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청음 정사룡(정운경) 기사

조선 영의정 정사용 (정운경관련기사 왕조실록등 )

아베베1 2009. 12. 8. 17:20

용재집(容齋集) 제2권
 오언율(五言律)
의령(宜寧)으로 근친(覲親) 가는 정운경(鄭雲卿)을 보내며 3수(三首)


일찍이 대궐 섬돌을 밟았고 / 早展花磚步
지금은 근친 길을 떠나누나 / 今兼綵服行
옥당에서 막 하직하고 물러나 / 玉堂初下直
역마 타고 다시 장도에 오르네 / 馹騎復長程
경연에선 주상의 은총 입었고 / 經幄勤三接
유림에선 대명을 독차지하였지 / 儒林擅大名
빨리 조정에 돌아와 입대해도 / 遄歸催入對
어버이 마음 오히려 위로되리 / 猶得慰親情

흰 구름 서린
사굴산은 멀고 / 白雲闍崛遠
가을 물 맑은 낙동강 잔잔해라 / 秋水洛江平
돌아가는 노 재촉이 성화인데 / 歸棹如星火
잔을 들매 형제가 한자리로세 / 稱觴共弟兄
조정에선 시종을 추중하였고 / 朝廷推侍從
향리에선 은영인 줄 알았지 / 鄕曲識恩榮
작은 시로 증별 노래 대신하니 / 小什當歌詠
오히려 후생을 권면할 만하여라 / 猶堪勸後生

정진 나루 물 질펀히 흐르는데 / 鼎津流浩渺
나의 집은 그곳 강가에 있었지 / 吾舍在其涯
예전에 심은 대는 천 개이련만 / 舊竹應千箇
새로 옮긴 매화는 몇 가지런고 / 新梅定幾枝
옛날에 놀던 시절 꿈만 같은데 / 昔遊渾似夢
가지 못하고 그저 시만 읊노라 / 未去但吟詩
부로들이 만약 내 소식 묻거든 / 父老如相問
머리털 이미 세었다 말하지 마소 / 休言鬢已絲

용재집(容齋集) 제2권
 오언율(五言律)
정운경(鄭雲卿)의 시에 차운하다. 5수(五首)


이름은 마치 사굴산처럼 무겁고 / 名垂闍崛重
마음은 흡사 정진 물인 양 맑아라 / 心似鼎津淸
이별한 후 소식이 끊기었더니 / 別去音塵隔
보내온 서신 흉금을 다 쏟았구나 / 書來底裏傾
하늘과 땅이 우리를 용납하니 / 乾坤容我輩
시와 술은 전생부터 맺은 인연 / 詩酒自前生
아름다운 경치 보면 그대 생각노니 / 美景思携手
아련히 내 낀 꽃 도성에 가득해라 / 煙花滿洛城

새로 보낸 시에서 깊은 정 알고 / 新詩知繾綣
종횡으로 쓰인 가는 글자 보노라 / 細字看縱橫
지금은 머리에 온통 백발이니 / 此日頭渾白
어느 때나 반가운 눈길로 만날꼬 / 何時眼共明
강호에 물고기는 제 길 찾았것만 / 江湖魚得計
종고는 새의 마음에 맞지 않아라 / 鍾鼓鳥非情

우리 양쪽의 하염없는 상념은 / 兩地無窮思
붓끝으론 결코 그리지 못하겠네 / 毫端寫不成

헤어진 지 오래매 오늘 슬퍼하고 / 乖闊悲今日
함께 어울려 놀던 옛날 생각노라 / 遊從記昔年
악기와 노래로 만류하던 그해 / 笙歌留舊歲
가인의 붉은 분 서천에 빛났지 / 紅粉耀西天
당시의 행락이 일장춘몽 같나니 / 行樂如春夢
벼슬길은 바로 이별의 자리로세 / 名途是別筵
서로 그리워도 만나지 못하는데 / 相望不相見
쇠잔한 머리털 어느새 허옇구나 / 衰鬢坐蕭然
정주(定州)에 있을 때 제석(除夕)에 함께 놀던 것을 추억하며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재상 자리는 내 분수에 안 맞아 / 鼎台非我分
산골짜기에 있는 내 집을 생각노라 / 丘壑憶吾家
오늘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나니 / 今日知魚樂
새로 보낸 시편 말편자와 맞먹누나 / 新篇當馬撾
첩첩 산을 마주하고 높이 읊조리며 / 高吟對疊巚
날이 저물 때까지 꼿꼿이 앉았노라 / 危坐到棲鴉
어찌하면 우리 서로 반겨 만나 / 安得逢迎地
할 말 잊은 채 함께 차를 달일꼬 / 忘言共點茶
누옥(陋屋)이 또한 정수(鼎水) 가에 있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그대가 고향으로 떠난 뒤로 / 自君之出矣
누구와 더불어 다시 글을 논하리 / 誰與更論文
돌아오는 길 도리어 천리인데 / 歸路還千里
올봄은 또 반이 이미 지났구나 / 今春又半分
옛 소리 참으로 화답할 이 적고 / 古聲眞寡和
천리마는 무리가 빈 지 오래라네 / 絶足久空群
한 글자를 가벼이 놓지 말지니 / 一字休輕下
그 가치 황금 몇 근과 맞먹는다네 / 黃金直幾斤


[주D-001]강호에 …… 않아라 : 여기서 물고기는 고향인 의령(宜寧)에 가 있는 정운경을, 새는 조정에 몸 담고 있는 작자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장자》 지락(至樂)에,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내려앉자 노후(魯侯)가 그 새를 사당에 모셔 놓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하고 태뢰(太牢)의 성찬(盛饌)을 올리니, 새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고기 한 점 술 한 잔 먹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는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하였다.
[주D-002]물고기의 즐거움 :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강물 위 다리를 거닐다가 장자가 “피라미가 조용히 노니니 이는 물고기의 즐거움이로다.” 하니, 혜자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이에 장자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줄 어찌 아는가?” 하니, 혜자가 “나는 그대가 아니므로 진실로 그대를 알지 못하니,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므로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莊子 秋水》 여기서는 정운경의 자득한 즐거움을 뜻한다.
[주D-003]새로 …… 맞먹누나 : 정운경이 새로 보낸 시편을 받아 보니 그가 직접 말편자 소리를 울리며 찾아온 것과 같다는 뜻이다.

용재집(容齋集) 제2권
 오언율(五言律)
무진정(無盡亭)


높은 정자 지을 터 새로 잡았기에 / 高亭新卜地
지나는 길손 우연히 시를 남겼었지 / 過客偶留詩
오늘 세상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 今日聞傳說
남방에서 제일 경관이 빼어나다네 / 南方擅絶奇
그곳 강산은 유독 눈에 선하지만 / 江山獨在眼
흐르는 세월에 그저 슬픔이 일 뿐 / 歲月只生悲
늙은 못 장차 어디 갓 쉴거나 / 休老終安適
덧없는 인생 흰 머리털만 가득해라 / 悠悠雪滿髭

맑은 가을 벗님네들 모여서 / 淸秋故人會
낙동강 가에서 백주를 마시었지 / 白酒洛東涯
신세는 물 위에 뜬 도경과 같고 / 身世同浮梗
재명은 저녁노을에 부끄러워라 / 才名愧落霞
고담에 다투어 포복절도하고 / 高談爭絶倒
취묵은 반이 삐뚤삐둘하였지 / 醉墨半欹斜
고개 돌리니 도무지 꿈만 같아 / 回首渾如夢
그대가 물화를 차지함만 못하오 / 輸君領物華


지금은 옛날 아니라 앉아 탄식하다가 / 坐歎今非昔
후세엔 지금 보리라 뒤집어 생각노라 / 飜思後視今
뜬구름은 일정한 형태가 없고 / 浮雲無定態
가는 물은 슬픈 소리가 있었지 / 逝水有哀音
술을 거름에 다시금 흰 거품 뜨고 / 釃酒還浮白
시를 노래하여 거문고를 대신했네 / 歌詩當鼓琴
남쪽 땅 행락하는 곳 중에 / 維南行樂地
유독 이 정자가 내 마음에 들었어라 / 獨此會吾心

비 온 뒤 산은 푸른빛이 짙고 / 雨餘山翠重
바람 지난 물엔 무늬가 가늘었네 / 風過水紋纖
신발 아래에는 향긋한 꽃잎 밟히고 / 屨覺花香澁
옷은 댓잎에 맺힌 이슬에 젖었지 / 衣從竹露霑
홀로 노니는 것이 비록 즐겁지만 / 獨遊雖可樂
경치 죄다 차지하면 염치 아니네 / 盡取恐非廉
새로 술 익었다 부인이 말하기에 / 婦報新醪熟
하염없이 서로 잔을 주고받았지 / 相酬亦不厭

갈매기와 벗하리라 맹서했건만 / 海鷗曾托契
벼슬길에 오래도록 헤매었구나 / 官路久迷津
좋은 정자 천혜의 비경 차지하고 / 華構占天祕
구경오는 이들은 모두 선비들이라 / 來觀摠席珍
눈가에 흥취가 끝없이 펼쳐지니 / 眼邊無盡趣
사물 밖 자유로이 노니는 몸일세 / 物外自由身
묻노니 먼 길을 가는 길손이여 / 爲問長途客
부지런히 오가기 그 몇 번인고 / 憧憧定幾巡


정덕(正德) 경진년 가을 8월, 내가 영남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면서 호숙(浩叔)과 한 배를 타고 낙동(洛東)으로 황가이(黃可而)를 찾아갔다. 가이가 강가에 새로 정자 터를 잡아 놓고서 백주(白酒)를 권하며 나에게 정자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에, 내가 무진(無盡)이라 명명(命名)하고 율시 한 수를 남겨 그 일을 기록해 두었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 정자가 완공되자 영상(領相) 지정공(止亭公)이 편액을 써서 부쳐 주었다. 문사로서 영남을 오가는 이들은 반드시 이 정자를 유람하여 읊은 시가 모두 약간 수(首)인데, 가이가 일을 보러 서울에 오면서 그것들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 시편들을 보니 지난날 노닐던 때가 완연히 꿈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미 노쇠하였고 게다가 명리(名利)의 굴레에 묶여 있으니, 비록 다시 이 정자에 노닐고 싶지만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에 그 시들 중 정운경(鄭雲卿)의 운(韻)을 써서 나의 감개(感慨)한 심정을 담아보았다.


[주D-001]물 위에 뜬 도경(桃梗) : 도경은 복숭아나무로 만든 인형이다. 《전국책》 제책(齊策)에, “토우(土偶)가 도경에게 말하기를, ‘지금 그대는 동국(東國)의 도경으로 나무를 깎아서 사람꼴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비가 내려 치수(淄水)가 불어 그대를 떠내려 보내니, 그대는 표표히 떠서 장차 어디로 가려느냐?’ 하였다.” 한 데서 온 말로, 정처 없이 표류하는 것을 비유한다.
[주D-002]저녁노을 : 뛰어난 문재(文才)를 뜻하는 것으로, 당(唐)나라 초기의 기재(奇才)였던 왕발(王勃)의 문필을 가리킨 말이다. 홍주 자사(洪州刺使) 염백서(閻伯嶼)가 유명한 등왕각(滕王閣)을 중수한 기념으로 중양절에 큰 연회를 베풀고 참석한 손님들에게 서문을 짓게 하였다. 그는 내심 사위인 오자장(吳子章)의 문필을 자랑할 요량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나이 어린 왕발(王勃)이 나타나 서문을 짓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다가 “저녁노을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는 구절에 이르러 손뼉을 치며 탄복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滕王閣序》
[주D-003]고개 …… 못하오 : 지난날을 회상해 보니 꿈만 같아, 무진정 주인 황가이(黃可而)가 정자 위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맘껏 구경하는 것이 부럽다는 뜻이다.
[주D-004]갈매기와 벗하리라 : 벼슬길에서 물러나 자연에 은거하겠다는 뜻이다.
[주D-005]묻노니 …… 몇 번인고 : 작자 자신을 비탄한 말로, 벼슬길에 오래 묶여서 한가할 때가 없이 분주함을 말하고 있다.
[주D-006]정덕(正德) …… 담아보았다. : 《용재집》 제2권 〈무진정(無盡亭)〉에 대한 작자의 자서(自序)이다.


동사집(東槎集) 후서(後序)
 후서(後序)
동사집(東槎集) 후서(後序) [소세양(蘇世讓) 찬]

신사년, 당고(唐皐)와 사도(史道) 두 조사(詔使)가 우리나라로 왔을 때 지금의 우상(右相) 용재공(容齋公)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두 사신은 문장을 좋아하여 무릇 경치를 만나서 흥취가 일면 문득 붓을 쥐고 시를 지어 밤으로 낮을 이으면서 시 읊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은 태연히 응수하여 좌우로 수답(酬答)함에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시를 지어내는 듯한데도 구절이 갈수록 더욱 기이하니, 두 사신이 크게 경복(敬服)한 나머지 이별할 때가 되어서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고 아녀자처럼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와 정운경(鄭雲卿), 이백익(李伯益)이 곁에서 직접 목격하매 자부심이 느껴지는 듯하였다. 그때 지은 《황화집(皇華集)》을 두 질로 나누어 집에 보관해 두고 사람들이 독송하곤 하였는데, 처음 압록강(鴨綠江) 가에서 두 사신을 영접하고부터 송별하고 돌아올 때까지 우리 일행끼리 서로 창화(唱和)한 작품들을 공이 《동사집(東槎集)》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공은 재상으로 발탁되고 우리 세 사람은 혹 집안에 변고가 있고 혹 외직으로 지방에 나간 탓에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여러 해였다. 작년 봄에 나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이 고을의 부윤(府尹)으로 부임했고, 정운경과 이백익은 나란히 조정으로 들어가서 바야흐로 청학동(靑鶴洞)의 서당에서 공과 만나고들 있었다. 나만 홀로 남쪽에서 부서(簿書)의 업무에 골몰하는 터라 옛날 노닐던 시절을 돌이켜 보니, 이미 묵은 자취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공의 ‘부침미정(浮沈靡定)’이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이에 이 시집을 판각하여 세상에 전하는 바이다.
용집(龍集) 무자년 가을 7월 하한(下澣)에 진산(晉山) 소세양(蘇世讓)은 완산(完山)의 연침당(燕寢堂)에서 쓰노라.
해동야언 3
중종(中宗) 상(上)

○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박원종(朴元宗)은 부귀한 집에서 성장하였다. 젊었을 때 뜻이 커서 구속받지 않아 고기 파는 집에 드나들며 활쏘기를 배워서 무과에 합격하여 청현직을 거쳤는데 드디어 기질을 굽히고 글을 읽어서 대의(大義)에 통하고, 세속에 따라서 휩쓸리지 않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은 바로 그 누이인데, 연산군에게 더러움을 입고 병이 전염되어 죽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항상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그때 성희안(成希顔)은 일찍이 연산군을 따라 망원정(望遠亭)에서 놀다가 연산군이 여러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는데 성희안의 시에, “성주(聖主)의 마음은 원래 청류(淸流)를 사랑하지 않는도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연산군이 보고 자기를 비방한다고 여겨 크게 노하여 드디어 벼슬이 떨어져서 집에 있었다. 연산군의 문란한 정치가 날로 심하여 종묘사직이 위급하였다. 성희안은 본래 큰 지략이 많아서 혼란한 조정을 숙청하고 어진 임금을 추대하려 하였으나, 함께 계획할 이가 없어서 근심스런 마음을 의뢰하지 못하였다. 박 공같으면 큰일을 부탁한 만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였으나, 본래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므로 말을 하기가 어려웠는데, 마을 사람 중에 신윤무(辛允武)라는 이가 있어 두 집을 왕래하며 매우 친숙하였다. 창산군(昌山君 성희안)이 드디어 은미(隱微)한 뜻을 시험하게 하였더니 평성(平城)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는 내가 밤낮으로 쌓은 뜻이다.” 하였다. 창산은 곧 저물녘에 평성의 집에 가서 각각 통곡하며 평소의 충의(忠義)를 펴서 말하기를, “마땅히 죽음으로써 나라에 몸을 바칠 것이다. 남아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어찌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이 가까이 있는데도 돌보지 않으리오.” 하며, 두 공이 매우 흡족하였다. 몇 달 후에 공등이, 각기 고립되어서는 성공하기가 어렵다고 여겨 드디어 그 뜻을 유순정(柳順汀)에게 통하니, 유순정은 오래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했으나 이미 같이 행동하기로 하였으므로 마지못해 따랐다. 드디어 박영문(朴永文)ㆍ신윤무ㆍ홍경주(洪景舟) 등에게 알려서 각각 동지를 불러 모으게 하였는데, 규합된 자는 대개 무부(武夫)가 많아서 의리(義理)를 따지질 않고 거사를 통해 공로를 성취하려고 하니, 함께 모의(謀議)하지 않아도 마음을 같이하여, 있는 곳마다 좋아서 날뛰었다.
9월 2일에 연산군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서 놀려고 하였는데 호종(扈從)하는 재집(宰執)에게 구사(丘史 하인) 한 사람만 허락하였다. 공등이 이날 성문을 막아 지키고, 진산대군(晉山大君 중종)을 추대하기로 약속하고 계획이 이미 정해졌는데, 연산군이 이 행차를 정지하기를 명하였다. 장사(將士)들이 분발(奮發)을 생각하기를, 거사의 기미가 이미 드러났으니 형세상 중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공등이 의논하여 1일 밤중에 장사들을 훈련원에 모아서 나누어 양쪽을 지키게 하여, 최한홍(崔漢洪)은 내성(內城) 동쪽을 지키고, 심형(沈亨)과 장정(張珽)은 내성 서쪽을 지키게 하였는데, 급박한 때이기에 군사들이 없으므로 역부(役夫)를 모아서 수위하게 하였다. 박 공과 유순정ㆍ성희안이 광화문 앞 수백 보(步) 가량 앞에서 말을 세워 진을 만들고, 박 공이 부채를 휘두르며 지휘하였는데 모양이 신(神)과 같았다. 신윤무로 하여금 용사(勇士) 이조(李藻)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신수영(愼守瑛)을 쳐서 죽이고, 다음은 임사홍과 신수근을 죽였다. 수겸(守謙)은 당시 개성 유수로 있었기 때문에 일이 안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천천히 사람을 보내서 주벌하려고 하였다. 신수근 등은 비록 권세를 빙자하여 교만하고 사치하기가 짝이 없었으나, 당시에 어지러운 임금에게 아첨하여 실로 나라의 근본을 기울어지게 한 자가 어찌 없었겠는가. 하지만 이 세 사람만 죽였으니,이는 신수근은 본래 교만하고 방탕한데 또 국구(國舅 중종의 장인이 됨)가 되면 장차 권세를 부려서 제어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겸해서 그 우익(羽翼)을 없앤 것이다. 공은 처음에 구수영(具壽永)이 음탕하게 인도하고 악한 일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함께 없애려고 의논하였는데, 그 족질(族侄) 구현휘(具賢暉)란 자가 그 모의를 알고 달려가서 구수영에게 고하여 구수영이 훈련원에 나와서 살려 달라고 애걸하므로 공등이 용서하였다. 신윤무가 네 사람을 쳐죽였는데, 이때 이조(李藻)가 먼저 철퇴를 가지고 길 왼편에 엎드렸다가, 별감 한 사람을 시켜 명패(命牌)를 가지고 그들이 대궐에 나가기를 재촉하게 하니 그들도 놀라고 두려워하며 대궐로 나가는데, 이조가 드디어 철퇴로 쳐서 말에서 떨어져 골수가 모두 나왔다. 신수근이 얻어맞고 말에서 떨어지자 종 한 사람이 몸으로 철퇴를 막기에 이조가 드디어 함께 쳐죽였다. 마침내 이조가 네 사람을 죽이니, 피가 튀어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는 공(功)을 나타내려고 며칠동안 얼굴을 씻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 않아 보는 이들이 추하게 여겼다. 아침에 백관이 모두 모였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입직한 도총관 민효증(閔孝曾)과 병조참지 승지 이우(李堣)가 다음, 윤장(尹璋)과 조계형(曺啓衡)이 또 나오고, 입직한 군사가 모두 성을 넘어 나와서 따랐다. 궁중에서 처음에는 변고를 듣고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연산군이 차비문에 앉아서 승지들을 불러서 들어와 앉게 하고 말하기를, “이와 같은 태평시대에 어찌 다른 변고가 있으랴. 아마 흥청(興淸 연산군 때 각 지방에서 뽑아 올려 궁중에 두었던 기녀의 무리)의 사내들이 서로 모여서 도둑질하는가 보다. 급히 정승과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불러서 처치하라.” 하고, 이우에게 명하여 열쇠를 가지고 궐문(闕門)을 순행해 살피게 하였다. 이우가 사람을 시켜 궐문에 나가게 하여, 조정이 이미 소속된 것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빠져나갔다. 연산군은 이우가 이미 문으로 달아난 것을 알고 급히 앞으로 나가 윤장과 조계형의 소매를 잡으니, 두 사람이 거짓으로 피하고 사양하다가 뿌리치고 나와서 문구멍으로 나갔다. 조계형은 연산군이 사랑하는 신하이므로 문을 지키는 장사가 그를 잡아서 상을 받으려고 붙들고 군문으로 나아가니 공들이 용서하였다. 궐내에서는 내시와 색인(色人)들은 모두 나가고, 후궁과 창기들만 서로 모여서 울부짖어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이때 극문(戟門) 안에서 회의하고, 유자광과 이수남(李秀男)은 머물러 두어 연산군이 달아남을 방비하게 하고, 공들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문 밖에 나아가 자순대비(慈順大妃)에게 명을 청하니, 조금 후에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였다. 공들이 근정전 문 서편에 나아가 열지어 앉아서, 유순정과 정미수(鄭尾壽)로 하여금 대가(大駕)를 잠저(潛邸)에서 맞아오게 하였다. 그때 임금(연산)은 평시서(平市署) 곁 인가에 피하였었는데, 유순정 등이 이문(里門) 밖에 앉아서 두세 번 나오기를 권하여 임금이 융복(戎服)과 어연(御輦)으로 법물(法物)을 갖추고 나오니, 저잣거리가 동요하지 않고 부로(父老)들이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한낮에 경복궁에 들어갔다. 유자광 등이 곽광(霍光)의 창읍왕(昌邑王)을 폐위한 고사(故事)를 따라서 전왕(前王 연산)을 전(殿) 안에 불러놓고 대비께 임금을 폐위한 까닭을 고하고자 하니, 공등이 의논해서 중지하였다. 날이 저물기 전에 백관을 나누어 정하고 임금이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사방에 교서를 펴고 크게 은사(恩赦)를 내렸다. 교서는 도승지 강혼이 초한 것인데, 젊어서는 당시에 이름이 알려졌으나, 연산군의 은총을 받게 되자 경술(經術)로 인하여 난정(亂政)을 문식하여 아첨하고 구차스럽게 용납되었다. 어느 궁인이 죽었을 때 연산군이 애석하게 여겨서 강혼에게 애사(哀辭)와 재소(齋疏)를 지으라 하였는데, 그 글이 극히 아름다웠다. 이로부터 은총이 날마다 두터웠는데, 이때 교서를 초하게 하니, 문득 썼다가 문득 지워서 마침내 문리(文理)를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그때 사람이 호리문(狐狸文)이라 일컬었다. 이것은 여우와 살쾡이는 어두운 밤에는 날뛰어도 밝은 낮이 되면 스스로 기운을 잃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체로 연산군을 폐위한 일은 창산군(성희안)에서 시작되어 공(박원종)에게서 이루어져서 위태로움이 안정으로 전환되었고, 화가 변하여 복이 되었으니, 실로 동방에 있어서 만세의 공업(功業)이다. 창산은 성품이 과단성이 있으나, 학술(學術)이 없고, 청천(菁川 유순정의 봉호)은 성품이 너그럽고 부드러워서 굳게 잡는 마음이 없으며, 공은 거칠고 요량이 없었는데, 오직 충의(忠義)가 격동한 대로 하여 공훈을 반드시 이루었으나 정사를 시행한 것은 적당하지 못하였다. 옛 은혜로 적신(賊臣) 유자광을 용서하여 후일의 화근을 만들었고, 일가 친척들에게 모두 철권(鐵券)을 주었으며, 뇌물이 많고 적음에 따라 공훈의 높고 낮은 차례를 정하였으니, “수레가 이어지고 고관이 많아 담비 대신 개꼬리로 모자를 만들었다.[連車續狗]”라는 기롱으로 지금까지 흠이 된다. 《음애일기》
연산군을 폐위시킬 때에 정승 성희안이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에게 가서 그 까닭을 알리니, 우의정이 말하기를, “이는 나라의 큰 일인데 내가 일의 시말을 알지 못하고 갑자기 한 재상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이 옳겠는가.” 하고, 곧 베개에 누우며 말하기를, “그대는 내 머리를 가져가라.” 하였다. 정승이 대군(大君 중종을 가리킴)을 세울 뜻을 말하니 우의정이, “그러면 나도 마땅히 갈 것이니, 그대는 먼저 가라.” 하였다. 연산군을 폐위한 뒤에 전한(典翰) 김전(金銓)은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관찰사 장순손(張順孫)은 춤을 추었다. 《전언왕행록》
○ 중종이 즉위하자 김응기(金應箕)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명 나라에 청하니, 예부에서 제준(題準)하기를, “모름지기 일국(一國)의 여론을 기다려야 한다.” 하였다. 공은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아 여러 사람의 뜻이 합치하였다. 또 노공필(盧公弼)과 최숙생(崔淑生)을 보내어 왕친 문무관(王親文武官)이 함께 1천 3백여 원(員)의 회본(會本)의 아룀을 가지고 예부에 알리니, 또, “우선 국사(國事)를 권서(權署 임시대행)하게 한다.”고 제준하므로, 노공필이 곧 갖추어 써서 올렸는데, 그 대략에, “삼가 생각하건대, 국사를 임시로 대행하는 것은 대개 국내에 임금이 없고, 천자에게 명을 받지 못했을 때에 권도를 좇아 가정(假定)으로 하는 일입니다. 어찌 권도로써 오랫동안 왕위에 처하여 위로는 제후국의 중한 책임을 맡고 아래로는 일국의 민심을 안정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또 들으니, 위태한 병(病)은 요사함이 엿보고, 큰 지위는 간사함이 엿본다고 하였으니, 국왕의 고질병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신왕(新王)의 작명(爵命)을 더하지 않으면 국사가 체통이 없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여, 만약 무도한 무리가 그 사이에 선동하여 국내가 편하지 못하면 어찌 조정에 근심을 끼치지 않으리까. 대개 천자가 사해(四海)를 진무(鎭撫)하는 것은 가까운 곳과 먼 곳을 회유하여 사방에서 그 직분을 편안하게 행하여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도 각각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왕위가 빈 것이 이미 1년이 넘어서 온 나라가 허둥지둥 호소할 바가 없어, 한 해에 사신이 두 번이나 와서 계속 은명(恩命)을 청하였으나 아직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저희 나라로 하여금 명분이 정해지지 못하고, 국세(國勢)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우면 성조(聖朝)께서 먼 지방을 편히 하는 도리가 아닐까 두렵습니다.” 하였더니, 예부에서 또 제준하기를, “지금 만약 윤허하면, 왕위를 정한 것이 두세 명의 배신(陪臣)의 손에 있는 것이다. 집 일은 어른이 맡으니, 다시 왕대비의 주본(奏本)을 갖추어서 오라.” 하였는데, 다음해 봄이 되어서야 고명(誥命)을 주었다. 《패관잡기》
○ 무령군(武靈君) 유자광은 일찍이 연산조에서 벼슬하면서 처음으로 사류(士類)들을 모해하여, 연산군으로 하여금 방탕하고 살육을 좋아하게 한 것은 오로지 유자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림이 이를 갈았으나 반정(反正)한 뒤에, 비밀스러운 계에 먼저 참여하여 추대한 공이 있는 까닭으로 공의(公議)가 일어나지 못하였다. 어느날 유자광이 총관으로써 곧 입직하려고 초헌과 구종을 이미 갖추고, 의복과 갓과 띠를 정제하고 앉아서 헌 부채는 버리고 새 부채를 찾아서 들고 보니, 부채에 가는 글씨로, “기화가 당장 이른다.[奇禍立至]” 하는 넉 자가 쓰였으므로 크게 놀라며 묵묵히 한참 있다가 나가려고 하니, 어떤 아전이 와서 보고하기를, “대간에서 번갈아 상소하여 죄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대로 윤허되어 유자광은 관동(關東)으로 귀양갔다가 풀리지 못하고 죽었고, 아진 진(軫)과 방(房)은 모두 북도로 귀양가서 죽었으니, 이 이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비록 사람의 손을 빌렸으나, 어찌 천명이 아니리오. 《사재척언》
○ 유씨는 본래 세가(世家)인데, 유자광에 이르러 서얼(庶孼)로써 갑자기 기용되었다. 그때에는 사고가 많았으므로 간교한 지혜를 부릴 수 있었다. 마음이 험악하고 일을 좋아하여 선류(善類)들을 다 없앴다. 중흥(中興 중종반정)할 때에 성희안에게 붙어 다시 공훈의 반열에 참여하였다. 또 넘어뜨리고 위태롭게 하는 습성으로 맑은 조정을 흐리게 하고 어지럽게 하려고 하였다. 화복(禍福)이 징험이 있어서 마침내 바닷가에서 고생하다가 죽었는데 두 눈이 아주 장님이 된 지가 수 년이 되었었다. 그가 죽었을 때 조정에서 그 자손에게 거두어 장사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아들 유진은 슬픔도 잊고 색(色)에 빠져서 끝내 달려오지 않았고, 유방도 병을 청탁하고 손님과 술을 마시면서도 아비의 장례를 보지 아니하였다가 마침내 모두 망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 《음애일기》
○ 10월에 특진관(特進官) 이우(李堣)가 조지서(趙之瑞)의 아내 정씨(鄭氏)의 절행(節行)을 아뢰었다. 정씨는 바로 충의백(忠義伯) 정몽주(鄭夢周)의 증손(曾孫)으로 대대로 산음(山陰)에서 살았는데, 조지서가 상처(喪妻)하고 후취(後娶)로 들였다. 연산조 때, 동궁(東宮) 때부터 조지서가 항상 간절히 풍간(諷諫)하여 깊게 그 병통을 맞히므로 연산군이 항상 꺼리고 미워하였는데, 갑자년 사변이 일어나자 정성근(鄭誠謹)과 함께 붙잡혀갔다. 조지서는 스스로 화를 면하기 어려움을 짐작하고 술을 마시며 그 아내와 영결하기를, “나의 요번 걸음은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인데, 조상의 신주(神主)를 어떻게 하겠소.” 하니, 정씨가 울며 말하기를, “마땅히 죽음을 무릅쓰고 보호할 뿐입니다.” 하였다. 조 공이 과연 죽음을 당하고 그 집을 적몰(籍沒)하여 정씨가 돌아갈 데가 없으니,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집이 이미 망하였는데, 어찌 친정으로 돌아와 그 결말을 보지 아니하느냐.” 하니, 정씨가 의리로써 거절하기를, “망인(亡人)이 나에게 조부의 신주를 부탁하여 첩이 죽음으로써 보호하기를 허락하였는데, 어찌 중도에서 저버리겠습니까. 또 첩은 별도로 집이 있으니 가서 의탁할 수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신주를 안고 그 집으로 가서 조석으로 울며 제사하였는데, 중사(中使)가 근처에 왔다는 말을 들으면 곧 신주를 안고 대숲 속에 숨기를 혹 며칠씩 하면서 3년상을 마쳤다. 반정(反正)한 뒤에는 드디어 예전 집으로 돌아와서 제사 받들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니 온 고을이 칭찬하였다. 이우가 그때 진주 목사가 되어 여러 고을과 마을에 물으니, 마을 백성들이 모두 그렇다고 말한 까닭으로 일찍이 아뢰어 정려문(旌閭門)을 세웠다. 그렇다. 충의백의 후손으로써 백부(伯符 조지사의 자)의 배필이 되어 죽음을 맹세하고 변하지 않아 부도(婦道)를 온전히 하였으니 시대의 관념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상하다고 할 만하나 근원이 맑은 물과 모양이 바른[表正] 그림자처럼 어찌 관계가 없다고 하리오. 《음애일기》
○ 11월에 찬성사(賛成事) 이집(李諿)이 죽었다. 이집은 호귀(豪貴)한 집에서 자라났으나 성품이 검소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았다. 처음 벼슬할 때부터 대사헌을 거쳐 관찰사가 되고, 삼조(三曹)의 판서가 되기까지 공정함을 지키고 아첨하지 않았으며, 뇌물을 받지 않았다. 일찍이 형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지돈녕부사 성세명(成世明)이 사사로이 부탁하였으므로 공이 미워하였는데, 대궐 뜰에서 만나니 성세명이 나와서 읍하고 또 공경하려고 하니, 공이 뿌리치고 거절하기를, “재상으로써 감히 구구함을 어찌 남에게 보이리오.” 하여, 성세명이 땅에 엎어질 뻔하였다. 그는 질박(質朴)하고 꾸밈이 없으며 법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아 이와 같은 일이 많았다. 그가 죽에 되어서는 조야(朝野)에서 모두 애석하게 여겨 포염라(包閻羅)에게 비유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음애일기》
○ 대사헌 김전(金銓)은 아버지의 병으로 벼슬을 사면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간에서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와 기신재(忌辰齋) 일로 여러 달 동안 궐문에 엎드려 있었고, 시종과 대신들도 주창하여 가까스로 허락을 얻게 되었다. 그의 파직은 비록 말이 성실하지 못한 것을 빙자하였으나, 실은 그 의논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또 대간이 간언한 일을 이미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일을 빙자하여 파직시켰으니, 식자들은 모두 성조(聖朝)를 위해서 애석하게 여겼다. 김전이 대신 헌정(憲長)이 되고, 권민수(權敏手)가 집의가 되자 사람들이 모두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서 대사(大事)를 끝마치기를 기대하였다. 두 사람은 굳이 역대조(歷代朝)에서 인습된 폐단을 반드시 거취(去就)로 다툴 필요가 없다는 이론(異論)을 주창하여 중지하고 말하지 않으므로 여론이 비루하게 여겼다. 대체로 장리(長利)는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고, 기재(忌齋)는 선조를 욕되게 하여 국조(國朝)를 모독한 것인데, 고려의 구습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없애지 못한 것이다. 간언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 성명(聖明)한 조정에 이르러 혁파하기를 청하였다면, 성상도 반드시 따랐을 것인데 두 사람의 입으로 막혀 버렸으니 애석하도다. 두 사람은 본래 선비들이 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연산군에게 여러번 죽을 뻔하였는데, 험한 세상을 겪어서 그 절개가 바뀐 것인가. 《음애일기》
○ 연산조 이후로 도성에 있는 사찰을 모두 폐하여 관청으로 삼았는데, 두 종파는 빈 이름만 청계사(淸溪寺)에 붙여서 선종(禪宗)이라고 일컬었다. 12월에 어떤 미친 선비 두어 사람이 경첩(經帖)을 가져갔는데, 절의 중이 하인을 시켜 그 종적을 찾아서 거짓으로 절 안에서 쓰는 유기(鍮器) 일곱 바리를 가져갔다고 하고, 포도장(捕盜將)에게 정소(呈訴)하였다. 포도장이 입계(入啓)하여 그 집을 수색하였더니, 다만 불경 두어 첩(帖)이 있을 뿐이었다. 모두 사실대로 아뢰었더니 명하여 유생을 정원(政院)에 보내 꾸짖고 타일러 놓아 보내고, 그 불경은 절에 돌려주었다. 유생으로써 불경을 가지고 간 것은 비록 행동이 단속되지 못한 것이나 본래 괴이한 일은 아닌데, 중들이 말을 꾸며내어서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간과 시종들이 그 속인 죄를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주상이 뜻을 결정하지 못하니, 식자들이 말류(末流)의 폐단을 근심하였다. 《음애일기》
○ 임금이 경연(經筵)에 거둥하니, 대사헌 박열(朴說)과 대사간 성세정(成世貞)이 아뢰기를, “박영문(朴永文)은 육경(六卿)에 적당하지 못한 인물인데다가 더욱이 전하의 뜻이 거절하시고, 유세웅(柳世雄)은 포도장으로써 도둑을 잡는 것은 당연히 행할 임무인데, 특별히 가자(加資)한 것은 모두 조정의 벼슬을 가볍게 하고 명기(名器)를 더럽히는 일이니, 급히 바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유순정(柳順汀)이 아뢰기를, “근래에 도둑이 성하여 감히 잡지 못했는데, 유세웅이 잡아서 다스렸으니, 벼슬이 비록 중하나 공도 큽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경기는 도둑의 소굴로, 인천과 장단(長湍)이 가장 심하니, 그곳에 보내는 관원은 반드시 무인을 써야 합니다.” 하였다. 유세웅은 차례를 뛰어넘어 벼슬을 더하였는데, 이를 속으로 옹호하였다. 도둑을 막는 방법은 붙들어 매거나 활과 칼을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닌데, 반드시 무인을 쓰라고 한 것은 유순정이 문신(文臣) 출신이었으나,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변경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끌어 쓰는 사람은 모두 예전에 군사일을 돕던 사람들이었다. 공론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마음대로 하였으니, 이와 같이 무식한 일이 많았다.
경오년 정월 9일에 임금이 경연에 거둥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간에서 여러번 박영문(朴永文)이 탐욕스럽고 음흉한 것을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반정(反正)한 처음에 박영문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을 주장해 기록하였는데, 공공연하게 그 집에서 뇌물을 행하여, 공이 없어도 재물을 많이 쓴 사람은 1등이 되고, 공이 있어도 재물이 없는 사람은 마침내 참여하지 못하니, 모든 원망이 끓어오르게 되었습니다. 대간에서 이를 논열(論列)하였는데, 박영문은 몰래 중상하려고 박원종(朴元宗)에게 말하기를, ‘대간과 문사(文士)들이, 무인(武人)으로 삼공(三公)이 되는 것은 사체(事體)에 합당하지 못한 일이라 하여 공(公 박원종)을 탄핵하여 나에게까지 미치게 하려고 하니 마땅히 미리 도모하라.’하여, 박원종으로 하여금 자기를 끼고 조정의 신하들에게 화(禍)를 입히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첫째 일이오, 군기시(軍器寺) 관원에게 부탁하여 궐내의 관혁(貫革)을 마음대로 내오고 문지기가 꾸짖으며 금하니, 전지를 받았다고 핑계하여 가지고 나가서 그 집에 두었으니 이것이 둘째 일이오, 공조 판서가 되자 대간들이 바야흐로 궐문에 엎드려 체직(遞職)시키기를 청할 때 뻔뻔스럽게 대궐에 나아가서 스스로 변명하였으며, 또 포도대장이 되었을 때에 그 위장(衛將)인 유세웅이 우봉(牛峯) 등지에서 도둑을 잡은 공이 있었습니다. 박영문은 탄핵을 입고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인지를 알지 못하면서 감히 논공(論功)을 마음대로 하여 종사관(從事官) 이해(李海)를 제2의 공신(功臣)으로 기록하였고, 이해는 서울에 있으면서 약간의 공도 없었는데, 그 상(賞)을 자기에게로 옮기려고 그렇게 하였으니 이것이 셋째 일입니다.” 하여, 대간에서 이때문에 해직(解職)하게 되었다. 이날 박원종은 영군사(領軍事)로써 경연에 들어왔다. 대사간 성세정(成世貞)이 바야흐로 박영문의 일을 논하자, 박원종이 아뢰기를, “박영문의 일은 모두 애매합니다. 대간에서 음험하다고 하는 것은 곧 신(臣)과 함께 말한 데서 나왔으며, 대간에서 나를 반박하려고 한 말은 실로 윤양로(尹陽老)에게서 나왔습니다. 박영문은 젊어서 신과 함께 활 쏘고 말몰기를 배웠고, 같은 해에 과거에 올랐으며, 정국(靖國 반정)할 때에도 공(功)이 같았으므로 의(義)가 형제보다도 중한데, 만약 이 말을 듣고 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이른바 음험한 것이나 말하였으니 음험한 것이 아니요, 관혁(貫革)의 일은, 비록 궐내의 물건이라도 전설사(典設司)의 장구(帳具) 같은 것은 외인들이 내어 쓸 때도 있으며, 신도 무인(武人)이기에 전일에 활을 내어다가 쏜 일이 있었으니, 이는 조금도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오, 도둑을 잡은 논공의 일 역시 단자(單子 명단)를 써서 정원(政院)에 취품(取稟)하였고, 전적으로 입계한 것이 아닙니다. 근일에 대간들이 과격하여 조정을 불안하게 만들게 되니 신을 간절히 근심됩니다. 성종께서는 서정(西征)에 공이 있는 까닭으로 공신(功臣) 박지번(朴之蕃)ㆍ정유지(鄭有智)에게 청현직을 주어 그 공로를 갚으려고 하셨는데, 대체로 두 사람은 한 글자도 모르는 무부(武夫)이옵니다. 성종께서 관작(官爵)을 아끼시면서도 육조의 참판으로 제수하려고까지 하였거늘, 더구나 박영문의 정국(靖國)의 공은 그들보다 만 배나 큰 것입니다. 박영문은 생원으로 무과(武科)에 올라서 일찍이 형조 정랑이 되었을 때에도 당상(堂上)들이 모두 그 재능을 칭찬하였고, 더구나 지금 대훈(大勳)에 참여하고 벼슬이 2품에 있으니, 공조 판서를 주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은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옛날의 대간들은 사직한 뒤에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지금의 대간들은 반드시 그 청이 이루어지기를 기약하려는 것은 또 여론이 자기를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성세정은 말하기를, “신은 박원종이 아뢴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박영문으로 하여금 자신이 호소하게 하여도 어찌 이보다 더 낫겠습니까. 성종께서 사기(士氣)를 배양하고 언로(言路)를 크게 열었는데, 폐조(廢朝)에 이르러서는 곧은 말을 듣기를 싫어하였고, 당시의 대신들도 모두 음험한 사람들로 일찍이 올바른 선비들이 자기를 배척하는 것을 원망하여 무오년에 거의 다 죽였고, 갑자년 이후로 목베고 죽이기를 삼대[麻] 베듯 하여 대간은 자리만 채울 뿐이었으니, 기강이 크게 무너지고 인륜이 쇠퇴하여 상중(喪中)에도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반정한 뒤에도 아직 남은 풍습이 있으니, 이럴 때에 탁(濁)함을 없애고 맑음을 드러내지 않으면, 조정이 어느날에 청명하게 다스림을 보겠습니까. 이는 대간의 책임인데 박원종이 이를 배척하며 박영문의 악함은 성상께서 밝게 살피시는 바인데, 왜곡하여 변명하니, 신은 박원종이 말한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박원종은 말소리와 낯빛을 엄하게 하고 말하기를, “대간들의 말은 항상 사람들의 뜻을 억측하기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박영문의 일은, 대간에서 일을 폐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잠시 들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박영문에게 다시 이 자리를 회복시키면, 뒤의 대간 중에 누가 감히 다시 논의하겠습니까.” 하였다. 지경연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대간들이 사직한 지가 오래되어 조정이 기강과 이목(耳目)이 없으니, 신의 뜻으로는 급히 박영문의 벼슬을 갈아서 대간들로 하여금 직무에 나오게 함이 옳을까 하옵니다.” 하고 두세 번 아뢰었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당하였다.
이날 아침에 박원종이 경연청에 앉아서 논의하기를, “대간들이 사직하였으니, 박영문을 마땅히 체직(遞職)시키도록 아뢰겠다.” 하고는, 주상 앞에서는 이와 같이 변덕이 심하여 신용하기 어려웠다. 대개 이들은 뜻이 부귀에만 있고, 나라의 대체를 생각하지 않아서 전원(田園)과 대사(臺榭)를 극히 높고 사치스럽게 하는 데만 힘쓰고, 음악과 여자, 놀이개를 날마다 부족하게 여기며, 이것으로 서로 높은 체하여 팔을 뽐내고 기운을 부려서 비록 주상 앞에서라도 간혹 소리와 낯빛을 거칠게 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며, 세상 공론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 오직 성희안(成希顔)은 조금이라도 공도(公道)를 옹호하려 하였으나, 성품이 경솔하여 의기(意氣)를 낼 때는 다시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망령되게 행하며, 또 부귀를 탐하고 사치를 숭상하여 박원종이나 유순정과 다름이 없었다. 반정할 때에는, 성희안이 본래 중망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 인품에 기대하였는데, 이미 부귀가 극진하자, 행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11월에 정부와 육조가 대궐에 나아가 박영문(朴永文)을 체직하기를 청하자, 체직을 명하였다. 중종이 즉위한 뒤로 조정의 큰 일은 모두 대신들이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였는데, 국시(國是)가 일정하지 못하여 대간에서 말하는 것이 반드시 서로 모순이 있었다. 그러므로 임금이 들을 때는 반드시 여러번 생각을 되풀이하고, 재상들이 함께 아뢰는 것을 듣기를 바라며, 대간에서 올리는 청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명하였다. 처음 의논할 때는 매양 공론을 저지하였으나, 대간에서 강하게 다투는 날은 대신들이 도리어 대간이 관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여 들어주기를 청하였다. 대개 전조(前朝)의 대신들은 형적(形跡)을 혐의하여 구차하게 당시의 의논에 따르고, 신진 인물들은 고식주의(姑息主意)에 따르기를 힘써서 부귀를 뜻으로 삼고, 모두 만족해 하여 겉으로만 따르고, 충심으로 보국(報國)하는 사실은 없었다. 만일 멀리 떨어져 있는 신하로써 나라를 근심하고 시국을 원망하여 분연히 몸을 돌아보지 않는 이가 있으면, 여러 사람이 화(禍)의 근본이 된다고 꾸짖으며, 성조(聖朝)로 하여금 맑고 밝은 정치가 없게 하고, 벼슬하는 사대부가 호랑이 꼬리를 밟는 듯한 위험이 있게 하였으니, 식자들은 시국을 위해 애석하게 여겼다.
2월에 사헌부 관원에게 파직하기를 명하였다. 전일 청계사(淸溪寺) 중 일정(日精)이 그 절의 종을 시켜서 유생(儒生)이 절 물건을 많이 가지고 갔다고 무고(誣告)한 일을 사헌부에서 국문하니, 중 일정은 도망갔는데, 절의 종은 곧 내수사(內需司)의 종이었다. 판결사 이맥(李陌)은 바로 대비(大妃)의 오촌 아저씨인데, 본디 불량하고 경망한 자요, 집의(執義) 이위(李偉)는 바로 이맥의 사촌 형제인데, 언제나 이위에게 청탁하기를, “내수사의 종이 오랫동안 갇혀 있으니 내전(內殿)에서 매우 걱정한다.” 하며, 또 장령(掌令) 서후(徐厚)와 유인귀(柳仁貴)에게도 청탁하였다. 어느날 대청(臺廳)에서 이위가 서후에게 묻기를, “요즈음 이맥을 보았소.” 하니, 서후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이위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다시 물으니 서후가 말하기를, “내수사 노비를 추국(推鞫)하는 것을 내전에서 매우 걱정한다고 말합니다.” 하였다. 그뒤에 유인귀도 이 말을 대중(臺中)에서 발언하여 그 사람을 풀어주었는데, 사간원에서 듣고 먼저 이위를 논박하므로 임금이 대장(臺長 집의(執義))에게 물으니, 말이 서후를 언급하여 드디어 서후에게 파직을 명하였다. 간원에서 또 대장(臺長)이 참여해 듣고도 논박하지 않은 것을 논하니, 임금이 이위와 서후는 서도(西道)로 보내라고 명하고, 남은 사람은 좌천시켰다. 유인귀는 사실 그 논의를 이룬 사람인데도 자백하지 않았으므로 사림(士林)에서 유인귀가 허물을 덮어 버리고 그렇게 뻔뻔스러움을 기롱하였다. 이맥도 이죄로 호군(護軍)으로 체직되었다.
3월 5일에 영의정 박원종이 굳게 사직하기를 청하므로 김수동(金壽童)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박원종은 호사하고 부귀한 집에서 생장하였으며 무과(武科) 출신으로 좋은 벼슬을 역임하여 명예와 예절에 구속되지 않았다. 난(亂)을 만나게 되자 기지와 계교를 움직이고 일을 잘 처리하여 드디어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룩하였으므로, 비록 나무꾼이나 목동까지도 그 이름을 알았다. 그가 정승이 되었을 때도 스스로 여러 사람의 기대를 만족하게 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기개를 꺾고 겸손하고 공순하게 공정한 논의에 힘썼으나, 학문과 경술(經術)이 없으므로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얼굴에 나타나며, 비록 임금 앞에서라도 논의하는 이가 한번 그 뜻에 거슬리면 역시 그 소리와 얼굴에 나타내어 스스로 진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확실하여 거취를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이때 힘써 사직하였으므로 당시의 논의가 아름답게 여겼다. 김수동은 단정하고 중후하며 지혜가 많아서 선비로 있을 때부터 재상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그 옳고 그름을 논의하지 못했다. 연산군이 흉포할 때 비록 총애를 받아 정승에 임명되었으나, 때에 잘 맞추어서 위로는 죄를 얻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을 살려서 조정 신하들이 많이 안전한 혜택을 받았다. 당시에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면 다투어서 집을 수리하여 사치를 다하기에 힘쓰고, 뇌물이 저잣거리를 이루어 집안에 들끓었는데도 김수동만은 그렇지 않았다. 반정하던 날, 성희안이 그 집에 가서 말하였으나, 간사하게 따르지 않고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으며, 조용히 살피고 생각한 뒤에 행하였으니, 선비들이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이에 이르러 영의정에 오르니 인심이 매우 흡족해 하였다.
28일에 흥천사(興天寺) 사리각(舍利閣)에 화재가 나서 유생과 근방에 사는 주민들을 추국(推鞫)하였다. 이 절은 신라의 고찰(古刹)로 우리 태조대왕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죽음을 슬퍼하여 절 안에 두기를 명하고, 사리각을 창건하였다. 높이가 5층으로 도성 안에 높이 세웠으며, 보물과 불경을 그 사이에 간직하였다. 연산조 때부터 폐하여 사복시로 삼았고, 중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관청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화재로 절은 불타고, 지금은 사리각과 대문만 남았는데, 이때 대비가 중사(中使 왕과 대비의 명령을 전하는 내시)에게 명하여 불경을 내수사로 옮기게 하였더니, 유생 윤형(尹衡) 등은 본시 무뢰한으로써 혹 중사를 겁탈하여 능욕하기도 하였다. 이튿날 밤 어두울 때 처음 불이 일어나서는 불꽃이 공중에 닿고 연기가 하늘을 덮어 도성 안의 깊은 골짜기나 어두운 구멍 속에 있는 작고 가는 물건까지도 모두 비쳤다. 임금이 처음에는 이것을 간인(奸人)들이 난리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궁궐 안이 흉흉하였다가 오래 뒤에 안정이 되었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추측하기를 유생들의 소행이라고 지목하고, 곧 중학(中學)ㆍ서학(西學)의 유생과 절 사방으로 열 집 내에 있는 유생과 주민들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고, 곧 잡아 가두지 않는다고 의금부를 질책하였으며, 특히 경력(經歷) 김보(金俌)의 벼슬을 파면하고, 영의정 김수동과 형방 승지 이희맹(李希孟)으로 하여금 가서 그 옥사(獄事)를 다스리게 하였다. 일이 증거가 없는 데에서 시작하였고, 또 고문으로 실상을 파악하려 하니, 시종들과 삼정승ㆍ육판서가 연일 대궐에 엎드려,
유생이 불경을 빼앗은 일로 불지른 것이라 편벽되게 의심하여 마구잡이로 형장(刑杖)을 행하는 것은 마땅히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임금은 더욱 거부하고 끝까지 형벌과 신문을 가하였으나, 과연 증거는 없었다. 중사(中使)를 능욕한 일만 죄를 삼으니, 추관(推官)들이 아뢰기를, “유생이 불경을 가져갔다는 이유로 중사가 폐찰(廢刹)에 불경을 옮기는 것은 본래 적당하지 못하오니, 법조문에 없어서 죄주기가 어렵습니다.” 하여, 임금이 스스로 윤형(尹衡) 등의 죄를 정하였다. 윤형은 죄의 우두머리로써 형장 80을 쳐서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그 나머지는 속장(贖杖)과 정거(停擧 과거의 자격 정지)에 처하며, 혹은 정거만 하게 하였다. 대관과 시종들이 또 임금께서 법률을 직접 시행하는 것이 부당하고, 윤형을 장류(杖流)에 처하는 것도 마땅치 못하다고 논하니, 임금이 윤형의 부처를 면제하도록 명하였다. 김수동은 수상(首相)으로써 임금의 과실을 보고도 제대로 강경하게 간쟁하지 못하였다. 작은 일을 추험(推驗)하는 것은 본래 그 직책이 아니라고 하여, 머리를 숙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사림(士林)들이 한스럽게 여겨, 비루한 사람과는 함께 임금을 섬기기는 어렵다.” 하였다.
4월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고, 4일에는 왜놈들이 삼포(三浦)를 침범했다. 왜놈들이 우리와 더불어 섞여 살아서 점점 퍼지고, 오래되니 본국(本國)의 방비가 없음에 익숙하여 교만한 습관이 만들어져서 평시에 진장(鎭將)이 조금이라도 그 뜻을 거슬리면 반드시 욕을 하고 듣기 싫은 말을 하며 칼날을 목에 대기까지 하였다. 진장으로 있는 자는 대개가 용렬하고 비겁한 이들이 많아서 굴욕 당하는 것을 덮어버리고 구차하게 세월을 보냈으니, 사람마다 조석으로 헤아리지 못할 변란이 있을 것을 알았으나, 조정의 의논은 항상 사이좋게 지내는 것만 주로 도모하여 변장(邊將)을 골라서 진정시키려고 하여, 추천해 쓴 사람은 모두 신진(新進)으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부산포 첨사 이우증(李友曾)은 본래 노둔하고 겁이 많은 사람인데, 허풍을 쳐서 거주하는 왜놈들을 제어하는 데 절도가 없었다. 토목(土木) 공사를 오직 위엄과 힘으로만 겁내게 하려고 새끼줄로 왜놈의 머리를 나무 끝에 매달고 활을 당겨 매달아놓은 새끼를 쏘니, 사람들이 모두 독기(毒氣)를 마음에 품고 겉으로는 겁을 내었다. 절도사 유계종(柳繼宗)도 거칠고 야비한 무인(武人)인데, 급히 아뢰어 이우증을 칭찬하고 표창하므로 조정에서 의복의 안감과 겉감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더니, 여러 진(鎭)에서 다투어 서로 가혹하고 사납게 하였다. 좌도 수사(左道水使) 이종의(李宗義)도 공을 세우려고, 거주하는 왜놈 가운데 바다에서 수초 캐는 자 10여 명을 목베니, 원망을 일으켜 침략을 불러온 것은 이 두 사람의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변란이 나기 하루 전에 많은 왜선(倭船)이 해변을 침범하므로 포구의 사람들이 정탐하여 보고하였더니 이우증은 꾸짖어 보내고, 여러 진에서 글을 보내도 역시 방비하지 않았다. 4일 새벽에 적이 제포(薺浦)와 부산포로 나누어 침공하였는데, 두 진(鎭)이 모두 성을 지키지 않아 적이 장막 밑에 이르렀을 때야 주장(主將)이 깨달았다. 제포 첨사 김세균(金世鈞)은 기어서 성을 넘다가 적에게 잡혔는데 적이 구속해 두고 죽이지는 않았다. 이우증은 스스로 그 몸을 풀단 속에 싸서 방안에 숨어 있었는데, 적이 찾아내어서 드디어 난도질하였고, 이우증의 형 이우안(李友顔)도 함께 살해를 당하였으며, 두 성의 노소(老少)와 진군(鎭軍)이 도륙을 당하였다. 드디어 나아가서 웅천(熊川)과 동래(東萊)를 포위하였다. 대개 적의 무리는 수천에 불과하고 성칭정장(盛稱程長)을 수령으로 하였는데, 행군과 포진(布陣)이 제법 기강이 있었다. 그 동안 유격대를 보내어 마을을 불지르고 겁탈하여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었다. 이때는 오랫동안 평화로워서 백성들이 난리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관리들은 사람의 낯빛을 잃고, 달아나 숨기에만 뒤질새라 두려워하였다. 우도 절도사 김사철(金賜哲)이 군사를 거느리고 웅천(熊川)을 구원하려 하였는데, 보이는 군사는 겨우 수백 명이므로 적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적의 많은 군사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또 실제로 겁이 나서 전진하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게 되어 후퇴하여 창원(昌原) 땅을 지키게 되었다. 7일에 웅천 현감 한륜(韓倫)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니 드디어 웅천이 함락되었다. 웅천은 남쪽의 큰 진(鎭)이며 또 왜국 사신의 왕래를 주관하는 곳으로, 공급하는 선구(船求)와 창고에 쌓인 물품이 다른 고을보다 몇 배가 되는데, 하루 아침에 모두 적의 소유로 되었다. 동래를 포위한 왜놈은 군사가 적고 형세가 고립되어서 현령 윤인복(尹仁復)이 조금 물리쳐서 서로 버티었다. 한륜(韓倫)은 포위를 당했을 때 손발을 떨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오직 성을 순행하며 장졸들에게 적을 쏘지 말라고만 경계하였는데, 그의 애첩이 적이 물러감을 엿보고 나가려고 하므로 성문을 열고 나가게 하니, 성안이 소동이 나서 모두 주장(主將)이 도망갔다고 말했기 때문에 성이 속히 함락된 것이다. 적이 성에 들어와서 방자하게 노략질하여 창고가 탕진되었고, 혹은 고을 사람을 협박하고 부려서 그 노획품을 배 위에 싣고, 날마다 술을 차리고 모여서 놀며 다시 방비하지 않았다. 김사철(金賜哲)은 본시 광대패인 무뢰배로써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여 남쪽 지방을 전제(專制)하게 되었는데, 난을 당하자 계책이 없어서 군사를 잃고 국경을 빼앗기고는 오직 날마다 조정에 급함을 고하라고 청할 뿐이었다. 일이 별안간 일어나니 조정에서도 계책없이 조당(朝堂)에서 회의만 하여 재집(宰執)들이 화친을 정하고 침략을 늦추려고 하는 이가 많았다.
이때 전 절도사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 제치사(制置使)로 명하고, 금위군(禁衛軍) 백여 명을 나누어 소속시켜 가게 하였다. 황형은 전에 탐혹한 까닭으로 벼슬을 잃고 집에 있었는데, 명을 받고 문에 나서자 문득 팔을 뽐내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같은 자는, 가문[旱] 날의 나막신이라, 비가 오면 문득 쓰인다.” 하였다. 금위군에 종군(從軍)하는 자가 대낮에 다른 사람의 말을 빼앗으니, 서울의 악한 소년들이 이 기회를 타서 방자하게 겁탈을 행하여도 법관들이 제재하지 못하므로, 식자들은, “장수가 교만하고 군사가 기강이 없으니 어떻게 적을 방어하리오.” 하였다. 또 참판 안윤덕(安潤德)에게 먼저 자헌대부를 가자(加資)하여 경상도 체찰사로 가도록 명하였다. 안윤덕은 허풍을 치고 노둔한 겁쟁이로써 본래 장수의 재목이 아닌데, 명을 듣고는 놀라고 두려워서 시간을 지체하고 떠나지 않았으면 앞에 간 군사의 성패(成敗)를 기다리다가 구차하게 10일을 지난 뒤에야 떠났다. 또 좌의정 유순정을 도원수로 삼아서 군무를 전적으로 통제하도록 명하니, 유순정도 역시 가기를 꺼려서 임금 앞에서 아뢰기를, “우의정 성희안은 계책을 잘 세우고 판단을 잘하니 큰 일을 맡길 만합니다.” 하니, 성희안이 또 말하기를, “유순정은 군사 일에 익숙하여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의 뜻도 큰 일일 당하여 구차하게 편하려는 것을 비루하게 여겨서 특별히 유순정을 가도록 명하였다.
황형과 유담년 등이 왜적을 격파하였다. 왜적은 우리에게 방비가 없는 것을 업신여겨서, 높은 데 올라 진을 치고 창고에 쌓인 물건을 다 싣고 돌아가려 하므로, 황형 등이 세 길로 나누어서 협격(挾擊)하고, 수군으로 하여금 적의 배를 포위하게 하였다. 왜적은 본시 날래고 가벼워 오래 버티지 못하여, 수군이 바다에 덮인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억제하지 못하고, 드디어 산골로 도망해 숨어서 그 배를 보호하였다. 황형 등이 승리한 기세를 타서 마구 쳐서 죽이고 잡은 자가 매우 많았고, 또 배를 다투어 빠져 나가려다 물에 빠져 죽고, 혹은 황급하게 배에 오르느라고 배가 엎어진 경우도 많았다. 안윤덕(安潤德)은 이때 물러나서 밀양에서 승전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공을 세운 일을 조정에 올렸는데, 장황하게 공을 자랑한 말이 많아서 듣는 이가 크게 웃었다. 그 막료(幕僚)인 김근사(金謹思)란 자가 팔을 휘두르며 말하기를, “왜적을 평정하는 데에 큰 공이 있는데, 겨우 정옥(頂玉 옥관자 3품 이상)을 얻었으니 마음이 진실로 유쾌하지 못하다.” 하며, 또 박영문에게 옷을 구하여 말하기를, “조석으로 또 그 옷을 입을 것입니다.” 하더니, 조정에서 마침내 논공(論功)하여 김근사에게는 다만 산계(散階)를 주었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공은 옷을 장만하여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하였다.
정덕(正德) 정월에 삼포(三浦)에서 왜놈이 몰래 대마도의 왜놈을 끌고 와서 공모하여 난(亂)을 구며, 제포(薺浦)와 웅천성을 함락하고 첨사 이우증을 죽였다. 방어사(防禦使) 유담년ㆍ황형을 보내어 막게 하여 일시에 함께 나아갔다. 황형은 깃발을 휘두르며 용맹을 떨쳤으나, 유담년은 머뭇거리고 나아가지 않으므로 황형이 유담년의 한 군사를 잡아다가 군법으로 목을 베어 장대에 달았더니 유담년이 비로소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교전한 지 한참만에 왜적이 패해 달아나며 앞을 다투어 배에 오르려 하여 배에 타고 있던 우리 군사가 칼로 뱃전을 치니 왜적의 손가락이 한움큼이었다. 그리하여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3백여 급(級)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미리 전선(戰船)을 보내어 돌아가는 길을 막아 쳤으면 다 잡았을 것인데, 여러 장수들이 당황하여 이런 계책을 내지 못했다.” 하였다. 이때 참판 안윤덕이 부원수로 제포까지 쫓아와서 승전한 일을 빨리 아뢰고, 또, “신등은 기쁘고 하례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는데, 대간에서 말하기를, “왜적을 이건 것은 곧 방어사의 공인데, 자기의 공인 것처럼 하였고, 또 몸이 남변(南邊)에 있으면서 멀리 ‘희하(喜賀)’라는 두 글자를 아뢰는 것은 그 임무가 아니오니, 청컨대 그 죄를 다스리옵소서.” 하였으나, 중종(中宗)은 윤허하지 않았다. 《패관잡기》
○ 5월에 개성부 유수(留守) 이세영(李世英)이 죽었다. 이세영은 몸가짐을 맑고 검소하게 하며 세속의 성쇠를 따르지 않았다. 국법에 도승지가 인사 행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청탁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세영이 승지가 되어서는 홀로 팔짱을 끼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정부와 육조의 당상(堂上)들이 자기들만 마음대로 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고하기를, “영공(令公)은 어찌하여 하나도 말하는 것이 없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보새(寶璽)를 받들어서 왕명(王命)을 출납하는 것이 승지의 책임이며, 어질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나가게 하고 물러가게 하여, 각각 그 재주에 적당하게 하는 일은 담당관이 따로 있습니다.” 하여, 동렬(同列)들이 부끄러워서 사례하였다. 안윤덕이 승지가 되자 달포가 못 되어 그 일가 친인척들을 벼슬시켜서 옛날에 은혜받은 이는 거의 다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더욱 이세영의 절개를 중히 여겨서 그 당시 공경 대신으로 기약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조야(朝野)에서 애석해 하였다. 《음애일기》
○ 계유년 4월에 임금이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와서 선비의 기풍이 해이함을 근심하여, 친히 정사를 보살피고 인물을 헤아려서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제(品題 인물을 평판해서 정함)하여 여러 관직에 등용하려고 하였다. 대신들에게 이를 수의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대신을 들이고 물리치는 것은 마땅히 여러 논의를 종합하여 임금의 마음으로 결단할 것이오나, 미천한 관직이야 어찌 반드시 친히 성상께서 염려하시오리까?” 하였다. 이에 정사에서 오직 영의정ㆍ좌의정 및 정광필(鄭光弼)과 신(臣) 자(耔 필자의 이름)와 승지는 특지(特旨)로 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옛 전례에 따라 비의(備擬 관리를 임명할 때에 세 사람의 후보를 추천하는 일)하여 수점(受點 임금이 후보자에게 낙점하는 일)하였다. 임금의 뜻도 하관(下官)을 친히 선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논의하는 사이에 그 인물의 고하(高下)를 보고, 또 아랫사람의 마음을 막힘 없이 펴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대신들이 보통으로 상의하였으므로 여론이 그르게 여겼다.
함경도 관찰사 정광필을 우의정으로 삼은 것은 영의정 성희안의 추천이었다. 도량이 있고 응접(應接)을 잘하며 말과 태도는 화순하되 분별함은 매우 엄하였다. 성희안이 항상 그 도량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정광필과 같은 이는 소리가 없는 곳에서 듣고, 형체가 없는 곳에서 본다고 이를 만하다.” 하며, 공경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힘써 추천하였다. 감사에서 계급을 더하고 또 계급을 더하여 찬성(贊成)이 되고, 찬성에서 정승이 된 것은 모두 성희안의 힘이었다. 삼공의 자리가 비어서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영사(領事) 김응기(金應箕)를 촉망하였는데, 임금이 일찍이 재추(宰樞)들에게 정승을 추천하게 하였더니 송질(宋軼)은 김응기를 천거하고, 유순(柳洵)도 뜻이 김응기에게 있었으나, 성희안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정광필을 함께 추천하였다. 성희안이 큰소리 치기를, “오늘날 정승을 고르는 데에는 마땅히 정광필이어야만 제대로 사람을 얻었다고 할 것이고, 신용개(申用漑)를 그 다음으로 할 것이다. 김응기같은 이는 비록 정밀한 금이오, 아름다운 옥과 같으나 나라에서 할 일이 있을 때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오, 또 벼슬이 추부(樞府)에까지 올라 국정(國政)에 참여하니, 굳이 다시 정승의 자리에 올릴 필요가 없다.” 하였으니, 실은 그가 정승에 오르는 길을 막은 것이다. 김응기는 행실이 단중(端重)하고 공경으로 마음을 잡아서 평생 빠른 말이나 급한 기색이 없으므로 성종께서 아주 중히 여겼다. 성희안이 중론을 살피지 않고 망령되게 비방하고 낮추어서 선택을 거꾸로 하였으므로 조정의 공론이 애석히 여겼다. 《음애일기》
○ 소릉(昭陵 문종비 권씨)을 폐한 후 정덕(正德) 계유년(중종 8)까지 햇수로 계산하여 58년이 되었는데도 인심이 깊이 통분하여 오랫동안 복위(復位)되기를 바랐다. 어느날 경연검토관 소세양(蘇世讓)이 맨 먼저 그 논의를 발언하니, 임금이 슬픈 모습으로 대신에게 춘추비기(春秋祕記)를 찾아 상고해서 아뢰라고 명하였는데, 그때 폐하게 된 까닭이 과연 정부의 요청에서 나왔었다. 공경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함께 의논하게 하였다. 판상(判相) 장순손(張順孫)이 부르는 명을 받고 들어가면서 영의정 유순정 집에 찾아가서 말하기를, “오늘의 논의가 어떠합니까?” 하니, 영의정이 굳게 그 불가함을 말하였다. 조정에 들어가서 논의할 때는 삼공 이하가 모두 어렵다고 하였는데, 오직 신용개ㆍ강혼(姜渾)ㆍ장순손 공들과 나의 계부(季父) 충정공(忠貞公)김전(金銓)은 마땅히 복위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대간과 시종(侍從)들이 다투고, 태학생(太學生)이 상소하였으나, 때가 지나도록 수각(守閣 중대한 일을 임금에게 청하고 화답이 있기를 편전 문앞에서 기다리는 일)할 수 없고, 중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때 나는 김국경(金國卿) 등과 함께 속삼강행실청(續三綱行實廳)에 있었는데, 동료들과 상의하기를, “대간에서 중지하면, 뒤에는 기회가 없을 것이니, 우리들은 직분에 벗어남을 혐의하지 말고 글을 지어 올려서 대간의 형세를 도웁시다.” 하였다. 때마침 태묘(太廟 종묘)의 나무에 벼락이 치자 임금이 놀라고 두려워서 그날로 태묘에 가서 공경히 절하고, 급히 공경ㆍ대간ㆍ시종 등을 불러서 임금의 잘못을 입대(入對)하게 하니, 소릉의 일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의논이 지배적이므로, 드디어 윤허를 내려서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그 일을 감독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능을 폐하고 해변으로 옮겼는데, 제사와 수호를 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다만 어느 언덕을 그곳이라고 전하였으나 일찍이 다른 말이 있어서 사람들을 의심하게 하였다. 악전(幄殿)을 설치하고 장차 이장하려고 흙을 깊게 파도 옥갑(玉匣 관을 가리킴)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두렵고 놀라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날 밤에 감독관이 졸았는데, 꿈에 장전(帳殿)의 안석에 의지하여 왕후의 형상을 갖추고, 두 시비[丫鬟]가 모시었는데, 감독관을 불러서 위로하기를, “너희들이 수고한다.” 하니, 감독관이 절하고 엎드려서 놀라 땀을 흘렸다. 꿈을 깨자 이상히 여겨서 이튿날 아침에 두어 자 가량 더 파니, 홀연 손바닥 만큼한 옷칠한 조각이 삽날에 붙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대개 재궁(梓宮 임금의 관)은 옷칠을 두텁게 하였는데, 떨어져서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일을 잘 마쳤다. 안산(安山) 사람이 말하기를, “능을 폐하지 않았을 적에, 밤에 곡하는 소리가 능소에서 나는 것같았다.” 하여, 근방에 사는 백성들이 괴상히 여겼더니, 이튿날 역졸들이 갑자기 와서 드디어 능을 옮겼다. 민가에서 폐릉(廢陵)에서 나온 돌을 쓰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병이 나고, 마소를 놓아 능자리를 밟으면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져서 큰 폭풍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이 공경하고 신비롭게 여겼다. 새 능을 현릉(顯陵 문종의 능)의 왼편 등에 정하여 두 능 사이에 해송(海松)이 하늘에 닿았는데, 역사를 시작하자 두어 주(株)가 아무런 까닭없이 스스로 마르므로 베어 버렸더니, 두 능이 마주 대하고 막힘이 없었으니 이상한 일이다. 처음에 기정(岐亭) 권숙달(權叔達)이 승정원에서 숙직하는 데, 꿈에 해평군(海平君) 정미수(鄭尾壽)와 영의정 유순정이 서로 다투고 치면서 분함을 참지 못하였는데, 영의정이 매우 곤란을 당하였다. 기정은 놀라고 이상하여 사람들에게 말을 하자 수일 후에 능을 복위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영의정이 맨 먼저 어렵다고 하였는데, 논의를 마치자 갑자기 병이 나서 묘당에서 수레에 실려 나와서 병이 점점 더하여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병들어 있을 적에 근자의 조정에 관한 일을 자제에게 물으니, 소릉의 일로 크게 다툰다고 대답하므로, 공이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그 일은 끝내 할 수 없다.” 하였으니, 그의 고집이 이와 같았다. 소대(召對)할 때에 만약 공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끝내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해평군은 소릉의 바로 외손인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혼이 있으면 어찌 이 일에 통분이 없으리오. 신(神)의 은밀한 보응(報應)은 이치에 없다고 하지 못할 것이니, 기저의 꿈이 영험하다.” 하였다. 이는 진실로 황당한 일로 반드시 믿는다고 말하지 못하나 다만 우연한 기회에 서로 감응(感應)하는 바가 있는 듯하니, 이 역시 괴이하도다. 《용천담적기》
○ 17일에 소릉의 옛 무덤을 팠다. 전 역사에는 다만 기록하기를, 후(后)의 모제(母弟 동복 동생) 권자신(權自愼)이 성삼문 등과 더불어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복위(復位)를 모의하다가 목베임을 당하였으니, 왕후도 마땅히 연좌시켜야 한다는 정부의 청으로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하였고, 그 시말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소릉은 현릉의 배(配)가 되어 동궁에 있었는데, 덕과 행위가 모두 지극하였으므로 영릉(英陵 세종)께서 사랑하셨다. 나이 24세에 노산군을 탄생할 때에 난산(難産)으로 병이 나서 훙서(薨逝)하였다. 광묘(光廟 세조)가 즉위하자 노산이 영월(寧越)로 피해 나갔는데, 병자 4년에 구신(舊臣)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 등이 노산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는데, 같이 공모한 이는 모두 당대의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권자신이 이 모의에 참여한 것과, 소릉을 폐한 것이 그와 연좌되어 폐함을 당한 것인지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정축년(세조 2)에 세조가 언젠가 금중(禁中)에서 대낮에 가위 눌리는 꿈을 꾼 일이 있으므로 곧 소릉을 파내도록 명하였다. 그때 사명을 받든 신하가 먼저 석실(石室)을 가르고 재궁(梓宮)을 끌어내려 하였는데, 무거워서 이기지 못하여 군민들이 해괴하게 여기고, 곧 글을 지어 제사하니 그제야 재궁이 나왔다. 3ㆍ4일을 그대로 두었다가 일반 백성의 예법으로 장사하기를 명하였다. 능을 파던 수일 전 밤에 부인의 울음소리가 능 속에서 나며 이르기를, “곧 내 집을 무너뜨릴 것이니, 나는 장차 어디에 의지한단 말인가.”라는 소리가 마을 백성들에게 들렸으며 얼마 되지 않아 변이 일어났다고 한다. 비록 언덕에 옮겨 묻었으나, 자못 영검이 나타나서 촌민들이 옛 능의 나무나 돌을 건드리는 자가 있으면, 문득 비바람이 일어나므로 서로 경계하고 가까이 못하도록 하였다고, 부로(父老)들이 시말을 눈으로 보고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이가 있었다. 지금 추복(追復)하게 되자 하늘이 깨우침을 보여 조정의 의논과 임금의 결단이 일치되어, 50여 년 동안의 신과 사람의 원한을 펴게 하였으니, 종묘사직에 큰 다행이다. 다만 창졸간에 옮겨 묻어서 오랫동안 보살피지 못하였으므로 법물(法物 관 안에 쓰는 여러 물건)을 보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였는데, 이때 능을 파니, 안팎 재궁은 모두 형체가 있고, 염한 것은 완전하므로 재궁만 바꾸어 쓰고 법의(法衣 왕후의 정식 의복)로 그 빈 곳만 채웠다. 아, 어찌 하늘이 돌보심이 아닌가. 〈음애일기〉
○ 5월 6일에 현릉왕후(顯陵王后)를 다시 태묘(太廟)에 부(祔)하였는데, 부묘하려고 알현하는 것과 올려 부묘하는 예식 일체를 처음 예법대로 하니 모시고 향사하려는 묘정(廟庭)에 있는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새 능은 옛 현릉(顯陵)의 왼편에 있는데, 거리가 멀지 않고, 소나무 삼목(杉木)으로만 막혔는데, 현궁(玄宮) 뒤 하관한 후에 그 사이의 소나무 한 가지가 무단히 말라 죽으므로 시역 제조(視役提調) 장순손(張順孫) 등이 공인(工人)에게 베라고 명하였더니, 바로 가렸던 것이 서로 트여서 두 능이 다시 막힘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혼령이 감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능을 파던 날, 옛 능 주위에 맑은 해에 큰 비가 오다가 잠시 후에 그쳤으니 아, 괴이하도다. 《음애일기》
○ 6월 8일 정사에 특지(特旨)로 홍숙(洪淑)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홍숙은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형제 세 사람이 옷을 바꾸어 입으며 출입하였고, 늦게 과거보는 글을 배워서 과거에 오른 지 10년이 못 되어 가선(嘉善)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는 용렬하고 비루하며 무식하고 재리를 탐하고 인색하여 사람들이 더러운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형조 판서에 뽑히더니, 지금 또 특별히 예조 판서로 제수되어 모두들 해괴하게 여겼다. 대개 당시의 숭상하는 풍조가 오직 묵묵히 따르며 웃고 말하기 좋아하는 것을 재상의 체모로 삼고 다투어 본받았기 때문에, 위에서 올려 쓰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았다. 전조(銓曹 이조)에서 물망에 오른 사람 셋을 추천하면, 임금이 추첨으로 낙점하기에 물정(物情 민심)이 크게 막혔다. 《음애일기》
7월에 큰 비가 와서 물이 졌다. 서울에는 평지에도 물이 두어 자나 깊어서 냇가의 인가는 침몰된 것이 많았고, 오래 된 돌다리가 곳곳에서 무너지고 성밖의 사람도 빠져 죽은 이가 많았다. 사방에서 모두 수해를 입었고, 산과 성(城)이 무너져 사람과 물건이 치어서 상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중종이 즉위한 이후로 해마다 한재로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편히 살지 못하였는데, 중족은 비록 성심으로 사랑하고 어루만져 주었으나, 관리들이 연산군의 악정에 인습되어 정성으로 봉직(奉職)하지 않았다. 구차하게 문서만을 꾸며서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여 임금의 뜻이 조정에 전달되지 못하고, 조정의 명령이 사방에 시행되지 못하고, 번거롭게 오직 문서상 소소한 것만 일삼으니, 식자들은 국체(國體)가 엄하지 못함과 기강이 서지 못함을 깊이 탄식하였다. 《음애일기》
○ 영의정 성희안이 졸(卒)하였다. 성희안은 성품이 관대하여 사소한 예법에 구애받지 않고 대절(大節)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강개하여 뜻이 구차스럽지 않음을 숭상하였으나, 학술이 없고 또 아랫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주지 못하고 발끈 화내면서 스스로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정승의 업적이 간략하여, 공(功)과 명성이 크게 손상되었다. 전날 정승을 고를 때에 팔을 뽐내며 큰 소리치기를, “김응기(金應箕) 1천 명으로, 신용개(申用漑) 하나와 바꿀 수 없고, 신용개 1천 명으로 정광필(鄭光弼) 하나와 바꿀 수 없다.” 하였으니, 이처럼 돌아보지 않고 망령되게 말하는 일이 많았다. 그가 힘써 정광필을 천거한 것은 비단 사사로이 친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정광필의 뜻을 받들어서 일찍이 혼인을 맺었던 중요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되지 않아 영의정 김수동(金壽童)ㆍ박원종ㆍ유순정 및 성희안이 잇따라 죽으니 온 조정이 두려워하고 놀랐다. 김수동은 단정하고 중후하였으며 욕심이 적었으나 착하고 부드럽고 변변치 못하여, 비록 사직을 보위하는 신하는 되지 못하나 역시 당시의 어질고 착한 사람이다. 세 사람은 모두 반정한 으뜸 공훈으로 임금의 총애를 최고로 받았으나, 공렬(功烈)이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당대에 명망(名望)이 높았는데, 정욕에 방탕하여 잇따라 죽으니, 여론이 한스럽게 여겼다. 성희안은 평양 기생 신(申)이라는 여자를 사랑하여 정욕을 강행하다가 병을 얻어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고 이른다. 복상(服喪)하던 날 기생이 머리를 풀고 맨발로 남의 집에 몰래 숨었다가 다시 법사(法司)에게 잡히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 공(成公)의 밝은 지혜로는 한 계집의 실정을 알아볼 것인데, 미혹됨이 심하여 죽던 날도 이 기생을 그 아들 표()에게 부탁하였으니, 아,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위와 같다. 《음애일기》
○ 사문(斯文) 정붕(鄭鵬)은 선산(善山) 사람인데, 기개가 커서 기절(氣節)이 있었다. 일찍이 연산조에서 홍문관 교리로 일을 논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 반정한 뒤에는 곧 불러서 교리를 도로 제수하였으나 병을 핑계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뒤에 또 홍문관 교리를 제수하여 부르니, 벗들이 나아가기를 권하므로 마지못해 나아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도로 사양하고 돌아가서는 여러번 제수하여도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은명(恩命)이 간절하여 부득이 억지로 조정에 나아갔더니, 자못 마음속에 놀라운 일이 있어서, 나의 전리(田里)로 물러가서 내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같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마음에 놀라운 일이 무슨 일이냐고 또 물으니, 말하기를, “내가 교리를 배은(拜恩)하는 일로 입궐하여 승정원 문앞에 나아갔는데 서대(犀帶)를 띤 재상이 돌아서 있기에 두려워서 머뭇거리며 물러났었다. 조금 후에 그가 돌아서는 것을 보니 그 아이가 바로 홍경주(洪景舟)임을 알았고, 그의 벼슬을 물으니 바로 찬성(贊成)이라고 하였다. 나는 홀연 마음속으로 놀라워서 몸을 받들고 물러나온 후로는 벼슬에 뜻이 없어졌다.” 하였다. 최후에는 조정에서도 그가 벼슬하지 않을 것을 알고, 한가하고 궁벽진 청송부(靑松府) 부사로 제수하니, 부임하여 일 없이 편하게 다스렸다. 창산군 성희안이 젊었을 때 서로 좋아하였는데, 영의정이 되어서는 편지를 통하여 안부하고 곧 잣과 꿀을 청하니, 정붕이 답하기를, “잣은 높은 산위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속에 있는데, 부사로 있는 이가 어떻게 얻겠소.” 하여, 창산군은 부끄럽고 후회스러워서 사죄하였다. 뒤에 또 벼슬을 사양하고 전리로 돌아가서 벼슬하지 않고 죽었다. 《사채척언》
○ 국법으로는 봉상시에서 시호(諡號)를 정하는 일을 주관하였는데, 중흥(中興)한 뒤로 시호를 정하는 일이 정당하지 못하였으므로 특히 홍문관 응교 이상에게 가서 참여하고 논박(論駁)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김수동의 시호를 경순공(頃順公)으로 하고, 유순정은 무안공(武安公)으로 하였는데, 정부에서 명분과 실상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봉상시로 하여금 고치는 것을 논의하게 하였다. 그후로 시호를 정할 때는 그 자손들이 힘써 간청하여 반드시 아름다운 시호를 얻으려 하기 때문에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문득 다시 고치려 하여 논의한 바가 모두 정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무관으로써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한 장정(張珽)이란 이가 죽었는데, 안팽수(安彭壽)가 봉상정(奉常正)이 되어 시호를 충렬공(忠烈公)이라고 결정하였다. 이로부터 시호에 문(文)과 충(忠) 두 글자가 없으면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음애일기》
○ 계유년 9월에 유진(柳珍)의 전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도록 결정하였다. 유진이 늙은 어미를 구박해 내쫓고 동생 방(房)을 죽였으니, 법으로는 마땅히 주벌하여야 하나, 다만 불효(不孝)와 부제(不悌)에 대한 정해진 법률이 본래 없기 때문에 의금부에서 부모에게 욕한 율(律)만 적용하였는데, 조정에서도 이 율에 견주어 죄를 정하였다고 말하므로, 임금이 전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오직 사간원에서는 불가하다고 고집하니 임금이 또 시종에게 회의를 명하여, 합의(合議)로 사형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였다. 조정에서는 임금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미덕(美德)으로만 돌리고, 형벌을 그르치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불효보다 더 큰 죄가 없는데, 잠시의 은혜로 마침내 큰 인정(仁政)을 해쳤으니, 반정한 뒤로부터 형법(刑法)이 옳게 거행되지 못하여, 간신들이 나라를 그르쳐서 어둡고 요망하게 하는 자를 일체 불문에 붙이고, 도리어 벼슬을 높이고 예사롭게 공산의 칭호를 더하였으며, 그들도 의기가 양양하여 스스로 뜻을 얻었다 하여 다시 기탄이 없었다. 이렇게 일시의 풍속이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이 없고, 오직 이익만을 따르고 강상(綱常)을 돌아보지 않고 예법을 범하고 어지럽히는 자도 악행인 줄 알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유진은 홀로 죽음을 면하였으니,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우의정 정광필은 일찍이 경연에서, 선상(選上)한 노자(奴子)와 각 부(各府)의 조예(皂隸 하인)와 각 진(各鎭)의 수군(水軍)이 군정(軍丁)은 적은데 일은 무거워서 장차 지탱할 수 없음을 지극히 의논하고, 기한과 노동량을 적당하게 요량하여 직업에 안정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므로, 특별히 재상에게 수의하도록 명하였더니, 재상들은 모두 예전대로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고, 정광필도 우물쭈물하며 건의해 밝힌 바가 없었다. 처음 정광필이 정승으로 들어왔을 때에 논의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광필이 거짓으로 광대한 범위와 심원한 규모로 인망(人望)을 속이리라.” 하였는데, 앉지 못할 자리에 앉자, 솜씨가 모두 드러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첫째로 건의한 것은 사령 하인의 일 몇 가지뿐이며, 다시 두드러진 것이 없었으므로 식자들이 비난하였다.
10월 14일 밤에 크게 천둥과 번개가 치며 비가 왔다. 천점(泉佔)에서 타위(打圍 사냥)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18일 구름 없는 대낮에 비와 우박이 오고 또 우레소리가 굉장하였다. 22일에 의정부의 종[奴] 정막개(鄭莫介)가 박영문(朴永文)과 신윤무(辛允武)가 난(亂)을 꾀한다고 밀고하였다. 이보다 앞서 천둥의 변괴로 임금이 정전(正殿)을 피하였는데, 이때 사정전 월랑(月廊)에 친히 나아가 옥사(獄事)를 신문하다가 밤 사고(四鼓)에야 파하였다. 23일에 함께 반역한 내용의 글을 얻어서 24일에 박영문ㆍ신윤무를 모두 역적으로 논하여 극형에 처하고, 그 아들은 모두 교살형에 처하였다. 그 집은 추관(推官)에게 나누어주고, 박영문의 집은 모두 정막개에게 주었으며, 막개에게 특별히 당상상호군을 제수하고, 별도로 은대(銀帶)와 의장(儀章)ㆍ안마(鞍馬) 등을 주었다. 승지 이사균(李思鈞)ㆍ김극복(金克福)에게는 특별히 가선(嘉善)을 더하고, 윤희인(尹希仁)ㆍ유운(柳雲)은 문사관(問事官)으로써 모두 당상(堂上)에 올리고, 이사균에게도 별도로 금대(金帶)를 주었다. 임금이 처음에는 노영손(盧永孫)의 전례대로 추관과 밀고한 자에게 모두 공신(功臣)을 더하려고 하였는데, 정승이 정막개의 고변(告變)이때가 늦은 것이라는 말을 하였으므로 임금이 마지 못해 따랐다. 정막개는 본래 천한 종인데,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일찍이 매우 익숙하게 박영문과 신윤무 두 집에 드나들었는데, 박영문은 본래 흉악하고 교활하여 사류(士類)들이 자기를 배척하는 것이 미워서, 조석으로 항상 집권하지 못함을 한탄하여 날로 심하게 조정을 원망하였다. 16일 천점에서 타위(打圍)할 때 영문이 대장이 되자 화심(禍心)이 생겼다. 어두웠을 때 신윤무의 집에 가서 반역을 꾀하는 것을 막개가 여우처럼 엎드려서 들었다. 대체로 언사(言辭)의 곡절은 막개가 많이 붙여 꾸며서 이루었으니,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대개 박영문은 변을 일으켜 조정을 바꾸어놓아 자기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신윤무는 항상 형세를 들어서 꺾었다. 박영문이 같은 무리로 죽음을 함께 하자는 말이 있으면, 윤무는 원래 약해서 마지못해 말하기를, “전에 그대와 더불어 평성(平城 박종원)의 집에서 함께 맹서하였는데, 내가 어찌 차마 그대를 배반하리오. 마땅히 그대를 좇아 주선하겠다.” 하였다. 반정할 때에 평성이 두 사람과 함께 무부(武夫)로써 모두 일어나서 본시 부귀를 도모한 것이고, 의리(義理)는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땅히 때를 보아 처치할 약속은 있었으나 어느 때인지는 자세하지 못하다고 한다. 막개는 밤낮으로 모책을 생각하는 중에 언제인가 꿈에 수레 위에 얽혀 매여 있었다. 처형하려고 군기감(軍器監) 앞에 이르자 문득 준마를 타고 있었으며 의종(儀從)이 매우 많았다. 꿈을 깨어 생각하기를, “이는 나에게 상서로운 꿈이다.” 하고, 곧 결심하고 고변하였다. 옥사는 다른 증거는 없고, 막개가 들은 두 사람의 말뿐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막개의 고장(告狀)으로 두 사람을 신문하였다. 박영문은 연달아 두 차례의 고문을 받고도 오히려 숨겼는데, 신윤무는 병이 많아서 큰 매질에 견디지 못하여 한번 매를 내릴 적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였다. 우리 나라 조정에서는 대체로 난역(亂逆)의 모의에 관계될 경우 모두 거칠게 깎은 몽둥이를 사용하므로, 매질하는 자가 계속 열 대를 치면 팔과 손가락이 이리고 아파서 다시 들지 못하며, 또 낙형(烙刑 화형(火刑))을 베풀어서 공초의 말이 한번 기울어지면 다시 번복하기가 어려우므로, 신윤무가 한 차례에 먼저 자복하니 영문도 자복하였다. 대개 박영문은 흉한 마음이 쌓여 발언하였으며, 신윤무는 흉모(凶謀)를 받아들였으니, 죄는 용서할 수 없으나, 두 사람은 일찍이 나라에 충성을 바친 공로를 기록하여 재상의 지위에 있었는데, 말을 망령되게 낸 이유로 문득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였으니, 본래 여러 사람의 마음에 납득되지 않았다. 아울러 그 아들을 죽이고 또 죄를 끝까지 감하는 예(例)조차 없었으니, 길 가는 사람도 슬퍼하였다. 신윤무가 형(刑)을 받을 적에 집의(執義) 김협(金協)을 부르며 말하기를, “김협, 김협, 나라에서 간인(奸人)의 말을 듣고, 말을 잘못하여 사소한 연고로써 가볍게 대신(大臣)을 죽이는데, 그대는 어찌 힘을 다해 구해 주지 않았는고.” 하니, 김협은 본래 겁이 많고 무식하여 요괴(妖怪)가 있을까 의혹되어 그날 밤에 촛불을 밝히고 잠을 자지 않으며, 노비들로 하여금 밤이 새도록 떠들어서 요괴를 풀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비웃었다. 송질(宋軼)ㆍ정광필ㆍ이사균(李思鈞) 등은 스스로 역적을 잡는 데에 자기들의 힘이 있었다고 말하며 기쁜 빛을 드러내어 서로 하례하고, 조정의 은사(恩赦 역적을 잡았다고 축하하는 의미로 은사하는 것) 등의 일에 모두 찬성하였다. 희인(希仁)은 본시 글씨나 쓰고 문서를 담당하는 벼슬이 낮은 관리이고, 유운(柳雲)은 명사(名士)로 이름난 사람인데 같이 당상에 올랐으니, 그때 사람이 삼절충(三折衝 세 절충 장군)이라고 이름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막개를 충성절의지사(忠誠節義之士)라고 하여 무수한 보물을 내사(內賜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내리는 일)하였으니, 선비의 기풍(氣風)이 사라져서 형세가 다시 수습하기 어려웠다. 정막개가 일찍이 의물(儀物 행차할 때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격식을 갖추는 물건)을 갖추고 시정(市井)에 나가면 무뢰배인 거리의 어린아이들이 말[馬] 앞뒤를 에워싸서 갈 수 없게 하며, 혹은 그 영화를 흠모하고 좋게 여기는 자도 있고, 혹은 더럽게 여겨 꾸짖는 사람도 있었다. 조정 여론은 그와 함께 같은 반열에 있음을 부끄러워하였는데, 임금이 존중하고, 대신들이 부탁하였기 때문에 감히 발언하지 못하였다.
계유년 사이에 박영문과 신윤무가 모반(謀叛)한 죄로 처형되었다. 박영문은 시기하고 포학한 사람이라 진실로 울분한 마음을 가졌으니, 그 꾀를 추측할 수 없으나, 신윤무는 다만 박영문의 말을 듣고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함께 크게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지금도 사람들이 애매하다고 한다. 진실로 그의 죄가 아닌데도 반역의 허물을 그르치게 더하였으니 그 억울함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박영문이 신윤무의 집에 갔다는 날은, 바로 신윤무가 휴가로 홀로 집에 있었고, 한 사람도 와서 본 이가 없었다고 이웃과 동리에서 모두 말하였다. 또 정막개가 고하기를, “마루 밑에 들어가서 그 말을 자세히 들었다.……” 하였는데, 그 말의 앞뒤가 하나도 빠짐이 없었으니, 지금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르기를, “그 마루가 얕아서 사람이 엎드려서도 들어갈 수 없으며, 두 사람이 서로 역모를 하였으면, 반드시 비밀리 말을 했을 터인데, 밖에 있는 사람이 어찌 자세하게 다 듣고 한마디도 차이가 없을 수 있는가.” 하니, 역시 의심할 만하다. 고변하기 전에 정막개가 도승지 이사균(李思鈞)을 만나보고 의논하였다. 이사균이 국문에 참가하여 취초하였는데, 억지로 누르는 말이 많았고, 감추는 태도가 은근히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의심하였다. 《무인기문》
12월에 지평 권벌(權撥)이 정막개에게 참람하게 상(賞)을 준 일에 대해 단독으로 아뢰었는데, 양사(兩司)에서 각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보다 앞서 권벌이 정막개의 일로 동료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도, 다시 의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번 말을 고쳤는데, 이때 어떤 일이 있어 대궐에 나아가서도 머뭇거리고 아뢰지 않으므로 별계(別啓)하였다. 대사헌 박열(朴說)은 원래 마음이 좁아서 그에게 반박당하는 것이 분해서 노여운 빛을 얼굴에 드러내고 말다툼을 하려고 하다가 논리가 어그러진 것을 알고 곧 물러갔다. 《음애일기》
정부에서 정막개가 상변(上變)하여 신윤무ㆍ박영문의 역모를 고발한 일로 당상(堂上)의 계급을 주었다. 그때 권벌이 지평(持平)으로 있었는데, 곧 고향에 부모를 뵈러 가려고 하직하고 떠나려고 할 때 동료들과 함께 의논하여 마땅히 아뢰어 정막개의 벼슬을 빼앗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조정에 돌아왔을 때 그 논의가 중지된 것을 알고 대궐에 나아가 여러 동료들을 반박하고 곧 아뢰기를, “정막개가 이미 박영문과 신윤무의 모의를 알았으면, 마땅히 지체없이 즉시 고발했어야 합니다. 여러 날이 지난 다음에 고하였으니, 그가 허물을 받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데, 중한 벼슬까지 주었으니 청컨대, 그 벼슬을 삭탈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으므로 그때의 논의가 좋게 여겼다. 《퇴계문록(退溪文錄)》
○ 내농작(內農作)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국속(國俗)에 정월 보름날 짚을 얽어서 곡식 이삭을 만들고, 비[箒]를 세워서 많은 열매를 만들며 나무에 걸치고 새끼를 매어서 그해에 곡식 잘되기를 빌었다. 대궐 안에서도 나라 풍속에 의하여 조금 그 제도를 번거롭게 하였는데, 〈칠월편(七月篇 시경 편명)〉에 기재된 인물 모양을 본떠서 농사짓는 모양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기이하고 교묘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고 역시 근본에 힘쓰고 농사를 중히 여긴다는 취지였는데, 끝에 가서는 좌우로 편을 갈라 승부(勝負)에 따라 이긴 자에게는 상(賞)을 주므로, 관리와 공장(工匠)들이 다투어서 새롭고 교묘한 것을 만들며 물건 모양을 모방해 지어서, 그 지극히 교묘히 꾸미려고 물색(物色 물감)을 구해 모았으므로 저잣거리가 모두 텅 비었다. 문관(文官) 이빈(李蘋)이라는 자는 본시 심각(深刻)하고 재간과 능력이 있었는데, 정원(政院)에서 아뢰어 우변(右邊)에 소속시켰다. 고사(故事)에 여섯 승지를 좌우로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좌변(左邊)에 속해 있는 이가 그 밑에 동료에게 부탁하기를, “이빈이 좌변에 있으니 그대들의 일은 낭패로다.” 하자, 밑에 동료가 소매를 떨치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일을 주선하는 데 어찌 남의 밑에 있으리오.” 하고, 서로 겨루어 여론이 침뱉고 비루하게 여겼다. 금년의 관나(觀儺)와 관화(觀火)는 쓸데없이 허비를 하여 희롱하고 구경하는 놀이를 지극하게 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는 까닭으로 대간과 시종들이 행하지 말기를 청하였더니 모두,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이기 때문에 갑자기 폐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고 답하였다. 정부에서, “15일은 마침 월식하는 날이니 안팎에서 마음을 닦고 살펴서 재앙을 구제해야 할 것인데, 다시 즐기는 놀이를 설비하는 것은 마땅치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농작(農作)은 꼭 15일에만 볼 것이 아니라 다음날 보아도 무방하다.” 하였다. 대간과 시종들이 여러번 그 불가함을 논하니 임금이 이에 이르기를, “농작은 세사(歲事)의 정해진 일이니, 중지하여 그만두는 것은 부당하다.” 하며 억지 말로 말을 바꾸어, 반드시 놀음을 구경하려고 하여, 온 나라가 다투어도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대소 신료들이 실망하고 이상히 여겼다. 《음애일기》
○ 갑술년 정월에 정조(政曹 정부와 육조)에 효유하여 고세보(高世輔)를 혜민 제조(惠民堤調)로 삼고, 고세보의 아들을 혜민 교수(惠民敎授)로 삼게 하였는데, 정조에서 이를 아뢰자, 특별히 하종해(河宗海)와 서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하종해는 일찍이 활인 제조(活人提調)로 있었기 때문이다. 고세보와 하종해는 모두 연산조서 음탕하고 더럽던 신하로써, 고세보는 더욱 간사스럽고 아첨함은 측량할 수 없었다. 반정한 뒤에 이어 의장(醫長)이 되었다가 제법 간청에 통하여 이때는 특명으로 벼슬을 주었다. 임금은 또 잡술(雜術)에 정신을 기울여서 지리(地理)와 운명(運命)을 말하는 무리들을 모두 끌여들여 보고 어의(御衣)를 하사하는 은혜를 베풀었고, 술사(術士) 조륜(趙倫)은 제한도 없이 드나들었다고 말한다. 《음애일기》
○ 2월에 반정하던 날 입직(入直)한 승지 윤장(尹璋)ㆍ조계형(曹繼衡)ㆍ우(李堣) 등에게 공권(功卷)을 추삭(追削)하도록 명하였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은 대개 친인척의 부탁으로 되었다. 권균(權鈞)은 문밖에서 누워 있었고, 강혼(姜渾)과 한순(韓洵)은 조복(朝服)으로 대궐에 나아가다가 군문(軍門)에서 잡혔는데, 모두 공신록에 기록되었고, 이 세 사람은 폐주(廢主)의 곤궁함을 보고 반정하는 군사에게 몸을 의탁하여 목숨을 부탁하였다가 도리어 속이고 달아났으므로 여론이 더럽게 여겼다. 임금이 이때 절의(節義)로 신하들을 꾸짖고 정부와 육조에 수의하기를 명하였다. 유순(柳洵)은 기절(氣節)이 적고 시비(是非)가 없어서 홀로 아뢰기를, “신은 반정하던 날 수상(首相)으로써 변고를 듣고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역시 공훈록에 기록되어 태평 세상에 뻔뻔스럽게 있으니, 신은 세 사람과 더불어 실로 자취가 같으므로 감히 논의를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듣는 이들이 옳게 여겼다. 송질(宋軼)은 폐주에게 사랑을 입어 벼슬이 높은 품계에 이르렀는데, 반정하던 날 허둥지둥하며 분주하게 힘을 써서 공훈록에 참여하고, 이날 논의를 드리는 데에서 홀로 말하기를, “인신(人臣)으로 실절(失節)하면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하니, 마땅히 법으로 처리하옵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폐주에게 삼강(三綱)의 도리를 잃은 것은 오직 주상 전하를 추대할 것만 알았고, 폐주가 있음은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뻔뻔스럽고 부끄럼 없는 일이 이와 같이 많았다. 《음애일기》
○ 3월에 양사(兩司)에서 합계하기를, “송질ㆍ홍숙(洪淑)ㆍ윤순(尹珣)ㆍ강징(姜徵) 등은 본직(本職)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송질은 본래 벼슬에 잃을까 두려워하는 하찮은 인물로써 벼슬을 탐하여 부끄러움이 없이 재상을 이르게 되었고, 착하다고 일컬을 만한 것이 한 가지도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완악하게 집에 있으면서 흥덕동(興德洞)에 집을 짓고, 상복을 입은 채로 여(輿)를 타고 대낮에 왕래하면서도 뻔뻔스러운 모양으로 꺼림이 없었다. 전토(田土) 수백 결(結)을 영유(永柔) 등지에 장만하여 다스리는데, 고을 수령에게 관아의 사람을 써서 다스리기를 청하고, 또 이윤검(李允儉)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다. 이윤검은 평안 절도사(平安節度使)가 되었는데, 본시 아첨하는 성질이 있어 많은 배를 만들어서 가득 실어 보냈다. 그것을 받고도 부끄러움이 없었고 뇌물을 많이 받아들였다. 또 일찍이 큰소리치기를, “나로 하여금 음양(陰陽)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륜(經綸)하게 하면 병통이나, 국록(國祿)을 먹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나의 마음으로 달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홍숙(洪淑)은 학술이 없고 재물을 탐하여 싫어하는 것이 없었다. 양민(良民)을 억눌러서 노비(奴婢)로 삼고, 소송의 단서를 만들어 백성들의 전지를 빼앗기를 좋아하고, 말과 웃음으로 상하(上下)에 아첨하기를 즐겨하였으며, 스스로 처세(處世)하는 데에는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이것을 좋게 여겨서 갑자기 높은 벼슬을 주고 정부에 참여하게 하였다. 본래 가난하여 형제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가며 외출하였는데, 여러번 요해지의 관리가 되어 마침내 넉넉하게 되자 관기(官妓)를 길러서 첩을 삼고, 첩의 집을 아주 깨끗하고 화려하게 하며, 첩도 비단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윤순(尹珣)은 연산군에게 총애를 훔쳐 받아서 과거에 오른 지 5년만에 갑자기 자헌(資憲) 벼슬을 하고, 그 아내도 연산군의 사랑을 받아 궁중에 드나들면서 매우 추한 소문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윤순의 자헌 벼슬은 왕에게 마누라를 빌려준 대가이다.” 하였다. 성조(聖朝 중종)에 들어와서도 그 벼슬에 그대로 머무르고 그 아내를 잘 대우하니 모두들 더럽게 여겼다. 성품이 또 자질구레하여, 예전에 함경 감사로 있을 때 변지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많이 잡아 먹었는데, 그런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고 날마다 번잡스럽게 문서나 장부 따위에만 힘썼다.
강징(姜徵)은 본래 어둡고 용렬하여 재주와 행실이 없고 벼슬살이에 주책이 없었다. 근년에 임금이 마음을 가다듬고 정치에 힘써서 재상들을 책망하였으나, 대부분 용렬하고 비루하여 구차하게 세월을 보냈다. 재주가 송질이나 홍숙같은 이는 임금이 믿고 중히 여기는 바인데, 날마다 더 우물쭈물하기만 하고, 윤순이나 강징같은 이는 남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대상인데도, 오히려 공경(公卿)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여론에 거슬렸으나 조정의 재집(宰執)들이 이들과 같은 무리가 많으므로, 문득 옳고 그른 구별을 더하면 화의 단서가 될까 두려워하였다. 이때 간원(諫院)에서 먼저 상소하였으나, 그 실상은 지적하지 않고 그 대강만 논하니, 대체로 형세를 강박하려 하지 않고, 오직 임금의 짐작으로 들이고 물리치기를 바라며, 또 그들이 사양하고 피하는 것으로 인하여 파면하면 거의 체통에 맞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미 발설된 후에는 여론이 더욱 비등하여 부득이 합계한 것이다. 《음애일기》
○ 정덕(正德) 갑술년(중종 9) 사이에 닭의 이변(異變)이 자주 일어났다. 혹은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기도 하고 혹은 닭이 세 발이 나기도 하는 데, 이와 같은 것은 다 기록할 수 없다. 《경방역전(京房易傳 한(漢) 나라 경방이 지은 책의 이름)》에 이르기를, “임금이 부인의 말을 들으면 닭의 요괴(妖怪)가 있다.” 하였다. 한 원제(漢元帝) 때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여 울지도 않고 암탉을 거느리지도 않으니 의논하는 이가 말하기를, “왕비가 장차 황후(皇后)가 될 것인데, 귀하게 될 기미는 있었으나 높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였고, 당(唐) 나라 무후(武后)가 정권을 잡을 때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이 두 번이고, 위(韋)씨가 정사를 결정할 때 닭이 세 발이 있었으니, 닭의 요괴는 모두 여자의 화(禍)에 감응하는 것이었다. 식자들이 근심하였는데, 을해년 봄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승하하였으니, 그 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으리오. 《용천담적기》
○ 병자년(중종 11)에 내가 검상(檢詳)으로 있으면서 숙직하였는데, 패(牌)를 가진 사람이 밤중에 문을 두드리며 재촉해 부르기에 허겁지겁 대궐에 나아갔더니,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앉았고, 금부 당상(禁府堂上)과 삼공(三公)이 입시하였다.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과 지사(知事) 이장생(李長生)을 전정(殿庭)에 붙잡아 놓고, 나와 정운경(鄭雲卿)은 문사관(問事官)으로 들어가 참여하였다. 대개 어떤 천인(賤人)이 유담년이 역모하여 그날 밤에 궐문(闕門)에 모였다가 흩어졌다고 고발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실제 고한 자는 상(賞)을 받을 생각으로 먼저 병조의 말로 국경(國境)에 경보(警報)가 있다는 일을 빙자하여 동지와 다른 무반(武班)에게 두루 고하고, 궐문에 모이게 하여 일의 흔적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서 고발한 것을 실증(實證)하려 하였던 것이다 내금위(內禁衛)에 민숭영(閔崇英)이란 자가 먼저 국문(鞫問)을 당하였다. 내가 명을 받고 오늘밤의 출입 여부를 국문하니, 그가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몰라서 그들이 궐문에 온 일을 숨기려고 하므로 내가 가만히 이해시키기를, “오늘의 옥사(獄事)는 말을 바로 하면 면할 것이고, 바른 대로 하지 않으면 면치 못할 것이니, 놀라지 말고 조심하여 오늘 행동한 것을 바로 말하여라.” 하니, 민숭영이 내 말을 알아듣고 숨기지 앟고 바른 대로 말하여 일이 마침내 바르게 되었다. 대개 옥사를 듣고 자세히 분변하지 않고 오로지 말이 어긋나는 것만으로 문득 중한 형벌을 더하면, 그릇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만약 민숭영의 말이 그릇되어 형벌을 더하여 거짓으로 자복하였다면 판서들도 역적의 죄를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이와 같이 옥사를 담당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재척언》
○ 병자년 12월 25일에 우승지 신상(申鏛)이 노산군(魯山君 단종)을 치제(致祭)하고 돌아왔다. 노산군의 묘는 영월군(寧越郡) 서편 5리 되는 길가에 있는데, 허물어져서 높이가 겨우 두 자 가량이다. 여러 무덤이 곁에 나열되었으나, 고을 사람들이 임금의 묘라고 불러오고 있으며 아이들까지도 모두 구별해 알고, 또 무덤마다 모두 돌을 곁에 벌여놓았으나 여기에만 없다고 이른다. 노산이 당초의 불행하던 날 진무(鎭撫 감독관)가 와서 형벌로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시체를 밖에 버려두었으나, 고을의 수령과 시종하던 이도 감히 거두어 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고을 수리(首吏) 엄흥도(嚴興道)라는 이가 곧 와서 곡하고 관을 갖추어 염습(斂襲)하고, 그 관은 마침 어느 관노가 만들었는데 화재가 무서워 고을 옥에 두었던 것을 취하여 썼다고 이른다 다른 논의가 있을까 두려워서 즉시 여기에 장사하였다고 이른다. 노산이 영월에 있으면서 금성군(錦城君)이 실패한 것을 듣고 자살하였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여우와 쥐같은 무리들의 간사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 대체로 후일에 실록을 편찬하는 자들이 모두 당시에 아첨하던 자이므로 《계유일록(癸酉日錄)》이란 것도 이런 류가 많다. 노산의 묘를 어떤 충의(忠義)한 무리들이 몰래 파서 법물(法物)에 의하여 이장(移葬)하였다고 한 것도 낭설이다. 다만 읍 사람들이 지금까지 애통하여 제물을 차려 제사지내고, 길흉화복을 당해서도 모두 나아가서 제사하므로 비록 부녀들이라도 오히려 분명히 전해 말하기를, “간악한 역적 정인지의 무리들에게 충동되어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천명(天命)을 마치지 못하게 하였다.” 하니, 슬프다. 예로부터 충절을 지키는 선비는 반드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당시에 임금을 팔고 이로움만 노려서 반드시 그 임금을 혹심한 화란에 몰아넣고야 마음이 쾌하던 자들을 엄 공(嚴公)과 비교하여 본다면 어떤가. 촌 부녀자나 마을 아이들은 마음으로 군신의 의리를 알지 못하고, 눈으로 흉한 변고를 보지 못하였으나, 지금까지 울분과 불평을 지니고 모르는 사이에 말이 입에서 나오고 말로 퍼지니 사람의 천성을 속이기는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음애일기》
○ 기묘년 11월 15일 초저녁에 중경(仲耕)이 달빛을 받으며 관(館)에 왔는데, 정연(挺然) 이구(李搆)도 왔다가 별을 보려고 간의대(簡儀臺)로 돌아갔다. 조금 후에 정원 사령(政院使令)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서문(西門) 재상 두어 사람이 입궐하고 또 근정전 안에 불빛이 있는데, 군사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하니, 서로 말하기를, “어찌 정원에서 알지 못한는 일이 있으리오.” 하고, 곧 내려왔다. 잠시 후에 명이 내려서 입번(入番)한 승지 두 사람과 홍문관 두 사람, 한림(翰林)ㆍ주서(注書) 등을 의금부에 내렸는데, 밤 이고(二鼓)에 곧 옥에 갇히었다. 사재(四宰) 이자(李耔), 형조 판서 김정(金凈), 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대사헌 김식(金湜), 부제학 김구(金絿),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憙),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 등을 잡아 가두었는데, 유인숙ㆍ공세린(孔世麟)ㆍ홍언필 등 세 사람은 석방을 명하고, 또 심연원(沈連源)ㆍ안정(安挺)ㆍ이구(李搆) 등 세 사람에게 석방을 명하였으며, 이자에게도 석방을 명하였다.
16일 아침에 부사(府事) 김전(金銓)ㆍ이장곤(李長坤)ㆍ홍숙(洪淑) 등이 국청(鞫廳)에 나란히 앉아 국문하기를,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이 서로 편을 지어서 속이고 격동시키는 풍습을 이루고, 후진들을 유인하여 권세있는 관직에 점거하고 명성과 위세를 서로 의지하여 자기들과 맞지 않는 사람은 배척하고, 자기에게 붙이는 자는 받아들여서 공론이 바르지 못하고, 나라 일이 날로 잘못되었다.” 하였다. 공사(供辭)에 관련된 윤자임(尹自任)ㆍ박세희(朴世熹)ㆍ박훈(朴薰)과 나는 조광조 등의 속이고 격동시키는 논의에 호응하였다고 하였다. 공사에 관련된 공초 내용은 대개 같았다. 내가 공초하기를, “신은 젊어서부터 고인(古人)의 글을 읽어서 자못 방향을 알았으므로 집에 있으면 효제(孝悌)를 다하고, 나라에 있으면 충의(忠義)를 다하여야 한다고 여겼으며, 동지들과 더불어 옛 도(道)를 강구하여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堯舜)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 세도(世道)가 지극히 잘 다스려지게 되기를 기약하여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려 하였다. 또 어진 사람은 어질다 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어질지 못하다고 할 뿐인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아부하였으리오. 조광조 등과는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기 때문에 서로 교유하였으나, 결렬함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당상(堂上)들이 곧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니 임금이 취초(取招 죄인을 심문하여 공초를 받음)를 지만(遲晩 고문을 그치고 자복한다는 뜻)하고 법률에 비춰서 시행하도록 명하고 날이 저물어 또 앉아서 모두 지만으로 취초하여 조광조 등 네 사람은 사형(死刑)에 준하고, 남은 네 사람은 형장 1백에 3천리 유형을 처하기를 입계(入啓)하였는데, 조광조와 김정 두 사람에게는 사약을 내리기를 명하므로 삼공(三公)들이 다투어서 사형을 감하고, 형장 1백을 쳐서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고, 남은 네 사람에게는 형장을 속죄하여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고, 삼경(三更)에 모두 놓아주니 집에 와서 조금 잤다.
17일 이른 아침에 동소문(東小門) 밖의 백성의 집에 나가 있었는데, 또 금부(禁府)에 모두 모이라는 명이 있었다. 색승지(色承旨) 성운(成雲)이 와서 전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는 신하로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여 지극히 좋은 정치를 기약하였다.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의 일을 처치하는 것이 지극한 과오가 있어 인심을 불평하게 하였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죄를 준 것이니, 나의 마음도 어찌 편하겠느냐. 죄주기를 청하는 대신도 어찌 사적인 의도가 있겠는가. 너희들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내가 밝지 못하여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법률대로 죄를 주면 반드시 이 정도가 아닐 것이다. 너희들은 사심(私心) 없이 국가를 위하였기 때문에 끝으로 감하여 가벼운 죄를 주었으니 알고 떠날지어다.” 하였다. 이날 밤은 동소문 밖 민가에서 잤다.
금부에 갇히던 날 밤에는 모두 꼭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날 밤 넓은 하늘에는 구름이 없고, 밝은 달빛이 뜰에 가득하였는데, 빈 뜰에 벌여 앉아서 서로 술을 부어 권하며 영결하였다. 원충(元冲) 김정이 시를 지었는데,
저승으로 돌아가는 오늘 밤 나그네에게 / 重泉此夜長歸客
부질없이 밝은 달이 머물러 인간을 비추네 / 空留明月照人間
하고, 대유(大柔 김구의 자)가 또 고시(古詩)를 읊었으니,
흰 구름 속에다 뼈를 묻으면 길이길이 그만일 것을 / 埋骨白雲長已矣
부질없이 흐르는 물 남아서 인간으로 향하네 / 空餘流水向人間
하고, 또 읊기를,
밝은 달 긴 하늘의 밤 / 明月長天夜.
하니, 원충이 화답하기를,
추운 겨울 이별하는 때로다 / 嚴冬惜別時
하였다. 모두 조용하고 근심이 없는데, 다만 서로 말하기를, “차야(次野)는 반드시 면할 것이다.” 하니, 차야가 울고, 홀로 효직(孝直조광조의 자)이 통곡하며, “우리 임금을 보고자 한다.” 하였다. 서로 권면하기를, “마땅히 조용히 의리에 나아갈 것인데 어찌 울기까지 하리오.” 하니, 효직이 말하기를, “조용히 의리를 성취하는 것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리오마는, 우리 임금을 보고자 한다. 우리 임금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리오.” 하고, 밤이 새도록 울었는데, 이튿날 사형에 처하는 것을 들은 뒤에는 태연하였다.
기묘년에 지정(止亭) 남곤(南袞)이 판서 홍경주(洪景舟)와 함께 대궐 북쪽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서 비밀리 아뢴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밤중에 선전관을 보내어 금위군(禁衛軍)을 거느리고 제학 김정, 대사헌 조광조 등 일곱 사람을 대궐 뜰에 나치하여 금부에 내려 가두기를 명하였다. 이튿날 밝기 전에 지정이 미복(微服)으로 초립(草笠)을 쓰고, 거친 베옷을 입고 떨어진 신을 신고서 정승 정광필 집에 이르러 문지기를 불러 말하기를, “급히 안에 들어가서 알리되 손님이 왔다고만 말하여라.” 하였으나, 문지기가 그 얼굴을 보고 남 정승임을 알고 들어가 고하기를, “어떤 손님이 왔는데, 얼굴을 보니 남 판서인데, 다만 의관이 허름하여 천인(賤人)같습니다.” 하였다. 정 정승이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겨서 급하게 나가 보니 바로 남공이었다. 공이 이상하여 묻기를, “어찌하여 이러하는가?” 하니, 지정이 그 까닭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곧 또 말하기를, “이 무리를 만약 한 사람이라도 남기면 해로움이 무궁할 것인데, 상감이 반드시 공을 불러서 의논할 것이니, 공은 상감의 뜻에 따르도록 힘써야 한다. 남김없이 없애 버려야 나라의 형세가 평안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후회가 많을 것이니,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위험한 말로 위협도 하고, 혹 감언이설로 꾀하기도 하였다. 정 정승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공이 정승으로써 천한 의복을 입고 시내를 거쳐 왔으니, 이는 크게 놀랄만한 일이오, 사림(士林)들을 모해하는 것은 본디 내 마음이 아닌데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리오.” 하니, 지정(止亭)이 크게 성을 내어 옷을 떨치고 돌아갔다. 조금 있다가 정광필이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서 입시하니, 지정이 벌써 그 일을 도와서 일망타진할 계획으로 형구(刑具)가 이미 뜰에 갖추어져 있었다. 정광필이 울면서 간언하여 중지하게 하였는데, 눈물이 두 뺨에 흐르고 옷과 소매가 다 젖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죽음을 면하고, 죄가 유배에 그쳤는데, 드디어 지정과 함께 거스름이 있어서 즉시 정승에서 파면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에 일을 담당한 재상들이, 예문관 관원을 파면하기를 아뢰어 이조 랑(吏曹郞)을 불러 그날로 정사(政事)하게 하였다. 사문(斯文) 구수복(具壽福)이 그때 이조 랑이 되었는데,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에 이르러서 항의하기를, “만약 사관(史官)을 다 파면하면 오늘날 기주(記注)를 누가 담당하리오.” 하고, 하교에 서명(署名)하지 않으므로 일을 담당하던 자들이 크게 노하여, “명령을 거역하는 죄는 다스리자.” 하였다. 그 다음날 밤 새벽 종을 칠 때에 영의정 정광필 필보(弼父)가 비로소 대궐 뜰에 들어오자 구 사문(具斯文)이 맞이하며 그 까닭을 말하니, 영의정이 그렇다고 하고는 또 말이 없었다. 영의정이 빈청(賓廳)에 들어가니, 일을 담당하던 자들이 먼저 이 일을 거론하여 고함치며 노기(怒氣)가 발발하였고, 영의정도 크게 노하여 꾸짖으니 그들의 마음도 진실로 조금 풀어졌다. 날이 새자 초계(抄啓)하는 일을 크게 논의하는 데 영의정이 말하기를, “주상께서 진노하시면 그때 가서 그 죄를 끝까지 다스려도 늦지 않다.” 하고, 인해 천면하여 곧 당하지 않게 하고, 또 큰 죄도 없게 하였다. 영상이 임기응변으로 어진이를 도와 나라를 보필하고 사람을 구제하고 덕을 펴서 어지러움을 포용하고, 난폭함을 안정시킴이 이와 같았다.
국조(國朝) 이후로, 범죄자에게 공적(功籍)을 깎은 것도 있고, 선원(璿源 왕실의 족보)에서 이름을 삭제한 이도 있으나, 문무방(文武榜)에는 공정치 못한 시험으로 뽑은 경우가 있으면, 파방(罷榜)을 시켜도 이름을 깎는 일은 없었다. 과거를 본 사람 중에 성수종(成守琮)이란 자가 있어 기묘년 별시(別試)에 합격하였는데, 논의하는 자가 대책문(對策文)이 문리(文理)가 접촉되지 않는다고 아뢰어 방목(榜目)에서 이름을 깎았으니,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찬성 이항(李沆)이 배척을 당하여 경상도 감사가 되었다가 대사헌 조광조 등이 죄로 귀양간 뒤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부름을 받고 곧 돌아오려 할 때 함양(咸陽) 군수 문계창(文繼昌)이 전별시(餞別詩)를 지어 주었는데, 이르기를,
명공의 이번 걸음, 신선에 오르는 것같구려 / 明公此去似登仙
얼크러진 많은 일을 칼날로 풀 베듯이 / 盤錯須憑利器剸
사냥한 뒤라고 삼굴에 토끼 없으리 / 畋後豈無三窟兎
때마침 독수리 한 마리가 가을 하늘에 오르네 / 會着一鶚上秋天
하였는데, 찬성이 기뻐하며 받아 가지고 조정에 돌아와서 전하니 사림(士林)들이 겁을 내어 발을 움츠렸다.
황계옥(黃季沃)은 목사 필(㻶)의 아들이다. 기묘년에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이 이미 귀양가게 되었는데 황계옥이 우리 형님 숙균(叔均)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상소하여 조 대사헌 등을 구제하려고 이미 원고를 갖추었으니, 자네가 그것을 정서해 주게.” 하고, 드디어 소매 속에서 내어보이며 말하기를, “상소의 뜻이 어떤가.” 하니 답하기를, “이 글이 매우 아름답구려. 선(善)을 좋아하는 공의 마음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으리오.” 하고, 극진한 말로 권하였는데, 황계옥이 정서하지 않고 갔다. 며칠 후에 윤세정(尹世貞)ㆍ이래(李來) 등과 함께 연명으로 상소하였는데, 그 요지에, “조 아무개는 옛 법도를 어지럽게 하고, 당파를 만들어 나라를 그릇되게 하였으니 청컨대 법으로 처치하소서.” 하였다. 조 공은 이 일로 화를 당하였다. 대개 황계옥은 상소 두 건을 지어놓고 먼저의 글을 우리 형님에게 보였는데, 자기와 맞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서하지 않고 갔으니, 그 간사한 형상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패관잡기》
조 부자(趙夫子)는 집을 다스리고 몸을 행동하기를,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학문을 독실하게 하여 심한 더위에도 꿇어앉아서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고, 아침부터 저물도록, 초저녁부터 삼경까지 우뚝이 움직이지 않고, 맑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을 여름 더위나 짧은 밤에라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학문을 생각하면 정주(程朱)에는 미치지 못하나, 역시 많은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직접 조금 시행하다가 갑자기 불행하게 되었으니, 당시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충암(沖庵)의 학문은 처음에는 비록 노장(老莊)에 빠졌으나, 후에는 식견이 실제로 남보다 한층 높았으며, 그의 귀양소(歸養疏)와 사직소(辭職疏) 등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이런 식견을 가지고도 그 뜻과 같지 못하고 마침내 큰 화에 빠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제학 김정(金淨)은 당화(黨禍)에 연좌되어 제주도로 장류(杖流)되었다. 해남(海南) 바닷가에 이르자 길가의 늙은 소나무 밑에서 쉬면서 세 절구(絶句)를 지어 읊고 소나무를 파서 쓰기를,
뜨거운 길에서 더위 먹는 사람 쉬어 가라고 / 欲庇焱程暍死民
바위와 계곡을 멀리 하직하고 길가에 몸을 굽혔네 / 遠辭巖壑屈長身
촌 도끼 날마다 찾아 오고 가을 불볕 뜨거운데 / 村斧日尋商火煑
정(정은 진시황인데 다섯 소나무에 대부를 봉하였음)만큼 그 공을 아는 이도 세상에는 다시 없네 / 知功如政亦無人
하였고, 또,
바닷 바람 지나가니 슬픈 소리 멀리서 나고 / 海風吹過悲聲遠
산에 달이 외로이 떠오르니 여윈 그림자 성글고 / 山月孤來瘦影踈
곧은 뿌리 샘 밑에 뻗게 되어 / 賴有直根泉下到
눈ㆍ서리에도 그 기상 없어지지 않았네 / 雪霜標格未全除
하였고, 또,
가지는 부러지고 잎사귀 헝클어져 / 枝條摧折葉鬖소髿
도끼에 상한 몸이 모래 위에 누우려 하네 / 斤斧餘形欲臥沙
기둥과 들보가 되려던 희망 슬프다, 그만일세 / 望絶棟樑嗟已矣
굽은 가지는 바다 신선의 뗏목이나 만들리라 / 楂牙堪作海仙槎
하였는데, 사림들이 전송(傳誦)하며 가엾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충암이 처음 금산(錦山) 유배지에 이르렀을 때 어머님이 하룻길 되는 곳에 있었는데, 근심으로 병을 얻어 점점 위급하였으므로 충암이 듣고 달려가서 문병하고, 조카 천부(天富)를 머물러 두어 집을 지키게 하였다. 이어 수직(守直)하는 사람을 시켜서 군수 정웅(鄭熊)에게 고하고, 또 그 이튿날 돌아갈 뜻을 말하였더니, 정웅이 편지를 쓰고 감자(柑子)ㆍ꿩ㆍ술을 보내어 병든 어버이에게 공급하게 하였는데, 마침 이배(移配)되어 금부 도사가 급히 유배지로 향하였다. 충암이 허둥지둥 돌아와서 곧 진도(珍島)로 나아갔다. 후에 권신(權臣)들이 망명(亡命)하였다고 잡아다 문초하므로, 충암이 정웅을 끌어들여 말하였더니, 정웅이 거짓으로 말하기를, “그가 사실 도주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알지도 못하였으며 감자ㆍ꿩ㆍ술을 보냈다는 것은 바로 그가 꾸민 말입니다.” 하였더니, 도대체 잠시 죄수를 놓아준 죄를 면하려고 사군자(士君子)가 사형에 빠지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마음인가. 《패관잡기》
○ 충암이 그 생질에게 답장한 글에 제주(濟州)의 풍토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는데, 그 물산(物産)을 서술한 곳이 상여(相如 한(漢) 나라 사마(司馬)상여)의 〈자허부(子虛賦)〉와 같으면서도 광채가 더하였고, 또 문장이 비장(悲壯)하여 실로 근세에 없는 작품이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만약 한라산 절정(絶頂)에 올라서 사방으로 바다를 돌아보며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구부려 보고, 월출(月出)ㆍ무등(無等)의 여러 산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기이한 가슴속을 씻을 만한데 이태백이 이른바,
구름이 드리우니 대붕이 나는듯하고 / 雲垂大鵬飜
물결이 움직이매 큰 자라가 잠겼도다 / 波動巨鰲沒者
한 것이 오직 여기에 해당할 만하다. 나는 객지에 갇혀 있는 몸으로 형편이 할 수 없으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남자가 세상에 나서 큰 바다를 가로질러 와서, 발로는 이 기이한 땅을 밟고 눈으로는 이 진기한 풍속을 보니, 또한 세간의 기이하고 장한 일이다. 도대체 오려고 하여도 올 수 없고, 머물려고 하여도 머무를 수 없는 것은 역시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같으니, 어찌 그렇다고 한탄하리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부모형제가 멀리 떨어져 있고, 친한 벗들을 멀리서 생각해 보니, 예전에 같이 따라 놀던 사람이 시들어지고 죽은 이가 이미 많을 것이다. 하늘 밖에서 외로운 몸이 몇 번이나 세상의 변고(變故)를 당하여서도 평소처럼 마음을 먹었으니, 진실로 기꺼이 천리에 순응하지 못함은 아니나, 홀연히 이를 생각하면 역시 슬픈 느낌이 없을 수 없다.” 하였는데 나는 이 글을 읽다가 항상 이 대목에 이르면 문득 책을 덮고 눈물을 흘렸으니 아, 슬프도다. 《패관잡기》
○ 충암이 죽음에 임하여 사(辭)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몸을 절도에 던져, 외로운 넋이 되었도다 / 投絶國兮作孤魂
자모를 저버렸으니 천륜이 막혔도다 / 遺慈母兮天倫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을 빠뜨렸도다 / 遭斯世兮隕余身
구름을 타고 상제의 문을 지나서 / 乘雲氣兮歷帝閽
굴원을 따라 함께 놀리라 / 從屈原兮齊逍遙
기나긴 어두운 밤이여 언제나 날이 새려나 / 長夜冥兮何時朝
빛나는 붉은 정성이여 풀속에 묻혔도다 / 炯衷丹兮埋草萊
당당한 장한 뜻이여 중도에 꺾이었도다 / 堂堂壯志兮中道摧
아 천추만세토록 나는 슬퍼하리라 / 嗚呼千秋萬歲兮應我哀.
하였다.
이신(李信)이란 자는 본래 중인데, 대사성 김식(金湜) 등이 이학(理學)으로 문도를 가르치는 것을 듣고, 곧 머리를 기르고 불교를 버리고 와서 학문에 종사하였다. 대사성의 집 담가에 토실(土室)을 짓고 과거의 마음가짐이나 행실을 굽혀 학문에 매진하여 조석으로 게을리 하지 않으므로 대사성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친자제와 같이 마음을 다해 가르쳤다. 대사성이 실패한 뒤에, 대사성의 문도를 모아 대신을 모해하였다고 무고(誣告)하여 옥사가 성립되어 포상을 받았다. 뒤에 충청도에 돌아갔는데 강도(强盜)에 관련되어 옥에 갇혀서 매맞아 죽었다.
○ 몽옹(夢翁)은 본래 한산(韓山) 사람이다.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목은(牧隱) 문정공(文定公)으로부터 모두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중국에 나타나 일국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첨서공(簽書公)의 휘(諱)는 종학(種學)인데, 선조(先朝 성종조)에 충절을 다하여, 반정할 때에 목숨을 바쳤다. 양도공(良度公)의 휘는 숙묘(淑畝)로, 4도의 관찰사를 거쳐서 형조 판서가 되었는데, 형법을 밟게 하여 억울함이 없었고, 지돈녕부사로 벼슬을 마쳤다. 임종할 때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나이가 70이 지났고, 벼슬은 2품에 올랐으니, 죽어도 무슨 한이 있으리오마는, 자손이 많아서 굶주리고 추움을 면치 못할까 두렵다.” 하였으니, 서울과 지방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집에 보탠 물건은 없었다. 조부 참판공의 휘는 형증(亨增)인데, 몸가짐을 매우 맑게 하여, 흥주 목사로 있을 적에 지푸라기 하나도 남에게서 취하거나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분이 선부군(先府君 죽은 아버지)을 낳았다. 선부군이 난 지 한 달이 넘지 못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조모 조(趙)씨도 갑자기 돌아가시어, 전조(前朝) 왕(王)씨 순녕군(順寧君)의 부인 조씨(趙氏)에게서 자라났다. 부지런히 힘써 글을 읽어 과거를 하였고, 조정에 있은 지 40여 년 동안 있는 곳마다 청렴과 근신으로 이름이 있었고, 자제들을 가르치고 단속하는 외에는 다른 것은 없었다. 몽옹은 서울에서 나서 영남과 관동(關東) 지방에서 자랐는데, 항상 선부군의 임지(任地)에 따라다녔던 것이다. 나이 열 살에 두타산 중대사(中臺寺)에 올라 송사(宋史)를 읽고, 개연히 스스로 분히 여겨서 만언서(萬言書)를 지어 올리려고 하였는데, 선부군이 경계하여 못하게 하였다. 한 늙은 대사가 있었는데, 계(戒)를 매우 엄하게 지키고, 말하는 것이 도리(道理)가 있으므로 또 좋아하여 참여하려고 하였다. 절 앞에는 절벽이 높게 서 있고, 쌓인 눈이 창문에 비쳤는데 밤중에 글을 읽으며 천고(千古)를 격앙(激昻 감격하여 감정이 높아짐)하였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속세(俗世)의 먼지 속에 골몰하여 어지럽고 시끄러워 세상에서 외로이 몸이 함께 말할 이가 없었다. 때로는 마을 사람을 따라서 장기와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니, 정밀하고 날카롭던 기운이 사라져서 다시 그들과 더불어 세월을 보내었다. 신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동방(同榜)인 김국경(金國卿)ㆍ정숙간(鄭淑幹)ㆍ성번중(成蕃仲)ㆍ유종룡(柳從龍) 등은 모두 좋은 벗들이었다. 성균관에 나가서는 이희강(李希剛)ㆍ심정지(沈貞之)ㆍ이공중(李公仲)ㆍ이언지(李彦之)ㆍ김몽정(金夢禎)ㆍ송의지(宋宜之)ㆍ화보(和父)ㆍ경우(景遇) 등과 함께 갈고 닦아서 다행히 과실은 없었다. 그러나 전에 기대했던 바는 이미 10중 8ㆍ9는 허물어지고, 또 불행히 일찍 과거에 합격하여 폐조(廢朝)에서 벼슬을 하니, 억지로 하는 수 없이 종사하면서도 오직 술로써 스스로 더럽혔다. 편히 봉양하기 위하여 문소 현감(聞韶縣監)으로 나갔으나 문서와 장부에 묵묵히 머리를 굽히고, 점잖게 사람 대하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서 여러 정사를 개혁하고 먼저 불러서 시종(侍從)으로 삼으니, 소외되었던 종적이 문득 미친 사람이나 장님처럼 일을 하였으나 여러번 임금의 칭찬을 받아 조정에 출입한 지 무릇 10여 년 동안 가장 은총을 받아 아름답고 좋은 벼슬을 취하였으니, 당시의 동배(同輩)들이 이미 곁눈질하게 되었다. 스스로조차 부족함을 알고 있기에 몸을 부수어서라도 보답하기를 생각하였으나, 다만 학문은 배운 것이 없고 성품이 또 성글고 완고하며, 겸하여 갑자기 기용되어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지 못하였다. 어진이를 추천하고 선비를 좋아하려 했으나 처리할 방법이 없었는데, 뒤에 들어온 여러 사람들은 나이가 젊고, 기운이 날카로워서 걸핏하면 위험과 막힘에 부닥쳐서 물정이 크게 어그러졌다. 신대용(申大用)ㆍ권중허(權仲虛)ㆍ조효직(趙孝直)의 무리들이 두 사이를 조정하여 파탄에 이르지 않았으나 신구(新舊) 사이가 서로 못마땅한 채 오늘에 이르렀으니, 아, 이것이 어찌 특별한 사람의 계책이 잘못된 것인가. 물러나와 음애(陰崖)에 살면서 인사(人事)를 끊고 문을 닫고는 허물을 반성하였으며, 샘을 뚫고 못을 만들며 띠를 베어 정자를 얽어서 시를 읊조리고 마음을 펼쳤다. 때로 술을 얻으면 통쾌하게 마시고는 열흘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하여, 세수와 빗질을 오래도록 폐하고, 손톱에는 때가 가득하다. 몸은 쇠하여 쓰러지려 하고, 정신은 혼미하게 사라져가는데, 외로이 거친 터에서 마치 잠꼬대 같은 말도 하고 혹 문자(文字)를 적어가며 시구(詩句)를 지어도 다시 놀랄 만한 말이 나오지 않고 근심이 쌓여서 습관이 되었다. 다시 깊고 한적한 곳을 찾아 토계(兎溪)로 자리를 옮겼더니 인적이 멀리 끊어지고 촌가(村家)가 아주 적으며, 산은 높고 물을 깊은데, 종일토록 노닐면서 산새와 들짐승들과 더불어 기심(機心)을 잊고 왔다갔다 하니, 나의 소박한 성품이 우연히 깊숙한 심기(心期)에 뜻이 같았다. 또 이탄수(李灘叟)와 가까이 살면서 맑은 바람과 밝은 달밤에 문득 한 돛대로 서로 저어 나아갈 수 있다. 돌위에 앉아 시를 읊조리며 신선이 종적을 높이 사모하며 맑은 물에 달을 낚으며, 또 가을산에서 물고기를 잡으니 그 흥취가 또한 얕지 않다. 항상 스스로 다행히 여기기를, 30세 전에는 임금과 어버이에게서 사랑을 받아 영광으로 드나들렸고, 40세 후에는 논과 밭을 넉넉히 얻어 마시고 먹기를 자족하게 하였고, 다시 멀고 궁벽한 곳을 얻어서 주인이 되었으니, 어찌 천지 사이에 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랴. 옛일을 미루어 생각하면 동지들이 모두 없어지고 남은 이는 겨우 두어 사람뿐인데, 또 세상에 기인(畸人)이 되었으니, 자못 괴이하도다. 옹(翁)은 새로 토계(兎溪)에 자리를 잡고 집 이름을 몽암(夢庵)이라 하고, 또 몽옹이라 자호하였다. 옹의 성품이 널리 사랑하여도 사람들이 친하지 않고, 후하게 베풀어도 모든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지 않고 착함을 좋아하여도 독실하지 못하며, 악함을 미워하되 용기가 없어서, 한 세상을 우물쭈물하며 시일을 낭비하여 어언 51세가 되었다. 옹의 약력은 이것으로 전부이다. 그 견마(犬馬 임금에게 충성하는 뜻)와 시달(豺獺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마음)의 성품은 천품에서 나온 것이니 땅속에 들어가도 쉬지 않을 것이나, 베풀 바가 없음이 한스럽다. 하늘이 다시 몇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서 강호(江湖)에 마음껏 노닐다가 뼈가 고향에 돌아가게 하면 달게 잠자듯이 눈을 감고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군색한 여생이 박약하고 용렬하여 고향에 돌아가서 선영(先塋)을 지키지 못하며, 때로 천향(薦享)할 적에 외로운 한 몸으로 돌아다보면 후사가 없으니, 슬프고 마음이 상하여 살고 싶지 않도다. 또 생각하니,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임금과 어버이가 있어 벼리[綱]를 삼는데, 어버이는 이미 돌아가셨으나 제사도 예를 갖추지 못하니, 북쪽을 향하여 보면 눈물이 흐른다. 또 신하가 되어서는 잘한 일이 없고, 죄와 허물이 함께 쌓여서 헐뜯고 욕하는 것이 만 가지나 되지만 오히려 입을 벌려서 밥을 먹고 남을 향하여 말하고 웃으니, 어찌 뻔뻔스러운 추물이 아닌가. 이러므로 낙(樂)을 오로지 이루지 못하고 근심이 간절하여 비록 다시 산골에서 뜻을 펼쳤으나, 목숨이 형장(刑場)에 달렸으니, 항상 밤중에도 놀라고 두려워서 스스로 예전에 절조를 삼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더구나 말년에는 몸에 병이 얽혀서 매양 추위와 더위의 절기가 바뀔 때에는 수화(水火)의 기운이 핍박하여 기침이 올라와서 숨이 끊어지려 하니, 이 상태라면 4ㆍ5년이 되기 전에 이 몸이 없어질 것이다. 뜬 구름같은 이 세상에 아무런 애착도 없으나 오직 딸 두셋이 아직 시집가지 않았으니, 버리려 하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 전세의 인연으로 이런 고뇌를 준 것이 아닌가. 대체로 사람의 수명은 70을 사는 이가 극히 드물고, 5ㆍ60을 사는 이도 요수(夭壽)라고 일컫지 않는데 옹의 나이는 51세이다. 전에 겪은 바를 돌이켜보면 한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지금은 세월이 더욱 재촉하고 빠른 것같이 느껴지는데, 만약 6ㆍ70이 되도록 살더라도 지금부터 얼마이리오. 역시 굶주림을 참고 시를 읊조리며, 술을 얻으면 미친 말과 허탄한 소리를 하면서 날을 보낼 것이니, 다시 무슨 일을 시작하여 굳게 잡으리오. 옹은 젊어서는 문장을 좋아하지 않았고, 중년에서는 힘쓰지 않았다가 늙어서 비로소 종사하려 하니, 정신이 억눌리고 기력이 쇠약하여 옛글을 읽을 적에 서너 장을 펴면 문득 또 정신이 아득하여지고 조금 있다가 잠이 온다. 잠이 깨면 원림(園林)을 산책하며 꽃을 심고 풀을 가꾸다가 피로하면 또 자리로 나와 앉아서 아까 읽던 글을 되풀이하면 보지 않았던 것같다. 이와 같이 대충대충 소일하였으니, 끝내 힘을 얻게 될 수가 없었다. 시(詩)에 대한 눈은 높고 솜씨는 모자라서, 두어 구(句)를 읊어보고 뜻에 차지 않는 곳이 있으면 화가 났다. 한가하게 있을 때에 비록 붓을 놓지 않았으나 마침내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그럭저럭 일력(日歷 일기)에 흐리고 맑은 날씨만을 기록하였다. 시(詩)는 의사를 말로 표현한 것이니, 말이 문채가 없으면 그 뜻이 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빈빈(彬彬 글의 내용과 표현이 아름다운 것)함을 좋아하는 것이 삼백편(三百篇)의 시경(詩經)도 혹은 여염집 부부의 평상시 말에서도 나오고, 혹은 교묘(郊廟)의 제사와 군신(君臣)의 훈계에도 표현되었는데, 모두 마음속에서 나와서 문장으로 발현된 것이다. 그 성정(性情)에서 나온 바름의 증험이기 때문에 그 말이 저절로 공교하였고, 후세에 수식과 조각을 더하여 기이함을 다투고 괴상한 것을 본받았다가, 다시 변천되어 시의 폐단이 극도에 달한 것과는 같지 않았다. 이는 앵무새의 말에 불과하니, 어찌 숭상할 만하랴. 옹의 시는 거칠고 유창하지 못하여 감히 작가의 높은 수준을 엿보지 못하고 오직 스스로 즐길 뿐이었다. 자손이 된 자가 떨어진 상자 속에 보관하였다가 때때로 펼쳐서 오늘의 광경을 생각해 볼 수는 있으나,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니 이는 비웃고 손가락질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경인년 섣달 그믐날 술이 취한 기분으로 붓가는 대로 쓴다. 《음애자서(陰崖自序)》
○김모재(金慕齋)가 장원(壯元) 강태수(姜台壽)와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다. 후에 자녀가 모두 장성하여 혼인할 시기가 되었는데, 강태수의 아들이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언약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드디어 혼례를 이루었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 내가 일찍이 홍문관 교리로 경연(經筵)을 겸임하였는데, 《강목(綱目)》〈동한 헌제기(東漢獻帝紀)〉를 진강(進講)하다가, 이최(李漼)ㆍ곽범(郭氾)의 이름에 이르러서 범(氾)의 음이 ‘사’로 나서 음을 ‘사’로 진강하였는데, 뒤에 임금께서 음을 ‘범’으로 읽으므로 나는 임금께서 ‘범’을 잘못 읽는 것이 두려워서 다시 아뢰기를, “음이 ‘사’로 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에도 ‘범’ㆍ‘사’ 두 음으로 났었다.” 하기에 내가 황공하여 땀이 나서 등이 젖었다. 읽기를 끝내고 곧 곽범의 처음 나온 곳을 보니 과연 ‘범’ㆍ‘사’ 두 음으로 나왔기에 더욱 두려워서 죄를 기다렸다. 대개 나는 포의(布衣 벼슬하지 않는 사람, 선비)로써 재주가 거칠고 지식이 얕았는데, 외람되게 과거에 참여하여 겨우 열흘만에 뽑혀서 수찬이 되었다. 일찍이 같이 당직하는 동료들을 보니, 저물게 들어와서 강(講)할 책을 두어 편(篇)을 읽어보고 단지 진강할 글의 구두(句讀)만 알고 앞뒤를 읽어보지 않으며, 진강(進講)할 때에도 이렇게 하였다. 나도 습속을 따름을 면치 못하여 이런 실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불민한 죄를 뉘우치고 그뒤로는 교리로부터 전한(典翰)ㆍ직제학을 거치면서 반드시 진강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루 보고 자세히 상고하여 의문이 없도록 하였다. 매양 입직(入直)을 하게 되면 새벽밥을 먹고 일찍 나가서 하번(下番) 동료들과 더불어 밤이 다하도록 널리 여러 책을 상고하여 질의하고, 논란(論難)하여 마음에 쾌하고 흡족한 뒤에 진강(進講)하였다. 관원들이 혹 괴벽스럽다고 비웃었으나, 강신(講臣)의 직분으로써는 당연하므로 비록 비웃음을 당하여도 계속하였다. 뒤에 또 뜻밖에 부름을 받아 비현각(丕顯閣)에 들어가서 야대(夜對)에 입시하여 진강을 마친 뒤에, 임금이 전에 강독(講讀)한 일에 대하여 강독관들에게 서로 문답하고 논의하기를 명하였는데, 나는 예전에 본 것이기에 강론에 그릇됨이 없었다. 전례에는 경연이 있으면 전날 밤에 출직(出直)한 강관이 강서(講書)의 문단을 끊어서 표지(標紙)를 붙이고, 내전에 들인다. 시강(侍講)이 책을 받들어 들여오면, 서리(書吏)가 내전에 들여온 책에 의하여 표지를 붙이고, 입직한 강관(講官)은 그 표지를 보고 미리 음(音)과 뜻[義]을 익혀서 진강하는 것이다. 성종조(成宗朝)에 사문(斯文) 민이(閔頤)가 직제학으로 입직하였는데, 서리가 부표(付標)를 잘못하여 임금이 보는 절표(絶標)와 달랐다. 진강할 때 임금이 이르기를, “어느 곳을 읽느냐? 표신(標信)한 책면(冊面)이 아니니, 그 말 이하로부터 읽어야 된다.” 하므로, 민이가 펴보니 문의(文義)가 마침 어려워서 입을 붙일 수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본래 학술이 없고 문리도 해석하지 못하였습니다. 요행히 과거에 올라 외람되게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서 항상 입직하는 날이 되면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진독(進讀)할 글에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으면 동료들에게 물어서 겨우 뜻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다른 면(面)의 글은 힘이 미치지 못하는 데, 서리가 책에 표지를 잘못 붙여서 하교를 받고 펴보니 문의가 어려워서 입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신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음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죄가 남을 것입니다. 청컨대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곧 진강을 파하였는데, 임금이 도로 전교하기를, “아무의 말이 옳으니 나는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에게 특별히 통정대부를 가자하라.” 하였다. 그뒤에 연산조에서는 사문 김홀(金忽)은 응교(應敎)로, 찬성 홍숙(洪淑)은 수찬(修撰)으로 입직히여 진강을 담당하였는데, 김홀이 갑자기 뱃속이 체해서 소리를 내지 못하니, 연산군이 먼저 나가라고 명하고, 다시 수찬으로 대강(代講)하기를 명하니, 홍공은 하번(下番)이었기 때문에 진강하는 것은 자기의 임무가 아니라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일을 당하여 겨우 구두(句讀)를 분변하고 땀을 흘리며 나갔다. 뒤에 또 현 조정에서 지사 김세필(金世弼)이 전한(典翰)으로 입시하였는데, 서리가 잘못 부표(付標)한 것이 민이(閔頤) 공의 경우와 같았다. 마침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맡았는데, 그 글은 여러 글을 인용한 것이 많아 가장 알기 어려운 대목이 있기 때문에 좌우에서 놀라 실색하였다. 그러나 김세필은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성품이 또 영민하고 통달하며 이치에 밝아 막힘이 없어서 비록 익숙하게 보지는 못하였으나 조용히 펴서 읽어 조금도 착오가 없었다. 문리에 능통하여 막힘없이 연의(衍義)해 밝히고, 논설이 결함이 없었으므로 좌우에서 탄복하였다. 경연관이 앞뒤를 다 찾아 읽지 않고, 임시로 그 목전에 있는 것만 읽어 갑자기 일을 당하면 창황하여 대답할 바를 모르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니니 강관의 경계로 삼을 만한 일이다. 이천(伊川 송(宋)의 정이(程頤))이 항상 진강할 때가 되면 반드시 미리 재계하고 가만히 생각하고 정성을 기울여 임금의 뜻을 감동되기를 바랐으니, 신하로써 마음씀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 이상(二相 찬성) 김안국(金安國)의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모재(慕齋)이며, 아우 참판 김정국(金正國)의 자는 국필(國弼)이고, 호는 사재(思齋)인데, 함께 유림종장(儒林宗匠)으로 찬성은 이천(利川)으로 물러나서 살았고, 참판은 고양(高陽)으로 물러나서 살다가 19년만에 다시 등용되었다. 어느날 참판이 이천에 갔는데, 동네에서 혹은 풋콩을 삶고, 혹은 외를 따서 이상에게 드렸다. 이상은 모두 받아서 책에 기록하니, 참판이 상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형님은 어찌하여 이런 물건을 받아 쓰면서 어찌하여 책에 기록합니까.” 하니, 이상이 말하기를, “남이 성심으로 주는 것인데 내가 어찌 물리치며, 책에 기록하지 않으면 나는 반드시 잊어버릴 것이니, 어찌 남의 은의를 버리리오.” 하였다. 그가 시골에 있을 적에 참판은 간소하고 담박하여 나물과 거친 밥으로 겨우 이어갔고, 이상은 전원(田園)을 만들고 곡식을 쌓아서 거두고 뿌리며 과부된 자매를 모두 거느려서 기르고, 안팎 가묘(家廟)에 제사를 고루 행하며, 서재(書齋)를 넓혀서 학도(學徒)를 맞이하고, 향음례(鄕飮禮)와 향회(鄕會)에도 참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정에 돌아왔을 때 집 지을 것이 있어서 기와 만드는 공인과 함께 일을 계산하여 값을 정하는 데, 재상 한 사람이 찾아왔으므로 읍하고 맞이하여 인사를 마치고는 기와 만드는 공인과 더불어 액수를 계산하되 토목(土木) 값이 얼마, 인부 값이 얼마, 대목[匠人] 수공이 얼마, 운임이 얼마인가를 따지는 동안에 재상이 하직하고 가버렸다. 친족들이 비방하기를, “재상이 와서 보는데 같이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하니, 이상이 말하기를, “내가 그때 그 일을 한 것은 내 몸만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일국에 통용(通用)하는 예(例 가격의 표준)를 위한 것이었는데, 만약 내가 기와 만드는 공인에게 속임을 당하면 일국의 과부나 가난한 선비들이 장차 기와를 사서 쓸 수 없을 것이다. 마침 나에게 그런 일이 있으니, 재상이 오더라도 어떻게 하랴.” 하였다.
○ 응교 기준(奇遵)이 하루는 금직(禁直)하는 데, 꿈에 관외(關外)에 여행하며 고생스러운 길을 걸었다. 객 중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읊기를,
이역의 강산은 고국과 같은데 / 異域江山故國同
하늘가에 눈물지며 외로운 배에 의지하네 / 天涯垂淚倚孤篷
구름은 막막한데 하관이 닫혀 있고 / 頑雲漠漠河關閉
고목은 쓸쓸한데 성곽은 비어있네 / 古木蕭蕭城郭空
들길은 가을 풀속에 가늘게 나뉘었고 / 野路細分秋草裏
인가는 저녁볕에 많이도 모여 있네 / 人家多在夕陽中
가는 돛 만리 길에 돌아오는 배가 없으니 / 征帆萬里無回棹
푸른 바다 아득하여 소식을 못 통하네 / 碧海茫茫信不通
하였는데, 홀연히 깨어서 꿈의 글을 벽에 써서 부쳤더니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년 당화(黨禍)에 연좌되어 호서(湖西)로 귀양갔다가 다시 북방 병방 지역 온성(穩城)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도중(道中)에서 보는 풍경이 모두 시(詩)에 있는 것과 같아 말을 잡고 읊으면서 슬프게 울먹이니, 종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온성에 이르자 곧 사약(死藥)이 내렸으니, 사람의 일이 미리 정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사림(士林)들이 전송(傳誦)하며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덕양유고(德陽遺稿)》를 상고해 보면, 이 시는 꿈을 깬 뒤에 꿈속에서 본 바를 기록한 것이오, 꿈속에서 지은 것이 아니다. 사재는 응교와 동시대인데도 기록한 내용에 잘못이 있으니, 하물며 다른 것에 있어서랴.
○ 승지 한충(韓忠)은 기개가 호방(豪放)하여 일찍이 문학에 이름이 있었고, 음률과 거문고 타기에 능하였다. 계유년에 과거에 장원하였고, 홍문관 제학으로 주청검찰관(奏請檢察官)에 보충되어 북경에 갔는데, 점을 잘 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고, 통역관을 시켜 평생의 길흉을 물었더니 점쟁이가 점을 쳐보고 다만 장두체(藏頭體 시의 한 격식) 율시(律詩) 하나를 써주었다. 그 시에,
소년 때의 재예는 천마에 의지하여 / 少年才藝倚天摩
손으로 용천검을 잡고 몇해나 갈았던고 / 手把龍泉幾歲磨
돌 위에 오동나무 거문고로 소리내니 / 石上梧桐將發響
음속의 율려에 때로 화답하도다 / 音中律呂有時和
입으로는 삼대의 시서 교화를 전하고 / 口傳三代詩書敎
문학은 천추의 도덕 물결을 일으켰도다 / 文起千秋道德波
가죽 폐백으로 현사의 값을 이룩했는데 / 皮幣已成賢士價
가생(한 나라 가의)만은 어찌하여 장사로 귀양갔던고 / 賈生何獨謫長沙
하였는데, 돌아오는 즉시 당화에 연좌되어 귀양갔다가 오래지 않아 또 옥중에서 매맞아 죽었으므로 평생의 전후가 이처럼 시(詩)와 같았으니, 또한 매우 이상하도다.
○ 뜬소문을 듣고 논사(論事)를 잘못하여 내가 직접 겪은 일이 두 번 있다. 계유년에 내가 헌납이 되었는데, 찬성 이계맹(李繼孟)이 그때 평안 감사로 있었다. 그때 한재로 인하여 흉년이 들었는데, 헐뜯는 자가 내게 말하기를, “이 공이 별도로 큰 누대를 덕암(德巖) 위에 짓는데, 규모가 굉장하고 공역이 많아, 백성들이 괴로워서 원망이 심하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사실과 다를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서도(西道)에서 오는 사람에게 들으니, 대략이 같았다. 나는 전에 나에게 말한 이도 미더운 사람이니, 그 한 사람만으로도 믿을 만한데, 뒤에 들은 것도 같으니, 이 사실은 반드시 그러한 것이 의심 없다고 생각되어 사간원의 동료들과 의논하고 논박하여 아뢰기를, “평양은 유람할 장소가 가장 많아 우리 나라에서 제일이므로 별로 누관(樓觀)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괴로워하므로 더욱 급한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추고하소서.” 하였더니 윤허하고, 또 체직하기를 명하였다. 뒤에 다시 들으니, 다만 노는 관속들을 부려서 두어 칸 작은 정자를 더 지었는데, 열흘이 못 되어 마쳤다고 말하니, 전하는 소문이 그릇됨은 이와 같았다. 이 공은 마음이 넓어서 후진들에 대하여 정성을 기울이며, 비록 몹시 헐뜯고 반박하여도 조금도 혐의함이 없고, 오히려 용감하게 말하는 선비라고 칭찬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공이 참찬이 되었는데, 나는 검상(檢詳)으로 공의 집에 찾아가 뵈었다. 나는 전에 잘못된 일로 마음이 오히려 불안하여 머뭇거리며 사죄하니, 공이 술상을 놓고 거리낌없이 크게 웃고 말하기를, “듣건대 나의 일을 주장하여 논한 자가 너라고 하더라. 이는 네가 잘못 들은 것이니, 어찌 마음에 두리오. 나는 일찍이 너의 형제의 지절(志節)을 아름답게 여기니, 더욱 힘써서 게을리 말아라.” 하며, 오히려 선진(先進)들 사이에서 칭찬하였다. 한번 논핵(論劾)을 만나면, 원망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문득 중상하기를 생각하는 자와 비교하면 기상이 짝할 수 없다. 또 경진년에 내가 백씨와 함께 죄에 연루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는데, 홍문관에서 상소하여 논핵하기를, “아무 등 10여 명이 일찍이 정완(鄭浣)의 집에 모여 조정의 정치를 비평하였으니 다시 죄를 더하소서.” 하였다. 백씨와 정완은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나는 일찍이 승지로 있을 때에 정완은 생원으로 상소하려고 승정원에 와서 한번 얼굴은 보았으나, 모두 그 집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는데 이와 같이 의논하였다. 다행히 성상께서 밝게 통찰하시어, 놓아두시고 불문에 붙였으므로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것으로 억울하게 죽었더라면 끝내 밝히지 못했을 것이다. 이 두 일은 내가 직접 겪은 것으로 뜬소문으로 일을 논하는 데에 경계가 될 만하다.
○ 김태암(金泰巖)은 보은(報恩)의 품관(品官)이다. 학문은 하지 않았지만 기상이 커서 김원충(金元沖 김정) 제공들과 함께 벗하고 좋아하였다. 조정에 천거하여 찰방(察訪)이 되었다가 뒤에 물러나 시골에 살았다. 좌랑 구수복(具壽福)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곳이 없어 보은 산간에 거닐며 놀았는데, 태암이 집 한 채와 전토 수십 경(頃)을 주어 살게 하여 좌랑의 부인과 그 세 아들이 지금까지 편히 살았으므로 한 지방에서 의사(義士)라고 일컫는다.
○ 김윤종(金允宗)은 정승 김상식(金相湜)의 훌륭한 제자이다. 이 까닭으로 역시 기묘사화에 참여하게 되어 북쪽 지방으로 귀양갔다가 죽었다. 처음 공이 화가 일어남을 듣고 북장사(北丈寺)에 와 있었는데, 하루는 밤중에 피하여 속리산으로 들어갔더니, 많은 군사들리오를 따라와 마침내 체포되었다. 종이 울면서 음식을 올리니 말하기를, “나는 장차 죽을 사람이지만 울지 않는데 너는 무엇 때문에 우느냐.” 하고 드디어 조용히 밥을 먹고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았다.
○ 태의(太醫) 박세거(朴世擧)는 기묘사화의 사류(士類)들과 종유하며 매우 지조가 있었고, 효직(孝直 조광조) 공을 정성껏 섬겼다. 기묘년 후에도 명절에는 반드시 문안하고, 외객(外客)이나 형제들이 병이 나면 극력 구호하여 밤중이라도 찾아가 보았다. 그 집 행랑이 짚으로 덮였으나 해마다 고쳐 덮지 못하여 곧 썩어 무너지려고 하자, 역시 자기의 비용으로 와서 제조(瓦署提調)에게 얻어다가 기와로 덮었으니, 세상에 드문 선비인데 애석하다. 천도가 무심하여 가업(家業)을 전할 아들이 없고, 또 남에게 미움을 받아 마침내 패망하게 되었으니 통탄을 견딜 수 있으랴.
○ 기묘년 변란에 지정(止亭) 남곤(南袞)이 실상 그 일을 주장하였다. 승지와 사관(史官)을 피하여 후원(後園) 북쪽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와 비밀리 아뢰어 옥사를 일으켰다. 그뒤에 나이가 어린 무리들이 불평자들을 모아 임금의 측근자를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계속 일어나 목을 나란히 하여 죽임에 나아갔으나 오히려 그치지 아니하니, 지정이 속으로 위태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매일 어두운 밤에 미복(微服)으로 몰래 다니면서 다른 집으로 번갈아 옮겨 자고, 새벽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일년여 동안 하다가 일이 없어지자 그쳤다.
○ 가정(嘉靖) 임자년(중종 17) 사이에 나는 서해(西海)에 유람하였는데 마침 날이 가물었다. 강령현(康翎縣)에서 어떤 세 사람이 함께 논을 매면서 한 사람이 말하기를, “가뭄이 이와 같으니 금년에도 반드시 흉년이 들 것이다. 근년에 들으니 재상 조광조가 지극히 청렴하고 간소하여 백관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각 도의 주군(州郡)에도 청탁하는 편지나 뇌물이 전연 없었기 때문에 마을 안에서도 꾸짖고 고함치는 아전이 없었는데, 지금 들으니 귀양가서 죽었다고 하니, 천재(天災)가 아마 이 까닭일 것이다.” 하였다. 그 한 사람이 서울에 가서 고하여 곧 잡아다가 고문하였는데, 끝내 극형(極刑)을 당하였고, 같이 김매던 사람은 고하지 않은 죄로 처벌하고, 고한 자는 면포로 상을 주었다. 《패관잡기》
○ 예로부터 항간에서 동요(童謠)가 발생할 적에 처음에는 의미 없이 무심하게 나왔으므로 인위적인 협잡을 용납할 수 없고, 순전히 자연발생으로 이루어져 스스로 감통(感通)되어, 전정(前定)의 참응(讖應)이 틀리지 않았다. 우리 태종조(太宗朝)에, “저 남산에 가서 돌 깨는 정, 남은 것 없다.”라고 한 동요가 있었는데, 정(釘)이란 것은 돌을 깨는 연장이다. 얼마 안 되어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이 어떤 일로 사형되었는데, 남(南)은 남은을 이른 것이고, 정(釘)은 정(鄭)과 음이 같으니, 정도전을 말한 것이다. 여(餘) 자는 우리 말로 번역하면 ‘남은’의 음과 같으므로 정과 남이 없어진다는 것을 이른다. 성종조(成宗朝)에, “망마다 승슬어이라.”고 하는 동요가 있었다. ‘망마다(望馬多)’는 상말로 끊는다는 말[辭絶之辭]이고 앞에 사(辭) 자는 굳이 사양한다는 것이다 ‘승슬어이라(勝瑟於伊羅)’는 싫다는 말인데 모두 끊는다는 뜻이다. 얼마 뒤에 윤 서인(尹庶人 성종의 폐비 윤씨)이 죄가 있어 폐하였다. 연산조에 동요가 돌기를, “견소의로고(見笑矣盧古), 구질기로고(仇叱其盧古 신라 이부〈吏簿〉에 천서(賤庶)의 이름자는 방언을 썼는데, 반드시 질(叱) 자를 빌려 소리를 도왔으니 옳지 않고 쓰기에 어려운 것을 사용하는 예가 바로 이것이다), 패아로고(敗阿盧古)” 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삼합로고(三合盧古)라고 일렀다. 노고(爐古)는 쇠탕기〔鐵湯器〕인데, 대ㆍ중ㆍ소 세 겹을 같이 한 갑(匣)에 넣은 것을 시속에서 ‘삼합로고’라고 이른다. ‘로고’라는 것은 말을 끝내는 말인데. 말이 노고(爐古)와 같고 세 번 말을 중복한 것은 노고 셋을 합한 것과 같다고 이른 것이다. ‘견소의로고’라는 것은 행위가 도리에 어긋남이 많아 남에게 웃음을 당한다는 뜻이고, ‘구질기로고’는 방언(方言)에 사람이 더러운 행동과 방탕하고 편치 못한 것을 이른다. ‘패아로고’라는 것은 방언에 이미 이룩된 것을 파괴하는 것을 이른다. 한 말을 끝내고 반드시 ‘로고’로 끝맺는 것은, 시속 말투가 그러한 것이다. 바로 연산주가 도리에 어긋나고 음탕하여 이미 이룩된 대업(大業)을 무너뜨려 몸을 마침내 보전하지 못하고 남에게 웃음을 당한다는 뜻이다. 연산조에 또 동요가 돌기를, “매이역가 수묵묵(每伊斁可首墨墨)” 하였는데, 대개 평성(平城) 박원종(朴元宗)과 창산(昌山) 성희안(成希顔)의 집이 모두 남산 밑 묵사동(墨寺洞)에 있었고, 두 공이 반정(反正)의 공에 있어 우두머리였다. ‘매이(每伊)’라는 것은 시속 사람들이 존장(尊長)을 불러 고하는 말이며, ‘역(斁)’은 국휘(國諱 중종의 어휘(御諱))와 음이 같고, ‘가(可)’는 보통 사람들이 서로 이름을 부르는 조사(助辭)인데, 불러서 윗 어른에게 고한다는 뜻이다. ‘수묵묵(首墨墨)’이라는 것은 그 계책을 우두머리로 하는 이가 묵사동에 있다는 뜻이다. 그것 역시, “오마남도(五馬南渡)”의 동요와 같은 것이다. 나라의 흥망과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향배(向背)가 반드시 먼저 징조가 나타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다. 지난 때의, “그 손님인가, 만손(萬孫)이지.”[其客也耶 萬孫也哉]란 동요같은 것은 너무 가소롭다. 백성 중에 만손이란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양평군(襄平君)이라 일컫고 조정에 자수하기를, “양평군에게 사사(賜死)할 때에 유모(乳母)가 속여, 양민(良民)의 집 아들로 얼굴이 같은 자를 대신하게 하였다. 내가 참으로 양평군이다.” 하였는데, 양평군은 연산(燕山)의 아들이다. 조정에서 옥리(獄吏)에게 명하여 사실을 조사해 다스리게 하였는데, 마침내 무망(誣罔)한 죄로 사형을 당하였다. ‘그 손인가[其客也耶]’ 한 것은 이 손님은 어떤 손님이냐는 뜻이고, ‘만손이지[萬孫也哉]’ 한 것은 이 손님은 곧 만손이라는 뜻을 이른 것이다. 이는 한 미친 백성인데, 무슨 관련이 있어 또한 동요에 나타났을까. 이것으로 천지간에 한가지 일이나 사물의 성패와 존몰에도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운명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오직 현미(玄微)한 이치를 알아보는 사람이라야 앉아서 추산하여 미리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요(善謠)가 풍속을 옮기고 바뀌는 이치는 역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용천담적기》
○ 역인(逆人) 유세창(柳世昌)이 공을 얻고 상을 받으려고 모의하여, 이웃의 어리석고 아첨하는 소년들을 모았다. 서로 여러 가지 놀음을 하고, 성명을 기록하여 계(契)를 만든 형상을 하였다. 꾀어서 집에 모아 술을 마시고, 장기로 내기하여 각 사람의 옷을 빼앗고 말하기를, “내일 술을 갖고와서 옷을 찾아가라.” 하여 모두 흩어져 가게 하고는, 몰래 각 사람의 성명과 모역(謀逆)하는 사연을 써서, 옷깃을 따고 넣은 뒤에 도로 꿰매어 간직하였다. 이튿날 약속대로 각각 이르자 도로 옷을 주어 입게 하고는, 그날로 고변(告變)하여 모두 대궐 뜰에 붙잡기를 명하여 국문하였는데 다른 증거가 없었다. 유세창이 공사(供辭)하여 옷깃을 따고 보면 알 것이라고 청하므로, 곧 공사대로 따서 보니 과연 역모한 말이 기록돼 있었다. 말없이 자복 받아 수십 명이 모두 사형되고 매맞아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그 수십 명은 나이가 겨우 열 대여섯 살로 머리에 서캐가 가득하였는데, 속이고 유인되어 죽음을 당하였으니 듣는 이가 원통하게 여겼다. 우리 집 외사촌 형은 갓난애기 때부터 성품이 어둡고 어리석어서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였다. 여럿이 모인 곳에 가면 놀라고 겁을 내어 어쩔 줄을 모르기 때문에, 친척 집에 혼례와 상례 및 제사 때에 사람이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겁을 내어 머리를 들고 나오지 못했다. 유세창과 집이 가까워 역시 속임에 넘어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내가 가장 그 사유에 자세히 알고 있다. 천하의 일이 요량 밖에 일어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옥사(獄事)를 맡은 자의 경계가 될 것이다.
○ 이항(李沆)이 좌의정에 임명되자, 대간(臺諫)에서 논박하여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는 데 이르렀다. 대신과 재추(宰樞)들이 빈청(賓廳)에 모여 신구(申救)할 때에 정광필(鄭光弼)이 영의정으로 있었고, 찬성 허굉(許硡)이 판서로 있었는데 홀로 늦게 이르렀다. 영상이 말하기를, “왜 늦었소.” 하니 찬성이 대답하기를, “마음에 온당하지 못한 곳이 있어 깊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늦었습니다.” 하였다. 영의정이 말하기를, “성희안도 정승이 되었는데 이항만은 해서는 안 되는가.” 하니, 찬성이 말하기를, “대간에서 논한 것을 지금 꼭 시비할 것이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사체에 크게 그렇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대간의 말로써 이항을 밖에 귀양보냈다면, 이항의 걸음이 비록 겨우 성문 밖에 나갔을지라도 대신이 재추를 거느리고 빈청에 나아가 신구하는 것은 옳겠으나, 지금 대간에서 논의하고 방금 대간청(臺諫廳)에 모여 있는데, 대신들이 재추를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서 동시에 함께 아뢰어 마치 싸움터같음은 또한 무슨 일이오.” 하였다. 영의정이, “판서의 논의는 젊은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 합하고, 우리들의 논의와는 서로 맞지 않음은 또 무엇 때문이오.” 하니, 찬성은, “나를 허흡(許洽)으로 인정하는 까닭이오. 그러나 내가 논한 내용이 적절한 말인데 마침 의견이 맞지 않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찬동하겠소.” 하고, 드디어 하직을 고하고 나왔다. 그때 허흡이 바야흐로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허흡과 권예(權輗)가 함께 이름이 있었다. 집권자들이 그의 강직함을 미워하여 그의 동류들과 사사로이 밖에서 약속하고, 김극복(金克福)이 먼저 경연에서 발언하기를, “허모와 권모는 속이고 과격하며 불온하오니, 내쳐서 부박(浮薄)함을 경계하옵소서. 이 뜻을 대신들에게 물으면 그 정상(情狀)을 밝게 아실 것입니다.” 하였는데, 심정(沈貞)이 듣고 대궐에 나아가다가 찬성을 동빈청(東賓廳)에서 만나 함께 청(廳) 안에 들어가서 말하기를, “김모는 본래 몸을 삼가니 어찌 스스로 이 말을 말하리오. 내가 장차 그 논의를 충족시키려고 왔소.” 하니, 찬성은, “한때의 이록(利祿)도 좋아할 만하나 만세의 명예와 절의(節義)만을 어찌 버릴 것이오.” 하자, 심정이 잠자코 도로 나왔다. 김극복이 얼마 안 되어 폐출당해 죽었는데, 세상에서는 심정이 김을 매수하였다고 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 사문(斯文) 어득강(魚得江)의 자는 자유(子游)인데, 영남 진주(晉州)에서 살았고 문학과 아치(雅致 고상한 취미)가 있었다. 과거에 오른 뒤로부터 외군(外郡)에 수령으로 나가기를 원하였다가, 청렴하게 물러나 벼슬에 마음을 끊었더니 조정에서 여러번 요직(要職)으로 불렀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조그만 집을 산림(山林) 속에 지어, 가족을 버리고 어린 종 하나만 데리고는 아침과 저녁 끼니 정도만 간략하게 갖추었으니, 담박(淡泊)하기가 절간과 같았다. 사람들과 말할 때는 농담을 섞어 이야기하였다. 하루는 사람들과 더불어 마주 앉았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전하기를, “도사(都事) 정만종(鄭萬鍾)이 문학(文學)으로 체임(遞任)되어 갔습니다.” 하니, 어 공이 문득 대구하기를, “내가 일찍 문학이 되었는데, 어찌 정만종이 되었다고 말하시오.” 하였다. 좌우에서 괴이히 여겨 물으니 어 공은, “《논어》에 문학은 자유(子游 공자의 제자인데, 자신의 자와 같기 때문에 한 말)와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라고 하지 않았소.” 하니 듣는 이가 포복절도하였다.
○ 판서 송인수(宋麟壽)의 자는 태수(台叟)이다. 벼슬을 하직할 때에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를 찾아뵈니 마침 유인숙(柳仁淑)ㆍ신광한(申光漢)도 와서 뵈었는데, 모재가 매우 기뻐하지 않으므로 두 공이 간 뒤에 그 연고를 물었다. 모재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원명(原明 유인숙의 자)은 학문과 경술(經術)이 없으니, 그 종말이 어떠할 것을 알지 못하겠으며, 신광한은 팔자(八字)가 매우 좋아서 기묘사화 때에 사류(士類)들과 같이 쫓겨났으니, 다행이다.” 하였다. 두 분은 당시의 이른바 명류(名類)인데, 모재의 논의가 이와 같으니 쇄락(灑落)한 기상이 있다고 말할 만하다.
○ 세종 19년에 전교하기를, “공순공(恭順公) 방번(芳蕃)과 소도공(昭悼公) 방석(芳碩)은, 모두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불행히 후사가 없으니,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를 공순공의 후사로 삼고,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소도공의 후사로 삼아, 사당을 세워 봉사(奉祀)하라.” 하였는데, 당시에 별로 이의가 없었다. 병자년에 지금 임금이 연산주의 뒤를 세워 봉사하고자 하니, 모든 논의가 시끄러워서 마침내 거행하지 못하였고, 기해년에 한산(韓山) 군수 이약수(李若水)가 상소하여, 연산군과 노산군의 뒤를 세워 그 제사를 받들기를 청하자, 대간에서 죄주기를 청하여 명을 내려 옥(獄)에 송치하고, 마침내 파직시켰으니 세상이 변한 것을 알겠다.
○ 처사(處士) 서경덕(徐敬德)은 당성(唐城) 사람인데, 송도(松都)의 화담(花潭)에 자리잡고 살았다. 총명하고 강하며 굳세어,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18세에 처음으로 《대학》을 배웠는데, 문을 닫고 꿇어앉아 오로지 격물(格物)로써 치력하였다. 오래 뒤에 경전(經傳)을 취하여 읽는데, 마음속으로 깨달음이 있는 듯하여 이에 더욱 잠심하고 연구하여, 성리학으로 자임하고 더욱 역경(易經)에 연구가 깊었으므로, 제자(弟子)가 되어 배우기를 구하는 자가 문에 끊어지지 않았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거상(居喪)할 적에 소금과 나물도 먹지 아니하였고, 집이 가난하여 혹 며칠동안 밥을 짓지 못하여서, 안자(顔子)의 가난에 비교할 정도 뿐만 아니나 항상 태연하였다. 평생에 남보다 특이한 행동을 아니하고, 시골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여도 일찍이 그 다른 점을 보지 못하였다. 어버이의 명으로 진사 시험에 나아갔으나, 그뒤에는 다시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중종 말년에 대신의 추천으로 후릉(厚陵)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마침내 선비로 몸을 마쳤으니 애석하도다. 저작한 〈태허설(太虛說)〉ㆍ〈원리기론(原理氣論)〉ㆍ〈귀신론(鬼神論)〉ㆍ〈사생론(死生論)〉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스스로 호를 복재(復齋)라 하였는데 학자들이 화담선생이라 일컬었다. 화담이 어릴 때에 이웃 선비에게 《서전》을 배웠는데, ‘기삼백(朞三百)’에 이르러서, 선비는 책을 덮고 책장을 넘겨 지나므로, 화담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본래 알지 못하는 대목이기에 세상 사람이 모두 읽지 않는다.” 하였다. 화담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약 실상 알지 못하는 곳이라면, 선유(先儒)들이 무엇 때문에 전(傳)에 기록하였으리오.” 하고는, 이어 배우기를 청하여 보름 동안에 몇 천 번을 읽었는지 자연히 밝게 통하였다.
○화담이 3년 동안 괴롭게 공부하여, 수일 동안이나 낮에는 밥먹기를 잊고 밤에는 잠자기를 잊으며, 문을 닫고 판자 위에 꿇어앉아서 깔고 덮지도 아니하더니, 기혈(氣血)이 막혀 통하지 않아서 소리를 들을 적마다 놀라게 되었다. 드디어 3도(道)의 명산(名山)을 유람하다가 만년(晩年)에 돌아왔는데 이뒤로는 건강하여 동정(動靜)이 모두 편안하였다.
○ 화담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할 때에, 사물의 명목(名目)을 열기(列記)하여 벽에 붙이고, 차례로 연구한 뒤에 그 사물의 해설을 지었다. 그 부지서법(不知序法)이란 것에 이르기를, “바야흐로 한 물건을 생각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변소에 가면 변소에서도 전심하여 생각하고 멈추지 아니하므로, 오래 뒤에 그대로 일어났다.” 하였다.
○ 화담이 산수(山水)가 좋은 곳을 만나면 문득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 화담은 얼굴이 환하게 밝고 눈이 샛별같았다. 모시고 앉은 이는 반드시 참판 민기(閔箕) 경열공(景說公)인데, 공이 항상 화담을 높여서 말하기를, “참으로 유자(儒者)의 정맥(正脈)이다.” 하였다. 경열공은 여러 사람과 섞여 표를 내지 않으므로, 남들이 그 도량을 알지 못하니 그 덕(德)이 두텁다고 이르겠다. 좌랑(佐郞) 노수신(盧守愼)의 자는 과회(寡悔)인데 나의 벗이다. 일찍이 내게 묻기를, “자네가 학문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하기에, 내가 당세의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을 일일이 거론하여 대답하니, 모두 아니라고 말하였다. 내가, “자네는 어떤 사람을 보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이복고(李復古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의 자)가 이에 가깝다.” 하였다. 이 문답은 계묘ㆍ갑진 연간에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과회는 이미 그때에 학문의 대체를 보고 깨쳤는데, 나는 글자 배우는 것만 알고 학문의 일은 알지 못하였다. 과회는 그때 나이가 겨우 30이니 일찍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
○ 기사년 윤9월에 영의정 유순(柳洵)이 파직되었다. 유순은 포의(布衣)로 일어나서 문묵(文墨)으로 출세하여, 좋은 벼슬을 거쳐 세상에 거슬림이 없이 드디어 정승에 이르렀다. 연산조에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오직 그대로 따르기만 일삼았는데, 반정한 뒤에는 전례대로 공신(功臣)의 칭호를 더하였다. 심하게 더럽혀짐을 이미 제자신도 헤아렸으나 역시 정사에 건의하여 밝힘이 없고, 또 우물쭈물하기만 하였다. 대간과 시종이 상소하여 파면하기를 논하였는데, 역시 굳게 사양하지 않았고 이에 이르러 천변(天變)으로 인하여 다시 논하니, 유순도 굳이 사양하므로 파면을 명하였다. 《음애일기》
○ 계유년 5월 22일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임금이 경기 지방의 한재(旱災)와 함경도의 큰 흉년으로 인하여,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의 수를 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큰 비가 왔다. 신미년 가을로부터 해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 비록 약간의 비가 내리더라도 넉넉하게 땅을 적시지 못하여 밭에 물기가 남지 아니하고, 샘과 못이 모두 말랐는데 경기 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함경도는 작년부터 가뭄이 들어 북청(北靑)에서 길이 가까운 여덟 고을에는 들에 푸른 풀이 없었는데, 금년 봄에는 백성들이 자식과 아내를 파는 이가 있고, 들에 죽은 사람이 있으면 문득 그 고기를 취하여 굶주림을 채웠는데, 얼마 안 되어 먹은 이도 죽었다. 어느 한 여자가 그 어머니는 늙고 또 장님인데, 붙들고 다니면서 빌어 먹다가 둘이 다 살 수 없음을 생각하고, 어떤 누(樓)에 끌고 가서 잠시 쉬게 하고는, 여자는 곧 통곡하면서 몰래 돌아왔더니, 그 어머니가 길가에 엎어져 죽었는데 이를 듣는 이가 슬퍼하였다. 진휼경차관(賑恤敬差官) 한효원(韓效元)이 글을 빨리 보내어 급한 사정을 알리니, 조정에서는 바다로 곡식을 운반함을 의지하고 힘써 처치하지 않았다. 해운선곡(海運船穀)은 함경도의 흉년이 든 뒤로부터, 관원을 보내어 배를 만들어서 시험하였더니, 다행히 올 여름에는 바람이 없어서 안변(安邊)에 도달하였는데, 지금 또 관원을 보내어 경상좌도와 강원도 연해(沿海)의 관곡(官穀)을 운반하게 하였다. 경상좌도에서 강원도나 안변까지는 바닷길이 멀고 넓으며 의지할 만한 섬이 없으니, 만약 풍파를 만나면 사람이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데, 한 척의 배로써 위급한 인명(人命)을 구제하기를 요행으로 바랐으니, 사람들은 모두 구제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 막개(莫介)가 고변한 말 중에, 영문(永文)이 영산군(寧山君 성종의 아들)을 추대하고자 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송질(宋軼)과 정광필이 주창하기를, “영산이 이미 역모에 관련되었으니, 마땅히 먼 지방에 귀양보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뜻은 견성군(甄城君)의 옛일에 따르고자 한 것이다. 임금의 하교가 간절하고 측은하게 이르기를, “전날에 견성군의 일은 반정한 처음이라 사세가 황급하여 억지로 좇았더니, 지금까지 불쌍하고 슬픈데 어찌 허물 없음을 알면서 도리어 죄를 더할 것이냐.” 하니, 송질은 간쟁을 그치지 않았다. 노공필(盧公弼)과 유순(柳洵)은 본래 늙고 병들어서, 집에 있고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송질 등이 겁박하여 나와서 함께 간쟁하도록 하고, 또 6조 참의 이상과 종친 2품 이상에게 청하여, 함께 청하기를 논하게 하였다. 김응기(金應箕)는 조금 학식이 있어서, “영산의 일로 죄를 청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으나, 성품이 본래 유약하여 다른 의견을 세우지 못하였다. 사헌부의 관원들도 대부분 어리석고 겁내는 이가 많았다. 그리하여 사헌부 관원들이 합하여 대궐에 들어가니 여러 사람들이, ‘영산의 무죄를 해명하리라.’ 여겼더니, 도리어 죄를 청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였다. 대개 양사(兩司)의 뜻은 구차하게 재상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고, 또 망령되이, 상감의 뜻이 비록 밖으로는 간절하고 측은한 하교를 하셨으나, 신하들의 뜻을 보려고 한 것이다.”라고 억측하였기 때문에, 양사가 여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감히 청하였다. 박열(朴說)은 속은 밝았으나 간사하고 홍언필(洪彦弼)은 음휼(陰譎)하여 꾀를 좋아하는 까닭으로 실로 이 일을 주장하였다. 그밖에 다른 대원(臺員)들은 모두 용렬한 무리들이라 책망할 것도 못 된다. 송질 등이 수일 동안 모질게 간쟁하였으나, 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 물러갔다. 《음애일기》
○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은 어버이를 섬기기 위해 지방 수령이 되기를 원하여 순창(淳昌) 군수로 나갔는데, 을해년 가을에 담양(潭陽) 부사 눌재(訥齎) 박상(朴祥)과 상의하기를,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둘째 왕비 윤씨)가 승하하였고 원자(元子 뒤의 인종)께서 포대기 속에 있는데, 박 숙의(朴淑儀)가 후궁에서 사랑을 받으며 또 아들이 있으니, 만약 성종조의 폐비(廢妃)와 자순대비(慈順大妃)와 같이, 모두 후궁으로써 왕비에 오른 전례에 따라 정비(正妃)로 책봉(冊封)한다면, 원자(元子)의 지위를 위해 어려움이 있다. 신(愼)씨를 다시 세워 허물없이 폐비(廢妃)되어 있는 억울함을 펴고, 첩(妾)을 정처(正妻)로 삼지 못하는 의리를 밝혀서 옛 은혜를 온전히 하고, 후궁이 왕비의 자리를 엿보는 일을 막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지금 올바른 말을 구하시려는 하교를 받았으니, 침묵을 지킬 수 없다.” 하고, 함께 상소하여 항의하였다. 그 대략에, “부부(夫婦)의 도(道)가 정도(正道)에서 나오면, 큰 벼리[綱]와 큰 근원이 질서가 정연하며, 빛나고 밝음이 위에서 움직여서 모든 일과 말은 교화에 사무치는 것이 그림자가 형체에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아서, 어디에서나 한결같이 바르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행하면서 성공을 구하면, 비유하건대, 그 근원을 흐리게 하면서 하류(下流)의 맑음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날 주(周) 나라의 교화가 부도(婦道)에서 비롯되어 조정에 미치고, 왕성히 사방에 덮였습니다. 이때에는 부부는 부부의 도리를 다하고 부자(父子)는 부자의 도리를 다하며, 군신(君臣)은 군신의 도리를 각각 다하여, 조그만 요사스럽고 더러움도 그 사이에 없고 천지가 안정하고 만물이 육성함에 이르러서, 추우(騶虞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주 나라 왕후의 덕을 찬양하였음)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운 상서가 반드시 감응하여, 나라가 8백 년을 이어 전하였으니 어찌 관저(關雎)와 작소(鵲巢)의 교화가 아님이 있겠습니까. 그 나라가 쇠함에 이르러서는 내교(內敎 궁내의 교육)가 무너지고 풀어져서, 죄 없이 정후(正后)를 폐해 내쳐서, 마침내 융적(戎狄)의 화를 일으켰으며, 첩을 정처로 올려서 명분을 문란하게 하여, 마침내 쟁탈하는 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밖에, 당 고종(唐高宗)은 왕황후(王皇后)를 폐위하여 마침내 종사(宗社)가 넘어지고 자손이 끊어졌으며, 송 철종(宋哲宗)은 맹후(孟后)를 폐위하여 근본과 원류가 전도(顚倒)되었으므로, 음험하고 사특한 무리들이 재얼(災孼)을 빚어내어 정강(靖康)의 변을 초래하였는데, 더구나 또 첩을 부인으로 삼아서 그 떳떳한 예법을 어지럽게 하는 자는 그 화가 어찌 적겠습니까. 옛날부터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증거가 명료하여, 이와 같이 증험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제왕(帝王)의 배필을 중히 하여 교화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자 하면 어찌 구차히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등은 삼가 보건대, 고비(故妃) 신(愼)씨는 내침을 당해 밖에 있으나 어떤 큰 사고가 있었으며, 어떤 명목을 들어서 이런 매우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까. 반정하던 초기에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등이 이미 신수근(愼守勤)을 없앴으므로, 왕비는 그의 딸이니 그 아비를 죽이고 그 조정에 있으면, 후일에 화가 있을까 염려되어 그릇되게 스스로 온전하게 할 사욕으로써, 비로소 폐위하여 내치는 꾀를 내었으니, 이는 진실로 사고가 없고 또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신씨는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시던 처음에 혼인을 정하여 좋은 짝을 이루었으며,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중궁의 자리에 앉아, 신민(臣民)들의 하례를 받고 모후(母后)의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자전(慈殿 대비)에게 잘못하는 꾸지람이 없었고 제조(第稠)에서 내칠 만한 실수가 없었는데, 전하께서 강한 신하들의 제압을 받아 부부의 중함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우리 조정의 심온(沈溫)은 헌릉(獻陵 세조)께 죄를 입었으나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조의 비로 심온의 딸)에게는 누(累)가 미치지 않았으니, 이전의 일을 밝게 징험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신수근은 나라에 관계되는 죄가 아니고 지친(至親)을 구조하는 법으로써 용서하여 온전하게 하여도 괜찮은데 지금 이미 죄를 더하고 또 반드시 그 연루로써 왕후를 폐위시키고 내쳤으니, 이는 제 몸을 아껴서 임금을 업신여기는 까닭에 불과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화(和)한 기운은 상서로움을 이루고 어그러진 기운은 재이(災異)를 이룬다.” 하였고, 옛날, 서녀(庶女)가 원한을 품자 여름에 서리가 내려 연(燕) 나라를 쳤습니다. 더구나 종묘사직과 귀신과 사람, 상제(上帝)가 돌보는 이를 무고히 폐해 내쳐서, 단칸 방에 쓸쓸하게 지내면서 길이 그윽한 원한을 맺게 하였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천지의 화한 기운을 상하게 하고, 여러 재변이 거듭 이르게 함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정(內政)의 자리가 비었으니 마땅히 이때에 빨리 결단하시어, 다시 신(愼)씨에게 왕비의 자리를 회복해 바르게 하시면 천지의 마음이 좋아할 것이고, 조종(祖宗)의 영혼이 윤허할 것이며, 신민(臣民)의 소망에 맞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자리를 장차 누구에게 붙이고자 하십니까. 이미 허물어진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세우고, 이미 어그러진 옛 은혜를 온전하게 하시면, 이는 바로 대의(大義)에 합치되는 일임이 분명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저 원종(元宗)의 무리는, 비록 왕실(王室)에 공이 있다 하나 당시에 천명(天命)과 인심이 모두 전하에게 귀의하였습니다. 마침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 합하는 기회를 타서 그 힘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 공을 믿고 방자하게도 기탄이 없이 군부(君父)를 제압하고 국모(國母)를 추방하여 천하 고금(古今)의 대의명분을 범하였기에 이는 바로 만세의 죄인이니, 공으로 그 죄를 덮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미 죽었더라도 마땅히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안팎에 효유하여 당시와 만세로 하여금 대의명분이 명확하여 범할 수 없음을 밝게 알도록 하면 인륜(人倫)의 근본, 교화의 근원과 정치를 바르게 하는 도(道)가 맑고 밝아서, 천지가 어둡고 막혔다가 다시 열리고 맑게 개여서 넓게 드러냄과 같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또 정일(精一)ㆍ근독(謹獨)하시어 성의(誠意)ㆍ정심(正心)에서부터 미루어가서 정치에 확충하시면, 주(周) 나라 왕실의 인지(麟趾)ㆍ추우(騶虞)의 교화가 이로부터 이루어질 것이며, 왕업(王業)이 8백 년을 지나서 만세에서 무궁토록 이를 것입니다. 신등이 가슴속에 울분을 품은 적이 오래었으나 전에 털어놓지 못한 것은, 바로 장경왕후가 곤위(壼位 왕후의 자리)에 계셨으므로, 만약 신씨를 복위하면 장경왕후께서 난처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장경왕후가 승하하여 곤위가 다시 비었으니, 다시 바로잡을 기회입니다. 또, 바른 말을 구하는 때를 당하였으므로, 이에 신등이 급급히 곡진하게 아뢰옵니다.” 하였다. 이때 양사(兩司)에서 모두 시장(試場)에 들어갔었는데, 방(榜)이 나와서 숙배(肅拜)한 뒤에 서빈청(西賓廳)에 모였다. 대사간 이행(李荇)이 주장하기를, “장경왕후께서 이미 원자(元子)를 탄생하고 승하하였는데, 다시 신씨를 세워서 만약 선후를 논한다면 신씨가 먼저인데, 왕자를 탄생하는 일이 있으면 세자(世子)의 지위가 혹 흔들릴 것이다.” 하니, 양사에서 휩쓸려 따라서 상소의 뜻을 요사스러운 논의라고 지적하여 잡아 추궁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육조 당상(堂上)과 홍문관에게 모두 의계(議啓)하기를 명하니, 모두 말하기를, “바른 말을 구하는 하교를 받아서 말한 것이니, 말이 비록 맞지 않을지라도 죄를 주어 언로(言路)를 막을 수 없다.” 하였다. 오직 대간에서 힘써 말하여 조옥(詔獄 임금이 친국하는 옥)에 붙잡아 국문하게 하였는데, 대신들의 구제하는 바가 되어 도배(徒配)에 그쳤다. 병자년 겨울에 조정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조정으로 돌아왔다. 안로(安璐)의 《기묘당적보(己卯黨籍補)》. 아래도 같다.
○ 장경왕후는 을해년 2월 26일에 원자를 탄생하고 7일만에 승하하였다. 이때 김충암(金沖庵)과 박눌재(朴訥齋)가 항소(抗疏)하여 신씨의 복위를 청하였는데, 대사간 이행과 대사헌 권민수(權敏手)가 사론(邪論)이라고 지목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준하여 문초해 치죄하기를 애써 청하여, 금부 낭관(禁府朗官)을 보내어 잡아오자 사태를 측량할 수 없었다. 좌의정 정 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이 조정 신하를 거느리고 구하기를, “말이 비록 맞지 아니하나 죄를 주어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여, 8월 23일에 형장 1백 대와 도배(徒配)에 해당되었는데, 고신(告身 직첩(職牒))을 빼앗고 속장(贖杖)된 것은 대신의 힘이었다. 선대부(先大父 죽은 조부) 안당(安塘) 께서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항상 대신의 논의가 조정에 행하지 못하여 체통이 엄하지 못함을 분하게 여겼다. 8월 26일에 조회가 끝나자, 인하여 아뢰기를, “박상(朴祥)과 김정(金凈)은 바른말을 구하는 하교로 인하여 힘을 다해 말하였는데, 지금 한두 사람의 말로써 도리어 엄한 꾸지람을 더하면, 이는 실로 언로(言路)를 막고 선비의 사기를 꺾어서 만세에 비방을 받은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재상은 국론(國論)을 잡고 국사를 결단하나, 대간(臺諫)은 특히 허물을 다스리고 그릇됨을 규탄할 뿐입니다. 대신과 6경(卿)과 시종들이 모두 죄 주지 말라고 청하였으니, 국시(國是)가 여기에 있는데, 대간에서만 그르다고 하니 공론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또 용감하게 말하는 선비에게 죄를 준다면, 누가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따르겠습니까.” 하였다. 권민수와 이행이 선대부(先大夫)를 반박하여 나라를 그르친다고 지목하였는데, 여론에 꺾여 정지하였다. 이로부터 조야(朝野)의 선비들이 기운을 잃고 두려워하여 바른 말 하기를 꺼렸으므로, 이를 모두 권민수와 이행에게 허물을 돌렸다. 9월 4일에, 응교 이언호(李彦浩)가 야대(夜對)로 인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근일에 시관(試官)이 되어 어떤 과거 본 사람의 대책문을 보니, 대간에서 박상(朴祥) 등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스스로 직분을 잃은 일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유생의 망령된 논의이므로 버려야 마땅한데, 도리어 취하였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우부승지 신상(申鏛)이 즉시 아뢰기를, “과거 보는 선비의 대책문은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한 것인데, 만약 자기의 뜻과 다름을 혐의하여 취하지 아니하면 선비를 뽑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이언호가 원한을 품고 권민수(權敏手)에게 말하여, 권민수가 장차 신상을 탄핵하고자 하였는데, 공론이 합치하지 않아서 드디어 그쳤다. 그뒤 10월 18일에, 정암(靜庵)이 처음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곧 이행 등을 배척하기를, “대간의 직책은 언로를 열어 주는 것을 주장하는 데, 도리어 말하는 사람을 죄주어 먼저 스스로 길을 막아서, 임금에게 간언하는 말을 거부하는 징조를 이루었으니, 그 과실이 크니 구차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면하소서.” 하고, 계속 아뢰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양사(兩司)를 모두 바꾸었다. 11월 1일에, 새 대사헌 이장곤(李長坤), 대사간 김안국(金安國)은, 정암(靜庵)이 언로(言路)를 옹호함을 옳다 하고, 장령(掌令) 유부(柳溥)와 김희수(金希壽)는 이언호의 논의에 미혹되어 이언호의 논의를 옳다고 하여, “언로는 나라의 하찮은 일이다.” 하니, 이장곤이 되풀이해 깨우쳤으나, 오히려 서로 용납되지 못하여 대궐에 나아가 각기 자신의 생각을 진달하였는데, 이장곤과 김안국에게는 체직하기를 명하고, 이어 유부 등에게는 직임을 수행하라고 명하였다. 직제학 김안로(金安老) 등이 유부 등을 논박해 체직하게 하였으나, 역시 분변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조광조는 언로(言路)를 위하여 옹호하고, 권민수와 이언호는 종사(宗社)를 위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다.” 하였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서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였다. 박열(朴說)은 대사헌이 되어 폐(廢)하는 일을 칭탁하여 사직서를 올리고, 방유령(方有寧)은 대사간이 되어 논의가 정암(靜庵)과 같았는데 홍문관의 탄핵하는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여론이, “김정과 박상은, 신(愼)씨의 죄없이 폐위된 억울함을 펴고 또 첩(妾)으로 처(妻)를 삼을 수 없는 논의를 밝히고자 하였는데, 권민수와 이행이 요사스러운 말이라고 지목하였으니, 실로 인재를 질투하고 착함을 미워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언호의 아부와 김안로(金安老)의 양시론은 모두 만세의 공론(公論)에 죄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 한림(翰林) 이약수(李若水)가 공사로 인하여 좌의정 정 문익공(鄭文翼公)의 집에 찾아가 보니, 공이 말하기를, “대간의 직책은 언로(言路)를 주장하는 것인데, 유부(柳溥)와 김희수(金希壽) 등이 언로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니, 나는 심히 그르다고 여긴다. 홍문관에서는 양편이 다 옳다는 말을 내어 조정에서 분변해 밝히지 아니하므로 고집하는 무리로 하여금 깨우침이 없게 하여 한갓 임금의 뜻을 의혹하게 한다.” 하였다. 병자년 봄에 이르러 대신 및 대간과 시종들이 박상(朴祥)과 김정(金凈)을 석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사간원에서 차자를 올려 힘써 아뢰었으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으니, 모두 말하기를, “양편이 다 옳다는 말에 끌려서 오래도록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여, 공론이 홍문관 상소에 허물을 돌렸다. 3월 8일에, 정언 박세희(朴世憙)가 사직하기를, “신이 전에 부수찬이 되었을 때에, 직제학 김안로(金安老)가 양편이 다 옳다는 말을 꾸며내었는데, 당초에 신의 뜻은 그렇지 않았으나 남에게 끌림을 당하여 감히 별도로 제 자신의 뜻을 아뢰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음에 그르다고 여기면 그때 즉시 신의 뜻을 진술하는 것이 옳거늘, 이미 그렇지 못하고 이제야 말하기를, ‘내 뜻은 본래 이와 같지 않았다.’고 운운하면 옳으냐.” 하니, 박세희가 땀이 나서 등이 젖었다. 장령(掌令) 홍언필(洪彦弼)과 지평 윤지형(尹止衡)이 또 사직하기를, “홍언필은 응교로 있고 윤지형은 수찬으로 있을 때에 김안로의 교묘하게 꾸미는 말에 끌려서 같은 말로 아뢰었다.”고 인책하였다. 10일에, 홍문관 교리 신광한(申光漢), 부교리 이청(李淸), 부수찬 윤자임(尹自任), 저작(著作) 기준(奇遵) 등이 이에 이르러 후회하고 깨달아서 역시 사직을 청하였더니, 권민수와 이행이 정암을 매우 미워하였다. 이언호가 일찍이 모재(慕齋)와 더불어 이 일을 언급하자, 이언호가 발끈 성을 내며 소리치기를, “그때에 왜 김정과 박상을 없애지 아니하여 이와 같이 시끄럽도록 하였는가.” 하였다. 이해 11월 3일에 김정과 박상이 공론으로 인하여 조정에 나왔는데, 이언호는 전라 감사로 나가서 정축년에 죽었고, 권민수는 충청 감사로 있다가 무인년에 죽었다. 이행(李荇)은 수원 부사로써 파면되었는데, 이성언(李誠彦)이 상소하여 해명하여 구원하다가 또 탄핵을 입고 파면되었다. 김안로는 또 이조 참의에서 경주(慶州) 부윤이 되었다.
○ 인종(仁宗)대왕이 동궁에 있을 때에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의 일로 중종대왕에게 상소하기를, “엎드려 생각하건대, 형제의 친함은, 부모의 똑같은 기혈(氣血)에서 나누어진 것이므로 호흡이 서로 통하고 우애의 정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비록 혹시 비상한 변고가 뜻밖에 일어나더라도 옛 사람은 오히려 은혜로써 허물을 용서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전에 이미의 일은 신이 나이가 어려서 상세히 그 전말을 알지 못하나 그 화의 참혹함은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요사한 소행을 일으킨 것은 비록 박씨이나 이미가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먼 지방에 귀양가 있는 것도 지나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뒤에 또 큰 옥사에 관련되어 모자가 연이어 죽고 홍려(洪礪)도 형장(刑杖)으로 죽었으니, 이렇게 지극한 변고는 예전에도 듣기 드문 일입니다. 그 형제간의 정리에 어떻다 하오리까. 죽은 이는 이미 그만이나, 이미의 한 딸을 민간에 버려두어서 서인(庶人)과 다름이 없으니, 어린 계집애가 또 무슨 죄입니까. 이것이 또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두 옹주(翁主)는 나이가 어린 여자이니 그 일에 간여하지 않았음이 명백한데 속적(屬籍)이 또한 끊어졌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한 몸으로 말미암아 형제의 변고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니, 이는 신이 평소에 항상 슬픔을 품은 것입니다. 맹가(孟軻)가 말하기를, ‘자신은 천자(天子)가 되고, 아우는 필부(匹夫서인)가 됨이 옳으냐.’고 하였더니, 지금 신은 동궁에서 모시고 있어 성상의 총애가 지극하온데 두 누이와 한 질녀로 하여금 아직 하천(下賤)에 있게 하니, 몸을 돌이켜 생각하면, 얼굴이 두터워도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어진 사람은, 형제간에 노여움을 품지 아니하고 원망을 간직하지 아니하여 친하고 사랑할 따름이라고 하였는데, 신과 같은 자는 어떤 노여움과 원망이 있기에 친함을 얻지 못하옵니까. 변두(籩豆 변은 대그릇, 두는 나무그릇)에 음식을 베풀고 술을 배부르게 마실 적에도 화락하게 친하고 즐길 수 없으니, 슬픈 생각이 더욱 마음속에 간절합니다. 이에 앞서 삼가 이 뜻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심을 얻지 못하여 다시 미미한 정성을 주달하여 성상께 번거롭게 하오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굽어 살피시고 어여삐 여기소서.” 하였다. 신[필자의 지칭]이 삼가 이 글을 읽으니, 정(情)과 말이 모두 지극하여 상성(上聖)의 덕과 재주가 아니면 어찌 능히 이럴 수 있으리오. 그뒤에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이 친히 글을 지어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하늘 땅 그 사이에 / 天地覆載
만물이 생겼는데 / 品物以生
부모가 보살펴서 / 父母顧復
자식이 성장하였네 / 子支以成
터럭 하나 살갗 하나 / 一髮一膚
모두 다 받은 것이라 / 皆有所受
무릇 세상 사람으로 / 凡有血氣
누가 이 은혜 없으랴 / 其孰無是
하물며 어리석은 신도 / 矧臣昏塞
하늘같은 높은 은혜 몇 갑절 더 받자와 / 倍荷天賜
어려서부터 장성토록 / 自孩至長
오롯하게 기르셨소 / 養專且久
태어난 지 열흘이 못 되어 / 生未浹旬
어머님 승하하사 / 奄違慈侍
어리고 외로운 몸 / 伶仃無護
보호하기 어려운데 / 殆不可遂
비와 이슬을 몸에 젖어가며 / 雨露曲霑
여윈 몸 보호했소 / 獲保殘軀
외람되이 동궁에서 모시니 / 叨侍靑宮
돌보심이 남달랐고 / 恩眷卓殊
용정(대궐 뜰)에 나아가서 / 進趨龍庭
옥음(임금의 말)을 받자오니 / 每接玉音
분수를 헤아리매 감당하기 어렵기에 / 揆分難堪
우러러 정성을 갑절을 다하여서 / 倍殫葵枕
산같이 높은 수를 / 方期岡陵
무궁토록 누리시기 기약하고 바랐더니 / 永享無彊
갑자기 하룻밤에 / 何料一夕
큰 변을 당할 줄을 누가 생각이나 하였으리 / 遽罹大殃
순의 나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 未半舜齡
하늘 일 어찌하여 이토록 아득한가 / 天何茫茫
망극한 애통은 / 罔極之痛
가슴이 뻐개지고 창자가 끊어지오 / 摧胷薰膓
일월이 빨리 가서 / 日月荏苒
인산을 정했으니 / 因山已卜
궤연만 의지하나 / 只憑几筵
뵈올 수 없습니다 / 亦將難覿
하늘 땅 장구토록 / 天長地久
사모함이 깊으오며 / 怨慕卽深
유명이 막혔으나 / 幽明雖隔
이 마음은 통하시리 / 必通此心
박한 제물 올리오니 / 聊薦菲薄
굽어 흠향하옵소서 / 庶幾俯歆
하였다. 《패관잡기》
○ 가정(嘉靖) 을사년(인종 원년)에 태학생 등이 날마다 상소하여 조광조(趙光祖)의 벼슬을 회복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인종대왕이 손수 써서 답하기를, “그대들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옛 법도를 좋아하고 시국을 논하여 소장(疏章)을 세 번 올렸는데, 말이 간절하고 의리가 곧으니, 올바르게 배운 것을 여기에 어떻게 더할 수 있으리오. 우리 선왕(先王)께서 교육하신 혜택을 또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어떤 뜻이 있어서이다. 또 태학은 비록 공론(公論)이 있는 곳이나 옳고 그름을 정하는 것은 따로 조정에 있으니, 그대들이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은 옳지마는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제생(諸生)의 일이 아니다. 우선 물러가서 생각하라.” 하니, 이에 제생들이 감격해 울면서 물러갔다. 지금 상고하건대, 임금의 비답(批答)에, “말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어떤 뜻이 있다.” 한 것은 대개, “3년을 아버지의 도(道)를 고치지 아니해야 효자라 이른다.” 한 공자의 말뜻이 그 중에 숨어 있으니, 이것이 일세의 마음을 기쁘게 복종시킬 수 있는 이유이다. 을사년 정월에, 양사(兩司)에서,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이 자전(慈殿)의 뜻을 맞추어서 대군(大君 인종)을, 역질(疫疾)이 있어 폐위해야 한다고 하였고 또 대행왕(大行王 죽은 임금 곧 중종)의 제사에 요망한 여승[尼]을 빈전(殯殿)에 출입하기를 권하였다.”라고 논박하여 여러 날 논계(論啓)하였는데, 윤허하지 아니하고 그 비답에는 이러이러하였다. 윤허하지 아니한 뜻은 원로 구신(元老舊臣)을 대접하는 도리에 합하고 비답 가운데에는 스스로 간사한 무리의 마음을 놀라게 하는 뜻이 있으니, 어찌 우리 동방의 복이 아니랴. 또 선왕(先王)께서 기묘사화에 죄를 받은 사람에게 여러번 공론에 따라 용서하고자 하였으나, 언필이 번번이 꺼리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어 아뢰는 일을 계속 방해하였으니, 그 악함이 또 어떠한가.
○ 인묘조에, 형조에 송사(訟事)가 있어 대가(大駕) 앞에서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거늘 임금이 작문(作文) 중국에서 이른바 권종(卷宗)이다. 을 들이기를 명하였다. 판서 윤임(尹任)이 당상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작문을 들인 적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임금이 친히 작문을 모아서 그 원통함을 분변하고자 하는 데 송관(訟官)이 명을 어기어 들어지 아니하느냐.” 하니, 윤임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송사는, 본조(本曹)에서 며칠 안 되어 없고 그 원작(元作)은 전라도 아무 군(郡)에 있습니다.” 하므로 삼현령(三懸鈴)을 명하여 가지고 오도록 하였는데, 겨우 서울에 도착하자 임금의 병이 위독하여 미처 친람(親覽)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사람들의 억울함이 있을 적에 송관(訟官)이 억눌러서 펴지 못함이 많은데, 인종께서 대가(大駕) 앞에서 호소함을 인하여 전말(顚末)을 자세히 궁구하고자 하여 방계(防啓)함을 듣지 아니하고 삼현령을 시켜 가지고 오게 하였으니, 인종의 과단성과 윤임의 전권(專權)을 볼 수 있다. 《패관잡기》
○ 7월 1일에, 성주(聖主 인종)가 승하하니, 슬프다. 신민(臣民)이 복이 없고 종사(宗社)가 불행하여 하늘이 은혜를 적게 하여 우리 동방의 요순같은 성군(聖君)을 빼앗으니, 오장이 무너지고 천지가 망극(罔極)하도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행왕(大行王)은 동궁에 있을 때부터 학문이 높고 밝아서 성인(聖人)의 경지에 넉넉히 들어가며 그윽한 성덕(聖德)이 극히 여망(輿望많은 사람의 소망)에 합치하였다. 왕위에 오르자 집상(執喪)하기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하여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함이 예절에 지나치며 호령(號令)의 하나하나에 움직임을 옛 성인에 따르고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목을 늘이고 기대하여 지극히 다스려지기를 바랐더니, 어찌 1년이 못 되어 문득 병에 걸려서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러 갑자기 궁검(弓劍 임금이 죽는 것을 말한다)을 버리실 줄을 알았으리오. 어젯밤에 성상께서 기운이 미약하여 삼공(三公)에게 고명(顧命 유언)하여 경원대군(慶源大君 중종)에게 전위(傳位)하고 친히 유서를 지었다. 또 ‘전왈(傳曰)’ 두 자를 썼다가 문득 깨닫고는, “내가 이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을 잊고 그릇 ‘전왈’을 일컬었다.”고 하며, 드디어 고쳤다. 또 조광조의 직첩을 다시 주고 천거과(薦擧科)를 다시 주기를 명하였다. 간절한 심정으로 생민을 위하여 염려하고, 정릉(靖陵 중종능)과 희릉(禧陵 장경왕후 능) 사이에 간소하게 장례를 치를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아, 망극하고 망극하도다.
○ 을사년 8월에, 이기(李芑)ㆍ정순명(鄭順明)ㆍ허자(許磁)ㆍ임백령(林百齡) 등이 승정원에 나아가서 유관(柳灌)ㆍ윤임(尹任)ㆍ유인숙(柳仁淑) 등의 죄를 아뢰었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는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육경(六卿) 이상을 불러들여서 의논하게 하니,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撥)이 아뢰기를, “여론을 신이 듣지 못하였으나, 전일에 대윤(大尹)ㆍ소윤(小尹)의 말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예종(睿宗)께서 후사(後嗣)가 없었는데,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차례에 해당하였으나 정희왕후(貞憙王后 세조비 윤씨)께서 차례를 넘어서 성종대왕을 끌어서 세웠습니다. 나이가 겨우 열 세 살이었으나, 오히려 끝까지 아무 일이 없었는데, 이제 성상께서는 인묘(仁廟)의 적제(嫡弟)이오며 이미 위(位)에 오르셨으니, 어찌 또 다른 근심이 있겠습니까. 또 지금 왕자들이 당(黨)을 결성함이 없고 대신이 집권함이 없는데, 누가 감히 음흉하고 간사한 마음을 내겠습니까. 윤임이 만약 간사한 마음이 있었다면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방금 이 첫 정사에 인심을 얻기에 힘써서 마땅히 대공지정(大公至正)으로 행할 것입니다. 중종 때에 대신들이 옳게 인도하지 못하여 이과(李顆)가 반역했다고 하여 노영손(盧永孫)이 당상관을 얻었으니, 이로부터 고변(告變)하는 이가 많았는데, 중종께서 뒤에 그 까닭을 알고 연좌(連坐)된 사람을 다 풀어주어 온 나라가 모두 감복하고 인심이 안정되었으니, 이것을 오늘날 마땅히 경계할 바입니다.” 하였다. 이날에 윤임은 멀리 귀양가고 유관은 정승에서 갈리고 유인숙은 파직되었다. 이때에 헌납 백인걸(白仁傑)이, 대간(臺諫)에서 고집해 다투지 못한 것을 공격하니, 밀지(密旨)로 백인걸을 금부의 옥에 가두고 국문하여 윤임은 절도(絶島)에 귀양보내고 두 유(柳)씨는 부처(付處)하기를 명하였다. 권 공이 또 홀로 대궐에 나아가 서계(書啓)하기를, “선조(先朝) 말년으로부터 하늘이 여러번 큰 재변을 내렸고, 근일에 큰 바람이 불고 연달아 비가 와서 어둡고 개지 않으니, 신은 하늘의 뜻이 혹시 감응(感應)된 것이 있어 그러한가 심히 두렵습니다. 또 어린 임금이 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신들을 멀리 귀양보내어 사람들이 그 실마리를 측량할 수 없으며 또 간관(諫官)을 가두었으니, 누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말을 올리겠습니까. 신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죽을 것을 알고 감히 아뢰옵니다. 윤임은 비록 중한 죄를 입어도 족히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왕대비(인종비)는 사왕(嗣王 명종)에게 어머니의 도리가 있는데, 만약 이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여 편찮으시면 어찌 큰 누(累)가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유언비어는 예로부터 있었으나 예전의 밝은 임금은 이로써 사람을 죄주지 않았습니다. 유관(柳灌)은 본래 속병이 있어서 조정 마루에서 매양 벽을 의지하고 앉으며, 이미 자식이 없어도 감히 사직하는 못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유인숙(柳仁淑)은 상기증(上氣症 기혈(氣血)이 머리 부분으로 오르는 증상)을 얻어서 이미 여러 해 되어 이들 늙고 병든 서생(書生)으로 벼슬이 신하 중에 최고였으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멀리 갔다가 병이 들어 죽으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라 사람이 죽였다.” 할 것이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공평한 마음으로 살피시고 여러 신하에게 널리 물어서 실정과 죄가 서로 맞으면 인심을 진압하고 천변(天變)을 막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윤원형(尹元衡)에게 편지를 전하여, “내가 서행(西行)하지 않으면 큰 화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서 꾸짖었다. 그때에 임백령과 허자(許磁)가, 윤임의 죄목(罪目) 가운데 종사(宗社) 두 글자를 없애기를 아뢰어 청하였는데, 이로 인해 격노(激怒)하여 이에 상소하여 세 사람의 죄를 극렬하게 말하고 다시 충순당(忠順堂)에서 인대(引對)하여 이에 세 사람은 모두 역모로 사형시키고 논공행상(論功行賞)하였다. 공이 평상시에는 화기(和氣)가 훈훈하였으나, 이해(利害)에 임하고 사변에 당하여서는 의기(義氣)가 얼굴에 나타나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서 일을 담당하여 용감하게 결단하기를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의 용맹과 같았다. 그 두 번째 계사(啓事)할 적에 밤을 새워 계사(啓辭)를 초(草)하여 일찍 조정에 나가려고 하니, 집사람과 자녀, 사위들이 붙잡고 울며 만류하였으나 문득 뿌리쳐 버리고 대궐에 이르렀다. 신광한(申光漢)이 서로 만나 같이 가면서 공의 뜻을 물어서 알고는 놀라며 굳게 말렸으나, 공은 듣지 아니하고 원상(院相) 이언적(李彦迪)의 자리에 나아가서 주서(注書) 유경심(柳景深)을 불러 계사를 쓰게 하니, 이 공이 초본(草本)을 보고 역시 놀라며 말하기를, “형세가 이 지경이니 말만 하여도 예측치 못할 화를 끌어 일으킬 것이니 무엇이 유익하리오.” 하고, 그 위험한 말이 있는 대목은 모두 지워버리니, 공이 물러앉아서 무릎을 안고 탄식하기를, “이와 같이 깎아버리면 아니함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공이 정순붕과 더불어 교분이 깊었다. 정순붕이 처음 윤임을 고변할 때에 병이 심하여 수개월 동안 이고(移告 문서를 돌려가며 보이는 것)하다가 이날에 비로소 나왔는데 공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또 무엇 때문에 나왔소.” 하니, 정순붕의 기색이 꺾였다. 일이 결정된 뒤에 정순붕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흉악한 무리들을 즉시에 마땅히 해치울 것이나, 내가 권벌(權撥)의 말을 듣자 등에 땀이 나서 다시 말을 못하고 중지하였다.” 하였다. 뒤에 이문중(李文仲)의 일처리가 엄하지 못하여 많은 말썽으로 소란을 일으켰는데 윤사익(尹思翼)은 사람됨이 거칠고 거짓되어 공이 여러번 책망하였는데, 인대(引對)하던 날에 윤사익이 아뢰기를, “대행대왕의 병환이 위독할 때에 신이 권벌에게 말하기를, ‘급히 대군(大君 중종을 가리킴)을 안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하니, 권벌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공은 다만 아뢰기를, “대신이 있으니 신이 감히 마음대로 결정한 사항이 아니다.” 하고 물러나서 빈청(賓廳)에 나아갔었다. 허자(許磁)가 윤사익을 주목하고 말하기를, “공이 권 공을 잡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울 때를 당하여 권 공이 대의(大義)로써 큰 계책을 힘써 도왔으니 권 공의 충성된 마음은 조정에서 모두 알고 있으니, 어찌 다른 뜻이 있으리오.” 하니, 윤사익이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하지 못하였다. 퇴계가 찬(撰)한 〈행장〉에서
○ 이완(李岏)은 중종의 아들인데 봉성군(鳳城君)으로 봉하였다. 총명하며 어질고 효도하였다. 을사년 가을에, 양사에서는, 여러번 간흉들의 입에 오른 까닭으로써 큰 죄에 처하기를 청하였더니, 임금은 듣지 않았다. 뒤에, 그 집을 막아서 출입을 못하게 하고 또 수직군사(守直軍士)를 두어서 집안의 왕래를 끊게 하도록 청하였으나, 또 듣지 않았다. 이기(李芑)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인종대왕이 병이 위급할 적에 윤임 삼부자(三父子)가 내전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봉성군으로 임금을 삼으려고 하였으나 형세상 할 수 없게 된 뒤에야 주상에게 전위(傳位)하였습니다.……” 하고,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병오년 가을에, 양사에서, 대의(大義)로써 처단하기를 아뢰어 청하였고, 영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의정 이기, 우의정 정순붕(鄭順朋) 등이 아뢰기를, “주상께서 골육지간인 형제는 서로 해롭게 할 수 없다고 하교하시니 이는 진실로 구구한 어진 마음입니다. 청컨대, 종묘사직을 생각하여 대의로써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자전(慈殿)에서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이완(李岏)은 어릴 때부터 친히 낳은 자식과 같이 궁중에서 길렀고 비록 나이가 장성하였다고 하나 지금 겨우 17ㆍ8세이니 어찌 전후의 일을 알 것이며, 어찌 차마 큰 죄에 처하리오.……” 하였다. 대신들이 다시 아뢰고, 육조에서, 대의(大義)로써 처단하기를 전원 계청(啓請)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고 정부와 육조에서 합계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사직하고 물러가게 되기에 드디어 영산군(寧山君)의 예(例)에 의거하여 울진(蔚珍)으로 귀양보내기를 명하였는데, 평창(平昌)에서 병을 얻어서 그대로 그곳으로 유배지를 정하고 쌀ㆍ콩ㆍ세포(細布) 등을 주기를 명하였다. 전지(傳旨)한 말에, “어미와 더불어 역모하려는 자들의 마음먹는 방향을 알고 드디어 참람하게 복을 누리려는 생각을 내어, 그 운명을 점친 것은 말이 반역(反逆)에 관계되니 하루라도 이 세상에 구차하게 용납될 수 없다.”고 하였다. 정미년 가을 9월에, 양사(兩司)에서 정언각(鄭彦慤)이 아뢴 익명서(匿名書)의 일로 인하여 왕법(王法)으로 처단하여 통쾌하게 그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부제학 정언각 등도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하로써 역적의 추대하는 대상이 되어 그 목숨을 보전한 자는 고금에 있지 아니합니다. 비록 스스로 알지 못했을지라도 형벌을 폐할 수 없는데, 하물며 참여하여 알고 있는 자취가 밝게 드러나서 의심이 없으니,……” 하고 양사에서 연계(連啓)하였으나 또 듣지 않았는데, 겨울 10월에 이르러 마침내 죽였다. 드디어 복관(復官)하고 예장(禮葬)하기를 명하니 양사에서 반대하기를 두세 번 하여도 듣지 않으므로 드디어 정지하였는데, 정언각 등이 차자를 올려 논하니 드디어 양사를 체직시키고 내린 명(命)을 도로 거두었다.
○ 이류(李瑠)는 윤임의 생질이다. 처음에 왕자 계성군(桂城君)의 양자(養子)로써 계림군(桂林君)으로 이어 봉하고, 뒤에 자급이 올랐다. 윤임이 죽음을 당하자 머리를 깎고 도망해 숨었는데, 김명윤(金明胤)의 밀고(密告)로 중앙과 지방에 명령을 내려 급히 체포하게 하였다. 토산(兎山) 현감 이차남(李次男)이 잡아 고하자, 극형(極刑)에 처하였다. 이때 먼저 윤원로(尹元老)가 말을 지어내기를, “윤임이 동궁을 보호한다 칭탁하나 실은 이류(李瑠)를 세우고자 한다.”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그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윤임이 이 말로써 죽었고, 이류도 마침내 큰 형벌을 당하였다.
○ 송인수(宋獜壽)의 자는 미수(眉叟), 호는 규암(圭菴)인데, 신사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착한 일을 즐겨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성품이 또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그 강직함을 탄복하였다. 을사년의 화가 일어나자, 대간에서 경박한 무리의 영수(領袖)라고 지적하여 벼슬을 빼앗기고 청주 본가로 갔었다. 정미년 9월에, 정언각의 고한 익명서 사건으로 인하여 사약(死藥)이 내렸는데, 사자(使者)가 문앞에 이르니, 마침 그 생일이라 친족과 문생들이 그 집에 많이 모였다. 종이와 붓을 얻어 크게 쓰기를, “하늘과 땅이 진실로 이 마음을 나타낼 것이다.” 하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다.
○ 참판 송인수(宋麟壽)는, 일찍이 진사 엄용공(嚴用恭)에게 학문을 받고 또 김모재(金慕齋)에게 배웠다. 평생에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며 자상하고 화락하여 착한 일을 즐겨하기를 목마른 것처럼 하였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올라 청현직의 벼슬을 역임하여 명망이 심히 중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정직하여 소인(小人)에게 거슬려서 정미년 가을에 사약이 내렸다. 죽음에 임하여 손수 글을 써서 아들에게 부치기를, “부지런히 글을 읽어 구천(九泉 저승)의 영혼을 위로하라.” 하였다. 규암이 화를 만난 것을 사람들이 어리석은 군자(君子)라고 이르니, 아, 군자로써 어리석은 이가 있을까. 가정(嘉靖) 을사년에, 지사 최보한(崔輔漢)이 동지(同知) 장언량(張彦良)의 집에 두 번이나 찾아오니 이는 이기 등과 더불어 같이 일을 하게 하려고 한 것이며 또 말하기를, “만약 우리 계책을 따르면 마땅히 큰 공훈(功勳)을 얻을 것이다.” 하니, 장언량이 말하기를, “선인(先人)께서 일찍이 정국공(靖國功 중종반정)에 참여하였으니 이것도 충분한데, 또 큰 공을 얻는 것은 소원이 아니다.” 하고 굳이 거절하고 따르지 아니하니, 듣는 사람이 어질게 여겼다. 《패관잡기》
○ 안명세(安名世)는 갑진년 과거에 올라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 무신년 2월에, 이기 등이, “일찍이 사관(史官)이 되어 유관 등을 높이 표창하였다.”라고 아뢰어 역적을 편들었다고 논죄하여, 수형을 당하고 처자(妻子)는 종이 되었다. 그때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하였는데, 대신들이 계청(啓請)하여 사초(史草)를 꺼내보았다. 안명세가 이기의 악한 일을 매우 그 실상대로 썼는데, 이기가 크게 노하여 당역(黨逆)으로 죄를 성토하여 극형(極刑)에 처하였다. 《패관잡기》
○ 기유년(명종 4) 여름 5월에, 영월(寧越)에서 귀양살이하는 이홍남(李洪男)이 그 동생 홍윤(李洪胤)의 반역한 상황을 가지고 그 처남 원호섭(元虎燮)과 동서 정유길(鄭惟吉)에게 편지로 통하였다. 두 사람이 비밀리 아뢰어 홍윤을 잡아 문초하고 역모로 논하여 능지처참하고, 가산을 적몰(籍沒)하고 처자는 종을 삼았다. 종묘(宗廟)에 고하고 중외(中外)에 반사(頒赦 은사(恩赦))하였는데, 바로 5월 2일이다. 전지(傳旨)의 말에, “적신(賊臣) 홍윤은 독사같은 뱃속에 태어나서 효경(梟獍)같은 집에서 자라났다. 몰래 불평하는 무리와 결탁하여 위를 침범할 모의를 이루고자 하여 이에 배광의(裵光義)ㆍ이휘(李輝)ㆍ최대관(崔大觀)ㆍ이무정(李戊丁) 등과 더불어 요망한 술법을 빌어 경상(卿相)들의 길흉(吉凶)을 점치고, 폐조(廢朝)를 지목하여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것을 바랐다. 장졸(將卒)의 성명을 비밀히 기록하고, 주군(州郡) 병기를 도둑질하기를 꾀했으니, 마땅히 형제의 버림이 되어 하늘의 죄를 더하게 하였다.……” 하였다. 강유선(康惟善)ㆍ이이(李彝)ㆍ이규(李揆)ㆍ이인정(李寅丁)ㆍ최순학(崔順鶴)ㆍ홍현(洪峴)ㆍ홍륜(洪崙)ㆍ변복(邊復)ㆍ우수평(禹水平)ㆍ최흡(崔洽)ㆍ최대립(崔大立)ㆍ최대림(崔大臨)ㆍ최대수(崔大受)ㆍ차헌지(車獻之)ㆍ연백재(延百載)ㆍ안매(安邁)ㆍ안희우(安喜遇)ㆍ안희봉(安喜逢)ㆍ배몽정(裵夢呈)ㆍ이유성(李有成)ㆍ이수성(李遂成)ㆍ이복기(李福基)ㆍ손수공(孫守恭)ㆍ이후정(李後丁)ㆍ지칠동(池七同)ㆍ지억년(池億年)ㆍ안세장(安世章)ㆍ손수양(孫守讓)ㆍ연원(延瑗)ㆍ김의순(金義淳)ㆍ손수검(孫守儉)ㆍ무송수(茂松守) 언성(彦成)ㆍ모산수(毛山守) 정랑(呈琅) 등은 공사(供辭)에 관련되어 모두 이홍윤(李洪胤) 등에 의하여 논죄되었다. 전지(傳旨)한 말에 “유선(惟善)은 당시 유명한 사람으로써 주모자가 되어 통솔하고 약속하는 글을 짓기까지 하였다. 유선이 대장이 된 것은 의순ㆍ언성ㆍ정랑ㆍ수검 등 여러 역적들이 같은 말로 끌어대었으니, 비록 매를 맞아 죽었으나 정당한 형벌을 보여야 한다. 또 그들이 말하기를, ‘국가의 운수가 쇠하였다.’, ‘법은 원수될 만하다.’, ‘천명(天命)을 도모할 수 있다.’, ‘하늘을 쏠 수 있다.’, ‘과인이 어려서 없앨 수 있다.’ 이르고, ‘종실(宗室) 모산수(毛山守)를 세울 만하다.’ 이르며, ‘의순ㆍ세장ㆍ광의ㆍ이휘의 점(占)은 틀림이 없다.’ 이르고, ‘유선ㆍ대립(大立)ㆍ대림(大臨) 이이(李彝)의 붓끝은 귀신이 백일(白日)에 휘파람 불게 한다.’ 이르면서 연이어 의논하고 책을 만들었다. 드디어 사사로이 칼과 창을 만들고 활과 화살을 지어서 열읍(列邑)에 군사를 출동시켜 장차 왕성(王城)에 포위하고자 하여, 3년을 모의하되 더욱 비밀리 하였으므로 여러 고을을 유인하였으나 고발하지 않았다. 대개 그 국정(鞠庭)의 공사(供辭)가 위에 저촉되는 말이 많았다. 참여한 자가 혹 무사(武士)도 있으나, 우두머리는 모두 유생(儒生)들이다. 어찌 반역한 무리가 여러번 문필가(文筆家)에서 나왔는고……” 하였다. 또 전지(傳旨)에, “충주의 역적은 그 무리가 실로 많고 모의한 계획을 펴두고 책을 만드는 데 이르렀으니, 진실로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 고을 사람이 한 사람도 사전에 아뢰는 이가 없으니, 오로지 인심이 어둡고 미련하여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몰랐던 연유일 것이다. 비록 대읍(大邑)이라고 하나 마땅히 혁파(革罷)하여 신과 사람의 분함을 쾌하게 해야 할 것이므로, 우선 낮추어서 현(縣)으로 삼아 충주(忠州)를 유신현(維新縣)으로 삼고, 충청도를 청홍도(淸洪道)로 삼는다.” 하였다.
○ 본국에서 쓰는 율관(律管)은, 영락(永樂) 3년(태종 6)에 성조(成祖) 황제가 준 것이다. 가정(嘉靖) 계축년(중종 8)에 오래되어 파손되었다고 하여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여 매입하여 응용(應用)하기를 청하였다. 그 글의 대략에, “원래 쓰던 율관이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그 틀리고 그릇된 것이 약간이 아닌데, 더욱 해사(該司)의 각 음악이 전습(傳習)된 지 이미 오래이므로 그릇된 데에서 또 그릇됨을 전하여 점점 그 참됨을 잃었습니다. 여기에 의거한 음악은 묘사(廟社)의 연례(宴禮)에 사용되어 신과 사람을 화락하게 하는 것이므로, 지금 악관(樂官) 한 사람과 악사(樂師) 세 사람을 뽑아 가포(價布 화폐)를 싸가지고 하례(賀禮)하러 가는 배신(陪臣)의 뒤를 따라서 경사(京師 북경)에 달려가게 하여 전달(傳達)을 청하니, 특히 매입하기를 허락하고 도착하면 태상시 악공(太常寺樂工) 및 다른 사람과 더불어 비교해 정하여서 성조(聖朝)의 율도량형(律度量衡)의 제도와 같게 하소서,……” 하였다. 자문(咨文) 가운데, ‘해사(該司)의 각(各) 음악’이라고 말한 것은 당악(唐樂)을 가리킨 것인데, 지금의 당비파(唐琵琶)와 같은 종류이다. 예부에서 회자(回咨)한 대략에 이르기를, “조선에서 조정을 섬기는 일을 매우 삼가히 하여, 조정에서 조선을 대접하는 은혜와 예법이 본디 넉넉하였다. 정삭(正朔 책력)이 미치는 곳에는 양형(量衡)을 같이 하거늘, 하물며 관약(管籥)의 음률(音律)은 예악(禮樂)에서 큰 것인데, 어찌 감히 성조(聖朝)에 청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제작(製作)하리오, 행문이첩(行文移牒)이 없이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음률에 정통(精通)한 악사(樂師)와 악생(樂生) 두 명을 뽑아서 파견한 악관과 악사와 더불어 낱낱이 교정하라. 그 율관(律管)은 매입함을 허락하지 말고 특별한 은혜로 나누어주어서 후한 예(禮)를 보이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율관을 주라고 하였으므로 이를 받들어 살피건대, 율관은 음악의 근본이 되니 반드시 제조(制造)가 정교(精巧)하고 소리의 기운이 잘 맞아야 한다. 요컨대, 달포 사이에 정밀하게 제조할 것이 아니니 착령(着令)이 없이 통사(通事) 한 명, 악관 한 명, 악사 세 명, 종인(從人) 한 명을 서울에 머물러 제조가 완전히 마치기를 기다려서, 받아서 돌아가게 하고, 그 배신(陪臣) 등의 관원은 먼저 돌려보내니, 성지(聖旨)를 받들어……” 하였다. 논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본국의 자문(咨文) 중에, ‘성조(聖朝)의 율도량형(律度量衡)과 같이 한다.’는 말과 예부의 자문 가운데, ‘정삭(正朔)의 미치는 곳에는 양형(量衡)을 같이 하거늘 하물며 관약(管籥)의 음률은 예악에서 큰 것인데, 어찌 감히 성조(聖朝)에 청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제작하리오.’ 한 글은 이쪽과 저쪽이 모두 그 예(禮)에 적합하다.” 하였다. 《패관잡기》
○ 가정 을묘년에 왜선(倭船) 60척이 전라도를 침범하였다. 병사 원속(元續)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갔는데, 날이 저물어서 달량(達梁)에 주둔하였더니, 이튿날 아침에 도적의 무리가 성을 포위하자, 구원병이 북쪽으로 달아나고 관군(官軍)도 많이 성을 넘어 달아났다. 원속이 갑옷과 투구를 벗고 성밖에 던져서 항복하는 시늉을 하자 적이 우리의 형세가 급박함을 알고 군사를 독려하여 성을 치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원속과 장흥 부사 한온(韓縕)을 죽이고, 영암 군수 이덕견(李德堅)을 사로잡고, 연달아 난포(蘭浦), 마량(馬梁), 장흥부 병영, 강진현(康津縣) 가리포(加里浦) 등을 함락하였는데, 죽이고 노략질한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준경(李俊慶)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고, 김경석(金景錫)과 남치근(南致勤)을 좌우방어사(左右防禦使)로 삼았다. 김경석이 영암성(靈巖城)에 주둔하였다. 때마침 전주 부윤 이윤경(李潤慶)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는데, 군사를 잘 기르고 격려하였다. 남은 도적들이 인근의 고을을 노략질하므로, 이윤경이 김경석에게 권하여 군사를 내어 더불어 싸우게 하였더니, 적이 패해 달아나서 관군(官軍)이 2백여 급(級)을 참수하고 사로잡았다. 남치근은 영암에 간 지 얼마 안 되어서 말하기를, “우리의 부대는 같이 이 성에 있을 수 없다.” 하고 곧 장졸을 거느리고 갔는데, 나주에서 적과 만나 싸우자 적이 싸움이 불리함을 알고 후퇴해 달아났다. 이덕견(李德堅)이 적진으로부터 돌아와서, “적은 말하기를, ‘만약 군사의 먹을 것을 주면 곧 돌아가겠다.’라고 말한다.” 하니, 이덕견을 군중에서 목베어 돌리기를 명하였다. 《패관잡기》
○ 왜적이 영암에 나올 적에, 늙고 어린이와 잡은 여자들을 배안에 머물러 두고, 거기에다 노략질한 붉은 칠을 한 목반(木盤)을 뱃전에 늘어놓아서 방패를 대신하였는데, 햇볕이 내려쪼이면 붉은 광채가 황홀하였다. 우리 군사가 바라보고 그 군용(軍容)을 두려워하였으니, 팔공산(八公山) 초목이 진(秦) 나라 군사를 겁내게 함과 다름이 없다. 적이 패해 달아나 배가 떠나려 할 적에, 배안의 자녀들이 일시에 통곡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는데, 제장(諸將)들이 잘못 알고, 적이 그 패전함을 슬퍼해 운다고 하였으니, 한번 웃을 만한 일이다.
○ 성제원(成悌元)의 자는 자경(子敬)이다. 보은 현감이 되었을 적에 성운(成運)선생이 속리산 밑에 살았는데, 선생이 초당(草堂)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였는데, 성자경이 관아의 목수로 그 공사를 마쳤다. 성청송(成聽松) 수침(守琛)이 이를 듣고, 어떤 선비에게 말하기를, “현감이 관아의 목수로 사가의 일을 시키며 사가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으니 어쩐 일인가.” 하니 그 선비가 주회암(朱晦庵 주자)의 정사(精舍)의 일을 들어 고하자 청송이 말하기를, “반드시 온당하지 못함이 있다.” 하였다. 회암이 정사 짓기를 계획하니 안무사(安撫使)가 듣고 관아의 힘으로 지으려고 하므로, 회암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차라리 정사를 세우지 않겠소.” 하였으니, 청송의 이 말은 바로 이 일과 합치한다. 그러나 내가 또 논하건대, 안무사는 지금 관찰사이다. 한 도의 주인이 되어 한 도의 힘을 움직여서 한 정사를 짓는 것은 진실로 적당치 못하다. 그러나 수령은 관찰사와 같이 규검(糾檢)하는 일에 비할 것은 아니다. 그 남는 힘으로 한 초당을 짓는 데 도와주는 것이 의리에 무엇이 해로우리오. 옛 사람은 관아의 힘으로 집을 지어서 은자를 살게 한 이가 있었으나, 후현(後賢)들이 그르다고 한 이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청송은 신하의 의리에 마음을 편히 하여 비록 한 지푸라기라도 주고받는 데에 구차스러운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성현(聖賢)의 조심하여 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천성(天性)을 온전히 하는 일이니, 진실로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 추측할 바가 아니다. 후학들이 마땅히 공경히 지켜서 잃음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자경(子敬)도 어진 사람이다. 천성이 호매(豪邁)하며, 용감하고 뜻이 커서, 주광(酒狂)으로 행동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깊은 속마음을 엿보지 못하였다. 성운(成運) 선생은 속리산에 은거하여 마음을 편안히 하고 염담(恬淡)하여, 거문고와 글로 스스로 즐겼다. 징사(徵士) 건중(健仲) 조식(曺植)이 일찍이 산중에 찾아왔는데, 자경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서로 만남에 미쳐 건중과 자경은 초면으로 말을 붙였는데, 예전에 사귄 친구처럼 친숙하였다. 수일을 같이 즐기다가 떠나려 하자, 자경이 미리 전송하는 자리를 중로에 베풀고 홀로 따라가서 보내면서 손을 잡고 울며 작별하기를, “그대와 내가 모두 중년(中年)인데 각각 멀리 떨어진 고을에 사니, 다시 만날 것을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자경이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으니, 슬프다. 자경이 어떤 중과 더불어 보름 동안 밤에 잠자지 아니하기를 비교하였는데, 중은 열 사흘에 이르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쓰러져 누워서 수일을 곤히 잠들었으나, 자경은 보름 밤을 지난 뒤에도 잠자고 먹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아, 이같은 역량(力量)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하지 못하리오. 만약 중국에 났었더라면 반드시 공업(功業)에 뜻을 베풀어 넉넉히 성인(聖人)의 영역에 들어갔을 것인데, 수명도 5ㆍ60세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 윤원형(尹元衡)은 영돈녕 윤지임(尹之任)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에 나아갔으나, 그 인물이 간사하고 외척의 세력으로써 이조가 추천할 사람을 검상(檢詳)하는 데에서 매양 저지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여 도승지로써 특별히 공조 참판을 임명하니, 대사헌 송인수가 그 적합하지 못함을 논박하여 두 달에 이르도록 그만두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바꾸었다. 윤원형이 권세를 잡은 뒤에 몇몇 악한 사람과 더불어 굳게 결탁하여 평생에 원망하던 사람은 모두 죽도록 하였으며 위엄과 권세가 이미 높아지자 사방에서 뇌물이 그 집에 모여서 서울 안에 집이 16채나 있었는데도 남의 종[奴]과 전토를 빼앗은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으며, 당시의 생살여탈이 모두 그 뜻에서 나왔다. 또 그 첩(妾)을 부인으로 삼았는데, 조정 선비로써 세리(勢利)를 탐하는 자들이 그 첩의 자녀와 혼인을 하였다. 다행히 공론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20년 만에 그 죄를 성토하여 내치고, 얼마 안 되어 죽었으니 어찌 종묘사직의 영혼이 어두운 속에서 묵묵히 도우심이 아니겠느냐. 《패관잡기》아래도 같다.
○ 융경(隆慶) 정묘년(명종 22)에, 한림검토관(翰林檢討官) 허국(許國), 병사좌급사중(兵事左給事中) 위시량(魏時亮) 등이 등극개원조(登極改元詔)를 받들고 와서 일행이 가평관(嘉平館)에 이르렀는데, 수령들이 감사의 공문(公文)을 원접사(遠接使)인 판서 박충원(朴忠元)에게 올렸다. 대개 명종대왕이 6월 28일에 승하하였는데, 조정에서 창황하여 명 나라 사신에게 부음(訃音)은 미처 전하지 못하였고, 감사의 공문으로 수령들이 위전(慰箋)을 올렸는데, 승하한 지 나흘만이었으니, 안팎에서 모두 체통이 손실되어 탄식할 만하였다. 이날에 원접사가 일행과 차사원(差使員)을 거느리고 검은 사모(紗帽)와 흰 옷을 갖추고 거애(擧哀 조문하는 예식)하였는데, 통사 홍순언(洪純彦)으로 하여금 국휼(國恤)을 고하니, 상사(上使)가 눈물을 머금고 말하기를, “천고에 없는 일을 우리들이 흠차(欽差 황제의 명으로 파견된 것)되어 비로소 보게 되었다.” 하였다. 이어 묻기를, “왕세자가 있는가?” 하니 “없습니다.” 대답하고, “형제는 있는가?” 하니,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면 왕을 대신하여 조서(詔書)를 받을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왕실(王室)의 일은 천신(賤臣)으로는 헤아릴 바가 아니오.” 하였다. 또 영의정은 누구냐고 묻기에 이준경(李浚慶)이라고 대답하기, “그 사람은 문장이 있는가. 덕량(德量)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본디 덕량이 있어서 일국에서 신망이 있습니다.”고 대답하니, “그러면 너희 나라는 근심이 없다.” 하였다. 저녁에 원접사(遠接使)가 상사(上使)의 방에 나아가니, 두 사신이 모두 얕게 검은 옷을 입고 대청에 나가 앉았다. 원접사가 앞에 나가 말하기를, “뜻밖에 국왕의 훙(薨)하심을 들으니 애통이 망극하옵니다. 또 조문하는 예식이 있었는데 부음을 직접 고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갑자기 흉변(凶變)을 들으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소.” 하였다. 무릇 조서를 맞이할 때에는 모두 길복(吉服)을 입고 사신을 위해 잔치를 마련하는 일들은 모두 정지하였다. 《패관잡기》

[주D-001]모양이 바른[表正] : 스스로 모범이 되어 바로 잡는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중외지고(仲虺之誥)에 나온다.
[주D-002]오마남도(五馬南渡) : 중국 서진(西晉) 때에 북방 민족의 침략으로 나라가 무너지고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그때에 황족 다섯 사람이 피란하여 양자강 남쪽으로 건너갔다. 그 황족의 성씨가 사마씨(司馬氏)이므로 이를 ‘오마남도(五馬南渡)’라고 한다.
[주D-003]팔공산(八公山) …… 겁내게 :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동진(東晉)을 치다가 패하여 도망가는데 군사들이 겁먹고 팔공산(八空山) 초목을 멀리서 보고 모두 진(晉) 나라 군사인 줄 알았다.
국조보감 제22권
 명종조 1
9년(갑인, 1554)

○ 1월. 초관(草串)의 야인(野人)인 골간족(骨幹族) 불등(不等)이 북도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는데, 병마사 이사증(李思曾)이 군대를 보내어 쳐서 물리치고 59급(級)을 참획(斬獲)하였다. 일이 보고되자 차등 있게 논상하였고,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매장하고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 2월. 대신(臺臣)이 , 옛날에 노인을 봉양하고 구언(求言)하였던 뜻에 따라 지중추부사 이현보(李賢輔)에게 하유하여 진언(陳言)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현보가 아뢰기를,
"전야(田野)의 늙은 백성이 물러나 한가하게 지낸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잘못이나 대궐의 시정(時政)에 대해 감히 지적하여 진달드릴 수는 없으나, 간언을 받아들이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 물 흐르듯이 하는 아름다움이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옛사람이 이것을 나무가 먹줄을 따르고 물이 모습을 비추는 데 비유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임금이 늘 반성하고 생각해야 할 점입니다."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 팔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효행과 절의가 있는 사람을 찾아 아뢰게 하였다.
○ 사간원이 아뢰기를,
"비변사는 조종조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중종 말년에 시작되었는데, 대개 그 당시 대신이 병사(兵事)를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청하여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를 설립한 이후로 변경이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으니, 이는 비변사의 당상이 대부분 무신인 관계로 공을 좋아하고 일 만들기를 기뻐하여 병단(兵端)을 만들고, 대신이 그 말을 믿고 현혹되어 외방의 오랑캐와 흔단을 맺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비변사를 혁파해야만 변경이 안정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성상께서 당상을 더 차출하도록 명하셨으니, 실로 성상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조종조의 고사(故事)에 따라 비변사를 혁파하고 병정(兵政)을 병조에 통합시킨 다음 삼공과 변방 일을 잘 아는 무신이 함께 군무(軍務)를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에 지변사 재상(知邊事宰相)에게 양계(兩界)의 변방 일을 전담시켜 살피게 하였으니, 지금의 비변사 또한 이러한 뜻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 상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영사 윤개(尹漑)가 아뢰기를,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병으로 사직하여 체직되었습니다. 지금 후임을 차출해야 하겠는데 조종조의 고사를 고찰할 길이 없습니다. 얼마 전 김안국(金安國)이 죽자 성세창(成世昌)으로 대신하였고, 성세창이 죄를 받자 신광한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죽은 자와 죄를 받은 자는 모두 다른 사람을 천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당시 어쩔 수 없이 권점(圈點)으로 차출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신광한이 있으니 그로 하여금 후임을 천거하게 해야겠습니다. 어찌 권점을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신광한이 천거하여 정사룡(鄭士龍)을 후임으로 삼았다.
○ 5월. 성균관에 어제(御題) 율부(律賦)를 내리고 대제학 정사룡 등으로 하여금 시취하게 하였으며, 도승지를 보내어 유생들에게 선온(宣醞)하였다. 이어 하교하여 유생들은 강학을 힘쓰도록 하라고 신칙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율부의 팔각체(八角體)라는 말은 당(唐) 나라와 고려에 모두 있었으며,《문한유선(文翰類選)》과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율부의 체제도 동일합니다. 세종조에 일찍이 율부로 선비를 시취하였는데, 안성중(安省中)의 전시(殿試) 시권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법으로 취할 만합니다. 대개 팔각 압운(八角押韻)은 모두 명운(命韻)을 쓰며, 차례를 조금도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제1각은 반드시 파제(破題)로 해야 하는 데, 지금의 유생들은 이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대제학으로 하여금 헤아려 규정을 정하게 하여 중외의 선비가 모두 정식(程式)을 알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이에 앞서 호조가, 환자의 모곡(耗穀)을 수령이 멋대로 쓰지 못하게 하고 별도의 창고에 회록(會錄)한 다음 10분의 1의 수를 채운 자는 차례로 논상하게 할 것을 계청하였다. 영경연사 윤개(尹慨)가 아뢰기를,
"수령이 쓸 수 있는 비용은 모곡뿐입니다. 그런데 모곡을 쓰지 못하게 한다면 형세상 반드시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과세를 무겁게 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그 가운데 훌륭한 수령은 반드시 비용을 절약하고 저축하여 남은 것으로 백성들이 작년에 받은 환자곡을 충당할 것이니, 이러한 사람들을 상께서 포상하고 장려하신다면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하려 들어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전의 의논을 취소할 것을 명하였다.
○ 혜성과 유사한 별이 나타났다. 상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삼공 이하를 불러 재앙을 그치게 할 방책을 강구하게 하였으며, 팔도 및 개성부에 명하여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게 하였다. 이어 교서를 내려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구언(求言)하였다. 이르기를,
"하늘과 사람은 서로 더불고 이(理)와 기(氣)는 간격이 없으며, 정기(精氣)와 요기(妖氣)는 번갈아 움직이고 선과 악은 같은 부류끼리 상응하니, 일이 아래에서 일어나면 형상이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내가 덕이 없고 어리석어 임금이 되기에 부적합한 탓으로 하늘이 경계를 내리고 도와주지 않으시니, 기근이 거듭 든 데다가 재앙까지 겹치는가 하면 장마비가 농사를 해치고 혜성이 변고를 보였다. 그리하여 늘 깊은 못가에 서거나 살얼음을 밟은 듯이 두려워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잊은 채 근심을 더하건만, 잘못된 정사가 이미 많고 폐단이 계속하여 생겨난다.
은택은 아래에까지 이르지 못해서 막혀버리고, 백성들은 억울함을 당하고도 씻을 길이 없으며, 법령을 분분하게 고쳐 아래에서 일정하게 따를 수가 없고, 상벌이 참람하여 사람들이 권면되거나 징계되지 못하며, 공도(公道)가 버려진 채 행해지지 않고, 탐욕을 부리는 풍조가 극성을 부려 막을 수 없다. 조정은 사방의 근본인데 청명한 다스림을 볼 수 없고, 수령은 한 고을을 주재(主宰)하는 사람인데 대부분 잔혹한 무리이니, 과세를 과중하게 하여 살갗을 벗기고 피를 빨며, 요역을 번잡스럽게 하여 근골(筋骨)을 괴롭힌다. 해마다 흉년이 들어 도적이 날뛰고, 변방을 제대로 방비하지 못해 오랑캐가 침입하곤 한다. 관직은 어진 사람을 임용하는 것인데 적합하지 않은 자를 함부로 제수하기도 하며, 형벌은 간사한 자를 꾸짖는 것인데 죄도 없이 억울하게 처벌받는 자가 있다. 토목 공사가 한창 일어나 군민(軍民)이 이미 지쳐버렸으니, 항상 화란의 기미가 닥쳐올 것이 염려되며 언로가 막히지나 않았는지 매우 두렵다. 내수사는 폐단을 만들어 백성을 병들게 하고, 중의 무리가 다스림을 방해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화기(和氣)를 해쳐 재앙을 부르는 것이니, 단지 스스로 허물을 반성하고 자신을 가다듬을 뿐이다.
아, 너희 대소 신하 및 초야의 백성들은 폐단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깊이 생각하고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를 남김없이 진달하라. 말이 적절하지 않더라도 죄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중외에 효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 야인(野人) 골간이 500기(騎)로 경원(慶源)의 조산보(造山堡)를 침략하였는데, 부사 남치욱(南致勗)이 꾸물대며 구원하지 않아 성이 거의 함락할 지경에 이르렀다. 조방장(助防將) 최한정(崔漢貞)이 그 추장을 쏘아 죽이자 적들이 마침내 달아났다. 북도 병마사 이사증(李思曾)이 조정에 보고하니, 최한정은 5품직에 제수하여 그대로 본보의 만호(萬戶)를 겸하게 하고 남치욱은 삭탈관작하여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 8월. 상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정언 이준민(李俊民)이 아뢰기를,
"근래 성상께서 문아(文雅)에 뜻을 두시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흥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왕의 다스림에는 본말(本末)이 있는 법입니다. 경악(經幄)의 신하를 체차하여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셨으니, 이는 독서당을 중히 여기고 경악을 가볍게 여긴 것이며, 문예를 우선으로 하고 덕행을 뒤로 미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덕행은 근본이고 문예는 말단이다. 실로 근본을 말단보다 우선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독서당의 일은 조종조로부터 뜻을 두고 권장해온 것이다. 근래에 문풍(文風)이 침체되었기 때문에 이로써 권면하려는 것이지 어찌 덕행을 뒤로 미룰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법을 쓰기를 각박하게 하는 것과 너그럽게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대답하기를,
"주(周) 나라 말엽에는 지나치게 너그럽게 했다가 망하였고 진(秦) 나라 초기에는 지나치게 매섭게 했다가 망하였으니, 임금이 법을 쓰는 것은 때에 따라 적절하게 변통해야 합니다."
하고, 영사 윤개(尹漑)가 아뢰기를,
"기쁜 때에 법을 쓰면 너무 너그럽게 되고 노여울 때 법을 쓰면 너무 사납게 됩니다. 모름지기 마음을 공정하게 하여 너그러움과 매서움이 적절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동지사 이준경(李浚慶)이 아뢰기를,
"법 쓰기를 각박하게 하면 일시적으로 복종시킬 수는 있지만 그 폐단이 끝이 없게 되고, 너그럽게 하면 종국에는 부지할 수가 있습니다. 전조(前朝) 때는 법을 쓰기를 너무 너그럽게 했기 때문에 권간(權奸)이 없는 때가 없었습니다만, 5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충후(忠厚)함을 숭상한 결과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충후함을 주로 하고 때에 따라 폐단을 바로잡으며, 기쁘고 노여운 감정이나 가깝고 먼 관계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는다면 제대로 될 것이다."
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경사(經史)나 문서에 흩어져 나오는 열성조의 어휘(御諱)를 선조(先朝) 때부터 대부분 다른 글자로 대신 정하였습니다. 인종(仁宗)의 어휘 및 당저(當宁)의 어휘를 대용(代用)할 글자를 홍문관으로 하여금 정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마침내 문(㞶)으로 인종의 어휘를 대신하고 전(崟)으로 당저의 어휘를 대신하였다.
○ 장령 이언충(李彦忠)이 아뢰기를,
"사도(師道)가 끊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동몽훈도(童蒙訓導)를 세워 유학(幼學)의 선비를 가르친 것은 실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이중호(李仲虎)는 학식이 고명하고 이끌어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습니다. 주서 이인(李訒), 검열 박응남(朴應男)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며, 그 밖에도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한 자가 40여 명입니다. 지금 만약 부직(付職)하여 유생들을 가르치게 한다면 반드시 국가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데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 10월. 경복궁(景福宮)이 완성되었다. 종묘 및 문소전(文昭殿), 연은전(延恩殿)에 제사를 올려 고하고, 다시 명하여 강녕전(康寧殿)에 옛날처럼 억시(抑詩)와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걸게 하였다.
○ 상이, 정몽주(鄭夢周)의 도덕과 충절이 안유(安裕)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가 생장한 곳에다 서원을 세울 것을 명하고, 편액(扁額), 서책, 노비, 전결(田結)을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예에 따라 내려주도록 하였다.
○ 11월. 대제학 정사룡(鄭士龍) 등에게 명하여 성균관에 가서 석촌음잠(惜寸陰箴)으로 유생들을 시험 보이게 하고, 이어 인륜을 밝히고 예의를 알아서 훗날 쓸 만한 재목이 되도록 하라고 신칙하였다.
○ 12월. 기대항(奇大恒)을 사간으로, 임보신(任輔臣)을 판교로 삼았다. 기대항은 기준(奇遵)의 아들이다. 임보신은 일찍이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고 논하였다가 오래도록 조용되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울러 발탁해 쓴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1 ○ 학산초담
학산초담(鶴山樵談)

제왕의 문장은 반드시 범인(凡人)을 초월하게 마련이다. 우리 역대 임금의 작품들이 대개는 《대동시림(大東詩林)》에 보이는데 그 밖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현재 임금은 하늘이 낸 어진 임금으로 무릇 교유(敎諭)하는 말을 손수 지었는데, 질박하고 엄숙하여 기백(氣魄)이 있었다. 그러나 시는 있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러던 차에 신묘년(1591, 선조24) 가을에 외간(外間)에 임금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절구(絶句)가 있었으니 다음과 같다.
한밤에 칼 어루만지니 호기가 무지개를 토해라 / 撫劍中宵氣吐虹
웅장한 마음은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더니 / 壯心曾欲奠吾東
이제껏 그 사업은 한단의 걸음 / 如今事業邯鄲步
가을 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네 / 回首西風恨不窮
시격(詩格)이 노련하고 건장하여 시인에 못지 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변고가 있을 줄을 알았으리오.

동궁(東宮)이 또한 임금 되기 전에 시[詞藻]에 뜻을 두어 고서(古書)를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三淸洞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進士) 유희발(柳希發)의 궤 속에 있다기에 그에게 삼가 청하여 읽어보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이내 속에 붉은 골짜기는 그늘졌는데 / 丹壑陰陰翠靄間
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천단을 에웠도다 / 碧溪瑤草繞天壇
노을 어린 옥솥에 단약은 익어가나 / 煙霞玉鼎靈砂老
다래넝쿨에 달 비치고 솔바람 일어도 학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 蘿月松風鶴未還

시화(詩話)가 맑고 서늘하며 자법(字法)도 또한 기이하다. 임금의 제작은 저절로 세속 시인들의 구기(口氣)와는 다르다. 아, 존경할 만하다.
희발(希發)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광해군의 처남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계해년(1623)에 사형되었다.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위주로 하여 비록 경렴(景濂) 같은 대유(大儒)로도 역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 날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찌꺼기를 빨아 비위를 썩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만들 따름이니, 읽으면 염증이 날 정도이다. 성당(盛唐)의 소리는 다 없어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梅月堂)의 시는 맑고 호매(豪邁)하고 세속을 초탈하였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을 쓰지 않고 갑자기 지은 것이 많기 때문에 간혹 가다가 박잡한 것도 섞여 결국 정시(正始)의 시체는 아니다.
망헌(忘軒) 이주지(李冑之)의 시는 침착ㆍ노련하여 나의 중씨(仲氏)가 대력(大曆 당 대종(唐代宗)의 연호)ㆍ정원(貞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 연간의 작품과 가깝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식ㆍ두보(杜甫)로부터 나왔는데도 대체가 순박치 못했다. 충암(冲庵)은 맑고 굳세고 기이하고 아름다워 작가라고 할 만하되, 거친 말[生語]과 중첩되는 말[疊語]이 약간 많다. 그 후에는 퇴폐한 것을 일으킨 자가 없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ㆍ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연간에 최가운(崔嘉運)ㆍ백창경(白彰卿)ㆍ이익지(李益之) 등이 비로소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시대의 공부를 전공하여 정화(精華)를 이루기에 힘써서 고인에게 미치고자 하였으나, 골격(骨格)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아름답기만 하였다. 당(唐)의 허혼(許渾)ㆍ이교(李嶠)의 사이에 놓더라도 바로 촌뜨기의 꼴을 깨닫게 되는데, 도리어 이백(李白)ㆍ왕유(王維)의 위치를 앗으려고 한단 말인가? 비록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학자는 당풍(唐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세 사람의 공을 또한 덮어버릴 수는 없다 하겠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자는 열경(悅卿), 강릉인(江陵人)이다. 처사(處士)로서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이주지(李冑之)의 이름은 주(冑)이며 고성인(固城人)으로 벼슬은 정언(正言)이다. 중씨(仲氏)는 하곡(荷谷) 허봉(許篈)이다. 자는 미숙(美叔), 양천인(陽川人)이며 벼슬은 전한(典翰)이다.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冲), 경주인(慶州人)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가운(嘉運)의 이름은 경창(慶昌), 호는 고죽(孤竹)인데 해주인(海州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이다. 창경(彰卿)의 이름은 광훈(光勳), 호는 옥봉(玉峯)인데 해미인(海美人)으로 벼슬은 참봉(參奉)이다. 익지(益之)의 이름은 달(達), 호는 손곡(蓀谷)이며 홍주인(洪州人)으로 쌍매(雙梅) 첨(詹)의 서손(庶孫)이다.
가운(嘉運)은 제고봉군산정시(題高峯郡山亭詩)에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도 없는데 / 古郡無城郭
산재에는 다만 수풀뿐 / 山齋有樹林
백성도 아전도 흩어져 쓸쓸한데 / 蕭條人吏散
물건너 마을에 겨울 다듬이 소리 / 隔水搗寒砧
라 하였다. 창경(彰卿)은 제화시(題畫詩)에,
문서 기록은 백발을 재촉하는데 / 簿領催年鬢
시내와 산이 그림 속에 들었구려 / 溪山入畫圖
모래톱 평평하니 옛 언덕이 예로구나 / 沙平舊岸是
달빛은 하얀데 낚싯배 외로워라 / 月白釣船孤
하였고, 제승축시(題僧軸詩)에
지리산은 쌍계가 승경이오 / 智異雙溪勝
금강산은 만폭이 기이하다던데 / 金剛萬瀑奇
명산엔 몸소 가보도 못하고서 / 名山身未到
매양 스님을 보내는 시만 짓누나 / 每賦送僧詩
하였다. 익지(益之)는 산사시(山寺詩)에,
흰 구름 속에 절이 있으니 / 寺在白雲中
흰 구름이라 중은 쓸지를 않네 / 白雲僧不掃
손이 오자 그제사 문을 여니 / 客來門始開
골짜기엔 온통 송화만 흐드러졌구나 / 萬壑松花老
하였고, 회주시(回舟詩)에,
병든 가을 해오리 모래밭에 내려앉고 / 病鷺下秋沙
늦매미는 강가 나무에서 울어대네 / 晩蟬鳴江樹
흰 물마름에 바람 일자 배를 돌리니 / 回舟白蘋風
꿈속에 서담엔 비가 내리네 / 夢落西潭雨
하였다.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3인의 시는 모두 정시(正始)의 법을 본받았는데, 최씨의 청경(淸勁)과 백씨의 고담(枯淡)은 귀히 여길 만하나, 기력(氣力)이 미치지 못하여 다소 후한 결점이 있었다. 이달의 부염(富艶)함은 그 두 사람에 비하면 범위가 약간 크긴 하나, 모두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최경창ㆍ백광훈은 일찍 죽었고, 이달은 늙어서야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자기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그 기려(綺麗)를 거두고 평실(平實)로 돌아갔다. 나의 중형이 자주 칭찬하기를,
“수주(隨州 당(唐)의 유장경(劉長卿)을 가리킴)와 어깨를 겨룬다고 하더라도 큰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므로 내가,
“문장이란 세상의 흥망을 따르는 것이니 송(宋)은 당(唐)만 못하고 원(元)은 송만 못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데, 어찌 이대(二代)를 뛰어넘어 당시의 작가와 우열을 다툴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중씨는,
“한퇴지(韓退之)는 당 나라 사람인데 유자후(柳子厚)가 ‘곧장 자장(子長 사마천(司馬遷)의 자)과 함께 달린다.’고 하였으니, 자후가 어찌 헛말을 할 사람인가? 이달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를 않았다.

나의 중형의 시가 처음에는 동파(東坡)를 배워서 전아(典雅) 순실(純實)하고 온건(穩健) 노숙(老熟)하더니, 호당(湖堂)에 뽑히자 《당시품휘(唐詩品彙)》를 익히 읽어 시가 비로소 청건(淸健)해졌다. 늙마에 갑산(甲山)으로 귀양 갈 때, 이백시(李白詩) 한 부를 가지고 갔었기 때문에,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의 시는 천선(天仙) 이백(李白)의 말을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고 단편이고 휘몰아치는 기세여서 일찍이 이익지가 말하기를,
“미숙 학사(美叔學士 미숙은 허봉의 자)의 시를 읽으면 공중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 같다.”
하더니, 중씨가 불행히 일찍 죽어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보지 못했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임진왜란에 찾아낼 겨를도 없이 다 병화(兵火)에 타버렸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느냐. 내가 경호(鏡湖 강릉(江陵)의 별칭)에 살 때, 놀라움이 우선 가라앉자, 일찍이 외던 것을 생각해 내어 보니 겨우 5백여 편이라, 베껴서 세상에 전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기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만 태산(泰山)의 일호(一毫)일 뿐이다.

최경창(崔慶昌)의 자는 가운(嘉運)이니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무진년(1568, 선조1)에 진사(進士)를 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강등(降等)되었다가 국자 직강(國子直講)을 제수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북경(北京)에 가 조천궁(朝天宮)에서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한밤이라 구슬단에 백운을 쓸고 / 午夜瑤壇埽白雲
향 피우고 멀리 옥신군에게 절한다 / 焚香遙禮玉宸君
달 아래 절하는 모습 보는 이 없고 / 月中拜影無人見
아름다운 나무만 겹겹이 궁문 가리웠네 / 琪樹千重鎖殿門

삼청의 이슬기운 주궁을 적시고 / 三淸露氣濕珠宮
봉피리 부는 신선 달밤에 배회했건만 / 鳳管裵廻月在空
동산길에 지금은 향기로운 수레 끊기고 / 苑路至今香輦絶
푸른 복사 붉은 살구 봄바람 한창일세 / 碧桃紅杏自春風
하였다. 어떤 도사(道士)가 있었는데 성은 진씨(秦氏)이고 이름은 지금 기억에 없다. 그 또한 시를 잘 지었다. 이 시를 크게 칭찬하여 통주(通州) 하청관(河淸觀)까지 쫓아와 그 책에 제(題)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벽우는 진계를 상징하고 / 碧宇標眞界
현단은 태청과 가깝네 / 玄壇近太淸
난새는 주포수에 깃들고 / 鸞棲珠圃樹
노을은 자미성을 감돌았네 / 霞繞紫微城
삼원의 보록은 비장되어 있고 / 寶籙三元秘
금단은 구전으로 이루어졌네 / 金丹九轉成
지거를 탄 사람 보이지 않고 / 芝車人不見
공중 저 밖에 피리 소리만 / 空外有簫聲
이 시가 중국에 전파되어 왕봉주(王鳳洲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호) 선생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충장공(忠壯公) 양조(楊照)의 무덤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운중에 해 지자 불빛이 산을 비치니 / 日沒雲中火照山
선우는 이미 녹두관에 다가왔네 / 單于已近鹿頭關
장군이 홀로 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 將軍獨領千人去
한밤에 요하 건너 싸우다 돌아오지 않았구려 / 夜渡遼河戰未還
이 시는 당인(唐人)의 수준에 못지 않으니 중원(中原)에서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백광훈(白光勳)의 자는 창경(彰卿)이고, 글씨 쓰는 법은 왕희지ㆍ왕헌지에 가까우며, 첫 벼슬은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다. 언젠가 홍경사(弘慶寺)를 지나다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풀 쓸쓸한 전조의 절 / 秋草前朝寺
낡은 비석엔 학사의 글 / 殘碑學士文
유수는 천년토록 의구한데 / 千年有流水
해질 무렵 떠가는 구름을 보네 / 落日見歸雲
임오년(1582, 선조15)에 병으로 서울집에서 죽었다. 난설(蘭雪) 누님의 감우시(感遇詩)는 다음과 같다.
요즘 최씨 백씨 무리들이 / 近者崔白輩
성당을 법삼아 시를 익혀 / 攻詩軌盛唐
적막하던 대아의 음률이 / 寥寥大雅音
이들 만나 다시금 크게 떨쳤네 / 得此復鏗鏘
하료는 마냥 광록이고 / 下僚因光祿
변방의 고을살이 적신이 슬프네 / 邊郡悲積薪
나이나 벼슬이 모두 쇠락하니 / 年位共零落
이제야 믿겠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함을 / 始信詩窮人
난설헌(蘭雪軒)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니, 초당(草堂) 엽(曄)의 딸이며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의 아내이다. 난설헌의 강남곡(江南曲)은 다음과 같다.
남들은 강남땅 좋다 하지만 / 人言江南樂
나보기엔 강남땅 시름겹기만 / 我見江南愁
해마다 모래톱 포구에 서서 / 年年沙浦口
애끊는 마음으로 가는 배만 바라보네 / 腸斷望歸舟
빈녀음(貧女吟)은 또 다음과 같다.
가위를 손에 잡으니 / 手把金剪刀
추운 밤 열손가락 곱네 / 寒夜十指直
남 위해 시집갈 옷 지어주건만 / 爲人作嫁衣
해마다 도리어 혼자 살다니 / 年年還獨宿
채련곡(采蓮曲)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긴 호수엔 비취옥이 흐르는데 / 秋淨長湖碧玉流
연꽃 깊숙한데 난주 매어두고 / 荷花深處係蘭舟
물건너 님을 만나 연밥을 던지다가 / 逢郞隔水投蓮子
남의 눈에 그만 띄니 반나절이나 무안해라 / 剛被人知半日羞


임제(林悌)의 자는 자순(子順)이니 나주인(羅州人)이다. 만력(萬曆 송신종(宋神宗)의 연호) 정축년(1577, 선조10)에 진사가 되었다. 본성이 의협심이 있고 얽매이질 않아서 세속과 맞질 않았으므로 불우했고 일찍 죽었다. 벼슬은 의제 낭중(儀制郎中 예조정랑 겸 지제교(禮曹正郞兼知製敎)의 별칭)에 그쳤다. 죽은 뒤에 어떤 이가 ‘역괴(逆魁 정여립(鄭汝立)을 말함)와 더불어 시사를 논하면서 항우(項羽)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치 못한 것이 애달프다 말하고 나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무함했는데 그 말이 삼성(三省)에 전해지자 그 아들 지(地)를 국문하니 지(地)가 그의 선친이 지은 오강(烏江)에서 항우를 조상한다는 부(賦)를 올리므로 인하여 용서받아 변방에 귀양 가게 되었다. 그의 평사 이영을 보내는 시[送李評事瑩詩]는 다음과 같다.
북방 눈 내리는 용황의 길 / 朔雪龍荒道
음산한 바람 부는 발해 바닷가 / 陰風渤澥涯
원융의 서기를 맡은 이는 / 元戎掌書記
일대의 미남아로다 / 一代美男兒
칼집엔 별을 찌르는 칼 있고 / 匣有干星劍
주머니엔 귀신도 울릴 시가 들었네 / 囊留泣鬼詩
변방 모래 바람 금갑옷에 자욱한데 / 邊沙暗金甲
쪽문 위의 달 홍기를 비치누나 / 閨月照紅旗
옥문관 걸음 어딘들 안 가리오 / 玉塞行應遍
공신각에 화상 걸기 머지 않으리 / 雲臺畫未遲
바라보니 머리카락 곤두세우고 / 相看豎壯髮
먼 길 떠날 슬픈 빛 짓지 않네 / 不作遠遊悲
시격(詩格)이 양영천(楊盈川 당(唐)의 양형(楊炯))과 매우 비슷하다.
제(悌)의 호는 백호(白湖), 벼슬은 북평사(北評事)를 지냈다. 《잠영보(簪纓譜)》를 상고해 보면 ‘제(悌)의 맏아들은 탄(坦)이고 호는 한정(閒亭)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기(垍)인데 호는 월창(月牕), 벼슬은 좌랑(佐郞)이다.’ 하였다.
탄(坦)은 혹 지(地)의 개명(改名)이 아닌지?
백호(白湖)의 규원시(閨怨詩)는 다음과 같다.
열다섯 살 월계 아가씨 / 十五越溪女
남보기 부끄러워 말도 없이 헤어졌네 / 羞人無語別
돌아와 겹문 닫고는 / 歸來掩重門
배꽃에 비친 달 보며 울었네 / 泣向梨花月
산사시(山寺詩)는 다음과 같다.
한밤중 숲 속에 중이 자는데 / 半夜林僧宿
무거운 비구름이 초의를 적시누나 / 重雲濕草衣
느지막에 사립을 여니 / 巖扉開晩日
깃든 새 그제서야 놀라서 나네 / 棲鳥始驚飛
영(瑩)은 고성인(固城人)으로 자는 언윤(彦潤), 호는 남고(南皐)이니 청파(靑坡) 육(陸)의 손자로 벼슬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중형의 경흥압호정(慶興狎胡亭)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국경에서 스산하게 바라다 보니 / 塞國悲寒望
인가의 연기는 귀방과 접했구나 / 人煙接鬼方
산은 외로운 장막 밖을 에웠고 / 山圍孤障外
물은 무너진 능 옆으로 흘러드는구나 / 水入毁陵傍
초가집에 해 바뀌도록 병들었는데 / 白屋經年病
푸른 모에 한밤중 서리 내렸네 / 靑苗半夜霜
이곳에 오르자 가장 서글퍼지니 / 登臨最蕭瑟
까칠한 수염은 낙엽과 함께 누렇구나 / 衰鬢葉俱黃
임자순(林子順)이 크게 칭찬하며 그 운자로 화답하려 하였으나 종일 궁리해도 뜻대로 되질 않자 시를 보내기를,
백옥과 청묘는 열자의 사기로다 / 白屋靑苗十字史
하였으니, 셋째와 넷째 구절이 사실(史實) 기록임을 말한 것이다. 금성 객관(金城客館)에 옛사람이 추(秋) 자로 압운하여 판각해서 못을 박아 걸어 놓았는데, 최고죽(崔孤竹)이 차운하기를
서글픈 대평소 소리 옛고을에서 나는데 / 殘角生古縣
깊은 강물은 어둠속 급히 흐르네 / 沈河急暝流
으스레한 등불 아래 초객의 꿈이요 / 疏燈楚客夢
한밤중 중선의 다락일레 / 半夜仲宣樓
찬 비 비록 개었으나 / 寒雨雖逢霽
고향 생각 또다시 가을을 만났네 / 歸心更値秋
라고 했다. 중씨가 이어 읊기를
나그네 만리길 가매 / 行人萬里去
말 멈추어 차가운 물을 먹이네 / 駐馬飮寒流
큰 길엔 온통 꽃다운 풀들 / 芳草遍官道
저녁 연기 역루에서 피어오르네 / 晩煙生驛樓
나그네 회포는 어렴풋 꿈과 같아서 / 旅懷渾似夢
봄이라지만 거의 가을 같고나 / 春事半如秋
라고 했다. 고죽이 보고,
“봄시를 가을 추(秋) 자로 압운하기는 가장 어려운 것인데 이 글귀는 옛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하였다.

내 생각에 누대 현판은 모조리 케케묵은 시들이라, 비록 청신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으니, 지을 필요가 없다. 임자순(林子順)이 언젠가 가학루(駕鶴樓)를 지나갔는데, 판시(板詩)가 많아 만여 개나 되므로, 그 되지 않은 잡소리를 싫어하여 관리(館吏)를 불러 말하기를,
“이 현판들은 관명(官命)으로 만든 것이냐? 아니면 안 만들면 벌을 주었느냐?”
하니, 그의 말이,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말고 싶으면 안 만들지요. 어찌 관명이나 처벌이 있겠습니까.”
하자, 자순이,
“그렇다면 난 짓지 않겠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다 웃었다. 임진왜란에 적이 관사를 불살라 남은 게 없었으며, 불사르지 않은 곳은 현판을 철거하여 불 속에 던져버렸다. 아마 하늘도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싫어했으리라.

누제(樓題)에도 좋은 시구가 또한 더러 있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하여 북변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谷口驛)에 이르니, 임형수(林亨秀)가 지은 시의 항련(項聯)에
꽃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얼굴 같고 / 花低玉女酣觴面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 山斷蒼虯飮海腰
하였다. 시어(詩語)가 청절(淸絶)하니 어찌 누제라 하여 흠잡을 수 있겠는가.
형수의 자는 사수(士遂)이고, 호는 금호(錦湖)이다. 평택인(平澤人)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 정미년 벽서(壁書) 사건 때 원통하게 죽었다.

어촌(漁村)의 시는 혼후하고 부염하기가 호음(湖陰)에 못지 않은데, 송계(松溪)가 중종 이래 대가를 평하되 그 선(選) 중에 어촌이 들지 않았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가 북변의 누제(樓題)를 보다가, 공의 시를 읽고는, 눈을 씻고 장단을 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동역시(嶺東驛詩)는 다음과 같다.
총과 욕이 유유하다 두 가지 다 놀래니 / 寵辱悠悠兩自驚
표령한 남은 목숨 그 어디에 붙일까 / 飄零何處着殘生
하늘가 해질 무렵 고향 그리는 눈물 / 天邊落日懷鄕淚
국경밖 늦가을 고국 떠나는 마음일세 / 寒外窮秋去國情
구름송인 어지러이 날아 산은 온통 새까맣고 / 雲葉亂飛山盡黑
둥근 달 나직이 비치니 온바다는 밝아라 / 月輪低照海全明
나그네신세 오늘밤 유난히 시름겨워서 / 羈愁此夜偏多緖
푸른 등불 마주하여 앉아 지샜네 / 坐對靑燈到五更
수성역(輸城驛)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 떠나 가을 지나 국경 성에 머무니 / 去國經秋滯塞城
낯선 땅 풍경은 모두가 고향을 그리게 하네 / 異方雲物摠關情
넓은 강 건너고 싶으나 사공 없고 / 洪河欲濟無舟子
겨울나문 말라가도 겨우살인 매달렸네 / 寒木將枯有寄生
일신을 도모함이 곧은 길 아님 우습고 / 自笑謀身非直道
세상 속여 헛된 이름에 붙들림 오히려 부끄럽네 / 還慙欺世坐虛名
새벽 문을 열고 푸른 바다 마주하니 / 曉來拓戶臨靑海
아침해 밝고 밝아 간담을 비치네 / 旭日昭昭照膽明
이와 같은 작품들이 어찌 호음(湖陰)무리만 못하단 말인가? 아래 시의 제4구는 안로(安老)가 죽었지만 그의 잔당은 아직 다 죽지 않았음을 가리킨 것이다.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의 자는 사형(士炯)이니 삼척인(三陟人)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자는 운경(雲卿),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이다.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은 안동인(安東人)이니 벼슬은 학관(學官)이고 이조 참판 응정(應梃)의 서제(庶弟)이다. 안로(安老)의 성은 김씨(金氏),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希樂), 연안인(延安人)이고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다. 탐욕스럽고 간사하며 조정의 일을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중종 정유년(1537)에 사사되었다.
어촌의 사과꽃 지다[來禽花落]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련붉은 꽃 봄을 도와 늙은 가지에 피니 / 朱白扶春上老柯
눌 위해 단장하는고 야인의 집에 / 爲誰粧點野人家
한밤중 비바람에 초췌할까 두렵더니 / 三更風雨驚僝僽
다닥다닥 핀 사과꽃 모조리 다 졌구나 / 落盡來禽滿樹花
송계(松溪)의 촉석루시(矗石樓詩)는 다음과 같다.
구름 사이 새어나는 희미한 달이 잔잔한 물결을 비추어 주니 / 漏雲微月照平波
잠자던 해오리 나직이 날아 물언덕 모래톱에 내려 앉는다 / 宿鷺低飛下岸沙
물가 정자에 발 거두고 기둥 기대어 앉아 있으니 / 江閣捲簾人依柱
나룻머리 노 젓는 소리 밤이라 크게 들리네 / 渡頭鳴櫓夜聞多
중씨가 근래 시인을 평하되, 소재 상공(蘇齋相公)을 대가로 여기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그 다음으로 쳤다. 이익지(李益之 익지는 이달(李達)의 자)는 중씨의 시ㆍ문이 모두 고공(高公)보다 낫다고 치는데 논란은 오래되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권응인(權應仁)을 만나게 되어 물어보니, 이익지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권응인이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는 중씨를 보내는 시의 항련(項聯)에
라 하니, 고사 인용이라든가 대우(對偶)가 다 적절하다. 중형이 서애(西厓)에게 부친 시에 또
갑자년 참상을 말하지 마라 / 莫言甲子泥塗日
응당 경인년에 하강하는 때를 맞으리 / 應値庚寅下降年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자는 과회(寡悔)니 광산인(光山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자는 이순(而順)이니 장흥인(長興人)이다. 벼슬은 목사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자는 이견(而見)이니 풍산인(豐山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형이 귀양 가기 전 옥당(玉堂)에 있을 때 꿈속에서 시를 짓기를
텃밭에 채마 부치노라니 솜씨야 늘었다만 / 稼圃功夫進
천상은 꿈결에도 어렴풋 / 煙霄夢寐稀
오직 가의의 눈물만 남아 / 唯殘賈生淚
밤마다 차가운 옷을 적실 뿐 / 夜夜濕寒衣
하더니, 가을이 되자 갑산(甲山)에 귀양 가게 되었다. 누님이 평시에 또한 꿈속에서 지은 시에
푸른 바단 신선 사는 요해에 젖어들고 / 碧海浸瑤海
청난은 채봉을 기대었구나 / 靑鸞倚彩鳳
연꽃 스물일곱 송이 / 芙蓉三九朵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구나 / 紅墮月霜寒
하더니 이듬해 신선되어 올라가니,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인사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유선시(遊仙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문(文)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四六文)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이 세상에 전한다. 중형이 일찍이,
“경번(景樊)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모두가 이태백(李太白)과 이장길(李長吉)의 유음(遺音)이다.”
라고 한 적이 있다. 아, 살아서는 부부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이옥봉(李玉峯)은 사문(斯文) 조원(趙瑗)의 소실이다. 그 시가 몹시 맑고 강건하여, 거의 아낙네들의 연지 찍고 분 바르는 말들이 아니다. 남편을 따라 진주부(眞珠府)로 가는 길에 노산묘(魯山墓)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닷새는 장간이요 사흘은 영월이라 / 五日長干三日越
참담한 노릉 구름 슬픈 노래 끊어지네 / 哀歌唱斷魯陵雲
이 몸도 또한 왕손의 딸이라서 / 妾身亦是王孫女
이 땅 두견새소리 차마 들을 수 없구려 / 此地鵑聲不忍聞
서군수(徐君受)의 소실이 액서(額書)와 단율(短律)을 부쳐준 데 사례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여위고도 굳세게 하늘밖의 정취 써서 이루니 / 瘦勁寫成天外態
유공권(柳公權) 서체의 남은 자취 보여주네 / 元和脚跡見遺蹤
진서는 나부끼는 가운데 봉새처럼 날아오르고 / 眞書翥鳳飄揚裏
큰 글씨는 뭉게구름이 응집되었네 / 大字崩雲結密中
시험삼아 산헌에 걸고 보니 호랑이가 뛰는 듯 / 試掛山軒疑躍虎
문득 강각에 거니 용이 오르는 양 / 乍臨江閣訝騰龍
위부인 필재 바야흐로 건장한 줄 알거니와 / 衛夫人筆方知健
소야란의 재주라고 어찌 공교함을 독차지할 것인가 / 蘇惹蘭才豈擅工
몸은 마치 혜초가지 같아도 생각은 씩씩하며 / 體若蕙枝思則壯
가녀린 손 파대공 같건만 글씨를 쓰면 웅장하여라 / 手纖蔥玉掃能雄
정신적인 사귐이 만리를 문묵으로 통하니 / 神交萬里通文墨
여의주를 갚기 위해 백옥동자에게 알리노라 / 爲報螭珠白玉童
그 아우 또한 시를 잘 지어, 언젠가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그 하구는 다음과 같다.
창 열고 새백 달빛 아래 거니노라니 / 開窓步曉月
이슬은 매화가지에 함초롬하구나 / 露濕梅花枝
그 전집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옥봉(玉峯)의 이름은 원(媛)이고 완산인(完山人)인데, 충의(忠義) 봉(逢)의 딸이다.
원(瑗)의 자는 백옥(伯玉), 호는 운강(雲江), 임천인(林川人)으로 벼슬은 승지(承旨)이다. 서군수(徐君受)의 이름은 익(益), 호는 만죽(萬竹), 부여인(扶餘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다.
옥봉의 규정시(閨情詩)에
언약하신 서방님 어이 이리 더디신가 / 有約郞何晩
뜰가의 매화는 이울려 하는데 / 庭梅欲謝時
갑자기 가지 위에 까치소리를 듣고 / 忽聞枝上鵲
헛되이 거울 비쳐 눈썹 그리네 / 虛畫鏡中眉

최고죽(崔孤竹) 등이 언젠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지명은 중국만 못하여 시 지을 때 지명을 구사할 수 없다.”
하며 늘 한스럽게 여겼는데, 소재(蘇齋)의 시에
길은 막다른 평구역이오 / 路盡平邱驛
강물은 깊어라 판사정 앞에 / 江深判事亭
라는 것을 보니, 상하구가 모두 속어를 썼건만 구법이 온당 적절하다. 그러니 대가의 솜씨는 자연 여느 사람과 다름을 알겠다.

이익지(李益之)는 젊어서 화류계(花柳界)에 출입한 실수로 말미암아, 그 재주를 시새우는 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비방하였고, 심지어는 ‘어머니도 잘 대우하지 않고 부인과의 예의도 닦지 않았다.’ 하며 비난해 마지않았다. 양봉래(楊蓬萊)가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부임했을 때 그를 빈사(賓師)의 예로 대우하자, 강샘하는 이들이 선대부(先大夫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을 가리킴)에게 무근한 말을 하여 선대부께서 편지로 익지를 사절토록 권하였다. 양봉래가 답장을 보내기를,
“오동꽃은 밤비에 지고, 바닷가 나무는 봄구름 속에 사라진다.[桐花夜雨落海樹春雲空]라고 시를 짓는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접한다면 진왕(陳王)이 갓 응탕(應瑒)과 유정(劉楨)을 잃을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다. 그 후에 대우가 약간 소홀해지자, 익지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작별하였다.
나그네의 떠나고 머무름은 / 行子去留際
주인의 눈썹 사이에 달렸나니 / 主人眉睫間
오늘 아침 반기는 빛 없으니 / 今朝失黃氣
우리 집 고향산 그리워지네 / 舊宇憶靑山
노 나라에선 원거를 잔치해 주고 / 魯國爰居饗
남정에는 의이로 돌아갔다네 / 南征薏苡還
가을바람에 소계자의 신세로 / 秋風蘇季子
또다시 목릉관을 떠나노라 / 又出穆陵關
이에 양봉래가 놀라고 뉘우쳐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봉래(蓬萊)의 이름은 사언(士彦), 자는 응빙(應聘), 청주인(淸州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이다. 선대부(先大夫)의 이름은 엽(曄),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며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이다.
봉래의 국도시(國島詩)는 다음과 같다.
단청한 누대에 보라빛 연기 떨치며 / 金屋樓臺拂紫煙
구름길에 용을 타고 여러 신선 내려오네 / 濯龍雲路下群仙
청산도 또한 인간속세 싫어선지 / 靑山亦厭人間世
푸른 바다 같은 만리장천으로 날아드누나 / 飛入滄溟萬里天


연산군이 집정하였을 때, 강혼(姜渾)은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출제하기를
한식동산에 삼월은 다가오고 / 寒食園林三月近
비바람에 꽃지는 새벽은 싸늘해라 / 落花風雨五更寒
하고, 승지ㆍ사관ㆍ경연관에게 칠언율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강혼의 시는 다음과 같다.
청명이라 대궐 버들 찬 연기 서렸는데 / 淸明御柳鎖寒煙
쌀쌀한 봄바람 새벽들어 한층 더 미친 듯하구나 / 料峭東風曉更顚
붉은 꽃잎 땅을 덮도록 내버려두고 / 不禁落花紅襯地
휘날리는 버들개지 온 하늘에 자옥하구나 / 賸敎飛絮白漫天
물건너 높은 누각에 구슬발 걷히니 / 高樓隔水搴珠箔
꽃구경 가는 좋은 말 비단안장 빛나네 / 細馬尋香耀錦韉
금동이술 다 마시고 취하여 별원으로 돌아오노라니 / 醉盡金樽歸別院
단청한 난간가에 오색드림 나불리네 / 綵繩搖曳畫欄邊
하였다. 연산군이 크게 칭찬을 하며 금은 보화를 많이 하사하였다.
강혼(姜渾)의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진주인(晉州人)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응교(應敎) 기준(奇遵)이 온성(穩城)으로 귀양 가 있는데, 서울로부터 사약이 내려왔다. 그는 조용히 시를 읊어 스스로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해 지자 하늘은 먹빛 같고 / 日落天如墨
산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 山深谷似雲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 君臣千載意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 / 惆悵一孤墳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지게 한다.
기준의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 행주인(幸州人)이며, 벼슬은 응교(應敎)에 그쳤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최원정(崔猿亭)이 항상 화(禍) 입을까 두려워 세상 밖에 방랑했건만, 마침내 그의 숙부(叔父)의 참소를 받아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그가 만의사(萬義寺)에 제(題)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옛 불전에 몇 중이 있고 / 古殿殘僧在
나뭇가지엔 저물녘 경쇠소리 맑아라 / 林梢暮磬淸
산굽이는 천리나 아스라한데 / 曲通千里盡
담장은 우뚝 뭇산 하마 낮아 뵈네 / 墻壓衆山平
나무는 하 늙었으니 몇 살이나 되었누 / 木老知何歲
새들의 지저귐도 곳에 따라 유달라라 / 禽呼自別聲
어려운 세상 죄의 그물 근심했더니 / 艱難憂世網
오늘이야말로 부끄럽다. 나의 삶이여!/今日愧余生
시어(詩語)가 맑고도 빼어났다. 끝구는 대체 그 화 입을 것을 미리 헤아렸단 말인가?
원정의 이름은 수성(壽城), 자는 가진(可鎭), 강릉인(江陵人)이며, 처사(處士)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의 숙부 세절(世節)의 자는 개지(介之), 벼슬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다. 원정의 망천도시(輞川圖詩)는 다음과 같다.
가을달이 서녘산에 내리니 / 秋月下西岑
어두운 연기 먼 나무에 피어나네 / 暝煙生遠樹
끊어진 다리에 복건쓴 두 사나인 / 斷橋兩幅巾
그 누가 망천의 주인인지 / 誰是輞川主


장음정(長吟亭) 나공 식(羅公湜)은 웅장한 글과 곧은 절개가 천세에 빛난다.
외로운 배는 일찍 매어야만 하니 / 孤舟宜早泊
풍랑은 으레 밤 깊으면 더하다네 / 風浪夜應多
라는 구절은 선배들이 이미 칭찬하였던 것이고, 원숭이 그림 제한 절구 두 편을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호)은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칭찬하였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산원숭이 포도를 안고는 / 山猿擁馬乳
다리로 긴긴 가지를 밟는구나 / 脚踏長長枝
떨어진 열매 주울 때 / 收拾落來顆
뉘 능히 암수를 구별하리오 / 誰分雄與雌
또 이런 시도 있다.
늙은 원숭이 그 무리를 잃고 / 老猿失其群
마른 나무 등걸 위에 해는 지네 / 落日枯査上
동그마니 앉아 고개조차 까딱 않으니 / 兀坐首不回
아마도 일천 봉의 메아리 듣나 보네 / 想聽千峯響
아랫시가 더욱 기발하다.
나식(羅湜)의 자는 장원(長源), 안정인(安定人)이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의 문인. 을사사화에 형인 부제학(副提學) 숙(淑)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그의 여강시(驪江詩) 상구(上句)는 다음과 같다.
푸른 강가에 해는 저물고 / 日暮滄江上
하늘이 차니 물결은 절로 이네 / 天寒水自波
다른 야사(野史)를 참고해 보면 최원정(崔猿亭)의 시로 되어 있다. 그의 숙부인 세절(世節)이 이 시를 가지고 그를 참소했다고도 하나,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화원시(畫猿詩)의 아랫수를 《기아(箕雅)》에서는 원정(猿亭)의 시라고 하였는데, 혹 잘못이 아닌가 한다.


손곡(蓀谷) 이익지(李益之)의 한식시(寒食詩)에
배꽃에 비바람 치는 한식철인데 / 梨花風雨百五日
병객으로 떠돈 지 삼십년일세 / 病客江湖三十年
라든지, 임귀성(林龜城)에게 보낸 시에
해마다 떠돌이라 옷은 벌써 해어지고 / 頻年作客衣還弊
몇 달을 집 떠나니 허리품 줄었구나 / 數月離家帶有餘
범숙(范叔)의 이 가난 뉘 가엾이 여길 건가 / 誰憐范叔寒如此
소진(蘇秦)처럼 곤궁하여 못감을 스스로 비웃노라 / 自笑蘇秦困不歸
라든지, 노산묘시(魯山墓詩)에
봄바람에 귀촉새 울음 애닯고 / 東風蜀魄苦
해 저물녘 노릉은 스산도 해라 / 西日魯山寒
등의 시구는 대우(對偶)가 자연스럽고 침착하고 돈좌(頓挫)하다. 세상 사람들은 더러 바람 앞의 꽃이라 하여 결점으로 여기나, 글쎄 미처 생각을 못해서 하는 말이 아닌지?

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 시집 속에 ‘청산금야월(靑山今夜月)’이라는 시는 바로 용재(容齋) 이 문민공(李文愍公)의 작품으로 시법(詩法)이 같지 않다. 편찬한 자가 잘못 엮은 것이다. 내가 승축(僧軸)을 보니 충암(冲庵)의 시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고개 너머 한산사에 / 嶺外寒山寺
스님 만나니 문득 반가워라 / 逢師眼忽靑
돌샘 가의 같은 병든 나그네 / 石泉同病客
천지간에 하나의 부평초 / 天地一浮萍
성긴 빗속 가물거리는 등불은 싸늘한데 / 疏雨殘燈冷
잔 들자 들려오는 먼 바닷소리 / 持杯遠海聲
창 열고 거듭 두런거리다 헤어지니 / 開窓重話別
구름 설핏 샛별만 밝구나 / 雲薄曉星明
이 시가 본집에는 없으니, 당시 편자가 혹 미처 못본 것인가?
문민(文愍)의 이름은 행(荇), 자는 택지(擇之), 덕수인(德水人)이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었는데 문정(文定)이라 고쳤다가 다시 문헌(文獻)이라 고쳤다. 용재(容齋)의 제화시(題畫詩)는 다음과 같다.
후둑후둑 소상강에 비가 내리고 / 淅瀝湘江水
아스라이 보이네 반죽의 숲 / 依俙斑竹林
그러나 거기서 묘사키 어렵기는 / 此間難寫得
아황ㆍ여영의 심정 / 當日二妃心
서직사벽시(書直舍壁詩)는 다음과 같다.
늙마에 분주타 보니 병은 약속이나 한 듯 찾아오고 / 衰年奔走病如期
봄 흥취라야 많지 않으니 시까지 지을 건 없다 / 春興無多不到詩
졸다 깜짝 놀라 깨니 꽃철이 늦었구나 / 睡起忽驚花事晩
한 차례 보슬비가 장미를 적시누나 / 一番微雨濕薔薇
‘합천서 자규 소리를 듣다[陜川聞子規]’ 한 시는 다음과 같다.
강북 봄경치 밤이라 더 서글퍼서 / 江陽春色夜凄凄
잠깨자 까닭없이 나그네 맘 설레이네 / 睡罷無端客意迷
세상 만사 고향에 돌아감만 못하니라고 / 萬事不如歸去好
건너 숲에 울어대는 자규 소리 잦아라 / 隔林頻聽子規啼
주운영(朱雲詠)은 다음과 같다.
허리에 칼이 있으니 청할 게 무어 있소 / 腰間有劍何須請
땅밑에 사람 없어도 또한 노닐 만하네 / 地下無人亦足游
가석하다 한 나라 조정의 괴리령은 / 可惜漢廷槐里令
일생에 영신 머리 베기만을 알았구려 / 一生唯識佞臣頭


나의 중형이 언젠가 이손곡(李蓀谷)의 유송경시(遊松京詩) 가운데
대궐 앞 거둥하던 길엔 가을풀 스산하고 / 宮前輦路生秋草
누대 아래 격구하던 뜰엔 저녁 소를 먹이누나 / 臺下毬庭放夕牛
라는 구절을 칭찬하였으나 사인(舍人) 홍적(洪迪)의,
누대는 비었어도 반월대요 / 臺空猶半月
각은 황폐하나 옛 첨성각이네 / 閣廢舊瞻星
하는 시만큼 절실하지는 못하다.
홍적(洪迪)의 자는 태고(太古), 호는 하의(荷衣)이며, 남양인(南陽人)이다.

나의 중형이 일찍이,
“홍덕공(洪德公)ㆍ이명보(李明甫)의 시는 모두 일가라 이를 만한데, 홍덕공은 장편을, 이명보는 칠언율시를 특히 잘 짓는다.”
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또,
“명보(明甫)는 반드시 대제학(大提學)이 될 것이다.”
하더니, 후에 명보는 나이 겨우 서른이 넘자 대제학에 임명되고, 벼슬로는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대제학이 되리라던 말이 비로소 증명되었다. 홍(洪)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는 하였건만 불행히도 뜻을 얻지 못하여 벼슬이 변변치 못하였으니, 재주와 팔자는 이처럼 같지가 않다.
덕공(德公)의 이름은 경신(慶臣), 호는 녹문(鹿門)이며 남양인(南陽人)이다. 만정당(晩全堂) 가신(可臣)의 아우로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명보(明甫)의 이름은 덕형(德馨), 호는 한음(漢陰), 광주인(廣州人)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홍덕공(洪德公)의 봉래풍악가(蓬萊楓嶽歌)를 나의 중씨가 아침 저녁으로 한번 죽 읊으면서 장단을 맞추며 감탄하였다. 그 시는 이태백(李太白)의 천로음(天姥吟)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종횡(縱橫)ㆍ억양(抑揚)에 한 자도 세속에 찌든 태가 없다. 반통투수사(飯筒投水詞)ㆍ기택요(沂澤謠) 등 작품은 모두 호방하며 기력이 있으나, 율시(律詩)나 절구(絶句)는 장편만은 조금 못하고, 산문 또한 간결하고 엄정하다. 운부(雲賦)ㆍ격구부(擊毬賦) 같은 작품은 양봉래(楊蓬萊)가 몹시 부러워하며,
“사마 장경(司馬長卿)과 천년 뒤에 고하(高下)를 다툴 만하다.”
하였다.

명 나라 사람의 시를 이손곡(李蓀谷)은 하중묵(何仲黙 중묵은 하경명(何景明)의 자)으로 첫째를 꼽되 나의 중형은 이헌길(李獻吉 헌길은 이몽양(李夢陽)의 자)을 최고로 여겼고, 윤월정(尹月汀)은 이우린(李于麟 우린은 이반룡(李攀龍)의 자)을 그 두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여겼으니, 정론(定論)을 내릴 수 없다. 봉주(鳳洲 명(明)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말은,
“비교하자면 헌길(獻吉)은 높고 중묵(仲黙)은 통창하며 우린(于麟)은 크다.”
하고 그도 또한 누가 첫째요, 누가 다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익지(益之)가 하루는 율시 한 수를 내어 보이며,
“이것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 중묵의 시일세.”
하기에, 처음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
“이 시는 맑고 뛰어났으니, 율시 고르는 자가 빠뜨렸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의작일 겁니다.”
하니, 익지가 자기도 모르게 껄걸 웃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이불에 스미는 가을 기운에 밤은 깊어가고 / 客衾秋氣夜迢迢
그윽한 집 성긴 반딧불만 고요 속을 나는구나 / 深屋疏螢度寂廖
밝은 달은 뜰에 가득 서늘한 이슬은 함초롬 / 明月滿庭凉露濕
푸른 하늘은 물 같은데 은하수는 아득해라 / 碧天如水絳河遙
이별의 꿈 고개고개 넘다 깨니 / 離人夢斷千重嶺
대궐 누수 소리 십이교에 여운지네 / 禁漏聲殘十二橋
지척에서 새삼 동각로 그립건만 / 咫尺更懷東閣老
고관의 말굽 소린 하늘처럼 아득해라 / 貴門行馬隔雲霄
짜임새와 구어(句語)가 대복(大復 하경명의 호)과 꼭 같아서, 감식안(鑑識眼)이 있는 사람이라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 시는 바로 이익지가 월정(月汀)에게 올린 작품이다.
월정(月汀)의 이름은 근수(根壽), 자는 자고(子固), 해평인(海平人)이며 벼슬은 예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임진난에 신노 제이(申櫓濟而 제이는 자)와 같이 북쪽으로 가는데, 명종(明宗)의 제삿날이 되었다. 그가 객창(客窓)에서 다음과 같이 지었다.
선왕[明宗]이 이날 세상 뜨실 때 / 先王此日棄群臣
유언은 정녕 새 임금 부탁이었네 / 末命丁寧托聖人
선조 이십육년 종묘 제례도 못 모시게 되니 / 二十六年香火絶
센머리로 울부짖는 건 오직 유민들 / 白頭號哭只遺民
뜻이 몹시 서글퍼서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이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절(絶)’ 자를 고쳐 ‘냉(冷)’ 자로 하기도 하는데, 뜻은 좋으나 격은 먼저 글자만 못하다.
노(櫓)는 고령인(高靈人)이며 생원(生員)이다. 선대의 누로 과거에서 보류되어 급제를 못했다. 성민(聖民)의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 남양인(南陽人)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그쳤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명 나라 사람 등계달(滕季達)의 자는 진생(晉生)인데 오인(吳人)으로 글과 시를 잘하고, 글씨를 잘 쓰며, 또한 천하의 명산 대천을 두루 돌아다녔고 스스로 북해(北海)라 호하였다. 소재(小宰) 한세능(韓世能)이 계유년(1573, 선조6)에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북해(北海)가 따라왔는데, 그때 습재(習齋) 권벽(權擘)ㆍ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ㆍ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수행하였었다. 북해가 네 분과 서로 몹시 좋아하여 여러 번 시문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때, 나의 중형은 태사(太史 사관(史官)의 별칭)로 임금을 모시고 거침없이 일을 기록하자 조사(詔使)가 누구냐고 물으니 재상인 김계휘(金繼輝)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이름은 모요, 자는 모라 대답하였다. 북해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갑술년(1574, 선조7)에 나의 중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조천궁(朝天宮)에서 서로 만나보고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중형이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도 북해는 여러 번 사신 편에 편지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첨사(詹事) 황홍헌(黃洪憲)ㆍ도헌(都憲) 왕경민(王敬民)이 임오년(1582, 선조15)에 조서를 반포하러 올 때 북해가 나의 중형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하고, 또 그들에게,
“모의 벼슬이 선위사(宣尉使)가 되지 않았으면 반드시 도감(都監)이 됐을 것이오. 당신들은 그를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첨사가 의순관(義順館)에 이르러, 역관 곽지원(郭之元)에게 물어보고 중형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편지를 보이고 한편 쥘부채[手扇]를 선사하였다. 나의 중형도 율시를 지어 두 사신에게 인사하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번국(藩國 우리나라를 말함)에도 또한 인재가 있구려.”
하였다. 귀국하자 첨사가 북해에게,
“노형은 참으로 사람을 볼 줄 아십니다그려.”
하였다. 이것은 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에게 들은 말이다.
권벽(權擘)의 자는 대수(大手), 안동인(安東人)이며 벼슬은 감사(監司)이다. 정유일(鄭惟一)의 자는 자중(子中),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다. 한호(韓濩)의 자는 경호(景浩), 삼화인(三和人)이며 진사(進士)로 벼슬은 호군(護軍)이다. 김계휘(金繼輝)의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광주인(光州人)이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이다. 홍순언(洪純彦)은 역관(譯官), 남양인(南陽人)이며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었다.

사구(司寇) 정유일(鄭惟一)이 세상을 뜨자, 북해(北海)가 듣고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그리워라 지난날 현도 땅에 노닐 때 / 念昔游玄菟
청강 위에 일산을 기울이고 즐긴 일 / 傾蓋淸江上
싸늘한 달빛 감미로운 술잔에 일렁이고 / 寒月漾芳罇
눈송인 털방장에 엉기었었지 / 雪花凝毳帳
그해 다섯 사람은 다리에 올라 / 斯年五子上河梁
바람머리에 손잡고 일어나 세 번이나 노래 불렀지 / 握手臨風起三唱
헤어진 뒤 갑자기 신선이 되어 / 別來何自遽游仙
학 타고 놀 속 만릿길을 소요하다니 / 萬里逍遙鶴背煙
가을밤은 쓸쓸하고 화표주에 / 秋夜冷然華表柱
푸른 하늘 가없는데 그대 오기만을 바라누나 / 碧天無際望君還
말쑥하고 속기가 없어 읽으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중국인이 인재를 아끼기가 대개 이와 같다.

황 조사(黃詔使 황홍헌을 가리킴)의 시를 사람마다 시원찮게 여겼으나 나의 중형만은,
“이런 재주는 예로부터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했지만, 남들은 믿지 않았다. 《풍교운전(風敎雲箋)》에 첨사(詹事)의 글이 실린 것을 보면, 문법이 간결ㆍ엄숙하고 전아ㆍ미려하며 온후ㆍ순수하였으니 나의 중형은 인재를 아는 분이라고 할 만하다.
중추(中樞) 최립(崔岦)은 문장이 간결(簡潔)하고도 예로워서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더러 그의 시는 문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랑(正郞) 하응림(河應臨)을 제(祭)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 찍는 소리 쩡쩡 울려라 산새도 슬퍼하네 / 伐木丁丁山鳥悲
홀로 와 어느 가지에 칼을 건단 말가 / 獨來懸劍向何枝
재주와 명망이 당시의 비방을 이기지 못했는데 / 才名不救當時謗
사귐 도는 응당 저승 가야 알리라 / 交道還應入地知
영해에서 작별한 뒤에 영 이별을 하다니 / 瀛海別回爲此別
역정에서 시 지은 뒤 그대 시가 끊어졌네 / 驛亭詩後斷君詩
평생 술만 보면 다 마시고야 마시던 님 / 平生對酒須皆飮
궤연에 부어놓은 한잔 술 살피실지 / 倘省靈牀奠一卮
역시 근엄하고도 기발하며 건장하니 어찌 문만 못하다 할 것인가.
최립(崔岦)의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 통천인(通川人)이며 벼슬은 형조 참판이다. 하응림(河應臨)의 자는 대이(大而), 호는 청천(菁川), 진주인(晉州人)이다. 경재(敬齋) 하연(河演)의 오대손(五代孫)이며 벼슬은 수찬(修撰)이다.

나의 중형은,
“문장을 배우려면 반드시 한퇴지(韓退之) 글을 익히 읽어, 우선 문호를 세우고, 다음으론 《좌씨전(左氏傳)》을 읽어 간결체를 배우고, 다음에는 《전국책(戰國策)》을 읽어 문장력이 종횡무진케 하고, 다음에는 《장자(莊子)》를 읽어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솜씨를 연구하고, 《한비(韓非)》ㆍ《여람(呂覽)》으로 지류를 통창케 하고, 《고공기(考工記)》ㆍ《단궁(檀弓)》을 읽어 뜻을 가다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익히 읽어 자유자재롭고 뛰어난 태를 키우는 것이다. 시를 배울 때는 먼저 《당음(唐音)》을 읽고, 다음으로 이백(李白)의 시를 읽되, 소동파(蘇東坡)ㆍ두목(杜牧)은 그 솜씨만 따면 그만이다.”
하였다.

나의 중형은 언젠가,
“내가 평생에 번천(樊川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호)을 익히 읽은 탓으로 문장이 높지 못하다.”
고 한탄하였고, 이익지(李益之) 또한,
“소동파ㆍ황산곡의 시가 내 폐부에 달라붙은 지가 이미 오래인지라, 시어를 만듦에 성당(盛唐)의 품격이 없다.”
하였다. 그러나 시 짓기를, 소동파ㆍ황산곡처럼 하면 그만이지, 하필 새삼스레 도연명(陶淵明)ㆍ사영운(謝靈運) 사이를 꾀할 것인가.

나의 중형의 만년의 글은 유자후(柳子厚)와 너무도 같아서, 주한정기(晝寒亭記)ㆍ축려문(逐癘文) 등 작품은 가히 대씨당(戴氏堂)ㆍ축필방(逐畢方)등 문과 서로 어슷비슷하다. 최입지(崔岦之)가 화기(畫記)에 대해서 말하기를 철로보지(鐵鑪步志)만 못지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명(碑銘)과 묘지(墓誌)는 무엇보다도 그의 장기인데도 세상 사람은 다 모르고, 보아도 아는 이가 드무니, 후세에 반드시 양웅(揚雄)이 있어 알아 줄 것이다.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서울을 함락하고 바로 철령(鐵嶺)을 넘었다. 장계(長溪) 황정욱(黃廷彧)이 북청(北靑) 진남루(鎭南樓)에 올라 한탄하기를,
“정입부(鄭立夫)가 살았더라면 왜놈이 어찌 능히 철령을 넘었으랴.”
하더니, 7월에 회령(會寧)에서 사로잡혔다. 장계의 문장은 우뚝하고 웅건하며 속기가 없다. 조선초로부터 문병(文柄)을 잡은 자가 모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자 가운데서 나왔지만 장계만은 그렇지가 않아 세상에선 그를 영화롭게 여기지만 지난해 난리에 화를 유달리 더 입었다.
황정욱(黃廷彧)의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장수인(長水人)이며 벼슬은 병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입부(鄭立夫)의 이름은 언신(彦信), 호는 나암(懶庵),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우의정인데, 기축년(1589, 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원통하게 죽었다. 뒤에 신원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병부 주사(兵部主事) 왕사기(王士驥)는 봉주(鳳洲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아들로 우리나라 사신의 복물(卜物 사신이 가지고 가는 공물(貢物))을 검열하러 왔다가 마침 한집에 있게 되었다. 통역을 통하여 우리나라 문장을 보기 원하자 어떤 이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호)가 지은 정암(靜庵) 비문(碑文)을 보였다. 주사가 소매에 넣고 가며,
“우리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또
“명(銘)은 추역산송(鄒嶧山頌) 같으면서도 광염(光焰)은 더하고, 서(序)는 법언(法言) 같으면서도 넓고 크기는 그보다 나으니, 당신네 나라에도 이런 인물과 이런 문장이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고 한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자는 효직(孝直), 한양인(漢陽人)이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소재(蘇齋)의
바다 달에 벌레 소리는 끝지고 / 海月蟲音盡
산 바람에 이슬 기운 걷혔네 / 山風露氣收
라는 구절은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호)의 시집 중에서 찾는다 해도 흔히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애초에 우의정 사임하고 / 初辭右議政
문득 판중추 되었다네 / 便就判中樞
라는 구절은 대우(對偶)가 자연스러워 솜씨를 부리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간 자기 아버지 신도비(神道碑)를 지을 때는 밋밋하여 굴기(崛奇)한 곳이 없으니, 아마도 기발하게 하려고 마음 쓰다가 도리어 옹졸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중형은 논평하기를, 국초 이래 문은 경렴당(景濂堂)을 제일로 치고, 지정(止亭)을 다음으로 치며, 시는 충암(冲庵)의 높음과 용재(容齋)의 난숙함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충암은 세련되지 않은 것 같고 용재는 너무 진부하니, 시 또한 경렴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지정 남곤(南袞)의 자는 사화(士華), 의령인(宜寧人)이며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기묘사화 때 간인(奸人)의 괴수이다.

가사(歌詞)를 지으려면 반드시 글자의 청탁(淸濁)과 율(律)은 고하(高下)를 분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음률(音律)은 중국과 달라서, 가사를 짓는 이가 없다.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이 왔을 때,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이 차운하지 않자, 세상에서는 체면을 유지했다고들 하였다. 그 후에 소퇴휴(蘇退休)가 시강(侍講)의 운에 차운한 시에,
마음이 서글픈 이 발 걷고 다시 보니 / 傷心人復卷簾看
꽃다운 풀빛 위에 눈길이 멈추네 / 目斷凄凄芳草色
라는 구절은 화공(華公)이 여러 차례 칭찬하였으니, 모두 음률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다만 그 말씨의 아름다움을 취한 것인지?
소퇴휴의 이름은 세양(世讓), 자는 언겸(彦謙), 진주인(晉州人)이며 벼슬은 찬성(贊成)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나의 누님이 언젠가 ‘시를 지으면 운율에 맞다’고 차칭하면서 소령(小令)짓기를 좋아하기에, 내 속으로 남을 속이는구나 하였는데, 《시여도보(詩餘圖譜)》를 보니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으로, 어떤 자는 전청(全淸)ㆍ전탁(全濁)이고 어떤 자는 반청(半淸)ㆍ반탁(半濁)이라 하여 글자마다 음을 달았기에 시험삼아 누님이 지은 시를 가지고 맞추어 보니, 어떤 것은 다섯 자 어떤 것은 세 자의 착오가 있을 뿐, 크게 서로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걸출ㆍ고매한 천재적인 소질로 겸손하게 힘썼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성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가오(漁家傲)’ 한 편은, 모조리 음율에 맞고 다만 한 자가 맞지 않았다. 사(詞)는 다음과 같다.
뜰에는 봄바람 스산하고 / 庭院東風惻惻
담머리엔 한그루 배꽃 희어라 / 墻頭一樹梨花白
옥난간에 기대어 고향 그리나 / 斜倚玉欄思故國
갈 수는 없고 / 歸不得
하늘과 맞닿은 우거진 꽃다운 풀빛만이 / 連天芳草凄凄色
비단방장 비단창도 쓸쓸히 닫겼는데 / 羅幙綺窓隔寂寞
단장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 적시네 / 雙行粉淚霑朱臆
강북과 강남은 무성한 나무가 가리었는데 / 江北江南煙樹隔
이 그리움 어이하리 / 情何極
산 높고 물은 아득 님 소식은 없으니 / 山長水遠無消息
‘주(朱)’ 자는 마땅히 반탁(半濁)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주(朱)’ 자는 전탁(全濁)이다. 하긴 소장공(蘇長公) 같은 재주로도 굳이 운율에 맞추지를 않았거든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일까보냐.

나의 중형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쓸쓸한 들에 북두성 자루는 드리웠고 / 斗柄垂寒野
부서진 배 여울 모래에 놓였구나 / 灘沙閣敗船
이것을 소재(蘇齋) 상공이 몹시 칭찬하여 당인(唐人)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나의 중형의 산역에 살다[居山驛]라는 시는 이러하다.
새벽 별빛 아래 먼 길 떠나는 고각 소리 들리는데 / 長路鼓角帶晨星
터벅터벅 청주 고역정으로 향한다 / 倦向靑州古驛亭
나하동 그윽하고 산은 웅기중기 / 羅下洞深山簇簇
시중대(侍中臺)를 감도는 바다는 아득아득 / 侍中臺廻海冥冥
천년 전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혀 짧고 / 千年折戟沈沙短
십리 황무지는 비 온 뒤에 비린내 나네 / 十里平蕪過雨腥
옛일은 아득해라 물을 데 없고 / 舊事微茫問無處
두어 가락 젓대 소리 차마 어이 들을 건가 / 數聲橫笛不堪聽
삭계례(朔啓例)에 따라 그 시가 대궐에 들어가니, 주상이 보고 몇 번이나 감탄하고는 오륙구(五六句)에 이르러서는,
“작구법(作句法)이 의당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조사(詔使) 황번충(黃樊忠)이 거련관(車輦館)의 반송(蟠松)을 읊었는데, 그 맨 끝구에 한(韓) 자를 압운하니, 나의 중형이 한 선자(韓宣子)가 각궁(角弓)을 읊은 일을 인용하여 짓기를
라 하였다. 이숙헌(李叔獻) 선생이 그 당시 원접사였는데 이 시를 버리고 쓰지 않자, 고제봉(高霽峯)이 크게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홍당릉(洪唐陵)이 몰래 황공(黃公)에게 보이니, 황공이 전편을 손으로 베껴 가져오게 하고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었다. 중국 사람은 시의 공정을 아는 것이 이러하다.
숙헌(叔獻)의 이름은 이(珥), 호는 율곡(栗谷), 덕수인(德水人)으로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당릉(唐陵)은 당성(唐城)의 잘못인 듯하다. 당성은 역관 홍순언(洪純彦)의 호이다.
율곡(栗谷)의 산중절구는 다음과 같다.
약 캐다 갑자기 길을 잃으니 / 采藥忽迷路
산마다 온통 가을 낙엽뿐 / 千峯秋葉裏
산승이 물 길어 오더니 / 山僧汲水歸
숲가에 피어나네 차 달이는 연기 / 林末茶煙起
성을 나서는 느꺼움[出城感懷]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사방에는 먹구름만 가득해도 / 四遠雲俱黑
중천엔 해 정히 밝구나 / 中天日正明
외론 신하의 한줌 눈물을 / 孤臣一掬淚
한양성 향하여 뿌리노라 / 灑向漢陽城


근세 어떤 선비가 지리산(智異山)에 유람갔는데, 한 외진 숲에 이르니, 폭포는 이리저리 흐르고 푸른 대 우거진 가운데 한 띳집이 있는데,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섰다가, 선비를 보고는 몹시 반기며 손을 맞아 솔 아래 앉혀 놓고 막걸리에 나물국으로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이 늙은 것이 평소에 머리 빗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꼭 천 번은 빗어내린다오.”
하면서 쪽지를 내어 놓는데, 그 속에 든 것이 바로 머리를 빗는다는 소두시(梳頭詩)였다.
얼레빗으로 솰솰 가려 낸 다음 참빗으로 훑되 / 木梳梳了竹梳梳
천 번이나 훑어내니 이는 벌써 없어졌네 / 梳却千廻蝨已除
어떻게 하면 만 길 되는 큰 빗 구하여 / 安得大梳長萬丈
백성의 이 모조리 훑어 없앨꼬 / 盡梳黔首蝨無餘
선비가 자신도 모르게 뜰 아래 내려가 절하고 그 이름을 물으니 숨기고 알려 주지 않았다. 이튿날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는 두세 사람이 같이 다시 찾아가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성혼 호원(成渾浩原 호원은 자) 선생이 청양군(靑陽君)을 애도한 시에,
속세에 벼슬살이 진정 뉘가 참인고 / 宦遊浮世定誰眞
역려에서 만나니 바로 친구일레 / 逆旅相逢卽故人
오늘의 이별 자리 한 가락 노래로 / 今日祖筵歌一曲
고향 봄동산에 가서 누울 그대 전송하네 / 送君歸臥舊山春
하였으니, 이른바 길게 읊는 가락의 서글픔이 통곡보다 더하다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선생의 호는 우계(牛溪)이고 창녕인(昌寧人)이다. 벼슬은 참찬(參贊)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庵)이며, 청송인(靑松人)으로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차천로 복원(車天輅復元 복원은 자)의 글은 당시 사람들이 웅문(雄文)이라 일컬었다. 글(文)이란 기(氣)로써 주를 삼아야 하건만 복원(復元)은 하찮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고, 사륙문(四六文)은 전아(典雅)해야 하는데도 복원의 사륙문은 순정치 못하고 거칠다. 시는 그보다 더 못하다. 그의 일본기행고(日本紀行稿)가 매우 많아 천여 수나 되지만, 읊을 만한 글귀는 하나도 없다. 다만 명천(明川)으로 귀양 갈 때 지은
하늘가에 성난 소린 발해의 파도 / 天外怒聲聞渤海
눈속에 시름겹긴 음산의 빛이로다 / 雪中愁色見陰山
라는 구절은 정말 웅혼(雄渾)하다. 그러나 전편이 다 그렇지는 못하다. 만약 복원이 조금만 사리를 추구하여 많이 짓거나 빨리 짓는 데 치우치지만 않았다면, 고인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천로(天輅)의 호는 오산(五山)이며, 연안인(延安人)으로 벼슬은 봉정(奉正)이다.

복원(復元)이 이필이 형산에 돌아가기를 비는 표[李泌乞還衡山表]를 지었는데,
객성이 임금자릴 여러번 침범하고 / 屢犯客星於帝坐
늘 경월이 천혼을 두드렸네 / 常叩卿月於天閽
라는 구절이 있어 세상에서 적절하다고 일컬었다. 우리 중형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가는 윤칠계(尹漆溪)를 보내는 시의 항련(項聯)에 역시
경월이 잠시 대궐을 하직하자 / 卿月暫辭天北極
복성이 먼저 낙동강을 비추누나 / 福星先照洛東江
라는 구절이 있으니, 차천로의 표에 비하면 나은 것 같다.
칠계(漆溪)의 이름은 탁연(卓然),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이며 칠원인(漆原人)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한익지(韓益之)가 어떤 일로 파직되어 농사를 짓기로 하고 온 식구가 원주로 내려갔다. 배가 종실(宗室) 순치수(順致守)의 별장에 닿았는데, 수(守)는 마침 활을 쏘고 약을 캐던 터라 사람을 달려 보내어 누구냐고 물어왔다. 익지(益之)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절구 한 수로 대구하기를
공자의 풍류가 무리에 뛰어나니 / 公子風流自不群
봄이 오자 살구꽃 마을에 낚시질하네 / 春來漁釣杏花村
쪽배 탄 나그네가 정겹게 문안드리니 / 扁舟過客勤相問
이 사람은 금양의 옛 원이라오 / 我是衿陽舊使君
라 하자 수가 배를 타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한익지는 금천 군수로 있다가 파면되어 가는 중이고, 순치(順致)는 금천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익지(益之)의 이름은 준겸(浚謙), 호는 유천(柳川)이다. 청주인(淸州人)으로 벼슬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인조의 장인이다.

이익지(李益之)가 최가운(崔嘉運)을 따라 영광(靈光)에 노닐 적에, 사랑하는 기생이 있어 자금(紫錦)을 사주려는데, 그 비단 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익지가 시로써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장사아치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니 / 商胡賣錦江南市
아침 해가 비치자 자주빛 안개가 피어나는구나 / 朝日照之生紫煙
미인은 그걸 사서 치마며 허리띠를 만들려는데 / 美人欲取爲裙帶
주머니 더듬어야 돈은 없구려 / 手探囊中無直錢
가운(嘉運)이 말하기를,
“손곡(蓀谷)의 시는 한 자가 천금이니 감히 비용을 아끼랴.”
하고는 한 자에 각각 세 필씩 쳐서 그 요구에 응해 주었으니, 그 재주를 아낌이 이와 같았다.

동파(東坡)의 시에
슬프다 사하 물가 십리의 봄 / 惆悵沙河十里春
한 차례 꽃 이울자 다음 꽃 새로워라 / 一番花老一番新
비낀 저녁 놀에 작은 누각 예 같건만 / 小樓依舊斜陽裏
그 당시 춤추던 이 어디 갔는지 / 不見當時垂手人
라는 것이 있는데, 손곡(蓀谷)이 죽은 아내를 슬퍼한 시에도 또한 동파의 말을 답습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깁 방장엔 향내 가시고 거울엔 먼지 / 羅幃香盡鏡生塵
닫힌 문엔 복사꽃만 쓸쓸한 봄날 / 門掩桃花寂寞春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달은 밝은데 / 依舊小樓明月在
발 걷고 달 즐길 이 그 누구런가 / 不知誰是捲簾人
이 시는 무르녹게 곱고 정겨워 전사람의 말을 쓴 줄도 모를 정도다. 익지(益之)가 기생을 너무 좋아한 것으로 남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정에 끌린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당 나라 장우(張祐)와 최애(崔涯)가 창루(娼樓)에 제시(題詩)를 해 주었는데, 만약 칭찬을 하면, 네 말[馬]이 끄는 수레가 그 문을 메우고, 그 시가 기생을 헐뜯으면 손님도 끊겼다. 신차소(申次韶) 선생이 상림춘(上林春)이라는 기생에게 준 시에
제오교 머리에 내 낀 버들 비꼈고 / 第五橋頭煙柳斜
밤들자 바람 자고 날씨도 해맑아라 / 晩來風日轉淸和
노르스름한 열두 난간에 아가씨 옥과 같으니 / 緗簾十二人如玉
대궐 안 시인들도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 靑瑣詞臣信馬過
라 하니, 기생의 명성은 이로 인해 십배나 올랐다. 이익지(李益之)가 옥하선(玉河仙)이란 기생을 비웃기를
빗자루 같은 머리털 그나마 센데다가 / 頭如刷箒色如銀
암말 않고 앉은 꼴 귀신 같구나 / 黙坐無言似鬼神
몸에 걸친 비단옷도 얻어 입은 듯 / 遍身綺羅疑借著
고작해야 곽충륜에게나 시집가겠군 / 只宜終嫁郭忠輪
이라 하였다. 충륜(忠輪)은 장님인데 돈은 있었다. 이 기생은 유명했었으나 익지(益之)의 시가 나오자 문득 그 집이 쓸쓸해졌다. 똑같이 이름난 기생이로되, 한 시로 그 값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었으니, 어찌 다만 기생뿐이겠는가? 대개 선비도 이와 같았다.
차소(次韶)의 이름은 종호(從護), 호는 삼괴(三魁)로 고령인(高靈人)이다. 벼슬은 예조 참판에 이르렀는데, 연경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송도에서 죽었다.
삼괴(三魁)의 상춘(傷春) 절구에
한 사발 차 마시자 졸음 막 깨니 / 茶甌飮罷睡初醒
이웃에서 들려오는 붉은 옥피리 소리 / 隔屋聞吹紫玉笙
제비도 오잖고 꾀꼬리도 날아갔는데 / 燕子不來鸎又去
뜰에 가득 붉은 꽃잎만 지네 소리도 없이 / 滿庭紅花落無聲
라는 시가 있다.


임자순(林子順)은 스스로 소치(笑癡)라 호하였다. 우리 중형이 언젠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지었는데, 화치(和癡)의 고사를 따서 이십사령(二十四令)을 지었다. 자순(子順)이 칠언시로 제하기를
추리고 가린 명기 스물넷인데 / 揀得名花二十四
소치의 차지는 하나도 없네 / 笑癡之物一無之
인간 만사 다 거짓이라고 / 人間萬事皆虛僞
곳곳마다 풍류랑은 소치라 말들 하네 / 處處風流說笑癡
라 하였는데, 그의 글은 흔히 볼 수가 없다. 이른바 《수성지(愁城志)》라는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로 특별한 글이니, 천지간에 절로 이런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익지(益之)의 시를 세상 사람들은 기생에 대한 실수 때문에 트집을 잡지만, 그의 동산역시(洞山驛詩)에
이웃집 어린 며느린 저녁거리도 없어 / 隣家少婦無夜食
비맞으며 보리 베어 풀섶길로 돌아오네 / 雨中刈麥草間歸
축축한 생솔가지 불도 안 붙는데 / 靑薪帶濕煙不起
문 들어서자 어린 것들 옷 잡고 칭얼대네 / 入門兒女啼牽衣
라 하였으니, 시골 살림의 식량 딸리는 보릿고개 실정을 직접 보는 듯하다. 그의 이삭줍기노래[拾穗謠]에는
논에서 이삭 줍는 어린이 하는 말 / 田間拾穗村童語
온 종일 이리저리 주워야 소쿠리도 안 차요 / 盡日東西不滿筐
올해는 벼 베는 이 솜씨 하 좋아 / 今歲刈禾人亦巧
한톨이라도 흘릴세라 관창에 다 바쳤대요 / 盡收遺穗上官倉
라 하였으니, 흉년에 시골 사람의 말을 마치 친히 듣는 듯하다. 영남도중(嶺南道中)이란 시에서는
영감은 솥 지고 숲길로 가버렸는데 / 老翁負鼎林間去
할멈은 어린 것을 데리고 따라가질 못하네 / 老婦携兒不得隨
사람 만나 떠돌아다니는 괴로움 넋두리하되 / 逢人却說移家苦
종군하기 육년이라 부자도 이별이라오 / 六載從軍父子離
라 하였으니,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살 수 없어 유리 신고하는 모습이 한편에 갖추 실려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놀라 깨달아, 고달프고 병든 자를 어진 정치로 잘 살게 한다면, 그 교화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 할 것인가. 문장을 지음이 세상 교화와 관계가 없다면 한갓 짓는데 그칠 뿐일 것이니, 이러한 작품이 어찌 소경의 시 외는 소리나 솜씨 있는 간언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망헌(李忘軒 망헌은 이주(李冑)의 호)이 진도(珍島)로 귀양 갈 때, 이낭옹(李浪翁 낭옹은 이원(李黿)의 자)을 작별하는 시에
바닷가 정자에 가을밤도 짧은데 / 海亭秋夜短
이번 작별에 새삼 무슨 말 할꼬 / 一別復何言
궂은비는 깊은 바닷속까지 연하였고 / 怪雨連鯨窟
험상궂은 구름은 변방에까지 이었네 / 頑雲接鬼門
흰 구레나룻에 파리한 안색 / 素絲衰鬢色
두려운 눈물 자국 적삼에 그득 / 危涕滿痕衫
이소경(離騷經)의 말을 가지고 / 更把離騷語
그대와 꼼꼼히 따질 날 그 언제런가 / 憑君欲細論
라 하였다. 그가 제주도로 이배(移配)될 제, 배가 막 뜨려는데 친동생이 뒤쫓아 왔다.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어 작별하기를
찌걱거리는 노 굳이 멈추고 한평생을 서러워하니 / 强停鳴櫓痛平生
백일은 밝게밝게 우리 형제를 비추네 / 白日昭昭照弟兄
정위새 와서 바다를 메우기만 한다면 / 若敎精衛能塡海
한 덩이 탐라도를 걸어서도 가련만 / 一塊耽羅可步行
하였으니 천년 뒤에도 읽는 이의 애를 끊어지게 하리라. 김경림 명원(金慶林命元 경림은 봉호)이 우리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낭옹(浪翁)의 이름은 원(黿),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며, 경주인(慶州人)이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장류(杖流)되었고, 갑자년에 원통하게 죽었다. 망헌(忘軒)의 아우의 이름은 여(膂), 자는 홍재(弘哉)이고 벼슬은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명원(命元)의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이고 경주인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우리 형의 이름은 성(筬), 자는 공언(功彦)인데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호는 악록(岳麓)이다.
망헌(忘軒)의 만성시(漫成詩)에
나이 드니 풍상은 두렵기만 하고 짓궂은 병은 더욱 떠날 줄 모르는데 / 老怯風霜病益頑
외로운 처마 아침해에 포단에 앉았네 / 一簷朝旭坐蒲團
이웃 중이 가버린 뒤 사립 다시 닫았는데 / 隣僧去後門還掩
산구름만 돌난간을 스쳐 지날 뿐 / 只有山雲過石欄
이라는 것이 있다. 중에게 준[寄僧] 시는 또 다음과 같다.
종소리는 달을 두드려 가을 구름에 지고 / 鍾聲敲月落秋雲
산비는 주룩주룩 그대는 안 보이네 / 山雨翛翛不見君
염정은 닫히고 불길만 보이는데 / 鹽井閉門唯有火
개울 너머 인기척 밤깊도록 두런두런 / 隔溪人語夜深聞


한 경홍 호(韓景洪濩)는 글씨를 잘 쓸뿐더러 시도 잘 지었다. 그러므로 한경당(韓敬堂 경당은 한세능(韓世能)의 호)ㆍ등북해(滕北海 북해는 등계달(滕季達)의 호)ㆍ황규양(黃葵陽 규양은 황홍헌(黃洪憲)의 호)이 모두 그를 시인으로 대접했다. 임궁아집시(琳宮雅集詩)를 경홍(景洪)에게도 운을 화작하게 하였으니, 중국인이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언젠가 《봉주집(鳳洲集)》을 보니, 한 태사(韓太史)의 《동행록(東行錄)》에 발문을 지은 것이 있는데, 거기에서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를 칭찬하되 액자(額字)는 양속(羊續)보다 나아서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고 해서(楷書)는 왕헌지(王獻之)와 비슷하고 초서(草書)는 바로 회소(懷素)와 같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경홍을 잘 알아주었다고 하겠다.
다른 책을 상고하면 호(濩)의 자는 경호(景浩)인데, 여기서 경홍(景洪)이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혹은 자가 둘인지?
근세에 이현욱(李顯郁)이라는 이가 있어 시마(詩魔)에 걸렸는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 상공(相公)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굉장히 칭찬을 하였다. 이익지(李益之)가 어느 날 상공을 뵈러 가니 상공은 현욱(顯郁)의 시를 보여주며 그에게 고하(高下)를 품평케 하였다. 그러자 이익지는
봄이 오는 걸음걸인 느릴 것도 없고 서두는 것도 아닌데 / 步復無徐亦不忙
봄빛은 동서남북으로 고루 비치네 / 東西南北遍春光
라는 구절을 들어,
“이것은 정말 문장가의 말투입니다. 우리나라 서ㆍ이(徐李) 같은 분도 일찍이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나이도 어리니 필경 시마(詩魔)가 붙은 것입니다.”
하였지만, 상공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으나 얼마 있다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허영주(許郢州)에게 차운한 시에
봄 산길 외져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물으니 / 春山路僻問歸樵
손가락으로 앞산 돌길을 가리키네 / 爲指前峯石逕遙
중도 백운도 어두운 골짜기로 돌아간 뒤 / 僧與白雲還暝壑
달은 푸른 바다 찬 밀물을 따라 오르네 / 月隨滄海上寒潮
세상살이 늙을수록 도무지 믿을 수 없는데 / 世情老去渾無賴
유흥만은 요즘에도 삭을 줄 모르누나 / 遊興年來獨未銷
둘러보니 외로운 배 벌써 자취 아득한데 / 回首孤航又陳迹
물 건너 드문 종소리만 한밤에 은은해라 / 疏鐘隔渚夜迢迢
라 하였고, 이익지에게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에 휘몰려 놀란 기러긴 편편한 모래밭에 내려앉고 / 風驅驚雁落平沙
물맵시 산빛엔 어스름 빛 자욱해라 / 水態山光薄暮多
용면(龍眠)시켜 이 경치 그림폭에 옮기려 하는데 / 欲使龍眠移畫裏
고깃배의 젓대소린 이를 어쩐다지 / 其如漁艇笛聲何
말들이 모두 속기가 없고 격이 또한 노숙하다. 시마(詩魔)가 떠난 뒤로는 일자무식이 되어 마치 추매(椎埋)처럼 되어버렸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자는 여수(汝受)이고 한산인(韓山人)인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용(鄭鎔)의 아들 백련(百鍊)이 일찍이 중풍에 걸렸는데 하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어떤 젊은 서생을 만났는데,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용모는 눈빛[玉雪] 같았다.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당 나라의 아사(雅士) 요개(姚鍇)로 이장길(李長吉 장길은 이하(李賀)의 자)과 친한 친구 사이인데, 안탕산(雁蕩山)에 산 지 2백년이 된다. 조선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기에 한라산에 옮겨 산 지도 천 년 가까이 되었다. 다시 금강산으로 가려고 하다가 자네와 인연이 있으므로 삼각산에 와 살게 되었다. 그런 지도 벌써 30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여기에 왔다.’고 했다.”
하였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만리라 큰 바다에 날은 저문데 / 萬里鯨波海日昏
벽도꽃 그림자 하늘문에 비치네 / 碧桃花影照天門
신선 수레 한 번 쉬면 천년이 훌쩍 지난다던데 / 鸞驂一息空千載
구령의 신선 피리 소리 한밤에 들리누나 / 緱嶺靈笛半夜聞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삼각산에 깃든 지 삼십년인데 / 棲身三角三十春
남녘 구름 바라보며 늘 울었네 / 日日每向南雲哭
솔바람 소리는 용음 소리만 못한데 / 松風不如龍吟聲
난안은 또 삼릉학만 못하도다 / 蘭雁又下三陵鶴
삼릉학은 오지를 않고 / 三陵鶴不來
촉도봉 앞엔 가을 달만 어둡구나 / 蜀道峯前秋月黑
어떤 이가 난안(蘭雁)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난초가 시들 무렵이면 철새인 기러기가 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한 해 남짓 지나더니 시마(詩魔)가 떠나자 병도 나았다. 이현욱(李顯郁)의 시마는 장편 대작도 다 지을 수 있었고, 산문(散文)도 다 원숙했는데, 정백련에게 걸린 시마는 격은 현욱보다 나았지만 율시는 절구에 못 미쳤으니, 더구나 그 문(文)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요개(姚鍇)의 이름은 전기(傳記)나 소설(小說)에도 보이지 않으니, 혹 당 나라 말기에 절구로 이름난 이가 아닌가 한다. 우리 중형은 그의 오언 절구를 사랑하여 성당(盛唐)에 못지 않다고 여겼다. 그가 노산(魯山)의 구택(舊宅)에 제(題)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복사꽃 핀 강 언덕을 지나가고 / 人度桃花岸
말은 버들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 운다 / 馬嘶楊柳風
노을진 산 그림자 속에 / 夕陽山影裏
노산군댁은 쓸쓸도 하여라 / 寥落魯王宮
청명날 남에게 주다[淸明日贈人]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이월이라 제비가 바다를 뜨니 / 二月燕辭海
고을마다 꽃이 가득할 때로다 / 千村花滿辰
청명이면 으레 취한 지도 / 每醉淸明節
올 들어 하마 삼십년일세 / 至今三十春
춘만(春晩)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봄잠 자고 나서 술잔 따르니 / 酒滴春眠後
걷은 발 앞에 꽃이 흩날리네 / 花飛簾捲前
덧없는 인생 얼마나 살리 / 人生能幾何
비 내리는 하늘을 창연히 바라보네 / 悵望雨中天
추일(秋日)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국화는 빗속에 꽃 드리우고 / 菊垂雨中花
뜨락의 오동잎은 가을에 놀래누나 / 秋驚庭上梧
오늘아침 갑절이나 서글퍼짐은 / 今朝倍惆悵
어젯밤 시골 꿈을 꾸어서일세 / 昨夜夢江湖
그의 문금(聞琴)이란 시는 이러하다.
아름다운 여인 붉은 비파를 끼고 / 佳人挾朱瑟
삐비 같은 섬수를 희롱하누나 / 纖手弄柔荑
갑자기 유수곡 타니 / 忽彈流水曲
집이 고릉 서녘에 있네 / 家在古陵西
익지가 또,
밝은 달은 큰바다 저문 줄도 모르고 / 明月不知滄海暮
구의산 기슭엔 흰 구름만 자욱 / 九疑山下白雲多
이란 구절을 전해 주었는데, 이런 구절은 이미 꿈의 경지에 든 것이다. 백련(百鍊)의 아우 감(鑑)은 나와 절친하므로, 상세한 얘기를 갖추 들었다.
용(鎔)의 호는 오정(梧亭)이고 해주인(海州人)이다. 시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일찍 죽었다. 감(鑑)의 호는 삼옥(三玉)인데 벼슬은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김충암(金冲庵)의 비로봉에 올라서[登毗盧峯]란 시에
해는 비로봉 위에 지고 / 落日毗盧峯
동해는 먼 하늘인 양 아스라해라 / 東溟杳遠天
푸른 바위에 불을 지펴 자고 / 碧巖敲火宿
옷소매를 나란히 자욱한 안개 속을 내려오다 / 聯袂下蒼煙
하였는데, 우리 중형의 시는
팔월이라 한가위 밤에 / 八月十五夜
비로봉 위에 홀로 서다 / 獨立毗盧峯
계수나무에 하늘 서리 차갑고 / 桂樹天霜寒
하늬바람결에 외기러기 그림자 / 西風一雁影
라 하였으니 충암(冲庵)의 시와 같은 가락이라 할 만하다.

고이순(高而順 이순은 고경명(高敬命)의 자)의 귤시(橘詩)는 다음과 같다.
평생을 소강남에서 마음껏 조으니 / 平生睡足小江南
귤밭 속 길이란 훤하여라 / 橘柚林中路飽諳
주황빛 열맨 예같건만 어버인 기다려 주질 않으시니 / 朱實宛然親不待
육적(陸績)이 있은들 그 뜻 어이하리 / 陸郞雖在意難堪

심어촌(沈漁村 어촌은 심언광(沈彦光)의 호)의 두견시(杜鵑詩)는 다음과 같다.
삼월이라 임금 여읜 이 마음 아픈데 / 三月無君弔此身
두견새 울음에 한결 더 슬프구나 / 杜鵑聲裏更悲辛
산중에서도 신하의 도리 폐치 않으니 / 山中不廢爲臣義
서천에서 재배하던 사람에 비기노라 / 準擬西川再拜人
이 두 시의 뜻은 너무도 서글프니 모두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어버이 생각, 임금 사랑하는 정성이 말 밖에 넘친다. 저 화려하게 꾸미기나 하는 자는 정말 시틋하다.

보락(保樂) 김안로(金安老)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봄은 우 임금이 정리한 산천에 무르녹고 / 春融禹甸山川外
풍악은 순 임금 뜰 새짐승 사이에 아뢴다네 / 樂奏虞庭鳥獸間
라는 시를 보이면서,
“이 구절은 그대가 평생 드날릴 점(占)이라네.”
하였다. 꿈을 깨고 보니, 무슨 뜻인지도 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연산군이 병인년(1506, 연산군12)에 율시로 제를 내는데, 바로 ‘봄날 이원제자가 악보를 본다[春日梨園弟子閱樂譜]’라는 것이었고 간(間) 자로 압운(押韻)하라는 것이었다. 보락(保樂)이 갑자기 꿈속의 구절이 생각났는데 글제의 뜻과 꼭 들어맞으므로 이것으로 항련(項聯)을 메웠다. 그때 문경공(文敬公) 김감(金堪)은 대제학이고, 문경공 김안국(金安國)은 예조 좌랑으로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는데, 시를 읽다가 이 구절에 이르러,
“이 시는 귀신의 말이다.”
하였다. 그러나 김감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다. 모재(慕齋 김안국의 호)가 말하기를,
“이름을 떼어 본 뒤 이 수재(秀才)를 불러서 따져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감이 방을 내어 걸고, 보락을 불러 물어보니, 과연 꿈속에 신이 일러 준 것이었다. 이 일로 해서 모재를 시를 잘 알아보는[藻鑑] 사람이라 일컫게 되었다.
감(堪)의 자는 자헌(子獻), 호는 선동(仙洞)이고 또 다른 호는 일재(一齋)인데 연안인(延安人)이다.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렀다. 안국(安國)의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고 의성인(義城人)이다.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렀고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이 일이 정소종(鄭紹宗)의 일로 되어 있는데 근거가 분명하며, 또한 《국조방목(國朝榜目)》을 참고해 보아도, 연산군 갑자년(1504) 11월 별시에 어제(御題)는 춘방이원한열방악(春放梨園閒閱放樂)이었고 시는 칠률(七律)이었는데 제4등은 정소종(鄭紹宗)으로 되어 있어, 송와(宋窩 이기(李墍)의 호)가 기록한 것과 딱 들어맞는다. 여기서 김안로(金安老)라 한 것은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우리나라 아낙네로서 시 잘하는 사람이 드문 까닭은, 이른바 ‘술 빚고 밥 짓기만 일삼아야지, 그 밖에 시문(詩文)을 힘써서는 안 된다.’ 해서인가? 그러나 당인(唐人)의 경우는 규수로서 시로 이름난 이가 20여 인이나 되고 문헌 또한 증빙할 만하다. 요즘 와서 제법 규수 시인이 있게 되어 경번(景樊 허난설헌의 호)은 천선(天仙)의 재주가 있고 옥봉(玉峯) 또한 대가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선비인 정문영(鄭文榮)의 아내가 남편 대신 남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바람 불고 이슬 내린 열두 층 요대에 / 風露瑤臺十二層
아롱진 구름 모롱이에 도사(道士)의 경 읽는 소리 끊기었네 / 步虛聲斷綵雲稜
솔숲 새에 그립단 말 부치고파도 / 松間欲寄相思字
병꾸러기 장경은 무릉에 누웠다네 / 多病長卿臥茂陵
생원(生員) 신순일(申純一)의 아내가 글 잘하고 시 잘 지었는데 절구 한 수가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구름은 험상궂고 하늘은 물같은데 / 雲險天如水
높은 다락 곧 날 듯하네 / 樓高望似飛
무단히 밤새 내리는 비에 / 無端長夜雨
십년이라 그리운 서방님 생각 / 芳草十年思
양 부사(楊府使)의 첩도 시를 잘했는데 추한시(秋恨詩)는 다음과 같다.
우수수 가을 바람 오동 가지 흔들고 / 秋風摵摵動梧枝
하늘은 까마득 기러기 낢도 더디어라 / 碧落冥冥雁去遲
깁창에 기댔어도 사람 하나 안 보이고 / 斜倚綺窓人不見
눈썹 같은 초생달만 서녘 섬돌에 내리네 / 一眉新月下西墀
또한 모성(某姓)의 아내라고 전하는 이의 시는 다음과 같다.
그윽한 시내는 서늘만 하고 달은 아직 안 떴는데 / 幽磵冷冷月未生
충충한 등 덩굴 길에 드리웠고 다니는 이는 드물어라 / 暗藤垂路少人行
촌집은 정녕 맞은편 봉우리 너머려니 / 村家知在前峯外
엷은 안개 성긴 별빛 속에 외방앗소리 들려라 / 淡霧疏星一杵鳴
송강(松江) 정 상공(鄭相公 이름은 철(澈))의 소실이 남편의 호색(好色)을 간한 시는 다음과 같다.
도헌 벼슬 낮지도 않고 / 都憲官非下
그 충성 나랏님도 아시는 터인데 / 忠誠聖主知
나라를 경륜할 솜씨를 가지고 / 徒將經國手
부질없이 날마다 기녀(妓女)만 마주하시다니 / 日日對蛾眉
사문(斯文) 권붕(權鵬)의 계집종은 이름이 금가(琴哥)인데 또한 글을 알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장흥동에서 처음 헤어지고는 / 長興洞裏初分手
승학교 가에선 남몰래 애가 끊겼다오 / 乘鶴橋邊暗斷魂
해질 무렵 방초에서 헤어진 후론 / 芳草夕陽離別後
꽃지는 그 어디에선들 임 생각 안 했으리 / 落花何處不思君
이런 작품은 이루 다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문풍(文風)의 성함이 당 나라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국가의 한 성사(盛事)이다.
순일(純一)은 충경공(忠敬公) 신점(申點)의 아들로 벼슬은 군수이다. 아내는 이씨니 군수 경윤(景潤)의 딸이다. 양 부사(楊府使)의 이름은 사언(士彦)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연일인(延日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붕(鵬)의 자는 경유(景游)인데 안동인(安東人)이다. 찬성(贊成) 정응두(丁應斗)의 사위이며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송강의 우야시(雨夜詩)에
차가운 밤비는 대숲에 후두둑 떨어지고 / 寒雨夜鳴竹
가을 들자 풀벌레 침상으로 다가오네 / 草蟲秋近牀
흐르는 세월을 어이 머무르게 하며 / 流年那可住
자라는 백발을 어이 말리리 / 白髮不禁長
라고 하였고, 통군정시(統軍亭詩)에는
강 건너 가서 / 我欲過江去
곧장 송골산에 오르고 싶네 / 直登松鶻山
서녘 화표주의 학을 불러 / 西招華表鶴
구름 사이에 함께 노닐고지고 / 相與戲雲間
라고 하였으며, 의월정시(宜月亭詩)에는
백두산은 하늘에 연달아 솟고 / 白嶽連天起
성 외호의 물은 바다에 깊숙이 들어가네 / 城川入海遙
해마다 꽃다운 풀길 위로 / 年年芳草路
해지는 다리를 건너들 간다 / 人渡夕陽橋
라고 하였고, 추야시(秋夜詩)에는
우수수 잎 떨어지는 소리 / 蕭蕭落葉聲
후둑이는 성긴 비 인줄 알았네 / 錯認爲疏雨
아이 불러 문 밖에 나가보라니 / 呼童出門看
시내 남녘 나무에 달 걸렸다고 / 月掛溪南樹


박사(博士) 김질충(金質忠)이 병이 위독하기 하루 전에 지은 시에
삼년이나 약 먹고도 사람은 아직 앓고 / 三年藥力人猶病
하룻밤 빗소리에 꽃은 활짝 피었구나 / 一夜雨聲花盡開
하였으므로, 학사(學士) 김홍도(金弘度)가 보고는,
“김모(金某)가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뜨겠다.”
하더니 이튿날 새벽에 돌아갔다.
질충(質忠)의 자는 직부(直夫)이고 광주인(光州人)으로 벼슬은 호조 좌랑이다. 홍도(弘度)의 자는 중원(重遠)이고 호는 남봉(南峯)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벼슬은 전한(典翰)이다.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崔雲溥) 이후에는 등과(登科)한 사람이 없어, 이인(異人)이나 문인[翰士]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는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보다.
동원(東原)의 이름은 부림(傅霖), 호는 난계(蘭溪)이며, 강릉인인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이고,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치운(致雲)의 자는 백경(伯卿), 호는 경호조은(鏡湖釣隱)이며, 강릉인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이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응현(應賢), 자는 보신(寶臣), 호는 수재(睡齋)이며, 벼슬은 대사헌이다. 간재(艮齋)의 이름은 연, 자는 연지(演之)이며, 강릉인인데, 벼슬은 참찬이고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운보(雲溥)의 자는 대중(大仲)인데, 연지의 당질(堂姪)이다. 아버지 해(瀣)는 벼슬이 한림(翰林)이다.

강릉부에서 구경할 만한 곳으로는 경포대(鏡浦臺)가 으뜸이요 한송정(寒松亭)이 다음간다. 이곳을 구경하는 사신(使臣)이 하 많은데도, 사람 입에 전파된 가구(佳句)ㆍ경어(警語)가 하나도 없으니, 이 어찌 묘사할 절경(絶景)이 너무나 무궁해서가 아니겠는가. 두로(杜老 두보(杜甫)를 가리킴)나 맹양양(孟襄陽 맹호연(孟浩然)을 말함)이 이 경치를 본다면
오와 초는 동남으로 트였고 / 吳楚東南坼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들뜬 듯하구나 / 乾坤日夜浮
라든지, 또
운몽택엔 기운이 찌는 듯 / 氣蒸雲夢澤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 / 波撼岳陽城
등의 구절이 반드시 현판에 걸렸을 터인데, 우리나라 인재는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또한 알 만하다.

명 나라 사람 산동 참의(山東參議) 여민표(黎民表)의 자는 유경(惟敬)인데 시를 잘하였다. 장 시랑의 훌륭한 맏아들 초보(肖甫)에게 부치다[寄張侍郞佳胤肖甫]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온 냇벌엔 백 번 이상 싸운 자취 / 滿目川原百戰餘
나그네 시름과 이운 풀은 한결같이 스산하다 / 旅情衰草共蕭疏
쓸쓸한 산 오래된 역에선 말탄 가을 손을 만나고 / 寒山古驛逢秋騎
먼 숲과 가물대는 불빛은 밤낚시로다 / 遠樹殘燈見夜漁
땅이 소상강에 가깝고 보니 저녁 비는 늘 내리고 / 地近瀟湘多暮雨
분포에 기러기는 온다만 고향 소식 드물구나 / 雁來湓浦少鄕書
벗은 정녕 아득한 하늘가에 있거니 / 故人政在雲霄外
안개 낀 물가에 서글퍼 정처 없어라 / 怊悵煙波未定居
이 시가 우리나라에 퍼져서, 《송계만록(松溪漫錄)》에는 나 장원 만화(羅壯元萬化)의 시로 실려 있는데, 글자가 잘못된 것이 많으니, 송계(松溪)는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을 뿐이기에 착오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송계만록》을 참고하건대, 만화(萬化)는 만호(萬湖)라고도 하는데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의당 다시 상고해야 할 것이다.

명 나라 사람 중 글로 이름을 날린 십대가(十大家)는 공동(崆峒) 이헌길(李獻吉)ㆍ양명(陽明) 왕백안(王伯安)ㆍ형천(荊川) 당응덕(唐應德)ㆍ좨주(祭酒) 왕윤령(王允寧)ㆍ안찰(按察) 왕신중(王愼中)ㆍ심양(潯陽) 동분(董玢)ㆍ녹문(鹿門) 모곤(茅坤)ㆍ창명(滄溟) 이반룡(李攀龍)ㆍ봉주(鳳洲) 왕세정(王世貞)ㆍ남명(南溟) 왕도곤(汪道昆)인데, 이공동(李崆峒)은 오로지 서한(西漢)만 본받고, 왕세정ㆍ이반룡은 난삽한 글귀가 선진(先秦)을 앞지르고자 하고, 왕남명(汪南溟)은 화려하고 건실하며 동분ㆍ모곤은 평이하고 원숙하며, 왕신중은 풍부하다. 그러나 명 나라 사람은 모두 역겹게 여기며 진부하고 속되다고 한다. 나의 의견도 거의 같다.
백안(伯安)은 문(文)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박잡함을 면치 못하고, 형천(荊川)은 전아 순실(典雅純實)하여 모두 대가가 될 만하다. 왕원미(王元美)의 무리가 명인(明人)의 문장을 서한(西漢)에 비기고, 이헌길(李獻吉)을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말함)에게 비기고, 우린(于鱗)은 양자운(揚子雲)에게 비기고, 자기는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비겼으니, 그 자기 자랑이 너무도 심하다.
우리나라 김계온(金季昷)ㆍ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南袞)의 호)ㆍ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ㆍ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의 글은 명 나라 십대가 속에 넣어 동심양(董潯陽)이나 모녹문(茅鹿門)에 비긴다면 그다지 못할 것 없으나 중국에서 팔을 휘두르고 뽐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계온(季昷)의 이름은 종직(宗直),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며, 선산인(善山人)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점필재가 제천정운(濟川亭韻)에 차운한 시에
꽃을 흩날리고 버들을 꺾는 반강 바람에 / 吹花劈柳半江風
돛그림잔 석양 기러기를 진 채 건드렁거린다 / 檣影擔搖背暮鴻
한 조각 고향 생각에 부질없이 기둥에 기대니 / 一片鄕心空倚柱
흰 구름만 날아서 술 실은 배를 스치는구나 / 白雲飛度酒船中
라 하였고, 보천탄즉사(寶川灘卽事)란 시에는
복사꽃 필 때 이는 파도 그 몇 자런가 / 桃花浪高幾尺許
은빛 바윈 이마까지 묻혀 보이도 않는구나 / 銀石沒頂不知處
쌍쌍이 나는 가마우지 옛 놀던 자갈밭 잃고는 / 兩兩鸕鶿失舊磯
물고기 입에 문 채 줄과 부들 속으로 날아드네 / 銜魚却入菰蒲去
라 하였으니, 참 좋다.


명 나라 사람으로서 시로 이름난 이로는 대복(大復) 하경명(何景明)ㆍ공동(崆峒) 이몽양(李夢陽)이 있어 사람들이 이백(李白)ㆍ두보(杜甫)에 비긴다. 한 시대에 잘 한다고 칭도된 자는 화천(華泉) 변공(邊貢)과 박사(博士) 서정경(徐禎卿)ㆍ태백(太白) 손일원(孫一元)ㆍ검토(檢討) 왕구사(王九思)인데, 하경명ㆍ이몽양의 장편칠률(長篇七律)은 근체(近體)ㆍ고체(古體)를 다 잘 쓴다. 이우린(李于鱗)ㆍ왕원미(王元美) 역시 이대가(二大家)라 일컬어지며, 오국륜(吳國倫)ㆍ서중행(徐中行)ㆍ장가윤(張佳胤)ㆍ왕세무(王世懋)ㆍ이세방(李世芳)ㆍ사진(謝榛)ㆍ여민표(黎民表)ㆍ장구일(張九一) 등이 모두 나란히 달려 앞을 다투었다.
우리나라의 김계온(金季昷)ㆍ김열경(金悅卿)ㆍ박중열(朴仲說)ㆍ이택지(李擇之)ㆍ김원충(金元冲)ㆍ정운경(鄭雲卿)ㆍ노과회(盧寡悔) 등의 작품이 비록 하경명ㆍ이몽양ㆍ왕세정ㆍ이우린에게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찌 오국륜ㆍ서중행 이하 사람에게야 뒤지겠는가. 그러나 칠자(七子)로 더불어 중국에서 서로 겨루지 못함이 한스럽다.
중열(仲說)의 이름은 은(誾),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며 고령인(高靈人)이다. 벼슬은 수찬(修撰)이다. 18세에 문과 급제하고 연산군 갑자년(1504)에 사형되었다.
그때 나이는 26세였다.


요즘 중국인의 문학은 서경(西京)의 시조(詩祖)인 두보(杜甫)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보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른바 고니를 새기다가 집오리를 만드는 셈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문(文)은 삼소(三蘇)를, 시는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를 배우므로 저속하여 취할게 없다. 시 잘한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임제(林悌)ㆍ허봉(許篈)은 모두 일찍 죽고, 다만 이익지(李益之)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이익지는 비방이 산더미 같으니, 세상이 너무도 재주를 아끼지 않는다.

중국 근래 명사로 글 잘하는 이 중에 요천(瑤泉) 신시행(申時行)ㆍ영양(穎陽) 허국(許國)ㆍ동록(洞麓) 여유정(余有丁)ㆍ상서(尙書) 육광조(陸光祖)ㆍ사업(司業) 원응기(苑應期)ㆍ강주(康洲) 나만화(羅萬化)ㆍ시랑(侍郞) 심일관(沈一貫)ㆍ규양(葵陽) 황홍헌(黃洪憲)ㆍ백담(柏潭) 손계고(孫繼皐)ㆍ태사(太史) 심무학(沈懋學)ㆍ곤명(崑溟) 위윤중(魏允中)ㆍ태사(太史) 이정기(李廷機)가 더욱 두드러지고, 글을 잘하여 후세에 입언(立言)할 만한 정도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옥당 벼슬을 하는 사람도 눈으로 어로(魚魯)를 구별 못하며, 제고(制誥) 벼슬을 띠고 있는 사람도 사륙문(四六文)에 익숙지 못하여 심지어는 잘하는 이에게 차작을 해서 자기 직책을 메워가기까지 하니, 남의 의론이나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 고평(考評)을 하는 이도 또한 그 이름만 따라 등수의 고하(高下)를 매기니, 조선조에는 신시행(申時行)ㆍ허국(許國)의 무리를 바라볼 만한 사람도 없거든, 하물며 중국의 칠자(七子)와 재주를 겨룰 수 있겠는가.
대개 명 나라 사람은 학문을 애써 쌓아서 문과에 오른 사람도 등잔불을 켜놓고 새벽까지 글을 읽어 늙어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시문(詩文)이 모두가 혼후(渾厚)하고 기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는 문구(文句)나 잘 꾸며서 과거를 보는데 과거에 붙게 되면 곧바로 책 버리기를 원수같이 한다. 우리나라가 예전에는 문헌으로 일컬어졌는데, 이제 와서는 문헌이 어찌 이다지도 미약하단 말인가. 이 어찌 윗사람이 장려하고 이끌어 성취시키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혹 세상이 말세가 되고 풍속이 저속해져서 인재가 옛날에 미치지 못해서인가?
그러나 사람마다 다 요순(堯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데, 하찮은 하나의 기예를 어찌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하여 진력하지 않을 것인가. 애써 공부를 계속하면 고인에게 미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칠자(七子)라든지, 신시행(申時行)ㆍ허국(許國) 따위일까보냐. 우선 이것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한다.

선대부(先大夫)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의 고사(古史)만 전공하여 우리나라 사적은 알지 못하니 근본을 힘쓰는 도리가 결코 아니다.”
하셨다. 그러므로 두 형과 나는 모두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생각하기를, 읽을 만한 책이 하도 많은데, 하필 이것을 읽을 것이 무엇인가 하였었다. 그러다가 황 조사(黃詔使)가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관반(館伴)인 정임당(鄭林塘) 상공(相公)에게 고려와 신우(辛禑) 부자의 내력을 묻자 상공이 입만 벌리고 대답을 못하니, 우리 중형이 들어가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선대부의 높은 견식이 여느 사람보다 매우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아, 재주가 임당(林塘) 같은 분으로서도 중국 사신과 문답할 때에 곤욕을 당했으니, 사신의 접반관이 되어 본국의 일을 몰라서 되겠는가.
임당(林塘)의 이름은 유길(惟吉), 자는 길원(吉元)이며 동래인(東萊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길의 사제극성(賜祭棘城)이란 시에
성조에선 죽은 이에게도 은혜 베푸사 / 聖朝枯骨亦霑恩
해마다 쓸쓸한 담장에 제사를 내려주시네 / 香火年年降寒垣
제사 마친 단 위엔 비바람도 잦아지고 / 祭罷上壇風雨定
흰 구름만 바다인 양 앞 마을에 자옥해라 / 白雲如海蒲前村
라 하였고, 영유이화정(永柔梨花亭)이란 시에는,
꽃샘 비바람은 옛 시에도 있거니와 / 落花風雨古人詩
올봄 꽃은 공교롭게도 늦장부리네 / 花到今春巧耐遲
꽃 필 때 되면 응당 달이 있겠고 / 直至開時應有月
그중의 봄빛 자규야 알고말고 / 個中春色子規知
라 하였으며, 또 그의 몽뢰정춘첩(夢賚亭春帖)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선대의 백발 판서 / 白髮先朝老判書
한가컨 분망컨 깜냥대로 편안했네 / 閑忙隨分且安居
고기잡이 영감 봄 강이 따사롭다면서 / 漁翁報道春江暖
꽃도 피기 전이건만 쏘가릴 진상하네 / 未到花時進鱖魚


최보(崔溥)의 자는 연연(淵淵)이요 나주인(羅州人)으로 호는 금남(錦南)이다. 문장에 능하여 문과와 문과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바다를 건너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40일 만에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 우두(牛頭) 외양(外洋) 땅에 배가 닿게 되었다. 당두채(塘頭寨) 천호(千戶)가 왜구(倭寇)라 무고하였으나 최보가 질문에 척척 응답하였으므로 화를 모면하였다. 항주(杭州)에 이르자, 삼사관(三司官)이 본국의 역대 흥망과 군현의 건치(建置), 산천ㆍ예악ㆍ인물에 대하여 매우 꼼꼼히 물었으나 최보의 대답이 마치 대를 쪼개듯 하므로, 삼사관이 모두 감탄하였다.
돌아오자 성종이 일기를 쓰도록 명하므로 이를 써서 바치니, 모두 3권이다. 최보의 시는 흔히 볼 수 없는데, 송사를 읽다[讀宋史]라는 시에
등잔불 돋우고 다 읽고 나선 문득 긴 한숨 짓노니 / 挑燈輟讀便長吁
중국 천지엔 대장부랄 사람 하나 없구나 / 天地間無一丈夫
삼백 년 내려온 중국 전토를 / 三百年□中國土
어쩌자고 늙은 선우에게 내어 주었나 / 如何付與老單于
하였다. 시가 침착하고 노련하니, 그 사람 됨됨이를 짐작할 만하다.
최보의 벼슬은 사간(司諫)인데 연산군 갑자년(1504)에 처형되었다.

성종(成宗) 때 정의 현감(旌義縣監)에 이섬(李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보(崔溥)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揚州府) 굴항채(崛港寨)에 닿으니, 채관(寨官)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 / 布帆十幅不遮風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섬(暹)은 무인(武人)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記事)가 없어 애석하다.

가정(嘉靖) 임술년(1572, 명종17) 간에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 정 상공(鄭相公)의 이웃 사람으로 해상(海商)을 업으로 하는 자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닿자, 지부에서는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하고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을 가는 길이 공 천사(龔天使 조선에 사신왔던 공용경(龔用卿))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龔氏)는 그때 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있었다. 조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역관(譯官)에게 청하여 길을 늦추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상인이 호음의 가계(家系)와 벼슬 지낸 경위를 말하자, 공씨가 크게 놀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처자를 나오라 하여 인사시키고, 호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또 후히 대접하여 보냈으니, 공씨가 호음에게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장흥(長興) 사람 이언세(李彦世)가 왜인(倭人)에게 사로잡혀 남번(南蕃)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주야(晝夜) 40일을 가서야 중국의 광서(廣西) 향산현(香山縣) 땅에 닿았다. 그는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명(明) 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반자[火伴]와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지현(知縣)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는 만인(蠻人)이 올린 고장(告狀)이라고 하여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조선국(朝鮮國)의 장흥(長興)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남웅부(南雄府)에 압송하니 삼사관(三司官)이 그 문초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언세는 남창(南昌)과 항주(杭州)ㆍ소주(蘇州)의 풍경이며 북경ㆍ남경의 훌륭한 경치를 말하기는 하나, 자세하지는 못하다.

승지(承旨) 이정립(李廷立)이 지은 표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 데 감사하는 표[謝刷還漂海人口表]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만 이랑 파도 헤치고 / 越萬頃之波濤
빛나는 요 임금 땅에 나아갔다가 / 就堯如日
천리라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 返千里之桑梓
우 임금 같은 임금 아니었던들 고기밥 되었으리 / 微禹其魚
이 글은 대우(對偶)가 적절하고 뜻이 좋다. 전편을 볼 수 없음이 섭섭하다.
이정립(李廷立)의 자는 자정(子正), 광주인(廣州人)으로, 호는 계은(溪隱)이고,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신묘년(1591, 선조24) 겨울에 중국 상인 20여 명이 사탕을 팔다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왔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가서 보고 소주와 항주의 풍속을 물으니,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중국 풍토를 역력히 아십니까?”
하였다. 그 중에 장덕오(莊德吾)란 사람이 있어, 자기 말로 복건(福建) 장포(漳浦) 사람이라 하기에, 내가 시랑(侍郞) 장국정(莊國禎)과 시랑 주천구(朱天球)가 당신의 이웃인가고 묻자 장덕오가 놀라며,
“장 시랑은 저의 당숙(堂叔)이고 주 시랑은 한 동네 사람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그러면 태사(太史) 장이풍(莊履豊)과 어사(御史) 이명(履明)은 당신 당형제(堂兄弟)이겠구려.”
하자, 덕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껄껄대고 웃었다. 역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수재가 나이 젊어도 중국의 일을 잘 안다고 하더라.’고 했다. 왕신민(王信民)이라는 자가 나에게,
“무슨 벼슬이요?”
하고 묻기에, 무자년에 과거하여 국자감생(國子監生)이 되었다 하니, 왕씨가,
“언제 추천되지요?”
하고 물었다. 대개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이 으레 이부(吏部)에 추천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은 시를 잘하며 순평하고 전아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한 연구를 자랑하였는데
산귀신은 밤마다 금정불을 엿보고 / 山鬼夜窺金井火
물새는 가을이라 석당 연기에 잠들었네 / 水禽秋宿石塘煙
하였으니, 시구가 절로 좋다.
대박(大樸)의 자는 사진(士眞), 호는 청계(淸溪) 남평인(南平人)으로 벼슬은 학관(學官)이었다. 임진년 왜란 때 고제봉(高霽峯)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무기며 군량을 모두 자기집에서 대었다. 군중에서 병으로 죽자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으로 내렸다.

상사(上舍) 정지승(鄭之升)이 시를 잘했는데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의 무리가 몹시 추장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한 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돋아나는 풀잎 속에 왕손의 한 스며들고 / 草入王孫恨
피어나는 꽃잎따라 두견이 시름을 더하누나 / 花添杜宇愁
물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 汀洲人不見
바람에 목란배만 일렁이누나 / 風動木蘭舟
스님을 전송하다[送僧]란 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서에서 돌아오고 나는 또 서로 가니 / 爾自西歸我亦西
봄바람 한 지팡이 가는 길은 높고 낮네 / 春風一杖路高低
그 언제 달 밝은 밤 소요사에서 / 何年明月逍遙寺
동녘 숲 두견이 울음 함께 들을꼬 / 共聽東林杜宇啼
또 한 연(聯)은 다음과 같다.
손이 돌아가자 문을 닫으니 남은 건 달빛뿐 / 客去閉門惟月色
꿈 깨자 빈 산엔 흩어지느니 솔바람 소리 / 夢廻虛岳散松濤
그 전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지승(之升)의 자는 자신(子愼), 호는 총계(叢桂) 온양인(溫陽人)으로 정렴(鄭)의 조카이다. 벼슬은 하지 않았다.

송익필(宋翼弼)이란 자도 시를 잘하니, 그의 산설(山雪)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밤새도록 내린 찬 눈 층대에 수북 쌓였는데 / 連宵寒雪壓層臺
다른 산에 묵은 주승 돌아오질 않았네 / 僧在他山宿未廻
등잔불 깜박이는 작은 절집 신령한 바람 고요한데 / 小閣殘燈靈籟靜
소나무 스쳐오는 밝은 달 홀로 보네 / 獨看明月過松來
구격(句格)이 맑고 뛰어나니, 어찌 사람의 지체로서 어찌 그 좋은 말까지 무시할 것인가.
송익필(宋翼弼)의 자는 운장(雲長), 호는 귀봉(龜峯)으로 흉인(凶人) 사련(祀連)의 아들이다. 본디 사천(私賤)의 자식이나, 문학의 조예가 뛰어나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서로 친했다. 아우 한필(翰弼)은 자는 사로(師魯), 호는 운곡(雲谷)인데 역시 시를 잘했다. 익필(翼弼)의 저물녘 남계에 배를 띄우다[南溪暮泛]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꽃에 홀려 돌아오기 하마 늦었고 / 迷花歸棹晩
달 뜨기 기다리다 여울 내려오기 머뭇거렸네 / 待月下灘遲
거나한 가운데도 낚싯대 드리우니 / 醉裏猶垂釣
배는 흘러가도 꿈은 그대로 / 舟移夢不移
한필(翰弼)의 우음시(偶吟詩)는 다음과 같다.
어제 비엔 꽃이 피더니 / 花開作日雨
오늘 아침 바람에 그 꽃 지는구나 / 花落今朝風
애닯다 한철 봄이 / 可憐一春事
비바람 속에 오고 가누나 / 往來風雨中


최전 언침(崔澱彦沈 언침은 자)이 신동(神童)이란 이름이 있었다. 어려서 금강산에 노닌 적이 있었는데 그 길로 영동(嶺東) 산천을 구경하고 경포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봉래산 한번 들어 삼천년을 / 蓬壺一入三千年
은바다 아득아득 물은 맑고 얕아라 / 銀海茫茫水淸淺
난새 타고 피리 불며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 鸞笙今日獨飛來
벽도화 꽃 그늘에 님은 아니 보이네 / 碧桃花下無人見
중형이 그 시를 매우 칭찬하고 그 운자에 이어 읊기까지 하였는데, 그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전(澱)의 호는 양포(楊浦)니 해주인(海州人)으로 진사(進士)였다. 양포(楊浦)의 늙은 말[老馬]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늙은 말 솔뿌리 베고 누워 / 老馬枕松根
꿈결에 천리길 가네 / 夢行千里路
가을바람 나뭇잎 지는 소리에 / 秋風落葉聲
놀라 깨니 지는 해가 뉘엿뉘엿 / 驚起斜陽暮
어복등(魚腹燈)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멱라수는 흘러 흘러 끝이 없는데 / 楚水流無極
굴원(屈原)은 불평을 원망했네 / 靈均怨不平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도 / 至今魚腹裏
속마음 밝은 것은 간직했겠지 / 留得寸心明

금각(琴恪)의 자는 언공(彦恭)이니 봉성인(鳳城人)이다. 중형에게 12세 때 글을 배워 육경(六經)을 통하고 자사제집(子史諸集)을 두루 읽지 않은 게 없었다. 글 짓기를 전중(典重)하고도 온화하고 아름답게 하여 이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조대기(釣臺記)ㆍ주류천하기(周流天下記)ㆍ한발문(旱魃問) 등의 글이 세상에 전한다. 16세에 해외에 유학하였다. 복충증(腹蟲症)을 얻어 집에 있으면서 《풍창랑화(風牕浪話)》를 지으며 심심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무자년(1588, 선조21) 가을에 죽었다. 죽는 날에 스스로 명(銘)을 짓기를,
“봉성인(鳳城人) 금각(琴恪) 자(字) 언공(彦恭)은 9세에 글을 배우고 18세에 죽는다. 뜻은 원대하나 수(壽)는 짧으니 운명이로다.”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아버님 어머님 / 父兮母兮
나 때문에 울지 마세요 / 莫我哭兮
《조대집(釣臺集)》 4권이 있다.

종실(宗室)인 금산수 성윤(錦山守誠胤)은 자가 경실(景實)인데 우리 중형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시는 온정균(溫庭筠)과 이상은(李商隱)을 숭상하여 그들의 시풍을 터득하였다. 그의 향렴체(香奩體)란 시는 다음과 같다.
부용성 밖 예주궁에 / 芙蓉城外蕊珠宮
난새 수레로 허 시중을 맞네 / 鸞馭來迎許侍中
앵무부는 달 밝은 밤에 읊조리고 / 鸚鵡賦吟明月夜
숙상 갖옷은 비단 병풍에 걸려 있네 / 鷫鷞裘掛錦屛風
추운 비단 방장엔 향로까지 곁들였고 / 寒重繡幕漆香獸
꿈 깬 은등잔엔 등화[玉蟲]가 맺혔네 / 夢罷銀燈結玉蟲
앵무새에 말 전하노니 자주 손을 물리쳐서 / 傳語雪衣頻撝客
운우의 정 총총히 흩어지게 말아다오 / 莫敎雲雨散悤悤
달[姮娥]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운모병풍 썰렁하고 아름다운 방장 비었는데 / 雲母屛寒寶帳虛
옥같은 달에 이슬만 함초롬 맺혔구나 / 露華徧濕玉蟾蜍
항아가 장생약이야 얻었다 한들 / 姮娥縱得長生藥
해마다 홀로 사는 애달픔 어쩌지 / 爭奈年年恨獨居
자못 부귀롭고 아름다운 운치가 있다. 임진왜란에 어버이를 하직하고 임금을 호종하기에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배운 바 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할 만하다.
금산(錦山)의 호는 매창(梅窓)으로 성종(成宗)의 4세손(世孫)이요, 왕자 익양군 회(益陽君懷)의 증손이다. 그 아버지는 청원도정 간(靑原都正侃)이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양정집(梁廷楫)은 호남 사람으로 나이 10세에 글을 잘 써 고향에서 신동(神童)으로 소문났었다. 스님에게 보내는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노닥노닥 기워 입은 한 늙은 영감 / 百結一老翁
지팡이 의지하여 바위 아래 서 있어 / 倚杖巖下立
머리 돌려 뭔지 기다리는 듯하니 / 回頭如有看
필경 동해바다 달일 테지 / 應待東溟月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잔치에도 초대받았었으나 불행히 세상을 떴다.

근세 선비들은 예(禮)를 병으로 여기고 다만 허무(虛無)를 말하고 욀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채 수레를 타고 태연히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조금도 꺼리낌이 없는 이가 있는데 엄숙한 선비나 단아한 선비조차 이에 물들었다. 요즘 박엽 숙야(朴燁叔夜 숙야는 자)라는 사람이 있어 시문(詩文)을 잘하나 불행하였다. 기생집[秦樓]에서 나의 글씨 솜씨와 시법을 보고 본떠 가는 곳마다 벽에다 써대었는데 뒷사람이 와 보고는 으레 이를 아무개 글씨다 하였다. 그의 상춘곡(傷春曲)은 다음과 같다.
연분홍 꽃 오련한 푸른 잎은 아침햇살 머금고 / 妖紅輭綠含朝陽
꾀꼬리 읊조리고 제비는 지지배배 남의 시름 자아내네 / 鸎吟燕語愁人腸
이끼 자욱 이슬에 함초롬 비취빛으로 젖었는데 / 苔痕漬露翡翠濕
흩날리는 눈같은 살구꽃은 연지빛으로 향기롭다 / 杏花撲雪臙脂香
봉황 무늬 저고리는 흐르르 얇아 봄추위 스며드는데 / 鳳衫輕薄春寒襲
은병풍 기대어서 이별을 슬퍼하네 / 斜倚銀屛怨離別
서방님 한 번 떠나 돌아오질 않아 / 藁砧一去歸不歸
손꼽아 기다리던 그 봄도 또 삼월이라니 / 屈指東風又三月
선자가리개[仙子障]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하얀 옥꽃 족두리에 무지개옷 입고서 / 白玉花冠素霓裳
손으로 바둑알 잡고 생각만 거듭 / 手拈棋子費思量
몇 해 두고 바둑은 두질 않으니 / 經年不下神僊著
아마도 선경엔 세월이 긴가보이 / 想是蓬萊日月長
달 나라 궁전[月殿]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창창한 밤 꽃동산 / 花苑夜蒼蒼
등불 들고 해당화 구경 / 移燈賞海棠
이슬은 붉은 너울에 스미고 / 露華侵絳帕
향기는 다홍 치마에 배어드네 / 香氣襲紅裳
고래론 황금빛 자물쇠 만들고 / 鯨製黃金鑰
소라는 백옥상에 아로새겼네 / 螺雕白玉牀
가던 구름 저물녘 비 되어 내리니 / 行雲著行雨
돌아가면 초 양왕을 뵙게 되겠네 / 歸見楚襄王
이울어가는 봄[殘春]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먼지 탄 병풍은 우중충한데 / 屛暗下流塵
엉긴 구름 비단 수렐 옹위하듯 / 凝雲護綺輪
버들 꽃은 어지러이 흩날리고 / 斷絲縈落絮
제비새낀 이우는 봄을 재재거리네 / 雛燕語殘春
졸음기 붉은 볼에 피어나고 / 睡思生紅頰
눈물 자국 푸른 수건에 젖네 / 啼痕染翠巾
용이 서린 옥대의 거울은 / 盤龍玉臺鏡
눈썹 그릴 미인을 기다릴 뿐 / 只待畫眉人
선동요(仙洞謠)는 다음과 같다.
푸른 새 깃으로 금자(錦字) 전하니 / 靑鳥翩翩錦字通
광한전엔 옥피리 소리 / 玉簫吹煙廣寒宮
알고 말고 선동 안의 꽃같은 여인 / 情知洞裏如花女
웃으며 멋쟁이 허 시중을 가리킬 것을 / 笑指風流許侍中
시격(詩格)이 나와 비슷하며 자획(字畫)은 분간할 수 없어 진짠지 가짠지 사람들이 정말 의심하게 된다. 이 때문에 내가 화류가에 드나든단 소문을 얻게 되었으니 우습다. 옛사람이 찻집[茶肆]ㆍ술집[酒坊]에도 도리상(道理上) 들어가지 않았거든 하물며 이보다도 더한 기생집일까보냐? 서진(西晉) 말(末)의 선비가 청담(淸談)을 숭상하자 오호(五胡)가 중국을 어지럽게 했고, 당(唐)이 망할 무렵 세상 풍속이 풍류를 즐기자 칠성(七姓)이 쟁립(爭立)하였으니, 이 두 가지를 겸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요행일 뿐이다.
박엽의 호는 국창(菊窓), 반남인(潘南人)이며 벼슬은 평안 감사를 지냈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 때에 사형되었다.

두남(斗南) 김일숙(金一叔)은 글은 보통이었으나, 남을 풍자하는 작품으로는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이웃에 어른(丈人)이 있었는데 앞니가 길어 홀(笏) 모양 같았음으로, 다음과 같이 찬(贊)을 지었다.
나이 일흔에 / 生年七十
긴 것이라곤 이[齒]니 / 所長者齒
이는 홀을 만들만 허구려 / 齒兮可爲笏兮
또 이웃사람이 눈이 가늘어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모든 것 보고 싶지 않아 한세상을 하찮게 보는 자인가 / 不欲觀諸眇視一世者邪
보이는 것이 작으니 / 其見者小
우물에서 하늘을 보는 자 아닌가 / 豈非坐井觀天者邪
그 눈동자를 보면 / 觀其眸子
그 사람 무슨 수로 속마음 숨길쏜가 / 人焉瘦哉
나의 중형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였다.
김두남(金斗南)은 원주인(原州人)이며 응남(應南)의 사촌 동생이다. 음관으로 부윤(府尹)을 지냈다.

내가 다리를 앓아 핑계삼아 장인댁에 가니, 중형은 내가 나들이 않음을 빈정대어 시를 지어 보냈는데 첫 수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태왕(太王)을 사모하는 자네 마음 알아 / 天意憐君慕太王
짐짓 두 다리에 온통 부스럼이 나게 했구나 / 故敎雙脚遍生瘡
이웃이 지척이나 오히려 멀다 혐의하니 / 隣家咫尺猶嫌遠
하물며 물마름 우거진 십리길이랴 / 何況蘋洲十里長
또 다른 수는 다음과 같다.
체 짧은 수레도 안 타는 자네 / 知君不駕短轅車
덩그런 황문이 한길가에 서겠네 / 高處黃門大路隅
세상이 온통 공사에만 종사한다면 / 擧世若從公事業
이 세상 어디메서 잠부를 찾을꼬 / 人間何地覓潛夫
대개, 태왕이 그 비를 사랑하기에 세상에서 애처가를 태왕이라 부르는 것이다. 황문은 옛날 어떤 사람이 그 아내를 너무 사랑하여 그 친구가 빈정대기를,
“열녀는 홍살문을 세워 정문을 삼으니 정남(貞男)은 마땅히 황문을 세워야겠지.”
하였다 해서 쓴 것이니, 그 풍류와 익살이 모두 이와 같다.

익지(益之)가 일찍이 ‘낙화(落花)’를 읊기를
슬프다 진분홍에 또 연분홍 / 惆悵深紅更淺紅
한꺼번에 풀풀 날아 작은 뜰에 지는구나 / 一時零落小庭中
푸른 이끼에 붙어 남는 것만은 못하나 / 不如留著靑苔上
바람 따라 동서로 흩날리는 것보단 낫구나 / 猶勝風吹西復東
하니, 어의(語意)가 함축되어 있다. 또 감회를 읊은 절구 두 수는 다음과 같다.
성궐은 들쑥날쑥 솟을대문 늘어섰는데 / 城闕參差甲第連
오후의 집 풍악소리 하늘 높이 울리는구나 / 五侯歌管沸雲煙
패릉교 위 나귀 탄 나그네 / 灞陵橋上騎驢客
양양땅 맹호연 만은 아니라오 / 不獨襄陽孟浩然
둘째 수는 다음과 같다.
벼슬 높은 고관들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고 / 好爵高官處處逢
수레는 물 흐르듯 말은 용 같네 / 車如流水馬如龍
장안 밭두렁에 부질없이 고개 돌리니 / 長安陌上空回首
지척인 대궐문 아홉 겹이 가렸구나 / 咫尺君門隔九重
용나루를 건너며[渡龍津]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강물은 용나루에 급히 내리니 / 秋江水急下龍津
나루의 아전은 배 멈추고 웃었다 성냈다 / 津吏停舟笑更嗔
서울 나들이 그 무슨 소용 / 京洛旅游成底事
십년을 오가도 포의인 것을 / 十年來往布衣人
그 뜻이 몹시 서글프니 참으로 불우한 사람의 시다.

양봉래(楊蓬萊) 선생의 아량과 풍도는 세상의 숭상받는 바가 되거니와,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사마(司馬)ㆍ문과(文科)를 모두 같이 합격하였으므로, 그 사귐이 가장 친밀한데 문장이 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 듯한 기상이 있고, 행서(行書)ㆍ초서(草書)를 잘 쓰는데 그 쓰는 법이 마치 용이나 뱀처럼 분방하며,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에 정을 붙여, 짚신과 밀로 결은 나막신차림으로 어느 때고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바위 골짜기에 사는 이들이 사강락(謝康樂 강락은 육조(六曹) 진(晉)의 사영운(謝靈運)의 봉호)에 비겼다. 언젠가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운 일도 있었다. 언젠가 금강산에서 시를 읊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봉래섬의 백옥루를 / 蓬萊島白玉樓
소문으로만 들었더니 이제야 구경하네 / 我昔聞之今則游
운모병 들러 치고 호박구슬 베개삼고 / 雲母屛圍琥珀枕
산호 발걸이로 수정발 거두었네 / 水晶簾捲珊瑚鉤
벽도화 피고 지니 일천 년인데 / 碧桃開落一千年
서왕모 머물기는 팔만 년이라네 / 王母淹留八萬秋
요대 맨 위에 호올로 서니 / 瑤臺上表獨立
흰 구름 누른 학은 한가롭게 가는구나 / 白雲黃鶴去悠悠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노을처럼 공중에 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봉래의 금수정(錦水亭)시는 다음과 같다.
비단물 은모래는 마냥 고운데 / 錦水銀沙一樣
골구름 강비 속에 갈매기 산뜻 / 峽雲江雨白鷗明
진인 찾아 그릇 봉랫길에 들었거니 / 尋眞誤入蓬萊路
고기잡이 배를 동구 밖으로 내몰진 마오 / 莫遣漁舟出洞行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죽은 뒤, 오세억(吳世億)이란 자가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나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어떤 관부(官府)에 이르니 ‘자미지궁(紫微之宮)’이란 방이 붙었는데 누각이 우뚝하여 난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學士) 한 분이 하얀 비단 옷을 입었는데, 흘긋 보니 바로 하서였다. 오씨는 평소에 그 얼굴을 알고 있는데, 하서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
하더니,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고 했다.
세억은 그 이름 자는 대년 / 世億其名字大年
문 밀치고 와서 자미선 뵈었구려 / 排門來謁紫微仙
일흔에 또 일곱 된 뒤에 다시 만나리니 /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오 / 歸去人間莫浪傳
깨어나자 소재 상공(蘇齋相公)께 말씀드렸다. 그 뒤에 오씨가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인후(麟厚)의 자는 후지(厚之), 울주인(蔚州人)이며 벼슬은 교리(校理)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하서(河西)가 충암(冲庵) 시권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오기를 어디로부터 왔으며 / 來從何處來
가기를 또한 어디를 향해 가는고 / 去向何處去
가기도 오기도 정한 자취 없이 / 去來無定蹤
유유한 세월 백년 남짓이로구나 / 悠悠百年許


양봉래(楊蓬萊)의 풍악에서[在楓岳]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백옥경 봉래도에 / 白玉京蓬萊島
허허 넓은 연파는 태고적이고 / 浩浩煙波古
맑고 따사로운 날씨도 좋구나 / 熙熙風日好
벽도화 그늘에 한가로이 오가니 / 碧桃花下閒來往
학 탄 신선 피리소리에 세월은 간다 / 笙鶴一聲天地老
신선 같은 풍채와 도인 같은 느낌이 짙다. 자동(紫洞) 차식(車軾)이 흉내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침엔 현포에 저물녘엔 봉래산에 / 朝玄圃暮蓬萊
산달 걸린 박연폭포요 / 山月鉢淵瀑
향풍어린 계수대라 / 香風桂樹臺
동해를 굽어보며 마고에게 절하고 / 俯臨東海揖麻姑
삼십륙동천에 돌아가노라 / 六六壺天歸去來
원숙하기는 하나. 격(格)이 미치지 못한다. 나의 중형도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학은 훤칠하게 제비는 높게 낮게 / 鶴軒昂燕差池
삼신산에 돌아와 오색 구름에 나는구나 / 三山歸去五雲中飛
이 천지간 석자짜리 지팡이에 / 乾坤三尺杖
포의로 한 세상 보내누나 / 身世一布衣
바윗머리 나무에 긴 칼 척 걸어 두고 / 好掛長劍巖頭樹
맑은 시내에 손 담그고 영지풀잎 씹네 / 手弄淸溪茹紫芝
비록 좋기는 해도 마침내 양봉래의 신선 같은 운치에는 미치질 못한다. 이익지(李益之)에게 읊게 한다 해도 미치지 못할는지 모르겠다. 양봉래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산 위에 또 산 있으니 산이 땅에서 나오고 / 山上有山山出地
물가에 또 물 흐르니 물 속에 하늘 어리었네 / 水邊流水水中天
아득해라 이 몸 공허 속에 있거니 / 蒼茫身在空虛裏
연하도 아닌 것이 선경도 아니로세 / 不是煙霞不是仙
불게(佛偈)와도 비슷하다. 또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금옥루대에 보랏빛 안개 떨치고 / 金屋樓臺拂紫煙
용이 나는 구름길에 신선 내려오네 / 躍龍雲路下群仙
청산도 인간 세상에 역겨웠던지 / 靑山亦厭人間世
푸른 바다에 어린 구만리 장천 속에 날아들었네 / 飛入蒼溟萬里天

삼천 년 만에 익는다는 신선 복숭아 / 蟠桃子熟三千歲
한밤중 하얀 난새 쌍으로 왔네 / 半夜白鸞來一雙
중천에 신선 서왕모 내려오니 / 中天仙郞降王母
아롱진 바다기운 구름창에 이었네 / 玲瓏海氣連雲牕
역시 그를 따라 배울 만하다.
차식(車軾)의 자는 경숙(敬叔), 호는 이재(頤齋), 연안인(延安人)이며 벼슬은 군수이다. 《기아(箕雅)》를 참고하건대 ‘金玉’은 ‘金屋’으로 되었고, ‘躍龍’은 어떤 본에는 ‘濯龍’으로 되어 있다.

내 누님의 보허사(步虛詞)는 다음과 같다.
난새 타고 한밤 중 봉래도에 내려서 / 乘鸞夜下蓬萊島
기린수레 한가로이 몰고 아름다운 풀 밟기도 하네 / 閒碾麟車踏瑤草
바닷바람은 벽도화를 불어 꺾어오고 / 海風吹折碧桃花
옥소반엔 가득찬 외만한 대추 / 玉盤滿摘如瓜棗
또 다음과 같이도 읊었다.
구화의 치마폭에 육수의 웃옷 입고 / 九華裙幅六銖衣
학의 등 싸늘바람 자부로 돌아왔네 / 鶴背冷風紫府歸
비취 바다 달도 지고 은하수 기우는데 / 瑤海月沈星漢落
옥피리 소리 속에 상서구름 날리네 / 玉簫聲裏霱雲飛
유몽득(劉夢得)을 본받았으나, 맑고 뛰어나긴 그보다 더하다. 유선사(遊仙詞) 백편은 모두 곽경순(郭景純 경순은 동진(東晋) 곽박(郭璞)의 자)의 남긴 뜻인데, 조요빈(曺堯賓) 따위로는 미치지 못한다. 나의 중형과 이익지가 모두 모방하여 지었으되, 마침내 그 울을 넘지 못했으니, 우리 누님은 천선(天仙)의 재주라 할 만하다.

양봉래(楊蓬萊)의 선종암(仙鍾巖)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거울속 부용은 서른 여섯인데 / 鏡裏芙蓉三十六
하늘가에 바라뵈는 일만 이천 봉 / 天邊螻䯻萬二千
그 가운데 한조각 창주석에는 / 中間一片滄洲石
한 백년 동안에 시라고 말할 수가 있다오 / 可以言詩此百年
박 상공(朴相公)이 끝구절을 고쳐,
동녘에 온 해객이 졸기에 합당하네 / 合著東來海客眠
하자, 봉래가 온당하다고 하여 드디어 고치고 나중에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의 호) 황 상공(黃相公)에게 말하니 상공이,
“이는 공의 시어(詩語)가 아니니 바른 대로 말하시오”
하므로 봉래가 지천의 식견에 크게 탄복했다. 지천은 봉래를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박 상공(朴相公)의 이름은 순(淳),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 충주인(忠州人)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사암의 퇴계 선생이 남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며[送退溪先生南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생각 끊임없어 고리인 양 이어지니 / 鄕心不斷若連環
한필 말로 오늘아침 한관 떠나네 / 一騎今朝出漢關
추위에 고갯매화 봄인데도 못 피니 / 寒勒嶺梅春未放
늦은꽃 응당 늙은 신선 돌아오길 기다리리 / 留花應待老仙還
총병(總兵) 양조(楊照)의 사당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철갑옷 금빛칼도 이미 흙이 되었고 / 鐵衣金劍已塵沙
사당집 소나무 전나무엔 저녁 까마귀 지저귀네 / 廟間松杉噪夕鴉
슬프다 중국 날센 장수 죽었으니 / 惆悵漢家飛將死
갈대 피리 소리만 백낭하 자주 넘네 / 胡笳頻度白狼河
청풍(淸風) 한벽루(寒碧樓)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그리움 외로이 절로 시름 생기니 / 客心孤廻自生愁
앉은 채 강물소리 듣노라 다락에서 내려올 줄 모르네 / 坐聽江聲不下樓
내일 또 벼슬길로 가버린다면 / 明日又登官道去
흰 구름에 단풍은 누구 위한 가을일꼬 / 白雲紅樹爲誰秋
견 상인(堅上人)에게 보내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입은 은혜이기에 이 마음 궁리 많아 / 久沐恩波役此心
새벽 닭소리에 조회 나갈 비녀를 꽂네 / 曉鷄聲裏戴朝簪
강남 땅 들집은 하마 황폐했겠지 / 江南野屋今蕪沒
산승을 고용하여 대밭을 돌보게 했네 / 却倩山僧護竹林
짧은 거문고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역산에서 그 누가 오동나무 잘랐는가 / 嶧山誰採鳳凰枝
벼락친 자욱 있어 깎아보니 더욱 기이해 / 雷斧餘痕斲更奇
소리 알 이 이미 갔다 서러워 마라 / 休恨賞音人已逝
옷깃 비추는 저 달이 바로 종자기라네 / 照衿明月卽鍾期
이양정(二養亭) 벽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산새 소리 어쩌다 외마디 들리고 / 谷鳥時時聞一箇
침상은 쓸쓸해라 여러 책 흩어졌네 / 匡床寂寞散群書
가엾어라 백학대 앞 저 물도 / 可憐白鶴臺前水
산문을 나서자 이내 진흙 머금으리니 / 纔出山門便帶淤


신기재(申企齋)의 동산시(洞山詩)는 다음과 같다.
봉래도는 아득아득 지는 해 시름겹고 / 蓬島茫茫落日愁
흰 갈매기 해당숲에 다 날아갔네 / 白鷗飛盡海棠洲
오늘에야 비로소 명삿길 밟게 되니 / 如今蹈踏鳴沙路
이십년전 옛꿈에 놀던 데라오 / 二十年前舊夢游
나는 그곳에 가 본 뒤에야 이 시의 절묘함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언젠가 꿈에 한 곳에 이르니 거친 연기, 들풀이 눈길 닿는 데까지 끝없는데, 불탄 나무의 껍질 벗겨진 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원통한 기운 끝없어 / 冤氣茫茫
산하가 한 빛이로다 / 山河一色
세상엔 사람 하나 없고 / 萬國無人
중천에 달도 침침하네 / 中天月黑
잠에서 깨어 몹시 언짢게 여겼었는데 임진란에 서울이나 시골을 막론하고 피를 흘리고 집들이 불탐에 이르러서 이 시가 바야흐로 징험이 되었다.

무위자(無爲者) 천연(天然) 스님은 집안이 본래 좋았으나 잘못 중이 되었는데 씩씩하여 기개가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智異山) 성모(聖母) 음사(淫祠)가 대중에게 혹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겨, 이를 쳐부수었다. 남명 선생(南冥先生)이 용사천연전(勇士天然傳)을 지었으며 양송천(梁松川)이 그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제하였다.
주먹 한번 휘둘러 산꼭대기 돌 깨부수니 / 張拳一碎峯頭石
갈 곳 없는 잡귀가 대낮에 울더라 / 魍魎無憑白晝啼
양봉래(楊蓬萊)ㆍ박사암(朴思庵)과 나의 중형이 모두 천연의 친구가 되었다. 천연이 약간 시를 알아 우리 중형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잘못 고기 배에 걸린 용 곤핍함을 슬퍼하고 / 枉罹魚腹嗟龍困
닭우리에 그릇 떨어진 봉황새 쇠해만 가네 / 誤落鷄巢欲鳳衰
임진란에 정화상(靜和尙)을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자는 건중(楗仲), 창녕인(昌寧人)이며 벼슬은 전첨(典籤)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의 자는 공섭(公燮). 남원인(南原人)이며 벼슬은 부윤(府尹)이다. 정화상(靜和尙)은 휴정(休靜)이니 호는 청허(淸虛)이다. 임진란 때 승병 대장으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었다. 시를 잘하였다. 송천의 어양교를 지나다[過漁陽橋]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빛이며 풍경은 태평세월 그렸는데 / 樹色煙光畫太平
강다리는 아직도 옛이름을 띠었구나 / 河橋猶帶舊時名
이주곡(伊州曲) 양주곡(涼州曲)이 소소곡 같았더라면 / 伊涼若是簫韶曲
어찌 오랑캐놈들이 양경(兩京)을 침범하였으리 / 豈使胡雛犯兩京
청허의 한성도중(漢城道中)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 나무엔 가을 서리 내리고 / 海樹落秋霜
초관엔 이른 기러기 떠나네 / 楚關鴻去早
종산 외론 새 나는 하늘가에 / 鍾山獨鳥邊
나그넨 배 안에 늙어만 가네 / 客子舟中老


중형이 무위자(無爲者)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천왕봉 위로 나는 듯 달려가 / 天王峯上走如飛
천 년 묵은 돌덩이 주먹으로 부수고 돌아왔네 / 手碎千年片石歸
애닯다 영웅은 속절없이 늙어가고 / 可惜英雄空老去
산속에 밝은 달이 닫힌 사립문 비추네 / 碧山蘿月掩柴扉

두만강가 나뭇잎은 시들고 / 豆滿江邊木葉衰
여기저기 외론 산엔 깃발만 펄럭이네 / 孤山處處見旌旗
산속에 하늘을 떠받칠 솜씨 버려졌으니 / 山中褒却擎天手
슬프다 월지국 선우 머리 벨 이 그 누구런가 / 怊悵何人斮月支
그에 대한 칭찬이 이와 같았다. 또 장편 시의 머리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무위자는 사람중에 용이니 / 無爲者人中龍
전생엔 바다를 가르던 금시조(金翅鳥)였는데 / 前身擘海金翅鳥
벼락이 한밤에 천왕봉에 떨어졌네 / 霹靂夜下天王峯
말이 매우 기발하였는데 전편을 못 외우겠다. 필경 무위자의 책속에 있을 것이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이 이우정(二憂亭)에 제한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물가에 가로 세로 밀물은 지고 / 洲渚縱橫潮漸退
나무숲 우수수 기러기 손이 오네 / 樹林搖落雁來賓
조어(造語)가 기이 건장한데 전한(典翰) 엄흔(嚴昕)은 하찮게 보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엄흔(嚴昕)의 자는 계소(啓昭)이고 호는 십성(十省)이다. 영월인(寧越人)으로 벼슬은 전한(典翰)을 지냈다.

남추강(南秋江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의 한식시(寒食詩)는 다음과 같다.
흐린 날 울 밖에 저녁 해 나고 / 天陰籬外夕陽生
한식날 봄바람에 들 물은 맑다 / 寒食東風野水明
배에 가득찬 장사아치 끝없이 지껄이는 말 / 無限滿船商客語
버들꽃 필 무렵이라 고향의 정일레라 / 柳花時節故鄕情
안자정을 꿈에 보다[夢子挺]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부귀 영화 덧없는 꿈 저문 산 앞에서 꾸니 / 邯鄲一夢暮山前
넋과 넋 만남이란 정말 우연이라 / 魂與魂逢是偶然
가는 비 뜰에 내리고 봄은 쓸쓸한데 / 細雨半庭春寂寞
살구꽃 수없이 지네 붉은 돈처럼 / 杏花無數落紅錢
상사일 성남에서[上巳日城南]란 시는 다음과 같다.
성남이고 성북이고 살구꽃 붉은데 / 城南城北杏花紅
해는 꽃 서녘에 있으니 꽃 그림잔 동에 있네 / 日在花西花影東
외로이 말 탄 병든 늙은이 철 바뀜에 놀라니 / 匹馬病翁驚節候
비낀 바람이 성가퀴에 눈물을 흩뿌려주네 / 斜風吹淚女墻中
이상 몇몇 시는 당인(唐人)에 못지 않다. 귀신론(鬼神論) 일편은 학문이 극히 높다. 훌륭한 재주를 지녔어도 펴보지 못했으니 아깝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고 의령인(宜寧人)인데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안자정(安子挺)의 이름은 응세(應世)이고 호는 월창(月窓)이며 죽산인(竹山人)이다. 진사(進士)를 지냈다.
남추강(南秋江)의 성거산(聖居山)에 제한 절구는 다음과 같다.
동녘에 해 높이 돋으니 / 東日出杲杲
신령스런 비에 나뭇잎 지네 / 木落神靈雨
창 열자 온갖 시름 스러지니 / 開牕萬慮淸
병든 몸이 날개가 돋는 듯 / 病骨欲生羽


무절공(武節公) 황형(黃衡)은 무장(武將) 출신으로, 또한 글과 글씨에 능했다. 경오년(1510, 중종5)에 왜구를 진압하고 몰운대(沒雲帶)에 올라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높은 대에 깃발 세우니 큰 바람 이는구나 / 建節高臺起大風
바다 구름 갓 걷히고 해는 둥실 붉어라 / 海雲初捲日輪紅
하늘에 비겨 칼 어루만지며 자주 고개 돌리니 / 倚天撫劍頻回首
탄환만한 대마도가 가까이 보이는구나 / 馬島彈丸指顧中
조어(造語)가 기이하고 장엄하여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어찌 인재가 옛사람에게 못 미치랴.
무절(武節)의 이름은 형(衡)이요 창원인이다. 무과급제로 공조 판서를 지냈다. 시안(諡案)을 상고컨대 형의 시호는 장무(莊武)이지, 무절이 아니었다.

《승암시화(升庵詩話)》에 명초(明初) 이래 재상의 업적을 논함에 있어 유성의(劉誠意 성의는 유기(劉基)의 봉호)를 제일로 치켜세웠다. 성의가 실로 어질긴 하지만 재상의 업적에 대해서는 소문난 게 없다. 영락(永樂) 연간에는 하원길(夏原吉)을 제일로 삼고 삼양(三楊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보(楊溥))은 그 축에 들지 않았으니 그 의논 또한 온당치 못하다. 이 문달공(李文達公 문달은 이현(李賢)의 시호)이 그를 헐뜯어 심지어는 문달이 나륜(羅倫)을 내쳤으니, 비록 흠이 됨을 면할 수는 없으나, 그 공정한 것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정덕(正德) 연간에 이르러는 거드름스럽게 자기 아버지를 제일로 쳤다. 젊어서는 비록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입각(入閣)하여서는 임금의 외척을 연줄로 삼았으니 이미 올바른 선비는 아닌데, 공평하여 사심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가정(嘉靖) 이래로 명정승은 문정공(文正公) 사천(謝遷)과 충의공(忠毅公) 양부(楊傅)가 더욱 드러나게 유명했는데, 소인(小人)도 제일 많았다. 계악(桂萼)ㆍ방헌부(方獻夫)ㆍ장총(張璁)ㆍ엄숭(嚴嵩)ㆍ이본(李本)이 모두 소인들인데, 그 중 엄숭은 은총을 20여 년이나 독차지했다. 그 뒤에는 소사(少師) 서계(徐階)ㆍ소부(少傅) 이춘방(李春芳)이 다 명정승인데, 서소사(徐少師)는 남들이 사마공(司馬公)에 비겼으니, 오랫동안 논정(論定)하는 일을 담당했었다. 융경(隆慶) 이래로 고공(高拱)ㆍ장거정(張居正)은 모두 약골(弱骨)이었으며 신시행(申時行)은 기롱을 면할 수 없었고, 승상(丞相) 마자강(馬自强)ㆍ소부(少傅) 허국(許國)ㆍ소보(少保) 왕석작(王錫爵)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그들의 사업은 삼양(三楊)에게 비기면 누가 나은지는 모르겠다. 인재가 날로 저하되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명상(名相)은 황ㆍ허(黃許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제일로 삼는다. 세상에서는 더러 전조(前朝 고려(高麗))의 과제(科第)를 병폐로 여기기도 하는데, 과연 그 뒤에는 별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중종 때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은 전인(前人)에 부끄럽지 않다.
황희(黃喜)의 자는 구부(懼夫)이고 호는 방촌(厖邨)인데 장수인(長水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익성(翼成)으로 세종묘정(世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허조(許稠)의 자는 중통(仲通)이고 호는 경암(敬庵)인데 하양인(河陽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정광필(鄭光弼)의 자는 사협(士協)이고 호는 수부(守夫)인데, 동래인(東萊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단간공(端簡公) 정효(鄭曉)의 《오학편(吾學編)》에 우리나라가 여진(女眞)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한 일의 본말(本末)이 아주 자상히 실려 있는데, 강순(康純)ㆍ어유소(魚有沼)ㆍ남이(南怡)의 이름을 대서특필하였다. 이 세 사람은 진실로 장군감으로 국사(國史)에 그 이름이 드러났으니 이보다 큰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강순의 자는 태초(太初)요 신천인(信川人)이다. 음관으로 좌의정을 지냈고 남이의 옥사(獄事)에 죽었다.
어유소는 충주인(忠州人)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남이는 의령인(宜寧人)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의산위(宜山尉) 남휘(南暉)의 손자(孫子)이고 익평(翼平) 권람(權擥)의 사위로 유자광(柳子光)의 무고에 의해 살해되었다. 남이의 정남(征南)이란 절구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닳아지고 / 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마르리라 / 豆滿江流飮馬無
사나이 스물에 북을 정벌치 못하면 / 男兒二十未平北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 後世誰稱大丈夫


척 총병(戚總兵 척계광(戚繼光)을 가리킴)은 위명(威名)과 사업이 남의 이목에 번쩍거릴뿐더러 또한 시문에 능하여 이창명(李滄溟)의 무리가 치켜세웠다. 임회후(臨淮侯) 이언공(李言公)의 자(字)는 유인(惟寅)인데, 또한 시문에 능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바람은 밀물소리 휘몰아 섬들 떠들썩하고 / 風捲潮聲喧島嶼
해에 비낀 돛 그림자 누대에 오르네 / 日斜帆影上樓臺

요즘 스님으로 시 잘 쓰는 사람이 많지 않는데, 유정산인(惟政山人)은 당(唐) 나라 구승(九僧)의 유를 배워 시가 몹시 맑고 고고하였다. 행사(行思)도 자못 좋은 시구가 있어서 상서로운 오색구름 아롱지니 나물 먹는 중이 아니다[慶雲爛熟非筍蔬]라는 구가 있다. 요즘 홍정(弘靜)이란 분이 또한 시를 잘하여 스님을 칭송하다[送僧]란 시가 있었는데 우리 중형(仲兄)이 몹시 칭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해 헤어질 땐 가을 강물에 단풍 지더니 / 去年別紅葉秋江波
올해 작별에는 봄 산언덕에 매화가 지네 / 今年別落梅春山阿
물결은 아득하고 산언덕은 가렸는데 / 波杳杳山阿隔
단풍잎 지는 매화 이 시름 어이하리 / 紅葉落梅愁奈何
유정(惟政)의 호는 송운(松雲)이다. 행사(行思)와 같이 일본에 사신갔었다. 이 두 분의 시가 같이 《기아(箕雅)》에 들어 있다.

백대붕(白大鵬)은 천한 종으로 중의 대열에 끼었다. 시를 잘 하였으므로 우리 중형과 승지(承旨) 심희수(沈喜壽)가 다 대등한 벗으로 사귀었는데
가을 하늘에 엷은 그늘 어리어 / 秋天生薄陰
화악의 그림자 침침해라 / 華岳影沈沈
라는 시는 우리 중형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백형을 따라 일본에 오간 일이 있으며, 아름다운 시가 매우 많다.
백대붕은 전함사(典艦司)의 종이다. 심희수의 자는 백구(伯懼)이고 호는 일송(一松)으로 청송인(靑松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내가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형님들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차마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게을러 빠져서 독서에 힘쓰지 않았다, 차츰 자라서는 남들이 과거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덩달아 해 보았으나, 글치레나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짓은 아니었다.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니, 세상에 나갈 뜻은 이미 사그라졌다. 10년 글읽기로 작정했으나, 아, 그 또한 늦었도다. 《학산초담(鶴山樵談)》 1부(部)를 짓는다.
명 신종(明神宗) 21년 계사년(1593, 선조26) 양월(陽月) 연등(燃燈)한 뒤 사흘 만에 교산자(蛟山子)는 쓰다.

[주D-001]한단의 걸음 : 한단학보(邯鄲學步)의 준말. 연(燕) 나라의 소년 수릉(壽陵)이 조(趙) 나라 서울 한단 사람의 한가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까지 잊어버린 고사. 자기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만 냄을 이름.
[주D-002]이듬해 변고 :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말함.
[주D-003]정시(正始)의 시체 : 정시는 위 제왕(魏齊王)의 연호. 그 당시 사대부들이 청담(淸談)을 숭상하였는데, 그 후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이라 불리는 혜강(嵇康)ㆍ완적(阮籍) 등이 그 풍조를 더욱 발전시켜 형성한 표일(飄逸) 청원(淸遠)한 시체.
[주D-004]적신(積薪) : 섶을 쌓을 때 맨 먼저 쌓은 것이 맨 밑에 깔린다는 뜻에서 먼저 임용된 관리가 나중에 임용된 자보다 지위가 낮은 것을 말함.
[주D-005]삼성(三省) : 강상 죄인(綱常罪人)을 추국하는 세 아문(衙門). 곧 의정부(議政府)ㆍ사헌부(司憲府)ㆍ의금부(義禁府)
[주D-006]정미년 벽서(壁書) 사건 : 1547년(명종 2)에 일어난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 을사사화 당시 대윤(大尹)을 숙청한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 등이 대윤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층인 자신들을 비방하는 내용의 벽서를 조작하여 그 혐의를 유림들에게 뒤집어 씌워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은 사사(賜死)되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磁)는 극변안치(極邊安置)되는 등 많은 유림들이 화를 당했음.
[주D-007]정묘교……신하로다 : 정묘교 곁에 별장을 짓고 살았던 당 나라의 허혼(許渾)과 초 나라에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상관대부(上官大夫)와 근상(靳尙)의 참소를 입고 쫓겨난 굴원(屈原)을 말한다.
[주D-008]갑자년 참상 :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를 말함. 앞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위를 찬성했던 많은 사람들이 참화를 당했음.
[주D-009]노산묘(魯山墓) : 영월(寧越)에 있는 조선조 제6대 왕 단종의 무덤.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찬탈되어 노산군에 봉해짐. 나중 1698년(숙종 24)에 복위(復位)되고 묘효(廟號)가 추증되었음. 능호는 장릉(莊陵).
[주D-010]진왕(陳王)이……유정(劉楨) : 진왕은 위(魏) 조식(曹植)의 봉호(封號). 응탕과 유정은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두 사람.
[주D-011]괴리령 : 한 성종(漢成宗) 때의 주운(朱雲)을 말함. 성종에게 상방검(上方劍)을 빌려주시면 영신(佞臣) 장우(張禹)를 베겠다고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죽이려 하여도 난간을 붙잡고 “신은 용봉(龍逢)ㆍ비간(比干)을 따라 저승에 노닐고 싶습니다.” 하여 마침내 임금의 용서를 받고, 직신(直臣)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漢書 卷67 朱雲傳》
[주D-012]동각로(東閣老) : 한(漢) 나라 공손홍(公孫弘)이 승상이 되어, 동각을 지어 어진 선비를 맞아들인 고사. 여기서는 윤근수(尹根壽)를 가리킴.
[주D-013]소재(小宰)……반포 : 소재는 명 나라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의 별칭. 이때 명 목종(明穆宗)이 죽고 신종(神宗)이 즉위하였는데, 한림원 편수 한세능과 이과 도급사중(吏科都給事中) 진삼모(陳三謀)가 우리나라에 와서 신종이 등극했다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주D-014]첨사(詹事)……반포 : 첨사는 한림원 편수의 별칭이고 도헌은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의 별칭. 이때 명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황태자 탄생의 조서를 반포하였다.
[주D-015]다섯 사람 : 1573년(선조 6)에 명 나라 사신 한세능(韓世能)이 왔을 때 같이 어울렸던 우리나라의 권벽(權擘)ㆍ정유일(鄭惟一)ㆍ유성룡(柳成龍)ㆍ한호(韓濩)와 등계달(滕季達) 자신을 말함.
[주D-016]소령(小令) : 사체(詞體)의 하나. 58자 이내의 사(詞)를 소령이라 함.
[주D-017]한 선자(韓宣子)가…… 읊은 일 : 한 선자는 춘추(春秋) 시대 진(晉) 나라 대부 한기(韓起)를 말함. 선(宣)은 그의 시호. 각궁(角弓)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주(周) 나라 임금이 친족(親族)을 멀리하고 소인들을 가까이 하므로, 친족들이 임금을 원망하여 부른 노래이다. 한 선자가 일찍이 노(魯)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노 나라 대부 계 무자(季武子)와 연향(宴享)하는 자리에서 서로 수호(修好)를 잘하자는 뜻에서 《시경》 각궁(角弓)의 “내 형제 내 겨레만은 서로 멀리하지 마시오.[兄弟婚姻 無胥遠矣]”라는 구절을 읊었던 고사이다. 《左傳 昭公 二年》
[주D-018]노 나라……잊을쏜가 : 진(晉) 나라 대부 한 선자(韓宣子)가 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노 나라의 대부인 계 무자(季武子)의 집에서 연향할 때에 거기에 좋은 나무[嘉樹]가 있는 것을 보고 한 선자가 그를 좋다고 칭찬하자, 계 무자가 말하기를 “제가 반드시 이 나무를 잘 북돋아 길러서 공께서 각궁(角弓)을 읊은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昭公 2年》
[주D-019]서ㆍ이(徐李) : 조선 시대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서거정(徐居正)과 이 행(李荇)을 합칭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음.
[주D-020]용면(龍眠) : 호가 용면산인(龍眠山人)인 송(宋) 나라 때의 화가 이공린(李公麟)을 말함. 이공린은 박학(博學)한데다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뛰어났음.
[주D-021]추매(椎埋) : 사람을 죽이고 파묻어서 그 죄적(罪跡)을 완전히 감춤. 또는 도굴꾼이 무덤을 파헤치고 물건을 꺼내가 버리는 것을 말하기도 함. 전하여 전에 있었던 것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을 비유한 말임.
[주D-022]구령(緱嶺)의 신선 피리 소리 : 춘추 시대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 진(晉)이 피리를 매우 잘 불어서 피리로 봉황새의 울음 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가 도사(道士)인 부구공(浮丘公)과 숭산(嵩山)에 올라가 30여 년 만에 구씨산(緱氏山)으로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구령은 곧 구씨산을 가리킨다.
[주D-023]용음(龍吟) : 용의 울음 소리. 또는 피리 소리를 일컫기도 함.
[주D-024]육적(陸績) : 삼국(三國) 시대 오(吳) 나라 사람으로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는데, 그가 6세 때에 원술(袁術)의 집에 갔다가 그 집에서 귤(橘)을 내오자 귤 3개를 품 안에 싸가지고 와서 모친께 드린 고사가 있음. 《三國志 吳志 陸績傳》
[주D-025]병꾸러기……누웠다네 : 장경(長卿)은 전한(前漢) 때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 그는 무제(武帝) 때에 효문원 영(孝文園令)을 지내다가 병(病 : 소갈증)으로 사직하고 무릉(茂陵)에 들어가 살았다.
[주D-026]칠자(七子) : 명(明) 나라 때에 문학(文學)으로 이름 높았던 일곱 사람. 전칠자(前七子)와 후칠자(後七子)가 있는데, 전칠자는 이몽양(李夢陽)ㆍ하경명(何景明)ㆍ서정경(徐禎卿)ㆍ변공(邊貢)ㆍ강해(康海)ㆍ왕구사(王九思)ㆍ왕정상(王廷相)이고, 후칠자는 이반룡(李樊龍)ㆍ사진(謝榛)ㆍ양유예(梁有譽)ㆍ종신(宗臣)ㆍ왕세정(王世貞)ㆍ서중행(徐中行)ㆍ오국륜(吳國倫)임.
[주D-027]삼소(三蘇) : 북송(北宋) 시대 문장가였던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인 소식(蘇軾)ㆍ소철(蘇轍) 형제를 합칭한 말.
[주D-028]삼사관(三司官) :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리.
[주D-029]금자 : 전진(前秦) 두도(竇滔)의 아내 소씨(蘇氏)가 직금회문시(織錦回文詩)를 남편에게 보낸 고사로, 아내의 편지, 또는 아름다운 시구를 뜻함.
[주D-030]칠성(七姓) : 후량(後梁)ㆍ요(遼)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주(後周)ㆍ송(宋) 등 7국을 말함.
[주D-031]태왕(太王) :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 고공단보(古公亶父). 《맹자》 권2에 “옛날에 태왕은 여색을 좋아하여 그의 비를 사랑하였다. [昔者 大王好色 愛厥妃]” 하였음.
[주D-032]이주곡(伊州曲)……소소곡(簫韶曲) : 이주곡과 양주곡은 당(唐) 나라 때에 주로 기생들이 부르던 풍류 곡조이고, 소소곡은 정중한 순 임금의 음악임.
[주D-033]금시조 : 불경(佛經)에 나오는 새. 수미산(須彌山) 북쪽 철수(鐵樹)에서 살면서 입으로 불을 토하여 용을 잡아 먹는다고 함.
성소부부고 제25권
 설부(說部) 4
성수시화(惺叟詩話)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 최 학사(崔學士)의 시는 당말(唐末)에 있어 역시 정곡(鄭谷)ㆍ한악(韓偓)의 유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개는 경조하고 부박하여 후(厚)한 맛이 없다. 다만
가을 바람 일어라 애달픈 노래 / 秋風唯苦吟
한 세상 돌아봐도 지음 드무네 / 世路少知音
삼경이라 창밖에는 비가 으시시 / 窓外三更雨
만리라 등잔 앞엔 내 고향 생각 / 燈前萬里心
이라 한 절구(絶句) 한 수가 가장 훌륭하며, 또 다른 한 연구(聯句)에,
먼 나무는 강둑 길에 들쭉날쭉하고 / 遠樹參差江畔路
찬 구름은 말 앞의 봉우리에 떨어지네 / 寒雲零落馬前峯
라 하였으니, 역시 아름답다.
정 대간(鄭大諫 고려의 시인 정지상(鄭知常))의 시는 고려 전성기에 있어 가장 아름답다. 유전된 것은 극히 적지만 편편이 모두 절창이다. 이를테면
바람 부는 객선에 구름은 조각조각 / 風送客帆雲片片
이슬 엉긴 궁 기와엔 옥빛이 번쩍번쩍 / 露凝宮瓦玉粼粼
이라 한 것은 조금 가볍다 하겠고
버들 숲에 지게 닫은 엳아홉 집이라면 / 綠楊閉戶八九屋
밝은 달에 발 걷은 서너너덧 사람일레 / 明月捲簾三四人
라는 구절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신기하고 뛰어나다. 그,
바위 머리 소나무는 조각달에 늙었고 / 石頭松老一片月
하늘 끝의 구름은 천 점 산에 나직하네 / 天末雲低千點山
라는 구절은 딱딱하고 어렵지만 역시 청초(淸楚)한 맛을 지니고 있다.
정 대간의 서경시에
비 갠 긴 뚝에 풀빛은 더욱 짙고 / 雨歇長堤草色多
님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 언제나 다할 날이 있으리 / 大洞江水何時盡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라는 것은 지금까지 절창이라고 일컫는다. 부벽루 현판에 새겨진 시들은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모두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 시만은 남겨 두었었다. 그 뒤에 최고죽(崔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이 이 시에 화운(和韻)하기를,
강 언덕 길고 긴데 휘늘어진 능수버들 / 水岸悠悠楊柳多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요란터니 / 小船爭唱采菱歌
붉은 꽃도 다 져서 서풍은 차가웁고 / 紅衣落盡西風冷
해 저문 물가엔 흰 물결만 일어나네 / 日暮芳洲生白波
라 했고, 이익지(李益之 이달(李達)의 자)는,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은 주렁주렁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서로 사이해서 아가씨가 노래하네 / 蓮花相間女郞歌
돌아 올 땐 물목에서 벗 만나자 기약했기에 / 歸時約伴橫塘口
고되이 배 저어 거슬러 올라가네 / 辛苦移船逆上波
라 했다. 두 시가 매우 훌륭하여 왕소백(王少伯 소백은 당 나라 왕창령(王昌齡)의 자)ㆍ이군우(李君虞)의 여운이 있으나 이는 채련곡(採蓮曲)이라 서경 송별시의 본뜻과는 다르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도 유원순(兪元淳)의 문, 이인로(李仁老)의 시를 일컬었으니 이 대간(李大諫)의 시는 참으로 당시의 제일이었다. 그의
몇 번이나 이[蝨] 문대며 좋은 도략 일렀던고 / 幾回捫蝨話良圖
라는 구절은 썩 훌륭하여 구종길(瞿宗吉)의
지난날엔 이광 따라 범바위를 쏘더니 / 射虎他年隨李廣
한밤중 닭 울음에 유곤의 춤을 추네 / 聞鷄中夜舞劉琨
라는 시와 비슷하며, 그 팔경시(八景詩) 또한 아름답다.
이 대간이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
공작 병풍 깊은 곳에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 孔雀屛深燭影微
원앙새는 쌍쌍 자니 어찌 각각 날아가리 / 鴛鴦雙宿豈分飛
애닯구나 초췌한 청루 속의 여인이여 / 自憐憔悴靑樓女
길이 남을 위하여 시집갈 옷 짓다니 / 長爲他人作嫁衣
라 했으니, 대개 대간이 오래도록 하관(下官)으로 있어 상기 등용되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모두 재상 길에 올랐으므로 재상의 사령장(辭令狀)을 초(草) 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었다.
이 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의 시호)의 시는 부려하고 방일하다. 그 칠석우(七夕雨)란 시는 참으로 절창이다. 그 시에
얇은 적삼 삽자리로 바람 난간에 누웠다가 / 輕衫小簞臥風欞
꾀꼬리 울음 소리 두세 번에 꿈을 깼네 / 夢覺啼鸎三兩聲
짙은 잎에 가린 꽃은 봄 뒤까지 남아 있고 / 密葉翳花春後在
엷은 구름 헤친 햇살 빗속에 밝도다 / 薄雲漏日雨中明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읽기만 해도 시원해진다. 또,
관인이 한가로이 젓대를 골라 부니 / 官人閑捻笛橫吹
부들자리 바람 타고 날아갈 듯하구나 / 蒲席凌風去似飛
천상에 걸린 달은 천하가 함께 누릴 텐데 / 天上月輪天下共
내 배에 혼자 싣고 돌아오나 여기네 / 自疑私載一船歸
라고 한 시 또한 지극히 고일(高逸)하다.
같은 시대의 한림(翰林) 진화(陳澕)는 이 문순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했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아름답다. 그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가지 처졌는데 / 小梅零落柳僛垂
한가로이 청람(淸嵐) 밟아 걸음걸이 느리네 / 閑踏靑嵐步步遲
어점(漁店)은 닫기고 사람 소리 드문데 / 漁店閉門人語少
온 강의 보슬비는 실실이 푸르네 / 一江春雨絲絲碧
라고 한 작품은 청경(淸勁)하여 읊조릴 만하다.
사인(舍人) 홍간(洪侃)의 시는 농염(濃艶)하고 청려(淸麗)하다. 그 나부인(懶婦引)과 고안(孤雁) 등의 시편(詩篇)은 가장 훌륭하여 성당(盛唐) 시인의 작품과 흡사하다.
이견간(李堅幹)의 시에
여관에는 호롱불 하나 남은 심지 돋우노니 / 旅館挑殘一盞燈
사신(使臣)의 풍미가 중보다 담박하네 / 使華風味淡於僧
창 너머 두견 소리 밤새도록 듣노니 / 隔窓杜宇終宵聽
산꽃의 몇째 층에 울음소리 나는고 / 啼在山花第幾層
라 했는데, 이 시를 두고 당시에는 절창이라고 일렀다. 나는 관동(關東) 지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그 이른바 두견이란 곧 소쩍새의 무리였다. 절강(浙江) 사람 왕자작(王子爵), 사천(泗川) 사람 상방기(商邦奇)가 함께 강릉(江陵)에 왔으므로 그들에게 내가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두견이 아니라고 하였다. 대개 시인들은 흥을 붙여 말하는지라, 비록 그 물건이 아니더라도 시 가운데 그 말을 쓴 것이다. 이를테면
수풀 너머 흰 잔나비 울음 부질없이 듣노라 / 隔林空聽白猿啼
와 같은 경우, 우리나라에는 본시 잔나비가 없고,
집집마다 긴 대 숲에 비취새 울음 우네 / 脩竹家家翡翠啼
와 같은 경우는, 파랑새를 보고 염주취(炎洲翠)라 한 것이고,
자고새는 놀라서 해당화를 흔드네 / 鷓鴣驚簸海棠花
와 같은 경우는, 때까치가 깍깍 우는 것을 보고 행부득(行不得)이라 한 것이니, 모두 이와 같은 유이다.
원외(員外) 김극기(金克己)는 시상(詩想)이 극히 교묘하다. 겨울날에 핀 이화(李花)를 읊으면서 끝 구에
기이한 향내가 굴 속에 모여들어 / 無乃異香來聚窟
한궁에서 이 부인을 다시 보네 / 漢宮重見李夫人
라고 하였으니, 이는 옛 시인이 아직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의주(義州)에 있으면서 지은 시에는
문장이란 늘그막에 서로 즐길 만하니 / 文章向老可相娛
일검 짚고 변새(邊塞) 돌며 오거서(五車書)를 우러르네 / 一劍游邊尙五車
공무(公務)를 파하니 새리된 줄 내 몰라라 / 衙罷不知爲塞吏
종이 창문 밝은 곳에 누워 책을 보누나 / 紙窓明處臥看書
라 하였으니 그 세속 근심을 물리쳐 보내는 심사를 후련하게 떠올릴 수 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최예산(崔猊山) 이익재(益齋 익재는 이제현(李齊賢)의 호)의 시권(詩卷)을 모두 먹칠해 지우고 다만,
얇은 이불에 한기(寒氣) 나고 불등은 흐릿한데 / 紙被生寒佛燈暗
상좌중은 한밤 내내 종 울리지 않는구나 / 沙彌一夜不鳴鍾
아마도 자고 난 손 문을 일찍 열고 나서 / 應嗔宿客開門早
뜰 앞에 눈 덮인 솔 보라 할까 꺼렸겠지 / 要見庭前雪壓松
라는 시 하나를 남겨두자, 익재가 크게 탄복하며 지음(知音)으로 여겼다고 하나 이는 모두 과장된 이야기다. 익재의 시에는 좋은 작품이 매우 많으니 화오서곡(和烏棲曲)과 민지(澠池) 등의 고시(古詩)는 모두 옛 시에 핍근하고 여러 가지 율시(律詩)들 또한 홍량(洪亮)하다. 젊을 적에 지은 영사시(詠史時)의
뉘라서 알리오 업하의 순문약이 / 誰知鄴下荀文若
길이 요동의 관유안에 부끄러울 줄 / 永愧遼東管幼安
이라는 것이나, 또
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떠날 줄 몰랐다면 / 不解載將西子去
월궁에는 도리어 고소대(姑蘇臺) 하나가 있었으리 / 越宮還有一姑蘇
라는 작품과, 또
이라는 등의 작품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규모에 들어맞고 이전 사람들이 미처 발(發)하지 못했던 것이니 어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는 역시 영웅이 범인을 무시한 격이라 다 믿을 수는 없다.

익재의 장인은 곧 국재공(菊齋公 국재는 권보(權溥)의 호)인데 부부가 함께 94세까지 살았으나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다. 익재공이 장인을 애도한 만시(挽詩) 한 연(聯)에
항아는 광한전에 님 오시길 기다리나 / 姮娥相待廣寒殿
거사는 다만 홀로 도솔천에 돌아가네 / 居士獨歸兜率天
라고 했다. 권공(權公)이 부처를 좋아했기에 낙천도솔(樂天兜率)에 비유한 것은 무방하겠으나, 항아가 약을 훔친 것은 자고로 시인들이 속세로부터 선계(仙界)로 올라간 것을 비유함이 상례였는데, 이를 장모에게 쓴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이 문정(李文靖 문정은 이색(李穡)의 시호)의 ‘어제 영명사에 들르다[昨過永明寺]’라는 작품은 별로 수식하거나 탐색한 흔적 없이 저절로 음률에 맞아서 읊으면 신일(神逸)하다. 허영양(許穎陽)은 이를 보고 ‘당신네 나라에도 이와 같은 작품이 있소.’라고 했다. 그의 부벽루(浮碧樓) 시는 대편(大篇)인데 거기에
문 머리엔 고려 시가 상기도 걸렸으니 / 門端尙懸高麗詩
당시에도 하마 중화 문자 깨쳤다네 / 當時已解中華字
라고 했으니, 비록 우리나라 사람을 깔보기는 했으나 또한 문정공의 시에는 감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정공은 원(元)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응봉한림(應奉翰林) 구양규재(歐陽圭齋) 이름은 현(玄)ㆍ 우도원(虞道園) 이름은 집(集)의 무리가 모두 추장(推獎)하였다. 규재는 탄복하면서
“우리의 의발(衣鉢)은 마땅히 해외로 그대에게 전해지리라.”
하였다. 그 후 문정공이 고려조 말에 곤궁해져서 이리저리 옮기며 쫓겨 다닐 적에, 문하생과 옛 동료 관리들도 모두 배반하여 돌을 던지니, 공이 시를 지어
의발은 마땅히 해외로 전하리란 / 衣鉢當從海外傳
규재의 한 말씀이 아직 귀에 낭랑한데 / 圭齋一語尙琅然
근래의 물가 모두 날개 돋혀 올라가나 / 近來物價俱翔貴
호올로 내 문장은 한 닢 값이 안 나가네 / 獨我文章不直錢
라 했는데, 대개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원(元)이 얼승(孼僧)을 보내왔을 적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놀랐는데 우리 태조(太祖)가 작은 군사로 그들을 덕흥(德興)에서 크게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태조가 개선하자 공민왕은 그 공을 포상하여 문정공과 태조에게 명하여 함께 대정(大政)에 참여케 하였다. 교지(敎旨)를 선포하는 날 공민왕은 기뻐하며 좌우에게 이르기를
“문관으로는 이색(李穡)을 쓰고 무신으로는 이모(李某 이성계를 말함)를 쓰니 나의 사람 씀이 어떻소.”
하였다. 태조는 문정공과 사귐이 매우 두터웠기에 자기의 당호(堂號)를 지어 달라고 청하니, 문정은 송헌(松軒)이라 이름하고 설(說)을 지어 이를 권면하였으며, 또한 환조(桓祖)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후에 문정공이 외지(外地)에 유배되면서 아들 종학(種學)ㆍ종선(種善)도 모두 먼 곳에 귀양 가게 되자 문인 정총(鄭摠)ㆍ정도전(鄭道傳)이 문정을 여지없이 공격하였다. 그러자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송헌이 나라 맡자 나는 귀양 가게 되니 / 松軒當國我流離
꿈속엔들 이런 생각 어찌 한 번 해봤으리 / 夢裏何曾有此思
두 정(鄭)이 게다가 대의에 참여한다니 / 二鄭況聞參大議
한 집안이 모일 날 언제 다시 있으리 / 一家完聚更何時
라 하였다. 첫구[首句]는 비록 가긍하나 뜻은 심히 오만하다.

정포은(鄭圃隱 포은은 정몽주의 호)은 이학(理學)과 절의가 일시의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문장도 호방하고 걸출하였다. 그가 북관(北關)에서 지은 시에,
정주라 중구절(重九節)에 높은 곳을 올라보니 / 定州重九登高處
국화는 의구하다 눈에 비쳐 환하구나 / 依舊黃花照眼明
개펄은 남으로 선덕진에 연해 있고 / 浦漵南連宣德鎭
산등성이 북으로 여진성에 비껴 있네 / 峯巒北倚女眞城
백 년 사이 전란(戰亂) 치른 나라의 흥망사에 / 百年戰國興亡事
만 리의 나그네는 강개한 정 끓는고야 / 萬里征夫慷慨情
술상 파하자 원수(元帥)는 말 붙들어 올라타고 / 酒罷元戎扶上馬
낮은 산에 기운 해는 깃발에 비치누나 / 淺山斜日照行旌
라고 했으니, 음절(音節)이 질탕하여 성당(盛唐)의 풍격이 있다. 또
풍류 고장 태수는 이천 석의 자리라 / 風流太守二千石
옛 친구 해후하여 삼백 배를 기울이네 / 邂逅故人三百杯
라 한 것이나, 또는,
나그네 고향 못 가 제비 새끼 만나고 / 客子未歸逢燕子
살구꽃 떨어지자 복사꽃도 떨어지네 / 杏花纔落又桃花
라 한 것과, 또는
매화 핀 창에는 봄빛 이르고 / 梅窓春色早
판자 집 지붕에는 빗소리 많네 / 板屋雨聲多
라 한 구절들은 모두 호방하게 펄펄 드날리니 그 사람됨과 비슷하다.
포은의 시에
강남의 여아는 머리에 꽃을 꽂고 / 江南女兒花揷頭
웃으며 짝을 불러 방주 가에 노는데 / 笑呼伴侶游芳洲
노 저어 돌아오니 날은 지려 하고 / 盪槳歸來日欲暮
원앙이 쌍쌍 날아 그지없는 시름이네 / 鴛鴦雙飛無限愁
했으니, 호탕한 풍류가 천고에 빛을 내며 시 또한 악부(樂府)와 흡사하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시는 매우 청신하고 섬부하였으니,
목은(牧隱)이,
“경지(敬之 김구용의 자)가 붓을 내려 쓰면 마치 운연(雲煙)과 같다.”
고 칭찬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일찍이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폐백을 요동(遼東)에 바치니, 도사(都司) 반규(潘奎)가 경사(京師)에 잡아보냈다. 그 자문(咨文)에 ‘말 50필’이라 할 것을 ‘5천 필’이라 잘못 적었기 때문이다. 명(明)의 고황제(高皇帝)는 우리나라가 요동백(遼東伯)과 사교(私交)한 것에 대해 성을 내고 또 말하기를
“말 5천 필이 오면 풀어서 돌아가게 해 주겠다.”
고 했다. 이때 이 광평(李廣平 광평부원군 이인임(李仁任)을 말함)이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는데 평소에 공의 무리들과 사이가 나빠 끝내 말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황제가 공을 대리(大理)에 유배시키니,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사생은 명이라 하늘 뜻을 어이하리 / 死生由命奈何天
동으로 부상 바라보니 고향 길은 아득한데 / 東望扶桑路渺然
양마라 오천 필이 어느 제나 닿을는지 / 良馬五千何日到
도화 핀 문 밖에는 풀만 수북 우거졌네 / 桃花門外草芊芊
라 하였고, 또 무창(武昌)에서 지은 시에서
황학루 앞에는 물결 솟구치는데 / 黃鶴樓前水湧波
강따라 발 드리운 주막은 몇천 챈고 / 沿江簾幕幾千家
추렴한 돈 술을 사와 회포를 푸노라니 / 醵錢沽酒開懷抱
대별산 푸르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大別山靑日已斜
라 했는데, 공은 마침내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그뒤 참의(參議) 조서(曺庶)가 또한 금치(金齒)에 유배당한 수년 만에 석방되어 돌아왔는데, 황주(黃州)에서 지은 시에
물빛과 산 기운은 맑은 모래 어루고 / 水光山氣弄晴沙
버들 푸른 긴 뚝에는 천만 채 집이로세 / 楊柳長堤千萬家
무수한 상선은 성 아래 대고 / 無數商船城下泊
죽루의 연월에는 젓대 노래 드높네 / 竹樓煙月咽笙歌
라고 하였다. 나는 장부의 몸으로 좁은 땅에 태어나 천하를 유람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왔었는데 두 공(公)은 비록 이방(異方)에 유배되었으나 그래도 오ㆍ초(吳楚)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참으로 인간의 쾌사라 할 수 있겠다.
이도은(李陶隱 도은은 이숭인(李崇仁)의 호)의 오호도시(嗚呼島詩)를 목은(牧隱)은 추장하여 성당(盛唐)에 비길 만하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삼봉(三峯)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되고 기구한 화마저 당하게 되었다. 지난날 주 태사(朱太史)가 이 작품을 보고 또한 매우 감탄하였다. 그
산북과 산남으로 세로는 갈라지고 / 山北山南細路分
송화는 비 머금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 松花含雨落紛紛
도인이 물을 길어 초가로 돌아오니 / 道人汲井歸茅舍
한 가닥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들이네 / 一帶靑煙染白雲
라고 한 시는 유수주(劉隨州 당 나라 유장경(劉長卿))에게 무엇이 모자란다 하겠는가?
국초(國初)에는 정교은(鄭郊隱 교은은 정이오(鄭以吾)의 호)ㆍ이쌍매(李雙梅 쌍매는 이첨(李詹)의 호)의 시가 가장 훌륭했다. 정교은 시에
이월도 무르익어 삼월이 오려 하니 / 二月將闌三月來
한 해의 봄빛이 꿈속에 돌아오네 / 一年春色夢中回
천금으로도 가절은 살 수가 없으니 / 千金尙未買佳節
술 익는 뉘 집에서 꽃은 정히 피었는고 / 酒熟誰家花正開
라 한 시는 당인(唐人)의 아름다운 경지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쌍매의
신선이 차고 온 옥소리 쟁그랑쟁그랑 / 神仙腰佩玉摐摐
고루에 올라와서 벽창에 걸어놓고 / 來上高樓掛碧窓
밤 들어 다시금 유수곡을 타노라니 / 入夜更彈流水曲
한 바퀴 밝은 달이 가을 강에 내리누나 / 一輪明月下秋江
라고 한 시 역시 빼어난 아취가 있다.
쌍매의 문앵시(聞鸎詩)에
삼십육궐(三十六闕) 후궁에 봄 나무 깊숙하고 / 三十六宮春樹深
미인이 꿈을 깨니 남창은 어둑해라 / 蛾眉夢覺午窓陰
영롱한 울음소리 수심 엉겨 듣자 하니 / 玲瓏百囀凝愁聽
모두가 향규의 님 바라는 마음일레 / 盡是香閨望幸心
라 했으니 두목지(杜牧之)의 시와 흡사하다.

석간(石磵) 조운흘(趙云仡)은 고려 때 이미 관직이 현달하였으나 늘그막에는 미친 체하며 세상을 즐기고 지내면서 사평원주(沙坪院主)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하루는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의 당여(黨與)로서 외지에 유배당한 사람들이 길에 줄이은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한낮에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 柴門日午喚人開
숲 속 정자로 걸어나가 이끼 돌에 앉으니 / 步出林亭坐石苔
어젯밤 산중의 비바람이 거칠더니 / 昨夜山中風雨惡
개울 가득 흐르는 물 꽃잎이 떠 내려오네 / 滿溪流水泛花來

세종조(世宗朝)에는 인재가 일시에 배출되어 뛰어난 문장 석학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고시(古詩)는 옛사람에 비하면 자못 부끄러울 뿐 아니라 율시나 절구에 있어서도 놀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의 시가 지리하지만 그래도 부섬하고 아름다워 간간이 좋은 구절도 있다. 이를테면
노는 벌은 쉴 새 없이 날기만 하고 / 游蜂飛不定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 조누나 / 閑鴨睡相依
달빛은 벌레 소리 너머 비치고 / 月色蛩音外
은하는 까치 그림자 속에 흐르네 / 河聲鵲影中
라 한 구절이나
다시 한 번 난새 타고 철적을 불며 / 更欲乘鸞吹鐵笛
깊은 밤 밝은 달에 강남을 찾고 싶네 / 夜深明月過江南
와 같은 구절들은 역시 아취가 있다.

김괴애(金乖崖 괴애는 김수온(金守溫)의 호) 시 또한 호방하다. 이를테면
사립문 삐딱하게 시냇둑에 다다르니 / 柴門不整臨溪岸
산 비에 아침마다 물 나는 걸 보누나 / 山雨朝朝看水生
라 한 구절이나,
밝은 창에 중은 납의(衲衣)를 깁고 / 窓虛僧結衲
고요한 탑에 손은 시를 짓누나 / 塔靜客題詩
라 한 구절들은 매우 한원(閑遠)하여 운치가 있다.

강경순(姜景醇 경순은 강희맹(姜希孟)의 자)의 양초부(養蕉賦)는 대단히 훌륭하며, 그의 시 또한 청경(淸勁)하다. 그 병여음(病餘吟)에
남창에 종일토록 세사(世事) 잊고 앉았으니 / 南窓終日坐忘機
뜨락 채엔 사람 없어 새는 날기 배우네 / 庭院無人鳥學飛
가는 풀에 그윽한 향내 어디에서 나는지 / 細草暗香難覓處
묽은 연기 낡은 빛에 부슬부슬 비내리네 / 澹煙殘照雨霏霏
라 하고, 영매(詠梅)에,
어둘녘 울 가에서 퍼진 가지 보고서 / 黃昏籬落見橫枝
느린 걸음 향내 찾아 물가에 와 닿으니 / 緩步尋香到水湄
천년의 나부산(羅浮山) 둥근 달이 / 千載羅浮一輪月
지금에 와 비치니 꿈이 깨일 때로세 / 至今來照夢回時
라 한 시구들은 모두 한아(閑雅)하여 읊조릴 만하다.

서사가(徐四佳)가 오랫 동안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므로 동시대의 강진산(姜晉山 진산은 강희맹(姜希孟)의 봉호)ㆍ이양성(李陽城 양성은 이승소(李承召)의 봉호)ㆍ김영산(金永山 영산은 김수온(金守溫)의 봉호)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문형(文衡)을 주관하지 못하고 먼저 죽었다. 이양성의 제비를 읊은 시에
버들 푸른 골목에 동녘 바람 저물었고 / 綠楊門巷東風晩
풀 푸른 못가에 부슬비는 침침하네 / 靑草池塘細雨迷
라 한 구절은 당 나라 시인의 시구와 흡사하다.
우리나라 시는 고체(古體)를 본뜬 것이 없는데 오직 성화중(成和仲 화중은 성간(成侃)의 자)이 안연령(顔延齡)ㆍ도잠(陶潛)ㆍ포조(鮑照) 세 사람의 시를 본뜬 세 편의 시는 깊이 그 법을 얻었으며 여러 절구 역시 당의 악부체(樂府體)를 얻었으니 이분에 힘입어 가까스로 적요함을 면하게 되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의 글은 요체는 깨달았으나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니 최동고(崔東皐 동고는 최립(崔岦)의 호)가 그를 가장 업신여겼다. 그의 시는 오로지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에게서 나왔으니 전고자(銓古者 고전을 비평하는 사람)가 작게 보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우리 중형은 일찍이 그의 시를 말씀하기를
학 울자 맑은 이슬 내려 맺히고 / 鶴鳴淸露下
달 뜨자 큰 고기 뛰어오르네 / 月出大魚跳
라 한 구절은 결코 성당(盛唐)의 시에 뒤지지 않으며,
가랑비 오는데 중이 장삼을 꿰매고 / 細雨僧縫衲
찬 가람에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 寒江客棹舟
와 같은 구절은 심히 한담(閑淡)한 맛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驪江)에서 읊은,
십년간의 세상사는 홀로 읊는 시 속에 / 十年世事孤吟裏
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에 / 八月秋容亂樹間
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神勒寺)에서 지은,
상방에서 종 울리니 여룡은 춤을 추고 / 上方鍾動驪龍舞
만 구멍에 바람 우니 철봉이 나래 치네 / 萬竅風生鐵鳳翔
라 한 구절의 홍량(洪亮)ㆍ엄중(嚴重)함만 같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우주를 버팀직한 시구이다. 그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에서는
복사꽃 띄운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고 / 桃花浪高幾尺許
은석은 목까지 잠겨서 어딘지 모르겠네 / 銀石沒頂不知處
쌍쌍의 가마우지 여울돌을 잃고 / 兩兩鸕鶿失舊磯
물고기 물면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 銜魚却入菰蒲去
라 했는데 이는 가장 항고(伉高)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

김열경(金悅卿 열경은 김시습(金時習)의 자)의 높은 절개는 우뚝하니 더할 나위가 없다. 그 시문도 초매하나 마음 쓰지 않고 유희삼아 지었기 때문에 억센 화살의 최후와 같아서 매양 허튼 말이 섞이니 장타유(張打油)와 같아 싫증이 난다. 그가 세향원(細香院)에 쓴 시에
아침해 돋으려 하니 새벽빛이 갈라지고 / 朝日將暾曙色分
숲 안개 걷힌 곳에 새는 떼를 부르누나 / 林霏開處鳥呼群
먼 봉에 뜬 푸른 빛 창 열고 바라보며 / 遠峯浮翠排窓看
이웃 절 종소리는 언덕 너머에서 듣는다 / 隣寺鍾聲隔巘聞
파랑새는 소식 전하며 약 솥을 엿보고 / 靑鳥信傳窺藥竈
벽도화 떨어져 이끼에 비추이네 / 碧桃花下照苔紋
아마도 신선은 조원각(朝元閣)에 돌아가서 / 定應羽客朝元返
솥 아래 한가로이 소전문을 펴 보리 / 松下閑披小篆文
라 했고, 소양정(昭陽亭)에서는
새 너머 하늘은 끝나려 하고 / 鳥外天將盡
읊조림 끝에 한은 그지없어라 / 吟邊恨未休
산은 첩첩 북을 따라 굽이쳐 가고 / 山多從北轉
강은 절로 서쪽 향해 흐르는구나 / 江自向西流
먼 물가에 기러기 내려와 앉고 / 雁下汀洲遠
그윽한 옛 기슭엔 배 돌려오네 / 舟回古岸幽
어느 제나 속세 그물 떨쳐버리고 / 何時抛世網
흥을 따라 이곳에 다시 와 놀아볼까 / 乘興此重遊
라 했고, 산행(山行)에서는,
아이는 잠자리 잡고 할아비는 울 고치고 / 兒捕蜻蜓翁補籬
작은 개울 봄 물에 가마우지 목욕하네 / 小溪春水浴鸕鶿
푸른 산 끊긴 곳에 돌아갈 길은 머니 / 靑山斷處歸程遠
등나무 한 지팡이 비껴 메고 오누나 / 橫擔烏藤一個枝
라 했는데, 모두 속기를 떨쳐버려 화평(和平)하고 담아(澹雅)하니 저 섬세하게 다듬는 자들은 응당 앞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조매계(曺梅溪 매계는 조위(曺偉)의 호)ㆍ유뇌계(兪㵢溪 뇌계는 유호인(兪好仁)의 호)는 일시에 함께 성명을 드날렸으나 정순부(鄭淳夫 순부는 정희량(鄭希良)의 호)보다는 못했다. 그 혼돈주가(渾沌酒歌)는 매우 훌륭하여 소동파(蘇東坡)와 흡사하다.
조각달은 이 맘 비춰 고국에 다다르고 / 片月照心臨故國
낡은 별 꿈을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 / 殘星隨夢落邊城
라고 한 구절은 극히 신일(神逸)하며,
나그네 길 우연히 한식 비를 만나니 / 客裏偶逢寒食雨
꿈속에서 오히려 고향 봄을 생각하네 / 夢中猶憶故園春
라 한 시구에는 중당(中唐)의 고아(高雅)한 운치가 있고,
봄이 와도 꽃 안 뵈고 눈만 보이나니 / 春不見花唯見雪
기러기 안 오는 곳 사람 어이 찾아오리 / 地無來雁況來人
라 한 구절은 비록 다듬은 흠이 있으나 또한 다정다감하다.
이망헌(李忘軒 망헌은 이주(李冑)의 호)의 시는 가장 침착하여 성당(盛唐)의 풍격이 있다.
아침해는 붉게 뿜어 발해에 솟구치고 / 朝日噴紅跳渤澥
갠 구름 희게 펴져 무려산(巫閭山)을 나오네 / 晴雲挹白出巫閭
와 같은 시구는 매우 힘이 있으며
언 비는 천 산 마루 눈으로 비껴 닿고 / 凍雨斜連千嶂雪
주린 까마귀 한 수풀 바람에 놀라 우네 / 飢烏驚叫一林風
라 한 시구는 노창(老蒼)하고 기걸(奇杰)하다. 통주(通州)에서 지은 시는
통주는 천하의 승경(勝景)인지라 / 通州天下勝
누각들이 구름 하늘에 솟았구려 / 樓觀出雲霄
저자에는 금릉의 물화(物貨) 쌓이고 / 市積金陵貨
강 줄기는 양자의 물결로 가네 / 江通揚子潮
가을이라 갈가마귀 물가에 내리고 / 寒鴉秋落渚
저녁 되니 외론 학은 요동으로 돌아가네 / 獨鶴暮歸遼
말에 탄 신세는 천리 나그네 / 鞍馬身千里
정자에 오르니 고국은 멀고멀어라 / 登臨故國遙
라 했는데, 이 역시 기막히게도 왕유(王維)ㆍ맹호연(孟浩然)의 수준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南袞)의 호)은 일찍이, 김일손(金馹孫)의 글이나 박은(朴誾)의 시는 쉽게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옳다. 박은의 시는 비록 정성(正聲)은 아니나 엄진(嚴縝)하고 경한(勁悍)하다.
흐린 봄날 비 오련다 새는 서로 지저귀고 / 春陰欲雨鳥相語
늙은 나무 무정하니 바람 절로 슬퍼지네 / 老樹無情風自哀
와 같은 구절은 당의 섬려(纖麗)한 시풍만을 배운 자로는 어찌 감히 그 경지에 올라설 수 있으랴.
폐주(廢主 연산군을 가리킴)는 비록 황란(荒亂)하였으나 또한 시문을 좋아하였다. 강목계(姜木溪 목계는 강혼(姜渾)의 호)가 오랫동안 도승지로 있었는데, 연산이 언젠가
한식이라 동산 숲에 삼월은 저물고 / 寒食園林三月暮
꽃 날리는 비바람에 오경은 싸늘하네 / 落花風雨五更寒
라 한 시구로 시제(詩題)를 내고서 근신(近臣)들에게 지어 바치도록 명하였는데 목계의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그 시에
청명이라 궁 버들은 찬 내에 잠기고 / 淸明御柳鎖寒煙
쌀쌀한 봄바람 새벽 되어 더욱 몰아치네 / 料峭東風曉更顚
지는 꽃 땅에 붉게 포개지고 / 不禁落花紅襯地
나는 버들개지 하늘 희게 뒤덮누나 / 更敎飛絮白漫天
못물 너머 높은 누각 구슬발을 걷고 / 高樓隔水褰珠箔
세오마(細烏馬)는 꽃을 찾아 비단 언치 빛내네 / 細馬尋芳耀錦韉
금동이 술 실컷 취해 별원으로 돌아오니 / 醉盡金樽歸別院
오색 끈 흔들리며 그림 난간 가로 끄네 / 綵繩搖曳畫欄邊
라 했는데, 폐주는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준 물건도 매우 많았다. 언젠가 폐주가 죽은 희첩(姬妾)을 슬퍼하여 사신(詞臣)들로 하여금 만시(挽詩)를 짓게 하였는데 이백익(李伯益 백익은 이희보(李希輔)의 자)이 시를 짓되
궁궐 문은 깊이 잠겨 달빛도 황혼인 제 / 宮門深鎖月黃昏
열두 번 종소리가 밤중에 들린다 / 十二鍾聲到夜分
어디메 청산에 옥골을 묻었는지 / 何處靑山埋玉骨
가을 바람에 지는 잎 소리 차마 못듣겠네 / 秋風落葉不堪聞
라 하니 폐주가 극찬하였고 드디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서 직제학(直提學)으로 발탁되었다. 두 편 시가 비록 좋기는 하나 두 사람도 또한 이 때문에 이름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 시로는 이용재(李容齋)를 첫째로 함이 마땅하다. 그의 시풍은 침착하고 화평하며 아담하고 순숙(純熟)하다. 오언고시(五言古詩)는 두보(杜甫)와 진후산(陳後山)의 품격과 비슷하여 고고(高古)ㆍ간절(簡切)하여 글이나 말로는 찬양할 수가 없다. 내가 평소에 즐겨 읊던 절구 한 수로
평생에 사귄 벗 모두 늙어 죽어가고 / 平生交舊盡凋零
흰머리 마주 보니 그림자와 몸뚱이라 / 白髮相看影與形
때마침 고루에 달조차 밝은 밤엔 / 正是高樓明月夜
애처로운 피리소리 어찌 차마 들으리 / 笛聲凄斷不堪聽
는 감개가 무량하여 이를 읽노라면 가슴이 메어진다.

국조(國朝)의 시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용재 상공(容齋相公)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ㆍ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ㆍ충암(冲庵) 김정(金淨)ㆍ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족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국조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소재(盧蘇齋)는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지천(黃芝川)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익지(李益之)가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여장(權汝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용재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
정호음은 추앙 굴복하는 경우가 적었고 다만 눌재의 시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벽 위에
서북의 두 강은 태고적부터 흘러오고 / 西北二江流太古
동남의 두 산줄기 신라를 파고드네 / 東南雙嶺鑿新羅
라는 것과,
거문고 타던 사람은 학 가의 달로 가고 / 彈琴人去鶴邊月
피리 부는 손은 솔 아래 바람에 오네 / 吹笛客來松下風
라는 시구를 써 놓고 스스로 탄식하며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또 이르기를,
“허종경(許宗卿)의 시에
들길이 어두워 오는데 소는 홀로 돌아오고 / 野路欲昏牛獨返
강 구름이 비오려 하니 제비가 낮게 나네 / 江雲將雨燕低飛
라는 구절은 강목계(姜木溪)의
자지 제비 엇날자 바람은 버들 스치고 / 紫燕交飛風拂柳
청개구리 와글 울자 비는 산에 어둑어둑 / 靑蛙亂叫雨昏山
이라 한 시구와 서로 대적할 만하다.”
고 했다. 그 당시 ‘신기재의 시는 중체(衆體)를 모두 갖추었으나 호음은 칠언율시에만 능했으니 그에게 못 미칠 것 같다.’고들 했는데, 호음은 ‘그의 중체가 감히 내 율시 한 구를 당할소냐.’ 했으니 그의 자부가 이러했다.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때 / 昔年窮寇此殲亡
혈전 벌인 신검(神劍)에는 붉은 빛깔 둘렸다네 / 鏖戰神鋒繞紫芒
한의 깃대 꽂힌 흔적 돌 틈에 남아 있고 / 漢幟豎痕餘石縫
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 빛을 물들이네 / 斑衣漬血染霞光
소슬바람 살기 띠어 수풀 뫼는 엄숙하고 / 商聲帶殺林巒肅
도깨비불 음기 타니 성루는 묵어졌네 / 鬼燐憑陰堞壘荒
동방 사람 어육(魚肉) 면킨 우 임금의 덕일진댄 / 東土免魚由禹力
소신이 해를 그려 어찌 감히 칭찬하리 / 小臣摸日敢揄揚
기걸(奇杰)하고 혼중(渾重)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浙江)의 오명제(吳明濟)가 이 시를 보고 비평하기를,
“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
고 했는데 대개 당시(唐詩)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
이익지(李益之)는 어릴 적에 두시(杜詩)를 호음(湖陰)에게 배웠는데 하루는 익지더러 서가 위의 여러 책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그리하여 호음이 그것을 보다가 《춘정집(春亭集)》이 나오니 땅에 던져버렸고, 《매계집(梅溪集)》은 펴보고 웃으며 덮었는데 대개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오직 《점필재집(佔畢齋集)》만은 집어들고 익히 보기를 마지않았다. 익지가 엿보니 모두 뽑아서 줄을 그으니 대개 그들을 좋아하여 소재로 취해 시의 자료로 하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평생에 가장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는 시구를 물었더니
산 나무 함께 우니 바람 언뜻 일어나고 / 山木俱鳴風乍起
강물 소리 문득 높자 달이 홀로 걸렸네 / 江聲忽厲月孤懸
라는 구절을 사람들이 깎은 듯 아름답다고들 하고,
산꼭대기에 깜빡이는 별은 조각달과 빛 다투고 / 峯頂星搖爭缺月
나무 위에 움직이는 새는 깊은 떨기 숨는고야 / 樹顚禽動竄深蕞
라는 시구 역시 시상(詩想)은 교묘하지만 마침내
빗기운 노을 눌러 산은 문득 어두워지고 / 雨氣壓霞山忽暝
냇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밝구나 / 川華受月夜猶明
라 한 구절보다는 못하니, 이는 마치 신이 도운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
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의 시에
지는 해는 거친 들에 뉘엿 비치고 / 落日臨荒野
갈가마귀 저문 마을 내리는고야 / 寒鴉下晩村
빈 수풀엔 연화가 싸늘히 식고 / 空林煙火冷
초가집도 사립문 걸어 닫았네 / 白屋掩柴門
는 유장경(劉長卿)의 시와 흡사하다. 그의 우도가(牛島歌)는 심오하고 황홀하며 미묘하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며 가진 재치를 다 부렸다. 그래서 신기재(申企齋)는 그를 추존(推尊)하여 장길(長吉)에게 견주었다.
최원정(崔猿亭 원정은 최수성(崔壽峸)의 호)은 세상을 내리보고서 벼슬하지 아니하고 화나 면하기를 바랐다. 하루는 제현(諸賢)이 정암(靜庵 조광조의 호)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밖에서 들어오며 숨이 가빠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황급히 물을 달라고 해 마시고는,
“내가 한강을 건너올 제 물결이 솟구치고 배가 부서져 거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났다.”
고 하니, 주인이 웃으면서,
“이는 우리들을 풍자하는 말이다.”
고 했다.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다 산수를 그리자 원충(元冲 김정(金淨)의 자)이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 산 봉우리 우뚝한데 / 淸曉巖峯立
흰 구름은 산 기슭에 비꼈네 / 白雲橫翠微
강촌에는 사람 모습 보이지 않고 / 江村人不見
강변 나무 저 멀리 아득하누나 / 江樹遠依依
라 했다. 원정이 만의사(萬義寺)에 올라 지은 시에,
옛 불전엔 몇 안 되는 중이 지키고 있고 / 古殿殘僧在
수풀 끝엔 저녁 종 맑게 울리네 / 林梢暮磬淸
창문은 트이어 천리 끝 닿고 / 窓通千里盡
담장이 눌러 서니 뭇산은 평평 / 牆壓衆山平
나무는 몇 해나 늙어 왔는지 / 木老知何歲
새는 별난 목청 우짖고 있네 / 禽呼自別聲
험난한 세망에 걸릴까 근심하려니 / 艱難憂世網
오늘에 내 인생을 한탄하노라 / 今日恨吾生
라고 했다. 결구(結句)에 뜻이 담겨 있으니 아마도 스스로 화를 입을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애석하구나.

김이숙(金頣叔 이숙은 김안로(金安老)의 자)이 젊어서 관동에 놀러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읊조리기를
봄은 우전의 산천 밖에 무르익고 / 春融禹甸山川外
풍악은 우정의 조수 사이 아뢰누나 / 樂奏虞庭鳥獸間
라 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어(詩語)이다.”
고 하므로 꿈을 깨고 나서 이를 기억해 두었다. 다음해 정시(庭試)에 들어가니 연산(燕山)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 시험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봄날 이원 제자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들춰보다.[春日梨園弟子沈香亭畔閑閱樂譜]’라는 시제(詩題)를 가지고 한(閑) 자를 압운(押韻)으로 해서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이 생각하니 그 글귀가 꼭 들어 맞는지라 이내 그걸 가지고 써 냈다. 강목계(姜木溪 목계은 강혼(姜渾)의 호)가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크게 칭찬하고 장원(壯元)을 시켰다.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가 본디 글을 잘 안다고 이름이 난지라 참시관(參試官)을 하면서,
“이 구절은 귀신의 소리지 사람의 시가 아니다.”
하고 즉시 그 출처를 묻자 김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신낙봉(申駱峰 낙봉은 신광한(申光漢)의 호)의 시는 청절(淸絶)하여 아취가 있다. 중추(中秋)에 배를 긴 여울에 대고[中秋舟泊長灘]라는 시에
갈대꽃 핀 물 기슭에 외론 배 매고 보니 / 孤舟一泊荻花灣
양 갈래 맑은 강에 사면에는 산이로세 / 兩道澄江四面山
인세(人世)에도 이 밤 같은 달이야 없을까만 / 人世豈無今夜月
백년 가도 바랄쏜가 이 가운데 보는 달을 / 百年難向此中看
이라 하고, 배 위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며[船上望三角山]라는 시에
외론 배 잡아타고 광릉(廣陵) 나루 떠나오니 / 孤舟一出廣陵津
열다섯 해 동안 죽지 못한 몸이라 / 十五年來未死身
나는야 정이 있어 아는 얼굴 같지만 / 我自有情如識面
청산이야 옛사람을 기억할 수 있으랴 / 靑山能記舊時人
라 했다. 김 공석(金公碩)의 옛 집을 지나며[過金公碩舊居]라는 시에
같은 때 귀양살이 몇 사람이 남았는고 / 同時逐客幾人存
동풍에 말 세우고 홀로 애를 태우누나 / 立馬東風獨斷魂
한식이라 안개비 자욱한 개산 길에 / 煙雨介山寒食路
석양 마을 젓대 소리 차마 듣지 못할레라 / 不堪聞笛夕陽村
라 하고, 삼월 삼짇날에 박대립에게 부침[三月三日寄朴大立]이라는 시에
삼월 삼일 구월 구일 해마다 만나자던 / 三三九九年年會
옛 약조는 남아 있되 일은 오직 어그러져 / 舊約猶存事獨違
방초에 답청할 날 오늘이 맞건마는 / 芳草踏靑今日是
맑은 동이 흰 술은 옛 친구가 아닐세 / 淸尊浮白故人非
바람 앞의 제비 소리 앳되게도 들리나 / 風前燕語聞初嫩
비내린 뒤 꽃가지는 또한 보기 어렵네 / 雨後花枝看亦希
모동의 어른들이 탈속(脫俗)한 이 많으니 / 茅洞丈人多不俗
봄옷을 전당잡힐 생각이 없을쏜가 / 可能無意典春衣
라 했으니, 편편이 모두 읊을 만하다. 비록 웅기(雄奇)함에 있어서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에 미치지 못하나 청창(淸暢)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하겠다.

장음정(長吟亭) 나식(羅湜)의 시는 시취(詩趣)가 있어 이따금 성당시(盛唐詩)에 접근하고 있다. 신광한과 정사룡 등 노대가들이 어느 집에 모여 바야흐로 포도(蒲桃) 그림 족자를 놓고 시를 읊으려 하는데 생각에 잠겨 미처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음이 술에 취해 와서는 붓을 빼앗아 들고 족자 위에 쓰려 했다. 주인이 말리려 하자 호음이 그냥 두라고 하니, 장음은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하나에
늙은 원숭이 무리를 잃고 / 老猿失其群
지는 해는 마른 등걸 위에 비치네 / 落日枯楂上
우뚝 앉아 고개도 아니 돌리니 / 兀坐首不回
아마도 천산의 메아리 듣는 거지 / 想聽千峯響
라 하였다. 호음이 크게 칭찬하고는 붓을 놓아버리고 짓지 않았다.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성당 이주가(伊州歌)의 법이니 이른바 한 구절이라도 끊어 놓으면 시편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퇴휴(蘇退休 퇴휴는 소세양(蘇世讓)의 호)가 젊었을 적에는 상 좌상(尙左相 상진(尙震)을 가리킴)과 동료로 지냈는데 상(尙)이 하관(下官)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재상이 되자 기러기 그린 화축(畫軸)을 가지고 퇴휴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퇴후가 절구 한 구를 지어 써 보냈는데
쓸쓸한 외그림자 저녁 강가 비치고 / 蕭蕭孤影暮江潯
붉은 여뀌꽃 시들어 두 기슭에 그늘졌네 / 紅蓼花殘兩岸陰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 짝을 불러대며 / 漫向西風呼舊侶
구름 물 만 겹이나 깊은 줄 모르누나 / 不知雲水萬重深
라 했으니, 함축된 의사가 심원한지라 상 정승이 보고는 탄식하며 서글퍼했다. 심어촌(沈漁村 어촌은 심언광(沈彦光)의 호)은 늘그막에 김안로(金安老)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자 내쫓겨 북도방백(北道方伯)이 되었는데 시를 짓기를
넓은 강 건너려니 나룻배가 없거늘 / 洪河欲濟無舟子
추운 나무 시드는데 더부살이 있구나 / 寒木將枯有寄生
라 했으니, 대개 후회하는 마음이 싹튼 것일 것이다.
임석천(林石川 석천은 임억령(林億齡)의 호)은 사람됨이 고매하고 시 역시 사람됨과 같았다. 낙산사영(洛山寺詠)은 마치 용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 형세로 문세(文勢)가 날아 꿈틀거려 그 기이한 경치와 자못 장려함을 다툴 만하였다. 그 시에
마음은 유수와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 心同流水世間出
꿈에는 백구 되어 강 위를 나네 / 夢作白鷗江上飛
라 한 구절은 기상이 높아 신룡이 바다를 희롱하는 뜻이 있다.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풍류가 호일(豪逸)하고 그 시 또한 펄펄 나는 듯하니
고개 숙인 꽃은 술에 취한 옥녀의 얼굴이고 / 花低玉女酣觴面
끊어진 산은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로다 / 山斷蒼虯飮海腰
라 한 시는 지금까지 사람 입에 회자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이를 몹시 사랑하여 만년까지도 문득 생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면 임사수(林士遂 사수는 임형수의 자)와 더불어 서로 대면할 수 있으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고광(高曠)하고 이수(夷粹)한데 시 역시 그 인품과 같았다. 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은 그의 등취대시(登吹臺詩)를 극찬하여 고적(高適)ㆍ잠참(岑參)의 높은 운이라 했다고 한다. 그 시에
양왕이 노래하고 춤추던 곳에 / 梁王歌舞地
오늘은 나그네가 올라왔노라 / 此日客登臨
구름을 능지를 강개한 흥취 / 慷慨凌雲趣
옛을 묻는 처량한 마음이로세 / 凄凉弔古心
긴 바람은 먼 들에 일어나는데 / 長風生遠野
밝은 해는 층산(層山) 뒤에 숨어 버리네 / 白日隱層岑
그 시절의 번화한 일들을 이제 / 當代繁華事
아득하니 어디에서 찾아보리오 / 茫茫何處尋
라 한 것은 침착하고 준위(俊偉)하여 가늘고 약한 태를 일시에 씻어버렸으니 참으로 귀중히 여길 만하다.

하서가 죽은 후 영남(嶺南)의 하양(河陽)에 오세억(吳世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소생하여 말하기를,
“꿈에 천부(天府)에 갔었는데 붉은 옷 입은 저승 사자가 소원(小院)으로 데리고 가니 거기에 윤건(綸巾)을 쓴 학사가 있어 김하서라고 하면서 ‘너는 금년에 하늘에 오름이 합당치 않으니 나가 힘써 행실을 닦으라.’ 하며 시로써 보냈는데 그 시는
세억은 그 이름, 대년(大年)은 그 자(字)인데 / 世億其名字大年
천문(天門) 열고 들어와 자미 신선 뵈었더라 / 排門來謁紫微仙
일흔 일곱 지난 뒤에 서로 다시 볼지니 /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계 돌아가 함부로 전치 말라 / 歸去人間莫浪傳”
고 하였다.
세억은 효자였는데, 그 후 과연 77세에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선친(先親)께서는 늘,
“윤장원(尹長源)의 재주는 따를 수 없다.”
고 말씀하시며, 그의
넓은 바다 쪽배 위에 꿈은 천리 떠도는데 / 海闊孤舟千里夢
두어 가락 젓대 소리 달 밝은 가을이다 / 月明長笛數聲秋
한 것과,
맞바람이 살구에 불어 중문을 때리네 / 交風吹杏打重門
라는 시구를 매양 칭송하면서 청절(淸切)하여 고시(古詩)에 핍진하다고 하셨다.

선친께서는 기묘년에 영남 관찰사를 제수받으셨는데 권습재(權習齋 습재는 권벽(權擘)의 호)가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가면서 우리 선친을 송별한 시에,
평생의 회포 좋이 푸리라 여겼더니 / 懷抱平生擬好開
담소를 이제부턴 모시기도 흔찮구려 / 笑談從此未多陪
달빛 비친 요하 건너 나는 사신길 떠나고 / 朝天我渡遼河月
유령 매화 찾으며 군은 부절(符節) 안고 가리 / 擁節君尋庾嶺梅
맡은 일 갈 길이 모두 다 염려스럽고 / 職事道途俱可念
이별이라 노쇠(老衰)라 서로 재촉하네 / 別離衰謝兩相催
공무 여가 벗 그리는 노래를 짓는다면 / 公餘倘有停雲詠
시통이나 자주자주 부쳐주기 바라네 / 佇望詩筒數寄來
라 하였는데, 선친께서는 간절하고 적당하다고 칭찬하셨다.

선친의 송행시첩(送行詩帖)에 있는 소상(蘇相 소세양을 가리킴)의 시 가운데
백옥당 이뤄진 지 오래이러니 / 白玉堂成久
황금대 하사받기 오늘이라네 / 黃金帶賜今
라는 구절을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긴다. 그러나 박수암(朴守庵 수암은 박지화(朴枝華)의 호)의 시 가운데,
경월이 높이 뜬 걸 문득 보노니 / 忽看卿月上
내 옷이 화사하다 뉘 아깝다 하리 / 誰惜我衣華
라는 절구는 바로 경책(警策)이다. 그가 미암(眉庵)을 애도한 시에
천추의 푸른 바다 물결 위에서 / 千秋滄海上
백일은 큰 이름을 드리웠도다 / 白日大名垂
라 한 것은 어찌 두릉(杜陵 두보를 가리킴)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박수암이 청학동(靑鶴洞)에서 놀며 지은 시에,
고운은 당 나라 진사였으니 / 孤雲唐進士
당초에 신선을 아니 배웠네 / 初不學神仙
만촉같은 삼한의 날이라면 / 蠻觸三韓日
풍진은 온 누리에 가득찼구려 / 風塵四海天
영웅을 어이 가늠할 수 있으리 / 英雄那可測
진결은 본디 아니 전하는 것을 / 眞訣本無傳
봉래산(蓬萊山)에 한번 들어가 버린 후에 / 一入蓬山去
청향(淸香)만 팔백 년을 남아 전하네 / 淸芬八百年
는 연한(淵悍 깊고 굳셈), 간질(簡質 조촐하고 질박함)하며 사려 깊은 맛이 있으니 두보와 진자앙의 진수를 깊이 얻은 것이다.

양봉래(楊蓬萊 양사언(楊士彦)의 호)가 풍악(楓岳)에서 놀 제 돌 위에 시를 새겨
백옥경과 / 白玉京
봉래섬엔 / 蓬萊島
아득할손 연파는 예스럽고 / 浩浩煙波古
따스할손 풍일(風日)은 좋을씨고 / 熙熙風日好
푸른 복사꽃 아래 한가로이 오가며 / 碧桃花下閑來往
학 등의 피리 소리 천지는 늙어가네 / 笙鶴一聲天地老
라 했으니 신선의 흥취가 있다. 같은 때에 송경(宋暻)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서자(庶子)였다. 그 또한 이 시에 이어 읊기를
학은 높이 날아오르고 / 鶴軒昂
봉은 휘적이며 / 鳳逶遲
삼신산 아래로 굽어보고 / 三山朝下
오색구름 가운데를 질러 나네 / 五雲中飛
천지는 석 자의 지팡이라면 / 乾坤三尺杖
신세는 한 벌의 육수의로세 / 身世六銖衣
바위 꼭지 나무에 긴 칼 좋이 걸어두고 / 好掛長劍巖頭樹
맑은 샘 희롱하며 붉은 지초(芝草) 캐먹노라 / 手弄淸泉茹紫芝
고 하니, 봉래가 극도의 찬사를 보내고 돌아가신 형도 기꺼이 칭찬하였다.
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사람됨이 행실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선친이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니 공이 답장하기를
밤 연기에 오동 꽃 떨어지고 / 桐花夜煙落
바다 숲에 봄 구름 사라지도다 / 海樹春雲空
고 읊었던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곧 진왕(陳王 위(魏) 조식(曺植)의 봉호)이 응양(應瑒)ㆍ유정(劉楨)을 처음 잃던 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익지는 시를 남기고 작별하는데
나그네 가고 머물 사이란 것은 / 行子去留際
주인이 눈썹 까딱하는 사이라 / 主人眉睫間
오늘 아침 기쁜 빛을 잃게 됐으니 / 今朝失黃氣
오래잖아 청산을 생각하리 / 未久憶靑山
노국에선 원거에게 제사를 했고 / 魯國鶢鶋饗
남방에 출정가서 율무 갖고 돌아왔네 / 南征薏苡還
소 계자는 가을 바람 만나자마자 / 秋風蘇季子
또 다시 목릉관을 나가는구나 / 又出穆陵關
라 읊으니, 공이 크게 칭찬과 사랑을 더하며 그를 처음처럼 대접했다. 선배들이 붕우간에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의가 어떠했던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
소재(蘇齋) 노(盧) 정승이 승축(僧軸)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 및 익지(益之)의 시가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이 시대에 제일가는 문장으로는 / 當代文章伯
유독 이와 최를 일컫는다오 / 唯稱李與崔
라 하였는데, 대체로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중형 또한 말하기를,
“이의 시는 신라 이래로 당시(唐詩)를 법받은 자로서는 그 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그의 시 중에서,
중천의 생학은 가을 하늘에 내려오고 / 中天笙鶴下秋霄
천년의 고운은 하마 벌써 적막하구나 / 千載孤雲已寂寥
밝은 달 트인 문엔 유수가 놓였으니 / 明月洞門流水在
어디쯤 무릉교가 있는지 궁금하네 / 不知何處武陵橋
라 한 작품을 칭송하면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라 여겼었다.
조지세(趙持世 지세는 조위한(趙緯韓)의 자)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명(地名)은 시(詩) 속에 들여와도 우아한 맛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대기는 운몽택을 쪄서 올리고 / 氣蒸雲夢澤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네 / 波撼岳陽城
와 같은 시구를 보면 무릇 열 글자 중에서 여섯 글자가 지명이고, 그 위에 네 글자를 보탠 것이요, 그 힘쓴 곳은 다만 증(蒸)자와 감(撼)자, 이 두 글자뿐이니 시를 짓기가 어찌 수월하지 않은가.”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또한 일리는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노 정승의 시인
길은 평구역에서 다해 버리고 / 路盡平丘驛
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진다네 / 江深判事亭
청파의 저녁에 버들빛 짙고 / 柳暗靑坡晩
백악의 봄날에 하늘은 맑네 / 天晴白嶽春
같은 구절은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이것은 글귀 만드는 묘법에 있을 뿐이나 쇠로서 금을 만들기에 무엇이 해로우랴?

박사암(朴思庵 사암은 박순(朴淳)의 호)의 시에
은파에 오래 젖어 이 마음 쉴새없이 / 久沐恩波役此心
새벽 닭 울자마자 조복(朝服)을 챙기누나 / 曉鷄聲裏戴朝簪
강남의 들집이 봄풀에 파묻히니 / 江南野屋春蕪沒
도리어 산승시켜 대숲을 지키라네 / 却倩山僧護竹林
라 했으니 아, 사대부로서 그 누군들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한 치의 녹봉에 끌리어 고개를 숙이고 이 마음을 저버리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한 번 탄식의 소리를 내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ㆍ황지천(黃芝川 지천은 황정욱(黃廷彧)의 호)은 근대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近體詩)에 솜씨가 뛰어나다. 노의 오언율시(五言律詩)와 황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모두 1천년 이래의 절조이다. 그러나 장편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양경우(梁慶遇)가 일찍이 나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칠언고시를 누가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글쎄 어떠할지 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니, 경우가 박(朴)ㆍ이(李)의 잠두(蠶頭)는 어떤지 차례로 물어 왔다. 내가 대답하기를,
“한퇴지(韓退之)에서 나왔으되 한 사람은 억세고 한 사람은 번거로우니 그 지극한 것은 아니다.”
고 하니,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호)의 진양형제도(晉陽兄弟圖)와 충암의 우도가(牛島歌)는 어떤지 물었다. 대답하기를
“진양형제도는 굉걸(宏烋)하나 막힘이 있고 우도가는 기이하나 음침하다.”
고 하니, 그렇다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 하여 대답하되,
“어잠부(魚潛夫 잠부는 어무적(魚無迹)의 호)의 유민탄(流民歎)과 이익지의 만랑무가(漫浪舞歌)일 것이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시로 본다면 기재(奇才)가 그대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소.”
하니, 그 역시 크게 웃었다.

선친께서는 자제들이 화순(和順)에 있었던 까닭에 진사 김윤(金潤)과 서로 사귀고 매양 그의 시를 칭찬하시곤 했다. 병사(兵使)가 일찍이 진남루(鎭南樓)를 건축하고는 진사를 맞아 들여 대편(大篇)의 시를 지어 쓰도록 하니 술김에 한번 붓을 휘저어 육십 구를 이뤘는데 그 첫구에 이르기를
만 근의 무지개 들보 주작을 누르고 / 虹梁萬鈞壓朱雀
용이마엔 공손랑이 칼춤을 추네 / 龍顔舞劍公孫娘
라 했으니, 굉장한 걸작이다. 일찍이 물길로 가다가 배가 부서져 근근히 기슭에 닿자 정자에 올라 시를 짓기를
의관은 모두 쓸려 광류에 잃었지만 / 衣冠俱被狂流失
몸은 부모님 주신 대로 남았구나 / 身體猶存父母遺
높은 정자 다시 올라 갠 경치 보노니 / 更上高亭看霽景
가을 산 맑고 푸르러 새 시에 들어오네 / 秋山淡碧入新詩
라 하였으니, 높은 흥취가 대단하다. 그는 60세 후에 처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유일(遺逸)로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내가 수안(遂安)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이 시로 전송하여
시재(詩才)는 우뚝하니 동료들 가운데 뛰어나나 / 詩才突兀行間出
벼슬 복은 어그러져 분수 밖에 기구하네 / 官況蹉跎分外奇
이 모두 인생에는 각기 명이 있으니 / 摠是人生各有命
유유한 남은 일은 미뤄두고 지날밖에 / 悠悠餘外且安之
라 하였으니, 자못 감개가 깊다. 공이 젊어서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 이백생(李伯生 백생은 이순인(李純仁)의 자)ㆍ최가운(崔嘉運 가운은 최경창(崔慶昌)의 자)ㆍ하대이(河大而 대이는 하응림(河應臨)의 자) 의 무리들이 함께 당운(唐韻)을 숭상하여 대궐안의 소도(小桃)를 두고 읊어 작품이 꽤 많았는데 공이 이에 화운하기를
무수한 궁중 꽃은 흰 담장에 기댔는데 / 無數宮花倚粉牆
벌 나비는 노닐며 남은 향을 좇아가네 / 游蜂戲蝶趁餘香
늙은이는 봄바람을 채 보지 못하고 / 老翁不及春風看
속절없이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이로세 / 空有葵心向太陽
라 하였다. 이처럼 함축된 뜻이 심원하고 조사(措辭)가 기한(奇悍)하니 시를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되지 않겠는가? 부드러운 것 고운 것 바람 꽃 따위를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호) 정승이 돌아가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오직 성우계(成牛溪 우계는 성혼(成渾)의 호)의 한 절구(絶句)가 절창이었다. 그 시에
세상 밖에 운산이 깊고 또 깊으니 /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에 초가집은 이미 찾기 어려워라 /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拜鵑窩)위에 뜬 삼경의 달빛은 / 拜鵑窩上三更月
아마도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
고 하였는데, 무한한 감상(感傷)이 말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간에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있겠는가?

근대의 관각시(館閣詩)에서는 이아계(李鵝溪 아계는 이산해(李山海)의 호)가 으뜸이다. 그의 시가 초년부터 당을 법받았으며 늘그막에 평해(平海)에 귀양 가서 비로소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고제봉(高霽峰 제봉은 고경명(高敬命)의 호)의 시 또한 벼슬을 내놓고 한거하는 가운데 크게 진보된 것을 볼 수 있었으니, 이에 문장이란 부귀 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험난과 고초를 겪고 강산의 도움을 얻은 후에라야 묘경에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공(二公)뿐만 그러하랴. 고인이 모두 이러하니 유주(柳州)로 좌천됐던 유자후(柳子厚)나 영외(嶺外)로 귀양 갔던 소동파(蘇東坡)에서도 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고죽(崔孤竹)의 시는 한경(悍勁)하며 백옥봉(白玉峯 옥봉은 백광훈(白光勳)의 호)의 시는 고담(枯淡)하다. 모두 당시(唐詩)의 노선(路線)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익지(李益之)는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러므로 최ㆍ백을 함께 뭉쳐 나름대로 대가를 이루었다.

고죽(孤竹)의 시는 편편이 다 아름다우니 반드시 갈고 닦아 마음에 걸림이 없은 다음에야 내놓기 때문이다. 이가(二家 최경창, 백광훈)의 시를 나는 골라서 《국조시산(國朝詩刪)》에 넣은 것이 각기 수십 편인데 그 시들은 음절이 정음(正音)에 들어 맞을 만하나 그 밖의 것은 뇌동(雷同)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고죽의 오언 고시와 율시, 그리고 돌아가신 형님의 고가행(古歌行) 소재 정승의 오언율시, 황지천의 칠언율시, 이손곡(李蓀谷)ㆍ백옥봉 및 돌아가신 누님의 칠언절구를 모아 한 질의 책을 만들고 읽어보니 그 음절(音節)과 격률(格律)이 모두 고인에게 가까웠으나 한스러운 것은 기(氣)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 누가 그 본래 소리를 돌이킬 수 있을 것인가?

근일에는 이실지(李實之 실지는 이춘영(李春英)의 자)가 시문에 능하다. 그 시가 비록 번잡한 것 같으나 기(氣)는 나름대로 창대(昌大)하여 작가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권여장(權汝章 여장은 권필(權韠)의 호)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실지의 안목은 높아서 일세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나와 여장ㆍ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만을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는 허세가 있고 권은 말랐으며 이는 융통성이 없다.’ 고 하였는데 역시 지당한 평론이다.
실지는 망형(亡兄)의 글을 칭찬하기를,
“문장을 깊이 아는 자는 허미숙(許美叔 미숙은 허봉(許篈)의 자)이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묻기를,
“후배로서 누가 망형을 잇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신현옹(申玄翁 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 그를 이을 만하니 청량(淸亮)함은 미치지 못하나 농후(濃厚)함은 그를 넘어선다고 봅니다.”
했다.
정송강(鄭松江 송강은 정철(鄭澈)의 호)은 우리말 노래를 잘 지었으니, 사미인곡(思美人曲) 및 권주사(勸酒辭)는 모두 그 곡조가 맑고 씩씩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이론(異論)하는 자들은 이를 배척하여 음사(陰邪)하다고는 하지만 문채와 풍류는 또한 엄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있어 왔다. 여장이 그의 묘를 지나며 시를 지었는데
빈산에 나뭇잎 우수수 지니 / 空山木落雨蕭蕭
상국의 풍류는 이곳에 묻혀 있네 / 相國風流此寂寥
서글퍼라 한 잔 술 다시 권하기 어려우니 / 惆悵一杯難更進
지난날 가곡은 오늘 두고 지은 걸세 / 昔年歌曲卽今朝
라 했다. 자민이 강 가에서 노래를 듣는다[江上聞歌]의 시에
강 어귀에 그 뉘라서 미인사(美人辭)를 부르니 / 江頭誰唱美人辭
때마침 강 어귀에 달이 지는 시각이라 / 正是江頭月落時
서글퍼라 님 그리는 무한한 마음을 / 惆悵戀君無恨意
세상에선 오로지 여랑만이 알고 있네 / 世間唯有女郞知
라 했는데, 두 시가 모두 송강의 가사(歌辭)로 인해 나온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들 자민의 시는 둔하여 드날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가 함흥에 있을 때에 지은 시에
비 개자 관가의 버들 푸르르게 늘어지니 / 雨晴官柳綠毿毿
객지에서 처음 맞은 삼월 삼짇날이라네 / 客路初逢三月三
다 함께 고향 떠나 돌아가지 못한 신세 / 共是出關歸未得
가인은 망강남의 노래를 부르지 마소 / 佳人莫唱望江南
는 청초(淸楚)하고 유려(流麗)하니 중국 사람들과의 차이가 어찌 많다 할 수 있겠는가?

중형은 고제봉(高霽峰)에게 깊이 심복하여 늘 말하기를,
“평양에 함께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교(交) 자로 운을 내니 고공(高公)이 이에 화답하기를,
마을 연댄 벼 기장은 삼추 지나 무르익고 / 連村稌黍三秋後
한 고을의 서리 바람은 시월이라 초승일세 / 一路風霜十月交
라 하므로 나도 모르게 굴복하게 되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참판(參判) 유영길(柳永吉)의 시는 비록 시경(詩境)은 협소하나 좋은 곳이 있으니,
이를테면
금슬은 성급히 해를 녹이고 / 瑟錦消年急
금 병풍은 웃음 사기 더디구려 / 金屛買笑遲
발에 비친 석류는 곱기도 하고 / 映箔山榴艶
연못으로 통하는 들물은 맑기도 하네 / 通池野水淸
등의 시구는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
고 하였다.
윤 사문 면(尹斯文勉)이 사명을 받들고 호남으로 떠나 어느 산을 지나가는데 산 속에 초가집이 있었다. 거기서 한 늙은이가 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펴 보니 늙은이가 다가와서 빼앗으며,
“되지 않은 작품이라 남의 눈에 보여 줄 수가 없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겨우 첫머리에 쓴 빗을 읊은 시만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았다.
얼레빗 빗질하고 참빗으로 빗질하니 / 木梳梳了竹梳梳
빗질 천 번 쓸어 내려 이는 벌써 없어졌네 / 梳却千回蝨已除
어찌하면 만장 길이 큰 빗을 얻어다가 / 安得大梳長萬丈
백성들의 물것을 남기잖고 쓸어낼꼬 / 盡梳黔首蝨無餘
그 이름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혹은 말하기를 전주 진사 유호인(兪好仁)이라고도 한다.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은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켜 받들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은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朔雪龍荒道]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 일찍이 그의 말을 들으면 어느 절에 가니 승축(僧軸)에
동화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 竊食東華舊學官
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지만 / 盆山雖好可盤桓
십 년이나 그리던 꿈 비로봉(飛盧峯)을 감도니 / 十年夢繞毗盧頂
베갯머리 솔바람 밤마다 서늘하네 / 一枕松風夜夜寒
라 했는데, 어사(語詞)가 심히 탈쇄(脫洒)하나 그 이름이 빠져서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중형(仲兄)이 사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壓胡亭)에 올라서
백옥에는 해 지난 병든 백성들 / 白屋經年病
푸른 벼를 망쳐 버린 하루 밤 서리 / 靑苗一夜霜
라 읊었는데, 임자순은 이를 극찬하고,
백옥 청묘는 열 글자의 시사(詩史)로다 / 白屋靑苗十字史
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중형도 임자순의
오랑캐 일찍이 이십 주를 엿볼 적엔 / 胡虜曾窺二十州
장군은 말 솟구쳐 봉후를 취했는데 / 將軍躍馬取封侯
지금은 절새에 정벌 싸움 없으니 / 如今絶塞無征戰
장사는 옛 역루에 한가로이 잠을 자네 / 壯士閑眠古驛樓
라는 시를 칭찬하여 협기(俠氣)가 펄펄 뛴다고 하였다.
중형이 풍산(豐山) 역에서 벽에 쓴 시 한 수를 보니
세상에는 준재를 알아 줄 이 없는데 / 世上無人識俊才
누굴 위해 황금으로 높은 대를 쌓았나 / 黃金誰爲築高臺
변방 서리 검푸른 귀밑털 다 물들이니 / 邊霜染盡靑靑鬢
필마(匹馬)로 음산을 열 번이나 오가네 / 疋馬陰山十往來
라 했다. 말 기운이 감개하고 매우 훌륭하여 우졸(郵卒)에게 누구의 작품인 가고 물었더니 병영 군관 손만호(孫萬戶)가 지은 것이라고 했다 한다.
임진년(1592, 선조25) 6월 28일은 명종(明宗)의 기일(忌日)이라 신제이(申濟而 제이는 신노(申櫓)의 자) 가 곡구역(谷口驛)에서 시를 쓰기를
선왕께서 이 날에 군신을 버리실 적 / 先王此日棄群臣
유언은 은근히 성인에게 부탁했네 / 末命慇懃托聖人
스물이라 여섯 해에 향불이 끊어지니 / 二十六年香火絶
소리쳐 우는 사람 늙은 유민(遺民)뿐이로세 / 白頭號哭只民遺
라 하니, 보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의 누님 난설헌(蘭雪軒)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趙伯玉 백옥은 조원(趙瑗)의 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청장(淸壯)하여 지분(脂粉)의 태가 없다. 영월(寧越)로 가는 도중에 시를 짓기를
오일 간은 장간이요 삼일 간은 영월(寧越)이니 / 五日長干三日越
노릉의 구름에 슬픈 노래 목이 메네 / 哀歌唱斷魯陵雲
첩의 몸도 이 또한 왕손의 딸이라 / 妾身亦是王孫女
이곳의 두견 소린 차마 듣지 못할레라 / 此地鵑聲不忍聞
라 하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어 익지의
동풍에 촉제(蜀帝) 혼 괴롭고 / 東風蜀魄苦
석양에 노릉은 싸늘하네 / 西日魯陵寒
라는 시구와 한가지로 쓰라린 가락이다.

우사(羽士) 전우치(田禹治)는 사람들의 말에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하며 그의 시는 매우 청월(淸越)하다. 일찍이 삼일포(三日浦)에서 지은 시에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 / 秋晩瑤潭霜氣淸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 / 天風吹下紫簫聲
푸른 난(鸞)은 오지 않고 하늘 바다 넓으니 / 靑鸞不至海天闊
서른 여섯 봉우리에 가을 달은 밝도다 / 三十六峯秋月明
라 하니, 이를 읽노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젊었을 적에 정백련(鄭百鍊)을 만나 본 일이 있었다. 그때 그가 병이 들어 귀신을 만났는데 절구를 지을 줄 알더라고 했다. 그의 시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봄 잠을 자고 나서 술을 따르니 / 酒滴春眠後
발 걷은 앞에서 꽃은 날리네 / 花飛簾捲前
인생이 얼마나 된단 말가 / 人生能幾許
비 내리는 하늘 슬피 바라보노라 / 悵望雨中天
와 또
만리라 거센 파도에 바다 해는 저무는데 / 萬里鯨波海日昏
벽도꽃[碧桃花] 그림자는 하늘 문에 비치네 / 碧桃花影照天門
난새 수레 한 번 가서 천년이나 고요터니 / 鸞驂一息空千載
후령의 영소 소리 한밤중에 들리네 / 緱嶺靈簫半夜聞
는 그 음운이 맑고 그윽하여 인간 소리가 아니었다.

부안(扶安)의 창기 계생(桂生)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다. 나중 그 태수가 떠난 뒤에 읍인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를 세웠는데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하소연하며 길게 노래했다. 이원형(李元亨)이라는 자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짓기를
한 가락 요금은 자고새를 원망하나 / 一曲瑤琴怨鷓鴣
묵은 비는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네 / 荒碑無語月輪孤
현산이라 그날 양호(羊祜)의 비석에도 / 峴山當日征南石
눈물을 떨어뜨린 가인이 있었던가 / 亦有佳人墮淚無
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관객(館客)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李汝仁)과 함께 지냈던 까닭에 시를 할 줄 알았다. 다른 작품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호)가 그를 좋아하고 칭찬했다.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葛川)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光州)에 있으면서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호)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인(前人)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 竹葉朝傾露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 松梢曉掛星
라 하니 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백대붕(白大鵬)이라는 자가 있어 또한 시에 능했다. 일찍이 문지기를 했는데, 그의 동류(同類)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배워 고담(枯淡)하고 연약했다. 까닭에 권여장은 만당(晩唐)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체라고 일컬었으니 대개 그 연약함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본조(本朝)의 승려로는 시에 능한 자가 매우 드문데 오직 참료(參寥)가 으뜸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수운 같은 발자취 이미 여러 해더니 / 水雲蹤迹已多年
의기가 서로 맞아 인연됨을 기뻐하네 / 針芥相投喜有緣
종일토록 객헌에 봄날은 적막한데 / 盡日客軒春寂寞
지는 꽃 눈처럼 비 갠 하늘에 날리네 / 落花如雪雨餘天
라 하니, 준결(俊潔)한 맛이 있다.

[주D-001]한밤중……춤을 추고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 주부(司州主簿)로 재직할 때 매우 가깝게 지냈다. 어느날 같이 잠을 자다가 밤중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는 곤의 발을 차서 깨우면서 “이것은 좋은 소리이다.” 하고는 일어나서 춤을 춘 고사를 가리킨다. 《晉書 卷62 祖逖傳》
[주D-002]몇 번이나……일렀던고 : 진(晉) 나라 왕맹(王猛)이 환온(桓溫) 앞에서 거리낌없이 이를 잡으면서 당세(當世)의 일을 담론한 고사. 《晉書 苻堅載記》
[주D-003]최예산(崔猊山) : 예산은 고려 말의 문인 학자인 최해(崔瀣)의 호인 예산농은(猊山農隱). 가세가 빈한하여 만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에서 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저서에 《졸고천백(拙藁千百)》ㆍ《동인지문(東人之文)》이 있다.
[주D-004]순문약(荀文若) : 문약은 후한(後漢) 시대 사람 순욱(荀彧)의 자. 절개를 굽혀 조조(曹操)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분무사마(奮武司馬)를 지냈다. 《三國志 卷10 荀彧傳》
[주D-005]관유안(管幼安) : 유안은 후한 관녕(管寧)의 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절개를 지키며 산속에 묻혀 살았다. 《三國志 卷11 管寧傳》
[주D-006]서시(西施)를……떠날 줄 : 서시는 춘추(春秋) 시대 월(越) 나라의 미녀(美女).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하자, 범려(范蠡)가 서시를 취하다가 오왕 부차에게 바쳐 그의 마음을 황란(荒亂)하게 만들어서 오 나라를 패망시켰는데, 그 후 서시는 끝내 범려를 따라 배를 타고 오호(五湖)로 떠났다는 고사이다.
[주D-007]고소대(姑蘇臺) : 춘추 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越) 나라를 격파하고 미인 서시(西施)를 얻어 그를 거처하게 하기 위해 건축한 대(臺) 이름.
[주D-008]유랑(劉郞)이……생겼을 걸 : 잠총(蠶叢)은 촉왕(蜀王)의 선조. 촉주(蜀主) 유비(劉備)가 어렸을 때 중종(中宗)의 아이들과 뽕나무 아래서 놀 때에 농담으로 “내가 반드시 이 뽕나무처럼 생긴 우보개거(羽葆蓋車)를 타게 될 것이다.” 한 고사를 가리킨다. 《三國志 卷32 劉備傳》
[주D-009]장타유(張打油) : 저속한 시를 뜻함. 《양승암집(楊升庵集)》에 의하면, 당(唐) 나라 장타유가 눈[雪]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노란 개는 몸 위가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 위가 부어올랐다.[黃狗身上白 白狗身上腫]"고 한다.
[주D-010]조원각(朝元閣) : 노자(老子)를 제사지내는 도관(道觀)의 이름.
[주D-011]노국(魯國)에선……했고 : 분수에 지나친 대우를 받는 것을 말한다. 노(魯) 대부 장문중(莊文仲)의 인(仁)스럽지 못한 것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원거(爰居 : 바다새의 일종)에 제사 지낸 것이라고 하였다. 《左傳 文公 2年》
[주D-012]남방에……돌아왔네 : 남의 비방을 받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 풍질(風疾)에 좋은 의이인(薏苡仁)을 여러 수레에 싣고 왔는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금은보화를 싣고 왔다고 비방하였다.
[주D-013]배견와(拜鵑窩) : 박순(朴淳)의 별장 이름. 박순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으로 본관은 충주(忠州)임.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음.
 성소부부고 제24권
 설부(說部) 3
성옹지소록 하(惺翁識小錄下)

선왕(先王 선조(宣祖))은 문장에 능하여 여러 임금 중에 뛰어났으므로 신하들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었는데 유독 나의 망형(亡兄)의 시를 칭찬하였다. 북방에 사명을 띠고 갔다가 돌아와서삭계(朔啓)하는 가운데 거산역(居山驛)에서 지은 시가 있었다. 끝의 연구(聯句)에
천년 전 부러진 창은 모래에 묻혀 있고 / 千年折戟沈沙短
평평한 넓은 벌엔 비가 오자 비릿하네 / 十里平蕪過雨腥
라는 구절이 있었다. 주상께서 직접 비점(批點)을 쳐서 내렸다.
임인년에 고(顧)ㆍ최(崔) 두 칙사가 왔을 때에 월사(月沙 이정귀의 호)가 입대(入對)하여 나를 해운 판관(海運判官)에서 체직(遞職)하기를 청하자, 주상(主上)이 묻기를,
“그의 형 아무개와 비교해 볼 때 재주는 누가 나은가?”
하였다. 이로 보면 대개 만년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선왕(先王)은 또 황지천(黃芝川 지천은 황정욱(黃廷彧)의 호)의 문장을 좋아하였는데, 소재 상공(蘇齋相公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이 극력 추천하여 끝내 제학(提學)에서 겸 대제학(兼大提學)으로 승진되었다.
호당(湖堂 독서당)을 설치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제도를 시행한 후로는 문형은 반드시 호당 출신을 임용하였다.
이 때문에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은 대제학 권점(圈點)에 들었으나 일찍이 사가독서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서 사퇴하였다. 그런데 유독 지천(芝川)이 호당을 거치지 않고도 문형이 되자 사람들이 모두들 영예로운 일로 여겼는데 이 또한 성상께서 칭찬하여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선왕은 《장자(莊子)》를 매우 좋아하여 전교(傳敎)하는 글에서도 가끔 《장자》를 인용하기도 하고 문법(文法)도 흡사하였다.
이로해서 배우는 자가 《장자(莊子)》를 읽다가 이에 빠질까 염려해서 해조(該曹 예조를 가리킴)에 명하여 과장(科場)의 논(論)ㆍ책(策)에는 절대로 《노자(老子)》나 《장자》의 글을 인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경자년(1600, 선조33) 전시(殿試)에서 거인(擧人) 이함(李涵)은 모두(冒頭 문장의 첫머리)에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 하여 삭과(削科)하도록 명하였다. 이 함은 그 후 기유년(1609, 광해군1)에 다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한경홍(韓景洪 경홍은 한호(韓濩)의 자)은 글씨에 능하여 선왕의 지우(知遇)를 받아 사랑이 극진하였고,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여 장려하였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면 술ㆍ쌀ㆍ찬거리ㆍ붓ㆍ종이를 매우 넉넉하게 사급(賜給)하도록 명하고, 봄 가을 의대(衣帶) 및 안장 얹은 말과 신발 등 하사하는 물품이 끊임없었다. 특명으로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제수된 지 수 년 후에, 헌부(憲府)에서 탄핵하자 추고(推考)만 하도록 하였다.
그 후에 공부 낭관(工部郞官)으로 있을 때는 으레 바치는 글을 법대로 하지 않았다가 파직당하게 되었으나 임금은 다스리지 말도록 명했다. 그의 병이 위급하자 약을 가져가서 치료하도록 명했고, 죽자 임금은 한동안 슬퍼하고 부물(賻物)을 후하게 내리는 등 임금과 신하 사이의 지우가 이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

석봉(石峰 한호(韓濩)의 호)이 임당 상공(林塘相公 임당은 우의정 정유길(鄭惟吉)의 호)을 따라서 한경당(韓敬堂 경당은 한세능(韓世能)의 호)을 압록강 가에서 맞이하니 한이 매우 칭찬하였다.
등계달(滕季達)이 따라왔다가 석봉의 필적을 얻어가지고 돌아가
왕원미(王元美)에게 보이자,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과 어깨를 겨룰 만하다.”
하였고, 도장경(陶長卿)은 이를 보고,
“노한 사자가 돌을 퉁기는 기세다.”
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명성이 중국에 떨치게 되었으니, 이는 근래에 없던 일이다.

석봉이 일찍이 당전지(唐牋紙)에다 이태백(李太白)의 시를 써서 다섯 책을 만들었다. 진서(眞書)ㆍ행서(行書)의 대소 여러 체(體)를 모두 갖추어 쓰되 온갖 정력을 다하였다. 또 큰 종이에다 《동서당집고첩(東書堂集古帖)》을 썼는데, 하나하나 원래 체(體)를 떠서 똑 같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참으로 지극한 보배였다. 선왕께서 이를 들으시고, 급히 중사(中使 내시)를 보내 모두 다 찾아서 궐내로 가져오도록 하고는 이튿날 명주ㆍ베ㆍ소금ㆍ쌀ㆍ종이ㆍ붓ㆍ먹ㆍ향ㆍ어연(御硯)ㆍ옷ㆍ신 등의 물품을 매우 후하게 하사하고, 이것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하였다.

나의 망형(亡兄)이 《연화금자경(蓮花金字經)》 네 권을 사내(四耐 안경창(安慶昌)의 호)에게서 얻었다. 이것은 세조(世祖) 때에 대내(大內)에서 화장사(花庄寺)에 시주한 것으로서 서강중(徐剛中 강중은 서거정(徐居正)의 호)ㆍ성중경(成重卿 중경은 성임(成任)의 자)ㆍ정동래(鄭東萊 정창손(鄭昌孫))ㆍ강인재(姜仁齋 인재는 강희안(姜希顔)의 호) 네 분이 왕명을 받들어서 쓴 것이고, 끝에는 그들의 직함이 아울러 적혀 있었다.
망형이 곧 석봉을 청해서 금자(金字)로 《주역(周易)》ㆍ《중용(中庸)》ㆍ《참동계(參同契)》ㆍ《황정경(黃庭經)》을 그 끝에다 썼는데, 작은 해자(楷字)가 절묘하여 마침내 지극한 보배가 되었다. 형이 작고하자 내가 전해 받았다. 장첩(粧帖)하는 사람 김대건(金大乾)이 우리 집에 매우 친밀하게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주상(主上)께 이 사실을 아뢰니 상이 가져오도록 하고는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질을 하사하였다.

종실(宗室) 석양정 정(石陽正霆)은 묵죽(墨竹)을 잘 그렸고 매화와 난초에도 능했다. 선왕이 매우 칭찬하여, 족자 한 폭을 그릴 때마다 많은 물품을 은사(恩賜)하였다.
내가 귀한 분을 통하여 임금이 그린 대와 난초 그림을 얻었는데 이를 석양에게 보였더니 석양은 감탄하면서,
“힘차고 씩씩하여 화법(畫法)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선품(仙品)이다.”
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선왕께서 절구(絶句) 한 수(首)를 지어 벽에다 썼는데
한 밤에 칼 어루만지니 기세는 무지개를 토하는 듯 / 撫劍中宵氣吐虹
웅장한 마음은 일찍이 우리 동방을 편케 하려 했네 / 壯心曾欲奠吾東
지금 사업은 한단(邯鄲) 걸음 배우듯 하여 / 如今事業邯鄲步
서쪽 바람에 머리 돌리니 한이 끝없네 / 回首西風恨不窮
시의 기세가 넓고 드높아서 참으로 제왕(帝王)의 말이었다. 아아, 다음해 일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일까.

정유년(1597, 선조30)에 양창서(楊滄嶼 창서는 양호(楊鎬)의 호)는 우리나라 군무(軍務)를 경리(經理)하기 위해 서울에 와서 유둔(留屯)하였다. 선왕께서 하루는 저궁(儲宮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하여 수서(手書)를 친히 써서 도승지(都承旨) 이호민(李好閔)을 시켜 양창서에게 전하도록 했는데, 사연이 수천 자에 달했고 뜻도 매우 간절하였다. 경리는 회답하는 편지에다,
“방패와 창이 어수선한 시기이니 일을 게을리할 때가 아닙니다.”
라는 두 글귀를 적어서 돌려 보냈는데 임금도 매우 옳게 여겼다.

창서(滄嶼)는 문관 대신으로서 친히 갑옷을 입고 전진(戰陣)에 올랐다. 청정(淸正)을 도산(島山)에다 몰아넣어 거의 사로잡을 뻔하였다. 공이 이보다 클 수가 없었는데, 끝내 참소를 받아 파직되어 돌아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그가 돌아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돌에다 화상을 새겨서 사모의 뜻을 표하였다.

예부터 동방(東方)을 정벌한 장사(壯士)는 공을 세우더라도 모두 죄를 당했다.
한 무제(漢武帝) 때 사군(四郡)을 평정한 다음 순체(荀彘)와 양복(楊僕)이 모두 죄로써 수감되었고, 당 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다음 영공(英公)은 공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계자(階資)와 녹봉(祿俸)을 삭탈당했다. 백제를 평정한 후에 소정방(蘇定方)과 설인귀(薛仁貴)가 공을 다투다가 봉후(封侯)가 정지되고 관작(官爵)도 낮아졌다. 요동(遼東)에서 강조(康兆)를 사로잡았으나 소손녕(蕭遜寧)은 고려왕을 추격하지 않았다 하여 변방으로 유배되었고, 원(元) 나라는 살례탑(撒禮塔)이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써 부장(副將) 아록첩목아(牙祿帖木兒) 이하를 함께 죽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이래로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참소를 당해서 회적(回籍)했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은 공적을 너무 과장하여 보고했다는 참소를 받아 죄를 당했으며, 찬획사(贊畫使) 유황상(劉黃裳)과 원황(袁黃)은 아울러 파직(罷職)되었다.
정유년(1597, 선조30)에는 양 경리(楊經理)가 참소를 받아 돌아갔고, 군문(軍門) 형개(邢玠)와 제독 마귀(麻貴), 제독 유정(劉綎)은 아울러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의 탄핵을 받았다. 그 후 정(丁)도 이 일로 해서 관직이 낮아졌고, 만 경리(萬經理 만세덕(萬世德))도 또한 안신(按臣)의 말로써 녹봉이 정지되었으니 자못 괴상한 일이다.

난리 후로는 조사(朝士)들이 갓과 도포와 의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상하(上下)가 모두 융복(戎服)에다 슬갑[褶]을 하며 칼을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경자년(1600, 선조33)에 비로소 조복(朝服)을 갖추었는데 당상관(堂上官) 이상은 담홍색 견포(絹布)로 지은 표단(表單)을 입었고, 당하관(堂下官)은 담홍색 면포로 지은 표단을 입었다. 그런데 식자(識者)들이 임금의 복색도 붉은데 임금과 신하가 같은 복색을 입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이에 흑의(黑衣)를 입기 시작하였다. 그때 당하관이 깁옷 입는 것을 임금이 엄격히 금하였다. 사람들이 싫어하여 붉은색 옷으로 복구되기를 희망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34)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복(服)을 벗자 복색에 대해 다시 의논했는데, 서경(西坰 유근(柳根)의 호)이 예조 판서[大宗伯]로 있으면서 붉은색 깁옷을 주장했고, 나도 당시에 의제사(儀制司)에 있으면서 또한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니 모두 조정 논의가 옳다 했으나, 유독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이 그르게 여겼다. 오성은 나를 불러서 힐책하기를,
“한 낭관(郞官)이 붉은색 깁옷을 입고자 해서 감히 묘당(廟堂)의 논의를 흔드는 것인가?”
하였다. 그 후 경술년(1610, 광해군2) 담사(禫祀)날에 복색을 검은색으로 정하고자 했으나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았다.
대개 우리나라에는 홍화(紅花 잇꽃)를 많이 심어서 붉은색은 물들이기가 쉽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월하게 여긴 것이다. 조종조(祖宗朝)에서 홍색ㆍ회색ㆍ백색을 금제하는 조목에 올리기까지 하였지만 금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의복과 모자와 기명(器皿) 등에 옛 제도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모두 칭찬한다.
남녀가 신는 족건(足巾)은 곧 옛적에 버선이란 것이고, 남자가 쓰는 갓은 옛날에 일컫던 곡병립(曲柄笠)으로서 사 임천(謝臨川)이 즐겨 쓰던 것이다. 사대부 집의 부인들이 쓰던 머리쓰개는 옛날의 유모(帷帽)이고, 신부가 혼인날에 쓰던 권수(捲首)는 곧 《모시(毛詩)》에 말한 ‘부계육가(副笄六珈)’라는 것이며, 융복(戎服)인 철릭[帖裏]은 곧 바지와 슬갑[褶]이다. 종묘에 쓰는 보궤(簠簋)와 항아리와 멱서리[羃]는 모두 주(周) 나라 제도이고, 노부(鹵簿)에 쓰는 웅ㆍ표 골타자(熊豹骨朶子)와 가서봉(哥舒棒)은 모두 수(隋) 나라의 제도이다. 병조와 도총부(都摠府)에 붉은 갓에다 날 없는 창을 가지고 금관자(金貫子)에다 가죽바지를 입고 슬갑을 한 것은 또한 당 나라의 제도이다. 이외에도 속습(俗習)으로서 오랜 세대(世代)에 걸쳐 이용되는 것이 매우 많아서 능히 다 기록하지 못하거니와 중국에는 없는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악기(樂器)는 모두 옛 제도이다.
현금(玄琴)은 옛날 오현금(五絃琴)을 본떠서 한 줄을 보탠 것이고, 가야금(伽倻琴)은 옛날 비파(琵琶)를 본떠서 열세 줄을 줄인 것이다. 방향(方響)ㆍ요고(腰鼓) 및 대금(大琴)과 묘정(廟庭)에 쓰는 편종(編鍾)ㆍ편경(編磬)ㆍ축(柷)ㆍ어(敔)ㆍ운(塤)ㆍ지(篪) 등의 악기는 모두 당 나라 제도이다. 그리고 묘악(廟樂) 중에 등가 악장(登歌樂章)도 또한 당인(唐人)이 지은 것을 모방한 것이다. 속악(俗樂)에 쓰는 것으로 풍입송(風入松)ㆍ서자고(瑞鷓鴣)ㆍ수룡음(水龍吟)ㆍ오운봉서도(五雲棒瑞圖) 등 악장(樂章)은 또 송(宋) 나라 도군(道君) 때에 하사(下賜)한 대성악(大晟樂)으로서 오히려 옛 풍악이 남았다 하겠다. 그러나 중국에는 남북곡(南北曲)이 성행(盛行)한 후로 당ㆍ송 시대의 옛 풍악은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이 없다. 소위,
“예(禮)가 없어졌거든 야인(野人)에게서 구하라.”
는 것이던가.
고려 초에 악관(樂官)이 당 나라 때의 협폐정악(夾陛正樂)의 음을 모방해서 황풍악(皇風樂)을 지었다. 그 악장(樂章)은 왕씨(王氏)가 처음 일어난 공덕을 찬송한 것이었다 무릇 국왕이 크게 조회(朝會)하거나 거둥할 때에 반드시 연주하였다.
본국 초년에는 사신(詞臣)에게 명해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다섯 권을 지었다. 그중 상칠장(上七章)과 하삼장(下三章)을 뽑아서 여민락(與民樂)을 만들고, 황풍악 가락에 좇아서 협주(協奏)하였다. 임금이 서교(西郊)에 나가서 조칙(詔勅)을 맞이하게 되면 악은 전폐(殿陛)에서 연주하기 시작하며, 숭례문(崇禮門)에 와서야 악장이 끝난다. 또 연주하면서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린 다음에 마쳤다. 선왕 초년에는 가락이 점차 잦아져서 처음 마침을 으레 광통교(廣通橋)에서 하게 되니, 악관(樂官)이 가락의 초쇄(噍殺)함을 매우 걱정했는데, 얼마 못되어 임진년(1592, 선조25) 사변이 있었다. 지금은 가락이 슬프고 급박하며 흐트러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소시 적에 태평한 문물(文物)을 볼 수 있었다.
악공(樂工)에 허억봉(許億鳳)이란 사람이 있어서 피리를 잘 불었는데, 만년에는 현금(玄琴)으로 옮겨서 또한 잘했다. 박소로(朴召老)는 거문고를 잘 타서 옛 가락을 잘했고, 홍장근(洪長根)은 속조(俗調)를 잘해서 아울러 일류라 일컬었다. 또 가야금은 이용수(李龍壽), 비파는 이한(李漢), 아쟁은 박막동(朴莫同)을 아울러 일류라 일컬었다. 노래로는 기생 영주선(瀛洲仙)과 송여성(宋礪城)의 여종 석개(石介)를 모두 제일이라 하였다.
그 후에는 이한의 조카 전한수(全漢守)와 용수의 제자 임환(林桓)이 스승의 재주를 전해 받았다. 이외에도 종실(宗室) 죽장감(竹長監)은 아쟁과 비파에 능했고 김운란(金雲蘭)은 아쟁을 잘 타서, 사람이 말하는 듯했고, 그 가락을 듣는 사람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또 서자(庶子) 김연(金鋋)이 가야금을 잘 탔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런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용수는 이미 늙었고, 오직 임환 한 사람이 있을 뿐이며 노래는 한 사람도 대를 이을 만한 자가 없다. 이것도 세대가 내려오면서 인재가 모자라게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또한 개탄할 일이다.

공헌왕(恭憲王 명종(明宗)의 시호) 때에 사인(士人) 이언방(李彦邦)이란 자가 노래를 잘했다. 가락이 맑고 높으니 감히 그와 재주를 겨루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최득비여자가(崔得霏女子歌)를 불렀는데, 온 좌석이 모두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서경(西京)에 유람했는데 교방(敎坊) 기생이 거의 이백 명이 되었다. 방백(方伯)이 열지어서 앉힌 다음, 노래에 능하거나 못하거나를 가리지 않고 도상(都上)에서 동기(童妓)까지 한 사람이 창(唱)하면 언방이 문득 화답했는데, 소리가 모두 흡사했으며 막힘이 없었다.
송도(松都) 기생 진랑(眞娘)이 그가 창을 잘한다는 것을 듣고서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언방은 자신이 언방의 아우인 양 속이면서,
“형님은 없소. 그러나 나도 제법 노래를 하오.”
하고 드디어 한 곡조 불렀다. 진랑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나를 속이지 마시오. 세상에 이런 소리가 어찌 또 있겠소. 당신이 바로 진짜 그 사람이요. 모르기는 하지마는 면구(綿駒)와 진청(秦靑)인들 이보다 더 잘하겠소?”
하였다.

진랑(眞娘)은 개성 장님의 딸이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풍악(楓岳 금강산의 별칭)에서 태백산(太白山)과 지리산(知異山)을 지나 금성(錦城)에 오니, 고을 원이 절도사(節度使)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다. 진랑은 해어진 옷에다 때묻은 얼굴로 바로 그 좌석에 끼어 앉아 태연스레 이[虱]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여러 기생이 기가 죽었다.
평생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墅]에 가서 한껏 즐긴 다음에 떠나갔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 선사(知足禪師)가 30년을 면벽(面壁)하여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죽을 무렵에 집사람에게 부탁하기를,
“출상(出喪)할 때에 제발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
하였다. 지금까지도 노래하는 자들이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또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진랑이 일찍이 화담에게 가서 아뢰기를,
“송도(松都)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
하니 선생이,
“무엇인가?”
하자,
“박연폭포와 선생과 소인(小人)입니다.”
하니, 선생께서 웃었다. 이것이 비록 농담이기는 하나 또한 그럴듯한 말이었다.
대저 송도는 산수가 웅장하고 꾸불꾸불 돌아서 많은 인재가 나왔다. 화담의 이학(理學)은 국조(國朝)에서 제일이고, 석봉의 필법(筆法)은 해내외에 이름을 떨쳤으며, 근자에는 차씨(車氏) 부자와 형제가 또한 문명(文名)이 있다. 진랑도 또한 여자 중에 빼어났으니, 이것으로써 그의 말이 망령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송도에 안경창(安慶昌)이란 자가 있어, 스스로 호를 사내(四耐)라고 하였다. 추위ㆍ더위ㆍ주림ㆍ배부름을 견뎌내는 까닭으로 호를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다. 젊어서부터 집을 버리고 산수간을 유람했는데 70세에도 얼굴이 늙지 않았고, 소재 상공(蘇齋相公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ㆍ황지천(黃芝川 지천은 황정욱(黃廷彧)의 호) 및 망형(亡兄)과 가깝게 지냈다. 갑신년(1584, 선조17)에 갑산(甲山)으로 망형을 찾아갔을 때는 눈내린 겨울이었다. 그는 설중에 적생원(赤生院)의 우물에서 목욕을 하는였데도 살에 소름이 돋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고 무슨 비법이 있다고 하였다. 84세로 병없이 죽었으니 이 사람 또한 이인(異人)이었던 모양이다.

증선지(曾先之)가 지은 《십팔사략(十八史略)》이 처음 우리나라에 나오자 성 문대공(成文戴公 문대는 성현(成俔)의 시호)이 이를 구하고는 매우 좋아하였다. 당시에 공의 아들 번중(蕃仲 성세창(成世昌)의 자) 상공이 이미 과거에 올랐는데 공이 한차례 외도록 하고,
“이만하면 주문(主文)하기에 족하겠다.”
하였다. 건국 초에는 모든 사람들이 《고문진보(古文眞寶)》의 전후집(前後集)을 배우고서 문장을 지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도 처음 배울 때에는 반드시 이 책을 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십팔사략》은 전사(全史)를 통독한 자가 요점을 잡아서 본 다음 잊지 않고 기록한 것이고,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뽑아 모은 것이니 그 취사의 기준은 비록 알 수 없으나 이것은 읽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몽학(蒙學)으로서 문리(文理)를 밝히는 데에는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와 《통감(通鑑)》으로도 충분한데 하필 그런 책으로 기준을 삼을 것이 있겠는가.

조 사문 위한(趙斯文緯韓)이 일찍이 말하기를,
“중국 사람이 우리 동국 사람의 문장이 중국보다 뛰어남을 꺼려하여 《십팔사략》과 《고문진보》 두 책을 편찬해서 동국에 보내왔다. 이 책이 온 이후로 문장 규모가 좁고 막혀서 예전에 미치지 못하니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이것은 농담으로 한 말이라서 믿을 수는 없지만 나는 징험해 본 바가 있다. 나는 열두 살에 처음 글을 배워서 《십팔사략》을 읽기는 부끄러워서 먼저 《통감(通鑑)》과 《논어》를 배웠는데, 일 년이 못되어서 문리가 해통(該通)하였다. 이웃에 살던 이생(李生)은 일곱 살부터 《사략》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빠짐없이, 십 년을 외었으나, 《통감》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리고 권여장(權汝章 여장은 권필(權韠)의 자)과 이자민(李子敏 자민은 이안눌(李安訥)의 자)은 모두 《고문진보》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는 좋기만 하였으니 지세(持世 조위한(趙緯韓)의 자)의 말도 또한 이치가 있다.
판부사(判府事) 김수(金晬)는 젊어서 《십팔사략》 읽기를 좋아해서 공부가 깊었다. 교리(校理)가 되자, 선왕이 《십팔사략》을 교정하도록 하고, 그 끝에다 발문(跋文)을 짓도록 하였다. 공의 동료들이 조롱하기를,
“신하를 알아보는 것은 임금이 제일이다.”
하였다.

세상에 문리(文理)는 부족하면서도 글은 잘짓는 이가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金誠立)은 경ㆍ사(經史)를 읽으라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문(科文)은 요점(要點)을 정확히 맞추어서 논ㆍ책(論策)이 여러 번 높은 등수에 들었다.
그가 책문을 지을 때에는 편 끝부터 거꾸로 지어 올라가되 맨 처음 끝 부분을 짓고 그 다음에 구폐(救弊)를 말하고 다음 축조(逐條), 다음 중두(中頭)를 짓고, 시지(試紙)에 옮겨 쓸 무렵에 모두(冒頭)를 짓는데 모두 질서 정연하니 이것은 또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식년(式年)에 경서(經書)를 강(講)하도록 하는 것은 당초의 뜻이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한 것이었는데 근세의 선비들은 구두(句讀)만 익히고 뜻은 전혀 알지 못한다. 경서의 장구(章句)에 초두(初頭)가 많아서 기억하기가 어려우므로 거짓말을 꾸며서 기록하는데, 요란한 말을 성현(聖賢)의 훈계하는 말씀 위에다 벌여 적는다. 이것은 선성(先聖)을 욕보이는 것이니 매우 한심한 일이다.

일찍이 우초춘(虞初春)이 엮은 《명퇴조록(明退朝錄)》과 왕감주(王弇州 감주는 왕세정(王世貞)의 호)가 지은 《성사술(盛事述)》을 보니 조달(早達)한 자를 갖추어 기록하였는데 11세에서 50세까지 모두 찾아내어 누락된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상고할 만한 문적(文籍)이 없으므로 우선 보고 들은 것으로써 기록한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좁아 인재가 매우 적기 때문에 요행으로 과거에 오르고, 요행으로 재상 반열(宰相班列)에까지 오른 자도 많다. 이제 20세 이전에 과거에 합격한 자에서부터 30세 이전에 고관(高官)이 된 사람과 40세 이전에 공경(公卿)이 된 사람들의 명단을 다음에 적어둔다.
14세 : 곽거완(郭居完)이 진사가 되었고, 그 후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교리(校理)였으나 일찍 죽었다.
15세 : 구수영(具壽永)이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고, 이희순(李希舜)ㆍ이승건(李承楗)ㆍ권주(權倜)ㆍ김규(金珪)는 진사가 되었으며, 심언광(沈彦光)은 향시(鄕試)에서 삼장(三場)에 모두 장원하였다.
16세 : 권홍(權弘)ㆍ심은(沈隱)ㆍ장계금(張繼金)ㆍ이명한(李明漢)이 진사가 되었다.
17세 : 남지(南智)는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고, 이행(李荇)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8세 : 귀성군 준(龜城君浚)은 병조 판서가 되었고, 이파(李坡)는 문과에 합격하고, 김수녕(金壽寧)과 박지(朴篪)는 문과에 장원했으며, 허봉(許篈)ㆍ윤훤(尹暄)ㆍ이구(李久)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다.
19세 : 이대해(李大海)ㆍ이집(李㙫)ㆍ이후(李厚)는 문과에 합격했고, 오남(吳楠)은 무과(武科)에 장원했다. 우흥적(禹弘績)은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20세 : 박은(朴誾)ㆍ박홍린(朴洪麟)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구(李久)는 문과에 방안(榜眼 갑과에 둘째로 급제한 사람)이었다.
21세 : 귀성군 준은 도원수(都元帥)가 되었고, 이파는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며, 윤계선(尹繼善)은 문과에 장원하였다.
22세 : 성표(成㟽)는 정국 공신(靖國功臣)으로 녹훈되었다.
23세 : 엄흔(嚴昕)이 이조 좌랑이 되었다.
24세 : 허봉과 김신국(金藎國)이 이조 좌랑이 되었고, 남이(南怡)는 승지가 되었다.
25세 : 윤계겸(尹繼謙)은 승지가 되었고, 박동량(朴東亮)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26세 : 남이는 병조 판서, 이파는 도승지, 박원종(朴元宗)은 병조 참의, 김신국은 사인(舍人)이 되었고, 정사룡(鄭士龍)은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27세 : 허봉은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성표는 당상 첨지(堂上僉知), 김수녕은 이조 참의, 신면(申㴐)은 승지가 되었다.
28세 : 귀성군 준은 영상(領相)이 되었고, 이행(李荇)은 승지가 되었다.
29세 : 윤사흔(尹士昕)은 감사(監司), 박은(朴訔)은 승지, 한숙창(韓叔昌)은 호조 참의, 이계동(李季仝)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30세 : 권건(權健)ㆍ신종호(申從濩)는 모두 승지가 되었고, 유운(柳雲)은 충청 감사가 되었다.
31세 : 이덕형(李德馨)은 겸 대제학(兼大提學)이 되었다.
32세 : 박원종(朴元宗)은 판윤(判尹), 윤계겸은 공조 판서가 되었다.
33세 : 김감(金勘)은 예조 판서, 김정(金淨)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34세 : 박은(朴訔)은 병조 판서, 한확(韓確)은 이조 판서, 허종(許琮)은 행 함경감사(行咸鏡監司)가 되었다.
35세 : 김감은 겸대제학(兼大提學), 윤사윤(尹士昀)은 참찬(參贊), 유담년(柳耼年)은 판윤(判尹)이 되었다.
36세 : 성준(成俊)ㆍ이극감(李克堪)은 모두 형조 판서가 되었고, 박동량은 호조 판서가 되었다.
37세 : 윤사흔은 찬성, 이정귀(李廷龜)는 호조 판서, 이자(李耔)는 참찬이었다.
38세 : 이덕형은 우상(右相), 한확은 찬성, 이정귀는 대제학, 장운익(張雲翼)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39세 : 윤사흔(尹士昕)은 우상(右相), 이파(李坡)는 찬성, 황치신(黃致身)은 참찬, 성표는 음직(蔭職)으로 봉군(封君)되었다.
40세 : 김질(金礩)은 부원군(府院君)이 되었고, 남지(南智)는 우상, 최천건(崔天健)은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외에도 75세에 정승이 된 자가 두 사람이니 심청천(沈聽天)과 이완성(李完城)이다. 나의 외사촌형 김자한(金自漢)은 62세에 강경(講經)에서 14푼(十四分)을 받아 입격해서 과거에 올랐으니 늘그막에 귀하게 된 경우로서 기이한 일이다.

근래의 재신(宰臣)으로서 90세를 누린 이가 두 사람이니 판부사 원혼(元混)과 삼재(三宰) 송찬(宋贊)이다.
형조 참판 이거(李蘧)의 모친은 1백 3세에 죽었다. 상을 당할 때 참판은 77세였고, 큰딸은 85세, 다음 딸은 82세였는데 모두 병이 없었다. 그 노인의 나이가 만 1백세 되었을 때에 임금께서 부인 칭호를 봉하고자 했으나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특히 그 아들에게 우윤(右尹)을 제수하고, 아들의 관직에 따라서 부인의 고명(誥命)을 내렸으며, 이외에도 쌀ㆍ폐백(幣帛)ㆍ술ㆍ고기를 후하게 내리는 등 은사(恩賜)가 많았다. 참판의 아들 다섯 사람이 모두 벼슬길에 들었고, 손자가 근 1백 명이었으니 또한 당대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강릉부(江陵府) 태화현(太和縣)의 갑사(甲士) 임세적(任世績)은 1백 17세에 죽었으니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다.

근세에 다섯 아들이 문과에 오른 자로는 윤신(尹新)의 아들 후(昫)ㆍ길()ㆍ서(曙)ㆍ감()ㆍ탁(晫)이다. 모두들 2~3년 사이에 연달아서 발탁되었는데, 끝의 세 사람은 먼저 죽었다.
그 다음은 윤해원(尹海原)의 아들 방(昉)ㆍ양(暘)ㆍ휘(暉)ㆍ훤(暄)이 모두들 문과에 합격했고, 벼슬은 모두 당상이었다. 맨 끝으로 서자 한(旰)도 과거에 올랐는데, 자급(資級)과 녹봉이 당상급으로 승진되었다. 다섯 사람이 과거에 오르고, 아울러 당상인 것도 또한 드문 일이다. 이외에 무과로는 원주의 이응해(李應獬)와 부안의 민정란(閔庭鸞) 형제가 있다.
과거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서 높게 발탁된 경우로는 우상(右相) 정지연(鄭芝衍)이 13년 만에 등용되었는데 이는 감반(甘盤)의 노고가 있기 때문이었고, 좌상(左相) 기자헌(奇自獻)은 15년 만에 정승으로 뽑혔는데, 이는 인아(姻婭 사돈관계)로서 총애를 받아서였다.
연원군(延原君) 이광정(李光庭)과 금계(錦溪) 박동량(朴東亮)이 4년 만에 정옥(頂玉)한 것은 호종(扈從)한 공로 때문이었고, 안종록(安宗祿)이 8년 만에 금대(金帶)를 두른 것은 관리로서의 능력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참의 송준(宋駿)과 참의 성이문(成以文)이 모두 5년 만에 붉은 옷을 입은 것은 청반(淸班)으로 제수되어서 갑자기 승진한 것이었다.
낮은 관직에서 갑자기 승진된 자는 이월사(李月沙 월사는 이정귀(李廷龜)의 호)로, 정유년(1597, 선조30)에 병부 낭관으로서 필선(弼善)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서 준직(準職)으로서 집의(執義)가 되는 동시에 당상에 올랐다. 무술년(1598,선조31)에는 병조 참판으로 발탁되었고, 경자년(1600, 선조33)에는 호조 판서로 승진되었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문학으로써 임금에게 인정을 받아서였다. 그 다음 한유천(韓柳川 유천은 한준겸(韓浚謙)의 호)은 정유년에 사간에서 승지가 되었다가 잠깐 후에 경기 감사가 되었다. 최분음(崔汾陰 분음은 최천건(崔天健)의 호)은 정유년에 헌납(獻納)에서 잇달아 사간과 승지로 승진했고, 기해년(1599, 선조32)에 가자(加資)되어서 지신사(知申事 도승지)가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재주와 국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상(右相) 정언신(鄭彦信)이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軍器寺提調)를 겸했는데, 같은 때에 장원했던 이충원(李忠元)은 겨우 시정(寺正)이었다. 그 후에 오성(鰲城 이항복의 봉호)도 또한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였고, 같은 때 장원이었던 황치성(黃致誠)이 또한 시정(寺正)으로 있었다. 이 두 경우는 서로 부합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오성이 황치성에게 농담으로,
“그대가 완원(完原 이충원(李忠元))같이 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정 정승[鄭相 정언신]같이 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였다. 대개 완원은 그 후에 일품(一品)에 이르러 부원군(府院君)이 되었고, 정 정승은 정승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귀양 가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오성 상공은 해학(諧謔)을 잘하였다. 근래 국가에 변고가 많이 발생하자, 해조(該曹)에서는 으레 대신에게 수의(收議)해서 입계(入啓)하곤 하였는데 이것이 도를 넘어서 작은 일까지도 수의하니 대신들이 괴롭게 여겼다. 하루는 예조 낭관이 수의하러 와서 앞에 있었다. 공이 방금 구상(構想)해서 의견을 말하려 하는데, 어린 계집종이 안에서 여쭙기를,
“말먹이 콩이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므로 공이 꾸짖으며,
“말먹이 콩을 잇대는 것도 대신에게 수의하는가?”
하여 듣는 자가 배를 쥐고 웃었다.

나의 친가(親家)는 건천동(乾川洞)에 있었다. 청녕공주(靑寧公主) 저택의 뒤로 본방교(本房橋)까지 겨우 서른네 집인데, 이곳에서 국조 이래로 명인(名人)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李季仝)이 같은 때였고, 양성지(梁誠之)ㆍ김수온(金守溫)ㆍ이병정(李秉正)이 한 시대였으며, 유순정(柳順汀)ㆍ권민수(權敏手)ㆍ유담년(柳耼年)이 같은 시대였다. 그 후에도 노 정승(盧政丞 노수신(盧守愼))과 나의 선친 및 지사(知事) 변협(邊協)이 같은 때이며, 근세에는 유서애(柳西厓 서애는 유성룡(柳成龍)의 호)와 가형(家兄) 및 덕풍군(德豊君) 이순신(李舜臣)ㆍ원성군(原城君) 원균(元均)이 한 시대이다. 서애는 국가를 중흥(中興)시킨 공이 있었고, 원ㆍ이 두 장수는 나라를 구원한 공이 있었으니 이때에 와서 더욱 성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런 일을 들어서 오성 상공에게 이야기하니 상공이,
“그 동네에 무장(武將)이 있는가?”
하기에 내가,
“성우길(成佑吉)의 관직이 가장 높습니다.”
하니 다시,
“그대와 상대해도 괜찮을까?”
하므로 내가 웃으면서,
“성(成)도 북문(北門)에서 공을 세우면 후세에서 오늘날을 볼 때, 오늘날 예전 일을 보는 것과 같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상공이 크게 웃었다.

정승 심연원(沈連源)은 정호음(鄭湖陰)과 같은 신해년(1491, 성종22)생이었다. 호음이 병자년(1516, 중종11) 봄 중시(重試)에 장원하고 응교가 되어 찬성 김당(金璫)의 집에 갔다. 심 정승은 김찬성의 사위였는데 김공이 불러내어 호음과 배면(拜面)토록 하였다. 좌정한 다음, 그의 나이를 물으니, 동갑이었다. 그런데 정은 벌써 두 번이나 과거에 올랐는데, 공은 아직 유학(幼學)이어서 그때에 자못 부러워하는 빛이 있었다. 그 후 심공(沈公)도 과거에 올라서 좋은 벼슬을 지내고 정부(政府)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은 돈녕부 지사(敦寧府知事)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심공이 비로소 추천해서 예조 판서가 되었다. 세상에 벼슬이 수없이 변하는 것이 대개 이러한 것이다.

참의(參議) 박미(朴楣)는 아들이 셋이었다. 그 중 소영(召榮)과 증영(增榮)은 모두 일찍 과거에 올라서 함께 이조 낭관이 되니 당대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맏이인 광영(光榮)은 그럭저럭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40세의 나이로 박사 제자(博士弟子)로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무랐고, 공도 스스로 곤혹(困惑)스럽게 여겼다.
그 후 두 동생은 잇달아 죽었고, 공은 늦게야 과거에 올라서 청요(淸要)한 관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봉군(封君)되었으며 76세에 죽었다. 그의 자손도 연달아서 과거에 올랐고, 재상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러해서 이르고 늦음과, 통하고 막힘을 가지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나의 외왕부(外王父) 참판공(參判公)은 계묘년(1603, 선조36)에 영남 방백으로서 두 번째 호조 참판이 되었다. 당초에 유공 인숙(柳公仁淑)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공과의 우의가 두터웠으므로 공을 추천하여 지신사(知申事)로 삼았다. 공은 송인수(宋仁叟)ㆍ구수담(具壽耼)ㆍ이임(李任)ㆍ이해(李瀣) 등과 더불어 자주 삼사(三司)의 망단(望單)에 올라 열여섯 번이나 천거되었으나 끝내 낙점(落點)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쩍게 여겼다. 가장 늦게야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어서 나갔는데, 유공은 그의 외직으로 나감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유공에게 죽음이 내려지자, 그가 천거해서 언관(言官)으로 된 자는 모두 뜻밖의 화변(禍變)을 당했다. 공의 강직함으로써 그때를 당했더라면, 반드시 흉악한 사람들의 노여움에 부딪쳤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하게 외방에 나가 있어서, 도리어 면했으니 화복을 요량할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왕부(王父)께서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에 조정의 논의는 안로(安老)를 불러 들이고자 하였다. 공의 고향사람이었던 심언광(沈彦光) 형제가 그때 요직에 있었다. 안로는 이들과 은밀히 결탁하고, 기묘년(1519, 중종14) 화변에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임용하기를 허락하였다. 대개 두 심씨는 그때 화를 당한 사류(士類)를 추서(追敍)해서 심정(沈貞)ㆍ이항(李沆)과 대항코자 하였다. 그러나 도와 줄 사람이 없었는데, 안로의 말을 믿고 힘을 다해서 추진하였다. 그런데 회재 선생(晦齋先生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이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그 논의를 힘껏 배격하였다. 언광이 말하기를,
“이모가 조정에 있는 한, 안로는 조정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여, 탄핵해 쫓아버리고자 하였다. 왕부께서 만류하며,
“복고(復古 이언적의 자)는 정직한 사람이고 안로는 단정하지 못하다. 그런데 지금 사류를 임용하겠다는 그의 말을 믿고 착한 선비를 공격함은 불가하다.”
했으나, 언광은 듣지 않았다.
그 후 안로가 조정에 다시 들어오자, 하는 짓이 착하지 못하고, 기묘년의 사람도 수용(收用)하지 않았다. 언광이 비로소 분하게 여겼고, 장옥(張玉) 부자를 죽이려 할 때에는 언광이 힘껏 구원하였기 때문에 안로의 뜻을 거슬려 이조에서 함경 방백으로 제수되어 나갔다.
그 뒤 다시 안로가 쫓겨가자 언광을 대사헌으로 임명하여 소환하니 당시 논의는,
“언광이 아니었으면 안로가 어찌해서 조정에 들어왔겠는가. 그 후에는 비록 대립(對立)했으나 도헌(都憲)으로는 제수할 수 없다.”
하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왕부께서 그때에 강원도 방백으로 있었는데, 노상에서 만나 위로하였다. 언광이 손을 잡으면서,
“군자(君子)가 그 천거함을 조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실패한다고 예부터 경계하였는데, 나는 능히 실천하지 못했으니 공이 한 말을 생각하고 이제와서 후회한들 미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이것으로써 한을 품고 집에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었다.

외왕부의 아우 광진(光軫)도 벼슬이 참판이었다. 소시 적에 판윤(判尹) 최연(崔演)과 함께 절에 가서 공부하였다. 《주역(周易)》을 읽다가 반이 못 되었는데 설날이 되었다. 두 분이 함께 근친(覲親)하러 돌아가는 도중에 각자 공부한 것을 외었다. 최공은 잊은 것이 있었으므로 곧 절로 되돌아 올라가서 죄다 왼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전배(前輩)가 배움에 뜻이 독실했음이 이와 같았다.

최연(崔演)은 문장에 능하고, 용모가 아담해서 악담(岳湛)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물세 살에 과거에 급제하니, 여러 공이 사랑하였다. 그가 호당(湖堂)과 홍문관에 들어간 것은 모두 생김새 때문이었다. 정릉(靖陵 중종을 가리킴)께서도 그의 아름다운 용의(容儀)를 칭찬하였다. 일찍이 연일 야대(夜對)했는데 내관(內官)이 너무 자주함을 품(稟)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내가 최연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이다.”
하였는데, 이는 공이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라 한다.

가정(嘉靖 명 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신축년(1541, 중종36)에 외왕부께서 호남 방백이 되었다. 아우 참판공은 그때 경상 우병사(右兵使)로 있었는데, 쌍계역(雙溪驛)에 모여서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 갑진년(1544, 중종39)에 왕부께서 영남 방백이 되었고, 공이 또 호남을 안무(按撫)하게 되었다. 또 쌍계역에서 제사를 거행했는데 양남(兩南) 사람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다.

강원도는 지역이 비좁은데, 강릉(江陵)과 원주(原州)에 많은 이름난 인사가 많았다.
건국 초기에는 강릉에서 유명한 정승이 많이 나왔으나, 공헌왕(恭憲王) 때부터 높은 관직을 한 사람이 전혀 없다. 원주에는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 판서(判書) 이개(李墍)가 가장 알려져 있다. 근래에는 과거에 높게 합격한 자가 잇달아 나왔으나, 다만 얼마 못 되어서 죽는 자가 많다. 강릉에는 태사(太史) 최대중(崔大中)이 과거에 합격한 지 서른 해 만에 비로소 이오(李璈)가 과거에 급제했다 한다.

원주 사람 고경오(高敬吾)는 을사년(1605, 선조38) 증광 향시(增廣鄕試)에서 홍수불벽(紅袖拂壁)이라는 부(賦)를 지어 일등으로 장원했고, 남성(南省)은 서명벽상(書名壁上)이라는 부를 지어 합격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성균관 관원으로 있다가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장폐(杖斃)되었으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을 때에 저보(邸報)가 강릉에 내려왔는데, 교생(校生) 함승술(咸承述)이 강릉부(江陵府)에 들어왔다가, 그 이름자가 제 이름 술(述)자와 같은 줄로 잘못 알았다. 집에 돌아오니, 친구들이 물었다.
“누가 부사로 되었던가?”
하니,
“정술이 되었다.”
하여, 사람들이 웃었다.
그 후 한강이 도임하여 교안(校案)을 열람하다가 승술의 이름을 보자, 또 자기 이름과 같은 글자로 잘못 알고,
“함승구의 자(字)는 무엇이라 하는가?”
하니, 듣는 자가 모두 크게 웃었다.

감사 권윤(權綸)은 외왕부(外王父)의 외증조(外曾祖)이다. 성묘(成廟 성종을 가리킴) 때에 주감(冑監)의 장으로 있은 지 20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중묘(中廟) 때에 문학한 선비는 모두 그가 지도한 자였다.
그의 손자 연(璉)은 기묘년(1519, 중종14) 봄 과거에 대악부(大樂賦)와 어룡무동정시(魚龍舞洞庭詩)를 지었는데, 모두 좋았다. 이름을 뜯어 보니 바로 공의 손자였다. 지정(止亭 남곤(南袞)의 호)이 주시관(主試官)이었는데, 바삐 뽑아서 장원을 시켰고, 식년강(式年講)에는 두 번 응시하였다. 집에 두 장이 떨어져 나간 《맹자(孟子)》 책이 있었는데, 시험이 반드시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것은 읽지 않고 응시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 시험에 맹자 문제는 모두 그 부분에서 나왔으므로 운명이라 하여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후 조정에서 세마(洗馬)와 왕자 사부(王子師傅)로서 두 번이나 불렀으나 모두 가지 않았다.
정원과 연못을 잘 꾸미고 풍류로서 자신을 봉양함이 그 고을에서 첫째였고, 조촐한 복을 40여년이나 누렸다.

권장원(權狀元)의 딸은 곧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아내이다. 그 시어머니가 병으로 위태롭게 되자 권씨는 향을 피우며, 한데에서 밤낮 7일 간을 하늘에 기도하였다. 권씨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하늘에서 새알만한 빨간색의 환약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주워다가 갈아서 먹게 하였는데, 향취가 방안에 가득하고 시어머니의 병도 곧 나았다.
이것은 정성어린 효도가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지금도 그 고을 노인들이 일컫는다. 조정에서 듣고 정려(旌閭)하였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는 바로 권씨의 외손녀이다. 그런 까닭으로 선생은 북평(北坪) 권장원의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때에 서광(瑞光)이 하늘에 비쳤는데 장원이 이 아기를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모부인은 성품이 고요하고 굳세었으며 문장에 능하고 그림도 그렸다. 규범(閨範)이 매우 엄해서 여칙(女則)으로써 자신을 단속했는데, 선생의 학문은 태교(胎敎)에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

강릉은 풍속이 순박하여 예부터 효도와 정절을 지킨 사람이 많았고, 정표(旌表)가 마을 사이에 잇달아 보였다. 송강(松江)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집마다 봉작(封爵)할 만하다.’란 것이 별로 헛말이 아니었다.
한강(寒岡)이 부사로 되어 와서 효자와 순손(順孫)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참석한 자가 52명이나 되었다. 이런 장한 일은 고금에 드문 것이었다.

첨지(僉知) 김담(金澹)은 강릉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이 극진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몸소 만들었고, 조석으로 곁에 모시기를 40여 년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연달아 죽자, 곡하는 소리가 끊임없었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일어났다. 잔에다 술을 부어 놓고 침장(寢帳) 앞에 엎드려서 종일토록 통곡했는데, 잔이 문득 말라서 사람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일찍이 산에 올라 돌을 떠서 묘표(墓表)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한창 얼어붙은 겨울이어서 쪼아내지 못하게 되자 공이 돌을 붙들고 통곡하니 돌이 갑자기 벌어졌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았다. 효성이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세 번이나 관직에 임명했으나 모두 가지 않았고,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였다. 그 후 나이가 70이라는 것으로써 방백이 계문(啓聞)하여 특별히 당상관(堂上官)인 첨지(僉知)에 제수되었고, 90세까지 살았다.

남사고(南師古)는 울진(蔚珍) 사람인데 힘껏 공부해서 역리(易理)에 능통하였다. 천문[象緯]ㆍ지리[堪輿]ㆍ점술(占術)에 밝아 말한 일이 모두 기이하게 맞았다.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끝내 급제하지는 못했다. 벗들이,
“자네는 남의 명수(命數)는 잘 알면서도 자신의 운명은 헤아리지 못하고 해마다 헛걸음을 하니 왜 그런가?”
하자, 남(南)이 웃으면서,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면 점술도 어둡게 된다. 내가 합격하지 못할 줄을 분명하게 알면 과거장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나 욕심으로 생각이 벌써 어두웠던 까닭으로 항상 합격될까 하고 이렇게 들떠서 왕래한 것이다.”
하였다. 만년에 천문학 교수(天文學敎授)로서 서울에 있을 때에 태사성(太史星)에 무리가 지자 관상감 정(觀象監正) 이번신(李蕃臣)의 나이가 늙었으므로 자신이 이에 해당될 것이라 하니, 남사고가 웃으면서 ‘따로 해당될 자가 있다.’ 하였다. 두어 달 후에 남사고가 과연 병들어서 죽었다. 이것은 오중(吳中)의 은사(隱士)가 죽기를 구했으나 되지 못한 것과 어떻게 다른가.

종실(宗室) 서천령(西川令)은 장기를 잘 두었다. 하루는 금강산 백전암(金剛山柏田庵)에 유람하다가 지엄화상(知嚴和尙)을 만났다. 텅 빈 방에 아무것도 없고, 장기 주머니가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영(令)이 묻기를,
“화상은 장기를 잘 두시오?”
하니,
“30년 전에 두어보았소”
하였다. 영이 곧 가져다가 대국(對局)했는데 한쪽 포(包)가 없었다. 괴이해서 물으니,
“노승(老僧)은 평생에 포를 하나만 썼소.”
하였다. 영이,
“나는 전국에서 첫째가는 솜씨요. 남들은 대국하지도 못하는데 그대가 하나를 떼고자 하오?”
하자,
“시험삼아 해봅시다.”
하였다. 세 판을 상대했으나 번번이 지자 화상이 웃으며 장기를 치우고 다시 두지 않았다. 영은 탄복하면서 갔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자는 예 문희(倪文僖 문희는 예겸(倪謙)의 시호)로부터, 진즙희(陳緝熙)ㆍ동규봉(董圭峯 규봉은 동월(董越)의 호)ㆍ당자양(唐紫陽) 등으로서 모두 한 시대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입각(入閣)하지 못한 까닭으로 한림(翰林)으로서 사신으로 내정되면 문득 회피하려 하였다.
정묘년(1567, 명종22)에 목종(穆宗)이 등극하고 우리나라에 조서(詔書)를 반포하게 되었다. 당초에 시강(侍講) 정사미(丁士美)를 사신으로 삼았으나 병으로 체대(遞代)되고, 병록(屛麓) 범응기(范應期)를 대신 임명했으나 역시 회피하였다. 그때에 각로(閣老) 허국(許國)이 마침 검토(檢討)로 있었는데 자진해서 가기를 청했고, 사신의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돌아갔다.
그 후에 정(丁)은 시랑이 되었다가 일찍 죽었고, 범(范)은 탄핵을 당해 성서(省署)에 어물거리다가 늦게야 겨우 남좨주(南祭酒)가 되었지만, 또 권신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을 떠났다. 그런데 허공(許公)은 을유년(1585, 선조18)에 입각(入閣)해서 벼슬이 소부(少傅)와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고, 70세까지 살았다. 이것은 하늘이 정ㆍ범 두 사람이 일부러 피한 것을 미워해서가 아닌지?

왕감주(王弇州)가 한 태사(韓太史)의 세기(世紀)에 발문(跋文)을 썼는데, ‘조선(朝鮮) 사람이 문장에 능하다.’ 한 다음, 우리나라의 시(詩)를 중국의 선덕(宣德)ㆍ성화(成化) 시대와 비교하고, 우리나라의 글씨는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와 비교하였다. 감주의 문집(文集)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 유명한 분들이 보고, 우리나라를 깔보았다 하여 매우 치욕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자세히 보니 왕공(王公)이 평론(評論)한 것은 바로 기린 것이고, 깎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원미(元美)가 일찍이 선덕시대에 있었던 양동리(楊東里)와 성화시대에 있었던 이서애(李西厓)ㆍ정황돈(程篁墩) 등 여러 사람의 작품을 당 나라 경룡(景龍)시대와 비교하였다. 그런데 양씨(楊氏)ㆍ이씨를 이태백(李太白)ㆍ두자미(杜子美)와 비교하면서 우리나라 시를 경룡시대와 비교했으니, 이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원미가 또 글씨를 평하면서 두 왕씨[二王氏 왕희지와 왕헌지] 이후에는 다만 조송설(趙松雪)이 있을 뿐이고,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褚遂良)ㆍ우세남(虞世南)ㆍ안진경(顔眞卿)ㆍ채양(蔡襄)ㆍ미불(米芾)은 모두 그 다음이라 하였다. 그런데 석봉(石峯)의 글씨를 자앙(子昂 조맹부의 자)과 비교했으니 또한 족하다. 잠깐 보고서 분하게 여겼으니 참으로 한바탕 웃어도 부족하다.

급사(給事) 서관란(徐觀灡)이 가장 글씨에 능하였다. 동국에 온 장관(將官)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로 된 족자를 입수하고는, 그것을 자앙(子昂)의 친필이라 하면서 급사에게 바쳤다. 급사는 나를 불러서 이것이 어떤 사람의 글씨인가를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장헌왕(莊憲王 세종의 시호)의 아들 안평대군 용(瑢)의 글씨요.”
하니, 급사는,
“나는 참으로 자앙의 글씨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세상에 어찌 이렇게도 신묘(神妙)한 글씨가 있는가.”
하였다. 하루는 석봉에게 글씨를 요구하므로 석봉이 옛사람의 글씨를 본떠 열 폭을 만들어서 바쳤다. 급사가 분간하면서,
“이것은 장지(張芝), 이것은 우군 대령(右軍大令 왕희지), 이것은 저하남(褚河南 저수량), 이것은 구솔경(歐率更 구양순)과 지영(智永), 이것은 안노공(顔魯公 노공은 안진경의 봉호), 이것은 미남궁(米南宮 미불)ㆍ조송설(趙松雪 조맹부)의 체이다.”
하였다. 마지막 한 폭은 김생(金生)의 글씨를 본뜬 것이었는데, 급사가 이르기를,
“이것은 옛법은 아니나, 또한 굳세고 아름다워서 사랑스럽다.”
하였다. 석봉이 깊이 탄복하였다.

서 급사가 일찍이 먹 한 장을 나에게 주면서,
“이것은 금국(金國) 장종(章宗)이 만든 것이오,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가져다가 갈아보니 빛깔은 정흑색(正黑色)이면서 조금 엉기었고, 향기가 아직도 대단하다. 무술년(1598, 선조31) 겨울부터 쓰기 시작해서 지금 13년이 되었으나 다만 한 글자만큼 갈렸을 뿐이니 참으로 기이한 물품이다.

감주(弇州)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성(宣城) 제갈씨(諸葛氏)가 만든 붓은 아주 정밀해서 종일 써도 닳지 않는다.”
하였다. 주 태사(朱太史 주지번)가 나에게 다섯 자루를 주었는데, 토끼털은 강하여 쉽게 마르고, 양털은 부드러워 쉽게 꺾이어서 모두 우리나라 황모(黃毛) 붓만은 못하였다.
주 태사가 나의 붓을 써보고는,
“5일 동안을 썼는데도 닳지 않으니 이것이 천하에 제일가는 붓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붓을 수천 자루나 구하여 갔다. 또한 우리나라 종이를 좋아해서 아주 엷은 것을 많이 가려 가지며,
“이것은 탑본(搨本)이나 모본(摹本)하기 좋다.”
하였다.

중형(仲兄)이 일찍이 말하기를,
“황ㆍ왕(黃王) 두 조사(詔使)는 몸가짐이 아주 엄정하였다. 주상이 지필묵(紙筆墨)을 주었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하루는 대내(大內)에 보관중인 왜국(倭國) 닥종이로 박은 《이백집(李白集)》과 《두시(杜詩)》 한 질씩을 나누어 주었는데, 채양(蔡陽)은 펴보고는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사람을 보내서 부사(副使)도 받아 들였는가를 물어보고는 되돌려 주었다고 하자 자기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 이런 사람을 어디서 다시 보겠는가.”
하였다.
근세(近世)에 나온 조사(詔使) 중에 유독 웅대행(熊大行)을 일컫지만 그 사람도 서책(書冊)이나 종이ㆍ붓은 받아갔다 한다.

이오봉(李五峯 오봉은 이호민(李好閔)의 호)은 고(顧)ㆍ최(崔) 두 조사를 접대하면서, 물품을 요구해 오는 데에 고통을 겪었고, 유서경(柳西坰 서경은 유근(柳根)의 호)은 주(朱)ㆍ양(梁)을 접대하면서 시부(詩賦)를 창수(唱酬)하느라 고통을 겪었다. 여장(汝章 권필(權韠)의 자)이 말하기를,
“오봉은 몸이 고달팠고, 서경은 마음이 고달팠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 하였다.

역관(譯官) 이화종(李和宗)이 소싯적에 지정(止亭)ㆍ음애(陰厓 이자(李耔))를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런데 마침 무종(武宗)이 남방(南方)을 순행 중이므로 화종은 역말을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갔다가 남경(南京)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우(高郵) 물가에 이르러 말이 지쳤으므로 앉아 쉬고 있었는데 모래 속에 삐죽이 나온 뼈가 있었다. 그래서 파내보니, 여섯 마디인데 꾸불꾸불하고 눈같이 희었다. 실없이 짐 속에 챙겨가지고 북경에 도착하니 장사꾼이 물건들을 벌여 놓고 값을 논란하고 있었다. 화종은 그 뼈를 꺼내어 자랑하며 속였다. 한 장사꾼이 보더니 절하면서,
“이것은 뿔없는 용의 등뼈인데 큰 구슬 여섯 개가 들어 있으니 참으로 값을 정할 수 없는 보배입니다.”
하였다. 급히 톱질해 보니 과연 복숭아씨만큼 큰 구슬 여섯 개가 나오는 것이었다. 곧 천 냥 값에 해당하는 비단을 주고 바꿔갔다. 화종은 ‘이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니 어찌 내가 독차지할 수 있느냐.’ 하고, 그 비단을 죄다 나누었는데 상통사(上通事)에서 노복(奴僕)까지 고루 주었다. 양공(兩公)도 아름답게 여기고 시를 지어서 칭찬하였다.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의 조부는 우리나라 이산(理山) 지역 독로강(禿魯江)가에 살다가 살인사건으로 해서 부부가 철령위(鐵嶺衛)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부친은 변경을 수어(守禦)한 공이 있어, 유격(遊擊)이 되었고, 성량은 음직(蔭職)으로 지휘(指揮)가 되었다. 소싯적에 오랑캐를 공격해서 포획한 것이 많았으므로 험산보 참장(險山堡參將)으로 기용되었다.
허영양(許穎陽)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압록강 가에까지 전송하면서 법으로 정해 놓은 호위 군사의 수효를 줄이고, 그럼으로써 남게 되는 말을 사유(私有)로 하였다. 허공(許公)이 탄핵할 참인데, 성량이 역관(譯官) 곽지원(郭之元)에게 주선[居間]하도록 청해서 면하게 되었다.
그 후 두어 해가 못 되어서 공을 세우고, 총병(摠兵)이 되어 지역을 천 리나 개척해서 다섯 곳에 보(堡)를 세웠다. 백(伯)으로 봉함을 받았고, 아들과 사위 중에 고관으로 된 자가 수십명이었다. 이들의 위세가 동쪽 지역을 덮어 거의 사십 년이나 부귀와 영화를 누려 근래에는 겨룰 데가 없었다.
지원이 일찍이 북경(北京)에 왕래할 때마다 성량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고, 이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한다.

우리집 성씨(姓氏)는 가락국 왕비(駕洛國王妃)로부터 얻었으니 거의 칠백 년이나 되었다.
고려 초에 들어와서 시조(始祖)의 채읍(采邑)이 양천(陽川)이었으므로 드디어 여기에다 호적을 붙였던 것이었다. 고려조 오백 년을 마칠 때까지 과거에 연달아 올라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정승이 된 사람이 열한 분이고, 추부(樞府)에 들어간 사람이 여섯이다. 학사(學士)가 아홉이고, 공주(公主)와 결혼한 사람이 다섯이다.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벼슬한 사람이 둘이고 봉군(封君)된 사람이 열넷인데, 대(代)마다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조금 쇠퇴해져서, 정승이 세 사람, 찬성(贊成)이 두 사람이고, 육조의 경(卿)이 넷이다. 공신(功臣)이 세 사람, 학사가 열둘이다. 그런데 충정공(忠貞公) 형제와 지사(知事) 집(輯)과 찬성(贊成) 자(磁)ㆍ선인(先人) 초당 선생(草堂先生)을 최고로 일컫는다. 근래에 유수(留守) 허잠(許潛)이 청백리(淸白吏)로 되었는데, 역시 선조[前烈]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유격(遊擊) 허국위(許國威)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나를 보고 기뻐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허태악(許太嶽)의 윤군(胤君)을 나와 같은 성씨이다 하니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여긴다. 그러나 가락국 왕비가 다른 나라에서 배를 타고 나왔다는 것인즉, 그분은 중국 사악(四嶽)의 후손으로서, 왕국의 딸이라 핑계하고 혼인을 이루었던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는데, 유격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우리 선대(先代)는 야당(野堂) 선생 뒤로는 두 대를 연달아서 과거에 오른 분이 없다. 그러다가 우리 고조(高祖) 때에 와서 형제분이 과거에 뽑혔으나 계씨(季氏)분은 겨우 사간(司諫)이었고, 고조께서는 벼슬하지 못하고 일찍 작고(作故)하였다. 사간의 아들 집(輯)은 벼슬이 지사(知事)였고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다.
우리 증조(曾祖)는 과거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으며, 위(渭)는 지평(持平)이고, 온(溫)은 승지였다. 조부는 문장에 능했으나 일찍 작고했고, 선대부 때에 와서 비로소 드러났다. 나의 삼형제가 함께 문과(文科)에 올랐는데, 백형(伯兄)은 육경이고, 중형(仲兄)은 학사이며, 나도 당상관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백형의 아들 실(實)이 문과에 올라, 정언(正言)이 되었고, 여러 조카도 모두 청일(淸逸)하며 문명(文名)이 있다.
이것은 모두 선조(先祖)께서 공덕을 쌓으신 효과인데, 대개 오랠수록 더욱 나타난 것이었다.

우리 선대부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節行)은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되었다. 큰 형이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작은 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고고(高孤)해서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욱 맑으면서 씩씩하고. 높으면서 아름다워 개원(開元 당(唐) 현종(玄宗)의 연호)ㆍ대력(大曆 당(唐) 대종(代宗)의 연호)시대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서 천신사부(薦紳士夫)가 모두 칭찬한다. 재종형(再從兄) 체씨(䙗氏)는 고문(古文)을 공부해서 시격(詩格)이 매우 높고 굳세며 부(賦)는 더욱 뛰어나서 국조 이래로 그 짝이 드물다. 나도 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文藝)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참여되고, 중국사람에게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4부자(四父子)가 함께 제고(製誥)를 맡았다. 선대부께서 작고하자, 형이 또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으며, 3형제가 모두 사필(史筆)을 잡기도 했다. 작은형과 나는 같이 과거에 장원했고, 나는 또 세 번이나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에 문헌(文獻)하는 집으로서는 반드시 우리 가문(家門)을 첫째로 꼽았다.
옛적에 유효작(劉孝綽) 일가에 부자와 자매가 함께 문장에 능했는데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허ㆍ사(許史)의 부귀와 왕ㆍ사(王謝)의 영화로움도 모두 우리집 문헌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였는데, 나도 그렇다고 말한다.

[주D-001]망형(亡兄)이……돌아와서 : 망형은 허균(許筠)의 중형(仲兄)인 허봉(許篈 1551~1588)을 가리킨다. 그는 선조 6년(1573)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그 이듬해인 선조 7년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明) 나라를 다녀왔고, 여행기로서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남겼다.
[주D-002]삭계(朔啓) :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사람이 월말에 제술(製述)을 하여 올리면 대제학(大提學)이 등급을 매겨서 월초에 보고하는 제도. 《肅宗實錄 卷22 肅宗 16年 12月 庚午條》
[주D-003]고(顧)ㆍ최(崔) : 선조 35년(1602)에 사신으로 온 명 나라 한림(翰林) 고천준(顧天峻)과 행인(行人) 최정건(崔廷建)을 가리킴. 이들은 사신으로 나와서 이익만을 노리어 많은 방종한 행동을 일삼았음. 《甲辰漫錄》
[주D-004]삭과(削科) : 과거의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를 한 급제자의 합격을 취소함.
[주D-005]왕원미(王元美) : 원미는 명(明) 나라 때의 문인 왕세정(王世貞)의 자(字). 호는 봉주(鳳州). 시문(詩文)에 능하여 이반룡(李攀龍)과 함께 이왕(李王)으로 병칭된다.
[주D-006]도장경(陶長卿) : 장경은 명 나라 학자인 도융(陶融)의 자.
[주D-007]한단(邯鄲) 걸음 배우듯 : 춘추 시대 연(燕) 나라 사람이 조(趙) 나라의 한단(邯鄲) 사람이 보행(步行)을 잘하는 것을 보고 한 청년이 그곳에 가서 걷는 방법을 배웠는데 배우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나라의 걸음걸이도 잊어버리고 기어서 돌아왔다 함. 자기의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를 내다가는 두 가지 다 잃게 된다는 비유로 쓰인다. 《莊子 卷6 秋水》
[주D-008]사 임천(謝臨川) : 임천 내사(臨川內史)를 지낸 남송(南宋)의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킴.
[주D-009]면구(綿駒)와 진청(秦靑) : 《맹자》에 의하면 면구는 춘추 시대 제(齊) 나라 사람으로서 노래를 잘하였다 함. 《열자(列子)》에 의하면 진청 또한 노래에 능한 이로서 설담(薛譚)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함. 《孟子 告子下, 列子 湯問篇》
[주D-010]차씨(車氏)……형제 : 차식(車軾)과 그의 아들인 천로(天輅)ㆍ운로(雲輅) 형제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시문에 능하였음.
[주D-011]정옥(頂玉) : 옥으로 만든 망건 관자. 정3품 당상 이상의 관원은 조각을 하고 종1품 이상의 관원은 조각을 하지 않았음.
[주D-012]금대(金帶) : 금띠. 정2품 관원이 공복(公服)에 두르던 띠. 가장자리와 띠 등을 금으로 아로새겨 꾸몄음.
[주D-013]외왕부(外王父) 참판공(參判公) : 허균(許筠)의 외조부인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광철(金光轍)을 가리킴. 《國朝人物考 卷19 許曄碑銘》
[주D-014]악담(岳湛) 같은 아름다움 : 진(晉)의 반악(潘岳)과 하후담(夏侯湛)을 일컫는 말로서 이들이 모두 문장에 능하였으며 서로 사이가 좋았다 함. 《晉書 卷55 夏侯湛傳》
[주D-015]오중(吳中)의 은사(隱士) : 진(晉) 나라 때 달이 소미성(少微星)을 범하자 점치는 자가 은사(隱士)가 죽을 것이라고 하여 당시의 은사인 오(吳) 땅의 대규(戴逵)가 죽을까 걱정했는데 얼마 후 회계(會稽)의 은사인 사부(謝敷)가 죽자 오중(吳中)의 은사가 죽기를 구했으나 죽지 못했다고 비웃은 일. 《蒙求 卷中》
성소부부고 제23권
 설부(說部) 2
성옹지소록 중(惺翁識小錄中)

국초(國初)의 명상(名相)으로는 황ㆍ허(黃許 황희(黃喜)ㆍ허조(許稠))를 친다. 언젠가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상고해보니 특별히 건백(建白)한 것은 없고, 임금이 조금이라도 지나친 거동이 있으면 반드시 굳게 고집하고 따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황(黃)은 관리의 임명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제도 변경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허(許)는 약간 문학(文學)으로 꾸몄으나 조심스럽게 정법(正法)을 지켰으니, 비록 경세(經世)의 도량이나 시속(時俗)을 구제할 만한 재주는 아니었지만 역시 현신(賢臣)들이었다. 쇄론(瑣論)에도 이 내용이 있으나 약간 다르다.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시호)이 영상(領相)으로 있을 때, 김공 종서(金公宗瑞)가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있었다.
하루는 삼공(三公)ㆍ육경(六卿)이 대궐에서 회의를 하는데 해가 저물었으므로, 종서가 간단한 밥상을 준비해왔다. 익성공이 밥상을 물리치고는 조당(朝堂)에 앉아 종서를 불러 섬돌 위에 세워 놓고, 법외(法外)에 사사로이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힐책했다. 말이 매우 엄숙하니 종서는 진땀을 흘리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이러기를 한참 한 후에야 돌려보냈으니, 익성공이 규범(規範)을 지킴이 이와 같았다.

익성공이 국정(國政)을 맡는 동안에 김종서가 여러 번 병조 판서와 호조 판서를 지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익성공이 심하게 책망하고 혹은 종을 매질하거나 구종(驅從)을 가두기도 하였다. 동료들이 모두 너무 심하다고 여겼고, 종서도 매우 곤욕스럽게 여겼다.
하루는 맹 정승(孟政丞 맹사성(孟思誠))이 묻기를,
“김모(金某)는 당대의 명경(名卿)인데 공이 어찌 그리도 심하게 합니까?”
하니, 익성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종서를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오. 종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기가 날카로워 일을 처리하는 데 과감하니, 후일 우리들의 자리에 올랐을 때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것이 분명하오. 그러니 그 기세를 꺾어서 경계토록 하고 뜻을 단속하여 조심하게 함으로써 일에 임하여 신중하게 하도록 하자는 것이 나의 뜻이지, 그를 괴롭히자는 것은 아니오.”
하니, 맹 정승이 감복하였다.
뒷날 익성공이 사직을 청하면서 종서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 한다.

김종서가 북관(北關)에 있을 때에 정사는 엄격하고 용도(用度)는 매우 사치하니 백성과 아전들이 싫어하였다. 하루는 화살이 그의 책상에 날아왔으나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누차 독약을 넣었으나 그를 죽이지는 못하였다.
무릇 한 번 잔치를 하면 비장(裨將) 백 사람에게 각기 쇠다리를 돌리므로 어떤 사람이 낭비라고 간하자,
“북새(北塞)는 우리 왕조가 일어난 곳으로서 조종(祖宗)께서 개척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곳이다. 지금 다행히 강토를 개척하였으나 장수와 군졸이 이 먼 곳에서 10년 동안이나 수자리하고 있으니, 잔치를 이와 같이 하지 않고는 이들을 위로할 길이 없다. 더구나 일을 하는 시초에 쓸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비록 쇠다리 하나씩을 쓰더라도 10년이 지난 후에는 닭다리 하나도 넉넉치 못할 것이다. 장수와 군졸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게 되면 누구와 이 변방을 지키겠는가?”
하고 대답하니, 간하던 사람이 더 말하지 못했다.

김종서가 신범옹(申泛翁 범옹은 신숙주(申叔舟)의 자)을 천거해서 막료(幕僚)로 삼고, 범옹의 재기(才器)를 극진히 대우하였다. 무릇 계획할 것이 있으면 이면에서 돕는 일이 많았다.
9성(城)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한가의 여부에 대한 조정의 의논이 자신의 의견과 다르므로 종서가 상서(上書)하여 그를 쟁론(爭論)했는데, 내용이 수만여 자(字)에 달하였다. 종서가 범옹에게 붓을 잡아 쓰게 하고 자신이 구술(口述)하는데 전에 지어둔 글을 외는 것처럼 줄줄 나와서 그치지 않았다.
범옹은 명을 받들어 부르는대로 적으며 붓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 글자도 되묻는 것이 없었고, 또 한 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것이 없었다. 종서가 이렇게 탄복하였다.
“나는 본래부터 내 재주를 자부하고 있지만, 자네도 드물게 보는 큰 재주일세.”

정난(靖難)이 있던 날에 범옹은 성중(省中)에 있었다. 그의 부인은 범옹이 반드시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려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고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물녘에 갈도(喝道)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알아보니 범옹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부인이 치마끈을 풀면서,
“나는 당신이 죽을 줄로 생각했소.”
하니, 범옹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과 문정공(文貞公) 허침(許琛)은 두 형제가 다 정승이 되었고 덕업(德業)도 모두 현저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전에 없던 일이다. 그의 누님도 문행(文行)과 식감(識鑑)이 있었고 백 세나 살았으므로 문중(門中)에서는 지금까지 ‘백세 할머니’라고 부른다. 두 형제가 누님을 매우 공손하게 섬겼고, 조정에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면 두 형제가 반드시 찾아가 의견을 묻곤 했다.
성묘(成廟 성종)가 윤비(尹妃)를 폐위하려 할 때에 두 형제가 자문을 구하니,
“아들이 동궁(東宮)으로 있는데, 그 어미를 죄주고서 어찌 국가가 편안히 탈이 없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충정(忠貞)은 병을 핑계로 논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문정(文貞)은 의논을 달리하여 체직되었다.
그후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가 황란(荒亂)해져서 ‘윤비(尹妃)의 폐위가 마땅하다.’고 논의한 자는 다 죽였는데 문정(文貞)이 홀로 면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누님의 뛰어난 식견에 탄복하였다.

연산군의 폐위를 논할 때에 성창산(成昌山 창산은 성희안(成希顔)의 봉호)이 실로 그 모의를 먼저 하고, 평성(平城 박원종(朴元宗)의 봉호)이 이에 참여하였으며 청천(菁川 유순정(柳順汀)의 봉호)은 늦게야 참여하였다. 그런데 위차(位次)가 박(朴)ㆍ유(柳)가 앞서고 성(成)이 끝으로 된 것은 본래의 작질(爵秩)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실로 창산이 겸손해서 스스로 셋째로 된 것이었다. 모든 일이 겸양(謙讓)해야 잘 이루어지는데, 더구나 반정(反正) 같은 큰 일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양보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니, 창산의 식견은 따를 수 없다.

창산(昌山)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에, 이미 굳세고 과감해서 권력에 눌리지 않았다. 그가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하례(下隷)에게 욕을 당하고는 동료들과 연명(聯名)하여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 하례는 당시의 수규(首揆 영의정)인 신 정승(愼政丞 신승선(愼承善))의 종이면서 좌상(左相) 이광릉(李廣陵 광릉은 이극배(李克培)의 봉호)의 여종의 남편이었다.
이렇게 되자 판서(判書) 한치형(韓致亨)은 죄를 결단하기 어려우므로 병을 구실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 일로 광릉(廣陵)의 아우 극돈(克墩)이 공의 집을 두 번이나 찾아갔지만 병을 핑계를 만나주지 않으니, 두 정승이 노하였다.
하루는 공이 조당(朝堂)에 나아가니 두 정승이 공을 공격하였다. 공이 좌중에게 내놓고 말하기를,
“여러 유생(儒生)이 한 천한 종에게 구타당했으니, 그 종의 죄는 사형에 해당하오. 이것이 국법이니 용서할 수 없소. 그러니 어찌 상공(相公)을 위해서 용서하겠소. 그렇지 않으면 주상(主上)께 아뢴 뒤에 스스로 물러가겠소.”
하니, 두 정승이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동석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물러나와서 그 종에게 곤장을 쳐서 죽였으니 그 과단성이 이와 같았다.

창산(昌山)은 식감(識鑑)이 있었다. 일찍이 정 문익공(鄭文翼公 문익은 정광필(鄭光弼)의 시호)은 참으로 정승이 될 만한 인물이다 하여 탄복하였다. 문익공이 함길도(咸吉道) 방백(方伯 감사)으로 있다가 우규(右揆 우의정)가 되어 돌아온 것은 모두 창산의 천거로 된 것이었다. 당시의 논하는 사람들 중에는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문익공이 뒷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사림(士林)에 공이 있었고 정승으로서의 업적도 훌륭하여 황ㆍ허(黃許 황희(黃喜)ㆍ허조(許稠))와 세대는 다르지만 명망은 같게 되니 사람들이 비로소 공(公)의 식감에 탄복하였다. 《쇄론(瑣論)》에도 이러한 기사가 있으나 약간 다르다.
평성(平城)은 영상으로 병조 판서를 겸임하여 총애와 권세가 매우 높았다. 은퇴하려고 하여 신병을 핑계로 도산(陶山)의 별장에 가 있었는데 조정에 큰 일이 있을 때면 임금이 반드시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에 정호음(鄭湖陰 호음은 정사룡(鄭士龍)의 호)과 황유촌(黃柳村 유촌은 황여헌(黃汝獻)의 호)이 함께 병조의 낭관으로 있으면서 도산에 가서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평성(平城)은 평소에 사치한 것을 매우 좋아하여 원유(苑囿)ㆍ지대(池臺)ㆍ관우(館宇)를 크게 짓는 등 집을 가꾸는 것이 매우 화려하였으며, 시첩(侍妾) 수십 명은 비단 치마를 입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능하였다. 평성은 호음과 유촌이 재사(才士)라 하여 매우 극진히 대접하였다. 진수성찬을 차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술을 권하였고 시비(侍婢)에게 각자 시 한 수씩을 요구토록 하여 잔뜩 취하고 한껏 즐긴 뒤에 흩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다짐하기를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평성의 생활 중 한 가지를 본뜨겠다.’고 하였다. 호음은 만년에 가서 음식을 사치스럽게 들었고, 유촌은 제택(第宅)을 크게 짓고 비첩(婢妾)에게 거문고도 타고 노래도 부르게 했는데 이것은 모두 평성을 흉내낸 것이다. 그러나 한사(寒士)의 하는 일이 어찌 훈신 귀족(勳臣貴族)과 같을 수 있겠는가.

정 문익공(鄭文翼公 문익은 정광필의 시호)은 식감(識鑑)이 있었다. 사람을 천거하거나 임용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용모를 보았다. 그래서 공이 천거한 사람 중에 대관(大官)에 이른 자가 많았다.
정승 황헌(黃憲)이 막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서 공의 집을 찾아왔다. 공은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였다. 황이 하직하자 일어나서 전송하는데 그의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자제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얼굴이 풍후(豐厚)하면서도 수려(秀麗)하니 반드시 경상(卿相)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마시고 먹는 것을 보니 반드시 속히 승진했다가 일찍 물러나겠고, 등이 안면만 못하니 응당 자손이 없겠다.”
하였다. 황은 과연 얼마 안 가서 등용되었고, 막 정승이 되자마자 관직을 삭탈당했으며 또 자식이 없었으니, 모두 공이 예언한 대로 되었다.

문익공(文翼公)은 식사 때마다 자신이 먹고 남은 것을 좌상 정유길(鄭惟吉)과 우상 정지연(鄭芝衍)만 먹게 하고 다른 자제는 주지 못하게 하였다.
완성 상국(完城相國 완성은 이헌국(李憲國)의 봉호)은 공의 족손(族孫)이 되므로 어렸을 때에 가서 문안하였다. 공이 막 식사 중이었고 두 정공(鄭公)은 마침 집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완성(完城)을 한참 바라보더니 시비(侍婢)를 불러서 남은 음식을 걷어다 주게 하므로 완성이 먹고 물러나왔다. 시비들이 서로 눈짓을 하며 웃으면서, ‘저분도 정승이 될 상(相)인가?’ 하였다. 그후 완성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상(左相)에 이르렀고, 충직(忠直)으로 선조(宣祖)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며 나이 80에 죽었다. 그의 상(相)을 보고 문익공은 대개 알았던 것이다.

정호음(鄭湖陰)은 젊었을 때에 행동을 조심하지 않아서 문익공에게 칭찬받지 못하였고, 선비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겨 외방(外方)으로 물리침을 당하였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소환하여 사간(司諫)에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면서,
“저 사람이 분한 마음을 품은 지 오래이니 반드시 분풀이를 하려고 들 것이다.”
하니, 문익공이,
“내가 알기로는, 내 조카가 비록 제 몸가짐은 삼가지 않았으나 반드시 남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가 사간으로 들어오자 과연 사피(辭避)하고 시의(時議)에 참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보고 호음을 훌륭하게 여겼고, 문익공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을 칭찬하였다.

호음(湖陰)은 치산(治産)을 잘 하여 부자가 되자, 자신의 봉양은 왕공(王公)과 비슷하였으나, 성품이 인색하여 손님을 대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의 선비로 호음의 집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이 찾아오면 반드시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정씨 집 식객’이라 하였다.
만년에 가서는 동교(東郊)에 물러나 살았는데, 임석천(林石川 석천은 임억령(林億齡)의 호)ㆍ신원량(申元亮 원량은 신잠(申潛)의 자)과 시주(詩酒)로 상종하며 청복(淸福)을 누린 것이 20여 년이었다. 비록 세상을 구제한 공은 별로 없었지만 그의 풍류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어서 여항(閭巷) 사람들이 그의 자(字)로 자(字)를 삼은 이들이 많다 한다.

박눌재(朴訥齋 눌재는 박상(朴祥)의 호)는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었다. 정암(靜庵 정암은 조광조(趙光祖)의 호)이 북문(北門)의 화를 당하자 당시의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공이 모두 돌보아 주었으므로 김성동(金省洞 성동은 김세필(金世弼)의 호), 이음애(李陰崖 음애는 이자(李耔)의 호), 이탄수(李灘叟 탄수는 이연경(李延慶)의 호) 같은 사람들이 다 가서 의지하였다.
공이 하루는 여강(驪江 여주)에 갔다가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와 신기재(申企齋 기재는 신광한(申光漢)의 호)가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여주 목사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의 호)을 찾아가서 쌀 백 섬을 빌려 두 사람을 구제하였다. 충주로 돌아와서는 서둘러 쌀을 배에다 실어서 빌려온 수량대로 안분공에게 갚았다. 선배들은 친구들 사이에 대개 이러하였다.

박수량(朴遂良)은 강릉인(江陵人)으로서 효도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갑자년(1504, 연산군10) 사마시(司馬試 진사시(進士試)의 별칭)에는 모친의 사망으로 응시하지 못하였고, 현량(賢良)으로 선발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부임하였으나 두어 달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이 풍악(楓岳)을 유람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일꾼들 사이에 끼어 손수 새끼를 꼬고 있었으므로 충암은 처음에 그가 주인인 줄을 몰랐다. 드디어 풀을 깔고서 술을 마셨는데 질동이에 담은 술과 나물 안주였다. 이틀 밤을 묵으며 한껏 놀다가 떠나는데, 작별할 때에 척촉장(躑躅杖)을 선물로 주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주었다.
높디 높은 벼랑에서 / 萬玉層崖裏
늦가을 서리와 눈을 겪은 가지네 / 九秋霜雪枝
가지고 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니 / 持來贈君子
오래오래 이 마음 변치 말게나 / 歲晩是心期

기묘년에 선비들이 화를 당한 후로는 인가(人家)에서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말하기를 꺼렸고 자제들에게 배우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나의 선친께서는 젊었을 때에 장음(長吟) 나식(羅湜)에게서 배웠다. 한번은 외가에 갔다가 낡은 함 속에서 좀이 슬고 다 떨어진 《소학(小學)》 네 권을 보았다. 펴서 읽어 보고는 학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첫째 권을 소매 속에 넣고 나공(羅公)에게 가서 보이니, 공이 깜짝 놀라면서,
“네가 어디서 이런 귀신 붙은 물건을 얻었는가?”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사화로 죽은 전현(前賢)들의 불운을 슬퍼하였다. 선친께서 이를 배우기를 청하니, 나공이 매우 칭찬하고는 《소학》과 《근사록》을 가르쳤다. 그러나 남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나공(羅公)은 천품이 총명하고 큰 절조가 있었다. 공의 문장은 매우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었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 아우인 나숙(羅淑)과 나익(羅瀷)을 가르쳐 모두 세상에 알려졌다.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은 항고(亢高 뜻을 고상하게 가져 남에게 굽히지 않음)하여 남을 창찬하는 일이 없었는데, 공을 보고는 감동하여 칭찬하기를,
“압록강 동쪽에서는 나생(羅生) 한 사람 뿐이다.”
하였다.

나의 선친은 소시(少時)에 교리(校理) 이여(李畬)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여(畬)는 진천인(鎭川人)으로 그의 형 치(菑)와 함께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교리는 인묘(仁廟 인종(仁宗))가 세자로 있을 때에 오랜 시일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규간(規諫)하고 강독(講讀)하여 보익(補益)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일찍 죽었는데 인묘가 친히 제문을 지어 궁신(宮臣)을 보내 조문하였다.
치(菑)도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하고 박사(博士)로 죽었는데, 진천의 유사(儒士)들이 두 분을 위하여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하였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매번 주선하여 제사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이곳 선비들이 잇달아 과거에 급제하고 고을의 풍속도 좋으니 이는 모두 이 교리(李校理)의 교화이다.

조정암(趙靜庵)이 화를 당한 뒤로 이(理)와 성(性)을 궁구하는 성리학에 대하여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모재(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만이 여강(驪江 여주)에 은거하며 선비를 만날 때마다 성현(聖賢)의 일을 인용하여 논설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회재(李晦齋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는 영남(嶺南)에서 여강을 오가며 반드시 질문하고 변난(辨難)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도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면서 공의 집에 들렀을 때 비로소 성리학의 연원(淵源)을 들었다. 모재는 이처럼 두 분에게도 계도(啓導)한 공이 있지만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나의 선친은 젊어서부터 모재에게 배웠으므로 이 사실을 두루 알고 있었다.
대개 공은 평소 문장가로 칭송을 받았고 성품이 또한 위세가 없었으므로 세상에서는 문인(文人)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모재는 성품이 경박하지 않고 지성으로 사람을 사랑하였다. 처음에 김안로(金安老)와 매우 친하였는데 안로의 하는 일이 불만스럽자 공이 매번 책망하였다. 안로도 공의 솔직함을 아는 터라 화내지 않았다.
안로가 정권을 잡자 공의 형제를 가장 먼저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안로는 이불을 가지고 공의 집에 가서 잤는데 공이 베개를 맞대고 누워 자면서 경계하는 말이 너무도 간절하고 지극하였으므로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호)가 옆에 누워 있다가 공의 발을 밟으며 말하지 말도록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공은 모르고,
“너도 자지 않고 있었느냐. 내 다리에 기대지 말라.”
하였다. 사재는 찔끔하여 다시 말리지 못하였다.
안로가 권좌에서 물러나 죽음을 당하였을 때 공이 사재(思齋)에게,
“안로가 간사하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마는 우리 형제가 이미 그와 깊이 사귀었으니 그의 단점을 말하지 말자.”
하며, 매번 안로의 가족들에게 음식을 보내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모재가 우상(右相) 성세창(成世昌)과 함께 호당(湖堂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였다. 둘이서 같이 직숙(直宿)하였다. 성공(成公)은 본래 집이 넉넉하였으므로 금침을 모두 비단으로 만들어 매우 화려하였고, 모재는 본래 가난한데다 성품 또한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베 이불에 목침을 베고 자니 한사(寒士)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성공은 몹시 부끄러워 밤새도록 잠을 설치고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가 부인에게,
“국경(國卿 김안국(金安國)의 자)이 차라리 나의 사치부리는 것을 비웃어주기라도 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오.”
하고는 서둘러 검소한 것으로 바꾸게 한 뒤에야 한 방에서 잤다 한다.
나의 선친께서는 화담 선생(花潭先生 화담은 서경덕(徐敬德)의 호)에게서 가장 오래 배웠다. 한번은 7월에 선생 댁을 찾아가니 화담(花潭)으로 떠난 지 이미 엿새나 되었다 하므로 즉시 화담 별장으로 가는데 가을 장마에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여울물이 조금 줄었으므로 겨우 건너서 화담에 이르니 선생은 거문고를 타며 큰소리로 읊조리고 있었다.
선친께서 저녁밥을 짓기를 청하니 선생은,
“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몫까지 함께 짓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하인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이끼가 솥 안에 가득하였다. 선친이 이상히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선생이,
“물이 막혀서 엿새를 집사람이 오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오랜 동안 식사를 못하였다. 그러니 분명 솥에 이끼가 끼었을 것이다.”
하므로, 그 얼굴을 바라보니 조금도 굶주린 기색이 없었다. 이것은 증자(曾子)가 7일을 굶고서도 신을 끌면서 상송(商頌)을 읊조리는데 그 소리가 금석(金石)이 울리듯 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오년(1510, 중종5)에 삼포(三浦)에서 왜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공 담년(柳公耼年)이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있었다.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호)이 공경(公卿)들을 인대(引對)하여 정토(征討)를 의논하려고 할 때 삼공(三公)이 먼저 공에게,
“방어사(防禦使)로 삼을 만한 자가 누구인가?”
하니,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일로(一路)는 제가 가서 막겠고 다른 일로는 달리 막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므로, 삼공이 누구냐고 물으니, 공이,
“말하면 반드시 다투어 헐뜯을 것이니 주상(主上)의 앞에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인대(引對)할 때에 과연 주상께서,
“누가 장수로 삼을 만한가?”
하므로, 공이,
“좌로(左路)는 신(臣)이 맡겠고, 우로(右路)는 쓸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반드시 안 된다고 할 것이니, 주상께서 중론(衆論)을 물리치고 등용하신다면 신이 응당 천거하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니, 상(上)이 중론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허락하였다. 공이 그제서야,
“전에 승지(承旨)를 지낸 황형(黃衡)이 바로 적임자입니다.”
하였다. 좌우에서 과연,
“그 사람은 일찍이 자기의 장인을 매질하여 버림을 당했으니 다시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므로 공이,
“지금은 효기(孝己)나 미생(尾生)과 같은 훌륭한 행실이 있는 자라도 전쟁의 성패에는 도움이 안 되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 설사 황형이 그런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사세가 시급하니 다른 것을 따질 때가 아닌데다가 그는 사실 그런 악한 일이 없었습니다. 계란 두 알을 받았다고 해서 간성(干城) 같은 인재를 버리는 것은 예로부터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성창산(成昌山)이 또한 공의 의논에 극력 찬동하였으므로 마침내 황형은 공과 함께 각기 좌ㆍ우방어사(左右防禦使)로 임명되었고 출정하여 왜적을 무찔렀다. 결국 국가가 그에 의해서 무사하게 되었으니 이는 유공(柳公)의 힘이었다.

황 장무공(黃壯武公 장무는 황형(黃衡)의 시호)의 전사(田舍 전지와 집)가 강화(江華) 연미정(燕尾亭)에 있었다. 공이 일찍이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으니 사람들이,
“공이 이미 늙었는데 소나무를 많이 심어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이,
“후세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후 임진년(1592, 선조25)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전라 병사(全羅兵使) 최원(崔遠)이 강도(江都)에 들어와서 지키면서 선박ㆍ영책(營柵)ㆍ방패ㆍ기계 등을 만들 때에 모두 여기에서 마련하였다. 이때에 쓰고 남은 것은 정유년(1597,선조30)에 양 경리(楊經理)가 주상(主上)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가려할 때 관부(官府)에서 베어다가 행궁(行宮 별궁(別宮))의 치비(峙備)와 건물과 성책(城柵)을 만들었다. 이때에 와서야 사람들은 황공(黃公)이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음을 알고 탄복하였다 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인품이 매우 높고 학문과 문장이 모두 뛰어나서 스스로 터득함이 있었으나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묘(仁廟 인종(仁宗))는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 그를 인재로 여겼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맨 먼저 불러들였는데 그가 서울에 오자 임금이 승하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귀가하였는데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그의 덕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자가 매우 많았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은 기개가 높기로 당대에 뛰어났는데, 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굴복하여 그의 말을 공손하게 받들면서 감히 한 마디도 못하였다. 공의 앞에서 물러나와서는 반드시 여러 날을 감탄하면서,
“후지(厚之 김인후의 자)는 지금의 안자(顔子)이다.”
하였다.

삼재(三宰) 송순(宋純)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재직할 때에 찬성(贊成) 허자(許磁)와 합심하여 어진 이를 천거하다가 권신(權臣)의 미움을 받아 외방으로 5년이나 유배되었다. 이후로는 항상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공의 서숙(庶叔)으로서 가깝게 지내는 이가 있었는데 매번,
“지방 출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치고 나는 서소문(西小門)으로 나오는 자만 보았지 남대문으로 나오는 이는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는 대개 서울에 와서 벼슬하는 이는 죽을 때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공은 늘 그 말을 듣기 싫어했다.
그후 공이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에 서숙(庶叔)이 강가에 나와 전송하였다. 공이 술잔을 잡고서,
“나는 지금 남대문으로 나왔습니다.”
하였다.

요즈음 외방(外方)에는 향안(鄕案)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내외가 사족(士族) 출신인 자를 가려서 기록한다. 외족(外族)이나 아내가 다른 고을에서 왔고 현족(顯族)이 아닌 경우에는 비록 고관(高官)이라도 또한 이에 기록될 수 없다. 그래서 이에 실리는 것이 홍문록(弘文錄)이나 이조천(吏曹薦)에 드는 것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송공(宋公 송순(宋純))은 담양(潭陽) 사람이다. 외가가 남원(南原)에서 왔고, 현달한 벼슬을 한 이도 없었기 때문에 공도 향안(鄕案)에 들 수 없었다. 공이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였다. 휴가를 얻어 성묘(省墓)를 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향청(鄕廳)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즉시 음식을 성대히 장만하여 수십 명의 짐꾼을 시켜 향청으로 보내고, 먼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시켜 향로(鄕老)에게,
“도헌(都憲 대사헌) 이 성찬(盛饌)을 보내어 마을의 노사 숙유(老師宿儒)들을 대접하고자 하는데, 이를 거절하는 것은 공손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니, 향로들이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에 즉시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자, 한 노인이,
“주인을 불러서 우리와 합석(合席)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니, 모두들, ‘옳다.’ 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청했으나 사양하고 오지 않다가 굳이 청한 뒤에야 왔다. 와서 좌우를 둘러보니, 일찍이 훈도(訓導)를 지낸 늙은 선비로 공과 동갑이면서 생일이 위인 자가 있으므로 급히 그 다음 자리에 가서 앉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향로들이 말하기를,
“도헌이 이미 이 모임에 참석하였으니 향안(鄕案)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곧 향안을 가져다 공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공의 기민(機敏)하고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김하서(金河西 하서는 김인후(金麟厚)의 호)가 급제하기 이전, 반궁(泮宮 성균관)에 있을 때였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이 당시 관관(館官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애석히 여겨 자기 집에 메어다 두고는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하서는 이를 감사하게 여겼다. 뒷날 미암이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을 때, 하나 있는 자식이 매우 어리석었다. 하서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온 집안이 모두 찬성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치르니, 사람들이 하서와 미암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미암 선생(眉庵先生)은 금남(錦南) 최보(崔溥)의 외손이다. 금남은 선릉(宣陵 성종의 능호)과 연산군(燕山君) 때에 큰 명망이 있었고, 문장에도 매우 능했는데 무오년(1498, 연산군4)의 사화(士禍)에 죽었다.
공은 형인 성춘(成春)과 더불어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성춘은 벼슬이 헌납(獻納 사헌부의 정5품관)에 이르렀고, 일찍 죽었다. 공은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에 을사년(1545, 인종1)의 변을 만나 처음에는 제주(濟州)로 유배되었으나 고향과 가깝다 하여 종성(鍾城)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총명이 뛰어나서 읽은 책치고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지에 있을 때 《속몽구(續蒙求)》 4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암송하고 있는 것을 토대로 하여 만든 것이다.
선왕(先王 선조를 가리킴)조에 발탁되어 경연(經筵)에 있었는데 주상을 규익(規益 경계하여 보익함)한 공이 매우 많았다. 주상이 장차 중용(重用)하려던 참이었는데 공이 갑자기 죽으니 주상이 매우 슬퍼하며, 찬성(贊成)을 추증(追贈)하고 공의 아들을 등용하였다.

나의 두 형님은 젊은 날에 미암(眉庵)에게서 수학(受學)하였다. 공은 학문이 매우 정밀하고 행실이 극히 독실하였으며 배우는 이를 대할 때마다 반드시 성명지학(誠明之學)을 자세히 가르쳐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우활(迂闊)해서 가사(家事)를 다스릴 줄 몰랐고, 의관과 버선이 때묻고 해어져도 부인이 새것으로 바꿔주지 않으면 꾸밀 줄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은 책을 펴놓은 책상 외에는 비록 먼지와 때가 끼어 더러워도 쓸고 닦지 않았다. 남을 만나 세상일을 말할 때에는 전연 무식한 사람 같았지만, 이야기가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하는 공부와 신심(身心)을 다스리는 방법에 이르면 뛰어난 의견과 해박한 지식이 다른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어 세밀히 분석하여 통쾌하고 명백하니 듣는 이들이 정신이 쏠려 피곤한 줄 몰랐다.
대개 이러하였으므로 강석(講席)에서 하는 말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서 배운 것을 시행하게 함으로써 성덕(聖德)을 도왔던 것이다. 선왕(先王 선조)의 초년 정사 중 청명(淸明)하여 일컬을 만한 것은 모두가 공이 선도(善導)한 힘이었다고 한다.

미암(眉庵)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젊어서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에 삼재(三宰 좌참찬) 백인걸(白仁傑)은 무장(茂長) 원이었다. 마침 참판 송인수(宋麟壽)가 방백(方伯)으로 부임하자 세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송공(宋公)은 부안(扶安)의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그와 정을 통하지는 않고 다만 마음으로 사랑하여 수레에 태워서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늘 글을 보내어 무장 원과 남평 원을 불렀고, 노는 곳에 항상 함께 다니니, 도내(道內)의 사람들이 세 차비[三差備]라고 불렀다 한다.
송공이 임기가 차서 떠날 때에 여량역(礪良驛)에서 공을 전별하는데, 두 사람과 기생이 따라왔다. 송공이 기생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 사람의 뛰어난 슬기를 사랑하여 1년 동안이나 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죽을까 염려 되어서였네.”
하자, 기생이 즉시 앞산에 있는 많은 무덤을 가리키면서,
“과연 그렇습니다. 저기 보이는 많은 무덤들이 다 나의 서방이었습니다.”
하였다. 이는 공을 원망해서 한 말이었으므로 온 좌석이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기생은 늘 송공의 일을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습재(習齋) 권벽(權擘)은 나의 선친과 교분이 가장 두터웠다. 공은 젊었을 때에 안명세(安名世)ㆍ윤결(尹潔)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서로 뜻이 맞아서 매우 즐겁게 지냈다. 이 두 사람이 말을 과감히 하다가 화를 당하여 죽은 뒤로 공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남과 담소하지 않았고 종일토록 책만 볼 뿐이었다.
최렴(崔濂)과 최낙(崔洛) 형제는 이웃의 후생으로서 공에게 수학(受學)한 지 거의 1년이 되도록 이름을 묻지 않아서 그들이 진사시에 급제한 뒤에야 이름을 알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별로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74세를 살았다.
내가 어릴 때에 공이 나의 선친을 뵈러 온 것을 보았는데, 주인이 묻는 말에나 대답하고 그렇지 않으면 종일토록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조용할 뿐이었다. 공이 소신을 철저하게 지킴이 이러하였다.

윤장원(尹長源 장원은 윤결(尹潔)의 자)의 옥사(獄事)에 초사(招辭)가 선친(先親)에게 관련되었다. 선친께서는 당시 병조(兵曹)의 낭관으로 성(省)에 입직하고 있었다. 추관(推官)이 문초하기를 청할 때 진복창이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입시(入侍)해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복하며,
“허모(許某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을 말함)는 경박한 사람이 아니니 그럴 리가 없음을 보증합니다. 이제 잡아다가 문초한다면 일이 더욱 확대될까 염려되니 문제삼지 마소서.”
하였다. 이렇게 두세 번을 강경하게 주장하니 문정왕후(文定王后)도 옳게 여겨서 문초하지 않았다.
선친은 이런 일이 있었는 줄도 모르고 정원(政院)에 이르니 승지들이 모두 치하하였으나 그래도 영문을 모르다가 물러나 병조로 돌아와서야 알았다. 승지들이 감탄하면서,
“난을 겨우 면했으면서 얼굴빛 하나 안 변하니 참으로 강직한 신조가 있다.”
하였다. 선친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유없이 받는 칭찬이다.”
하였다.
진복창은 나의 선친과 평소에 전혀 친교가 없이 지내던 사이인데도 선뜻 나서서 구원하였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하겠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나의 두 형님은 진군(陳君)의 아들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후하게 대하곤 하였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은 기개가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누차 청현(淸顯)한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응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있는 때가 많았다.
그의 아우 백령(百齡)이 을사년의 공신에 참여해서 권세가 일세(一世)를 경도(傾倒)하게 되자, 당시 승지로 있던 석천은 서둘러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백령이 굳이 만류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한강(漢江)을 건너면서 시를 지어 주었는데
잘 있거라 한강수야 / 好在漢江水
고요히 흘러 물결을 일으키지 마라 / 安流不起波
하였다. 그 후로 서울에는 오지 않으니 사론(士論)이 그를 옳게 여겼다.
백령이 죽은 뒤 만년(晩年)에야 서울에 왔고, 자청하여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나가서는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하며 많은 글을 지었으므로 지금까지 그곳 산수(山水)를 빛내고 있다. 정치의 교화도 청녕(淸寧)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호남의 인사 가운데서 걸출한 사람이다. 그는 학문이 고매하여 문순공(文純公 문순은 이황의 시호)이 매우 칭찬하였다.
선왕(先王 선조)에게 지우(知遇)를 받았으나 제대로 쓰이기 전에 죽었는데, 공이 죽은 뒤로 호남 사람은 한 명도 조정에 등용된 자가 없었다. 공이 일찍이,
“호남 선비들의 풍속과 기습이 점차 해이해지고 있으니, 수십 년이 지나고 나면 과거에 합격하는 자도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서 공의 말이 과연 증험된 것이다. 공은 아마 그 기미를 예견했던가 보다.

정릉(靖陵 중종의 능호)조에는 호남 출신의 인재로서 드러난 자가 매우 많았다. 박눌재(朴訥齋 눌재는 박상(朴祥)의 호) 형제ㆍ사인(舍人) 최산두(崔山斗)ㆍ미암(眉庵) 형제ㆍ교리(校理) 양팽손(梁彭孫)ㆍ제학(提學) 나세찬(羅世纘)ㆍ목사 임형수(林亨秀)ㆍ김하서(金河西)ㆍ임석천(林石川)ㆍ삼재(三宰) 송순(宋純)ㆍ찬성(贊成) 오겸(吳㻩) 같은 사람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이들이다.
그 후로도 박사암(朴思庵 사암은 박순(朴淳)의 호)ㆍ이일재(李一齋 일재는 이항(李恒)의 호)ㆍ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ㆍ기고봉(奇高峯 고봉은 기대승(奇大升)의 호)ㆍ고제봉(高霽峯 제봉은 고경명(高敬命)의 호 )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재행(才行)으로 당대에 드러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는 것도 차츰 적어져가니 그 원인을 모르겠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호남을 출입하면서 그 풍습을 보았는데, 대체로 후생을 교도(敎導)하여 이끌어 주는 큰 선생이 없는데다 사람들의 품성 또한 모두 경박하고 잘난 체해서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였다. 게다가 의식(衣食)의 자원이 넉넉하기 때문에 모두들 목전의 이익에만 매달리느라 앞일을 계획하는 자가 없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하지 않는 빌미가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국조(國朝) 이래로 대신(大臣)으로서 어버이가 생존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창산(成昌山 창산은 성희안(成希顔)의 봉호)의 경우는 모친이 생존해 있었으나 공이 먼저 죽었고, 이외에는 아득하여 기억할 수가 없다. 선왕(先王 선조) 초년 영상 홍섬(洪暹)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 주상이 명하여, 대신이 상을 당했을 때에 호상(護喪)하고 부의하는 예를 조사토록 하였으나 전례를 찾을 수 없어서 다만 관에서 대신(大臣)의 예에 준하여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부의하도록 하였다. 그 후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상을 당했을 때도 이 예를 따랐다.

지금의 영상인 이한음(李漢陰 한음은 이덕형(李德馨)의 호)은 38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게다가 부친이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있다. 공이 정승으로 있을 때 부친은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있었는데 번거로운 일들을 잘 다스렸고 게으르지 않았다.
한음이 금상(今上) 초년에는 금상의 봉왕(封王)을 주청(奏請)하는 일로 명(明) 나라에 가서 윤허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자 주상이 그의 부친을 특별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로 올려서 판결사(判決事)에 제수하니, 당시에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였다.

홍인재(洪忍齋 인재는 홍섬(洪暹)의 호)의 모친은 정승 송일(宋軼)의 딸이고 영상 언필(彦弼)의 아내이다. 이처럼 삼종(三從)이 모두 정승인 경우는 예전에 없던 일인데다 나이가 또 90세였다. 부인의 말년에 인재(忍齋)는 70세로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니 이는 특히 세상에 드문 일이다.
그러므로 소재(蘇齋)가 그 경사로운 자리에서 지은 시에
삼종이 정승집 문을 벗어나지 않은 건 / 三從不出相門闈
지금에야 처음 보게 되었네 / 此事如今始見之
성에서 영수장(靈壽杖)을 다시 짚었고 / 更拄省中靈壽杖
당에서 노래자(老萊子)의 옷을 다시 입는다 / 却披堂上老萊衣
하였으니, 사실을 잘 기록한 시이다.
근래에 한 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경우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와 그의 매부인 좌상(左相) 김응남(金應南) 및 사위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뿐이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의 시호) 집안의 세 정승도 세상에 드문 일이다. 문정공(文定公) 이행(李荇)과 그의 형 기(芑),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과 아우 통원(通源)도 한집에서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이다. 심청천(沈聽天 청천은 심수경(沈守慶)의 호)과 그의 조부 정(貞)은 조손(祖孫)이 정승이 된 경우이다. 그러나 위의 문정공 이하는 모두 훈(薰)과 유(蕕)의 구분이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무과(武科)와 정승 집에 있었던 훌륭한 일 중에서 이미 성용재(成慵齋)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실린 것은 다시 싣지 않는다.

한집에서 부자와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중에서도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의 시호) 형제만이 흠이 없다. 정창손(鄭昌孫)과 그의 아들 괄(佸)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그의 사위인 김질(金礩)도 정승이었으나 이는 성삼문(成三問)을 고발한 공으로 발탁된 것이다.
심온(沈溫)과 그의 아들 회(澮), 윤사흔(尹士昕)과 사분(士昐) 형제 및 자부(姊夫) 성봉조(成奉祖), 신승선(愼承善)과 아들 수근(守勤) 등은 모두 초방(椒房 후궁(后宮)의 별칭)의 덕으로 된 것이니 칠 것이 못 된다. 부자간에 이어서 문병(文柄)을 잡은 것은 오직 문대공(文戴公) 성현(成俔)과 그의 아들 세창(世昌)뿐이다.

유서애(柳西厓 서애는 유성룡(柳成龍)의 호)와 유영경(柳永慶)은 첩동서 간으로서 모두 영상이 되었다. 서애는 배척을 받아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가 죽었고, 영경은 죄를 짓고 외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성(姓)도 같은 유씨이고 벼슬도 같은 영상이었지만 훈(薰)과 유(蕕)의 구분이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인천군(仁川君) 채수(蔡壽)가 문과(文科)에 장원하였는데, 사위인 김이숙(金頤叔 이숙은 김안로(金安老)의 자)과 이차야(李次野 차야는 이자(李耔)의 자)도 모두 장원하였다. 하루는 용두회(龍頭會)를 여는데 가운데 사위인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 김감(金勘)이 이에 참여하려고 하자 장원 급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김공이 부인을 보내어,
“소서(小婿)는 서른 다섯 살에 대제학(大提學)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모임에 참석시켜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인천군(仁川君)이 웃으며,
“이 사람은 불가불 참석시킬 수밖에 없다.”
하고, 곧 불러서 함께 잔치를 열었다 한다.

한음 상공(漢陰相公)은 서른한 살에 문형(文衡)을 맡았으니 가장 젊은 나이에 문형을 지낸 경우이고, 김연창(金延昌)은 서른다섯 살이었으니 그 다음이다. 이외에는 이용재(李容齋 용재는 이행(李荇)의 호)가 마흔 살에 문형을 맡았다.

가장 많은 문형(文衡)을 배출한 집안으로는 길창(吉昌 권근(權近)의 봉호)의 집이 제일이다. 국초(國初)에 문충공(文忠公 권근의 시호)도 문형의 일을 행하였으며, 그의 아들 지재(止齋) 제(踶)는 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외손인 서거정(徐居正)과 손자 사위 최항(崔恒)도 아울러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그 외에, 문충공 신범옹(申泛翁 범옹은 신숙주(申叔舟)의 호)과 그의 손자 용개(用漑)ㆍ광한(光漢)이 모두 문형을 맡았으니, 이런 경우는 특히 세상에 드문 일이다.

한 가문에서 정승이 나온 것과 과거에 여러 번 장원한 것은 성용재(成慵齋 용재는 성현(成俔)의 호)가 자세히 기록하였다. 근세에 여러 번 장원 급제한 자로는, 대사헌 권홍(權弘)은 문과(文科)와 중시(重試)에 장원하였고,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은 생원시(生員試)와 중시에 장원하였으며, 진사시와 문과에 연달아 장원 급제한 사람은 김홍도(金弘度)와 강신(姜紳)이다.

율곡 선생(栗谷先生)은 한해에 생원시와 문과에서 잇달아 장원하였다. 초시(初試)에는 삼장(三場)을 내리 장원하였고, 회시(會試)에도 장원하여 한해에 여섯 번이나 장원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
문형(文衡)을 맡은 사람은 과거에 장원 급제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가 삼장(三場)에 장원한 것이 가장 기이하고, 그 다음은 율곡(栗谷)의 두 번 장원이다.
변춘정(卞春亭 춘정은 변계량(卞季良)의 호)ㆍ정호음(鄭湖陰 호음은 정사룡(鄭士龍)의 호)은 중시에 장원하였고, 최영성(崔寧城)ㆍ김이숙(金頤叔)ㆍ정임당(鄭林塘 임당은 정유길(鄭惟吉)의 호)ㆍ박사암(朴思庵 사암은 박순(朴淳)의 호)ㆍ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ㆍ유서경(柳西坰 서경은 유근(柳根)의 호)은 문과에 장원하였다. 판서 박충구(朴忠九)ㆍ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ㆍ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은 생원시에 장원한 반면, 인재(忍齋) 홍섬(洪暹)은 생원시에서 말등을 하였으니, 이 또한 전에 없던 일이다.

선왕(先王 선조)의 말년까지 대광 보국 숭록대부로서 생존했던 사람은 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심수경(沈守慶)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ㆍ김응남(金應南)ㆍ정탁(鄭琢)ㆍ이원익(李元翼)ㆍ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 등 모두 열 사람이었다. 김 정승과 심청천(沈聽天 청천은 심수경(沈守慶)의 호)이 죽은 후에 이헌국(李憲國)과 김명원(金命元)이 정승이 되었고 최 정승이 죽자 윤승훈(尹承勳)이 정승이 되었다.
그후 윤두수가 죽자 유영경(柳永慶)이 있었고, 정탁이 죽으니 허욱(許頊)이 있었으며, 유성룡이 죽자 한응인(韓應寅)ㆍ기자헌(奇自獻)ㆍ심희수(沈喜壽)가 정승이 되어 그때마다 열 사람의 수효가 찼으니, 이 또한 근세에 없었던 일이다.

선왕 말년에 대제학(大提學)도 열 사람이었으니, 즉 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ㆍ황정욱(黃廷彧)ㆍ이덕형ㆍ윤근수(尹根壽)ㆍ이항복ㆍ심희수ㆍ이정귀(李廷龜)ㆍ이호민(李好閔)ㆍ유근(柳根)이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장한 일이었으며, 일곱 사람이 부원군(府院君)이 된 것도 기이한 일이다.

선왕 말년에 지제교(知製敎)가 72명,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이가 84인이나 되었으니, 건국 이래 없던 일이다. 그런데도 국가의 중요한 글을 지을 때면 언제나 인재가 없음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전조(銓曹 이조(吏曹))에서 옥당(玉堂) 관원을 의망(擬望)할 때에도 매번 적격자가 없다 하여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자와 상피(相避)한 사람 및 추고(推考) 당한 사람까지 대상으로 계청(啓請)하곤 하였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이완성(李完城 완성은 이헌국의 봉호)은 성품이 충직하여 주상(主上)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피하거나 숨기지 않았으나 선왕이 항상 너그럽게 받아 들였다.
임진왜란에 상(上)이 개성(開城)에 이르러 두 정승을 해임하였는데 완성은 당시 간장(諫長 대사간의 별칭)으로서 입시해 있었다. 상이 막 정승을 선임하기 위하여 몸소 재상 좌목(宰相座目 정3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자들의 명부)을 펼쳐 놓고 명단을 가리키면서 공에게,
“정탁(鄭琢)이 어떤가?”
하니 공이,
“정탁은 비록 청백하고 신중하나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는 없습니다. 그는 옛사람이 ‘높은 다락에 묶어놓고 태평하기를 기다린다.’는 데 해당된 사람입니다.”
하였다. 다시,
“최황(崔滉)은 어떤가?”
하니 공이,
“강직한 면은 있지만 성품이 편협하니 대사(大事)를 맡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유홍(兪泓)과 황정욱(黃廷彧)을 묻자 모두 적당치 않다고 대답하다가 상이 최ㆍ윤(崔尹 최흥원(崔興源)과 윤두수(尹斗壽)) 두 정승의 이름을 드니 공이 합당하다고 하여, 드디어 두 사람이 등용되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듣고 모두들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완성(完城)은 무술ㆍ기해년간에 연이어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취임하지 않으니, 상이 옳게 여겼다.
그 후 정승을 임명할 때에 특별히 공을 발탁하면서,
“내가 이조 판서를 사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사퇴하였으니 정승을 삼을 만하다.”
하였다. 이 말은 귀당(貴璫 내시의 별칭) 이봉정(李奉貞)이 직접 주상의 말을 듣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한 말이라 한다.

평양(平壤)에서 한창 왜적과 싸우고 있을 때에, 주상이 오음(悟陰 오음은 윤두수(尹斗壽)의 호)에게 성을 지킬 것인가, 버리고 갈 것인가를 물었다. 공(公)은 그때마다 떠나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여 수십 번을 물었지만 모두 처음 대답과 같았다. 그 후 영변(寧邊)에 이르자 조정의 논의가 갈라져 한편에서는 북쪽으로 가자하고, 한편에서는 강계(江界)로 가자고 하였으나 공은 홀로 의주(義州)로 가는 계책을 고집하였다. 끝내 이로 해서 국운(國運)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모두 그의 힘이었다.
영변(寧邊)에 있을 때 우의정 유홍(兪泓)이 입대(入對)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종사(宗社)가 여기 있는데, 전하께서 가시면 장차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하며, 요동(遼東)으로 건너가는 것이 잘못임을 극력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兪)는 즉시 하직하고, 동궁(東宮)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정유년(1597, 선조30) 봄에 왜적이 재차 변경을 침입하자, 주상이 대신 및 공경(公卿)들과 의논하면서,
“적이 만일 계속해서 돌진해오면, 승여(乘輿 임금이 탄 수레)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하니, 한편에서,
“영변(寧邊)은 형세가 매우 견고하고 중국과도 가까우니 가서 지킬 만합니다.”
하였다.
평천(平川) 신잡(申磼)이 전에 이곳 절도사(節度使)를 지냈으므로 그곳으로 가는 편리한 점과 불편한 점을 모두 아뢰고 군량의 저축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끝으로 백관(百官)의 수가 많으니 미리 장(醬)을 준비해서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한유천(韓柳川 유천은 한준겸(韓浚謙)의 호)과 남자안(南子安 자안은 남이공(南以恭)의 호)이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 입직해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자안(子安)이,
“신공(申公)을 합장사(合醬使)로 삼아 먼저 영변에 가서 조처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유천(柳川)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은 결코 보낼 수 없다.”
하므로, 자안이,
“무슨 까닭인가?”
고 묻자 유천의 대답이,
“책력에 의하면 신일(辛日)은 장담그는 데 좋지 않다고 했다.”
하자, 듣는 이들이 큰소리로 웃었다. 신(辛)은 신(申) 자와 음(音)이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정유년에 내가 외람되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임진란 이후의 사첩(史牒)을 모두 조사해보니, 명(明) 나라 장수들의 용병(用兵) 한 사실과 우리나라 장사(將士)들의 공을 세운 내용 및 왜적이 내침(來侵)한 사실을 어느 하나도 제대로 밝혀 기재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보면 태평하여 전쟁이 없었던 나라처럼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사관(史官)이 제대로 기록한 것이겠는가.
그 후에, 주상께서 명하여 명 나라에서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한 곡절을 모아서 《동정록(東征錄)》을 편찬해 올리게 하였으므로 윤월정(尹月汀 월정은 윤근수(尹根壽)의 호)과 신현옹(申玄翁 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 찬집 당상(纂集堂上)을 맡고, 내가 낭청(郞廳)을 맡아 찬수해서 올렸다. 현재 실록청(實錄廳)에서도 이 《동정록》을 가져다 실록에 실었으나 우리나라의 사적(事迹)에 대해서는 아득하여 한 가지도 간책(簡冊)에 실린 것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선왕(先王)의 검소한 덕은 여러 임금보다 뛰어났다. 말년에 병이 들어 내의(內醫)가 입진(入診)했는데, 주상께서는 푸른 베로 만든 요를 깔았고 자색 명주로 만든 이불을 덮었으며 입고 있는 옷도 푸른 명주베로 지은 것인데 올이 매우 거친 것이었다. 약을 올리는데, 그릇은 흰 자기로서 꽃무늬가 없는 것을 썼고, 검소한 안석(案席)과 글씨를 쓴 병풍뿐이었고 유장(帷帳)도 없었다 한다. 이 얘기는 최분음(崔汾陰 분음은 최천건(崔天健)의 호)이 직접 보고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나는 지제교(知製敎)를 오랫동안 맡았는데 그간에 가장 급박한 적이 두 번 있었다. 경자년(1600, 선조 33) 의인왕후(懿仁王后) 장삿날에 나는 장생전(長生殿)의 낭관으로서 재궁(梓宮)을 배행(陪行)해서 능(陵)에 가 있었다. 밤중에 영악(靈幄)에 불이 났는데 겨우 내재궁(內梓宮)만을 불에서 구해내었다.
이 일로 조전(朝奠) 때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기 위하여 동궁(東宮)에서 나에게 제문(祭文)을 지어오라는 명이 내렸다. 날도 새기 전에 정원(政院)에서 나를 불러 당장 지어 바치라 하였다. 급하기는 하고 당황해서 글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창졸간에 지은 것이라 하여 사람들이 많이들 칭찬하였으나 매우 부끄러웠다.
계묘년(1603, 선조36) 봄에 한음 상공(漢陰相公)이 이장(移葬)하는 일로 해서 사직을 고(告)하자 이숙평(李叔平 숙평은 이준(李埈)의 자)이 초도불윤비답(初度不允批答 첫 번 올린 사표에 대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지었는데, 주상께서 마땅치 않게 여겨, 특별히 나를 불러서는 대궐에 와서 급히 지어 바치라 하였다. 이때 숙평(叔平)이 지은 글이 매우 잘 지은 것이었는데도 버려두고 별도로 지으라는 것인데다 이장하는 데에는 곡절(曲折)이 있어서 말을 만들기가 매우 어려웠다. 땀이 흘러 붓을 제대로 댈 수가 없었을 정도였는데, 겨우 형식을 갖춰서 직접 써서 바치니, 주상께서 하교(下敎)하기를,
“임금의 말은 의당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졸렬한 문장으로 주상의 칭찬을 받기까지 한 것은 또한 그 까닭을 모르겠다.

전양(全陽 유영경(柳永慶)의 봉호)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였다. 전양이 어느 사건으로 해서 정고(呈告)하자 내가 불윤비답(不允批答)을 짓게 되었다. 비답 중 그의 인품을 찬양하면서,
“재주는 온갖 일에 능통하고 기개는 공경(公卿)들을 제압한다.”
하였더니, 전양이 보고는 나를 미워하였다. 그 후로는 한림(翰林)들과 짜고 다른 지제교(知製敎)에게 맡아 짓게 하니 지나친 칭찬이 많았다.
뒷날 전양이 패하자 신요(申橈)와 민경기(閔慶基)는 그에게 아첨한 일로 해서 삼자함(三字銜 지제교(知製敎))이 삭탈되고 죄를 받아 파직되었다 한다.

오성 상공(鰲城相公 이항복(李恒福))은 나의 글을 좋아하였다. 훈적(勳籍)에 오르기 전에 다짐하기를,
“나의 공신 녹권(功臣錄券)은 반드시 자네의 글로 받고 싶네.”
하므로, 나도 그 말에 승낙하였다. 그 후 회맹(會盟)할 때 나는 마침 지방에 나가 있었으므로 이미 홍녹문(洪鹿門 녹문은 홍경신(洪慶臣)의 호)에게 짓도록 부탁한 후였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 공(公)이 그의 장인인 도원수(都元帥) 권공(權公)의 권문(券文)을 짓도록 부탁하면서 전에 한 약속을 이것으로 대신 갚으라고 하였다. 내가 지어보낸 초고의 끝부분에,
“원공(元公 영상(領相))에 추증되어 선친(先親)이 지낸 정승 자리를 이었고 길창(吉昌)으로 봉군(封君) 되어 문충공(文忠公)의 복지(福地)를 받았네.”
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공이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이는 대개 영상으로 추증되어서 그의 선친인 철(轍)과 작위가 같고,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호)의 후손으로서 봉군(封君)된 읍호(邑號)도 서로 같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릇 공신 녹권 내에는 ‘부모도 추봉(追封)되었다.’는 등의 말은 의례적으로 기록한다. 승지(承旨) 조정지(趙庭芝)가 정원군(定遠君)의 녹권을 지으면서 우연히 깜빡 잊고 ‘부모도 아울러 봉작(封爵)하였다.’는 구절을 녹권에 써 넣었다. 주상께서 이를 보고서,
“정원군의 부모가 언제 봉작을 받은 일이 있는가?”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그를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자 윤허하지 않고, 나에게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나도 겨우 지어 바쳤으나 주상이 보고는 칭찬한 말이 지나치다 하여 수정하여 녹권에 쓰도록 하였다. 이로 보아서 선왕(先王)께서 말을 신중히 하려는 지극한 뜻을 알 수 있다.

정미년(1607, 선조40)에 나는 여름, 가을, 겨울의 세 분기에 걸친 월과(月課)에서 연달아 장원하였는데 주상께서 법전을 상고해서 시상하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상고해 보니,
“홍문관(弘文館) 월과에서 연3차 1등의 성적으로 수위(首位)를 차지한 자는 가자(加資 품계를 올림)한다.”
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에 대제학(大提學)은 유서경(柳西坰 서경은 유근(柳根)의 호)이고, 제학(提學)은 신현옹(申玄翁 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었는데, 모두 법전에 기재된 뜻을 몰랐다. 누군가가,
“‘연3차’는 ‘연3등’의 뜻이고 ‘일등’은 즉 ‘상등’의 뜻이다.”
하였으므로, 이 말을 갖추어 회계(回啓)하니, 주상께서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다. 나는 이렇게 해서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대개, 법전에 이른 ‘연3차’는 석 달에 걸쳐 시행한 아홉 번의 제술(製述)을 모두 장원한 것을 말하고, ‘1등’은 점수의 합계가 30점이 되어 수위를 차지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연3등으로서 아홉 달에 걸친 27회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한 것으로 점수의 합계가 1백 2점이나 되니, 법전에 언급된 내용과는 좀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평시에는 글에 능한 이들이 많아서 누구도 혼자서 장원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없으므로 이 법은 규정에만 있을 뿐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지 못하여 자기의 추측으로 법을 헤아린 나머지 이러한 착오가 있게 된 것이다.

[주D-001]정난(靖難)이……날 : 정난은 1453년(단종1)에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이 원로(元老) 신하들을 없애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사건.
[주D-002]도산(陶山)의 별장 : 여기에 대해서는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제6권 문부 3(文部三) - 기(記), 도산(陶山) 박씨(朴氏)의 산장기(山莊記) 참조.
[주D-003]증자(曾子)가……했다 : 증자는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을 말함. 증자가 일찍이 위(衛) 나라에 있을 때 10년 동안 옷 한 벌 지어 입지 않고 혹은 3일 동안 굶기도 하며 신을 끌면서 상송(商頌 : 《시경(詩經)》 삼송(三頌)의 하나)을 읊조리면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차고 금석(金石)의 악기를 연주하듯 고아했다는 고사로,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나오는 말인데, 여기서 7일 동안 굶었다고 한 것은 3일의 착오인 듯 하다.
[주D-004]효기(孝己)나……행실 : 효기는 은 고종(殷高宗) 무정(武丁)의 태자.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고종이 후처(後妻)의 말을 듣고 그를 내쫓아 죽게 만들었다. 미생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사람. 미생이 어떤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물이 불어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다리 기둥을 붙잡고 죽었다고 한다.
[주D-005]계란……것 : 춘추 시대 위(衛)의 구변(句變)이 관리로 있으면서 백성으로부터 계란 두 개를 받아 먹었다고 하여, 위후(衛侯)가 그를 장수로 임용하는 것을 거절하다가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 공급(孔伋))의 권유를 받고 다시 임용하였다. 《通鑑 卷1 周紀》
[주D-006]양 경리(楊經理) :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명(明) 나라에서 구원병을 인솔하고 들어온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양호(楊鎬)임.
[주D-007]삼재(三宰) : 재상의 열에서 이상(貳相)의 다음이라는 뜻으로 좌참찬(左參贊)을 일컫는 말.
[주D-008]두 사람이……당하여 : 1548년(명종 3)에 안명세(安名世)가 사관(史官)이 되어, 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이 을사 사화를 일으켜 현신(賢臣)들을 많이 숙청한 사실을 시정기(時政記)에 빠짐없이 적어 넣은 것이 누설되어 이기의 무고로 사형을 당하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고 윤결(尹潔)은 구사안(具思顔)의 집에서 술을 마실 때 안명세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말했다가 진복창(陳復昌)에 의해 죄에 걸려 죽은 일을 말한다.
[주D-009]백령(百齡)이……경도하게 되자 : 임백령이 1545년(명종 즉위년)에 호조 판서로서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小尹)에 가담, 윤임(尹任)ㆍ유인숙(柳仁淑)ㆍ유관(柳灌) 등 대윤(大尹)을 제거한 을사 사화를 일으킨 주동인물이 되었다. 그 공으로 위사 공신(衛社功臣) 1등이 되고 숭선부원권(崇善府院君)에 봉해졌다.
[주D-010]삼종(三從) : 여자의 입장에서 친정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을 말함.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덕으로서 어렸을 때는 어버이를 좇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좇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좇는 일. 《儀禮 喪服傳》
[주D-011]노래자(老萊子)의……입는다 : 노래자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현인(賢人)으로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나이 70에 어린애 옷을 입고 어린애 같은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한 데서 온 말로, 나이가 70이나 된 노인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12]훈(薰)과……구분 : 훈은 향기를 풍기는 풀, 유는 악취를 풍기는 풀. 전하여 선(善)과 악(惡), 군자와 소인의 뜻으로 쓰인다.
[주D-013]용두회(龍頭會) :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회. 이것은 고려때부터 행해졌음.
[주D-014]높은……기다린다 : 전혀 쓸모가 없음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유익(庾翼)이 당시 재명(才名)이 매우 높았던 두예(杜乂)와 은호(殷浩)를 인재가 아니라고 여겨 늘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의당 높은 시렁에 묶어 올려 놓고 천하가 태평해진 다음에야 직책 맡기는 것을 논의할 수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성소부부고 제22권
 설부(說部) 1
성옹지소록 상(惺翁識小錄上)

명(明)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대우한 것이 다른 외국과는 아주 달랐다. 그래서 유고(諭告)와 조제(弔祭)에 예물을 하사하고 사신을 보내어 위문함이 번봉(藩封)이나 친왕(親王)에게 하는 것과 대등하였다.
대개 성종 문황제(成宗文皇帝)가 우리나라 공정대왕(恭定大王 태종의 시호)과 매우 친밀하여 그의 특별한 대우와 권면함은 제왕(諸王)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이에 우리도 지성(至誠)으로 공경하고 예를 갖춰 도리를 다하였다. 이 때문에 열성조(列聖朝)에서도 잇따라 변치 않아 2백 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은총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명 나라에서 힘을 다해 구제해 줌으로써 끝내 우리 국토를 회복하고 다시 중흥(中興)하게 했으니, 아, 훌륭하도다.

명 나라의 황제가 즉위하거나 황장자(皇長子)가 탄생하거나 태자(太子)를 봉(封)하게 되면 그때마다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서(詔書)를 내렸다. 사신은 한림(翰林)이나 과도관(科道官) 중에서 보내는데, 일이 있으면 낭서(郎署)의 행인(行人)을 보냈으며 조제(弔祭)에도 행인(行人)을 보내었다.
우리나라의 임금을 봉(封)하거나 세자(世子)를 봉할 때면 내관(內官)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내관을 시켜 조서를 보내는 것은 큰 은전(恩典)이다.
중국에서 친왕이나 번왕(藩王)을 봉할 때에도 내관을 보내지 않는데 우리나라에만 보내니 그 영예로움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가 환관(宦官)이 된 자가 처음에 사신으로 오기를 황제에게 청하여 파견된 것인데, 이것이 규식(規式)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들이 말할 수 없는 큰 폐단이 되고 있다.

중국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1403~1424) 연간에 황장손(皇長孫)이 탄생했을 때는 조서를 보내 알리지 않았는데, 현재의 황제는 을사년에 황장손이 탄생하자 특별히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주지번(朱之蕃)과 형과 도급사(刑科都給事) 양유년(梁有年)을 보내 조서를 반포했으니 이 또한 남다른 예우였다.

우리나라가 조종(祖宗) 이래로 중국에서 하사받은 시호(諡號)는 모두 아름다웠다. 그중 강헌(康獻 태조(太祖)의 시호)ㆍ강정(康靖 성종(成宗)의 시호)은 최상의 시호이고 장헌(莊憲 세종(世宗)의 시호)과 소경(昭敬 선조(宣祖)의 시호)이 그 다음이고 공헌(恭憲 명종(明宗)의 시호)은 또 그 다음이다. 다만 인묘(仁廟 인종(仁宗))는 그 성덕(聖德)에도 불구하고 ‘영정(榮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법(諡法)에 보면 ‘총록(寵祿)이 빛나고 큰 것을 영(榮)이라 하고, 관대하고 안락하게 천수(天壽)를 마친 것을 정(靖)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처럼 평범한 시호는 높고 빛나는 공업과 걸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 서운하게 여긴다.
우리나라는 당초에 시법(諡法)을 중하게 여겨서 정2품 실직(實職) 이상과 공신(功臣)으로 추봉(追封)된 자 이외에는 비록 선량한 행실과 큰 공로가 있더라도 시호를 내리지 않았다.
시의(諡議)는 먼저 봉상시(奉常寺)에서 해당자의 행장(行狀)을 받아 해당되는 여러 가지 시명(諡名)을 적어 이조(吏曹)로 보내고, 이조에서는 홍문관(弘文館)에 모여 감정(勘定)해서 재가를 받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사시(賜諡) 해당자가 죽으면 그 집은 즉시 행장(行狀)을 갖추어서 해사(該司)로 송부한다. 죽은 자가 평소에 일컬을 만한 공덕이나 행실이 없더라도 그 집에서는 시호를 청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양(煬)’이나 ‘황(荒)’ 또는 ‘혹(惑)’의 시호가 내려도 사양할 수 없었다. 근래에 와서는 이러한 풍조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논의에 오른 집이 있었으나 나쁜 시호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장청(狀請 시장(諡狀)을 올려 시호를 청함)하지 않았는데 끝내는 명신(名臣)과 큰 공로가 있는 사람까지 따라서 시호를 청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금이 만대에 시행하던 상벌을 시행하지 않으니 개탄할 일이다.

선왕(先王 선조(宣祖)) 때에 봉직(封職)되고 시호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중 낮은 관직을 지낸 이로서 시호를 받은 사람은 김굉필(金宏弼)의 문경(文敬), 정여창(鄭汝昌)의 문헌(文獻), 서경덕(徐敬德)의 문강(文康)인데, 이는 실로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 선생도 추봉(追封)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나의 중형(仲兄 허봉(許篈)을 가리킴)이 경연(經筵)에 참석했을 때 미암(眉岩) 선생의 시호를 청했으나, 상(上)이 다만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토록 하고 시호 내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한다.

우리나라 의정부(議政府)의 권한이 문종(文宗) 이전에는 매우 높고 무거웠다. 아침마다 삼공(三公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이 출근하면 육조(六曹) 이하 해당 관청에서 각기 맡은 업무를 가지고 와서 참알(參謁)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임금의 재가를 받은 모든 공사(公事)는 어느 것이나 다 의정부로 보내어 대신과 동ㆍ서벽(東西壁)이 함께 모여 알맞게 처리함으로써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참여해 결정하였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은 높고 나라의 체통도 엄중하였다. 그후 광묘(光廟 세조(世祖))가 대통(大統)을 이어 즉위한 이래 위와 같은 절차를 폐지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권한은 줄어들었고 국가의 기강도 차츰 해이해졌다.
의정부에서 공사(公事)를 처결하는 날에는 좌ㆍ우사인(左右舍人)과 검상(檢詳)은 모두 이조(吏曹)의 낭관(郎官) 중에서 뽑고, 사록(司錄) 2명은 으레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의 참하관(參下官 7품 이하의 관원)으로서 예문관(藝文館)의 관직을 겸임하고 있는 자로서 임명하고, 새로 급제한 사람 1명을 녹사(錄事)로 삼았다. 이들이 각기 육방(六房)을 나눠 맡아서 종일 응대(應對)하느라 몹시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기악(妓樂)을 베풀어 즐기게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공사를 처결하는 일이 폐지된 뒤에도 이러한 풍습은 그대로 남아서 대신은 대청에 모여 앉았는데 사인(舍人)이 있는 곳에서는 노랫소리와 풍악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심지어는 전곡(錢穀)을 관장하는 낭리(郎吏)를 패초(牌招)하여 벌주(罰酒)를 먹인 다음 술값을 받아내거나 시중(市中)의 부자를 잡아들여 공공연히 비용을 받아내는 등의 방법으로 물건을 거둬 들여 창고에 쌓아두고 광대와 기생의 화대(花代)로 쓰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것이 선조(宣祖) 때에 장령(掌令) 유몽학(柳夢鶴)이 경연에서 이의 폐단을 강력히 진언(進言)한 뒤로 감히 그와 같이 하지 못하였다.

나의 중형(仲兄)이 언젠가 말하기를,
“사인(舍人)으로 오래 재직하게 되면 그 사이 많은 정승을 겪어보게 되는데, 그 중 정승 권철(權轍)은 성품이 매우 엄숙한 분이었지만 자신이 사인 벼슬을 거쳤으므로 그들의 술잔치를 매우 기쁘게 여겼고, 노래와 풍악 소리가 천지를 진동해도 모른 체하였다. 반면에 노 정승(盧政丞 노수신(盧守愼))은 매사에 극히 너그러운 분이었지만 사인들이 술자리 벌일 때에는 언제나 ‘노래와 풍악이 너무 소란하다.’는 것을 문제삼아 누차 금지시켰다. 이는 그분이 사인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였다.

검상(檢詳)은 형조(刑曹) 상복사(詳覆司)의 정랑(正郞)을 관례상 겸임하였다. 그래서 평소에 형조 낭관청(刑曹郎官廳) 서편에 북루(北樓)가 있었고,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검상청(檢詳廳)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전고(典故 전례(典禮)와 고사(故事))를 담당하는 관서가 없다. 각 기관에는 당연히 등록(謄錄)이 있어야 할 터인데도 모두 없다. 열성조(列聖朝)의 길례(吉禮)와 흉례(凶禮)에 대해서도 모아 기록해 놓은 것이 없다. 그래서 일대(一代)의 제도와 연혁을 상고해 볼 길이 없다.
전에는 정부에 가각고(架閣庫)란 것이 있어 녹사(錄事)가 맡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모든 수교(受敎)와 대신들의 수의(收議) 및 군국(軍國)의 중요한 문서들을 모두 보관해 두고 필요시에 참고하도록 하였는데, 성종(成宗) 이후로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는다.
가각(架閣)은 송(宋) 나라 때의 관제이다. 송 나라에서는 문학(文學)에 능한 신하를 뽑아서 이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양부(兩府)에 모두 두었다. 이는 대개 전고(典故) 자료의 수집과 조사를 위해서 둔 제도였다. 우리나라도 초기에 이를 본따서 설치했었던 것 같다.

사간원(司諫院)이 전에는 승정원(承政院)에 예속되어 있었다. 좌사간(左司諫)ㆍ우사간(右司諫)ㆍ좌사의(左司議)ㆍ우사의(右司議)를 두었는데 이들은 당상관(堂上官)으로서 ‘대부(大夫)’라는 두 글자를 보태서 불렀고, 이외에 헌납(獻納)과 정언(正言)을 2명씩 두었다. 이들이 각기 육방(六房)을 나누어 맡았고, 날마다 교대로 번(番)들었다.
무릇 여러 관청과 도(道)에 내려지는 공사(公事)는 반드시 간원(諫院)을 거치는데, 그 중에 온당치 못한 것이 있으면 논박하여 되돌려 보냈다. 이는 중국의 육과(六科 육부(六部))의 규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간관(諫官)과 사헌부(司憲府)를 따로 두어 대치되는 아문(衙門)으로 만든 다음 사의대부(司議大夫)는 없애고 대사간(大司諫)ㆍ사간(司諫)ㆍ헌납(獻納)ㆍ정언(正言) 2명만을 두었다. 이때부터 봉박(封駁)하던 일은 맡지 않게 되었다.
지금 여러 관청과 도(道)에서 위에 청해서 수교(受敎)를 고치는 것이 불편한 점이 많아도 대간(臺諫)이 규찰해서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의금부(義禁府)는 옛날의 집금오(執金吾)이다. 고려(高麗)에서는 순군부(巡軍府)라 하였는데 상ㆍ부 만호(上副萬戶)를 두어 금위친군(禁衛親軍)을 관장하였다.
처음에는 옥(獄)을 설치해서 금군(禁軍) 중에 군령(軍令)을 어긴 자를 가두던 곳이었다. 중기(中期)에 와서는 국왕이 직접 죄수를 판결하였고 조정의 신하로서 임금의 뜻을 거스린 자도 바로 이곳에 가두기도 하였다. 대개 당시 사대부는 직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죄를 지으면 다 대옥(臺獄)에서 다루고 왕옥(王獄)과 조옥(詔獄)은 없었다. 말엽에 와서는 이곳이 진신(縉紳)만을 다루는 옥이 되어 일명(一命) 이상인 자의 범죄는 모두 이곳에서 다루었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르다가 얼마 안 가서 곧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라 고치고 판사(判事)ㆍ지사(知事)ㆍ동지사(同知事) 4명을 두었다. 낭관(郎官)은 문관과 무관을 섞어서 임용하였으며 금위친군(禁衛親軍)을 거느리는 것은 고려 때와 같았다.
그후 의금부(義禁府)라 고치면서 병권(兵權)은 없어지고 왕옥(王獄)으로서 죄수의 판결만을 주요 임무로 하고, 대가(大駕)가 거둥할 때와 내외의 금람처(禁濫處)에 낭관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가서 비상시에 대비하여 경계할 뿐이니, 이 또한 관직을 설치한 본래의 뜻을 상실한 것이다.

지금은 공신(功臣)으로서 정1품에 오른 자는 으레 부원군(府院君)이라 하는데, 이것도 본래의 뜻을 상실한 것이다.
전조(前朝 고려)에서 대신(大臣)은 으레 봉군(封君)되었고, 추밀원(樞密院)을 거쳐 문하부(門下府)의 관직을 지낸 자는 양부(兩府)의 벼슬을 역임한 것으로써 관함(官銜)을 부원군(府院君)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성균관(成均館)의 하례(下隷)가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을 축하할 때 아직도 쓰고 있다.
낮은 관직에서 삼공(三公)까지 좋은 관직을 모두 부르다가 끝에 가서 부원군(府院君)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1품이라 하여 대신(大臣)이 아닌데도 부원군이라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1원(員)으로 쓰여 있으니 한 사람만을 두어야 하는데도 지금은 특별히 두 사람을 두고 있으니 이는 지금 임금의 뜻이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2월에 성영(成泳)이 정권을 잡자 연흥영사(延興領事)를 체직(遞職)하고 문양(文陽)으로 대신하기를 청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성영이 아첨한다고 하였으나 조종조(祖宗朝)에도 이러한 전례(前例)가 있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하게 여기는 관직은 이조 낭청(吏曹郎廳)이다. 직제학(直提學) 이하 청망 관직(淸望官職)에 승진하거나 퇴임시키는 것은 모두 낭청이 전담하고 당상관(堂上官)은 이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래서 이조 낭청으로 뽑히기가 매우 어려우며, 사화(士禍)의 대부분이 이 문제에서 발단되었다.
근래의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당(分黨)도 나의 장인인 김인백(金仁伯 인백은 김효원(金孝元)의 자)이 판서 심충겸(沈忠謙)이 전랑(銓郞)에 선발되는 길을 막은 데서 발단한 것으로서 선비들의 의논이 지금까지도 갈라져 있다.
정승 김응남(金應南)이 언젠가 말하기를,
“임금의 외척으로 전랑(銓郞)을 삼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당초의 의논은 참으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심(沈)이 국가를 위해 애쓰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신(忠臣)이다. 그때 사론(士論)을 지나치게 따름으로 해서 마침내 붕당으로 갈라졌으니 이 점이 후회스럽다.”
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선왕(先王)께서 명하여 이조 낭관이 추천하는 일을 폐지하였는데 병조(兵曹)는 그대로 두었다 한다.

옛 규례에 이조 낭관(吏曹郎官)은 좌랑(佐郞 정6품)으로 서른 달을 재직하면 정랑(正郞 정5품)이 되고, 정랑에서 다시 서른 달을 재직하면 바로 사인(舍人 의정부의 정4품)으로 승진되었으며 한 달을 넘기기 전에 준직(準職 당하(堂下) 정3품)에 올랐다. 여기서 다시 두어 해도 안 되어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미움을 받거나 사론(士論)의 지적을 받아서 자리를 물러난 경우에도 초승(超陞 차례를 무시하고 승진함)에 급급해서 1년 내에 반드시 계제직(階梯職)으로 옮겨갔다.
찰방(察訪 종6품)ㆍ판관(判官 종5품)ㆍ도사(都事 종5품) 등의 외직(外職)은 사람들이 낮게 여기고 싫어하여 회피하고 가지 않던 자리였는데, 근래에는 이러한 풍조가 사라졌다. 송인수(宋仁叟)와 김숙도(金叔度)는 다 찰방(察訪)으로 나갔고, 오여익(吳汝翼)은 늙은 아비를 집에 두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는가 하면, 송홍보(宋弘甫)는 4품직을 지냈는데도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나갔으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모두 관직을 신중하게 하지 않아서 요행수로 얻는 자가 많은 데에서 시작되어 결국은 사람들이 벼슬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게 되어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시하는 곳은 병조(兵曹)이다. 그래서 조종조(祖宗朝)에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된 자는 대부분 변방의 일을 아는 자를 임용해서 오래 맡겼다. 김종서(金宗瑞) 같은 분은 10년 동안 체직되지 않았다.
이계동(李季仝)과 유담년(柳聃年)은 무신(武臣)이었으나 또한 십수 년이나 나라의 군무(軍務)를 도맡아서 작은 일은 모두 자신이 결단하고 큰 일은 대신(大臣)에게 아뢰나 대신도 그의 조치를 따르고 약간 수정할 뿐이었다.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면서부터는 대소 군정(軍政)의 처리를 모두 비변사에서 맡게 되었는데, 유사 당상(有司堂上) 몇 사람이 전적으로 관장하고 정승의 지시를 받아 시행하였으므로 병조에서는 멍하니 무슨 일을 할지를 몰랐다. 근래에는 내지(內地)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까지도 비변사에서 선임하게 되어 병조의 권한이 더욱 줄어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공물(貢物)의 제도가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연산조(燕山朝)에 창설된 것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말이다. 성용재(成慵齋)의 말에 ‘성종조(成宗朝)에 비로소 횡간(橫看)을 만들었다.’ 하였으니 연산조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찬성(贊成) 이이(李珥)가 개혁하려다 이루지 못하였고, 갑오년(1594, 선조27)에 서애 선생(西厓先生)이 국정(國政)을 맡았을 때 비로소 줄여서 다시 정하였으나 백성들의 고통은 오히려 심하였다.
근래에 오리 정승(梧里政丞 이원익(李元翼))이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먼저 경기(京畿)에 시행하였는데 경기의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긴다. 그래서 산릉(山陵 왕ㆍ왕비의 무덤)의 일과 두 차례의 조사(詔使 중국의 사신) 접빈을 치렀는데도 백성들이 큰 요역(徭役)인 줄을 모르니 그 효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 어떻게 하면 팔도(八道)를 다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오례의(五禮儀)》는 광묘조(光廟朝 세조(世祖))에 신 문충공(申文忠公 문충(文忠)은 신숙주(申叔舟)의 시호)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총괄하여 제정한 것이다. 이는 《개원례(開元禮)》를 본뜨면서 고례(古禮)를 참고한 것이다. 일체가 사리에 맞고 편리하여 시행한 지 백여 년이 되도록 폐단이 없었다.
선왕조(先王朝)에 와서 유현(儒賢)들이 전적으로 고례(古禮)를 사용하면서 고친 부분이 많았는데 간혹 엇갈려서 시행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이로써 옛사람들도 시험해 본 바가 없지 않았음을 알겠다.

나의 백형(伯兄)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吏)ㆍ예(禮)ㆍ병(兵) 3조의 판서 중에서 병조 판서는 몸은 힘들어도 계획을 세우기는 힘들지 않고, 이조 판서는 계획하기는 힘들어도 마음까지 피곤하지는 않은데, 종백(宗伯 예조 판서)은 마음과 몸이 다 피곤하다.”
하였다. 이는 대개 조정의 큰 예(禮)는 반드시 종백(宗伯)이 예의(禮儀)를 총괄하는데, 갑자기 변통해야 할 예라도 있게 되면 항상 근거없음을 걱정하며 강정(講定)하는 동안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에 한 말인 듯하다.

형조(刑曹)는 개국 초기에는 업무상 권한이 사헌부(司憲府)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형옥(刑獄)에 관련된 사건은 ‘형조에서 계(啓)하기를…….’ 하면서 직접 탄핵하였는데, 이런 풍습이 어느 때부터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법에 위배되는 것을 금하는 점에서는 법사(法司)와 같고, 도둑을 처벌하는 기능에서 보면 금오(金吾)의 권한도 있다고 할 것이다.

공조(工曹)는 같은 육조(六曹)의 하나인데도 창고의 물품을 출납할 때면 반드시 대감(臺監 사헌부 감찰)을 청해 놓고 출납한다. 그뿐 아니라 호조 낭관(戶曹郎官)이 수시로 창고를 순회하는데 마치 호조의 창고를 도는 것과 다름이 없이 하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형조(刑曹)에서 관장하는 업무는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것만이 아니라 인구(人口)를 쇄출(刷出)하는 일도 전담한다. 그러므로 중국 조정에서는 매년 황책(黃冊 호구책(戶口冊))을 반드시 형관(刑官)에게 보내고 형관은 이를 접수하고 위에 아뢰어 재가를 받은 뒤에 호조(戶曹)에서 보관하는 것이 관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호적장부를 모두 호조에서 다루고 형조(刑曹)에서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비(奴婢)에 관한 소송도 모두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에 따르고 있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노예를 관장하는 업무도 전에는 형조(刑曹)에 속해서 도관사(都官司)가 노비 관계의 소송을 전적으로 다루었는데, 지금은 별도로 원(院)을 두어 관제가 번거롭기만 하다.

승정원(承政院)은 임금의 말을 전달하는 곳으로서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므로 조정에서 중히 여긴다. 그래서 당상관(堂上官) 중에서도 이조(吏曹)나 대간(大諫)을 지내야 겨우 할 수가 있다.
평성군(平城君 평성은 원종의 봉호) 박원종(朴元宗) 같은 이를 승지로 임명하였다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체직시켜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한 것이 이 경우이다.
근래에는 물망이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합칭)의 아래에 있다. 또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반드시 무신(武臣) 한 사람씩을 참여시키는 것은 대개 그 사람의 인망을 키워서 후일 크게 쓸 바탕을 만들고자 해서이다. 그래서 서북 방면(서쪽은 황해ㆍ평안도, 북쪽은 함경도를 지칭함)의 장수는 모두 승정원을 거친 사람 가운데에서 임명한다. 근래에는 선왕(先王 선조를 지칭) 때의 남언경(南彦經)과 양사형(梁思瑩) 이후로는 한 사람도 없다.

근래에 과거에 등제(登第)하지 않고서 승지(承旨)가 된 자는 정내암(鄭來庵 내암은 정인홍(鄭仁弘)의 호)과 정한강(鄭寒岡 한강은 정구(鄭逑)의 호) 두 사람이다. 한강은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전시(殿試)의 시관이 되었으니 역시 특이한 일이다.
얼마 전에 강명지(康明之 명지는 강복성(康復誠)의 자)가 승지에 임명된 것은 감반(甘盤)으로서 수고한 때문이었다. 간옹(艮翁) 홍가신(洪可臣)은 비록 승지는 되지 못하였지만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고, 서인원(徐仁元)은 강원도 감사(江原道監司)가 되었으며, 이외에 참의(參議)가 된 자가 겨우 두세 명이다.
선왕조(先王朝)에는 남행(南行)으로 사헌부(司憲府) 벼슬을 한 자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과감하게 말해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자도 있었다. 간옹(艮翁)이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4품 벼슬)으로 있을 때 ‘안여경(安汝慶)을 부윤(府尹)으로 임명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였는데, 상(上)이 이에 노하여 안(安)을 부윤에서 체직시킴과 동시에 이후로 남행(南行)은 대관(臺官)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선왕(先王) 초년에는 4조(四曹)의 낭관(郎官)은 남행(南行)과 무과(武科) 출신을 섞어서 임용하였는데, 모두 명망 있는 자 중에서 택하였다.
중년(中年)에 들어서는 이의 선발을 매우 신중하게 하여 남행과 무과에서는 일체 임명하지 않자 대신(大臣)들이 경연(經筵)에서 전과 같이 남행과 무과에서도 선발하는 제도를 복구하도록 청해서 겨우 이경욱(李景郁)이 호조 낭관, 이경준(李慶濬)이 형조 낭관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모두 승진하였다. 왜란 후에는 인재가 부족하여 되는 대로 구차하게 자리만 채웠다.
근래에는 4조의 낭관의 반수 이상이 남행(南行)인데 반해, 문관으로서 녹용(錄用)되지 못하고 있는 자는 거의 백여 명이나 되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불편하게 여기지만, 문관으로서 형조와 호조의 낭관이 된 자들도 대부분이 시험을 거쳐 선발된 자가 아닌데다 무능한 자들이 많다. 이 때문에 당상관(堂上官)으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남행(南行) 낭관을 찾게 된다. 이것은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감찰(監察)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고려(高麗)와 우리나라 초기에는 이를 선발 임명하는데 매우 신중을 기하였다. 부참(府參) 때마다 대장(臺長)의 과실을 종이에 써서 품에 간직했다가 달려 들어가서 뜰에 떨어뜨렸다. 재신(宰臣) 중에 탐오(貪汚)한 자가 있으면 밤에 그의 집 문간에 모여서 대문에다 먹을 칠했다. 그러면 그 재신은 감히 출사(出仕)하지 못하였고 조정에서도 다시 임용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대각(臺閣)에 나올 때면 비록 왕자나 대신이라도 이들을 만나면 말에서 내렸다.
지금도 뜰에 달려 들어가는 예와 묵척(墨尺)을 소지하는 것은 전과 같으나, 과실을 기록한 글을 품에 간직하는 것과 대문에 먹칠하는 것은 거행되지 않은 지가 오래이다. 대각에 나올 때에 왕자나 대신이 말에서 내리는 것은 전과 같다 한다.

각사(各司)에서 감찰(監察)에게 청대(請臺)할 때는 각사의 아전이 법사(法司)에 값을 지불하는데, 이 일은 수석 아전이 분대(分臺)에게 와서 의논한다. 이때 어물어물 너그럽게 처리해주는 감찰인 경우에는 값이 비싸고 강직하고 꼼꼼해서 속일 수 없는 경우에는 값이 싸게 마련이니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나의 재종형 체씨(䙗氏)가 감찰로 있었는데,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찬찬하여 아전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았으며, 또 모질고 박정해서 숨긴 것을 찾아내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혜민서(惠民署)의 약을 담당하는 아전이 형의 집에 와서 약을 짓고 있기에, 내가 장난삼아,
“근래 전중(殿中 감찰의 별칭)에게 주는 값은 누가 가장 싼가?”
하고, 물었더니,
“허 감찰(許監察)은 피 쭉정이 다섯 홉입니다.”
하였다. 이에 온 문중이 전해 가며 웃었고, 재종형을 강홉랑(糠合郞)이라고 불렀다.

국조(國朝)에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에 능한 선비로 정선 임명하여 임금의 자문에 대비토록 하였다. 인원은 스무 명을 두었는데 그 중 열 사람은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고 열 사람은 서연관(書筵官)을 겸하였다. 교대로 숙직(宿直)하였고 임금의 은례(恩禮)가 특별하였는데, 광묘조(光廟朝 세조)에 폐지하고, 다만 문관(文官)을 택하여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임시켜 경연에 참여토록 하였다.
그 뒤 성묘(成廟 성종(成宗)) 초에, 예문관에 부제학(副提學) 이하 수찬(修撰)까지 총 17명을 두고 경연관을 겸임시켜 집현전의 옛일을 계승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홍문관(弘文館)으로 고쳐 지금에 이르렀다 한다. 예문관으로 부를 때에, 노 사문 분(盧斯文昐)이 교리(校理)로 있다가 죽었는데, 그의 증손 사회(士誨)가 수령(守令)으로 서경(署經)을 받을 때 양사(兩司 사헌부ㆍ사간원의 합칭)에서 모두,
“홍문관(弘文館)을 예문(藝文)으로 잘못 썼다.”
하여 넘겼는데, 이는 모두 옛일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국초(國初)에는 주문(主文 과거의 상시관(上試官)의 별칭)하는 자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하면 문형(文衡)을 맡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비록 주문(主文)의 일을 행하는 자라도 문형에는 끼지 못했으니, 안지(安止)와 박원형(朴元亨)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성묘(成廟 성종) 이후에는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의 합칭)의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해야 문형을 맡았다고 하였다.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 번(番)드는 일은 누구나 괴롭게 여겨 피하려 들지만, 선왕(先王 선조를 가리킴) 때의 승지 성낙(成洛)은 특히 더 번들기를 거절하였고 번을 들더라도 곧 나가버렸다.
당시에 나의 중형(仲兄)과 판원사(判院事) 김수(金睟)ㆍ이조 판서 김찬(金瓚)ㆍ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ㆍ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ㆍ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함께 옥당에 있었다. 서로 약속하기를,
“성(成)이 번에 들거든 정해진 일수대로 하도록 교대해 주지 말자.”
하였다. 이런 약속이 있은 뒤에 성공(成公)이 입직(入直)한 지 겨우 하루 만에 또 나오고자 하여 홍문관의 아전을 매질하는 등 매우 심하게 굴었다. 이에 아전이 여러 집을 다니며 교대할 사람을 알아보았지만 모두들 거절하였다. 남은 사람은 완평(完平)뿐이었으나 번을 막 마치고 나온 터이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였다. 일이 급해지자 시험삼아 가서 부탁하니 완평도 처음에는 응하려 들지 않다가 아전이 슬프게 울면서,
“팔순 노모가 추운 옥중에 갇혀 있는데 운명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하였다. 그때 완평도 노모를 모시고 있는 터였으므로 측은하게 생각되어 교대를 허락하였다. 아전은 뛸듯이 밖으로 나와서는 손뼉을 치면서,
“이 교리(李校理)는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하였다. 듣는 이들이 모두 웃었다.

대개 야대(夜對)하는 날에는 반드시 임금이 술을 많이 권해서 흠뻑 취한 뒤에야 끝을 내었다. 술잔이 돌아오면 주량이 적은 사람은 실수할까 염려하여 머뭇거리며 즉시 마시지 못하였다.
나의 중형(仲兄)은 대개 큰 잔으로 마셨는데, 잔이 돌아오면 즉시 다 마셔버렸다. 술을 따르는 중관(中官 내시)은 아직 술이 남았으리라 생각하고 머뭇거리면서 잔을 되돌려 받지 않으나, 임금은 중형이 벌써 다 마신 것을 알고는 웃곤 하였다.
당시에 술 마시는 사람 중에서 승지 강서(姜緖)가 형의 적수였는데 관(館)의 아전이 장지에,
“허 전한(許典翰)과 강 교리(姜校理)는 휼주(恤酒)한다.”
고 써 놓았는데 ‘휼주(恤酒)’의 휼(恤) 자는 좋아한다는 뜻으로, 보는 이들이 크게 웃었다.

옥당(玉堂)에는 술 닷되 들이 정도의 노구솥 하나가 있는데 이것으로 통쾌하게 단숨에 마시면 그 이름을 솥에 새긴다. 솥에 이름이 새겨진 자는 전에는 김천령(金千齡)뿐이었는데 중형(仲兄)의 이름을 비로소 뒤따라 새겼다.

사관(四館)의 풍속 중에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것이 가장 심한데 그중에서도 예문관(藝文館)이 특히 까다롭다. 위계(位階)마다 질서가 엄중해서 마주 앉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번(番)에서 나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방자하면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27) 여름에 내가 사관(史館)으로 천거되었으나 복(服)을 입게 되어 강(講)에 응하지 못하였고 정유년(1597, 선조30) 봄에 비로소 관(館)에 들어갔다.
심중경(沈重卿)과 이대중(李大中) 등은 모두 나보다 후배였는데 이들이 위에 있으면서 몹시 까다롭게 굴었다. 그때 중시(重試)를 보이는데 규례상 한림 하번(翰林下番)은 응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두 사람에게 청하였더니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시험을 며칠 앞두고 내가 공사(公事)로 파직(罷職)되는 바람에 입시(入試)하여 장원으로 선발되었다.
예부 낭관(禮部郎官)으로 임명되어 사은(謝恩) 차 대궐에 들어갔을 때 상번(上番) 심학이(沈學而)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데, 중경(重卿)이 대간(臺諫)의 말을 접수하여 상번에게 기별하러 들어왔다. 전례상 선생(先生 전임자를 지칭)이 좌석에 있으면 하번(下番)이 선생에게 먼저 말한 다음 상번에게 말하게 되어 있다.
이날 중경이 먼저 내 앞에 엎드려서 인사하고 나가므로 내가,
“중시(重試)에 장원하고도 별로 기분 좋은 줄 모르겠더니 이제야 기분이 좋다.”
하였더니, 학이(學而)가 큰소리로 웃었다.

국조(國朝)에 맨 처음 시행한 중시(重試)에서 변춘정(卞春亭 춘정은 변계량(卞季良)의 호)이 장원하였고, 그 다음 회에는 김자(金赭)가 장원하였으나, 그의 글은 양여공(梁汝恭)이 지은 것이다. 양은 문장에 능했다. 그후에 장원한 정 하동(鄭河東 하동은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를 가리킴)ㆍ남수문(南秀文)ㆍ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成三問)의 자)는 모두 대가(大家)였다.
이영근(李永根)은 나이도 어리고 명망도 없었는데 갑자기 장원하고,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이 도리어 2등ㆍ3등을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으나, 이영근도 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도 중시에 합격한 자는 모두 문장의 명가(名家)였는데,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이 이에 끼었으니 과분한 일이다.

조종조에 사대부(士大夫)는 중시(重試)를 가장 중히 여겼다.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가 중시 공부를 할 때에 표문(表文)과 대책(對策)을 많이 연습하였는데, 시장(試場)에 들어가니 평소 대책에 능한 대사헌 권홍(權弘)도 응시한 것을 보고 모재가 말하기를,
“내가 장원하려고 하였는데 이분이 응시했으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발표하는 날에 보니 과연 권홍이 장원이고 김은 2등이었다. 그런데 선조(先朝) 이후로는 명관(名官)은 으레 응시하지 않는데,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정(嘉靖) 병진년(1556, 명종11)에 김홍도(金弘度)가 중시(重試)에 응시하여 대책(對策)은 짓지 않고 술만 마시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 것이 두 번인데, 지금 양응정(梁應鼎)이 응시하였으니 내가 이연성(李延城) 꼴이 될까 두렵다.”
하였다. 이는 대개 연성군(延城君) 이석형(李石亨)이 한 해에 세 번 장원하였으나 중시에서는 6등을 하였으므로 성근보(成謹甫)의 집에 가서 절을 하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은 지 오래이다.”
하자, 성근보가 웃으면서,
“남에게 굽히지 않은 무릎을 내가 굽혔다.”
하였는데, 김홍도 역시 진사(進士)와 문과(文科)에 연이어 장원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17) 중시에 정승 강귀손(姜龜孫)이 응시하였는데, 마침 그의 장인의 아우인 성허백(成虛白 허백은 성현(成俔)의 자)이 지신사(知申事)로서 성중(省中)에 있었다. 그의 부친 진산(晉山 진산군 강희맹(姜希孟)을 가리킴)은 총관(摠管)으로서 입직해 있다가 허백(虛白)에게,
“우리 집안에서 연달아 장원하는 것도 좋은 일이니, 그대와 내가 귀손(龜孫)의 대책(對策)을 지어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리하여 허두(虛頭)에서 조대(條對)까지는 강(姜)이 짓고, 당금 설구폐(當今設救弊)에서 끝까지는 성(成)이 지어서 귀손에게 베껴서 바치도록 하였다.
당시 고관(考官)인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와 이삼탄(李三灘 삼탄은 이승소(李承召)의 호)은 다 무릎을 치며 탄복하며 1등으로 해야 마땅하다 하였으나, 상시관(上試官)으로 참석했던 김괴애(金乖崖 괴애는 김수온(金守溫)의 호)는 자는 체하면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참시관(參試官)들이 의견을 물으니,
“등수를 고치라.”
하였다. 다시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었다. 밤에 고단해서 그런가 하고 보관해 두었다가 새벽에 다시 읽어보고 품의하니,
“차상(次上)으로 매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며,
“이 글이 매우 훌륭한데 어째서 등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김(金)이 웃으면서,
“이 글의 작자가 성씨(成氏)나 강씨(姜氏) 집 자제가 아니면 의당 장원감이다.”
하므로, 급히 봉미(封彌)를 뜯고 살펴보니, 과연 강 정승의 글이었다. 김(金)이,
“나는 강(姜)과 함께 공부하였고 성현(成俔)은 나에게 배웠으니, 그들의 글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저기까지는 강의 글이고 저기서 여기까지는 성이 지은 것이다. 내가 어찌 그들에게 속아서 나라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그르치겠는가.”
하니, 모두들 탄복하였다. 결국 강의 글을 빼버리고 신종호(申從濩)를 장원으로 뽑게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의 풍속이 문과의 장원은 중시하지 않고, 사마시(司馬試 진사시의 별칭)의 장원을 중시한다. 사마시는 문장의 고하(高下)를 따지지 않고 1~2등 10여 명을 뽑으며 인물을 가려서 하기 때문에 한번 방(榜)에 들면 종신토록 공경을 받는다.
본조(本朝)의 이석형(李石亨)ㆍ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서 모두 장원하였다. 김모재(金慕齋)가 이를 흠모하여 생원 진사 두 시험에 응시하였다. 모두 잘해서 다 장원하게 되었으나 고관(考官)이 한쪽 시험을 깎아서 둘째로 만들었으므로 마음으로 항상 분하게 여겼다.
그후 자신이 고관이 되었을 때에 김구(金絿)가 두 시장에서 지은 글이 아울러 1등이었으므로 힘껏 주장하여 양쪽을 다 장원으로 뽑았다 한다.

세묘(世廟 세종(世宗)) 때에 처음으로 독서당(讀書堂)을 설치해서 사가독서(賜暇讀書)케 하여 후일에 크게 임용하려 하였는데 당시에는 산사(山寺)에서 독서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에는 권채(權採)ㆍ신석조(辛碩祖)ㆍ남수문(南秀文)이 사가독서하였고, 다음은 성삼문(成三問)ㆍ신숙수(申叔舟)ㆍ박팽년(朴彭年)이 하였고, 또 다음은 이석형(李石亨)ㆍ최항(崔恒)ㆍ성간(成侃)ㆍ이영서(李永瑞)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김수온(金守溫)ㆍ서거정(徐居正)ㆍ이승소(李承召)ㆍ강희맹(姜希孟)이 서로 잇따라 하였다.
문묘(文廟 문종) 때에는 홍응(洪應)ㆍ홍귀달(洪貴達)ㆍ어세겸(魚世謙)ㆍ박기년(朴耆年)이 사가독서하였다. 흉년에는 철폐하였고, 이유 없이 사가독서를 시키지 않은 때도 있었다.
성묘(成廟 성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현(成俔)ㆍ채수(蔡壽)ㆍ조위(曺偉)ㆍ허침(許琛)ㆍ양희지(楊熙止)ㆍ권건(權健)ㆍ유호인(兪好仁) 등에게 용산사(龍山寺)에서 글을 읽도록 하였다. 이후부터는 결원이 있으면 보충하였고, 동호(東湖)에다 독서당(讀書堂)을 지어 엄연히 한 아문(衙門)이 되었다.
중묘(中廟 중종) 때에는 고과(考科)하는 방법이 매우 엄해져서 잇따라 두 번을 입격(入格)하지 못하면 도태시켰다. 이들에 대한 은사(恩賜)와 특별한 대우가 옥당(玉堂)에 뒤지지 않았는데, 난리가 일어나자 폐지되었다.
금상(今上) 초년에 대신(大臣)과 의논하고 다시 설치하도록 명해서 이이첨(李爾瞻) 등 12명을 선발했으나, 다음해에 흉년이 들어서 우선 정지하였다.
서당(書堂)은 40세가 안 된 사람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이 처음으로 40세에 뽑혔고, 이이첨은 48세에 뽑혔으니 파격적인 일이다. 당상관(堂上官)으로 사가독서를 한 이는 박민헌(朴民獻)과 이덕형(李德馨)이다.

조사(詔使 중국 사신)의 빈대(儐待)는 반드시 당대에서 문망(文望)이 높은 자를 뽑았다. 박원형(朴元亨)과 허종(許琮)은 모두 의표(儀表)와 예모(禮貌)로 중국인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박이 방주(芳洲 명 나라 유태(兪泰)의 호)와 화답한 시와 허가 규봉(圭峯 명 나라 동월(董越)의 호)과 화답한 시는 모두 종사관(從事官)으로 수행한 이삼탄(李三灘 이승소(李承召))과 신삼괴(申三魁 삼괴는 신종호(申從濩)의 호)가 대신 지은 것이었다.

박연성(朴延城)은 세 번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정호음(鄭湖陰 호음은 정사룡(鄭士龍)의 호)도 세 번 원접사가 되었으나 그중 한 번은 내관(內官 환관)을 접대(接待)한 것이므로 박보다는 영예롭지 못하다.
세 번 종사관(從事官)이 된 사람으로는 이삼탄(李三灘)이고, 나도 세 번이었으나 그중 한 번은 내관(內官)이었다. 그러나 내가 빈대한 유 태감(劉太監)은 시를 잘 지어서 창수(唱酬)하는 데 따른 괴로움이 한림(翰林) 과도관(科道官)이 왔을 때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호음(湖陰)이 조용하게 넘긴 것에 비하면 힘이 들었다고 하겠다.

규봉(圭峯)이 조사(詔使)로 왔을 때 허 충정(許忠貞 충정은 허종(許琮)의 시호)은 종사관(從事官) 두 사람을 대동하였는데, 한 사람은 삼괴(三魁)였고, 한 사람은 직장(直長) 박증영(朴曾榮)이었다. 참하관(參下官 7품 이하의 관원)으로서 종사관이 된 것이다. 그후 주지번(朱之蕃)ㆍ양유년(梁有年)이 왔을 때에 조이숙(趙怡叔 이숙은 조희일(趙希逸)의 자)은 박사(博士)에서 전적(典籍)으로 뛰어 올라 종사관이 되었으니 또한 은명(恩命)이었다.
조사(詔使)를 빈대(儐待)하는 데는 반드시 필찰(筆札)을 담당하는 자가 있었다.
국조(國朝)에서 조신(曺伸)ㆍ홍유손(洪裕孫) 같은 사람을 등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종래 제술관(製述官)을 대동한 사람은 없었는데, 임인년(1602, 선조35)에 고천준(顧天峻)과 최정건(崔廷健)이 왔을 때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호)는 김현성(金玄成)ㆍ차천로(車天輅)ㆍ권필(權韠) 세 사람을 대동하였고, 병오년(1606, 선조39)에 서경(西坰 유근(柳根)의 호)은 다시 김현성과 권필 두 사람을 대동하기를 청하였으나 권은 사퇴하고 김만 수행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서경이 또 차천로와 양경우(梁慶遇)를 대동하였는데, 이로부터 규식(規式)이 되었다 한다.

적암(適庵) 조신(曺伸)은 규봉(圭峯)이 왔을 때부터 자양(紫陽)이 왔을 때까지 그때마다 전례(典禮)의 임무를 맡아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이때에는 아직 한리학관(漢吏學官)이 설치되지 않았었기 때문데 적암이 그때마다 의원(醫員)의 직함으로 왕래하였다.
그후 정번(鄭蕃)을 출신이 천하다 하여 과방(科榜)에서 삭제하는 대신 한리학관을 설치하여 그를 처우했다. 이후로는 조사(詔使)가 올 때마다 학관(學官)에게 필찰(筆札)을 맡겼으니, 정번ㆍ어숙권(魚叔權)ㆍ정화(鄭和)ㆍ박지화(朴枝華)ㆍ권응인(權應仁) 등이 서로 잇따라 이 일을 맡아 하였다.
지금은 이재영(李再榮)이 도합 네 번이나 이 일을 맡았는데 무리 중에서 가장 민첩하고 총명하여 서경(西坰)이 매우 감탄하였다. 그래서 주지번(朱之蕃)ㆍ양유년(梁有年)과 수창한 시는 대부분이 그가 지은 것이라 한다.

총명하고 민첩함이 뛰어난 것으로 얘기되는 사람이 국조(國朝) 이래로 많이 있지만, 내가 목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근세에는 윤 사문 계선(尹斯文繼善)이 가장 총명한 것으로 얘기된다. 내가 태복시(太僕寺)에 재직할 때였다. 어느 날 그가 태복시로 나를 찾아왔다. 마침 말 3백여 필의 털빛과 소재 지명, 기르는 이의 이름을 적은 마적책(馬籍冊)이 옆에 있었는데 윤이 한 번 보고는 다 외었다. 3일이 지난 뒤에 그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진사 임숙영(任叔英)도 중조(中朝)의 《이력편람(履歷便覽)》을 보고는 정확하게 모두 기억하였다. 이 두 사람은 참으로 탄복할 만한 사람들이다.

서천(西川) 정곤수(鄭崑壽)는 서사(書史)에는 그리 총명하지 못하나 족보(族譜)에는 어느 것이나 잘 알아서 막힘 없이 줄줄 외었다. 이실지(李實之 실지는 이춘영(李春英)의 자)도 보첩(譜牒)에 능통하고 아울러 문사(文史)에도 해박하였지만 문사가 보학(譜學)만 못하였다.
한번은 서천이 실지와 강변에서 만났는데 밤을 지새가며 보학에 대하여 논변(論辨)하였다. 나도 그 곁에서 듣고 있었는데, 지금 거가대족(巨家大族) 치고 그들의 선계(先系)나 외파(外派) 중에 허물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내용은 몰라서는 안 되지만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혹 유시(流矢)에 맞아 죽을 염려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젊은 날에 당숙 참봉공(參奉公)의 집에서 《고려사(高麗史)》를 뒤적이다가 권한공전(權漢功傳)을 보고는 옳고 그름을 논하였더니, 참봉공이,
“어린애는 말을 조심하여야 한다. 우리나라 재신(宰臣)들의 허물을 부디 말하지 말라.”
하면서, 가보(家譜)를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알고 보니 권공(權公)은 나의 5대조 호군(護軍) 부인의 외증조였다.
내가 이런 일이 있은 뒤 5대에 걸쳐 내외(內外)의 조상을 널리 조사해보니 고려 이전의 드러나게 벼슬한 집안치고 나의 조상과 관계 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보첩(譜牒) 세 권을 만들어서 자질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내가 한번은 정서천(鄭西川)을 찾아가니 공(公)이 갑자기,
“자네는 8고조(高祖)를 아는가? 하나하나 말해 보게.”
하므로, 내가 8고조를 몰라 멍하니 있으니, 서천(西川)이,
“내ㆍ외조(內外祖)와 모친(母親)의 내ㆍ외조 및 아내의 내ㆍ외조이다.”
하였다. 내가 드디어 낱낱이 헤아려서 여덟에 이르니, 공이 이르기를,
“자네는 8고조를 아니 참으로 조상을 잊지 않는 사람이군. 내가 이를 물어보면 백 명에 한두 사람도 아는 이가 없더군. 자손으로서 자기의 조상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생각하면 그 말이 매우 옳다.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의 《필원잡기(筆苑雜記)》를 보면, 태종(太宗)은 말[馬]을 살필 줄 알았다. 여윈 말을 가려서 상렬(上列)에 넣어 명(明) 나라에 진공(進貢)하니, 성조(成祖)가 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천마(天馬)이다. 너의 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였다.
내가 언젠가 《증자계집(曾子棨集)》을 보니 천마가(天馬歌)가 들어 있는데,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1403~1424) 연간에 조선에서 황류마(黃騮馬)를 진공하였는데, 매우 좋은 말이었으므로 임금이 천마가(天馬歌)를 짓도록 명하였다.”
하였으니, 아마 이때 바친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여자로서 중국 조정에 뽑혀 가서 황제를 모신 자는 누구나 총애를 받았다. 그로 해서 권영균(權永均)ㆍ여귀진(呂貴眞)ㆍ최득비(崔得霏)는 열경(列卿)이 되었고, 조선에 있으면서 중국의 봉록(俸祿)을 받았으니, 왕감주(王弇州 감주는 왕세정(王世貞)의 호)가 이전술(異典述)에서 ‘외국인이 중국 관직을 갖고서 외국에 살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은 누이동생 두 사람이 중국 조정에 들어 갔으므로 불러서 광록소경(光祿少卿)을 제수하고, 조서를 받들어 우리나라에 반포하게까지 하였으니 더욱 특이한 은전(恩典)이다.

중관(中官 내시)으로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은 대(代)마다 있었는데,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1488~1505) 연간에 이르러 뽑아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피해가 되고 있는 일의 한 가지를 덜어준 것으로서 이를 명한 효종 황제(孝宗皇帝)는 참으로 성인(聖人)이었다.
태감(太監) 김영(金英)은 안동인(安東人)으로서 중국 조정에 들어가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이 되어 헌종 황제(憲宗皇帝)의 총애를 받았다. 사신으로 본국(本國)에 나오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내가 어찌 우리 국왕에게 대등한 예로 만날 수 있겠는가?”
한 것을 보면, 그는 어진 사람이었다. 이로 보아서 중국의 사첩(史牒)에,
“김영(金英)은 겸손하고 사체(事體)를 알았으며, 바른 사람을 보호한 공이 있다.”
고 한 것이 사실임을 알겠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조공(朝貢)하는 길은 해주(海州)에서 광녕(廣寧)을 거치지 않으면 바로 영원위(寧遠衛)로 통하게 되는데, 이 길이 오랑캐와 가깝지 않고 또 빠르다.
중관(中官)으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이 우리 사신과 의논하여 헌종 황제에게 아뢰어 조공로(朝貢路)를 바꾸려 하니, 병부(兵部) 항충(項忠)은 그대로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산(東山) 유대하(劉大夏)가 직방사(職方司)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조선의 조공로는 당초에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정(詳定)한 것으로서 서너 곳의 대진(大鎭)을 우회하여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게 한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니 경솔히 고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항충이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전 길대로 조공하고 변경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의 공사(貢士)가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고려조에서 홍륜(洪倫)이 임금을 시해하고, 김의(金義)가 중국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지, 우리 조선조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들어 중국에 요청한다면 중국에서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옹졸하고 기발한 절조가 없는데다 멀리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나쁜 평판을 뒤집어쓴 채 빈공과(賓貢科)에 참여하지 못하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가 한번은 낭중(郎中) 가유약(賈維鑰)에게 물었더니,
“안남(安南)과 유구(琉球)는 모두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한다. 안남출신 진유(陳儒)는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1506~1521) 연간에 과거에 급제해서 우도어사(右都御史)를 지냈고, 완악(玩鶚)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에 급제해서 공부 우시랑(工部右侍郞)이 되었으며, 손응오(孫應鰲)는 본국에서 도망하여 광서(廣西) 지방에 살다가 역시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현재에도 거인(擧人)이나 공사(貢士) 출신으로서 주현(州縣)의 관리로 있는 자가 다섯 사람이 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나라 종계(宗系)가 잘못된 것을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선왕(先王 선조(宣祖))이 정성을 다하여 호소하고 변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영양(穎陽) 허국(許國)이 당시 내각(內閣)에 있으면서 주선한 공이 있었다. 대개 허공(許公)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에 마침 우리는 국상(國喪)을 당해서 총망할 때였다. 그런데도 정례(情禮)가 절도가 있었으므로 우리의 정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조정에 있으면서 힘써 주장하여 우리나라의 억울함을 씻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형 군문(邢軍門)과 석 상서(石尙書)를 제사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허공(許公)도 당연히 제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삼국(三國) 이래의 국성(國姓) 중에서 박(朴)ㆍ김(金) 두 성씨보다 더 번성한 성은 없다. 석씨(昔氏)와 고씨(高氏)ㆍ부여씨(扶餘氏)는 아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왕씨(王氏)가 적어진 것은 왕자는 으레 중이 되었기 때문에 종성(宗姓)이 적어진 것이다. 고려가 망할 때에 이르러서는 남은 종실(宗室)이 겨우 50여 명이었다.
본조(本朝)는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하여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전에 선계 찬술관(璿系纂述官)으로 있을 때 헤아려 보니, 종실 중에서 관대(冠帶)를 물려받아 녹봉을 받는 자가 3백여 명이고 조정의 문ㆍ무관과 남행(南行)으로 벼슬하는 자도 백여 명이었다. 이 외에 유사(儒士)와 충의(忠義)로운 사람과 무인(武人)에서부터 아래로 지서(支庶 지손과 서손)에 이르기까지 천여 명에 가까웠으니 번성하다고 할 만하다.

종성(宗姓)으로서 정승이 된 사람은 두 명이니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과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이헌국(李憲國)이다. 두 사람 모두 원훈(元勳)으로 정승으로서의 업적까지 남겼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일이다.

[주D-001]번봉(藩封) : 제후(諸侯). 명 나라 때 종래의 성(省)을 왕(王)으로 봉하였는데 이를 말함.
[주D-002]친왕(親王) : 황제의 종실(宗室)로서 왕(王)에 봉해진 자를 일컫는 말.
[주D-003]동ㆍ서벽(東西壁) : 관원의 품계에 따라 동ㆍ서로 나누어 앉는 것을 말함. 동쪽 벽을 등지고 앉으면 동벽, 서쪽 벽을 등지면 서벽이라 함.
[주D-004]상복사(詳覆司) :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특별히 신중하게 다루기 위해 반복하여 심리하는 사무를 관장하던 형조(刑曹)의 한 부서.
[주D-005]일명(一命) : 처음으로 관등(官等)을 받아 정리(正吏)가 되는 것. 곧 9품관(品官). 《周禮 春官》
[주D-006]횡간(橫看) : 나라의 예산안 가운데 세출(歲出) 항목을 나열해 적은 명세서. 또는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적은 예산표를 말함.
[주D-007]감반(甘盤) : 은 고종(殷高宗)의 스승. 즉위 전의 스승을 감반이라 함.
[주D-008]남행(南行) : 과거를 보지 않고 조상(祖上)의 공덕으로 얻어 하던 벼슬. 음직(蔭職)ㆍ음사(蔭仕)와 같음.
[주D-009]청대(請臺) : 각 관아에서 섣달 그믐께 사무를 마치고 창고를 봉해 두기 위해 사헌부 감찰의 검사를 청하던 일.
[주D-010]분대(分臺) : 수령(守令)이나 관리들의 탐포(貪暴)와 민생(民生)의 질고(疾苦)를 규찰(糾察)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헌부(司憲府)의 관리. 분견대신(分遣臺臣)의 약칭. 이때 파견되는 관리는 감찰(監察)ㆍ장령(掌令)ㆍ지평(持平) 등 일정치 않음. 《世祖實錄 卷3 世祖 2年3月 丁酉條ㆍ同實錄 卷5 世祖 2年 12月 丙申條》
[주D-011]서경(署經) : 당하관(堂下官)을 임명할 때 그 사람의 내외사조(內外四祖)와 처(妻)의 사조(四祖) 등 신원을 사헌부ㆍ사간원에서 조사하던 일. 양사(兩司)에서 하자(瑕疵) 없음을 확인하여야 이조에서 사령서를 발부하였음.
[주D-012]봉미(封彌) : 과거(科擧)의 공평을 기하기 위하여, 답안지 오른편 끝에 성명ㆍ생년월일ㆍ주소ㆍ사조(四祖) 등을 쓰고 이를 보이지 않게 봉하여 붙인 것.
[주D-013]형 군문(邢軍門)과 석 상서(石尙書) : 1592년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명(明) 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총독군문(總督軍門) 형개(邢玠)와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가리킴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文部) 12 ○ 뇌(誄)
이실지(李實之)의 뇌사 병인

이실지(李實之 실지는 이춘영(李春英)의 자)는 젊어서 기개로써 스스로 젠체하였고, 한편 자기 재주를 자부하기도 하였다.
성호원(成浩原 호원은 성혼(成渾)의 자)ㆍ정계함(鄭季涵 계함은 정철(鄭澈)의 자) 사이를 왕래하면서, 당세에 선비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보았다. 일찍이 세상에 팔뚝을 걷어붙이고 뽐냈기 때문에, 비록 선비의 신분이었지만 자기 의견으로 조정의 의논을 억눌렀다.
기축년간에 가장 집정(執政)의 사이에서 손뼉을 치며 날렸는데, 집정자(執政者)들은 모두 그의 말을 따랐고, 당시 선비들도 또한 그를 기이하게 여겨 모두들 그에게 부동(附同)하였다. 그러자 그와 서로 친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두고 보자고 벼르고 있었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여 태사(太史)가 되어 홍문관(弘文館)과 규장각(奎章閣)에서 붓을 잡았으니, 또한 이미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집정자가 몰리게 되자 실지 또한 삼수군(三水郡)으로 귀양 가게 되니, 그에게 부동하던 자들이 도리어 그를 공격함으로써 평소 호시탐탐 벼르던 자들은 매우 고소하게 여기었다. 이는 실지가 나이 젊고 앎이 없어, 망녕되고 거칠고 어리석음의 소치이겠으나, 집정자를 감싸는 자도 또한 덩달아 실지에게 죄를 덮어 씌우니, 얼마나 원통한가? 만약에 당세의 집정자들이 온화하고 바르고 진중하여, 조급하고 난폭한 자의 충동에 놀아나지 않았더라면, 비록 실지가 백이 있더라도 또한 어찌 감히 입을 함부로 놀려 일을 벌였겠는가. 오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런 분란을 일으켰으니, 이는 실로 집정자의 잘못이다. 그런데 어찌 유독 실지만을 벌할 것인가.
실지가 친구에게 버림 받고, 뜻이 맞지 않는 이에게 미움을 받아 이로 인해서 뜻을 펴지 못하게 되자, 드디어 세상에 스스로 방종하여 술꾼들과 어울려 마을 사이에서 떠들고 즐기되, 그럴수록 더욱 그 문장은 크고 분방해갔다. 그의 문장은 양한(兩漢) 이하를 추종했고, 시는 두보(杜甫)ㆍ한유(韓愈)ㆍ소식(蘇軾) 세 사람을 본받아서, 호한(浩澣)하고 뛰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다만 그 사람됨이 자중하지 않아서 날림을 면치 못하여 남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므로 남들이 그의 안목을 천히 여김으로써 명성과 지위가 당대에 진동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를 추천하고 뽑아 쓰는 이가 없어서 끝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뜻만 품은 채로 죽었으니 가엾다.
내가 글로 그와 벗을 삼아, 늘그막에 서로 자주 찾아 종유하였으므로, 그의 사람됨을 자세히 알거니와, 그의 문장은 짝할 이가 드물었지만, 마침내 유락하여 불우하였고, 50세도 못 되어 요절하였기 때문에 특히 이를 애석하게 여겨 뇌문을 짓는다. 그 뇌사는 다음과 같다.
아 문운이 / 嗟嗟文運
금세에 한창 막혔어라 / 方厄于今
오직 두세 친구들만이 / 唯數三儕
문단(文壇)에서 날렸도다 / 幟于詞林
그대 기개로 호기 부려 / 君氣以豪
수염을 떨치며 일어났네 / 奮髥而起
쌓아 둔 지식 많고 깊으니 / 蓄厚而深
글로 발휘함이 마땅하고 말고 / 宜發之駛
넘실거리는 문학의 파도가 / 滔滔文瀾
큰 강에 대어 동으로 흘렀네 / 注瀆而東
북덕물에 썩은 고기 떴다 해서 / 腐胔潦漲
그 넓음에 해가 되랴 / 不害其洪
시 또한 재치가 있어 / 詩亦翩翩
화려하고 억세기도 / 腴而能悍
용과 지렁이가 뒤섞이되 / 螭蚓雜陳
그 방대함엔 무방하다오 / 不妨其漫
북 치고 고함 치며 나아가니 / 鼓躁而出
그 이론 누가 신봉하였나 / 誰信其論
호음(湖陰)이며 소재(蘇齋) 이하 / 湖蘇以下
그 입에는 온전한 이 하나도 없건만 / 舌無全人
오직 권필(權韠)과 이달(李達) / 唯權唯李
그리고 허균(許筠)만을 추어올렸다네 / 唯許是獎
더러는 메마르고 어떤 것은 막히고 / 或枯或滯
더러는 싫증나도 그런대로 다 좋았네 / 或飫俱當
그가 입을 뻥끗하면 / 當其吐辭
온 방 안이 조용하였으니 / 四座霮然
그 값이 떨어진 것도 / 其價之卑
또한 여기 달렸던 것 / 亦坐是焉
세상에선 그 재주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나 / 世不憐才
그렇다고 그대는 깎이지 않아 / 君不少貶
더욱더 고담 준론만 하여 / 益高其談
미워라 하는 이는 곁에서 그대를 엿보고 있었다네 / 憎者旁睒
수부도 안 된다 하고 / 水部不可
종정도 안 된다 하여 / 宗正亦麾
마침내는 내쫓겨 야인이 되니 / 竟黜之野
아 운명은 이에 그쳤네 / 吁命止斯
아 슬프도다 / 嗚呼哀哉
지난날 진주의 / 曩宿眞珠
응벽루에 묵을 적에 / 凝碧之榭
그대가 이정(李楨)을 데리고 / 君携李楨
표연히 찾아와서 / 飄然來過
손뼉 치며 고금을 논하고 / 抵掌今古
백가의 작품 품평하며 / 雌黃百家
죽는 게 정녕 편하겠고 / 謂死甚樂
산다는 건 한숨겹다더니만 / 生也足嗟
갑자기 죽으니 / 倏然形開
그 밝음 오히려 귀에 쟁쟁하구나 / 猶耳其諦
싸늘히 바람 부는 장막 앞에 / 冷冷風帷
그대 위해 한번 눈물 지우네 / 爲之一涕
아 슬프다 / 嗚呼哀哉
그대가 이 세상에 쓰일 땐 / 當君用世
그것 참 기특하다 말들 하더니 / 論者謂奇
그대 물러나게 되자 / 及其絀也
모두들 등을 돌렸다네 / 皆背而馳
어디 등만 돌렸을 뿐인가 / 不唯背之
돌까지 던졌었지 / 而又下石
알랑대던 무리들은 / 其附會者
도리어 높은 벼슬을 / 反赤其舃
남들은 그대에게 성을 내지만 / 人爲君怒
난 그대 위해 원통히 여긴다오 / 我爲君冤
그대 넋이 앎이 있다면 / 魂若有知
반드시 내 말에 수긍하리라 / 必頷斯言
아 슬프다 / 嗚呼哀哉
칠원(漆園)은 침몰하고 / 漆園沈冥
현정(玄亭)은 적막하네 / 玄亭寂寞
부귀하고 삭는 것은 / 富貴而朽
그대 소원 아니었네 / 非君所樂
무한한 그대의 슬기 / 無涯之智
맺히어 대년이 되어 / 結爲大年
천고에 빛날 것이며 / 炳烺千古
해와 달같이 늘 밝으리니 / 日月常鮮
그의 굴함 슬퍼 말고 / 莫悲其屈
그의 요절 슬퍼 말라 / 莫悲其短
아 슬프도다 / 嗚呼嚱嘻
아 무얼 탄식할 것인가 / 夫亦何惋

[주D-001]호음(湖陰)이며 소재(蘇齋) : 호음은 조선 시대 시문(詩文)의 대가였던 정사룡(鄭士龍)의 호이고, 소재는 조선 시대 문장가(文章家)이며 학자였던 노수신(盧守愼)의 호이다.
[주D-002]칠원(漆園) : 전국 시대 장주(莊周)가 일찍이 칠원리(漆園吏)를 지냈기 때문에, 전하여 장주를 일컫는 말로 쓴다.
[주D-003]현정(玄亭) : 전한(前漢) 때의 문장가(文章家)인 양웅(揚雄)을 가리킨 말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83권
 묘지명(墓誌銘)
지천(芝川) 황공(黃公) 묘지명 병서(幷序)

본조(本朝)의 이름난 재상은 황 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의 시호)을 으뜸으로 삼는데, 공은 익성공의 6대 손으로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임진년(1532, 중종27) 4월 26일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아이들과 희유(戱遊)하지 않고 늠연히 남달랐으며, 점차 자라서는 총명이 크게 뛰어나 경적(經籍)을 궁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 스스로 문사(文辭) 짓기를 좋아하므로 일시의 과거 공부하는 이들이 서로 다투어 전습(傳習)하였다.
임자년(1552, 명종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무오년(1558, 명종13)에 문과에 합격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의 별칭)에서 한림으로 뽑혔다. 이때 조정에서 세자를 위하여 궁료(宮僚 세자궁의 관속)를 매우 가려 뽑는데, 공이 설서(說書)가 되었고 이어 호조 좌랑에 승진,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禮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중신(重臣)의 뜻에 거슬려 호서(湖西 충청도)의 해미현(海美縣)으로 전출되었는데, 공의(公議)가 매우 만족해 하지 않으므로 이윽고 본도(本道)의 도사(都事)로 옮겼으나 사건으로 그만두었다가 예조랑(禮曹郞)ㆍ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임용되었다.
명종(明宗) 말년에 인재를 불러 모을 때 공이 헌납 겸 지제교(獻納兼知製敎)에 제수되고 옥당(玉堂)에 들어가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로부터 청직(淸職)을 역임한 바, 부교리(副校理)ㆍ교리(校理)ㆍ응교(應敎)ㆍ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ㆍ사간(司諫) 등 직책에 갈렸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여러 번 거듭하였다.
세자가 훙(薨)한 뒤 동궁(東宮)이 오래도록 비어 있을 때 공이 문학하는 사람을 널리 뽑아 종속(宗屬)을 교육시키기를 청하였고, 또 옥당 요석(僚席)에서 동궁 책립의 의논을 주창, 장차 차자(箚子)를 올려 청하려 하였으나 동료의 의논이 통일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얼마 안 되어 선조(宣祖)가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는데, 공은 일찍이 여기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즉 공은 명종(明宗)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하여 방상(方喪 부모의 상(喪)과 같이 집례(執禮) 하는 것)의 예에 정성을 다하므로 식자(識者)들이 감탄하였다.
선조가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자, 공이 매번 경연(經筵)에서 이치에 의거 사건을 논의하였는데 말은 간략하여도 의사가 명백하므로 상이 허심(虛心)으로 받아들였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동료들에게 자주 칭찬하기를,
“참된 강관(講官)의 재목이다.”
하였고,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도 배우는 이들에게 말하기를,
“내 너희들을 위하여 훌륭한 스승을 얻어 놓았으니, 이 다음 서울에 가거든 집지(執贄)하고 뵙기를 청하라.”
하였다.
정묘년(1567, 명종22)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 나라에 조회(朝會)하였고 무진년(1568, 선조1)에 부응교(副應敎)로 차자(箚子)를 올려 시폐(時弊) 열 가지를 아뢰었다. 기사년(1569)에 사성 겸 춘추관편수관(司成兼春秋館編修官)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수찬하였고 얼마 후 다시 교리(校理)가 되었으나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그만두자, 상이 매우 아까워하면서 여러 차례 말하였다.
다시 제사(諸司)의 첨정(僉正)과 판관(判官)을 역임하다가 계유년(1573, 선조6)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했고, 상을 마친 뒤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으며, 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내놓았다. 공은 전후 집상(執喪)하는 중에 제가(諸家)를 탐구하여, 성력(星曆)ㆍ감여(堪輿)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 같은 책에 모두 정통하였다.
또 제사(諸司)의 정(正)과 통례원 좌우통례(通禮院左右通禮)와 해주 목사(海州牧使)ㆍ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역임하였다.
구례(舊例)에, 종묘의 축호(祝號)에 대해 국상(國喪)을 당하면 애자 국왕모(哀子國王某)라고 쓰도록 되어 있는데, 공이 상소하여,
“종묘의 제사에는 종고(鐘鼓)가 울리고 열성(列聖)의 영(靈)이 양양(洋洋)히 위에 계시는데, 전하께서 애자(哀子)로 자칭하시면, 이는 초상(初喪)의 예(禮)로 열성(列聖)을 섬기는 셈이 됩니다.”
하므로, 조정 의논이 옳다고 하여 마침내 효자(孝子)로 개칭하였다.
언관(言官 간관(諫官)의 별칭)이, 진주(晉州)에 부임하지 않았다고 논핵하여 파직되어 물러나 있은 지 매우 오래되자,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공에 대해 아뢰기를,
“황모(黃某)가 지난번 실병(實病)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으로 오래도록 폐척되었으나 그 문한(文翰)은 금세(今世)에 견주기 드뭅니다.”
하므로 상이 즉시 복직을 명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폐위(廢位)되었던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康氏)를 말함)의 복위(復位) 문제를 논의하는 데 조금의 미사(微辭 숨겨 주는 것)도 없으므로 공이, 성인(聖人 공자)이 진(陳)의 사패(司敗)에게 답한 뜻을 근거로 소장(疏狀)을 작성하여 논박하려 하는데, 공의 백씨(伯氏)가 힘껏 저지하였으므로 올리지 못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글제를 내어 문사(文士)를 시험할 때 통정(通政) 이하가 모두 응제(應製)하였는데, 상이 공의 작품이 동류에서 뛰어났음을 사랑하여 특별히 통정(通政) 품계에 승진시켜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하고 삼자함(三字啣 지제교(知製敎))을 이전처럼 띠게 하였으며, 얼마 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본조(本朝)의 종계(宗系)가 무고(誣告 태조가 고려의 적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로 된 것을 말함)되었으므로 본조에서 힘을 다하여 변론하였으나 완전히 간정(刊正)되지 못하였는데, 마침 명 나라에서 《대명회전》이 완성되어 간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서 논하기를,
“마땅히 빨리 일대(一代) 문학의 선비를 보내어 이 기회에 수정해야 한다.”
하므로, 상이 공을 불러들여 승지(承旨)를 삼아 행인(行人 사신)을 맡기고 나서 이르기를,
“금번 사신의 일은 경(卿)만 믿는다.”
하였다.
이에 명 나라에 도착하자, 황제가 전례에 따라 원주(原奏)를 예부(禮部)에 내렸다. 공이 예부에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실을 진술하므로 상서(尙書) 우신행(于愼行)이 공의 정문(呈文)을 재삼 보고 자주 ‘좋은 문자이다.’라고 칭찬하며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너희 재상(宰相)이 이 글을 미리 지은 것이냐? 어쩌면 그렇게 신속할 수 있단 말이냐.”
하고, 즉시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가 바로 수정을 특명하고 이어 《대명회전》의 그 부분을 등사하여 보이게 하였으며, 또 채홍전(彩紅氈)을 황극문(皇極門) 안에 펴고 한림학사(翰林學士)에게 예로 칙명을 주게 하였으니, 이는 특이한 일이었다.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오자, 상이 매우 기뻐하며 종묘에 사유를 아뢰고 사형수 이하는 모두 사면하였으며, 공을 가선(嘉善) 품계에 승진시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하고 어의(御衣) 한 벌과 전택(田宅)ㆍ노비(奴婢)를 하사하였다. 그 일행에게는 모두 차서대로 상을 주었다.
호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의 이직(貳職 참판(參判)을 말함)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ㆍ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으나, 병(病)으로 그만둔 적이 많았다.
그 뒤에 사신(使臣)이 《대명회전》의 인쇄본을 얻어 왔는데, 본조의 무고(誣告)된 종계(宗系)가 모두 수정되어 아주 깨끗했다. 상이 또 공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공을 내가 경(卿)에게 갚을 수 없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특진시켰는데, 마침 흉년을 만나 공사(公私)의 사정이 모두 곤궁하였다.
공은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재주와 힘을 다 쏟았고, 상은 공을 의중(倚重 의뢰하고 중요시하는 것)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대간(臺諫)의 탄핵과 강관(講官)의 공격이 연속되므로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보니, 지부(地部 호조)에는 마음을 다하여 일하는 이가 많은데, 모두가 날카롭게 배척하고 있다.”
하므로 공이 공사(控辭)하였으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고, 그 뒤에 병으로 체임되었다.
이어 여러 차례 동지중추(同知中樞)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형조(刑曹)에서 다시 호조(戶曹)로 전임되어 총관(摠管) 및 금부(禁府)를 겸임하였는데, 형조(刑曹)와 호조(戶曹)에 있을 때 치적(治積)이 많아 사람들이 매우 힘입었다.
이때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오고 종계(宗系)의 무고(誣告)가 더욱 신원되므로 상이 전일 공에게 내렸던 상(賞)이 걸맞지 않다 하여 특별히 숭정(崇政) 품계를 더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하자, 공이 두 번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그러나 상은 이르기를,
“공은 큰데, 상이 적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명이 있어, 공이 예조판서 지경연(禮曹判書知經筵)에 장계군(長溪君)으로 수봉되었다.
이때 공이 여러 차례 차자(箚子)를 올려 일을 말하였다. 즉 첫째는 조회 받고 제사 지낼 적에 하나같이 중조(中朝 중국 조정)에서 사용하는 품대(品帶)에 의거할 것을 청하였고, 둘째는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을 꾀하다가 복주(伏誅)된 뒤에 초야(草野)에서 올린 소장(疏章)에 과격한 말이 많으니 마땅히 규제해야 한다는 것과 고상(故相) 박순(朴淳)이 간당(奸黨)의 미움을 받아 초야에서 죽었으니 장 곡강(張曲江 장구령(張九齡)을 말함)의 고사에 의거하여 서원(書院)에 제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많이 채택하였다.
태묘(太廟)에 화재(火災)가 났을 때 공이 상하(上下)가 변복(變服)하고 거애(擧哀 세 번 곡(哭)하는 예(禮))하는 절차를 찬진(撰進)하였고, 종계(宗系)가 뚜렷이 밝혀져 상이 장차 몸소 제사를 올리고 경사로움을 고(告)하려 할 때 공이 또 명을 받고 그 의식을 제정한 바 정문(情文)이 구비되었고, 또 태묘(太廟)에 들어가 행사를 도왔는데, 예를 마친 뒤에 상이 이르기를,
“문(文)과 질(質)이 빈빈(彬彬)하여 볼만하였다.”
하고,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공이 또 건백(建白)하기를,
“열성(列聖)의 덕행(德行)이 동일하지 아니하고 공적이 각각 다른데, 지금 종묘의 악(樂)에 있어 국초(國初)에 정한 것으로써 제위(諸位)에게 유식(侑食 제사 지내는 것을 뜻함)하니, 상성(象聲 주 무왕(周武王)의 공(功)을 노래한 《시경》 무(武)편을 인용한 말)을 표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여름에 서리가 내리자, 공이 또 아뢰기를,
“역옥(逆獄)이 만연(蔓延)되어 반드시 원통하게 죽은 자가 있을 것이니, 경외(京外)에 의심나는 죄에 연좌된 자는 즉시 풀어 주어 상제(上帝)의 호생(好生)하는 인(仁)을 본받기 바랍니다.”
하였다.
가을에 상이 짐승의 피를 마시며 맹세하고 마침내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 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의 호를 하사한 다음, 두 품계를 뛰어서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고 영경연사(領經筵事)를 임명하였으며, 하사품이 매우 융숭하고 연회(宴會)를 두 차례나 하사하였다. 공의 장자(長子)에게도 은전을 내려 통정(通政) 품계에 승격시키니, 당시에 이를 영광되게 여겼다. 그러나 시의(時議)가 영경연(領經筵)은 삼공(三公)이 아니면 불가(不可)하다고 하므로 그만두고 예조ㆍ병조의 판서와 의금부(義禁府)의 장(長)을 제수받았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우리에게 글을 보냈는데, 언사가 너무 패역(悖逆)하였고, 명 나라를 바로 공격해 가겠다는 말이 있으므로 상이 여러 재상에게 문의하자, 공이 대사헌(大司憲) 윤두수(尹斗壽)를 부르기를 청하였다. 윤두수가 와서 아뢰기를,
“일이 황명(皇明)에 관계되었으니, 사체가 매우 중대합니다. 전하께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함은 천일(天日)이 위에 있으니 어찌 숨겨질 수 있겠습니까. 속히 명 나라에 주문(奏聞)하소서.”
하므로, 공이 아뢰기를,
“윤두수의 말이 옳습니다. 신도 주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그 뒤 경연(經筵)에서 다시 이전의 말을 되풀이해서 아뢰고 이어, 병마(兵馬)를 수칙(修飭)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卿)이 힘써 보라.”
하므로, 공이 경외(京外) 모든 부서에 있는 군병을 기록하여 고찰에 편리하게 하였다. 또 국가를 수호할 장병을 양성시켜야 한다고 청하고, 이어 이순신(李舜臣) 등은 장수의 임무를 맡길 만하다고 추천하였는데, 뒷날 이순신이 마침내 큰 공을 세우고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하기를 공의 말과 같이 하였다.
공이 문형(文衡)의 물망에 오른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상도 이를 더디다고 여긴 나머지, 특별히 제학(提學)을 제수하여 그 계제(階梯)를 삼아 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를 제수하였다. 공이 사직하기를 청하자 상이 비답하기를,
“이 직책을 어찌 우연히 주었겠느냐. 나는 적격자(適格者)를 얻었다고 자랑한다. 내 비록 배우지 못하였으나 경(卿)의 수학 고재(邃學高才)를 안지 오래다.”
하였다.
또 공이 조사(詔使 중국 사신)가 올 적에는 으레 자신의 쇠후(衰朽)함을 핑계하여 그 임무를 사양하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중화(中華) 사람들이 보더라도 경이 연고 덕소(年高德邵)한 줄을 충분히 알 것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가 났을 때 최영경(崔永慶)이 정여립의 배후자라는 비어(飛語)에 의해 옥에 갇혔는데, 일부의 사람들은 우계 선생(牛溪先生)과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최영경을 죄로 얽어 죽여 감정을 푼 것이라 하여, 그 친구와 제류(儕流)가 일체 연좌되었고 공과 윤공 두수도 축척(逐斥)당하였다.
겨울에 왜정(倭情)에 관한 주문사(奏聞使)가 명 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황제가 융숭한 포사(褒賜)를 내리자, 상이 마침내 윤공을 방환(放還)하였고, 공은 왜정에 관한 상주문(上奏文)을 사실대로 썼다 하여 속히 복작(復爵)할 것을 명하는 한편, 황제가 하사한 비단을 주었다. 처음에 공이 상주문을 지을 때,
“우리가 왜(倭)와 통신(通信)한 일을 상세히 기록하여 황제 섬김에 속임이 없는 성상(聖上 선조)의 의(義)를 나타내어야 한다.”
하였으나, 시의(時議)는 우리가 왜적과 교통(交通)한 일을 숨겨야 한다면서 그 사실을 지워 버렸다. 그 뒤 명 나라에 군사를 청하게 되어서는 끝내 숨길 수 없었고, 또 명 나라의 변방 장수가 이미 전후의 실상(實狀)을 알아내어 우리를 치죄(治罪)하자고 주청(奏請)하였다. 임진년에 공이 적보(賊報)를 듣고 전리(田里)에서 급히 달려 대궐에 나아가 대략의 기의(機宜)를 아뢰었는데, 대강 다음과 같다.
“조정에서 비록 도민(都民)이 달아나는 것을 금지하지만, 평소 백성에게 굳게 맺어 놓은 은혜가 없이 난리에 임하여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왕자(王子)에게 분명(分命)하여 도민들을 불러 모으고 덕의(德意)를 선포하게 하시면 거의 보합(保合)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어휘가 자못 시휘(時諱)에 저촉되었다.
왜구(倭寇)가 깊이 들어오자, 상이 밤을 이용하여 서쪽으로 행행하므로 공이 뒤따라 동파역(東坡驛)까지 당도하니, 상이 공의 부자(父子)에게 왕자 순화군(順和君 이름은 보())을 호위, 관동(關東)으로 들어간 뒤 사방 백성을 불러 모아 수복을 기필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명을 받고 눈물을 뿌리며 철원(鐵原)에 당도하여 병사들과 피를 마셔 맹세하고 원수(元帥) 등 제공(諸公)에게 공문(公文)을 보내어 충의(忠義)를 격려하고 팔로(八路)에 격문을 돌렸는데 그중에,
“묘당(廟堂)에서 금(金)과의 화친을 힘써 주장하니, 진회(秦檜)의 고기를 먹어야 하고, 간신(奸臣)이 앞장서서 촉(蜀)으로 몽진(蒙塵)할 것을 외치니 양국충(楊國忠)의 머리를 달아 매야 한다.”
는 대문은, 보는 자가 모두 혀를 내둘렀다.
관동(關東)에서 길을 돌아 북로(北路)를 향하여 가는데, 회령(會寧)의 난민(亂民) 국경인(鞠敬仁) 등이 꾀를 써서 일행을 잡아 적에게 바치니, 적장 청정(淸正)이 왕자에게는 약간의 예모(禮貌)로 대하였고 공과 상공 김귀영(金貴榮)은 딴 곳에 유치(幽置)하였다. 공의 장남 승지(承旨) 혁(赫)은 왕실(王室)의 사돈(査頓)이라 하여 매번 본국을 위협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장계를 써서 올리게 하므로, 공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적정(賊情)을 자세히 알리기 위하여, 매번 진(眞)과 가(假) 두 장의 장문(狀文)을 작성해서 가짜를 적에게 보여 속여 왔다. 마침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왕자의 안부를 묻는다는 핑계로 그 막하(幕下)를 보내왔으므로 혁이 다시 두 장의 장문을 만들어 김천일의 막하에게 주자, 김공이 이를 체찰사(體察使)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체찰사가 가짜 장문을 가지고 전례를 어겼다 하여 죄로 몰아세우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뒤에 황제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공이 왕자를 받들어 부산(釜山)에서 돌아와 대질을 받게 되었는데, 공이 힘써 변명하였으나 끝내 길주(吉州)로 유배되었다가 또 여범(餘犯)이 있다는 무고(誣告)로 다시 이의(吏議)에 오르내렸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특명으로 석방, 전례에 의하면 마땅이 복직되어야 하지만, 공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의언(議讞)의 지위에 있으므로 공에게 편리한대로 거주(居住)하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뒤 10여 년에 다시 공에 대해 추론(追論)하자, 공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기를,
“임진년 파월(播越) 중에 상의 명을 받고 세자를 보호하여 국토 회복에 힘쓰다가 적의 침공이 날로 박두하여 오기에 북쪽으로 들어갔는데, 회령(會寧)의 군민(軍民)이 일시에 국가를 배반하였고, 왕자와 재상이 모두 결박되어 적에게 바쳐졌습니다. 그때 장문(狀文)에서 관함을 삭제한 것은 다만 임시 변통으로 구차히 무사하기만을 바랐던 것이고, 또 그 장문 첫머리에 일본 장수 청정(淸正)의 ‘대명(大明)은 화친을 허락하였는데 귀국(貴國)만이 화친을 허락하지 않으니, 관백 전하(關白殿下)가 앞으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다.’ 한 말이 소개되었는데, 소위 ‘전하(殿下)’란 바로 왜적이 제 주인을 지칭하는 말이므로 내가 다만 그의 어휘에 의해 써서 조정에 아뢰었을 뿐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쓰도록 해도 아마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또 왜적이 신(臣) 자를 사용하는 데는 피아(彼我)의 구분이 없지만, 만약 우리가 신 자를 사용하면 왜적이 그들의 풍속과 같게 하라고 위협할 것이니, 화(禍)를 취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후의 위서(僞書)에 모두 신 자가 없었습니다. 만약 이것으로써 죄를 삼는다면 왕자와 김귀영(金貴榮) 이하는 다 나의 소견에 따라 잘못된 바이니, 내 스스로 죄를 당하겠습니다.
또 을미 옥사(乙未獄事) 때 풍원(豐原 유성룡(柳成龍)의 봉호)이 이 위서(僞書)를 끝내 비밀로 할 수 없어 남에게 보이자, 도헌(都憲) 김늑(金玏)이 보고는 ‘어찌 이것으로써 사람을 죽음으로 핍박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위서 중에는 왕자가 손수 쓴 일건(一件)도 있고 또 언서(諺書)로 밀통(密通)한 일건도 있는데, 풍원(豐原)이 모두 진달(進達)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원본(原本) 조차 올리지 않았으니, 그 저의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강연(姜綖)이 정언(正言)이 되어 이 사건을 매우 날카롭게 논박하다가 그 뒤에 《동문선(東文選)》 서계(書契) 중에 ‘관백 전하(關白殿下)’란 어휘를 보고는 사람들에게 ‘국서(國書)를 이렇게 칭하였으니, 이는 비록 황혁(黃赫)이 망녕되이 쓴 것이지만 큰 죄는 아니다.’ 하였습니다.
경인(庚寅) 연간에는 내가 연이어 삭직(削職)되었고, 풍원(豐原)이 예조 판서로 있었는데, 내가 그때의 통신 사목(通信事目)을 상고해 보자고 하니, 하리(下吏)가 의주(儀注 나라의 전례(典禮)의 절차를 적은 것)를 정납(呈納)하면서 ‘이것은 바로 전 판서(判書 유성룡을 말함)가 감정(勘定)한 것이다.’ 하는데, 그 국서에도 ‘관백 전하(關白殿下)’라 칭하였으니, 풍원같이 예를 알고 의(義)를 지킨다는 이로 평화로운 시기에 있어서도 왜적을 겉으로 높이고 거짓으로 공경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다른 사람이야 무엇을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위 풍원은 당시의 체찰사(體察使)이다. 그러나 당시에 공을 좋아하지 않은 자가 매우 많은 까닭에 공의 억울함은 끝내 신설(伸雪)되지 못하였다.
공이 윤월정(尹月汀 윤근수(尹根壽))과 가장 친하였는데, 일찍이 공을 위하여 지은 수서(壽序)에,
“공은 두 왕자를 받들어 북으로 향하면서 격문(檄文)을 초하여 고유(告諭)할 때 맨 먼저 묘당(廟堂)의 화친 주장하는 자를 그르다 하여 진회(秦檜)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므로 마침내 반대파들이 이를 갈면서 나날이 기회를 노렸으나 발작하지 못하였다. 마침 공이 적중에 잡혀 있으면서 적정(賊情)을 기록하여 본국에 알릴 때, 적이 만약 실정을 알리는 내막을 알면 반드시 저지할 것이므로, 별도로 가장(假狀)을 만들어 적에게 보이고 나서 진장(眞狀)과 함께 본국에 보내왔었는데, 마침 그때 묘당(廟堂)에서 공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그 가장(假狀)만을 입수하여 공을 모함하는 함정으로 이용, 공에게 죄가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어휘는 일부러 날카롭게 수식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 가장을 직송(直送)하다가는 진장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될 것이므로 그 가장은 놓아두고 새로 작성해서 보내면서 ‘그 장(狀)에는 신자(臣子)로서 차마 보지 못할 바가 있으므로 감히 보내지 못한다.’ 하였는데, 공이 마침내 여기에 걸렸고 이어 적중에서 돌아와서는 부자(父子)가 다 대질을 받아 하마터면 참화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가 다시 멀리 유배되었다. 그들이 비록 가장을 차마 볼 수 없다고 속였으나, 다음날 공의 죄를 의논하려면 반드시 가장을 내놓아야 송사에 붙여 죄의 경중이 판결될 터인데, 어찌 군부(君父) 앞에 차마 올릴 수 없다고 하였겠는가. 죄의 경중이 이 장(狀)의 진가(眞假)에 매여 있는데도 굳이 숨긴 것은, 남이 그 가짜인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장차 사지(死地)에 몰아넣고야 말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그 뒤 여러 해가 되자, 성상(聖上)께서 원훈(元勳)을 오래도록 적소(謫所)에 둘 수 없다 하여 특명으로 방환(放還)하였고, 언관(言官)의 논박을 수개월이 지나도록 윤유(允兪)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말하는 자도 이미 그쳤고 사명(赦命)이 장차 내려지려 하였는데,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또 공격하는 말을 곁들여 마침내 다시 논란을 받아 겨우 전리(田里)로 돌아왔으니, 어쩌면 연상군자(輦上君子 관로(官路)의 인사(人士))가 기회를 노려 혐원(嫌怨)을 만들어 내는 자가 그처럼 많았는지 모르겠다.”
하였으니, 이 글은 공평한 의논이라 할 수 있다. 상이 일찍이 이르기를,
“황모(黃某)는 바로 조종(祖宗)에 대한 공신이다. 여러 번 복직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매번 언관(言官)들에게 저지되었다.”
하였다.
공이 관해(關海 함경도)에서 기보(畿輔 경기 지방)로 옮겨 오자, 상이 네 차례나 식물(食物)을 하사하고 갖가지로 위로하였다. 일찍이 질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의약(醫藥)을 보내므로 공이 글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는데, 거기에,
“장안(長安)을 북으로 바라보니 다행히 천일(天日)의 빛이 가깝고 위수(渭水)가 동으로 흐르니 남산(南山)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하였다.
정미년(1607, 선조40)에 병으로 경구(京口 서울 입구)의 노량(露梁)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는 의약(醫藥) 쓰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해 8월 14일에 끝내 별세, 춘추가 76이다. 임종(臨終)에 막내아들 석(奭)이,
“월정(月汀 윤군수)이 대인(大人)을 위하여 조정에 글을 올렸습니다.”
하였다. 대저 월정이 이미 신축ㆍ갑진년에 공을 신구(伸救)하는데 매우 극진하였고 이때에 다시 차자(箚子)를 올려 신구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간절하였다. 공은 곧 눈을 뜨고 서너 번 소리를 내어 응답하였다.
공은 천분(天分)이 매우 높고 기국(器局)이 준정(峻整)하여 남이 바라보면 감히 범할 수 없을 것 같았으나 그 언사를 접하게 되면 사랑하고 사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평소 남과의 교유(交遊)를 좋아하지 않았고 별다른 기호도 없이 다만 문학만을 스스로 즐기되, 깊고 넓게 가없기를 힘써, 장구(章句)의 밖에서 얻은 바가 많았다.
또 예학(禮學)에도 정밀하였으나 의장 도수(儀章度數) 따위에 집착하지 않고 경전(經傳)의 본뜻을 깊이 깨달았으며, 시(詩)는 노두(老杜 두보(杜甫)를 말함)를 주로 삼되, 경의(經義)에 근거를 두었는가 하면, 그 골격(骨格)이 개장(開張)되고 문호(門戶)가 엄밀(嚴密)하여 전인(前人)의 도철(途轍)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항시 말하기를,
“시 역시 경학(經學)에 근본하지 않으면 비속(鄙俗)하다.”
하였다.
백씨(伯氏)와의 우애가 더욱 독실하여 공직에서 퇴근하면 서로 마주 앉아 해를 보냈고, 익성공(翼成公)의 사당(祠堂)이 오래되어 무너졌으므로 종족과 상의하여 중건하고 해마다 한 차례씩 제사하였으며, 화수회를 결성하여 종족 중에 몹시 가난한 자가 있으면 비록 구마(裘馬)라도 즉시 아낌없이 내주었다.
조정에 나가서는 옛사람이 말한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믿고 벗 없이 홀로 서다.’란 말로써 자허(自許)하였다. 그러므로 벼슬길에 들어서 높은 관직에 오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고 남의 추천을 빈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도 감히 성세(聲勢)로써 서로 돕지 못하였다. 겉치레를 하지 않았고 말을 어물거리지 않았으며, 관각(館閣)의 문자 같은 것은 모두 청류 준선(淸流俊選)의 작품이었으나 자르고 지우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적고 싫어하는 자가 많아 마침내 한번 배척당한 뒤에 다시 회복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운명의 탓일 뿐이겠는가.
국가의 걱정을 가정과 같이 하여 물러나 있으면서도 일본 격문(日本檄文)을 지어 분규 해소를 꾀하였다. 소시에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소무(蘇武)가 만일 지금 세상에 있다면 반드시 사지(死地)에 들고 말 것이다. 가령 소무의 죄를 논하여 ‘흉노(匈奴)가 너에게 양(羊)을 치라고 하였으니, 양이나 치는 것이 옳을 터인데, 소선우(小單于 추장의 태자)에게 궁술(弓術)을 가르치고 또 호녀(胡女)에게 장가들어 자식까지 낳았으니, 어찌 수절(守節)하였다고 하겠느냐.’고 한다면 소무는 무슨 말로 자신을 해명하였겠느냐.”
하였다. 이는 비록 한때의 격발된 말이기는 하나, 어쩌면 이것이 예언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의 문장은 거론하는 이들이 많다. 세상에서는 대개 정호음(鄭湖陰 정사룡(鄭士龍))ㆍ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와 비등하다고 하지만, 율곡(栗谷)은 말하기를,
“경술(經術)에서 발휘되어 자득(自得)으로 이루었으니, 참으로 의리(義理)의 글이다. 마땅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와 함께 달릴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여기에 따르지 못한다.”
하였다.
공의 휘는 정욱(廷彧), 자는 경문(景文),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호(自號)는 지천자(芝川子)이다. 상조(上祖) 경(瓊)은 신라(新羅) 때 시중이었고 그후로 사대부(士大夫)가 끊이지 않았다. 익성(翼成)의 아들 휘 치신(致身)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인데, 다섯 아들이 급제한 은전(恩典)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고, 휘 사장(事長)과 휘 섬(蟾)은 모두 무계(武階)로 현달(顯達)하였고, 휘 기준(起峻)은 생원(生員)으로 별좌(別坐)에 이르고, 휘 열(悅)은 부호군(副護軍)인데, 이상이 바로 공의 고조ㆍ증조ㆍ조부ㆍ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인데, 공의 영귀(榮貴)로 3대가 모두 전례에 따라 추증되었으며, 부인 조씨(趙氏)도 정경부인에 봉하여졌다.
부인은 고려 정당문학(政堂文學) 염지(廉之)의 후손인 현감(縣監) 전(銓)의 딸로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맏이와 막내가 혁(赫)과 석(奭)으로 석은 학유(學諭)였으며, 장녀는 봉산 군수(鳳山郡守) 이욱(李郁)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측실(側室)의 딸은 판관(判官) 박유신(朴由新)에게 출가하고, 승지(承旨) 혁(赫)의 아들은 곤후(坤厚)로 일찍 죽었으며, 측실의 아들은 곤건(坤健)이고, 좌랑(佐郞) 윤천구(尹天衢)ㆍ의정(議政) 홍서봉(洪瑞鳳)ㆍ순화군 보(順和君)ㆍ군수(郡守) 신희업(辛喜業)이 네 여서(女壻)이다. 학유(學諭)의 외아들은 진사(進士) 곤재(坤載)이고 두 사위는 부사(府使) 이성항(李性恒)ㆍ군수(郡守) 김익렬(金益烈)이다.
봉산 군수 이욱의 소생은 3남인데 후재(厚載)는 첨추(僉樞), 후배(厚培)는 부사(府使), 후원(厚源)은 우의정(右議政)으로 흥운(興運)을 협찬, 세칭 우재 상공(迂齋相公)이다.
곤후(坤厚)의 소생은 2남으로 장자는 8세에 북쪽으로 공을 따라갔다가 적군에게 책살(磔殺)되었고, 그 다음이 상(裳)이며, 내외(內外)의 증손ㆍ현손이 매우 번창하였다. 상(裳)의 아들은 이징(爾徵)이고, 이징의 아들은 휘(暉)인데, 공의 제사를 맡고 있다.
공이 돌아간 지 6년째 되는 해, 즉 광해군(光海君) 임자년(1612)에 승지(承旨)가 원수 신률(申慄)의 모함으로 곤건(坤健) 및 상(裳)과 함께 음형(淫刑)에 죽었고 학유(學諭)도 남쪽으로 귀양 가서 죽었다. 그 뒤 11년째 되는 해, 즉 인조대왕(仁祖大王) 원년(元年)에 맨 먼저 그 원통함을 씻어 주었고 공의 신원(伸冤)에 대해서는 감히 함부로 거론하는 이가 없었다.
이리하여 내외 자손이 글을 올려 아뢰자, 상이 공의 도당문(都堂文)과 선조대왕의 어찰(御札)을 보고 마침내 여러 대신과 의논하여 전일의 잘못됨을 깨끗이 씻고 관직과 봉작(封爵)을 회복시켜 주었다. 따라서 세도의 쇠퇴함과 융성함이 바로 공의 진퇴(進退)에 달려 있었으니, 여기서도 공을 알 만하다. 임자년의 화(禍)에 공의 문집(文集)도 금중(禁中 궁중)에 수색되어 들어갔는데, 그후 금중의 한 내신(內臣)이 대내(大內)의 고지(故紙)로 어떤 자에게 주어 도배지로 사용하려고 할 때 공의 문집이 마침 그 속에 있으므로 이 봉산(李鳳山 공의 여서(女婿)인 봉산 군수 이욱을 말함)이 사들여 간수하였다가 뒤에 우재 상공이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특이한 일이며, 효종대왕 때 전례에 따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니, 진정 지속(遲速)이 각기 때가 있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재 상공을 따라 놀았으므로 공의 시종(始終)을 익히 들었고 또 우재 상공이 유당(幽堂)의 명을 부탁하였다. 내 감히 흔구(釁咎)의 몸으로 이 시비(是非)의 와중에 뛰어들어 그 의논을 좌우할 수 없으나 정의상 감히 사양할 수도 없어 마침내 응낙하였으나 바로 붓을 들지 못했는데, 의외에도 사람의 일이 변하여 우재 상공의 무덤에 풀이 두 번이나 묵었고 또 그 아들 진사(進士) 선(選)이 선인(先人)의 뜻을 들어 재촉하므로 차마 더 이상 끌 수 없어 마침내 눈물을 씻으며 대충 기록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종계의 무고는 / 璿系之誣
신인 모두 격분한 바인데 / 神人憤切
공이 황제 앞에 사실 아뢸 제 / 公敷帝庭
머리 부숴지고 간담 찢어졌네 / 首碎肝裂
황제가 그 정성 가엾게 여겨 / 帝愍哀誠
잘못 어서 수정하라 하여 / 亟除其衊
상과 주의 시조 설과 기가 / 周棄商契
뚜렷이 보책에 기재되니 / 昭載寶冊
종령이 고무하고 / 宗靈鼓舞
국인이 기뻐 뛰었네 / 國人歡躍
성 짓밟고 적국 없앤 이 / 屠城滅國
그 공로 기록되었지만 / 古紀其績
그 경중 비교한다면 / 較其重輕
누가 공을 맞설쏜가 / 疇與公埒
그 이름 맹부에 기록한 뒤 / 遂策盟府
모습 그리고 관작 주셨네 / 圖形錫爵
저 왜적 맹세 어기고 / 海狡渝盟
하늘도 쏠 수 있다 하므로 / 謂天可射
공이 달려가 임금께 아뢰기를 / 公入告后
속히 황제께 알려야 한다면서 / 奏聞宜亟
직접 상주문 작성하는데 / 公作奏文
거짓 없이 사실 그대로 하므로 / 不奸以實
조정 의논 의심 내어 / 庭議疑
외람되이 손질을 가했으나 / 猥加斟酌
황제가 그 충성 가상히 여겨 / 帝猶眷忠
융숭한 예물 하사하셨네 / 寵有和錫
왜란이 한창 치열할 때 / 及其亂生
왕자 모시고 나갔다가 / 護王子出
일이 크게 잘못 되어 / 事有大謬
몸이 호혈에 빠졌으나 / 身墜虎穴
꾀를 쓸 수 있다고 단정한 것은 / 謂可謀成
그 중심이 곧은 때문인데 / 在其中直
마침내 논핵따라 / 卒從吏議
갖은 욕 받았으며 / 關木受辱
떠돌며 고생하다가 / 流離困阸
일생을 죄인으로 마쳤네 / 終以謫籍
성주가 대위에 오르고 / 聖主撫運
현상이 치도를 협찬하여 / 宅相勵翼
도 높고 법 밝아져 / 世升謨明
그 억울함 신설되었으니 / 其冤遂白
극한 억울함 신설되는 것은 / 抑極而伸
본시 틀림없는 이치일세 / 惟理不忒
누가 증거 없다고 할쏜가 / 亦豈無徵
그 문헌 얼마든지 있다네 / 文獻之足
내가 월정(月汀)의 말을 증거로 / 我徵汀公
이를 유석에 기록하누나 / 用誌幽石

[주D-001]성인(聖人)이 …… 답한 뜻 :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진(陳)의 사패(司敗 관명(官名))로 있는 사람이 공자(孔子)에게 ‘노군(魯君 소공(昭公)을 말함)은 예(禮)를 압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그저 안다고 대답하였다. 다음날 그가 공자의 제자 무마기(巫馬期)를 만나서 ‘군자는 사(私)가 없다고 하던데, 군자도 사가 있을 수 있는가? 노군이 오(吳)의 여인(女人)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이는 다 같이 희성(姬姓)이다. 노군이 예를 안다면 누군들 예를 모르겠는가.’ 하므로 공자가 듣고 ‘내가 잘못했구나. 누구나 잘못이 있으면 남들이 다 알게 마련이구나.’ 했다.” 하였는데, 이는 본국(本國) 선군(先君)의 잘못을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공자의 저의를 본 사건에 인용한 말이다.
[주D-002]진회(秦檜) : 송 고종(宋高宗) 때 재상으로, 금(金) 나라와 화친(和親)을 적극 주장하였다.
[주D-003]양국충(楊國忠) : 당 현종(唐玄宗) 때의 권신(權臣)으로, 양 귀비(楊貴妃)의 오빠인데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을 충동하여 촉(蜀)으로 피난하게 하였다.
[주D-004]소무(蘇武) : 한(漢)의 절의(節義) 높은 신하로, 무제(武帝) 천한(天漢) 초기에 중랑장(中郞將)으로 흉노(匈奴)에 사신 가서 19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흉노와 화친이 성립되어서야 돌아와서 무제의 사당에 복명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1권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
명종조의 문형



정사룡(鄭士龍)

정사룡은,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호음(湖陰)이요,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영상 광필(光弼)의 조카로서 신해년에 나서 중종 기사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병자년에 중시에 장원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기사에 들어갔으며, 벼슬이 판중추부사ㆍ영경연사에 이르고, 신미년에 죽었다.
○ 공은 젊어서 행검(行檢)이 없어 광필에게 칭찬을 받지 못하였고, 선비들이 매우 부족하게 여겨 외직으로 밀려 나갔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불리어 사간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기를, “저 사람이 분을 품은 지 오래여서 반드시 앙갚음을 하리라.” 하니, 광필이 말하기를, “나는 내 조카가 비록 몸가짐은 삼가지 않았어도 반드시 사람을 해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을 안다.” 하였다. 공이 들어오자 과연 사간을 사피하고 시국의 의논에 참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공을 칭찬하고 또 광필이 사람을 안다 하였다. 《지소록》
○ 공은 산업을 일구어 부자가 되자 스스로 봉양하기를 왕공과 같이 하면서도 천성이 인색하여 손님을 접대하지 않으니, 일시의 친구들이 공에게 얻어 먹은 이가 없었으나, 다만 어득강(魚得江)이 오면 반드시 성찬으로 대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득강을 ‘정가의 식객’이라고 일렀다. 만년에 동교에 은퇴하여 임억령(林億齡)ㆍ신잠(申潛)과 함께 20년 동안이나 시 짓고, 술마시는 것으로 상종하여 맑은 복을 누리니, 풍류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아서 여염 사람들이 많이 공의 자(字)로 저의 자를 삼았다. 《지소록》


홍섬(洪暹) 선조조의 상신에 들다.


정유길(鄭惟吉) 선조조의 상신에 들다.


박충원(朴忠元)

박충원은, 자는 중초(仲初)이며, 호는 낙촌(駱村)이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참판 광영(光榮)의 손자로 무진년에 나서 중종 무자년에 생원과에 장원하고 진사과에 둘째로 합격하였으며, 신묘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병오년에 중시에 올라 호당에 뽑히어 밀원군(密原君)을 봉하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임오년에 죽으니, 나이 75세였다.
○ 중종 신축년에 영월 군수로 나갔는데, 그 고을의 전 임원이 계속하여 갑자기 죽었으므로 충원이 제물을 정결하게 마련하고 단종(端宗)께 제사하니, 이로부터 죽는 일이 없어졌다. 제문(祭文) 단종기(端宗紀)에 있다.
연려실기술 제9권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중종조의 문형(文衡)



신용개(申用漑) 상신(相臣)에 보라. ○ 《조야첨재》에는 연산조 문형이라 씌어 있다.


남곤(南袞) 상신에 보라.


이행(李荇) 상신에 보라.


김안로(金安老) 상신에 보라.


소세양(蘇世讓)

소세양은, 자는 언겸(彦謙)이며, 호는 퇴휴(退休) 또는 양곡(陽谷)이요 본관은 진주(晋州)다. 병오년에 태어나서 기사년에 문과에 뽑혀, 전한(典翰)을 거쳐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기사에 들고 찬성에 이르렀으며, 무술년에 죽었다.
○ 공은 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는데, 이행이 공을 가장 칭찬했다. 이행이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기를, “소세양은 마땅히 문형을 맡을 사람이니, 아래 벼슬에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통정(通政)으로부터 가선(嘉善)에 오르고 자헌(資憲)에 이른 것은 모두 이행이 청해서 된 것이었다. 공이 부모를 봉양하려고 청하여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제수했더니, 부임한 지 수개월이 안 되어 이행이 또 아뢰기를, “문장하는 선비를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하여, 임금이 즉시 명하여 불러들였다. 《지봉유설》
○ 공은 비록 사론의 배척을 받았으나, 일찍이 물러나 집에 있어서 맑고 한가한 복을 누린 지 거의 20년이 되었으니, 근세에 글하는 사람치고 제 수명과 부귀를 누린 사람 중에 그 보다 좋은 자가 없었다. 《지봉유설》


김안국(金安國) 《기묘당적》에 들어 있다.


성세창(成世昌) 《기묘당적》 인종 상신에 들어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Ⅲ 등과 총목(登科摠目)

태조 2년 계유 봄에 송개신(宋介臣) 등 33명을 뽑았다. 을과(乙科)에 3명, 병과(丙科)에 7명, 동진사에 23명, 다음은 모두 같다. ○ 지공거(知貢擧) : 설장수(偰長壽). 동지공거(同知貢擧) : 원굉(元紘)
동년(同年)에 감시(監試)에서 생원 안신(朴安信) 등을 뽑았다.
5년 병자에 김익정(金益精)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조준(趙浚). 동지공거 : 판삼사(判三司) 정도전(鄭道傳). 고시관(考試官) : 우승지(右承旨) 정탁(鄭擢). 좌산기(左散騎) : 이황(李滉). 대사성(大司成) : 함부림(咸傅霖). 판교서(判校書) : 유관(柳觀). 사헌중승(司憲中丞) : 이원(李原). 성균관 좨주(祭酒) : 장덕량(張德良). 전부(典簿) : 강사경(姜思敬)
동년에 생원 유학(幼學) 이수(李隨) 등을 뽑았다.
정종 원년 기묘에 전가식(田可植)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
동년 생원 유학 서미성(徐彌性)과 진사 의금부 진무 서진 등을 뽑았다.
태종 원년 신사에 즉위 증광시(增廣試)에서 조말생(趙末生)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영삼사(領三司) 하륜(河崙)
동년 생원 조종생(趙從生)을 뽑았다.
2년 임오에 신효(申曉)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권근(權近). 동지공거 : 이첨(李詹)
동년에 생원 민무회(閔無悔) 등을 뽑았다.
5년 을유에 유면(兪勉)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별장(別將) 조서로(趙瑞老) 등을 뽑았다.
7년 정해에 중시(重試)에서 예문관 직제(藝文館直提) 변계량(卞季良) 등을 뽑았다. 독권관(讀卷官) : 권근(權近) 등 10명
8년 무자에 어변갑(魚變甲)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이조 판서 이직(李穆). 동지공거 : 병조 판서 유량(柳亮). 고시관 : 변계량ㆍ김여지(金汝知)ㆍ장자숭(張子崇)ㆍ박안신(朴安信)ㆍ장이(張弛). 대독관(對讀官) : 이간(李簡)ㆍ이안유(李安柔). 전시(殿試) 독권관 : 황희(黃喜)ㆍ이조(李慥)
동년에 생원 별장 윤수(尹粹) 등을 뽑았다.
11년 신묘년에 권극중(權克中)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시제(試題) : 치도(治道)의 본말(本末) ○ 지공거 : 하륜(河崙). 동지공거 : 성석린(成石磷). 고시관 : 양수(梁需)ㆍ윤회탁(尹會卓)ㆍ신유의(愼柳顗)ㆍ박서생(朴瑞生). 대독관 : 진준(陳遵)ㆍ양여공(梁汝恭). 전시(殿試) 독권관(讀卷官) : 유백순(柳伯淳)ㆍ김여지(金汝知)
동년에 생원 유학 권극화(權克和) 등을 뽑았다.
14년 갑오에 정인지(鄭麟趾) 등 33명을 뽑았다. 처음으로 1등 3명, 2등 7명, 3등 23명이라 했다. ○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도리[天人相感之道]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조서강(趙瑞康)을 뽑았다.
친시 알성시(親試謁聖試)에서 권제(權踶) 등 25명을 뽑고, 정상(鄭常) 1명에게 급제를 은사(恩賜)하였다. 성균관에 행차하여 임금이 친히 시무ㆍ지인ㆍ임인(時務知人任人)을 시제(試題)로 내었다. 지인ㆍ임인(知人任人)은 사람을 알아 보는 것과 쓰는 것
16년 병신 친시(親試)에서 정지담(鄭之澹) 등 9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시제 : 충효(忠孝)
임금이 친히 중시(重試)에 임하여 김자(金赭)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는 위와 같다.
17년 정유에 식년시(式年試)를 식년 제도가 이해부터 시작되었다. 친시하여 한혜(韓惠)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권채(權採) 등을 뽑았다.
세종 원년 기해 즉위 증광시(增廣試)에서 조상치(趙尙治)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유관(柳觀)ㆍ변계량(卞季良). 고시관 : 허조(許稠)ㆍ박은(朴訔)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성이검(成以儉) 등을 뽑았다.
2년 경자 식년시에서 안숭선(安崇善)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의 대책 시제 : 무농(務農)ㆍ예양(禮讓)ㆍ성곽(城郭)ㆍ수군(水軍) ○ 명관(命官) : 우의정 이원(李原). 고시관(考試官) : 예조 판서 허조(許稠)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민원(閔瑗)을 뽑았다.
5년 계묘에 식년시에서 정집(鄭楫) 등 32명을 뽑았다. 김시석(金視石)이 전시(殿試) 전에 고향에 내려갔으므로 점수가 차지 않아 병오년 식년시에 추가하여 보게 하였다.
동년에 생원 유학 남계영(南季瑛)을 뽑았다.
8년 병오에 식년시에서 황보량(皇甫良) 등 34명을 뽑았다. 김시석(金視石)이 추가되어 붙었다.
동년에 생원 유학(幼學) 신석견(辛石堅)을 뽑았다.
9년 정미에 등극 친시(登極親試) 명 나라 선종(宣宗)이 등극(登極)한 경축겸 중시(重試)로 식년시에 당(當)하였다. 에서 남계영(南季瑛) 등 20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금ㆍ은의 방물(方物)을 면제해 주기를 청하다.[請免金銀方物] 대책 시제 : 토지 제도[制田之法]
중시 병오년 식년시를 연기하여 실시하다. 에서 정인지(鄭麟趾) 등 12명을 뽑았다. 1등 3명ㆍ2등 9명
11년 기유 식년시에서 허사문(許斯文) 등 33명을 뽑았다. 주문(主文) :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회(尹淮)
동년에 생원 유지(柳智) 등을 뽑았다.
친시 알성(親試謁聖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에서 조주(趙注) 등 3명을 뽑았다. 시제 : 본조(本朝)의 찬성(贊成) 권근(權近)이 7월 편도전[七月篇圖箋]을 바치다.
14년 임자 식년시에서 김길통(金吉通)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녹사(錄事) 정창(鄭昌)을 뽑았다.
16년 갑인 알성ㆍ친시에서 최항(崔恒) 등 25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 □
17년 을묘 식년시에서 이함녕(李咸寧)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종학(宗學)ㆍ호구패(戶口牌)ㆍ병농(兵農)
동년에 생원 유학 남지(南輊)를 뽑았다.
18년 병진에 친시 명 나라 영종의 등극 경축 겸 중시로 식년시에 당하였다. 에서 윤사균(尹士昀) 등 9명을 뽑았다.
중시(重試)에서 남수문(南秀文) 등 12명을 뽑았다. 이 시험 합격자는 국적(國籍)에 있지 않다.
20년 무오 식년시에서 하위지(河緯地) 등 33명을 뽑았다. 처음 진사시(進士試)를 설치하였다. 동진사(同進事)를 정과(丁科)로 개정 ○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왕정(王政)의 손익(損益) ○ 시관(試官) : 판중추(判中樞) 허조(許稠)
동년에 생원시에서 유학 최청강(崔淸江) 등을, 진사(進士)시에서 유학 신숙주(申叔舟) 등을 뽑았다.
21년 기미 친시에서 최경신(崔敬身) 등 10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우의정 신개(申槩)
23년 신유 식년시에서 이석형(李石亨) 등 33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신개(申槩)ㆍ대제학(大提學) 권제(權踶)
동년에 생원 사정(司正) 이석형(李石亨) 등과 진사시(進士試)에서 사정(司正) 이석형 등을 뽑았다.
24년 임술 친시에서 이교연(李皎然) 등 8명을 뽑았다.
26년 갑자 식년시에서 황효원(黃孝源)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한백륜(韓伯倫) 등을 뽑았다. 무오년에 법을 정하여 연령을 25세로 한정하여 응시하게 하였다. 계해년에 법도에 어긋나게 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진사시를 정지시키고 개혁하였다. 병인년에 생원 2백 명을 시험보아 뽑았다.
29년 정묘 식년시에서 이승소(李承召)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탁중(卓中)을 뽑았다.
추과(秋科) 중시에서 성삼문(成三問) 등 19명을 뽑았다. 고관(考官) : 좌의정 하연(河演])ㆍ이조 판서 정인지ㆍ예조 판서 허조(許稠)ㆍ도승지(都承旨) 이사철(李思哲)
친시 중시(重試) 대거(對擧) 에서 강희맹(姜希孟) 등 26명을 뽑았다.
32년 경오 식년시 명 나라 문종이 등극한 때이므로 실시했다. 에서 권남(權擥) 등 33명을 뽑았다. 임금이 낸 대책 시제 : 어진 이를 구하고 간(諫)하는 것을 따르며, 욕심을 적게 하고 정치를 부지런히 함[求賢從諫寡慾勤政] ○ 시관(試官) : 안지(安止)
동년에 생원 충순위(忠順衛) 홍숙부(洪叔阜)를 뽑았다.
문종 원년 신미 즉위 증광시(增廣試)에서 홍응(洪應) 등 40명을 뽑았다.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학문의 요령과 정치하는 방법. 시관(試官) : 영의정 하연(河演). 예조 판서 김양몽(金陽蒙). 이조 참판 이사철(李思哲)
동년에 생원 유학 손순효(孫舜孝) 등을 뽑았다.
단종 원년 계유 즉위 증광시에서 이숭원(李崇元) 등 40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유학 김상(金湘), 진사 유학 최한보(崔漢輔) 등을 뽑았다. 연령 제한 법을 폐지했다. 십운시(十韻詩)를 고시(古詩)로 개정했다.
가을 식년시에서 김수녕(金壽寧)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 : 수성난(守成難)
동년 생원시에서 유학 김성원(金性源)과 진사 유학에 윤탁(尹濯)을 뽑았다.
2년 갑술 증광시에서 정효상(鄭孝常)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군사의 식량[兵食] ○ 시관(試官) : 신숙주(申叔舟)
세조 2년 병자 식년시에서 임원준(任元濬)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현재(賢才)ㆍ용관(冗官)ㆍ성곽(城郭) ○ 시관 : 박중손(朴仲孫)
동년에 생원 민수(閔粹)와 진사시에서 박순(朴詢)을 뽑았다.
3년 정축 친시 명 나라 영종(英宗) 복위 경축 겸 중시 대거 알성시를 치른 후 대궐로 돌아와 시권을 거두었다. 에서 강자평(姜子平) 등 13명을 뽑았다. 시관 : 신숙주(申叔舟)
중시에서 이영은(李永垠) 등 21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도적(盜賊)ㆍ육축(六畜)ㆍ군기(軍器) ○ 시관 : 영중추(領中樞) 이변(李邊)
별시에서 오응(吳凝) 등 13명을 뽑았다.
4년 무인 알성 별시에서 도하(都夏) 등 5명을 뽑았다.
5년 기묘 식년시에서 고태정(高台鼎) 등 33명을 뽑았다. 사신이 입경할 날짜가 박두하였으므로 회시(會試) 제3장에서 단지 전책(殿策)은 1도만을 보였다. ○ 시관 : 박중손(朴仲孫)
동년 생원시에서 유순(柳洵)과 진사에서 이복선(李復善)을 뽑았다.
6년 경진 춘장(春場)에서 임금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와 초시 유생에게 강(講)을 시켰다. 이맹현(李孟賢) 등 4명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최경지(崔敬止) 등 20명을 뽑았다. 무과(武科)에서 1천 8백 명을 뽑았다.
겨울 평양(平壤) 별시 임금이 친히 부벽루(浮碧樓)에 임하였다. 에서 유자한(柳自漢) 등 22명을 뽑았다. 무과(武科) 1천 8백 명을 뽑았다.
7년 신사 별시에서 하숙산 등 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우리나라 사방의 허실[我國四方虛實]
8년 임오 가을 식년과에서 유자빈(柳自濱) 등 33명을 뽑았다. 강경(講經)을 면제함. 전시 대책 시제 : 문무(文武) ○ 명관 : 신숙주
동년에 생원 배맹후(裵孟厚)와 진사 배맹후를 뽑았다.
가을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에서 강안중(姜安重) 등 9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예악(禮樂) 용인(用人) ○ 이 시험 합격자 명단은 국적(國籍)에 실리지 않았다.
10년 갑신 춘시(春試)에서 온양 온천에서 과거를 보였다. 이육(李陸) 등 13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신숙주(申叔舟)
11년 을유 식년시에서 성진(成晉) 등 33명을 뽑았다. 강경(講經)을 면제하다. ○ 판관(判官) 현득리(玄得利)가 끝자리에 앉았다가 누이 아들 유양춘(柳陽春)의 시권을 몰래 바꾸어서 합격시켰다. 양춘이 주범으로 파면되자 제명되었다.
동년 생원 이창신(李昌臣)과 진사 정지(鄭摯)를 뽑았다.
7월 알성시에서 이봉(李封) 등 3명을 뽑았다.
12년 병술 봄에 고성(高城)에서 오대산에 행차하였다. 시험보여 진지(陳祉) 등 18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순성(巡省) 명관 : 신숙주
봄 알성시에서 임금이 친히 문묘에 제사를 지내고 선비를 뽑았다. 참지(叅知) 신승선(愼承善) 등 17명을 뽑았다. 명관 : 신숙주
3월 중시에서 김극검(金克儉) 등 9명을 뽑았다. 명관 : 신숙주
5월 10일 발영시(拔英試)에서 지사(知事) 김수온(金守溫) 등 4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치세(治世)에 유능한 신하요, 난세(亂世)에 간활한 영웅[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 ○ 명관 : 신숙주
등준시(登俊試)에서 판중추(判中樞) 김수온 등 12명을 뽑았다.
14년 무자 봄 식년시에서 이인형(李仁亨) 등 33명을 뽑았다. 강경(講經)을 면제하였다. ○ 시관 : 영순군(永順君) 보(溥)ㆍ판중추(判中樞) 정창손(鄭昌孫)ㆍ신숙주ㆍ김수온ㆍ지중추(知中樞) 어효첨(魚孝瞻)ㆍ홍응(洪應)ㆍ송처관(宋處寬)ㆍ서거정(徐居正)ㆍ이석형(李石亨)ㆍ대사성 김예몽(金禮蒙)ㆍ참의(叅議) 신후갑(愼後甲)ㆍ대간 상□(尙□)ㆍ승지(承旨) 이극증(李克增)
동년에 생원 조형문(趙亨門)과 진사 김흔(金訢)을 뽑았다.
2월 중시에서 영순군 보(溥) 등 5명을 뽑았다. 임금이 전시 대책을 출제하다. ○ 명관 : 신숙주. 온천 행차시
온양(溫陽) 별시에서 유자광(柳子光) 등 4명을 뽑았다.
예종 원년 기축 가을에 즉위 경축 채수(蔡壽) 등 33명을 뽑았다. 표(表)와 대책을 시험하고, 겸하여 글을 지을 수 있는 자에게는 이를 허락하였다. 명관 : 신숙주ㆍ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
동년 생원시에서 김괴(金瑰)와 진사시에서 한언(韓堰)을 뽑았다.
성종 원년 경인에 별시에서 신준(申浚) 등 16명을 뽑았다.
2년 신묘에 봄 별시에서 김흔(金訢) 등 9명을 뽑았다.
3년 임진 봄 식년시에서 계묘년 식년시에서 사고가 있었으므로 연기 시행했다. 안양생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이승언(李承彦)과 진사시에서 유인종(柳麟種)을 뽑았다.
5년 갑오 식년시에서 최관(崔灌)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조지서(趙之瑞)와 진사시에서 신종호(申從濩)를 뽑았다.
6년 을미 친시에서 성균관에 거동하여 석채(釋菜)를 하였다. 박형문(朴衡文) 등 20명을 뽑았다.
7년 병신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윤희손(尹喜孫) 등 13명을 뽑았다.
중시에서 정회(鄭淮) 등 10명을 뽑았다.
8년 정유 봄 식년시에서 신계거(辛季琚) 등 33명을 뽑았다. 명관 : 판추(判樞) 김국광(金國光)
동년에 생원 남궁찬(南宮璨)과 진사 남세철(南世聃)을 뽑았다.
8월 친시에서 반궁(泮宮)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권건(權健) 등 4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본조(本朝)에서 중국의 궁각(弓角)을 사들이는 것을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다. ○ 명관 : 윤자운(尹子雲)
9년 무술 겨울 친시에서 권경희(權景禧) 등 5명을 뽑았다.
10년 기해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정광세(鄭光世) 등 10명을 뽑았다.
중시에서 조지서(趙之瑞) 등 5명을 뽑았다.
11년 경자 친시에서 최서(崔湑) 등 3명을 뽑았다. 석전(釋奠)을 친히 행하였다. ○ 표(表)의 시제 : 당(唐) 재상이 한유(韓愈)를 조주(潮州)에 귀양 보내는 것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다.
봄 식년시에서 신종호(申從濩)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최연손(崔連孫)과 진사시에서 이오(李鰲)를 뽑았다.
12년 신축 친시에서 윤달신(尹達莘) 등 13명을 뽑았다.
13년 임인 친시에서 진현시(進賢試) 대거(對擧). 성균관에 거동하여 석채(釋菜)를 행했다. 김기손(金驥孫) 등 11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정통(正統)
진현시(進賢試)에서 이승건(李承健) 등을 뽑았다.
14년 계묘 봄 식년시에서 이문좌(李文佐)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강혼(姜渾)과 진사 이상(李瑺)을 뽑았다.
16년 을사 별시에서 정희왕후(貞熹王后)를 태묘(太廟)에 합부(合祔)하고 6월에 알성한 후 시험을 보여 뽑았다. 송영(宋瑛) 등 16명을 뽑았다.
17년 병오 겨울 식년시에서 민이(閔頤)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일손(金馹孫)과 진사 임희재(任熙載) 등을 뽑았다.
중시에서 신종호 등 8명을 뽑았다.
18년 정미 3월 별시에서 유순정(柳順汀) 등 5명을 뽑았다.
19년 무신 4월 별시에서 명 나라 효종(孝宗) 등극 경축 이수공(李守恭) 등 4명을 뽑았다.
20년 기유에 식년시에서 김전(金詮)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김언평(金彦平)과 진사시에서 김천령(金千齡)을 뽑았다.
21년 경술 12월 별시에서 명 나라 태자의 탄생 송일(宋軼) 등 10명을 뽑았다.
22년 신해 4월 별시에서 권세형(權世衡) 등 6명을 뽑았다.
23년 임자 식년시에서 강숙돌(姜叔突)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정희량(鄭希良)과 진사 윤효빙(尹孝聘) 등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명 나라 황태자 책봉 경축 이희맹(李希孟) 등 40명을 뽑았다.
25년 갑인 별시에서 한훈(韓訓) 등 22명을 뽑았다.
연산군 원년 을묘에 즉위 별시에서 이목(李穆)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이장곤(李長坤)과 진사 조계형(曺繼衡) 등을 뽑았다.
2년 병진 식년시에서 을묘년 식년시를 연기 시행하였다. 김천령(金千齡)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극성(金克成)과 진사 김우서(金禹瑞) 등을 뽑았다.
3년 정사 9월 별시에서 성종을 태묘(太廟)에 합부(合祔)한 경사 겸 중시 대거 권홍 등 13명을 뽑았다.
9월 중시에서 윤장(尹璋) 등 10명을 뽑았다.
4년 무오 식년시에서 정인인(鄭麟仁)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세충(金世忠)과 진사 이광조(李光祖) 등을 뽑았다.
별시에서 김극성 등 6명을 뽑았다.
7년 신유 식년시에서 이부(李頫)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에 이수정(李守貞)과 진사 김안국(金安國) 등을 뽑았다.
8년 임술 별시에서 알성한 후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송세림(宋世琳) 등 14명을 뽑았다.
9년 계해 별시에서 세자 책봉(世子冊封) 경사 권복(權福) 등 8명을 뽑았다.
10년 갑자 별시에서 윤은필(尹殷弼) 등 9명을 뽑았다.
식년시에서 이자(李耔) 등 31명을 뽑았다. 합격권에 들은 이세홍(李世弘)이 전시(殿試)를 보기에 앞서 집안 화를 당하였으므로 정묘년 증광시에 추가로 붙였다.
동년에 생원 유예신(柳禮臣)과 진사 정백붕(鄭百朋)을 뽑았다.
11월 별시에서 최세절(崔世節) 등 19명을 뽑았다.
12년 병인 4월 별시에서 김안로 등 17명을 뽑았다. 칠률추천시(七律鞦韆詩) ○ 4등까지로 구분하였다.
중종 원년 병인 9월 별시에서 진식(陳植) 등 15명을 뽑았다.
2년 정묘 즉위 별시에서 김정(金淨) 등 36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유돈(柳墩)과 진사 박우(朴祐) 등을 뽑았다.
식년시에서 유옥(柳沃)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구(金絿)와 진사 김구(金絿)를 뽑았다.
중시에서 권홍(權弘) 등 6명을 뽑았다.
3년 무진 알성시에서 권성(權晟) 등 3명을 뽑았다.
4년 기사 별시에서 김정국(金正國) 등 18명을 뽑았다.
5년 경오 식년시에서 이려(李膂)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김취정(金就精)과 진사 조광조(趙光祖)를 뽑았다.
6년 신미 별시에서 강태수 등 16명을 뽑았다. 명관 : 김수동(金壽童)ㆍ문형 신용개(申用漑) ○ 강경이 있었다.
8년 계유 2월 친경(親耕)하고 별시에서 한충(韓忠) 등 10명을 뽑았다. 강경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위징(魏徵)이 인정(仁政)을 행할 것을 청하다. 송(頌)의 시제 : 상제가 좋은 보필을 주다.[帝賚弼良] 대책 시제 : 주화(酒禍)
가을 식년시에서 표빙(表憑)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이약빙(李若氷)과 진사 신잠(申潛)을 뽑았다.
9년 갑술 5월 명경별시(明經別試)에서 최호(崔灝) 등 4명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박세희(朴世熹) 등 20명을 뽑았다.
10년 을해 8월 별시에서 장옥(張玉) 등 15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홍범(洪範)
11년 병자 식년시에서 김유신(金庾信)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심연원(沈連源)과 진사 조연(趙連)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심희전(沈希佺) 등 11명을 뽑았다. 중시로 식년시를 대신하였다.
중시에서 정사룡(鄭士龍) 등 3명을 뽑았다.
12년 정축 10월 별시에서 허관(許寬) 등 18명을 뽑았다.
14년 기묘 봄 식년시에서 박소(朴紹) 등 29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이원휘(李元徽)와 진사 권연(權璉)을 뽑았다.
4월 현량과에 김식(金湜) 등 28명을 천거하였다.
10월 별시에서 김필(金珌) 등 19명을 뽑았다.
15년 경진 9월 별시에서 세자를 책봉 송염(宋㻩) 등 11명을 뽑았다.
16년 신사 12월 별시에서 명 나라 세종(世宗) 등극 경축 조세영 등 18명을 뽑았다. 명관 : 좌의정 남곤(南袞)
17년 임오 식년시에서 강전(姜銓)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채무일(蔡無逸)과 진사 이거(李璖)를 뽑았다.
11월 별시에서 세자관례(世子冠禮) 경축 강숭덕(姜崇德) 등 7명을 뽑았다.
18년 계미 3월 알성시에서 신영(申瑛) 등 4명을 뽑았다.
19년 갑신 별시에서 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한 것을 경축 이효충(李效忠) 등 30명을 뽑았다.
20년 을유 식년시에서 심광언(沈光彥) 등 33명을 뽑았다 명관 : 영중추(領中樞) 정광필(鄭光弼)
동년 생원 신억령(申億齡), 진사 김개(金鎧)를 뽑았다.
21년 병술 9월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김홍윤(金弘胤) 등 13명을 뽑았다. 초시(初試)에서 3백 명
중시에서 박상(朴祥) 등 8명을 뽑았다.
23년 무자 식년시에서 정희안(鄭希顔)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박충원(朴忠元), 진사 윤심(尹沈)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김만균(金萬鈞) 등 19명을 뽑았다.
10월 여주별시(驪州別試)에서 임금이 영릉(英陵)에 가서 친히 제사지내고 청심루(淸心樓)에 가서 선비에게 시험보임. 신석간(申石澗) 등 3명을 뽑았다.
26년 신묘 식년시에서 김충렬(金忠烈)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추(李樞), 진사 이윤경(李潤慶)을 뽑았다.
27년 임진 2월 별시에서 성균관과 4학의 도기(到記) 유생에게 시험보여 뽑았다. 초시(初試)가 있었다. 정대년(鄭大年) 등 5명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정현왕후(貞顯王后)를 태묘에 합부하였다. 이현당(李賢讜) 등 8명을 뽑았다.
28년 계사 5월 별시에서 이현충(李顯忠) 등 14명을 뽑았다.
29년 갑오 식년시에서 김희성(金希聖) 등 2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채승선(蔡承先), 진사 진우(陳宇)를 뽑았다.
9월 별시에서 임금이 친히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이존인(李遵仁) 등 8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왕도론(王道論)
30년 을미 별시에서 이출(李秫) 등 11명을 뽑았다.
9월 임금이 시학(視學)한 별시에서 이을규(李乙奎) 등 7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우리나라 우백익(虞伯益)이 현인을 임용하거던 의심하지 말 것을 청하다. ○ 민전(閔荃) 이하 3명이 같은 등수로 합격하였다.
9월 송도(松都) 별시에서 임금이 친히 제릉(齊陵)에 제사지내고 개성에서 선비에게 시험을 보임 진복창(陳復昌) 등 3명을 뽑았다.
31년 병신 별시에서 중시 대거(重試對擧) 이정(李楨) 등 7명을 뽑았다.
3월 중시에서 홍춘경(洪春卿) 등 5명을 뽑았다.
8월 경회루 친시에서 각촉시(刻燭試) 허경(許坰) 등 4명을 뽑았다.
32년 정유 식년시에서 윤현(尹鉉) 등 27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송찬(宋贊), 진사 최계훈(崔繼勳)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명 나라 황태자 탄생 심통원(沈通源) 등 8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좌의정 김안로
33년 무술년 별시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함. 정유길(鄭惟吉) 등 8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목 : 본조 예조에서 우리나라 명신 언행록 편찬을 청하다. ○ 즉일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9월 별시에서 탁영시(擢英試)로 대거(對擧)함. 이만영(李萬榮) 등 15명을 뽑았다.
탁영시(擢英試)에서 나세찬(羅世纘) 등 12명을 뽑았다.
34년 기해 별시에서 성몽설(成夢說) 등 12명을 뽑았다.
11월 임금이 친히 광화문(光化門)에 나와 앉아서 별시 김주(金澍) 등 6명을 뽑았다.
35년 경자 식년시에서 김윤정(金胤鼎)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양응정(梁應鼎), 진사 김범(金範)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윤희성(尹希聖) 등 19명을 뽑았다.
36년 신축년 성균관에 거동한 별시에서 유혼(柳渾) 등 5명을 뽑았다.
37년 임인 정시(庭試)에서 도기유생(到記儒生)에게 보임 이건(李楗) 등 4명을 뽑았다.
38년 계묘 9월 식년시에서 노수신(盧守愼)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광전(李光前), 진사 김균(金鈞)을 뽑았다.
39년 갑진 9월 별시에서 권용(權容) 등 23명을 뽑았다.
명종 원년 병오 즉위 증광시에서 최응룡(崔應龍)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박민헌(朴民獻), 진사 김경운(金慶雲)을 뽑았다.
10월 식년시에서 심수경(沈守慶)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비(尹棐), 진사 김홍도(金弘度)를 뽑았다.
10월 중시에서 유경심(柳景深) 등 10명을 뽑았다.
2년 정미 윤9월(閏九月) 알성시에서 이수철(李壽鐵) 등 6명을 뽑았다. 즉일로 방을 발표하였다.
3년 무신 중종을 태묘에 합부(合祔)하였다. 별시에서 김홍도 등 22명을 뽑았다.
4년 기유 민시중(閔時中)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홍부(洪溥), 진사 이형(李泂)을 뽑았다.
6년 신해 별시에서 문묘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김충(金沖)등 5명을 뽑았다.
7년 임자 식년시에서 황서(黃瑞) 등 3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정엄(鄭淹), 진사 김우굉(金宇宏)을 뽑았다.
8년 계축 3월 별시에서 친경(親耕) 김경원(金慶元) 등 39명을 뽑았다. 특명으로 차중(次中) 이상은 모두 급제를 내려 주게 하였는데, 사헌부에서 아뢰어 고집하였으나 허락지 않았다. 명관 : 좌의정 상진(尙震) ○ 전시의 대책 시제 : 치효(治效)
9월 명정전(明政殿) 친시에서 경서로써 선비에게 시험을 보였다. 박순 등 4명을 뽑았다.
10년 을묘 식년시에서 한복(韓輹)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두수(尹斗壽), 진사 서엄(徐崦)을 뽑았다.
11년 병진 2월 중시에서 양응정(梁應鼎) 등 9명을 뽑았다.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이민각(李民覺) 등 12명을 뽑았다.
7월 알성시에서 정윤희(丁胤禧) 등 6명을 뽑았다.
13년 무오 8월 별시에서 세자 책봉(世子冊封) 오운기 등 11명을 뽑았다. 대제학 정사룡(鄭士龍)
10월 식년시에서 고경명(高敬命) 등 35명을 뽑았다. 명관 : 우의정 이준경(李浚慶)
동년 생원 주박(周博), 진사 이중립(李中立)을 뽑았다.
14년 기미 9월 경회루 정시(庭試)에서 유영길(柳永吉) 등 12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순창(順昌)에서 승리를 얻음을 송축하다.
15년 경신 9월 별시에서 세자가 관례(冠禮)를 행하고 입학하였다. 민덕봉(閔德鳳) 등 18명을 뽑았다. 초시(初試)에 6백명 ○ 전시(殿試) 대책(對策) 시제목 : 용인(用人)
16년 신유 식년시에서 최립(崔岦) 등 3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조정기(趙廷機), 진사 홍성민(洪聖民)을 뽑았다.
17년 계해 3월 알성시에 이정빈(李廷賓) 등 4명을 뽑았다. 즉일로 방을 발표하였다.
19년 갑자 식년시에서 이이(李珥)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이(李珥), 진사 조원(趙瑗)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종계(宗系)가 변무(辨誣)되었다. 이광헌(李光軒) 등 12명을 뽑았다.
20년 을축 3월 알성시에서 김효원(金孝元) 등 4명을 뽑았다. 표제 : 주(周) 나라 태보(太保)가 여오표(旅獒表)를 받지 말 것을 청하다.
21년 병인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이충원(李忠元) 등 17명을 뽑았다.
윤10월 중시에서 정윤희(丁胤禧) 등 6명을 뽑았다.
선조 정묘 11월 식년시에서 권수(權燧)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에 조휘(趙徽), 진사에 강신(姜紳)을 뽑았다. 또는 진(縉)이라고도 한다.
원년 무진 즉위 증광시에서 정희적(鄭熙績)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에 허봉(許篈), 진사에 하락(河洛)을 뽑았다.
2년 9월 알성시에서 노진(盧稹)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목 : 주(周) 나라 군신(群臣)들의 두 노인을 얻은 것을 축하한다. ○ 명관 : 우의정 홍섬(洪暹). 대제학 박순(朴淳)
10월 별시에서 명종을 태묘에 합부함. 윤담휴(尹覃休) 등 1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宋)의 조개(趙槪)가 《간림(諫林)》을 바치다.
3년 경오 식년시에서 김대명(金大鳴)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윤정(尹渟), 진사시에서 정안(鄭安)을 뽑았다.
5년 임신 3월 춘당대(春塘臺) 친시에서 심충겸(沈忠謙) 등 15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宋)의 강주(江州) 지사(知使) 주술(周述)이 백록동(白鹿洞) 서원에 구경(九經)을 내려주기를 청하다. ○ 이튿날 합격자 발표를 하였다.
3월 친경(親耕) 별시에서 유근(柳根) 등 16명을 뽑았다.
12월 별시에서 신종(神宗)이 등극함. 임영로(壬榮老) 등 2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인(仁)ㆍ명(明)ㆍ무(武)의 도를 다하기를 청하다. ○ 시관 : 유희춘(柳希春)
6년 계유 식년시에서 주덕원(朱德元)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이산악(李山岳), 진사시에서 김굉(金鋐)을 뽑았다.
9월 알성시에서 이발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사호(四皓)가 태자를 도와 보호하라는 명을 감사하다
7년 갑술 별시에서 종계(宗系)가 변무(辨誣)됨 정상(鄭詳)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고려에서 송(宋)에 여진(女眞)에 통하지 말기를 청하다.
9년 병자 식년시에서 윤기(尹箕) 기(祈) 자로 고침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국(李), 진사 윤형(尹泂)을 뽑았다.
9월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정곤수(鄭昆壽) 등 1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唐)의 사문박사(四門博士) 한유(韓愈)가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를 지어 올리다.
중시(重試)에서 조광익(曹光益)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唐) 나라 두보(杜甫)가 묵제(墨制)로 휴가주어 집에 가보게 한 것을 감사하다.
10년 정축 알성시에서 김여물(金汝岉)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제목 : 송(宋)의 팽사영(彭思永)이 벼슬의 계자(階資)를 내지(內旨)로 올려주지 말 것을 청하다.
9월 별시에서 인순왕후를 종묘에 합부하였다. 강신(姜紳) 등 17명을 뽑았다.
12년 기묘 식년시에 홍인상 이름을 이(履)로 고쳤다.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여섯 가지 폐단
동년 생원 한준겸(韓浚謙), 진사 이호민(李好閔)을 뽑았다.
13년 경진 2월 알성시에서 황치성(黃致誠) 등 12명을 뽑았다. 송(宋) 나라 정이(程頤) 등이 수정학제(修正學制)를 바치다.
3월 별시에서 종묘에 합부함 황혁(黃赫) 등 27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재용(財用)과 사람을 임용하다.
15년 임오 식년시에서 장운익(張雲翼)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조익(趙翊), 진사시에서 우홍익(禹弘翼)을 뽑았다.
16년 계미 4월 알성시에서 차운로(車雲輅) 등 12명을 뽑았다.
8월 별시에서 명 나라 황태자 탄생 심우정(沈友正)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군사ㆍ식량[兵食]
12월 정시(廷試)에서 이홍로(李弘老)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제치보방(制治保邦)
17년 갑신 서총대(瑞葱臺) 친시에서 원점(圓點)이 규정에 달한 유생에게 시험을 보임. 그날 합격 발표 박호(朴箎) 등 4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목 : 송(宋)의 장제현(張齊賢)이 10가지 대책을 조목조목 진술하여 바치다. ○ 명관 : 영의정 박순(朴淳)
8월 별시에서 민인백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이 마음을 미루어 이런 정치를 행하소서[推是心行是政]
18년 을유 식년시에서 고한운(高翰雲)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상의(李尙毅), 진사 정협(鄭恊)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 최철견(崔鐵堅) 등 12명을 뽑았다. 초시(初試)에 3백 명. 경서 강독이 있었음. ○ 주문(主文) 이산해(李山海)
19년 병술 9월 알성시에 여계선 등 9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이필(李泌)이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다.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남근(南瑾) 등 14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육경(六經)
중시에서 이장영(李長榮) 등 6명을 뽑았다.
21년 무자 식년시에서 김시헌(金時獻)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영현(尹英賢), 진사 김의원(金義元)을 뽑았다.
5월 알성시에서 황신 등 11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漢) 나라 정중(鄭衆)이 군사마(軍司馬)에 임명을 사양하다.
22년 기축 증광시에서 명 나라 《회전(會典)》에 종계(宗系)를 고쳐 반포하였다. 유몽인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황근중(黃謹中), 진사 이성길(李成吉)을 뽑았다.
23년 경인 증광시에서 정여립(鄭汝立)을 토벌한 후 존호(尊號)를 올림. 남이공(南以恭) 등 40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宋) 나라 조보(趙普)가 태원(太原)을 먼저 치지 말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김광엽(金光燁), 진사 윤선(尹暄)을 뽑았다.
24년 신묘 식년시에서 민유부(閔有孚)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성순(成恂), 진사 민여임(閔汝任)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이유함(李惟緘) 등 15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홍범(洪範)
25년 임진 7월 용만(龍灣) 별시에서 정종명(鄭宗溟) 증 4명을 뽑았다.
26년 계사 12월 전주(全州) 별시에서 세자가 분조(分朝)하였다. 윤길(尹) 등 9명을 뽑았다.
27년 갑오 2월 정시(庭試)에서 박동열(朴東說) 등 13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명(明) 나라 한취선(韓取善)이 식량을 운반하여 조선을 구하기를 청하다.
10월 정시(庭試)에서 이때 임금이 정동(貞洞)에 머무름. 유담(柳潭) 등 10명을 뽑았다. 하(夏)의 군신(群臣)이 임금이 나쁜 옷을 입고 거친 식사함을 치하하다.
28년 을미 11월 별시에서 중전(中殿)이 오랜 동안 해주(海州)에 머물렀으므로 승지 기자헌(奇自獻)을 보내어 선비에게 시험보임. 조정견 등 3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宋) 나라 장준(張浚)이 임금으로 하여금 친히 건강(建康)에 나와 머물러서 중원(中原)의 인심을 움직이기를 청하다.
12월 별시에서 성이민(成以敏) 등 15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宋) 나라 범진(范鎭)이 중서(中書)ㆍ추밀(樞密)ㆍ삼사(三司)로 민정(民政)ㆍ군정(軍政)ㆍ재정(財政)을 아울러 맡게 하여 국가 비용을 조절하기를 청하다.
29년 병신 11월 정시(庭試)에서 안종록(安宗祿) 등 19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이필(李泌)이 한고(韓皐)에 명하여 돌아가 아버지를 보게 하기를 청하다.
30년 정유 3월 별시에서 중시 대거 조수인(趙守寅) 등 19명을 뽑았다. 초시에 3백 명 응시, 두 곳으로 나눠 봄.
동월 모화관(慕華館) 정시(庭試)에서 북방 군사에게 친시를 보여 대거(對擧)함. 이호의(李好義) 등 9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唐) 나라 동천 절도사(東川節度使) 고숭문(高崇文)이, 조서(詔書)를 주어 촉(蜀)을 정벌하는데 모든 군대를 감사하다.
동월 알성시에서 윤계선 등 8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 나라 반초(班超)가 서울로 돌아오게 한 것을 사례하다.
32년 기해 3월 정시에서 참두(斬頭) 대거(對擧) 이재영(李再榮) 등 10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이필(李泌)이 봉래원(蓬萊院)을 지으라는 명령에 감사하다.
7월 별시에서 세자가 입학하고 맏손자가 태어났다. 조탁(曺倬) 등 16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인재(人才)○ 명관 : 영중추 이산해(李山海)
33년 경사 4월 별시에서 이시정(李時楨) 등 16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백성을 두려워하다.[畏民]
34년 신축 4월 식년시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갑오년 정유년의 두 식년시와 경자년 식년시가 이때 비로소 추후하여 시행되었는데 경서와 기타 책이 탕진되어 사서(四書)는 모두 강하게 하고 3경은 1경만을 자원하게 하였다. 이사경(李士慶)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김지선(金止善), 진사 조희일(趙希逸)을 뽑았다.
35년 임인 9월 알성시에서 문묘(文廟)가 중건(重建)된 후이므로 작헌례(酌獻禮)로 행하였다. 안욱(安旭) 등 5명을 뽑았다. 한 나라 문제(文帝)가 흉노와 화친(和親)한 것을 논하라.
10월 별시에서 명 나라 황태자 책봉 김수현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9경 8조(九經八條) ○ 대제학 이호민(李好閔)
36년 계묘 정월 정시에서 주사(舟師) 별시로 대거(對擧) 이명준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제사(祭祀)
10월 식년시에서 이언영(李彦英)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안위치란(安危治亂)
동년 생원 유업(柳), 진사 이구(李久)를 뽑았다.
38년 을사 4월 존호를 올린 경사로 증광시에서 이식립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최명길(崔鳴吉), 진사 고용후(高用厚)를 뽑았다.
6월 정시에서 무사(武士)로 북변을 방위시키고 정시(庭試)로 대거(對擧) 전유형(全有亨)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태종이 위징(魏徵)의 쓰러진 비(碑)를 다시 세우도록 한 조칙(詔勅) ○ 조칙을 시제(試題)로 내는 것이 나라 법전에 실려 있는 바이나, 오랫동안 폐하여 쓰지 않았다가 이때 전교로 말미암아 비로소 썼다.
12월 별시에 임금이 건강이 3년 동안 편치 못하다가 이때 비로소 회복되었으므로 다시 경연을 열었다. 이은로 등 12명을 뽑았다.
39년 병오 증광시에서 즉위 40년 양응락(梁應洛) 등 3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사호(李士浩), 진사 오환(吳煥)을 뽑았다.
식년시에서 임기(林)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유달(李惟達), 진사 남이웅(南以雄)을 뽑았다.
광해군(光海君) 무신년 중시에서 병오년 중시를 왕실에 일이 많아서 이때 비로소 실시하였다. 이이첨(李爾瞻)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곽자의(郭子儀)가 분양왕(汾陽王)에 봉함을 감사하다.
별시에서 중시 대거 정호서(丁好恕) 등 14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술ㆍ사치[酒ㆍ侈]
원년 기유 10월 즉위 증광시에서 홍천경(洪千璟)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끝을 잘 맺기 위해 시초부터 신중을 기하다.[愼終于始] ○ 대제학 : 이정귀(李廷龜)
동년 생원 김시주(金是柱), 진사 이민구(李敏求)를 뽑았다.
2년 경술 5월 식년시에서 기유년 식년시가 연기되어 시행됨. 권득기(權得己)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시제 : 화폐[錢幣]
동년 생원 최충운(崔冲雲), 진사 유진(柳袗)을 뽑았다.
9월 알성시에서 오현(五賢)을 문묘에 배향(配享)한 후 석채(釋菜)를 행하다. 김개(金闓)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宋) 나라 한림학사 구양수(歐陽修)가 태평(太平)이란 글자가 나타난 감나무를 발표하지 말기를 청하다.
12월 별시에서 선조를 종묘에 합부한 것. 세자의 책봉과 입학, 그리고 관례(冠禮)를 행한 것의 4가지 경사를 별시로 함. 신광엽(申光葉) 등 2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도학을 숭상할 것.[崇道學] ○ 명관(命官) : 좌의정 이항복(李恒福)ㆍ대제학 이정귀(李廷龜). 시관(試官) : 박승종(朴承宗). 대독관(對讀官) : 조탁(曺倬)ㆍ이이첨(李爾瞻)ㆍ홍서봉(洪瑞鳳)ㆍ허균(許筠)ㆍ이덕형(李德泂). ○ 변헌(卞獻)이 삭과(削科)되었다. ○ 6백 명이 초시에 응시하였다.
3년 신해 별시에서 세자책봉(世子冊封) 정문익(鄭文翼) 등 1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시조(時措) ○ 명관 : 우의정 심희수(沈憙壽)
4년 임자 식년시에 홍명형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풍속을 숭상하는 것 ○ 문형(文衡) 이정귀(李廷龜)
동년 생원 남호학(南好學), 진사 이대엽(李大燁)을 뽑았다.
9월 증광시에서 창덕궁이 중건되어 전년에 이곳으로 이어(移御)한 것과 동궁(東宮)의 가례(嘉禮)의 두 경사를 합쳤다. 이민구(李敏求)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사기(史記)
동년 생원 정두원(鄭斗源), 진사 정택뢰(鄭澤雷)를 뽑았다.
5년 계축 4월 알성시에서 존호를 올린 후 친히 종묘 남별전(南別殿)에 제사지내고 문묘에서 작헌례를 행하였으며, 선비에게 각촉시(刻燭詩)를 보이다. 신해익(愼海翊) 등 6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전연(澶淵)에서 오랑캐를 물리친 송(頌) ○ 그날 합격자 발표
10월 증광시에서 존호를 올리고 세자가 면류관과 의복을 받음. 임성지(任性之) 등 42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관제(官制) ○ 시관 : 유근(柳根)
동년 생원 이제(李穧), 진사 나만갑(羅萬甲)을 뽑았다.
6년 갑인 11월 전주(全州) 별시에서 경기전(慶基殿)이 중건되었으므로 본도 유생에게 시험을 보여 시권을 봉하여 가지고 와서 등급을 정하였다. 양곡(梁穀) 등 4명을 뽑았다.
7년 을묘 식년시에서 이상빈(李尙馪)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심지청(沈之淸), 진사 기수격(奇秀格)을 뽑았다.
8년 병진 증광시에서 중국 조정에서 비(妃)를 추숭(追崇)하는 고명(誥命)을 내려 주었다. 김세렴(金世濂) 등 41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적전(籍田)
동년 생원 우방(禹舫), 진사 임기지(任器之)를 뽑았다.
8월 알성시에서 공성후(恭聖后)를 종묘에 합부한 후 기준격(奇俊格) 등 1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군신(群臣)이 유유화(楡柳火)를 내려준 것을 감사하다. ○ 주문(主文) : 이이첨(李爾瞻)
10월 별시에서 중시 대거 공성후(恭聖后)를 종묘에 합부한 경사. 정흔(鄭昕) 등 27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공(功)을 포상하다.[褒功]
중시에서 이대엽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교위(校尉) 습륭(習隆)이 제갈량의 묘(廟)를 면양(沔陽)에 세우기를 청하다.
9년 정사 9월 알성시에서 공성비(恭聖妃)의 관복(冠服)이 추후에 중국으로부터 주어졌으므로 종묘에 고하고 문묘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허직(許稷)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예조에서 평안도 사민(士民)의 원함에 따라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 비를 건립하여 인현(仁賢)의 교화를 표창하여 주기를 청하다.
10년 무오 7월 정시에서 중국에서 건주(建州) 오랑캐를 징벌하기 위해 군사를 징발하고 무사(武士)를 널리 뽑으므로 대거(對擧)함. 이직(李稙)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중서령(中書令) 이성(李晟)이 임금이 근신(近臣)을 시켜 자기를 부축하여 붙들어 말[馬]에 올려 주게 함을 감사하다.
10월 증광시에서 공성비(恭聖妃)의 면류관과 의복이 도착하고, 또 종계변무(宗系辨誣)된 경축 김기종(金起宗) 등 40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녹(祿)을 제정하는 법식
동년에 생원 이영구(李榮久), 진사 조석형(趙碩亨)을 뽑았다. 조석형은 조익형(趙益亨)으로도 되어 있다.
10월 식년시 칠대문(七大文)의 비방이 있었으므로 전시를 베풀지 않았다. 계해 반정 후에 재시험을 보여 12명이 합격되었는데 한 사람을 추가하여 정묘 식년시에 부쳤다.
동년 생원 이기숙(李基肅)과 진사 유명립(柳命立)을 뽑았다.
11년 기미 9월 수원(水原)과 개성부(開城府) 별시 영숭전(永崇殿)의 태조 영정(影幀)과 봉선전(奉先殿)의 세조 영정을 난후에 잃어버렸으므로 당시 그려 올려 왔는데 국가에 일이 많아서 수원과 개성에 두어 모시게 하였다가 금년 9월 비로소 중사(中使)와 승지와 예조 참의를 보내어 받들어 와서 함께 봉자전(奉慈殿)에 모셨다. 지난 8월 26일 두 곳에서 과거를 베풀고 한림을 나눠 책문의 제목을 가지고 가게 하고 거둔 시권을 봉하여 가지고 왔다. 에서 유성증(兪省曾) 등 4명을 뽑았다.
10월 알성시에서 홍명구(洪命耈) 등 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평안도에서 오랑캐가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해 돌아온 군사들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오랑캐의 소굴을 즉시 공격하기를 청하다.
12월 정시에서 함경도 무과(武科) 대거(對擧) 이경의(李景義) 등 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육지(陸贄)가 고공 낭중(考功郞中)을 사양하다.
12년 경신 7월 정시에서 방수병(防戍兵)이 적어서 광취무과(廣取武科)를 여는데 대거함. 김우진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군신(群臣)이 갑옷을 쌓은 것이 산과 같음을 칭하하다.
13년 신유 9월 정시 서변(西邊)의 방위가 급하여 전년의 만과(萬科)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에 떨어진 자 또 전시를 행하기 전에 죽은 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뽑았다. 정시(庭試) 대거(對擧) 에서 박안제(朴安悌) 등 1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충렬록(忠烈錄)》을 바치다. ○ 명관(命官) :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대제학 이이첨(李爾瞻)
10월 알성시 요계(遼薊)의 유언(流言)에 명 나라 조정에서 변무(辨誣)되고 또 은사물(恩賜物)이 있다고 하므로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고 종묘에 고한 다음 알성하였다. 에서 선세휘(宣世徽)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강굉(姜肱)이 그 형(形)을 그리라는 조칙을 사양하다.
12월 별시 전년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을 행하고 7월에 육백관시(六百館試)를 베풀었는데 국가에 일이 많았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전시를 행하였다. 경인년 증광시의 예(例)에 따라 40명을 뽑았는데 합격 발표를 연기하였다가 계해년 반정 후에 다시 시험보아 단지 11명을 뽑았다. 에 최유연 등 40명을 뽑았다.
인조 원년 계해 5월 알성시에서 홍보 등 10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끝을 잘 맺기위해 시초부터 신중을 기하라.
5월 정시 명 나라 희종(憙宗)의 등극을 축하하는 과거가 지금까지 연기되었다가 비로소 행함. 에서 신달도(申達道) 등 4명을 뽑았다. 대책(對策) 시제 : 기강(紀綱)
8월 개시(改試)와 전시(殿試) 무오년의 식년시에 칠대문(七大文)이 비방이 있었고 신유년 별시에 오류(五柳)의 말이 있었으므로 방을 발표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두 시험을 합쳐 한 시험으로 하고 다시 시험을 보아 회시(會試)라 하였다. 에서 채유휴 등 24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이기숙(李基肅)과 진사 유명립(柳命立)을 뽑았다.
2년 갑자 2월 공주(公州) 정시 이괄(李适)의 변(變)에서 승리를 얻자, 호남ㆍ호서와 경기도 유생에게 시험보여 뽑음. 에서 홍습(洪霫) 뒤에 익한(翼漢)으로 고침.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이강(李綱)이 장방창(張邦昌)의 참역(僭逆)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다.
4월 별시에서 역적 이괄을 토벌하고 환도하였다. 김주우(金柱宇) 등 11명을 뽑았다.
9월 즉위 증광시에서 김육(金堉) 등 38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하늘은 말하지 않는 성인[天者不言之聖人]
동년 생원 윤형지(尹衡志), 진사 조석형(趙錫馨)을 뽑았다.
10월 알성시에서 이경증(李景曾) 등 4명을 뽑았다.
11월 식년시에서 조빈(趙贇)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신면(申冕), 진사 조수익(趙壽益) 등을 뽑았다.
3년 을축 8월 별시 세자를 책봉하고 호량보(胡良輔)가 와서 조칙을 반포하였다. 에서 김종일(金宗一) 등 12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뉘우침[悔]
4년 병인 7월 별시에서 중시(重試) 대거(對擧) 세자가 입학하였다. 심연(沈演) 등 17명을 뽑았다. 사헌부에서 파방(罷榜)하기를 아뢰었다. 위의 과제(科制) 조에 상세함.
8월 정시(庭試)에서 별시를 파방한 후 과거 응시자가 서울에 많이 모였으므로 별도로 이 시험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였다. 조경(趙絅) 등 4명을 뽑았다. 잠의 시제 : 수성(守成)
5년 정묘 3월 강도(江都) 정시 임금이 강도(江都)에서 적병을 피하였으므로 강도와 교동(喬桐)ㆍ통진(通津)의 3읍에서 시험을 보임. 에서 허색(許穡) 등 4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간우(干羽)춤을 양계에서 춤[舞干羽于兩堦]
전주(全州) 정시 동궁(東宮)이 분조(分朝)하였으므로 호서와 호남의 선비에게 시험을 보임. 에서 김상빈(金尙賓) 등 4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걱정이 성(聖)을 열어줌[殷憂啓聖]
7월 정시 강도(江都)에 호종(扈從)하였던 무사(武士)에게 환도 후에 무과를 뽑는데 대거(對擧)하고 세자 입학을 겸함. 에서 임득열(林得悅) 등 7명을 뽑았다. 논(論頌의 시제 : 산삭한 후 시(詩)가 없다[刪後無詩]
9월 식년시에서 김호(金灝)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전(戰)ㆍ수(守)ㆍ화(和)
동년 생원 서원리(徐元履)와 진사 유념(柳淰)을 뽑았다.
6년 무진 4월 별시 세자가 가례를 행하였다. 에서 조석윤(趙錫胤) 등 11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천심에 순응하다.[順天心] 주문(主文) : 장유(張維)
9월 별시에서 명 나라 의종(毅宗)이 등극 이방(李㬅) 등 1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수신(修身)ㆍ안민(安民)ㆍ제적(制敵) 대제학 : 장유. 초시에 6백 명이 응시하였다.
7년 기사년 별시에서 황태자의 탄생 정두경(鄭斗卿) 등 25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천도(天道)를 본받다.[體天道]
12월 정시 임금이 김포(金浦) 원릉(園陵)에서 성묘한 후 에서 이상질(李尙質) 등 5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치우(蚩尤)를 토평(討平)하다.
8년 경오 3월 식년시에서 정시망(鄭時望)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안민(安民)
동년 생원시에서 이시해(李時楷)를, 진사시에서 홍명일(洪命一)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황태자를 책봉하다. 정뇌경(鄭雷卿)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복수하여 수치를 씻다. ○ 명관 : 좌의정 김류(金瑬)ㆍ대제학 : 정경세(鄭經世)
9년 신미 9월 별시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에서 민우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성지(城池)
10년 임신 3월 알성시에서 김시번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禹)의 정명(鼎銘) ○ 대제학 : 장유
11년 계유 4월 증광시에서 원종(元宗)을 추송함. 이조(李稠)등 33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육경의 대의[六經宗旨]
동년 생원시에서 박종부(朴宗阜)를, 진사에서 김진표(金震標)를 뽑았다.
11월 식년시에서 목행선(睦行善) 등 33명을 뽑았다. 명관(命官) : 영의정 윤방(尹昉)
동년 생원 송시열(宋時烈)과 진사 이명식(李命式)을 뽑았다.
12년 갑술 3월 별시에서 원종 추숭에 대한 명 나라의 고명(誥命)이 반포됨. 오달제(吳達濟) 등 12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君臣相與] ○ 초시에 6백명 응시. 서울과 지방으로 나눴고 강경(講經)이 있었다.
13년 을해 9월 알성시에서 이만영 등 8명을 뽑았다. 잠 시제 :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게 되기를 생각하다.
10월 증광시 성종(成宗)을 세실(世室)에 모시고, 인목대비(仁穆大妃)와 원종(元宗)을 종묘에 합부하며, 세자를 봉하다. 에서 이이송(李爾松) 등 43명을 뽑았다. 시관 : 김신국(金藎國) ○ 관시(館試)는 소(疏)에 대한 유생(儒生)들의 분쟁으로 응시하지 않으므로 취소했다.
동년 생원 김익겸(金益兼)과 진사 홍중보(洪重普)를 뽑았다.
14년 병자 11월 별시에서 맏손자 탄생 겸 중시 대거(重試對擧) 신유(申濡) 등 11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시무(時務)를 아는 것 ○ 대제학 : 이식(李植) ○ 초시에 5백명이 응시하였으나 호란(胡亂)으로 합격 발표를 못하다가 정축년 8월에 비로소 발표하다.
12월 중시에서 신희계(申喜季) 등 6명을 뽑았다.
15년 정축 8월 정시에서 환도 후 종묘에 친히 제사지내고 장차 알성하고 과거를 보이려 하였는데 마침 임금의 건강이 좋지 못하여 정시로 변경하여 보였다.
조한영(曺漢英) 등 1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문제(文帝)가 현량(賢良)ㆍ방정(方正)ㆍ직언(直言)ㆍ극간(極諫)할 선비를 구하다.
동월 정시 남한산성에 호종한 사람에게 무과를 특설하고 대거(對擧)하다. 에서 정지화(鄭知和) 등 10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위태로운 자가 그 지위를 안전하게 하다.
16년 무인 3월 정시에서 장차 알성하여 과거를 보이려 하였는데 마침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정시로 변경하였다. 황위(黃暐) 등 15명을 뽑았다.
17년 기묘 3월 알성시에서 권집(權諿)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에서 금ㆍ은의 그릇과 완구를 부셔, 군기(軍器)에 보태도록 한 명령을 치하하다.
9월 별시에서 계비(繼妃)가 가례를 행하였다. 이이존(李以存) 등 16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장수와 정승[將相] ○ 대제학 : 이경석(李景奭)
10월 식년시에서 김운장(金雲長) 등 33명을 뽑았다. 임금이 이경전(李慶全)에게 시험을 보였다.
동년 생원 권지(權趾)와 진사 박세견(朴世堅)을 뽑았다.
19년 신사 9월 정시에서 식년시의 초시에 거자들이 모두 모였으므로 정시를 별도로 보여 위로하고 기쁘게 해 주었다. 홍석기(洪錫箕)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악숙(樂叔)이 화성군(華城君)으로 봉해 줌을 감사하다.
20년 임오 3월 임한백(任翰伯)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조현양(趙顯陽)과 진사 이면하(李冕夏)를 뽑았다.
9월 정시에서 경연관이 아뢰어 전시를 파하고 제술(製述)로 등급을 매겨 급제시키려 하였는데 비변사의 아룀으로 이내 과거를 보였다. 심찬(沈譔) 등 5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숨은 것보다 더 들어남이 없음[莫見乎隱]
21년 계미 2월 평안도(平安道) 별시 관서 지방이 전쟁의 피해를 혹심히 입었으므로 이조 낭관 심대부(沈大孚)를 보내어 시험보여 시권을 가지고 올라와 등급을 정하였다. 에서 김여욱(金汝旭) 등 4명을 뽑았다. 대제학 이식(李植)
22년 갑신 9월 정시에서 역적을 토벌하고, 별시를 보였는데 거자들이 모두 모여들므로 전시를 보기 전에 정시를 특별히 보여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었다. 이경억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시중(侍中) 김일제(金日磾)가 타후(柁侯)에 봉함을 사양하다. ○ 명관(命官) : 영의정 김류(金瑬)
9월 별시 역적 심기원(沈器遠)을 토벌하다. 에서 최후현(崔後賢) 뒤에 ‘현’ 자를 윤(胤) 자로 고쳤다. 등 19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변통(變通). 초시에 6백 명이 응시하다.
23년 을유 11월 별시에서 세자가 책봉되고 입학하였다. 권오(權悟) 등 15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관작(官爵) ○ 명관(命官) 우의정 : 이경석(李景奭)
24년 병술 식년시에서 4월 정승명(鄭承明)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책(尹策)과 진사 김수항(金壽恒)을 뽑았다.
10월 정시 중시 대거(對擧) 별시의 초시 합격자를 발표한 후에 두 시장 중 한 고시장의 시제가 시휘(時諱)를 범하였으므로 시관을 제명하고 그 방을 파하며 별도로 정시를 보였다. 세자가 가례를 행한 경사를 합하여 정시를 베풀었다. 에서 오격(吳翮)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백성은 물과 같다.[民猶水]
26년 무자 8월 정시에서 이정기(李廷蘷)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의 공우(貢禹)가 시중(侍中) 이하 관리는 사사로이 매매하여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다.
11월 식년시에서 조정(曹烶)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한오상(韓五相)과 진사 이단상(李端相)을 뽑았다.
27년 기축 3월 별시에서 세손(世孫)이 책봉되다. 오두인(吳斗寅) 등 13명을 뽑았다. 초시 3백 명
4월 정시 거자(擧子)가 서울에 많이 모여 들었으므로 특별히 정시를 열어 위로하여 기쁘게 하였다. 에서 민정중(閔鼎重) 등 7명을 뽑았다.
효종 원년 경인 12월 즉위 증광시에서 이운근(李雲根)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민시중(閔蓍重)과 진사 한성열(韓聖悅)을 뽑았다.
2년 신묘 3월 정시에서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었다. 이창현(李昌炫)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옛날의 정치는 사람을 사랑함을 큰 것으로 삼았다.
9월 식년시에서 이익한(李翊漢)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원록(李元祿)과 진사 이익상(李翊相)을 뽑았다.
동월 알성시에서 김수항(金壽恒) 등 7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남훈금(南薰琴)
11월 별시 인조를 세실(世室)에 합부하고 휘호(徽號)를 올렸으며, 대비에게 존호를 드렸고, 중전(中殿)의 책례(冊禮)ㆍ세자의 책례(冊禮)와 관례(冠禮) 등 7가지 경사를 합치다. 초시에 6백 명, 고시장을 세 곳으로 나눴다. 에서 정시대(鄭始大) 등 17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8폐(弊)
3년 임진 10월 증광시에서 세자의 가례와 입학. 역적 김자점(金自點) 토벌의 3경사 여증제(呂曾齊)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별의 변괴[星變]
동년 생원 송도창(宋道昌)과 진사 정유악(鄭維岳)을 뽑았다.
4년 계사 8월 알성시에서 민주면(閔周冕)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에서 임금이 태상박사(太常博士) 및 여러 유자(儒者)를 백호관(白虎觀)에 모이게 하여 오경 동이(五經同異)를 의논케 하고 친히 임하여 결제하였음을 치하하다.
11월 별시에서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김진표(金震標) 등 15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시 제목 : 일자(一字) ○ 명관(命官) : 이경석(李景奭). 함경도에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부(賦)의 시제목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거둔 시권지 1백 50장이 서울에 올라왔는데 8장 이외는 모두 임금 뜻에 어긋났으므로 단지 2명을 뽑아 방에 붙였다.
5년 갑오 3월 춘당대(春塘臺) 정시에서 박세모(朴世模)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에서 제위(諸衛)의 장수와 병졸로 하여금 현덕전(顯德殿) 뜰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도록 하고 5년에 임금의 친유(親諭)가 내렸음을 감사하다.
10월 식년시에서 유경립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뜻(志)은 만사의 근본이다.[志者萬事之根柢]
동년 생원 박빈(朴鑌)과 진사 이혜(李嵆)를 뽑았다.
6년 을미 4월 춘당대(春塘臺) 정시에서 유경(柳炅)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재계하고 일을 처결하다.[齋居決事]
7년 병신 8월 별시에서 중시 대거 이민적(李敏迪)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말[言]을 구하고, 인재를 기르며 욕심을 막는다.
9월 중시에서 남용익(南龍翼)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제목 : 부열(傅說)이 좌우에 있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드리게 해 줌을 감사하다.
8년 정유년 9월 식년시에서 민중노(閔重魯)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형(李泂)과 진사 김석주(金錫冑)를 뽑았다.
9월 알성시에서 최준형(崔俊衡)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태위(太尉) 장우(張禹)가 임금에게 모험으로 멀리가 놀지 말 것을 청하다.
현종 원년 경자년 4월 소두산(蘇斗山)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희택(李憙澤)과 진사 김하진(金夏振)을 뽑았다.
11월 즉위 증광시에서 박세당(朴世堂) 등 3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양염(楊炎)이 천하의 재부(財賦)를 모두 좌장(左藏)에 돌릴 것을 청하다.
동년 생원 오시대(吳始大)와 진사 유명필(兪命弼)을 뽑았다.
3년 임인 3월 대증광시(大增廣試)에서 효종을 종묘에 합부하고, 두 대비의 존호를 올리며, 왕후의 책례(冊禮)와 원자 탄생의 5가지 경사. 김석주(金錫冑) 등 4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노(魯) 나라 장손진(藏孫辰)이 제(齊) 나라에 가서 쌀을 사들이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이만정(李萬程)과 진사 이우성(李羽成)을 뽑았다.
10월 춘당대(春塘臺) 대정시(大庭試)에서 대왕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홍만용(洪萬容) 등 1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장준(張浚)이 천심(天心)에 합치하려 함을 학문하는 근본으로 삼을 것을 청하다.
4년 계묘 4월 권진한(權震翰) 등 33명을 뽑았다. 잠의 시제 :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뜻 두기를 생각하다.
동년 생원 이적(李積) 이름을 석(䄷)으로 고침 과 진사 홍석보(洪碩普)를 뽑았다.
5년 갑진 춘당대 정시에서 민시중(閔蓍重) 등 8명을 뽑았다. 명의 시제 : 토계명(土堦銘)
8월 함경도 별시에서 한기백 등 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용흥강(龍興江) ○ 시관 : 대제학 김수항(金壽恒)
6년 을사 4월 정시에서 김만중(金萬重) 등 1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육상선(陸象先)이 겨울의 소나무와 잣나무 같다고 포창함을 감사하다.
동월 온양(溫陽) 정시에서 홍우기(洪宇紀) 등 9명을 뽑았다.
10월 별시에서 임금의 건강이 회복하다. 임상원(任相元) 등 12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수성(守成)이 창업(創業)보다 어렵다.[成難於創業]
7년 병오 식년시에서 이후징(李厚徵) 등 3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周) 나라 소공이 무익(無益)한 것을 지어서 유익을 해하지 말기를 청하다.[無益害有益] ○ 제주도(濟州道)에서 직접 응시함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동년 생원 임영(林泳)과 진사 최석만(崔錫萬)을 뽑았다. 후에 만(萬) 자를 정(鼎) 자로 고쳤다.
4월 온양 별시에서 임금이 왕대비(王大妃)를 모시고 온양으로 행차하였다. 권열(權說) 등 3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순수(巡狩) ○ 대제학 : 김수항(金壽恒)
9월 별시에서 왕대비(王大妃) 건강의 회복겸 중시 대거 윤진(尹搢)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체통(體統)
중시에서 홍중용(洪重容)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태상(太常) 환영(桓榮)이 임금이 수레에서 내려 경(經)을 가지고 친히 문안한 것을 사례하다.
9년 무신 11월 별시에서 정미년 세자 책봉의 경축이 흉년으로 연기되어 이해에 시행되다. 민홍도(閔弘道) 등 13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3대를 법삼으라.[爲治必法三代]
12월 정시에서 세자의 병환이 회복되다. 정수준(鄭壽俊) 등 9명을 뽑았다. 제고(制誥)의 시제 : 당 나라에서 배도(裵度)를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임명하다. ○ 시험 제목이 일찍이 성균관 제술(製述) 시험에 나왔던 것이므로 사헌부에서 아뢰어 파방(罷榜)하고 무과(武科)도 아울러 파방하였다. 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2년 전에 대사성으로서 이 시제를 과시(課試)에 내었다.
10년 기유 3월 평안도 별시 중신(重臣)을 보내어 안주(安州)에서 보았다. 에서 양현망(楊顯望) 등 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단군의 사당[檀君祠] ○ 시관 : 판윤(判尹) 정지화(鄭知和)
식년시 6월에서 이덕령(李德齡) 등 33명을 뽑았다. 대책시 제목 : 경학을 선비에게 시험보이다.[經術試士]
동년 생원 한성좌(韓聖佐)와 진사 신엽(申曅)을 뽑았다.
10월 정시에서 한태동 등 12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기형(璣衡)으로써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다.[璣衡齊七政]
11년 경술 11월 별시에서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종묘에 합부하고, 세자의 입학과 관례(冠禮)의 경사 정도성(鄭道成) 등 10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의 대책 시제 : 미리 준비하다.[備豫]
12년 신해 11월 정시에서 박태상(朴泰尙) 등 8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동지(冬至)에 관문(關門)을 닫음[至日閉關]
13년 임자 10월 별시에서 왕대비(王大妃) 병환이 회복됨. 세자의 가례(嘉禮) 유명천(柳命天) 등 21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 시제 : 인재(人才)의 성쇠(盛衰) ○ 초시에 6백 명 응시. 서울과 지방으로 나눠 봄.
14년 계축 춘당대 정시에서 유명현(柳命賢) 등 10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양심각명(養心閣銘) ○ 대제학 : 김만기(金萬基)
4월 식년시에서 이익(李榏) 등 3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대풍가(大風歌)는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다.[大風安不忘危]
동년 생원 이현기(李玄紀), 진사 이사명(李師命)을 뽑았다.
숙종 원년 을묘 5월 식년시에서 조지석(趙祉錫) 등 34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질경덕(疾敬德) 기천영명(祈天永命)을 청하다.
동년 생원 서종태(徐宗泰), 진사 강현(姜鋧)을 뽑았다.
11월 즉위 증광시에서 이봉징(李鳳徵) 등 34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임금의 덕을 성취시킬 책임이 경연(經筵)에 있다.
동년 생원 권흠(權歆), 진사 목림중(睦林重)을 뽑았다.
2년 병지 정월 정시(庭試)에서 만과(萬科) : 무사(武士) 만명의 과거ㆍ대거(對擧) 오시만(吳始萬) 등 11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 나라 처사(處士) 뇌차종(雷次宗)이 임금이 친히 그의 집에 행차하여 건구(巾褠)를 착용한 채로 시강(侍講)하게 하고 상품을 심히 후히 내려 준 것을 사례하다.
3월 알성시에서 박태보(朴泰輔) 등 7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탕반명(湯盤銘)
4년 무오 3월 증광시 인선왕후(仁宣王后)와 현종을 종묘에 합부(合祔) 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며 두 대비에게 존호를 드리고, 왕비의 책례(冊禮)와 선조의 세실(世實)등 7가지 경사를 합쳤다. 에서 이진은(李震殷) 등 42명을 뽑았다. 정사년 2월에 보였으나 파방하고 이때 비로소 시행하였다.
동년 생원 이현명(李顯命)과 진사 이윤문(李允文)을 뽑았다.
윤3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 에서 조효창(曺孝昌) 등 10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천지가 조절되어 4시가 이루어진다.[天地節而四時成]
5년 기미 4월 정시 중시 대거. 연달아 흉년을 당하여 금년에서야 시행하다. 에서 김석(金晢) 등 10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 나라 영포(英布)가 거처와 음식이 모두 임금의 처소의 것과 같음을 감사하다.
10월 중시(重試)에서 강세귀(姜世龜)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고공낭중(考功郞中) 육지(陸贄)가 대사서(大赦書)에서의 조서(詔書)는 피하거나 기(忌)함이 없도록 하기를 청하다.
12월 식년시 흉년으로 인하여 연기되어 시행하다. 에서 이인징(李麟徵) 등 3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虞)의 백익(伯益)이 백성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면서 자신의 욕심에 따르지 말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채시익(蔡時益)과 진사 이현령(李玄齡)을 뽑았다.
6년 경신 6월 춘당대 정시(庭試)에서 이사명(李師命) 등 4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안일함이 없어야 한다.[所其無逸] ○ 임금이 갑인년에 송시열(宋時烈)을 구(救)하려다가 과거 자격이 정지된 자들을 위로하여 기쁘게 해주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소두(疏頭)를 석방하고 특별히, 승지 이익(李翊)ㆍ제학(提學) 이민서(李敏叙)ㆍ김만중(金萬重)을 보내어 성균관에 가서 시험을 보여 주게 하고, 3명에게 전시에 바로 응시할 특권을 주었으며 아울러 전에 바로 응시하게 한 사람 중에서 1명을 등용하였다. 임금이 친히 춘당대에 나가 시험을 보여 등수를 정하고 성종 때의 고사(故事)에 따라 별시에 앞서 그날로 방을 발표하였다.
9월 정시에서 서문중(徐文重)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대장(大將) 위청(衛靑)이 그의 아들을 봉해 후(侯)로 삼은 것을 사양하다. ○ 대신이 아뢰기를, “인조 갑신년 역적 토벌 기념 별시 때에 사방의 거자(擧子)가 모두 서울로 모여 들었으므로 따로 정시를 보여 위로하고 기쁘게 하였는데, 지금도 이제 참하(參下)의 등급에 인원이 부족하니 역시 갑신년의 예에 따라 정시를 별도로 열어서 많은 선비를 위로하고 기쁘게 하소서.” 하여 시행하였다.
동월 별시에서 조형기(趙亨期) 등 20명을 뽑았다. 역적 남견(柟堅) 등의 토벌을 경하하였다. 초시 6백 명. ○ 전시의 대책 시제 : 옛것을 본받다.[法古] ○ 대제학 : 이민서(李敏敍)
7년 신유 9월 알성시에서 김성시(金盛始)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한신(韓信)이 의병(義兵)으로 동방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있는 장사들을 따를 것을 청하다.
12월 식년시에서 이태동(李泰東)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재이(災異)
동년 생원 민진후(閔鎭厚)와 진사 조정만(趙正萬)을 뽑았다.
8년 임술 4월 춘당대 정시에서 김구(金構) 등 1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낭서장(郞署長) 풍당(馮唐)이 망언(妄言)으로 임금에게 저촉된 죄를 다스리지 않고 다시 불러 장수를 논함을 감사하다.
11월 증광시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에게 존호를 올림. 왕비의 책례(冊禮)의 세 가지 경사 기념 에서 김창협(金昌協)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박태순(朴泰淳)ㆍ진사 김진규(金鎭圭) 등을 뽑았다.
9년 계해 11월 증광시 태조와 태종에게 시호를 더 올리는 것과 인조와 효종의 세실(世室)을 정한 네 가지 경사의 기념 에서 허윤(許玧) 등 3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경덕(敬德) 기명(祈命)
동년 생원 윤시교(尹峕敎)와 진사 홍만적(洪萬迪)을 뽑았다.
10년 갑자 9월 정시 계해년 겨울,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어 장차 증광시를 열려고 하였는데 곧 명성대비(名聖大妃)의 국상(國喪)을 당하였으므로 시행을 연기하였다. 금년에 증광시를 정시로 변경하였다. 에서 신필청(申必淸) 등 2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수(隋) 나라 태상경(太常卿) 우홍(牛弘)이 중국의 구음(舊音)을 정리하고 위(魏)ㆍ주(周)의 변방음을 사용함을 정지시키기를 청하다.
11월 식년시에서 홍수점(洪受漸) 등 3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반풍기화(反風起禾) ○ 대정시(大庭試)를 본 후에 시골 선비들 중에 병려(騈驪)에 익숙하지 못하여 백지 제출한 것이 많았으므로 별도로 대제학 이민서(李敏叙)를 보내어 부(賦)의 시제를 내어 시골 선비에게 시험을 보여 손덕승(孫德升) 등 3명을 뽑아 전시(殿試) 등에 응시케 하였다.
동년 생원 한배주(韓配周)와 진사 유봉서(柳鳳瑞)를 뽑았다.
12년 병인 4월 춘당대 정시(庭試) 문묘에서 작헌례(酌獻禮)를 마친 후, 이어서 성균관에서 과거를 볼 응시자들이 다투어 문을 들어 가다가 밟혀서 목숨을 잃은 자가 8명이나 되었다.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아뢰어 과거를 정지시키고, 하루를 지나서 춘당대에서 과거를 보였다. 에서 조식(趙湜)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상(商) 나라 이윤(伊尹)이 함유일덕(咸有一德) 편을 바치다.
8월 별시 명성왕후(明聖王后)를 종묘에 합부한 기념과 겸하여 중시 대거 에서 민진장(閔鎭長)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필(李泌)이 안서(安西)와 북정(北庭)의 두 진(鎭)을 토번(吐蕃)에게 넘겨주지 말기를 청하다.
동월 중시에서 신계화(申啓華)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저무량(褚無量)이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충성된 말을 받아들이며 아첨을 멀리하고 빨리 동도(東都)의 행차를 정지하기를 청하다.
9월 함경도 별시에서 한항(韓沆) 등 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
10월 정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회갑 경사 정시가 명성왕후(明聖王后)의 국상(國喪)으로 인하여 연기되었다가 이때 시행되다. 에서 김진규(金鎭圭)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조변(趙抃)이 필마(匹馬)로 촉(蜀)에 들어가 정치를 간이(簡易)하게 하였다고 임금이 칭찬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한 것을 감사하다.
13년 정묘 9월 알성시 친히 종묘에 가을 제사를 올리고, 계사년 예(例)에 따라 성균관에 시학(視學)하고 과거를 보이다. 에서 권성(權)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漢) 나라 제갈량(諸葛亮)이 전한(前漢)의 흥륭을 본받고 후한의 쇠퇴로 경계를 삼기를 청하다. ○ 명관 : 영의정 남구만(南九萬)ㆍ대제학 남용익(南龍翼)
10월 식년시에서 이극형(李克亨) 등 38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의 대책 시제 : 때[時]가 가면 불가(不可)함이 있다.
동년 생원 이세면(李世勉)과 진사 김진화(金鎭華)를 뽑았다.
15년 기사 4월 증광시 원자(元子)의 호를 정하였다. 에서 이사상(李師尙) 등 3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회서(淮西) 백성들에게 2년간 납세와 부역을 면제해 준 것을 감사하다.
동년 생원 이협(李浹)과 진사 조백붕(趙百朋)를 뽑았다.
16년 경오 3월 식년시에서 조덕순(趙德純) 등 40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신(尹鋠)과 진사 이의홍(李儀鴻)를 뽑았다.
11월 정시 정묘년 봄, 태조의 영정(影幀)을 다시 그려 남별전(南別殿)에 모셨는데 장렬대비(莊烈大妃)의 국상(國喪)으로 임금이 보지 못하다가 이때에 뵙고 이름을 고쳐 영희전(永僖殿)이라 하였다. 에서 한명상(韓命相)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우상(右相) 왕회(王淮)가 주희(朱憙)의 황정(荒政)은 그의 학문을 시행한 것이니 마땅히 관직을 승급시켜 부르기를 청하다.
17년 신미 3월 증광시 장렬왕후의 종묘 합부, 세자의 책봉, 장희빈(張禧嬪)의 왕후 승진 등 세 경사 합동 기념 에서 송래백(宋來栢) 등 42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진정(賑政)
동년 생원 홍상민(洪相民)과 진사 이만근(李萬根)를 뽑았다.
8월 알성시에서 이야(李壄)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본조(本朝) 유생들이 승지로 하여금 비망기(備忘記)를 낭독하게 하고, 특별히 말씀을 내려준 데 감사하다. ○ 명관 :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18년 임신 8월 춘당대 정시에서 신이익(愼爾益) 등 6명을 뽑았다.
19년 계유 4월 식년시에서 나만영(羅萬榮) 등 40명을 뽑았다. 전시 대책의 시제 : 학교를 설치하여 선비를 양성하다.
동년 생원 장대방(張大方)과 진사 노하정(盧夏鼎)를 뽑았다.
8월 알성시에서 이인병(李寅炳)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에서 소장(疏章)에 부사(浮辭)를 금지한 것을 치하하다.
9월 개성부(開城府) 정시 임금이 후릉(厚陵)에 행차한 길에 개성에 가서 친히 만월대(滿月臺)에 임석하고 그날 방을 발표하였다. 에서 허보(許溥) 등 3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백성에게 금년 전조(田租)의 반을 준 것에 대하여.
20년 갑술 8월 알성시에서 오명준(吳命俊)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동평장사(同平章事) 송경(宋璟)이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 구제(舊制)를 복구하여 제사(諸司)로 하여금 대장(對仗)하여 일을 아뢰게 하기를 청하다. ○ 명관 : 영의정 남구만(南九萬)ㆍ대제학 박태상(朴泰尙)
10월 별시 중전(中殿)이 복위되다. 에서 이광좌(李光佐) 등 26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편의(便宜) ○ 초시 6백 명
21년 을해 2월 평안도 별시에서 전처경(田處坰)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임금 된 자 세 가지의 사사로움이 없음을 따라야 한다.[王者奉三無私] ○ 시관(試官) : 우참찬(右參贊) 이세백(李世白)ㆍ안주(安州)에서 보였다.
9월 별시 세자의 입학과 관례(冠禮) 기념 에서 이탄(李坦) 등 1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대전(大典) ○ 명관(命官) : 유상운(柳尙運)ㆍ대제학 박태상(朴泰尙)
22년 병자 8월 정시(庭試) 임금의 건강이 회복된 기념 과거인데 흉년으로 연기되어 이때 시행하다. 에서 이만성(李晩成)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참지정사(參知政事) 범중엄(范仲淹)과 추밀부사(樞密副使) 부필(富弼) 등이 서북변의 일을 나누어 맡도록 한 명령을 감사하다. ○ 대제학 겸 명관 : 최석정(崔錫鼎)
11월 식년시에서 강영(姜楧) 등 35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현규(玄圭)로 성공을 고하다.
동년 생원 이진망(李眞望)과 진사 박양한(朴亮漢)을 뽑았다.
23년 정축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중전(中殿)의 묘현(廟見) 세자의 가례(嘉禮) 세 경사를 합쳐 기념하고 겸하여 중시(重試) 대거(對擧) 에서 엄경운(嚴慶運)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촉한(蜀漢)에서 유비(劉備)가 황제의 위에 즉위, 제갈량(諸葛亮)으로 승상(丞相)을 삼은 것을 치하하다. ○ 명관 : 유상운(柳尙運)ㆍ대제학 오도일(吳道一) ○ 당초에는 증광시로 정하였으나 흉년이라 사헌부에서 아뢰어 정시로 바꾸다.
10월 중시에서 정사효(鄭思孝)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동평장사(同平章事) 이필(李泌)이 천명(天命)을 말하지 말기를 청하다. ○ 명관 : 영부사(領府事) 남구만(南九萬)
24년 무인 9월 춘당대시(春塘臺試) 알성한 후 에서 윤헌주(尹憲柱)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리나라에서 강토를 개척하고 6진(鎭)을 설치한 것을 치하하다. ○ 명관 : 우의정 이세백(李世白)ㆍ대제학 서종태(徐宗泰)
25년 기묘 4월 정시 세자의 천연두가 낫다. 에서 정식(鄭栻) 등 1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소식(蘇軾)이 절강(浙江) 지방의 꽃 등(燈)을 사들이라는 명령을 회수하고 장차 정월 보름날 꽃 등을 걸 때에는 다만 전례(前例)대로만 하고 모든 놀이와 연회를 검약(儉約)하기에 힘쓰기를 청하다. ○ 명관 : 최석정(崔錫鼎)ㆍ홍문관 제학 강현(姜鋧)
4월 식년시에서 이제(李濟) 등 40명을 뽑았다. 조칙(詔勅)의 시제 : 희(羲)ㆍ화(和)에 명(命)하여 호천(昊天)에 공경히 순응하게 하다.
동년 생원 이승원(李承源)과 진사 홍중주(洪重疇)를 뽑았다.
□월 증광시 단종이 복위되다. 에서 한세량(韓世良) 등 3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 나라 상부(尙父)가 단서(丹書)를 올리다. ○ 정언(正言) 이탄(李坦)의 아룀으로 과거(科擧)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파방(罷榜)되었다. 경인년에 사간(司諫) 이덕영(李德英)이 소로 복과(復科)시키기를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여 과옥(科獄) 죄인 8명 이외는 모구 복과(復科)시켰다. 그 중에 4명은 이미 다른 과거에 합격하였고 2명은 죽었었다.
동년 생원 윤지대(尹志大)와 진사 어유봉(魚有鳳)를 뽑았다.
26년 경진 9월 춘당대시 알성한 후 에서 이익한(李翊漢) 등 3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사도(司徒) 중서령(中書令) 배도(裵度)가 지정사(知政事)에 임명하고 위로하는 말과 상을 주는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영의정 서문중(徐文重)ㆍ대제학 오도일(吳道一)
28년 임오 3월 알성시에서 이희태(李喜泰)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명 나라 대신들이 임금이 어진 이를 구한다는 조칙을 거듭 내리고 또 자기가 지은 의의난조(擬猗蘭操)를 내어 보인 것을 칭하(稱賀)하다. ○ 명관 : 좌의정 이세백(李世白)ㆍ대제학 이여(李畬) ○ 방을 발표한 후 유생의 소(疏)가 있었다.
4월 함경도 별시 특별히 판서 서문중(徐文重)을 보내다. 에서 한재회(韓在誨) 등 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어진 이를 등용하면 대적할 자 없으니 이것은 장성(長城)과 같다.[用賢無敵是長城]
5월 식년시에서 김일경(金一鏡) 등 38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그윽한 방구석에서도 부끄럽지 아니하다.[不愧于屋漏]
동년 생원 이진휴(李眞休)와 진사 홍계적(洪啓迪)을 뽑았다.
12월 별시(別試) 중전의 가례(嘉禮) 에서 권집(權緝) 등 1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의 대책 시제 :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항상 망한다. ○ 명관 : 호조 판서 김창집(金昌集)ㆍ예문관 제학 김진규(金鎭圭)
30년 갑신 9월 춘당대 정시에서 한세필(韓世弼) 등 8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 나라 주발(周勃)이 고조(高祖)가 유(劉)씨를 안전하게 할 자는 반드시 발(勃)일 것이다라고 신임하여 준 것에 감사하다. ○ 명관 : 영의정 신완(申琓)ㆍ홍문과 제학 이이명(李頤命)
31년 을유 4월 식년시에서 정동후(鄭東後) 등 41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천도가 내려 화합하여 빛난다.[天道下濟而光明]
동년 생원 조문명(趙文命)과 진사 서명균(徐命均)을 뽑았다.
4월 알성 별시에서 이교악(李喬岳)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제갈량(諸葛亮)이 임금에게 곧고 진실하여 절의(節義)에 죽을 만한 신하를 믿어 주기를 청하다. ○ 명관 : 판서 서종태(徐宗泰)ㆍ예문관 제학 김진규(金鎭圭)
11월 증광시 즉위한 지 30년 된 경사 에서 임상덕(林象德) 등 3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진평(陳平)이 옥사(獄事) 판결은 정위(廷尉)에게 묻고, 화폐와 곡식은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묻기를 청하다. ○ 명관 :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
동년 생원 이병상(李秉常)과 진사 김제겸(金濟謙)을 뽑았다.
32년 병술 3월 정시(庭試)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니 선위(禪位)한다는 비망기(備忘記)를 회수하다. 에서 홍호인(洪好人) 등 7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주 나라 주공이 ‘낙사도(洛師圖)’를 올리다. ○ 명관 :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조태채(趙泰采)ㆍ홍문관 제학 이이명(李頤命)
33년 정해 3월 별시 중시 대거 에서 이기성(李基聖) 등 12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명 나라 형부주사(刑部主事) 이해서(李海瑞)가 출옥(出獄)하게 하고, 그 관직에 돌아가게 한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우의정 이이명(李頤命)
4월 중시에서 김일경(金一鏡) 등 7명을 뽑았다.
34년 무자 윤3월 식년시에서 이정주(李挺周) 등 37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봄에 진대(賑貸)를 의논하다. ○ 명관 : 우의정 이이명(李頤命)ㆍ예문관 제학 강현(姜鋧)
동년 생원 이현익(李顯益)과 진사 이하곤(李夏坤)을 뽑았다.
35년 기축 알성 별시에서 김상옥(金相玉) 등 5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 나라 국자박사(國子博士) 이각(李覺)이, 임금이 친히 태학(太學)에 제사를 드리고 《역(易)》의 태괘(泰卦)를 강론하며 자기를 판국자감(判國子監)으로 승진시킨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좌의정 서종태(徐宗泰)ㆍ제학(提學) 강현(姜鋧)
36년 경인 6월 증광시 임금과 세자의 병환이 회복되다.에서 박징빈(朴徵賓) 등 41명을 뽑았다. 표의 제목 : 송 나라 참지정사(叅知政事) 필사안(畢士安)이, 임금이 장차 정승을 시키겠다 말하고 또 함께 정승될 만한 자가 누구인가를 물은 것을 감사하다.
동년 생원 권적(權)과 진사 민응수(閔應洙)를 뽑았다.
기묘년 과거를 복과(復科)시켜 22명을 뽑았다.
8월 춘당대 정시 무재(武才)시험에 대거함 에서 이세면(李世勉)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의 진덕수(眞德秀)가 의기(欹器)를 만들어 자리 옆에 놓아두기를 청하다. ○ 대제학 : 김진규(金鎭圭)
37년 신묘 4월 식년시에서 이진망(李眞望) 등 36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언행(言行)은 군자(君子)의 천지를 감동시킨다.
동년 생원시에서 임상악(林象岳)과 진사시에서 조하망(曺夏望)을 뽑았다.
38년 임진 2월 정시 중전(中殿)의 종기가 나음. 에서 양정호(梁廷虎) 등 19명을 뽑았다. 4명을 삭제하다. ○ 표의 시제 : 한 나라 발해 태수(渤海太守) 의조(議曹) 왕생(王生)이 임금이 공수(龔遂)를 수형승(水衡丞)에 임명하여 표창한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좌의정 김창집(金昌集)ㆍ홍문관 제학 이돈(李墪)
39년 계사 10월 증광시 즉위한 지 40년이 되고, 존호를 올린 두 경사를 합쳐 기념하다. 에서 남세운(南世雲) 등 5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왕진(王縉)이 임금의 자신을 반성ㆍ조심하고 대신에게 섭리(燮理)하기를 명하도록 청하다. ○ 명관 : 김창집
동년 생원 이진수(李眞洙)와 진사시 이덕해(李德海)를 뽑았다.
40년 갑오 11월 증광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 에서 이정숙(李廷熽) 등 3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목 : 송 나라 소식(蘇軾)이 지일(至日)날 선왕을 법받아 천도(天道)에 순응하여 국가와 몸에 실천하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박사한(朴師漢)과 진사 이영보(李英輔)를 뽑았다.
41년 을미 5월 식년시에서 박진량(朴震亮) 등 35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강(江)과 한(漢)이 바다에 조회(朝會)한다.
동년 생원 윤득형(尹得衡)과 진사 이기지(李器之)를 뽑았다.
43년 정유 8월 온양 별시 온천에 행차한 기념인데, 흉년으로 연기되었다가 청주로 옮겨 보였다. 에서 이유춘(李囿春) 등 7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가을달이 찬물 위를 비친다.[秋月照寒水]○ 시관 : 공조 판서 조태채(趙泰采)
동년 평안도 별시에서 임익빈(林益彬) 등 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풀속에 바람이 불면 수그러진다.[草上之風必偃] ○ 시관 : 판서 민진원(閔鎭遠)
동월 함경도 별시에서 주형리(朱炯离)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문무(文武) 병용(幷用)이 국가를 장구하게 하는 방법이다. ○ 시관 : 판서 권상유(權尙游)
10월 정시 중시 대거 에서 이거원(李巨源)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초(楚) 나라 송옥(宋玉)이 임금이 자기에게 이르기를 “의논을 잘 하는구나. 다시 서민의 바람[風]을 진술하라.” 한 것을 감사하다. ○ 대제학 송상기(宋相琦)
중시에서 권세항(權世恒)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주발(周勃)이 우승상을 사직하다.
11월 식년시에서 유복명(柳復明) 등 42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홀로 주 나라에 조회(朝會)하다.[獨朝周]
동년 생원 신방(申昉)과 진사 이구(李絿)를 뽑았다.
44년 무술 10월 정시 중전의 홍역이 낫고, 세자의 가례(嘉禮) 등의 두 경사 에서 홍현보(洪鉉輔) 등 1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배복(裴復)이, 자기 아버지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아버지는 충성되고, 아들은 효성스럽다고 말하고 상(喪)을 마치면 기필코 다시 한림(翰林)을 삼겠다. 한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우의정 이건명(李健命)ㆍ대제학 김유(金楺)
45년 기해 별시 민회빈(愍懷嬪) 복위되다. 에서 이성환(李星煥) 등 1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근면(勤勉)과 안일(安逸) ○ 시관 : 위와 같음
9월 증광시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가다 에서 정형익(鄭亨益) 등 3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한신(韓信)이, 한왕(漢王)이 자기에게 “승상(丞相)이 자주 장군을 말하더니 장군은 무엇으로써 과인(寡人)에게 계책을 가르치겠소.” 한 것을 사례하다. ○ 대제학 이관명(李觀命)
동년 생원 조명익(趙明翼)과 진사 권혁(權爀)을 뽑았다.
10월 춘당대 정시 세자가 문묘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한 후 에서 남수현(南壽賢) 등 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에서 주 나라 태사(太師)로부터 상송(商頌) 16편을 얻어서 돌아가 그의 선왕에게 제사지냄을 치하하다. ○ 명관 : 영의정 김창집(金昌集)ㆍ대제학 이관명(李觀命)
경종(景宗) 원년 신축 2월 정시 임금이 동궁으로 있을 때 홍역이 나았다. 에서 윤심형(尹心衡)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소식(蘇軾)이 어시(御試)의 대책에 있어서 아첨하여 비위 맞추는 자를 뽑지 말아서 폐하가 곧을 말을 꺼리지 않는 뜻을 보여 주기를 청하다. ○ 명관 : 좌의정 이건명(李健命)ㆍ홍문관 제학 최석항(崔錫恒)
4월 식년시 경자년의 식년시를 연기하여 시행하다. 에서 오성유(吳聖兪) 등 34명을 뽑았다. 전시의 대책 시제 : 농(農)
동년 생원 김형(金烱)과 진사 김신겸(金信謙)을 뽑았다.
11월 즉위 증광시에서 신처수(申處洙) 등 32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성지(城池)
동년 생원시에서 민통수(閔通洙)와 진사시에서 김치만(金致萬)을 뽑았다.
2년 임인 2월 정시(庭試) 세자 책봉 에서 조경명(趙景命) 등 9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소식(蘇軾)이 고삐를 놓고 말[馬]을 먹이고 동방이 밝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서서히 9궤(九軌)의 길로 가기를 청하다. ○ 명관 : 우의정 최석항(崔錫恒)ㆍ대제학 이광좌(李光佐)
9월 알성 별시에서 성덕윤(成德潤)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에서 손석(孫奭)이 올린 무일도(無逸圖)를 강독각(講讀閣)에 걸어 놓고 다시 채양(蔡襄)에게 명하여 무일편(無逸篇)을 강독각의 병풍에 쓰게 한 것을 치하하다. ○ 명관 : 우의정 최석항(崔錫恒)ㆍ대제학 조태억(趙泰億)
3년 계묘 3월 대증광시(大增廣試) 숙종을 종묘에 합부하고 인경왕후(仁敬王后)와 인현왕후(仁顯王后), 단의왕후(端懿王后)를 소급하여 책례(冊禮)를 올리며, 왕대비(王大妃)를 존숭하고, 중궁(中宮)의 책례와 세자의 입학 등 7경사를 합치다. 에서 박사수(朴師洙) 등 41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상백(尹尙白)과 진사 오수엽(吳遂燁)을 뽑았다.
3월 별시에서 박사유(朴師游) 등 1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섬주 지사(陝州知事) 구준(寇準)이 생일날 산붕(山棚)을 만든 죄를 다스리지 않고, 다만 어리석음이라고 말한 것을 감사하다. ○ 명관 : 관서 이태좌(李台佐)ㆍ제학 이조(李肇)
10월 정시 임금과 세제(世弟)의 병환이 낫다. 에서 김상성(金尙星) 등 5명을 뽑았다. 전(箋)의 시제 : 월(越) 나라 범여(范蠡)가 전일 회계(會稽)의 패전한 벌(罰)을 받기를 청하다. ○ 주문(主文) : 이조(李肇)
11월 식년 정재춘(鄭再春) 등 35명을 뽑았다. 논(論)의 시제 : 글을 모두 믿으면 글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
동년 생원 박필현(朴弼顯)과 진사 이광의(李匡誼)를 뽑았다.
영종 원년 을사 8월 정시 대왕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당초에는 갑진년 8월로 정하였으나 국상(國喪)으로 말미암아 연기 시행되다. 에서 박필철(朴弼哲) 등 15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성성존존 도의지문(成性存存道義之門) 명관 : 이조 판서 민진원(閔鎭遠)ㆍ예문관 제학 이의현(李宜顯)
10월 즉위 증광시에서 정언섭(鄭彥燮) 등 4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호안국(胡安國)이 《춘추전(春秋傳)》을 임금에게 바치다. ○ 명관 : 좌의정 민진원(閔鎭遠)ㆍ주문 : 이의현(李宜顯)
동년 생원 유묵기(兪黙基)와 진사 윤급(尹汲)을 뽑았다.
11월 정시 세자 책봉과 천연두가 낫다. 에서 이만영(李萬榮) 등 2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신하들이 당 나라 말기부터 백년 만에 비로소 입저(立儲)의 예를 거행함을 칭하하다. ○ 명관 : 민진원(閔鎭遠)ㆍ주문 : 이의현
2년 병오 2월 강도(江都) 별시 숙종의 초상을 봉안한 후 에서 성유열(成有烈) 등 5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 ○ 시관 : 이조 판서 이병상(李秉常)
11월 식년시에서 이휘항(李彙恒) 등 35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우정(禹鼎)
동년 생원 이후(李)와 진사 홍계흠(洪啓欽)을 뽑았다.
동월 알성시에서 김치후(金致垕) 등 7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송 나라 문천상(文天祥)이, 임금이 집영전(集英殿)에 나와 진사 급제를 내려준 것을 사례하다.
3년 정미 윤3월 증광시 4가지 경사 에서 민원(閔瑗) 등 4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송사흠(宋思欽)과 진사 홍상한(洪象漢)을 뽑았다.
9월 정시 중시대거 에서 강백(姜栢) 등 5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망의(蟒衣)를 입고 선왕을 뵌다. ○ 명관 : 호조 판서 이태좌ㆍ예문관 제학 이집(李㙫)
10월 중시에서 이정작(李庭綽) 등 4명을 뽑았다. 율시(律詩)의 시제 : 내 백성의 재물을 불리고 백성의 원망을 푼다.[阜財解民慍]
4년 무신 5월 춘당대시 출정하였던 장군과 병사가 돌아온 후 임금이 친히 무과를 보이고 거기서 대거(對擧)하다. 에서 오원(吳瑗) 등 3명을 뽑았다. 잠(箴)의 시제 : 편안한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 ○ 대제학 윤순(尹淳)
8월 평안도 별시에서 이양(李瀁)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재반헌괵(在泮獻馘) ○ 시관 : 판서 김동필(金東弼)
9월 별시 세자의 입학ㆍ가례(嘉禮)ㆍ관례(冠禮)의 3경사 에서 안복준(安復駿)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공(周公)이 형옥(刑獄)을 신중히 하고, 군비(軍備)를 잘 다스려 문왕(文王)의 빛을 보이고 무왕(武王)의 공을 들어 내기를 청하다.
10월 정시 반역의 변이 평정되다. 에서 박대후(朴大厚) 등 6명을 뽑았다. 제고(制誥)의 시제 : 송 나라에서 부필(富弼)을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임명하다.
5년 기유 11월 식년시에서 정동혁(鄭東爀) 후에 열(說)자로 고치다. 등 41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춘추는 왕도의 권형[春秋王道之權衡] ○ 명관 : 영의정 홍치중(洪致中)
동년 생원 박사백(朴師伯)과 진사 이석표(李錫杓)를 뽑았다.
6년 경술 2월 정시 숙종의 세실(世室)을 정하다. 에서 이시희(李時熙) 등 20명을 뽑았다. 전(箋)의 시제 : 우리나라 찬수청(纂修廳)에서 《선조보감(先朝寶鑑)》을 바치고 이어서 근면하고 경건히 선왕의 지극한 덕을 계술(繼述)하여 선왕의 큰 공적을 아름답게 선양(宣揚)하기를 청하다.
7년 신해 2월 정시 무고(巫蠱) 옥사(獄事)를 처결하고 범인 필웅(必雄)을 처단하다. 에서 심악(沈䥃)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법제(法制)ㆍ전부(田賦)ㆍ양역(良役)ㆍ군정(軍政)ㆍ전화(錢貨)ㆍ태학(太學) 등의 일곱 가지 폐[七幣]
3월 함경도 별시에서 이재춘(李載春) 등 5명을 뽑았다. 부(賻)의 시제 : 친경(親耕) ○ 시관 : 판서 윤순(尹淳)
8년 임자 10월 정시 선의왕후(善懿王后)를 종묘에 합부함. 에서 오대관(吳大觀) 등 10명을 뽑았다. 송(頌)의 시제 : 본지백세(本支百世)
9년 계축 9월 알성시 춘당대 에서 이석표(李錫杓)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이광필(李光弼)이 태위(太尉)에 임명하여 8로(路)의 행영(行營)을 통어하게 한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우의정 김흥경(金興慶)ㆍ대제학 윤순(尹淳)
11월 식년시 임자년 식년시가 흉년으로 연기 시행되다. 에서 박첨(朴) 등 51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군신(群臣)이 임금이 친히 나와 군사를 위로함을 칭하하다.
동년 생원 정실(鄭宲)과 진사 이종적(李宗迪)을 뽑았다.
10년 갑인 2월 정시 중전의 수두(水痘)가 나았다. 에서 김상구(金尙耈) 등 6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 나라 소호(召虎)가 그 문덕(文德)을 베풀어 이내 나라를 흡족하게 하기를 청하다. ○ 명관 : 김흥경(金興慶)ㆍ홍문관 제학 송인명(宋寅明)
10월 춘당대시에서 이명곤(李命坤)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리나라에서 대전(大典)을 편수하여 열성(列聖)의 옛법을 부활시키고 태학을 배양하여 많은 선비의 나아갈 길을 바르게 하기를 청하다. ○ 시관은 위와 같다.
11년 을묘 윤4월 증광시 원자(元子)의 호를 정하다 에서 박필리(朴弼理) 등 42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주 나라는 비록 옛 나라이나 그 국운은 유신(維新)된다.[周雖舊邦其命維新] ○ 명관 : 김흥경
동년 생원 박만원(朴萬源)과 진사 임박(任璞)을 뽑았다.
8월 식년시에서 윤택휴(尹澤休) 등 3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독서함이 연단(鍊丹)함과 같다.[讀書如鍊丹]
동년 생원 이광회(李匡會)와 진사 이존중(李存中)을 뽑았다.
10월 정시에서 원자(元子)의 수두(水痘)가 낫다. 신수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큰 업(業)을 처음 열다.[肇開鴻業]
12년 병진 4월 정시 세자 책봉 에서 조하망(曺夏望)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에서 장락궁(長樂宮)이 이루어짐을 축하한다. ○ 명관 : 우의정 송인명(宋寅明)ㆍ제학 조원명(趙遠命)
9월 정시 대왕대비의 병환이 회복되다. 에서 원경하(元景夏) 등 1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먼저 농사짓기의 어려움을 미리 알아야 이에 편안할 수 있다.[先知稼穡之艱難乃逸] ○ 명관 : 송인명ㆍ대제학 이덕수(李德壽)
10월 알성시에서 윤득경(尹得敬) 등 5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명륜당(明倫堂) 명관 : 좌의정 김재로(金在魯)ㆍ대제학 이덕수
13년 정사 3월 별시 대거 중시 에서 홍계희(洪啓禧) 등 17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양역(良役) ○ 명관 : 송인명ㆍ대제학 이덕수 ○ 이현필(李顯弼)의 대책이 망녕되므로 합격이 삭제되고 시관은 파직되었다.
3월 중시에서 이섭원(李燮元) 등 8명을 뽑았다. 제고(制誥)의 시제 : 당 나라에서 한신(韓信)의 고사에 따라 혼함(渾瑊)을 부원수에 임명하다. ○ 명관 : 김흥경ㆍ주문 : 이덕수(李德壽)
14년 무오 4월 식년시에서 한광회(韓光會) 등 41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선비가 많으므로 문왕(文王)이 편안하다.[濟濟多士文王以寧] 명관 :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동년 생원 이명덕(李命德)과 진사 박인원(朴麟源)을 뽑았다.
15년 기미 3월 알성시 친경한 후 알성함. 에서 이희겸(李喜謙) 등 10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경근거(耕根車) ○ 명관 : 판부사 서명균(徐命均)ㆍ주문(主文) : 오원(吳瑗)
9월 정시 단경왕후(端敬王后)가 복위되어 종묘에 합부되다. 에서 이기경(李基敬) 등 19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내치와 외국 방어는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모나게 함과 같다.[內修外攘如直內方外] ○ 명관 : 우의정 유척기(兪拓基)ㆍ홍문관 제학 서종급(徐宗伋)
16년 경신 4월 정시 대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다 에서 정계주(鄭啓周)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크도다 건원(乾元)이여.[大哉乾元] 명관 : 유척기ㆍ홍문관 제학 조관빈(趙觀彬)ㆍ예문관 제학 서종급(徐宗伋)
8월 알성시 친히 석채(釋菜)를 행하다. 에서 이창수(李昌壽) 등 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에서 중흥 공신 28장군을 운대(雲臺)에 그려 놓고 임금이 행차한 것을 치하하다. ○ 명관 : 좌의정 김재로(金在魯)ㆍ대제학 오원(吳瑗)
9월 개성 정시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참배한 후 친히 임하여 선비에게 시험을 보이다. 에서 전명조(全命肇) 등 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옛 서울에 감회(感懷)가 있다.[感古都] ○ 처음에 강남(江南)의 춘색(春色)이 손 안에서 전해진다.[江南春色手中傳]라는 부(賦)를 출제하였는데 응시자들이 시제를 풀지 못하였으므로 시제를 고쳤다. 명관 : 김재로(金在魯)
11월 증광시 효종에게 소급하여 존호를 올림. 대왕대비에게 존호를 더 올림. 임금과 중전(中殿)에게 존호를 올림. 4경사 합동 기념 에서 홍중효(洪重孝) 등 51명을 뽑았다. 시제의 : 명 나라 시랑(侍郞) 구준(丘濬)이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바치다. ○ 명관 : 김재로(金在魯)
동년 생원 최홍간(崔弘簡)과 진사 민백창(閔百昌)을 뽑았다.
17년 신유 식년시 11월 에서 안극효(安克孝) 등 37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오현금(五絃琴)
동년 생원 김양택(金陽澤)과 진사 조재홍(趙載洪)을 뽑았다.
18년 임술 9월 정시 세자가 입학하다 에서 이맹휴(李孟休) 등 9명을 뽑았다. 시제 : 양역(良役)ㆍ학교ㆍ군정(軍政)ㆍ화폐 통용 ○ 명관 : 송인명(宋寅明)
19년 계해 윤4월 알성시 친히 대사례(大射禮)를 행함. 에서 한광조(韓光肇)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비오는 것을 기뻐하여 활쏘기를 하다.[喜雨觀德] 명관 : 송인명
10월 정시 세자의 홍역이 낫고 관례(冠禮)를 행한 두 가지 경사 에서 조영로(趙榮魯) 등 26명을 뽑았다. 부의 제목 : 백량어지(百兩御之) ○ 명관 : 송인명ㆍ홍문관 제학 오광운(吳光運)
20년 갑자 3월 춘당대 정시 세자의 가례(嘉禮) 에서 장주(張澍) 뒤에 정(淀)으로 고쳤다. 등 10명을 뽑았다. 시제 : 옛 거울[古鏡] 명관 : 판서 조상경(趙尙絅)ㆍ문임(文任)은 없고 임금이 친히 임하였다. 그날로 합격 발표함.
9월 식년시에서 박창원(朴昌源) 등 3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기산(岐山)에서 우는 봉황[岐山鳴鳳] ○ 제학 : 조관빈(趙觀彬)
동년 생원 송환성(宋煥星)과 진사 민백겸(閔百謙)을 뽑았다.
10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에서 황합(黃柙)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호랑이로 …… 박히다.[射虎石] ○ 명관 겸 주문 : 조관빈(趙觀彬)
21년 을축 9월 정시 작년 8월 임금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으므로 증광시를 금년 2월에 보이기로 정하였는데, 정월 홍관(虹貫)의 변으로 말미암아 연기하여 9월에 시행하면서 정시로 변경하였다. 초시에 5백 명 에서 이관섭(李觀燮) 등 12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길보가 송(誦)을 지으니 목연하기 청풍 같다.[穆如淸風] ○ 명관겸 주문 : 원경하(元景夏)
22년 병인 윤3월 정시 중시 대거 초시에 5백 명 에서 남운로(南雲老) 등 9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주 나라에서 인지(麟趾)는 관저(關雎)의 효과임을 축하하다. ○ 명관 : 송인명ㆍ홍문관 제학 원경하
동월 알성시 춘당대에서 에서 이득종(李得宗)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탁무(卓茂)가 포덕후(褒德侯)에 송함을 사례하다.
동월 중시에서 이윤신(李潤身) 등 7명을 뽑았다. 조칙(詔勅)의 시제 : 배와 수레를 만들어 교통하다.
4월 평안도 별시에서 이인채(李仁采)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조천석(朝天石) ○ 시관 : 판서 이주진(李周鎭)ㆍ본도의 지방관 이종성(李宗城)
7월 춘당 대시 무재(武才)를 시험하는데 대거함 에서 이명희(李命熙)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우리나라 종신(宗臣)이 열성어제(列聖御製)를 바치다.
8월 함경도 별시에서 주형질(朱炯質)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육진을 개척하다.[開拓六鎭] ○ 시관 : 지사(知事) 권적(權)
23년 정묘 3월 식년시에서 심국현(沈國賢) 등 34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남묘(南畝)에 점심밥을 내어가니 전준(田畯)이 이르러 기뻐하다.[饁彼南畝田畯至喜] ○ 명관 : 우의정 민응수(閔應洙)ㆍ홍문관 제학 조관빈
동년 생원시에서 허증(許增)과 진사시에서 이재관(李在寬)을 뽑았다.
9월 정시 대왕대비의 존호를 올리다. 임금이 친히 경복궁에 임하였다.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에서 이유수(李惟秀)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억계시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읊어 외우다. [作抑戒詩朝夕諷誦] ○ 명관겸 주문 : 조관빈
24년 무진 3월 춘당대 경시 숙종의 영정(影幀)을 영희전(永禧殿)에 모시다. 에서 김치인(金致仁) 등 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장공예(張公藝)가 임금이 집에 찾아와 능히 친족을 화목하는 방법을 물은 것을 감사하다. ○ 명관겸 주문 제학(提學) 정우량(鄭羽良)
25년 기사 3월 알성시 춘당대에서 보임 에서 이양천(李亮天)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관풍각(觀豐閣) ○ 명관 : 영의정 김재로(金在魯)ㆍ제학 정우량
26년 경오 3월 식년시에서 이존중(李存中) 등 51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종루의 종[樓鍾]
동년 생원 박지익(朴志益)과 진사 강필교(姜必敎)를 뽑았다.
9월 알성시 임금이 세자를 거느리고 문묘에 작헌례를 행하다. 에서 이인원(李仁源) 뒤에 심원(心源)으로 고치다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명명(明命)이 혁연하다.[明命赫然] ○ 명관 : 우의정 정우량ㆍ예문관 제학 이천보(李天輔)
동월 온양 정시 임금이 친히 참석하다. 그날로 합격자 발표 에서 조시겸(趙時謙)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오늘 아침 대나무 창문이 태양을 향하여 열리다.[今朝竹牖向陽開] ○ 명관 : 정우량ㆍ홍문관 제학 원경하(元景夏)
27년 신미 2월 춘당대 정시 맏손자 출생 에서 오찬(吳瓚) 등 10명을 뽑았다. 시제 : 효도와 공경함은 인(仁)을 하는 근본이다.[孝悌也者爲仁之本] ○ 명관 : 조관빈ㆍ제학 원경하
9월 정시 대비에게 존호를 올림. 임금이 건강이 회복됨. 세손(世孫)의 책봉, 세손의 병환이 회복됨. 네 경사 에서 윤득우(尹得雨) 등 24명을 뽑았다. 초시에 1천 명 ○ 부의 시제 : 교득채근(晈得菜根) 명관겸 주문 : 이천보(李天輔)
28년 임신 9월 정시(庭試) 대비와 임금과 중전의 존호(尊號)를 올린 세 가지 경사 에서 이명환(李明煥) 등 25명을 뽑았다. 초시(初試) 1천 명 ○ 시제 :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함은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근본이다. ○ 명관 : 판서 신만(申晩)
29년 계유 2월 알성시 춘당대에서 보이다. 에서 홍억(洪檍)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명 나라 구준(丘濬)이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바치다. ○ 명관 : 좌의정 이천보ㆍ제학 김상성(金尙星)
2월 정시 세자의 홍역이 회복되고 맏손자의 출생의 두 경사 에서 노성중(盧聖中) 등 12명을 뽑았다. 5백 명 초시 ○ 부(賦)의 시제 : 슬피옥찬황류재중(瑟彼玉瓚黃流在中)
10월 정시(庭試) 육상궁(毓祥宮)에게 시호를 숙빈(淑嬪)이라고 올리고 원(園)을 봉함. 친히 춘당대에 임하였다. 에서 이현옥(李鉉玉)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초룡주장(草龍珠帳) ○ 명관 : 이천보(李天輔)
동월 식년시에서 권세구(權世矩) 등 3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태양의 출입을 측정하다.[定太陽出入]
동년 생원 강심면(姜心勉)과 진사 신사권(申史權)을 뽑았다.
30년 갑술 도과(道科) 정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해이므로 경기도 유생에게 춘당대에서 과거를 보임. 에서 이빈(李贇) 등 8명을 뽑았다. 시(詩)의 시제 : 집희경지(緝熙敬止) ○ 명관 : 판서 신만(申晩)
윤 4월 증광시 숙종 인경왕후(仁敬王后)ㆍ인현왕후(仁顯王后)ㆍ대비ㆍ임금에게 존호를 올리다. 에서 홍종해(洪宗海) 등 40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의정부의 신하가 과거 규칙을 엄히 하여 선비의 습성을 바르게 하기를 청하다.
동년 생원 신광정(申光鼎)과 진사 문연박(文演樸)을 뽑았다.
31년 을해 3월 함경도 별시에서 오상현(吳尙顯)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제목 : 협화만방(協和萬邦) ○ 시관 : 판서 조영국(趙榮國)
5월 정시(庭試) 역적을 평정함.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 에서 이시민(李時敏) 등 1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영대를 경시하다.[經始靈臺] ○ 명관 : 신만(申晩)
9월 정시 인빈(仁嬪)에게 시호를 올리고 원(園)을 봉함.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함 에서 심이지(沈履之)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현주대갱(玄酒大羹) ○ 명관 : 영의정 이천보(李天輔)ㆍ홍문관 제학 정우량(鄭羽良)
32년 병자 3월 정시 대비의 춘추가 칠순(七旬)되어 존호를 올리고, 육상궁(毓祥宮)에게 시호를 더 올림. 임금과 왕후에게 존호를 올림. 네 가지 경사. 초시 1천 명 에서 김성유(金聖猷) 등 3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일감(日監)이 이에 있다.[日監在玆] ○ 명관 : 판부사 이종성(李宗城)
7월 기로(耆老) 정시 대비의 춘추가 칠순(七旬)이고, 임금의 춘추 70을 바라봄으로써 기로사(耆老社)의 모든 신하에게 술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세자 및 기로(耆老) 이품(二品) 이상을 거느리고 대비에게 하례(賀禮)를 드리고 세자는 백관을 거느리며 세 대비ㆍ임금ㆍ왕비에게 하례를 드렸다. 임금이 친히 춘당대에 나왔다.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에서 이가우(李嘉遇)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노인을 잘 봉양하다.[善養老] 명관 : 신만
윤9월 식년시에서 한종찬(韓宗纘) 등 38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 나라 조충국(趙充國)이 금성방략(金城方略)을 바치다.
동년 생원 남대만(南大萬)과 진사 이지형(李之珩)을 뽑았다.
동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그날로 합격 발표함. 에서 정원달(鄭遠達) 등 8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원회(元會) ○ 명관 : 판부사(判府事) 이종성(李宗城)
33년 정축 8월 정시 대비의 병환이 회복된 경축의 시험이 개최되기도 전에 국상(國喪)을 당하여 인산(因山) 후에 보였는데 초시를 면제하다. 에서 이택진(李宅鎭)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비록 효도를 하고자 하여도 누구에게 효도를 하리오.[雖欲孝誰爲孝] ○ 명관 : 판중추(判中樞) 이정보(李鼎輔)
9월 정시 세자의 천연두가 낫다. 겸하여 중시 대거 초시를 면제함. 에서 이재협(李在協) 등 8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삼대(三代)의 기상(氣像)인데 어찌 관악(管樂)에 비하랴.[三代氣像何比管樂] ○ 명관 : 판서 홍상한(洪象漢)
동월 중시에서 이기경(李基敬)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장량(張良) 유후(留侯)에 봉함을 사례하다. ○ 주문 : 이정보(李鼎輔)
34년 기묘 4월 식년시에서 이태정(李台鼎) 등 56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금거울[金鑑]
동년 생원 이인섭(李寅燮)과 진사 강대언(康大彥)을 뽑았다.
7월 별시 인원왕후(仁元王后)를 종묘에 합부하다. 에서 이만영(李晩榮) 등 12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기로과(耆老科)를 추억하다.[憶耆老科] ○ 명관 : 이정보(李鼎輔)ㆍ홍문관 제학 오수채(吳遂采)
동월 알성시 춘당대에서 보이다 에서 신익(申熤) 등 6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계성사(啓聖祠)에 참배하다. ○ 명관 : 이정보ㆍ제학 황경원(黃景源)
8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임금이 작(爵)을 받은 지 60주년이 됨. 왕비의 가례(嘉禮)를 행함. 왕비의 수두(水痘)가 낫다. 세손(世孫)을 책봉하다. 5가지 경사. 초시를 면제하다. 에서 심익운(沈翼雲) 등 11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너무 편암함을 경계하다.[戒太康] ○ 명관 : 우의정 민백상(閔百祥)ㆍ제학 황경원
37년 신사 9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 세손의 입학 에서 권극(權極) 등 31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과거 제도. 시관 : 이정보(李鼎輔)
38년 임오 3월 알성시에서 권이강(權以綱) 등 3명을 뽑았다. 표의 제목 : 주 나라 강숙(康叔)이, 임금이 명하여 위후(衛侯)로 봉해준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윤동탁(尹東度)
4월 식년시에서 조진형(趙鎭衡) 등 37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덕유여모(德輶如毛)
동년 생원 박수문(朴垂聞)과 진사 이관조(李觀祚)를 뽑았다.
7월 정시 임금이 세자를 대리시켰다가 다시 정사를 봄. 세손의 마마가 낫다. 세손의 가례 3경사 합동 기념. 초사에 천 명 에서 신상권(申尙權) 등 1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한 나라 곽광(藿光)이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임명함을 사례하다. ○ 명관 : 좌의정 홍봉한(洪鳳漢)ㆍ전 대제학 김양택(金陽澤)
39년 계미 정월 기로(耆老) 정시 그날로 합격 발표하여 모두 통정(通政)에 승진시키다. 에서 이종령(李宗齡)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노인에게 묻다.[詢玆黃髮]
10월 증광시 임금의 춘추가 70으로 즉위한 지 40년이다. 친히 경복궁에 임하여 장막을 쳤다. 에서 조덕성(趙德成) 등 70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지팡이를 짚고 조서(詔書)를 듣다.
동년 생원 김성환(金星煥)과 진사 한광정(韓光傳)을 뽑았다.
40년 갑신 2월 충량시(忠良試) 숭정(崇禎) 갑신년의 3주기로서, 특명으로 현절사(顯節祠)와 충렬사(忠烈祀)에 제사(祭祀)를 내리고 모셔진 그들의 자손 및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인의 자손을 응시하도록 하다.임금이 친히 숭정전(崇政殿)에 임하였고 홍패(紅牌)도 청 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에서 김노순(金魯淳) 등 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풍천(風泉) ○ 명관 : 홍봉한ㆍ이정보(李鼎輔)
2월 강화 별시에서 유택하(柳宅夏)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억위보장(抑爲保障) ○ 시관 : 판서 김양택
4월 정시 세손이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됨. 그날로 합격을 발표함 에서 민홍렬(閔弘烈)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이견대인(利見大人)ㆍ명관 : 홍봉한. 주문 : 이정보(李鼎輔)
41년 을유 3월 식년시에서 서호수(徐浩修) 등 52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아아, 이해 이 과거가 몇 회인고. 지난 일을 추억하니 감회를 일으키는구나.[此年此科於戱幾回追憶昔年臨殿興懷] ○ 명관 : 우의정 김상복(金相福)
동년 생원 서득량(徐得亮)과 진사 남경택(南景宅)을 뽑았다.
3월 알성시 세손을 이끌고 문묘에 작헌례를 행함 에서 강이정(姜彝正)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공자가 말하기를, “내 점(點)을 찬성한다.” 하였다. ○ 명관 : 김상복. 홍문관 제학 : 서명응(徐命膺)
42년 병술 2월 정시 중시 대거 초시에 5백 명 에서 이한경(李漢慶) 등 13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만년(晩年)에 스스로 반성하여 더욱 힘씀.[暮年自省益勉]
3월 중시에서 이성원(李性源) 등 8명을 뽑았다. 제목 : 우리나라에서 중국이 8장(章)과 9음(音)을 내려 준 것을 받으려 하는 전(箋) ○ 명관 : 김상복
동월 정시 세손의 병환이 회복되다. 에서 조재준(趙載俊) 뒤에 시준(時俊)이라 고치다. 등 6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충효(忠孝) ○ 명관 : 판서 김양택(金陽澤) ○ 이번 과거부터 초시와 강경(講經)을 폐지하고 한결같이 옛대로 하였다.
4월 정시 임금의 병이 회복되다. 에서 홍찬해(洪纘海) 등 10명을 뽑았다. 시제 : 봄에 내리는 조칙[春詔] ○ 명관 겸 제학 : 남태제
9월 정시 임금이 건강이 작년 섣달부터 불편하다가 6월에 비로소 종묘를 참배하고, 8월에 명릉(明陵)에 행차하다. 세손을 거느리고 친히 춘당대에 임하다. 에서 서유인(徐有隣) 등 2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수레를 멈추고 앉아서 늦 단풍을 사랑하다.[停車坐愛楓林晩] ○ 명관 : 우의정 김치인(金致仁)ㆍ주문 황경원(黃景源)
43년 정해 3월 정시 친경(親耕) 친잠(親蠶)에서 김문순(金文淳) 등 3명을 뽑았다. 전(箋)의 시제 : 우리나라 성균관 학생들이 친경ㆍ친잠을 해서 백성들에게 의식(衣食)을 가르치기를 칭하다. ○ 명관 :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홍문관 제학 : 서명응(徐命膺)
9월 알성시 문묘를 참배하여 세손에게 작헌례를 행하게 하고 춘당대로 돌아왔다. 에서 김광묵(金光黙) 등 10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백성들이 자식처럼 온다.[庶民子來] ○ 명관 : 영부사 윤동탁(尹東度)
12월 중시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태조가 상왕(上王) 위에 있을 때의 정해년 중시의 예에 따라 친히 경복궁에 임하여 그날로 발표하고 천동(天童)과 도포와 말을 내려 주다. 에서 이지회(李之晦)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옛일을 생각하니 추모(追慕)하기 만배(萬倍)로다.
44년 무자 3월 식년시에서 조정(趙) 등 5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어버이에게 맛난 음식을 실컷 드리다.[親極滋味]
동년 생원 이노술(李魯述)과 진사 이태원(李太源)을 뽑았다.
9월 정시 중전(中殿)의 혼례한 지 10년이 되고, 임금의 춘추가 80을 바라봄. 두 경사를 합쳐 기념 에서 신사찬(申思贊) 등 9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춘당대의 가을빛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春塘秋色古今同] ○ 명관 : 판부사 김상복(金相福)
45년 기축 2월 정시 세손(世孫)을 위하여 식희과(飾喜科)를 보였다 에서 홍낙임(洪樂任) 등 3명을 뽑았다. 부(賦)의 시제 : 지성이 서로 합함은, 나는 문손을 보겠다.[至誠相孚予見文孫] ○ 명관 : 우의정 김상철(金尙喆)
5월 기로 정시 문무관 중 나이 70 이상의 응시를 허락하다. 에서 윤득성(尹得聖)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군신기구(君臣耆耈) ○ 명관 : 좌의정 김양택(金陽澤)
9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당초에는 춘당대에서 보여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경희궁으로부터 창덕궁에 행차한 후에 큰 뇌성과 비로 말미암아 경희궁으로 돌아가 다음 날 숭정전(崇政殿)에서 보임. 에서 최해녕(崔海寧)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우리 백성의 옷과 양식은 오직 양잠과 농사에 달려 있다.
46년 경인 12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 친히 경복궁에 임하다. 에서 신대승(申大昇)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창승월광(蒼蠅月光) ○ 명관 : 김치인(金致仁)ㆍ홍문관 제학 서명신(徐命臣)
47년 신묘 2월 정시에서 이상암(李商巖) 뒤에 의익(義翊)으로 고침.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我愛其禮] ○ 명관 : 김양택(金陽澤)
3월 식년시에서 남봉로(南綘老) 등 7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담(膽)은 크고자 하며 마음은 작고자 한다.[膽欲大心欲小] ○ 명관 : 좌의정 한익모(韓翼諅)
10월 정시 중국에 대한 교섭이 성공했고 종묘의 예를 제정하였다. 에서 김상정(金相定) 등 2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편안함에 빠질까 경계하다.[戒深太康] ○ 명관 : 김양택ㆍ주문 황경원(黃景源)
48년 임진 2월 기로과에서 신광수(申光洙) 등 6명을 뽑았다. 시의 시제 : 우리나라 기로사(耆老社)의 제신이 위(衛) 나라 무공(武公)의 억계시(抑戒詩)를 바치다. ○ 명관 : 김상철(金尙喆)
8월 탕평 별시에서 임종주(任宗周) 등 11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무당(無黨) 무편(無偏)에 왕도(王道)가 평평(平平)하고, 무편 무당에 왕도가 탕탕하다.[無黨無偏王道平平無偏無黨王道蕩蕩] ○ 명관 : 채제공(蔡濟恭)ㆍ주문 원인손(元仁孫)
9월 정시 육상궁(毓祥宮)에게 시호를 더 올리다.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다. 에서 서유신(徐有臣)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남훈전(南薰殿)에 앉아서 오현금(五絃琴)을 타다.[坐南薰殿彈五絃琴]
49년 계사 윤3월 증광시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에게 휘호(徽號)를 소급하여 올림. 그 임금과 정성왕후(貞聖王后)와 중전(中殿)에게 존호(尊號)를 더 올린 다섯 가지 경사 기념으로 개최 에서 이회수(李會遂) 등 6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어버이를 사랑함을 보배로 삼는다.[仁親以爲寶] ○ 명관 : 김양택(金陽澤)
동년 생원 조형규(趙亨逵)와 진사 김정근(金正根)을 뽑았다.
10월 임금이 친히 임한 정시 선조가 의주(義州)의 용만관(龍灣館)에서 돌아온 해이므로 경운궁(慶運宮)에 나가 하례(賀禮)를 받음.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다. 에서 이겸환(李謙煥) 등 2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저 기욱(淇澳)에는 푸른 대가 우거졌구나.[瞻彼淇澳綠竹猗猗] ○ 명관 : 원인손(元仁孫)ㆍ주문 서명응
50년 갑오 정월 등준시 세조조 병술년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근정전(勤政殿)에 나가 종1품 이하로부터 당상관 3품에 이르기까지의 신하에게 시험을 보여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여 2품 이상에게 말을 내려 주고 2품 이상은 초헌을 타고 유가(遊街)하게 하다. 에서 조덕성(趙德成) 등 15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경연(經筵) 특진관(特進官)이 근정전 앞에서 이전ㆍ삼모(二典三謨)를 바치다.
3월 식년 김진구(金振久) 등 4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뜻을 가진 자,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다.[有志者事竟成]
동년 생원 김재순(金在淳)과 진사 정재원(丁載遠)을 뽑았다.
8월 정시에서 김노영(金魯永) 등 2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새해와 함께 봄을 같이 하도다.[與歲同春] ○ 명관 : 신회(申晦)ㆍ주문 서명응
9월 평안도 도과에서 계덕해(桂德海)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원원(元元)[모든 백성을 말함] ○ 시관 : 김종정(金鍾正)
동월 함경도 도과에서 주중순(朱重純)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함길도[咸吉道] ○ 시관 : 판서 정상순(鄭尙淳)
11월 증광시 숙종이 병환이 쾌차되던 회갑[60주년]. 임금의 춘추가 90을 바라봄. 병환이 회복되고 왕비 혼례한 지 15년이 되다. 4경사를 합동 경축 에서 이영철(李永喆) 등 4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섣달눈이 풍년될 징조요, 상신[(上辛 : 새해의 첫 신일(辛日)]에 기곡(祈穀)하다.
동년 생원시에서 이규섭(李奎燮)과 진사시에서 이기양(李基讓)을 뽑았다.
51년 을미 5월 정시 임금의 건강이 회복됨. 경복궁에서 보임. 에서 정극환(鄭克煥) 등 3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오륜 가운데 충ㆍ효가 먼저다.[五倫中忠孝先] ○ 명관 : 영의정 신회(申晦)ㆍ대제학 이휘지(李徽之) ○ 시관으로서 사사로이 부정을 행함이 많다고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였으므로 병신년 7월 사헌부에서 파방(罷榜)하자는 아룀을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정유년 7월 대신에게 수의(收議)하기를 명하였으나 사헌부의 아뢴 글 중의 부정을 했다고 한 정극환(鄭克煥)ㆍ송익언(宋翼彥)ㆍ송재중(宋載中)ㆍ이상진(李尙進)ㆍ이진상(李鎭常)ㆍ오한원(吳翰源)ㆍ김재기(金載器)ㆍ조덕윤(趙德潤)ㆍ홍시부(洪時溥)ㆍ이심연(李心淵)ㆍ박종집(朴宗集)ㆍ이복일(李復一) 등 12명인데, 명관이 이미 죽었으므로 질문할 곳이 없어 모두 파방하고 다만 직부(直赴)한 이와 및 무과(武科)만 그대로 두었다. 파방된 자 윤익동(尹翊東)ㆍ연동헌(延東憲)ㆍ김낙성(金樂誠)ㆍ이양원(李養遠)ㆍ허책(許策)ㆍ이방인(李邦仁) 모두 음사(蔭仕)하고, 홍문영(洪文泳)ㆍ이복윤(李福潤)은 다시 다른 과거에 급제하였다.갑진년 8월 세자의 책례(冊禮)의 경사를 당하여 이로 말미암아 전교(傳敎)로 부정을 범한 12명 이외의 나머지 8명을 특명으로 복과(復科)시켰다. 경술년 6월 나라에 경사가 있어 12도 특명으로 모두 복과시켰다. 두 송씨와 이심연(李心淵)은 복과되기 전에 죽었다.
8월 임금이 친히 임석한 근정전 정시 임금이 건강이 더욱 좋아져서 하례를 드림.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함. 에서 이연년(李延年) 등 2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동한(東漢)의 중흥(中興)한 여러 장수들이 28장수를 남궁운대(南宮雲臺)에 그려 부친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이익정(李益炡) 주문 : 이휘지(李徽之)
9월 임금이 친히 임석한 문과 전시 1일에 과거를 보였고, 9일날에 구일제(九日製)를 짓게 하고, 후에 전일의 직부(直赴)한 자와 1일 과거와 구일제에 합격한 자를 합쳐서 전시를 베풀어 비록 시골에 있어서 응시하지 못한 자라도 합격자 명단 끝에 붙이게 함. 에서 심낙수(沈樂洙) 등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남훈전에 앉았는데 팔원(八元) 팔개(八凱)가 모시다.[坐南薰殿元凱侍] ○ 명관 : 이은(李溵)ㆍ주문 이휘지 등 5명
11월 현량과에서 조진관(趙鎭寬)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꿈에 좋은 보필자를 얻다.[夢得良弼]
12월 정시 세손으로 정사(政事)를 보게 함을 하례하다. 에서 임도호(林道浩)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한 명의 원량으로 만 나라가 바르게 되다.[一人元良萬邦以貞] ○ 명관 : 영의정 김상철(金尙喆)ㆍ주문 이복원(李福元)
52년 병신 2월 기로과에서 강세황(姜世晃) 등 2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풍년을 송(頌)하다.[年豐頌] ○ 명관 : 한익모(韓翼謩)ㆍ주문 이휘지(李徽之)
당저(當宁 현재 임금 즉 정조) 10월 별시 금년 봄에 숙종과 인경(仁敬)ㆍ인현(仁顯)ㆍ인원(仁元)왕후와 임금(영종), 정성(貞聖)왕후와 중궁(中宮)에게 휘호(徽號)를 올리고 저경궁(儲慶宮) 육상궁(毓祥宮)에게 시호를 올린 경사로 증광시를 보여 초시의 합격 발표를 하기 전에 영종의 승하로 정지되었다가 인산(因山) 후에 별시로 보였다. 9월 2일에 지난 봄의 증광 초시에 시권을 제출하여 명부에 오른 사람을 두 곳으로 나누어 초시를 행하며, 10월 1일에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임하여 친히 출제한 대책에는 다만 서울과 지방에서 한 명씩을 뽑았다. 에서 윤행리(尹行履) 뒤에 이(頤)로 고침 등 11명을 뽑았다.
10월 중시에서 오준근(吳濬根) 뒤에 정근(正根)으로 고침 등 3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에서 영주(靈州)에 돌을 세워 ‘설치수백왕, 제흉보천고(雪耻酬百王 除凶報千古)’ 새김을 하례하다. ○ 명관 : 정존겸(鄭存謙)
당저 원년 정유 4월 즉위 증광시에서 유성한(柳星漢) 등 35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김유기(金裕己)와 진사 목조눌(睦祖訥)을 뽑았다.
10월 식년시에서 남술의(南述毅) 등 33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인(仁)한 사람이라야 능히 남을 미워할 수 있다. ○ 재래로 강경(講經) 점수가 14분이 되면 곧 신래(新來)를 부르던 법을 처음으로 폐지하고 모든 거자(擧子)들이 모두 강경을 마친 후에 합계하여 우등을 뽑다.
동년 생원 원윤손(元允孫)과 진사 이원성(李源誠)을 뽑았다.
10월 토역(討逆) 정시에서 박한규(朴漢圭) 등 9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신(信)은 임금의 큰 보배다.[信者人君之大寶]
2년 무술 7월 알성시에서 박종정(朴宗正) 등 3명을 뽑았다.
8월 정시 영종ㆍ진종(眞宗)을 종묘에 합부함. 정성왕후(貞聖王后)와 효순왕후(孝純王后)를 종묘에 합부함. 대비(大妃)와 혜경궁(惠慶宮)에게 존호를 올림. 중궁을 책봉함. 정빈(靖嬪) 이씨에게 시호를 올리다. 도합 9경사 ○ 명관 : 정홍순(鄭弘淳)ㆍ주문 이휘지(李徽之)ㆍ김종수(金鍾秀) ○ 초시에서 두 곳으로 나누어 3백 명을 뽑다. 에서 최수옹(崔粹翁) 등 8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의(義)와 이(利)
3년 기해 8월 남한(南漢) 별시 영능(寧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여주(驪州)ㆍ이천(利川)ㆍ광주(廣州) 3읍 선비에게 시험을 보이다. 에서 민태혁(閔台爀) 등 3명을 뽑았다. 시제 : 덕(德)에 있지, 험(險)함에 있지 않다.[在德不在險]
4년 경자 3월 식년시에서 김우해(金宇海) 등 44명을 뽑았다. 논의 시제 : 용(龍)을 맨 끝에 임명한 것을 논하라.[命龍于末論] ○ 명관 : 정홍순(鄭弘淳)
동년 생원 이후연(李厚延)과 진사 정가용(鄭可容)을 뽑았다.
6년 임인 3월 알성시에서 조항진(趙恒鎭) 등 4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동한(東漢)에서 임금이 노(魯)를 지나다가 공자(孔子) 및 72제자에게 제사를 드리고, 강당에 나가 태자로 하여금 제생(諸生)에게 경서를 강론하게 함을 청하다. ○ 명관 : 영의정 서명선(徐命善)ㆍ주문 김종수(金鍾秀)
10월 평안도 별시에서 조몽언(趙夢鶠) 등 9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황하에 비하다. ○ 시관 : 정창성(鄭昌聖)
동월 함경도 별시에서 박문원(朴聞遠) 등 7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천일생수(天一生水) ○ 시관 : 정일상(鄭一祥)
12월 정시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찬이 완성되다. 에서 신엄(申曮) 등 15명을 뽑았다. 초시 3백 명 ○ 전(箋)의 시제 : 우리나라의 정부 제신(諸臣)이 계마수조(繫馬樹棗)를 내려준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우의정 김익(金熤)ㆍ판서 정창성(鄭昌聖)
7년 계묘 4월 증광시 영종의 세실을 정하고 원자(元子)의 칭호를 정하다. 에서 이면긍(李勉兢) 등 38명을 뽑았다. 본조의 종친과 문무 백관이 《보감(寶鑑)》 편찬 기념으로 과거를 베풀고 세실(世室)을 정한 것과 원자(元子)의 호를 시정한 것을 하례하다.
동년 생원 성임(成稔)과 진사 유산주(兪山柱)를 뽑았다.
9월 정시 경모궁(景慕宮)ㆍ혜경궁(惠慶宮)에게 존호를 올림.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이 이루어짐. 세 가지 경사 에서 한상신(韓商新) 등 5명을 뽑았다. 대책 시제 : 사람을 알아볼 줄 알면 철(哲)이니, 능히 사람을 벼슬 줄 수 있다.[知人則哲能官人]
10월 식년시에서 최벽(崔璧) 등 33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이수(李樹)와 진사 유풍주(兪豐柱)를 뽑았다.
8년 갑진 9월 정시 세자 책봉하다. 에서 정최성(鄭崔成) 등 18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중희당(重熙堂) ○ 명관 : 홍낙성(洪樂性)ㆍ주문 오재순(吳載純)
10월 정시 영종 정성왕후(貞聖王后) 대비(大妃) 경모궁(景慕宮)ㆍ혜경궁(惠慶宮)에게 존호를 올리다. 에서 한치응(韓致應) 등 8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주 나라에서 후직(后稷)을 원구(圜丘)에 배향하고 문왕(文王)을 명당(明堂)에 모셔 제사지냄으로써 높은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히 한 도리를 칭하하다. 부의 제목 : 우여극석 여보극(于汝極錫汝保極) 시관 : 위와 같음ㆍ초시에 6백 명
9년 을사 3월 알성시에서 김이익(金履翼) 등 5명을 뽑았다. 명(銘)의 시제 : 대성전(大成殿) ○ 명관 : 정재겸(鄭在謙)ㆍ주문 오재순(吳載純)
10월 토역 정시 초시에 1백 50명이 임금이 친히 춘당대에 임하다. 에서 장지면(張至冕) 등 10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당 나라 울지경덕(尉遲敬德)이 태종이 말을 달려 들어가 구출하였던 날에 이르기를, “전일에 모든 사람이 공(公)이 반드시 배반하리라고 생각하였으나 내 홀로 변명하였더니 이 은혜를 갚는 것이 어찌 이처럼 빠를 줄이야 알았으리오.” 하고, 금ㆍ은 한 상자를 내려준 것을 감사하다. ○ 명(銘) : 은사출(恩賜出) ○ 명관 : 김익(金熤)
10년 병오 2월 별시 중시 대거ㆍ초시에 3백 명 에서 박유환(朴猷煥) 등 7명을 뽑았다. 표의 시제 : 송 나라 조빈(曹彬)이 강남을 정벌하러 갈 때에 금중(禁中)에서 술을 주어 취하자 그의 얼굴을 물로 적시게 하고, 그의 등을 어루만져 난폭히 약탈하지 말 것을 경계시키고 평정하는 날 사상(使相)의 인(印)을 주겠다고 말한 것을 사례하다. ○ 명관 : 정존겸(鄭存謙)
3월 중시 춘당대에서 개최 에서 목만중(睦萬中) 등 8명을 뽑았다. 조칙(詔勅)의 시제 : 당 나라에서 곽자의(郭子儀)를 분양왕(汾陽王)이 봉하는 조칙 ○ 명관 : 서명선(徐命善)ㆍ주문 이명식(李命植)
3월 식년시에서 오대곤(吳大坤) 등 32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봉황새가 저 높은 언덕에서 울고 오동(梧桐)이 저 조양(朝陽)에 나도다.[鳳凰鳴矣于彼高岡梧桐生矣于彼朝陽] ○ 명관 : 정존겸(鄭存謙) ○ 원방(元榜)의 합격자 명단임을 정운제(鄭運齊)와 유지원(柳之源)이 전시에서의 구(句) 수(數)가 심히 적어 제거되고 나중 명단에 추가하여 붙여짐.
동년 생원 김익중(金翼重)과 진사 권찬(權)을 뽑았다.
11년 정미 정시 역적을 토벌한 것과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린 두 가지 경사 에서 이의강(李義綱) 등 1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이 봄술을 만들어 장수를 빈다.[爲此春酒以介眉壽] ○ 명관 : 홍낙성ㆍ주문 오재순ㆍ오양호(吳良浩)
13년 기유 2월 알성시에서 신헌조(申獻朝) 등 6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다. ○ 명관 : 김익(金熤)
3월 식년시에서 서영보(徐榮輔) 등 6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유은주(兪殷柱)와 진사 윤기환(尹箕煥)을 뽑았다.
11월 춘당대 시 관무재(觀武才) 대거. 현륭원(顯隆園)에 이장(移葬) 후에 대여(大轝)를 따른 군사에게 시험을 보임. 에서 조득영(趙得永)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자흥시야(子興視夜)
14년 경술 2월 수원 별시 수원ㆍ광주ㆍ과천 3읍에서 시험 에서 이덕승(李德昇)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제목 : 고굉군(股肱郡)
2월 알성시에서 김경(金憬) 등 4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생민(生民) 이래로 공자보다 성(盛)한 이가 있지 않았다.[自生民以來未有盛於夫子] ○ 명관 : 채제공(蔡濟恭)ㆍ주문 홍양호(洪良浩)
9월 증광시 원자 탄생(元子誕生) 에서 이문회(李文會) 등 47명을 뽑았다. 송의 시제 : 일인 원량 만방이정(一人元良萬邦以貞) ○ 명관 : 채제공ㆍ주문 오재순
동년 생원 이상우(李尙愚)와 진사 서준보(徐俊輔)를 뽑았다.
16년 임자 3월 식년시에서 이조원(李肇源) 등 59명을 뽑았다. 시제 : 삼각산명(三角山銘) ○ 명관 : 박종악(朴宗岳)ㆍ주문 예문관 제학 서호수(徐浩修)
동년 생원 권심도(權心度)와 진사 김진백(金鎭白)을 뽑았다.
18년 갑인 2월 알성시에서 김근순(金近淳) 등 5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문무길보(文武吉甫)
2월 춘당대 정시 대비 춘추 50이 되고 혜경궁의 춘추 60이 됨. 에서 권준(權晙) 등 50명을 뽑았다. 부의 시제 : 선군(先君)이 이르기를, “너의 만수무강을 점친다.[君曰卜爾萬壽無疆]” ○ 명관 : 김희(金熹)ㆍ주문 정창순(鄭昌順)

[주D-001]치도(治道)의 본말(本末) : 정치하는 도리에는 본(本)이 있고 말(末)이 있는데, 어떤 것이 본이고 어떤 것이 말인가를 기술하라는 것이다.
[주D-002]금ㆍ은의 …… 청하다 : 우리나라에서 명 나라에 방물(方物)을 바치는데, 명 나라에서 금ㆍ은을 많이 요구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금ㆍ은이 많이 산출되지 않는다 하여 감면(減免)을 청한 것이다.
[주D-003]7월 편도전[七月篇圖箋] : 《시경》에 1년 간의 농가의 일을 노래한 <7월편>이 있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임금에게 올려 농민의 어려움을 알게 하라는 것이다.
[주D-004]종학(宗學) : 종학은 왕족을 모아서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다.
[주D-005]왕정(王政)의 손익(損益) : 삼대(三代)의 정치에 한(漢) 나라에서는 충(忠)을 숭상하고, 상(商) 나라에서는 질(質)을 숭상하며, 주(周) 나라에서는 문(文)을 숭상하였는데, 시대마다 손익(損益)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답습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D-006]수성난(守成難) : 당 나라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창업(剏業)과 수성(守成)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하고 묻자, 혹은 창업이 어렵다 하고 혹은 수성이 어렵다 하였는데, 창업이란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키는 개국(開國)을 말한 것이고, 수성이란 그것을 이어 받아서 지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07]순성(巡省) : 천자(天子)가 지방을 순시하며 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주D-008]치세(治世)에 …… 영웅 : 후한(後漢) 때에 허소(許劭)가 인물을 잘 알아보고 평론하기로 유명하여 조조(曹操)가 찾아가서 자기의 인물에 관한 평론을 구하였더니, 허소가 이와 같이 답하였다고 한다.
[주D-009]한유(韓愈)를 …… 청하다 : 당 나라 현종(玄宗) 때에 인도에서 온 부처의 사리[佛骨]를 궁중에 맞아들여 성대하게 공양하였는데, 한유(韓愈)가 글을 올려 불교를 배척하니, 현종이 크게 노하여 한유를 조주(潮州)로 귀양보냈다.
[주D-010]정통(正統) : 역대 왕조를 계승하는 순서에 대하여 정통이니 아니니 하는 말이 있다. 예를 들면 중국 삼국 시대에 유비(劉備)가 정통이니 조비(曹丕)가 정통이니 하는 것이 후세 사가(史家)들의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주D-011]왕도론(王道論) : 《맹자》에 왕도와 패도(覇道)와를 구별하여 말하였는데, 순수한 인의(仁義)의 정치는 왕도요, 공리주의(功利主義)는 패도라 하였다.
[주D-012]우백익(虞伯益)이 …… 청하다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있는 말이다.
[주D-013]주(周) 나라 …… 청하다 :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에 큰 개[犬]를 바치는 자가 있으므로 소공(召公)이 그것을 받지 말라고 여오편(旅獒篇)을 지어 올린 고사가 있다.
[주D-014]주(周) 나라 …… 축하한다 : 은 나라 말기에 주 나라 문왕(文王)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두 노인이 먼 곳에서 주 나라로 옮겨가니, 천하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주 나라로 쏠렸다 하는데, 이 두 노인이 다름 아닌 백이와 강태공이었다 한다.
[주D-015]간림(諫林) : 《간림》은 역대의 어진 신하들이 임금을 간한 좋은 말을 모아서 편찬한 책 이름이다.
[주D-016]한 나라 …… 감사하다 : 한 나라 고조(高祖)가 후궁의 소생인 여의(如意)를 사랑하여 태자 영(盈)을 폐하려고 하나 여후(呂后)가 장량(張良)의 꾀를 써서 상산(商山)에 숨어 있는 네 노인[四皓]을 불러 왔더니, 고조가 태자를 폐할 것을 중지하고 네 노인에게 태자를 잘 보호할 것을 부탁하였다.
[주D-017]당(唐)의 …… 지어 올리다 : 원화(元和)는 당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성덕시는 헌종의 즉위 이래로 간신을 물리치고 반적들을 토벌한 헌종의 덕을 칭송한 것이다.
[주D-018]당(唐) 나라 두보(杜甫)가 …… 감사하다 : 당 나라 두보가 난중에 숙종(肅宗)을 따라다니다가 임금에게 허락을 얻어 먼 곳에 있는 처자를 보러 가면서 ‘북정(北征)’이라는 장편의 기행시를 지은 것이 있다.
[주D-019]송(宋)의 팽사영(彭思永)이 …… 청하다 : 내지는 임금의 특명인데, 벼슬의 계자(階資)를 올릴 때에 정부를 통한 정당한 순서를 밟지 않고, 임금의 사사로운 은혜로 특명을 내리는 것을 부당하다는 것이다.
[주D-020]송(宋) 나라 …… 바치다 : 《소학》에 나온 말로 송 나라 정이(程頤)가 학교 교육에 대한 수정안을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21]제치보방(制治保邦) : 《서경》에 나오는 말로, “난(亂)하기 전에 치(治)를 마련하고, 위태롭기 전에 나라를 보전하라.[制治於未亂保邦於未厄]”는 말을 줄인 것이다.
[주D-022]송(宋)의 장제현(張齊賢)이 …… 바치다 : 송 나라 태조가 낙양(洛陽)에 행차했을 때, 장제현(張齊賢)이 포의(布衣)로 와서 보고 열 가지 대책을 진술하였더니 태조가 그 중 네 가지만을 채택하자, 남은 조목도 모두 옳은 것이라고 고집하였다. 태조가 노하여 무사를 시켜 끌어내었는데, 태조가 돌아와서 그 아우인 태종에게 “내가 이번 걸음에 오직 장제현을 얻었다. 나는 벼슬을 주지 않겠지만 장래에 너를 도와서 정승이 될 인물이니 그리 알라.” 하였다.
[주D-023]이 마음을 …… 행하소서 : 제 나라 선왕(宣王)이 죽으러 가는 소[牛]를 보고 불쌍히 여겨 놓아 준 일이 있었는데, 맹자가 왕을 보고, “이 마음을 미루어서 이런 인자한 정치를 행하소서.” 하였다는 말이 《맹자》에 나온다.
[주D-024]당 나라 이필(李泌)이 …… 청하다 : 당 나라 이필이 어려서 천재로 이름이 있어 현종(玄宗)이 불러 보고 기특히 여겨 태자와 같이 놀게 하여 친구가 되게 하였다. 뒷날, 이필이 형산(衡山)에 가서 숨어 공부하고 있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난리 때에 숙종(같이 놀던 태자)을 도와 군중(軍中)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는데, 난리가 평정되자 다시 형산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하였다.
[주D-025]육경(六經) : 육경(六經)은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이다.
[주D-026]한(漢) 나라 정중(鄭衆)이 …… 사양하다 : 정중(鄭衆)은 한 나라 때의 어진 환관(宦官)인데, 환자(宦者)에게는 원래 벼슬을 주지 않는 것이다. 임금이 그를 특별히 군사마에 임명하였다.
[주D-027]송(宋) 나라 조보(趙普)가 …… 청하다 : 송 나라 태조가 눈오는 밤에, 미복(微服)으로 조보의 집에 찾아가서 태원[북한(北漢)]을 토벌할 것을 의논하니, 조보가 “태원이 서북 오랑캐를 질러 막고 있는데, 태원을 먼저 멸하면 서북 오랑캐가 우리와 직접 부딪치게 될 것이니, 태원은 이 뒤에 토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주D-028]명(明) 나라 한취선(韓取善)이 …… 청하다 :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주D-029]하(夏)의 군신(群臣)이 …… 치하하다 : 공자가 말하기를, “우(禹) 임금은 나쁜 옷[菲衣]과 거친 음식[惡食]을 먹으면서 토지 개간과 귀신 섬기는 데 정성을 쏟았다.” 하였다.
[주D-030]조선에서 …… 청하다 : 임진왜란 후에 명 나라 군사가 철병(撤兵)할 때의 일이다.
[주D-031]송(宋) 나라 장준(張浚)이 …… 청하다 : 남송(南宋)의 수도(首都)가 한쪽 구석인 항주(杭州)ㆍ임안(臨安)에 있으므로 장준(張浚)이 이렇게 말하였다.
[주D-032]한(漢) 나라 제갈량(諸葛亮)이 …… 청하다 : 제갈량이 후주(後主)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 중에 있는 구절이다.
[주D-033]당(唐) 나라 …… 감사하다 : 당 나라 헌종 때에 서천 절도사(西川節度使) 유벽(劉闢)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고숭문을 시켜 토벌하였는데, 숭문이 연달아 이기므로 서천을 토벌하는 모든 장수를 지휘하는 권한을 숭문에게 일임하였다.
[주D-034]당 나라 이필(李泌)이 …… 감사하다 : 당 나라에서 이필을 우대하여 봉래궁(蓬萊宮) 옆에다 서원(書院)을 지어 주어 거처하게 하였다.
[주D-035]당 나라 태종이 …… 한 조칙(詔勅) : 당 나라 태종이 곧은 말 잘하는 위징(魏徵)을 사랑하여 그가 죽은 뒤에 친히 비문(碑文)을 지어서 세워 주었다. 그 후에 후군집(侯君集)이 반역으로 죽자 일찍이 위징이 후군집을 정승이 될 재목이라고 추천한 일이 있었으므로 태종이 위징의 비(碑)를 넘어뜨렸다.그 뒤에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가서는 깊이 후회하고 말하기를, “위징이 만일 살아 있었더라면 나를 간하여 이번 걸음이 없게 하였을 것이다.” 하고 넘어뜨렸던 비를 다시 세워 주었다.
[주D-036]끝을 …… 기하다 : 《서경(書經)》에 있는 말이다.
[주D-037]송(宋) 나라 …… 청하다 : 송 나라 인종(仁宗) 때에 지방에서 ‘천하태평(天下太平)’이라는 네 글자가 천연적으로 쓰여져 있는 감나무를 바쳤는데, 구양수(歐陽修)는 그것을 상서(祥瑞)라고 발표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주D-038]시조(時措) : 시조는 정치를 때에 따라서 적의(適宜)하게 변통하여 조처한다는 말이다.
[주D-039]사기(史記) : 《사기(史記)》는 한 나라 사마천(司馬遷)이 처음으로 기전체(紀傳體)를 사용하여 중국의 상고(上古)로부터 그의 당대인 무제(武帝)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적은 책
[주D-040]각촉시(刻燭詩) : 불을 켠 초에다 금을 그어 놓고 그 금에 닿을 동안에 글을 짓도록 하는 시험을 말한다.
[주D-041]전연(澶淵)에서 …… 송(頌) : 송 나라 진종(眞宗) 때에 거란이 전연(澶淵)에까지 침략하여 왔으므로 진종이 직접 출전(出戰)하러 가서 거란과 화의(和議)를 맺아 많은 세폐(歲幣)를 바치기로 하고 돌아왔다.
[주D-042]한 나라 정균(鄭均)이 …… 감사하다 : 한 나라 장제(章帝) 때에 정균은 청렴하고 행실이 착하기로 이름이 있었는데, 벼슬이 상서에 이르렀다가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임금이 동방을 순시[東巡]하다가 그의 집으로 찾아가 보고 종신토록 상서(尙書)의 녹(祿)을 주게 하였다.
[주D-043]당 나라 …… 감사하다 : 당 나라 덕종(德宗) 때에 이성이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우대하였다.
[주D-044]당 나라 …… 사양하다 : 당 나라 덕종(德宗) 때에 육지를 고공 낭중으로 임명하니, 육지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벌을 가할 때에는 벼슬이 높고 측근(側近)한 자에게 먼저 가하고, 상을 줄 때에는 지위가 낮고 소원(疎遠)한 자에게 먼저 주는 것이니, 큰 공에 먼저 상을 주어 여러 신하에게 두루 미치면 신도 이 임명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주D-045]한 나라 …… 칭하하다 : 한 나라 광무황제(光武皇帝)가 적미(赤眉)를 토벌했을 때 30만 명을 항복시키니, 노획(鹵獲)한 무기와 갑옷을 쌓은 것이 마이산(馬耳山)과 같았다는 것을 말한다.
[주D-046]한 나라 …… 사양하다 : 한 나라 환제(桓帝) 때에 강굉(姜肱)이 명망이 있었는데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으므로 화공(畵工)을 보내어 그의 얼굴을 그려 오라 하였다.
[주D-047]이괄(李适)의 …… 뽑음 : 인조(仁祖)가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공주(公州)로 파천하였기 때문이다.
[주D-048]송 나라 이강(李綱)이 …… 청하다 : 송 나라 때에 금(金) 나라 군사가 침입하여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두 황제를 잡아가고 송 나라의 신하인 장방창(張邦昌)으로 괴뢰정권(傀儡政權)을 세우고 갔는데 뒤에 장방창이 자진 사퇴하였으나 남송의 이강이 그 동안에 장방창이 황제 노릇한 죄를 추궁한 것이다.
[주D-049]하늘은 말하지 않는 성인[天者不言之聖人] : ‘하늘은 말하지 않는 성인’이요, 성인은 말하는 하늘이라는 옛말이 있다.
[주D-050]한 나라 소하(蕭何)가 …… 감사하다 :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촉중(蜀中)으로 들어갈 때에 수행했던 장사(將士)들이 중도에서 도망하는 자가 많았으며 한신(韓信)도 한왕(漢王)이 알아주지 않으므로 도망하여 갔는데,승상(丞相) 소하(蕭何)가 한신이 훌륭한 인재임을 알았으므로 한신이 도망하였다는 말을 듣자 한왕에게 알릴 여유도 없이 급히 한신을 뒤쫓아 가서 중도에서 데리고 왔다. 처음에는 한왕이 소하도 역시 도망한 것으로 알고 당황하였으나 소하가 돌아오니 한왕이 한편 기쁘면서도 한편 노하여 꾸짖기를 “허다한 사람이 도망갈 때에는 뒤쫓지 않더니 한신이 도망하자 나에게 말도 없이 갔으니 한신을 쫓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고 한 일이 있었다.
[주D-051]간우(干羽)춤을 양계에서 춤[舞干羽于兩堦] : 간우(干羽)는 방패에다 깃을 단 것이다. 춤추는 사람이 그것을 들고 춤을 추는 것인데, 순(舜)이 삼묘(三苗)를 치다가 굴복하지 않으므로 돌아와서 덕을 닦고 간우(干羽)의 춤을 양계(兩堦)에서 추니, 70일 만에 삼묘가 귀순하였다 한다.
[주D-052]걱정이 성(聖)을 열어줌[殷憂啓聖] : 은우(殷憂)는 크게 근심한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국가가 큰 우환을 겪는 것은 새 성주(聖主)의 운명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진(晉) 나라 유곤(劉琨)이 원제(元帝)에게 임금의 위에 오르기를 권고한 글에 있는 말인데, 이때의 과거는 인조반정 후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시제를 내었을 것이다.
[주D-053]산삭한 후 시(詩)가 없다[刪後無詩] : 본래의 《시경(詩經)》에는 글이 많았던 것을 공자가 지금 전하는 3백편으로 산삭(刪削)하였다. 그 뒤로 경(經)이 될 만한 시가 없었다.
[주D-054]한 나라 …… 청하다 : 한 나라 성제(成帝) 때에 주운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지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는 더러운 자들이니 상방(尙方)에서 말[馬]을 베는 칼을 빌려 주시면 아첨하는 신하 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 다른 신하들을 징계하겠습니다.” 하다가 임금이 노하여 죽이라 한 일이 있었다.
[주D-055]치우(蚩尤)를 토평(討平)하다 : 고대(古代) 황제(黃帝) 때에 이마[額]는 구리[銅]로 되었고, 큰 안개를 만들어 낸다는 치우라는 자가 난을 일으켰는데 황제가 그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주D-056]복수하여 수치를 씻다 : 이 해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다음 해이므로 이런 시제를 내었을 것이다.
[주D-057]어진 이를 …… 생각하다 : 《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인데,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속으로 스스로 반성하여 보라.” 하였다.
[주D-058]시무(時務)를 아는 것 : 후한(後漢) 때에, 유현덕(劉玄德)이 사마휘(司馬徽)에게 인재를 추천하여 주기를 청하니 사마휘가 답하기를, “유생(儒生)과 속사(俗士)는 시무(時務). 당대에 필요한 급무를 모른다. 시무를 아는 자는 준걸(俊傑)이다.” 하고 제갈량을 추천하였다.
[주D-059]숨은 것보다 더 들어남이 없음[莫見乎隱] : 《중용》에 있는 말인데, 숨은 데서 불선(不善)한 일을 하여도 결국은 나타나므로 군자는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데서도 삼간다 하였다.
[주D-060]한 나라 …… 사양하다 : 김일제는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흉노(匈奴)로부터 귀화한 사람으로, 지극히 충성스럽고 근신한 신하였다. 역적 마하라(馬何羅)가 무제를 암살하려고 할 때에, 김일제가 눈치를 먼저 채고 대단히 위급할 순간에 역적을 안아 뜰아래로 던져서 무제의 화를 면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때의 과거가 역적 심기원(沈器遠)을 처단한 뒤였으므로 이와 같은 시제를 내었을 것이다.
[주D-061]한 나라 …… 감사하다 : 한 나라 창읍왕(昌邑王) 때에, 하후승이 바른 말로 간하다가 옥에 들어간 일이었었는데 창읍왕이 폐위된 뒤에 선제(宣帝)가 하후승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으면서 전일의 일로 징계함이 없이 곧은 말을 하라 하였다.
[주D-062]백성은 물과 같다.[民猶水] : 《상서(尙書)》에 “백성은 물과 같고, 임금은 배와 같은데, 물이 배를 띄워 주기도 하고, 물이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는 말이 있다.
[주D-063]한 나라의 …… 청하다 : 《예기(禮記)》에 “벼슬로 녹을 먹는 사람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다른 일로 백성과 이익을 경쟁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주D-064]남훈금(南薰琴) :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노래하기를, “남풍(南風)의 따뜻함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불리우고 우리 백성의 불평을 푸는도다.” 하였다.
[주D-065]별의 변괴[星變] : 옛날에는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나면 그것을 변괴라 하여 인사(人事)에 관계가 있다고 보았는데 당시에 그런 일이 있었다.
[주D-066]한 나라에서 …… 치하하다 :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에 백호관에서 선비를 모아 오경(五經)을 토론하였는데 토론한 말을 기록한 책이 《백호통(白虎通)》이다.
[주D-067]당 나라에서 …… 감사하다 : 당 나라 태종이 제위(諸衛)의 장사(將士)들을 현덕전 뜰에서 활쏘기를 연습시키며 이내 친유(親諭)하기를 “너희들에게 다른 노역을 시키지 않고 오로지 활쏘기만 연습시키는 것은 일이 없을 때에는 내가 너희들의 스승이 되고 돌궐(突厥)이 침입하면 내가 너희들의 대장이 되기 위함이다.” 하였다. 신하들이 간하기를 “법률에 임금의 옆에서 무기를 휴대하면 교형(絞刑)에 처하는 것인데 지금 장수와 군사들로 하여금 전정(殿庭)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다가 만일 덤비는 자가 있으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백성은 모두 나의 적자(赤子)인데 어찌 친위(親衛)하는 장사들까지 의심을 하겠느냐.” 하였다.
[주D-068]재계하고 일을 처결하다.[齋居決事] : 한 나라 선제(宣帝)가 죄수를 처결할 때에는 별실에 거처하여 재계(齋戒)한 뒤에 처결하였으니, 그것은 신중히 하는 뜻이었다.
[주D-069]부열(傅說)이 …… 감사하다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에게 “나의 좌우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교훈을 다오.” 하였는데 이 말은 《상서(尙書)》 <열명편(說命篇)>에 있다.
[주D-070]당 나라 양염(楊炎)이 …… 청하다 : 당시의 덕종 황제가 경림대영고(瓊林大盈庫)를 설치하여 자물쇠를 따로 두고 사사로 쓰는 것이 많았으므로, 양염이 천하의 재부(財賦)를 모두 좌장(左藏) 즉 국고(國庫)에 속하게 하였다.
[주D-071]노(魯) 나라 장손진(藏孫辰)이 …… 청하다 : 춘추(春秋) 때에 노(魯) 나라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장손진이 노 나라에 가서 쌀을 사들이기를 청하였다.
[주D-072]토계명(土堦銘) : 요(堯) 임금이 검소하여 초가집에 살고 뜰을 흙으로 세 층계를 만들었다.
[주D-073]용흥강 : 함경도 영흥(永興)에 있는 강인데, 조선 태조가 일어난 고장이므로 용흥강(龍興江)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주D-074]당 나라 육상선(陸象先)이 …… 감사하다 : 당 나라 현종(玄宗)이 태자로 있을 때, 태평공주(太平公主)가 태자를 폐하려 하므로 육상선(陸象先)이 이에 반대하였다. 뒤에 현종이 태평공주의 도당(徒黨)을 처단하고 나서 육상선을 불러 칭찬한 말이다.
[주D-075]수성(守成)이 …… 어렵다. : 당 나라 태종(太宗)이 여러 신하들에게,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어느 것이 어려운가.”고 물으니, 혹은 “창업이 어렵다.” 혹은 “수성이 어렵다.” 하였다. 여기서 창업이란 왕업(王業)을 처음 일으킨 개국(開國)을 말한 것이요, 수성이란 그것을 받아서 지키는 것을 말한다.
[주D-076]소공이 …… 청하다 : 주 나라 성왕(成王) 때에 서족(西族)에서 오(獒)라는 큰 개를 바쳤으므로 태보(太保) 소공(召公)이 여오편(旅獒篇)을 지어 말하기를, ‘무익(無益)한 일을 가지고 유익한 일을 해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주D-077]순수(巡狩) : 천자(天子)가 제후의 나라에 순시[巡狩]하는 것.
[주D-078]태상(太常) 환영(桓榮)이 …… 사례하다 : 한 나라 명제(明帝)가 태자로 있을 때에 환영(桓榮)에게 상서(尙書)를 배웠는데, 임금이 된 뒤에 그를 스승으로 극진히 받들었다.
[주D-079]당 나라에서 …… 임명하다 : 당 나라 헌종(憲宗)이 회서(淮西)의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하려 하는데, 다른 신하들은 찬동하지 않고 오직 배도(裵度)와 무원형(武元衡)이 찬동하므로, 적이 자객(刺客)을 보내어 두 사람을 새벽 입궐(入闕)할 때에 습격하였는데, 무원형은 죽고 배도는 모자가 두터웠으므로 죽지 않았다. 후에 배도를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주D-080]경학을 선비에게 시험보이다 : 역대로 과거 문제가 문예(文藝)를 위주로 하였으므로 경학을 위주로 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주D-081]기형(璣衡)으로써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다 : 순(舜) 임금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이란 천문학의 기구를 만들어 칠정(七政)을 맞추었다. 칠정은 일월(日月)과 수ㆍ화ㆍ금ㆍ목ㆍ토 오성(五星)을 말한다.
[주D-082]미리 준비하다 : 《예기(禮記)》에 ‘유(儒)가 그 죽음에 낌은 기다림이 있는 것이며, 그 몸을 기름은 장차 유위(有爲)할려고 하는 것이니, 그 미리 준비함이 이와 같다.’ 하였다.
[주D-083]동지(冬至)에 관문(關門)을 닫음 :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동지(冬至) 날에는 관문(關門)을 닫고 행려(行旅)를 쉬게 한다.’ 하였다.
[주D-084]대풍가(大風歌)는 …… 잊지 않다 : 한 나라 고조(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고향인 풍폐(豐沛)에 들러서 부로(父老)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베풀고 술이 취하여 대풍가(大風歌)를 지어 부르기를 ‘큰 바람이 일어남이여 구름이 날리는구나. 어찌하면 맹사(猛士)를 얻어 사방(四方)을 지킬꼬’ 하였으니, 이 끝 구절이 곧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뜻이란 것이다.
[주D-085]소공(召公)이 …… 청하다 : 주 나라 성왕(成王)이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소공(召公)을 시켜 먼저 터를 보게 하였다. 새 도읍이 완성된 후에 소공이 왕에게 폐백(幣帛)을 올리며 소고(召誥)를 지어 왕에게 아뢰기를 ‘왕은 빨리 공경하는 덕을 행하소서. 나는 왕을 위하여 하늘에 빌어 명(命)을 길게 하리라.’ 하였다.
[주D-086]탕반명 : 탕(湯) 임금이 반(盤)에다 명(銘)을 지어 새기기를 ‘날로 새롭고 또 날로 새롭다.[日新又日新]’ 하였다.
[주D-087]영포(英布)가 …… 감사하다 : 초(楚) 나라와 한(漢) 나라가 서로 싸울 때에 한 나라에서 변사(辯士) 수하(隨何)를 보내어 초의 편인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를 달래어 한 나라로 데리고 왔다. 영포가 와서 처음으로 한왕(漢王)을 보니, 한왕이 심히 거만스럽게 두 계집을 시켜 발을 씻으면서 영포를 대하였다. 영포는 분하고 실망하여 나와서 자살(自殺)하려 하였다가 자기를 위하여 준비한 처소로 가보니, 거처와 음식의 화려하고 풍부하기가 한왕의 처소와 같은 것을 보고는 소망에 지나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주D-088]우(虞)의 백익(伯益)이 …… 청하다 : 《상서(尙書)》 < 대우모편(大禹謨篇)>에 백익(伯益)이 순(舜) 임금에게 아뢴 말이다.
[주D-089]안일함이 없어야 한다 : 주공(周公)이 무일편(無逸篇)을 지어 성왕(成王)을 훈계하였는데, 그 첫머리에 있는 구절이다.
[주D-090]위청(衛靑)이 …… 사양하다 : 위청(衛靑)은 노예(奴隸) 출신으로 그의 누이가 무제(武帝)의 황후가 되니 위청이 대장군이 되어 흉노(匈奴)를 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무제가 그의 어린 세 아들까지 봉후(封侯)하였다.
[주D-091]한신(韓信)이 …… 청하다 : 한신(韓信)이 한 나라의 대장이 된 뒤에, 한왕(漢王)이 그에게 항우(項羽)를 칠 계책을 물으니 한신이 말하기를, “항우가 포학해서 인심을 잃었으며, 초(楚) 나라의 임금인 의제(義帝)를 죽였으니, 대왕께서 항우를 토벌하는 명분을 세우고 동쪽으로 돌아가려는 장사들을 의병(義兵)으로 삼아 앞세우면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때에 한중(漢中)에 있는 촉(蜀)의 장사들의 고향이 모두 동쪽인 중원(中原)에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92]낭서장(郞署長) 풍당(馮唐)이 …… 감사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가 낭서(郞署)를 지나다가 늙은 낭관인 풍당(馮唐)을 만나 그의 고향을 물으니 조(趙) 나라라 하였다. 문제는 당시에 흉노의 강성함을 걱정하여 조 나라의 옛날 장수 이제(李齊)의 이야기를 하며 감탄하였다. 풍당이 조 나라 옛날 장수 염파(廉頗)ㆍ이목(李牧)의 장한 것을 말하니, 문제는 엉덩이를 치며 “어찌하면 나도 그런 사람을 장수로 삼을 수 있을까.” 하니, 풍당이, “폐하(陛下)는 염파ㆍ이목을 만나도 쓸 줄을 모르실 것입니다.” 하면서, 당시에 위상(魏尙)이란 장수를 조그만 과실로 옥에 가둔 것을 비난하였더니, 문제가 깨닫고 즉시 풍당을 시켜 위상을 석방시켰다.
[주D-093]수(隋) 나라 …… 청하다 :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북방의 위(魏)는 선비족(鮮卑族)이라 북주(北周)가 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중국 재래의 음악은 흩어지고 북쪽 변방의 음악이 유행하였다. 수(隋) 나라 남북을 통일하여 음악을 맡은 태상경 우홍이 중국의 옛 음악을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주D-094]반풍기화(反風起禾) : 주 나라 무왕(武王)이 죽고, 아들 성왕(成王)이 어리므로 그의 숙부(叔父)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하였더니, 주공의 형 관숙(管叔)과 그의 여러 아우들이 주공에 대한 유언(流言)을 퍼뜨리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성왕도 주공에게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주공이 조정을 떠나 관숙을 토벌하였더니 그 뒤 가을에 큰 비가 오고 태풍이 불어 벼[禾]가 모두 쓸어지고 큰 나무들이 뽑히었다.성왕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금등(금실로 봉한 궤)을 열어 보았으나, 그 속에서 전일에 무왕의 병이 위독할 때에 주공이 무왕을 위하여 자기가 대신 죽겠다고 기도(祈禱)한 글이 나왔다. 성왕이 그제야 그 글을 잡고 울며 주공의 마음을 알고 뉘우치니 곧 바람이 거꾸로 불어서 쓸어졌던 벼가 모두 다시 일어났다.
[주D-095]이윤(伊尹)이 …… 바치다 : 상(商) 나라 이윤(伊尹)이 새로 즉위한 임금 태갑(太甲)에게, “임금과 신하가 모두 순일(純一)한 덕이 있어야 한다[咸有一德]”는 글을 지어서 훈계하였다.
[주D-096]지리(地利)가 …… 못하다 : 맹자(孟子)의 말에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보다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보다 못하다.적의 성을 여러 달 동안 포위 공격할 때에, 천시(天時)로 보아서는 적을 함락시킬 좋은 일진(日辰)이 있었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은 천시가 지리보다 못한 것이며, 적을 방어할 때에 성이 아무리 견고하여도 인심이 이반(離叛)하면 지킬 수 없는 것이니, 지리가 인화(人和)보다 못한 것이다.’ 하였다.
[주D-097]제갈량(諸葛亮)이 …… 청하다 : 제갈량이 후주(後主)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에, “어진 신하를 친히 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은 전한(前漢)의 흥륭(興隆)한 바요, 소인을 친히 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한 것은 후한(後漢)의 경퇴(傾頹)한 바입니다.” 하였다.
[주D-098]때[時]가 …… 있다 : 어떤 좋은 정책이라도 시대에 따라서 가(可)할 때가 있고 불가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주D-099]당 나라 …… 감사하다 : 당 나라 헌종(憲宗) 때에 회서(淮西)의 반적(叛敵) 오원제(吳元濟)를 토벌 평정한 뒤에 그 지방 백성에게 2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주D-100]송 나라 우상(右相) 왕회(王淮)가 …… 부르기를 청하다 : 주자가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흉년이 들었으나 구제를 잘하였다. 주자는 도학자(道學者)이므로 왕회(王淮)가 이렇게 말하였다. 부사(浮辭)는 형식적인 헛말로 임금을 칭찬하는 등의 글귀를 말한다.
[주D-101]한 나라에서 …… 치하하다 :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소장에, 허식으로 임금을 칭찬하는 부사를 폐지하라고 한 것은, 임금의 겸손하고 진실한 것을 표시한 것이므로, 신하들이 그것을 취하는 것이다.
[주D-102]백성에게 …… 대하여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므로 농사를 장려하기 위하여 특히 금년의 전조(田租)의 반을 백성에게 돌려 준다.” 하였다.
[주D-103]당 나라 동평장사(同平章事) 송경(宋璟)이 …… 청하다 : 장(仗)은 임금을 호위하는 의장(儀仗)인데 여기서는 의장에 가까이 와서 말을 아뢰는 것.
[주D-104]임금 된 자 …… 따라야 한다 : 《예기(禮記)》에, “하늘은 사사(私私)로이 덮음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음[載]이 없고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침이 없는 것이니, 이 세 가지를 본받아 천하를 다스린다.” 하였다.
[주D-105]현규(玄圭)로 성공을 고하다 :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어 성공한 뒤에, 요(堯)가 현규(玄圭)를 주어 성공을 표창하였다.
[주D-106]중전(中殿)의 묘현 : 신부(新婦)가 시집와서 사당[廟]에 처음 뵈옵는 것.
[주D-107]당 나라 …… 청하다 : 당 나라 숙종(肅宗)이 “나라의 흥망은 천명(天命)이 있다.”고 말하니, 이필(李泌)이 아뢰기를, “보통 사람은 천명을 말할 수 있어도 임금은 천명을 말해선 안 되며, 인사(人事)에 힘써야 합니다.” 하였다.
[주D-108]소식(蘇軾)이 …… 청하다 : 소식(蘇軾)의 글에 절강 지방(浙江地方)의 등(燈)을 사들이는 것을 간하는 소[諫買浙燈狀]가 있는데, 그 당시 임금이 많은 비용을 들여 절강 지방의 화려한 등을 많이 만들어 올리게 명하였으므로 소식이 간하였다.
[주D-109]희(羲)ㆍ화(和)에 …… 순응하게 하다 : 요(堯) 임금 때에 희씨(羲氏)와 화씨(和氏)는 천지 사시(天地四時)를 맡은 벼슬이므로 요 임금이 명하여 하늘에 공경히 순응하여 역법(曆法)을 제정하라 하였다.
[주D-110]상부(尙父)가 단서(丹書)를 올리다 : 주(周) 나라 강태공이 무왕(武王)에게 단서(丹書)를 바쳤는데, 그 가운데에 ‘경(敬)이 태(怠)를 이기는 자는 길(吉)하고, 태가 경을 이기는 자는 흉(凶)하다.’ 한 말이 있다.
[주D-111]의의난조(擬猗蘭操) : 의난조(猗蘭操)는 공자가 지은 글인데, 이것을 모방하여 지은 글을 ‘의의난조(擬猗蘭操)’라 한다.
[주D-112]그윽한 …… 아니하다 : 불괴우옥루(不愧于屋漏)는 《시경(詩經)》에 있는 문구인데, 양심에 가책이 없으므로 방구석에 혼자 있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주D-113]적국(敵國)의 …… 망한다 : 《맹자》에 “적국의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안락함에 빠져 두려워하고 조심함이 없어, 마침내 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주D-114]주발(周勃)이 …… 감사하다 : 한 나라 고조(高祖)가 죽을 때에 여후(呂后)에게 말하기를, “장래 우리 유씨(劉氏)를 편안하게 할 자는 반드시 주발(周勃)일 것이다.” 하였다.
[주D-115]제갈량(諸葛亮)이 …… 청하다 :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에, “장완(蔣琓)ㆍ동윤(董允) 등은 곧고 진실하여 절의(節義)에 죽을 만한 신하이니, 이들을 친히 하고 믿으시면 나라가 흥할 것입니다.” 하였다.
[주D-116]진평(陳平)이 …… 청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우승상(右丞相) 주발(周勃)에게,“1년에 국가의 전곡(錢穀)의 출입(出入)이 얼마이며, 죄수의 판결이 몇인가.”고 물으니, 주발이, “모른다.” 하였다. 문제가 다시 우승상 진평(陳平)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곡의 출입은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으시고, 죄수의 판결은 정위(廷尉)에게 물으소서.” 하니 문제가, “그러면 승상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니, 진평이 대답하기를, “재상은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고 백성이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주D-117]주공이 ‘낙사도(洛師圖)’를 올리다 : 주 나라 성왕(成王) 때에 도읍을 낙읍(洛邑)으로 옮겼는데, 주공(周公)이 낙사도(洛師圖)를 그려 바쳤다. 낙사(洛師)는 서울인 낙읍이다.
[주D-118]봄에 진대(賑貸)를 의논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봄이 화창할 때에 만물은 모두 즐거이 살아 나는데 우리 백성들 중에 곤궁(困窮)한 자들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걱정하지 아니할 수 있는가. 구제할 방책을 의논하라.” 하였다.
[주D-119]진덕수(眞德秀)가 …… 청하다 : 공자가 주 나라에 가서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니 의기(欹器)란 그릇이 있었다. 이것은 비어 있을 때에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물을 반쯤 부으면 바로 서며, 가득 차면 엎어진다. 공자가 이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저것을 보아라. 차면 넘치느니라.” 하였다.
[주D-120]한 나라 …… 감사하다 : 한 나라 선제(宣帝) 때에 발해군(渤海郡)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임금이 공수(龔遂)를 발해 태수(太守)로 임명하였더니, 공수가 부임하여서는 도적을 잡는 관리들은 모두 해산하고 도적을 감화시켜 양민으로 만들었다. 임금이 곧 공수를 불러들여 수형도위(水衡都尉)로 승진시켰다. 공수가 조정으로 들어올 때에 왕생(王生)이 그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만일 묻거든, ‘모두가 폐하의 은덕이요, 신이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라.” 하였다.
[주D-121]왕진(王縉)이 …… 청하다 : 옛글에 “대신의 직분은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섭리는 조화(調和)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D-122]소식(蘇軾)이 …… 청하다 : 동짓날은 《주역(周易)》의 복괘(復卦)에 해당되는데, 이날은 음(陰)이 극도에 달했던 나머지에 양(陽)이 새로 생기는 것이므로, 양을 기르기 위하여 선왕(先王)이 이날에는 관문(關門)을 닫으며, 나그네도 임금도 출입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는 소식(蘇軾)이 임금에게 나라를 안정(安靜)하게 다스리고 몸을 안정하게 가지라는 뜻이다.
[주D-123]강(江)과 한(漢)이 바다에 조회(朝會)한다 : 양자강과 한수(漢水) 등의 모든 물은 결국 바다로 향하여 들어간다. 이 말은 모든 속국들이 대국(大國)을 우러러 섬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주D-124]풀속에 …… 수그러진다 : 《논어》에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인데, 풀에 바람이 불면 수그러진다.” 하였다. 백성은 윗사람의 지도에 따른다는 뜻이다.
[주D-125]초(楚) 나라 송옥(宋玉)이 …… 감사하다 : 송옥(宋玉)의 풍부(風賦)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내용은 “초왕(楚王)이 대(臺)에 올라서 놀다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니, 초왕이 ‘아, 바람이 시원하다.’ 하니, 송옥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왕의 수바람[雄風]이요, 서민(庶民)의 암바람[雌風]은 시원하지 못합니다.’ 하고, 수바람에 관하여 진술하니, 초왕이 ‘말은 잘 하는구나. 다시 서민의 바람을 진술하라.’ 하였다.
[주D-126]주발(周勃)이 우승상을 사직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 때에 주발(周勃)이 우승상(右丞相)이 되고, 진평(陳平)이 좌승상이 되었는데, 문제가 주발에게 “1년의 전곡(錢穀) 출납이 얼마이며, 1년의 죄수의 판결이 얼마인가.” 하고 물으니, 주발이 “모른다.”고 답하면서 땀이 흘러 적시었다. 그는 자기의 재능이 부족함을 알고 우승상을 사직하였다.
[주D-127]홀로 주 나라에 조회(朝會)하다 : 주(周) 나라가 쇠약한 말기에는 천하의 제후들이 천자(天子)에게 조회(朝會)하는 이가 없었는데, 제(齊) 나라 위왕(威王)이 홀로 주 나라에 조회한 일이 있었다.
[주D-128]한신(韓信)이, …… 사례하다 :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승상(丞相) 소하(蕭何)의 추천으로 한신(韓信)을 대장으로 삼은 뒤에 이렇게 말하였다.
[주D-129]송 나라에서 …… 치하하다 :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송(宋) 나라는 상(商) 나라의 후손으로 상 나라 선왕(先王)의 종묘(宗廟)를 받들고 있었다. 종묘의 제사는 반드시 악장(樂章)으로 송(頌)을 노래하는 것인데, 상송(商頌)을 잃어서 이때에 주 나라의 음악을 맡은 태사(太師)로부터 상송을 얻어 갔다.
[주D-130]소식(蘇軾)이 …… 청하다 : 정치에 비유한 말로 밝고 탄탄(坦坦)한 정치를 하라는 뜻이다.
[주D-131]손석(孫奭)이 …… 치하하다 :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은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안일하지 말고, 부지런하라는 뜻으로 훈계한 것인데, 그것을 도(圖)로 그린 것이 무일도다.
[주D-132]송 나라 …… 감사하다 : 송 나라 구준(寇準)이 섬주 지사(陝州知事)로 있을 때에 생일(生日) 잔치에 산대놀이[山棚]를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의 생일에만 하는 것이다. 임금이 이를 듣고 노하여, “구준이 매사에 짐(朕)을 본받는 것이 옳은가.” 하였다. 왕단(王旦)이 구준을 변명하기 위하여 말하기를, “구준이 그만큼 나이를 먹었어도 아직 어리고, 철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도 마음이 풀려서, “그렇다. 다만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하였다.
[주D-133]월(越) 나라 범여(范蠡)가 …… 청하다 :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 나라와 싸우다가 패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오왕에게 항복하고 돌아와서, 범여(范蠡)와 함께 국력(國力)을 준비하여 마침내 오(吳)를 멸하여 원수를 갚고는, 범여의 공을 상주니 범여가, “전일에 회계에서 패전한 벌을 받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주D-134]글을 …… 못하다 : 맹자가 말하기를, “옛글을 모두 믿는다면 글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 예를 들면 《서경(書經)》 <무성편(武成篇)>에 주 나라 무왕이 상(商) 나라 주(紂)를 토벌할 때에 피가 많이 흘러서 방아공이[杵]가 둥둥 떴다 하였는데, 이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지극히 인(仁)한 무왕이 지극히 불인(不仁)한 주(紂)를 쳤으니, 저쪽 백성이 절로 따를 것이지 어찌 그처럼 싸웠겠느냐?” 하였다.
[주D-135]성성존존 도의지문(成性存存道義之門) : 성성존존 도의지문은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있는 말인데, 만물(萬物)의 성립(成立), 존재(存在)하는 것이 도의(道義)에서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주D-136]호안국(胡安國)이 …… 바치다 : 호안국(胡安國)이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는데 그것을 호전(胡傳)이라 하여 우리나라 도학자들이 많이 숭상한다.
[주D-137]송 나라 신하들이 …… 칭하하다 : 입저(立儲)는 태자를 세우는 것인데, 당 나라 말년부터는 예법이 퇴폐하여 태자를 세우는데 예식(禮式)을 갖추지 않았다.
[주D-138]우정(禹鼎) : 우(禹)임금이 구주(九州)의 철(鐵)을 걷우어서 구정(九鼎)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역대로 전하는 보물로 되었다.
[주D-139]문천상(文天祥)이, …… 사례하다 : 송 나라 이종(理宗) 때에 문천상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대책(對策)의 글이 1만여 자가 넘었다. 임금이 친히 뽑아서 1등을 시켰다. 고시한 왕응린(王應麟)이 아뢰기를 “이 시권은 충성된 마음이 철석같습니다. 좋은 인재 얻은 것을 축하합니다.” 하였다.
[주D-140]망의(蟒衣)를 …… 뵌다 : 명 나라에서 우리나라 임금에게 흔히 망용의(蟒龍衣)를 내려 주는 일이 있다. 망용의는 붉은 바탕에 구렁이를 그린 것인데 외국의 왕에게 간간이 내려 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선조(先祖) 때의 종계변무(宗系辨誣)된 때에 망용의를 받는 일이 있으니, 그것을 입고 종묘에 가서 선왕을 뵈옵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주D-141]내 백성의 …… 푼다 : 순(舜)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부른 노래에 “남풍(南風)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불리우며 우리 백성의 불평을 풀어주는도다.” 하였다.
[주D-142]재반헌괵(在泮獻馘) : 《시경(詩經)》 <노송(魯頌)>에 있는 글귀인데, 장수가 전쟁에 이겨서 적병의 귀를 베어 와서는 반궁(泮宮)으로 가서 임금에게 바친다는 말이다.
[주D-143]주공(周公)이 …… 청하다 : 《서경(書經)》 입정편에 있는 말인데 성왕(成王)을 훈계한 말이다.
[주D-144]송 나라에서 …… 임명하다 : 부필(富弼)이 지방관으로서 굶은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반역을 예방한 공이 있으므로 동평장사에 승진시켰다.
[주D-145]춘추는 왕도의 권형 : 《춘추(春秋)》는 대의 명분을 밝혀서 시비를 포폄(褒貶)하는 것이므로 왕도(王道)의 저울대가 된다.
[주D-146]본지백세(本支百世) :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있는 말인데, 문왕(文王)의 손자는 본종(本宗)과 지자(支子)가 백세(百世)로 번창한다는 말이다.
[주D-147]이광필(李光弼)이 …… 사례하다 : 당 나라 숙종 때에 이광필(李光弼)은 곽자의(郭子儀)와 함께 당 나라를 중흥시킨 명장(名將)인데, 이때에는 사사명(史思明)을 크게 격파하였다.
[주D-148]한 나라 군신(群臣)이 …… 칭하하다 : 한 나라 문제(文帝) 때에 흉노(匈奴)가 침입하니, 주아부(周亞夫) 등의 세 대장에게 방비하게 하고, 문제가 친히 각 군중을 다니면서 군사를 위로하였다.
[주D-149]소호(召虎)가 …… 청하다 : 소호(召虎)는 주 나라 선왕(宣王)의 어진 신하요, 선왕(宣王)은 주 나라를 중흥(中興)한 어진 임금이다.
[주D-150]주 나라는 …… 유신(維新)된다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로 주 나라 문왕(文王)을 칭찬한 말이다. 주 나라가 생긴 지는 오래 되었으나 이때에 와서 문왕이 새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주D-151]독서함이 …… 같다 : 연단(鍊丹)은, 신선(神仙)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만드는 약(藥), 단사(丹砂) 등 귀중한 약을 특수한 방법으로 오랜 시일 동안 불에 연(鍊)하는데 정신이 전일(專一)하지 못하면 마지막에 가서도 실패한다.
[주D-152]한 나라에서 …… 축하한다 : 한 나라 고제(高帝)가 천하를 통일한 3년 만에, 장락궁(長樂宮)을 낙성하였는데 낙성연에서 처음으로 숙손통(叔孫通)이 제정한 예의(禮儀)를 시행하였다.
[주D-153]먼저 농사짓기의 어려움을 …… 편안할 수 있다 :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에 있는 구절인데, 주공이 성왕을 경계한 말이다.
[주D-154]명륜당(明倫堂) : 성균관(成均館)에 공자를 제사지내는 집이 대성전(大聖殿)이며, 선비들이 경(經)을 강론하는 집은 명륜당(明倫堂)인데 인륜(人倫)을 밝힌다는 뜻이다.
[주D-155]당 나라에서 …… 임명하다 : 한 나라 고제(高帝)가 한신을 대장(大將)으로 임명할 때에 특별히 단(壇)을 쌓고 날을 받아 성대한 예식을 행하였다.
[주D-156]선비가 …… 편안하다 : 《시경》에 있는 말인데, 주 나라 문왕(文王)을 칭송한 말이다. 이 말은 문왕이 선비를 많이 길러서 편안하다는 것임.
[주D-157]내치와 외국 방어는 …… 함과 같다 : 《주역(周易)》에, “공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사물의 처리를 모나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경과의 두 가지가 안과 밖으로 서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국가가 안으로는 내정(內政)을 닦고, 밖으로는 적(敵)을 물리치는 것도 이와 같이 동시에 행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주D-158]크도다 건원(乾元)이여 : 《주역》 <건괘(乾卦)>에,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그것을 자(資)하여 시초가 된다.[大哉朝元萬物資始]” 하였다.
[주D-159]한 나라에서 …… 치하하다 : 후한(後漢)의 중흥(中興)에, 28명의 장수가 공을 이루었으므로 명제(明帝)가 이들의 화상을 그려서 남궁운대(南宮雲臺)에 걸어 두었다.
[주D-160]명 나라 …… 바치다 : 송 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학의 수신(修身) 제가(齊家) 등 팔조(八條)에다 각 부분별로 역대의 사실을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명 나라 구준(丘濬)이 여기에다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부문을 보충하여 《대학연의보》를 편찬하였다.
[주D-161]비오는 것을 …… 하다 : 관덕(觀德)은 활쏘기를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에 “활과 화살을 가질 때에 살피고 굳게 잡은 연후에야 맞힐 수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덕행(德行)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여기서는 오랫동안 가물다가 비가 왔으므로 그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활쏘기놀이를 한 것이다.
[주D-162]백량어지(百兩御之) : 《詩經(시경)》에 있는 구절인데, 제후(諸侯)의 딸이 제후에게 시집갈 때에 백 채의 수레[百兩]로 영접[御之]한다는 것이다.
[주D-163]기산(岐山)에서 우는 봉황 : 주 나라 문왕(文王)의 덕이 거룩하므로 서울인 기산(岐山)에 봉(鳳)이 와서 울었다.
[주D-164]호랑이로 보고 쏜 화살이 돌에 박히다 : 한 나라 이광(李廣)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밤에 흰돌을 보고 범인 줄 잘못 알고 활로 쏘아 맞혀 가까이 가서 본즉 화살이 돌에 박혀 있었다.
[주D-165]길보가 …… 청풍 같다 : 주 나라 선왕(宣王)의 신하 윤길보(尹吉甫)가 지은 선왕의 중흥한 공덕을 칭송한 시에 있는 말이다. 목(穆)은 조화(調和)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성정(性情)을 조화시켜 맑은 바람이 만물을 양성하는 듯하다는 뜻이다.
[주D-166]주 나라에서 …… 축하하다 : 주 나라 시대의 시(詩) 관저편(關雎篇)은 부부(夫婦)가 화합한 것을 노래한 것이요, 인지편(麟趾篇)은 자손이 많은 것을 노래한 것인데, 부부가 화합하므로 자손이 많다는 뜻이다.
[주D-167]탁무(卓茂)가 …… 사례하다 : 탁무(卓茂)가 덕행이 높고, 지방의 수령으로서 어진 정치를 하였으므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는데, 이것은 덕을 포함한다는 뜻이다.
[주D-168]배와 수레를 만들어 교통하다 : 상고 시대(上古時代) 황제(黃帝)가 처음으로 배[舟]와 수레[車]를 발명하여 교통하지 못하던 곳이 비로소 교통하게 되었다 한다.
[주D-169]조천석(朝天石) :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에 대한 전설의 돌로 평양에 있다.
[주D-170]남묘(南畝)에 …… 기뻐하다 : 《시경(詩經)》 <칠월편(七月篇)>에 있는 구절인데, 농사짓는 실생활을 노래한 시이다. 전준(田畯)은 농사를 권하는 관직인데, 농촌을 순시하다가 농가의 주부가 점심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주D-171]억계시를 …… 외우다 : 위(衛) 나라 무공(武公)이 나이 90에 억편(抑篇)이란 시를 지어 주 나라의 유왕(幽王)을 풍자하고 스스로 반성하였는데 위의(威儀)를 조심하라는 뜻이다.
[주D-172]당 나라 장공예(張公藝)가 …… 감사하다 : 당 나라 장공예(張公藝)는 한 집에서 9대까지 동거(同居)하였다. 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 행차하던 길에 그의 집에 들러서 “어떻게 9대까지 동거하게 되는가.” 하고, 물으니 공예가, “입으로는 대답할 수 없고 붓으로 써서 대답하겠다.” 하고, 참을 ‘인(忍)’ 자 백여 자를 써서 바치었다. 그것은 9대로 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은 참아야 된다는 뜻이다.
[주D-173]명명(明命)이 혁연하다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로 명명(明命)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란 뜻이다.
[주D-174]오늘 아침 …… 열리다 : 《논어(論語)》에 있는 유자(有子)의 말이다.
[주D-175]효도와 공경함은 …… 근본이다 : 주자(朱子)의 시에 있는 구절이다.
[주D-176]교득채근(晈得菜根) : 《소학(小學)》에 있는 말인데, 나물뿌리를 먹어야 온갖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D-177]슬피옥찬황류재중(瑟彼玉瓚黃流在中)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슬(瑟)은 깨끗하다는 말이며, 옥찬(玉瓚)은 황금으로 꾸민 옥잔이요, 황류(黃流)는 제사에 쓰기 위하여 향초(香草)로 만든 술이다.
[주D-178]집희경지(緝熙敬止)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로 주 나라 문왕(文王)의 덕을 말한 것인데, 문왕의 광명(光明)한 덕을 공경한다는 뜻이다.
[주D-179]협화만방(協和萬邦) : 《서경(書經)》에 있는 구절인데, 요(堯)의 정치를 칭송한 말이다.
[주D-180]영대를 경시하다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주 나라 문왕이 영대(靈臺)라는 대를 처음으로 경영하는데 백성들이 기꺼이 그 부역에 달려 왔다 한다.
[주D-181]현주대갱(玄酒大羹) : 대갱(大羹)은 양념으로 조미하지 않은 고기국이며, 현주(玄酒)는 맑은 물인데, 온갖 맛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주D-182]일감(日監)이 이에 있다 : 《시경(詩經)》에 있는 말인데, 날마다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뜻이다.
[주D-183]노인을 잘 봉양하다 : 은(殷) 나라 말기에,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은 주 나라 문왕(文王)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 나라로 갔다.
[주D-184]한 나라 조충국(趙充國)이 …… 바치다 : 한 나라 선제(宣帝) 때에 서방(西方)의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조충국(趙充國)을 보내어 평정하게 하니, 충국이 “군사(軍事)는 멀리서 예측할 수 없으니 신이 금성(金城)에 도착한 뒤에 방략(方略)을 그림으로 그려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주D-185]원회(元會) : 송 나라 소강절(邵康節)이 《황극경세(皇極經世)》를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천지(天地)의 생성(生成)과 존립(存立)의 기간을 일원(一元)이라 하고, 일원을 12회(會)로 분하였다. 1회가 만 2천년이 되고, 첫회에서 끝회까지의 상황을 추수(推數)로 서술하였다.
[주D-186]비록 효도를 …… 하리오 :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모가 계실 때에는 집이 가난하여 봉양을 옳게 하지 못하였더니, 지금은 벼슬하여 녹을 많이 받으나 효도하려 한들 누구에게 효도하랴.” 하였다.
[주D-187]삼대(三代)의 기상(氣像)인데 …… 비하랴 : 송 나라 정이천(程伊川)이 한 나라 제갈량을 평하기를, “삼대 하(夏)ㆍ은(殷)ㆍ주(周)의 현신(賢臣)의 기상이 있다.” 하였다. 제갈량이 처음 은거(隱居)할 때에 스스로 춘추 때의 관중(管仲)과 전국 시대의 악의(樂毅)에 비하였는데, 여기서는 정이천의 말을 인용하여 제갈량은 관중과 악의에게 비할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주D-188]한 나라 장량(張良) 유후(留侯)에 봉함을 사례하다 : 한 나라 고제(高帝)가 땅을 나누어 공신(功臣)들을 봉하여 주는데 장량(張良)이 말하기를, “신은 유(留) 땅에서 폐하(陛下)를 처음 만났으니 유후(留侯)로 봉하여 주시면 족하겠습니다.” 하였다.
[주D-189]금거울 : 당 나라 현종(玄宗)의 생일인 천추절(千秋節)에 여러 신하들이 축하의 선물로써 각각 보감(寶鑑)을 바치는데, 홀로 장구영(張九齡)은 정치에 거울이 될 만한 전대(前代)의 사적(事跡)을 엮어서 《천추금감록(千秋金鑑錄》이라 하여 올렸다.
[주D-190]계성사(啓聖祠)에 참배하다 : 계성사(啓聖祠)는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을 비롯하여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 등 오성(五聖)의 아버지를 모신 사당으로 문묘(文廟) 옆에 세웠다.
[주D-191]강숙(康叔)이, …… 사례하다 : 주 나라 성왕(成王)이 어려서 임금이 되었는데, 그의 동생 강숙과 희롱하면서 오동잎으로 규(圭)를 만들어 보이면서, “이것으로써 너를 봉하여 주겠다.” 하였다.주공(周公)이 이 말을 듣고 성왕에게 들어가서 강숙을 봉한 것을 축하하니 성왕이, “그것은 희롱이요.” 하였다. 주공이, “천자는 희롱하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하고, 권하여 강숙을 위후(衛侯)로 봉하였다.
[주D-192]덕유여모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덕의 수레[輶]는 가볍기가 털과 같아서 만드는 사람이 적도다.” 하였다.
[주D-193]곽광(藿光)이 …… 사례하다 : 한 나라 무제(武帝)가 죽을 임시에, 태자가 아직 어리므로 조정에서 제일 성실하고 근신한 곽광(藿光)을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삼고 유조(遺詔)를 받들어 정사를 돕게 하였다.
[주D-194]노인에게 묻다 : 《서경(書經)》에 있는 말인데, “머리털이 희다 못해 누렇게 된 늙은 노인에게 물어서 하면 허물이 없느니라.” 하였다.
[주D-195]지팡이를 짚고 조서(詔書)를 듣다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어진 정치를 하였으므로, 매양 조서(詔書)가 민간에게 내리면 시골 노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가서 조서를 들었다 한다.
[주D-196]숭정(崇禎) 갑신년의 3주기 : 명 나라 숭정 갑신에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으로 의종황제(毅宗皇帝)가 자살하고 청 나라 조사가 북경으로 들어와 명 나라는 망하였다.
[주D-197]풍천(風泉) : 《시경》의 비풍편(匪風篇)과 하천편(下泉篇)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제후국(諸侯國)의 사람들이 주 나라를 생각하여 지은 시다. 여기서는 망한 명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다.
[주D-198]억위보장(抑爲保障) :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의 조간자(趙簡子)가 윤탁(尹鐸)을 보내어 진양(晉陽)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윤탁이 묻기를, “진양을 다스리는 데는 산업을 위주하리까, 군사의 방어[保障]를 위주하리까.” 하니, 조간자는 “보장을 위주하라.” 하였다.
[주D-199]이견대인(利見大人) : 《주역(周易)》에 있는 구절인데, 용(龍)이 물속에서 육지로 두각(頭角)을 나타내는 격이니 대인(大人)을 이롭게 본다. 용이 날아서 하늘에 있는 격이니, 대인을 이롭게 본다.[見龍在田 利見大人 飛龍在天 利見大人]하였다.
[주D-200]공자가 말하기를, “내 점(點)을 찬성한다.” : 《논어》에 있는 말인데, 공자가 몇 제자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이 각각 뜻한 바를 말하라.” 하니, 각각 자기의 능력과 소원대로 “군정(軍政)을 하겠다.” 혹은 “재정(財政)을 하겠다.” 혹은 “외교(外交)를 하겠다.” 하는데, 최후에 증점(曾點)은 말하기를, “모춘(暮春)에 춘복(春服)을 새로 입고 동자(童子) 5, 명과 관자(冠者)인 6, 명을 데리고 무우(舞雩)에게 바람 쏘이고, 기수[沂]에서 목욕하고 읊으면서 돌아오겠나이다.” 하였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나는 점(點)에게 찬성하노라.” 하였다.
[주D-201]우리나라에서 …… 받으려 하는 : 구장 곤룡포(九章袞龍袍)와 팔음(八音)의 악기(樂器)를 말한다. 구장(九章)은 산(山)ㆍ꿩[雉]ㆍ쌀[米] 등의 아홉 가지 무늬이며, 팔음은 포(匏)ㆍ토(土)ㆍ혁(革)ㆍ목(木)ㆍ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이다.
[주D-202]봄에 내리는 조칙 : 봄은 만물이 나고 자라는 계절이므로, 불쌍한 백성을 구제하고, 원통한 죄수를 풀어주는 정치를 행한다는 말이다.
[주D-203]수레를 …… 사랑하다 : 당시(唐詩)에 있는 구절로, 가을에 산으로 가서 단풍을 읊은 시인데.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은 철 신나무 숲을 사랑하노니 서리 맞은 잎이 2월의 꽃보다도 붉구나.” 하였다.
[주D-204]어버이에게 …… 드리다 : 한 나라 황향(黃香)은 지극한 효자로서 집이 매우 가난하여 겨울에 동복과 이불이 없으면서도 어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바쳤다 한다.
[주D-205]지성이 …… 보겠다 : 우리나라의 영종(英宗)이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인 뒤에 세자의 아들인 정종(正宗)을 세손(世孫)으로 봉하여 극히 사랑하고, 세손이 할아버지를 잘 받들었으므로 영종이 그 조손(祖孫)간에 지성(至誠)이 서로 합한다고 말하였는데, 문손(文孫)은 세손을 가리킨 것이다.
[주D-206]창승월광(蒼蠅月光) : 《시경(詩經)》의 계명편(鷄鳴篇)에, “부인은 닭이 이미 울었소. 아침이 되었소. 남편은 닭의 울음이 아니라 파리[蒼蠅]의 소리로다. 부인은 동방이 밝았소. 아침이 되었소. 남편은 동방이 밝은 것이 아니라 달이 뜨는 빛이로다.” 하였다.
[주D-207]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 : 매년 연말에 주 나라 천자(天子)가 노(魯) 나라에게 다음 해 열두 달의 삭일(朔日)을 제후(諸侯)에게 내려주면 제후는 그것을 종묘에 간수하여 두고, 매월 삭일(朔日)이 되면 양(羊)을 잡아서 종묘에 고하였던 것인데, 노 나라 문공(文公) 때로부터 그 예(禮)를 폐지하였다.그러나 양(羊)은 전례대로 달마다 바치었다. 자공(子貢)이 그 양(羊)을 바치는 것을 폐지하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그 양(羊)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 하였다. 그것은 양(羊)을 전례대로 바치면 종묘에 삭일(朔日)을 고하던 그 예(禮)가 이름이라도 남아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주D-208]담(膽)은 크고자 하며 마음은 작고자 한다 : 당 나라 도인(道人) 손사막(孫思邈)의 말에, “담은 커야 하고, 마음은 작아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사람이 대담(大膽)하게 용감하여야 하는 동시에 소심(小心)으로 근신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에 인용하였기 때문에 시제가 된 것이다.
[주D-209]편안함에 빠질까 경계하다 : 《시경(詩經)》에, “너무 편안하지 아니한가. 주로 일을 생각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임금을 경계한 것이다.
[주D-210]우리나라 기로사(耆老社)의 …… 바치다 : 위(衛) 나라 무공(武公)이 나이 90세에 억편(抑篇)을 지어 더욱 반성하고 부지런히 할 것을 스스로 경계하였다.
[주D-211]무당(無黨) 무편(無偏)에 …… 탕탕하다 : 《서경(書經)》에 있는 말인데, 국가를 다스리는 임금의 도리는 편당(偏黨)이 없고, 탕탕(蕩蕩) 평평(平平)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에 사색 당파(四色黨派)의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이 시제를 낸 것이다.
[주D-212]어버이를 사랑함을 보배로 삼는다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있는 말인데, 진(晉) 나라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진(秦) 나라에 망명하여 있을 때에, 본국에서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부고가 왔는데, 진(秦) 나라 임금이 사람을 시켜 조상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후원할 터이니 본국으로 급히 돌아가서 임금의 자리를 도모할 생각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구범(舅犯)이 중이에게 말하기를 “다른 것이 보배가 아니라 부모를 사랑함이 보배인데, 아버지의 죽은 것이 어떠한 일인데, 이때에 감히 다른 생각을 낸단 말이냐. 그대는 사양하라.” 하였다.
[주D-213]저 기욱(淇澳)에는 …… 우거졌구나 :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위(衛) 나라 기수(淇水)의 언덕에 있는 푸른 대[竹]를 읊어서 군자의 덕에 비유한 것이다.
[주D-214]경연(經筵) 특진관(特進官)이 …… 바치다 : 이전(二典)은 《서경》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이요, 삼모(三謨)는 《서경》의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 등의 편명이다.
[주D-215]뜻을 가진 자…… 이루어지다 : 후한(後漢)의 광무황제(光武皇帝)가 농서(隴西)를 평정하고 나서 등우(鄧禹)에게 말하기를, “절일에 그대가 농서를 평정할 것을 말하기에, 나는 될 것 같지 않게 생각하였더니, 과연 뜻이 있으면 일이 마침내 성취되는 것이로구나.” 하였다.
[주D-216]구일제(九日製) : 9월 9일에는 문신(文臣)에게 시를 짓게 하여 시험을 보이는 것으로 절일제(節日製)의 하나이다.
[주D-217]남훈전에 …… 모시다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있는 말인데, 옛날에 고신씨(高辛氏)가 재주 있는 아들 여덟이 있었으니 8원(元)이라 하였고, 고양씨(高陽氏)가 재주 있는 아들 여덟이 있었으니, 8개(凱)라 하였다. 이들은 모두 순(舜) 임금의 신하이다.
[주D-218]꿈에 좋은 보필자를 얻다 : 은 나라 고종(高宗)의 꿈에 상제(上帝)가 어진 보필 한 사람을 주었다. 꿈을 깬 뒤에 그 사람을 기억하여 사방으로 찾아서 부열(傅說)을 얻었다.
[주D-219]한 명의 …… 바르게 되다 : 《서경》에 있는 말인데, 원량(元良)은 태자(太子)를 말한다.
[주D-220]당 나라에서 …… 새김을 하례하다 : 당 나라 태종이 설연타(薛延陀)를 쳐서 항복을 받고 크게 기뻐하여 지은 시(詩)다.
[주D-221]인(仁)한 사람이라야 …… 미워할 수 있다 : 《논어(論語)》에 있는 말인데, 공자(孔子)가, “오직 인(仁)한 사람이라야 남을 좋아할 수 있으며 남을 미워할 수 있다.” 하였다.
[주D-222]신(信)은 임금의 큰 보배다 : 위(魏) 나라의 유학자(儒學者) 왕숙(王肅)의 말이다.
[주D-223]덕(德)에 있지, 험(險)함에 있지 않다 :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위(魏) 나라 무후(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로 내려 가다가 말하기를, “장하다. 산천(山川)이 험하고 견고하구나. 적국이 침범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위국(魏國)의 보배로다.” 하니, 오기(吳起)가 말하기를, “옛날에 여러 나라들이 산천이 험준하고 견고하였으나, 덕을 닦지 않은 때문에 망하고 말았으니, 나라의 보배는 덕(德)에 있는 것이지 산천의 험한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주D-224]용(龍)을 …… 논하라 : 순(舜) 임금이 신하 22명에게 각각 직무를 맡기고, 끝으로 용(龍)에게 납언(納言)의 관직에 임명하면서, “나의 말을 출납(出納)하되 성실히 하라.”고 부탁하였다.
[주D-225]황하에 비하다 : 기자(箕子)가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대동강을 중국의 황하(黃河)에 비하였다 한다.
[주D-226]천일생수 : 《주역(周易)》에 ‘천일지이천삼지사(天一地 二天三地四)’란 말이 있는데, 이것을 오행(五行)에 분배하면 천일 생수(天一生水)ㆍ지이 생화(地二生火)라고 한다.
[주D-227]사람을 …… 줄 수 있다 : 《서경(書經)》에 있는 우(禹)의 말에, “사람을 알아보는 이는 철(哲)이니, 능히 사람에게 벼슬을 줄 수 있다.” 하였다.
[주D-228]주 나라에서 후직(后稷)을 …… 칭하하다 : 후직(后稷)은 시조(始祖)이니 높은 이요, 문왕(文王)은 아버지이니 친한 이다.
[주D-229]당 나라 울지경덕(尉遲敬德)이 …… 감사하다 : 당 태종 때에 울지경덕(尉遲敬德)이 적장(敵將)으로서 항복하여 왔는데, 얼마 후에 같이 항복을 한 자들이 반역을 하였다. 당 나라 장수들이 경덕을 가두어 죽이려 하자, 태종이 “경덕은 반역할 사람이 아니다.” 하였더니, 그 뒤에 태종이, 왕세충(王世充)의 장수 선웅신(宣雄信)에게 포위를 당하여 매우 위급할 때에 울지경덕이 말을 달려 들어가서 태종을 보호하여 구출하였으므로 태종이 그를 표상하였다.
[주D-230]당 나라에서 …… 봉하는 조칙 : 곽자의는 당 나라 숙종(肅宗)ㆍ대종(代宗) 때의 장수로서 중흥(中興)의 공이 가장 컸으므로 분양왕(汾陽王)에 봉하였다.
[주D-231]봉황새가 …… 나도다 : 《시경》에 있는 구절인데, 조양(朝陽)은 산의 동쪽을 말한 것이며, 봉황은 어진 선비에, 오동은 밝은 임금에 비한 것이다.
[주D-232]이 봄술을 만들어 장수를 빈다 : 《시경》의 7월편에 있는 구절인데, 농가의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풍년이 들어 추수를 마친 뒤에 봄술을 빚어 노인들에게 드린다는 뜻이다.
[주D-233]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다 : 주 나라 문왕(文王)의 아버지인 태왕(太王)을 칭송하는 말로 《시경》에 있는,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었는데 태왕이 편안히 하였다.” 하였다. 여기서 높은 산은 주 나라의 수도(首都)에 있는 기산(岐山)을 말한다.
[주D-234]자흥시야(子興視夜) : 《시경》에 있는 구절인데,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이 일어나서 밤을 보시오. 밝은 별이 찬란하오. 일어나서 오리와 기러기 사냥을 나가시오.” 하였다. 이것은 색(色)을 좋아하고 덕을 좋아하지 아니함을 풍자한 시다.
[주D-235]고굉군(股肱郡) : 한 나라 문제(文帝)가 하동 군수(河東郡守)인 계포(季布)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려고 불러들였다가 술이 과하여 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사관(舍館)에 머물게 한 지 한 달 만에 계포를 도로 하동으로 돌려보냈다. 그가 불러들였던 이유를 물은즉, 문제가, “하동은 나의 고굉군(股肱郡)이므로 불러보았다.”고 하였다. 고굉군은 팔 다리와 같은 중요한 고을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수원ㆍ광주(廣州)ㆍ과천(果川)의 세 고을을 두고 한 말이다.
[주D-236]생민(生民) …… 있지 않았다 : 공자의 제자인 재아(宰我)가 공자를 칭찬한 말이다.
[주D-237]문무길보(文武吉甫) : 《시경》의 6월편에 있는 구절인데, 주 나라 선왕(宣王) 때에 험윤(玁狁)의 침략을 윤길보(尹吉甫)가 격퇴시켰으므로 “문무(文武)를 겸한 길보는 만방(萬邦)에 법이 된다.”고 칭찬하였다.
[주D-238]선군(先君)이 이르기를, “너의 만수무강을 점친다.” : 《시경》의 천보편(天保篇)에 있는 구절인데, 제사를 지낼 때에 선군(先君)이 복을 내린다는 말이다.

용재집(容齋集) 제3권
 칠언율(七言律)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부임하는 소언겸(蘇彦謙)을 보내며

훌륭한 아우께서 또 수령을 맡으니 / 小難今日又專城
향리 사람들 모두 근친의 영광 알리라 / 鄕里爭知彩服榮
앉아서 온 고을을 효우로 감화시키고 / 坐使一方歸孝友
장차 최상의 실적 올려 공경이 될 테지 / 行看上最入公卿
높은 벼슬 분수에 넘쳐 나는 부끄럽고 / 靑雲愧我叨非分
우뚝한 그대 큰 명성 떨치리 기약노라 / 獨步期君擅大名
무단히 눈물 흘린다 괴이쩍어 마시라 / 莫怪無端雙涕淚
부모 없는 이 몸 형제의 정에 슬프다오 / 蓼莪身事鶺鴒情
병든 아우가 죄로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포주성의 흥겹던 놀이 아직 기억나건만 / 勝遊猶記抱州城
지금은 생각노니 영욕이 서로 다르구려 / 今日相思異悴榮
알지 못하겠다 완산에 국사가 필요한지 / 未信完山須國士
사굴산에 낙향한 장경을 다시 말하노라 / 更論闍崛滯長卿

선비의 득실은 참으로 운수소관인 것 / 儒冠得失眞關數
이 늙은이 부침하며 명성만 훔칠 뿐일세 / 老子浮沈只竊名
그대의 머리털이 하얗게 센 뒤엔 / 待得吾君頭白後
지금의 내 마음을 틀림없이 아시리라 / 定應知我此時情
이때 운경(雲卿)이 벼슬을 잃고 고향 의령(宜寧)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그가 소갈병을 앓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이렇게 언급하였다.

[주D-001]훌륭한 아우 : 소세양(蘇世讓)의 자가 언겸(彦謙)으로, 역시 용재와 벗인 소세량(蘇世良)의 아우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2]알지 …… 말하노라 : 지방관인 전주 부윤 자리가 국사(國士)인 소언겸이 앉기엔 부족하며, 게다가 운경(雲卿) 정사룡(鄭士龍)처럼 훌륭한 선비가 고향인 의령의 사굴산 아래에서 낙척(落拓)한 신세로 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장경(長卿)은 한(漢)나라 때 부(賦)에 능하였던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字)로, 그가 늘 소갈병(消渴病)을 앓았다 한다.
용재집(容齋集) 제8권
 동사록(東槎錄)
운경(雲卿)의 시에 차운하다. 10수(十首)

마른 얼굴 언제 붉은 윤기 돌아왔더뇨 / 槁面何曾返渥丹
식은 마음 다시는 유란을 묶지 않느니 / 灰心無復結幽蘭
젊을 적 행락일랑 모두 남에게 맡기고 / 少年行樂全分付
밤중에 이불 두르니 비로소 편안하여라 / 擁被中宵始覺安

소슬한 송뢰 소리가 밤에 유독 크니 / 松籟蕭蕭入夜多
창택에서 낚시하던 시절의 꿈을 깨노라 / 夢驚滄澤舊漁蓑
어찌하면 남쪽으로 나는 까치가 되어 / 若爲化得南飛鵲
세모에 새끼들 데리고 한 보금자리 틀꼬 / 歲晩將雛共一窠

조회에서 돌아와 가슴속 술로 달래고 / 胸次朝回酒使平
작은 창가에 누워서 맑은 풍경을 본다 / 小窓欹枕賞新晴
이 사이의 흥취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 此間有趣無人會
높은 벼슬자리로도 경중을 비기지 말라 / 莫把封侯較重輕

늙을수록 인간 만사 관심이 없어지거니 / 老向人間萬事疏
하물며 도의 나머지일 뿐인 문장임에랴 / 文章況復道之餘
객창에 비바람은 쓸쓸히 몰아치는데 / 客窓風雨蕭蕭急
남산 나의 초가집을 누워서 생각하노라 / 臥憶南岡一草廬

맑은 흥 많이도 일어 가눌 길이 없느니 / 淸興多多不自勝
새 시가 옥호의 얼음을 그려 내누나 / 新詩寫出玉壺氷
이제부터 날마다 천 수씩 시를 쓰리니 / 從今一日應千首
관서의 종이 값이 오를까 외려 걱정일세 / 却恐關西紙價增

국색의 미모 분단장한 적이 있으랴 / 國色何曾汚粉丹
꽃다운 마음 단지 지란에만 의탁할 뿐 / 芳心只許托芝蘭
풍류의 소정이라 사람들마다 말하니 / 風流蘇鄭人爭說
동산의 사안 한 사람 뿐만이 아니로세 / 不獨東山一謝安


눈길 닿는 곳마다 참으로 감회와 탄식 많으니 / 觸眼眞成感歎多
푸른 물가 안개비 속 도롱이 걸치던 때 추억한다 / 滄洲煙雨憶披蓑
무단히 다시금 내 집의 즐거움을 사랑하노니 / 無端更愛吾廬樂
낙엽은 뿌리로 돌아가고 새는 둥지 가리는 법 / 落葉歸根鳥擇窠

아스라히 펼쳐진 들판은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 極目荒郊掌樣平
하늘이 또 이렇게 맑은 날씨를 빌려 주었구나 / 天公又借此時晴
석양 비낄 제 매 부르고 말 달려 사냥하다가 / 呼鷹跋馬斜陽外
한바탕 취해서 돌아오면 만사가 가볍게 뵈느니 / 一醉歸來萬事輕

평소에 문장 짓는 일 스스로 멀리하다가 / 平日文章自作疏
늘그막에 의식주에서 다시 나머지 구하랴 / 老來眠食更求餘
지금은 헛된 명성의 굴레를 잘못 써서 / 只今剛被虛名誤
눈보라 속 말 달리느라 내 집도 없어라 / 風雪驅馳未有廬

사람 몰아대는 세상사를 이기기 어려워서 / 世故驅人未易勝
여윈 말 억지로 채찍질하여 두터운 얼음 밟노라 / 強鞭羸馬踏層氷
검은 담비 갖옷은 다 낡아 온기라곤 없는데 / 黑貂弊盡無餘煖
변방 땅의 추위는 더욱더 매서워지는구나 / 塞地寒威轉覺增

[주D-001]유란(幽蘭)을 묶지 않느니 : 굴원의 이소경(離騷經)에 “그윽한 난초 묶고서 서성이노라.[結幽蘭兮延佇]” 하여, 혼탁한 세상에서 버림받은 은자(隱者)의 모습을 형용하였다.
[주D-002]옥호(玉壺)의 얼음 : 상대방의 맑은 마음을 뜻한다. 당(唐)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의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 시에 “낙양의 친우가 만약 묻거든, 한 조각 빙심이 옥호에 있다고 하게나.[洛陽親友如相問一片氷心在玉壺]” 한 구절에서 연유하였다.
[주D-003]종이 값이 오를까 : 사람들이 시를 베껴 쓰느라 종이 값이 폭등할까 걱정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의 시를 칭찬한 것이다. 한(漢)나라 좌사(左思)가 구상한 지 10년 만에 삼도부(三都賦)를 완성하자, 당시 사람들이 이 작품을 베껴 적느라 낙양의 종이 값이 비싸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주D-004]풍류의 …… 아니로세 : 위 구절로 보아 종사관 소세량(蘇世良)과 정사룡(鄭士龍)이 기생과 풍류를 즐겼던 듯하다. 동진(東晉)의 명신(名臣) 사안(謝安)이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 동산(東山)에 은거할 때 산천을 유람하면서 늘 기생을 데리고 다녔다 한다.
[주D-005]나머지 구하랴 : 그저 먹고 살 만하면 되지 더 무엇을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뜻이다. 후한(後漢) 마원(馬援)이 관속(官屬)에게 말하기를 “내가 강개하여 뜻이 큰 것을 보고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선비가 한 세상을 살면서 의식(衣食)이 족하고 하택거(下澤車)를 타고 관단마(款段馬)를 몰면서 군의 하급 관리가 되어 조상의 선영이나 지키면서 향리 사람들에게 선인(善人)이라 불리면 그만이니, 그 나머지를 구하면 스스로 괴로울 뿐입니다.’ 하더라.” 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용재집(容齋集) 제8권
 동사록(東槎錄)
10월 19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선천(宣川)의 동헌(東軒)에 쓰다. 2수(二首)

늙은 기개로 처음 제주하던 곳 / 矍鑠初題柱
세상길에 실의하여 지친 지 오래 / 蹉蛇久倦遊
이 한 몸은 천리 밖에 노닐고 / 一身千里外
오경이라 깊은 밤 꿈을 꾸노라 / 殘夢五更頭
은퇴하고픈 맘 더욱 간절한데 / 丘壑心逾切
풍진 속에 세월은 자꾸만 흐른다 / 風塵歲屢遒
닭 울어 어서 일어나라 재촉하니 / 鳴鷄催早起
새벽 공기가 양 갖옷에 엄습하누나 / 曉氣襲羊裘

오랜 벗 세 사람이 모였으니 / 久要逢三友
이번 길은 참으로 장쾌한 유람 / 玆行信壯遊
아침에는 말 타고서 손을 잡고 / 朝鑣仍接手
밤에는 촛불 아래 머리 맞댄다 / 夜燭互傾頭
강해에 시 지을 근원은 드넓고 / 江海詞源闊
풍상에서 붓의 힘은 굳세어라 / 風霜筆力遒
마침내 구천에 오르길 기약건만 / 終期九天上
나는 그만 토구에서 늙고 싶어라 / 吾欲老菟裘

[주C-001]선천(宣川) : 평안북도 선천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읍이다.
[주D-001]제주(題柱) :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장안(長安)으로 들어가면서 촉(蜀) 땅의 승선교(昇仙橋)의 기둥에 “대장부가 사마(駟馬)를 타지 않고는 다시는 이 다리를 지나지 않으리라.”라고 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용재가 언젠가 이곳을 지나면서 비장한 각오로 시를 지은 적이 있기에 이렇게 말한 듯하다.
[주D-002]구천에 오르길 기약건만 : 용재가 일행인 소세량(蘇世良)과 정사룡(鄭士龍)에게 하는 말로, 그대들은 앞으로 조정의 높은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뜻이다.
[주D-003]토구(菟裘) : 본래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지명인데, 은거지(隱居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좌전》 은공(隱公) 11년 조(條)에 “은공(隱公)이 ‘내가 장차 토구 땅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늙으리라.’ 하였다.” 하였다.
용재집(容齋集) 제8권
 동사록(東槎錄)
운경(雲卿)의 시에 차운하다. 10수(十首)

마른 얼굴 언제 붉은 윤기 돌아왔더뇨 / 槁面何曾返渥丹
식은 마음 다시는 유란을 묶지 않느니 / 灰心無復結幽蘭
젊을 적 행락일랑 모두 남에게 맡기고 / 少年行樂全分付
밤중에 이불 두르니 비로소 편안하여라 / 擁被中宵始覺安

소슬한 송뢰 소리가 밤에 유독 크니 / 松籟蕭蕭入夜多
창택에서 낚시하던 시절의 꿈을 깨노라 / 夢驚滄澤舊漁蓑
어찌하면 남쪽으로 나는 까치가 되어 / 若爲化得南飛鵲
세모에 새끼들 데리고 한 보금자리 틀꼬 / 歲晩將雛共一窠

조회에서 돌아와 가슴속 술로 달래고 / 胸次朝回酒使平
작은 창가에 누워서 맑은 풍경을 본다 / 小窓欹枕賞新晴
이 사이의 흥취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 此間有趣無人會
높은 벼슬자리로도 경중을 비기지 말라 / 莫把封侯較重輕

늙을수록 인간 만사 관심이 없어지거니 / 老向人間萬事疏
하물며 도의 나머지일 뿐인 문장임에랴 / 文章況復道之餘
객창에 비바람은 쓸쓸히 몰아치는데 / 客窓風雨蕭蕭急
남산 나의 초가집을 누워서 생각하노라 / 臥憶南岡一草廬

맑은 흥 많이도 일어 가눌 길이 없느니 / 淸興多多不自勝
새 시가 옥호의 얼음을 그려 내누나 / 新詩寫出玉壺氷
이제부터 날마다 천 수씩 시를 쓰리니 / 從今一日應千首
관서의 종이 값이 오를까 외려 걱정일세 / 却恐關西紙價增

국색의 미모 분단장한 적이 있으랴 / 國色何曾汚粉丹
꽃다운 마음 단지 지란에만 의탁할 뿐 / 芳心只許托芝蘭
풍류의 소정이라 사람들마다 말하니 / 風流蘇鄭人爭說
동산의 사안 한 사람 뿐만이 아니로세 / 不獨東山一謝安


눈길 닿는 곳마다 참으로 감회와 탄식 많으니 / 觸眼眞成感歎多
푸른 물가 안개비 속 도롱이 걸치던 때 추억한다 / 滄洲煙雨憶披蓑
무단히 다시금 내 집의 즐거움을 사랑하노니 / 無端更愛吾廬樂
낙엽은 뿌리로 돌아가고 새는 둥지 가리는 법 / 落葉歸根鳥擇窠

아스라히 펼쳐진 들판은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 極目荒郊掌樣平
하늘이 또 이렇게 맑은 날씨를 빌려 주었구나 / 天公又借此時晴
석양 비낄 제 매 부르고 말 달려 사냥하다가 / 呼鷹跋馬斜陽外
한바탕 취해서 돌아오면 만사가 가볍게 뵈느니 / 一醉歸來萬事輕

평소에 문장 짓는 일 스스로 멀리하다가 / 平日文章自作疏
늘그막에 의식주에서 다시 나머지 구하랴 / 老來眠食更求餘
지금은 헛된 명성의 굴레를 잘못 써서 / 只今剛被虛名誤
눈보라 속 말 달리느라 내 집도 없어라 / 風雪驅馳未有廬

사람 몰아대는 세상사를 이기기 어려워서 / 世故驅人未易勝
여윈 말 억지로 채찍질하여 두터운 얼음 밟노라 / 強鞭羸馬踏層氷
검은 담비 갖옷은 다 낡아 온기라곤 없는데 / 黑貂弊盡無餘煖
변방 땅의 추위는 더욱더 매서워지는구나 / 塞地寒威轉覺增

[주D-001]유란(幽蘭)을 묶지 않느니 : 굴원의 이소경(離騷經)에 “그윽한 난초 묶고서 서성이노라.[結幽蘭兮延佇]” 하여, 혼탁한 세상에서 버림받은 은자(隱者)의 모습을 형용하였다.
[주D-002]옥호(玉壺)의 얼음 : 상대방의 맑은 마음을 뜻한다. 당(唐)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의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 시에 “낙양의 친우가 만약 묻거든, 한 조각 빙심이 옥호에 있다고 하게나.[洛陽親友如相問一片氷心在玉壺]” 한 구절에서 연유하였다.
[주D-003]종이 값이 오를까 : 사람들이 시를 베껴 쓰느라 종이 값이 폭등할까 걱정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의 시를 칭찬한 것이다. 한(漢)나라 좌사(左思)가 구상한 지 10년 만에 삼도부(三都賦)를 완성하자, 당시 사람들이 이 작품을 베껴 적느라 낙양의 종이 값이 비싸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주D-004]풍류의 …… 아니로세 : 위 구절로 보아 종사관 소세량(蘇世良)과 정사룡(鄭士龍)이 기생과 풍류를 즐겼던 듯하다. 동진(東晉)의 명신(名臣) 사안(謝安)이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 동산(東山)에 은거할 때 산천을 유람하면서 늘 기생을 데리고 다녔다 한다.
[주D-005]나머지 구하랴 : 그저 먹고 살 만하면 되지 더 무엇을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뜻이다. 후한(後漢) 마원(馬援)이 관속(官屬)에게 말하기를 “내가 강개하여 뜻이 큰 것을 보고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선비가 한 세상을 살면서 의식(衣食)이 족하고 하택거(下澤車)를 타고 관단마(款段馬)를 몰면서 군의 하급 관리가 되어 조상의 선영이나 지키면서 향리 사람들에게 선인(善人)이라 불리면 그만이니, 그 나머지를 구하면 스스로 괴로울 뿐입니다.’ 하더라.” 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화남악창수집(和南岳唱酬集) 발(跋)
 발(跋)
화남악창수집(和南岳唱酬集) 발(跋) [정사룡(鄭士龍) 찬(撰)]

고(故) 좌상(左相) 용재 선생은 문장과 덕망으로 한 시대에 우뚝하였다. 그 문하에 노닌 이들로 퇴휴(退休) 소 찬성 언겸(蘇贊成彦謙)과 안분(安分) 이 부윤 백익(李府尹伯益) 등은 모두 당시의 명망을 한 몸에 받았거니와, 그 나머지 후진으로서 선생의 인정을 받아서 훌륭한 선비가 된 이들은 숱하게 손가락을 꼽을 수 있다.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도 선생의 이끌어 주심을 받아 그 덕화(德化)를 입은 것이 실로 여러 해였다.
선생의 시는 형식의 틀을 과감하게 벗어나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시속(時俗)의 요구에 따라 빨리 지을 때도 어김없이 법도에 맞아서, 억지로 깎고 다듬어서 단련시키는 이들이 그 경지를 엿볼 수 없었다. 당고(唐皐)와 사도(史道) 두 중국 사신을 접반(接伴)할 때 창수(唱酬)하면서 사람을 시켜 붓을 쥐고 입으로 불러 주는 것을 받아 적게 하였는데, 시가 무려 열 편에 이르러도 어병(語病)과 첩자(疊字)가 없었으니, 참으로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시를 평하는 이들은 선생을 국조(國朝)의 제일로 추중하니, 참으로 지나친 것이 아니다.
선생의 시문은 모두 직접 모아서 기록해 두었는데, 이 시집은 그중 적은 일부로, 비방을 피하며 근심에 잠겨 있던 중 번민을 달래면서 지은 것들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선생은 권행(權倖)의 배척을 받아 유배지에서 별세하였으니, 이는 거의 절필시(絶筆詩)인 셈이다. 선생의 동료 한공 사앙(韓公士仰)이 일찍이 공의 지우(知遇)를 가장 깊이 입었기로 개성(開城)의 수령이 되어서 자신의 녹봉을 덜어 이 시집을 판각하여 널리 유포토록 하는 한편 나에게 권(卷) 뒤에 적을 발문을 부탁하였으니, 그 마음씀이 어찌 깊고 경건하지 않은가. 나 같은 사람은 선생이 이끌고 보살펴 주신 데 힘입어 이미 허명(虛名)을 차지하였고 또 주제넘게 문병(文柄)을 잡았으니, 이 모두가 선생의 덕택이 아님이 없다. 이 시집에 있어 어찌 무심할 수 있으리요. 이에 이 글을 써서 돌려보낸다.
가정(嘉靖) 갑인년(1554, 명종9) 중추(中秋) 기망(旣望)에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은 삼가 발문을 쓰노라.


[주D-001]한공 사앙(韓公士仰) : 사앙은 조선조 문신 한두(韓㞳)의 자이다. 그는 중종(中宗) 21년 별시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였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역임하였다.
율곡선생전서 제32권
 어록(語錄)
어록(語錄) 하(下)

선생이 하신 말씀이 여러 사람들의 글에 흩어져 있는 것을 수집하여 이 편을 만들었다. ○ 김우옹(金宇顒)의 《경연강의(經筵講義)》에 선생이 상(上)에게 아뢴 말이 많이 실려 있다. 비록 이른바 말이 지나치게 통쾌하고 강력했으며 건의나 조처를 함에 성급하였다는 등의 말로 선생을 흠잡은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 문제자(門弟子)들이 미처 몰랐던 선생의 치택(治澤)의 뜻과 충간(忠諫)의 정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씨외서(程氏外書)》에 공문중(孔文仲)의 상소를 실은 예에 의거하여 그 몇 가지 조항을 채택하여 끝에 부록으로 붙였다.

10년 전에 율곡이 나를 찾아왔다가 계려(溪廬)에서 잤다. 때마침 중추(仲秋)라서 창밖에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하였는데, 열 마리인지 백 마리인지 무리 지어 다투어 울고 서로 노래하여 잠시도 쉬지 않았다. 새벽종이 칠 때가 되니 그 소리가 더욱 요란하여 제 낙을 제가 즐겨 수고와 고생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내가 탄식하기를, “미물도 오히려 제 직분 다하기를 이렇게까지 한다.” 하니, 율곡도 탄식하기를, “지각이 많은 자는 이해에 대해 생각을 깊이 하여 이익을 택하고 편안함을 취하여 게으르게 그날 그날을 보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고난 천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저 천기(天機)가 자연히 움직여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도 타고난 직분을 다하는 것을 미물에서 보았다.”고 하였다. 내가 그 탁월한 소견을 기뻐하여 잊은 적이 없다. -《우계집(牛溪集)》에서 나왔다.-
숙헌(叔獻 율곡의 자)이 이르기를, “선유(先儒)가 《춘추(春秋)》에 기린을 얻은 것은, 지(志)가 한결같아 기(氣)를 움직인 것이요, 또 질병이 오는 데는 성현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병이 나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기가 지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설명이 잘된 것 같다. 대저 지를 움직이고 기를 움직이는 것은 모두 선과 악을 겸해 말해야 되는 것이다. 맹자의 말은 평범한 사례를 범범하게 말한 것뿐이니, 어찌 병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것인가.” 하였다.
숙헌이 평일에 내게 말하기를, “여식(汝式)이 몸소 실천하고 힘써 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지만 소견은 장점이 아니다. 그러나 일을 논하기를 좋아하고 일을 보는 눈이 소루함을 생각하지 않으니 이래서 염려된다.”고 하였다.
이경진(李景震)이, 색욕(色慾)이 자주 발동하여 억제하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이 생각을 없앨 수 있겠는가 물으니, 율곡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별다른 공부가 없다. 다만 마음이 일정한 주견이 있어서 글을 읽으면 이치를 연구하는 데에 전심하고, 일에 당하면 실천하는 데에 전심하며, 일이 없을 때에는 고요한 가운데에 수양을 쌓아 항상 이 마음으로 잊을 때가 없게 한다면, 색념(色念)이 자연 발동하지 못하게 되며 발동하더라도 반드시 살펴 깨닫게 될 것이니, 살펴 깨닫는다면 색념은 자연 물러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마음을 놓아 소홀히 하고서 색념과 싸우려 한다면 힘을 많이 들이더라도 흙으로 풀을 덮는 것 같아서 덮을수록 더 나오게 될 것이다.” 하였다. -우계일기(牛溪日記) 이하 같다.-
숙헌이 말하기를, 조형(趙兄) 대남(大男)이 착한 종을 얻기 어려움을 탄식하자 토정(土亭)이 말하기를, “착한 선비도 쉽게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종들이야 말할 것 있는가. 착한 종을 얻는 집은 만에 하나나 있을 수 있는 다행일 것이다. 반드시 착한 종을 구하려고 한다면 마음만 수고롭고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착하게 부리는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지 착한 종을 구해서는 안 된다. 종이 착한 주인의 종이 되게 할 것이니, 어찌 반드시 착한 종의 주인이 되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이 말이 매우 좋으니 자신을 책망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의사가 있다.
율곡이 우계 선생에게 묻기를,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초하루 보름 참배하는 것은 제례(祭禮)가 아니니, 평상시대로 행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평상시대로 찬을 갖추는 것도 미안할 것 같으니, 대략 술과 과실을 갖추고 참알(參謁)을 행할 따름이니, 내 소견은 이렇소.” 하였다. -우계언행록(牛溪言行錄)에서 나왔다.-
기사년(1569, 선조2) 7월 28일 석강(夕講)에 《근사록(近思錄)》을 강(講)하였다. 이이(李珥)가 “경전을 해석하는 것이 같지 않아도 해가 없다.”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대개 국사를 의논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제 조강(朝講)에서 말한 청대(請對)를 해야 할 것인가 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 하는 말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다만 임금을 요순에 이르게 하고, 세상을 당우(唐虞) 삼대(三代)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 정론(正論)이고 옛날의 높은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사설(邪說)입니다.”고 하였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일록(日錄)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갑술년(1574) 1월 21일, 비현합(丕顯閤)에서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희춘(希春)이, 변언(辯言)이 옛 정사를 어지럽게 하였다는 대목을 강론하면서 상앙(商鞅)ㆍ장탕(張湯)ㆍ조우(趙禹)ㆍ채경(蔡京) 등의 사실을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왕안석(王安石)은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른 말로 신종(神宗)을 현혹시켜 법을 변경하여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것이 이른바 변언으로 정사를 어지럽힌 것입니다. 기타 소인의 말이야 어찌 변언으로 정사를 어지럽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희춘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변언으로 정사를 어지럽힌다는 것은 부정한 사람이 임금의 나쁜 짓에 대해서 아첨하여 예전의 법을 변란하는 것을 범범하게 말한 것이지 반드시 왕안석 같은 사람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2월 1일, 주강이 있었다. 이어 역대 제왕의 사적을 논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호치당(胡致堂)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을 조조(曹操)에 비견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희춘도, “조조의 성질은 음흉하고 험악하여 어질고 유능한 이를 시기하였으니, 결코 태종처럼 어진 이에게 맡기고, 유능한 사람을 써서 정관(貞觀)의 정치를 이룰 수 없다.” 하였는데, 주상께서 이르기를, “나는 호씨의 의논이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태종이 형제를 죽이고 그 자손까지 멸족하며 제수를 아내로 삼아 천륜을 어지럽힌 것을 보고는 그만 통분하여 책을 덮고 차마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신 등이 말하기를, “태종이 저지른 인륜상의 잘못은 참으로 성상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구양수(歐陽脩)가 태종을 찬양하여, ‘수(隋)나라의 어지러움을 제거한 것은 그 행적이 탕(湯)ㆍ무(武)에 비견되며, 정치의 아름다움을 이룩한 것은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깝다. 한(漢)나라 이래로 공과 덕이 함께 높은 것이 태종 이전에 일찍이 없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이 두 가지는 모두 공이지 덕이 아니다. 이것은 구양공 무리들이 근본이 되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대개 태종은 재주가 많았지만 덕이 부족하였고 공은 있었지만 덕이 없는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신이 또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와 금 세종(金世宗)이 가장 어집니다.” 하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삼대(三代) 이하로는 한 문제 같은 이가 없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금 세종은 어질고 조용하며 절약하고 검소하면서 어진 이를 좋아하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였으니 어찌 문제보다 못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이이가 말하기를, “금 세종이 어질기는 하지만, 항상 자제들에게 여진(女眞)의 옛 풍속을 고치지 말라고 주의시켰으니 이것은 그 뜻이 원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태종에게서 취할 것이 없다 하셨으니 그렇다면 한 문제에게서도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삼대의 성왕(聖王)으로 본보기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강론을 마친 다음 이이가 말하기를, “먼저, 백성을 구제하고 폐단을 개혁하는 정치를 시행한 후에 향약(鄕約)을 시행하소서.” 하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나는 애초 어렵다고 생각하니 대신들에게 물어보아야 하겠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시급한 폐단을 구제하려면 옛 법을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더구나 공안(貢案)은 폐왕조(廢王朝 연산군(燕山君))에 제정된 것이니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법도를 지키지 않고 포학하게 취하던 임금이 한 짓이라 참으로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옛 법규를 그대로 지키고 경장하려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좋은 정치를 할 희망이 없습니다.”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사람은 자신을 알지는 못한다. 그대가 나를 보건대 좋은 정치를 할 것 같은가 그렇지 않는가.”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영명(英明)하시니 어찌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희춘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청명하고 바르시니 참으로 일을 크게 하실 수 있는 자질입니다. 다만 성질이 고집스러워 탁 트이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김희원(金希元)이 묻기를, “도심(道心)은 은미하다는 데에 대하여 주자가 말하기를, ‘미묘하여 보기 어려운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율곡이 이르기를, “오직 이(理)는 소리나 냄새가 있다고 말할 수 없어 은미하여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은미하다고 한 것이다. 비유하여 말하면, 여기 먼 산이 있는데, 원래는 은미하여 보기 어렵다. 그런데 눈이 어두운 사람이 보면 은미한 것이 더욱 은미하지만, 눈이 밝은 이가 보면 은미한 것이 뚜렷해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구봉간첩(龜峰簡帖)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김희원이 또 묻기를, “‘도심과 인심 두 가지가 한마음 가운데에 섞여 있다.’ 하였는데,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혹은 형기(形氣)로 인하여 발생할 때가 있으며 혹은 성명(性命)으로 인하여 발생할 때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발생하는 것은 모두 마음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섞인다고 하는가 봅니다.” 하니, 율곡이 이르기를, “인심이나 도심은 모두 활용하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인데, 위의 말대로 한다면 아직 발생하기 전의 경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된다. 두 가지의 발생하는 것이 모두 한 가지 일에 있으니, 인심에서 발생하여 도심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도심에서 발생하여 인심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였다.
상중의 묘제(墓祭)에 대해, 여성(礪城)과 숙헌은 “한 잔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성 적성(成積城)과 김 이정(金而精)은, “시속을 따라 석 잔을 드리는 것이 정리에 흡족할 것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묘제는 새로 상사를 당한 동안의 일을 말하는 것 같다. ○ 송강 정철(鄭澈)의 일기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적성(積城)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삭망(朔望) 참례(參禮)에 대하여 상사를 만났을 경우를 두고서 숙헌과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신주를 내어 모시고 먼저 참신(參神)하고서 술을 부어 놓고 재배하며 사신(辭神)하고 재배하여, 사당에서의 참례와 다르게 하였다.” 하였다. 숙헌이 말하기를, “내 어버이가 당상에 있는데 어찌 참례하지 않고 먼저 강신(降神)을 하겠는가.” 하였다.
적성의 서신에, “손위 누님이 와서 궤연(几筵)에 인사를 드렸는데, 신혼(晨昏)에 곡배(哭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상제(祥祭) 때에는 주부(主婦)가 없다면 한 분 만으로 배제(陪祭)하는 것은 미안한 것 같다.”고 하였는데, 숙헌의 말도 그러하였다.
연제(練祭) 후의 심의(深衣)와 띠에 대해, 숙헌이 말하기를, “역시 대략 강등(降等)이 있어야 할 것이요 옛날 것을 그대로 입을 수는 없다.” 하였다.
적성이 여러 가지 말을 하는 중에 또 이 정랑(李正郞) 숙헌이 송사련(宋祀連 송익필(宋翼弼) 아버지)을 회장(會葬)한 것이 온당치 않다는 의견으로 말하였다. 일찍이 숙헌에게 묻기를, “송가 집의 신주를 쓴 사람이 누구냐.”고 하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상인들이 초토(草土)에서 호읍(號泣)하는 중에 부탁을 매우 간절히 하였기 때문에 내가 매우 난처하여 부득이 썼다.” 하였다.
이 정랑 숙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방심(放心)을 거둬들이는 것으로는 《소학(小學)》만 한 책이 없다. 《심경(心經)》같은 책들도 수신에 절실한 점은 있지만 《소학》처럼 구비하지는 못하였다. 글을 읽는 데는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만일 기억하여 외우는 데에 유의한다면 오래지 않아서 싫어지고 또 의미가 없어질 것이니, 잘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연구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송군(宋君)이 이른바 궤연(几筵)에 참신(參神)이 없다는 말이 옳은 것 같다. 또 연제 후에는 이미 공최(功衰)를 한다 하였으니 다시 참최(斬衰) 제도를 쓰는 것은 부당한 것 같고, 삼띠에 베를 사용한다[絞帶用布]는 말도 불가한 것 같다. 포혜[脯醢] 3품이라 한 것은 포혜 중의 세 가지라는 뜻이지 포 세 가지, 혜 세 가지로 모두 여섯 가지를 말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갑자기, 자강(子强)이 논박을 입게 될 일을 말하다가 매우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럭저럭 이렇게 날만 보내고 있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만약 어진 사람이 대신이 된다면 화패(禍敗)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연제 후에 상식(上食)에 곡하는 일에 대하여, 송운장(宋雲長 송익필(宋翼弼))의 형제가 “만일 상식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시속을 따라 상식을 드린다면 역시 곡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자 성(成)ㆍ이(李) 두 친구도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숙헌(叔獻)이 파평(坡平)에서 와서, 근래의 일들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대답하니, 놀라는 모습으로 한참 있다가 강남(江南)으로 떠나면서 “담제사는 서자(庶子)가 있으니 거행할 수 있다.” 하였다.
숙헌이 두 번째 지나면서 백립(白粒) 서 말을 두고 갔다. 군수가 자신이 가져오기가 어려워 숙헌을 통하여 전달하려 한 것이었다. 물리치고 서과(西苽 수박)만을 두었더니 숙헌이 후에 서신 중에서, “군수가 보낸 것을 일체 받지 않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 하였다.
진일(辰日) 제사에 대하여 의논이 같지 않아서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와 이암(頤菴 송인(宋寅)) 같은 이들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후에 와서 이숙헌에게 의논하니 이숙헌이, “삭망에도 두루 전을 드리는데, 이것 또한 무엇이 도리에 해롭겠느냐.”고 하였기 때문에 여러 신위에 편전(遍奠)을 드렸다. 지금 호원(浩源)의 말을 들으니, “예법(禮法)을 따를 수 없다면 차라리 중국 별제(別祭)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협제(祫祭) 드리기 전에 삭망에 두루 전(奠)을 드리는 데에 대해 숙헌이 말하기를, “만일 아직 협제를 드리지 않았다고 하여 미안히 여긴다면 다 폐지하는 것만 못하고 처음 상례(祥禮) 후에 삭제(朔祭)를 거행했다면 협제 전이라 하더라도 두루 전을 드리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다른 곳에서 별제를 드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하였다.
허봉(許篈)이 율곡을 논죄하여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그의 뜻이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그 후에 이발(李潑)이 심의겸(沈義謙)의 당파에 누락되었다고 하여 이이ㆍ성혼(成渾)을 더 넣어서 왕께 아뢰었다. 평시에 율곡이 구봉(龜峰)에게 이르기를, “지금 내가 죄를 입으면 저 무리들이 공신이 되고자 할 것이다.” 하였는데, 구봉이, “어떻게 알았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그 형적(形跡)이 벌써 나타났다. 반드시 이준경(李浚慶)으로 원두(原頭)를 삼으려 하는 모양인데, 그 의논하는 말에서 기축(機軸)이 환히 드러났으니 속일 수 없다.” 하였다. -송강유사(松江遺事)에서 나왔다.-
정송강(鄭松江)이 말하기를, “구용(九容)은 이(理)요 기(氣)가 아니다.” 하니, 율곡이, “구용은 이가 아니다. 발동하는 것이니 바로 기이다.” 하여 변론이 한참 계속되었으나 결론을 보지 못하였다. 율곡과 송강의 설이 각각 주견이 있다고 생각하니 융통성 있게 보아야 한다. -《소학(小學)》 글귀에 대한 것이다. ○ 문인(門人)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경서변의(經書辨疑)》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습관이 천성과 함께 이루어지면 성현이 된다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습관이 성품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은 오래도록 쌓인 습관이 성공하면 천성에서 나오는 것 같은 것이다. 이른바 소년 시절의 습성이 천성처럼 되어 습관이 자연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성(天性)은 당초에 타고난 기질(氣質)의 성품을 말함이요, 본연(本然)의 착한 성품을 말함이 아니다.” 하였는데, 송구봉이 말하기를, “습관이 성품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성(性)은 바로 본연의 성품이다.” 하고, 주자가 “횡거(橫渠)가 말한 예를 알면 성품을 이룬다.”는 것을 논하기를, “습관이 성품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性)이라는 것은 내가 하늘에서 얻은 도의이니,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따라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답하기를, “그 글이 나온 곳을 찾아보아야 한다. 이천(伊川)의 이 말은 실은 이윤(伊尹)의 이른바 ‘이 불의(不義)는 습관이 천성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글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도 본연의 성품이라고 할 것인가.” 하였다.
‘함양(涵養)하는 것이 심생(甚生)한 기질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집설(集說)에서는 “함양이 이루어지면 좋은 기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고, 《근사록(近思錄)》의 섭씨(葉氏)의 주석에서는, “심생은 비상(非常)이라는 말과 같다.” 하였는데, 율곡은 섭씨의 설명이 옳다고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학집주(大學集註)》의 이른바 ‘지(志)가 정향(定向)이 있다.’는 것은, 시비(是非)를 명백히 하여 선을 향하고 악을 등진다는 뜻이다. ‘정(靜)은 마음이 망녕되이 움직이지 않음을 말함이다.’는 것은 옳고 그름이 이미 정해져서 다른 갈림길에 동요되지 않고 마음이 항상 안정된다는 뜻이다. ‘안(安)은 어느 곳에서나 편안함이다.’는 것은 나의 저울을 바르게 하여 사물을 응접하므로 어느 때나 어느 곳이나 태연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여(慮)는 일을 처리하는 데에 정밀하고 자세하다.’는 것은 사물이 닥쳐올 때에 다시 그 기미를 연구하여 살펴 처리한다는 뜻이요 ‘득(得)은 그 그칠 바를 아는 것’은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 지극한 선(善)에 그친다는 뜻이다.” 하였다. -《대학(大學)》-
일찍이 율곡 선생에게 묻기를, “물격(物格)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입니까. 나의 지식이 극처에 이르는 것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사물의 이치가 극처에 이르는 것이다. 만일 나의 지식이 극처에 이르는 것이라면 이것은 지식이 이르는 것이지 사물의 이치가 이르는 것이 아니다. 물격과 지지(知至)는 다만 한 가지의 일인데 사물의 이치로 말한다면 물격이라 하고 내 마음으로 말한다면 지지라 하는 것이니, 실은 두 가지 일이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사물의 이치는 원래 극처에 있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 후에야 극처에 이르는 것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이 물음은 당연하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방 안에서 책은 시렁 위에 있고 옷은 횃대 위에 있으며 상자는 벽 아래 있는데 어둠 때문에 물건을 볼 수 없으면 책이나 옷, 상자가 어느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 비추어 보면 책ㆍ옷ㆍ상자가 각기 그곳에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런 후에야 책은 시렁에 있고 옷은 횃대에 있으며 상자는 벽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치는 원래 극처에 있으니 격물을 기다려야만 극처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이치가 스스로 이해되어 극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식이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함이 있기 때문에 이치가 이르고 이르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격물의 격은 궁리한다는 의미가 많고, 물격의 격은 이른다는 의미가 많다.” 하였다.
수신(修身) 이상은 명덕을 밝히는 일이요, 제가(齊家) 이하는 신민(新民)하는 일이다. 이것은, 옛날에, ‘명덕을 밝히려고 하면’이라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절(本節) 중의 문자를 써서 수신이니 제가니 한 것이다. “사물이 격(格)하고 지식이 이른다면 그칠 바를 알게 되고 의성(意誠) 이하는 모두 그칠 바를 얻는 순서이다.”고 한 이 말은 사물이 격한 후에 지식이 이른다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절 중의 문자를 써서 물격이니 지지니 의성이니 한 것이다. 율곡이 말하기를, “이것은 상하의 두 구절을 서로 통하여 연결한 것이니 반드시 조목을 나누어 해석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구봉(龜峰)의 의사도 그러하였다.
전(傳) 5장 소주(小註)에서, 옥계 노씨(玉溪盧氏)가 말하기를, “표(表)와 추[粗]는 이치의 용(用)이요, 이(裏)와 정(精)은 이치의 체(體)이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반박하여 말하기를, “금수와 분양(糞壤)의 이치라면 표가 추[粗]도 되고, 이가 추도 되지만 모든 물건을 표ㆍ리ㆍ정ㆍ추로 체와 용을 나누어 둘로 할 수는 없다.” 하였다.
율곡 선생에게 묻기를,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 무엇이 다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성의라는 것은 참으로 선을 행하고 실지로 악을 제거함을 이름이요, 정심이라는 것은 마음이 치우치거나 기대하거나 정체(停滯)하는 일이 없으며, 또 부질없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그중에서도 정심이 제일 어려우니, 사마온공(司馬溫公)과 같은 이도 성의는 하였지만 언제나 생각은 흔들렸으니 이것은 정심이 되지 못한 까닭이다. 비록 그렇지만 참으로 성의를 한다면 정심과의 거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참으로 성의를 한다는 것은 격물치지를 하여 이치가 밝고 마음이 열려서 그 뜻을 진실하게 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온공은 치지 공부가 정밀하지 못하여 참다운 성의의 경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일찍이 《화담행록(花潭行錄)》을 보니, 제자가 ‘선생의 공부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하고 물으니 화담이 말하기를, ‘성의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화담이 참다운 성의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스스로 ‘지식이 십분 극진한 곳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참으로 알지 못한 것이다. 만일 참으로 알았다면 도리가 무궁한 것인데 어찌 자신의 지식이 십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처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알지 못하면 참다운 성의에 이르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욕(欲)이 동하고 정(情)이 이겨 그 용(用)의 행함이 혹 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제 생각으로는, 용이 동하고 정이 이기면 그 행함이 바름을 잃을 것이 분명한데 주(註)에 혹(或)이라는 글자를 쓴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율곡 선생 역시 말하기를, “혹 자는 과연 의심스럽다.” 하였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心不在焉]’이라는 주에 ‘반드시 이것을 살펴야 한다[必察乎此]’라고 하였는데, 퇴계(退溪)는, “차(此) 자는 마음이 있지 않은 병통처를 가리킨 것이다.” 하였고, 율곡은, “차 자는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였다.
‘갓난아이처럼 보호해야 한다[如保赤子]’에 대한 소주(小註)의 여러 설명 중에서 율곡은 신안 진씨(新案陳氏)의 설명이 옳다고 하였다.
‘몸에 간직한 바가 용서하지 않는다[所藏乎身不恕]’라는 대목에 대하여, 선생이 말하기를, “여기의 서(恕) 자는 실은 충(忠) 자를 가리킨 것이니, 이것은 서(恕)가 몸에 간직된 것으로써 서 자를 빌어서 충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것을 치국(治國)이라 한다’는 소주의 인산 김씨(仁山金氏) 설명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인산의 미루어 변화한다는 설명이 역시 근사하다. 다만 주자가 이 장(章)을 논하여 말하기를, ‘또 다만 동화(動化)가 근본이 되는 것만을 설명하고 미루어 올라가는 것까지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렇다면 10장은 미루어 나가는 것을 설명한 것이요, 9장은 다만 몸소 실현하여 아랫사람을 감화시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하였다.
‘반드시 그 동일한 것을 따라야 한다’는 대목에 대해 율곡이 말하기를, “동일한 것은 마음이니 이것이, 곧 법이다.” 하였다.
‘재물이 있으면 이에 용(用)이 있다[有財此有用]’는 대목에 대하여,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은, “용은 기용(器用)이다.”라고 하였는데 율곡은, “그 말은 옳지 않다.” 하였다.
《혹문(或問)》에 보이는 반명(盤銘) 조(條)의 ‘성경(聖敬)이 날로 진취된다’는 대목에 대한 주에, “성인이 그 덕을 공경하여 날로 높고 밝은 데로 올라가는 것이다.” 한 것에 대하여 물으니, 율곡이 말하기를, “이 성(聖) 자는 성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 성은 통명(通明)과 같은 것이니, 성경(聖敬)의 덕이 날마다 높고 밝은 데로 진취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 인(仁)을 행하는 근본[其爲仁之本]’이라는 주에, “어찌 일찍이 효제(孝悌)가 있을 것인가.[曷嘗有孝悌來]”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래(來) 자는 어조사이다. 《장자(莊子)》의 유이어아래(有以語我來)라는 것과 같다.” 하였다. -《논어(論語)》이다.-
“병이 없을 것인데 운명인가 보다[亡之命矣夫]의 망(亡)은 사망한다는 망이다. 대개 이 사람에게 이 병이 있을 수 없다는 일단(一段)은 이것이 명의부(命矣夫)를 해설한 것이요, 망지(亡之) 두 글자를 해석한 것이 아니다.” 하니, 율곡 선생도 역시 존망(存亡)의 망으로 보았다.
‘여는 3년의 사랑이 부모에게 있었느냐[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은 삼년상(三年喪)이라는 뜻으로 말하였으나, 지금 직해(直解)를 상고하니, “3년의 사랑은 품어 기른 기간을 말한 것이라.” 하여 나의 소견과 서로 맞는데 아직 옳은지 그른지를 모르겠다.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죽을 곳으로 나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은 곡속약(觳觫若)으로 구절을 띄었다. -《맹자(孟子)》이다.-
‘수세(數歲)의 중을 비교한다[校數歲之中]’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은 수년간을 비교하여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 중년(中年)이라고 해석하였는데, 나의 생각에는, 수년간에 걸친 수확한 수량을 통계하여 그것으로 일정한 규정을 삼는 것이라 하겠다.
‘다 넓혀 채울 줄 안다[知皆擴而充之]’는 대목에 대해 퇴계는, “알아서 확충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생각하면, 지(知) 자는 충지(充之) 아래에서 해석해야 한다. 율곡이 이르기를, “퇴계의 해석은 그른 것 같다. 이것은 아는 것뿐이요, 때가 아직 확충되지 않은 것이다. 알기만 한다면 불이 처음 피어오르는 것 같고, 샘이 처음 나오는 것 같으니 그 아래에 이르러 참으로 확충한 연후에야 비로소 확충한 때인 것이다. 만약 퇴계의 설명 같다면 이것은 이미 확충된 것이니, 불이 처음 피어오르고, 샘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다.” 하였다.
《맹자(孟子)》 7편 중에 공명의(公明儀)가 네 번 보이는데 첫째는,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3개월 동안 임금이 없으면 위문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푸줏간에 살찐 고기가 있다.’는 것이며, 넷째는, ‘마땅히 죄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율곡이 말하기를, “공명의는 옛날 어진 사람으로, 맹자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었다. 이른바 마땅히 죄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은 역시 옛날 공명의의 말을 맹자가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공명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맹자와 동시대 사람일 것이다.” 하였다.
순(舜)ㆍ우(禹)ㆍ익(益)이 서로 거리가 구원(久遠)하였다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원(遠)은 속(速) 자의 잘못인 것 같다.” 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율곡의 의사가 순과 우 사이의 거리는 멀고, 우와 익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고 여긴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뜻이 매우 평탄하고 순순하다.
학문하는 길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방심(放心)을 구제할 뿐이라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그 방심을 구하는 것은 바로 배우는 자의 공부의 궁극처이다.” 하였다.
독법(讀法)의 주에서 서산 진씨(西山眞氏)가 말하기를, “반드시 독실하고 공손한 후에라야 무성무취(無聲無臭)한 경지에 나갈 수 있다.” 하였다. 생각건대, 원주에서는 무성무취로 독실하고 온공한 묘(妙)를 형용하였는데, 지금 여기서는, “독실하고 공손한 연후에야 무성무취한 경지에 나갈 수 있다.” 하였으니, 원주의 뜻을 상실한 것 같다. 율곡도 일찍이 여기에 대하여 의심하였다. -《중용(中庸)》이다.-
수장(首章) 소주(小註)에서, 운봉 호씨(雲峰胡氏)가 말하기를, “일음 일양(一陰一陽)이 도라 하였는데, 이 도(道) 자는 한 태극(太極)을 모두 가진 것이요,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 하였는데, 이 도(道) 자는 각기 한 태극을 갖춘 것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일음 일양의 도가 곧 성을 따르는 도로서 두 도(道) 자는 하나인 것이다. 호씨가 이것을 나누어 둘로 하였는데 옳지 않다. 율곡 선생도 나의 소견을 옳다고 하였다. 대개 일음 일양을 도라 하는 것은, 선(善)을 이어 천성을 이룬다는 것과 상대하여 선후의 분별이 있는 것이지만, 통체(統體)의 태극은 각기 갖춘 것과는 선후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군자의 도는 비(費)하고 은(隱)하다는 대목에 대하여, 비는 기(氣)요, 은은 이(理)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날에도 그대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소주(小註)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형이하(形而下)라는 것이 비가 되고, 형이상(形而上)이라는 것이 은이 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형이하의 것은 매우 넓은데 형이상의 것이 사실 그 사이에 행하여 물건마다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가는 데마다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비라 하는 것이요, 그 가운데서 형이상이라는 것이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은이라 한다.’ 하였다. 주자의 설명이 이렇게 십분 분명한데, 전일에 허공(許公) 엽(曄)이 역시 비가 기(氣)라는 설을 주장하므로, 퇴계와 율곡이 반복하여 논변하였지만 끝내 고치지 않았다.” 하였다.
촬(撮) 자는 《운회(韻會)》에서, “두 손가락으로 집는 것이다.” 하였는데, 율곡은 “한 손으로 움키는 것이다.” 하였다.
‘개왈문왕지소이위문야순역불이(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純亦不已)’에 대하여 율곡은 왈(曰) 자를 불이(不已) 아래에서 해석하였는데, 나는 문야(文也) 아래서 해석하고자 한다. 율곡은 이미 순수하고 또 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는데, 나는 역(亦) 자는 문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늘이 쉬지 않으니 문왕도 쉬지 않는 것이라 여겨진다.
순전(舜典)의 ‘내언저가적(乃言底可績)’ 주에서, “행동이 미더운 데에 이르면 공적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율곡은, “네 말이 장차 공적이 있는 데에 이를 것이다.”고 해석하여, 채씨(蔡氏)의 주와 같지 않다. 그러나 율곡의 해석은 본경(本經)에 있어서 문리가 매우 순하니 옳을 것 같다. -《서전(書傳)》이다.-
‘중정인의(中正仁義)로 정한다’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중전인의는 스스로 동정(動靜)이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중정인의를 말한 것으로 태극도의 주(註)와는 같지 않다. -사계(沙溪)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 나온다. 이하 같다.-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한다[與天地合其德]’는 대목에 대하여 묻기를, “이 글 중에 네 개의 기(其) 자가 있는데, 그것은 성인을 가리킨 것입니까, 천지ㆍ일월ㆍ사시ㆍ귀신을 가리킨 것입니까?” 하니, 율곡이 대답하기를, “성인이 천지와 합한다면 글 뜻이 순하고, 천지가 성인과 합한다면 글 뜻이 순하지 못하다.” 하였다.
제비(除非)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시비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하였는데, 구봉(龜峰)은, “주자의 시의, ‘제시인간 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이라 한 것이 역시 이런 뜻이다.” 하였다.
채절재(蔡節齋)가 ‘역에 태극(太極)이 있다’고 한 것을, 무극(無極)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는 것과 비하여 같이 본 것은 좀 온당하지 않다. 율곡도 일찍이 절재의 견해를 그르게 여겼다.
‘심향상거(尋向上去)’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향상은 어느 곳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율곡이 또 이르기를, “상중(喪中)의 조석 제사 때가 여름철이라면 청주가 맛이 변하니 소주가 매우 좋다.” 하였다. -사계의 《의례문해(疑禮問解)》에 나온다. 이하 같다.-
율곡이 말하기를, “아버지 사당에 제사 드리는 것은 친근함에 지나칠까 염려된다.” 하였다.
기일에 부모를 함께 제사 드리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선현들이 일찍부터 행하였는데, 율곡 역시 말하기를, “양위(兩位)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다.” 하였다.
물격(物格)에 대한 설명은 율곡의 의논이 제일 훤하게 꿰뚫고 깨끗하다. 율곡의 말에 “물격이라고 한 것은, 사물의 이치가 모두 밝아서 더 남은 것이 없는 것이니, 이것은 사물의 이치가 극처(極處)에 이른 것으로, 사물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지지(知至)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모두 밝아서 나머지가 없는 후에야 나의 지식도 극처에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지식을 위주로 말한 것이다. 어떻게 주자의 설명에 근거한 것인 줄 알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보망장(補亡章)에 이르기를, ‘모든 물건의 표리와 정추[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물을 가지고 말한 것이며 또 말하기를,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지식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혹문(或問)》에는, “이치가 사물에 있는 것이 이미 그 극치에 이르러 나머지가 없다면 내게 있는 지식도, 그 나가는 데에 따라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계어록(沙溪語錄)》에 나온다. 이하 같다.-
율곡이 항상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도 주자 후에 태어나서, 학문이 틀리지 않게 되었다.” 하였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대목에 대해서, 율곡의 해석이 제일 분명한데 그 의견은, 비록 그 극은 없지만 실은 큰 극이 있다고 말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정(情)이라는 것은 부지불각 중에 저절로 발동하여 나오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평일에 함양(涵養)한 공부가 지극하면 정이 발동하여 나오는 것이 자연 사특함과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의(意)라 하면 이것은 정이 발동하여 나옴으로써 계교(計較)하는 것이며, 지(志)라면 이것은 한 곳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쫓아가는 것이니, 의는 음(陰)이요 지는 양(陽)이다. 그렇다면 성(性)과 정은 심(心)에 통솔되고 지와 의는 또 정에 통솔되는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점철(點掇)은 원주에서, ‘첨철(拈掇)ㆍ첨철(沾綴)이라는 것 같다.’고 말하였는데, 첨철(拈綴)은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져다가 여기저기에 놓는다는 뜻이고 첨철(沾掇)은 물방울을 땅 위에 적신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정명도(程明道)가 웅치(雄雉) 시를 설명하면서, ‘저 해와 달을 쳐다보니 나의 그리움 한이 없네. 길이 하도 멀다 하니 언제나 돌아오리.[瞻彼日月 悠悠我思 道之云遠 曷云能來]’라는 그 구절 아래에서 바로 ‘그리움이 간절한 것이다.’ 하였으며, ‘모든 군자들이여 덕행을 알지 못하네. 사납지 않고 탐하지 않으면 무엇을 한들 착하지 않겠는가.[百爾君子 不知德行 不忮不求 何用不臧]’라는 그 구절 아래에서는 바로 ‘바른 데로 돌아간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자기의 소견으로 간간히 본문 중의 의사에 대하여 말을 해 본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허노재(許魯齋)가 원(元)나라에 벼슬한 데 대하여 사람들이 많이 비방한다. 그러나 이것은 몸을 잃은 것이지 절개를 잃은 것은 아니다. 대개 노재는 원나라에 벼슬하는 것이 마땅하지는 않지만 원래 북방에서 생장하였으니 저 송나라 유민(遺民)들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축색(蓄色)한 일과 을사년(乙巳年) 일에 있어서 회재(晦齋)와 퇴계(退溪)가 같이 과실이 있었는데, 선생이 회재만을 허물하기에 무슨 까닭인가 물으니, 율곡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대저 사람을 보는 도리는 덕을 이룬 뒤와 인격이 아직 덕을 이루기 전을 구별해야 한다. 퇴계의 실수는 연소한 시기에 있었지만 회재는 이미 늙고서 이 실수가 있었으니 이래서 구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청풍(淸風) 김권(金權)과 함께 율곡 선생의 문하에 있었다. 청풍이 그 할아버지 김대성(金大成)의 비문을 청하였는데, 선생이 대답하지 않으니, 청풍이 실망하는 모습으로 물러나와 나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선생께 물어보려 하였지만, 엄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으니 그대가 틈을 타서 물어 주오.” 하였다. 내가 그 말대로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죽을 때를 당하여 처리한 의리가 매우 온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내가 그대로 청풍하게 말하니 후에는 끝내 다시 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선생에게 묻기를, “선생께서는 어떤 일에나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장수(將帥)의 소임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군대를 거느리는 일을 맡는 것이라면 감히 자신하지 못하겠지만 장수의 스승은 될 수 있겠다.” 하였다.
“선생께서 국사를 담당하여 만일 매우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물으니, 율곡이 말하기를, “죽을 때까지 해 볼 뿐이다. 학문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성공하느냐 성공하지 못하느냐는 아직 의논할 것이 아니고, 마땅히 몸과 마음을 다해 나랏일에 이바지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선생이 풍악(楓岳)에 계실 때에 일찍이 형용을 변하지 않았습니까?” 물으니, 율곡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산에 들어갔으니 형용을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그 마음이 빠진 데에 도움이 되겠는가. 이 일에 대해서는 물어볼 것이 없다.” 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말하기를,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동이요,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동이다.” 하였는데, 퇴계(退溪)가 평생 두고 주장하는 바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가 발동하면 기가 따른다는 말을 하였다. 율곡은 “사단도 원래는 기를 따라 발동하는 것이지만 기에 가린 바가 되지 않고 바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의 발동이라 하는 것이며, 칠정도 원래는 이가 타서 되는 것이지만, 간혹 기에 가리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기의 발동이라 하는 것이니 융통성 있게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칠정 중에도 이를 위주로 하여 말할 것이 있으니 순(舜)의 기뻐함과 문왕(文王)의 노함은 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단 중에도 기를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주자의 이른바, ‘사단 중의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두 가지는 성인 문하의 학문에 있어서 수레의 두 바퀴 같고,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하였는데, 율곡은 언제나 이것을 외워 가르쳤다.
율곡 선생이 일찍이 격치(格致)의 뜻을 논하기를, “정자와 주자 모두 격(格)은 지(至)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격물(格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극진한 곳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 물격(物格)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이미 극진한 곳에 이르러서 다시 더 연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 설명이 훤하게 꿰뚫고 깨끗하여 십분 명백하다. 그런데 후에 분분한 설이 매우 많아 “사물의 이치가 와서 내 마음에 이르는 것이다.”는 설까지 있게 되었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다[五行一陰陽]’의 주에, “정(精)ㆍ조(粗)ㆍ본(本)ㆍ말(末)이 피차가 없다.” 하였는데, 사계(沙溪)가 말하기를, “웅씨(熊氏)의 주에, ‘태극이 정이 되고 음양이 조가 되며 태극이 본이 되고 음양이 말이 된다.’ 하였는데, 이 주가 잘못된 것 같다.” 하였으며, 율곡은 일찍이, “정ㆍ조ㆍ본ㆍ말은 기(氣)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하나의 이치는 정도 없고 조도 없으며 본말과 피차도 없는 사이에 통하는 것이다.” 하였다. 후에 와서 주자의 글을 읽어 보니, “기의 정ㆍ조를 막론하고 이 이치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율곡의 설명이 사실 여기서 나온 것이니 웅씨의 설명을 좇을 수 없는 것이다. -문인 수몽(守夢)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천지와 그 덕이 합한다.’는 말에서 ‘그 길흉이 합한다.’는 말까지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원문 가운데 네 개의 기(其) 자는 천지ㆍ일월ㆍ사시ㆍ귀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한다는 것은 성인이 일의 길흉 알기를 귀신의 밝음과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와 기를 합하여 기질(氣質)을 이룬다.’는 말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이와 기를 합한다는 이 말이 온당하지 않다. 기를 말하면 이는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매일수구다소위익 지소망 개득소불선(每日須求多少爲益 知所亡 改得少不善)’에 대하여, 퇴계가 율곡에게 회답하기를, “이 부분의 글 뜻이 과연 명백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대의는 다만 섭씨(葉氏) 주의 설명과 같다. 주에서는 부지(不知) 두 글자를 소무(所無) 자에 붙였는데, 이것은 《논어》의, ‘날마다 그 없는 바를 안다.’는 의미이다. ‘개득소불선’은 적은 불선이라도 바로 고치는 것을 말함이요, 다(多) 자 한 자가 빠진 것은 아니다.” 하였다. 율곡은 구(求) 자를 선(善) 자 아래에 붙여 해석하여 퇴계의 해석과 같지 않다.
‘불해심질(不害心疾)’에 대하여 퇴계가 말하기를, “심질의 해하는 바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해는 아마도 환(患) 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습여성성(習與性成)’의 성(性)에 대하여 섭씨의 주에서는 ‘성(性)을 본연의 성이다.’ 하였고,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서전(書傳)》의 이것이 바로 불의이니 습관이 천성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들어 기질의 성이다.’고 하였는데, 어느 것을 바르다고 할 것입니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진씨의 설명이 낫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성춘(李成春)에게 이르기를, “너의 문리가 아직도 통달하지 못하였으니, 아직 《집요(輯要)》는 놓아두고, 《통감(通鑑)》을 읽는 것이 좋겠다.” 하자 대답하기를, “소생의 나이 30이 되는데 조금도 성취한 것이 없으니 지금부터 성리학(性理學)의 서적을 읽어도 따라가지 못할 듯한데 언제 다른 글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너의 말도 옳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방도는 반드시 먼저 문리에 통달해야 하는 것이니 그런 뒤에 나의 지식이 날로 늘어나고 소견이 날로 밝아진다. 그래서 공부하기는 쉽고 소득도 반드시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글 뜻에 통달하지 못하고 먼저 도를 구하려 한다면 마음속이 꽉 막혀 식견이 어두워 도를 구하려 해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학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종신 사업이니 어찌 그렇게 급급히 서둘 것이 있겠느냐. 공자께서, ‘속히 하려 하면 통달하지 못한다.’ 하였으며, 맹자는, ‘나가는 것이 빠른 사람은 물러가는 것도 빠르다.’ 하였다. 성현의 교훈이 분명하게 경전(經傳)에 있는데 네가 그것을 배우지 않았느냐.” 하였다. -《직월기(直月記)》에 나온다. 이하 같다.-
여러 학생이 모시고 앉았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여러 학생이 모여 있으면서 종일토록 마음을 쓰는 데가 없다면, 산당(山堂)에 고요히 앉아 그 마음을 기르는 것만 못하다.” 하면서 이어 훈계하기를, “요즈음 보면 여러 학생들이 그냥 놀기만 하면서 학업에 근면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여러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나 여러 학생들이 나에게 배우는 것이 그 의미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이겠는가. 유념하고 또 유념해서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이유경(李有慶)이 묻기를, “초목(草木)과 금석에도 오행의 기(氣)가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있다. 구멍을 마찰시켜 불을 내는 것이 나무가 아닌가. 물로 인하여 자라나는 것이 나무가 아닌가. 부딪쳐서 불을 내는 것이 돌이요, 적시고 불려 물을 내는 것이 돌이다. 금도 역시 기가 있기 때문에 태양에 비치면 불이 나오고 달에 비치면 물이 나온다. 이것은 그 대계가 그렇다는 것이고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선생이 이성춘(李成春)에게 이르기를, “네가 근자에 술에 취하여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데 그러하냐.” 하니, “감히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술이 곤하여 음성이 길었기 때문에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노래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이미 긴 음성으로 불렀다면 노래라고 해도 옳지 않으냐. 또 네가 잘못하였다. 내가 들으니 전일에 너의 숙부가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는데 네가 노래 부르지 않았고, 나도 노래를 하라고 하였는데 네가 역시 노래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술의 위엄이 도리어 어른의 명보다 중한 것이냐.”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정오산(鄭鰲山)에게서 들으니, ‘만일 노래를 잘 못한다면 부모의 명이 있더라도 감히 노래를 부를 수 없다.’ 하였다는데 그러하냐?” 하니, 대답하기를, “오산의 말이, ‘부모가 은근히 말한다면 그런대로 노래를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감히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오산의 말이 이상하구나. 옛사람이 나이 70에도 때때옷을 입고 춤추며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느냐. 진심으로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이다. 이렇기 때문에 효자는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있어 반드시 즐거운 얼굴빛을 가지며, 즐거운 얼굴빛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온화한 기색을 가진다. 그러므로 설령 옳지 않은 명령이 있더라도 힘써 순종하며, 수고로운 일에 종사하더라도 감히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노래 부르는 것은 그 본의가 원래 해가 없고 몸에 수고로울 것도 없으니,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라도 그 의사에 앞서 받들어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어찌 노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아,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다면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도 누구를 위해 기쁘게 해 드리겠는가. 부모가 계신데도 그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밤에 여러 학생들이 모두 절하고 물러가려 하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로 있으라. 내가 말할 것이 있다. 여러 학생이 정사(精舍)에 함께 있으면서 글을 읽으며 사색(思索)하기도 하고 조용히 앉아서 마음을 수양하기도 했는데 전일에 비하여 달라진 것이 있는가.” 하니 김의정(金義貞)이 대답하기를, “비록 용감하게 나아가는 공부는 없지만 어찌 전일보다 좀 다른 점이야 없겠습니까.” 하고 허극성(許克城)은, “소생은 근래 잡념이 더 커져서 글을 읽어도 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자려 해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그러하냐?” 하니, 허극성이 말하기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양친이 집에 계신데 집안 형편이 궁곤하기 이를 데 없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하니, “생각하여 잘 처리할 방도가 생긴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신만 괴롭혀서 도리어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될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였다. 오결(吳潔)은 대답하기를, “서재나 집안에 있으면 스승과 친구, 부형이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일찍이 방심할 일이 없는데, 밖에 나가게 된다면 농지거리도 하고 웃어대기도 하여 자연 해이하게 됩니다. 때로 근심스러워서 생각해 보면 온몸이 오싹 떨려서 진정할 수 없게 됩니다.” 하니,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학문을 하는 길은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하였다. 이유경(李有慶)은 대답하기를, “소자가 전번에 집에 돌아가 부모님을 뵈었는데 부모님의 마음은 소자가 오랫동안 선생님을 모셨으니 큰 소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성인(成人)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마음이 항상 조심스럽고 송구스러워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너의 마음이 착하구나. 이런 마음이 있다면 학문을 할 수 있으니 이 마음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오결(吳潔)이 묻기를, “가령 날이 저문 산길을 도보로 가다가 갑자기 다리를 삐어 걸음을 걸을 수 없어 바위 밑으로 가려 했는데 또 호랑이와 표범이 많아 방황하여 답답할 때에, 마침 전에 알던 도적패가 말을 몰고 지나 가다가 그 죽게 된 형편을 동정하여 간곡히 말을 타고 가기를 청한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그 말을 타고 간다 해도 어찌 죽지 않을 줄 알겠는가. 내가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노숙(露宿)을 한다 하여 어찌 살아나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그 말을 타지 않는 것은 의(義)요 타는 것은 이(利)이다. 그 의를 생각지 않고 이만 취하려고 한다면 어찌 군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유경이 자리를 피하면서 말하기를, “소생의 의견으로는 저 사람이 도적이 되기는 했지만 이미 나와 아는 사이고, 또 다른 의사가 없는 것이라면 내가 우선 옷을 벗어 주고 말을 타고 가도 될 것 같은데 이 생각이 어떻습니까?” 하니, “이런 것은 반드시 그때 가서 형편을 보아서 처신할 것이지 미리 작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군자가 평일에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반드시 의(義)로 이(利)를 삼아야만 천하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실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허극성(許克城)이 묻기를 “형제가 동거(同居)하는 것은 후한 인륜의 일입니다. 지금 여기에 형제 세 사람이 있는데, 한 형의 뜻은 나와 같고 한 형의 뜻은 나와 같지 않다면 뜻이 같은 형하고만 동거해도 됩니까?” 하니, 말하기를, “그렇게 하여도 된다. 그러나 뜻이 같지 않은 형도 반드시 감동시켜서 끝내는 동거하는 것이 더 좋다.” 하였다.
또 묻기를, “지금 여기에 한 선비가 있는데 전에는 빈천하여 그 부모를 박장(薄葬)하였으나 후에 부귀해져서 개장(改葬)하려는데 어떻습니까? 만일 개장하지 않으면 관곽(棺槨)이 썩고 백골이 드러나게 될 것이니 사람의 자식으로서 그지없는 슬픔을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빈천해서 박장한 것은 부득이한 형세였지만, 잘살게 되어서도 개장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자식으로서의 정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맹자는 후상(後喪)인 어머니 상을 전상(前喪)인 아버지 상보다 후하게 지냈으나 전상 때의 박장(薄葬)을 개장하지 않았다. 개장할 수 있는 예법이 있다면, 맹자 같은 현자(賢者)가 어찌 정리가 부족해서 개장하지 않았겠는가. 참으로 개장하는 예법이 없어서였다. 성현의 사실이 분명히 경전에 있는데, 그대는 그것을 아직도 보지 못하였는가. 다만 한 가지 일이 있으니 그것은 그 무덤의 흙을 보축하고 사초(莎草)를 무성하게 하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삼가 지낸다면 나의 정리는 다한 것이다. 억지로 개장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미욱한 짓이지 예법이 아니다.” 하였다.
이유경이 묻기를, “지금 여기 한 사람이 있는데 오래도록 같은 문하에서 놀면서 서로 교제를 하다가 어느 날 과실로 하여 친구들에게 쫓겨나게 되었다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전과 같이 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범범하게 대하여 그와 더 이상 교제하지 않아야 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정말 그 사람에게서 크게 형편없는 일이 보인다면 이전의 친분이 있었더라도 그와 다시 교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때의 과실이 있다고 하여 동문(同門)의 친구를 끊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조용히 만나 간절하게 책망하여 허물이 없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친구의 도리이다.” 하였다.
이유경이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의 사생(死生) 득실에 대하여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관중이 산 것은 권도(權道)요, 소홀이 죽은 것은 정직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옳다. 그러나 적자(嫡子)를 세우는 명분은 이것이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상법(常法)이니 그렇다면 관중의 한 일이 역시 소홀의 죽음보다 좀 낫지 않겠는가. 후에 신하로서 만일 이런 변고를 만난다면, 굳이 관중이나 소홀을 좇을 것이 아니라 먼저 큰 의리를 보고 처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였다.
이유경이 묻기를, “양화(陽貨)는 대부가 아닌데 대부로 자처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돼지를 보낸 것은 참람한 일인데도 성인이 가서 그 문에 절한 것은 어쩐 일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양화는 대부는 아니지만 당시의 정권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갔으니 그의 소임은 곧 대부의 소임이었다. 때문에 부자(夫子)께서도 대부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양화와 불요(弗擾)가 다 같은 반역자인데 부자께서 양화에게는 거절하면서 불요에게는 가려 하였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만일 천하에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양화만이 변화시킬 수 없는 자가 되겠습니까? 또 불요가 끝내 부자를 등용하였다면 부자께서는 과연 불요에게 가서 그를 따라 주(周)나라의 도를 일으켰겠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양화는 전연 착한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부자께서 이미 알았기 때문에 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불요의 경우에는 그가 비(費)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반역의 무리들을 부르지 않고 공자를 불렀으니 그 의사가 앞으로 선을 행하고 과오를 뉘우치려고 한 것이니, 부자의 천지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으로 어찌 가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그가 과오를 고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역시 끝내 가지 않은 것이니, 그것이 양화를 대접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불요가 부자를 등용하더라도 부자께서 어찌 이 사람과 함께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그로 하여금 선을 행하고 과오를 고쳐 계씨(季氏)에게 순종하게 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인으로서 별도로 조치하는 일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길을 가다가 충ㆍ효의 정문(旌門)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지나가야 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만일 조상의 정문이라면 내려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만 식(式)에 기대고 공경만 할 뿐이니 나는 식에 기대고 공경만 하고 내리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소자가 전일 서울로 올라올 때에 서인(庶人)으로서 노직(老職) 당상관 세 사람이 우연히 길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을 탄 채로 지나려 하니 마음이 불안하기에 내려서 지나갔는데 이 생각이 어떠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이미 그 연령이 있고 그 직위도 있으니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네가 내리기 잘하였다.” 하였다.
봉성민(奉聖民)이 묻기를, “선생이나 어른이 밖에서 들어오면 제자 된 사람은 뜰 가운데서 차례로 서서 맞아들이고 배알(拜謁)하는 것이 예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피하여 갔다가 선생이 당상으로 들어온 다음에 배알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거기에 대한 예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리로 본다면 맞아들여서 배알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선생이 이성춘(李成春)에게 이르기를, “요즘 들으니, 네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잘하라는 책망을 듣고 많이 수긍하지 않는 기색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냐. 나를 책망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자신에 돌이켜 반성하여 나에게 참으로 책망할 만한 소행이 있다면 그 사람의 책망이 지나쳤더라도 마음속으로 책망하여 과오를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아야 할 것이니 어찌 나를 책망하는 사람을 그르다고 할 것인가.” 하니, 이성춘이 일어나 자리를 피하면서,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무오년(1558, 명종13)에 도산(陶山)에 가서 보았을 때에 퇴계 선생이 선군자(先君子)에게 주일무적 수작만변(主一無適酬酢萬變)의 뜻을 물었으며, 또 말하기를, “주자는 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는 일을 중(中)에 지나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의 병환이 중하게 되면 사람의 자식으로서 급하고 간절한 마음에 못할 일이 없게 된다. 혹 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 병을 치료하여 병이 낫게 된다면 이것은 이른바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야말로 자식으로서 어버이에 대한 지극히 선한 마음이니 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 살을 벨 때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생각이 있다면 이것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자는 이런 것을 분간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중에 지나친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는데, 선군자께서 대답하기를, “이것이 비록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이 감동할 때도 있지만, 사리로 따진다면 사실은 천하의 상도(常道)는 아닙니다. 더구나 다리 살을 벨 때에 그 사람의 마음속을 다른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과연 지극히 선한 중도가 된다면 증자 같은 효성으로도 어찌 다리 살을 베지 않았겠습니까. 부득이 그렇게 보자면 이런 경우가 있겠습니다. 세상에서 화타(華陀) 같은 신통한 의원이 나와서 말하기를, ‘이 병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피를 취하여 보조해야만 나을 수 있다.’ 하여 그 아들이 곧 자기 살을 베어 피를 내어서 어버이의 피를 보조하고 낫게 되었다면 이것은 중을 얻은 것일 것 같습니다.” 하니, 퇴계 선생이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선생의 아들 이경림(李景臨)의 연보 초고(年譜草稾)에 나온다.-
우계 선생과 이기(理氣)를 논란하여 아홉 번이나 서신을 왕복하였는데, 우계가 선생의 설을 많이 좇았기 때문에 우계가 선생에 대한 제문(祭文)에 스승으로 섬기려 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의리상(義理上)에 있어서 깨달아 아는 것은 우계보다 나아서 우계가 많이 내 설을 좇았지만 나는 성질이 해이하고 느려 알면서도 실천을 못하는데, 우계는 알면 곧바로 하나하나씩 실천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니, 이것이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하였다. -《사실기(事實記)》에 나온다.-
내가 일찍이 우계정사(牛溪精舍)에 있었는데 우계 선생이 말하기를, “소인 한거장(小人閑居章)의 여견기폐간(如見其肺肝)이라는 말을 율곡공이 자네에게 가르쳐 무엇이라 하던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남이 나를 보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숙헌(叔獻)이 평생에 식견이 매우 높아 남보다 뛰어난 의사가 있어 언제나 문자 중에서는 특별한 이론을 만들어 내서 옛날 성인의 말한 본뜻을 크게 상실하였다. 이미, ‘남이 나 보기를 그 폐간을 보는 것같이 한다.’ 하였다면 이것은 소인의 몸을 가리킨 것으로 사람이 소인을 보는 것은 그 겉의 거짓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폐간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뜻이 이러하고 그 밖의 다른 의미는 없다.” 하였다. 때마침 이 선생이 대사간으로 있다가 하직하고 화석정(花石亭)으로 돌아와서 석담(石潭)으로 이사하려 할 때 와서 선생을 뵙고 작별하였다. 선생이 전에 나에게 했던 말을 하니 이 선생이 말하기를, “존형의 이론이 크게 들어맞지 않습니다. 대개 몰래 불선한 일을 하는 자는 비록 그 불선을 가리려고 해도 남들이 나의 불선 보기를 마치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폐간을 보는 것같이 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의가 이 같아야 글이 순하고 이치가 바른 것입니다. 잘못 본 세속 학자들이 전의 말만 따라가 돌아올 줄 모르니 안타까운 일인데, 존형의 생각 역시 막힌 병통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반복해 가며 서로 논쟁하였으나 끝내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최후에 선생이 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형이 스스로 고명한 것을 믿고 남은 자기만 못하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깨우치는 날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 선생이 말하기를, “많이 말해 봐야 소득이 없으니, 아직은 각자의 소견을 가지고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한음(漢陰) 이 상국(李相國)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다음, 율곡 선생을 뵙고 문장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마음이 도에 통한 후에야만 자연 문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문장의 기운이 유창하지 못하는 것이니, 대개 도를 배우기를 반드시 문장을 배우는 것보다 앞서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신분(申濆)이 부평(富平) 여금산(餘金山)에 집을 짓고 살면서, 여러 명사에게 시를 구하였다. 시인 윤기리(尹紀理)의 시에 이르기를, “형문(荊門)에 날이 따스하니 복사꽃 잘도 피었구나. 무수한 벌 떼들 들락날락 날아드네. 낮잠을 깨자마자 동자가 하는 말이, 광주리에 가득 살찐 고사리 꺾어 왔어요.[荊門日暖桃花淨 無數晴蜂上下飛 午睡初醒童子語 折來山蕨滿筐肥]” 하니, 여러 사람이 더 쓰지 못하였다. 율곡이 그 시를 보고 감탄하기를, “이것이 어찌 보고 들은 소감만을 그린 것이겠느냐. 이야말로 저절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서포(西浦) 곽열(郭說)의 일록(日錄)에서 나왔다.-
율곡이 옛날 석담(石潭)에 있을 때 하루는 찾아가서 문안드렸는데 황혁(黃赫)에게 이르기를, “옛날 옥당(玉堂)의 글 친구 중에 신군망(辛郡望)은 앉아서도 글을 안 읽어 재주가 날마다 줄었는데, 주공(主公)은 외곬으로 학문을 즐겨 재주가 배나 증가하여 문장을 당할 수 없었다.” 하였다. 시인 백광훈(白光勲)과 국조(國朝) 이래의 시가(詩家)를 평가하면서 말하기를, “황 아무공의 시는 경술(經術)에서 출발하여 마음의 자득(自得)으로 이루어지니 의리의 글이다. 점필재(佔畢齋)와 더불어 이름을 떨친 것이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나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황혁(黃赫)이 지은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의 행장에서 나왔다.-
상께서 대신을 연방(延訪)하였을 때, 박순(朴淳)은 “이조(吏曹)에 연소한 사람을 등용해서 안 된다.” 하였으며, 대사헌 구봉령(具鳳鹷)은 “오늘날 유생들은 글 읽기를 일삼지 않고 고담(高談)과 대언(大言)만 한다.”고 하였다. 이때 율곡이 입시(入侍)하였다가 나아가 말하기를, “이조의 관원은 인재만을 택해야 하니, 나이가 젊더라도 쓸 만한 재주가 있다면 임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또 선비의 습관이 바르지 않으면 조정에서 어진 스승을 가려서 배치하여 교화를 밝혀서 중정(中正)한 데에도 돌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동계(東溪) 우복룡(禹伏龍)의 잡록(雜錄)에서 나왔다.-
율곡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서얼(庶孼)을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전번에 김 훈도(金訓導)나 이 훈도 같은 이가 있어도 쓰이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상께 아뢰기를, “옛날부터 선비는 시속의 관리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선비들이 ‘당우(唐虞)의 정치를 당장 이룰 수 있다.’ 하는데 시속 관리들은 ‘옛날의 도는 반드시 행하기 어렵다.’ 합니다. 그래서 시속 관리는 유학자(儒學者)를 비난하고 유학자는 또 시속 관리를 비난하는데, 공평하게 말한다면 양쪽 말이 모두 그른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데는 삼대(三代)를 본받아야 하지만 일은 모름지기 점차 진취시켜야 합니다. 신이 삼대를 말하는 것은 한 발걸음에 바로 도달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 가지 선한 정사를 하고 내일에도 한 가지 선한 정사를 시행하여 점차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잡록(雜錄)에 나온다. 이하 같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맑은 물의 연꽃[淸水芙蓉]이요, 맑은 바람에 갠 달[光風霽月]이다. 벼슬하고 은거함의 바른 것을 공과 함께 비견할 사람이 없다. 율곡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우계 선생이 말하기를, “율곡이 생전에 항상 말하기를, ‘대개 사람은 3, 40전에는 비록 광대나 배우의 놀이를 하더라도 해가 될 것이 없다.’ 하였다.” 이것은 그의 친구가 만년에 지조를 근신하지 않음을 미워해서 말한 것이다. 그때는 나도 그것이 세상을 분개해서 하는 과격한 말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는 율로(栗老)의 말이 과격한 것이 아니고 사실 우리 측 친구들의 거울로 삼아 주의해야 할 일인 줄 절실히 알았다. -《우산언행록(牛山言行錄)》에 나온다.-
윤월정(尹月汀)이 조용히 말하다가 하서 선생에 이르러서는 일어나서 말하기를, “숙헌이 생시에 매양 하서의 출처가 바른 것은 우리나라에서 그와 비할 이가 없다고 칭찬하였다.” 하였다. -오희길(吳希吉)이 기록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행적(行蹟)에 나온다.-
율곡 선생이 화담(花潭)을 논평하기를, “기(氣)를 이(理)로 인정하는 병통은 있었지만 《대학》 소주(小註)에 나오는 진북계(陳北溪)의 설에 대한 말에 대해서는 반박하여 말하기를, ‘이와 기가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나 혼합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일찍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의논하면서 ‘묘하게 합쳐져 엉긴다[妙合而凝]’는 말이 주자의 ‘한데 뭉쳐서 틈이 없다[渾融無閒]’는 말만 못하다. 후세에는 반드시 그 해석을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기암(畸菴) 정홍명(鄭弘溟)의 잡록(雜錄)에 나온다.-
이숙헌을 방문하였는데 숙헌이 먼저 시사에 대하여 말하면서 탄식하고, 그다음에 이와 기는 일본(一本)이라는 것, 마음이 성정(性情)을 통솔한다는 것, 명덕(明德)은 본심이고 양지(良知)는 천리(天理)가 아니라는 것 및 《곤지기(困知記)》를 가볍게 볼 수 없다는 등의 설명을 하였는데 매우 온당하고 흡족하였다. -허봉(許篈)의 《조천록(朝天錄)》에 나온다.-
계유년(1573, 선조6) 9월 21일에 이이가 직제학으로 부름을 받아 입시하였다가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의 병으로 오랫동안 물러가 있다가 오늘 옥음(玉音)을 엎드려 들으니 음성이 매우 잘 통하지 못하니 어찌하여 그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여색을 경계하라는 말을 잘 들으려 하시지 않는다 하는데, 이러시는 성상의 생각이 계신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성상께서 자질이 원래 청명하고 욕심이 적어 다른 사람이 말해 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남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알지 못하고 망녕된 말을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인가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없다면 더욱 힘써야 되고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上)께서 이르기를, “그대가 일찍이 상소할 때에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말소리란 본래 서로 같지 않은 것으로 나의 말소리는 원래 이러하니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 신이 일찍이 모셨는데 그때는 옥음(玉音)이 낭랑하여 일찍이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감히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보통 계사(啓辭)할 때에는 성상의 말씨가 매우 쾌활하고 정직하였는데 이때는 왕의 안색이 상당히 거슬리는 것으로 보였다. -김우옹(金宇顒)의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나온다. 이하 같다.-
하루는 이이가 정제엄숙(整齊嚴肅)의 뜻을 논함으로 인하여 정사(政事)의 잘잘못에 대한 일을 아뢰기를, “경(敬)을 하여 안을 곧게 하고, 또 의(義)를 하여 밖의 행동을 방정하게 하여야 한다.” 하니, 김우옹(金宇顒)이 말하기를, “참으로 경을 하여 안을 바르게 한다면 의를 하여 밖의 행동을 방정하게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있다.” 하였다. 이이가 또 말하기를, “기묘년의 일은 여러 사람이 근본된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형식적인 말단에만 종사하였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일을 하는 데에 급하여 모든 아뢰는 것이 대부분 일을 가지고 왕을 위해서 부연하여 주달하였으므로, 김우옹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어찌 음식이 신체와 생명에 관계됨을 알지 못하겠는가만, 비위(脾胃)가 상하고 약하여 음식을 목으로 넘기지 못하는 것과 같소. 그런데 지금 비위에 대하여 약을 써서 원기를 도와 음식이 생각나도록 하지 않고, 다만 밥이나 고기를 가져다 강권한다면 사리에 통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참으로 약을 써서 먼저 비위를 치료하는 것이 마땅하오. 그러나 음식이 신체와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또한 약을 먹어 병을 치료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요.” 하였다.
10월 26일 조강(朝講)에 입시하여 유윤궁선견(惟尹躬先見)에서부터 사씨지언 충신유종지설(史氏之言忠信有終之說)까지 진강(進講)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충과 신으로 서로 함께 하여 인정과 뜻이 서로 믿음직했기 때문에 나중까지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노수신(盧守愼)이 말하기를, “이이의 말은 별다른 해석이요, 《서경(書經)》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말하기를, “충(忠)과 신(信)이라는 것은 성(誠)입니다. 간직한 것이 다만 한 개의 성실한 마음이기 때문에 일마다 끝마침이 있는 것인데 그 중요한 것은 방구석에 혼자 있을 때 본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이의 말과 같이 군신이 서로 주고받는 충과 신 역시 이 가운데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요 두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을 믿고 마음대로 방종하였기 때문에 이윤이 이렇게 말한 것이니 그것은 태갑의 몸을 바루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태갑이 이윤을 믿고 마음대로 방종한 것은 원래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윤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알았으니, 역시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식견이 있었고 그 밝은 식견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허물을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노진(盧稹)과 김성일(金誠一)이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하사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이이가 말하기를, “정몽주(鄭夢周)가 유학을 주창한 후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같은 이가 도학(道學)의 인물이지만 역시 그 용공(用功)의 자세한 것을 몰랐으며, 그 밖에는 학문한다고 하는 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모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황 같은 이는, 그 언론의 풍지(風旨)를 들으면 참으로 옛사람의 학문을 아는 이로서 진실로 그에 비할 이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천품과 정신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한 것 같으나 전하께서는 이것으로 하여 작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학문의 공부가 그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고 옛사람의 학문에 마음을 기울여 시종 한결같이 공부를 꾸준히 계속하여 조예가 날로 깊어졌으니 그 점을 작게 여길 수 없을까 합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군액(軍額)이 부족한 폐단에 대해 언급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군액을 감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풀어 준다면 백성이 생업에 안정하여 번성할 길이 있을 것이오니, 백성이 점차 생업을 회복한 연후에 점점 다시 옛날 군액수를 회복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때 군사를 소집하는 사자들이 위의 눈치를 살피고 뜻을 맞추어 각박하고 급속히 일을 진행하기에 힘쓰므로, 과장이 많아 지방이 소란하였기 때문에 언급하였다.- 이이 등이 계속하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사천(私賤)에 대하여 법을 만들 때에 유독 치우치게 하여,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고 또 아버지를 따르게 하니, 거기에 따르는 폐단으로 양민이 모두 사가(私家)에 들어가게 되고, 군인이 날로 적어졌습니다.”고 하니 상께서 이르기를, “이 법은 참으로 온당치 않으니 변통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였다. 노수신이, 천재지변이 있음으로 인하여 관직을 해임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께서 이르기를, “경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오늘날 여러 신하 중에서 경보다 나은 이가 없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천재지변으로 삼정승을 해임시키는 것은 이치에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임금이 재변을 만나면 죄를 자신에 돌려 책망하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행실을 닦아야 합니다. 어찌 죄를 대신에게 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갑술년(1574, 선조7) 1월 27일 주강(晝講)에 김우옹이 말하기를, “크게 도가 없는 세상에는 재변이 없다고 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항상 그렇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그 후 승지 이이가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여기에 대하여 또 물으니 이이가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이치가 있을 뿐입니다. 크게 도가 없는 세상에는 재변이 없다는 것은 그 설이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2월 1일 주강에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한 것은 물격 지지(物格知至)하였기 때문이요. ‘한결같다, 왕의 마음이여’한 것은 뜻이 성실하고 마음이 바르기 때문입니다.” 하니 김우옹이 이이와 함께 아뢰기를, “이 말이 옳지 않습니다. 격치 성정(格致誠正)의 공부가 있기 때문에 그 말이 크고, 그 말이 크기 때문에 그 마음의 한결같음을 아는 것이니, 말과 마음을 나누어 둘로 할 수 없습니다. 말은 마음의 소리로 마음이 한결같으면 말이 큰 것은 형상과 그림자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말에서 얻지 못하면 마음에 구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것은 말에서 깨닫지 못함이 있는 것은 바로 마음에 밝지 못한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우옹에게 이르기를, “나 같은 사람도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상의 자질(資質)이 고명하고 초월하시니 마음먹고 뜻을 독실히 하신다면 어찌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우옹의 말이 사실이지만 말이 너무 지나칩니다. 전하께서 변함없이 덕을 지니고 계시니 훌륭한 정치를 할 만 한 자질이 있습니다. 만일 더욱 힘쓰신다면 어찌 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을해년(1575) 6월 24일 소대(召對) 때에 이이가 아뢰기를, “근래 대간(臺諫)이 말하는 것을 따르지 않으시니 인심이 상당히 풀어집니다.”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불민하기 때문이다. 다만 당우(唐虞) 시대에도 신하의 말을 어기는 일이 있었으니 어찌 모두 응낙만 하겠는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이것은 원래 그렇습니다. 다만 따를 만한 일이라면 빨리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간의 말도 그릇된 것이 있다면 또한 반박하여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황해도에 있을 때 대간이 최세해(崔世瀣)를 논박하여 여러 말을 한 것에 대해 말하고서 대간의 말이 언제나 그렇다고 하여 믿지 못할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이가 또 아뢰기를, “지평 민순(閔純)이 벼슬을 내놓고 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진 이가 나라를 버리고 가니 이것은 주의하고 반성하여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놀라며 이르기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이다. 어째서 갔느냐.”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세상 풍습이 도도(滔滔)하여 좀 처신을 곧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괴상한 무리들이 모여 욕질하여 그 몸을 용납받지 못하게 하니 이래서 민순이 떠나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속으로는 무엇을 해 볼 희망이 결코 없으니, 만일 전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여 하지 않는다면 어진 사람이 누구를 믿겠습니까. 또 지금 시속에 지성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 극히 적으니 나라의 일은 곧 임금의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 혼자만 그 근심을 도맡아 할 수 없는 일이니, 어진 이를 얻어서 함께 근심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흰 베로 의복과 갓을 만들어 착용한 일 또한 많은 이가 그릇된 일이라 말한다고 하니, 인심이 이러하니 무엇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니라 인심과 세상 풍습이 좋지 않은 지 오랩니다. 전하께서 만일 일을 하려고 한다면 인심이 반드시 기뻐하지 않고 저해하려는 자가 있을 것이니, 오직 상의 마음이 굳게 정해져 변하지 않는다면 어찌 성사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유능한 인물에 대한 초천(超遷)과 구임(久任)하는 법에 대해 아뢰고 또 말하기를, “지금 민생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이미 고갈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구원하려 해도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않고 항간에서 근심하는 소리가 전과 다름이 없으며, 서민들은 조정의 청명함을 알지 못합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해서인데, 민생이 이러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인심이 바르지 못하고 관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법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상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여 근본부터 바로잡아 기강을 세운 후에야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상께서 오직 왕도에 마음을 두고 백성을 생각한다면,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보좌하고 성덕(聖德)이 높아져서 기강을 세울 수 있고, 큰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밝은 임금이 좋은 정치를 하려면, 당시의 제일가는 인사들을 근본되는 곳에 모으고, 평상시 규정에 구애할 것 없이 과거 출신이 아닌 민순(閔純) 같은 이들도 모두 한관(閒官)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대하여 출입하여 논란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또 경연만이 아니라 수시로 불러 보아, 임금과 신하 사이를 집안사람이나 부자간처럼 되게 하여 정의가 서로 접해져야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경연의 직임을 겸대하게 하는 데에 대하여는, 혹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없는 일이라 하여 어렵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와 특진관(特進官)도 모두 《대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경연 이외에 어찌하면 자주 여러 신하들을 만나 볼 수 있겠는가?” 하시니,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승지는 항상 들어와 일을 아뢰었으며, 시종하는 관원도 무시로 독대(獨對)하여 의심나는 일을 논란하였습니다. 성종조와 중종조에서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대신과 옥당으로 입직하는 경우라면 내가 자주 불러 보겠지만, 승지가 일을 아뢰는 일은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상께서 이이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슨 글을 읽었으며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슨 글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과거를 준비할 때에 읽은 것은 안 읽은 것이나 같습니다. 학문에 뜻을 두면서 《소학》부터 읽어 《대학》ㆍ《논어》ㆍ《맹자》에 이르렀는데, 아직 《중용》까지는 못 읽었습니다. 다 읽고서 다시 시작하여 반복하였으나 아직도 통달하여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육경(六經)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사서(四書) 중에 무슨 글을 제일 좋아하는가?” 하시니, 이이가 아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습니다. 여가가 있으면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 등의 글도 읽었습니다. 다만 질병과 공무로 인하여 많이는 전심하여 읽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소싯적에 글짓기도 연습하였는가. 그대의 문장을 보니 매우 좋은데 역시 일찍이 배웠던 것인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신이 소싯적부터 문장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소싯적에는 선학(禪學)을 상당히 좋아하여 여러 불경을 보았는데 착실한 곳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우리 유학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것도 문장을 하기 위하여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문장을 짓는 데에 대강 문리를 이룬 것 역시 특별히 공부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찍이 한문(韓文)과 《고문진보(古文眞寶)》 및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대문(大文)을 읽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신사년(1581) 2월 10일 조강에 《춘추(春秋)》의 양공(襄公)이 함께 제(齊)나라를 포위한 대목부터 《좌전(左傳)》의 숙사위(夙沙衞)가 곽최(郭最)를 함몰시킨 대목까지 강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위(衞)가 작은 원한으로 큰일을 그르쳤으니 참으로 소인입니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소인의 마음은 다만 사사로운 자기 몸만 있는 줄 알고, 국가가 있음을 알지 못하니 이래서 소인은 쓸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초나라 자경(子庚)이 정(鄭)나라를 친 대목에 이르러 이이가 말하기를, “공자 오(公子午)가 정나라를 치는 것이 불가함을 알고서도 애써 그 임금의 뜻을 좇아서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많은 군사들을 죽였습니다. 대신으로서 이러하였으니 역시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닙니까?”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오(午)가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편안함만 생각한다는 혐의를 피하려고 군사를 출동하여 시험하였으니 이것은 자기 몸만을 생각하고 나라에 불충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뒤이어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은 반드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어 사람들에게 나아갈 바를 알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순이 천하 사람을 인(仁)으로 거느리자 백성이 좇아갔으며, 걸주(桀紂)가 천하 사람을 포학함으로써 거느리자 백성이 좇아갔습니다. 지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아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상의 뜻이 향하는 바를 모르게 하여 요순이 될지 걸주가 될지를 모르니, 이래서 정치의 효과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므로 신이 아뢰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선하여도 상 주지 않고, 악하여도 벌을 주지 않는다면 요순의 덕이 있더라도 천하를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솔하고 천박하여 겨우 일을 할 만하게 되면 바로 분분하게 경장(更張)하자는 의논을 일으키니 상의 생각에 소요(騷擾)가 있지 않을까 염려하여 일을 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정치를 잘해 보려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일 전하께서 사헌부에 대답하신 말씀이 잘못되어 아랫사람들이 모두 낙심하여 일을 해 보려던 마음이 다 달아났다고들 하기에 신이 웃으면서 ‘말이라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심이 이러하니 발언을 삼가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시니, 이이가 아뢰기를, “박민헌(朴民獻)에 대하여 논계(論啓)할 때 상교(上敎)에, ‘대신의 비밀스런 사사로운 일을 파헤치겠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어찌 그대들이 오랫동안 논란한다고 하여 그만 고칠 줄 아느냐.’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이미 온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수령(守令)에 관한 일을 말하게 되자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암행어사는 선문(先文)이 없으면 사체(事體)에 손상이 될까 합니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수는 외방(外方)의 일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어사가 선문을 발송하고 순행한다면 불법을 살필 이치가 만무하니, 반드시 미행(微行)으로 민간에 출입해야 합니다.” 하였다.


[주D-001]공문중(孔文仲) : 촉당(蜀黨)의 한 사람으로 정자(程子)를 지적하여 위학(僞學)을 하는 간사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희령(熙寧) 초에 왕안석(王安石)의 이재(理財)와 훈병(訓兵) 법에 대하여 논하다가 파직당하였다.
[주D-002]여식(汝式) : 조헌(趙憲)의 자이다. 율곡 문하생인데,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금산(錦山)에서 전사했다.
[주D-003]상앙(商鞅) …… 채경(蔡京) : 상앙은 전국 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 형명학(刑名學)을 좋아하여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 법령을 고쳐 정전법(井田法)을 없애고 부세법(賦稅法)을 개혁하였다. 장탕은 한(漢)나라 사람으로 무제(武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모든 율령(律令)을 제정하였다. 조우도 한나라 사람으로, 무제 때 도필리(刀筆吏)에서 어사대부가 되어 장탕과 함께 율령을 논정하였다. 채경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휘종(徽宗) 때 염철법(鹽鐵法)을 고쳤으며 원우제신(元祐諸臣)을 몰아내고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부활시켰다.
[주D-004]호치당(胡致堂) : 송나라 학자인 호인(胡寅)을 가리킨다. 양시(楊時)에게 종학(從學)하였다. 《宋史 卷435 胡寅傳》
[주D-005]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이다.
[주D-006]여성(礪城) : 송익필(宋翼弼)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이 여산인데 여성으로도 쓰기 때문에 그렇게 지칭한다.
[주D-007]성 적성(成積城)과 김 이정(金而精) : 성 적성은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지낸 성혼(成渾)이고, 이정은 퇴계의 문인인 김취려(金就礪)를 가리킨다.
[주D-008]궤연(几筵) : 죽은 사람의 영위(靈位)를 모시어 놓는 자리로 옛날의 제석(祭席)이다.
[주D-009]연제(練祭) : 소상(小祥)을 말한다. 소상에 상복을 빨아 입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D-010]초토(草土) : 거적자리와 흙 베개라는 뜻으로 거상(居喪) 중임을 이르는 말이다.
[주D-011]사실 : 백인걸(白仁傑)의 탄핵을 입은 일을 말한다.
[주D-012]허봉(許篈) : 선조(宣祖) 8년(1575)에 동서 분당이 생기자 동인(東人)의 선봉이 되었으며 뒤에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주D-013]이발(李潑) : 선조(宣祖) 때 동인(東人)의 거두로서 이이(李珥)를 좋지 않게 보았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당하였다.
[주D-014]운회(韻會) : 《고금운회(古今韻會)》의 약칭이다. 송나라 황공소(黃公紹)가 편찬하였다.
[주D-015]채절재(蔡節齋) : 송나라 학자인 채연(蔡淵)을 가리킨다. 몸소 농사지으면서 벼슬하지 않았으며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宋元學案 卷62》
[주D-016]보망장(補亡章) : 《대학(大學)》에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이 없어졌다고 하여 주자가 보충하여 넣은 장(章)을 말한다.
[주D-017]웅치(雄雉) :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웅치장을 말한다. 그 내용은 부인이 부역에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작품이다.
[주D-018]허노재(許魯齋) : 원나라 학자인 허형(許衡)을 가리킨다.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오징(吳澄)과 함께 원나라 시대의 이대가(二大家)로 손꼽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송시열(宋時烈)이 그가 호족(胡族)인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다고 하여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시켰다.
[주D-019]축색(蓄色) : 여색을 좋아하여 첩을 두는 것을 말한다.
[주D-020]을사년(乙巳年) 일 : 인종(仁宗)의 외숙인 대윤(大尹) 윤임 일파가 제거되고, 명종의 외숙인 소윤(小尹) 윤원형 일파가 득세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명종(明宗) 즉위 초에 회재 이언적(李彥迪)은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國事)를 관장한 공으로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올랐고, 퇴계는 사옹원 정(司饔院正),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등을 역임하였다. 성현의 출처 의리로 보면 이언적이나 이황의 출처가 모두 중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주D-021]소인 한거장(小人閑居章) :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을 가리킨다. 성의장 중에 소인한거(小人閑居)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D-022]주공(主公) :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로, 여기서는 황혁(黃赫)의 아버지 황정욱(黃廷彧)을 가리킨다.
[주D-023]곤지기(困知記) : 명나라 나흠순(羅欽順)이 지은 4권(卷)의 책으로,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주자학(朱子學)을 따르고 선학(禪學)을 배격하였으나 일원기론(一元氣論)을 주장하였다.
[주D-024]유윤궁선견(惟尹躬先見)에서부터 사씨지언 충신유종지설(史氏之言忠信有終之說) : 《서경(書經)》 태갑(太甲)에 나오는 말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조선의 시파(詩派)

조선의 시인은 서거정(徐居正)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뒤에는 김종직(金宗直), 김시습(金時習), 성간(成侃), 이주(李胄), 박은(朴誾), 이행(李荇), 신광한(申光漢), 정사룡(鄭士龍), 기준(奇遵), 박상(朴祥), 임억령(林億齡), 임형수(林亨秀), 박순(朴淳), 노수신(盧守愼), 황정욱(黃廷彧), 고경명(高敬命),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차천로(車天輅), 이안눌(李安訥), 권필(權韠), 최립(崔岦), 임제(林悌), 김종직(金宗直), 임전(任錪), 이춘영(李春英), 이수광(李睟光), 허봉(許篈), 이춘원(李春元), 이식(李植), 이민구(李敏求), 정두경(鄭斗卿)이 있다.
용재집 제1권
 칠언 절구(七言絶句)
운향(雲鄕)의 남행시권(南行詩卷) 뒤에 적으며, 시권(詩卷) 첫머리에 있는 절구 세 수의 운(韻)을 차용하다.

구만리 푸른 하늘을 노정으로 삼고 / 九萬靑冥剩作程
구름 바라보며 다시금 영남으로 가누나 / 望雲還向嶺南行
하늘 반쪽 가로지른 죽령 재를 오르면 / 躋攀竹嶺橫天半
눈 아래 뭇 봉우리 절로 평탄함을 느끼리 / 眼底群峯自覺平

열흘 넘어 병 앓아 술을 끊고 지내니 / 一病經旬斷酒杯
문 앞에 오는 반가운 손 보이지 않구나 / 門前不見可人來
정자의 풍류 작품을 한가히 읊조리고 / 閑吟鄭子風流作
때로 푸른 회나무에 우는 꾀꼬리 소리 듣노라 / 時聽黃鸝韻綠槐

고향 돌아가고파 유장한 흥 주체 못해 / 故園歸興不禁長
홍진 속 광음이 빠른 줄 점점 깨닫노라 / 塵世光陰漸覺忙
하늘에 잇닿은 정수 끝없이 흐르는데 / 鼎水接天輸不盡
그 언제나 조각배 띄워 어랑을 두들길꼬 / 扁舟何日扣漁榔

[주D-001]정자(鄭子) : 남행시권을 지은 저자의 성(姓)이 정(鄭)이었기에 이렇게 부르는 듯하다.
[주D-002]정수(鼎水) : 경남 함안(咸安)과 의령(宜寧) 사이에 있는 정진(鼎津) 나루의 물이다.
[주D-003]어랑(漁榔) : 어부가 고기를 잡을 때 고기가 놀라서 그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뱃전을 두들기는 긴 나무이다.

용재집 제4권
 조천록(朝天錄) 경신년에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갔다.
행산(杏山)을 지나 연산(連山)에 묵으며

요동 하늘엔 오월에도 바람이 거세어 / 遼天五月風怒號
지루하게 비 내리니 참호에 한기 이누나 / 涔涔積雨生寒壕
열결이 기운 떨쳐 우레가 위세를 부리니 / 列缺作氣雷勢豪
수만 군대가 북을 치며 요란하게 행진하듯 / 萬軍鼓噪嚴弓刀
언덕이고 늪이고 온통 진흙탕이 미끄럽고 / 黃泥滑滑迷陵皐
평지 위 지척에 구름 파도가 뒤집히누나 / 平地咫尺翻雲濤
나그네는 여장을 꾸려 한창 부산을 떨고 / 遠人結束方騷騷
마부는 일찍 일어나 수레에 기름을 친다 / 僕夫夙起車載膏
짧은 채찍으로 말 몰아 물 천지를 헤치니 / 短策驅馬行滔滔
눈 가득 보이느니 쓸쓸한 쑥대뿐이로고 / 滿眼寂歷蓬與蒿
고국 떠나 만리 밖에서 머리털은 세지만 / 故國萬里凋鬢毛
왕명 받들고 감히 행역의 고달픔 말하랴 / 王事敢言于役勞
세상일 사람 핍박하여 도망칠 곳 없으니 / 世故逼人無所逃
멍청한 몸 이렇게 된 건 우리 무리 때문 / 一身矹矹緣吾曹
낙동강 가에서 훗날 계모 삶아 먹으리니 / 洛濱他時煮溪毛
내가 지금 못 가는 건 탐욕 때문은 아니지 / 我今未去非貪饕

평생토록 위로 북창의 도연명을 벗했나니 / 平生尙友北窓陶
서안 위엔 현금이요 동이 속엔 탁주로세 / 案上玄琴樽有醪
그저 사모할 수 있고 불러올 수 없기에 / 但可思之不可邀
진종일 눈으로 하늘 나는 기러기 보내노라 / 盡日目送冥鴻高

[주D-001]열결(列缺) : 높은 공중에 있는 틈으로 이곳에서 번개가 일어난다고 한다. 《초사(楚辭)》 원유(遠遊)에, “위로 열결에 이름이여, 아래로 큰 골짜기를 바라본다.[上至列缺兮 降望大壑]” 하였다.
[주D-002]멍청한 …… 때문 : 무능한 자신이 사행(使行)에 끼이게 된 것은 전적으로 벗들이 자기를 가만 놔두지 않고 추천했기 때문이라는 뜻인 듯하다.
[주D-003]낙동강 …… 아니지 : 낙동강 가란 필자의 고향인 정진(鼎津) 나루를 뜻하며, 계모(溪毛)란 시냇가에서 나는 나물이다. 즉 훗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은퇴할 작정을 하고 있으니, 지금 그곳으로 가지 못하는 것은 부귀에 탐욕을 부려서가 아니라 지엄한 왕명(王命)을 받든 처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D-004]북창(北窓)의 도연명(陶淵明) : 이백(李白)이 도연명의 고사를 차용하여 지은 〈희증정율양(戲贈鄭溧陽)〉이란 시에,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 누워, 스스로 태곳적 사람이라 하누나.[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하였다.
[주D-005]현금(玄琴) : 도연명이 타지 않고 벽에 걸어 두었다는, 줄이 없는 거문고인 소금(素琴)을 말한다.
[주D-006]탁주(濁酒) : 도연명이 갈건(葛巾)을 쓰고 다니다가 벗어서 탁주를 걸러 마셨다 한다.
[주D-007]눈으로 …… 보내노라 : 위(魏)나라 혜강(嵇康)의 시 〈증수재입군(贈秀才入軍)〉에 “눈으로 멀리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내고 손으로 오현금을 뜯는다.[目送歸鴻 手揮五絃]”라고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매우 자적(自適)한 모습을 형용할 때 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도연명을 사모하는 마음을 아울러 담고 있다.
용재집 제7권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취원루(聚遠樓) 의령(宜寧)에 있다.

주인의 정사 처리는 참으로 능숙해 / 主人政事少全牛
여유로운 솜씨 새로 백척 누각 지었군 / 遊刃新修百尺樓
사해 문장이 여기 한 번 돌아보았으니 -누각에 강혼(姜渾)의 기(記)가 있다. / 四海文章曾一顧
천년의 명승지 틀림없이 길이 전해지리 / 千年名勝定長流
정진의 가을 물은 환히 맑아 볼만하고 / 鼎津秋水明堪翫
사굴산의 봄빛은 멀리 허공에 뜰 듯해라 / 闍窟春光遠欲浮
훗날 이 누각 오를 땐 내가 늙었을 터 / 他日登臨吾便老
옛 숲과 산은 그때까지 은근히 잘 있겠지 / 慇懃好在舊林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