)의 시제 : 희(羲)ㆍ화(和)에 명(命)하여 호천(昊天)에 공경히 순응하게 하다.
동년 생원 이승원(李承源)과 진사 홍중주(洪重疇)를 뽑았다.
□월 증광시 단종이 복위되다. 에서 한세량(韓世良) 등 3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 나라 상부(尙父)가 단서(丹書)를 올리다. ○ 정언(正言) 이탄(李坦)의 아룀으로 과거(科擧)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파방(罷榜)되었다. 경인년에 사간(司諫) 이덕영(李德英)이 소로 복과(復科)시키기를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여 과옥(科獄) 죄인 8명 이외는 모구 복과(復科)시켰다. 그 중에 4명은 이미 다른 과거에 합격하였고 2명은 죽었었다.
동년 생원 윤지대(尹志大)와 진사 어유봉(魚有鳳)를 뽑았다.
26년 경진 9월 춘당대시 알성한 후 에서 이익한(李翊漢) 등 3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사도(司徒) 중서령(中書令) 배도(裵度)가 지정사(知政事)에 임명하고 위로하는 말과 상을 주는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영의정 서문중(徐文重)ㆍ대제학 오도일(吳道一)
28년 임오 3월 알성시에서 이희태(李喜泰)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명 나라 대신들이 임금이 어진 이를 구한다는 조칙을 거듭 내리고 또 자기가 지은 의의난조(擬猗蘭操)를 내어 보인 것을 칭하(稱賀)하다. ○ 명관 : 좌의정 이세백(李世白)ㆍ대제학 이여(李畬) ○ 방을 발표한 후 유생의 소(疏)가 있었다.
4월 함경도 별시 특별히 판서 서문중(徐文重)을 보내다. 에서 한재회(韓在誨) 등 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어진 이를 등용하면 대적할 자 없으니 이것은 장성(長城)과 같다.[用賢無敵是長城]
5월 식년시에서 김일경(金一鏡) 등 38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그윽한 방구석에서도 부끄럽지 아니하다.[不愧于屋漏]
동년 생원 이진휴(李眞休)와 진사 홍계적(洪啓迪)을 뽑았다.
12월 별시(別試) 중전의 가례(嘉禮) 에서 권집(權緝) 등 1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의 대책 시제 :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항상 망한다. ○ 명관 : 호조 판서 김창집(金昌集)ㆍ예문관 제학 김진규(金鎭圭)
30년 갑신 9월 춘당대 정시에서 한세필(韓世弼) 등 8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 나라 주발(周勃)이 고조(高祖)가 유(劉)씨를 안전하게 할 자는 반드시 발(勃)일 것이다라고 신임하여 준 것에 감사하다. ○ 명관 : 영의정 신완(申琓)ㆍ홍문과 제학 이이명(李頤命)
31년 을유 4월 식년시에서 정동후(鄭東後) 등 41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천도가 내려 화합하여 빛난다.[天道下濟而光明]
동년 생원 조문명(趙文命)과 진사 서명균(徐命均)을 뽑았다.
4월 알성 별시에서 이교악(李喬岳)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제갈량(諸葛亮)이 임금에게 곧고 진실하여 절의(節義)에 죽을 만한 신하를 믿어 주기를 청하다. ○ 명관 : 판서 서종태(徐宗泰)ㆍ예문관 제학 김진규(金鎭圭)
11월 증광시 즉위한 지 30년 된 경사 에서 임상덕(林象德) 등 3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진평(陳平)이 옥사(獄事) 판결은 정위(廷尉)에게 묻고, 화폐와 곡식은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묻기를 청하다. ○ 명관 :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
동년 생원 이병상(李秉常)과 진사 김제겸(金濟謙)을 뽑았다.
32년 병술 3월 정시(庭試)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니 선위(禪位)한다는 비망기(備忘記)를 회수하다. 에서 홍호인(洪好人) 등 7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주 나라 주공이 ‘낙사도(洛師圖)’를 올리다. ○ 명관 :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조태채(趙泰采)ㆍ홍문관 제학 이이명(李頤命)
33년 정해 3월 별시 중시 대거 에서 이기성(李基聖) 등 12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명 나라 형부주사(刑部主事) 이해서(李海瑞)가 출옥(出獄)하게 하고, 그 관직에 돌아가게 한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우의정 이이명(李頤命)
4월 중시에서 김일경(金一鏡) 등 7명을 뽑았다.
34년 무자 윤3월 식년시에서 이정주(李挺周) 등 37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봄에 진대(賑貸)를 의논하다. ○ 명관 : 우의정 이이명(李頤命)ㆍ예문관 제학 강현(姜鋧)
동년 생원 이현익(李顯益)과 진사 이하곤(李夏坤)을 뽑았다.
35년 기축 알성 별시에서 김상옥(金相玉) 등 5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 나라 국자박사(國子博士) 이각(李覺)이, 임금이 친히 태학(太學)에 제사를 드리고 《역(易)》의 태괘(泰卦)를 강론하며 자기를 판국자감(判國子監)으로 승진시킨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좌의정 서종태(徐宗泰)ㆍ제학(提學) 강현(姜鋧)
36년 경인 6월 증광시 임금과 세자의 병환이 회복되다.에서 박징빈(朴徵賓) 등 41명을 뽑았다. 표의 제목 : 송 나라 참지정사(叅知政事) 필사안(畢士安)이, 임금이 장차 정승을 시키겠다 말하고 또 함께 정승될 만한 자가 누구인가를 물은 것을 감사하다.
동년 생원 권적(權)과 진사 민응수(閔應洙)를 뽑았다.
기묘년 과거를 복과(復科)시켜 22명을 뽑았다.
8월 춘당대 정시 무재(武才)시험에 대거함 에서 이세면(李世勉)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의 진덕수(眞德秀)가 의기(欹器)를 만들어 자리 옆에 놓아두기를 청하다. ○ 대제학 : 김진규(金鎭圭)
37년 신묘 4월 식년시에서 이진망(李眞望) 등 36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언행(言行)은 군자(君子)의 천지를 감동시킨다.
동년 생원시에서 임상악(林象岳)과 진사시에서 조하망(曺夏望)을 뽑았다.
38년 임진 2월 정시 중전(中殿)의 종기가 나음. 에서 양정호(梁廷虎) 등 19명을 뽑았다. 4명을 삭제하다. ○ 표의 시제 : 한 나라 발해 태수(渤海太守) 의조(議曹) 왕생(王生)이 임금이 공수(龔遂)를 수형승(水衡丞)에 임명하여 표창한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좌의정 김창집(金昌集)ㆍ홍문관 제학 이돈(李墪)
39년 계사 10월 증광시 즉위한 지 40년이 되고, 존호를 올린 두 경사를 합쳐 기념하다. 에서 남세운(南世雲) 등 5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왕진(王縉)이 임금의 자신을 반성ㆍ조심하고 대신에게 섭리(燮理)하기를 명하도록 청하다. ○ 명관 : 김창집
동년 생원 이진수(李眞洙)와 진사시 이덕해(李德海)를 뽑았다.
40년 갑오 11월 증광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 에서 이정숙(李廷熽) 등 3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목 : 송 나라 소식(蘇軾)이 지일(至日)날 선왕을 법받아 천도(天道)에 순응하여 국가와 몸에 실천하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박사한(朴師漢)과 진사 이영보(李英輔)를 뽑았다.
41년 을미 5월 식년시에서 박진량(朴震亮) 등 35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강(江)과 한(漢)이 바다에 조회(朝會)한다.
동년 생원 윤득형(尹得衡)과 진사 이기지(李器之)를 뽑았다.
43년 정유 8월 온양 별시 온천에 행차한 기념인데, 흉년으로 연기되었다가 청주로 옮겨 보였다. 에서 이유춘(李囿春) 등 7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가을달이 찬물 위를 비친다.[秋月照寒水]○ 시관 : 공조 판서 조태채(趙泰采)
동년 평안도 별시에서 임익빈(林益彬) 등 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풀속에 바람이 불면 수그러진다.[草上之風必偃] ○ 시관 : 판서 민진원(閔鎭遠)
동월 함경도 별시에서 주형리(朱炯离)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문무(文武) 병용(幷用)이 국가를 장구하게 하는 방법이다. ○ 시관 : 판서 권상유(權尙游)
10월 정시 중시 대거 에서 이거원(李巨源)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초(楚) 나라 송옥(宋玉)이 임금이 자기에게 이르기를 “의논을 잘 하는구나. 다시 서민의 바람[風]을 진술하라.” 한 것을 감사하다. ○ 대제학 송상기(宋相琦)
중시에서 권세항(權世恒)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주발(周勃)이 우승상을 사직하다.
11월 식년시에서 유복명(柳復明) 등 42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홀로 주 나라에 조회(朝會)하다.[獨朝周]
동년 생원 신방(申昉)과 진사 이구(李絿)를 뽑았다.
44년 무술 10월 정시 중전의 홍역이 낫고, 세자의 가례(嘉禮) 등의 두 경사 에서 홍현보(洪鉉輔) 등 1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배복(裴復)이, 자기 아버지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아버지는 충성되고, 아들은 효성스럽다고 말하고 상(喪)을 마치면 기필코 다시 한림(翰林)을 삼겠다. 한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우의정 이건명(李健命)ㆍ대제학 김유(金楺)
45년 기해 별시 민회빈(愍懷嬪) 복위되다. 에서 이성환(李星煥)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근면(勤勉)과 안일(安逸) ○ 시관 : 위와 같음
9월 증광시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가다 에서 정형익(鄭亨益) 등 3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한신(韓信)이, 한왕(漢王)이 자기에게 “승상(丞相)이 자주 장군을 말하더니 장군은 무엇으로써 과인(寡人)에게 계책을 가르치겠소.” 한 것을 사례하다. ○ 대제학 이관명(李觀命)
동년 생원 조명익(趙明翼)과 진사 권혁(權爀)을 뽑았다.
10월 춘당대 정시 세자가 문묘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한 후 에서 남수현(南壽賢) 등 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에서 주 나라 태사(太師)로부터 상송(商頌) 16편을 얻어서 돌아가 그의 선왕에게 제사지냄을 치하하다. ○ 명관 : 영의정 김창집(金昌集)ㆍ대제학 이관명(李觀命)
경종(景宗) 원년 신축 2월 정시 임금이 동궁으로 있을 때 홍역이 나았다. 에서 윤심형(尹心衡)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소식(蘇軾)이 어시(御試)의 대책에 있어서 아첨하여 비위 맞추는 자를 뽑지 말아서 폐하가 곧을 말을 꺼리지 않는 뜻을 보여 주기를 청하다. ○ 명관 : 좌의정 이건명(李健命)ㆍ홍문관 제학 최석항(崔錫恒)
4월 식년시 경자년의 식년시를 연기하여 시행하다. 에서 오성유(吳聖兪)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농(農)
동년 생원 김형(金烱)과 진사 김신겸(金信謙)을 뽑았다.
11월 즉위 증광시에서 신처수(申處洙) 등 32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성지(城池)
동년 생원시에서 민통수(閔通洙)와 진사시에서 김치만(金致萬)을 뽑았다.
2년 임인 2월 정시(庭試) 세자 책봉 에서 조경명(趙景命)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소식(蘇軾)이 고삐를 놓고 말[馬]을 먹이고 동방이 밝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서서히 9궤(九軌)의 길로 가기를 청하다. ○ 명관 : 우의정 최석항(崔錫恒)ㆍ대제학 이광좌(李光佐)
9월 알성 별시에서 성덕윤(成德潤)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에서 손석(孫奭)이 올린 무일도(無逸圖)를 강독각(講讀閣)에 걸어 놓고 다시 채양(蔡襄)에게 명하여 무일편(無逸篇)을 강독각의 병풍에 쓰게 한 것을 치하하다. ○ 명관 : 우의정 최석항(崔錫恒)ㆍ대제학 조태억(趙泰億)
3년 계묘 3월 대증광시(大增廣試) 숙종을 종묘에 합부하고 인경왕후(仁敬王后)와 인현왕후(仁顯王后), 단의왕후(端懿王后)를 소급하여 책례(冊禮)를 올리며, 왕대비(王大妃)를 존숭하고, 중궁(中宮)의 책례와 세자의 입학 등 7경사를 합치다. 에서 박사수(朴師洙) 등 41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상백(尹尙白)과 진사 오수엽(吳遂燁)을 뽑았다.
3월 별시에서 박사유(朴師游) 등 1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섬주 지사(陝州知事) 구준(寇準)이 생일날 산붕(山棚)을 만든 죄를 다스리지 않고, 다만 어리석음이라고 말한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관서 이태좌(李台佐)ㆍ제학 이조(李肇)
10월 정시 임금과 세제(世弟)의 병환이 낫다. 에서 김상성(金尙星) 등 5명을 뽑았다. 전(箋)의 시제 : 월(越) 나라 범여(范蠡)가 전일 회계(會稽)의 패전한 벌(罰)을 받기를 청하다. ○ 주문(主文) : 이조(李肇)
11월 식년 정재춘(鄭再春) 등 35명을 뽑았다. 논(論)의 시제 : 글을 모두 믿으면 글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
동년 생원 박필현(朴弼顯)과 진사 이광의(李匡誼)를 뽑았다.
영종 원년 을사 8월 정시 대왕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당초에는 갑진년 8월로 정하였으나 국상(國喪)으로 말미암아 연기 시행되다. 에서 박필철(朴弼哲) 등 15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성성존존 도의지문(成性存存道義之門) 명관 : 이조 판서 민진원(閔鎭遠)ㆍ예문관 제학 이의현(李宜顯)
10월 즉위 증광시에서 정언섭(鄭彥燮) 등 4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호안국(胡安國)이 《춘추전(春秋傳)》을 임금에게 바치다. ○ 명관 : 좌의정 민진원(閔鎭遠)ㆍ주문 : 이의현(李宜顯)
동년 생원 유묵기(兪黙基)와 진사 윤급(尹汲)을 뽑았다.
11월 정시 세자 책봉과 천연두가 낫다. 에서 이만영(李萬榮) 등 2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신하들이 당 나라 말기부터 백년 만에 비로소 입저(立儲)의 예를 거행함을 칭하하다. ○ 명관 : 민진원(閔鎭遠)ㆍ주문 : 이의현
2년 병오 2월 강도(江都) 별시 숙종의 초상을 봉안한 후 에서 성유열(成有烈) 등 5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 ○ 시관 : 이조 판서 이병상(李秉常)
11월 식년시에서 이휘항(李彙恒) 등 35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우정(禹鼎)
동년 생원 이후(李)와 진사 홍계흠(洪啓欽)을 뽑았다.
동월 알성시에서 김치후(金致垕) 등 7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 나라 문천상(文天祥)이, 임금이 집영전(集英殿)에 나와 진사 급제를 내려준 것을 사례하다.
3년 정미 윤3월 증광시 4가지 경사 에서 민원(閔瑗) 등 4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송사흠(宋思欽)과 진사 홍상한(洪象漢)을 뽑았다.
9월 정시 중시대거 에서 강백(姜栢) 등 5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망의(蟒衣)를 입고 선왕을 뵌다. ○ 명관 : 호조 판서 이태좌ㆍ예문관 제학 이집(李㙫)
10월 중시에서 이정작(李庭綽) 등 4명을 뽑았다. 율시(律詩)의 시제 : 내 백성의 재물을 불리고 백성의 원망을 푼다.[阜財解民慍]
4년 무신 5월 춘당대시 출정하였던 장군과 병사가 돌아온 후 임금이 친히 무과를 보이고 거기서 대거(對擧)하다. 에서 오원(吳瑗) 등 3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편안한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 ○ 대제학 윤순(尹淳)
8월 평안도 별시에서 이양(李瀁)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재반헌괵(在泮獻馘) ○ 시관 : 판서 김동필(金東弼)
9월 별시 세자의 입학ㆍ가례(嘉禮)ㆍ관례(冠禮)의 3경사 에서 안복준(安復駿)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공(周公)이 형옥(刑獄)을 신중히 하고, 군비(軍備)를 잘 다스려 문왕(文王)의 빛을 보이고 무왕(武王)의 공을 들어 내기를 청하다.
10월 정시 반역의 변이 평정되다. 에서 박대후(朴大厚) 등 6명을 뽑았다. 제고(制誥)의 시제 : 송 나라에서 부필(富弼)을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임명하다.
5년 기유 11월 식년시에서 정동혁(鄭東爀) 후에 열(說)자로 고치다. 등 41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춘추는 왕도의 권형[春秋王道之權衡] ○ 명관 : 영의정 홍치중(洪致中)
동년 생원 박사백(朴師伯)과 진사 이석표(李錫杓)를 뽑았다.
6년 경술 2월 정시 숙종의 세실(世室)을 정하다. 에서 이시희(李時熙) 등 20명을 뽑았다. 전(箋)의 시제 : 우리나라 찬수청(纂修廳)에서 《선조보감(先朝寶鑑)》을 바치고 이어서 근면하고 경건히 선왕의 지극한 덕을 계술(繼述)하여 선왕의 큰 공적을 아름답게 선양(宣揚)하기를 청하다.
7년 신해 2월 정시 무고(巫蠱) 옥사(獄事)를 처결하고 범인 필웅(必雄)을 처단하다. 에서 심악(沈䥃)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법제(法制)ㆍ전부(田賦)ㆍ양역(良役)ㆍ군정(軍政)ㆍ전화(錢貨)ㆍ태학(太學) 등의 일곱 가지 폐[七幣]
3월 함경도 별시에서 이재춘(李載春) 등 5명을 뽑았다. 부(賻)의 시제 : 친경(親耕) ○ 시관 : 판서 윤순(尹淳)
8년 임자 10월 정시 선의왕후(善懿王后)를 종묘에 합부함. 에서 오대관(吳大觀) 등 10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본지백세(本支百世)
9년 계축 9월 알성시 춘당대 에서 이석표(李錫杓)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이광필(李光弼)이 태위(太尉)에 임명하여 8로(路)의 행영(行營)을 통어하게 한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우의정 김흥경(金興慶)ㆍ대제학 윤순(尹淳)
11월 식년시 임자년 식년시가 흉년으로 연기 시행되다. 에서 박첨(朴) 등 5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군신(群臣)이 임금이 친히 나와 군사를 위로함을 칭하하다.
동년 생원 정실(鄭宲)과 진사 이종적(李宗迪)을 뽑았다.
10년 갑인 2월 정시 중전의 수두(水痘)가 나았다. 에서 김상구(金尙耈)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 나라 소호(召虎)가 그 문덕(文德)을 베풀어 이내 나라를 흡족하게 하기를 청하다. ○ 명관 : 김흥경(金興慶)ㆍ홍문관 제학 송인명(宋寅明)
10월 춘당대시에서 이명곤(李命坤)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리나라에서 대전(大典)을 편수하여 열성(列聖)의 옛법을 부활시키고 태학을 배양하여 많은 선비의 나아갈 길을 바르게 하기를 청하다. ○ 시관은 위와 같다.
11년 을묘 윤4월 증광시 원자(元子)의 호를 정하다 에서 박필리(朴弼理) 등 42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주 나라는 비록 옛 나라이나 그 국운은 유신(維新)된다.[周雖舊邦其命維新] ○ 명관 : 김흥경
동년 생원 박만원(朴萬源)과 진사 임박(任璞)을 뽑았다.
8월 식년시에서 윤택휴(尹澤休) 등 3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독서함이 연단(鍊丹)함과 같다.[讀書如鍊丹]
동년 생원 이광회(李匡會)와 진사 이존중(李存中)을 뽑았다.
10월 정시에서 원자(元子)의 수두(水痘)가 낫다. 신수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큰 업(業)을 처음 열다.[肇開鴻業]
12년 병진 4월 정시 세자 책봉 에서 조하망(曺夏望)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에서 장락궁(長樂宮)이 이루어짐을 축하한다. ○ 명관 : 우의정 송인명(宋寅明)ㆍ제학 조원명(趙遠命)
9월 정시 대왕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에서 원경하(元景夏) 등 1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먼저 농사짓기의 어려움을 미리 알아야 이에 편안할 수 있다.[先知稼穡之艱難乃逸] ○ 명관 : 송인명ㆍ대제학 이덕수(李德壽)
10월 알성시에서 윤득경(尹得敬) 등 5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명륜당(明倫堂) 명관 : 좌의정 김재로(金在魯)ㆍ대제학 이덕수
13년 정사 3월 별시 대거 중시 에서 홍계희(洪啓禧) 등 17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양역(良役) ○ 명관 : 송인명ㆍ대제학 이덕수 ○ 이현필(李顯弼)의 대책이 망녕되므로 합격이 삭제되고 시관은 파직되었다.
3월 중시에서 이섭원(李燮元) 등 8명을 뽑았다. 제고(制誥)의 시제 : 당 나라에서 한신(韓信)의 고사에 따라 혼함(渾瑊)을 부원수에 임명하다. ○ 명관 : 김흥경ㆍ주문 : 이덕수(李德壽)
14년 무오 4월 식년시에서 한광회(韓光會) 등 41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선비가 많으므로 문왕(文王)이 편안하다.[濟濟多士文王以寧] 명관 :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동년 생원 이명덕(李命德)과 진사 박인원(朴麟源)을 뽑았다.
15년 기미 3월 알성시 친경한 후 알성함. 에서 이희겸(李喜謙) 등 10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경근거(耕根車) ○ 명관 : 판부사 서명균(徐命均)ㆍ주문(主文) : 오원(吳瑗)
9월 정시 단경왕후(端敬王后)가 복위되어 종묘에 합부되다. 에서 이기경(李基敬) 등 19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내치와 외국 방어는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모나게 함과 같다.[內修外攘如直內方外] ○ 명관 : 우의정 유척기(兪拓基)ㆍ홍문관 제학 서종급(徐宗伋)
16년 경신 4월 정시 대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다 에서 정계주(鄭啓周)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크도다 건원(乾元)이여.[大哉乾元] 명관 : 유척기ㆍ홍문관 제학 조관빈(趙觀彬)ㆍ예문관 제학 서종급(徐宗伋)
8월 알성시 친히 석채(釋菜)를 행하다. 에서 이창수(李昌壽) 등 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에서 중흥 공신 28장군을 운대(雲臺)에 그려 놓고 임금이 행차한 것을 치하하다. ○ 명관 : 좌의정 김재로(金在魯)ㆍ대제학 오원(吳瑗)
9월 개성 정시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참배한 후 친히 임하여 선비에게 시험을 보이다. 에서 전명조(全命肇) 등 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옛 서울에 감회(感懷)가 있다.[感古都] ○ 처음에 강남(江南)의 춘색(春色)이 손 안에서 전해진다.[江南春色手中傳]라는 부(賦)를 출제하였는데 응시자들이 시제를 풀지 못하였으므로 시제를 고쳤다. 명관 : 김재로(金在魯)
11월 증광시 효종에게 소급하여 존호를 올림. 대왕대비에게 존호를 더 올림. 임금과 중전(中殿)에게 존호를 올림. 4경사 합동 기념 에서 홍중효(洪重孝) 등 51명을 뽑았다. 시제의 : 명 나라 시랑(侍郞) 구준(丘濬)이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바치다. ○ 명관 : 김재로(金在魯)
동년 생원 최홍간(崔弘簡)과 진사 민백창(閔百昌)을 뽑았다.
17년 신유 식년시 11월 에서 안극효(安克孝) 등 37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오현금(五絃琴)
동년 생원 김양택(金陽澤)과 진사 조재홍(趙載洪)을 뽑았다.
18년 임술 9월 정시 세자가 입학하다 에서 이맹휴(李孟休) 등 9명을 뽑았다. 시제 : 양역(良役)ㆍ학교ㆍ군정(軍政)ㆍ화폐 통용 ○ 명관 : 송인명(宋寅明)
19년 계해 윤4월 알성시 친히 대사례(大射禮)를 행함. 에서 한광조(韓光肇)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비오는 것을 기뻐하여 활쏘기를 하다.[喜雨觀德] 명관 : 송인명
10월 정시 세자의 홍역이 낫고 관례(冠禮)를 행한 두 가지 경사 에서 조영로(趙榮魯) 등 26명을 뽑았다. 부의 제목 : 백량어지(百兩御之) ○ 명관 : 송인명ㆍ홍문관 제학 오광운(吳光運)
20년 갑자 3월 춘당대 정시 세자의 가례(嘉禮) 에서 장주(張澍) 뒤에 정(淀)으로 고쳤다. 등 10명을 뽑았다. 시제 : 옛 거울[古鏡] 명관 : 판서 조상경(趙尙絅)ㆍ문임(文任)은 없고 임금이 친히 임하였다. 그날로 합격 발표함.
9월 식년시에서 박창원(朴昌源) 등 3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기산(岐山)에서 우는 봉황[岐山鳴鳳] ○ 제학 : 조관빈(趙觀彬)
동년 생원 송환성(宋煥星)과 진사 민백겸(閔百謙)을 뽑았다.
10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에서 황합(黃柙)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호랑이로 …… 박히다.[射虎石] ○ 명관 겸 주문 : 조관빈(趙觀彬)
21년 을축 9월 정시 작년 8월 임금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으므로 증광시를 금년 2월에 보이기로 정하였는데, 정월 홍관(虹貫)의 변으로 말미암아 연기하여 9월에 시행하면서 정시로 변경하였다. 초시에 5백 명 에서 이관섭(李觀燮) 등 12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길보가 송(誦)을 지으니 목연하기 청풍 같다.[穆如淸風] ○ 명관겸 주문 : 원경하(元景夏)
22년 병인 윤3월 정시 중시 대거 초시에 5백 명 에서 남운로(南雲老) 등 9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주 나라에서 인지(麟趾)는 관저(關雎)의 효과임을 축하하다. ○ 명관 : 송인명ㆍ홍문관 제학 원경하
동월 알성시 춘당대에서 에서 이득종(李得宗)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탁무(卓茂)가 포덕후(褒德侯)에 송함을 사례하다.
동월 중시에서 이윤신(李潤身) 등 7명을 뽑았다. 조칙(詔勅)의 시제 : 배와 수레를 만들어 교통하다.
4월 평안도 별시에서 이인채(李仁采)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조천석(朝天石) ○ 시관 : 판서 이주진(李周鎭)ㆍ본도의 지방관 이종성(李宗城)
7월 춘당 대시 무재(武才)를 시험하는데 대거함 에서 이명희(李命熙)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리나라 종신(宗臣)이 열성어제(列聖御製)를 바치다.
8월 함경도 별시에서 주형질(朱炯質)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육진을 개척하다.[開拓六鎭] ○ 시관 : 지사(知事) 권적(權)
23년 정묘 3월 식년시에서 심국현(沈國賢) 등 3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남묘(南畝)에 점심밥을 내어가니 전준(田畯)이 이르러 기뻐하다.[饁彼南畝田畯至喜] ○ 명관 : 우의정 민응수(閔應洙)ㆍ홍문관 제학 조관빈
동년 생원시에서 허증(許增)과 진사시에서 이재관(李在寬)을 뽑았다.
9월 정시 대왕대비의 존호를 올리다. 임금이 친히 경복궁에 임하였다.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에서 이유수(李惟秀)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억계시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읊어 외우다. [作抑戒詩朝夕諷誦] ○ 명관겸 주문 : 조관빈
24년 무진 3월 춘당대 경시 숙종의 영정(影幀)을 영희전(永禧殿)에 모시다. 에서 김치인(金致仁)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장공예(張公藝)가 임금이 집에 찾아와 능히 친족을 화목하는 방법을 물은 것을 감사하다. ○ 명관겸 주문 제학(提學) 정우량(鄭羽良)
25년 기사 3월 알성시 춘당대에서 보임 에서 이양천(李亮天)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관풍각(觀豐閣) ○ 명관 : 영의정 김재로(金在魯)ㆍ제학 정우량
26년 경오 3월 식년시에서 이존중(李存中) 등 51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종루의 종[樓鍾]
동년 생원 박지익(朴志益)과 진사 강필교(姜必敎)를 뽑았다.
9월 알성시 임금이 세자를 거느리고 문묘에 작헌례를 행하다. 에서 이인원(李仁源) 뒤에 심원(心源)으로 고치다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명명(明命)이 혁연하다.[明命赫然] ○ 명관 : 우의정 정우량ㆍ예문관 제학 이천보(李天輔)
동월 온양 정시 임금이 친히 참석하다. 그날로 합격자 발표 에서 조시겸(趙時謙)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오늘 아침 대나무 창문이 태양을 향하여 열리다.[今朝竹牖向陽開] ○ 명관 : 정우량ㆍ홍문관 제학 원경하(元景夏)
27년 신미 2월 춘당대 정시 맏손자 출생 에서 오찬(吳瓚) 등 10명을 뽑았다. 시제 : 효도와 공경함은 인(仁)을 하는 근본이다.[孝悌也者爲仁之本] ○ 명관 : 조관빈ㆍ제학 원경하
9월 정시 대비에게 존호를 올림. 임금이 건강이 회복됨. 세손(世孫)의 책봉, 세손의 병환이 회복됨. 네 경사 에서 윤득우(尹得雨) 등 24명을 뽑았다. 초시에 1천 명 ○ 부의 시제 : 교득채근(晈得菜根) 명관겸 주문 : 이천보(李天輔)
28년 임신 9월 정시(庭試) 대비와 임금과 중전의 존호(尊號)를 올린 세 가지 경사 에서 이명환(李明煥) 등 25명을 뽑았다. 초시(初試) 1천 명 ○ 시제 :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함은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근본이다. ○ 명관 : 판서 신만(申晩)
29년 계유 2월 알성시 춘당대에서 보이다. 에서 홍억(洪檍)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명 나라 구준(丘濬)이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바치다. ○ 명관 : 좌의정 이천보ㆍ제학 김상성(金尙星)
2월 정시 세자의 홍역이 회복되고 맏손자의 출생의 두 경사 에서 노성중(盧聖中) 등 12명을 뽑았다. 5백 명 초시 ○ 부(賦)의 시제 : 슬피옥찬황류재중(瑟彼玉瓚黃流在中)
10월 정시(庭試) 육상궁(毓祥宮)에게 시호를 숙빈(淑嬪)이라고 올리고 원(園)을 봉함. 친히 춘당대에 임하였다. 에서 이현옥(李鉉玉)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초룡주장(草龍珠帳) ○ 명관 : 이천보(李天輔)
동월 식년시에서 권세구(權世矩) 등 3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태양의 출입을 측정하다.[定太陽出入]
동년 생원 강심면(姜心勉)과 진사 신사권(申史權)을 뽑았다.
30년 갑술 도과(道科) 정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해이므로 경기도 유생에게 춘당대에서 과거를 보임. 에서 이빈(李贇) 등 8명을 뽑았다. 시(詩)의 시제 : 집희경지(緝熙敬止) ○ 명관 : 판서 신만(申晩)
윤 4월 증광시 숙종 인경왕후(仁敬王后)ㆍ인현왕후(仁顯王后)ㆍ대비ㆍ임금에게 존호를 올리다. 에서 홍종해(洪宗海) 등 4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의정부의 신하가 과거 규칙을 엄히 하여 선비의 습성을 바르게 하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신광정(申光鼎)과 진사 문연박(文演樸)을 뽑았다.
31년 을해 3월 함경도 별시에서 오상현(吳尙顯)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제목 : 협화만방(協和萬邦) ○ 시관 : 판서 조영국(趙榮國)
5월 정시(庭試) 역적을 평정함.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 에서 이시민(李時敏) 등 1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영대를 경시하다.[經始靈臺] ○ 명관 : 신만(申晩)
9월 정시 인빈(仁嬪)에게 시호를 올리고 원(園)을 봉함.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함 에서 심이지(沈履之)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현주대갱(玄酒大羹) ○ 명관 : 영의정 이천보(李天輔)ㆍ홍문관 제학 정우량(鄭羽良)
32년 병자 3월 정시 대비의 춘추가 칠순(七旬)되어 존호를 올리고, 육상궁(毓祥宮)에게 시호를 더 올림. 임금과 왕후에게 존호를 올림. 네 가지 경사. 초시 1천 명 에서 김성유(金聖猷) 등 3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일감(日監)이 이에 있다.[日監在玆] ○ 명관 : 판부사 이종성(李宗城)
7월 기로(耆老) 정시 대비의 춘추가 칠순(七旬)이고, 임금의 춘추 70을 바라봄으로써 기로사(耆老社)의 모든 신하에게 술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세자 및 기로(耆老) 이품(二品) 이상을 거느리고 대비에게 하례(賀禮)를 드리고 세자는 백관을 거느리며 세 대비ㆍ임금ㆍ왕비에게 하례를 드렸다. 임금이 친히 춘당대에 나왔다.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에서 이가우(李嘉遇)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노인을 잘 봉양하다.[善養老] 명관 : 신만
윤9월 식년시에서 한종찬(韓宗纘) 등 38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 나라 조충국(趙充國)이 금성방략(金城方略)을 바치다.
동년 생원 남대만(南大萬)과 진사 이지형(李之珩)을 뽑았다.
동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그날로 합격 발표함. 에서 정원달(鄭遠達) 등 8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원회(元會) ○ 명관 : 판부사(判府事) 이종성(李宗城)
33년 정축 8월 정시 대비의 병환이 회복된 경축의 시험이 개최되기도 전에 국상(國喪)을 당하여 인산(因山) 후에 보였는데 초시를 면제하다. 에서 이택진(李宅鎭)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비록 효도를 하고자 하여도 누구에게 효도를 하리오.[雖欲孝誰爲孝] ○ 명관 : 판중추(判中樞) 이정보(李鼎輔)
9월 정시 세자의 천연두가 낫다. 겸하여 중시 대거 초시를 면제함. 에서 이재협(李在協) 등 8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삼대(三代)의 기상(氣像)인데 어찌 관악(管樂)에 비하랴.[三代氣像何比管樂] ○ 명관 : 판서 홍상한(洪象漢)
동월 중시에서 이기경(李基敬)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장량(張良) 유후(留侯)에 봉함을 사례하다. ○ 주문 : 이정보(李鼎輔)
34년 기묘 4월 식년시에서 이태정(李台鼎) 등 56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금거울[金鑑]
동년 생원 이인섭(李寅燮)과 진사 강대언(康大彥)을 뽑았다.
7월 별시 인원왕후(仁元王后)를 종묘에 합부하다. 에서 이만영(李晩榮) 등 12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기로과(耆老科)를 추억하다.[憶耆老科] ○ 명관 : 이정보(李鼎輔)ㆍ홍문관 제학 오수채(吳遂采)
동월 알성시 춘당대에서 보이다 에서 신익(申熤) 등 6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계성사(啓聖祠)에 참배하다. ○ 명관 : 이정보ㆍ제학 황경원(黃景源)
8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임금이 작(爵)을 받은 지 60주년이 됨. 왕비의 가례(嘉禮)를 행함. 왕비의 수두(水痘)가 낫다. 세손(世孫)을 책봉하다. 5가지 경사. 초시를 면제하다. 에서 심익운(沈翼雲) 등 11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너무 편암함을 경계하다.[戒太康] ○ 명관 : 우의정 민백상(閔百祥)ㆍ제학 황경원
37년 신사 9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 세손의 입학 에서 권극(權極) 등 31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과거 제도. 시관 : 이정보(李鼎輔)
38년 임오 3월 알성시에서 권이강(權以綱) 등 3명을 뽑았다. 표의 제목 : 주 나라 강숙(康叔)이, 임금이 명하여 위후(衛侯)로 봉해준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윤동탁(尹東度)
4월 식년시에서 조진형(趙鎭衡) 등 37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덕유여모(德輶如毛)
동년 생원 박수문(朴垂聞)과 진사 이관조(李觀祚)를 뽑았다.
7월 정시 임금이 세자를 대리시켰다가 다시 정사를 봄. 세손의 마마가 낫다. 세손의 가례 3경사 합동 기념. 초사에 천 명 에서 신상권(申尙權) 등 1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곽광(藿光)이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임명함을 사례하다. ○ 명관 : 좌의정 홍봉한(洪鳳漢)ㆍ전 대제학 김양택(金陽澤)
39년 계미 정월 기로(耆老) 정시 그날로 합격 발표하여 모두 통정(通政)에 승진시키다. 에서 이종령(李宗齡)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노인에게 묻다.[詢玆黃髮]
10월 증광시 임금의 춘추가 70으로 즉위한 지 40년이다. 친히 경복궁에 임하여 장막을 쳤다. 에서 조덕성(趙德成) 등 70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지팡이를 짚고 조서(詔書)를 듣다.
동년 생원 김성환(金星煥)과 진사 한광정(韓光傳)을 뽑았다.
40년 갑신 2월 충량시(忠良試) 숭정(崇禎) 갑신년의 3주기로서, 특명으로 현절사(顯節祠)와 충렬사(忠烈祀)에 제사(祭祀)를 내리고 모셔진 그들의 자손 및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인의 자손을 응시하도록 하다.임금이 친히 숭정전(崇政殿)에 임하였고 홍패(紅牌)도 청 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에서 김노순(金魯淳) 등 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풍천(風泉) ○ 명관 : 홍봉한ㆍ이정보(李鼎輔)
2월 강화 별시에서 유택하(柳宅夏)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억위보장(抑爲保障) ○ 시관 : 판서 김양택
4월 정시 세손이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됨. 그날로 합격을 발표함 에서 민홍렬(閔弘烈)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이견대인(利見大人)ㆍ명관 : 홍봉한. 주문 : 이정보(李鼎輔)
41년 을유 3월 식년시에서 서호수(徐浩修) 등 52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아아, 이해 이 과거가 몇 회인고. 지난 일을 추억하니 감회를 일으키는구나.[此年此科於戱幾回追憶昔年臨殿興懷] ○ 명관 : 우의정 김상복(金相福)
동년 생원 서득량(徐得亮)과 진사 남경택(南景宅)을 뽑았다.
3월 알성시 세손을 이끌고 문묘에 작헌례를 행함 에서 강이정(姜彝正)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공자가 말하기를, “내 점(點)을 찬성한다.” 하였다. ○ 명관 : 김상복. 홍문관 제학 : 서명응(徐命膺)
42년 병술 2월 정시 중시 대거 초시에 5백 명 에서 이한경(李漢慶) 등 1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만년(晩年)에 스스로 반성하여 더욱 힘씀.[暮年自省益勉]
3월 중시에서 이성원(李性源) 등 8명을 뽑았다. 제목 : 우리나라에서 중국이 8장(章)과 9음(音)을 내려 준 것을 받으려 하는 전(箋) ○ 명관 : 김상복
동월 정시 세손의 병환이 회복되다. 에서 조재준(趙載俊) 뒤에 시준(時俊)이라 고치다. 등 6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충효(忠孝) ○ 명관 : 판서 김양택(金陽澤) ○ 이번 과거부터 초시와 강경(講經)을 폐지하고 한결같이 옛대로 하였다.
4월 정시 임금의 병이 회복되다. 에서 홍찬해(洪纘海) 등 10명을 뽑았다. 시제 : 봄에 내리는 조칙[春詔] ○ 명관 겸 제학 : 남태제
9월 정시 임금이 건강이 작년 섣달부터 불편하다가 6월에 비로소 종묘를 참배하고, 8월에 명릉(明陵)에 행차하다. 세손을 거느리고 친히 춘당대에 임하다. 에서 서유인(徐有隣) 등 2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수레를 멈추고 앉아서 늦 단풍을 사랑하다.[停車坐愛楓林晩] ○ 명관 : 우의정 김치인(金致仁)ㆍ주문 황경원(黃景源)
43년 정해 3월 정시 친경(親耕) 친잠(親蠶)에서 김문순(金文淳) 등 3명을 뽑았다. 전(箋)의 시제 : 우리나라 성균관 학생들이 친경ㆍ친잠을 해서 백성들에게 의식(衣食)을 가르치기를 칭하다. ○ 명관 :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홍문관 제학 : 서명응(徐命膺)
9월 알성시 문묘를 참배하여 세손에게 작헌례를 행하게 하고 춘당대로 돌아왔다. 에서 김광묵(金光黙) 등 10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백성들이 자식처럼 온다.[庶民子來] ○ 명관 : 영부사 윤동탁(尹東度)
12월 중시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태조가 상왕(上王) 위에 있을 때의 정해년 중시의 예에 따라 친히 경복궁에 임하여 그날로 발표하고 천동(天童)과 도포와 말을 내려 주다. 에서 이지회(李之晦)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옛일을 생각하니 추모(追慕)하기 만배(萬倍)로다.
44년 무자 3월 식년시에서 조정(趙) 등 5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어버이에게 맛난 음식을 실컷 드리다.[親極滋味]
동년 생원 이노술(李魯述)과 진사 이태원(李太源)을 뽑았다.
9월 정시 중전(中殿)의 혼례한 지 10년이 되고, 임금의 춘추가 80을 바라봄. 두 경사를 합쳐 기념 에서 신사찬(申思贊) 등 9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춘당대의 가을빛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春塘秋色古今同] ○ 명관 : 판부사 김상복(金相福)
45년 기축 2월 정시 세손(世孫)을 위하여 식희과(飾喜科)를 보였다 에서 홍낙임(洪樂任) 등 3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지성이 서로 합함은, 나는 문손을 보겠다.[至誠相孚予見文孫] ○ 명관 : 우의정 김상철(金尙喆)
5월 기로 정시 문무관 중 나이 70 이상의 응시를 허락하다. 에서 윤득성(尹得聖)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군신기구(君臣耆耈) ○ 명관 : 좌의정 김양택(金陽澤)
9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당초에는 춘당대에서 보여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경희궁으로부터 창덕궁에 행차한 후에 큰 뇌성과 비로 말미암아 경희궁으로 돌아가 다음 날 숭정전(崇政殿)에서 보임. 에서 최해녕(崔海寧)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우리 백성의 옷과 양식은 오직 양잠과 농사에 달려 있다.
46년 경인 12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 친히 경복궁에 임하다. 에서 신대승(申大昇)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창승월광(蒼蠅月光) ○ 명관 : 김치인(金致仁)ㆍ홍문관 제학 서명신(徐命臣)
47년 신묘 2월 정시에서 이상암(李商巖) 뒤에 의익(義翊)으로 고침.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我愛其禮] ○ 명관 : 김양택(金陽澤)
3월 식년시에서 남봉로(南綘老) 등 7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담(膽)은 크고자 하며 마음은 작고자 한다.[膽欲大心欲小] ○ 명관 : 좌의정 한익모(韓翼諅)
10월 정시 중국에 대한 교섭이 성공했고 종묘의 예를 제정하였다. 에서 김상정(金相定) 등 2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편안함에 빠질까 경계하다.[戒深太康] ○ 명관 : 김양택ㆍ주문 황경원(黃景源)
48년 임진 2월 기로과에서 신광수(申光洙) 등 6명을 뽑았다. 시의 시제 : 우리나라 기로사(耆老社)의 제신이 위(衛) 나라 무공(武公)의 억계시(抑戒詩)를 바치다. ○ 명관 : 김상철(金尙喆)
8월 탕평 별시에서 임종주(任宗周) 등 11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무당(無黨) 무편(無偏)에 왕도(王道)가 평평(平平)하고, 무편 무당에 왕도가 탕탕하다.[無黨無偏王道平平無偏無黨王道蕩蕩] ○ 명관 : 채제공(蔡濟恭)ㆍ주문 원인손(元仁孫)
9월 정시 육상궁(毓祥宮)에게 시호를 더 올리다.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다. 에서 서유신(徐有臣)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남훈전(南薰殿)에 앉아서 오현금(五絃琴)을 타다.[坐南薰殿彈五絃琴]
49년 계사 윤3월 증광시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에게 휘호(徽號)를 소급하여 올림. 그 임금과 정성왕후(貞聖王后)와 중전(中殿)에게 존호(尊號)를 더 올린 다섯 가지 경사 기념으로 개최 에서 이회수(李會遂) 등 6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어버이를 사랑함을 보배로 삼는다.[仁親以爲寶] ○ 명관 : 김양택(金陽澤)
동년 생원 조형규(趙亨逵)와 진사 김정근(金正根)을 뽑았다.
10월 임금이 친히 임한 정시 선조가 의주(義州)의 용만관(龍灣館)에서 돌아온 해이므로 경운궁(慶運宮)에 나가 하례(賀禮)를 받음.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다. 에서 이겸환(李謙煥) 등 2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저 기욱(淇澳)에는 푸른 대가 우거졌구나.[瞻彼淇澳綠竹猗猗] ○ 명관 : 원인손(元仁孫)ㆍ주문 서명응
50년 갑오 정월 등준시 세조조 병술년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근정전(勤政殿)에 나가 종1품 이하로부터 당상관 3품에 이르기까지의 신하에게 시험을 보여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여 2품 이상에게 말을 내려 주고 2품 이상은 초헌을 타고 유가(遊街)하게 하다. 에서 조덕성(趙德成)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경연(經筵) 특진관(特進官)이 근정전 앞에서 이전ㆍ삼모(二典三謨)를 바치다.
3월 식년 김진구(金振久) 등 4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뜻을 가진 자,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다.[有志者事竟成]
동년 생원 김재순(金在淳)과 진사 정재원(丁載遠)을 뽑았다.
8월 정시에서 김노영(金魯永) 등 2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새해와 함께 봄을 같이 하도다.[與歲同春] ○ 명관 : 신회(申晦)ㆍ주문 서명응
9월 평안도 도과에서 계덕해(桂德海)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원원(元元)[모든 백성을 말함] ○ 시관 : 김종정(金鍾正)
동월 함경도 도과에서 주중순(朱重純)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함길도[咸吉道] ○ 시관 : 판서 정상순(鄭尙淳)
11월 증광시 숙종이 병환이 쾌차되던 회갑[60주년]. 임금의 춘추가 90을 바라봄. 병환이 회복되고 왕비 혼례한 지 15년이 되다. 4경사를 합동 경축 에서 이영철(李永喆) 등 4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섣달눈이 풍년될 징조요, 상신[(上辛 : 새해의 첫 신일(辛日)]에 기곡(祈穀)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이규섭(李奎燮)과 진사시에서 이기양(李基讓)을 뽑았다.
51년 을미 5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경복궁에서 보임. 에서 정극환(鄭克煥) 등 3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오륜 가운데 충ㆍ효가 먼저다.[五倫中忠孝先] ○ 명관 : 영의정 신회(申晦)ㆍ대제학 이휘지(李徽之) ○ 시관으로서 사사로이 부정을 행함이 많다고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였으므로 병신년 7월 사헌부에서 파방(罷榜)하자는 아룀을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정유년 7월 대신에게 수의(收議)하기를 명하였으나 사헌부의 아뢴 글 중의 부정을 했다고 한 정극환(鄭克煥)ㆍ송익언(宋翼彥)ㆍ송재중(宋載中)ㆍ이상진(李尙進)ㆍ이진상(李鎭常)ㆍ오한원(吳翰源)ㆍ김재기(金載器)ㆍ조덕윤(趙德潤)ㆍ홍시부(洪時溥)ㆍ이심연(李心淵)ㆍ박종집(朴宗集)ㆍ이복일(李復一) 등 12명인데, 명관이 이미 죽었으므로 질문할 곳이 없어 모두 파방하고 다만 직부(直赴)한 이와 및 무과(武科)만 그대로 두었다. 파방된 자 윤익동(尹翊東)ㆍ연동헌(延東憲)ㆍ김낙성(金樂誠)ㆍ이양원(李養遠)ㆍ허책(許策)ㆍ이방인(李邦仁) 모두 음사(蔭仕)하고, 홍문영(洪文泳)ㆍ이복윤(李福潤)은 다시 다른 과거에 급제하였다.갑진년 8월 세자의 책례(冊禮)의 경사를 당하여 이로 말미암아 전교(傳敎)로 부정을 범한 12명 이외의 나머지 8명을 특명으로 복과(復科)시켰다. 경술년 6월 나라에 경사가 있어 12도 특명으로 모두 복과시켰다. 두 송씨와 이심연(李心淵)은 복과되기 전에 죽었다.
8월 임금이 친히 임석한 근정전 정시 임금이 건강이 더욱 좋아져서 하례를 드림.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함. 에서 이연년(李延年) 등 2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동한(東漢)의 중흥(中興)한 여러 장수들이 28장수를 남궁운대(南宮雲臺)에 그려 부친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이익정(李益炡) 주문 : 이휘지(李徽之)
9월 임금이 친히 임석한 문과 전시 1일에 과거를 보였고, 9일날에 구일제(九日製)를 짓게 하고, 후에 전일의 직부(直赴)한 자와 1일 과거와 구일제에 합격한 자를 합쳐서 전시를 베풀어 비록 시골에 있어서 응시하지 못한 자라도 합격자 명단 끝에 붙이게 함. 에서 심낙수(沈樂洙) 등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남훈전에 앉았는데 팔원(八元) 팔개(八凱)가 모시다.[坐南薰殿元凱侍] ○ 명관 : 이은(李溵)ㆍ주문 이휘지 등 5명
11월 현량과에서 조진관(趙鎭寬)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꿈에 좋은 보필자를 얻다.[夢得良弼]
12월 정시 세손으로 정사(政事)를 보게 함을 하례하다. 에서 임도호(林道浩)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한 명의 원량으로 만 나라가 바르게 되다.[一人元良萬邦以貞] ○ 명관 : 영의정 김상철(金尙喆)ㆍ주문 이복원(李福元)
52년 병신 2월 기로과에서 강세황(姜世晃) 등 2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풍년을 송(頌)하다.[年豐頌] ○ 명관 : 한익모(韓翼謩)ㆍ주문 이휘지(李徽之)
당저(當宁 현재 임금 즉 정조) 10월 별시 금년 봄에 숙종과 인경(仁敬)ㆍ인현(仁顯)ㆍ인원(仁元)왕후와 임금(영종), 정성(貞聖)왕후와 중궁(中宮)에게 휘호(徽號)를 올리고 저경궁(儲慶宮) 육상궁(毓祥宮)에게 시호를 올린 경사로 증광시를 보여 초시의 합격 발표를 하기 전에 영종의 승하로 정지되었다가 인산(因山) 후에 별시로 보였다. 9월 2일에 지난 봄의 증광 초시에 시권을 제출하여 명부에 오른 사람을 두 곳으로 나누어 초시를 행하며, 10월 1일에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임하여 친히 출제한 대책에는 다만 서울과 지방에서 한 명씩을 뽑았다. 에서 윤행리(尹行履) 뒤에 이(頤)로 고침 등 11명을 뽑았다.
10월 중시에서 오준근(吳濬根) 뒤에 정근(正根)으로 고침 등 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에서 영주(靈州)에 돌을 세워 ‘설치수백왕, 제흉보천고(雪耻酬百王 除凶報千古)’ 새김을 하례하다. ○ 명관 : 정존겸(鄭存謙)
당저 원년 정유 4월 즉위 증광시에서 유성한(柳星漢)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김유기(金裕己)와 진사 목조눌(睦祖訥)을 뽑았다.
10월 식년시에서 남술의(南述毅) 등 33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인(仁)한 사람이라야 능히 남을 미워할 수 있다. ○ 재래로 강경(講經) 점수가 14분이 되면 곧 신래(新來)를 부르던 법을 처음으로 폐지하고 모든 거자(擧子)들이 모두 강경을 마친 후에 합계하여 우등을 뽑다.
동년 생원 원윤손(元允孫)과 진사 이원성(李源誠)을 뽑았다.
10월 토역(討逆) 정시에서 박한규(朴漢圭) 등 9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신(信)은 임금의 큰 보배다.[信者人君之大寶]
2년 무술 7월 알성시에서 박종정(朴宗正) 등 3명을 뽑았다.
8월 정시 영종ㆍ진종(眞宗)을 종묘에 합부함. 정성왕후(貞聖王后)와 효순왕후(孝純王后)를 종묘에 합부함. 대비(大妃)와 혜경궁(惠慶宮)에게 존호를 올림. 중궁을 책봉함. 정빈(靖嬪) 이씨에게 시호를 올리다. 도합 9경사 ○ 명관 : 정홍순(鄭弘淳)ㆍ주문 이휘지(李徽之)ㆍ김종수(金鍾秀) ○ 초시에서 두 곳으로 나누어 3백 명을 뽑다. 에서 최수옹(崔粹翁) 등 8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의(義)와 이(利)
3년 기해 8월 남한(南漢) 별시 영능(寧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여주(驪州)ㆍ이천(利川)ㆍ광주(廣州) 3읍 선비에게 시험을 보이다. 에서 민태혁(閔台爀) 등 3명을 뽑았다. 시제 : 덕(德)에 있지, 험(險)함에 있지 않다.[在德不在險]
4년 경자 3월 식년시에서 김우해(金宇海) 등 44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용(龍)을 맨 끝에 임명한 것을 논하라.[命龍于末論] ○ 명관 : 정홍순(鄭弘淳)
동년 생원 이후연(李厚延)과 진사 정가용(鄭可容)을 뽑았다.
6년 임인 3월 알성시에서 조항진(趙恒鎭) 등 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동한(東漢)에서 임금이 노(魯)를 지나다가 공자(孔子) 및 72제자에게 제사를 드리고, 강당에 나가 태자로 하여금 제생(諸生)에게 경서를 강론하게 함을 청하다. ○ 명관 : 영의정 서명선(徐命善)ㆍ주문 김종수(金鍾秀)
10월 평안도 별시에서 조몽언(趙夢鶠) 등 9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황하에 비하다. ○ 시관 : 정창성(鄭昌聖)
동월 함경도 별시에서 박문원(朴聞遠)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천일생수(天一生水) ○ 시관 : 정일상(鄭一祥)
12월 정시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찬이 완성되다. 에서 신엄(申曮) 등 15명을 뽑았다. 초시 3백 명 ○ 전(箋)의 시제 : 우리나라의 정부 제신(諸臣)이 계마수조(繫馬樹棗)를 내려준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우의정 김익(金熤)ㆍ판서 정창성(鄭昌聖)
7년 계묘 4월 증광시 영종의 세실을 정하고 원자(元子)의 칭호를 정하다. 에서 이면긍(李勉兢) 등 38명을 뽑았다. 본조의 종친과 문무 백관이 《보감(寶鑑)》 편찬 기념으로 과거를 베풀고 세실(世室)을 정한 것과 원자(元子)의 호를 시정한 것을 하례하다.
동년 생원 성임(成稔)과 진사 유산주(兪山柱)를 뽑았다.
9월 정시 경모궁(景慕宮)ㆍ혜경궁(惠慶宮)에게 존호를 올림.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이 이루어짐. 세 가지 경사 에서 한상신(韓商新)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사람을 알아볼 줄 알면 철(哲)이니, 능히 사람을 벼슬 줄 수 있다.[知人則哲能官人]
10월 식년시에서 최벽(崔璧)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수(李樹)와 진사 유풍주(兪豐柱)를 뽑았다.
8년 갑진 9월 정시 세자 책봉하다. 에서 정최성(鄭崔成) 등 18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중희당(重熙堂) ○ 명관 : 홍낙성(洪樂性)ㆍ주문 오재순(吳載純)
10월 정시 영종 정성왕후(貞聖王后) 대비(大妃) 경모궁(景慕宮)ㆍ혜경궁(惠慶宮)에게 존호를 올리다. 에서 한치응(韓致應)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 나라에서 후직(后稷)을 원구(圜丘)에 배향하고 문왕(文王)을 명당(明堂)에 모셔 제사지냄으로써 높은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히 한 도리를 칭하하다. 부의 제목 : 우여극석 여보극(于汝極錫汝保極) 시관 : 위와 같음ㆍ초시에 6백 명
9년 을사 3월 알성시에서 김이익(金履翼) 등 5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대성전(大成殿) ○ 명관 : 정재겸(鄭在謙)ㆍ주문 오재순(吳載純)
10월 토역 정시 초시에 1백 50명이 임금이 친히 춘당대에 임하다. 에서 장지면(張至冕) 등 1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울지경덕(尉遲敬德)이 태종이 말을 달려 들어가 구출하였던 날에 이르기를, “전일에 모든 사람이 공(公)이 반드시 배반하리라고 생각하였으나 내 홀로 변명하였더니 이 은혜를 갚는 것이 어찌 이처럼 빠를 줄이야 알았으리오.” 하고, 금ㆍ은 한 상자를 내려준 것을 감사하다. ○ 명(銘) : 은사출(恩賜出) ○ 명관 : 김익(金熤)
10년 병오 2월 별시 중시 대거ㆍ초시에 3백 명 에서 박유환(朴猷煥)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조빈(曹彬)이 강남을 정벌하러 갈 때에 금중(禁中)에서 술을 주어 취하자 그의 얼굴을 물로 적시게 하고, 그의 등을 어루만져 난폭히 약탈하지 말 것을 경계시키고 평정하는 날 사상(使相)의 인(印)을 주겠다고 말한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정존겸(鄭存謙)
3월 중시 춘당대에서 개최 에서 목만중(睦萬中) 등 8명을 뽑았다. 조칙(詔勅)의 시제 : 당 나라에서 곽자의(郭子儀)를 분양왕(汾陽王)이 봉하는 조칙 ○ 명관 : 서명선(徐命善)ㆍ주문 이명식(李命植)
3월 식년시에서 오대곤(吳大坤) 등 32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봉황새가 저 높은 언덕에서 울고 오동(梧桐)이 저 조양(朝陽)에 나도다.[鳳凰鳴矣于彼高岡梧桐生矣于彼朝陽] ○ 명관 : 정존겸(鄭存謙) ○ 원방(元榜)의 합격자 명단임을 정운제(鄭運齊)와 유지원(柳之源)이 전시에서의 구(句) 수(數)가 심히 적어 제거되고 나중 명단에 추가하여 붙여짐.
동년 생원 김익중(金翼重)과 진사 권찬(權)을 뽑았다.
11년 정미 정시 역적을 토벌한 것과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린 두 가지 경사 에서 이의강(李義綱)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이 봄술을 만들어 장수를 빈다.[爲此春酒以介眉壽] ○ 명관 : 홍낙성ㆍ주문 오재순ㆍ오양호(吳良浩)
13년 기유 2월 알성시에서 신헌조(申獻朝)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다. ○ 명관 : 김익(金熤)
3월 식년시에서 서영보(徐榮輔) 등 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유은주(兪殷柱)와 진사 윤기환(尹箕煥)을 뽑았다.
11월 춘당대 시 관무재(觀武才) 대거. 현륭원(顯隆園)에 이장(移葬) 후에 대여(大轝)를 따른 군사에게 시험을 보임. 에서 조득영(趙得永)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자흥시야(子興視夜)
14년 경술 2월 수원 별시 수원ㆍ광주ㆍ과천 3읍에서 시험 에서 이덕승(李德昇)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제목 : 고굉군(股肱郡)
2월 알성시에서 김경(金憬)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생민(生民) 이래로 공자보다 성(盛)한 이가 있지 않았다.[自生民以來未有盛於夫子] ○ 명관 : 채제공(蔡濟恭)ㆍ주문 홍양호(洪良浩)
9월 증광시 원자 탄생(元子誕生) 에서 이문회(李文會) 등 47명을 뽑았다. 송의 시제 : 일인 원량 만방이정(一人元良萬邦以貞) ○ 명관 : 채제공ㆍ주문 오재순
동년 생원 이상우(李尙愚)와 진사 서준보(徐俊輔)를 뽑았다.
16년 임자 3월 식년시에서 이조원(李肇源) 등 59명을 뽑았다. 시제 : 삼각산명(三角山銘) ○ 명관 : 박종악(朴宗岳)ㆍ주문 예문관 제학 서호수(徐浩修)
동년 생원 권심도(權心度)와 진사 김진백(金鎭白)을 뽑았다.
18년 갑인 2월 알성시에서 김근순(金近淳)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문무길보(文武吉甫)
2월 춘당대 정시 대비 춘추 50이 되고 혜경궁의 춘추 60이 됨. 에서 권준(權晙) 등 5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선군(先君)이 이르기를, “너의 만수무강을 점친다.[君曰卜爾萬壽無疆]” ○ 명관 : 김희(金熹)ㆍ주문 정창순(鄭昌順)

[주D-001]치도(治道)의 본말(本末) : 정치하는 도리에는 본(本)이 있고 말(末)이 있는데, 어떤 것이 본이고 어떤 것이 말인가를 기술하라는 것이다.
[주D-002]금ㆍ은의 …… 청하다 : 우리나라에서 명 나라에 방물(方物)을 바치는데, 명 나라에서 금ㆍ은을 많이 요구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금ㆍ은이 많이 산출되지 않는다 하여 감면(減免)을 청한 것이다.
[주D-003]7월 편도전[七月篇圖箋] : 《시경》에 1년 간의 농가의 일을 노래한 <7월편>이 있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임금에게 올려 농민의 어려움을 알게 하라는 것이다.
[주D-004]종학(宗學) : 종학은 왕족을 모아서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다.
[주D-005]왕정(王政)의 손익(損益) : 삼대(三代)의 정치에 한(漢) 나라에서는 충(忠)을 숭상하고, 상(商) 나라에서는 질(質)을 숭상하며, 주(周) 나라에서는 문(文)을 숭상하였는데, 시대마다 손익(損益)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답습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D-006]수성난(守成難) : 당 나라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창업(剏業)과 수성(守成)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하고 묻자, 혹은 창업이 어렵다 하고 혹은 수성이 어렵다 하였는데, 창업이란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키는 개국(開國)을 말한 것이고, 수성이란 그것을 이어 받아서 지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07]순성(巡省) : 천자(天子)가 지방을 순시하며 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주D-008]치세(治世)에 …… 영웅 : 후한(後漢) 때에 허소(許劭)가 인물을 잘 알아보고 평론하기로 유명하여 조조(曹操)가 찾아가서 자기의 인물에 관한 평론을 구하였더니, 허소가 이와 같이 답하였다고 한다.
[주D-009]한유(韓愈)를 …… 청하다 : 당 나라 현종(玄宗) 때에 인도에서 온 부처의 사리[佛骨]를 궁중에 맞아들여 성대하게 공양하였는데, 한유(韓愈)가 글을 올려 불교를 배척하니, 현종이 크게 노하여 한유를 조주(潮州)로 귀양보냈다.
[주D-010]정통(正統) : 역대 왕조를 계승하는 순서에 대하여 정통이니 아니니 하는 말이 있다. 예를 들면 중국 삼국 시대에 유비(劉備)가 정통이니 조비(曹丕)가 정통이니 하는 것이 후세 사가(史家)들의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주D-011]왕도론(王道論) : 《맹자》에 왕도와 패도(覇道)와를 구별하여 말하였는데, 순수한 인의(仁義)의 정치는 왕도요, 공리주의(功利主義)는 패도라 하였다.
[주D-012]우백익(虞伯益)이 …… 청하다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있는 말이다.
[주D-013]주(周) 나라 …… 청하다 :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에 큰 개[犬]를 바치는 자가 있으므로 소공(召公)이 그것을 받지 말라고 여오편(旅獒篇)을 지어 올린 고사가 있다.
[주D-014]주(周) 나라 …… 축하한다 : 은 나라 말기에 주 나라 문왕(文王)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두 노인이 먼 곳에서 주 나라로 옮겨가니, 천하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주 나라로 쏠렸다 하는데, 이 두 노인이 다름 아닌 백이와 강태공이었다 한다.
[주D-015]간림(諫林) : 《간림》은 역대의 어진 신하들이 임금을 간한 좋은 말을 모아서 편찬한 책 이름이다.
[주D-016]한 나라 …… 감사하다 : 한 나라 고조(高祖)가 후궁의 소생인 여의(如意)를 사랑하여 태자 영(盈)을 폐하려고 하나 여후(呂后)가 장량(張良)의 꾀를 써서 상산(商山)에 숨어 있는 네 노인[四皓]을 불러 왔더니, 고조가 태자를 폐할 것을 중지하고 네 노인에게 태자를 잘 보호할 것을 부탁하였다.
[주D-017]당(唐)의 …… 지어 올리다 : 원화(元和)는 당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성덕시는 헌종의 즉위 이래로 간신을 물리치고 반적들을 토벌한 헌종의 덕을 칭송한 것이다.
[주D-018]당(唐) 나라 두보(杜甫)가 …… 감사하다 : 당 나라 두보가 난중에 숙종(肅宗)을 따라다니다가 임금에게 허락을 얻어 먼 곳에 있는 처자를 보러 가면서 ‘북정(北征)’이라는 장편의 기행시를 지은 것이 있다.
[주D-019]송(宋)의 팽사영(彭思永)이 …… 청하다 : 내지는 임금의 특명인데, 벼슬의 계자(階資)를 올릴 때에 정부를 통한 정당한 순서를 밟지 않고, 임금의 사사로운 은혜로 특명을 내리는 것을 부당하다는 것이다.
[주D-020]송(宋) 나라 …… 바치다 : 《소학》에 나온 말로 송 나라 정이(程頤)가 학교 교육에 대한 수정안을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21]제치보방(制治保邦) : 《서경》에 나오는 말로, “난(亂)하기 전에 치(治)를 마련하고, 위태롭기 전에 나라를 보전하라.[制治於未亂保邦於未厄]”는 말을 줄인 것이다.
[주D-022]송(宋)의 장제현(張齊賢)이 …… 바치다 : 송 나라 태조가 낙양(洛陽)에 행차했을 때, 장제현(張齊賢)이 포의(布衣)로 와서 보고 열 가지 대책을 진술하였더니 태조가 그 중 네 가지만을 채택하자, 남은 조목도 모두 옳은 것이라고 고집하였다. 태조가 노하여 무사를 시켜 끌어내었는데, 태조가 돌아와서 그 아우인 태종에게 “내가 이번 걸음에 오직 장제현을 얻었다. 나는 벼슬을 주지 않겠지만 장래에 너를 도와서 정승이 될 인물이니 그리 알라.” 하였다.
[주D-023]이 마음을 …… 행하소서 : 제 나라 선왕(宣王)이 죽으러 가는 소[牛]를 보고 불쌍히 여겨 놓아 준 일이 있었는데, 맹자가 왕을 보고, “이 마음을 미루어서 이런 인자한 정치를 행하소서.” 하였다는 말이 《맹자》에 나온다.
[주D-024]당 나라 이필(李泌)이 …… 청하다 : 당 나라 이필이 어려서 천재로 이름이 있어 현종(玄宗)이 불러 보고 기특히 여겨 태자와 같이 놀게 하여 친구가 되게 하였다. 뒷날, 이필이 형산(衡山)에 가서 숨어 공부하고 있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난리 때에 숙종(같이 놀던 태자)을 도와 군중(軍中)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는데, 난리가 평정되자 다시 형산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하였다.
[주D-025]육경(六經) : 육경(六經)은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이다.
[주D-026]한(漢) 나라 정중(鄭衆)이 …… 사양하다 : 정중(鄭衆)은 한 나라 때의 어진 환관(宦官)인데, 환자(宦者)에게는 원래 벼슬을 주지 않는 것이다. 임금이 그를 특별히 군사마에 임명하였다.
[주D-027]송(宋) 나라 조보(趙普)가 …… 청하다 : 송 나라 태조가 눈오는 밤에, 미복(微服)으로 조보의 집에 찾아가서 태원[북한(北漢)]을 토벌할 것을 의논하니, 조보가 “태원이 서북 오랑캐를 질러 막고 있는데, 태원을 먼저 멸하면 서북 오랑캐가 우리와 직접 부딪치게 될 것이니, 태원은 이 뒤에 토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주D-028]명(明) 나라 한취선(韓取善)이 …… 청하다 :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주D-029]하(夏)의 군신(群臣)이 …… 치하하다 : 공자가 말하기를, “우(禹) 임금은 나쁜 옷[菲衣]과 거친 음식[惡食]을 먹으면서 토지 개간과 귀신 섬기는 데 정성을 쏟았다.” 하였다.
[주D-030]조선에서 …… 청하다 : 임진왜란 후에 명 나라 군사가 철병(撤兵)할 때의 일이다.
[주D-031]송(宋) 나라 장준(張浚)이 …… 청하다 : 남송(南宋)의 수도(首都)가 한쪽 구석인 항주(杭州)ㆍ임안(臨安)에 있으므로 장준(張浚)이 이렇게 말하였다.
[주D-032]한(漢) 나라 제갈량(諸葛亮)이 …… 청하다 : 제갈량이 후주(後主)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 중에 있는 구절이다.
[주D-033]당(唐) 나라 …… 감사하다 : 당 나라 헌종 때에 서천 절도사(西川節度使) 유벽(劉闢)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고숭문을 시켜 토벌하였는데, 숭문이 연달아 이기므로 서천을 토벌하는 모든 장수를 지휘하는 권한을 숭문에게 일임하였다.
[주D-034]당 나라 이필(李泌)이 …… 감사하다 : 당 나라에서 이필을 우대하여 봉래궁(蓬萊宮) 옆에다 서원(書院)을 지어 주어 거처하게 하였다.
[주D-035]당 나라 태종이 …… 한 조칙(詔勅) : 당 나라 태종이 곧은 말 잘하는 위징(魏徵)을 사랑하여 그가 죽은 뒤에 친히 비문(碑文)을 지어서 세워 주었다. 그 후에 후군집(侯君集)이 반역으로 죽자 일찍이 위징이 후군집을 정승이 될 재목이라고 추천한 일이 있었으므로 태종이 위징의 비(碑)를 넘어뜨렸다.그 뒤에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가서는 깊이 후회하고 말하기를, “위징이 만일 살아 있었더라면 나를 간하여 이번 걸음이 없게 하였을 것이다.” 하고 넘어뜨렸던 비를 다시 세워 주었다.
[주D-036]끝을 …… 기하다 : 《서경(書經)》에 있는 말이다.
[주D-037]송(宋) 나라 …… 청하다 : 송 나라 인종(仁宗) 때에 지방에서 ‘천하태평(天下太平)’이라는 네 글자가 천연적으로 쓰여져 있는 감나무를 바쳤는데, 구양수(歐陽修)는 그것을 상서(祥瑞)라고 발표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주D-038]시조(時措) : 시조는 정치를 때에 따라서 적의(適宜)하게 변통하여 조처한다는 말이다.
[주D-039]사기(史記) : 《사기(史記)》는 한 나라 사마천(司馬遷)이 처음으로 기전체(紀傳體)를 사용하여 중국의 상고(上古)로부터 그의 당대인 무제(武帝)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적은 책
[주D-040]각촉시(刻燭詩) : 불을 켠 초에다 금을 그어 놓고 그 금에 닿을 동안에 글을 짓도록 하는 시험을 말한다.
[주D-041]전연(澶淵)에서 …… 송(頌) : 송 나라 진종(眞宗) 때에 거란이 전연(澶淵)에까지 침략하여 왔으므로 진종이 직접 출전(出戰)하러 가서 거란과 화의(和議)를 맺아 많은 세폐(歲幣)를 바치기로 하고 돌아왔다.
[주D-042]한 나라 정균(鄭均)이 …… 감사하다 : 한 나라 장제(章帝) 때에 정균은 청렴하고 행실이 착하기로 이름이 있었는데, 벼슬이 상서에 이르렀다가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임금이 동방을 순시[東巡]하다가 그의 집으로 찾아가 보고 종신토록 상서(尙書)의 녹(祿)을 주게 하였다.
[주D-043]당 나라 …… 감사하다 : 당 나라 덕종(德宗) 때에 이성이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우대하였다.
[주D-044]당 나라 …… 사양하다 : 당 나라 덕종(德宗) 때에 육지를 고공 낭중으로 임명하니, 육지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벌을 가할 때에는 벼슬이 높고 측근(側近)한 자에게 먼저 가하고, 상을 줄 때에는 지위가 낮고 소원(疎遠)한 자에게 먼저 주는 것이니, 큰 공에 먼저 상을 주어 여러 신하에게 두루 미치면 신도 이 임명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주D-045]한 나라 …… 칭하하다 : 한 나라 광무황제(光武皇帝)가 적미(赤眉)를 토벌했을 때 30만 명을 항복시키니, 노획(鹵獲)한 무기와 갑옷을 쌓은 것이 마이산(馬耳山)과 같았다는 것을 말한다.
[주D-046]한 나라 …… 사양하다 : 한 나라 환제(桓帝) 때에 강굉(姜肱)이 명망이 있었는데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으므로 화공(畵工)을 보내어 그의 얼굴을 그려 오라 하였다.
[주D-047]이괄(李适)의 …… 뽑음 : 인조(仁祖)가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공주(公州)로 파천하였기 때문이다.
[주D-048]송 나라 이강(李綱)이 …… 청하다 : 송 나라 때에 금(金) 나라 군사가 침입하여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두 황제를 잡아가고 송 나라의 신하인 장방창(張邦昌)으로 괴뢰정권(傀儡政權)을 세우고 갔는데 뒤에 장방창이 자진 사퇴하였으나 남송의 이강이 그 동안에 장방창이 황제 노릇한 죄를 추궁한 것이다.
[주D-049]하늘은 말하지 않는 성인[天者不言之聖人] : ‘하늘은 말하지 않는 성인’이요, 성인은 말하는 하늘이라는 옛말이 있다.
[주D-050]한 나라 소하(蕭何)가 …… 감사하다 :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촉중(蜀中)으로 들어갈 때에 수행했던 장사(將士)들이 중도에서 도망하는 자가 많았으며 한신(韓信)도 한왕(漢王)이 알아주지 않으므로 도망하여 갔는데,승상(丞相) 소하(蕭何)가 한신이 훌륭한 인재임을 알았으므로 한신이 도망하였다는 말을 듣자 한왕에게 알릴 여유도 없이 급히 한신을 뒤쫓아 가서 중도에서 데리고 왔다. 처음에는 한왕이 소하도 역시 도망한 것으로 알고 당황하였으나 소하가 돌아오니 한왕이 한편 기쁘면서도 한편 노하여 꾸짖기를 “허다한 사람이 도망갈 때에는 뒤쫓지 않더니 한신이 도망하자 나에게 말도 없이 갔으니 한신을 쫓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고 한 일이 있었다.
[주D-051]간우(干羽)춤을 양계에서 춤[舞干羽于兩堦] : 간우(干羽)는 방패에다 깃을 단 것이다. 춤추는 사람이 그것을 들고 춤을 추는 것인데, 순(舜)이 삼묘(三苗)를 치다가 굴복하지 않으므로 돌아와서 덕을 닦고 간우(干羽)의 춤을 양계(兩堦)에서 추니, 70일 만에 삼묘가 귀순하였다 한다.
[주D-052]걱정이 성(聖)을 열어줌[殷憂啓聖] : 은우(殷憂)는 크게 근심한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국가가 큰 우환을 겪는 것은 새 성주(聖主)의 운명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진(晉) 나라 유곤(劉琨)이 원제(元帝)에게 임금의 위에 오르기를 권고한 글에 있는 말인데, 이때의 과거는 인조반정 후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시제를 내었을 것이다.
[주D-053]산삭한 후 시(詩)가 없다[刪後無詩] : 본래의 《시경(詩經)》에는 글이 많았던 것을 공자가 지금 전하는 3백편으로 산삭(刪削)하였다. 그 뒤로 경(經)이 될 만한 시가 없었다.
[주D-054]한 나라 …… 청하다 : 한 나라 성제(成帝) 때에 주운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지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는 더러운 자들이니 상방(尙方)에서 말[馬]을 베는 칼을 빌려 주시면 아첨하는 신하 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 다른 신하들을 징계하겠습니다.” 하다가 임금이 노하여 죽이라 한 일이 있었다.
[주D-055]치우(蚩尤)를 토평(討平)하다 : 고대(古代) 황제(黃帝) 때에 이마[額]는 구리[銅]로 되었고, 큰 안개를 만들어 낸다는 치우라는 자가 난을 일으켰는데 황제가 그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주D-056]복수하여 수치를 씻다 : 이 해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다음 해이므로 이런 시제를 내었을 것이다.
[주D-057]어진 이를 …… 생각하다 : 《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인데,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속으로 스스로 반성하여 보라.” 하였다.
[주D-058]시무(時務)를 아는 것 : 후한(後漢) 때에, 유현덕(劉玄德)이 사마휘(司馬徽)에게 인재를 추천하여 주기를 청하니 사마휘가 답하기를, “유생(儒生)과 속사(俗士)는 시무(時務). 당대에 필요한 급무를 모른다. 시무를 아는 자는 준걸(俊傑)이다.” 하고 제갈량을 추천하였다.
[주D-059]숨은 것보다 더 들어남이 없음[莫見乎隱] : 《중용》에 있는 말인데, 숨은 데서 불선(不善)한 일을 하여도 결국은 나타나므로 군자는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데서도 삼간다 하였다.
[주D-060]한 나라 …… 사양하다 : 김일제는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흉노(匈奴)로부터 귀화한 사람으로, 지극히 충성스럽고 근신한 신하였다. 역적 마하라(馬何羅)가 무제를 암살하려고 할 때에, 김일제가 눈치를 먼저 채고 대단히 위급할 순간에 역적을 안아 뜰아래로 던져서 무제의 화를 면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때의 과거가 역적 심기원(沈器遠)을 처단한 뒤였으므로 이와 같은 시제를 내었을 것이다.
[주D-061]한 나라 …… 감사하다 : 한 나라 창읍왕(昌邑王) 때에, 하후승이 바른 말로 간하다가 옥에 들어간 일이었었는데 창읍왕이 폐위된 뒤에 선제(宣帝)가 하후승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으면서 전일의 일로 징계함이 없이 곧은 말을 하라 하였다.
[주D-062]백성은 물과 같다.[民猶水] : 《상서(尙書)》에 “백성은 물과 같고, 임금은 배와 같은데, 물이 배를 띄워 주기도 하고, 물이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는 말이 있다.
[주D-063]한 나라의 …… 청하다 : 《예기(禮記)》에 “벼슬로 녹을 먹는 사람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다른 일로 백성과 이익을 경쟁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주D-064]남훈금(南薰琴) :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노래하기를, “남풍(南風)의 따뜻함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불리우고 우리 백성의 불평을 푸는도다.” 하였다.
[주D-065]별의 변괴[星變] : 옛날에는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나면 그것을 변괴라 하여 인사(人事)에 관계가 있다고 보았는데 당시에 그런 일이 있었다.
[주D-066]한 나라에서 …… 치하하다 :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에 백호관에서 선비를 모아 오경(五經)을 토론하였는데 토론한 말을 기록한 책이 《백호통(白虎通)》이다.
[주D-067]당 나라에서 …… 감사하다 : 당 나라 태종이 제위(諸衛)의 장사(將士)들을 현덕전 뜰에서 활쏘기를 연습시키며 이내 친유(親諭)하기를 “너희들에게 다른 노역을 시키지 않고 오로지 활쏘기만 연습시키는 것은 일이 없을 때에는 내가 너희들의 스승이 되고 돌궐(突厥)이 침입하면 내가 너희들의 대장이 되기 위함이다.” 하였다. 신하들이 간하기를 “법률에 임금의 옆에서 무기를 휴대하면 교형(絞刑)에 처하는 것인데 지금 장수와 군사들로 하여금 전정(殿庭)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다가 만일 덤비는 자가 있으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백성은 모두 나의 적자(赤子)인데 어찌 친위(親衛)하는 장사들까지 의심을 하겠느냐.” 하였다.
[주D-068]재계하고 일을 처결하다.[齋居決事] : 한 나라 선제(宣帝)가 죄수를 처결할 때에는 별실에 거처하여 재계(齋戒)한 뒤에 처결하였으니, 그것은 신중히 하는 뜻이었다.
[주D-069]부열(傅說)이 …… 감사하다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에게 “나의 좌우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교훈을 다오.” 하였는데 이 말은 《상서(尙書)》 <열명편(說命篇)>에 있다.
[주D-070]당 나라 양염(楊炎)이 …… 청하다 : 당시의 덕종 황제가 경림대영고(瓊林大盈庫)를 설치하여 자물쇠를 따로 두고 사사로 쓰는 것이 많았으므로, 양염이 천하의 재부(財賦)를 모두 좌장(左藏) 즉 국고(國庫)에 속하게 하였다.
[주D-071]노(魯) 나라 장손진(藏孫辰)이 …… 청하다 : 춘추(春秋) 때에 노(魯) 나라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장손진이 노 나라에 가서 쌀을 사들이기를 청하였다.
[주D-072]토계명(土堦銘) : 요(堯) 임금이 검소하여 초가집에 살고 뜰을 흙으로 세 층계를 만들었다.
[주D-073]용흥강 : 함경도 영흥(永興)에 있는 강인데, 조선 태조가 일어난 고장이므로 용흥강(龍興江)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주D-074]당 나라 육상선(陸象先)이 …… 감사하다 : 당 나라 현종(玄宗)이 태자로 있을 때, 태평공주(太平公主)가 태자를 폐하려 하므로 육상선(陸象先)이 이에 반대하였다. 뒤에 현종이 태평공주의 도당(徒黨)을 처단하고 나서 육상선을 불러 칭찬한 말이다.
[주D-075]수성(守成)이 …… 어렵다. : 당 나라 태종(太宗)이 여러 신하들에게,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어느 것이 어려운가.”고 물으니, 혹은 “창업이 어렵다.” 혹은 “수성이 어렵다.” 하였다. 여기서 창업이란 왕업(王業)을 처음 일으킨 개국(開國)을 말한 것이요, 수성이란 그것을 받아서 지키는 것을 말한다.
[주D-076]소공이 …… 청하다 : 주 나라 성왕(成王) 때에 서족(西族)에서 오(獒)라는 큰 개를 바쳤으므로 태보(太保) 소공(召公)이 여오편(旅獒篇)을 지어 말하기를, ‘무익(無益)한 일을 가지고 유익한 일을 해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주D-077]순수(巡狩) : 천자(天子)가 제후의 나라에 순시[巡狩]하는 것.
[주D-078]태상(太常) 환영(桓榮)이 …… 사례하다 : 한 나라 명제(明帝)가 태자로 있을 때에 환영(桓榮)에게 상서(尙書)를 배웠는데, 임금이 된 뒤에 그를 스승으로 극진히 받들었다.
[주D-079]당 나라에서 …… 임명하다 : 당 나라 헌종(憲宗)이 회서(淮西)의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하려 하는데, 다른 신하들은 찬동하지 않고 오직 배도(裵度)와 무원형(武元衡)이 찬동하므로, 적이 자객(刺客)을 보내어 두 사람을 새벽 입궐(入闕)할 때에 습격하였는데, 무원형은 죽고 배도는 모자가 두터웠으므로 죽지 않았다. 후에 배도를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주D-080]경학을 선비에게 시험보이다 : 역대로 과거 문제가 문예(文藝)를 위주로 하였으므로 경학을 위주로 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주D-081]기형(璣衡)으로써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다 : 순(舜) 임금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이란 천문학의 기구를 만들어 칠정(七政)을 맞추었다. 칠정은 일월(日月)과 수ㆍ화ㆍ금ㆍ목ㆍ토 오성(五星)을 말한다.
[주D-082]미리 준비하다 : 《예기(禮記)》에 ‘유(儒)가 그 죽음에 낌은 기다림이 있는 것이며, 그 몸을 기름은 장차 유위(有爲)할려고 하는 것이니, 그 미리 준비함이 이와 같다.’ 하였다.
[주D-083]동지(冬至)에 관문(關門)을 닫음 :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동지(冬至) 날에는 관문(關門)을 닫고 행려(行旅)를 쉬게 한다.’ 하였다.
[주D-084]대풍가(大風歌)는 …… 잊지 않다 : 한 나라 고조(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고향인 풍폐(豐沛)에 들러서 부로(父老)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베풀고 술이 취하여 대풍가(大風歌)를 지어 부르기를 ‘큰 바람이 일어남이여 구름이 날리는구나. 어찌하면 맹사(猛士)를 얻어 사방(四方)을 지킬꼬’ 하였으니, 이 끝 구절이 곧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뜻이란 것이다.
[주D-085]소공(召公)이 …… 청하다 : 주 나라 성왕(成王)이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소공(召公)을 시켜 먼저 터를 보게 하였다. 새 도읍이 완성된 후에 소공이 왕에게 폐백(幣帛)을 올리며 소고(召誥)를 지어 왕에게 아뢰기를 ‘왕은 빨리 공경하는 덕을 행하소서. 나는 왕을 위하여 하늘에 빌어 명(命)을 길게 하리라.’ 하였다.
[주D-086]탕반명 : 탕(湯) 임금이 반(盤)에다 명(銘)을 지어 새기기를 ‘날로 새롭고 또 날로 새롭다.[日新又日新]’ 하였다.
[주D-087]영포(英布)가 …… 감사하다 : 초(楚) 나라와 한(漢) 나라가 서로 싸울 때에 한 나라에서 변사(辯士) 수하(隨何)를 보내어 초의 편인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를 달래어 한 나라로 데리고 왔다. 영포가 와서 처음으로 한왕(漢王)을 보니, 한왕이 심히 거만스럽게 두 계집을 시켜 발을 씻으면서 영포를 대하였다. 영포는 분하고 실망하여 나와서 자살(自殺)하려 하였다가 자기를 위하여 준비한 처소로 가보니, 거처와 음식의 화려하고 풍부하기가 한왕의 처소와 같은 것을 보고는 소망에 지나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주D-088]우(虞)의 백익(伯益)이 …… 청하다 : 《상서(尙書)》 < 대우모편(大禹謨篇)>에 백익(伯益)이 순(舜) 임금에게 아뢴 말이다.
[주D-089]안일함이 없어야 한다 : 주공(周公)이 무일편(無逸篇)을 지어 성왕(成王)을 훈계하였는데, 그 첫머리에 있는 구절이다.
[주D-090]위청(衛靑)이 …… 사양하다 : 위청(衛靑)은 노예(奴隸) 출신으로 그의 누이가 무제(武帝)의 황후가 되니 위청이 대장군이 되어 흉노(匈奴)를 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무제가 그의 어린 세 아들까지 봉후(封侯)하였다.
[주D-091]한신(韓信)이 …… 청하다 : 한신(韓信)이 한 나라의 대장이 된 뒤에, 한왕(漢王)이 그에게 항우(項羽)를 칠 계책을 물으니 한신이 말하기를, “항우가 포학해서 인심을 잃었으며, 초(楚) 나라의 임금인 의제(義帝)를 죽였으니, 대왕께서 항우를 토벌하는 명분을 세우고 동쪽으로 돌아가려는 장사들을 의병(義兵)으로 삼아 앞세우면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때에 한중(漢中)에 있는 촉(蜀)의 장사들의 고향이 모두 동쪽인 중원(中原)에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92]낭서장(郞署長) 풍당(馮唐)이 …… 감사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가 낭서(郞署)를 지나다가 늙은 낭관인 풍당(馮唐)을 만나 그의 고향을 물으니 조(趙) 나라라 하였다. 문제는 당시에 흉노의 강성함을 걱정하여 조 나라의 옛날 장수 이제(李齊)의 이야기를 하며 감탄하였다. 풍당이 조 나라 옛날 장수 염파(廉頗)ㆍ이목(李牧)의 장한 것을 말하니, 문제는 엉덩이를 치며 “어찌하면 나도 그런 사람을 장수로 삼을 수 있을까.” 하니, 풍당이, “폐하(陛下)는 염파ㆍ이목을 만나도 쓸 줄을 모르실 것입니다.” 하면서, 당시에 위상(魏尙)이란 장수를 조그만 과실로 옥에 가둔 것을 비난하였더니, 문제가 깨닫고 즉시 풍당을 시켜 위상을 석방시켰다.
[주D-093]수(隋) 나라 …… 청하다 :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북방의 위(魏)는 선비족(鮮卑族)이라 북주(北周)가 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중국 재래의 음악은 흩어지고 북쪽 변방의 음악이 유행하였다. 수(隋) 나라 남북을 통일하여 음악을 맡은 태상경 우홍이 중국의 옛 음악을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주D-094]반풍기화(反風起禾) : 주 나라 무왕(武王)이 죽고, 아들 성왕(成王)이 어리므로 그의 숙부(叔父)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하였더니, 주공의 형 관숙(管叔)과 그의 여러 아우들이 주공에 대한 유언(流言)을 퍼뜨리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성왕도 주공에게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주공이 조정을 떠나 관숙을 토벌하였더니 그 뒤 가을에 큰 비가 오고 태풍이 불어 벼[禾]가 모두 쓸어지고 큰 나무들이 뽑히었다.성왕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금등(금실로 봉한 궤)을 열어 보았으나, 그 속에서 전일에 무왕의 병이 위독할 때에 주공이 무왕을 위하여 자기가 대신 죽겠다고 기도(祈禱)한 글이 나왔다. 성왕이 그제야 그 글을 잡고 울며 주공의 마음을 알고 뉘우치니 곧 바람이 거꾸로 불어서 쓸어졌던 벼가 모두 다시 일어났다.
[주D-095]이윤(伊尹)이 …… 바치다 : 상(商) 나라 이윤(伊尹)이 새로 즉위한 임금 태갑(太甲)에게, “임금과 신하가 모두 순일(純一)한 덕이 있어야 한다[咸有一德]”는 글을 지어서 훈계하였다.
[주D-096]지리(地利)가 …… 못하다 : 맹자(孟子)의 말에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보다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보다 못하다.적의 성을 여러 달 동안 포위 공격할 때에, 천시(天時)로 보아서는 적을 함락시킬 좋은 일진(日辰)이 있었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은 천시가 지리보다 못한 것이며, 적을 방어할 때에 성이 아무리 견고하여도 인심이 이반(離叛)하면 지킬 수 없는 것이니, 지리가 인화(人和)보다 못한 것이다.’ 하였다.
[주D-097]제갈량(諸葛亮)이 …… 청하다 : 제갈량이 후주(後主)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에, “어진 신하를 친히 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은 전한(前漢)의 흥륭(興隆)한 바요, 소인을 친히 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한 것은 후한(後漢)의 경퇴(傾頹)한 바입니다.” 하였다.
[주D-098]때[時]가 …… 있다 : 어떤 좋은 정책이라도 시대에 따라서 가(可)할 때가 있고 불가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주D-099]당 나라 …… 감사하다 : 당 나라 헌종(憲宗) 때에 회서(淮西)의 반적(叛敵) 오원제(吳元濟)를 토벌 평정한 뒤에 그 지방 백성에게 2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주D-100]송 나라 우상(右相) 왕회(王淮)가 …… 부르기를 청하다 : 주자가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흉년이 들었으나 구제를 잘하였다. 주자는 도학자(道學者)이므로 왕회(王淮)가 이렇게 말하였다. 부사(浮辭)는 형식적인 헛말로 임금을 칭찬하는 등의 글귀를 말한다.
[주D-101]한 나라에서 …… 치하하다 :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소장에, 허식으로 임금을 칭찬하는 부사를 폐지하라고 한 것은, 임금의 겸손하고 진실한 것을 표시한 것이므로, 신하들이 그것을 취하는 것이다.
[주D-102]백성에게 …… 대하여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므로 농사를 장려하기 위하여 특히 금년의 전조(田租)의 반을 백성에게 돌려 준다.” 하였다.
[주D-103]당 나라 동평장사(同平章事) 송경(宋璟)이 …… 청하다 : 장(仗)은 임금을 호위하는 의장(儀仗)인데 여기서는 의장에 가까이 와서 말을 아뢰는 것.
[주D-104]임금 된 자 …… 따라야 한다 : 《예기(禮記)》에, “하늘은 사사(私私)로이 덮음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음[載]이 없고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침이 없는 것이니, 이 세 가지를 본받아 천하를 다스린다.” 하였다.
[주D-105]현규(玄圭)로 성공을 고하다 :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어 성공한 뒤에, 요(堯)가 현규(玄圭)를 주어 성공을 표창하였다.
[주D-106]중전(中殿)의 묘현 : 신부(新婦)가 시집와서 사당[廟]에 처음 뵈옵는 것.
[주D-107]당 나라 …… 청하다 : 당 나라 숙종(肅宗)이 “나라의 흥망은 천명(天命)이 있다.”고 말하니, 이필(李泌)이 아뢰기를, “보통 사람은 천명을 말할 수 있어도 임금은 천명을 말해선 안 되며, 인사(人事)에 힘써야 합니다.” 하였다.
[주D-108]소식(蘇軾)이 …… 청하다 : 소식(蘇軾)의 글에 절강 지방(浙江地方)의 등(燈)을 사들이는 것을 간하는 소[諫買浙燈狀]가 있는데, 그 당시 임금이 많은 비용을 들여 절강 지방의 화려한 등을 많이 만들어 올리게 명하였으므로 소식이 간하였다.
[주D-109]희(羲)ㆍ화(和)에 …… 순응하게 하다 : 요(堯) 임금 때에 희씨(羲氏)와 화씨(和氏)는 천지 사시(天地四時)를 맡은 벼슬이므로 요 임금이 명하여 하늘에 공경히 순응하여 역법(曆法)을 제정하라 하였다.
[주D-110]상부(尙父)가 단서(丹書)를 올리다 : 주(周) 나라 강태공이 무왕(武王)에게 단서(丹書)를 바쳤는데, 그 가운데에 ‘경(敬)이 태(怠)를 이기는 자는 길(吉)하고, 태가 경을 이기는 자는 흉(凶)하다.’ 한 말이 있다.
[주D-111]의의난조(擬猗蘭操) : 의난조(猗蘭操)는 공자가 지은 글인데, 이것을 모방하여 지은 글을 ‘의의난조(擬猗蘭操)’라 한다.
[주D-112]그윽한 …… 아니하다 : 불괴우옥루(不愧于屋漏)는 《시경(詩經)》에 있는 문구인데, 양심에 가책이 없으므로 방구석에 혼자 있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주D-113]적국(敵國)의 …… 망한다 : 《맹자》에 “적국의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안락함에 빠져 두려워하고 조심함이 없어, 마침내 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주D-114]주발(周勃)이 …… 감사하다 : 한 나라 고조(高祖)가 죽을 때에 여후(呂后)에게 말하기를, “장래 우리 유씨(劉氏)를 편안하게 할 자는 반드시 주발(周勃)일 것이다.” 하였다.
[주D-115]제갈량(諸葛亮)이 …… 청하다 :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에, “장완(蔣琓)ㆍ동윤(董允) 등은 곧고 진실하여 절의(節義)에 죽을 만한 신하이니, 이들을 친히 하고 믿으시면 나라가 흥할 것입니다.” 하였다.
[주D-116]진평(陳平)이 …… 청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우승상(右丞相) 주발(周勃)에게,“1년에 국가의 전곡(錢穀)의 출입(出入)이 얼마이며, 죄수의 판결이 몇인가.”고 물으니, 주발이, “모른다.” 하였다. 문제가 다시 우승상 진평(陳平)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곡의 출입은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으시고, 죄수의 판결은 정위(廷尉)에게 물으소서.” 하니 문제가, “그러면 승상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니, 진평이 대답하기를, “재상은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고 백성이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주D-117]주공이 ‘낙사도(洛師圖)’를 올리다 : 주 나라 성왕(成王) 때에 도읍을 낙읍(洛邑)으로 옮겼는데, 주공(周公)이 낙사도(洛師圖)를 그려 바쳤다. 낙사(洛師)는 서울인 낙읍이다.
[주D-118]봄에 진대(賑貸)를 의논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봄이 화창할 때에 만물은 모두 즐거이 살아 나는데 우리 백성들 중에 곤궁(困窮)한 자들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걱정하지 아니할 수 있는가. 구제할 방책을 의논하라.” 하였다.
[주D-119]진덕수(眞德秀)가 …… 청하다 : 공자가 주 나라에 가서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니 의기(欹器)란 그릇이 있었다. 이것은 비어 있을 때에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물을 반쯤 부으면 바로 서며, 가득 차면 엎어진다. 공자가 이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저것을 보아라. 차면 넘치느니라.” 하였다.
[주D-120]한 나라 …… 감사하다 : 한 나라 선제(宣帝) 때에 발해군(渤海郡)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임금이 공수(龔遂)를 발해 태수(太守)로 임명하였더니, 공수가 부임하여서는 도적을 잡는 관리들은 모두 해산하고 도적을 감화시켜 양민으로 만들었다. 임금이 곧 공수를 불러들여 수형도위(水衡都尉)로 승진시켰다. 공수가 조정으로 들어올 때에 왕생(王生)이 그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만일 묻거든, ‘모두가 폐하의 은덕이요, 신이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라.” 하였다.
[주D-121]왕진(王縉)이 …… 청하다 : 옛글에 “대신의 직분은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섭리는 조화(調和)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D-122]소식(蘇軾)이 …… 청하다 : 동짓날은 《주역(周易)》의 복괘(復卦)에 해당되는데, 이날은 음(陰)이 극도에 달했던 나머지에 양(陽)이 새로 생기는 것이므로, 양을 기르기 위하여 선왕(先王)이 이날에는 관문(關門)을 닫으며, 나그네도 임금도 출입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는 소식(蘇軾)이 임금에게 나라를 안정(安靜)하게 다스리고 몸을 안정하게 가지라는 뜻이다.
[주D-123]강(江)과 한(漢)이 바다에 조회(朝會)한다 : 양자강과 한수(漢水) 등의 모든 물은 결국 바다로 향하여 들어간다. 이 말은 모든 속국들이 대국(大國)을 우러러 섬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주D-124]풀속에 …… 수그러진다 : 《논어》에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인데, 풀에 바람이 불면 수그러진다.” 하였다. 백성은 윗사람의 지도에 따른다는 뜻이다.
[주D-125]초(楚) 나라 송옥(宋玉)이 …… 감사하다 : 송옥(宋玉)의 풍부(風賦)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내용은 “초왕(楚王)이 대(臺)에 올라서 놀다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니, 초왕이 ‘아, 바람이 시원하다.’ 하니, 송옥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왕의 수바람[雄風]이요, 서민(庶民)의 암바람[雌風]은 시원하지 못합니다.’ 하고, 수바람에 관하여 진술하니, 초왕이 ‘말은 잘 하는구나. 다시 서민의 바람을 진술하라.’ 하였다.
[주D-126]주발(周勃)이 우승상을 사직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 때에 주발(周勃)이 우승상(右丞相)이 되고, 진평(陳平)이 좌승상이 되었는데, 문제가 주발에게 “1년의 전곡(錢穀) 출납이 얼마이며, 1년의 죄수의 판결이 얼마인가.” 하고 물으니, 주발이 “모른다.”고 답하면서 땀이 흘러 적시었다. 그는 자기의 재능이 부족함을 알고 우승상을 사직하였다.
[주D-127]홀로 주 나라에 조회(朝會)하다 : 주(周) 나라가 쇠약한 말기에는 천하의 제후들이 천자(天子)에게 조회(朝會)하는 이가 없었는데, 제(齊) 나라 위왕(威王)이 홀로 주 나라에 조회한 일이 있었다.
[주D-128]한신(韓信)이, …… 사례하다 :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승상(丞相) 소하(蕭何)의 추천으로 한신(韓信)을 대장으로 삼은 뒤에 이렇게 말하였다.
[주D-129]송 나라에서 …… 치하하다 :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송(宋) 나라는 상(商) 나라의 후손으로 상 나라 선왕(先王)의 종묘(宗廟)를 받들고 있었다. 종묘의 제사는 반드시 악장(樂章)으로 송(頌)을 노래하는 것인데, 상송(商頌)을 잃어서 이때에 주 나라의 음악을 맡은 태사(太師)로부터 상송을 얻어 갔다.
[주D-130]소식(蘇軾)이 …… 청하다 : 정치에 비유한 말로 밝고 탄탄(坦坦)한 정치를 하라는 뜻이다.
[주D-131]손석(孫奭)이 …… 치하하다 :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은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안일하지 말고, 부지런하라는 뜻으로 훈계한 것인데, 그것을 도(圖)로 그린 것이 무일도다.
[주D-132]송 나라 …… 감사하다 : 송 나라 구준(寇準)이 섬주 지사(陝州知事)로 있을 때에 생일(生日) 잔치에 산대놀이[山棚]를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의 생일에만 하는 것이다. 임금이 이를 듣고 노하여, “구준이 매사에 짐(朕)을 본받는 것이 옳은가.” 하였다. 왕단(王旦)이 구준을 변명하기 위하여 말하기를, “구준이 그만큼 나이를 먹었어도 아직 어리고, 철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도 마음이 풀려서, “그렇다. 다만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하였다.
[주D-133]월(越) 나라 범여(范蠡)가 …… 청하다 :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 나라와 싸우다가 패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오왕에게 항복하고 돌아와서, 범여(范蠡)와 함께 국력(國力)을 준비하여 마침내 오(吳)를 멸하여 원수를 갚고는, 범여의 공을 상주니 범여가, “전일에 회계에서 패전한 벌을 받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주D-134]글을 …… 못하다 : 맹자가 말하기를, “옛글을 모두 믿는다면 글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 예를 들면 《서경(書經)》 <무성편(武成篇)>에 주 나라 무왕이 상(商) 나라 주(紂)를 토벌할 때에 피가 많이 흘러서 방아공이[杵]가 둥둥 떴다 하였는데, 이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지극히 인(仁)한 무왕이 지극히 불인(不仁)한 주(紂)를 쳤으니, 저쪽 백성이 절로 따를 것이지 어찌 그처럼 싸웠겠느냐?” 하였다.
[주D-135]성성존존 도의지문(成性存存道義之門) : 성성존존 도의지문은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있는 말인데, 만물(萬物)의 성립(成立), 존재(存在)하는 것이 도의(道義)에서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주D-136]호안국(胡安國)이 …… 바치다 : 호안국(胡安國)이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는데 그것을 호전(胡傳)이라 하여 우리나라 도학자들이 많이 숭상한다.
[주D-137]송 나라 신하들이 …… 칭하하다 : 입저(立儲)는 태자를 세우는 것인데, 당 나라 말년부터는 예법이 퇴폐하여 태자를 세우는데 예식(禮式)을 갖추지 않았다.
[주D-138]우정(禹鼎) : 우(禹)임금이 구주(九州)의 철(鐵)을 걷우어서 구정(九鼎)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역대로 전하는 보물로 되었다.
[주D-139]문천상(文天祥)이, …… 사례하다 : 송 나라 이종(理宗) 때에 문천상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대책(對策)의 글이 1만여 자가 넘었다. 임금이 친히 뽑아서 1등을 시켰다. 고시한 왕응린(王應麟)이 아뢰기를 “이 시권은 충성된 마음이 철석같습니다. 좋은 인재 얻은 것을 축하합니다.” 하였다.
[주D-140]망의(蟒衣)를 …… 뵌다 : 명 나라에서 우리나라 임금에게 흔히 망용의(蟒龍衣)를 내려 주는 일이 있다. 망용의는 붉은 바탕에 구렁이를 그린 것인데 외국의 왕에게 간간이 내려 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선조(先祖) 때의 종계변무(宗系辨誣)된 때에 망용의를 받는 일이 있으니, 그것을 입고 종묘에 가서 선왕을 뵈옵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주D-141]내 백성의 …… 푼다 : 순(舜)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부른 노래에 “남풍(南風)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불리우며 우리 백성의 불평을 풀어주는도다.” 하였다.
[주D-142]재반헌괵(在泮獻馘) : 《시경(詩經)》 <노송(魯頌)>에 있는 글귀인데, 장수가 전쟁에 이겨서 적병의 귀를 베어 와서는 반궁(泮宮)으로 가서 임금에게 바친다는 말이다.
[주D-143]주공(周公)이 …… 청하다 : 《서경(書經)》 입정편에 있는 말인데 성왕(成王)을 훈계한 말이다.
[주D-144]송 나라에서 …… 임명하다 : 부필(富弼)이 지방관으로서 굶은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반역을 예방한 공이 있으므로 동평장사에 승진시켰다.
[주D-145]춘추는 왕도의 권형 : 《춘추(春秋)》는 대의 명분을 밝혀서 시비를 포폄(褒貶)하는 것이므로 왕도(王道)의 저울대가 된다.
[주D-146]본지백세(本支百世) :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있는 말인데, 문왕(文王)의 손자는 본종(本宗)과 지자(支子)가 백세(百世)로 번창한다는 말이다.
[주D-147]이광필(李光弼)이 …… 사례하다 : 당 나라 숙종 때에 이광필(李光弼)은 곽자의(郭子儀)와 함께 당 나라를 중흥시킨 명장(名將)인데, 이때에는 사사명(史思明)을 크게 격파하였다.
[주D-148]한 나라 군신(群臣)이 …… 칭하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 때에 흉노(匈奴)가 침입하니, 주아부(周亞夫) 등의 세 대장에게 방비하게 하고, 문제가 친히 각 군중을 다니면서 군사를 위로하였다.
[주D-149]소호(召虎)가 …… 청하다 : 소호(召虎)는 주 나라 선왕(宣王)의 어진 신하요, 선왕(宣王)은 주 나라를 중흥(中興)한 어진 임금이다.
[주D-150]주 나라는 …… 유신(維新)된다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로 주 나라 문왕(文王)을 칭찬한 말이다. 주 나라가 생긴 지는 오래 되었으나 이때에 와서 문왕이 새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주D-151]독서함이 …… 같다 : 연단(鍊丹)은, 신선(神仙)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만드는 약(藥), 단사(丹砂) 등 귀중한 약을 특수한 방법으로 오랜 시일 동안 불에 연(鍊)하는데 정신이 전일(專一)하지 못하면 마지막에 가서도 실패한다.
[주D-152]한 나라에서 …… 축하한다 : 한 나라 고제(高帝)가 천하를 통일한 3년 만에, 장락궁(長樂宮)을 낙성하였는데 낙성연에서 처음으로 숙손통(叔孫通)이 제정한 예의(禮儀)를 시행하였다.
[주D-153]먼저 농사짓기의 어려움을 …… 편안할 수 있다 :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에 있는 구절인데, 주공이 성왕을 경계한 말이다.
[주D-154]명륜당(明倫堂) : 성균관(成均館)에 공자를 제사지내는 집이 대성전(大聖殿)이며, 선비들이 경(經)을 강론하는 집은 명륜당(明倫堂)인데 인륜(人倫)을 밝힌다는 뜻이다.
[주D-155]당 나라에서 …… 임명하다 : 한 나라 고제(高帝)가 한신을 대장(大將)으로 임명할 때에 특별히 단(壇)을 쌓고 날을 받아 성대한 예식을 행하였다.
[주D-156]선비가 …… 편안하다 : 《시경》에 있는 말인데, 주 나라 문왕(文王)을 칭송한 말이다. 이 말은 문왕이 선비를 많이 길러서 편안하다는 것임.
[주D-157]내치와 외국 방어는 …… 함과 같다 : 《주역(周易)》에, “공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사물의 처리를 모나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경과의 두 가지가 안과 밖으로 서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국가가 안으로는 내정(內政)을 닦고, 밖으로는 적(敵)을 물리치는 것도 이와 같이 동시에 행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주D-158]크도다 건원(乾元)이여 : 《주역》 <건괘(乾卦)>에,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그것을 자(資)하여 시초가 된다.[大哉朝元萬物資始]” 하였다.
[주D-159]한 나라에서 …… 치하하다 : 후한(後漢)의 중흥(中興)에, 28명의 장수가 공을 이루었으므로 명제(明帝)가 이들의 화상을 그려서 남궁운대(南宮雲臺)에 걸어 두었다.
[주D-160]명 나라 …… 바치다 : 송 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학의 수신(修身) 제가(齊家) 등 팔조(八條)에다 각 부분별로 역대의 사실을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명 나라 구준(丘濬)이 여기에다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부문을 보충하여 《대학연의보》를 편찬하였다.
[주D-161]비오는 것을 …… 하다 : 관덕(觀德)은 활쏘기를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에 “활과 화살을 가질 때에 살피고 굳게 잡은 연후에야 맞힐 수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덕행(德行)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여기서는 오랫동안 가물다가 비가 왔으므로 그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활쏘기놀이를 한 것이다.
[주D-162]백량어지(百兩御之) : 《詩經(시경)》에 있는 구절인데, 제후(諸侯)의 딸이 제후에게 시집갈 때에 백 채의 수레[百兩]로 영접[御之]한다는 것이다.
[주D-163]기산(岐山)에서 우는 봉황 : 주 나라 문왕(文王)의 덕이 거룩하므로 서울인 기산(岐山)에 봉(鳳)이 와서 울었다.
[주D-164]호랑이로 보고 쏜 화살이 돌에 박히다 : 한 나라 이광(李廣)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밤에 흰돌을 보고 범인 줄 잘못 알고 활로 쏘아 맞혀 가까이 가서 본즉 화살이 돌에 박혀 있었다.
[주D-165]길보가 …… 청풍 같다 : 주 나라 선왕(宣王)의 신하 윤길보(尹吉甫)가 지은 선왕의 중흥한 공덕을 칭송한 시에 있는 말이다. 목(穆)은 조화(調和)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성정(性情)을 조화시켜 맑은 바람이 만물을 양성하는 듯하다는 뜻이다.
[주D-166]주 나라에서 …… 축하하다 : 주 나라 시대의 시(詩) 관저편(關雎篇)은 부부(夫婦)가 화합한 것을 노래한 것이요, 인지편(麟趾篇)은 자손이 많은 것을 노래한 것인데, 부부가 화합하므로 자손이 많다는 뜻이다.
[주D-167]탁무(卓茂)가 …… 사례하다 : 탁무(卓茂)가 덕행이 높고, 지방의 수령으로서 어진 정치를 하였으므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는데, 이것은 덕을 포함한다는 뜻이다.
[주D-168]배와 수레를 만들어 교통하다 : 상고 시대(上古時代) 황제(黃帝)가 처음으로 배[舟]와 수레[車]를 발명하여 교통하지 못하던 곳이 비로소 교통하게 되었다 한다.
[주D-169]조천석(朝天石) :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에 대한 전설의 돌로 평양에 있다.
[주D-170]남묘(南畝)에 …… 기뻐하다 : 《시경(詩經)》 <칠월편(七月篇)>에 있는 구절인데, 농사짓는 실생활을 노래한 시이다. 전준(田畯)은 농사를 권하는 관직인데, 농촌을 순시하다가 농가의 주부가 점심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주D-171]억계시를 …… 외우다 : 위(衛) 나라 무공(武公)이 나이 90에 억편(抑篇)이란 시를 지어 주 나라의 유왕(幽王)을 풍자하고 스스로 반성하였는데 위의(威儀)를 조심하라는 뜻이다.
[주D-172]당 나라 장공예(張公藝)가 …… 감사하다 : 당 나라 장공예(張公藝)는 한 집에서 9대까지 동거(同居)하였다. 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 행차하던 길에 그의 집에 들러서 “어떻게 9대까지 동거하게 되는가.” 하고, 물으니 공예가, “입으로는 대답할 수 없고 붓으로 써서 대답하겠다.” 하고, 참을 ‘인(忍)’ 자 백여 자를 써서 바치었다. 그것은 9대로 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은 참아야 된다는 뜻이다.
[주D-173]명명(明命)이 혁연하다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로 명명(明命)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란 뜻이다.
[주D-174]오늘 아침 …… 열리다 : 《논어(論語)》에 있는 유자(有子)의 말이다.
[주D-175]효도와 공경함은 …… 근본이다 : 주자(朱子)의 시에 있는 구절이다.
[주D-176]교득채근(晈得菜根) : 《소학(小學)》에 있는 말인데, 나물뿌리를 먹어야 온갖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D-177]슬피옥찬황류재중(瑟彼玉瓚黃流在中)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슬(瑟)은 깨끗하다는 말이며, 옥찬(玉瓚)은 황금으로 꾸민 옥잔이요, 황류(黃流)는 제사에 쓰기 위하여 향초(香草)로 만든 술이다.
[주D-178]집희경지(緝熙敬止)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로 주 나라 문왕(文王)의 덕을 말한 것인데, 문왕의 광명(光明)한 덕을 공경한다는 뜻이다.
[주D-179]협화만방(協和萬邦) : 《서경(書經)》에 있는 구절인데, 요(堯)의 정치를 칭송한 말이다.
[주D-180]영대를 경시하다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주 나라 문왕이 영대(靈臺)라는 대를 처음으로 경영하는데 백성들이 기꺼이 그 부역에 달려 왔다 한다.
[주D-181]현주대갱(玄酒大羹) : 대갱(大羹)은 양념으로 조미하지 않은 고기국이며, 현주(玄酒)는 맑은 물인데, 온갖 맛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주D-182]일감(日監)이 이에 있다 : 《시경(詩經)》에 있는 말인데, 날마다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뜻이다.
[주D-183]노인을 잘 봉양하다 : 은(殷) 나라 말기에,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은 주 나라 문왕(文王)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 나라로 갔다.
[주D-184]한 나라 조충국(趙充國)이 …… 바치다 : 한 나라 선제(宣帝) 때에 서방(西方)의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조충국(趙充國)을 보내어 평정하게 하니, 충국이 “군사(軍事)는 멀리서 예측할 수 없으니 신이 금성(金城)에 도착한 뒤에 방략(方略)을 그림으로 그려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주D-185]원회(元會) : 송 나라 소강절(邵康節)이 《황극경세(皇極經世)》를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천지(天地)의 생성(生成)과 존립(存立)의 기간을 일원(一元)이라 하고, 일원을 12회(會)로 분하였다. 1회가 만 2천년이 되고, 첫회에서 끝회까지의 상황을 추수(推數)로 서술하였다.
[주D-186]비록 효도를 …… 하리오 :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모가 계실 때에는 집이 가난하여 봉양을 옳게 하지 못하였더니, 지금은 벼슬하여 녹을 많이 받으나 효도하려 한들 누구에게 효도하랴.” 하였다.
[주D-187]삼대(三代)의 기상(氣像)인데 …… 비하랴 : 송 나라 정이천(程伊川)이 한 나라 제갈량을 평하기를, “삼대 하(夏)ㆍ은(殷)ㆍ주(周)의 현신(賢臣)의 기상이 있다.” 하였다. 제갈량이 처음 은거(隱居)할 때에 스스로 춘추 때의 관중(管仲)과 전국 시대의 악의(樂毅)에 비하였는데, 여기서는 정이천의 말을 인용하여 제갈량은 관중과 악의에게 비할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주D-188]한 나라 장량(張良) 유후(留侯)에 봉함을 사례하다 : 한 나라 고제(高帝)가 땅을 나누어 공신(功臣)들을 봉하여 주는데 장량(張良)이 말하기를, “신은 유(留) 땅에서 폐하(陛下)를 처음 만났으니 유후(留侯)로 봉하여 주시면 족하겠습니다.” 하였다.
[주D-189]금거울 : 당 나라 현종(玄宗)의 생일인 천추절(千秋節)에 여러 신하들이 축하의 선물로써 각각 보감(寶鑑)을 바치는데, 홀로 장구영(張九齡)은 정치에 거울이 될 만한 전대(前代)의 사적(事跡)을 엮어서 《천추금감록(千秋金鑑錄》이라 하여 올렸다.
[주D-190]계성사(啓聖祠)에 참배하다 : 계성사(啓聖祠)는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을 비롯하여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 등 오성(五聖)의 아버지를 모신 사당으로 문묘(文廟) 옆에 세웠다.
[주D-191]강숙(康叔)이, …… 사례하다 : 주 나라 성왕(成王)이 어려서 임금이 되었는데, 그의 동생 강숙과 희롱하면서 오동잎으로 규(圭)를 만들어 보이면서, “이것으로써 너를 봉하여 주겠다.” 하였다.주공(周公)이 이 말을 듣고 성왕에게 들어가서 강숙을 봉한 것을 축하하니 성왕이, “그것은 희롱이요.” 하였다. 주공이, “천자는 희롱하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하고, 권하여 강숙을 위후(衛侯)로 봉하였다.
[주D-192]덕유여모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덕의 수레[輶]는 가볍기가 털과 같아서 만드는 사람이 적도다.” 하였다.
[주D-193]곽광(藿光)이 …… 사례하다 : 한 나라 무제(武帝)가 죽을 임시에, 태자가 아직 어리므로 조정에서 제일 성실하고 근신한 곽광(藿光)을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삼고 유조(遺詔)를 받들어 정사를 돕게 하였다.
[주D-194]노인에게 묻다 : 《서경(書經)》에 있는 말인데, “머리털이 희다 못해 누렇게 된 늙은 노인에게 물어서 하면 허물이 없느니라.” 하였다.
[주D-195]지팡이를 짚고 조서(詔書)를 듣다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어진 정치를 하였으므로, 매양 조서(詔書)가 민간에게 내리면 시골 노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가서 조서를 들었다 한다.
[주D-196]숭정(崇禎) 갑신년의 3주기 : 명 나라 숭정 갑신에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으로 의종황제(毅宗皇帝)가 자살하고 청 나라 조사가 북경으로 들어와 명 나라는 망하였다.
[주D-197]풍천(風泉) : 《시경》의 비풍편(匪風篇)과 하천편(下泉篇)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제후국(諸侯國)의 사람들이 주 나라를 생각하여 지은 시다. 여기서는 망한 명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다.
[주D-198]억위보장(抑爲保障) :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의 조간자(趙簡子)가 윤탁(尹鐸)을 보내어 진양(晉陽)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윤탁이 묻기를, “진양을 다스리는 데는 산업을 위주하리까, 군사의 방어[保障]를 위주하리까.” 하니, 조간자는 “보장을 위주하라.” 하였다.
[주D-199]이견대인(利見大人) : 《주역(周易)》에 있는 구절인데, 용(龍)이 물속에서 육지로 두각(頭角)을 나타내는 격이니 대인(大人)을 이롭게 본다. 용이 날아서 하늘에 있는 격이니, 대인을 이롭게 본다.[見龍在田 利見大人 飛龍在天 利見大人]하였다.
[주D-200]공자가 말하기를, “내 점(點)을 찬성한다.” : 《논어》에 있는 말인데, 공자가 몇 제자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이 각각 뜻한 바를 말하라.” 하니, 각각 자기의 능력과 소원대로 “군정(軍政)을 하겠다.” 혹은 “재정(財政)을 하겠다.” 혹은 “외교(外交)를 하겠다.” 하는데, 최후에 증점(曾點)은 말하기를, “모춘(暮春)에 춘복(春服)을 새로 입고 동자(童子) 5, 명과 관자(冠者)인 6, 명을 데리고 무우(舞雩)에게 바람 쏘이고, 기수[沂]에서 목욕하고 읊으면서 돌아오겠나이다.” 하였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나는 점(點)에게 찬성하노라.” 하였다.
[주D-201]우리나라에서 …… 받으려 하는 : 구장 곤룡포(九章袞龍袍)와 팔음(八音)의 악기(樂器)를 말한다. 구장(九章)은 산(山)ㆍ꿩[雉]ㆍ쌀[米] 등의 아홉 가지 무늬이며, 팔음은 포(匏)ㆍ토(土)ㆍ혁(革)ㆍ목(木)ㆍ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이다.
[주D-202]봄에 내리는 조칙 : 봄은 만물이 나고 자라는 계절이므로, 불쌍한 백성을 구제하고, 원통한 죄수를 풀어주는 정치를 행한다는 말이다.
[주D-203]수레를 …… 사랑하다 : 당시(唐詩)에 있는 구절로, 가을에 산으로 가서 단풍을 읊은 시인데.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은 철 신나무 숲을 사랑하노니 서리 맞은 잎이 2월의 꽃보다도 붉구나.” 하였다.
[주D-204]어버이에게 …… 드리다 : 한 나라 황향(黃香)은 지극한 효자로서 집이 매우 가난하여 겨울에 동복과 이불이 없으면서도 어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바쳤다 한다.
[주D-205]지성이 …… 보겠다 : 우리나라의 영종(英宗)이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인 뒤에 세자의 아들인 정종(正宗)을 세손(世孫)으로 봉하여 극히 사랑하고, 세손이 할아버지를 잘 받들었으므로 영종이 그 조손(祖孫)간에 지성(至誠)이 서로 합한다고 말하였는데, 문손(文孫)은 세손을 가리킨 것이다.
[주D-206]창승월광(蒼蠅月光) : 《시경(詩經)》의 계명편(鷄鳴篇)에, “부인은 닭이 이미 울었소. 아침이 되었소. 남편은 닭의 울음이 아니라 파리[蒼蠅]의 소리로다. 부인은 동방이 밝았소. 아침이 되었소. 남편은 동방이 밝은 것이 아니라 달이 뜨는 빛이로다.” 하였다.
[주D-207]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 : 매년 연말에 주 나라 천자(天子)가 노(魯) 나라에게 다음 해 열두 달의 삭일(朔日)을 제후(諸侯)에게 내려주면 제후는 그것을 종묘에 간수하여 두고, 매월 삭일(朔日)이 되면 양(羊)을 잡아서 종묘에 고하였던 것인데, 노 나라 문공(文公) 때로부터 그 예(禮)를 폐지하였다.그러나 양(羊)은 전례대로 달마다 바치었다. 자공(子貢)이 그 양(羊)을 바치는 것을 폐지하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그 양(羊)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 하였다. 그것은 양(羊)을 전례대로 바치면 종묘에 삭일(朔日)을 고하던 그 예(禮)가 이름이라도 남아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주D-208]담(膽)은 크고자 하며 마음은 작고자 한다 : 당 나라 도인(道人) 손사막(孫思邈)의 말에, “담은 커야 하고, 마음은 작아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사람이 대담(大膽)하게 용감하여야 하는 동시에 소심(小心)으로 근신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에 인용하였기 때문에 시제가 된 것이다.
[주D-209]편안함에 빠질까 경계하다 : 《시경(詩經)》에, “너무 편안하지 아니한가. 주로 일을 생각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임금을 경계한 것이다.
[주D-210]우리나라 기로사(耆老社)의 …… 바치다 : 위(衛) 나라 무공(武公)이 나이 90세에 억편(抑篇)을 지어 더욱 반성하고 부지런히 할 것을 스스로 경계하였다.
[주D-211]무당(無黨) 무편(無偏)에 …… 탕탕하다 : 《서경(書經)》에 있는 말인데, 국가를 다스리는 임금의 도리는 편당(偏黨)이 없고, 탕탕(蕩蕩) 평평(平平)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에 사색 당파(四色黨派)의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이 시제를 낸 것이다.
[주D-212]어버이를 사랑함을 보배로 삼는다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있는 말인데, 진(晉) 나라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진(秦) 나라에 망명하여 있을 때에, 본국에서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부고가 왔는데, 진(秦) 나라 임금이 사람을 시켜 조상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후원할 터이니 본국으로 급히 돌아가서 임금의 자리를 도모할 생각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구범(舅犯)이 중이에게 말하기를 “다른 것이 보배가 아니라 부모를 사랑함이 보배인데, 아버지의 죽은 것이 어떠한 일인데, 이때에 감히 다른 생각을 낸단 말이냐. 그대는 사양하라.” 하였다.
[주D-213]저 기욱(淇澳)에는 …… 우거졌구나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위(衛) 나라 기수(淇水)의 언덕에 있는 푸른 대[竹]를 읊어서 군자의 덕에 비유한 것이다.
[주D-214]경연(經筵) 특진관(特進官)이 …… 바치다 : 이전(二典)은 《서경》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이요, 삼모(三謨)는 《서경》의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 등의 편명이다.
[주D-215]뜻을 가진 자…… 이루어지다 : 후한(後漢)의 광무황제(光武皇帝)가 농서(隴西)를 평정하고 나서 등우(鄧禹)에게 말하기를, “절일에 그대가 농서를 평정할 것을 말하기에, 나는 될 것 같지 않게 생각하였더니, 과연 뜻이 있으면 일이 마침내 성취되는 것이로구나.” 하였다.
[주D-216]구일제(九日製) : 9월 9일에는 문신(文臣)에게 시를 짓게 하여 시험을 보이는 것으로 절일제(節日製)의 하나이다.
[주D-217]남훈전에 …… 모시다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있는 말인데, 옛날에 고신씨(高辛氏)가 재주 있는 아들 여덟이 있었으니 8원(元)이라 하였고, 고양씨(高陽氏)가 재주 있는 아들 여덟이 있었으니, 8개(凱)라 하였다. 이들은 모두 순(舜) 임금의 신하이다.
[주D-218]꿈에 좋은 보필자를 얻다 : 은 나라 고종(高宗)의 꿈에 상제(上帝)가 어진 보필 한 사람을 주었다. 꿈을 깬 뒤에 그 사람을 기억하여 사방으로 찾아서 부열(傅說)을 얻었다.
[주D-219]한 명의 …… 바르게 되다 : 《서경》에 있는 말인데, 원량(元良)은 태자(太子)를 말한다.
[주D-220]당 나라에서 …… 새김을 하례하다 : 당 나라 태종이 설연타(薛延陀)를 쳐서 항복을 받고 크게 기뻐하여 지은 시(詩)다.
[주D-221]인(仁)한 사람이라야 …… 미워할 수 있다 : 《논어(論語)》에 있는 말인데, 공자(孔子)가, “오직 인(仁)한 사람이라야 남을 좋아할 수 있으며 남을 미워할 수 있다.” 하였다.
[주D-222]신(信)은 임금의 큰 보배다 : 위(魏) 나라의 유학자(儒學者) 왕숙(王肅)의 말이다.
[주D-223]덕(德)에 있지, 험(險)함에 있지 않다 :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위(魏) 나라 무후(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로 내려 가다가 말하기를, “장하다. 산천(山川)이 험하고 견고하구나. 적국이 침범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위국(魏國)의 보배로다.” 하니, 오기(吳起)가 말하기를, “옛날에 여러 나라들이 산천이 험준하고 견고하였으나, 덕을 닦지 않은 때문에 망하고 말았으니, 나라의 보배는 덕(德)에 있는 것이지 산천의 험한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주D-224]용(龍)을 …… 논하라 : 순(舜) 임금이 신하 22명에게 각각 직무를 맡기고, 끝으로 용(龍)에게 납언(納言)의 관직에 임명하면서, “나의 말을 출납(出納)하되 성실히 하라.”고 부탁하였다.
[주D-225]황하에 비하다 : 기자(箕子)가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대동강을 중국의 황하(黃河)에 비하였다 한다.
[주D-226]천일생수 : 《주역(周易)》에 ‘천일지이천삼지사(天一地 二天三地四)’란 말이 있는데, 이것을 오행(五行)에 분배하면 천일 생수(天一生水)ㆍ지이 생화(地二生火)라고 한다.
[주D-227]사람을 …… 줄 수 있다 : 《서경(書經)》에 있는 우(禹)의 말에, “사람을 알아보는 이는 철(哲)이니, 능히 사람에게 벼슬을 줄 수 있다.” 하였다.
[주D-228]주 나라에서 후직(后稷)을 …… 칭하하다 : 후직(后稷)은 시조(始祖)이니 높은 이요, 문왕(文王)은 아버지이니 친한 이다.
[주D-229]당 나라 울지경덕(尉遲敬德)이 …… 감사하다 : 당 태종 때에 울지경덕(尉遲敬德)이 적장(敵將)으로서 항복하여 왔는데, 얼마 후에 같이 항복을 한 자들이 반역을 하였다. 당 나라 장수들이 경덕을 가두어 죽이려 하자, 태종이 “경덕은 반역할 사람이 아니다.” 하였더니, 그 뒤에 태종이, 왕세충(王世充)의 장수 선웅신(宣雄信)에게 포위를 당하여 매우 위급할 때에 울지경덕이 말을 달려 들어가서 태종을 보호하여 구출하였으므로 태종이 그를 표상하였다.
[주D-230]당 나라에서 …… 봉하는 조칙 : 곽자의는 당 나라 숙종(肅宗)ㆍ대종(代宗) 때의 장수로서 중흥(中興)의 공이 가장 컸으므로 분양왕(汾陽王)에 봉하였다.
[주D-231]봉황새가 …… 나도다 : 《시경》에 있는 구절인데, 조양(朝陽)은 산의 동쪽을 말한 것이며, 봉황은 어진 선비에, 오동은 밝은 임금에 비한 것이다.
[주D-232]이 봄술을 만들어 장수를 빈다 : 《시경》의 7월편에 있는 구절인데, 농가의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풍년이 들어 추수를 마친 뒤에 봄술을 빚어 노인들에게 드린다는 뜻이다.
[주D-233]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다 : 주 나라 문왕(文王)의 아버지인 태왕(太王)을 칭송하는 말로 《시경》에 있는,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었는데 태왕이 편안히 하였다.” 하였다. 여기서 높은 산은 주 나라의 수도(首都)에 있는 기산(岐山)을 말한다.
[주D-234]자흥시야(子興視夜) : 《시경》에 있는 구절인데,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이 일어나서 밤을 보시오. 밝은 별이 찬란하오. 일어나서 오리와 기러기 사냥을 나가시오.” 하였다. 이것은 색(色)을 좋아하고 덕을 좋아하지 아니함을 풍자한 시다.
[주D-235]고굉군(股肱郡) : 한 나라 문제(文帝)가 하동 군수(河東郡守)인 계포(季布)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려고 불러들였다가 술이 과하여 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사관(舍館)에 머물게 한 지 한 달 만에 계포를 도로 하동으로 돌려보냈다. 그가 불러들였던 이유를 물은즉, 문제가, “하동은 나의 고굉군(股肱郡)이므로 불러보았다.”고 하였다. 고굉군은 팔 다리와 같은 중요한 고을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수원ㆍ광주(廣州)ㆍ과천(果川)의 세 고을을 두고 한 말이다.
[주D-236]생민(生民) …… 있지 않았다 : 공자의 제자인 재아(宰我)가 공자를 칭찬한 말이다.
[주D-237]문무길보(文武吉甫) : 《시경》의 6월편에 있는 구절인데, 주 나라 선왕(宣王) 때에 험윤(玁狁)의 침략을 윤길보(尹吉甫)가 격퇴시켰으므로 “문무(文武)를 겸한 길보는 만방(萬邦)에 법이 된다.”고 칭찬하였다.
[주D-238]선군(先君)이 이르기를, “너의 만수무강을 점친다.” : 《시경》의 천보편(天保篇)에 있는 구절인데, 제사를 지낼 때에 선군(先君)이 복을 내린다는 말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0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제도(科擧制度) Ⅳ. 무거(武擧)

○ 고려 예종(睿宗)이 무학(武學)을 설치하여, 강예재(講藝齋)라 일컫고, 무사를 시험하여 선발하였다. 그 뒤에 무학의 재생(齋生)이 응시하는 자가 적어서 대책(對策)은 비록 합격되지 못하여도 점수에 따라 선발하니, 급제하기가 매우 쉬워서 과거에 응시할 자들이 다투어 무학에 몰려드는지라, 무학이 점점 성하게 되어 문학하는 사람들과 대립하고 불화할 조짐이 있었다. 조정에서 이를 심히 우려하여, 인종(仁宗)이 명하여 무학재생의 무과 선발 및 재호(齋號)를 폐지하도록 명하였다.공민왕(恭愍王) 때에, 생원 이색(李穡)이 글을 올려 무과를 보여 궁궐의 숙위(宿衛)에 충당할 것을 청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문무(文武)의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음을 아뢰었다. 본조(本朝)에서는 다만 문과만을 뽑고 무과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예에 능한 인재가 적으므로,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년에 무과를 실시하여 병서에 통하고, 무예에 익숙한 자를 뽑을 것을 영구책으로 삼도록 청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
○ 태조(太祖) 2년에 무과를 설치하였다.
○ 태종(太宗) 8년에 무과를 설치하여 용호방(龍虎榜 용은 문과(文科)를, 호는 무과(武科)를 말한다)을 갖추니, 국조(國朝)의 무과가 이에서 비롯하였다.
○ 고려조의 무과 제도는 비록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식년(式年)의 법규는 인ㆍ신ㆍ사ㆍ해년에 문과와 함께 같이 서울과 각 도에서 초시를 실시하며 배정된 일정한 정원이 있는데, 그 거자가 과녁을 맞춘 화살 수효에 따라 방(榜)을 내붙이고, 다음 해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초시에 입격한 사람을 모아서 육량 편전(六兩片箭)과 기창(騎槍 기병이 쓰는 긴 창)을 시험하여 입격한 연후에 《장감(將鑑)》 《동래박의(東萊博議)》 《무경(武經)》중에서 하나, 사서 중에서 하나와 《대전(大典)》을 강하게 하여,조(粗)ㆍ통(通) 이상에 입격한 자를 과녁에 맞친 화살 수효와 글을 강한 점수를 합계하여 등급을 나누어 28명만을 뽑는 것을 회시(會試)라 이르고, 다시 회시에 응한 사람을 모아 임금이 친히 임어하여 그 재예를 시험하여 그 석차를 정하는 것을 전시(殿試)라 하였다. 《송와잡기》
○ 옛날에는 무과가 없던 것을 태종 때에 비로소 설치하였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문ㆍ무과의 방을 게시하던 날, 홍패(紅牌)와 어사화(御史花)와 술을 하사하였으며, 문ㆍ무과 1등 3명에게는 별도로 검은 일산을 하사하였다. 세조 때에 이르러 문과에는 일산을 주었고, 무과에는 기(旗)를 주어, 유가(遊街)하는 날에 어리석은 아이들이나 부녀자도 모두 문ㆍ무과를 분별할 수 있어 무반(武班)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으므로, 얼마 안가서 폐지하고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필원잡기》
○ 세조 6년 경진에 사방을 순행하여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무과를 베풀었는데, 초시를 보이지 않고, 규정의 제한도 없이 그 응시자의 다과(多寡)에 따라 선발하니, 1년의 통계가 1천 8백여 명에 이르렀다. 지금까지도 무사가 말[馬]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자나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하는 자를 반드시 ‘경진년 무과’라고 기롱한다. 이로부터 무과(武科) 또한 경시되었다. 《송와잡기》
○ 세조 12년에 임금이 강릉(江陵)오대산(五臺山)에 행차하여 어림대(御林臺)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무사를 뽑았다.
○ 세조 때에 무과 1천 명을 선발했는데, 임금이 말석으로 합격한 자를 불러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재예가 너보다 떨어지는 자가 있느냐?” 하니, 답하기를, “다음 방(榜)의 장원은 그 재예가 곧 신의 아래에 있는 자일 것 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웃고 그 사람을 썼는데, 뒤에 과연 그 직무에 합당하였다 한다. 《지봉유설》
○ 중종(中宗) 경진년에 과거를 설치하여 무사 1천 명을 선발할 때, 호사자(好事者)가 말하기를, “무사가 소를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았으나 맞지 않았으므로, 소를 멈추고, 그 화살을 빼어 다시 쏘니, 시관이 소리지르기를, ‘저 거자(擧子)는 어째서 소를 멈추고 있느냐?’ 하니, 거자가 답하기를, ‘소가 방금 오줌을 누고 있습니다.’ 하였다.” 한다. 《어우야담》
○ 성종ㆍ중종 두 임금 때, 특별 과거의 법규는 반드시 육량(六兩)의 화살로써 20보 밖에서 말을 달리며 쏘아 네 번 맞추고, 강(講)에서 조(粗)ㆍ통(通)에 입격한 연후에 방에 참여시켰기 때문에, 선발된 무사는 모두 뛰어나 쓸 만했었다. 만력(萬曆) 계미년에 니탕개(尼湯介)가 변방을 침입하니,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국경을 방비하고 전장에 나가게 하기 위한 계책을 건의하여, 드디어 특별 과거를 설치하여 무사 6백여 명을 선발하였더니 매년 선발한 자가 각기 수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조종조의 과거 법규가 이에 이르러 여지없이 무너져 잡색 군병 중에 약간의 궁술(弓術)을 아는 자면 모두 과거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왕궁을 시위(侍衛)하는 갑사(甲士)ㆍ별시위(別試衛)ㆍ정로위(定虜衛)의 부류 및 외방 각 진영의 기병ㆍ보병ㆍ수군에 새로 선발할 정원이 많이 비게 되었다.임진년에 임금이 서쪽으로 행차하여 관서(關西 평안도)와 해서(海西 황해도)에서 연년이 무과를 설시하였고, 계사년 가을에 전주(全州)무군소(撫軍所)ㆍ영남 원수부(元帥府)와 각 도에서 선발한 인원이 매우 많았다. 계사년 환도로부터 정유년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에 여러 차례의 과거를 설시하였는데, 글을 강(講)하지 않고, 다만 화살 한 개를 맞춘 사람까지도 모두 선발하였으니, 명칭이 과거이지 실상은 군적(軍籍)과 같았다. 방을 게시하던 날에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홍패(紅牌)를 손에 든 사람이 미투리를 신고 도보로 가는 자 또한 많않으니, 뽑는 사람은 더욱 많아졌는데도 장수 재목은 더욱 모자랐던 것이다. 《송와잡기》
○ 선조 계사년에 영유(永柔)행재소(行在所)에서 무사 2백 명을 뽑았는데 이때에 국가의 법금이 엄하지 않아 공사 노비들도 시험장에 나가 과거를 도둑질한 일이 있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손[客]과 마주 앉아 종을 불렀으나 응답이 없으므로, 항복이 말하기를, “이 고얀 놈이 필시 과거보러 간 것이로구나.” 하니 만당의 손님들이 크게 웃었다. 《어우야담》
○ 선조가 평안도로부터 연을 돌려 오는 길에 연안(延安) 관사에 들려 성을 지키는 장사들을 시험하여 친림한 가운데 방방(放榜)하였다.
○ 군병들에게 조총(鳥銃)을 학습시키고 이를 무과의 여러 기예 종목 중에 넣도록 명하였다.
○ 성혼(成渾)이 소를 올리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거를 가장 중히 여기오니, 마땅히 각 도에 특히 무과를 보이되, 방비가 가장 긴요한 곳에는 2~3개 장소에 나누어 설치, 널리 평안도의 예와 같이 선발하여, 숨어 있는 자들도 모두 나아가 입격하도록 하면 정병이 될 것이요, 그 나머지도 맞힌 살의 수효를 각기 성명 아래 거주하는 향리와 함께 기록하여 전과 같이 누락됨이 없도록 하면 또한 징발할 수 있는 군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 계사년 겨울에 광해군(光海君)이 동궁(東宮)으로서 전주(全州)에 머물러 무사 5백 명을 뽑았다. 이때, 전국적으로 기근이 심하여 굶에 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하였는데, 남쪽 지방으로부터 과거에 응시한 자들은 쌀 닷되[五升]로 급제를 사기까지 하였다. 《어우야담》
이때, 전주에서 알성과(謁聖科)를 베풀어 문신 11명과 무신 1천 6백 명을 뽑았고, 권율(權慄)도 명을 받들어 합천(陜川)에 가서 무과를 실시하여 무사 9백 명을 선발하였다. 《일월록》
갑오년에 이순신(李舜臣)의 장계로 무과 백 명을 뽑으니, 이를 주사 급제(舟師及第)라 이름하였다. 《일월록》
○ 임진란 후에 무과를 시취함이 매우 넓어서 한 방에 뽑은 숫자가 많은 것은 수천에 달하여, 혹 활을 잡을 줄 모르면서도 참여한 자가 있고, 혹 천한 신분이면서도 참여한 자가 있어, 통털어 수만 명이나 되었다. 대개, 사람들로 하여금 의욕을 북돋우기 위함이었으나, 실용에는 도움이 없었으니 과거의 명목이 또한 너무 천했었다. 《지봉유설》
왜놈의 머리 하나를 베어오는 자는, 공천ㆍ사천을 막론하고 과거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니, 혹 굶어 죽은 사람의 머리를 베어 왜놈의 머리로 속여 상을 요구하는 자도 있었다. 영남에서 어느 한 사람이 머리를 베어 급제한 것을 그 고을 원이 잔치를 베풀어 그의 영광을 축하하니, 어느 사람이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굶주린 백성의 머리 위에 계화(桂花)가 떠 있고 / 飢民頭上桂花浮
쌓인 홍패 속엔 원한의 피 흘렀네 / 紅紙群中怨血流
태수(太守)의 축하연 술이 있을 것이니 / 太守慶筵知有洒
원컨대, 남은 찌거기로 죽은 넋 위로하오 / 願分殘瀝慰啾啾

하였다. 《지봉유설》
○ 병신년에 시종의 신하를 한산도(閒山島)로 보내어 과거를 베풀어 수자리 사는 군졸을 응시하게 했으니, 이순신(李舜臣)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 임인년에 조정 논의가 수군이 고생한다고 하여, 경상도의 부산(釜山)과 거제(巨濟), 전라도의 경도(鯨島)와 고금도(古今島)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1만 7천여 명을 뽑았는데, 겨울에 조정 논의가 내지 사람도 많이 혼입되어 있다 하여, 초시의 시행을 청하므로, 다시 수군에게 과거를 실시하여 1천 6백여 명을 뽑았다.
○ 을사년에 외방 무사로 활쏘기에 응시하여 회시(會試)에 바로 나가게 된 자들을 북방 변경의 방위에 충당코자 따로 정시(庭試)를 실시하였다.
○ 광해 초년에 특히 함경도에서 무과를 설시하였는데, 문과는 베풀지 않고 무과만으로 방을 발표하였다.
○ 11년에 변경 사정이 날로 급박하므로 승지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과거를 실시하고 널리 무사를 뽑았다. 모두 서울로 모아 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모두 합하여 1만여 명을 뽑으니 당시에 이를 만과(萬科)라 일컬었다.
○ 인조 병자년에 평안도에 무과를 설시하고 싸움터에 나가기를 자원하는 자는 어느 도를 막론하고 모두 응시하게 하여 1만여 명을 뽑았다.
○ 정축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지켰던 사람과 호종한 사람은 물론이요, 공천ㆍ사천까지도 각기 한 기예로써 정시(庭試)에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 구인후(具仁垕)가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이후로 무과에 활쏘기와 말타기만을 취하였기 때문에, 병법에 통달한 자가 도리어 참여하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제부터 약간 옛 법규를 변경하여 글을 강(講)하는 것까지 겸하여 사람을 뽑도록 할 것을 청하옵니다.” 하였다.
○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무사를 많이 뽑는 것이 국가의 막대한 폐단이 되고 있으니, 군사의 수효가 날로 줄어드는 것이 그 첫째요, 벼슬을 여러 사람에게 고루 주지 못하여 그 원망이 조정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 둘째요, 관직이 날로 가벼워져 사람들이 그 본분을 지키지 못함이 그 셋째입니다. 근일에 일을 논하는 자가 한갓 부방(赴防 국경을 방위하러 가는 것)의 중요성만을 알고, 뒷날의 폐단을 생각지 않고서 매양 널리 선발하고자 하니, 서로(西路 평안도)에서 과거를 설시한 것도 오히려 너무 지나쳤다는 한탄이 있사온데, 또 삼남에서 교생(校生)을 깨우쳐 그 무예를 전형하여 다가오는 별시와 방을 합하려고 하니, 막중한 과거를 어찌 한번의 시험으로써 그 참방(參榜)을 허용하오리까.” 하였다. 《지천집》
○ 인조 병인년의 대간의 계청으로 별시의 방을 파했으나, 무과는 파하지 않고 정시(庭試)에 합쳤다.
○ 현종 을사년에 대신의 내삼청(內三廳)에 무변의 적임자가 적다 하여 과거를 설시할 것을 계청하므로, 대거(對擧) 문과 정시를 실시하였다.
○ 숙종 병진년에 정시(庭試)ㆍ초시는 도로 나누어 시행하여 전시(殿試)를 와서 보도록 하고, 관서ㆍ관북과 영남엔 따로 중신을 보내어 시행하여 그곳에서 방을 발표하도록 하였는데, 합해서 모두 1만 9천여 명을 뽑았다.
이때, 무과에 급제한 자가 1만 4천여 명에 달하였는데, 방을 부를 때에 대궐 뜰이 협착하여 정축ㆍ신묘년의 예에 의거하여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거행하였다. 《비국등록》
○ 송시열(宋時烈)이 소를 올리기를, “무인의 만과(萬科)는 오늘의 난처한 폐단이 되어 있습니다. 그 수효가 2만에 가까운데, 모두 서울로 몰려와 벼슬에 등용되기를 바라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나라를 원망하니, 서울의 쌀이 귀한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며, 농민도 점점 감소되어 가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정자(程子)의 ‘정원 없앤 것을 삭제하여 이익으로 꾀는 것을 제거한다.’ 는 말에 의하여 각기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재예를 전형하여 그 중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병사(兵使)에게 올리면, 병사는 다시 모아서 전형하여 그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병조에서 또 전형하여 뽑아 가지고, 차례대로 관직에 보직시키면 곧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각기 그 시골로 돌아가서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또 한편으로는 무예를 익히게 될 것이오니, 공사(公私)와 경향이 모두 그 편리함을 얻을 것이요, 그 천한 품계 중에도 반드시 쓸 만한 인재가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우암집》
○ 숙종 병인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 무과 초시의 방을 보면, 사대부의 자제로서 참여한 자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쓸 만한 자는 극히 드무니, 어찌 장래의 임용을 바라리오. 조정에서 인재를 씀에 있어 문ㆍ무를 가리지 않으니, 입시한 제신 중에 만약 자제를 여럿 둔 자가 있거던 권고하여 무예를 배우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지사(知事) 신여철(申汝哲)이 아뢰기를, “신이 매양 전교를 듣자옵고 나아가 친구들에게 말하여 자제들에게 무예를 배우게 하도록 권고하였사온데, 한번 만과(萬科)를 설시한 뒤로부터 벼슬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 헛되이 늙은 자 많사옵고, 또 무변이라고 일컬으며 음관까지도 또한 모두 그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이것이 곧 사대부의 자제로서 차라리 궁한 선비가 될지언정, 즐겨 무변으로 나가지 않는 까닭이옵니다.” 하였다.우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중국의 과거 제도에는 무진사(武進士)라는 것이 있사온데, 몇 가지 무예 이외에 평변론(平邊論)과 치안책(治安策)으로써 전형하여 뽑기 때문에 입격하는 자는 적사오나 쓸 만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글을 강하는 제도가 있사오나 다만 음석(音釋 한문(漢文)을 음(音)으로 읽고 언해(諺解)로 새기는 것)만 강하여도 모두 참여하게 되니, 사대부의 자제는 비록 글을 강하는 데는 능하오나 무예가 부족하기 때문에, 상놈들이 방에 드는 자가 많사옵니다. 만약 이러한 폐단을 고치려고 한다면, 과거의 규식을 약간 높이고 선발하는 사람의 수효를 줄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비국등록》
○ 경오년에 전교하기를,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는 데에 있어 문ㆍ무가 어찌 다르랴. 근래 무과 방목(榜目) 속에 사대부의 자제가 전혀 없으니, 사족들이 무업(武業)에 종사하지 않음을 가히 알겠도다. 청(廳)을 설치하여 무학을 권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임진년에 비로소 평안도 별무사 도시(平安道別武士都試)를 설치하였고, 정유년에 강화부 장려 의려 도시(江華府壯旅義旅都試)를 설치하였으며, 무술년에는 황해도 별무사 도시ㆍ동래부 별기위 도시(東萊府別騎衛都試)를 설치하였고, 기해년에는 의주(義州)ㆍ강계(江界)ㆍ선천(宣川)ㆍ창성(昌城)ㆍ삼화(三和)에는 별무사 도시를 설치하였다.
○ 영종 기유년에 강원도 별무사 권무 군관 도시(江原道別武士勸武軍官都試)를 설치하였고, 병진년에 황해도 추포 무사 도시(黃海道追捕武士都試)를 설치하였으며, 병진년에 경상도 별무사 도시를 설치하였고, 신미년에 경기ㆍ충청ㆍ경상ㆍ전라ㆍ황해ㆍ강원 등 각 도에 선무 군관 도시(選武軍官都試) 및 황해도 향기사 도시(黃海道鄕騎士都試)를 설치하였다.

[주D-001]조(粗)ㆍ통(通) : 경(經)을 강할 때에 등급을 매기는데, 최상은 통(通), 다음은 약(略), 또 그 다음은 조(粗), 최하는 불(不)이라 한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0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제도 Ⅴ. 신래(新來)ㆍ회자(回刺)

○ 옛날에 신래(新來 과거에 급제하여 새로 들어온 관원)를 제압한 것은 호방한 선비의 예기를 꺾고, 상하의 등분을 엄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규칙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품을 거두어 낼 때에, 어물은 용이라 일컬으며, 닭은 봉(鳳)이라 일컫고, 술은 맑은 것은 성(聖), 탁한 것은 현(賢)이라 하였는데, 그 수효가 또한 한정이 있었다.처음 관직에 나오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이르고 겨우 10여 일이 지나서야 그들과 더불어 같이 앉았는데, 이를 면신(免新)이라 하였다. 이제 와서는 한갓 사관(四館)만이 아니라, 충의위(忠義衛)ㆍ내금위(內禁衛) 및 여러 위(衛)의 군사(軍士)와 아전ㆍ하인[僕隸]까지도 새로 들어온 사람을 침해(侵害)하여 모든 귀한 음식물은 재촉해서 거두어들이고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비록 한달을 지나더라도 같이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용재총화》
○ 삼관(三館)의 풍속에 남행원(南行員 음관(蔭官))의 수석을 높여 상관장(上官長)이라 하여 공손히 받들고, 새로 급제하여 분속(分屬)된 자를 신래라 하여 이들을 욕보이고 괴롭혔으며, 또 술과 음식을 제한 없이 강요하는 것은 교만스런 태도를 꺾기 위함이었다. 처음 벼슬하는 것을 허참(許叅)이라 이르고, 예를 마친 것을 면신이라 하였는데, 그런 뒤에야 구관과 더불어 같이 앉게 된다. 술자리를 베풀면 말석 관원이 왼손으로 여자(기생)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큰 술잔을 잡고는 먼저 ‘상관장(上官長)님’하고 세 번 부르며, 또 가는 소리로 세 번 부르면 상관장이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하였고, 아관(亞官)을 부르면, 아관이 또한 큰 소리로 대답했는데, 하관이 술을 이기지 못하면 벌주가 있었으나, 상관이 술을 이기지 못한 것은 벌주가 없었으며, 비록 벼슬이 높은 대신이라 할지라도 상관장의 윗자리에 앉지 못하였다.삼관(三館)이 서로 자리를 띄어 앉고 정1품을 부를 때엔 대(大) 자를 다섯 번 붙이고, 1품에는 대 자를 네 번 붙이며, 2품에는 대 자를 세 번, 3품 당상관에는 대 자를 두 번, 당하관에게는 대선생(大先生)이라고만 부르고, 4품 이하에게는 범칭(泛稱) 선생이라 불렀는데, 각기 그 성을 들어 불렀다. 부르고 난 뒤에 또 신래를 세 번 부르고, 또 흑신래(黑新來)를 세 번 부르는데, 흑신래란 기생을 일컫는 것이다. 신래가 사모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을 등에 지고 머리를 땅에 닿도록 구부리고 선생 앞에 나가서 두 손으로 사모를 싸 쥐고, 머미를 쳐들었다 숙였다 하는 것을 예수(禮數)라고 이름했으며, 관직명을 외는데, 위로부터 내리 외는 것을 순함(順銜), 밑으로부터 올려 외는 것을 역함(逆銜)이라 하였다. 또 기쁜 표정을 짓게 하는 것을 희색(喜色)이라 이르고, 노여운 표정을 짓는 것을 패색(悖色)이라 했으며, 그 별명을 말하면 그 별명대로 형용을 하도록 하는 것을 삼천 삼백(三千三百)이라 하였는데, 그 무수한 침욕(侵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방목(榜目)의 발표를 경축하는 날은 반드시 삼관(三館)을 맞아 와야만 잔치를 베풀고 행례를 했으며, 만약 신은(新恩 신래와 같다.)이 불공하게 하여 삼관에게 죄를 얻으면, 삼관도 가지 않으려니와, 신은도 유가(遊街)를 다니지 못하였다. 삼관이 처음 문에 이르면, 한 사람이 북을 울리고 그의 좋은 벼슬을 소리 높이 부르는데, 여러 서리(胥吏)들이 소리를 모아 응대하고, 함께 신은을 손으로 받쳐 쳐들었다가 내렸다 하면서, “경하합니다.” 하고, 또 부모 친족에게 축하하기를, “생광스럽습니다” 하고, 최후에는 기생을 번쩍 쳐들어 경축하기를, “유모(乳母), 유모” 하였다.또 신은들이 합동하여 의정부ㆍ예조ㆍ승정원ㆍ사헌부ㆍ사간원ㆍ성균관ㆍ예문관ㆍ교서관ㆍ홍문관ㆍ승문원의 각 아문에 배알하면, 여러 아문의 선생(선진)들이 많은 포물을 징수하여 술마시고 잔치하는 비용으로 썼는데, 봄에 교서관에서 먼저 행하는 것을 홍도음(紅桃飮)이라 하였으며, 초여름에 예문관에서 행하는 것을 장미음(薔薇飮)이라 하였고, 여름철에 성균관에서 행하는 것을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용재총화》
면신연(免新宴)에 상관장은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여러 선생과 더불어 사이를 띄어 앉았으며,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게 마련이었으나 상관장은 기생 둘을 끼게 하고, 이를 좌우 보처(左右補處)라고 이름하였다. 아래로부터 차례로 술을 부어 돌리고, 또 차례로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혼자서 추면 술로 벌을 주었다. 새벽에 이르러 상관장이 비로소 일어나 술을 부어 돌리면, 여러 사람이 모두 손뼉을 치고 몸을 흔들어 춤을 추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부르면 이에 매미 소리와 같은 청아한 노래 속에 많은 개구리가 들끓는 듯한 소리가 뒤섞이게 되는데, 날이 밝아서야 비로소 헤어져 돌아갔다. 《용재총화》
○ 선조조에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인재 성취하는 공효를 비록 일조에 볼 수는 없더라도 다만 폐습이 교화를 상하게 하는 것만은 고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날 선비들의 처음 등과(登科)한 자를 사관(四館)에서 신래라 하며, 오욕하고 침학하게 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대개 호걸(豪傑)의 선비는 오히려 과거도 염두에 두지 않는데, 하물며 그들로 하여금 관(冠)을 부수고 옷을 찢고, 진흙 속에 굴려서 위의(威儀)를 잃게 하고 염치를 버리게 한 후에 비로소 사판에 오르게 한다면 호걸스런 선비들이 누가 즐겨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신은을 접대하는 데 있어, 자못 예모(禮貌)를 더하는데, 만약 이런 일을 듣는다면, 반드시 오랑캐의 풍속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침학하는 풍습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전기에는 증거될 만한 데가 없사옵고, 다만 듣자오니, 고려말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여 급제한 자가 귀한 집 자제들로서 입에서 아직 젖내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홍분방(紅粉榜)이라 일컬었으며, 인심이 분격하여 드디어 침욕(侵辱)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고쳐야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전교를 내려 사관(四館)에서 신진을 침학하는 풍습을 고치도록 명하였다. 《석담일기》
○ 우리나라에서 새로 급제한 자를 신래라 불렀고, 사관(四館)에 나누어 예속시키는 것을 분관이라 하였으며, 분관한 후에 새로 예속된 자가 밤에 본관의 선진(先進)의 문(門)에 가서 인사드리는 것을 회자(回刺)라고 하였는데, 출입ㆍ진퇴할 때에 어떤 침학과 곤욕을 주어도 오직 선진의 명에 따라야 했으며, 거의 10여 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사(本司)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고, 신임을 면했다 하여 이를 신래 면신(新來免新)이라 이름했으며, 밤에 다녀도 순경(巡更)하는 자가 그의 행동을 금하지 못하였고, 복색이 극히 괴상스러워 심지어 새 귀신[新鬼]이란 조롱까지 하였다.박태한(朴泰漢)이 등과하여 분관된 뒤에, 회자(回刺)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니, 최창대(崔昌大)가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단엄(端嚴)한 선비의 달갑게 여기는 바는 아니나, 나라의 풍속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비록 선배들의 이름 있고 덕 있는 분이라 할지라도, 모두 이를 면하지 못했는데, 어찌 사소한 절목(節目)에 이론을 세워 세속의 지적을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니, 박태한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것이 선비가 출신하는 첫길인데, 어찌 억지로 속투(俗套)를 따라 스스로 도깨비의 지목을 달게 받는단 말인가.율곡이 이 폐습을 고치자고 청한 것이 경연일기(經筵日記)에 실려 있고, 근래에 윤 정승[尹相公] 지완(趾完)이 비록 도학의 선비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이것을 즐거워하지 않았으니, 어찌 스스로 제 몸을 사랑하는 선비가 몸소 이런 풍습을 행할 리가 있겠나?” 하니, 최창대가 안색을 고치고 옳은 말이라고 칭찬하였으나, 자기는 억지로 나아가 회자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뒤에 글로써 박태한에게 회보하기를, “귀신의 행동을 이미 면치 못하였고, 조롱하고 장난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또한 남을 따라 같은 행동에 휩쓸린 것이 많았으니, 형과 더불어 거취를 같이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하였다. 《곤륜집(崑崙集)》
일찍이 박태한이 이광좌(李光佐)ㆍ최창대와 함께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가 급제하거든 신래의 행동에 응하지 말자.” 하였었다. 갑술년 별시(別試)에 세 사람이 동방(同榜) 급제하였는데, 같은 연배의 친구들이 박태한은 본래 고집이 있어 결코 시속에 응할 리가 없을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애당초에 신래를 가서 부르는 자가 없었고, 이광좌는 정승 남구만(南九萬)이 좌주(座主)로서 와서 부르는 것도 또한 끝내 불응하여 말하기를, “대감께서 대신으로서 선생이 되어 신진을 가르치되, 자기 몸을 바로하여 임금을 섬기는 도리로 하지 않고, 홍분방(紅粉榜)의 남긴 풍습으로 하려 하십니까?” 하니, 남구만이 웃으며 이를 허용하였는데, 최창대는 그 아버지의 명령이 허락지 않아 부득이 시속을 좇았던 것이다.
최석정(崔錫鼎)이 이광좌에게 준 서신에 말하기를,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에 이르기를, ‘일이 의리에 해되지 않는 것은, 시속을 따르는 것도 가(可)하다.’ 하였다. 근세의 선진들이 신래를 괴롭히는 것이 진실로 아이들 장난에 가까운 일이나,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드디어 풍속을 이루었고, 선배들의 유명한 사람도 모두 시속을 따름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제 들으니 그대가 박교백(朴喬伯)과 더불어 선생을 만나 불공하게 하였고, 박교백이 또 과하게 하였다 하니, 아마 경중(輕重)의 소재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선비의 마땅히 할 바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은 자질구레한 조목은 우선 풍속에 순응하는 것이 엽각(獵較)하는 뜻에 해될 것이 없으니, 그 마땅히 힘쓸 곳에 더욱 힘써 줌이 나의 변변치 못한 바람이다.” 하였다. 《명곡집(明谷集)》

[주D-001]좌주(座主) :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고시를 맡았던 대제학(大提學)을 좌주(座主)라 하고, 합격한 자를 문생(門生)이라 한다.
[주D-002]엽각(獵較) : 공자가 노(魯) 나라에 있을 때에, 노 나라 사람들이 엽각을 하면 공자도 풍속에 따라 엽각을 하였다는 것인데, 엽각은 사냥할 때 따르는 일종의 행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