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관련/대제학에 대한 기사 (관직전고)

조선 최고의 영예 대제학(大提學) 관련 이야기 (기사)

아베베1 2009. 12. 8. 17:34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대제학(大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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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학에 뽑힌 자는 관직을 논할 것 없이 항상 겸대하였고, 비록 죄를 받았거나 상(喪)을 만난 자일지라도 역시 갈지 않았으며, 죄에서 풀리거나 상을 마치면 전과 같이 근무하였다.
○ 국초(國初)에는 문형(文衡)을 주관하는 이가 예문관 대제학이나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직하였으면 문병을 맡게 되었으나, 그렇지 아니하면 비록 문사(文事)를 주장하는 벼슬을 하였더라도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안지(安止)와 박형원(朴亨元)이 그랬었다. 홍섬(洪暹)의 시에는 안ㆍ박 두 사람이 없다.
성종조 이후에는 양관(兩館)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무하게 하였는데 문병을 관장하게 함이었다. 《지소록》
○ 국조고사(國朝故事)에는, “태조조(太祖朝)에 권근(權近)이 문병을 주장하였다.” 하였고, 남곤(南袞)이 중종에게 아뢴 말에는, “세종조에 신장(申檣)ㆍ신석조(辛碩祖)가 수대제학(守大提學)이 되었다.” 하였으며, 김종직(金宗直)의 《이존록(彛尊錄)》에는, “세종 기해년 조상치(曹尙治)의 과거 방(榜)은 대제학 유관(柳觀)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하였으나, 홍섬(洪暹)의 시와 《지봉유설》에는 모두 이 말이 없다. 《조야기문》
홍섬의 시에,

계회제지주항정 / 季淮踶趾舟恒正   
어달성감개곤용 / 魚達成勘漑袞容
노양국창신정인 / 老讓國昌申鄭忍
길충순신귀무궁 / 吉忠淳愼貴無窮

이라 하였는데,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 호가 용재(容齋))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 호가 인재(忍齋))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金貴榮)을 이름이다. 근세에 문형(文衡)의 선생안(先生案 전임자의 명단)을 이 시로써 차례를 정하였기 때문에 권근(權近) 이하 여러 사람이 모두 들지 못하였는데,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또한 문형(文衡)을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므로 누락되었다.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그 끝 구(句)를 고치기를, ‘길충순퇴과전동(吉忠淳退寡傳東)’이라고 하였으니, 이황의 호가 퇴계(退溪)이고, 노수신의 자는 과회(寡悔)이며, 김귀영의 호는 동원(東園)인 까닭이었다.
유근의 시에,

율아애로경명익 / 栗鵞厓鷺景明益
해백송사효회동 / 海白松沙孝晦同
퇴익필구사불수 / 退益弼懼辭不受
계이위자기명공 / 繼以爲者幾明公

이라 하였는데 이는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아계(鵞溪) 이산해(李山海)ㆍ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ㆍ노저(鷺渚) 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 자 경문(景文))ㆍ이덕형(李德馨 자 명보(明甫))ㆍ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성민(洪聖民)ㆍ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ㆍ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ㆍ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ㆍ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ㆍ이호민(李好閔 자 효언(孝彦))ㆍ유근(柳根 자 회부(晦夫))을 이름이다. 효언의 다음과 회부의 위에 이이첨(李爾瞻)이 있었으나 빼고 넣지 않았다. 백사의 다른 호는 필운(弼雲)이고 심희수의 자는 백구(伯懼)이다.
○ 문장의 의발(衣鉢)을 서로 전함은 본래 고사(故事)가 있다. 권제(權踶)가 문형을 주관하다가 병이 위독하자 여러 사람이 의논하기를, 다음 문형을 맡을 사람은 정인지(鄭麟趾)라고 하였으나, 권제는 안지(安止)에게 위임하고 죽었다. 안지가 대신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파직(罷職)되고, 인지가 주관하게 되었다. 《필원잡기》
권채(權採)가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는데 일찍 죽으니 벼슬은 승지였다. 김 장군(金將軍) 자웅(自雄)이 심히 애석하게 여기므로 박이창(朴以昌)이 말하기를, “자네는 문형을 주관할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 목은(牧隱 이색)이 죽으니 양촌(陽村 권근)이 주관하였고, 양촌이 죽으니 춘정(春亭 변계량)이 주관하였으며, 춘정이 죽으니 윤 대제학(윤회(尹淮))이 주관하였고, 윤이 죽으니 권지재(權止齋 권제)가 주관하였는데, 지재가 만약 죽으면 남수문(南秀文)이 반드시 주관할 것이다. 수문이 만약 죽으면 내가 또 있고, 내가 죽으면 장군이 있는데 채(採)가 일찍 죽는 것을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가.” 하였으니, 그 말 속에는 문장이 날로 점점 저하된다는 뜻이 말 속에 은연(隱然)히 나타나 있다. 《필원잡기》
○ 중종조에 남곤이 대제학으로서 정승을 배명받고 대제학은 면직되기를 청하니 임금이, “누가 대신할 만한가.” 하고 물었다. 남곤이 아뢰기를, “죄입은 사람 중에 몇 사람 해당될 만한 자가 있으나, 새로 죄입은 사람으로는 이행(李荇)만이 매우 합당합니다만 품계가 낮습니다. 그러나 세종조에 신장(申檣)ㆍ신석조(辛碩祖)도 수대제학(守大提學)이 되었는데 이행은 아직 가선(嘉善)도 되지 못하였으며, 이 밖에는 어떤 사람이 합당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행을 특히 가선 품계에 올려서 수대제학으로 임명하였다. 《동각잡기》
○ 중종조에 이행이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기를, “소세양(蘇世讓)이 마땅히 문병을 관장할 만한 사람이니 아래 벼슬에 둘 수 없습니다.” 한 까닭으로 통정(通政)에서 가선(嘉善) 자헌(資憲)으로 올랐는데 모두 행이 청한 것이었다. 세양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을 원하므로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두 달이 되지 않아서 행이 또, “문장이 뛰어난 선비를 외직으로 나가게 함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말하였다. 《지봉유설》
○ 세조 2년에 신숙주(申叔舟)을 우의정으로 삼고, 그대로 문형을 맡게 하였는데 정승으로서 문형을 겸하는 것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 명종조에 홍섬(洪暹)을 대제학으로 삼았는데, 노쇠하였다고 하여 사임하므로 정승들에게 의논하니, 그때 영의정이 아뢰기를, “문장은 기운에 따라서 성했다 쇠했다 하는 것입니다. 홍섬의 나이가 쇠모(衰暮)에 가깝고 문장 역시 퇴보하므로 간절히 사퇴하는 것이오니, 마땅히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홍섬은 마침내 벼슬이 갈렸다. 《우복집(愚伏集)》
○ 명종 경신년에 홍섬이 대제학을 사임하므로 새 대제학을 내어야 되었는데, 정원에서 고사(故事)대로 무릇 가선 이상인 문관을 모두 패초하여 함께 경복궁 빈청(賓廳)에 나아갔다. 영의정 상진(尙震)ㆍ좌의정 이준경(李浚慶)은 북쪽 벽 앞에 앉았고, 옆으로 꺾어서 서쪽 벽에는 홍섬이 첫 자리에 앉았으며, 여러 재상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홍섬이 옛 예에 따라서 자신이 그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는데, 예조 판서 정유길(鄭惟吉)ㆍ지사 윤춘년(尹春年)ㆍ동지 이황(李滉)을 추천하고, 이어 정승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모(李某)의 학술과 문장이 실제로 이 임무에 합당하지마는, 산골에 굳게 숨어서 나오지 아니하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주서(注書) 윤근수(尹根壽)가 추천된 사람의 단자(單子)를 가지고 아래에서 올라와 앞에 나아가서 권점 찍기를 청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임금의 의향이 유길에게 있음을 알고 가선 품계의 사람은 유길에게 권점을 많이 하였고, 박영준(朴永俊)이 처음으로 이황에게 권점하였다. 추천 단자가 한 재상에게 돌아갔는데 그 재상이 자리에서 나와 앉으며 정승에게 말하기를,“사람마다 각각 한 사람씩 권점하는데, 내 생각에는 세 사람을 모두 합쳐서 아울러 권점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정승이 허락하였다. 권점하기를 마치고 영의정 앞에 가지고 가서 보니, 정유길이 16점이고 이황은 12점이었으며, 윤춘년은 5점이었으므로, 영의정이 춘년의 이름을 가리키면서, “여기가 너무 적으니 내가 권점하겠다.”고 하였다. 춘년이 이래서 6점을 얻어 후일에 첫째로 추천되었으며 권점이 많다고 하여 정유길이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는 평시에 있었던 고사(故事)이고, 난리 뒤에는 문병을 주관할 사람을 낼 때에 다만 시임 정승과 6조 판서만을 패초하여서 모임을 갖고 권점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박충간(朴忠侃)은 음관(蔭官)으로서 마침 판서가 되었는데 거만스럽게 권점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월정만록》
○ 선조 원년에 대제학 박순(朴淳)이 아뢰기를, “대제학과 제학이 비록 같은 관(館)ㆍ각(閣)의 직임이오나 제학의 임무가 대제학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지금 신이 대제학으로 있는데, 이황이 제학으로 있습니다. 나이 많고 학식이 높은 선비는 도리어 아래 임무에 있고, 후진 초학(初學)이 중한 지위에 있게 되었으니, 신의 직임을 갈아서 이황에게 제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명하였더니, 모두 박순의 말이 옳다 하므로 이에 서로 바꾸기를 명하였으나 황은 늙고 병들어서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며 힘껏 사퇴하여 허락을 얻었다. 《조야기문》
박순이 대제학이 되었는데 인망이 흡족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돌길의 발자국 소리는 자는 새가 안다 / 石逕跫音宿鳥知

라는 시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는 새도 능히 세상 사람의 눈을 속이는가.” 하였으니, 대개 그의 문장이 문형에 맞지 않는 것을 기롱한 것이었다. 당시에 문형을 맡는 자는 모두 늙고 학덕이 높은 선비였으니 박순이 기롱을 당함도 마땅하다 하겠지마는, 지금 문형을 맡은 자는 순에게 비교하여도 그 차이가 또 하늘과 못[淵] 같을 뿐만이 아니니, 인재의 품이 점점 낮아짐이 이에 이르렀는가. 효종조에 대제학을 권점할 때에 어떤 무관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이름도 혹시 권점 중에 들지 않을까.” 하니, 듣는 자가 웃었다. 《국당배어(菊堂俳語)》
○ 옛 규례에는 반드시 호당(湖堂)을 겪고 추천을 받은 자라야 문형이 되었다. 심언광(沈彦光)이 일찍이 문형 권점에 참여되었으나 호당을 겪지 아니하였으므로 사퇴하였다. 선조조에 황정욱(黃廷彧)이 비로소 호당을 겪지 아니하고서 문형이 되었다.
임금이 정욱의 글을 좋아하였고, 노수신(盧守愼)이 극력으로 추진하여서 드디어 제학에서 승진하여 대제학을 겸하였다. 호당에 휴가를 주어 글 읽게 하는 제도를 창설하면서부터 문병(文柄)을 주장할 자는 반드시 호당에서 글 읽은 사람을 임용하였던 까닭으로, 언광이 권점에 참예되었으나 일찍이 글 읽는 휴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 번이나 소를 올려서 사퇴하였던 것인데, 정욱은 홀로 호당을 겪지 아니하고서도 얻었으니 세상에서 모두 영예(榮譽)라고 하였다. 《지소기》
○ 조종조에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병을 주장하였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으로 삼았던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중종조 이후로부터는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하였다.” 하나, 세조조에 신숙주가 영의정으로서 대제학과 예조 판서를 겸하였으니, 이 말은 믿기 어려운 듯하다. 어세겸(魚世謙)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성세창(成世昌)ㆍ유성룡(柳成龍)이 모두 정승으로서 대제학을 겸하였으며, 이행과 이덕형(李德馨)은 통정(通政)으로서 천거를 받았으므로 모두 가선에 올려서 대제학을 제수하였으니, 벼슬 제도는 적당한 사람을 얻는 데 있는 것이고, 일정한 규정은 없는 것이었다. 《지봉유설》
○ 이덕형도 나이 31세에 문형을 잡았다. 그때 도당(都堂)에 모여서 권점하였는데, 홀로 덕형에게 권점이 하나만 찍혔으므로 만좌(滿座)가 놀랐다. 김귀영(金貴榮)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노부(老夫)가 한 짓이다. 덕형이 나이 젊고 품계가 낮은데 반열(班列)은 여러 선배보다 앞섰으니, 그의 재주와 덕이 노숙(老熟)하기를 조금 기다림이 어떻겠는가.” 하니, 덕형이 그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백사집》
근래에 대제학이 된 사람으로는 이덕형이 가장 젊었다. 그때에 덕형이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통정 품계로서 천에 뽑힘을 받았는데, 권점할 때에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이 홀로 덕형에게 권점하지 않고서 말하기를, “이덕형은 나이가 젊다. 그 전에 나이 31세에 문형을 맡은 자가 어디 있었는가. 나는 그를 성취(成就)시키고자 한다.” 하였으니, 선배들의 인재를 사랑하고 아끼는 뜻이 이와 같았다. 《지봉유설》
○ 옥당에 옛날부터 큰 벼루가 있었는데 항상 장서각(藏書閣)에 간수하였다가 대제학이 옥당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서 여러 학사들에게 글 짓기를 시험할 때에 내어다가 사용할 뿐이었다. 남곤(南袞)이 문형이 되고서는, 별도로 큰 벼루 한 개를 옥당에 간수한 것과 같이 만들어서 자기의 집에 두었다가 문형을 사임한 뒤에는 이행(李荇)에게 전하였다. 그 뒤에 여러 사람이 대제학을 지냈으나 벼루는 그대로 이행의 집에 있었다. 정사룡(鄭士龍)이 대제학이 되었을 때에는 이행은 이미 죽었는데, 부인이 벼루를 사룡에게 보내면서, “이는 용재(容齋 이행의 호)의 뜻입니다.” 하여 이로부터 으레 문형을 주관한 사람에게 전하여졌다. 임진년 병화 뒤에 이덕형이 그 벼루를 돈을 주고 구해서 이이첨(李爾瞻)에게까지 전하였는데, 이이첨이 죽임을 당하자 벼루 역시 잃어버렸다. 신흠(申欽)이 문형을 맡은 뒤에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을 쪼아 옛 것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김류(金瑬)ㆍ장유(張維)에게 차례로 전하였다. 고사(故事)에 문형이 갈릴 때마다 벼루를 전할 때에는 반드시 서로 주고 받은 시축(詩軸)이 있었으니 드디어 문단(文壇)의 아름다운 풍습이 되었다. 계유년에 장유가 문형에서 두 번째 갈릴 때에 최명길(崔鳴吉)이 대신하게 되었는데, 벼루를 보내면서 한 수의 율시(律詩)를 주었는데 그 율시에,

불문에서 의발을 전하는 풍습이 / 空門衣鉢有宗風
예문관에서 벼루를 서로 전하는 일과 자못 같도다 / 藝苑相傳事頗同
묘한 솜씨는 각각 은 붓을 뽑았고 / 妙手各拈銀不律
문심은 애오라지 돌벼루에 의탁하였네 / 文心聊托石虛中
문형을 두 번씩이나 주관하매 선배에게 부끄럽고 / 齊盟再主慚前輩
교장은 옆에서 보고 졸장을 비웃는다 / 巧匠傍觀笑拙工
이로부터 문단에 정채가 더할 것이네 / 從此騷壇倍精彩
삭방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훌륭한 대장을 맞이하듯이 / 朔方旗鼓得元戎

하였다. 《계곡만필(谿谷漫筆)》
○ 인조조에 이명한(李明漢)을 도승지(都承旨)로서 대제학을 겸하게 하였더니, 전례에 없던 일이라고 하여 본직은 갈아주기를 청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전례에는 의거할 데가 없으나 이경석(李景奭)이 일찍이 예문관 제학을 겸하게 되었으므로, 도승지가 비답을 받아서 내릴 때에 직제학을 고쳐서 제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이 대제학은 일이 신규에 관계되오니 전하께서 결재하소서.” 하므로, 그대로 겸무하도록 특명하였다. <백주행장(白洲行狀)>
○ 인조조에 김류가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특명으로 대제학을 그대로 겸무하게 하였더니, 해면되기를 청하는 차자에 대략 아뢰기를, “대제학은 으레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하는데, 지성균관사는 2품의 품계입니다. 어찌 정승의 직위에 있으면서 다시 2품 관직을 겸할 수 있겠습니까. 관방(官方 관에서 지켜야 할 예법)이 차례를 잃게 되면 관계됨이 적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북저집(北渚集)》
○ 현종 무신년에 문형의 망(望)을 추천할 참인데 원임대신 이경석(李景奭)이 전(前) 대제학으로서 추천하는 일을 관장하여야 함에도 병중이었으므로 임금이 경석에게 자기 집에서 추천하도록 명하였더니, 경석은 감히 그럴 수 없다 하고 대루원(待漏院)에 나아가서 적어 올렸다. <백헌시장>
○ 숙종조에 김수항(金壽恒)이 정승이 되었으나 그대로 문형을 겸하였고, 남구만(南九萬)ㆍ최석정(崔錫鼎) 또한 그대로 겸하였다가 곧 사면되었다. 《조야기문》
○ 정승으로서 문형을 겸한 사람은 신숙주ㆍ어세겸(魚世謙)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성세창(成世昌)ㆍ유성룡ㆍ김수항ㆍ남구만ㆍ최석정ㆍ조태억(趙泰億)이었다.
○ 3대가 잇달아서 문형을 맡았던 사람은 이정귀(李廷龜)ㆍ명한(明漢)ㆍ일상(一相)과 김만기(金萬基)ㆍ진규(鎭圭)ㆍ양택(陽澤)이었다.
○ 부자가 문형을 맡았던 사람은 성현(成俔)과 세창(世昌), 이식(李植 이행의 현손)과 단하(端夏), 이진망(李眞望 경석의 종손)과 광덕(匡德), 김수항(김상헌의 손자)과 창협(昌協)이었다.
○ 형제간에 문형을 맡았던 사람은 김만기(金萬基)와 만중(萬重), 민점(閔點)과 암(黯)이었다.
○ 한 집안에 문형을 맡았던 이는 권근(權根) 같은 이가 없었다. 권근과 그 아들 제(踶), 외손자 서거정(徐居正), 손서(孫婿) 최항(崔恒)이었다. 《지소기(識小記)》


[주D-001]지공거(知貢擧) : 여기서의 공거(貢擧)는 과거를 말한 것인데, 지공거는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반드시 대제학이 한다.
[주D-002]수대제학(守大提學) : 대제학이 될 계자(階資)가 못 되는데, 임시로 대제학의 직무를 행하는 것을 ‘수대제학(守大提學)’이라 한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경연(經筵)

고려에서는 경연을 보문각(寶文閣)이라고 하였는데, 충렬왕(忠烈王) 이후에는 그 명칭만 있었다. 충목왕(忠穆王)은 서연관(書筵官)을 두고 번을 넷으로 나누어 날을 번갈아 시독(侍讀)하게 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은 5품 이하의 관리 네 사람을 시학(侍學)으로 삼았는데, 공양왕(恭讓王)이 ‘경연’이라고 명칭을 고치고, 영사(領事)ㆍ지사(知事)ㆍ강독관(講讀官)을 두었다.
○ 태조(이성계)는 경연관(經筵官) 18명을 두었다.
○ 세종이 경연청(經筵廳)을 설치하여, 강독(講讀)하고 논사(論思)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영사[領經筵事] 세 사람, 으레 정승이 겸하였다. 지사[知經筵事] 세 사람, 동지사(同知事) 세 사람, 모두 다른 관리가 겸하게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일곱 사람, 으레 부제학과 6승지가 겸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으레 직제학에서 부응교까지 겸하였다. 시독관(試讀官), 으레 교리ㆍ부교리가 겸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으레 수찬(修撰)ㆍ부수찬(副修撰)이 겸하였다. 사경(司經), 으레 홍문관 박사(博士)가 겸하였다. 설경(說經), 으레 홍문관 저작이 겸하였다. 전경(典經) 으레 홍문관 정자가 겸하였다. 을 두었다.
○ 세종이 처음으로 경연을 개설하였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았다. 날마다 편전(便殿)에 나아가서 정무를 보살피고, 물러나와서는 경연에 임어하였으며, 상왕(上王)을 모시고 놀거나 잔치하는 이외에는 잠시도 폐지하지 않았다.
○ 세종은 상중에도 경연을 개설하였다. 국상(國喪)조에 상세하다.
○ 성종 2년에 특진관(特進官)을 두었는데, 3망(望)을 갖춘 3품 이상의 사람 중에서 가려서 제수하였다. 그 후에는 2품 이상의 문관ㆍ음관(蔭官)ㆍ무관 중에서 뽑았는데 일정한 정원이 없었다. 옥당 장관(長官)이 초계(抄啓)하여, 의정부ㆍ육조ㆍ한성부(漢城府)의 벼슬을 지내지 않은 사람은 뽑지 말게 하였다.
○ 성종이 어려서 왕위를 이었는데 대사간 김수녕(金壽寧)이 차자를 올리기를, “학문하는 방법은 배[舟]가 흐르는 물에 뜬 것 같아서 전진하지 아니하면 후퇴하는 것이니, 경연관에게 날마다 교대로 번을 들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성종기(成宗紀) 조에 상세하다.
○ 전례가, 그날에 경연이 있으면 전날 저녁에 번을 든 강관(講官)이 강(講)할 글 사이에 표지를 붙여서 안에 들이고 경연 있는 날에 여러 시강(侍講)이 책을 받들고 들어오면 서리(書吏)가 안에 들인 책에 의하여 표를 붙여 놓는다. 번에 든 강관은 그 표를 보고 미리 그 글의 음과 뜻을 밝혀서 강석(講席)에 나아갔다. 성종조에 직제학 민이(閔頤)가 번에 들었는데 서리가 표를 잘못 붙인 적이 있었다. 강하기를 시작해서 임금이 이르기를, “어느 곳을 읽는가. 표 붙인 책장이 아니니 아무 말[語] 아래에서 읽는 것이 옳다.” 하였다.민이가 보니 글 뜻이 마침 어려운지라, 임금 앞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臣)이 본래 학술이 없고 문리 또한 해독하지 못했었는데 요행으로 과거에 올라서 외람되이 분수 아닌 벼슬에 참여하였습니다. 항상 번 드는 날에는 아침 일찍 출근하여 진독(進讀)할 글에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동료에게 물어서 하게 되므로 다른 책장에는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서리가 책 표를 잘못 붙였으므로 상교(上敎)를 받들어 책장을 펴보니 글 뜻이 마침 어려워서 잘 읽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허물이 남사오니, 신의 죄를 다스려주시기 청합니다.” 하고, 즉시 강하기를 파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아무의 말이 솔직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특히 통정(通政) 품계로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사재척언(思齋摭言》
○ 연산조에 응교(應敎) 김물(金勿)과 수찬 홍숙(洪淑)이 진강(進講)하게 되었는데, 김물이 갑자기 기운이 질려서 말소리를 내지 못하므로 먼저 물러나기를 명하고, 수찬에게 대신 강하기를 명하였다. 홍숙은 자신이 하번(下番)이므로 진강하는 것은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여, 소홀히 하고 글에 유의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변을 만나니 근근이 구두(句讀)만을 분별하고는 땀을 흘리면서 나왔다. 《사재척언》
○ 중종(中宗) 기묘년에 사인(舍人 의정부의 정4품 관직)이 3정승의 의사로써 아뢰기를, “조강(朝講)할 때에 만약 영사(領事)가 여러 사람이고 사고가 없으면 늘 입시할 수 있지마는, 요즈음은 영사의 수가 적고 혹 병고(病故)가 있어서 사세가 늘 입시하기 어렵습니다. 조종조의 예를 보면 영사가 없더라도 조강을 하였으니, 이후로는 영사가 비록 유고하더라도 조강을 폐지하지 아니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옳다. 조강 때에, 영사가 유고하면 의정부의 다른 당상관을 대신 들게 하라.” 하였다.
○ 명종 초년에 대신이 의논하여 영사가 유고할 때에는 지사를 대신 들게 하였다. 《동각잡기》
○ 조광조(趙光祖)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분의(分義)가 뚜렷합니다. 근래에 강관(講官)에게 ‘마음을 평안하게 갖고 앉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으나,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뜻이 진정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 까닭으로 옛 습관을 갑자기 변경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보면 습관을 변경하기 어려움이 사실입니다. 정희왕후(貞憙王后)께서 수렴청정하실 때에 여러 신하가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으므로 따라서 이 습관이 이루어진 것이지 만약 성종조였다면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폐조(廢朝 연산조) 때 심순문(沈順門)이 우러러본 일로써 죄를 받았는데 지금 부복(俯伏)하는 것도 폐조 때 버릇입니다.” 하였다. 《정암집(靜菴集)》
○ 김정국(金正國)이 일찍이 교리로서 경연관을 겸무하였다. 《강목(綱目 자치통감강목)》의 동한(東漢) 헌제기(獻帝紀)를 강하다가 이곽(李㴶)ㆍ곽사(郭汜)에 이르러서 ‘사(汜)’ 자의 음(音)을 ‘사(似)’로 강하였는데, 뒤에 중종이 ‘범(汎)’ 자로 읽으므로 정국이 아뢰기를, “사(汜)는 음이 사(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찍이 범ㆍ사 두 가지 음으로 풀이하였다.” 하여, 정국이 등에 땀이 흠뻑 배었다. 강을 마치고 물러나와서 곧 곽사의 이름이 책에 처음으로 나타난 곳을 보니 과연 범ㆍ사 두 가지 음으로 풀이되어 있었다.대개 홍문관 관원이 강할 때는 저물게야 들어와서 강할 글을 두어 번 읽어보는데, 다만 그날 강할 글에 구두만 익히고 전체는 열람하지 않았다. 정국도 그 습속을 면치 못하여 이런 실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그뒤에는 반드시 강할 글을 첫머리에서 끝까지 자세히 보아서 의심이 없게 하였으며, 늘 번을 들게 되면 이른 아침에 이부자리 안에서 밥 먹고 출근하고 또 하번(下番) 동료와 더불어 날이 저물도록, 밤이 새도록 여러 글을 널리 상고하여 질문하며 논란하니 동료들이 고지식함을 웃기도 하였다. 《사재척언》
○ 전한(典翰) 김세필(金世弼) 중종 명신(名臣)조에 있다.
○ 정사룡(鄭士龍)이 시율(詩律)에 능하여 글을 잘한다는 평판이 자자하였으나 경술은 연구하지 않았으므로 늘 강할 때를 당하면 이마를 찌푸리고 머리를 긁으면서, “차라리 열 번의 학질을 앓을지라도 한 차례의 경연 진강은 원치 않는다.” 하였다.
○ 명종조에 신광한(申光漢)을 판중추(判中樞)로 삼았다. 정승 심연원(沈連源)과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신광한이 조정에 벼슬한 지가 가장 오래이며 나이 많고 학문이 있는데 그대로 종1품에 있으니, 품계를 올리고 영경연을 제수하여 강석(講席)에 도움이 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므로, 이에 특히 정1품으로 올렸다. 지금은 시임정승 외에는 비록 원임대신이라도 영경연을 겸하지 못하게 되니, 진실로 옛 제도가 아니다. 《지봉유설》
○ 선조는 상중에도 경연을 개설하였다. 국상[國恤]조에 있다.
○ 선조 무자년에 이황(李滉)이 올라왔다. 고사(故事)에 지경연(知經筵 지경연사)은 다만 조강(朝講)에만 참석하였고 주석강(晝夕講)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조정의 의논이 경연에 이모(李某)가 없을 수 없다 하여 주강(晝講)ㆍ석강(夕講)에도 아울러 참석하게 하였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 경연에서 읽는 것은 옥당 상번(上番)이 하는 것이 예였다. 선조조에 주박(周博)이 교리가 되었는데, 늙어 기운이 쇠하여 소리를 내지 못하므로 강할 때에 하번에게 대신 읽기를 청하였다. 하번이던 수찬 이충원(李忠元)이 갑자기 읽게 되어 거의 구두도 떼지 못하여 당시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지봉유설》
○ 선조가 늘 경연에서 한 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앉아만 있으니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훌륭한 다스림을 일으키려고 하면 반드시 성심으로 어진 이를 대우하여 문답함이 메아리[響]치듯 하고, 흉금을 열어 말을 받아들여서 상하가 모두 서로 합하여야만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순(堯舜) 때에는 말하지 않아도 믿고, 일함이 없어도 교화(敎化)되었으므로 언어가 소용 없는 것 같았지마는, 옛글을 상고하면 요순도 조정 신하와 더불어, 옳으니 그르니 하고 대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온데, 하물며 후세이겠습니까.전하께서 뭇 신하의 말에 조금도 답하시지 않으시는데, 대저 한 집안에 부자와 부부가 비록 지친(至親)간이라도 만약 자식의 말에 아비가 답하지 아니하고, 아내의 말에 지아비가 답하지 아니하면 인정이 오히려 막히는데, 하물며 임금과 신하의 명분과 위치가 현격(懸隔)한 데에 이르러서야 더하지 않겠습니까. 뭇 신하가 천안(天顔)을 뵙는 것은 다만 경연에서뿐이므로 입시하는 신하는 아뢸 말을 미리 생각하여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리지만 임금 앞에 와서는 위엄에 겁이 나서 마음먹은 대로 말을 다 못하고 열 가지에 두세 가지만 겨우 아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더라도 오히려 아랫사람의 심정이 통하지 못할까 걱정하실 터인데, 하물며 침묵하심으로써 막으셔서 되겠습니까.” 하였다. 《석담일기》
○ 효종 기축년 겨울에 임금이 비로소 경연에 임어하였다. 《중용(中庸)》을 강하여 책끝에 이르기까지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하고 또 강관에게도 휘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자(子思子)ㆍ맹자(孟子)ㆍ정자(程子)ㆍ주자의 이름을 아울러 휘하였다. <지장(誌狀)>
○ 경인년 11월에 효종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주강할 때에 임금이 이르기를, “강을 개시한 지 벌써 오래인데도 대신이 보이지 않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보는데 어찌 일정한 예가 있을 것이랴. 나는 대신과 간관(諫官)을 모두 경연에 들어와서 참석하게 하고자 한다. 드물게 볼 것 같으면 정이 어디서 나겠는가.” 하였다.
○ 효종조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초야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경연을 겸대하는 일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김집(金集)은 특진관(特進官)으로 임명되었고 송준길(宋浚吉)은 마땅히 참찬관(參贊官)으로 제수할 터인데, 《대전(大典)》을 상고하면 당하관으로서 경연을 겸하는 데는 으레 문관으로서 제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듣자오니 선조조의 유신(儒臣) 성혼(成渾)이 경연관을 겸하지 않았으나 다만 한관(閑官)으로서 경연에 입시하게 하였다 합니다. 이번에 부름을 받은 여러 사람도 상격을 깨뜨려서 겸대하게 하여도 불가함이 없을 듯하나, 법전이 이 같으므로 선조조의 예에 따라서 각각 본직으로 경연에 참석하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비변사등록》ㆍ《조야첨재》에는 신묘조에 있다.
○ 최석정(崔錫鼎)이 아뢰기를,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분(笨)’ 자를 하문하였는데, 유신(儒臣) 중에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한 무겸(武兼 무관으로서 선전관(宣傳官)을 겸직한 사람)이 아뢰기를, “이는 백거이(白居易)의 ‘양죽기(養竹記)’에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겨 잇달아 무신에게 인견하는 자리에 들어와서 참여할 것을 명하였다. 《회은집》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홍문관(弘文館)

신라에서는 상문사(詳文師)라 하다가 ‘통문박사(通文博士)’라 고쳤으며 또 서서원(瑞書院)을 설치하였다.
○ 고려 예종(睿宗)이 대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뽑아서 조석으로 경서를 강론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서 청연각이 궐내에 있으므로 학사들의 일직 숙직과 나고 들기가 곤란하다고 하여 그 곁에 별도로 집을 마련하고 이름을 ‘보문(寶文)’이라고 고쳤다. 이어서 홍루(紅樓) 아래 편 남랑(南廊)을 보수하여 학사들이 모여서 강하는 당(堂)으로 하고 당 이름을 ‘정의(精義)’라 하사하였으며, 그 당 좌우에 휴식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거기에 뽑혀 충원된 사람은 모두 당시의 호걸이었다.
또, 숭문관(崇文館)ㆍ홍문관ㆍ수문전(修文殿)ㆍ집현전ㆍ우문관(右文館)ㆍ진현관(進賢館)과 제학(提學)ㆍ학사 등의 관직이 있었다.
○ 세종 2년에 비로소 집현전을 설치하였다. 세종조 조에 상세하다.
○ 세조 2년에 집현전을 폐지하기를 명하였다.
9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건의로 서책을 간수하는 내각(內閣)을 홍문관이라 하고, 예문관 봉교 이하의 관원으로서 박사ㆍ저작ㆍ정자(正字)를 겸임시켜서 비각(祕閣) 문서의 출납을 맡게 하고 그 중에서 다만 문신만을 가려서 예문관 응교를 겸임시키고 경연에 참석하게 하였다. 용재(慵齋)가 말하기를, “문관 수십 명을 가려서 겸예문(兼藝文)이라고 일컫고 날마다 불러들여 논사(論思)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 성종 원년에 예문관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부제학에서 수찬까지 17명이었는데 모든 문한(文翰 외교 문서)ㆍ경연ㆍ기주(記注 기록) 등의 일을 집현전의 예전 예와 꼭 같게 하였다.
10년에 고쳐서, 홍문관을 설치하였는데 영사(領事) 한 사람 정승이 으레 겸하였다. 대제학 한 사람, 제학 한 사람, 모두 다른 벼슬아치가 겸하였다. 부제학ㆍ직제학 전한(典翰)ㆍ응교ㆍ부응교 각 한 사람씩, 교리ㆍ부교리ㆍ수찬(修撰)ㆍ부수찬(副修撰) 각 두 사람씩, 박사(博士)ㆍ저작(著作) 각 한 사람씩, 그리고 정자(正字)가 두 사람이었다. 직제학에서 응교까지를 동벽(東壁), 교리에서 수찬까지를 서벽(西壁), 박사에서 정자까지를 남상(南牀)이라고 일컬었는데 모두 경연을 겸대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성종이 집현전의 예에 의거하여 홍문관을 다시 궁전 곁에 설치하고 문학과 재주와 행실이 특출한 선비 17명을 뽑아서 날마다 교대로 숙직하게 하여 그들을 매우 후대(厚待)하였다. 경사(經史)를 강할 때 도의(道義)로써 풍간(諷諫)하게 하고, 자주 궁중의 술 빚는 법[醞法]을 베풀었다. 또 정원(政院)에 불러 모아 승지들과 대작하게 하였고, 노비를 많이 하사하여 부리게 하였으며, 또 관(館)에서 부리는 하인들은 모두 은패(銀牌)를 차게 하였다. 《용재총화》
○ 연산 11년 을축에 홍문관을 폐지하고 경연을 고쳐 ‘진독(進讀)’이라 하였다. 《문헌비고》에는 진독청이라 하였다. 이어서 관원도 개혁하여 예문관으로서 겸하게 하고 예문관에 봉교 이하 네 사람, 주서(注書) 두 사람을 더 두었다. 《고사촬요》
12년 병인 여름에 4관(館) 박사 이하를 다른 관청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본관(本館)의 직무를 겸하게 하였다. 《고사촬요》
○ 중종 초년에 홍문관을 복구하였는데, 영사 이하는 모두 경연과 춘추관(春秋館)을 겸하게 하였다.
○ 궐내에 번 드는 각 관청 관원은 항상 사모(紗帽)를 썼고 감히 갓이나 두건을 쓰지 못하였는데, 옥당과 춘방(春坊 세자시강원) 관원만은 갓을 썼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조종 조에서 일찍이 옥당에 갓을 하사하였더니 그것이 준례가 되었는데, 춘방에서는 자신들도 옥당과 더불어 사체(事體)가 균등한 까닭으로 옥당을 본받았다.” 하였다. 《홍문관지(弘文館志)》
○ 양성지가 소를 올리기를, “가만히 보면 역대의 서적을 혹 명산(名山)에 간수하고 비각(祕閣)에 간수한 것은 유실(遺失)에 대비하여서 영구히 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전조(前朝) 숙종이 경적(經籍)을 간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책에 찍힌 인장이 어떤 것은 ‘고려국 14엽(대(代)) 신사년 어장서 대송 건중 정국 원년 대요 건통 9년(高麗國十四葉辛巳歲御藏書大宋建中靖國元年大遼乾統九年)’이라 하였고, 어떤 것은 ‘고려국 어장서(高麗國御藏書)’라고 되어 있습니다. 숙종으로부터 지금까지가 3백 63년이 되었으나, 찍은 인장이 어제 찍은 것과 같아서 문헌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지금 궐내에 간수한 만 권 책도 숙종 때에 간수하여 전해진 것이 많습니다. 지금 간수하는 책 뒷면에는 ‘조선국 제6대 계미년 어장서 대명 천순 7년(朝鮮國第六代癸未年御藏書大明天順七年)’이라고 해자(楷字)로, 앞면에는 ‘조선국 어장서’라고 전자(篆字)로 모든 책에 인장을 찍어서 만세에 환하게 보이고, 또 모든 책을 간수한 내각(內閣)을 ‘홍문관’이라고 하여 대제학ㆍ직제학 등의 관원을 두어 예문관의 관원이 겸무하게 하여 책의 출입을 맡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좇아서, 비각 서적을 옛 동궁(東宮) 동편에 있는 작은 집에 간수하고 집 이름을 ‘홍문관’이라고 하여 예문관 봉교 이하의 관원에게 관장하도록 명하였다.
○ 시종(侍從 홍문관원)이 소를 봉해 올리는 일은 이계전(李季甸)에게서 비롯하여 성하여졌다. 세조 명신조에 상세하다.
○ 양성지가 여러 번 소를 봉해 올려서 당시의 일을 논하였다. 세조 명신조에 상세하다.
○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에는 주점(朱點)을 찍는 예가 없었는데, 중종이 어린 나이로 대통을 이었으므로, 보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로소 구절에다가 붉은 점을 찍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였다. 《홍문관지》
○ 가선(嘉善) 품계로 부제학이 된 것은 조원기(趙元紀)로부터 비롯하였다. 중종조 조에 상세하다.
○ 옥당의 상번과 하번이 반드시 면대해서 교대하였다. 명종조에 박계현(朴啓賢)이 번을 들었는데 이준민(李俊民)이 일찍 교대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르기 전에 궁궐 문이 갑자기 닫혔다. 계현이 서문 안에서 한참 기다리니 준민이 천천히 오고 있었다. 계현이 분해서 책망하였더니, 준민이 말에서 미처 내리지도 않고, “이같이 책망하면 나는 돌아간다.” 하면서, 곧 말을 달려 가버렸으므로, 계현은 마침내 나가지 못하였다 한다. 근래에 와서 옥당 관원이 임의로 교대할 사람이 오기 전에 먼저 나가고 간혹 날을 넘겨 번을 궐(闕)하기도 하며,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은 세도(世道)가 변한 때문이다. 《지봉유설》
○ 이황(李滉)이 응교가 되어서 날마다 경연에 들어갔다. 명종이 사(社 토지의 신)를 세운 본 뜻을 물었으나 이황이 마침 기억하지 못하여서 자세하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물러 나와서는 곧 문헌을 상고하여 기록해 가지고 동료에게 말하여서 아뢸 준비를 하도록 하고 나서 병을 핑계하고 사퇴하였으니 그가 직책에 충실함이 이와 같았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 옥당관이 으레 지제교를 겸무하는데 이를 ‘내지제교(內知製敎)’라 하고, 다른 벼슬로서 겸무하는 자는 이를 ‘외지제교(外知製敎)’라 한다. 무릇 시급한 교서는 반드시 옥당관에게 짓도록 명하였다. 선조조에 홍모(洪某)가 옥당관으로 있었는데, 글재주가 졸(拙)하여 교서를 능히 지어 바치지 못하였으므로 곧 벼슬을 사퇴하고 갔으니, 대개 공론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지봉유설》
○ 옥당에 번 드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겨서 회피하였다. 선조조에 성낙(成洛)이 가장 심하여서 번 차례를 어기고 들지 아니하거나 혹 들었다가도 곧 나갔다. 허봉(許葑)ㆍ김수(金睟)ㆍ김찬(金瓚)ㆍ이성중(李誠中)ㆍ이원익(李元翼)ㆍ김응남(金應男)이 함께 옥당에 있었는데, 서로 약속하기를, “성낙이 만약 번을 들거든 우리는 두어 달 한정하고 교대하지 말도록 하자.” 하였다. 약속이 정해진 뒤에 성낙이 번에 들었는데, 겨우 하루가 되자 또 나가고자 하여 관(館)의 아전을 회초리로 때려서 몹시 잔혹하게 하였다. 아전이 교대할 사람을 찾아서 여러 집을 다녔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이원익에게는 그가 이제 겨우 번에서 나왔으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였다. 사태가 급박하여 시험삼아 이원익에게 갔더니 이원익이 처음에는 답하지 않으므로, 아전이 슬피 울면서, “80살 된 늙은 어미가 차가운 옥에 갇혀서 운명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원익이 마침 모친을 모시고 있다가 측은하게 여겨서 허락하였더니, 아전이 문밖으로 뛰어 나가며 손뼉을 치면서, “이 교리는 참 성인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식소록》
○ 옥당에 한 노구솥[鐺]이 있었는데, 술이 닷 되쯤 들었다. 마시는 자가 한 숨에 다 마시면 그 이름을 노구솥에 새겼는데, 오직 김천령(金千齡)ㆍ허봉(許篈)의 이름만이 새겨졌다. 《식소록》
○ 선조조에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성종조에 옥당에 번 든 사람을 때 없이 불러 편전에서 면대하였는데 그것이 ‘독대(獨對)’라는 것입니다. 이 준례를 회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옥당의 관원을 마땅히 수시로 불러볼 것이니, 반드시 책을 가지고 진강(進講)할 것이 아니라 의리만을 토론함이 가하다.” 하였다. 《석담일기》
○ 선조조에 유희춘(柳希春)을 오랫동안 부제학에 임용하여 다른 벼슬로 옮기기를 허락하지 아니하더니, 뒤에 품계가 올라서 자헌(資憲)이 되었다. 정2품을 강등시켜서 부제학에 제수하는 예가 없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유모(柳某)가 부제학에 적임이니 비록 전례가 없더라도 제수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뒤에 김수(金睟)도 자헌(資憲)으로서 특히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니 이 준례를 쓴 것이었다. 《지봉유설》
그 뒤에 정경세(鄭經世)ㆍ정엽(鄭曄)ㆍ조익(趙翼)에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영조조 조엄(趙儼)에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 이준경(李浚慶)이 영의정이 되어 도당홍문록(都堂弘文錄)에 추천된 사람의 이름에 권점(圈點)할 때에 그의 아들 이덕열(德悅)의 이름을 붓으로 지워버리면서, “내 자식은 옥당 관원에 적합하지 아니함은 내가 자세히 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사정(私情) 없음을 탄복하였다. 유영경(柳永慶)이 영의정이 되어서 역시 그 아들 업()의 이름을 지워버렸는데, 그때 유업은 이미 이조에 들어가서 좌랑이 되었던 것이다. 공론(公論)이, “이조 낭관(郞官)의 높고 귀함은 옥당보다도 나을 뿐만 아니라 권세도 중하다.이미 이조에 들어간 것은 허락하면서 유독 도당록에는 이름을 지워버렸으니, 소인의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므로 비록 동고(東皐 준경의 아호)의 흉내를 내고자 하나 누가 허여하랴.” 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도당록에 권점할 때에 정승의 아들이나 손자이면 홍문관의 동벽(東壁 직제학에서 응교까지)과 서벽(西壁 교리에서 수찬까지)이 정승의 위세에 눌려서 감히 이름을 권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모두 점수에 차 뽑히니, 사정이 크게 작용하여 조정의 인사 행정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하담록》
○ 광해조 때 경연에서 이원익(李元翼)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말년에 간혹 경연을 폐하셨음은 병환 때문이었습니다. 평시에는 날마다 경연을 열었으므로 번에 들었던 옥당 관원이 비록 부모의 병 기별을 들었다 하더라도 교대할 사람이 오기 전에는 절대로 감히 나가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금란문(金鑾門 홍문관 정문)에 서서 발을 구르며 가슴을 치면서도 교대가 오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나갔습니다. 어버이의 병에도 이와 같았으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 선조가 날마다 경연에 나왔다. 한 학사(學士)가 납패(鑞牌 백철패)를 가리키면서 농담으로 말하기를, “저 납패 속에 몇 차례의 학질이 감춰졌는가.” 하였으니, 대개 날마다 진강하기 곤란함을 가리킨 것이었다. 인조가 초년에는 경연에 부지런히 나왔는데, 병자년 이후에는 병환이 있어서 십여 년이나 경연을 폐지하였으므로 본관(本館 홍문관)의 관원은 다만 일직ㆍ숙직만 할 뿐이었다. 당시에 한가로운 벼슬을 꼽을 때에 홍문관을 첫째로 쳤다.
○ 인조조에 정경세(鄭經世)의 품계가 정2품에 이르렀는데도 특히 그대로 옥당 장관을 맡게 하여 경서와 사서(史書)를 진강하도록 명하였다. 《공사견문》
○ 인조조에 이명한(李明漢)이 응교가 되고, 소한(昭漢)이 수찬이 되었는데, 명한이 소식(蘇軾)의 옛일을 인용하여 소를 올려 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전례가 있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백주행장(白洲行狀)>
○ 숙종조에 은잔을 하사하였다. 승정원 조에 상세하다.
○ 국조(國朝)의 이래로 당하관을 패초하기를 명하면 모두 분칠한 패를 사용하였으나, 오직 대각(臺閣)을 부를 때에는 붉은 패를 사용하였다. 영종 39년에 옥당 관원을 부를 때에도 양사(兩司)와 같이 붉은 패를 사용하기를 명하였다.
○ 영종 40년에 임금이 세손(世孫)과 함께 옥당에 와서 친히 어제(御製) 사언시(四言詩) 한 구(句)를 썼는데 ‘운종일당(雲從一堂)’이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세손을 돌아보면서, “문종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에 밤에 옥당에 와서 성삼문을 부를 때에 ‘근보(謹甫)’라고 자를 불렀으므로 지금까지 아름다운 일로 전해 오고 있다.” 하였다.
46년에 임금이 세손과 함께 옥당에 와서 야대(夜對)를 행하고 이어 옥등(玉燈)의 고사(故事)를 물었다. 전부터 6개의 등이 있었으므로 등 두 개를 더 하사하고 번을 든 유신(儒臣)에게는 말[馬]을 주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예문관(藝文館)

신라에서는 ‘한림(翰林)’이라 하였으며 또 ‘원봉성(元鳳省)’이 있었는데, 궁예(弓裔)도 그대로 하였다.
고려에서도 궁예의 제도에 의하여 원봉성을 두었다가, 뒤에 학사원(學士院)ㆍ한림원ㆍ문한서(文翰署)ㆍ사림원(詞林院)ㆍ예문관ㆍ춘추관이라고 고쳤다가 아울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고 하였다.
○ 태조는 그대로 예문춘추관을 두었다가 뒤에 나누어서 예문관을 설치하고 사명(辭命 주로 외교 문서 및 기타 교문) 짓는 것을 관장하게 하고, 직제를 고쳐 정하였는데, 영사(領事) 한 사람, 영의정이 으레 겸하였다. 대제학ㆍ제학ㆍ직제학ㆍ도승지가 으레 겸하였다 응교 홍문관 직제학에서 교리까지 그 중에서 가려서 겸하였다. 각 한 사람, 봉교(奉敎) 두 사람, 대교(待敎) 두 사람, 검열(檢閱) 네 사람이었다. 봉교 이하를 ‘한림’이라 하고 지제교는 3품에서 6품까지의 관원이 겸대하였다.
○ 성종 원년에 부제학 이하 수찬까지 17명을 증원하여 문한(文翰)ㆍ기주(記註)ㆍ경연 등의 일을 집현전의 옛일과 꼭 같이 맡게 하였다. 10년에 부제학 이하 수찬까지를 감원하여 별도로 홍문관을 설립하고, 예문관에서는 다만 사명(辭命)의 일만 관장하게 하였다.
성종조에 예문관을 설치할 때에 노반(盧盼)이 교리가 되었다가 죽었는데, 그의 증손 노사회(盧士誨)가 수령이 되어서 서경(署經)할 때에 양사에서 함께 홍문관 교리를 예문관 교리로 잘못 썼으나 모두 그대로 넘겼으니 옛일을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었다. 《지소록》
○ 연산군이 봉교(奉敎) 두 사람, 대교(待敎)ㆍ검열 각 한 사람씩 증원하여서 경연을 겸하게 하였다가, 곧 예문관을 폐지하고 봉교 이하를 다른 관청 벼슬로 나누어서 제수하였으며, ‘녹고관(錄考官)’이라는 관호(官號)를 겸하게 하였다.
중종 초년에 복구(復舊)하였다.
○ 옛 준례에 한림을 새로 추천할 때에는 전번 추천에 제일 끝으로 추천되어서 하번(下番)이 된 자가 여러 동료와 함께 모두 모여서 새로 추천할 사람을 서로 의논하는데, 회의는 하번이 실상 주관하는 것이었다. 문을 닫고 비밀히 의논하여 추천할 사람의 차례를 정하며 추천할 사람이 완정(完定)되면, 그 추천 문서를 일찍이 한림을 지낸 사람과 양관(兩館 홍문관ㆍ예문관) 당상에게 돌려서 이의가 없는 뒤에 향을 피우고 황천 후토(皇天后土)에게 고하는데 그 축문에, “사필(史筆)을 잡는 임무는 국가에서도 가장 중요하니 추천된 사람이 그 적임이 아니면 반드시 앙화(殃禍)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3정승과 의정부의 동벽(좌찬성ㆍ우찬성)ㆍ서벽(좌우참찬관)과 양 당상관ㆍ이조 당상이 합석하여서 추천에 참여된 사람에게 《강목(綱目)》ㆍ《좌전(左傳)》ㆍ《송감(宋鑑)》 등의 글을 강하게 하여, 그 성적의 높고 낮음을 매겼다.
○ 사국(史局)은 나라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곳이고, 사관(史官)을 새로 추천하는 것은 또 사국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다. 천만세(千萬世)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권리가 사관의 손에 달렸으므로, 예로부터 명신(名臣)과 석보(碩輔)로서 이 관직에 있던 자도 새로 추천하는, 이 한 가지 일에는 반드시 삼가고 조심하여 가려 뽑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김일손(金馹孫)이 하번(下番)으로 5년이나 있으면서 반드시 정여창(鄭汝昌)을 만난 뒤에야 비로소 새로 추천하는 일을 거행했던 것이다. 민진원(閔鎭遠)의 《한원제명록(翰苑題名錄)》 후편에 있다.
○ 고려 때부터 한림을 가장 중히 여겨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영주(瀛洲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한다)에 오름과 같이 여길 뿐만 아니었으니,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보아도 상상할 수 있다. 이른바 ‘한림 잔치[翰林宴]’란 것은 우리 조선에 와서 시작되어서 더욱 심하여졌는데, 근세에 와서는 옛 풍습을 일컬을 것이 없다고 하여 4관(館)의 옛 규정을 거의 철폐하여 드디어 묻혀버리기에 이르렀다. 아, 옛 풍습이 없어지면서 기강이 무너졌으니 비록 옛것 그대로 회복하려고 하나 되지 않는다. 《지봉유설》
○ 중종 3년에 황모필(黃毛筆) 40자루, 먹 20자루를 승정원 및 예문관에 특별히 하사하고, 수서(手書)로서 전교하기를, “나의 옳고 그름을 너희들은 각자 진술하여 숨김이 없게 하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또한 죄를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 매양 도목정사(都目政事)에는 한림이 나누어 정청(政廳)에 나아갔다. 이조(吏曹)조에 상세하다.
○ 고사(故事)에 이조에서 인사 행정을 하게 되면 예문관에서 관원 한 사람이 정청에 나아가서 잘되고 못됨을 적었다. 백인걸(白仁傑)이 검열(檢閱)이 되어 하찮은 신진으로서 그 폐지되었던 직무를 회복하여 붓을 잡고 부지런하게도 다니니 이조에서 그를 매우 꺼려하였다.
○ 예문관 응교는 반드시 장래에 문병(文柄 문형과 같다)을 주관할 사람으로서 겸무하게 하였다. 평시에 있어서는 김귀영(金貴榮)ㆍ노수신(盧守愼)ㆍ강사필(姜士弼)ㆍ이산해(李山海)ㆍ신응시(辛應時)ㆍ유성룡(柳成龍)ㆍ허봉(許篈)을 결원이 나는 대로 임명하였는데, 허봉 뒤로부터는 항상 결원이 있어도 보임하지 않았다. 임진년 뒤에 이호민(李好閔) 외에는 겸대한 사람이 전연 없었음은 그 선임(選任)하는 일을 중하게 여긴 때문이다. 《지봉유설》
○ 국가에서 예문관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기거주(起居注 임금의 좌우에 시종하면서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는 것)만 관장하게 한 것이었는데, 근래에는 사관(史官)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경대부(卿大夫)의 죽음을 적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생 행적을 단정하는 것이므로 관계가 매우 중한데, 이황(李滉)의 죽음 역시 적지 않았다. 봄가을에 전최(殿最 수령의 성적을 고사하여 최상을 최, 최하를 전이라고 한다)를 정할 때에 춘추관 당상관이 나와서 문적을 열람하니 다만 날씨의 흐림과 갬만을 적었을 뿐이고, 한 가지 일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으니 후세에서 무엇에 의거하여 사기를 만들 것인가. 《태천잡기(苔泉雜記)》
○ 사관(史官)은 반드시 추천으로써 임명하는데, 이를 ‘비밀추천[祕薦]’이라 하고 향을 피우고 하늘에 맹서하는 것은 그 일을 엄중하게 함이었다. 임진년 난리 때에 사관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기자헌(奇自獻)이 한림으로서 행재(行在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곳)에 있으면서 다만 한 사람을 추천하였으나, 그 사람의 명망이 드러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에 맹서하는 축문은 사용하지 아니하고 꿇어앉아서 말로써 하늘에 고하기를, “난리로 인하여 사람이 모자라 부득이하여 천망(薦望)만 갖추었습니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지봉유설》
○ 사관(史官)이 직분을 다하지 못함은 조사(曹司)가 있는 까닭이다. 사관이 여덟 사람이나 됨은 사기를 중하게 여기는 까닭이니 마땅히 각자가 맡은 그 직무에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은 여러 관원이 모두 시위소찬(尸位素餐)하면서 하번 한 사람에게만 맡겨두니, 보는 바가 반드시 모두 바르지는 못할 것이다. 만세에 전할 글이 초조하기 그지없으니 한심하다 하겠다. 《퇴계집》
○ 조정에서 존호 올리기를 청할 때에 윤방(尹昉)이 사관으로서 동료에게 주장하기를, “우리는 사필(史筆)을 잡고 임금을 좌우에서 모시고 있으니 이제 백관과 함께 정청하는 데에 참여함은 직분이 아니다.” 하니, 여러 동료가 그 말을 따랐다. 사관이 정청에 참여하지 아니한 것은 윤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 우리나라의 제도에 나이 젊은 신진을 한림으로 삼아 사관의 직무를 맡긴 것은 잘못이 아닐까 하고 일찍이 의심하였더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벼슬이 높은 사람은 너무 세상일에 저절로 익숙하게 되어 사정(私情)에 따르는 폐단이 많이 있으므로, 나이 젊고 의기가 날카로운 자로서 그 마음을 공평하게 가진 사람만 같지 못하다.” 하니, 조종에서 제도를 마련한 뜻이 어찌 우연하였겠는가. 이제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수(編修)하는데 사관의 기록이 극히 비루하고 졸렬하므로 조목마다 고쳐 짓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당파가 갈린 뒤로는 좋아함과 미워함이 더욱 공변되지 못하므로, 모두 믿을 수 없다.오윤겸(吳允謙)의 죽음을 적은 것도 ‘윤겸사거(允謙死去)’라고 하여 관작과 성을 버렸으니, ‘망대부(莽大夫) 양웅(揚雄)이 사(死)하다.’라는 서법(書法)보다도 심함이 있었다. 이는 대개 목릉(穆陵 선조와 선조비의 능)에 있었던 벼락 변고를 봉심(奉審)할 때에 벼락의 죄가 아니라고 한 것을 폄(貶)한 것이었다.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 영종 14년에 친히 사각(史閣)에 와서 특히 ‘대공사필(大公史筆)’이라는 넉 자를 크게 써서, 처마 끝에 달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공자께서 《춘추(春秋)》를 지으신 뒤에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이 있었는데, 사마광(司馬光)의 식견으로도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오히려 ‘제갈량(諸葛亮)이 들어와서 도적질하다.’라고 적었으니, 역사를 기록하는 법이 과연 어렵기도 하다. 이제 대신ㆍ제신(諸臣)과 여러 사관이 입시하였으나 당파에 치우친 뒤로 역사를 적는 법에 내림과 올림이 없음을 어찌 보장할 것이랴. 당 태종(唐太宗) 외에는 임금으로서 사책(史冊)을 가져다가 본 사람이 없었으니, 그 공변되고 공변되지 아니함을 누가 알겠느냐. 내가 특히 네 글자를 써서 벽 위에 건 것은 그 역사 적는 법을 아주 공변되게 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 17년에 전교하기를, “한림을 추천하는 것은 3백 년 동안 내려오는 규례이니, 비록 혁파하지는 못하나 이 뒤로는 한림에 추천될 만한 자는 분관(分館)의 예(例)에 의거하여 모두 추천하되, 시끄러움을 일으키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고, 잇따라 추천하는 규정은 홍문록의 예에 의거하여 참하(參下)에 있는 사람 중 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성명을 적은 책)과 대조하여 차례로 베껴낸 다음, 일찍이 한림을 지낸 세 사람이 모여서 권점하게 하되 차점(次點) 이상만 뽑게 하고, 송 나라 조정에서 관직(館職)에 임명할 때 불러 시험하여 벼슬을 주던 예를 본받게 하고, 맡길 한림이 세 사람이 갖추어지지 못할 때에는 도당(都堂)이 모여서 권점하도록 명하였다.

[주D-001]망대부(莽大夫) …… 사(死)하다 : 왕망(王莽)은 나라의 반역자인데, 유학자인 양웅(揚雄)이 그의 밑에서 대부(大夫) 벼슬을 하였으므로,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을 지을 때에 ‘망대부양웅사(莽大夫揚雄死)’라고 썼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춘추관(春秋館)ㆍ사고(史庫) 붙임

고려에서 처음으로 사관(史館)을 설치하였는데 뒤에 문한서(文翰署)에 합병하였고, 뒤에 다시 예문ㆍ춘추 2관(館)으로 나누어서 시정(時政)의 기주(記註)를 관장하게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예문관과 춘추관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나누어서 춘추관을 설치하였다. 영사(領事) 한 사람, 영의정이 으레 겸하였다. 감사(監事) 두 사람, 좌ㆍ우의정이 으레 겸하였다. 겸지사(兼知事)ㆍ동지사(同知事) 각 두 사람씩, 모두 다른 벼슬아치가 겸하였다. 수찬관(修撰官) 일곱 사람, 부제학과 6승지가 으레 겸하였다. 편수관(編修官), 당하관(堂下官) 3ㆍ4품 기주관(記注官), 5품 기사관(記事官), 6품 이하 사인(舍人)ㆍ검상(檢詳)의 관직을 두었는데, 홍문관의 직제학에서 정자(正字)까지, 예문관의 봉교(奉敎)에서 검열(檢閱)까지와 승정원의 주서(注書), 승문원의 판교(判校), 종부시 정(宗簿寺正) 모두 본품계로서 으레 편수ㆍ기주ㆍ기사관을 겸하였고, 사헌부의 집의(執義)에서 지평(持平)까지와 사간원 당하관 한 사람은 기사관을 겸하게 하였으며, 6조에도 당하관 각 한 사람씩을 차례대로 돌려가면서 기사관에 차임(差任)하였고, 8도(道) 도사(都事)와 북평사(北評事) 및 경기ㆍ충청ㆍ경상ㆍ전라ㆍ평안의 우도(右道)에 있는 문관 수령(文官守令)은 기사관을 겸하게 하였다.
연산군이 기사관을 녹고관(錄考官)이라고 고쳤는데 중종 초년에 복구하였다.
○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 영변(寧邊) 묘향산(妙香山), 강릉(江陵) 오대산(五臺山), 안동(安東) 태백산(太白山) 등 네 곳 사고(史庫)에 각각 참봉(參奉) 한 사람씩을 두었는데 본도(本道)에서 뽑아내어서 지키게 하였다.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
○ 국초(國初)에는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태종조에 이르러서 비로소 일기(日記)라는 것이 있었으나 초초(草草)하고 간략하여서 혹 그달이 다 가도록 다만 당상ㆍ당하관의 성명과 결근만 적었을 뿐이었다. 박세채(朴世采)의 《숭고록(崇考錄)》
○ 세종 5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역대의 사기를 보니 옛날에 사실을 적은 것이 아주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를 보니 소홀하고 간략하기가 너무 심하다. 지금은 오직 사관(史官) 한 사람이 조계(朝啓)에서 윤번으로 참여하여 사건을 기록하니, 어찌 국가의 일을 능히 다 기록할 것인가. 집현전이 궐안에 있으므로 또한 사실을 기록할 만하니 곧 신장(申檣)ㆍ김상직(金尙直)ㆍ어변갑(魚變甲)ㆍ정인지(鄭麟趾)ㆍ유상지(兪尙智) 등에게 모두 사관을 겸무하도록 명하여서 사실을 기록하는 길을 넓히게 하라.” 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세종 13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태종실록(太宗實錄)》이 거의 되었다 하니 내가 보고자 하노라.” 하니,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아뢰기를, “실록에 기재된 것은 모두 당시의 일로써 후세에 보이려는 것이므로 모두 실제의 일입니다. 전하께서 보신다 하더라도 또한 태종을 위하여 고치지는 못할 것이며, 이제 한 번 보시게 되면 후세의 임금이 본받을 것이므로 사관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반드시 그 사실대로 기록하는 직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니, 무엇으로 장래에 신실(信實)함을 전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국조보감》
○ 세조 병술년에 대사헌 양성지(梁誠之)가 소를 올리기를, “외방(外方)의 사고(史庫)는 모두 관사(官舍)에 붙여 두었으므로 매우 엄밀하지 못하여 화재가 염려스러울 뿐 아니라, 또한 뒷날에 외적(外賊)의 피해를 당할 걱정이 있습니다. 살펴볼 관원을 보내어 인가와 서로 떨어진 곳을 가리도록 하되, 전주(全州)는 남원(南原)의 지리산(智異山), 성주(星州)는 선산(善山)의 금오산(金鰲山), 충주(忠州)는 청풍(淸風)의 월악산(月嶽山) 등에 사고를 옮기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 논의를 좇지 않았다. 《눌재집(訥齋集)》
○ 예종조에 민수(閔粹)의 사옥(史獄)이 있었다.
○ 성종이 승지ㆍ주서(注書)ㆍ사관(史官)에게 먹 열 장을 하사하면서, “이것으로써 나의 옳고 그름을 써라.” 하였다. 《국조모열(國朝謨烈)》
○ 홍윤성(洪允成)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있으면서 <시정기(時政記)>를 보니 자기의 죄악이 낭자하게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분하게 여겨 말하기를, “왜종이에 쓴 《강목(綱目)》도 우리나라 사람이 즐겨 보지 않는데, 하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이겠느냐. 네 멋대로 적어보아라. 누가 즐겨 동국(東國)의 역사를 볼 것이랴.” 하였다. 《월정만필》
○ 연산군 무오년에 사화(史禍)가 있었다.
○ 선왕조(先王朝)로부터 입시하였던 사람은 으레 하급(下級) 관원부터 먼저 나가는 것이었다. 중종 기묘년에 검열(檢閱) 신잠(申潛)이 경연에서 사관이 먼저 나가는 것은 사리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아뢰어서 임금이 옳게 여기고 대신에게 의논하여 맨 윗자리에 앉았던 자로부터 먼저 나가기로 규칙을 정하였다. 《동각잡기》
○ 명종조에 안명세(安名世)의 사옥(史獄)이 있었다.
○ 선조 정묘년에 찬수청(撰修廳)에서 대행대왕(大行大王)의 행장(行狀)을 지을 참인데, 대신이 사고(史庫)를 열어서 실록을 상고하기를 청하였더니, 사관이 사고 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서 차자를 올려서 사기(史記)는 보지 말기를 청하였고, 양사에서도 또한 열지 말 것을 아뢰니, 이에 중지하였다.
사필(史筆)을 잡아서 사실대로 바르게 적는 것은 사관(史官)의 직분이고, 훌륭한 사관을 죄주지 않는 것은 조정의 책임이나, 사관이 사초(史草)를 비밀히 간수하는 것은 그의 임무가 아니다. 다만 인군(人君)이 평일에 사책(史冊)을 보게 되면 사관이 죄받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바로 쓰지 못할 것이므로 전세(前世)의 사관이 혹 사초를 숨기고 들이지 않는 자가 있었고, 근래에는 사화가 매우 참혹하여서 사관이 더욱 깊게 숨기는 것을 그 직분인 것처럼 하나 이것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행장을 짓는 것은 보통 때와 견줄 것이 아니니 이런 데에 실록을 상고하지 못한다면 그 사기는 쓸 곳이 없을 것이 아닌가. 뜨거운 국[羹]에 놀라서 부추[薤]를 부는[吹] 자라고 하겠다. 《석담일기》
○ 선조조에 기사(記事)하는 임무를 가장 중하게 여겼다. 김정목(金庭睦)이 가주서(假注書)가 되어 문필(文筆)이 그다지 졸(拙)하지도 않았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근래에 사관이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 본 뜻을 많이 유실하고 글씨는 새 발자국을 그리듯 하니, 가주서를 갈아내고 이 뒤로부터는 주서는 문학이 아울러 우수한 이가 아니면 임명하지 말 것을 특히 명한다.” 하였다. 《지봉유설》
○ 재신(宰臣 참판 이상의 벼슬)이 죽으면 사국(史局)에서 반드시 그 사람의 죽음과 그의 평생 행실의 옳고 그름을 적었다. 얼마 전에 한 사관이 발의하기를, “이 일은 중대하니 여러 사람이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려서 해야 한다.”고 하여, 그뒤로부터는 마침내 재신(宰臣)의 죽음을 적지 아니한 지가 이제 10년이나 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명신 행적(名臣行蹟)이 아주 없어짐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사기가 없음과 같은 것이어서 애석하도다. 이수광(李睟光)이 한림이 되어서 포쇄(曝曬 사고에 간수하였던 사기 책을 볕바램하는 것)할 때에, 사고의 여러 글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전조(前朝 고려를 말함) 때의 비사(祕史)로 쌓여 있는 것이 매우 많았다.《해동금경록(海東金鏡錄)》이란 책이 한 권 있는데, 이제현(李齊賢) 등이 지은 것으로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제법 볼 만하였다. 또 정총(鄭摠)ㆍ이첨(李詹)이 만든 <사기초고(史記草稿)>는 그 사람들의 집에 간수했던 사초(史草)로서 사실을 상세하게 적었고, 천재(天災)와 시정(時政)을 바로 지적하여 숨김이 없었으며, 또 책머리에는 글 쓴 사람의 성명이 바로 적혀 있었다. 그 일이 옛 것에 방불하여 좋았다. 《지봉유설》
○ 임진년 왜변(倭變)에 충주와 성주의 두 곳 사고(史庫)와 내관(內館 춘추관)에 간수하였던 실록은 모두 왜적의 병화를 당하였고, 전주 사고의 한 벌만이 화를 면하였으므로, 바닷길로 실어 오기를 명하여서 행재소에 봉안(奉安)하였다가, 환도한 뒤에 더 박아내기로 맨 먼저 논의하여, 계묘년 7월에 박아내는 일을 개시하였다. 춘추관 관원을 정원 외에 당상관 열 사람을 증원하고 편수관 이하 높고 귀한 벼슬을 지낸 사람이면 인원 수효는 한정하지 않았다. 병오년 4월에 박아내기를 마쳐서 새로 박은 정본(正本) 세 벌과 초본(草本) 한 벌을 본관(本館)과 묘향산ㆍ오대산ㆍ태백산에 나누어서 간수하고 구본(舊本)은 강화에 간수하였다. 《월사집(月沙集)》 실록인출청 제명록 서(實錄印出廳題名錄序)
○ 임진년에 서쪽으로 피란갈 때에 사관 조존세(趙存世)ㆍ박정현(朴鼎賢)ㆍ임취정(任就正)ㆍ김선여(金善餘) 등이 사기 초고를 불태우고 도주하였으므로, 정묘년에서 신묘년에 이르기까지 25년 동안의 사적(事蹟)은 깜깜하게 증거할 곳이 없게 되었다. 《상촌휘언(象村彙言)》
<시정기(時政記)>는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나라에서 야사(野史)를 금하였으므로 사삿집에도 간수한 사고(史稿)가 없어서 20년 동안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정사를 증빙하여 적을 수 없었으니 애석하다. 《지봉유설》
유성룡이 국정을 담당하여 사초 태웠던 사람을 배척하고 조정 반열에 참여시키지 않았더니, 무술년에 조정의 의논이 크게 변하여져서 - 원주 빠짐 - 명 나라에 사은사(謝恩使)를 보낼 때에 사초 태운 그 사람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의망하므로 전교하기를, “이 무리는 사책(史冊)을 불사르고 임금을 버린 채 도망갔던 사람이다. 천조(天朝)에 가는 중로에서 다시 도망칠 폐단이 없지 않을 터이니 의망을 고치라.” 하였다. 《부계기문(涪溪記聞)》
계사년 가을에 한림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그때 사관(史官)으로서 기억에 남은 일을 기록한 것이 혹 있고, 민간에도 야사(野史)로서 이정형(李廷馨)의 잡기(雜記) 같은 것이 있으니, 때에 맞추어서 수집(蒐集)하게 하소서.” 하고, 정승 김응남(金應南)이 역시 찬성하였으나 그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염헌집(恬軒集)》
○ 선조가 승하하여 실록을 편수하게 되었는데, 이항복(李恒福)이 총재관(摠裁官)이 되고 신흠(申欽)ㆍ이정귀(李廷龜)가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 신흠이 아뢰기를, “25년 동안의 사적을 날마다 사실마다의 것을 모두 기록하려고 하면 비록 10년이 걸려도, 다 물어서 성취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의 이름난 정승과 훌륭한 재상의 행적이 사람들의 이목에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 많으니 적어서 제출하게 하여 기록하기를 열전(列傳)과 같이 하면 당시의 사적을 따라서 알 수 있을 것이고, 기리고 폄(貶)하는 뜻 또한 거기에 따라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항복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나누어서 기록하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계축년 화란(禍亂)이 일어나서 신흠이 먼저 추방되고 항복과 정귀도 따라서 파편되었다. 새로 집권한 사람이 역사를 편수하면서 그들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대로 하였으니, 나라는 망하지 않았으나 역사가 먼저 망하였다. 《상촌휘언(象村彙言)》
○ 광해 때에 편수하였던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인조조에 고쳐서 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최명길(崔鳴吉)이 의논하기를, “항간의 말과 사가(私家)의 기록 및 여러 신하의 비문(碑文)ㆍ지문(誌文)ㆍ행장(行狀)ㆍ전기(傳記) 등을 수습하여 절충해서 가필(加筆)하거나 삭제하여 일가(一家)의 글을 만들되, 치우치게 취하거나 버리지 말 것이며, 또 갑자기 정정(訂正)하지도 말고 다만 실적 그대로 갖추어 기재하여 각처 사고에 간수하며 별도로 사국을 창설하거나 관원을 두지 말고, 사마광(司馬光)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홀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찬술하던 예에 의거하여서 대제학 이식(李植)에게 전적으로 맡기면 충분히 완성할 것입니다.대개 자기 집에 있으면서 찬술하게 하면 관원의 늠료(廩料 봉급)를 덜 수 있고, 한 사람이 담당하게 되면 자연히 미루거나 핑계를 대어서 일을 끌 폐단이 없을 것이며, 그 관청의 사소한 종이와 붓을 허비하는 데 불과할 것입니다. 반드시 참작하고 토론하고자 하면 예원(藝苑)의 관원이 본래부터 동료들이니 상번(上番)ㆍ하번(下番) 외에는 모두 일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며, 글을 쓰는 일은 괴원(槐院 승문원)과 옥당에서도 소관(所管)되는 일이니, 그 관원 중에 글씨 잘 쓰는 자를 가려 뽑아서 손을 나누어 끝까지 쓰게 하면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지천집》
○ 동춘추(同春秋) 이식(李植)이 소를 올리기를, “우리 동방에 문물(文物)이 구비되고 인재(人材)가 모인 것이 선조 때보다 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명 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가 왜란을 만나서 국운이 높았다가 무너졌으나, 천심(天心)이 끝까지 돌보아서 나라를 다시 정하였으니, 이는 성인(聖人)의 깊은 근심으로 계도(啓導)한 바여서 사기(事機)의 호전(好轉)함과 외교(外交)의 효과는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사책(史冊)에 기재할 일이 이때보다 더 자세하게 할 것이 없는데도 불행하게도 폐조(廢朝 광해조)가 중간에 끼어서 간신이 왕명을 제 마음대로 하였던 것입니다.기자헌(奇自獻)이 실록청(實錄廳) 총재(摠裁)가 되었는데 이이첨(李爾瞻)ㆍ박건(朴楗) 등이 실록 편수를 전적으로 맡아서, 몰래 옛 기록을 삭제하고 마음대로 왜곡된 붓을 가하여 시비(是非)와 명실(名實)이 일체 거꾸로 되었습니다. 무릇 이첨이 높이던 5, 6사람은 거짓으로 아름답게 꾸며서 여러 성현에게 비겼으며 이 밖에 명신(名臣)ㆍ석보(碩輔)와 도학(道學)의 선비로서 그들과 본래부터 사소한 원한이 있거나 사이가 어긋났던 사람은 추잡하게 매도(罵倒)하고 흉악한 사람들의 죄목을 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말년에 이르러 적었던 유영경(柳永慶)ㆍ정인홍(鄭仁弘) 등의 일은, 감히 일월(日月)의 밝음을 더럽히고 정기(正氣)를 은폐하여 장돈(章惇)과 채경(蔡京)이 선인태후(宣仁太后)를 무함한 것과 동일한 간사한 수법이어서, 진실로 천고에 없는 사가(史家)의 큰 변입니다. 지금 항간의 말과 사삿집 기록이 다 흩어져 없어지기 전에, 문학을 하고 옛일에 박식한 신하를 정해 맡겨서 대략 사마광(司馬光)의 백관표(百官表)와 주자(朱子)의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본떠서 한 벌의 책을 만들고, 조종조(祖宗朝)의 당시의 저술도 아울러 사고에 간수하던 예에 의거하여서 일체로 전하게 하면, 거의 한 시대의 전형(典刑)이 후 세대에 징빙(徵憑)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 숙종 6년 경신 6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정면(鄭勔)이 소를 올려 선조(先朝)의 실록을 고쳐서 편수하기를 청하였는데, 듣건대 그 찬술(纂述)한 바가 심히 초초(草草)하고 간략하다고 하니, 선왕의 아름다운 말씀과 착한 정사를 빠뜨린 것이 없다고 보증하기 어렵습니다.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冑)가 처음에 역사를 편수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먼저 곡절을 물어보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석주가 아뢰기를, “민점(閔點)이 신을 대신하여 문형이 되었는데, 민점은 비록 사국(史局)에 참여하였으나 늦게 나왔다가 문득 교대가 오기도 전에 나가고, 뒤에 이당규(李堂揆)ㆍ이관징(李觀徵)을 당상관으로 증원하였으나 오직 속히 완성하기를 주장하였으므로 6, 7삭(朔)만에 16년 동안의 실록을 완질(完帙)하였으니, 그 초초하고 바쁘게 하였음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춘추관 당상관과 낭관(郞官)에게 실록을 고람(考覽)할 것을 명하고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실록을 찬술함은 사체가 아주 중한데도 그 기재(記載)한 바가 착란되고 소략(疎略)함이 이 같다면 결단코 후세에 전할 수 없으니 고쳐 편수함이 가하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성균관(成均館)

신라에서는 국학(國學)ㆍ태학감(太學監)이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국자감(國子監)이라고 하였다가, 국학(國學)ㆍ성균감(成均監)이라고 고쳤고, 얼마 안 되어서 감(監)을 고쳐서 관(館)이라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해서 성균관을 설치하여 유생을 교도(敎導)하는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아울러 문관을 임용하였으며 그 소속으로 정록청(正錄廳)을 부설하였다.
대사성(大司成)ㆍ좨주(祭酒)ㆍ악정(樂正)ㆍ직강(直講)ㆍ전부박사(典簿博士)ㆍ순유박사(淳諭博士)ㆍ진덕박사(進德博士)ㆍ학정(學正)ㆍ학록(學錄)ㆍ직학(直學)ㆍ학유(學諭)의 직제가 있었는데,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을 제조로 삼아 4품 이하의 관원과 유사(儒士)를 모아서 경사(經史)를 강습하게 하였다.
뒤에 직제를 고쳐 정하여 지사(知事) 한 사람, 대제학이 으레 겸하였다. 동지사(同知事) 두 사람, 다른 벼슬아치가 겸하였다. 대사성 한 사람, 좨주(祭酒) 두 사람, 태종이 사성(司成)이라고 고쳤다. 사예(司藝) 세 사람, 직강(直講) 네 사람, 전적(典籍) 열세 사람, 박사(博士) 세 사람, 학정(學正) 세 사람, 학록(學錄) 세 사람, 학유(學諭) 세 사람, 겸 박사(兼博士) 한 사람 의정부 사록(司錄)이 겸하였다. 으로 정하였다가 뒤에 다시 겸 학정ㆍ겸 학록ㆍ겸 학유는 폐하고,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이하와 사학 훈도(四學訓導)로서 겸하게 하였다.
태종이 좨주를 고쳐서 사성(司成)이라고 하고, 뒤에 사성ㆍ사예(司藝) 각 한 사람씩을 감원하였다.
○ 연산군이 박사 이하의 관직을 폐지하여 다른 관청에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중종 초년에 복구하였다.
○ 처음에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학교가 오랫동안 폐지되었으므로 새로 성균관을 창설하여, 이색(李穡)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고, 거유(巨儒) 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ㆍ정몽주(鄭夢周)를 뽑아서 학관(學官)을 겸하게 하였다. 《명신록》
고려 풍속이 부도(浮屠 불교)를 일삼았으므로 학교가 쇠퇴하고 폐해졌다. 지봉(芝峰)이 말하기를, “거란(契丹)의 난리가 있은 뒤로부터 학교가 황폐하였다.” 했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건의하여 학전(學錢)을 증가하고, 중국에 사람을 보내 오성(五聖)과 십철(十哲), 70자(子)와 고당생(高堂生) 이하 모든 유현(儒賢)의 화상을 구해 와서 제사하게 하고, 충렬왕(忠烈王)때 제기(祭器)와 예악(禮樂)에 소용되는 물건을 갖추고 경사(經史)와 백가서(百家書)를 구비하였다. 문학사(文學士)인 이산(李㦃)ㆍ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를 교수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안향이 일찍이 학궁(學宮)에 쓰기를,

향과 등불 밝은 곳곳마다 부처에게 기도하고 / 香燈處處皆祈佛
퉁소와 피리소리 집집마다 귀신에게 제사지내네 / 簫管家家盡祀神
홀로 한 칸 공부자의 사당만이 / 獨有一間夫子廟
봄풀이 뜰에 가득한데 고요하게 사람 없네 / 滿庭春草寂無人

하였다. 개연히 사문(斯文 유교의 학문)을 부흥시키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서 녹봉(祿俸)을 희사(喜捨)하고, 노비 백 명을 성균관에 바쳤다. 《소문쇄록》
안향이 죽은 뒤에 문묘에 배향하고 국전(國典)으로 제사를 지냈다. 충숙왕(忠肅王) 6년 친손ㆍ외손과 제사를 받드는 종자(宗子 종손)가 10대(代)를 연달아 과거에 올랐다. 《소문쇄록》
지금 성균관에서 부리는 자들은 모두 안향의 노비(奴婢)이다. 서로 전하여 옛 주인을 경모하며, 안향의 자손이 입학하면 노비들이, “우리 주인이다.” 하였고, 관의 관원도 다른 학생과는 달리 접대하였다. 두 계집종이 시녀(侍女)로서 궐내에 들어갔는데 태종이 우연히 본관(本貫)을 묻자 성균관의 노비적(奴婢籍)이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옛 사람이 희사한 것을 나는 능히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그들을 빼앗겠는가.” 하고 곧 내보낼 것을 명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태조 6년 정축 3월에 태학(太學)을 건축하려고 서울 동북쪽 모퉁이 숭교방(崇敎坊) 에 터를 잡고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에게 감독할 것을 명하였다. 무인년 가을 7월에 성균관이 낙성(落成)되었고 명륜당(明倫堂)은 문묘(文廟) 북쪽에 건립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문묘비(文廟碑)
권근(權近)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였는데, 대사성을 겸대하는 것은 권근으로부터 비롯되었다.
○ 정종 경진 년에 문묘에 화재가 있었다.
○ 태종 정해년에 옛터에다 다시 문묘 건축할 것을 명하여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과 중군총제(中軍摠制) 박자청(朴子靑)이 역사를 감독하였으며 4개월이 지나서 완성되었다. 문묘비
전답 1만여 묘(畝)와 노비(奴婢) 3백 명을 성균관에 하사하였다.
○ 태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반궁(泮宮 성균관)에 유학(遊學)하여 이로부터 벼슬길에 올랐다. 신석조(辛碩祖)의 기문(記文)에, “묘효(廟號)가 지금도 벽 위의 제명기(題名記)에 있다.” 하였다.
○ 반궁에 옛날부터 푸른 화종자(畵鍾子)가 있었는데 여러 유생이 사용하는 그릇이었다.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에 반궁에 유학하면서 이것을 매우 사랑하였다 왕위에 올라서는 본관(本館)에 명하여 갑(匣)을 만들어서 간수하게 하고 여러 번 주식을 하사하여 잔치하게 하니, 이로 인하여 본관의 보물이 되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지러졌다, 세종 29년 에 대사성 정인지(鄭麟趾)가 그 사유를 아뢰었더니 임금이 곧 궁중의 흰 술두루미 두 쌍과 백종자ㆍ화종자 각 한 쌍씩을 하사하고 또 태학과 사학(四學)에 술을 내려주었다. 학관(學官)이 여러 유생을 거느리고 사은하였으며, 우의정 하연(河演)은 경(卿)ㆍ사(士)와 더불어 명륜당(明倫堂)에 모여서 그릇 하사한 일을 기념하는 잔치를 베풀고 여러 유생에게 모두 시 짓기를 시험하여 칭송(稱頌)하였다.
○ 태종 기축년에 성균관에 전교하기를, “여러 유생이 읽는 경서를 치부(置簿)하여 아뢰라. 내가 여러 유생을 광연루(廣延樓) 아래 나오게 하여 문신(文臣)을 시켜 상세하게 강론을 더하려 한다.” 하고, 또 이직ㆍ조박(趙璞)ㆍ유관(柳觀)ㆍ이첨(李詹)에게 성균관에 가서 여러 유생을 교훈(敎訓)하기를 명하였다. 《국조보감》
○ 세종조에 김구(金鉤)ㆍ김반(金泮)ㆍ김말(金末)이 윤상(尹祥)의 뒤를 이어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인재를 길러내어 효과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관중삼김(館中三金)이라 하였다. 세종조 명신조에 상세하다.
○ 세종조에 유생이 무당[巫]을 쫓았다. 세종조 조에 상세하다.
○ 문종조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니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하다.” 하였다. 이어 관(館)ㆍ각(閣) 여러 신하에게 윤번으로 성균관에 나아가 날마다 여러 유생과 강론(講論)하기를 명하고, 자주 주식(酒食)을 하사하였다.
○ 세종조에 강석덕(姜碩德)이 과거(科擧)를 거치지 아니하고서 대사성이 되었다. 《필원잡기》
○ 성종 2년 신묘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금 조정에 늘어서 있는 자는 모두 부귀한 집의 자제로서 배우지 못하여 학식이 없다. 성균관 유생 중에는 반드시 경전에 통달하고 시무(時務 당시의 정무)를 알아서 재간이 임용할 만한 자가 있을 것이니, 성균관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성균관에서 진사 안양생(安良生)을 천거하였더니, 임금이 높은 품계로 등용하였다.
재(齋)에서 천거하는 법이 학령(學令)에 기재되었는데 성종 2년에 성균관에 별도로 어진 선비를 천거하기를 명하니 이로부터 천거하는 법이 더욱 중하여졌다. 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서경덕(徐敬德)은 성균관에서 천거한 중에서 가장 저명(著名)한 사람이고, 선조 무진년에 조목(趙穆) 역시 성균관에서 천거하여 벼슬에 임명되었다 한다.
○ 성종 신묘년에 임금이 성균관에 가서 면복(冕服)과 규장(圭璋)을 갖추고 태뢰(太牢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는 것)로써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 제사하였다. 명륜당에 임어하여 관의 관원과 유아(儒雅)하고 노성(老成)한 사람을 인견하면서 경서를 펴 어려운 대목을 질문하였다. 강하기를 마치고 임금이 친히 꿇어앉아서 그들에게 비단을 주었으며 여러 유생에게는 주찬(酒饌)을 베풀었다.
○ 성종 신묘년에 성균관 생원 권자후(權子厚) 등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국가에서 도읍을 정하던 초기에 반수(泮水)를 파서 옛 제도와 꼭 같이 하였는데, 얼마 전에 궁궐 담을 더 넓힘을 인해서 반수가 없어졌습니다. 신 등이 일찍이 소를 올려 청하였더니 세조께서 전교하시기를, ‘학궁에 반수가 없음은 진정 궐전(闕典)이다.’ 하시어 신 등은 목을 늘이고 눈을 닦으면서 임금의 명(命)을 기다려 왔습니다. 궐전을 보수ㆍ거행함은 바로 오늘에 있사오니 반수를 다시 파서 옛 제도를 회복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성종조에 대사성 안침(安琛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손)이 여러 유생의 식당(食堂)이 더럽고 비좁음을 근심하여 고쳐서 넓히고, 또 학궁이 여염집과 함께 서로 어지럽게 섞여 있음을 근심하여 동구(洞口)의 민가를 매수하여 철거하였는데 서쪽 반수(泮水)를 한정으로 하였다. 《명신록》
○ 성종 정유년 8월에 임금이 친히 석전(釋奠)에 참여한 뒤에 이어 대사례(大射禮)를 거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교지를 여러 도에 반포하여서 여러 고을에 음사례(飮射禮)를 거행하게 하였다.
○ 성종조에 안윤덕(安潤德)이 계묘년 과거에 올라 승문 권지(承文權知)에 보임되었는데, 조정의 논의가 공은 경학에 조예가 깊으니 여러 유생의 스승됨이 마땅하다고 아뢰어서 성균학유(成均學諭)에 이임(移任)되었다가 올려서 박사에 이르렀다. 《호음집(湖陰集)》
○ 성종 15년 갑진에 성균관 학생에게 밭 4백 결(結)을 하사하였는데 시골 학교에는 차등이 있었다. 《고사촬요》
○ 23년 임자에 성종이 학궁에 가서 문묘(文廟)에 참배하고 대포의 예[大酺禮 술과 음식을 크게 베푸는 예식]를 거행하려 하는데 예조 판서 노공필(盧公弼)이 아뢰기를, “명륜당 뜰이 넓지 않아 마땅히 하련대(下輦臺)를 이용할 것이나, 또한 협착해서 거행하기 어렵습니다. 동(東)ㆍ서(西) 반수(泮水) 안쪽을 모두 치장하여 넓히고 다리를 더 놓아 사람들이 왕래(往來)할 수 있게 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날에는 임금이 하련대에 임어(臨御)하여 잔치를 하사하니 백관과 유생이 꽃을 나누어 모자에 꽂았으며, 사신(詞臣)에게 악장(樂章)을 고쳐 지어서 군신이 서로 즐기는 악장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이날 모인 유생의 수가 수천 명이었다.
성현(成俔)이 대포송(大酺頌)을 지었는데,

하늘이 거룩한 임금을 낳아서 우리 동방을 다스리게 하였다 / 天生聖主撫我東方
유술을 높이고 숭상하시며 더욱 학교를 중히 여기셨다 / 尊崇儒術尤重黌庠
장엄한 저 학교는 예의의 광장이었다 / 翼翼黌庠禮義之場
절후는 중추인데 날도 좋고 때도 좋았다 / 時維仲秋日吉辰良
난여가 왕림하시어 몸소 공자를 뵈었다 / 鑾輿戾至躬謁素王
친히 석채례를 행하시니 변과 두가 향기롭구나 / 親釋蘋蘩籩豆苾芳
이에 예관에게 명하시어 잔치를 방에 개설하였다 / 爰命禮官開宴于坊
팔진미가 차려지고 꽃 꽂은 모자가 휘황찬란하도다 / 八珍交錯苑帽輝煌
이에 사신에게 명하시어 나누어서 사가를 짓게 하셨다 / 爰命詞臣分製歌章
풍악은 소무를 아뢰는데 궁ㆍ상으로 화답하였다 / 樂奏韶舞協之宮商
임금께서 하신 말씀 아아 명성은 사업으로 인해 드러난다 / 王曰嗚乎名由業彰
배움은 사업에 근본이 되니 배우지 않으면 담벼락에 맞닿은 것과 같다 / 學爲業本不學面墻
아아 너희들 유사야 어찌 힘쓰지 아니할 것인가 / 吁爾儒士其敢不覆
몸을 세워 이름을 날리라 이에 성하고 창성하리라 / 立身揚名乃熾而昌
임금께서 하신 말씀 아아 나라가 태평하고 시절은 풍년이로다 / 王曰嗚呼時和歲穰
나는 놀이를 탐락함이 아니며, 나는 게을러 일을 버려둠이 아니다 / 我非耽樂我匪怠荒
너희들 유사는 내가 준 술잔을 다 마셔라 / 嗟爾儒士其盡我觴
사문과 함께 이 즐거움을 같이 하리라 / 欲與斯文同此樂康

하였다.
○ 성균관은 교훈(敎訓)하는 것을 전적으로 관장하였다. 국가에서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관의 관원으로서 겸무하게 하고, 항상 유생 2백 명을 양육하였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아뢰어서, 존경각(尊經閣)을 건립하고 경적(經籍)을 많이 인출(印出)하여 간수하였다.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아뢰어서 전사청(典祀廳)을 지었으며, 성현(成俔)이 아뢰어서 향관청(享官廳)을 세웠다. 그뒤에 성전(聖殿) 동(東)ㆍ서무(西廡)와 식당(食堂)을 고쳐 짓고, 또 쌀 3백여 섬과 베[布] 5백여 필을 하사하였으며, 또 학전(學田)을 하사하여 관중(館中)의 수용(需用)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극중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받아 쌀과 베를 많이 받았으니, 주식(酒食)을 갖추고 조정의 문사(文士)와 여러 유생을 모아서 사문(斯文)의 성사(盛事)로 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성종이 윤허하였다.이에 문사를 명륜당에 크게 모았는데, 음식이 극히 정결하였으며, 승지가 어주(御酒) 및 어주(御廚 수라간)의 진미(珍味)를 나르는데,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계축년 《문헌비고》에는 임자년으로 되어 있다. 가을에 임금이 성균관에 가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하고 장전(帳殿)을 꾸민 하련대(下輦臺)에 물러나와 있으니 문신의 재신(宰臣)ㆍ추신(樞臣)이 전내(殿內)에 입시하였고 당하관 문신은 뜰에 나누어서 차례로 앉았으며, 8도의 유생이 구름처럼 서울에 모였는데 무려 만여 명이었다. 위아래 사람이 모두 머리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는데 새로 제정한 악장(樂章)을 연주하여 흥을 돋구었다.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음식을 베풀었으며, 임금도 자주 내관(內官)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취하고 배불리 먹었으니 예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용재총화》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성균관은 인재를 양육하는 곳인데 읽을 만한 서적이 없으니 이것이 큰 흠입니다. 마땅히 경서와 제자서(諸子書)와 사서(史書)를 인쇄해서 집을 지어 간수하고 여러 유생이 마음대로 뽑아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명회는 스스로 집을 건립하는 비용을 내어서 도왔다. 어세겸(魚世謙)이 지은 한명회의 비문ㆍ《동각잡기》
○ 창경궁(昌慶宮) 집춘문(集春門)이 태학(太學) 서쪽에 있는데 매우 가까웠다. 세간에 전하는 말로는 조종조에서 가끔 간편한 가마를 타고 대학에 가서 경전을 강론하였다 한다. 성종이 하루는 춘당대(春塘臺)에 임어하였다가 집춘문으로 나와서 반궁에 있는 유생들을 불러서 경전을 강론하고 과거를 시켰는데, 지금까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한다. 《지봉유설》
○ 성종조에 무당이 내지(內旨 왕비의 밀지)라고 칭탁하고서 반수(泮水) 안에서 기도하는 제사를 지내니, 여러 유생이 모두 분개하고 미워하면서도 꾸지람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태학생 안팽명(安彭命)이 홀로 쫓아버렸다.
○ 이목(李穆)이 무당을 매질하여 쫓았다.
○ 성종조에 동지관사(同知館事) 윤탁(尹倬)이 강당 앞에 나무 두 그루를 마주 보게 심고 지금 명륜당 뜰에 있는 두 은행나무 ‘뿌리가 무성하여야 가지가 뻗는다’는 뜻을 여러 유생에게 깨우쳐서 그 근본에 힘쓰게 하였다.
○ 성균관에 거재(居齋)하는 유생이 상재(上齋)ㆍ하재(下齋)와 동재ㆍ서재에 각각 50명씩 총 2백 명이 있는데, 하재에는 사학(四學) 유생으로서 재주있는 자를 뽑아서 충원하였고, 동재ㆍ서재에는 각각 3명씩 자신의 식량조로 쌀을 바치게 하고 반찬만 관에서 공급하고서 이것을 ‘사량(私糧)’이라고 하는데, 최항(崔恒)은 사량으로서 성균관에 있었다. 이해 별시(別試)에 삼관(三館 홍문관ㆍ예문관ㆍ성균관)에서 사량 먹는 유생은 응시하지 못하도록 거부하므로 최항(崔恒)이 표(表)를 올리기를, “먹는 것은 비록 공ㆍ사의 분간이 있으나 학문 또한 피차(彼此)의 다름이 있습니까.” 하여, 시험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험장에서 늙은 상사(上舍 생원과 진사)가 조롱하기를, “어느 곳의 가죽 불알 자식이 이같이 덤비느냐.” 하므로, 최항이 답하기를, “네 아비 불알은 쇠냐.” 하였는데, 마침내 장원으로 뽑혔다. 《용재총화》 ○ 최항이 세종 갑인년에 장원하였다.
○ 중종 갑오년에 임금이 학궁에 행차하여 친제(親祭)하고 대사례(大射禮)를 거행하였다. 예를 마친 다음 많은 신하와 잔치하였으며, 이튿날에는 또 유생을 대궐 뜰에서 잔치하게 하였다. 당초에는 임금이 백관과 유생에게 함께 잔치를 내리고자 하였는데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신하들에게만 내리었고, 유생에게는 대궐 뜰에서 잔치를 내렸던 것이다. 그때 분란하여 편리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자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연산(燕山)이 이 예를 거행하면서 유생은 공궤(供饋)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매우 옳지 못하게 여겼었다. 유생이 비록 많으나 공궤하여야 한다.” 하였다.
○ 중종 계묘년에 영남 유생 배신(裵紳)ㆍ이제신(李濟臣)이 태학에 유학하면서 의논하기를, “모범을 보이는 곳에 어찌 어른과 아이의 차례가 없게 할 것인가. 마땅히 나이대로 앉을 것이다.” 하여 드디어 동(東)ㆍ서(西)ㆍ하재(下齋)에 시행하고, 또 미루어서 여러 상사(上舍)에게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많이 즐겨하지 않았다. 이에 여러 유생이 사장(師長)에게 질문하였더니 대사성 이준경(李浚慶)과 사성 송세형(宋世珩)은 모두 옳다고 하였는데 유독 지성균 성세창(成世昌)만 옳지 않게 여기면서, “공자의 문하에서도 나이대로 앉았던가.” 하여, 그 법이 드디어 시행되지 않았다.
○ 중종조에 부제학 이행(李荇)을 대사성에 이임(移任)하고 전교하기를, “부제학으로서 대사성으로 삼은 것은 전에는 없던 예이나 사람 양성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으로 특히 제수한다.” 하였다.
○ 중종조에 김정국(金正國)이 이조 낭관이 되었는데, 묘당(廟堂 의정부)에서는 성균관에서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으로써 친혐(親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 안국(安國)을 사성(司成)으로 이임(移任)시켰다. 《명신록》
○ 명종 8년에 임금이 학교의 규율이 쇠폐(衰廢)되고 해이(解弛)된 것을 걱정하여 주자(冑子)를 교육하는 직임을 가리었다. 대신이 당하관이라도 문학과 덕행이 있는 자는 임용하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부응교(副應敎) 이황(李滉)을 발탁하여 대사성에 임명하였으니, 당하관에서 바로 대사성에 임명된 자는 옛날에는 드문 일이었다. 뒤에 유희춘(柳希春)과 우성전(禹性傳) 역시 당하관으로서 발탁ㆍ임명되었다.
○ 부자 상인이 학전(學田 성균관에 소속돤 땅)을 침범하여 경작한 지 여러 해 되었으나 아무도 묻지도 않았는데, 학유(學諭) 유중영(柳仲郢)이 문적(文籍)을 조사하여 추심하였다. 중영은 양현고 직장(養賢庫直長)을 겸하였다. 그 상인이 호조에 송사하였는데, 판서가 상인의 뇌물을 받고 편들어 중영을 불러서 사실을 물으므로 중영이 변백(辨白)하여 대답하고 이어서, “이 밭은 실상 관가에서 선비를 기르는 밑천인데, 공(公)이 기어코 빼앗아서 부자 상인에게 주고자 함은 무슨 뜻이오?” 하였더니, 판서가 매우 노하여 거짓말로 꾸며 아뢰어서 중영이 파직되었으나 밭은 마침내 학궁에 귀속(歸屬)되었다. 《서애집》 비문
○ 선조 경인년에 임금이, 성혼(成渾)을 대사성으로 삼아 인재를 성취시키는 책임을 부탁하고자 한다고 전교하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였으나, 의논이 통일되지 않아 드디어 중지되었다. <연보>
○ 반시(泮試)와 절일제(節日製)에 유생이 뜰에서 읍(揖)하는 것은 지관사(知館事)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과거제도에 상세하다. 《죽창한화(竹窓閒話》
○ 선조조에 3정승이 6조 판서를 거느리고 태학에 들어가서 여러 유생을 시험하였다. 유생들이 뜰 아래서 절하는데, 진사 우복룡이 홀로 읍만 하고 절하지 않으므로 예관(禮官)이 불러서 책망하니 복룡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친림하신 예가 아니니 여러 유생이 뜰 아래서 절함은 부당합니다. 세조께서 정승이 되었을 때부터 처음으로 이 예를 행하였으나, 그뒤에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가 예가 아니라고 하여 폐지하였던 것입니다. 남곤(南袞)이 정승이 되어서는 일찍이 선비들을 많이 죽였으므로, 유생들이 자기를 비방하는 것을 성내어서 드디어 그 절하는 것을 회복했던 것이나, 소생은 그것이 옳지 못하다 생각되므로 감히 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착하다고 칭찬하고 읍하는 예로써 하기를 정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선조조에 태학 유생들이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는 소를 올리기 위하여 차례대로 대궐문 밖에 앉아 있었다. 그때, 원종(元宗)께서 친왕자(親王子)의 높은 신분으로서 말을 탄 채 그 앞을 지나갔다. 선비들이 그 종자(從者)를 벌주었더니, 임금이 듣고 기뻐하기를, “선비들의 기풍은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니, 나는 그저 선비를 배양할 뿐이다.” 하였다.
○ 성균관 정록청(正錄廳)은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입직한 상관(上官)이 당시 정사의 큰 일을 기록하고, 그 책을 ‘현책(玄冊)’이라고 하여 궤 속에 간수하였는데, 궤 문을 열고 닫으며 책을 출납하는 것이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 모르나 왜란 뒤에는 폐하였다. 《지봉유설》
○ 문과(文科) 식년(式年) 초시(初試)에 성균관에서 생원ㆍ진사로서 원점(圓點) 3백이 된 사람 중에서 50명을 뽑게 하니, 대개 진사들이 거관(居館)하기를 권장한 것이었다. 양현고(養賢庫)를 관(館) 곁에 설치하고, 별도로 쌀과 콩을 저축하여서 매일 2백 명의 공궤(供饋)를 제공하는 것인데 생원ㆍ진사들이 거관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까닭으로, 또 원점이 3백이 되어야 응시(應試)하게 하는 법을 세웠던 것이다. 원점 3백이 된 자는 관시(館試)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십이 된 자는 한성시(漢城試) 및 향시(鄕試)에 응시하게 하였으니, 그 배양하고 권장하는 뜻이 지극하였다.그러나, 이른바 거관이란 것은 밤낮으로 성균관에 거처하면서 선성(先聖)을 시위(侍衛)하고 글 읽기에 힘쓰는 것인데, 지금 거관이라는 것은 명칭만 있지 실상은 없고, 한갓 관시에 응시할 계책으로 하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다음 책자(冊子)에 서명하면, 그 이름을 계산하여서 장부에 적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한 번도 성균관에 유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 있다가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책자에 서명한 뒤에는 곧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런 것도 거관이라고 할 것인가. 임진년 난리 뒤에는 식년 과거를 거행하지 아니하고 원점 또한 폐지하였으니, 더구나 개탄(慨歎)스럽다. 《청천견한록(聽天遣閒錄)》
인조 을해년에 오활한 유생들이 소를 올리느라고 소동을 피우므로 관시(館試)를 없앴다.
○ 춘추(春秋)로 석전제(釋奠祭)를 마친 뒤에 문(文)ㆍ무(武) 대소관원을 모아서 음복례(飮福禮)를 거행하였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 계자(階資)에서 당상관 3품까지는 명륜당 위에서 의자에 앉고, 당하관 3품에서 9품까지는 뜰에서 긴 평상에 앉는다. 간단한 음식 탁자가 설치되면 모두 탁자 앞에 와서 앉았다가 차례대로 엎드렸다 일어나 음복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음복이 끝나면 음식 탁자와 의자 및 긴 평상을 철거하고, 본래 자리에 되돌아가서 편하게 앉았다가 각기 큰 상을 받는다.음식이 극히 풍족하였는데, 모두 본관(本館)에서 준비한 것이었다. 당상관ㆍ당하관이 각각 술을 서로 권하고, 또 잘 마시는 자를 가려서는 특별히 큰 잔을 주기도 하여 한껏 취하면 끝나는 것이다. 봄ㆍ가을 독제(纛祭 독에 지내는 제사) 뒤에도 훈련원에서 음복하기를 석전(釋奠)에서 하는 예와 꼭 같이 하였다. 관악(官樂)과 광대와 기생을 하사하여 노래와 춤을 성대하게 베풀어 한껏 즐기고서 파하는 것이었는데, 임진왜란 뒤에는 아울러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았다.
○ 어떤 사람이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유생이 관(館)을 비우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이황이 말하기를, “간관(諫官)의 책임이 있는 자가 그 임금에게 간하여도 들어주지 아니하면 가는 것도 옳으나, 벼슬이 없는 선비는 본래 간할 책임이 없는데, 소장을 올려서 탄핵함은 그 직분이 아니다. 만약 일이 종사(宗社)의 존망(存亡)과 우리 유도(儒道)의 성쇠(盛衰)에 관계되어 의리상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면 또한 소장을 올려서 논할 뿐이다. 그 듣고 듣지 않음은 임금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그 말을 들어주어서 청한 대로 되기를 기대할 것인가.성균관과 사학(四學)에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소장을 올리고 청한 대로 안 되면 서로 거느리고 관(館)을 비우며, 관을 비워도 아직 청한 대로 안 되면 서로 거느리고 관에 돌아오는데, 가는 것이 이미 도리가 아니고, 돌아오는 것 또한 명분이 없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또, “관을 비우는 짓이 어느 때에 시작되었습니까.” 하니, 이황이 말하기를, “사서(史書)에 나타난 것으로써 말한다면, 송 나라 때에 권당(捲堂)한 것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관을 비우는 짓은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 선조조에 성균관 유생이 나이 차례로 앉은 규약을 만들었는데, 일반이 많이 옳지 않게 여겼다. 이해수(李海壽)가 이이(李珥)에게 말하기를, “나이대로 앉음이 성균관 안에서는 마땅한 것이 아니다. 과방(科榜)에서 장원한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또한 예속(禮俗)인데, 어찌 장원의 위에 앉을 것인가.”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장원의 높음을 방회(榜會)에서 시행함은 가하거니와 성균관은 곧 인륜을 밝히는 곳이니, 장유(長幼)의 질서를 문란할 수 없으며, 또 장원의 높음이 왕세자(王世子)의 높음과 어떠한가. 옛날에 세자가 관에 입학하여도 오히려 나이대로 앉았으니, 장원은 논의할 바 아니다.” 하였다. 《석담일기》
○ 광해군 신해년에 태학의 여러 유생이 사건으로 인해 분격하여 관을 비우고 나갔다. 한 유생이 시를 짓기를,

엄한 서리 4월에 정아에 내렸구나 / 嚴霜四月下菁莪
다만 이 미치고 어리석었을 뿐 어찌 다른 뜻이 있으랴 / 只是狂愚豈有他
반궁을 돌아보니 향불 꺼졌는데 / 回首泮宮香火滅
행단이 쓸쓸하고 햇빛도 기우네 / 杏壇寥落日初斜

하였다. 《지봉유설》
○ 인조 원년 6월에 임금이 조정 신하 중에서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가려서 교화(敎化)를 밝히고 선비의 기풍을 바르게 하려고 하였으나 합당한 사람이 없어서 묘당(廟堂)에 묻기를, “옛날에도 다른 실직(實職)에 있으면서 대사성을 겸한 자가 있었는가.” 하니, 대신이 아뢰기를, “정인지(鄭麟趾)ㆍ서거정(徐居正)이 이를 겸하였고, 그 뒤에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므로, 이에 정엽(鄭曄)을 겸대사성(兼大司成)으로 삼았다.
정엽의 품계가 숭정(崇政)이 된 뒤에도 그대로 대사성을 겸하였더니, 이조에서 전례에 의거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비로소 체차하기를 윤허하였다. 《상촌집(象村集)》
겸대사성 정엽이 소를 올리기를, “지금부터 별도로 규칙을 세워서 원점의 수효를 정하고, 모든 과거는 모두 원점으로써 응시하기를 허락한다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서 재주와 학식을 겸비한 선비가 모여들기를 바랄 수 있고, 또 조정에서 사람을 뽑는 데도 반드시 정선(精選)이 될 것입니다. 원점을 계산하여 응시하기를 허락하는 것은 신이 새로 시작하자고 함이 아니고, 이것은 실상 선조(先朝)에서 이미 시행하였던 규칙입니다.” 하였다.
○ 7년에 조익(趙翼)을 겸대사성으로 삼았다.
○ 김덕함(金德諴)이 대사성이 되었을 때에, 유생들이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므로, 인조가 근시(近侍)에게 어온(御醞 궁중에서 빚은 술)을 들여보내서 벌주(罰酒)를 먹이고 효유(曉諭)하기를, “선비로 세 가지 섬김이 있는데, 스승과 제자의 분의(分義)가 중(重)하다. 하물며, 나라에서 스승으로 정한 사람이겠느냐.” 하였다. <지장(誌狀)>
○ 인조 갑술년에 이조에서 대사성 이명한(李明漢)을 부제학 망(副提學望)에 첫 번으로 추천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사성은 옮기지 말아서, 유생의 스승으로서의 임무를 중하게 하라.” 하였다. 《백헌집》
○ 인조가 특별히 성균 사업(成均司業)이라는 직제를 설치하여서 김장생(金長生)을 거기에 맡겼다.
○ 성균관은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우대하였던 까닭으로 순라군과 금부(禁府) 이속(吏屬)이 모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인조조에 한 군교(軍校 장교)가 밤에 순라를 돌다가 반촌(泮村 성균관 구역)에 들어갔는데, 임금이 듣고 그 군교를 치죄하기를 명하였다.
○ 효종조에 특별히 좨주(祭酒)를 두어서 품계를 따지지 않고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로 좨주를 삼았다. 또 사업이 있었는데, 선우협(鮮于浹) 등으로 사업을 삼았다. 《조야기문》
○ 효종 6년에 은잔[銀杯] 두 벌을 성균관에 하사하고 수찰(手札 친필 편지)을 관의 관원과 유생에게 보냈는데, “옛 법에 따라 특히 은잔을 하사한다. 사치하게 함이 아니라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함이요, 술 마시기를 장려함이 아니라 화합하게 하고자 함이다. 너희들 스승과 유생은 그 의의를 밝혀서 서로 공경하여 해태(懈怠)하지 말라.” 하였다.
○ 효종 9년 무술에 여러 유생이 붕당(朋黨)의 색목(色目)으로 식당에서 갈라 앉았다. 정언(正言) 김익렴(金益廉)이 장무관(掌務官)으로서 식당을 감시하던 자를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사장(師長)의 책임이니, 신칙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고, 대사성 조한영(曺漢英)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후원(李厚源)이 이이(李珥)의 논의를 좇아서 나이 차례로 앉는 제도로 하기를 청하여 임금이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대신이 어렵게 여겨서 그 일은 마침내 정지되었다.
현종 4년에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의 말로 인하여 나이 차례로 앉게 하는 것을 비로소 건의(建議)하여 시행하였다.
숙종 무오년에 이원정(李元禎)이 대사성이 되었는데, 대학에서 나이 차례로 앉게 하는 것은 이이(李珥)의 의논이고, 옛 예가 아니라 하여 드디어 나이 차례를 폐지하고, 고쳐서 과거 방 차례로 앉게 하였다. 임술년 10월에 대사성 조지겸(趙持謙)이 임금에게 아뢰어서 다시 나이 차례로 시행하였고, 경오년에 이봉징(李鳳徵)이 또 고쳐서 방 차례로 앉기로 하였는데, 정축년에 이인환(李寅煥)이 다시 나이 차례로 시행하기를 청하여 임금이 그대로 정제(定制)하기를 명하였다.
○ 현종 4년에 민정중을 겸대사성(兼大司成)으로 삼았다.
○ 현종이 이원(尼院 여승이 있는 절)을 철거하고, 그 재목과 기와로 비천당(丕闡堂)ㆍ일양재(一兩齋)ㆍ벽입재(闢入齋)를 건축하였다. 승교(僧敎)조에 상세하다.
○ 대학에는 학령(學令)이 있는데, 대학성전(大學成典)에 기재되었다. 선조조에 이이가 거재(居齋)하는 자는 모구 학령에 의거하기를 청하였다. 현종조에 민정중이 소를 올려서 그 제도를 논의하였다. 또 《대전(大典)》에는 학령에 의거한 권선징악(勸善懲惡)하는 글이 있는데, 대개 국초(國初)에 정한 법이다.
○ 숙종 갑인년에 가주서(假注書) 유수방(柳壽芳)이, 유생들에게 벌(罰)을 받은 몸이라고 하여 습의(習儀)에 참석하지 않았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병인 연간에 남학(南學) 유생들이 형조 좌랑 맹세형(孟世衡)을 유적(儒籍)에서 제명하였으므로, 인조께서 그 유생에게 역(役)을 정하도록 특명하였다가 대신의 차자로 인하여 중지하였고, 또 기해 연간에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승문원 정자 김하량(金厦樑)을 유적에서 제명하므로, 대간에서, ‘유생들이 조관(朝官)을 유적에서 제명하는 것은 실로 막중한 거조(擧措)이므로, 이런 버릇을 그대로 따른다면 조관의 앞길이 통하고 막히는 것이 유생의 손에 매이게 되니, 이 버릇을 통절하게 고쳐서 뒷날의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제, 유생들이 영(令)을 어기고 벌을 시행하였으니, 본관(本館 성균관)에게 빨리 벌을 없애게 하고 이 뒤에도 금단(禁斷)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술이(述而)》
○ 무오년 4월에 김석주(金錫冑)가 소를 올리기를, “국조의 고사(故事)에 원자(元子)와 세자(世子)가 입학하면 항상 지관사(知館事)를 박사관(博士官)으로 삼았는데, 박사관이란 옛날의 태학에 제자원(弟子員)에게 보(補)한 자의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단을 광주리에 진설하고 포육(脯肉)을 반에 설시(設施)한 것은 스승을 뵙는 폐백이었고, 그가 ‘저는 선생에게 배우기를 원합니다.’라고 한 것은 스승에게 청하는 말이었습니다. 대개 임금의 아들과 세자의 높음으로도, 나이가 차서 경서(經書)를 배우는 날에는 오히려 높여 선생이라고 하였는데, 저들은 하찮은 유생으로서 학교에 발자취를 들여놓고서는 이에 스승으로 삼지 않겠다 하니, 이것이 과연 어느 전고(典故)에서 나왔으며 어느 기록에 나타난 것입니까.” 하였다. 《술이》 대제학 겸 지관사(兼知館事)를 논한 소
○ 숙종 33년에 본관(本館) 노복(奴僕)의 숫자가 점점 많아졌는데, 반촌(泮村)이 매우 좁아서 능히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사섬시(司贍寺)의 옛터를 주라고 명하였다.
35년에 유생을 공궤(供饋)할 때에 여자 종에게 시키지 말고 남자 종으로 대신하기를 명하였다.
○ 영종(英宗) 을묘년에 반궁 노속(奴屬)들이 반궁 경내에서 산대(山臺) 놀이를 베풀고 풍악을 벌였는데, 임금이 듣고 유사(有司)에게 성균관에 입직한 관원의 죄를 다스리고, 두 장의(掌議)는 모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정지시키도록 명하였다.
○ 영종 무신년에 임금이 여러 학생에게 효유하기를, “지난번 역적의 반란에 백 명에 가까운 유생이 거의 다 흩어지고 수십 명만 남아 있었다고 하니, 아아, 태학에서 선비를 기르는 것은 성묘(聖廟 문묘)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조종조에서 선비를 배양하는 뜻은 심상(尋常)한 데에 비할 것이 아닌데, 이들 작은 역적의 변란에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현문(賢門)에 선비를 기르는 뜻이 어디 있느냐. 아아, 옛날에는 대현(大賢 맹자)을 위하여 화살촉을 맞으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에는 도둑 소문만 듣고도 성묘(聖廟)를 돌보지 아니하니, 이것은 한갓 여러 유생만의 허물이 아니라 사신(師臣)의 과실이고, 한갓 사신만의 과실이 아니라 실상 내가 사신에게 능히 임금의 도리를 못한 것이다.” 하였다.
○ 영종 계해년 향사(享祀) 뒤에 대사례(大射禮)를 거행하였는데, 임금이 화살 4개를 쏘아서 세 살[三矢]를 맞췄다. 이튿날에 유생을 불러서 어주(御酒)를 하사하고, 기문(記文)을 지어 판(板)에 새겨서 명륜당(明倫堂)에 달도록 명하였다. 5월에 육일각(六一閣)을 세우도록 명하여 각이 완성되니, 임금이 사용하던 활과 살 및 대사(大射)에 소용되었던 모든 도구를 간수하게 하였다. 육일(六一)은 6예(藝)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 성균관의 관원은 대사성 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문신(文臣)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낮은 자로서 충원된다. 처음으로 문과(文科)에 합격한 자 중에서 맨 먼저를 홍문관에 들게 하고, 그 다음은 승문원에 들어가며, 승문원에도 못 들어가는 자가 성균관에 돌아오는 것이다. 성균관은 위로 성현을 받들고 아래로는 선비들을 교육하는 곳인데, 이들 선비들은 모두 뒷날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할 책임을 맡을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 성균관에 있을 자를 어찌 구차스럽게 숫자만 채울 것인가. 마땅히 온 나라에서 명망(名望)이 있는 사람을 잘 가려야 할 것이며, 선비들을 뽑는 데에도 사방의 준수한 인재를 뽑아야 할 것이다. 국초(國初)에 입법(立法)한 것이 당초에는 이와 같았는데, 성균관이 벼슬길에 나아가는 요로가 아니므로, 점점 세력이 없고 한산한 자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또 선비를 뽑아서 관(館)에 들게 하는 법이 없고, 진사(進士)는 제 마음대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며, 유학(幼學 초시도 못한 선비)은 하재(下齋) 및 사학(四學)에 들게 하였다. 재주와 학행이 있는 다를 추천하지 않으므로, 경화(京華 서울)의 문벌가(門閥家) 자제와 8도에서 문학으로 이름 있는 자는 함께 같이 있기를 모두 수치로 알고 거관(居館)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시골 사람으로서 일이 있어 서울에 왔다가 빈곤하여 의지할 데가 없고, 양식이 떨어지면 연줄을 찾아서 관(館)에 들기를 도모하니, 현관(賢館)을 더럽힘은 이미 말할 수도 없거니와 원래부터 교육한다는 이념도 없는 것이다. 대사성은 다만 초하루ㆍ보름으로 다른 사사 연고가 없어야 관에 들어와서 관에 있는 여러 유생을 거느리고 분향(焚香)한 다음 곧 되돌아 나갈 뿐이며, 이 밖에는 일찍이 관에 들어가지 않으며, 다시 선비들을 교육하는 법이 없다.이렇게 해서야 학교를 일으키고 영재(英才)를 교육하여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할 근본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마땅히 숙덕(宿德)으로서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아 온 나라의 명망(名望)을 짊어진 이로서 사유(師儒)의 장(長)이 되게 하고, 그 밖의 관원도 모두 일대(一代)의 인재를 엄히 가려서 교육하는 데에 협력하게 하며, 모두 오랫동안 그 임무를 맡겨서 항상 관에 있으면서 오륜의 도리로써 여러 학생을 교훈하게 하고, 관을 나누는 데도 엄히 가려 뽑은 사람을 먼저 성균관에 넣고 그 다음을 홍문관에 넣게 해야 하며, 선비를 뽑는 법도 엄하게 하여서 문벌은 보지 말고 반드시 경술(經術)에 능통하고 행검이 훌륭한 자를 천거해야 할 것이다.입학한 뒤에는 가르치는 방법을 자세하게 밝히고 대략 호안정 선생(胡安定先生)의 고사(故事)를 본받아서 달마다 고시(考試)하여 내리고 올리면 인재가 성하게 일어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평론(平論)》

[주D-001]정아(菁莪) : 《시경(詩經)》에 정아편(菁莪篇)이 있는데, 국가의 선비 교육을 노래한 것이다.
[주D-002]행단(杏壇) : 공자가 살구나무가 있는 단(壇)에서 제자를 데리고 예(禮)를 익힌 일이 있으므로, 성균관을 행단이라 별칭한다.
[주D-003]대현을 …… 있었는데 : 명(明) 나라 태조가 맹자의 글 가운데 있는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 같이 한다.”는 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맹자의 위패를 문묘(文廟)에서 내치면서, “맹자를 위하여 간(諫)하는 자가 있으면 활로 쏴 죽이라.” 하니, 형부 상서(刑部尙書) 전당(錢瑭)이 가슴을 헤치고 나서며, “신이 맹자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하였다.
[주D-004]호안정 선생(胡安定先生)의 고사(故事) : 송 나라 사람 호원(胡瑗)을 이름. 교육가로서 호주(湖州)의 학교와 태학(太學)에서 교육에 관한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사학(四學)

고려에서 동ㆍ서 학당(學堂)을 설치하였다. 뒤에 경사교수도감(經史敎授都監)을 두어서 7품 이하에게 학업을 익히게 하였고, 뒤에 명망 있는 선비 두 사람을 가려서 스승으로 삼았으며, 뒤에 또 이학도감(理學都監)을 두었다. 공양왕은 10학 교수를 두어서 예학(禮學)은 성균관에, 악학(樂學)은 전의시(典儀寺)에, 병학(兵學)은 군후소(軍候所)에, 율학(律學)은 전법사(典法司)에, 자학(字學)은 전교시(典敎寺)에, 의학(醫學)은 전의시(典醫寺)에, 풍수음양등학(風水陰陽等學)은 서운관(書雲觀)에, 이학(吏學)은 사역원(司譯院)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 태종 신묘년에 중부학당(中部學堂)ㆍ동부학당(東部學堂)ㆍ서부학당(西部學堂)ㆍ남부학당(南部學堂)을 설치하고 관내 유생의 교육을 관장하게 하였다. 교수 2명을 두어 성균관 참상(參上)에게 나누어 맡기고, 훈도(訓導) 2명은 성균관 참하(參下)에게 나누어 맡겼다. 뒤에 북부학당(北部學堂)을 증설하였다가 곧 폐지하고 훈도 각 1명씩을 감하였다.
의례훈정소(儀禮訓定所) 제조 허조(許稠)의 말을 좇아서 학당을 설치하였다.
○ 성종 8년 정유에 예조에 전교하기를, “학교에는 사표(師表)될 사람을 가려서 반드시 오랫동안 그 임무를 맡긴 뒤에라야 배우는 자가 성취함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사학(四學)의 교관(敎官)을 적임자를 가려서 뽑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주 갈아서 학술이 정밀하지 못하고 또한 전임(專任)이 아니니, 성취된 효과가 있기를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부터는 시임(時任) 또는 산관(散官 보직 없는 벼슬)을 물론하고 경학에 밝고 행실이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교관으로 삼고, 또 30개월의 법을 세워 그 임무를 오랫동안 맡기며, 학업에 전념하게 하여 나의 인재를 배양하는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 세종 9년에 생선 포(脯)를 5부 학당에 하사하였다. 《국조보감》
○ 문종이 4부 학당에 노비(奴婢)를 하사하였다. <행장>
5부 학당이 변하여서 4부 학당이 된 것이 이때인 듯하나 연대는 상고할 수 없다.
○ 임진년 병화 뒤에 서울 안에 다만 중부ㆍ서부 두 학당만을 세웠다.
광해 기유년에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사학을 다시 세우기를 아뢰어 사학을 모두 복구하였는데, 옛 제도와 같이 하였다. <월사행장(月沙行狀)>
○ 학당마다 사유(師儒 스승) 각 10명씩을 두었는데, 갑자년 변란(이괄의 난)을 겪고는 감하여 5명으로 하였고, 정묘년 난리 뒤에는 또 감하여 2명이 되었다. 인조 기사년에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아뢰어 3명을 증원하여 5명이 되었다.
○ 효종 갑오년에 김익희(金益熙)의 아룀으로 교수(敎授) 각 1명을 겸교수(兼敎授)라고 일컫고 시종 가운데서 임명하였다.
○ 현종 신축년에 다시 북부학당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또 폐지하였다.
그때에 이원(尼院)을 헐어서 북부학당을 건축하였는데, 남구만(南九萬)을 북학 교수로 삼아서 그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서 완성하지 못하였다. 승교(僧敎)조에 상세하다.
○ 숙종조에 이원정(李元禎)의 아룀으로 교수 직제를 폐지하였다가 뒤에 다시 설치하였고 또 나누어 맡겼던 교수를 감하였다.
○ 숙종 30년에 경적(經籍)을 사학에 나누어주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독서당(讀書堂)

세종이 처음으로 집현전을 설치하고, 나이 젊고 재행(才行)이 있는 자를 뽑아 휴가를 주어서 글을 읽게 하였다. 세종기(世宗紀)에 상세하다.
○ 병오년에 권채(權採)ㆍ신석견(辛石堅)ㆍ남수문(南秀文) 등 3명에게 글 읽기를 명하였는데, 규범(規範)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지시를 받게 하였다. <세종기>에 상세하다.
○ 임술년에 또 신숙주(申叔舟) 등 6명을 독서당에 보내 글뜻을 조용히 연구하고 깊이 완미(玩味)하여 그 힘을 크게 펴도록 하였다. 조위(曺偉)의 독서당기(讀書堂記)
신숙주 등에게 휴가를 주어서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용재총화》
○ 문종 신미년에 또 홍응(洪應)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다. 조위의 <독서당기>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용재총화》
○ 세조 병자연 간에 집현전을 폐지하고 독서당도 또 폐지하였는데, 독서당 설치한 지가 21년이었다. 조위의 <독서당기>
○ 성종이 즉위하여 맨 먼저 예문관을 개설하고, 옛 집현전의 제도를 회복하였다. 병신년에 다시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답습하여서 채수(蔡壽)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다. 조위의 <독서당기>
채수 등에게 장의사에서 글 읽는 휴가를 주어서 상시(常時)의 조참(朝參)에는 모두 참여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때에 이를 ‘문장접(文章接)’이라고 일컬었다. 하루는 조반(朝班)의 모임에 홍문관 하리(下吏)가 사헌부의 거안(擧案)에 채수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문장’이라고만 하고 우연히 ‘접(接)’ 자를 빠뜨렸는데, 사림(士林)이 모두 웃으면서 채문장ㆍ권문장이라고 지목하였다. 《소문쇄록》에는 권은 곧 권건(權健)이라고 하였다.
계묘년 봄에 또 김감(金勘) 등 8명에게 휴가를 주고 장의사에 가서 글 읽기를 명하였는데, 사옹원(司饔院) 관원은 쌀을 공급하고 어주(御酒) 맡은 사람은 단술을 준비하였으며, 때때로 중사(中使)를 보내 음식을 하사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조위의 <독서당기>
그때에 홍문관의 관원에게 차례로 글 읽기를 명하였다. 또 상사(上巳 음력 3월 3일)ㆍ중추(仲秋)ㆍ중양(重陽) 등의 가절(佳節)에는 교외에 나가 놀기를 명하고 잇달아 술과 풍악을 하사하였다. 《용재총화》
계묘년에 용산(龍山)에 있는 폐사(廢寺)를 글 읽는 곳으로 하였으나 명칭은 없었다. 윤현(尹鉉)의 <문회당기(文會堂記)>
남호(南湖)의 귀후서(歸厚署) 뒤 언덕에 예부터 절이 있었는데, 세간에서는 16나한(羅漢)이 영험이 있다고 하여 향불이 끊어지지 않았다. 상운(尙雲)이라는 중이 그 절에 있으면서 장가를 가고 자식도 낳았으므로, 사헌부에서 중을 국문하고 벌주어서 속세에 되돌아가게 하였으며, 불상(佛像)은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드디어 그 절을 홍문관에 주고 차례로 글을 읽게 하였는데 그 집을 독서당(讀書堂)이라고 하였다. 《용재총화》
조위(曺偉)에게 독서당기(讀書堂記)를 짓고 독서당이라는 3자(字)를 액(額 큰 글로 쓴 현판)으로 쓰도록 명하고, 술과 풍악을 내려주고 승지를 보내 낙성(落成)하게 하였다. 독서당에서는 사은하는 잔(盞 표문의 일종)을 올리면서 붉은 보자기로 함(函)을 싸서 메고 갔는데, 그뒤에는 여악(女樂)을 따르게 하였으니, 임금께서 하사한 것을 영화롭게 여긴 것이다.
폐사(廢寺)를 고쳐 지어서 당(堂)으로 만들었다. 중종 10년에 두모포(豆毛浦)에 옮겨 지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성종이 상으로 궁중의 술을 하사하면서 수정배(水精杯)로 먹기를 권하였다. 관(館)의 관원이 도금(鍍金)으로 잔대를 만들었는데, 김일손(金馹孫)이 명(銘)을 짓기를,

맑아서 흐려지지 않고 비어서 능히 받아들인다 / 淸不涅虛能受
그 물건 주심을 감사히 여겨 저버리지 말기를 생각한다 / 德其物思勿負

하였다. 《대동운옥(大東韻玉)》
뒤에 또 서문을 지었는데, “잔이 처음에는 반(盤)이 없어서 공장을 시켜 만들었는데, 구리 바탕에 도금을 하였다.” 하였다. 반면(盤面) 네 둘레에는 임희재(任熙載)의 8분체 글씨로 명을 볼록하게 새기고, 반 한가운데는 강사호(姜士浩)의 전(篆)자 체로 ‘내사독서당(內賜讀書堂)’ 다섯 자를 오목하게 새겼다. 뒤에 맡아 지키던 자가 훔쳐갔는데, 가정(嘉靖) 연간에 조사수(趙士秀)가 중국에서 구해 사들여서 고사를 보충하였던 것이다. 《패관잡기》
○ 연산군 갑자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제도를 폐지하니, 당(堂)은 드디어 궁인(宮人)이 차지하게 되었다. <문회당기(文會堂記)>
○ 중종이 반정한 뒤 맨 먼저 옛 제도를 회복시켜서 정업원(淨業院)에 우선 우거(寓居)하게 하였다. <문회당기>
병(丙)ㆍ정(丁) 연간에 김세필(金世弼) 등 6, 7명에게 휴가를 주었다.
○ 신미년에 이행(李荇)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홍언필(洪彦弼)ㆍ소세양(蘇世讓)ㆍ정사룡(鄭士龍)ㆍ황여헌(黃汝獻) 등 7명을 고쳐 뽑아서 장번(長番)으로 삼았다. 윤현(尹鉉)의 독서당 규칙을 고치자는 논의에 있다.
○ 을해년에 동호(東湖)에 있는 월송암(月松庵) 서쪽 기슭에 터를 잡아서 건축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정축년에 준공하였고, 윤4월에 나가서 우거하였는데 곧 이른바 호당(湖堂)이다. <문회당기>
○ 중종조에 고시(考試)하는 법을 매우 엄하게 하여 만약 잇달아 입격(入格)하지 못하면 퇴학시켰다. 독서당에 물건을 하사하여 총애 우대(優待)함이 옥당(玉堂)보다 못하지 않았다. 《지소록》
○ 윤현(尹鉉)이 당상관이 된 뒤에 다시 휴가를 주었으니 특이한 대우였다. 박민헌(朴民獻)도 당상관이 된 뒤에 다시 휴가를 주었다. 윤현의 자는 자용(子用), 호는 국간(菊磵), 시호는 문장(文壯)이며, 호조 판서를 지냈다. 박민헌의 자는 희정(希正)이고, 벼슬은 북병사(北兵使)이다.
○ 임진년 뒤로부터는 호당(湖堂)이 텅 비어 남은 것이 없었고, 휴가 주는 것도 오랫동안 폐하였었는데, 무신년에 대제학 유근(柳根)이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여서 우선 한강(漢江) 별영(別營)을 독서하는 장소로 삼았다.
○ 독서당은 40세 전인 사람을 뽑아서 맡겼던 예가 있었는데, 이후백(李後白)이 처음으로 40세가 되어서 들어갔고, 이이첨(李爾瞻)은 48세로 들어갔으니 역시 파격이었다.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그대로 겸무한 자는 박민헌(朴民獻)ㆍ이덕형(李德馨)이었다. 《지소록》
○ 인조조에 정백창(鄭百昌)ㆍ이명한(李明漢)이 당상관이 된 뒤에도 그대로 겸무하였다. 《택당집(澤堂集)》
○ 숙종 기사년에 대제학 민암(閔黯)의 아들 민창도(閔昌道)가 처음에는 가려 뽑는 데에 들지 않았었는데, 제학 유명천(柳命天)이 창도가 상피법(相避法)에 걸려서 뽑는 데에 들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아뢰었더니, 뽑는 데에 들게 되었다. 《택당집》
○ 국조(國朝)에서는 문을 숭상하여 정치를 잘하려 하였으므로, 그 인재를 가려 뽑는 것의 중함과 예(禮)로써 대우하는 것의 융숭함이 호당에 이르러서 지극하였다. 대성(臺省)의 좋은 명예와 관각(館閣)의 고상한 명망이 없으면 호당의 뽑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관에서 급여(給與)함이 그 대우가 특별하여 태관(太官 궁중 음식을 맡은 관청)의 진미(珍味)와 소부(少府 궁중의 의복과 보화를 간수하는 관청)에 간수하였던 것이며, 천한(天閑 임금의 마구간)의 훌륭한 말[馬]과 옥으로 장식한 굴레, 아로새긴 안장을 하사하는 것이 서로 잇달았었다.혹 중사(中使 내시)가 어제(御題)를 받들어 불시에 와서 그 자리에서 회보(回報)하는 글을 독촉하기도 하는데, 칠보시(七步詩)를 짓는 재주가 아니면 가끔 군급(窘急)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그 영화로움은 지극하였으니, 그 책임이 중하고 그 임무가 실상 어려웠다. 계곡(溪谷) 호당계(湖堂契) 병풍서(屛風序)
○ 한창 성할 때에는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였는데, 예(例)대로 12명을 뽑고 두 차례로 나누어서 일직ㆍ숙직을 하게 하였다. 대제학이 날마다 제술(製述)할 것을 맡겨서, 등급을 매겨 한 달에 세 번씩 올리는 것이다. 어주(御酒)를 하사하면 별도로 제술이 있고 상이 있는데, 당원(堂員)은 모두 3사(三司)의 명관(名官)으로 벼슬이 자주 옮겨지고, 혹 말미를 청하는 까닭으로 항상 차례의 수가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며, 혹 3, 4명뿐이기도 하였다. 예에 따라 한 달 양식으로 쌀과 콩을 각 15섬씩 공급하고, 내섬시(內贍寺)에서 날마다 술 한 병과 소채ㆍ시탄(柴炭 땔나무와 숯)을 흡족하게 공급하였다.출입할 때에는 역마를 탔고, 두 척의 방주(方舟)를 장식하여 잔치 놀이에 대비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에서는 기악(妓樂)을 제공하여서, 비록 중서사인(中書舍人)이라도 감히 먼저 차지하려고 다투지 못하였다. 관에서 조석반(朝夕飯)을 공급하지마는, 당원이 또 수용을 요구하면 안팎 관원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리(書吏) 9명과 사예(使隸) 8명은 모두 급료를 받았으며, 노비 80여 호가 당(堂) 곁의 둘레에 살았다. 《택당집(擇堂集)》의 <당기(堂記)>
○ 독서당이 두모포(豆毛浦) 북쪽 산꼭대기에 있었다. 성종이 수정배(水精杯)를 하사하였고, 중종이 선도배(仙桃杯)를 하사하였다. 명종 기유년 여름에 당에 어주를 내리면서 혜호배(蟪䗂盃 혜호는 벌레 이름인데, 술을 먹이면 곧 죽는다. 이것을 형상하여 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라’는 뜻이다)를 하사하였다. 심수경(沈守慶)이 사은하는 전(箋)을 지었는데, 그 한 구절에,

수정배 선도배를 함께 전하니 / 與水精仙桃而竝傳
성종과 중종에서 더욱 빛나다 / 于成宗中廟而益顯

하였다. 정유길(鄭惟吉)이 당중고사(堂中故事)에 쓰기를, ‘실록(實錄)이다.’ 하였다 《청천견학록》
홍천민(洪天民)의 부인 유씨(柳氏)는 몽인(夢寅)의 누이이다. 만년에 두모포를 지나는데 마침 독서당이 비었으므로 올라가 보았다. 지키던 노파가 예로부터 전해오던 백옥(白玉) 잔을 내보이면서, “이 잔은 호당선생(湖堂先生)이 아니면 마시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내 비록 부인이지만 존구(尊舅 시아버지인 춘경(春卿))께서 호당에 들었고, 지아비가 호당이 되었으며, 아들 서봉(瑞鳳) 이 호당이고, 지아비의 아우 성민(聖民) 와 나의 조카 유숙(柳潚)ㆍ유활(柳活) 가 모두 호당이 되어서 이 잔으로 마셨는데 내 홀로 이 잔으로 못 마실 것인가.” 하니, 그 당시에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하였다. 《홍씨가승(洪氏家乘)》
○ 세종 초년에는 특명으로 휴가를 주어서 정원(定員)이 없었고, 이졸(吏卒)이 정수가 없었으며, 공급하는 것이 정한 액수가 없었으나, 뽑힌 사람은 각자 학문에 힘쓰고 문사(文辭)를 닦아서 감히 지나치게 사치하지 않았다. 뒤에 관청을 설치하고 규제를 정함에 그 고과(考課)하는 것은 엄한 듯했으나, 공급은 사치함을 면치 못하고 풍습은 노닥거림을 면치 못하였으니, 전후에 인재를 양성한 효과가 다름을 가히 볼 수 있다. 《택당집》

[주D-001]칠보시(七步詩) : 위(魏) 나라 문제(文帝)가 그의 아우 조식(曺植)을 죄 주려고, “일곱 걸음[七步] 걷는 동안에 시를 지으면 놓아주겠다.” 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승문원(承文院)

고려에서는 문서감진색(文書監進色)을 설치하여 대국을 섬김과 이웃나라와 사귀는 문서를 관장하게 하였다. 뒤에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라 개칭하고 다른 관원으로서 겸하게 하였다.
○ 국초(國初)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 10년에 승문원이라 개칭하고, 판사(判事)ㆍ지사(知事)ㆍ첨지사(僉知事) 각 1명과 교리ㆍ부교리ㆍ정자(正字)ㆍ부정자(副正字) 각 2명을 두었다.
15년에 박사(博士)ㆍ저작(著作) 각 2명을 증원하였다.
세종 15년에 첨지(僉知)를 고쳐서 부지(副知)라 하였다.
세조 12년에 판교(判校)ㆍ참교(參校)ㆍ교감(校勘) 각 1명과 교리ㆍ교검(校檢)ㆍ박사 저작ㆍ정자ㆍ부정자 각 2명과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20명을 고쳐 두었다.
연산군이 박사 이하의 관직을 폐지하였다.
중종 초년에 복구하였으나 참교ㆍ교감ㆍ교리 및 교검 1명씩을 감하였다. 뒤에 판사를 고쳐서 도제조(都提調) 세 사람으로 하고 정승이 으레 겸하였다. 지사를 제조(提調)로 하였는데 정원이 없었으며, 부지를 부제조 한 사람으로 하고 혹 두 사람도 하였는데 모두 다른 벼슬이 겸하였다.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는 정원이 없었다. 문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를 박사에 올려 분관(分館)을 주장하게 하고, 또 간택을 겪은 뒤에라야 예에 따라서 부직(付職)하였다.
19년 《고사촬요》에는 20년 을유라고 하였다. 에 이문학관(吏文學官)을 증설하여 백의(白衣 관직이 없는 사람)로서 종사하게 하였다. 뒤에 한리학관(漢吏學官)으로 고쳤다. 실직(實職)이 7명이고, 미리 뽑아두는 사람이 3명이다.
을유년에 남곤(南袞)의 아룀에 의하여 이문학관을 설치하였는데, 그 제도는 경(經)ㆍ사(史) 중에서 세 가지 글을 강론하고, 시(詩)ㆍ부(賦)ㆍ논(論) 각 한 편을 시험하며, 정원을 6명으로 하여 동지(同知) 최세진(崔世珍)에게 수업하게 하였다. 신축년에 김안국(金安國)이 건의하여 한리학관(漢吏學官)이라 고치고, 7명을 정원으로 하여 실관(實官)이라 하며, 또 예차(預差 미리 뽑아두는 것) 3명을 두었다. 《패관잡기》 ○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역설(譯舌)>
선조조에 학관(學官) 4명을 감원하고, 제술관(製述官) 3명을 추가하여 두었다.
숙종이 학관 3명과 제술관 1명을 감하였다. 지금은 2명이 남았는데, 1명은 문관으로서 교서관에서 쓰고, 1명은 음관(蔭官)으로서 일찍이 학관을 지낸 사람을 쓴다.
사자관(寫字官) 40명을 두었다.
국초에는 사자관이 없고 문신 중에서 글 잘 쓰는 자로 하였는데, 뒤에 문신으로서 글 잘 쓰는 자가 매우 적은 까닭으로 선조조에서부터 사(士)ㆍ서인(庶人)을 막론하고, 글 잘 쓰는 자에게 군직(軍職)의 직함을 주고 관대(冠帶)를 하여 매일 근무하게 하였는데, 이해룡(李海龍)ㆍ한호(韓濩)가 곧 그 시작이었다.
○ 승문원은 사대(事大)를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황제가 내린 조칙(詔勅)을 여기에 간수하였다. 이숙감(李淑堿)의 <제명기(題名記)>
○ 세종 15년에 승문원이 북부 양덕방(陽德坊) 마을에 여염집과 섞여 있어서, 황제가 내린 조칙을 감수하였는데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는 뜻이 아니라고 하여, 드디어 궐내로 옮겨 따로 각(閣)을 북쪽 모퉁이에 세워서 간수하게 하였다.
○ 영종 46년에 양궐(兩闕 경희궁ㆍ창경궁)을 승문원 안에 각각 세워서 국조(國朝) 이래의 조칙을 봉안하고, 임금이 각(閣) 이름을 써서 현판을 붙였는데, 경희궁(慶熙宮)에 있는 것은 ‘경봉각(敬奉閣)’이라 하고 창경궁(昌慶宮)에 있는 것은 ‘흠봉각(欽奉閣)’이라 하였다.
○ 승문원에서 평상시에 문서를 감진(監進 물건을 진상할 때 감독하는 것)하는 날에는 어주(御酒)를 하사하는 일이 있었다. 옛날에 기사시(記事詩 교리 조안정(趙安貞)이 즉석에서 지었다 한다)가 있었는데,

문서를 감진하는 그날에 / 監進文書日
제조는 각기 흩어져 돌아갔다 / 提調各散回
마른 노루포를 한 마리 찢고 / 乾獐一口割
하사하신 어주는 두 두루미를 열었다 / 宣醞兩尊開
대선생을 불러서 마시고 / 呼大先生飮
모든 요장을 오라고 청한다 / 請諸僚長來
고령종이 오르내리니 / 高靈鍾上下
옥산(玉山)이 무너짐을 깨닫지 못하네 / 不覺玉山頹

하였다. 고령종은 승문원 안에 있는 옛 그릇인데, 18되[升]의 술이 든다. 전하는 말에,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가 마셨던 그릇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고령 땅에서 산출(産出)된 것이라고 의심하나 옛 일을 지금에는 다시 볼 수 없다. 《지봉유설》
문서를 상고하는 날에는 제조가 일제히 앉아서 감진(監進)하는데, 내자시(內資寺)에서는 술을 제공하고, 사재감(司宰監)에서는 안주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사하는 의식을 마치면 제조는 모두 헤어지고, 낭청(郞廳)이 그대로 앉아서 대작(對酌)을 베푸는 것이었다. 《용재총화》
○ 국조에서 사대하는 일을 중하게 하는 까닭으로, 당하문관(堂下文官)을 ‘이습관(肄習官)’ 이라 일컬어서 모두 괴원(槐院 승문원)에 예속시켰다. 매달 2일에는 부제조가 모여 앉아서 일과를 감독하는데, 이문(吏文 관용 문서의 용어와 격식)에는 ‘순제 백일장(旬題白日場)’이란 것이 있고, 한어(漢語)에는 ‘별초(別抄)’가 있었다. 또 정시(庭試)와 전강(殿講)이 있어서 상을 주고 벌을 주기도 하였다. 근래에는 그 제도가 해이하여져서, 제조가 모여 앉는 날에도 혹 병을 핑계하고 오지 않는 자가 있으니 매우 한심하다. 《지봉유설》
○ 승문원 제조는 반드시 당시에 학문상의 명망이 있는 사람을 극히 가려서 제수하는 것이었다. 만력(萬曆) 병술 연간에 이수광(李睟光)이 처음으로 본원에 출근하였는데, 그때 도제조는 노수신(盧守愼)ㆍ정유길(鄭惟吉)ㆍ유전(柳㙉)이었고, 제조는 이산해(李山海)ㆍ정탁(鄭琢)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ㆍ윤탁연(尹卓然)ㆍ윤의중(尹毅中)이었으며, 부제조는 권벽(權擘)ㆍ정윤복(丁胤福)ㆍ이성중(李誠中)이었다. 비록, 최립(崔岦)이 문재(文才)로 임진년 난리 뒤에 비로소 제조에 제수되었으나 마침내 사직하였고, 홍여순(洪汝諄)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도 역시 제조는 되지 못하였다. 부제조는 ‘공사 제조(公事提調)’라 하여, 예에는 3, 4명에 불과하였는데, 근년에는 부제조가 많아서 10여 명까지 되고, 또 전에는 제조가 승지로 되면 제조는 사면하였는데, 근년부터는 승지가 제조를 겸하니 옛 일이 아니다. 《지봉유설》
○ 평시에는 괴원(槐院)이 경복궁 광화문 안에 있었다. 괴원 안에 장서각(藏書閣)이 있어서 매우 높았는데, 중국의 고문(誥文)과 조칙(詔勅), 여러 글을 간수하고 세 사람이 갖추어져야 여닫는 것이었다. 신관(新官)으로 뽑힌 자는 이름을 누각 아래에 쓰고 이어 큰 잔치를 거행하는데, 이를 ‘제명(題名) 잔치’라고 한다. 본원에서 한림(翰林)ㆍ주서(注書)가 된 자를 ‘서비(西飛)’라고 하는 것은 괴원이 동쪽에 있는 까닭이었다. 윤인함(尹仁涵)이 정자(正字)가 되었을 때에 시를 지었는데,

과거에 오른 지 3년이나 되었건만 / 登科三載後
아직도 조사(낮은 벼슬아치)를 면치 못했구나 / 猶不免曹司
매양 까닭 없이 꾸지람만 받고 / 每受無端責
입이 있으나 굶주림은 견디기 어렵네 / 難堪有口飢

하였는데, 이는 실상을 기록한 것이었다. 《지봉유설》
○ 원중(院中)에 관원은 많고 급료는 적어서, 점심 때가 되면 다만 밥 한 그릇과 나물, 젓 한 그릇 뿐이었다. 그때에 기롱하는 자가,

반 가운데 깨진 주발은 배보다 크고 / 盤血破鉢大於舟
좁쌀 밥은 엉긋덩긋 꿩 대가리보다 작다 / 糲飯參差小雉頭
배가 차지 않아 도리어 고프고 / 膓未果然還自惄
말몰이 놈은 남은 밥조차 얻어먹지 못하누나 / 騶童曾不歷餘休

하였다. 전임(前任) 문사(文士)로서 학관이 되어 왔다가, 이것으로 인하여 실직을 얻은 자가 제법 많으니, 그때 사람이 괴원을 활인원(活人院)이라고 하였다. 그뒤에 신숙주가 예조 판서를 겸하여 봉급을 넉넉하게 주기를 청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조금 넉넉하여졌다. 《용재총화》
○ 선조가 지성껏 대국(大國)을 섬겼으므로 표문(表文)과 자문(咨文) 문자는 반드시 친히 참고하고 열람하여서 범연하게 넘기지 않았는데, 괴원의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을 능히 체득(體得)하지 못하여 자신이 지어 바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제술관 허징(許澂)에게만 맡겼다. 허징은 천얼(賤孼)이므로, 식견이 많이 부족하여 그 지은 것이 혹 임금의 뜻에 맞지 못하니, 임금이 여러 번 엄교(嚴敎)를 내려서, “공경(公卿)은 국사를 ‘나 몰라’ 하는 처지에 두고서 오직 허징이 담당하여 근로(勤勞)하게 되니 애처롭구나.” 하고, 이어 허징에게 어떤 물건을 하사하였으니, 대개 여러 신하를 과격하게 꾸짖은 것이었다. 《공사견문》

[주D-001]옥산(玉山)이 무너짐 : 진(晉) 나라 혜강(嵇康)이 풍채가 좋아서 술이 취해 넘어지면 옥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교서관(校書館) 붙임 향실(香室)

궁예(弓裔)의 태봉국(泰封國)에서는 금서성(禁書省)을 설치하였다.
고려에서는 내서성(內書省)이라 하였다가 비서성(祕書省)ㆍ비서감(祕書監)ㆍ전교서(典敎署)라 고쳤고 또 올려서 ‘시(寺)’라 하였다.
○ 태조는 교서감(校書監)을 두어 경적(經籍)의 인쇄ㆍ반포 및 향(香)ㆍ축(祝)과 인전(印篆)에 대한 임무를 맡게 하였고, 또 서적감(書籍監)을 두었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 태종이 고쳐서 교서관이라 하였다. 제조(提調) 2명ㆍ1명은 대제학이 으레 겸하였다. 판교(判校)ㆍ다른 관원이 겸하였다. 교리ㆍ별좌(別坐) 각 1명, 별제(別提)ㆍ박사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ㆍ부정자 각 2명을 정하였다.
세조조에는 고려의 옛 명칭을 사용하여 ‘전교서(典校署)’라 일컬었다. 성종 15년에 다시 ‘교서관’이라 일컬었고, 연산군이 고쳐서 박사(博士) 이하는 다른 관원이 겸하도록 하였는데, 중종 초년에 복구(復舊)하였다. 뒤에 판교ㆍ별좌ㆍ별제를 없애고 겸교리(兼校理) 세 사람을 더 두었다.
영종 26년에 임시로 겸교리를 감하였다.
사준(司準)이 여덟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창준(唱準)이라 하여 14명 생도로서 취재(取才)하여서 실직(實職)에 올렸다. 이고, 사감(司勘)이 한 사람인데, 지금은 보자관(補字官)이라 한다.
○ 서(署)의 이름을 옛날에는 비서감(祕書監)이라고 일컬었고, 혹 교서관이라고도 일컬어서, 칭호는 비록 같지 않았으나, 직분은 전적으로 전적(典籍)을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배부하는 것이었다. 국초에 창설하여서 사서(四書)ㆍ오경(五經)과 제사(諸史)ㆍ자집(子集)의 판각(板刻)을 간수하였다. 세종조에 명 나라 황제가 신찬(新撰)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글을 하사하니, 임금이 경상도와 전라도에 명하여 판에 새겨 본관(本館)에 실어오도록 하였다 이승소(李承召)의 <기문(記文)>
○ 또 향실(香室)을 궐내에 설치하여 본관(本館)의 참외랑(參外郞)으로서 날을 번갈아 일직ㆍ숙직하게 하였고, 월령충의위(月令忠義衛) 2명을 두어 축문(祝文)을 쓰게 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치사 봉조하(致仕奉朝賀) 붙임 궤장(几杖)의 하사

국조에서는 당상관 정3품 이상의 관원으로서 나이 70세가 된 자는 치사(致仕)하기를 허락하고 ‘봉조하(奉朝賀)’라고 일컬었는데, 정원은 15명이었다.
○ 태종 16년에 영의정 하륜(河崙)이 치사하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하여서,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더니, 조말생(趙末生)이 대답하기를, “70세에 치사하는 것은 옛날의 좋은 법입니다. 나이가 되어서 물러가기를 청하는 자는 그 청을 들어주고, 물을 것이 있으면 부르소서.”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 성종조에 대전(大典)을 반포하였는데, 봉조하와 기로소(耆老所) 당상은 다만 1월과 동지, 임금의 탄생일에만 평상복으로 숙배(肅拜)하게 하고, 당상관으로 치사한 자에게는 그 관사(官司)와 그 고을에서 달마다 술과 고기를 주게 하였다.
○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치사한 신하에게는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하사하는 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법이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전날 역사를 낱낱이 상고하여도 모두 이 예절이 없으나, 전하는 말에, “고려의 권신(權臣) 최충헌(崔忠獻)이 권세를 탐내고 벼슬자리를 굳혀서 오래도록 국권을 잡고자 하였으나, 나이가 치사에 이르렀던 까닭으로, 특별히 이 예(禮)를 만들었던 것인데, 그 뒤에 그대로 답습하여 드디어 예가 되었다.” 하니, 진실로 성왕(聖王)이 마련한 만세에 통행하는 법은 아니다. 《동고집(東皐集)》
○ 세종 11년에 유관(柳寬)이 우의정으로 치사하였으므로, 제4과(科)의 녹봉(祿俸)을 종신토록 지급하기를 명하였다. 《동각잡기》
○ 이정간(李貞幹)이 가선(嘉善)으로서 치사하였다. 세종이 자헌(資憲) 품계에 올려서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임명하고, 새서(璽書)를 내리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안석과 지팡이는 찬성(贊成)을 지내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인데, 유독 효행(孝行)으로써 얻었던 것이다. 《지봉유설》
○ 좌윤(左尹) 이찬(李燦)이 만년에 병을 핑계하고 집에 있으면서 녹봉을 받지 않았으므로, 대신 심연원(沈連源)ㆍ상진(尙震) 등이 아뢰어서, 봉조하로 삼아 종신토록 녹봉을 받게 하였다. 그뒤에 부윤(府尹) 이언경(李彦澋)이 나이 80세가 되어서 봉조하가 되고자 하였으나, 이조에서는 전례가 없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고사(故事)를 알지 못함이 심하기도 하다. <오학편(吾學編)>을 살펴보면, “황명 나라의 제도에 치사하기를 청하는 자는 나이에 한정 없이 들어준다. 경관(京官)은 70세에, 외관(外官)은 65세에 치사하는 것은 염치를 배양하는 도리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대부로 나이가 물러갈 때에 이른 자가 아주 적고, 봉조하에 있어서는 법전에 기록되어 있건마는 역시 거행하지 않으니 한탄스럽다. 《지봉유설》
○ 70세에 치사하는 것이 법이었는데, 조종조 이래로 치사한 자가 대개 드물었다. 대신이 연로하여 물러가기를 청하면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할 뿐이었다. 근세에 재신(宰臣)으로서 치사한 자는 오직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ㆍ영부사(領府事) 심수경(沈守慶)ㆍ정탁(鄭琢)ㆍ영원군(寧原君) 홍가신(洪可信)뿐이었다. 《지봉유설》
○ 현종 무신년에 이규령(李奎齡)이 아뢰기를, “영중추(領中樞) 이경석(李景奭)은 세 조정의 원로(元老)로서 나이 지금 74세지만, 임금을 섬기는 정성이 더욱 지극하여 조정 식전(式典)의 반열(班列)에 일찍이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근력이 부족하여 걷기가 곤란하니, 마땅히 선조(先朝)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특히 늙은이를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더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판부사 송시열에게 물어서 곧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드디어 11월 27일 에 안석과 지팡이 및 교서(敎書)를 주고, 내외의 어주(御酒)와 1등 풍악(一等風樂)을 하사하였다. 여러 공경(公卿)은 옛 예로써 안석과 지팡이가 만들어진 그 이튿날 전문(箋文)을 바쳐서 사은(謝恩)하였다. 《백헌집(白軒集)》 ○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의 뒤 50년 동안에는 거행하지 않았는데, 이제 비로소 거행하였으니 훌륭한 일이다.
○ 인재(忍齋) 홍섬(洪暹)은 선조 계유년에 안석과 지팡이를 받았고,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은 인조 계해년에 안석과 지팡이를 받았으며, 임당(林塘) 정유길(鄭愉吉)도 안석도 지팡이를 받았다.
○ 옛날에는 대부(大夫)가 나이 70세가 되면 치사하였는데, 만약 사직하지 아니하면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던 것이나, 후세에는 이 예(禮)가 점점 폐지되었다. 국조에서는 오직 3정승으로서 나이가 치사에 이른 자에게만 이런 것을 준 일이 있었으나 역시 매우 드물었다. 《송곡집(松谷集)》
○ 숙종조에 영의정 권대운(權大運)과 우의정 허목(許穆)이 모두 안석과 지팡이를 받았다.
○ 숙종 9년에 영부사 송시열이 치사하니 교서를 내리기를, “대신이 치사하니 사체(事體)에 마땅히 특별함이 있어야 될 듯하다. 반드시 상례(常例)에 구애되지 말고 술과 고기 외에도 달마다 관의 곡식을 주는 것이 가하다.” 하여 그대로 예가 되었다.
○ 영종 21년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이 치사하였다. 정승의 아룀으로 인하여 쌀과 콩을 더 하사하였는데, 정경(正卿)에게 달마다 쌀과 콩을 보내는 것은 이때에 시작되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제사(諸司)

선혜청(宣惠廳) : 국초에는 상평청(常平廳)으로 창설되었다. 5참(站)의 칙사(勅使) 수용(需用)을 전관(專管)하게 하였고, 낭청 한 사람은 음관(蔭官)으로서 차임하였다.
선조조에서 ‘선혜청’이라고 명칭을 고쳤다. <대동전고(大同典故)>에 상세하다.
균역청(均役廳) <대동전고>에 들어 있다.
준천사(濬川司) : 영종 경진년에 창설하여 개천을 치고 사방의 산(山)을 금벌(禁伐)ㆍ보호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도제조 3명, 정승이 으레 겸하였다. 제조 6명, 비국(備局) 제조와 병조ㆍ판윤ㆍ3군문 대장이 으레 겸하였다. 도청(都廳) 1명, 어영천총(御營千摠)이 으레 겸하였다. 낭청 3명 3도 참군(參軍) 을 두었다.
개천을 치는 데 전후 57일이 걸렸다. 역부(役夫)는 방민(坊民)이 15만이고 삯 주는 장정이 5만여 명이었으며, 돈 3만 5천여 꾸러미와, 쌀 2천 3백여 포(包)를 소비하여 공사를 비로소 마쳤다.
충익부(忠翊府) 충훈부(忠勳府) 전고(典故)에 들어 있다.
사옹원(司饔院) : 고려에서는 ‘상식국(尙食局)’이라 하였다가 ‘사선서(司膳署)’라 고쳤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사선서를 설치하여 어선(御膳 임금의 찬수)과 궐내의 공궤(供饋)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뒤에 사옹원으로 고쳐 설치하였다.
○ 해마다 사옹원 관원을 광주(廣州)에 보내어, 좌우 두 패로 나누고, 봄에서 가을까지 자기(磁器) 만드는 것을 감독하여 어부(御府)에 실어 들였는데, 그 공로를 기록하여 등급이 우수한 자에게는 물품을 하사하였다. 세종조에는 어기(御器)를 오로지 백자기(白磁器)만 사용하였는데, 세조조에 이르러서는 채색 자기를 섞어 사용하였다. 회회청(回回靑)을 중국에서 구해다가 두루미와 잔에 그림을 그렸더니, 중국 물건과 다름이 없었으나 회회청이 귀하여서 중국에서 구하여도 많이 얻을 수 없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중국에서는 비록 궁벽한 마을 초가집 가게에서라도 모두 그림 그린 그릇을 사용하는데, 어찌 모두 회회청으로써 그린 것이겠는가. 응당 다른 물품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중국에 물어보니, 모두 이것은 ‘토청(土靑)’이라고 하나, 이른바 토청이란 것 역시 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그림 그린 자기가 매우 적었다. 《용재총화》
○ 영종(英宗) 경인년 4월에 임금이 주원(廚院)에 나아가서 도제조 이하를 불러서 음식을 하사하고, 3일이 지나서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사은(謝恩)하는 전문(箋文)을 받았으니, 60년 전 6월 12일 곧 영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주원 도제조로서 낙점(落點)을 받던 날이었다.
상의원(尙衣院) : 고려에서는 상의국(尙衣局)ㆍ장복서(掌服署)라 하였는데, 공양왕(恭讓王)이 공조(工曹)에 합병시켰다.
고려에서는 또 중상서(中尙署)를 설치하여 임금이 쓰는 그릇과 완호품(玩好品)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뒤에는 ‘공조서(供造署)’라 고쳤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공조서를 설치하였다가 뒤에 ‘상의원(尙衣院)’이라 고쳐서 임금의 의대(衣襨)와 내부(內府)의 재화(財貨)와 금보(金寶)등 물품을 관장하게 하였다.
○ 상방(尙方)의 직제가 주(周) 나라의 내부(內府)ㆍ옥부(玉府)와 같음이 있으나, 주서(周書) 입정편(立政篇)에 ‘철의(綴衣)’라 한 것과는 더욱 근사하다. 김만기(金萬基)의 기록
상서원(尙瑞院) : 고려에서는 ‘지인방(知印房)’이라 하였는데, 혹은 ‘정방(政房)’ㆍ‘차자방(箚子房)’이라고도 하였고, ‘상서시(尙瑞寺)’라고 고치기도 하였다. 또 부보랑(符寶郞)을 두었는데, ‘인부랑(印府郞)’이라 고쳤다. 또 승지방(承旨房)을 고쳐서 ‘인신사(印信司)’라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상서사(尙瑞司)를 설치하여 새보(璽寶)ㆍ병부(兵符)ㆍ신패(信牌)ㆍ절월(節鉞)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뒤에 사(司)를 ‘원(院)’으로 고쳤다. 부새전고(符璽典故)에 상세하다.
내의원(內醫院) : 고려에서는 ‘상약국(尙藥局)’이라 하였다. 장의서(掌醫署)ㆍ봉의서(奉醫署)ㆍ상의국(尙醫局)이라 고쳤다. 전의시(典醫寺)에 병합하였다.
○ 태조는 전의감(典醫監)을 설치하였다가 뒤에는 내의원(內醫院)으로 나누어 설치하여, 화제(和劑 처방)와 어약(御藥)을 관장하게 하였다.
효종 신묘년에 침의(鍼醫)를 증원하였고, 현종 계축년에는 의약 동참(議藥同參)을 더 두었다.
당상관 의관은 ‘어의(御醫)’라 하고, 당하관의 의관은 내의(內醫)라 하였는데, 당하관의 의관 중에서도 의술이 정통한 자는 어의로 특채(特採)하기도 하였다. 동반(東班)으로서 벼슬이 바뀌어 부직(付職)된 자를 ‘겸관(兼官)’이라 하였다. 의약 동참과 침의는 당상관과 당하관을 막론하고 아울러 ‘어의’라 하였다.
장악원(掌樂院) : 신라에는 ‘성음서(聲音署)’ㆍ‘대악감(大樂監)’이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대악서(大樂署)’ㆍ‘전악서(典樂署)’라 하였고, 공양왕이 별도로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여 종묘의 풍악과 노래를 익히게 하였다.
○ 태조는 전악서(典樂署)ㆍ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였고, 세종은 아악을 태상시(太常寺)에 귀속시켜 관습도감(慣習都監)을 두고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교습(敎習)하게 하였다.
세조 무인년에 비로소 장악서(掌樂署)를 설치하여 삼악(三樂 아악ㆍ향악ㆍ당악)을 한 관청에 합치고 아악ㆍ속악(俗樂)을 교습하게 하였다.
○ 채수(蔡壽)가 이조 정랑으로서 장악 첨정을 겸직하였는데, 음률(音律)을 터득한 까닭에 그대로 겸하게 하였던 것이다.
사역원(司譯院) : 궁예(弓裔)의 태봉국(泰封國)에서는 사대(史臺)를 설치하고, 모든 통역(通譯)을 맡게 하였다.
고려에서는 ‘통문관(通文館)’이라 하였다가, ‘한문도감(漢文都監)’이라 고쳤다.
○ 국초에 사역원을 설치하여 여러 나라의 언어와 사대교린(事大交隣)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한학(漢學)ㆍ청학(淸學 청국어)ㆍ몽학(蒙學 몽고어)ㆍ왜학(倭學 일본어) 등이 있었다.
○ 선조가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에 통사(通事 통역)를 시켜 중국 사신에게 말을 전하기를, “우리나라의 진심을 잘 알아서 황상(皇上)에게 명백히 아뢰기를 대인(大人 사신)에게 바라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감히 찬양(贊襄 돕는다는 말)하지 않으리까.” 하였는데, 통사가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때 이덕형(李德馨)이 모시고 있다가 곧 돕는다는 뜻으로 아뢰니, 임금이 기특하게 여겼다. 이로부터는 중국 사신이 오면 반드시 문신통사(文臣通事)가 있었다.
○ 이원익(李元翼)ㆍ이경석(李景奭)이 모두 한어(漢語)를 해득하였으므로, 제조가 되어 사역원 관원이 오면 반드시 한어로 수작하였다. 김덕승(金德承)은 지위와 명망이 중지하(中之下)였으나 항상 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한 것은 그가 한어에 능한 때문이었다.
○ 민정중(閔鼎重)이 널리 사학(四學 한ㆍ청ㆍ몽고ㆍ왜어)에서 나이 젊고 재주 있는 자를 뽑아서 ‘우어청(偶語廳)’이라 하고 한인(漢人) 문가상(文可尙)ㆍ정선갑(鄭先甲)을 조정에 아뢰어 관(官)의 곡식을 주고, 한어 훈장(訓長)으로 삼았다. 또 각학(各學)의 훈장을 날마다 공청(公廳)에 모아서 우리나라 말을 금하고 강습을 부지런히 하도록 하였으며, 때때로 자신이 시험하기도 하였다.
○ 한학 겸교수(漢學兼敎授)는 명망이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반드시 한어를 아는 자를 가려서 생도를 교습시키게 하였다. 김덕승 같은 사람은 비록 지극히 높은 명망은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겸교수로 있었는데, 계하(啓下)한 문서에는 으레 ‘한어를 해득한다.’ 하였다. 지금은 명망 있는 관원이 한어를 일삼아 하는 자가 없으나, 명망이 무거우면 겸교수로 삼았다. 최석정(崔錫鼎)이 이조(李肇)를 위에 아뢰어 차임(差任)하면서, “내가 이군이 한어(漢語)를 해득하지 못함을 알면서, 위에 아뢰기는 ‘한어를 깨쳐 안다.’ 하였으니, 이것도 임금을 속인 것인가.” 하고 크게 웃었다. 남시직(南侍直)의 《문견록》ㆍ《통문관지》
사복시(司僕寺) : 신라에서는 ‘승부(乘府)’ㆍ‘사어부(司馭府)’라 하였다.
○ 궁예는 ‘비룡성(飛龍省)’이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태복시(太僕寺)’라 하였다가 ‘사복시(司僕寺)라 고쳤다. 또 상승국(尙乘局)을 설치하여 내구(內廐)를 관장하게 하였고, ‘봉거서(奉車署)’라 고쳤는데, 공양왕이 중방(重房)에 병합하였고, 또 전목서(典牧署)를 설치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사복시를 설치하고, 수레ㆍ말ㆍ마구ㆍ목축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소관 목장은 아울러 감목관(監牧官) 조에 상세하다. 잡직(雜職)으로는 안기(安驥)ㆍ조기(調驥)ㆍ이기(理驥)ㆍ보기(保驥)ㆍ이마(理馬)가 있었다.
○ 국초에 내사복시(內司僕寺)를 설치하여 내구 어승(內廐御乘)을 맡게 하였다. 내승 3명이 있었는데, 1명은 외시정(外寺正)이 겸하였다.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할 때에 1명을 증원하였다.
○ 숙종 갑자년에 김수항이 아뢰기를, “내승(內乘)이 타는 말은 곧 임금이 타는 말인 까닭으로, 고사(故事)에, ‘내승이 말에서 내리면 비록 재상(宰相)이라도 역시 말에서 내렸다.’ 하였는데, 대개 노마(路馬 임금이 타는 말)를 공경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근래에 들으니, ‘당상관 대간(臺諫)이 내승이 길을 피하지 않았다고 하여, 어승(御乘) 견마잡이[牽夫]를 가두기까지 하였다.’ 하오니, 사체(事體)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이 뒤에는 내승이 비록 당하관의 대간을 보더라도, 으레 피하지 말게 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 숙종 을묘년에 최후량(崔後亮)이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그때 세도(世道)가 이미 변하였으므로, 얼마 안 되어서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였다. 사복시 안의 늙은 아전이 서로 말하기를, “본시(本寺)에 첨정(僉正)으로서 두어 달만에 사직하는 것은 이제 처음 보겠다.” 하였다. 최완릉(崔完陵)의 비문
○ 내승이 출입할 때에 내구 어마(內廐御馬)를 타는데, 도중에서라도 관직이 갈리면 말에서 내렸다.
내자시(內資寺) : 고려에서는 ‘대관서(大官署)’라 하여 제사와 잔치의 찬품(饌品)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 ‘선관서(膳官署)’라 고쳤다. 또 운진창(雲臻倉)을 설치하였다가 부흥창(富興倉)에 합병하였고, 얼마 뒤에 의성창(義成倉)이라 고쳤으며, 또 ‘내방고(內房庫)’라 고쳤다.
○ 태조가 의성고(義成庫)를 설치하였는데, 태종이 ‘내자시(內資寺)’라 고쳐서 내공(內供)에 소용되는 쌀ㆍ국수ㆍ술ㆍ간장ㆍ기름ㆍ꿀ㆍ채소ㆍ과실과 내연(內宴)ㆍ직조(織造)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내섬시(內贍寺) : 고려에서는 ‘덕천창(德泉倉)’이라 하였다가, 창(倉)을 고쳐서 ‘고(庫)’라 하였다.
○ 태조가 덕천창을 설치하였는데, 태종이 내섬시라 고쳐서 여러 궁전에 바치는 것과 2품 이상에게 주는 술과 왜인(倭人)ㆍ야인(野人 만주족)에게 하는 공궤(供饋)와 직조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사도시(司䆃寺) : 고려에서는 ‘비용사(備用司)’라 하였다가 ‘요물고(料物庫)’라 고쳤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요물고를 설치하였더니, 태종이 ‘공정고(供正庫)’라 고쳤다가, 뒤에 사도시라 고쳐서 어름(御廩)의 미곡 및 내공(內供)하는 겨자ㆍ간장 등의 물품을 관장하게 하였다.
예빈시(禮賓寺) : 신라에서 ‘왜전영객부(倭典領客府)’ㆍ‘사빈부(司賓府)라 하였다.
궁예는 ‘봉빈부(奉賓部)’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예빈성(禮賓省)이라 하였다가, ‘객성(客省)’ㆍ‘전객시(典客寺)’라 고쳤고, 얼마 뒤에는 예빈시(禮賓寺)라 고쳤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예빈시를 두어 빈객(賓客)의 연향(宴享)과 종재(宗宰 종척과 재상)의 공궤(供饋)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 계미년에 의순고(義順庫)를 본시(本寺 예빈시)에 병합하였다.
○ 국초에 대신선반소(大臣宣飯所)를 본시에 설치하였으나, 선반(宣飯)은 폐지되었는데, 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 태종이 예빈시에서, ‘묵은 쌀로서 못의 고기를 기른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달마다 열 말씩 소비됩니다.” 하는 것이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쌀이 비록 묵고 썩었으나 채소보다야 낫지 않으랴. 굶주리는 사람을 능히 구제할 것인데, 어찌 고기 기르는 데에 쓸 것인가. 그만 두라.” 하였다. 《국조보감》
통례원(通禮院) : 신라에서는 ‘사범서(司範署)’라 하였다.
○ 고려에서는 ‘통례문(通禮門)’이라 하여 조회(朝會)의 의례(儀禮)를 맡게 하였고 합문사(閤門使)ㆍ지후(祗候) 등의 벼슬을 고쳤다. 또 사의서(司儀署)를 두어 찬례(贊禮)를 관장하게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합문(閤門)을 두어 조하(朝賀)ㆍ제사ㆍ찬알(贊謁)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뒤에 ‘통례문(通禮門)’이라 고쳤고, 그 뒤에 문(門)을 고쳐 ‘원(院)’이라 하였다.
○ 영종(英宗) 계유년에 전교하기를, “대전(大殿 임금)의 조의(朝儀)에는 찬의(贊儀)를 ‘전의(典儀)’, 세자가 예를 거행할 때의 인의(引儀)를 ‘장의(掌儀)’, 세손(世孫)이 예를 거행할 때의 인의를 ‘사의(司儀)’라 일컬을 것이며, 백관이 예를 거행할 때에는 인의를 ‘도의(導儀)’라 일컫게 하라.” 하였다.
장예원(掌隸院) : 고려에서는 ‘도관(都官)’이라 하였다가, 뒤에는 헌부(讞部)에 합병시켰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형조도관(刑曹都官)을 두어 노예(奴隸)의 문적(文籍)과 소송을 결정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세조는 이를 고쳐 ‘장예원’이라 하였다.
영종 갑신년에 폐지하여 형조에 도로 붙였고, 본원(本院)이 지금은 보민사(保民司)로 되었다. 보민사는 다음에 나온다.
종부시(宗簿寺) : 고려에서는 ‘전중성(殿中省)’이라 하여 족속(族屬)의 보첩(譜牒)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뒤에 ‘시(寺)’로 고쳤고. 또 ‘종정시(宗正寺)’ㆍ‘종부시(宗簿寺)’라 고쳤다.
○ 태조는 전중시(殿中寺)를 설치하여 친속(親屬)의 보첩과 전내(殿內)의 급사(給事) 등의 일을 맡겼다. 뒤에 종부시로 고쳐 <선원보첩(璿源譜牒)>을 찬술(撰述)하고, 종실(宗室)의 허물을 살피고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 세종 기미년에 전교하기를, “종실의 노복(奴僕)과 하예(下隷)가 민간에게 사납게 구는 것은 금단하고 제어함이 없는 까닭이다. 옛날에는 종정(宗正)이 친속을 맡아서 허물을 살피고 규탄하였으니, 앞으로는 종친의 과실은 종부시에서 규탄ㆍ처리하라.” 하였다.
봉상시(奉常寺) : 신라에서는 ‘전사서(典祀署)’라 하였다.
○ 고려에서는 ‘태상부(太常府)’라 하였다가 봉상시로 고쳤고, 다시 ‘전의시(典儀寺)’ㆍ‘태상시(太常寺)’로 고치기도 하였다.
○ 태조는 봉상시를 설치하여 제사와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태종이 ‘전사시(典祀寺)’로 고쳤는데, 세종이 다시 ‘봉상시’라 일컬었다.
분봉상시(分奉常寺)는 고려에서는 사농경(司農卿)을 두어 자성(粢盛) 바치는 것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는 ‘전농사(典農司)’란 것이 있어서, 사자(使者)가 나가면 ‘무농염철사(務農鹽鐵使)’라 일컬었다. 곧 고쳐서 ‘적저창(績儲倉)’이라 하였으며, 다시 사농시를 설치하였고, 또 적전관(籍田官)을 두어서 본시(本寺 분봉상시)에 예속시켰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사농시를 설치하여 적전(籍田)에 경작(耕作)한 곡식 및 사당 제사에 소용되는 술ㆍ단술과 희생(犧牲)을 진설하는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태종이 전농시(典農寺)라 고쳐 일컫고 자성(粢盛) 바치는 것을 맡게 하였다가, 뒤에는 봉상시에 병합하여 ‘분봉상시’라 일컬었으며, 동서 적전을 예속시켰다.
○ 세종조에 내시별감(內侍別監) 김원효(金元孝)가 순곡(舜穀) 30이삭을 진상(進上)하므로, 각궁(角弓) 한 장을 하사하였다. 원효가 조회에 들어오자 어떤 사람이 종자를 얻어 가꾸어 바쳤는데, 줄기는 조대[秫莖]와 같고, 이삭은 포황(蒲黃)과 같으며, 열매는 조와 같았다. 임금이 내농소(內農所) 동서 적전에 심어서 가꾸도록 명하였다.
사재감(司宰監) : 고려에서는 ‘사재시(司宰寺)’라 하여 어량(魚梁)과 천택(川澤)을 맡게 하였다. ‘사진감(司津監)’ㆍ‘사재감’이라 고치기도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사재감을 설치하고, 어육(魚肉)과 소금ㆍ땔나무ㆍ횃불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 세종조에 호조에서 사재감의 묵은 생선포를 백성에게 주고 값을 거두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백성과 이(利)를 다투는 것이다.” 하고, 성균관과 5부(部)의 학생들에게 주기를 명하였다.
전의감(典醫監) : 고려에서는 ‘태의감(太醫監)’ㆍ‘사의서(司儀署)’ㆍ‘전의시(典醫寺)’라 하였다.
○ 태조는 전의감(典醫監)을 설치하여 의약(醫藥), 대내(大內)의 용품 공급, 사여(賜與)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 선조 37년 는 치종청(治腫廳)을 설치하여 종기(腫氣) 치료를 맡게 하였는데, 뒤에 전의감(典醫監)에 병합하였다.
광흥창(廣興倉) : 신라에서는 ‘좌우사록관(左右司祿館)’이라 하였다. 또 ‘늠전(廩典)’이 있었는데, 뒤에 ‘천록사(天祿司)’라 고쳤다.
고려에서는 ‘태창서(太倉署)’라 하였다. 또 좌창(左倉)을 설치하여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뒤에 ‘광흥창(廣興倉)’이라 고쳤다.
파천(播遷)한 뒤로 녹전(祿轉 녹봉)의 출납을 창고 관원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따로 한 곳을 세웠는데, 이를 ‘녹전색(祿轉色)’이라 하였다. 또 용도(用途) 조달이 넉넉하지 못하므로 백성들에게서 쌀과 콩을 더 거두었는데, 그 명칭을 ‘무단미(無端米)’라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광흥창을 설치하여 백관의 녹봉을 관장하게 하였다.
장흥고(長興庫) : 고려에서는 ‘대부상고(大府上庫)’라 하였는데, 그것이 장흥고가 되었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장흥고를 설치하여 돗자리ㆍ유둔(油芚)ㆍ종이 등의 물품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 3년에 흥신궁(興信宮)을 본고(本庫)에 병합하였다.
의영고(義盈庫) : 고려에서는 의영고라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의영고를 설치하여 유밀과(油蜜菓)ㆍ황랍(黃蠟)ㆍ소물(素物 소찬(素饌)에 쓰이는 나물 등속)ㆍ후추[胡椒] 등의 물품을 관장하게 하였다.
태종 3년에 연복궁(延福宮)을 본고(本庫)에 병합하였다.
빙고(氷庫) : 본조(本朝)에서는 동빙고(東氷庫)ㆍ서빙고(西氷庫)를 설치하여 얼음을 관장하게 하였다. 동빙고에서는 제사의 용품(用品)을 공급하고, 서빙고에서는 어주(御廚)의 용품을 공급하며, 백관의 용품을 나누어주었다.
○ 동빙고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었는데, 다만 한 창고만이 있어 제사의 용품을 공급하였다. 얼음을 간수할 때는 봉상시에서 이를 주관하여 별제(別提) 두 사람과 함께 협력하여 물품을 검사하였다. 또 감역부(監役部)가 있었는데, 얼음을 채취하려 할 때는 군관(軍官)이 저자도(楮子島)의 사이에서 채취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개천 하류(下流)의 더러운 것을 피하려 함이었다. 서빙고는 한강 아래 둔지산(屯知山)의 기슭에 있었는데, 창고는 모두 8동(棟)이었다. 모든 국용과 여러 관사(官司)ㆍ여러 재신(宰臣)ㆍ추신(樞臣)들이 모두 이것을 사용하였다. 군기시ㆍ군자감ㆍ예빈시ㆍ내자시ㆍ내섬시ㆍ사섬시ㆍ사재감이 이를 주관하여 별제 두 사람과 함께 협력하여 물품을 검사하였다. 또 감역부(監役部)가 있었는데, 얼음을 채취하려 할 때는 군관과 그 외 여러 각 관사에서 8동(棟)에 나누어 소속되어, 얼음이 단단하기가 네 치가 된 연후에 채취하였다. 《용재총화》
종묘서(宗廟署) : 고려에서는 ‘태묘서(太廟署)’라 하였는데, ‘침원서(寢園署)’라 고쳐서 전의시(典儀寺)에 예속시켰다.
○ 태조는 종묘서(宗廟署)를 설치하여 침묘(寢廟) 수위(守衛)를 관장하게 하였다. 종묘 전고(宗廟典故)조에 상세하다.
사직서(社稷署) : 고려에서는 ‘사직단(社稷壇)’이라 하였다.
○ 태조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는데, 뒤에 서(署)로 고치고 제단(祭壇)과 제단의 담 소제(掃除)를 관장하게 하였다. 사직 전고(社稷 典故)조에 상세하다.
평시서(平市署) : 신라에서는 동시전(東市典)ㆍ서시전(西市典)이라 하였다.
○ 고려에서는 경시서(京市署)라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경시서를 설치하였는데 시전(市廛)을 맡아 검사하여 말[斗]과 자[尺] 등을 공평하게 하고, 물화(物貨)의 가격을 올리고 낮추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 신라 소지왕(炤知王) 12년 경오에 비로소 시사(市肆)를 개설하였다.
장원서(掌苑署) : 궁예(弓裔) 때에는 ‘식화사(植貨司)’라 하였다.
○ 고려에서는 내원서(內園署)라 하였다.
본조(本朝)에서는 장원서를 설치하여 원유(苑囿)의 꽃과 과실나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전생서(典牲暑) : 고려에서는 ‘장생서(掌牲署)’라 하였다.
○ 본조에서는 전생서를 설치하여 희생(犧牲) 기르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사포서(司圃署) : 본조에서 처음 설치한 것인데, 원포(園圃)의 소채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지서(造紙署) : 본조에서 처음 설치하였는데, 표(表)ㆍ전(箋)ㆍ자문(咨文)에 소용되는 종이와 제반 지소(紙所)를 관장하게 하였다.
○ 세종이 조지서를 설치하여 자문(咨文)ㆍ표(表)ㆍ전(箋)에 소용되는 종이를 감조(監造)하게 하고, 또 책 찍는 종이와 여러 종류의 종이를 제조하였는데, 그 품질이 한결같지 않아서 고정지(藁精紙)ㆍ유엽지(柳葉紙)ㆍ유목지(柳木紙)ㆍ의이지(薏苡紙)ㆍ순왜지(純倭紙)가 있어 모두 극히 정제(精製)되었고, 서적을 찍은 것 역시 좋았는데, 지금은 다만 고정지ㆍ유목지 두 종류뿐이고, 자문ㆍ표ㆍ전의 종이도 또한 옛날만큼 정제되지 못하였다. 《용재총화》
관상감(觀象監): 신라에서는 ‘누각(漏刻)’이라 하였으며, 전천박사(典天博士)가 있고 첨성대(瞻星臺)를 지었다.
고려에서는 태복감(太卜監)ㆍ태사국(太史局)ㆍ사천대(司天臺)라 하다가 뒤에 대를 ‘감(監)’이라 고쳤으며, 또 관후서(觀候署)ㆍ서운관(書雲觀)이라 고쳤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서운관을 설치하였는데, 천문ㆍ지리ㆍ역수(曆數)ㆍ점술(占術)ㆍ측후(測候)ㆍ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 세종 7년에 천문(天文)의 비밀은 금루(禁漏)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역시 아울러 강습하게 할 수 없다 하여 금루 40명을 나누어 두었다. 15년에 예조의 아룀으로 인하여 중국 조정의 흠천감(欽天監) 설호정(挈壺正)이 금루를 겸해서 관장하는 예(例)에 의거하여 금루를 다시 천문에 예속시켰고, 뒤에 관상감(觀象監)이라 고쳤다.
○ 천문학(天文學)ㆍ지리학(地理學)ㆍ명과학(命課學)ㆍ금루관(禁漏官)ㆍ삼력관(三曆官)이 있었다.
○ 교수(敎授) 한 사람은 문신이 겸하였고, 때로는 자벽(自辟)하기도 하였는데, 뒤에 개혁하여 천변(天變)이 있으면 문신(文臣)으로서 임시로 차임하였다.
○ 흠경각(欽敬閣) 세종조에 상세하다.
○ 선조조에 흠경각(欽敬閣)ㆍ보루각(報漏閣)을 창덕궁에 세웠다.
○ 영종 46년 이 관상감에 집[閣]을 세워 돌에 새긴 천문도(天文圖)를 간수하게 하고, 다시 ‘흠경(欽敬)’이라 명명(命名)하였다.
군자감(軍資監) : 궁예는 ‘납화부(納貨府)’ㆍ‘물장서(物藏書)’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물장서를 ‘소부감(少府監)’ㆍ‘내부감(內府監)’이라 고쳤고, 감을 ‘시(寺)’로 개칭하였다. 공양왕이 개혁하여 군자시(軍資寺)로 설치하였다가 ‘전수도감(轉輸都監)’이라 고쳤다.
○ 태조가 군자감을 설치하여 군수품의 저축을 맡게 하였다.
제용감(濟用監) : 고려에서는 ‘잡직서(雜織署)’라 하였다가, 뒤에 도염서(都染署)에 병합하여 ‘직염국(織染局)’이라 하였다. 공양왕이 또 제용고(濟用庫)를 설치하였다가 얼마 후에 보원해전고(寶源解典庫)에 병합하였다.
○ 태조가 제용고를 두었다가 고를 ‘감(監)’ 으로 고치고, 진상하는 모시ㆍ마포(麻布)ㆍ피물(皮物)ㆍ인삼과 하사하는 의복 및 사라(紗羅)ㆍ능단(綾段)ㆍ포화(布貨)ㆍ채색ㆍ염색ㆍ직조(織造)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선공감(繕工監) : 신라에서는 ‘공장부(工匠府)’라 하였다.
○ 궁예는 ‘남상단(南箱壇)’이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장작감(將作監)’이라 하였다가 선공감으로 고쳤고, 다시 감(監)을 ‘사(司)’로 고쳐 소부(小府)의 궁궐도감(宮闕都監)ㆍ창고도감(倉庫都監)ㆍ연등도감(燃燈都監) 국신(國贐)을 병합시켰다. 또 도교서(都校署)ㆍ잡작국(雜作局)을 설치하였는데, 공양왕이 선공사(繕工司)에 병합하였다.
○ 태조가 선공감을 두어 토목(土木)ㆍ영선(營繕)을 맡게 하였다.
○ 본조에서는 또 자문감(紫門監)을 설치하여 궐내의 영선을 관장하게 하고, 감역관(監役官) 한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주관하게 하였다.
○ 세종조에 호조에서 선공감에 저장하였던 숯이 다하여 가니, 각 고을에 명하여 명년에 바칠 숯을 미리 바치게 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농사 일이 한창일 때인데, 백성을 부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선 씀씀이를 줄여 추수(秋收)하기를 기다리라.” 하고, 숯 쓰는 수를 조목조목 기록하기를 명하여 친히 내용(內用) 숯 수십 섬을 감하고, 이어 승정원에 명하여 1년에 소용되는 숯을 계산하여, 남는 양(量)을 감하게 하니, 감한 시탄(柴炭)이 매우 많아서 백성이 힘입어서 편안히 쉬었다. 《국조보감》
양현고(養賢庫) : 태조가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양현고를 설치하고, 성균관 유생에게 공궤(供饋)하는 쌀과 콩을 관장하게 하였다. 성균관조에 상세하다.
혜민서(惠民署) : 고려에서는 ‘혜민국(惠民局)’이라 하였다가, 고쳐서 사의서(司醫署)의 관할(管轄)로 하였다. 공양왕은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이라 고쳤다.
○ 태조가 혜민고국(惠民庫局)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혜민서로 고치고,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과 의녀(醫女)를 교습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인조 15년에 폐지하고 전의감(典醫監)에 병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설치하였다.
○ 각 관사의 나이 젊은 여자 종을 가려 뽑아서 혜민서에 예속시키고, 의서(醫書)를 가르치고 그들을 ‘여의(女醫)’라 하여 부인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용재총화》
○ 태종 6년에 지제생원사(知濟生院事) 허도(許衜)가 아뢰기를, “부인이 병이 났을 때 남자의 의사에게 진찰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워하여 병을 보이기를 꺼려하다가 죽는 일이 있으니, 원컨대, 창(倉)ㆍ고(庫)ㆍ궁(宮)ㆍ시(寺)에 있는 동녀(童女) 수십 명을 선택하여, 맥경(脈經)과 침구(鍼灸)하는 법을 가르쳐서 구호ㆍ치료하게 하면, 전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에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귀후서(歸厚署) : 태종이 창설하였는데, 관곽(棺槨)을 만들고 예장(禮葬)에 공급하는 일 등을 맡게 하였다.
○ 좌의정 하륜(河崙)의 건의에 의하여 임금이 유사에게 명하여, 쌀 30섬[苫]과 오종포(五綜布) 1백 필을 내게 하여, 용산(龍山) 물가에 관곽소(棺槨所)를 설치하고, 또 노비 60명을 주었으니, 부리기에 넉넉하게 한 것이고, 전토(田土) 50결(結)은 경비를 지출하게 함이었다. ‘귀후소(歸厚所)’라 명명(命名)한 것은 아마 죽은 사람에게 후하게 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간다는 뜻에서일 것이다.
와서(瓦署) : 신라에서 ‘와기여도등국(瓦器與陶登局)’이라 하였다.
○ 고려에서는 ‘제요직(諸窯直)’이라 하였다.
○ 태조는 동서 요직(東西窯直)을 설치하였다가 후에 고쳐서 ‘와서(瓦署)’라 하고, 기와ㆍ벽돌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전옥서(典獄署) : 고려에서 전옥서라 하였다가 뒤에 대리시(大理寺)라 고쳤고, 그 뒤에 복구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전옥서를 설치하고 옥수(獄囚)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도화서(圖畵署) : 신라에서 ‘채전(彩典)’이라 하였다가, ‘전채서(典彩署)’로 고쳤다.
○ 본조(本朝)에서는 도화원(圖畵院)을 설치하여 회화(繪畫)의 일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 원(院)을 고쳐서 ‘서(署)’라 하였다.
전설사(典設司): 고려에서는 ‘상사국(尙舍局)’이라 하여 포설(鋪設)에 이바지하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사설서(司設署)’라 고쳤고, 또 ‘수궁서(守宮署)’를 설치하여 장막(帳幕) 공급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 본조에서는 전설사(典設司)를 두어 장막 공급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보민사(保民司) : 영종 40년에 보민사를 옛 장예원(掌隸院)에 창설(創設)하여 형조ㆍ한성부(漢城府)의 속전(贖錢)을 맡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형조와 한성부의 원역(員役 아전)은 급료도 없고 포(布)도 없었다. 금패(禁牌)를 내어 난전(亂廛)을 단속하는데,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속전(贖錢)을 징수하여, 도성 백성에게 고질적인 폐가 된 지 오래였다. 이에 이르러서 보민사를 장예원 옛 관사(官舍)에 설치하고, 형조와 한성부에서 받는 속전을 모두 거둬들여 두 아문(衙門) 원역(員役)의 삭포(朔布 월급) 밑천으로 하고, 난전(亂廛)의 금령을 영구히 폐지하여 함부로 속전 받는 폐단을 엄하게 막았다.
내수사(內需司) : 본조(本朝)에서 창설하였는데, 대내(大內)에서 소용되는 쌀ㆍ포목ㆍ잡물(雜物)ㆍ노비(奴婢)를 관장하게 하였다. 환관전고(宦官典故)에 상세하다.
장생전(長生殿) : 세종조에 사인(舍人) 정척(鄭陟)의 말에 따라 창건하였다. 세종조 정척조에 상세하다. 도제조ㆍ영의정이 으레 겸하였다. 제조 세 사람ㆍ호조ㆍ예조ㆍ공조 판서가 겸하였다. 낭청 세 사람 호조ㆍ예조ㆍ공조의 낭청이 겸하였다. 이 있었다.
내시부(內侍府) : 환관(宦官)의 아문인데, 대내에서 음식 감독, 명령 전갈, 문 지키기, 소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액정서(掖庭署) : 전알(傳謁) 및 임금이 쓰는 붓과 벼루의 관리, 궐문 자물쇠와 열쇠의 보관, 금정(禁庭)을 포설(鋪設)하는 임무를 맡았다.
능관(陵官): 국초(國初)에 각 능소(陵所)에는 모두 직(直)이 있었는데, 세조조에 참봉 두 사람으로 고쳐 그 중 한 사람은 음관(蔭官)으로 차임하였다. 그후에 혹은 영(令)으로 올리고, 혹은 별검(別檢)으로 올렸으며, 혹은 직장(直長)ㆍ봉사(奉事)로 올렸었는데, 별검은 문신으로 차임하고, 영(令)은 문사, 혹은 음관으로 차임하였다.
원(園)묘관(墓官) : 순강원(順康園)ㆍ소녕원(昭寧園)에는 수봉관(守奉官)을 두었고, 여러 묘에는 수위관(守衛官)을 두었다.
내시교관(內侍敎官) : 본조에서 두 사람을 두고 환시(宦侍) 가르치는 일을 맡게 하였다.
동몽교관(童蒙敎官) : 본조에서 동몽훈도(童蒙訓導) 한 사람을 두어 동몽을 교훈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가, 뒤에 교관으로 고치고 네 사람으로 증원하였다.
효종조에 송준길(宋浚吉)이 소를 올려 동몽교관 네 사람을 증원하여 4학에다가 두 사람씩 나누어 보내어, 사대부나 서민의 자제를 막론하고 일체로 교훈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 말에 좇았으나 그후에 감하여 네 사람으로 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혁파(革罷)된 제사(諸司)

제생원(濟生院) : 국초에 조준(趙浚) 등이 제생원을 창설하고, 여러 가지 약방문(藥房文)을 수집하고, 또 우리나라 사람이 경험한 것을 엮어 《향약제생집(鄕藥濟生集)》이라 하고,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였는데, 발문(跋文)은 권근(權近)이 지었다. 《해동잡록(海東雜錄)》
○ 태조 6년에 제생원을 창설하고, 각도(各道)에 매년 혜민국(惠民局)의 예와 같이 향약재(鄕藥材)를 바치게 하였는데, 그 뒤에 폐지된 연대는 상고할 수 없다.
종학(宗學) : 세종 경오년에 창설하여 종실(宗室)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게 하였는데, 도선(導善) 한 사람, 전훈(典訓) 한 사람, 사회(司誨) 두 사람이었다. 모두 성균관 사성(司成) 이하 전적(典籍) 이상으로 겸무하게 하였고, 태조의 자손으로 종적(宗籍)에 소속된 자는 모두 배우게 하였는데, 연산군이 폐지하였다. 중종 초년에 다시 설치하였다가 뒤에 또 폐지하였는데,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 세종이 종학을 세우고 문학과 행검(行檢)이 있는 자를 가려 박사(博士)로 삼아서 종친(宗親)을 가르치게 하였다.
풍저창(豐儲倉) : 고려에서 좌우창(左右倉)을 고쳐 ‘풍저창’이라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풍저창을 설치하고, 쌀ㆍ콩ㆍ초둔(草芚)ㆍ종이 등의 물품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뒤에 폐지하여 장흥고(長興庫)에 병합하였다.
의염창(義鹽倉) : 고려에서 의염창을 설치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의염창을 설치하고 염세(鹽稅)의 일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 폐지하였다.
가각고(架閣庫) : 태조가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가각고를 설치하고, 도서(圖書)를 수집ㆍ저장하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 폐지하였다.
해전고(解典庫) : 고려에서는 ‘보원해전고(寶源解典庫)’라 하였다.
○ 태조가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해전고를 두고 전당(典當)하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 폐지하였다.
사온서(司醞署) : 고려에서는 ‘양온서(良醞署)’ㆍ‘장온서(掌醞署)’ㆍ‘사온서(司醞署)’라 하였다.
○ 태조가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사온서를 두고 술과 단술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 폐지하였다.
사축서(司畜署) : 고려에서는 ‘전구서(典廐署)’라 하였다가 뒤에 고쳐서 전의시(典醫寺)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전구서를 두고 여러 가지 가축(家畜) 먹이는 일을 맡게 하였다. 인조조에서 폐지하였다가 뒤에 복구하였다.
인조조 병자호란 뒤에 필요 없는 관원을 감하고, 사축서를 전생서(典牲暑)에 병합하였다. 27년에, “전생서는 제향(祭享)을 위한 것이고, 사축서는 객사(客使)를 위한 것이니, 마땅히 구별해야 될 듯하며, 또한 제향에 쓰는 희생(犧牲)이 전과 같지 못하니, 사축서를 다시 설치하지 아니하더라도 예빈시에 병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여, 예관에게 품의(稟議)하도록 명하였더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생서와 사축서가 모두 짐승을 맡은 아문(衙門)인 까닭에, 난리 후에 임시로 합병하였더니, 이제 희생이 전과 같이 살찌지 못하여 진실로 흠되는 일이니,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예빈시는 짐승을 맡은 아문이 아니니, 예빈시에 병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 일이 폐지하였던 것을 다시 일으키는 데 관계된다 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명하였더니, 그 논의가 드디어 중지되었다.
영종 43년에 전교하기를, “‘필요 없는 관을 도태시킨다.[汰宂官]’라는 세 글자는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에 특서(特書)한 것인데, 오늘에야 사축서가 유명무실한 것임을 알았다. 이제부터라도 감하고 생략하라.” 하여, 드디어 폐지하였다.
소격서(昭格署) : 본조에서 소격서를 설치하고 삼청전(三淸殿)을 세워 삼청(三淸)과 성신(星辰)의 초제(醮祭)를 맡게 하였다.
○ 《송도지(松都誌)》에, “궁성(宮城) 북쪽 산 기슭에 소격전 옛 터가 있다.”고 하였으니, 고려 때에도 이 관청이 있었으나 역사에는 기록을 빠뜨린 것인가.
○ 소격서를 폐지하였다가 복구하였으나, 뒤에 드디어 폐지하였다. 모두 중종 기묘년 조에 상세하다.
○ 소격서는 모두 중국 도가(道家)의 일을 모방한 것이었다. 태일전(太一殿)은 칠성(七星)과 여러 별을 제사하는데, 그 화상(畫像)이 모두 머리 푼 여자의 얼굴이고, 삼청전(三淸殿)은 옥황상제(玉皇上帝)ㆍ태상노군(太上老君)ㆍ보화천존(普化天尊)ㆍ재동제군(梓潼諸君) 등 십여 위(位)를 제사하였는데, 모두 남자의 상(像)이었다.그 나머지 안팎 여러 제단(祭壇)에는 사해용왕(四海龍王)ㆍ신장(神將)ㆍ명부시왕(冥府十王)ㆍ수부제신(水府諸神) 등 위판(位版)에 무려 수백 신의 이름이 쓰여 있고, 헌관(獻官)과 서원(署員)들은 모두 흰 옷과 검은 두건[烏巾]으로 재계(齋戒)하고, 관(冠)ㆍ홀(笏)ㆍ예복(禮服)으로써 제사를 거행하는데, 제수(祭需)는 여러 가지 과실ㆍ떡ㆍ차(茶)ㆍ탕(湯)ㆍ술을 썼으며, 분향(焚香)한 다음에 여러 차례 절을 하였다. 도사(道士)들은 머리에 소요관(逍遙冠)을 썼으며, 몸에는 아롱진 검은 옷을 입고, 경쇠[磬]를 스물 네 차례 울린 다음, 두 사람이 도경(道經)을 읽으며, 또 푸른 종이에 축사(祝辭)를 적어 불사르니, 그 하는 짓이 아이들 장난 같았다. 조정에서 관원을 두어 직책을 맡기고 헛되게 제사를 받들어서 한 번 제사에 드는 비용이 적지 않았다. 성현(成俔)이 시(詩)를 짓기를,

남궁의 학사는 백발이 성성한데 / 南宮學士髮星星
흰 옷과 검은 두건으로 신령께 빌기 괴롭네 / 白服烏巾苦乞靈
문득 동료들이 손가락질하며 조소하기를 / 却怕朋僚爭指笑
노군(남궁 학사)이 와서 노군(태상노군)의 뜰에 예배한다고 할까 두렵네 / 老君來禮老君庭

하였다. 《용재총화》
권초례(捲草禮) : □에 상세하다.
태청관(太淸觀) : 고려에서 태청관을 설치하여 둑[纛]을 맡아 간수하게 하고, 출정(出征)할 때에는 반드시 본관(本觀)에서 마제(禡祭 군신(軍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
○ 태조는 그대로 판관(判官)을 두었는데 뒤에 폐지되었다.
활인서(活人署) : 고려 때에는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이라 하였다. 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고 부사(副使)를 정하였다.
○ 태조는 그대로 동서대비원을 설치하였는데, 뒤에는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로 고쳤고, 도성(都城) 안의 병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숙종 35년에 혜민서(惠民署)에 소속시켰다.
○ 본조에 열무서(閱巫署)가 있었는데, 그 창설하고 폐지한 시대는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은 무당들이 활인서의 소속으로 되었으니, 폐지할 때 활인서에 병합시켰던 것인가.
사섬시(司贍寺) : 고려에서는 ‘제용사(濟用司)’라 하였다가 ‘자섬사(資贍司)’ㆍ‘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라 고쳤는데,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 태종이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여 저화(楮貨) 만드는 일과 외방에 있는 노비의 공포(貢布) 등의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인조 병자년 난리 후에 폐지하여 제용감(濟用監)에 이관(移管)시켰다가, 갑신년에 호조 판서 정태화(鄭太和)가 건의하여 다시 설치하였다. 숙종 을유년에 이조 판서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노비공목(奴婢貢木)의 일을 호조에 이관한 뒤로 사섬시의 관원들은 맡을 일이 없어서 빈 관아만 지킬 뿐이오니, 감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이여(李畬)도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를 논하자면 필요 없는 관원을 감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아서 드디어 폐지하고, 호조에 붙여 ‘사섬색(司贍色)’이라 일컫게 하였다. 판적랑(版籍郞)이 겸해 맡았다.
내부시(內府寺) : 태조가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내부시를 두고서 내부(內府)에 간수한 재화(財貨)의 출납(出納)과 복식(服飾)ㆍ포진(鋪陳)ㆍ등촉(燈燭)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는데, 그 연대는 상고할 수 없다.
도염서(都染署) : 고려에서는 ‘도염서’라 하였다가 뒤에 잡직서(雜織署)와 병합하여 ‘직염국(織染局)’이라 하였다. 그 뒤에 또 분리시켜서 ‘도염서’라 하였다.
○ 태조가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도염서를 설치하여 염조(染造)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뒤에 제용감(濟用監)에 병합하였다.
전함사(典艦司) : 신라에서는 이제부(利濟府)라 하였다가 선부(船府)라 고쳤다.
○ 고려에서는 ‘도부서(都府署)’라 하고 병선군(兵船軍)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 ‘사수서(司水署)’라 고쳤다.
○ 태조는 사수감(司手監)을 설치하여 전함(戰艦)의 영조(營造)와 운수(運輸)를 감독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뒤에 폐지하여 공조에 소속시키고 해운 수운 판관(海運水運判官)은 호조에 예속시켰다.
수창궁제거사(壽昌宮提擧司) : 태조가 수창궁 제거사를 두고 소제와 관약(管籥 자물쇠와 열쇠) 등의 일을 맡겼는데 뒤에 폐지하였다.
경복궁제거사(景福宮提擧司) : 태조가 두었는데 뒤에 폐지하였다.
경덕궁제거사(敬德宮提擧司) : 태조가 두었는데 뒤에 폐지하였다.
전연사(典涓司): 본조에서 전연사를 설치하여 궁궐을 보수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뒤에 폐지하여 선공감 수성금화사(繕工監修城禁火司)에 병합하였다. 신라에서는 ‘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이라 하였다가, 뒤에 ‘수성부(修城府)’라 고쳤다.
○ 궁예(弓裔)는 ‘장선부(障繕府)’라 하였다.
○ 본조에서 수성금화사를 설치하여 궁성과 도성(都城)의 수축과 궁궐ㆍ공청(公廳)ㆍ방리(坊里) 각호(各戶)의 화재를 구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뒤에 개혁하여 금화(禁火)는 한성부(漢城府)에 이관하고 밤에는 순청(巡廳)에게 주관하게 하였다. 성을 보수하는 일은 병조에 이관하였다.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 : 국초에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서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였는데, 혹 ‘의례상정소’라고도 하였다. 제조(提調)를 두었는데, 허조(許稠)가 일찍이 겸임하기도 하였다. 폐지한 연대는 자세하지 아니하다.
연경궁제거사(延慶宮提擧司) : 국초에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연경궁 제거사를 설치하였는데, 태종이 폐지하여 군자감(軍資監)에 병합하였다.
경흥부(敬興府) : 태조가 경흥부를 설치하여 중궁(中宮) 요속(僚屬)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뒤에 폐지하였다.

[주D-001]삼청(三淸) : 도교(道敎)에서 천상(天上)을 상청(上淸) ㆍ 태청(太淸) ㆍ 옥청(玉淸) 등 3청으로 구분하였으므로, 이것을 ‘삼청’이라 한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동궁(東宮)의 요속(僚屬)

시강원(侍講院) : 태조가 세자 관속(世子官屬)을 설치하여 경사(經史)를 시강(侍講)하고, 도의(道義)를 풍간(諷諫)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는데, 뒤에 ‘시강원’이라 고쳤다. 사(師) 한 사람, 영의정이 겸하였다. 이사(貳師)한 사람, 찬성이 겸하였다. 좌우 빈객(左右賓客) 각 한 사람씩, 좌우 부빈객(副賓客) 각 한 사람씩, 모두 다른 관원으로 겸하게 하였다. 부(傅) 한 사람, 좌의정 혹은 우의정이 겸하였다. 보덕(輔德)ㆍ필선(弼善)ㆍ문학(文學)ㆍ사서(司書)ㆍ설서(說書) 각 한 사람씩, 뒤에 겸보덕(兼輔德)ㆍ겸필선(兼弼善)ㆍ겸문학(兼文學)ㆍ겸사서(兼司書)ㆍ겸설서(兼說書) 각 한 사람씩을 더 두었다.
익위사(翊衛司) : 태조가 세자 관속으로 설치하여 시위(侍衛) 등의 일을 맡게 하였는데, 뒤에는 익위사(翊衛司)ㆍ좌우 익위(左右翊衛)ㆍ좌우 사어(司禦)ㆍ좌우 익찬(翊贊)ㆍ좌우 위솔(衛率)ㆍ좌우 부솔(副率)ㆍ좌우 시직(侍直)ㆍ좌우 세마(洗馬) 각 한 사람씩으로 나누어 두었다.
붙임 강서원(講書院) : 세손(世孫)의 관속으로 직무는 시강원과 같았다. 세종 30년에 창설하였고, 인조 37년에 다시 설치하였으며, 영종 27년과 영종 35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좌우 유선(左右諭善)ㆍ좌우 권독(勸讀)ㆍ좌우 익선(翊善)ㆍ좌우 찬독(贊讀) 각 한 사람씩과 사(師)ㆍ부(傅) 각 한 사람씩을 두었다.
붙임 위종사(衛從司): 세손의 관속으로 직무는 익위사와 같았고, 강서원과 동시에 설치하였다. 좌우 장사(左右長史)ㆍ좌우 종사(左右從史) 각 한 사람씩을 두었다.
○ 예종(睿宗)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 성준(成俊)이 강관(講官)이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였을 때, 성준은 마침 장령(掌令)으로서 파직되었으므로, 다시 서용(敍用)하기를 특명하였다. 이조에서 결원이 없다고 아뢰자 임금이 이르기를, “시강원이 비록 폐지되었으나 성준을 위하여 필선을 특별히 마련하여 제수하게 하라.” 하였다. 《명신록》
○ 중종 신축년에 특명으로 김안국(金安國)에게 세자 이사(世子貳師)를 겸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에 곧 갈았는데, 동궁이 청을 올리므로 다시 서연(書筵)에 모시고 《주역(周易)》을 강(講)하라 하였다. 사직하기를, “전번에 이사(貳師)의 자리에서 이미 뜰에 내려 영접하는 예를 받았는데, 이제 직임을 떠났으니 어찌 감히 이를 당하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그 예(禮)는 생략하기를 명하였다. 다시 사퇴하기를, “세자께서 일찍이 신을 이사로서 대우하였는데, 이제 만약 생략한 예로써 대우하게 되면 전후의 예가 달라지니 스승을 대우하는 예에 관계됨이 적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과연 옳다. 이사를 대우하는 예대로 거행하라.” 하여, 굳이 사퇴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호음집(湖陰集)》ㆍ《미수기언(眉叟記言)》
○ 춘방(春坊)에 입시하는 하번(下番) 관원이 세자가 배우는 책에 대하여 좌우에서 강론(講論)하던 말을 밖에 나와서 단자(單子)에 기록하여 정원(政院)에 바치면, 정원에서 임금에게 다시 아뢰는 것이 옛 예(例)였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은 지 거의 30년이므로, 학문이 날로 향상했는데, 삼시(三時) 서연(書筵) 이외에 야대(夜對)를 하고, 또 수시로 접견할 때가 있었으니, 하번이 뒤쫓아 기록하기에 군급(窘急)하여 붓과 벼루를 가지고 입시하는 양이 어전(御前)에 사관(史官)이 하는 것 같이 하였다. 빈객(賓客) 임권(任權)이 동궁(東宮)에게 고하기를, “서연에서 말이 누락된 것이 있을지라도 별로 해됨이 없을 것이며, 머리에 붓을 꽂고 입시하는 것은 임금 앞에서 하는 일인데, 임금 앞에서 하는 일과 근사하게 하는 것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참람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여 이로부터 드디어 폐지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 이행(李荇)이 박사관(博士官)이 되었는데, 박사관은 사부(師傅)의 직책이었다. 강연(講筵)에서 세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물었더니, 이행이 말하기를, “이는 오늘날에 물을 바가 아닙니다.” 하고, 인하여 효도와 공경하는 도리를 진달하니, 논하는 자가 그 대체(大體)를 얻었음을 탄복하였다.
○ 명종이 보양관(輔養官)을 설치하였다. 명종기(明宗紀) 순회세자(順懷世子)조에 있다.
○ 순회세자 때에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로서 나아와 뵈옵는 자를 모두 신(臣)이라 하지 않았으며, 새로 제수된 관원이 동궁에게 사은(謝恩)할 때에도 ‘신(臣)’이라 하지 않았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도 역시 그러했으니, 춘방(春坊)의 관원을 ‘동궁의 신하’라 하지 아니하고, ‘궁료(宮僚)’라 하는 것은 대개 위에 임금이 있어서 나라에 두 높은 이가 없는 까닭이다. 지금 어지러운 때에 정권을 잡은 자들이 조종(祖宗)의 여러 조정에서 준행(遵行)하던 법을 알지 못하고, 다만 《오례의(五禮儀)》에 신(臣)이라고 한 문구(文句)에만 의거하여 갑자기 그 예를 변경하고 나아와 뵙는 관원은 반드시 ‘신’이라 하며, 사은하는 단자(單子)와 문서상에도 모두 ‘신’ 자를 쓴다. 대개 기묘년 제현(諸賢)이 예문(禮文)을 빠짐없이 밝혔는데도, 그때에 ‘신’ 자를 쓰지 않았는데, 그 개정(改定)한 논의에 반드시 근거되는 말이 있을 것인데도 지금에는 볼 수 없으니 한스럽다. 《송와잡기》
○ 선조조 이전에는 춘방(春坊) 관원과 대신들이 세자 앞에서 ‘소인(小人)’이라 일컬었는데, 어느 때부터 신(臣)이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회은집(晦隱集)》
○ 인조 병술년에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차자를 올리기를, “행실이 방정(方正)하고, 학문에 독실하여 성망(聲望)과 실상이 이미 나타난 사람을 널리 뽑아서 과목(科目)은 한정하지 말고, 별도로 관명(官名)을 정하여 세자를 보도(保導)하는 자리에 출입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송(宋) 나라의 고사를 본떠서 찬선(贊善)ㆍ서열(序列)은 보덕(輔德)의 위 익선(翊善)ㆍ서열은 문학(文學)의 다음 자의(諮議) 서열은 설서(說書)의 다음 의 직제를 증설하고, 김집(金集)을 찬선으로, 송시열을 익선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자의로 삼았다. 뒤에 익선을 ‘진선(進善)’이라 고쳤다. 《휘언(彙言)》에, “정해년에 김집이 찬선이 되었다.” 하였다.
○ 효종조에 궁관(宮官)이 세자에게 ‘신(臣)’이라 한 것은 옛 예법(禮法)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한(漢)ㆍ당(唐)의 고사와 《오례의》를 인용하여 그렇지 아니함을 밝혔다. 이후원의 묘표(墓表)
○ 익위사(翊衛司)는 세자가 나가면 앞에서 인도하고, 강관(講官)이 모여 강하면 뜰 아래에 시립(侍立)하였던 것인데, 성문준(成文濬)이 세마(洗馬)가 되었을 때에 강관이 그를 자리에 올려서 강하는 데 대비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우암집》
○ 김우명(金佑明)의 딸을 간택(揀擇)하여 세자빈(世子嬪)으로 삼았는데, 가례(嘉禮)를 거행할 때에 우명을 세마에 임명하였고, 이미 가례를 거행한 뒤에는 시직(侍直)을 거쳐 부솔(副率)에 이르렀다. 《삼관기(三官記)》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원자부(元子府) 붙임 왕자사부(王子師傅)ㆍ왕손교부(王孫敎傅)

태종 2년에 경승부(敬承府)를 설치하고, 유신(儒臣)으로 문학과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원자(元子)의 요속으로 삼기를 명하여, 조서(趙敍)ㆍ김시용(金時用)을 좌우유선(左右諭善)으로, 이공의(李公義)ㆍ이양명(李陽明)을 좌우시학(左右侍學)으로, 김훈(金訓)ㆍ홍여방(洪汝方)을 좌우동시학(左右同時學)으로 삼았다. 원자의 학궁(學宮)을 성균관 동북(東北) 모퉁이에 세우니, 박석명(朴錫命)이 아뢰기를, “원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면 누가 가르치겠습니까. 대궐 안보다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대궐 안이라 한들 누가 가르칠 것인가. 성균관만 같지 못하다.” 하고, 원자부(元子府)를 설치하여 ‘경승(敬承)’이라 호칭하였다.
○ 원자ㆍ원손(元孫)이 어릴 때에는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였는데, ‘강학청(講學廳)’이라고도 하였다. 보양관(輔養官) 두 사람을 선택하여 두었다.
○ 인조조에 특별히 원자 강학관의 직제를 설치하고, 김장생(金長生)이 그것을 맡게 하였다.
○ 대군과 왕자가 있으면 사부(師傅)를 두고, 왕손(王孫)이 있으면 교부(敎傅)를 두었다.
○ 명종 정묘년에 임금이 사속(嗣續)이 없음을 생각하고, 특별히 유사(儒士)를 뽑아 여러 왕손을 가르치고, 그들의 학문의 성취(成就)를 보아서, 그 중에서 합당한 자를 고르려고 하였는데, 교부로서 한윤명(韓胤明)ㆍ정지연(鄭芝衍)이 가리는 데에 참여하였다. 《석담일기》 ○ 명종 유일(遺逸) 조에도 상세하다.